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곡교회 사경회
(1995년 단편설교모음)
설교기간|1995년 2월 14 - 16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영혼의 목마름(시 42:1-2) 1995.2.14 세곡교회 사경회 1
2.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자(계2:4-5) 1995.2.15 세곡교회 사경회 20
3. 십자가를 따라서(눅 23:26-28) 1995.2.16 세곡교회 사경회 38
1. 영혼의 목마름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제가 이 교회를 20년 전에 한 번 왔었습니다. 그 때가 언제냐 하면 1976년 10월 15일 저녁 7시에 이 교회를 왔는데 그러니까 꼭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때는 교회당이 이렇게 크지 않고 조그맣고 옆에 식당 비슷한 게 천막으로 쳐 있고 그랬습니다. 그 때는 저도 아주 어렸을 때 스물 몇 살쯤 되었을 때니까 설교를 하러 온 것은 아니었고 문학의 밤인가 한다고 해서 보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위에 올라가서 찬송가도 한 곡 부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20년 만에 이 교회를 왔으니까 저도 구면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집회를 하려는 데 여러분, 부흥회 해 보시면 알지만 이제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부흥회 끝나는 날입니다. 왜 그래요? 그거 여러분이 잘못해서 그래요.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강사가 누군가 하면서 시간을 다 보내는 것입니다. 필요 없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3일 동안 그것도 저녁때만 와서 말씀을 전하는 데 눈치보고 서론하고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누굴까 저 얼굴에서 뭐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그런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습니다. 경계를 다 푸시고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할 때 여러분이 마음을 푹 놓고 시계 볼 필요 없습니다. 재미있습니다. 그러니까 시계 볼 필요 없습니다. 언제 끝날지 나도 모르니까요. 큰일 났다. 저렇게 침을 놓으니 몇 시까지 갈려나. 오늘은 모래시계 하는 날인가 나도 모르겠는데. 모래시계는 어떻게 하나 그러지 마시고 설교를 들으면서 긴장을 푸세요. 웃음이 나면 웃고 슬프면 울고 재미있으면 또 재미있다고 하고, 물어보면 어린아이처럼 대답하고 그러면서 천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집회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만 더 이야기를 하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시작하면 은혜를 받으려고 그러지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아예 은혜를 받으려는 생각을 안 하고 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을 전하는 사람 성령 듣는 사람 성경 본문 이 네 가지가 일체가 되어서 우리가 한 마음으로 흘러야지만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한다고 하면서도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아주 큰 감격을 하고 그러는 예가 흔치가 않습니다. 그게 늘 그런 일이 있으면 신앙생활이 참 신납니다.
요즘 남부지방에 가뭄이 들어서 땅이 갈라집니다. 그거 왜 그래요? 비가 안 와서 그래요.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매일 비가 쏟아지는 것은 바라지도 않고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우리들이 큰 은혜의 단비를 받게 되면 그 사람은 아름다운 결실을 많이 맺으면서 기쁨과 소망에 찬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잘 들립니까? 그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를 깊이 받는 비결은 무엇인가? 이거 아무데서나 잘 안 가르쳐 드리는 건데 오늘 특별히 하나만 가르쳐 주고 집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는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은혜는 설교자가 손에 가지고 와서 던져주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풀 때 그 말씀을 이전에 몰랐던 것을 깨닫고 깨달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것이 머리로만 깨닫다가 가슴으로 내려오고 가슴에서 팔과 다리와 온 몸을 지배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전심으로 실천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집회기간에는 말씀의 수풀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수풀 속으로. 그렇지요? 20년 전에 여기 올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멀다’ 그 생각만 났습니다. 한 없이 차를 타고 오는 데 끝이 없습니다. 오는 데 시골길을 돌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논 옆을 달리고 그러면서 왔는데 마찬가지로 성경말씀을 풀고 이번 집회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모두 수풀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 느낌을 받아야 됩니다. 맨날 성경을 읽지만 큰 은혜를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집회를 통해서 우리 모두 손을 잡고 말씀의 수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날 걸어 다니지 않습니까. 맨날 그 길이 그 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이전에 내가 모르던 성경 말씀을, 내가 전에 다 알았지만 깊은 뜻을 모르던 성경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열어주실 때 우리는 성경의 숲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맨날 길로 다닐 때는 그 길이 그 길 같고 맨날 걸어 다니니까 땅이 다 까져서 거기서 먼지가 나고 옆에 있는 소나무 낙엽송 이런 것들이 먼지가 가득 쌓였는데 수풀 속으로 들어가니까 이 수풀 속에 이전에 보지 못하던 아름다운 나무와 풀과 꽃이 잔뜩 솟아 있는 것입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는데 그 하늘 끝까지 닿을 것 같은 나무 사이로 아침 햇살이 죽 비치는. 햇살이 비치니까 풀잎에 달린 이슬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립니다. 그리고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새 우는 소리가 들리고 꽃이 피고 향기가 납니다. 안 가본 사람 아시겠어요? 모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세상을 이길 큰 힘을 그 숲속에서 얻고 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서 맨 처음 교회에 올 때는 이제는 시들어서 패잔병 같은 사람들이 말씀으로 새 힘을 얻고 나면 용사가 되어서 문제가 많은 세상에서 불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런 역사가 이번 집회에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지 않고 아직 신앙의 체험이 없을 때에는 시편처럼 재미없는 성경이 없습디다. 왜냐하면 펼치면 맨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고 하나는 41편 하나는 42편이라고 하는 데 똑같은 이야기만 쓰여 있는 것 같고 왜 이렇게 똑같은 말을 많이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맨날 죽겠다는 소리뿐이고.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련을 만나고 환란을 만나고 고난을 겪기도 하고 또 침체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 몸부림을 치면서 극복해 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신앙생활이 연수가 깊어지니까 성경에서 시편처럼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래요?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갈등이 나 혼자만의 고민이요 갈등인지 알고 괴로워했는데 성경을 보니까 이미 몇 천 년 전에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들의 눈물어린 기도와 부르짖는 탄식소리가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내 기도 같습니다.
저는 이 교회에 방문하던 20년 전만해도 그렇게 훌륭하게 변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후로 몇 년 더 있다가 큰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았는데 그리고 나서 동두천에 있는 기도원에 갔습니다. 지금도 그 때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새벽기도라고 해서 갔는데 그 때가 기도원에 구정이 임박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목사님들 몇 분이 앉아서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어린 나이에 그 틈에 끼어서 새벽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아무개 목사님 나오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 주시겠습니다.’ 그랬더니 이 목사님이 올라오셔서 천천히 기도를 하는데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어디서 많이 듣던 내용입니다. 알고 보니 시편이었습니다. 그걸 죽 두 장정도 읽은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데 읽어가는 과정에 흐느끼다가는 다시 읽으시고 읽으시다가는 다시 목이 메고 시편을 읽어가다가는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저는 그 때가 벌써 15년이 훨씬 넘었는데 가슴에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새겨졌습니다. 아 신앙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도전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나의 이야기처럼 깊이 감동을 받으면서 읽어 내려간다. 다른 성경도 그럴 수 있겠지만 이 시편은 잘난 척 하려고 쓴 것이 아닙니다. 또 이 시를 쓰면서 사람들이 나를 좀 본받아라 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시 속에는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도 그대로 나와 있고 우리가 깨닫는 것도 그대로 나와 있고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고통 하는 내용도 그대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몸부림치는 울부짖음이 나오는가 하면 박수를 치며 환호성 치는 기쁨의 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좌절하는 탄식소리가 나오는가 하면 어두움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깨달음의 노랫소리도 여기에 실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면 시편을 읽기만 해도 아마도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가 시편을 읽어갈 때에 그냥 성경을 읽는 것처럼 들린다면 아마 그는 아직도 깊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신앙이 깊어지고 성경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려고 하는 간절한 열망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가 이 시편을 읽어가는 것이 성경을 읽는 것처럼 들리지 아니하고 높으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언어로 자기의 말로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남의 글을 읽는 것처럼 들리지 아니하고 자기의 글을 읽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 제 생각이 사실에 가까우리라고 저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편 42편을 보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42편을 지은 시인과 같은 마음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오늘 점검해 보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편 42편은 고라의 자손이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이런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이것이 괄호 안에 들어있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이것이 1절입니다. 이것을 지은 사람이 고라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고라의 자손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생각나는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서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을 향해서 광야를 행진하고 있을 때에 고라집안의 자손들이 모세를 향해서 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반기를 드는 데 하나님은 그 일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징표로 고라 자손이 진을 치고 살아가는 그 장소를 지진을 일으키셨습니다. 땅이 갈라지고 고라의 자손들이 땅속으로 들어가고 땅이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전대미문의 큰 재앙으로 말미암아 고라 집안은 멸문지화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 쑥밭이 되고 그 가문이 폐가 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데 아마 그 때 모든 고라의 자손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 사람들 중의 몇 사람들은 남기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고라의 자손들이 계속 씨가 퍼졌습니다. 저 집안은 모세 때에 반기를 들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족속의 자손이라고 하는 불명예를 짊어지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이 집안이 그나마 명예를 회복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윗이 임금이 되려고 할 때 이 고라의 자손들이 다윗을 도와줍니다. 다윗이 임금이 된 후에는 이 사람들을 어여쁘게 여겨서 성전에서 시중도 들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러한 직분을 이 고라의 자손들에게 허락을 해 준 것입니다. 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지은 마스길이란 것입니다. 마스길이란 히브리말로 교훈하는 시다 그런 뜻입니다. 자꾸 읽으면 지혜로워지고 자꾸 읽으면 교훈을 담고 있는 시다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지어진 시가 성가대 지휘자 정도에 맞추어서 노래를 부르게 되어있는 그런 시다 그런 것입니다. 그 자체는 별 뜻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 시가 언제 쓰여졌느냐 말할 때 모두 거의 의견의 일치를 보기를 이 시는 이 시인이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도록 강제로 추방된 상태에서 쓰여진 것임에 틀림없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다윗 시대에 다윗 왕의 수종을 들던 고라의 자손 중 어떤 사람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도망을 가야 했던 그 다윗의 망명길을 동행해서 다윗과 함께 이방인들과 함께 망명생활을 하면서 지은 시가 틀림없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여러분 압살롬이 다윗이 나은 자식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칼을 차고 일어섰습니다. 다윗은 아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을 못했지만 이 아들 압살롬은 3년 동안이나 면밀 주도하게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칼을 차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정말 졸지에 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다윗이 몇몇 신하들과 가족을 이끌고 급히 왕궁을 빠져나와서 법궤도 버려둔 채 왕좌도 버려둔 채 요단강 건너편 땅으로 망명길에 오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망명길에 오르게 되어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법궤도 없고 성소도 악한 자들에게 빼앗겨서 이제는 이방인의 땅에 와서 잠시 거처를 빌어서 쓰면서 그렇게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이 처지에서 쓴 시가 바로 이 시이다 이 이야기입니다.
시인은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기도의 제목은 언제나 우리가 처한 어려움. 그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게 마련입니다. 사업을 하다가 시련을 만나서 사업이 위기에 놓인 사람은 입을 열면 제일 먼저 위기에 처한 사업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죽음을 눈앞에 두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 사람들의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건강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명예를 잃어버리고 억울하게 모함을 받은 사람들은 명예가 회복되는 것이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라의 자손은 임금과 함께 그 하나님을 섬기던 성소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이 다윗 왕은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부여하신 왕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왕의 권좌는 악한 자들에게 빼앗기고 지금은 언제 돌아갈 지도 모르는 요단강 건너 남의 나라 땅에 잠시 붙어서 사는 그러한 허망한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다윗 왕의 뒤를 쫒아 다니던 고라의 자손의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여 이 시간에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종의 고난을 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권능을 베푸셔서 우리에게 그 왕권을 돌려주시옵소서 악한 자들로 말미암아 당하는 이 고난을 기억하셔서 다시 한 번 우리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주시고 그 권능으로 우리를 인도하사 대적을 파하시옵소서 이것 말고도 더 간절한 기도제목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고라의 자손들은 모든 이 기도의 제목을 팔로 다 밀쳐 버리고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간절한 제목을 하나님 앞에 떠올리며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옵나이다. 쉽게 말하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목말라 헤매는 것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목마르옵나이다 하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왕권을 잃어버리고 원수들에게 쫓겨나서 얼굴도 모르는 남의 나라 땅에 와서 그 사람들이 끊임없는 도전과 박해와 조롱을 당하면서 이렇게 비참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마음을 지배했던 가장 커다란 마음은 왕권을 잃어버렸다거나 아니면 직분을 잃어버렸다거나 명예를 잃어버렸다거나 아니면 사랑을 잃어버렸다거나 헤어져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시인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목마른 것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그러니까 이 시인에게 있어서는 가족과 헤어진 것 명예를 잃어버린 것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향을 잃어버리고 친구를 잃어버리고 이런 모든 것은 다 참을 수 있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다는 고통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그래서 이 시인은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간절한 열망과 간절한 욕망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뵙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속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별로 없으면서도 상당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데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천부적인 재주가 있습니다. 제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 믿고도 여러 해 동안 교회 밖에선 술도 먹고 담배도 피고 교회 와서는 그런 것과는 일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청년인 것처럼 그렇게 행세를 했습니다. 별로 든 것이 없으면서도 뭔가 내가 경건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이 일에 있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다 못해 자기가 남에게 보이는 이 모습이 남에게 보이려고 지어낸 모습인지 자기 원래 모습인지 자기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에게 속아버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속아 주면- 그럴 수 없는데- 남들은 정확하게 다른 사람들의 신앙의 수준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작년의 일이었습니다. 온누리교회의 청년부 집회를 갔습니다. 가기 전에 저는 전혀 저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태어나서 저는 입원이라고는 해본 일이 없습니다. 작년에 그 기록을 드디어 깼습니다. 자고 일어났는데 몸이 견딜 수가 없이 뜨거워서 체온계를 넣고 재 보았더니 41도입니다. 그래서 차에 실려서 병원으로 갔더니 병원에서 입원을 시켰습니다. 떨어질 줄 알았던 열이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까지 가는 것입니다. 수요일 오후 4시에 온누리교회에서 저를 데리러 차를 가지고 오겠답니다. 수요일예배 저녁 집회를 해야 하는데 열이 올라서 입이 다 헐어버렸습니다. 도저히 일어날 기운이 없는데 교회에서 전화가 왔는데 ‘이상 없습니까?’ 그 전날 제가 전화를 시켰습니다. 어쩌면 못 갈지도 모르겠다. 그랬더니 저 쪽에서는 초상집이 된 것입니다. 다 준비해 놓고 현수막까지 걸어 놓고 선발대까지 보냈는데 강사가 못 간다고 하니 초상집이 된 것입니다. 정말 심령이 가난해 졌을 것입니다.
