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성소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시 46:4)
녹취자: 이배훈
저는 오늘 시편 46편 4절의 내용을 가지고 도시와 성소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분류상으로 이 시편 46편은 찬송시임에 틀림없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5절로 나오는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 강이 여러 개의 시내가 되고 하나님의 성읍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거하시는 거룩한 곳을 기쁘게 하나니.” 이 구절을 통해 몇 가지 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I. 도시는 성소
여기서 우리가 제일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도시는 성소’라는 교리입니다. 여기서 ‘성읍’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이르’()라는 단어인데 ‘성’을 말합니다. 성채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서의 성을 가리킵니다. ‘이르’는 ‘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헤비탄트’(habitant) 즉, ‘그 안에 거주하는 거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마치 ‘에레츠’()라는 단어가 ‘땅’이라는 뜻도 되고 ‘땅에 사는 인민’이라는 뜻도 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도시’ 혹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을 생각나게 하는 구절입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도시를 지존자의 성소와 동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도시가 지극히 높으신 분이 거하시는 성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습니다.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되지만 세상 속에 있고 그 교회는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만들려고 하셨던 사회의 본보기로 여기에 있는 것이고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사회를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첫 사람의 갈비뼈로 만드시고 세 번째 사람부터는 사람으로부터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결혼이 성립할 때 아담은 고백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은 결혼 주례사에 나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게 하는 열쇠 구멍입니다. 즉 아담과 하와의 고백은 부부 사이의 고백이 아니라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류가 고백해야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인류 사회였습니다. 그러한 인류 사회는 위로 하나님을 알고 옆으로 인류를 알고 그리고 아래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선과 아름다움을 인간의 섬김을 통해 온 세계에 충만하게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타락하고 죄가 들어오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성소와 이 세상은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거룩하지 않은 것들이 들어오게 되어 거룩한 것과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사회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만드셨는데 그 사회는 사랑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본 뜬 사회입니다. 그 사회가 인간의 타락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계획을 펼치시고 그 구원 계획의 완성은 온 인류가 서로를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사랑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완성이 시작이 되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의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적으로 앞당겨서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사회입니다.
어거스틴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의 상태는 네 가지로 나뉘는데, 맨 처음 타락하기 전에는 ‘죄를 지을 수 있는’(posse peccare) 상태였습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non posse non peccare) 상태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posse non peccare) 상태이고, 마지막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죄를 지을 수 없는’(non posse peccare) 상태입니다. 그 때에는 모든 죄의 요소들이 완벽하게 제거되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나라를 앞당겨 선취하지만 여전히 죄의 요소가 신자 속에도 교회에서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완성될 나라에 비하면 미리 앞당겨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교회는 불완전합니다. 여기에서 도시와 성소 사이의 구별이 생깁니다.
여기서 나오는 성소라는 말은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성막 안의 12평과 6평의 방으로 나뉘는 성소와 지성소에서의 성소를 가리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서 구별이 되어 경계를 정하신 모든 지역을 통틀어서 성소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전자의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소 안에서만 제사장이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제사 제도를 통해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인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 모두가 중보자인 제사장의 도움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성소로 들어갑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사실상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구별이 사라졌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그 곳에 우리가 들어가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힘입어 모든 사람이 주님을 뵙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시가 하나님의 성소라고 표현되고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의 구별은 이행하는 과정의 개념입니다. 결국에는 속된 곳과 거룩한 곳의 구별이 사라지고 모든 하나님의 통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으로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두고 교회가 구별된 곳으로 존재하면서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최종 완성은 인간의 노력으로 오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통해서 옵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타락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 세상이므로 교회를 포함한 모든 도시가 하나님께 바쳐진 성소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노력하여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도달할 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삶 전체를 다 드려서 교회를 포함한 모든 도시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도시가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세계관입니다. 선교지에 가면 그 신학의 편협함에 놀라게 될 때가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대학생들을 모아서 열심히 신앙 훈련을 시키고 똑똑한 학생들만 신학교로 보냅니다. 그러면 세상이 바뀌겠습니까? 그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꿈을 꾸도록 흘러가게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은혜가 필요함
