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32
목 차
자복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시 32:3-5) 9
나의 은신처이신 하나님(시 32:6-7) 12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시 32:8-10) 15
여호와를 기뻐하는 자(시 32:11) 21
시편56편 강해 1
시편32편 강해 1
시편32편 강해 1
시편32편 강해 1
시편32편 강해 1
자복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시 32:3-5)
본문해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양심을 깊이 찌르는 죄가 있는데 그것을 고백하지 않고 내버려 두니까 이것이 자기를 찌르고 고통스럽게 해서 신음할 정도가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사람의 육체와 마음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육신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배를 갈라서 해부를 해봐도 마음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지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마음이 건강하다가도 몸이 아프면 마음이 낙심되고 우울해집니다. 마음이 활기차고 기쁜 일이 생기면 육체도 함께 좋아지게 됩니다.
마음을 찌르는 양심의 가책 속에서
시인은 마음속을 깊이 찌르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괴로움을 가슴에 붙들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육체에 괴로운 징조들이 나타났습니다. 깊이 고통 받고 아파하는 상태를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때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라고 표현합니다. 깊은 고통 가운데서 마음에 감추고 있던 죄들을 하나님께서 누르셔서 급기야 그것이 마음을 가득 채우며 고통이 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통회할 때가 되면 마음이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리고 죄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의식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인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붙들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지 않을 수 없는 아주 간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깊은 고통의 마음, 자신을 찌르고 누르는 것 같은 깊은 괴로움과 아픈 마음이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누르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몸을 누르고 공격할 때 우리보다 힘이 약하면 뻘떡 일어나면서 그를 밀치고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힘이 훨씬 강한 사람이 우리를 누른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눌림을 당하고 숨이 막히는 고통을 치러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르시는데 누가 그것을 물리칠 수가 있겠습니까? 시인이 그런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죄를 지니고 주님을 등지고 거스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자유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계, 괴로움, 고통들을 물리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데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마음 중심으로 죄를 자백함
시인은 그 길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비춰서 말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자복하였다고 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진작 자복하지 그렇게 누름을 경험하고 고통을 당할 때까지 자복을 안 했나?’ 인간이란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복하게 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을 때도 마음을 실어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를 자복할 때도 마음을 실어서 자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적인 인간들에게는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고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기를 합리화하고 자기를 칭찬하고 자기 아첨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양심의 깊은 가책을 느끼며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죄를 지은 자신이 마치 남인 것처럼 미워하고 자신과 결별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깊이 결단을 하고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죄 자체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나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내 영혼을 건져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신앙의 원리입니다. 아버지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뉘우치니까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큰 자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에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자백하고 용서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은신처이신 하나님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시 32:6-7)
본문해설
시인이 고백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마음을 토하고 당신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경건한 사람은 주님을 만날 기회를 타서 그분 앞에 기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경건한 사람’은 히브리어로 ‘하시드’(dysij;)라는 단어인, 우리말로 하면 ‘성도’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사이에 있는 언약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약속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어떤 죄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참회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은혜의 약속입니다.
하나님 없이 불신자로 살아갈 때 육신의 양식은 자기가 벌어서 얻을 수 있었지만 영혼의 양식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은 그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양식은 이 세상의 음식과 이 땅의 자원이지만, 영혼의 양식은 하늘나라에서 내려오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향하여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영혼으로 하여금 그분 앞에 다시 시작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영혼들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용서의 은혜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매일 매일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생활이고 신앙입니다.
