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에 관하여
(2019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19년 11월 24일 – 12월 29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0년 02월 03일
목 차
설교 프레임
1. 제사보다 먼저 할 일 (마 5:23-24) 2019.11.24. 주일오전설교 1
2.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 (요일 3:13-14) 2019.12.01. 주일오전설교 11
3. 목숨을 버린 사랑 (요일 3:15-16) 2019.12.08. 주일오전설교 22
4.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 (요일 4:20-21) 2019.12.15. 주일오전설교 32
5. 미움의 죄를 끊으라 (골 3:13-14) 2019.12.22. 주일오전설교 41
6. 사랑으로 평강을 누림 (골 3:15) 2019.12.29. 주일오전설교 49
<설교 프레임>
미움에 관하여1 2019. 11. 24 주일 낮 예배
< 제사보다 먼저 할 일 >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I. 본문해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생활에 대한 가르침이다.
모세의 율법(律法)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아주셔야 했다.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 중 여섯 번째 계명인데,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것으로서는 두 번째 계명이다(출 20:13).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인이 육신을 죽이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뿌리는 미움(hatred)이라는 가르침이었다.
형제에게 욕하는 자가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은 그 행위가 지옥에 가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향적으로 그런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입증한다는 뜻이다.
II. 제사보다 먼저 할 일
하나님과의 교제(交際)가 끊어질 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미움의 죄는 습관적인 제사 행위로써는 해결될 수 없다.
A. 생각함
제사는 희생 자체가 아니라 생각나게 하는 가르침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 5:23)
제사는 불결한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로 나아가게 한다.
죄 사함을 통해 용서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 된다.
여기서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은 깨달음 없이 제사를 드리던 당시의 현실을 보여준다.
제사에 깨달음이 없다면 그저 짐승을 죽이는 행위다.
하나님은 이런 제사를 싫어하실 뿐 아니라 모독으로 여기신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
이는 제사드릴 때마다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깨닫고 삶을 돌이켜야 함을 보여준다.
예배에 생각하는 기능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배드릴 때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지나 않은지를 생각하라.
B. 화목함
헌제자는 최선의 제물을 드릴 뿐 아니라 자신을 드려야 한다.
예배 행위는 반드시 사람들과의 관계를 묻는다.
제사를 통해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은 은혜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 5:23)
이것은 과실상계에 의한 자기 죄의 합리화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면 다시 화목해야 한다.
형제와의 화목이 깨진 것은 대부분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a. 영원(永遠)에 대한 무관심 b. 이기심(利己心) c. 교만(superbia)
이기심(利己心)은 하나님 사랑에 역행하는 것이며 여기서 배려(配慮)가 없는 행동이 나온다.
한 신자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올 때 그는 자신의 전(全) 존재와 이제까지의 삶을 모두 갖고 나아오는 것이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따라서 예배는 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관계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힘을 가지고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불결하다는 신전의식(神前意識)이 없는 예배의 습관화가 영적 변화를 가로막는다.
그것이 생각났다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화목하기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예배행위(礼拝行爲)는 진실하지 않다.
C. 제사함
“화목하고”는 형제들과 다시 사랑(love)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4)
성경에서는 세 가지 대상에 대한 화목(和睦)을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 제물 드림으로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돌이키게 한다(히 2:15). 이는 속제를 통해 이뤄진다.
인간과 인간: 인간 사이의 온전한 사랑의 교제를 이룬 상태로서 구속을 통해 주어진다(마 5:24, 고전 7:11).
인간과 자연: 탄식하던 피조물이(롬 8:22), 구속을 통해 화목이 회복되어 양과 표범, 암소와 곰, 아이와 독사 사이에 대적과 해(害)함이 사라진다(사 11:6-8).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본래의 모습이다. 일치와 조화, 균정(均整)과 절제 속에서 서로 때문에 만족한 상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화목의 완전한 완성은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화목을 세계 속에서 확장해 가야 한다.
인류는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23)로 여기는 사랑의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그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하셨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 형제들 안에서 먼저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
III. 적용과 결론
신자 안에 남아있는 죄 때문에 불화가 생긴다. 영원에 대한 무관심, 이기심,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교만 때문이다.
불화하게 될 때마다 사랑의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미움에 관하여2 2019. 12. 1 주일 낮 예배
<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 >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3-14)
I. 본문해설
다수의 무리가 교회에서 떨어져나가 그릇된 교훈에 빠진 때였다.
이것을 상기시키며 구원의 실제적인 증거가 형제 사랑임을 교훈한다.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다.
II.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
믿음으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는 사랑이다.
미움이 무엇이며 그것이 왜 큰 죄인지 알기 위해서는 생명과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A.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자신을 지탱하고, 보호하고, 개체를 번식하는 힘이다.
육적 생명은 자신을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존재이게 하는 힘이다.
생명에는 ‘창조된 생명’(vita creata)과 ‘창조되지 않은 생명’(vita increata)이 있다.
창조된 생명에는 육체적 생명(physical life)과 영적 생명(spiritual life)이 있다.
타락된 한 인간은 모두 영적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태어난다.
영적 생명은 영혼이 올바르게 기능하게 한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구원이란 인간의 영혼이 영(靈)이신 하나님과 연합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영생’(永生)이다.
영적 생명은 자신이 잘 살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게 한다.
따라서 구원 받은 신자의 가장 뚜렷한 표(摽)는 사랑(love)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B.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love)은 어떤 대상에게 고착(固着)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 또는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것을 심화하려는 마음과 정신의 지속적인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없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형제를 사랑할 수 없다.
그 사랑의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기 위함이다.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다.
C. 미움이란 무엇인가?
미움(hatred)은 즐거워해야 할 대상을 마음으로 싫어하는 것이다.
관계를 맺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관계를 파괴하려는 마음과 정신의 지속적인 움직임이다.
미움은 하나님 사랑의 결핍 때문이다. 이는 곧 은혜의 결핍이다.
이때 신자는 상대의 아름다움 보다는 추함에 더 크게 정동된다.
미움은 사랑의 결핍이며 죄의 결과다. 미움은 궁극적으로 비존재(非存在)를 갈망한다.
미움은 자기애(自己愛)에서 온다.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보다, 싫어하는 자신의 욕망을 더 따르기 때문이다.
형제를 주심은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교회를 만드시기 위함이다. 이는 성취될 하나님 나라를 보여준다.
따라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그를 한 몸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증거다. 왜냐하면 그 생명이 있다면 사랑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움은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한 인간은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욱 행복하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한다.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거나 거스르는 것이다.
은혜를 받으라. 미움으로부터 돌이켜 서로 사랑하라.
미움에 관하여3 2019. 12. 8 주일 낮 예배
< 목숨을 버린 사랑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5-16상)
I. 본문해설
다른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영혼의 생명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구원 받고 성화(聖化)된 증거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사랑이다. 은혜(恩惠)는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생명이 없거나 은혜가 부족한 것이다.
신자의 본분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II. 목숨을 버린 사랑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게끔 나타났다. 이는 감각에 호소하여 누구나 쉽게 믿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A. 우리를 위한 사랑
첫째로, 그 사랑은 “우리를 위한”(hyper hemon) 사랑이었다. 우리를 구원하신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으니 그리스도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상)
우리가 어떠한 상태였기에 구원하셔야 했나? 생명(生命)이 없고 사랑(love)이 없었으니, 이는 비참한 삶을 살게 했다.
우리 스스로 자초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서 “우리를 위한”(for us)이라는 말은 세 가지 뜻이 있다.
a. 이익(利益): 구원과 행복
b. 대신(代身): 속죄와 용서
c. 대표(代表): 대속과 전가
이는 하나님의 박애적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죄(罪)는 이기적 자신을 위하는 것이고 사랑(love)은 진정한 자기를 위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자기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기 떄문이다. 반면에,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생명의 근원을 가진 분은 자기 밖에 계시기에 자기사랑은 사망이다. 그리고 이것은 참된 자기사랑이 아니라 자기파괴일 뿐이다.” (KNJ 私譯),『요한복음 강해』123.5
이 사랑은 질서다. 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는 질서다.
이 사랑으로 돌아가야 행복한데 인간에게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
그런 상태에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B. 십자가의 죽음
둘째로,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나타났다.
그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은 궁극적으로 죽으시기 위함이었다.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인을 위한 대신적(代身的) 죽음이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끔찍함은 인류의 죄(罪)의 크기를 보여준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류와 사회의 유일한 희망임을 보여준다.
변천하는 세상 속에서 희망은 오직 십자가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C. 그 사랑을 알라
셋째로, 우리는 일평생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상)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에서 “이로써”(en touto)는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가리킨다.
사랑은 이 세상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랑이 있으나, 대부분 하나님 사랑의 그릇된 모사(模寫)일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극치를 이룬다.
그 사랑이 태양이라면 다른 사랑은 그것 때문에 빛나는 별들이다.
형제를 사랑하시고 미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그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라.
그 사랑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셨다. 인생의 모든 길은 그 사랑을 아는 데 있다. 그 사랑을 안 자가 사랑한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나타났다.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미움에 관하여4 2019. 12. 15 주일 낮 예배
<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I. 본문해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이는 사랑의 동기가 우리 자신에게 비롯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인류에게 참된 사랑이 두 번 주어졌다.
첫 아담: 본성 안에 사랑을 주셨으나 타락했다.
둘째 아담: 새 생명을 주심으로 사랑하게 하셨다.
II.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
당시 사람들은 믿음의 증거를 율법적 행위(막 10:19-20)나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찾았다(마 3:9).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증거를 사랑이라고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A. 사랑의 두 지평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두 가지로 제시된다.
하나님 자신의 사랑(agape): 삼위일체의 사랑으로서 모든 사랑의 원천(原泉)이다.
그 사랑에 반응한 사랑(caritas):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생겨나게 된 지순(至純)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두 사랑은 하나가 되었다.
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시작된다. 십자가의 복음(福音)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긴다.
a. 죄를 깨달음: 율법(律法)
b. 죄를 슬퍼함: 십자가(十字架)
c. 죄를 떠나감: 믿음(信仰)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죄 지은 것을 참회한다. 용서 받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구원은 죄인을 용서하셔서 다시 교제 속에 들어오게 하시는 것이다. 두 지평의 사랑이 융합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B. 두 지평이 하나임
구원 받음으로 두 지평은 하나가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한다.
a. 하나님을 사랑함: 순수한 영(靈).
b. 사람을 사랑함: 하나님의 형상(形狀). 전인을 사랑함.
하나님은 오직 자기 사랑으로 영원히 만족하고 기뻐하신다.
인간이 자기사랑으로는 영원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당신 안에 돌아오게 하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 안에서만 인간은 참으로 행복하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이것은 정신이 상승(上昇)하는 효과를 준다. 그 사랑 때문에 존재와 가치의 질서를 깨닫는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하셔서 온 인류를 한 사랑의 가족으로 만드신다. 보이는 형제들과의 관계는 그 우주적 사랑의 시작이다.
미움은 이런 우주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깨뜨리고 이기심(利己心)을 따르는 것이다. 그는 반드시 불행해진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 안에서 행복을 누린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미움은 자기사랑이다. 자기사랑은 자기를 찢어지게 한다.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다. 행복하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복한 자가 되라. 용서하고 사랑하라.
미움에 관하여5 2019. 12. 22 주일 낮 예배
< 미움의 죄를 끊으라 >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
I. 본문해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온 인류가 당신의 우주적 사랑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이 일을 위해 죽었던 영혼을 살리셨다.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새 생명을 주셨다. 따라서 미움은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에 대한 반역이다.
II. 미움의 죄를 끊으라
골로새서의 주제는 온 우주의 근원이며 통치주이신 그리스도시다.
세계와 그리스도, 교회와 구원에 관한 도리(道理)들을 설명한 후 실제적인 삶에 대해 교훈한다.
그토록 큰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 미워할 수 있기에 구체적으로 교훈한다.
A. 용납하라
첫째로, 서로 용납해야 한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골 3:13)
“불만”(mompen)은 “비난, 불평, 다툼, 혐의”를 뜻한다. “서로 용납하여…”(anekomenoi allelon)는 “서로 참으면서…”라는 뜻이다.
“참는다”는 것은 어떤 충동이나 감정 등을 억누르는 것이다. 이는 형제와의 사랑(love)의 관계를 잃지 않기 위함이다. 관계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어려움을 견디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전개되진 않는다. 매일 우리를 괴롭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마 6:34).
신자들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다툼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것이 신앙의 근본적 진리에 관한 것이 아닌 한, 서로 용납해야 한다. 사랑으로 인내(忍耐)해야 한다.
a.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 때문에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b. 그리스도께서 참으셨기 때문에
“…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신앙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다. 진리를 아는 자는 사랑을 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하라.
B. 용서하라
둘째로, 서로 용서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두 섬김을 주셨다.
a. 나눔(sharing): 육체를 위한 나눔
b. 용서(forgiving): 영혼을 위한 나눔
용서는 “자신에게 지은 죄나 잘못을 꾸짖지 않고 덮어주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온다.
용서는 힘든 것이다. 자신에게 지은 죄(罪)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본성에 어긋난다. 때로는 자기 이익과 공정에도 어긋난다.
우리가 서로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알아가게 하셨다.
하나님께 받은 용서는 감격적이다. 그러나 빨리 잊혀진다. 경건 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반복적 경험이다.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사랑 안에 살지 않을 때 용서는 어렵다.
미움을 통해서 십자가 사랑에서 떠나있는 자신을 보게 하신다. 용서를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하신다.
허물이 없는 형제가 없고 자신도 완전하지 않다. 미워할 일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도 용서 받아야 한다.
용서는 끊어질 사랑의 관계를 이어지게 한다. 사랑을 심화시킨다.
C. 사랑하라
셋째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용서는 단지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 3:14)
용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기 위함이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그 사랑을 세상에 확장하기 위함이다.
미움은 상대방을 고통(苦痛)으로 느끼는 것이고 사랑은 기쁨(delight)으로 여기는 것이다.
미움은 배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랑은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신자의 사랑은 성령(聖靈)의 작용이다. 미워하는 마음은 성령이 슬퍼하시나 사랑하는 마음은 기뻐하신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여기서 “이 모든 것들”은 앞에서 언급된 덕(德)들, 곧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을 가리킨다.
이 모든 덕(德)들을 단단히 결합시켜 온전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다른 사람을 인내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그 위에 사랑을 더하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희생하셨는지를 생각하라. 사랑은 희생이다.
