다 이루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19:30)
녹취자 : 윤은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섯 번째로 남기신 ‘다 이루었도다’하는 이 말씀은 마지막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한다는 그 기도를 제외하면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언급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의 사생애와 공생애 전체를 통틀어 마지막 남긴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고, 마지막 운명하시는 그 순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까? 사람이 보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던 그의 선포는 실패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오늘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6번째 말씀이 신학을 한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신앙이 정리가 되었고 올바른 신학이 수립된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신학이 수립되는 것은 신학이 가져다주는 정보의 양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그 모든 신학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아는 신앙의 체험 속에서 비로서 신학은 제자리를 밟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THM을 다니던 2학년 때에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제 생애에 잊혀질 수 없는 영광의 날이었는데, 그 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경험하고 난 다음에 저는 이제껏 소위 개혁신학이라고 배운 그 모든 신학들이 사실은 그 설명과 묘사가 너무나 빈약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탁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과 위엄과 존귀를 발견하게 되자, 전통적인 신학자들이 많은 글 속에서 언급했던 희미했던 내용들이 나의 마음속에 아주 선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동산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셔야 됩니다. 거기에 모든 신학함의 중심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 자신의 놀라운 속성과 성품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끊임없이 자기밖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으시려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속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도 이미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사랑과 생명의 교통을 나누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속성에 의해서 주님은 이 모든 창조의 세계를 만드셨고 그리고 영원한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이번에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바라보시며 영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천지창조의 동기이기도 하지만 또한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당신이 천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다스렸지만, 지상의 세계는 인간을 창조하셔서 당신과 방불한 지위를 가지고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며 돌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기 위해 인간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당신을 닮은 존재의 양상인 영혼을 주셨습니다. 그 영혼의 기능 안에서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인간은 하나님과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한편으로는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또 한편으로는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 땅과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를 이 모든 창조세계 속에 실현함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보다 완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세계를 그에게 맞기셨습니다. 그는 종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는 선량한 왕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모든 것들은 그의 명령과 통치에 굴복하고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창조의 세계를 다스리고 하나님의 의지와 지성을 이 세계속에 구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로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었고 모든 세계는 자신에게 복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에게도 복종 받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기준을 따라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그 가치의 근거이기 원했고, 자신이 그 모든 존재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원 저자가 되기를 원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사악한 욕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는 커다란 죄악이 쓰나미같이 밀려와 뒤덮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 창조세계는 아름다운 모든 연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우주의 거대한 천체와, 그리고 이 창조된 지구의 모든 생물들과, 심지어는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발아래 구르는 돌맹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이 모든 세계에 드러내고 있었고, 이 모든 것들은 아주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통치의 연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커뮤니 케이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아름다운 연결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은 눈부실 정도로 피조세계 속에 가득찼습니다. 이 모든 창조의 세계가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고 있었다면 인간의 그 모든 세계의 불이 들어오게 하는 스위치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가 타락하고 죄에 삼킨바 되었을 때에 그 모든 피조물들 속에 연결되어 흐르던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당신 자신의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다시 거두워졌고, 이 모든 피조세계의 아름다운 관계는 깨뜨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뱀이 유혹했던바 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하는 정녕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약속은 창세기 5장의 죽고로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서 거짓임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이 모든 피조세계와의 관계가 깨어졌고,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져서 서로 사랑해야 될 사람들이 미움과 살인으로 점철되는 불행한 인류의 역사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창조의 세계를 수포로 돌아가게 할 정도로 커다란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 도전했던 몹쓸 인간들을 하나님께서는 멸망시키는 대신에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 가지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데 하나는 메시야를 약속하신 것이었고, 하나는 즉시 죽임을 당하여야할 인간들의 지상생애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연장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끝없이 후손들이 태어나고, 그 후손들이 태어날 때마다 조상들은 바로 여자의 후손에게서 메시야가 나겠다는 그 약속이 바로 이 아이가 주인공이 아닌가 하는 그 열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자손들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구속한다는 의미를 가진 가인의 이름이나, 쉼을 얻었다는 신앙의 고백인 노아의 이름은 바로 구약의 조상들 속에 있었던 메시야에 대한 약속과 열망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또 하나 약속하신 것이 있으니 잊기 쉬운 인간들에게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그림자를 제사의 형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인간의 죄를 위해서 누군가 대속자가 죽을 것이며, 그를 통해서 우리가 이 모든 영원한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나 다시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 계시되었습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며 이 제사의 제도는 보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제사의 교제 속에서 한시적으로 닫혔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이 일시적으로나마 사람들에게 부어지게 하셨고,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우리들이 은혜언약이라고 부르는데, 이 은혜언약 안에는 무한한 보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끊임없는 용서와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한없는 시여입니다. 이런 속에서 제사를 드렸지만, 그들은 제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자신의 타락한 본성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제사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짐승들은 바로, 오늘 우리 앞에 놓여있는 본문의 이 사건을 바라보며 죽어갔던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던 것입니다.
