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수에 사무친 불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찌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푸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고적하여 곤비케 하셨도다"(애 1:12-13).
예레미아 애가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직후의 그 비참한 상황에서 예레미아가 노래로 자신의 심경을 토하며 주님의 음성을 전해준 것입니다. 거듭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벨론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끊임없이 애굽을 의지하며 외교를 통해서 자신의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슬픈 선지자 예레미아에게 민족의 멸망을 예고하는 예언을 선포하게 하셨고 그의 그 예고는 하나님의 큰 경륜, 육적인 이스라엘을 청소해서 남은 자 곧 영적인 이스라엘을 세우시고자하는 계획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지막 기회마저도 놓치고 결국은 예루살렘이 멸망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택한 사람들이고 특별히 예루살렘은 이미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훨씬 전에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왕권이 행사되는 주님의 임재가 있는 중심지로 선택됩니다. 왜 하나님이 선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아브라함과의 무조건적인 은총의 언약의 신학에 호소하며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이라는 이유 때문에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아브라함의 언약뿐만이 아니라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까지 염두에 두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이 선택하신 목적에 맞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으로서의 올바른 가치를 드러내지 못할 때 하나님이 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이렇게 가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집안에서 쓰는 가구라고 생각하지 않고 성구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성구인 이유는 이 가구가 집에서 쓰는 가구와는 달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죠. 이 성구가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때에는 성구가 아니라 가구입니다. 설령 거기에 십자가 문양을 새겨 넣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가구일 뿐이죠. 용도가 끝나고 폐기되어서 고물상으로 실려 가는 즉시 그 나무토막은 더 이상 성구가 아닌 폐품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학교가 신학교일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신학교인 것이죠.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은 교회, 그것을 마음에 품고 그리면서 신학공부를 함으로써 이 학교는 신학교가 되는 것이고 여기에서 등록금을 내고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세상에서 그렇게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과는 구별되는 신학생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신학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과 맺는 관계가 따로 있고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 맺는 관계가 따로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지요. 오늘날 강물처럼 밀려드는 이 어마어마한 세속주의는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정통적인 신앙을 수호하고 삶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순결한 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 어찌 이러한 신앙과 삶의 모토가 한 교단만의 것일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왜 멸망시키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육적인 이스라엘과 그리고 선택을 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그들 자체가 최종적인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소명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죠. 그 소명은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오게 하는 소명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 넘치는 세속주의의 근원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교회는 진리를 증거하고 전하는 공동체로서의 순결함보다는 교회가 이 산업사회에서 생존해 남는 일에 더 많은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더 크게, 더 많이, 더 강하게’를 구호로 내걸고 그리고 사람들을 모으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신학교와 관계를 맺고 또 가르치기도 하면서 느낀 가슴 아픈 현실은 신학교 안에서 이런 세속주의의 징조가 아주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는 것이죠. 무슨 뜻입니까? 신앙의 본질을 가지고 신학교 시절에 진지하게 고민을 해도 사역을 나가고 목회라고 하는 현실의 장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이 둔하여지는데 신학교에 다닐 때부터 신앙의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제 이 세속적인 시대로 뛰어들 때에 어떻게 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학업을 위해서 현저하게 헌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매우 미약한 것은 두 번째로 치더라도 신앙의 본질을 가지고 고민을 하지 않는 신학생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신본주의적인 신앙생활은 뚜렷한 이유와 동기가 있어야지만 가능한 삶이지만 이 인본주의적인 삶을 그런 계기나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가능한 것입니다. 마치 아름다운 것은 엄격한 질서 속에 들어가야지만 아름다운 것이지만 추한 것은 특별한 기준이 없듯이 신본주의는 신본주의 적으로 밖에 살 수 없는 내적인 이유와 신앙의 본질적인 변화가 필요하지만 세속주의는 그냥 그런 것 없이 살고 사역하면 세속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시절부터 이제 진지하게 이론신학을 공부하고 그 속에 담겨진 영적인 의미를 깨달으며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철저한 개혁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자기 훈련을 등한시하고 성공하는 목회를 찾아가서 배우려고나 하고 그리고 비전이니 꿈이니 하면서 그런 것들을 가슴에 품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전적인 소명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는 신학생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슬픈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안 믿을지 모르지만 저는 목회의 현장에서 개인적으로 만나면 정말 신실하고 그리고 좋은 분이 목회의 사심도 없으신 분이 사실상 목회는 아주 세속적으로 하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전혀 개인의 영달을 취하겠다고 하는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닌데 목회의 방식이 지극히 세속적이에요. 여러분들은 세속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세속주의는 개념적으로 악을 행하고 타락한 것이 세속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할 자리에 사람이 올라가 있는 것이 세속주의입니다. 그리고 모든 판단과 가치의 기준들을 사람 중심으로 성립시키고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세속주의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가 세속화 되어가게 되면 세속적인 한사람, 한사람이 진실하고 심오한 회심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중생과 회심의 교리를 선포해야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죠.