그러더니 내일 집회인데 오늘 청년들이 기도원에 올라가서 철야를 하면서 기도를 하고 그랬습니다. 열시 반 열두시가 되었는데도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두 시가 딱 되었는데 도저히 못가겠다 라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될까 교인들과 이야기 하면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그래 죽더라도 가다가 죽어야 된다 그래서 퇴원하겠다고 하니까 의사가 퇴원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해서 각서를 쓰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4시에 차가 와서 데리러 왔습니다. 그랬더니 육신을 가진 인간이 집회가 제대로 될 리가 있습니까? 힘을 다해서 했는데. 링거를 맞으며 했습니다. 몸이 괴롭고 그런데다가 영적으로도 다운되고 기도도 못했으니 더 다운되고 그러면서 밤새도록 너무너무 잠도 못자고 고통을 하다가 그런 번민 속에서 지내다가 아침에 나왔습니다. 그러니 그 몰골이 얼마나 흉악 하겠습니까 그리고 세수를 겨우 하고 옷을 입고 나오는데 힘을 얻기 위해서 식사도 못하니까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형제가 저 쪽에서 막 뛰어오더니 저한테 인사를 했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했는데 그 말이 거짓말이나 지어낸 것이면 보면 알잖아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강사님 오늘 얼굴을 뵈니 어제보다 훨씬 더 성령 충만 하시군요. 속으로 내가 지금 성령 충만 좋아 하시네 내가 지금 죽을 맛이다. 인간이 이렇게 불완전합니다. 판단도 불완전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인정해주는 모습이 여러분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하거나 여러분 자신이 그리고 있는 여러분 모습이 여러분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대단한 오해입니다. 왜? 자신도 속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자 가장 잘 보여주는 숨길 수 없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가? 우리가 어떤 말을 즐겨 하는가? 어떤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욕망입니다. 욕망.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있는 지배적인 욕망이 무엇인지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과연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서 이 시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더니 주체할 수 없는 어떤 욕망이 물길처럼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뜨거워서 이 욕망 이외에는 다른 욕망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원초적인 욕망이 마음속에서 용솟음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었습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그리고 성적인 욕망 등은 절대적인 욕망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너무너무 목이 마른 사람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 목마름을 대치할 수 있을 까요? 편안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목마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있는 이 욕망을 물 말고 다른 것으로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없어요? 이렇게 하면 어때요? 막 목이 마른 사람에게 찾아가 내가 멋있는 영화 한 편을 보여줄 테니 목마른 것을 참으라 그러면 참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보았습니다. 광주리장사 아줌마. 하루 종일 광주리를 메고 돌아다니니 얼마나 목이 마르겠어요? 자기만 목이 마른가요? 뒤에 매달린 애기도 목이 마르지. 목이 말라서 물 좀 달라고 해서 퍼 먹으라고 했더니 펌프질을 해서 물을 펐습니다. 그 물을 자기가 먼저 먹을 까요? 아니면 아기를 먼저 줄까요? 그래요. 인간은 죄인입니다. 먹고 나서 비로소 아기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초적인 욕망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있어서의 밥. 이것은 대처할 수 없는 욕망입니다. 배가 고파 죽게 된 사람에게 멋진 금강산 구경을 시켜 줄 테니 참으라고? 저녁 한 끼 더 참으라고.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적인 욕망이 불타오르고 있는 사람. 그것이 그의 마음과 삶과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 그는 기필코 범죄를 하고 말아요. 이게 바로 인간을 지배하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의 마음속에 그런 것과 비교될 수 없는 더 뜨거운 욕망이 시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마음만 지배한 것이 아니라 머리를 지배하고 삶을 지배하고 시인 전체를 지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 하나에 일생을 돌진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그 욕망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싶다는 그 뜨거운 열망.
팔레스타인에 가면 가을이 되면 사슴들이 암수가 만나 짝을 짓는 교미의 계절입니다. 암사슴과 수사슴들이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데 그 때 수사슴들이 암사슴들을 찾아 나선 답니다. 가을이 되면 사슴의 몸에 큰 변화가 오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타는 것 같은 목마름. 그러니까 맨 처음에는 사랑하는 연인을 찾아다니다가 그 다음에는 목마름이 온 몸을 엄습하니까 다 필요 없고 물을 찾아서 달음박질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중동지방에는 아무데나 물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달리다가달리다가 나중에는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 같은 것이 보여서 마구 달리는 것입니다. 가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가는 그 사슴들에게 있어서 이 한 모금의 물은 무엇이죠? 그렇죠. 그건 생명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시냇물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생수와 똑같은 말입니다. 생수 혹은 시냇물은 하나님과의 생생한 영적인 교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들판을 다니면서 한 모금의 물을 얻지 못해서 비참하게 죽어있는 수많은 사슴들의 시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맹수에게 물린 것도 아니요 병든 것도 아닌 건장한 사슴들이 광야에 퍽퍽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 한잔의 물의 소중함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일이 되어서 주님과 교통하기를 원하지만 물리적으로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차단되었습니다. 주님을 노래하고 싶어도 노래할 장소가 없고 주님께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성소는 악한 사람들의 수중에 떨어져 버리고 감히 그 성소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시인은 사슴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라는 (음질 불량) 마음의 상태를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 한 모금의 물이 없어서 광야에서 눈을 부릅뜨고 뜨거운 태양 볕 아래 앞발로 땅을 파다가 파다가 죽어간 수많은 사슴들의 시체를 보셨나요? 지금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나의 마음이 그렇사옵나이다. 하나님 앞에 갈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니까 저것은 목사님들이 저렇게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시나보다 저는 지금 특정한 사람의 영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매일 매일 살아가야 할 영적인 삶, 그리고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의 마음과 영적인 상태가 매일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이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의 정상적인 영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즉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강사님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목 놓아 울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몇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온 땅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혹시 나를 찾는 자가 있는가 하여 사방을 두루 보아도 하나도 나를 찾는 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큰일 났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예배도 참석하고 헌금도 봉사도 하는데 그 예배를 드리는 동기 봉사를 하는 동기 헌금을 하는 동기가 모든 동기가 바로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에서 출발되어야 하는데 그런 갈망이 거의 사라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여러분은 전통이 아주 오래된 교회에서 존경받는 목회자 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강남구라고요? 여기 와서 처음 알았습니다. 성남시 세곡동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강남구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교회도 강남에 있으니까 할 말이 없지만요. 저는 큰 교회도 섬겨 보았고 작은 교회도 섬겨 보았습니다. 많은 교회는 아니지만 한 교회에서 5년 8년 이렇게 섬겨보았습니다. 그리고 89년부터 하나님이 보내주셔서 이 교회 저 교회 큰 교회 작은 교회 집회도 많이 다녔습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를 들어서든지 느끼는 분위기 가운데 하나는 여러분 말고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생명이 없다 생명이.
예를 들어볼까요? 예배가 11시에 시작하는데 15분전만 되어도 사람이 없습니다. 10분전만 되어도 사람이 없고 5분전이 러시아워입니다.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11시가 되어도 못 들어온 사람들이 찬송 부르는 시간에 우르를 몰려 들어옵니다. 그렇죠? 예배 시간에 겨우 찬송 몇 장 부르고, 성가대 찬송 부르는 시간은 주보 읽는 시간입니다. 읽고 설교 시작하면 마저 주보 읽는 시간입니다. 그러면서 한 15분은 참아주는데 그 다음부터는 계속 조는 것입니다. 피곤하면 졸 수 있죠. 육신을 가진 인간이니까. 바울의 설교를 들면서도 졸다 떨어졌는데. 피곤하면 졸 수 있죠. 저 같은 사람의 설교를 들으며 조는 것은 황공무지로소이다. 그러나 한 주 정도는 졸 수 있지만 매 주 존다면 그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천 명 가까이 되는 교회에서 섬겨 보았는데 2층에 올라가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설교가 시작되었는데 다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고개 숙이고 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태반이 졸아요. 그리고 12시 반이 되면 예배가 딱 끝나고 우르를 몰려 나가는데 그렇게 쏟아져 나가는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나가겠어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맞아. 오늘 목사님 말씀대로 그렇게 살아야지 결심을 하고 내려가도 어두운 세상에서 살다보면 이기다가 올까 말까인데 한참 아멘 하다가 뭘 들었는지도 모르고 아 이제 예배가 끝났다 내려가고 오후 스케줄 짜기 바쁜데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어요?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다음날도 ‘ 손들고 옵니다’ 맨날 회개하러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 끝나면 어차피 죄 지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고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 기대를 걸지 마십시오. 그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엄마하고 아빠 하고 매일 손을 잡고 5, 6세 된 아이를 데리고 교회를 와서 가운데 놓고 예배를 드리는 데 이 엄마 아빠가 매일 자는 것입니다. 아빠가 앞으로 숙이면 엄마가 뒤로 넘어가고 엄마가 앞으로 숙이면 아빠가 뒤로 넘어가고 매 주 이러는 것입니다. 안조는 사람은 30%있습니다. 세 식구 가운데에. 다섯 살 먹은 꼬마는 안자는 것입니다. 하도 자니까 ‘엄마 아빠 오늘은 자지 마’ 알았다 약속을 했는데 또 약속을 못 지킨 것입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이 꼬마가 ‘ 엄마 아빠 그렇게 잘 바에야 빨리 요금내고 집에 가자’ 얘는 헌금이 요금인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어디를 보든지 생명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잠자고 있다는 증거는 충만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부흥회를 하면 와 모인다 이것은 새카만 옛날이야기입니다. 지지난 주에도 500명 모이는 교회인데 초지일관 200명입니다. 300명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저녁시간에 집회인데 아침에 못 나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직장 가니까 . 저녁엔 빨리 퇴근해서 집회에 참석해야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20년 전 30년 전만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대단한 설교가 아닌 것 같은데도 부흥회 그러면 입원하는 기분으로 모였습니다. 꾸역꾸역 모여서 꽉 차는 게 어느 교회든지 정상이었습니다. 지금은 결국 무슨 시대가 되었냐 하면 피리를 부어도 춤추지 않고 가슴을 쳐도 애곡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왜 그래요?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간절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만난다고 말했지요? 신명기 4장은 말하기를 너희가 거기서 하나님을 찾으리니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나를 찾으면 너희가 나를 만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이렇게 주일을 지키고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 헌금을 하고 때가 되매 주일학교 공과 한 두 줄 가르치고 이러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시인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자기를 찾는 자가 있는 가 살피신 즉 한 사람도 자기를 찾는 자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 헌금을 하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고 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예배드리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그냥 당연히 영적인 상태가 변화되는 것도 없이 매 주일 뜻 없이 흘러가면서 세월이 되풀이 되고 평신도가 권찰이 되고 권찰이 집사가 되고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드문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예루살렘 성 곁에 가서 두루 사면을 돌아다니며 나를 찾는 자가 단 한명이라도 있는가보라 있다면 내가 이 성을 멸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결국은 아무도 하나님을 그렇게 찾는 자가 없었습니다. 주일이 되매 왠지 주일을 안 지키면 찝찝하니까 헌금봉투 하나 덜렁 들고 와서 꺼떡꺼떡 감동도 없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도 없이 예배드리고 가는 사람을 교회는 고마워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기준을 맞추지 마십시오. 세상은 평일 저녁에 이렇게 모여서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대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여러분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찾는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한 번 하나님과의 대면, 거룩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고 그분의 생명과 그 분의 은혜를 힘입어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기를 소망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주체할 수 없는 열망을 가지고 주님을 뵈옵기 위해서 오직 세상과 나도 간 곳 없고 오직 구속한 주 한 분만을 바라는 열망으로 오직 하나님 앞에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나아오는 이러한 사람 이런 마음에 이런 심령의 간절한 부르짖음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에 오르셔서 팔복을 선언하실 때 첫 번째 복이 무엇이었는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무엇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무엇을 얼마나 가진 사람이 복이 있느냐 무언가를 얼마나 누리는 사람이 복이 있느냐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 하나만을 얻기 위해서 간절히 갈망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헬라어 성경에서는 투토코스라고 했습니다. 그게 가난하다는 뜻입니다. 그건 한 달에 500만원씩 벌다가 한 달에 100만원씩 벌게 된 사람을 갖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뜻은 파산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파산한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저는 어렸을 때 저를 설교자로 만들려고 그랬는지 나이도 얼마 안 먹었는데 정말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경험가운데 하나가 파산한 경험입니다. 여러분 파산한 경험 있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집안에 들어와서 노란 딱지를 붙이기 시작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끊김) 그렇게 해 가지고 냄비 몇 개 가지고 길거리로 쫓겨난 것입니다. 겨울에. 시간이 흐르자 어둠이 찾아오고‘후’ 삭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보따리 하나 길거리에 놓고 처량한 달빛 아래서 덜덜 떨고 있습니다. 그게 파산한 것입니다. 갈 데가 없습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누가 와서 ‘당신들이 어째서 이렇게 이 추운에 한 데 나와서 떨고 있습니까?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 이렇게 물어볼 때 ‘아저씨 집으로 가자고요? 그게 몇 평짜리입니까?’ 이렇게 물어봅니까? ‘가면 아침은 줍니까? 우리 방 따로 줄 수 있습니까 욕실은 되어 있나요 수세식 인가요 아침은 무슨 국물이 나옵니까?’ 그런 거 물어봅니까? 파산한 사람이 그런 걸 물어볼 여유가 없습니다. 물어볼 여유가 없이 ‘고맙습니다. 하루 밤만 재워 주십시오.’ 쫒아가는 것입니다. 심령이 된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무언가 하면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셔요. 하나님 없이도 혼자 잘 사는 것, 세상에서는 그 사람을 가리켜서 주관이 뚜렷하고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교만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심령이 부요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때요? 그저 축복해 주시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간섭만 하지 말고 내버려만 두십시오. 내 힘으로도 잘 살아갑니다. 주일날 만나십시다. 이러면서 일주일을 사는 사람- 많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주님 슛은 제가 쏩니다. 센터링이나 똑바로 해 주십시오 이런 사람들이 전부다 심령이 부요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부요하니까 예배시간에 예배드리는 태도가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드리는 속에서 오 주님 이렇게 갈망합니다. 일주일 동안도 세상에서 비참하게 실패하는 것 보셨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내 영혼에 축복하셔야 됩니다. 은혜와 말씀의 축복 없이는 내가 살아갈 자신이 없사옵나이다. 그러면서 정말 하나님 앞에 사모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주님 없이 씩씩하게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사람, 얼마든지 너끈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필요할 때만 내가 부를 때에 콜택시처럼 나에게 나타나주시길 원하고, 슈퍼맨처럼 내가 부를 때에 와주기만을 바라며 신앙생활을 해 주길 바라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이 시편 42편을 백 번을 읽어도 이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무너진 왕권이나 잃어버린 나라나 두고 온 이산가족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나 만날 만한 장소가 없고 네가 하나님과 사귀고 경배하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적인 은혜가 내 영혼에 흘러 들어오는 그 은혜 받기를 네가 소원하나 그렇게 하나님을 만날 곳이 없고 그 특권을 빼앗겨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흐르는 시인의 눈물을 씻어줄 수 없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슬픔은 그 어떤 것으로도 달랠 수 없었습니다. 이방에서의 아름다운 음식과 이방에서의 아름다운 노래 가락과 이방의 아름다운 여인들도 이 시인의 마음속에 메아리치고 있는 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끌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영적인 삶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쉬운 걸 어렵게 말하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과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신앙을 안 가진 사람들은 그냥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혼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고 기도할 때에 영이신 하나님이 간구하는 우리와 교제를 나누시고 그 교제의 통로를 통해서 그 생명과 은혜를 우리의 영혼 속에 충족하게 부어주셔서 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생명을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신앙을 가진 사람이고 그런 신앙적인 삶이 정상적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서 이렇게 하나님과 생명적인 교제를 일주일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늘 누리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이 바로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사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헌금을 많이 하거나 사회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재작년 12월 12일에 일곱 명이 모여서 개척을 했습니다. 지하실에. 이 교회는 성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교회의 육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됩니다. 사분의 일도 될까 말까입니다. 전도지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전도지에 무어라고 했냐면 -개척한 지 한 달도 채 안되어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나 그 길이 어딘가 알 수가 없고 주님의 뜻을 알아서 그 뜻대로 살고는 싶지만 그렇게 살 힘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 와서 집회에 한 번 참석하십시오. 다함이 없는 생명의 물가서 임마누엘의 샘에서 말씀을 먹고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삽시다. 그랬더니 그 중의 한 사람이 나중에 교회 와서 간증을 하는데 길거리 지나가다 전도지를 딱 받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나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워하나 그렇게 살아갈 힘이 없는 사람들이여 하는데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래요. 맞습니다. 하나님 내가 어두운 세상을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그건 마음이고 그렇게 살아갈 힘이 없사옵나이다. 왜 그래요? 우리의 속이 우리의 속사람이 이렇게 하나님과 생생하게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에서 오는 은혜와 그 능력으로 살아갈 때에만이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자 봅시다. 금년에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질적으로 큰 축복을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우리의 삶의 축복과 형통과 이런 모든 것들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갈망하는 것은 다릅니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집에 애들이 있습니다. 이제 9살 3살입니다. 할아버지가 자주 오셔요. 우리 아버님이 저에게는 아주 냉정하셨는데 손자들에게 하시는 십분의 일만 저한테 하셨으면 제가 잊을 수 없는 아버님이 되었을 텐데 참 차가왔습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까지 무릎을 꿇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앉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같이 있으면 불안했습니다. 맞아본 적도 별로 없는 데 하여튼 불안하고 싫었습니다. 소화도 안 되는 것 같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손주들에게는 참 잘합니다. 그게 원래 그런 거라고 하네요. 뭘 선물을 한 보따리 가지고 오면 애들이 ‘할아버지’ 하고 달려와서 안아주려고 하면 품으로는 안 들어오고 밑으로 내려가서 선물을 채 가지고 가면 안방으로 가면 문 닫고 끝입니다. 이건 할아버지를 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아버지 손에 있는 선물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의 축복을 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것을 향하는 갈망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물질적인 궁핍에 빠진 사람은 물질을 주시기를 구할 것이고 명예가 필요한 사람은 명예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것입니다. 자녀에게 지혜가 필요한 사람은 자녀에게 지혜를 달라고 간절히 간구할 것입니다. 학부모들이 제일 열심히 기도할 때가 어느 때냐면 11월입니다. 9월에도 별로 기도 안합니다. 11월 수학능력시험 볼 때쯤이면 기도의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그 불이 언제까지냐면 대학 들어가면 꺼집니다.