죄 없는 인간이 범죄 하였으니 그를 위해 대속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인간이 제물이 되셔야했고, 인간의 죄는 무한했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무한한 희생의 댓가를 치룰 수 없기에 그는 또한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나 그러나 그분은 사람의 인격으로 사람의 몸을 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것을 교회학에서 안휘포스타시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니 사람의 인간에 대해서는 안휘포스타시스로 오시고, 하나님의 인격을 입으셨으니 그는 앤휘포스타시에스의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임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 사람이셨으나, 그러나 사실은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0년 동안 성숙하기 위한 지상의 생애를 사시고, 인간의 세상에서의 모든 슬픔과, 고통과, 기쁨과, 그 모든 괴로움을 죄는 없으셨지만 모두 맛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을 배워 가셨던 것입니다. 3년 동안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그분은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천군과 천사와 그리고 모든 성도들의 경배와 영광을 한 몸에 받으셔야 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 사시는 날 동안에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노예처럼 일생을 사셨습니다. 벌레 같은 인간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모두 바친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주린 자를 먹이고, 그리고 무지한 자를 가르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계셔주셨고, 병들고, 그리고 희망이 없는 자들에게 이웃이 되어 주셨습니다. 아픈 자들의 헌데를 만지시면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씻겨주심으로서 이제껏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생애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육관을 이용하여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고치고, 어루만지시는, 그 모든 지상의 생애는 비록 말이 없으셔도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보여주는 찬란한 계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일생을 자기를 온전히 버리시는 삶을 사시고, 그러나 그것도 그분의 희생의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활용점정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이 세상에 보여주신 그 모든 아름다운 모본의 마지막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인류가 지신 그 모든 죄악을 그 어린양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두 담당하시고 불처럼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심으로 준엄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아래에 죽어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고안해낸 사형방법 가운데는 가장 잔인하고, 가장 무서운 형벌인 이 십자가를 이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쏟아지는 진노를 한 몸에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으셨고,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당신의 공의로운 진노를 쏟아부어주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칠 때, 하나님의 마음도 가슴 아팠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번 죽이시는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찬양)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 달려 재물 되실 때
누가 저에게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신학을 공부하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화려한 꿈을 꿀지라도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교계에서 일어나는 매일 신문에 보도되고 텔레비전에 보도되는 부끄러운 소식을 전하면서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나는 두 가지, 세 가지 생각도 안하고 오직 한가지 생각을 합니다. 맨 처음 저분들도 회심하던 때가 있었을텐데,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러면서 이 세상에 잘나가던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큰 사랑을 생각하고 가슴을 치면서 회심하던 때가 있었겠죠.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노라고, 그래서 나를 온전히 주님의 평화의 도구로 사용해 달라고,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홀로 받으시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게 해달라고 몸부림치며 눈 덮인 기도원에서, 그리고 추운겨울 예배당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때가 있었겠죠. 여러분들에게도 있었고, 제게도 있습니다. 거기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영광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이 길을 들어섰습니까? 세상에서 주님을 알기위해 버린 것들을 교회에 들어와서 다시 쌓아올리기 위해서 우리들이 주의 종이 되겠다고 이 길을 들어섰습니까? 감당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이 사랑을 아직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말할 수 없는 긍휼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직업을 버렸고, 잘라가던 직장을 포기했습니다. 주님 없이 번영하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불쌍한 영혼들과 이 짧은 인생을 마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이 길을 들어서지 않았습니까?