두 번째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나흐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시내가 아니라 강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하르’라는 단어가 때로는 바다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많은 수량이 있는 넓은 강을 말합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앨라배마(Alabama)에 갔을 때 테네시강(Tennessee river)에 들렀습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강이 넓었습니다. 모터보트를 타고 30분을 가도 강을 건널 수 없을 만큼 넓은 강이었습니다. 그런 강을 상상해보십시오. 실로 어마어마한 강입니다. 그런 강이 대륙을 관통하더라도 모든 땅이 그 강의 혜택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군사적 위기 속에서도 세계의 강국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역사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일본과 달리 독일은 자신들의 나치 시대 만행을 인정하고 무한 책임을 지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독일로부터 이스라엘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유대인 학살 배상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돈을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그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한 가지 사업에 모두 투자하였습니다. 그것은 전 국토의 수로 사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토는 곡식을 심을 수가 없는 땅이었습니다. 거미줄처럼 만든 수로 덕분에 농사를 지을 만한 모든 곳에는 물이 다 공급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산업이 농업과 첨단 산업이 되었습니다. 첨단 산업도 농업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자, 한 강이 있습니다. 그 강이 대륙을 관통하면서 수많은 수로가 나와서 뻗어갑니다. 거미줄처럼 만들어져 모든 땅에 물이 넉넉히 대어져서 동산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개혁주의자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뇌된 개혁주의자와 체험된 개혁주의자입니다. 칼빈주의자도 두 종류가 있는데, 칼빈주의 밖에는 배운 것이 없는 칼빈주의자와 체험으로 칼빈주의자가 된 사람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런 예는 많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탁월한 수재였고 그 사람에게 있어서 칼빈주의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인간을 너무 수동적인 존재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1장 17절 말씀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체험하면서 일시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에서 칼빈주의자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저는 청교도를 너무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제 서가에는 청교도 서적이 4천권이나 있습니다. 저는 청교도와 개혁주의와 17세기 교부들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청교도를 좋아하지만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이것은 청교도를 좋아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의 칼날 같은 교리만 배우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성경적인 방식대로 예배를 드리면 거지가 되고, 죽을 수도 있는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굳이 그 길을 택하게 만들었던 위대한 힘이 단순히 사실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들은 보편 교회를 많이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존 오웬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죽기 2년 전까지 쁘아송에 사람을 파송해서 가톨릭과 마지막으로 협상합니다.
그런데도 보편교회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다 깎아내어 버리고 어느 한 청교도에 세뇌된 것처럼 개혁파 신학자들의 방대한 스펙트럼 가운데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하나만 붙들고 나머지는 모두 이단으로 생각하는 오늘날의 소위 ‘신청교도주의’(neopuritanism)는 역사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청교도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충고합니다. 청교도를 배우고자 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나 청교도가 신학을 했던 방식도 배우면서 청교도를 익히라고 말입니다. 청교도에도 율법주의적 청교도, 복음주의적 청교도,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청교도, 신비주의적 청교도 등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모든 것을 읽고 모든 것에 심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진정으로 당신을 이 시대에 목회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각자 자신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지만 은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이기는 하지만 키더민스터에서 목회한 리처드 박스터의 발자취를 보십시오. 그는 존 오웬과는 상반된 길을 걸었습니다. 존 오웬이 꽃길을 걸었다면 그는 피투성이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핍박과 시련에도 목숨을 걸고 메이플라워호를 타게 만들었던 원동력이 차가운 교리의 칼날이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역사를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신학이 무엇인지 겨우 눈을 뜨니 목회를 서서히 정리할 나이가 이르렀습니다. 신학을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가슴 속에 흘러서 그것이 설교와 목회와 인격에서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청교도들이 청교도 신앙을 유지했던 방식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큰 강이 대지를 흐르면서 지나갑니다. 거기서 수많은 수로들이 거미줄처럼 펼쳐집니다. 그래서 불모의 땅에 하나님의 은혜가 흐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리비아의 대수로 공사는 인류 역사 이래 손꼽히는 불가사의한 건축 공사였습니다. 5600km 길이를 32평의 철판을 접어서 만든 수로관을 묻어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든 물을 흐르게 한 그 역사는 온 땅을 기름진 농토로 만들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사막은 물이 없어서 사막입니다. 물만 흘러가면 사막에도 생태계가 형성됩니다. 풀들이 자라게 되고 벌레들이 모이고 새들이 모이고 짐승들이 깃들고 나무들이 자라고 물속에서는 물고기들이 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리가 다리라면 사람들이 그 다리를 지나가게 하시는 이는 성령님이시다.” 교리의 삽으로 물길을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물을 흘러가게 하는 것은 신학 그 자체가 아닙니다. 작은 신학자는 다른 사람의 논문을 보면서 태어나지만 위대한 신학자는 성경을 보면서 태어납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본다고 위대한 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통적인 것은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은혜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성령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설교와 목회와 가르침과 대화 등 모든 사역이 개울이 되게 하십시오.” “성령의 강이 섬김 구석구석에 흘러 여러분의 설교를 듣고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은혜의 기운을 느끼게 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성경 말씀이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III. 은혜는 도시를 기쁘게 함
