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가 있는 복음(장년)
(201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용서가 있는 복음 1 (2012.8.12 온가족여름 장년부수련회 저녁)
목 차
용서가 있는 복음 2 (2012.8.13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용서가 있는 복음 3 (2012.8.14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1. 용서하시는 하나님(사55:7) 2012.8.12 온가족 여름수련회(장년) 1
2. 용서하게 하시는 하나님(마6:14-15) 2012.8.13 온가족 여름수련회(장년) 19
3.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엡4:32) 2012.8.14 온가족 여름수련회(장년) 38
용서가 있는 복음4 (2012.8.19 주일오전설교)
4. 용서로 하나 되게 하심(엡4:32) 2012.8.19 주일오전 54
5. 사랑받는 자녀 같이(엡5:1) 2012.8.26 주일오전 67
용서가 있는 복음5 (2012.8.26 주일오전설교)
6. 포도나무 예수님(요15:5) 2012.8.13 온가족 여름수련회(장년)(새벽) 77
7. 교회에 은혜 늘 주신 것은(사61:3) 2012.8.14 온가족 여름수련회(장년)(새벽) 85
2012.8.13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새벽
용서가 있는 복음 1
용서가 있는 복음 1 (2012.8.12 온가족여름 장년부수련회 저녁)
용서가 있는 복음 2 (2012.8.13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용서가 있는 복음 3 (2012.8.14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용서가 있는 복음4 (2012.8.19 주일오전설교)
용서가 있는 복음5 (2012.8.26 주일오전설교)
2012.8.13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새벽
2012.8.14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새벽
용서가있는복음(1) 온가족여름청년부수련회 2012. 08. 05(저녁)
1.용서하시는 하나님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I. 본문해설
-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40장)
-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 예언(53장)
- 회복될 영적 나라와 하나님 사랑(55장)
II. 자기 백성을 부르심
A. “악인과 불의한 자들”도 자기 백성으로 여기심
1. “악인”(רָשָׁע)과 “불의한 자들”(וְאִ֥ישׁ אָ֖וֶן)의 구분
a. 언약관계와 상관없는 불법자들
b. 언약관계에서 미끄러진 자들
2. 미끄러진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심
B. 죄인들에게 요구하심
1. 악인은 그 길을 버리도록
a. “악인의 길”
- “길”(%,r,,D,)의 의미: 성향, 취향이 되어서 살아가는 본성적인 삶
- 이스라엘의 오래된 악을 보여줌
- “악”(!w,a)은 구속목적을 떠난 삶을 가리킴: 자기만족, 세속적 번영,
우상숭배
- 이스라엘을 ‘의의 포도원’으로 심으셨으나 ‘포악’과 ‘부르짖음’만 가득하게 됨(사 5:2)
b. “버리고”(יַעֲזֹ֤ב)
- 순종과 순종을 위한 싸움
- 의인의 길을 가는 것과 악인의 길을 가지 않기 위한 싸움
- 시대 정신, 사회 구조, 자기 성향에 대항함
- 순종하는 사람만 은혜의 거룩한 능력을 경험함
2.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도록
a. “너의 생각들”(מַחְשְׁבֹתָ֑יו)
- 불의한 삶의 뿌리로서의 인간의 마음을 가리킴
-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니라”(창 8:21)
- 단순한 생각들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삶의 근원인 마음을 가리킴
b. “버리고”
- 인간은 불순종하는 마음을 스스로 고치고자 할 때, 자기 안에 있는
악의 심각함을 앎
- 그 일을 위한 자신의 절대 무능을 인식함: 자포자기와 하나님 의존의 갈림길
- 단지 사변적인 이해가 아니라, 기도에 이르도록 실천적 이해로 나아가야 함
- 기도의 실천으로까지 이어질 때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짐
III. 돌아오는 자를 기다리심
A. “긍휼히 여기심”(ירַחֲמֵ֔הוּ)
1. “긍휼”의 두 구분
a. 사람의 긍휼
- 본성적 도덕관념과 이차적 사랑에서 비롯됨
- 응분의 대가를 넘어선 비참한 상태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감정
- 인간의 근원적 비참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지 못함
b. 하나님의 긍휼
- 하나님 자지사랑과 일차적 사랑에서 비롯됨
- 정당한 대가임에도 비참한 상태 자체에 불쌍히 여기는 감정
: caritas의 특징
-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자기 회귀적 사랑
2.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
- 어찌할 수 없는 죄인들: 법은 책임을 묻지만, 복음은 하나님 사랑을
보여줌
-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처럼 긍휼히 여기지 않음
- 하나님만 죄인들의 비참함 보시며, 그것이 정당한 보응인데도 긍휼히 여기심
B. “너그럽게 용서하심”(יַרְבֶּ֥ה לִסְלֽוֹחַ)
1. 정확한 의미
- “용서하도록 너그러워 지심”
- 은혜의 날을 약속하심, 은혜 받을 만한 때, 하늘의 복락을 누리게 하시는 때
- 지금은 은혜의 시대,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1)
2. “용서하심”
- 용서는 과거의 죄책을 사함 + 현재의 관계를 복원함 + 미래의 관계를 지속함
- 우리의 죄는 관계를 지속치 않아도 된다는 마음을 보여줌(사랑의 결핍)
- 하나님의 용서는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마음을 보여줌(사랑의 표현)
- 용서의 약속 안에는 복음과 함께 주어진 특권을 다시 누림이 포함됨
- 불순종과 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유업들을 다시 누리게 하심 (탕자의 반지)
IV. 결론: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용서가있는복음(2)온가족여름청년부수련회 2012. 08. 06(저녁)
2.용서하게 하시는 하나님
“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I. 본문해설
- 주기도문 다음에 다시 한 번 용서의 문제를 반복함
- 용서의 실천이 기도의 실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줌
- 하나님의 용서는 사람들 사이의 용서를 실현하는 원인이며 목적임
II.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경험
A. 교리적 문제
-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하는 공로에 달린 것인가?
- 구원에 이르는 용서가 반복되어야 하는가?
- 이미 용서한 신자들을 용서치 않으시는 일이 가능한가?
B. 단회적 용서로 충분한가?
1. 구원에 이르는 용서
- 하나님 안에서: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 사건
- 인간 경험 안에서: 반복될 수 있는 사건, 교화의 수단임
2. 단회적 용서의 충분성과 불충분성
a. 용서의 충분성
- 구원 받기에 충분함. 하나님의 불변성과 관련
- 성령의 내주, 자녀 됨, 그 유업의 특권이 불변함.
b. 용서의 불충분성
- 구원은 교화의 삶을 필요로 함.
- 성화를 위해서 충분하지 않음.
- 죄로 말미암는 낯섦(unacquaintedness)과 거리감(alienation)
- 용서의 경험을 통해 이를 해소하심
-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방식으로 사용하심
- 영혼에 직접적으로 주시는 축복
III.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하심
A.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하시는 두 방법
1.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으로써
-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의 죄악을 깨달음.
- 사랑의 질서에서 이탈한 자신의 고립을 깨달음.
- 불순종하기에 적합한 마음을 고치심.
-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경험하게 하심
- 오래 참음, 긍휼, 자비는 사랑의 하위적 속성
2.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a. 하나님의 용서의 경륜
-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의 관계를 다시 여심
-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사랑받고 사랑하게 하심
- 영적 자원의 분여와 실제적 교제가 이루어짐
-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들어 오게 하심
b.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시는 섭리
- 하나님의 사랑을 인류의 연합 안에서 구현하게 하심
- 나를 사랑하심은 그들로 더불어 하나 되게 하심임
-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하심
- 용서할 때 십자가의 희생의 크기를 알게 됨
- 자신이 하나님 사랑의 종착역이 아니라 간이역임을 알게하심
B.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때
1.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의미
a. 부정적 의미에서
-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님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노하신다는 의미가 아님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수하신다는 의미가 아님
b. 긍정적 의미에서
- 우리의 과실에 대해 훈련하심
- 하나님과의 교통의 복됨에 대하여 알게 하심
-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을 위하여 교통하게 하심
2.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심
a. 사람 때문에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님
b.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심
c.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만큼 당신의 용서를 누리게 하심
C. 용서받은 증거: 사람들을 용서함
1. 하나님 앞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임
2. 하나님 사랑은 흘러가도록 주신 사랑임
3. 용서는 우리의 의무나 권한처럼 부여하심
- 우리의 지성과 의지 안에서 행사되기를 바라심
-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항상 경험하게 하심
-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게 하심
- 용서는 단지 항상 사랑 가운데 하나 되게 하기 위함임
- 용서의 진정한 표지는 사랑임
IV. 결론: 용서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용서가있는복음(3)온가족여름청년부수련회 2012. 08. 07(저녁)
3.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I. 본문해설
II. 만물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경륜
A.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심
1. 만물을 하나로 창조하심
2. 죄로 인하여 깨어진 하나 됨
3. 만물을 다시 하나 되게 하심
B. 만물의 하나 됨의 핵심
1. 인간과 하나님의 하나 됨
2.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하나 됨
3. 모든 만물들이 그 화목의 덕을 누림
III. 교회와 하나 되게 하시는 경륜
A. 교회를 통해 하나 됨을 보여주심
B. 제도와 형식이 아닌 영적 하나 됨임
C. 삼위일체의 모상은 사랑의 모상임
IV. 사랑: 오래참음, 긍휼, 자비
A. 사랑: 관계의 성향 - 친밀함 + 정염 + 헌신
- 관계를 세우고, 지속하고자 하는 성향
B. 인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함
- 인간의 불완전성 + 자기중심적 죄성
- 자신도 알 수 없는 내면의 모순률들
C.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하심
1. 중생을 통하여 사랑의 성향을 부여 받음
2. 은혜를 통하여 사랑의 정동을 경험함
D. 교회의 이상을 실현함에 신자들이 참여함
- 사랑을 실천을 통하여 받은 은혜의 가치를 알게 하심
-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당신은 의존하게 하심
V. “친절하게 하며 긍휼히 여김”
A. “서로 친절하게 하며”(εἰς ἀλλήλους χρηστοι)
- “서로들 속으로”(εἰς ἀλλήλους): 깊이 영향을 주고받음
- “친절하게 되며”(γίνεσθε χρηστοί)
- 친절이 사람됨에서 나옴을 보여줌
- 친절한 사람됨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보여줌
- “친절한”(χρηστοί); 쓸모 있음, 이용할 수 있음, 봉사할 수 있음,
- 고전 13:4에서 “온유함”으로 번역: 남의 유익을 위해 쓸모 있게 됨
- 친절한 사람은 온유하며, 온유한 사람은 남의 유익에 기여함
- 치열한 자기 이익에 공동체의 하나 됨이 상처를 입음
B. “서로 긍휼히 여기며”(εἰς ἀλλήλους εὔσπλαγχνοι)
- “긍휼하게 되며”(γίνεσθε εὔσπλαγχνοι)
- 긍휼이 사람됨에서 나옴을 보여줌
- 긍휼히 여기는 사란이 되는 것이 하나님 은혜의 결과임을 보여줌
- “긍휼한”(εὔσπλαγχνοι): εὔ + σπλαγχνοι
- 목자 없는 양떼를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마 9:36)
- “창자에 이르기까지 떨리는 마음” 그 마음에 “좋음”이 덧붙여짐.
- 긍휼은 비참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불쌍히 여기심을 본받는 것임.
- 포스트모더니즘의 자기중심성이 가르쳐 준 것
: 소중히 여김 받고 싶어하는 존재
- 그 소중히 여김이 하나님의 품 외에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VI.결론: 자신을 다 주신 사랑
용서가있는복음(4) 2012. 08. 19 주일오전예배
4.용서로 하나되게 하심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하)
I. 본문해설
II. 하나되게 하신 교회
A. 교회, 하나인 몸(4)
B. 성령안에서 하나임(4-5)
C. 다양한 섬김의 한 목적(11-12)
III. 남은 옛사람
- 신자와 남은 옛사람
–허망, 무지, 욕심, 구습
–거짓, 분노, 도둑질, 더러운말
–특히 버릴 것: 모든 악의
–악의의 열매: 악독, 노함, 분노, 떠드는 것, 비방
IV. 하나님의 용서를 본받음
A.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 1. 영원한 용서
2. 단번의 용서
3. 완전한 용서
4. 사랑을 더함
B. 서로를 용서함
- 불완전한 사랑을 흐르게 함
- 용서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
- 은혜를 구하게 하심
V. 결론
용서가있는복음(5) 2012. 08. 26 주일오전예배
5.사랑받는 자녀같이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 5:1)
I. 본문해설
II. 하나님을 본받음
- 존재 아닌 성품을 본받음
–피조물의 위치에서 본받음
–관계에서 행하심을 본받음
–용서와 사랑이 가장 대표적임
III. 사랑받는 자녀같이
A.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심
- 성육신: 하나님 성품의 나타남
–십자가: 신적성품의 탁월한 현시
–그리스도 안에서: 이후에도 계속될 하나님 사랑의 근거→영적연합
–따라서 용서는 사랑의 계속 지향함
B. 사랑받는 자녀로서 용서함
–억압받는 노예와 대조됨: 형상
1. 부성적 사랑
–지성과 의지의 사용: 자녀와 노예
–두려움과 보상의 감각만이 아님
2. 인격적 사랑
3. 설복적 사랑
4. 순종적 사랑
IV. 결론
용서가 있는 복음 1
용서가 있는 복음 1 (2012.8.12 온가족여름 장년부수련회 저녁)
용서가 있는 복음 2 (2012.8.13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용서가 있는 복음 3 (2012.8.14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저녁)
용서가 있는 복음4 (2012.8.19 주일오전설교)
용서가 있는 복음5 (2012.8.26 주일오전설교)
2012.8.13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새벽
2012.8.14 온가족여름 청년부수련회 새벽
1.용서하시는 하나님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55:7)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아시는 바와 같이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선지자였습니다.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하기 때문에 때로는 이 세상을 심판하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는 강조하였습니다. 39장까지 이어지는 전반부에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이러한 사실을 경고적으로 선포하였고 40장부터는 하나님의 위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약적인 용서와 자비, 은총 같은 것들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4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시던 하나님이 53장에 와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과 그분이 구원받을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고난과 그리고 그 모든 부활을 예고하였고 55장에 와서는 회복될 영적인 이스라엘 나라와 그리고 그 나라의 특징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Ⅱ. 자기 백성을 부르심
A. "악인과 불의한 자들“도 자기 백성으로 여기심
선지자는 이 중요한 본문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즉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혜의 때는 시작될 것이고 바로 그 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이 오셔서 열린 은혜의 시대이며 이때는 주님을 만날만한 때요 하나님을 찾을만한 때이니 그때 주님을 찾고 그를 부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그들에게 임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악인과 불의한 자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인가 이 이사야서의 기조가 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전반부에서는 악인과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고 그들에게 채찍을 가하고 그들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주종을 이루었지만 여기에서는 악인과 불의한 자들도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으로 여기시며 부르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 악인과 불의한 자들의 구분
성경에 악인이라고 하는 말인 ‘라샤’ 라는 이 단어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이 나오는 단어이고 불의한 자들이라는 표현된 이 ‘샤웬’ 이라는 단어도 역시 아주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그저 번역을 해도 악인, 혹은 나쁜 사람, 불의한 자 혹은 사곡한 자 혹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악인과 불의한 사람들이 모두 한 종류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a. 언약관계와 상관없는 불법 자들
다시 말해서 악인과 불의한 자들이 첫째는 언약관계와 아주 상관이 없는 불법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b. 언약관계에서 미끄러진 자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언약관계에 있지만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지 못했고 불순종하기 때문에 그 언약관계에서 미끄러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그 악인과 불의한 자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여겨 부르시면서 그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그리고 부활하고 이제 성령께서 오신 은혜의 시대가 되면 그들을 하나님이 불러 회개시키시고 하나님의 언약관계로 돌이키시는 놀라운 은혜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2. 미끄러진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심
여기서 우리는 미끄러진 자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신앙생활은 일체의 미끄러짐이 없게 올곧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은총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올곧고 올바르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종종 미끄러질 때가 있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미끄러진 자들조차도 자기의 백성으로 여기시고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도록 그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언약관계에서 미끄러지고 범죄하고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매우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놓고 본다면 특별히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은혜의 때, 하나님을 찾을 만한 때라고 가리키는 이 신약의 시대에 성경을 놓고 본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멀지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듣기만 하던 하나님의 사랑, 은혜, 그리고 당신과의 언약관계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자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예수님이 사셨더라면 예수님 자신이 편안하셨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이 죄악 된 세상 속에서 나타내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그분의 소명은 잘 이루어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평생 미끄러진 사람들, 죄지은 사람들, 그리고 불의한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어울려 당신도 미끄러진 자가 되고 죄인과 같은 무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극히 탁월하시고 거룩하신 분임을 유지하시면서 그 당신의 거룩한 영향력을 미끄러지고 죄를 짓고 이 세상의 쭉정이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일으키시고 다시 살리심으로써 영향을 끼치고 나타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 세상이 진리의 빛을 떠나 어둠속에 있고 또 진리의 빛을 떠났기 때문에 그들이 윤리적인 어둠속에 있었던 것이 오히려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죄악 된 인간들과 더불어 교제하시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분은 당신의 미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죄인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들을 죄로 말미암아 엄격하게 벌하시는 경우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겨냥한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 죄를 짓고도 뻔뻔스럽게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는 자들을 향해 불같은 진노를 토하셨으나 자신의 죄를 알고 고백하는 사람들,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지극히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몸소 이렇게 미끄러진 자들을 찾아가시고 자기 백성으로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의 시대가 올 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바라보고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선지자가 바라보고 예언하였던 그 축복된 상황을 지금 여러분들은 누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이기 때문에 찾아야하고 주님을 만날만한 때이기 때문에 가까이 계신 때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불러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우리들이 3일 동안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을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가장 커다란 감정은 정죄의 느낌입니다. 혹시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온 외톨이가 된 느낌,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것이 전혀 없다면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멀기 때문에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길에 대한 지식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그 돌아가는 길이 쉽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곧 복음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그 성품을 아는 것은 미끄러진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도 미끄러진 자들조차도 자기의 백성으로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도록 간절히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저녁에 주님의 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죄인들에게 요구하심
1. 악인은 그 길을 버리도록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미끄러진 자기의 백성들, 악인과 불의한 언약의 백성들을 무조건 돌아오도록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러한 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는 그 길을 버리도록 요구하시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도록 강력하게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긍휼히 여기시리라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a. “악인의 길”
악인의 길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다. 이 길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데레크’라고 되어있는 이 길에 가장 흔한 용례는 그냥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말하는 크고 작은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데레크’는 아주 큰 길을 의미하기도 하고, 좁은 길을 의미하기도 하고, 숲 사이로 사람들이 걸어가서 난 아주 작은 오솔길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길의 의미는 사람들이 통행하고 걸어가는 길입니다. 일단 이리저리 다니다가 길이 생기면 사람들은 길이 아닌 곳으로는 가려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종 성경은 아주 많은 곳에서 이 길이라는 의미가 인간의 성향, 취향, 그래서 그것이 본성이 되어서 인간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마음의 어떤 틀, 성향, 이런 것을 의미하는 은유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길을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아주 오래된 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길로 어쩌다가 한번 들어간 것이 아니라 늘 그 길을 걸었기 때문에 이제 습관이 되고, 그리고 그것이 성향이 되고, 취향이 되고,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주 편리하고 마음의 풍취와 어울리는 그러한 습관적인 악에 빠지게 되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악인’ 할 때 이것은 악의 사람입니다. 이 악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악은 무엇인가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 기준과 판단을 따라서 이것은 악이고 이것은 선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엄마, 아빠가 되어서 아이들에게 타이를 때에 아이들이 자기 말을 잘 들으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참 착하구나!’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기준인데 아이가 거기에 잘 맞추어주었기 때문에 엄마 아빠의 마음에 그 아이가 잘 들게 된 하나의 표현을 그렇게 머리를 쓰다듬으려 ‘너는 참 착하구나!’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어떻게 할 때에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참 착하구나!’ 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어떤 때에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너는 참 착하구나! 그래 네가 있어서 내가 참 기쁘다. 내가 너를 거듭나게 한 보람이 있구나!’ 혹은 ‘이 교회를 여기에 세운 보람이 있구나!’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떨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것을 우리 오늘 성경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해서 먼저 한번 대답을 찾아봅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세상의 모든 민족 가운데 구별하여 불렀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구속의 우두머리로 삼으시고 그 가정을 통하여 민족을 이루고 민족을 통하여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나라 없이 영토 없이 방황하던 그들을 가나안에 들여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나라가 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의 빛, 열방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 삼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택과 보호와 인도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셨고 그 길을 걸어가기 어려운 때는 보호해주셔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에 인도해주신, 애굽에 종살이하던 곳에서 건져내어 광야에서 이끄시고 마지막에 가나안에 나라를 세우게 하신 그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과 의도를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희는 참 착하구나! 어쩌면 이렇게 예쁘니? 그래 내가 너희에게 그렇게 살라고 너희들을 이 가나안에 인도해내었단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죄악 된 세상에서 짐승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누리며 살던 여러분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여러분들을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아서 여러분들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성도의 유업을 누리며 하나님의 선택과 보호와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 중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을 왜 하나님이 그렇게 죄악 된 세상에서 구출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고 부족함에도 교회의 한 몸에 접붙이시고 그래서 그 접붙임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생명을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들이 누리게 하셨겠습니까? 왜 미련하고 알지 못할 때 목회의 사역을 통해 여러분들을 깨우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었습니까? 지금도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하나님과 지체들에게 돌봄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참 잘했다. 정말 너는 착하구나!’ 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심으신 것처럼 여러분들을 똑같이 이 죄악 된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고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그들의 사상, 그들의 윤리적인 삶,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동행하는 그들의 행복한 삶을 보면서 자신들도 그 백성 중 일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끔 하게하기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을 오늘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서 어두운 세상에 두신 것은 바로 이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 부름을 받고 예전에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짐승처럼 살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그들도 하나님과 올바른 생명의 관계를 맺으며 우리와 함께 서로 피로 나눈 형제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이 세상의 평화와 사랑을 확정하며 살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을 도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구속의 목적에 부합하면서 살면 그것은 착한 삶이요, 선한 삶이고 이것을 벗어나서 다른 목적을 위해서 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악한 삶입니다. 선은 기준이 분명하지만 악은 그 기준을 떠난 모든 것이 다 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악인들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나안에 보내어 심어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대로 살지 않는 것이 자신의 취향이 되고 성향이 되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이사야서 5장 2절에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을 의의 포도원으로 심었으나 포악과 부르짖음만 가득하게 되었구나!’ 라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포도가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다녀온 사람들이 가끔 포도주를 사옵니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것들은 아주 맛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특별히 포도의 주산지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쓴 카일과 델리치라는 구약학자의 주석이 있는데 그 주석에 보면 그 당시를 기준으로 에스골 골짜기에 가면 그때도 포도원이 아주 많이 있는데 한 송이의 무게가 4.5㎏에서 6㎏까지 나가는 포도송이가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간단한 무게가 아닙니다. 거의 수박 한통과 같은 크기입니다. 나뭇가지를 받쳐주어야 할 정도로 주렁주렁 열리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줄거리가 약 12m까지 뻗었답니다. 그러면 그것이 거기에 매달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맛있는 그런 포도 중에서도 특상품의 포도를 맺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포도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서 술도 만들고, 음료로 삼고, 그리고 그것으로 식품을 삼은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심으셨는데 의와 공평의 열매를 맺기는커녕 포악과 부르짖음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이 포악과 부르짖음은 어떤 것입니까? 의와 공평, 의와 공평이 이루어지면 모든 백성들은 평안합니다. 그러니까 과도한 욕망을 가지고 막살아보려는 사람에게는 의와 공평이 가득한 사회가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사랑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와 공평의 세상은 사랑을 베풀기에 가장 훌륭한 사회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의과 공평의 열매를 맺어 그 가나안 모든 땅들을 변화시키고 열방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포악과 부르짖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의와 공평을 펼쳐서 다른 나라 백성들이 보면서 ‘어쩜 사람이 사는 나라가 이렇게 행복하고 아름다우실수 있습니까?’ 이렇게 부러워하게 해야 하는 사회가 오히려 서로 물고 뜯고 빼앗고 미워하고 질시하고 억압했기 때문에 이 속에서 분노와 포학 그리고 그것을 당하는 사람의 울부짖음이 가득한 세상이 되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삼으신 그 목적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b. 버리고
바로 그 길에서 이제는 돌이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의인의 길을 가는 것과 한편으로는 의인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또 악인의 길을 걸어가지 않기 위해서 자기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악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중 이 악인들은 의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가보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은 길이고 악인의 길은 가지 말아야하는데 그 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걸어 다녔기 때문에 그 길에 익숙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순종과 순종을 위한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 있는 생각뿐만이 아닙니다. 시대의 정신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 사회의 구조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자기의 성향, 오랫동안 악한 성향을 가지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자기의 그런 악한 성향에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전에 행하던 악을 그대로 행하면서 사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고 이것에 항거해서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아주 먼 길, 거의 걸어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워 보이는 길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으면 오늘부터라도 좋으니 여러분들이 성향에 익숙해진 것 중에 한두 가지를 안 하기로 한번 다짐을 해보십시오. 스마트폰에 정신을 파는 사람은 한번 스마트폰을 꺼놓고 일주일만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드라마에 푹 빠진 사람들은 한 달만 드라마를 보지 않기로 결심을 해보십시오. 술에 인 박인 사람들은 한 달만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고기를 워낙 좋아하시는 분은 6개월만 육식을 피하겠노라고 한번 다짐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결심하는 그 순간부터 기쁨이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밀려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심리적인 불안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통계가 나왔는데 한국 사람들이 하루에 평균 38번을 자기의 핸드폰을 들여다본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100번도 넘습니다. 나이 많이 드신 노인네들은 잘 안보이니까 38번까지는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빼앗아보니까 금단현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도 손에 들고 있어야합니다. 옆에 놓고 만지면서 밥을 먹습니다. 심지어 장로님들이 모여도 테이블 밑에 핸드폰을 놓고 두드립니다. 그래서 특별히 프로그램이 필요 없습니다. 모이라고 그러고 밥을 먹고 가만히 있으면 자기들끼리 혼자서도 잘 놉니다. 이렇게 자기 성향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정말 순종하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아, 이제는 내가 하나님께 순종해야겠다.’고 순종하는 것이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그가 심각한 불순종을 한사람도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악인으로서, 불의한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흐르는 물위에 보트를 띄우고 그 물에 떠내려가는 것처럼 쉽지만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물로 뛰어들어 물살을 거스르며 헤엄을 치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힘으로 순종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의 거룩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자기 기도는 잘 안 들어주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수 있습니다. 또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하나님은 기도를 잘 들어주시기도 하고 잘 안 들어주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누구이든지 차별이 없이 잘 들어주시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진실한 기도라면 하나님은 도와주십니다. 악인은 더 잘 도와주십니다. 왜냐하면 더 많이 도와주셔야만 그 사람은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이 되면 오늘 저녁부터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누구한테도 내 기도는 특별히 잘 들어주시더라고 자랑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는 것이 사실은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떠나서 자기의 마음을 잠시 자신의 일상적인 마음을 잠시 떼어놓고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비추어 정확하게 보고 그리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되 먼저 여러분들이 받는 고통과 괴로움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여러분 때문에 얼마나 속상하고 힘들어하시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착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싶다고, 순종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고, 알아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그럴 수 있는 힘을 제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아주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게 만들어주십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순종을 위해 기도해서 악인의 길을 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도록
a. 너희 생각들
두 번째는 불의한자는 그 생각을 버리도록 하나님이 강력하게 촉구하셨습니다. ‘불의한 자는 너희의 생각들을 버리고’ 그랬습니다. ‘그 생각을 버리고’ 그랬습니다. 이 생각은 그냥 단순히 떠오르는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삶의 뿌리로써 인간의 마음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창세기 8장 21절에서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노아 홍수가 끝난 다음에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사를 드릴 때,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그 제물의 향기를 흠향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사실 이 부분은 번역이 잘 못되었습니다. 이렇게 번역해야합니다. ‘내가 다시는 물로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아니하리니 비록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할지라도…….’ 이렇게 번역하여야합니다. 어쨌든 이것은 단순한 생각들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삶의 근원인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음이 악한 것은 거의 필연적이고 운명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초자연적이 방법으로 개입하셔서 그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주시고 그 이후에도 하나님이 말씀과 은혜를 통하여 그 마음을 계속 어루만져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쳐주시지 아니하시면 그는 결코 이러한 불의한 생각들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의한 생각들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 자체가 그렇게 필연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그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삶은 불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계명 속에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너 이제 고3이야! 5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해.’ 라고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규율을 주었다면 그 규율 속에는 ‘이제 고3이니까 일찍 일어나서 열심히 공부해야지만 된다. 그렇게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는 밤늦게까지 중학교 때처럼 게임이나 하고 있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부모로서의 의지가 그 규율 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계명에 부합하는 삶을 살면 의로운 사람이고 그 계명을 어기면서 사는 것은 그가 의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지자는 강력하게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삶의 근원인 그의 마음을 강하게 바꾸고 변화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b. 버리고
