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016년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 / 새벽)
설교기간|2016년 8월 14일 - 16일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1 (2016.8.14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첫째날)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2016년 9월 1일
목 차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 (2016.8.15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둘째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3 (2016.8.16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셋째날)
1. 그리스도와 성육신적 연합(히 1:3) 2016.8.14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1
2.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골 2:9) 2016.8.15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15
3.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벧후 1:4) 2016.8.16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30
2016.08.15. 장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첫째날
4. 십자가의 감화(요 19:38)) 2016.8.15 장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46
5. 십자가로 돌아온 사람(요 19:26-27) 2016.8.16 장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50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1 (2016.8.14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첫째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 (2016.8.15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둘째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3 (2016.8.16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셋째날)
2016.08.15. 장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첫째날
2016.08.16 장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둘째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1) 2016.8.14 수련회 저녁 집회1
<그리스도와 성육신적 연합>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3)
I. 본문해설
- 말씀으로 구원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심
-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
- “만유의 상속자”, “창조의 중보자”
- 상속자와 창조의 중보자되심의 의미
- 그보다 중요함은 인간과의 관계임
- 성육신 안에서 인간과 새로운 관계
- “하나님 영광의 광채, 본체의 형상”
a. 만물을 붙듦 b. 죄 정결케 함 c. 좌정
II.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됨
- 하나님을 닮은 영혼과 정신의 특성
- 만물을 통치: 하나님+인간+자연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 창조됨
- 하나님의 형상: 넓은 의미+좁은 의미
- 성육신은 구속 계획과 관련됨
a. 그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b. 성육신: 인간과 연합-우주 통치
c. 본체의 형상: 지식+의+거룩함
III. 성육신적 연합
-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간의 연합됨
a.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b.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교회와 연합
c. 우리를 거룩케 하심으로 온전한 연합
-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길이 열림
- 사람되심: 인간 하나님처럼 되게
A. 참 사람으로 오심
- 인간의 모든 고통, 슬픔, 시험을 겪음
-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심”(히5:8)
히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인간에게 참 사람+하나님을 보이심
- 인간을 자신과 연합: God의 통치 구현
B. 하나님을 닮을 길 여심
- 성육신 안에서 온 인류와 연합하심
- 성육신은 단순히 속죄의 수단이 아님
- 그분 안에 우리를 거하게 하셔서 존귀케 하심
-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존엄
- 타락으로 형상의 존귀한 부분을 상실함
- 인간의 악함+행복 추구+형상 파괴
- 주님 형상의 회복을 위해 성육신하심
- 성육신적 연합과 주님의 성품에 참여함
IV. 적용과 결론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임
- 그 자체로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
- but 성육신 통해⇒인간과 하나됨
a. 성육신 안에 온 인류와 연합하심
b. 인성 안에서 교회를 통해 신자와 연합하심
- 우리가 영적으로 누구인지 알라!
- 그리스도와 연합된 운명으로 살자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2) 2016.8.15 수련회 저녁 집회2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골2:19)
I. 본문해설
- 로마 감옥의 투옥 중 62년경 기록됨
- 옥중 서신+에베소, 빌립보, 빌레몬서
- 골로새 교회 침투한 이단 반박이 목적임
-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머리되심을 변증
- 성육신적 연합과 신비적 연합의 차이
II.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
-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요15:5)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참감람나무와 접붙임(롬11:17)
롬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 신랑과 신부의 비유(마25:1)
마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 머리와 몸의 비유(엡1:22)
엡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 “생명, 연합, 사랑, 질서” 의미함
III.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A. 중생과 칭의의 연합
-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예정함
- 그 예정이 중생과 칭의로써 실현됨
- 은총에 대한 반응인 믿음으로써 됨
B.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
-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이기에
-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방식
- 그리스도의 신성과의 동일시 아님
- 전기의 통과와 인입선의 시공 비유
- 삼위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들어감
- 새로운 성향 도입과 새 자원의 공급
- 새로운 자원을 힘 입는 새로운 생활
IV. 적용과 결론
-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라
- 우리는 그분께 접붙여진 예수의 몸이다
- 그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살게 하심
- 신령한 자원이 없던 때를 기억하라
- 그 연합 안에서 생명과 사랑을 누리라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3) 2016.8.16 수련회 저녁 집회3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후1:4)
I. 본문해설
II. 그리스도의 인성과 교회의 연합
- 인성, 영혼+육신 통해 교회와 연합
- 성육신 안에서 인성이 하나님 되심
- 그 안에서 인간 하나님처럼 되게 함
- 그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 안에 있음
-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함
III. 신의 성품에 참여함
- 성육신적 연합+신비적 연합 비교
- 신비적 연합+영적 연합을 비교함
A. “참여함”
- 그리스도 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
-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삼위 관계
- “참여”는 본질적인 섞임 아닌 본받음
-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음
B. 영적 연합의 성질
- 칭의를 통해 접붙여진 연합의 발전
- 신비적 연합:
a. 이성적인 이해를 초월함
b. 연합의 결과가 신비적임
1. 본질상 그리스도 인성과의 연합
2. 신자의 성화와 영화를 포함함
3. 성령으로써 이루어짐
4. 영적 자원의 증진에 관련됨
5. 인간성의 완성을 목표로 함
IV. 연합 안에서의 삶
- 순종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함
- 원리적 연합을 넘어 실제적 연합으로
A. 예수 몸에 접붙임
- 연합 안에서 하늘의 자원을 공급 받음
-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실제로 연합
a. 그리스도와의 관계
b. 사람들과의 관계
- 실제적으로 연합되게 하시는 주님
- 연합의 궁극적 목적은 창조 세계 통치
B.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하심
- 하나님을 닮은 지성과 의지로써
- 지혜로 이해하고 사랑으로 통치함
- 그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연합을 구현함
- 온전한 인간됨+온전한 지체가 됨
- 이미 온 천국⇔도래할 천국: 성화
- 영원한 천국: 영화로 완성하심
- 그때까지 은혜로 죄를 이기며 생활
- 지성의 밝은 빛+사랑이 감화로써
- 성령 충만은 그 온전한 교통의 선취임
- 주의 몸의 일부로 살며 사람이 되어 감
- 불완전한 교회+온전한 삶의 이상
- 끊임 없는 은혜 생활이 꼭 필요함
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1 (2016.8.14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첫째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 (2016.8.15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둘째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3 (2016.8.16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셋째날)
2016.08.15. 장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첫째날
2016.08.16 장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둘째날
그리스도와 성육신적 연합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이번 여름수련회의 주제는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히브리서는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을 붙들어 주기 위해서 누군가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사도 바울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인물들이 거론되지만 아직 확실하게 이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통일된 학설을 내놓지는 못합니다. 이 편지를 받을 때 아마도 히브리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가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되니까 기독교신앙을 포기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속출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 기자가 그런 사람들을 격려하고 붙들어주기 위해서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편지를 쓴 사람은 히브리인으로서 구약의 제사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런 점에서 그는 유대인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상당한 복음의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특히 구약의 제사제도와 신약의 구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사건을 구약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얼핏 보기에도 이 히브리서의 도입부는 사도 바울이 쓴 모든 편지들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수신자에 대한 인사, 축복의 기도 이런 것들이 모두 생략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의문을 갖게 합니다.
아무튼 이 히브리서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 그분의 속죄의 완전성에 대해서 변증하는데 거의 대부분을 할애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의 사건에 대한 탁월한 신학적인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될 때에 중보자의 역할을 하였고 그래서 이 온 세계를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계를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성자는 원래 하나님이시고 또 하나님의 본체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었고 그 본체의 형상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모든 세계의 만물을 붙드시고 인류를 붙드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바로 그 모든 인류 중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게 될 그 영광의 광채, 하나님의 형상을 참으로 본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로 만드시는 것이 최초의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창세기 1장으로 넘어가보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십니다. 한 사람을 흙으로 만들어 아담을 창조하셨고 두 번째 사람은 그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그 살과 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둘은 최초의 인류의 조상이 되었고 인류의 모든 신은 바로 그 두 사람을 통하여 육신의 살과 뼈를 물려받으며 후손들이 번성한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됨
자,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을 대부분의 개혁신학자들은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 반복된 것으로 보고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해로 통합합니다. 그러면 그 형상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형상이라는 것은 그냥 사물의 모양을 의미하거나 플라톤 철학에서 질료를 주장하는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닮은 영혼과 성품의 특성 즉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닮은 영혼의 특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형상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인간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독자적으로 느끼고 개별적으로 판단하고 그래서 얼굴 모양은 비슷해도 각자가 자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수많은 인류가 존재했지만 누구도 똑같이 창조하지 않으셨고 심지어 한 엄마에게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거의 같은 시간에 태어나서 모양이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을지라도 그 아이는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형제가 혹은 오누이가 혹은 자매가 완전히 구별된 독자적인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님 닮은 성품을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위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옆으로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을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이해하면서 그러면서 그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자기를 사람으로 지으신 뜻에 맞게끔 이 모든 세상의 질서를 다스리고 또 가꾸어갈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인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위대한 특성 중의 하나는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모든 것이 풍족해도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인간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고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가지고 의미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되물으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 결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형상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 이외의 모든 피조물을 통틀어서 하나님을 가장 닮은 피조물이 인간이고 인간 중에서 하나님을 가장 닮은 것이 인간의 영혼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해하면서 그 하나님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삼아서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계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여 피조 모든 만물들을 창조의 목적 안에서 존재하고 살아가도록 만들고 우리 인간들이 바로 그렇게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한 가족처럼 공동체로 살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름답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맨 처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또 다른 사람을 흙으로 빚지 아니하시고 아담의 몸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그 살과 뼈로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이끌어 올 때에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두 남녀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서 모든 인류가 어떤 관계가 되어야할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담과 하와가 아이를 낳았을 것이고 그 아이를 낳았을 때도 엄마가 아빠는 똑같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동생이 태어났을 때도 똑같이 세 식구가 똑같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을 것이고 그 아이들이 성장하면서도 자기의 가족을 향해 똑같이 고백했을 것입니다. 이런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낳으면 아무리 철이 없고 까불고 돌아다니다가도 엄마가 되어서 아이를 품에 안고 보면 이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주어야하겠다고 하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이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물론 살다가보면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이 자식 저 자식하며 욕도 하고 때리고 돈도 안주고 구박도 해서 아이들은 상처를 받고 엄마 아빠를 미워하고 이러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몇 달 전인가 중국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사파리를 들어간 것입니다. 중국 안에 있는 사파리였습니다. 당연히 짐승들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뒤에 친정엄마가 탔는데 남편과 아내가 싸웠답니다. 싸우니까 이 여성이 화가 나니까 아무것도 안보이니까 남편이 꼴 보기 싫으니까 내려서 문을 닫았습니다. 내렸는데 숲에서 호랑이가 있다가 달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를 물고 끌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남편과 친정엄마가 대조가 된 것입니다. 남편은 내려서 ‘이놈의 호랑이 이놈의 호랑이’ 하다가 들어왔습니다. 서너 걸음 가서 이런 시늉을 하더니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벌써 내렸는데 사위가 들어오니까 엄마가 뛰어가서 호랑이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결국은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관심이 딸에게서 엄마에게 쏠리는 바람에 엄마는 죽고 딸은 중상을 입고 살아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성입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남편도 똑같았을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는 남편들입니다.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는 온 인류가 하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건설하시려고 했던 인류사회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그 수십억의 사람들이 각기 서로 다른 각각의 특점들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그러면 공부 잘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음악, 예술, 문화 건축, 과학 모든 것에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으니까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쓰이도록 흘러갈 것입니다. 물론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자본주의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그렇지만 어쨌든 어떤 재물이 있었더라면 없는 사람에게 흘러들어갈 것입니다. 그런 사회가 되기를 꿈꾸면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지만 인간들이 그런 사회를 건설해나가는 것은 ‘되라’ 그러지 않고 당신 닮은 독특한 이성과 지성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를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회가 되게끔 만드셔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런 유기적인 연결을 이루면서 아주 아름답게 이 지구를 가꾸어 나가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그리워했던 모습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자기의 독특한 형상을 따라 우리 인간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런 구도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이렇게 이 세상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스리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서 그런 하나님의 형상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주신 것이지만 동시에 이런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사람은 다른 모든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과 구별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닮은 형상을 가진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존재 그 자체로 존엄성이 있는 가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인권을 존중받아야하는 그런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러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의 존귀한 피조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하나님이 형상을 이렇게 만들어서 인간에게 휙 던져주신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인간과 끊임없이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마르틴 루터 같은 신학자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절망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다 망가진 이 더러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라는 칭의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덕의 근원을 칭의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진짜 의로워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의롭지 않은데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서 그 의를 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는 것이니까 이럴 때에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적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인간이 태어났지만 타락하면서 인간은 이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완전히 잃어버린 그 형상을 칭의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자, 그렇게 되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다시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타락했을 때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였는데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존재였는데 타락과 함께 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고 그래서 완전히 추하고 더러운 인간이 되었는데 그래서 그리스도 때문에 다시 칭의를 받음으로써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렸다고 할 때에 우리에게 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은 이 세상의 짐승과 구별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을 아예 갖지 않은 다른 짐승들과 인간이 비교할 때 인간이 더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아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어려운 난점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의 많은 종교 개혁가들은 마르틴 루터의 이러한 견해가 너무 극단적인 것이라고 보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뭔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신 존재론적인 형상이 있고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중생과 함께 새로워진 존재론적인 측면이 같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은 그가 창조하여 뭔가 주신 존재론적인 개념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관계론적인 개념이 함께 고려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을 파악해야한다고 바로잡게 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느냐하면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비록 타락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어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역시 인간은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렸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보아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어도 여전히 인간으로 태어나면 선과 악, 도덕, 인간의 도리, 정의 이런 것들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고 또 아름다움과 추함 같은 것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모든 사물들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 사이의 모든 관계와 법칙도 함께 창조하시고 바로 그 관계와 법칙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자께서 로고스로 실제 계심으로써 모든 만물들을 붙들고 계신 이치가 법칙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을 비록 구원받지 못한 상태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이성을 사용해서 그 법칙들을 발견해가는 과정 그 자체가 사실은 그런 로고스를 파악해가는 과정입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여전히 남겨두신 것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형상은 자연적으로는 아무리 탁월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우리의 이성으로 깨닫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불완전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타락하고 그리고 여전히 구원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가 설령 동물보다 악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서 존중받아야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여기에서 설득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 사상은 사실은 이슬람이나 사회주의 국가,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위험한 사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슬람이 막 몰려온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이슬람 포비아 라고 해서 이슬람에 대해서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정 반대입니다. 한 십 년 전에 어느 선교사를 만났는데 그분의 이야기는 자신들이 파악하기는 이란에서만 매주 3,000교회가 주일날 모이고 있답니다. 그 사람들은 금요일이 안식일인데 왜냐하면 지금 말씀드리는 이 교리가 이 사상이 마약처럼 퍼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슬람이라는 말 자체가 복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자비라든지 사랑이든지의 개념이 없습니다. 복종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면 특히 이슬람 사회에서 짓밟히는 여성들의 인권 같은 것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 선교사가 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코란의 교리에 의해서 이방여자들은 성적으로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외국인이 이슬람 국가에서 특히 여자가 비자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내주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 썼는데도 얼굴이 다 보이니까 이방여자인줄 알았는데 그 여자를 범하기 위해서 남자들이 막 따라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범할 테니 허락을 하라.’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명예살인이라고 해서 누가 야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죽였다고 해도 벌금 몇 푼만 내고 풀려나고 죄를 묻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여성들은 운전도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선택받은 것입니다. 왜 아멘을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섞여서 수련회에 함께 참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더군다나 요즘은 남자들이 눈치 보기 바쁜 세상입니다.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물건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회에 이런 교리는 얼마나 무섭습니까?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아직까지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국가들이 무서워하는 사상이 바로 이런 사상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동등한 존귀하고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이 너무 무서운 사상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한동안 도무지 인간이 왜 그렇게 존귀한 존재인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이 하나님의 형상을 공부하면서 ‘아,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구나!’ 잡히면 사형인데 계속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왜?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하고 존엄하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 대접받으며 살고 싶어 하고, 그 모든 하나님 이의의 다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자하는 그런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각입니다. 그런 인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일생을 사는 동안에 한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눈뜨는 과정이 신앙이 성숙해져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이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번 수련회의 본론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서 이제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아주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주 희미했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본래 잃어버렸던 창조의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려는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이 수련회 3일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소개하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류가 그리스도인인 신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되는가 하는 것을 세 가지 차원에서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성육신적 연합입니다. 두 번째가 신비적 연합이고 세 번째가 영적 연합입니다. 우선 개요를 말씀드리면 성육신적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모든 인류와 연합을 가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냥 형식적으로 이론적으로 연합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분은 우리와 연합될 수 없는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인성은 이후로도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의 인성과 연합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육신적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는 그렇지만 그런 인성적인 연합을 이루었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그분께로부터 오는 그 충만한 불멸의 생명 그리고 그 충만한 사랑을 힘입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신 후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또 하나의 연합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한 사람씩 한사람씩 구원되어 영적인 몸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짐으로써 그가 이제 비로소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받으면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연합은 마지막 날 말씀드릴 것인데 이것은 그렇게 예수의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아도 여전히 불완전한 이 세상에 살면서 죄와 유혹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생명이 어떤 때는 충만하게, 어떤 때는 매우 적게 흐릅니다. 그래서 곤고한 때도 있고 성령이 충만한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모두 부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에는 이런 모든 죄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래서 조금도 막힘이 없는 그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되어 이전에 두 단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보다 완전한 연합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영적인 연합이라고 합니다.