III. 적용과 결론
미움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반역이며, 선(善)을 등지는 것이다.
미움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른 덕들을 부끄럽게 한다. 결코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지 못한다.
미움은 우리의 영혼을 얽어매고 있는 사슬과 같다. 미워하는 자에게는 자유가 없다. 그것은 성령을 근심케 한다.
이제 미움의 죄를 끊어버리자.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자.
미움에 관하여6(끝) 2019. 12. 29 주일 낮 예배
< 사랑으로 평강을 누림 >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I. 본문해설
하나님은 사랑하며 살게 하셨다. 미움은 그 계획에 대한 반역이다.
우리가 형제들에 대해 참음과 용서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내게 악을 행한 형제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이유가 있다.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기 위함이다.
II. 사랑으로 평강을 누림
인간의 불행은 사랑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A. 평강을 위한 부르심
구원 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하여 한 몸을 이룬다. 한 몸인 교회는 평강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골 3:15)
여기서 “평강”(eirene)은 “평화, 안녕, 화목”을 뜻한다. 구약성경의 “샬롬”(shalom)을 배경으로 한다.
일치(一致):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뜻에 일치함
안녕(安寧): 그 사랑의 질서 안에서 행복을 누림
한 사람을 구원하실 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신다. 모든 지체들과 한 몸(body)을 이루게 하신다.
신자는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구원하셨으나 또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신자는 한 몸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 서로 염려하고 함께 아픔을 느껴야 한다.
평강을 잃은 삶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와 관계를 맺은 다른 사람들도 불행하게 한다.
진정한 사랑은 형제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안타까워하게 한다. 모든 지체들의 평강을 원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 11:28-29)
교회는 자신이 먼저 사랑 안에서 평강(平康)을 누리고 모든 사람들을 그 안으로 불러들이도록 부름을 받았다.
인류를 위한 평강은 교회에서 시작되고 교회의 평강은 신자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 3:15)
여기서 “주장하게”(brabeueto)라는 단어는 “심판자로서 행동하게, 통치하게, 지배하게”라는 의미다.
미움은 먼저 교회의 지체들과의 평화(平和)를 해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반역이다.
미워하는 자는 행복할 수 없으며 이웃은 고통을 받는다. 그는 결코 생명(生命)의 전달자가 되지 못한다.
미워하는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 그는 성령을 슬프게 하는 자다.
B. 마음에 임한 평강
교회는 평강을 위해 부름(calling)을 받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평강은 먼저 마음에 임한다. 그것은 성령의 은혜의 작용이다.
1. 그리스도를 통함
첫째로, 참된 평강은 오직 그리스도(Christ)를 통해 온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화목(和睦)케 하시는 능력 때문이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화목의 반대는 “원수됨”(being enemy)이다. 화목은 사랑에서 시작되고 원수됨은 미움에서 비롯된다. 화목은 평강의 열매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원수된 것을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미움은 구원(救援)을 욕되게 한다.
2. 마음에 주심
둘째로, 평강은 먼저 신자의 마음(heart)에 주어진다.
우리가 때로는 평강이 주어지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너무 초월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간절히 기도하는 신자의 마음에 평강을 주신다. 이것은 기도 응답의 가장 중요한 표지다.
하나님께 바쳐진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린다. 사람들과 평화함으로 안식을 얻는다.
먼저 자신의 마음 안에서 평강을 누리라. 영혼이 육체를 다스리게 하라. 신앙과 이성(理性)이 육체와 욕심을 다스리게 하라.
불변하는 것들에 마음을 고정하고 잠세적인 것들에 요동치 말라.
결코 헛된 생각이나 욕망(慾望)이 마음을 지배하게 하지 말라.
마음 전체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게 하라. 행복이 거기서 비롯된다. 남을 미워하면 평강이 없다.
III. 적용과 결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평강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위해서였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평강이 있으나 미워하는 자에게 갈등과 고통이 있다. 끊임없는 분쟁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기억하라.
미움에 관하여 (2019.11.24._주일오전 1)
1. 제사보다 먼저 할 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 중에 있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와 그 백성들의 생활에 대해 가르침을 적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생각은 매우 육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오해의 한복판에는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이제껏 해석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율법에 대한 해석을 올바로 바로 잡아주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이 계명을 그냥 문자 그대로만 이해했습니다. 십계명 중의 여섯 번째 계명이고, 사람과의 관계를 규율하는 계명 중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다음으로 나오는 두 번째 계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살인의 심리적인 뿌리를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살인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 누구에게나 살인의 뿌리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움의 문제였습니다. 이 미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누구도 이렇게 화목을 깨뜨리고 형제에 대해서 함부로 대하는 이러한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II. 제사보다 먼저 할 일
당시 제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종교적인 것이었고, 가장 신성한 영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사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A. 생각함
그 첫 번째가 바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사는 희생하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 제사의 제도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사가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결정적인 기능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생각나거든”이라는 일종의 가정법을 쓰신 이유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는 드리지만 얼마나 깨달음이 없이 제사를 드리고 있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지만 만약에 생각이 없이 제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애먼 짐승을 죽이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모욕으로 여기기까지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1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많은 사람이 제사를 드리러 성전으로 당신을 경배하기 위해 오지만 당신은 그 모든 수많은 짐승들을 죽이는 제사와 피에 이미 질력이 났고, 그리고 하나님의 집을 찾지만 그것은 겨우 마당만 밟고 지나갈 뿐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런 모든 종교적인 실천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제사 드릴 때마다 무엇인가 하나님이 깨닫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육학적으로 이 제사 제도는 실연식 교육법입니다. 즉, 실제적인 역할 속에 거기에 메시지를 담아서 그 행위를 할 때마다 어떤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이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제사제도를 기억해 보십시오. 죄인이 흠 없는 짐승을 선택해 가지고 성전에 옵니다. 제사장의 도움을 받아서 결국은 그 짐승을 제사로 드립니다. 드리기 전 이 짐승을 죽이는 일이 먼저 있고, 거기에서 온갖 피와 배설물들이 쏟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단에 올려놓고 자신의 죄를 거기에 전가시킨 가운데 하나님 앞에 그 죽임을 당한 제물을 하나님 앞에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들리는 메시지는 그냥 소리로 들릴 뿐이지만 이 실연식 교육법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전 감각적인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제사를 제대로 드린다면 그 제사 드리는 현장은 죄인의 통절한 회개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생각하는 바가 없다면 아마 지루하게 짐승이 죽고, 피를 흘리고, 각이 떠지고, 불태워지는 광경을 지켜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을 죽이는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단번에 자기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드리는 자기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제물로 당신 자신을 영원히 단번에 바쳐지신 제사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화 구경 갈 때에는 15분전에 도착을 해서 표도 끊고 입장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예배당에는 늦기가 일쑤입니다. 예배당에 좀 일찍 들어온 사람들은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이 은혜 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함에도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드디어 찬송을 부르는 시간이 됩니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이야기할 때에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시끄러울 정도로 큰 소리로 떠들던 사람들이 찬송 시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찬송을 하지 않습니다. 모기만한 소리로 찬송을 하거나 아예 어떤 사람은 무슨 생각이 있는지 자기 입술을 두 지퍼로 잠근 듯이 입을 꼭 다물고 화난 얼굴로 찬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자기가 왜 여기에 있는지, 찬송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누구시며, 찬송하고 있는 자기는 누구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는 예배의 극치는 설교 시간입니다. 엎드려 자거나 아니면 졸거나 쓸데없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거나 설교자를 응시하고 있으나 생각은 딴 데 있는 사람들, 예배가 끝나고 나면 예배자들의 절반은 오늘 설교가 구약 성경에서 설교된 것인지 신약 성경에서 설교된 것인지조차도 기억이 안 나도록 그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결국은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씨앗이 길가에 돌짝 밭에, 가시나무 덜기 사이에, 옥토에 뿌려졌지만 똑같은 씨앗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뒀고 나머지는 말라서 없어지거나 아예 뿌리를 내리지 못하거나 혹은 영양실조로 죽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에 지성을 부지런하게 작용시켜서 그 말씀과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묶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일어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고,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침묵 속에서 혹은 무관심한 가운데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마지막에 찬송을 부른 후 축도를 받고 나갈 때 올 때는 그렇게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이 갈 때는 왜 그렇게 급할까요? 무슨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길래 앞에 사람 어깨를 밀치면서 단숨에 쏟아져 내려갑니다. 그들이 교회의 계단을 밟을 때 그 계단에는 주일의 햇빛이 아니라 공휴일의 햇빛이 비취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확신하며 말합니다. 거기 하나님 안계십니다. 헛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성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염려 시리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하여 보라”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고”에서 뜻은 ‘디아노이아’ 곧 지성입니다. 여러분들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생각하라, 잊지 말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수없이 나오는 이 성경구절은 지성의 헌신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제국의 백성들이고, 어느 날 황제가 여러분들을 자기의 황궁으로 초청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복을 갖춰 입고 황제 앞으로 나아갔고 예를 따라서 여러 번 엎드려 경배를 드린 후 드디어 독대하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고 있고 이야기가 약간 길어졌습니다. 그때 만약에 여러분들이 정신 줄을 놓고 딴 생각을 하고 있거나 핸드폰을 검색하거나 혹은 졸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수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없이 황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황제의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황제의 권위를 합해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오늘 피었다 사라지는 들풀과 같을 뿐입니다.
그런 태도로 예배를 드리고, 생각하는 것 없이 예배를 마치고 나니까 당연히 생각 없는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곤고했던 사람들은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도 곤고하고, 마음이 괴로웠던 사람은 예배드린 것이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그는 무엇 때문에 예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단지 자기가 예배하였다는 위로를 얻기 위해서 예배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헌신은 아닙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아서 행복하십니까? 생각 없이 예배드리고, 생각 없이 살아서 행복합니까? 그렇게 지성을 헌신하지 않고 편하게 사니까 즐거웠냐고 묻는 것입니다. 물론 먹고 입고 마시고 쾌락을 즐기는 일과 관련 되었을 때에는 여러분들은 전혀 생각이 없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빠르게 머리를 회전하고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육의 생각이고 마지막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사를 드릴 때 그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가 생각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고, 그 관계 안에서 자기가 화목을 해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들과 화목을 이루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과의 화목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그들의 죄와 허물을 말하고, 그들에 관해 뒷 담화를 할 때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청산유수 같이 말이 쏟아져 나오지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거의 벙어리가 됩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의 그 사람을 능가하지도 못하고 못 미치지도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세상에서 권력을 누리고 부모의 후광을 입고 제물을 가지고 있는 것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여러분들이 어떤 예배자인가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소한 예배자이면 여러분은 결코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예배에 생각하는 기능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자신과 하나님과 관계가 어떤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관계를 고칠 때 거기에서 새로운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 새로운 삶, 그리고 새로운 인생관이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 세상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생명과 능력을 공급 받으며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이 말씀을 듣고 먼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형제들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그 화목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자각하며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화목함
두 번째는 화목함입니다. 헌제자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 아니라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참된 예배의 행위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지를 깨닫게 만들고, 그 깨달음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고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 용서 받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은혜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소위 과실 산계에 의한 자기 합리화의 여지를 제거해 버립니다. 즉, ‘나는 잘못했지만 저 사람도 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니 이제 우리는 어차피 비긴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 나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신앙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이다’라고 하는 말은 서로 연결을 지을 상대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내게 어떻게 했든지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가 나에게 많이 잘못했어도 그것 생각하지 말고, 자기가 잘못한 일을 생각하고 용서를 빌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형제들 안에서 화목한 것을 강조하시는 것일까요?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인류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수많은 인류가 살았고 또 지금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사람은 한 사람 아담 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그의 신체의 일부를 취하여 만드셨고, 이후의 사람은 두 사람이 부부의 연합을 통해서 자녀들을 생산하게 만드셨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온 인류를 하나의 몸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고 이 몸을 깨뜨리고 찢어버렸습니다. 결국은 사랑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깨졌고, 이후에 태어난 자녀들은 살인을 자행하게 되었고, 이후로도 인류의 역사에서 이 끔찍한 살인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가지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신학적인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죄 때문에 찢었던 그 몸을 당신이 한 몸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이번에는 당신 스스로 당신의 몸을 찢으시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류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화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제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화목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그렇고 그런 사회,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분쟁하고 헐뜯고 그렇게 다툼이 가득한 세상이 우리들이 보는 세상이었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들 하나하나를 불러 당신의 몸의 일부를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당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교회라는 기관을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 그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랑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고, 한 몸처럼 살아가는 것을 이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우리가 보지 못한 새로운 사회가 여기 있구나 생각하게 하시고, 이들이 이렇게 서로를 질서 있게 사랑하고, 서로를 향하여 오래참고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이 아름다운 삶, 행복한 인생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그 답을 하나님에게서 찾게 하기 위하여 교회를 이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구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며 화목하게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훌륭한 섬김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가장 평화로워지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화목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오해를 받고 혹은 핍박을 받고, 많은 환란과 시련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 사람의 정신은 분열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과 결정하는 것이 모두 일체를 이루어 가장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모든 사람에게 다 칭찬을 받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이 사람의 정신은 분열됩니다.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이 다르고, 결정하는 것이 또 달라서 심지어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 혼란스러운 모순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제일 하는 말이 “아, 몰라, 아 진짜 모르겠어, 골치 아파” 이런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형제들을 사랑하며 살 때 그는 완전히 하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신세계가 온전하고 내적인 분열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살면서 속에서 여러 개의 자아가 쌈질하는 것 같은 혼란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는 자기가 진짜 어느 자아가 자기의 자아인지, 심지어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사랑하지 않고 미움 속에서 화목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불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세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영원(寧遠)한 것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눈앞에 먹고, 입고, 마시고, 즐기고 누리고 때로는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현세적인 삶이 모두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분쟁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유용성은 잠시 오류에 빠졌다가도 진리를 인식함으로써 다시 자기를 바르게 할 수 있는 데에 있습니다. 누구나 오류에 빠질 수 있고, 또 오류가 없다면 진리의 진실성이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가치는 진리를 깨닫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단지 현세의 생활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와 관련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자신에게는 분명이 이익이 되는 일인데도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난 못해’ 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진리가 가르쳐 주는 힘입니다.
