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에 관하여
(2019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19년 9월 15일 – 11월 10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19년 11월 18일
목 차
설교 프레임 …………………………………………………………………………………………………… 1
1. 염려는 어디서 오는가 (마 6:26-27) 2019.09.15. 주일오전설교 ……………………………… 12
2. 너희 자신을 알라 (마 6:26-27) 2019.09.22. 주일오전설교 ……………………………………… 24
3. 들풀에 깃든 사랑 (마 6:29-30) 2019.09.29. 주일오전설교 ……………………………………… 34
4. 필요한 것을 아심 (마 6:32) 2019.10.06. 주일오전설교 ………………………………………… 42
5.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 (마 6:33 상) 2019.10.13. 주일오전설교 3부 ………………………… 56
5.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 (마 6:33 상) 2019.10.13. 주일오전설교 4부 ………………………… 67
6. 먼저 그의 의(義)를 구하라 1 (마 6:33 중) 2019.10.20. 주일오전설교 ……………………… 83
7. 먼저 그의 의(義)를 구하라 2 (마 6:33 중) 2019.10.27. 주일오전설교 ……………………… 95
8. 이 모든 것을 더하심 (마 6:33 하) 2019.11.03. 주일오전설교 ………………………………… 109
9. 오늘 염려하지 말라 (마 6:34) 2019.11.10. 주일오전설교 ……………………………………… 122
<설교 프레임>
1. 염려는 어디서 오는가?
I. 본문해설
염려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마음을 기울여 걱정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마음의 불안정함. 선한 것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마음이 나뉘는 것”을 뜻한다. 거룩한 염려와 세속적 염려로 구분된다.
II. 염려는 어디서 오는가?
A. 자기를 사랑함
본문의 가르침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 6:19)는 교훈의 맥락 안에 있다. 그 결론은 “그의 의(義)를 구하라”이다(마 6:33).
지금 저축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물질의 욕심(慾心) 때문에 인생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위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염려는 자기 자신을 그릇되게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런 마음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 누구나 사랑하는 것에 대해 종이 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사랑하면 지혜(知慧)를 잃어버리게 된다. 마음의 눈이 어둡게 된다.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게 된다.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은 모두 육체(肉體)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육체를 사랑할수록 더 많이 염려하게 된다.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을 맡기지 못할 때 자기를 돌볼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럴 경우 미래에 대한 최선의 대책은 재물(財物)이다.
결국, 염려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그릇된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불확정적인 미래에 대한 불안(不安)에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까지 염려(念慮)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라.
B. 의지하지 않음
염려는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선하심과 능력(能力)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이시거나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의지하는 길은 재물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는 육체를 위한 자원의 공급이 재물로써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신뢰가 부족할 때 자기의 행복을 지켜줄 수단은 재물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세속적 염려는 자신, 그중에서도 육체(肉體)만을 위한 것이다. 영혼을 위한 염려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려는 것은 미래의 불안에 대비하려는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염려는 불안한 마음에서 온다. 이 불안은 두 가지다.
(1)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 두려움
(2)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이 염려는 신자이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데서 오는 불안이다.
거룩한 근심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바라고, 세속적 근심은 자기의 뜻이 이뤄지길 바란다.
세상 염려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의지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III. 염려가 엄습할 때
궁극적인 비결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을 깊이 누리는 것이다.
당장 그렇게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불안할 때마다 어떻게 할까? 염려가 밀려올 때 어떻게 대처할까?
1. 끊어서 생각하라
너무 힘들면 멀리 생각하지 말라. 이것이 인생의 지혜다. 인생의 시간(時間)을 끊어서 생각하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1년 후까지 생각하기가 힘들면, 1개월, 1주일, 1일, 그것도 힘들면 1시간, 10분, 1분으로 토막을 내서 생각하라. 그 시간만 생각하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고통 받지 말라. 그래봐야 염려로 몸과 마음만 상할 뿐이다.
2. 현실을 대면하라
중요한 것은 눈앞의 현실(現實)과 대면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다. 아무리 힘이 없어도 현실을 대면해야 함을 인정하라.
*조종사들의 훈련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가지라. 그러면 미래의 상황에 맞서서 극복할 힘도 생긴다.
염려로 고통 받을 때 조심하라. 불안과 괴로움을 도피하려고, 습관적 오락이나 쾌락, 약물 중독(中毒)에 빠지지 말라. 이것은 더욱 극복하기 어려운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어차피 당신이 마주해야 할 현실이다. 도피하려는 마음으로 이런 악습에 빠지게 되면 삶에 대한 주체성(主體性)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폐인이 되어가기 쉽다.
지금 인생이 꼬였지만 그런 현실에 직면했다는 이유 때문에 폐인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은 생각보다 강하다. 은혜(恩惠)를 주실 때 특별히 강해진다. 한순간을 이겨내고 나면 다음 순간을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생각하라.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것도 잠시 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이전에 가장 힘들었던 때를 생각하라. 이때도 지나간 것을 생각하라. 힘겹다고 생각되던 현실이 견딜만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3. 간절히 기도하라
짤막한 기도를 자주 간절히 드리라. 긴 시간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짧은 기도(祈禱)라 할지라도 진심으로 드려라.
간절히 기도하면 홀로 버려진 고립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은혜의 경험은 하나님을 의존(依存)
하게 하고 이 경험의 반복은 하나님의 도움을 더욱 갈망하게 한다. 기도하게 된다.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을 생각하라. 그 후에 있을 천국(天國)을 생각하라. 욕심을 버리게 될 것이다.
생사 간에 의지할 분이 하나님뿐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 욕심이 사라질 것이다. 마음은 평정(平靜)을 찾게 될 것이다.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라도 간절히 기도하라.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의미는 없다. 음식과 의복, 그리고 음료는 우리로 살아있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의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우리를 살아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안에서 평안, 기쁨, 그리고 쉼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육신의 삶을 위해 불안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염려를 통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확인하라. 삶을 돌이키라. 하나님을 바라보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우신다.
2. 너희 자신을 알라
I. 들어가는 말
염려하는 신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소크라테스(Socrates)의 어록으로 알려졌지만, 원래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 앞마당에 새겨진 신탁(神託)이다.
“그러므로 신(神)이 ‘자신을 알라’고 명하는 것은 우리가 영혼을 가진 자임을 잊지 말라고 깨우치시는 것일세”(Alkibiades, I.11.130c)
그러므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네 주제를 파악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영혼(靈魂)을 가진 위대한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염려하는 신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일깨워 주신다.
II. 너희 자신을 알라
“공중의 새를 보라”(26). 이는 의미(意味)를 생각하며 특별히 관찰해 보라는 뜻이다. 거기서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돌보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존귀하다.
A. 천부께서 돌보심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마 6:26)
새가 살아 있지 아니하고는 공중(空中)을 날 수 없다. 그 충만한 생명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인간은 농사를 짓고 그 작물을 거둠으로써 양식을 얻는다. 곡식을 창고에 모아두어 미래의 결핍에 대비한다. 이로써 자기의 생명을 보존(保存)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사실은 하나님이 돌보시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만 하실 뿐, 더 이상 돌보지 않고 버려두신다면 어찌 선(善)하신 하나님이시겠는가?
창조(創造)의 능력이 찬송 제목이 되는 것은 그것을 노래할 만물(萬物)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의 돌보심 없이 무엇이 존재하겠으며 있지 아니한 것이 어찌 그분을 찬송하겠는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더욱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4중의 아버지이심(fatherhood)이 있다. (1) 위격적. (2) 창조적. (3) 신정적. (4) 양자적 아버지이심이다.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구속(救贖)하심으로 아버지가 되셨다. 당시 청중들은 그리스도의 속죄(贖罪)를 아직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안다.
“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판단하려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과 또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는 생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보라. 이 생각이 예배와 기도 및 그의 총체적인 인생관을 촉발하거나 지배하는 생각이 아니라면, 이는 그가 기독교를 그리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다.”(J. I. Packer, Knowing God, p.224)
“너희”가 지상(地上)의 존재인 우리를, “하늘”이 천상(天上)의 존재인 하나님을 가리킨다면 “아버지(pater)”는 이 둘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다. 사랑의 아버지시다. 그분이 “너희 하늘 아버지”이심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불완전하고 이기적(利己的) 아버지가 아니시다. 완전하실 뿐 아니라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시다.
신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자녀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신하며 살라.
B. 귀하게 여기심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하)
1. 인간의 존귀함
인간은 존귀(尊貴)하다. 인간의 탁월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특별함에 있다. 그것은 사랑의 관계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신약에서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본문으로 인용된다(히 2:6-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지를 보여주셨다. 성육신-죽음-영광-구원-통치.
염려로 자기 마음을 상(傷)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존귀(尊貴)한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앗사리온은 1/16 데나리온으로 현재 약 6,000원 정도의 가치이다.
그렇게 가치가 적은 참새조차도 하나님이 먹여 기르신다면 그에 비할 수 없이 존귀한 인간은 얼마나 더 잘 돌보시겠는가?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귀함은 인간 존엄성(dignity)의 근거다.
“존엄하다”는 말은 “높고 엄숙하여 인간의 권력이 함부로 해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존엄(尊嚴)”은 임금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인간의 탁월함은 하나님 닮은 영혼과 정신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인정되어야 한다.
a. 보편적 인간성: 인간이기 때문에
b. 개별적 인간성: 자신이기 때문에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하)
어떤 새들의 조상을 친히 흙으로 빚어 만드셨는가? 어떤 새가 하나님과 가족처럼 교제(交際)하도록 창조되었는가? 어떤 새들이 영혼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는가? 인간은 존귀하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인간의 생명(生命)은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 염려하지 말라. “너희 자신을 알라.” 하나님께 존귀한 존재임을 기억하라.
2.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공중의 새들(ta peteina tou ouranou)”보다 귀하다. 왜 “땅에 앉아있는 새”가 아닐까? 이는 날아다니는 것이 매 순간 지속되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더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약 3,000원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도 이렇게 매 순간 돌보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소중하게 돌보실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는 사랑하지 않는 데서 오는 고립감(孤立感)이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은혜(恩惠)의 상태에 따라 각각 다르다.
인간으로서의 합당한 자존감(自尊感)은 사랑받고 인정받는 데서 온다. 이런 사람이 대체로 자신감이 있고 사회성도 뛰어나다.
하나님께 사랑받음으로써 자존감을 회복한다. 그 자존감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귀(貴)하게 여기신다는 확신이다. 매 순간 자기를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하나님은 분초(分秒)마다 우리를 돌보신다. 신앙이 식고 은혜에서 멀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어찌 당신의 자녀를 버리시겠는가?
염려(念慮)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염려는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좌절하게 만든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7)
매 순간 우리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라. 우리의 앞날이 주(主)의 손에 있다(시 31:15). 주님의 돌보심을 믿으라.
III. 적용과 결론
모든 염려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시는 그분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하늘 아버지시다. 전능하실 뿐 아니라 사랑하신다.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살라.
3. 들풀에 깃든 사랑
I. 본문해설
공중을 나는 새의 비유가 먹을 것에 관한 것이라면, 들에 핀 백합화의 비유는 입을 것에 관한 염려다.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대한 염려는 육신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 좁게는 육체의 생존이지만, 넓게는 육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II. 들풀에 깃든 사랑
A. 들풀을 입히심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생각하여 보라”(마6:28). 돌보는 사람도 없이 자라는 들판의 백합화를 보며 교훈을 받으라는 뜻이다. 자신에게 적용해 보라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는 여러 종류의 백합이 있는데 모두 일년생 화초다.
이 백합화는 아가서에서 신부(新婦)에 비유되기도 한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아 2:1-2)
이런 의미 때문에 백합화는 솔로몬 성전에 있는 놋바다 문양에 사용되었다(대하 4:5). 더욱이 성전 두 기둥, 보아스와 야긴의 꼭대기가 백합화 형상으로 장식되었다(왕상 7:21-22).
그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고두고 칭송했던 솔로몬의 영광과 비교해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
무엇 때문에 솔로몬을 영광스럽게 했던 왕(王)의 화려한 의복보다 들판의 백합화가 더 영광스러운가?
옷의 아름다움은 꽃의 아름다움을 모방한 것임.
옷에는 생명이 없지만 풀에는 생명(生命)이 있음.
옷은 장인의 솜씨를 보여주지만 꽃은 주님의 사랑을 드러냄.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마 6:28)
이것은 그냥 활짝 핀 백합화를 보라는 것이 아니다. 들판의 백합화가 어떻게 그리도 아름답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돌보시기 때문이 아닌가?
이 점에서 백합화는 솔로몬의 화려한 옷보다 더 아름답다. 하나님이 생명(生命)을 주시는 동안에만 그러하다. 죽으면 곧 메말라 버린다. 생명을 거두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합화가 아름답게 피어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살아 있도록 돌보신다는 증거다.
며칠 동안 피었다가 불 태워질 백합화도 아름답게 자라게 하신다면 당신의 자녀들은 얼마나 더 아끼시겠는가?
B. 믿음을 깨우심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
육신을 위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작기 때문이다.
믿음은 다음의 세 가지 요소로 이뤄진다. 지식에 대한 동의(同意), 인정(認定), 의뢰(依賴)이다.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 이외에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가난한 마음이 최고의 믿음이다.
만일 의지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수단(手段)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육신에 대한 염려는 작은 믿음에서 비롯된다. 염려는 믿음과 유사하다. 믿음의 부족은 무지(無知), 불신(不信), 의심(疑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데서 온다.
신뢰는 하나님에 대한 현재적이고 인격적인 경험에서 오는 감정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不安)은 이것이 부족한 데서 온다.
백합화는 들풀이다. 시편에서는 “들풀”이라는 표현은 “힘없고 연약한” 인간에 비유되기도 했다(시 37:2. 102:4).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 37:2)
이처럼 들풀은 하찮은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영광스럽다. 들풀에 깃든 생명(生命)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돌보시기 때문이다.
백합화가 비할 데 없이 아름답지만 그것의 본질(本質)은 들풀일 뿐이다. 들풀에 깃든 사랑을 기억하라.
들풀조차 돌보사 꽃 피게 하신다면 당신의 자녀들은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겠는가? 영혼에 생명을 주셔서 살게 하시지 않겠는가?
들풀이 스러져 불타는 것처럼 우리의 육신도 아름다움을 잃고 소멸된다.
우리의 관심이 단지 육신만을 행한다면 그 끝은 허무(虛無)일 뿐이다. 그러나 인생은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자주 생각하라. 인간은 단지 영원과 영원의 틈새에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라.
과거의 경험을 되새기라. 염려(念慮)가 나를 무기력하게 하고 좌절로 이끌었던 것을 기억하라.
염려하는 생각은 피할 수 없겠지만 사로잡히지 말라.
가장 막막하고 어려울 때 하나님이 도와주셨던 순간을 기억하라.
생사(生死) 간에 의지할 분이 하나님 한 분이시다. 아무리 염려해도 인생(人生)은 결국 하나님 손 안에 있음을 잊지 말라.
III. 적용과 결론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조차 입히시는 하나님이시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어찌 돌보시지 않겠는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은혜(恩惠)를 받으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라.
4. 필요한 것을 아심
I. 본문해설
염려하지 말도록 말씀한 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 생활의 모든 필요를 미리 아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육신의 필요(必要)에 대한 우리의 해결 방식은 이방인들의 그것과는 달라야 한다.
II. 필요한 것을 아심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A. 염려의 해결 방식
이방인(異邦人)
이방인들이 육신의 필요에 대한 해결 방식이 있었다. 욕망으로 신에게 비는 것이었다. 그들이 취하는 태도의 특징은 두 가지다.
a. 자기 신(神)을 섬기면서도 끊임없이 염려한다.
b. 그 염려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집중된다.
그들에게 기도는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 당시 이방인들에게는 신들과의 인격적(人格的) 관계 같은 개념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도덕적 신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방인의 자기의 신들에 대한 관계는 아부(阿附)와 뇌물(賂物)의 관계였다. 이것은 단지 탐욕을 투영시킨 것이었다.
그들은 좋은 일이 생겨도 불안해하고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 때면 더욱 염려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의 ‘비는 행위’로서의 기도는 신앙의 표현이 아니었다. 욕망으로 인한 염려(念慮)의 표현이었다.
불신자였던 때, 우리도 자기 운명을 생각하며 염려하거나, 자기를 믿으면서도 염려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2. 하나님의 자녀(子女)
-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신의 필요에 대해 다른 해결 방식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기 때문이다(롬 5:5).
- 신자가 세상 염려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그의 마음이 은혜를 떠나 부패했기 때문이다.
- 신자가 된 후에는 염려의 단계(段階)가 있다. (1) 자기를 위해 염려 함. (2) 남을 위해 염려함. (3) 하나님을 위해 염려함. 이것은 사랑 이 순전(純全)하게 되는 과정이다.
-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인격적(人格的)이다. 인격적 관계란 서 로를 함께 인격체로 인정하는 교제의 관계다.
이방신은 비인격적이다. 끊임없이 인간을 겁주고 굴복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다. 끊임없이 우리의 지성(知性)을 설득하시고 의지(意志)에 감화를 주셔서 당신을 사랑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전심으로 믿고 의존하게 하신다.
원래 “인격(人格)”이라는 말은 그리스(Greece) 시대 때, 연극에서 극중의 인물을 표현해 내기 위해 사용되던 가면(假面)을 가리키는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되었다.
이 개념은 기독교에서 구체적으로 발전했다. “인격”이란 신(神)과 결합한 존재의 개념으로서 ‘사람(human)’을 ‘사람’이게 하는 “내적 실체(實體)”, 혹은 “자립적 본질”(本質)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 사람the man/women)’을 ‘그 사람’이게 하는 것과 나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자기의 고유성(固有性)을 지닌 채, 살아가면서 주어진 환경의 변화와 이에 대해 대처를 통해 온갖 종류의 겪음(passion)을 당한다.
이 과정에서 그이 고유한 삶의 상황들은 생존하고자 하는 그의 영혼과 정신의 틀을 독특하게 형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격의 사회성(社會性)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염려하게 된다.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killing) 염려도 있고 살리는(vivifying) 염려도 있다. 두 가지 염려는 모두 사랑에서 비롯된다.
생각해 보라. 염려 없이 누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겠으며, 걱정이 없는데 어찌 예수를 믿었겠는가? 욕망(慾望)하는 것이 없다면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은혜(恩惠)에는 육신의 염려를 영혼에 대한 걱정으로 전환(轉換)시키는 힘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 자신과 이웃의 영혼에 대한 염려까지 포함한다.
* 예화: 장애아를 두었던 두 부모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그 반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즉, 영혼의 걱정을 육신에 대한 염려로 환원시켜 준다. 이때는 자기의 육신이 아니라 남의 육신에 대한 염려가 생겨난다.
* 예화: 영혼을 사랑할 때 육신도 염려함.
육신적 염려에 대한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탐욕(貪慾)과 이기심(利己心)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사랑을 알고 의지하는 것이다.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돌보신다는 확신 속에서 살라.
B. 육신의 필요를 아심
“아시느니라”(oiden). 제1완료형으로 “(이미) 알았다”는 뜻이다. 원형은 ‘호라오(horao)’인데, “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보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만물을 시간 안에서도 보시고 시간을 초월해서도 보신다.
1. 욕망으로 기도함
신들을 섬기지만, 이방인들은 육신적이다. 사고(思考)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들은 기도의 목적이 신에게 자기의 필요를 깨우치거나 원하는 것을 주도록 조르기 위함이라고 여겼다(마 6:7)
그들은 세상적인 욕구를 자신들의 기도 속에 투영(投影)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이 만들어 낸 신(神)이다. 그들이 겉으로는 기도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스스로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모든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보라. 무슨 일이 생길까? 즉시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갈 뿐이다. 그 자유의 대가는 무서운 혼란(混亂)과, 고독(孤獨) 그리고 허무(虛無)뿐이다.
* 예화: 사르트르와 보봐리의 결혼과 그 이후
2.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는 다르다. 우리는 묻게 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기도하게 하시는 것일까?
더욱이 열렬히 간구하라고 하시고, 심지어 기도(祈禱)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눅 11:10상)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약 5:17)
그것은 우리를 참 된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시키시는 훈련(訓鍊)이다.
a. 좋은 것들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짐을 알게 하신다.
* 예화: 가난한 시절, 점집에 다녀오신 아버지.
믿음은 모든 좋은 것들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이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b.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존(依存)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독립하려고 한다. 급기야 자기를 온 우주(宇宙)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죄(罪)다.
-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당신께 묶어 두려고 은혜를 주신다.
육체의 필요에 대한 예수님의 두 가르침이 있다.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 “하나님께 구하라.” 이 둘은 서로 모순(矛盾)처럼 보인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9-11).
그러나 이 둘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모순이 아니다.
주기도문에서의 ‘양식’(糧食)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위한 양식도 포함한다.
주기도문에서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依存)을 가르쳐 주는 문맥이지만 본문의 “양식”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염려를 경고하는 문맥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마 6:33).
따라서 육신의 필요를 위해 도무지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 안에서 무엇이 우선순위(優先順位)를 차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당시에 이방인의 자기의 신들에 대한 관계는 아부(阿附)와 뇌물(賂物)의 관계였다. 종교라는 것은 단지 탐욕을 투영시킨 것이었다.
“...너희 하늘 아버지는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여기서 “…있어야 할 줄 아시는” 행동은 우리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늘 아버지”(26,32)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님은 기도에 관해 교훈하실 때뿐만 아니라, 늘 그 우주적 절대자(絶對者)를 “아버지”(pater)라고 부르셨다.
“아버지”(pater)는 당시 유대 문맥에서 직계가족인 항렬(行列) 관계에 있는 조상에 대해서만 부르는 단어다.
이는 가족관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하늘”이 절대자로서의 무한한 초월성(超越性)을 보여준다면, “아버지”는 가족으로서의 친밀한 동질성(同質性)을 보여준다.
이런 표현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완전한 사랑과 무한한 능력이다.
능력이 없는 사랑(love)은 무기력하고, 사랑이 없는 큰 능력(power)는 무서울 뿐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실뿐만 아니라 땅에 있는 나를 한 가족(家族)으로서 사랑하신다.
“사랑은 필요(必要)를 안다.” 더 온전한 사랑일수록 상대방의 필요를 더 욱 더 잘 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의 기쁨은 사랑 받는 자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공포는 정동(情動)을 불러일으킨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예민함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유사한 감정(感情)이다. 큰 두려움을 경험한 사람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원인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사랑도 그러하다. 사랑의 경험은 그 대상뿐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모든 사물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한다.
* 일본 여자가 받은 프로포즈
참 된 사랑에는 인격적 헌신(獻身)이 뒤따르게 된다. 쇠가 불에 녹을 때 열(熱)의 존재를 증명하듯이, 드러나는 헌신은 감춰진 사랑을 입증한다.
처음부터 헌신이 없었다면 사랑이 아니었고, 예전에 있었는데 사라졌다면 그것은 “유산(流産)된 사랑”이다. 사라졌었는데 다시 나타났다면 그것은 “재활(再活)한 사랑”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유산되지 않는다. 재활한 사랑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언제나 나의 필요(必要)를 아실뿐 아니라, 공감(共感)하신다는 것은 자명하다.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시다. 나를 돌보신다. 그런 하나님을 알기에 나는 염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염려를 물리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헌신이 동반된 사랑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을 당신의 뜻과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랑의 연합을 위한 훈련이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인생의 많은 날들을 영혼을 죽이는 염려(念慮)로 허비한다.
염려하게 만드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라. 그러나 결코 자기 능력을 의지(依支)하지 말라. 마음 깊이 하나님을 의지하라.
육신의 결핍 때문에 마음이 상(傷)하기까지 염려하지 말라. 염려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함으로 성령(聖靈)을 근심케 하지 말라.
욕심(慾心)을 버리라.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풀조차 입히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라. 자신의 믿음 없음을 염려하라. 귀신 들어 비참한 아들을 위해 예수께 빌던 한 사람의 기도를 기억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 9:23-24)
5.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
I. 본문해설
“먼저(proton)”는 시간적으로, 혹은 질적으로 앞서는 것을 가리킨다.
“그의 나라”는 “하늘 아버지”(26), “하나님”(30), “하늘 아버지”(32)라는 표현으로 미루어볼 때 “하나님의 나라”가 분명하다.
여기서 “하늘”은 “초월, 영광, 무한, 능력”을 의미한다. “~의”(of)는 소유(所有)를 뜻하므로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소유로서 그분의 의도(意圖)대로 존재하는 나라”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핵심은 이것이다. “이방인들은 육신적 욕망을 추구하지만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라”.
II.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두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이미(already) 임했으나, 또한 아직(not yet)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나라다.
A. 하나님 나라의 두 차원
1. 현재적(現在的) 차원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이미 지상에 임한 하나님의 통치의 현재적 국면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기적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분의 생애는 인간임을 보여주는 평범한 사건들과 함께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기적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제껏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의 통치에 굴복하게 만든 최대의 무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fear)이었다.
신자는 복음을 믿음으로써 죽음의 위협도 이기게 되었다. 왜냐하면 구원받음으로 하나님 사랑 안에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이 오셨는데, 하나님 성령(聖靈)은 사랑으로 신자 안에 영원히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불변하시니 그분으로 하여금 그 사랑을 그만 두시게 할 상위의 존재가 없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그 죽음은 기껏해야 육체의 죽음이다. 그것을 지나고 나면 보다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이유다(요일 4:18).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세상의 기쁨보다 더욱 소중하게 여긴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들의 마음에 임했기 때문이다.
2. 미래적(未來的) 차원
이것은 이미 임한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성취(成就)되는 “그 나라”(the kingdom)미래적 국면을 가리킨다.
신자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는 이미 마귀의 통치를 부숴버렸다.
사탄의 나라를 거대한 공룡으로 비유한다면, 이미 머리가 박살나고 등뼈가 산산이 깨져버린 것이다. 두 팔과 다리는 이미 으스러져서 겨우 기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따라서 마귀에게는 우주적 승패(勝敗)를 번복할 힘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진리를 떠나 무지한 인간을 미혹할 수는 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이미 유효하지도 않은 무기로 신자를 겁박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유혹할 정도의 힘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어떤 사람들은 현실적인 악(惡)의 무서운 힘을 생각하며 이러한 논리를 부정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건재하는 세상의 외관을 보지 말고 복음 앞에 무너지는 인간의 내면을 보라. 세상을 바꾸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준다.
복음(福音)을 떠날 때 신자와 교회는 타락한다. 이는 이전에 그것들을 떠받치고 있던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준다.
신자는 회개(悔改)하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여 죄(罪)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 안에는 “거짓 신자”들이 있고, 보이지 않는 교회 안에도 “은혜에서 미끄러진 자”들이 있다.
빛 가운데 있는 어둠의 자식(sons of the darkness)들이 있고, 어둠 속을 걷는 빛의 자녀(sons of the light)들도 있다. 마지막 날에는 이 모든 악들이 제거되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B. 하나님 나라를 추구함
여기서 “구하라”(zeteite)의 동사 원형은 “추구하다, 이루고자 애쓰다, 실현되기를 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추구(追求)한다”는 것은 “어떤 생각과 행위들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기여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추구점(追求點)”은 인생의 궁극적 목표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통치다.
이것은 영혼과 마음 안에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통치(統治)며, 개인의 삶과 사회의 현실 속에서 사랑과 정의(正義)로 드러난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 어차피 육체(肉體)는 지상의 물질적 자원을 필요로 하고 영혼(靈魂)은 천상의 자원을 필요로 한다.
성경은 신자가 신앙을 이유로 육체에 고통을 가하며 사는 것을 결코 칭찬하지 않는다(골 2:23).
하나님이 주시려는 행복은 영혼과 육체 모두를 포함한다. 우리의 육체 또한 쉼과 만족, 그리고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은 죄가 아니며, 거기서 기쁨을 누리는 것도 하나님이 뜻하신 바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의 만족과 기쁨, 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것들을 인생의 추구점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삶은 “그 나라”(the kingdom)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향락”을 추구하는 것이며, 인간을 창조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반역(反逆)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 나라의 간첩으로 사는 것이다. 신자가 어찌 이 세상에서 사탄의 반란에 동조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런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것은 살아있어야 할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비참(悲慘) 중 죄 때문이 아닌 것이 어디에 있는가? 모두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인간의 위대함을 생각해 보라.
드넓은 제국을 지휘하도록 만들어진 황제의 금빛 지휘봉으로 하수구의 쓰레기를 건져내고, 드높은 위엄을 드러낼 황금 면류관을 돼지 머리에 씌워주는 행동을 생각해 보라.
상상만으로도 역겹지 않은가? 그 훌륭한 것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용도를 모르는 그 사람의 무지(無知)가 비참하지 아니한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상)
인생의 궁극적 목표는 “그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미 온 하나님 나라를 누리면서 그의 통치(統治)를 실현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신자의 삶은 때로는 실낱같다. 그러나 어두운 세상에는 불꽃이다. 우리의 삶은 그 불꽃놀이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榮光)이기 때문이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 안에서 말씀과 성령(聖靈)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 자신이 이 행복을 누리며 살고, 또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아 이 사랑 속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육체를 가지고 살지만, 단지 육체의 만족을 위해 살지는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한 뼘이라도 확장(擴張)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 살아있다. 신자의 행복(幸福)이 여기에 있다.
6. 먼저 그의 의(義)를 구하라(1)
I. 본문해설
염려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그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다.
여기서 “그의 의”는, “그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너희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의(義)다.
II. “의(義)”란 무엇인가?
“의”(dikaiosune)는 하나님의 성품들 중 하나이다. 의로운 존재는 “의”(義)라는 자질을 갖는다.
의(義)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세 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정의(正義), 신실(信實), 자비(慈悲)다.
이 개념의 뿌리는 구약에서 “체덱”(chedek). 혹은 “체다카”(chedakah)다. 이것들을 인간에게 적용시킬 때는 “올바름”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 혹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한 상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된 상태다.
하나님의 뜻은 계시를 통해 나타났고 기록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聖經)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다.
구약에서는 율법(律法)을 통해 복음을 보여줌으로써.
신약에서는 복음(福音)을 통해 율법을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등학교 세계사에 단 두 줄 밖에 언급되지 않는다. 왜 성경은 그것을 상세하게 다루는가?
그것은 의미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길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합치되어, 의(義)롭게 된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생명과 사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었다.
인류의 첫 조상들이 범죄했을 때, 즉시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되었다. 인간과 함께 자연도 저주를 받았다(창 3:15-17).
이때 하나님은 두 가지 은총을 베푸셨다. 형벌인 죽음의 유보와 메시아(messiah)에 대한 약속이었다. 이것은 제사로 표현되었다.
죄인들을 위한 제사(祭祀)를 통해 임시적 교제의 길을 여셨다. 의(義)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지만 용서하심으로 교통해 주셨다. 영원한 의(義)가 필요했다.
III. 의(義)와 믿음
1. 오래 된 오해
예수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지배하던 오해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의로운 자이며 그 의(義)로 자신들이 그분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율법(律法)에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합치함으로써 스스로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죄인이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2. 복음적 의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이 당신께 받아들여지게 한 “의”(義)를 도입하셨다. 이 의(義)는 하나님 자신의 “의”(義)였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이 구절을 읽으며 절망했다. “어찌하여 복음속에 당신의 칼을 두셨나이까”.
하나님의 의(義)를 율법에 의한 심판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구원과 관련해 선언한 바는 그런 의(義)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의(義)였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경건한 시인들에 의해 많이 고백된 바였다.
“주의 의(義)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시 36:6)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義)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40)
3. 하나님의 의
이런 의(義)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만 베푸실 수 있었다.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죽으심으로 이 의(義)를 이루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였다.
복음을 믿는 자에게 이런 의(義)를 주심으로써 죄인을 거룩하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셨다.
* 교회를 위해 돈을 빌려준 장로님
복음(福音)을 주시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신다. 구원하신다. 성령님은 보증이시다(엡 1:13).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信賴)다. 따라서 그 뒤에는 반드시 순종이 뒤따라온다. 의로운 생활이 이어진다.
IV. “추구하라”는 무슨 뜻인가?
“추구하다”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어떤 생각과 행위들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바지하다”.
따라서 “그의 의(義)”를 추구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다.
1. 인류의 구원을 추구함
“그의 의”(義)를 추구하는 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당신의 의(義)를 누리기를 바라신다.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음으로써 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우리는 하나님의 의(義)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다 그 의(義) 때문에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하나님은 유한한 자원으로 고통 받던 인간에게 자원을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감
그의 의(義)를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모든 인류가 그렇게 되길 갈망해야 한다.
그 일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義)를 본받아, 정의롭고, 신실하고, 자비한 사회가 되게 해야 한다.
V. 복음을 믿으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첫 선포는 하나님 나라였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여기서 “천국”(天國)은 문자적으로 “그 하늘의 나라”이다. “하늘”은 유대인에게 “하나님”을 가리키는 유대식 표현이다. 따라서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다음 두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a.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유대인들은 지상(地上)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믿었다.
그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는 표현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 바깥에 있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b. “회개하라”
이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는 복(福)의 나라라고 믿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재앙이 될 수 있다는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가복음에는 “회개하라”를 “회개(悔改)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구체적인 명령으로 나타난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천국의 도래는 하나님의 의(義)의 도래다. 그 의(義)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祝福)과 심판(審判)이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다. 자녀가 되어 지위와 특권을 누린다. 죄 때문에 잃어버렸던 사랑과 생명을 누리게 된다.
복음을 믿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信賴)를 의미한다. 그 신뢰는 곧 사랑(love)이다.
믿음을 통해 당신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신다. 그 관계는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충만히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이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드러나게 하셨다.
그 결과에 따라 하나님의 의(義)는 다르게 나타난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救援)하시는 의로,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審判)하시는 의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faith)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손과 같다. 이로써 하나님의 의(義)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아직도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늘 자원이 단절된 사람들이다. 그 결과는 고통이다.
구원은 하나님과 새로운 영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관계는 사랑의 관계다. 이것은 그 사람의 영혼과 마음, 생활을 하나로 묶는다.
* “당신의 사랑이 식었지?”
행동의 잘못은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들만 바꾸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V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좁은 땅덩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바로 그 나라 의를 추구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지상과 천상의 자원은 이 일에 이바지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의(義)가 이루어지기를 추구하며 살라.
7. 먼저 그의 의(義)를 구하라 2
I. 본문해설
이처럼 의(義)는 죄인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義)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룬 것이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언약관계를 깨뜨린 죄인을 예수의 희생으로써 의롭다 여겨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II. 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
의(義)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의 성품으로서의 의(義)는 다음과 같이 정의(定義)된다.
의(義)는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성을 침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시는 성품이다.
이에 관해, 성경에서 우리는 섬뜩한 사례들을 발견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법궤가 이동할 때 일이다. 뛰는 소 때문에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였다. 웃사가 손으로 잡았다. 이 일 때문에 그는 죽었다(대상 13:9-10).
사도시대 하나님께 이미 바친 땅을 팔았다. 받은 돈 중 일부를 감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시신이 되었다(행 5:4-6).
이런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어떠한 관용도 발견할 수 없고 용서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강조점의 문제다.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범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것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의(義)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의(義)가 용서하시는 사랑(love)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복음의 핵심이다. 기독교가 반지라면 그것은 그 위에 박힌 보석과 같다. 정답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침범하는 인간들을 사랑하심으로 그것을 지키신다.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복음의 비밀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 죄인들에게 예수의 죽음으로 이루신 의(義)를 주심으로써 당신의 거룩함을 보호하신다.
마르틴 루터(M. Luther)의 절규는 하나님의 의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을 모르는 데서 온 절망의 탄식이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하나님의 의의 비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義)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시는 신비가 있다.
III. 신자와 사회 안에서 이뤄지는 의(義)
A. 신자 안에서
먼저 한 사람 안에 이 의(義)가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살펴보자.
1. 율법으로 깨달음
먼저 율법(律法)을 통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것을 침범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의(義)의 요구는 심판이다. 자신은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가 죽음의 심판을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여전히 남아있다.
2. 복음에 대한 믿음
그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을 위해 의(義)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자신이 하나님께 다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의를 충족해야 하는데, 예수가 이루신 의(義)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자신이 만든 의가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길밖에 없다. 염치없지만 예수를 통해 이루신 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우리를 당신께 받아들여지도록 의롭게 하시는 방식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믿음이다.
3. 사랑하게 하심
복음에 대한 가장 짧은 묘사는 이것이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롬 5:8).
거듭남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써 구원하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의(義)와 사랑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되는지를 깨닫게 하여 사랑을 불러일으키신다.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이 생겨나게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義)를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B.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러한 경험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의(義)를 추구하게 하신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장하신다.
이렇게 신자는 하나님의 의(義) 때문에 믿음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 핵심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다. 의로운 자로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는 것이다.
