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11
부흥과 위대한 언약(창35: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 그것이 이제 부흥이었다는 이야기를 드렸고 또 나타나셔서 새카맣게 잊혀졌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다시금 생각나게 해주셨고 자기의 본분을 생각나게 해주셨고 그리고 그에게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계시해주셨는데 이것이 순간에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거기서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흥을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영원히 자기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날 동안에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자기의 신앙을 잡아주어서 그의 인생의 길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전능하신 분을 의지하면서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흥은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부흥의 최대의 관심이라고 그럴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흥을 주실 때 부흥을 통해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가장 큰 것, 그것은 결코 부흥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것처럼 성령이 충만하면 만사가 형통하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디모데 후서 1장은 오히려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봐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받은 사람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권능을 주시면 내가 아주 힘들게 하던 일들을 아주 쉽게 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부흥을 통해서 능력을 주시면 그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힘들게 살던 인생을 편하게 살게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로부터 한없는 능력을 힘입었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평탄한 길을 걸어갔습니까?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능력을 구하고 도움을 구하니까 하나님하고 핀트가 안 맞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부흥과 능력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참다운 진리의 힘으로 말미암은 그런 능력들이 경험이 안 됩니다. 오히려 사도는 자기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어렵게 하던 일을 쉽게 하라.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네가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정말 충만하게 받았던 사람은 마치 하나님이 그에게만 능력을 내려주시는 것같이 탁월하고 발군의 능력을 소유했던 사람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진리답게 증거하므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였던 그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 쉽게 얘기해서 제 명에 못 살고 죽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제 명에 살다가 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걸어간 그 인생길을 정말 그렇게 걷고 싶습니까?
여러분, 야곱이 축복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아니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받았습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야곱과 같은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말고 싶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한없이 받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 사람 같은 인생을 살라고 한다면 난 사양하겠습니다. 기근이 들어서 부인을 데리고 도망가고 또 부인이 잘생긴 것이 죄라서 누이동생이라고 그래서 갖다가 다시 또 찾아오고 그러면서 100세가 다 되도록 아이도 못 낳고 하면서 롯은 왜 또 붙어 다니면서 속을 썩이고 그 인생길이 결코 편안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그런 식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인생이라는 자체를 그런 식으로 보면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 같다고 하면 휙 날아가 버립니다. 그것은 잠깐이지, 휙 날아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부흥을 주셔서 야곱이 큰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까? 사람들의 온통 관심은 이 세상입니다. 형태는 틀릴지라도 온통 관심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저는 영원히 이 말을 되풀이하는데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곤고함의 원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마음에 칼을 품고 그리고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방종하게 죄를 지으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고 각성하고 회개할 생각을 안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우신 분인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해지고 돈 푼깨나 있으면 목이 뻣뻣해지고 교회에서 직분이 올라가면 허리가 뒤로 펴지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원인은 거기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모르고 세상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모든 곤고함의 모든 근원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늘 이 야곱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과 만나서 하나님께서 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것을 알려주시는 그 순간에 이전에 얽어매었던 모든 인생에 밧줄이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장엄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것은 상식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은 상식입니다. 아멘, 그럼 무슨 심오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슨 설교 시간에 제가 설교할 때 무슨 우리가 몰랐던 놀라운 것을 알려주시는가 하는데 설교를 듣고 나면 항상 그 뻔한 것, 여기에 늘 뭐하는 곳인가 하면 뻔한 것을 이야기하는 곳, 결론은 전도하며 삽시다. 뻔한 것입니다. 기도하며 삽시다. 누가 모릅니까?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삽시다. 아니, 그것을 누가 모르는 사람이 있어. 늘 뻔한 것을 이야기하는데 뻔한 것을 뻔한 인생들이 뻔히 모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각성이 일어날 때는 여기서 뻔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뻔하게 생각이 안 되고 와!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이 있다면 그분은 전능할 것이다. 누구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야곱도 아버지께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당연히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뻔한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여기까지 강림하셔서 야곱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야곱에게 뻔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렇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런 식으로 알아야지만 비로소 우리가 그 하나님을 붙들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번 가정해봅시다. 아니, 교회에 안 나오고 세상으로 다니는 사람을 붙잡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아, 그래. 나는 그것을 모르고 여태까지 놀았지. 그렇게 얘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알지. 그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살아가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그것은 참 지식이 아닙니다.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몰랐던 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 압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 아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흥은 그렇게 뻔한 이야기를 우리의 영혼 속에 살아서 역사하게 움직여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온 마음과 영혼이 우리의 삶이 그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진리에 붙잡히게 만들어줍니다. 오늘 유행하는 성령운동이 있습니다. 춤도 추고 별 것 다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부흥에 대해서 강의를 했더니 어떤 사람이 교수님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더니 교수님과 똑같은 사람을 제가 발견했습니다. 있다면 참 감사한 이야기다. 난 비슷한 사람은 많이 받는데 아니 어디 코가 똑같은가, 입이 똑같은가. 아니라고 하면서 말씀이 추구하는 바가 너무 똑같다고 그러면서 테잎을 자기가 선교하는 마음으로 150몇 개를 복사해서 나누어주면서 이 사람이 김남준 목사님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나누어주면서 들어보라고 그랬다고 합니다.