역시 여기서도 ‘버리고’ 라는 버리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인간은 불순종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동안에는 자기의 마음이 고치기 힘든 질병의 상태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불순종하던 삶을 돌이켜 순종하려고 하고 하나님께 반항하던 삶을 돌이켜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경험하게 되고 그 어려운 것은 환경이나 다른 이유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만큼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한쪽으로는 오로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소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마음보다는 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기보다는 나 좋은 대로 살고자하는 정욕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이 마음이 이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손더러 ‘내밀어라.’ 발더러 ‘걸어가라.’ 하면 잘 듣지만 손발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향해 명령하면 우리의 마음은 반항하고 우리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다른 마음이 있어서 우리에게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반항하는 그 자체가 우리 자신의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는 마음을 스스로 고치고자 할 때 자기 안에 있는 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게 되고 이렇게 자기 안에 있는 악한 마음을 고치는 것이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한 자신의 절대적인 무능을 인식하게 되고 바로 여기에서 인간은 자포자기하게 되는 길과 하나님을 의존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으면 자포자기하게 되고 자신에게 실망하고 하나님께는 원망을 토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갖게 되면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능을 인식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여러분 손으로 흔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일을 누가 도와주었다면 여러분들은 그것을 인해 사람에게 별로 고마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은 불편하게 느낄지도 모르고 오지랖 넓다고 뒤에서 그 사람을 보며 흉을 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는 이행이 불가능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도와주어서 여러분들의 의도대로 성공했다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의 은혜의 도움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도 보면 성도들이 가끔 ‘이사를 했다.’ ‘이사를 간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솔직히 목회를 하고 난 다음에는 목회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면 우리 집이 이사가 있었고 그랬습니다. 뭐 학교가 바쁘고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바빠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때도 교수로 있을 때였습니다. 사당동에 살다가 인천으로 조그만 아파트 하나를 사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고 우리는 돈도 없었으니까 이삿짐센터를 빌릴 생각도 못했고 그저 운전사가 와서 그 짐을 아파트 마당에 잔뜩 부려놓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이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하나하고 걱정했는데 물론 돕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어렸습니다. 그래서 한번 짐을 지고 올라가보았습니다. 3개를 날랐더니 주저앉아서 울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몇 개 나른 것은 표도 나지 않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어디서 일꾼을 불러다가 날라야겠는데 내가 생각해도 이것을 돈을 조금 준다고 누가 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 계단을 걸어서 6층까지 걸어서 갖다놓고 내려와서 다시 하나를 가지고 가는데 저녁이 되어도 끝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기서 어떤 젊은이들이 한 떼가 옵니다. 20명 정도 되는데 교수님! 그러면서 옵니다. 아니 내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입니다. ‘너희가 여기에 웬일이냐?’ 그러니까 교수님이 이사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네는 어느 기도원에 기도하러 가는 길에 가서 교수님을 도와드리고 가자고 하면서 왔다는 것입니다. 너무 고마웠습니다. 시작해라. 그랬더니 남학생이 16명 정도 된 것 같은데 하나씩 짊어지고 두 번인가 세 번을 올라가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끝냈는데 세월이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기억이 나고 고마웠습니다. 자장면을 잔뜩 사 먹여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렇게 잊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제로 짐을 한번 날라보니까 너무 힘이 듭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그 수십 개의 짐을 나를 수 없는데 그것을 학생들이 도와주니까 오래도록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불의한 자가 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 만약에 마음먹은 대로 아주 쉽게 되는 일이라면 여러분들이 주님께로 돌아간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겠습니까? 또 만약에 불의한 자가 그 마음을 고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아무리 시도해도 불가능한 길이라면 누가 그 길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고 간증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 지점에서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자신이 절대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드신 다음 자포자기하게 되는지 혹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매달리게 되는지 하나님은 우리들을 한번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고 계속 불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들도 두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집중해서 깨닫고 나니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알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들은 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변적으로만 정리된 것이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럴 수 있습니다. 또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보니까 잘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미끄러진 상태에 그냥 있기가 싫고 어쨌든 회개하고 돌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하는 강한 갈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해야 되겠다고 결단하게 되는 이러한 실천적인 이해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러한 실천적인 이해의 첫 번째 행동이 기도의 실천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실천으로까지 이어질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미끄러진 자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까지의 말씀을 거울삼아서 여러분들을 비춰보면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에는 어떠한 처지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멀리 떠나 미끄러져 악을 행하고 불의한 자가 되었는데도 여러분들은 그런 사실 조차 혹시 모르고 있는 불행한 처지에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은 오늘 오전 3부의 설교를 들은 것처럼 하나님께 여러분들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처해있는 영혼의 상황을 올바로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여러분들의 절박한 영혼의 위기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께로부터 미끄러져 불의한 길에 서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미적대는 중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미끄러진 자리에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악한 길을 가고 불의한 생각대로 살아감으로 마지막에 얻을 수 있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무엇을 얻게 되겠습니까?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되겠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악인의 길을 걸어가는데 불의한 마음을 고치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사랑하며 살아가는데 정말 좋은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행복한 일이 생기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날 때에는 그런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달랐습니다. 흉년이 들어 가지고 간 모든 것을 허비하고 외톨이가 되었고 그는 쥐엄 열매조차도 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에야 아버지와의 평화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이 심각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을 하고 싶은데 여러 번 노력을 해봤지만 실패하여 이제는 낙심하고 자포자기 하는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은 언감생심 여러분들을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모든 길에서 돌이켜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죄인들에게, 불의한자들에게 돌아오라고 명령하셨을 때에는 그들의 능력을 믿으시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할 때에 그럴 수 있는 힘을 하나님 앞에 구하면 주시겠다는 은혜의 약속이 이미 그 명령 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이 경험을 이런 식으로 노래했습니다. ‘내가 이제 걸어온 방탕한 길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갈라치면 악마가 나를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전에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쾌락을 좋아했는데 이제 정말 나를 버리려느냐? 나 없이도 정말 네가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정녕 네가 나를 떠나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럴라치면 마음이 자지러지는 것 같아서 그것과 결별할 수 없을 것 같은 괴로운 때에 천사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금욕의 천사가 나타나서 그렇게 자기의 욕망과 죄를 따라서 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행복을 자기에게 보여주었노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천사는 자기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너보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들도 하나님께로 돌아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는데 그것이 어찌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더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들도 그렇게 한 것이 아니냐? 너도 할 수 있다.’ 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명령하는 것을 먼저 내게 주시옵소서.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내게 명령하십시오.’ 왜? 만약에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할 수 있는 은혜의 힘을 자신에게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것을 명령하셔도 자기는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먼저 그렇게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매달렸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주님 앞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를 하나님 앞에 구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방해물들과 싸우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Ⅲ. 돌아오는 자를 기다리심
이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돌아오는 자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긍휼, 영어로 Compassion 이라는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라함’이라는 이 단어는 무슨 의미입니까? 이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 긍휼은 사랑의 한 요소입니다. 교리반에서 이미 여러분들이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니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무엇입니까? 오래 참음, 긍휼, 자비입니다. 이것을 조금만 설명해드리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원래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마음이 무엇인가 특정한 대상에 고정되어서 그것을 계속 즐거워하면서 누리고 싶은 정신의 경향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기본적으로 관계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반드시 복수성을 원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려면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그 대상과의 관계를 좋아하고 그 관계가 좀 더 깊고 돈독해져서 자기가 그 사람처럼 일치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이 제일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남자를 만드시고 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셨지만 이 아담과 하와는 이후에 생겨날 모든 부부의 원형이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둘이 남자와 여자이기 전에 인간 대 인간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받고 태어난 인간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태어난 또 다른 인간, 이것이 사실은 부부로 만난 것보다도 더 기본적인 관계입니다. 둘이 인간이기 때문에 부부가 되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둘이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각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부가 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남편과 아내이기 전에 인간 대 인간이었고 인류의 종자씨였습니다.
그 인류의 종자 씨에게 하나님이 고백하게 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입니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흔한 것이 아니라 치명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살 중에는 주먹만큼 떼어내도 생명에 아무 지장이 없는 살이 있습니다. 지방, 지방흡입, 비계 걷어내기, 이런 것들은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손톱 깎기로 한번만 찍어도 죽는 그런 살이 있습니다. 심장, 장기, 이런 것들은 손톱 깎기로 한번만 찍어도 죽습니다. 아담에게 하와는 바로 그렇게 지방덩어리나 비계, 비만으로 삐져나온 살, 몇 ㎏를 걷어내도 건강에 도움이 되는 그런 종류의 살이 아니라 손톱깎이로 한번만 탁 찍어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살 중의 살이었습니다. 그런 살들은 하나님께서도 아무데나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심장을 손등에 달아놓으셨다면 얼마나 우리가 잘 죽겠습니까? 뛰어가다가 넘어지기만 해도 즉사할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폐 뒤에 그리고 웬만해서 부러지지 않는 갈비뼈로 보호하고 앞에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뒤의 등뼈까지 넣어서 박스로 단단하게 만든 다음에 그 속에다가 깊이 숨겨놓으셨습니다. 왜? 살 중의 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골도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이 속에 집어넣어서 웬만하면 안 부서지게끔 탄탄히 만드셨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골을 여기에 순두부처럼 올려놓으셨다면 한번만 부딪혀도 즉사할 것입니다. 그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이런 관계의 사랑을 이 세상에 태어날 모든 인류들이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보면서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요.’ 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도 그렇게 고백하고, 어미도 자식에게 그렇게 고백하고, 애비도 자식에게 그렇게 고백하고, 새끼도 부모에게 그렇게 고백하게 되는 그런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인류에 대해서 그렇게 고백하는 완전한 사랑의 세계를 만드시려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것을 죽을 때까지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의 아름다운 모형을 첫 번째로 제대로 구현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 바로 이 교회의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입니다. 부부에게도 이것을 구현하도록 부르셨는데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남편이나 아내가 제대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간에 나눌 수 있는 사랑이 왜곡되어서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거나 아내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부모를 등지고, 새끼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부모를 모르는척하고, 그러다가 또 자기의 자식에게는 버림을 받고 말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왜곡된 망가진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세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오래 참음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랑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런 것입니다. 오래 참음, 긍휼, 자비 이런 모든 것들은 사실은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면서 사랑의 그런 속성들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비참이 있었겠습니까? 비참이 없는데 무슨 자비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데 아주 제일 크게 기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의 관계가 올바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올바르게 사랑을 하게 되면 그러면 그 관계를 계속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나타나느냐하면 오래 참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만약에 참지 않으면 이 관계 자체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좀 들지 않아도 너무나 그와 함께 있고 싶고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향한 사랑이 나도 어느 순간에 한계에 도달하는 때가 있는데 하나님과의 사랑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래 참는 것입니다.
A. 긍휼히 여기심
1. 긍휼의 두 부분
a. 사람의 긍휼
그 다음에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중의 하나가 긍휼입니다. 이 긍휼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사람의 긍휼과 하나님의 긍휼로 나눠지는데 사람의 긍휼은 본성적 도덕관념과 2차적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사람의 긍휼은 응분의 대가를 넘어서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긍휼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면 그가 잘못했습니다.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하는데 그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 것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바로 긍휼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 고속도로로 오셨을 것입니다. 잘 타고 오는데 한 차가 계속 끼어들기를 하면서 까불면서 나를 굉장히 힘들게 합니다. 그러면 화가 납니까? 안 납니까? 당연히 납니다. 은혜를 받는 것은 받는 것이고 ‘저 인간이 왜 그러나’ 하면서 화는 납니다. 그때에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저렇게 까불고 빨리 달리다가 경찰한데 걸려서 딱지나 한 장 떼어라.’ 그런 마음이 듭니까? 안 듭니까? 야단치지 않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보십시오. 그런 마음이 듭니까? 안 듭니까? 그런데 진짜로 가다가보니까 그 녀석이 경찰에 걸려서 스티커를 끊고 있는 것입니다. 그 운전사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아, 고소하다. 자식! 안성부터 그렇게 까불고 새치기를 하고 나를 귀찮게 하더니 잘되었다. 인마!’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막 까불어서 ‘딱지나 한 장 떼어라.’ 그러는데 저기 보니까 갑자기 차가 꽉 막힌 것입니다. 사이렌을 불면서 구급차가 오고 난리인데 보니까 그 까불던 그 녀석이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완파되고 이 녀석은 밖으로 튕겨 나와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거의 절명 상태가 되어서 산소 호흡기를 끼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구급차에 실려 가는 것입니다. 그때 ‘딱지뗄 떼보다 더 고소하다.’ 그런 마음이 듭니까? 그것은 왜 그럽니까? 그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했는데 나타난 그 결과가 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정도보다 훨씬 더 크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때에 안됐다는 마음이 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의 긍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의 이 도덕 감정은 상당히 정확하게 그 사람이 행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이 정도라는 가늠자가 인간의 도덕의식 속에 있습니다. 조금씩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러나 차이가 아주 많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초월해서 이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이것이 사람의 긍휼입니다.
b. 하나님의 긍휼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은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사랑과 일차적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본성적 도덕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사랑과 일차적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섭리 속에서 혹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 속에서 그가 이런 저런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고통스러운 상태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한 다음에 어떤 나쁜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것도 자기가 행한 죄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클 수는 없습니다.
이것도 예전에 몇 번 들었던 예화인데 이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야, 이 자식아!’ 하고 욕을 합니다. 이 사람이 너무 화가 나서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이 사람이 지나가는데 나에게 욕을 했다고 말입니다. 감옥에 집어넣어 달라고 하면 경찰이 검찰에 고발해서 감옥에 집어넣습니까?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벌을 받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경범죄 정도로 처벌받을 것 같은데 법을 잘 몰라서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음부터 그러지 마시오. 나이든 사람이…….’ 그렇게 야단맞고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걸어가던 사람이 황제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야, 이 자식아!’ 그에게 마지막 벌이 무엇입니까? 황제가 지나가는데 ‘야, 이 자식아!’ 그랬단 말입니다. 벌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말로 한 것이 아니라 큰 칼을 들고 황제에게 달려가서 ‘야, 이 자식아!’ 그러면서 목에 겨누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형입니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저 황제를 죽이기 위해서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까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서 군대를 조직해서 집단적으로 테러를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야, 이 자식아!’ 그런 것도 사형이고 총을 들고 반란을 일으킨 것도 사형입니다. 그것은 왜 그럽니까? 어떤 나쁜 행동을 하는 대상이 아주 높은 존재일 경우에는 이것이 큰 것이냐? 작은 것이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잘못을 하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이런저런 나쁜 결과가 생겼습니다. 불쌍합니까? 안 불쌍합니까? 원래 불쌍한 것입니까? 안 불쌍한 것입니까? 불쌍한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사람이 지은 죄보다 작은 것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그렇게 불쌍히 여기십니까? 우리와의 관계를 끊고 싶지가 않습니다. 계속 우리와 관계를 갖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긍휼은 바로 거기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정당하게 잘못했기 때문에 정당한 대가를 받아서 비참한 상태가 되었는데도 하나님은 그것을 정당한 대가라고 보시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는 자녀들이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자체를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바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여러 곳에서 너희는 서로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실 때 그 긍휼히 여기라는 의미가 바로 그렇게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아서 너희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불쌍히 여기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기회귀적인 사랑 안에서 인간의 이 필연적인 죄를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은혜 받은 당신의 자녀들의 교회의 공동체를 사랑으로 유지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인간에 대해서 짓는 모든 죄들이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 앞에 책임질 일이 크지만 특별히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로 영적으로 묶여져있는 이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더욱 더 커다란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의 샬롬을 누리면서 충만한 영적인 생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일 강의하러 오시는 강영안 장로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 중의 한분이십니다. 강의가 끝난 다음에 청년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은 그렇게 사상도 탁월하시고 유명하신데 교회에서 목사님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것을 가르치실 때 어떻게 하십니까?’ 굉장히 대답하기 난해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당신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젊었을 때에 유럽에 유학 갔을 때는 피가 펄펄 끊을 때니까 다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철학도 공부하고 신학도 있었는데 저것은 성경에 비추어볼 때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끝나고 찾아가서 목사님께 따졌답니다. ‘목사님 이것은 이렇게 설교하셨는데 이것은 사실은 성경적으로 이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철학적으로 보더라도 틀리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보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계속해서 살았더니 그 다음에 자기의 영혼이 견딜 수 없게 곤고해지더랍니다. 그러면서 그때의 영혼의 깊은 침체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 깨달은 것이 ‘아!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렇게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소위 이야기하는 공감적 청취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에서 어긋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고 어린아이처럼 은혜를 받고 하면서 살아가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세상에서 세상의 단체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똑같은 처세의 방법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 그대로 행동하는 것은 마치 수술실에 칼을 들고 들어간 의사가 푸줏간에서 푸줏간 아저씨가 큰칼을 들고 돼지고기를 다루는 것과 똑같은 태도인 것입니다. 절묘한 비유입니다. 큰일 납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너무나 곤고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서 찔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이틀 동안 말씀을 들으면서 풀어보십시다.
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들을 혼자 공부하면서 대부분의 내용들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이렇게 잘못된 사상을 몰랐더라면 눈뜨기 어려웠을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에 대한 집착입니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적인 정신은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사상입니다. 사실 이 사상은 오늘날에 생겨난 사상이 아니라 인류역사에 언제나 있었습니다. 동학혁명이 일어날 때도 인내천 사상인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러나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느냐하면 인간이 부당하게 자기의 편을 들고 하나님 앞에서의 죄와 불의를 정당하게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인간 중심적인 사상들은 이렇게 인간이 수많은 필연성 속에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인간이 자율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동의하기 어려운 바이지만 악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인간들에게 많은 필연성이 있다고 하는 이 부분은 사실 우리에게 가르쳐준 바도 많습니다. 마치 인간이 일방적으로 환경과 사회, 자기의 능력을 초월하도록 부여받은 본성 때문에만 죄를 짓는다는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사상에는 우리들이 동의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인간에 있는 많은 필연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2.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
언젠가 한번 글을 읽었는데 어떤 흉악범의 일대기를 추적해서 어려서부터 얼마나 비참함속에서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고,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버림을 받으면서 자라온 과거가 있는 사람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걸어온 과정을 통해서 굉장히 수줍고 착했던 소년이 변하여서 수많은 사람들을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죽일 수 있는 흉악범으로 변했는데 그것을 쭉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멀리 생각하지 않고 내가 이 상황에 던져졌더라면 그래서 똑같이 이 사람이 겪은 일을 그대로 겪었더라면? 이렇게 질문하고 나니까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처럼 안 되었을 것이라는 자신 있는 답변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어찌할 수 없는 죄인들에 대해서 법은 책임을 묻고 그리고 법은 그 책임에 대해 형벌을 가하므로 사람들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의 처지를 다르게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처럼 긍휼히 여겨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이 기대하면 안 됩니다. 사람으로부터 그 모든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당신이 너무너무 사랑하는 자녀들을 이 세상에서 친구들에게 버림받게 하시고 신뢰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하게 하셔서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이 거룩한 긍휼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찬양)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오직 예수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질 않네!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오직 하나님만이 죄인들의 비참함을 보시고 그것이 마땅히 받아야할 정당한 대가인데도 하나님은 죄인들의 비참함을 보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긍휼이 여기신다.’ 라는 라함이라는 히브리 단어를 그대로 옮겼을 때에 그 단어가 열린 교회가 세워지게 된 성경본문 마태복음 9장 35절에 나오는 ‘예수께서 나오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느니라.’ 고하는 에스프랑크니스타 라는 단어와 일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했는데 순결한 양이었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무지 속에서 자신들이 죄를 짓고, 불의 속에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그리고 더러움과 욕망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비참하게 된 것은 자신들 스스로 걸어 들어간 그 길이었습니다. 탕자가 집을 떠나서 돼지우리에 처박혔고 굶주림 속에서 기어 다니면서 쥐엄 열매를 먹고 싶어 했고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었는데 돈을 준 아버지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자기가 당연히 그렇게 걸어왔고 자기가 선택해서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불쌍하다고 여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초췌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그 아들을 보는 순간 과거에 아들이 행한 모든 것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달려가 끌어안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들이 일평생을 살아왔지만 우리도 남을 이렇게 긍휼히 여긴 적이 별로 없지만 도대체 누가 나를 이렇게 가슴이 저미도록 불쌍히 여겨준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까? 없습니다. 무한히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고 악에 빠졌을 때조차도 비참하게 된 우리의 형편이 당연한 결과였는데도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의 나타남입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실 수 없는 여러분들,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끝까지 지키시면서 바라보시는 결과라는 이야기입니다. 한, 두 번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못했는데도 너무 가엾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울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심지어 나에게 나쁜 일을 행했는데도 그를 위해 기도하다보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 망가진 그 사람이 너무 가여워서 가슴이 저미도록 울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그래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변함없이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우리가 어디에서 이러한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나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나를 지겨워하는 이 세상에서 나를 지극히 불쌍히 여기며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보다 더 뛰어나게 우리를 불쌍히 여길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너그럽게 용서하심
1. 정확한 의미
마지막으로 너그럽게 용서하신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정확한 의미는 너그럽게 용서하신다기보다는 용서하도록 용서할 수 있기까지 마음이 너그러워지신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날에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이 세대에 풍성히 나타날 것을 예수님은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긍휼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더러운 죄를 많이 지은 죄인인데도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죽이기 위해서 손에, 손에 돌멩이를 들고 모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여자는 돌에 맞아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너희들이 지금 돌을 들고 왔다. 쳐라.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그렇게 하라.’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모두 돌을 내려놓고 돌아갔습니다. 이제 그 돌을 들어서 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한 분이 계셨으니 그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용서하노라. 다시는 가서 죄를 범하지 말라.’ 거기에 보면 이 여자가 용서해달라고 주님께 빌었다는 이야기도 없고 간절히 눈물로 매달렸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주님이 두려워 떨며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고 있는 이 여자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얼핏 보기에는 율법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부족한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은혜의 때인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넘치게 드러날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이 지금은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이고 그가 계시기 때문에 그를 부를만한 때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날을 약속하셨고 은혜 받을만한 때가 되었고 하늘의 복락을 누리는 때가 되었기 때문에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55장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고 외쳤던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의 강퍅함은 내려놓고 그분께 나아가 그분의 은총과 긍휼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를 입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2. 용서하심
이것이 바로 용서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용서는 크게 세 가지 지평의 약속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과거에 대해서는 죄책들을 용서해준다는 것이고, 현재에 있어서는 깨어진 관계를 복원시켜준다는 의미이며, 미래에 있어서는 이렇게 복원된 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용서하심을 죄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한 자들, 돌아올 길을 찾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죄는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는데 사랑이 결핍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자기의 자녀들을 용서해주신다는 약속 안에는 복음과 함께 주어진 모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다시 누리도록 만들어주시겠다는 약속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제가 너무 멀리 떠나왔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고 심지어는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는데 제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예전의 그 은혜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회복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용서의 약속은 거짓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 안에는 복음과 함께 주어진 특권을 모두 다시 누리게 되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미끄러져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먼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돌아올 때에 다시 하나님이 친밀함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악인의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의 생각을 버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새로운 의의 길을 주시고 할례 받은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만 헌신하고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그림 같은 비유가 탕자의 비유에 나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 유산을 모두 물려주었고 그는 그것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준 아버지가 그를 깨끗이 씻기고 잔치를 베풀면서 그의 손가락에 끼워준 반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로 말하자면 재산권에 대한 행사를 할 수 있는 도장이었습니다. 이 의미는 비록 탕자가 돌아올 때에는 아버지의 집에 품꾼 중 하나로만 여겨달라는 마음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의 마음에 아들은 언제나 아들이었지 단 한 번도 종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진심으로 자기에게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전에 그가 행했던 모든 것을 잊고 아들로서의 유업을 다시 누리고 권리를 갖도록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신 것입니다.