두 번째는 이기심(利己心) 때문입니다. 이기심은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이기심을 아주 특이하게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마음이 이끌리게 되지만 이기심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자기가 근거도 없이 좋아함으로써 이끌리는 것이 이기심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마약이 무엇인지 그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고 그냥 그것을 흡입하거나 주사하려고 하는 갈망을 갖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이기심 때문에 결국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를 세우고자 하고 그래서 사람들과 끊임없는 불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굴복해도 그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 자기와의 평화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교만(superbia)입니다. 교만은 사물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 판단할 때 자기의 판단이 더 이상 비판받을 수 없는 가장 최종적인 판단이라고 고수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은 충돌을 하게 되고 여기에서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고 화목한 상태가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기심은 하나님 사랑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이 이기심 때문에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신자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올 때 그는 자신의 전 존재와 예배드리기 직전까지 살았던 모든 삶을 짊어지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는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가 있습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 일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넓은 의미의 예배에서 성공할 수 없고, 넓은 의미의 예배를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온 사람은 좁은 의미의 예배를 훌륭하게 드릴 수가 없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회개할 것이 많은 사람들은 거의 회개를 안 합니다. 그리고 회개할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많이 회개를 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넓은 의미의 예배에서 살았던 자신의 삶을 예배 시간에 말씀에 비추어볼 때 많은 잘못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좁은 의미에서 예배를 드릴 때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예배에서 진리의 빛이 거의 없이 살았던 사람들은 잘못한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잘못한 것이 생각났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죄의 성향에 의해서 그것을 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넓은 의미의 예배를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예배자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아주 비참하고 비천한 존재라고 하는 의식이 없는 습관적인 예배가 우리의 영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져야 합니다. 형제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잠시 멈추어도 하나님에게 욕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하찮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고 또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배도 드리고,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지만 아무것도 여러분들을 새롭게 하지 못할 때 그런 무기력에 빠졌을 때 형제들과의 관계를 돌아보십시오.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있고, 불화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일보다 더 급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형제들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고 난 후에 그때 드리는 그 제사가 하나님께 합당한 제사가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예배는 삶을 바꾸며, 바뀐 삶은 그 사람의 예배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오늘 여러분들의 죄를 한번 정밀하게 조사해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죄, 특히 형제들을 미워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불화하게 지냈던 일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새 삶을 살게 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제사함
마지막 세 번째는 제사하는 것입니다. ‘화목하고’라는 말씀은 형제들과 다시 사랑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쓰이는 화목(和睦)이라는 단어는 원래 구약 성경에 나오는 ‘샬롬’이라는 단어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샬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가장 어울리는 말이 안녕입니다. 이별하는 말로서의 안녕이 아니라 ‘그대는 안녕하신지요’라고 할 때 그 안녕입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모자라는 것이나 넘치는 것이 없고, 찌그러진 것이나 구겨진 것이 없이 어떤 사물의 온전한 상태가 샬롬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서 빵집에 들러서 ‘텐 리 샬롬’하면 그것은 ‘샬롬을 나에게 주십시오’라는 뜻이고 이 때 주인은 큰 빵 온전한 것 하나 전체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많아서 반만 주십시오 ‘텐 리 하찌’라고 이야기 하면 이 빵을 잘라서 절반을 주는 것입니다. 샬롬은 누가 뜯어가거나 깨지거나 찌그러지지 않고 원래 제빵사의 의도대로 완전하게 구워진 온전한 하나의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샬롬이라는 이 중요한 신학적인 단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평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찌그러지거나 망가진 구석이 없는 온전한 사랑, 비교적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화목하고 서로 찌그러진 것이 없이 그렇게 온전한 사람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샬롬입니다.
그러므로 샬롬은 첫 째는 하나님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가르치고, 두 번째는 사람과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11절에 보면 구속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이런 샬롬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세 번째는 자연과의 화목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8장 22절에는 우리의 몸에 완전한 구속을 기다리며 이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이 자연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1장 6절과 8절에는 이제 이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진 그러한 세계가 되었을 때 양과 표범이 사이좋게 놀며, 암소와 곰이 함께 어울리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장난을 쳐도 독사가 물지 않는 자연과의 화목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2050년도에는 확실하게 북극의 여름에 모든 얼음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는 그냥 우리가 모르는 땅에서 얼음이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지구 전체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이상 기후와 어마어마한 폭우와 태풍들이 예고 없이 일어나고,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재산의 파괴, 자연의 파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탐욕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을 해치는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끊어진 것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투영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이런 식으로 자연을 해치면서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자연과 완전한 화목의 상태에서 인간은 자연이 있는 것 때문에 행복하고, 자연은 사람이 있는 것 때문에 가치가 느껴지는 그런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자신의 삶부터 이 환경을 파괴하는 일에 대해서 깊은 경각심을 가지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평화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받은바 사랑을 가지고 형제들을 사랑하고, 그 형제들의 연약한 것을 짊어지며 일치와 화해를 이루며 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주신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형제와 화목하라고 한 이 말씀은 바로 이렇게 사람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미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제사 시간에 이 생각이 났을까요? 그것이 형제에게 잘못한 일을 생각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장소가 제사의 장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죄를 지었다는 의식을 가지고 그래서 짐승을 구해서 가지고 옵니다. 소까지는 아니어도 양을 가지고 왔다고 칩시다. 더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서 자기가 계속 기르던 양을 갖고 왔다고 칩시다. 제사장의 기도에 의해서 나의 죄가 이 양에게로 전가되고, 양이 죽임을 당하면서 산산이 몸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그 상황을 눈을 부릅뜨고 보면서도,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그 짐승을 볼 때에 무섭지 않다면 그게 사람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를 다시 용서해 주신다는 선언을 들었을 때 기쁘지 않다면 그 사람이 인간일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꾸어 놓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을 때 그냥 그것은 짐승을 죽이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화목하고 난 후에는 이렇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도 회복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되 그렇게 진심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망가진 관계를 고치고, 사람들과의 깨뜨려진 관계를 고칩니다. 자연과의 관계를 온전히 합니다. 자신 때문에 하나님이 기쁘시고 자신은 하나님 때문에 기쁜 자가 됩니다. 이웃은 자신 때문에 즐거운 사람이 됩니다. 자연 세계는 자신 때문에 만족을 누립니다. 바로 이런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릴 가장 훌륭한 제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삶이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었을 때에 시인 다윗이 고백한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예배하고, 불화했던 형제들 가족들과의 관계를 치료하고, 온전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결국 신자 안에 남아있는 죄와 불완전성 때문에 화목이 깨뜨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무관심,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 자기의 판단을 고집하는 교만 때문에 관계는 깨어지고, 깨어진 관계는 치료되지 않고, 질병처럼 번져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죄 때문에 교회는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겪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상처와 아픔을 극복해 낼 것이고, 오히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나 본인에게는 안식이 없는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또한 불화하게 될 때마다 하나님과의 사랑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려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함이었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불화한 관계를 치료하고 화목하게 만들기 위해서 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속죄의 사역에 기초하여 우리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인데도 하나님이 예배자로 받아들여주시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 속에서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의 삶을 살게 될 때에 그는 분명히 하나님과의 샬롬을 누리면서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그 사랑을 확장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움에 관하여 (2019.12.01._주일오전 2)
염려에 관하여 (2019.09.22._주일오전 2)
2.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3-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본문의 배경은) 다수의 무리가 교회에서 찢어져 나가 그릇된 교훈에 빠진 때였습니다. 이 일을 화제 삼아 사도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참된 표징에 대해 말합니다. 구원의 실제적인 증거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사랑은 그가 구원 받은 가장 중요한 증거입니다.
II.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
사도 바울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은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묵직하고 중요한 주제들을 오늘 이 짧은 본문에서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면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내용들입니다. (먼저 미움이 무엇이며 그것이 왜 큰 죄인지 알기 위해서는 생명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A. 생명이란 무엇인가?
제일 먼저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생명입니다. 생명이 무엇일까요? 생명은 자신을 지탱하고 외부 세계에 대해 반응하고 자기와 동일한 개체를 번식시키는 힘입니다. 그래서 생물학이라는 학문이 있지만 그것은 생명의 원리와 현상에 대해서 다룰 뿐입니다. 생명 자체를 연구하지는 않습니다. 어떠한 학문도 생명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생명은 아직도 그 본체가 신비에 쌓여있습니다.
생명에는 창조된 생명(vita creata)과 창조되지 않은 생명(vita increata)이 있습니다. 창조된 생명은 피조물의 생명이고, 창조되지 않은 생명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모든 피조된 생명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분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에는 육체의 생명(physical life)과 영혼의 생명(spiritual life)이 있습니다. 육체는 바로 흙으로부터 빚어져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육체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고 기동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영혼에게도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이 있음으로 육체를 육체답게 지탱하고, 외부의 환경에 대해 반응하는 것처럼 또한 영혼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영혼이 영혼다워지고 영혼과 육체를 위협하는 모든 주변의 환경에 대해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눈에 보입니다. 죽고 나면 숨 쉬고,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모든 것이 멈추고 움직이던 인간의 몸은 보이는 하나의 물체가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에 있어서 사망의 개념과 영혼에 있어서 사망의 개념은 사뭇 다릅니다. 육체는 물질에 속했기 때문에 죽음이 명백하지만 영혼은 처음부터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육체가 죽는 것같이 그렇게 죽음에 처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에 있어 죽음의 개념은 생명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영혼이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영혼답게 작용을 잘 하고, 또 하나님을 알아보고, 또 육체를 지도하면서 그 모든 환경이 자신의 영혼에 주는 의미를 파악하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육체의 생명이고,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이 결핍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에는 고등한 기능과 하등한 기능이 있습니다. 하등한 기능은 감각하고, 먹고, 입고, 느끼고, 감각하는 그 모든 것들입니다. 이 영혼의 하등한 기능은 어떠한 경우에도 죽지 않는데 고등한 기능에 잘 통제를 받을 때 인간은 짐승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하나님이 붙드시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처럼 영혼의 생명도 생명이신 하나님이 붙들고 계실 때 그 생명을 공급받아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죽어 있었던 사람이 생명이신 하나님과 접붙여져서 그분의 생명을 공급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영혼에 속한 생명이고,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영(靈)이신 하나님과의 연합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영적 생명은 자신이 잘 살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게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길에 대해서는 인류 역사 이래 많은 종교가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주가 존재하는 길이요, 이것이 사람이 존재하는 길이며, 따라서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이라고 가르친 것은 대부분 종교의 몫이었습니다. 인간의 유고한 철학의 역사와 학문의 역사는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의 역사였습니다. 자연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자연의 학문이, 사회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사회의 학문이, 이 모든 것을 통괄하는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철학이 대답하는 임무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인류가 제대로 된 인간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이후로 이 진리에 대한 생각은 끊임없이 탐구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드넓은 우주 속에서 무슨 의미를 가진 존재이고, 어디로부터 왔으며 그리고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도리이고 자신에게도 행복이 되는지를 철학이 탐구해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전 5세기부터 3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라성처럼 살다 갔던 그리스 철학자들의 역사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 중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 시대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자살의 의미는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살의 의미와 사뭇 다르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결국 그 진리만으로 무엇인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길에 대해서는 인간의 종교가 보여주고, 진리에 대해서는 학문과 철학이 보여주었지만 그 어디에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료를 능가하고 모든 철학위에 뛰어난 새로운 신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야말로 이 모든 길과 진리를 의미 있게 하는 실질적인 힘입니다. 이 생명이 이 세상의 종교와 철학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는 바로 이 생명이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이 생명에 접붙인 바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없었던 놀라운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육체적으로 큰 질병에 걸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경험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후 의학의 도움으로 혹은 기도의 도움으로 급속하게 건강이 좋아져서 회복을 경험하신 적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사뭇 다른 사람을 만들었나요? 숟가락 하나도 들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없었던 사람을 뛰어다녀도 피곤치 않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넘치는 육체의 생명이 회복된 것입니다.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 육체의 힘을 통솔하고, 올바른 길로 이끄는 영혼의 생명과 힘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최근에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들이 성폭력에 관한 범죄로 재판 판결을 받고 6년, 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렇게 외모도 잘 생기고, 인기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재물도 가지고 있고 건강한 젊은이들이 그런 끔찍한 범죄에 연루가 되어 일생을 망치게 되는 일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까요?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생명의 부족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생명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만들고, 하나님과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 세계와도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우리의 영혼에 주시는 놀라운 힘입니다. 인생의 대부분의 많은 문제는 결국 이 생명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 만약에 우리가 힘이 없다면 우리는 너무 힘든 일을 그만 두면서 인생을 새로 설계해야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돈도 있고 건강도 있기 때문에 아주 먼 곳까지 여행을 떠나고 고단한 일정 속에서도 여행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게 되면 그렇게 고단한 여행의 일정을 소화해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재정적인 여유가 있어도 여행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이런 저런 활동을 해보고 싶지만 그러나 육체의 생명의 기운이 모자라서 그것을 그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중 누군들 에베레스트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한번 큰 소리로 야호를 외쳐보기 싫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체력으로는 대부분이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육체의 힘이 모자라는 것만큼 우리의 행위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활동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내가 행하여야 할 의무를 구성하고 있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행위들입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우리의 건강을 업시켜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생명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간 사람들이기 때문에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생명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안 믿었더라면 살아갈 수 없을 어떤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생활입니다.