성령운동파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안 들어오고 마지막에 부흥의 시대에는 성령이 놀랍게 임합니다. 그것만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귀신론, 성령은사.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이 아닙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특별히 그렇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기회가 있으면 제가 샅샅이 여러분들이 들을만한 기회가 되면 성령운동과 참된 신앙부흥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장구하게 이야기를 해야지 되겠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참된 부흥이 일어나던 시대에는 성령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추구하거나 은사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운동에서는 끊임없이 성령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참된 부흥이 일어날 때는 하나님 자신을 추구합니다. 그러니까 신비하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이 모든 것들은 부흥에 결과입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헤어지는 남북이산가족을 보면 알 듯 이 몇 십 년 동안 떨어져 살았는데 어느 날 만나서 아니 저 사람이 40년 전에 헤어진 내 남편이 아닌가, 그러면서 여의도 광장에서 만났는데 끌어안을 때 눈물도 나오고 감정도 나오고 별 감정이 다 나옵니다. 그게 결국 부수적입니다. 아, 내가 오늘은 눈물을 흘리고 싶은데 누구 눈물을 흘릴 사람이 없을까? 그게 그렇게 추구한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자기의 헤어진 남편과 만났기 때문에 그 모든 감정들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과 만날 때 신비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정말 이상한 것입니다. 분량 이상의 생각을 여러분이 자꾸 할까봐 내가 말을 하지 않겠는데 정말 신기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자꾸 노골적으로 하면 사람들이 또 앞의 이야기는 하나도 안 들어오고 그것만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경험을 한다면 아주 저 잘났다고 고린도 교회에서 떠드니까 내가 말을 안 하겠다고 그러면서 살짝만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고 말아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들만을 자꾸 바라봅니다.
참된 신앙부흥에서는 성령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마시도록 탄원합니다. 전도 집회에서는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실 사람은 앞으로 씩씩하게 나오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걸어 나오는 것을 보면 진짜로 회개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오는 사람도 있고 별의별 사람도 다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부흥의 때에는 주님을 영접할 사람은 나오십시오.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의 가슴을 찢으며 주님이 나를 영접해달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그게 부흥의 시기와 오늘날 전도 집회, 부흥의 시대에 성령의 역사와 오늘날의 은사파 운동과의 차이입니다. 그것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뭔가 생기가 있어 보이지만 그러나 금방 곤고함을 느낍니다.
여기 순복음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이 있는가 모르겠는데 사실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무슨 흉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장로교회를 5-6년 계속 다녔는데 처음에는 그냥 그럭저럭 다녔는데 5년을 다녀서 집사가 되었는데도 거듭났는지 안 났는지, 예수를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모르겠는데 옆에 순복음 교회를 보니까 박수를 치고 매일 불을 때는데 매일 뭐가 되는 것 같아, 그래서 갔더니 진짜 살맛이 나는데 예배 시간마다 불이 내리고 살맛이 나더랍니다. 그런데 한 3년 지나고 나니까 불이 내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예배 시간에 뭔가 좀 깨닫는 것이 있어야지 되는데 똑같은 날의 반복입니다. 성령, 구원, 축복, 형통, 치료, 신유 그것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순복음 쪽에서 나오는 설교가 쉽습니다. 그게 사실은 강점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이 전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들으니까 이제 할 것도 다했으니까 이제 더 깊은 것으로 가야지 되는데 이게 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 이게 아닌가보다. 다시 장로교회로 돌아가야지 되겠다. 그리고 와보니까 그것도 뭐 양쪽 다 탁월한 설교자가 있으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설교를 적어보니까 거기서는 한 3년 적고 보니까 적을 것이 없었는데 여기에 와보니까 맛을 알겠더랍니다. 아, 역시 깊다.
