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1
야곱을 부르시는 하나님(창28:)
이것을 읽으면서 아주 커다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나온 책이 이 책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 창세기는 전체가 50장으로 되어있는 책인데 그 중에서 약 80%정도가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1장까지는 전체 민족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1부라고 할 수 있고 2부에는 12장부터 50장까지인데 불과 몇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네 사람의 이야기를 약 창세기 전체 80%정도를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말씀드리는 야곱을 오늘 우리들이 생각을 해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35장 1절을 여러분들에게 말씀 전해드리기 위해서 배경을 쭉 읽은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35장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벧엘로 올라가라 그러는 장면을 중심으로 이번 학기에 강의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우선 352장을 이해하기 전에 35장의 밑그림이 되고 있는 29부터 34장을 다 읽어야 됩니다.
제일 먼저 우리들이 야곱이란 인물에 대해서 먼저 배경설명을 하고 어떻게 해서 이 35장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을 하게 되셨는가, 거기까지 오늘 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한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 가운데 이 야곱이란 인물처럼 아주 재미있는 인물이 없습니다. 야곱은 에서와 함께 쌍둥이로 리브가의 뱃속에서 태어났는데 쌍둥이를 낳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엊그제도 6쌍둥이를 낳아서 강아지 새끼모양 뉘어났는데 일본에 보니까 유모차도 두 개, 세 개 세트로 되어있는 게 있는데 쌍둥이를 낳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쌍둥이를 낳으면 몸 안에서야 쌍둥이가 동시에 가졌지만 나올 때는 이렇게 차례대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순서대로 나가면 누가 먼저 나가든지 나가면 되는데 자기가 먼저 나가겠다고 뱃속에서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잡아당긴 것입니다. 뱃속에서부터 문제를 일으켰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집안에도 많은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것은 당연히 먼저 태어나면 형인데 형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하나님이 아예 태어나기도 전에 예언하기를 뱃속에 두 민족이 있는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나님도 참 이상하십니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겨야 되는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바에야 작은 자를 먼저 내보내시면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신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왔는데 우리들은 늘 성경을 대할 때 조심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을 너무 엄청나서 우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을 읽으면서 올바른 태도는 위대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신통치 않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위대하게 쓰시는 크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늘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 다윗이라든지 아브라함이든지 다니엘이든지 아니면 훌륭한 믿음의 선지자의 삶을 보면 늘 우리와 같은 형제, 자매라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먼 나라에 있는 사람, 전혀 다른 곳에 있는 사람 같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이 야곱이 그렇게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야곱은 그렇게 해서 태어나게 되었는데 태어나서도 그 야곱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전형적인 표본입니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그 당시에 활달하게 말도 타고 사냥도 하고 그리고 들일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천성적으로 계집아이입니다. 그래서 늘 엄마 치마폭에 싸여서 졸졸 부엌으로 안방으로 따라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에서는 또 정 반대입니다. 온 몸에 털이 나고 늘 들판에 나가서 사냥하고 그리고 거친 일을 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엄마가 냉철한 것 같으면서도 늘 감정적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아버지는 좀 덜한데 특히 어머니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친친 애라고 자식이 밥만 먹으면 인사도 안 하고 들판으로 뛰어나가서 짐승을 잡는다, 사냥을 한다고 뛰어다니다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아들보다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엄마 설거지를 도와주고 뭐 하면서 부엌으로 안방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자기 치마폭에 싸여서 살아가고 있는 이 아들에게 더 따뜻한 정이 갔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정이 점점 쌓여서 이게 편애로 변했습니다.