B. 사랑(love)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또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은 원래 “어떤 대상에게 고착하여 지속적으로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을 뜻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사랑은 영혼을 가진 사물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즉,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이 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대상에 집착해서 그것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 자체를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사랑합니다. 그래서 성경도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영혼도 없고 인격도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올바르지 않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혹은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 관계를 더욱 심화하려는 마음과 정신의 지속적인 움직임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고,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그 사랑을 받았고 배웠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이 세상에 존속시키고,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동물들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사랑 비슷한 효과를 각각의 사물들에게 주셨습니다. 의미와 목적은 모르지만 새끼를 끔찍이 여기는 어미 동물들의 각별한 태도가 없다면 아마 동물들은 오래전에 많은 종들이 멸종하였을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식을 사랑하되 그 의미와 목적을 알 수 있는 존재로서 자식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데 야단을 치기도 하고, 너무 아끼는데 책망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맹목적인 동물과 같은 사랑이 아니라 도덕적인 목적을 가진 사랑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홀로 계시지 아니하시고, 성자 성부 성령이 함께 계셔서 서로를 사랑하시는 완전한 교제 속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렇게 삼위 일체 안에서 서로 알고 사랑하는 것처럼 인간들도 그렇게 알고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한 몸에서 또 다른 몸을 만들고, 두 몸이 합하여 또 다른 생명들을 산출해내게끔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맨 처음 인류를 지으실 때처럼 모든 인류가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사회를 꿈꾸셨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자신의 행복이 이웃의 행복과 나뉘지 않는 행복 공동체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그렇게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원천적인 사랑이 거기로부터 왔었는데 그것이 깨져버렸기 때문에 이제 아담과 하와는 서로 사랑할 수 없었고,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류도 서로를 어느 정도는 본성적으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것만큼 미워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결국은 인류의 참된 행복과 사랑은 그 통일성이 깨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당신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랑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가정을 택하셔서 그 가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언약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그 가정이 민족이 되게 하셨고, 나라가 되게 하셨으니 이는 앞으로 이루어질 진정한 나라와 민족의 그림자였습니다. 그 민족의 대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그 생명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당신과 한 몸으로 만드셔서 모든 교회를 영적으로 한 몸이 되게 하셔서 당신이 그 모든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과 기쁨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신 것처럼 당신의 것들을 우리의 것 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실 때 병든 자를 고치신 것은 예수 당신 자신의 몸을 돌보신 것이며, 주린 자를 먹인 것은 당신의 굶주림을 스스로 해결하신 것입니다. 무지한 자를 가르친 것은 바로 당신의 사랑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여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고착하여 우리를 즐거워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그런 우리를 붙드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은 죽으시고 우리에게 그 충만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영원한 육적인 생명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가 회복되어 그 속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들어오는 축복의 삶을 누리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생명과 동전의 관계입니다.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나타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하던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죠? 인간의 도리로 보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인데 그를 배신하고 버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충만한 생명의 결핍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오늘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라고 말입니다. 당연히 이 생명은 영적인 생명이고 또 사망은 영적인 사망입니다. 사망의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었고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우리의 본성에서 나온 사랑이거나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망보다 큰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이 사망의 빈 공간을 생명으로 가득 채우자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세상보다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 인간으로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끔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 그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지루할 정도로 많이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는데도 우리의 인생은 꼬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충분하다. 나의 삶의 환경은 너무나 만족스럽다. 이제껏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최고로 만족스러운 상황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분들 가운데 신앙으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정말 이 모든 삶의 상황이 내 뜻대로 되고 있다고, 그래서 기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누가 있을까요? 어차피 세상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인생의 묘미가 있습니다. 생명의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세상을 떠나고 싶은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으니까 사랑할 능력이 생기고, 사랑하니까 삶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고,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기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이고, 사람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거운 짐이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좋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지기 힘든 멍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나면 과연 자유를 느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느끼는 인생의 많은 무게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서부터 비롯되는 무게입니다. 이 무게를 해결하는 것은 무게를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이 무거운 인생의 무게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가 줄이려고 해도 이 인생의 무게는 줄어들지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그런 식으로 무중력의 상태를 가지며 신처럼 살게끔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랑의 힘으로 그 모든 현실들을 이기며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최근 영화로도 화제작이 되었던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작품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딸은 시집을 가서 경력 단절 여성이 되었고, 매일매일 삶의 공허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심리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에 도달하여 그래서 자기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의식을 가지고 빙의한 사람처럼 때로는 어머니 행세를 하고, 때로는 시어머니 행세를 하면서도 자신이 그런 줄 모르기까지 심리적으로 매우 척박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낯설게 느껴지고 그리고 가족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워진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딸이 너무나 너무나 직장에 다니고 싶어 하자 여러 가지 많은 제약을 느끼고 힘들어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말합니다.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내가 다 도와줄게. 내가 하던 사업을 접고 너희 동네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가서 내가 너희 아이를 전적으로 돌볼 테니 너는 직장에 다녀라.” 82년생 김지영은 일반적으로 72년생 김지영보다 훨씬 쉬운 삶을 살았던 삶이고, 62년생 김지영에게는 쨉도 안됩니다. 52년생 김지영은 세상 사람이 산 삶이 아니겠죠. 두 살 때 전쟁을 겪었으니 말이죠. 똑같은 여성인데 왜 한 사람은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힘들어 하는데 김지영보다 훨씬 힘든 삶을 살았기 때문에 김지영도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그 불쌍한 엄마는 도대체 어디에서 힘이 나오기에 그렇게 펄펄 끓는 힘으로 “내가 너의 어려움을 모두 해결해줄게” 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던지는 것일까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식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한 여자로서는 할 수 없는 그 일을 엄마로서는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본성도 이러한 사랑의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면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영원한 하나님으로부터 그 영원한 사랑을 충만하게 받는다면 무엇을 못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고 했습니다. 왜 입니까?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갖고 싶은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있으니까 갖고, 갖고 싶으니까 갖는 것이지 잃어버리는 게 무서울 정도로 그렇게 갖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한분이신데 그분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어려움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어려움은 우리가 이제껏 겪은 것과는 격이 다른 무서운 어려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보다는 그 고통보다는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82년생 김지영을 만나면서 제가 받은 가장 큰 감동중의 하나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엄마의 힘.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의 불행의 이유를 자원의 결핍에서 찾습니다. 그것도 항상 지상의 자원의 결핍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문제는 영적 자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충만한 사랑이 모자라고 그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영원하지도 않을 것을 영원한 것처럼 집착하고,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을 마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즐거워하게 될 때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었을 때 결국 우리의 집착과 사랑은 대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불행인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어떤 한 대상에게 고정되어서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결국 하나님자신으로부터 온 사랑이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이렇게 당신에게 고정되어 당신을 즐거워하고 좋아하게 함으로써 그 충만한 사랑의 힘으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에 접붙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누리며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첫 번째 사회입니다. 육신의 피보다 더 진한 세례의 물을 믿으며 그 영적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해 감으로써 그 새로운 사회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어쩌면 저렇게 서로를 사랑하며 살까? 저들은 참 행복하겠다. 나도 저 사람들 속에 들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눈 것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의 이런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 함께 사랑하게끔 만들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교회라는 사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C. 미움(hatred)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오늘의 주제인 미움이란 무엇일까요? 이 미움은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의 결핍’이고, ‘사랑의 결핍’입니다. 즉, 미움이라는 것은 “사랑의 결핍에서 생겨나는 결함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즐거워해야할 대상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미움은 그 상대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이고, 미움은 관계를 맺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관계를 발전시키고 심화시키려고 하여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이고, 미움은 그 관계를 파괴하여 영원히 따로따로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미움은 사랑의 결핍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결핍은 은혜의 결핍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한 것은 우리의 힘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 사람은 자기가 그를 위해 행했던 희생과 모든 좋은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런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영웅적으로 하나님을 섬겼는지 기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를 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힘겨웠던 세월들,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힘든 세월을 이겨올 수 있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모르겠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는 근원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이 사람의 영혼은 분열을 겪게 됩니다.
신자는 구원받은 그 순간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그렇게 영혼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자석이 극이 같은 것을 서로 밀치고 서로 다른 것을 잡아당기는 힘을 영원히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자석의 자성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사랑을 항상 충만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충만한 생명을 사랑으로 나타나게 하실 때 당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이 일을 하십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없었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없었던 생명을 우리에게 충만하게 불어넣어 주십니다. 우리가 만약에 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될 때에 우리는 그 멀어진 것만큼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고, 사랑을 잃어버린 것만큼 우리는 미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싫어하고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자녀는 한편으로는 사라질 수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본성과 현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 두 본성 간에 다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영혼의 질서는 깨지고, 영혼은 분열되는 것 같은 혼란을 경험합니다. 영혼의 지도아래 복종하던 육체적인 욕망들이 날뛰게 되고, 이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되어서 영혼이 육체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욕망이 영혼을 지배하는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은 결국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성향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가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은혜 생활을 할 때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며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사랑의 본성과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현재적인 경험들이 일치를 이룰 때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질서를 갖추게 되고, 우리의 영혼과 마음의 작용은 단정하게 됩니다.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과 결정하는 것, 아는 것과 그리고 관계를 맺는 것 사이에 놀라운 질서가 생김으로써 어디서도 자기 분열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는 온전한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샬롬’의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으로 화목하고 자신 안에서도 모든 요소들이 화목을 이루고 있는 완전한 평화의 상태입니다. 그 속에서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비참에 처한 사람을 가엾게 여기고,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고, 슬픈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관계의 힘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과 만나는 사람들은 최고의 복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좌절할 인생이 그런 사람을 만나며 희망을 갖게 되고, 자포자기 했을 사람이 그런 사람을 만남으로 용기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 때문에 참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나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제하고 최고의 복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훌륭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두 번째 복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그 이하의 복들입니다. 하나님이 형제를 주신 것은 당신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회를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그를 한 몸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이며 그 모든 사람들을 한 몸으로 삼으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어느 시점에서 피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그렇게 형제를 미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사랑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형제들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할지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날마다 배웁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약해져서 나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심지어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어두워지고 진리는 보아도 우리에게 지각되지 않으며,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공부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주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마치 예전에는 빛이 없어서 어두움이었는데 빛을 주었지만 스스로 눈을 감음으로 어둡기를 선택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회개합니다. 사랑하여야 할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하고, 그럴 가치가 없는 자기의 욕망을 사랑한 죄를 뉘우칩니다. 통렬하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눈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어느덧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다시 받아주십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고, 이 교제의 통로를 통해서 생명이 공급되는 것입니다. 이길 수 없는 현실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끔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용서와 그리고 새로운 관계의 수립을 통해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 받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것처럼 그렇게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 형제의 과오를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며 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죄가 남아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결함이 있기 때문에 날마다 경험해야 하는 미움을 딛고 결국은 사랑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미움의 죄가 얼마나 큰지 짐작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예쁜 옷을 입고 예의 바른 표정으로 공손하게 여러분들에게 인사를 할 때 그것을 싫어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러분들에게 인사하고 친근한 말을 건 낸 사람이 품 속에서 방금 사람을 죽인 따뜻한 피가 묻어있는 시퍼런 칼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으시겠습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입니다. 교회도 나오고 예배도 드리는데 이상하게 무기력한 삶이 계속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미움의 죄 때문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마땅히 사랑해야 할 형제들 그리고 나의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은지, 또 혹은 미워하고 있지 않은지, 그 미움이 죄가 되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속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을 앗아가는 이 주된 죄가 바로 미움의 죄인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모두를 한 몸으로 만드셨던 예수의 몸을 찢으시는 행위입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칼로 예수의 몸을 찢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예수를 사랑하는 이 일이 동시에 한 인격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가 아무리 많은 섬김으로 주님을 위해 일하고 많은 기도를 주님 앞에 드릴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을 것입니다.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힙니다. 더욱이 사랑해야 할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미워함으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막힌 채 살아가는 것은 성령은 슬퍼하실 일이고 마귀는 박수를 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살아가는 인생 내내 여러분들은 고달플 것이고, 어디에도 완전한 기쁨이 없을 것이고, 여러분은 늘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가야 하는 사람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자유는 결코 누리지 못할 것이고, 언제나 커다란 우리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부자유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는 사람들이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들인데 우리가 그렇게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살아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를 미워한 죄를 깊이 뉘우치고, 많은 말로 형제의 명예를 더럽힌 것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가족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것도, 마음으로 불화한 것도, 미워하고 있는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에 대한 관계를 돌아보면서 미움을 내려놓는 그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미움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받기를 갈망하지만 행복은 누군가의 사랑을 받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 끊임없이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없다면 스스로 존립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찬양)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났도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는 아무의 사랑을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가엾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사랑을 받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그는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며 누군가를 미워할 때 가장 큰 해를 입는 것은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자녀가 된 가장 중요한 표는 단순히 내가 구원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확신, 그 자체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어도 없는 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오늘 한 사람이 형제를 미워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사람이 아니요. 형제를 사랑하면 그는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무기력한 삶을 떨쳐 버리고 미움의 죄를 깊이 회개하십시오. 하나님 사랑하며 모든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에 티끌만큼도 미워하는 사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도록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돌이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이 다시 한 번 충만하게 여러분 속에 부어질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형제를 사랑하니 이는 그 사랑이 같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큰 죄이며 이 죄 때문에 충만한 은혜의 삶을 상실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십시오. 미워했던 죄를 돌이키고 진심으로 용서하고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움에 관하여 (2019.12.08._주일오전 3)
미움에 관하여 (2019.12.08._주일오전 3)
염려에 관하여(2019.09.29._주일오전 3)
3. 목숨을 버린 사랑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5-1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다른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받은 사람이 살인을 하는 것은 그 생명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고 성화된 증거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령한 은혜의 체험은 거룩한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생명이 없거나 은혜가 매우 부족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본분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사랑을 매일매일 배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II. 목숨을 버린 사랑
오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살인의 죄라고 못 박으심으로 변명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이런 미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어떤 사랑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교훈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숨을 버린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보이게 나타나셨습니다.
인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맨 처음 이 세계를 아름답게 창조하실 때에도, 인간을 지으셨을 때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와 그리고 사랑을 인간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맨 처음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기에 하나님을 닮은 상대방을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후에도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볼 수 있는 눈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많이 보여주셔도 조금 밖에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한 가족에게, 한 나라에게 다양한 개인사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당신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여 주셨습니다마는 대부분은 이해되지 못했고, 그리고 이해된 것 중 많은 부분들은 오해되었습니다.