의로운 세상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속에서 생명과 사랑을 누리는 것이다.
1. 사랑으로 섬김
우리가 의롭게 된 방식을 기억하라. 자기의 의(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義)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셨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는 오직 하나님의 의를 받았는가에 달렸다.
신자는 아무 공로(功勞)가 없음을 안다. 자기가 의롭게 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신자는 사랑하는 것이 힘들 때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의롭게 하신 방식을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자기희생을 배운다.
그 사실을 자기에게 적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2. 의로운 사회의 실현
신자는 사랑으로써 정의(正義)가 완성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다.
정의는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때 구현되는 덕이다.
그러나 사회의 현실은 그런 이상(理想)과는 다르다. 신자는 세상에서 그런 이상을 실현하도록 부름 받았다.
한 시민(市民)으로서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한 신자(信者)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한다.
교회는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주는 사회다.
신자의 삶은 어떻게 사랑으로 정의가 완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는 하나님의 의(義),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로 구원을 받았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희생으로써 우리를 위해 의(義)를 이루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義)가 이루어지기 위해 이 세상에 살아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힘들 때마다 희생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8. 이 모든 것을 더하심
I. 본문해설
인생은 염려 속에 저물어 간다. 밝게 웃는 때가 얼마나 드문가?
“인생의 99%는 비극이다”(F. Nietzsche). 인생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살아 있는 한, 염려와 결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불안(Angst)을 통해서 실존을 확인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염려를 운명처럼 끌어안고 산다. 그것이 사라진 때에는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기에 걱정거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염려는 인생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육체에 대한 염려다.
II. 이 모든 것을 더하심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
여기서 “더하리라”(prostithemi)는 “덧붙이다, 더 받다”, 또는 “다시 보내다(to send again)”라는 뜻이다(눅 20:11).
A. 먼저 주시는 것
그의 나라와 의(義)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은 이미 받고 있는 혜택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동행(同行)이다.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것을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고 가장 큰 관심사라면, 하나님은 우리로 인해 즐거워하실 것이다.” (John Owen, Posthumous Sermons, p.125)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세 가지 결정적 특징이 있다(J. Owen).
하나님과의 평화(平和)
하나님의 영광(榮光)
새 생명의 원리(原理)
이런 신자는 불완전한 세상과 자신 때문에 갈등하지만 행복하다.
그는 육체를 위해 염려하지 않는다. 자유인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거기서 육체의 만족을 넘어선 행복을 누린다.
B. 더하시는 것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했던 육체를 위한 것들이다(마 6: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마 6:31-32)
이것은 일종의 대유법(代喩法)이다. 즉, “먹을 것, 입을 것과 마실 것”은 육체의 행복을 위한 조건들을 가리킨다.
먹을 것은 결코 단지 배부름을, 입을 것은 추위와 더위를 피함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마실 것도 또한 그러하다. 인간은 그 이상의 만족(滿足)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행복을 모른다. 그러므로 더욱더 육체의 만족을 추구한다. 이 가르침은 다음의 내용을 포함한다.
1. 거래가 아님
섬김의 댓가로서 육신의 쓸 것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먼저…구하라”는 시간(時間)의 순서가 아니라 의미(意味)의 순서다. 무엇을 추구점으로 삼느냐와 관련된 것이다.
신자는 세속적 이익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義)를 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2. 목표의 질서
목표와 목적 사이에 질서가 있다. 가치에 있어서, 목표(目標)는 결코 목적을 능가하지 못한다.
목표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실제적 대상으로 삼는 행동이나 그 대상을 가리킨다.
따라서 목표는 반드시 목적(目的) 실현에 이바지해야 한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義)”의 실현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하나님은 최고의 영광(榮光)을 받으시고 이웃과 자신은 행복(幸福)을 누리기 때문이다.
사랑(love)은 육체를 위한 모든 것을 질서있게 사용하게 해 준다.
신자는 자기의 행복을 왕국의 소명(召命)에 앞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참 신자는 자기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3. 사랑의 신뢰
사랑은 신뢰를 동반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염려하지 않는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인간은 자기에게 무엇이 꼭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 또한 아는 것을 모두 실행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실 뿐 아니라, 실행하실 수도 있으시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신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삶의 상황들을 통해 우리를 훈련(訓練)하신다. 우리로 하여금 그릇된 삶의 동기를 버리도록 단련하신다.
우리가 소명(召命)을 따라 살 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복(福)을 주신다.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義)”를 추구하는 데 있다.
그런 신자들은 사랑(love) 안에 산다. 필요한 것을 더해 주신다.
9. 오늘 염려하지 말라
I. 본문해설
염려에 관한 가르침의 결론(結論) 부분이다. 세속적인 염려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부실함에서 온다.
염려를 벗어나는 길은 인생의 목표(目標)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마 6:33).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
II. 오늘 염려하지 말라
A. 내일을 위한 염려
먼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위해 미리 근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마 6:34상)
염려하는 동작의 주어(主語)는 내일이다. 내일을 위한 염려(念慮)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자기 인생에 대한 욕망(慾望)이 있는 한, 염려가 없을 수 없다.
수많은 삶의 굴곡들을 지나며 인생길을 걷는다. 지나간 일은 후회(後悔)로 바꿀 수 없고 다가올 일은 염려(念慮)로 변경할 수 없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내일을 위한 염려는 쓸모가 없다.
a.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상상으로 예측한다.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 염려한다.
욕망하는 바에 대한 집착(執着)이 클수록 염려는 더욱 심해진다. 그러나 염려하는 일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b.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염려함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염려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7)
염려하는 것은 욕망은 있으나 능력(能力)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염려는 우리의 육신을 상하게 하고 마음까지 병들게 만든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반복되는 염려는 좌절의 경험을 거쳐 심리학에서 말하는 핵심감정이 될 수도 있다.
‘핵심감정’(nuclear feeling)이란 한 사람을 지배하는 주도적 감정이다. 모든 사고와 정서, 행동과 습관을 그것에 맞게 작용하도록 지속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감정이다.
나쁜 일이 있었다고 해서 그 일을 겪은 부정적 감정이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c.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염려는 문제에 집중하게 만들지만, 그것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또한 인생의 근원적 문제와 씨름하지 못하게 한다.
본질적 문제는 어떻게 인생의 의미(意味)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행복을 누리느냐이다.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의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가야 한다.
d. 기쁨을 빼앗아 간다.
염려는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인생의 기쁨들을 빼앗아 간다.
실제적으로, 인간은 늘 한없는 긴장 속에서 살지는 못한다.
선(線)적 행복과 점(點)적 행복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
성경에는 인생살이가 헛되고 무익하다는 가르침이 있다(전 2:11). 그러나 또한 그 헛된 날에 즐겁게 살라고 가르친다(전 9:9).
우리는, 거룩한 천상의 기쁨으로부터 소소한 일상(日常)의 기쁨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로써 삶을 살아갈 격려를 받는다. 염려는 이러한 기쁨을 빼앗아 가버린다.
만약 즐거움이 없다면 일평생 자기의 인생처럼 살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내일을 위한 염려로 오늘을 물들이지 말아야 한다.
B. 그날로 족한 괴로움
또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만족하는 마음을 갖도록 가르치신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하)
1. 괴로움이 있음
먼저 우리의 인생에는 괴로움(trouble)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괴로움”(he kakia)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래 “악(惡), 나쁨, 재난, 고통”이라는 뜻이다.
이는 “선(善), 좋음(goodness)”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나쁜 것, 행복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행복(幸福)을 약속하신다. 실제로 경건한 삶 속에서 그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신다.
현실의 인생은 선(善)과 악(惡), 즐거움과 괴로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섞여 있다. 나쁜 것은 세상과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이다.
좋은 일만 일어나리라는 낙관(樂觀)은 나쁜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비관(悲觀)만큼 현실적이지 않다. 모두 도움이 안 된다.
자신의 현실(現實)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상황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주체(主體)로 살아가야 한다.
2. 하루에 한정함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악하고 괴로운 일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 한다.
“…족하다(arketon)”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래 “만족스럽다, 충분하다. 넉넉하다”라는 뜻이다.
괴로운 일을 겪을 수 있지만 그것을 확대 해석하지 말라는 뜻이다.
오늘의 괴로움이나 악(惡) 때문에 내일을 비관(悲觀)하지 말아야 한다. 하루를 즐겁게 살아갈 기회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인생을 사는 것은 쉽지는 않다. 특히, 헛된 집착이 클 때 인생은 가시밭길 같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갈 때 살만하다.
III. 적용과 결론
예수님의 생애는 분투하는 일생이었다. 울기도 하셨다(히 5:7). 그러나 그것은 육신을 위한 염려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는 매일 염려하며 산다. 오늘을 살며 내일 때문에 염려한다.
삶에 괴로움이 없을 수 없으나, 그것 때문에 내일을 비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돌보시기 때문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며 믿음으로 살라. 기뻐하라.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이 돌보신다.
염려에 관하여 (2019.09.15._주일오전 1)
1. 염려는 어디서 오는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6-2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염려는 사전적으로 볼 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마음을 기울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이 염려는 ‘세속적인 염려’와 ‘거룩한 염려’로 나뉩니다. 성경은 세속적 염려에 대해서는 경고하고 있고, 거룩한 염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염려는 마음의 불안정함, 혹은 선한 것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마음과 정신이 갈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염려를 달고 삽니다. 그래서 실존 철학자들은 인간의 존재가 기본적으로 자신을 확인하는 방식이 바로 불안을 통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한한 자유에서 오는 불안입니다. 우리가 무한한 자유는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무튼 우리 자신은 끊임없이 불안을 통해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염려와 떼어놓을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II. 염려는 어디서 오는가?
(이처럼 염려를 달고 살면서도) 우리는 염려에 대해서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적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결정적인 힘을 휘두르는 것이면 그럴수록 우리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당하기만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염려는 어디로부터 오는지, 그 염려가 엄습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 염려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A. 자기를 사랑함
그러면 이 염려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 염려가 ‘자기 사랑’에서 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라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는 염려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는 사람에게도 염려는 없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일에 대해서 염려를 많이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합니다. “아니 그까짓 게 뭐 그렇게 염려가 돼? 아무려면 무슨 상관이 있어? 그게 무슨 큰 대수라고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염려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나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또 내게는 그것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 정도로, 잃어버려도 되고 가지고 있어도 될 정도로 무관심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염려한 것을 나는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유서 깊은 본문의 시작은 마태복음 6장 19절입니다. 19절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저축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질의 욕심 때문에 인간이 인생의 본분을 저버리는 위험에 대해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 사이에 갈등이 적게 됩니다. 그만큼 살아가는 것이 염려로부터 벗어난 안정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사랑하든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는 사랑하는 것에 종이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깊이 사랑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아닌 한 우리는 그것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한 15년 전 열린교회에 와서 은혜를 많이 받은 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자기가 살아온 지난 날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었는데 가장 큰 회개의 제목이 자기의 취미 생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바’라는 그룹을 만나고 얼마나 심취했는지 LP를 모두 사 모으고, CD를 모으고, 심지어는 ‘아바’의 공연을 보기 위해 청소년 시절인데도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데도 미국을 왕래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아바에 심취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자매가 저에게 한 간증의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많이 회개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진실로 깨달은 것은 자신이 아바 그룹을 사랑하고 젊은 시절부터 아바에 대한 사랑 속에서 산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허무한 일에 몰두한 것이 죄였다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 책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수집한 아바에 관한 모든 음반들과 자료들을 모아놓고 불 질러 버리면서 이렇게 가치 없는 것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바쳐온 날들이 허무한 것이었고 잘못된 것이라고 회개하면서 이제 주님을 최고의 관심사로 놓고 살아가겠다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만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 경계하고 있는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방식으로 하는 자기 사랑이 아니라 그릇된 방식으로 사랑한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어거스틴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알쏭달쏭한 말처럼 느껴지지만 이 말만큼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이 논지를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 격언도 없을 것입니다. 해설을 말씀드리자면 잘못된 방식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학대하는 것이고, 그릇된 방법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되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충만한 사랑을 받고, 그 안에서 나는 더 이상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끊임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성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인간의 정신과 영혼은 순전해져서 지혜롭게 되지만 그 이외의 것들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인간은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 재물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마음의 등불을 끕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사물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하게 되기에 무지하게 행하게 되고, 거기에서 고통이 온다고 가르칩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은 모두 육체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먹고 입고 마시는 것뿐이 아니라 더 좋은 집에서 살고, 경치 좋은 곳을 구경하고, 안락한 환경을 누리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먹고 입고 마시는 것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분수를 넘어서는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모든 것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염려하면 염려할수록 인간은 더 많이 그것을 사랑하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을 맡기지 못할 때 자기를 돌볼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은 자기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몸에 지니고 있는 모든 사물들 중 여러분이 스스로 제조해서 가지고 계신 것은 아마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 시장에서 샀거나 혹은 시장에서 사온 재료에 여러분의 수공을 더해서 새로운 물품으로 만들어 몸에 지니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모든 자원들을 구입하게 만드는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고상한 인격입니까? 아닙니다. 물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를 의지하며 산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물질을 사용해서 자기를 의지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어두운 그림자와 같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분량 이상의 욕망을 품으면 품을수록 우리의 인생은 미래에 대해서 더 많이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나 죽으나 내가 그분의 손안에 있으며, 나는 그분 안에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리라’는 다짐이 없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염려는 결국 자신의 육체에 대한 그릇된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불확정적인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기를 사랑한다, 라고 할 때 이것은 육체와 영혼을 골고루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육체와 영혼에 대해서 골고루 생각한다면 우리는 금세 다음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는 이 세상의 자원이 필요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세상의 자원이 아니라 하늘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세상의 자원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 대부분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영혼을 위한 자원은 하나님이 안주시면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자원입니다.
저는 최근에 무신론자들이 하고 있는 어떤 논쟁을 잠깐 보았습니다. 유물론적인 진화론자이었는데 모든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이 모든 것은 우연이고 기계적인 법칙에 의한 전개일 뿐이라고 믿는 과학자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과학자가 하루도 명상을 하지 않고 보낸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자가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을 평정하게 하며 깊이 생각하면서 눈에 보이는 이 세계에 매이지 않도록 자기의 정신을 풀어준다는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과학 법칙과 물질에 의해서만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렇게 명상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인간에게 물질 뿐만이 아니라 무엇인가 정신과 영혼에 속한 어떤 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궁극적인 양식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염려는 육체에 대한 편협한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비췰 때에는 영혼과 육체를 골고루 사랑하게 되지만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질 때 우리는 육체 밖에는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은 염려와 결별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비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분의 교제의 품속에 자기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이처럼 자기 사랑에서 옵니다.
B. 의지하지 않음
두 번째로 염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에서 옵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면 자기 자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보다는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들이나 자기가 신뢰하는 다른 이를 의지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한 통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부족할 때 그는 아주 작은 불안에도 큰 염려를 하게 됩니다.
세속적인 염려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돈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그 돈이 그런 어려움 속에서 가장 훌륭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때로는 가전제품을 새로 바꾸었을 때, 돈을 보태어서 더 큰 집에 이사하게 되었을 때, 혹은 아주 럭셔리한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 평소보다 훨씬 더 큰 편안함을 느끼면서 ‘야, 돈이 좋긴 좋구나.’ 라고 한두 번쯤은 말씀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보다 돈은 우리의 인생에서 많은 것을 해결해 줍니다. 돈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의 많은 필요들을 커버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떠한 의사도 고칠 수 없는 치명적인 질병에는 돈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편안한 특급실에서 죽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돈으로 점점 늙어가는 것은 막을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노화를 방지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 또 죽음의 기운으로부터 육체의 기력을 보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불행과 이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돈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보자라는 것도 돈이 가지고 있는 이 막강한 위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천국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도 마태복음 6장 19절 이하 문맥에 등장하는 사람은 여전히 불안해하고 땅에 보물을 쌓아두려고 합니다. 그 불안한 마음은 염려를 보여줍니다. 이 불안은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두 번째는 원하는 것을 미래에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물질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가 곡식을 넣어둘 큰 창고를 짓기로 결심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지금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이렇게 먹고 마시며 잔치를 하고 즐겁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창고를 짓고 곡식을 그렇게 많이 쌓아두지 않으면 오늘 누리는 이 파티의 즐거움을 내년에는 계속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로 하여금 곡식을 쌓아두는 창고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신자이면서도 불안한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보살펴야 하고, 질병이 생기면 치료를 받아야 하며, 인생의 치명적인 사고를 위해서 보험을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 모든 인생의 불안이 근원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위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인격적인 신뢰가 없으면 이 근심과 염려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근심과 불안을 해결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걱정 속에서 염려하며 사는 것이 거의 그 사람의 인격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한 번도 활짝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사람, 하도 인상을 찡그리고 힘든 표정으로 살아서 아예 그 사람의 얼굴의 특정 부위에 살이 접혀서 주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무슨 대화를 나누든지 항상 그 염려가 축이 되어서 우울한 쪽으로 생각하고, 걱정스러운 쪽으로 결론을 내고, 비관적으로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특징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으로 창조된 아주 좋은 부분 중 한 부분을 상실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릴 것 같아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리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빼앗기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나 조금도 애착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진정한 삶의 기쁨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에 묶여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하는 이 말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의 욕망과 관련된 것입니다. 자, 어느 설교자가 이런 예화를 들었는데 -저는 그 설교자의 신학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추호도 동의하지 않지만- 그 예화에 대해서만큼은 깊이 공감했습니다. 우리말 버전으로 바꾸어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힘들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남편이 이야기 합니다. “여보, 그동안 애 키우느라고 정말 고생했어. 우리 이번 추석 때에는 부모님께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양해의 말씀을 구하고, 추석 전에 미리 찾아뵙고, 휴가 기간 중에는 제주도에 가자. 그래서 한 5일 동안 아주 경치 좋은 곳에 호텔을 얻어서 아이와 함께 휴가를 오붓하게 즐기자” 그 말은 들은 아내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게 몇 년 만에 타보는 비행기인가? 그리고 몇 년 만에 가보는 제주도 여행인가!’라면서 너무 기뻐서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웃들과 함께 만나서 티타임을 갖게 되었는데 바로 옆집에 사는 여자가 자기의 가을 휴가 계획을 늘어놓았습니다. 남편과 함께 아이들 모두를 데리고 비즈니스석을 타고 유럽으로 넘어가 유럽 일주를 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스위스에서 열흘간 체류하면서 자연의 풍경을 만끽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오는 순간 불과 1시간 전까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제주여행의 기쁨은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왜 나는 이렇게 초라하게 살아야 하나’고 넋두리하며 우울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예화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진짜로 세상이 우리를 안 되도록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가지고, 어떤 욕망을 가지고 사느냐와 관계가 많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인생에 대한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분수에 넘치는 욕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여러분들은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더 자주 경험하고 더 자주 좌절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에서 꿈을 꾸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높은 뜻을 갖지 말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없다면 사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바라고 원하고 꿈꾸는 것이 적어도 내 인생 자체를 불안하게 만드는 집착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형편을 이기고 24평 아파트를 마련하게 되었으니 다음에는 한 5년 동안 열심히 저축하고 모아서 32평으로 이사를 가자는 것이 뭐 그렇게 정죄 받을만한 세속적인 욕망이겠습니까? 아이들도 크고 하니까 아이들에게 방을 하나씩 따로 주기 위해서는 최소한 방 세 개짜리 집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5년 뒤에 안 이루어졌다고 깊이 염려하고, 자신의 상황을 보며 한탄할 정도는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염려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더 높은 목적을 위해 기도해야 할 우리의 기도의 시간은 대부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들을 위해서 써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신령한 의미에서 효율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근심은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되고, 세속적인 근심은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욕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삶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만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오히려 죄를 지었더라도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없다면 주실 것이고, 연약하다면 강하게 해주실 것이며, 그가 죄가 있다면 하나님이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일생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면서 나는 나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결정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염려를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염려가 엄습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가 엄습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과 동일한 이유일 때도 있고, 다른 이유일 때도 있지만 저 역시 염려 속에서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하는 이 시간에도 제 마음에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염려의 경험들은 저에게 고통만 준 것이 아니라 때로는 지혜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게 염려가 엄습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어떻게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예기치 않은 곳에서 펀치를 날리는 이 염려에 대처할 수 있을까요?
1. 끊어서 생각하라
첫 번째 지침은 끊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염려와 함께 씨름하면서 제가 발견한 지혜 중의 하나입니다. 너무 힘들면 멀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원래 인생은 10분 뒤를 생각할 때에 그 10분의 시간이 10년 후에 가져올 의미까지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에너지가 넘치면 오늘 내가 한 시간 안에 하는 이 일이 내가 죽은 후에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살게 합니다. 그러나 워낙 힘이 고갈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 시간을 토막토막 끊어서 자기 능력이 미치는 범위까지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서 이 모든 교훈을 끝내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예전 번역 성경에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오늘 염려는 오늘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 가서 하자’는 식으로 오해되었는데 그리스어 본문에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즉, 염려하는 주체가 인간인 ‘내’가 아니라 ‘내일’이라는 날입니다. 어떻게 추상 명사인 내일이 염려를 할 수 있을까요? 결론은 하나님의 자녀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1년 후까지 생각하기가 힘들면 1개월로 끊고, 1개월도 어려우면 일주일, 그것도 도저히 에너지가 미치지 않으면 하루만 생각하십시오. 그것도 힘들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이 될 일까지만 생각하십시오. 그것마저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1시간, 아니 10분, 그것도 어렵다면 1분이라도 토막을 내서 생각하십시오. 지금의 1분이 다음 1분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끊어내고 그 1분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시간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고통을 받고, 그 고통을 견딜 수 없는 연약함 때문에 몸과 마음이 상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몸만 망가지고 마음만 끊임없이 불안함을 더할 뿐입니다. 내일 일어날 일은 내일 두고 볼 것이고, 오늘 극복하고 나면 또 내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틀림없이 죽음을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이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다 필요 없습니다. 지금만 생각하십시오. 내가 이렇게 불행하게 된 과거에 대한 생각은 좀 더 있다가 에너지를 가진 다음에 생각하시고 지금 당장만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이 현실을 어떻게 맞서서 나갈 것인가만 생각하십시오.
2. 현실을 대면하라
두 번째 지침은 현실을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나의 현실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피하는 방법이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 극단적인 선택이 자살입니다. 자살은 욕망이 없어서,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너무너무 다르게 살고 싶은데 현실이 그 기대와 너무 달라서 자기가 감당할 수가 없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없어도 이 현실을 대면해야 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선택지가 거의 없습니다. 내 앞에 전개된 현실은 이기든지 지든지 내가 마주하여야 할 것이며, 나 이외에는 나에게 전개된 이 사실을 대신 맡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염려에 대한 가장 좋은 대비책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가 다 예상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은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자주’ 혹은 ‘어찌 그런 일이 나에게’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의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안드레아 보첼리라는 한때 제가 좋아했던 이태리 오페라 가수가 있습니다. 그는 폭발 사고로 어린 시절에 두 눈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래도 끊임없이 음악을 연습하고 노력해서 루치아노 파파로티 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이제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 역정을 들으면서 너무 부러웠던 것이 있었습니다.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나는 한순간에 시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시력을 포기하고 살아야 된다고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1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는 농담을 잘한답니다. 주위의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재주가 있다고 합니다. 눈은 잃어버렸으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태도가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빛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가 신앙을 의지해서 그렇게 했는지 안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여러분들이 현실을 마주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투기 조종사를 오래했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의하면 전투기를 타고 하늘을 날 때 전투기를 뒤집어야 하는 상황이 오는데 그때 조종사는 순간적으로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하늘인지를 순간적으로 놓치게 되는 수가 있답니다. 더욱이 어두움 속을 비행할 때에는 더더욱 그러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종 학교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연습하는 것이 두께가 있는 커다란 굴렁쇠를 만들고 거기에 손과 발을 묶은 다음 그것을 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붙잡은 사람이 굴렁쇠가 180도 굴러가면 그 다음에 머리는 땅으로 내려가고 다리는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이것이 굴러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굴러가면서도 이 사람은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하늘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조정의 기본적인 연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갔지만 서커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높이가 15m, 어쩌면 20m가량 되어 보이는 그 커다란 공간에서 그 작은 줄 하나에 의지해서 서커스하는 사람들이 공중을 날아다니며 줄에서 줄로 이동을 하고 아슬아슬한 연기를 펼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그러한 곡예사가 되기 위해 제일 먼저 연습하는 것은 얕은 곳에 줄을 매고, 그 밑에는 그물망을 받쳐놓습니다. 수없이 떨어지면서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여담)저는 언젠가 한번 신문에서 사진을 봤는데 삼각형으로 된 절벽 위에서 그 어느 여자가 딱 등산복을 입고 한 손으로 매달려 있는 그 천길 같은 그 땅위 매달려 있는 그 사진을 봤고, 더 황당한 사진은 그 여자는 벼랑 끝에 매달려 있고 남자는 그 벼랑 끝에 바짝 다가와서 여자와 키스를 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야, 저거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더 황당하게 했던 것은 한 남자가 발끝 두 개를 절벽 위에 높고 물구나무처럼 거꾸로 서서 그 절벽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줄 하나도 없이 말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웠는데 알고 보니까 그 사진의 비밀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뾰족한 바위가 튀어나오고 그 바로 밑에는 넓적한 바위가 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이 밑에 바위를 안 찍고 저 멀리 바다를 찍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 길 만 길 되는 거기가 마치 산 정상의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스포츠 상품을 선전하는 배경이 되는 이 장면들은 이렇게 모두 연출하여 나온 것들입니다.
문제는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한 피할 수가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 되는 것을 수없이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갖게 되면 그러면 미래의 상황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강한 존재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렇게 현실에 대면할 수 있는 힘이 없을 정도로 어려움에 처하게 됐을 때 가슴에 새겨야 할 조언이 있습니다. 염려로 고통을 받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짓눌리는 것 같은 고도의 긴장 상태입니다. 이럴 때 이런 불안과 괴로움을 도피하기 위해서 습관적인 오락에 뺏기거나 쾌락에 떨어지거나 혹은 약물 중독 같은데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런 곳에 빠지게 되면 삶에 대한 주체성을 급속히 잃어버리게 되고, 그는 이제 자신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드넓은 바다 위에 구명조끼 하나 걸친 채 던져진 것같이 조류에 자신을 맡여야 되는 상황입니다.
지금 인생이 여러분 마음대로 안 되고 꼬였다고 칩시다. 그런 현실에 직면했다는 것 때문에 폐인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 정도로 폐인이 된다면 우리는 오래 전에 수없이 폐인이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되고, 꼬일 수도 있고, 때로는 불안해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결코 이러한 상황 때문에 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매우 연약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용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용기가 주어지고 이 현실을 극복하며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생각보다 훨씬 강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담대하게 하고, 말씀의 은혜를 주실 때에는 우리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힘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한 순간을 이겨내고 나면 이상하게 다음 순간을 이길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저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싸우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도 싸운 적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것을 그렇게 즐길 정도로 빗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교실을 휘어잡고 있는 일진 주먹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이 싸운 경험을 가진 아이들입니다. 처음 어느 누군가와 싸울 때에는 불안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를 주먹으로 눕혀 봅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코피를 흘리면서 ‘엄마’하고 울고 가는 것을 보면서 이 아이는 훨씬 강해집니다. 그보다 더 힘 쎈 놈이 나타나도 이길 것이라는 자신이 생기고, 그렇게 두 번, 세 번, 네 번 이기고 나면 그 다음에는 꺾이지 않는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영적인 싸움도 이렇습니다. 너무나 불안하고 인생이 꼬인 것 같아서 살 수가 없는데 현실을 피해서 도망 다니면 도망 다닐수록 점점 자기가 무력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현실을 극복하고 나면 다음 현실을 맞이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이 안에서 생겨납니다. 영적으로 보면 작은 것에서 주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그 다음에 더 큰 것에서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염려가 엄습한다면, 그래서 견디기 힘들다면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이전에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도 또한 지나가리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에 여러분들의 인생에 일어났던 가장 힘들었던 때, 매일매일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괴로웠던 때, 가슴을 움켜쥐고 아파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아주 힘겹다고 생각되는 현실이 그때에 비하면 훨씬 견딜 만 하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라도 현실을 대면할 용기를 잃지 않고 거기에 맞서야 하는 것입니다. 최고로 잘할 수는 없지만 결국 내 인생의 주체는 나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해야 한다고 하는 것, 주님을 의지해서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현실을 대면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간절히 기도하라
세 번째 지침은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삶의 상황 속에서 존재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불안해하는 사람은 대부분 기도의 은혜를 잃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간절히 기도할 수 있고, 기도 속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눈물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삶의 현실에서 불안이 엄습할 때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의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은 다리가 부러져 뛸 수 없는 사람에게 빨리 달려서 위기를 모면하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 드리는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짤막한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기도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정말 살기가 괴롭고 염려가 엄습할 때에 가슴에 손을 얹고 ‘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불과 3초에서 4초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짧게라도 간절히 기도드리면 그 기도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짧게나마 간절히 기도하면 홀로 버려진 고립감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사라지지는 않아도 고립감이 주는 큰 힘이 꺾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절망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고립감입니다. 내가 저 캄캄한 우주 한 가운데 던져져서 하나님에게도 돌봄을 받지 못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낯선 사람이 되었으며, 누구도 나의 친구가 없다는 고립감입니다. 그것을 적절히 다루면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신앙으로 그를 쇄신시키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간절히 순간순간 기도하고 나면 마치 작은 불씨가 일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작은 크기로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을 반복하고 나면 마치 추운 들판에서 아주 작은 마른 나무 이파리들을 모아놓고 불을 붙이는 것처럼 ‘훅’하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의지하게 되고, 의지하게 되면 내가 버려진 것처럼 혼자 내동댕이쳐진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의존하게 됩니다. 은혜의 경험은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고, 이 경험의 반복은 더욱더 자신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맡겨드릴 수 있게끔 만들어 줍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마다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후에 있을 천국을 생각하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면 여러분들을 불안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욕심을 상당히 많은 부분 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극단처럼 보이지만 거기서도 하나님은 삶과 죽음 사이를 주관하시는 통치자이십니다. 생사 간에 의지할 분이 하나님뿐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삶의 경계를 넘나들어 생각할 때에 여러분들은 세상에 치우친 욕심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욕망을 버리고 나면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마음은 급속히 평정을 찾게 될 것입니다. 불안에 떨고 잃어버릴까봐 무서워하던 여러분들이 왜 그럴지 모를 정도로 놀라운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우리의 동의를 얻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동의 없이 우리는 어느 순간 인생의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의지했던 물질도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했던 사람도 더 이상 우리를 돕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부활할 모든 육체의 운명을 선하신 하나님 한분의 손에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그 출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잠시 전개되는 단막극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현실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주님은 나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모든 것을 통해서 나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순간 순간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모든 것들은 육체의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한 사람으로 살아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 안에서 평안과 기쁨과 쉼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육신의 염려 때문에 삶 전체가 요동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염려하고 계시다면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이 염려스러운 상황을 통해서 주님을 더 의지하고, 이제껏 몰랐던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은혜의 도약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공중의 나는 새와 잠시 피었다 지는 들풀도 이렇게 돌보시는데 그 좋으신 하나님이 아들까지 주셨는데 여러분들을 돌보지 않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염려에 관하여 (2019.09.22._주일오전 2)
2. 너희 자신을 알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6-2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염려하는 신자들에게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자신을 알라”고 말입니다. 원래 ‘네 자신을 알라’라는 이 말은 소크라테스의 어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 앞마당에 새겨진 신탁입니다.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라고 하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자신을 알라’고 명하는 것은 우리가 영혼을 가진 자임을 잊지 말라고 깨우치시는 것일세.”(I.11.130c)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네 주제를 파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영혼을 가진 위대한 존재임을 기억하고, 거기에 맞게끔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II. 너희 자신을 알라
예수님은 염려하는 신자들에게 너희가 누구인지를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도록 일깨워주십니다. 이로써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너희 자신을 알라’입니다.
본문 말씀은 ‘공중의 새를 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의미를 생각하며 특별히 관찰해 보고 거기에서 깨닫는 바를 너희 자신의 삶에 적용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다음 두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욱더 많이 돌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존귀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A. 천부께서 돌보심
첫 번째는 하늘 아버지께서 이것들을 돌보신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라고 말입니다. 새가 살아있지 않고는 공중을 날아다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충만한 생명을 보여줍니다. 떨어지지 않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의 그 무한한 생명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인간은 농사를 짓고 그 작물을 거둠으로써 양식을 얻습니다. 그것을 창고에 모아 보관함으로써 미래의 결핍을 대비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 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그렇게 하는 것일 뿐 우리를 살아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그것들을 더 이상 돌보지 않고 버려두신다면 그 하나님이 어찌 선한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창조를 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가 될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봅시다. 한 젊은 여자가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아무도 그가 좋은 엄마인지 나쁜 엄마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를 학대했습니다. 마지막에 그 아이를 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여자는 아주 몹쓸 엄마라고 하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뿐 돌보시지 않는다면 창조하신 것보다 더 못한 불명예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인간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 돌보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영예스러우셨을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거론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삼으시고 그들을 더 이상 돌보지 않고 버려두신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인줄을 당신의 자녀들이 알 수 있겠으며, 하나님이 그런 분인지를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겠습니까? 창조의 능력이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은 그것을 찬송할 사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찬송할 사람이 있는 것은 그를 돌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돌보심 없이 무엇이 존재할 수 있겠으며, 있지도 않은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fatherhood)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위격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성자는 성부를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둘째는 창조적 아버지 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모든 것이 그분께로 나왔기 때문에 모든 사물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겨야 합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는 심지어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셋째는 신정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말인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시고 그 백성들 모두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아버지 되심에 더 위대함은 마지막 네 번째입니다. 양자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즉, 하나님이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의 친자녀 삼으심으로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친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신들이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속죄의 교리’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압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우리의 양자적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 어찌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제임스 파커(J. I. Packer)는 영국의 옥스퍼드 학생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즉시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 빠졌고 혼돈 속에 있다가 존 오웬의 책과 존 라일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적 회심을 경험하고 세계적인 청교도 연구가로 일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의 한 책에서 나오는 다음 문장은 이 주제와 관련하여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아주 깊은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려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과 또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시라는 생각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라. 이 생각이 예배와 기도 및 그의 총체적인 인생관을 촉발하거나 지배하는 생각이 아니라면, 그는 기독교를 그리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다.”(Knowing God, 224)라고 말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을 얼마나 아버지로 여기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하는 말은 그 아버지를 얼마나 친근하고 가깝게 느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신앙의 깊이를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땅에 있고 그분은 하늘에 계신데 땅에 함께 있는 사람보다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경험되어 집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그렇게 참된 아버지로, 아주 친근한 아버지로 느끼며 살아가는 깊이가 신앙의 깊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마당을 지나가다가 교인들이 칼빈 파크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인사를 했습니다. 청년들이 한 10여명이 둘러앉아 있었고, 그 중의 2/3는 자매들이었고, 1/3은 형제들이었습니다. 앉으라고 해서 잠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물어보았습니다. “오늘 너희들 중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낸 사람 손들어 봐라” 딱 한 자매가 손을 들었습니다. 청년들에게 아버지는 그렇게 가까운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스럽지도 않고 친근하지도 않고, 더욱이 멀리 있을 때 보고 싶거나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는 더더욱 않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문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잘못된 아버지 상을 우리의 마음에서 걷어내고, 참된 아버지의 상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그런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라 오히려 매일매일 같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어머니 같은 따뜻한 아버지이시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골목에서 구슬치기를 하고 딱지치기를 하고 놀다가 다툼이 벌어지게 됩니다. 싸움이 나게 되고 한 아이가 얻어맞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울기 시작합니다. 엄마는 직감적으로 자기 아이의 울음소리를 파악합니다. 그리고 밖으로 달려 나옵니다. 이 아이는 집으로 걸어가다가 엄마가 오는 것을 발견하고 달려갑니다. 그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자기가 얼마나 서러운 일을 당했는지 고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때 엄마는 이 아이를 가슴에 품고 동네 아이들을 나무라고 역정을 냅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편을 들어주고 그의 눈물을 씻기고 집에 데려갑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그림입니다.