마지막 세 번째는 은혜는 도시를 기쁘게 한다는 교리입니다. “강이 여러 개의 개울로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개혁주의와 청교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상은 일반적으로 언제나 심각하고 논쟁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한 교회의 목사님께서 저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혁주의와 청교도로 널리 알려진 모 신학교 출신 학생들을 자신들의 교회에서 교역자로 쓰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력서가 들어오면 그 신학교 출신 학생들을 먼저 배제하고 심사한다는 것입니다. 그 신학교 학생들은 논쟁적이고 불평이 많고 비평적이며 희생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가르쳐 주었던 삶의 모본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청교도를 사랑하고 개혁주의를 좋아하기 때문에 수용적이고 이해를 잘 합니다. 비평적이기 보다는 자신의 신앙으로 잘 녹여내고 양떼들을 사랑하고 헌신하며 보편 교회를 향한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과 위대한 청교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엄격하게 따르는 신학교가 많은 목회자들에게 왜 나쁜 인상을 주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쁨입니다. 목회자들은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려는 우리에게 이 세상은 때로는 고통을 주기도 하고 수많은 힘겨운 장애물을 제공합니다. 그분이 주신 양심을 따라서 목회자의 길을 걸어갈 때 많은 역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능가해서는 안 됩니다. 탁월한 개혁신앙을 반영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엄정한 교리를 얘기하던 사람들도 인간의 첫 번째 의무를 얘기할 때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그분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삶입니다. 오늘날 번창하는 산업을 보십시오. 모두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달음질칩니다. TV를 켜면 먹는 것과 오락들만 나옵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삶이 너무 시시하고 재미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억지로 사람들을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것들이 인기를 끌고 많은 돈들이 모여듭니다.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돈들이 게임 산업에 투자되고 있을까요? 사람들이 거기에서 기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에 붙잡혀 살도록 하는 것이 무서운 심판의 교리만이라면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만들 수 있을까요? 이 점이 오늘날 우리가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교회의 효과는 교회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성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행복을 알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자신도 좋아하지 않는 제품을 우울한 표정으로 팔면 누가 사겠습니까? 장사꾼들조차도 자기의 제품에 대한 분명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즐거워해야 합니다. 최근 개혁교회를 표방하는 한 교회의 이야기는 황당합니다. 교회를 옮기면 출교를 한다고 합니다. 다른 교인이 그와 전화만 하여도 치리에 들어간다고도 합니다. 그건 개혁교회가 아닙니다. 누군가 저에게 목회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목회의 이치를 인생 말년에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쓸 때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목회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빌립보서 1장 9절에서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목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성경 전체에서 이보다 명료하게 목회를 이야기하고 있는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목회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는 두 가지의 장작은 지식과 총명입니다. 목회의 최종적인 열매는 성도들이 분별력을 갖고 진실하고 허물없이 살아서 그 존재와 삶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영광을 돌리는 것이 바로 목회의 목표입니다. 사람들이 분별력이 없고 진실하지 못하고 허물이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지식과 총명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보여줄 때 사람들은 그동안 붙들고 있던 이 세상의 것들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더욱 더 탁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IV. 맺는 말
어느 교인이 부산으로 이사를 간다고 교회를 추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좋은 교회를 찾는 것도 훈련의 과정이라고 말해줬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판단 기준을 알려주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 교회 설교를 듣고 나면 매순간 새롭게 깨닫게 하는 지식이 있는지, 혹은 설교를 듣고 나면 성경을 읽고 싶어지는 지식이 있는지 여부입니다. 두 번째는 설교를 듣고 나면 감동이 오면서 예수 사랑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주님을 순전히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지 여부입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무엇으로 그런 기쁨을 얻게 될까요? 그것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죄를 꾸짖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에서 “세상이 쾌락주의에 빠지는 것은 단순한 죄가 아니라 질병입니다.” G. K. 체스터턴이라는 영국의 사상가는 두고두고 곱씹을 말을 남겼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몇 달 동안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든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모든 정신과 삶은 정당한 것을 기뻐할 때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죄가 들어와서 정당하지 않은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육욕이고 정욕입니다. 그 육욕과 정욕이 크다는 것은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곳에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는 데서 영혼의 외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7년 전쯤 어느 출판사에서 저에게 기고를 부탁했습니다. 책이름이 ‘나도 가끔은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였습니다. 한 여배우의 성적 일탈을 그려낸 자서전이었습니다. 50억 원 어치의 책이 팔리고 그 책은 검찰의 수사까지 받았습니다. 그 책을 읽고 인터넷에 글을 올렸는데 수많은 네티즌들이 저에게 욕을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이 외설적인 책을 읽고 울었다. 누가 이 여자의 갈망을 채워줄 수 있을까? 나는 이 여자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최근에 들으니 그 여배우는 결국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존 오웬이 얘기했듯이 우리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죄와 죄인을 대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죄와 죄인을 나누어서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와의 화해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버리면 죄인과의 화해는 가능합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면서 돌아서서 눈물을 흘린 사람들입니다. 특히 호세아가 그랬습니다. 죄가 잘못됐다는 것에 있어서는 우리의 견해를 굽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 죄인까지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자들이 왜 그런 도그마에 빠지게 될까요? 그것은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으면 이 기쁨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을 향한 연민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설교자가 죄를 미워하는 설교를 했으면 동일한 깊이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죄인의 현실에 긍휼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 23:34) 이것은 스데반도 반복했던 기도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쁨이 목회자 안에 있어야 합니다. 결국 이 도시는 기쁨의 근원인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은혜를 통해서만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