A. 우리를 위한 사랑
하나님께서는 이런 간접적인 방법 말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구약의 가장 뛰어났던 인물,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말했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것은 비유일 뿐 그는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은 “나를 보고는 살 자가 없나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신 주와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진리를 목격했던 다윗은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그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절실하게 깨닫기를 하였으나 하나님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보다 확실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그대로 오시면 우리의 감각으로 그 하나님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셔서 누구든지 감각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그분의 향취를 맡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그러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감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보다 더 잘 믿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영상으로 이어지던 화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자막이 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셨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고, 한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안에서 인간은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위한”(hyper hemon)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좋음이나 아름다움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죄인들을 위해 사람들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으니 그가 곧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본문 16절 상반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면서까지 이 세상에 오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생명이 없고, 사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그 형상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짐승 같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할 수 없었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함께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할 세상을 고통을 받으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몸과 같은 모든 이웃을 찌르고 살해하였으니 이는 곧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비참함에 빠진 우리를 가엾게 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 스스로 비참하게 되었으면서도 스스로 고칠 수 없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모든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은 죄에서 우리를 구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를 위하다”(for us)라는 말은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이익(利益)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으로 돌아가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우리를 대신(代身)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파괴했고, 우리의 육체와 영혼도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대로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었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죄였습니다. 그 죄에는 응당 죄에 대한 대가가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죄를 우리들이 지었기 때문에 우리가 죄의 대가를 치루어야 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 대신 형벌을 치루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은 우리를 위한 사랑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를 대표(代表)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처음 사람이었지만 그가 이후에 태어날 우리 모두의 대표자가 되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가 언약을 지켰더라면 그 대표자와 함께 부름을 받은 우리 모두도 그 낙원의 행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대표자가 되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또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죄 있는 자가 되었고, 그 있는 죄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악을 행하며 살아 하나님의 진노를 더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 대표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기꺼이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할 우리 모든 사람들을 당신이 품에 안으시고 우리의 죄를 당신의 죄로 일치시키신 후 그 죄에 대한 형벌로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형벌을 겪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죽으시고, 당신의 품에 있는 우리는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이고 그렇게 이룬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바로 우리를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이 사랑을 안 사람입니다. 이 사랑을 벗어나서 살았던 모든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달은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이 처음 깨달음에 굳게 붙들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형제들을 사랑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박애적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장점과 우리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성품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게 된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는 이기적인 자기를 위하는 것이고 사랑은 진정한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간하지 못하는데서 신자들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행과 혼돈에 빠지는 것입니다.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론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역설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자기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생명의 근원을 가진 분이 자기 바깥에 계시기 때문에 자기 사랑은 사망이다. 그것은 참된 자기 사랑이 아니라 자기 파괴일 뿐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요한복음 강해』, 123.5). 결국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만약에 그가 그릇된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가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자기는 이미 그 안에서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라고 명령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안에서 자신은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형제에 대한 미움은 극단적인 자기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 안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그래서 그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과 맞서야 합니다. 행복이신 하나님과 맞서고 다투면 어떻게 행복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신 하나님을 떠나서 사랑함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사회를 만드실 때에는 서로 사랑 하는 사회가 되게끔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데 마음이 쏠려 있습니다. 자신이 사랑을 받는 데에 마음이 쏠려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받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분하기 때문에 아무로부터 사랑을 받지 않아도 그는 외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을 향해 마음을 닫고 누구의 사랑도 필요하지 않는 자폐적인 인간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에서 기쁨을 찾지 사랑을 받는 것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누가 그렇게 예수님을 살뜰히 사랑했나요? 물론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랑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지막 부끄러운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렇게 사랑받던 제자들 중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한 한 사람이 돌아왔으나 모두 한때는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랬는데도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힘들어 하시거나 괴로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인간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함으로써 형제를 사랑하고, 이 안에서 충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사랑을 구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끊임없이 정죄하는 것은 자신이 그 사랑이 없는 사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생명의 근원은 이기적인 우리 자신 안에 없고, 하나님께 있으니 이기적인 자신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극단적인 이기심의 표현이니 형제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동시에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바로 이렇게 우리를 위해 자기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충분히 받는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을 이 사랑의 질서 속으로 데려가는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B. 십자가의 죽음
인간은 많은 것을 누리고 갖고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사라질 사물들을 사라질 인간의 육체로 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째로 그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볼 수 있도록 모든 인류에게 나타났으니 이는 그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굳이 시간과 공간에 매인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기에 죽으실 수 없었고,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흠 없는 제물이 되실 수 있었고, 사람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죽게 하여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은 궁극적으로 제물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났고 이는 죄인을 위한 대신적인 죽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정당하게 십자가에서 죽듯이 형벌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것을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인류가 고안해 낸 모든 사형 방법 가운데 가장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양팔과 두발에 못을 박아 자신의 몸으로 고통을 더하고, 생명이 있는 시간 동안은 끝없이 피가 흐르게 함으로 극한 고통에 시달리게 하였으니 이는 우리의 죄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은 바로 십자가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만이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자기를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자기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생명 없는 삶으로 데려가는 이 모든 그릇된 자아의 욕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과 함께 죽고,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면 언젠가 이렇게 필설로 다 말할 수 없는 그 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은 간 곳 없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이 영원히 빛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육체를 위한 욕망을 채우다가 허무하게 멸망할 삶이 얼마나 서러운 삶인지를 알았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를 사랑하라고 유혹하는 이 모든 죄의 유혹 속에서 우리는 욕망을 버립니다. 바로 내가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는 이 자기 사랑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께서 날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눈물에 우리의 욕망은 씻기고, 그 회개하는 통곡 속에서 우리는 죄를 사랑했던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은 죄인의 본성에서 본다면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구원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새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요,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많은 날들을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원망 속에서 흘려보냅니다. 그 사람은 사랑할 수 없이 불구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사랑할 의지도 없건만 그가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끊임없이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결국은 자신도 남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끊임없이 원망하며 자신의 생명을 죽인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미움이 올무가 되어 생명의 샘은 막히고, 형식적으로는 자유를 얻었으나 커다란 창틀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죄수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한번 마음을 넓게 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사랑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모자랍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신 것은 사람으로부터도 그런 사랑을 기대하며 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인간성의 완성은 사랑을 많이 받음으로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형성에 그때그때 사랑을 받는 것이 꼭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완성으로 데려가지는 못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부모의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은 어린 시절에 이미 사랑이 완성 되었을 것이고, 젊어서 사랑하는 연인을 만난 사람은 그 사랑 안에서 좋은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늙어서 좋은 자식을 만난 사람은 그 사랑 안에서 완성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완성되지 않습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사랑을 받음으로 최종적으로 인간성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우리의 인간성은 완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감사의 제목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이기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끝까지 사랑하는 것, 그것이 더 큰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천합니다. 그래서 세대와 세대 간에도 서로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가치관이 급격히 변해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행복을 끊임없이 찾지만 그 행복을 찾는 방식은 지난 세대의 그 방식과는 달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마 그 말들이 어느 정도는 현실에 적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진정한 행복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변천하는 세상 속에서도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사랑을 가져다주고, 인간을 진정으로 인간답게 완성할 수 있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대는 다르고 고민하는 바는 같지 않아도 여전히 오래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사람을 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그 사랑과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십자가로 승부하고,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 그것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C. 그 사랑을 알라
마지막 세 번째는 그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평생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사랑을 따라 삶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지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16절 상반절은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로써는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없는 곳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온갖 종류의 사랑 때문에 인간들은 끈끈하게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죄에 대한 사랑이 있고, 세상이 있는 곳에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 죄와 세상은 결국 인간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심지어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어느 곳도 사랑이 없는 곳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도 결국 여러분들은 사랑할 것을 사랑하는 대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집착하기 때문에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은 사랑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달콤한 사랑으로 유혹을 합니다. 이런 저런 종류의 사랑을 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잘못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은 것이나 그릇되이 본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랑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고통과 번민에 가득 찬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수많은 우리가 빠진 사랑이 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바로 그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안에서 극치를 이룹니다. 즉,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바로 그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인류가 돌아가야 할 사랑의 극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도 사랑이 있다, 저기도 사랑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고, 저것을 소유하면 만족을 누리리라’고 외치는 수많은 거짓된 사랑을 향하여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태양이라면 다른 모든 올바른 사랑은 그것 때문에 빛나는 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 사랑을 올바르게 비취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시고, 미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문제는 결국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없이 우리 신자가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모든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신데 그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어디에서 우리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마음으로는 끊임없이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의 원천은 끊임없이 떠나려고 하는 이 모순적인 삶이 우리의 번뇌와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가 말했듯이 인간은 불가해한 존재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눈물겹게 찾으면서 또 한편은 집요하리만치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는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결국 진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하지 않는 불구의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이 어떤 삶의 자리에 놓여있든지 참 행복으로 돌아가는 한 길을 성경에 입각해서 나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긴급동의와 같은 것입니다. 회의시간에 긴급동의는 모든 회의의 진행을 멈추게 만들고 그것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오래도록 여러분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모든 일을 해왔고 심지어는 죄까지 지었고, 사랑하는 형제를 미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항상 열매 없는 삶과 거친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이제 언제까지 그 길을 계속 가려고 하십니까? 형제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형제를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당신 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행ㅂ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바로 그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자기 인간의 공로와 모든 자랑을 그리스도 십자가 아래서 벗어놓고 그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보좌에 뿌려 놓으신 그 피 길을 모든 의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은 받아주십니다. 그의 죄가 아무리 크고 흉악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속죄하시는 사랑이 그 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보혈의 피로 모든 사람을 용서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데려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했던 사람도 그리고 심지어 마음으로 살인했던 사람들조차도 결국 그것은 자기가 모르는 하나님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참 하나님을 발견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았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됩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인간의 사회가 끝없이 변천해도 우리를 살리는 생명은 세상 안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찾고, 새것을 갈망하고, 우리의 눈을 가득 채운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무리 보아도 마음을 채울 수 없고, 아무리 많이 가져도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 안에서만 완전한 만족을 누리도록 창조된 피조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예수 믿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유정입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 있을까 하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마는 요즘은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도록 가엾습니다. 결국 알고 보면 아이를 죽이고, 남편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지만 사실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 여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 사랑을 그런 방식으로 펼치고 살았던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 여자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난다면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끔찍하고 어리석은 행위였는지를 알게 될 것이고, 사실은 체스터턴이 말한 바와 같이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처럼 ‘한 여자가 누군가를 살해할 때 그것은 너무나 너무나 살고 싶다는 또 다른 몸부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만난 적이 없지만 그가 그 감옥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남은 생애라도 그 충만한 생명 속에서 죄를 속죄하며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결국 우리와 그런 사람의 차이는 오직 하나, 그 사람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고 우리는 이 사랑을 안 차이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그 사랑을 알았으니 그 사랑을 안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 일이 어려운 것일까요?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알았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그 사랑에 매일매일 묻는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한때 알았다고 할지라도 똑같이 이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에 있는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염전을 하시던 어느 장로님이 그런 말씀을 남기셨답니다. 소금을 생산하여 맹물에다가 풀 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소금이 잘 녹지를 않는답니다. 그러나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담은 가마니를 후크로 끼워서 어깨에 메고 가다가 아차 하고 실수를 하여 바다에 빠뜨린 적이 있답니다. 아까워서 급히 꺼내고 보면 가마니 안에는 소금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 하시는 말씀이 성도는 원래 하늘나라에서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고향에서 부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살면 그는 비교되지 않는 다른 사람이지만, 세상으로 돌아가면 순식간에 섞여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예배를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연약한 여러분들을 다시 한 번 회개의 눈물과 말씀의 깨달음 속에서 흩어졌던 마음을 십자가 사랑에 묶게 하시기 위해서 예배를 주신 것이고,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을 주신 것은 그렇게 여러분들의 마음을 세상에 묶이지 않게 하시지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오늘 이제껏 하나님을 믿었던 그 신앙에 만족하지 말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을 깊이 뉘우치고, 그리고 아직도 그 사랑이 없기 때문에 집요하게 형제를 미워하고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 잔인함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들의 눈을 이 땅위에 고정시키는 한 그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눈을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지켜보십시오.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신자의 인생은 이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어떠한지를 배워가고 우리의 삶을 그 사랑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봉헌하며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아는 지식 속에서 참 사람이 되어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죄 있는 우리를 용서하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이 사랑을 받게 하신 것은 다시 그 참 생명으로 돌아가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자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을 알고 완전한 사람으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시 모든 미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 행복을 누리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움에 관하여 (2019.12.15._주일오전 4)
4.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의 동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입니다.
인류에게 참된 사랑이 두 번 주어집니다. 첫째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할 때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 안에 참 사랑을 넣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으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도 그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 하는 순간 이 사랑은 깨어져 버렸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사랑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셨다면 인류도 존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의 그림자들을 여전히 간직하게 하셨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졌으나 여전히 결함이 있지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또 형제가 서로 사랑하고 양심의 발자취를 따르는 마음을 어느 정도 간직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이분은 두 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첫 번째 아담이 창조의 인류의 대표였다면 이분은 재창조의 대표자로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인간의 본성 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구원받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영적인 교제를 회복시킴으로써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이었고 사랑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눈에 보이게끔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사랑으로 이끄시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첫 번째 사랑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인류에게 주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으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가장 행복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II.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은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를 율법의 행위를 지키는데서 찾았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부자인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으로서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 9절 이하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가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신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하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은 자기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형제 사랑이 믿음의 진실성에 얼마나 중요한 증거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A. 사랑의 두 지평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두 지평을 만납니다. 한 지평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agape)입니다. 이 하나님 자신의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할 대상이 있어야지만 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할 사람을 창조하심으로 비로소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온 인류가 창조되기 전 당신 홀로 계실 때도 사랑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영원 전부터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 그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인간에게 주어지는 이 사랑을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또 하나의 지평은 그 사랑에 반응해서 생겨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caritas)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은 하나님 사랑이고,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지순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화를 받아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까리따스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지평과 사람을 향한 사랑의 지평이 융합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으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동시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만나게 되고 동시에 우리 안에도 있는 하나님의 사랑인 까리따스의 사랑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자신이 아니기에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심으로 비로소 하나님 사랑을 갖게 됩니다.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 가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하나님을 모르다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들을 때 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 과정을 밟게 됩니다.
1. 죄를 깨달음: 율법(律法)
첫째는 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죄에 대한 생각을 깨끗이 인간의 마음에서 지워버리셨다면 아마 인류 사회는 성립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죄에 대한 감각 기능인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공통된 감각을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악을 행하면 가책을 받고, 선을 행하면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죄라는 것을 희미하게 알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또 어떻게 그것이 죄가 되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들을 때 그의 마음에 뚜렷한 기준이 생기게 됩니다. 그 기준을 세우는 작용을 하나님의 말씀 중 율법이 담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을 때 그분은 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따라서 모든 세상은 그분의 손끝에 달려있습니다. 자신은 그 세상의 일부로 태어났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존재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때 그것이 기준이 되어서 자기가 그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자신에 비추어본 죄가 아니라 거룩하고 무한하고 완전하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뜻을 거스른 것임을 깨닫는 깊은 자각입니다.