‘너희’가 지상적인 우리를 가리킨다면 ‘하늘’은 천상적 존재인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바로 이 둘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입니다.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이 너희 하늘 아버지이심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불완전하고 이기적인 아버지가 아닙니다. 완전할 뿐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사랑하고 돌보시는 자녀입니다. 염려와 근심 속에서 마음을 썩이고, 육신에까지 깊은 해를 불러오며 그렇게 절망에 가까이 다가가는 인생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도 돌보신다면 당신의 자녀들은 얼마나 잘 돌보시겠습니까? 주님을 멀리 떠나지 말고 이런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께 붙어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귀하게 여기심
두 번째는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26절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인간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탁월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특별함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공중에 나는 새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같지 않습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그 인간이 신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니체조차도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인간의 존엄성도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1. 인간의 존귀함
이와 관련하여 성경의 가르침은 이러합니다. 시편 8편 4절,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그냥 우리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히브리서 2장 6절과 8절에서 이것을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신을 보고 사람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려고 친히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처럼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처럼 되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영광 가운데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되 당신에게 접붙여 하나님의 아들된 당신의 운명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모든 신자들과 영적으로 일체를 이루게 되었고, 구원받지 못한 자녀라고 할지라도 보편적인 인간성 안에서 당신과 연합을 이루게 하심으로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 존귀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그를 닮아 존귀하다면 그분과 한 몸이 된 신자는 얼마나 더 소중하겠습니까?
염려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허망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하게 돌보시는지를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앗사리온은 1/16 데나리온이고, 당시 1 데나리온은 장정 남자가 하루를 일할 때 받는 품삯이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6천 원 정도의 가치입니다. 그것도 두 마리가 말입니다. 이렇게 가치가 적은 참새조차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기르신다면 이에 비할 수 없이 존귀한 인간은 하나님이 얼마나 더 사랑으로 돌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존귀함이 인간 존엄성의 근거입니다. 그래서 ‘존엄하다’라는 말은 높고 엄숙하여 인간의 권력이 함부로 해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인간이 산길을 지나가다가 짐승에게 다리가 물려서 불구가 되었다면 그것으로서 인권이 침해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은 자연의 만물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침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심으로써 인간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싶으신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 모든 만민을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니 너희도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가 이교도요, 불신자요, 혹은 배교자이라도 할지라도 그의 존엄성이 인정되어야 하고,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깊이라고 하는 사실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인간의 탁월함은 하나님을 닮은 영혼과 정신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바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인 줄을 기억하고 그것을 토대로 생각하고, 그것을 토대로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입니다. 어떤 새들의 조상을 하나님이 친히 흙으로 빚으셨습니까? 어떤 새가 하나님과 가족처럼 교제하도록 창조되었나요? 어떤 새들이 영혼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을까요?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인간을 그렇게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세상에 있게 된 인간인데도 하나님은 인간을 폭력으로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기 결정적인 특징을 존중하시고, 그 스스로 결정하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선하게 살도록 그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생명을 온 천하에 비교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온 우주를 주고 바꿀 수 없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생명을 위한 것들이고 살아있어야지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해 전 상인들이 모여서 만든 어느 교회에 새벽 부흥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어떤 한 건물을 보여주면서 이 건물이 우리 교회에서 최근에 구입한 건물입니다, 라고 말하셨습니다. 그 건물은 원래 200여 점포가 들어있는 상가였습니다. 부동산에 아주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인수 받았고, 그리고는 길고 긴 법정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200여명이 넘는 그 점포 주인들과 하나하나 법정 다툼을 하면서 결국은 여러 해 걸쳐서 싸웠고, 드디어 그 건물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암으로 죽었습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골치 아픈 일에 몰두하며 그 건물을 손에 넣기 위해서 몇 년 동안을 법정에서 싸우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런 질병에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으나 그것을 기뻐할 자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일깨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알라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시는 자들이니 그것을 기억하며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공중의 새들보다 귀합니다. 왜 땅에 앉아있는 새가 아닐까요? 이는 날아다니는 것이 매순간 지속되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더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닭을 비롯한 날짐승들은 그 건강한 상태를 알 수 있는 척도가 있습니다. 날개의 위치입니다. 건강하고 생명력이 있는 새들은 날개가 바짝 접혀서 위로 올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고 기운이 없는 새들은 마지막으로 이 날개들이 아래로 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부채처럼 활짝 펴지게 됩니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공중의 새가 날고 있다는 것은 충만한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매순간 그 새들을 먹이고 기르시기 때문에 그런 생명으로 공중을 날고 있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거나 곡식을 모아 곡간 안에 들이시지도 않지만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먹이고 기르심으로써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한 마리에 약 3000원에 팔릴 참새 한 마리도 이렇게 매순간 돌보신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당신의 자녀가 된 우리는 얼마나 더 소중하게 돌보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버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사라진 데서 오는 고립감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지 않고, 성령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데도 자신은 우주 공간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존재라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럴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와 다르면 다를수록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떤 결심을 하고 우리들의 인생을 훼방 놓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짧은 우리의 인생을 감사할 틈도 없고, 기뻐할 여유도 없이 끊임없는 불만족과 원망 속에서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반항하고 대들고 그리고 인간에게 악한 말을 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저주하고 욕하며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그런 것에 영향 받지 않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 대신 더러운 것이 가득 찬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그는 끊임없는 염려 속에 시달릴 것입니다. 혹시 그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면 결단코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욕심을 불태울 것입니다. 그것도 소유했다면 틀림없이 자기처럼 갖지 않은 사람을 멸시하고 얕잡아 볼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이 어떻게 행복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그 속에서 평안과 기쁨과 쉼을 얻게 하도록 창조된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어찌 그것이 인간의 삶일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두고 환경을 탓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독한 말로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사람들은 이미 행복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집안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 잘못하면 혼을 내십시오. 그것이 꼭 작대기로 후려치는 폭력적인 교육이 아니라 할지라도 조용히 침묵하고 자기를 생각하는 그런 방식의 징계라도 주십시오. 그러나 항상 사랑은 그것보다 커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귀하게 여김을 받고 한없이 사랑을 받은 아이들이 자존감도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별로 질투하지 않으며, 사회성도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써 나라는 한 인간이 정말 쓸모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박수쳐 줄 만한 특별한 것이 없고, 어마어마한 부자와 나의 재산은 비교할 수 없으며, 몇 십년에 한두 명 나올 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과 나는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수십 만 명에 한두 명씩 주어지는 높은 권세의 자리에 올라간 사람과 나 같은 평범한 시민은 서로 대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써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을 향해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으로서의 존귀함이 사람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때문에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지푸라기와 같이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존귀하게 여기셔서 사랑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주시기까지 우리를 애틋하게 아끼셨습니다. 아들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아들보다 소중하지 않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자신이 받고 있고, 언제 이 세상에서 쓰러질지 모르는 인간의 목숨이라고 할지라도 그분의 영원한 계획 아래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자존감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런 한 인간으로서의 거룩한 자존감을 회복하게 될 때에 우린 열등감에 빠지거나 쓸데없는 우월감에 빠져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존귀한 사람으로 여기고, 자신은 자신의 몫에 맡겨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갈 때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끊임없는 좌절과 자신에 대한 실망을 불러옵니다. 물론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아, 저 사람 안에는 내게 없는 것이 있구나. 그러므로 나도 더 성실하자. 열심히 살자. 그래서 이미 내 안에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드러나게 하면서 저 사람처럼 아름다운 인생을 나도 살아가자.’ 그러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다른 사람과 단순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흙수저로 태어났는데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과 비교하면서 그것에 대해 혐오심을 갖고 복수심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은 금수저 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품는 자신에게 나쁜 일입니다. 누구하고 비교할까요? 자신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작년의 나보다 올해 나는 얼마나 좋아졌나? 그리고 지난 달의 나와는 이번 달에 내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지난 달 나보다 얼마나 더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보다 더 인간다운 사람이 되었는가를 비교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는 계시를 받았을 때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끊어진 것 같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오히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나라가 멸망한 그 현장에서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멸망해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역사는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그 파괴된 현장 위에서 그는 예레미야 애가 3장 22절과 23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하나님은 분초마다 우리를 돌보십니다. 여러분들이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뿐 아니라 신앙이 식고 은혜에서 멀어졌을 때도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이 어떻게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식을 어떻게 하겠는지 보십시오.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 집을 멀리 떠나고, 그리고 조폭에 연루되어서 칼이나 휘두르고 다니는 폭력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포기하겠습니까? ‘그 아들은 인간 같지 않는 삶을 사니 이제 내 아들도 아니다’라고 혼자 집에서 생각 속에서 정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경찰을 불러서라도 그 폭력배의 꼬임에 빠진 여러분의 자식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서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불완전한 부모인데도 자식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고, 또 그를 찾아 나선다면 완전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나 여러분 자신을 주인 삼고 세상의 모든 염려를 끌어안고, 그리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도 하나님에게는 손해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하고 산 결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공중의 나는 새를 돌보시는 것처럼 오늘 당신의 자녀들을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그들을 책임지신다고 말씀하시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염려와 근심 속에서 고통을 받고 혹은 질병으로 자신의 목숨을 태우며 죽어가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혹시 간호사들 사이에 유행한다고 하는 ‘태움’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군대에서는 병사들의 기합이 빠졌을 때 ‘엎드려뻗쳐’를 하고 구타를 했습니다. 그러나 (태움에 관여한) 간호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군대에서처럼 하면 차라리 더 나을 것입니다. 이들은 온갖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괴롭히고, 괴롭히고, 또 괴롭혀서 한 사람의 영혼을 마치 ‘불에 태워 재를 만들듯이’ 집요하게 괴롭힙니다. 그래서 ‘태움’이라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여러 명의 간호사가 그 괴로움에 견디다 못해서 목숨까지 끊었겠습니까? 이런 더러운 일들이 왜 일어나고 있을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면 죽을 때까지 이 세상에게 태움을 당합니다. 말라 죽을 때까지 괴롭히고, 퇴사할 때까지 간호사들이 괴롭히는 것처럼 그렇게 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죽을 것 같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고, 눈을 뜨기 싫은 인생의 고통이 계속됩니다. 그것이 하늘로부터 온 고통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시작되는 고통이고 자기 사랑에서 시작되는 고통입니다.
그 놈의 세상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해주겠습니까? 스펄전 말에 의하면 세상이 보기에 그리스도인인 여러분들은 세상의 품을 배신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돌아간 원수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의 품에서 멸망할 때까지만 유혹할 것이고,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가치가 없어서 돌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 태움을 당하면서 우리는 긴 인생을 아득바득 살았습니다. 다행히 주님의 은혜로 살아남았습니까? 자, 오늘 선택하십시오. 일평생 그런 식으로 태움을 당하면서 이 세상의 괴롭힘을 당하고 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한번 일어나 보십시오.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오늘 죽어도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100년을 산다고 할지라도 저는 그런 식으로 세상의 태움을 당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만의 고백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고백일 것입니다.
왜 세상으로부터 그런 태움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우리가 마땅히 의지해야 할 하나님을 버리고 의지해서는 안 되는 자기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류 최초로 자기를 믿은 사람은 하와였습니다. 그를 통해 사망이 유입되었고 아담이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죽음 아래 살아가는 것이고 천상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신의 존재와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게끔 이 세상에서 태움을 당하고 살아갑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 믿는 대신 자기를 신뢰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선택하십시오. 이제 일생동안 그렇게 뼈가 마르도록 태움을 당하고 살고 싶습니까? 저는 그러지 말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인생이 아니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염려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염려하면 염려할수록 세상은 여러분들을 만만한 사람으로 보고 집중적으로 태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27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매순간 우리는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태움을 받으면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살기에는 너무나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매순간 여러분들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시편 31편에서 시인이 고백한 바와 같이 우리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습니다. 이제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요,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내일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앞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죽기 전날도 그날이 우리가 죽는 날이라는 사실을 모르다가 쓰러져 갈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치 앞도 모르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아 그분을 신뢰하며 산다면 이 세상은 결코 태움과 같은 나쁜 짓을 우리에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맞서서 존귀하게 살 것이며 그 모든 것을 비우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손 안에 있고, 오늘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처럼 내일도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해 믿으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인지를 생각하십시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돌보심을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모든 염려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사람들이며, 존엄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염려를 그분께 맡기고 그분께 세상으로 받던 모든 태움의 고통을 고발하고, 그분의 품으로 피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염려에 관하여(2019.09.29._주일오전 3)
3. 들풀에 깃든 사랑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26-2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공중을 나는 새가 먹을 것에 관한 것이라면 들에 핀 백합은 입을 것에 관한 염려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대한 염려는 육체의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좁게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것을 원하지만 넓게는 육신의 만족을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II. 들풀에 깃든 사랑
A. 들풀을 입히심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들풀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제일 먼저 들풀을 입히신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28절은 말합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하여 보라는 것은 돌보는 사람 없이 아름답게 꽃 피도록 자라는 들판의 백합화를 보며 교훈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관찰하지만 말고 거기에서 배우는 교훈을 너희 자신에게 적용해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여러 종류의 백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합꽃은 1년생 화초입니다. 한 해에 피었다가 그 해에 스러지는 풀입니다. 이 백합화는 성경에서 두 가지 상반되는 의미로 인용이 됩니다. 첫째는 아주 고귀함을 상징하는 것이고, 둘째는 아주 하찮게 힘없는 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에서는 이 백합화가 순결한 신부에 비유되었습니다. 2장 1절에서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라고 말입니다. 많은 고난을 받지만 순결을 지키고 신랑만을 사랑하는 신부에 비유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백합화는 솔로몬 성전에 있는 놋 바닥 문양에 사용되었습니다. 더욱이 열왕기상 7장에 보면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오른쪽에 보아스 , 왼쪽에 야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두 기둥의 꼭대기가 백합화의 형상으로 장식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과 고난 속에서도 순결을 지키며 살아야 할 것을 성전의 두 기둥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고두고 칭송했던 솔로몬의 영광과 비교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9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솔로몬을 영광스럽게 했던 왕의 화려한 의복보다 들판의 백합화가 더 영광스러울까요? 이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옷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꽃의 아름다움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꽃의 아름다움은 원형이고, 옷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본 딴 모형이었기 때문에 백합화의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의상보다 뛰어났던 것입니다. 둘째는, 옷에는 생명이 없지만 풀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옷은 그냥 만들었을 뿐이지만 생명은 하나님이 직접 주셔서 지니고 있는 것이니 어찌 솔로몬의 화려한 의복의 영광을 들꽃의 아름다움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옷은 장인이 솜씨를 보여주지만 꽃은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옷은 만들 때에 최고의 장인이 최고의 정성으로 만들 뿐이지만, 그래서 옷의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마다 세상의 임금의 영광을 생각하고 장인이 솜씨를 기억하지만, 들에 핀 백합화는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들고, 그 생명을 유지시켜주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해준다는 점에서 더 탁월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28절에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들에 활짝 핀 어느 백합화가 아니라 꽃이 없고 이파리만 있던 시절에서 화려한 꽃이 피고 시드는 순간까지 그 모든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들판의 백합화가 한포기 풀에서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활짝 핀 아름다운 꽃 핀 시절만을 기억하고 백합화가 일단 시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꽃 중에 시들면서 아름다운 꽃이 없지만 아름다운 꽃일수록 시드는 모습은 더욱 보기 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들판의 백합화가 자라나는 전체의 과정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임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꽃 가게에 밑둥이 잘려진 채 물에 꽂혀있는 그 꽃도 아름답고, 땅에 심겨있는 꽃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잘라내어 꽃다발로 만든 그 꽃은 길어야 생명이 3-4일 뿐입니다. 땅에 심겨있는 그 꽃은 그것보다 훨씬 오래 생명을 유지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그 들에 핀 백합화조차 자라게 하시고 돌보셔서 결국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시는 것을 보면서 그 안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화려한 의상도 능가할 수 없는 백합꽃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그것들을 입하시기 때문이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백합화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화려한 의복을 지을 뜻도 없고, 노력한 적도 없지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기대어 한없는 아름다움을 뿜어내며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꽃집에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아마 주인이 팔기 위해 직접 기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굳이 들판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십 여 년 전, 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깊은 사유에 잠기던 중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눈을 들어 우주를 보면 수많은 별들이 있어 우리는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이 겨우 6000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1천억 내지, 2천억 개 되는 별들이 1천억 내지 2천억 개의 그룹으로 모여 있는 것이 우주라고 과학자들은 추측합니다. 그러면 그 많은 별들 중에 대부분은 우리의 눈에 띄지도 않고 혼자 폭발하고 생겨나고, 사라지고, 흩어지고 하면서 수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 우주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것을 보지도 못하는데 그것이 존재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문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인도의 시인, 타고르와 아이슈타인 사이에서 나온 대화에서도 언급되는 것입니다. 타고르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우주의 별과 천체가 거기 있다고 한들 그것이 우리의 인생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아이슈타인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별은 언제나 거기 있습니다.” 다시 타고르가 말합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도 역시 이런 의문을 가졌던 것입니다. 왜 그 드넓은 우주 중에서 아주 일부분만 우리에게 보여주셨을까요? 이제 눈을 땅으로 향해봅시다. 들판에 있는 수많은 꽃들 중 우리가 보고 정말 예쁘다고 감격하는 꽃은 존재하는 꽃의 1/10000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집회 차 외국에 잠시 있었을 때 거기 교역자 한 분이 제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겠노라고 한없이 차를 타고 달렸습니다. 30분이면 간다고 했지만 1시간 반 가까이 걸려서 정말 외딴 곳에 저를 내려놓았습니다. 1시간 반씩 달려와서 볼 정도로 그렇게 예쁜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언덕과 골짜기를 잠시 걸으면서 오랫동안 궁금히 여기던 것에 대해서 생애적인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제가 걷던 그곳은 우연히 사람들이 들어오기에는 길이 거의 없고, 일부러 들어오기에는 아예 알려지지도 않은 후미진 곳이라 사람들이 나타나서 거기를 살펴볼 이유가 거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때마침 꽃들이 피는 계절이라 (난생 처음 보는) 아주 작은 꽃들이 구릉에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그 꽃을 보면서 얘기했습니다. ‘얘들아, 인간은 처음 보지? 나도 너희를 처음 본다.’ 그런데 그 순간 제 마음속에 똑같은 의문이 들었었습니다. ‘이 많은 꽃들이 여기에 있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이 와서 보지도 못하는 이곳에 피어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때 마치 꽃들이 저에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이 보지 않을 때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처럼 들리실지 모르지만 저에겐 충격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보고 계시구나.’ 어떤 사물의 아름다운 가치는 인간이 그것을 보고 감탄하는 것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아주시기에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피었다 사라지는 수많은 들꽃들을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나으시기에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 꽃들이 서로 다투며 자라고,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흔들리면서 꽃들은 일제히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꽃들이야’ 노래하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의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의상보다 더 아름답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염려가 엄습할 때에 우리에게 밀려드는 생각은 ‘내가 왜 태어났을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닐 때쯤 1953년 3월 4일생이라는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원래 그 노래는 호세 펠리치아노라는 맹인 가수가 작곡을 한 것이고, 아마 작사도 그 사람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저를 비롯하여 많은 친구들이 그 가사에 공감했습니다.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그리고 내가 있는 것이 너무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진짜 인간이 얼마나 허무한 것을 직시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되고 싶은 자기와는 너무 거리가 멀고,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갑자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아닌데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내쳐진 사람처럼 자신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쓸모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염려하면 염려할수록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과 비교합니다. 그렇게만 비교하면 차라리 나을 텐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남편을 다른 남편과 비교하고, 자기 아내를 다른 아내와 비교하며, 심지어는 자기 자식을 다른 사람의 자식과 비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추호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비교한답시고 선택한 대상이 자기 남편보다 못한 부랑 무도한 사람이 아니라 내 남편보다 더 훌륭한 사람과 꼭 비교합니다. 남의 남편보다 못한 자신의 남편을 보며 그 사람의 아내로 살아있는 자신을 불행하게 생각하는 동안 자신의 남편도 이웃집 남자의 아내를 보며 똑같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웃집 남편에게 가서 물어보면 그 사람은 또 다른 비교 대상인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교하며 사는 것은 인생을 계속 불행하게 사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인생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흙 수저를 물고 태어났고 내 친구는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났는지, 왜 나는 그렇게 몸부림쳐도 추천서 하나 받을 수 없는데 어떤 사람은 그냥 저절로 추천서를 받을 수 있는지를 가지고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잘못된 것은 고쳐야 되겠지만 왜 힘 있는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아닌지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아버지도 여러분을 보면서 저 자식이 왜 내 자식일까, 고민하며 여러 날을 보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고민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신은 한없이 불행한 존재가 되고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런 고민이 누구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비교는 자기 자신과 하는 비교여야 합니다. 1년 전의 나와 비교할 때에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그때는 믿음이 좋았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그때는 내가 아내를 아주 많이 사랑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있는가?’와 같은 반성을 하면서 자신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나아졌다면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가던 길로 계속 가자고 자신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왜? 나의 인생은 내가 부러워하는 어떤 사람의 인생이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 영국에서 온 코킨 목사님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산책을 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자기는 세계에서 너무 유명한 사람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겸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목회자가 부러워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들인데도 아픔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내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나라는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나만이 살아갈 수 있는 독특한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인생만이 내가 주체가 될 수 있는 인생입니다. 내 인생의 의미는 여기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이웃집의 남편이나 아내에게서, 잘 나가는 집의 자식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의 연관(비교)을 생각하지 않는 자존감이 있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주체적인 의식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데에서 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하나님께 너무 고마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 나는 나를 너무 쓸모 없다 여겼으나 하나님을 만난 후부터는 내가 너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쓸모없는 자로 취급해도 하나님은 내가 너무 소중하다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가치는 이 세상 누구에 의해서도 대치될 수 없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찬양)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들에 핀 백합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철에는 언제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중의 나는 새를 보면서, 들에 핀 백합을 보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그것들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근심과 염려 속에서 살아갑니다. 들풀조차 입히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B. 믿음을 깨우심
그러면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 때문에 둘째로, 우리의 믿음을 깨우시는 것입니다. 30절에서 말씀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일까 보냐’라는 말의 뜻은 ‘너희와 들풀은 비교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해 염려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보다는 믿음의 기능을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현실을 이기고, 믿음으로 우리는 고통을 견디며, 믿음으로 시련 가운데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가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믿음은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지식에 대한 동의(同意)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없는 곳에는 어떠한 믿음도 생겨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정서적으로 인정(認定)입니다. 알게 된 바에 대해서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셋째는, 의지적으로는 의뢰(依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 이외에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마음은 상한 심령이고, 통회하는 심령이며, 이것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최고의 믿음인 것입니다. 만일 의지할만한 어떤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수단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손에 있다고 하는 마음이 곧 큰 믿음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육신에 대한 염려는 믿음이 작은 것에서 비롯됩니다. 염려는 믿음과 아주 유사합니다. 믿음이 작은 것, 혹은 믿음이 없는 것은 지식적으로는 무지한 것이고, 정서적으로는 불신하는 것이며, 의지적으로는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를 내어 맡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손자와 손녀 둘을 만났습니다. 이 아이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뭘 그렇게 사달라는 것이 많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이거 사주세요, 저거 사주세요 하면서 졸라댑니다. 어느 날 음식점 앞에 장식으로 된 아주 예쁜 작은 자동차가 서 있었는데 그 옆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하는 말이 ‘할아버지, 나 이거 하나 사주면 안 돼?’ 그 아이는 할아버지의 경제력에 대해서 무한 신뢰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동차를 사줄 만큼 경제력이 안 되지만) 확실한 것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할아버지에게 무엇이든 구하면, -왜 제가 그 아이한테 그 모든 것을 해줘야 하는지 다 설명할 수는 없으나- 그분은 반드시 그렇게 해줄 것이며 무엇인가 모자람이 없기에 못해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뢰입니다. 엄마와 아빠의 손에 붙잡혀 있는 아이는 부모님을 무한히 신뢰합니다. 어떤 뜻이 있어서 안 해주는 것도 있지만 엄마와 아빠가 능력이 모자라서 안 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세상 물정을 알게 된 다음에는 생각이 달라지지만 말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내가 가끔 안 좋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적은 있지만 해결할 능력이 없으셔서 나를 결핍 속에 내어 버려두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많은 염려와 근심을 하는 사람이 있기에 제가 말해주었습니다. 뭘 그렇게 염려하고 두려워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그분에 대한 현재적이고, 인격적인 감화에서 오는 경험의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한 불안은 진짜 미래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족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들이 통계를 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염려하는 것들 중 40%는 실제로 일어나지를 않는답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것들은 그들이 염려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게 일어나고, 실제로 그 사람들의 삶에 염려했던 대로 그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어떤 고통을 주는 문제들은 10%도 채 안된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않은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백합화는 들풀입니다. 시편에서는 들풀이라는 표현이 힘없고 연약한 인간에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2절이 말합니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하였습니다. 이처럼 들풀은 하찮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영광스럽습니다. 들풀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백합화가 비할 데 없이 아름답지만 그것의 본질은 들풀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들풀에 깃든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써 너희는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느냐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아있게 하시고, 영혼에 생명을 주셔서 이렇게 있게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염려를 극복하는 아주 좋은 몇 가지 실제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인생의 무상함을 자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염려의 원인인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는데 아주 훌륭한 수단입니다. 들풀이 쓰러져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육신도 곧 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육신으로부터 얻는 만족이 잠깐 지나가는 것이라면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도 잠시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훌륭한 처방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관심이 단지 육신만을 향한다면 그 끝은 허무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인간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시작하는 영혼과 끝나는 영혼 그 사이에 잠시 있다 사라지는 반딧불과 같은 존재임을 기억하십시오.
둘째는 과거의 경험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불행했던 한 순간을 기억하고, 염려가 자기를 얼마나 무기력하게 하고, 비참한 좌절로 이끌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던 옛날을 추억 하십시오. 지금 염려하는 이것도 그때처럼 나에게 똑같이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만약에 우리가 염려하는 것으로 염려를 해결할 수 있다면 정말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 뜨면 매일매일 염려하게 됩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이기면서 사는 삶의 첫 번째 지혜는 자기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살아있는 삶의 현실이고, 내가 받아 들여야 할 상황이다, 라고 생각하고 힘들어도 그 상황을 자기의 것으로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현실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는 것이 현실적인 것입니다. 실패할 사람은 자기의 현실이 자기가 바라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끊임없이 불평하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승리할 사람은 거기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염려하는 생각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염려는 이상하게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럽게 눈뜨면 우리의 마음에서 솟아납니다. 평안과 기쁨,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는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지만 염려는 은혜가 없는 모든 마음에서 먹구름처럼 피어납니다. 아주 작은 뭉게구름을 허락하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 전체를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고, 그것도 만족하지 않아서 우리의 마음에 벼락을 때리고 천둥을 울려서 무섭게 만듭니다. 염려하는 생각은 피할 수 없겠지만 거기에 사로잡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비결은 가장 막막하고 어려울 때 하나님이 도와주셨던 순간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인생 속에서 반드시 여러 번 도저히 길이 막막했는데 상상치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서 기적적인 도움을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나지 않는다면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 순간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아주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되 성령 충만하고 온 힘을 다해 당신을 위해 봉사하는 동안에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멀리 떠나 있을 때에도, 곤고하고 좌절했을 때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생사 간에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의지할 수 없게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내동댕이쳐서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외의 것을 의지하던 나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몰아 당신을 붙들게 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염려해도 우리의 염려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인생이 전개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믿음임을 깨달으시고, 염려의 원인이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를 받고 큰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비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조차 입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왜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염려하는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을 구하십시오. 은혜를 간구하십시오. 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염려를 극복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염려에 관하여 (2019.10.06._주일오전 4)
4. 필요한 것을 아심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도록 교훈하신 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육신의 필요를 알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염려에 대한 우리의 해결 방법은 이방인들의 해결 방법과 달라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II. 필요한 것을 아심
본문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염려의 해결 방식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A. 염려의 해결 방식
1. 이방인(異邦人)
이방인들은 염려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이방인들의 방식은 이것이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욕망을 가지고 자기 신들에게 부지런히 비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도의 와중에 그들이 취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기도의 태도는 첫째는 자기 신을 섬기면서도 끊임없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염려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에게 기도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에게는 신들과의 인격적인 관계 같은 개념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도덕적인 신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이러한 신들에 대한 생각은 우리나라에도 유사하게 남아있습니다. 집을 지으면 누가 짓든지 간에 대부분 터줏대감에게 먼저 제사를 드린 후에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옛날 커다란 정부의 청사를 지을 때도 그런 일이 행해진다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터줏대감에 대한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거나 터줏대감 때문에 공사하는 중에 커다란 복을 받고 싶다는 개념 따위는 없었습니다. 혹시나 터줏대감에게 밉보여서 그가 심술을 부릴까봐, 그래서 공사에 이상이 올까봐 뇌물의 의미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개념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인격적인 관계 같은 것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과 그들의 신의 관계는 아부와 뇌물 공여로 이어지는 관계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욕망을 신에 대한 생각에 투영시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좋은 일이 생기면 신들의 심술 때문에 나쁜 일로 바뀔까봐 전전긍긍하고, 진짜 나쁜 일이 생길 조짐이 보이면 신들이 장난을 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자기 힘으로 그것을 못 막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전전긍긍하였던 것입니다.
신을 섬기면서도 마음에 평정이 없고 염려에 사로잡혔던 그들을 보면서 그 얘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아주 형식적인 신앙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내면세계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불신자였을 때에 바로 우리도 그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비록 신은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어떤 운명이 자기를 불행하게 결정지었을 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고, 또 아무것도 의지할 데가 없어서 자신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믿음직스러워 하지 못하며 염려하면서 살아온 것이 우리의 과거가 아니겠습니까?
2. 하나님의 자녀(子女)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혀 다른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의하면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그 마음에 부음 바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진 신자인데도 끊임없이 세상 염려에 사로잡혀서 평안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단 하나,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 스스로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염려의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위해 염려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나 대부분의 기도는 자기의 염려를 해소하는 일에 쓰입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 단계가 되면 남을 위해 염려하게 됩니다. 기도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많이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단계의 염려는 하나님을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염려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 안에 있는 사랑이 하나님을 향해 순전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인격적(人格的)입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인격적 관계란 서로를 각기 독립된 인격체로 여겨주고, 인격체 대 인격체로서 인정하며 교제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방신은 비인격적입니다. 사람들을 인격적 독립체요, 자기 목적적인 존재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자기들을 위한 노예 혹은 기계의 부품 정도로 생각하며 끊임없이 착취해 내는 것입니다. 그 대가로 종종 무엇을 주기도 하지만 항상 그것은 거래일뿐입니다. 비인격적이기 때문에 존중심이라는 것은 없고, 그래서 끊임없이 인간을 겁주고 굴복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의 지성을 설득하시고 의지의 감화를 주셔서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여자가 남자를 갑자기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이런 표현을 합니다. “글쎄요. 어느 날 저녁 그 남자가 제 마음속을 훅 파고 들어왔어요.” 이 말은 어떻게 보면 거짓말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성은 충분히 설득되었고, 속았을지 모르지만 의지는 발동했으며 그래서 그를 받아들였는데 그것을 재는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훅’이라는 표현을 쓴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뜻을 세우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 그냥 모르게 내버려 두시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면 설득은 하시지만 안 되면 놔두시고, 끊임없이 감화의 기회를 주시는데도 그 감화를 거절하면 당신 없이 사는 쓴맛을 충분히 보게끔 놔두시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신앙은 남이 갖게 해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에게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제일 먼저 우리의 지성에 당신의 말을 건네십니다. 그렇게 설득시키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의지에 감화를 일으켜서 사랑하던 것들이 사랑스럽지 않게 되고, 또 사랑스럽지 않던 것이 사랑스럽게 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저는 영화배우들 중에서 가슴이 아릴 정도로 좋아했던 여자 배우가 딱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지금은 연세가 너무 많으신데 그리스도인이십니다. 그 교회 집회를 간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 연세가 약 75세 정도 되었는데도 단박에 그 분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스캔들 하나 남기지 않고 일생을 사셨습니다. 어느 날 잡지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그렇게 살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막 은막에 데뷔할 때의 나이가 18-9세 정도였는데도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하고, 인기와 명예, 돈과 같은 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아주 뼛속 깊이 체험하게 되었답니다. 아마 신앙 안에서 그렇게 체험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스캔들에 오르내릴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고 설득하시고 우리의 의지의 감화를 불러일으키십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예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돈을 대주고, 무슨 수많은 스펙을 쌓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30년의 차이가 나지만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고, 말로 설득하고 설득당하며, 말로 감동을 주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인격적 관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 사람과 이런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면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들어볼 기회가 없으니까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인격’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인격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 시대 때에 연극에서 나온 소품의 이름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유난히 연극을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비극이 아주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일이 끝나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에 사람들이 비극을 보고자 극장에 모두 모입니다. 당시 극장은 수천 명, 혹은 수만 명의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음향학적으로 설계를 해서 똑같은 시간에 음성이 울리면서 전달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연극을 보고 펑펑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했습니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서 극중 성격에 맞는 독특한 가면(假面)을 만들어서 배우들에게 씌웠습니다. 당연히 똑같은 마스크는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한 마스크에 한 배역이 할당되었던 것입니다. 이때에 씌운 그 가면을 그리스어로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고, 거기에서 영어의 ‘person’이라는 단어가 유래하게 됩니다. 맨 처음 페르소나를 통해서 의도했던 것은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 극중 인물의 독특한 face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더 깊이를 가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기독교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격에 대한 구체적인 사유가 사실은 동양에서도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인간이 하늘과 같다.’라든지 ‘백성 없이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인본주의를 외치기는 했지만 개체로서의 한 인간이 인격적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기독교가 이 인격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해석했을까요? 초창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인격’이란 ‘신과 결합된 존재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었고, 인간은 그 영혼을 통해서 신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인격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여러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공통된 인간의 본성을 주어 소통할 수 있게 하셨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독특한 다른 본성을 주어서 아무도 판박이처럼 되지 않고 각자 다른 모습들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게 하신 것이 인격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 개념이 발전하면서 인격을 ‘사람’(human)을 ‘사람’이게 하는 ‘내적 실체’(實體), 혹은 ‘자립적 본질’(本質)을 가리킨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the man/woman)을 ‘그 사람’이게 하는 것과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공통된 인간의 본성이 있고, 그 위에는 독특한 자기만의 본성이 있어서 인간인 동시에 인간이면서도 타인이 아닌 ‘나’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것은 이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유리 상자 속에 살다가 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회에서 태어나서 그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섞이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나면서 온갖 종류의 겪음(passion)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겪음 속에서 인간은 생존해 내기 위해서 여러 반응을 보이는데 이것이 그의 영혼과 정신의 독특한 틀을 형성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격의 사회성(社會性)이라고 부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형성되는 일에는 신으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요인 말고도 사회 속에서 겪음을 당하면서 후천적으로 획득하게 되는 또 다른 요소들이 있는데 이를 인격의 사회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염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염려도 있고, 살리는 염려도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먼저 죽이는 염려를 생각해 보십시다. 누가 고통스러운 염려의 과정 없이 절망에 이르겠으며, 절망에 이르지 않은들 누가 감히 자살이라는 최고의 선택을 하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때 여러분들이 근심했던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혼자 사는 것이 충분했더라면 결코 예수를 믿었을 이유가 없고, 예수를 믿은 것은 여러분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해 근심했다는 것이며, 그 근심은 복음을 만나자 살리는 근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7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그렇게 세상 근심만 했다는 이야기는 세상만 사랑했다는 뜻이고,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근심하면서 살아가는 그 날도 매일매일 죽은 것과 같이 살아가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섬뜩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런 죽은 것과 같은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은 육신의 염려를 피할 수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이 육신에 대한 염려를 영혼에 대한 걱정으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 자신과 이웃의 영혼에 대한 염려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도 사회에서 아주 탁월한 성공을 거두었구요, 아내도 아주 훌륭한 사회적 직분을 누리고 있는 정말 매우 특별한 남녀였습니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뇌에 문제를 가지고 태어난 선천적 장애아였습니다. 행복하기만 했던 집안에 이 아이의 출생은 커다란 먹구름을 몰고 왔습니다. 다투는 날이 잦아졌고, 집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아이가 한 살쯤 됐을 때인가 그 아이를 어디론가 치워버렸습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그러나 부부는 다시 행복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 아이를 마음에서까지 영원히 지울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하나 낳았습니다. 이 아이가 간신히 기어 다닐 때쯤 됐는데 남편이 아내에게 황당한 제안을 합니다. “우리 다음 아이는 입양을 합시다. 고아들이 불쌍하지 않아요?” 아내도 곧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이야기는 더 충격이었습니다. 정상적이고 예쁜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입양해 가니까 한국에서는 절대 입양될 수 없는 아이를 입양하자고 결정했던 것입니다. 사실 입양을 받으러 가면 비밀이라고 사인을 받고 그 아이의 실제 부모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떤 유전 인자를 가지고 태어났는지까지 다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은 그것까지 다 고려해서 아이를 입양하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결국 장애아를 선택했습니다. 몸도 잘 못 가누는 장애아를 데려다가 아들로 삼았고, 그때부터 사모님의 눈물의 생활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열심히 노력했고 아이를 키워냈습니다. 후에 아내가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이 아이는 처음에 눈물을 주었지만 이 아이를 기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사랑을 받으며 사는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선물입니다.”