Ⅳ. 결론: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에 너무 멀리 온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지금이라도 여러분들이 그동안 걸어왔던 악인의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의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긍휼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다시 하나님의 친밀함을 보여주시고 다시 여러분들이 선택되어 내가 너를 선택했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큰 은혜로 여러분들을 강하게 붙드셔서 모든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보호하고 여러분들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용서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부채의식을 일평생 지니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시는 목적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지하실 작은 공간에서 일곱 명의 성도들이 함께 열린 교회를 시작했고 지금 여러분들은 그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이름 없는 헌신과 희생의 도움을 받아서 여러분들이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렇게 열린 교회를 위해 여러분들을 섬기고 희생했던 사람들 중에는 오늘날 여러분들의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에 교회를 섬긴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에 붙들려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으며 섬겼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러분들이 그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지금 뿌리고 있는 눈물의 희생과 땀의 수고를 통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충성된 증인으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주신 그 은혜를 매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면 감읍할 수 없을지 몰라도 한 가지 사실은 죄인 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악인의 길을 걸어가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불의한 자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던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그 큰 용서하시는 사랑을 기억한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감당하기 너무 어려운 희생이 그리고 자존심 상하는 너무 큰 헌신 이런 것들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기도하면서 정말 오래간만에 여러분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여러분들이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주님을 멀리 떠난 여러분들이 오늘 깊이 회개하고 여러분 보기에는 여러분들이 모두 옳아 보이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시며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여태까지 우리들이 걸어왔던 악한 길을 버리고 주님을 향해 굽었던 우리의 마음을 여기에 내려놓고 그동안 우리들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용서를 경험한 할 말 없는 죄인으로 살아야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대로 살지 않았던 것을 회개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용서해주시기까지 너그러워지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 속에서 은혜의 때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닫혔던 하늘은 열릴 것이고 생명의 은혜는 고갈된 우리의 마음에 충만히 부어져 이기며 살 수 있는 하늘의 신령한 힘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용서하게 하시는 하나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 : 14-15
녹취자: 이병두
Ⅰ. 본문해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바로 앞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 주기도문 속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오니, 또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기도문이 끝나자마자 다시 한 번 용서의 문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용서를 비는 기도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공동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용서에 대한 교훈은 하나님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도 이 용서가 확장 되어야 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실제로 사람들을 용서하는 용서의 실천이 주기도문의 삶을 사는 것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동시에 만약 우리들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그 기도 할 바를 알고 또 기도하고자 하는 열의를 품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 기도를 실행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신 이 용서는 사람들 사이에 용서를 실천하면서 살아 갈 원인도 되고 또 목적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은, 바로 그 용서를 힘입어서 우리도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동기가 되고, 또 이러한 용서의 경험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끊임없이 하나님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경험
A. 교리적 문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경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은 우선 우리에게 몇 가지 교리적인 문제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읽은 내용을 보면 '만약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는다'고 되어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하는 공로에 달린 것인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 그 행위의 공로를 기초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 구원의 하나님의 일방적 주권성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단번에 용서 받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구원에 이르는 이 용서는 반복되는 것인가? 혹은 또 우리의 용서가 취소되기도 하고, 다시 실행되기도 하는 것인가? 하는 교리적인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약에 영원히 단번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면, 이미 용서하신 우리를 단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또 다시 용서하지 않으시는 일들이 어떻게 가능 할 수 있을까? 하는 복잡한 교리적인 문제들이 이 성경 본문에 얽혀 있는 것입니다.
B. 단회적 용서로 충분한가?
1. 구원에 이르는 용서
우선 우리들이 먼저 다루어 볼 것은 정말 단회적인 용서로 충분한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에 이르는 용서,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반복 될 수 없는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자, 우리가 어느 시점에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하고 우리의 죄의 용서를 빌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 하나의 생명 공동체의 지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관계는 영원히 변함이 없는 관계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단번에 용서해 주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아주 중요한 교리적인 문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지었고 하나님 앞에 회개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지은 모든 죄가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기억 속에 있는 모든 죄를 회개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또 그렇게 구원받고 난 이후에 무죄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도 우리가 지은 모든 죄가 생각나는 것도 아니고 생각난 모든 죄를 회개한 것도 아니라면, 결국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우리는 회개하지 않은 죄들을 갖고 있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용서받지 못한 죄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용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 할 때, 동기와 계기는 우리들이 어떤 특정한 죄일 수 있겠지만 그 기도를 통해서 마지막에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의 사역을 고백하는 그 때의 회개의 기도는 사실 죄에 그 뿌리를 발견하고, 나의 존재 자체가 죄의 깊이 뿌리를 내린 존재이기 때문에 이 절대적인 죄에 사로잡힌 상태를 내 힘으로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 우리의 지난 죄 뿐 아니라, 지금 짓고 있는 죄 뿐만 아니라,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도 시간을 초월해서 한 번에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 안에서 본다면, 이 용서는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 안에서 이 용서는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용서를 가지고 우리를 교화하시는 수단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실하게 우리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흔들림이 없는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용서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의 이성 속에서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게끔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지지만, 믿어지는 만큼 똑같은 정도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 용서의 결과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단회적인 용서의 충분성과 불충분성이 대두가 되는 것입니다.
2. 단회적 용서의 충분성과 불충분성
a. 용서의 충분성
그래서 먼저 용서의 충분성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한 번에 용서해 주신 것은 구원 받기에 충분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관련이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가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며 진실하게 뉘우칠 때 우리의 죄를 영원히 단번에 용서해 주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후회 없는 결정이어야 하고,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과 구원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불완전성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에는 우리가 이미 지은 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도 이미 아시면서 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서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핏값이 그렇게 크기 때문에 우리가 그 피를 의지할 때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용서 받을 수 있는 은총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로 그 영원히 단번에 이루어진 한 번의 용서를 통하여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유업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게끔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이고 또 특권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영원히 단번에 용서해 주신 그 한 번의 구원에 이르는 용서는 우리에게 충분하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b. 용서의 불충분성
그러나 또한 우리는 용서의 불충분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되었지만, 이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겨우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것은 애굽에서 보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를 얻은 모든 종살이가 끝나는 최종적인 종착역이지만, 가나안 땅에서 바라보면, 애굽에 있을 땐 아직 시작도 안 된 것이고, 홍해를 건너면서 이제 가나안으로 오는 길이 겨우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고 이 세상 권세 잡은 자들에게 사로잡혀 종 된 생활을 하고 마귀의 자식으로 살아가던 그 처지에서 바라본다면, 우리가 영원히 단번에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고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이 있고, 그 유업의 권리를 우리들이 갖게 되었을 때 거기에서 보면, 이미 완성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시점이 여기가 아니라, 만약 하늘나라라고 한다면, 그래서 우리를 이제까지 태어나기는 했으나 한 번도 하나님을 위해 제대로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을 이제 비로소 고치셔서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살아 갈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해 주어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셨다면, 그러면 이것은 이제 겨우 저 먼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면, 이제 겨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미 있는 삶을 하나님 앞에서 겨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이제 이 구원은 사실 이 멸망 할 세상에서 보면 종결이지만, 영화롭게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견지에서 보면 이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원은 반드시 교화의 삶을 필요로 하고, 그리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번, 영원히 단번에 용서 받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여전히 자기중심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죄성들이 자기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과의 관계에서 한 번도 부인하거나 모른다고 말씀하시거나 버리시는 분이 아니지만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또 다른 용서의 경험이 우리에게 있어야지만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새로운 헌신이 삶을 시작할 수가 있고, 이미 맺고 있는 그 언약을 갱신함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자주 우리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불순종하고 주님을 주신 계명에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불화가 생겨진 것을 느끼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이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가르침을 받도록 만들어 주신 것 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원히 구원에 이르도록 단번에 경험한 이 하나님의 용서는 한편으로는 충분하고, 또 한편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가르치고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그 화목을 지키면서 살라고 우리에게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미약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두려운 인상을 갖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을 향한 두려운 감정은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감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감정이 사랑의 감정과 함께 결합 할 때에 그 두려움의 감정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감정으로 화하는 것이지,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종종 성경은 특히 구약 성경은 무서울 정도로 하나님을 엄격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또 실제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무섭게 다루시면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형벌하시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거두시기도 하십니다. 이러한 모든 구약의 계시들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우신 분인가 하는가를 보여주는데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서운가, 그리고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어떠한 평화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고, 그런 평화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계시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교화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당신 자신이 엄격하고 진노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계시를 올바로 이해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순종하고 잘못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원수처럼 여기시고 복수하시는 것처럼 그런 어떤 살의에 사로잡힌 하나님에 대한 인상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그려내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종종 자녀들을 다루면서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는 자녀들을 교화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랑 하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그 사랑을 기초로 친절과 자비를 베풀기도 하지만 때로는 엄격하게 우리가 분노하기도 함으로써 이 자녀들에게 선과 악을 가르치고 개념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화) 종종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돌아와서 깨끗이 씻고, 자기 할 일을 하고, 숙제도 하고 공부를 해야 되는데 매일 친구하고 돌아다니면서 놀고 별로 좋지 않은데 몰려다니고 집에는 늦게 들어옵니다. 그래서 엄마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에게 학교가면서 단단히 다짐을 받습니다. “너! 오늘 학교 갔다가 곧 바로 집을 돌아와야 돼, 안 그러면 너 죽을 줄 알아.” 영어로 번역하면 ‘I will kill you.’ 혹은 ‘You should die.’ 무슨 터미네이터도 아니고 엄마가... 그 때 엄마와 아이 사이에 있는 사랑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맨 뒤에 있는 문장, ‘너 내가 죽일 거야 !’ 그것만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의 목표는 자기 새끼를 죽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바가 강력하니, ‘너는 학교 끝나는 대로 딴 짓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오라.’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최상급의 협박 수단을 사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진노에 대해서 강한 계시를 주실 때에 하나님의 목표는 자기가 우리에게 내리시는 경고를 그대로 실행해서 불순종하는 자들을 짓밟아버리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도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불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화) 그래서 몸이 좀 안 좋으면 금방 금방 몸에 싸인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좀 몸이 약해서 조금 무리하면 너무 피곤하고, 힘이 없다든지 아니면 조금 무리를 하면, 이렇게 가슴이 벌렁벌렁 뛰고, 드러누워야 되고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래 삽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은 김남준 목사 50주기 추도식에 참여 할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돌아가신 지가 50년 됐데!” 그럴지도 모릅니다. 오래 삽니다. 어떤 사람들이 잘 죽느냐 하면, 미치도록 일하고 밤새워 막 자기 건강을 상해도 아무 느낌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돌연사 하는 것입니다. 잘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가 들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조금만 밤을 새도 너무 피곤하고, 무거운 것을 들면 쉬고 싶고, 머리 아픈 일을 많이 만나면 잠을 자야 되고, 이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거기에 어느 정도는 수긍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이번에 여러분들이 GBS 공부를 사실 좀 어려운 것을 하는데, 그 설교를 맨 처음에 했을 때 딱 두 가지 반응 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은혜를 받고, 심지어는 막 8년씩 9년씩 회심 안했던 사람들이 그 설교 듣고 회심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8,9년 동안 훈련을 많이 받았으니까 쉽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나오지만 선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인류 역사에서 철학자들과 많은 사상가들이 선과 악에 대한 담론을 늘어놓았지만, 사실은 누구도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은 선과 악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선이었던 것이 지금은 악이 되고, 지금은 악이었던 것이 또 다음에는 선이 되고, 이렇게 빙글빙글 도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예화) 저희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그때도 벌써 구박을 받는 시어머니 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시어머니들이 구박을 받는다는 이야기조차도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정도의 시대가 됐습니다. 그래서 막 그렇게 시어머니들을 함부로 대하고 하는 것을 볼 때 마다, 할머니는 꼭 이 말을 하셨습니다. “얘야, 이게 전부 다 뜻이 있는 거란다.” “뭐가요?” 당신 세대 때에 시어머니가 얼마나 며느리들을 달달 볶았는지 거의 종취급하면서, 시어머니들이 며느리를 그렇게 핍박을 하고, 말하자면 짓밟았기 때문에 이것이 이제 세월이 바뀌어서 공평의 원칙에 의해서 이렇게 이제 그 시어머니들이 밟히는 시대가 됐는데, 이 시대가 지나가면 언젠가 또 바뀔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까지 우리가 볼지 안 볼지는 모르지만 어째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선이었던 것이 오늘은 악이 되고 하는 것들이 수시로 변천하기 때문에 이미 오늘날의 시대에서는 선과 악에 대해서 논쟁하는거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실은 선과 악이라는 기준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어떤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하나님의 의도 있지 않습니까?. 또 인간을 만드셨을 때, 이 인간을 만들어서 세상에 두면 ‘이 인간을 통해서 이 세상을 이런 식으로 바꿔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실 때에 가지고 계셨던 계획,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기준에 부합하면 선이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모두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활쏘기로 말하자면 10점짜리 하나만 선이고 바깥으로 나가는 모든 것은 다 악입니다. 그래서 악하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을 특별히 악하게 살도록 훈련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내버려 두면 됩니다 그러나 선하게 살기 위해서는 죽을 때 까지 교육을 시켜야 됩니다. 요 즘 보면 노인들의 범죄가 아주 많아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보니까 어떤 사람이 야한 동영상을 많이 만들어 가지고 돈받고 막 팔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70이 넘은 할아버지입니다. 이것이 무엇 입니까? 이 모든 것이 악입니다. 그래서 결국, 선행은 목적이 있지만 악은 목적이 없는 것 입니다. 그리고 악은 실체가 아니고, 선만이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우리의 지성이 맑아져서 혼란스러움을 벗어나 하나님의 명료한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감정은 출렁거리지 않고, 고른 상태가 되고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해서 불끈 솟아오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우리를 구원하신 그 목적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신앙 고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항상 그렇게 선을 추구하고 그렇게 정말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일을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느냐하면 이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한번 용서 하시고, 우리에게 또 다른 용서의 경험이 필요 없다고 하시면, 올바로 살아 갈 때는 문제가 없는데, 올바로 살아가지 않고 방향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돌이킬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올바르게 살다가, 불순종한다, 죄를 짓는다, 그것은 악을 행한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과는 어긋나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내버려 두면 이 사람의 삶은 계속 악을 향해 치달아 갑니다. 악은 어는 정도 악으로 치달을 수 있고, 극단적인 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든 이 방향은 이미 선을 떠나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순종과 죄가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돌이키셔야 되지 않습니까? 돌이키실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이 우리 양심의 기능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오늘날 개신교에서 볼 때에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는 이런 삶들 중에 원인 중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양심의 기능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들을 참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 그러면 이것은 복음에 방해가 되는 아주 나쁜 것, 그리고 복음은, 이 양심을 극복하고 율법을 극복한다 그래서 마치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면 예수님을 못 만날 것 같은 이런 식으로 대립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를 안 하겠습니다. 이것만 이야기 하더라도 2시간은 이야기 합니다. 나중에 산상세미나 가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하고 올바른 양심을 향상 유지하면서 사는 것, 이것을 우리 안에 불붙는 은혜의 증거로 받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교육을 시켜야 됩니다. 어째든 들어가면, 제가 이것도 좀 재미있어하는 분야이기에 많이 이야기할 것 같아서 그러면 오늘 못 끝날 것 같으니까 다음에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시는 느낌을 받도록,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했다 싫어했다 좋아했다 싫어했다 이렇게 하신다고 하면 하나님이 굉장히 체신이 없으신 분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불변하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불변하는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실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과 화목을 느끼기도 하고 불화를 느끼기도 함으로써 우리를 교화하는 수단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게 되면 제일 먼저 우리의 양심이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들어온 죄와 불순종은 우리의 양심의 기능이 우리의 상태와 상관없이 잘 작동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죄로 오염시켜 가지고 양심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을 안하는 것이 마치 나침반을 쓸 때에는 근처에다가 자석을 놔두면, 나침반이 작동을 안 합니다. 나침반이 그쪽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나침반 근처에는 자석이 없는데다 놓고 해야지 남북을 정확하게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양심이라는 나침반 옆에다 죄라는 자석을 막 던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막 왔다갔다 왔다 갔다 하면서 판단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근심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매일매일 예배에 참석하면 자기를 하나님 앞에 홀로세우는 것 같은 말씀이었는데, 언제인가부터 그 말씀이 안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언제나 자신의 기도는 향기로운 향처럼 하나님을 향해 타올랐었는데, 어는 순간부터 기도를 그렇게 할 수 없게 됐습니다.이런 것 들이 반복되게 하시고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하심으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끔 반성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을 통해서 죄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렸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한한 거리감이 있다는 소외의식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면서 나 자신을 반성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합니다. ‘회개한다’라는 단어가 ‘메타노에오’라는 단어입니다. 그 원래 그 단어는 그리스 문학에서는 ‘회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각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는 순간에 이 지상에 있는 것이 전부 인줄 알았는데, 어는 순간에 신령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깨닫고 나서 확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메타노에오’입니다. 기독교에 들어오면서 ‘회개하다’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의 가장 훌륭한 특징은 펑펑우는게 아니라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전의 생각이 회개를 통해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이 이런 저런 어려운 일들 때문이고, 이런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누구 때문이고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어는 순간 자기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실을 발견 하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펑펑 울고도 생각이 바뀌지 않은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고 친밀함을 잃어버리고 무한한 거리감이 느껴져서 자기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서 멀리 이탈했던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깨달은 사람들을 용서의 경험들을 통해서 이것을 해소시켜주어 다시 당신께 돌아와 실제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용서는 하나님이 당신과의 관계에서 이탈하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하시는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이 불순종 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친밀함을 거두시고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노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은 우리를 향한 아주 훌륭한 훈련입니다.
(예화) 지금으로부터 한 8년 전 쯤에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설교를 2003년도에 18번인가 걸쳐서 설교를 하다가 기가 막힌 비유하나를 제가 만들어서 여러분들에게 들려 드린 적이 있습니다. 죄와 죄인에 대한 미움과 죄인에 대한 사랑을 기가 막히게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묻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어떤 인간이 나에게 죄를 짓고 나쁜 짓을 했으면 죄만 밉습니까? 사람도 밉습니까? 사실은 죄는 별로 미워하지 않고 사람을 미워합니다. ‘저놈의 인간이 어떻게 저런 짐승 같은 짓을 나한테 할 수 있을까? 저건 인간도 아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단칼에 사형시켜버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죄는 미워하지만 죄지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에 보이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매일매일 하고 있는 일입니다. 다시 한 번 남에 대해선 불가능한 일이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매일매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감싸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용서를 안 하셨는데 자기가 먼저 용서하니까 문제입니다. 자기가 끊임없이 죄를 지어도 죄는 미워하지만, 그 죄를 짓고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자기는 여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나는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끊어졌을 때 인간이 자살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자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늘어납니다.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가 최고입니다. 앞으로 점점 심해질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데서 사실은 기독교가 어떤 한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예화)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자매가 형제를 너무 좋아합니다. 뭐 형제도 자매를 좋아합니다. 그러고 이제 어디에선가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길가 어는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형제가 자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오다가 이 쪽 숲에서 저쪽 숲속으로 건너던 토끼를 어는 자동차가 치여 죽였습니다. 산토끼를. 그래서 산토끼가 피가 낭자해서 다 밟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토끼탕을 좋아하는 남자였습니다. 토끼탕이 약간 신맛이 나지만 무넣고 끊이면 먹을 만합니다. 그래서 지나가다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것을 깨끗이 씻어서 끊이면 한 가족이 실컷 먹을 수 있는데, 요즘 어디서 저런 토끼를 구하랴’하고, 더구나 자연산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딱 들고 이제 밖에 나와서 자매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매는 육식을 못할 뿐 아니라 동물 애호가입니다. 이 형제가 아주 깔끔한 양복을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선글라스를 끼고 언제 어디를 가든지 간에 정말 너무나 예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손에 뭘 들고 있는데 멀리서 보니까 토끼입니다. 그런데 토끼의 내장이 터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자매가 집에서 걸어 나올 때 생각하기는 이번에는 형제를 보면, 한번 극적으로 자기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슬로우 비디오로 달려가서 안기리라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막 슬로우 비디오로 뛰어가다가 보니까 피 묻은 토끼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막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것 좀 버리라고 그리고 가지 않는 것입니다. 형제를 향한 자매의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니라, 그 죽은 토끼를 들고 있는 그 사람과는 함께 포옹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버리면 문제는 간단한데.... 저는 이것이 복음적인 교리,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완벽하게 드러내주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만난 많은 비유를 가운데 가장 탁월한 비유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하는데, 우리는 우리에게 대해서만 그 일을 하는데 그것도 아주 은혜를 받으면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렇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용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담겨있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중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생애에 한두 번쯤은 아주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 그 놀라운 사랑의 경험은 어디에서 오느냐하면, 용서의 경험에서 그러니까 자신이 흠없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면서 살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에게 왜 이렇게 너그럽게 대해주시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나 하면서, 감격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만, 더 극적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졌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고, 나는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셔서, 다시 그 사랑으로 받아 주실 때 거기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버린 악한 삶과 그 것을 용서하고 자기를 받아주시는 이 놀라움 사이에 아주 놀라운 그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었던 사람들이었고, 그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림과 같은 설명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옵니다. 탕자의 비유에 보면, 주연급의 사랑이 셋 나옵니다. 아버지가 나오고 어머니는 안 나옵니다. 아버지가 나오고 그 다음에 탕자가 나옵니다. 또 누가 나옵니까? 탕자 형이 나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에게 이 탕자는 근심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집에 살고 있으면서 생각은 딴 곳에 가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산을 나눠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아주 불학무식하고 불효막심한 인간입니다. 아버지가 죽었다고 치고 유산을 달라 이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들도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유산 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유산에 대한 생각을 좀 끊으십시오. 좀 멋있게 살아 보십시오. “내가 유산을 너에게 물려줘야 되겠다.” 그러시면, “아버지, 지금 우리들이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선한일에 쓰시고 돌아가시죠? 열린교회 선교에 쓰시든지..” 그렇게 멋있게 말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런데 유산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가 나누어 줬습니다. 그런데 들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다 털어먹었습니다. 거지가 되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어떻습니까? 아버지 집에서 그런 얘기 전혀 안하고 그냥 꾸준히 성실하게 일하면서 아버지 시키는 일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이 얘기하지 않습니까? ‘아버지 시키는 대로 다 일했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기에는 형이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결국 정말 아버지의 마음에 있었던 자식은 탕자였습니다. 왜? 형은 겉으로는 자기가 아버지께 순종하며 살고 있었지만,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 끝날 때 까지도 몰랐는데, 이 탕자는 탕자가 된 경험을 통해서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형이 모르는 그 행복을 느낀 것 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그 형이 바로 율법주의자들, 율법주의적인 유대인들을 가르키는 것이고 그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온 세리와 창기들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뭐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있음직한 해석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이런 큰아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덕적으로 보면, 탕자보다 훨 낫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시킨 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모범생입니다. 그런데 그 것 뿐입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없습니다.
(찬송)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이 쓸데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왜 그렇게 사랑하실까? 그것이 너무 신비해서 너무 감격스러워서 가끔은 주님을 위해 섬기던 손을 멈추고 눈물을 흘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방식으로 사용을 하십니다. 사랑에는 사랑을 사랑이게 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가 친밀함. 그래서 사랑하면 자꾸 가까이 있고 싶고, 옆에 앉고 싶고 붙어 있고 싶고 이런 것이 사랑이라는 것 입니다. 두 번째는 psaaion, 열정입니다. 사랑하면 왠지 생일날 뭐라도 좀 사가져 가고 싶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뭘 좀 해줄까? 이런 생각이 좀 들고 생일을 만나거나 결혼 기념을 만나거나 교제를 시작한 날이 되거나 그러면 ‘잘됐다.’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passion이 식으면 '결혼기념일이 이렇게 빨리 돌아오나!' '뭐, 아마 5년에 한 번씩 돌아오든지, 어휴, 뭐 이러나!'
(예화) 어떤 사람이 결혼 2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자네 결혼 20주년인데, 부인한테 선물했나?” “그럼 했지!” “뭘 했나?” “다이아반지를 선물했지!” 친구가 깜짝 놀라면서, “자네 부인은 그렇게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지프차를 선물 받고 싶어 했잖아!” 남편이 “알지! 그런데 어디에서 가짜 지프차를 구하겠어?” 지금 무슨 소린지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옆 사람한테 자꾸 물어보지 않습니까?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열정이 식으면, passion이 식으면 그렇습니다. 세 번째는 헌신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결합되어 있어야지만 진정한 사랑입니다. 가끔 가다가 보면 자매들이 전혀 아닌 결혼, 하면 정말 안 될 것 같은 형제한테 콩커플 확 씌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에 이 이야기를 명심하고 이 세 개로 가늠을 해보십시오. 이 세 가지가 있는지? 친밀함 있다. 열정 있다. 헌신 없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럼 이제 평생 고생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들이 그렇게 고개를 그렇게 끄덕거리면 옆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삼각형 모양은 계속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각형이 날카롭게 되기도 하고, 반듯하게 되기도 하고 이쪽으로 치우치기도 하고 이러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열정과 친밀한 쪽으로 이렇게 치우치고,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들면, 오히려 반대쪽으로 치우치겠지만 그러나 이 삼각형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이 용서해 주심으로써, 불순종할 때에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복구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passion, 열정도 복구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나도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느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나에 대해서 passion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고 나를 위해 헌신하신다는 것도 느껴지고, 나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당신을 멀리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직접 주시는 그 은혜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은혜에서 멀어졌다면 한번 은혜 가운데 있을 때 매일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들을 울렸던 이유가 여러분들을 울게 했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저의 경험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마다 저를 울린 것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많이 고생했고, 힘들었고 이런 것 때문에 눈물 흘린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희생하셨구나! 나를 용서해 주셨구나!’ 이것 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 이런 용서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고 나면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떠오는 것이
(찬송)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신이 용서 받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때에 거기에서 솟아오르는 반응은 하나님께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입니다. 지고지순한 사랑, 우리에게 주시는 이 용서의 경험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화) 이번에도 올림픽에서 양궁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을 이렇게 보면서 참 대단하다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총알일 경우에는 그 정도 거리에서 큰 문제를 안 받는데 화살은 속도가 느립니다. 그래서 바람에 따라서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때 기술이 첫 번째 화살을 쏘고 그것이 맞춰진 방향을 보면서 오조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조준하기도 하지만 정 가운데를 겨냥해서 쐈더니, 바람 때문에 왼쪽으로 2cm가 밀려났다면 이번에는 과녁을 정 가운데 놓치않고, 왼쪽으로 밀려났다면 오른쪽으로 2cm를 이동해서 빗긴 데를 맞춘다는 마음으로 화살을 쏘면 날아가면서 바람을 받으면서 조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끊임없이 이러한 우리의 삶의 초점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이런 조정이 필요한데, 이 조정이 회개인데 여러분들이 회개를 이렇게 탕자의 회개같이 일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그런 회개만 생각하지 말고, 그때까지 죄를 계속 쌓아두었다가 극적으로 한번 멋있게 해보려고 그러지 말고, 우리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은 드라마가 아닙니다. 그것을 모았다가 이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몹쓸 인간으로 완전히 성장시킨 다음, 거기에서 그냥 팡하고 터져서 세기적인 회개를 하려고 하지 말고, 회개를 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것도 주님이 도와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자기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그 때에 하나님이 용서를 경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Ⅲ.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하심
A.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하시는 두 방법
1.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으로써
이런 용서를 깊이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영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복을 주시는데 첫 번째는 우리의 영혼을 깨끗게 정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죄를 가장 미워할 때,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마음이 들 때가 언제냐 하면, 방금 회개 했을 때입니다. 맞지 않습니까? 방금 회개했을 때 그때가 죄와 가장 상관이 없는 마음이 되고, 죄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감정을 품는 시간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두 번째는 잘 들으십시오. 영적으로 행하는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우리의 영혼을 사용하지 않고도 되는 일이 없겠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면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면, 뭐 사업을 해서 돈을 벌고 하는 일들은 일상적인 일이지만, 내가 어떤 사람에게 전도를 한다든지, 어떤 사람을 목양 한다든지 하는 일들은 훨씬 더 직접적으로 영적인 일이지 않습니까?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나의 영혼의 어떠한 상태가 그 일을 하는데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어서 제가 붕어빵을 구워서 판다고 칩시다. 그런데 30년을 붕어빵를 구워서 팔았는데, 30년을. 성령 충만하면 붕어빵이 맛있게 구워지고, 은혜가 떨어지면 붕어빵이 뭐 동태빵이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죠?
