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0일 새벽예배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행15:22-28)
녹취자: 김은영
아주 일을 체계적으로 처리했습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들끼리 다 논쟁을 하고 정리한 후 그 합의를 토대로 온 교회가 일치된 신학적인 견해를 갖게 한 다음에 그것을 이방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게 했습니다. 전하게 할 때에도 예루살렘에 있는 원 사도들 가운데서 그 일을 하게 한 것이 아니라 원래 이방인의 사도로 불리운 사도바울과 바나바, 그 일행에게 권위를 주어서 이 사실을 전파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었는가와 성령님이 지혜롭게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고 기독교의 원뿌리는 유대인인 우리에게 있으니 예루살렘교회가 이 문제를 처리하겠다하여 바울을 제쳐두고 다른 사람을 통해 이 문제를 처리하게 했다면 상당한 문제가 생겼을 것 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이방인들과 고린도교회에서 그랬듯이 예수님이 직접임명하지 않은 바울에 대한 신한적인 논쟁과 감정이 있었을 겁니다. 원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그들에게 이 권한을 주어서 기독교의 전체 결정사항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아주 탁월한 지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에 이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바나바와 사도바울을 보내면서 이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주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사람들이라’ 이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바나바와 바울입니다. 이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감히 꿈을 꾸지 못한 대단한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선교를 위해서 엄청나게 헌신했고 또 선교의 성과도 대단히 놀라웠으니 보고할 때마다 이방인들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큰일이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방인을 위해 넘치도록 헌신했고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이방인들 가운데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일으켰던 이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가서 겸손하게 이 문제에 대한 권위 있는 결정을 요청했던 바나바와 바울의 인격도 훌륭했고 그들의 사역을 깊이 존중하고 그들이 주를 위하여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자들이란 사실을 인정했던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대단한 인격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하면은 서로 헐뜯고 그리고 자기와 생각이 조금만 다르면 등지고 미워하고 서로 다르면 서로 도와서 할 수 있다 생각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인데 진짜 각 각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소는 틀리고 또 하나님이 그들을 쓰시는 방향도 틀리지만 그 한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성도의 교제로써 예루살렘교회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에 동역자들이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버릴 수 있을 정도로 헌신적으로 사역했던 바울과 바나바를 인정하고 깊이 신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들을 직접 보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교회가 그들과 깊이 형제들과 관련을 맺고 있지만 그것이 상하관계나 주종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교회임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흩어진 이방인의 교회에 가서 예루살렘의 교회가 정한 그 결정을 사람들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 가운데 어떤 구원받았던 사람들이 유대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유혹을 해서 적지 않은 소동이 있는데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방인을 괴롭히지 말고 우상숭배와 피와 목메어 죽인 것과 음행 이 4가지를 멀리하라면서 더 이상 소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의 중요한 의의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더 이상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써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것을 이 사람들에게 명백히 한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율법들, 특별히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는 강제조항과 함께 들어왔던 수많은 행위언약의 율법들, 즉 다시 말하면 약속 안에 있는 율법들이 아니라 의식법, 제사를 드리는 것과 관련된 율법들, 당시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민생활을 주관하던 율법들, 예를 들면 소가 사람을 받으면 그 소를 죽이고 배상을 하고 하는 등등에 나오는 시민법들을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언약으로써 율법들이 있습니다. 약속들 속의 약속들, 약속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들, 예를 들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또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리니 너희는 순종하라’ 이런 것들은 율법이긴 하나 이것을 지켜서 구원을 얻기 위한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십계명도 구원을 위한 것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언약을 베푸시는 과정에 하나님 당신의 의지를 흠 없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언약 속에 나타난 당신 자신에 대한 흠 없는 계시들은 읽고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새로운 힘과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성호 목사님이 설교한 하나님의 율법은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라고 설교했던 19장의 그 내용이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구약시대의 사람들도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은혜가운데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런 율법들은 우리들이 지켜야 하지만 그것은 이미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써가 아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너희가 거룩하지 않으니 내가 너희를 죽여버리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즉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제 속으로 들어오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들을 누리면서 사는 비결이 무엇이냐하면 주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니 우리도 거룩하기를 많이 힘쓸 때 그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증진되고 주님이 주신 유업들을 끝까지 얻을 수 있게 순종하는 백성들이 된다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우리에게 율법들을 지켜야 한다고 이방인 중 예수 믿기로 한 사람들을 유대인들이 미혹했기에 그래서 선을 분명히 그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 가운데 놀라운 안정감이 생겼습니다. ’너희가 아무리 그래봐야 베드로를 비롯한 원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보다 너희가 잘 알겠느냐 거기에서 내려진 결정을 우리들은 따르겠노라‘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되겠노라는 말은 이제 구원을 받는데 문제가 없고 구원받은 후에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데 문제가 없으며 교회 안에서도 분란이 사라질 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성숙한 인격이라는 것이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그래도 이방인의 선교지를 일궈놓은 것은 우리인데 우리가 왜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라고 했다면 교회는 산산이 부서졌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인격이 교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얼마나 큰 동력이 되느냐 하는 것을 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문제뿐 아니라 개인적인 어려움에서도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