이 문제가 왜 이렇게 중요하냐 하면 우리들이 인생에서 겪는 대부분의 많은 문제들은 자원의 문제입니다. 그런 자원이 우리들에게 부족하기 때문에 그 결핍으로 말미암아서 고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건강하면 질병에 걸릴 수 없습니다. 또 몸이 상한다고 할지라도 몸이 건강하면 금방 회복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런 건강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과 사랑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에 사실은 질병에 걸리고 그리고 무엇인가 극복할 수 있는 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둘째 날과 셋째 날에 걸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Ⅲ. 성육신적 연합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조금 생소할지 모르겠는데 언젠가 여러분에게 이 교리를 가르쳐야겠다고 계속 생각을 하다가 이번 수련회로 잡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적 연합입니다. 이 성육신적 연합을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예수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삼위일체 중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영원한 삼위일체의 2위였는데 영원하신 그분이 바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할 때 중보자가 되셔서 그 성자를 통하여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창조된 세계가 인간의 죄에 의해서 망가졌을 때 그 성자에 의해서 세계가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계가 창조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모든 세계를 회복시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을 붙들고 계시고 타락했을 때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넓게는 이 모든 세계를 다시 완전하게 회복시킬 때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인간을 멀리 떠난 인간들을 구속시킬 때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모든 일을 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세계를 구속하실 계획을 인간이 타락한 즉시부터 하나님이 계시해 주셨는데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원래 신성밖에 없으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을 입으실 때 인성을 취하십니다. 인성은 단순히 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두 성품이 결합하여 한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시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의 성품인 신성과 사람의 성품인 인성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때 가지셨던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인성과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그냥 인성을 가진 인간인데 그리스도는 신성을 가진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오셔서 그래서 당신의 인성과 모든 인류의 인성과 연합을 가지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이제 바로 그런 연합된 인성 안에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구체적으로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와 상관없던 우리와 접붙여져서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그 예수의 몸에 일부가 될 때에 사실은 하나님과 예수와 아무 상관없었던 우리가 접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인성 안에서 이미 연합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인성 안에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에 접붙인바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루신 인성의 연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아주 분명한 아주 중요한 구속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A. 참 사람으로 오심
이러한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참 사람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고 슬픔을 당하셨고 시험도 겪으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참 사람이 되어서 오셨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우리 모두는 이미 이상적인 인간상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참다운 인간상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또한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 즉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큰 일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속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지만 죽으실 수 있었고 죽으셔야지 만 우리의 죄를 속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 분으로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잊지말아야할 사실은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것은 오직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보다도 더 원대한 뜻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완전한 단절이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여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모든 인류의 인간 본성과 당신 자신의 인성이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신성과는 연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성과는 연합되어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교도를 바라보는 마음도 그들이 진리 가운데 있지 못한 것은 매우 가슴 아픔 것이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은 매우 나쁜 것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그러한 이교도들을 바라보시는 그 마음이 이렇게 원한과 종교적인 복수의 감정으로 가득한 죄 많은 인류의 내면의 세계와는 달랐을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실제로 당신이 보여주신 많은 행동과 그리고 당신이 보여주신 많은 모본은 이런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도 불결하다고 내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를 정죄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위협으로부터 그 여자를 보호하셔서 다시는 가서 죄를 범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쓰레기처럼 버림받은 창녀와 기생들 그리고 세리와 같은 사람들과 가까이 계시면서 최초로 그 사람들을 영혼이라고 생각하고 품으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단지 하나님을 닮은 형상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그리고 존엄한 존재인지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모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수도 사랑하라는 계명을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그런 성육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된 한 인간으로 인류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해야할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하나의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우리는 여태까지 몸의 개념을 항상 교회까지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는 바로 그런 신비적인 연합체이고 교회밖에 더 큰 연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인류의 연합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듣고 보면 예수님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계명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거기서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것을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도 말씀해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원래 유대인들은 상종을 안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이웃이 누구인가를 설명해 주었는데 결론은 너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은 너의 이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가 이웃이라는 정신을 실현해야 할 사람은 너를 필요로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혈통적 이스라엘의 개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의미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신학적으로는 이렇게 연결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온 인류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오늘 성경을 펼쳐서 처음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처음 듣는 이야기겠지만 존 칼빈을 비롯한 많은 개혁자들이 이미 세워놓은 교리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혼란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 안에서 교회의 성도들이 되어서 이루는 이 연합이 이것이 다 인줄 알았는데 이것 밖에 그런 연합이 있었다니 그것은 어떤 것일까? 그래서 최근에 읽은 책에서 어떤 신학자가 이 두 연합을 아주 기가 막힌 비유로 설명을 했는데 재미있어서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온 인류가 성육신적 연합을 가졌다고 해서 그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비유를 하자면 전기가 전혀 없던 마을에 전봇대가 들어갑니다. 그러면 전기가 갈 골목을 통과합니다. 분명히 그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전기가 지나간다는 이유 때문에만 그 전기의 혜택을 받아서 등잔불을 끄고 밝은 전구의 빛을 받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요리를 하거나 난방을 하거나 냉방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나가는 전기를 끌어다가 자기 집에 끌어들이고 그것으로써 전구를 달고, 인덕션 렌지를 달고, 냉방기를 달고, 난방기를 달았을 때 그것을 실제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설명하기를 성육신적 연합은 바로 그 마을로 전선이 지나가는 것이고 그리고 신비적 연합은 그 전선을 끌어다가 구체적으로 자신의 가정에 그 전기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해하기는 쉬울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와 성육신적인 연합 이것은 그러니까 개념적으로만 연합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 자신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의 인성과 연합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합, 이러한 성육신적인 연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여기도록 그렇게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치를 깨닫고 나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할 때 이것이 두 개의 계명이 아니라 하나의 계명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는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랑은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인간을 향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을 많이 사랑했으니까 이제는 사람을 사랑하자는 식의 논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그 자체는 처음부터 명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온 인류가 당신의 인성 안에서 연합이 되어 예수의 한 몸이 되었다는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선교는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과 하나 된 모든 인류의 아픈 부분을 보시면서 그들을 치료하라고 보내시는 당신의 몸에 대한 애정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선교를 하든 가르치던 무엇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한 인간으로서의 진실한 사랑 그것이 인류사회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B. 하나님을 닮을 길 여심
바로 그런 연합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을 길을 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 안에서 당신이 부여받은 인간성을 가지고 모든 인간의 인간성과 연합을 이루심으로써 당신은 하나님이시지만 여전히 인간과 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으로서 그들을 당신의 몸처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단순히 속죄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는 속죄이지만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온 인류와 인성의 연합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이 아무리 망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와 인성의 연합을 이루고 있는 그렇기 때문에 타락했으나, 회개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존귀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자,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인간에 관한 일들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제껏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사는 적은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매우 소극적이고 이기적이고 그리고 자기 평안을 추구하는 종교인들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사랑하고 아주 엄밀하게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냐?’ ‘밖에 있는 사람이냐?’ 나누고 ‘저 사람들과는 적대적인 영적으로 빛의 자식과 어둠의 자식으로 대치하고 있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와 사랑의 자녀의 대치이며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이미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끼리만 나누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우리는 암암리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워낙 사랑이 없으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관심 없지만 교회밖에 일어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신경을 끄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와 관련된 일도 아닌데 어디에 연루되고 휘말리는 것이 골치 아프고 싫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위로와 경건에서 주는 기쁨을 그것을 최종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이 세상에 빛으로 부르신 그 의도와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실 때 그 동기가 바로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백성들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셨던 것처럼 또한 예수님은 바로 이 모든 인류를 모두 그런 마음으로 보십니다. 예수님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온 인류를 생각하신다는 우주적인 급격한 확산이 성령 강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놓고 보면 선교의 위대한 역사들은 모두 그렇게 ‘원래 교회 밖에 있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그들도 예수님이 사랑하는 한 몸인데 그렇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없어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가지고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속의 사랑이 교회를 넘어서 이 세상을 향하여 확장되어야합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인권 탄압, 이것이 결국은 우리의 몸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성의 연합을 이룬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몸에 대한 탄압이고 그들이 존엄성을 짓밟히고 그렇게 인간성이 파괴되어 가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간성을 향한 도전이고 파괴라는 의식을 가져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을 인류애적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선교의 동기이고 기도의 동기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십시오.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인권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이슬람의 어느 여학교에서 불이 났습니다. 여학생들이 35명인가 38명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왜? 불이 나니까 아이들이 체육복 차림으로 뛰어나오는 것입니다. 종교경찰이 불타는 교실 앞에서 지키고 있으면서 빨리 가서 쓰고 나오라고 못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얘들이 가서 그것을 뒤집어쓰고 나오려다가 다 타서 죽었습니다. 책임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교장선생님이 나와서 ‘저 아이들은 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애들이다. 그렇지만 이슬람 여성으로서 아무 것도 쓰지 않은 모습으로 나와서 수치를 당하고 종교의 명예를 더럽히느니 차라리 저기서 불타죽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 눈물을 흘리는데 이것은 악어의 눈물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명예입니까? 누구를 위한 영광입니까? 불에 타서 죽는 인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이렇게 해놓고 우리의 근대사를 보면 군사정권 독재치하에서 자행된 엄청난 만행들, 민주인사에 대한 투옥과 감금, 암살, 그리고 남북한이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로 대립하면서 일어났던 그 끔찍한 살육의 현실들 이런 모든 것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지를 깨달아야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분명히 법이 그렇지 않은데 힘이 없기 때문에 그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다양한 형태로 인권이 짓밟히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폭압적인 사회의 현실입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 중에는 가해자도 있을 것이고 피해자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진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스토리가 무엇이냐 하면 탈북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들어가 보면 탈북한 사람들이 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가는 경우는 몰래 도망간 시점부터 혹은 속아서 팔려가는 그 순간부터 인권은 없습니다. 설교시간에 모두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만행이 자행됩니다. 같은 탈북동포에 의해서 혹은 거기 조선족에 의해서 혹은 중국 사람들에 의해서 끔찍한 만행이 자행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피해자입니까? 우리는 월남에 가서 한 짓이 똑같은 그런 짓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이미 40세가 되었을 텐데 그 엄청난 월남에서 낳은 전쟁고아들입니다. 한국 남자들이 가서 씨를 뿌려 낳은 아이들 말입니다. 필리핀에 가서도 그런 짓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네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월남전에 가서 그렇게 많은 병사들이 죽고 아무 상관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양민까지 학살한 역사들이 지금 계속 들춰져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역사를 인식하면서 일본사람들이 36년 동안 우리를 비참하게 폭압한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사는 그것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는 끝없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입니다. 일본사람들이 되뇌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망해서 갈 때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행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도 할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역사의 현실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이해를 가져야합니까? 저나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금 가난한 나라에서 몰래 밀입국해서 와서 불법취업자로 한국에서 근로하는 사람들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실제로 그들이 상당부분 우범자이기도 합니다. 안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깔보지 않습니까? 마치 옛날에 미국사람에게 ‘Give me chocolate’ 하면서 새까만 애들이 쫒아오고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가는 지지리 가나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저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아주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문화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정말 자기의 자녀들에게 그런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고 그 아이들을 학교에서 만날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그 아이들을 대해야하는지를 가르치는 부모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부모는 정말 다문화에 대해서 성경에 입각한 하나님의 형상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목사이고 그리고 제가 목회를 이렇게 하고 있고 제가 일평생 어떤 한 학문을 깊이 공부해서 세계적인 학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동네에서는 학자입니다. 특히 관양동에서는 말입니다. 여러분보다 많이 압니다. 누구와도 이야기를 해도 무시당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기네들은 많이 알아도 나는 넓게 알아서 내가 이야기를 해도 자기네는 모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무리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대단한 사람을 만나도 그 앞에서 주눅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교만해본적도 없지만 주눅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해서 내가 틀려도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시골교회의 목회자입니다. 촌교회의 목회자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그리고 삽니다. 그런대도 어떤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Respect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백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나를 낮게 보는 때가 느껴지는 때가 있는데 하물며 제3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물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불신자들이 아니니까 노골적으로야 못하지만 사람들은 느낍니다. 그런데 한참 세월이 지난 다음에는 이야기합니다. 그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친구가 되었으니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중국선교를 하고 제3세계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많이 배웁니다. 우리는 뭔가 위에서 하사하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지는데 정말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로서 그리고 너와 내가 모두 하나님 앞에 정말 소중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우리 함께 피부의 색깔과 문화를 뛰어넘어서 서로 사랑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도록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도 안 되는데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다문화 문제는 더더욱 심각한데 이제 조금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많은 무슬림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무슬림이 이렇게 급격하게 늘어나게 된 것은 뭐냐 하면 아내를 4명 거느릴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3명씩만 낳으면 12명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둘이 둘도 잘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이 자기네의 씨로 전 세계를 덮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선교적인 모토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들이 몰려옵니다. 그것은 싫으나 좋으나 몰려옵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이슬람 신앙으로 똘똘 무장해서 들어온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이 옵니다. 그리고 점점 이주노동자들도 많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삽니다. 그런데 이미 현실적인 대세도 그러한데 이런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으로 비추어볼 때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때문에,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생김새가 곱슬머리이고 말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여기가 우리나라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고 불이익을 주고 핸드폰 하나 제대로 개통해서 쓸 수 없게 만들고 이러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하나의 몸을 향한 처사라고 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는 높은 지위에 있다면 입법부를 설득하고 제도를 뜯어고치고 필요하면 혁명적인 개혁을 도입해서 바꿔야할 것 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런 어마어마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록 동네에서 섞여서 살아도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이런 견해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고 나는 너희들과 생각이 달라도 나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방식대로 살아간다고 하는 단호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2년 전에 여기서 수련회를 했던 아우라가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존재의 울림입니다.