오늘날 칼빈주의를 지향하는 교단이고 그렇지 않은 교단이고 간에 상관없이 사라진 것이 없습니다. 중생과 회심에 대한 설교가 현저히 사라졌습니다. 교인들은 교회에 와서 들리는 이 세속적인 메시지들을 보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지 않고도 성공하고 복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암시받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난무하고 있는 ‘꿈은 이루어진다, 꿈이 이루어지는 교회, 당신의 꿈을 이루어주는 교회,’ 이런 등등의 수많은 세속적인 가치관의 기치를 높이는 교회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교회에서 고색창연한 이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인 중생과 회심의 교리가 울려 퍼지겠습니까? 용감한 청교도들처럼 ‘뤽펜치오하르페스시’ 라고 외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이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이것들이 없이 교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 교회의 연합운동을 비롯한 에큐메리칼리즘의 모든 그 실패의 핵심에는 바로 이 문제를 덮어두었던 것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여기에는 분명히 영적인 요소가 들어갑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두려움과 그리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하나님의 엄중하신 공의의 성품을, 하나님의 자비의 성품을, 십자가에서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자기 자신을 돌이키고 꺽은 그 신비한 영적인 거듭남과 회심의 경험, 그 속에서 솟아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 이것이 바로 경건, 곧 삐에따스의 원천이 아닙니까? 이것이 개혁주의의 요체인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상관없이 일단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보자고하는 이 운동이 결국은 교회를 모두 망쳐버렸습니다. 여러해 전에 호주에 갔을 때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설교하도록 부름 받은 교회가 유나이팅 처치라고 하는 교단이었습니다. 이 ‘유나이팅’ 이라는 게 말이 안돼서 이게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다른 교단은 연합된 교회이지만 우리는 지금도 연합되고 있습니다. 그 연합의 핵심은 동성애자들의 교회를 끌어안는다는 연합이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던 은사님이 계셨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구약을 가르치셨는데 하루는 제자한테 전화를 받으셨어요. ‘김 교수님, 저 제자인 아무개목사입니다.’ ‘아 그래 목회를 한다며? 수고가 많지?’ ‘예! 그래도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교인이 한 천여 명 모이고 이번에 교회까지 크게 지어서 빚도 갚고 헌당을 했습니다.’ ‘그래 네가 고생이 참 많았겠구나!’ 그랬더니 하는 말이 ‘저 선생님’ ‘왜’ ‘제가 이제 이 교회에 사표를 내려고 합니다.’ ‘아니 교회도 지어놓고 왜 사표를 내?’ ‘이제 제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교인은 천명이나 모이고 장로님들도 다 세워지고 예배당도 크게 지었으니 저는 이제 이 교회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다시 개척을 하려고 합니다.’ 이 선생님이 야단을 쳤어요. ‘아 이 사람아 자네는 전공이 건축학인가? 신학인가? 예배당을 큰 것을 지어놓고 교인이 많이 모이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그만두고 이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이 사람아! 보이는 교회는 자네가 그렇게 크게 지어놓았다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교회도 그렇게 지어졌는가?’ 이 제자가 충격을 받은 것이에요.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내가 오해하고 있었구나!