문제는 리브가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고 이삭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태어나기도 전에 말씀하시기를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민족은 너희 작은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으면 그 뜻 이루어지리라. 그러면서 기다리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될 터인데 리브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이 야곱이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을까, 그것을 계속 염려했고 또 이삭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셔서 작은 아들에게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어떻게 하면 큰아들을 축복을 해줄 수 있을까.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당시 신앙과 당시의 관습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요즘말로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신앙적인 선택과 세상적인 선택의 갈림길에서 이삭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신앙적인 선택을 하는 대신에 세상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내는 그 방법도 아주 간교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가 하면 아버지가 장막에서 에서에게 내가 이제 기력이 쇠하여 죽을 때가 되었는데 내가 네가 사냥한 음식을 먹고 마음껏 네게 축복을 해주고 싶다고 하면서 가서 짐승을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 아는 바와 같이 그 이야기를 리브가가 엿듣고 와서 야곱에게 말하기를 큰일났다. 네 형이 아버지께 축복을 받으려고 하니까 이때 절호의 찬스로 가로채지 않으면 정말 가망이 없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작은 아들에게 그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버지의 마음을 돌이키든지 아니면 그 축복을 무효가 되게 하든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그 믿음을 갖는 대신에 인간적인 이삭의 실수에 대해서 인간적인 교묘함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짐승을 잡아다가 요리를 해서 가죽이 무슨 가죽인지 아십니까? 양가죽이 아닌 염소가죽입니다. 염소 가죽을 손과 목도리에 해서 털 많은 에서 흉내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대로 받습니다. 받은 게 무엇인가 하면 그 염소 사건 때문에 뼈아픈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언제 만납니까? 아니 삼촌 댁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나중에 아들을 많이 낳아서 요셉을 형들이 죽인 다음에 가지고 온 것이 피 묻은 옷과 그 다음에 염소가죽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 야곱이 응분의 대가를 그대로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렇게 해서 거기에서 축복을 가로채게 되는데 그 축복을 사모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옛날부터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다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동기야 어떻든지 간에 기본적인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아야지만 참된 축복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축복을 가로챈 것이 긍정적인 면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너무 인간적이었고 불신앙적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합작품이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리브가는 뼈아픈 징계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아들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커다란 징계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축복을 가로채고 할 수 없이 형의 복수가 무서워서 도망가는데 그 도망가는 장면이 오늘 우리가 맨 처음 읽은 28장에서 읽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28장서부터 처음에 그런 속에서 무슨 신앙이 있겠습니까. 신앙도 별로 없고 그런 것인데 그런 면에서 볼 때 이삭도 아브라함과 같이 자식을 얻기 위해서 첩을 취하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런 점에서는 인내가 있었지만 그러나 또 이런 면에서 볼 때 이삭의 말년의 신앙생활이 굉장히 해이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을 듣는데 둔감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신앙생활을 해야지 됩니다. 성경에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보겠습니다만 구약에 나오는 그 훌륭한 대부분의 임금들이 모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 육체로 마쳤습니다. 아사 왕, 히스기야 왕, 여호사밧 왕, 심지어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말년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육체로 인생을 마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우리의 신앙에 좋은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연세가 들수록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예민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야곱이 28장에 들어오면서부터 이제는 아버지의 하나님, 어머니의 하나님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무대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28장서부터 그 무대가 본격적으로 그 무대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이 사람이 이제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8장에서 막막한데 에서였다면 덜 막막했을 것입니다. 왜? 평소에 늘 강인했으니까. 그리고 늘 들에서 돌아다니고 외로움을 안 타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엄마 치마폭에만 쌓여서 살던 사람이 이제 그 먼 길, 가나안에서 밧단 아람까지는 엄청난 먼 길입니다. 그 당시에는 여행하는 것이 지금과 같지 않고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강도를 만날 위험, 맹수를 만날 위험 그래서 요셉의 옷에 묻힌 그 피가 바로 염소의 피였습니다. 그래서 그 대가를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 염소 가죽 때문에 그 형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더니 마지막에 그 염소 피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한번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나 배우게 되는 사실은 부모님의 하나님, 그리고 과거에 집안에서 알아왔던 하나님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에 설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생생하게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어머니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28장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 여행의 길이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었고 제일 큰 어려움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야곱이 기도한 것으로 봐서 먹는 문제였습니다. 