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Ⅰ,Ⅱ
(1999-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서론(1) 왜 조국교회가 부흥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계3:17) 1999.11.28 주일오후 1
2. 서론(2) 부흥이란 무엇인가?(계3:17) 1999.12.5 주일오후 13
3. 서론(3) 왜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가?(계3:17) 1999.12.12 주일오후 24
4. 영적각성이란 무엇인가?(스10:1) 1999.12.19 주일오후 33
5. 말씀과 부흥(스10:10-12) 1999.12.26 주일오후 44
6. 거룩하고 영화로운 곳에 계신 하나님(사63:15上) 2000.1.2 주일오후 53
7. 자비와 긍풀을 베푸소서!(시63:15下) 2000.1.16 주일오후 62
8. 부흥을 구하는 두 근거(사63:16) 2000.1.23 주일오후 72
9. 하나님의 구속 행동과 부흥(시63:16下) 2000.1.30 주일오후 82
10. 여호와여 돌아오소서(사63:17) 2000.2.6 주일오후 93
11. 대적이 성소를 유린할 때(사63:18) 2000.2.13 주일오후 111
12. 주의 통치가 그칠 때(사63:19上) 2000.2.20 주일오후 123
13. 부흥 이외에 대안이 없을 때(사64:1上) 2000.2.27 주일오후 135
14. 부흥의 능력(사64:1下-2上) 2000.3.5 주일오후 149
15. 대적에게 주를 알게 하소서(사64:2下) 2000.3.12 주일오후 160
16. 열방으로 떨게 하소서(사64:2下) 2000.3.26 주일오후 172
17. 앙망하는 자를 통해 오시는 하나님(사64:3-4) 2000.4.2 주일오후 180
18. 하나님의 교회가 진노 아래 있을 때(사64:5) 2000.4.9 주일오후 205
19. 교회가 하나님을 버릴 때(사64:6) 2000.4.16 주일오후 218
20. 병든 냉담함(사64:7) 2000.4.23 주일오후 228
21.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사64:8) 2000.4.30 주일오후 241
22. 정직한 판단과 호소(사64:9-10) 2000.5.7 주일오후 250
23. 부흥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사64:11-12) 2000.5.28 주일오후 261
1.서론(1):조국교회가 왜 부흥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오늘부터 몇 주가 될지 모르지만 부흥에 대해서 연속해서 설교하겠습니다. 부흥이 어떤 것인지, 왜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지, 부흥이 오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의 책임이 어떤 것인지, 이런 것들이 연속해서 강해될 때 부흥에 대해서 적절한 통찰을 얻고, 성경을 보는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 뜻깊은 주제에 대해서 이삼년 전에 다니엘 9장에 나오는 신앙부흥을 가지고 서너 달 동안 설교한 기억이 있습니다. 부흥에 대한 시리즈를 시작하기 전에 부탁하고 싶은 것은 몇 가지를 읽었으면 합니다. ‘거룩한 부흥’,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꽃처럼 살아야 한다’라는 책을 읽으시고, 테이프 중에서는 특별히 다니엘 9장을 설교한 것, 창세기 35장 ‘벧엘로 올라가자’ 테이프를 구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몇 달 동안 설교 중에 읽으라고 한 책을 읽고, 들으라는 테이프를 듣고 설교에 집중하면 설교가 끝날쯤에는 여러분들이 오늘날 기본적인 부흥에 대해서 어떤 것들이 참된 부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정확한 시각을 갖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 시리즈를 시작하는 이유는 십 년 전에 제가 처음 부흥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깊이 눈뜨고 글을 시작해서 작은 강의안을 만들기 시작할 때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부흥’이라는 책이 막 번역되어서 나왔습니다. 그 전에는 부흥이라는 주제가 그렇게 크게 부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부흥을 경험하고 책을 읽어가던 중, 로이드 목사님의 리바이벌이라고 하는, 그때는 번역되지 않았었데 ‘부흥, 우리가 일으킬 수 있습니까?’ 라는 부제가 붙은 피커린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우연히 구해서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어가면서 ‘세상에 어쩜 이렇게 내가 경험한 것과 꼭같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면서 처음으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 대해서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통해서 부흥을 알았다기 보다는 제 나름대로 부흥을 경험하고 그분의 책을 보면서 내가 경험한 부흥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얘기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청교도와 부흥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손을 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책이 나의 눈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책은 지금 출판사에서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이 되어서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때 원서를 제가 삼분의 이 가량 읽었을 때 막 번역된 책이 나왔습니다. 그때 저는 책을 원서로 보면서 엄청난 도전을 받았습니다. 번역된 책은 두껍지만 오리지날 텍스트는 얇고 깨알같은 글씨로 되어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이 나오고 나서 부흥에 대한 얘기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정직하게 고백을 하자면 오늘날 부흥에 대한 얘기들이 십 년 전 로이드 목사님의 부흥에 대한 책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보편화되지를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었는데 우선 첫째는 그 동안에 사람들이 부흥에 대해서 실증을 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흥’그러면 부흥 자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부흥회’가 떠올랐는데, 그 부흥회라는 그림은 한국교회 오래 다닌 교인들의 가슴속에는 좋게 찍혀 있는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조금은 부흥의 정신이 있는 부흥회를 맛보았지만, 특별히 후대에 믿기 시작한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 끝물에 일어나는 부흥의 안 좋은 현상들만이 머리에 입력되었기 때문에 부흥회라는 자체에 대해서 ‘부흥’ 그러면 ‘부흥회’를 생각하면서 헌금거두고, 통성 기도하고, 병자가 낫는다는 것들이 입력되었기 때문에 그 주제가 달가운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가 스스로 부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절제를 했습니다. 그래서 명백하게 ‘부흥회’를 하면서도 ‘세미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흥회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다 알지만 세미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니까 애매모호하게 걸고 부흥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때 당시에 십년 후에 이렇게 부흥이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라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라고 봅니다.
부흥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반대하는 층이 두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흥을 많이 오늘날 말하고 거론하게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참된 부흥에 눈을 떳다기 보다는 80년대 이후로 급격히 쇄퇴해가는 교회적인, 성장이 멈춘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90년대를 가리켜서 저는 실험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교회에서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뭐든지 실험해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단적인 것까지도 실험해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작업들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교회 성장이 그치고 더 이상의 진보가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뭐든지 받아드려서 벽에 부딪힌 교회의 침체 상황을 극복해 보다는 몸부림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드려졌다 라고 봅니다.
두 번째는 한국 교회에서 지성주의에 대한 싫증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1900년대 초에 평양에서 강력한 부흥이 있었고, 20년 30년대까지 건전한 교회의 분위기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이끌어 왔었고, 40년대에 들어서서 뭔가 한에 정서를 담은 종말론에 상당히 많이 치우친 설교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안 좋은 부흥회의 현상들이 50년대, 60년대에 와서 극에 달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커다란 문제는 1907년도에 평양에서 강력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에 대해서는 ‘한국 교회의 영적 기상도를 본다’라는 책의 제 5장을 보시면 상세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평양에서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면서 부흥은 경험을 했는데, 그 후에 50년대 60년대로 넘어오면서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푸는 신학적인 토양, 성경 중심적인 말씀을 해설하고 푸는 토양들이 오래가지 않고 60년대 들어오면서 거의 실종을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60년대에 우리 사회에는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6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으로 정권을 잡으면서 모든 이제껏 까지의 국가 정책을 배고픔으로부터의 해방, 모든 가치를 경제 성장에 둔 것입니다. 민주화, 인권운동들이 물러가고 ‘너희들이 배고픔의 설움을 아느냐, 나도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하면서 극도로 빈곤한 국가의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경제 제일주의의 정책들이 펼쳐졌습니다.
그런 경제정책들이 펼쳐지면서 경제 성장을 주도하는 정책들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국민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의식의 변화가 찾아왔는데 그것은 그러한 격변화는 사회 환경의 변화와 함께 사람들이 1차 산업에 종사해서는 사람들이 살수 없다라는 결론을 빨리 내렸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배워야 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사람들을 교육을 위해서 헌신적인 노력을 부모들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초등학교에 집어넣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60년대가 지나면서 최고는 밀어붙이기 식의 정책이었고, ‘성공하면 좋은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미국에서는 소위 얘기하는 프라그마티즘, 실용주의라는 새로운 사조가 일어나서 ‘쓸모 있는 것이 선한것이다’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이제껏 까지 여러 가지 논쟁들보다도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용적인 것이다. 쓸 수 있고 사용될 수 있는 용도에 맞는 학문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고, 그런 쪽으로 내려지는 결정이 사회적으로 합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도 40년대, 50년대 이후로 눈부신 경제적인 성장을 하면서 고능율 사회로 가고자 하는 도전들이 강하게 일어나면서 60년대의 실용주의로 이어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문화적으로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 나라에 얼마나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계를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러한 사고 방식이 60년대의 경제성장을 위해서 줄달음질 치는 새로운 혁명정부에 철학과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밤낮없이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열심히 극도의 악조건 속에서 공장이 돌아가면서 사회가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데 그것은 6,25 이후에 어떻게든지 가르켜야 되겠다 라고 몸부림치던 사람들이 자식을 보낸 아이들이 빠르면 60년대 말, 70년대 초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시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민도가 높아진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사람들이 깨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고등학교 자체는 그 이후로는 학력에 속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보편적인 의무교육 사회로 가는 시대로 70년대, 80년대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쏟아져 나올 때 기독교 안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것은 60년대 말까지 보이던 강한 성령의 역사, 그런 것들이 현격하게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냉각된 분위기를 70년대 후반에 맞이할 때 갑자기 고학력 사회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교육의 맛을 본 사람들은 옛날의 농사나 지으면서 신앙생활하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상당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70년대 중반 이후로 들어서면서 드디어 정치적인 문제를 가지고 젊은이들이 계속해서 씨름을 하는 민주화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갈등하는 시대가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런 고학력 사회가 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무조건 믿어라”, “불 받아라”, “할렐루야” 하면 “아멘” 하는 식의 고전적인 부흥회가 이미 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다행스럽게도 70년대 후반부터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성경공부라는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성경 공부를 배우는 방법은 설교를 들으면서 배우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특별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에 70년대에 들어와서는 설교가 교육적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설교 속에서 예배를 통해서 설교를 들으면서 뭔가를 깨닫고 신앙 지식의 체계를 쌓아 가는 일이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불가능해 질 정도로 설교가 외도를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긴 성경 본문을 읽고 신문의 난 기사 몇 개를 거론하면서, 착하게 잘 살아야지만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식의 설교들이 독버섯처럼 유행스럽게 번져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교역자 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문제는 뭐냐하면 일제 시대 때의 깊은 신앙의 맛을 본 사람들이 아니라 그후 6,25 후에 태어나서 신앙의 길을 걸어서 목회자가 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70년대 후반이나 80년대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아침의 설교와 같이 여호수아와 여호수아와 함께 했던 장로들처럼 하나님이 장엄한 부흥의 역사, 그리고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급격하고 강하게 하나님이 자기를 변화시켜서 새사람이 되어 가는 영적인 변화의 과정들을 겪지 못한 사람들이 제도권의 교육을 타도 대거 목회자로 진출을 하면서 교회 상황은 점점 심각하게 되어졌던 것입니다.
특별히 7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대학의 필요성이 굉장히 강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고, 그리고 대학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이 굉장히 좁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대학에 가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가는 꿈의 좌절을 맛봐야 했습니다. 이런 틈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신학 대학입니다. 성적이 낮으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는 뭔가 사상이 있어서 진학한 것 같은 애매모호한 대학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대학원을 가게 되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면 시험을 보고 목사가 되면 교회로 사람들이 교회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 비율은 마치 세상 속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과 거의 같은 비율로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뭔가 중대한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전에는 한국 교회 안에서도 목회자가 되는 방식이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고 목회를 할 때 거기에서 웬 청년이 하나 있는 데 유별나게 주님을 사랑하고 물불을 안 가리는 것을 보고 가난한 시절이라 목사님 혼자서 교회를 이끌어 갈 시대였기 때문에, 목사님이 어디를 가실 때 “너가 기도회를 인도해라” 그런데 이상하게 그 청년이 기도회를 인도하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날 “목사님 아무래도 저는 주의 종의 길을 가야되나 봅니다.”, “그러면 기도해 보자” 그러면서 노회에 청을 합니다. “아무개가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 데 어떻게 합니까?”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시대였으므로 도제처럼 들어가서 낮이면 심방 가방을 들고 전도도 하고 심방을 하면서 다니고, 저녁때는 호롱불 밑에서 무릎을 꿇고 “강도란” 강도란 설교하는 것을 옛날에는 강도라고 했습니다. “강도란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 무슨 철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제까지 해 보니까 효과적이었다는 것이 입증된 대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에 책은 엄청나게 귀했기 때문에 필요를 다 구해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란 것입니다. 그래도 거기에서 배운 것은 하나의 정신을 배운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살고 죽은 정신을 배운 것입니다. 핍박과 고난을 견디면서 신사참배하지 않고 버텨온 선배들의 신앙의 정신, 예수를 위해서라면 불 가운데라고 들어가겠다라고 하는 정신들을 배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한 것입니다. 그들이 자라온 세대가 이제는 학문을 하고 공부를 해온 세대들에게 잠식당하기 시작하고 물려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똑같은 일들이 미국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미국이 18세기 후반을 넘어서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급격히 자유주의화 되어갈 때, 부지런히 공부를 하고 경건하게 학문을 한 사람들이 상당히 깊이 있는 학문을 가지고 있었고, 경건을 겸비한 성학, 성자와 같은 학자적 기질을 가지 목회자들이었습니다. 그랬는데 당시에 학문적으로 많이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독일이나 유럽에 가서 유학을 하고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 세대들은 이미 구라파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굉장히 자유스러운 신앙의 물결, 다시 말하면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 하나님의 말씀을 내용을 가지고 비평하면서 ‘이런 일들이 이런 기적이 지금 입증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그 때에 일어날 수 있겠느냐, 따라서 이런 것들은 진정한 성경이 아니다, 뭔가 내려오면서 왜곡이 되어 잘못 되었고 여기에서 이런 기적과 같은 사건들은 신화이고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 이겁니다. 예를 들자면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사건을 어떻게 해석 하냐면 ‘어떻게 한번 기도했다고 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또 먹어도 모자라지 않는 떡과 물고기가 나올 수 있겠느냐 이것은 동화에나 나오는 얘기이지, 이것은 결국 당시 배고픈 유대인들이 자신의 배고픔이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라고 만들어낸 얘기이고 오히려 이 얘기의 핵심은 이렇게 이런 아이가 자기가 배고픈 것을 무릅쓰고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내어놓으니까 예수님이 기도를 했더니, 그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고 감동 받은 사람들이 숨겨놓았던 도시락을 꺼내놓으니까 다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는 얘기이다.’ 이런 생각이 그 당시 합리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었던 신 사고의 시대에 지성인들에게는 엄청나게 어필을 하는 것이었고 기독교에 등을 돌리려고 하는 사람들의 뒷덜미를 잡아줄 수 있는 성경 해석의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들어와서 보니까 아직까지도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엄청난 영향력을 성도들에게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발톱을 감추고 기다리고 있다가 신학교에서 정년 퇴직을 해서 한사람, 한사람 물러나기 시작하니까 그 젊은 세대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제는 뭔가 성경에서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교리들에 관해서 논쟁을 하기 시작했을 때 무식한 대다수의 많은 대중들은 생각하기를 ‘그래도 유학하고 공부를 많이 하고 온 독일 출신 젊은 학자들이 더 잘 알겠지!, 저 나이 먹은 할아버지들이 뭘 잘 알겠어!’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시에 자유주의로 넘어가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일들이 이 땅에도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성주의 쪽으로 많이 치닫게 되었습니다. 성경공부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무릎꿇고 가만히 앉아서 가르쳐주는 데로 배워야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성경을 한 줄 읽고 각기 한번 말 해보라고 하니까 감지덕지한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성경공부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굉장히 유익한 것들을 한국 교회에 많이 제공을 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는 습관을 새롭게 불러 일으켰고, 소위 얘기하는 QT라고 하는 것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 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성경에 관한 책들을 다양하게 읽고자 하는 것을 불러일으켰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은 먼저 교회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선교 단체들 속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선교 단체들은 이미 세계적인 현상에 대해서 눈을 뜨고 있었고, 그리고 상당히 많은 선교 단체의 책임자들은 이미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말기적인 부흥의 증상과 새로운 기독교에 대한 냉담함이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이미 구라파나 미국에서 경험된 바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나름대로 적절한 처방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하나는 피동적이던 인간관계에서 적극적인 인관 관계를 끈으로 맺어주는 인간이 있는 신앙생활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교제하는 즐거움을 갖게 해주고, 함께 성경을 탐구하고 공동생활을 해 나나가는 인격적인 교제가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현상이 일어났느냐 하면 교회 안에 젊은이들이 전부다 빠져서 교회밖에 있는 선교 단체로 나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고 교회는 젊은이 동공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1500명 성도가 모이는 교회를 1970년대 중반에 교역자로 부임을 했는데 주보를 보니까 장년 성도 1500명이 모이는데 대학부 1명이라고 쓰여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들이 급격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심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들이 다 빠져나갔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는데 젊은이들이 안 붙어있고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상당히 많은 학생들은 신앙을 버린 채 살아가고 그 중에 상당수의 학생들은 그런 곳에 가서 은혜를 받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저 운동을 교회와 접목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선교단체의 틀을 교회가 용납할 수 있는 수준까지 최대로 끌고 들어와서 받아드리면서 성경 공부 같은 제도들을 정착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대부분의 많은 교회에서는 반대가 굉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우리들이 생각했던 신앙생활하고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물을 먹고 성경 공부에 재미를 붙인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권위주의 적으로 설교하고 말도 되지 않는 얘기로 협박하고 축복이나 남발하는 식의 비인격적이고 반지성적인 설교, 가르침이라고는 별로 없으면서 뭔가 교회가 원하는 길들여진 사람들로 만들려고 하는 거대한 교회의 체제의 움직임에 대해서 거부반응 내지는 반기를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성경 공부하는 그 시간에는 바글바글 모이는데 예배 시간에는 다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자라온 장년 세대에게는 ‘저런 것들을 길러서 무엇에 쓰나!’ 하는 반발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저가 아는 교회에서는 “우리는 청년부 없어도 된다.” 이름만 대면 여러분들이 다 아는 유명한 교회에서는 아예 청년부을 당회에서 결정해서 없애 버렸습니다. 육 개월 후에 다시 부활하기는 했지만 그런 식의 갈등들이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젊은이들이 그런 쪽에서 길들여진 젊은이들이 예배에 대해서 냉소해 진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일어난 속담 가운데 하나가 뭔가 좋은 얘기를 상세하게 해 주려고 하면 “설교하지 마!” 그런 얘기들이 60년대 70년대 이후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심각하게 번져하기 시작하면서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역사는 젊은이들의 판정승으로 끝났습니다. 이제는 나이든 세대들이 ‘아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고, 타협점들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서 신앙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의 속에서도 ‘역시 교회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끊을 수 없다!’ 라고 하는 것들이 경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양자가 합의하는 선에서 해결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적당히 서로를 눈감아준 가운데 정착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 공부운동들이 장년 부에까지 깊게 파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안 그런 교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교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냐 하면 중대한 목회 패러다임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예배를 중시하고 목회자의 목양을 받으면서 예배 속에서 충전을 받으면서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던 전통적인 커다란 틀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각자가 알아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분위기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나마도 교역자가 일찍 깨어서 그러한 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드리면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시키고 나름대로 붕괴된 틀을 재건하기보다는 붕괴된 것을 인정하고 그러면 어떻게 영혼들에게 영적인 공급을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해서 제자훈련이라든지 성경공부라는 것들을 받아들인 교회들은 그래도 충격을 줄일 수 있었는데, 아무도 인정을 안 하는데 ‘막대기 튼튼히 붙들고를 강조하면서 세상은 변해도 우리는 우리식대로 믿는다’ 그렇게 저돌적으로 나가는 교회들은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이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연세가 많이 드신 분들이 전통적인 예배와 권위있는 목회를 중심으로 하던 방법들을 굉장히 많이 청산하고 어떻게 성경공부를 해야되고, 어떻게 교인들을 훈련시켜야 되고, 예배와 전통적인 방식들이 무너진 현상에서 어떻게 해서 이 사람들을 신자로서 살아가게끔 만들어야 되는가 하는 것들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굉장히 큰 변화가 또 일어납니다. 그것은 교회가 그렇게 되면서 제일 커다란 변화는 예배에 대한 기대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냐 하면 목양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라고 하는 이 전통적인 목회자 중심의 교회의 상을 구닥다리고 생각하는 풍조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번에 교리반을 했는데 강도 높은 훈련을 사람들이 거의 모두 마쳤습니다. 교리반을 하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10명에게 질문을 했는데 “열린 교회에 오기 전에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사님에게 기대하던 바가 뭐냐?”라고 질문을 했더니 8명이 “아무것도 기대하는 바가 없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두 사람만 대답을 했는데 그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면 목사는 무엇 때문에 존재를 하는 것입니까? 기대하는 것이 없는데, 이것은 뭔가 목사가 잘못 되었든지 기대한 것이 없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그 사람들이 잘 못되었든지 둘 중에 하나가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둘 다 잘못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서 1930년대로 올라간다로 했을 때 성도들에게 목사님으로부터 뭘 기대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아마 여러분처럼 10명 가운데 8명이 “기대하는 거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소그룹에 대한 굉장한 호기심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결국은 우리 나라 사회 현상하고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60년대, 70년대 시대에는 우리들이 정신없이 자기 일에 몰두하던 시대였습니다. 미국에서 40년대, 50년대를 지나면서 인기를 끌던 관료 방식이 FORD시스템이었습니다. 자동차 한 대를 3분만에 생산한다고 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긴 회사입니다. 커다란 자동차가 굴러오는데 한 사람이 한가지 일만 하면서 벨트 앞에서 그 일만 하는 것입니다. 나사 조이는 사람은 나사만 조이고, 유리를 끼우는 사람은 유리만 끼우면서 벨트를 따라서 계속 가는 것입니다. 몇 년이고 계속 그것만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있는지를 아무 상관이 없고, 이렇게 하니까 능률을 오르고 차는 3분만에 한 대씩 나오지만 성취감도 없고, 거대한 차를 부품을 끼워서 만드는데 시간이 흐르니까 그 부품을 끼우는 사람도 부속 중에 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급격하게 사회에 기계화, 산업화 현상들이 일어나면서 기계화된 사람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수많은 관계들이 생겨나면서 번호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필요 없고 인간 그 자체가 존중받기보다는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의 극치가 일본 군국주의나 전쟁의 치하에서 일어났던 전체주의 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번호만 존재하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일들이 우리 나라 근대화의 과정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에 저도 생생하게 기억을 합니다. ‘와우 아파트’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와우 아파트는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에 집을 지은 아파트에 저의 친구가 살았기 때문에 수시로 올라 다니면서 그 때 어린 마음에 ‘저게 무너지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억척주의입니다. 작년에 10만호를 지었는데 서울시장이 되어서 이번에 10만호를 지었으면 보고가 올라갈 때 성장률 0% 이렇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들이 그런 수치로 따지는 것입니다. 그때 생겨나 유명한 격언이 “안되면 되게 하라” 외국 사람에게 그것을 써놓고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무슨 소리인지 자기는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지 어떻게 되게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되게 하면 처음부터 되는 거지 어떻게 그게 안 되는 것일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알고 통하는 용어인데 그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으로 변하면서 교회에서는 성경공부를 하면서 사람들이 급격하게 굶주린 인간 관계를 교회에 와서 굉장히 많이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방식이 60년대, 70년대 후반, 80년대를 들어오면서 경험했던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60년대 후반에는 대형집회들이 굉장히 많이 열렸습니다. 거기에서 뭔가 강력한 울부짖고, 은혜를 체험하면서 산업화 과정에서 경험하는 소외와 인간적인 고통, 비애들을 쏟아놓았습니다. 대중 집합적인 카타르시스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성숙해지니까 사람들의 요구가 훨씬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가난했을 때에는 음식점에 들어가서 량을 많이 주고 국물을 많이 주는 식당이면 누구나 갔는데 이제 먹고 살만해지면 아무리 음식이 맛있다고 해도 나를 무시하는 곳은 싫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대우해주는 곳에 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회가 높아지면서 요구가 많아지고 관계에 대한 요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가 그렇게 놀랍게 변하고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요구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와르르 모여서 “와-” 함성을 지르면서 펑펑 울고 쏟아 붓는 것으로면 만족이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나’ 나를 생각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생각해주고 나에게 누군가 만져주고 나에게 개인적으로 손을 뻗어주고 나라고 하는 인간 개인을 행해서 관심을 가져주는 것들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생겨난 것이 ‘대중 속에서도 인간은 고독하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많이 있지만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어떤 소그룹을 모이는 성경공부는 엄청난 매력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거기에서 삶을 나누면서 그리스도 인으로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들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모든 것이 좋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듯이 문제를 가져온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이런 것들을 모든 교회들이 예외 없이 다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중대한 문제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박대통령이 있을 때 통일벼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통일벼는 쌀알이 굵고 매달리는 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그래서 매달려 있지 못해서 떨어질 정도입니다. 그때에 그것을 개발해 낸 팀들이 박대통령에게 보고하기를 “각하 이제 우리 나라에서 굶주림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월남에 보내서 그것을 1년에 세 번씩 실험을 해서 개발을 해서 대통령이 명령을 내려서 전체 농지에 통일벼로 바꾼 것입니다. 그랬더니 중대한 문제가 한 해에 벌어진 것입니다. 병충해가 먹었는데 천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충해가 일어나기 시작하니까 그것이 똑같은 품종에 먹혀 들어가는 병충해였습니다. 그러므로 삽시간에 번져서 엄청난 병충해가 들어서 흉년이 든 것입니다. 그때에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게 많이 생산하는 것이 최선의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절대 그렇게 심지 않습니다. 수 십 종의 벼 품종을 가지고 각자 심습니다. 한 종류가 초토와 되도 다른 종류로 살아남는 것입니다.
비슷한 경험을 교회가 하게 된 것입니다. 예외 없이 그런 것들을 받아드리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어떤 문제를 가지게 되었냐 하면 아까 말씀드린 훌륭한 점들을 갖게 된 동시에 교회가 급격하게 직면하게 된 문제는 첫째는 지상주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열렬하게 찾고 간절하게 간구하는 것들, 뜨겁게 전도하는 것들을 미성숙한 신앙의 표지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점잖게 앉아서 성경공부하고 삶을 나누고, 자기들끼리 즐거워하는 쪽으로 많이 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뜨겁게 복음을 전하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일시에 바뀔 수 있다고 하는 것들을 믿지를 않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로 회심의 문제를 별로 중요하게 시작하지 않는 분위기가 교회에 팽배에 지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일어난 분위기는 이제는 사람들이 교회에서의 생활에서 중요한 변수가 뭔가 바깥으로 뻗어나가면서 복음을 전하고 뜨겁게 성령의 역사를 힘입으면서 선교를 하는 것들이라기보다는 자기 만족적인 분위기에 많이 흘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임스 패커가 말하는 것과 같이 즐거움에 대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여 앉으면 무‘슨 모임을 가져서 우리를 즐겁게 할까!’ 하면서 과도한 인간 중심에 호소하는 분위기들이 일어나기 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관계 자체를 추구하고 그것을 중시하는 교회에서는 부흥이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난한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위기들이 아주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교회는 급격하게 성령의 역사가 식고 차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교제라는 것은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고 은혜의 역사가 있으면 교제를 나누고 나면 항상 돌아갈 때 은혜 못 받은 사람들은 갈등하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저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갈까!’ 하고 은혜 받은 사람들은 그런 은혜를 나누면서 그것을 간직하고 싶은 거룩한 충동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은혜가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나누게 되면 인간적인 면들만 얄팍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똑같이 세상의 모임과 다름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저도 기억을 합니다. 저가 섬기던 교회에서 모여서 계를 하고 구역예배 모여서 잘먹고, 놀고, 마시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뭔가 신앙에 있어서 생명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만족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뭔가 지루한 분위기를 타계하고 뜨겁고 강력하고 열렬한 것들이 없을 까!’ 라는 마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 성령 운동’ 60년대에 일어났던 성령 운동에 대한 향수가 들기 시작했는데 다시 말하면 그 때에는 무식하기는 했어도 뭔가 부서지는 게 있었고, 뒹구는 데 있었고, 펑펑 쏟는 눈물도 땀도 있었는데 그 때가 낫다. 쉽게 얘기하면 한참 양식을 먹다가 토장국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 분위기가 90년대 분위기와 상당히 많이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부흥에 대한 얘기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얘기들이 수없이 많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아주 정확하게 갈래를 치면 네갈래 정도로 한국 교회 안에서 부흥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60년대의 성령운동, 은사주의 운동을 리바리벌 시키려고 하는 움직임입니다. 용어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확실합니다. 뭔가 신앙의 전체적인 구도를 조정하면서 부흥이 무엇인가를 캐들어 가서 역사적이고 개혁주의 선상에 있는 부흥을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을 고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여기에다 60년대의 성령 운동을 가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현재 대부분의 교회들이 말하고 있는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우리 나라에 있는 오순절 주의는 세계적으로 보면 아주 건전하고 복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의 불건전한 복음주의에 비해서 상당히 복음적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제는 굉장히 오순절 운동에 대해서 호의적이 되었습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이단이냐 뭐냐 해서 싸우다가 이제는 호의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있는 교회들도 이제는 장로교나 기존 교회의 방식을 많이 받아들였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이제는 성령의 운동을 억압하고 그런 것을 못하는 교회가 깨어있는 교회가 아니라 폭넓게 인정을 하는 것, 어느 교회에 가니까 설문지가 있는데 ‘당신이 받은 은사를 쓰시오, 능력, 권세, 귀신 내어쫓음,’ 그런 교회들이 이제는 상당히 깨어있는 교회라고 되었으니 이게 70년대나 80년대의 사고 방식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혁명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버리고 떠난 성령 운동을 향수를 느끼고 다시 돌아가서 포옹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입니다. 심지어 조금 문제가 있더라고 열렬하고 뜨거운 것이 역시 좋다라는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지성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대안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적인 갈래에서의 부흥입니다.