예루살렘과 바벨론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세요? 바벨론은 하나님을 버린 도성이에요. 세상나라의 상징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을 버릴 때의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같이 되리라.’ 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버린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존재를 악한 방식으로 본뜨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나라가 더 많은 사람을 모아서 바벨론을 모래알같이 많은 백성을 가진 국가로 만들려고 하는 야망은 종말까지 사라지지 않아요. 무엇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편만하신 지배력을 본뜨는 것이에요.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배금주의에요. 많은 물질들을 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어있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풍요로우심을 본뜨는 것이에요. 세상나라는 큰 권력을 지향해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 권력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흉내 내기 위한 권력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바벨론은 하나님과 맞서기 위해서 자신이 하나님만 못한 콤플렉스를 더 많이, 더 크게, 더 강하게 이것으로써 극복하려고하는 것이 바벨론의 정신이에요. 예루살렘은 그렇지 않아요. 이스라엘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두 줄 밖에 안 나오는 나라에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예루살렘을 드셔서 당신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지를 이 온 세상에 알려 이 만민으로 하여금 당신의 구원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역사를 볼 때에 교회가 온 땅에 편만하고 핍박이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던 때에 다음 세대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처럼 된 역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교회의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성공을 꿈꾼다면 길을 잘못 들어서셨어요. 사업을 하세요. 사업을……. 이 길은 성공을 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 아니에요. 또 그 성공이 무엇인지 나는 묻고 싶어요. 많은 교인이 모이는 것을 성공이라고 말한다면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것을 성공이라고 해야 할까요? 모세는 남전도회원만 육십만 명을 거느린 목회자였어요. 그렇게 큰 교회를 목회해서 모세가 무슨 덕을 보았는지 묻고 싶어요. 물론 이 세상에서 교회를 크게 하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넓은 주택에 살 수 있고 그리고 좀 더 편안한 차를 탈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게 그렇게 인생에 커다란 차이를 가져옵니까?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행복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지금 가슴속에 무슨 가치를 간직하고 있습니까? 예전에는 고신이라는 팻말을 보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림없습니다. ‘합동 측’ 하면 대세구나 하고 문을 두드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는 점점 교회의 간판에서 무슨 장로교회, 감리교회, 이런 것들을 떼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성공하느냐에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죠.
그러나 여러분 성경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그런 개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진정한 가치는 진리의 말씀을 외치다가 죽는 사람입니다. 윌리엄 포사이스 라고 하는 신학자의 말처럼 설교자는 설교의 결과로 하나님께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하나님이 산출하시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설교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신학교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앞에서 자기의 악함과 죄성,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삶과 그 무한하고 광대한 진리에 대한 무지한 자신을 발견하고 애통하고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인해 깊이 슬퍼하는 자기 부인과 극복의 노력이 없다면 여러분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현장으로 나가는 즉시, 까만 가운을 뒤집어쓰는 즉시, 신령한 사람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미신적인 기대가 아닐까요?
