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낙심케 말라
녹취자 : 오희열
가족관계의 회복에 대한 시리즈 여덟 번째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고민 중에 하나가 있다면 부모님과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도 참 어렵겠지만 자녀와의 관계는 정말 어렵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 혹은 아이들이 청년기에 접어들어서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때, 부모와 대화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부모와 대화의 상대를 하지 않으려는 경우에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아이들이 아예 빗나가버리거나 할 경우에는 부모로서 한없는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일단 나무를 심어 놓은 후에는 그 나무를 어떻게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 자녀들을 낳아서 어린 아이일 때, 그때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갖고 충분한 사랑을 받고 부모로부터 배울 수 있도록 관계를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몸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병이 들고 나면 수평추의 기울기가 기울어져 버립니다. 그것을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평소에 우리 몸의 균형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질병 상태에 들어가지 않도록 건강과 위생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오늘 즐거운 마음으로 자녀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자녀를 사랑하라”인데 사랑은 부모와 자녀들과의 관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그 사랑을 가지고 부모의 관계, 자녀의 관계, 모든 것에 다 적용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연 모든 만물들에 대해서도 선의를 갖는데,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창조하신 세계를 잘 지키려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림을 보시면, 결국 교회 안에 한 가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혼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 결혼합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만, 교회의 한 사람이 불신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그가 신앙을 갖게 될 때까지 기다린 후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우리는 정리를 합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교회의 일원들이 모여서 교회의 한 부분이 된 가정입니다. 그것은 교회나 가정이나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공로와 사랑을 믿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때 비로소 조각조각 돌아다니던 생각들이 하나로 모이면서 내가 왜 태어났는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삶의 시작과 끝이 보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적합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전쟁을 수행하는데 일개 사단의 병력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온 힘을 다해서 적군과 싸웁니다. 거기에 1만5천 명의 군인들의 지휘관은 별이 두 개입니다. 그 지휘관 밑으로 별 하나도 있고 대령들도 많이 있고 중령들도 많이 있고, 그 밑에는 소대장도 있고 2주 전에 입대한 병사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같이 움직입니다. 쳐내려오고 있는 적군을 어떻게 하든지 물리쳐서 이 국토를 안전하게 지키고 원한다면 공격을 해서 저들이 다시는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 하나의 목표에 모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부대가 가진 모든 전력들을 동원해서 합리적으로 사용하면서 싸워 나갑니다. 그 안에는 직접 1만5천 명의 군인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도 있겠지만 2주 전에 입대한 이등병도 있고 총을 들고 나가서 싸우는 사람도 있고 군인들이 나가서 전쟁을 잘 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탱크나 트럭에 기름치고 볼트를 조이며 정비하는 사람도 있고 밥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각각 다른 일들에 종사하고 있지만 그 부대가 거기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 전투를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나’라는 인간을 만드신 목적, 나에게 가족을 주신 목적,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연관 관계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이 모두 단절되어 있습니다. 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거기에 무슨 목적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연관 관계를 다 제해버리고 나면 기껏해야 자기 자신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이 꼭 남을 짓밟고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됩니다. 기껏해야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것 정도로 말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은 창조되고 가족이라는 제도를 하나님께서 우리게 주셨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인생의 궁금증이라는 것은 풀리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가정을 이룹니다. 그 가정은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다른 사람과 함께 어떻게 가는지를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인류 사회가 원래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가지셨던 그 계획을 따라서 움직이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런 큰 구도 속에서 가정을 보아야 하고 자녀들과의 관계를 보아야 합니다.