두 번째는 극단적인 신비주의에서 부흥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있었던 빈여드 운동이라든지, 1980년대 중반에 있었던 ‘내가 본 천국’의 펜시 콜라를 비롯해서 신비적인 종말운동들이 부흥이라는 이름 하에 거명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눈여겨볼 대목인데 아까 말씀드린 것도 약간 포함하는데 강한 교회 만들기라는 목표를 거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뭔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려면 펄펄 뜨겁게 하고, 전도를 하려면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하고, 뭔가 화끈하게 해야 되는 데 이 모양인가 해서 강한 교회 만들기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능력, 강함, 힘이 오순절 쪽에서 부는 바람과 굉장히 많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강하게 만들 수 있다면 기존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상당히 많은 부분을 버리고 포기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찬양운동, 성경공부 운동, 제자운동 식으로 일어났던 운동중에 하나입니다. 교회에 대한 깊은 아픔이라든지 교회가 힘을 잃었을 때 왜 궁극적으로 힘을 잃었느냐 하는 진지한 탐구라기 보다는 강력하게 만들고 싶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교회에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성령이 은혜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교회가 열렬히 뜨거워질 수 있습니다. 옛날에 월드컵할 때 왜 그렇게 잘 떨어졌는지 모릅니다. 본선에 올라가려고 하면 호주에게 져서 온 나라가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와 상관없이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강하게, 뜨겁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강한 교회를 만드는 선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도 역시 부흥의 깊은 뿌리를 발견하고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이 고침받은 것이 아닙니다. 강한 교회를 만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찬양은 뜨겁게, 기도를 간절히, 설교를 간단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용어가 교회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전도 특공대’, ‘기도 돌격대’ 교회가 하나의 거대한 병영입니다. ‘30일 여리고 작전’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웬만큼 자극을 받아서는 처음에는 뜨끔뜨끔하는데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런 용어에 사람들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이 강한 교회 만들기 작업입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부흥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부흥에 대해서 얘기해야 한다”, “그 교회 부흥이 많이 됐대?” 그게 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 자체를 외적인 성장이나 이런 것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강한 교회 만들기 작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부다 부흥의 본질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럼 본래적인 의미의 부흥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이 계획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의 한국 교회에서는 부흥회라는 말을 사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부다 50년대 이후에 들어와서 60년대에 기승을 부린 것들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부흥회’라는 것은 부흥을 일으키기 위한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게 말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사경회’였습니다. 살필 ‘사’자, 성경 ‘경’자입니다. 성경을 살피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기억을 하십시오. 예배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식이 무아지경으로 끌어 올려가는 찬양이라든지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이교적인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집회 속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식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여기 계신 것처럼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이 없는 예배는 이교적인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도 한결같이 예배가 가지고 있는 어떤 제 2적인 기능보다는 교육의 기능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설교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에 참된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 자체가 부흥을 증거하고 부흥은 인간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일으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부흥이 오기 전에는 조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난해진다든지 열렬히 기도한다든지, 그러나 가난해지고 열렬해지면 자동적으로 부흥이 온다라는 식의 자판기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려운 이런 상황을 타계할 때 항상 그런 식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가 상황이 이렇게 어려우니까 부흥회를 열자’, ‘건축 헌금을 해야 되니까 부흥회를 열자’ 라는 식으로 해서 집회를 열고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머릿속에서는 ‘부흥회’ 그러면 떠오르는 생각은 막 북을 치면서 열렬하게 함성을 지르면서 찬송을 하고 흥분의 도가니가 되는 것들을 가리켜서 그게 곧 부흥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부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태까지 가지고 있었던 부흥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늘 이 시간을 접어서 그것은 거의 다 부흥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다 머릿속에서 쓸어버리고 참된 부흥이 어느 것인가를 알아나가야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먼저 기억해야 될 것은 부흥은 결국 우리들이 찾아낸, 교회가 어려움 속에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들이 90년대에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 중에서 또 한가지가 제시된 것이 아니냐 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서론(2): 부흥이란 무엇인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번 시간에도 부흥에 대한 서론적인 말씀이 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왜 조국 교회가 부흥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부흥에 대한 관심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게 되었는가를 말씀을 드리면서 지난 주 마칠 때 말씀 드리기를 뭔가 특별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에서 이어지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발명품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부흥을 징검다리로 해서 건너온 역사다. 그러면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부흥의 역사가 뭐냐?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흥에 대해서 말을 하면 어떤 사람은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와, 정말 그런 것을 나도 보고 우리 교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라는 소망을 갖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은 잘못 된 것이다. 이미 성령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시고 우리들이 이 신약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구약 시대에 일어났던 부흥 같은 것을 가지고 오늘도 그런 것이 일어나야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는 것이냐? 그리고 이제까지 부흥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사실 봐라 얼마나 문제가 많았느냐? 이단을 얘기하는 열광적인 사람들 치고 부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직장도 그만두고 가정도 팽개치고 산으로 도망가지 않으면 부흥을 경험했다면서 교만하고 쓸데없는 헛된 신비 주위에 빠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이러면서 부흥 자체에 대해서 혐오하고 경계심을 갖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면 참된 부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잘못 생각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을 바르게 알면 부흥에 대한 그릇된 태도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릇된 태도를 버려야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부흥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부흥이 뭐냐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부흥이라는 말이 하박국서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번역을 그렇게 한 것이고, 영어로 얘기하면 re-vival. re는 다시, vive는 생명을 불어넣다. 다시 생명을 불어넣음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야’라는 동사로 나옵니다. ‘하야’라는 히브리말의 동사는 ‘있다’, ‘존재하다’, ‘되다’ 라는 뜻입니다. ‘생존하다’ 라는 뜻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할 때에 ‘하야’입니다. 오히려 구약 성경에는 부흥이라는 말보다는 소생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그 소생이라는 말이 바로 부흥이라는 말과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와 방불하게 되어버린, 완전히 죽어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서 갑자기 확 살아나는 것을 소생이라는 의미입니다. 발을 실컷 먹고 자다가 아침에 일어난 사람에게 “안녕히 소생하셨습니까?” 그렇게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생’ 그러면 생명의 중대한 위협을 느끼면서 최소한 가사 상태에 갔던 사람이 깨어날 때 소생이라고 하지, 컨디션이 안 좋은데 낮잠을 자고 나니까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는 사람을 소생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방불한 상태, 혹은 거의 죽은 상태까지 갔던 사람이 생기를 회복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또한 거의 죽은 자와 같았는데 실눈 같은 눈을 떴다가 다시 감는 사람을 보고 소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소생은 다시 얼굴에 화기가 돌고 일어나서 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소생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완전히 죽어있는 상태에 있었는데 벌떡 일어나서 강하고 활발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소생시키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소생시키시고’, ‘소생시키소서’, ‘다시 살리사’ 이것은 모두 부흥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인습 속에서 이해하고 있던 부흥과는 다릅니다. 1989년도에 이곳 가까이 있는 신학대학에서 교회사 교수로 봉직하고 계신 어느 박사님이 논문을 써서 교지에 내셨는데 내용이 ‘18세기 미국은 굉장히 어둡고 죄악이 관영했기 때문에 죠나단 에드워드란 사람이 보다 못해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그랬더니 부흥이 일어났다.’ 대게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어느 출판사에 나온 ‘죠지 윗필드’라는 18세기의 부흥의 도구로 쓰였던 사람의 표지 발문에는 ‘대각성을 일으킨 사람 죠지 윗필드’ 그렇게 나옵니다. 이런 것들은 전부다 다 부흥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부흥은 인간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부흥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흥”, “부흥” 하면서 부흥은 마치 인간에 의해서 일으켜질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미국의 암스트롱이라는 부흥에 대해서 많이 연구한 어느 저자가 어렸을 때의 얘기를 합니다. 어렸을 때 동네 앞을 지나는데 현수막에 ‘월요일 우리 교회에 오십시오.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그리고 일요일에도’ 그래서 어린 생각에 ‘왜 부흥이 오는데 월, 화, 수요일에 오고 목, 금, 토는 쉬었다가 주일날 올까!’ 그런 현수막을 내어 건 사람들은 모두 “부흥”이라고 할 때 그들은 모여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기도회를 할 때 열렬해지는 것을 가리켜서 부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들의 모임이 월, 화, 수, 일요일에 있으니까 거기에는 부흥이 있고 목, 금, 토는 쉬니까 부흥이 없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흥회라는 간판이 아직도 많이 걸립니다. 사람들에게 별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부흥회라고 하면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너무 안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흥회 그러면 생각나는 것은 우선 북이 하나 있어야 하고, 북쟁이가 있어서 눈을 지긋이 감고 북을 쳐야 합니다. 그 북도 하루아침에 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받은 사람만 시켜줍니다. 북을 칠 때 가락에 맞춰서, 분위기에 맞춰서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흥회를 할 때에는 교회가 환하지만 기도시간이 되면 어두운 분위기를 만들어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부흥이 오려면 반드시 헌금을 잘해야 하기 때문에 헌금에 대한 강조가 주어집니다. 또한 전통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회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이 은혜를 받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를 사람들은 이성이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성을 많이 죽인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흥회라는 간판이 붙기 시작하면서 한국교회의 설교가 굉장히 어두워진 것입니다. 초점 자체가 한국의 초대교회에는 사경입니다. 성경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고 탐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경회라고 했고 강사를 사경사라고 했습니다. 사경사가 물론 목사님이 될 수 있고 전도사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경사가 성경을 천천히 풀어주면서 깨닫는 모임이 사경회였고, 그러다 큰 부흥이 일어나면 후에 그 사경회는 부흥회였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5,6,70년대에 오면서는 부흥회가 전통적인 깨끗한 그림에서 벗어나서 탈선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가 보기에는 물질문제하고 많이 관련이 있습니다. 성장을 위한 하나의 방편, 그렇게 부흥회를 이용하려고 하는 교회의 지도자들, 또 부흥회를 복 받는 기회로 삼으려고 하는 기복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무지한 교인들의 합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도가 낮을 때 부흥회가 굉장히 유행을 했습니다. 병고침을 받는 현장, 축복을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통성 기도하는 현장, 전권을 장악한 듯이 부흥사가 휘두르는 언어의 폭력, 권위주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거기에 몰입되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한없이 받는 것입니다. 그런 그림들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흥이 아니다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부흥은 전도하는 것을 가리켜서 부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큰 집회를 만들어 놓고 모임을 갖는 것도 부흥회라고 부르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냥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혹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사회를 고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는 것도 부흥이 아닙니다. 그것이 필요 없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부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거철이 되면 교회에서 거대한 공명선거 감시단을 스스로 발족해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부정 선거하는 사람들을 고발해서 올바른 선거문화를 정착시키는 것들도 부흥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돈을 많이 걷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호하는 것도 부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흥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부으심입니다. 그래서 부흥은 하나님의 생명을 확 부어주셔서 사람들이 갑자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는 것, 영혼이 살아나는 것 같은 기쁨을 느끼는 것, 그러한 부흥이 일어날 때 뚜렷한 특징이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이전에 바로 보지 못했던 자신과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 되는 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흥이라는 말과 각성이라는 말이 거의 함께 쓰여지다시피 합니다. 역사적으로 18세기에 일어났던 부흥을 The great awakening movement. 라고 부릅니다. ‘크게 깨어나는 운동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부흥과 각성이라는 말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는 데 구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부흥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른 것입니다. 하나의 현상, 하나님의 강력한 성령의 생명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영혼이 살아나고 갑자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방편들이 강한 힘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전에는 “예수 믿으세요”, “너나 잘 믿어” 그랬는데 부흥이 일어나니까 “예수 믿으세요” 하면 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면서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고, “어떻게 해야 예수를 믿을 수 있겠느냐?” 하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을 놓고 부흥이라는 말은 그런 것들이 확 살아나서 외부로 영향을 미치는 모습에 착안에서 볼 때에는 부흥이라고 말하고, 각성이라는 말은 똑같은 부흥인데 부흥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에서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이 놀랍게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에서 경험하는 것처럼은 못 경험했을 지 모르지만 은혜를 받지 못하고 살아갈 때에는 자기가 이런 저런 죄를 저지르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해서 ‘그런 일이 없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내 인생이 지저분했다.’ 이런 생각이 들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서 자신이 죄악 덩어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존 번연 같은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가 영혼의 각성을 경험하고 18개월 동안을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먹이를 찾아서 강가를 기어다니는 오리 새끼들을 그렇게 부러워했습니다. ‘너는 얼마나 좋겠니! 나는 어쩌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나의 죄를 인해서 괴로워하는데!’ 이 사람이 한때는 그 죄의식을 이기지 못해서 보트를 타고 베드포드 강으로 가서 투신 자살을 하려고 까지 시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이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까지는 안 갔더라도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어느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하고 왔는데 그 다음날 어느 자매가 전화를 했습니다. 왜 전화를 했냐고 하니까 “목사님, 제가 전에는 굉장히 좋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이번 집회를 하고 났는데 밤에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제가 창녀 같습니다.” 그 자매가 술집에 나가는 자매가 아닙니다. 몸을 팔거나 그런 부정한 일에 종사했었던 자매가 아니었습니다. 믿는 집안에 태어나서 곱게 자란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는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깨닫고 보니까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니까 너무나 더러운 것입니다.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자매가 말씀의 비췸을 받아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전에 “야, 넌 살아온 과정, 너의 마음을 보니까 창녀같구나!” 그랬으면 난리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변화가 생겨났습니까? 심령에 각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식의 변화가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읽은 라오디게오 교회를 향해서 주님이 “네가 부요하다고? 넌 가난하다. 좋은 옷을 입었다고? 넌 벌거벗었다. 너희 동네에서 나온 안약이 눈 감은자도 눈을 뜨게 한다고? 사실은 너희가 눈 먼자다”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무한대하게 연장을 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부흥의 때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하나의 현상을 놓고 부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각성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어느 쪽에서 이것을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부으심 속에서 커다란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먼저 이런 각성이 일어나서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는 각성이 먼저 있고 후에 큰 성령의 능력이 부어지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같이 올 수도 있고, 혹은 부흥이 먼저 오고 각성이 올 수도 있습니다. 순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때에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어쨌는 각성과 부흥은 어느 각도에서 그러한 현상을 봤느냐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람들이 “부흥”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성령의 진정한 역사, 그리고 병자들이 낳고, 큰 기적이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들이 부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중국에서 온 어느 선교 편지를 보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공안원이 쫓아왔답니다. 잡히면 죽는데 “아버지 도와 주세요” 그리고 도망가면서 기도를 했는데 두 공안원이 쫓아오다가 몸이 서서 마비가 되어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도 기적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30년대와 5,60년대에 일어났던 부흥에서는 성령께서 ‘어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캄캄한 밀림 속에 빛이 비치고 그 빛을 따라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부흥” 그러면 요술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부흥의 핵심이 아닙니다. 부흥이 나타날 때 그러한 현상들이 부수적으로 수반될 수는 있습니다. 폭탄을 만들 때 멋있게 빛을 내려고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미사일 캄캄한 바다에서 지나가는 함정을 향해서 발사를 하면서 ‘쾅’하고 미사일이 맞는 동시에 햇빛같이 찬란한 빛이 발산을 합니다. 그러면 미사일 만드는 사람들이 빛이 찬란하게 나오게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강력한 파괴력을 가져서 인명을 살상하고 격파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흥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기한 기적을 보여주시고 싶으셔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시려고 그러한 일을 행하시겠습니까? 부흥은 핵심은 부흥의 시기에는 장엄한 하나님의 거룩과 인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을 체험하고 이적을 체험한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체험한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관계가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어떠한 강한 이적이나 신비한 체험이 없이도 깊은 회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인격을 심오하게 경험하고 사상적으로 완전히 바뀌어진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얘기를 들어도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했던 부흥은 성경에서 얘기하는 참된 부흥과는 많이 다릅니다. 암스트롱이 쓴 ‘When God moved'라는 최근에 나온 책에서 서두에서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레이라는 가공의 목사가 있는데 부흥을 떠드는 사람에 대해서 좋아하지도 않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목을 맸다고 까지는 못하지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겠다는 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주일날도 설교를 꼼꼼하게 준비해서 올라가서 설교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일 평생 목회하면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 그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당에 하나님이 가득 차신 것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모든 죄인 눈 어두워 보지 못하네’ 이 대목에 와서는 하나님이 이렇게 거룩하시고 이렇게 위대하신데 죄로 말미암아 눈이 멀어서 이런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다는 사실에 가슴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너무나 불쌍하다는 사실이 느껴지는 거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이 레이 목사님 자신이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제 성경을 폈습니다. 20시간씩이나 원고 준비를 해서 설교를 하려고 본문을 읽는데 본문이 우렁찬 함성처럼 들려오는 것입니다. 이제는 준비해 온 원고를 따라서 일평생 설교해온 방식대로 할 수 없을 것 같다라는 느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이 터져나가는데 입을 열면 말씀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일은 1부 예배가 끝났는데 사람들이 움직이지를 않고 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2부의 사람들이 들어와야 되는데 회개하느라고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정을 해서 내보내서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2부 예배가 끝나니까 사람들이 기도회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인도해주는 사람이 없이 간절하게 그 말씀에서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성품에 붙들려서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갔습니다. 열댓 명이 갔습니다. 기도하면서 한 아이가 회개하는데 끝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기다려 줬습니다. 그런데 기차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안 끝나는 것입니다. 한번 기차를 놓치면 오늘밤에 서울을 못 가는데 데려가자 해서 일으키는데 양쪽에서 부축을 하면서 가는데 산길을 넘어갈 때 계속 통곡하며 우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항상 있지 않는 예사롭지 않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강한 역사를 경험하고 나니까 사람들이 한 달에 한번씩 성찬을 하는데 “나오시오, 나오시오” 해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에서 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기도회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예배 시간마다 큰 변화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깨닫는 것입니다. 성경, 기도, 예배, 성찬에 대해서 하나씩 깨닫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은 우리들이 기존에 생각했던 부흥이 아닙니다. 부흥의 핵심은 기적이나 이적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은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라고 질문을 하면 “네”라고 대답을 해도 “하나님만 사랑합니까?” 라고 질문을 하면 대답을 못합니다. 사랑의 순도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많습니다. 추운 겨울날 찬바람이 불 때에는 따끈한 쌍화차 한잔도 사랑할 만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날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는 찻집에서 한잔 마실 수 있는 따끈한 커피도 사랑할 만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식의 사랑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입할 수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흥을 경험하고 나면 부흥 속에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경험이 있는데,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경험을 하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눈뜨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눈뜨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서 눈을 뜨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면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부흥을 통해서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될 때에 나타나는 가장 탁월한 현상 가운데 하나가 거룩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해 지고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속되고 죄악 되고 더럽고 불결한 것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져서, 순결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주님을 뵈올 수 있으리 만치 거룩해지고 싶다’ 라고 하는 사모함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부수적인 효과가 따라오는데 도덕적인 수준이 향상됩니다. 교회의 도덕적인 수준도 향상되고 개인에 있어서 도덕적인 수준도 향상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이 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나니까 자기가 불결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그 불결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비결이 죄를 짓지 않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아가면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법을 몰라도 성경 말씀대로 잘 살면 서양에 가도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부르고, 동양에 와도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불러줍니다.
이사야가 6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의 영광을 뵈면서 그는 자기가 불결한 사람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정결케 하신 후에 비로소 사명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이 부흥은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핵심이고, 그런 인격을 경험하게 될 때에 사람들은 거룩해지고자 하는 깊은 사모함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성경의 역사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차례 아까 말씀드린 레이 목사의 경험과 비슷한 부흥의 강한 역사가 많이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것만 해도 열 번이 넘게 구약, 신약 속에서 흐릅니다. 그런데 부흥이 일어날 때 하나님이 부흥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주단들이 있습니다.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은 은혜를 받는 방법입니다. 교회에 의해서 인정되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거스틴 같은 사람들은 아이들이 동네에서 부르는 동요를 들으면서 회개를 경험했습니다. 다른 여러가지 방법으로도 사람들이 회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교회에 의해서 확인된 방편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사람들이 은혜를 경험하고 새사람이 되지, 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새사람이 되는 경우는 수천만 명중에 한두 명이 나올까 말까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수십만 명이 나와서 이렇게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수십만 명이 다 변화될 수도 있고, 그렇게 축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할지라도 몇만 명이라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술집에서는 하나님이 어마어마하게 축복하시면 어쩌다 한두 사람이 깊이 깨달을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얼마나 좋은 신앙이 생겨날 지는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공부하면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떤 때 한계에 다다르면 우리의 신앙에 도움을 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경험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영적으로 힘이 없고 곤고하고 기도하면 새 힘이 솟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때도 있습니다. 설교를 듣거나 예배를 드리는데 아무 것도 깨닫는 것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래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개인이 아니라 나라 전체라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라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럴 경우에는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들에 대한 거룩성들이 무시당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수단에 참여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조소조, 냉소조의 분위기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 자신도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도 주시고 다른 것도 주셨는데 이런 것들을 가지고는 이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을 열렬하고 순결하고 순수하고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시는가,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보면서 알 수 없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고 찾아낸 결과가 무당들이 자기 신을 만들어 놓고 절하는 것이고, 석상을 세워놓고 절하고 재산을 바치는 것이 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기를 알리시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과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르쳐 준 것은 도구가 되었고 하나님이 그 가르침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만나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내 친구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나 엄마의 하나님 아니라 내 하나님, 그리고 우리 엄마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도구가 되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면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보고 ‘아 저게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 예수는 저런 분이겠구나!’ 하고 정확하게 압니다. 그런데 예배 드릴 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갈 때는 세상 방법대로 살고 자기의 이익이 있으면 그 이익을 위해서 사는 이중적인 사람들의 삶을 세상사람들이 볼 때에는 헷갈리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두손 불끈 쥐고 하나님을 볼 때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있는 것 같았는데 탈세하고 사기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것입니다. 결국은 ‘헛것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너가 예배당에 가서 아멘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내가 몇 천원을 가지고 경마장에서 소리지르는 거나 다 비슷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하나님이 만족한다는 것이 아니라, “순도는?”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순도는?”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만을 사랑하느냐?” 그럴 때 “네”라고 대답을 할 때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온전한 것을 철저하게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렇게 우리들이 살아야지만 우리의 삶과 신앙과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장 잘 투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옛날에 거울이 없을 때에는 동경, 은경, 금경을 사용했습니다. 동이나 은을 판으로 만들어서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지금은 비록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나” 그게 무슨 의미인가 했는데 돈 있는 사람들은 겨우 동경, 더 부자에게는 은경이나 금경,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석경이었습니다. 돌을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얼굴을 비취는 것입니다. 돌에 비취면 모습이 나타나기는 하는데 흑백입니다. 사람들이 그 거울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지를 아는데 여러분과 저가 돌 같다면 하나님의 모습을 아무리 비춰줘도 사람들이 파악하기 힘들 것입니다. 동경이나, 은경, 금경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의 유리 거울이라면 하나님을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순도, 신앙의 온전함, 영성의 깨끗함들이 이렇게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순결한 삶, 지나칠 정도로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 그래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면 모두 미쳤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는커녕 한심하게 해도 사람들이 “야 너 요즘에 교회에 미쳤구나!” 어떤 사람은 “교회에 빠졌구나!”, “예수에 미쳤구나!” 사실 그런 말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썰렁한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정말 미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순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싶어하시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정확하게 비취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시기 위한 방법들은 율법도 주시고, 선지자도 주시고, 제사장도 주시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복음도 주시고, 성경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가지고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안 되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제 더 이상 내버려두면 나의 백성이 내 백성으로서의 진정한 정체성을 잃어버리겠다’ 라고 생각되실 대에 하나님이 전권적으로 개입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부흥이라고 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그런 부흥의 사건이 일어날 때 무엇인가 확 달라진 것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껏 까지 드렸던 수많은 예배인데 이상하게 그날은 가슴을 찌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교회에 나와서 덜렁덜렁 돌아다니고 왔다갔다 할 수 있었는데 정확한 말씀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 보면 하웰 해리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영국의 웨일즈에서 부흥의 도구로 쓰였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예배 시간에 졸다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예배 시간에 한참 졸고 있는데 목사님이 광고를 하시는데 “다음주 성찬이 있는데 삶이 개떡같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성찬을 받을 생각도 하지 마시오” 했는데 졸다가 그 한마디만을 들었는데 자기가 바로 그 개떡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났는데도 돌아가지 못하고 종탑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성찬을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각성이 일어나면서 회개해서 위대한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개인의 부흥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개인에게 일어나면 개인적인 부흥이고 집단에게 일어나면 집단적인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교회사에 있어서 부흥이라고 하면 한 두 사람에게 일어난 것들보다도 역사적으로 의미를 줄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을 가리켜서 흔히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흥은 꼭 집단적으로만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도 얼마든지 경험될 수 있고 지극히 소수의 무리들에게도 경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가 그렇게 부흥을 사모했지만 그 목사님은 부흥을 못 보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어느 관점에서 달려있는 것입니다. 18세기와 규모적으로 비교를 하면 못 봤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얼마든지 부흥을 보신 분입니다.
그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면서, 폭탄을 터뜨리듯이 이루시면서 기울어져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다시 새롭게 하시고, 다시 새롭게 하시면서 물결치듯이 건너는 역사가 성경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기에는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모든 수단들을 사용해서, 그런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됐을 때에는 선지자를 보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주의 이름으로 내가 너희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노니”, “너는 누구냐?, 하나님도 우리 안 중에 없는데 너는 누구냐?” 하면서 막 가는 사람들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악했던 백성들이 갑자기 어느 순간에 일시에 하나님의 큰 진노에 대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커다란 두려움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렇게 기울어져 가는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타락해가던 역사를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셔서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참 있으면 다시 기울어져 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질 것, 올라가면 뭐하냐?”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부흥이라는 것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확 다가왔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라져도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비유를 하자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던 수많은 사람의 신앙을 뿌리를 내리게 만들어 주고 부흥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이 떠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부흥을 보지 못하고 살아도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주시고, 성령이 일반적으로 역사하시면 그 안에서도 사람들이 변화되고 거듭나고 새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아주 느립니다. 이런 것들이 부흥의 기운이 남아 있을 때에는 상당히 효과적인데 부흥으로부터 아주 멀어지고 나면 1년 내내 설교해도 거의 한 사람도 회심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옛날에 죄를 회개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져서 막가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그런 것들이 방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경험이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새로워집니다. 말씀이 다가옵니다. 그러다가 미끄러지게 됩니다. 나중에 “하나님, 마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하면서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이 다시 살려 주셔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다음에 다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에 떨어질 때는 다릅니다. 덜 떨어진다, 더 많이 떨어진다라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앞에서 크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영향이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을 개인적으로 경험을 하고 다시 침체가 되도 그의 영적인 수준은 부흥을 통해서 굉장히 많이 상승되어 있는 것입니다.
얘를 하나 들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게 무슨 말인지 알지 않습니까? 모르시는 분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아실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안 도와 주실려면 말구요” 이런 식으로 기도를 했는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안되겠다 라는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안 도와 주시려면 죽여주세요” 이렇게 이판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에 깊이 들어가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 한 분 앞에 자신이 녹아 내려가는 것 같은 가난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아가지 못하지만 그 후에 항상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매달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지식은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충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면 됐지!’ 하는 마음은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성간에 사랑의 법칙이 있는데 연애론 자가 쓴 표현에 의하면 남녀가 서로 사랑을 표현을 하는데 항상 전진을 하지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후퇴하면 만족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용어를 동원해도 격렬한 용어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후퇴하고는 관계가 확인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 예전에 도달했던 한계치를 초월해서 넘어 가야지만 완전한 기쁨이 신자 안에 있지, 후퇴하는 것을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 가난해지는 것에 있어서도 후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흥은 그런 한계를 뚫고 나가면서 진정한 사랑, 진정한 가난함, 진정한 열망, 진정한 성결 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신앙의 수준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이번에 교리반에서 공부 후에 한 얘기들이 “목사님 이번에 교리반에서 공부를 하고 나서 업그레이드 된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부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관념적으로 생각하던 것들을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나 영적인 수준을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것입니다.
만나서 십분 정도 얘기하면 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설교 한번 시켜보고 기도를 시켜보면 저 사람이 어느 수준인지 알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2학년이면서도 불성실한 학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이면서도 성실한 학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아니가 아무리 열심히 수학문제를 푼다고 해도 미적분의 문제를 풀 수 있겠습니까? 배우지를 못했는데 어떻게 풀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고등학생은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말이 “나는 어떤 설교자가 나에게 희미한 빛이나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의 위대함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가르쳐줄 수 있다면 나는 그가 무슨 일을 했던지 모두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면 자신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줄 수 있고 그것이 작은 부스러기라고 할지라도 자기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면 자기에게 그렇게 가르쳐 줄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아주 탁월한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부흥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전히 제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구약의 신앙은 완전히 혼합되어서 알아볼 수 없는 신앙으로 되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나기 직전에 일어나는 현상은 성경이 명백한 대도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봐도 신앙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주지 못하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부흥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새로워지는데 그 때마다 업그레이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영적인 수준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한 걸음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사르트르가 인간을 가리켜서 개미인생이라고 했습니다. 10층만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실감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족장시대에는 물론이고 왕국시대에 와서도 나라가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까지 왔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일시에 회개와 각성을 불러일으키시고 하나님의 거룩을 눈뜨게 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시게 하는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왕국이 날마다 새롭게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역사 속에서는 어떻게 이것들이 진행되어 왔는가 하는 것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서론(3): 왜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이 시간에는 사람들이 왜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될 일들을 보여주시기 전에 2장에서부터 7곱개의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들은 실제로 소 아시아 지방의 흩어져 있던 교회들이었습니다. 교회들을 향해서 편지를 쓰라고 밧모섬에 귀향온 요한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요한이 이 부분을 적었던 것입니다.
4장에서부터 미래에 일어날 찬란한 역사적인 계시를 보여주시기에 앞서 먼저 2장과 3장을 할애해서 1장에서는 요한이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2장과 3장에서는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먼저 적고, 4장부터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서 자체가 우리에게 중요한 멧세지를 줍니다. 1장에서는 개인이고, 2장에서는 교회이고, 3장에서는 교회와 전 세계에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일곱 개의 교회가 등장하는데 일곱 개의 교회가 무슨 의미냐를 놓고 해석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곱교회, 에베소 교회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까지의 일곱 개는 교회의 이름은 그 시대에 실존했던 교회의 이름이지만 그것은 각각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강림과 함께 세워진 교회시대로부터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까지의 역사를 일곱 등분으로 나누어서, 각 시대마다 각 시대의 교회 역사를 하나의 교회로 묘사한 것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때로부터 이루어진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시대의 교회, 그리고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쓸 때까지의 교회를 가르키고, 다음은 그 다음의 교회 시대로 차례대로 이어져서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의 말세 시대의 교회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리들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일곱 개의 교회는 그 시대에 존재했던 실제의 교회들이고, 실제로 교회들을 향해서 편지를 예수님께서 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거울 삼아서 주님오실 때까지 계속될 모든 교회들로 하여금 교회가 이 지상에 있는 동안에 빠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위험을 경고하시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교회의 모습이 가꾸어 질 때에 주님이 흡족해 하시는가를 칭찬하시는가의 장면도 보여주셔서 거울로 삼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록하게 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 개의 교회는 특별한 순서가 없이, 지리적인 순서도 아니고, 알파벳 순서도 아니고, 특별하게 순서를 가릴 수가 없이 에베소 교회에서 시작해서 라오디게오 교회까지 옵니다. 두 개의 교회는 책망만을 받고 두 개의 교회는 칭찬만 받고 나머지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들은 교회인데, 칭찬만 받은 교회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책망만 받은 교회부터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라오디게아는 로마시대 때에 안약을 만드는 명산지였습니다. 속설에 의하면 라오디게아산 안약을 바르면 소경도 눈을 뜬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열심히 없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잘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없는 것에 대해 묘사하기를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배경이 있는데 당시 로마 제국은 상수도 시설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적지를 보면 2000년이 훨씬 넘은 전에 공중 목욕탕이 있고, 빵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던 것이 발견이 됩니다. 당시의 문명이라는 것이 굉장히 고도의 문명을 누렸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두 가지의 재질로서 상수도관을 만들었는데 연관이 아니면 석관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납으로 만든 관이 금속성이었으므로 훨씬 고급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책에는 로마가 왜 망했는가 하는 것이 역사학에서 미스테리인데 상수도 시설 때문에 로마제국이 망했다고 썼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부유층들이 납으로 수도관을 만들어서 사용하면서 특권층들이 누리는 문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납중독이 되어서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죽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냐 하는 설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지방에서는 아마 석관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돌에 홈을 파서 위로 물이 흘러가고 뚜껑을 덮은 식입니다. 그래서 여름이면 더우므로 그 돌관이 미지근해 집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물이 미지근해서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뜨겁다, 차갑다 하는 것이 차가운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뜨겁다는 것은 하나님을 열렬히 믿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을 하지만 핵심은 뜨겁다, 차갑다라도 하는 온도의 문제가 아니라, 미지근한 물을 먹을 때의 역겨움, 상태가 그 비유의 초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들의 신앙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비난을 받은 것이고, 또 하나는 무지입니다. 벌거벗었는데도 벗은 줄을 모르고 가난한대도 가난한지도 모르고,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운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라오디게아 지방은 안약을 많이 팔아서 상당히 부요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이것은 도시 전체가 가난했다라기 보다도 초점은 라오디게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정신으로 라오디게아 도시의 정신을 정복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라오디게아라는 지방에 넓게 퍼져있는 도시의 정신에 의해서 자신들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의 도시의 정신은 어떤 정신입니까? 무엇이라고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경건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 정신은 아닙니다. 날마다 늘어나는 룸싸롱, 퇴폐업소 등의 모습이 도시의 정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차려서 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 도시의 정신에 물들어가게 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확실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속에 사는 사람들보다 많은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시속에 살 때에 할 일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때에 도시의 정신을 정복하면서 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면 그 도시의 정신에 의해서 교회가 평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 강력한 영적 싸움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그런 풍조들이 교회 속에 많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런 것이 많이 들어옵니다. 어떤 신문에 목회자 세미나를 하는데 어떤 것을 강연을 해서 일깨운다는 내용이었는데 ‘참석하시는 분들에게는 커다란 행운이 있습니다. 보물을 잡으십시오. 1등 냉장고, 2등 컴퓨터 3등, 전자렌지’ 이런 것들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총동원 전도주일이라고 써놓고 현관에 승용차와 오토바이가 서 있었습니다. 아벨라 승용차에 1등, 대림 오토바이가 2등이라고 붙어 있어서 뭐냐고 물었더니 전도를 제일 많이 한 사람들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또 어느 교회의 전단지를 보니까 ‘천명을 교회에 데려오신 분에게는 1억원을 드립니다.’ 이게 모두 백화점에서 배운 것입니다. 세상의 도시의 정신이 교회속으로 흘러들어온 것입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런 도시의 정신이 흘러들어 온 것입니다. “야 우리 부자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은 세상적인 생각에서 자신의 육적인 생활이 그러했지 자신의 영적인 생활이 부유하지 않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무슨 말씀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교회에 대해서 다 평가하신 후에 하신 말씀이 ‘볼지어다’ 성경에서 나오는 be hold입니다. 의미심장한 말이 나올 때에 청중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감탄사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없는 교회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셔야 할 분이 아니라 교회 한 가운데 좌정하셔서 친히 모인 당신의 무리들을 명령하고 권고하셔야 하는 곳이 교회인데, 예수님은 사라지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식의 교회의 모습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무엇을 안 했겠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성가대를 안 했겠습니까? 장로투표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선교헌금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창립 감사예배를 안 드렸겠습니까? 구역이 없었겠습니까? 해마다 행사, 성찬, 헌금, 구제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거기에 없으신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결핍하고 있는데 나머지 모든 것들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 있느냐 하는데 그렇게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 한 분이 소경이었습니다. 전에 안마사 일을 했습니다. 저가 교수였을 때 그 목사님이 안마를 해 주시겠다고 오라고 해서 받았는데 정말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안마를 받으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불편하지 않습니까? 개안 수술을 받아 보시지 그러십니까?”라고 질문을 했더니 그 분의 대답이 일생 동안 살아오면서 수술까지 해서 눈을 떠야 될 정도로 불편함을 생각해 본 적이 아직 없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씩 영화를 보러 가는 것입니다. 외국영화만을 골라서 간답니다. 영어도 잘 모를 텐데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보이지 않아도 영화관에 가면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이 참 기이했습니다. ‘불편하지 않다. 수술해서 눈을 떠야 할 정도로 불편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것이 자위하는 말인지 알았는데 정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저에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당 3동에 살다가 건너편 빌라로 이사를 갔는데 변기에 물이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보고 갈아달라고 하니까 망가졌으니까 우리보고 갈아서 쓰던지 말던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치지 않고 바게스에 물을 담아서 볼일을 본 다음에 물을 떠서 부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습니다. 그해 여름에 집회를 다니는 시작이었는데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강사로 갔습니다. 한달동안 설교를 준비해서 갔는데 침실이 하나있고, 응접실이 있고, 욕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열심히 집회를 하고 집회를 한지 3일째가 되었는데 볼일을 보다가 내 자신을 보니까 바게스에 물을 담아서 거기에 물을 붓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3일 동안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집에서 그렇게 볼일을 보고 물을 부었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하면서 거기의 밸브를 누르니까 잘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3일 동안을 하면서도 그게 처음이었으면 불편했을 텐데 항상 그런식으로 사니까 전혀 그것이 불편한 것을 못 느낀 것입니다.
지난 번에 영국에 다녀왔는데 화장실이나 공공 장소에 가면 추우니까 미지근한 물에 씻고 싶어서 비누칠을 하고서 물을 틀면 뜨거운 물이 나오는데 손이 델 정도로 뜨겁게 나옵니다. 반대쪽은 찬물이 나와서 손이 시립니다. ‘이상하다 왜 우리나라처럼 하나를 틀어서 돌려서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들은 그게 무엇이 불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왔으니까 그것이 불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인간은 망가진 것에 대한 탁월한 적응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적응력이 없으면 무슨 장애가 생기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다 죽어버릴 것입니다. 어떻게 살겠습니까? 제가 아는 한 사람이 전기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려버렸습니다. 아주 성실했던 사람이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성실하고 좋은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언제 바뀌었겠습니까? 장애에 익숙해지고 장애를 기정 사실로 받아드리기 시작한 때부터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뭔가 비정상적이고 망가진 것이 그런 식으로 인간을 압박해서 망가진 현실에 대해서 적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끝까지 적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큰 희망을 품든지 아주 절망해 버리든지 둘중의 하나입니다.
이 라오디게오 교회가 매우 악하고 특별한 교회였는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는 교회입니다. 일반적으로 돈이 많고 사람이 많이 모이고 교회에 큰 걱정이 없으면 그저 그렇게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헐벗고 신앙적으로 가난하고 신앙 인격에 있어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모습이 되었는데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망가진 것에 적응하는 탁월한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부흥의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흥이라고 하는 것이 구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현실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저 같은 사람은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합니다.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말은 여러 가지 합니다. 그리고 복잡하게 많이 하는데 잘라서 얘기하자면 부흥에 대한 기대와 갈망은 구약에 나타난 것이고 구약에 나타난 부흥에 대한 기대와 갈망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서 간절히 기대했던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쾅하고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성령님이 오순절에 오셔서 계속해서 계시는 영속적인 실재 자체를 가리켜서 부흥이라고 보는 것이지, 어떤 교회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다든지 한 지역에 어떤 큰 부흥이 일어났다는 종류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부흥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께 순종하고 열심히 순종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부흥을 구해야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없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공식만을 가지고는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신약 시대에 계속 계시는 것 자체가 부흥이다라고 말을 한다면 우리는 두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충분히 인정은 합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성령님께서 오셔서 계속해서 은혜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성령께서 교회와 각 개인 믿는 사람들 가운데 오셔서 친히 성령께서 우리들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의 시대에 살던 성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특별한 영적인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완성되고 나서 구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막연하게 바라보던 사람들보다는 아주 확연하게 파악을 하고,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인가 대해서 아주 분명한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구약에 성도들에 비하면 우리는 비교되 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충분히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약은 모든 시대가 부흥이다, 그리고 부흥은 사건이라기 보다는 영속적인 한 실재이다 라고 말할 때 그런 간단한 공식을 가지고 풀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같은 성령아래 살고 있는데 왜 어떤 교회에는 성령의 능력과 진리의 권능이 매우 특별하게 드러나서 사람들이 그 교회에 나아올 때에 그 교회에서는 특별히 은혜를 받고, 특별히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교회를 뒤덮고 계시는 것 같은 권세를 느끼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심하고, 새사람이 되고, 귀신들렸던 사람들이 자유함을 얻는 놀라운 영적인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서 탁월한 생명을 누리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이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예수님도 아예 밖에 나가계시고 문을 두드리시면서 들어오셔야 할 상황이 되었고 완전히 죽은자와 다름이 없는 교회의 모습, 심지어는 아주 눈에 뚜렷한 정도로 완연한 악령의 역사가 나타나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짓밟아서 이름은 교회이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신 교회라고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영적으로 죽어있는 판이한 차리를 같은 영속적인 실재로서의 부흥 아래 살고 있는 교회에서 어떻게 그렇게 차이가 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차이뿐만 아니라 그렇게 죽어있는 것과 같은 교회에 부흥이 와서 그 교회가 일시에 갑자기 교회가 살아나고, 지난주에 말씀 드린 것과 같이 교회에서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예배속에 권세가 느껴지고 거룩한 영이 임하셔서 완악하던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에 뜨거운 열심을 내도록 만들어 주는 각별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건이 아니고 보편적인 일이면 어디서나 그런 일이 늘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부흥을 반대하는 일각에서는 부흥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영속적인 실재라고 하는 사실은 구약에서는 부흥을 구하는 얘기가 많이 나오지만 신약 시대에서는 부흥을 구하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지 않느냐? 그러므로 이미 다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도 일리는 있지만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흥이 일어나야 된다라고 외치던 선지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진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신앙이 최대에 달했을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은 되에 빠져있을 때에 회개하도록 선포했고, 침체되었을 때에 다시 살아나야 하는 소생을 하나님께 선지자들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는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진정한 신약 시대가 시작이 되는데 성령 강림이 일어난 자체가 어마어마한 부흥의 사건이었고, 부흥의 규모는 거의 당시로서는 전 세계적이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부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부흥 속에서 살아가는데 누가 우리가 부흥을 열렬히 구해야 한다고 하겠습니까? 다른 것을 말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흥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편만하게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구태여 부흥을 구하라는 식으로 얘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시기 에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만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약에는 부흥 사건이 없어야 되는데 신약에도 부흥 사건이 실제로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과학화되고 현대와 되면서 사고방식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미신이나 신들에 대한 신뢰심이 많이 깨어진 것입니다. 영화를 봐도 괴기 영화가 큰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 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고를 벗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는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무당들에 의해서 농락당하던 시대였고 실제로 귀신들의 역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는 실직히 부흥이 없이는 복음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은 한 집안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살지만 옛날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집에서 자르는 것은 씨족사회에서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한 집안이 모두 복음화가 되면 해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오랫동안 조상신들을 버리고 생명을 걸고 수백년동안 선조들이 지켜온 신주단지를 불태우고 어떻게 기독교에 귀의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시골의 전도 현장에 가서도 그런 것을 느낍니다. 깊은 시골에 들어가면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철저하게 매여 있어서 열리지를 않습니다.
15년 전에 경남 함양에 내려가서 전도는 하는데 “예수 믿고 천국에 가십시오” “안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지옥간다고 대답했더니 “지옥이 어떤댄지 설명을 해 주십시요.” 그래서 지옥과 천국을 다 설명하니까 “어떻게 해야지 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된다고 하니까 그러면 예수 안믿고 죽은 시어머니는 어디로 갔냐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얘기를 했더니 그러면 자신도 지옥에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옥불에서 자기 시어머니가 고통을 받으면 같이 고통을 받으면서 지내야지 어떻게 자기혼자 천국에 갈 수 있겠느냐고 심각하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저가 깊이 깨달은 것이 우리가 정말 이 우리 민족을 제대로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백성들의 뿌리를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인간의 논리로는 해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그의 마음이 바뀌어지는 일이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닷가의 우상으로 깊이 젖어 있는 땅에 부흥이 일어난 일 말고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의 역사는 부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복음의 문이 닫혀진 캄캄한 철의 장감 같은데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이 놀라운 일들이 결국은 부흥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의 역사 자체가 부흥의 역사입니다. 우리 나라가 이만큼 복음이 전해진 것은 강력한 부흥의 역사가 1907년에 있었고, 그 후에 크고 작은 부흥들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이 고루하고 우상숭배, 조상신, 유교 사상에 매여있는 나라에서 이만큼이나 예수믿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을 신약시대에 살고 있다라는 간단한 공식을 가지고는 해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왜 사람들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현실속에 매일 골몰하고 살아가므로 현실속에 골몰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신앙이 좋다, 나쁘다’ 하는 것들, ‘교회가 건강하다, 병들었다’ 하는 것들을 잴수 있는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하는 얘기가 ‘유럽에서는 성령님이 떠나셨고, 미국에서는 보따리는 싸셨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계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는 영적으로 선진국이다.’ 영국이나 구라파에서 성령님이 보따리를 싸셨다는 얘기는 이해가 가는 면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많이 팔립니다. 큰 교회를 지어놓고 유지를 못하니까 반을 막아서 다른 방에 모슬렘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결국은 팔립니다. 슈퍼마켓이 들어오고 술집이 들어오는 현실입니다. 교회 자체를 어마어마하게 크게 지어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크게 지었다는 것은 그것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인데 일시에 사람들이 빠져나가니까 텅비게 되는 것입니다.