그런데 우리가 영혼을 돌보고 이렇게 전도를 하고 할 때에는 내가 은혜가 충만하면, 이것이 잘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놀라운 표징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렇치 못할 때에는 내가 하는 이 일을 하나님이 안 기뻐하신다는 싸인들이 나타납니다.
(예화) 76년도 회심을 하고, 미끄러졌다가 78년도 이때 쯤 돼서 이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잘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신학을 공부하기도 전이었으니까 무엇을 알았겠습니까? 그저 직장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공과책 읽고 가르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란 것이, 나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이들에게 성령을 가르치는데, 그것도 혼자 가르칠 능력이 안 되니까 공과책 잘 읽고 와서 조그마하게 노트에 적어갖고 와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하는 것이 무슨 그렇게 대단한 힘이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공과 공부할 장소가 없다고 맨날 그러는데, 거기는 진짜 요만한 예배당에 그냥 한 80여명의 학생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앉아서 여기에서 공과 가르치면 뒤에서 가르치는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고 그러는데 아이들은 떠들고 그러는데, 그렇게 제가 청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만, 아이들이 그것을 들으면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생애에 있어서 굉장히 기이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기에서 ‘내가 참 성경을 잘 가르친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정말 누가 가르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참 살아있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동네가 가난하고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냥 막 나돌아 다니면서 그러던 아이들이 와서 그렇게 공과공부를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는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 아이들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그림자가 없을 때에는, 내가 하나님 영적인 일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겨우 씨를 뿌렸는데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가 하면, 씨 뿌렸을 뿐만 아니라 고단하도록 수고하면서 헌신했는데도 마지막 가서 거두는 열매가 거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헌신의 열매가 비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순수성도 함께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약 여러분들이 오늘 하나님과의 관계에 막힘이 없이 그 충만한 하나님과의 화해, 화목 거기에서 얻는 영적인 충만한 은총을 여러분들이 힘입으면서 그 일을 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지는 여러분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관계를 누가 알겠으며, 누가 그것을 지적해서 네가 지금 오늘 하고 있는 사역이 병든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의 양심이 지금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창조해서 내가 돌보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내게서 뭔가 끌어내서 확 영향을 줄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써 주셔서 주님이 나에게 주셔서 하나님이 이렇게 해서 흘러가게 하는데, 내가 혹시 방해하고 있는 것은 없나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자가발전을 해가지고 뭐를 한번 확 쏟아 부어서 저 사람이 일평생 나한테 목회 받은 것을 자랑하게 하고 싶고, 그런 영웅적인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항상 학생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환자를 치료할 때 환자를 어떻게 하면 회복하게 할까를 첫째로 생각하지 말고, 혹시 내가 하는 이 의료 행위가 환자의 몸 안에 있는 어떤 건강을 손상을 하게 하지는 않을까? 이것부터 먼저 염려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가 여기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영혼에 풍성한 복과 은혜를 내려 주시면, 우리가 하고 있는 지금의 섬김들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더 많은 영혼들을 살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때에 우리가 섬기는 일 위에 내려주시는 복은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감동하지 못합니다. 전율이 올 정도로 하나님이 움직인 증거가 나타납니다.
2.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a. 하나님의 용서의 경륜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중간 결론을 하나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경험이 우리에게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면 대답을 잘하는데.... 그러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런 용서의 경험을 강력하게 받을 필요성이 있다는 것 입니다. 이미 받은 용서를 오히려 현실 속에서 새롭게 경험하게 하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세워 줍니다. 하나님 말씀으로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신앙에서 미끄러졌을 때 마다 기도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미끄러졌을 때 제일 먼저 머리부터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돌아올 때도 머리부터 돌아와야 되는 것처럼, 제대로 똑같이. 그러니까 먼저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으면, 먼저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서 거기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깨달을 때 우리를 하나님이 거룩하신 당신 앞에 세워 주시고, 거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한 죄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람들이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질서에서 이탈한 자신의 고립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순종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기의 마음을 고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당신이 우리를 용서해 주셨지만 그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러한 용서의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새롭지 않다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으로 죽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사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경험을 새롭게 하시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서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경험을 우리 안에 놀랍도록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용서의 경륜을 이야기할 테니까 귀담아 잘 들으시면, 내일 공과 공부가 쉬워질 것입니다. 들어 보십시오
이 용서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 두 사람, 혹은 하나님 혹은 사람 혹은 사람과 사람 이 관계와 관련된 용어입니다. 용서는 무슨 뜻이냐 하면, 관계 자체가 사랑을 나누도록 되어 있는 이 관계에서 이 사랑이 하나님 때문에 막힌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죄와 허물, 죄 때문에 막힐 수도 있고, 죄라고 까지는 이야기 할 수 없는데 허물 때문에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말 많은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말 많다는 사실 자체가 곧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설교자가 말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올라와서 그리고 빙긋이 웃고 내려갑니다. 그 때 여러분들이 막 회개를 합니다. 이 무슨 불교도 아니고... 그런데 성향자체가 말 많은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말이 아주 많습니다. 그것을 죄라고 까지 말하기는 싫은데, 나는 싫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랑의 관계가 지속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랑의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는 것이 넓게 보면, 다 죄 때문이지만 반드시 직접적으로 죄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서 이 관계가 막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모든 인간들이 함께 서로 사랑하기를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사랑하시며, 한 하나님이신 것 같이 그와 유사하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그런 사랑과 즐거움의 관계를 형성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들이 죄 때문에 혹은 여러 가지 허물 때문에 계속 막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막히게 된 것을 끊임없이 다시 재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용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최후의 가르침 중에 하나가 용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가 오늘날은 잘못 적용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가 풍부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용서하는 것이 풍부합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에서도 고발하는 것이 그것 입니다. 나, 하나님이 다 용서하셨다. 그런데 피해자들은 아직 거기 참여도 안했는데, 자기가 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세상 사람들이 뭐라 그래도 좋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는데..’ 가슴에 하나도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용서에 대한 잘못된 적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너를 많이 아프게 했으니까 나를 용서하렴. 네 용서를 받기 까지는 내 마음에 평화가 없었어!’ 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정말 용서가 무엇인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어째든 이러한 것들이 막혔을 때 이 사랑을 다시 흐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항상 하나님의 관계가 막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항상 우리가 일을 저질러서 막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용서를 빌지만 항상 이 관계를 다시 열어주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런 은혜를 입어서 끊임없이 막힌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주시는 은택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았으니, 우리도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에 그렇게 막힘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극복하는 방법이 용서입니다. 그런데 잘 안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잘 안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와의 관계, 접어도 나는 괜찮아!’ 그것이 무엇이지 아십니까? 미움입니다.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 너같이 인간하고 관계 끊어도 넉넉히 살 수 있어’ 하는 것은 이 사람 안에 있는 뭐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외형적으로 선한 행실 중 상당 부분은 사랑이 없어도 행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사랑이 없으면 죽어도 못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은, 그의 외적인 헌신적인 삶을 통해서는 정확하게 입증할 수 없습니다. 뭐냐 하면 얼마나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관계를 맺게 하신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마치 그들이 없으면 자신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자람, 그것이 바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당신과 화해하고 살아가는 것과 사람과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을 아주 밀접하게 연관을 맺으셔서 사람들 사이에 막히면 하나님과도 관계도 막히게 만들어주셔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가 막혔는데도 오늘 교회가면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씀의 은혜가 쏟아지고 그러면 계속 그렇게 사람들과 맺히면서 살아갈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는 하나님 앞에 소중한 영혼이라고 생각하고 저 사람은 신통치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소중한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막혔을 때에 당신과의 관계가 막히게 하심으로서 자기가 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영적인 침체가 아주 오래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용서하라 그러니까 ‘와서 잘못했다고 빌어야지 용서를 해주지요?’ 그러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이 용서라고 하는 것은 그런 수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표 자체가 용서가 아니라 목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용서 위에 사랑을 더하라’라고 한 것인데, 그것은 용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시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 그래, 내가 너를 용서해. 그런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그것은 복수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자원들을 부어주시고, 실질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b.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시는 섭리
그런데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보면, 이 용서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충만할 때는 이 용서가 비교적 쉽지만, 자신이 은혜에서 멀어지면 용서가 매우 어렵습니다. 용서를 명령하시는 것 자체가 무엇이냐 하면, ‘서로 사랑하며 살아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하면서 사는데 너희의 허물과 죄가 미움이 끊임없이 이 사랑의 관계를 단절시키는데, 그것은 불완전한 세상에서 너희들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끊임없이 용서해서 너희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처럼 다시 사랑의 관계를 흐르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의 진실성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그들 모두가 다 하나가 되고,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진심으로 용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려고 할 때 십자가의 희생의 크기를 알게 되고 ‘나는 차라리 저런 인간을 안보고 사는 것이 편한데, 그래도 저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랑하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게 될 때에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됩니다. 그런데 참 여기에서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기도를 그렇게 잘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악한 감정을 품고 이렇게 마음이 틀어졌을 때에는 우리의 기도의 힘도 현저하게 약해지게 됩니다. 마음에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나 다툼, 심지어는 살해하고자 마음, 심지어는 그와의 관계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품고 살아갈 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기도의 날개에 무거운 추를 매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자유로움 속에서 날아오를 때 이 기도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저히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특히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지체들끼리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으면서 마주치기 싫을 정도의 역한 감정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자기가 매일 새벽기도 나오고 말씀을 듣고 머리를 조아리고 그래도 현저하게 영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자신에게 느껴집니다. 진실성도 떨어지고. 그러면서 사실은 서서히 자신의 마음 안에서 고갈이 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종착역이 아닙니다. 최종적인 소비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라고 하는 존재는 그저 하나님의 사랑이 스쳐지나가는 간이역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많은 사랑은 흘러가라고 주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고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내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는 나도 언젠가는 누구에게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자기는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부족한 나를 용서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또 다른 사람을 위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시만 내일은 내가 사람한테 죄를 짓고 그 사람한테 용서를 받아야 될지도 모릅니다. 이러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끊임없이 영적으로 용서를 경험함으로 육적으로 물질을 나눔으로서 이 풍족함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시는 공동체입니다.
요즘 이 교인들은 너무 거칩니다. 무엇인가 착해 보이는 것이 너무 없습니다. 표독스럽고 자기 이익에 아주 밝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그리고 자기의 입맛에 딱딱 맞는 사람들 하고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그렇게 뜨겁게 교제할 때에 이것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신앙의 크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죄인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어떻게 그를 용서하고 용납하고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영원히 깨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들을 위한 치료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경건의 깊이이고 그런 말 잘 안 쓰지만 영성의 크기입니다.
B.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때
1.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의미
a. 부정적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오늘 성경에 보면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의미는 우선 이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신다. 분노하지 않으신다. 복수하신다. 그런 뜻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을 훈련시키시고 하나님과의 교통에 대한 복됨에 대해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을 위하여 교통하게 하는 이것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b. 긍정적 의미에서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증거는 다른 사람들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있다는 증거는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게 용납되어서 최소한 나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지는 않는 그런 것이 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흘러가도록 주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용서가 마치 우리의 의무나 혹은 권한인 것처럼 우리에게 부여해 주셔서 우리가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심
여러분들은 아마 이때쯤 되면 하나님에 대한 많은 경험, 다른 사람이 감히 따라오기 힘든 하나님과의 많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극적인 회심이나 신비한 체험, 그리고 온갖 시련과 환란을 극복하며 살아온 영웅적인 삶, 그것에 의해서 여러분들의 현재의 경건의 상태가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경건의 상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적인 삶의 크기는 여러분들이 얼마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혹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모두 다 깨어진 관계 밖에 가질 수 없는 사람인데도 여러분과 만났을 때에는 관계를 맺는 일이 가능해 지는 것,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경건의 크기, 영적인 생명의 크기, 하나님을 향한 보이지 않는 사랑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다른 곳에 가서는 그 성격, 그가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결함,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독특성 때문에 누구에게도 용납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관계를 맺었을 때는 그가 용납이 됩니다. 그리고 관계를 맺는 일이 가능하고,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게 될 때에, 그 사람들 보다 여러분들의 경건의 크기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크기가 큰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13장을 30번에 걸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설교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제가 죽은 후에라도 김남준 목사가 어떤 신학을 가진 어떤 사람이었냐고 알고 싶은 사람들이 아마도 그 설교를 연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그 설교의 절반도 이해를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고린도후서 13장에 담겨있는 진리의 절반도 설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사랑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돼먹은 우리들이 매일 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빛, 성령의 은혜 그리고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점점 더 성숙해 가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점점 신령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그 신령한 사람이 되어갔다는 최고의 표가 무엇이냐 하면, 사랑의 사람이 되고, 사랑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관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살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훌륭하게 여기 와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이 교회 안은 세상과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받아들여지고 있는구나! 그리고 나를 용납해 주는구나! 그리고 나를 이해해 주는구나!’ 그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빚을 지면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C. 용서받은 증거: 사람들을 용서함
그럼 여러분들에게 만약 그렇게 관계를 계속하게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고, 심지어 여러분들에게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은 사람들이 여러분 가까이 가족 중에 교회 안에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안다며, 오늘 한번 네 신앙을 달아보자’ 그리고 하나님이 가족 중에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을 두시고, 교회 와서 이상하게 구역에 들어갔는데, 도저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너의 사랑은 얼마큼 되는지 달아보자’ 사랑은 긍휼히 여기는 감정입니다. 어떤 사람을 우리들이 쉽게 하지 말아야 될 말이 무엇이냐 하면 ‘이해할 수가 없어’ 그것은 대부분 ‘나는 사랑이 부족해'입니다.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고 받아주셨던 것처럼 그렇게 용납하고 받아 주면서 살아라, 아프고 힘들겠지만 그때마다
(찬송)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취미삼아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목숨을 건 사랑입니다. 남편이 실망 시킬 때, 아내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찌를 때, 결심을 하십시오. ‘내가 너를 사랑으로 복수하리라’ ‘오! 내 남편 나한테 복수 좀 해주지’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이 이야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기도할 때 마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 잘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괜히 하면 안 됩니다. 괜히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진짜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능력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주십니다. 그리고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그 중에서 더 잘 들어 주시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병이 있기 때문이지 저 사람에게 병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할 수 없는 한계에서 우리는 치료되지 않은 우리의 마음의 질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는 사실은 자신의 마음의 질병을 치료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보면은 대개 사람들이 만나서는 가족이나 남편, 아내 그 다음에 이웃 교회의 지체들 이렇게 사람을 갈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갈구는 사람들은 그를 위해서 한 번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진지하게 몇 번 만이라도 기도하면 그를 칭찬 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양심 속에 각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지고 고민들 많이 하는데 기도는 절대 안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직 섭리 속에서 찢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찢어지고 다음에 만나는 사람이 더 독한 사람 만날지 어떻게 압니까? 어는 구역장이 하도 힘들어가지고 불평 불평 했더니 새로운 구역을 짜줬는데 가보니까 옛날 구역 생각이 계속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깊이 회개하고...
Ⅳ. 결론: 용서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한 시간 정도 더 설교하고 싶지만, 그만하고 마치겠습니다.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이 요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깊이 기도하고 마음의 그림자가 없이 열심히 사랑하여 주님이 주신 아름다운 성도의 연합을 이루는 사람들, 가정의 연합을 이루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용서를 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 4:32)
녹취자: 박지성
I. 본문해설
에베소서는 신약성경 중 가장 우주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는 1장에서부터 4장 까지 장대한 교리를 다루고 5장부터 6장 사이에서 4장부터 시작되지만 4장부터 5장, 6장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1장부터 3장까지 제시된 인간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한 비밀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먼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바울이 갑자기 주는 권면이 아니라 이미 에베소서 1장에서부터 3장, 나아가서는 1장에서부터 4장 바로 앞에까지 주어진 유장한 기독교의 교리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이 본문을 해설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에베소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인간 창조의 우주적인 계획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는 것이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II. 만물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경륜
그것은 바로 만물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에베소서 1장 9, 10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무엇이 비밀을 알리는 것이고 무엇이 예정한 것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미 예정된 것이고, 때가 찬 경륜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들을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세계와 만물을 통일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A.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심
1. 만물을 하나로 창조하심
그것은 바로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을 하나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라고 하는 것은 어떤 물건이 단일하게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만물들이 서로 서로가 아무관계가 없는 동떨어진 피조물이 아니라 관계와 의미를 가지고 모든 것들이 상호 연관을 맺고 있는 그러한 하나의 통일체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통일체적인 연관은 자연의 모든 세계에서도 나타나있습니다. 우주의 질서정연한 공간의 배치 그리고 거기에 있는 수많은 별들. 오늘 오전에 강의를 들은 것처럼 자연세계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그 지적인 설계와 균형, 조화 그리고 질서 이런 것들은 아주 탁월하게 이루어져있습니다. 막연하게 그냥 아름다운 디자인의 질서일 뿐만 아니라 힘들이 움직이는 역학적인 질서 그리고 모든 생명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는 아주 아름다운 질서들을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서로 서로 연관을 지으며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연적인 하나 됨은 사실은 영적인 하나 됨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하나 됨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그 인간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주시지 않은 탁월한 영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으로 말미암아서 사람들은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제일 먼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무한한 존재의 격차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은 하나님과 어떤 면에서도 하나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존재에 있어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지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 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형상을 부여해서 당신과 함께 교제하게 하시고 지성으로써 당신을 알고 의지로써 당신을 따를 수 있고, 모든 사람과 자연의 세계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고 결정하고 사랑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을 마치 하나님을 닮은 것처럼 그렇게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교제하심으로 존재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또 다른 교제의 의미에서 인간과 하나님을 하나 되게끔 하시기 위한 사랑의 교제를 위해서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인간들이 위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과 하나 되고 그 인간들이 수평적으로 모든 인간들을 알고 사랑하기를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사랑하시는 것과 유사하게 서로를 알고 사랑함으로써 그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연결을 이루면서 마음과 뜻을 합치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서로 합치하고 그래서 “너는 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아내와 남편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그리고 이웃과 이웃 사이에 고백하게 하여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그 뜻들을 성취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세계는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워낙 탁월하고 초월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와 비교될 수 있는 어떠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 말이 맞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차피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어떤 식이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자라고 하신 그 말씀도 사실은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사이의 아름다운 이 교통, 사랑의 완전한 이 교통을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동일한 종류의 그러한 관계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하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모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한 바와 같이 이 모든 세계는 결국은 하나님 자신의 관념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그리는 생각들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사실 넒은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모상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상들도 층차를 형성하고 있는데 영혼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고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는 이것이야말로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가장 탁월하게 본뜬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이 인간과 함께 영적으로 교통하시고 창조하신 모든 사물들이 서로 자연적인 교통을 이루게 하시며 인간들이 그것들을 통치하고 다스림에 있어서 모든 일치를 이루게 하셔서 아주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천상에는 천상의 세계, 지상에는 지상의 세계가 있고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는 모순과 갈등을 일으키는 세계가 아니라 이 천상세계의 모형이 지상세계 속에 나타나는 아주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창조된 세계를 바라보시며 당신 자신 안에 있는 관념들이 이 세상 속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창조된 것을 보시면서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결들과 하나 됨이 죄로 말미암아 깨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때 자연의 모든 사물들이 그 죄에 동참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자연의 모든 사물들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 모든 세계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심으로 모든 자연의 세계가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고 하는 하나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그러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모두 부서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함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분쟁하고 살인하는 그러한 사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다툼과 미움,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전적으로 죄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자연 세계의 모든 연결들이 파괴되어버린 이 불행한 환경의 파괴도 결국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파괴될 가능성이 제시되었고 그런 가능성들을 인간이 더욱 더 자원을 낭비하고 소비하면서 이 자연의 세계는 더 심층적으로 파괴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원래 이 세계를 지으신 목적, 의도와는 정 반대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만물들이 다시 하나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 망가진 것부터 차례대로 고쳐 이 모든 것들을 치료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함으로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졌고 이 세상의 모든 자연들을 올바로 선의로 대하는 선량한 관리자의 본분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연의 세계도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치료하실 때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십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치료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급기야 인간과 자연 사이에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심으로써 마지막으로 이 모든 구원을 완성하셔서 다시 인간들이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고 인간 사이에 모든 사람들이 온전한 사랑으로 서로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고 자연의 모든 세계까지 올바른 용도로 사용하여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세계가 되게 하는데 이바지하도록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B. 만물의 하나 됨의 핵심
이 모든 만물의 하나 됨의 핵심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하나 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어서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 된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있는 피조물과 조물주의 절대적인 구분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사랑을 받는 그런 의미에서의 사랑의 연합과 일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그렇게 부어지는 충만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 교통하고 그들에게 받은 것들을 나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이런 사랑의 일치가 두 번째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우리 안에서 자가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짐으로써 우리가 그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계적인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그 뜻을 우리들이 물려받게 하셔서 하나님이 하시는 그 사랑에 우리가 참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나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고 다른 사람의 사랑의 덕을 입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이런 것들을 이 사람들 사이에 온전한 하나 됨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이 관계 속에서 모든 만물들을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선량한 관리자의 본분을 가지고 이 세계를 잘 사용하고 돌보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자기를 지으신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삶을 살아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과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고 사람들 사이에 사랑의 삶을 누리는 덕을 보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계획이 아직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에 망가진, 다 깨어진, 이 찢어짐을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이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의 과도기적인 조치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종교적인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다 망가진 것을 그 완성된 아름다운 세계로 만드시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있고 마지막에 이루어질 완성이 이미 침투해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이 세상의 나라이기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미 침투해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바로 하나님이 이 땅을 고치고 치료하시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구속하고 완성하시려고 하는 이 세계의 시련이 빨리 도래할 수도 있고 늦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이 마지막 때에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상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어떻게 아름답게 치료할 것인가 하는 것을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실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볼 수가 있고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볼 때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잘 이해할 수 있고 교회를 통해서 성령을 볼 때 그 성령이 정말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고 싶어 하셨던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아름다운 이 상호작용으로써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의해 파괴된 이 세계를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으로 완성하시는가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교회에 대한 생각이 올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그 위에 여러분들이 많은 신앙생활의 경험과 지식을 쌓아도 항상 신앙생활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청년수련회 때에도 이야기했는데 한번 설교하고 지나가면 그것을 다시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교인이 되었다고 하면 이번에 이 시리즈는 물론이거니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성도의 공동생활,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같은 시리즈들을 깊이 숙독해서 이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배우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III. 교회와 하나 되게 하시는 경륜
그래서 이 교회를 통해서 이제 저 멀리 완전히 이 세계를 완성하실 때 이루어질 하나님과 아주 아름다운 사랑의 연합을 이루고 사람들과 모두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고 자연과 물질의 모든 세계를 선량한 관리자로서 대하는 덕스러운 삶을 미리 맛보게 하신 곳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로 제도와 형식도 물론 있지만 단지 제도와 형식으로만 통일된 교회가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 된 교회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커다란 임무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아름다운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을 이루고 사람들이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여 교회 안에서 지체들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고 그 고백이 교회를 흘러넘쳐서 이 세상 바깥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까지도 그렇게 하게끔 만들고 그리고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삶으로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자연의 세계들을 선량한 관리자로서 대함으로 쓸데없이 더 많이 파괴하지 말고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망가지지 않도록 잘 보존하고 이 자연의 세계 속에 하나님이 깃들게 하신 창조의 아름다움에 잠재적인 성격들을 발현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세 가지 중요한 사명이고 이 사명은 마지막 날에 모든 인간들이 하여야할 사명인데 아직까지 인간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안 삽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힘이 없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구원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교회의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춰주셔서 이 세 가지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 윤리는 세상의 윤리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윤리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윤리와는 달라야하고 당연히 이 세상의 윤리를 뛰어넘는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 윤리를 가진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여기 모여 있을 때에만 교회가 아니라 흩어져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에도 영적으로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이렇게 이 세상 속에 흘러들어가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 가지고는 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면 자기네들의 집단에서는 이미 버린 사람이고 짓밟은 사람인데 그 사람을 용납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쓸모없는 그 사람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는 없는데 그렇게 사랑합니다. 도대체 그 사랑의 자원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우리가 할 수 없는 저런 사랑의 삶을 살아가게 만들까? 그것을 궁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놀라운 힘이 복음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우리에게 역사하신 것처럼 그들 안에 역사할 때 그들의 눈의 비늘이 벗겨지고 “메타노에오”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사랑의 모상은 결국은 하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당신의 하나님이 삼위일체 안에서 하시는 가장 탁월한 일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실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에게 닮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모든 인류보다도 더 뛰어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모상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됐느냐에 따라서 이 교회는 하나님을 잘 보여주는 사랑의 모상이 되기도 하고 혹은 전혀 그렇지 않은 교회가 되기도 합니다.
(예화) 여러분, 전도하다가 사람들이 쉽게 예수를 믿지 않지만 믿을 마음이 별로 없고 혹은 믿으려고 하는데 자꾸 의심이 생겨서 잘 안 믿어지고 이러는 사람 말고 가끔 전도해보면 안 믿겠다고 말뚝을 박듯이 뜻을 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꺾어지지 않겠노라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이 실망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이 실망한 사람들은 믿으려하는데 안 믿어지거나 관심이 적은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 많습니다. 그러나 결심을 했습니다. 안 믿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이 진리냐 아니냐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안 믿겠다고 뜻을 세운 것입니다.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누구냐면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복음전파를 가로막는 최대의 적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인간은 그러면 이런 하나님의 위대한 우주적인 계획 속에서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이여야 하는가? 이것을 우리들이 생각을 해야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제대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인간이 정말 그렇게 하나님과 아름다운 사랑의 연합을 누리고 이 세상에 자기를 지으신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두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인간은 끊임없이 거룩한 천상의 가치를 향하여 정화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정화입니다. purification.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기 때문에 교만하고 욕망을 갖고 사치하고 방탕하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은 아주 탁월한 것이지만 이 형상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는 모든 인간이 아닌 피조물보다도 아주 뛰어난 영광스러운 삶을 살지만 이게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되지 못할 때에는 나쁘게 얘기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닮았더라면 그렇게 안 불행해지는데 하나님을 닮아서 불행합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가끔 얘기했습니다. 개는 무슨 짓을 해도 개만 못할 수가 없습니다. 개를 보고 우리가 너는 개도 아니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 형상을 주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진리의 빛 안에서 살아가지 못할 때 그때 인간은 개만도 못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개가 훨씬 나을 때가 많습니다.