왜 똑같은 상황을 만났는데도 한 사람은 그 아이 때문에 마음에 지울 수 없는 먹구름 같은 상황에 엮여서 불행해지고, 또 한 사람은 그 아이가 없었더라면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덜 복됐을까를 생각하며 그 장애아를 입양한 것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리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환경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은혜가 바로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스럽게 물질을 모음으로써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혼자서도 잘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잘 살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잘 살 수 없습니다. 후자와 같이 미숙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되면 상대방의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 됩니다. 다행히 그가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사람이라면, 그래서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자라면 자신을 지켜줄 것입니다. 마릴린 먼로와 결혼해서 평생 봉사했던 아서 밀러와 같은 미국의 천재 극작가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적 염려에 대한 해결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의 육신의 필요에 대해서 염려하게 됩니다. 그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이 추운 겨울에 무엇을 입을까? 이 어려운 때에 무엇을 먹으며 살아갈까?’ 염려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온갖 동정심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 베풂이 시작됩니다. 탐욕과 이기심으로 재물을 모으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며 권력을 얻는 것만으로는 결코 염려를 극복하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에는 언제나 이런 결핍이 있기 마련이고,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모자라는 것이 없는 사람은 또 다른 이유 때문에 결핍을 경험하며 고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최고의 대안은 탐욕과 이기심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인격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염려와 근심 속에 시들어 가게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 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육신의 필요를 아심
두 번째는 육신의 필요를 아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시느니라”라고 번역된 말의 그리스어는 ‘오이덴’(oiden)이라고 되어 있는데 제 1완료형입니다. ‘이미 알았다’는 뜻입니다. 원형은 ‘호라오’(horao)인데 ‘보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보았다.’ 혹은 ‘통찰력으로 보았다’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물을 시간 안에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서도 보시니 하나님에게는 과거도 현재이고, 현재도 현재이고, 미래도 현재입니다.
1. 욕망으로 기도함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너무 육신적입니다. 사고에 있어서도 육신적이고,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도 너무 육신적일 뿐만 아니라 세상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품에서 푸근히 의지하며 행복해지는 것을 잘 모릅니다. 이방인들은 신들을 섬겼지만 육신적이었고, 사고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신에게 자기의 필요를 깨우쳐주는 것이고, 원하는 것을 해주도록 조르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에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욕구를 기도 속에 투영해 담고, 욕망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신을 만들어 냅니다. 겉으로는 기도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스스로 욕망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지만 하나님께 속박 받는 것은 싫고, 인간들과도 사랑을 나누고 싶지만 즐거움만 취하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은 떠맡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과연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철학사에서 한 세기의 획을 그었던 인물이 있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라는 프랑스 철학자입니다. 21살에 교수가 되기 위한 철학 교사 시험을 치렀고,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의 모토는 니체와 하이데거 등을 이어받으며 하나님 없는 철학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우연히 태어난 존재이고, 꼭 필요하지도 않는 여분의 존재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났던 어린 시절에 저는 그의 책에 매료가 되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자유로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후일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마지막에 죽었는지까지 살펴보면서 저는 한 사람으로서 그의 인생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철학적인 재능까지 가지고 있었으며, 아주 유창한 화법을 구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외모는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람인데 150cm밖에 안되었으니까 여성들에게도 매력을 끼칠만한 인물이 아니었고, 얼굴도 어디서 얻어맞은 사람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겼으며, 한쪽 눈은 거의 실명이 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반 동료 중에 퀸이 있었습니다. 이 여학생과 교제하고자 남성들이 줄을 설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이었는데 그녀가 바로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였습니다. 이 여자가 자기보다도 서너 살이나 나이가 많은, 그것도 150cm 키에 못생긴 이 남학생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가 쏟아내는 달변과 사람을 휘어잡는 화술 때문이었습니다. 서로에게 반해서 교제를 하다가 어느 날 사르트르가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나와 결혼해 줄 수 있겠니?” 그랬더니 이 여자가 한 칼로 거절을 했습니다. 상처를 깊이 안은 사르트르는 그래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예쁜 여자에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철학 이야기로 시작해서 배우고 싶어 하는 이 여자의 갈증을 풀어주면서 슬슬 로맨스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르트르는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나를 좋아하면서도 결혼은 하기 싫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이 여자는 결혼에 대한 훌륭한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계약 결혼을 하자.” 이것이 바로 세기의 계약 결혼이 성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1, 2, 3… 식으로 여러 개의 조항에 서명을 하는 것으로 계약서가 작성되었습니다. 지금 그것을 다 읽어드릴 수는 없지만 중요한 몇 개를 살펴보면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도록 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 누구를 좋아하든지 간에 개의하지 않고 동시에 존중하기로 한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참 이상한 결혼이지요? 그렇게 계약 결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제자들을 꼬이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부인의 제자들을 아주 집요하게 유혹해서 결국은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어느 시간에 철학을 공부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만 부분적으로는 성공하고 부분적으로는 실패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보부아르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혼 계약서 가운데 ‘무슨 일이 신변에 일어났든지 서로에게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한다.’라는 것이 있었는데 샤르트르는 보부아르 앞에서 그녀의 제자와 하룻밤을 즐기고 와서는 신발 벗는 순간부터 마지막에 헤어지는 순간까지 상세하게 나열을 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그때마다 사르트르는 경고했습니다. “정신 차려. 마누라 유세하지 말고 계약서를 다시 읽어봐.” 이럴 정도였습니다. 보부아르는 결국 채워지지 않는 부부 관계의 정을 동성애에서 찾게 됩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마지막에 사르트르가 죽는 모습입니다. 죽을 때 폐수종이라는 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폐에 물이 차는 병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 당시로서는 고치기 어려운 질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용감하게 신에 대해서 타격을 입혔던 사람이 얼마나 겁쟁이이었는지 아내에게 자신이 죽을 때까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묻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증이 오면 거의 미치광이처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욕을 하고 온 병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다가 얼마 안 있어서 절명하고 맙니다. 이것을 보면 결국 인간이 하나님 없는 자유를 택하는 그 마지막의 결말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 용기조차 없을 때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 사르트르의 그 장면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속박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고, 가족이 있기 때문에 가족과의 신의를 지켜야 하고, 아내가 있기 때문에 혹은 남편이 있기 때문에 도덕적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는 것은 끓어오르는 욕망의 상태에서는 말할 수 없이 귀찮은 속박이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즐거운 속박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박 때문에 내가 더 큰 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모든 속박을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갈 때에 그 바람직하지 않은 자유의 대가는 무서운 혼란과 고독, 그리고 허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고결한 인격체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2.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은 기도 속에 큰 섭리를 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방신들이 비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탐욕을 가지고 우리의 영달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는 우리를 그렇게 기도할 수 없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일까?” 더욱 열렬히 기도하라고 명령하시고 심지어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어갖지 못할 것이라고 경계 하듯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야고보서 4장 2절은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라고 말하고, 누가복음 11장 10절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라고 하고 있으며, 야고보서 5장 17절은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리포트를 받고 싶어 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자식에 지식을 더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명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기도로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다 아시는 주님이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좋은 것들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빠 보이지만 결국 좋았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좋아보였지만 결국 나빴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었거나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간이 잘못 사용한 것들입니다.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은 평생 사업을 하셨습니다. 어마어마한 사업은 아니었지만 제법 성공도 하셔서 그 동네에서 부러워하는 유지가 되어 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쯤 되었을 때 일입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매우 상황이 나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아버님의 늘어나는 담배, 말 수 없으신 태도, 그리고 종종 하시는 잠꼬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무례하게 찾아와서 소주병을 휘두르는 채권자들의 출연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건넛방에 있는 저를 아버님이 좀 보자고 부르셨습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밥하러 부엌으로 내려가시고 아버님 혼자 반쯤 이불이 개켜진 어두운 안방에서 방안 가득히 담배 연기를 채우신 채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내가 너무 힘들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내가 어제 점집에 갔단다.” 그때엔 저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아버지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릴 이유도 없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 말씀이 재미있었습니다. 그 점쟁이가 말하기를 ‘당신은 참 사나운 팔자를 타고났어. 결국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당신은 쓸쓸한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야. 그러나 당신에게 딱 하나의 희망이 남아있는데 큰 아들이다. 나머지는 다 필요 없다. 그 아이들 때문에 너는 늙어서도 마음 고생 많이 할 거다. 그러나 큰 아들은 너에게 보배다. 너는 쫄딱 망하겠지만 노후를 큰 아들에게 의탁할 것이며 큰 아들은 아주 훌륭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너를 정성껏 봉양할 것이니 이것이 당신 인생의 마지막 즐거움이 될 것이다.’ 아버님은 이 말씀을 마치고 제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용돈을 쥐어주셨습니다. 나오면서 열어보니 생전 받아본 적이 없는 액수의 용돈이었고 -이 사실은 아직까지도 동생들에게 비밀입니다- 원래 아버님은 저보다는 제 동생을 훨씬 예뻐하셨기 때문에 저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뭐, 아멘을 하실 것까지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뭐 비슷하게 됐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몰랐을 때에는 모든 좋은 것들이 자기를 통해서 혹은 귀인을 통해서 온다고 믿었으니 아버지에게 저는 아들이었지만 노후의 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게 되면 이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이 근원이시며 그분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라고 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만을 의존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고백은 기도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믿는 사람이라도 기도하지 않고 살면 행운이 찾아왔을 때 ‘정말 오늘 재수 좋은 날이야’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야. 하나님이 보내주신 거야.’ 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때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와 하나님을 의존할 때입니다. 그냥 수많은 사람 중 의지할 것들 중 하나로써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분이 아니면 나는 갈 데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가질 때 인간의 영혼은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하나님 의지하여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려고 합니다. 독립하면 독립할수록 자유를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비참한 속박으로 데려갑니다. 독립하면 독립할수록 자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영혼의 본질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그 하나님을 멀어질 때에 아름다운 영혼은 없습니다. 영혼이 아름답지 않은데 존재가 아름답다는 것은 이상한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께로부터 충분히 멀어진 다음에는 하나님을 치워 버리고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권력을 손에 넣어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데로 움직이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자기가 원하는 질서를 사회 속에 그려 내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당신께 묶어 두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십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스스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씩씩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 만만하게 사는 것을 제일 싫어하시고,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는 인생길 한발자국도 떼어놓을 수 없다고 주님의 품으로 파고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가 있으면 용서해 주시고, 모르면 가르쳐 주시고, 연약하면 강하게 하시고, 유혹 받으면 그것을 물리칠 힘을 주셔서라도 당신의 품에 머물게 하십니다.
눈물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린 때가 언제였습니까? 찬송을 부르다가 눈물 자국이 남은 장들이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다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놀라워서 이 버러지 같은, 쓰레기 같은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거두시는 은총 때문에 감사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어려움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마음을 때리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당신께 묶어 두시려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노예 주인은 쇠사슬로 자신들의 노예를 묶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인 사랑의 줄로 우리를 묶으십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도 알고, 그 사랑 때문에 묶이는 사이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육체의 필요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두 가지 가르침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시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둘은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마태복음 6장 32절에서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가 하면 마태복음 6장 9절과 11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고 나옵니다. 둘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모순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에서 양식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위한 양식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간구하는 기도의 제목이 의식주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비난하신 것이지 기도하는 것 자체를 비난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필요를 위해 도무지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엇이 우선순위를 자치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방인과 그들의 신과의 관계는 아부와 뇌물의 관계였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종교라고 하는 것은 단지 탐욕을 투영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6장 32절은 “너희 하늘 아버지는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에서 “있어야 할 줄 아시는” 그 행동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늘 아버지”라는 반복되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가르치실 때, 또 우주적인 절대자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실 때에 항상 그 절대자를 ‘아버지’라고 부르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 받는 부자 관계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 관계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 같은 삶을 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파테르’(pater)라는 단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빠’라고 번역하면 정확한 번역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그리스어 파테르라는 단어는 유대 문맥에서 직계 가족의 직접적 상급 항렬에만 적용되던 용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인 증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현조 할아버지, 그런 식으로 일직선상에 있는 부자, 부자, 부자, 부자의 관계를 아버지에 관해 부를 때 ‘파테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몇 십 대 손 위에 있는 할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고, 이 모두를 뭉쳐서 아버지들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맨 아래로 내려오면 한 아버지가 있을 것이고, 그 아버지가 젊은 아버지라면 아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아이들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은 가족적인 호칭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과 가족관계라고 하는 하나님의 집의 이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하늘’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늘’이라는 표현이 절대자로서의 무한한 초월성을 보여준다면 ‘아버지’는 가족으로서의 친밀한 동질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버지니까 자기 자식을 끔찍이 사랑할 것이요, 그 아이의 아픔은 아버지의 아픔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완전한 보호자가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공급에 아이의 복지가 달려 있고, 선하고도 능력 있는 아버지라면 그런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아이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아버지를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이 완전한 사랑이실 뿐만 아니라 무한한 능력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능력이 없는 사랑은 무기력합니다. 누가 경제적으로 너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넉넉하지 못하다면 ‘나도 돈이 없어.’라고 하거나 기껏 해줄 수 있는 말이 ‘내가 기도할게.’ 밖에 못합니다. 능력이 있다면 ‘얼마만한 금액인데 그렇게 고통을 받아? 두 시간 후에 통장 열어봐. 그 돈 갚지 않아도 돼. 내가 기도해 줄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되어 본 적이 없으니 그런 사람을 만나리라는 기대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사랑은 무력하고 사랑이 없는 능력은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실 뿐만 아니라 땅에 있는 나를 가족으로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은 필요를 압니다.” 불멸의 격언입니다. 더 온전한 사랑일수록 상대방의 필요에 대해 민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의 기쁨은 사랑받는 자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공포는 정동을 불러일으킨 원인에 있어서 예민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감정입니다. 큰 두려움을 경험한 사람은 그 두려움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무서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젊은 여자가 골목길을 홀로 걸어가다가 강도를 만나고, 구타를 당하고, 핸드백을 뺏기는 충격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그 다음서부터 이 여자는 밤도 싫고, 골목길은 더 싫고, 혼자 가는 것도 더 싫고, 더욱이 밤중에 핸드백을 매고 다니는 것은 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랑도 이와 아주 유사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만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사물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 멀쑥한 한 청년이 일본에 가서 연애를 했습니다. 그곳 현지에서 일본 자매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이 여자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일본의 풍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적인 방식으로 서프라이즈를 해주기로 했습니다. 일본에는 그런 것이 별로 없는 것 너무 잘 아시죠? 아마 지금도 여자들이 가정적이지 않은 남자하고 사는 비율이 매우 높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 중의 하나가 일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겨울연가>와 같은 드라마가 유행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꿈에도 그리는, 현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그런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그 드라마 때문에 일본 여자들이 한국 남자들을 동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여자를 만나기 전에 자기 방을 꾸몄습니다. 온갖 풍선으로 장식을 하고- 제가 보기에는 조금 촌스럽게 장식을 해놓았습니다- 꽃을 여기저기에 꽂고, 연애하면서 찍은 사진을 실사 출력해서 액자에 넣어서 여기 저기 걸고, 꽃가루를 뿌리고, 예쁜 등불을 천장에 매달고, 케이크를 하나 사다 놓고 거기에 촛불까지 켜놨습니다. 드디어 딩동 벨이 울렸습니다. 일본 여자 친구가 도착했습니다. 현관문 번호를 누르면서 문을 덜컥 열었습니다. 집안은 깜깜하고 아무도 없습니다. 남자친구가 옆에 섰다가 짜잔 하고 나타나 여자 친구를 방 한 가운데 데려다 놓고 불을 탁 켰습니다. 이때에 저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일본 여자들은 그런 것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황당해 하며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펑펑 우는 것입니다. 일본 여자도 한국 여자하고 똑같은 심성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펑펑 울면서 서로 포옹을 했습니다. 그리고 둘이 앉아서 같이 대화를 나눕니다. 이제 그 여자에게는 거기에 매달린 풍선은 자기네 동네 골목 문방구 집에서 팔던 그 풍선이 아니었을 것이고, 거기 있는 꽃은 길가 리어카에서 파는 꽃이 아니었을 것이며, 제가 보기에 좀 촌스러운 그 실사 사진도 그에게는 소중한 추억의 기념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만약 그 여자라면 모든 물건을 수거해서 커다란 박스에 넣고 ‘몇 월, 몇 일 사랑하는 애인의 서프라이즈를 기념하며’라고 적어 놓고 죽을 때까지 영구 보관할 것 같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참된 사랑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인격적인 사랑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쇠가 불에 녹을 때 비록 열의 존재를 볼 수 없어도 그것을 증명할 수 있듯이 드러나는 헌신은 감추어진 사랑을 입증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결혼을 하셨든지 그렇지 않든지 살아있는 동안에 최대한의 사랑을 표현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제발 이런 말은 하지 마세요. “말을 하면 모르더라구요.” 그런 말을 하지 말고 표현을 하세요. 그리고 그 표현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어 보십시오.
처음부터 헌신이 없었다면 그것은 그냥 좋은 감정이었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 사라졌다면 그것은 유산된 사랑이고, 잠시 없는 것 같았는데 다시 나타났으면 그것은 재활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유산되지도 않고, 재활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변하는 것은 우리들이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 다음 논리에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사랑은 필요를 안다.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 하나님은 내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주실 수 있다. 고로 나는 염려하지 않는다.” 어느 틈새를 논리적으로 비집고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마치 튼튼한 기초위에 지어진 견실한 집처럼 그렇게 인격적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문제는 걱정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염려를 물리치지 못하는 미지근한 신앙생활입니다.
염려를 물리치는 가장 확실한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그분에게 자신이 헌신하는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충분히 경험하십시오. 그분이 나의 필요를 충분히 공감하시며 모든 것을 주실 수 있기 때문에 내가 필요한 것은 주실 것이며 주시지 않은 것은 나에게 필요가 없거나 또 다른 훈련을 시키시기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내게 주시기 위해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미끄러지기 쉬운 우리의 정신을 당신께 일치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행복의 유일한 조건인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랑의 연합을 위한 훈련입니다. 수없이 설교를 들어도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 설교는 수박의 겉을 핥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마음의 가죽을 찢고,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말씀은 그 길을 인도하고 여러분의 마음에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의 욕구는 그 길을 가게 만들어줍니다. 그 길을 갈 때 성령님이 힘차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는 분임을 믿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많은 날들은 영혼을 죽이는 염려로 허비되었습니다. 만약 염려하게 되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는 마십시오. 마음 깊이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육신의 결핍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까지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염려 때문에 불평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성령을 근심케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간구하는 것만큼 욕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공중의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풀조차 입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린 아이처럼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손을 꼭 잡고, 믿음 안에서 그분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살고자 애쓰시기를 바랍니다.
이 설교를 들으며 좌절을 느끼는 어떤 분들에게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염려해야 할 것은 세상의 물질의 부족이 아니라 믿음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믿음 없는 것은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귀신들린 비참한 아들을 위해 예수께 빌었지만 주님이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시자 이렇게 기도했던 이 사람의 기도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큰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주님보다는 믿지 못할 나를 신뢰했고,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살다가 이 꼴이 되었나이다.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예수여, 도와주소서. 나에게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어린 아이처럼 의지할 믿음을 주소서.’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풀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주님 앞에 신앙으로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염려에 관하여 (2019.10.13._주일오전 5_ 3부 예배)
5.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마 6:33 상)
녹취자: 장미연
I. 본문 해설
가르침의 결론을 내시듯이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이라고 하신 이 말씀은 앞에 가르침을 모두 종합해볼 때 도달하게 되는 결론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먼저’ 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프로톤’이라는 말인데 시간적으로 질적으로 다른 것보다 앞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관심은 “그 나라를 구하라”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 나라’는 무엇일까요? 26절에 ‘하늘 아버지’라는 존함이 등장하고 30절에는 ‘하나님’ 32절에는 다시 ‘하늘 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을 종합해보면 여기서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합해보면 결국 ‘그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유대인의 표현법인데 영광, 초월, 무한, 능력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를 ‘그’라는 대명사와 연결합니다. ‘그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기에서 ‘의’는 당연히 ‘소유’를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라가 소유당하는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의 의도대로 있는 나라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신바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육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지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II.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
그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이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두 차원에서 이해해야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미래에 완전히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 이렇게 두 차원으로 나누어 볼 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A. 하나님 나라의 두 차원
1. 현재적(現在的) 차원
먼저 현재적인 차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그게 바로 현재적 차원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놀랍지요?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님이 오셨는데 처음부터 기적으로 시작해서 기적으로 끝이 납니다.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리라는 예고도 기적이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은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평범한 사람이 겪는 사건과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두 종류의 사건들이 함께 밧줄처럼 엮여진 생애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이 겪듯이 배고프고 목마르시고 슬퍼하시고 기뻐하시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모두 겪으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놀라운 기적이 연속되면서 예수님의 생애는 전개됩니다. 귀신들렸는데 주님이 명령하시니까 나았습니다. 당시 그 사람들에게 귀신들린 것은 거의 운명적인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병이라고 믿던 문둥병자를 고치셨는데 이것은 그렇게 명령함으로써 질병이 낫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더 극적인 것은 자연의 세계를 명령하여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그 위를 걷기도 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아예 죽은 자를 살려내시기도 하는 놀라운 일들이 수없이 연결되면서 예수님의 생애는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한편으로는 당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고 또 한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의 인생이 전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준 이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증거였던 것입니다. 사인이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무슨 뜻이냐면 “내가 귀신을 내어 쫓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이렇게 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나와 함께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뜻입니다.
이제껏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의 통치에 굴복하게 만든 최대의 무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이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괴롭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죽음 이후에 이루어질 일들이 현재에 맞닥뜨리는 일보다 더 기대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죄에 종노릇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단이 가지고 있는 전가의보도인 이 죽음에 의한 위협이 무용지물이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로 임하시는 그 때에 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이제 그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에 관점에서 보면 세상 나라에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 속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 안에 사망이 지배하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게 물러가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사람이 바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믿고 나 보니까 이 사단의 전가의 보도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위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음으로 그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에게 임한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에게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이후에 성령이 오셨지요. 성령은 사랑이십니다. 그 성령님이 이제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직접 임하셔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그 분의 통치를 받으며 살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고 나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죽음은 결국 살아있는 육체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으면 그냥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죽어도 보다 더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예화) 장난감도 없던 시절의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사교 장소였고 사회를 배우는 학교였고 아이들이 서로 편 갈라 싸우던 싸움터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마른땅에 석필로 줄을 그어놓고 이제 놀이를 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깡총깡총 뛰어다닙니다. 그러다 금이라도 밟을라치면 상대편 아이들이 박수를 치면서 “너 죽었다. 죽었다” 하면 규칙 때문에 이 아이는 게임에서 잠시 물러나야 합니다. 이렇게 재미있게 금을 밟았다 안 밟았다. 너는 죽었다 살았다 이야기를 하면서 오후 시간을 재미있게 노는데 저녁이 되면서 굴뚝에 연기가 나기 시작하고 이집 저집에서 엄마가 행주치마를 두르고 나타나서 각기 자기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얘야. 밥 먹으러 들어오너라. 저녁 차렸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렇게 금 밟았니, 안 밟았니 싸우던 아이들이 다 내던져 버리고 집으로 가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It’s the game. 이건 그냥 게임이었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어린 아이를 위해 엄마의 정성으로 잘 차려진 따끈따끈한 밥상이 기다리고 있는 그 집은 게임보다 훨씬 실감나는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죽었니 살았니 버리고 집에 가는 겁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은 그걸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이 허무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 속에서 살고 있지만 영원을 잇대어 사는 것이구나.’ 이걸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는 그 영원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교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사단은 그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위협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임한 사람들입니다.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하도록 만들 상위의 존재가 없습니다. 당신은 사랑하시는데 그분은 영원하고 불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마음에 임한 사람들의 확신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실제적인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건데 그 통치가 하나님 사랑의 통치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9절에서 이러한 확신을 우주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외롭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성경은 외칩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고 말합니다. 그 죽음은 기껏해야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염려한다고 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지나고 나면 보다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 속으로 들어갈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내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이유입니다. 그래서 요한 1서 4장 18절에서 말하기를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세상에서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진짜 갖고 싶은 것은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고 진짜 가지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상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하나님을 세상보다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보다 훨씬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분인지 우리 안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것을 우리에게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놀라운 경험을 우리는 늘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어느 날 삶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생활이 나를 속입니다. 내가 원하는 질서들이 깨뜨려지기 시작하고 마음에 고통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힘든 시간들이 계속 됩니다. 괴로움과 고통, 번민과 괴로움들이 밀려옵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저녁에 눈을 감으면 그냥 아침에는 이 세상에서 다시 눈 뜨고 싶지 않습니다.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그리고 기도할 마음이 아니라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여, 나를 도와주옵소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눈물이 쏟아지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나의 이 상황을 기억하시고 나를 이 인생의 곤고한 골짜기에서 구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상황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데 근원을 알 수 없는 평화가 내 마음속에서 샘물이 솟아나듯이 나오는 겁니다. 그 뿌리를 추적해도 어디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주일날 와보니 나를 위해서 개인맞춤으로 준비한 것 같은 설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큰 충격을 받으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립니다. 그런데 놀랍게 이 현실을 이겨내게 만드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이 임하는데 내게 이렇게 솟아나고 주님께로부터 주어지는데 이게 사랑의 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비상한 집중이 이루어지고 몸과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집니다. 내일 이 곤궁한 처지에 있는 나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동일하게 아무 전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하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많은 시련을 겪으나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내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마음에 임했지만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움직이지 않게 물질적으로 임한 나라가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임할 때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마음정신에 먼저 뚜렷하게 놀라운 표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에 의해서도 절대로 결코 방해받지 않는 이미 더 이상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나라가 여러분에게 임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소수일 것입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임했습니다. 놀라운 기쁨과 만족, 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누립니다. 그런데 기도 안합니다. 말씀의 은혜 안 받습니다. 기도생활 안 합니다. 그리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육체에 욕망을 따라서 삽니다.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 그 사람처럼 현실의 무게는 어마어마하게 느껴지고 자신은 아무 항거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게 현재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과 그 다음에 제한성입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대로 순종하며 믿음으로 은혜를 따라 신실하게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마어마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나라지만 여기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에게는 그 나라에 거의 안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처지로 그 사람을 데려가는 것입니다.
2. 미래적(未來的) 차원
그러면 두 번째. 미래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심으로 이 개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보다 우주적이 되었습니다. 굳이 이제는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시지 않아도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님이 믿는 그 사람들 마음속에 임하시고 그 성령님이 성경을 통해 예수와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실제 하나님과의 사랑의 완전한 연합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게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현재적 국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항상 그 모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많이 믿는 사람들 속에 임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방해받는 것이 없도록 최종적으로 완결된 나라는 아닙니다. 물론 신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엄청난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놀라운 에너지로 현실을 극복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이렇게 현재적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마귀의 통치를 부숴버렸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부숴버렸습니다. 사단의 나라를 거대한 공룡에 비유한다면 그 공룡이 이미 머리를 맞아 박살이 나서 하얀 골이 줄줄 흘러내리고 배가 갈라져서 창자가 줄줄줄 흘러내리고 피가 낭자하면 등뼈가 산산이 깨어져서 뼈 위에 뼈 하나도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힘을 휘두르던 그 거대한 두 팔과 다리는 마치 망치로 으깨어진 닭 모가지처럼 뼈와 살이 하나가 되어서 이미 그냥 덩어리로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목숨이 완전히 끊어지진 않아서 그런 비참한 형태로 간신히 기어서 곧 죽을 듯이 움직이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 정도 묘사면 희망적입니까? 따라서 이런 마귀에게는 이미 결정된 우주적 승패를 번복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여전히 진리를 떠나 하나님 통치를 벗어나는 사람들에게는 무지한 인간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이 될 정도의 힘은 남아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미혹시킬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7절은 말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틈을 주지 말라고 애써서 경계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미 유효하지도 않은 무기로 신자를 겁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할 정도로 유혹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신자가 거기에 호응하기만 하면.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8절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합니다. 나의 이런 마귀의 결정적 패배론을 어떤 사람은 부정하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그 악의 무서운 힘을 생각하면 그럴리가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건재하고 있는 이러한 엄청난 악의 힘을 가진 세상의 외간을 보지 말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내면의 무너짐을 보십시오. 이것은 세상을 바꾸는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총이나 폭탄을 들고 선교하지는 않습니다.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예외 없이 그냥 착하게 선교합니다. 가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글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글을 가르쳐주어 소통하게 하고 예의를 모르는 사람에게 범절을 가르쳐주고 세상에 대해 아무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지식을 깨우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만듭니다. 그런데 왜 마치 그 선교사들이 이슬람세계나 사회주의 국가, 심지어 아직도 남아있는 공산주의 국가 안에서는 창칼을 들고 자기네 나라에 잠복한 사람보다 더 잔인하게 대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고 투옥시키면 옥에 갇힐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칼 한 자루 들지 않은 사람들인데 색출해서 고문하고 죽이고 그들과 알게 지낸다는 사실 때문에 살해하고 심지어 합법적 비자를 가지고 입국해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집단으로 색출해서 추방하고 입국하지 못하게 합니다. 저처럼. 뭐가 그렇게 무서운 것일까요? 왜 그럴까요? 그들은 제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창과 칼 몇 자루를 들고 이슬람세계나 사회주의 국가에 들어갔다고 그 사회가 정복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복음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세계를 지탱하고 있던 어마어마한 제반들을 무너뜨리고 건축의 기초들을 붕괴시켜버리는 위대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복음이 전해져서 자신들이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질서들이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질 때 그 질서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멀리가지 말고 우리나라 역사를 생각해봅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나쁜 풍습들이 사회전체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양반과 상민의 현격한 격차. 조선 초기에는 10% 밖에 안 되던 양반이 계속 늘어나서 마지막에는 70%가 양반인데 양반은 면세입니다. 양반과 상민 사이에는 함께 밥도 먹을 수없는 엄격한 차별이 존재하고 노예의 수준으로 내려가면 이것은 그 관계보다도 더 심한 차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사회를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격차를 허물어뜨리는 운동이 무엇과 함께 일어났습니까? 내부에서도 일어났다고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것을 붕괴시킨 것은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종과 상전이 왕족과 마부가 실제로 한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며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민주적인 사상이 개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주 일찍 시집을 보내고 장가를 보내는 조혼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아들을 가진 집에선 그렇게 빨리 며느리를 맞이하고 싶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의 노동력을 획득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살, 12살, 13살. 우리 할머니는 14살 밖에 안 된 나이에 시집을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일하고 그 집안에 일꾼처럼 살아가지요. 딸을 보내는 집안에서는 입을 하나 덜어내는 방편으로 식구를 줄이는 방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안 된다고 항거하며 조혼을 비판하는 기류들이 자생적으로 물론 반성이 있었지만 그러나 결정적으로 불을 지핀 것은 기독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첩을 여러 명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위세 있는 가문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오해와 관습을 타파하고 인격적인 사랑으로 자라가도록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랑의 정신을 불러일으킨 것이 결국은 복음이 전해지면서 일어나는 사회 반성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규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누구도 능력이 있으면 지도자가 될 수 있고 그 지도자는 민의에 의해서 선출된다고 하는 사상을 교회에서 투표하면서 사람들은 실습을 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그 세상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조선시대에 선교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중국을 통해서 성경의 사상이 들어왔습니다. 사대부속에서 철저한 비판이 이루어지는데 의견이 쫙 찢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빨리 이런 세상이 와야 된다는 사람과 한쪽에서는 절대 이것은 망국의 사상이라고 이미 핍박하려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교가 이루어졌을 때 한 쪽에서는 호응하고 안쪽에서는 피 비린내 나는 박해가 이루어졌던 것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사실이었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왜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요?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요? 자신들이 지탱하던 왕국의 질서들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그 요소를 그 파워를 각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떠날 때 신자도 교회도 타락합니다. 그런데 이걸 보면서 우린 어떤 생각을 하냐면 도대체 그 사람에 있는 복음이 무엇인가? ‘신앙이 아무것도 아니네.’ 이러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교회가 정말 순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떠나면서 예전에 충성스러웠던 일꾼이 교회를 찌르는 가시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던 교회가 주님의 명예에 먹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복음과 신앙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복음과 신앙이 사라지고 나면 무너지는 그 무서운 타락의 현실을 보면서 예전에 그것을 떠받히고 있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물러감. 신자의 타락은 신앙이 별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게 아니라 신앙이 없을 때 그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신앙과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회개하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여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잊어버리지 않게끔 비유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예화) 36년 동안 일제의 지배를 받았고 그리고 우리는 부끄러운 식민지 생활을 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통치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일본 왕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이미 길거리 곳곳에서 태극기가 나부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이제는 칼에 맞을지도 모르고 저격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이 할 수 있는 대한독립만세였습니다. 왜냐하면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관공서에 일본기는 내려지기 시작했고 도시에 있는 일본 집권자들은 투옥되거나 혹은 도망가거나 숨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 시골 사는 사람들. 아무런 통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살아가는데 거기 있는 일본 순사는 아직 자기 국왕이 항복을 선언했다는 방송도 못 들었습니다. 칼을 차고 동네에 나타납니다. 거기 있는 사람은 여전히 일본순사한테 끌려갈까봐 벌벌 떠는 상황이 그게 바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데도 여전히 죄에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처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으나 그 남아있는 죄의 요소들은 마치 패잔병들이 일본으로 도망가다가 산속에 숨어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가끔 산에 내려와서 사람들도 쏘고 그 다음에 닭도 훔쳐가듯이 그런 짓들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죄. 그리고 신자들 안에 있는 그 죄의 영향력입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자기를 사랑해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충만하게 누리고 원리적으로 그 나라를 번성하게 하는 신앙과 순종의 원리에 따라 사느냐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데 한 번도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은 것처럼 지옥처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왕국의 원리에서 볼 때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고 영원한 하나님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 안에는 거짓 신자들이 있고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 안에는 은혜에서 미끄러진 신자들이 있습니다. 왕국의 언어로 묘사하자면 한 때는 왕국의 통치를 받았으나 지금은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에 그 왕국이 쇠퇴해서 다시 패잔병 같은 죄의 졸개들이 판치고 거기에 굽실거리며 살아야하는 그런 사람들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선포되는 교회에도 어두움의 자식들이 있고 어둠속을 걷고 있지만 사실은 그 안에 한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던 빛의 자녀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적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의 불완전성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는 이 모든 악들이 제거되고 이제 어떠한 가능성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과 통치가 있는 나라가 우리 안에 그리고 모든 사회 속에 실현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미래적 측면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미 임한 그 충만한 사랑의 통치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한편으로는 완전히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깨어있어라. 그리고 우리에게 종말을 준비하라”고 가르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B. 하나님 나라를 추구함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구하라고 번역된 우리말의 그리스어 단어는 ‘제테이테’ 라는 명령어입니다. 이 단어의 동사원형은 ‘추구하다’, ‘이루고자 애쓰다’, ‘실현되기를 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생각과 행위들이 그 궁극적 목적을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바지하도록 애쓰는 것. 이게 바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어떤 생각과 행위들이 궁극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여하도록 애쓰는 것을 ‘추구한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추구점은 결국 인생의 궁극적인 하나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통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통치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이 통치는 개인의 삶과 사회 안에서 사랑과 정의로 나타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차피 육체는 지상의 물질적 자원을 가지고 살게 되어있고 영혼은 천상의 영적 자원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신자가 신앙을 이유로 육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을 결코 칭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골로새서 2장 23절에서는 이것을 무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행복은 인간의 행복입니다. 인간은 육체, 영혼 모두를 아우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 또한 만족과 기쁨. 그리고 쉼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육체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은 죄가 아니고 거기서 기쁨을 누리는 것도 하나님이 뜻하신 바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의 기쁨이 우리의 인생에 추구점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가족과 함께 목적이 있어서 부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저녁 6시까지 도착해야 합니다. 그래서 좀 일찍 가족들과 출발했습니다. 당연히 500㎞ 가까이 되는 길이니 가다가 보면 용변도 보아야할 것이고 물도 마셔야할 것이고 음식도 먹어야 될 것이고 또 차도 한잔 마시고 커피도 먹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아무데나 갈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지혜로운 인솔자라면 틀림없이 “우리 어디쯤 가서 용변을 볼까?” “세 번째 휴게소가 제일 깨끗해.” 당연히 거기로 데려가겠지요. 그리고 “점심은 어느 휴게소에서 먹을까?” 당연히 거기서 먹겠지요. 기왕이면 값이 싸면서도 맛있는 것. 혹은 비싸도 좋으니까 맛있는 것 먹겠지요. 커피는 아무 커피면 될까요? 아니죠. 기왕이면 질이 좋고 그 다음에 커피를 받아와서 길거리에서 아스팔트 위에서 먹지 않고 뒤뜰로 가서 그래도 앞에 펼쳐진 숲이라도 바라보며 먹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 휴게소를 택하겠지요. 그러나 6시까지 부산에 도착하는 건 어김이 없어야 합니다. 그 커피를 먹으면서 그날 못 들어간다든지 술을 마시면서 가기를 포기한다든지 하는 것은 제대로 정신이 있는 인솔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런 원리입니다. 먹고 싶으십니까? 능력껏 드십시오. 맛있는 것. 먹어도 죄 아닙니다. 입고 싶으십니까? 입으십시오. 예쁜 것 입고 싶으십니까? 입으십시오. 편한 것 입고 싶으십니까? 편한 것 입으십시오. 고무줄 없는 바지. 마시고 싶으십니까? 마시십시오. 좋은 음료를 마시고 싶으십니까? 마시십시오. 생수를 마시고 싶으십니까? 마시십시오.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쁨을 느끼십시오. 그런 맛을 주시고 그런 해갈함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그리고 능력이 생기면 더 좋은 것 먹고 싶으면 더 좋은 것 먹고 더 예쁜 옷 입고 싶으면 더 예쁜 옷 입고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삶을 목표지울정도의 중요성을 우리 마음 안에서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삶은 그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향락을 추구하는 것이며 인간을 창조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건 명백한 죄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 나라에 간첩으로 사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도왔던 후손들 아직도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뻔뻔하게 지금도 국가를 상대로 재산 반환 소송을 냅니다. 그런데 나는 부럽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조상에 대해 언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대한민국이 살아있는 한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후손이 짊어지고 살아가야할 불명예고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나라를 팔아넘기고 그 덕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작위를 받았던 인간들. 심정적으론 이 땅위에 살 가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일제 강점기 때 식민지배에 부역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런 분노의 마음을 품으면서 여러분은 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신에게 왜 분노하지 않습니까?