중세시대에 경건한 신학자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신학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이렇게 내려다보시니까 수도원에서 기도를 하는 데 다른 사람도 열심히 기도하지만 아퀴나스는 특심합니다. 툭 하면 금식, 툭 하면 철야 고행을 하면서 너무너무 애처롭게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야, 이거 참 불쌍하다. 그래서 하루는 하나님이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아퀴나스야 아퀴나스야 내가 무엇을 해 주랴 네가 내게 무엇을 원하기에 철야하며 금식하며 그렇게 오랜 시간 너의 몸을 괴롭게 하면서 부르짖는 그 기도의 제목은 무엇이냐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주랴. 아퀴나스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그런데 너는 왜 모든 수도사들이 잠든 한밤중에 들판에 나와 내 이름을 부르고 식사 때가 되면 끼니를 거르고 동굴 속에서 나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이여 저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 당신 자신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당신 자신을 주시옵소서. 그것이 저의 행복이옵나이다. 주님 자신을 내게 주시옵소서.
이 시인은 오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말라 죽을 것 같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께로부터 잃어버린 왕권을 되찾고 나라를 되찾고 법궤를 되찾고 이산가족을 다시 만나고 명예를 되찾고 생활비를 다시 받고 잃어버린 전토를 다시 찾고 이런 것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 하나님 앞에 당신 자신이 목마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에게 있어서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든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든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율법의 멍에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든 자기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내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있어 내가 그분과 사귀고 그분이 나와 교통할 수 있는 이 영적인 교제의 특권 그런 사귐 그런 생명적인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목말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교회는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고 있습니까?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을 충만하게 채우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지 않는다면 사람으로 가득한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에스골 골짜기에 마른 뼈같이 모여서 덜거덕 거리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수많은 군대처럼 마른 뼈들이 모여 있으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먼저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해 져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해 져야 하고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해진 사람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으로 가득 차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교회는 먼저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해지지 못한 교회의 영적인 모습을 인하여 안타까워하며 하나님 자신으로 교회가 가득 차기를, 하나님 자신이 오셔서 자신을 가득히 채우시는 교제와 영적인 교통의 놀라운 역사를 주시기를 사모하며 부르짖는 간절한 울부짖음이 있는 기도의 사람들이 먼저 있고 나서야 비로소 그렇게 하나님이 오셔서 교회를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케 하시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교회가 생명을 잃어버린 증거는 어디서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향해 차오르는 뜨거운 갈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저 이야기가 이해가 되는 데 잘 모르겠다. 여러분 돌이켜 서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묵은 땅을 쟁기를 깊이 대고 갈아엎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는 그 밭에서 무슨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겠으며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그렇게 초토화된 상태에서 어떻게 어두운 이 세상에서 불꽃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질문 하나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고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한 그런 사무치는 갈망을 마음에 가져야 하는 데, 왜 오늘날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갈망이 없을까요? 왜 이런 갈망이 없이 덤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중요한 질문에 답을 해야만 우리가 메시지를 찾아내서 거기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죄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이 무감각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만 -저는 그런 노래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유심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 때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던 가수 가운데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하는 가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팬들을 가지고 있었는지 한국에도 엄청난 팬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20여년 가까이 된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러니 그 때 돈이 얼마나 귀하던 시대입니까 그저 공무원 월급이 만 오천 원하던 때였으니까 지금의 물가하고는 비교가 안 되던 때였습니다. 그 때에 그 사람이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지 호주에서 그 사람에게 제의하기를 우리나라에 와서 3일을 노래해주면 8억을 주겠다 그랬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80억 이상 될 것입니다. 그랬더니 대답이 호주까지 가기에는 너무 바쁘다 그게 답장이었습니다. 하여튼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에게 딸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 집을 청소하다 보니 공연 나갈 때마다 그 딸이 불쌍해서 사 준 장난감이 일곱 트럭분이 나왔다고 합니다. 장난감 일곱 트럭이 나오고도 장난감이 어디 있는지 모를 정도니까 집의 규모는 얼마나 큰지 우리가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불행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첫 번째 부인과도 이혼하고 두 번째 부인과도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그 집에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러 갔습니다. 응접실에 가서 인터뷰를 하는데 어디서 달걀껍질 타는 냄새가 났습니다. 타는 냄새가 나는데요. 글쎄요. 우리 집에는 탈 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인터뷰가 진행되었는데 온 방안에 점점 달걀 타는 냄새가 가득해졌습니다. 그 때에 같이 인터뷰를 나갔던 기자가 깜짝 놀랐습니다. 프레슬리, 정신 차리십시오. 손을 보십시오. 무슨 냄새인가 했더니 손에 담배를 들고 있다가 손에 담배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인터뷰를 하는데 이 담배가 타들어가서 자기의 두 손가락을 태우면서 나는 냄새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손이 타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왜? 온 몸이 마약이 중독이 되어서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감각을 잃어버리니까 손이 타들어 가는데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지지직거리면서 냄새가 온 방안을 진동하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죄는 우리를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이도 넉넉히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영적으로 무디어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간절한 갈망이 없이 살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시인의 시대가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오신다면 뭐라고 말씀 하실까요 사면을 두루 살펴볼 때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다고 말씀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심령이 무디어지고 더 무디어져서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이제는 주님이 오셔서 불러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피 묻은 손으로 두드려도 그 손이 예수님의 손인지 감각조차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이런 신앙생활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죄의 부피만 늘어갈 뿐입니다. 죄가 점점 두꺼워지고 점점 무디어져서 이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심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워하지 않는 그런 양심에 화인 맞은 것과 같은 그런 심령의 상태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영적인 삶이 없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이상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영적인 삶 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부인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생명적인 관계를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시고 하나님과의 화해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길을 이어가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그 핏 길을 걸어서 내 앞에 와서 나와 더불어 화해하고 나로 더불어 주어지는 생명과 은혜를 힘입어서 세상을 불꽃처럼 살라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열어 놓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길을 열어가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생명을 위해서 길을 여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적막한 영혼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영적인 교통이 끊어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너희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히 보시는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 가르쳤습니다. 기도의 골방 하나님과의 교제의 골방이 과연 여러분 건실하게 여러분 속에 있느냐고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하나님과 이전에는 사귀었지만 너무나 그 골방에 들어가 본 지가 오래 되어서 지금은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고 구더기가 뒹굴고 거미줄이 쳐지고 한 번 들어서면 방구들이 꺼질 것 같은 그러한 폐허가 되어버렸다면 우리의 삶도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짠 맛과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무엇? 세상의 소금이라. 누가 세상의 소금입니까? 우리가 정말 세상의 소금입니까? 그런데 세상이 왜 이리 썩어갑니까? 정말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이 빛입니까? 그런데 왜 이 세상이 이렇게 어둡지요? 왠지 자신만만하게 강사가 아무리 말해도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우길 수 있는 힘이 우리는 없습니다. 뒤가 켕겨요. 빛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아멘 하면 좋겠는데 정말이요? 글쎄요. 정말 빛이십니까? 정말 빛이라고 믿습니까? 몰라요.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냐 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다 말씀하시다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무슨 뜻입니까? 팔복의 사람이 되면 빛이 되려고 라이터를 켜고 깜박이지 않아도 그는 빛이라 이것입니다. 돌아다니면서 나 소금이야 나 죽염이야 폼 잡지 않아도 그저 가만히 있어도 그가 팔복의 사람이 되고 이 내면 속에서 하나님과 그런 생명의 교통을 누리고 있으면 그는 가만히 있어도 소금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 사람 때문에 세상은 안 썩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는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되지 않으면 인생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 흉보는 것은 아니지만 일주일 특별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교인들이 별로 새벽기도를 안 하니까. 그거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새벽기도를 하니까 운동을 합니다. 구역별로 많이 나온 구역은 비누도 주고 치약도 주고 경쟁을 합니다. 그건 별로 이해가 안가지만 그냥 했습니다. 새벽기도면 그냥 새벽기도 나오면 되지 않습니까. 근데 한복까지 입고 저 길까지 나가서 깜깜한데 그냥 늘 오던 교회인데 오면 되는데 안내를 하고. 그런데 역시 놀라워요.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전화를 하고 하니까 60명 정도밖에 새벽에 안 나오는데 350명이 나와요. 인천 수원에서 새벽에 차타고 날아와요. 400명 교인인데. 근데 놀라운 것은 새벽기도를 하고 주기도문을 마치고 다 같이 기도하시다가 돌아가십시다. 15분 후에 눈 떠보니까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모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도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인 사람이 그 시간에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기도드리는 것 그것은 사람의 힘이나 제도의 힘으로 안 됩니다. 심령이 깨뜨려져서 죄를 회개하고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은혜와 하나님과의 교통이 새롭게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날 때에 하나님 앞에 뜨거운 교통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들이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갈망을 가지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간절한 갈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서 점점 우리의 심령이 무디어지고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이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깊이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게 되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은 갑자기 이 세상에서 박력이 없는 사람처럼 되어 버리고 말아요. 어떻게? 전에는 매일 씩씩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이거? 이렇게 하면 되지 늘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즉각즉각 결정 내리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깊이 들어가고 주님의 은혜가 깊이 들어가면 박력이 없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매일아침 일어나서 눈 비비고 가방을 들고 출근 하는 게 이제는 안 됩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오늘도 주님 없이 살 수 없나이다. 주님 없이 내가 어떻게 이 긴 하루를 승리하며 살 수 있겠사옵나이까? 주님 저를 향해 그런 기대를 걸고 계시다면 그건 위대한 착각이옵나이다. 주님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기대를 걸지 마옵소서.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그리고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415장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간절한 갈망 가운데서 늘 살아가야 되는데 죄로 말미암아 이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바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는 깊은 회개와 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 시인과 같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이전처럼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면서 살면 지금보다 참 좋을 것 같다 나도 좀 그랬으면 좋겠는데 은혜라고 그러는데 나도 은혜 좀 받아볼까 이런 마음 가지고는 아직 멀었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올바르고 풍성하지 못한 가운데 억지로 살아가는 이 그리스도인들의 삶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인하여 안타까워하시고 우리의 모든 삶의 구석구석에서 얼마나 많은 불명예를 하나님께 안겨드리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면서 ‘주님 주님이 만나주셔서 내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내 속에 있는 수많은 죄의 씨앗들 뿌리들을 자르시고 뽑아내셔서 그리하여 이전과 같이 또 이전에는 누린 적이 없지만 오늘 이 시인과 같이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갈망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교통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두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생명의 힘과 혼탁한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그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과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영적인 원동력을 내 마음 속에 주셔야 되겠습니다’ 라고 하는 이 갈망과 간절한 부르짖음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역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인 회복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태도를 보면 교회의 영적인 깊이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충만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이 현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그 백성들을 만나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교통과 은혜를 잃어버리고 사니까 죄를 더 짓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점점 더 각질이 되어 두껍게 쌓여가니까 전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에 오셔서 말씀하셔도 깨달았는데 이제는 주님께서 오셔서 흔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그런 무감각으로 자꾸 나아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것이 쌓이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한 번 손을 내미셔서 우리의 인생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하나님이 간섭하신다 하나님이 치셔서 우리를 부르신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말로 많이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들을 혼내시기 전에 수없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께서 그러한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통해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껍질밖에 없는 삶인가 하는 것을 늘 깨닫게 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의 죄, 죄를 기뻐하는 육신의 생활 이런 것들 때문에 부르시는 주님을 멸시하며 그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제가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과 교통하면서도 그 교제가 불완전합니다. 하나님과 사귀면서도 그 사귐은 어두운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공급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것입니다.
