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받는 사람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 17:11-12 )
녹취자: 장소연
I. 본문 배경
이때는 사도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때의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성령님께서는 그들의 선교의 계획을 마게도니야로 인도하셨고, 그래서 결국 유럽이 기독교 전파에 커다란 혜택을 입게 하셨던 것입니다. 선교 학자들은 당시 만약에 아시아로 복음이 전도됐더라면 그 전파된 복음이 들어와서 세계적인 영향을 오늘날처럼 끼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를 합니다. 왜냐하면 전도된 그것이 아시아에 들어와서 그래서 아시아의 사상과 만나서 변질되어서 선교적 동력을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마게도니야를 통해서 유럽으로 들어간 이 복음은 당시에 있었던 그리스 그리고 로마의 사상들로부터 후원을 받으면서 기독교의 교리의 체계를 상세화 하였고, 구체화함으로 인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기독교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II. 말씀을 받은 결과
어쨌든 2차 전도여행에서 그들은 빌립보로부터 내려와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매우 포악한 성격을 가진 핍박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다시 그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라고 하는 곳으로 옮기게 되었고, 거기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하고는 다른 사람들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커다란 열매들이 많이 맺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전해질 때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이 사람들은 베뢰아에 사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뢰아에 사는 유대인들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고, 또 그들과는 구별되는 이방인들인 헬라의 귀부인들과 지체 높은 이 귀부인과 함께 남자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III. 말씀을 받은 베뢰아 사람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베뢰아의 사람들은 이렇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커다란 변화를 받게 되었는지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은 이 베뢰아 사람들에 대해 오늘 성경은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거론하면서 그것이 이들로 하여금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A. 너그러운 사람들
우선 첫째는 너그러운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것보다는 옛날 번역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옛날의 번역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느냐면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희랍어 성경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eugenestoros’라고 되어 있습니다. ‘eu’라고 하는 말은 ‘좋다’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genestoros’라는 말은 ‘타고난, 천성의, 태생의’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의 이름 가운데 유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유’는 ‘좋다’고 ‘진’은 ‘종자’ 아니면 ‘태생’ 그런 뜻입니다. ‘종자가 좋은 종자다’ 그런 뜻입니다. 살아봐야 알지 이름만 보고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좋은 태생의 사람이었다 이렇게 평가를 받았습니다.
자, 그러면 이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하는 이것은 그렇게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그러면 좋은 태생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뭘 의미할까? 이것은 당시에 로마 시대의 사람들 속에 있던 사람에 대한 관념을 염두에 두어야지만 이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당시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로마가 무력으로 그리스를 지배했지만 사실은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헬레니즘 속에 함몰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로마 때문에 그리스 문화가 더 활짝 꽃 피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리스 사상에 의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두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첫째는 선한 본성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렇게 무엇인가 자꾸 악을 행하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본성으로부터, 원래의 인간이 부여받은 본성으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 자꾸 그런 사람이 되는 거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사람에 대한 견해가 동북아의 사상과 아주 유사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원래의 자연의 본성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선해진다 라고 하는 사상과 아주 유사합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로마 사람들이 사람이 좋은 태생의 사람이다 그러면 첫째는 뭐냐 하면 원래의 인간의 선한 본성에 충실한 사람, 그런 선한 사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지성과 관련해서 함부로 판단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최대한 이성을 사용해서 공정하게 사태가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을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하는 이성의 능력을 가진 사람, 이 사람을 좋은 태생의 사람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이 사람들이 보기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좋은 태생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반대했던 사람들 중에는 이익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바로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이 그 안식일에 성령을 강론하면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전파했을 때 그때 많은 유대인들이 반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시기한 것입니다. 