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30일 교직원예배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환경은 어차피 수없이 변하게 마련입니다. 기독교 신앙도 허공중에 매달려 있는 신앙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세계 속에서의 신앙이니까 시대마다 각각 그 신앙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고 또 그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데 제가 아는 목사님이 나름대로는 좀 은혜를 받으셨다고 하시는데 그 부분에는 잘된 부분도 있고 제가 보기에는 아닌 부분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무엇인가 강의하는 가운데 목회자이긴 하지만 가슴에 와 닿는 내용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같은 급우들 중의 몇 명이 그분이 목회하시는 교회를 가기위해 대전까지 따라가 보았답니다. 갔다 오고 나서 충격을 받았대요. 뭐 말씀에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래도 그때가 1980년대 초반이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하느냐고 마룻바닥에서 예배를 드리더랍니다. 그것도 당시만 해도 참 생소한 것이었는데 이윽고 교인들이 11시 가까이 되어서 나오는데 깜짝 놀랐답니다. 모든 성도들은 까만 치마에 하얀 저고리 그리고 쪽을 찌고 그리고 와서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추어서 무릎 꿇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더라는 것이죠. 그것을 굉장히 자랑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그 시대와 호흡하면서 많이 변하게 되는 것이죠. 어느 목사님은 지상에서 나무강대가 사라지고 플래식글래스가 생기는 것에 대해서 개탄하시는 장면을 보았는데 개탄할 것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플래식글래스냐 우드냐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무슨 말씀이 전파되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런 점에서 우리는 마음이 좀 열릴 필요가 있고 그리고 오늘날의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과거와 똑같아야 된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대의에 있어서는 항상 같은 것이 되어야합니다. 그 대의가 무엇입니까? 오늘 사도바울은 이 영광스러운 에베소서를 시작하면서 복에 대해서 제일 먼저 말합니다. 즉 옥 속에 갇혀서 이 편지를 쓰면서도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감당할 수 없는 복에 대해서 회고하며 그 복에 대한 생각을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대의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짧은 선교의 기간이긴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참 시대를 끌어안고 시대와 함께 호흡한다는 미명아래 이런 신앙의 대의들을 많이 양보했습니다. 그 결과 선교에 많은 성과들이 오늘날 상당부분 거품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1930년 1940년 해방되기 전까지만 해도 물론 이단들도 있었지만 교회는 비교적 순수했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교회 학을 전공하고 가르치셨던 지금은 아마 작고하신 박복남 박사님이 계십니다. 그분과 함께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1930년도 후반에 당신이 중학생이셨답니다. 그래서 그때 평양에서 예배드리던 광경을 좀 상세히 말씀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아주 순수했답니다. 뭐 불이 임하고 그런 것보다도 아주 순수하고 설교는 길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주 순수한 어느 교회에 가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교적 순수한 기독교의 진리를 선포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에요. 전쟁을 겪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폐허가 된 위에 교회가 서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던 기복신앙은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가져다주었지요. 당시는 그것이 굶주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을 안겨주는 아주 좋은 선교적인 에토스가 되었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많은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의 대의를 오해하게 만드는 소지가 많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 기독교 신앙의 대의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 오늘날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그 당시의 기복신앙은 초점이 간단했습니다. 