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19
목 차
궁창에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시 19:1-4) 33
하나님의 말씀의 효능(시 19:5-8) 36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시 19:9-12) 39
고범죄를 피하는 길(시 19:13-14) 42
날마다 주님을 묵상하라(시 19:13-14) 44
궁창에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창조세계에 하나님이 드러남
본문은 찬송시로서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성가대 지휘자정도 됩니다. 그 사람의 지휘에 맞춰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에 대해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모든 세계를 보면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들이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과 관계된 물건들이나, 그 사람과 관련된 글을 기억하면서 자꾸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시집 간 딸을 생각하는 친정어머니의 마음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 깃들여져 있는 그분의 손길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만한 은혜가 없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잘 안 느껴집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깊이 받게 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들 속에 깃들여져 있는 그분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전에는 교회를 와야지 겨우 하나님이 느껴졌는데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은혜를 받으면 언제 어디서나 무엇ㄹ을 보든지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달 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 풀 섶에 핀 풀꽃 하나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아궁 속에 던질 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들풀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아버지께서 그 모든 것들을 친히 다스리시고 돌보시는 자비하심이 보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사랑을 많이 받으면, 모든 피조물들에 있는 아름다움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하늘을 쳐다봐도 ‘달이 떠 있구나, 해가 지는구나.’ 이런 정도 밖에 몰랐는데 이제는 ‘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과 우리 인간을 향한 탁월한 자비하심을 보여주시는 구나.’하며 감탄해 마지않습니다.
창조 세계에 선포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세계 속에 당신의 영광을 선포하십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전하니 들리는 소리가 없고 나도 없으나”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큰 목소리를 내야지만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먹을 쥐고 ‘까불면 죽어!’하는 것처럼,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아도 하나님을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모든 피조물 속에서 하나님의 지성, 하나님의 의지를 읽어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모두 멸망당해 버린, 예루살렘이 모두 멸망당해 버린 전쟁의 와중에서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심판하시는데도 예루살렘에 아침이 오고 또 하루가 지나고 또 아침이 오는 것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인합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니 아침마다 새롭고 새로우니 늘 새롭고 새롭다. 주의 성실하심이 크심이라”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 그리고 심지어는 계절의 변화에 따르는 자연환경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여전히 세계를 붙들고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할 그런 종류의 삶이 됩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놀라운 존재를 이 피조세계 속에서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하여’라는 시리즈를 설교할 때 일이었습니다. 어떤 지체가 ‘열린신문’에 간증을 기고했는데 내용이 이러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에 와야지 겨우 하나님이 느껴졌는데 이제는 어디서든지 그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 뜬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늘의 해, 달, 별 그리고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 이런 것들은 하나의 보조적인 자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 자료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것들은 보조적인 자료가 되어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시고 무슨 일을 하는 분인지를 아주 명백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효능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5-8)
본문해설
1절부터 5절까지 자연에 대한 찬양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고 만드신 아름다운 비밀이 온 세상에 드러나 보입니다. 온 세상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 온 세상에 충만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위엄, 이것들을 자연 속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름답고 놀라운 솜씨, 위엄과 영광은 창조세계 어디에든지 다 묻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눈이 어두워서 잘 못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인생사, 그리고 자연의 흐름, 역사의 흐름 이런 모든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시는 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신성, 영광의 충만함을 온 궁창과 하늘이 선포하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전하며 온 세상과 우주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위대한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구체적으로 6절 이하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영혼을 소생시키는 말씀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힘이 있다” 영혼의 소생시킨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소성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데 이러한 놀라운 변화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믿기를 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가 성경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그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믿어야 되는구나. 이렇게 살아야 되는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 합치하는 삶을 살고자 하면, 오랫동안 막혀있던 어두움들, 욕망들이 사라지면서 우리의 영혼이 되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죄와 어리석음의 사슬에서 끌러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지혜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말씀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며 살아갈 때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구나.’라는 것을 믿음을 통해 알게 되고 또 순종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즉, 욕망과 어리석음 때문에 가려졌던 것들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시고 어두움이 물러가게 해주십니다. 세 번째로, 말씀의 효능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기 때문에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안은 무엇인가 마음에 확신하는 바를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우리가 확신을 갖게 되면 그것 때문에 기뻐하게 됩니다. 그래서 깊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마음에 큰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우리들이 방황하고 흔들릴 때 우리의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생각과 마음이 잘 정리됩니다.