여러분,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은 결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아무리 알고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안 됩니다. 여러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을 하고 하루를 시작했는데 왜 장사하는데 있어서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공공연히 세금조정을 하고 적당량을 탈세하지 않으면 기업운영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왜 사람들이 그렇게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못하고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쉽게 얘기하면 그렇게 우리의 머리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 가지고는 그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 미국을 안 가봤습니다만 누가 갔다 온 사람이 보고 이야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캐나다와 미국 국경 사이에 계곡이 있는데 여러분 보시면 케이블카의 로프 같은 것으로 계곡 사이에 이어놓고- 굵어봐야 얼마나 굵겠습니까. 이정도 될 것인데 -거기를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다니며 돈을 받는 서커스 꾼이 있다고 합니다. 있습니까? 못 보셨습니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저쪽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캐나다 쪽에, 이쪽은 이제 미국 쪽이라. 부릉~ 하면 저쪽에서 한번 돈을 걷고 부릉~ 하면 이쪽에서 돈을 걷고 그러니 돈을 잘 버는 모양입니다. 그 밑에는 우리나라에는 그런 곳이 없는데 가끔 사진 같은 곳에서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낭떠러지인데 거기를 여러 해 동안 그런 위험한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사람들보고 물어봅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여기를 오토바이를 타고 건너가는데 이번에도 시동을 걸고 갑니다. 와! 하고 함성을 지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갔다가 올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와! 하면서 당신이 지금까지 했는데 못하겠는가. 틀림없이 믿는다. 제일 큰 소리를 치는 사람에게 내 뒤에 타고 같이 가자고 그러면 갔겠습니까, 안 갔겠습니까? 그런 것은 건너갈 줄 아는 것이지 정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도움이 별로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위대한 증인들은 얼른 올라탔습니다. 아멘,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때도 그냥 이렇게 보고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확실하게 체험적으로 나타나셔서 진리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주셔서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으셨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 믿잖아요. 그런 식으로 믿는 것은 칼빈 주의자도 소용없고 보수주의자도 소용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리고 거기에는 절대로 올라타지 않는 사람, 무슨 소용이 있고 무슨 쓸데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니까 부흥은 결국 무엇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가 하면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가슴에 선명하게 인 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전폭적으로 그 하나님에 성품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적용을 해보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시지요? 계속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점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있습니까? 전에는 주님이 이런 분정도로 알았는데 이제는 점점 주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이해가 깊어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 삶이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그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케하리라. 결코 신앙이 깊어지는 것, 그것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오고 그리고 주님을 아는 지식의 샘물이 솟아나오면 어떻게 주님을 안 섬기며 살 수 있겠습니까? 즉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영광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인데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안 살 수 있겠습니까!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오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몸을 다 불사르도록 하나님을 위해서 내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이 세상에 있는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 원치 않으며 즐겨 고난 길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무엇이 그럴 수 있게 만들었습니까? 믿는 게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섬김은 강요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속에서 솟아나오면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새벽에 일을 해야 하는데, 아, 그럼 새벽에 나오지요. 하루 밤 새야지 되는데,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그렇게 나오고, 이것이 없는데 저녁때 일을 해야지 한다면, 저녁때 TV 봐야지, 아침 해야지 되는데 밥해야지요, 점심에 뭐 하는데 시장가야지요, 뭐가 남는 것이 있겠습니까?
부흥은 우리들에게 이런 변화를 줍니다. 결코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교회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교회에 갖다놓고 5-6년 굴리고 손때가 묻으면 눈치 빠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교회에서 더군다나 자기를 인정해주면 그 속에서 사회적인 소속감을 느끼면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은 비극적인 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행동함으로서 자기의 허한 심령, 주님을 모르면서 곤고한 심령을 스스로 위로하고 감추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해서는 소망이 없습니다. 정직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멀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외부에서 구하지 아니하고 우리 깊은 내면의 세계 속에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그래서 닫혔던 샘 다시 여시고 말랐던 물을 터트리사 다시금 우리로 하여금 넘치는 기쁨과 진리를 아는 지식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해달라고 그렇게 우리들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부흥은 이와 같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이름을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잊어버렸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머리에서 사라졌을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선명하게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 그렇게 알려준 게 짧으면 10년 길면 20년 쯤 지났지만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기억하고 있었으나 머리에는 남았으나 가슴에는 사라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그럴 때 가슴에 깊이 밀려오는 아, 맞아.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야, 하나님의 약속한 자녀야. 그러면서 밀려오는 그 내적인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 됨의 포만감, 이런 것이 사라진 것입니다.
