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이기라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시 18:3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울의 박해를 받으며 도망 갈에 올랐던 시인이었습니다. 많은 고난과 환란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삼으시고 그 모든 날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 고난으로 넘쳤던 지난날을 회고하며 이 찬송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시편 18편은 다윗이 쓴 시 가운데 가장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몇 편 안되는 시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이 자기와 어떻게 함께 해주셨는지를 노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짧지 않은 시편 18편은 세 개의 표절을 패턴처럼 바꿔가며 찬송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련 당한 시인, 건져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 시련, 구원, 말씀이 짝을 이루면서 이 시편 18편을 펼쳐 나가고 있습니다.
II. 완전한 말씀
하나님은 시련을 당할 때 용사와 같이 나타나셔서 시인을 구원해 주셨고, 그런 구원을 통해서 시인은 더욱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시인은 완전한 말씀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며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와 여호와의 말씀이 짝을 이루고 ‘완전하고’와 ‘순수하니’라는 두 형용사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같은 의미의 말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강렬한 인상을 심고 있습니다.
‘완전하다.’라고 하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탐밈’인데 온전한 것을 가리킵니다. 온전하고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없는 그런 상태를 뜻하는 것이라면 ‘순수하다.’라고 하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찰룹’인데 이것은 금을 제련할 때 쓰는 동사에서 나온 형용사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분사입니다. 즉, 금광석에서 한번 녹여낸 금은 금이긴 하지만 순도가 떨어지는데 같은 제련을 여러 번 할 때 그 금은 더욱 순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며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고 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도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도리에 대한 교훈이라면 여호와의 말씀은 그 교훈이 언약관계 속에서 주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지만 자기 나름대로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긴 세월을 살아온 여러분들의 삶은 바로 여러분들이 이제껏 결정하고, 선택한 것이 집약되어서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완전하고 순수하지만 사람들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행복할 줄 알고 선택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불행의 원인이 되고, 옳은 것인 줄을 알고 결정했는데 뼈아픈 후회를 불러오는 잘못된 결정으로 판명이 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자신이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한 대상과 선택하는 주체를 넘어서는 객관적인 어떤 분명한 진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도,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명백히 말합니다. 이 말씀은 여러 번 연단해서 가장 순수하게 된 금과 같이 그렇게 맑고, 그리고 아주 순수합니다. 그래서 이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생각하고 판단한 그것은 결코 부정확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옳은 것이라고 가르치면 그것은 영원히 옳은 것이고, 진리가 행복한 것이라고 가르친 것은 영원히 선택해도 후회함이 없는 그러한 행복에 이르는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매일매일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려놓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발견하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신뢰했던 것에 대한 깊은 후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면 자신을 믿었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 말씀은 완전한 말씀이기 때문에 후회가 없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때로는 그 말씀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큰 고통을 가져오고 때로는 큰 손해를 안겨줄 것같이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 말씀의 판단을 따를 때 우리는 그 말씀의 판단이 옳았다는 사실을 후에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을 사모했던 사람임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완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완전함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누구든지 자신이 온전해지고자 하는 마음 없이는 누구도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지만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해서 단박에 우리가 완전에 도달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완전을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자체 안에서 매우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진리의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에 도달하지는 못했으나 그 완전을 향해 가는 그것은 우리에게 언제나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자유론으로 유명한 작가,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인 제임스 밀러부터 영재 교육을 받고, 당대에 내로라하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자신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이 어린 스튜어트 밀은 벤담(Jeremy Bentham)과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물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을 때 나는 행복할 것인가 놀랍게도 그 대답은 ‘아니요.’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존 스튜어트 밀은 아버지 제임스 밀과 함께 그리고 벤담과 같은 사상가들과 더불어 공리주의를 대표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공리주의는 여러분들이 배운 바와 같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들이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아니었습니다만 말입니다. 그러나 스튜어트 밀은 여기에서 객관적인 공리주의 원칙에 의해 모든 사람의 행복을 잴 수 없는 요소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있었던 낭만주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감정, 느낌, 그리고 자신이 일상에서 겪는 이 행복하다는 느낌 같은 것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지 의문에 빠지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행복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찾아가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간다고 칩시다. 그러면 저의 개인적인 경우에 가장 행복한 때에는 막상 그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가 아니라 그 계획을 짜고 그 다음에 그곳이 어떤 곳일까를 생각하며 지도를 찾아보고 여행 경로를 그리고 이런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행복을 주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매일 그 일만 하다가 한 번도 여행을 못 간다고 해서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완전함을 찾아서 걸어가는 모든 길이 고난의 길이요, 끊임없는 고통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자신도 완전하고자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기준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진리가 주는 진정한 기쁨과 환희를 경험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완전함을 향해 가는 그 과정 그 자체가 끊임없는 행복을 주고,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과 희열을 우리에게 주어서 그것이 우리의 삶을 생기 있게 하고, 그리고 여유 있게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용서하고 자비를 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또한 완전을 지향하며 살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또한 온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III. 방패이신 하나님 말씀