(예화) 개를 아껴서 유산까지 물려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개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니 그 대답이 참 충격이었습니다. 개는 최소한 배반은 안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배신을 많이 당했으면 그러겠습니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인간이 자기 분수도 모르고 교만해서 날뜁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받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잘못 본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또 사람들을 처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수하거나 아니면 살해하거나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 인간은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자기가 하나님을 한번 흉내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거해버립니다. 방탕이 무엇입니까? 내 생긴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막 살아보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해 볼 욕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뿐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살면 안 되지만 자기도 한번 하나님처럼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사치가 무엇입니까? 돈도 없는 것이 분수에 넘치도록 낭비하며 사는 것이 사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는데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모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셔서 인간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소비하시는 하나님을 한번쯤 본받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원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맘껏 못합니다. 좀 하다가 쫄딱 망해가지고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삽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정결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죄를 버리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 잘 드리고 은혜를 받아야하고 정성껏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고 공부해야합니다. 공과예습을 안 해온 사람이 많다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좋은 학생이 아닌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웃는데 좋은 학생을 말할 때 학생이라는 것은 책 놓고 글씨 쓰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잘 배우려는 태도입니다. 그런 좋은 학생이 되지 않고는 좋은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 배우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간절히 기도하고 마치 이 세상에서 살면서도 가끔은 난 이 세상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처럼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고 하면서 잠시 이 세상에서 자기의 마음을 떼어놓아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기도하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향하여 문을 닫고 고요히 성경을 펴고 그 진리를 묵상해야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영혼을 정화해야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깨끗하게 순결하게 되면서 우리들이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수련회에 이렇게 와서 세상 다 끊고 3일 밖에 안 되지만 말씀의 은혜를 정말 많이 받고 나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들을 매일매일 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극단화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어느 교회의 집회에 갔더니 교회가 분란이 일어나서 생난리가 났습니다. 교회가 찢어지고 교인들이 나가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 새로 목사님이 오셨는데 기이한 목사님이셨습니다. 하루에 9시간을 기도하신답니다. 언제 기도하시냐했더니 아침에 나와서 퇴근시간까지 기도하신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침 먹고 나와서 기도하다가 점심 잠깐 먹고 와서 계속 기도하고 끝나고 집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우리의 삶이 극단에 치우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또 하나의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있는데 인간이 참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부합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세상이 되게 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해서 있는 이 세상에다 무엇인가 자신의 창조적인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게 하는데 이바지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고 은혜를 받았는데 그게 정말 하나님이 주신 올바른 은혜면 그 힘을 가지고 이 세상을 자꾸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야 합니다. 무시무시하게 특수부대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쟁이 났는데 적진에 침투를 안 하려고 하고 자기들끼리만 모여 있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훈련은 받아서 무엇을 하겠습니다. 침투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과 보람이 되어야합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정결한 영혼이 되어가는 자기 정화, 거룩한 삶, 거룩한 경건, 그리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을 힘입어 이 현실 세계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런 일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면서 사람의 모든 영역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거기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이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없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IV. 사랑: 오래참음, 긍휼, 자비
여러분들은 교리반에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배우셨을 것입니다. 사랑은 세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래 참음과 긍휼, 자비입니다. 오래 참음, 긍휼, 자비 이 모든 것들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둘 이상의 당사자가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사랑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자하는 대상과 관계를 맺고 그를 즐거워하고자하는 경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덕과 기술은 다릅니다. 기술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사물들을 잘 사용해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기술입니다. 그런데 덕은 나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 그 탁월한 사람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데서 찾아야합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번영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부요함은 우리 육신의 많은 고통을 덜어 줄 수도 있고 또 육신으로부터 오는 많은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서 인간이 충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이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이치를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도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니까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사람들을 서로 불쌍히 여기고 살아가는 이것들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관계의 성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친밀함과 정념, 헌신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면 가까이 있고 싶고 일체의 거리감이 없게 되는 것을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마음에 접어두고 있는 것들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친밀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나누지 않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들도 나눕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알고 있고 내가 그를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친밀함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이 속에서 끓어올라 그를 사랑하는 감정과 열정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헌신의 요소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할 때 콩깍지가 씌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사랑처럼 느껴집니다. 그때에는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재보면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정념만 있고 헌신이 없다. 친밀함은 있는데 정념이 없다. 그리고 헌신도 없다. 이것은 가짜 사랑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결국은 사랑은 관계를 세우고 관계를 강화하기위해서 그렇게 좋은 관계를 갖는 데에 방해가 되는 어려움들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서 올수도 있고 상대방에게서 올수도 있고 둘 아닌 다른 것에서도 올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잘 견디고 끝까지 그 관계를 유지하려고하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그리고 긍휼이고 자비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런 것을 무제한하게 계속하면서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또 자기중심적인 죄성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랑한다고 그렇게 불 때던 사람들이 먼저 마음이 변해서 관계를 끊고 파탄으로 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불완전한 존재이고 자기도 알 수 없는 내면에 끊임없는 모순율들이 생겨나서 사랑하고 있을 때에는 저 사람의 좋은 점들이 보이지만 사랑이 식고나면 나쁜 점들이 계속 보여서 좋은 점들을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하심으로 이런 사랑의 나라를 완성해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중생을 통해서 자기의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시고 끊임없이 은혜를 주심으로써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그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만이 아니라 당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이 교회의 이상을 실현함에 있어서 신자들이 참여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진리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은혜를 받음으로 그들도 날마다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또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실천하여 자기가 받은 은혜의 가치를 깨닫게 하시고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수시로 자기에게는 그런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없고 하나님만이 자기를 그런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도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는 하나님 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그런 사랑을 했다고 말할 수 없도록 그렇게 당신의 은혜를 의지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놓으신 위대한 경륜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고 교회를 통해서 마지막에 완성하고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저마다의 사랑이 아니라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중심점을 둔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 여러분들은 분명히 자기의 죄를 회개하게 될 것이고 자기가 하나님의 이 진리로부터 멀리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돌아가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돌아가게 될 때에 여러분들은 그 돌아가는 곳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곳이며 그 돌아가는 그곳에서 여러분들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에 두 가지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끊임없는 진리의 찬란한 빛을 비추시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끊임없이 주시도록. 이 두 가지가 없이는 누구도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예화) 물레방아는 어느 나라에나 다 있는 것인데 로마시대 같은 때에는 이 물레방아가 거대한 공업단지를 형성했습니다. 이 물레방아가 계단식으로 되어있어서 물레방아가 돌아가면서 이 돌아가는 회전 운동을 직선운동과 수평회전 운동으로 바꾸어서 어마어마한 양의 밀가루를 집어넣으면 이 물레방아 때문에 찧어지기도 하고 맷돌이 돌아가면서 갈아지기도 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돌리려면 물이 있어야합니다. 물길을 정성껏 만들어서 항상 물이 공급되도록 해서 그 방아를 돌리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군은 제일먼저 이 물길을 막아버립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전기를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고 알고 이해하고 하는 받은바 훈련하는 모든 것들은 물레방아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는 물레방아를 돌리도록 흘러오는 물입니다. 그것이 끊어져버리면 아무리 훌륭한 방앗간 시설을 가지고 있어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교회에 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다른 것들은 우리가 가서 구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주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위로부터 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린아이처럼 가난하게 하나님께 우리에게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놓으신 거룩한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짓는 죄는 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대해서 짓는 죄보다도 훨씬 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되 믿음의 성도들에게는 더욱 그리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V. “친절하게 하며 긍휼히 여김”
이런 전망을 가지고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긍휼히 여기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를 하려고합니다. 첫째는 “서로 친절하게 한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희랍어 성경에 “에이스 알렐루스 크레스토이”라고 나옵니다. “에이스 알렐루스”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알렐루스”가 다른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혹은 “서로”라는 뜻입니다. “에이스”는 무엇인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깊이 마음으로 깊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는 그런 의미에서 친절한 자가 되라는 그런 뜻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친절하게 되며”는 수동태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뭘 보여 주냐면 친절이라는 것이 불쑥 불쑥 행하는 행위라기보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변화되고 마음이 움직여서 그 결과로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친절하게 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친절이 그의 악한본성을 변화시키시고 은혜와 사랑으로 감화시키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돈독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재미있는 단어가 “크레스토이”라는 단어입니다. “친절하게 하며”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고린도 전서 13장 4절에서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할 때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 단어의 정확한 뜻은 “쓸모 있음”, “이용할 수 있음”, “봉사할 수 있음”입니다. 우리는 가끔 화장실에 갑니다. 급해서 막 들어갔는데 소변기마다 전부다 ‘사용불가’, ‘고장 났음’, ‘사용할 수 없음’이라고 되어있다면 굉장히 힘듭니다. 화장실이 딱 하나 있는데 변기가 ‘고장 났음’, ‘사용할 수 없음’이라고 붙어있다면 다른 데로 뛰어가야 합니다.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나의 유익을 위해서 그것들을 언제든지 내 것처럼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좀 나쁘게 번역을 하면 “이용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용당한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이 그렇습니까?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가까이 친근히 대해주고 무엇인가 도와주겠다는 귀인들이 많이 나타나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인복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뭐냐면 신세지겠다는 사람들이 많을 때, 도와달라는 사람들이 많을 때, 귀찮게 와서 치대고 개개는 사람들이 많을 때, 오지랖 넓어지지 않으면 도저히 관리가 안 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을 때, 그런 사람들이 성경적인 관점에서 복된 사람들입니다.
(예화) 개를 길러보면 개가 얼마나 영리한지 식구들한테 막 와서 반갑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두 번만 발로 차면 대문을 두드려도 나오지도 않습니다. 왕왕 짖습니다. 그런데 귀여워해주면 이게 좋아서 하루 종일 마루밑구멍에 엎드려 있다가 주인이 나타나면 좋아서 길길이 뛰면서 기어 올라옵니다. 개도 서너 번 발로 차면 문을 두드려도 주인도 손님처럼 짖고 쳐다보지도 않는데 사람은 개보다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 어떤 사람을 보기 싫으면 두세 번만 정색을 하고 까칠하게 대해보십시오. 그러면 문자도 안 옵니다. 오겠습니까? 뭐 그 사람이 자기 목숨 붙들고 있는 것도 아닌데 누가 하겠습니까?
누군가 여러분들에게 와서 속된 말을 써서 그렇지만 개갠다고 하지 않습니까? 경우 없이 막 비비면서 신세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뭘 보여 주냐면 여러분들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습게 본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지만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친절함입니다. 친절한 사람은 결국 온유한 사람이고 온유한 사람은 남의 유익에 기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혹은 사랑해야할 가족들이 상처를 입는 것은 치열한 자기이익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가정이 찢어지고 교회에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친절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렇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에게 친절히 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친절하다면 그것은 거래를 위한 친절이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음 때문에 친절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이 친절은 사람들에게 아주 즐겁게 이용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가지고 있는 많은 허물들을 내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허물들로 말미암아 내가 적잖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이 시점에서 끌어안고 내 마음으로 녹이고 그가 나를 충분히 이용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도록 이렇게 그를 돕는다면 그의 허물은 나에게서 딱 멈춥니다. 여기에서 내가 충돌을 일으키고 치열한 이익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또 다른 사람에게 튀게 됩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가서 이야기합니다. ‘그 인간 상종하지마라. 내가 너한테만 이야기하는데….’하면서 무수한 사람에게 너한테만 얘기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결국 이 사람과의 관계가 깨져서 온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씹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그것들이 돌아올 때에 그 사람은 거기에 존속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비방하지 말라, 비난하지 말라, 남의 허물을 지적하지 말라, 사랑은 허물을 덮는다.”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친절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하는 그런 식의 태도, 그런 정도의 인격을 가지고 만약에 직장에서 그렇게 했다면 벌써 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나라이지 않습니까?
여기는 그런 세상나라와는 다른 사랑의 윤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등대처럼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어떤 일들이 이 안에서 일어나야하고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받아보지 못한 어떤 대우를 교회에서 그것을 받아 볼 수 있어야합니다. 그는 오늘 자기가 남이 자기를 그렇게 용납해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얼마나 많이 은혜를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고 참고 인내하고 긍휼히 여기는지 모를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몰랐던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위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사랑을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기꺼이 그것을 하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울 때마나 사도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종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시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버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전 목사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솔직히 얘기하는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솔직히 ‘다른 교회에 나가지 왜 우리교회에 있나’라고 까지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정말 힘들다. 그리고 마주치지 않았으면….’합니다.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친다는 목사도 그런 마음이 들고 더군다나 교인이 교회에서야 그런 일이 없지만 옛날에 학교 다닐 때 보면 이상하게 일이 꼬여서 나에 대해서 비난을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오해로 그러기도하고 실제로 내가 잘못해서 그러기도하고 또 그 사람이 나를 시기해서 그러기도하고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경우에는 그런 마음이 더 많이 듭니다. 어느 인간이든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여러분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그리고 교회는 원래 망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혼자서는 죽어도 이 세상에서 못살 사람들이 포기하고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 대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이 세상에서 망가진 그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되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옛날모습이 그대로 나옵니다. 여러분들 은혜 떨어지면 여러분이 회심하기 전에 누구였는지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은혜 떨어져서 돈에 인색해지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회심하기 전에 구두쇠였다고 알게 되고 성깔부리는 사람들은 은혜받기 전에는 정말 꼬챙이 같은 사람이어서 가족들 깨나 눈물나오게 했겠구나하고 다 보이는 것입니다. 들키지 마십시오. 계속 은혜 안에 계셔서 들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화) 우리는 늘 그렇게 말합니다. ‘그 인간이 나를 그렇게 뒤집어 놓지 않았어도 그러지 않았을 거야’ 여러분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지금은 돈을 주면 음식물 쓰레기를 다 걷어갑니다. 옛날에는 커다란 새우젓 독 같은 것을 놓고 거기에 뜨물을 넣습니다. 그러면 돼지를 치는 사람들이 와서 다 퍼갑니다. 여기에 온갖 뜨물을 집어넣으면 저녁때 와서 걷어가니까 뜨물찌꺼기가 쫙 가라앉습니다. 위에는 마치 청주처럼 제법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맑은 물이 뜹니다. 그런데 뜨물을 가져가는 사람은 이것만 떠가지고 가면 밑에 있는 건더기가 돼서 못 가져가니까 항상 커다란 작대기를 가지고 다닙니다. 작대기로 새우젓 독을 흔들면 밑에서 말하기 싫은 별난 것들이 다 올라옵니다. 막대기가 죄입니까? 뜨물이 죄입니까? 이 세상은 어차피 수 없는 막대기들이 우리들을 휘젓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막대기 노릇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막대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치 뜨물을 다 가라앉힌 다음에 맑은 청주처럼 약주처럼 떴을 때 ‘나도 이 정도면….’하고 그렇게 생각될 때 네 주제를 파악하라고 막대기를 집어넣고 한번 확 돌리시는 것입니다. 생선뼈다귀부터 시작해서 닭 내장까지 온갖 것들이 다 올라옵니다. 그 맑은 약주 같은 상태가 여러분의 상태가 아닙니다. 네가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을 알아라하고 막대기를 확 휘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너무 개념이 없는 지체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건성거리고 생각 없이 그냥 교회생활을 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인데 가끔 기어가서 남의 다리를 물고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이 교회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무엇인가 부족하고 모자라는 지체들을 만났을 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친절히 여겨야합니다. ‘아! 저렇게 망가지고 모자란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저 사람을 용납하고 저 사람에게 내가 이용가치가 있게 하기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은 굉장히 힘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공급받으면서 은혜로서 이것들을 이기며 나아가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친절히 하며”라는 뜻입니다. 친절히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친절한 사람들은 항상 옆에 사람들이 많습니다. 친절한 사람들은 차를 마시러 열린공간에 앉아 있으면 여기서 하나 저기서 하나 와서 같이 앉고 싶어 합니다. 식당에 조용히 가서 밥을 먹으려고 국그릇을 들고 저 구석에 가서 앉아 있어도 “집사님 안녕하셨어요? 오래간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아이는 입학했다더니 학교에 잘 적응하나요?”하고 숟가락, 젓가락을 들고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가도 무엇을 해도 항상 혼자입니다. 뭔가 이렇게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사용할 수 없음’을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굉장히 많은 성도들이 사용할 수 없음을 붙이고 다닙니다. 그게 얼마나 나쁩니까?
(예화) 아주 오래전 한 6,7년 전의 일입니다. 행정실을 지나가는데 행정실 앞에 “성도들에게 알림. 칼, 가위, 지우개, 볼펜 이런 것 빌려달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가 하도 기가 막혀서 그것을 떼고 얘기했습니다. “너희들은 어쩜 그렇게 친절이 없느냐. 똑같은 말인데 이렇게 써 붙이면 어떠니? 성도님께 알림. 호치키스, 볼펜, 풀 이런 것들은 저 앞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편하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바빠 죽겠는데 자꾸 풀을 달라 가위를 달라하니 죽을 맛일 것입니다. 그럼 그런 것들을 테이블위에 올려놓고 “여기에 비치되어있습니다. 혹시 모자란 것은 말씀해 주시면 비치해 놓겠습니다.” 이 둘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당신들이 알아서하라는 똑같은 얘기입니다. 그러나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친절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립니다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참 잘 깨달은 사람 많고 오늘 공과 같은 것도 가져다 놓으면 아빠다리 탁하고 성도들 모아놓고 가르치는 것 보면 선생으로서의 포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얼굴에는 사용하지 마시오가 너무 많습니다. “사용할 수 없음.” 뒤에는 “요즘 은혜 떨어졌음.” 은혜 떨어진 인간은 사용불가입니다. 망가진 변기와 같습니다. 그럼 빨리 고쳐야지 않습니까? 그렇게 몇 년째 그것을 사용불가하고 다니면 어쩝니까?
이것은 뭐가 잘못 된 것이냐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창조하고 구속하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창조적인 행위로써 사람들을 섬겨 이 세상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돌려놓는 그 일을 위해서 헌신을 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필요한 자리에서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전도하러 가십시오. 병원 전도하십시오.”그러면 “제가 요새 은혜가 떨어져서요.”합니다. 그러니까 가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여기서는 은혜가 떨어졌다고 말하지만 병원전도를 나가보면 당신의 은혜가 바닥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시면 “제가 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거기서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지 만날 텔레비전이나 보고 앉아있고 노닥거리며 드라마나 보면서 밤에 잘 때 능력 달라고 기도합니다. 능력 주면 어디다가 쓸 것입니까? 어차피 사용불가인데. 안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의 그 큰 사랑 때문에 구원을 받았을 때 자기 자신 안에서 행복을 찾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입니다.
(예화)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젠가 소말리아의 해적들에게 납치됐다가 기가 막힌 특공작전으로 전 세계가 깜짝 놀란 일이 있지 않습니까? 전쟁하는 것까지도 중계방송을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출했는데 소령 한 사람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소령에게 아프지 않느냐.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부분을 신문에서 보면서 저는 눈물이 났습니다. 그 소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군인이 된 순간 저의 생명은 조국의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렇게 따지면 우리도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로 입대한 사람들인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사람하고 어떻게 사세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구역식구들 데리고 참고 견디는 것 힘드시죠? 그렇게 까칠하고 포악한 사람들을 용납하면서 복음을 전하시는 것 너무 힘들죠?”하고 사람들이 물을 때 “아니에요.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그 순간 저는 이미 예수님의 것이 되었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찬송)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친절하게 대해야합니다.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친절에 한계를 긋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 저 인간은 반응이 없다. 그것은 거래적인 친절입니다. 우리의 친절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으로 지체들을 대하고 영혼들을 돌봤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빛 가운데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긍휼히 여기며”라고 했습니다. 똑같이 “에이스 알렐루스 유스프랑크노이” 라고 나옵니다. 이것도 역시 수동태입니다. 그래서 뭔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한 사람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긍휼이 결국은 우리를 바꿔 놓으시고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보여주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긍휼히 여기며”라고 되어있는 단어가 “유스프랑크노이”라는 단어인데 “유+스프랑크노이”입니다. “유”는 희랍어로 “좋다”는 뜻입니다. “프랑크노이”는 열린교회가 세워지게 된 성경본문 마태복은 9장 35절의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창자에 이르기까지 떨리고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말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이 좋은 방면으로 그렇게 되어야합니다. 무엇인가 상처받고 고통 받고 심지어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도록 망가진 영혼을 가진 사람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질 듯 긍휼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목자 없는 양떼를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하는데 만약에 인간이 그럴 수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필요했겠습니까? 긍휼은 비참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불쌍히 여기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어제 긍휼에 대해서 인간의 긍휼과 하나님의 긍휼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받는 모든 고통 중에서 부당한 고통은 없습니다. 전부 다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마땅한 결과를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서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 적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불쌍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그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을 많이 비난하지만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서 한 가지 깊이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기중심성입니다. 좋은 의미에서 배운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중히 여김을 받고 싶어 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들어갔고 사상이 바뀌고 그가 하나님을 추구함으로 영혼이 깨끗해지게 되면 그렇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 경지에까지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은혜를 먼저 받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용납해서 그들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어서 그들의 영혼들을 북돋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뭐에요. 목사님은 수련회 안온 사람들 보고는 그렇게 하라고 안 그러고 왜 비싼 회비내고 여기 와서 고생하고 불편한데, 우리들을 보고만 자꾸 이렇게 희생하라고 이용당하라고 그러고 긍휼히 여기라고 그럽니까?” 그러나 그래야합니다. 왜냐면 여러분들이 은혜를 더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VI. 결론: 자신을 다 주신 사랑
교회에서 정말 유리한 사람은 막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충분히 대접받습니다. 어디에서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절바르게 대해줍니다. 그러나 진짜 죄인인 사람은 누구냐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용당해야하고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그를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 하나님 이외에 어디계시겠습니까?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충만히 받은 증거, 한 사람이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고 성화된 가장 탁월한 증거는 바로 이렇게 자기를 끊임없이 희생하여 남에게 이용당하고 남을 세우고 그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가 자기를 이용하여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가도록 기다려주고 자기를 포기하고 그 사람의 진정한 행복아래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에게는 이용당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신 하나님은 그 사람이 당신의 은혜를 이용하도록 당신의 창고를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용당하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다른 사람들이 시기가 날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찬송)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말 자녀들을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들은 자식들이 자기들의 희생을 통해서 아주 아름답게 살아가면 자기가 늙은 것을 거울을 보면서도 실망하지 않고 힘이 없고 죽을 날이 가까운 것을 보면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니까 자녀들의 행복과 영광 속에서 자신이 기쁘고 보람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를 향해서 늘 하는 그 일이 사실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요.” 교회의 지체들에게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는 한이 없어서 나의 어떤 것도 부당하거나 지나친 희생일 수가 없고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이런 삶을 여러분들이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4.용서로 하나 되게 하심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3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1장부터 3장까지 해서 유장한 기독교의 교리를 설파하였습니다. 4장부터는 구체적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우주적인 계획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구속 역사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4장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무엇이고,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서 어떻게 살고 봉사해야 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II. 하나되게 하신 교회
제일 먼저 이 4장에서는 하나 되게 하신 교회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하나의 몸이라고 말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자기 혼자 동떨어진 삶을 살았고, 하나님과의 교통도 끊어지고, 사람들과의 온전한 교통도 이루지 못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됩니다. 그 몸은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몸이니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교회에 충만하게 되고, 한 몸이 됨으로 그는 그 몸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로 창조하신 세계는 인간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찢어지고 불완전한 세계를 생명과 사랑으로 통합된 하나의 새 하늘, 새 땅을 만들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창조되는 완전한 이 재창조의 세계는 바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충만한 세계입니다. 이때에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이 모든 피조 세계의 자연에 맺혔던 하나님의 저주가 풀려집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는 완전한 화목이 이루어져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나누며 사랑의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구속의 사건을 통하여 만들고자 하시는 이 세상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에베소서 1, 2, 3장에서 계속 언급된 위대한 하나님의 이 우주적인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선구자적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아직 땅에 속해있으나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위대한 왕국에서의 축복을 미리 앞당겨 맛보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한 본보기인 것입니다. 바로 성도는 이 하나인 몸의 한 지체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것과 그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구현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운명입니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여러분들은 한 몸인 그리스도의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이 모든 교회의 지체들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성도의 소명은 바로 이렇게 하나 되게 하신 그것을, 원리적으로 영적으로 하나 되게 하신 그것을 그의 온 삶과 인격 안에서 구현하고, 교회 안에서 그것을 성취하고, 교회의 담장을 넘어 이 세상을 향해 흘러들어가 그들도 변화시켜 이 하나의 몸을 더하여 가는 것이 이것이 바로 성도의 가장 중요한 본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의 사람됨은 교회됨 안에서 구현해 가는 것이고,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담지한 사람으로서만 참 사람답게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 세상을 향하여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에도 가장 훌륭한 일이고, 이 세상을 향해서도 가장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로 이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도 한분이시니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도다”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해서 우리들이 죄 용서를 받고 다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지만 이 화해를 통해서 이루게 된 하나님의 실제적인 생명과 이 사랑은 성령의 교통을 통하여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그는 지극히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를 믿은 즉시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짐으로 성령의 교통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사이의 관계를 여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영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이미 있는 교회에 한 몸을 이루게 함으로 이미 있는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교통에 접붙여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교통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인 성자에게 부어주신 사랑은 바로 이 성령의 교통을 통하여 우리 모든 각 교회에 부어지고, 교회에 접붙여진 모든 신자에게 전가됨으로써, 이익 됨으로써 우리 모두 그 사랑에 함께 참여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성도의 가장 신성한 의무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성도가 교회를 가장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은 성령을 슬프시게 하고, 근심하고 심지어는 성령을 모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개인의 삶일 수 없고, 성령을 기쁘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 전체가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로 만들고, 성령을 근심시켜 드리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그 무거움을 온 교회가 함께 짊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개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교회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도 하나이시오, 그리스도도 하나이시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교회에 주신 성령도 한 성령입니다. 바로 그 한 성령 안에서 우리들이 부름을 받았으니 우리가 성령 안에서 교통하게 하신 이 완전한 하나님과의 평화와 화목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야 말로 우리 안에 있는 이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충만하게 증폭시켜 교회를 새롭게 하고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섬김 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다양한 섬김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이 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전쟁이 일어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일에 종사하지만 결국 그 궁극적인 목적이 전쟁에서의 승리임과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로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입니다. 다양한 직분들이 있고 그것은 각각 섬김을 위하여 제정된 직분이고, 그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또한 다양한 재능을 주셔서 그리고 은사를 주셔서 그 섬김에 합당하도록 봉사하게 하십니다. 