제가 주기도문을 할 때 셋째 시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한없이 멉니다. “우리 아버지” 그 하나님이 내려와서 우리와 함께 껴안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야말로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복음이고 성경의 진술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 됨의 감격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게 하나님의 자녀 됨이 가슴속에 인 쳐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에는 있는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은 알지만 하나님이 오토바이를 운전을 하신다고 그래도 그 뒤에 못 타는 사람들,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녀라고 말해도 주님의 집에 함께 거하는 것보다 세상의 궁전에서 거하는 것을 훨씬 더 즐거워하는 사람들, 아버지의 아버지 되심, 자기의 하나님 자녀 되심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살아가는 것은 계속해서 옛날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애굽을 늘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집을 떠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의 집의 정원의 그 아름다운 생명나무와 그 진리의 나무와 그 아름다운 은혜의 숲과 그 놀라운 진리의 생수와 정원의 꽃과 풀이 만발하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주님의 음성이 청아하게 들려오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늘 담장 밖을 쳐다보면서 그 비참한 군상들이 그 속에서 서로 비비고 볶으면서 서로 치고 빼앗고 피 흘리면서 각기 범죄하면서 쌓아가는 이 세상의 영광, 그것을 담장에서 턱걸이를 하면서 쳐다보면서 돌아가고 싶은데 하면서 가고 싶은데 하면서 담장에 새카맣게 붙어있습니다. 정원에서 놀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그 동산에서 말할 수 없는 즐거움들이,
그 청아한 주의음성 울던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주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얼마나 한없는 진리의 숲으로, 어제 정말 곤고하기 짝이 없는 형제가 4년 만에 전화를 했습니다. 서울대 공학과를 나왔는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나는 한없는 기쁨 속에서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하루, 하루가 너무나 꿈같고 구름 속을 다니는 것 같아서 너무너무 황홀하다고 했더니 좋겠네요. 아, 그럼 좋지. 턱걸이 하면서 담장 내려 보다가 불럭 떨어지면 굴러 떨어져 머리 깨지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쭉 매달려있는 인생들 가운데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가셔서 그 엉덩이에다 몽둥이를 한 대씩 때립니다. 왜 그리고 합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지만 세상에 있는 돈과 명예 그거 다 버리고 여기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 것 이 세상에 있는 학벌, 이 세상에 있는 뭐 그런 것,
어제 종강시간이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콤플렉스를 잔뜩 받아 졸업하니 무슨 가서 학사고시를 다시 봐서 졸업장을 따야 되는가, 무슨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왜 그렇습니까? 계속 공부하라. 그러나 늘 가슴에 새겨라.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될 터인데 그것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니 열심히 해라. 그러나 잊지 말아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 유익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불변하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때요?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정원이 아름다우면 그 한없는 아름다운 정원 속에서 우리가 만족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잠깐 놀다보면 세상 가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이제 잠깐 보이는 이런 정원이아니라 영원히 있는 정원에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속히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흥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런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체험적인 지식을 갖게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렸습니다. 인생이 큰 은혜를 받았다고 깨닫는 것을 보면 지극히 기초적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수많은 고통을 치르면서 과외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식으로 학교에 가르쳐줄 때는 안 듣고 안 믿습니다. 밖에 나가서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고 하며 과외비를 고액을 지출한 다음에 마지막에 손들고 와서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그것은 상식적인 것이 아닙니까? 인생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체험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깊이 깨달을 때, 그때 완전한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습니까?(?)분주하게 움직이고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늘 타다만 막대기 같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상식은 많으니까 회의할 때 손은 제일 많이 들고 떠들 때 목소리 제일 크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아는 참된 기쁨 속에 사로잡혀서 살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현장, 그 속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합니다. 말씀을 듣는 현장은 침묵이 흘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래서 설교를 다 하고 난 다음에 고요한 침묵이 흐르면 가슴속에 깊은 좌절감이 옵니다. 아, 내가 이로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다니는 사람인가. 어느 때 가슴속에서 막 전율이 일어나면서 설교를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하나님, 언제 일어납니까? 메시지가 선포될 때 놀랍게 빨려 들어올 때 그러면 설교가 반도 못되었는데 여기, 저기서 흐느껴 웁니다. 왜 하나님을 만난 표증, 그리고 사람들이 울음을 참지 못해서 소리를 내어서 울기 시작합니다. 어떤 때는 계속 설교를 하고 한꺼번에 울어봅시다. 설교가 끝났을 때 마치 잔뜩 막혔던 댐에 수문을 열면서 하늘 끝까지 치솟는 폭포와 같은 물줄기가 솟아나오는 것처럼 우리 속에 막혔던 모든 죄의 담이 무너지고 그리고 단단했던 심령들이 터지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우리의 기도가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그런 일이 예배 시간마다 일어나는 그것이 내가 꿈꾸는 교회입니다. 매주는 그만두고 일 년에 한번쯤이라도 일어나면 되겠는데 이래서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런 참된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영혼이 참되게 만나는 부흥이 있다면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참다운 느낌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체험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머리속에 맴돌던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하는 그런 시각을 통해서 가슴속에 확 새겨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지금 나오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야곱이 얼마나 회개했겠습니까? 그야말로 자기가 살아온 모든 인생의 죄악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있었는가 하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못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못 믿을 분이다. 누구를 믿어라. 