돈을 가지고 음식을 사먹으며 갈수 있는 길도 아니었기 때문에 먹는 것이 문제였고 또 먹는 것과 입는 것, 신을 신는 것도 문제였고 맹수와 도적의 위험, 이런 것이 문제였습니다. 모두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는데 이제 그 벧엘이라고 하는 곳에 와서 저녁이 되었으니 쪼그리고 잠을 자는데 자는 동안에 또 습격을 만나면 어떻게 하나. 외삼촌집이라고 했는데 그게 어디쯤 되나, 얼마나 더 가야지 되는지, 그리고 얼마 전만 해도 따뜻한 이불 속에서 그리고 포근한 장막에서 부모의 사랑을 느끼며 그렇게 편안하게 잠들었는데 이제는 하늘을 이불삼아 땅을 요를 삼아서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외롭게 잠들어있는 그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불쌍하고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인지,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 나타나십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는 첫 번째 본격적인 장면이 이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그럴 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장막에서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속에 있을 때 그때 야곱아 내가 네 하나님이다. 이렇게 나타나시지 않으시고 모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고 그리고 있는 것이라고는 지팡이와 괴나리봇짐 밖에 없고 그리고 온통 누워있어도 쉽게 잠들 수 없을 정도로 불안과 공포를 느껴야 하는 이런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우리의 인생에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편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를 만나주실 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치마폭에 싸여서 부족한 것이 없이 장막 속에 살 때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 그런 것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셨더라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도 28장과는 사뭇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야곱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곁을 떠나고 지금 누워 자면서도 모든 귀는 그대로 깨어있습니다. 왜? 바삭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형이 쫒아오는 것은 아닌가. 사방은 안전한가. 돌아보고 맹수의 위험은 없는가. 그러니 야곱의 인생은 축복을 가로챈 것 자체를 크게 이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완전히 이 세상에 있는 부모님도 의지할 것이 없고 자기를 도와줄 사람도 없고 사방을 돌아보아도 자기에게 위로가 되어줄만한 것은 하나도 없는 찬 이슬이 내리는 벧엘의 언덕에 새우잠을 자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인생에서 이런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도무지 사랑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믿을 수 없게 나를 배신해버리고 내가 의지했던 것들은 다 놓쳐버리고 어디 기대려고 해도 기댈 때조차도 없는 이런 상황에 서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게 인생의 위기 가운데 있을 때 기뻐하십시오. 그때가 바로 크신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많은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십시오. 모두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모든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하나님만 소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가있을 때까지 하나님을 기다리십니다.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하나님과의 장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천사가 사닥다리에서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사닥다리라고 번역이 되어있지만 히브리어로 ‘술라미’라는 말인데 하이웨이입니다. 천사가 품위 없이 날개도 있는데 사닥다리를 잡고 오르락내리락 거리겠습니까. 하이웨이, 고속도로가 하늘로부터 쭉 뻗어있는데 그 길을 천사들이 신비하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늘나라의 장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간혹 이삭도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니까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이야기해주었겠지만 말년에는 신통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깊은 침체에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침체 속에서 야곱에게 하나님에 관해 얼마나 이야기를 해주었으며 또 이야기를 들었다고 치더라도 그 듣는 이야기로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상상도 못한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천사가 하이웨이로 오르락내리락 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같이 신앙이 좋은 사람이 그것을 봤다고 그래도 놀라울 것인데 이 야곱과 같은 생짜배기가 그것을 봤을 때 완전히 정광석화같이 영혼이 보통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나가떨어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장면을 보니까 그랬더니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 음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축복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정말 신나는구나. 우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룰 때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이것 이상의 큰 축복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데,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겠다는 이야기는 그냥 같이 있기만 하겠다는 이야기입니까? 함께 있겠다는 이야기는 동행해주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함께 있기는 있지만 네가 어려움을 당하면 얼마나 고통을 받는가, 내가 옆에서 한번 쳐다보고 네가 곤란한 일을 만나면 얼마나 괴로운지 내가 옆에서 지켜보겠다,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내가 너와 동행하고 어디로 가든지 높은 계곡과 언덕을 다니든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든지 깊음의 들판을 지나든지 그리고 위험한 강물을 지날 때든지 어디에 있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입니다.