시인은 이러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한 후에 그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라고 말입니다. 방패는 전투 병기 중 방어용 무기입니다. 전쟁터에서 칼과 칼이 맞부딪치고 그 번뜩이는 칼날이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올 때 방패는 그 칼날의 위험으로부터 병사를 보호해 줍니다. 거센 기운으로 찌르며 들어오는 그 창을 빗나가게끔 밀어붙이는 것도 방패가 없으면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발사됐는지도 모를 수많은 화살이 소낙비처럼 내릴 때 방패가 없는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화살을 맞고 죽어가지만 방패 뒤에 숨어있는 병사는 자신의 방패를 관통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수많은 화살들의 소리를 들으며 위안을 느낍니다. 이 시인은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옮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말씀의 은혜도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이고 죽음을 넘나드는 수많은 전쟁터에서 그는 전투를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창과 칼이 맞부딪히고 그리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곳에서 방패 뒤에 숨어 목숨을 보존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방패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정말 그렇게 여러분 자신을 보호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방패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투입니다. 전투의 한복판에서 여러분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매일매일 치열한 전투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무리 여러분들의 삶에 대해서 진지한 견해를 가지고 있고, 피 흘리기까지 여러분들의 삶을 위한 전투에서 이기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에게 방패가 없다면 적들의 그 공격을 무엇으로 막아내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방패가 없다면 여러분들은 적군의 수많은 칼날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고, 여기저기서 찌르고 들어오는 그 날카로운 창끝에 여러분들은 죽고 말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모르게 날아오는 화살이 소낙비처럼 쏟아질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거기서 목숨을 보존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던져 보기 전까지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지 못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여러분들이 예수님 믿기 전부터 사랑하셨지만 주님의 믿고 난 후에야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 것과 꼭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여러분보다 훨씬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면서도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한번 조사해 보십시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렇게 여러분들의 마음에 은혜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무엇에 바쁜지 모르지만 성경 한 장 읽을 시간 없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바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먹고 싶은 곳에 가서 먹고, 보고 싶은 것 보고, 그리고 가고 싶은 곳을 갑니다.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을 시간은 없는 것입니다. 영화 구경은 15분 전에 도착해서 팝콘을 사며 콜라를 마시면서 마음을 정돈하고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는 10분, 20분, 심지어 30분 넘어서 예배당에 오는 것을 조금도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정말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의 모습이겠습니까?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런 말씀의 방패가 없이 산다면 여러분들은 영적인 전쟁터에서 노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을 전쟁터에서 죽게 하기 위해서는 수만 명의 군대가 동원될 필요가 없습니다. 목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짧은 단검 하나로도 절명할 수 있고, 가슴을 깊이 찌르고 들어온 창 하나에도 목숨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을 묻힌 화살 하나가 스치고 지나가도 절명에 이르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무슨 배짱입니까? 어디에서 나오는 용기인지, 하나님의 말씀의 방패 없이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맨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상처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합니다. 전쟁터에서 상처받는 일이야 그게 어디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살아 있는 것이 놀랍고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방패가 없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고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아서 삶이 흔들리고 좋아하는 사람 한 사람 변심했다고 인생이 뒤집힐 것 같은 위기를 만나는 것은 주체성이 없는 삶입니다. 원래 인생은 그런 것입니다. 속고 속이고 또 내 마음대로 안 되고, 시련을 만나고, 원치 않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그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우리를 영구히 행복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보십시오. 오늘 시인은 자신의 온 존재를 걸고 경험한 사실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주시나니 곧 하나님의 말씀이 방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깨달아져서 우리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면 그 말씀은 작용을 멈추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찾아오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전에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을 사랑했고, 헛된 것들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감화시키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의 그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 찰 때 우리의 지성은 가장 명료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처럼 욕망에 치우치지 않고 지혜를 줍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부딪힌 수많은 현실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언제나 믿음을 만들어서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써 현실을 이기며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의 힘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첫 번째도 하나님의 말씀, 두 번째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배 시간에 와서 설교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리고 일주일 동안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또 한쪽에는 성경에 대한 이해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경건한 책을 들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그러한 보험료와 같은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미래에 대해서 대비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동차 보험을 들고, 혹은 질병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은 질병을 위한 보험을 듭니다. 