호주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인이 200명인데 들어가보면 1000명 정도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 체육관, 넓은 캠프장, 잘 정돈된 교육시설등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애물단지입니다. 떼어서 팔 수도 없고, 심지어 주일날 우리로 말하자면 동창회를 하는 사람들에게 빌려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너무 적어서 헌금으로 교회가 유지가 안되는 것입니다. 50년때까지만 해도 거기에 젊은이들이 꽉꽉 찼다는 것입니다. 숲속에 들어가보면 캠프 시설이 초대형으로 얼마나 잘 되어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다 문을 닫았습니다. 거기에 올 수 있는 젊은이들은 다 세상으로 갔고, 노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거기까지 오기에는 기력이 너무 딸립니다. 그러므로 다 폐기처분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유럽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성령이 보따리를 싸신다.’ 사실 우리들이 미국을 잘은 모르지만 저가 보기에는 미국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들으면 펄쩍 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들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은혜가 살아있고, 한국 목회자들이 가서 배우려고 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성령이 충만히 계시다’ 그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성령이 계시는데 왜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너절하겠습니까?
또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문 닫은 유럽 교회와 비교를 하고, 하나님도 싫어서 떠나는 미국 교회와 비교를 하면서 ‘이만하면 우리는 잘 사는거지!’ 하고 자위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경쟁상대는 누구입니까? 문닫은 유럽교회입니까? 아니면 파장하는 미국교회입니까? 여러분의 개인적인 신앙에서 경쟁상대는 누구입니까? 라오디게아 교인입니까? 거기에서 이기면 어느 정도입니까? 어느 교회가 진짜 교회입니까? 여러분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능력을 받고 주의 말씀을 배반하지 않고 정말 충성되게 살았던 교회, 연단을 많이 받았는데도 열린문을 가졌던 교회입니다. 교회가 죄인들이 들어오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를 느끼면서 깊이 회개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교회가 정상적인 교회입니까? 아니면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혼자 다닐 때는 무엇을 아는 것 같았는데, 교회에서 배우니까 뭐가 뭔지 헷갈리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입니까? 빌라델비아의 교회가 매우 특별한 교회이고 라오디게아의 교회가 표준입니까? 다른 교회들은 그 표준보다 조금씩 낫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매우 뛰어난 교회였습니까? 시대를 본다고 한다면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고 복음이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이방의 세계를 정복하면서 교회를 세워나가는 찬란한 복음 승리의 역사가 있는 교회의 시대는 매우 특별한 비정상적인 시대이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전도지를 들고 거리를 누벼도 하루 내내 한 사람의 결신자를 못내는 이런 시대가 정상적인 교회의 시대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기준을 어디에 둔 것입니까? 라오디게아 교인같은 사람은 후자에 투표를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은 눈의 비늘을 벗는 것입니다. 복음의 참된 비밀을 알고 전통 속에서 잘못 가르쳐져 온 진리에 대한 인식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삶에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참된 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게끔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데 대부분이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누가 예수를 믿는데” “응, 그래” 우리는 그런식으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많이 때문입니다. “그가 살아있는 신자야?” 그 말은 참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교회생활, 참된 의미의 복음 선포를 확인하는 시대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시급한 일은 눈의 비늘을 벗는 것입니다. 예전의 저처럼 아직까지도 멀쩡하게 지어놓은 새집에서 바게스에 물을 담아서 화장실 변기에 물을 내리는 것과 같은 사고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망가졌는데도 전혀 불편한지를 모르고, 1년내내 예배를 통해서 한번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데 그렇다고 한번도 억울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뭔지를 모르고 풍성한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느 의과 대학 교수와 얘기를 나누는데 “목사님 저는 교회만 가면 왜 그렇게 졸음이 쏟아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친구를 전도했는데 친구를 보기 민망할 정도로 졸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왜그러냐고 했더니 “되게 고민이 됩니다.” “그런 고민이 얼마나 되셨습니까?” “몇 년이 됬습니다.” “왜 그렇게 교회만 가면 잠이 쏟아집니까?” “모르겠습니다.” 3년을 고민하고도 아직까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파악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르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해결을 해야지 심각하다고 하면서 모른다고 하는 것은 정말 불행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여러분들이 알아야 될 사실은 눈의 비늘이 벗어지기 전에는 신앙이 성립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성경에 의하면 영광의 광채의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느 순간에 그의 영혼에 영광의 참된 광채의 빛을 받고 눈이 번쩍 뜨인 사람입니다.
I want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eye see.
예전에는 눈이 먼 사람이었습니다. 영광의 빛이 비춘 것입니다. 눈이 띄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가장 비참한 존재일 뿐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2000년전의 성인이었던 그 분이 바로 나를 죄에서 구원하셨던 장본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시야, 새로운 삶에 대한 견해들이 생겨 나오고 새로운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was blind but now eyes ‘옛날에는 눈 멀었네 그러나 이제는 보네’ 그것이 예수 안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가 아니라 예수를 이미 믿은 사람들도 이 세상의 죄, 계속되는 실패 그리고 거기에 저항할 하려고 몸부림치지만 자신의 몸부림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잘못됐고 망가진 것에 대해서 항거해야할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아주 쉽게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받은 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요즘에 가장 궁금한 것이 ‘인격적으로 만났느냐고 저 설교자가 자꾸 묻는데 왜 나는 아멘이라고 말할 수 없을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데 아멘이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의미, 정말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와 같이 쏟아져서 감격속에서 살아간다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야 되는 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필요없는 것은 한번 머리속에 들어오면 끝장을 볼때까지는 떠나지를 않습니다. ‘야, 저것을 한번 먹어봐야 되겠다!’ 라고 생각을 하면 머리속에 입력이 되어서 꼭 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각 세대마다 각기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얘기처럼 ‘정말 내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을까! 안 만났다고 말할 수 없는데 왜 나는 이렇게 자신이 없을까! 나는 하나님을 믿은 것을 후회는 하지 않는데 정말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데 왜 나는 대답할 수 없을까!’ 이런 질문이 영생에 이르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루도 못갑니다. ‘왜 그럴까!, 왜 그럴까!’ 하다가 또 다른 일에 몰두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음에 주일날 와서 꼭같은 것을 물어보면 ‘맞아 그런 것이 있었지! 왜 그럴까!’ 그리고 끝나고 나서 또 잊어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민은 항상 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을 하면 대답은 “모르겠는데요”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각성으로 가려면 문답식이 좋은데 머리가 스톱된 그리스도인으로 영적인 변화도 스톱이 되어서 대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진전이 없습니다. 그에게 진전이 있다면 익숙해 진 교회 생활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역사는 눈을 뜨는 각성과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을 뜨는 각성과 함께 이제껏 익숙해져 왔던 교회의 수준과 개인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강력한 반발을 갖는 것입니다. ‘이게 아니다 이 이상의 무엇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은 영적인 각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각성이 무엇이냐?’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영적각성이란 무엇인가?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스10:1)
오늘 영적인 각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부흥을 얘기하면서 이런 영적인 각성에 대해서 말을 하느냐 하면 부흥의 가장 커다란 특징이,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큰 능력, 큰 권세, 그리고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 모이는 것 물론 그런 것들이 부흥이 일어날 때 눈에 보이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모두 그것이 부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흥의 특징을 사람들의 과격한 체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부흥이 일어날 경우에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고 평소에는 보기 힘든 급격한 체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기한 이적을 체험하기도 하고 놀라운 평상시에는 체험하지 못한 신비한 경험을 부흥 중에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부흥으로부터 비롯된 체험이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 체험이냐 하는 것을 그것 자체만을 가지고 가려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들이 커다란 정신적인 쇼크를 받거나 환상을 보거나 하는 것이 모두다 영적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적이지 않고 그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에 미치다시피 하니까 정신이상 증세가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광반응성 발작증이라고 해서 아이들이 게임을 하다가 게임을 하지 않는데도 발작증세를 보입니다. 그런 것은 영적인 것과 거의 상관이 없이 깊은 집중, 몰두 이런 것들이 정신병적인 증세를 우리들에게 가져오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축구를 하다가 전쟁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김일성이 죽었을 때에 외신보도에 의하면 온 나라가 히스테리에 빠졌다 라고 합니다. 그런 것들도 하나의 정신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뭔가 우리들이 아주 깊은 슬픔에 잠기거나, 아주 과격한 흥분된 상태에서는 평소에 나타나지 않는 정신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모두 영적인 것은 아니고 영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것들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부흥에 있어서 그러한 현상들만을 가지고 부흥을 얘기할 수 없다면 어떤 것을 부흥을 얘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적인 것만을 보면은 참된 부흥을 알 수 없고, 참된 부흥의 결정적인 특징은 심오한 각성입니다. 영적인 각성과 부흥은 같은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18세기의 일어났던 미국의 부흥을 가리켜서 영적각성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논란이 많았지만 그런 용어가 정립이 되었습니다. ‘대각성’ 어떤 사람들은 ‘대각성운동’이라고 말을 하는데, 큰 각성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부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분하면 부흥은 부흥이 일어나는 전체적인 외적인 증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영적각성은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흥이 일어날 때에 사람들의 각성이 일어난다’ 각성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완전히 자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깨어있는 것도 아니고 몽롱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각성시키는 것, 깨어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국에 보면 각성제라고 하는데 몽롱한 상태에 있지 못하게 합니다. 핏줄을 타고 들어가서 심장을 자극해서 몽롱한 상태로 있지 못하고 쌩쌩하게 깨어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상태로서는 몽롱한 상태, 의식이 희미한 상태로 떨어져야 하는데 탁탁 탁탁 심장을 자극해서 깨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리켜서 각성이라고 합니다. 부흥에 있어서 각성이 가장 중요한 특징인데 그것은 부흥의 때가 되면 몽롱한 상태에 있어서 희미하던 것들이 아주 또렷하게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 교회의 모습, 세상의 모습들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인식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길게 읽은 장면은 바벨론 포로 시대이후에 기적적인 은혜로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서 발견한바와 마찬가지로 70년이 찼을 때에 포로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특별한 호의가 베풀어졌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비록 아직까지 주권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이제 자치정부를 만들고 예루살렘에서 다시 정착할 수 있도록 특별배려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도 지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이민족에 대한 당시 바사 나라의 종교 융화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돌아오게 되었는데, 돌아왔을 때에 감격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가서 70년을 살아왔으니까 뭘 해서라도 먹으면서 정착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감동을 받아서 자기들을 시기하는 이방민족들이 에워싸고 있는 거기에 가서,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성을 쌓고 성전을 짓는 일을 하기 위해서 포로의 상태로부터 귀환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좇아갔던 사람들은 신앙의 특별한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평안한 삶의 기반을 다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토를 향해 올라간 것입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조금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 날 누군가가 와서 에스라에게 보고는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악을 행한다.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안 믿는 사람들과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는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라가 깜짝 놀란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대성 통곡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보편화된 사회현상인데 에스라가 얼마나 세상 사람과 담을 쌓고 살아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경건하기도 해야하지만 슬기롭기도 해서 사회 속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잘 알고 있었어야 했는데, 학사요 경건한 제사장인 에스라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세상물정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경건한 것은 문제가 없는데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혈통이 혼잡하게 된 일이 보편화되고 난 다음에 어느 날 남의 얘기를 듣고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에스라의 강력한 현실 인식도 영적각성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각성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각성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가슴아파하며 뒹구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 때문에 지금 이렇게 고통하고 있는 모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할 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내용은 ‘우리가 왜 망했는가! 죄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그 수치와 멸시, 천대 속에서 70년의 세월을 보내고 우리가 이렇게 본토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었는데,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가 또다시 이렇게 범죄를 하다니,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감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는 지도자로서 얼굴을 들고 하나님 앞에 아뢸 수 있는가!’ 그러면서 깊은 비탄에 빠져서 몸부림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그렇게 애통하며 괴로워하는데 그 자리가 성전 문 앞에 엎드려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기에서 깊이 탄식하면서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을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는데 에스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너무나 기가 막혀서 엎드려서,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고 공경해야 할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면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성전 앞에서 행하므로 모든 사람들이 다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라가 지금 정신없이 엎드려서 통곡한다더라’ 하는 소문이 들리니까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셔서, 처음에는 왜 그렇게 에스라가 통곡하면서 우는지 의미도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그 우는 모습 자체가 메시지가 된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왜 에스라 선생이 저렇게 운데?”, “조용히 해 우리가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 자식들을 낳고 율법의 금한 일들을 했기 때문에 에스라 선생이 저렇게 처참하게 울고 계시다네” 이제 그가 왜 그렇게 우는지 울음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스라가 그렇게 우는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뭐! 요즘에 어떻게 율법대로 다 살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인데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지은 죄도 아니고 남이 지은 죄를 가지고 저렇게 애통하고 몸부림치는 모습 속에서 죄에 대해서 고통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를 깨닫기 시작하면서 모두 통곡하며 울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에스라의 통곡이 메시지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각성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깨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의 원인이 뭐냐 라고 물을 때 우리는 ‘영적인 각성 때문이다’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영적인 각성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저절로 일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론 아주 예외적이고 특별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농부가 밭을 갈다가 큰 나무뿌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뽑아 내야지만 좋은 밭이 되는데 아무리 삽으로 파도 되지 않으니까 도끼를 가지고 와서 번쩍 들어서 내리치려고 하는데 ‘열매 맺지 않은 나무마다 찍히어 불에 던지우리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끼를 꽝하고 내리친 다음에 설교자도 없고 상담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밭 한가운데 주저앉아서 통곡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 마을에 부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많은 닭을 팔아서 많은 돈을 싸들고 마차를 타고 기분 좋게 돌아오면서 얼마를 벌었나를 마차 위에서 ‘하나, 둘...’ 세어 가는데 갑자기 ‘이 돈으로 한번밖에 없는 영혼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였다고 하는 확신이 죄의식으로 밀려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돈 다발을 세지 못하고 놓치고 통곡하니까 바람이 불어서 온 길거리로 날아가 버리면서 그 마을에 부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종류가 다르긴 하지만 죠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이야기에 보면 아비가일 허친슨이 나옵니다. 불치의 병에 걸려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부인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각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교회의 역사를 보면 지진 같은 것이 일어날 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다라고 하는 확신을 불러일으켜서 그들로 하여금 교회로 몰려와서 자신의 죄를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특별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도 항상 이미 어떤 말씀은 없었지만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사건을 통해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 말씀이 사람들 속에 역사한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일들은 복음이 전혀 전해지지 않는 곳에서는 일어날 가망성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으니까 영원, 죄인, 예수님의 죽으심, 하나님의 심판 등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지,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이 없는 곳에서는 그런 각성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본다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영혼에 대한 각성이라는 것은 없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각성 가운데 또 하나는 니느웨성의 대 각성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결국은 갑니다. 가서 눈물로 예언한 것도 아니고 회개하라고 하면서 40일 후에는 이 성이 무너진다 라고 하면서, 그의 마음에 ‘제발 이 말을 듣고 회개하지 말아라’ 하면서 돌아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왕부터 시작해서 대소 신료들까지 심지어 짐승들까지 모두 금식하면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미스테리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요나가 선포하러 갔을 그때가 그 쪽 지방에서 일식을 볼 수 있을 때라고 합니다. 요나가 외치면서 지나가는데, 히브리 사람 하나가 와서 그렇게 설치고 다닌다고 할 때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한국에서 온 사람이 뉴욕에서 도포자락을 휘날리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전 보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해가 떠 있다가 해가 먹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엄청난 두려움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구나!’ 그들이 섬기는 대표적인 우상이 태양이었습니다. 먹혀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끝이다라는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의 각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각성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근본적으로 안 믿는 사람을 향해서도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주된 초점은 믿는 사람을 향해서 있는 것입니다. 부흥이라는 자체가 re-vival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은 옛날에 한번 살았던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피노키오 나무 인형을 만들어서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소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생이란 살았는데 지금은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사람들을 치료해서 다시 살려내는 것, 어떤 방법으로 다시 기력을 회복하게 하는 것을 가리켜서 소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영적인 각성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각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영혼의 각성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선포가 없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없이는 부흥이 오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흥처럼 느껴져도 사람들 마음속에 이전에 몰랐던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동반하지 않는 부흥은 엄밀한 의미에서 부흥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의 다양한 체험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중심축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마술사인 데이비드 카퍼필드는 TV 통해서 여러 번 봤는데 저가 볼 때 그 사람은 상당히 영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트릭이 아닙니다. 사람을 띄우고, 점보 제트기를 사라지게도 합니다. 저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영적인 세계에서는 우리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난다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은 어떤 영적인 일들이 일어나면 그것이 모두 성령의 역사일 것이라고 하는 편집증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모든 것은 신령한 역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악마도 광명의 천사로 위장을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그런 영적인 것에 대해서 매우 둔감하고 그리고 그 영적인 것들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지만, 일단 일어나면 아주 쉽게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을 마귀도 알기 때문에 합리적인 사람들일수록 그러한 일들을 경험하게 해서 자신이 이제껏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포기하고 버리고, 아주 쉽게 극단으로 가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 마귀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들이 어떤 부흥이 일어났을 때에 그것을 외관적으로 나타나는 특성,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적이 되느냐,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신비한 체험을 하느냐, 심지어 사람들이 한 순간에 얼마나 놀라운 광적인 분위기가 되느냐 하는 것에 의해서 부흥을 판단하려 하면 반드시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부흥을 판단할 때는 그곳에 진정한 각성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흥의 때에 일어나는 각성은 가장 대표적인 각성이 죄에 대한 아주 심오한 각성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깊은 인식입니다. 그것이 참된 부흥인지 아닌 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부흥이 있는 곳에는 체험도 있고, 영적인 특별한 현상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결정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죄에 대한 심오한 각성,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깊은 참회, 이런 것들이 부흥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에스라가 성전 문 앞에서 통곡하고 우는 광경을 통해서 뭔가 메시지를 받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그렇게 크게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왜 담대하게 죄를 짓고 불순종하면서도 그렇게 뻔뻔하게 살아가느냐 하면 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죄에 대한 심각성에 대해서 예민함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도 있다. 괜찮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항상 우리의 머리를 정복하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일단 머리에서 ‘그럴 수도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면 거기에서는 죄의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죄를 짓고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각성이 가져다주는 것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부흥의 때마다 항상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이 안전한 줄 알았는데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 자신이 신앙에 있어서 거의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까 아무 것도 없는 껍데기뿐이 라는 것, 심지어 자기는 이제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한순간에 깨닫고 나니까 정말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 이제껏 자신이 모든 것이 좋고 괜찮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가정, 교회의 모습들의 참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참된 신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아갔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가난함에 대해서 눈을 뜨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기도하면 응답이 없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실패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섬겨도 사람들이 예수를 잘 믿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럼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누가 그렇게 예수를 호락호락 믿겠어!’
그런데 그 얘기는 17세기 때도 다 했던 얘기입니다. 어느 시대든 그 사람들은 자기 시대가 가장 개명한 시대이고 세상은 지혜롭고 복음은 어리석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그 복음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정도의 변명은 어느 시대든지 다 가지고 있고, 심지어 사도 바울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각성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그 모습에 어울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죄와 공동체의 죄를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지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과 같이 정말 그런지는 모르지만 성령께서 보따리 싸시고 떠난 유럽의 교회와 비교하고, 막 보따리 싸시려는 미국의 교회와 비교한다는 식의 어불성설 같은 것을 가지고 위로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만약에 생각을 하면 우리는 전혀 각성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훨씬 낫지 아무개 좀 봐라, 내가 훨씬 낫지’ 그렇게 하면 각성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성하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데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면 무조건 죄에 대해서 지적하는 말씀이라기 보다는 이런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각성의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못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든지 조금씩은 느낍니다. 하나님을 전혀 안 사랑한 사람 있습니까? 하나님을 조금씩 다 사랑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지 않습니까?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뭔가, 정말 한 사람의 영혼이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고 정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든지 본다 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통해서 보든지, 아니면 성경을 통해서 보든지, 그 보는 것들이 성경의 진리와 이어집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깨닫기가 힘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늘 경험하고 있는 것은 깨닫는 것은 굉장히 쉽습니다.
전기 감전사고를 보셨습니까? 감전 당해봐야 집에서 전구를 갈다가 느끼는 정도입니다. 제가 아는 친구가 있는 전파타 감시 사무소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기술자입니다. 그런데 7,700 볼트 전기를 먹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는데 구두 밑창이 뚫어집니다. 아스가 된 것입니다. 몸에 들어온 전기가 땅하고 연결이 됐기 때문에 아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전기가 뚫고 나가면서 구두창을 뚫어버린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그렇게 전기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스위치를 건들면 큰일나!” 그러면 두려움이 확 밀려옵니다. ‘저것을 건들면 죽는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무서워하지를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만을 이해하지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컴퓨터를 잘 작동할 지도 모르지만 컴퓨터의 원리가 무엇인지 몇 사람으로부터 설명을 들었지만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이해가 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사용하시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만히 파고 들어가 보면 걱정이 많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만들었을까!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어떻게 흙으로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흙이 어떻게 이렇게 하얗게 될까!’ 경험하지 못한 것은 우리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농사를 많이 지은 사람들이 농사 얘기를 하는 것을 들으면 짓지 않는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고, 이해한다고 해도 피상적입니다.
영적인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깊은 사랑,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리고 눈물 한 방울 떨어지면 자기도 펑펑우는 것입니다. ‘그 사랑! 나도 알아!’ “주님에게 야단 맞으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지 아세요?” 실컷 두들겨 맞았던 사람은 고개를 끄덕끄덕 합니다. ‘내 인생이 그 교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외비 많이 내지 말고 교회에서 바르게 가르쳐줄 때 바로 잘 믿으세요. 그 과외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돈을 많이 내고 과외를 해서 인생이 고달프게 살아오면서 실패 속에서 겨우 조그만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끄덕 합니다.
그러므로 체험해 보지 못한 것을 얘기하는데 그것을 듣고 각성한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저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이렇게 목사가 오금을 못 펼 정도로 고마워하는 것이 신앙생활인줄 알다가 그런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얘기를 하니까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결국은 상상 속에서밖에 생각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지금 에스라가 대성 통곡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개판을 치면서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켰고 때문에 이런 슬픈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이방의 여인과 시집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고 이렇게 혈통을 섞으면서 율법에 금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 내 백성의 죄, 이 백성의 불충함과 교만함을 어찌하여야 되겠습니까?” 아무도 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에스라의 심정 속으로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큰 각성을 주셔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위험한 영혼의 상태에서 통곡하면서 울어보고 그들의 죄에 대해서 자신의 마음이 물같이 녹는 중보의 영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지금 이 얘기를 하면 즉시 무슨 얘기인지 압니다. ‘아 그 에스라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정말 찢어지는 것 같았을 거야!’ 그러나 찢어져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 왜 울지! 그 사람들이 울어야지 왜 에스라가 울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험해 보기 전에는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 순환 논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경험을 못해 봤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못한다. 경험을 해야지 그런 기도를 한다. 그런 경험은 그런 기도를 통해서 온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얘기냐 이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시다. 태어나서 가장 억울해 본적이 있습니까? 언제입니까? 너무너무 억울한 적이 언제였습니까? 학교 다닐 때 억울한 적은 우리 학교는 축구하고 아이스하키를 잘 했는데 너무 잘하다가 결승전에 수업을 중지하고 전체 응원을 가면 꼭 집니다. 그러면 축구 선수들은 지고 나면 그라운드 바닥에 앉아서 펑펑 웁니다. 애교심이 뛰어난 애들은 따라 웁니다.
또한 한일합방 때에 나라가 합방이 되니까 나라 곳곳에서 할복 자살해서 죽는 사람, 혈서를 쓰는 사람, 대성 통곡하고 절로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의 무한대를 확장시켜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느꼈던 뼈저리게 가슴아팠던 일들을 생각을 해 보십시오. 뭐든지 일생을 살면서 가장 가슴아팠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무한대로 한없이 확장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아픔을 이 에스라가 지금 경험하면서 통곡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각성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음을 통해서 일어나는데 이 깨달음은 교회에 다니면서 봉사도 하고 십일조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줄 알았는데 어느 날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은 얼마나 열렬해지는가!’ 하는 것들을 깊이 경험하고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될 때 어느 날 그것이 자신에게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겠구나! 사랑에 빠지면 그렇겠구나!’ 그렇게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가오는 장면에 자기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자신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개념이 성경에서 얘기했던 사랑의 개념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눈을 뜨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얘기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었다면 자기가 사랑이다라고 생각했던 사랑이라는 것은 주간지에서나 수시로 나오는 그런 통속적인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기에는 합당한 분이 아니셨기 때문에 ‘내가 이전에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던 고백들이 사실은 그런 완전한 고백들에 비하면 없었던 것과 다름이 없는 고백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가 이것이 진정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런 사랑을 알고 싶어서 그런 사랑에 대해서 몸부림치며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자신은 그런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그러나 지금의 내 마음속에 있는 이런 사랑은 아니다 라는 사실이 확연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고 싶고 그런 사랑을 바치고 싶다라고 하는 갈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이 영혼의 각성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깊이 부은바 되면서 경험하게 될 때에 어떤 의미에서 그의 마음속에서 큰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의 표현은 뒤로 표현하는 법이 없습니다. 남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표현은 항상 전진을 하지 후퇴하는 법이 없습니다. 후퇴해서는 만족이 반드시 안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깊은 사랑에 빠져본 사람들은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의 상태에 도달될 때까지는 영혼이 곤고하고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항상 최선의 것이 아니 차선의 것, 차차선의 것, 그 이하의 것들로 만족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진짜 오염되지 않은 맑은 생수를 먹었던 사람들은 수돗물이나 아무렇게나 뽑아 올린 지하수 같은 것을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먹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원 같은데 가서 맑은 공기를 실컷 마신 다음에 서울에 들어올 때 가슴이 막히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 체험들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들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그런 인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만 예를 들었지만 하나님의 많은 성품들에 대해서 이러한 각성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 그래서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깊이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습니다. 요즘에는 농담 속에서도 하나님을 들먹거리는데 그게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의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긍휼, 자비, 성결 모든 면에 있어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 영적인 각성이라고 하는 것은 도달해 보지 못한 영혼의 상태에 대한 눈뜸입니다. 정말 기도가 무엇인지를 깊이 경험해 본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 유행하는 대부분의 기도의 모습들이 사실 진정한 기도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험해 보지 못한 그것을 경험이나 통해서 겨우 알 수 있는데 어떻게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곧 경험하게 될 것처럼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면서, 거룩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 거기에 합당한 신령한 삶을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하는 일에 모든 일에 있어서 성령의 경험을 빼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성령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부흥에 있어서 성령 하나님만이 계속 부각되는 모습 자체도 굉장히 인위적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부흥의 때에 우리 인간들에게 내려오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인식은 하고 있지만 체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신단 말입니다. 체험하지 못했지만 경험하게 만들어 주시는 일을 성령님이 하시지만 그러나 성령님은 그러한 작용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일변도의 찬양이 유행하고 있는 그 자체도 결코 바람직한 풍조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고 마땅히 도달하여야 할 신앙의 표준을 보여주는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런 깊고 심오한 진리가 없어도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섬기고 일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방언도 하게 하시고 여러 가지 은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경험을 하고 난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 인식이 있어서 벽돌을 쌓아 올려 가듯이 이 기독교 신앙의 지식을 쌓아가지 않을 때, 말씀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지식이 없으니까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이런 은혜를 주실 때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굉장히 희미하니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이 슬퍼하시는 일들을 행하고 성령의 은혜를 간직할 수 있는 성숙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각성은 아까 말씀 드린대로 죄로 말미암아 무감각해졌던, 그리고 흐려졌던 인식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깨어나는 것이 영적인 각성이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영적인 각성을 통해서 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삶, 보다 완전한 하나님에 관한 진실한 지식을 갈망하게 만들고, 더 신령한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게 만드는 데 경험하지 못했는데도 그것을 느끼게 만들어 주시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정리를 하면 ‘그러면 우리에게도 각성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각성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 정확한 지식이 있어도 깨닫는 것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참 잘못했다! 진짜 그렇게 하지 말아야 되는데!’ 기껏 듣고 나서 ‘다음부터는 조심해야지!’ 반성문 쓰는 정도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똑같은 말씀을 깨닫는데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죄악 덩어리야! 하나님 내가 이런 더러운 인간의 상태로 거룩한 하나님을 어떻게 뵈올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막 뒹굴면서 회개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정확한 지식도 문제가 되었지만 전자에 있어서는 성령이 전혀 역사하시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비교적 정도가 떨어졌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된 상태를 아주 예민하고 깊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애통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냐?’ 각성은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감당해야할 몫이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여러분 자신의 신앙의 상태, 교회의 상태, 가정의 영혼의 상태들이 지금이 최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을 하고 그것보다 훨씬 더 완전하고 진정한 모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일들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런 것들이 각성에까지 사용될 수 있도록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도록 그렇게 우리들이 쉼 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 아니라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말씀과 부흥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스10:10-12)
만약에 영적인 각성을 우리들이 지난 시간에 말한 것처럼 그렇게 보지 못하던 것들을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갑자기 보게 되는 것이라고 우리들이 부르게 된다면, 그러한 각성은 참된 의미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기도해야 하며, 또 어떤 것들을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되는지를 우리에게 진정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들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신앙을 매우 잘못된 교회들과 잘못된 그리스도인과 비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다 죽어가는 교회, 그런 교회와 우리들이 바라는 교회와 비교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도 아주 형편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형편 없다고 해서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진리에서 멀리 떨어진, 요즘에 유행하는 신앙생활하고 우리와 비교를 해서 뭔가 위로를 얻는다든지 혹은 거기에서 도움을 얻는다든지 하는 식의 생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방식의 신앙생활도 알고 보면 우리가 진정으로 비교해야할 초점에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요즘에 보면 책들이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는 책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도전이냐 보다는 감동만 되면 모두다 도전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가다 뭔가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스토리로 엮어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는 신앙이 무엇이고 하나님을 아는 복음이 무엇인 것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들이 못하는 어떤 특별한 일을 한다고 생각을 하고 우리 모두 그것을 본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얘기가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모든 점에서 모두다 훌륭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못 하는 것을 반대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정보를 보면서 도전을 받는 것은 좋습니다. 그것 자체를 정죄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정한 표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속에 어떤 혼란을 불러일으키느냐 하면 ‘참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표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본 받으면서 계속해서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좋은 신앙이 되겠구나! 그리고 그런 것들이 부흥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뭔가 세상적인 기준에서 성공한 교회들이 수많은 교회들의 모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그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배워야 할 것들이 그런 식으로 정말 습득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세계 안에서도 성공주의 적인 사고 방식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그가 하나님을 아는 깊은 지식 속에 있고, 얼마나 주님을 친밀히 경험하고 있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꿋꿋이 살아가고 얼마나 거룩한 주님의 모습을 반영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라 누가 성공했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신앙의 세계 안에서도 유행하는 책들이나 사고들은 이 세상에서 ‘당신도 1억을 벌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정리해고 되서 오히려 성공했다’는 성공주의 적인 종류의 간증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런 것들을 보면서 박수갈채를 보내고 자신도 그 사람들처럼 본받아서 인생에 있어서 성공을 이루어야 겠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들이 신앙의 세계 안에서도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서 그런 식의 비교를 우리들이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는 참된 교회의 모습,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갖기는 힘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각성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보는 계속 쌓여 가는데 더 잘 보려고 애를 쓰고 바꾸면 바꿀수록 이상하게 성경이 얘기하는 참된 기독교 신앙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 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관심사가 오직 지금 현재의 상태, 그리고 비교를 해도 다른 교회와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과 비교를 하고 이 시대와 비교를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신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지고 기초 자체를 다시 새롭게 해야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상당히 올바르고 잘 되었기 때문에 조금씩 뭔가를 추가하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나면 자기들의 교회가 훌륭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자신의 신앙이 매우 탁월하고 훌륭한 신앙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생각을 가지면서 잘못 비교 대상을 선정을 하니까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비교해야 할 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정말 교회다웠던 교회들, 정말 신자 다웠던 모델이 될 만한 신앙의 사람들과 비교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있느냐? 그런 것들이 없다 이겁니다.
여러분들이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스승이 있습니까? 신앙적인 스승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의 세상은 그런 것이 없는 것이 상당히 주체성이 있고 훌륭한 신앙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받아 드려지고 있습니다. 사람과 상관이 없는 하나님과 직접 한다는 것입니다. 스승이 누구냐고 질문을 했더니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직접 주님께 교육을 받고 싶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바울아 비켜라’ 한다고 합니다. 스승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껏해야 자기 동료, 주위의 잘못된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하면서 자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도 바리새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친구들은 예수님을 같이 믿었지만 다 쓰레기같이 가는데 나는 그래도 상당히 괜찮지요?” 그러므로 어떤 변화나 각성이 일어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떤 교회를 본 받고 싶은지 모델을 찾아보십시오. 성경이나 역사를 통해서 정말 훌륭했던 모델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어떤 모델이 있겠습니까? 성경으로 돌아가서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이후에 한번 설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돌아와서 삼 천명씩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광경을 본다는 1년 동안에 10명 전도했다고 폼 잡을 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고 하더라도 수에 있어서 삼 천명을 능가했다고 해서 정말 그렇게 가슴을 치고 뉘우치면서 본질적으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는 깊이에 있어서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우리는 늘 하나님의 부흥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년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도 참 크고 놀랍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하필이면 개척을 해도 교회가 안되고 사람이 모여도 다 바보 같은 사람만 보여서 죽을 쓰는 교회들과 비교하면서 ‘참 대단하다!’ 라는 생각을 갖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만과 자기 만족밖에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비교해 보십시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바르게 섰을 때에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들이 나타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성립되면서 일어났던 놀라운 일들을 보십시오. 정말 그렇게 수많은 점치는 사람들이 돌아와서 회개하고 마술하는 도시의 책들을 다 불사르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들도 복음의 도에 복종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무당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사창가의 윤락녀들이 자신의 삶을 회개하면서 돌아와서 새사람이 되고 퇴폐 업소들을 경영하던 업주들이 모두 회개해서 다 부수고 업종을 변경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음란하고 타락한 책들을 모아서 불태워 버리고 거룩한 삶을 선포하는 그런 영광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굳이 우리들이 성경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가깝게 생각하면 우리들이 1907년에 일어났던 평양의 부흥에서 볼 수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1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많이 성숙했습니다. 대견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던 사람은 믿음이 많이 생기고 삶이 너저분하던 사람들은 많이 정리해서 단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래된 죄악의 길에서 완전히 뿌리를 끊고 돌아서서 새 사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웠던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웠던 때가 정상적인 때고 덜 놀라운 때가 비정상적인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복음에 대해서 냉담합니다. 우리들이 전도를 나가보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회심하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냉담한 사람들이 더 많고, 마음이 강퍅해 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그들을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전도를 하면서 우리들은 철저하게 느낍니다. 누가 그것을 꺾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평양에 부흥이 일어났을 때 쌀 가게의 주인들이 쌀을 팔면서 되 밑에 얇은 판자를 하나 더 놓아서 쌀을 덜 주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이었는데 그게 많이 쌓이면 굉장히 이익을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왔던 사람이 부흥회가 끝나고 나서 ‘내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쌀을 속여서 팔았습니다. 나에게 쌀을 싸간 사람들은 모두 와서 돌려받으십시오’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또 돈을 꾸고서 갚지 않으면서 고통을 주던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면서 자기가 꾼 돈을 갚으러 다녔습니다. 그런 근본적인 변화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일어난 변화도 감사하고 놀랍지만 그러나 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적도 얼마든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기억하면 우리들이 그렇게 경솔하게 우리들을 아무에게나 비교하면서 위로를 느끼거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펄전 시대의 교회를 봐도 그렇습니다. 타버나클 처어치를 목회하고 있을 때의 기록을 보면 스펄전이 설교할 때, 사람들은 이사를 가면 그 근저의 교회로 나가는 시대였는데 그런 것들을 깨고 그 교회당에 1만 2천명, 많이 모일 때는 2만명 가까이 운집했습니다. 기록에 ‘많은 사람이 예배시간마다 회개했습니다.’ 그 회개한 사람들 가운데 철학가도 있습니다. 정치인, 철학가, 시인, 노동자들도 회개하고 변화를 받는 놀라운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우리들에게 지난 1년 동안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가 참 크고 감사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지만, 정말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다웠던 때에 비하면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너무나 초라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보다 더 장엄한 모습, 보다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지난 한해동안 아무렇게만 살지 않고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했고 또 말씀대로 잘 순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연말이면 항상 잘못했다고 하지만 잘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팽개치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불한당 같은 사람과 비교를 하면 여러분들은 참 단정합니다. 요즘에도 여러분의 예배를 드리고 신앙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떨려서 등록을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너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감격 어린 찬사를 받으면서 ‘그렇지 사람 한번 잘 봤구만!’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입니다. 우리는 절대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그런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 여러분들은 참 단정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비교할 데가 없어서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사는 이름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비교를 해서 위로를 얻는다면 여러분들의 목표는 천국입니까? 지옥입니까?