이정도가 되면 여러분같이 신앙이 좋으신 분들은 하나님이 이 정도 말씀하시면 주여, 주의 말씀이 내게 족하니이다. 이럴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겠다는 이야기는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약속했는데 이 야곱은 솔직히 말해서 신앙의 수준이 여러분만큼도 안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 영광스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어떤 극적인 체험을 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만나면 이런 말 할 사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풀썩 엎드려져서 고개도 못 들고 뻥 나가떨어져서 주여 뉘시니까? 주여 제가 어찌하오리까? 딱 두 개 물어봤습니다. 그리고 또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밧모섬에서 있던 사도 요한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나타나십니다. 뭐라고 그러십니까? 죽은 자와 같이 내가 엎드려졌더라. 하나님이 나타나시니까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안전이라고 거기서 고개를 들고 대꾸를 하는지, 주님이 나타나셔서 그래도 주님만 나타나셨습니까. 배경이 깔립니다. 주님만 나타나시면 혹시 이게 착각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배경이 증명을 해줍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하이웨이가 휙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틀림없이 이 지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황홀한 가락의 찬양이 울려 퍼졌을 것입니다. 아, 그런 배경이 깔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내가 너와 함께 하여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리라. 그러는데 거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대꾸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한 것입니다. 감히 거기서 대꾸하는 것입니다. 요만한 애들이 왕이 누군지 압니까? 까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강원도 설악산에 갔다가 오다보면 이승복 기념관이라고 있습니다. 어린애가 괴뢰군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습니까. 공비들인데 총을 들고 있는데 거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죽었습니다. 물론 애국심도 있겠지만 그러나 어른들은 그놈들이 얼마나 잔학무도한지 알기 때문에 감히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는데 천방지축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러면 그 음성만 듣고도 질겁을해서 엎드려서 주여, 떠나소서. 내가 죽겠나이다.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말해야지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들고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게넷사레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 뭐라고 말씀도 안 하셨는데 고기가 엄청나게 잡힌 것을 보고 예수님을 쳐다보니까 보통 분이 아니야, 그 자리에서 탁 엎드려지면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왜? 두렵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 6장에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스랍 가운데 서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뭐라고 하는가 하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중에 거하면서 거룩한 하나님을 뵈웠음이라.” 그러면서 망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죄인이 그 거룩한 하나님을 뵈었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가, 이제 죽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생긴 사람이 보통 강심장이 아니라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장엄하게 말씀하시는데 벌떡 일어나더니 하는 말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조건을 걸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하고 있는 사업이 잘되고 그다음에 집도 평수가 넓은 곳으로 옮겨가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겠나이다. 요즘 말로 하면 그런 것입니다. 웃기는 것입니다. 아니, 내게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하나님은 처음서부터 자기에게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자기가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안 하고 그런 문제없습니다.
성경이 첫 장을 넘길 때마다 -인간이 그래서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맨 처음 대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것은 사람들이 동의를 하든지 말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조하셔서 하나님이 지금도 하늘의 별과 달과 모든 천체를 운행하는 것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생명도 그분의 손끝 하나에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하나님이 내게 하나님이 될 것이며 예를 들면 여러분 정도의 신앙의 수준이라면 좀 더 고상하게 얘기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해드리면서 고상하게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나의 갈 길을 지키시고 그리고 나에게 축복해주시면 하나님을 섬기는데 더 잘 섬기겠습니다. 이 사람은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아주 무서운 말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안 지키시고 먹을 양식을 안 주시고 입을 옷을 안 주시고 나로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못하시면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안 되실 것입니다.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것은 자기 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감격적인 순간에 분명히 이것도 신앙적인 반응은 반응인데 이 사람이 여기서 감히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다고 하는 것만 해도 이 사람에게는 장죽의 발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두 번째로 하는 말이 내가 기둥으로 세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며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마지막으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아멘,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신앙도 그렇게 대단한 신앙이 아니었다고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들의 상태가 정말 특별한 변화가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변화가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대게 이런 정도입니다. 신앙생활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이용하는 정도 아니면 신앙생활 그 자체를 그저 하나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얻기 위한 수단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게 바로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한 모습을 우리는 28장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셨으면서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축복을 해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셔야지 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있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정말 우리들의 신앙이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빨리 29장과 30장 이후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 그랬는데 29장에 들어가서 역사가 다시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29장에 들어가서는 이제 드디어 이 사람이 밧단아람에 도착을 합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밧단아람에 도착했을 때 온갖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 먼 길을 걸어서 왔을 때 이제 비로소 아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보신 분들은 아마 멀리서 그 민가의 불빛을 발견할 때 얼마나 기쁜지 여러분들은 아마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그 위험을 통과하면서 마지막 목적지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목적지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외삼촌 라반의 집이었습니다. 가는데 이 외삼촌은 고수 중에서 뛰어난 고수라.
