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수에 사무친 불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 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애 1:12-13)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직후에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 쏟아놓은 슬픈 노래입니다. 이미 왕국은 기울어졌고 하나님의 진노는 확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언약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갔을 때 주님은 심판의 채찍을 드셨습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낙관적인 신학들이 유행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지키고 시온을 보호하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예고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비참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 목적은 양식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모아두었던 자신들의 돈을 꺼내어 난리 통에서 품귀현상을 빚고 있는 양식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이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지 한번 살펴보라. 왜 너희의 마음에는 내 마음에 일어나는 것 같은 이 근심과 걱정이 없느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있는 이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자기 스스로 일으킨 염려와 걱정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근심과 걱정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보내신 위에서부터 보내어 골수에까지 사무치게 한 불이 이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신적인 불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여러 차례 경험하였고 이것은 일종의 신적인 강제력이었습니다.
시위대들에 갇혔을 때에 그는 자신의 예언을 멸시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골수에 사무쳐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아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하는 예언이 아니라 가장 싫어하고 예언을 올바르게 하면 할수록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해야 하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은 예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던 때에 선지자들은 울며 금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고 걱정이 없다고 하는 때에 선지자들은 안타까워하며 근심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과 그리고 신학생들이 한국에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 다 죽어가는 교회들을 돌아보고 나서 우리 한국교회는 정말 살아있다고 그렇게 자부합니다. 물론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쇠퇴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그 유럽에 있는 교회들보다 훨씬 좋은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탄탄한 신학적인 전통과 광대한 유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몽주의의 쓰나미를 맞고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폭풍을 만나면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가 견뎠습니다. 만약에 이와 같은 추세로 가게 된다면 그래서 우리나라가 이러한 현대사상에 더 깊이 휩쓸리게 된다면 방대한 유산도 없고 신학적인 깊이도 없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쉽게 세속화될까에 대해서 저는 오히려 더 많이 염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제 것 한국교회에 부어주셨던 큰 축복들 때문에 교만하지 말고 오히려 주님이 바라보시는 것과 같은 동일한 시각으로 오늘날 우리의 역사와 현실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다수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같은 시각에서 한시대의 교회와 그리고 영적인 현실을 돌아보는 것,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수와 소수의 견해가 엇갈리는 것에 관해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 사람이 다수이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이 다수인 것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저에게 묻습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의 조국교회의 영적인 현실이 이렇게 어둡다면 우리는 어디부터 시작을 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저는 항상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여러 방면에서 많은 노력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단 한명 혹은 두 명 혹은 세 사람이라도 문제없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놓고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상태와 또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교회의 영적인 현실을 비교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차이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겸비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 속에서 교회의 현실을 놓고 빌면 하나님은 점점 더 기도하는 사람 마음속에 위로부터 불을 보내실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목회의 야망이나 신학적인 야심에서 비롯된 열정과 하나님이 순수하게 그의 마음속에 말씀을 통해 불어넣어 주시는 불은 그 불의 종류가 다릅니다. 야망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지만 자기를 실현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게 만들지만 주님이 보내신 골수에 사무친 불은 자기를 버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잊히고 우리가 한 일은 많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도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의 시선을 집중하고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작은 헌신이라도 사용하셔서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것입니다 조나난 에드워즈가 일평생 두 가지 기도의 제목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교회의 영적인 번영이었고 또 하나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똑같은 두 기도의 제목을 계승하기 위해서 오늘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학문적인 실력이나 그가 가지고 있는 아카데미즘을 사람들에게 보여 개인이 인정받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현실을 아파하고 어떻게 하던지 이렇게 예루살렘이 멸망했는데도 하나님의 나라가 멸망한 것에 대한 근심이 없이 양식이나 구하러 다니는 이 무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꾸짖고 경계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깨우게 하기 위하여 또 우리가 깨어나기 위하여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없는 개혁신학은 사실상 죽은 개혁신학입니다.
저는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개혁신학자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많은 개혁신학자들을 만나지만 그 많은 개혁 신학자들 중 이렇게 깊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미 현대정신은 기도의 정신을 기각해버렸습니다. 심지어 유럽에 있는 어느 학자는 개혁신학자임이 분명한데도 한국에 와서 여러 달 동안 머물면서 한국교회에 대해서 마음에 걱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것은 너무 많이 기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글을 읽고 비행기 안에서 막 웃었습니다. 제 마음에는 한국 교회가 너무 기도하지 않아서 근심이 큰데 그 분은 너무 많이 기도해서 걱정한다고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해서 나온 충고이겠지만 우리는 정말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점점 더 우리는 기도에서 멀어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개혁신학을 공부해도 항상 피상적으로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결국은 그 지식이 고린도전서 8장에서 사도바울이 경고한 것 같이 우리를 교만 하게 하는데 사용되고 있지 않은지 깊이 경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의 추구는 개혁신학적 삶을 살게 하기 위한 도구이지 개혁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복음주의 목에 칼을 들여대기 위한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우리가 전인적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그분의 마음을 부여받은 골수에 사무친 불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다수이고 대중적이던 때는 없었습니다. 언제나 어두움은 일반적이고 빛은 소수였습니다. 어두움은 항상 많았고 크고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빛과 진리는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더 큰 교회 더 많은 회중. 더 많은 교회의 교단, 큰 정치적인 힘, 이런 모든 것들은 바벨론의 정신이지 예루살렘의 정신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규모가 하나님의 나라를 좌우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된 나라로 뽑으신 것은 커다란 실수였습니다. 오히려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은 로마나 중국을 선민으로 택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캄캄한 밤바다에 반짝거리는 등대하나가 폭풍을 만난 수많은 배들을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는 것처럼 진리의 힘은 그렇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날 사회가 너무 세속화되어가고 규범을 상실해 가고 포스트모더니즘화 되어가는 현실에 대해서 나는 여러분과 함께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운 법이고 칠흑 같은 밤이 깊어지면 등대의 불빛은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순수한 신앙을 굳게 지키고 주님의 마음을 물려받은 사람들로서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골수에 사무친 불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들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세미나가 여러분에게 이런 불을 안겨주는데 도움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