너를 보는 이마다 주 생각하리
정말 좋은 그리스도인, 여러분들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책 속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눈에 보이는 분들 가운데 그렇게 많은 스승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스승은 자기가 나에게 스승이라고 해서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고 제가 깊이 마음에 승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책을 썼는데 자기에게는 스승이 많다는 것입니다. 스승의 이름을 수 십명을 거론했는데 이상하게 스승들이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여주기 힘든 스승들이 모여서 한 사람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신앙 사상이 안 맞아서 서로 대화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한 사람의 스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의 의미 자체를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 나보다 나은 사람!’ 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스승 말고 정말 본받고 싶은 사람이 제게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 중에 없으면 책 속에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정말 본받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더 잘사는 것을 저가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만큼만 살다가 죽어도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과 우리의 신앙생활을 비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정말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고 성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았던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훌륭한 신앙을 가졌던 신앙의 위인들의 책을 읽어야만 됩니다. 늘 읽으십시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조금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여러분이 결정적인 위기나 어려움 속에 심각하게 판단하게 될 때는 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뭔가 지금 여기에서 정확하게 판단을 해야 됩니다.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비교했던 사람들이 전부다 너절한 사람들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개판 치며 신앙생활 하던 아무개 성도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해서 여러분들이 선택의 기로에서 정말 도움이 되겠습니까? 뭔가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위기에 섰을 때에는 ‘나는 이렇게 밖에는 못살았지만 내가 깊이 존경하는 어떤 성도하면 이 지점에서 어떻게 판단했을까!’ 그러면서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할까! 이렇게 밖에 판단하지 못할까!’ 그렇게 자기를 성찰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을 본 받으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드리고 싶은 내용은 그러한 사실들을 기초로 해서 영적인 강력한 각성, 그리고 이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커다란 부흥이 무엇을 통해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0절에서 12절을 보면 10장에서 지도자인 에스라가 백성들이 범죄 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깊이 참회하면서 괴로워 하다가, 그 광경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태까지 자신들이 담대하게 저질렀던 잡혼의 죄들이 정말 심각하게 율법을 어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모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문제를 민족적으로 다루어야 되겠다 라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모이라고 단호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모이지 않으면 모두 가만두지 않겠다 라고 하는 강한 징계를 밝히면서 예루살렘으로 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가끔 일어나야 합니다. 나라가 큰 위기에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 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민족을 위해서 기도한다든지, 교회적으로 큰 위기나 놀라운 축복의 기회가 올 때에 모두 모여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의 도움을 열렬하게 바라는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일날도 사정사정 해야 나오는시대가 되었으니 되겠습니까? 교회가 비상연락망으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더 좋은 것은 모든 성도들이 교회 가까이에 살아서 종소리를 들으면서 모이는 교회가 더 이상적인 교회일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속히 모이도록 요구했습니다. 모두 모여서 유서깊은 예루살렘에서 뭔가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에스라가 범죄한 자신의 민족을 다루어 가는 하나님의 방법을 알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들이 자신이 깊이 회개하고 뉘우칠 때에 백성들이 함께 와서 울면서 함께 죄를 자복하고 자기의 회개의 깊이 동참할 때 이 에스라가 일어나서 전 앞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여호하난이라는 사람의 방으로 들어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면서 하나님 앞에 금식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종의 답을 얻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거기에 깊고 간단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요점은 ‘너희 죄를 알겠느냐 너희들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해서 이방 여인에게 장가를 들고 거기에서 태어난 혼열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모두 정리하고 율법으로 돌아가라’ 하는 아주 간단한 요구였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한마디의 말이 엄청난 파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됐든 이방 여인이 들어와서 가정이 형성되었는데 모두 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지어서 이방 여인에게 장가를 들었다기는 하지만 이방 여인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방 여인이 율법을 알았겠습니까? 또한 거기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 자식에 대한 사랑이나 연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다 내어쫓는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부흥은 삶의 강력한 개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금년을 지나면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작년에 여러분의 삶 속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고치고 싶었던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잘 고쳐졌습니까? 안 고쳐진 것이 많을 것입니다. 힘들 것입니다. 인간으로 힘으로 인간 자신이 오랫동안 지속해 온 죄악 된 습관이나 이런 식으로 가정의 구조 같은 것을 깨뜨려 버리고 쇄신한다라고 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부흥이 왜 이런 것들을 가져다주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에스라의 설교를 듣고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삼일 내에 안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 재산을 다 적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끊어버리겠다.’ 그런 것들은 하나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이미 세상이 좋아서 하나님을 등지고 막가는 사람들에게 “너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벌 주신다” 할 때 그게 다 웃기는 얘기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너 그렇게 계속 살면 지옥 갈텐데!”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을 때에 “천국”이라고 하면 ‘아 소망스러워!’, “지옥” 그러면 ‘아 끔찍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 어차피 막가파가 되어 버렸는데 천국과 지옥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우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간단한 에스라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큰 변화가 밀어닥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족들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서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누가 말리겠습니까? 눈물이 범벅이 되서 “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구나!” 그러더니 “여보, 애들 데리고 빨리 가!”, “어디로 가라구요?”, “너희 집으로 가! 하나님이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을 슬퍼하신데!” 그리고 펑펑 울 때, 자식과 부인이 볼 때 뭐라고 하겠습니까? 정신병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일어났습니다.
부흥이 가지고 있는 기가 막힌 묘미 가운데 하나는 강력한 회심입니다. 그래서 뭔가 우유부단하던 것들을 가차없이 결단하도록 만들어주는 강력한 힘이 부흥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과 참된 회심, 그리고 죄에 대한 심오한 슬픔과 참된 부흥, 이것은 떼어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때가 되면 사람들의 양심이 아주 예민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자신을 의식하면서 자신들의 잘못된 점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깊은 두려움들을 함께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도자가 원한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여보, 당신 애들 데리고 빨리 가!”, “왜?”, “우리 지도자가 에스라가 싫데!” 그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그런 동기로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식의 범죄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부흥이 일어난 때를 제외하고는 이런 악을 청산한 때가 없었습니다. 그냥 묻어서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난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깊이 뿌리 박힌 죄들이 뿌리 뽑여진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뭔가 정말 고쳐야 되지만 그러나 이상하게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것, 애를 쓰고 몸부림을 치고 수시로 결단을 하면서도 어떤 특정한 죄악 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후회하고 뉘우치는데 다시 또 의식이 돌아오면 다시 그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이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그 오래된 패역한 삶을 청산하려고 하는 소원은 간절히 있지만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부흥이 아니면 그 문제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그것들을 고치고 변화시키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생명을 누릴 수 없는데 그렇게 많이 애를 써서 몸부림을 쳤는데도 결국은 실패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의 강력한 부흥이 나의 심령 속에 그리고 우리 모든 교회 안에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반쪽 짜리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겠구나! 이게 무슨 소망이 있을까! 하나님 정말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오셔서 역사하시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라는 절박함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두 가지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한가지는 해도 안되는 것을 계속 애를 쓰면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대신 자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져서 포기한 채, 싸우는 갈등을 버리는 대신 모든 것을 포기한 포기의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그만큼 힘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오늘 이 시간에 결론을 내리자면 부흥에 관해서 하나의 교리를 우리들이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이 부흥은 이렇게 뭔가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도구로 사용되면서 부흥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10장에서 일어나는 이 사건도 하나의 큰 영적인 각성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부흥입니다.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데 사람들이 늘 익숙하게 지으면서 살아왔던 죄를 성전 문 앞에서 엎드려 통곡하며 울부짖는 에스라의 모습을 보면서 모두 나와 그렇게 남녀노소가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자체가 이미 부흥입니다. 그런데도 거기에서 끝나지를 않고 그 부흥이, 영적인 각성이 부흥으로 근본적으로 확산되어서 결국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들을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뿌리채 뽑아서 공중에 날려버리는 놀라운 일들이 무엇를 통해서 일어났느냐 하면 에스라의 분명한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진리가 선포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부흥은 진짜 부흥이기가 힘들고 또 성령의 역사가 어느 정도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순도는 의심할 만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진실한 예언자적인 목소리입니다. 결국은 그것이 선포된다고 해서 반드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목소리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부흥이 필요한 때가 되면 이러한 외침이 사라지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증거하고 외치는 외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마음을 그 시대에 보여주는 설교자는 부흥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흥이 필요한 시대이므로 부흥이 멎은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형제가 전도하다가 와서 하는 얘기가 자신은 열심을 전도를 하는데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앞으로 교회를 다니게 될 생각을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것입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정말 교회에 가서 복음을 알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시대에도 아주 분명하게 교회에 가기만 하면 그 교회에서 분명하게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고,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모든 교회들이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오래 교회에 다녔는데도 핵심은 빗겨간 정보들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10년, 20년을 믿었어도 기독교의 가장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를 전하면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뭔가 신앙에 있어서 이 시대에 굉장히 많이 가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식으로 우리 자신을 잘못된 시대와 비교를 하고 잘못된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섭취한 하면서 쌓아들인 많은 지식이나 본받음들이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것들이 되게 한 것입니다.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이고, 하나는 세상을 향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오늘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우리가 믿는바를 너무나 대중화 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성경이 얘기하는 데로 ‘십자가는 이런 것이고, 복음은 이런 것이고, 인간은 이렇게 타락했고,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야만 사는 길이 있고, 예수를 믿어도 이렇게 믿고 이렇게 살아가야지만 거기에 참된 생명이 있다’라고 얘기를 하면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그대로 가르쳐 주어서 사람들에게 참된 우리의 선포를 통해서 참된 하나님이 누구시고,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보다는 이것을 자꾸 대중화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명한 복음보다는 복음을 제시하면 어떤 사람들은 ‘주님 내가 죄인입니다’ 하고 회개하면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데 “예수 믿으면 좋은 친구도 만나도 복을 받습니다”라고 얘기를 해야지 “당신은 하나님 앞에 흉악 무도한 죄인이고 안 믿고 살아가면 지옥의 불길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다”라고 얘기를 하니까 사람들은 그것이 대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선포해서 정확하게 하나님을 대면하게 해 주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사람도 모르는 사이에 살짝 복음을 넣어줄 방법이 없을까!’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패역해진 인간에게 복음이 들어갈 때에는 영적인 반응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서 성경이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복음의 광채가 비췬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받은 사람들, 그래서 한번 영혼의 세계가 깨어나서 옛 질서를 모두 무너뜨려 버리고 새로운 질서가 생겨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 그 영혼 속에 비췬바 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자꾸 대중화하다 보니까 다음에는 생명을 걸고 선포해야 할 분명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심각해져도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장난처럼 생각을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 자신이 자기가 믿는 내용에 대해서 너무 대중화시키려고 노력을 하다보니까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도 이제는 모르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뭐냐하면 복음이라고 하는 하나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경험되어져야만 거기에 생사를 걸지, 경험되어지지 않은 것에는 거기에 생사를 걸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그 피로 구속받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졸도할 지경이다 이겁니다. 어떻게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 예수의 보혈의 피, 그것밖에 더 있느냐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행위로 구원을 받든 믿음으로 구원을 받든 이것도 하도 저것도 하면 되지 뭘 그렇게 싸누냐?’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문학 작품 좋아하십니까? 읽어보면 소설가들이 복음송가 가수와 같습니다. 복음송가 가수도 가수의 얼굴을 볼 필요 없이 멜로디를 피아노로 쳐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작곡한 찬양을 들으면 속에서 뭔가 솟아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부감은 없는데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들입니다. 저는 거의 알아맞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설이 그렇습니다. 진짜 인생이 무엇인지, 삶과 죽음을 오르내리지 않은 사람들, 어디에서 문장법을 익혀서 말장난이나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사람들이나 이념 투쟁 속에서 생명을 건 뭔가를 했던 사람들의 글 속에는 사람들을 잡아당기는 흡입력이 있습니다. 무서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600페이지, 700페이지를 써내려 가는데 19일 동안에 썼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아니지만 그렇게 써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거는 무엇인가 있는 것입니다. 생사를 건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런 정신들이 글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데려와서 강의를 하라고 해도 다른 사람과 다른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매일 듣기만 하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왜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겠습니까? 그러므로 얼마든지 대중화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명하게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대신 돈이나 몇 푼 주려고 하고, 아이들에게 분명한 신앙을 가르쳐 주는 대신 데리고 놀려고 하는 것들이 분명한 복음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물결 속에서 자신이 간직하고 지켜야 할 파수할 메시지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설교자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종의 부흥을 통해서 세워지는 것이 설교자인데 부흥이 필요한 때에는 그런 일들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정말 하나님의 메시지가 필요한 때에는 정말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예외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그 시대가 모두 부패하고 타락해서 이제는 율법을 팽개치고 이방 여인과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하는 것들이 보통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여기 올라올 때에 간직했던 그 율법의 정신, 하나님 경외의 정신을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시골에서 밤늦게까지 불을 때고, 새벽에 나가서 보니까 모두 불이 꺼졌는데 저 깊은 재 속에 묻혀 있던 작은 불씨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문제의 실를을 보게 되었을 때 율법의 정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들이 확 타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거기에 서니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어떤 타협도 필요없이 정확하게 문제의 핵심으로 바로 찌르고 들어간 것입니다. “너희들은 그 결혼생활 정리해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 만약 너희들이 정리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들을 다 쓸어버리겠다” 아주 강력한 신앙적인 결단이 생겨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자신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죄라는 의식이 밀려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내릴 수 없었던 위대한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단을 내릴 수 있게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거룩하고 영화로운 곳에 계신 하나님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사63:15)
우리는 몇 시간에 걸쳐서 부흥과 하나님의 말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부흥이 어떻게 기도와 관련이 되고, 부흥이 구하는 기도는 어떤 것이며 그리고 우리들이 부흥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어떤 것들인가를 본문을 쫓아 앞으로 여러 시간에 걸쳐서 63장과 64장의 본문으로 진도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시인은 말하기를 분위기가 시편에 나오는 분위기와 같습니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성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하는 것입니다. 부흥이 올 때 먼저 사람들에게 영혼의 각성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는데 그 각성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대한 각성이고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고 더러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렇게 비참한 인간이 자기의 참 모습을 깨닫는 것 없이는 누구도 부흥을 위해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선지자는 말하기를 “하늘에서 굽어살피시고 거룩하고 영화로운 성소에서 우리를 보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거룩하고 영화로운 성소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계시는 보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늘을 보시옵소서 그리고 하강하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 인간은 땅에 있다는 아주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오늘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인간이 땅에 있다는 사실은 부흥의 때마다 가장 실감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듣고 말하고 있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말하는데 대한 친밀함도 없으면서 늘 듣는 얘기, 늘 듣는 성품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명하면서 하는 농담가운데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농담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명될 때는 언제나 우스게 소리나 농담 속에서 거명 될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할 때에 그 일컫는다가 들어올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올리지 마라, 하나님의 이름을 거들먹거리지 마라 하는 것입니다. 청문회장에서 “하나님이 어떻고....” 그런 것은 다 십계명 위반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거들먹거릴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고 우리는 많이 사랑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엄위롭고 영광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함부로 그 이름을 들먹이거나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심이 얼마나 천박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불신자들이 신앙을 조롱하기 위해서 지어내는 얘기들입니다.
여기에서 선지자는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주님은 하늘 높이 계셔서 우리를 굽어살피시고 우리는 그 아래 살아가는 인생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라도 하나님이 우리는 부르시면 누구도 하나님의 죽음을 향한 부르심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물론 이거니와 우리의 죽음, 그리고 우리의 기쁨과 슬픔, 인간의 행복과 불행,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은 존재일 뿐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 신앙의 깊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 앞에 나는 보이지 않고 하나님만 보이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심이 깊어지면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빼놓고 보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라고 하는 것도 신앙을 통해서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마치 신앙심의 깊이처럼 말하는데 그런데 그 친밀함까지는 좋은데 진정한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신령한 친밀함은 경박한 친밀함이 아닙니다. 신령한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거룩과 경외의 마음을 동반한 친밀함입니다. 애들같이 장난하는 식의 친밀함이 아닙니다. 거룩한 두려움을 동반한 침밀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먼저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 하늘에 계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먼저 생각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억할 때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하나님’ 그럴 때 떠올라야 할 대목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우리는 땅에 있고 그분은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는 그 분의 손에 의해서 지은 바 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이 본분을 잊어버리면 정말 추합니다.
(예화) 고등학교 다닐 때 한 아이가 중간 고사 때 컨닝을 했는데 선생님이 고발해서 정학을 당했 다. 그런데 기말고사에서 또다시 그 선생님에게 걸렸다. 그래서 그 선생님이 “남들은 다 공 부해서 시험을 보는데 너는 왜 그렇게 남의 것을 보냐?”그랬더니 그 아이 하는 말이 “선생 님, 꼭 그렇게 저가 보고 쓰는 것을 지적해서 정학을 당하게 해야지 좋습니까?” 선생님이 어안이 벙벙해서 가만히 있으니까 “이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까? ‘야 임마, 왜 그렇게 보고 쓰냐? 다음부터는 그렇게 해서는 못쓴다.’ 이렇게 하고 끝내면 안됩니까?” 그래서 선생님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하는 말이 “야 임마 그런 말은 목까지만 나오고 밖으로 못 나오는 거 야 임마!” 애들이 모두다 엎드려서 킥킥거리고 웃었다.
분수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학생이면 컨닝하다 걸렸으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 거기에서 선생님에게 대들면서 책에서 감동을 주는 것처럼 자신에게 왜 감동을 못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하나님 앞에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를 보십시오. 여러분,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독기를 품은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 진짜 이러시기입니까?”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손에 의해서 지은 바 된 피조물일 뿐입니다. 여기에 올려 있는 십자가 종을 성구하고 하는데 이것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폐품인 것입니다. 여기에 올려 있으니까 성구하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도 내에서 거룩한 것이고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굉장히 깊이 사랑하는 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두려운 분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움과 기쁨과 사랑함이 함께 있어서 두려우면서도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면서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 두렵기 때문에 사랑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안 들고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안 드는 분입니다. 그래서 찬송을 불러도 주님의 거룩과 주님의 높으심을 생각나게 하는 찬송을 많이 불러야 합니다. 뜻도 없고 의미도 없는 식의 복음송가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 거룩한 분이 우리와 구별된 분이시라는 사실이 그분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구나! 목사님은 오전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하셨는데 언제 올라가셨나!’ 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면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셔도 그 분은 하늘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만큼 질적으로 우리와 현격하게 구별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교회가 얼마나 거룩한 성도들이 모였는가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면서도 깊이 두려워하는가, 그런 것을 가리켜서 쉽게 얘기하면 경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외심이 있는가,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경외감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의 인격을 향한 깊은 거룩한 경외심에서 출발하지 않는 믿음은 단순한 자기 암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함, 이런 것들이 오늘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농담 속에서 지금 이 시간도 수없이 하나님의 이름이 들먹거리고 하나님 면전에서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행동과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막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들을 이 선지자의 말이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거룩하고 영화로운 성소에서 보시옵소서’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이 선지자는 거룩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불결한 것이나 사악한 것이나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들이 혼재하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섬김과 함께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아무렇게나 대하는 방만함, 죄악들이 함께 혼재하는 상태를 가리켜서는 거룩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땅에 있으면서 깊이 마음을 기울여야 할 최우선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먼저 교회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음과 삶이 말이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곳입니다. 신발을 안 벗지만 들어설 때 신발을 벗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저희는 아직 한번도 그런 일을 격지 않았습니다만 교회에서 회의하는 중에 소리를 지른다는데 다 동물들입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혈기를 부리는지,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불쌍히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뿐만 아니라 혈기를 부리지 않고 말만 거룩하다고 해서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내면의 세계에 온갖 탐욕과 더러운 것들이 있으면 더 나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세상 속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말 고쳐지지 않습니다. 신령한 선생을 만나고 고매한 선생을 만나서 인격적인 깊은 감화를 받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망가진 사람은 망가진 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야지 될 인간들이 이곳에 와서 자신의 성품대로 막 살고 싶은데 성도대로 살라고 하고, 자신의 성품은 옛 기질대로 살고 싶은데 새로운 성품을 따라 살라고 하고, 자기는 아무렇게나 살고 싶은데 단정하게 살라고 하고, 자기는 단지 한 인간의 길을 걷고 싶을 뿐인데 성도의 길을 걸으라고 타이르고 가르치는 곳이 교회라 이것입니다. 다 거룩해져가기 위한 한 방법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여있는 이 백성들 속에 먼저 거룩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면뿐만 아니라 말, 행동 모든 것에 있어서 새사람이 되어 가는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오늘 아침에 말씀 드린 것처럼 그러한 새 사람을 만드는 진정한 변화는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께서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심으로 이러한 일들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도 거룩해질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룩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기를 거룩하고 영화로운 성소에서 하나님이 계신 그곳입니다. 왜 천국이 그렇게 거룩한 곳입니까? 그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니까 거룩한 곳입니다. 그곳이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가셨더니 거룩한 곳으로 변한 것입니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그럴리는 없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지옥으로 내려가시면 지옥이 거룩한 곳이 되고 천국이 속된 곳이 될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런 거룩한 곳에서 굽어 살펴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묘사가 뭔가 선지자의 마음속에 흐르고 행간의 진심을 읽게 만들지 않습니까? 왜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인간들이 짐승처럼 살고 있는 유대 나라를 향해서 하나님께 은총을 호소하면서 왜 굳이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보좌, 그리고 그를 둘러선 천사들과 성도들이 있는 거룩한 성소의 영광과 거룩을 얘기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땅의 얘기를 하는데 하늘을 들먹거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뭔가 집히는 것이 없습니까? 이것은 의심할 것이 없이 아주 단순한 정답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부흥을 향한 갈망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갈망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확연히 드러나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곳이 거룩하게 되었고 그 거룩한 곳에서 주님이 거하시기 합당한 것처럼 이 땅도 또한 그렇게 동일체가 되기를 바라는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의문이 즉각적으로 떠오를 것입니다. ‘참 이상하다 선지자가 천국을 가본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보좌에 있다가 온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가보지도 않은 천국, 하나님의 영화롭고 거룩한 성소의 영광, 이런 것에 대해서 이렇게 지나가는 얘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해서 탁월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선지자의 얘기는 지나가는 얘기가 아니라 아주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 하나님의 계신 하늘나라의 영광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 나라의 거룩을 알고 그리고 그 성소의 영광을 안다 이겁니다. 그러한 거룩과 영광이 자기가 땅을 디디고 살아가는 이 유대 나라의 역사의 현실에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늘에 가본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절실하게 느껴질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깊이 다가옵니까?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것은 이렇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땅에 있으면서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천국을 보고 왔다고 하는데 다 쓸데없는 얘기입니다. 뭘 보기를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죽고 천국으로 가서 경험하고 다시 내려와서 하는 것들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서 얘기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 영화롭고 거룩한 곳이라고 하는 탁월하고 분명한 지식을 가진 것은 물리적으로 육체를 가지고 가서 천국을 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교류를 통해서 그 나라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영적으로라면 영적인 교류를 통해서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은 물론이고 지옥의 불붙은 심판도 우리는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오는 것은 주님이 이 세상을 모두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고 심판의 모든 것이 다 끝나고 완결되었을 때 완전한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심지어는 성령님이 오신 이후에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거스리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믿는 자들 안에, 교회 안에까지도 사단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교회를 대항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대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 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아직 물리적으로는 완벽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와서 실제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나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통치의 효과를 이 세상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적인 관계에서 경험된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물리적인 이 나라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인격적으로 승복해서 주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한 다음에 새 사람이 되어서 은혜가 하나님의 신령한 사람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불의한 직업활동을 하며 살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임한 나라는 영적인 왕국이지만 그 영향은 실제로 살아가는 물리적인 삶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지자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영화롭고 거룩하며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우신 분이신지를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이렇게 말씀 선포자로 부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6장이 생각납니다. 성전에 스랍 가운데 계시는 영광을 뵈옵고 엎드러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전 처음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과 영광을 경험했을 때에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자신이 그 거룩과 영광 앞에 한번에 부스러져서 날아가 버릴 재와 같은 인간, 부스러기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 거룩의 경험이 이 선지자의 선포 사역에 신학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람을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이 사람의 모든 메시지의 핵심,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 도래의 초점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도 하늘에서 영광스럽고 거룩한 이름으로 많은 피조물들에게 인정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인정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을 오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일을 얘기하기 전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 주님이 계시는 하늘의 거룩과 영화와 영광에 대해서 먼저 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을 갈망하는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은 부흥에 대한 갈망 자체는 현실에 대한 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에 대한 한, 한 맺힌 신앙들이 많은데 ‘노동자가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서 되겠느냐!’ 그런 것도 한의 출발일 수 있고 ‘이 교회 정말 잘못됐다 다 때려부수고 새로 만들어야 겠다!’ 라는 개혁의 의지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변화를 위해서 제도를 고치고 잘못된 것들을 개혁하기 위해서 생사를 건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부흥에 대한 기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 한 사람의 기도자가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동기는 자신이 본 하나님의 영광,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거룩과 영화로움이 있으면 영광스럽고 거룩한 하나님으로 동일하게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대접해 줄 때까지는 분이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분노입니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을 구하는 기도가 대게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의 열성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얼핏 보면 이 사람이 땅의 일을 가지고 고민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땅에 있는 상황을 보면서 맺힌 한이 그것이 저절로 부흥을 위한 기도로 이어진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에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생사를 건다.’ ‘당회를 고치기 위해서 생사를 건다.’ 심지어는 평신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교회를 개혁하고 생명을 건다고 하는데, 그것들이 꼭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게 생사를 건 절박한 마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진정한 부흥을 구하는 마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시작된 것만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한 탁월한 선지자와 시인, 예수그리스도를 비롯해서 사도들에게서 볼 수 있는 부흥을 향한 궁극적인 간절한 갈망은 무엇을 기초로 하느냐 하면 그런 부흥을 구하기 전에 그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심과 그의 계신 곳의 영화로움을 먼저 경험하고 그 분이 자신을 다스리실 때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질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경험한 사람이, 그런 경험 속에서 인식하게 된 하나님이 지극히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인정되어지는 하늘나라의 모형이 자기가 이미 경험된 모형이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선지자나 시인들의 가슴을 뚫고 나온 피묻은 탄원이 부흥을 향한 갈망입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린 것이 그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부흥을 위해서 처절하게 기도할 수 있다면 그 사람 속에는 이미 부흥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여기에서 딜레마가 됩니다. ‘그러면 나는 부흥을 위해서 기도할 자격이 없구나! 몇 사람만 하면 되겠구나!’ 그것이 바로 지난 지간과 지지난 시간에 한 설교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말씀한 바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늘이며 그분이 다스리고 계신 성소가 거룩하고 영화롭다고 하는 사실이 그렇게 가슴 저미도록 다가오고 그런 영화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는 하찮게 취급받고 있는 것에 대해서 견디지 못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나는 왜 없을까!’ 이런 질문과 의문에서부터 개인에게 그런 각성과 변화가 일어나는 하나의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커다란 종이에 스티카로 붙어 있는 것을 뜯을 때 우리는 중간을 잡고 뜯지 않습니다. 맨 끝으로 가서 손톱으로 문질러서 작은 꼭지를 잡아서 당깁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작은 것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왜 저 사람에게 있는 것이 내게는 없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그런 것들을 캐 들어가 보면 굉장히 커다란 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자신의 영혼의 회복을 가지고 ‘왜 저 사람은 하나님을 인해서 저렇게 행복해 하는데 나는 일평생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해 지는 경험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의문점을 가지고 깊이 캐 들어가 보면 커다란 둔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인 상태의 실체를 그런 문제들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 풀어야 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일수도 있고, 혹은 회심에 이르기 위해서 해결해야 될 문제들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뭔가 풀어야할 문제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지자가 간절하게 먼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이 얼마나 영화롭고 거룩한 곳에 계시는지를 상기하면서 또 우리에게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무엇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능력이 이제 어디 있습니까?’ 주의 열성이라고 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어떤 열정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는 특별한 열정입니다. 그런 열정과 능하신 행동,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행하시는 위대한 일들입니다. 그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버릇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따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은 다릅니다. 오전에 말씀드린 따지지 말라는 따지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따지는 것은 아집과 이기심, 그리고 깨뜨려지지 않은 강퍅한 자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선지자가 얘기하는 ‘주님의 열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주의 능하신 행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확보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는데 왜 하나님 가만히 계십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있는 일을 안 행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었던 백성들도 이제 하나님을 떠나는데 하나님 이렇게 되시면 하나님이 손해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신데 왜 하나님이 이렇게 모욕을 받도록 이 세상에서 내버려두십니까? 내게는 이것이 너무나 고통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따지는 것은 그것은 아집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따지는 백성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기분 나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열성이 어디 갔습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왜 이렇게 게으르십니까?’ 그것입니다. ‘우리를 행하신 능하신 일들이 이제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우리를 위해 능력을 베풀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따지는 동기 자체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해져야 하고 주님을 향한 경외심이 넘쳐야 하며 하나님 자신의 이름은 온 세상에서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받아야 한다라고 하는 피 어린 갈망에서 생겨나는 탄원입니다.
이것과 관련시켜서 출애굽기 34장을 강해한 적이 있습니다. 부흥에 대해서 관심 있는 분들은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라는 TAPE와 다니엘 9장을 들으십시오. 거기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당신은 의로우십니다. 주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말을 하는데 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신 것이 당연한데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말할 때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당신의 그런 성품을 본 받아서 살고 싶어하는 갈망이 없이는 그런 고백을 못하는 것입니다. ‘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이렇게 말할 때 이미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들을 용서할 용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성품이 찬송 제목이 되는 것을 굉장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 성품만이 찬양하고 그 찬양에서 진심에서 우러나올수록 그것은 그 성품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부흥의 때가 되면 밀물처럼 밀려드는 찬양이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주님의 전능하심, 그분의 영광스러운 성품에 대한 찬양이 우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선지자가 ‘주님의 열성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사라졌습니다.’ 왜 선지자가 이렇게 처절하고 부정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g문입니까? 그것은 실제로 그런 하나님의 열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동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는 사람들이 말로 해서는 안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성이 사라지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가 남아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것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신 분인지 그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향해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지를 설명하면 아직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에 남아 있을 때에는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의 마음이 한없이 강퍅해지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면 잘난척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가 실제로 사라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아무리 자세하고 상세하게 말해도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이미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진짜 하나님의 열성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이 무엇인가 하는 위대한 일에 사람들이 동참해야만 비로소 눈이 번쩍 뜨여지면서 ‘아 정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선조들의 수많은 찬송이 장난이 아니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이 이제껏 까지 생각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신앙이 좋아진다라고 하는 고백, 그 진실한 고백 속에는 무엇이 담겨있습니까? 거기에 정말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분이시라는 사실, 그리고 그분의 성품을 닮아서 거룩해져 가고자 하는 사모함들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대답해야 될 차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자비와 긍휼을 베푸소서!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사63:15下)
지난 주에 설교한 것을 다 반복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그런 개인적인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대한 경험이 선지자로 하여금 태평한 시대인데도 ‘하나님의 열성이 사라졌고 하나님의 능하신 일들이 사라졌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탄식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의 보편적으로 유행하는 경박한 신앙의 하류에 묻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흥에 대한 것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흥이라는 주제만을 가지고 탐구해야 합니다. 어떤 지체가 말하기를 부흥에 대한 기대를 갖고 나니까 설교가 귀에 들어오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설교를 움직이는 커다란 사상적인 줄기가 부흥입니다. 신앙이 어린 분들에게는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시편 23편이 개인적인 부흥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얘기하는 부흥은 교회적이고 커다랗게 확장시킨 부흥을 얘기한 것이므로 연결을 시키면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런 얘기로 마쳤습니다.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에 있나이까?’ 무슨 뜻이냐 하면 모두들 큰 문제없이 잘 먹고 잘사는 것 같은 시대인데 문제는 신앙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열성이 없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열성이 없다기 보다는 인간이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능하신 일이 없는 것 같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이 모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변해 가는 장면을 볼 때에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시다. 그래서 몇 년 동안을 무지무각하게 교회를 다니다가 이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변하는구나!’ 저 사람이 변하는가 했는데 옆 사람이 변하고 옆 사람이 변하는가 했는데 뒷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사람들이 가정에 가므로 가정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신다’라고 하는데 그런 감동이 그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일을 행하셨다. 예를 들면 ‘오늘도 식당 운영 체제가 바뀌어서 일하는 아줌마들이 오셔서 밥을 해주시는데 점심을 과연 먹을까 라고 근심을 했는데 아무도 굶은 사람이 없더라. 주일날 하나님께서 참 놀라운 일을 식당에서 행하셨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가 밥을 해주던지 먹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것과 같은 예배였는데 오늘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셔서 온 교회가 은혜의 도가니가 되었더라’ 그러면 이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크고 능하신 일을 행하셨다 라고 말합니다. 일상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하신 일들이 행해졌다 라고 봅니다. 그런 것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선지자가 깊이 탄식한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선지자가 간절히 하나님의 부흥을 구하면서 ‘주님이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고 주의 거룩한 성소에서 내려다 보시옵소서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열성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데굴데굴 구르는 것처럼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애통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부흥을 구하는 선지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소연의 맥락에서 오늘 한 말을 더 추가합니다. 그 말이 의미 심장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히 내게 그쳤나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볼 때 ‘당신의 창자의 그 많음과’ 다시 말하면 ‘당신의 많은 창자와 당신의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 나를 향하여 다 하였나이다’ 여기에서 창자 얘기가 왜 나오냐 하면 ‘메에’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내장을 말합니다. 그래서 비유적으로 사람의 속, 사람의 심정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간곡한 자비’라고 했는데 성경에는 ‘많은 내장’ 문화적으로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창자가 한국 맥락에서 보면 기분이 나쁜 곳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창자가 인간의 영혼이 깃드는 곳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정말 네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지를 가슴에 손을 얹고 말을 해라”라고 말을 하는데 그 사람들의 표현으로 등가번역을 하면 “네가 진심으로 그 말을 하고 있는지 아랫배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문화의 차이입니다.
옛날에 우간다의 이디아민이 굉장한 독재자였습니다. 부하들이 반역을 일으키려고 하면 잡아 죽여서 간을 빼먹었습니다. 우간다 사람들에게는 간이 인간의 영혼이 깃드는 처소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디아민이 간을 먹은 것은 혹시 이놈을 죽이더라도 망령이 살아나서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한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문화의 차이입니다.
이 표현 자체가 성경의 맥락에 들어가서 보면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주 애끓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나에 대하여 이제는 모두 끝났나이다.’ 라는 표현입니다. 얼마나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간곡한 자비’가 아니라 ‘애끓는 마음’ 주님의 애끓는 마음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내게 대하여 그쳤나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러면 도대체 선지자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상적인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수필가가 사랑은 홍역과 같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 사람의 의하면 ‘사랑은 홍역과 같다 왜냐하면 사람이 태어나서 평생 한번 홍역을 하는 것처럼 사랑도 한번 한다. 홍역이 무서운 병은 아닌데 앓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 중병을 앓고 있는 것 보다 심각한 것처럼 사랑이 그렇다’ 라고 묘사를 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열렬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지자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 사랑으로 말미암아 애타는 마음, 가슴이 미어지는 것처럼 애끓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향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도 그친 것 같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단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큰 진노를 받아서 지진이 나고 전쟁이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고 죽어가고, 나라가 무너지고 IMF 같은 것이 터져서 수 십만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가정이 파괴되고, 길거리로 나서고, 길거리에 노숙자들이 자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만이 ‘하나님이 진노하셨나보다!’ 그런 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전쟁이 일어나게 하실 수도 있고, 큰 재앙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시는 방법만큼이나 무궁무진합니다. 우리의 보통 육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지만 누군가가 “봐라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신다 우리를 지금 안 기뻐하고 계신다. 우리에게 깊이 마음 아파하시고 계신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실감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시야자체가 매우 육적이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아 진짜 그렇구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큰 재앙이 일어날 때 커다란 회개의 운동이 일어난 적이 많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잘못했구나!’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그러한 육적인 시각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런 정도가 되어서 나라가 박살이 나고, 백성이 뿔뿔이 흩어지고 수많은 사람의 시체가 거리에 뒹굴 정도가 된 것은 이미 그런 결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영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백성을 안 기뻐 하신다 라고 하는 것이 충분히 느껴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살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고 바르게 살지 않을 때 주님이 책망하셨지만, 역사를 보면 일률적인 공식을 가지고는 해결이 안되는 적도 많다는 얘기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거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구하며 매달리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복 받혀서 범죄한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찾아오셔서 용서해주시는 것, 원망하고 있는데 단칼에 쓸어버리시는 대신에 원망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많지만 여러분들이 잘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도망쳤을 때 제일 먼저 부딪힌 난관이 홍해 앞에서 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했지만 비무장이었습니다. 비무장의 노예 생활하던 사람들을 잘 훈련받은 그 시대의 세계 최고의 군대가 죽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단번에 달려왔을 테인데 하나님께서 밤새도록 불기둥을 보내셔서 접근을 못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기적을 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막 원망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만히 내버려두고 죽게 하지 여기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만히 보면 눈앞에 불기둥이 보이고 애굽의 병사를 못 오도록 가로막고 있는데, 쉽게 얘기해서 그 불길이 병사들 한 가운데로 지나가기만 하면 다 끝나는데, 기적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보통 때 같으면 하나님을 그렇게 원망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갔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므로 일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기적도 사라지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한 불신의 죄 때문에 애굽 병사들의 칼에 목이 떨어지거나, 바다로 내 몰리거나, 끝에 가서 회개하는 사람은 살아가게끔 하시는 모습이 성경에 나오는 일반적인 방식인데 하나님께서 “너희는 오늘 잠자코 여호와가 너희에게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시면서 물을 쫙 가르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공식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놀라운 일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애굽 병사들이 쳐들어와도 ‘너희들이 쳐들어와도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편이시고 너희가 그렇게 병거를 이끌고 와도 피난처 되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리라. 할렐루야 아멘. 우리가 주를 믿나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공식인데 그 공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독한 말을 하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까지 “하나님 왜 우리를 이런데 보냈습니까?” 하면서 모세를 원망하다가 “야 떠들지마, 뒤를 봐 갈라졌어 빨리 건너가”, “정말!” 그리고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를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에서 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사라졌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얘기하는 ‘하나님의 많은 창자가 이제는 없어졌나이다’ 다시 말하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 무엇을 애끓겠습니까? 자비입니다. 사랑으로 애끓는 마음, 호세야 선지자의 표현으로 말하면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때만해도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은 건재하고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벌써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다 사라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굳어질대로 굳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는 선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한 시대의 교회의 모습, 개인의 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외형에 마음을 팔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 항상 선지자가 지금 대면하고 있는 답답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예수님 당시에 헤롯이 지은 것입니다. 헤롯이 왜 성전을 지었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화려하게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을 그렇게 지어놓고 나니까 갈릴리와 지방 변두리에 있던 사람들이 오래간만에 예루살렘에 와서 보니까 “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저 성전이 어떻습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모두 부서질 것이다”
사람들은 그 성전을 보면서 ‘잘 지었다. 세상에 저 돌을 어디서 가져오고 누가 깎았을까!’ 라고 감탄을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성전은 그렇게 서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사는, 하나님을 등진 그 시대의 형식적인 백성들을 본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예수님은 곧 임박해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읽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면서 이렇게 독백하셨습니다. ‘네가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그러면서 통곡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시야를 이 이사야 선지자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니까 막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대해서 이것을 적용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 나왔을 때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시는 애끓는 사랑의 마음, 자비의 심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해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혹은 여러날 동안 세상에서 각기 자기 일에 몰두하면서 살면서 하나님을 깊이 느낄 수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교회에 왔을 때에는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교회 왔을 때에는 자기가 마땅히 와야 될 듯한 것을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의 시설이 좋고, 잘 생긴 사람들이 있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특성입니다.