강호에서 쌓아온 그 술수를 믿으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라반의 집에서 그렇게 당하고도 배운 것은 하나님을 아는 신앙도 배웠지만 술수를 배운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도 또 33장과 34장 사이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도 거의 변하지 않으며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한없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지식이 계속 쌓이면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학문이 쌓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이 기가 막힌 방법을 찾아내고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또 환경이 열리고 내 마음을 계속 갈구는 그 사람이 변화되면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너무나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코 인생은 그렇게 되먹지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에서 우리를 자유케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고 그 체험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 그때 우리가 비로소 그런 삶을 사는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전능한 하나님이라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전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주님이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이제는 음성으로만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 직접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소개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야곱의 영혼 속에 잊혀질 수 없는 인상으로 주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인치심을 하시고 그 후로 지난 시간에 살펴보신 것처럼 계속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인생의 위기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바로의 앞에 설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라도, 그렇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내게 주신 약속대로 너희를 옮기시리라. 그것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 그러면서 뭐라고 했는지 성경을 봅시다. 11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 다음에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많은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이게 뭔가 핀트가 안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벧엘을 향하여 떠나면서 떠나기 전에 세겜에 있을 때 또 떠나면서 또 벧엘에 왔을 때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야곱의 모든 고민이 무엇이었을 것 같습니까? 야곱의 심정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야곱은 세겜에 그 좋았던 그 삶의 기반을 얼마나 1-20년 살았으니까 우리가 결혼해서 한 13-4년 살아도 살 터전이 있고 살림살이도 많고 그러면 뭔가 자리가 잡히는데 돈 꽤나 있고 세겜에 영향력을 미쳤던 지방 유지였습니다. 거기서 수많은 식구들과 가축을 데리고 20년 가까이 살았으니까 땅도 있고 얼마나 든든하게 자리를 잡았겠습니까. 그것을 다 남에게 넘겨주고 홀홀단신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것이나 끌고 겨우 벧엘로 올라온 것입니다. 벧엘에 80평 아파트가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가서 이번에 텐트를 친 것입니다. 옛날로 도루묵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나를 설교자로 만드시려고 요즘 애들이 겪지 않는 별의별 경험을 다 시키셨습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철거단이 와서 다 때려 부셨습니다. 그리고 일찍 가야지 좋은 터를 잡는다고, 그때 대토라는 것을 주었습니다. 집 대신 땅을 주는 것, 가니까 배추밭에 하얀 줄을 그어놓았습니다. 거기에 가서 텐트를 치고 깜깜할 때 새벽 네 시에 가서 자리를 맡아 놓고 눈떠보니까 갈 때는 몰랐는데 눈떠보니까 완전히 배추밭이었습니다. 흰줄로 죽죽 그어났는데 그때가 11월 서리가 하얗게 내렸는데 그 텐트에서 기어 나왔습니다.
난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야곱이 벧엘에 가서 텐트를 치고 아침에 나올 때 심령이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야곱이 지금 당면한 문제는 어디에 거처할 것인가. 다시 어떻게 판벽한 집을 짓고 살까? 아니면 어떻게 이제 먹고 살 것인가. 어떻게 안정하고 정착할 것인가? 어느 동리에 가서 정착할 것인가. 뭐 숙제가 수없이 많습니다. 주님은 그런 것은 관심도 없으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아니, 야곱이 언제 애를 못 낳아서 한이 맺혔습니까? 야곱이 그런 사람입니까? 정품, 사은품, 사은품에 또 사은품까지 합해서 서로 자기 방에 들어와서 자고 그래서 애들을 줄줄이 낳았는데 지금 야곱이 자식들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자식들 그러면 34장으로 봐서는 이가 갈리는 것입니다. 디나, 그것이 가서 그렇게 일을 저질렀지. 시므온과 레위는 가서 그렇게 사건을 쳤지, 그래서 결국은 도망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식이라면 이가 갈리는데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니, 자꾸 자꾸 낳아서 온 땅에 가득하게 하라. 야곱에게 어필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자녀를 길렀는데 곤고한 일이 많습니다. 큰놈은 가서 경찰서에서 연락오지, 작은놈은 학원비 떼어먹고 도망가지, 딸은 가출했지 이렇게 애들 셋이 있는 것이 온통 속만 썩이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꾸 낳아라. 아니 과장했지만 문맥이 그것이 아닙니까? 내가 또 아들을 주리라 딸을 주리라 쌍둥이를 주리라. 셋 쌍둥이를 주리라. 그러면 할렐루야! 아멘 그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여, 주의 은혜가 내게 족하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것을 간파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뭔가 핀트가 안 맞는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 땅에서 130-140년 살다가죽는 야곱의 그런 인생,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뭘 보셨습니까? 야곱 한사람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담 이후로 죄 가운데서 떨어져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모든 인류를 구원해내기 위한 물줄기입니다. 난 여기에 와서도 금방 다시 한 번 보면서 야, 하나님이 얼마나 멋있는 하나님이신가. 물줄기에 우리들이 서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이 야곱의 물줄기를 통해서 누구를 보내시는 것입니까? 메시야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된 야곱의 후손들이 이렇게 많아진 것입니다. 온 세계를 덮게 된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국민들에 네 몸에서 나오며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들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을 만들어주시는 그런 하나님의 도구로서 이 허물 많은 야곱을 택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은혜 받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전에는 예수를 안 믿고 제 밥벌이 제가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던 여러분들을 만나주신 이유는 전에는 제 밥벌이 하며 살아가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 때문에 밥벌이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의 나라, 그 흘러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나라, 그 나라의 시민으로 부르시고 일꾼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우리가 행하는 이 모든 일이 이 세상을 움직이면서 이 세상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이 허허로운 세월을 보내면서 세상 속에서 울고 웃으면서 생활하다가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복음을 전했습니다. 알지도 못하던 사람이 슬픔 속에서 비탄 속에서 아니면 몇 푼 안 되는 돈, 별로 잘나지도 못한 미모를 자랑하며 살아가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도하면서 다시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쳐졌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보면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해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살던 사람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이 세상에 썩어질 나라를 위해서 명예를 다투며 살던 사람들이 주의 나라의 임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 물줄기에 떠내려 죽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으며 그러면서한 시대를 하나님께서 움직여 가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놀랍습니까?