저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면 그러면 자신들의 사상에 대해서 공격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과연 그럴까 하고 생각하는 자세가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확고한 편견에 어긋나니까 ‘저것은 틀려먹었어.’ 그리고 폭력적이 되어서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우리가 읽은 성경 바로 앞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고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커다란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 여종이 귀신들려서 점을 쳐서 먹고 살았는데 온전해 지니까 점을 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로마 사람들이 생각할 때 좋은 태생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놀랍게도 당시 로마 사회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뭐냐 하면 로마의 식자층들이 혹은 중산층 이상의 식자층들은 일단 다른 사람이 말하면 한번 과연 그런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훈련을 아주 많이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토아학파 철학자든지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자든지 누구든지 각기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었고 그게 바로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이루어지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과 같이 공부 많이 한 사람이 뭔가 들고 나왔을 때 그런 많은 사상가들 중의 한 사람의 사상을 또 말한다고 생각을 했고, 새로운 사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베뢰아 사람들이 그런 점에서 좋은 태생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가장 첫 번째 비결은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태도, 신사적인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에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고 건전하게 자신의 이성을 사용해서 과연 그 말씀이 그럴까 하고 생각을 하며 받아들이고 그리고 도저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성으로서는 분별이 안 되는 것은 믿을 마음을 갖는 것, 이게 모두 지성에서 일어나는 활동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면 건전한 이성을 사용해서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치에 맞으면 받아들이고, 이해가 잘 안되면 그것을 믿을 마음을 갖는 것, 이게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너그러운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학습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 말씀에 집중하고 그리고 말씀을 잘 깨달아야지만 은혜를 받는다.’ 이것을 가르쳐 줄 필요가 없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그것이 학습이 안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런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학습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항상 충고를 해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생각 없이 100번의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는 온전한 집중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에 이성을 사용해서 말씀을 들으려고 해라. 그리고 믿으려고 해라. 그런 사람이 훨씬 더 은혜를 많이 받는다.” 제가 그렇게 충고를 하곤 합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많기 때문에 제가 한 사람씩 접촉을 못하지만 지하실 교회 때에는 많아 봐야 한 200명 정도니까 예배실 자체가 백 몇 십 명도 안 들어가는 조그만 예배당이었으니까 누가 어떤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지 훤히 알았습니다. 지금은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이 안경을 쓰면 보이는데 잘 안 보인다고 하면 안심할까봐 걱정입니다. 그래서 훤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태도가 안 좋은 사람은 개인적으로 면담을 했습니다. ‘너 왜 그러냐?’ ‘나는 교회에 나올 마음이 없는데 사귀는 형제가 예수 믿어야지 결혼해 주겠다고 해서 지금 끌려나왔는데 죽을 맛입니다.’ 그래서 내가 수요 예배에도 나오고 주일 예배에도 나온다고 해서 ‘다 집어치워라. 오후 예배도 나오는데 다 관두고 주일 예배 하나 달랑 드리고 네가 싫으면 집에 가서 쉬어라. 월요일부터 직장생활 해야 하니까. 그 대신 네 번만 나와 봐라. 네 번 나와서 안 믿어지면 관둬라. 너 다시 교회에 나오라고 조르지 않겠다. 그 대신 네 번의 예배를 형제하고 만날 손잡고 예배드리지 말고 저리 가라고 하고 여기 정 가운데 앉아서 그래서 1초도 내 눈에서 눈을 떼지 마라. 그리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설교를 다 들은 다음에 다른 사람이 무얼 들었냐고 물어보면 반복할 수 있을 정도로 들어라. 네 번만 예배를 드려라. 그래도 주님을 못 만나면 내가 다시는 너한테 전화해서, 우리 교회 식구들이 전화해서 교회 나와라 뭐 예배 드려라 일체 재촉하지 않으마. 네 번만 드려라’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네 번의 예배를 드리기 전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개했습니다. 지금 신앙생활 잘 합니다. 그게 바로 너그러운 태생의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이해를 통해서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산란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 여러분이 절대로 주님을 못 만납니다. 혹시 주님을 만났다면 그게 아닙니다. 정상적인 바람직한 신앙의 체험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집중된 올바른 태도를 갖는 것, 그게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그게 지금 성도들이 늘어서 위에서도 예배를 드리고 그러지 않습니까? 교회가 정상적이지 않잖아요. 온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나는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힘들게 왔는데 그러면 지금 본당에 여러분 와서 앉아있지만 누군가는 여러분 때문에 못 들어왔잖아요. 그래서 지금 위층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잖아요. 그러면 집중해서 설교를 들으면서 무엇인가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잖아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마치 살기 싫은 부부가 애들 때문에 죽어라고 그냥 사는 것처럼 그런 신앙생활을 해서 마지막에 얻을 게 무엇이 있습니까? 자기도 그런 생활을 하면서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면 그 괴로움을 종식 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신사적인 태도를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말씀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판단하도록 그렇게 자신을 맡기는 신사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이해를 통해서 옵니다. 이해가 없는 곳에서는 올바르고 건전한 하나님의 은혜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 이렇게 여러분도 신사적인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말씀 받는 사람들
