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3일 교직원예배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오늘 이 아침에도 저희들의 마음을 옥토와 같게 어루만지셔서 주님의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람이 무얼 하든지 하면 합니다. 그런데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경우가 있죠. 외적으로 할 수밖에 없어서 해야 되는 때는 강요를 받는 때이고 내적으로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때는 무엇인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자기를 붙들고 있는 것이죠. 오늘 사도는 바로 그런 종류의 매임이 자기 마음 속에 있었기 때문에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성령이 증거하셨지만 자기는 그 매임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를 붙들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붙들어 매고 있는 것도 성령님이시고 환란과 결박이 널 기다리고 있다고 예고해 주시는 것도 성령님이시라면 그럼 왜 성령님은 이렇게 한편으로는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게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것을 예고해 주시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예고하는 것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예언이지만 사도바울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성령의 강한 매임은 이것은 사도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수 없게 하는 그런 내적인 강한 구속력이에요. 그런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그러한 내적인 구속력은 어디서 왔을까....
우선 어디서 그것이 온가를 이야기 하기 전에 이것이 복음 사역에 있어서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먼저 아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진리들로 이뤄져 있지만 그 진리는 하나의 진리에 붙어 있는 수많은 나뭇가지와 같아요. 나뭇가지가 직경이 수 십미터 될 정도로 그렇게 크게 펼쳐진 거목의 나뭇가지라 할지라도 그 나무는 한 그루의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야. 그 한 그루에 붙어있는 수많은 나무의 가지들은 펼쳐지고 뻗쳐져서 그래서 커다란 가지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 수많은 가지, 거기에 매달린 더 작은 가지, 거기에 매달린 꽃들, 잎사귀, 그리고 거기에 매달리는 열매, 많은 변화들이 가지에서 일어나면서 이 자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요.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한 그루의 나무로부터 매달린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진리와 아름다운 교훈들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 있어요. 그래서 그 한 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진리에 매달려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 아름다운 가지에 수많은 꽃도 아름답고 잎사귀도 참 예쁘고, 거기에 피는 꽃도 아름다고 거기에 맺히는 열매도 탐스럽지만 그것 하나 하나에 대한 감격 보다는 그 나무 그 자체에 대한 감격이 필요하다는...오늘 사도 바울이 바로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라고 하는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신적인 강제력이에요. 그 신적인 강제력의 기원이 바로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그거에요. 그래서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 오시고 하나님이 이 모든 창조 세계를 완성으로 이끌어가시는 중보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리스도 예수께 강력하게 사로잡힌거죠. 그것이 바로 심령의 매임이에요. 많은 사람, 유대인과 헬라인 중에 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화급성이 거기에서 오는...인턴쉽을 하는데 제가 좀 다른 기수보다 공을 들이고 있어요. 매주 만나서 강의를 하는데 이제 이렇게 그 사역을 하도록 책을 읽히고 나누고 하면서 벌써 한 넉 달 사오륙 네 석달 넉달이 흘렀어요. 근데 뭐 은혜를 받고 막 새로워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음 주면 이제 종강인데요, 괴로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 그러면서 고백이 “내가 과연 목회에 부름을 받았는가 혹시 내 마음대로 여기 들어선 것은 아닌가” 심지어는 “나는 정말 구원 받았는가” 무지하게 괴로워해요. 그게 무엇 때문일까요? 자기가 읽은 책이나 많은 글들 속에 이렇게 분명하게 그리스도 예수께 매임 받은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 생애나 일기, 글, 설교, 그들의 논설, 이런 것들을 직면하게 될 때 자기는 그런 중심성이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그러면 그것은 마치 바다에 떠 있지만 닻을 내리지 못한 배와 같아서 물결에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휘몰리는...중심성이 없는 거죠. 성경을 펴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진리를 가르치고 삶의 교훈을 가르치고 어떻게 생활하는 것이 슬기로운 것인지를 가르치지만 뿌리가 그리스도에게 닿아 있지 않아요. 