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새벽예배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5-16)
녹취자: 전인현
이 세상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은 거의 인간의 특별한 노력이 없어도 본성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젊었을 때보다도 보다 나이가 들게 되면 더 깊은 향수에 잠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금강산을 여행하던 관광객중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철조망을 이렇게 쳐져있는 그곳은 마음대로 다녀도 되고 자전거도 탈 수 있는데 그 철조망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철조망 너머로 수십 년 전에 적어도 50년 전에 살던 집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인이 철망을 붙들고 대성통곡하면서 가지는 못하더라도 내 어머니가 살아계신지 가르쳐 달라고 거기 주저앉아 대성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북 사람들도 너무 노인이 철망을 붙들고 그렇게 통곡하면서 이제 못가니까 안 되어서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부모님 돌아가신 걸로 전달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결국 보면 인간이 얼마나 고향과 결별할 수 없는 존재인가! 그래서 생물학에선 그것을 귀소본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육신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는 것은 특별한 노력이 없어도 가능하지만 영적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는 것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꼭 이 세상을 떠날 것이며 그리고 여기는 나그네의 길일뿐이고 그리고 영원한 하늘나라가 그 완전한 집인 하늘나라가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의식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면 아마 우리의 삶이 엄청나게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그 많은 앞서 언급되었던 그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특히 아주 좁게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그 믿음의 조상들이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야곱 요셉 등등의 이 믿음의 족장들이 정말 이 세상을 나그네 길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특히 아브라함 같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자신 스스로 나그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까?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이삭이나 요셉이나 모두 이 세상에서 축복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축복들이 이 세상에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은혜에서 멀어져 부패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런 축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더더욱 자신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생활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러한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이 주시는 축복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언급했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 같은 사람들도 그렇게 주님이 주신 이 세상의 많은 분깃들을 넘치도록 누리면서 산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무엇이냐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시는 축복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그러나 자기가 이 세상을 지나는 이 길은 나그네의 길일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이 세상에 빠져 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요셉의 경우를 예를 들어봅시다. 온 땅의 흉년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큰 상을 준비해서 잘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많은 음식을 주고 그리고 베냐민에게는 먹을 수 있는 것에 다섯 배나 주었습니다. 옳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칼빈이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절제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 아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나 기쁜 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것들을 성도들이 누리면서 사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본향을 잊어버릴 정도로 현세에 몰두하면서 사는 이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순례자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온전하고 평정한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이 평안함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내적인 평안함입니다. 그러나 금욕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그 궁극적인 가치는 내면의 굳음입니다. 단단해져서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감각해지는 것이 목표이지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져버릴 정도로 이 세상에 몰두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바로 이 아브라함과 이상과 야곱과 요셉에게 이어지는 이 믿음의 생애가 증거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많은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그 하늘나라에서 맛볼 그 최종적인 즐거움의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세상에서 많은 복을 주시면 주실수록 그들은 더욱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하셨는데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냐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냐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매우 기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앞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최대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성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이야기 하냐면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최종적으로 쉬게 하실 하늘나라를 그들을 위해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구원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무엇이냐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똑같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이 세상에 살기에 영원한 집이라고 고백하지 않고 나그네라 일컬음 받으면서까지 늘 그러면서까지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랬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도 모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었고 그러니까 한 때 아브라함 같은 사람들도 본향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잠시 죄악에 빠져서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리는 때가 있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고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주시는 많은 축복가운데서도 이 세상을 자기의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은 결국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시킨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사랑하고 하늘나라를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이 이 세상에서 함께해주시는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주님이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복주시면 그것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주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이 한둘입니까? 또 주님이 안주시면 안주니까 원망하는 것으로 또 주님과 멀어집니다. 은혜가 주어지면 하나님이 그런 많은 것들을 주시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또 그런 것들을 주시지 않으면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환경에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죠? 그럼 무엇의 문제입니까? 은혜의 문자입니다. 신자가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는 은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보고 환경이 어려워졌을 때 하나님과 가까웠느냐? 평안했을 때 하나님과 가까웠느냐? 물어보면 우리가 획일적으로 가난할 때 부요할 때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어떨 때입니까? 은혜가 있을 때 하나님을 사랑했고 은혜가 떨어지면 하나님과 보통 멀어지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 잠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들인가! 분초라도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쓰러지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너무 믿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주님의 품 안에 안길 때까지 그 정말 절실하게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나그네의 길이며 우리의 본향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모두 마감하도록 주님이 부르셨을 때에 그 때에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길 그 때에 진짜 쓰러지듯이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모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찬양)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자신의 꿈이나 야망 물질이나 성공 그런 것들 때문에 적어도 주님이 자신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그리고 하늘나라의 소망이 자신의 시야에서 흐려지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냐면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물이 없어서 갈한 사람도 아니고 떡이 없어서 주린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진 사람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