여기 주일학교 선생님들 많지요? 최고의 선생은 하나님 앞에 가장 훌륭한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훌륭한 선생이 되는 최고의 지름길입니다. 성령과 함께 동행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얻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 선한 결심과 선한 욕망과 선한 마음이 그를 지배하고 있을 때 그는 비로소 그의 손에 들려진 성경공부 교재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말하기를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말했습니다. 시인은 영혼으로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입술로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말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한다고 말로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말이나 글이나 그리고 머리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시인의 인격 가장 중심부에 자리 잡아서 그의 인격과 삶을 다스리고 있는 그 영혼으로서 하나님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타오르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뵈옵고자 하는 그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름으로 타오르는 불에 그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뿌리면 뿌릴수록 불꽃이 더 치열하게 타오른다는 사실을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여건이나 환경이나 자기가 처한 처지는 하나님과 만나지 못하도록 그를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비록 이방의 땅이고 요단강 건너편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졌고 성소로 돌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막히면 막힐수록 시 속에 있는 영혼이 사무쳤습니다. 시인의 영혼 속에 불꽃같이 타올라 굳게 사무치는 갈망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뵙기를 원하는 갈망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오직 그것 하나만 눈에 보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기를 바라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생명적인 교제와 능력을 얻기를 원하는 그 갈망만이 이 시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찬양)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자신의 비참한 영적인 생활,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린 신앙의 생활, 그리고 이미 정상적인 생활에서 이탈해 버려서 마른 뼈와 같이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에 나와서 간절히 부르짖지 못하는 이유는 모두 죄의 억압 때문입니다. 오늘 이것을 끊어버리고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갈망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우리의 영혼에 은혜를 베푸시고 기이한 은총의 빛을 베푸실 때에 마치 메마르고 갈라졌던 그 땅에 비가 내리고 이렇게 모두 황무하게 비참하게 버려졌던 이 땅에 새들이 깃들고 아름다운 싹이 돋아나고 풀이 돋아나고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고 그 꽃이 열매를 맺고 새들이 깃들고 벌레들이 우는 아름다운 신앙의 동산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지게 되면 시내에는 물이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풀은 시들고 새들은 날아가고 벌레들의 우는 소리도 그치고 까마귀들의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으며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시인은 자신의 이러한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영적인 상태를 통해서 타는 듯한 갈망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하나님,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갈망했는데 시인이 그토록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목말라 했던 것 같은 하나님은 관념 속에 있는 하나님이나 교리 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이 갈망하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생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시면서 동행하신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시인이 갈망했던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이후에 천당에 올라가서 악수할 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의 갈망하는 하나님은 생존하시는 하나님, 살아서 역사하시고 움직이시고 나를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홍해의 물을 말리시고 바산 왕 시혼 왕을 꺾으시고 애굽의 군대들을 수장시키시고 마른 땅에서 물을 내시고 반석에 샘이 솟게 하시는 위대한 하나님, 요단강 강물을 말리시고 여리고 성의 라합의 마음을 서늘케 하셔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그 위대한 권능의 하나님 그래서 나의 인생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신 것을 확실히 믿지 않을 수 없는 이런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데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교회가 동행하는 역사가 일어날 때 그 교회에서는 매 주 죄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속에 살아계시는 하나님 생존해 계시는 하나님으로 동행하실 때 여러분의 삶을 살아가는 삶 자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말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일이 필요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교회에 충만하게 역사하셔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있는 증거를 이 어두운 세상과 불신하는 세상에 혁혁히 드러내 보여주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나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합니다. 바로 부흥입니다. 이런 부흥이 필요합니다. 매일매일 죄인들은 나와서 회개해야 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뉘우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이 감격해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기를 사모하는 이러한 갈망들이 교회 속에서 충만케 되어 질 때에 그 교회가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렇게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 생존해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삶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할 때에 어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는지 여러분은 구약을 통해서 읽으셨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교회와 동행하실 때 교회에서 어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는지 여러분은 신약성경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강퍅한 심령을 가진 자들이 뉘우치며 주님을 거절하던 죄인들이 가슴을 찢고 통회하며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도무지 이 어두운 세상을 거스르며 살아갈 용기가 없고 살아갈 용기가 있어도 실제로 그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서 이길 만한 힘이 우리의 삶을 붙잡아 주지 못하는 이러한 처지에서 우리에서 필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동행하시고 주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우리를 통해서 혁혁하게 드러내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섬기시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몸담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영혼을 통해서 여러분 속에 살아계시고 여러분과 동행하시고 여러분의 기도를 따라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도 전심으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그렇게 당신을 진심으로 찾는 자들을 오늘도 전심으로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자기를 찾는 자들을 또한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을 또한 찾으시느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이방의 땅에서 모든 즐거움을 잃어버린 가운데 오직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갈망으로 하나님 자신을 향한 목마름으로 쓰러질 것과 같은 목마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혼으로 갈망하던 이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금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뵙게끔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수많은 하나님께 경배하러 나오는 무리들을 동행하며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는 이런 놀라운 특권을 다시금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마음껏 회복된 왕권과 다시 돌아온 성소에서 모든 악인의 그림자들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껏 찬양하다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도록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자신에게 당신 자신을 모두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과 욕망을 내어 버리고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갈망하며 그 교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마음으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한 모금의 물을 찾기 위해서 들판을 가로지르는 것같이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에 모든 소망을 걸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인 받으소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 여러분이 이런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고라의 자손들같이 주님을 만나게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시간 우리 같이 주악에 맞추어서 기도하시겠습니다.
2.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오늘 이 요한계시록 2장이 첫 번째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평가를 받는 에베소 교회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써 사경회 이틀 째 날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일 때문에 핍박을 받고 박해를 받아서 밧모라고 하는 섬으로 유배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귀양살이를 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두고 온 교회를 그리워하며 하나님 앞에 교통하다가 주님께서 요한에게 하늘을 여시고 미래에 되어 질 일들을 보여주신 것을 기록을 한 것이 바로 이 요한계시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1장은 서론이고 2장과 3장을 보면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기 전에 먼저 2장과 3장에 거쳐서 현재 있는 교회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를 상세하게 평가를 내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되는대로 쓰여 진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앞 뒤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소연 하듯이 그렇게 풀어놓은 것을 한꺼번에 모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앞뒤가 있는 책이고 성경에 있어서 이 순서는 그 순서 자체가 훌륭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됩니다.
무슨 메시지가 있을까요? 왜 하나님은 미래에 일어날 모든 교회와 세상에 일어날 일들을 하늘을 열어서 요한에게 보여주시기 전에 먼저 이 일곱 교회의 이야기를 먼저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성경은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함에 있어서 2장과 3장에서 왜 먼저 일곱 교회 이야기를 자세하게 쓴 다음에 비로소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말하던 나팔소리와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렇게 하면서 비로소 4장에 가서야 미래에 일어날 계시를 보여줘야 할 이유,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 순서가 갖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우선 이 순서가 갖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미래에 이루어질 이 세상을 심판하실 위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교회의 현재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가 하나님 앞에 판단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고 그 후에 승리한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할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하나님의 관심은 믿지 않은 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인해서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보다 더 슬퍼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불꽃처럼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영적으로 무기력한 그 현실 때문에 주님이 더 슬퍼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타락하고 세상이 문제가 많다고 말합니다. 문제가 많습니다. 문제가 많죠. 여러분은 세곡동 강남구에 있다고 말하는데 저희 교회도 강남에 있습니다. 강북은 그만 두고 강남에서 하루 저녁에 팔리는 술값이 30억 원, 한 달이면 900억, 1년이면 1조 8천억의 술값이 이 강남에서 지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는 서울이 선도를 하는데 서울의 모든 문화는 강남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강남이 주도하고 있는데 불행히도 그 문화는 하나님을 높이고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는 경건한 문화가 아니라 부패와 타락과 인간의 쾌락과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신앙의 죄를 좇는 이러한 문화가 강남에서 서울을 주도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들은 또 모두 강남에 모여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악해져가고 타락해져가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악하고 어두워지는 것은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런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때도 그러하였고 로마의 치하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언제나 타락하고 그리고 죄악의 어두운 밤 속에서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 속에 잠긴 채 살아가고 분별력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세상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타락하기 때문에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혼탁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세상은 언제나 어둡지만 그러나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그 어두운 세상에서 불꽃처럼 살도록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꽃처럼 이 어두운 세상을 지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교회도 문제가 되고 세상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시간에도 믿지 아니하는 이 세상보다도 믿음을 고백하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에돔의 하나님이었고 니느웨의 하나님이었으며 또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성경은 마치 이 세상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이외에는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고백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신앙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빛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들에 핀 풀포기를 보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는 저녁노을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참 위대하시고 지혜가 한없으신 분임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나자 인간들이 그런 것들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해와 달과 별을 보고 죄가 들어오게 되자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만드신 해와 달과 별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대신에 오히려 그 해와 달과 별을 두려워하고 거기에 경배를 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거기에 돌려야지만 오늘도 마음을 놓으며 안심을 하고 잠을 들 수 있는 불안한 존재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위대한 창조의 세계를 보면서는 도저히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드디어 한 민족을 택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선택된 백성들이었고 아브라함의 후손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오늘날의 신약의 교회입니다. 택해서 그 사람들을 이 죄 많은 세상에 살게 하셔서 그 사람들 모임 가운데 오셔서 충만하게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그들을 다스림으로 말미암아서 사람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저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는 우리와는 다른 어떤 분이 다스려주는 것 같아, 그 분이 누구일까?’ 그리고 교회에서 배워보니까 그 분이 우리를 피 흘리고 죽으신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만이 이 세상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지 않는 한 세상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은 그리고 우리 교회는 세상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으로 가는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날에 이 세상에 이처럼 죄악이 관영하고 소돔과 고모라 성을 방불케 하는 강남의 거리가 된 데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꽃과 같이 어두운 세상을 살 지 못한 이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이 어두운 세상을 살지 못하는가를 하는 것을 오늘 한 번 생각해 보면서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는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일곱 개의 교회를 보여주셨습니다. 에베소, 서머나, 두아디라, 사데 죽 일곱 개의 교회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일곱 개의 교회가 진짜 그 시대에 있었던 일곱 개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2천년에 해당하는 역사를 나누어서 처음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간 다음에 약 백년 후에서부터 삼백년 까지는 에베소의 교회의 시대이고 그 다음에는 서머나 교회시대이고, 그 다음에는 두아디라, 이렇게 죽 나누어서 지금 20세기에는 라오디게아 시대에 와 있는데 이것이 역사의 끝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해석은 이 일곱 개의 교회는 그 때에 실제로 존재하던 교회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때는 교회가 그냥 이렇게 서 있는 교회가 아니라 에베소교회 그러면 에베소지방에 있는 모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에베소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가정교회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에베소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에베소교회와 그 다음에 서머나, 두아디라, 버가모 이런 교회들 말하자면 현재 그 교회들이 처해있는 영적인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예수그리스도께서 평가를 내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후대에 이 땅에 생겨날 모든 교회들이 2장과 3장을 읽으면서 자신의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며 자신들이 어떤 잘못에 빠지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점검하고 돌이키고 회개함으로서 4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기이한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되어 질 일들을 영적인 교통 속에서 이 하나님의 사도인 요한이 받아서 모든 교회에게 유익을 끼친 것 같이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교통을 새롭게 회복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일곱 교회를 보여주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왜 서버나 교회나 두아디라 교회나 사데나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니라 왜 하필이면 에베소 교회가 처음입니까? 이것도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는 분명히 일곱 교회 중에서 책망만 들은 교회가 있고, 칭찬만 들은 교회가 있고,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들은 교회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맨 처음에 칭찬만 들은 교회들을 놓고, 그 다음에 칭찬과 책망만 받은 교회를 놓고, 맨 마지막에 책망만 받은 교회를 놓는다든지, 아니면 좋은 것을 나중에 말씀하시고 싶으시면 책망만 들은 교회를 먼저 놓고, 그 다음에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들은 교회를 놓고, 맨 마지막에 칭찬만 들은 교회를 놓아야지만 우리들이 분류하기 쉬운 분류법에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이 일곱 교회는 그런 순서를 전혀 따르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받았지만 두 번째 나오는 서머나 교회는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나오는 버가모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사데 교회의 경우는 또 책망만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 다음에 여섯 번째 나오는 빌라델피아 교회는 오히려 칭찬만 받은 교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받은 교회였습니다. 일정한 순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 모두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왜 에베소 교회가 맨 위에 올라오게 된 것인가? 그것은 에베소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이 문제가 모든 교회가 빠질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위험이고 가장 커다란 위험이며 그리고 모든 교회의 기초가 되는 문제에 있어서 지적을 받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인 것입니다. 쉽게 먼저 말씀을 드리면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께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 그것을 잃어버린 것을 오늘 지적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에베소 교회는 이 문제에 있어서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지적을 하기 전에 그 앞부분에 또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이 문제를 지적하시면서 교회를 평가하는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데 이 부분이 바로 1절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여기는 모두 똑 같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그렇지만 서머나 교회에서는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버가모 교회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일곱 개의 교회가 그 일곱 개의 교회에 말씀하신 이가 예수그리스도 한 분이신데 말씀하시는 이가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묘사는 일곱 개의 교회가 다 다르게 받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십니까? 쉽게 말해서 에베소 교회에게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에베소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평가하시고 드러내실 때에 에베소 교회가 기억해야 할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여 너희는 기억해라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느냐 그는 금 촛대를 손에 잡은 분이시다 그가 금 촛대를 잡고 어떻게 다니는지 아시느냐 일곱별을 붙잡은 것이다 그가 일곱별을 어떻게 붙잡고 어떻게 하시는지 아시느냐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이시다 너희는 예수그리스도가 그런 분이심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받고 있는 메시지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자, 오늘 먼저 1절은 ‘에베소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편지를 했다고 했습니까? 우선 에베소교회입니다. 이 말은 두 단어가 하나로 묶어진 말입니다. 그렇죠? 하나는 ‘에베소’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에베소는 하나님의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그냥 원래 있던 도시의 이름이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기 전에 이 에베소는 아시아에 있는 지역으로서 이단들이 많이 깔려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릇된 사람의 철학과 사상이 잔뜩 있는 도시였습니다. 거기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에베소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상업을 하며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도시입니다. 저마다 돈을 모으고 명예를 쌓고 부를 누리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수고하고 애쓰고 선생들은 자신들의 철학과 사상들을 전파하기 위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애쓰며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강남과 같은 도시였습니다. 