나같이 형편없고 죄 많고 정말 만물의 찌기와 같은 나 같은 자를 인생의 가장 허허롭고 갈등이 많은 시절에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또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변하게 하셨습니다. 그 변화된 사람이 또 변화된 마음을 가지고 변화 받지 못한 이 세상을 향해 애타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을 향해 살도록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메신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나라는 내가 예언했습니다. 우리 80년 후에는 다시 만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확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영혼들이 이제는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천국을 향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다가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 받아쓰리라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 예루살렘 성에서
눈물을 씻고 우리의 인생을 잘 관리하여 주님의 나라에 가도록 살아가는 그래서 담 벽에 매달려서 세상 바라보는 그런 비참한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서 정원에 그 아름다운 곳에서 한없는 하나님의 그 주신 축복들을 가지고 주와 함께 밤 깊도록 주와 함께 동산에 거하리려나 슬픔 많은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시니 그 속에서 힘을 얻고 또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뭘 근심하십니까? 인생에 위기가 있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죽는 것밖에 더 일이 있겠습니까? 그럼 할렐루야입니다. 곧 하나님께로 가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서 이 세상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기쁨과 담대함 속에서 세상을 다스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셨는가 하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땅을 준다는 이야기지만 이것은 땅을 준다는 이야기는 이제 땅을 준다는 단순한 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선 땅을 준다는 말도 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공포가 아닙니다. 나중에 출애굽기 하면서 지난 학기에 제가 설명했지만 이미 선진 국민들이 땅을 다 점령하고 살아가는 그 땅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싸움을 통해서 그 땅을 빼앗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준다고 그랬는데 그 땅을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에게 주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이스라엘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나라가 서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전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그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 계시와 그 계획들을 이렇게 보존해 나가셨고 발전해나가셨지만 이제는 그 가정이 아니라 나라를 세우셔서 모든 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 된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누구고 그리고 그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한 계획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쉽게 얘기하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옛날도 살아계시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들이 죄가 없을 때는 하늘을 쳐다보면 저녁에 구름을 쳐다보면 정말 신비하지 않습니까? 똑같을 때가 한 번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노을이 붉게 확 타오를 때는 정말 신비합니다. 그것을 보면 어떻습니까? 확실히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만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내가 만든 것을 보고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인줄 보라고 하늘을 만드시고 해와 달을 만드시고 아름다운 풀과 자연을 주셨지만 인생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총명이 가리워지니까 태양을 한참 쳐다보다가 무섭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저 태양이 화를 내면 어떻게 하나. 태양이 무슨 화를 내.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물건일 뿐인데. 그런데 그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경배를 태양을 향해 드리는 것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하나님의 솜씨가 오묘하구나. 그렇게 찬양을 해야 하는데 인간 속에 죄가 들어가니까 눈이 멀어서 별을 바라보면서 저별 중에 내 별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수호신이 필요해, 저 별들이 화를 내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서 일월성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천사를 만들어 났더니 천사는 하나님이 부리는 영인데 그 천사를 섬기는 이런 지경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이 만들은 것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인생들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깨닫는 것을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당신의 백성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아니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선포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시고 내가 그 하나님을 만났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금도 너희를 만드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면서 선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모든 세계를 지으신 것, 그 하나님을 내가 만났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그러는데 하나님 계시데. 그럼 말발이 서겠습니까? 우리 전도사님이 그러시는데 확실히 있데. 안심하고 믿어보래. 왜 믿어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전철에서 전도를 하는데 초치는 사람이 꼭 한사람씩 나옵니다. 당신 하나님 만나봤어?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보지는 못했지만 그러면 이제 완전히 파토 나는 것입니다. 예스, 나는 그분을 보았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우리 모두 주님을 직접 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생생하게. 그래서 관념 속에 있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보여주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참된 부흥이 일어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이 말이 필요 없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 마음속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준다고 하시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후일에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지고 나라가 되고 그 나라가 모든 나라 한복판에 지구의 배꼽, 그 한복판에 서서 발달한 문명은 가지고 사는 그 모든 나라 한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다스림 속에서 살아가는 특별한 민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연 보여줍니다. 출애굽을 하고 홍해가 갈라질 때 그 소문이 여리고성까지 들어가서 간담이 서늘하였도다. 우리는 덜덜 떨었다. 