이 섬김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섬김이 대단하고 나머지 섬김은 하잘 것 없고 쓸데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이 모든 성경적인 섬김과 직분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몸인 교회의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온전하게 된 그 성도들로 하여금 열심히 주의 일을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든든히 세워 이 교회로 하여금 이 세상을 섬기도록 만들어 마지막 그 하늘과 그 아름다운 종말의 완성을 지양하는데 이바지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일들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이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또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순결한 영혼을 갖는 교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경건의 실천을 하고 여러분들이 기도 속에서 여러분들이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들이 정결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심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해진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가장 잘 깨닫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이고 그렇게 지성의 밝은 빛이 있는 마음이야 말로 그 진리의 빛을 따라 살기에 적합한 의지가 깃들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런 속에서 여러분들은 교회의 공동체를 통하여 예배드리며, 여러분들의 영혼이 날마다 정결해지고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순수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세상 속에 있으나 이 세상과 같은 무리가 아니라 구별된 하나님의 성도들로서 하늘의 가치를 위하여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중요한 교회의 사명이 있으니 이것은 바로 이렇게 순결해진 영혼으로 이 세상에서 창조적인 행위를 통하여 섬김으로 이 속에 무엇인가 이 땅을 이롭게 하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면서 살게끔 만들어 주는 훌륭한 역할을 구현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고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시고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셔서 하늘나라의 진리들을 깨닫게 하시고, 성령의 은혜를 힘입게 하는 것은 이 모든 은혜와 진리,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여러분 자신을 최종적인 소비처로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은 이런 충만하게 받은 사랑과 은혜, 하늘나라의 가치와 영혼의 순결함을 가지고 이 세상을 마치 망가진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마음으로 고치도록 여러분들이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나아가서 건강하게 직장 생활을 함으로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뜻들을 구현하고, 또 가정을 이룸으로써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며 살고, 또 그런 후손들을 만들고, 나아가서 창조적인 행위로써 여러분들에게 주신 모든 재능과 지식, 학문과 그리고 모든 기술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삶을 살도록 이바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교회의 한 몸 중 일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육신 하신 몸으로써 봉사했으나 우리는 그가 부활승천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몸의 일부로서 그 일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예수 사셨더라면 계속하셨을 그 위대한 섬김을 계승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III. 남은 옛사람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이지만 교회 안에는 남은 옛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의 남은 옛 사람의 종합은 신자 각 사람, 각 사람 마음과 영혼 안에 남은 옛 사람의 총합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성령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셨던 그 일들을 훌륭하게 계승하기 위해서는 이 교회가 남은 옛 사람을 끊임없이 벗어버리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새 사람을 매일매일 덧입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 영적인 교통을 나누는 신령한 존재가 되었으나 여전히 그 안에는 옛 사람의 습성이 남아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마지막 날에 영화에 이르게 되게 하시기 전까지는 이 옛 사람을 운명처럼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위대한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도 우리가 이미 거기에 들어간 사람인 것처럼 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때에 우리로 하여금 교회 안에 남아있는 이 옛 사람의 구습들 때문에 교회에서 누리는 하늘의 큰 축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만드셨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분명히 교회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지식의 빛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거짓된 것이고,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아는 지혜의 놀라운 빛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한 성도는 이 세상의 허탄한 것을 위하여 일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망한 것들을 찾아 사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더군다나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고, 이 아무 열매도 없는 허탄한 일들을 위하여 자기의 일생을 바치며 주님을 섬기듯이 자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는 그 순간 진리의 밝은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없이 살았던 그 허허로운 많은 날들을 회개하게 되었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악이 여러분들을 삼키고 은혜에서 멀어졌을 때 여러분들은 또 다시 지식을 싫어하고 무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육체의 즐거움을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밤늦게까지 수고하고 그리고 밤늦게까지 그 즐거움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는 일에는 게으름을 부리고 그리고 그것이 마치 남을 위해 하는 일인 것처럼 태만한 것들은 바로 여러분들 안에 남아있는 옛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미 그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거늘 여전히 그 욕심을 따라 살기를 좋아하는 것도 결국은 여러분들 안에 남아있는 옛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이제는 옛 구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성령의 습관을 입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익숙해지지 않는 성령의 습관보다는 오래도록 일평생 익숙해 온 정욕을 따라 사는 구습을 좇는 것도 바로 여러분들이 옛 사람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거짓과 분노, 도둑질과 더러운 말,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성도의 본분을 더럽히고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를 해치는 이 모든 것들은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진리를 사랑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바꿔놓으셨건만 여전히 영혼의 지배적인 경향성을 거스려 진리보다는 거짓을 좋아하고, 참기보다는 분노하기를 좋아하고, 거짓된 일을 탐하여 심지어 교회에서도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욱이 더러운 말들을 쏟아놓음으로 말미암아 그 말들이 자신의 영혼을 더럽혀 더러운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이니 이 모든 일들이 남의 일이 아니라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 남아있는 이 모든 옛 사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세상을 위해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참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도가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바로 이렇게 성령과 진리로 말미암아 깨끗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럼으로 말미암아 그는 교회 안에 있는 옛 사람을 끊임없이 죽여 교회로 하여금 새 사람으로 충만하게 하고, 새 사람으로 충만한 것만큼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찬 공동체를 만드는데 이바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는 이 모든 악과 함께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악의와 함께 버려라” 특히 버릴 것이 “악의”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악의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의견 혹은 의지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 자기와 관련된 사람들이 나쁘게 되고 잘못되기를 바라는 강한 의혹이고, 그리고 의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의지가 충만하지 못할 때에는 마음에 머물러 있고, 이 의지가 충만하고 능력이 있을 때에는 이웃과 하나님의 교회에 해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 있는 악의의 열매가 악독, 노함, 분노, 떠드는 것, 비방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떠드는 것은 다른 사람의 단점이나 결점을 근거 있이 혹은 근거 없게끔 끊임없이 퍼뜨림으로써 다른 사람들 속에 그의 명예를 현저히 실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열매들은 마음에 있는 악의에서 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고 사람들과 단절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생명적인 교통을 나누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이 일은 그에게 후천적으로 성령의 놀라운 은혜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지, 선천적으로 자기 안에 있는 그런 식의 모두스비벤디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과 성령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이러한 삶이 지극히 행복하지만,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빛으로부터 떠나게 될 때에 그는 다시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자기를 끊임없이 사랑하려고 하는 이 욕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는 이 이 삶을 한없이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도는 이제 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해서 다루는 이 4장의 부분에서 마지막으로 성도와 성도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이 아름다운 교통에 대해서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이 성도의 아름다운 교통을 가로막고 있는 악의와 미움, 그리고 용서하지 않는 마음과 사랑 없음, 이 모든 무관심,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흐르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이 친절하게란 말은 희랍어로 사용할 수 있는, 이용할 수 있는, 써 먹을 수 있는 그런 의미의 뜻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끊임없는 과학의 발견과 연구를 통하여 이미 있는 법칙들을 통해서 발견하고 그것들을 가지고 사물들을 배열하고 조작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문명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매우 이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굉장히 많이 늘어나게 되었고, 사람들의 삶의 질도 훨씬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술입니다. 그래서 기술은 물질을 이용해서 우리 인간인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기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을 통해서는 이 땅으로부터 지음받은 우리의 육체를 복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영혼까지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각이 있는 많은 사상가들과 그리고 많은 학자들은 이 물질문명이 우리에게 정신과 우리의 마음에 주는 커다란 피해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문명은 지극히 발달하고 우리는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지만 누리게 된 것만큼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복은 물질의 누림을 통해서가 아니라 덕의 증진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술은 물질을 사용하여 사람의 몸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덕은 나 자신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해 주는 것이 덕입니다. 그래서 비루투스라고 하는 이 덕 개념 그 자체는 이미 타자와의 관계가 그 안에 전제되어 있어요. 자기 혼자서는 덕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거죠. 덕, 사랑, 용서, 자비, 긍휼, 은혜 이 모든 것들은 다 양자 이상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친절히 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남에게 끊임없이 이용될 수 있는, 남이 사용할 수 있는, 남에게 봉사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은행에 저금을 하고 많은 돈을 예금하면서 내일이라도 내가 원하면 찾아가겠다고 하면 거의 이자를 주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오히려 보관료를 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많은 돈을 맡기면서 20년 동안 절대로 찾아가지 않겠다고 각서를 써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굉장히 많은 이자를 줍니다. 그러나 그 돈은 20년 동안 여러분들이 설령 굶어죽을 처지가 된다고 해도 그 돈은 꺼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보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두 예금 중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맡기고 내일이라도 찾아 쓸 수 있는 것 같은 저금통장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은 내가 저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내일은 내가 저 사람의 도움에 도움이 되고 하는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저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로, 나에게 준 하나님의 사랑이 저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공동체가 되어 이 세상에서는 누리지 못하는 온전한 사랑과 생명의 교통을 누리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 마지막 날에 완성될 그 나라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라고 주님이 이 땅에 남겨놓으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만 되면 이 교회는 그 존재하는 것 자체가 선교예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면서 진정한 인간의 행복, 그리고 하나님의 현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것이 미움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흘러야 할 사랑의 관계가 미움과 원망에 의해서 막히게 됩니다. 이것은 어느 한 쪽이 잘못했을 수도 있고, 양쪽이 잘못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 서로 오해했기 때문에 그런 관계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이 장애물이 생기게 될 때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많은 것들은 흘러가라고 주신 것인데 그것에 막혀서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자, 예를 들어 보십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우리가 그것을 모두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물질에 대해서 그런 견해를 갖는다면 그는 매우 위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주신 것은 이 물질을 통하여 나에게 맡겨 주셔서 또 다른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흘러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나의 소중한 물질을 나누어줄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약에 놀라운 진리를 아는 지식을 주셨다면 이것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엔조이하고 소비해 버리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주시는 그 즉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진리를 주시면서 무지한 어떤 사람을 눈여겨보십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 그것을 주었으니 이 사람을 통하여 너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만약에 큰 진리를 깨달았으면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가서 그 진리를 가르쳐 주어 깨닫고 나와 같은 진리를 누리게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만이 아니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갈 수 있는 자원들은 크게 세 가지로 이루어져요. 하나는 물질적인 자원이에요. 이것은 물질, 돈 이런 것들이에요. 또 하나는 정신적인 자원이에요. 학문, 지식, 기술 이런 것들이죠. 또 하나의 자원은 영적 자원이에요. 이 영적 자원이야말로 직접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아래에서 교회가 누리는 생명과 사랑에 관련된 것이죠. 이 세 가지 자원 중에 용서하지 않으면 처음 두 개는 물론이고, 세 번째 자원이 막히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사랑을 강조하면서 용서를 본받으라고 강력하게 촉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을 용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커다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몸이 어디를 지나가다가 부딪치면 상처가 나죠. 그러면 상처가 나면 즉시 피가 흐르기 시작하고, 온 몸이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임파선이 움직이면서 여기에 임파액들이 몰리고, 이러면서 몸 안에 이 상처를 통해 침투하려고 하는 균들과의 전쟁이 이루어지고, 고름은 바로 그렇게 장렬하게 죽은 시체들의 흔적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과 정신도 똑같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나쁜 행동을 하거나 우리에게 고통을 주면 그것은 마음의 상처로 남는 것이죠. 이 상처를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이렇게 상처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줄 알게 되고, 경계하게 되고 그래서 저 사람을 대할 때 우리의 온 마음이 깨어나서 저 사람으로부터 두 번, 세 번째 또 다른 피해를 입지 않도록 우리를 방어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가 정말로 악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는 그런 방어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기능이고 작용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를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체된 성도들이 끌어안고 살기 시작하면 그 상처는 아주 훌륭한 사단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이 상처는 점점점점 덧나서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영혼 그 자체를 아주 피폐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만드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보면 우울증을 앓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에요. 큰 상처를 받은 사람도 있고, 자잘한 상처를 많이 받아서 굽어진 사람도 있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라고 한다면 상처를 받는 일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마치 햇빛에 우리 자신을 노출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에요. 죄가 들어온 다음서부터는 이런 일들은 늘상 있는 일이고, 이것은 인간으로 살아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 이거는 어떤 사람은 받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주기만 하고 절대 그렇지 않고 서로가 서로 주고받으면서 사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누군가 상처를 많아 받았어도, 여러분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어도 한때는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고, 여러분들은 누구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만 언젠가 여러분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이 세계의 모습이고, 아직도 옛 사람을 간직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완전하시지만 교회는 아직 완전하지 않아요. 왜? 옛 사람을 간직한 사람들의 연합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불완전한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완전해져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IV. 하나님의 용서를 본받음
A.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우리들에게 고통을 주고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보복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모자라서 일수도 있고, 우리에게 보복할 만한 자원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때로는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 사람을 그래도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 된다는 양심의 작용들이 팽팽한 대응을 이루고 있을 때 그때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그 사람을 향한 미움을 품고 그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적잖은 위로를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고통 하는 사람이 질병을 근원적으로 고치지 않으려고 하고 진통제로서 이 모든 것을 이기려고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친절하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길 뿐만 아니라 서로 용서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우리 앞에 눈물을 흘리며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이행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일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는 잔인하리만치 가혹하게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를 빌지 않아도 용서해 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용서의 교훈인 것입니다.
1. 영원한 용서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이러한 용서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용서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 하셨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는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용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적으로 이 끝이 없는 영원한 효력을 가진 용서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하게 하신 동기가, 주체가 바로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에게는 영원한 사랑이 아니면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들을 용서해 주시되 영원히 용서해 주셔서 영원한 사랑이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용서하신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2. 단번의 용서
두 번째 특징은 단번의 용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향한 용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를 기초로 이루어진 영원한 용서일 뿐만이 아니라 한 번에 하신 용서인 것입니다. 반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도덕적으로 교화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지 영혼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단번에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시고 한번 우리를 용서하신 후에는 우리를 용서하신 것을 후회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얼마나 긴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했는가 하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인 것입니다.
3. 완전한 용서
세 번째 특징은 완전한 용서입니다. 하나님이 가계약 하듯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계속 공로를 쌓아 가면 그것으로 보충하여 겨우 용서가 완성되는 그런 종류의 용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일에는 우리의 노력도 보탠 것이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거기에는 아무것도 우리가 보탠 것이 없는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퍼부어진 하나님의 용서인 것입니다. 이러한 완전하고 단번에 이루어지고 영원한 용서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용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고, 분명한 것이고 신뢰할 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출발이고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놓을 수 없는 사랑의 나타남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말년에서도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용서를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4. 사랑을 더함
마지막 네 번째 이 용서의 특징은 사랑을 더한 특징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그것으로 끝났다면 이것이 어찌 진정한 용서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복수가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용서라는 둑이 무너지는 그곳에는 반드시 사랑이 폭포수처럼 밀려들어오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깊이는 용서를 경험하는 깊이이고,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경험했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의 죄를 용서 받는 그 용서의 깊이 있는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할 때에 용서 자체를 위해 용서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만 사랑의 관계가 복구될 수 있고, 사랑의 교통이 복구되어야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원을 이웃에게, 이웃에게 주신 자원을 또 나에게 이렇게 흘려보내어 우리 모두가 한 생명과 사랑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하라고 명령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교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 피 묻은 복음에 대해 매우 낯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옛 사람을 따르는 생활을 즐거워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용서와 사랑의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실 때에 완전한 교회로 세우지 않으시고 이렇게 옛 사람이 남은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 교회에 진리의 빛과 성령의 은혜를 보내주셔서 그래서 끊임없이 그 빛으로 자기에게 남아 있는 옛 사람을 보게 만들고 그 은혜의 불로서 우리를 날마다 고치고 변화시켜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신 그리스도 교회의 몸의 한 지체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을 충만하게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여러분들에게 직접 내리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교회에 질서를 두시고 목회자를 통해 여러분들의 영혼을 돌보게 하신 것은 한편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서는 이 세상의 창조적인 행위를 섬김으로 보태어 이 세상을 여러분들이 없었던 세상보다는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 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들은 섬김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여러분을 바라보시며 기뻐하고, 그렇게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이루어진 평화와 섬김의 관계를 통해 덕스러운 삶을 살면서 이웃의 많은 사람들에게 윤택함을 끼치는 것, 마치 산으로부터 흘러내린 그 물들이 산 아래 잇대어 있는 수많은 밭들에 물이 깃든 동산같이 만들어서 많은 식물이 자라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덕을 베풀기 위하여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이 용서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그렇게 그 용서를 본받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하나님의 충고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만약에 용서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때마다 너희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용서하신 사람들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는 이유는 그 이면에 죄인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용서하신 공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실은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여겨주신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가 본래 누구였었던 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더럽히고 주님께 반역하기를 악독스럽게 반역하던 무한한 죄를 지은 인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에 있었고, 본질상 마귀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습니까? 우리의 공로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뉘우치게 했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죄악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된 모든 구원의 요청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더니 하나님이 우리를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전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던 막힌 담을 열고 하늘로부터 그 신령한 생명과 그리고 놀라운 사랑을 물 붓듯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일들을 통하여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단 한순간도 나는 이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고,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기에 나는 충분히 내 자신이 준비되었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나에게 어울리는 것은 지옥의 그런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마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 하나로써 우리를 모두 용서해 주셨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나의 인생, 나의 존재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나의 육신까지도 이제 내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것이고, 우리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우리에게 가혹한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것이 나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행복과 나의 행복은 나뉘어지지 않았고, 주님의 기쁨과 나의 기쁨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로 돌아가면 용서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안에 있는 영성은 사랑의 크기에 달린 것이고, 이 사랑은 끊임없이 원수들과 조차도 관계를 맺으며 함께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성향입니다. 내가 저 사람으로부터 받을 어떤 이익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사랑, 그리고 나같이 무지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진리, 나를 위하여 자기를 십자가에서 버리신 그 희생하시는 사랑, 나에게 흘러가라고 명하기 때문에 내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B. 서로를 용서함
그러면서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를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완전한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성령과 진리 안에서 완전해져 가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끊임없이 흐르게 하라고, 그리고 만약에 그 사랑을 흐르게 하지 않으면 나도 그 사랑과 관련이 없는 사랑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혹하게도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도록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자기를 진정으로 미워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를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용서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이고, 사랑의 깊이는 진리를 아는 지식의 넓이요. 그래서 진리는 진실을 요구하고 진실은 홀로 있는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덕목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언제나 진실을 요구하고 진실은 관계를 전제로 해요. 그래서 우리들이 끊임없이 진리 앞에 서면 진리는 우리에게 관계를 요구하고 타자와의 관계성에서 자신의 삶을 보도록 촉구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들이 누리고 경험하는 충만한 사랑은 사람들과의 관계의 지평 속에서 그것들이 구현되도록 첫 번째는 교회에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구현되도록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용서를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용서하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요구는 가혹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배어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용서를 빌지도 않는 사람, 나에게 악을 행하고도 뻔뻔스럽게 뉘우치지 않는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고통을 받고 손해를 보는 것일지 모릅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변상을 하는 것과 같이 부조리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용서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나에게는 손해가 나는 일이라고 주님께 호소하면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만약 그 사람을 용서하면 그것은 아픈 것이지만 이후에 내게로부터 받는 사랑은 그 아픔보다 훨씬 큰 사랑이고, 그 아픔이 없이는 너는 살 수 있지만 나의 사랑 없이는 너는 살 수 없는 존재란다”고 말입니다. 진정으로 남을 용서해 본 사람은 이 용서가 우리 죄인에게는 얼마나 본성에 어긋나고 나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본성에는 없는 이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경험해 본 사람은 주님의 모든 은혜가 우리를 용서했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 쓸데없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끊임없이 관계를 갖고 싶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또한 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을 움직일 때에만 용서할 수 있고, 그리고 이 용서를 베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정말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기도가 안 나온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는 강 교수님 추천을 받아서 야슬로프 볼프(Miroslav Volf)라는 사람이 쓴 책 한권을 읽고 있습니다. 예일 대학에 오래도록 교수로 있었고, 지금도 예일대학에서 일하고 있고, 크로아티아 출생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입니다. 그가 이제 이 인류사회 속에 있는 대립과 전쟁, 원한의 문제를 가지고 많이 고민을 하고 그것에 대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모두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 볼트만이라는 학자가 야슬로프 볼프에게. 자기 제자에요. 질문을 했어요. “당신은 체찬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체찬 사람들이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 워낙 나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우리는 실감이 안 나지만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기억이 나요.
지금도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죠. 그죠? 이런 것들이 용서가 안 되는 거죠. 더욱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더더욱 용서가 안 되는 거죠. 그 사람들이 행한 일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인간을 가지고 생체 실험을 하고, 그리고 그 수많은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폭행하고 그래서 수많은 씨를 퍼트리고, 그 끔찍한 죄들을 덮기 위해서 또 다른 죄를 저지르고 한 그 완전히 광기 어린 만행들이 얼마나 많이 자행되었습니까? 아마 우리들이 일본 사람들에게 느끼는 거의 유사한 감정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혹은 러시아 사람들이 독일에 대해서 느끼고 있을 거예요.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600만이라고 하는 그 많지도 않은 민족 중에서 600만이라 사람들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을 때, 그 기록들이 지금 생생하게 다큐멘터리로 남아있습니다. 얼마나 끔직한 일들을 행했는지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그런 일을 행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들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한국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인류중의 한 인간으로서 분노하는 것은 자기들이 저지른 그 끔찍한 만행을 미워하지 않는 그 태도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이미 일어난 일이에요. 자기네들이 한 게 아니라 자기네 선조가 한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들은 연대 책임을 지고 있는 거죠. 그러나 정말 한국과 화해를 원한다면 그들이 최소한 그 악한 일들이 악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을 미워하는 태도는 가져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요. 일본 사람들이. 옛날에 65년도인가에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전부다 변상했는데 한국사람 참 지긋지긋하고 질기기도 하다고 말입니다. 변상은 그때 끝났을 지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의 변상들도 남아 있으니까 변상해야 될 것이고, 나는 변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미워하는 마음은 그때 한번이 아니라 이 세상이 사라지는 날까지 계속 되어야 해요. 그리고 그거는 할 수 있으면 매년 잘못했다고 말해야 되요. 매년. 지금 독일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독일 사람하고 관계가 틀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치에 대해서 한참 떠드는 거예요. 다시 못 만나요. 그 많은 세월이 흘러갔는데도 독일 수상이 이스라엘에 가서 그 묘지에 참배하면서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무릎을 꿇고 울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지도자의 마음속에 진심으로 이 과거를 미워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바로 그거예요. 어쨌든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야슬로프 볼프는 거기에 대해서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는 아마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용서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말을 마쳤습니다. 그러면서 이 포용과 배제라고 하는 쉽지 않는 담론을 다루면서 마지막에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리는 결론이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와요. 성경을 면밀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 자비와 선을 베푸신다고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성경은 어느 곳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그들을 용납하고 사랑하고 우리도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을 말하지만 어느 한순간에는 하나님이 그냥 당신의 심판의 진노를 이 세상에 쏟아 부어서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악인들을 그냥 아예 맷돌에 갈아버리듯이 그렇게 온 사방에 피가 튀도록 심판하시는 장면도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백마 탄 자가 나타나서 이제 온 세상에 회개하지 않는 열방과 악인들을 짓밟을 때에 그들의 모습이 마치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면서 시뻘건 포도주가 튀어 나오듯이 인간들이 거기에 파멸되면서 피들이 사방에 튀어서 그래서 말하자면 피로 물웅덩이를 이루는 거예요. 그러한 국면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그 요구와 함께 하나님이 엄중하게 심판하신다는 피비린내 나는 심판도 제시되어 있다는 거죠. 그러나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그런 일을 행하실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지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심판하시는 백만 탄자의 깃발아래에 모여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깃발 아래에 모여야 되는 거예요.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혼자 하시는 일이고, 이거는 우리들이 함께 그 깃발을 들고 심판을 실행하는 피의 전사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의 가르침이에요.
V. 결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산산이 찢어지고 망가진 세상 속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고 심지어 우리의 원수까지도 불쌍히 여기도록 잔인하게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부가 잔인하지 않는 것은 주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무한한 사랑과 그 사랑을 대적하며 산 원수 같았던 우리의 삶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죠. 그런 감당할 수 없는 용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우리였습니다. 구속받은 이후 그 분이 우리를 한번 용서해 주신 용서를 영원하고 완전한 용서로 여기시고, 그 위에 사랑을 더하여 끊임없이 우리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었기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이지 변덕스러운 우리 자신에게 맡겨두었다면 아마 수십 번도 하나님을 더 버리고, 어쩌면 수십 번도 하나님을 더 찾았을 것입니다. 그 사랑이, 그 용서가 이 생명과 이 은혜를 누리며 살게 만들어 주셨으니 이러한 용서의 은혜를 경험한 너희들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향해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계명이 바로 우리와 이 세상 사람을 구분 짓는 계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계명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지만 이 모든 십계명을 능가하는 한 계명을 말씀하셨는데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만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리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 일이 힘들다고 느껴진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렇게 남을 용서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이 성령과 생명의 은혜를 끊임없이 흘려버리는 데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당신의 사랑스러운 성품들을 우리에게 보이실 것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최고의 보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오늘도 당신의 자녀들을 불러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로서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게 하시는 것이니 여러분도 이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사랑받는 자녀 같이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 5: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이루어질 위대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경륜을 말한 다음에 4장에서 하나님이 그러한 일들을 이루기 위하여 세워 놓으신 교회를 언급하였습니다. 교회는 한 하나님, 한 그리스도, 한 믿음, 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세상 사람들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지만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Ⅱ. 하나님을 본받음
사도는 지난주에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이 5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용서와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 일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이렇게 교회 안에서 지체들과 서로를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가 사람들 속에서 그것들을 찾지 말고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본받으면서 이러한 일들을 이루어 가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본받아야할 인간의 의무를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이 하나님을 본받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 피조물은 어떤 의미에서든 창조주 하나님을 본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성품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자,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 분의 존재를 본받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눈에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사물들입니다. 눈에 보이고 크기와 종류와 색깔, 무르고 단단함, 차가움과 따뜻함 등등의 우연적인 성격을 가진 물건들이 있습니다. 흙, 돌, 사람이 만든 많은 물건들은 바로 그러한 사물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어떤 시간과 공간 안에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어서 우리들은 이 사물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물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같이 자연적인 사물이라도 수증기나 공기, 혹은 원소나 분자 같은 것들은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더욱이 사람 정신 속에 있는 사랑이나 자비, 그리고 미움 등등의 감정 같은 것들은 이렇게 어떤 물건이 존재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겠죠.