제가 회심을 할 때 저 혼자 걸어가서 50명정도 앉으면 가득찰 만한 작은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바느질로 기워서 만든 방석을 깔고 차가운 바닥에서 톱밥 난로를 켜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피아노가 어디 있겠습니까? 풍금을 어느 자매가 치고 있었습니다.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처음 듣는 풍금 소리인데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들어갔을 때 느꼈던 것이 이 집이 진짜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닌 집이지만 들어왔을 때 오래 전에 떠났던 고향집에 돌아온 것과 같은 안온함을 느꼈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냄새, 색깔, 분위기, 소리 모든 것이 낯설지 않고 마땅히 내가 와야할 그 곳에 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낯설다는 느낌은 예배를 끝마치고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어디에서 오셨냐고 물어봤을 때 ‘아 내가 낯선 곳에 왔구나!’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 와서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말하지만 차가운 지식만을 가르쳐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건, 기독교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쳐주건, 신앙에 관해서 무엇을 상담하건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 주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지자는 육적인 시각에서 보면 나라가 아직도 번성하고 큰 문제가 없었지만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지금 역사 속에서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시는, 당신의 백성들을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가슴에 불타오르는 애틋한 마음을 어디에서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정치 속에서도 느낄 수 없고, 사람들의 가정 속에서도 느낄 수가 없고, 심지어는 성소에서 느낄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와 예배 속에서도 느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이 선지자가 가슴이 미어질 듯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뜨거운 열렬한 열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일들이 내가 지금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이제는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범죄해도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 어찌할 줄을 모르며 가슴이 찢어지는 마음으로 그들을 자비하게 여기시던 그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이제는 느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줄 압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거나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냐고 묻고 대답을 한다고 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부부가 있는데 한 부부는 사랑이 아주 열렬했습니다. 다른 한 부부는 사랑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화) 어느날 뜨겁게 사랑하던 부부의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뜨겁게 사랑하며 살던 부인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던 부인을 만났습니다. 만나서 얘기를 하는데
“나 이제 그만 살아야 되겠어!” - “왜? 너희 남편이 바람을 피웠니?”
“아니 우리 남편은 정말 정직한 사람이야.” - “그럼 사업이 망했니?” ]
“아니” - “그러면 성격상 차이가 있니?”
“아니” 이 친구는 지금 자기의 얘기를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뭐냐?” - “몰라, 하여튼 살기 싫어”
이런 심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간단하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이라는 것은 후퇴하면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전진을 해야만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옛날에 했던 고백을 그대로 똑같이 해도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소속감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옛날의 수준으로서는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는 쉽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이 사랑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부정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자기와의 사이에 심각한 금이 간 것도 아니고 단지 여기에서 느끼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충족하게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것은 아닌데 꽉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용량에 비해서 항상 떨어지는 것입니다. 애들이 목이 말라서 엄마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데 한 숟가락만 준다면, 물이 아닌 것은 아닌데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무한대로 확장해서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사랑 안 하신다. 이제 끝났다.’ 이게 선지자의 마음속에 확신같이 들어오게 되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닫히면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지?” 하면서 울고 불고 하면서 싸우는 여자는 아직까지 그 마음속에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완전히 끝났고, 나도 그런 사랑을 느낄 수 없다고 확신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들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선지자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 백성을 향해서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 선지자에게는 충분히 느껴지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열방중에 부으소서
이것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는 그런 것이 느껴지는데 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열방 중에 부어져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타는 듯한 자비의 마음을 함께 느끼면서 그들도 자기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감격하는 광경을 보고 싶은데 그런 광경이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모습, 그 현실, 그 건조하고 완전히 메말라 있는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타는 듯한 마음, 그 가슴의 타오르는 듯한 자비와 긍휼이 이제는 사라졌습니다.’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냉담한 것만큼 심각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교회 안에서 몇몇가지 죄악들이 행해지면서라도 다음 주일에는 통회하고 자복하는 경건한 인격적인 감동이 있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이지, 자기네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죄는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고 차가운 냉담함이 교회를 가득하게 채울 때 그런 교회는 최악입니다. 그것은 절망입니다.
(예화) 선교사 한 분이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가셨다. 선교지에서 영혼들을 위하시다 오신 목사님 이시니까 불붙는 마음으로 설교를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설교를 객관적으로 듣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자기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중이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무엇을 하나? 왜 저렇게 펄펄뛰나? 다혈질인가?’ 그리고 모두 앉아서 ‘미성숙한 것 같아!’ 반쯤 설교를 하시사 갑자기 “기도합시다” 보따리를 주섬주섬 싸 서 걸어나갔다. 부목사님이 뒤에 쫓아가시면서 강사를 안내하는데 강사 혼자 중얼거리는 소 리를 들었다. “아이고 내가 돌멩이들을 놓고 설교하는 게 낫지!”
그러한 냉담함이 하나님이 그들을 큰 심판으로 데려가시기 전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가기 전에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정말 여러분들이 막 나가는 신자가 아니라, 사경회 때에 살펴본 것처럼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마음을 먹으면 우리들이 매주일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수요일 날 나오고, 금요일 날 나오면서 용서를 빌고 새 사람이 되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쳐도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미울 정도로 안 변하는게 인간인데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마음이 굳어져서 어떤 감화, 우리를 향한 어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느낄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면 인간의 삶, 인간 내면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볼 수 있겠습니까? 껍질만 남도 내용은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화)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나라에 돈이 없으니까 군인들 월급을 못 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각하, 군인들이 월급을 안 준다고 불평이 많습니다.” 대통령이 하는 말, “나라를 찾았으면 됐지!”
그런 마음은 대통령 혼자나 뼈저리게 느끼지 다른 사람들은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그 분이 세상 물정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경제가 그렇게 어려워도 일제 치하에서 그렇게 사람들이 조금 더 나은 재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다는 주권을 가지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훨씬 더 낫다라는 지도자의 심정을 피력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정말 우리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을 깊이 알고, 깊이 깨뜨려지는 마음을 늘 갖고 살아도 야속할 정도로 안 변하는 게 인간인데 그런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는 세계가 스톱이 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느낄 수 있는 모든 통로가 모두 차단 돼 보십시오. 인간은 형식만 남겨놓고 급속히 부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군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나라를 되찾은 깊은 감격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 밀려오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향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안타까운 자비의 마음을 ‘하나님 이제는 내가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쳤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모두 다하였습니다. 끝났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가 그런 시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시대와 꼭 같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매우 가까워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디서든지 우리들은 신앙의 감격을 찾아보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교인들이 교회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의 식구들이, 자기네 자녀들이 혹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감격을 느끼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낄 때마다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쓰립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너무나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늘 베풀어주시고 우리들이 늘 받으면서 살아야할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사는 삶이 너무 신기한 모험과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가 메마른 삶을 살아왔다 이겁니다. 그게 저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열렬한 사람들은 가끔 만나는데 정말 진리의 말씀에 자극을 받아서 올바른 하나님의 열심으로 열렬한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그 이유가 인격적인 주님의 사랑에 어찌할 수 없는 신적인 요구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교제에서 비롯되는 따스함이 있는 열심히 아니라, 자기 성취에 취한 열심입니다. 자기가 이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라는 열심, 꼭 그런 자리에 가야지만 비로소 자신의 신앙이 확인되어지는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한없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긍휼의 마음을 잊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오늘날 우리 중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오늘도 여러분, 집에 돌아가서 일주일 동안 생활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일곱 여덟 명을 만나면 그 중에 한 두 명은 믿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놔두고 라도믿는 사람들을 조용히 살펴보십시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나요? 주님 만났나요?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시고 계십니까? 지난주간에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위로를 받으셨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당신의 마음에 다가왔습니까? 인격적인 주님이 당신의 마음에 감화를 주셔서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분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셨습니까?” 물어보십시오.
주님이 계십니까? 주님의 긍휼과 타오르는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그런 긍휼과 하나님의 애끓은 수많은 마음이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교회와 온 땅 가득히 부어져서 강퍅하고 완악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고, 주님의 그런 한없는 자비와 긍휼을 모르고 살았던 지난날들을 회개하며 주님의 참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세상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그런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본질적인 사명에 충실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교회의 존재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그 일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열방중에 비추소서
빛되신 주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한없이 내리고, 예수님의 한쪽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흉악한 강도중 회개한 한 사람같이 일생동안 긍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자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마치 사람을 죽이는 기계처럼, 이웃을 불행하게 하는 기계처럼 살아오던 그 아무 소망이 없는 인간이 칼과 창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던 인간이,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주의 애끓는 자비의 마음을 깨닫고 그 앞에 엎어져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좋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런 세상에 대한 갈망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될 갈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이렇게 모여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우리가 범죄했을 때에는 사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불타는 자비의 마음을 터득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외톨박이가 되며 고난을 받으면서 진리와 함께 외롭게 투쟁하면서 산 사람들은 바로 여기에 모여서 자신이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자기처럼 고난을 받으며 진리를 따라 살고 싶어하는 의로운 전우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한없이 부은바 되어서, 그래서 모였을 때에는 그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쏟아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의 많은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과 하나님의 은혜가 비같이 쏟아지는 것을 경험하고 그런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이 척박한 세상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물되어 흐르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선지자는 이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열성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능하신 일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자비와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자신이 느끼고 있으니까 이렇게 애절하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을 놓고 “형제여 하나님이 당신을 많이 사랑하십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그 사랑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받은 그 사랑을 보면서 저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해 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크신 일과 열성을 낯설게 느껴도 자신은 그런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고 자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 이 놀라운 긍휼, 주의 이 찬란한 자비, 주의 이 눈부신 진리를 하나님 저 뿐만 아니라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패역한 백성들에게 가득히 부어 주시옵소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눈을 조용히 감고 여러분 주위에 여러분의 가족, 사랑하는 친구들, 그리고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도저히 헤어질 수 없는 여러분들의 아내나 남편, 여러분들의 자녀, 더 멀게는 이따금 스치다 만나는 사람들을 그들은 자신의 문제가 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환경의 개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즐거움과 환락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만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피부 색깔이 어떠하든지, 그들의 출신이 어떠하든지, 그들의 학력이 어떠하든지, 그들의 성별이 어떠하든지, 연륜이 어떠하든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열방 중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그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핍절하게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의 가족과 이웃의 영혼 속에 부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깊이 감화를 받을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생명을 얻은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주의 이름을 높이고 살아가는 이때가 정말 우리에게 있어서 기다려지는 때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부흥이 그런 시대에 대한 답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부흥을 구하는 두 근거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63:16)
선지자가 앞 절에서 하나님께 따지듯이 묻고 있습니다. ‘주의 능하신 일과 열성이 어디 있습니까 주의 자비와 긍휼이 그쳤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마치 신문 기자가 자기 눈앞에 있는 사실을 보도하듯이, 하나님께 보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능하신 일들이 그치고 주의 열성이 사라지고 주의 넘치는 긍휼과 그리고 한없는 자비가 없는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능하게 행동하실 때에 드러나는 위대한 구원의 역사, 그런 것들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 표하시던 사랑의 표현, 그런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넘치는 긍휼과 그리고 목 메이는 마음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손을 내미시던 주님의 긍휼이 사라졌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사야에게 묻고 싶은 것은 왜 그렇게 사라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의미에서 지금 책임을 묻고 있는데 사실 하나님이 사라지게 하신 것인가! 그런 능하고 놀라운 역사, 넘치는 긍휼, 넘치는 자비, 이런 것들이 사라진 것이 단지 하나님이 자기의 의무를 태만히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처럼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께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사라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입니다. 어떻게 말하자면 그들이 긍휼이 사라지게 만들었고, 자기가 사라지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능하신 일들을 볼 수 없도록 행동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열성이 사라지게끔 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오늘 하나님께 그 책임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가슴에 와 닿는 게 없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깊이 읽는 비결은 성경을 읽으면서 질문을 많이 던지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지금 이렇게 따지는 것이 옳은가! 이렇게 하나님의 능하신 열성, 긍휼과 자비가 사라진 것이 하나님 한 분이 책임인 것처럼 이렇게 따지는 태도가 정말 옳은가!’ 우리는 결론을 내리기를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이런 행동은 어떻게 보면 건방지고 터무니없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로서는 근거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오늘 우리가 읽은 그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이렇게 나옵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흥을 구하는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이사야의 입장에서 보면 이사야도 이스라엘 백성중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능하신 일과 뛰어난 열성이 사라지게 한 공동체 중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불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호세아서 마지막 14장을 설교한 ‘패역을 고치는 길’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은 부흥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역을 고칠 때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번성하는가 하는 것이 나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열방중에 펼치시고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나타내실 때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이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삶의 개혁을 동반하는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이 없는 곳에는 부흥이 일어난 예가 거의 없습니다. 개혁이 저절로 부흥을 불러오는 것도 아니지만 참된 부흥은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상황을 회고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부흥이 똑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적용을 하면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 주시는데 인간들이 어떤 죄를 저지르고 인위적으로 그 불을 끄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잘못이 없는데 때가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거둬 가시거나 그 부흥을 옮기시는 것이 있습니다. 부흥이라는 자체가 하나님의 비상 간섭입니다. 기도하면 병도 낫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약국과 병원이 모두 문을 받아야 된다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기적으로면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기 걸렸으면 굳이 약을 안먹고 믿음을 시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을 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불신앙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적을 일상 생활에서 늘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좀 다른 데서 기적을 바라시기 바랍니다.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부흥이 왔다가 사라지면 그러면 다시 원위치 아닙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원위치가 아닙니다. 부흥이 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뛰어난 인식과 신앙의 영적인 수준을 높여 주시면 그것을 가지고 이제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최근에 쓴 거룩한 부흥이라는 책의 뒷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책을 읽으시면서 설교를 들으시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부흥에 대해서 인간의 잘못이 없는데 걷어 가시기도 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다 더 많은 경우는 인간들이 스스로 그 부흥의 불을 끄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강하게 역사해서 부흥의 불길들이 일어날 때 청교도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설교자들을 강단에서 축출해 버릴 때 설교를 못하게 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니면 어떤 범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사도행전에 나타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교회가 강력한 역사를 일으키면서 사도행전의 4장에서 부흥이 일어나는데 그 속에서 사람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였습니다. 땅을 판 값의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에 강력한 부흥의 역사가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죄가 정리되고 나니까 다시 강력한 추진력으로 도시를 휩쓸면서 복음이 줄달음질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여기에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그렇기 때문에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지만 그러나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하나님이 한번에 큰 도시에 부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키시는 원리는 우리들이 시골에서 불을 피우는 원리와 같습니다. 아무리 미련한 사람이라도 아궁이에 장작을 잔뜩 쌓아놓고 성냥으로 불을 붙이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은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붙이고 그 위에 큰나무를 올리면서 나중에는 물이 묻은 등걸도 올려놓으면 다 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키시고자 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항상 사람들을 사용해서 그 부흥을 전하는 발화점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런 발화점이 되는 사람들은 그 부흥의 불길이 발화하면서 번져나가는 가운데 사람들이 자기를 다 드리고자 하는 강력한 변화된 마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화점에서 부흥의 불이 닿는 인화물질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완전한 순종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흥의 불길이 번져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뒤집어서 말을 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사라지는 것이 이사야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죄가 없는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부흥을 거두셨다기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각하고 패역한 신앙생활에 대해서 지적을 하다가 지금 이 얘기가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이렇게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주의 능하신 일, 열성, 긍휼과 자비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 한분의 책임인 것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부흥에 있어서 initiative, 부흥의 선도권을 인간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쥐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선지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부흥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신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그 부흥을 일으키는 주최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불타기 좋은 쏘시개가 아무리 모여 있다고 하더라도 불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거기에 한줄기의 불꽃을 던져야만 큰 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처럼 부흥에 있어서 선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선지자가 이렇게 말을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선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려고 마음을 먹으시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부흥이 사라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능하신 일과 그리고 그 찬란한 영광, 은혜와 빛을 사라지게 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이요, 불순종이요, 불신앙이었지만 부흥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선도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누군가를 변화시켜서 그 일을 하시려고 강한 의지를 가지시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밑자락에 깔고 있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이런 호소를 하나님께 해도 그것이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의 역사를 보면 부흥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던 사람들이 부흥이 일어날 만한 상황에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도저히 응답될 수 없을 것 같은 기도를 하는데 그것이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부흥에 있어서 하나님이 선도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일랜드에 얼스터라는 곳에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깡패들이 부흥 집회를 방해하려고 무장을 하고 왔다가 워낙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졸도하는 역사가 일어나서 들것에 실려 나갑니다.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이 역사의 표면을 보면 번쩍번쩍하고 뜻하지 않게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면의 역사 말고 이면의 역사를 보면 항상 그 속에는 도저히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데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해 일곱 명의 사람들이 얼스터에 하나님께서 임해주시기를 오래 전부터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부흥이 임하는 것입니다.
드와이트 무디가 미국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을 때 영국을 자주 건너갑니다. 그래서 영국에 불을 붙이는데 사실 무디는 영국에 강한 불을 붙여주는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영국에 몇 번 왔다갔다하면서 생애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무디는 펄펄 끓는 사람이었는데 영국에 몇 번 왔다갔다하면서 무어하우스나 혹은 캠벨 모건 같은 성경에 탁월하고 박식한 인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설교 세계가 얼마나 정돈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전에는 맨손으로 일을 하다가 호미를 손에 쥐고 땅을 파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라고 할 정도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영국에 와서 레시라고 하는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설교를 하게 됩니다. 설교를 하는데 그 시대에도 무디에 대한 평가가 한결같지 않고 엇갈리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무디를 부릅니다. 거기에서 설교를 하는데 한번의 설교에서 400명이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인들이 모였는데 “오늘 주님을 진짜 영접하실 분들 일어나 보십시오” 하는데 전 교인이 다 일어난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확실한 회심이 없었던 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흥회가 끝났는데 그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자기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계속해서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1주일 동안에 찾아오게 되서 전 교역자들과 사역자들이 교회에 상주하면서 그 사람들을 상담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때에 병에 걸려서 교회를 못 나오고 있는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언니가 와서 “얘야 오늘 나는 놀라운 일을 봤다”, “뭔데?”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어, 너 이번 주에 누가 설교했는지 아니?” 그렇게 질문을 하니까 그 병석에 누워서 외부와 소식이 거의 단절된 자매가 “무디 선생님이 설교하셨지?” 그 당시만 하여도 무디가 그렇게 영국에 유명하게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너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아니?”,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분이 우리 교회 강단에 세우셔서 회심의 역사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 했어” 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표면의 역사를 보면 항상 우연히 일어난 것 같고, 신기하다고 말을 하지만 이면의 역사를 보면 ‘우연히’ 가 아닙니다. ‘필연히’ 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을 묘사하면서 누가가 전심으로 열심히 기도하는데 ‘홀연히 성령이 강림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장을 보면 ‘홀연히’가 아닙니다. 이미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그 사람들이 주님의 지시를 따라 모여서 간절히 전심으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기다리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표면의 역사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우연히’, ‘홀연히’, ‘이상하게도’, ‘신기하게’ 이런 말을 사용하지만 이면의 역사를 보는 사람은 아주 선명한 필연이 연결돼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부흥에 대해서 간절히 탄원하고 기도할 때 어떤 마음이 들었냐 하면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정말 몸부림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눈 앞에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신앙과 태만함 때문에 부흥이 안 올 것이라는 마음이 안듭니다. 반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흥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게 부흥을 위해서 기대하는 부흥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기대하는 부흥의 차이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부흥이 오기 어려운 수많은 이유들만 발견하는데, 정말 부흥을 기도하는 사람은 부흥이 올 수 없는 모든 이유들이 사실은 부흥이 와야 할 이유라고 하는 것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능하실 일들이 그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해서 그쳤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열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에 식었다. 식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양식이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가난한 마음으로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긍휼이 사라졌다. 그리고 주님의 신실하신 자비를 죄 가운데서라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그대로 있고 하나님의 자비의 흔적도 없어졌다.’ 이사야 선지자의 마음은 그렇기 때문에 부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일이 사라져도 사라진 줄을 모르고 주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이 방종한 신앙의 상태가 되었는데도 그 사랑이 사라진 줄을 모르고 긍휼과 자비가 필요한데도 자기의 힘으로 넉넉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찼기 때문에 그것이 부흥을 사라지게도 만들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부흥이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능하신 일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라진 긍휼과 자비와 열성에 대한 사모함을 갖게끔 만들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참 심오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번이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진 바 마음을 가지고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 본 사람들은 이런 진리가 결코 심오하고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기도를 하는데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렇게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처럼 호소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첫째는 부흥에 있어서 선도권을 그래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고, 그리고 두 번째가 오늘 성경에 나온 것처럼 그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게 ‘아버지시라’입니다. 선지자가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라고 말하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다. “키 아타 아비누” 이렇게 나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키, 왜냐 하면 아타, 당신은 아비누, 우리의 한 아버지 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와 당신은 어떻게 다릅니까? 주는 히브리 성경에서 아도나이나 혹은 야웨를 번역할 때 쓴 것인데 히브리 성경이 훨씬 더 친밀하다는 것입니다. 아타는 통상적으로 통용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의 YOU입니다. You are our father. 당신은 우리의 한 아버지 이십니다. 라는 얘기입니다. 일상적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뉘앙스를 주느냐 하면 지금 이 선지자는 하나님을 인간이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아주 친밀한 가족 관계에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호와를 그렇게 느끼면서 부르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라는 말자체가 가족 관계가 아니고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 적으로 영적인 아버지의 의미로서 부르기도 하지만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가족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라는 말보다는 ‘당신’이라는 말이 맞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당신’이라는 말이 높임말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하기 어려워서 ‘주’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가 짧은 이 구절에서 두 번이 반복됩니다. 앞에 나오고 뒤에 나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 지라도”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외심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적인 자신들의 시조라고 보는 것입니다. 앞에까지는 공통적인 것이고 아브라함부터가 많은 열방 가운데서 자신들이 선민이 된 뿌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에 대한 자부심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 지라도” 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야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언약의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을 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않을 지라도” 이 말이 우리에게는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사람들의 문맥에서처럼 가슴에 깊이 와 닿을 수 있도록 적용할 수 있는 그러한 인물이, 그러한 대상이 우리에게는 별로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구원하시는 순간에 그 사람이 구원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라는 말로 선언을 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말과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치입니다. 심지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얘기에서 하나님이 계신 천국, 거기와 통하는 낙원에 가 있는 상태를 표현하기를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러한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단순히 천국 낙원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보다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표현을 하면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훨씬 더 호소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아브라함이 모른다 라고 했는데 ‘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이 안 난다는 정도가 아니라 경험상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창세기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려고 천사들이 롯에게 방문했을 때 백성들이 덤벼들면서 “그 사람들을 내 놔라 우리가 상관하겠다” 여기에서 상관이라고 하는 것은 성적인 접촉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성애가 얼마나 심했는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 때에 롯이 하는 얘기가 “내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는데 그 사람들 대신 내 딸을 마음대로 해라” 그때에 쓰여진 단어가 모른다라는 단어입니다. 처녀가 남자를 모른다는 얘기는 지적으로 남자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어떤 남자와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는 그런 것입니다. 여기에 쓰여진 단어가 그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이스라엘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 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가 그런 끈끈한 핏줄로 이어진 관계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탁월한 약속관계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우리를 모른다고 말하고 이스라엘이 우리를 인정치 않는 것도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 있을 수 없는 일보다도 더 뛰어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아버지시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쪼개어져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관계에 기초해서 내가 하나님 한 분 홀로 이 부흥이 없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시오’ 라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방지거나 분수에 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믿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단수로 나오고 ‘우리’는 복수로 나옵니다. 여러분, ‘아버지’를 부르면 가슴에 와 닿는 게 많습니까? 앙케이트가 나왔는데 젊은이들 70%가 아버지가 싫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를 저주한다. 증오한다. 매일 아버지를 죽이는 꿈을 꾼다’라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로 가슴에 가지고 있는 수많은 한과 상처의 상당 부분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이렇게 말해서는 우리의 가슴에 안 와 닿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슴에 와 닿으려면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셔야 되냐 하면,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사상에서 안방에 폼잡고 앉아서 담뱃대를 두들기며 폼잡는 아버지는 성경이 얘기하는 아버지와는 다르기 때문에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런 엄격함만이 아닙니다.
성경을 정직하게 보면서 성경이 그려내려고 하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 라는 것을 볼 때에 제가 확실히 알 수 있는 바는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아버지, 가난해도 체면을 구기지 않는 아버지’ 그런 식의 유교에서 그려내는 아버지는 아닙니다. 우리들이 흔히 아는 아버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에서 그려내는 아버지는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는 이상적인 아버지와 이상적인 어머니, 즉 모성과 부성이 결합된 아버지입니다. 가슴에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6절부터 보겠습니다.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런 고백을 스스로 할 때에 인생 완전한 밑바닥에서 지금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체가 오해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많이 얻고 그것을 아버지 앞에 잘 호소하고 진심을 고백하면 아버지가 자기에게 최선을 다해서 해 주실 것이 있는데 아마 품꾼 중에 하나정도로 자기를 써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몰랐기 때문에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해서 아버지를 떠나서 허랑 방탕한 길을 간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지식이 엄청나게 삐뚤어진 인생을 살게끔 만든 것입니다.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 때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어떤 아버지였습니까? 다음을 보겠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런 생각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돌아가기로 결심을 한 것은 아들이 먼저 했는데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발견을 했지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보고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 ‘보고’ 그때 받은 느낌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했습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다음에 ‘아들이 가로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진심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리고 어떤 사본에는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나옵니다. 그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했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의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얘야 그런 것이 아니다. 네가 어떻게 품꾼이 될 수 있겠느냐?”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대해서 상대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가지고 와라 가락지를 끼워라 신을 신겨라 송아지를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는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우리 즐거워하자’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몇 년만에 와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펑펑 울면서 아버지를 만나면 그 말을 하려고 되지 우리간에서 준비를 하고 와서 그것을 처음 토해 냈는데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서 대꾸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까? ‘나 아버지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가 없단다’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품꾼 중에 하나로 나를 써 달라고 했는데 나 아버지는 너와 그런 관계를 아무리 맺으려고 노력을 해도 맺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말은 자기가 들어줄 가치조차도 없는 말입니다. 있을 수 없는 그 얘기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측은히 여기시는 장면입니다. 이 측은히 여긴다는 말 한마디 속에 이미 그가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오만 방자하게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치고 유산을 나누어 가지고 간 그 소행이나, 먼 곳에서 소식한번 전하지 않고 무심했던 죄나, 허랑 방탕하면서 여러 가지 죄를 지은 일이나, 가산을 모두 탕진한 것이나, 몸에 병까지 얻어서 돌아온 것이나 모든 것들이 이 측은히 여기시는 그 마음 하나에 다 덮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나라 사회에서 가정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이런 그림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스스로 통용되는 ‘아버지’라는 말을 떠올릴 때의 그림은 이러한 아가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좋은 어머니 쪽에 더 가깝습니다. 확실히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 속에서 그리고 있는 아버지의 그림과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아버지의 그림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요’라고 두 번 반복되는 이 말이 그렇게 이해하기 쉬운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깊이 가슴에 와 닿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시거나 아니면 가정을 버리고 도망가 버린 그의 자식들이 찬송가 ‘어머님의 넓은 사랑 놀랍고도 고마워’ 그 찬송을 부를 때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자기에게 상처를 주고 사라져 버렸는데 가슴에 와 닿겠습니까? 그것을 어디에서 발견하느냐 하면 하나님에게서 신기하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던 끝에 ‘미움과 용서’시리즈에서 한 얘기는 사람 속에는 아무 사랑이나 꽉 차면 OK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려서는 엄마 아빠의 사랑이, 커서는 동기간의 사랑이, 또 남편이나 아내의 사랑이, 더 커서는 자식들로부터 받는 사랑이 이 사랑들이 다 박스가 따로 있습니다. 그게 골고루 다 채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온 전한 인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도 안 채워지는 사람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엄마 아빠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아서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상상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랑하는 여성이 넘치도록 뜨거운 사랑을 받아도 이 부모의 사랑이 채워지지 않는 것 때문에 훼손 된 인성이 회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아도 나머지를 모두 다 해소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다 해소할 수 있는 대체될 수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는 추가적으로 어떤 사랑을 받음으로서 해결된다기 보다는 그 사랑 받지 못한 것을 인해서 굽어진 인성과 모든 패역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모두 넘쳐나면서 그런 것들이 더 이상 하나님과의 충만한 사랑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못 받은 것, 아내로부터 사랑을 못 받은 것이 그의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지 않게끔 사람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로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은가 봅니다. 그런 상처가 많기 때문에 어떤 사랑의 강한 결핍을 느끼면서 본성적으로 누구도 그런 사랑을 해주지 않으니까 받을 수 없으니까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때 그 사랑에 깊이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망가진 사람이 예수를 믿고 고침을 받으면 정말 훌륭하게 불꽃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아버지’라는 명사에 대해서 아는 것은 너무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았던 이사야의 경우에는 달랐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아버지의 사랑, 그 아버지의 성품에 대한 탁월하고 깊은 이해를 가지고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치하게 맞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사고는 우리가 쳤고 일은 우리가 저질렀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그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하신 일이 사라진 것이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 뜨거운 열성이 사라진 것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지 않으려는 이스라엘의 패역 때문입니다. 긍휼과 하나님의 자비가 그친 것도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입니다. 그래도 남아있는 관계가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닙니까?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 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부흥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과격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쓴 책 가운데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라는 책이 있고 다음에 나온 책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 인데 출판사의 얘기가 독자들이 전화하기를 “그 사람이 어떻게 이런 류의 책을 쓸 수 있습니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대답도 부흥입니다. 인간들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결이 뭡니까?
인애와 긍휼을 열방중에 부으소서
그냥 아무리 말해도 모르는 그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홍수를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 물에 떠내려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도록, 마치 둘이 논쟁하면서 “비가 오네!” “아니야 이게 무슨 비야?” “아니야 비야” “무슨 비야 하늘이 저렇게 청정한데”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젖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긍휼과 은혜를 열방중에 부으시면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이 많았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벌리고 더 이상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주제를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랑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 감정 자체가 통속적이 삼류 감정에 그치는 감정이 신앙에 있어서 그런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유일한 대안이 부흥이다라고 하는 것을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책을 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관계를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버리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보여주는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성경 16절에 대한 해설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이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부흥에 있어서 인이셔티브를 쥐고 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는 그분을 버려도 그분은 우리를 버리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 그 관계가 염치없이 부흥을 간절하게 구하는 그런 기반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죄 가운데 있고, 여러분들이 여태껏 살아온 삶이 엉망진창인 삶이었다고 하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살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 고백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냐?”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도 마귀가 했던 시험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해봐라” 가정법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호소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믿음의 기초가 되어서 자기의 분수에 넘치는 무엇을 구할 때 그것은 하나님 앞에 뻔뻔스러운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불려지는 간구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9.하나님의 구속 행동과 부흥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 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 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 63:16下)
부흥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이 선지자는 마치 이 땅이 모두 황무하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라지고, 주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이 사라져간 이 현실이 마치 주님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이었냐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 라고 하는 것 그것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께 부흥을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의 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지난 시간 뭐에 대해서 한시간 내내 설명했습니까? 누구에 대해서 한시간 내내 설명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 그래서 하여튼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그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려고 애를 쓴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에 이 지적했던 아버지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만날 때에는 우리들이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이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들어가면 안되고, 물론,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아주 드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러느냐? 세례요한이 출생하기 전에 그 세례요한이 오면 그가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천사가 예언을 했는데,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겠으며’ 그랬습니다. 그걸 가리켜서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와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이키고, 이스라엘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킨다했는데, 전혀,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한 시대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 타락과 참된 아버지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을 보여주냐 하면, 세례요한이 그 어두운 세상에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왔을 때, 그 세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가정의 참된 도덕이 무너지고, 제대로 된 아버지, 제대로 된 아들, 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최종적으로 남아있어야 할 이 관계조차 옛 사람들에 의하면, 천륜조차 파괴되어버린 그 황폐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요한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서 참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게 하면, 그 인륜지도가 다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풍부하게 이 아버지의 참된 모습이 이런 부흥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근엄하기만 하고, 큰소리만 치고, 담뱃대나 툭툭털고, 몽둥이로 때려주기나 하는 그런 근엄하고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이지만은 아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예수님이 정말 그림처럼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였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의 핵심은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시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가에 대해서 장시간 설명을 했더니 여러분이 알아듣는 눈빛이었습니다.
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추리를 해서라도 성경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참된 것을 찾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보면은 뭘 모르는 무지한 상태도 방해가 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잘못 알고 있는 선입견이 성경을 읽는데 더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면, ‘아, 그렇구나’라고 알게됩니다. 그런데 잘못 알거나, 착각을 하고 있거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최고인 것처럼 붙들고 있는 그런 잘못된 지식이나, 선입관, 관념들이 성경을 읽을 때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처음 신앙 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러면은 제대로 된 것이 쫙 들어가면 잘못된 게 들어오면 금방 압니다. ‘아, 이게 가짜구나’ 금방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것을 먼저 배워야합니다. 근데, 어째든 그런 저의 논리가 지난 시간의 우리들이 상당히 긴 말씀을 통해서 확실히 그렇겠구나 ‘아버지’ 하나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예요. 그런 오해의 껍질들을 다 벗겨놓고 보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속살이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보고 나니까 진짜 우리가 다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아버지-’그러면 실제로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그 아들을 기다리시는 그 측은히 여기시는 그리고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발견하고 그를 용서하고 그를 영원히 자기의 아들의 자리에서 옮기지 않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다가 이해가 안 될 것 같아서 제가 뭐라했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아버지는 어머니와 약간 썩긴 아버지다 그렇게 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근데, 이제 여기까지가 지난주 내용이고, 오늘은 선지자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하면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며 경외하지 않게 하십니까?”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자기들이 마음을 강퍅케 하고 하나님께 대들었는데, 선지자는 “왜, 하나님 그렇게 하셨습니까?“ 자기네들이 떠나갔지 하나님이 언제 떠나가라고 가르쳐 줬습니까? 자기네들이 떠나고 나서 ”하나님, 왜,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게 내버려두셨습니까? 그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제넘은 발언이 아니라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 기초가 무엇이냐고 하면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이 선지자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부흥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때마다 아주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두 가지 관계를 디딤돌로 해서 팍팍 밟고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있는데 그 탁탁 딛는 디딤돌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는 아버지이고 하나는 구속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는 조금 다르게 나옵니다. ‘하셨거늘’이라는 말이 없고 ‘메올람’ 영원으로부터 ‘쉐메카’ 당신의 이름은 ‘고알라누’ 우리의 구속자 이십니다. 구속자는 하나고 우리는 복수입니다. 그래서 ‘고알라누 메올람 쉐메카’ 당신의 이름은 영원으로부터 우리의 구속자였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당신의 이름은 영원부터 영원히 오래 전부터 우리의 구속자였습니다.
근데 이 구속자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흔히 쓰는 구속이라는 말은 경찰서에 들어가는 것을 구속이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구속이라는 말이 하도 많이 나오니까 “성경에는 잡혀 들어가는 사람이 왜 그리 많습니까?” 그런데 그 구속이 아닙니다. 그 구속은 ‘잡는다’ 의미의 ‘구’와 ‘묶는다’ 의미의 ‘속’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구속은 ‘구한다’라는 의미의 ‘구’와 ‘속량한다’ 다시 말해서 ‘대가를 지불하고 그를 건져준다’는 의미의 구속입니다. 그러니까 다릅니다.