저는 지지난주에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굉장히 많은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교회 속에서 살고 있고 그래서 현실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또 현실이 눈앞에 비춰도 먹고 살기에 급급하니까 직시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직시시켜주시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그 현실이 지금 이 그리스도의 온 인류와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세상에서 그 인간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짓밟히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지 오히려 그런 문제들을 집착하면서 마음 아파하고 그 일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냉담한 마음으로 바라보거나 때로는 멸시하고 배척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오류에 빠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봐야합니다. 제가 말씀드리지만 화염병을 들고 그리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던지고 전경들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죽창으로 경찰들을 찌르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자기가 어디에 있든지, 동네에 있든지, 유치원의 자모가 되든지, 학교 담임선생님이 되든지, 아파트의 한 동의 통장이 되든지, 줄반장이 되든지, 무엇이 되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안되어서 동네에서 그냥 좌판에서 물건을 놓고 파는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이것에 대해서는 이 견해가 이렇다는 것을 자신의 온 삶으로 보여주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고고한 교리를 터득하고 이런 고상하고 놀라운 교리는 이 교회의 목사님에게 배웠고 ‘나 정도 되니까 이것을 알아듣지!’ 하면서 그런 고고한 마음을 가지고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을 가지고 그러면 안 됩니다. 외모가 예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뚜렷한 차별대우를 받는지 한번 보십시오. 많이 배운 사람과 적게 배운 사람, 그리고 기력이 거의 없어서 누군가의 부축을 필요로 하는 노인네들과 싱싱한 젊은이들, 얼마나 많은 차별이 있는지 보십시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에 기여한 만큼 받는다는 그런 차별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인간들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로 모두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리고 그 인간들을 그 쓰레기 같은 우리들이 보기에는 그런 인간들이 존재해서 이 지구가 쓰레기장으로 변하는 것 같은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과 당신의 인성 안에서 연합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연합을 이루고 있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이 사회의 현실도 사실은 내 몸의 일부란다. 내 몸이 많이 아프구나! 너희는 내 몸을 치료하는 자들이 되어라.’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무엇인가 한 동네에 한 사람이 있어도 저 사람은 무엇인가 인간에 대한 별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구나!
엊그제도 뉴스에 보니까 50대 먹은 남자가 담배를 막 피니까 애기 엄마가 아이를 업고 있는데 20대 엄마입니다. 아이가 기침을 하니까 ‘담배 좀 끄세요.’ 좋게 ‘죄송한데 아이 때문에 그러는데 담배 좀 꺼주세요.’ 그랬다면 그랬겠습니까? 싸가지 없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가서 싸다귀를 날려버린 것입니다. 싸다귀를 날렸더니 이 애기 엄마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50대 넘은 노인을 반쯤 팬 것입니다. 쌍방폭행으로 걸린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해 예의가 없는 것은 형상에 대한 폭력입니다. 자기와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는 더 큰 것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작은 결점을 보았다는 이유 때문에 죽일 듯이 덤벼들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짓밟아버리고 그러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의 모습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우리는 그렇게 삽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세상이 수많은 세월동안 계속되는 것을 보시면서 이런 세상을 종식시키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셨던 사람들을 우리보고 아파하라고, 그가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보고 우리도 사랑하라고, 그가 그들을 살게 하시려고 죽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살게 하라고 그렇게 당신 안에서 온 인류를 당신의 인성과 하나로 연합시키시면서 구원의 계획을 펼치시고 그런 구원의 계획을 아는 사람들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를 자신의 몸으로 여기고 그 이웃을 진정으로 예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 세상 누구의 고통도 자신의 몸의 고통의 일부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녹취자 : 조원정
I. 본문해설
골로새서는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주후 62년 경 쯤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이 모든 것들이 옥 속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옥중서신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골로새서를 쓰게 된 동기는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어떤 이단들에 대한 반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아주 철학적이고 우주적인 기독론을 진술합니다. 이때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신학적인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맨 처음 회심할 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깊이 성숙하고 원숙해져서 자신 한 사람이 구원 받고 이스라엘 역사가 구원의 역사라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 온 우주적인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과 완성, 그 사이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에 대한 설명이 훨씬 강활하고 우주적인 아주 웅장한 서신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부분에서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지 않는 천사를 숭배한 사람들과 헛된 철학과 속임수에 사로잡혀서 이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모두 싸잡아서 머리를 붙들지 아니한다. 이 사람들은 진정으로 예수께 붙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그 머리의 작용으로 모든 지시를 받고 또 뇌의 작용으로 모든 온 몸이 단일체를 이루며 한 인격체가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거기에 붙어 있는 몸과 같으니 거기로부터 마디와 힘줄을 공급받고 그것들이 모두 연합해서 더욱이 하나님이 그것을 점점 더 자라게 하신다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어쩌면 우리의 이제까지 신앙생활에 다소 충격이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새로 한 이야기가 아니고 이미 성경에 나와 있고 종교개혁자들 이레로 그 이전부터 이미 오래로 내려오는 기독교의 유산과 같은 교리입니다. 배운 것이 성육신적 연합이었습니다. 어제 여러분에게 전한 설교의 요지는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었는데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당연히 그분은 하나님이시니 내려오셨다고 해서 하늘의 자리를 비워두고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오실 때에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인성을 취하셨고 그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를 당신 안에 연합시킴으로써 모든 인류가 당신과 하나의 연합 안에 있게끔 만드셨는데 이것이 바로 이제 당신과 우리를 진정으로 연합시켜 구원해 나갈 위대한 구원의 구체적인 실현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교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여태까지는 그리스도 교회만의 연합을 요구했지만 엄밀하게 보면 온 인류가 예수와 인성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인류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우리에게 남의 일일 수 없고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하나님이 인간 각자에게 부여한 그 소중한 권리들, 이런 것들이 존중되어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로 인정받고 보호 받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이라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신비적인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성육신적 연합이나 내일 마지막 시간에 배우게 될 영적인 연합은 신비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유독 신비하다고 부르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모든 연합은 다 신비입니다. 하나님인 그분이 인성을 가지셨다는 것, 인성 안에서 우리 모든 인류가 연합되었다는 것,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불완전한 연합이지만 그것이 완전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 모든 것이 다 신비합니다. 두 번째 연합에 연합을 신비적으로 부르는 것은 모든 연합이 다 신비하지만 이 연합을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세가지 연합 가운데 가장 신비한 비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성경이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II.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
성경에는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연합을 가리키는 여러 개의 그림이 나와 있습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네 가지 그림입니다. 우선 첫째는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것이 바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의 핵심 구절입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이고 우리는 거기에 접붙여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이 비유를 해석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비유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퍼즐을 맞추듯이 하나의 그림이 아니라 연합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 여러 개의 그림을 퍼즐처럼 모두 맞추면서 서로가 서로에 의해서 모순되지 않게 해석함으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이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르쳐주는 그 비유를 너무나 넘어가도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저도 흔히 청년 시절에 책을 읽으면서 접했던 문제입니다. 자 보십시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가지가 무슨 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냥 포도 나무에게 붙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는 저절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설명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구절을 잘못 설명해서 성화무용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과 접붙이는 순간에 인간은 완전한 성화에 도달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은 기도하기 위해 애쓴다든지 거룩한 삶을 위해 분투한다든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힘쓴다든지 하는 것들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사실은 우리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도 확실히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의 열매가 예수의 생명과 상관없이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처럼 해석을 할 때 이것을 주의 깊게 전체적으로 해석을 해야 하지만 소위 비유풀이 같은 이상한 해석에 빠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을 떠날 수 없다. 그분께 접붙여진 자만이 포도나무의 생명을 누린다는 그림입니다.
로마서 11장 17절에는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와 접붙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서 11장 17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였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이방인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이것은 포도나무 비유하고 좀 다릅니다. 참 감람나무는 유대인입니다. 돌 감람나무는 이방인들로 접붙여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무엇입니까? 진액입니다. 그 밑에서 진액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그 원천이 예수이신데 그 예수에게서 참 감람나무가 덧붙여지고 돌 감람나무가 덧붙여져서 돌 감람나무였는데 참 감람나무에 덧붙여지니까 결국은 참 감람나무에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쏟아 올라오는 생명과 진액의 원천은 예수이시고 그것들을 공급함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사실입니다. 유대인이 무슨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고 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았고 그 복음이 확장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사도 바울의 이 설명은 지나친 설명이 아닌 것입니다.
세 번째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마태복음 25장 1절에 나와 있는 신랑과 신부의 비유입니다.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또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신랑과 신부에 대해서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바울이 내가 진짜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설명을 합니다. 여기서는 앞에 두 비유는 생명을 얘기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기에서는 신랑과 신부, 남편과 아내를 통해서는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사랑입니다. 사랑과 함께 복종도 이야기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유통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연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복종을 하는 것도 사랑 때문에 복종합니다. 그것이 남편을 향한 사랑인가 주님을 향한 사랑인가 구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기도 하고 남편을 향한 사랑이기도 하고 아내를 사랑하는데 그것은 아내의 미모에 반한 사랑이 아니라 아내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보고 그를 지극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랑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특별히 누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류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진한 고백이 있어도 역시 누구는 누구를 좋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짝을 지어서 인류가 번성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의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 교회 있는 모든 지체들이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하고 결혼하지 않습니다. 뜨겁게 사랑하고 눈물 흘리지만 예식장에 나타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제가 맨 처음에 직장 다닐 때 깊이 변화를 받고 여러 사람에게 오해를 샀습니다. 저는 성령 충만하고 너무 은혜를 받으니까 사람들이 너무 곤고하고 어려우니까 도와줍니다. 그러면 형제도 있고 자매도 있고 결혼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전혀 그런 감정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유통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고백이 인류애적인 고백인 동시에 또한 남자와 여자로서 뜨거운 사랑을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비유는 대체로 생명에 관한 것이고 세 번째 비유는 사랑에 관한 것이고 다음에 네 번째 비유가 나오는데 오늘 읽은 골로새서도 되고 에베소서 1장에 보면 몸의 비유가 나옵니다. 1장 22절에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이거는 왠지 비유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머리와 몸을 나누지 않습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 생각할 수 없고 머리에서 떨어져 나간 몸,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참수를 당해서 머리가 여기 굴러다니고 몸이 여기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도 되지 않는 비유를 드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이 넓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관계가 동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머리 없는 인간의 몸, 상상할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 없는 인류, 예수 없는 신자, 예수 없는 이 세계 생각할 수 없단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미묘한 것은 포도나무의 비유와 감람나무의 비유에서는 주로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남편과 아내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서는 사랑과 함께 질서를 이야기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질서입니다. 남자이기 때문에 라는 뜻이 아닙니다. 놀랍게 머리 안에서 모든 세계의 비유들을 모두 통합해서 한곳에 담아 버립니다. 몸입니다. 몸인데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떨어진 머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우리 몸은 딱 떨어지지만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의 머리이시만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충만한 생명과 사랑입니다. 그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교회가 거기에 접붙여짐으로써 예수의 생명과 사랑이 온 몸속으로 스며들어서 인간의 몸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교회는 생명을 갖게 됩니다.