1, 2차 대전후에 espionage. 소위 간첩작전의 역사를 보면 어떤 사람은 조국 항아를 위해서 끝까지 올곧은 간첩으로 죽은 사람도 있지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중간첩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결점을 잡히고 발각이 나서 목숨을 위협하고 가족들을 위협해서 이쪽에도 간첩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중간첩 생활한 사람들이 결국은 마지막에 자기네 나라도 만족시키고 상대방 나라도 만족시켰을까요? 아닙니다. 양쪽 나라 중 어느 나라에 의해서 아주 무자비하게 제거됐습니다.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무 비극적인 것은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상처 받고 힘들고 어려운 것만 생각하지 자기가 하나님의 나라에 간첩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의 자녀인데도 세상 나라를 이롭게 하고 사단의 나라에 도움을 주는 반역적인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대가로 얻는 것은 육체를 위한 만족일 뿐입니다. 이런 삶은 선택할 수 없는 삶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런 삶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행복하기 위해 선택하지만 그것은 결코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살아있어야 할 자기의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경험하는 비참 중 죄 때문이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 자신의 죄 때문이거나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비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인간의 위대함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드넓은 제국을 지휘하도록 만들어진 황제의 금빛 지휘봉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수구에 쓰레기를 건져냅니다. 드높은 위엄을 드러낼 황금 면류관을 돼지우리로 가서 무릎을 꿇고 돼지새끼 머리위에 봉헌을 합니다. 이런 행동을 생각해보십시오. 상상만 하는 것으로도 역겹지 않습니까? 그 훌륭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의미와 그것들을 어디에 쓰는지 용도를 모르는 그 사람의 무지가 비참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설교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긴급동의와 같은 것입니다. 긴급동의가 이루어지게 되면 모든 토론은 중단됩니다. 그리고 모든 회원들이 그 안건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계속 자기 인생 힘들다고 어렵다고 그렇게 말해도 여러분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관심 없습니다. 여러분들 싫어하는 사람은 고소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런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있는 사람도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물론 여러분들 힘들게 하는 것들이 있으면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마십시오. 애를 쓰십시오. 건강을 잃었으면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 도움도 구해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모두 해결책의 전부일수는 없겠지요.
보십시오. 재벌의 계승자면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상속받은 재산만으로도 계산해보니 하루에 10억씩 써도 다 쓸 수 없는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든 걸 다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최고의 음식, 최고의 의복, 가고 싶은 곳까지의 화려한 여행과 모든 휴식이 보장되어있는데 굳이 마약에 손을 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LSD는 코카인의 백배의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코카인이 졸립게 하는 감기약이라면 LSD는 영원히 죽음으로 데려갈지도 모를 정도의 잠을 가져오는 약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결국은 수많은 재벌 후계자들이 손을 댑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왜 그럴까요? 돈이 많아서 그 비싼 LSD나 코카인을 샀다고요? 아닙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은 왜 거기다 손을 댈까요? 그건 답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일까요?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행복하지 않은 현실을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기는 싫습니다. 그럴 용기는 없고 가장 좋은 비결은 현실을 탈피하는 것입니다. 마약은 거기로 이끄는 훌륭한 비상구입니다. 이런 심리를 생각하고 보면 우리는 쾌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는 이 세상을 비난할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병에 들린 환자들의 광기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정상적인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질병에 걸려서 온 몸을 비틀고 입에 거품을 물고 데굴데굴 구른다면 ‘아, 역겹다.’ 그러시겠습니까? ‘너무 가엾다.’ 눈물을 흘리고 무엇인가 그들의 통증을 덜어주는 데라도 도움을 주겠습니까? 후자 아닙니까? 그런 증상입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해야지 이 모든 고통스러운 현실과 내가 마주할 수 없는 이 모든 힘겨운 현실과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돈 버는 법을 가르쳐주고 젊어지는 법을 가르쳐주고 주식으로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장소가 아닙니다. 세상이 전혀 줄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에게 임하게 하고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 안에서 충만히 누리며 삶으로써 이것들을 모두 극복하며 살 수 있도록 인간의 근원적인 힘을 주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복음이외에 아무데도 없습니다. 단연코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외에는 이것을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나라를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를 충분히 누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 안에서 살고 그 사랑을 자신 안에서 이룬 것처럼 다른 사람들 속에 이루어지도록 도우면서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두움이 너무 짙기 때문에 한 신자가 복음을 따라서 신앙으로 사는 것이 때로는 실낱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두운 세상에 그 실낱같은 한줄기 빛은 장렬 하는 불꽃입니다. 밤하늘에 도시를 벗어나서 불꽃놀이를 즐겨보십시오. 희미하게 하늘로 올라간 불빛은 장렬하며 폭죽이 됩니다. 이런 인공적인 것을 모두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밤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어두운 밤하늘을 수없이 밝은 빛으로 사선을 그리며 달리는 벌똥 별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의 크기가 모두 수십 킬로그램 되는 어마어마한 덩어리가 아닙니다. 때로는 정말 작은 덩어리 지구에 떨어지면 주먹하나밖에 안 되는 것들도 어마어마한 빛을 내면서 우주 공간을 가릅니다. 우리의 삶은 그 불꽃놀이를 기뻐하기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내가 그렇게 한줄기 빛이 되고 다른 사람의 의해 어두움을 가르고 떨어지는 그 빛의 불꽃놀이를 즐기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의미인 것입니다. 슬픔도 만나겠지요. 고난도 겪겠지요. 기쁜 날도 있겠지요. 힘든 순간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헤쳐가야 할 현실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을 모두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살지만 단지 그것의 만족을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꿈이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과 그리고 이웃의 마음 안에서 이 사회 안에서 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통치를 한 뼘이라도 확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염려에 관하여 (2019.10.13._주일오전 5_ 4부 예배)
5.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 : 3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주님께서는 앞에서 행하신 모든 가르침을 종합하시며 오늘 본문과 같이 결론을 제시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즉’이라는 말씀은 이 모든 논리로 미루어볼 때 피할 수 없이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라고 번역된 단어의 그리스어는 ‘프로톤’(proton)이라는 말인데 시간적으로 질적으로 다른 것들보다 앞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 “그의 나라”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의 나라”는 누구의 나라일까요? 26절에는 하늘 아버지로, 30절에서는 하나님으로, 그리고 32절에서는 다시 하늘 아버지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나라”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붙은 ‘하늘’은 유대식 표현 방법인데 ‘초월, 영광, 무한, 능력’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나라’ 사이에 소유격 ‘의’가 붙어서 결국 “그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로서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의도대로 존재하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시는 바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며 살지만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II.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에 담겨진 메시지를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A. 하나님 나라의 두 차원
하나님 나라는 두 차원에서 생각해야만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즉, 이미(already)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은(not yet)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이 두 측면을 함께 생각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1. 현재적(現在的) 차원
그러면 먼저 현재적 차원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임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그 통치가 이미 세상에 왔고, 믿는 사람들이 지금 그것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적 차원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오심은 기적으로 시작되어서 마지막에 죽으시고 그 이후에 부활하신 일도 기적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무엇일까요? 우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예언부터가 기적입니다. 실제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어 사람으로 태어나십니다. 기적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의 삶은 두 가닥의 밧줄이 함께 엮어져 하나의 큰 밧줄이 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냥 평범한 사람들의 사건의 연속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태어나고 죽고, 배고프시고, 목마르시고, 슬퍼하시고, 진노하시고 하는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겪으시며 사신 생애가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기적이 없이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시작해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일들에까지) 연속적인 기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는 전개가 됩니다. 귀신들린 자를 말씀으로 내어 쫓아 온전케 하셨는데 당시의 문맥에서 귀신들림은 거의 운명이었습니다. 더욱이 문둥병은 하늘의 저주를 받은 병이라고 사람들은 믿었고, 그것은 신이 부여한 운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하십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려내십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물이 포도주가 되어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기적들의 연속들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밧줄처럼 꼬이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찬란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두 가지 측면을 함께 보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추적해 갈 때에 거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계시해 주시는 눈부신 빛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20절에서 예수님은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더 쉽게 설명하면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지금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 이것은 바로 너희에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훌륭한 증거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통치이고, 그 통치는 사랑의 통치입니다. 신자는 복음을 믿음으로써 죽음의 위협도 이기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 받음으로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성령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실 때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듣는 사람만 믿을 수 있었는데 이제 성령이 오심으로 누구에 의해서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것입니다. 믿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람의 심령 속에 임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 통치는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우리를 기쁘게 하고, 만족스럽게 하고 놀라운 쉼을 줍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이 신자 안에 오셔서 결코 떠나가시지 않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나라는 한번 온 신자의 마음속에 계속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불변하십니다. 따라서 그분으로 하여금 사랑을 그만두게 할 상위의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고, 사랑하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누가 그 사랑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더 높은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사람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확신 때문에, 그 나라 안에 있다는 신념 때문에 놀라운 비전을 가집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 3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사단이 이제껏 인간을 죄에 굴복하게 만드는 최고의 무기였습니다. 전가보도(傳家寶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사람들은 죄에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죽음은 육체를 끝내는 것입니다. 육체에 달려 있는 욕망과 기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두려움은 증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괴로운 사람이거나 아니면 죽음 이후에 있을 보다 더 완전한 행복을 현실적으로 맛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인간이 끊임없이 죄에 종노릇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점점 더 죄의 지배를 받고 사단의 통치를 받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통치합니다. 그때 죽음은 기껏해야 육체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나고 나면 보다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 속으로 들어간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이유입니다. 그래서 요한 1서 4장 18절에서는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말합니다. 톨스토이가 말한 것처럼 사랑의 감정은 죽음의 공포를 이깁니다. 헤엄 못 치는 아버지가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 뛰어든 것은 사랑의 감정이 시킨 것입니다. 하물며 그 사랑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일 경우에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사단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온 인류를 이제껏 지배해 오던 가장 확실한 효과가 있는 최종 병기가 쓸모없게 된 것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세상보다 더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가 주는 그 기쁨과 행복이 세상이 주는 그것들을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 안에서 넘쳐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신앙은 왜 이렇게 힘이 없을까?” 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정말 세상이 힘들기 때문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힘이 없기 때문에 힘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다섯 살 먹은 아이에게 1kg 짜리 물건을 들라고 하는 것은 온 힘을 기울여야 할 수 있는 일이지만 100kg 짜리 근육의 몸을 가진 사람에게 1kg쯤은 껌 하나를 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문제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다는 명제와 지금 내가 힘들다는 것,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나라의 사랑의 통치를 받는 기쁨이 없다는 현실은 어떤 식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명백한 설명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을 방해할 추호의 가능성도 없는 확정된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이미 왔으나 우리가 일정한 원리를 따라서 그 나라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갈 때 그 나라는 견고하게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열렬한 기도로 회개하여 새 힘을 얻고,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서 모든 삶에 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 사랑을 자신의 사랑의 초점으로 두고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해 지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자의 순종하는 원리를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으로 아주 강하고 왕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힘이 얼마나 놀라우냐 하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아주 하찮게 보이리만치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인생을 살면서 “힘들다. 너무 힘들다”라고 말하는데 인생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남들도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힘들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요?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워낙 확고하고 하나님 사랑의 통치에 그 속에 있으니까 이것들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비교적 평안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삶의 질서들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경제적인 고통이 오고,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바라지 않는 상황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전개됩니다. 건강도 심각하게 손상 되어서 이제는 회복하기가 힘겨울 정도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런 상황이 극도에 달하면 누가 내 위에 올라타서 내 목을 양손으로 누르는 것 같은 질식을 경험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죽을 수 없어서 그냥 하나님 불러봤습니다. ‘주여’하고 기도가 나왔습니다.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처지가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기도하다 보니 그냥 자신은 이 세상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외롭게 떨어져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면을 돌아보아도 하나님 이외에는 붙들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막 살았던 수많은 일들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 때문에 예수가 죽으셨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가슴 저미는 회개를 하게 됩니다. 얼마를 기도하다 끝났는지, 모두 기도를 끝내고 돌아보니 예배당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밤에 걸어서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자신을 눈물 흘리게 만들었던 상황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이 한두 시간 사이에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평화가 어디에선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흙탕물로 가득 찬 샘에서 퐁퐁퐁 솟아나는 샘물처럼, 단 몇 분 만에 (옹달샘의) 물을 맑게 하면서 가득 채우듯이 마음 속에 평화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근원을 찾아가 보려고 해도 그 근원은 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날 와보니 나 개인을 위한 맞춤 설교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깨달음을 얻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역시 며칠이 지났지만 상황은 바뀐 게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고통스러운 현실의 무게가 능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깃털 같은 무게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이 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힘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사랑의 그 능력이 그 현실을 이기게 만들어 줍니다. 그게 여러분 속에 이미 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주 단순하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돌아가고,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고치면 하나님이 이런 근원을 알 수 없는 놀라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선택하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살 수 있는 최종적이고, 마지막 선택입니다. 만약에 이 선택을 안 하면 이방인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희로애락을 느끼며 그것 하나가 내 인생 전체에 방향을 결정짓는 것처럼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럴 정도의 능력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혹시 능력 있어서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얻기 전에 여러분들의 마음은 또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현재적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에 임한 나라는 나의 삶과 분리되지 않고, 삶으로 그대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숨길 수 없는 내면의 감정 두 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 따로 행위 따로일 수가 없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두 개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그 분리를 경험하며 살지 않습니다. 신앙도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행하는 것과 그의 사랑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하나입니다. 행위의 근원은 추적해도 알 수가 없고, 사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적해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 의해 만져질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도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는 각자의 마음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 분량만큼의 아름다운 삶이 펼쳐집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차원입니다.
2. 미래적(未來的) 차원
두 번째는 미래적 차원입니다. 이것은 이미 임한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성취된 상태입니다. 더 이상 방해하는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 실질적으로 그 통치가 완전히 이룩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차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과 만족과 쉼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나 그것이 아직 방해 요소가 없도록 완전히 완성된 나라는 아닙니다. 그래서 이 안에서 내적인 갈등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갈등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알고 보면 아주 극복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우리는 부끄럽게도 일본 제국주의 36년 동안 식민시대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과 함께 쉽게 잊히지 않는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시대에 비유하여 설명해 봅시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두 도시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이 잔인하던 일제 제국주의의 지배를 종식시켰습니다. 조선은 해방이 된 것입니다. 일본 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발표했고, 이제는 끌려가거나 총 맞을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인파의 물결이 온 도시를 뒤덮었습니다. 진짜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 대해 시골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옮겨볼까요?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해방을 전하는 방송도 들은 적이 없고, 신문도 본 적이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곳에 있는 순사는 지금 막 일본 제국이 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황급하게 도망을 가는 중이었습니다. 동네 사람은 도망가는 칼 찬 순사를 보고 온몸이 얼어붙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들을 잡아가곤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사람에게 죄는,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에 방해하는 이 내적인 마귀적인 요소들은 마치 항복하고 패망한 나라에 아직 남아있는 패잔병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패잔병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토벌로 말미암아 다 이긴 전쟁에서 남겨진 잔재들입니다. 그것들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절대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적하고 이길 수가 없습니다.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만 그렇게 이길 수 있습니다. 패잔병들은 산속에 숨었다가 배가 고프니까 떼를 지어서 총칼을 들고 마을로 내려와서 약탈하고, 불 지르고, 그리고 닭들을 훔쳐갑니다. 그리고는 산속에 숨었다가 또다시 배고프면 마을로 내려와 약탈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모르고 있는 주민들은 그들을 겁내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는데도 여전히 죄의 공격을 당하여 무기력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와 같은 처지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패한 마귀의 통치, 죄의 지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신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마귀의 통치를 부숴버렸습니다. 사단의 나라를 거대한 공룡에 비유해 봅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지금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공룡이 머리가 박살나서 흰 골이 흘러내리고, 등뼈가 산산이 부서져서 뼈 위에 뼈가 얹히지 못할 정도며, 길거리에 완전히 드러누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위협하던 두 팔과 다리는 이미 으스러져서 마치 닭 모가지를 해머로 으깬 것처럼 부서져 버렸습니다. 그런 상태로 길거리에 드러누웠습니다. 그런데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온몸으로 힘을 다해 조금씩, 조금씩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마귀에게는 이런 우주적인 승패를 번복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고 하나님의 통치를 떠난 무지한 인간은 여전히 미혹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이렇게 으스러진 마귀라 할지라도) 만약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이런 경고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미 유효하지도 않은 무기로 신자들을 겁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유혹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은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 안에 살아가도록 주어진 원리를 따라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powerful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베드로전서 5장 8절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공룡의 비유를 들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이 거대한 악의 힘을 생각한다면 그 논리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현재 건재하고 있는 세상의 외관을 보지 말고 복음 안에 무너지는 인간의 내면을 보십시오. 세상을 바꾸는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의 모든 선교사들은 권총이나 수류탄을 착용하고 선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그 나라에 가서 착한 일을 합니다. 병든 사람들을 돌봐 주고, 가난한 자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그리고 비위생적인 사람들을 위생적으로 살도록 가르쳐 주고, 예의범절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도덕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왜 이슬람 사회와 사회주의 국가,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그들을 그렇게 미워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섬기는 것이 뭐가 그리 큰 문제가 되길래 혈안이 돼서 색출하고, 색출하면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살해하고,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불태워죽이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합법적으로 입국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색출해서 집단으로 국외로 출국시키는 그러한 일들은 왜 하는 것일까요?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요? 어떤 일단의 사람들이 총이나 칼을 몇 자루 숨겨가지고 수십 명이 들어왔다고 해도 아마 그 나라에서 그렇게 집요하게 추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실상 그들은 복음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감이 안 나시나요? 멀리가지 말고 한국 사회만을 봅시다. 세계 선교사에서 한국은 아주 독특한 나라입니다. 선교사가 오기 전에 이미 기독교의 진리가 전파되어서 흘러 들어와 사대부의 엄밀한 사상 검증을 받았습니다. 이를 두고 그들 사이에 어마어마한 토론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것은 이 성경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그룹과 절대 받아들이면 큰일 난다는 그룹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이 어마어마한 사화 –소위 순교 사화로 일컫는-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제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조선의 고매한 선비들이 치를 떨면서 전파 되지도 않은 복음을 그렇게 경고하고, 이런 서양 사상은 망국의 사상이라고 판단을 내리며 만반의 대비를 하고 사활을 준비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이 사상이 몰고 올 어마어마한 사회적인 파장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회 자체를 뒤집어 엎어버릴 무서운 사상의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찍이 조선 시대를 유지시켜 온 것과는 공존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세계관의 변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냥 간단하게 몇 가지 예를 듦으로써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양반이 10% 정도밖에 안됐습니다. 말기에는 70%가 양반이었습니다. 양반은 면세의 특권을 누렸으니 이게 나라가 망하기로 작정한 것 아닙니까? 양반과 상민은 절대적인 차별이 있었고, 그것이 종의 계급으로 내려가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깊은 신분의 격차가 있었습니다. 그 신분의 격차를 인정하고, 자기 처지에서 만족하며 살도록 사회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미덕으로 가르쳤습니다. 관은 존귀하고,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윤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한 비인간적인 원리가 나라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왕적이었던 사람과 그의 마부였던 종이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실화입니다. 우리 모도가 하나님 앞에 사람인 것이 우리의 신분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배우지 않았을까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이 창조된 동일한 존귀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요? 물론 그 사회 안에서도 반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것을 뒤집어 버린 것은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힘이었습니다. 당시 양반의 지체 높음은 세속적인 사람들 속에 첩의 숫자로 가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축첩을 타파하게 된 것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물론 자체의 반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회가 축첩한 자들을 언제부터인가 징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역사를 아세요? 복음 때문에 일부일처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조혼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빠르면 11살, 10살에 딸을 시집을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는 16살에 시집을 오셨습니다. 왜 그렇게 빨리 며느리를 받으려고 했을까요? 그 며느리는 언제나 신랑보다 연상이어야 했습니다. 할아버지 14살에, 16살 먹은 할머니를 색시로 맞았습니다. 더 어린 나이에 며느리를 받아들이는 예도 있었으니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일찍 며느리를 받고 싶었을까요? 노동력을 얻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친정 쪽 입장에서 보면 한 식구의 식량을 세이브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조혼의 풍습을 타파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습니까? 물론 자체 안에서의 반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인 운동으로 번지면서 조혼의 풍습을 타파한 것은 기독교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고위 관료를 지내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그의 마음속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직의 부정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언론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습니다. 침묵했던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사회의 부정과 비리, 그리고 인간의 불평등을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정부는) 이것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적대 국가에 첨단 무기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이 이 사상의 폭풍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나 이슬람, 공산주의자만큼 복음의 능력을 확실하게 예측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보다 그것이 몰고 올 궁극적인 파장의 위력을 놀랍게 실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무자비할 정도의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미끄러지고 나면 내 신앙이 도대체 무언가, 복음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더욱이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떠날 때 타락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타락한 교회를 보면서 정말 신앙은 별거 아니구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입니다. 복음을 떠났을 때 어떤 사람이 그렇게 무참하게 무너질 수 있다면 이전에 그를 떠받치고 있었던 신앙의 힘이, 그 능력이 얼마나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건물이 이렇게 서있을 때에는 기둥이 엄청난 힘으로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부실 공사로 인해서 그 기둥 하나가 무너집니다. 건축학적으로 기둥으로 세운 건물의 약점은 두 개 정도만 부러지면 시간의 문제이지 결국은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모든 기둥이 다 부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그때 비로소 기둥이 떠받치고 있던 힘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마찬가지 논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는데 여러분들이 그 나라의 통치 안에서 실질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은혜 생활 안하고, 말씀 공부 안하고, 그리고 기도 생활 안하고, 여러분 마음대로 그저 육체에 좋은 것이나 하면서 세속적으로 삽니다. 그러면 은혜에서 미끄러지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불신자와 비슷하게 되고, 예수 믿는 것이 인생의 갈등을 해결하는데 티끌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아, 신앙이 별거 아니구나.’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예전에 나를 떠받치고 있었던 이 말씀의 능력이 굉장한 것이었구나. 이것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내가 이렇게 되는구나.’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제가 전하는 설교는 긴급동의를 요합니다. 긴급동의가 이루어지면 안건 토의는 중단됩니다. 그리고 그 안건에 집중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는 긴급동의를 요합니다.
여러분, 인생이 힘들다고 말하지요? (그 힘든 부분을) 고치려고 노력을 하세요. 건강을 잃었으면, 그래서 너무 힘들면 다시 건강을 되찾는 연습을 하십시오. 운동을 하고, 조금 더 좋은 음식을 섭취하고 다시 회복을 할 길을 찾으십시오. 계속해서 불평만 하지 마십시오. 경제적으로 어려우세요? 일을 하세요. 그리고 합법적으로 돈을 벌 방법들을 찾아보세요. 정 안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라도 청해보세요. 유산을 미리 받든지 뭐라도 해보세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너무 염려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 드리고 싶은 바는 뭐냐 하면 그 노력 하나로 모든 염려가 종식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LSD는 코카인의 100배의 중독성을 가진 환각제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세요? 코카인을 수면유도제인 멜라토닌에 비유한다면 LSD는 잠이 너무 와서 죽을지도 모르는 맹독성 수면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재벌의 후계자는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계산을 해보니까 매일 10억씩 써도 죽을 때까지 다 못 쓰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화려한 여행, 맛있는 음식, 럭셔리한 호텔, 값비싼 옷, 상상할 수 없이 비싼 외제차까지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최근에 소개된 어떤 차는 한 대 값이 300억입니다. 그런 차도 살 수 있습니다. 껌 값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LSD에 손을 댑니까? 코카인도 아니고, 대마도 아닌 LSD에 손을 댑니까? 이렇게 대답하면 안 됩니다. “돈이 많으니까요.” 아닙니다. 돈이 별로 없는 사람도 거기에 손을 댑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요? 그렇게 어마어마한 강도의 쾌락이 아니면 현실을 직면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을 직면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무시무시한 쾌락의 힘을 빌어서 현실을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염려가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그것도 보통 염려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밑 둥을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염려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단순히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염려는 인간 존재가 삶의 기저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그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회개하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의 육체를 사랑해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참된 통치의 원리로 돌아가지를 않으면 인간 자체를 힘들게 하는 엄청난 중압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재벌 후계자들은 LSD로 잠시 잊었지만 여러분들은 그렇게까지 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그마한 장신구, 친구와의 해외여행,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친구와의 달콤한 데이트를 통해서라도 잠시 행복해 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취의 특성은 깨고 나면 마취되기 전의 현실이 그대로 다시 재연되면서 이어져 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풀지 않은 수학문제를 덮어두고 놀다오면 그 페이지가 그대로 백지로 되어 있는 것처럼 다시 나오는 것입니다. 저절로 되는 경우, 요행수 없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삶의 현실입니다.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 안에는 거짓 신자들이 있고, 보이지 않는 교회 안에도 은혜에서 미끄러진 자들이 있습니다. 진리의 빛이 쏟아지는 교회 안에도 그 빛과 상관이 없는 어두움의 자식들이 있고, 윤리적으로 어둠 속을 걷고 있지만 이미 마음에 빛을 받은 자녀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 모두 불완전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 차원에서만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습니다. 내가 그것을 누리고 삽니다. 이것은 앞으로 3개월 이후에 있을 콘서트에 너를 초청한다는, 실행이 유보된 예매티켓이 아닙니다. 정말 좋은 비유네요. 예매티켓이 아닙니다. 그냥 이 티켓을 받는 순간 내 앞에서 공연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내게 이미 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나라는 아직 완전히 방해받을 가능성이 제거된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삽니다. 그래서 좀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온갖 상황을 만나도 그 안에서 우리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쁨을 발견합니다. 만족을 누립니다. 쉼을 누립니다. 그렇게 돈 많은 부자도 아니고 빼어난 남친이나 여친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고,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런 것이 하나도 부럽지 않은 그런 만족감이 내 앞에 밀려오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운명적 포기에서 오는 만족감이 아닙니다. 그것들로는 채워질 수 없는, 전혀 알 수 없는 새로운 것들로 내 마음과 영혼이 채워진 데서 오는 만족감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너무 사랑하는 사람에게 프로포즈를 했는데, yes라는 답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습니까? 돌아오는 골목길이 어땠습니까? 모든 것은 그대로 있으나 아무것도 예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의 세계도 아직 못 들어간 것입니다. 여러분들한테 설교할 때에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이렇게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과 나 사이가 멀기 때문입니까? 그렇게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앞서 가는 차가 막 새치기를 합니다. 그것도 문제가 안 됩니다. 심지어 옆 사람이 자기한테 무례하게 행했는데도 ‘아니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라고 지나칩니다. 왜 그래요? 그 사람 속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뭔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물론 이유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여자가 yes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솟아오르는 실체가 아니잖습니까? 조금 이해가 되세요?
이유는 명백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기쁨의 실체는 아니잖아요? 실체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가 이미 내안에 있으니까 앞에 닥친 현실이 조금도 무겁게 생각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바라기는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지 않습니까? 이렇게 더 기도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짓고 싶은 죄인데 안 지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눈물로 하는 회개도 필요 없고, 열심히 말씀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음이 메말라지는 상태도 없는 나라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나라가 옵니다. 그것이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상의 종말과 함께 완성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그러나 아직은 이라는) 현실 속에서 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끊임없이 저 세상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현재 나와의 접촉점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느끼는 경험이고 여러분들이 하는 불평입니다. 그런데 염려하지 마세요. (성경이 말하는 것과 내가 현재 당하는 세상의 많은 일들 사이에는) 접촉점이 안 생깁니다. 어떤 진리를 이야기해도 진리를 이야기하는 접촉점은 안 생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프로포즈한 여자 친구한테 ‘yes’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 그래, 맞아.’ 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만 그 경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지금 구원 받음으로 그것을 경험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어느 한 순간에 라디오가 주파수가 딱 맞아서 잡음이 없는 명료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조건이 그렇게 딱 맞춰준 때가 있었습니까? 저는 없었습니다. 아주 단연코 없었습니다. 그리고 눈감는 순간까지 그런 순간 기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런 날이 온다면 그 순간이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순간이 되지 않을까요? 결코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기대를 접으시라니까요.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으로 누리면서 사는 이 기쁨은 인생의 모든 시련과 괴로움, 그리고 비관적인 미래를 이기게 하는 힘입니다.
발달된 놀이기구가 없었던 시대에 아이들에게는 골목길이 사교의 장이었고, 교육의 장이었고, 놀이의 장이었고 서로 편 갈라서 싸우는 싸움터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모여서 오후에 놀이를 시작합니다. 한 아이가 석필로 바닥에 줄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거기를 뛰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점수를 계산합니다. 한 아이가 금을 밟았습니다. 상대편 아이들이 박수를 치면서 ‘너 죽었다, 죽었다’ 합니다. 그 애는 시무룩한 얼굴로 게임의 현장에서 잠시 물러납니다. 그런 놀이가 계속 됩니다. 드디어 저녁이 되었습니다. 골목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행주치마를 앞에 두른 엄마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각각 자기 집안의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애들아, 이제 들어오너라. 밥 먹자, 저녁 차려놨다.’ 아이는 모두 놀이하던 놀이터를 버려두고 엄마를 향해 달려갑니다. 아까는 금 하나 밟아서 죽었다, 살았다 하며 좋아하고 시무룩하기도 했던 아이들이 왜 그렇게 단숨에 모든 것을 접어버리고 엄마에게 달려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게임(it’s the game)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한창 배고픈 아이에게 그 게임보다는 엄마의 정성으로 차려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맛있는 식탁이 실제입니다. 게임이 아니라 리얼리티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이 염려하지 않으며 사는 비결입니다.
거기에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염려하고, 불평하고, 때로는 그것이 사람을 향한 원망이 되고, 한이 되고, 상처가 되고, 심지어는 마음의 병이 될 정도로 자기를 손상시킨 다음에 마지막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리 염려한들 그 키를 한 자라도 자라게 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외통수입니다. 장기에서 외통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장기에서 외통수가 무엇인지 아세요? 피할 수 없는 자리, 다른 대안이 없는 그 자리에 말이 있는 것이 외통수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거기서 어떻게 합니까? 항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그것이 선택지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내 안에서 누리고, 그 사랑의 통치를 받으면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쉽고 행복하고 안락한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really? 정말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온몸으로 시험 중입니다. 티끌만한 양심과 이성의 논리가 있다면 어떻게 거기에 대해서 yes라고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온몸이 그게 답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돈 버는 것도 배우고, 화장하는 법도 배우고, 사교술도 배우고, 사람과 거래하는 기술도 익히고, 심지어 기분 나쁘지 않게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방법도 다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그런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닙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것보다는 근원적인 것을 가르쳐 주고, 주는 곳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나라, 그게 내 안에 임하고,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 안에서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 그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것을 이미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며 사는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B. 하나님 나라를 추구함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말 성경에 ‘구하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제테이테’(zeteite)라는 명령입니다. 이 동사의 원형의 뜻은 ‘추구하다, 이루고자 애쓰다, 실현되기를 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생각과 행위들이 그 궁극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여하도록 애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추구점은 인생의 목표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되어 있는데, ‘구하라’는 번역은 좋지 않습니다. ‘추구하라’는 번역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빈 방을 구하는 것도 구하는 것이고, 오늘 하루 아궁이를 소재해 줄 사람을 구하는 것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하라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아주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구조자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이 동사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사랑의 통치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써 이루어지는 통치입니다. 이 통치는 개인의 삶과 사회의 현실 속에서 사랑과 정의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행복할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육체는 지상의 물질적 자원을 필요로 하고, 영혼은 천상의 영적 자원으로 필요로 합니다. 이 두 개가 결핍될 때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더욱이 성경은 신앙을 이유로 경건을 빙자하여 육체의 고통을 가하며 사는 것을 결코 칭찬하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2장 23절에서는 이런 것들이 무익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그렇게 육체를 아주 비참하리만치 학대를 해야지만 영혼이 겨우 사는 줄 알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은 가학적인 견해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행복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도 기쁨과 만족, 그리고 쉼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더욱이 거기서 기쁨을 누리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일정한 금액이 넘어가는 음식을 먹을 때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 대신 그것 때문에 신용 불량자가 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죠. 상관없습니다. 먹고 싶은 것 먹으세요. 능력이 있으면 좀 더 좋은 음식을 드시구요, 예쁜 옷이 있으면 예쁜 옷 입으시구요, 편한 옷을 입고 싶으시면 고무줄 바지를 사세요. 그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질 좋은 음료를 마시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너무 마시고 싶은데 능력이 없으면 될 때까지 기다리세요. 그리고 노력하세요. 문제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렇게 먹고 입고 마시는 데서 오는 기쁨을 우리의 추구점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은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삶과 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은 그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향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 승용차로 부산에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6시까지 도착해야 합니다. 일찌감치 오전에 출발했습니다. 내려가면서 용변도 보아야 할 것이고, 물도 먹어야 할 것이고, 음식도 먹어야 될 것이고, 잠시 쉬기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인솔자라면 아무데나 가겠습니까? 고속도로 가다가 풀숲에 차를 세우고 ‘자, 숲에 들어가서 볼일 보고 5분 후에 집합!’이라고 하겠습니까? 저 같으면 휴게소 가겠습니다. 그리고 휴게소도 잘 알아봐서 깨끗한 곳으로 선택하겠습니다. 물론 대부분 깨끗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어도 값이 싸면서도 맛있는 휴게소를 찾겠습니다. 커피도 그냥 자판기에서 먹는 커피를 먹을 사람은 먹더라도 원두를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원두커피를 내려주는 곳에서 먹을 것입니다. 1000원이나 2000원을 더 주고도 더 좋은 것을 먹고 싶은 사람은 먹을 것입니다. 어디 거기서 그치겠어요? 그냥 콘크리트 바닥위에서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뒤뜰에 가서 그 아래 숲들이라도 보면서 마실 수 있는 공간 있는 휴게소가 있는 곳이라면 전 거기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주저앉아서 노닥거리고, 커피를 마시고, 밥을 맛있게 먹다가 꼭 가야할 목적지에 시간 안에 못 가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 동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매일 먹고, 마시고, 입고, 어딘가를 지나면서 우리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 하나하나를 매순간 소중하게 생각하며, 또 만남을 즐거워하고 감사해 하고,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만족을 줄 때에 그런 맛을 주신 하나님께 찬송하고, 또 좋은 곳을 가서 발견한 내가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노래하고 살면 됩니다. 그러나 가야 할 목적지가 그 여행의 즐거움 때문에 망각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점적인 행복과 선적인 행복, 이 두 개를 같이 간직하면서 하나님 앞에 아주 긍정적이고, 감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승리하는 삶입니다. 무엇인가 고통을 견디는 일에 오늘 하루를 허비해 버리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늘 희생시키며 산다면 항상 우울할 것입니다. 그러한 행복이 언제나 미래에 연기되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젊은 시절 저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또 육체의 향락을 추구하는 삶 또한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것이며, 그것은 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 나라의 간첩으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찌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사탄의 반란에 동조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차 대전 이후 ‘에스피오나지’(espionage), 소위 간첩작전의 역사를 보면 조국 하나를 사랑해서 올곧은 간첩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중간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조국에만 헌신하지 못하고 약점이 잡힌 상대 국가를 위해서 정보를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온한 삶을 살다가 죽지 못하고 조국이나 적국 중 누군가에 의해서 무자비한 방식으로 제거 되었습니다. 일제시대 때에 일본을 위해 부역하고 그들의 식민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 했던 일제시대의 부역자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후손들이 아직도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 반환 청구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값비싼 변호사를 사서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당당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로부터 20대가 지난 후손들도 똑같이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것이 살만한 삶일까요?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사람들이 세상 나라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자기도 행복하지 않고, 하나님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는데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결코 그럴 수 없는데 신자임에도 사람들은 그런 삶을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렇게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살아있어야 할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비참들 중 죄 때문이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죄이거나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일어나는 비참입니다. 하나님은 지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창조된 위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들으면 너무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저는 며칠에 한 번씩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가슴이 벅찹니다. 그 얘기는 이 세상에 누구보다 내가 행복하다는 뜻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위대함 때문입니다. ‘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위대함 때문에, 그렇게 선택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드넓은 제국을 지휘하도록 만들어진 황제의 금빛 지휘봉으로 하수구의 쓰레기를 치우고, 드높은 위엄을 드러낼 황금 면류관을 더러운 돼지의 머리에 씌워주는 행동을 떠올려 보십시오. 상상만으로도 역겹지 않습니까? 그 훌륭한 것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용도를 모르는 그 사람의 무지가 비참하도록 가엾지 않습니까?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앞에 놓인 현실, 어마어마한 염려, 근심, 걱정, 심지어 죽음의 위협 등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사랑의 통치가 그것들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들은 부분적으로 경험했습니다. 그 길은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 첫 걸음은 하나님 앞에 침묵하는 것입니다. 조용히 침묵하고 주님을 생각하며 내가 누구인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마음으로 내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내가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하고, 광란의 밤을 보낼지라도 깨고 나면 한순간에 어지러운 꿈입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인생을 태워버리기에는 너무 고귀한 인간으로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혀를 깨물고 죽어도 그런 식으로 구차하게 우리의 인생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가 자신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나라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이 끝나면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걱정 마세요. 헤어질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이 모든 사람들과의 헤어진 슬픔을 능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고, 무한한 우주 공간에 홀로 남겨진 존재 같으며,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 중 내 손으로 마음대로 움직여 지배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은 갈대와 같이 연약한 존재이지만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외롭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거스르며 나를 파괴하기 위해 무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기껏해야 나를 이 세상에서 못살게 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추호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오는 힘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나라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미 내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온갖 그 행복을 누리면서 이 나라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온 세계 안에 우주적으로 완성될 날을 확신하면서 이미 얻은 승리 때문에 확실히 믿으면서 담대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빛줄기처럼 내리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소설가의 글에 비유하자면 순간순간 우리 온몸에 비늘이 돋는 것 같은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젊고, 나이 들고, 결혼하고, 미혼이고, 늙고, 병들고, 건강하고, 쇠퇴하는 모든 것들은 삶의 양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그 일을 겪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래서 아주 연약한 티끌에 지나지 않은 존재이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 그분의 사랑의 통치 아래서 살아갈 수 있는 존엄성을 가지고 누구에 의해서도 침범 받을 수 없는 담대한 인생의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책임질 수 있는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통치 아래 거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단순합니다. ‘설명은 들었는데 뭔지 모르겠나이다. 실제를 주소서.’라는 기도면 충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어둡고 우리의 삶이 암담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오늘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슨 영향을 미칠까, 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우리의 삶이 실낱같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두운 세상에는 그것이 한 줄기 빛입니다. 도심을 떠나 야외에 나가서 깊은 밤에 밤하늘을 바라보세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별똥들이 떨어집니다. 그 중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별똥도 있겠지만 대기권을 통과하고 지구에 떨어진 것들은 대부분 주먹만한 것들입니다. 그 작은 것들이 예외 없이 한줄기 빛을 그리며 우주 공간을 마치 불꽃처럼 수놓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 불꽃놀이를 즐기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꽃놀이는 밤이 제격입니다. 모든 조명을 오히려 꺼야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어두운 것은 우리에게 기회입니다. 실낱같은 나의 삶이 어두움을 가르는 한줄기의 빛이 되도록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이 살아갑니다. 추구하는 것은 있으나 육체에 집착하는 것이 없이 살아갑니다. 아주 미약한 인간이나 용감하고 굳건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 때문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살지만 단지 육체의 만족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육체의 만족을 기쁘게 누리지만 그것 때문에 인생의 추구점이 변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존재의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기 안에서, 이웃 안에서,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이 통치가, 사랑의 통치가 한 뼘이라도 더 확장되기를 바라면서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때문에 기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염려에 관하여 (2019.10.20._주일오전 6)
6. 먼저 그의 의(義)를 구하라 1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염려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였습니다. 여기서 그의 의는 그의 나라가 마찬가지로 ‘너희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의’입니다.