피난처이신 하나님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하면서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는 믿음을 시인이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불순종하고 범죄하며 살 때 수많은 환란과 어려움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외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끊임없는 고통과 어려움이 생겨납니다. 그런 끊임없는 고통과 많은 어려움이 생겨날 때 신자들이 가져야 될 확신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신다.”라는 굳센 믿음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잠시 떠났던 사람들도 거기에서 멸망치 않고 다시 그분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노래합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는 것입니다. 전쟁이 아무리 치열하게 일어나도 전쟁의 위협이 미치지 못하는 견고하고 안전한 피난처에 있으면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훌륭하게 보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난처이자 은신처입니다. 자기 몸을 감추고 보호하는 곳입니다. 시인은 전쟁을 많이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살아가는 삶이 전쟁터에서 쫓기는 군사와 같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전세가 기울게 되면 끊임없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적으로부터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무서움,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기억, 두려움들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정쟁입니다. 그런 깊은 두려움 속에 어디에도 자기를 보호해줄 피난처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피난처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한 죄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 죄 값을 물을 수 없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거슬러서 언약백성들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책임질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결론과 적용
언제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그 신앙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언제나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지만, 그것이 깨뜨려졌을 때 최선의 길은 하나님께 속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전쟁과 같은 환난과 고난 속에서 피난처가 되어 주셔서 오히려 그 때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배우게 됩니다.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지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시 32:8-10)
훈계하시는 하나님
6절까지는 시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주 하나님은 나의 은신처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직접화법이 등장합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이런 양식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러한 부분 가운데 상당 부분이 시인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매달리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은 음성과 응답을 가감 없이 직접화법으로 옮겨놓은 경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고통가운데 매달릴 때 주님께로부터 응답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그 응답은 “내가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 중 주님이 지키시지 않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바라보시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들을 지켜보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이 주목하고 훈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을 지켜보시고 돌보시지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주님의 자비와 은혜에 호소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를 주목하고 훈계하시는 것이 더 많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내 마음대로 살다가 돌아와서 그분의 큰 사랑과 은혜를 깊이 발견하고 그분 앞에 은혜를 받고 나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런 길을 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오늘의 일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하신 것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무엇을 하든지 거기 우리의 마음이 실려야 합니다. 전심으로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 앞에 매달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하여 매달리니까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고 그분의 음성이 다시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완고함을 버리라
두 번째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노새는 강제로 때리고 매질을 하지 아니하면 주인의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합니다. 주인에게 가까이 오지 않으려고 하는 완고한 노새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완고함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 슬픈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오셔서 사람들을 다루실 때 무엇으로 다루실까요? 우리가 모두 두 발을 땅에 딛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성령 충만할 때가 있고 은혜에서 미끄러질 때도 있습니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이 아무리 열심히 목회를 해도 사람마다 미끄러질 때가 있습니다. 미끄러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잠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식에 이르게 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더라도 따끔하게 책망을 하면, ‘아, 그렇구나. 내가 참 잘못 살았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제가 참 잘못했습니다. 바른 신앙의 길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렇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족한 많은 사람들이 있던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온전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임을 교회를 통해 온전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믿음생활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외쳐도 다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이야기하듯, 노새와 같은 완고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부끄러운 것이고 하나님을 완강하게 대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다면 그 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의해 다뤄지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참회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아프시게 했던 과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의해 다루어질 때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뉘우치는 사람 가까이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마음 다한 사랑
본문에서 노새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주님이 시인과 당신의 백성들에게 거는 기대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에 의해 마음이 쉽게 녹아서 변화되는 사람들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슬퍼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마음에 가득한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에 가득 찬 사랑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는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차서 그리움을 가지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섬김과 봉사는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간직한 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의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이것은 마음 중심 깊은 곳에서 충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며 나아가야 하는데 사람들은 너무 복잡한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슬픔에 차 있습니다. 받은 상처도 많고 괴로움도 많아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감화도 없고, 섬겨도 그것이 나 자신의 심령을 새롭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상처가 많고 고난과 괴로움이 많기 때문에 슬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슬픔과 고통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