무병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병에 걸리면 낫고 그리고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기복이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복을 구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제는 내면화 되고 그리고 이제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나라에도 심화되면서 인간의 고독이라는 문제가 아주 크게 부각되고 설명할 수 없는 심리현상 속에서 질병적인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기독교신앙의 대의는 또 다른 국면으로 왜곡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병 고침을 받고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위안을 얻고 평안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종교이든지 그것을 줄 수 있으면 상관없다는 생각이 기독교인 속에서도 늘어나니까 회심이 사라진 교회의 모습 속에서 자연스럽게 신앙의 대의를 그릇된 인간의 소망으로 대치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속에서 또 60년대, 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인간의 외로움과 고독, 심리의 문제를 잘 다루는 교회들이 성공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교회에서 상담과 심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이유가 바로 그때문인 것입니다. 시대의 코드를 비교적 정확하게 읽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앞으로는 교회에서 충분한 인간관계를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따뜻하고 가정적인 교회 이런 교회들이 한마디로 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끊임없이 인간의 입맛이 변하고 교회가 이런 것에 부합시켜줄 수 있을 것처럼 다양한 방법들을 만들어내도 그것이 그 사람들을 진정으로 불행과 고통에서 건져주지 못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잘살 수 있고 무병할 수 있고 병 고침을 받을 수 있고 그렇다고 가르쳐서 결국 성공하고 돈 많이 벌고 사회가 부강해졌을 때 더 많이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병도 좀 있고 가난해서 보리밥도 먹고 그러면서도 공동체가 물질주의로부터 좀 떨어진 가운데 인간이 서로의 관계를 중시하는 공동체생활을 이어갈 때 우리 사회가 훨씬 더 행복했습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볼 때 똑같이 앞으로도 이렇게 인간을 핵심으로 놓고 인간을 주인으로 섬기며 이 교회의 모든 것들을 인간에게 맞추어주는 그것이 단기적으로는 그 인간을 강하게 끄는 흡인력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허함과 영혼의 공허함은 이런 것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그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에 오는 것이에요.
사도 바울이 아들들이 된 것에 대해서 이렇게 감탄하고 찬양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것은 오늘날에는 별로 실감이 안 가는 것이에요. 고대 사회에서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핏줄에 의한 계대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여자가 시집을 가서 제때에 아이를 못 낳으면 칠거지악이 되지요. 아내의 자리에서 제거당할 만큼 커다란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것은 입양이에요. 그런데 서양에도 입양이 있었던 것이죠. 그 입양은 항상 법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희랍어에서도 보면 아이를 가르치는 단어가 두 개가 있는데 그것이 ‘파이디온’이라는 단어와 ‘테크논’이라는 단어에요. ‘파이디온’은 그냥 아이에요. ‘테크논’은 법적 상속의 권한이 있는 적자로서의 아들이에요. 적법한 아들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바로 그런 ‘테크논’으로 불림을 받은 것이고 그것이 ‘휘오스’라는 말로 표현 되요. 그게 아들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데 이 아들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남자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상속의 권한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고대로 돌아가 보면 한 사람이 입양이 된다고 할 때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이 사람이 원래 그 집안사람이 아니어야지만 입양이 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입양이 되고나면 그 다음에 모든 자녀로서의 권한을 원래 그 집안에 있던 자녀와 동일하게 향유해요. 그 권한은 법적인 권한이고 그리고 그것은 언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권세에요. 그래서 그 집안에서 적자인 아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을 충분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허락되는 것이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가난하게 다리 밑에서 친구들하고 놀고 깡통을 걸어놓고 밥이나 끊여먹던 가난한 처지에서 만약에 귀족의 집안에 입양되었다고 칩시다. 입양이 되니까 그 입양의 이면에는 귀족의 아버지가 그 아이를 아주 사랑하고 기꺼이 자기의 자식으로 받아주려는 그런 자비의 마음이 있잖아요? 그런 자비의 마음이 있는 사람이 그 아이가 왔을 때 그 아이가 자기와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사는 것을 원하는 것이지 와서 옷을 새로 입혀주고 용돈을 주머니에 넣어주었더니 그것을 가지고 가서 펄펄 뛰면서 내 주제에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이렇게 한주먹 돈을 움켜쥐었으니 이게 얼마나 좋을까 하고 돈을 쓰고 돈을 모으는 일에 온 정신을 판다면 그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겠어요?