오늘 이 예레미아 선지자는 자신 속에 골수에 사무친 불이 있다고 호소하고 있어요. 예루살렘은 파괴되어서 보물은 모두 약탈당하고 마치 그 거룩하던 성전이 약탈당한 부녀자처럼 그렇게 파괴되었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은 자신의 집안에 감추어둔 패물을 가지고와서 팔아 양식을 바꾸기 위해서 이 거리 저 거리를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예레미아 선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위로부터 나에게 불을 보내셨는데 그 불이 바로 자기의 골수에 사무치도록 불을 주셔서 이기게 하셨다.’ 라고 되어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베아츠노티 베이르덴나’ 라고 되어있어요. 직역을 하면 나의 뼈들 속으로 불을 보내셨습니다. into my bonds 에요. 구약성경에서 이 ‘에쩸’ 이라고 하는 뼈다귀는 그냥 물리적인 뼈를 가리킬 때도 있지만 은유적으로 인간의 영혼의 가장 깊은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셔서 아담에게 데려오실 때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라고 고백을 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은유적 표현으로써 자기의 깊은 심령 속에 하나님이 불을 두셨는데 ‘이르덴나’ 그 불이 자기를 지배하다는 표현으로 임금이 나라 전체를 통치해서 왕권이 안 미치는 데가 없게 하듯이 그렇게 모두 지배하고 다스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그 불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에요. 그것이 정체에요. ‘다트엘로힘’ 이라는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고 하실 만큼 중요한 요체였던 것입니다. 신대원을 마치고 하나님이 특별히 소명을 주신 사람이 아니면 제발 보따리를 싸들고 미국으로 도망치지 마요. 여기에서 별 볼일 없는 공부에 흥미와 재능이 없는 사람이 가서 외화 낭비하지 말고, 그리고 또 준비도 안 된 사람이 그것이 마치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개척을 하려고도 하지 말고, 큰 교회의 부목사로 가려고도 애쓰지 마시고, 신학교를 다니는 내내 그리고 목회를 하는 내내 점검해봐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누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여러분들 중에 있겠어요? 그러나 모두 다 똑같은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요.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 일종의 ‘안앙케’ 곧 숙명이에요. 숙명……. 숙명과 같아서 그것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살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에요. 설교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 외치는 설교, 목회를 할 필연이 없는 사람이 하는 목회, 신학교를 다닐 필연이 없는 사람이 다니는 신학교생활, 이게 세속이에요. 사도바울은 이런 필연을 가진 사람이었죠.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오직 성령이 내게 증거 하여 예루살렘에서 환란과 핍박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려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내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 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냉담한 설교자들이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그것이 이제 미래의 교회에 대한 아주 어두운 전망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배시간에 설교를 하거나 듣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 진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마음속으로 뜨거운 불을 느끼며 분노하거나 슬픔 속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회중으로서 예배당에서든지 아니면 교회에서든지 신학교에서든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이 찬란한 빛을 비춰 여러분들을 지적하고 깨뜨릴 때에 그 진리 앞에서 예전에 자기가 붙들고 있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있다면 그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묻고 싶어요. 왜 설교자가 이렇게 가슴에 불을 안고 토하듯이 하는 설교를 하지 못하고 냉담해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진리 대신 성공이 더 큰 가치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을 기준으로는 19세기중엽이후 구라파를 기준으로는 18세기 중엽이후 산업화사회가 이루어지게 되면서부터 이제 가치의 절대적인 기준 자체를 거부하는 정신이 도시를 중심으로 팽배하게 퍼졌어요. 그래서 이제 많은 교회의 설교자들은 당신들이 이 세상에서 찾는 것이 교회가 찾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금과 은도 내게 있거니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합니다. 실화인지는 모르지만 교황 이노센트 2세가 교황청에서 거기를 방문한 고매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말했답니다. ‘이보게, 이제 우리는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하면서 교황청의 금고를 보여주었답니다. 그때 이 경건한 수도사는 교황께 말했답니다. ‘교황이시여 그러므로 교회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개신교사람들이 지어낸 일화일 것이라고 믿지만 그러나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목회자의 정체성은 진리를 외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18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은 목회자가 누구냐는 정체성의 질문에 관한 그들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 핍박받던 사도들의 후예가 목회자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진리를 하나님을 만나서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공할 생각을 처음부터 버리세요. 그 생각을 가져도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버린다고 해서 성공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버리고 생애의 가치를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내가 발견한 이 온 우주를 포용하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탁월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 진리를 증거 하는 이 이일이 나의 생명이 이 땅에 있는 이유다.’ 라고 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