2. 죄를 슬퍼함: 십자가(十字架)
둘째는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나면 그렇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거스른 죄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비참함의 원인이 바로 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대적해서 악을 행한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때 느끼는 것이 죄에 대한 깊은 슬픔입니다. 이런 슬픔은 우리가 하나님 모르던 시절에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으면서 경험하는 구원에 이르는 슬픔은 그것과는 종류가 다릅니다. 그때 슬픔은 자신에 대한 후회에서 오는 자신이 비참하다는 자각에서 오는 슬픔이었지만 이 슬픔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고, 자신은 복된 하나님을 떠나 비참하게 되었다고 하는 데서 오는 슬픔입니다. 이 슬픔이 아주 크게 압도하게 될 때 그는 자신의 이 비참한 처지를 무엇으로도 개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전에 자기를 행복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던 모든 길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제까지 세상을 향하던 자신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3. 죄를 떠나감: 믿음(信仰)
셋째는 죄를 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복음을 통해 나타난 사랑이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렇게 죄를 지어 비참한 상태에 있는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의 죄를 그에게 짊어지게 하셨고, 그가 대신 형벌을 받음으로 이 사실을 믿는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주실 것이라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인간은 이 자신이 죄를 용서받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깊은 배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까지 나는 너만 믿었고, 너는 나의 임금이 되어 모든 것을 네 마음대로 했으나 자 결과를 보아라. 이제 좋으신 하나님을 반역하고 나는 그 분의 진노 아래 놓였고, 나는 슬픔에 빠져 비참한 자가 되었다. 난 너를 이제 믿을 수 없다.’ 거기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나를 사랑하사 자기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반드시 그 분을 향한 사랑을 산출합니다. 사랑을 산출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죄를 지은 것에 대해 깊이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용서받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향하던 비참한 사랑은 다시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한 것은 결국 그렇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를 사랑하는 자아와의 분리가 일어나고 참 자기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인을 용서하셔서 그를 다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교제를 갖고 그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 두 지평의 사랑이 신자의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융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가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일서 4장 1절은 이렇게 감동적으로 묘사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만약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증거이고, 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형제를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B. 두 지평이 하나임
결국 이 두 지평의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 이 두 지평이 우리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어 둘이 분리될 수 없게끔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랑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동시에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거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그런 모순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몇 만 년의 인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인간의 죽음을 범상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도 이미 사람이 죽은 것을 짐승이 죽은 것처럼 대하지를 않았습니다. 영혼이 있다고 믿은 대부분의 인류가 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사람의 죽음은 영원까지 포함하지 않는다고 보며 그들이 영원히 있을 것을 믿거나 다시 부활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무엇이 인간의 죽음과 동물의 죽음을 그토록 뚜렷하게 구분 짓는 것일까요? 진화심리학으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에 대한 희미한 인식이 모든 인류 속에 살아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 살아남아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인류의 몸을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조된 몸과 당신이 직접 창조하신 영혼을 만나게 하심으로써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하고 무한한 영이십니다. 그 영이신 하나님이 당신과 교제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면 당신을 닮은 영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당신을 닮은 영혼을 인간 속에 주셨습니다. 그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을 닮은 특성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이 존귀한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이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엄한 것입니다. 아무리 이름난 범죄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그의 몸을 형벌에 처할지언정 여전히 그를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의 사랑이 나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두 지평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 사랑으로 영원히 만족하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랑을 받으셔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관심이 없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랑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뭔가 결함이 있는 하나님이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사랑으로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도 그분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시는 일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더욱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벌을 내리시고, 때로는 책망을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사랑 받고 싶으셔서가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사랑함으로써만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보다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자신의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일에 온 마음을 쏟으셨습니다. 당신이 사랑 받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모든 불행한 사람들, 사랑 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엾습니다. 그러나 저는 특별히 아직 인간성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어린 시절에 아빠와 사별하거나 엄마와 사별하거나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두 사람과 모두 헤어지거나 혹은 아빠를 잃어버리거나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들입니다. 그들에게 부모를 잃어버리고 혼자 살아가야 하는 이 깊은 마음의 고통은 표현하지 않지만 엄청난 짐이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을 일평생 그 흔적을 간직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사랑받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렇게 태어나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부모에게, 형제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자녀에게, 배우자에게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참된 인간성을 완성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완성되는 것은 사랑을 받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이름 석 자가 그리움이 된 사람이 있습니까?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이름이 여러분들에게 그리운 이름이 된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그리움이 하나님 때문에 그리움이 된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도 그것으로서 인간성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 인간은 모든 사람에게 완벽한 사랑을 받을 수 없도록 그렇게 망가진 존재로 태어났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절대로 온전한 자녀였던 적이 없고, 온전한 부모였던 것은 더더욱 없으며 온전한 남편과 아내였던 적도 없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꿈속에서 그리는 이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로운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사랑의 동인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엄마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해서, 아빠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해서 미숙한 본성을 가지게 된 사람이 훌륭한 아내와 뛰어난 남편을 만나도 그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 영향이 조금 줄어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사랑하지 못해 깊은 상처를 받았을 때 연로하신 부모님이 끔찍하게 사랑해 준다고 해서 마음에 빈 공간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냉혹하게 말하면 한번 사랑 받지 못한 것은 영원히 나의 한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들이 비관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가능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랑의 빈 공간이 부모 때문에 생겼든, 아내와 남편 때문에 생겼든, 자녀와 친구 때문에 생겼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그것이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사랑을 충분히 받았던 사람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아주 놀라운, 그 사람의 인생을 빛나게 하는 어떤 특징이 생겨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님은 생전에 상이군인이셨습니다. 6.25 때 중공군과 전투를 하다가 뒤에서 장딴지에 총을 맞으셨습니다. 정신없이 후퇴를 하다가 군화가 너무 땀이 많이 차서 무거워서 벗었더니 군화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당시로서는 한국 최고의 군의관을 만나서 기적적으로 수술을 받으시고 일상생활에 큰 불편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면 늘 통증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면서 회복한 그 뼈를 만져볼 수 있도록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주 젊은 나이에 군대에 갔으니 총알이 관통해서 아예 뼈에 박혀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총알을 빼고 두 동강 난 뼈를 접합시켰는데 거기에서 액이 나와서 그 두 개의 뼈가 다시 붙었습니다. 그리고 그 붙은 부분의 뼈가 엄청나게 굵어졌다고 합니다. 진액이 쏟아져서 새로운 뼈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렇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뜻대로 안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더 받고 싶고, 지금보다는 훨씬 나를 사랑해 주는 남편을 만나고 싶고, 그런 아내를 만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기대는 죽는 날까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랑의 아픔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이 인간의 사랑으로 채워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그렇게 인간의 모든 사랑을 초월하는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에 감화될 때 우리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사랑의 결함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때로는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이런 가정의 슬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할 것이며, 언젠가 그렇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만나게 된 것이 가정의 슬픔 때문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오히려 그 지점을 하나님께 찬송 제목으로 삼을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를 타이르고 훈계 하시고, 때로는 우리를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면서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을 당신 안으로 돌아오게 하셔서 당신과 관계를 맺고 생명을 부여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결코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결국 영원한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 안에서만 인간은 행복을 누릴 수 있으니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을 멀리 떠나 행복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사는 바로 이것을 모르는 채 살아온 역사였고, 그래서 방향이 잘못된 사랑을 사랑에 휘둘려 이리저리 휘몰리고 쫓겨 다니고 혹은 이끌려 다니면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온갖 죄를 짓고 허무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느낌과 외롭게 이 우주공간에 홀로 던져졌다고 하는 소외감, 그것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은 하나님을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이 상승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우리가 지상에 서 있으면 이 동네가 어떻게 된 것인지, 그리고 내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1km 상공으로 상승해서 다시 이 땅 아래를 내려다보면 내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정신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려 올라감으로써 자기를 초월하는 질서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려오면서부터 이 모든 만물이 질서가 있고, 그 질서를 따라 사랑함으로써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질서를 몰랐을 때에 무질서했던 사랑을 후회하고, 참 질서 있는 사랑을 좋아하면서 그러면서 인간의 삶은 행복을 향해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셔서 한 사랑 안에 불러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을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만드시고 서로를 사랑하기를 자신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바로 그런 우주적 사랑이 시작되는 한 가정과 같은 것입니다. 미움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모든 사람을 감싸 하나님 안에 들이고, 그 사랑 안에서 살게 하는 것이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데 미움은 하나님을 향하던 사랑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던 그 사랑을 깨뜨려 하나님 아닌 자기에게 향하게 하기 때문에 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뜨리고 이기심을 따르는 것인데 그것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은 두 지평이 아니라 한 지평으로 융합되고 그 안에서 자기는 완전한 사랑을 받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 역사의 종교와 철학은 이것을 설명해 보려고 한 것인데 인류를 더 혼란에 빠뜨리고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아무리 뛰어난 지혜처럼 보여도 우리를 갈팡질팡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명료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행복해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와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그 사람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완성해 가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 안에서 행복을 누립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이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굳이 사람의 사랑을 구걸하지 않으니 이는 자신이 충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아서입니다. 미움은 자기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의 계획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지 아니하고는 결코 형제를 미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인간은 안정과 행복을 누리게 되지만 하나님을 떠나 자기를 사랑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정신의 찢어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이 박동 치며 무엇을 욕망하게 만들지만 막상 그것을 얻고 나면 기쁘지 않고, 잠시 기쁘지만 그 기쁨은 허무함으로 바뀌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결국 자기가 무얼 사랑하는지, 왜 그렇게 사랑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혼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과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지런한 질서를 갖게 되고, 그 안에서 인간은 세상의 금은보화보다도 더 뛰어난 평안을 먼저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을 위해서 자기를 사랑하지만 이 자기 사랑은 근원도 없고 목적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의 정신을 갈가리 찢어놓아 깊은 혼란과 비참 속에 빠뜨립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미움을 받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미움에 관하여 네 번째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듣는 것으로 여러분들이 그 사랑과 행복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미워하는 누군가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이제는 품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여러분의 상처 때문에 복수를 꿈꾸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보복하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일입니다. 그들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든지 간에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들이 죄인 되었을 때에 여러분들을 찾아오셔서 용서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분이 여러분들의 죄 때문에, (다시 말해서) 지금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며 짓고 있는 그 죄 때문에, 온 살이 찢기고 그리고 온몸이 상처를 받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그분이 여러분들이 생명처럼 사랑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들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십시오. 거기서 멈추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용서하고 사랑함과 같이 나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응답되는 기도는 순종하기 위해서 은혜를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의 힘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마십시오.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이렇게 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그 힘을 줄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던 미움의 칼을 피 묻은 칼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안아주실 것입니다.
미움에 관하여 (2019.12.22._주일오전 5)
5. 미움의 죄를 끊으라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 3:13-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가 당신의 사랑 안에서 모두 한 몸처럼 서로 아끼며 사는 사회를 만드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런 사랑 대신 이기심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그분의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 생명의 힘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미움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에 대한 반역이며, 모든 선으로부터 돌이켜 서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결코 기쁨이 있을 수 없고, 평안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을 등진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없으니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최고의 선이시기 때문입니다.
II. 미움의 죄를 끊으라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미움의 죄를 어떻게 끊어야 할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골로새서의 주제는 온 우주의 근원이시며 통치주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사도바울의 신앙이 원숙해질 대로 원숙해진 때에 이 서신을 썼고, 가장 깊이 있는 서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계와 그리스도, 교회와 구원에 관한 도리를 상세하게 설명한 후 실제적인 삶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토록 큰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자기 사랑 때문에 형제들을 미워할 수 있기에 구체적인 교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사슬처럼 얽혀있는 미움의 죄를 끊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해야 이 운명 같은 미움의 죄를 끊을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세 가지로 말합니다.
A. 용납하라
첫째는 서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불만’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몸펜’(mompen)이라는 단어인데 이는 원래 ‘비난, 불평, 다툼’, 혹은 ‘혐의’를 뜻합니다. ‘서로 용납하여’(anekomenoi allelon)라고 하는 이 말은 ‘서로 견디며’ 혹은 ‘서로 참으며’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어떤 충동이나 감정 등을 더 높은 목적을 가지고 억누르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교회 생활에 적용하자면 형제와의 사랑의 관계를 잃지 않기 위해서 모든 어려움들을 견디고 인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아주 뛰어난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전개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태복음 6장 34절에서 ‘한 날에는 괴로운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나쁜 일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 우리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일들이 한날 안에도 여러 번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정말 좋은 일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달콤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인생에는 쓰디쓴 일들과 달콤한 일들이 섞여 있고, 우리의 인생의 날 중 대부분은 쓰고 아픈 날들이 달콤하고 즐거운 날들보다 더 많습니다.