시온과 바산의 왕을 무찌르고 그러면서 출애굽의 행진을 계속 할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 시대는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보여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저는 감사한 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초기에 그래도 완전하고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뭔가 복음에 가깝게 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흥에 대해서 모를 때도 하여튼 확실한 것 하나는 그때도 신학교 가기 전인데 주일학교를 섬기면서 24살에 총각집사가 되었는데 그런 것도 제가 나중에 부흥에 대한 것들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24살에 총각집사가 되었는데도 주일학교에 모여서 이제 여름성경학교를 하는데 총각집사가 뭐 성경을 읽었으면 몇 번이나 읽었겠습니까. 신학도 않았는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게 설교를 하면 애들이 웁니다. 이상하다. 기도실에 모여서 철야기도를 한다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슨 초등학교 1,23학년 애들을 모아놓고 철야기도를 시키냐고 구시렁거리는데 철야기도를 하면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박혀죽으셨다고 기도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기도를 하면 그 꼬맹이들이 가슴을 치면서 막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한번 하고나면 땅바닥이 눈물로 흥건합니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탰습니다. 그러니까 비교적 복음에 근접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확실하게, 내가 여기에서 얘기했나, 교회에서 얘기했나 하도 얘기한곳이 많아서 헷갈리는데 어느 동리에서 지하실에서 모여서 늘 기도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하실에서 조심하면서 기도한다고 하지만 기도가 불이 확 붙으니까 막 박수를 치고 기도를 하니까 동리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얼마나 까다로운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고자질을 해서 형사들이 나왔습니다. 했습니까? 지지난 주에 했습니까? 그래요, 그렇게 해서 와서 형사들이 왔다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무슨 말이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을 붙잡고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수없이 얘기를 해도 그게 말이 먹혀들어가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취조하려고 뒤에서 계속 메모하고 있다가 완전히 성령에 사로잡혀서 덜덜 떨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갔으니 보고서가 어떤 내용인지 뻔한 것 아닙니까? 기도의 멤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넘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줄 수 있는 권세입니다.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깊은 권세, 이런 것이 있어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영혼들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착하고 진실 되게 사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옵니까? 어림없습니다. 주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의 행실로서만 나타내기에는 너무나 진리의 세계가 광대하고 넓습니다. 우리가 직접 입을 열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를 말하는데 그 진리가 사람들에게 호소력 있게 파고들어가는 것인데 무엇 때문인가 하면 권세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세는 결코 삼층 사층 오층 이렇게 만든다고 해서 교회의 권세가 높은 것이 아닙니다. 카톨릭에서 왜 건물이 높아진 줄 아십니까?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460년을 지었는데도 아직도 공사 중인 성당이 유럽에 있습니다. 딱 들어서면 한없이 높은 그 안에서 왜소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권위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참다운 권위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진리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진리를 선포 받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고 죄인들이 깊이 회개하고 반대하던 사람들이 뉘우치고 하나님을 떠나 살던 사람들이 눈물로 회개하고 그리고 참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주님 앞에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을 수 없게 하시는 그 어떤 변화의 능력, 이것을 소유한 교회가 되어 질 때 그때 비로소 그 교회가 능력을 소유한 교회가 되어 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아름다운 선행을 하기 위해서 세운 기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느끼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보면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안 살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위해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살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에서 무슨 목표 같은 것을 세우는데 나는 이 뒤에다 현수막을 붙이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꼭 무슨 운동권 들어온 것 같아 싫어합니다. 무슨 작전, 무슨 대회 그래서 계속 세우는 것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어느 집사님을 만났는데 교회에서 계속 작전, 작전 그러면서 나갑니다. 새벽기도회 40일 작전, 전도 100특공대, 그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참 놀라운 게 그분은 부흥에 대해서도 잘 모르십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데 교수님, 그런다고 되는 것입니까? 말씀을 듣고 개인 속에 변화가 일어나면 작전할 필요가 없이 그냥 하자면 된다는 것입니다. 전토 동원령 안 내려도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이 다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무슨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권하는 것도 한두 번입니다. 정말 여러분, 자기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그러면 모든지 되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권세 있는 진리가 그들의 영혼 속에 선포되는 그 권세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택하시고 교회를 택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봅시다. 야곱이 이제껏 34장에서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경배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 수준이 32장에 비하면 상당히 높이 올라갔습니다. 28장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이 354장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야곱은 이제 뭘 깨달은 것입니까? 자기 인생이 하나님을 잘 믿고 가족이 축복을 받고 내가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것 그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그 이상의 국민이 내게서 나오고 열왕이 내게서 나오고 큰 땅을 주어서 내가 너에게 너의 씨로 나라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 가운데 이스라엘을 우뚝 세우리라고 하는 이 원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계획 속에 자기가 그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도구로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에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8장에서 도토리처럼 시작했다가 29, 30, 31장에서 조금씩 올라가다가 그 다음에 32, 33장에서 한번 솟았다가 이번에는 완전히 누구도 쫒아올 수 없게 완전히 먼 곳으로 떠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야곱이 무엇을 보게 되었는가 하면 이렇게 들여다보면서 디나는 왜 강간당했을까? 시므온과 레위는 왜 그 모양일까? 애새끼들이 왜 속을 썩이나. 또 아니면 왜 마누라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나. 아니면 라반의 집에서 당한 그 모든 일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하나님 어떻게 하십니까? 