제가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들어갔더니만 애들이 시험을 보고 들어왔는데 나는 중학교 때 별로 그렇게 출중하게 공부를 못했어도 들어왔는데 들어와서 얘기하는데 보니까 중학교 때 수석을 하지 않은 애가 없었습니다. 나는 서산 중학교에서 수석하고, 선생이 내가 질문하면 쩔쩔맸고 계속 그런 애들이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보니까 별 볼일 없습니다. 중동고등학교 밖에 못 들어왔습니다. 보니까 지방에서 아무리 수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강호들이 모인 서울바닥으로 오면 축 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밧단아람과 가나안은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밧단아람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라스베가스 한복판이고 이 가나안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저 시골의 중소도시가 될까 말까 하는 한국의 도시 정도의 차이입니다. 거기에서 머리깨나 굴린다고 하는 이 야곱이 올라와봤지만 이 강호에서 뼈가 굵어지고 자라난 라반을 당한 재간이 없습니다. 양을 치고 목축을 해도 이 라반은 기업가적인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었고 야곱과 집안의 식구들은 양을 치고 짐승을 쳐도 순박하게 텃밭에서 채소나 가꾸고 닭이나 기르는 그런 수준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딱 가서 몇 달을 뒤척뒤척 거리며 얻어먹었는데 처음에는 눈빛이 곱습니다. 네가 진정 리브가의 아들이란 말이냐. 그러면서 이게 얼마 만인가 하면서 매일 불고기에 불 갈비를 먹이더니 그 다음에 점점 눈빛이 달라지면서 찬밥이 되어갑니다. 이 사람도 눈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정좌를 하고 삼촌 내가 왜 삼촌 집에서 공밥을 먹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반은 언제나 그 소리가 나올까 기다렸다가 옳지, 일을 해라. 그런데 그때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데 구약에서 수수깨끼입니다. 계산을 하면 칩 십 몇 세가 나오는데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게 하나의 수수깨끼입니다. 어떻든지 간에 아마 결혼을 할 때가 되었나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보니까 그 딸들이 있는데 그때는 근친결혼을 많이 했으니까 딸들 중에서 라헬이 곱고 인물이 출중하고 왠지 마음이 끌렸습니다. 고단하게 일을 하고 양떼를 치고 짐승들을 몰고 그러면서 자기 말대로 졸음이 쏟아지려면 눈을 비비면서 그렇게 양떼를 지키면서도 저녁때 집에 들어와서 밥 먹으라고 오빠가 되니까 밥을 차려주면 라헬하고 눈만 한번 마주치면 하루의 피로가 싹 녹는 것입니다. 웃으시는 분들은 그런 경험이 있으신 분들입니다.
아빠가 하루 종일 수고하고 들어와서 한번 집사님을 쳐다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가 풀리십니까? 혹시 왠지 나는 우리 집사람만 보면 피로가 쌓여, 이렇게 되면 곤란할 것입니다. 그런데 피로가 싹 풀리니 어떻게 결혼을 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그러니 라헬과 결혼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정식 제의를 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겠는가. 칠년 동안 내가 무보수로 일하겠습니다. 요즘 남자들 가운데 그럴만한 남자가 있을까, 칠년을 무료봉사하고 결혼을 한번 한다, 그 젊은 청춘을 다 바쳐서, 그런데 이 사람의 사랑은 불같이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봉사했는데 갑자기 일하는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일을 하는데 피로한 기색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칠년만 채우면 저 아리따운 여자가 내 아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성경에 칠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사랑이 있으면 이런 것입니다. 왜 교회에서 섬기고 봉사하다가 지치고 피곤하고 힘들다고 그렇습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으면 정말 이 칠년의 수고가 수일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니 사람들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고 다 죽어있는 사람을 이용해서 좀 부려먹어 교회일 좀 시키려니까 이게 교역자가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이것 좀 하십시오. 하면 그것만 딱 하고 차렷 자세로 기다립니다. 아니 이렇게도 해야지, 꼭 그것만 하고 기다립니다.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기본적인 원동력이 되는 모든 섬김과 인생의 원동력이 되는 그 사랑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부흥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라헬을 향한 사랑이 있으니까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거기서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밥이나 얻어먹자고 밧단아람까지 와서 내가 이 짓을 하고 있나 생각할 때 처량할 수 있을 것인데 그래도 이 칠년이 수일갈이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대망의 날이 왔습니다. 월부로 우선 칠 년 치를 갚고 그 다음에 이제 현품을 인수하는 날인데 현품을 인수하기 위해서 밤에 들어가서 꿈같이 황홀한 밤을 지냈습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라헬과 첫날밤을 보냈구나.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보니까 그 친구가 아니라 다른 여자였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삼촌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씩씩거리는 야곱에게 드디어 두 번째 고수의 카드를 내미는데 애야, 우리 지방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법이 없단다. 아니 그러면 진작 얘기하지 왜 이제 하는지, 아니 진작 얘기하면 포기할 것인데 십사 년을 해야지 되니까. 