두 번째 이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 우리가 말씀을 받다 혹은 받아들이다 하는 동사가 구약이나 신약이나 많이 나옵니다. 말씀을 받는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일까요? 객관적으로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래서 마치 나 자신의 것인 것처럼 나를 꽉 붙들고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상태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혀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 아무리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를 못하면 올바르게 할 수가 없고, 아무리 올바르게 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하더라고 그것에 대해서 그것을 하고자 하고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그러면 그것은 온전한 헌신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하나 들어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가 중동에 나가서 건설 수출을 많이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근데 그때의 일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편을 보내놓고 그때 월급들은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전도사로서 한 달에 한 15만원 받을 때 그 사람들이 받는 돈이 한 달에 200만원씩 되었으니까 굉장했습니다. 기술까지 있는 사람들은 돈을 막 벌었습니다. 너무 좋으면서도 아내는 남편이 그렇게 타지에 나가서 그 40~5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곳에서 몇 년씩 가족과 떨어져 사니까 너무 고통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염려를 합니다. 어느 날 전보가 왔습니다. 이것은 만들어 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 남편이 빌딩에서 공사를 하다가 떨어져서 너무 많이 다쳐서 그래서 의식 불명의 사태로 본국으로 후송되었다” 그런 이야기가 들립니다. 부인으로서는 혼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공항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그 비행기가 왔습니다. 그러면 감정이 없는 신앙이라는 것은 이것과 같습니다. 쭉 보니까 여러 개의 침대가 내려옵니다. 이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니고, 이 사람은 내 남편은 아니고, 다 찾아내서 이 사람이 당신 남편이 맞습니까? 이렇게 열어보니까 목숨은 간신히 붙어 있는데 자기 남편이 맞습니다. ‘아, 이게 제 남편입니다. 아 다쳤군요. 살까요? 죽을까요?’ ‘아무래도 목숨 건지기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제 남편 없이 애들하고 살 대책을 세워야 되겠군요.’ 이게 감정이 없는 지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집안에서 있었던 일인데 조상을 잘 안 찾아뵌다고 후손을 시골 노인네들이 나무랐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저씨가 오랜만에 아버지 산소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가서 산소에 엎드려서 막 흐느껴 울고 꺼이꺼이 술 한 잔 먹고 울었습니다. 시골 어른 내려오면서 하는 말이 ‘야, 이 사람아. 왜 거기서 우나. 거기는 자네 아버지 산소가 아니야. 남의 산소야.’ 그건 뭐냐 하면 지식은 없는데 감정은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신앙이 전부 다 신앙이 아닙니다. 말씀을 받았다고 할 때에는 정확한 지식, 그리고 지식에 대한 이해, 그 다음에 거룩한 감동, 이게 합쳐져서 우리의 마음을 꽉 붙들게 되었을 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여기에서 갈 길이 명료해지고 갈 길을 알아도 그렇게 살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어느 날 놀라운 힘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저께까지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는데 그런데 놀라운 힘이 하나님께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그래서 제가 자주 드는 비유인데 잔잔하고 큰 호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 하늘에서 큰 바위 덩어리 하나 동그란 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풍덩’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파문이 이렇게 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비유를 하자면 떨어진 바윗덩어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고 출렁거리는 것은 거룩한 정동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떨어진 것이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지식일 경우에는 사랑하는 정동이 일어나고, 그 지식이 더러운 것에 대한 지식일 경우에는 미워하는 충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보여주는 지식이 우리의 마음에 딱 떨어질 때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정동이 일어나고 죄나 이 세상 육욕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가를 아는 지식이 탁 떨어질 때 그것들과 대항해서 살고자 하는 미워하는 정동이 출렁거리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까지 못 버리던 것들 은혜를 받으면 오늘 버릴 수 있게 되고, 예전까지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을 은혜를 받으면서 사랑할 수 있는 힘들이 이 안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를 다 누가 하시냐면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지식의 태도, 인간의 마음 이것을 