II. “의(義)”란 무엇인가?
그러면 도대체 의란 무엇일까요? ‘의’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디카이오쉬네’(dikaiosune)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의롭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디카이오’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그리스 시대에 이 ‘의’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도덕적인 흠이 없는 상태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그것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개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신앙생활을 위해서라도 오늘의 설교를 집중해서 들으셔야 할 것입니다.
원래 이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여러 성품들 중 하나입니다. 이 ‘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꽤 긴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의가 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실 때 당신의 의를 세 가지로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정의’와 ‘신실함’과 그리고 ‘자비’입니다. 이것은 의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햇빛을 프리즘에 비추면 일곱 개의 빛깔이 선명하게 나타나듯이 ‘의’라는 것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라는 프리즘에 넣을 때 정의와 신실함과 자비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라는 개념의 뿌리는 이미 구약에서 발견됩니다. 구약에서 ‘의’를 뜻하는 두 단어가 있는데 히브리 말로 ‘쩨데크’(chedek)와 ‘쩨데카’(chedakah)라는 단어입니다. 전자는 대체적으로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의의 질’을 나타내고, 후자는 ‘그것이 나타난 행동’을 뜻하기도 합니다만 대체로 이 둘 모두를 ‘의’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시킬 때는 올바름과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로운 상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혹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흠이 없이 자기의 의무를 다해서 책망을 받을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 합치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계시를 통해서 나타나고, 그 계시의 기록된 형태가 성경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하나님의 의라고 할 때 그것은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라고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집니다. 구약은 율법을 통해서 복음을 보여줍니다. 신약은 복음을 통해서 율법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구약은 하나님 앞에 지키며 살아야할 법을 제시하는데 율법입니다. 그 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율법을 행하면서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하나님 앞에서 모두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오는 하나님이 나를 의롭게 하시는 복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에 비해서 신약 성경은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복음을 통해 이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습니다. (이때 율법은 구약시대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우리들은 율법을 보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터득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두 줄 밖에 나오지 않는데 성경은 왜 전체가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다 망해버린 나라의 역사를 공부해야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의미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 전체를 세계에 비유한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새끼손가락의 손톱만도 못한 규모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사용하셔서 사건과 인물을 통해 자기의 뜻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세계가 무엇이고,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그것을 통해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 때문에 그들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묻어있는 하나님의 뜻을 채집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역사를 도구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사건과 인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합치된 사람,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큼 의롭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통은 영적 교통입니다. 그 교통을 통해서 하늘의 충만한 사랑과 생명이 주어집니다. 이 생명은 영적 생명입니다. 그것을 누리면서 그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자기 힘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서 발견하며 의로운 행동을 해서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류의 처음 조상들이 범죄 했습니다. 즉시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되었고 집행되었습니다. 뱀은 저주를 받았고, 인간도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고, 이 자연의 모든 세계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본래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운 영광의 대부분을 잃어버렸고, 인간 본래 가지고 있었던 의를 모두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두 가지 은총을 죄인들에게 베푸십니다. 첫째는 죽음의 유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니” 이것은 화자인 하나님의 의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반드시 죽이리니”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영혼의 죽음은 물론,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을 유보하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두 사람을 죽여 버려 인간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세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사람을 지으셔서 그 사람을 당신의 대리자로 삼아 당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세상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뿐 아니라 그분의 지혜를 본받아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끔 가꾸게 하기 위해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없는 세계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어야 할 인간의 죽음을 그대로 집행 하시되 유보하셨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이 세상에 살면서 자손을 번식하였습니다. 그래서 필멸의 인간들이지만 그 필멸이 집행되기 전에 후손을 낳았고 온 인류는 번성하게 되어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의 목적을 계속해서 이어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메시야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 너희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의 후손은 그냥 사람인 여자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약속을 진심으로 믿었고, 죄를 범하였으나 이 계시의 빛 아래서 살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하나님의 계시, 즉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 사단의 지배를 부수어 버리고, 자신들에게 참된 구원을 줄 것을 믿었습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고 태어난 첫 아이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은 바로 ‘얻다’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자를 얻으리라’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서 므두셀라는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는데 그 이름의 뜻은 ‘휴식’, ‘안식’의 뜻이었습니다. 죄와 그 모든 고통으로 쉼이 없는 인간에게 자신의 몸을 통해 난 여자의 후손이 혹시 자신들의 시대에 쉼을 줄 메시야에 대한 여망에서 그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는 면면히 이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리아에게서 예수라 칭하는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여자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이미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었으니 구원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면면히 이 믿음을 이어왔던 것입니다. 메시야의 약속과 함께 즉시 도입되었다고 믿어지는 것은 제사 제도입니다. 몇몇 신학자들의 이견(異見)과는 달리 청교도 신학자들은 대부분 이 사실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즉 아담의 타락과 함께 구원의 약속과 더불어 제사 제도가 도입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제사 속에서 상징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여망인 메시야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불결한 죄인들이 하나님과 잠시 관계를 맺게 해주는 수단이었습니다. 죄인들을 위한 제사를 통해서 임시적인 교제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용서해 주셔서 그들과 임시적으로 교통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 교통에서 하나님은 하늘의 생명과 사랑을 보내주셨고, 그 힘으로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며 신앙으로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잠시 하나님이 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교제의 문을 여셨지만 그것은 곧 닫히는 것이었습니다. 또 열리지만 또 닫히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 마디로 감질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이 제사를 통해서 더욱 높은 수준의 기대를 갖게 되었는데 언젠가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와 같이 메시야가 와서 이 모든 죄를 완전히 청산하고,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완벽한 교제의 통로를 영원히 열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의(義)”와 믿음
A. 오래 된 오해
그러면 이제 그 의와 믿음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래된 오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의로운 자이며 사람은 그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은 율법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 존재가 됨으로써 하나님이 받아들여 주실만한 공로를 갖게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였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고, 또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 중 몇 가지는 지켰을지도, 혹은 열심이 있는 사람은 그것들 중 대부분을 지켰을지도 모르지만 단 한 개를 지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는 율법 전체를 어긴 것이 되어 결국은 죄인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아주 예외적인 사람이 있어서 거의 모두를 지켰다 할지라도 율법의 본질,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계명까지 지켰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B. 복음적 의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오해를 공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에 의로는 흠이 없는 삶을 살고자 했고,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으로서 스스로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자신은 율법 중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에서 그 감격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하고 말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일찍이 수도사가 될 것을 하나님께 서약했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 수도의 산하인 에르푸르트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주 부유한 광물 업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일찍이 인생의 허무를 통감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자신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는 그 수도원에서 한 가지 문제와 더불어 골몰하게 씨름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구원 받았음을 어떻게 아는가’였습니다. 수도원에서는 그에게 금식하고, 고행하고, 육체를 버리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그 과제를 수행했습니다. 자기의 자전적인 글에서 말하기를 오직 담요 한 장과 물 한통을 들고 깊은 굴속에서 여러 날을 금식하였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맨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며 피를 흘리는 고행에 자기를 복종시킴으로 구원에 이르러 보고자 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고행을 하고 금식을 할 때 확실하게 자신이 구원 받은 것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습니다. 잠시 그 일이 끝나고 약간 편해지면 온갖 욕망이 고개를 들면서 자신은 구원 받지 못한 인간이라고 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이 문제로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원래 마르틴 루터는 보면 체격이 굉장히 큰 사람으로 묘사가 되지만 수도사 때는 아주 바짝 말라서 피골이 상접한 사람이 됩니다. 보다 못해 수도원장은 여기 두었다가는 저 젊은이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비텐베르크 신학교로 그를 보냅니다. 그는 거기서 이제 수도 생활을 청산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복음으로 떠나는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라고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매우 명망 있는 신학교 교수였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가 종교계의 찬동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마르틴 루터에게 소중한 만남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는 이 고매한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슈타우피츠는 대답했습니다. “금식하고 고행을 한다고 구원 받은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 아니오. 구원은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오. 이 도리를 보다 깊이 알고 싶으면 로마서를 읽으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서를 천천히 읽다가 바로 이 구절에 와서 울부짖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였습니다. 그는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은 어찌하여 복음 속에도 칼을 두셨나이까?”라고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 울부짖었던 이유는 의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구원과 관련해 선포하고 있는 바는 그 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경건한 시인들에 의해 많이 고백되던 바였습니다. 시편 36편 6절은 말합니다.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시편 119편 40절에서는 보다 분명합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였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마르틴 루터는 이제 로마서, 갈라디아서, 시편, 하박국 등등을 강의하면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복음의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 속에도 칼을 숨겨두었다고 하던 그의 절규는 멈추게 되었고, 그 의가 그런 의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의 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주의 심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서는 주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인간을 받아들여지게끔 해주시는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미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의가 아니라 당신의 의에 기초해서 당신이 사람들을 의롭게 여겨주셨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의
이런 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획득하신 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였고, 하나님은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의를 나누어 주어 그 자신의 의로 삼아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획득한 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셔서 하나님 때문에 죄인을 받아들이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땅은 원래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건물을 보강해서 그 위에 이 건물이 덧세워졌습니다. 그 건물은 1960년대 이미 건립되었고, 60년대와 70, 80, 90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대화 초기와 그리고 산업화의 전 과정을 겪은 건물이었습니다. 저 멀리 60년대에 가방 공장으로부터 시작해서 80년대 전자 부품 공장에 이르기까지 여기에서 그런 모든 업종들이 제조 생산 담당하던 그러한 건물이었습니다. 저희는 방배동에서 장년 교인이 천 명 정도 되고, 어린이가 한 350명 되었을 때 더 이상 그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도록 사람이 늘어났고, 건물 주인은 재건축을 위해 교회에게 건물을 비워주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갈 터전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뜻하지 않게 하나님은 이곳에 땅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은 부동산에 한때 내어놓았다가 다시 물건을 거두어 드린 그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주인을 찾았습니다. 할아버지였습니다. 이 땅을 팔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더니 싫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재차 간청하였더니 “이 땅을 팔면 여러분은 여기에다가 무슨 사업을 하려고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짓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할아버지가 “교회요?” 깜짝 놀라시더니 “일주일만 생각해 보십시다.”라고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와서 일주일 동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살 돈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일주일 후에 갔더니 “계약을 합시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인에게 변통을 해서 계약금 3억 원을 가지고 그 할아버지와 계약을 했습니다. 그때야 할아버지는 입을 여셨습니다. 그 분은 현직에서 이미 은퇴하신 당시 80세가 되신 할아버지 장로님이셨습니다. 놀랍게 그분은 26살 때 한경직 목사님에게 장로 안수를 받았고, 60년대에 여기 우리 교회가 있는 이 터에 공장을 짓고 매주 목요일마다 한 목사님이 오셔서 성경공부를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평생의 사업을 마무리하는 마당에 공장이 있는 이 터에 교회가 서기를 간절히 기도했는데 이루어졌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셨습니다. 끝나자 장로님이 물어보셨습니다. “교회에 돈은 있수?” 그래서 우리는 대답했습니다. “이제 구해야죠.” “뭐가 있겠어.”라고 하시더니 계약금을 받고 사인을 한 후에 금고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집문서와 인감도장 일체를 교회에 건네주며 빨리 가지고 가서 등기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등기되면 은행에 가지고 가서 대출을 받아서 잔금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들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별로 감격도 안하겠지만 우리는 그날 밤에 한없이 울었습니다. 39억짜리 부동산이었는데 교회 통장에 1500만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연히 치러야 할 잔금은 은행이 주는 대출보다 많았습니다. 온 힘을 다해 갚았는데 마지막에 1억을 못 갚았습니다. 교회가 여기에 이사 온 지 1년이 넘도록 못 갚았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엄청 화가 나셨습니다. 전화를 걸어서는 말하셨습니다. “이럴 수가 있소? 회사 임직원들이 반대하는 것을 교회를 위해서 내가 그냥 넘겨주다시피 했는데 이렇게까지 마지막 남은 돈을 안 갚는단 말이요?” 화를 버럭 내셨습니다. 그래서 설명했습니다. 안 갚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온 힘을 기울여 이자를 갚고 원금을 갚다가 보니까 직원들 월급 줄 돈도 없을 정도라고 말입니다. 정말 죄송하다고 하였더니 할아버지가 한참 듣고서는 퉁명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계좌번호 부르십시오.” “네?” “교회의 은혜 계좌를 부르란 말이요.” 그래서 불러 드렸습니다. “내 창피해서 살 수가 없소. 직원들이 하는 말이 ‘사장님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헐값에 땅을 파셨습니까? 그리고 아직도 끝전을 다 못 받으셨습니까?’라고 놀리오. 그러니 내가 교회계좌로 1억 원을 몰래 송금할 테니 그 돈을 찾아서 우리 회사에 가져다 갚으시오.”라고 하고는 교회계좌에 1억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일체 모르는 척 하고 그 돈을 빼서 회사로 보내어 회사에게 갚았습니다. 우리 돈으로 갚은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 회사는 더 이상 우리에게 잔금을 지불하라고 독촉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의를 주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주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죄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성령님은 바로 그 일의 보증이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이 믿음은 최소한 다음 세 가지를 포함하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는 찬동입니다. 이 찬동은 어떤 사실에 대해서 깊이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제시받을 때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고 부인할 수 없이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믿음의 첫 번째 요소입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아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뢰입니다. 믿음은 찬동이 지식에, 지성에 관한 것이라면 신뢰는 감정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완전히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그것이 마음을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감정적인 신뢰가 생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갖춰졌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세 번째 것이 없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입니다. 의지는 자기를 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중국에 가면 용경협이라고 하는 관광지가 있습니다. 양쪽으로 한 300m는 되어 보이는 높은 봉우리들이 양쪽에 줄지어 서있고 가운데 폭 500-800m되는 꽤 깊은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 두 봉우리를 쇠줄로 연결해 놓고 거기를 그 위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답니다. 제가 그것을 믿었을까요? 안 믿었을까요? 말도 안 되잖아요. 어떻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가봤습니다. 그랬더니 진짜 그 줄을 타는 오토바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떨어지지 않도록 뭔가를 고정해 놓은 상태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 진짜 팔뚝만한 쇠 와이어가 있고, 팽팽하게 펼쳐진 그 위로 오토바이가 달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 여러분들이 거기로 가셨다고 합시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진짜 와이어 위로 오토바이가 두두두두하면서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소리를 내면서 아슬아슬하게 달려서 저쪽 끝으로 내리고, 내린 오토바이는 잠시 후 반대편에서 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거기 가서 봤다고 합시다. 그리고 가서 상세히 조사를 해보고 망원경으로까지 들여다보니까 의심할 수 없습니다. 밧줄을 만져 보았는데 그냥 케이블카 다니는 밧줄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것을 보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된 것, 이것은 지적인 찬동입니다. 묘기를 부리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보는 앞에서 며칠 동안을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묘기를 부리는 한 사람이 “자, 지금 제가 출발합니다.”라고 하고 어느 시점에서 시동을 걸고 밧줄을 타기 시작할 때 여러분들은 이번에도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이번에는 반드시 떨어질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하겠습니까? 이번에도 건너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요소인 신뢰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를 가지고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또 묻습니다. “여러분 제가 3년째 이렇게 타고 있는데 오늘 또 건너갈 것입니다. 제가 건널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뭐라고 얘기하겠어요? “믿습니다.”하였겠지요. 그런데 “거기 아주머니, 여기 뒤에 타시죠.”하면 타겠습니까? 안타겠습니까? 절대로 안 탑니다. 성경은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안다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고, 그럴 것이라는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며 복음적인 사실에 자기 인생을 덜컥하고 얹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진정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선물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의지입니다. 따라서 그 참된 믿음 뒤에는 반드시 순종이 뒤따라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IV. “추구하라”는 무슨 뜻인가?
그러면 추구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추구하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어떤 생각과 행위들이 궁극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바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의 의’ 곧 하나님의 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A. 인류의 구원을 추구함
첫째는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이렇게 구원을 받아서 당신의 의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의 때문에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자원의 부족 때문입니다. 육체의 자원이 부족할 때 우리는 가난에 시달리고 건강을 잃게 되고 육신의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적인 자원이 모자랄 때 우리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되고, 능히 견뎠던 현실을 극복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 되고, 심적인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막혔던 관계가 열리고, 이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이 다시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부으심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갈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감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불의한 세상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세상 나라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고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의가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세상에 살지만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나는 의롭게 살고,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공평하게 살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본받는 삶이고, 이 삶은 정의롭고 신실하고 자비로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V. 복음을 믿으라
그러면 마지막으로 복음을 믿으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선포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천국은 문자적으로 하늘나라입니다. 하늘은 유대식 표현으로 하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이 첫 선포는 유대인들에게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상의 이스라엘이 하늘나라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바로 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 바깥에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있다가 오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는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생각에 하나님의 나라는 행복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미 그 나라 안에 있습니다. 설령 그들이 그 바깥에 있다고 하더라도 기뻐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셔야 했는데 왜 마치 천국이 오면 모두 수레바퀴에 밟아 터지는 개구리처럼 멸망할 것을 예고하듯이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는데 회개하지 않는다면 너희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라는 선포였습니다. 이 의미는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우리에게 왔다고 가르쳐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오는 그날은 예수가 재림하시고, 이 세상에 심판을 하시는 날입니다. 믿고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람들은 심판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천국으로 이끌어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불신앙 하던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서 지옥에 떨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마어마한 복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말씀하신 의미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보다 더 오래전에 쓰였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회개하라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구체적인 명령으로 제시합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였습니다. 바로 이 의는 이렇게 축복과 심판의 두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은 궁극적인 우주적 심판이 유보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날이 오게 될 것이고 그것은 생각보다 가까운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믿고 복음 안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큰 복락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반대가 될 것입니다. 그가 교회에 출석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를 뜻합니다. 그래서 그 전 존재적인 의지는 곧 사랑과 동의어입니다.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전심으로 의지하며 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그 관계는 영적인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였는지 여부에 따라서 그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못 믿는지 드러내게 됩니다. 그 결과에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니 믿는 자에게는 구원하시는 의로,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 하시는 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은 “주 예수를 믿지 아니하려느냐. 너희는 반드시 심판을 받으리라”는 말씀과 동의어인 것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죄인들에게 의를 주셔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게 하시고, 영적인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 믿음이 참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생활이 동반되고, 보이지 않는 사랑은 행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녁부터 부부가 서로 안색이 안 좋더니 드디어 언쟁을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당신, 사랑이 식었지?” 남편은 황당해 하는 말로 “내가 뭘?”, “생각해봐. 당신 변했어.”, “왜?”, “아니 신혼 때에는 아침에 싫다고 해도 쓰레기를 분리수거해 버리고, 두 시간에 한 번씩 열심히 문자를 날리고, 저녁에는 땡하고 들어오고, 가끔 손에 선물도 들고 퇴근하더니 당신 요새 뭐하는 게 있어?” 남편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내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들은 그 네 가지였을까요? 그 다음날 남편이 아침 일찍 일어나니 쓰레기를 다 분리해서 분리수거대에 갖다 버렸습니다. 정확히 두 시간에 한 번씩 문자를 날렸습니다. 땡 하자마자 집에 들어왔습니다. 손에는 선물이 들려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면 진짜 큰 부부 싸움이 나는 거죠. “이제 됐어?” 선물을 탁 내려놓으면서 “이제 됐냐고?” 아내가 변했다고 말하는 것은 분리수거를 하고, 문자를 자주 하며, 땡 하면 집에 오고, 올 때 선물을 사가지고 오라는 게 아닙니다. 사랑이 변했다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행위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변했어.” “어떻게 알아?” “나는 척 보면 알아.” 그럴 수 없잖아요. 아내가 그렇게 잔소리를 하면서 ‘당신, 사랑이 식었지’라고 말하는 것은 그까짓 것들을 해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 그렇게 심오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눈빛을 하세요? 그러니까 부부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바빠서 쓰레기 분리수거 못해도 아내가 여러분 사랑이 느껴지는 날은 콧노래 부르면서 분리수거 했구요, 문자 안 해도 기도하면서 여러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를 했을 겁니다. 퇴근 시간 늦어지면 애들하고 가정 예배드리면서 아빠 위해 기도했습니다. 선물이 없이 들어오는 날도 안아주면서 ‘당신 자체가 선물이지’라고 했습니다. 이 얘기도 새롭습니까? 그게 걱정입니다. 무얼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진짜 그것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나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관계로 바꾸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행위와 우리의 믿음, 혹은 행위와 우리의 사랑을 분리하지 않는 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앙을 이야기할 때에는 이 둘이 찢어지는 분리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제 나이 7살에 돌아가셨고, 그때 할아버지의 연세는 마흔 일곱이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마흔 아홉에 홀로되셨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저희 아버지구요. 연세가 드신 후에는 지극히 효성스럽게 어머님을 위하셨습니다. 그러나 젊을 때에는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무심하셨습니다. 아들조차 자기에게 무관심하니 딸들에게 둘러싸여 사셨습니다. 아직 젊으신 나이에 혼자 되셔서 많이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첫 번째 사위가 들어왔답니다. 그런데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숨길 수가 없었대요. 여러분 아세요? 아줌마들이 남편에게도 별로 사랑을 못 받고, 애들에게도 관심을 못 받다가 사위를 얻으면 두 번째 연애하는 감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경험자에 의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뛴답니다. 얼굴이 빨개지고. 연애할 때와 똑같다고 어느 사모님이 저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제가 어려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주위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사위를 얻고 너무 좋으셔서 가족들 아무에게도 안주는 간식을 숨겨 놓았다가 몰래 사위에게 주고, 누구에게도 안하는 살갑고 따뜻한 표현을 하셨답니다. 할머니의 마음에는 그런 것을 감추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추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두 개 있는데 미워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감정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믿는 것과 사는 것을 하나로 묶어 한 뿌리에 닿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숨길 수 없이 자신의 삶을 통해 자기를 사랑하는 하나님께 그 고백을 드러내게 됩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그렇습니다. 믿음은 어느 곳에 있든지 그만 바라봅니다. 그만 사랑하고 그만 섬기고 그만을 위하고 그만을 위해서 생활합니다. 그래서 숨길 수 없이 그렇게 순종하는 마음과 말씀을 따라 사는 순종의 삶은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V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바로 그 나라의 의를 추구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지상과 천상의 자원은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것들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살도록 우리에게 수단으로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녀가 되기를 위해 애쓰시고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안 이루어지는 것 같은 세상에서 주 뜻 이뤄지기를 외치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염려에 관하여 (2019.10.27._주일오전 7)
7. 먼저 그의 의(義)를 구하라 2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 : 3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처럼 ‘의’는 죄인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획득하는 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룬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언약 관계를 깨뜨린 죄인을 예수의 희생으로 의롭다 여겨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이 이루신 그 의를 사람들 속에 실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II. 의(義)를 실현하시는 하나님
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성품 중 하나인데 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다음 내용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의는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성을 침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를 지키시는 성품”입니다. 이에 관해 우리는 성경에서 섬뜩한 사례들을 발견합니다. 첫 장면은 레위기 10장 1절에서 2절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원래의 이 향로에 분향할 때 쓰는 불은 번제단의 불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 두 사람은 다른 불을 사용했고 이것 때문에 불이 그들을 삼켜 즉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역대상 13장 9절과 10절에서도 등장합니다. 법궤가 이동 중이었습니다. 소달구지 위에 법궤를 실었고, 소가 날뛰자 법궤가 흔들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웃사라는 사람이 떨어지는 법궤를 손으로 붙잡았고, 이 일 때문에 웃사는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구약에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그 유명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들은 사도의 말에 감동을 받았고 그래서 땅을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땅을 팔아 돈으로 바꾸자 마음이 변했고, 일부를 감춰두고 바쳤습니다. 결국 이렇게 이러한 범죄는 성령을 속인 것이 되어 그들이 시신으로 실려 나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건 속에서는 하나님의 어떠한 관용도 발견할 수 없고, 용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만약에 모든 인간을 이런 식으로 다루신다면 이 세상에 과연 살아남을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원칙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시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우리에게 어떤 강조점을 보여주기 위한 sample case입니다. 그 강조점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함을 침범하는 자들에 대해 그것을 보호하시는 의의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거룩함을 침범하는 죄인들을 심판하는 가차 없으신 이 무서운 의와 죄인들을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사랑, 이 두 가지 그림이 성경에 모두 나오는데 이것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이 대답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중의 핵심입니다.
백금으로 반지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 반지의 가격은 백금 값 더하기 세공비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백금으로 만든 반지 위에 5캐럿 정도 되는 다이아몬드를 얹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5캐럿짜리 되는 다이아가 얼마나 될까요? 제 기억으로는 2억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약에 5캐럿 정도 되는 다이아 위에 얹었다고 할 때에는 반지 자체 값은 그 다이아에 비하면 아주 적은 금액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반지라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이아몬드와 같습니다.
그러면 질문을 다시 상기 시켜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거룩함을 침범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성품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은 심판하는 의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과 용서하시는 사랑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이것입니다. 다음 문장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함을 침범하는 인간들을 사랑하심으로 당신의 거룩함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복음의 비밀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음 문장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 죄인들에게 예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의를 주심으로써 당신의 거룩함을 보호하십니다.”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한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백년을 해로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인격 파탄자였습니다. 끊임없는 폭력과 돈 한 푼도 주지 않고 경제권을 움켜쥐고 있는 남편을 보면서 그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욕설과 폭력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그 결혼 생활을 파기하지도 못하고, 이 여자는 노예와 같은 마음으로 이 남자의 뜻에 맞게 해주려고 자신을 위해서 애쓰게 됩니다. 이 여자가 행실이 온전하겠습니까? 아니면 인격적으로 이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이라도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아내가 그 남자의 뜻에 보다 더 부합한 도움이 되는 아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좀 생기발랄하게 답변을 좀 해보세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폭력과 두려움만으로는 온전한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함을 훼손한 인간으로부터 자기의 거룩함을 보호하시는데 그것을 인간을 아예 당신을 사랑하게 하심으로 당신의 거룩함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율법의 심판으로 그를 겁주는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거룩함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 1장 16절을 읽으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한 구절을 보고 ‘당신은 어찌하여 복음에도 칼을 두셨나이까?’라고 하나님께 절규했던 장면은 바로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의 의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모르는 데서 온 절망의 탄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자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반역의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인 왕은 큰 칼을 들고 법에 따라서 이 자식을 죽여야 했습니다. 칼이 허공을 가르고 아들의 목이 땅에 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높이 칼을 들고 공중을 휘두르더니 그 칼로 자신을 찌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끌어안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는 죄가 없으신 분이며 그리고 우리 대신 죄 값을 담당하고 죽으셨으며 그가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비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과정은 신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와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로 넘어갈 시간입니다.
III. 신자와 사회 안에서 이뤄지는 의(義)
A. 신자 안에서
제일 먼저 신자 안에서 어떻게 이 의가 실현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율법으로 깨달음
첫째는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장소에 율법을 새기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돌판에 율법을 새기셨고, 또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율법을 새기셨습니다. 마음 안에 새겨진 율법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즉시 새겨진 것이고, 그것은 돌판에 새겨진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입니다. 사람들 속에 심겨진 그 율법이 사람들에게 자꾸 곡해되고 잊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심할 여지없이 돌판에 새기셔서 언약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을 아는 유대인들과 모든 사람들은 그 율법의 요체인 십계명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고, 신약 시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전해진 의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믿지 않는지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정죄되고 심판함으로 하나님 앞에 마지막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은 불공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 거룩성을 침범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요구는 심판입니다. 그리고 그 형벌은 마지막까지 언제나 최고의 형벌이 주어지는데 죽음입니다. 이것이 도덕 철학에 있어서 지위의 원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웃과 공개석상에서 다툽니다. 그러다가 이쪽에서 육두문자가 나옵니다. 에이씨 XX 그러고 주먹을 쥐었는데 그것을 모욕죄로 고발을 하면 현행법 체계 안에서 벌금 30만원쯤 나옵니다. 당연히 전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송에 들어가면 조심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에이 xx 라고 말했을 때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황제이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네 나라의 황제면 형벌이 300만원쯤 되겠죠? 아닙니다. 죽음입니다. 그냥 말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주먹만 쥐어도 죽음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높은 지위 그 아래서는 사실은 티끌 같은 죄도 큰 죄가 되고, 정말 큰 죄도 죄입니다. 그게 도덕 원리입니다.
간첩은 아닌데 홧김에 숭례문을 불 지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형은 아니었으나 설사 그가 죄 값을 모두 치르고 나온다고 하더라도 불길에 사라져버린 숭례문이 다시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4조원을 들여서 만든 어마어마한 댐이 있다고 합시다. 한번 파괴되면 도시 하나가 물에 잠기는 위치에 있는 그 댐에 폭약을 설치하고 폭발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수천 명의 사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마지막에 주어지는 형벌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사형일 것입니다. 그래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배상이 끝났을까요? 배상은 안 됩니다. 처벌만 됐을 뿐이지 그가 죽는다고 해서 무너진 댐은 복구되지 않고 그 수몰 사고로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범한 죄 때문에 인간이 형벌을 받아 육체와 영혼이 모두 죽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입힌 손해는 복구가 안 됩니다. 배상 불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범할 능력은 있는데 그 침범한 것을 배상할 능력은 없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바깥으로부터 오는 은총이 아니면 자기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아주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적인 원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복음에 대한 믿음
둘째로, 복음에 대한 믿음을 주십니다. 자, 이제 자신은 죽음에 처했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 될 위기에 놓여있으며, 영원한 심판이 남아있습니다. 그때에 복음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을 위해 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다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를 충족해야 하는데 이런 의가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의가 아니라 오히려 죄가 가득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로마서 10장 4절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에게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의 요구에 따라서 살 이유가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길밖에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염치는 없지만 예수를 통해 이루신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분의 약속인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께 받아들여지도록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방식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3. 사랑하게 하심
셋째로, 사랑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믿고 의로워지고 나면 하나님은 그가 의로워지는 것과 함께 우리에게 사랑을 주십니다. 그래서 사랑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복음에 대한 가장 짧게 요약할 수 있는 묘사는 영어로도, 한글로도 네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Jesus died for us.’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위해’(for)에 복음의 참된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 for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예수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죽었다, 두 번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세 번째는 우리를 대표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것은 예수인데 이익은 우리가 누리게 되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을 당했는데 결국은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당하신 것이고, 그리고 우리를 대표해서 죽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자신은 도저히 의로운 것이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이렇게 이익을 얻고,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과 함께 죽으심으로써 그 의의 유익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고 의로워진 사람의 내면 안에서 놀라운 신비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즉, 거듭남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었던 우리 영혼을 죄에서 씻겨서 생명을 부여하시고, 또 그 성령으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완전히 쇄신시키셔서 예전의 존재가 아닌 것 같은 새로운 삶을 살게끔 만들어 주시는 내면의 역사가 의의 전가와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때 신자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놀라운 조화를 이루게 되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일생동안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죄인인 그 사람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때 그는 하나님께로 영원히 상승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런 자기를 향하신 이 의의 비밀을 주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강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강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모든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15년 전쯤의 일이었을까요? 플라톤을 읽다가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국가론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유명한 비유가 몇 개 나오는데 그 중의 특히 유명한 것이 두 가지 비유입니다. ‘동굴의 비유’와 ‘태양의 비유’인데 사실 이 두 비유는 나눠진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 스토리는 이것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지하 동굴에 갇혀 살아갑니다. 그들은 항상 벽을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벽에 그림자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식물, 나무, 새 등등의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그 그림자를 보면서 그림자가 나타나는 법칙과 관계들을 탐구합니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은 출세할 기회도 얻고, 돈도 얻고 그리고 남보다 더 편안한 삶을 보장받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모두 그림자를 쳐다보고 이제껏 살아왔는데 도대체 저 그림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니까 물체의 모양이 있었고, 여기에는 밝은 등불이 있었습니다. 그 모양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바뀌면서 수많은 다양한 그림자들을 만들어 냈고, 자신들은 그것을 공부했던 것입니다. 플라톤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의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평생을 모든 사람과 함께 그림자만 보며 살던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돌려 그 뒤에를 보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철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다양한 답변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로서 나는 그것을 보게 한 힘은 진리 자체가 이끄는 힘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아무튼 뒤를 돌아보았더니 결국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었고, 실체는 사물의 모양이었고, 등불이 비추어서 그림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사람은 다시 그림자를 보고 싶을까요? 보고 싶지 않을까요? 생기발랄하게 대답을 해봐요. 보고 싶을까요? 보고 싶지 않을까요? 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여기 이 물체 때문에 뒤에 비취는 등불 때문에 그림자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은 무엇인가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 뒤편에 어딘가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고, 그리고 아주 가녀린 빛이 비취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에 이끌리는 사람처럼 이것도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양일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무엇인가에 이끌려 그 계단을 오르게 된 것입니다. 난 이것도 역시 진리라는 실체가 인간의 정신을 잡아당기는 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올라갑니다. 이 올라간다는 것을 그리스 말로 ‘아나바시스’(상승)라고 합니다. 상승입니다. 올라갔습니다. 상상하지 못하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태양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지하에는 등불밖에 없었는데 말입니다.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모양밖에 못 봤는데 말입니다. 동물이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림자가 만드는 모형 밖에 못 봤는데 말입니다. 큰 나무가 있었습니다. 역시 모형으로 본 것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그 쏟아지는 태양 빛 아래서 그 실제의 사물들을 보면서 여기에 있는 이 그림자를 만드는 도구들은 그것을 거칠게 따온 모형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림자는 그것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정신과 마음은 이 실체가 지는 광경으로 가득 찼고, 그는 거기서 그림자를 넘어 모형을 넘어 실체를 발견한 기쁨 때문에 기쁨과 희열, 환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가슴 벅차는 광경을 느끼면서 어디서도 일생동안 맛보지 못한 한없는 행복을 충만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스토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거기서 집을 짓고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았을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는 동안에 그는 깊은 감격과 아름다움에 넘치는 기쁨과 희열을 느끼고 그것은 결코 쇠약할 수 없게 되는 충만한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체를 보고 행복을 느꼈기 때문에 그는 숙명을 부여받습니다. 그것을 그리스어로 ‘아난케’라고 부르는 필연입니다. 숙명은 신이 결정했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바뀌지 않고, 반드시 겪게 되는 그 사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숙명은 무엇이었을까요?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려감을 그리스어로 ‘카타바시스’(하강)라고 부릅니다.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결국은 거기서 자기가 보고 온 아름다운 세상을 외치다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그의 운명입니다.