그러면 선하신 하나님이 왜 이렇게 우리에게 나쁜 일, 괴로운 일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당신의 선하심을 보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을 몰랐던 자들에게 빛의 고마움이 어떻게 느껴지겠습니까? 연약함을 안 사람들만이 강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증오가 얼마나 괴로운지를 안 후에야 사랑의 고마움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 속에서 나빠 보이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살아온 날들을 회고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범상치 않게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놀라운 감격들을 기억합니다. 그런 날들은 항상 꽃길을 걷던 유쾌하고 즐거운 날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하던 그때에 하나님은 당신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요동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이 평강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라질 것들이 있기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생각을 한번 공동체에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 한 개인에게도 그가 원하는 일들만 일어나지 않고 나쁜 일이 일어나는데 그러면 다른 형제에게는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 자신도 우리 마음에 완전히 들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고, 우리 자신의 정신이 찢어져 분열되는 고통을 느낀다면 남들에게는 우리의 존재가 고통이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성도는 하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여전히 남아있는 죄성이 있고, 여전히 한 인간으로서 불완전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참된 신자가 되도록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완전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동안 괴로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겠습니까? 나도 나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는데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내 마음에 만족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우리는 이 세상 누구에게 그렇게 만족을 주어서 우리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로 만들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한 형제들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들을 서로 참고 견디며 인내하면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함께 모으신 것입니다.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서로를 괴롭게 하는 일들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불신과 다툼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에 관한 것이 아닌 한 서로를 용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더 큰 목표가 우리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서로 다른 형제들을 용납하고 혹은 자신에게 나쁘게 행하는 형제들까지도 용납해야 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난 것이었고, 사랑하는 것이 기쁜 줄을 알지만 그렇게 올바르게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에게 원래 주신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사랑을 누리게 하신 것은 형제들을 사랑하고 나아가서 모든 인류를 사랑함으로써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에 대해 요한복음 17장 2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 때문에 우리는 방탕한 자아를 누르고, 자기의 욕망대로 살려고 하는 자신을 억제하면서 하나님의 이 우주적인 사랑의 계획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는 것은 욕된 것이었고, 더군다나 죄인의 취급을 받으며 고난을 겪으시는 것은 그에게 괴로우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렇게 참으심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인내의 깊이입니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인내하고, 덜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든지 그 관계를 깨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보기에는 오래 참는 사람이 못난 사람 같으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렇게 오래 참는 사람이 결국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는 것을 본받으며 자기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용납하고, 또 때로는 그들의 나에게 가하는 괴로움들을 잘 견디며 참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진리를 보내시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더 인내하였더라면 지금쯤은 아름다운 관계가 되었을 그 관계들을 얼마나 많이 깨뜨렸는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참고 용납했더라면 지금쯤 아름다웠을 관계들이 이미 부서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부스러지고 깨지면서, 또 형제와의 관계가 어긋나면서 그 속에서 복음의 광채 대신 인간의 더러운 육신의 냄새와 그리고 육욕의 더러운 향취들이 넘쳐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어야 할 교회는 수시로 인간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주는 대신 인간의 속됨을 보여주어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욕보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날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욕을 돌렸던 것으로 충분하다면 이제는 용납하여야 할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무것도 아닌 죄인을 받아주셔서 용납해 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새로운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그 큰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아버지 앞에 서로를 용납하며 사는 형제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용서하라
둘째는 용서하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은 내가 용서를 받지만 내일은 저 형제를 용서해야 하고, 오늘은 저 형제에게서 용서를 받지만 내일은 저 형제를 용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위해 서로 나누게 하셨습니다. 나눔(sharing)은 육체를 위한 섬김이고, 용서(forgiving)는 영혼을 위한 섬김입니다. 나눔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들을 없는 지체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있는 우리는 약간 가난한 사람이 되고, 없는 그들은 약간 부유한 자들이 되어서 있는 자나 없는 자나 궁핍을 면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물질로 서로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입술로만 사랑을 말하고 물질로 헐벗고 굶주린 형제를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로서 부름 받은 그날부터 마지막 주님의 나라에 가는 날까지 우리가 힘써 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물질적인 윤택함을 형제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물질이 없어서 궁핍한) 형제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눔으로써 육신의 궁핍을 면하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영혼의 궁핍을 면하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각자 자신에게 죄를 짓거나 나쁜 것을 행한 형제들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이 용서는 떨어져 나갈 형제를 붙드는 것이며, 찢겨져 나갈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용서는 자신에게 지은 죄나 잘못을 꾸짖지 않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고 심화시키기 위한 거룩한 목표 때문에 이 일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미움은 학습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멀리 떠난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랑하기 보다는 미워하기를 좋아합니다. 미워하는 것은 본성에 순응하는 것이지만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은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며, 새 본성이 주어지기까지는 누구든 그렇게 올바른 사랑을 열렬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자의 삶이 회개의 눈물로 이어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를 사랑한 것이 없다면 회개할 일이 어디에 있겠으며 회개할 것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용서 받아야 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이 시간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봅니다. 한때 하나님을 사랑했으나 이제는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쉽게 미워하지만 좀처럼 사랑하지 않습니다. 좀처럼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쉽게 용서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원한을 품었을 때 그에게 복수할 힘이 없다면 그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그를 마음 깊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그가 자신에게 한 것처럼 고통을 주며, 그를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향한 자해 행위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모든 형제들과 사람들에게 흘려보내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미워하는 일은 쉽고, 용서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명령하십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여기에는 하나님이 오묘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던 옛 조상들도 우리에게 교훈하였습니다. 원한은 돌에 새기고, 은혜는 흐르는 물 위에 새긴다고 하였으니 이는 고마운 일은 쉽게 잊어버리고, 가슴 아팠던 원한은 잊지 않고 깊이 새기는 인생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일은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일어나지만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힘든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 있는 은혜가 한 것입니다. 그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변명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그 일을 행하지 않았고, 여러분 스스로 그를 미워한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자란 데에서 여러분 스스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감격적이지만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빨리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날마다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용서할 사람들을 두시는 것입니다. 경건 생활의 핵심은 결국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죄인을 어떻게 용서하셨고, 내가 받은 그 용서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인됨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드넓고 깊은 사랑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자신도 대견할 정도로 정돈된 삶을 살고, 제법 그리스도인의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나쁜 일을 행하는 형제들을 보면서 분노하고, 마음속으로 미워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마다 예배드릴 때마다 말씀을 접할 때마다 그를 미워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생겨나고, 그를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그것을 알아도 마음으로는 그 일을 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욱이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그럴듯한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아직도 깊이 자기 사랑에 뿌리박고 있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그 과정이 얼마나 커다란 아픔과 희생을 동반하는지를 뼛속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 큰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래전에 어느 교인이 겪은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말합니다. “여보, 우리 친구 중 아무개 알지?” “그래요.” “걔가 결국은 이혼을 했어.” “그런데요?” “아내에게 위자료를 주어야 하는데 친구들이 30만원씩 걷어서 위자료를 보태 주기로 했어요.” 20여 년 전에 30만원이었으니까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월급 생활하는 아내들은 그 당시 시장에 가서 콩나물 하나를 깎느라고 애를 쓰고, 마트에 가서 여러 물건들을 비교하면서 이 물건은 저 마트에서, 저 물건은 이 마트에서 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30만원을 내놓으라고 하니 아내는 열 받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짜증을 내면서 잘못은 그 사람이 해서 이혼하는데 당신이 왜 그 돈을 나누어서 내야 되냐고 한바탕 부부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그날 저녁에 교리반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리반의 그날 공부의 주제가 대리적 속죄였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속죄를 이루셨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하고 남편에게 30만원을 주었던 교인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깊이를 오해합니다. 신앙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이고, 사랑의 깊이는 용서의 진실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형제들이 자신에게 나쁜 일을 했을 때에 진심으로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가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용서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말하기를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미워하는 마음을 통해서 자신이 십자가의 사랑에서 멀리 떠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용서를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신 것이 너무나 쉬운 일이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신자의 타락은 자신이 받은 구원을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신자는 매순간 신비합니다. 무엇 때문에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용서하시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부자연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늘 얼굴을 들 수 없고, 눈물을 거둘 수 없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을 드리는 길 밖에 이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 안에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허물이 없는 형제가 없고 자신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워해야 할 일이 그치지 않고, 그래서 용서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형제들에게 그렇게 용서받지 않으면 그리스도 교회에 온전히 뿌리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자기를 양보하고, 자기를 죽임으로써 형제들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불완전한 교회의 신자들을 완전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빚어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가족을 미워하고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들이 더욱이 형제들을 미워하고 있다면,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는 막힌 담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는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떨어질 것이며, 여러분들이 듣는 진리의 말씀은 귀를 즐겁게 할지언정 여러분의 가슴을 후벼 파 새 사람을 만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모든 악순환을 끊는 중요한 단절은 바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끊어질 사람의 관계를 사랑으로 심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형제들을 용서함으로 사랑 안에 들어가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사랑하라
셋째는 사랑하라입니다.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용서는 단지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용서의 의무에 담으신 진정한 목적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하셨습니다. 용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확장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용서를 통해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다시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당신과의 관계의 길을 열어주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불순종과 죄로 날마다 그 길을 막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통 가운데 용서를 빌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다시 교제의 문을 열어놓으십니다. 바로 하나님께 그런 은혜를 입는 것처럼 우리가 형제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며 살라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미움은 상대방을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요, 사랑은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미움은 배울 필요가 없으나 사랑은 끊임없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사랑은 은혜의 결과이며 이 은혜는 성령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미워하는 마음에는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있으나 형제를 사랑한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 고통보다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육체의 열매는 너무나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과 원수 맺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다양하지만 그것은 한 뿌리에 엮여있으니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1절과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이 모든 것들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였을 때 이 모든 것들은 앞에서 언급된 아름다운 덕들입니다. 즉,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 이 모든 덕들을 단단히 결합시켜서 흠이 없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본성적으로 사람들을 가엾게 여긴다면 그는 긍휼히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라면 자비를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겸손해지고, 온유하고, 오래 참을 때 그 모든 본성적인 덕들은 그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보여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인내할 뿐 아니라 용서하고 그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희생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피 뿌리는 희생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런 피 묻은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도 그 사랑을 입었으니 남에게 희생하며 사랑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선하게 해주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바리새인들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며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미움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역이며 모든 선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을 돌이키면 악으로 향하는 것인데 그 악에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원한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등진 사람에게는 태양을 등진 사람이 앞에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처럼 항상 불안과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미움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른 덕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미움을 통해 결국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아무리 정당화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니, 하나님은 구원 받을 모든 인류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우리의 영혼을 얽어매고 있는 사슬과 같습니다. 미워하는 자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근심케 합니다. 많은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나 그 기도는 결코 열납되지 않을 것이며 많은 선한 일을 행하나 그는 진정한 행복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를 듣기만 하지 말고, 이제 구체적으로 미워하는 사람을 떠 올리고 오늘 그를 향한 오래된 미움이 오늘 종지부를 찍게 하십시오. 미움의 죄를 끊어버리십시오. 사람을 용서하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만큼 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미워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것인지, 사람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것인지 선택하십시오.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은 미움의 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얽매였던 모든 미움의 죄를 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사랑으로 평강을 누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미움은 그러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에 대한 반역입니다. 우리가 형제들에 대해 참고 용서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게 악을 행한 형제까지도 참고 용서할 뿐 아니라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II. 사랑으로 평강을 누림
오늘 성경은 우리가 사랑으로 평강을 누린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이 없는 사람은 어떠한 평강을 누릴 수도 없고,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 사이에서도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A. 평강을 위한 부르심
첫째는 평강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구원을 받은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룹니다. 우리는 각자 혼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같지만 더 큰 그림을 보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몸인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몸에 접붙이십니다. 그 몸의 일부가 되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셔서 우리를 한 몸 이루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평강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평강’이라고 번역된 우리말의 단어는 그리스어 ‘에이레네’(eirene)라는 단어를 옮긴 것입니다. 성경을 쓴 사람들은 비록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이미 구약 성경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에이레네’, 곧 평강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와 맞먹는 히브리어의 동치어는 여러분도 잘 아는 ‘샬롬’(shalom)이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이 ‘샬롬’이라고 하는 단어는 ‘온전한 것’ 혹은 ‘온전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온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쪽이 찌그러지거나 상하거나 잘려나간 것이 없는 그런 상태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일치’(一致)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써 그의 뜻에 일치하고 이 일치 때문에 사람들 속에서도 질서와 안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함으로 전체가 하나님 앞에 일치된 상태입니다. 둘째는, 그 사랑의 질서 안에서의 온전함입니다. 우리말에서 이런 온전함의 상태를 가리키는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안녕’(安寧)이라는 단어입니다. 즉, 그러한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오는 질서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쉼과 만족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강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신자는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구원하셨지만 또한 이 개인적인 구원은 공동체로 이루어진 구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말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몸에는 각종 지체들이 있습니다. 손과 발이 있고, 귀가 있고, 눈이 있고, 입이 있습니다. 머리가 있고, 또 몸통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한 몸 안에서 놀라운 조화와 일치를 이룹니다.
어디 멀리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걸어가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고, 체력도 있습니다. 그런데 귀가 매우 아픕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길을 포기하게 됩니다. 귀가 그 길을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멀쩡한 다리가 있는데 꼭 가야할 길을 포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몸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귀가 아픈데 그것은 귀의 아픔이 아니라 몸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해 볼까요?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가까이 가서 그것을 취하려고 합니다. 눈이 그것을 보고 마음이 욕구를 느끼고 그렇게 하자고 의지가 결정을 합니다. 그때부터는 우리의 온 지체들이 일심으로 협력해서 놀라운 조화를 이루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목적에 이바지하게 됩니다. 어떠한 모순도 느낄 수 없습니다. 걸어가는 발, 흔드는 팔, 그리고 맡는 냄새, 그것을 붙잡는 동작 사이에 어떠한 모순과 불일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 몸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셨다고 하는 것은 그냥 한 고깃덩이가 되게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서로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다른 지체들에게 유익을 주며 자신은 이 몸의 일부가 되고, 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들을 나누어서 쓰며, 자신의 아픔은 몸의 아픔으로 환원하는 그런 일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한 몸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 사람의 뜻에 내가 굴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굴복했기 때문에 그 질서를 따라서 모두 하나님의 아름다운 더 커다란 질서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치 안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염려하고 함께 아픔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강을 잃어버린 삶은 결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마음속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고 사람들과의 평화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자신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싸우고,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바와 해야 할 바가 다투게 됩니다. 우리의 욕심은 이리저리 우리 자신의 욕망을 따라 찢어지게 되고, 우리의 정신은 분열을 겪게 됩니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그 분열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들어가게 됩니다. 자신의 정신이 이렇게 분열된 사람들은 결코 남을 위해 배려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에너지가 자기 자신에게 어마어마하게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런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여자들에게만 이런 현상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들에게도 이런 현상이 옵니다. 그게 바로 갱년기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어렸을 때에는 사춘기라고 하는 시기를 지나게 됩니다. 이 두 시기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끊임없는 자신 속에서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하지 않는 때가 없지만 이런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누군가가 더 많은 사랑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멀쩡하던 애가 왜 이 모양이야?’ 하고 시비를 걸기 시작하면 커다란 상처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저렇게 특별히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으니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가 자신에게 들어갈까? 그래서 아마 부모인 우리에게도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인데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이야.’ 하고 부모와 가족들이 사춘기에 있는 아이들을 더 따뜻한 사랑으로 돌봐야합니다.