한 번 더 넘어가서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영혼이나 혹은 귀신, 혹은 마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이런 것들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돌멩이나 흙, 혹은 풀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눈에 보이게끔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분명히 장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은 해부학적으로는 내 몸 어디에도 없지만 그러나 내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하고 내 안에는 나의 영혼이 있고, 여러분 안에는 여러분의 영혼이 있어서 각기 다른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돌이나 흙 같은 물질이나 영혼이나 혹은 천사와 같은 사물처럼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본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존재와 비슷한 양식의 존재가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흙이나 돌, 이런 것들이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은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안 계시거나 아주 멀리 계신 것이지만 그러나 사실 참다운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내 마음에 나보다도 더 가까이 계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 즉 흙이나 돌 혹은 인간의 정신을 생각하는 것 같은 기준으로 하나님을 측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의 한계이지요. 이런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본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피조물과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할 때의 이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성품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 홀로 있고 아무 대상도 없다면 그의 성품은 바깥으로 나타날 수 없을 것입니다. 바깥에 나타나 있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것이 때로는 사람이던, 사람이 아니든지 이것들을 통해서 그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성품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품이라는 말 그 자체가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고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세계가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성품을 이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에게도 세계와 인간들이 필요했다고 말해도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것은 존재가 아닌 성품을 본받으라는 것이고, 성품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이 아닌 타자, 즉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에게 어떻게 대해주시는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품을 본받음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본받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위치에서 본받아야 합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본받게 될 때에는 그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이 아주 커다란 죄악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사치하다고 칩시다. 사치라고 하는 것은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이 분에 넘치는 영화를 누림으로써 스스로 행복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치입니다. 그러면 이 사치는 바로 모든 피조물과 인간들에게 많은 것들을 아무리 많이 주시면서도 당신 자신에게는 모자란 것이 없으신 그 하나님을 피조물의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자기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허영을 부리는 것이 바로 사치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치는 아주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어디 사치뿐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을 정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똑같은 위치에 자기를 놓고 그 분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것을 본뜨려고 할 때에 이것은 매우 사악하고 무자비한 것이 됩니다. 방탕은 또 무엇입니까? 방탕은 바로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제한을 받지도 않으시고 스스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하나님처럼 행해 보려고 할 때에 이것인 방탕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친밀한 가운데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에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게 되면 그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그 가까움은 결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을 때, 하나님의 커다란 진노를 느끼는 그 가까움보다 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안 믿는 것조차도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인데 하나님을 안 의지하고 신뢰하지 않고 그 분께 기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독립적인 성품을 잘못된 방법으로 본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다고 할 때에 그것은 올바른 방법으로 피조물의 위치에서 겸손하게 본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하심을 본받을 때에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시면서 그 죄인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그 성품을 피조물의 위치에서 겸손히 본받으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주려고 할 때에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을 올바른 방법으로 본받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 중 사랑은 다른 많은 성품들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다른 모든 성품들 위에 뛰어나서 그 모든 성품들을 통일되게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하나님의 탁월성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공의로우시지만 사랑이 없이 공의로우시다면 무자비한 심판에 피비린내 나는 결과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사랑이 없이 진실하시다면 과연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그 진실하심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영원하시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그 하나님이 사랑이 없으시다면 그 영원함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습니까? 주님이 불변하시지만 사랑이 없이 불변하시다면 그 불변하심은 우리에게 무한한 심판을 보증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이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성품들 중 가장 탁월한 성품이고, 다른 모든 성품들을 규제하는 하나의 규율적인 성품입니다. 원리적인 성품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도 한때는 우레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과격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기 자신이 수행하는 것 같은 의협심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지만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깊이 변화된 후에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세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를 통해 이 주신 계명은 사도 자신이 창작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을 재정리한 것입니다. 더 훌륭한 증거는 율법사의 질문 앞에서 예수님이 주신 답변입니다. 율법 중 제일 가는 계명이 무어냐고 묻는 질문 앞에서 예수님은 대답하였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시기를 이것이 바로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강령이라는 이 말의 히브리 단어는 “크레마티”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벽에 박힌 못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못에 모든 율법의 계명들이 걸리고, 선지자의 가르침이 걸리는 것이니 만약에 그 사랑이라는 못에 걸리지 않으면 그것들이 모두 땅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가장 원리적인 성품입니다. 이 사랑은 끊임없이 타자와 관계를 맺고 그에게로 흘러가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이것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사람들 사이에 지은 죄이고 하나님을 향해 지은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들의 죄가 당신의 사랑이 그에게 흘러가지 못하도록 그의 사랑이 당신에게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지만 이것들을 용서라는 방법으로 처리하시고 장애물을 제거하심으로 끊임없이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이런 장애물을 놓으시는 법이 없고 항상 인간 편에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장애물을 놓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치우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용서의 크기는 사랑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의 지평 속에서 자기에게 잘못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결점과 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서로 관계가 계속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피조물의 위치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으라고, 특별히 용서하시는 이 사랑을 본받으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보고 싶었던 일은 바로 인간 안에 당신을 본받는 성품들이 가득하게 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로 창조하셨고, 피조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하나님과 지성과 그리고 의지 안에서 그 분과 사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모든 피조물은 당신의 자녀라고 부르지 않아도, 심지어 천사들도 당신의 일꾼이라고 부르시면서 우리들은 당신의 자녀라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약 하나님을 본받아야 할 소명을 거부하고 살아간다면 어떤 것들을 본받게 될까요?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본받지 않으면 그 이외에 본받을 많은 표상들이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이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인간은 오직 둘 중의 하나만을 본받을 수 있는데 하나님을 본받든지, 세상을 본받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말미암아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고, 세상을 본받는 것은 꾸삐띠다스의 육욕적인 사랑을 따라 살면 저절로 이 세상을 본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만 가능하지만 세상을 본받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이 세상을 본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사랑과 일치가 있지만 세상을 본받는 사람들 속에는 그런 일치가 없고 끊임없는 분열과 투쟁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사랑이요, 세상사랑은 자기를 세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되 우리는 직접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도 발견하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인간도 발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본받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든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본받게 되고 그리하여 그는 누구든지 이 모든 세상을 향하여 당신의 사랑을 베푸시고 그리고 친절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그 하나님을 본받아 살게 되고, 이렇게 살게 될 때에 자기에게 끊임없이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또 불쌍히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공동체성을 성취해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에 교회 안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은 진리와 함께 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더더욱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포악해 지는 시대가 되고, 단절된 시대가 될 터이니 이제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랑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갈 때 오히려 사랑 없는 이 세상과 폭력과 그리고 무자비한 범죄가 난무하는 이 세상이 오히려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신의 빛을 비출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받는다고 하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우리가 가진 소유나 우리의 지위, 심지어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도 우리의 자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큰 자랑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그리스도 안에서 본받는 사람이 됩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고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성도들이 될 때에 그는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이렇게 교회 안에서 한 지체로 불러 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께 접붙여 목양을 받으며 그 진리를 향유하게 여러분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본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Ⅲ. 사랑받는 자녀같이
Α.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심
그런데 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바로 사랑받는 자녀같이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성경 구절에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성품의 탁월한 나타남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의 성품을 나타내 보여 주시는지를 드높은 하늘 위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 가운데 계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치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눈물을 씻어 주셨을 때에 그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범죄한 인간들에 가지시는 성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을 열어 무지한 백성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에 그 고요한 진리의 울려 퍼짐은 바로 무지한 자들을 향해 하늘의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악을 행하고 외식을 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준엄하게 책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우렁찬 음성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해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 성품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오실 때에 바로 이렇게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 분이 가르쳐 주신 모든 것들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죽으신 이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탁월하게 보여주는 한 본보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으나 스스로 하나님과 관계를 복원할 수 없는 이 비참한 인간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은총과 용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용서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자기의 아들로 담당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희생 안에서 우리와 당신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듣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그 순간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동시에 우리를 영적인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이 교회에 접붙여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자기의 교회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을 부어주시고 성도는 바로 그렇게 교회에, 한 몸인 교회에 부여된 사랑을 자신이 받음으로써 그 사랑 아래에 있게 됩니다. 이후에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근거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버려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 우리의 인생 전체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죄 짓고 불순종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하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그 모든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하십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잠시 우리의 죄 때문에 막히는 것 같지만 다시 그 관계가 계속 되어 우리로 한번 받은 구원을 취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따라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 종교를 그리스도교, 혹은 기독교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사랑과 용서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고,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안에 허락해 주신 모든 자비와 은총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받은바 용서를 다른 사람들을 향해 실천하면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모든 지체들과 이웃에게 흘러들어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Β. 사랑받는 자녀로서 용서함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받는 자녀로서 용서하신 것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사랑받는 자녀”라고까지 한 것은 이것은 어떻게 보면 쓸모없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면 반드시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사랑받는 자녀들을 억압받는 노예와 대조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 글을 쓴 사도바울은 노예 제도가 있던 시대에 살던 사람이고, 수많은 노예들을 보았습니다. 그 노예들 중 대부분이 그들이 일하는 동기가 주인으로부터 떨어질 무서운 책망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보복, 이런 것들에 대한 공포심으로 주인들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고, 때로는 어떤 보상을 위하여 그 일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웃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용서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베풀지 않을 때 하나님이 진노하실 것이라는 노예적인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많은 사랑과 자비, 그 놀라운 은총 때문에 그리 하는 것임을 성경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이웃을 향하여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이 일이 어렵고 큰 희생을 요구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의 크기와 넓이, 그 은혜가 얼마나 무한한지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는 자녀라고 부르시면서 그렇기 때문에 지체들을 용서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타이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어떤 사랑이기에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렇게 우리에게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조차도 용서하는 희생도 서슴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우리가 받은 사랑은 부성적 사랑이었습니다. 즉, 아버지의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닌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아버지 상은 하나님의 아버지 상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 아버지는 포악하고, 제멋대로이고, 전제적이고, 폭군적이고, 강압적이고, 충분한 사랑이 없는 징계를 좋아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 부성적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고, 이 부성적 사랑은 모성적 사랑을 함께 가지고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더욱이 이 사랑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사용하여 자발적으로 당신의 사랑에 반응하게 하는 자녀로서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처럼 다루지 아니하시고, 자녀처럼 다루시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 잘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실 어떤 보상에 대한 감각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으신 분이시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주시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부성적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기꺼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끊임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받은 사랑은 인격적 사랑입니다. 폭압적이고 강압적인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에 호소하고 당신의 할 말만 우리에게 해 주시고, 대화의 창을 닫으시는 분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당신에 비해서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불완전한 인간의 신음하는 기도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사람에게서는 무시 받아본 경험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무시 당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우리의 인격에 다가오셔서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우리의 의지에 호소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높은 보좌 위에 앉아서 무서운 칼을 휘두르며 폭군처럼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가장 가까이 계셔서 우리와 함께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시고, 행로에 앉으셔서 우리의 귀에 속삭이시고 때로는 모든 사람을 보낸 후 단둘이 앉아서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인격적인 사랑을 우리들이 받았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도 계속된 사랑이었고,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노예처럼 다루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때려 우리로 하여금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격적으로 돌아오도록 우리를 설복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할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두려워 떪으로 승복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감화시키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만들어 주신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는 놀라운 통로입니다. 때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진리는 가벼운 이성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진리이고, 때로는 탁월한 이성을 가지고도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내용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직관저인 방법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지 인간의 이성을 사용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격적인 사랑은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놀라운 영적인 감각을 선사합니다.
언젠가도 제가 여러분에게 예로 들었습니다마는 교회에서 한 초등학교 학생이 회심하였는데 회심하던 날 그는 이렇게 고백을 했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목사님도 설교해 주셨고, 전도사님도 가르쳐 주셨지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서 내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가르치시며 눈물을 흘리실 때에 나는 그 모든 진리가 믿어졌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이 인격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그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성품을 본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은 설복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유 때문에 단지 당신의 뜻만 우리에게 보이고, 우리에게 복종만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이성적으로 설복시키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설복시키시는 논리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성경이 가르쳐 주는 아주 많은 가르침들이 복잡해 보이지를 않고 단순해 보이고, 또 복잡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깨달을 때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신학을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마음이고, 성경을 연구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을 때에 우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이 신학을 통해 논리로 우리를 가르치시는 모든 가르침의 내용들이 설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때리고 치시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우리를 이성적으로 설복하게 하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 방탕하고 그리하여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이제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었을 때, 쥐엄 열매조차 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주리게 되었을 때 자기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인격적인 사랑이 생각났고, 그 사랑이 생각나고, 그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내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아버지의 품꾼중 하나로 여겨달라고 하며 아버지를 봉사하면서 사는 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기쁨이다 라고까지 이성적으로 설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설복적인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우리와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고 깨닫게 하는데 있어서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만약에 우리가 전하는 이 사랑의 음성을 올바로 듣지 못하고 우리가 가르쳐 주는 성경의 진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으로 이 사람들을 설복하며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설복적인 사랑을 입게 하셨으니 우리도 사람들을 설복하면서 살아가는 인내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설복은 단지 차가운 이성으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진리를 따라 살고, 진리를 좋아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백하지 않아도 느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설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주셨으니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은 순종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을 때 그 사랑은 우리의 느낌이나 감상만이 아니라 실제로 순종하며 살 수 있게 하는 놀라운 헌신의 힘을 동반했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사랑의 삼 요소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친밀함과 열정, 그리고 헌신이 함께 있을 때에 그것이 진정한 인격적인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을 때 친밀함도 느끼고 열정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헌신의 능력도 함께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셨기 때문에 저 사람의 잘못은 내가 용서하기에 너무 크다, 저 사람이 나에게 입힌 손해는 용서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실천적인 사랑이고 그 사랑 안에 이미 원수라도 용서할 수 있게 하는 큰 힘을 하나님이 함께 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힘을 주실 때에 우리를 초월하여서 당신이 직접 행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이것들을 행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놀라운 용서와 사랑을 자녀로서 받았으니 이 받은 바를 생각하면서 지체와 이웃들을 끊임없이 용서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자비, 은혜가 우리의 지체들에게 흘러가 일체를 이루고 성령 안에서 하나 될 뿐 아니라 이것들이 흘러가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이웃과 관계없이 단절된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Ⅳ. 결론
오늘날 우리는 신문 지상을 통해서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전에는 어떤 특정한 이익을 위한 범죄였다면 이제는 그런 이유도 없이 불특정 다수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죽이는 일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총기 난사 사건 같은 것들은 이미 남의 일이 아니라 무기가 규제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조차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렇게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고 삽니다. 이번에도 일어났던 그 끔찍한 범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중 한 사람을 체포하여 휴대폰을 열어보니 그에게는 온 전화도 없고, 건 전화의 흔적도 없고, 메시지를 받은 흔적도 없고, 보낸 흔적도 없다고 그럽니다. 이렇게 완전한 단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 속으로 흘러들어가야 할 가장 절실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이렇게 마구잡이로 극단을 향해 치닫는 이 시대가 어떻게 보면 절망적인 시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는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받은 사람들에게는 기대가 됩니다. 그렇게 외로운 인간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주고, 따뜻한 식사라도 한 끼 할 수 있는 이웃이 있었다면 그들이 아마 그렇게 증오심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찬란한 진리의 빛과 함께 아골 골짝 빈들에도 이 진리를 전달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마지막 때가 될수록 사랑이 식고 사람들은 무자비해 질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당신의 자녀들에게 성령을 부어 사랑으로 가득차게 할 것도 아울러 우리에게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부흥은 사랑의 부흥이어야 하고, 우리의 진정한 부흥은 용서하는 부흥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쓸모없게 버려진 모든 사람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물질주의적이고 극단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패배자들이 나오고, 낙오자가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산업 사회에서는 이런 자들을 쓰레기라고 버리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람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이 세상의 경쟁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의 경쟁에서 진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고 그들을 일으켜 세워 품을 수 있는 그 어떤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그들이 우리들의 사랑을 모르고 악으로 갚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심판하는 백마 탄 기사 아래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깃발 아래로 모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관심사와는 얼마나 관계가 멉니까?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하늘을 열고 당신의 거룩한 부흥을 교회에 충만히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랑 안에서 우리들이 하나 되고, 이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자원들로도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흘러가 그들을 품고 일으키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며 우리를 이용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 자신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이 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여러분에게 거시는 우리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포도나무 예수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녹취자 :이경순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 네 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이 남겨놓으신 말씀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들이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요한복음은 앞에 있는 세 개의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무슨뜻이냐면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대체로 예수님의 생애를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서 기록을 했는데 이 요한복음은 의도 자체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증거할 목적으로 이 요한복음이 저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요한은 자기가 직접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보아온 사건들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미 있었던 예수님에 관한 많은 사실들을 사용해서 요한복음을 시간의 순서를 따라서가 아니라 주제를 따라서 재분류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읽을 때에는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예수님의 이 포도나무의 비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고 하는 이 유명한 비유가 이 15장에서 굉장히 길게 언급이 되고 있는데 무슨 문맥에서 이 내용이 나왔느냐 하면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소개하신 후에 그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과 우리들 사이에 있는 관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이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포도나무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이시고 진리이시고 길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어떻게 관계를 맺으시고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에 맺으셨던 그 풍성한 열매를 우리를 통해 계속 맺으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두 가지를 함께 보여주셨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분 이신지를 보여주셨고 또 하나는 우리 인간이 참으로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지를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와 긍휼 공평과 사랑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시면서 보여주셨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경건하고 의로운 자들과만 관계를 맺으시면서 이것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하고 죄있는자들과 함께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의 이 다양한 아름다운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므로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보여주셨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책망하고 징계하시면서 하나님의 불붙는 공의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무 가치가 없어 보이는 연약한 인간들을 찾아 나서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미천한 인간들을 향한 당신의 커다란 관심을 보여주심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겠금 만들어주셨던 것이죠.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화유 즉 하나님이시면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 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에 대해서도 보여주셨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죄가 없으신 완전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계속해서 성화되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한 사람으로 만드실 때에 도달해야하는 그 원형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하신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영혼 안에서 당신이 하셨던 똑같은 일을 우리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비록 예수님처럼 단번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그 예수님을 쫒는 신앙생활을 함으로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던 그 발자취를 본받는 삶을 살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야 하고 우리는 그 진리에 합치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가지고 예수님과 우리사이의 마땅히 있어야 하는 생명적인 관계를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어제 잠깐 설명을 드렸듯이 이스라엘 땅은 포도나무가 농사가 아주 잘 되는 지역들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 알다시피 포도나무는 끊임없이 가지를 뻗어나갑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12미터까지 가지를 뻗어서 그래서 지지대를 세워놓고 거기에서 수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그렇게 강한 생명력과 번식력을 가지고 뻗어나갑니다. 그래서 여기서 포도나무에 열매를 딸 때 사실은 포도나무의 둥치는 보이지 않아요. 저 멀리 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딸 때 이 포도나무 원 둥치가 보이지 않으니까 가지가 저절로 이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가지는 포도나무의 원 둥치에 붙어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수액과 진액을 먹으면서 한 포도나무의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었기 때문에 포도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흔히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포도나무 원 둥치와 줄기가 떼어놓을 수 없는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또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이런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는 아주 기막힌 신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늘 경험하는 일 아닙니까. 자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했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 우리는 곧바로 그 사람을 칭찬하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덕을 높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격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이 그 사람이 직접 생산해 낸 것처럼 그 사람을 높이고 그 사람의 덕을 칭찬하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과 비교하면서 그 사람의 우월성을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마치 포도가지에 맺혀있는 열매들을 보면서 원 둥치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사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했을 때 그런 아름다운 인격적인 열매 삶의 아름다운 열매 그의 영적인 성숙과 아름다운 경건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예수그리스도께 접붙여져 그분과 맺고 있는 생명적인 관계에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우리는 항상 이 죄인들에게서 무엇인가 아름다운 형상이 발현된다면 그리고 죄인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는 거룩함의 열매가 맺힌다면 우리는 항상 그러한 생명을 그에게 주셔서 그러한 열매를 맺겠금 만들어 주신 연합된 예수님을 찬송하고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이 그것이 정말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종 이 본문은 잘못된 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해서 오해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포도나무요 우리가 그의 가지라는 사실을 잘못 해석함으로서 우리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인격이 변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서 포도나무에 가지가 원둥치에 붙어있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고 또 붙어있는 그것도 자신이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접붙여서 붙어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그분에게 붙어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화에 있어서 매우 관조적인 견해를 표명하는데 이 15장이 사용이 되고 시중에서도 저는 그런 책들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성화에 대한 사상을 잘못 해석 한 것입니다. 예수님 이 어떤 것을 비유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때에 그것은 그 비유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의미를 우리에게 적용하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아주 오래전에 어느 설교자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고 하는 것을 설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전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 소금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요.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소금의 특성을 이야기 하다가 마지막에 소금을 국에다가 넣어보십시오 모두 풀어지고 형체가 남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풀어지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형체가 남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무엇인가 지금 너무 많이 나간 것이지요.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소금의 비유는 썩는 것을 썩지 않게 하고 그것이 가장 썩는 것을 썩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 어떤 음식의 맛을 짜게 하는 일에 있어서는 소금을 제거해 놓고 어떤 것으로도 대체 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존재와 삶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부패를 방지하고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모든 맛들을 고르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지 물에 풀어서 그것이 녹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우리들이 해석할 때 항상 문맥에서 그리고 성경전체에서 교리적인 관찰을 가지고 그 것과 모순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의도하신대로 그 비유를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비유가 바로 여기에서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포도나무 가지와 포도나무의 관계를 우리와 관련해서 말씀하실 때 언급하시고 싶었던 핵심적인 진리는 포도나무 가지와 포도사이에는 생명적인 연합이 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어 했던 하나의 핵심입니다. 당시에는 이 포도나무를 그냥 기르는 것이 아니라 수확을 많이 맺기 위해서 접붙이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접붙일 때에는 이 포도나무 원둥치를 까고 그 속에 다른 포도나무가지를 넣고 묶어요. 그러면 신기하게 이것이 둘이 붙어서 그래서 수액을 빨아들이면서 하나의 나무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실 우리에게 너희는 포도나무가지요 나 예수는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마치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에게 침투해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신적 본질을 갖는 사람이 된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커다란 격차가 인간과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지만 포도나무 가지가 접붙여져서 하나의 나무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과 우리사이에 생명적인 연결이 있을 때 우리가 변하여 참 포도나무의 접붙여진 가지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을 그래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화의 많은 열매들이 원래 가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신 예수그리스도와의 신비한 관계를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15장에서 잘 사용되는 단어가 무엇이냐면 안 에라고 하는 단어 입니다. 어디 어디 속에 어디 어디 안에 이것이 바로 엔 희랍어라 엔 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아주 매우 신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안에 라는 말씀을 아주 많이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그런 놀라운 신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주 놀라운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음으로서 우리는 그런 열매를 맺기에 합당하지 않은데 그 신비한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예수님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열매들을 많이 맺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예수님사이에 있어야할 의존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리고 그 의존적인 관계를 통해서 아주 놀라운 생명의 능력 그리고 영적인 은혜가 함께 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적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사실을 모두 종합하고 보면 그러면 우리들이 회복해야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입니다. 그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적인 자원들이 주어지고 죄인인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어울리는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를 본 예수님의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마다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고 또 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게 되는 이러한 선교적인 효과들이 나타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만 하고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맺으셨던 아름다운 인격적인 열매 삶과 생활의 아름다운 열매를 우리는 맺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가셨어도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맺으셨던 아름다운 두 열매 당신의 인격적인 열매와 생활적인 열매들을 우리들에게 맺게 하시므로 서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마다 예수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셨을 때 당신에게 영적으로 접붙이 시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이 그 영적인 연결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흘러들어가겠금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생명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또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이런 생명을 함께 분여받은 지체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주님의 생명과 은혜가 충만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서 우리의 부패한 죄성들을 이기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조금씩 닮아가고 이기적인 마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자기사랑이 아니라 예수님 사랑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매일 매일 이끄시고 돌보시는 일들을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시고 제자들을 모든 진리로 가르치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하나 되도록 묶으시고 우리하나님을 보여주시고 참 인간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그런 일을 그대로 뒤잇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 우리에게 즉시 성령을 보내셔서 그래서 그 성령과의 아주 친밀한 교통 속에서 살게끔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져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하나 된 가운데 이 영적인 생명을 충만히 누리면서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생명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했더라면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다 주셨을 때에 처음사람 아담이 타락하고 범죄한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뒤로 물러서 타락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생명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것을 우리의 순종과 밀접하게 연관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미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지만 이 생명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생명의 은혜가 우리에게 풍성하게 역사하도록 그렇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의지적인 노력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풍성해지도록 우리의 의지와 은혜사이에 신비적인 연합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많은 열매를 맺으며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시고 영적인 생명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겠금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아마 이번 수련회에서도 여러분들이 경험하실수 있었을 겁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매우 무겁고 마음이 어두운 가운데 이렇게 수련회에 왔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후 오랫동안 여러분들이 계속해오던 불순종과 그리고 수시로 성령의 마음을 근심시켜드리는 일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잘못된 것인줄을 몰랐다가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나서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깊이 회개하고 또 반성하고 그 일을 버리겠노라고 다짐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임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거웠던 영혼의 짐들을 내려놓는 가벼움 들을 느끼게 된 것을 여러분들이 체험할 것 입니다. 실제로 행동에 옮긴 것도 아니고 마음속으로 순종하려고 작정만 해도 영혼의 그런 가벼움과 은혜가 있다면 실제로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혜는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생명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이 생명은 너무나 신비하기 때문에 그 생명을 충만히 받아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산 사람들은 감히 자기가 그런 삶을 살고 자기가 그런 열매를 맺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자신은 오히려 포도나무의 가지와 같이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에게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열매를 맺은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명적인 관계를 주신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생명적인 사역에 대해서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훌륭한 표징하나가 바로 경건의 열매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영향을 받고 또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의 중심이 쏟아져 주님께 내어놓아지고 우리의 마음을 토하며 주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거리감들이 사라지고 낯섬들이 사라져서 어저께 말씀드린 그 언약적인 사랑의 친밀함을 느끼게 하는 이 놀라운 비결 이것들을 통해서 이런 생명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진리를 발견했고 또 진리를 알아가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심취하는 은혜의 세계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죄 많은 세상에 살고 있고 매 순간 우리의 욕심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굳게 붙들려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다가도 그 은혜와 생명에서 멀어지면 하나님의 자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육신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능력으로 이런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속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지키기 어려운 그 모든 계명들 우리가 원수도 사랑하는 일이 우리에게 가능하겠어요? 