그래서 그 교훈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교훈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은 이렇게 믿고 저 사람은 저렇게 믿으면서 도대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이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종교의 통일성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못 해요. 그거죠. 사도바울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순교할 때가 가까이 다가온 옥 속에서도 이 운명처럼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이 지워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떤 아주 슬프고 영광스러운 운명이 된..마치 예레미야 선지자가 감옥에 갇혀서 올바르게 예언한다고 하도 핍박을 하니까 결심을 했어요. “나는 그래 그렇다면 나는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들에게 예언하지 않겠다” 그것은 인간의 결심이었어요. 그 사람 속에 매여 있는 그것이 예레미야의 인간적인 결심을 용납하지를 않았어요. 참고 말하지 않았더니 중심이 불 붙고 그 외쳐야 할 말씀이 골수에 사무치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어요. 그런 속에서 이 사람은 깊이 고통을 받았는데 차라리 속에 불 붙는 것을 토해 놓고 맞아 죽는 것이 훨씬 쉽지, 그 불을 간직하고 골수가 녹는 것같은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던 거..그 체험이 오늘 이 시위대 뜰에서의 예레미야의 이 체험이 20장에서 바울의 이 체험과 동일한 거...그래서 결론은 내린 거예요. 그게 뭐냐면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 분의 십자가가 골수에 그 칼로 아로 새겨지는 일 없이는 목회를 못 한다...교회 어느 한 구석에서 거들면서 살 수는 있겠죠.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목회가 아닌 것은 구약 시대에 많은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였지만 선지자는 소수였어요. 그들의 예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죠.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자기 말로 말했을 뿐이에요. 사람은 몰랐지만 하나님은 알고 자신은 알 수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연구하고 목회의 기술을 익히고 유학의 꿈을 꾸고 미래에 비전을 펼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추구하는 사람이 돼야 된다...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붙잡히고 그를 본받고, 그리고 그와 온전한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살아있는 이 목숨의 이유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그런 사람이 돼야 된다라고....살아오면서 14년 동안 15년째 교회를 섬기면서 많은 일꾼들을 만났어요. 직원들, 스쳐가는 수많은 사모들, 그리고 교역자들, 유능한 사람도 있고 다시 만나기 싫을 정도로 무능한 사람도 있어요. 부지런한 사람도 있고, 정말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게으른 사람도 있어요. 열렬한 사람도 있고, 냉정한 사람도 있었어요. 공부를 잘 하는 사람도 있었고, 거의 공부를 안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도 있었고 정반대의 성향의 사람도 있었어요. 근데 참 신기한 게 그가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추구하는 사람이면 다 용서가 돼요. 심지어 나를 욕해도 용서가 돼요. 지나가는 과정이려니..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성도들이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이에요. 용서가 돼요. 길을 바르게 들어서면 느리게 가도 바른 길로 가..근데 길을 바르게 바른 길에 들어서지 않으면 올바로 가지 않아요. 기차가 레일 위에 서 있으면 바른 길로 가요. 탈선했으면 엔진에 힘을 걸고 바퀴를 돌리면 돌릴수록 사태는 점점 심각해지는 거죠. 그런데 미안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바퀴를 올바로 얹어놓은 경험 없이 사역을 하다가 죽는 거예요. 그리고 말합니다. “아. 어렵도다. 누가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역자가 있으리요.”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건 은혜가 없는 질문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다 한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옳은 길이 아니면 내가 갈 길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이 다 못 가도 안 가도 내가 가야 할 그 길이면 내가 가야 하는 그 길이에요.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 세상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외로움의 세계가 있는 거예요. 광야의 세계...그런 세계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세계 안에서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러면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거...그게 믿음의 생활이에요. 우리는 매순간 순간 이런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서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 분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운명처럼 그렇게 자기에게 굳게 매이게 될 때 그 때 그 사상은 그 그리스도의 사상은 그의 언어와 말, 그의 행실, 마음, 그의 모든 행동 속에서 배어 나와서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삶이 되는 것이에요. 