에드워즈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은 맨 처음 하나님이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인데 그 아들이 신부를 맞이함으로써 그것이 교회입니다. 신부를 맞이하고 둘이 연합함으로써 예수에게 부어졌던 생명과 사랑이 이제 교회 몸속에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그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가 생명을 누리는 것처럼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생명이신 하나님, 그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자마다 그 생명을 누리고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종합적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이고 교회를 몸이라고 할 때 생명과 사랑만 흘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서 질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가 있어서 그 머리 안에서 모든 작용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물들을 보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고 하는 모든 정보들이 오관을 통해서 들어오고 들어온 것들을 이 머리에서 조종해서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끌리고 어떤 것들은 배척하고 싶고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원인과 결과를 구분해 낼 수 있는 판단력이 생기면서 무엇을 결정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결심한 것을 이 지체는 어김없이 이행하는 것입니다. 손을 들어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몸의 장애가 있을 경우에는 못 들지만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에는 들어라 합니다. 만약에 들으라고 했는데 손이 안 든다는 것은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로는 들으라고 이야기하지만 하기 싫어 하니까 이것이 못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모든 지체들이 움직일 때 이것이 건강한 사람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몸을 가지고 머리의 판단을 가지고 매순간 어떤 의미를 찾으면서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그리로 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밥 먹고 이렇게 비스듬히 누워나 있고 이게 인생 아닙니다. 생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는다고 하더라도 의미 없는 일에 자기를 소비하고 있는 일도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피조물과 동물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은 의미를 찾는 능력입니다. 의미를 찾으려면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인생의 문제가 오는 것입니다. 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하고 싶으면 마음이 끌리면 그것이 의미입니다. 그러고 살아갑니다. 삶에 있어서 의미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의미를 찾아야 되기는 하지만 그런 것도 포함되지만 객관적으로 무엇인가 진리가 있고 그 진리가 동의하는 어떤 목표가 있고 그것이 내 마음에 끌려서 타인의 행복과도 조화를 이루어야지만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이다. 내 인생의 의미는 천명을 죽이는 거다. 그것도 만약에 어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국을 향해서 그렇게 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애먼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 천명을 죽이는 것이 목표라고 이야기 했을 때 자기는 의미를 부여했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인생의 의미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이십대가 지나기 전에 30억을 버는 것이 목표다. 아니면 애 하나 낳기 전에 50평 자리 아파트 사는 것이 목표다. 아니면 애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강남 진입하는 것이 목표다. 이런 것들을 목표로 세웠다고 칩시다. 미친 듯이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의미인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생의 많은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여기 머리와 몸의 비유를 통해서 말하는 것은 생명과 연합, 사랑, 질서, 이런 네 가지 개념을 함께 가지고 들어와서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의 모든 이야기를 이 몸과 머리의 비유 속에 모두 다 집어넣어서 종합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런 신비를 아주 기가 막히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III.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입니다. 이 연합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토대가 성육신적 연합을 토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육신적 연합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실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연합이 바로 이 신비적 연합입니다. 어제도 설명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인성을 가지셨을 때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를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자신의 몸처럼 여기며 사랑하셨습니다.
A. 중생과 칭의의 연합
그들 모두가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끊어져 버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저절로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그런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그분과 연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사람이 중생과 칭의의 연합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성령을 통해 거듭나고 또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의롭다 칭함을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어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적으로 접붙여지는 것을 우리들은 구원이라 부릅니다. 그것이 구원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즉각적인 구원이라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에게 접 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 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다는 말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이미 그 몸이 누리고 있는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시간에 로버트 레담이라고 하는 신학자가 설명하신 방식을 어제 제가 소개를 해 드렸습니다. 마치 그것은 성육신적 연합은 동네에 혹은 집에 전선이 지나가는 것과 같다. 신비적 연합은 바로 그 선을 끌어 들여서 불을 켜고 렌지를 작동하게 하고 선풍기를 돌아가게 하고 냉방기를 운영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아무리 많은 전기가 지붕을 관통하고 지나가도 그것은 실제적으로 끌어들여서 우리의 삶의 유익한 빛이나 열, 혹은 냉기나 온기로 바꾸지 않으면 그 선이 지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안에서 연합을 이룬 모든 인류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들을 그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속죄를 기초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그들과 연합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합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 구원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인가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구약에 전개되는 모든 슬프고 고통스러운 절망의 역사들, 여기 들어오기 전에도 중국 역사를 읽다가 왔는데 수천 년의 흘러 흘러온 세월이 피비린내 나는 역사입니다. 왕조가 바뀌고 새로운 제국이 서고 그 제국이 멸망하고 다시 다른 나라가 서고 찢어졌던 나라들이 하나의 통합을 이룰 때마다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민중들이 피 흘리면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비극적인 역사, 오늘날 우리들이 자본주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많은 물질적인 것들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가 주일학교 다닐 때 이 더위에 어떻게 시원한 환경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냉방기가 돌아가는 어느 곳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엄청난 부를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한 17세기나 18세기로 돌아가면 왕족들이 누릴만한 물질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그래서 인간이 더 행복하게 되었냐고 말할 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인생에서 신앙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제가 가장 행복하던 때는 시골에서 유치원 다닐 정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때도 현실을 너무 몰랐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지 그때에 집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갔고 부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 등등의 배경을 다 읽고 나면 그 아이도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시절들도 행복했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알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될 때 이미 그것은 아주 멀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엄청난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삶은 제가 55년 전에 보았던 한국 사회의 생활의 모습에 비하면 그때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상상조차 하지도 못하던 별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폭발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겠고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업들이 잘하길 바랍니다. 이제 곧 시작되었다는데 서울에서 부산까지 16분에 간다니까 새벽에 가서 부산에 갔다가 여기에서 새벽기도하고 내려갔다가 일보고 여기 와서 아침 먹을 수 있겠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아무리 그런 것이 발달해도 미국을 15분에 가고 각자에게 나라가 너무 잘살게 되어서 각자가 드론 같은 자기 비행기를 타고 30분 만에 미국을 날아가는 세대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게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느냐 입니다. 이미 물질문명에 폭발적인 발전이 있기 전에 많은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것이 가지고 오게 될 불행한 미래에 대해서 이미 예견을 다했습니다. 염려했습니다.
그럼 물질의 문제가 모두 문제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그렇게 편리한 도구들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예전보다 훨씬 많이 일합니다. 오늘도 잠깐 뉴스에서 보니까 OECD국가에서 한국 사람들이 두 번째로 일을 많이 하고 독일에 비해서 4.2개월을 일을 더하고 어느 나라에 비해서는 1.8배의 일을 더한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들을 노동에 쓰면서 가족을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살아야지만 겨우 그 대가로 그런 것들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자본주의 공부를 우리가 했지만 그런 것들을 관통하는 어떤 판단력을 가지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미친 듯이 인생을 살았는데 40정도 되어서 돌아보면 내 인생을 산 것 같다고 하는 내 인생에 대한 낯섦, 나는 어디에 있나? 그렇게 물어보면 안 됩니다. 그렇게 살아 왔는데 물으면 어떡합니까? 온 식구가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너무 힘들고 괴로웠기 때문에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냥 덜렁덜렁 거리고 교회 다니고 하면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구언은 받은 것 같습니다. 그것도 느낌 같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냉담한 것 같고 어떤 때는 신앙이 내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고 어떤 날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은 혼란 속에 사는 것입니다. 꾸준히 주님을 사랑하고 배우고 그 진리 안에서 성장해 가야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을 벗어나야 합니다.
B.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우리가 이것을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우리 신자가 이제 구원 받음으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기 이미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림은 어떤가 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생각은 낙지 같은 구원입니다. 머리이신 예수님이 달렸고 수많은 발들이 있는데 자기가 거기 하나씩 다 매달린 것입니다. 성경이 그런 낙지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아주 발이 많아야 합니다. 몇 십억 개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 강조하는 것이 주님은 나의 구주 그것만 강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원 얻을 때부터 우리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의 은혜로서 주어진 그 구원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하니까 주님이 성령의 역사로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때까지 내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구원을 받고 보니까 내가 예수의 몸 안에 있는 그것을 영원히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의 삶은 예수께 접붙여짐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이고 이 세 가지 연합 가운데 가장 신비합니다. 왜냐하면 인성적인 연합을 이루었다는 것도 신비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음으로서 우리들이 아주 분명하게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무너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지고 나를 사랑하던 사람이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생각, 물질과 세계에 대한 생각, 이 모든 생각의 관점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새로운 사상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해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들은 인간의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 끝없이 웅장한 철학의 세계를 몰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우리의 가치를 부여하면 그리스도 예수께 접 붙여지면 복음이라는 창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관 세계관 하나님 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 접 붙여졌기 때문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없었는데 그렇게 살 수 있는 실제적인 생명과 힘, 사랑, 능력을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모두는 아니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이유는 모두가 혼자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이 예수를 믿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의지의 나약만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여러분은 인생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보게 되었습니다. 돈 있으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인생의 몇 가지 문제만 해결되면 된다는 것을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만 해결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정도의 속임을 겪은 경험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아 내가 이것만 넘기면 괜찮겠지. 아 내가 돈이 없어 그럴 거야. 아니면 인간관계 때문에 그럴 거야. 가난 때문에 그럴 거야. 아니면 못 배워서 그럴 거야. 사실은 막상 부딪히면서 인생을 살다 보니까 그것들은 모두 겉으로 드러난 것뿐이고 그 밑에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뿌리가 있고 그것에서 끊임없이 생명이 우러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모든 고통과 악의 문제들이 쏟아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리석은 사람은 아직까지도 돈을 벌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아니라는 결론에 아직도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원의 문제라는 것을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적인 생각 밖에 없을 때에는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자원이 모두입니다. 돈 있고 백 있고 얼굴 예쁘고 권력 있고 비슷한 말이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남들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그래도 사려가 깊은 사람들은 그 정도 가지고 안 되고 다른 것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의 힘이라든지 집념이라든지 이상이라든지 꿈이라든지 등등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마지막에 알고 보니까 우리의 인생을 위해서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자원의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지상의 자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도대체 그 자원이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 정신, 영혼,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예수를 믿었다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외적인 것들을 통해서 인생의 문제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내면으로 돌아가면서 망가진 인생을 사는 이유가 망가진 정신과 마음에 있고 이것이 병든 영혼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병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랑과 생명의 결핍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도저히 나로서는 나의 망가진, 더 망가질 수밖에 없는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주 절실하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거기서 비로소 나의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게 됩니다. 경험을 한 사람도 외적인 설명했지만 자기 영혼 안에 일어난 모든 비밀스런 일들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무슨 뜻입니까? 그것을 쓴 사람이 노예상인이었는데 원래 그런 생명을 옛날에 누렸다는 것입니까? 누리긴 뭘 누립니까? 처음 구원 받았습니다. 원래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이런 생명을 누리도록 창조하셨는데 내가 죄 때문에 불순종 때문에 생명이신 주님을 멀리 떠나 어그러진 길로 갔기 때문에 그 생명에서 끊어진 자가 되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처음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마음속에 확 들어올 때 이건 뭐야? 이건 너무 부자연스러워. 견딜 수 없어. 이건 정말 아니야. 내가 어떻게 이상한 삶을 살아. 이런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생명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일생 동안 죽음에 익숙해져서 살아온 것입니다. 어느 날 생명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것을 낯설다고 인식하지 않고 아 이게 원래 바로 이 맛이야. 뭐라고 비유할까요? 바로 이거야. 라는 그런 것입니다.
똑같은 이치를 어거스틴이 설명합니다. 생전 진리를 못 들어본 사람이 진리를 딱 들었을 때 아 이게 진리야. 하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타락하기 전에 한 인류의 동일한 본성 안에서 이미 그 사랑을 그 생명을 그 진리를 맛보면서 살았는데 허물과 죄로 하나님께로 떨어져 나와서 망각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그 생명이 들어올 때 아주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아 이거야. 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도 낯설지 않은 성령이 충만해진 적이 없는데 성령이 최초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이런 충만함 없이 살았던 날들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힘들었는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제가 늘 말씀드리는데 예수를 믿는 것은 뭔가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에 그 상태에 있었는데 잠시 죄 때문에 그 상태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철없을 때 한번 성공해 보겠노라고 이 지루한 시골 생활 싫다고 대문을 박차고 아빠 돈 훔쳐가지고 나온 사람이 철이 들어서 너무 두고 온 고향과 엄마 아빠를 그리워하면서 돌아가는 것, 그 사람은 돌아가서 부모와 얼싸안고 형제들과 해후할 때 이건 뭔가 부자연스러워. 내가 30년이나 타국에 살았는데 이건 뭔가 내겐 안 맞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원의 문제입니다. 어제 오늘 김병년 목사님을 모셔서 강의 했습니다. 계속 그 강의를 내 방에서 들으면서 너무 가여웠습니다. 젊은 목회자가 얼마나 가엽겠습니까? 말은 쉽게 하지만 어떻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저도 작년에 우리 아내가 너무 아팠을 때 한 일 년을 같이 그렇게 아픔을 겪고 저도 몹시 아팠기 때문에 같이 아파하면서 왔는데 십년이라면 내가 어떻게 했을까? 강의 듣는 내내 했습니다. 누구도 나는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없습니다.
남의 이야기 하지 말고 자신의 문제로 돌아가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기도 싫습니까? 여기 결혼하지 않는 형제자매 있습니다. 시집갈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 지긋지긋한 집안에서 탈출해야지 하는데 거기 가면 더 강호의 적수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긴 그래도 문제 일으키는 엄마 아빠, 부딪히는 언니, 동생, 삼촌 뭐 복닦거리고 살고 어떤 사람은 다 들어보면 눈물이 납니다. 나라도 못 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싫은 것입니다. 왜 이런 인간들이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기에 내가 이 집안에 태어나서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상황에 얽혀서 내 인생 꽃 한번 못 피워보고 여기서 시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꿈이 뭡니까? 어떻게 하든지 예쁘게 하고 누구한테 찍혀서 시집 가보려고 그러는데 가 보십시오. 여긴 그래도 익숙해진 사람들입니다. 거기는 얼굴도 낯도 모르는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진을 치고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은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련의 연속입니다. 평탄한 길을 걸어갈 때는 역경을 만날까봐 무섭고 역경을 걸어갈 때에는 그런 삶속에서 끊임없는 평탄한 삶을 꿈꾸기 때문에 불만족에 시달리면서 살아갑니다. 산다는 것이 시련입니다.
오늘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이 그러실 리도 없지만, 얘야 한 번 더 인생을 살아보겠니? 주님 거두어 주시옵소서. 충분합니다. 누가 나보고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나하고 물으면 이십대로 돌아갈래? 여기서 죽을래? 하고 물으면 난 여기에서 죽겠습니다. 거기를 왜 갑니까? 더군다나 열네 살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거기를 왜 갑니까? 태어난 걸 얼마나 후회했는데 거기를 왜 갑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받고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자기 인생한번 꽃 피워 보지 못하고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그냥 지질이 짓이기면서 인생을 살아서 인생이 다 망가져 버렸습니다. 너 왜 그런 인생을 살았니? 하면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돈 못 벌고 동생은 돈 뜯어가고 누구는 하고 형제들은 나를 안 데리고 가고 해서 내 인생 종쳤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주위를 보십시오. 여러분과 비슷한 사람 보지 말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없는 것 같으면 저처럼 전기라도 읽으십시오. 어떻습니까? 사람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 비슷비슷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누가 나에게 김 목사님, 목사님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김병년 목사님이 진 십자가에 비하면 김남준 당신이 진 십자가는 오분의 일도 안 됩니다. 난 동의를 안 할 겁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다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영원히 묻어 두고 안 할 이야기일 겁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뜨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까? 다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행복하고 좋아 보입니다. 실상은 아닙니다. 내가 저런 사람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정말 어려운 상황에 좀 더 나은 상황에 있었더라면 좀 더 행복해지고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즐거운 인생을 살 것이다. 과연 성경이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가르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신학교에 하워즈 워즈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온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부인이 약간 정신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동료 교수들을 옷을 벗고 유혹하고 병에 걸립니다. 아내 곁을 지킵니다. 우리는 신학을 배우고 교리를 배우지만 이것이 우리의 삶을 고상하게 해준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흙바닥을 구르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 어떡하든지 가깝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피를 모두 쏟아 구원하신 나의 인생, 더 넓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나, 그랬기 때문에 의미를 몰랐더라면 생각 없이 살았을 텐데, 제가 회심하기 전에 정말 부러워했던 것이 길 아래 구르는 돌멩이. 심지어 벌레, 미친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어차피 맨 정신으로 못 사니까 차라리 저렇게 미쳐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하고 나눠 보십시오. 아마 나눠도 모든 사람이 다 이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만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절을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지납니다.