이렇게 육신으로 살아가는 이 도시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세곡교회는 강남구 세곡동에 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곡동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셔서 여러분을 90여 년 전에 이곳에 하나님의 교회로, 지체들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 때나 이때나 하나님 없는 세곡동 하나님 없는 이 강남구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대신 자기가 주인노릇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대신 자기의 뜻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대신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애쓰는 대신 자기의 육신의 영달과 안위를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육신의 사람들이 가득히 있는 곳 그곳에서 서로 경쟁하며 서로가 하루하루를 먹고 살며 자기의 육신의 이익을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며 살아가는 허망한 세상, 그것이 바로 에베소의 그림자이고 바로 이 강남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곳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려 하시는 것입니다. 죄악 된 세상이 있음으로 교회는 사명이 있고 타락된 도시가 있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불꽃같이 살아가는 인생이 의미가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받는 에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던 감독, 즉 목회자를 가리켰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단순한 성경의 묘사 속에서 우리는 중대한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교회에 당신의 뜻을 알리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자기의 뜻을 알리는 방법은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당신이 세운 사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그 말씀을 전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것도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편지를 두루마리로 말아서 인봉을 해서 인편에 보냈습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밧모 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낱낱이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루마리로 끈이 메어지고 인봉되었습니다. 누구도 뜯어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수신 란에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에게’라고 그 편지가 보내졌습니다. 제일 먼저 누가 받아보았을까요? 그 교회 목회자가 제일 먼저 받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목회자들이 일곱 개의 편지를 뜯어본 것입니다. 어느 목회자는 그 편지를 뜯어보았을 때에 충격을 받아서 거의 혼절할 뻔한 목회자도 있었을 것이고, 어느 교회 교역자는 그 편지를 뜯어보는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으로 그 동안 복음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던 그 모든 가슴 아팠던 시련들을 단번에 다 씻어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고 ‘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교회를 인정하셨도다’ 말할 수 있는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어설픈 민주주의가 교회에서 판을 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과 하나님이 불러 세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 그 양자의 관계가 신령한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교회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교인들이 생명을 걸고 교회의 영적인 은혜와 목회자의 영성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그런 의무를 지고 있다면 성경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다리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에베소 교회를 말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오늘 오른 손에 일곱 개의 별을 붙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일곱 개의 금 촛대 사이로 다니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 본 것은 네 오른 손의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손아래 붙잡혀 있는 일곱 개의 별은 일곱 교회의 목회자를 의미했습니다. 매주 단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말합니다. 제도에 대해서 말하고, 무엇이 바뀌어 지고 무엇이 새로워지고, 무엇을 고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모든 교회의 문제에 대한 최고의 치료책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목회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거룩한 그리스도예수의 오른팔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그 예수그리스도의 장중에 붙들려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그런 장엄한 권위와 엄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배의 주님께서 친히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종의 말씀이 악한 자들의 가슴을 꺾으며 모든 주역들의 심장을 터트려서 회개하게하고 매 시간마다 말씀의 역사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권능 있게 베풀어지는 역사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교회가 되어 지기 위해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도록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이같이 그리스도예수의 장중에 강하게 붙잡힌바 되어서 신령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언하고 그 말씀을 증언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백성들이 군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기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가슴에 불붙는 것 같은 역사가 일어나고 골수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원하는 소원이 불붙는 것 같아서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지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강단, 그 손에 붙잡힌바 된 거룩한 하나님의 종, 이것이 교회가 신령해지는 가장 중요한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일곱별을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도록 부름을 받은 여러분의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예수께서 그 손에 그 분들을 붙잡아 주실 때에만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지 그리스도가 이 손을 놓으시면 그는 가장 초라하고 더러운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현대교회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교회 교인들이 말씀을 참 사모합니다. 여러분처럼 이렇게 똘망똘망한 눈으로 어떤 때는 두 시간 반, 심지어는 몇 달 전에는 오후 세시에 예배가 시작되어서 일곱 시에 끝났는데 네 시간씩 계속 예배를 드리는데도 반짝반짝한 눈으로 말씀을 사모합니다. 그리고는 말씀이 파도와 같이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정말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들을 자격이 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왜? 과연 얼마나 이 강단을 통해서 그런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이 반석에서 터지는 샘 같이 솟아나서 수많은 백성들을 해갈시키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고 또 터지는 그 말씀의 샘을 막지 마시기를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저 이 교회에 가서 말씀이 시원찮으면 저 교회로 바람처럼 날아가고 저 교회에서 몇 달 들어보다 다른 교회가 좋다고 하면 또 다른 교회로 휙 날아가고 무슨 선한 것이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나오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마치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목회자들을 위해서 내가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이 자기의 기도제목인 것인 것처럼 자기의 기도제목과 목회자를 위한 기도제목이 구별이 안 될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이런 역사가 여러분 속에서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곱 개를 붙잡으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일곱 개의 금 촛대 사이를 다니고 계셨습니다. 이 일곱 개의 금 촛대는 바로 일곱 개의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이든지 간에 주님이 그 교회를 버리시기 전까지는 그것은 주님의 교회입니다.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도 주님은 사랑하고 그 교회를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 사이를 다니고 계십니다. 이 일곱 개의 교회 사이를 주님이 걸어 다니시는 이야기가 두 가지의 생각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냐 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믿음생활을 잘 하는 교회에는 주님이 우리 교회 사이를 지나다니신다는 것이 소망이 됩니까? 아니면 두려움이 됩니까? 소망이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비록 이렇게 연약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교회를 지나다니심으로 언젠가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이 세곡동에서 찬란한 불기둥과 같이 만들어 주실 것이다, 이렇게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주님을 떠나서 영적으로 타락한 가운데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것이 두려움이 됩니다. 왜? 언제든지 그 불이 이 촛대를 들어서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옮긴다고 하는 말은 쓸어버리신다, 훅~ 불어서 날려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나 교회가 예수n그리스도께서 우리 교회를 지금 어떻게 생각하실까? 또 고린도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를 성전이라고 불러주셨는데 ‘나’ 라고 하는 이 교회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 이것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됩니다. 교회가 깨어있는 교회일수록 이런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잠들어있는 교회일수록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은 모여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 오늘은 모여서 무슨 재미있는 놀이를 할 것인가? 오늘은 모여서 무슨 수다를 떨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를 우정으로 충만한 교회로 만들 것인가? 이러면서 교회는 애를 씁니다. 요즘은 하나님의 교회가 신령한 것으로 충만한 것과 우정으로 충만한 것 사이를 구분을 못합니다. 자기네끼리 모여서 먹고 마시고 놀고, 청년들이 집회를 한 번 하고 나가면 바닥에 맨 과자 껍질, 빵 껍질 뿐 입니다. 먹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네끼리 먹고 마시고 놀면 그것이 은혜가 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신령한 은혜로 가득해 지게 되면 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찬양, 그리고 세상과 나는 간 곳이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고, 주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우정으로 충만한 교회는 모여 있을 때에는 뭔가 잘 되는 것 같고 기분이 좋은데 조용히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실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정으로 충만해지는 교회를 젊은이들이 열심히 찾아갑니다.
여러분, 만약이 이 교회를 향한 평가가 사람의 평가라면 뒤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세곡교회를 가리켜서 ‘그 교회는 역사가 백년 가까이 이르렀다면서? 그 교회가 그렇게 은혜롭다며?’ 이렇게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여러분은 기분이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좋지요? 그런데 ‘어느 교회 다니니?’ ‘나? 세곡교회 다니지’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하면서 우리를 쳐다볼 때 아주 안 됐다는 듯이 어떻게 그런 교회를 다닐 수 있냐고 물어보면 기분이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안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까짓 것 ‘넌 그것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 버리면 되지요? 그런데 이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 교회를 판단하는 이가 사람이라면 틀리다고 말해 버리면 되는데 에베소 교회를 판단하고 계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주님이 너희는 이러이러한 것들을 잘못했다 말씀하시는데 ‘이이구 주님, 주님이 뭘 아시겠습니까? 주님도 사실 실정을 잘 몰라서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 수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한 번 배워보십시오.’ 그렇게 말할 수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 주님이 교회를 평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를 평가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불꽃과 같은 눈동자 앞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그리고 여러분 개인의 삶도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어제 저는 말씀드리면서 이 그리스도인들은 위장의 천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얼마나 잘 위장을 하는지 자신도 깜박 속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개개인을 평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개개인이 어떤 영적인 상태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깨닫고 깊이 이해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돌이켜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라고 죽 말씀하셨습니다. 하여튼 이 교회는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어떤 점에서? 이 교회는 많은 점에서 정말 탁월한 교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에베소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의 전용으로 꼽고 있지만, 그러나 저는 이만한 교회에서 평생 한 번만이라도 목회를 해 보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요즘의 교회는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특징을 지닌 아주 수준 높은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만큼 말이 많은 곳이 없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제가 직장 생활 할 때도 보면 다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조그맣고 비쩍 마르고 안경 쓰고 잘 따지는 사람은 100% 예수 믿는 사람이다, 가게에서도 물건 값 잘 깎고 조목조목 따지는 사람은 100% 예수 믿는 사람이다, 말 많고 회의 할 때 발언 많이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교회에서 배운 사람이다,’ 고 할 정도로 말은 무성하고 그 다음에 사람들은 실천이 없습니다. 재직 회나 공동 의회 때 마치 주주총회에 나온 대 주주처럼 손 높이 들고 목소리 높여가지고 조목조목 따지면서 씩씩대는 사람 치고 하나님 앞에 제대로 봉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말이 많은데 쓸 말은 별로 없고 이야기는 많은데 하나님을 향한 실천은 별로 없습니다. 누가 천국에 갔더니 다른 것은 다 지옥에 가고 입만 잘라져서 왔더라고 합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행위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내가 행위를 보았노니 교회는 말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행위에 있어서 모든 교회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에게까지 알려졌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행위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말만 하는 교회가 아니라 실천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회의만 하고 결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길 줄 아는 실천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 교회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오늘날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예수와 함께 복 받기를 원해도 예수와 함께 고생하기는 싫어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렇게 못 됐는지를 개척교회 하고 나서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구경은 많이 오는데 등록은 안합니다. 이유는 뭡니까? 이 교회가 지하실에 있는 개척교회라는 이유 그것 하나입니다. 우리교회는 지하실로 내려가서 화장실 앞으로 지나가고 여름이면 물이 콸콸 쏟아집니다. 그런데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 교인들이 물어봅니다. 어떻습니까? 하면 교인들도 사랑이 많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좋고 다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등록은 안 합니다. 그리고나서 등록은 저기 큰 교회에 가서 합니다. 거기에도 매주 안 나갑니다. 그러면서 등록한 교회에도 매주도 안 나가고 우리교회도 나오고 왔다 갔다 합니다. 그리고 한 다리를 걸쳐놓고 있지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다, 이 교회가 약하니까 내 몸과 건강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겨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소수였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신앙생활 할 때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교회를 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나가봐서 은혜롭고 기도해봐서 하나님이 너 이 교회에서 봉사해라 그러면 아멘! 하고 했지 교회가 부자가 얼마나 많나, 차 댈 곳이 있나 수준이 있나,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은혜를 받을 리가 있습니까? 쉽게 말해서 무슨 이야기입니까? 들을 귀는 높은데 삶으로 그 들은 말씀대로 애쓰고 수고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헌신적인 수고가 결핍된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엔가 금난 교회에 집회를 갔습니다. 7만 5천명이 모인다고 하니까 굉장히 큰 교회죠? 이런 비슷한 프로그램이었는데 교사만 모였는데 천 몇 백 명 모였습니다. 제가 차를 타고 가면서 제가 물었습니다. ‘교인이 7만 오천 명이나 모이니까 교사 수급에는 걱정이 없겠군요?’ 했더니 거기에 전도사님들이 하는 말이 ‘말도 마십시오. 년 초만 되어보십시오. 난리입니다. 말도 마십시오.’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필요한데 수고하며 봉사하겠다는 사람들은 소수라서 그 사람들을 서로 빼앗아가느라고 일대의 쟁탈전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작은 교회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큰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구나’ 여러분, 교회를 보십시오.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가고, 예수를 믿고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으나 그러나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리이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리라, 이렇게 예수를 위해 수고하기로 다짐하고 고생을 하고 예수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수고하려고 결심한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우리는 아직 건축 헌금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건축헌금 합시다’ 하면 사람들이 슬그머니 꽁무니를 감춥니다. 야유회 갔다가 타올이라도 하나씩 나눠주는데 자기 구역에 하나라도 빠져보십시오. 난리가 납니다. 교회가 이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 교회를 어떻게 안 좋아하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네 후일을 알고 네 후일을 네가 또 얼마나 수고하는 것을 안다’ 에베소교회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힘이 넘치도록 수고를 많이 한 신앙의 교회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에베소 교회는 본받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이만한 교회도 감히 서울에서 그래도 그 정도 가지고는 우리교회하고는 게임도 안 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교회가 많지 않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 교회는 말만 많은 교회가 아니라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행위가 있는 교회였고 복음과 함께 복을 받고 십자가를 타고만 다니려고 하는 축복만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만 모인 교회가 아니라 받은바 은혜대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애써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러한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들이 목회하는 교회가 이 정도만 되어도 우리는 어디를 가도 교회를 자랑하기 위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 수준에서 그쳤으면 제가 말을 안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뛰어넘었는데 이 교회는 참는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덕을 지닌 교회였습니다. 요즘의 교인들은 참지를 못합니다. 뭔가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목사님, 아무래도 교회를 옮겨야 되려나 봐요.’지금 누구 겁주는 것입니까? 저는 그런 사람들일수록 쳐다도 안 봅니다. 왜 그렇게 교만해 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참는 일에 있어서 아주 탁월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이 죄악이 관영하고 사단이 역사하는 세상에 하나님의 교회가 서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교회가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꽃처럼 살게 하기 위해서 애를 쓸 때 어둠의 세력들은 가만히 있겠습니까? 사단의 세력들은, 어둠의 세력들은 교회가 부흥하고 번창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자신을 다 불사르면서 헌신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도록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림없습니다. 치열하게 역사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부흥하는 교회는 시련이 많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핍박이 많습니다. 저의 교회에서는 눈물 날 정도로 열심히 전합니다. 우리 교회가 동네에서 큰 교회는 아니지만 사당동 방배동에서 우리 열린 교회를 모르면 간첩입니다. 교인들이 토요일마다 주일마다 발이 부르트도록 온 동네를 다닙니다. 하도 열심히 전하니까 동네사람들이 그러더랍니다. ‘거기가 어느 교회인지 한 번 가서 보면 좋겠네’ 왜? 미안해서, 하도 자주오니까.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보면 때로는 아파트 경비원들한테 잡상인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욕을 먹기도 하고, 지난번에 어느 교인 한 분은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개에게 물리는 일을 경험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도 하고 별의 별 일을 다 당합니다. 이럴 때 한 번 주님을 섬겨 보려고 하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풀썩 주저앉는다고 하면 인내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분의 생애는 인내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죄인들을 향하여 그토록 오래 참으신 이를 너희는 기억을 하면서 인내 하여야 함이라’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참는 일이 힘들고 견디기 힘든 일들이 어렵다고 느껴질 때에 예수께서 너희들이 죄의 길을 걸어갈 때에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 너희들이 생각을 해 보라, 너희들이 참는 것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 아니냐 이런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참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하도 닦달을 해서 안 그렇습니다만 벌써 열두시 10분에 끝나는데 20분만 되면 시계를 보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 시계를 보면 목사님이 몰라보니까 고개를 돌리면서 뒤의 시계를 보는 것입니다. 목사님, 몇 시인지 아십니까? 하면서 쳐다보는 것입니다. 참을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 교회는 참는 데 있어서 도가 튼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네가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내가 안다’ 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알아주실 정도로 이 교회는 핍박을 참고 고난을 견디고 어려움을 참고 그리고 오래도록 이기면서 자기의 신앙을 지켜온 이러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이 교회를 어떻게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시련이 많이 올 때도 참고, 역경이 올 때도 견디고 핍박이 올 때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려고 애를 쓴 교회였다는 말씀입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이제 감히 우리교회가 에베소교회보다 더 낫다고 명함을 내놓을 만한 교회가 없는데 이 교회는 거기에서 한 술 더 떴습니다. 그것은 순결한 교회였습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그랬습니다. 죄를 많이 짓고도 교회의 중직에 오르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에 악한 사람들을 도무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회개치 않은 죄인들을 덮어주고 교회의 직분을 주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죄와 악이 가득 들어와 있어서 죄인들이 그 죄를 지으며 역사하도록 남겨두는 이러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이 교회는 순결한 교회였습니다. 도무지 거짓말 하는 자나 행음하는 자나 아니면 이 세상에 도덕적인 죄를 짓는 사람들이나 지탄받을만한 잘못을 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을 용납해 주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이 교회가 한 번 더 우리들의 교회와는 비교가 안 될 수준으로 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과 같이 타락하고 세상의 죄악과 교회 속에 있는 죄악에 질적인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과 같이 되고 있는 오늘날과 같은 교회시대에 에베소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폼이 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멎은 것이 아닙니다. 