그럼 구속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이렇게 가르쳐 줄 기회가 흔치 않을 것입니다. 잘 가르쳐 줄 테니까 성경을 읽을 때, ‘구속’ 그러면 아 이게 그런 의미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 ‘구속한다’ 라고 하는 의미는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로 쓰입니다. 두 단어가 쓰이는데, 하나는 ‘파다’라는 단어와 ‘가알’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구속한다라는 말이 대게 어떤 때 쓰이냐면, 물질이나 돈을 가지고 그것이 아니면은 생명을 빼앗기게 되었는데, 그 물질이나 돈을 가지고 생명을 구하는 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은 레위기에 보면 그런 것이 많이 나오는데, 민수기에도 나옵니다. 출애굽기에도 나오고....그게 뭐냐 하면 특별히 민법에 나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살아가는 규례를 정한 그 민법에 나오는데, 어떤 것이냐 하면,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사람을 받기를 좋아하는 소를 그대로 풀어놓아서 그 소가 사람들 죽였을 때 그 사람은 죽게 되었는데, 가족이나 친구가 물질이나 돈을 내 줘서 목숨을 구해내는 것, 또 하나,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구속의 개념인데 여러가지 상황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는데 엄마도 없고 친척도 없을 때 그 노예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노예를 돈을 사서 구출해 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아무리 먼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혈족관계 속에서 보호하는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구속해야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구속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이사야에서 전반적으로 풍부하게 쓰이는 이 구속자라는 개념은 앞에 것이 아니라 뒤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굉장한 빛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따지듯이 대들듯이 그렇게 하나님이 마치 의무를 회피한 분처럼 ’왜, 우리를 내버려 둡니까? 왜, 이 땅을 이렇게 내버려 두십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이렇게 되도록 버려 두셨습니까라고 따지는 그것은 결국 무엇을 기초로 하고 있느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백성으로 딱 택하셨을 그때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아까 말씀드린 구속받는 자와 구속자와의 그런 관계로 하나님이 스스로 정하시고 자기를 그 의무에 묶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의 심정 속에서는 이런 그림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주님이 우리에게 ‘너에게 가장 가까운 인척이 만약에 노예로 팔리거나 빚때문에 다른 사람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는 상황이 되면은 니가 최고로 가까운 인척이니까 너는 가서 저 사람을 물질로 사서 구해서 자유하게 만들어 주라’는 의무를 우리에게 주님께서 부여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까? 하나님, 이스라엘 야곱입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 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인척이라는 사실을 하나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비록 우리의 죄,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우리 스스로 타락해서 이렇게 갔다 하더라도 ”너희들이 잘못했으니까 어쩔 수 없다” 하나님,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그건 하나님의 성품하고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러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할려고 해도 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조금도 자기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매달리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분수를 모른다든지 건방지다든지 그런 자의식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 배경에 대한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 성경을 볼 때는 “야, 이 친구 그래도 사람인데, 이렇게 하나님을 몰아세울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은 그러나 이 선지자 뒤에는 그런 아주 든든한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분은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호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어떻게 같은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의 백성 중에 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지금의 이스라엘의 백성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을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이름이 온 땅에 충만 나타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경외심을 가진 그런 불붙는 신앙심을 가진 열정있는 영광의 선지자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기도 안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성경에서는 선지자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도 진짜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은 전부 이런 식으로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랬습니까? 모세도 그랬던 것입니다. 모세도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해서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면 “너무 과하다. 어떻게 이렇게 불경스럽게 하나님께 몰아붙이듯이 매달릴 수 있을까?” 그게 불경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처절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러한 관계들을 하나님이 스스로 맺으셨기 떄문에 선지자가 이렇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이 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은 가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시면서 이런 사상을 확정시켜주시는 경우를 성경에서 종종 봅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시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내 이름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 맹세할 때에는.. 그럴 수 는 없습니다. “자, 내가 맹세할 수 있어” 무슨 맹세? “강아지의 명예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맹세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아, 맹세할 수 있어 우리아버지가 보증 서 주시면 할 수 있어”이렇게 할 수 는 있습니다. 물론, 그래도 그 아버지가 사회적인 지위가 있어야지 재떨이만 털고 있는 아버지는 말발이 안 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높이 걸 이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내가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끝입니다. 하나님이 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 믿으니까 믿음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더 하나님이 하신 행동 가운데 눈길을 끄는 행동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셔서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이 땅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해 주시겠다.” 이렇게 말씀 해 주시고 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백성의 실제적인 시조로써 택하고 나서 하나님이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오냐 하면, 한번 찾아볼까요? 창15장을 찾아봅시다. 제가 빨리 읽을 테니까 한번 눈여겨보세요 아주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15장 1절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이 말이 진실이다라고 하는 증거를 보여 주시는데, 그게 뭐냐하면, 짐승을 쪼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볼 수 없고, 귀신도 볼 수 없습니다. 영이니까. 근데, 이제 하나님이 매개체를 뭔가 자기의 임재로 어떤 매개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불입니다. 그 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확” 지나가는 것입니다.
근데, 이 광경이 굉장히 의미 깊은 광경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있을 수 없는 광경이라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연출 될 수 없는 광경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 고대 근동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항상 무슨 의식과 관련이 있냐하면 약속을 함께 맺는 그 약속 체결의식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두 나라가 예를 들면, 함께 싸우다가 두 나라가 화해를 하고, 다시 안 싸우기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혹은 또, 어떤 왕이 자기 신하를 임명을 하면서 땅을 때어 주면서 그 땅의 주인으로 삼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너를 보호하고 너는 나에게 충성을 다하라” 이렇게 약속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문서를 작성합니다. 그 시대도 다 글이 있었으니까. 작성한 다음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문화가 그런 문화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때는 성경 속의 민족이라는 그런 것이 없었고 그냥 메소포타미아의 발달한 사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그 시대의 문명인 중에 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지를 알리고 이해시키게 하려면 그가 살고 있는 그 시대의 문맥을 가지고 말씀하셔야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한국에서 열심히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한국말로 대답을 하시더니 미국에서 오래 이민생활을 하고 나니까 영어로 대답을 해 주시더라”고..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제 약속하시는데..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짐승을 쪼개라” 그 때 벌써 아브라함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짐승을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 이게 하나님이 나하고 같이 약속을 굳게 지키겠다고 나하고 맹세를 하시는 것이구나.” 서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짐승들을 쪼개놓고, 약속을 맺은 당사자가 그 문서를 들고, 그리고 그 황소가 쪼개진 그 사이를 같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소를 몇 마리 쪼개서 반 딱 갈라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이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피 범벅입니다. 그 피범벅이 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둘이서. 얼마나 무시무시하겠습니까? 이 만한 소가 머리부터 반씩 쪼개져서 있고, 거기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 많은 사람들이 증인을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서약을 맺고 그 문서를 하나씩 나눠 가지고 또 하나는 신당에다 보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뭘 확인하는 것입니까? 우리 둘 중에 누군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 짐승이 쪼개진 것 처럼 그런 저주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누가 저주하겠습니까? 말이 됩니까? 근데, 하나님이 그렇게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실 필요 없었지만 그렇게 보여주면 아브라함이 지금 자기에게 찾아 오셔서 예전에 잘 알지 못하던 어떤 여호와라는 신이 자기에게 찾아오셔서 자기를 불러주시고, 자기에게 믿음을 주시면서 자기와 한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실 지를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확고한 믿음을 심어주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얼마나 우리가 믿음을 갖기를 원하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관계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를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그렇게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 관계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그런 관계를 기초를 해서 이 선지자 생각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 두셔서는 안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려고 하면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려고 하면 우리의 마음에 큰 변화를 주시고 부흥을 주셔서라도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사랑하게끔 만드셔야하는 그런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근데, 왜 하나님이 이일을 우리를 위해 안 해 주십니까? 우리의 기도가 부족합니까? 그러면 우리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 부족합니까? 제가 매달리겠습니다. 그러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장면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속입니다. 그리고 그런 구속은 지금 말씀드린 그런 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선지자는 우리에게 부흥을 주셔서 하나님 백성다운 사람들도 만들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세번째로 넘어가서 그러면 구원이 주는 대표적인 구속의 행동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속자이다 라고 말 할 때, 그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결국 구약 속으로 역사가 쭉 진척되면서, 이 구속이라는 단어가 쭉 사용될 때 결국은 아까 말씀드린 것들을 배경으로 가지면서 결국 구속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시는 구원자이시다라는 말과 아주 유사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구속자라는 그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와 그런 관계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출해 주시는데, 그것이 구속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떄 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베푸신 그런 구속행동 구원행동의 대표적인 사례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뭐냐하면 출애굽사건이고, 또 하나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사건입니다. 그 두 가지가 영원히 기념될 구약에서의 대표적인 구속사건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친족이 친족을 구속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치하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그들을 건져내시기 위해서 주님이 무슨 댓가를 지불하셨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무슨 대가를 지불하셨습니까? 없습니다. 그 대신 그 사이에서 보이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죄 없이 죽어간 수 많은 어린양들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열 번째 재앙에서 모든 처음 새끼들이 죽게 되어있고, 사람도 마찬가지고 육축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알려주십니다. 천사가 와서 알려줍니다. 그래서 양을 잡고 그 피를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은 넘어 갈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해서 죄 없는 애꿎은 양들이 죽어가는 장면은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을 하나님이 희생을 치루면서 양을 대신 죽이셨다고 말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결국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구속이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구약 성경속으로 들어오다 보면 이제는 하나님이 그런 관계를 가진 백성들을 위해서 행하시는 그 기념비적인 강력한 구원 행동을 구속이라고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것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실 큰 구속을 내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그 어린 양들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는 하나님이 예수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분명히 대가를 지불하시고 사신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해 내신것도 마찬가지이죠. 어떤 희생을 치루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칙령을 내리게 하시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한 자유는 아니지만 고토로 돌아가서 성을 다시 쌓고,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놀라운 역사적인 행동을 취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약의 역사에서는 기념비적으로 남을 만한 국가적인 위대한 구속행동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제국의 식민지 치하에 있을 때 그런 구약에 나타난 두번의 그 기념비적인 구속행동을 이번에도 해 주셔서 그래서 이 로마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리라고 하는 기대를 대부분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이제 착각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나라는 육신적인 번영과 회복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서 걸립되는 그런 영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왕국이라는 것 그것을 바라본 것이 구약에 나타난 그런 구속행동이었다 라는 것 그것까지 미쳐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은. 대충 이해가 가시죠.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그런 구속의 행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 내셨는데, 그 구속행동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구속자 혹은 구속주 구속자는 그런 행동을 하신 분이시고, 구속주는 그런 구속 행동을 하신 분에 대한 신앙 고백이 함께 묻어있는 것입니다. 구속하셔서 구속하신 분이시므로 우리가 그분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신앙고백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구속행동을 상기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뭘 인식하냐 하면 두 가지를 인식하는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그런 구속행동을 하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끊을 수 없다. 이것이 첫째고, 두 번째는 하나님앞에서 그런 구속의 은혜를 입은 백성답게 살아드려야 한다. 이 두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신 것을 회상할 때마다 항상 어떻게? 감격이 일어나면서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헌신을 다짐하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매우 특별하고 이 세상 어느 민족과도 하나님이 그런 관계를 맺으신 적이 없다. 그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행동이 낭송되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백성들이 아멘하고, 그리고 다음에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당신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라는 헌신의 고백이 이제 우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사이에 구속관계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이렇게 점층적으로 확인하면서 호소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다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외에 우리가 우리를 구속해 줄 관계에 있는 우리의 친척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이시지 않습니까? 우리를 이렇게 내버려 두셔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이 아니면 누가 우리를 구속해 주겠습니까?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주님이 우리를 박대하실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내게 있어서 그러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호소하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그분이 우리의 구속자라 이 사실을 선지자가 고백함으로써 뭐를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확신시켜주는 가 하면은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찬송하고 그분을 경외하면서 살아야한다. 그렇게 안 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삶이 아니다. 그런 삶을 여태까지 살았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을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더 안타까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건져 내셔야할 이유가 있으시고 우리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백성들인데, 근데 이 백성들이 자기의 기도와는 상관없이 타락하고 강퍅하고 제멋대로 가는데 이 백성들이 자기의 힘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이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피가 터지도록 호소하고 몸부림치면서 매달리고 그렇게 간절히 생명을 걸고 외치지만 아무래도 이 백성들이 돌아올 것 같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돌아와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버려 두십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선지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중보의 영속에서 산 사람들입니다. 흔히들 우리들은 간단하게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고 제사장은 백성들 편에 선 사람이라는 그건 기계적인 생각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부흥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경험 해 보면은 그 부흥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지자의 영성과 제사장의 영성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리고 그 놀라운 사랑을 지금도 내 안에 베풀고 계신 그 사랑을 이 백성들에게도 이렇게 베풀고 계신데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그런 참된 사랑을 모른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짐승처럼 살고 불순종하고 죄의 길을 걸어가고 자기 마음대로 방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그들의 삶을 볼 때마다 울분이 터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데, 그런 사랑도 모르고 그런 은혜도 모르고 막 그렇게 살아가느냐! 그러니까 나와 가지고 어느 날 막 불타는 가슴을 가지고 이 나쁜 놈들아 너희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냐! 하나님이 어떤 놀라운 은혜를 주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너희를 가만 두실 것 같으냐! 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이 무지막지한 인간들아! 그러면서 막 강하게 토로하는 것입니다. 나귀도 자기 구유를 알고 소와 말도 자기의 주인을 알아보는데, 어떻게 너희를 살리려고 구속의 그 놀라운 행동을 가지고 이곳까지 인도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을 너희들이 몰라 볼 수 있는가! 막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런 선지자들의 마음속에 이런 부흥에 대한 갈망이 타오르고 막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할 때 막 과격한 말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사야도 그런 사람이었고, 세례요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요즘 말로 하면, “이 개새끼들아!” 그런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 당시의 문맥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야비한 욕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타오르는 열심이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만 있으면 막 욕을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터지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막 외치고, 누구 볼 땐 막 제사장들이 타락하고 선지자들이 야비하게 타락하고 정권과 결탁하고 왕들이 자기 나라인 것처럼 그렇게 다스리고 돈 사람들이 가난한 자 박해하고 율법도 안 지키기고 막 그러고 살아가니까 이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어떻게 이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러면 막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죽하면 뭘 호소해요? 어떤 때는 가슴이 하도 아프니까 하나님, 왜 참으세요? 오셔서 그냥 싹 쓰러버리시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한번 이 믿지 않는 이 더러운 인간들에게 한번 보여달라고 막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근데, 딱 돌아서요. 그러고 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자기 백성들을 생각합니다. 막 가슴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이 백성들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저렇게 살아가지만 전혀 행복할 수 없는 인간들인데. 주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받고, 하나님과 지극히 화목한 관계 속에서 주님의 마음에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고임을 많이 받으며, 그렇게 고귀하고 값지게 살아갈 수 있는 그렇게 살도록 부름 받은 인간들이 저렇게 밖에 살아가지 못하고 무지와 어둠 속에 깊이 갇혀있고, 아무도 저 인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이 선지자는 제사장의 복 받히는 설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일 때는 그냥 그들을 탄핵하면서 외치지만 돌아서서는 자기도 그 백성 중에 하나입니다. 그 연약한 이스라엘 양떼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보니까 정말 저 백성들이 그 중에는 악하게 마음을 품고 주님을 떠난 백성들도 있지만 그러나 정말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목자인 줄 알고 따라간 그 불쌍한 양떼들도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깊이 돌아서서는 통곡하는 제사장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순간에는 뭐가 보이냐 하면 선지자의 마음속에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 하나님이 아버지인데 고아와 같이 버려져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타오는 열망과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함께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흥을 구하던 이 선지자들의 처절한 이 영성의 깊이는 그렇게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과 그리고 이 백성들에 대한 그 주체할 수 없는 아가페의 사랑 사이에서 견딜 수 없도록 고통을 받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마음도 있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불쌍한 인간들의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갈망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있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서 막 텐션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들에게 의해서 계승되어져야하는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잘 하십니다. 최곱니다. 대한민국에서 당신 같은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교회집사는 다른 교회 목사보다 훨씬 낫죠. 우리교회 주일 학교는 다른 교회 장년보다 훨씬 낫죠. 아 대단하십니다. 주일날 십 분밖에 지각 안 하는 교인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렇죠. 죄가 어디 있습니다. 다 상처죠. 다 불쌍한 거죠... 그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구하는 이 선지자의 영성으로는 그런 식의 교회의 모습이 이해가 안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와 가지고서는 일 주일 내내 교인들을 위해서는 기도도 안하고 눈물도 안 흘리고서는 다 잡아죽일 듯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어떤 얘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 교회가서 맨날 욕만 먹어“그랬다는 겁니다. 올라가서는 막 이 잡듯이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아, 더 잡았어야했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설교자들이 가져야 될 영적인 퀄리티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가져야 하는 마음이 이런 마음인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믿는 자여 어이할꼬“ 그런 마음도 갖고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그 두 영성이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자기 남편이 예수를 안 믿음, 그 남편을 ”그 인간은 하 돌아오지않는다..“ 당신이 그 인간을 인간으로 생각하는 동안에 그 인간이 인간으로 돌아오는지 우리 인간들이 한 번 지켜봅시다.
그것은 이런 성경의 정신을 이해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영성으로써는 결함이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요, 때로는 정말 가정에게 주신 은혜가 큰데, 저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를 하나님, 정말 말로해서 안되면 세게는 말고 한 번 툭 쳐서라도 돌아오게 해 주십시요. 그렇게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나서 돌아서서 한 번 보고서는 그렇게 불쌍해서 영혼으로 보여서...........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선지자의 영성이 우리 자신들에게 계승되어져야 할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이 선지자의 이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할 수 도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이렇게도 호소해야되고, 저쪽에도 호소해야되는 자기는 중간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이 처절하고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알겠냐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향해서는 배신감을 느끼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느껴야하고, 그러면서도 자기는 어느 편에 설 수 도 없고, 그 사이에 서서 그 호소하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그것을 이해하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이렇게 호소하지만 사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맺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구나 정말 그 하나님이 진짜 우리의 진정한 구속주라는 사실을 오늘 이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도 이 구약에 나타난 이러한 구속행동을 보면서 그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속자이고,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백성을 버려서도 안되고 이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도 하나님이 부흥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니까, 찾아오셔서 강퍅한 백성들은 녹이시고 무지한 백성들은 깨우치시고 패역한 백성들은 치료하시고 그래서 돌이켜서 결국은 그래도 이 백성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 이 선지자의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선지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속의 성취를 본 사람들입니다. 이 때는 십자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봅니다. 이러한 애절한 선지자의 처절한 몸부림이 섞인 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이 죄에서 우리를 영원히 건져내시려고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내려보내신 것입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비참한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기를 그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자기의 아들을 비참하게 죽이시면서 까지 우리를 이 바벨론의 압제나 애굽의 압제와는 비교가 되지않는 그 죄로부터의 숙명적인 노예의 상태로부터 우리를 건져내 주시고 해방 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이 모든 세상을 위해 베푸셨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이 놀라운 사랑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체우지 못하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선지자는 구속을 꿈꾸고 바라보았지만 우리는 그 구속을 경험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으로 구속하였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의 구석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주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이 놀라운 사랑이 스며들어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구원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시고 원하시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구원의 역사가 불길처럼 번져나가는 것이 선교의 역사인데, 근데, 불길이 번져갈 때 황무지로 번져가지는 않습니다. 항상 떌감이 있는 곳을 타고 불길이 번져가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와 대적해서 갈멜산에 섯을 때 하나님의 불이 언제 내렸습니까? 장작을 쌓아놓고 물을 붓고 그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큰 불이 내렸던 것입니다. 불을 내리는 것은 우리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간이 아닙니다. 부흥을 불러오는 것은 우리들이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북 치고 꽹가리 친다고 해서 부흥이 오는 거 아니고 통성기도 한다고 부흥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을 우리가 오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의하면 그런 부흥이 하나님께만 속해 있지만 그런 부흥이 어디에 떨어지는지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 장작이 있는 곳에 불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 제사장의 영성에 선지자의 이 처절한 맨탈리티를 가지고 그리고 이 백성들에게 나아가 호소하고 하나님 앞에 와서 매달리고, 하나님 앞에 와서 약속 붙들고 매달리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갔던 선지자처럼 하나님을 거스리고 주께로 돌아오지 않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의 백성들에게 매달리면서 어찌하든지 그들 가운데 참된 하나님을 경외의 정신이 불 붙붓 일어나도록 간절히 호소해야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일시에 그런 불들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길같이 일어나서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의의 길을 걸어가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 불붙는 사람들로 일시에 일어서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한 두 사람들을 전도하고 성경을 가르쳐 준다고 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부흥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부흥은 특별한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흥이 있는 날보다는 교회 역사 속에서는 부흥이 없는 날이 훨씬 더 많습니다. 부흥이 없는 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해야됩니다. 우리들이 한번 설교해서 수많은 사람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세기적인 능력이 없어도 설교해야됩니다.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뒤집어지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도 그래도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급격한 열심이 없어도 그렇게 해야합니다. 열심히 전도해서 수십 만장을 뿌려서 몇명밖에 구원을 못해도 선교사역에 열심히 헌금을 하고 기도를 해 줬더니 일년에 두 명밖에 구원받지 못했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그래도 올해도 돈을 모아서 선교사들에게 보내야합니다. 위해서 기도해 주고 그들을 위해서 호소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만 하면 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계속 하면서도 ‘아,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고 거룩한 성소에서 우리가 이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는 대도 이렇게 적은 열매밖에 못 거둬서 우리 마음에 그렇게 공경하고 섬기고 싶은 하나님을 마음을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하는 이 현실을 주님이 정말 감동적으로 보시고 주님이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드셔서 한번 이 부흥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마음먹으시면, 정말 이 일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영광스러운 일들이 있을 텐데, 하나님, 부흥이 오지 않는 날에도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만, 이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사오니 오 주여, 서럽도록 이 하늘이 푸르는 날에는 부흥의 단비를 부어 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으로 전도하고 와서는 통곡하면서 기도하고 외치고 나서는 ‘이 정도면 되지 않겠어?’ 그게 아니라 ‘이렇게 힘껏 외쳤는데도 회심하는 사람이 지극히 소수밖에 없구나.’ 하고 기도하고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열심히 가르치고 많은 영혼들이 은혜를 받아도 하나님이 물 붓듯 은혜를 부어주시면 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저 수많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에 벌써 변화를 받아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을 텐데.’ 하는 그 탄식을 가지고 그 부흥에 대한 기대를 끊이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이 선지자처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10.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회 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 하사 돌아오시옵소서(사63:17)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 간곡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친 것을 하나님께 호소 하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매우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주님께 강력하게 상기시켜 드리며, 이 탄원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2가지인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버지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속자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성경 속에 흐르고있는 구속에 대해서 살펴 보았고, 그리고 과연 우리는 그 구속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과연 그런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관계가 매우 특별하기 때문에 과연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께 하소연 할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우리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흥은 하나님과 관계에 대한 깊은 확신, 그것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호소 하게 되는 기도 제목입니다.
그래서 다시 반복하지만 한 사람이 부흥을 위해서 그냥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결심으로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부흥을 위해서 열렬한 열심으로 기도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는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중 이거나 이미 부흥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지금도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런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사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구속자이시므로 그런 아버지와 구속자로서 하나님의 백성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이 믿어지기 위해서는 그 사실이 자신 속에 경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인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해도, 그게 어려워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자기 속에서 경험되어서 자기화 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소화 하지 못한 것은 항상 어렵고, 소화 한 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깊은 학식은 없지마는, 그 철학이나 혹은 역사나 혹은 심지어는 첨단 공학이나 이런 것을 설명할 때, 그 설명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은 그 사람이 자기가 전공한 것을 얼마나 소화했는지 이해를 합니다.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깊이 소화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그렇게 쉽게 설명을 해줍니다. 아주 수준 높은 그것도, 우리가 알아듣기 좋게 소개를 해줍니다
예수님이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셨습니다. 그리고 충만한 진리를 가지고 계셨으니까 그 아무것도 모르는 텅 빈, 그 시대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하실 때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수준이 맞아야 뭐 얘기가 될 것 아닙니까?
그래도 어려움 없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못 알아들으니까 내려온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은 소화된 진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도, 부흥을 위한 기도도, 자기가 그 부흥을 경험했거나 경험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 아버지와, 구속자, 이 두 가지를 깊이 묵상하고 그리고 설교 테이프를 다시 거꾸로 돌려가며 들으면서 구체적으로 정리를 하면서 특히 그 아버지를 정리를 하면서 그리고 나서 진도를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에 기초 해서 마치 그 15절에 반복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호소를 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왜 우리를 주님의 길을 떠나게 하시고, 그리고 왜 우리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그래서 우리로 주님을 경외하지 않게 하십니까? 주님은 돌아오시옵소서 당신의 지파인 기업으로 돌아오게 하시옵소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연필을 가지고 오셨으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한글 성경을 펴놓고 제가 이제 히브리어 성경에서 읽어 줄 테니까 조금씩 보충할 것이 있으면 보충해 보십시오. 무슨 뜻이냐 하면, 번역이 잘 되었는데 그래도 조금씩 차이가 있지않겠습니까? 인간이니까, 그런 것들을 보충해 놓고 보면 한글로는 어색하지만 우리들이 지금 보려고 하는, 살피려고 하는 성경 자신의 의미는 좀더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자, 보십시오 조금 차이가 납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해석을 하겠습니다. 보십시오, 17절에 여호와여 그렇게 주님을 부르면서 그 다음에 뭐라고 그랬냐 하면 어찌하여 그것도 똑같습니다. 당신이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라고 했는데 이게 그게 아니고 길이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당신이 그리고 정관사가 붙어있어서 당신의 그 길 들로부터 타에느, 타트에느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길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짐승 같은 것들이 길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어디로 갈지를 몰라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당신의 그 길들로부터 떠나 우리를 길 잃어 버리도록 하십니까.
다시 “여호와여 어찌하여 당신의 그 길들로부터 떠나 우리를 길 잃어버리게 하시나이까?” 그러니까 “우리를 당신의 그 길들로부터 떠나 길 잃어버리게 하시나이까” 그리고 똑 같은 평행법으로 또 하나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찌하여 우리의 마음(그러니까 하나입니다.) 당신을 향한 두려움, 당신을 향한 경외로부터, 당신을 향한 그 경외심 으로 부터 떠나 우리의 마음 을 딱딱하게 하십니까?” 쉬쁘, 쉬쁘 명령형 입니다. 되게 건방지죠? “돌아오십시오,” ‘아바데이카’,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돌아 오십시오’ 그런데 그 당신의 종이 누군가 하면 ‘당신의 기업인 지파들’, 무슨 지파? 복수입니다. 이것은 12지파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기업인 지파들, 곧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돌아오십시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업’이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이 라할라 라는 단어인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 을 건너가서 지도를 펼쳐 놓고 제비를 뽑습니다. 거기에서 뽑아서 얻은 그 땅 입니다. 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굉장히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땅은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이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는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업인 당신의 종들을 위해서 쉬브 돌아 오십시오. 그런데 이 쉬브 라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명령어로 많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돌이키라 너희는 돌아오라 너희는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키라 그럴 때 회개하다 돌이키다 라는 단어를 여기에다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쉬브 물론 히브리어에서는 명령형이, 명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기원을 의미 합니다. 강력한 기원, 그러니까 바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래도 몆 가지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차이가 나느냐 하면, 17절에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그 길들에서 떠나 길을 잃게 하십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우선 해설을 먼저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두 가지 면에서만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준 많은 신앙의 길을 다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떠나 갈 때 무엇인가 뚜렷한 지침, 뚜렷하게 갈 길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니라, 막상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경외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많은 길들을 다 버리고 떠나가 버렸는데, 떠나 가 버린 결과 어떤 상태가 되었느냐 하면, 양이 길을 잃은 것같이 그렇게 길을 잃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도 없이 방황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의미심장 하지않습니까? 그래요, 교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오늘 아침 설교한 것처럼 여호와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도록, 이땅을 고쳐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도록 그렇게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그런 본연의 사명을 충실 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결국은 무엇을 구하게 되느냐 하면 충만한 하나님의 부흥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두 가지 의미에서 항상 눈물이 넘쳐 나는 곳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입니까? 하나님의 큰 사랑에 대한 은혜로운 하나님과 만남에서 오는 그 감격이 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또 한편으로 눈을 들어서 세상을 바라 볼 때에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을 향한 그 중보의 눈물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후에 그리고 하신 말씀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사야 56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왜냐 하면 그 집은 만민을, 만민의 가 아니라 만민을 위한 레 콜하암민 입니다. 레,위하여 콜,모든 하
그 암,백성, 민족, 암민 민족들, 그러니까 내 집은 그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한 사람들이, 그 백성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 된 족속들이 기도하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러한 이사야 56장의 문맥이 미래에 그 신약시대가 도래하면서 그 신약 시대에 일어날 위대한 부흥들을 말하면서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면 성전의 모습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뀌는데, 그 바뀌는 모습이 어떻게 바뀌냐 하면, 만민을 위한, 만민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그 기도의 집 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적으로 중요한 구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이런 일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이것은 또한 신약시대 교회가 선교 되어야 할, 이 땅의 수 많은 족속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될 것을 그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 주신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한 목표가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역사를 보면, 교회가 그럼 왜 존재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한가지 교회가 설립된 그 목표를 향해서 모든 그 교회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적으로 봉사하며, 그 한가지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뚜렷하게 교회가 왜 존재 하는지를 보여주었던 때는 부흥이 일어나던 때,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조금씩은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가 전도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겠으며, 어느 교회인들 선교를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정도의 문제입니다.
이사야 56장에서 선지자가 말 하고 있는 것은 데트테필라,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a house of prayer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의 집, 그러니까 그런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되고, 그리고 더 멀리는 그 신약시대의 교회들이 영광스러운 부흥의 때를 경험하게 되면, 그러면 그때에는 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제사나 지내고, 그리고 무슨 제사장들이 고기나 탐내고 그러던 물질 주의적인 데서, 모든 관심이 다 바뀌고, 그리고 아주 분명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특징이 드러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베이트테필라 기도의 집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구체적으로 그냥 열렬히 기도하며 아무것이나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많이 기도 하지만 그 기도의 전체적인 흐름, 모든 기도를 쫘악 모아서 퓨우욱 하고 어느 과녁을 향해서 날아가는 목표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모든 백성을 위한, 그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 것들이, 그런 분명한 목표를 교회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런 분명하고 아주 뚜렷한 목표를 잃어버립니다. 잃어버리게 되면, 교회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 그 교회를 향한 분명한 목표, 구원 받지 못한 이 땅의 많은 백성들을 슬퍼하며,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 오지않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높여질 수 없다, 라고 하는 분명한 인식을 포기하거나 상실하게 되면, 교회는 어디로 가게 되겠습니까? 어디로 가는 목표가 있습니까? 무슨 목표가 있느냐 말입니다. 그것을 포기 고 어떤 다른 목표가 있는가 말입니다. 그냥 아까 그 히브리어 성경에서 본 주의 길들로부터 떠나 길 잃어버리게 하시며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마다 교회 마다 자기 목표를 세워놓고 무엇인가 마구 합니다. 그런데 중구난방이고 궁극적으로 그게 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분명하지를 않습니다. 길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됩니까? 매일 제 자리에서 도는 것입니다. 열심을 내는 것 같은데 제 자리에서 도는 것입니다. 다람쥐 체 바퀴 도는 것을 보십시오, 바쁘기는 되게 바쁩니다. 그러나 뭡니까? 치고 나가는 변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안되시죠? 안 되는 표정이네요. 그럼 좀더 이해하기 쉽게, 자꾸 교회, 교회 그러니까 이해가 안 되는데 아주 쉽게 이해가 가게 하겠습니다. 아주 쉽게, 자, 잠시 접어두고, 이제 개인의 경험을 기초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럼 이해가 분명해집니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진리의 비췸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의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을 향한 사랑도 알게 되었고, 주님을 향한 사랑도 갖게 되었고,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믿음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살았는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자기의 마음속에 전에는 누가 그냥 남이 그렇게 얘기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진짜 자기의 가슴속에 깊이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 그렇다 내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데 내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내가 주님을 믿으면서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교회 교역자라면 결국은 밥벌이하다 죽을 것이고, 직원은 직장 생활하다 죽을 것이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 클럽에 모여 살다가 죽은 것 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리고 눈을 들어 보니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나면, 먼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고, 두 번째는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세 번째 누가 보입니까? 이렇게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는데도 주님의 그런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핍절 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주님의 이런 사랑이 있는데도 주님의 이런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 줄타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떠오릅니다. 그것은 아주 정해진 수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경험하고 나면 제가 무엇이라 말씀 드렸습니까? 자기 혼자만 그 사랑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들지않는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이 아닙니다. ‘아아! 정말 좋다 다른 사람 다 주님을 떠나고 개판으로 사는데 나는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많이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진짜 하나님 사랑을 안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자기 마음속에 부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모르고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안타까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그 기도가 열렬하고 간절해져서 내가 기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이 오셔서 나를 사용하셔서 기도하시고 주님이 빠져 나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물론 그런 기도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해본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간절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 드리지만 구원받지 못한 가족이, 여러분의 가족으로 보이는 한 복음은 아직 멀었습니다. 무엇으로 보여야 한다고 했습니까? 영혼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저주를 받을지라도 그들이 구원 받기를 바라는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아마데마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어쨌든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신앙과 인생에 있어서 목표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 살고, 그리고 스치며 지나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사랑을 전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관계 있는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때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 심플하고 아주 단순하고 자기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이 아주 분명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간절한 그 하나님에 대한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간직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고, 이제 개인적인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개인적인 사랑도 아스라하게 추억으로 남고, 이제는 인간들을 보아도 영혼으로 보이지 않고 그저 인간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며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도 안됐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 이상은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이 세상 즐거움을 마구 찾아다니게 됩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인생이, 목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양 떼를 떠나서 길 잃어버린 나
목자의 음성 싫어서 먼 길로 나갔네
어딥니까? 그 먼 길이 어디냐 말입니다. 대답할 수 있습니까? 어디냐 말입니다. 목표가 어디인지 자기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어의 세계에 go astray길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떠나게 하다 그냥 떠나다가 아니라 ‘여호와의 그 길들을 떠나, (혹은) 그 길 을 이탈해서 길 잃어버린 상태가 되도록 만드시나이까?’ 길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깊이 이해가 되는 표정이네요. 여러분 자신이 경험한 것이니까요. 그런 하나님에 대한 고정된 분명한 푯대를 잃어버렸을 때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양 떼를 멀리 떠나서 처음에는 ‘어디 더 좋은 풀을 먹어볼까?’ 풍경에 끌리고 해서 양 떼를 잃어버리고 떠났습니다. 떠났는데, 그 양은 자기의 힘으로 목자에게 돌아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 어디로 갑니까? 지금 어디로 가고있습니까? 그 시안에다가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고, 날은 어두워지고, 그리고 어디론가 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목표를 잃은 것입니다. 그냥 헤메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자니 너무 두렵고 견딜 수 없으니까 그냥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타아의 상태입니다. ‘떠나게 하시나이까?’ ‘타태 무우’ 의 상태,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수많은 교회들을 만나서 서로 이렇게 이야기를 해봐도, 왜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되어서 하나님의 백성 된 교회들인데, 물론 이론상으로는 맞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산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누구를 위한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는 구체적인 길은 무엇이고, 그 나라를 향해 소망을 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해야 하는가? 뭐 이런 것들이 이제 도저히 합의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길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냐는 말입니다.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똑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하나님을 떠날 때에야 갈 때가 있었겠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이 좋다든지, 신앙을 한번 꺾고 라도 물질을 원한다든지, 신앙을 한번 버리고 내 자신이 좀 즐거워야 겠다든지, 처음에야 가는 목표가 분명하지요.
탕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 아버지 보고 재산 나누어 주세요 하며 그리고 재산을 챙길 때 갈 곳이 없었습니까? 아주 분명했습니다. 어디? 아버지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다른 나라 먼 곳으로 가서 사업도 하고 인생을 즐기자 하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가보니 결국 그것이 목표가 될 수 있었습니까? 길 잃은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상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버리고 그럴 때에야 더 좋아 보이는 그럴듯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고 보니 목표가 있었습니까? 모든 죄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것이 그런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눈에 가득 채워서 그 과일 하나가 눈에 들어왔을 때 그 선악과 가 눈에 들어왔을 때,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따먹고 나보니 진짜 목표가 있는 것입니까?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냥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정처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모르고 떠도는 그런 신세가 된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힘은 물론 없고, 그런 상태가 되도록 왜 내버려두시느냐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바로 이 상태가 어떤 상태였냐 하면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위해서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 하실 때 예수님이 바라본 바로 그 상태 그대로입니다.
그것을 이사야 시대에 생겨났던 것이, 그 후에 예수님 시대에 다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참 하나님께 돌아가서 주님이 주신 그 분명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선택된 자들의 목표를 향해서 그의 마음과 인생이 불 타지 않으면 평생 길 잃은 상태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길 잃어버린 상태였는데 어떤 왕은 나타나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희망은 없어도 나라를 잘 다스려서 돈도 많이 벌고 외화 획득도 많이 해 가지고 무역을 잘 해서 잘 먹고 잘살게 하던 때도 있었고, 바보 같은 왕이 나타나서 그것도 다 거덜 내고 IMF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있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외형에 지나지 않습니다. 잘 먹고 부강해도 길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쪼들려도 길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부르시는 그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한 이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한 길도 아니고 많은 주의 길을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그 말씀의 도를 따라 사는 삶을 이야기하면 그런 많은 여호와의 그 진리의 길, 하나님의 그 법도의 길을 다 버리고, 그리고 길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마치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고, 나침반도 없이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파도가 밀리는 대로 아무 목적과 계획 없이 유리하는 그런 상태가 되도록 하나님! 왜 이스라엘 백성을 내버려두십니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는가? 이런 사역형으로 나옵니다. 왜 우리를 그렇게 길 잃어버린 상태가 되도록 그렇게 만들고 계십니까? 과거형이 아닙니다. 현재형입니다. 만들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참 답답하지 않습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머리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고, 가슴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따로 있고, 실제로 손 과 발이 움직이면서 뭔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표현하는 것은 또 따로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우리 자신 개인이 말입니다.
부흥은 이런 것들을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가 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행 법으로 그것과 같이 반복하면서 더 지금 언급한 내용들을 심층적으로 묘사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찌하여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제대로 본다면 어찌하여 당신을 향한 경외로부터 떠나 우리의 마음이 딱딱해 지게 하십니까? 우리의 마음이 딱딱해 지게 하십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분명하게 가야 할 그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버리고 그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을 향한 탄원하는 그 기도도 잃어버린 채 그렇게 방향도 없이 표류하고 있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그것을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어떤 결론이 나오냐 하면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 마음은 단수로 나옵니다. ‘우리들’은 복수인데 ‘마음’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아주 일치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길을 떠나는 면에서 일치된 것입니다. 한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한 마음이 어디로부터 떠나는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경외로부터 그 경외로부터 그러니까 이것은 A,A B,B C,C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 나오는 우리의 길들을 떠나 그것이 문학적인 수사법으로 여기에 나오는 당신을 향한 경외로부터 떠나 이것과 짝이 됩니다. “왜 우리를 길 잃어버린 상태가 되게 하시나이까? 그것과 왜 우리의 마음을 딱딱하게 하십니까?” 이것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 시에서 병행법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냐 하면 우리를 길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렇게 길 잃어버린 상태가 될 때에 그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모든 길에서 떠난 그것이 결국은 어떤 것이냐 하면 딱딱해진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딱딱하게 하신다고 하셨지만 어쨎든 딱딱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역으로 이렇게 생각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 땅의 많은 백성을 위해서 호소하며 탄식하고 통곡하는 그러한 중보의 간절한 기도, 그래서 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되도록 하나님의 능하신 구원 과 그 은혜를 호소할 때에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딱딱한 마음이 아닙니다. 아주 여리고 상한 마음, 깨뜨려진 심령,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주님이 주신 목표를 향해서 녹아 내리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중간에서 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주님이 주신 분명한 목표를 잃어버리고, 길 잃은 상태가 될 때에 그 길 잃어버린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백성들의 마음의 특징은 딱딱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딱딱한 마음이 되어서 아주 강퍅한 상태로 변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하나님을 즐거워 하지않고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아도 자기가 즐겁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받아들일 만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딱딱한 밭, 딱딱한 길과 같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부어져도 쉽게 그 마음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주의 진리와 은혜로 깊이 스며드는 그런 마음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제가 그림하나를 그려 볼 테니까 한번 느껴 보십시오.