저는 이러한 것을 읽으면서 신약 성경을 펼쳤을 때 너무 유사한 삶을 산 사람이 내 눈앞에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님의 거룩함과 환희의 실체를 경험한 다음에 그는 숙명처럼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강제한 임무가 아니라 그 사랑에 감동을 받은 사랑의 강제력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향한 끓어오르는 사랑이 부여한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 내용을 여러분들이 더 이해하기 쉽게 찬송으로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찬양)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환희, 말할 수 없는 희열의 광경을 등지고 지하로 내려갈 수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거기에서 그 아름다운 세계를 등지고 칙칙한 동굴에서 그 무지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역시 찬송으로 대답하겠습니다.
(찬양)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그 찬란한 아름다운 광경을 본 그 속에서 신의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그 아름다운 이데아의 세계의 영상을 간직하면서 그 아름다움과 진리의 힘으로 그것을 혼자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카타바시스해서 거기서 마지막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에게 만족스러운 삶입니다. 이게 좁게 보면 목사의 삶이고, 이런 삶의 의미를 목회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그 초월적인 세계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복원한 사람이 그 사랑의 강제력 때문에 카타바시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진리를 외치다가 이해받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에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진리의 힘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이 우리에게 생겨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데, 그 동기는 오직 하나, 그분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과 의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B. 사회 안에서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것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아주 하나님에 의해 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당연히 의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미 이 의의 세계를 경험했고, 이것이 얼마나 인간의 마음을 바르게 행복하게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 안에도, 영혼 안에도 이런 의가 실현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그 사회 안에서도 그 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프리즘의 비유를 기억하고 계시죠? 햇빛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라면 프리즘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서 그것이 세 가지의 빛으로 품어져 나오게 됩니다. 정의, 신실함, 자비, 이 세 가지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의를 마음에 받은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프리즘처럼 뻗어나가면서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되고, 신실한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되고, 그리고 자비로운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습니다. 의로운 자로서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만 살고 싶어’라는 말을 남기고 최근 한 배우가 악플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했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기 싫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의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하는 그 순간은 이미 마음과 영혼 안에 있는 생명이 고갈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위장할 수는 있지만 팩트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핵심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생명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 힘입니다. 죄인 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운명이 아닐지 모르지만 미워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여러분들은 불신자 시절에 혹시 그런 경험 있으세요? 뼛속에 사무치도록 미운 사람이 있었는데 뼈 중의 뼈같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 경우가 있습니까? 전 없습니다. 전 주위에서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한번 미워하게 되는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운명처럼 한 길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사랑의 부족이고, 하나님은 당신과의 사귐 속에서 하늘의 사랑을 공급받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면 놀랍게 그 사랑할 수 있는 힘이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생겨납니다. 정말 상스럽고, 못됐고, 그리고 정말 싫은 짓을 했는데 그 사람을 생각하면 그렇게 가엾습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납니까? 왜 용서해 주고 싶죠? 사랑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나님은 그 사람의 성화의 정도에 따라서 엄청난 분량으로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난 뒤에는 뼈에 사무치도록 미운 사람을 용서해서 뼈 중의 뼈처럼, 살 중의 살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을 품게 됩니다. 인생에서 몇 사람을 그렇게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 부어지는 사람은 미움이 운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 종노릇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주는 위대한 생명력입니다.
1. 사랑으로 섬김
의로운 세상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세상입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귐 속에서 하늘의 생명과 사랑을 무한히 누리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의롭게 된 방식을 결코 잊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행한 율법의 공로 때문에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다시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는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일어나지 않았는가에 달렸습니다. 신자는 자신이 아무 공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기가 의롭게 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단 한 사람이라도 율법을 행해서 의롭게 될 수 있었다면 예수는 오실 수 없었습니다. 아니 오시지 말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모든 인류에게 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두 사람, 세 사람, 열 사람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 의인은 하나도 없었고, 그리고 오직 죄인이었고, 그들은 자기를 스스로 의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1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신자도 사랑하는 것이 항상 쉽지는 않습니다. 그가 진리로 충만하고, 사랑에 온전한 지배를 받을 때에는 사랑하는 것이 쉽습니다. 물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냥 사람에게 친절하게 해주는 것이 나에게 기쁨입니다. 나 때문에 그 사랑이 행복해 할 때 내가 행복해하는 것보다 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이 행복해지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에는 사랑하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그런 사랑이 없다는 것은 없는 크기만큼 죄가 있다는 것이고, 그 죄는 결국 자기 사랑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거스르면서라도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사랑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고, 은혜가 모자라면 죄를 생성해서 자기만 사랑하게끔 만드는 것이 대조적인 역할입니다.
그런데 비밀은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힘듭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인식이 있습니다. 자신도 그것을 원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힘듭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의롭게 하신 방식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의롭지 않은 우리를 의롭게 하신 방식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의를 이루기 위해서 당신 자신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의를 이루고, 우리에게 그 의를 거저 준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할 때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때 그는 그것을 못 참게 만드는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그를 오히려 하나님 사랑하게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의롭게 하시는 방식을 그대로 자신의 삶에 적용하면서 자기는 죽고, 예수는 사시는 삶을 구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주시는 비밀이고, 우리에게 주신 그 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달해 주시는 하나님이 신비로운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는 이렇게 중심이 하나님의 사랑에 있던 중심이 이동한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없는 의를 만드신 것과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의를 아무 공로 없이 우리에게 전가해주신 이 비밀에 대한 감격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죽으셨네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도 우리를 위해 흘리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때 그는 모든 자기의 희생을 감내하며 이웃 속에 그 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열망을 삶으로 지속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그 사람 마음 안에, 사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율법의 요구를 이룬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를 리가 없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 사람을 미워할 리가 없습니다. 로마서 13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습니다.
2. 의로운 사회의 실현
신자는 의가 그 마음 안에 이루어진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정의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회가 정의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정의만이 아니라 신실함으로도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세상일 뿐 아니라 믿을만한 신실한 사회가 되기를, 정부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자비로 감화를 받았으니 자기도 자비를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에 대한 관심을 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순된 세상이 편지지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편지에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글을 써나가는 것이 신자의 일생입니다. 그 글씨는 먹물을 찍어서 쓰는 펜글씨가 아닙니다. 자신의 눈물과 피를 찍어서 쓰는 편지입니다.
이 사회가 정의롭습니까? 더군다나 신뢰할만합니까? 어떤 대통령 한 사람이 누구의 충고를 받았는지 생각 없이 한 마디를 툭 던집니다. 공부를 조금 못하더라도 다른 방면에 좋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입학의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지 공정한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말은 너무 그럴싸하고 아름다웠는데 사회는 그것을 받쳐줄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학종(학생부종합전형)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 서민은 학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더군다나 학종이 무엇의 줄임말인 조차도 모르던 시절에 대통령의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강남에는 학종 프로세스라는 서비스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법망을 피해가면서 스펙을 쌓아 학종을 가득 채워서 사람들이 일류 대학을 입학할 수 있게 하는지에 대한 전문적인 서비스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서민은 도대체 정보도 없고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아들, 딸들이 일류 대학의 실험실을 쓰겠다고 요청을 하면 받아줄까요? 한 달, 두 달 동안 열심히 할 테니 논문의 제 1저자에 넣어줄 수 있냐고 물어보면 기회가 주어질까요? 처음부터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 이제는 학종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집단들이 생겨났고 소위 스카이 캐슬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잘해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은 하층에 있는 사람이 상층부로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사닥다리였습니다. 그것을 분질러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만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식으로 수시로 거의 80%이상을 대학에서 다 뽑아버립니다. 그래서 이미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정해진 것입니다. 이게 미친 사회 아닙니까? 도대체 사회적인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신뢰할만한 시스템도 없고 어떤 통제장치도 없으며, 사회는 믿을 수가 없는데 이 모든 것은 이런 식의 제도에 던져주어 버리고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의 먹잇감으로 삼은 것이 오늘의 입시제도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피비린내 나는 수능과 본고사로 이어지는 그 끔찍한 과거로 완전히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너무 좋은 제도지만 사회적인 정직성과 시스템 수준이 신뢰할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돈 많은 사람들이 입시에 접근하고 일류대학을 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은 것이 학종 제도라는 것을 밝히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이런 제도를 보면서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부자인 부모를 둔 아이들은 부를 세습하고, 그리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지위를 세습하고, 기득권층은 기득권층으로 유익을 누리면서 그렇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련의 사태들을 오늘날 지켜보면서 여러분은 분노하지 않습니까? 이게 나라입니까? 이게 공평한 나라입니까? 이게 신뢰할 수 있는 나라냐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입시생이라면 절대로 일류 대학 못 간 것에 대해서 승복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이 존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진 사람이 그것에 대해서 대다수가 승복할 수 있는 공정성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경쟁이 공정하고 결과는 승복할 수 있어야 되는데 두 가지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 살 때에 인간 속에는 원한과 사회에 대한 한이 맺히게 되는 것이고, 그런 한 맺힌 사람들이 많이 생겨날수록 사회는 불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고 나면 당연히 자신 속에 이루어지는 그 의가 사회 속에도 그대로 전개되어 정의롭고 신뢰할만하고, 그리고 경쟁에서 진 사람이 아예 짓밟히는 법이 없이 따뜻하게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는 자비로운 사회가 되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이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 시대 때에 그래도 보릿고개를 넘겼고,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말하며 그 정권에서 일어난 일들을 정당화하는 듯한 발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묻습니다. 그분이 정권을 안 잡았다면 반드시 굶주렸을 것이라는 논리적인 근거가 있습니까? 일부 좋은 치적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 싹을 짓밟은 군부독재와 수많은 사람들을 죄 없이 죽이고, 가두고, 그리고 사회를 1인 통치 체제로 만들고, 심지어 여염집 아내를 최고지도자로서 부끄럽게 겁탈한 사건들은 묻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김삼화 여배우의 사건 같은 것들을 읽으면 온몸이 진저리 쳐지는 비극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먹고 살고 좋은 옷을 입는 것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는 그것과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노예처럼 짓밟히며 생존하기보다는 자유와 존엄을 위해 장엄하게 죽기를 바랍니다. 인간답지 않게 살기보다는 인간답게 사는 죽음을 택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의 영원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화에 봄이 왔습니다. ‘아, 이제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를 뽑는구나.’ 하는 감격에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군부독재의 연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름하여 민주적 선거에 의해 당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마어마한 금전의 살포와 그리고 엄청난 부정선거와 회유들이 판을 친 공정하지 않은 선거였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민주 인사들의 찢어진 여론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긋지긋한 군사 독재 그와 비슷한 시대를 끝내고 이제는 너무나 사람들이 민주를 갈망했기 때문에 평생을 민주의 투사로 살았던 사람들을 최고 지도자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장로였고 그래서 갑자기 기독교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정권을 잡았다고 하는 엄청난 기대감에 교회는 들떴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족들이 감옥에 가고, 그 끊임없는 뇌물과 부정에 얼룩진 정권이었고, 정직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거니와 국가를 운영할 능력도 모자라서 IMF라는 초유의 사태를 만나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가족들은 파산을 하게 되고, 우리는 눈물겨운 고통의 시간들을 겪었습니다.
이제 그런 우파 정권에 진저리가 나서 좌파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그런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좌파와 우파로 찢어지게 되었고, 그리고 서로를 미워하기를 적을 미워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미워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런 시기를 지나면서 너무 고통 받은 백성들은 이제 다시 우파 정권을 택했습니다. 경제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을 최고 지도자로 뽑았고,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제는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통치 철학은 별로 없었고, 그리고 온 세상은 공사판으로 뒤덮여버렸고, 그 공사 중 어떤 것들은 심각하게 국토에 문제를 일으켜서 재검토되는 단계에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혈세는 여러 가지 사업의 미명하에 낭비되었고, 그 빚은 국민의 세금으로 떠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은 본인도 감옥에 들어가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그리고 우리는 다시 좌파의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어느 파에 국가의 미래를 향한 절대적인 희망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포기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든지, 어떤 입장에 서든지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꼭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목사님은 우파입니까? 좌파입니까? 본인이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의식적으로 각파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함께 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치우치지 않으려고 그러면서도 매순간 전개되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확고한 자신의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광화문에 태극기를 들고 가라고, 혹은 서초동에 노란 풍선을 들고 가라고 지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옳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이 오늘날 우리 앞에 전재되는 현실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한 시민으로서 이 사회가 보다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가 되어서 모두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든지 이 사회가 하나님의 법에 합치된 쪽으로 가는 사회가 되도록 우리는 기여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면서 말 한 마디라도 하고, 태극기를 들 때도 생각하면서 들어야 되고, 노란 풍선을 흔들 때도 생각하면서 흔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의와 신실함과 자비가 하나님의 한 의에서 빛깔처럼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만 아닙니다. 세 개 모두가 나오는 것이 진정한 의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은 이 국가와 세계, 세계와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을 끊임없이 묻고, 내가 이 한국이라는 작은 땅덩어리에 태어나 잠시 있다 스러지는 것이 이 세계에 무슨 의미를 줄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보다 하나님의 의에 가까운 세상이 되게 하는 일에 이바지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열심히 가꾸어서 예쁘게 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을 위해서 이바지하고 생각하면서 살고 행동하고, 사회가 불의할 때 우리는 분명히 불의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공평하지 않을 때 우리는 분명히 공평하지 않고, 신뢰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자비롭지 않을 때 그것은 너무 잔인한 것이라고 우리는 분명하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발언과 우리의 이런 행동 때문에 사회가 조금이라도 의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접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주님과 함께 도래하게 될 그 완전한 하나님의 의의 나라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 때 벽촌에 사는 사람에게 버킷 리스트는 한양에 한번 가보는 것입니다. 한성에 한번 가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골에서 토굴에 살던 사람들이 한양에 올라와서 경복궁 앞에 섰을 때 그 느낌이 어땠을까요? 아마 장용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로마 시대 때에도 똑같았습니다. 인류 역사의 최대의 판도를 자랑한 것이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그 로마제국이 그렇게 엄청났는데 그 로마제국의 위대함은 로마시에 집약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에 로마에 대해 처음 공부하고 그 충격에서 몇 달 동안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로마를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로마라는 도시가 어느 정도이냐 하면 건축에 대해서는 이미 말할 것도 없습니다. 동양에서 본 건축들은 이에 비하면 건축물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웅장하고 어마어마합니다. 로마시 전체가 진흙으로 된 땅입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사람이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로마 전역을 30cm되는 쇠말뚝을 만들어 그것을 수직으로 박아서 로마 전체를 깔았습니다. 그래서 마차가 달려도 땅이 꺼지지 않게 만든 것입니다. 한창 때는 아침만 되면 골목마다 빵을 실은 마차가 나와서 배고픈 모든 사람에게 빵을 나눠주었습니다. 그것은 황제의 뜻이었습니다. 이 세계 최도의 도시인 로마의 심장부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아침을 굶고 배를 움켜쥐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로마의 수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황제가 살고 있는 로마에 가보고 싶어 했겠습니까? 그러나 당시 로마로 가는 것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엄청난 모험을 각오해야 하는 길고긴 여행길이었습니다. 황제는 로마가 얼마나 위대한 도시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너무나 멀어서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정복한 곳곳에 로마를 닮은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아시아 지역에 있는 빌립보라는 도시였습니다. 아예 설계될 때부터 로마시를 본떠서 도로와 건물들을 설계하고, 건물을 웅장하게 지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웅장했다고 하지만 로마의 수도를 축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라도 보기 위해서 빌립보시에 왔고, 빌립보시에 와서 감탄을 했습니다. ‘야, 정말 이 도시는 대단하구나.’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로마의 못 오는 사람을 위해서 대리 만족이라도 하라고 빌립보시를 만들어주었더니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그것을 보자마자 이것의 원형인 로마시는 얼마나 위대할까 하면서 오히려 로마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다이어트를 해야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 때에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간식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고, 초등학교 2학년때 처음 캬라멜이라는 것이 처음 나왔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바가지 과자, 뽑기, 강냉이 옥수수, 이런 것이 간식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단 것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달달한 것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애들이 학교 끝내고 와서 점심을 대충 먹고 골목에 와서 하루 종일 뛰어놉니다. 한창 배고플 때인데 저 골목 끝에서 가위를 쩔렁거리면서 엿장수 아저씨가 옵니다. ‘고물 삽니다. 파쇄 삽니다. 금이나 은 삽니다.’ 애들이 새카맣게 몰려갑니다. 그러면 아저씨는 잠깐 기다려라 하면서 뚜껑을 열고 엿판에서 딱딱 쳐서 손도 못 대게 하고, 조금만한 엿을 떼어서 입에 넣어줍니다. 배고프고 단 것을 못 먹던 아이가 이만한 호박엿이 들어가서 단 맛이 입안에서 퍼지면서 온 세포에 전달되기 시작하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고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이 쓰다가 마루에 내다놓은 책부터 시작해서 강아지 양은 밥그릇까지, 심지어 살짝 구멍이 떨어지려고 하는 할머니의 신발까지 모두 수거해서 엿하고 바꿔 먹습니다. 그날 저녁은 골목 여기저기서 얻어맞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로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를 보면서 사람들은 마지막에 도래하게 될 하나님의 의의 나라를 생각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맛보는 말씀의 희열과 은혜의 기쁨은 사람 입에다가 오후 늦은 시간에 굶주린 사람 입에 넣어주는 한 조각의 호박엿입니다. 이것을 먹고는 너무 이 엿을 먹고 싶은 갈망에 가득 차듯이 여기서 받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 감사하면서도 감질이 나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의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물 붓듯 쏟아지는 그 마지막 날을 목말라 하며 기다리게 만들어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를 의의 공동체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자기가 세상 사람보다 의로워서 의의 공동체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셔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 덕분에 하나님과의 사귐이 이루어지고, 예전에 몰랐던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폭포수처럼 교회에 쏟아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의무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세상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돈이나 권력이나 미모나 지위나 그런 것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알지도 못하는 이유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커다란 의무입니다. 그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사랑으로 정의가 완성되는지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의의 비밀을 터득하고 이렇게 여러분 안에서 의가 실현되고, 여러분의 이웃 안에서 그리고 사회 안에서 이런 의가 실현되는 사람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희생으로서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은 아무 공로 없는 우리에게 그 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우리 안에 이루어진 이 의가 이웃 속에도 이루어기를 바라고, 사회 속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이 세상에 살아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의를 이루는 것이 힘들 때마다 희생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다. 그리고 그 희생의 정신을 본받아서 우리 자신을 그렇게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의가 이 사회에 이루어지도록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염려에 관하여 (2019.11.03._주일오전 8)
8. 이 모든 것을 더하심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 : 3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인생은 염려 속에서 저물어 갑니다. 티 없이 해맑게 마음 깊은 곳에서 웃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인생의 99%는 비극이라고 말한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슬픔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90편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염려와 결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불안을 통해서 자기의 실존을 확인한다고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염려를 운명처럼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사라진 때에는 자기의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서 또 다른 걱정거리를 스스로 찾아나서 곤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염려는 우리 인생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고, 육체와 영혼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범위를 골고루 걱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염려는 대부분 육체에 대한 염려입니다.
II. 이 모든 것을 더하심
예수님은 신자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6장 33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말에 더하시리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프로스티테미’(prostithemi)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덧붙이다”, “더 받다”, 심지어 누가복음 20장 11절에서는 “다시 보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한 것은 이미 받은 것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먼저 주시는 것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먼저 주신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은 이미 받고 있는 혜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이 표현은 아주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서 모두 다 죽어가고 있는 그때에 죽음을 보지 않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에녹이었습니다.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이 심오한 표현은 신약 성경에 와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표현으로 전환됩니다. 그래서 17세기의 청교도 존 오웬 목사님은 그의 사후 출판된 유고집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것을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이고 가장 큰 관심사가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인해 즐거워하실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posthumous sermons, p.125).
하나님이 동행하는 삶에는 세 가지 결정적인 특징이 있다고 존 오웬은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평화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과 자기 자신 사이에 어떠한 이익의 불일치나 혹은 트러블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부릅니다. 평화의 상태는 사랑으로 모든 것이 일치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없고, 그가 원하는 일중에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없는 상태가 평화의 상태입니다. 이 평화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는 결정적인 특징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입니다. 그러면 이 평화는 어떻게 수립되는 것일까요? 무엇에 의해서 이 평화가 깨지는지를 보면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볼 수 있습니다. 환란이나 위엄이나 칼, 심지어 죽음의 위협이라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것은 죄입니다. 죄 이외에 다른 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불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몰라서 잘못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과 평화가 깨지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무지해서 잘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지는 선택한 악입니다. 알지 아니하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무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결국은 넓은 의미에서 죄 때문에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평화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는 명확하게 됩니다. 첫 번째 평화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죄의 담장을 허물어 버리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쟁취한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죄의 담장을 무너뜨려 버리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뜨겁게 사랑으로 끌어 앉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우리가 구원 받을 때의 그 평화가 제일 먼저 수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평화가 조건을 가진 평화입니다. 그것은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죄를 버림으로써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죄가 없을까요?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누구도 그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혹은 신자라도 남아있는 죄 때문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해서 죄가 있는 것과 선택해서 의지를 가지고 죄를 짓는 것, 알면서 죄를 짓는 것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가볍게 감기에 걸려도 우리는 그것을 질병이라고 부르고 온 몸이 감염되어 침대에 눕혀져서 호흡기로 연명하며 중환자실에서 사망 날짜를 기다리는 사람도 질병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질병은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마찬가지로 전자의 방식으로 그렇게 피할 수 없이 죄가 있는 것과 자기가 죄를 선택하고 악을 행하면서 죄를 짓는 것 사이에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어쩔 수 없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죄가 남아있는 것 정도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결정적으로 깨드리지 못합니다.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즉 자기가 자신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자신에게 기쁨이 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자기는 가장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으로는 만족을 안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게 그의 나라와 의에 대한 갈망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새 생명의 원리’입니다. 새 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예전에 없던 생명이기 때문에 새 생명이라고 부르고, 예전에 있던 생명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른 생명이기 때문에 새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첫 번째 생명은 우리가 모태로부터 태어남으로써 첫 번째 생명을 부여받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육체와 정신과 모든 것을 움직이는 기능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영적으로 그는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뜻은 하나님 앞에 활기가 없다, 영혼으로서의 제 기능을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예수 믿게 만드셔서 두 번째 생명을 주십니다. 그게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새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원리적인 의미에서는 한번 심겨진 생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가 극단적으로 타락한다고 하더라도 새 생명은 항상 그에게 살아있습니다. 존 오웬은 이것을 불신자는 단일한 의지로 죄를 짓지만 신자는 복합적인 의지로 죄를 짓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어떤 경우에 죄를 지어도 마음 한구석에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또 다른 의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새 생명입니다. 이것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그것은 신자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는 이 새 생명은 조건적입니다. 즉, 믿음과 순종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이 생명은 매우 번성해서 그가 꿈꾸지도 못했던 삶을 살게끔 만들어 주는가 하면 불순종하고 불신앙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게 되면 그는 생명의 힘이 남아있지만 간신히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숨을 쉴 뿐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 생명은 조건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됐으면 어쨌든 이 새 생명이 자기 안에 풍성하게 역사해야 됩니다. 그게 인생을 가장 쉽게 사는 길입니다. 그러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하고, 끊임없이 말씀의 지식을 섭취하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제 3의 길은 없습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실험하면서 살아서 답을 못 찾은 이유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이 이미 주셔서 누리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면서 그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새 생명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쐐기 박듯이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 말씀은 지금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그 다음에 배가 부를 것이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조건과 조건을 만족시켰을 때 일어나는 성취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너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그러면 너는 배부르다”는 그런 뜻입니다.
B. 더하시는 것
그러면 여기에서 굳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라고 하면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것은 인간이 생존하는 일에 있어서 멈출 수 없는 것이고 육체를 위해 가장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금강산을 가자고 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먹고 나서 배가 불러야지만 구경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즉시 받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함께 걸어가는 삶입니다. 이런 신자라고 해서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불완전하고 자신은 아직 완전한 신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현실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소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행복 자체를 뒤흔들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육체를 위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을 위한 육체이지 육체를 위한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에게 진정한 로망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육체에 관한 한 가지 로망이 있습니다. 아주 멋있는 몸을 갖는 것입니다. 저도 여전히 그 로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헐크같은 근육 뚱땡이가 된 그런 몸을 부러워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바디빌딩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들의 몸매를 보고 그런 몸을 가져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적이 한 번도 없구요. 그런 몸으로 사느니 이 몸으로 살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몸은 주어진 키는 어쩔 수가 없고 딱 적당한 근육이 붙어 있어서 미세한 근육이 보이게 잘 다듬어진 몸입니다. 체형은 역삼각형이고, 배에는 초콜릿 복근이 식스팩으로 정확하게 나누어져 있고, 곁에서 보면 왕(王)자가 보이고, 슈트를 걸치면 물 흐르듯이 쫙 내려오는 그런 몸매입니다. 물론 목 위로는 우리 마음대로 못합니다. 이것은 다른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몸은 얼마든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드디어 내 앞에 진짜 내가 그리워하는 로망의 몸매를 가진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부러운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9시에 헬스클럽에 와서 오전에 흠뻑 운동을 하고, 싹 샤워를 한 다음에 자기 몸매를 거울로 한번 보고, 점심으로 닭가슴살을 먹고 와서 다시 오후 내내 운동을 하고 6시에 끝내서 샤워를 싹하고, 온몸에 바디 크림을 바르면서 좌우로 계속해서 자신의 그 아름다운 몸매를 보면서 아주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그 다음 일과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저녁을 간단하게 먹은 다음 내일 아침 일찍 헬스에 가기 위해서 빨리 잡니다. 남성분들, 여자는 이런 남자를 1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삶을 위한 몸이에요? 몸을 위한 삶이에요. 만약에 그 사람의 직업이 fitness 모델이라면 인정해 줄만한 구석이 있습니다. 촬영을 위해서 하는 거니까, 그리고 직업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30세 중반쯤 됐는데 부모님의 셋방에 얹혀살면서 매주 부모님에게 주급을 받으며 살아간다면 우리 중 아무도 그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하고 싶어요. 왜 매력을 못 느낄까요? 육체가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질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삶을 위한 몸이지 몸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그는 육체를 위해서 여전히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결혼을 했고 안했고, 좋은 직업을 가졌고 못 가졌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해서 훌륭한 대학을 나왔고 못 나왔고, 얼굴이 잘 생겼고 못 생겼고, 집에서 살림만 하고 직장을 다니고 이 모든 것은 삶의 양태입니다.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렇게 양태의 삶을 살면서 얼마나 인생에 본질을 구현하면서 사는가에 인생의 행복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드립니다. 열등감 갖지 마세요. 그것은 바보나 하는 일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여러분들을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내가 여기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친구와 비교하지 않고 그래서 열등감에 빠지지 말고 어제의 여러분과 비교하면서 반성을 하세요. 혹은 대견해 하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먹고 입고 마셔야 되지만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목적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를 위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의미를 위해서 염려합니다. 자유인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거기서 육체의 만족을 넘어서는 행복을 느끼고,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유언처럼 남기고 싶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더 해주시는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인들이 육체를 위해서 구했던 것들이고, 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더해주시겠다고 한 그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1-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것은 문학적으로 일종의 대유법입니다. 부분을 가지고 사물 전체를 나타내는 문학의 표현법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은 진짜 빵과 옷과 음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총칭하는 의미에서 그 대표로 입고 먹고 마시는 것을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야생 동물은 과식하지 않습니다. 더 넓게 보면 모든 동물은 거의 과식하지 않습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를 일으키고 죽었다는 돼지를 본 적이 있습니까? 돼지는 배부르면 딱 끝입니다. 개는 종종 분수없이 먹어서 소위 옛날 어른들이 얘기하는 ‘짜구’가 나서 그래서 죽는 경우를 가끔 봤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함께 하고 나서 생긴 현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야생 동물은 과식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자는 배고프기 전에는 자신이 위험을 느끼지 않는 한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먹이를 사냥에 성공하고 나면 아무도 접근하지 않게 독차지하면서 포식합니다. 그리고 식구들을 불러서 같이 먹습니다. 그리고 배부르면 떠납니다. 그리고 그 하위의 동물들이 와서 먹습니다. 하이에나나 다른 들짐승들이 와서 먹고 마지막에 새들이 와서 먹어서 청소가 끝납니다. 북방에 사는 호랑이는 다릅니다. 그들은 식량의 결핍을 많이 체험했기 때문에 그 사냥을 한 고기를 감추어 두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장소를 찾아가서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 산에 도토리나무가 이렇게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다람쥐가 도토리를 먹고 감추어둡니다. 땅을 파서 묻어두고 못 찾습니다. 그것이 이 도토리나무가 번성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재미있죠? 모든 동물들은 과식하지 않습니다. 배가 불뚝 나와서 뒤룩뒤룩하는 호랑이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배에 기름기라 많이 껴서 허리가 많이 늘어난 균형을 잃은 사자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항상 날씬하게 살다가 날씬하게 죽습니다. 결코 과식하지 않습니다. 3일 후에 굶주릴지언정 오늘 과식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다릅니다. 모든 동물은 두 개의 목적을 추구로 해서 그의 활동이 규정됩니다. 자신의 생명의 보존과 그 다음에 종족 개체의 번식, 이 두 가지를 추구로 모든 행위들이 결정이 됩니다. 인간은 안 그렇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과 개체를 증식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높고 심오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수많은 동물들에게서 볼 수 없는 악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먹을 것은 단지 배부르기 위한, 그리고 입을 것은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한, 마실 것은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신비로 가득 찬 오묘한 기쁨을 모릅니다. 그래서 더더욱 결국은 육체의 만족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이 주님의 가르침은 최소한 다음 세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거래가 아님
첫째는 상업적 거래가 아닙니다. “네가 나를 섬기면 그 대가로 내가 이만큼 주마. 그러니까 이 대가를 기대하면서라도 너는 날 위해 일하라.” 이런 상업적인 거래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구하라라고 하는 이것은 시간적인 순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순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한 그 말씀은 ‘그리고 나서 너의 육체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오히려 단정적으로 그 나라와 의를 추구하라 그것 이외에 딴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 뜻입니다. 문학적으로 그런 의미입니다.
한때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번영 신학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그는 부자가 되는 일에 1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해지고 싶은 열망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여전히 부자가 되고 싶은 갈망이 남아있으면 그는 결코 예수를 잘 믿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할게요.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그는 부자가 되는 것에 1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고 싶은 열망을 계속 간직하고 있으면 결코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 개의 명제는 동격으로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인 사랑의 대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 그러면 이 세상에서 그 여자를 제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는 그 여자와 일반 사람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많은 여자들 중 그를 비교적 제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 한 여자 이외에 모든 사람은 그냥 사람입니다. 어떤 여자를 만나도 이성의 감정에 동하지 않습니다. 성의 균형을 이루어야 된다고 그래서 반대 예도 들겠습니다.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면 한 사람만 남자고 모두는 사람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분만 사랑의 대상이고 나머지는 그와 동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종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구하라는 말은 무엇을 추구점으로 삼느냐와 관련된 것입니다. 신자는 세속적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진심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면 그는 세속적인 이익에 대한 갈망을 결코 가질 수가 없고, 세속적인 갈망을 계속해서 갖고 있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동기는 두 개도 아니고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가르침은 이것은 상업적인 거래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결과입니다.
2. 목표의 질서
두 번째는 목적과 목표 사이의 질서입니다. 목표와 목적은 다릅니다. 목적은 궁극의 개념이고, 목표는 그 궁극에 이르는 수단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목표와 목적사이에는 방향의 일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하나인 것은 아닙니다. 목표는 가치에 있어서 목표를 아무리 많이 합쳐도 목적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주목해 봅시다. “목표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실제적 대상으로 삼는 행동이나 그 대상 자체를 가리킨다” 이게 목표입니다.
다소 철학적으로 보이는 이 개념을 죽을 때까지 잃어버리지 않게끔 여러분들의 마음에 한 장의 그림을 그려 드리겠습니다. 그 그림은 전쟁의 그림입니다. 한 나라와 또 다른 나라가 물러설 수 없는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다가 결국은 서로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상당기간 계속되었지만 두 나라 중 한 나라도 망하면 망했지, 멸망하면 멸망했지 우리는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전면적으로 번졌습니다. 전선이 형성되었고 그래서 수많은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전투가 목표라면 전쟁은 목적입니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하는 것이고, 목표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이바지하기 위해서 하는 살상행위, 그것이 전투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전투에서 많이 이기면 그것은 반드시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전투에서 싸운 사람들 그 나라는 그 은공을 잊지 않고 칭송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 A국과 B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서 10개의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A국이 세 개의 전투에서 이겼고, B국이 7개의 전투에서 이겼습니다. 어느 나라가 승전국이 될까요? 생기발랄하게 반응을 해보세요. 어느 나라가 승전국이 되겠습니까? 뭔가 함정이 있는 것 같지요? 맞았습니다. 개수로는 7개의 전투에서 이겼는데 그것은 20명, 30명, 많으면 200명 300명이 한 전투였는데 세 개의 전투는 일 만명, 이 만명, 삼 만명이 서로 맞부딪힌 전투였습니다. 7개의 전투에서 패했어도 세 개 전투에서 이겼기 때문에 결국은 그 이긴 나라가 승전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투는 목표고 그 다음에 전쟁에서의 승리는 궁극적인 목적이 됩니다. 그래서 전술학에 나오는 기본 교과서를 보면 전쟁에서는 승리와 바꿀 수 있는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전쟁의 목적입니다. 거기에는 대목표, 중목표, 하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는 각각 중요도에 따라서 수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위의 목표는 반드시 상위의 목표 달성에 이바지하는 성격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이것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모여서 마지막에 전쟁에 승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목표와 목적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인생에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고 잘 입고 마셔서 육체를 보호하는 것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위의 목표입니다. 그 목표 사이가 뒤집힐 경우에는 말할 수 없는 인간의 추함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것이 추함입니다. 더러움입니다. 아주 그 추함의 본질은 결국은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역겨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그게 바로 그 목표의 질서, 목적과 목표 사이의 관계가 이탈되는 것입니다.