아내는 갱년기라고 하는 아주 깊은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게 됩니다. 여성들은 갱년기가 여성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남성들도 심각한 갱년기를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다윗이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시며”라는 고백이 사실은 다윗의 갱년기의 고백이 아닐까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만큼 이 세상으로부터 주님이 데려가시는 것 같은 커다란 격변을 겪는 것입니다. 이 처럼 여성들도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그 갱년기를 지나는 데에 쓰게 됩니다. 그리고 남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이해와 사랑입니다. 갱년기의 증상을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더욱이 겪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남성의 경험과 여성의 경험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해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 자신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지탱하는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를 단지 피해자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갱년기를 지나기 때문에 모든 책임에서 면제된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수많은 사람들도 갱년기의 시기를 지냈고, 그 가운데서도 믿음은 꽃 피고, 그들의 기도는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부르며 은혜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그리스도를 붙들고 살면 그런 인생의 어두운 터널이 올 때에 오늘 가졌던 이 믿음으로, 이 지식으로 그런 시련의 터널들을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약간 곁가지로 나간 것 같습니다마는 다시 돌아오자면 하나님과의 평강을 잃어버리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찢어지고 나면 우리 자신을 지탱하는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긍휼히 여기고 하는 것이 힘들어진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저히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우리의 정신 작용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도 있겠지만 핵심은 우리가 평강을 누리면서 사는 이것이 얼마나 우리의 에너지를 절약하는 길인지, 그리고 그 에너지를 올바른 곳에 쓸 수 있는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강을 잃은 삶은 당연히 자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와 관계를 맺은 다른 많은 사람들도 함께 불행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이렇게 평강이 없이 극도의 혼란스러운 삶을 살며 가족들을 미워하게 될 때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가족들은 어려움을 함께 겪게 됩니다. 반면에 누군가가 그렇게 하나님과의 평강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발생시키는 문제들을 잘 극복하고 견디고 사랑으로 그것을 수습할 수 있다면 많은 가족과 지체들이 그 덕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섬김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함께 겪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자체가 서로 교통하는 정신의 작용이기 때문에 사랑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게 만들어 줍니다.
이에 비해서 미움은 상대에 대해 문을 닫고 자기감정에 몰입되는 것입니다. 그는 폐쇄적이고, 자신 속에 한없이 빠져들지만은 자신 안에서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단절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유통하며 살도록 그렇게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형제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안타까워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지체들이 평강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 28절과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라고 물었으니 이것은 사람의 개인이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마음인 것입니다. 교회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평강을 누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그 평강 속으로 이끌어 들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마음속에 평강이 넘쳐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낸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을 만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며 자신은 그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받아들이지 못할 지라도 자신은 그 아픔과 슬픔을 그 사람이 공유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더 힘이 센 사람의 평안이 약한 사람의 슬픔을 이기고 스며들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사용하셔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들판에서 홀로 번개를 맞듯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변화되기 전 하나님이 쓰시는 그 누구가 있었고, 그 사람에 의해 전해진 말씀이 있었으며, 그에게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불안할 때에는 평안을 누리고 있는 그 사람을 부러워했고, 마음이 찢어질 때에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 온전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두려울 때에는 담대한 사람들이 부러웠고, 그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습니다. 사랑과 긍휼, 자비와 용기,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 평화를 사람들 속에서 실현해가는 믿음 생활에서 그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이런 평강을 잃어버리고 살면 삶은 메마르고 건조하거나 요동치게 되는 것입니다.
바다위에 떠 있는 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크고 화려한 배가 바다 위에 떠 있다 할지라도 에너지가 없어서 어디로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 한 모금 없어서 그 큰 배 위에 하늘을 쳐다보고 드러누워 널브러져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아무리 빛나는 지위를 얻고, 재능과 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평강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작은 배에 몸을 싣고 파도에 요동치며 순간순간 위협을 느낍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 이 세상의 시련에 요동치고 유혹에 물결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시각각 삶을 위협하는 그러한 무서운 풍랑 속에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신들 그에게 기쁨을 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무엇을 팔아서라도 사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평강입니다. 내가 어느 처지에 있어도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시며 내가 그가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아는 평화, 그래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아무 두려운 것이 없이 살아가는 그 완전한 평강, 모든 사람을 용납하고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이것 없는 행복이 과연 행복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평강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평화롭고 모든 사람과 평화로운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평강을, 불안하고 고통 받는 세상에 전하여 그들도 이 평강 속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끊임없이 요동치고 불안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온전한 평강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두신 기관입니다. 따라서 인류를 위한 평강은 교회에서 시작되고, 교회의 평강은 신자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면 그는 결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기심은 끊임없이 살아있을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자 하는 자신의 인간적인 욕망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이든지 자기의 생각과 배치되고 자기의 욕망과 부딪히는 일들이 일어나면 거침없이 이기심을 쏟아내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3장 15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우리를 평화롭게 하는 일들만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배를 기억해 보십시오. 잘 만든 배는 놀라운 복원력이 있습니다. 파도가 치면 기울어져야지만 배는 더 큰 재난을 당하지 않습니다. 파도가 치면 기울어지고, 또 파도가 앞뒤로 치면 출렁거려야 합니다. 그러나 잘 만든 배는 놀라운 복원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울어지면 복원하고자 하는 힘이 발휘되어서 똑바로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처럼 큰 파도에도 침몰하지 않는 배가 좋은 배입니다. 이게 바로 ‘주장하다’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주장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브라뷔에토’(brabeueto)라는 그리스어인데 이는 “심판자로서 행동하게, 통치하게, 지배하게, 다스리게”라는 의미입니다. 왕이 한 나라를 다스립니다. 물론 곳곳에서 소요와 폭동이 일어나지만 즉시 진압되어 나라의 기강이 위협을 받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한 나라를 한 지도자가 제대로 지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오만가지 생각이 오고가고 때로는 낙심하고 좌절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사람들을 향해 섭섭한 마음을 품게 되고 하는 일들은 우리가 아직 사람으로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길이 가고, 추한 것을 보면 찌푸리고, 평소 갖고 싶었던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들 때문에도 우리의 마음에 평강이 깨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그런 모든 일들을 겪고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마음이 영향을 받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는 복원력에 의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쁘고, 슬프고, 애달프고, 분노가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있지만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평강이 깨지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입니다.
우리 개인이 이런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가 이렇게 그런 평강을 공동체 속에서 온전히 누리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불꽃처럼 빛나는 성도의 삶은 스스로를 빛나게 함으로써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갈 때 그는 자기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도 불꽃같은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을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가 21살 때 회심을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주님을 멀리 떠나 있다가 심지어는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가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특별히 전도하는 사람 없이 오랜 고민 끝에 기독교 신앙을 다시 갖기로 했습니다. 제가 가는 곳은 벌판에 서 있는 3층 건물의 2층이었고, 이 예배당 크기의 1/10 정도 될까 말까한 아주 작은 방에 20여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저녁이었습니다. 삐거덕거리면서 들려오는 풍금 소리는 아직도 또렷합니다. 그 예배당에 들어가면서 처음 느꼈던 것은 평화였습니다. 때로는 교회에 다니고, 때로는 무신론을 선택하고, 때로는 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지만 그 모든 문학과 사상과 철학, 그 어떤 것도 내게 줄 수 없는 것을 그날 교회에서 느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였습니다. 마치 고단한 타지 생활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시골집에서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반기면서 저녁을 차려주시는 듯 했습니다. 부글부글 끓는 된장찌개와 함께 차려진 밥상을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평화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바라던 세상의 명예나 재능이나 혹은 학문과 같은 것들이 줄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존재들입니다. 어느 문학가가 말한 것처럼 어린 아이들은 자라고, 젊은이들은 늙고, 늙은이들은 죽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썩습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 눈을 감는 순간까지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하신 말씀을 붙잡고) “주께서 나를 아시나이다”라고 언제든지 고백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을 누리며 자신은 누구에게도 사랑 받고 싶어 하지 않지만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 마음이 가장 중요한 행복의 핵심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여기에 가까이 다가갈 때 좀 더 오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멀어질 때에는 많은 명예와 인기, 재산과 소유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워하는 사람은 이미 그 마음속에서 평강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졌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파괴되었으며, 영혼과 정신, 육체를 지탱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정신세계도 분질러진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자신은 끊임없는 자기 분열 속에서 어마어마한 삶의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 때문에 복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께 고유한 것이지만 사람에게 전해질 때에는 사람을 통하여 복음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생명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가장 훌륭한 전도는 내가 이 생명에 넘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피 끓는 젊음이 있고, 그 요체는 생명입니다. 같은 행동을 해도 생명이 넘치는 사람의 행동은 그렇지 못해서 억지로 흉내 내는 사람과 다릅니다. 유연합니다. 아름답습니다. 힘에 넘치고 실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받고, 그 생명을 영적으로 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전달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생명대신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자기와 관계를 맺는 그 사람 마음속에 또 다른 미움을 심어주고, 그 미움이 심겨진 사람은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미움을 원한으로 갚기를 꿈꾸면서 그들의 정신은 분열을 향하여 달리는 것입니다. 당연히 미워하는 사람은 평강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교회의 부르심에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니 그는 성령을 슬프게 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이런 평강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니 살아있는 동안 이 평강을 충만하게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 이 평강을 전해주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마음에 임한 평강
마지막 두 번째는 마음에 임하는 평강입니다. 교회는 이 평강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평화를 누리고 자신 안에서 영혼과 마음이 단정한 질서를 따라 쉼을 얻도록 우리를 신자 만드셨습니다. 이 평강은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에 임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혜로운 작용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어떤 물질이 갖고 싶어서 마음이 끝없이 요동치고 안달을 합니다. 그러다 그것을 갖게 되면 놀라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갖고 싶은 것을 얻은 만족감과 함께 말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그게 얼마나 갈까요? 얼마나 좋을까요?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그 기쁨은 잠시이고 그것은 영원한 평강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모든 일들이 내 마음 먹은 대로 형통하게 될 때 우리는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만 우리의 마음이 평화를 찾게 됐다면 그 평화는 며칠이나 지속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통함
결국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이 주는 일시적인 평강은 진정한 평강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평강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평강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을 통해 죄를 회개하는 영혼의 변화를 통해서 이 마음의 평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좁은 땅 덩어리에서 영남과 호남이 아주 심하게 갈등하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양쪽 중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어떤 사이였길래 그들이 함께 교회의 지체가 된 것에 대해서 성경이 그렇게 엄청나게 말하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드신다면 영남, 호남을 훨씬 더 극단적으로 편을 갈라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한 교회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한 형제자매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생각하는 방식과 자부심들이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다른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화목케 하시는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만나서 화해하기 전, 이방인이 유대인을 만나서 존경한다고 말하기 전 먼저 그들은 각각 있는 그 자리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나타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이방인이요, 저 사람들이 유대인인 이 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말을 하면 별로 반응을 하지 않던 사람들이 좌파우파를 이야기하면 이제껏 보인 적이 없는 열심을 내고 서로에 대해서 다른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 다툽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게 해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것을 깨닫고,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다름보다도 더 높은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정신이 천천히, 천천히 이 세상에 내려오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위해 살게 하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점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 형제라는 같음을 주목했습니다. 그 같음 때문에 다름을 서로 인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멸시를 받거나 유대인이라는 혈통 때문에 배척을 하지 않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십자가의 화목케 하는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하였습니다. 화목의 반대가 원수됨이라고 말합니다. 화목은 사랑에서 비롯되고 원수됨은 미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은 곧 평강의 열매이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 화목입니다. 그래서 불화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입증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여유, 그런 힘이 어디에서 생겼을까요? 그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그 놀라운 은혜 때문에 거기에서 사람들을 용납하고, 견디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이렇게 원수된 것을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니 미움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거꾸로 돌려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하는 동안에 그의 마음과 정신은 산산이 부서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피폐해지고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마음은 지옥을 지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평강도 누리지 못하고, 평강을 누려야할 사람들을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자신은 그렇게 살아간 삶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기다려야 할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위해 용기를 내야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 평강을 주셨으니 내가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이 평강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마음에 주심
이 평강은 마음에 주어집니다. 우리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아주 적은 지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채 살아갑니다. 인생 공부는 결국 마음에 대한 공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는 것도 마음으로 알아보는 것이니 하나님을 아는 그 순간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자신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마음을 배워야 하고, 마음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없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신 것, 그래서 우리가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고, 나 자신을 반성할 수 있게 하신 것은 바로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배우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종교와 사상보다도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큼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이 평강은 우리의 마음에 주어집니다. 사람들은 우리 주변의 환경이 우리 마음대로 되게 함으로써 마음에 평안을 얻어 보려고 하지만 그런 시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기쁜 일은 잠시 기뻐하게 할 뿐 기쁜 일이 지나고 나면 더 슬픈 일이 뒤따르게 마련이고 소유의 만족을 느낀 사람은 반드시 남보다 더 많이 상실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고뇌와 번민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강을 갈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데 우리는 그 평강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평강을 주시는 방식이 너무나 초월적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7절은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보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력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그분께 나의 모든 어려움을 토하고 눈물로 기도했더니 어느 순간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평안에 나에게 주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초월적이고 신비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평강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평강은 기도 응답의 가장 중요한 표지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마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사실은 우리 자신이 첫 번째 수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요동치지 않습니다. 종종 우리들이 직면하는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강을 잃어버립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 의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두려운 일들이 있으십니까? 염려가 있으십니까? 혹은 이렇게, 이렇게 사태가 변화될지 모르기 때문에 무서우십니까?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들의 마음을 바치십시오. 하나님 내 인생은 어차피 주님의 수중에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거역할 수 없고, 주님이 하고자 하시지 않는 일을 내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은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손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은 사람은 앞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미래를 아는 지식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미래를 알고 싶어 합니다마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런 재능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만약에 미래에 대해서 안다면 행운이 찾아올 사람들은 행운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고, 불행이 찾아오기로 결정된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철저하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그래서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을 찾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사람들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일은 모릅니다. 그래서 그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설교하는 저 자신도 그렇게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서 이제 내 인생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서 비록 그 미래가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커다란 격변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붙들린 한 사람으로서 그 미래의 그 어두운 웅덩이를 향해서 두 손을 꽉 쥐고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찌라
그런 담대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 주님께 바쳐졌사오니 사나 죽으나 내가 예수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내 인생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두 주먹을 꽉 쥐고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자신이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놀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평강을 누리십시오. 영혼이 육체를 다스리게 하십시오. 육체와 욕심이 신앙과 이성을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 변천하는 것들에 마음을 고정시키다가 어지러움을 느끼지 말고, 불변하는 것에 마음을 고정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매십시오. 마음 전체를 하나님을 향하게 하십시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를 통해 내게 주신 이 평강을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마음을 굳게 먹으십시오. 행복은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 평강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은 끊임없이 사람을 용서하고, 평화를 누리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에 이 평강이 가득 찬 채로 한해를 보내고 맞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롭고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사랑하며 화평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평강이 있으나 미워하는 자에게는 번민과 고통이 그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과 분쟁하고 다른 사람과 분쟁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없을 수는 없고, 자기 생각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때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죽으셨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이 은혜 때문에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았으니 그리스도의 평강을 충만히 누리고 이 부르심에 헌신하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