사용하셔서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자,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커다란 바위가 쿵하고 떨어지면 커다란 물결이 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똑같은 물결이 저 호수 끝 편까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엔 크다가 그 다음에는 점점 점점 해서 저 호수 끝에 가서는 아주 살짝 찰랑거립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게 한번만 떨어지면 충분하다 이게 아니라 떨어지는 것이 그 다음에 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계속 이러면서 계속 이 정동이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남으로써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되고 우리의 마음과 모든 삶의 질서들이 하나님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질서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무슨 왕년에 은혜 받은 것은 그것은 왕년에 먹고 살았고 오늘은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또 다른 은혜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져야 하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공부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떨어진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서 관념적인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동을 불러 일으켜서 그것을 알 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존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런 마음들이 계속 일어남으로써 우리들이 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함께 해 주실 때에 우리의 지성이 아주 쇄락하고 맑은 상태가 됩니다. 대게 시험에 들고 미끄러진 사람들은 정신이 혼탁합니다. 그래서 침체에 빠지거나 시험에 든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만날 모른다고 그럽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잘 모르겠어요. 어디서 미끄러지셨어요? 잘 모르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다음에 잘하는 말이 뭐냐 하면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게 솔직한 말입니다. 사랑의 힘, 지식의 명료함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 죄와 마귀가 지배하기 아주 좋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신사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와 함께 한 순간도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릴 수 없다고 하는 간절한 기도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그것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여러분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간절한 기도로 말씀을 받으려고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이 이번 사경회에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 상고하는 사람들
세 번째는 상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들은바 설교를 상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냥 만족한 게 아니라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보고 더 상세히 알고자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설교는 듣고 나서 설교자의 독창성에 박수를 치고 싶은 설교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 주는 설교가 좋은 설교입니다. 좋은 설교를 정말 깊이 들은 사람은 설교자가 생각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정말 좋은 설교는 환호성을 치고 싶은 설교가 아니라 성경을 다시 자세히 보고 싶게 만들어 주는 설교, 그 설교가 좋은 설교입니다. ‘아, 이정도면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게 해주는 설교가 좋은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 앞에서 자기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겠다는 가난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설교가 좋은 설교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명료한 지성으로 하나님 앞에 깨달으려는 진지하고 자발적인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거의 아무 것도 드리지 않는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무리 큰 뭉치의 돈을 헌금함에 집어넣더라도 그는 거의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혜자는 자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나에게 다오.’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이제껏 드린 예배 그리고 들은 설교 가운데 ‘아, 이것은 정말 내가 마음을 온전히 묶어서 우리 주님께 드린 것이었다.’ 라고 할 수 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어떤 태도로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갔으면 그러면 일주일 동안 성경을 가까이 하고, 그 성경을 통해서 들은 바 설교를 더 깊이 깨닫고 설교를 통해서 읽은바 성경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되는 이러한 순환의 작용들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예배를 통해서 성경과 친숙해지는 일상의 진리의 친숙한 신앙생활이 없이는 결코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견고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맨 처음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리고 우리가 변화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마음하고는 달랐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IV. 적용과 결론