때로는 우리 원하는 대로 사역이 잘 되는 때도 있고 때로는 고난의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깊은 고통의 때도 있어요. 그리고 눈을 감고는 다시 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수치와 모욕이 가득한 상황을 지나기도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인생이에요. 만약에 그 마음에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매임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명예를 잃어버리는 그 순간 그는 잃어버린 자예요. 건강을 상실하는 그 순간 그는 상실한 자예요. 목회 사역이 실패하는 동안에 그는 실패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혀 있는 그 사람, 세상의 명예와 소유, 명성, 그리고 사역의 기쁨, 이런 것들은 있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영원히 계시니, 그 하나님과 함께 늘 동행하면서 사는 것이죠. 그래서 남들이 다 슬퍼할 때 노래 부르고 모든 사람이 두려워 떨 때에 기도하고 모든 사람이 다 고독하게 느끼고 두려워할 그 때에 하나님 앞에 그 두려움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주님께 깊이 매인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요동하지 않아요. 물론 그 사람에게도 고난과 슬픔이 있어요. 그렇지만 삶이 뿌리째 흔들리진 않아요. 교회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지체들을 끊임없이 용서하며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뤄가는 것이죠. 일생동안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에요. 그리스도 예수께 굳게 붙들린 사람은 성공을 꿈꾸지 않아요. 오히려 성공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그리고 그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를 꿈꿔요. 오늘 보십시오.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데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난 꼭 성공할 것을 믿노라..말하지 않아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는 말이 뭐죠?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목표 그 자체가 외적인 성공이 아니라 자기의 진액을 다 쏟아서 자신이 완전히 소진되어 하나님 앞에 산화하는 것, 그것이 사도가 꿈꾸고 갈망하는 바에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이 사도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것이에요. 오늘날 우리의 목회의 계획과는 얼마나 달라요? 그게 비전이었어요.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바 그 놀라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할 사명, 그 사명을 배반하지 않고 자기를 버려 온전히 죽음으로써 그 사명에 합치하는 삶을 살고 자기는 그 복음과 함께 산화하는 것이 비전이었어요. 성공이 아니라 그게 비전이었어요. 마치 하늘 높이 솟은 불꽃이 자기 몸을 다 살라 몇 초 동안 그 찬란한 밤하늘에 아름다운 그 불꽃의 미를 보는 사람들에게 즐기게 하고 자신은 공중에서 산화되어서 사라지는 것처럼 그것이 비전이었어요.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 분이 전부이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비전을 근거를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거에요. 맨 처음 뷔페에 갔을 때 제 눈을 끌었던 신기한 음식이 하나 있었어요. 파란 풀이에요. 많은 풀....그게 뭐냐 그랬더니 같이 있는 사람들이 무순이라 그랬어요. 참..순을 무순을 이렇게 잘라서 먹나....그리고는 몇 개 가지고 와서 씹어 봤어요. 너무 신기한게 생긴 게 무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이 생겼는데 자근자근하고 씹으니까 그 이빨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그 약채의 즙이 그 무 꼭다리를 딱 잘라서 씹었을 때 그 알싸한 그 매운 그 맛이 똑같이 나는 거예요. 그 때 내 마음 속으로 무릎을 쳤어요. “아 그렇구나” 여러분들이 맨 처음 신학교에 들어오게 되면 목사하고는 거리가 멀잖아요. 생긴 게 벌써 틀리잖아요. 그래도 이렇게 씹으면은 숨길 수 없는 동질의 맛이 나야 돼요. 그리고 그 다음에 발전해 가는 거죠.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사역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요. 아주 소수의 사람만...쌓아 올려진 것, 터 그 위에 쌓아 올려지지 새롭게 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더라구요. 그래서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해요. 가장 큰 의무는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목 마르게 찾는 사람들이 되는 것.. 그리고 그 주님 앞에서 자기가 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모든 꿈과 희망을 그리스도 예수 앞에 십자가 앞에서 포기하고 그리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 앞에서 그 분이 내 안에 다시 사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처럼 여겨질 때 그 때 그 분이 사셔서 그 분이 자기의 뜻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비결이에요. 그래서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태어나고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태어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