나는 이건희 회장의 사건을 보면서 한 인간으로서 너무 가여웠습니다. 예전에는 좀 못마땅했는데 그 사건이 있고는 너무 불쌍했습니다.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생명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가까이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현실, 피눈물이나 흘리면서 면도칼이나 만지작거려야 할 사람이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나를 붙드시기 위해서 남들에게 주시지 않는 이 시련으로 가득 찬 인생의 가시밭길을 눈을 뜨면 근심이 눈을 감으면 고통이 끊임없이 파도처럼 밀려오는데도 다시 마음을 다스리면서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자신의 인생이 예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믿으며 감사함으로 그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뭐가 그렇게 인생을 바꿔 놓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설교시간에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사랑부 아이들이 수련회 들어오는데 주님 못 만났을 때에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아이를 쳐다보면서 눈물이 납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그런 처지에 있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자녀들 중, 남편이 이런 처지에 있다거나 아이들이 하나나 둘이 그런 상태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원망합니다.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시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이 연약한 아이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하게 하는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우리가 망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렇게 만들어 준 그 힘이 어디에서 옵니까? 예수의 생명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넘치도록 주겠다고 주님이 통로를 열어주시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의 몸에 접붙이신 것이고 혹시 우리가 못 믿을지 모르니까 그 보증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내주하심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는 어차피 끝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분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주님의 축복을 구하고 열심히 벌고 그것도 없으면 다른 데서 빌려보고 잘 갚고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모든 현실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에너지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이 생명과 사랑입니다. 도대체 생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끊임없이 이 속에서 에너지가 쏟아 납니다. 피를 돌립니다. 음식을 소화시켜서 다시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외부의 위험한 것들이 오면 자기를 보호합니다. 이 속에서 계속 스스로 신진대사를 통해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해 갑니다. 자기와 비슷한 개체를 생산해냅니다. 생명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 생명이 필요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더 많이 충만하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생명이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미 예전에 그것을 가지고는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다는 것을 경험한 세상의 자원에 이 부족에서 자신의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특별한 생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미친 듯이 구하며 따라다녀 봐도 그 자원은 만만하게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늘의 생명을 힘입어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그 생명의 결핍되어 가면서 거의 죽은 자와 같은 영혼으로 살아가면서 세상 자원이 없기 때문에 나의 영혼이 인생이 이렇게 꼬인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보십시오. 환란과 역경에 처한 많은 사람들, 오늘 사도바울은 이 편지를 쓸 때 감옥에 갇혀 사형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슴 벅찬 감격으로 이 세계의 완성을 내다보고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예수의 생명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가정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아내가 있습니까? 예쁜 아들, 딸이 있습니까? 돈이 있습니까? 권력이 있습니까? 자기는 쓰레기 같이 죄수 취급을 받아서 자기는 비참한 지경에 놓여있는데 이 세상이나 모든 것들이 자기를 이길 수 없는 어떤 힘이 이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련을 극복하고 사는 것입니다.
가정을 보니 다른 사람이 들어도 한숨이 나올만하고 나라도 도저히 못살 것 같은 가정입니다. 어떡합니까? 뛰쳐나와 본들 무슨 다른 새로운 것이 있습니까? 거기서 생명 없이 죽어가는 가족들을 보면서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져서 그 가족들을 붙들어주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적 선교입니다. 다시 태어나면 그런 상황에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보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 상황에 두셨을 때에는 도망쳐 나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거기서 뭔가 뜻이 있어서 그것을 극복하면서 살라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서 문제이지 그리스도인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나쁜 일이 일어나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가만히 회상해보면 여러분의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미 그런 인생을 살아왔고 살아냈고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매번 겪을 때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은 이전에 있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라고 항상 생각합니다. 왜입니까?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회상하면 감사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려움과 역경이 있을 때 몰랐습니다. 놀랍게 그것을 살아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상처가 납니다. 확 찢어졌습니다. 온몸이 피를 동원합니다. 확 쏟아 냅니다. 세균이 그 기회를 틈타서 막 침투하려고 몰려드는 것입니다. 못 들어오게 막 싸우는 것입니다. 한 이틀 자고나면 누런 고름이 흥건하게 있는데 전투에서 전사한 시체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로 그렇게 몸의 생명이 넘칠 때에는 이깁니다. 몸의 생명력이 다 사라졌을 때 어떤 사람들이 코털 세 개를 뽑았습니다. 죽었습니다. 뽑힌 코털로, 주사 맞으면 병원에서 항상 그럽니다. 한방 딱 맞았는데도 하루 동안은 절대 목욕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합니다. 목욕해도 웬만한 사람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불행히도 저항력이 바닥에 내려간 사람일 경우 거기로 균이 침투해서 피가 부패하는 것입니다. 48시간 내에 절명합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에 왜 문제가 없겠습니까?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날들이 많았습니까? 믿음으로 이기니까 지금 와서는 모두 하나님 찬송 제목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주님의 인자하심을 말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나 같은 죄인을 선대해주시는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우리가 시련과 역경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우리의 찬송 제목이 될 수 있습니까? 불가능했습니다. 그 기도가 그 말씀이 그 생명이 우리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부어졌기 때문에 맨 정신으로는 이길 수 없는 역경과 시련을 이기고 감사할 수 없는 처지 속에서 새로운 해석을 하면서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서 나를 온전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이 시련과 역경이 없었더라면 내가 결코 맛보지 못했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맛보게 하셨구나. 주님의 성실하심을 찬송하게 됩니다. 주님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뭡니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게 하는 정신의 힘입니다. 사랑 그 자체가 혼자는 사랑이 성립 안합니다.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부어졌기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는 그 남편을 용서하고 같이 살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아내와 살고 시어머니와 살고 시아버지와 살고 그렇게 하게 하는 힘이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와 지금의 우리와 뭐가 다릅니까? 예전에는 이런 자원이 없었고 통로 자체가 끊어졌습니다.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이 세상에 있는 지상의 자원에 묶여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풀려서 이 세상에 자원의 충분히 활용하며 살 수 있었을 때에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을 때 우리의 마음은 커다란 충격을 받고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생명이 강물처럼 들어왔습니다.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내 마음 속에 주님의 사랑만 있다면 나는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이 모든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 담대한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생의 불행, 올 테면 한번 와봐라. 이제까지도 수많은 불행을 겪으며 살았는데 그까짓 것 한두 번 쯤 더 온다고 내 인생 달라질 것이 무엇이냐? 내 인생의 꿈은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닌데 그래 와라. 나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다. 너희는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멘. 하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이 어떤 불행하고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극단적으로 말해서 온 인류가 나에게 등을 돌리고 나를 왕따 시켜도 그것에 의해서 내 인생이 뿌리 자체 흔들리는 법이 없다는 확고한 신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우리가 얻을 것도 잃어버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주님이 바로 이런 신비적인 연합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 자원을 힘입어서 네가 행복하고 능력 있게 살라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그런 예수의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려서 바깥으로는 예수 안에서 인성의 연합을 누리는 모든 인류를 자신의 몸처럼 생각하며 내가 내 몸을 스스로 위하며 살듯이 그들을 위하며 사랑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 그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생명과 사랑으로 우리 모두가 한 생명과 사랑 안에서 연합을 이루어 가라는 것입니다. 구역장들 가끔 만나면 목사님 우리는 너무 힘듭니다. 왜 우리 교구 목사님이 나한테는 이렇게 힘든 사람만 주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야기하겠는데 힘든 사람이 온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 안에 생명과 사랑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말한 그 사람도 내가 과거를 아는데 여러 구역장 잡아먹은 사람입니다.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고 자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 피를 말리면서 여기까지 온지는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목사님 이상하게 정말 이상한 사람만 날 찾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명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진짜 이상한 사람들만 저를 찾아왔습니다. 여러분이 증인입니다. 세상에 어디가도 안 되는 사람들, 나도 조상 적부터 주님을 경외하고 모든 헌금을 기꺼이 내놓고 싶은 그런 재벌과 같은 사람이 와서 목사님 뭘 도와드릴까요? 그런 사람이 줄지어서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다 다른 데로 가고 옛날에 부자였던 사람, 지금은 인생에 갈 길을 모르는 사람, 당장 안 만나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사람, 인생 끄트머리에 매달린 사람들만 개척할 때부터 계속 보내주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또 문제를 일으키면서도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문제를 일으키기 제일 좋은 환경이 여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끔 교회 마당을 다니며 이렇게 보며 저 사람도 그런 사람인데, 저 사람도 그런 사람인데, 하며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떠나서 내가 갈 곳이 어디에 있을까? 주님께 꽉 붙들려서 눈물 흘리며 말씀을 듣고 교회 한 구석에서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그런 사람들이 똑같이 자기 같은 사람을 주님께서 붙여 주십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하고 하면서 거의 죽입니다. 그런데 뭡니까? 자기 안에 생명이 역사할 때 정말 천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생명과 사랑이 부족한 것이지 상황이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에게는 쉬운 일도 없고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이 문제는 어려운 문제이고 이 상황은 해볼만 하다고 계산하지만 어차피 주님의 생명과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생명과 능력이 무한하게 우리에게 부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exciting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지 보십시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가 생기면 기대를 가집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살아계신 놀라운 증거를 어떻게 흥미진진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실까? 아 정말 기대가 된다. 이것이 생명이 넘치는 삶입니다.
도탄에 빠지고 주저앉아 있는 존재 자체가 그런 생명과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자체가 정말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웅변입니다. 누가 못살겠어요.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이야기하는 것은 같이 한숨 쉬어주고 넌 진짜 죽는 것이 낫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힘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생명과 사랑,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이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뿌리신 핏길을 걸어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몰려와서 정말 죽을 것 같은, 하나님 앞에 밤중에 교회를 찾아서 자기의 억울한 심령을 토해놓으며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간절히 매달리고 나면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인생은 주님의 계획안에 있다. 주님이 어두운 밤에서도 내 인생을 붙들고 계시다. 하며 아멘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녹취자: 원수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처음 읽은 본문은 베드로가 핍박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자신이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부인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핍박받는 성도들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게 있는 한 소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하나님의 성품에 혹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II. 그리스도의 인성과 교회의 연합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교회의 연합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신자였습니다. 신자는 이미 있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온 인류의 연합 안에서 실제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회심하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입니다. 그 연합을 우리는 성육신적 연합과 구별하여 신비적 연합이라고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바로 그 신비적인 연합은 실제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넘쳐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인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옵니다. 그것은 예전에는 전혀 없었던 자원인데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 순간 우리에게 그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하늘의 위대한 자원을 누리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성육신 안에서 연합된 우리 모든 인간의 연합을 뛰어넘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우리의 인성이 연합된 가운데 영적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성품이 매일매일 변화되어 가게끔 하나님이 놀라운 변화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변화는 중생과 회심을 통해 이미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이미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칭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신비적 연합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세상 불신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자원에 잇대어진 사람들입니다. 그 자원이 바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입니다. 그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누림으로써만 인생의 이 고통의 문제를 극복하고, 여전히 죄와 시련이 있지만 그것들을 이기고 극복하며,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히려 더 선한 일을 해 주시는 통로로 생각하며, 그것을 보여주며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정말 원래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 누리는, 자신들은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위대한 자원, 그 충만한 생명과 그 가득한 사랑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의 백성과 다른 존재라고 하는 것을 실제로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넘치는 생명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뚜렷한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우주를 바라보고 하나님과 인간을 바라보는 견해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가 신자가 될 때부터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그 진실한 생활을, 탐구하는 생활을 그치지 아니함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런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가게 할 수 있는 생명과 사랑이 나에게 없다면 그 지식은 나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 하는 것입니다. 이 계곡에서 저 계곡을 건너가야 되는데 한 사람은 다리가 없어서 못 건너갑니다. 한 사람은 다리를 다 놓았는데 건너가기 싫어서 안 건너갑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이 누구이고, 인간이 누구이고, 이 세계가 무엇이고, 인간인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탐구해 가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갈 길을 주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찾는다고 해서 우리 모두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인생관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하늘의 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히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실 수 있는 개통식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열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들어오는 통로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그런데 그것이 나 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있는 교회에 나를 접붙여서 예수의 생명을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공유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여기에서 우리는 똑같이, 성육신적 연합에서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관심을 가졌던 것과 꼭 같은 논리로, 우리는 우리와 실제적으로 한 예수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영적인 자원을 충만히 누리면서 살고 있는가? 그리고 또 육적인 자원들을 골고루 누리면서 살고 있는가? 그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정도 되는 교회의 규모에서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잘 가르치고 좋은 목회자와 함께 목양을 하는 헌신된 평신도들의 도움을 받아서 성도들을 잘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과, 그 다음에 세계에 흩어진 모든 교회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자원과 달란트와 소명을 따라서 섬기는 일을, 최대한 균형을 맞추느라고 저는 노력해왔고 그것이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이쪽으로 치우치는 것 같고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저렇게 치우치는 것 같았겠지만, 그러나 저는 항상 신학적으로 이 두 가지를 생각하면서 둘 다 우리들이 균형을 맞추면서 여러분도 그리고 나도 교회에 하나님의 주시는 물질도 재능도 여러분이 받은 생명과 사랑도 그렇게 쓰여야 된다고 나는 믿었기 때문에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제 여러분이 보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나는 이 모습이 완전하고 가장 좋은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크지 않은 교회를 방문했을 때 목사님이 자기 교회 하나만 알고 그 모든 수백 명의 성도들의 아이들의 이름까지 모두 외우는 목사님, 그리고 모든 구역장들과 함께 그리고 모든 교인들과 함께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 생활하시는 그런 목사님,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왜? 항상 미안한 것은 그 분처럼 그렇게 교회에만 모든 것을 교회에만 쏟아부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공부하느라고 여러분하고 가까이 있는 시간을 아꼈습니다. 솔직히 인정합니다. 우리 교회 많은 남자 성도님들 나오지만 나같이 이렇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목회자 없습니다. 같이 등산도 가고, 야유회도 가고, 복날이면 개도 먹으러 가고, 축구도 하고, 그리고 제가 노력을 하면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은 어차피 주어진 시간과 주어진 자원을 가지고 쓰는 거잖아요. 균형을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스스로 어디를 가고 싶어서 외국에다가 편지를 내서 나를 좀 초청해달라고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을 주셔서 그래서 이것들을 몸 전체에 흘러가게 하는데, 물론 세계 전체의 보편교회 안에서 우리 교회가 차지하는 것은 아주 지극히 작은 세포 하나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맞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전도를 하려면 동네에서 해야지 저 시골에 가서 남의 교회에 전도를 해주고 오면 우리 교회에 뭐가 남냐고 그럽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자기 교회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하나의 영적인 몸이 되었다고 할 때는 그런 지역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정말 눈물로 봉사하고 주님의 교회를 티끌만큼이라도 이롭게 하기 위해서 헌신할 때, 그것은 내가 우리 교회를 섬긴 것과 다름없이 모두 우리의 이 헌신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의 몸이신 교회에 바쳐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봉헌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많은 피부색과 문화,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몸이라고 부르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제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그냥 구원받은 사람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되고 그리고 그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실제로 공급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와 인성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지만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 사람들은 이런 생명과 사랑을 받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러나 아직 그것을 실제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III. 신의 성품에 참여함