이렇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의 꺼풀이 벗겨지면서 눈을 들어보니까 수 백 년, 혹은 수 천 년의 역사의 파노라마 치는 하나님의 구원의 물줄기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물줄기는, 가장 디나의 사건.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가 탁, 보니까 자기의 인생이 수 백 년 건너서 메시야의 이르기까지 물줄기 치는 거대한 구원의 역사의 파노라마의 없어서는 안 될 그 과정의 부속품으로 자기가 끼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아적인 그런 근시안적인 신앙을 버리고 눈을 뜨면서 장엄한 온 세계의 구원에 역사의 파노라마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후에는 이런 변화가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더 큰 변화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야곱의 신앙이 점점 좋아지고 점점 거룩해지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잘못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을 해도 그렇게 눈에 비늘이 벗겨지면서 장엄한 구원의 역사의 물줄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 그 증거가 어디에 나옵니까? 소망이 어디입니까? 약속에 땅에 대해서 소망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약속의 땅에 자기의 뼈가 가서 묻히면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제사 받아먹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닌데 무엇을 본 것입니까? 나는 죽어도 하나님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이 야곱은 부흥을 만나면서 눈이 떠지면서 소아적인 데서 눈을 떠서 파노라마 치는 거대한 물줄기가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벧엘로 올라가자’ 라는 강해를 하면서 여기서 똑같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34장까지 강해할 때는 아, 그랬는데 저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다. 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떠나고 자꾸 범죄하고 그러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니까 35장 딱 들어가서 하나님의 부흥을 이야기하면서 물줄기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비유하자면 그것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 장엄한 역사의 물줄기, 여기에서 지금 일렁일렁 거리는 물줄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한사람이 변하면 세계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모르고 교회가 어떻게 되는가. 자꾸 조국의 교회를 이야기하는데 눈꺼풀이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내 일도 바빠 죽겠는데 조국이 누구 땅이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도대체 한 두 군데야.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옆의 교회도 지금은 관심이 없고 자기 교회만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는가 하면 아직 소아적이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을 떠서 바라보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가는가 하면 아니 디나가 강간당했네, 시므온과 레위의 사건, 그러면서 집안에서 일어난 일 가지고 집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찾는 것도 진실입니다. 간절하고 그래서 주님이 나타나셔서 또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참다운 부흥의 눈을 뜨게 될 때 그때 어떻게 변하게 되는가 하면 그런 소아적인 것이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기의 인생이 이 속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이런 것에 웃고 우는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조국의 이 시대의 역사에 하나님의 거대한 물줄기의 파노라마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물줄기 속에 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며 그게 뻔뻔하게 머리에 안 들어오는 이유는 바로 부흥이 필요한 것입니다. 새벽기도에 가서 남의 기도를 엿들을 필요는 없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특히 대학 입시 때는 새벽기도의 숫자가 많아집니다. 매년마다 대학입시생을 모아놓고 기도회를 하는데 기도제목을 다양한 것을 내놓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더 중요한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떨어지든 붙든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하옵소서. 그것이 없이 무엇입니까. 그러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가 벌어집니까? 그러면서 사람들이 전부다 자기의 일들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답답한 것입니다.
야곱을 이 거대한 물줄기의 파노라마 치는 그 물줄기가 변화하는 결정점인 시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로서 야곱을 부르셨는데 그 야곱이 지금 하는 게 세겜에 가서 물건을 팔고 돈이나 세고 있고 그들과 또 좋다고 비유나 맞추고 술잔이나 마주하고 앉았고 거기에 가서 실실 웃으면서 물건이나 몇 개 더 팔아먹을까 생각이나 하고 그리고 우상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그래도 또 선린관계가 이루어질 것 같으니까 또 거기에 가서 참배도 하는 꼴을 보니 하나님이 볼 때 너를 부른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정말 위대한 일을 위해서 불렀는데 너는 겨우 그렇게 밖에 못사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부흥을 주면서 막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길을 여십니다. 그러면서 장엄한 드라마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할까요?
나는 매일 아침 저는 눈을 뜰 때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하나님이 나 한 사람을 통해서 무슨 일들을 이루실까? 나는 분명히 그 물줄기 속에 떠있다. 하나님이 어떠한 계획들을 이루실 것인가? 내 인생이 길게 되기도 원치 않고 그리고 속절없이 영광을 누리기도 원치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무슨 일들을 이루실까? 아, 한번 그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이루어졌으면, 늘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이미 주님이 너는 내 자녀라, 불러주셨을 때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이미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장엄한 뒤웅치는 역사의 물줄기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자의 우리의 삶이 시시해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정말 작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그의 나라와 그의 의와 하나님의 영광과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과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홀과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이 깊이 참회하고 주님을 위해서 그것들을 간구하고 그때에 주기도문의 기도가 가슴에 밀려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 그렇게 살아가도록 제자들, 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들 주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셨을 때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들이 울고 웃는 것으로 웃지 아니하고 더 장엄한 계획, 정말 더 원대한 계획이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 모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살도록 주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주님의 그 아름다운 동산에서 먹고 마시며 그 큰 계획을 이루어드리다가 주께서 부르시는 날 아멘! 하고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향해 가다가 영광 나라에서 우리 영원히.
지금은 이미 희미하게 보이나 그때는 주를 만나고 보리
이 세상에서 눈물 흘리며 이루어달라고 애원하던 것이 거기에 완전히 이루어져있습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