다소 철학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문제는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칼빈은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본질을 ‘선하게 질서 지워진 삶’이라고 보았습니다. ‘질서 지워진’이라는 말은 수동태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서 그것이 질서 지워진 삶, 예전에 불신자일 때에는 이 질서가 아무렇게나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과 목표를 뒤집어 버리고 상위 목표와 하위 목표를 전복시켜버려서 뒤죽박죽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냥 잠시이고, 그런 사람들의 대가는 말할 수 없는 혼돈입니다. 순간순간 반짝이는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처럼 순간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손에 아무것도 쥐는 것이 없습니다. 젊을 때 반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목표와 목적 사이의 질서, 상위 목표와 하위 목표 사이에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는 육체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서 육체를 영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먹고 입고 마시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최소한의 생명 유지를 위한 떡, 최소한의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의복, 그리고 최소한의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는 음료만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아시시의 프란시스는 밥상을 받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한줌의 재를 모든 음식위에 뿌리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음식의 맛을 혀가 못 느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그가 가지고 있는 휴머니즘 정신에도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지 이제 설명을 드릴 테니까 도움이 되니 들어보세요.
사람이 먹고 싶은 것이 있고 입고 싶은 것이 있고, 마시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데 인간이 게을리 할 수 있는 일에는 즐거움을 주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게 인간의 성생활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즐거움을 주지 않으셨다면 인구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심각하였을 것이고 결국은 소멸의 단계를 밟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는 피임이라는 것이 없었으니까 지금과는 또 달랐을 것입니다. 이야기하면 긴데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면 먹는 것을 이야기 합시다. 건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미각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미각은 오감이 모두 모이는 곳입니다. 음식을 보고 배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보기 좋아야 되고, 맛있는 냄새가 나야 하고, 씹을 때 소리가 아주 좋은 소리가 나야하고, 그리고 식감이 좋아서 촉각이 아주 만족스러워야 됩니다. 그때 그 음식에 대해서 아주 애착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먹습니다. 그 욕구를 느낍니다. 그 욕구를 느끼는 것이 낚시 바늘처럼 되어서 계속해서 그 몸에 음식을 넣음으로써 하나님이 그에게 건강을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입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거나 입어도 다 마찬가지라고 여긴다면 사람들은 자기 몸을 잘 보호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주 피부가 예민해서 옷을 제 2의 피부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같은 값이면 감촉이 좋은 것을 원하고, 색깔이 좋은 것을 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것을 원하고, 그리고 여름에 시원한 재질을 원합니다. 그리고 위생적인 재질을 원합니다. 그런 욕구를 가지고 있어서 그 욕구가 충족될 때 인간이 만족감이 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욕구를 느끼는 것을 통해서 그의 몸을 아주 잘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감각을 사용하여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주고, 겨울에는 아주 따뜻하게 해주고, 옷이 너무 무거워서 체력을 소비하지 않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음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질의 음료를 구하는 욕망을 사용하셔서 그의 신체를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게 정도를 넘어서 그것을 추구하게 된다면 점에 있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그것을 뛰어넘어서 보다 더 높은 무엇인가를 구현하려고 하는 데서 인간의 많은 타락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욕구 자체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몸이 약해져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을 때는 이게 얼마나 중요하고 감사하게 된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와 목적 사이의 질서를 만들어 주는 것을 결국 사랑입니다. 어떻게 사랑이 이 질서를 찾아가게 만들어 줄까요? 자, 너무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혹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너무 사랑합니다. 완전히 사랑에 빠졌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인류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 인생에 세워놓은 모든 계획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 여자가 혹은 그 남자가 하고 싶은 것이 나에게 아주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아야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유학을 가고 싶은데 그 사람을 따라 국내에 머물러야 될 수도 있고, 나는 여기서 엄마 곁에 살고 싶은데 그 사람을 따라 이민 생활을 해야 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은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큰 희생이 아닙니다.
사랑 그 자체는 질서를 재편하는 힘이 있어야지만 진정한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날 사랑하는지 알아보려면 질서가 재편되는지를 보면 그게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잠깐 만나고 환승할 사람들은 그렇게 재편 안합니다. 그냥 만나는 것을 즐기다가 끝나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니까 그렇게 삶 자체를 뜯어고쳐서 재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사람을 향할 경우에는 그 질서가 완벽하게 진리와 일치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부분의 사랑이지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진리를 향한 사랑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진리와 함께 합니다. 진리를 기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 진리가 조성하는 질서에 의해서, 사랑의 목표와 질서에 따라 대목표와 하목표 사이에 완벽한 질서가 한 번에 확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적어도 최소한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때에는 그러한 질서가 쫙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나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 되고, 하나님께서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의 행복을 하나님의 왕국의 소명에 앞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 신자는 자기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3. 사랑의 신뢰
마지막 세 번째는 사랑이 가지고 있는 신뢰의 요소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이 말씀은 상업적인 거래가 아니고, 그것은 결코 그것은 목표와 목적 사이에 있는 질서를 염두에 둔 개념으로 이해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요소가 사랑 속에 있는 신뢰의 요소입니다. 사랑은 신뢰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신뢰할 수 없으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방면에서 그 사람을 모든 것을 믿어버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돈을 헤프게 쓰는 그 본성을 보면서 너에게는 돈은 못 맡기겠다고 하는 것은 사랑하고는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이 내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지는 모르지만 염려하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6장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뭐가 꼭 필요한지 알지 못합니다. 결코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 꼭 갖고 싶어 하고, 꼭 가져야 할 것인데 갖고 싶지 않은데서 인간의 불행이 계속 생성되는 것입니다. 설령 올바르게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아는 것을 모두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세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은 인간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현실을 이겨야 한다면 그런데 도저히 현실 감당할 수 없다면 딱 두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현실을 바꾸든지, 그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기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가슴 아픈 예화지만 들어볼게요. 너무 서로를 사랑하던 부부가 있습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12년 동안에 애를 6명을 낳았습니다. 큰 아이가 12살이고 막내 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 자매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현실을 바꾸든지 아니면 현실을 살아갈 힘을 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요? 물론 고아원 6개를 알아보는 것도 방법일 수 있어요. 엄마가 할 일은 아닙니다. 성차별 때문에 남자의 예를 똑같이 들겠습니다. 6명의 아이를 남기고 젖병을 겨우 빨고 있는 아이를 두고 아내는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빠는 어떻게 할까요? 현실을 바꾸든지 아니면 살아갈 힘을 내야 될 것입니다. 6개의 고아원을 생각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버지로서 자랑스러운 선택지는 아닙니다.
현실이 여러분들이 힘들게 하면 고치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것도 안하고 계속해서 투정을 부리고 다른 사람에게 기대려고 하고, 계속해서 자기 불만을 쏟아놓고 심지어는 자기 모욕에 빠지는 것은 패배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평하고 투덜거리고 자기가 타고난 조건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자기를 미워한 결과로 무슨 도움을 좀 받았습니까? 없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어난 6명의 아이가 있다는 현실은 변경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그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장모님도 오라고 그러고, 그 다음에 처형도 가까이 와서 좀 살라고 하고, 좀 시간제라도 자기 아이를 봐달라고 하고, 자기는 full time 일에서 하프타임으로 바꾸고 아이를 양육하면서 사는 게 현실을 개선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을 개선하는 방법은 그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돈이 없다면 벌기 위해서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낭비한 적은 없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절대로 가난한 엄마 아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을 가지고 다시 문제를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패배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엄마 아빠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것을 원망하고 있으면 여러분들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도 몇 번은 들어주지만 나중에 지겨워합니다. 아무도 도움 받지 않을 일을 왜 합니까? 그것은 바보나 하는 일입니다. 너무 힘드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털어놓고 울 수 있습니다. 그런 정도의 인간미도 없어서 되겠습니까? 그것도 어쩌다가 한번입니다. 매일 그런 식으로 인생을 위로 받으면서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외로워하지 마세요. 인생은 어차피 외로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을 그 마음 심연 깊은 곳에 들어와서 완벽하게 안아주고 이해하는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있는지 물어보세요. 여러분들도 못하는 것을 누구에게 강요를 합니까? 그것은 가족이라도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내가 한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고독한 실존으로 서 있는 그것은 공감 못하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니고, 공감하는 것이 신비한 것입니다. 이해 못합니다. 원래 외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외로움 때문에 그렇게 하면 너무 미성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노력을 하세요. 그래서 적어도 내가 내년에는 누구를 의지하면서 살지 않아야 되겠다. 건강을 잃어버렸으면 낭비한 것을 반성하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건강을 위해서 애를 쓰고, 지식이 모자라면 지금이라도 책상에 앞에 앉아서 책을 읽으세요. 그리고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면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도 의미를 찾아가는 한 수단이지 의미 그 자체는 아닙니다. 열등감 느낄 필요 없어요. 이웃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비교를 하면서 반성을 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째 방법은 현실을 바꾸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도저히 현실을 바꿀 수 없고 심지어는 결코 손댈 수 없는 현실이라면 그러면 그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둘 중의 하나도 안합니다. 그리고 계속 슬픔과 염려, 시름에 잠겨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주 공간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외톨이 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엄마도 해결을 못해줍니다. 엄마는 여러분들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어요. 그런데 도움이 안 됩니다. 여러분의 남자친구도 심장을 떼어줄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해결 못합니다. 누구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혼자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인생은 오묘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는 것보다는 알지 못하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꽃길만 걷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그렇게 걷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SNS에 있는 것 같다구요? 가시밭길을 걷는 중입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믿지 마세요. 여러분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니라는 것 여러분의 마음이 증명하잖아요. 그렇게 인생을 생각하지 마요. 그래서 인생은 오묘합니다. 신비한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번 우리들이 살아온 인생의 날들을 돌아보세요. 정말 행복하고 싶었죠. 그리고 만족을 위해서 살고 싶었죠.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어요. 상한 갈대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그것을 꺾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요? 꺼져가는 심지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이 그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했을 수가 있을까요?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그렇게 들풀조차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들풀 같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그 들풀에 깃든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구요.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가 되어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떨어뜨리지 않고 먹이시는 하나님을 긍휼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함으로 가득 찬 신비, 그런 모든 속에서 확실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실뿐 아니라 실현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지고, 때로는 직면하기 싫은 현실이 있어도 그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며 궁극적으로 그 나라와 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먹고 입고 마시는데서 오는 육체의 감각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양한 삶의 상황들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연단과 시련 속에서 그릇된 삶의 동기를 버리도록 우리를 순결하게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무한한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그렇게 염려하면서 그렇게 사람 의존적으로 자유함이 없이 그렇게 살게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면서 살 때 모든 필요한 것을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인생의 의미는 먹고 입고 마셔서 육체의 무한한 만족을 누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실현하는 일에 이바지하면서 사는데 있습니다. 그런 신자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삽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육체의 필요한 것들을 요구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나 그것에 매인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것을 더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유인이 되십시오.
9. 오늘 염려하지 말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염려에 관한 가르침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세속적인 염려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실한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모든 염려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길은 인생의 목표를 올바르게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고 믿는 것에서 우리는 염려를 벗어날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II. 오늘 염려하지 말라
A. 내일을 위한 염려
염려에 관한 이 유장한 가르침을 마치신 후 예수님은 34절을 결론으로 제시하십니다. 그 내용은 내일 일을 위하여 오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내일 일을 위한 염려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오늘 이미 닥친 일은 지금 근심하든지, 그 근심을 극복했든지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내일이라고 하는 그 표현은 진짜 물리적인 내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속하는 모든 날들을 가리키는 문학적 수사입니다.
즉, 말씀의 요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미리 근심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본문 34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가르침의 결론을 내시듯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염려하는 동작의 주어는 내일입니다. 염려라는 것은 인간과 같은 불완전한 인격체가 할 수 있는 정신의 작용이니 내일은 결코 염려하는 것의 주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렇게 우리는 내일 일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고, 그 염려는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욕망이 있는 한 인간은 염려와 결별할 수 없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원하는 데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 있게 마련이고, 그 둘 사이의 차이만큼 우리는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격차가 육신이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대한 염려이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삶의 굴곡들을 지나는 나그네 길과 같습니다. 지나간 일은 후회해야 바뀔 수가 없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걱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음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염려는 불합리한 것입니다.
1. 아직 발생하지 않았음
첫 번째는 내일 일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염려의 대부분을 상상 속에서 먼저 경험합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면서 근심에 잠기는 것입니다. 욕망하는 바에 대한 집착이 크면 클수록 인간의 염려는 더욱 심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염려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매우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데 예감으로 그치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그런 케이스는 별로 기억에 담지 않고 예감대로 맞아 떨어졌던 일을 오래도록 기억이 붙잡으면서 그런 감정으로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을 감정의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 때문에 염려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2. 도움이 되지 않음
두 번째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염려함으로 염려가 해결된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염려할 필요가 없다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안 일어날 일은 반드시 안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실제 신체의 키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연장되는 목숨의 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키가 더 크거나 혹은 죽을 날을 며칠 더 연장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염려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능력 범위 안에 있고, 언제든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돈이 넉넉한 사람은 작은 돈을 써야 하는 것 때문에 근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바라는 바는 있지만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모자랄 때 하는 일이 바로 염려입니다. 이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몸을 상하게 하고 마음까지 병들게 만드는 아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17장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많은 날들을 근심과 염려로 태우며 살았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염려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 염려가 매우 해로운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반복되는 염려는 끊임없는 불안을 가져오고, 불안은 좌절의 경험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런 반복되는 좌절의 경험을 거쳐서 소위 심리학에서 말하는 핵심 감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핵심 감정이란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핵심 감정(nuclear feeling)이란 한 사람을 지배하는 주도적 감정이다. 모든 사고와 정서, 행동과 습관을 그것에 맞게끔 작용하도록 지속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감정이다.” 불안을 해소하지 못할 때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이 불안의 감정은 결국 두려움을 우리의 핵심 감정으로 남기게 됩니다. 핵심 감정은 감정중의 하나이지만 모든 것 위에 주도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감정입니다. 이 감정은 하위의 감정에 스며들어서 모든 것을 그렇게 해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젊은 여성에게 아주 멋지고 훌륭한 남성에게 프로포즈를 받는 것은 로망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왜 동의를 안 해요? 그런데 정말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하고 사귄다는 것이 무섭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좋아하는 감정이 그 두려움이라는 핵심 감정에 조정을 받으면서 그 기회를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볼까요? 분노가 한 사람의 인격에 지배적인 감정이 되면 그 사람이 정의를 생각할 때 자기가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주 격렬한 대상 파괴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정의는 사람과 사회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 정의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고, 그래야만 사회가 사회다운 사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정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하는 공평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싹 쓸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파괴적인 분노의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핵심 감정이 될 때 그 하위의 감정들은 그것의 지배를 받으면서 각각 그 통제를 벗어나지 못한 채 굽어져서 발산되는 것입니다. 이게 심리학에서 말하는 핵심 감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이 핵심 감정이어야 하는가? 핵심감정 같은 것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 인격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에 의해서 정의가 해석되고, 정당한 공포감이 해석되고, 도전정신이 해석되고, 사람들과의 비교 의식 같은 것들이 사랑에 의해서 해석이 되어서 어떠한 감정도 하나님의 그 사랑을 벗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지만 조화로운 인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쁜 일이 있었다고 해서 그 일을 겪은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의 모든 정신과 우리의 판단을 지배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내일을 위한 염려는 우리의 내일을 위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
세 번째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염려는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염려도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과 꼭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 한 여성이 어떤 남성 한 사람을 뜨겁게 사랑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뼛속까지 깊이 타들어가는 사랑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녀는 그 한 남자위에 이 세상의 다른 아무것도 중요한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자기가 관심을 갖는 그 대상에 아주 비상하게 집중하게 하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려도 자기 사랑의 변형이기 때문에 염려는 어떤 문제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렸을 때 만약에 시골에서 자랐다면 그런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여름날에 아이들과 함께 장난치며 놀다가 그리고 진흙에 빠졌습니다. 진흙에 점점 빠져서 다리도 들어가고 그 다음에 허벅지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허리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벗어나오기 위해서 막 몸부림을 치면 진흙과 몸 사이에 간격이 생기면서 몸은 더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절대로 자신의 혼자의 힘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건져주어야 합니다. 염려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상하게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자기가 걱정하는 한 문제에 꽂히게 만들고, 그것밖에 인생의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끔 우리를 유도합니다. 그리고 막상 근심하면 진흙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우리의 몸처럼 그렇게 점점 더 늪 속으로 빠져드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염려를 많이 하는 사람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걱정할 것 같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분야가 다릅니다. 그러니 본질적인 문제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게으르게 살아가고, 지엽적인 문제 먹고 입고 마시는 것, 그것 때문에 고민하며 문제에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따라 살면서 행복을 누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의 삶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나의 인생을 나의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그리고 나의 선택에 따라서 그것을 결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여기에 인간의 참된 의미가 있다고 보고, 이렇게 올바르게 자기로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그 일을 가장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결국 내일을 위한 염려는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 기쁨을 앗아감
네 번째는 보다 더 심각한 것인데 우리의 기쁨을 송두리 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그리고 누려야 하는 인생의 기쁨을 송두리 채 빼앗아 갑니다. 실제적으로 인간은 아무리 커다란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늘 한없는 긴장 속에서 살지는 못합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탁월한 정신력으로 자신의 세계에 집중하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기껏 해봐야 위선, 그렇지 않으면 남들에게 부끄러운 중독, 음란, 이런 것들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결국은 상상속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분리되는 삶을 사는 것이 고작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위대한 인물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창조된 사람일 뿐입니다. 모든 강함과 약함을 함께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적인 행복과 점적인 행복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적인 행복은 오늘 끊임없이 희생하고 양보하면서도 얻을 가치가 있는 미래의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치로 주어지는 대부분의 행복은 이런 선적인 행복입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누가 감히 나는 드디어 오늘 훌륭한 사람이 되었도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승리하는 신앙, 어제 비로소 내가 그것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나는 이런 승리하는 생활을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다고 확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것이 선적인 행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훌륭한 사람이 되고 승리하는 인생을 마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애쓰고, 그 미래에 있는 것을 매일매일 추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선적인 행복이 인간의 유일한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점적인 행복입니다. 매순간 인생의 시간을 지나면서 그 시간의 지점에서, 그 공간의 지점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좋은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선적인 행복이 만약 한 사람이 자기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면, 점적인 행복은 그렇게 보따리를 들고 고향집을 찾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덕을 넘을 때 눈앞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광에 시 한수 적는 것이 점적인 행복입니다. 주막에 들러 한 잔의 술과 음식으로 지친 몸을 달래고, 나그네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점적인 행복입니다. 그 나그네는 그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시 한수를 적고, 그리고 그늘에 누워 잠시 쉬기도 하고, 주막에 들러 동행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신이 가야할 곳이 고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졌다고 거기다 집 짓는 사람은 진정 본향을 찾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그리고 주막집이 좋다고 거기서 영원히 거주하겠다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인생에 대한 이 두 가지 행복에 대한 가르침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저도 신앙의 초기에는 그런 균형을 잡을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 있는 것들을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쓸어 붓고 그리고 자신은 끊임없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채찍질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을 알았습니다. 특히 청교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경멸하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쳤고, 그런 가르침을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하는 그런 실수도 있었습니다. 전도서 2장 11절은 인생살이가 헛되고 무익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같은 지혜자는 9장 9절에서 그렇게 헛된 날에 즐겁게 살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세속적인 일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러나 성경은 또한 그렇게 젊어서 취한 아내와 함께 즐겁게 인생을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가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떠한 혼란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점과 선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높은 정신력으로 무한대의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오직 천상에 있는 한 가지만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묘사할 때는 묘사하는 사람에 의해서 그가 너무 영웅시 되었거나 불완전한 점들이 간과되었기 때문에 문학적으로 그런 그림을 우리에게 그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전기는 항상 허풍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천상의 거룩한 기쁨으로부터 소소한 일상의 기쁨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삶을 살아갈 격려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오늘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염려는 이 모든 천상의 기쁨으로부터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까지 모두 앗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비관으로 물들이는 것입니다.
꽃처럼 향기 나는 인생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박수와 갈채를 보내는 인기 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두 눈 아래 아주 심각한 질병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두 눈알을 수술해서 제거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뇌가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질병에 걸렸습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은 시력을 잃고도 살기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의사가 마지막으로 찾아와서 침대에 누워 있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환자님, 마음을 강하게 가지십시오. 내일 10시에 수술하겠습니다.’ 이미 너무 많이 슬퍼했고 울었기 때문에 울 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근심 속에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병원 뒤뜰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커튼을 걷어보았습니다. 가을의 밝은 햇살이 내리꽂히고 거기에서 아주 아름다운 정원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사이사이 평화롭게 나뭇가지를 오가는 새들이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창문을 열었습니다. ‘음…. 하! 이것이 내 인생에 보는 마지막 풍경이구나.’ 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그 전까지 평범하던 모든 것들 중 아무것도 평범하지 않습니다. 구르는 돌멩이 하나, 떨어질 듯 매달려 있는 나무 잎새 하나 그리고 여기저기 부딪히고 찢어진 나무 둥치 하나도 아무것도 새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내 인생에 보는 마지막 풍경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모든 것을 가지고, 그리고 모든 것을 누리는 화려한 삶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타이르십시오. 그리고 한번 일상을 벗어나 단풍으로 물든 아름다운 산자락 앞에 서보십시오. 손을 벌리고 심호흡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한번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을 마음에 담아보십시오. 물감을 뿌려놓은 듯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거기에서 빛나는 가을의 태양, 그 빛을 받으며 빨갛게 노랗게 물든 단풍 잎사귀들을 봅니다. 이것들이 만약에 하나의 악기라면 눈앞에 펼쳐진 숲은 교향곡과 같습니다. 그 울긋불긋한 것들이 펼쳐지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냅니다. 변하는 그것들 때문에 너무 아름답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곱게 물든 단풍이 따로는 늦은 봄에 꽃들로 가득 찬 동산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깊이 느낍니다. 변한 그것들이 변한 색깔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아무리 계절이 바뀌어도 상록수들이라는 것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변화하며 어린 아이처럼 춤추는 단풍들 뒤에서 빼곡하게 푸른 숲으로 배경을 이루고 있는 상록수들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노랗게 물든 단풍 한그루나 새빨갛게 물든 단풍 한 그루나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이름 없이 묻혀있는 한 그루의 상록수라도 우리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깊은 살아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감격을 누립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이 광경, 지난날 수없이 무시하고 살았던 이 광경이 결코 평범한 광경이 아니라는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즐거운 순간들이 없다면 일평생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처럼 그렇게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일생을 시련과 고난 속에서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누구도 의지하신 흔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당신의 공생애를 다 바쳐서 사랑하고 정성껏 키웠던 제자들이 당신을 버렸는데도 상처 받으신 광경을 어디서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남의 일처럼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돌이킨 후에는 네가 형제들 굳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어떠한 기쁨도 없는 생애였을까요?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생애는 고난과 아픔이 점철된 생애였을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거짓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눈물로 자신의 연대기를 쓰셨습니다. 피로 자신의 연대기를 채우셨습니다. 그러나 들에 핀 백합을 보시는 순간 그분은 기뻤습니다. 그 백합화의 모습이 아름답기를 솔로몬의 모든 옷으로 입은 그 영광보다도 더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들풀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셨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바라보는 순간이 그분에게는 기쁨이었으니 창고도 없고, 곡식을 뿌리지도 않는 그 새가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공급받고 사는 것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그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 속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아끼시던 나사로의 집안 식구들과 어울려 한 끼 식사를 나누는 것은 예수님에게 얼마나 기쁜 시간들이었을까요?
그렇게 죄가 없고 완전하신 분도 순간순간의 기쁨을 자신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기회로 삼으셨다고 한다면 그분만 못한 우리같이 연약한 사람들에게야 얼마나 많은 기쁨과 일상의 위로가 필요하겠습니까? 하늘의 신령한 기쁨으로부터 매일매일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소소한 즐거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 모든 것들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우리는 잊지 않는 것입니다. 즐거움이 없다면 과연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아끼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염려는 이런 모든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게끔 격려하는 기쁨들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입니다.
작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한 염려로 오늘을 물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매일매일은 한 장의 하얀 도화지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 우리는 우리 소신껏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며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를 스케치북을 채우듯이 쌓아가며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없고, 아무리 잘 그리지 못해도 누구든지 하얀 도화지를 받고 싶지 누군가가 검은 물감으로 범벅을 해놓은 도화지를 받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염려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비웃듯이 오늘 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고, 기뻐할 것들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슬기로운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그날로 족한 괴로움
두 번째는 한날의 괴로움이 그날로 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마음과 함께 현실을 받아들이고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예수님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본문 하 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하)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1. 괴로움이 있음
첫째는 인생의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인정 하신 것입니다. 친히 죄 없으시지만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사셨고, 우리처럼 그 모든 시험을 한결같이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생의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에 괴로움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를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이것을 ‘trouble’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괴로움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헤 카키아’(he kakia)라는 단어입니다. 카코스(kakos)라고 하는 형용사는 ‘악한, 나쁜’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카키아는 ‘악, 나쁨, 재난 해로움, 고통’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선(善), 좋음(goodness)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나쁜 것, 행복하게 하지 못할 것, 불행한 것,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은 이미 자신의 삶 속에서 그 행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인생의 현실은 선한 것만 있지도 않고, 악한 것만 있지도 않습니다. 공정하게 말해서 우리의 인생에는 선과 악 그리고 즐거움과 괴로움, 좋은 일과 나쁜 일들이 섞여 있습니다. 좋은 것은 하나님 때문에 좋은 것이요, 나쁜 것은 우리가 그것을 나쁘게 했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만나는 매일 매일의 나쁜 일은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또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이고 나 자신이 한 인간으로 온전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인생에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는 낙관은 언제나 나쁜 일만 일어나고 말 것이라는 비관만큼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이 두 가지 일들이 언제나 섞여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공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낙관주의는 무엇일까요? 분명히 나쁜 일이 일어났는데 그걸 애써서 외면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들끼리만 연결해서 과거에 그렇게 좋은 것들이 일어났고 지금도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앞으로도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팩트가 아닙니다. 비관주의는 나쁜 일을 많이 기억에 붙들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 분명히 많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기억이 붙들려고 하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쁜 일들의 기억을 끊임없이 선분으로 이으며 기다란 연결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나쁜 일들이 과거에 일어났으니 지금도 매우 나쁜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에 나의 인생에 참된 소망이 있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인생에 대한 공정한 생각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낙관주의는 인생을 너무 가볍게 만들고, 그리고 심각한 비관주의는 무엇인가 살아볼 인간의 힘을 빼앗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공정한 것은 이것입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섞여 일어나는 현실을 그냥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흔들리지 않는 주체로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주체 없이는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치는 어떻습니까? 주체가 없는데 무슨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사랑을 받을 때 가장 사람답게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를 행사할 수 있다고 믿어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이 예상하지 못한 타격이 되지 않도록 준비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심한 통증을 느껴서 아픈 배를 부여잡고 병원을 갔습니다. 의사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동료의사 몇 사람을 불러서 알 수 없는 전문 용어를 쓰며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MRI 실로 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결과가 나왔습니다. ‘폐암 말기 중에 끝에 와 있습니다. 병원으로서는 손 쓸 것이 없고, 한 달 정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거꾸러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내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하고, 아무것도 새롭지 않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비관주의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일어나기를 두려워하는 일이 있다고 칩시다. 여러분들은 분명히 그런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 하십시오.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런데 일어나면 어떻게 할까요? 그래서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고 기도하되 이런 마음도 괄호 안에 넣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도 일어난다면 일어나라고 그러세요. 난 괜찮다 하시면 됩니다. 인생의 전개될 미래 앞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며 쳐다보지 말고 내가 그 위에 있는 것처럼 허리 뒤에 두 주먹을 쥐고 깔보듯이 내려다보면서 외치십시오.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 그런데 정말 일어난다고요? 그러면 일어나라고 하십시오. ‘괜찮아. 원하지 않지만 일어난다면 발생하라고 해라. 어차피 잠깐 살다가 죽는 것인데. 그리고 내가 너무 힘들 때는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하고 살았는데 일어나라고 해라 하나도 안 무섭다. 나는 계획보다 잠시 먼저 죽을 수 있지만 그러나 꿈에도 내가 그리워하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테니까 나는 괜찮다.’ 하십시오. 어차피 인간이 죽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인간을 실어 나르는 교통수단과 같은 것입니다. 모두 이유 없어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유는 충격적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일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수많은 인류가 공유하면서 그 긴 세월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 일 때문에 오늘 주눅이 들고, 오늘 누릴 기쁨도 못 느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게 인생입니까?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얼마나 멋있습니까? 죽는 것은 죽는 것이고, 먹고 싶은 떡볶이는 먹어야 합니다. 급 공감을 해야지요. 그래서 주눅 들지 마세요. 쫄지 마세요. 내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은 내 상상의 범위 안에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인생의 뿌리까지 뒤흔들리는 그런 바보 같은 인생은 안 살겠다고 하고, 항상 자신의 인생을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아랫것들을 다루듯이 그렇게 인생을 다루어야 합니다. “정말 일어날래? 정말? 일어나봐. 난 하나도 무섭지 않다. 일어나 봐라.”하십시오.
인생이 꼬이는 일은 유쾌한 일이에요? 힘든 일이에요? 왜 그렇게 생기발랄하지 못합니까? 인생이 꼬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에요? 힘든 일이에요? 힘든 일이에요. 저 십대 때에 그렇게 인생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영문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수필가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쩜 그 길이 그렇게 꼬입니까? 하여튼 꼬여도 한두 번도 아니고 수없이 꼬였습니다. 오죽했으면 회심하기 전에 막연하게 신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면서 있다면 내 인생에 참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생이 수없이 꼬여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전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내 인생을 만약에 꼬이지 않게 해주셨다면 내가 뭐가 됐을까? 우선 첫째 하나님을 믿었을 리가 없고, 그리고 만약에 불행하게도 작가가 됐다면 요살스러운 글을 가지고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홀렸을 가능성이 있고, 그리고 그 재주도 없어서 그냥 자비로 몇 권 출판하다가 문 닫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인생이 바람직합니까? 그런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다음 생애에도 그 꿈은 다룰 의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꼬이게 하신 하나님을 너무 찬송하고요. 꼬인 대로 사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 하루도 내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죽음의 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도 나는 오늘 떡볶이를 먹으면서 온 몸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특권이잖아요. 그렇다고 오늘 떡볶이 먹으러 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겠지만, 그러나 일어날 수밖에 없다면 일어나라고 하십시오. 발생하라고 하십시오. 아무거나 생겨나라고 하십시오. 나는 내 인생을 헤쳐 나갈 것이고, 마지막 인생의 무대의 휘장이 내리는 순간까지 나는 내 인생의 주체성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속에서 좀비처럼 존재하는 세포가 있습니다. 그것들이 생명의 유통의 작용을 가로막아서 우리로 하여금 서서히 늙어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세포를 모두 제거하면 감염이 될 위험이 많기 때문에 이 세포 자체가 장벽의 역할을 한답니다. 가장 과학적으로 적정한 수를 빼 내어서 늙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상어의 한 종류는 끊임없이 신비한 anti-aging의 작용을 하면서 400년 동안 젊음을 유지하며 살다가 죽는답니다. 통계가 나왔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설문조사를 했더니 아무리 anti-aging의 기술이 발달해서 수명을 연장할 수 있어도 132살 이상 살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어차피 인간은 한번 살고 죽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얼마나 빨리 사라지느냐 늦게 사라지느냐 간발의 차이고, 그것은 영원처럼 흐르는 천체의 시간,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그것은 입속에 기생하는 수많은 균들이 생존하는 시간의 비율 정도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한 번의 가글로 그 모든 입속의 균들의 생명은 끝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그것이 두렵다면 빨리 받아들이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일들이니까 살아가는 것입니다. 젊을 사람은 젊은 때의 기분으로 이런 미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나이든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고개를 돌리려고 합니다. 생각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고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있는 것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여러분이 보기에 충격적으로 어려운 일을 만났던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매순간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아무것이 발생해도 놀라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기본입니다. 그때에 쫄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굴복하고 염려하며 살아봐야 봐주지도 않습니다. 사람만 추해질 뿐이지 대담하게 손을 얹고 자신의 인생을 깔보듯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발생할래? 한번 해봐라. 하나도 무섭지 않다. 한번 해봐라. 나는 그냥 나로 살아갈 것이다. 괴로움을 겪을 수 있지만, 인생이 꼬이겠지만, 어차피 살아온 인생이 그렇게 살아왔는데 오이디푸스왕에 나오는 대사처럼 여기까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는데, 한번쯤 그런 일이 더 있다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무슨 커다란 의미를 가져오겠습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대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2. 하루에 한정함
두 번째 가르침 그 괴로움이 하루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 괴로움은 그날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악하고 괴로운 일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 합니다. 앞에 살아있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생존이고, 뒤에 나오는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 의미를 찾으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고 하신 이 말씀 속에 ‘족하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아르케톤’(arketon)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만족스럽다, 충분하다, 넉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한 접시의 음식은 그야말로 너무나 기쁜 혜택과 같습니다. 그래서 먹습니다. 드디어 배가 완전히 가득 찼고 이제는 배가 부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한 그릇 더 먹으라고 내놓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한 잔의 물은 영혼까지 시원하게 하는 청량제입니다. 그것을 먹고 갈증이 해갈된 사람에게 한 그릇을 더 마시라고 하는 것은 고문입니다. 여기에서 ‘족하다’ 라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괴로움이 없을 수는 없다. 그날에 괴로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일을 침범하게 하지 말라. 그리고 이미 끝난 것을 오늘로 넘어오게 해서 자기가 고칠 수도 없는 변경할 수도 없는 지난 일 때문에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그런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고개를 외면한다고 해서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괴로움이 있으면 그냥 있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의 위대함은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은 동물도 하는 일이고 그것을 회피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모든 짐승들도 인간처럼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점은 그 고통 속에서 인생 전체를 연결하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고통 때문에 어제의 나보다는 내일을 내가 훨씬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민인 것입니다. 괴로운 일을 오늘 겪을 수는 있지만, 그리고 그것이 늘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확대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괴로움이나 악 때문에 내일을 비관으로 물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불치의 병에 걸렸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유족들을 모아놓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 장례식은 하지 마라. 조용히 갖다 묻어라. 그런데 죽기 전에 내 인생에서 만났던 고마웠던 사람들, 마음이 아름다웠던 사람들, 기억에 남는 사람들을 꼭 한번 죽고 싶다.’ 그래서 그 자녀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아버지가 만나고 싶어 하는 아버지와 특별한 교분을 나눴던 혹은 도움을 베풀거나 도움을 받았던 많은 사람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가 이제 한 달 정도 밖에 안 남은 암 막기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 아버지가 여러분들을 이 세상 떠나기 전에 한번 보고 여러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어 하십니다. 일체의 선물이나 모든 것은 필요 없고 그냥 오시면 됩니다. 옷차림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으니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담요에 쌓여서, 그리고 말끔한 옷을 입은 채, 그리고 자신이 평소에 만나고 싶어 했던 모든 사람을 만났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고 눈을 쳐다보며 악수를 나눌 때 그때 느낌이 어땠을까요? 이게 이 세상에서 보는 이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하면서 저도 꼭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한 달 후 죽는 것은 죽는 것이고, 오늘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며 즐거워하는 이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인생을 사는 것은 제가 살아보니 분명히 쉽지 않습니다. 특히 헛된 집착이 클 때 우리의 인생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 진리를 모를 때 우리의 인생은 거친 황야를 물 한 모금 없이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아보니 살만합니다. 그렇게 해결 불가능한 어려운 난제는 아니었습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그렇게 하나님이 매순간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는 찬란한 지식의 빛을 꽃밭을 걸어갈 때, 꽃길을 걸어갈 때 우리에게 보여주시지를 않고 인생이 꼬이는 것 같아서 신음하고 있을 때, 보지 못했던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해 주시고,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오랜 기간 동안 아무리 축적해도 쌓을 수 없는 당신에 관한 지식을 그렇게 꼬인 인생의 한 마디에서 우리에게 찬란한 빛처럼 쏟아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내 인생을 꼬이게 하신 하나님의 모든 행동이 은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숨 거두는 그날까지 내 맘대로 안 되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에게 괴로운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 괴로움을 겪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흐느껴 울다가 잠이 들었어도 내일 아침은 기쁨의 날을 맞이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신앙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이 긴 시리즈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분투하는 일생이었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는 그 좋으신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육신을 위한 염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같지도 않은 이유 때문에 염려하고 두려워해봐야 소용없는 것들을 두려워하면서 일생을 종처럼 살아갑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데도 오늘 괴로움도 모자라서 내일 괴로움까지 앞당겨서 슬퍼하고 염려하며 인생 전체를 검은 먹물로 물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도 티끌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왜 괴로움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내일을 어두운 비관으로 물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신한 그런 것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정하십시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십시오. 내일은 예기치 못한 괴로움이 찾아올지라도 살아있는 오늘 기뻐하십시오. 염려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들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돌보고 계시니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쁨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