가정을 주신 경륜은,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서 태어난 인간을 참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가정이라는 제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는데, 어떤 여성분들은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남성의 우위를 보여 주는 것보다 두 가지를 보여주는데,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남자를 먼저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자의 몸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는데 그의 일부로 만드셨기 때문에 남자에게 종속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한 몸’, ‘하나의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갈비는 뼈와 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비뼈를 떼어내실 때 살점은 칼로 싹 도려내고 완전한 뼈다귀만 취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최초로 돌아가 보면 아담이 하와를 향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라고 했으니까 그 마음으로 돌아가 보면 저 여자가 아픈 것은 내가 아픈 것이고 저 여자가 고통 받는 것도 내가 고통 받는 것이고 저 여자가 너무 행복한 것도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면 되는 일입니다. 경험이 없으십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굉장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냈습니다. 사실 저는 스물일곱에 만났으니까 그 사람의 열두 살 시절과 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서 가만히 있는데 그 남자의 열두 살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와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 그림처럼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서른 살입니다. 18년이라는 공백이 있는데 그 18년을 뛰어넘어서 열두 살 때 그 남자가 느꼈던 그 쓰라림과 고통이 오늘 나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에게 불행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아닌데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영원의 특성’입니다. 영원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사랑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 부모님께서는 지방에서 사업을 하셔서 할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어제도 차를 타고 오는데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도대체 저를 그렇게 만든 힘이 뭘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천국에 가면 어거스틴과 할머니 이외에 특별히 보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 계신 아버님도 물론 보고 싶지만 가슴이 저릴 정도로 보고 싶은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다지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할머니께서는 30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죽는 순간까지 할머니가 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를 매일매일 생각하는데 딱 한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랑’ 사랑입니다.
남자의 몸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셨다는 것은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똑같은 이야기를 다른 말씀으로 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연애의 감정이 가져온 아담과 하와의 관계에서만 있는 배타적인 고백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고백입니다. 그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납니다. 만일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정확하게 자신의 살과 뼈처럼 사랑했을 것이고 또 그 아이도 엄마 아빠를 뼈와 살처럼 사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혹시 제외할지 모르니까,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결국 모든 인류를 그렇게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랑 속에서 참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신 것입니다. 바르게 알게 하시고 참되게 살게 하시려고 가정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부딪치는 문제가 있습니다. 부모가 바르지도 않고 참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양보해서 참된 사람이 되고 싶고 바르게 살고 싶은데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기 힘든 자식을 기르고 참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면서 시련과 고통을 받으면서 자신도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르게 알아가고 참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르게 알게 하시려고 가정에서 자녀들을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알게 하시려고 가정에서 자녀가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도 모르고 인간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세계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고, 아이도 별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에 아이는 황무지에서 자라나는 어린 순 같은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허무한 인생을 살겠습니까? 더구나 그 아이가 그런 선한 결심도 가지지 못한 아이일 경우에는 우리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저려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정에 자녀들을 주신 것은, 그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함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가정에서 이것을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부모들의 신앙을 위해서 우리가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로마의 저명한 사상가 마르코스 톨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치가, 웅변가, 철학자였고 수사학의 대가입니다. 이 사람이 쓴 라틴어 문체가 명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라틴어를 외우는 사람은 이 사람의 『우정론』부터 읽기 시작합니다. 다른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명문입니다. 명연설가였습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모두 연설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연설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을 잘 쓰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을 지극히 이롭게 하는 원천도 지극히 해롭게 하는 원천도 사람임이 분명하다.” 자연적인 적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갑자기 산사태가 난다거나 할 수는 있겠지만 산이 기다리고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덮치고 공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그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그들을 붙잡아 두는 것이 덕의 특별한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자신의 유익”이라고 했는데, ‘자신의 유익’ 은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좋은 관계 속에서 살면 제일 먼저 혜택을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저 사람이 불쌍해서 가서 도와주면 그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먼저 혜택을 받는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 선한 사람으로서의 성품 속에서 기쁨이 솟아나면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덕’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 없는 사물과 동물을 부리고 사용하여 인간의 삶을 이용하는 것은 기술에 의한 것이다.” 이것을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기술, 현대의 기술을 사물을 사용해서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덕은 자기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물을 사용하는 기술의 유익은 인간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컴퓨터를 만들어서 교육시키는 것에 참 좋다고 하지만 사람이 만든 콘텐츠가 그 안에 들어가야 그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이것을 ‘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덕’ 그 자체는 관계적인 용어이고 다른 사람과 올바른 사랑의 관계를 맺게 하는 영혼의 힘입니다. 이것이 ‘덕’ 입니다.