자칫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뜻입니까? 이 교회는 영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는 교회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몇 년 전에 어떤 이단이 나와서 92년 10월 28일에 주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니라고 절대 그 날에 주님이 안 오신다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안 믿었습니다. 그리고 웬 도깨비 같은 사람이 나와서 빨리 하얀 옷 입고 예수님이 오시니까 학교건 집안일이건 다 집어치우고 모여라 하니까 우르르 몰려다녔습니다. 그 사람들이 안 믿던 사람들이 아니라 태반이 예수 믿고 교회에 등록해서 다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녔습니다. 목사님들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 때 안 오신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안 믿고 집 팔아서 우르르 쫓아다녔습니다. 오시긴 뭘 오십니까? 그리고는 나중에는 ‘내가 잘못 알았다’ 그러면 끝입니다. 왜 그렇게 허망한 일에 우르르 몰려다닙니까? 이번에는 또 바뀌어서 5년 후로 다시 시간표를 조정했습니다. 또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런 어리석은 일이 일어나는데도 성도들이 그것 하나 분별할 줄 모르고 꿈에 뭘 봤다 하면서 우르르 몰려다니고 집 팔고, 땅 팔고, 가정 팽개치고 교회 떠나고 이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다 자칫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에베소 교회가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이렇게 드러낼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무엇일까요? 성경말씀 자체에 대한 많은 지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설교하러 오면 하나님이 보내신 종이라고 생각하고 정성껏 그를 접대하고 그리고 공손히 강대상으로 그를 인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기 시작할 때에 교인들은 모두 앉아서 ‘주여 다만 말씀 하옵소서, 종들이 듣겠사옵나이다’ 이렇게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가 서론을 지나서 본론을 지나갈 때에 성도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꽉 차있었기 때문에 아닌 것을 이야기 할 때 즉시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국은행에 가면 돈을 복사를 한 것을 우리는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행 직원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돈을 막 세는데도 탁 이것 이상하다 딱 보면 위조지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짜 지폐를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만져보고 또 만져보고 또 보고 냄새 맡아보고 또 맡아 보았기 때문에 가짜 돈이 들어오면 손으로 만질 때 감각이 틀린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약과 구약 성경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성경뿐만 아니라 신약의 사도들이 쓴 편지들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이고 그리스도가 무엇이고 구원이 무엇이고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성경의 교훈들이 에베소교회에 꽉 차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와서 허튼 소리 할 때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이단을 쫓아가는 일 같은 것을 에베소교회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그 성경의 지식으로 무장 된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질문을 하나 할 테니까 여러분이 분명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요즘 교인들이 신문을 읽고 잡지를 읽는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합니까? 성경을 읽는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합니까? 모래시계 보는데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합니까? 성경을 읽는데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합니까? 며칠 전에 방 안에서 온통 곡소리가 났답니다. 텔레비전에서 주인공이 죽었다나요? 오늘 새벽기도 갔다 와서 기사를 보고 설교자로서 그렇게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통곡을 하면서 텔레비전 보고 눈물을 흐리는 사람이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에는 와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가슴을 부여잡고 애곡하지 않던 사람들이 드라마 그것 다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모릅니까? 그것 다 공갈입니다.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냥 죽은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울긴 왜 웁니까? 그것을 보는 시간보다 성경을 읽는 시간이 더 많이 있어야 합니다. 여자들이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까요? 성경이라는 거울 앞에 앉아서 자신을 비춰보는 시간이 길까요? 그러니 도깨비 같은 사람이 하나가 나타나서 내가 예수라고 깃발 하나 흔들고 다니면 할렐루야, 아멘 하고 쫓아가는 이유가 다 매력 있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생겨난 일이 아닙니다. 신앙에 있어서 우연히 일어난 일은 없습니다. 모두 필연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철저히 준비되어 온 과정입니다. 그러니 오죽했으면 어느 교회에서 성경을 많이 읽으면 양동이를 주겠다, 전기밥솥을 주겠다, 하이타이를 주겠다 그렇게 꼬셔도 안 읽습니다. 심지어는 어느 교회에서는 공갈까지 합니다. 성경 신구약을 한 번 안 읽으면 12월 달에는 집사를 자르겠다. 그러니까 잘라라 잘라 나는 못 읽겠다. 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이 에베소교회를 볼 때에 얼마나 이 에베소교회가 부러웠겠습니까? 목사님들이 강단을 비우고 외부강사를 부르고 어디를 갈 때에는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따발총을 들고 무슨 소리를 얼마나 쏘고 갈까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에베소교회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말 같은 소리를 하지 않으면 전혀 듣지를 않았습니다. 올라갈 때에는 천사처럼 모셨으나 본론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저 자를 끌어내라’ 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왜? 성경지식이 꽉 차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평생 동안 열심을 내온 교회였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것 하나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 교회는 거짓 사도가 올라갈 때에 그가 거짓 사도이고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도라고 하지만 사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는데 그 이유는 성경만을 아는 것만으로는 그런 분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뭡니까? 영적인 통찰력입니다. 말을 많이 듣지 않아도 영을 분별하는 분별력이 있어서 사람을 보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출발은 우리 믿는 것과 비슷하나 끝이 다르다 이단 아닙니까? 갈수록 뭔가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직감적으로 ‘당신은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의 일꾼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판단하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생기는 줄 아십니까? 어림없습니다. 분별력이 없으면 삶이 천방지축입니다. 그리로 가면 안 된다, 가면 하나님께 혼난다, 그래도 가서 한 번 넘어져봐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왜 그렇습니까?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로 가면 낭떠러지입니다. 그리로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아주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그 길을 가시면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래도 간답니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가다가 쾅 하는 일이 일어나거들랑 오늘 내가 거기에 가지 말라고 했던 일을 기억하십시오. 하고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데도 전혀 마음이 켕기지를 않고 씩씩하게 ‘주 없이 살 수 있네.’ 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람들이 기도를 안 하는 줄 아십니까? 기도합니다. 성경을 안 읽는 줄 아십니까? 엄청 읽습니다. 무엇이 없습니까? 영적인 분별력이 없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서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영적인 분별력이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와 은혜의 넓이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높이를 알고 이해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거기에 익숙한 삶을 살게 될 때에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것이 아니다. 이 일은 분명히 될 수 없지만 그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깨닫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이러한 영적인 분별력과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감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을까요? 참된 회개와 거짓된 회개, 참된 사도와 거짓된 사도, 그리스도께로부터 말미암는 진정한 교훈과 인간이 만들어 낸 거짓 훈계, 참된 그리스도의 스승과 거짓 선생들을 분별해 낼 수 있는 뛰어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영적인 수준이 탁월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이 교회가 제가 부러워하는 것을 여러분이 탓 할 수 없는 교회가 아닙니까? 할렐루야. 이 교회는 이렇게 부지런한 교회였습니다. 회의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의를 해도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 섞여있으면 회의가 좋은 방향으로 가서 성령의 인도를 받기 쉬운데 이것이 좌가 어디인지 우가 어디인지 가리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그 다음에는 이 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기가 얼마나 힘들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이 교회는 그런 점에 있어서 뛰어난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 교회를 어떻게 안 부러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한 마디로 신령한 영향력이 있는 교회였다는 말씀입니다.
거기에서 끝나도 기가 막힐 텐데 이제는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수준으로 올라갔는데 그 교회는 또 어떤 용기가 있었습니다. 거짓된 것이 일단 판명이 되었으면 그것을 묻어두는 교회가 아니라 용감하게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의 용기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옳은 것을 사수하고 그릇된 것을 드러내어서 사람들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라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거짓된 것들을 드러냄에 있어서 희생을 치룰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소유한 교회였습니다. 흔히 통용되는 말이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 이런 말이 에베소교회에서 만큼은 에베소교회 사전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 된 것은 잘못된 것이고,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된 것과 그릇된 것이 드러나면 어떤 희생이 따르고 출혈이 따르던지 그것을 드러내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히 판단을 해서 거짓된 것은 거짓되다고 말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판단을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 줄 수 있는 신앙의 용기를 소유한 교회였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교회는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당했는지 참고 견뎠다는 말이 또 두 번이나 더 나와서 도합 인내한다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교회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에 부딪힌 교회였습니다. 여러분은 디모데 전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디모데가 바울로부터 디모데 전 후서를 받을 때에 그가 바로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 때에 사도는 이미 사역을 감당하면서 지칠 대로 지치고 거짓 선생들과 악한 자들의 도전으로 말미암아 기가 꺾이고 건강도 약화 되어서 목회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불안해하고 있는 아들과 같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속에서 말하기를 거짓된 선생들을 주의하라고 말했습니다. 거짓 된 교훈을 가지고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의 참된 질서를 헤치는 이런 영적인 도전들을 많이 겪은 시련의 길을 걸어온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그 끔찍한 시련의 터널을 인내로 지났고 그리고 그 끔찍한 도전의 골짜기를 참음으로 이겼으며 그 어려운 시절을 견디면서 이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교회는 끝까지 붙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이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이다
이 교회는 이렇게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면서 핍박이 와도 참고, 시련이 와도 견디고, 고난이 와도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다 버렸던 것입니다. 이 정도면 이제 지상에는 이런 교회가 몇 개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 위에 또 하나가 또 있었는데 이 교회는 부지런한 교회였습니다. 잠언 10장에 말씀하시기를 ‘게으른 자는 부리는 자의 이의 식초와 같고 눈의 연기와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이 일꾼으로 부르셨는데 우리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영혼들을 진실한 사랑으로 섬기면서 애쓰고 수고하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주님이 생각하실 때 여러분을 이에 초처럼 괴로우시다는 것입니다. 주일학교에서 선생자리를 맡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이 주님에게는 괴로우시다는 것입니다. ‘언제쯤 쟤가 그만 두나’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쟤는 저기 왜 계속 나오나?’ 눈에 나는 연기와 같아서 눈을 비비게 만드는 이렇게 꺼칠꺼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교회였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여 열심히 성실을 다하여 도무지 게으르지 않았던 교회입니다. 게으르다는 것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 게으른 자를 주님이 지칭하실 때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랬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악한 것은 성품이고 게으른 것은 삶의 태도입니다. 게으른 삶의 태도는 악한 성품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다 선한 사람은 아니지만 악한 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위하여 게으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게으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성품도 점점 하나님을 향해 악하게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부지런한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들어갔을 때 단정하고 깨끗해야지 거미줄이 여기저기에 있고 휴지가 있는 교회는 교회도 영적인 상태도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부지런한 교회였습니다.
자, 이 정도면 이제 여러분도 에베소교회에서 집사 한 번 해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러나’ 이 한 마디 말은 앞에 나오는 모든 좋은 것들이 소용이 없다는 듯이 뒤집어 버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가 안 나왔으면 좋으려니와 그러나 이 한 마디가 나와 버렸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차라리 앞에 나쁜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나가 나오면 소망이 있습니다. ‘너희는 뭐도 못하고 뭐도 못하고 뭐도 못했다. 그러나’ 라고 하면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 좋은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나’가 나오니까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재미있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칭찬한 이유는 아주 여러 가지입니다. 행위, 수고, 인내, 순결함, 영적인 분별력, 용기, 견딤, 부지런함, 아홉 가지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홉 가지의 탁월한 교회의 특징을 한 마디로 뒤집어 엎어버린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오직 무엇입니까? 무엇을 버렸다?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왜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지를 않고 굳이 처음 사랑, 첫사랑을 버렸느니라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은 많이 하지만 무엇이든지 첫 번째 경험이 가슴 속에 가장 선명하게 새겨져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초등학교 들어가서 생전 처음으로 가운데 고무줄로 된 까만 운동화를 신은 경험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후에 수 십 켤레의 신발이 제 발에 신겼다가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또 다 떨어져서 새 신발 사고 운동화, 슬리퍼, 고무신, 구두, 장화 별의별 신발이 다 쓰레기통에 들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신발들은 하나도 기억에 안 나고 초등학교 1학년인가 언젠가 운동화를 사줘서 그것이 너무 좋아가지고 그 새 운동화를 가슴에 품고 잠들던 때 그 감격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운동화가 제일 좋아서가 아니라 그 운동화가 신어본 것이 첫 번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신앙생활 하다보면 주님을 사랑하던 때가 있고 사랑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충만할 때가 있고 충만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뭐든지 기억에 강하게 남는 것은 처음 성령 체험한 것, 처음 성령의 은혜를 받았을 때 그것이 잊혀 지지 않고 기억에 강하게 남습니다. 또 처음 사랑을 깨달았을 때, 주님의 사랑을 처음 깨달았을 때 사는 것이 날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다가 5~6년을 교회를 그만 두고 안 다니다가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저는 대학에도 못 들어가고, 몸은 아프고, 돈은 하나도 없고, 집안은 쫄딱 망하고, 아무 소망이 없는 그러한 낙심한 젊은이였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망이 없어 한 때는 죽을 결심까지 하고 실행에 옮겼던 사람인데 그 때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이렇게 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는 벌판에 서있는 이 교회의 1/6정도 될까 말까 한 교회에 성도들이 약 30~40명 정도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뻑 하면 전기가 나가서 촛불을 켜놓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회를 해야 하는 아주 초라한 교회에서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보니까 그리고 내가 이렇게 소망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이 세상에 이렇게 희망이 없는데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니까 그 사랑이 내 마음에 밀려드니까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교회까지 걸어가려면 찬바람이 몰아치는 그 겨울에 30분 이상을 개울을 건너고 들판을 지나고 둑길을 걸어서 가야되는데 그 추운 겨울에 교회에 나가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 교회에 나가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새벽에 집에 돌아올 때에는 마치 길을 걸어가는 것 같지 않고 구름 위를 둥둥 떠서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왜? 은혜가 충만하니까. 그러면서 마음속에 그 하나님의 사랑, 예수의 넓은 사랑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찬송)
저 장미 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이슬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 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아 사람이 없도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자신을 드리려고 하는 이 신앙의 뜨거운 사랑 이것은 바로 모든 신앙의 아름다운 행위를 능가하는 가치를 지닌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즉 구약 성경의 모든 중심점이 무엇이냐 율법의 강령이 무엇이냐 그것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로 요약 하셨습니다. 사랑 그것이 바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사랑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크레마 파이’ 벽에 박혀 있는 못입니다. 율법도 선지서도 성문서도 모든 성경이 이 못에 걸려있지 않으면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일의 핵심은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같은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나누어질 수 없는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여기에 모든 신앙생활이 걸려야만 비로소 온전한 신앙생활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매일 설교하러 올라오는 제가 있다고 칩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와 여러분의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이 말씀을 전하면 선한 목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없고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영혼을 향한 사랑의 동기가 없이 내가 이 말씀을 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가리켜서 성경은 벌어먹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는 삯군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경건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살기위해서 때로는 금식하고 때로는 율법을 지키며 때로는 자신을 깨끗케 하고 거룩한 말씀을 따라서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쓸 때에 그 동기가 가슴속에서 날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동기가 되고 있다면 그는 경건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동기가 이 가슴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뜨거운 동기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사랑의 동기 없이 경건하려고 애를 쓰면 그 사람을 가리켜서 성경은 바리새인이요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사의 직분을 감당해 나가는데 있어서 그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영혼을 돌보면 그는 선한 복음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동기가 없이 영혼을 가르치면 그는 그저 교회에서 맡겨진 일을 위해서 애쓰는 그런 자기의 체면을 위해서 수고하는 일꾼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일을 행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왜 열심이 있는 경건이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선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바리새인이 되게끔 만드는 이유가 되는 그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 모든 하나님을 위한 섬김이 영혼 속에서 깊이 차오르는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고 있을 때에 비로소 그것이 그 모든 구별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자부하는 우리의 모든 삶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게 만들고 오늘도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게 하는 이 모든 이유가 가슴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그리스도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왕년에 한 번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옛날에 한 번 체험한 것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옛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은 것 그것을 가지고 오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매일 빈들에 나아가 내리는 그 만나를 모으고 그것을 호멜에 담아다가 일용할 양식을 삼으면서 매일 매일 먹고 기운을 차려서 그렇게 광야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을 공급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매일같이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신지를 깊이 깨닫는 사랑의 도전을 매일 매일 받으면서 그 사랑을 힘입어서 주님을 위해서 살고 그 사랑 때문에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어두운 세상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불꽃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죄가 많고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를 순결한 삶을 계속살고 그리스도예수께 굳게 붙어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며 살도록 우리로 하여금 모든 유혹으로부터 지켜주고 시련으로부터 우리를 굳게 붙들어 주는 힘이 무엇입니까
(찬양)
