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린 말씀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50)
녹취자: 허혜숙
누구에게나 고난의 문제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고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자신이 직접 그것을 겪을 때 많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어차피 자신이 겪어야 될 고통은 혼자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공감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공감입니다. 결국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고통들을 자기 스스로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넘쳐서 서로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며 그렇게 위로하며 사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이고, 또 교회는 그런 이상적인 사회를 내다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속에서 남의 고통을 공감하며 살아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다른 사람의 아픔은 깊이 공감하고 동참해 주면서 나 자신의 고통은 아무도 그렇게 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덕스러운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고통을 직면할 때 심약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우리의 인생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을 것이며 이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겪는 고통을 우리도 겪어야 한다면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무슨 유리한 점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초보적인 신앙일 때 우리가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고통은 물러가고 항상 행복만 우리에게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때로는 더 큰 고통을 주셔서 당신이 경험하지 못한 그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문학가이든지 예술가이든지 간에 그들의 작품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물론 하나를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없겠지만 - 음반을 내는 가수들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대표곡 8곡 정도를 반복해서 듣고 나면 대개 그 사람의 작품의 세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폭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여덟 개 정도 가지고서는 파악이 안 되는 깊은 세계를 우리들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술가나 문학가나 사상가나 심지어는 신학자들 가운데 사람들이 흔히 갈 수 있는 곳까지 간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남이 안 가본 그 너머의 예술과 학문과 신학의 세계가 있는 자들은 자기를 찢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영역이 확장된 것입니다. 그래서 글을 읽어보면 이 소설가가 삶과 죽음을 넘나든 적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소설을 열고 훅 냄새를 맡아보면 피 냄새가 안 납니다. 절망을 이야기 하는데 그냥 남한테 들은 절망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드리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이렇게 많은 고통을 겪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우리가 그 고통을 잘 소화함으로써 그 고통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가 볼 수 없었을 그런 세계를 넘나들게 하심으로 우리가 보다 더 좋은 위치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연극표를 살 때 잘 보이는 곳은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쌉니다. 외국의 오페라 극장에 가보면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층의 좌석이 있는데 거기에는 탁자도 있고 술도 가져와 마시면서 오페라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아랫사람들에게는 허락이 안 되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층에는 12유로 정도 내고 들어간다고 한다면 위에는 약 500유로를 내고서 올라가는 곳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그 고난을 겪으며 우리 자신이 확장되는 과정을 경험케 하심으로써 까치발을 들고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로얄 박스에서 인생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전망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십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에서 어떤 점이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말합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라는 단어는 안 나오고 히브리말로 ‘조트’인데 ‘이것들’이라는 대명사입니다. 여기에서 ‘위로’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나함’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위로’라는 단어는 아주 폭넓게 쓰입니다. 말하자면 부모를 여의고 받는 위로, 불행을 당한 다음에 받는 위로 등 육적인 위로로부터 정신적이고 영적인 위로까지 아주 폭넓게 풍부하게 사용이 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시인이 ‘이 말씀은 나의 위로입니다.’라고 할 때에 그 위로가 이해할 수 있게 가슴에 다가옵니다. 간절히 위로를 갈망하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이 한 상황에서 모두 기록한 것인지 여러 가지 상황에서의 경험들을 종합한 것인지 우리들이 확실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후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통적인 것은 악인들과 환경으로 인해서 극심하게 고난을 받는 상황입니다. 상황이 각각 달라도 다 유사하게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시인은 거의 절대적인 외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위로뿐만 아니라 정신과 마음, 감정과 영혼, 신령한 은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봅시다. 어린 나이에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니는데 몸은 너무 아프고, 외롭고, 고달프고, 서러울 때에 엄마를 만나 그 품에 안겼을 때에 받는 위로와 유사할 것입니다. 아주 복합적인 감정입니다.
사람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성격이 이상해지지 않습니다. 위로는 상처의 해독제입니다. 조금 상처를 받았어도 해독의 작용이 없었던 사람들은 성격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도 위로가 충분했던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을 겪은 것을 통해서 성격이 굽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낙천적이고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부드러움이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위로 안에서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고난 중’의 위로라는 말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베오니이’ 곧 ‘고난들’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복수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수적으로 양적으로 아주 많은 고난을 겪었음을 이 시인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그에게 위로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사람의 위로는 유한합니다. 어제 책을 읽는데 한 목회자를 초청할 때의 이유가 그 목회자를 쫓아낼 때의 이유와 똑 같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간의 마음이 요동치듯 변한다는 것입니다.
박희천 목사님이 옛날에 자기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목회자는 그 교회에 부임할 때에 버선발로 뛰어오는 그 사람이 나중에 자기를 그렇게 쫓아낼 것이라고 믿으면 된다고 말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오는 위로는 언제나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너무나 많은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시인에게 고통이 한 둘이 아니었는데 그 가운데 받는 위로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어 성경은 ‘왜냐하면 당신의 말씀이 나를 확 살아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여기에 나옵니다. 그래서 이런 의미가 됩니다. ‘이 말씀은 고난 중의 나의 위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나를 살아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살아났다고 하는 것은 죽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죽은 것과 같은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 살아나게 하셨을 때에 고난을 당하였지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위로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시인 다윗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도덕적 특성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이런 그의 마음을 높게 평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었든지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삼았으며, 사람에게서 조잡한 위로를 구하는 대신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위로를 받고 싶었으며,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고 그 말씀에서 은혜를 받으려 했던 데서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씻겨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가슴 아픈 일, 힘겨운 일들은 우리의 눈을 끊임없이 가립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게 만들고 갈등하게 만들고 집착하게 만들고 다투게 만들고 끊임없이 우리의 눈을 그렇게 만듭니다. 일단 그 안경이 한 번 씌워지고 나면 그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벗겨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맨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우리는 안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에 눈이 멀면 욕망에 뒤집혀서 욕망의 안경을 쓰고 모든 것을 봅니다. 한기총 회장을 누가 어떻게 뽑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 하라고 거기에 세워놓은 것은 아닙니다. 지도자들이 그런 안경을 쓰고 세계와 역사를 바라본다는 것은 너무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모두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사람은 원한에 맺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잠시 있다가 가는 것이고 누군가를 뼛속까지 미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정의라는 미명하에서 사람들은 피터지게 싸우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신 삼은 다툼의 결과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 쪽만 보고 다른 한 쪽은 보지 못하는 경우도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살아나는 기쁨을 시인이 말씀을 통해서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여러분들을 별다른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빵 공장에서 만들어진 빵을 그릇에서 용기에 담아서 포장하는 사람들이 배부른 것이 아니라 빵집에서 그것을 사서 비닐봉지를 뜯고 용기에 들어있는 그 빵을 먹는 사람들이 배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하지만 자신은 복음의 감격이 없는 사람,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지만 자신은 그 말씀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 설교를 하지만 그 설교가 자신의 마음을 파고들지 않는 사람들은 일평생을 살아도 ‘주의 말씀이 고난 중에 나의 위로가 되었나이다’ 그렇게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