조나단 에드워즈가 18세기에 영적 각성을 외치면서 두 가지의 뉴잉글랜드 백성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오늘날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이 그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이에요. 그 안에 모든 좋은 것이 있어요. 그 모든 좋은 것이 있거든요. 그 모든 좋은 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런 특권을 부여받지 못했어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가장 훌륭한 이 특권을 거의 사용할 줄을 모르고 이 가장 훌륭한 특권을 향유할 줄을 거의 모른단 말이죠. 그래서 오히려 중요하지 않은 비본질적인 것에서 신앙의 본질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얼마나 가엾은 일인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즐거워한다는 말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이러한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풍부한 것들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도움을 주지요. 이 하나님을 누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에요. 알지 아니하고는 그것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안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기계를 만지는 것을 정말 싫어합니다. 그래서 비디오플레이어든지 무슨 기계든지 갖다놓으면 끄고 키는 것과 볼륨정도만 알지 나머지는 몰라요.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작고 세세한 기능들까지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겠지요.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누릴 수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혹은 하나님을 주체로 하는 ‘알다’라는 단어는 100% 사랑하거나 혹은 미워하기 위한 앎이에요. ‘내가 죄인을 아노니’ ‘내가 악인의 길을 아노니’ 이럴 때 아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지요. ‘내가 내 백성을 알고’ 이것은 사랑이지요. 이렇게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이미 이렇게 충분히 누리는 가운데 언어로써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을 제한적으로나마 말을 사용해서 에베소교인들에게 전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때에 그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데 그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이 짧은 구절 속에 그리스도라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와요.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모든 아름다운 지식이 하나님을 누리면서 사는 길인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인격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의 시행되는 방식이라면 이것들을 모두 놓아놓은 집적과 같은 그 엑기스가 바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요. 물론 이 모든 자연의 세계 속에도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이 시행하는 방식이 드러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희미해요.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빛을 받아야지만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어있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찬란한 성품과 빛을 더 많이 이해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역사를 보면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싶어 했지만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인간의 이성 속에서, 영혼 속에서, 자연 세계 속에서 찾아야겠다고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충분히 찾아내지 못하였거니와 또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연결 짓는데 실패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골똘하게 신의 성품을 자연의 세계 속에서 찾으려던 사람들이 많은 이단에 흐르게 되고 이교를 만들어내는 창시자들이 되었어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 탁월하신 성품을 발견하게 되요.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묵상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이전의 존재의 상태와 그리고 이후의 영광스러운 인성의 상태를 묵상함으로써 거기에서 우리의 인생에 필요한 모든 위로와 자원과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이죠.
존 오웬 목사님이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장문의 글을 쓰게 된 이유도 바로 그 핍박과 고난이 가득찬 시기에 그것이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이 세상에서의 최상의 행복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오늘날은 이러한 신앙의 대의들이 너무나 무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우리의 목회사역의 영광은 바로 우리가 돌보는 영혼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이 탁월하심을 알고 그분의 성육신 이후에 또한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르신 영광의 좌정하신 모습 속에서 그의 지금도 계속 되는 통치 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충분히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크고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에요. 이 소망 속에서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인생의 기간과 죽음 저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안식을 누리게 될 그 사이에 아무런 간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때에 우리는 영원을 잇대어서 삶을 살아가는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은 세상이 바뀌면 빼앗길 수 있고 아무리 병 낫는 기적이 놀라워도 결국은 죽지 않습니까? 오늘은 병 고침을 받아도 내일은 다시 연약하게 되지 않겠어요? 모두 구름처럼 떠가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세상이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갈 수 없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되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하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 그리고 우리가 지금 그 모든 유업을 온 몸으로 누리고 있는 것, 보이는 것보다도 더 큰 자원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그리고 이 관계가 세상 끝날까지 변하지 아니하되 그 기저가 우리 자신의 견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은혜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고 우리가 미끄러져 멀리 떠날 때에도 거기 계셔서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주님 앞에 살게 될 때에 세상은 아무리 많이 변해도 우리 중심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찾아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