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에게 행할 바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시 25:21-22)
녹취자 : 오희열
사람이라는 것이 깊이 캐서 들어가 보면 자기사랑으로 가득 찬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선을 베풀지 못할 때가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명령을 받드는 인간에게는 형벌 같은 큰 고통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한다는 것을 몰랐을 때는 모르지만 일단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음이 닫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안 그런 척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잘 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신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솔로몬의 가르침을 통해서 주전 7세기경에 원수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배고프면 음식을 먹게 하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우게 하라하십니다. 우리는 원수에게 선을 베풀면서 환상에 사로잡힙니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꺾고 원수에게 힘껏 잘 해주면 우리의 선한 행동에 감동을 받아서 태도가 바뀌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사람이라면 원수가 안 되었을 가능성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인생은 항상 정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살기가 쉬울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교회를 지을 때 100억이면 지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한 130억이나 150억쯤 들겠구나.’ 생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서울의 이수교차로의 입체시설은 당초 공사비가 182억이었지만 11번의 설계변경으로 완공되었을 때는 315억이 늘어나 497억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생각을 많이 하고 전문가들이 설계를 하고 설계대로 공사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공사를 들어갔다가 계속 설계가 변경되어버려 추가되는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원수에게 이렇게 선을 베푸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 한 마디 건네고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선물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닙니다. 자신도 기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를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사람을 다 만나기도 힘든 세상인데, 싫어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스피노자 같은 사람이 본다면 코나투스가 없는 사람을 만나면서 왜 힘들게 그런 짓을 하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을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확산해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선을 행하고 베풀어도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냉대일 뿐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소 뒷걸음에 개구리 밟히듯이 상대방이 자신의 선행을 알아주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해주기 힘든데 잘해줬는데 알아주지도 않고 더 나빠졌다면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원수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이유는 ‘자기 칭의’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지내는 것이 끊임없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을 행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고 그가 어려울 때 돕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에 엉켜있는 우리의 마음을 푸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들을 상대할 때 늘 조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김용호 목사님께서 늘 가르치시던 것이 있습니다. 그분은 성자셨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분께 배우지 못했다는 게 매우 안타깝습니다. 우리 교회 두 번 오셨는데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정말 성자셨습니다. 악한 사람을 상대하면서 악한 사람과 불의 속에서 정의를 세우려고 할 때 사람들이 늘 잊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는 늘 정의 편에 있는 줄 알지만 악한 사람들이 악해졌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악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악이 좋아서 스스로 악한 사람이 되었지만 우리는 그 악한 사람과 부딪혀 싸우다가 악에 받혀서 그 인간성이 파괴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머리에 숯불을 피워놓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이 말씀의 의미를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시편 18편을 비롯해서 여러 곳을 펼쳐보면 숯불이 의미하는 바는 심판입니다. 시편 18편 10, 11절에도 보면 숯불로 심판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로 본다면 앞뒤 문맥이 말이 안 맞게 됩니다. 자기 원수에게 선을 베풀면서 그 마음에 선을 베풂으로 원수에게 재앙이 임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박희철 목사님께도 여쭤보았는데 잘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한 가지 가능성은 감동이 아닐까 하셨습니다. 머리에 숯불을 피우면 머리가 열을 받듯이, 무엇인가 생각에 감동이 와서 악인의 악한 마음이 누그러뜨리는 화해의 마음이 생긴다는 의미였습니다. 저도 두 번째 해석 쪽으로 마음이 가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선을 베풀면서 마음속으로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를 바란다면 그게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있는 행동이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언젠가 가정 시리즈 설교에서 자기를 미워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가장 확실한 복수는 그를 사랑으로 잘 선대하고 진심으로 대해서 후일 어느 순간에든지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 너무 미안해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렇게 쉽게 감동받을 사람이었다면 원수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세운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악한 사람들과 싸운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은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말이나 행동이 너무 극단적이고 거칩니다. 본인은 그것을 정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기 자신도 망가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정의가 완성되어야지 미움으로 정의가 완성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주저함이 없고 망설임이 없습니다. 아주 쉽게 악을 행하고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항상 피해를 보면서도 담대하게 악을 악으로 갚을 수 있는 용기가 없습니다. 그게 진정으로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주시리라” 예전에 어른들이 악한 자의 끝과 선한 자의 끝을 이야기 했습니다. 악한 자의 끝은 반드시 나쁜 결말을 맺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에게서 고통을 받고 그렇게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악을 행하기 때문에 나도 그만큼 악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과 똑같은 수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갚아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갚아 주실 지는 살아봐야 알겠지만 하나님께서 항상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알프레드 아들러라는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열등감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썼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과 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이해하며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이 우리에 대해서 평가를 내려서 나쁜 사람이라고 정의를 한다면 그것을 우리는 고민하지만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십시오, 우리의 책임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밖에 있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완벽하게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우리를 싫어하고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자체가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나는 생긴 대로 살 것이다 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게 아닌데 나의 선의를 곡해하고 사실을 왜곡해서 나를 곤경에 빠뜨리고 악평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배우고 싶어 하는데 정말 배울게 없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때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소통하도록 노력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섰을 때에는 자유로워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다 좋다고 하겠습니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데 모든 사람이 박수갈채를 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 자체가 두렵다면 산 속에 가서 감자밭이나 일구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재정 러시아 때,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720만 불을 주고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습니다. 당시 이 거래를 성사시킨 미국의 국무장관 윌리엄 헨리 슈어드는 쓸모없는 땅을 사들였다고 언론으로부터 맹비난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지금은 세계의 지하자원 리스트를 놓고 분포를 보면 절반 이상이 미국이 세계 1위입니다. 그 지하자원이 알래스카에서 나오고, 알래스카에 미사일 부대를 배치하니 러시아 코앞에 창을 들이대는 격이 된 것입니다. 러시아는 땅을 치며 후회해도 늦은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이런 것입니다.
원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아니지만 언약백성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고 원하시니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것을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신의 크기가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항상 노력하며 살아야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