(예화: 오랜 가뭄 끝에 대지는 말라 있고 도로는 지금처럼 포장되지 않았을 때 장대 같은 소낙비 가 내릴 때 초기 현상)
마음이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강퍅한 상태가 되면 가끔 와서 ‘아! 저것이구나!’ 하고 은혜를 받아도 너무나 오랫동안 건조한 상태가 계속 되었기 때문에 눈물 씻고 밖에 나가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은혜가, 은혜가 부어져야 합니다.
한꺼번에 폭포수와 같이 쏟아져도 괜찮지만 문제는 오랫동안 , 그래서 그것이 1cm ,2cm,3cm 그래서 작게 내리는 비가 봄에 언 땅을 녹이면서 깊이 스며들어서 뿌리를 깨워 성장하게 하듯이 다시 생명을 발휘 하도록 만들듯이 그렇게 파고들어가 변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봄비가 오고 이제 식목일 때쯤 되어서 적당히 습기가 있을 때 땅을 파면 어떻습니까? 물 붓지않고 땅을 파보면 삽이 쑥 들어갑니다. 확 뒤집으면 전부다 물로 촉촉하게 배어있습니다.
그것과 정 반대의 상태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선지자로서는 지금 하나님 앞에 절규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많이 신앙의 길 을 떠나서 길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사야서 1장에서 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는 장면이 나와 있는데 물질주의, 육체적인 향락, 그 다음에 신앙을 버린 포도원의 비유, 많은 비유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많은 불 신앙의 모습은 많이 굉장히 많이 있지마는 그러나 결국 그것을 통해서 말 하고자 하는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 그 고요한 마음이 아닙니다. 딱딱해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스라엘 선지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그 걸출한 선지자도 자기가 이 백성들을 변화 시킬 수 있다라고 하는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설령 한번 외쳐서 이 백성들이 통곡하며 자복하고 뒤 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그 마음이 마른 흙처럼 잔뜩 강퍅해져서 굳어져 있기 때문에 마치 수 개월 동안 마른 땅에 잠간 동안 소낙비 쏟아진 것 같은 그런 상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을 완전히 기경해서 그래서 정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뿌릴 때에 그 땅이 씨를 받아들여서 성장하고 소출을 거둘만한 나무로 성장시킬 수 있는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땅의 갈아 엎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이사야 선지자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상적으로 늘 볼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 가지고도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이것을 호소하겠습니까? 물론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탄원합니다. 눈물로 애원하기도 하고, 그리고 불 덩어리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설교하기시작 하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은 그렇게 시작 하잖아요, 그렇지요 안 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그렇게 돌이키라고 말하고 말도 구유를 알고, 나귀도 주인을 아는데 하나님은 너희들에게 누구냐? 너희들은 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느냐? 그러면서 막 외칠 때에 사용 했던 단어가 슈브 입니다. 돌이키라 똑같이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그렇게 호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거기에 희망을 걸면 안됩니다. 왜? 이 강퍅한 백성들이 돌이켜 서서,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 일들을 위해서는 단지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감동시켜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을 향해서도 간절히 선포하고 필요하다면 피를 토하는 심판의 메시지를, 필요하다면 눈물에 젖은 애원의 음성을 들려 주지만, 그러나 이 백성을 돌이켜서 옛날과 같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백성들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께 호소하는 데에 더 큰 희망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이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전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말 해주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전해야 할 그 사람들을 말해 드리는 것입니다. 전자는 복음 전도이고 후자는 하나님을 향한 간구 입니다. 그것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없는 교회에서의 아주 열심 있는 전도 활동을 할 수가 없고. 또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기독교를 전파하는 그런 활동이 되기 힘들다 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 간절한 호소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지금, 하나님을 어떤 면에서 추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길을 떠나서 길 잃어버린 상태를 만드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강퍅하게 하신다는 표현도 나오지만 그러나 순종하는 자에게 순종할 능력을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불순종하려고 마음먹는 사람들을 버려 두시기도 하고,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려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내버려두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교리적으로 볼 때라도, 타락 때에 주도권은 인간이 쥐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은 교리적으로 말이 안 맞지 않습니까? 구원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타락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도권이 아니라, 자신들이 앞서 행하고 하나님이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정당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이것이 사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선지자의 이런 하소연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다 시피 부당한 것입니다. 부당한데도 선지자가 이렇게 호소하는 것이 타당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두 가지 때문인데, 하나는 그렇게 하나님을 버리고 길 잃어버린 상태가 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이 물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간섭하시면 막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은 스스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백성들이니까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지난 두 주에 걸쳐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관계가 매우 특수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자기가 길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멀리 떠났는데 하나님이 무슨 책임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책임이 있는 관계에 놓여있는 분처럼 그렇게 행동하기로 자기 자신이 묶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선지자는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당신이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우리들이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까? 당신 자녀들이 아닙니까? 주님의 그 위대한 구속의 행동으로 우리를 건져 내 주시고 이제껏 까지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내시므로 우리와 하나님사이가 특별한 관계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들을 구원해 주셔 야 할 상황입니다. 비록 자신들이 좋아서, 자신들이 원 해서 길을 떠났고,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주님이 이 백성들을 돌이켜 주셔 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길을 모두 버린 이스라엘 백성, 그 마음을 강퍅케 한 하나님의 백성, 그들을 향한 치료의 길이 무엇인가 하면, “주의 종들, 주의 산업, 주의 기업인 당신의 지파들로 돌아오십시오. 지파들을 위하여 종들을 위하여, 곧 당신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여 돌아오십시오.” 여기에서 선지자들의 믿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아무리 무지막지해서 하나님을 떠나는 그 막 되 먹은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강권적으로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면 그 길을 잃어버렸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참된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며, 그 마음이 돌처럼 강퍅해졌던 백성일지라도 진심으로 섬겨야 할, 경외해야 할 분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오셔 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나 은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계시므로 그 관계를 지속하시고 영향을 끼치시면, 당신의 백성들은 길을 잃어버렸으나 찾게 될 것이요, 강퍅해졌으나 마음이 물 같이 녹아서 하나님 경외하는 길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이 백성들 가운데로 돌아 오셔 야 됩니다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자기의 죄 들을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마음을 정결케 한 사람들 가운데 주님이 오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이제껏 까지 오랫동안 익숙해진 하나님의 길을 떠난 그 길 잃어버린 상태의 삶, 이제껏 지내왔던 그 강퍅한 마음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정결케 해서 주님을 구 하는 것 자체가 사실 주님이 거기 오시지 않으면 일어날수 일입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냐 구요? 하나님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데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걸어와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수 있느냐 말입니다.
제가 죄 죽임의 교리에서 회개를 말하면서 나무 결에 비교한적이 있었습니다.
(예화: 나무를 자를 때 남,북한 사람과 동,서양 사들이 모두 같은 방법 나무의 결을 따라 자른다 는 이야기)
하나님도 회개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회개시키시고 그리고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다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한 사람이 이제껏 한민족이 수 십 년 동안 하나님을 떠나서 익숙해져 있는, 길 잃은 상태에서, 이 상황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고 우리는 옛 길로 돌아가련다 라고 결심하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이미 시작되지 않은 곳에서 본성상 타락한 그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스스로 일구어 낼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건 선지자가 그것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 은 하나님이 구속 하셨지만, 그런 백성들입니다. 그러니까 당신께서 먼저 행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은혜의 역사를 시작해 주셔서 이 백성들이 더 이상 길 잃어버린 상태가 되고, 더 이상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백성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이 현실이 더 이상 지속 되지않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 앞에 떼를 쓰면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논리의 관점에서 이해해서는 안되고 선지자의 이런 하나님을 다그치는 것 같고, 주제 넘어 보이는 ‘슈브’ 당신이 돌아오십시오. 이렇게 그 명령어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이런 것들이 절대 하나님 앞에 책망 받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절실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무모해 보일 정도로 “하나님! 이 백성들은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백성들입니다. 내가 돌아오라고 늘 말 하지만 저들이 나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하나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 인간들을 기다리지 마시고 주님이 오시옵소서 그래서 이 백성들 가운데 오셔서 회개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다면 회개 할 마음을 주시고, 여호와의 길을 떠난 것이 문제가 된다면 돌아갈 마음을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시옵소서. ”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총을 호소하고 있는 장면 이 자체가 더 이상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탁월한 열망, 하나님 자신을 향한 깊은 열망에서 우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없고 그런 열망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호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돌아오십시오. 그러니까 이 선지자가 인식하고 있는 이 현실 인식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상태라는 것입니다. ‘슈브’-‘돌아오십시오.’ 멀리 떠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생각 해 보십시오 이 당시 선지자가 예언을 하고 있을 때 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진짜 여호와를 아는 신앙이나 이런 것들이 완전히 잊혀 졌겠는가? 아닙니다. 제사도 있고, 율법도 살아 있고,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형식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형식 속에 깃들여야 할 하나님을 향한 내적인 충성심, 내적인 진실한 인애, 진실한 사랑,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진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한 평이라도 땅을 더 차지해서 토지에 토지를 연하면서 그러면서 땅 따먹기 하는 모습을 이 이사야 전반부에서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 땅을 모을 수 있었습니까?
율법을 어기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안식년이 되어도 그 땅을 돌려 주지 않습니다. 희년이 되어도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 땅을 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레위기 25장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번 돈인데, 그리고 자기 자신의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짓밟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좋은 민족적인 유대 관계들이 다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언약적인 관계들이 다 깨어지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들 사이에 흘러야 할 가족적인 연대들이 다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강포한 사회입니다. 자비와 인애가 없는 그런 사회, 포악과 피 흘림이 뒷 대이고 강포 와 악독함이 줄을 잇는 그런 세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선지자가 포도원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 번영한 팔레스타인에 심으실 때에 호세아 14장에 나오잖아요? 그 포도나무 가지가 쭈-욱 뻗어나가면서 그늘을 만들고 수 많은 열매들이 맺히고 뻗어나가는 그러한 참된 유일 신 신앙을 기대하시고 심어 놓으셨는데 악독한 포도를 맺는 겁니다. 들 포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래 세워 놓으신 목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가는 것입니다. 당신이 영광 받으시기 원해서 세워놓은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 선지자가 그 피 끓는 마음으로 그것을 돌이켜 서야 되는데 이 양자, 즉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하든 이 양자를 만나게 해서 돌이키게 하고 싶은데 이 백성들이 꿈쩍도 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해 보아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제는 하나님 밖에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버려 둘 수 가없는 것입니다. 이 상태로 계속 되게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내 버려 둘 수가 있다면 그것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내 버려 둘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 두 사이에 끼어 있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은 도저히 돌아갈 가능성이 없는 인간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이와 같은 때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 많았지만, 그 때 마다 모두 하나님이 모든 책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리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까지는 쳐다도 안 보시는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 특별한 때가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시고, 그리고 간곡한 자비와 긍휼을 쏟아 부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열렬한 자비를 보여 주셔서 그래서 그런 놀라운 호의를 입게 하셔서 내버려 두셨더라면 계속 그렇게 강퍅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숨에 돌이켜서 죽은 자와 같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게 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그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임을 만 천하에 드러내는 그런 백성들로 바꾸어 주시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부흥의 역사라는 사실 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주셨는데 지금은 왜 안주십니까? 그렇게 해 주셔 야 지만 그래야 불상한 이스라엘 백성이 살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당신의 이름이 더 이상 모욕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 존재에 합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 나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 눈물겨운 장면은 그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말입니다. 설렁설렁해서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잘 생각 해 보십시오 이것이 눈물 나는 장면입니다. 선지자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습니까? 아무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렸지만 돌아갈 능력도 없고 또 돌아갈 마음도 없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졌는데 그 마음을 깨뜨리고 싶은 의지도 없고, 깨뜨릴 능력도 없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라 부르고 있습니까? 당신의 종, 곧 당신의 지파들 당신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여 돌아오시옵소서. 이것이 눈물나는 것 아닙니까?
아무도 여호와의 길을 다 버린 상태에서, 마음을 돌 같이 만든 상태에서 아무도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택된 백성인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기 위해서 선택된 백성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살아가고 있는 그 백성 들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 상기 시키시며 당신의 종들 입니다. 당신의 종들입니다. 당신의 종들 입니다.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이 백성이 당신의 종들입니다. 당신의 산업입니다. 이 열 두 지파가 다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났지만 당신의 산업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종들입니다.”
자 이게 가슴에 와 닿기 위해서는 이런 설명이 필요합니다. 여기 ‘라할라’라고 되어있는 산업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앞두고 제비를 뽑았을 때에 그 할당된 땅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잘 생각 해보십시오 기업이라고 합니다.
자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 이라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아브라함 소명이 주전 21세기, 가나안 정복이 15세기이니까 600년 가까이 산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이 없었기 때문에 겪었던 그 설움은 이루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아브라함보고 “너는 누구냐? 하고 사람들 물어보니까 나는 잠시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요.” 아브라함이 아주 고상한 내세의 신앙을 가지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후에 아브라함의 생애를 바라본 사람들의 기술이고 아브라함 속에 있었던 하나님 자신을 향한 그 영원한 마음을 풀어서 설명할 때 그런 결론이 나온 것이고, 실제로 아브라함은 “이 땅에 거하는 나그네요.”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려고 했습니까? 가긴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땅이 있는데, 땅도 뭐라고 했습니까? “너한테 주긴 주는데 너는 거기 못산다.” 그럼 언제? 400년이나 지나야 얻을 수 있는 땅입니다.
땅이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산 것입니다. 땅이 없는 처절한 설움은 어디서 많이 경험했느냐 하면 애굽에서 많이 경험했습니다. 주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주권조차 없었으니까 노예 생활을 처참하게 하고, 더 뼈저리게 땅이 없어서 고통을 받았던 때는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무 의도가 없어요. 그저 진행하고 만 싶어요. 그러나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지나가기 위해서, 다 땅이 있는 것입니다. 빈들이 아닙니다. 광야라고 해도, 다 주인이 있는 것입니다.
지나가려고 하면 싸워야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잃고 그리고 지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요단 강 건너편에 보이는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그 땅, 그것도 버려진 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기라성 같은 당시 발달한 민족들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그들이 생명을 바쳐서 싸운 것입니다. 왜? 그것은 영법으로 말하자면 배수진을 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서 땅을 취하지 않으면, 아니, 신앙을 떠나서 과연 어디로 가야 될지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어디로 가겠습니까? 애굽으로 돌아가겠습니까? 맞아 죽으려고? 광야로? 광야에서 누가 받아준답니까? 어디로 가겠습니까? 더부살이하기엔 너무나 많은 민족입니다. 300만 가까운 민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진짜 이들은 신앙적인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이유만으로도 생명 걸고 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차지한 것입니다.
집, 사본적 있습니까?
(예화: 셋방살이의 설움)
이정도로 해서 설명이 안됩니다. 그게 ‘라 할라’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업은 곧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그 옛날에 땅이 없었을 때 겪었던 그 조상들의 유리하는 모든 삶을 상상하지 않고는 땅을 잃어버리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업을 잃어버리는 것을, 상상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배려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땅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제도적으로, 그래서 땅을 차지하지 않습니까? 지파 별로 지역을 나누었습니다. 그 지파는 다시 씨족 별로 나눕니다. 씨족은 다시 가족별로 나누고, 제비 뽑아서 자기 땅을 할당 해준 것입니다. 그것은 딱 정해 져 있습니다.
그런데 못난 엄마 아빠를 만나서 허랑방탕하게 살아가지고 다 털어먹고, 그 땅까지 팔립니다. 그리고 자기네들은 유리 방황하는 그 뭐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게 열심히 돈을 모아서 안식년이 되었을 때 갔다가 주면 그 땅을 판 값에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희년이 돌아오면 그 땅이 그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땅이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땅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종속되고 지배하고 하는, 지금도 그것입니다. 이것이 지배 구조가 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지배구조 입니다.
그러다가 IMF때 부동산 산 사람들 고생을 많이 했지마는, 땅을 중심으로 맺어지는 이것입니다. 이 지배 관계란 말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런 사람들에게 땅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땅이라고 하는 이 기업이라고 하는 것, 이 산업이라고 하는 이 것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여호와의 길을 다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다 떠나서 마음이 강퍅해져 있고 전부 다 떠났는데, 그런데 그래도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 두셔서는 안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이 땅이 우리의 산업인 것처럼 우리 이스라엘 백성이야 말로하나님의 산업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도 우리 없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 의미입니다.
좀더 설명을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또 하나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당신의 종들입니다. 누가? 이 못돼먹은 종들이 당신의 종들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길을 다 버리고 그리고 마음이 강퍅해져서 돌멩이와 같이 되어서 하나님을 경외 하지 않는 이 백성들이 당신의 종들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백성들이 그렇게 타락하고 하나님을 다 버리고 이방 백성과 똑같이 다름없는, 어떤 면에서는 더 악랄한 백성들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 백성들이 아니면 이 세상에서 누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그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이 선지자들은 말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렌즈입니다. 이 선지자들과 예수님을 비롯해서 사도들과 이 성경의 역사를 이어오는 믿음의 위인들은 이 사실을 굳게 붙들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무리 타락해서 하나님을 버렸어도 그들 이외에는 하나님을 섬길 인간들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만 섬김을 받으시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럼 아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불경스럽게 보이는 해석을 했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잃어버리면 아무 희망이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에게 그런 존재가 아닙니까? 또 보십시오 자 그러면 하나님이 백성들을 하나님이 만약에 그들이 너희들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너희들이 버린 길이고 너희들이 길을 잃어버렸고 너희들이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했으니까 나는 책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대로 내버려 두셔서 이방의 백성들과 똑 같이 만들어 버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 온 우주에 홀로 이 별에만 하나님의 이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하신 종교의 중심 지인데 여기에서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구속 행동을 경험했던 백성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인데 하나님이 그 불을 꺼 버리시면 아무도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를 택해서 다시 제 2의 아브라함을 만들고, 그것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그럼 또 많은 신학적인 문제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 은 또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선지자는 하나님 자신도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이 백성을 포기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호소, 하소연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을 보십시오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길이 싫어서 버리고 길 잃어버린 상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하나님 경외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스스로 팽개치고 스스로 창기와 같이 돌멩이처럼 굳어버린 마음이 되어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종들입니다. 라고 소개 할 때 이 선지자의 마음 속에 어떤 불이 타오르고 있었을지 생각을 해 보십시오
느껴지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오셔서 여러분들의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서 가장 자신이 없을 때 진짜 하나님 앞에 숨고 싶을 정도로 타락하거나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 졌을 때 주님이 다시 오셔도 오늘만은 절대로 다시 오시지 마시옵소서 라고 할 정도로 이 하나님의 자녀의 본래의 모습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을 때, 악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께 보시옵소서 하나님 당신의 종이옵니다. 당신을 섬기면서 사는 당신의 종입니다. 이렇게 소개 할 때 여러분 그 느낌이 어떻겠습니까? 선지자가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아무 희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 오죽했으면 이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호소하지 않습니까? 누구를 심판합니까? 이방 족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 백성들을 심판해서라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 달라고 호소하지 않습니까?
잠시 후 64장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이 선지자가 그런 이스라엘의 혐오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면서 하나님 이 인간들이 그래도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기며 살 사람들이 이 비참한 인간들 이외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라고 말 할 때에 이 선지자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왜 이 마음이 선지자의 마음일 뿐만 아니라 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피조물 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우리 아니면 희망이 없으시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확실합니다. 다만 문학적인 수사법일 뿐이지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자기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 근본적인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하나님 자신도 아무리 타락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포기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한 것입니다. 여러분! 맛 잃은 소금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빛 잃은 등불 일 수도 있습니다. 상한 갈대 일수도 있고 연기는 내면서 빛은 거의 발하지 못하는 꺼져 가는 심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아들의 피로 주고 사신 당신의 자녀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의 아들의 피를 발라서 구원하는 백성들이 모여 있는 교회,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그리고 그 백성들을 마지막 당신이 오셔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그 순간까지, 그 백성들을 소생 시키시고 살아있게 만드셔서 찬란한 불꽃처럼 일어나서 빛을 발 하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 이신가를 알리는, 그러한 불 꽃이 되기를 원하시는 그 마음이 심판 하실 그 때 까지 지속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교회를 향해서. .
이것이 우리의 입장, 부흥을 구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한없는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부흥을 간절하게 구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타락한 것을 보면서 좌절 하거나 하나님의 교회가 공의를 잃어버리고 죽은 자처럼 된 사실을 보고 낙심하고,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현실들이 종종 낙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항상 부흥을 구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인간들이 교회 안에서 보여주는 그 비참하게 자신들을 낙담하게 하는 모습 보다는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세우신 교회를 향한, 그 백성을 다시 확 일으켜서 다시 살리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이 백성들의 상태 하나 하나에 미래가 달린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교회가 융성하고 건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부흥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한심해 보일 정도로 비참하게 빠졌을 때 그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에 일어났던 그 부흥이 그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 영국 사회는 비참하게 타락해 있었고, 소위 얘기하는 장로교회는 아리오스라에 빠져 있었고, 아리오주의 라는 이단 사상에 깊이 빠져 있었고, 그리고 독립 교회라고 하는 이 청교도의 정신을 물려받은 교회들도, 죽은 정통을 고수 하고 있을 그 때에, 그 죄가 얼마나 만연한지 그 죄를 근절 시키기 위해서 웬만하면 잡아 다가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매어 교수형 시키며, 그렇게 다스려도 그 타락을 막을 수가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키셔서 그 사회를 뒤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기 나름입니다. 온 땅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을 진실되게 찾는 사람이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을, 반대 쪽에서 보면 비참하고 절망할 이유가 되지만 부흥이라는 쪽에서 보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이 일하셔야 될 때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희망이 없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깨워야 할 때이다. 물론 하나님은 주무시는 분은 아니지만 그러나 문학적인 묘사법으로 그 하나님이 그러한 복스러운 역사를 안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무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그 때에, 하나님이 정말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 특별한 긍휼과 강력한 사랑을 물 붓듯 부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실 기회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깊을수록 손에 높이 든 등불은 멀리 서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참 빛을 드러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가 오늘 하나님 앞에 현실에 낙망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 언약의 연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 하는 것입니다. 그래 이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교회를 쉽게 생각하고 쉽게 버립니다. 사람들도 보면 아 교회야 열심 이지 암, 헌신 됐지, 그런데 그는 그런 점에 있어서 못됐어, 쓸모없어 누구는 그랬다며,그랬다며, 그런데 마지막에 그랬대. 그런데 다 쓸데없어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아 그 교회가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다 죽고, 다시 서기 전에야 아무 희망이 없을 거야. (테이프가 여기서 끊어졌음)
11.대적이 성소를 유린할 때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사63:18)
오늘 성경은 그 앞 절에서 왜 그토록 간절하게 이사야 선지자가 마치 하나님이 멀리 떠나신 것처럼 그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그 백성 지파에게로 돌아오시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지를 이 18절과 19절에서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이제 이 부흥에 관한 선지자의 기도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64장으로 넘어갑니다.
거기에서 이 선지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한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나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18절만 설교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습니다”. 이 구절이 이사야서 연구 가운데 상당히 난해한 구절중의 하나입니다. 이 사야 선지자가 이것을 예언하고 있는 때가 주전 690년경쯤 됩니다. 그 때에는 누군가 와서 이스라엘을 초토화시키면서 유린한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이 문제를 보면서 이것은 미래를 바라본 것이라고 합니다. 미래에 보면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데 언젠가 하면, 여러분이 역사에서 배운 고대 문명의 황금국가라고 할 수 있는 바빌로니아, 즉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유다 나라를 모두 멸망시키고 성소를 유린하고 성전에 있는 금, 은을 약탈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유린한 것입니다. 그래서 690년경에는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은 모두 망한 후입니다. 주전 722년에 망했으니 벌써 30년 후의 일입니다. 말하자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남왕국 유다만 남았는데, 이제 유다도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 때가 586년입니다. 그것을 바라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무슨 질문이 생기는가 하면 시제의 문제입니다. 시제가 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며”. 과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설명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하면, 성경에서는 예언적 과거라는 기법이 이 선지서를 기록할 때 동원이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깊은 영감 속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할 때에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잘 이해가 안되실 것입니다. 그런 눈빛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는 은혜 받으려는 자세와 공부하려는 자세가 어우러져야 합니다. 조금 상세하게 설명해도 ‘어렵다,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은 매일 불이나 때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남겠습니까? 잘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이해가 가십니까? 제 집사람이 이해하면 도두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체험에서는 종종, 시간을 넘나드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해도 이해가 잘 안되실 것입니다. 한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의 예를 들면 가장 쉽지 않겠습니까?
(예화) 섬기던 교회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었다. 특강의 주제는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이었다. 20 명 정도 모여 꼼꼼히 준비한 강의안을 나누어주고 강의를 하는데, 그중의 몇 사람이 강의 시간에 벌벌 떨었다.
왜입니까? 종말에 대해 강의를 하는데 그것이 내일 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오셔역사하시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그것이 지금 내가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느 순간에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애통하며 웁니다. 왜 입니까?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이미 이 천년 전에 끝난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4월에도 십자가 사경회를 하지 않습니까? 그 때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체험하면서 예수님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세계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가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여주신 이상이라”라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 제가 설명드리는 것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히브리말로 “하조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꿈도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 또한 아닙니다. 말하자면 실제이면서도 현실은 아니며, 환상이면서도 환상은 아닙니다. 현실은 아니면서도 또 꿈은 아닙니다. 아주 독특한 반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조이”라고 하는 것이 반 실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체험을 훨씬 신령하고 거룩하게 연장해서 생각하면,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부연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가르침을 보면 예수님은 종말이 곧 올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와서는 주춤주춤하다가 바울 서신에 와서는 한참 후에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많이 착각을 해도 착각을 했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죽고 나면,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종말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안 일어났다. 제자들도 그렇게 굳게 믿었는데 종말이 오지 않았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사실을 이론적으로 꿰어 맞추기 위해서 이 다음에 오신다고 말들었다. 그래서 결국은 복음서에서 실패하신 예수님의 종말에 대한 기대가 사도행적에서 우물쩍우물쩍 하다가 서신서에 와서는 뒤로 연장됐다. 그러므로 신약은 사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한번 만나 보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종말의 특강을 듣는데, 내일 오는 것입니까? 200년에 종말이 온다고 하는데 그런 말은 믿지 마십시오.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벌벌 떠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의 세계 속에서는 시간은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예언적 과거라고 합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그것이 생생하게 선지자 속에서 하나의 사실로서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벌써 일어난 것처럼 보고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해가 안 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그렇게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40년 후에 멸망할 텐데 앞서 우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것은 예수님에게 의미가 없으십니다. 시간을 초월하신 전능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번에 다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성소를 황폐하게 만들어버릴 것이 선지자의 눈에 확연히 들어왔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석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이 1절로부터 시작해서 죽 읽어보면 문맥이 15절부터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미래의 일어날 일을 가지고 통곡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사야 시대에 벌써 나라가 신앙적으로 매우 부패하고, 율법이 짓밟히는 상황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피를 토하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가 그렇게 해석하면, 그 해석을 틀렸다고 하지는 않을지라도 문맥의 자연스러운 흐름하고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70인역이라고 합니다. 권위에 있어서는 원래 히브리어 성경보다는 못하지만, 그러나 2~3세기경의 헬라시대 때에, 말하지만 헬라어에 젖고 히브리어를 잊고 살아가는 후손들을 위해서 각 지파에서 파송된 70여명의 번역자들이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 구약 헬라어는 신약 헬라어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옛날 헬라어입니다. 그런데 그 번역에 보면, 히브리 성경하고 조금 다릅니다. 전문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 희랍어 성경을 구약을 번역했을 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히브리어 성경을 가지고 번역을 가지고 번역한 것이냐, 아니면 이것 외에 다른 것이 있었느냐하는 주장이 다시 나뉘어 집니다. 그리고 만약에 있었다면 이것이 더 권위가 있는 것이냐,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이 더 권위가 있는 것이냐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때로는 다른 번역이 나오기도 합니다.
어쨌든 70인역이라고 하는 구약 헬라어 번역은 그 당시 사람들이 그 히브리어 본문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보여주는 해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떻게 번역했는가하면, “대적들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란 구절을 “우리는 다시 처음과 같이 되었사오니”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번역을 놓고 보면은 이 전체 문맥이 맞아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히브리어 성경을 버리고 헬라어 성경을 택하자는 말이 아니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할 때에 이 대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곳에서 가장 의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여기에 보면 구약성경이든지 신약성경이든지 “땅”이라고 쓰여진 것 같은 작은 단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글자를 보십시오. 그것을 가리켜서 보역이라고 합니다. 보역이란 원래의 원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것을 빼고는 번역이 어색하기에 보충해서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그 보역은 원래 성경에는 없는 것을 이렇게 하면 어떻겠는가하고 번역자가 의견을 제시해서 집어넣은 것입니다.
진짜 히브리어 성경에는 “주의 거룩한 백성이 상속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라고 나옵니다. 무엇을 상속했는가를 “땅”보다는 그 뒤에 나오는 “성소”를 이 동사가 받는다고 보는 것이 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번역이 이렇게 됩니다. “주의 거룩한 백성들이 주의 성소를 상속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우리의 대적들이 주의 성소를 짓밟았으며”. 그런데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땅 안에 성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이사야 선지자가 생각하는 어떤 대적이 성소를 짓밟고 유린하고, 다 부서지고 파괴된 성소를 보면서 이 선지자가 비통해하고 아파하면서 결국은 하늘을 가르고 주님이 이 땅에 강림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64장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해석이 성경 전체와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말하고 잇는 대적은 흔히 많이 생각하는 바벨론의 공격과 같은 미래에 들어올 대적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이미 주전 690년경에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그 상황에서 대적이 들어와서 성소를 유린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대적은 하나의 영적인 의미의 대적입니다.
불신앙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세속적인 것, 이런 모든 것들을 주관하는 영적인 세력,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사단의 세력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해석이 맞는 것이 그 앞에 보면 선지자가 15절에서부터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어디에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실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특별한 은혜와 긍휼, 은혜와 사랑, 친밀함과 같은 모든 것이 사라진 나라의 상황 자체가 이미 대적들이 와서 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소를 유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철거반이 와서 도끼를 들고 때려부수고, 포클레인이 와서 부수고 지나가야만 하나님의 교회가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여러분들이 불신앙과 세상의 습성에 젖어서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일편단심 주를 사랑하고 섬기려는 이 신앙의 결의에서 흔들리면 교회는 무너진 것입니다. 그 관점이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제자들이 보면서 “이 성전 대단하지 않습니까?”. 헤롯이 지은 성전입니다. 그래서 헤롯 성전이라고 불립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아주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놀랍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화려한 성전을 보시면서 비통하게 예언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비통해지셨습니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리라”.
제사장이 이렇게 가문에 따라 세워지고 대제사장이 혈통을 따라 세워지지 않습니까? 율법에 따라 아론의 자손이 세워집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모두 무너지고 이미 로마시대에 들어오기 전에 헬라시대 때부터 아부하고 뇌물을 주어서 제사장이 되고 대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제사장이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자기도 지키지 않는 율법을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경외심은 전혀 없고, 메시아가 와도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고 하는 불한당 같은 자들이 가득한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보실 때 성전은 이미 성전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시각입니다.
사단이 어떻게 교회를 허무는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철거반을 데리고 오는 사단을 보았습니까? 그것은 교회라고 하는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곳을 이사가고 다른 사람이 댄스홀을 만들면은 춤 집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교회당을 짓기 전에 다른 곳, 하다못해 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쳐도 그곳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백성들의 그 모임과 영적인 연합이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사단이 그런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교회를 허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철거반을 동원하고 폭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허무는 것입니다. 하나 하나를 실패하도록 만듭니다. 강단을 실패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치도록 만들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사라지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완악하고 강퍅한 마음이 가득 차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런 식의 대적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적이 짓밟고 유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짓밟고 유린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은 때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아서 소명을 받던 때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내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라고 했습니다.
유다 나라에 있어서 이 때는 신앙적으로 많이 쇠퇴했지만 웃시야 왕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 아직도 유다 왕국의 영광이 있던 때였습니다. 그때에 선지자는 영적인 측면을 통해서 유다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성소, 처참하게 유린된 광경을 보는 것입니다.
이때에 서있던 성전이 어떤 성전입니까? 솔로몬 성전입니다. 솔로몬 성전의 영광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금만 90조원 어치가 들어간 성전입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건물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자부심을 갖게 하는 영광스러운 성전이 서 있는데, 이제는 짓밟혔다는 것입니다. 모두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그림이 어떤 것입니까? 진짜로 바벨론 시대처럼 겁탈 당한 처녀처럼 성전이 모두 뜯긴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실제로 통곡하는 장면이 예레미야 애가 1장의 장면입니다. 그 심정과 이사야 선지자의 심정이 역사는 엄청나게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동일한 심정을 가지고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결론이 한가지 있습니다.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만이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예화) 교황 이노센트 2세가 교황청을 찾아온 수도사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어마어마한 금이 쌓여있는 금고문을 열어 보여주면서 “이보게, 우리는 이제 세상을 향해서 ‘금과 은에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이렇게 교회에 금이 많으니 말일세”. 그랬더니 하나님의 사람,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교황 성하, 이제는 교회가 많은 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서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죽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얼마나 시야가 다른가를 보여줍니다. 그 당시 교황이라는 사람은 상당했습니다. 사생아를 낳아 감추고,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같은 사람들이 들고일어날 때는 엄청났습니다. 그 시각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베드로와 요한이 금과 은이 없었습니까? 왜 없습니까? 그 당시에도 교회에 많이 있었습니다. 땅을 팔고 집을 팔아서 가져다 준 돈이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에 다 있지 않겠습니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이유는 진실로 금과 은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앉은뱅이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구걸해서 사는데 금이나 은을 네게 준들 네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 본질적으로 그런 불행을 고칠 수 있는 분은 살아 계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분을 필요로하는 사람이 되라. 그러니 금과 은을 기대하지 말고 교회가 네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인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대하라”는 것을 말해준 것입니다.
시야 자체가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네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말하고 있는 강조점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였습니다. 네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줄 터인데 그것에 대해 네가 기대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금과 은을 네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시야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늘어난 재산이나 미리 사둔 기도원 부지, 산에다 사둔 묘지터, 높이 올라간 교회당이나 통장에 차곡차곡 싸이는 교회 적금통장, 늘어나는 교인수, 새로 들어온 파이프 오르간이나 보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부흥을 위해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이 이루어 지이다
세상에 나가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구석구석이 모두 썩고 부패해서 절망적인 분위기입니다. 그렇기 깊이 절망하게 되었을 때에 교회에 와서는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통곡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절망스러운 세상의 형편,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않고 주님께 경배하지도 않는 이 비참한 세상을 보면서 마지막 희망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정말로 살아있고 그런 세상을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 앞에 항의하듯이 믿음으로 호소하며 “주님 우리를 향한 긍휼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에게 베푸시던 그 큰사랑과 인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주 앞에서 마치 보지 않음을 당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땅을 황무하게 버려두시나이까?” 애끓는 호소함이 이 교회에 있어야 하는데 교회가 한 수 더합니다. 순진한 사람이 와서 세상 술수를 배웁니다. 그런 상황이 된다면 세상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세상이 정말로 고쳐질 수 있겠습니까?
신학교에서 95년도 가을쯤에 호세아서를 강의하고 내려오는데 어떤 학생이 황급히 쫓아옵니다. “교수님. 교수님”. “왜 그러니”. “호세아서를 더 깊이 깨달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해에 4학년에서 호세아서를 한달 동안 강의했는데 한 반에서 다섯 명이 휴학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아무래도 이 길을 못 갈 것 같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했다고 했습니다. “잘 했다. 하나님이 다시 불러주시면 오고 그렇지 않으면 한푼이라도 벌어라. 놀아서 무엇을 하겠느냐! 핫도그 장사를 하든지 오뎅을 팔든지, 아니면 다른 곳에 취직을 하든지 벌어라. 그래서 좀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서 헌금도 해라”라고 돌려보냈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내보내는 쪽으로 지금도 제가 많이 권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 참 가르쳐 줬습니다. “호세아서를 먼저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가 이 호세아서를 공부하려하지 말고 호세아의 마음이 되어보려고 하라. 그래서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공부하지 말아라”. 성경은 그렇게 해서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가르치려고 들춰보는 사람은 항상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호세아의 마음을 부어 달라고 기도해라. 그러면 그 글 쓴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 아니냐?” 군대 갔다 온 사람의 편지는 군다 갔다 온 사람들의 마음에 척척 와 닿습니다. 시집가서 시집살이하는 딸의 편지를 보고 펑펑 우는 엄마는 자기도 시집살이를 한 사람입니다.