불이 세게 타오를 때는 물을 끼얹으면 오히려 불이 더 치열하게 타오릅니다. 오히려 슬픔이 많고 고통이 많을 때 치밀하게 우리의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은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
본문은 말하기를,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라고 합니다. 악인에게는 슬픔이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쁨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슬픔이 많은 가운데 혼자 던져진 것 같은 외로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온 것 같은 적막감, 두려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낙심, 이것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많은 날들을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거기에서 깊은 고통과 괴로움, 시련과 아픔을 경험합니다. 고통과 괴로움이 계속되고 그 속에서 고통과 아픔을 느끼면서 인생을 삽니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가 불순종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태양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 항상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땅을 파서 지워보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러한 사실들을 응답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와 믿음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통해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갈 길을 보여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거꾸러트리시고 그 후에 얻어맞을까봐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는 올바른 길을 걸어 갈수도 없거니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마음이 궁금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해지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시간과 공간과 상관없이 나의 마음속에 그 사람의 마음이 전해지게 만들어줍니다. 심지어는 20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사랑하면, 부모님의 마음이 시간을 초월해서 나에게 전해집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데 그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거짓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나태해지거나 말씀과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 갈피갈피에 있는 마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아,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못 알아듣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결국은 하나님이 안타까이 부르셔도 자기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외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비참함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진리이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가운데 그분을 만나고, 그 안에서 행복해하며, 그 안에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펼치는 삶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본문해설
고난에 관해 노래하던 시인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노래를 합니다. 그 시의 앞부분을 기억하십니까? 나에게 죄가 있었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토설하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내 뼈까지 삭히면서 큰 고통을 주었는데, 그것을 고백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께 피할 때 보호해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의인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따라 행하면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시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의인은 허물의 사함을 입고 그 죄를 가리움을 입은 사람입니다. 토설치 아니하고 그것을 부여잡고 있을 때는 악인이었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모두 고하고 하나님의 용서로 인하여 허물의 사함을 받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마틴 루터 같은 종교 개혁자는 의인의 개념은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31편을 보면,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사람, 그 의를 덧입은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고, 당신의 의로 하나님께서 구해주신 사람이 바로 의인이다.’라는 것입니다. 추호의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 앞에 옳게만 살아온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죄에서 깊이 놓임 받았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고 올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의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속으로 기뻐하라
시인은 의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이 히브리 성경에서는 “여호와 속으로 기뻐하라”고 나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속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갈수록 신자는 거기에서 큰 행복을 느끼고 그 속에서 무한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맥없이 성경을 읽으면 우리 영혼에 큰 도움이 안 됩니다. 여름에 자두도 있고, 천도복숭아도 있고, 아오리 사과도 나오고, 포도와 바나나, 많은 것들이 나오지만 껍질을 깎지 않고 빨아 먹으면 수많은 과일을 빨아먹어도 그것이 자신에게 양분이 되지 않습니다. 껍질을 벗기고 그것을 깨물 때 과육이 씹히면서 복숭아의 참맛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자두나 사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물에 깨끗이 씻어서 빨아먹는다면, 빨간 사과나 자두나 잘 익은 수밀도 복숭아나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 맛이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영혼이 병들고 영양실조에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깊이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의인의 정체 1: 허물의 사함을 받은 사람
의인이어야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의인이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기뻐하는 의인’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허물의 사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입은 사람, 예전에는 올바르게 살지 못했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것에 깊이 참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데, 그 의의 기초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죄 값을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대신 죽으신 것에 기초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불의를 제거하고 거기에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릇행하다가 그분 앞에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놀라운 감격이 있습니다. 그것이 의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율법을 그대로 지키면서 어긋남이 없이 살아온 사람이 의인이라면 한번 미끄러진 사람들은 다시 여호와를 기뻐할 수 있는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참다운 의인은 참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다시 덧입은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기쁨이 없었던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믿음생활인 것입니다. 의인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게 되었을지라도 삶에 공을 들이지 않으면 금방 더러운 자가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의인의 정체 2: 삶에 공을 들이는 사람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셔서 다시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으면, 그 다음에는 자신의 삶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삶이라는 것은 마음이나 영혼의 상태와는 상관없는 단순한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과 삶은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같습니다. 