일흔 번에 일곱 번이나 용서하는 일이 가능하겠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는 일이고 아니고 그냥 우리에게 해보신 말씀이고 될 수 있으면 그런 식으로 한번 살려고 노력을 해봐라 하고 하나님이 시범적으로 주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히 부어지지 않을 때에는 우리가 아무리 해봐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런 생명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원수와 나의 친구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 까지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나 자신에게서 생산되는 것이라면 친구와 원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겠지만 어차피 이 사랑과 자비와 긍휼 오래 참음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적인 은혜에 의하여 행사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원수와 친구사이의 문제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구원받을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당신을 따르던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죽으시는 것은 쉬운 일이였고 당신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자들을 위해 죽으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언젠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하나님께 부터 오는 충만한 생명과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기를 사용해서 냉방기를 틀어 시원하게도 하고 겨울이면 난방기를 틀어서 따뜻하게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음성을 크게 확대하기도 하고 불을 켜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게도 합니다. 다양한 많은 기구들이 있어 우리의 삶에 유익을 주지만 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전력입니다. 이것이 끊어지면 모든 것이 형식은 남아있지만 그것이 하고 있는 제대로 된 기능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로부터 받는 그 충만한 생명의 은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는 모든 아름다운 삶의 열매와 인격의 열매에 공급되는 전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 세상에서 나와 마음이 맞고 그리고 나와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만 만날 수 있고 또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주님을 의지할 필요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제가 결혼식에 주례 설 때마다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연애시절의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이고, 결혼한 다음에 사랑은 항상 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주님을 의지할 필요도 없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의 눈에 취해서 누군가에게 콩꺼플이 씌어서 뜨거운 연애에 돌입하게 되었을 때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디까? 물론 말로는 필요하다고 그러죠, 그런데 자동 이예요 자동 자동적으로 좋아하는 거예요. 별로 도움 필요 없어요. 그러나 결혼을 해서 살고 보면서 이 인간이 정말 흉악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그때에 이제 정신이 들면서 이제 이 사랑이 이상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게 되는 겁니다. 언젠가 우리 교역자중 하나가 팔짝팔짝 뛰면서 장가가게 되었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나이에 이제 선을 봐서 맘에 드는 자매를 만났으니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래서 얘야 좋니 ? 그러니까 예 너무 좋습니다. 좀 기다려라 그러니까 왜요 이제 며칠 있으면 불과 한두 달 되기 전에 두려움이 확 밀려오면서 내가 이 여자와 일평생을 살까 하는 공포를 느낄 때가 있을 거야 그랬더니 목사님 왜 그래요 한창 좋은데 겁주지 마세요. 그러더니 신혼여행을 갔다 왔어요. 신혼여행을 갔다 왔다고 인사를 왔어요. 인사를 하고 나서 둘이 있을 때 그러는 거예요 목사님 그때를 벌써 경험했어요. 왜 그러니까 신혼여행에 가서 이틀째인가 삼일 째 되었는데 다퉜데요.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이 여자와 일평생을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확 밀려오더래요. 그래서 내가 공포도 자주 경험하면 제법 견딜만하니 그러면서 보태는 말이 있습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주님이 있어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인격적인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 생각해 보세요. 미움이 있는 곳이 아니면 사랑이 드러날 수 없고, 분열이 있는 곳이 아니면 우리를 일치하게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드러내 보여줄수 없습니다. 의심이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보여줄 수 있고 그리고 오류가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진리는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가정에서나 특별히 교회에서나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예수님을 조금 사랑한다면 아마 여러분들은 미워하는 사람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을 것이고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관계를 맺기 싫어합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남을 용서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합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가서 함께 찢어지는 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무엇인가 사랑으로 일치되는 곳에 가서 자신도 그들과 하나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우리들이 진리의 맛을 조금이라도 보고나면 오류에 빠진 사람들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고 나와 똑같이 진리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유가 아닙니다. 조금 은혜를 받으면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정말 주님을 많이 사랑하면 오히려 미움이 있는 곳에 있을 때 거기에서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고 믿을 것이고 상처가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나를 통해 보여주게 하시려고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고 믿을 거야. 그리고 오류가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진리의 밝은 빛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게 하시려고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마음속으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만 지난겨울에 캄보디아에 선교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캄보디아에 가서 활동하고 있는 좋은 사역자들을 같이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밤늦도록 함께 토론을 하다가 선교사들의 의견들이 하나로 모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은 한국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목회를 배우다가 온 사람들이 아니고 젊은 날에 선교의 열정이 불타서 그래서 훈련을 받고 소명을 따라 선교지에 온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하고 선교할 줄은 아는데 그렇게 예수 믿은 사람들을 어떻게 잘 돌봐서 신실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우는 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들도 너무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교회에서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여기에도 한인교회들이 있고 선교사들이 한인교회 다니니까 그런 교회에서 목회를 잘 배우면 되지 않습니까. 하니까 그게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해도 너무 이건 아니다 라고 하는 것들이 교회 속에 많아서 별로 배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많은 불평들을 쏟아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스스로 담임목사가 되어서 원주민들을 데리고 목회를 하니까 사실은 그러수 있는 기회가 없지요 그러면서 저보고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캄보디아에 직접 오셔서 교회를 개척할 수는 없겠지만 부목사님 중에서 훌륭한 분 한사람 보내서 여기다가 교회를 번듯하게 세우면 우리들이 그 교회에 가서 그런 목회의 본질들을 배우고 싶습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생각을 좀 바꾸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많이 망가졌고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잘 희생해서 그렇지 못한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도록 여러분들이 이바지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니 모두 고개를 끄덕이면서 숙연해졌습니다.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주문이라는 것은 다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로 그런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생동안 하나님 믿으면서 살아도 우리가 받은 은혜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그런 환경과만 만나면서 신앙 생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시면 많이 주실수록 미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셔서 우리안에 주시는 이 생명의 은혜로 그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정하시면 인정하실수록 상처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은 결코 모를 용서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많이 주시면 많이 주실수록 오류에 빠진사람들과 붙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진리를 통해 그들이 오류에 빠진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주실수록 나쁜 사람들을 만나게 하셔서 정말 주님과 생명적인 교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은 정 반대의 상황들을 사용하셔서 자기 안에 있는 아주 아름다운 속성들을 드러내시면서 살게 해주시는데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서 사랑을 보여주기 보다는 미움이 있는 곳에서 미움을 보태어 그렇게 분열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이런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명이라고 할 때에 무엇인가 아주 영웅적이고 전사적인 삶에 대해서만 생각해요 선교지에 가서 장열하게 피 뿌리며 죽는 것, 아니면 밥을 굶으면서 그렇게 고생하며 황무지에 큰 교회를 세우는 것 , 아니면 죽이겠다고 핍박이 일어나는 그러한 현실속에서 끝까지 신앙을 파수하다가 사형을 당하는 그런 별로 현실적으로 일어나지도 않는 영웅적인 삶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적인 삶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부어진 이 생명적인 충만한 능력을 가지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많은 사람들과 만났을 때 오히려 용서를 분열이 많은 곳에 오히려 일치를 오류가 가득한 곳에 오히려 진리의 빛을 심어주는 그런 삶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일 정도의 전사적인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런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에게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충만한 생명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없이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고 이 모든 것을 이기면 나아갈 수 있는 생명의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시는 이유입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분열을 보태고 상처가 있는 곳에 소금을 뿌리고 오류가 있는 곳에 오히려 진리 때문에 교만해 진다면 우리는 정말 그분께로부터 오는 충만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열매가 얼마나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주님은 우리를 극상품의 포도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우리를 접붙여 그리스도의 가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맺은 열매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혹시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극상품의 포도열매를 맺게 하셨는데 우리는 오히려 미움이 있는 곳에서 다투고 상처가 있는 곳에서 더 큰 상처를 만들고 이러면서 나를 만나는 많은 사람들의 포악과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이런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한번 우리자신의 삶을 돌아봅시다.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좋은 사람만나고 좋은 교회 만나고 이러고 싶지 않아요? 나보다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항상 나는 용서받고 이해받고 용납되고 내가 분열을 일으키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일치를 도모하고 내가 오류에 빠지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진리로 나를 붙들어 주는 그러한 만나고 싶지 않으세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주시고 은혜의 불을 주시면 주실수록 우리들이 바라는 이러한 기대와는 정반대의 환경에 우리를 두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인격 속에서 깊이 우리를 변화시켜서 더불어 승화되기까지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그래서 당신의 사랑과 의로운 열매들을 드러내며 살게 하시는 그런 것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우리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을까요 교회는 포도원입니다. 그래서 이 포도원에 그런 열매가 가득 맺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우리의 그러한 삶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주님의 큰 영광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시 이 생명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이러한 열매 맺는 삶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7.교회에 은혜 늘 주신 것은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녹취자: 백지영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이사야서 61장은 첫째 날 저녁에 살펴 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노래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에 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될 전망을, 그리고 더 멀리는 신약시대에 이루어지게 될 그리스도 교회의 번영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61편에 보면 제일 먼저 이 시인이 하나님의 영이 내리셨는데, 이는 이런 기름을 부어 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고,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가까이 보면 이사야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성령 주신 의도를 뜻하는 것이지만, 좀 더 넓게 확장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실 때에 이런 영적인 은혜를 충만하게 주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더 멀리 보면 신약시대의 교회에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이 이루어지고 성령께서 친히 오셔서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변화시키셔서 신약시대의 교회를 만드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읽은 3절 본문은 우리에게 이런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부어주시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다만 바라보고 전망하였던 이 일들이 우주적으로 성취가 된 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의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충만하게 부어진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우리 각 사람들을 아주 탁월하게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전에는 하나님과 원수로 행하고 어디에 가든지 우리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우리를 구속해 주신 목적대로 살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 모든 죄에서 용서해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버려 우리와 화목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유업들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내주와 그리고 하나님의 큰 은혜의 역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유업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영적인 공동체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성령 받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을 포함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런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신 역사를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충만하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로 하여금 사람들을 세우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어떤 사람이냐 하면 훌륭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아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 짓밟히고 버림받고 망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름답게 고쳐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일들을 시온에서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분지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나라들을 향하여 거룩한 왕권을 행사하시는 곳입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우리들이 제일 먼저 알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성령을 부으신 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섬기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성령을 체험한 우리의 경험에 대해서 간증할 때에는 마치 우리가 체험한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내가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분투하여 얻은 전쟁의 노획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매우 특별히 사랑하신 증거가 바로 그런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하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성령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징이기도 하고 우리를 인정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인침이기도 합니다만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은혜를 자기만족적 영성으로 사용하도록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아닙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고 은혜를 주신 거기에는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이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성령을 주신 것에 담겨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을 섬기는 일이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섬기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쓸모없는 사람들을 이 성령 받은 공동체가 잘 세워서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낼 자로 인정받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체적으로 사람을 섬기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 그리고 근심하는 자,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고치셔서 그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만들어서 예전에는 쓸모없는 사람들이었고 좌절에 빠지고 슬퍼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악한 사람들이었으나, 성령 받은 공동체가 그들을 잘 세워서 그 쓸모없는 사람이 변하여 오늘 성경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자’라 하고 일컬음을 받도록 그를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성령을 주셔서 그 일을 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너무나 당연하다며 생각하며 받아들였지만 오늘 왜 그럴까 하고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두 번째 다루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둘째로, 왜 하나님께서는 슬픔에 빠지고 좌절하고 낙심한 그런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 하나님 앞에 쓸모없었던 사람들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당신의 교회에 성령을 부으셔야 했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당연히 사람이 고쳐지려면 성령이 역사해야 고쳐지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훌륭한 정답입니다. 정말 성령이 역사하시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도 기쁨의 사람으로 바뀔 수 있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좌절했던 사람들도 용기를 얻을 수 있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모두 망가졌다고 믿던 사람들이 그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바뀌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기 밖에 있는 많은 환경과 씨름하고 투쟁하면서도 좌절하고 주저앉았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성령은 고치시고 바꾸시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 주시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것과 함께 하나님이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이렇게 슬픔에 빠지고 좌절하여 근심하여 하나님 앞에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놀라운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하면 그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만이 그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설교하면서 계속 여러분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사랑의 특성이지요. 사랑은 관계적인 특성이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한 것들을 흘려보내는 성향이고 정신의 움직임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셨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직접 망가진 사람 하나 하나 하나를 고친다는 의미도 이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성령을 부어주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칠 뿐만 아니라 그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사랑의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이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을 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유통함으로써 그래서 영적으로 빈곤한 자가 없도록 그들을 부요케 하고 영적으로 모자라는 자들이 없도록 있는 자들이 그 모든 것들을 채워주어서 그래서 주님 앞에서 사람들을 세우는 이것이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증거들이 역사적으로 아주 분명하게 입증이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61장이 성취된 때의 사건이지요.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과 의미도 모르는 채 방황하고 있었고, 또 그분과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는 이단의 괴수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한 이단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를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실 때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복음으로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어둡던 눈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와 부활의 목적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마음은 깨뜨려져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했고, 나사렛 예수가 이단자의 괴수라고 믿었던 그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지성의 눈을 열어 주시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찬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직접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치신 수직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성령을 받은 이스라엘 공동체는 놀라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섬기게 되었고, 물질이 있는 사람은 그 모든 물질을 팔아서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쓸 것으로 하나님께 바쳤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모든 자연적인 재능과 그리고 영적인 은사들은 성도들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케 하는데 사용되었고, 그들끼리 나누는 사랑이 얼마나 돈독하고 아름다웠든지 그들이 모든 세상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는 십자가의 도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착한 공동체라는 것,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선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안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신약시대의 이처럼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신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수직적으로 고치려는 의도뿐 아니라, 그 성령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서로 교통하여 하나님의 선을 우리의 지체들에게 흘려보내고 유통하게 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하여 성령을 주심으로써 슬픈 자를 기쁜 자로, 그리고 낙심한 자를 위로받은 자로 변화시켜서, 쓸모없었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 중 은혜의 비밀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혜를 우리에게 충만히 주시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극복하고 싶지만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 잘못된 것인 줄 알고 거기에서 돌이켜 서고자 하지만 내 능력으로 돌이킬 수 없을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성령의 은혜를 구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성령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굽은 우리의 의지를 바르게 하고 연약한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의지를 강하게 불러 일으켜 은혜 받지 못했을 때는 순종할 수 없었던 우리를 순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실 때에는 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은혜를 받고, 이 성령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 변화 받게 하는데 그들을 하나님 앞에 용납되게 하는데 이바지 하도록 하나님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령이 아니면 교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성령의 기름부음을 한량없이 받으심으로 소통을 시작하셨고,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이 받을 뿐 아니라 그 사랑을 통해서 그 사랑을 많은 이 땅의 인간들을 섬겨서 쓸모없었던 사람들로 하여금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바꾸어 놓고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세 번째 성령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원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원리와 구별되고 달라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원리는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아마 모두 직장에 다니시거나 혹은 교회 말고도 또 다른 이 세상 사람들과의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의 움직이는 원리는 어떻습니까? 여기에는 유용성의 원리가 작용합니다. 직장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나가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직장을 나가겠다고 하면 회사에서 그를 꼭 붙들고 사정하며 못나가도록 그렇게 말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잘 했는데 회사가 서울에 있는 그 사람을 제주도로 발령을 내버렸답니다. 제주도에 매우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당신은 가서 거기서 근무를 해 달라 해서 승진을 시켜서 내려 보냈습니다. 회사에서 먼저 의향을 물어보았지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저는 가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가족과 떨어져서 주말부부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회사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저를 계속 쓰시려면 출퇴근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회사에서 공항 가까이에 집을 얻게 해 주고 그 다음에는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비행기타고 퇴근할 수 있도록 모든 비행기표를 끊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회사는 그렇게 대우가 달라집니다. 미국을 가면서 늘 느끼는 일인데 이런 유용성의 원리가 기가 막히게 적용되는 나라, 그래서 부강한 나라가 된 나라가 미국입니다. 거기에서는 어떤 직원이 비록 하급직원이라도 열심히 일해서 많은 성과를 내서 회사에 돈을 벌어 주면, 그 직원이 해외에 출장을 다닐 때 일등석을 타고 다니라고 이만한 쿠폰을 끊어줍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미국을 가는데 프리미엄 일등석 항공권이 1,020만원이예요. 그런 것을 쿠폰을 책으로 사서 한꺼번에 줘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원리가 바로 그런 유용성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정말 쓸모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든지 대접을 받고 환영을 받습니다. 반대로 쓸모없는 사람들은 늘 회사에 고통을 주고 정리하는 일 순위예요. 제발 나가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고 한 시대의 정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성령을 받았지만 가치관은 이 세상의 그러한 말하자면 유용성에 관한 유용성 주의가 자리를 잡아서 교회에 와서도 사람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정말 은혜 많이 받고 충성 많이 하는 저 사람은 어디 가면 안 되는데 그리고는 멀리 이사 갔는데도 고속버스 타고 다니라고 붙들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신통치 않아서 늘 교회에 와서 구역장 힘들게 하고, 교구 전도사 힘들게 하고, 목사 힘들게 하고, 매일 심방오라고 하면 딴 데는 이렇게 좋은 일이 있습니다. 오셔서 축복해 주시고 감사기도 해 주십시오 이러는데 이 사람은 심방 갔다고 하면 부부가 싸웠느니 누가 형무소에 갔느니 하는 이야기로 굉장히 스트레스 받는 일들만 일어나요 그러면 그 사람은 유용성에 있어서 별 볼 일이 없는 사람이예요. 교회에서 제껴 놓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신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번 피의 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몸이 외부로부터 상처를 입잖아요. 상처를 탁 입어서 찢어지기 시작하면 온 몸의 피들을 향해서 명령합니다. 그래서 지금 위급사황이다. 너는 빨리 달려가서 저쪽에 우리 백혈구 군대를 결집시켜라. 적혈구도 보내고 해 가지고 피를 막 쏟아내서 그래서 균이 못 들어오도록 하고 그리고 백혈구들이 모여서 들어오는 균들을 막 잡아먹고 싸우는 것이예요.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양쪽에 서로 죽은 시체들이 모여 있는데 그것이 의학적으로 고름이거든요 염증이라는 말이예요. 치열한 전쟁의 흔적이예요. 전사자들이예요. 그렇게 하면서 우리 몸을 보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교회에 성령을 충만히 주신 것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심방이 필요한 사람들은 와 달라는 이야기도 못하는 사람들이 심방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배워야 할 필요성조차도 못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진짜 섬겨야 할 사람들은 감히 도와달라고 요청하지도 못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살펴 그렇게 교회에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서 그래서 시온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대신 슬픔과 좌절에 빠진 사람들, 예루살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대신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흘러가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다시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쓸모없는 사람들이었으나 바로 이런 충만한 은혜로 말미암아서 변화시켜 아버지 앞에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 하나님의 성령을 당신의 교회에 부어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충만한 사랑이 내게 없었을 때에는 지식도, 성령의 은사도, 물질도, 그리고 용서도 모두 결코 누구에게도 흘러 갈 수 없는데, 하나님이 이런 성령을 부어 주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되어서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서, 그래서 내게 지식이 있으나 무지한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이 지식을 나누어 주어 그들도 빛 가운데 살게 하고 싶은 사모함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충만한 성령의 사랑이 있을 때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오히려 거기에서 힘든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를 따라서 연약한 지체들을 섬겨 그래서 그를 좌절하고 주저앉은 사람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사람으로 고칠 수 있는 도구가 되게끔 해 주셨다는 것에 대해서 감격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족할 때에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섬기도록 내게 맡겨주신 많은 연약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데, 내게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사람들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그리고 나는 왜 하필이면 저런 인간과 가정에서 만나고 교회에서 만나고 이웃에서 만나고 직장에서 만나서 이렇게 나의 기력을 쪽쪽 빨아먹고 그리고 피를 말리듯이 나를 힘들게 하는가 라고 하는 회의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뜻과도 배치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우리가 섬기도록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좋은 것들을 흘려보내어 그를 고치게 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런 소명과도 배치되는 것입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민족과 열방을 치유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하지요? 우리는 저런 구호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뭔가를 왕처럼 많이 받아서 사람들에게 동냥하듯이 던져 주어서 그래서 사람들을 고친다고 하는 그런 제왕적인 사고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주님이 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겠어요?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손가락으로 명령하시면 되었잖아요. 그런데 당신 자신이 충만한 성령을 받으신 분으로 오셔서 그래서 당신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을 끊임없이 흘려보내어 그들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치료하여 그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병든 자들을 고치고 치료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을 깨고 생명으로 충만한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매우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초대교회처럼 칭찬받는 선한 사람들이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그것은 결국은 우리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충만히 역사하셨을 때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분명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에 이 사랑은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인데 종종 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흉내 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 구르는 가치 없는 것들을 모조품으로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조품으로 만드는 것이 진품을 가져오는 것보다 더 많은 수고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모조품은 좋은 것을 모방하는 데서 모조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충만한 성령의 모조품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만족적’ 영성입니다. 이런 것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성령을 모방한 것 같고 성령의 역사인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자기만족을 위한 영성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는 항상 우리에게 사명을 줍니다.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 많이 자신을 희생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도록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것은 사실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한편으로는 은혜로운 기도이기도 하지만 무서운 기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하나님 앞에 구할 때에는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그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가지고 흘러가겠다고 하는 그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온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지만 거기에서 슬픔에 빠진 사람, 낙심하고 좌절한 사람은 아마 시온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고쳐서 기쁨의 화관을 씌워주고, 그런 사람들을 고쳐서 낙심하고 좌절한 데서 일어나 위로를 받고 그리하여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열매를 맺게 하는 백성들로 고치는 것,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는 우리가 달라고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제한으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지요? 여기에는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바 은혜를 올바르게 사용하면서 살아가는 실제의 삶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살아가는 삶이 성령을 주신 목적에 부합하는 삶이 될 때, 그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간절히 기도하는 그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성령을 자신에게 주신 그 목적과는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성령의 은혜를 부어달라고 하는 많은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기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주신 성령도 하나님께서 거두십니다. 성령을 완전히 거두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 풍성한 성령의 누림에서 우리를 제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모든 사람들이 한 지체로서 이렇게 함께 모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누리고 있는 성령의 그 충만한 은혜는 여러분 중 단 두 사람도 동일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성령을 근심케 함으로 잃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성령을 충만히 주셨지만 성령을 주신 목적대로 살지 아니함으로 서서히 서서히 고갈되어 가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충만한 은혜를 달라고 부르짖지만 이미 그의 마음 속에 그 성령을 부어주신 의도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진실성을 인정해 주시지 않음으로 성령의 은혜에서 결핍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이런 것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도 물론 경험했겠지만, 나태하게 살다가 말씀을 통해 깊이 깨닫고 자신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서 부족하지만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헌신하려고 애를 쓸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기쁨도 주시고 은혜도 주시고 성령의 큰 능력도 주시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구할 때에는 이 두 가지 조건들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그 은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이 모든 것들이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무엇이냐 하면 새로운 은혜를 구하기 전에 이미 주신 은혜가 아무리 조금 남았어도 그 남은 것만이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의도에 합당하도록 사용하려고 하는 실천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구하는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구하고, 찾고, 두드리도록, 구하는 것은 입으로 구하지요, 찾는 것은 눈으로 찾지요, 두드리는 것은 손으로 두드립니다. 그래서 성령을 구함에 있어서 우리의 전인격적인 삶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삶을 살면서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보다는 그렇게 살면서 많이 기도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은혜가 꼭 필요한 삶을 살면서 은혜를 달라고 조금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가 응답될 가능성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삶이 동반된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여기에서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바라보시는 시각은 우리들이 사람을 보는 시각과는 다르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 잘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 예루살렘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환호할 때에 슬픔에 잠긴 사람, 시온에서 모든 사람들이 비젼을 꿈꾸고 하나님 앞에 소망에 불 탈 때에 낙심하고 근심에 빠진 사람,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 앞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실 때 하나님이 더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9월 초에도 어느 교수님이 오셔서 우울증에 대해서 강의를 하시겠다고 하는데 관심 있는 가족들은 참석해 보십시오. 굉장히 우리에게 좌절을 주는 질병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우울증 같은 데 걸린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주위의 사람들의 많은 따뜻한 돌봄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 공동체에 교회나 가족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진실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한 공동체인지를 시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울증 걸린 사람 여러 사람 보내주시면 확실하게 증명이 되지요. 이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종 하나님이 정말 놀라운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정말 희망이 없어 보이던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을 하나님이 교회에서 고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약물 하나에 의해서 치료되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가벼운 증상이라면 모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도하라 막 이야기하는데 그것 하나에 의해서 고쳐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사랑은 그 모든 것을 고치는 아주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깊은 우울증에 걸렸다가 치유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이 두 가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의 은혜와 그리고 누군가 그 곁에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면서 끝까지 참고 사랑해 준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요. 드물긴 하지만 그런 속에서 아주 심각했던 사람들이 나음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증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끊임없이 소통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때는 무한한 에너지를 나에게서 빼앗아 갑니다. 가족들 중 그런 사람이 있는 분들은 아주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시온에 하나님이 성령의 충만한 기름을 부어주신 것은 바로 거기에서 이렇게 슬픔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좌절하고 낙심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성령의 은혜를 주셨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보기에는 그런 사람들이 쓸모없는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착한 집안에 태어나서 선하게 살고 은혜 생활 잘 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종자가 나와 다른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쓸모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하찮았던 인간들, 버림받았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고침을 받고 예전에는 무익했으나 이제는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지체들이 될 때, 그때에 그들을 통해서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은 매우 큰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러한 종류의 윤리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공동체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충만한 은혜와 사랑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 사랑부가 참 소중하다고 생각하는데,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폐증이나 이런 증상이 있는 자녀들이 어디 오갈 데가 없어서 서 너 명씩 모아놓고 시작한 것이 사랑부였습니다. 그런데 제법 지금은 점점 많이 모이지요. 그런데 그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증상에 따라 좀 다르지만 쉬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한 아이에게 선생님 하나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가서 하루만 봉사해 보면 “야, 이것은 내 분량이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들을 잘 섬기면서 받는 놀라운 은혜는 그렇게 어쩌다가 한 번 가 가지고 자선하듯이 도와주는 사람들에게는 경험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놀라운 은혜의 경험이 그렇게 좌절하고, 하나님 앞에 상처 받고, 그리고 마음에 병든 그런 사람들을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놀라운 성령의 은혜는 해 본 사람들이 아니면 모릅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일들을 사람들이 기쁨으로 봉사하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을 성령으로 세우시는 원리인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교회가,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정이 정말 이런 가정입니까? 슬퍼하는 사람들이 와서 기쁨의 화관을 쓰게 되는 곳, 낙심하고 좌절한 사람들이 와서 여러분 때문에 오히려 위로와 용기를 얻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그런 공동체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 중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주님이 우리에게 아주 많은 것을 주셔서 후히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은혜, 성령의 충만한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슬픔에 빠진 사람, 좌절한 사람, 정신적인 어려움이 있는 사람, 물질이 없는 사람, 이런 저런 이유로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좌절하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시온에서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다시 힘주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으로 교통하면서 그들에게 흘러가 그들을 유익하게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래서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은 못 받은 사람을 섬겨야 하고, 상처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은 아직 치료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물질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겨야 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시녀처럼 봉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치료하고, 회복해서 쓸모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들로 세움 받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이제껏 주셨고, 지금도 남아 있고, 앞으로도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 세상을 위한 사랑의 한 목적을 위해 부르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숙연해 지게 됩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그것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행복 안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은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은 자기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행복 안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다른 사람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자본주의적이고 소비주의적인 관점에서 은혜를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복음적이고 그리스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주신 경륜을 생각합시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기도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충분합니다. 주님이 제게 주신 모든 은혜와 그리고 모든 혜택과 배려가 충분합니다. 이제 저 자신을 위해서는 그만 주셔도 됩니다. 주님이 이미 제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슬픔에 빠진 자들, 좌절한 자들,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자들, 상처받은 자들을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 제게 은혜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버거워하는 그 사람도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사랑으로 품었을 사람들이고, 심지어 제게 상처의 칼을 들이댄 사람도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그 칼에 주님 찔리시면서도 끌어안았을 사람들입니다. 아마 제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우리 구역에 있는 이상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 우울증에 걸려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좌절에 빠져서 부정적인 생각만 하는 사람들을 귀찮은 양떼라고 생각하지 않으셨겠지요.” 오리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 안에서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 알의 밀알로 썩는 삶이고, 나는 죽으나 나의 죽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산다면 나는 거기에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우리가 만약에 이런 사랑으로 끌어안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성도들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핏기 잃은 얼굴로 유리하고 방황하며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은혜에서 미끄러진 것이 그들의 마음의 강퍅함 때문이요,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 때문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도 우리가 눈물로,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 남아 있어서 재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기쁨을 근심대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며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일 하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셨고 말씀의 은혜를 주셔서 변화 받고 하나님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한 번 자기를 버리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주셨던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가족들에게 흘러가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용서가 있는 복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