그러지 않으면 언니는 사은품으로 끼어달라고 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했을 것인데 아니 왜 이제야 얘기하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고수인지 보십시오. 칠년을 또 일해라. 그러면 라헬을 주리라, 그러면 포기하고 가나안으로 가버릴 것 같으니까 일주일을 기다려라. 네가 원하는 사은품이 아니라 이번에는 정품을 주겠다. 그리고 그 후로 칠년을 더 일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울며 겨자 먹기입니다. 할 수 없이 울며겨자 먹기로 사은품을 받은 대가로 칠년 동안을 앞에 일한 것은 허탕이고 그 다음에는 현품을 먼저 받고 월부로 갚아나가는 외상 결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같은 실명제 시대에 이상한 말인지 모르지만 어째든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 칠년 일할 때야 신났겠지만 다음 칠년은 신이 났을까요, 버거웠을까요? 틀림없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칠년이면 그 사랑하는 아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원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았던 사은품을 강매를 받아서 할 수 없이 칠년을 일해서 다 탕감해버렸으니 이제는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지만 그러나 차츰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솔직한 이야기지만 첫날밤의 감격이 칠년 동안 유지되겠습니까. 서서히 그런 감격이 식어지는 것과 함께 나이는 드니까 일은 점점 고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십사 년을 허송세월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가 하는 것인가 알게 됩니다. 거기서 이 야곱이 깨닫는 것이 그것도 하나님은 야곱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하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사용했는가 하면 봐라. 네가 네 머리를 믿고 가나안에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이제 온천하가 네 머리 하나에 있는 것처럼 네 엄마와 난리를 치고 했지만 봐라, 세상은 이렇게 넓다. 이렇게 진짜 고수가 있는데 너 이 고수에게 한번 놀아나면서 인생에 자기 꾀를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배워봐라, 하면서 철저하게 굴리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고수의 머리싸움에서 진 대가로 온갖 고생을 다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수가 또 얼마나 지독했는지 나중에 그 야곱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양을 쳤을 때는 야 지금 몇 마리가 새끼를 가진 몇 마리다. 장부책에 써가지고 간 것 같습니다.돌아와서도 계산을 해서 낙태한 것 네가 잘못해서 물어내. 짐승에게 찢겨간 것 네가 물어내, 다리 부러진 것도 변상해라. 이렇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지긋지긋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내 인생에 내 술수 하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 있습니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말 곤고함과 고통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한 예수를 믿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빨리 포기할 때 사은품이 나올 때 그때부터 알아봤어야 합니다. 이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못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늘의 생명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나라의 신령한 복을 모두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자기의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그러면 환영을 받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서 야곱과 같이 자기 꾀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계속 골탕을 먹으면서 살아가게 만듭니다. 어느 때까지, 하나님, 저는 정말 고수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내 방법, 내 방식으로는 정말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인 것을 이 시간에도 고백합니다. 이 세상의 고수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사은품밖에는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를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야곱이 그곳에서 보낸 21년 가운데 마지막 최종적인 14년은 완전히 실패한 14년이었습니다. 철저히, 야곱의 믿음이 단번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보면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이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기 보다는 자기에 대해서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이 좀처럼 안 들어갑니다. 신앙이 안 들어가면 14년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으면 14년이 아니라 7년까지는 그렇게 했을지도 몰라, 7년까지 하고 우리 같았으면 즉시 주님이시여 이것이 나의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두 손 벌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내가 레아를 데리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정말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반성하는 회개의 울부짖음을 하기 위해서 기도원으로 찾아올라갔을 텐데 이 사람은 그러면서도 또 7년을 가지고는 훈련이 안 되고 7년 곱빼기 14년을 신앙이 안 들어간 것입니다.