그러면서 오늘은 이 신자의 삶의 영광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 신의 성품은 누구의 성품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어떻게 참여하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인성과 연합을 함으로써, 하나님과 그분의 인성에 연합됨으로써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말하자면 영적인 연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신 신성에 우리가 연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고 할 때는 두 가지인데 그분의 인성 안에서 우리가 연합을 이루고 그리고 그 연합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면 우리는 그 생명과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결국 우리는 신성은 우리에게 없지만 우리의 인간의 성품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배우면서 우리가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제가 잘 사용하는 말로 햇빛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프리즘을 통과할 때는 일곱 개로 분광이 되어서 빨주노초파남보 아주 찬란하게 일곱 가지 색깔로 분광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이 우리 모든 인간과 관계를 가지실 때 그분의 본질은 보이지 않지만 성품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하실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뭐냐면 하나님은 안 보이시는데 예수님이 인성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보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인성은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왜? 먹고, 마시고, 주무시고, 기뻐하시고, 슬퍼하시고, 아파하시고, 눈물 흘리시고, 그런 모든 인간의 희로애락을 그분의 인격 안에서 보면서 우리는 그분의 인성을 만질 수는 없지만 그분이 바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시라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십니다. 우리 눈에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신성도 우리는 못 봅니다. 그런데 그분이 사람과 관계를 맺으십니다. 그래서 정말 가엾은 사람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시며 불쌍히 여기시며 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볼 수 없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불쌍한 사람을 보시면서 취하시는 태도와 이 모든 마음의 작용들을 그분의 인성 안에서 발견하면서 우리는 미루어서 추측을 하며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진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어떻게? 불의한 사람을 보시면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보이십니다. 또 어떻게? 시간 속에서 죽는 사람들에 비해서 그분은 영원히 사시는 분입니다. 유한한 인간에 비해서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시라는 것, 그리고 악한 인간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을 배신하거나 악을 행하는 사람들조차도 자비를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를 보면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제든지 끊고 혹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어도 하나님은 인간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서로 교통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A. “참여함”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닮아가는 방식을 오늘 여기에서 “참여하는 것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성과 섞인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이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면서 우리가 그 성품을 닮아 가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는 훌륭한 증거가 된 것처럼 우리도 또한 똑같이 우리가 살아있고 생활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자지고 계신지를 보여주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보여주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성품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여함”이라고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이미 있는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서 예전에는 없던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들어오는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통로가. 그래서 필요하면 그 자원을 한없이 하나님이 부어주셔서 그 생명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하고 그 사랑으로 이길 수 없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관계를 지속하고 맺을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관심을 자원이라는 측면에 맞추어서 생각한다면 이 구원은 무진장의 자원을 향한 통로를 주님이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 자원의 측면에서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예수 믿고 예수의 능력을 받았으니 내가 예전에 나 혼자 있을 때는 못 하던 일을 예수와 함께 할 수 있구나. 그리고 예전에는 내가 생명이 없어서 못 하던 일을 이제 예수께로부터 충만한 생명을 받아서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살겠구나. 그리고 내게 사랑이 없었으니까 이제 이런 사랑이 내게 부어져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내 안에 하나님이 이런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평화를 주시고 내 삶이 행복해 지겠구나.’ 무엇인가 그 자원을 활용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아주 진취적이고 기상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우리가 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몸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을 예수를 통해 우리가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은 단지 살게 하시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뭘까요? 존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면 우리로 하여금 참된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과 그런 생명과 사랑을 받아서 능력 있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이것이 기차가 지나가는 데 있어서 두 길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기찻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차가 지나갑니다. 성능이 좋습니다. 옛날에 증기기관차라고 합시다. 칙칙폭폭 그러면서 힘차게 달려갑니다. 문제는 뭡니까? 언제나 철로가 두 길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면 안 됩니다.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가슴에 새깁니다. 그 길을 달려가는데 그 달려가는 기관차가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한다면 길 하나는 주님을 섬기는 삶이고 또 하나는 주님 앞에 되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 되는 것. 섬기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생활이고 되는 것은 우리의 성품이 주님을 날마다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열심히 일하지만 인격에 있어서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많이 일하고 하지만 저렇게 일하는 동기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일까를 의심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은 순수한 생명과 순수한 사랑만은 아닙니다.
옛날에 제가 알던 교인 하나가 자기의 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너무 신앙도 없는데 어느 날 좋은 승용차를 팔아버리더니 봉고를 사더랍니다. 그래서 “형, 이거 왜 샀어?” 그러니까 교회의 교인들을 열심히 실어 나르려면 승용차보다도 봉고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신앙으로 볼 때 자기 형이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희생할 사람이 아닌데 저렇게 저런 결정을 했을까? 형이 하는 말이 “그렇게 한 2년 해야지 안수집사가 되잖아.” 그렇게 해서 그 다음에 뭐가 될까요? 장로가 끝인데. 계속 있으면 2년에 한 번씩 계속해서 한 70까지 가면 계속 좋은 사람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니죠.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하는 것은 참생명과 사랑만이 아닙니다. 어떤 좋은 일을 하는 것도 꼭 그렇게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족하지만 일을 합니다. 그 일이 교회의 일이냐 집안일이냐 직장일이냐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그 일의 자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합니다. 여러분 헷갈리지 않게 어저께 우리 하다가 말았죠. 그냥 하기 싫은데 목사님이 하도 설득을 해서 할 수 없이 구역장이라고 하나 맡았는데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점점 교회가 가기 싫은 겁니다. 구역 모임에 가기 싫은 겁니다.
아들이 교회를 안 가니까 “교회 가야지.” “엄마, 나 안 갈래. 오늘 정말 가기 싫어.” “그래도 참고 가라.” “싫어.” “담임목사인 네가 교회를 가기 싫으면 교인들은 어떻게 하냐?” 구역장인데 구역 예배 돌아오는 게 너무 싫은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들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이제 올바르게 섬기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람 자신이 변화되어 갑니다. 안 그럴 수가 없습니다. 동의 안 되십니까? 나쁜 사람이 어쩌다 구역장 덜미 잡혀서 진짜 어려운 사람들을 맡겨줬는데 올바로 해나가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섬기고 그리고 돌아올 때는 “12월만 되라. 내가 당장 때려치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자기를 죽이면서 하다보면 다른 사람이 보면서 변했다고 그럽니다. 자기는 모르는데. “집사님, 진짜 많이 변했어요.” 그 얘기는 뭐냐면 “옛날에 너 진짜 못됐었어.”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정말 많이 변하셨네요.”
그 다음 두 번째 반대로 내가 어느 날 아무것도 안 하지만 어느 날 말씀을 듣고 보니까 내가 정말 나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너무 죄송해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회개가 진실하고 지속적이면 그는 무위도식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무위도식을 하지, 진짜 변화되어서 이 속에서 새 사람이 되기 시작해서 이 안에 생명과 사랑이 역사하기 시작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 태어난 아이들 가만히 있습니까? 우리 손녀 이제 두 살 좀 넘었나? 가만히 있습니까? 한번 어른이 걔네들 하는 거하고 똑같이 따라해 보십시오. 병원에 입원해야 될 것입니다. 얘네들은 유연합니다. 뛰어내리고 뒹굴고 정신없이 삽니다. 왜? 생명이 있으니까. 애들 정신없다고 그러지 마세요. 걔가 아마 가만히 누워서 천장만 쳐다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라 그러고 찬송을 해야 합니다. 좀 깨도 “야, 진짜 생명이 넘치는구나.”
그러니까 진짜 주님 앞에 자기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변화되어 가면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이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 사실은 야고보 선생이 죽은 믿음이다 그러는데 죽은 믿음이 아니라,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 되어서 그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면 그것은 반드시 행위를 낳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린 게 뭐냐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겨주셨을 때 그 일의 크기나 모양새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를 올바르게 하면 그 일을 하는 동안에 자신이 주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반성을 할 때에 자기가 나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무위도식하고 못되게 살아가는 인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대면하기 싫어합니다. 상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왜? 참생명과 사랑은 진리의 생명이고 진리의 사랑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로부터 그 사랑이 왔기 때문에 사랑을 받은 사람은 진리로 돌아가고 그 진리로부터 생명이 왔기 때문에 생명이 넘치는 사람은 그 진리를 위해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우리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하나인 것입니다.
B. 영적 연합의 성질
그러면 여기서 얘기하는 영적인 연합,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영적인 연합은 무엇이냐? 영적인 연합의 성질이 무엇이냐? 이런 것입니다. 첫 번째 성육신적 연합이 인성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 안에서의 온 인류의 연합, 첫 번째이고, 신비적 연합은 그런 모든 인류 중에서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아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는 것, 그래서 그 생명과 사랑을 누리도록 눈이 열리는 것, 그것을 우리들이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 영적 연합은 뭐냐면 그러한 신비적인 연합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점점 더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다가 그런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 조금도 방해 없이 우리에게 완전히 흘러들어오는 영광스러운 상태에 도달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우리들이 영적인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똑같이 그런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비적 연합과 성육신적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 아닙니까?” 영적인 연합입니다. “그러면 왜 이것을 영적인 연합이라고 특별히 부릅니까?” 모든 연합이 영적인 연합이지만 이 연합이 가장 영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그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무한히 주어질 것, 그리고 언제든지 이 생명과 사랑이 너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보증으로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성령. 그런데 이 영적인 연합은 바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다시 말하면 영적인 작용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그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연합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연합은 그 성질이 어떻습니까? 자, 구원과 함께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하나님이 통로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회심 때 하나님을 아는 영광과 사랑과 죄와 용서, 은혜 이런 것을 아는 지식의 빛이 확 들어오고 들어올 때에 생명과 사랑도 함께 들어옵니다. 그런 처음 경험을 여러분이 첫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확 들어오니까 예전에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가엾고 눈물 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내게 들어오니까 인생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생각이 생겨나면서 어떠한 시련과 난관이 와도 내 인생에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인생의 목표가 편안하게 많은 것을 누리면서 이 세상 자원을 가지고 자기의 몸을 예쁘게 잘 가꾸고 편안하게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며 사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그 꿈이 실현되지 못할 때 무서웠는데, 두려움이 뒤따랐는데 이제는 죽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 이제는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 것을 깨닫고 나니까 잠시 있다 지나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짓밟히고 잠시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이 밀려오면서 충만한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만 인생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 불행을 당하고 사는 사람들도 어려움을 만나거나 난관을 만나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늘의 놀라운 기쁨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도 포기한 인생을 내가 살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생명입니다. 생명.
자,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이런 생명을 우리가 항상 충만하게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충만했을 때 용서한 사람을 그 생명이 사라지고 나니까 죽도록 미워하고 복수하고 싶어지고, 그 생명과 사랑이 충만할 때에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족들이 너무 소중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문제가 많은 가정에서 상처를 받고 태어나게 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이 나를 굽이굽이 내 인생길을 인도해서 나를 하나님 앞에 데려오는 통로였구나.’ 그러면서 살아온 모든 길, 내 인생에 일어난 불행하기 짝이 없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가끔 독자들에게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얼마나 많은 죄를 지어 보셨기에 그렇게 죄에 대해서 실감나게 묘사를 하고 아냐고. 심지어 누군가 그럽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일 중에 겪어보지 않으신 게 없으신 것 같다고. 사실 아닙니다. 물론 죄를 많이 지었죠. 진짜 더러운 죄인이죠. 그렇지만 나보다 많이 지은 사람들 꽤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있다고 쳐도 ‘죄와 은혜의 지배’를 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막 밀려올 때 생각했습니다. 그 때도 교회에 나왔을 때인데 밤이었습니다. 밤에 교회에 나와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표현을 위한 거니까. 내게 일어난 좋은 일을 통해서는 별로 받은 게 없는 겁니다. 내게 일어난 아주 나쁜 일, 심지어는 젊은 시절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게 만들었던 그 지긋지긋한 고통과 상처, 내 인생의 약점, 수치, 그런 것들을 통해서 가장 보석처럼 소중한 것들을 내게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내게 일어난 모든 나쁜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송하게 됩니다. 여러 날 동안 계속 됐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인생이 너무 편합니다. 왜냐하면 나쁜 일이 일어나봐야 좋은 겁니다. 나쁜 일이 일어나봐야 또 좋은 것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드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너무너무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그 깨어진 관계들을 고치는 하나님의 사랑, 그런 것을 내가 경험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믿음 가지고 있어도 우리 맘먹은 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되면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물이 산속을 흐르며 이런저런 돌멩이를 부딪치면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어 계곡을 생명의 물소리로 가득 채우듯이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녀들 항상 가엾게 보십시오. 손녀가 탁 태어났는데, 방금 태어났다는 것을 사진으로 보내줬습니다. 외국에서 봤습니다. 첫 번째 드는 생각이 ‘너도 네 인생을 살아내야 되겠구나. 2100년까지.’ 걔네들이 2100년까지 살거든요. ‘2100년까지 네 인생을 살아내야 되겠구나. 그게 얼마나 큰 무게인가.’ 그런데 우리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누린다면 그러면 나쁜 것들은 그 속에 들어와서 그런 생명과 은혜 속에서 놀랍게 휘돌려져서 정말 좋은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마어마한 책에 쓸 간증은 아니더라도 역사에 남을만한 위대한 간증은 아니더라도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내게 너무 나쁜 일이 일어났는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순종하게 주님 앞에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눈물로 하나님께 매달렸더니 나쁜 줄만 알았던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놀랍게 좋은 것으로 바꾸셨다는 그런 경험쯤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죠? 무엇이 그렇게 바꿔놓았습니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그것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하나님이 그런 생명과 사랑을 무한히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우리가 그런 것들을 무한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약속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의 삶 속에서 그것들을 그렇게 누리며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IV. 연합 안에서의 삶
그래서 우리는 영적 연합 안에서의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연합 안에서 그 생명과 사랑을 충분히 누리면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즘도 우량아 대회 그런 거 아직도 있습니까? 없죠? 옛날에 가난하던 시절에 아이들을 데려와서 저울에 달아가지고 제일 많이 나가는 애들 우량아라고 상 줬습니다. 그 때 우량아 된 아이들보면 돼지 같은 아이들이고 우리 시대에 지금 아이들이 그러면 ‘어려서 비만이 평생을 간다는데.’ 그러고 고민을 할 것입니다. 분유 선전할 때도 항상 이렇게 돼지같이 생겨서 목이 보이지 않은 애들, 그런 애들 갖다놓고 선전을 했습니다.