자녀들과 덕이 있는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기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토대가 있는데 그 토대는 사랑입니다. 당연히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서 솟아난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에서 자라서 두 개의 가지로 뻗습니다. 하나는 자녀를 낙심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플러스적인 요인이고 이것은 마이너스적인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뭔가를 하지 마라.”, 그리고 “뭔가를 해라.” 이 두 가지가 자녀교육에 있어서 필요한 것인데 사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먼저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녀를 양육하는 것보다 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자녀를 낙심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아프게 해서 낙심하게 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차가 있습니다. 기차는 생활입니다.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예를 들자면, 직장생활을 하고 친구들과 관계를 맺고 자기 꿈을 펼치면서 취미생활을 하는 등등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회인으로서 힘차게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들을 이끄는 것은 맨 앞에 있는 기관차입니다. 기관차가 이끄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열정’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를 낙심하게 하면 인간으로서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정 자체가, 그 엔진이 약해지거나 꺼져버리는 것입니다. 낙심하는 요인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 화가 나게 하면 자녀들의 삶의 엔진이 꺼져버리는 것입니다. 엔진이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철로의 방향이 다른 방향이라서 기차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그의 생애를 읽어보면, 어렸을 때 신앙생활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지만 대여섯 살 때는 교회에서 성가대도 하고 교회에서 생활하던 사람이었는데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첫사랑에 빠집니다. 그녀가 일하는 공장의 주인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주인이 무참하게 그 여자를 유린했다는 이야기를 다 듣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폭발적으로 생겨나게 된 것이 그때였고 600만 명을 죽입니다. 삶의 열정이 꺼져버린 것이 아니라 열정은 남아 있는데 중대한 방향의 전환을 한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살육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상처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노엽게 하면 삶은 움직이는 엔진을 꺼지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에듀모씬’이 동사 변화한 것인데 이것은 ‘에’ 는 ‘없다’ 라는 뜻이고 ‘듀모씬’ 은 ‘열정을 갖다’ 입니다. 그래서 ‘열정을 갖는 것이 없어지는 것’ 입니다. 자녀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교육할 때 중요한 것은 삶에 열정을 갖도록 아이를 격려해주고 그 열정이 올바른 곳을 향해 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 가져야 할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굉장히 많이 있겠지만 흔히 성경과 우리 환경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가정의 폭력과 폭언입니다. 그런 폭력과 폭언은, 충분한 사랑이 없이, 그리고 사랑이 있어도 폭력과 폭언이 이루어지면 안 됩니다. 그런 충분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폭력과 폭언이 행해지면 아이가 노여워지고, 아이가 노여워지면 삶의 열정을 잃어버리거나 삶의 열정의 방향이 다른 곳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아이를 거의 방치하는 것입니다. 무관심 속에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부모가 함께 살아가도 거의 무관심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녀 교육에 대해서 아빠나 엄마가 거의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집안이 의외로 많습니다. 놔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장은 아이들에게 귀찮지 않으니까 좋은 것 같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게 뭐지? 왜 부모가 나에게 이렇게 하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한 사람은, 어렸을 때 공부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부모도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자식을 못 이긴 것입니다. 결국 인생이 그렇게 전개되니까 힘겹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돈을 벌고 직업을 갖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데도 자신이 그런 것에 현저하게 교육을 못 받았을 경우에는 말도 잘 못 알아 듣게 됩니다.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때 철이 들고 나면 부모를 원망하게 됩니다. ‘우리 부모가 왜 그랬을까?’ 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어린 나이였는데 내가 뭘 알았을까? 나를 때려서라도 교육을 시켰어야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그 어린 나이에 다 설득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방치와 무관심 속에 아이를 내버려 두는 경우에는 그게 당장은 아이들에게 자유를 줄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그 자체가 엄청난 상처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과도한 기대입니다. 자녀를 향해서 큰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준비하다가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둘 다 공부를 잘했습니다. 둘 다 일류대학을 다닙니다. 그 중에 한 아들이 서울대를 나왔는데 이 분이 너무 속상해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했더니, 그렇게 최고의 학부를 졸업했는데 세상에 좋은 직장도 있고 더 공부할 수도 있는 무수한 길이 있는데 다 때려치우고 만화를 그린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대화를 나눠본 것은 아니지만 너무 실망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셨습니다.