교회역사를 돌아보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뭍은 복음의 생명을 걸고 그것을 외치지 않을 그 때에 이 세상에 세속의 정신은 교회를 삼켰습니다. 돌아가신 한상동 목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신학교때 흘린 눈물은 30년이 간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같은 신학의 도상에 서있는 한 사람으로서 동료이고, 학우인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다른 이유 말고, 신학 책을 읽든지, 성경을 읽든지, 혹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든지, 다른 이유 말고,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좋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분들이 앉아서 기도하던 그 자리가 눈물로 젖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이 십자가에서 고요히 죽어 가시는 것보다,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만한 위대한 일들을 많이 체험하셨습니다. 그러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이 곳 이외에 아무 곳에서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병이어로 수만 명의 사람을 먹이고, 사람들이 예수를 임금 삼으려할 그때에도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일어나 걸어 나올 그 때에 사람들이 많이 믿게 되었지만, 예수님은 그 기적의 순간에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수 많은 사람이 팔복 산에 모여 청아하게 들려오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 그 순간에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마지막 십자가에서 못 박혀 마지막 숨이 끊어지시는 그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율법은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한 인간에게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를 하고, 양심은 율법의 도움을 받으며 이 사람이 끊임없이 처벌받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송사합니다. 이 세상에 인간들이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그는 외적으로만 속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도, 마음도, 죄의 원리에 의해 속박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사람들의 죄 값을 다 담당하고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끔찍한 형벌을 받으심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루셨고, 제사를 통해 우리에게 점진적으로 계시되어오던 인류 구속의 대업에 대한 전망을 모두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한 순간을 보고 구약의 역사는 달려왔고, 신약의 역사는 바로 이 한 지점에서 달음질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 우리들이 서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그 십자가 아래 우리들이 서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과 사역의 비젼, 우리들이 쓰는 모든 책과 언어, 우리들이 외치는 이 설교는 그렇게 십자가 아래서 피에 폭포수를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들은 주님이 이루셨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인은 수많은 죄인들이 당신의 그리스도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보좌로 향하여 난 피 뿌린 그 길을 걸어, 휘장을 지나, 맨발로 우리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그 보혈의 우리의 몸을 씻으며, 우리의 마음을 씻으며, 그 피에 우리의 목을 적셔,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고, 미래를 위해 하나님 앞에 신학을 연마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직도 이 소식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이 그들을 이렇게 사랑하셨노라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루었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전할 수 있겠으며,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위대한 일들을 먼저 우리의 온 영혼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처럼 아직 때뭍지 않고, 순수한 때에는 설교단에 서서 사랑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할 때에 펑펑 울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착한 어린이가 될지 한 시간 동안 많은 언어로 가르치는 선생님의 공과공부보다는 ‘예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십자가에서 죽으셨단다’ 라고 말하면서 차마 목이 메어서 울먹거리며 말을 잊지 못하는 선생님의 말없음 속에서 아이들은 더 많은 교리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마음이 깊은 갈망을 가지고, 사도바울이 가슴에 품었던 신학적 소원을 여러분도 품어야 합니다. 그의 일생에 비젼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과,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것이 일생의 비젼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학우여러분, 성공할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준비하십시오. 그래서 주께서 여러분들을 이 땅에 살아있게 하시는 그날 동안, 어디에 있든지, 어디에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여러분의 사랑하는 그리스도 그분이 그대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셨노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