A.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하심
그런데 이런 생명과 사랑을 우리들에게 계속 공급해주심으로써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정신이 그렇게 예수의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입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그 시절에 모든 사람이 대개 모유를 먹였습니다. 그런데 엄마도 무얼 먹어야 젖이 나옵니까? 애들이 시장바닥에 보면 나오지도 않는 젖을 물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엄마 가슴에 매달려있는 아이들을 우리는 많이 봤습니다. 또 우리 동네 어떤 아이는 엄마가 일찍 죽었습니다. 할머니가 얘를 키우는데 젖이 있어야죠. 그래서 동냥젖이라고 해서 동네 사람들이 먹여주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러니까 밥을 끓여서 미음을 먹입니다. 분유는 굉장히 여유 있는 집안사람이나 분유를 먹이는 거지. 우리 아들 낳았을 때도 나도 분유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습니다. 먹으니까 떨어지잖아요. 돈은 없는데 왜 그렇게 잘 먹어. 그것을 사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니까. 그런데 그렇게 그나마도 못 먹고 자란 아이들은 발육이 안 됩니다. 지금 북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군인들이 우리나라 중학교 1, 2학년 키밖에 안 됩니다. 평균 10cm가 우리나라 국군보다 작습니다. 왜 그래요? 못 먹어서 그럽니다. 특히 고난의 행군 때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데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먹는 거, 특히 아이들에게 주는 분유나 이런 것들 빨리 보내야 됩니다. 안 보내면 나중에 우리 건강보험으로 전부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진짜입니다. 우리 자손들에게 그것을 물려주는 겁니다. 거기서 미숙아들이 태어나고 정상이 아닌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없어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분유 같은 것으로 폭격을 해야 합니다. 위에다. 진짜입니다. 그게 한 20년, 30년, 40년, 50년에 건강보험 재정적자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막 갖다가 융단폭격 하듯이 막 깔아야 합니다. 아무나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깔아야 합니다.
그런데 비실비실 마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없습니까?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 겁니다. 산에 암벽 같은 데 간신히 붙어있는 나무들은 몇 년 된 것인지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왜? 겨우겨우 물기를 머금고 말라죽지 않고 버티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추운 지역에 가 보면 300년 됐다고 그러는데 어른 키보다 좀 클 정도밖에 나무가 안 됩니다. 왜? 너무 추운 데서 영양분도 없이 간신히 생명을 버티고 사니까, 그게 분재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 생명과 그러한 사랑을 거두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모든 사람이 그것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떡하라는 말입니까? 그런 것들을 충만히 누리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데 아주 비틀어진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될 것이 뭐냐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 속에서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때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기로 서약을 했지만 바탕 자체는 죄인입니다. 그 죄가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감격,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혜, 성령의 감화, 그리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과 현재적인 감격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뭐가 다르겠습니까? 똑같이 악하고, 죄 짓고, 속이고, 부정직하고, 남을 해하고, 자기 이익을 부당한 방법으로 취하고, 그런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뭐가 다를 수 있습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안 됩니다. 그런데 현실은 “안 돼.” 하는 줄 하나 가지고 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소금이다.’ 이것을 항상 되뇌면서도 이념 하나를 가지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현재적으로 그런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아야지만 우리가 세월이 흘러갈수록 좋은 사람들이 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B. 영적 자원을 누리는 길
그 뿐만은 아닙니다. 이러한 연합 안에서 우리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영적 자원이 증진되는 것입니다. 영적 자원을 증진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셔서 “그것으로 끝났다.” 그러지 않고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아라. 순종하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 은혜를 받아라. 간절히 기도해라. 그리고 주님을 섬겨라. 자기를 이겨라. 주님을 바라보며 견뎌라. 환란 속에 불평하지 말고 충성하라.” 이런 요구를 우리에게 수없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 연합의 특성은 뭐냐면 성육신적 연합이나 신비적 연합에는 차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연합은, 특히 완성에는 차이가 없는데, 영광의 날에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을 때 완성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는데 그렇게 구원받은 이후부터 그 영광의 날에 이를 때까지, 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죽어서 성화를 하나님이 완성시키기 전까지, 성화의 요구 아래 있는 동안에는 생명과 사랑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지는 않지만 이 생명과 사랑을 우리가 실제로 누리는 그 크기를 조건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너희가 믿음으로 사는 것만큼, 순종하는 것만큼, 죄를 죽이는 것만큼,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큼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주님이 조건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우리가 충만히 누렸을 때 ‘이것은 내가 순종했기 때문에 따낸 것이다. 내가 잘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만 주신 것이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해서 내가 벌어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받는 수단일 뿐입니다. 언제나 그 생명과 사랑은 우리의 대가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만히 주신 것을 우리들이 불순종과 죄, 나태, 태만, 게으름, 싫증,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충만히 누리지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것을 꺾을 때 주님께서 그것들을 우리 안에 다시 충만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을 아무리 펼쳐놓고 봐도 결국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그 위대한 생명과 사랑을 물 붓듯 부어주셨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렇게 말씀하지를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기도하라. 깨어있으라. 순종하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라. 열심히 주님을 섬겨라. 순전하라. 성실하라.” 성경이 우리에게 수없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말씀에 그 말씀을 따라서 정말 매일 매일 눈에 보이는 현실대로 살지 않고 오히려 이 현실너머에 계신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현실을 살아가고 내 생각과 나의 모든 인간적인 계산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생활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강물처럼 밀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려움이 있는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어려움을 물러가게 하실 것이라고. 그래요 사실. 역경과 어려움이 있을 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물러가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하나도 안 바뀝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것을 나는 도저히 그것을 이겨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생명과 사랑으로 나를 충만하게 하시니까 그 현실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놀라운 힘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알고 보니까 별거 아닙니다.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그래서 오히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저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정작 그런 시련과 역경에 처한 사람은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와 찬송을 돌립니다. 왜? 그 사람 안에 예전에 없는 생명과 사랑이 충만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게 게으르게 살고, 그렇게 기도 안 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하지 않고, 그렇게 마음을 다하여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지 않고, 태만하게 살면서, 구원받은 건 맞습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하나님이 없다고 느끼는 겁니다. 현실을 마주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가 얼마나 많은 신앙생활을 해오고 예전에 열정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헌신하며 살았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오늘 살아갈 수 있는 그 생명과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수십 년 전에 주어졌던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여러분을 내려다보시면서 정말 연약한 인간인데 그 연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어디까지 참고이길 수 있는지를 주님이 모르시겠습니까? 다 아시죠.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군대에 가면 군인들이 훈련을 받습니다. 목구멍에서 단내가 나오고 죽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교관을 총으로 쏴버리고 싶은 생각이 막 드는 겁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할 그 때쯤에 조교가 호루라기를 불면서 “5분간 휴식!” 그러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수없이 군인들을 훈련시켰기 때문에 죽겠다고 그래도 어디까지는 참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거기까지 끝까지 밀어붙이는 겁니다. 여기서는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휴식!” 그러는 겁니다.
사람도 사람을 그렇게 아는데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알아요.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처할 때 알아요. 그 시점에서 여러분은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돕지 않으시나?’ 여러분, 돕는 게 뭡니까? 계속 인생의 장애물 치워주는 거잖아요. 여러분 자녀들도 그렇게 기르면 안 됩니다. 넘어지면 제 손으로 일어나고 문제가 생겼으면 애가 좀 컸으면 “네가 책임지고 네가 해결해.” 그리고 내버려둬야 됩니다. 인생에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엄마 아빠가 가서 발길로 계속 차서 평탄한 길을 만들어 주면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절대로 푸른 풀밭을 골프화 신고 걸어 다니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끊임없는 시련과 난관을 통과하면서 부르짖게 만드시고, 살 소망이 끊어진 거 같았을 때 하나님 버린 것을 후회하게 만드시고, 어떤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 사실은 나에게 있는 모든 믿음이 껍데기였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생사를 걸고 매달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금 그런 충만한 생명이 넘치도록, 그 사랑이 넘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한 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을 뿐인데 하나님이 부어주셔서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들고 극복하며 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도록 하나님이 주시기도 합니다. 한 번의 예배가, 한 번의 기도가, 한 권의 책이, 한 편의 설교가 인생을 바꿔놓기도 합니다. 왜? 예전에 없었던 그 생명과 사랑의 힘을 내가 받고 나니까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미 주셨습니다. 그 통로를 여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보혈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은 간절히 모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누리고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신음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도록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도록 하나님이 그런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그렇게 어두운 인생을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용기와 결단, 자비와 사랑, 그 모든 풍성함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보여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얘기는 하나님이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에게 공급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증으로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기도 안 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자꾸들 그러는데 그러면 죄 안 졌다고 쳐요. 사실은 먹고 마시고 숨 쉬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숨 쉬는 모든 것들이 다 죄입니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죄 지은 게 없다고 칩시다. 신문에 날 죄 같은 것 없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 안 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사랑하지 않고, 공과 드린다고 그러면 하얀 공과책 들고 그냥 걸어 나오고, 그나마 구역예배 참석도 안 하고, 예배 시간에는 그냥 신천지에서 온 사람처럼 예배드리다 가고, 그러는데 무슨 생명이 무슨 사랑이 그 속에 부어지겠습니까? 빈털터리로 왔다가 빈털터리로 가는 겁니다. 잔고가 없는데 어떻게 투자를 해 봐요. 잔고가 없는데 어떻게 그 통장을 가지고 모험을 해보느냐 말입니다.
“그래, 우리 가정이 이렇게 힘들어. 그래, 우리 구역이 이렇게 힘들어. 그러나 나는 할 수 있어. 왜? 주님이 이런 일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해 주실 거야.” 그러려면 잔고가 있어야 합니다. 없습니다. 늘 하는 말로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거잖아요. 이렇게 힘든 일이 있고 저렇게 힘든 일이 있습니다. 상담할 때는 다 이해해줍니다. 그러나 기도 안한 건 안한 거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안하는 건 안하는 거잖아요. 예배에 은혜를 못 받는 건 못 받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사람의 삶이 전투적이어야 되잖아요. 기도하러 그렇게 힘들게 금요기도 나왔으면 반드시 기도하고 돌아가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되잖아요. 예배 오면 주님을 만나고 와야겠다는 결의가 있는 것처럼 그런 간절함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냥 흐느적거리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너무 힘든 인생이라고 얘기하면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사는 겁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행복이 뭔지를 모르고 마지막에 죽을 때 ‘성도 아무개’ 십자가 하나 그려놓고 예배드리는 겁니다. 천국 갔을 수도 있고 못 갔을 수도 있겠죠.
V. 적용과 결론
그러면 마지막으로 제가 도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 성육신의 연합 안에서 모든 인류와 예수의 인성이 연합되었습니다. 그들을 몸처럼 여기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살 자원이 있습니까? 그래서 가까이 있는 불쌍한 이웃들을 돕고, 아프리카의 난민들을 돕고, 공산 치하에서 사회주의 치하에서 억압받는 사람들, 인권이 짓밟힌 북한 모든 사람들 도와야 합니다. 외국에 나가서 보면 눈물이 납니다. 너무너무 할 일이 많은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무위도식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냥 지나가는 소리가 아닙니다. 세계에 할 일이 너무나 많고, 몇 사람만 거기 가서 예수 붙들고 생명과 사랑을 부여받고 십자가 지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혼들이 살아날 것이라는 선교적인 전망이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하고 싶은 일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의 일 만분의 일도 안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고 예수의 몸에 접붙여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은 모르는 그 생명과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그 생명과 사랑이 우리를 어떻게 이긴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지, 역경과 시련 속에서 어떻게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지를 우리는 생생히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것이 작년일수도 있고, 5년 전일수도 있고, 10년 전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간절히 기도하면, 죄가 있으면 용서해주시고, 역경이 있으면 물러가게 해주시거나 극복하며 살게 만들어주시고, 관계가 끊어졌으면 그 관계를 다시 복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모든 것을 주십니다.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에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응답이 안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 매달려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게 그렇게 된 것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떡합니까? 결국은 “너희들이 이 세상에 어떤 인생을 지나든지 간에 마지막 날 너희들이 숨을 거둘 때 내가 너희의 성화를 완성하고 그리고 마지막 날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우리 모두 부활하는 그 날에 내가 너희를 완전한 연합을 나와 함께 누리게 할 것이다. 어떠한 시련도 죄도 슬픔도 고통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연합을 막을 수 없는 완전한 연합 안에서 끝없는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한 그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 때까지는 너희들이 나를 믿어라. 믿음으로 살아라. 그리고 나에게 순종하라.”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둘입니다. 하나는 그냥 불순종하고 싫어서 그냥 뺀질거리면서 죽어도 살기 싫은 인생을 살다가 구겨진 채로 그렇게 사라져가든지, 아니면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누려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그렇게 그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많은 이웃들에게 누리도록, 그래서 교회를 넘어서 예수님이 당신의 인성과 연합시키신 이 모든 인류 안에 흘려보내다가 죽을지, 그러면서 주님과 함께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인생을 살든지, 둘 중의 하나 이외에 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딱 그것밖에 없습니다.