신앙은 연조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교회를 다녔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순박한 심령으로 하나님과의 위대한 만남을 언제 가셨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우리교회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면 믿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청년들이 말씀을 전하면 쑥쑥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믿음이 자라는 것이 매주 보입니다. 머리를 계속 굴리고 있는 사람들은 사은품만 만지작만지작 거리는 주제에 그러면서도 머리를 굴릴 게 남아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신앙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절박하게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매순간 매분 매초마다 우리를 지키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생들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대신에 하나님 잠깐 기다리십시오. 그래놓고 계속 설쳐봤지만 오는 것은 매일 사은품밖에 안 오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리고 자기가 뭔가 정말 자기의 인생을 행복스런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엄청난 교만, 이것이 남아있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밧단아람에서의 이 고달픈 기간은 계속 연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7년이 하나의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이제 떠나겠습니다. 내가 어느 때까지 내 집을 세우고 당신 집에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습니까. 이때 고수가 세 번째 카드를 내밉니다. 그 카드가 무엇인가하면 야, 그러면 품삯을 줄테니까- 주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를 위해서 7년을 더 고생하라. 그런데 야곱은 이미 성경에 자세히 안 나오지만 뭔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게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래서 카드를 내밀었는데 이 카드는 야곱의 인간적인 속임수의 카드가 아니라 계시가 준 카드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이 가져다준 카드입니다. 그런데 이놈이 말도 안 되는 제의를 한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색깔이 있는 양 중에 얼룩덜룩한 것은 다 가져가고 마지막에 남아있는 것 중에서 알록달록한 것이 태어나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달라고 하는 것인데 그런데 우생학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잠복되어있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자가, 그러나 예를 들면 짐승이 까만 것과 까만 것을 접을 붙여서 새끼를 낳으면 거기서 알록달록한 것이 나오는 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바둑이가 나온다는 것이, 바둑이와 검은 게 나오든지 바둑이와 하얀 게 나오든지 그러면 그럴 가능성이 많은데 그러면 하나도 없고 그런 짐승끼리만 나두고 그런 남겨둔 짐승과는 다른 색깔이 나오는 것을 갖고 자기의 소유를 삼겠다고 했으니까 이 라반은 쾌재를 부른 것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역시 네가 이 목축에 대해서 모르는 모양인데 그래라. 아주 흔쾌하게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때서부터 야곱이 본격적인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7년 동안 그 속에서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 그래도 신앙을 하나님이 주시기는 하셨지만 사람을 따라 주십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이라는 자체가 그렇게 간교하고 그러니까 주십니다. 그러면 얼마나 멋쩍겠습니까. 하나님이 참 신실하게 일을 했는데 하나님이 넘치도록 주셨다. 그렇게 축복을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주 상상할 수 없는 일들도 많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는데 약을 올리기에 보험회사에 다니는 사람인데 내 보험 두 개만 들어주면 교회에 다니지.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말 같지 않아서 상대도 안 했는데 그래도 기도할 때 마음에 걸리더랍니다. 아무리 그래도 영혼인데 불쌍해서 기분이하며 왕창 보험을 들었답니다. 그 다음 달에 불이 나서 그 두 개를 다 탔는데 가게를 새로 짓고 확장하고 집도 새로 짓고 완전히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정식적인 축복을 주시는 게 아니라 신풍나무 껍때기를 까서 물에 넣었다 뺐다 신통치 않은 것이 오면 저리 가라고 넣었다. 뺐다. 어떻게 생각하면 좀 졸렬합니다. 