간절히 주님을 만나기를 원했고, 그때 우리의 마음은 어린 아이처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주님의 말씀에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에 참석하는 그것을 커다란 특권이라고 여기고 그리고 한 말씀이라도 깨달아 그 말씀을 붙들고 살고자 하는 사모함이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의 우리의 기도는 간절할 수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 보기에는 우리가 죄 지은 자요, 미끄러진 자요, 절망에 빠진 자였지만 그 속에 도우시는 성령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난도 이기고 시련도 이기면서 눈을 뜰 수 없는 고통스러운 날 속에서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말씀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넘어졌으나 다시 그 말씀의 지팡이를 붙들고 일어섰고 쓰러졌으나 마귀에게 아주 짓밟히지는 않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죽음은 진짜 육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절망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생의 위기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윌리엄 몰트만이라고 하는 신학자가 얼마 전에 한국에 와서 강연을 했고, 그리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는 나치의 그 만행을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이고 부모를 모두 수용소에서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때 그는 젊은 날의 화두가 그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갈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 그가 신앙 안에서 발견한 대답은 이것이었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 죽어가는 그때에 나도 거기에 너희와 함께 있었노라” 그러면서 이 사람이 희망의 신학을 말하게 됩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당부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어떠한 인생의 위기에서도 희망을 가지십시오.” 우리의 인생의 최대의 적은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위기가 아닙니다. 언제나 있는 일이고,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옛날에도 우리에게는 그런 위기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위기는 ‘아, 이제 나는 희망이 없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나보다.’ 그리고 눈을 감는 것, 이게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위기이기에 키에르 케고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절망이야 말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유일한 병이라고 충고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인생의 위기에 있을지라도 또 우리가 삶의 벼랑 끝에 있을지라도 두 가지 사실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 하나님 자신이 선이시기 때문에 선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악에 빠지거나 잘못된 길로 갈 때에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가장 훌륭한 징표입니다. 무관심에서 우리를 버려두셨다면 죄악 가운데서도 형통해야 하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당신의 선택한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시는 그 선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멀리 떠나면 위기를 만나는 것이고, 죄를 지으면 괴로운 것입니다. 그 고통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간섭하고 계시다는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나에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대판 한번 싸울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어떤 생각이 들었냐 하면 이러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비난 속에는 대부분이 억울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였지만 1%정도의 진실이 그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충고가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그 사람을 찾아가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인정을 했습니다. ‘저 나쁜 인간이 나한테 한 저 나쁜 얘기 중에 1% 이거는 정말 사실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니까 너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하나님 앞에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아프지 않고 잘못된 것보다는 아프더라도 바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저를 다루어 주십시오. 하나님은 이처럼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 그리고 선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여러분이 선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 하나님이 선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당신에게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방황하거나 죄에 미혹되거나 혹은 깊은 시련을 만났을 때 혼란스럽지만 조용히 출렁거리는 이 거짓된 감정들을 가라앉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시련을 만나고 위기를 만나고 신앙이 미끄러졌을 때일수록 마음을 다스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말씀으로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여러분 자신에게도 여러분을 넘어뜨리는 이 세상에도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참된 희망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여러분은 주님을 수시로 버렸다 찾았다 해도 하나님은 한번 찾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고 붙들고 계신 신실한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새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번 사경회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도록, 은혜를 달라고 오늘부터 한 두주정도 작정 기도를 해보십시오. 거기가 직장이든지 혹은 남편과 아내들을 다 내보낸 가정의 건넌방이든지 어딘지 간에 시간을 정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여러분의 잘못과 여러분의 악함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대조해서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어린 아이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을 만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