재산을 염려하는 사람은 재산이 불시에 도적을 맞거나 화재가 났을 때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보험을 듭니다. 그렇게 드는 비용을 우리는 아예 사업을 할 때 원가에다가 모두 계산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인생살이에서 우리 자신이 보호받고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자신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전부가 아니라 그 일부의 시간과 그리고 집중된 마음을 떼어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람들이 예배에 대한 의식이 없을까요? 일주일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현저히 부족합니다. 사랑도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막 봐도 좋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불신앙적인 태도를 반복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여러분들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만나를 잔뜩 준비하고, 이 양식을 먹고 힘을 얻어 이 말씀 속에서 방패를 마련하여 한 주간 동안의 삶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승리하도록 생명을 유지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주님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상처입니다. 말씀이 없어서 모두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시련을 만났는데 죽을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의 방패가 없기 때문에 창에 찔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날에 맞은 것입니다. 화살에 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런 일들이 매일매일 되풀이 되는데 깨닫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가슴에 밀려오는 최고의 비중 있는 생각은 ‘내가 괴롭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도대체 누가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를 틀었습니다. 한편의 설교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한번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에 꼭꼭 씹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말씀 없이는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꼭 붙들고 사는 불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 마음이 쏴 했습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이미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색이 공인 줄을 모릅니다. 수없이 떠오르는 형형색깔의 많은 것들이 실제인 줄을 알고 거기에 목숨을 겁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에게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진리인데 무슨 진리의 보호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래서 칼에 맞아 베이고, 창에 찔려서 고통을 받고, 화살에 맞아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교훈을 주지 못하고 똑같은 일을 매일매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그 진리를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이 말씀이 방패가 되어서 여러분들을 지켜주시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을 한번 실천을 해보십시오. 많이도 말고 하루에 한 장, 한 장이 너무 짧다고 생각하면 세 장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시간을 내어서 읽고 싶은데 읽어 보십시오. 너무 어렵다고 생각되면 쉬워 보이는 성경 부분을 먼저 택하십시오. 시편이나 요한복음 같은 것을 읽는 것입니다. 천천히, 천천히 읽고 그리고 읽으면서 마음에 찔리는 부분은 멈추고, 다시 반복해서 읽어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네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명료해질 때까지 계속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꾸짖기도 하고, 가르쳐 주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잘못에 대해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 그것을 간략하게 정리를 하고, 그 다음에는 무릎을 꿇고 그 말씀에 깨달은 것을 꼭 붙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루에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30분이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라도 단 20분이라도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읽어나서 시편 하나, 저녁 때 요한복음 한 장, 어떻게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간절한 기도는 다음날 인생을 살아갈 때 여러분들을 피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방패가 됩니다. 나를 움직인 생생한 말씀을 내가 붙들고 사는 한 최소한 그 말씀 없기 때문에 걸려 넘어졌던 지난날의 실패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실제적인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았고 그래서 곤고했습니다. 상처를 받으면서도 여기가 전쟁터인지를 몰랐고, 창에 찔리면서도 이것이 방패가 없기 때문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붙잡히는 것 이외에 어떤 소망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교회는 여러분들의 인생을 돈이나 물질, 명예로 해결해 주는 곳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에 궁극적인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의 방패 없는 삶은 결국은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에 옛날처럼 지독하게 방황하고, 여기저기서 누가 찌르는지도 모르는 칼날에 찔리고, 그 다음에 화살에 쏘이고, 그리고 마지막에 창끝에 표적이 되는 그런 삶일 것입니다. 그런 삶이 지치고 너무나 병들었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 죽으신 것이 불순종하던 나의 이 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떠나 살았던 나의 패역한 삶 때문에 주님이 대신 죽으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진리를 따라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살기로 다짐한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인생의 전쟁터에 뛰어든다 한들 여러분들에게 말씀의 검이 없고, 말씀의 방패가 없는데 무엇으로 적을 이기겠으며 무엇으로 여러분들의 목숨을 보존하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도 무지몰각하게 예배를 드리고 나간다고 생각하십시오. 알몸으로 그렇게 치열한 전쟁터에 나간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 이러한 매일 매일의 패배를 우리가 되풀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그 말씀의 검으로 이기고 방패로 보호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시인은 말합니다.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를 위해 방패가 되어 주시지만 당신에게로 피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방패가 되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곤고하게 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방패 뒤로 피하고 거기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맛보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