주님의 사랑은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할 때에 두려움 사라지네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시련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네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생각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제법 무엇인가 하는 것 같고 가치 있는 것 같고 제법 무엇이나 된 것 같은 생각을 할 때에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실 때에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어떻게 인도하여 이곳까지 인도하였으며 내가 어떻게 너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였는지 기억하라”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주님을 멀리 떠났던 탕자와 같은 인생 진노의 불길 앞에 놓여 사망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죄인들이었음을 우리들은 깨닫게 됩니다. 그 사망의 길을 걸어가며 인생을 살아간 모든 날들을 후회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오늘 부르셔서 주님을 찬송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드신 것은 바로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강권하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미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세상 끝날 까지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내 주 되신 주를 참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며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강물과 같이 깊이 밀려오는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진 가운데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얼마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고 그리고 마라와 같이 쓴물을 머금어야 하는 광야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이 비참하고 삭막한 신앙생활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매일같이 메마른 신앙생활을 하고 도무지 기도도 하나도 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피리를 부셔도 춤 출 줄을 모르고 가슴을 치며 성령이 애통하셔도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이런 사악하고 부패한 심령을 가지고 살아가면 우리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죄가 쌓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 더욱 더 멀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욱 희미해지고 처음사랑을 날마다 더 잃어버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빗나가는 인생을 살게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생기 없는 이 모든 신앙생활을 보면서 주여 오늘도 이 마른 뼈와 같은 우리들의 심령에 생기를 주시옵소서. 사랑을 잃어버리고 마치 거북등처럼 갈라져 버린 논두렁같이 이렇게 모두가 무참하게 무너지고 그리고 황량하게 되어버린 우리의 심령을 은혜의 단비를 폭포수와 같이 내리셔서 마른땅에 비 내려 우리의 심령을 소생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들로 바꾸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통해서 이 같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십니까?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무엇보다도 깊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으면 뭐든지 다 새롭습니다. 기도회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고 예배 속에는 감격이 있고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 속에는 헌신이 담겨져 있고 교회를 향한 봉사 속에는 인내가 있고 소망이 있고 그리고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 속에 있는 사람은 섬기면 섬길수록 주님이 더 귀하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여기에 없는 사람은 섬기면 섬길수록 주님께로부터 더 멀어집니다. 섬길수록 더욱 더 재미없는 신앙생활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치유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깊이 회개해야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체험하려고 먼저 생각하지 말고 오늘처럼 말씀을 들을 때에 생각을 해야 됩니다. 맞아 이전에 내가 행위가 있고 수고가 있고 인내가 있고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삶을 살았지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내가 그런 삶에 해당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어디에서 나는 떨어졌을까 아 언제부터인가 내 기도의 골방에 눈물이 마르기 시작 했는가 언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이 교회의 봉사가 형식적인 것이 되어가기 시작했는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런 사실들을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있고 그 사랑의 강물이 매일 심령을 충만하게 채울 때는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나를 통하여 일어났는가 생각하며 열매 없는 신앙생활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깊이 뉘우칠 때 하나님은 다시 오셔서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일도 한 시간 남았습니다마는 오늘과 내일을 통해서 여러분이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깨닫고 그래서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깊이 슬퍼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귀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서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신앙의 정원에 꽃피고 새가 우는 그런 신앙의 전성기가 찾아오고 이 세곡 교회에 이전보다도 더 크게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역사하여서 잃어버린 영혼들이 매 주일마다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충만한 사랑의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3. 십자가를 따라서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6-28)
시작한 게 어제 같은데 벌써 그제입니다. 여러분 삶으려면 푹 삶아야 합니다. 그래서 집어 놓고 뜨거운 물을 한 솥 집어넣고 뼈다귀를 집어넣고 푹 삶아야지만 그것이 제대로 곰탕이 됩니다. 여러분, 오늘 이제 셋째 날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제가 한번 따라해 보십시다. 눈물로 따라간 예수. 이것이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23장에 그림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죄를 지은 사람을 죽도록 형벌을 내리는 말하자면 사형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선 이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시기에 앞서서 예수님이 이렇게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재판이 행해져야 했습니다. 그 재판에 대한 이야기가 23장 앞에 죽 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법을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와 같은 초신자들도 예수님의 재판을 보면 이 재판은 대단히 부당한 재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첫째는 이 재판이라고 하는 것은 죄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얼마큼 형벌을 줄 것인지를 결정을 하는 것이 재판인데 끌려온 이 죄수는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강행되었습니다. 또, 혹시 인간이 실수를 해서 죄가 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재판에 회부하는 경우가 있다손 치더라도 사실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심문해서 그래서 죄가 없으면 방면을 해주는 것이 재판의 목적인데 재판장이었던 빌라도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없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끔 내어준 재판장이 피고의 무죄를 확신했는데도 사형을 언도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이 법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이 재판은 전혀 잘못된 재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없는데도 사형을 받으신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재판의 결과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에 처하는 대신 진짜 사형시켜야 할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한 바라바라고 하는 강도를 살려주었음이 이 재판이야말로 공의가 죽은 재판이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느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되 저희가 큰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고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그러니까 빌라도의 법정에는 그저 몇 십 명의 방청객과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을 고소하는 유대인들이 모여서 재판을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빌라도 앞뜰뿐만 아니라 빌라도 앞뜰에 있는 동산까지도 다 뒤덮었다고 합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아니 웬 예루살렘에 이렇게 사람이 많았을까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은 어디에 흩어져 살든지 간에 이 유월절에는 모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보여야 하는 절기였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이때 대개 80만에서 100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복잡 거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한때 요술을 행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일으킨다고 하던 그 유명한 예수가 이제 이단으로 찍혀서 사형 언도를 받는 이 시점에 어찌 관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빌라도의 법정을 매웠고 빌라도의 법정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먼 동산을 완전히 뒤덮어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판결이 어떻게 나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판장인 빌라도가 보니까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들이 이말 저말 하는 것들이 도대체 맞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인 빌라도가 하는 말이 하는 말이 무슨 나쁜 일을 이 사람이 했느냐. 나는 그를 죽일 죄를 그에게서 찾을 수가 없다 말하면서 그를 놓아주겠다고 말을 했을 때 이 사람들은 무력으로 시위를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 그러고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래서 결국은 법적인 도리가 이긴 재판이 되는 것이 공의로운 재판인데 법이 이긴 재판이 아니라 소리가 이긴 재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목소리를 크게 지르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하는 예수를 당신이 놓아준다면 당신은 충성스러운 가이사의 종일 수 없습니다. 하면서 시위를 벌이자 그만 이 빌라도는 예수그리스도는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강직하고 정직하시며 의로운 것을 추구하며 살던 그리스도께서 왜 이렇게 잘못되고 그리고 그릇된 재판의 결과에 대해서 항의하지 않고 그대로 복종하시고 그래서 그 십자가를 지고 오늘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십자가를 지게끔 만든 이 빌라도의 재판은 공의를 어긴 재판이었고 엉터리인 재판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불법한 자의 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는데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빌라도를 사로잡고 유대인들을 사로잡고 대제사장들을 사로잡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좌절될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단의 한계였습니다. 사단은 인간보다 훨씬 지혜로운 자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깊이 있는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충동질 하였는데 사실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불법한 자의 손에 죽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사단의 사슬과 죄악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는 바로 유일한 하나님의 지혜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 십자가에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받은 다음에 사람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 지워서 그리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는 유대인들에게 두 가지 규례가 있었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은 십자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에게는 두 가지 규례가 있었는데 하나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채찍을 맞는 것이었습니다. 채찍을 맞는데 이 채찍은 대개 40의 하나 감한 39대 정도를 때리는 최근에 이 예수님 시대의 형틀을 연구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조사된 바에 의하면 그 채찍은 우리들이 말을 달리게 하거나 소를 몰 때 쓰는 그런 채찍이 아니라 가죽으로 되었는데 한 가닥이 아니라 아홉 가닥으로 된 채찍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닥에는 각각 말하자면 쇠붙이나 혹은 뼈를 깍은 그러한 재료들을 낚싯바늘 같은 것들을 죽 매달았습니다. 그래서 때리면 살점이 후두둑 떨어질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채찍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죄수들은 십자가를 지워 끌려가기 전에 이 채찍을 맞다가 살이 뜯어지고 뼈가 들어나고 채찍을 맞다가 십자가를 져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매를 다 맞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 십자가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인데 먼저 세로 막대를 세우고 두 번째 가로 막대에 죄수를 못 박은 다음에 도르래를 들어 올려서 끼우는 이러한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사람은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가야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규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무게는 대개 80Kg에서 120Kg까지 나가는 그러한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가지신 인간의 몸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이셨습니다. 오래 걸으시면 행로에 권하셔서 우물가에라도 앉으셔서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천한 여인에게도 물 한잔을 청해서 드셔야지만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 있는 연약한 인성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전날도 복음을 전하시고 그리고는 저녁 시간에 목요일 저녁입니다.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드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만찬이 그저 유월절 만찬정도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바로 이 지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나누는 저녁식사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셨을 것입니다. 제대로 식사를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식사를 끝마친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잠들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사를 건 영적인 투쟁에 들어가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요일에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미 목요일에 다 이겨 놓은 영적인 승리의 보증을 따라서 희생과 고난을 실천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질 십자가를 위해서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기도를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렸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아버지께 들으심을 입었느니라 말했습니다. 큰 울부짖음과 말하자면 가슴을 찢는 통곡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이겨야 할 것과 또 당신이 가고 난 다음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공동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보호를 계속 받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애의 마지막 남은 밤을 온전히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들을 위한 증보의 기도로 온 밤을 새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육신의 입으시고 마지막 보내신 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밤에 하나님 앞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미 시간을 넘고 공간을 넘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기 하루 전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고개를 들어 여호와 앞에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 속에 그림자처럼 드리우면서 밀물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 속에 밀려왔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철저한 버림당하는 것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처절하게 외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하나님으로 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이러한 느낌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죄짐을 짊어진 어린 양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이 세상에 임하여야 할 하나님의 진노가 당신 자신을 향하여 쏟아 부어질 내일의 고난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 속에 밀물과 밀려들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잠깐 여기 있어 나와 함께 있어 달라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 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언제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와 함께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나를 위해 기도를 해 달라. 부탁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겟세마네 동산에 맞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밤은 인간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처절한 외로움과 그리고 영적인 깊은 고뇌와 십자가가 육신의 고통이었다면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하나님과 담판을 짓는 이 몸부림 친 기도는 영혼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과 같은 고난을 동반한 순간들이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장작을 피우고 모닥불을 피워서 추위를 모면해야 하는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시자 땀이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이 되는 육체의 고뇌도 또한 드러났습니다. 이렇게 생사를 건 기도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렇게 매달린 다음에 간악한 로마 병정과 그리고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배반한 유다에 의해서 병정들에게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병정들에게 팔려가서 대제사장의 뜰로 끌려가고 그곳에서 갖은 심문을 다 받은 다음에 바야바의 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군병들에게 이끌려서 이번에는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빌라도에 받은 갖은 고초를 다 받고 이 사람이 귀찮으니까 이 사람이 갈릴리에서 부터 왔다는 소리를 듣고 갈릴리 지방의 총독이던 헤롯에게로 보냈는데 헤롯은 마침 휴가를 즐기기 위해 마침 예루살렘에 와서 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헤롯에게로 끌려가셨습니다. 헤롯에게서 온갖 모욕과 치욕을 받으시고 매 맞으시고 요술을 행해보라고 하는 주문을 받고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대답도 하지 아니하자 또 많은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빌라도의 뜰로 끌려왔고 빌라도의 뜰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장시간 심문을 받으시고 마지막에는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금요일 7시나 8시 아침쯤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갖은 고욕을 다 당하면서 오늘 80Kg내지 120Kg이나 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데 쓰러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꾸 아마 쓰러지시고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행렬이 아마 쳐졌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병정들은 옆에 지나가는 시몬이라고 하는 구레네 사람을 무조건 붙잡아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만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도 아니었고 예수님께로부터 병 나음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가 죽는다니까 그게 무슨 일인가 하고 구경을 나온 그저 평범한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시골 사람을 이 병정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라고 끌어들여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쫓아가게끔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전설에 의하면 이 구레네 시몬이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후에 은혜를 충만히 받아서 인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여러분, 이것을 가르쳐서 억지 은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예수를 믿는 것이 언제나 강권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주님을 섬기고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면 그보다 더 유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 죄로 가득한 존재가 되어서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냉담하게 식어서 도무지 가슴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그리고 하나님과 생생한 교제를 기대하는 영적인 간절한 열망도 잃어버린 채 껍데기만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때 하나님은 가끔 하나님은 여러분을 억지 은혜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 일을 놓고 세상에 가서 재미 좀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집사라는 직분을 강제로 씌우시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교사라는 직분을 주셔서 교사를 맡았기 때문에 주일을 빼먹을 수가 없게끔 그렇게 우리의 발목을 잡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나 보십시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스스로 버려두면 타락할 수밖에 없고 예수께로 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나가버릴 수밖에 없는 그 죄인들을 하나님은 이렇게 억지 은혜로라도 부르셔서 우리의 발목을 붙잡으시고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믿는 형제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도록 우리를 붙잡으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금년에도 여러분 가운데 본인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억지로 주위의 권유에 못 이겨서 교사를 맡거나 성가대를 맡거나 청년들 리더를 맡거나 집사를 되신 분들이 있거들랑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억지로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달게 지고 그것을 계기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을 다해 섬기려고 애를 쓰고 그 억지 은혜의 매여서라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려고 애를 쓴다면 잠시 후에 그 억지 은혜가 바뀌어서 자원하는 은혜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가 교회에 코꿰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그저 가끔씩 와서 설교나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그러한 마음의 정함이 없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내가 코 끼었다고 하면 말하면 그렇게 신이 나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제 제가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그래도 꿈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혹시 나를 한 천명되는 교회에서 한번 안 불러주나. 혹시 누가 교회를 다 차려놓고 좋은 목회자가 없다고 해서 나보고 한번 오라고 하는 그런 건수가 없나, 아니면 또 혹시라도 누가 큰 땅과 건물을 지어 줄 테니 와서 말씀만 전해달라고 그러는 데는 없나. 뭐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나님이 인도해주신다면 싫다 소리는 안할 작정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11월 15일까지도 개척의 '개'자도 생각을 안했는데 15일 아침에 일어나 기도를 하는데 얘야 네가 교회를 하나 세워야하겠다. 하나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하게 하십니까. 얘야, 그것이 농담이 아니다. 다 기도하고 나서 이것이 아마 복날의 개꿈 꾸는 것도 아니고 이럴 리가 없지 하고 지냈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하나님이 한 단계를 높이셨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세워야 되겠다. 하나님이 세워라. 뭐로 교회를 세웁니까? 나 같은 사람이 교회를 한다면 누가 쫓아와서 이 설교를 듣겠다고 모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누가 교회를 하자고 와서 한 20명이 와서 개척교회를 누가 하자고 돈도 대고 땅도 대고 한다고 해도 내가 할까 말까 하는데. 아무도 하자는 사람이 없는데 저보고 개척교회를 하나님이 하는데 하나님 오늘도 농담이시겠지요.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는 잠을 안 재우시고 침대 머리맡에서 철야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이것은 더욱 확실해. 하나님 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하고 이제 11월 15, 16, 17일 날 응답을 받고 12월 12일 의자를 다 들여놓고 마이크 설치하고 예배를 들였습니다. 콩 볶아 먹은 것입니다.