그 당시로 보면 나도 우리 아들이 그랬다면 실망을 안 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하면, 20년 전이었으니까 인생을 좀 더 살아 보면서 지난번 설교할 때 이야기했듯이 할머니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냥 놔둬라. 하고 싶다고 하잖니.” 라고 말했던 것처럼 지금 만약 내 아들이 최고의 학부를 나오고 만화를 그리겠다고 한다면 저는 기쁘게 허락을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웹툰이라는 문화가 펼쳐지면서 어마어마합니다. 그 웹툰 문화 속에서 어떻게 반기독교적이고 세속적인 조류, 웹툰이 대부분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 속에서 그것과 싸우면서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 성공을 할 것인가? 하는 꿈을 품고 만약 그 길로 가서 승자가 된다면 웹툰계 자체를 중요하게 정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웹툰 시장이 상상할 수 없이 어마어마합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성공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대접과 수익을 올립니다. 그랬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되지도 않는 엄청난 기대를 가지면 안 되고 자녀가 스스로 기뻐하는 길을 가도록,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동기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또 하나는 부모의 그릇된 모본입니다. 부모가 잘못된 모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르침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부모가 뭐라고 이야기를 하면 자녀는 속으로 ‘자기는…….’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아이를 사랑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이미 사회인으로서 자기의 주체성을 가지고 충분히 살아갈 나이가 된 다음에는 양육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일평생 그 자식을 사랑하며 살아가야겠지만 양육하라는 이야기는 아직 그것들이 확실하게 성립되지 않은 어린 시절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될까?’ ‘어떻게 살아갈까?’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까? 이것을 가르쳐주는 훌륭한 통로가 사랑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세계를 보고 이웃을 보고 자연만물을 보지만, 그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관심이 없고, 물론 보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세계를 보면 여행이나 하고 싶고 사람을 만나면 그저 ‘너는 너, 나는 나’라고 생각하고, 자연을 보면 한우고기나 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것을 보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면서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주신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분재가 있습니다. 이 사이를 다 철사로 감아놓았습니다. 세상에 어떤 나무가 이렇게 자라겠습니까? 그렇다고 나무를 방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마당의 나무도 정기적으로 가지치기해주는 것을 봅니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전문가가 와서 합니다. 그래서 저렇게 예쁜 형태로 나무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재처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휘게 하고 싶어서 철사로 감아놓고 줄로 잡아당기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을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게 해야 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보고 자녀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자유로운 주체로 살게 해야 합니다. 그 아이가 인생에서 무슨 일을 만날지 모릅니다. 그런데 최고의 보험은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와도 그 시련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의 배운 내용을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첫째, 가정은 참사람으로 자라게 하시려고 주셨습니다. 바르게 알게 하고 참되게 살게 하시려고 주셨습니다. 자녀 양육의 가장 기본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뭔가를 자녀에게 더 주는 것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삶의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라. 마지막으로 사랑과 교훈으로 자녀를 양육하라.
질문 1) 사회인으로서 자기 주체성을 가진 청년입니다. 어렸을 때는 스스로 하는 것이 힘들 것 같아서 깨끗이 치워주고 깨끗이 치워주다 보니까 이렇게 청년이 되어서도 치우는 것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부분은 다방면으로 만족을 하는데 치우는 것에 대해서 본인은 삶에 있어서 전혀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지저분해도 상관이 없다?) 네, 지저분해도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이 알아서 다 찾아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 연령이 되다 보니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때로는 참다 참다 제가 치워줍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답변 1) 이것은 제가 진짜 많이 고민하던 문제입니다. 저는 지저분한 것을 못 봅니다. 교회를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유리창도 매달 닦고 싶습니다. 그런데 한 번 닦는데 200만 원입니다. 못 합니다. 그런데 음식점에 가서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유리창이 투명한지를 봅니다. 일단 음식점이 깨끗하면 맛이 없어도 용서를 해줍니다. 다음에 다시 오지는 않아도 말입니다. 그런데 정돈이 안 되어 있는 식당은 가고 싶지 않습니다. 분식집에서 비빔밥 하나를 만들어 줘도 주인의 성품이 정갈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저분한 것을 못 보는 주인의 식당은 깨끗합니다.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방이 공개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남의 이야기를 하면 뭐하겠습니까? 제가 우리 아들과 제일 힘들었던 것이 그것입니다. 정리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나와 똑같았던 분이 손길원 목사님입니다. 가정 사역하시는 분입니다. 자기 아내가 너무 정리를 못하니까 이혼지경까지 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당신의 옷을 개키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정리를 할 줄 모르느냐?”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해주지 마십시오. 너무 괴로우실 것 같은데 아들이 출근하면 문을 잠가버리십시오. 그리고 돌아와서 거기서 살라고 하십시오. 잔소리를 하지 마십시오. 그 잔소리를 계속 하면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어렸을 때 저에게 매를 맞았던 것이 있는데 아마 합쳐보면 열 번 정도 때렸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그 열 번 중에서 공부를 못해서 맞은 것은 세 번밖에 안 되고 정리를 안 해서 일곱 번을 맞은 것입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이 아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혹시 아드님이 결혼을 했습니까? 아직 안 했습니까? 결혼했는데 같은 성격의 자매를 만나면 다행입니다. 집에는 정신이 없어도 그들은 아무 불편이 없이 삽니다. 그런데 자매가 정말 깔끔을 떠는 자매라면 그때는 힘듭니다. 그때는 자기가 필요를 느낄 것입니다.