자, 두 시간쯤 더하고 싶지만 이제 난 여기서 말씀을 끝냅니다. 나는 이 설교가 끝났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탕자는 가난하고 굶주렸을 때 ‘아,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아버지는 정말 부자인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은 흉년을 만나서 주려서 그 돼지에게 주는 쥐엄 열매조차도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도 ‘아버지가 얼마나 부자인가?’ 생각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요?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달콤한 사랑, 그리고 그 전율하는 생명을 맛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행복한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그것을 몰랐다면 오늘이 그 날입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 저는 성육신적 연합 안에 있지만 아직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 같지 않습니다. 오늘 오셔서 나를 구원해주시고 그 좋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몸에 나를 접붙여주십시오.”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 뿌리신 핏길을 지나 주님 앞에 나아가 생명과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모든 길을 주셨는데 불순종했고, 게을렀고, 믿음으로 살지 않았고,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다시 그 잃어버린 생명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 충만한 사랑과 생명을 누리며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게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의 감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 19:38)
녹취자 : 김세나
아리마대는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북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라고 합니다. 거기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아리마대 출신이었고, 이 사람이 돈이 아주 많은 부자였습니다.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일에 참여하지 않고 반대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제자’라는 말을 사용할 때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 번째로 열주 제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자하면 열두 제자를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라다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세 번째 가장 넓은 뜻으로 사용되는 의미로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지칭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이었고, 유대인 중에서는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매일 따라다녔던 전도대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매일 따라다녔던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은혜를 받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라 여겨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숨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확실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였지만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밝히 드러내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고 하는 이야기를 고백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였지만 무엇인가 용기, 결단, 자신의 정체성을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하는 신앙의 확고한 자세 같은 것들은 부족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 당시에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 사람이 돌연 태도를 바꿔서 빌라도를 찾아갑니다. 빌라도는 당시 총독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못 박아 죽이도록 사형 언도하여 내준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유대인의 매우 중요한 종교지도자로서, 그리고 부자로서 유대인 가운데 명망 있는 한 사람으로 빌라도를 찾아갈 수는 있었겠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나 모든 것을 볼 때 아마 청을 넣어서 빌라도와 면담은 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음모와 암투들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부터 예수를 죽여도 예수가 살아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진실한 것으로 가장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어디엔가 가져가 감추고 그렇게 해서 소문을 증폭시킬 지도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염려를 종교지도자들이 하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은 그가 그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든지 간에 매우 위험한 일에 휘말릴 수 있는 그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아리마대 요셉이 무엇인가 심경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는 이러한 행동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일이 일어났기에 이러한 행동을 하였는가 따지기 전에 먼저 그러면 아리마대 요셉은 왜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리마대 요셉뿐만 아니라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모든 제자들, 넓은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던 예수님의 제자들 까지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무엇인가 또 다른 의미라고 생각하였지, 진짜 죽은 사람으로서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만약 그것을 굳게 믿었다면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으신 후 그렇게 깊은 절망과 슬픔 속에 두려워하며 도망가고 숨어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던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그 예루살렘에서 온 여자들이 그렇게 슬피 울며 가슴 아파 했을 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리마대 요셉의 마음은 어떠한 것입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가장 중요한 예식이 장례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최소한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랍비, 선지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는데, 그 분이 십자가에서 흉악한 죄수들이나 당하는 끔찍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후 그 시체가 내팽개쳐져 있을 때 그것이 너무 마음 아팠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모셔다가 자기가 돈이 많고 여유가 있으니까 자기의 소유의 매장지 중 좋은 곳으로 예수님을 모셔서 편안히 안치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향품을 넣기 위해서 이른 새벽 언덕을 오르던 그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헌신도 역시 그렇게 예수님의 장례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고,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공의회 의원으로서, 부자로서,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는 사회적인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경건한 인물로서 무엇인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제자였지만 유대인들에게 그 사실을 감추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 사람이 분연히 일어나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고, 유대인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사람의 시신을 가져다가 마치 자신의 친 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의 소유지에 그 분을 훌륭하게 매장하려고 했다는 것은 자기 정체가 폭로되어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놀라운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그냥 간단하게 ‘이 일 후에’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 후에” 무슨 일이었겠습니까? 바로 앞을 보십시오. 34절을 보겠습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이 일 후에.” 무슨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그 후에 바로 이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어쩌면 이 사람도 바로 그 자리에 있어서 그 현장을 목격하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 올라가신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은 골고다 언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고 당신 자신이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당하신 것을 절실하게 마음 아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자였지만 두려웠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지위, 사회적인 명망,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 모든 평가, 이러한 모든 것들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유대인들에게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감추었습니다. 숨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는 그 분이 죽어야 우리가 속죄함을 받을 수 있다든지, 혹은 그 분이 죽은 후에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든지, 그러고나서 성경이 강림하셔서 새로운 시대가 올것이라는 등등의 구속사의 신학적인 의미를 그는 몰랐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던 예수 그리스도, 선지자, 혹은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그 분은 하나님 곁으로 갔겠지만, 자신은 여기에 남아있고, 그러면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시고 진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수고하신 분, 우리를 눈물로 희생으로 섬김으로 그렇게 사랑하던 예수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진리 때문에 죽임 당하였던 십자가의 사건을 보고 자신이 진리 때문에 예수님처럼 그렇게 용기 있게 행동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고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내 놓으라 할 때에는 자신이 이 일 때문에 예수의 제자인 것이 알려져서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잃어버려도 나는 괜찮다 라는 굳은 결심이 섰던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용기 없었던 아리마대 요셉에게 가져다 준 커다란 변화였습니다. 이전에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한 후에 그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이 사람만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직후에 그는 깊은 감화를 받아서 예수의 제자인 것이 드러나고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좀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았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하시기 전 두려워 도망가다가 다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을 받들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모든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노라고 다짐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이 정작 고난을 당할 때 도망하였고 멀찍이 따라왔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였고 그리고 처형되시자 숨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일생동안 예수를 버린 것이 가슴에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고 예수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신학적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 사도들은 한결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주는 의미에 자신의 인생을 묶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을 제외하고는 열두 제자 중 누구도 자기의 목숨을 다 산 사람이 없이 그렇게 예수를 위해서 순교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죽기 전에 쓴 베드로 서신에서 그는 바로 그렇게 임박한 핍박 앞에 흔들리고 있는 교인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불타는 소망을 가지고 기꺼이 고난을 받으라고 자신의 가슴으로 편지를 쓸 수 있었습니다.
(찬양)
새벽 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날 위해 바친 고귀한 희생
나도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예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찬양)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내가 지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던 아리마대 요셉을 보십시오. 그렇게 몰랐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예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괜찮다는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위해서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비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는 얼마나 분명합니까? 신학적으로 얼마나 풍부합니까? 그 당시의 사람이 십자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합쳐도 우리 한 사람이 알고 있는 것만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냐?” 십자가의 죽음이 아리마대 요셉에게는 숨겼던 제자의 신분을 기꺼이 드러내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도 좋다는 마음을 갖게 하였다면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바꿔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해 가면서 역경과 시련을 만날 때 우리들이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근거 없는 비난에 흔들리고 소심해 지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평판을 두려워하고 그러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위탁하신 진리와 복음의 정신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감화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그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덧입어 살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은 죽었고, 우리를 하나님께 인정받게 하기 위하여 당신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우리에게 하늘의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그 분은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다시 한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가슴에 새기고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그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붙들려 주님 앞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로 돌아온 사람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
녹취자 : 김세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지금 우리 시간으로 보면 금요일 아침 9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전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있었고, 그 기도 후에 체포되셔서 빌라도에게로 헤롯에게로 다시 빌라도에게로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고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브라이드리온 이라는 왕궁수비대가 있는 곳에서 매를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나타나신 것이 빠르면 6시, 늦으면 아침 7시 정도 되지 않으셨을까 추측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당신이 매달리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렬을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행렬을 따라왔는가 하면, 그때가 바로 유대인 최고의 명절인 유월절이었고, 이 때 경향각지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와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하신다는 소식은 엄청난 뉴스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많은 화제를 뿌렸던 종교지도자, 혹은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선지자 혹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그 예수가 순순히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 번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 우리들이 모두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저 평범한 사람처럼 예수는 정죄되고 결국 유대인들의 음모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바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 세 번째 말씀,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자기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였지만 이것이 어떤 주석가들에 의하면 왕궁에서 쓰는 어법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읽는 것처럼 예의에 어긋난 표현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서는 마리아가 당신의 어머니였지만 그러나 자신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또 우리가 그제 배운 대로라면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와 연합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제껏 까지 살았던 모든 삶을 접고 십자가에 매달릴 때에는 마리아의 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온 인류와 인성적인 연합을 이루시고, 그 온 인류의 대표로서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십자가 아래 있었던 어느 한 사람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지만 그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서 따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던 일부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가슴 아파 하며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면서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나무에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죽음은 사람을 못 박아서 나무에 매달고 이제 그 피가 쏟아져 서서히 죽는 것을 기다리는 고통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가슴을 치고 울면서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도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수들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죽기도 하지만 또 어떤 죄수들은 3일, 4일씩 매달려 있는 동안 죽지 않았다고 하니 그 매달려 있는 동안 겪은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로 어쨌든 모든 많은 사람들이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의 십자가 곁에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가 나무에 매달려 죽어 가시는 그 가슴 아픈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여시고 그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보시옵소서 아들입니다.” 누구이겠습니까? 복음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인물이 자기 자신일 때 그것을 ‘나’라고 표현하지 않고 3인칭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바로 사랑하시는 제자가 거기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제자들을 아끼셨지만 특별히 마음에 품고 사랑하시던 제자가 셋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가 보면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34절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명백하게 사도요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창에 허리를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리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십자가 아래에서 일어난 마지막 순간의 상세한 기록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생략되어 있고 그리고 요한복음에만 목격자의 증언같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요한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있게 된 것입니까? 성경 구절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5절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나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 광경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배신자의 유다가 데리고 온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체포하시는 광경입니다. 그때 이미 제자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홀로 체포되시고 빌라도 앞에서, 그리고 헤롯에게 다시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시고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매 맞으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고 못 박히고 그리고 몇 시쯤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마도 9시에 못 박히시고 9시에서 12시 사이, 앞에 이미 몇 가지 기록들이 나오니까 최소한 10시 반에서 11시와 12시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신 후에 배신자에 의해서 체포되어 가시는 장면만 나오는데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고 나오는데, 오늘 요한복음에는 예외적으로 한 사람이 예수를 버리지 않고 십자가 아래 서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핵심적으로 말하자면 마태복음 26장에 나와 있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는 말도 사실이고, 오늘 이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이 사도요한의 모습도 진실입니다. 그러면 그 사이를 매울 수 있는 유일한 추측은 모든 제자들이 도망갈 때 요한도 도망갔지만 그러나 모든 제자들 중 유일하게 사도요한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려움 속에 견딜 수 없는 혼란을 느끼며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되도록 내버려두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갔습니다.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흘렀고 도망간 것은 금요일 새벽일 것입니다. 잠시 시간이 흘렀을 때 그의 가슴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하였고 자기들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일생을 함께 해 주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자책감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 그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였을 때 더더욱 자기가 예수를 버린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달려갔을 것입니다. 어쩌면 요한이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올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은 예수 십자가에 못 박은 이후 골고다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인파를 해치며 십자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한 어린 사도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늦게나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깨달았고 그래서 예수를 버리고 예수보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해서 도망갔던 것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그 분이 운명하실지라도 그 분 앞에 있는 것이 자신의 마땅한 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갔습니다. 막상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갔지만 그는 예수님께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과 함께 “우리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주님을 위해서 죽는 데까지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다짐하였던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과 모든 각오는 사라지고 차갑게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그리고 자신 한 사람이 살고자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디에 있는지 몰랐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행동을 깊이 후회하게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핍박을 무릎 쓰고 자신들을 사랑하고 보호하시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가르쳐주신 일관된 행동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모든 것을 잘못 없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신앙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잘못을 진솔하게 뉘우치고 돌이켜 서는 것입니다. 누가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가 있겠으며 흠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이 “주께서 우리의 허물을 감찰하시면 누가 하나님 앞에 서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요한은 다른 사도와 똑같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깊이 뉘우쳤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사랑한 예수 그리스도, 자기들에게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착한 삶을 가르치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 모든 고난과 핍박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그 이유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보면서 예수보다 자기의 목숨을 잠시 아꼈던 것을 깊이 후회하고 예수의 십자가 아래로 돌아왔습니다. 인파를 헤치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그는 아마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없이 나 혼자 이런 양심의 가책을 부여안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예수와 함께 죽을 수 있다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골고다 언덕,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간 상황에서 당신이 가장 사랑하던 제자 중 한 사람이 그 인파를 헤치고 죽음을 각오하고 당신의 십자가 아래에 서 있었던 것을 보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그 분이 십자가를 지시매 사람을 의존하지 않으셨지만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가 당신과의 사랑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돌이켜 회개하고 당신께 와 서 있는 그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요한은 예수님께 아무 말을 건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 모습은 요한이 평소에 뵈어 왔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부끄러움에 휩싸여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 사랑하는 이 제자의 마음을 풀어 주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그는 아들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어머니, 나는 이제 이 십자가를 지고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습니다. 이제 예전처럼 목수 일을 하면서 어머니 가까이에서 어머니를 돌봐드리지 못합니다. 나대신 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그 일을 해 드릴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입니다. 그리고는 부끄러움 속에 떨며 울고 있었을 사랑하는 이 제자에게 한 말씀 건내셨습니다. “보아라, 네 어머니라.” 즉 사랑하는 나의 제자 요한아 나는 이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인류의 구속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이제 속죄의 제물이 된다, 나대신 네가 우리 어머니를 육신의 어머니라 생각하고 돌보아 드리거라.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요한의 마음을 풀어 주셨습니다. 마치 요한으로 하여금 요한에게 ‘너는 잠시 나를 버렸다고 자책하지 말거라. 너는 나는 버렸으나 나는 너를 버린 적이 없단다.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니 너는 마음에 가책을 받지 말거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 이 사람 요한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신의를 지킨 유일한 제자가 되었고 이후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떤 일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어떻게 물과 피를 쏟으시고 죽으셨는지 오직 한 사람, 요한에게서 그 증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생동안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빚진 것을 기억하고 전승에 의하면 그 어머니를 모셨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다가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잠시 주님을 떠나고 은혜에서 미끄러지는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깊이 돌이키고 그 십자가 은혜 아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그리스도 은혜 아래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 한번 우리가 예수께 속한 자이고 우리가 주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께 돌아온 모든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배척하지 않으시고 주님이 받아주셔서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용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를 멀리 떠나 숨으셨습니까? 아니면 이제 아직까지도 멀리 도망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배신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잠시 주님을 떠났지만 그리스도 예수께로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지금 다시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까? 주님은 오늘도 당신을 멀리 떠났던 사람들이 이 요한처럼 당신의 십자가 아래로 돌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증인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십자가 아래서 자신의 잘못을 진솔하게 뉘우치고 용서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 망가지고 모두 끝난 것 같은 인생이 사실 우리의 끝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의 생각으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에서 우리를 살리시고 다시 건지시는 우리 예수의 사랑을 힘입어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그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