눈을 밝혀주는 말씀
마지막 네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결하기 때문에 눈을 밝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은 육체의 눈보다는 마음의 눈, 혹은 영혼의 눈을 가리킵니다. 육체의 눈과 마음의 눈은 다릅니다. 육체의 눈은 사물들을 보지만 마음의 눈은 그것들을 해석합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인가, 과연 이것들은 영원한 것인가, 내가 이것들은 사랑해도 되는 것인가, 내가 이것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붙들며 살아야갈 만한 가치 있는 것들인가?”하는 분별력을 줍니다.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분별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순결해져야 합니다.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게 될 때 마음이 순결해집니다. 근심과 염려에 많이 휩싸여도 아침에 일어나서 말씀을 읽으며, 설교를 들으며, 책을 읽으며, 은혜를 받으면 싹 사라집니다. “아, 그렇구나.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는구나.”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생활이 끊어지고 나면 모든 것이 뒤엉키면서 제멋대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속에서 참된 기쁨과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고통 가운데 신음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그런 순전한 마음, 온전한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게 될 때 영혼의 큰 힘과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9-12)
송이 꿀보다 단 말씀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결하고 그분의 규례가 얼마나 완전한지 앞에 이어서 설명한 후에 그 말씀에 대한 성도인 자신의 반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빈들에 있으면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할 때 그것이 바로 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꿀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지 않다면 그는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인의 특별한 경험이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꿀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곳을 향하여 있으면 꿀같이 달콤하게 느껴지지만,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가고자 하는 바와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바가 서로 다른 방향일 때는 송이 꿀처럼 달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똑같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도 어떤 때는 송이 꿀처럼 달고 또 어떤 때는 전혀 아무 맛도 없고 퍼석퍼석하고 무미건조하고 나하고는 도무지 아무상관이 없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애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뜨겁고 달아서 내 마음을 마구 움직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서 맛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울리고 또는 아무리 말씀을 대한다고 할지라고 자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대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시인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그렇게 송이 꿀처럼 달았습니까? 영혼의 깊은 침체와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로 그렇게 달지 않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말씀의 맛은 훨씬 달라집니다. 음식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배도 불러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때 세상없는 진미를 주어도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적당히 일도 하고 식욕이 당길 때는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바가지에 보리밥이랑 열무김치만 넣고 고추장으로 비비기만 해도 얼마나 맛있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은 몸으로 하기 전에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숨은 허물을 깨닫게 하심
두 번째로 시인이 “자기의 숨은 허물을 깨달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효능은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가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깊은 허물들을, 보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보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다는 시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마음속에는 무슨 소원이 있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진실한 소원이 있었기에 자기의 숨은 허물까지 보여주는 뼈아픈 말씀도 송이 꿀보다 더 달콤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회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이끌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에 대한 이끌림.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숨은 허물까지 다 들추어내는 하나님의 앞에서도 그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나에게 기쁨입니다. 그 말씀은 나에게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데려갑니다. 말씀에 기록된 대로 믿고,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사랑하면, 말씀에 기록된 대로 생활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데려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려고 하면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데려가려는 곳과 우리의 마음이 가려하는 곳 사이에 일치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프면서도 즐거운 것이 되고, 쓰면서도 달콤한 것이 되고, 쓰라리면서도 행복한 것이 됩니다. 그와 같은 역설적인 효과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만듭니다. 말씀에 거역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접하지만, 내 마음이 가고자 하는 바와 말씀이 데려가고자 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꺾지 않는 것이 바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창조의 목적으로 데리고 갑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을 향하고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연약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정말 우리의 인생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매우 연약합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것에 있어서 연약한 인간이 강해지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에 잇대어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현세적인 삶에 대한 애착을 끊고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자신이 영원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며 주님이 우리를 지상에 살게 하실 때 부어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보이지 않은 사랑은 그 계명을 지키는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체를 갖추고 드러납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매일매일 자기를 깎아서 주님의 뜻에 맞추고 자기를 허물되 주님을 세워드리면서 매일매일 한 걸음씩 주님 앞에 가까이 나가는 신자가 되어야합니다.