같은 질의 것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고 믿음생활입니다. 끊임없이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이 새롭게 해주신 본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과 내면세계를 은혜로 유지하면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한 순종을 바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에 공을 들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죄의 용서를 통해 의인이 되었으나 이러한 삶을 통해 의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되었으나 또 의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나오지만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감격을 느끼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의인인데, 의인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깊은 참회를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신의 삶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싫습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들릴 때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합치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으면 진리가 그에게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러나 삶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등지게 되면 그 다음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 진리가 들릴 때 진리에 대한 미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를 주지만, 자신의 삶을 진리에 합치시키기 싫어하고 돌아서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그들을 책망하기 때문입니다. 그 책망을 아프게 받아들이면서도 육신의 행복보다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영혼의 행복을 찾아가야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참회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진리를 버리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 가득한 것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앙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추호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세상 때문에 갈등을 하고 세상에서는 교회 때문에 갈등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박쥐와 같은 삶 가운데 그들은 하나님께도 버림받고 세상에서도 버림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참된 기쁨이란
종교적인 형식 속에서 하나님 없는 삶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면서 살면, 그것은 벌써 영혼이 병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영혼의 질병은 계속 주입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의 영혼이 부패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짓는 모든 죄와 불순종에는 그것을 기뻐하는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는 등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패와 영혼의 병듦, 사람의 모든 고통은 옳지 않은 것을 사랑하고 거기에서 기쁨을 누리게 되는데서 발생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없는 삶은 병든 삶입니다. 비록 그가 어떠한 행위로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모습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아무 것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데서 기쁨을 찾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빼놓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을 하는데 마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행위로는 배우자를 섬기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배우자를 향해 헌신하고 있는 배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혼생활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과 모든 뜻이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없는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 속으로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은 속을 헤아려 가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사랑의 근거: 아름다움의 원형
형제들이 장가갈 때가 되면 처자를 고릅니다.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강력하게 마음을 끄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만나본적도 없고 먼발치에서 쳐다봤는데 무엇이 그렇게 마음을 끌겠습니까? 기껏해야 외모입니다. 외모가 아주 예쁘다고 해봐야 사실은 몇 cm 차이입니다. 코가 0.5cm 더 튀어나왔든지, 허리가 5cm 더 들어갔다든지, 가슴이 3cm 나왔다든지 그 정도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강력한 매력을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용모로는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끄는데 가슴 깊이 독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독이 든 사과처럼 말입니다. 자기와 관계를 갖는 사람들에게 깊은 고통을 주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좋아합니다. 그것은 속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은 그것을 뚫고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화를 하고 사귀고 생활을 할수록 자신을 기쁘게 하는 참되고 아름다운 무엇이 그 안에 많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아름다움의 본체는 누구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의 원형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속은 아주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발견할수록 기뻐하고 소중히 여기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속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마치 장가갈 형제가 반지르르한 외모를 보고 가슴 뛰듯이, 성도들이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영화나 텔레비전에 배우들이 나오면 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너무 예뻐.” 감탄을 하는데 그 사랑도 계속 변합니다. 저 사람을 좋아하다가 이 사람을 좋아하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쁜 외모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참다운 사랑이 아닙니다. 외모가 시간이 지나가서 늙고 모양이 바뀌면 그 사랑도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 모습이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균형이 잡히고 예쁘던 외모도 시간이 지나면서 붙어서는 안 될 곳에 살이 잔뜩 붙고 볼도 쳐지고 목에는 주름이 생기고 눈 껍질도 무거워져서 내려오면서 몸의 형체가 바뀝니다. 그러면 그때는 사랑할 대상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참다운 사랑이 아닙니다. 참다운 사랑은 그 사람의 영혼에 속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영혼의 아름다운 경향 자체가 바뀌기 전까지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참다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워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셨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또 알아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생활이고 신앙입니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신열의 삶, 도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하는 도열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한없는 행복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위로로 삼으며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허물의 가리움을 받은 사람, 고난과 시련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복입니다. 이렇게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56편 강해 1
시편32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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