정리 정돈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있습니다. 보내시면 됩니다. 우리 교회에도 거기를 다녀온 사모님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떠나셨는데 남편과 맨날 부딪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 사모는 그래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놀랍게 변화했습니다. 눈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차피 다시 덮을 이불인데 그냥 놔두고 가면 되지 뭐가 문제인가? 내 양말이 책상에 있든 어디에 있든, 입은 옷을 다시 서랍 속에 넣든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내가 입을 텐데…….’ 그냥 놔두십시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관계를 깨뜨릴 정도까지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깔끔을 떠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다른 것으로 괴롭히는 것은 견디겠는데 지저분한 것을 보면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향이 그것에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물어볼 테니 대답해보십시오. 자매님이 돈 계산에 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친구가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기쁘게 빌려줬습니다. 큰돈도 아닙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갚는다고 했는데 갚지를 않습니다. 한 번 이야기했는데도 갚지 않습니다. 그때 열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쫙 뻗칩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믿어야 하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도 안 들을 때 열이 뻗칩니까, 안 뻗칩니까? 안 뻗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안 지키는 것은 내게 그다지 큰 감정을 안 가져다주는데 자기 인생관과 충돌하는 사람을 만나면 열이 확 솟구칩니다. “이런 인간과는 상종도 말아야지!” 하는 단계까지 갑니다. 가치관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아끼는 사람은 낭비하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고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은 못 지키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고 정돈을 잘하는 사람은 정돈을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삶도 열등한 삶이 아니고 나름대로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교육에서도 성과가 나왔습니다. 정돈을 깔끔하게 하지 않고 지저분하게 사는 학생들의 창의성이 높다고 나왔습니다. “우리 아들은 저 나이를 먹도록 창의성이 계속 자라고 있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누그러뜨려야 합니다.
질문 2) 성격이 특별난 사람입니다. (매우 유별한 사람이군요.) 백 명 중에 한 명 있을 만한 사람이면 그런 사람을 계속 포용하기에는 힘이든(에너지가 엄청 많이 듭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그 벽을 넘으려고 하지만 때로는 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물질적인 부분이나 정신적인 부분, 모든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함께 해야 할지 여쭙니다.
답변 2) 물질적인 관계는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만큼만 도와주는 것이니까 그런 사람이 있으면 보통 사람 열 사람과 사귀는 것보다 더 에너지가 많이 듭니다. 심지어는 교인들도 그런 교인을 만나면 목회자가 한 30명을 돌볼 수 있는 에너지를 한 사람이 다 뺏어갑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운동을 하다가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깁스를 합니다. 그러면 그 다리 때문에 온몸이 신경을 쓰면서 목발도 사야하고 휠체어도 사야하고 신경을 쓰듯이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들을 돌볼 때에는 균형감각을 잘 가지고 그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매몰되어서 자기 생활이 정상적으로 이어가지 못할 정도로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균형을 갖는 것이 첫째이고 두 번째는 그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도 그 사람이 거부를 당하면 그 사람은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는 굉장히 열심히 나옵니다. 절대 안 떠납니다. 곁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참아야 합니다. 그 능력이 모자라니까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은혜를 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냥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다행히 우리는 그 정도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나를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돌보고 하다보면 끝까지 변화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변화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끝까지 다른 사람의 복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도와주랴?”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자신이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 무능력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끌어안고 살아가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더 빛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