고범죄를 피하는 길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범죄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3-14)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해주서소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비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해 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범죄란 고의로 짓는 죄입니다. 그러니까 똑바로 살고 싶은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연약해서 저지르는 그런 종류의 죄가 아니라, 계획과 의도를 가지고 짓는 죄를 가리킵니다. 사실 우리가 짓게 되는 죄의 대부분이 고범죄입니다.
우리들도 살다보면 잘하려고 하는데 잘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다 고범죄는 아닙니다. 고범죄는 의도를 가지고 짓는 계획적인 죄입니다. 짓기 전에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짓는 순간에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짓고 난 후에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아는, 그런 종류의 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죄를 짓게 되면 죄가 자기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 죄를 거듭거듭 저지르게 되면서 점점 죄의 종이 되어갑니다. 시인이 살던 때가 대략 주전 3000년경인데, 주전 10세기에도 죄와 은혜의 지배 같은 교리들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양심을 거스르는 뚜렷한 죄를 더욱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묵상이 열납되길 바라나이다
시인이 하나님께 간절히 비는 것은 “내 입술의 모든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행동으로 짓는 죄를 경계하는 것을 넘어서 나의 모든 것이 흔들리지 않도록, 변하지 않도록 붙들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범죄가 행동으로 짓는 죄일 수도 있고 마음으로 짓는 죄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미워할 때, 그것이 고범죄입니다. 그러면 그 죄가 자기를 주장하게 되고, 같은 죄를 반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죄에 의해서 주관당하면서 그 다음에는 아주 작은 힘의 유혹에도 쉽게 흔들리고 죄로 신속히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에 고착되거나 행동으로 죄가 흘러나오기 전에 우리의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음의 묵상이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교회에서 섬길 때만 나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혼자 누워있을 때도 받으실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매순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범죄를 짓지 않습니다. 혹여 그런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말아야지’라는 결심으로 죄를 짓는 것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이고 건설적으로,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모든 묵상이 주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었으면’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것이 죄를 이기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지속적인 은혜 안에서 사는 비결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죄입니까?”라고 묻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쓰레기 같은 우리 인간을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필요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묵상하라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3-14)
고범죄를 짖지 말게 하소서
본문에서 시인은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고범죄란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죄를 말합니다. 모든 죄는 질에 있어서 동일하지만 그 죄의 성질은 각각 다릅니다. 더욱이 이 죄가 양심에 미치는 영향을 훨씬 더 큽니다. 죄인지 모르고 지었을 경우는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우리 마음을 얽어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고범죄는 얽어맵니다. 명백히 하지 말라는 것을 불순종했을 경우, 그리고 명백히 하라는 것을 불순종했을 경우로 나눠지겠지만, 어느 것이든 고의적으로 행하는 것은 마음과 영혼에 깊은 해악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로 하여금 고범죄를 짖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고범죄는 의지를 가지고 짓는 것이니, 물론 우리가 그것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도 의지가 필요하지만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제목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절실합니다.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두 번째 시인은 “이 죄가 나를 주장케 말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고범죄를 짓고 나면 이제는 그 고범죄가 장성해서 자기를 주장하지 말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술이 그렇듯이 우리의 모든 습관적 행실들이 그러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이 처음에는 생각 속에서 일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 안에 성향, 곧 본성화가 이루어집니다. 이때는 우리 의지로 좀처럼 꺾지 못합니다. 죄의 본성을 너무나 잘 알기에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미 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빨리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그때가 가장 빠른 것입니다.
시인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실어 마지막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결국 죄를 안 짓기 위해서는 고범죄든, 마음의 죄든, 우발적인 죄든 그것을 짓지 않으려는 노력만으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흙더미를 쌓으려 할 때, 이미 물이 들어오고 있는데 그 흙더미를 쥐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길을 틀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드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빕니다.
시편19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