사람이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엄청난 떼를 얻어서 가만히 보니까 처음에 한 마리 두 마리 늘어날 때는 얼굴이 그래도 좀 많이 늘어나는구나. 그리고 좋아하더니 이게 기하급수적으로 튼튼한 놈으로 늘어나니까 낯빛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또 얼마나 빠른 사람입니까. 저 강호 고수의 이마에 여덟팔자가 자꾸 두터워지는 것을 보니까 언젠가는 깽판을 놓겠구나. 장기를 두다가 마음에 안 들면 확 흩어버리는 것처럼, 분명히 옛날 도장 찍은 것 소용없다. 계약서 찢어버리고 당장 칼 들고 달려와서 빼앗아갈 사람이다. 자, 시작,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도망갈 때다. 보따리 다 챙겨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라반의 자식들이 가보니까 없습니다. 신통치 않은 것 몇 마리 남겨놓고 다 데려간 것입니다. 쫓아가는데 거기서 또 하나님께서 놀랍게 구원하십니다. 반 죽여 버리려고 쫓아갔는데 하나님을 잘 믿지도 않는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야곱에게 털끝하나 건드리면 넌 죽을 줄 알라고 하십니다. 가서 왜 진즉에 간다고 그러지 왜 그랬느냐고, 또 고수입니다. 눈치가 보통이 아닙니다. 야, 왜 그렇게 도망치나. 간다고 하고 갔으면 내가 비파도 켜주고 바이올린도 켜주고 노래를 불러서 환송식을 해서 보냈을 탠데 왜 그랬는가. 마음에 없는 순 거짓말을 했습니다. 간다고 그러면 가만히 내버려두었겠습니까? 벌써 불구의 객이 되었지. 하여튼 피는 못 속이는 게 라반이 그러니까 리브가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 오빠, 그 동생, 그 동생의 아들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라반을계속 보면서 저 말이 내 말이구나. 하고 늘 깨달았어야 하는데 깨달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이 그 모습이고 그 핏줄이 그 핏줄인데 그런데 참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결국은 라반이 완전 판정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돌비를 세우고 다시 내가 돌 경계선을 넘어오면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뒤로 쫓아올 것에 대해서는 근심을 그쳐지게 만들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수많은 꾀와 수많은 술수로 그 뒤에 따라오는 대적과 근심을 끊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느 한구석이 터질 것 같아 막아놓으면 이쪽에 또 뻥 터지고 저쪽에서 막아놓으면 이쪽이 뻥 터지고 혹시 이런 인생을 사시는 분은 없습니까? 하님이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오게 되었는데 여태껏 살아온 인생의 경력은 그래도 견딜 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진짜 이판사판 공사판 이제 막판이 나왔는데 그 막판이 나왔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할 수 있어도 에서 이는 감당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머리가 그렇게 돌아가는 사람인데도 대책 없음, 컴퓨터에 넣고 어떻게 할까 그랬더니 삐리릭 나오는 말이 대책 없음, 그대로 당하세요. 그것만 나옵니다. 하나도 당할 수 없고 그리고 여태껏은 라반의집에 있고 그런 것은 가끔 위협을 당했지만 생각을 바꾸어 봐도 자기가 형이면 자기는 가만히 안 내버려두리다. 죽여 버릴 것입니다. 계책이 안 섭니다. 거기에서 야곱이 인생의 위기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인생에 곤경에 처했을 때는 하나님의 위대도움을 경험하나 인생에 깊은 위기를 만났을 때는 그 속에서 정말 위대한 결단을 하게 됩니다. 이게 신앙을 가진 사람과 안 가진 사람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믿은 신앙을 가진 사람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중요한 차이점은 평소 살아가던 삶의 모습도 물론 틀리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지 못한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위기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를 의지합니다. 그러게 돈독한 신앙으로 못 살아가는 것 같다가도 영적인 감지력이 있습니다. 아, 이것은 위기다. 여기서는 정말 내 힘으로 안 된다고 하는 어느 시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 지점에서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매달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 힘이 영혼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야곱이 생각하기를 여기서도 머리를 굴립니다. 자기의 엄청난 소유를 나누어서 신통치 않는 종자들은 앞으로 보내서 에서가 와서 멱살을 잡으면 나는 뒤에 것을 끌고 도망가리라. 그 다음에 사은품으로 얻은 레아는 앞으로 가라고, 은혜를 받아도 못 버립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내보내고 그 다음에 이쪽 에서가
(시작하는 부분도 조금 잘린 듯 하고 다 끝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테입이 다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