그렇게 다 들어왔는데 개척교회를 한다고 하니까 7명이 있었습니다. 저와 저의 집사람, 그리고 전도사님 두 분, 교역자가 여섯 명이고 깍두기 하나 해가지고 7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를 시작을 했습니다. 그것도 지하실에 냄새나는데 거미줄 다 뜯어가지고 그리고 이제 시작을 해서 교인들이 이제 20명, 30명, 40명. 그때에 어느 교회에서 1200에서 1300명 모이는 교회에서 후임자를 거론하는 가운데에 정식으로 청탁이 온건 아니지만 제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제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어휴 어차피 물 건너갔다. 진작 이야기를 하지. 교인들한테 와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저는 인생 끝났습니다. 이제 이 열린교회에 코꿰었습니다. 제가 이제 어디를 가겠습니까? 수많은 교회에서 절 오라한들, 오라할 일도 없겠지만 오라한들 올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저를 거기에다 코를 꿰어 놓으셨으니 이제 저는 나올 수도 없고 도망 나올 수도 없고 교회를 옮길 수도 없습니다. 전도사님 때에는 그래도 교회를 옮겨 다닐 제목이라도 되는데 이제 애를 낳아 놨으니 이제 길러야죠. 이제 코꿴 것입니다. 이제 저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무슨 교회가 뭘 이야기를 하든 뭘 하자고 하든 저는 이제 소망이 없고 주일날도 못 가고 수요일도 못 가고 이런 특별한 날은 방학이라서 허락하는 것이죠. 이제는 코를 완전히 끼였습니다. 교인들이 이제 자기네는 돌아다녀도 목회자가 코꿰었다고 하니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얀 이를 열개씩 다 드러내놓고 좋아서 웃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일군이 코를 꿰고 거기에 메인 바 되니깐 성도들이 안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 참 좋구나.
지금도 제가 이력서를 들고 이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 교인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님 저도 이 교회에서 임종을 맞이하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한사람 두 사람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야기를 다 믿지는 않지만 나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렇게 코 꿴 사람들, 억지로라도 코 꿴 사람들. 전에는 솔직히 말해서 저녁에 11시 30분에 강의를 끝내고 나서 돌아와서 너무 피곤하면 어떻게 4시에 일어납니까. 그래서 조금 자다가 6시나 7시쯤 일어나서 기도했는데 이제는 몇 시에 자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4시 반에는 교회 종이 치는 것입니다. 그러고 어떻게 합니까? 주여 코 꿰었나이다. 하고 비몽사몽간이라도 옷을 주워 입고 그리고 교회를 갑니다. 처음에 한 석 달 동안은 속에서 신물이 나오고 막 토할 것 같아서 못 견디겠습니다. 나중에 3개월 4개월 지나가자 마지막에 결론 내리기를 주님, 이 코 꿰어 주신 것이 주님의 은혜이옵나이다. 생각하니깐 체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 하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깐 처음에는 고달프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억지로 코 꿰서 여기 있는 사람들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구레네 시몬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육신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이유가 없고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그 복음을 자랑할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 십자가를 지고 억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좇게 된 것을 계기로 해서 자기의 영혼이 구원을 받고 자기의 인생을 가장 고결한 일에 바치게 되었으니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억지로 끌려서 코 꿰어서 여기까지 온 분들 있거든 오늘 이 설교를 듣고서 아, 이것이 어찌 은혜라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사랑이었구나. 깨닫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 돈 많은 자, 지위가 높은 자, 낮은 자.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노인이나,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학식이 많은 사람, 무식한 사람. 수많은 사람이 다 섞여서 덩어리가 지어져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따라오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나뉘어서 줄을 서서 올라오는 것도 아니고 대열을 지어서 올라오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가난하고 부한 자, 배운 자, 못 배운 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한데 무리가 지어져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오는데 성경은 오늘 그렇게 예수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을 아주 날카롭게 두 부류로 잘라놓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27절입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35절입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48절입니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에 뒤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 오고 있었지만 성경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님의 뒤를 쫓아온 사람들을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정확하게 두 동강 내었습니다. 한 동강은 백성들이라는 사람들이었고, 또 한 동강은 슬피 우는 여인의 큰 무리라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여러분 보십시오. 이 백성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많은 무리도 그 뒷일을 보고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때에 예수의 뒤를 따라오던 많은 백성들은 그야말로 십자가를 어떻게 지시고 죽나 보기 위해서 따라왔던 방관자들이요 구경꾼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로 올라가다 기운이 진하여 쓰러지자 그 십자가는 구레네 시몬에게 대신 지어주고 그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저는 다리를 이끌고 피 흘리며 가시면류관을 쓰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고 있는 이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서 끌려가고 있는 이 모습을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던 이 백성들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의 사건을 객관적으로 목격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죽나 보자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쓴 채 어떻게 못 박혀 하늘 높이 매달려 얼마나 목숨을 부지하다가 숨이 넘어가나 보자 구경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구경꾼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가시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온몸을 채찍으로 맞으신 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조차도 구레네 시몬에게 맡기고 쓰러지듯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그가 거기서 주저앉지 아니하고 힘을 다하여 그리고 기어서 혹은 걸어서 골고다 언덕까지 기필코 올라가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해서 못 박히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은 쓰러지면서도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죄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시면류관까지 쓰고 채찍을 맞으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 그 뒤를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구속하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을 향한 진노를 거두게 하시고 하나님과 원수 된 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이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온 세상을 지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지은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박해와 멸시를 받으시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생명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이 스스로 죽음을 자처하시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을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건지시고 죄 사함을 입게 하기위해서 이 골고다 언덕으로 지금 올라가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사건은 객관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후일에 골고다 언덕에 박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한사람이 재판을 받고 그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이렇게 죽으셨던 것은 바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서 모인 이 사람들을 위한 죽음이었음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구경하는 백성들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면 올라가실수록 더 피어린 통곡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 그중에는 갈릴리로부터 온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백성이라는 말은 간단하게 되어 있지만 이 여자들은 복잡하고 긴 수식어구가 붙어 있습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퍼하며 우는 여자의 큰 무리였다고 성경은 오늘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 백성들은 구경했지만 이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잘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구경을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사람들이었지만 이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여기에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뒤를 그냥 따라갔지만 이들은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저렇게 죽은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슬피 울며 가슴을 치며 이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고난을 받으며 죽음을 눈앞에 둔 십자가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그는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늘의 영광과 천사의 합창 소리가 깃든 하늘의 천국의 보좌를 놔두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온 것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었습니까? 보좌를 받기 위해서였습니까? 영광을 받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말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마지막엔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찬양) 하늘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네
그는 육체를 입고 이 땅에 내려와서는 안 되는 분이었습니다. 하늘에 영광과 천사들의 경배와 신구약 성도들의 합창소리를 들으며 천사의 경배를 받으셔야 합당한 분이었으나 하나님의 사람이 그를 낮고 천한 이 땅에 보내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모두 버리고 자기가 지은 땅에 왔지만 사람들은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올 때에 환영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창칼을 갈면서 그 아기를 죽이기 위해서 창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그분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베들레헴에 낮선 여관의 마구간에 그것도 말구유에 오셨으니 그가 오실 때에 그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거친 강보 한 벌이었으니 그것을 입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모두 버리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시면서도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를 먹이시며 소외된 자를 찾아가시고 지친 자를 위로하시고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자들을 구원하셨으니 이 일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생애를 아낌없이 다 소진하였으니 마치 한 동강의 촛불이 자신을 깎으면서 빛을 발하여 어두움을 비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물질도 모아놓은 것이 없으셨고 명예도 저축하신 것이 없으셨습니다. 오실 때에는 벌거벗은 몸으로 오셨고 거친 강보에 쌓여서 구유의 누웠지만 마지막에는 자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베옷 하나도 벗어서 군병들에게 제비 뽑아서 갖도록 빼앗기시고 벌거벗은 몸으로 오실 때에 그대로 빈 몸으로 마지막 남은 것이라고는 육체밖에 없는데 그 육체마저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제물로 깨뜨려 드리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서 하나님 아버지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눈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그리고 언제나 가난한 자로 사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없는 자들의 친구가 되 주셨습니다. 고통 하는 자들의 고통을 헤아리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기 위해서 하늘을 향하여 거친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축사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다 버리셨지만 그러나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도전과 질시와 미움과 원망과 핍박에 직면하는 생애를 살아야 했던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국은 일생을 그렇게 선하게 사시고 마지막에는 그 한때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던 위대한 권능이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지고 이제는 초라한 죄수의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 갈 때에 누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시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조금도 귀하게 여길만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그러한 생애였습니다. 오늘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는 힘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가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힘없이 죽어가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단지 힘없이 매달려 죽어가는 실패한 한 인간의 모습 밖에는 읽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이 그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합니다.
힘없이 이렇게 악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골고다 언덕으로 힘없이 하늘의 영광과 권능을 포기하고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야 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가슴 속에서 멸망을 눈앞에 두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찾을 줄 모르는 멸망에 이를 죄인들을 향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심장 속에 역사하셨고 그 사랑이 그리스도를 강권하심으로 오늘 우리를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때에 이 여인들은 예수를 위하여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이제 예수의 뒤를 따라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여인들의 흐느낌은 변하여 울음이 되었고 울음은 변하여 피어린 통곡이 되었습니다. 여인들이 이렇게 운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지 아니하실 수도 없었고 목 놓아 울고 매달린들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줄 리가 없었습니다. 소용이 있고 없고는 이 여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우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를 안 지실 수 있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들이 마음속에 있는 그 무엇이 이 여인들로 하여금 예수의 뒤를 도저히 침묵하고 방관하면서 구경을 하며 그렇게 하지 않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어떠한 핍박과 저지가 따른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어저께 말씀드렸던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마음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이 여인들의 가슴을 움직이고 그 사랑이 이 여인들의 인격을 사로잡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이 여인들은 비록 이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겠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는 저렇게 죽을 이유가 없는 분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찌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이유가 있습니까? 그는 선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어떤 나쁜 일을 행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고난을 지셨고 하나님을 떠나고 죄가 운데 살면서 소망이 없는 인생들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우는 자를 위하여 함께 우시고 고통 받는 자를 위하여 자기의 평안을 포기하셨습니다. 시련 받는 자를 위하여 자기의 편안함을 포기하시고 귀신이 들려 죽게 된 나를 살리시고 나를 정결케 하시고 소망이 없는 창기와 같은 삶을 사는 나를 고치시기 위해서 찾아오셔서 아무 것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의 인생에 사죄하며 은총을 베푸셨던 그리스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우리를 위해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우리를 배부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진리 자체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버림받은바 되어서 지금은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그분. 자기를 위하여 아무 것도 모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수는 놓아주고 죄 없으시고 사랑 자체이신 진리이고 생명이신 그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사실은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죽인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때 이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예수의 뒤를 따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 여인들이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이었습니까? 이 여인들이 많이 배웠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가운데는 창녀와 같은 자들도 있었고 일곱 귀신이 들려서 버림받은 자와 같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이 구경하며 예수의 뒤를 따라갈 때 이들은 통곡하며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무엇이 이 여인들의 가슴속에 역사하는 예수를 향한 그 처음 사랑.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이 이 여인들의 가슴에 역사하자 그들은 그 십자가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리스도 예수는 저렇게 죽임을 당하실 이유가 없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고난은 부당한 것이었으니 그가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전혀 합당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이제 골고다 언덕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그 십자가는 무엇이었습니까? 이 여인들에게 있어서 여인들의 눈앞에 골고다 언덕에 기다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광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치와 모욕과 버림받음과 징계와 저주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은 그 십자가가 저주의 십자가였지만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멸시와 천대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는 골고다 언덕이었지만 가슴을 치면서 이 여인들은 그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를 따랐습니다. 이 여인들은 쫓아갔습니다. 그것이 저주의 십자가든 버림받은 십자가든 멸시와 천대를 받은 십자가든 사람들에게 저주거리가 되든 그것은 상관없었습니다. 그 저주받은 십자가 그것을 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골고다언덕으로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십자가가 멸시와 천대와 저주의 십자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명예와 육신의 안위를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천한 십자가의 뒤를 따랐다면 오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는 이 여인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멸시의 십자가입니까? 이 여인들이 상상했던 것과 같은 저주의 십자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이제 알게 된 십자가는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영광스런 부활의 능력이 깃들여 있는 우리의 자랑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가슴 벅찬 맘으로 말했습니다. 내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내가 세상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또한 세상이 나를 대하여 그러하니 그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의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여러분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임에도 이 여인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있기에 가슴을 치며 슬퍼하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만약에 이 여인들이 멸시와 저주의 십자가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가슴에 역사하자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십자가의 뒤를 따라 갔다면 오늘 선한 싸움을 다 싸우며 당신의 십자가를 향하여 나오는 사람들, 그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한 그 놀라운 십자가의 약속들, 그 놀라온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와 그 마르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언약들을 보증 받고 있는 우리들이 그 영광의 십자가를 뒤따라가고 있지 못하면 우리야말로 사랑을 잃어버리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른 몸을 가지고는 천국을 볼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늘 예수 죽인 것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그 사랑을 인하여 감격하며 이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 십자가의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전하며 살아가는 이러한 고난 받는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가슴 속에 이러한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향한 사랑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쫓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십자가가 오늘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며 쫓아가야 하는 가치가 있는 십자가임을 여러분은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십자가에서 비로소 모든 사람을 위한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는 이미 다 끝났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모였던 그 수많은 인파들도 흩어졌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 전에는 서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을 확인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끌어내려졌고 십자가는 지워졌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이스라엘에 가면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던 그 곳에는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셨던 흔적은 사라지고 이름 모를 집들이 빼곡히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푯말이 새겨져 있는데 첫 번째 쓰러지신 곳, 두 번째 쓰러지신 곳, 세 번째 쓰러지신 곳, 모두 여섯 개의 푯말이 골도다 언덕까지 이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제 그 십자가도 사리지고 골고다 언덕도 사라졌으니 그리고 모였던 사람도 흩어졌으니 그렇지만 여러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라졌지만 그러나 지금도 교회 속에는 보이지 않는 골고다 언덕도 그대로 서있고 거기에 피 묻은 십자가도 굳게 서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뒤를 따라 오던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교회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십자가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주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바라보시며 아파하시는 그 십자가의 고통을 오늘도 부여안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여러분에게 이 두 사람 중 어느 한 부류에 속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고난의 십자가는 사라졌지만 지금 이 세곡교회에도 골고다 언덕도 그대로 있고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도 그 언덕 위에 그대로 서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웃고 떠들고 구경하며 예수의 뒤를 따라간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아픔을 간직한 채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예수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고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오늘 성경은 오늘 여러분에게 이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세곡교회 사경회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