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시찰회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녹취자: 박은희B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 일정을 보면 고린도 지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렸던 곳이 아데네였습니다. 아데네에서 스토이고 학파들과 그리고 헤피크로스 학파 학자들과 만나서 변론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능한 변론이었지만 사실은 성과는 그리 탁월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시 아데네에서의 이 사도바울의 설교를 소위 칸택스쳘 라이제이션 혹은 미션 어코머데이션의 귀감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지만 저는 사실은 그런 해석의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깨달음을 준 사건이었다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고린도 지방에 들어올 때에 그가 심히 두려웠고 떨렸다라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결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와 및 십자가의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제 철학적인 변론들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승부를 하기로 다짐을 한 것이 고린도 지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고린도 지방은 아데네 못지않게끔 말쟁이들이 많이 모인 학문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아크로폴리스에 모여서 사람들이 각자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고 사상들을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유사한 도시인 아데네와 그리고 고린도지방에서의 접근이 사도바울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해석을 하면서 정 반대로 해석을 해서 아데네에서는 소위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변증으로 실패를 했기 때문에 여기 와서는 이제 일체 모든 철학을 끊어버리고 오직 마치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향해 제 2의 회심을 한 것처럼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 해석도 동의할 수 없는 해석입니다.
2장을 잘 읽어보면 거기에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로 묘사하면서 그 다음에 이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합니다. 이 지혜는 희랍어로 소피아고 여기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지혜를 사랑하다라고 하는 필로소피아가 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 2장에서 사도바울이 철학적인 모든 사상들을 완전히 폐기처분한 것이 아니라 이제 아데네에서 하던 유신 논증들을 유신논증으로 접근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이것을 믿어지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뿐이다 라고 하는 것을 승부하면서 오히려 거꾸로 예전에 접근방법이 귀납적이었다면 이번에는 연역적으로 접근을 하면서 이 십자가에 대한 진리를 통해서 이 모든 세상의 지혜의 미력함을 드러내 보여주고 오히려 하나님의 철학이 최고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2장에서 전개를 해나고 있습니다. 굉장히 심오한 내용들이 2장에 나옵니다.
짧은 시간에 제가 이것을 모두 설교할 수는 없지만 간략히 요약을 하자면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뭐냐 하면 우리들이 신학이 무엇인가라고 할 때에 그 정의를 마스트리트라고 하는 그 신학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신학은 어떤 면에서는 학문이고 어떤 면에서는 학문이 아닙니다. 그러한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의 목회사역이 바로 그 신학의 정의를 계승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목회의 영광은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살게 하는 것,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목회의 궁극적인 목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결국은 무엇이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성과 관련된 것이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윤리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지와 관련된 것이고 그래서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사상의 힘이고 윤리의 힘입니다. 그리고 이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목회사역이 사람을 본질적으로 바꾸는 사역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이 신학의 이상들은 우리의 목회 속에서 구체화 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신학대학교에 있는 교수를 만났는데 그 분이 목회를 하는 자기또래의 동료들과 함께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 이런 얘기들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점점 절망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자가 아니라 현재 목회에 종사 하고 있는 사람들, 특히 웬만큼 규모가 있는 교회 청빙 받아 가가지고 시달리는 그 목회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그 사람들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들이 맨 날 직면하는 현실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이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주님 앞에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우리의 목회에 있어서 본질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답을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선 목회에 가장 중요한 승부는 불신자들을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접근하는 것처럼 홍보나 판촉 같은 방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교회 불러 모으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빌하이벌스나 혹은 스델벡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야기하는 처치맨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는가? 사실은 그리스도인을 누구라고 정의하는가? 그것이 바로 그 모든 교회의 역사에서 분열의 한 관건이 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누구라고 생각해야 됩니까? 그리스도인은 단지 교회에 출석하거나 기독교문화에 젖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복음을 듣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로드쉽에 자기를 복종시킨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걸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의 질서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런 실제적인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위한 답을 사도바울은 십자가에서 찾는 것입니다. 예전에 찾았던 통합적인 세계에 대한 설명과 철학을 기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이성의 논리로부터 출발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부터 들어가는 입구를 선택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본질적인 승부를 하기위해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열렬하게 전해야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치열하게 전하는 목회자의 불붙는 마음 없이는 어떠한 목회도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성공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성공이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이 십자가의 사무친 사람들이 되어서 그래서 이 십자가를 피 묻은 십자가답게 설교할 수 있는 복음에 대한 열정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복음이 설교자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강력하게 역사하게 될 때에 그가 전파하는 설교가 그 배에서 솟아나온 생수의 강같이 사람들에게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진지한 것이지 가볍고 장난스러운 것일 수 없습니다. 만약에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복음은 장난이겠죠?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은 결국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최근에 하버드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신학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앤더버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데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제가 잘 아는 형제이고 젊었을 때에 제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서 소명을 받은 형제인데 그 형제가 이야기 한 것입니다. 하버드가 세계최고의 학문을 자랑하지만 신학부 교수들 중에서 30%만 교회에 출석하고 학생들 중에서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50%, 그중에서 진짜 자기가 볼 때에 진짜 우리기준에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또 다시 절반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모순 속에는 여러 개가 아니라 한 가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만난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신학을 배우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제대로 찾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의 부흥을 위해서 치열하게 기도하고 우리자신이 먼저 이 십자가의 사무친 사람들이 되어서 설교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대부분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원래 자유 주의자였잖습니까? 그 노파가 80이 다된 노파가 설교를 하고 나온 카이퍼 목사에게 오늘 설교 정말 은혜 받았는데 다음 주일에는 십자가를 좀 설교해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을 하니까 내가 못 할 줄 알고하고 폈는데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할 것이 자기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복음에 대한 고민이 시작이 되었고 그리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해서 이 시대의 정신에 역행해 갈 수 있는 그런 강한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여겨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결국 우리들이 구원받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로 잘 길러내야 되겠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 5장 1절에서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용서하라 또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윤리적인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이야기하는 디다케죠? 그렇죠? 이 디다케는 디다케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에치다드라는 사람이 1950년대에 40년대인가에 그 사도들의 설교와 계승과 발전이라는 책속에서 이게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의 가르침들을 케리그마와 디다케로 엄격하게 나눕니다. 그것들을 지금들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성경을 면밀히 관찰해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는 윤리적인 삶의 대한 교훈은 철저하게 케리그마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자신을 생축과 제물로 드리셨으니 너희도 형제들을 사랑하라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사도바울이 빌립보교회에 윤리적인 삶을 권면하면서 그 유장한 빌립보서 2장에 기독론을 개진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고 그래서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은 이런 것들이 다 산산이 깨져서 그래서 윤리적인 삶을 촉구하는데 사실은 장애인들에게 100미터 달리기를 칼루이스나 아니면 우사인 볼트처럼 달리라고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럴 수 없는 인간들인데.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제시되고 그렇지 않으면 윤리적인 기준을 현격히 낮춰서 그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이 자체에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하는 식으로 이런 식으로 되기 때문에 결국은 교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도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접근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그 생애를 본받으면서 사는 이 삶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하는 자기 인식 속에서 나와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결국은 성화에 대한 설교든지 윤리적인 삶이든지 모든 것이든지 한국교회에서 부실한 모든 것들은 결국은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부재라는 결론에 우리들이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인 우리들이 먼저 복음에 깊이 사로잡혀서 그래서 이 복음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