“어쨌든지 죽 이해를 해라. 그 다음에 호세아의 마음이 되면은 호세아가 무슨 뜻을 가지고 그 글을 썼을까를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해석을 해라. 그리고 그렇게 해석을 하고 이해를 다 끝낸 다음에는 이제 내가 이것을 외칠 때에는 어떻게 외칠까를 그때에서야 생각해라. 생각을 한 후에는 그대로 설교를 하지말고 지금까지 호세아를 연구했던 훌륭한 믿음의 사람과 만나서 그들의 작품을 통해 서로 협의를 해라. 그들의 말이 맞는지 네 생각이 맞는가를 모두 협의를 한 다음, 이 결정체가 되는 메시지를 가지고 호세아는 그 당시의 사마리아에서 외쳤지만 너는 카페골목에서 외칠 차례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교회를 향해서 예언해야할 차례가 아니겠느냐?”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번성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을 초월해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만을 보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만을 보고 자긍심을 느낀다면 그것은 상업주의입니다. 보십시오. 그 껍질에 현혹되지 말고, 그 속을 보십시오.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있는 가를 보십시오. 그런 시야를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오는데 진실되게 변화를 받는 사람들이 누가 있는가? 그리고 그 변화받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달라져 가는가? 이런 하나님을 믿음 사람들은 더 신실해져가고 있는가? 거룩한 삶이 더 증진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깊이 보십시오.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한 사람들은 굳어져가고 타성에 젖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견고해지고 있는가? 돌멩이처럼 되어가고 있는가, 나무처럼 자라가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보십시오. 이런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돈이나 물질,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살 수 있으면, 선지자가 왜 이렇게 통곡했겠습니까? 선지자는 돈이 없고 동역자가 없어서 통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지자가 보는 것입니다. 역사상 이 지구 위에 서 본적이 없는 그 영광스러운 솔로몬 성전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영적인 시야로 보니, 너무나 황무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을 대항하는 어떤 거대한 세력이 있어서 백성들을 움직이고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소를 짓밟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영적인 세력의 등장을 구약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도 명백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증거를 대겠습니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것과 버금가는 또 다른 큰 죄가 있었는데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그것을 충동시킨 것이 사단입니다. 사단이 충동시켜서 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몹쓸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왜 잘못된 일인가 하면 왕국의 인구를 조사해서 병사들의 숫자를 헤아리고 거기에 긍지를 느끼는 일들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할 하나님의 종 다윗이 할 일 아닌 것입니다. 행동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적인 세력이 백성들을 충동질하고 종교지도자들을 움직이면서 앙상하도록 종교의 규례는 남겨놓고 그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모두 사라지도록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 전에 역대하서를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할 때”라는 시리즈를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못 들으신 분은 오늘 내려가다가 사가지고 가십시오.
그것이 솔로몬 시대의 일입니다. 얼마되지 않은 때의 일이 아닙니까? 다윗이 10세기 사람이니 솔로몬은 900년대 아닙니까? 솔로몬은 그 후대입니다. 성전이 930년경에 건축되었다고 봅니다. 솔로몬 성전을 완공하고 난 뒤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드리면서 기도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고 백성들은 박석깐 땅에 모두 엎드려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영광스러움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 영광이 사라지고 나면 어떻습니까? 금과 은으로 지어진 그 화려한 성전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기에 영광스러운 것이지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는 눈도 가려서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누가 하나님 앞에 중요한 사람입니까? 아무리 이 세상에서 권세가 있고 돈이 많으며 많은 교육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똥을 퍼도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거지 나사로처럼 헌데를 긁으며 남의 집에서 빌어먹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정말로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람이면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VIP입니다.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그런 시야를 가지고 교회도 보고 사람도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 모두 사라진 것이 선지자의 눈에는 이미 원수들에 의해서 성전이 영적으로 유린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처절하고 하게 유린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얼마나 정신병자와 같았겠습니까? 예레미야가 통곡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예루살렘성이 모두 무너진 가운데서 그 앞에 엎드려서 심히 통곡하며 웁니다. 그것은 이해가 갑니다. 누구도 그 사람을 보고 정신병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멀쩡한 영광스러운 성전이 아직 서있는 이때에 “주의 성전이 유린당했습니다”. 누가 유린했습니까? 아무도 유린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린당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금이나 은과 같이 썩어질 것들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 당신의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임재, 그 축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교회당에 들어온 사람들이 언제 오든지 정직하고 선명한 하나님의 진리를 듣고, 그 하나님의 진리를 듣는 동안에 아무리 무심하고 멍청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진리를 깊이 깨닫고 말씀의 찬란한 빛의 비추임을 받아서 그것에 거꾸러지고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 이것이 교회가 큰 건물과 넓은 토지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 시야에서 만약 우리들이 교회를 본다면, 우리는 부요할 마음이 없어집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변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놀랍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캄캄하게 어두움 속에서 밝은 빛을 보고 벗어나서 하나님의 진리의 빛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삶이 놀랍게 변하고 망가졌던 가정과 관계들이 치유되고 고쳐집니다. 그가 정말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복의 근원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안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회심의 근처에 가지 않은 사람, 우리들이 아무리 간절히 권하고 눈물로 기도해줘도 마음을 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 얼마나 두꺼운 무지 속에서 태어났고 그렇게 살았는지 아무리 쉽게 진리를 설명하고 가르쳐도 진리를 깨달으며 하지 않고, 아무리 진리를 쉽게 가르쳐주고 풍부하게 가르쳐 줘도 도무지 그 빛 가운데로 나오기를 싫어하면서도 교회를 떠나지 않는 이 무지막지한 교인들, 하나님의 예배를 민방위 교육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드리고 늦게 오며 졸고 딴짓하며 벌떡 일어나 퇴장해 버리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다 솎아 내면은 그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소금창고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교회에 나온 지가 오래 됐는데도 변하지 않습니다. 해결의 방안이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는 교육 체질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랑의 교제를 가져볼 수도 있고 새로운 일꾼들을 임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마음을 열 수도 있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볼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행사를 해서 그들의 마음을 교회로 돌아오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열린 교회 오륙 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말하지 못해도 이 시대의 방법을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별의별 방법을 동원해서 어떻게 하면 이 진리가 사람들 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강구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겨우 회심은 했지만은 그러나 즉시 말라 비틀어져서 마음이 강퍅해지고 예전보다도 더 우울하고 불행한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한때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차가운 추억만을 간직하고 있고 그런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살고 깨닫고 믿어야 한다고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위한 대안이 무엇입니까? 조금 안된 이야기이지만 저는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대안은 없습니다. 그러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부흥의 찾아오셔서 평범한 하나님의 은혜로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사람들을 특별한 은혜로 고치시고 수많은 세월동안 무지무각하도록 수많은 진리를 떠나 보냈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하나님의 말씀의 칼에 맞아 쪼개지고 그 어둠 속에 찬란한 어둠의 빛이 들어가서 마음에 가득한 어두움과 불결과 옛 습관을 몰아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생애적으로 경험하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부흥 이외에 무엇이 이 절망적인 상황을 뒤엎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제가 그렇게 설교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질문이 하나있습니다. 질문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런 것을 모두 동의합니다. 진정으로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정말로 변화될 수 없는데 왜 수많은 사람들, 우리를 포함은 수많은 사람들은 오늘 하나님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듯이 몸부림치는 이 선지자처럼 이렇게 하나님 앞에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영광스러운 부흥을 주시도록 호소하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모두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어 가시기는 하지만 완전히 거두어 가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사데교회가 계시록에서 하나님께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향해서 죽은 교회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괄목할 만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흰옷을 무리들 몇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죽은 교회에 순결한 소수의 신자가 있는 것입니다. 말이 됩니까? 이것이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가 없는가는 흑백으로 잘라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설교하는 목사가 죽어서 없는 교회라 해서 그 다음날 아침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번에 정근두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시골 교회에서 목사님이 가고 나시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집고 교회당에 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오시면 다시 안나온답니다. 그래서 도루묵이 됩니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남은 은혜를 가지고 감사하는 것은 좋습니다. “감사하다. 진정으로 우리는 한 것이 없는데 이런 은혜를 주셨구나! 하나님 영광을 받으십시오.” 이렇게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우거지상만을 하지 마십시오. 경건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합니까? 감사하고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하면 잘되는 것만을 보지 마시고 잘 안되고 있는 곳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등록하지 않고 출석하는 교인이 이 백 명 가까이나 된다면 여러분은 믿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왜 그렇게 떠돌아다닙니까? 그들이 잘못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순간에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정처없이 유리 방황하며 떠돌아다니는 생활들. 물론 상당수가 좀더 다녀보고 결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없기 때문에 신앙이 쌓이면 등록하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많은 변화받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잘되는 곳만 보지 말고 안 되는 곳도 보십시오. 그리고 그곳을 보면서 얼마나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는가의 한계를 철저히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서 깊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곳까지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만 우리를 축복해주시는 하나님의 부흥이 역사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끝날 뿐이다. 하나님이 정말로 역사하실 때,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 애써도 될 수 없었던 교회를 짓밟고 있는 대적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도로 세우는 위대한 역사가 있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깊이 믿으면서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길 간절히 호소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교회에 대한 마땅한 견해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교회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 교회가 하나님이 전능하심과 충만한 역사를 보여주던 때를 기준을 두어서 그때를 표준으로 두고 그 뒤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기껏해야 “유럽에는 성령님이 벌써 떠나셨는데 우리는 그것보다는 훨씬 낳다”. 재수없게 성령께서 떠나신 교회와 비교합니까? 얼마나 못났으면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은 부흥은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선지자와 같이 일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입니다. 어떻게 입니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오 주여 이 땅이 황무하고, 이 땅을 고치도록 우리를 부르셨는데 하나님, 이 땅을 고치기는커녕 우리들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리고 우리들은 이 일을 할 능력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부산하게 애는 쓰지만 오 주여!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빛줄기가 필요합니다.”하고 하나님께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회 사무실에 갔더니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When man works man works, when man praies God works”. “사람이 일할 때 사람이 일하고, 그러나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서 부흥을 구하며 살 때에 그런 날들이 오게 하기 위하여 피 절인 통곡으로 기도하며 부흥이 오는 길 앞에 눈물을 뿌렸던 그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공로라는 것은 진정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12.주의 통치가 그칠 때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사63:19上)
지난 시간에는 18절 주의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대적들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습니다 거기까지 보았어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어떻게 보면 조금 어려운 듯한 그런 설명이 좀 많이 들어갔었죠 그죠? 그래도 여러분들은 훌륭히 이해를 잘했죠 그죠? 대답이 없어요
제가 오늘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은 어 이 설교단은 말이죠 아주 쉽게 말씀을 푸는 곳이에요. 여기는 학식있는 사람을 위한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무학자를 위한 강단도 아니에요 단지 마음으로 구원의 길을 찾고 싶어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설교단이라구 그러니까 아주 쉽게 하려고 애를 써요 그리고 또 그것이 하나의 설교자의 한 의무이기도 해요
예수님 말씀 생각해 보세요 굉장히 쉽죠? “얘들아 공중 나는 새를 보거라, 두 여자가 맷돌을 갈았거든, 바다에다 그물을 쳐서 고기를 많이 낚았거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세요. 굉장히 쉽죠? 그죠? 쉽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면 제자들이 쉽게 했기 때문에 모두 알아 들었냐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뜻들을 예수님이 다시 설명을 해주셔야 됐어요 이렇게 쉽게. 그래도 이해를 잘 못하는 얘기 있었죠 그건 예수님이 표현을 어렵게 하셔서 그런게 아니라 그 경우에는 이 영적인 수준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이해를 못했던거죠 그래도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고 쭉 설명하셨죠
뭔가 여기에서 뭔가 어렵게 설명이 되고 있다 그럴 경우에는 꼭 필요한 경우가 있어요. 그, 제가 당부해 드리고자 하는 것은 무슨 얘기냐하면 설교를 들을 때에는 뭔가 이해하기가 어려워지면은 여러분 입장에서는 저렇게 어렵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단지 설교자의 무능에서 찾으면 않돼요. 그렇게 찾으면 않돼고 ‘저렇게 까다롭게 이렇게 하나 씩 하나 씩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따지고 들어가면서 막 설명을 하는 거기에는 뭔가 그 과정자체가 성경에 있는 참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된다구요. 그래서 그 그런 태도로 마음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 성경을 읽어 나가야해요
100년 전에 설교가로서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을 받았던 찰스 스펄전 목사는 자기의 한 책에서 이런 얘길 했어요. 왜 많은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생생한 계시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희랍어로 성경을 읽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않는걸까? 그때 그 말을 할때 염두에 두었던 사람들은 저명한 목회자가 아니라 자기의 설교를 듣는 이 신자들이었다구. 그러니까 얼마나 설교자가 그런 정도에 사모함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로 설교가 풍성한 설교였는가 알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는 말하자면 신자들이 이 히브리어까지는, 희랍어 정도를 이렇게 공부를 해서 그 성경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도움을 찾아내려고 왜 노력을 안할까? 저는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 신학생들도 추억에 아스라한 희랍어를 무슨 평신도들이 또 그걸 배우겠어요. 허긴 어느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설교하러 올라가면 저 뒤에 사찰 집사님이 희랍어 성경을 탁 펼쳐놓고 설교를 듣는다고다 합니다만.. 사찰 집사님이 그렇게 희랍어를 잘 한데. 신학생도 못하는 희랍어를. 그런 사람이 교회마다 다 있겠어요? 어쩌다 한 명이겠죠.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을 잘 풀어서 설명할 때에는 뭔가 그 속에서 선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길어내는 과정이에요. 대게 그 부분들이 생략되는데 근데 그것을 과정을 다 보여 줘야할 때는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들을 설득해야할 아주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때 그렇게 한단 말이죠 그래서 청교도들은 말이죠 아주 철저히 그 이런 희랍어와 이 그 라틴어는 물론이고 희랍어와 그리고 원어에 대해서 박식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에게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할 때는 거의 그런 얘길 안 하거든요. 단, 꼭 필요할 때 그것을 설명하는 과정을 다 보여 줘야할 필요가 있을 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따금 하다가 그런 얘기가 나오면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잘 적어놨다가 그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배우면서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것이 성경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거라 이거죠. 우리는 조금만 설명이 상세해지면 ‘아이 뭐 이렇게 복잡해 그냥 손큰 여자 나물 무치듯이 요물쪽 조물쪽(?) 해서 휙 집어던지면 그만이지 왜 이렇게 복잡해’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러나 그렇게 돼서는 않된다 이거죠.
그래서 지난주에 18절을 해석하면서 그런 얘길했는데 여기에서 대적들이 주의 성소를 유린했다 라는 이야기를 어떤 사람들은 이후에 있을 바벨론 포로시대 때에 바벨론 침공에 의해서 성전이 망가진 그런 것들은 미리 내다보면서 말했다 하는데 사실은 그런 의미라기 보다는 에 그 어떤 어 그 하나님을 믿는 참된 유일신 신앙, 그런 것들을 가로막는 세속주의와 이 모든 것들을 대적으로 의인화해서 보고 그런것에 의해서 이제 황폐하게 되어있는 그런 것을 본 것이다. 그런 성전의 모습을 영적인 각도에서 본 것이다. 그 예수님도 멀쩡하게 않무너져있는 성전을 보시면서 통고하며 우시는 장면도 역시 말하자면은 성전이 그런 하나님의 심판을 겪지 않으면 않될 처지에 놓여있는 영적인 형편 때문에 통곡하신 것이 아니냐 그런 이야기를 쭉 드리면서 18절에 대한 설명을 마쳤어요
그런데 이제 18절을 보면서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거죠. 주의 백성이 땅을 그랬는데 땅이라는 말은 히브리 성경에 않나온다고 했죠 그래서 주의 백성이 이 성소를 뭐 성소가 땅에 있으니까 마찬가지긴 하죠 그 땅을, 그곳을 차지한지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런데 주의 그 대적들이 성소를 짓밟았습니다. 사실 이 말이 맞느냐 이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침공한 것이 아 그 15세기 경으로 보거든요 15세기에 출애굽을 해서 40년 방황을 해도 하여튼 14세기 그리고 조금 정복하는 기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15세기가 넘지 않아서 그 14세기 경에는 거의 정복이 마무리가 됐는데 여기 이것을 지금 기록하고 있는 연대는 690년경이 거든요? 그러니까 주전 7세기죠. 7세기,15세기면 약 700년,800년 차이가 나는 것 아니에요 그죠?
그 기간이 짧은 기간이냐 이거죠. 오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벌서 이런 것들이 이 선지자의 마음속에 있는 그 이세상의 주의 이름으로 구속받은 백성들에 의해서 그 세워지는 이 나라가 정말 그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주를 위해서 사는 그런 교회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 보여줘야 하는데 그 순간에 불꽃처럼 번쩍하고 사라지는 그런 것으로는 이 선지자가 만족할 수가 없는 거에요. 어떻게 영원히 주님이 통치하고 다스리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일시적으로 받고 반짝하고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랑 속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면서 늘 살아가는 신령한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거죠
그런 소망이 여기 묻어있는 거에요. 그러면서 이제 그 주의 성소가 그 대적들에 의해서 모두 유린되고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생활이 그 신앙생활이 황폐하게 되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져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니까 그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냐 하면은, 우리는 오랫동안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또 주의 이름으로 일컫지 못하는 백성처럼 되었습니다 그 두 가지거든요.
첫째는 이제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냐면은 이렇게 되있죠.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그랬거든요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그런데 말이 이해가 잘 않가죠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히브리어 성경에선 뭐라고 되있냐면 이렇게 되있어요
우리는 되었습니다 어떻게 메올란(?) 영원전부터 그러니까 오래전이겠죠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이렇게 이렇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당신이 우리를 다스려주시지 않는 그런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일컬음을 받는 그런 사람이 못되게 되었습니다. 그런 얘기에요 그게 무슨뜻이냐면은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그랬는데 이게 그 오래전 부터라는 거죠 그러니까 벌써 이 선지자가 보기에 이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맛을 잃어버렸는지 이제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볼때에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민족처럼 보였다 이거에요
보였다 이거죠. 그런데 그것을 뭐라고 표현했냐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려 주시지 않는 나라,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거죠 그러니까 ‘처럼’이 아니라 진짜 우리는 되었습니다.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다스려 주시지 않는, 우리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다스려 주시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다스려 주시지 않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있는거죠. 자 그럼 여기에서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선지자가 고민하는 내용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다스림과 일컬음이에요. 다스림과 일컬음 그죠? 다스림은 뭐냐하면은 하나님이 통치해주시는 거에요 통치해 주시는 것, 그 하나님이 통치해 주시지 않는 나라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해 주시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혹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해 주시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제 이 선지자에게 있어서 아 비통한 통곡의 제목이 된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다스려 주시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고 그랬는데 그걸 누가 원하던 거에요?
그것을 그렇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하나님이 다스려 주시지 않는 나라처럼 되어 버린 것을 불신앙속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바였어요. 원하는 바였어요 그리고 그대로 된거죠
그랬더니 진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참 이상하쟎아요? 뭐가 이상하냐면은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신앙을 점점점점점 잃어버리면,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그 야단도 치시고 그리고 징계도 하시고 그럴것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살면 않되는구나, 하나님이 계시구나 하나님께 순종해야 되겠구나, 이런 것을 자꾸 자극을 받게 되쟎아요 그런데 이게 정도가 지나가 버리면은 그 다음에는 실재로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셔도 사람들이 그런 간섭이 하나님께로 부터왔다고 생각을 않하는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 진노하시는 아주 굉장히 마지막에 가까운 방법중에 하나가 뭐냐하면은 내버려두시거에요. 내버려주시는거에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상태에 있는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싫어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했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복을 주었는데 어느 정도는 행복을 주었는데, 이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하나님께서 완전히 다스려 주시지 않는 그런 나라가 되었을 때 그들의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모두 바닥이 나고 이제 그러한 속으로 바닥이 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제 앞으로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바깥으로 드러나게 되어서 결국은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떠나셨다 그런 확신을 이방민족들에게 주는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이 공격해온 적이 많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고 막아주시는 경우를 이스라엘 주위에 있는 나라들이 맣이 경험을 했어요 그죠? 많이 경험을 했단 말이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이제 이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두려움을 가져다 준거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을 때에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광스러워지는거에요. 그래서 많은 이방에 있는 백성들이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모르지만은 저들이 홀로 있는 소수 민족의 백성이 아니라 저들 가운데 누군가가 함께 하셔서 저 민족을 특별히 지키고 있으며 따라서 저 민족은 매우 강한 민족이다 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들을 이방의 민족들이 갖는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한 조건은 뭐냐하면은 그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이 다스려주시는 것을 기뻐하면서 사는 백성들이 되어야한다 이거죠
그것 없이는 않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제 현실적으로 보면은 그 이스라엘 얘기만 하면 우리가슴에 다가오지 않겠죠 그런데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보라 이거죠. 여러분 자신을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
인생을 살면서 어떤 때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내 인생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이 커다란 위로와 격려, 말할 수 없는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이 될때도 있지만 주님이 지켜보시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쟎아요 그런 적 없어요?
주님이 지켜보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 어떤때 그래요? 불순종하며 살때는 그렇쟎아요
내가 뭔가 정말 마음을 다해서 주를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거나,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이 좀, 그 나의 인생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이 커다란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과 화해를 누리면서 살아갈 때에는 그런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면 막 큰 힘이 나는 거에요. 용기가 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할 때에 힘이 나는거에요. 왜? 그 모든 것 그럴때에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완전한 사랑은 아니지만 정말 주님 앞에 순전하고 정직하게 주를 위해서 살려고 하니까 그 내 마음 갈피갈피에 묻혀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이해해주지 못하는, 설명할 수도 없는 아주 미묘하고도 복잡한 모든 문제들을 주님께서는 모두 알고계시고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는 가장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나를 종종 오해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오해란 것이 없거든요. 오해를 하신다면 하나님이실 수 있어요? “너 왜 이렇게 했냐? 사실은 이런데요 아 미안하다 내가 잘 몰랐다. 그래서 그랬냐?” 하나님에게는 오해란 것이 없거든요
다 아신다 그럴 때 하나님이 혹시 잘못 알고 계시면 어떻하나 우리 그런 염려 할 필요 없거든요 감추어진 모든 것이 그분 앞에서는 벌거벗은 것처럼 모두 드러나는 것이에요. 그때에 그것이 한없는 위로가 되는 것은 그 하나님과 화목하고 무엇이든지 우리의 그 삶에 있어서 총체적인 부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모든 방향에 있어서 전방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모두 알고 계시다. 너를 지켜보고 계시다.’ 이게 한없는 위로와 기쁨이 되는 거에요. 그러나 뭔가 좀 어 요 순간만 하나님이 참 지켜보지 마셔야 하는데. 우리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은 그러나 주님의 시선이 한없이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경우 있쟎아요 그죠? 어 정말 이렇게 살고 있는 동안에 주님이 오시면 어떻할까 뭐 그런거 많이 있을 수 있을것 아니에요 그죠?
우리가 뭔가 양심에 꺼리끼면서 뭔가 행할 때 가책을 느끼면서도 뭔가 자기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크기 때문에 불순종인지도 알면서도 그것을 택해야 될 때 그럴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하는거에요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하는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아 인간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할 수도 있습니까? 그건 불가능한거에요. 하나님이 다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거죠 그 누구도 하나님의 그 이 뜻,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무슨 얘기냐하면 어항을 이만한 데에다 물고기를 기르쟎아요 이렇게 주인 딱 들면 물갈아주려고 번쩍 드는지, 물고기가 물을 갈아주려는지 자기를 회 쳐서 먹으려고 그러는지 뭐 알아요? 딱 드니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막 돌아 다니쟎아요. 아무리 돌아다녀도 여기에서 번쩍 들어서 저리로 옮기려고 번쩍 들었어요. 막 돌아다녀요. 그래도 여기다 갖다 놓으면 장소 이동이 되는 거에요, 않되는 거에요? 장소 이동이 되는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서 살 수가 없는거에요 다 다스리시는 거에요
교회를 떠나면 목회자의 사정권 밖으로 도망갈 수는 있죠 그러나 하나님의 사정권 밖은 없어요 어디서든지 도망가면은 그러니까 어떻게 멀리 도망 갔는데 하나님이 사랑의 미사일을 한방 싸가지고 그래서 또 손들고 옵니다. 그 찬송있죠? 그거 부르면서 이번 우리 또 십자가 사경회때도 그런 인간이 나올거야, 아마 손들고 옵니다. 하나님의 사정거리를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려 주시고 그 다스려 주시는 것을 말할 수 없이 행복해 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반응이 함께 어우러진 그런 삶이 바로 주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에요. 그런 성도의 마음이 잘 배어있는 성경이 시편 119편 같은 경우에요.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데 그 감사의 제목이 뭐냐하면 지키면서 살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에요. 자다가 깨서 생각을 해도 아, 세상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우리로 어떻게 살으라고 가르쳐 주셨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데 그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거에요. 어떤 사람이 그게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그 통치를 기뻐하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적마다 한없이 부담을 느끼고 한없이 이 그 힘겨운 것을 느끼는 그런 사람들은 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거에요.
언젠가 한번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언젠가 한번 심방을 갔는데 어느 지체집에 심방을 갔어요 가면 뭐 목사가 궁금한 게 뭐가 있겠어요? 그집 세간이 궁금하겠어요, 뭐 집이 궁금하겠어요 뭐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집 구경하고 그런 일도 없어요. 앉아서 제일 궁금한 건 요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가 그게 제일 궁금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요즘 어떻게 교회 나오면서 예배 잘 드립니까?”그랬더니 잘 드린데요. “요즘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 받습니까?” 그러면 못받으면 좀 그럴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주 지혜롭게 말을 돌려서 살살 잘해야돼. 그래 “요즘 말씀을 들으면서 뭐 좀 느끼는게 있습니까?” 그랬더니 교회만 가면 주일날이면은 너무 괴롭데요. 아, 얼마나 희망적이에요? 괴롭다는 건 좋은 것이거든요. 그죠? 괴롭다는 거는 회개일 수도 있고 그래서 나는 어떻게 괴롭냐고 주일마다 일주일동안 잘 살았는데 주일날 교회만 가면 목사님이 속을 다 뒤집어 놓는다는 거예요. 왜 뒤집힐까요?
뒤집어지기를 원하지 않으니까 뒤집히는 거에요 이해하시는 분들은 웃고 있어요 지금 아직도 눈을 멀끔하게 뜨고 멀뚱멀뚱해진 분들은 아직 이해가 않된거에요. 다시 반복할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뒤집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뒤집히는 거에요. 속이 뒤집히는 거에요
진짜 하나님 나를 정말 뒤집으셔서 그래서 옛것을 다 버리고 새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 것 같으면 속이 뒤집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뒤집히는 사람은 속이 시원해 그런데 나는 그냥 나대로 살고 싶은 거에요 근데 어떻게 살면 않된다고 그러는데 자기한테만 하는 얘기 같을 때 그때 뒤집히는 거죠 나는 안뒤집히고 싶은데 자꾸 얘기하니까는 이게 괴로워지는 거에요 근데 그것도 좋은 거에요 왜 한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하는 사람도 있지만은 그렇게 탕탕탕 얻어맞는 소리에 뒤집히는 사람도 있다구
얼마든지 그런거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건 우리가 쉽게 얘기할 수가 없는데 요지는 이거에요 여기에서 주의 다스림을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스리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을 말할 수 없이 행복해 하는 곳에 하나님의 주인 되심이 확연하게 드러나는거에요 예? 그게 하나님이 그 백성들 가운데 주인이 되신다고 하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고 주님이 주인 되신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는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한 백성이라 사실을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이거죠
그러면은 자 한번 보자 이 얘기죠 보자 이거죠. 시인은 말하기를 이미 오래 전부터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이 됐다 이거죠. 그게 무슨 얘기에요? 얼마전부터 여태까지는 않그랬었는데 하나님이 이 백성이 갑자기 이상해졌습니다라고 할 것 같으면은 그래도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을 기뻐하던 옛습관이라던지, 옛감각이 쭉 남아 있을 것 아니에요 그죠?
그래서 제가 이것을 가지고 한번 여러분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준적이 있었죠? 죄죽임의 교리를 할 때, 어떻게 설명을 해줬어요? 이런 얘화를 들은거 기억나세요? 촛불을 추운 겨울에 촛불을 켜놓고 이렇게 심지에 불을 붙히려고 그러면은 성냥불을 그어대면은 그 초에 불이 탁 붙죠? 실험을 해보면은 잘 않붙어요. 그래서 잘 한번 옛날 생각을 해보세요 켜가지고는 그냥 이렇게 대는 게 아니라 자꾸 이 심지를 그 성냥불로 부비면서 붙으라고 자꾸 사정을 하는 거에요 그게 겨우 붙어요 그래서 그것을 이제 맨처음 불꽃이 요만하다가 주위에 초가 녹으면서 그게 기름처럼 심지를 타고 올라오면서 빛이 점점 밝아지쟎아요 그죠? 그러다 이제 환하게 밝아져요 그렇게 해서 뭐 한 두시간 불을 켜놔요. 그러다가 아까와서 이제 그만 자자 훅 하구 껐는데 옆에서 아우 잠깐만 이거 좀 다시 켜봐 그때는 탁 켜서 근처에만 가도 퍽하고 불이 붙는다구 물론 퍽소리는 않나지만은 무슨 가스에요? 퍽소리는 않나지만은 탁 키면 근처에만 가도 불이 붙어요 그래서 문지를 필요가 없어요. 그게 뭐에요? 아직 타던 기운이 남아 있는거죠 마찬가지에요
이 백성이 지금 갑자기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못하는 백성들 같았다면은 그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런 것들이 남아있을거 아니에요? 그러면은 그런 것들이 남아 있으면은 그걸 같다가 존오웬 같은 경우엔 뭐라고 표현했냐면은 범죄를 했어도 그 범죄 했다고 해서 즉시 우리 속에 있는 은혜가 깡그리 날라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거에요 더 무서운 것은 한번의 범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뭐냐면 그것이 이어지는 연속적인 범죄를 필요하게끔 만들어내고 그것이 계속되는 동안에 우리속 에 있는 은혜의 불이 완전히 꺼져버려서 그래서 도저히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게 더 무서운 것이라고 그러니까 어때요
때도 마찬가지잖아요 때가 금방 묻은 것은 쓱 닦으면 닦아져요 오래도록 묻은 것은 날짜 정해가지고 맘먹고 세제로 막 닦아도 닦아질까 말까란 말이에요 그런 것과 똑같거든요 오래됬다고 하는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 이미 이런 그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지 않는 불신앙과 이 그 영적인 생명이 사라진지 아주 오래되어서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거의 그 캄캄한 어두움과 그리고 이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죽음이 사회 구석구석에 다 배어버렸다구, 그래서 자기와 같은 선지자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백성들을 향해 통곡을 하며 외쳐도 번쩍하고 불이 붙어도 어 자기의 설교에 불이 붙어도 그 불이 인간들에게 옮겨 붙지를 않는거에요 그러니까요 교회도 탁 갔을 때 성도들의 은혜가 워낙 고갈된지가 오래되어가지구 바닥까지 내려가서 완전히 얼음장이 되어버리면은 막 이렇게 그 말씀을 전해도 이게 쉽게 이동화가 않되요 그런데 은혜가 쭉 살아있는 교회일 경우에는 말이죠 가서 하나님께서 탁하고 말씀을 주시면은 금방 펑 하고 불이 붙는거에요 꼭 그 뭐야 가스 가득찬 방에 성냥불 그어서 휙 던지면 펑하고 붙듯이 여기서 그냥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하면 평하고 쫙해가지구 이 등(?)까지 펑하고 불이 붓는데 그 느껴진다구.
근데 이 이스라엘 백성 어떻게 그런 백성들이 방금 은혜를 잃어버렸다든지 방금 하나님의 어떤 실수를 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진짜 영원히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옛날에 이 백성이 하나님의 그런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다스려주심에 대해서 한없이 감격하던 적이 있는 인간들인가를 생각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히 불신앙으로 가득찬 돌덩어리와 같은 인간들이 되어버렸다는 거에요 그걸 말하고 있는거에요. 언제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영광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거에요.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거에요
아마 어 내가 돈을 많이 벌면 내가 사람들 앞에서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좋은 직장을 갖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면은 아마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못할거다. 누가 또 무시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다 자기 생각이지? 그런 데서 어떤 영광을 찾아요 근데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영광은 무엇이냐면은 하나님이 그를 충족히 다스려주시는 거에요
삶의 구석구석에 개입하셔서 이 그런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가득찬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영광이에요 왜 그렇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그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뻐할 때에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 사람이 바로 여호와와 함께 동행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여호와와 동행하는 사람으로 보이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거에요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행복이라구
예를 들면 요셉같은 사람이 그런 경우 아니었어요? 그죠? 사회적인 지위로 말하자면은 요셉이 새옷을 입고 바로앞에 섰을 때 그것은 바로 애굽의 임금인 바로하고는 비교도 않되고 바로 밑에서 봉사하고 있는 신하인 보디발의 소유였어요 소유 보디발 마음대로 이렇게 죽이면 죽이고 팔아버리면 팔아버리고 살리면 살려줄 수 있는 그런 소유물이었어요 소유물 그러면 보디발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세를 가진게 자기인데 대면하고 섰을 때 사실 세상적인 지위면에서 보면 오늘날엔 비교할 수없죠
여러분 사실 옛날에 애굽임금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줄 모르죠? 그 이 세상에 있는 지금 대통령 다 합쳐도 그 사람보다도 더 안 높아요. 그럴 정도로 권세가 있는 사람이라 이거죠? 그래서 (?) 그런데 벌써 이 바로는 그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은 몇마디 대화를 나누고 자기의 꿈을 해석해주는 그 모든 잠깐 동안의 면담을 통해서 즉시 딱 깨달은 것이 뭐냐면은 저사람은 혼자있는 사람이 아니다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이거에요 뭐가 이 지혜나 지식 그다음에 모사가 특별나고 얼굴이 예뻐서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개인의 어떤 천재성 속에서 저 사람이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사람처럼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어디서 찾겠느냐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하면은 바로가 요셉과 대화를 나누고 꿈을 해석하는 모든 과정을 다 이렇게 지켜보면서 바로가 정말 이 이 노예로 끌려온 젊은이가 정말 똑똑하고 대단한 일꾼이다 그거에 감격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는 거에요 저게 쉽게 말하자면은 신들린 인간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거에요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신들린 인간이구나 무슨 신 여호와의 신이 저와 함께 하는 그 신의 감동됐다라고는 의미는 히브리어에서는 이 전체가 그 신의 영향을 받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거에요. 육체와 정신과 마음과 모든 것이 예외없이 그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온통 감싸져서 그 영향아래 있는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거거든요 그게 세속적인 표현으로 신들린 거에요 그걸 본거에요
근데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어요? 뭐 여호와의 어떤 신의 권능을 받은 그런것을 사람이라기 보다도 성경이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은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라이었다.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정말 기뻐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더 재미있는게 그거쟎아요 흉년이 들고 풍년이 들것을 보여 줬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보여 주셨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 요셉은 재미있는게 풍년이 드는 동안에 곡식을 모아 둘 것을 장려를 했지 ‘아 걱정마십시오 바로여 내가 하나님께 직접 가서 그져 흉년은 없게 해주고 계속 풍년만 계속 해달라고 얘기를 해드릴때니 잠깐 기다리시라고’ 이 그런식으로 해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어요 그만큼 여호와의 뜻에 대해서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거에요. 그게 무엇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
다만 인제 그 고난을 받으면서 그러한 하나님의 모든 통치가 자신의 영광에 대한 기대와는 상관없이 더 순수해졌던 것은 사실이죠. 어쨌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뻐하고 자기가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니까 이제 이 바로가 딱 볼 때에 신들린 인간처럼 보인 거에요 그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잘 봐요.주님께 깊이 은혜 받고 성령의 감동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오로지 주님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그가 비록 주일학교 어린학생이라도 권위가 있다구 권위가 있어요 권위가 있다구 귄위가 있다고 권위가 그게 어디에서 오는거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데서 오는 거에요. 하나님의 자녀의 최대의 행복이 무엇이겠어요
우리가 왜 무엇 때문에 내 속에 일어나는 이 사악한 욕망과 피흘리기까지 싸워요? 우리가 지난 일주일동안에 지은 죄들도 세상의 법정에서 서야할 정도로 죄를 지은 적은 없었을 수도 있어요 그죠? 다른 사람들 법 없이 막 살아가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아요 오죽했으면 서대문 교도소 설교하러 갔더니 거기 있는 사람들은 그래 목사님 여기는 죄인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듣기만 했더니 여기는 조금 죄지은 사람들이 온데고 진짜 큰 죄지은 사람들은 밖에서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 뭐 그럴꺼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렇게 괴로워하고 뭐 나한테 잘못한 인간 내가 미워하는데 무슨 대한민국에 양심의 자유가 있는데 내가 뭐라고 마음을 먹든지 누가 나보고 뭐라고 정죄하냐 이거에요 그런데 그걸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가슴아프게 고백을 하고 용서를 빌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고 막 이러는 이런 처절한 몸부림 그래서 정말 정결해 지길 원하고, 순전해 지길 원하고 그러한 처절한 몸부림이 무엇 때문이에요 그건 그냥 그냥 이렇게 주일날 하루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 가지고는 하나님도 행복하시지 않지만 우리도 행복할수 없다는 것이 느껴지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삶 구석구석을 다스리시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세계속에 오셔서 하나님이 않기뻐하시는 모든 것들을 몰아내시고 순간순간 스쳐가는 마음과 생각 명상 모든 것 까지라도 주님이 다스리셔서 주님의 통치아래 있어서 그 모든 것 까지라도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그런 삶을 살게하는 동기가 아니냐 이거죠.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말해요?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에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이 외면적인 삶에 있어서 뭐 별로 그렇게 흠잡을건 없구나 그런 정도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스쳐가는 생각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를 원하고 입을 떼어서 잠시간 말하고 호흡하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죄와 더불어 싸우고 부패한 본성을 인해서 마음 아파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거죠. 정말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에요. 거룩한 그곳에 하나님의 충만한 다스림이 있고 거룩한 그곳에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이 있다 이거죠 바로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 치는 거 아니에요?
근데 그것이 인제 여기에서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확장되어서 교회적인 것으로 떠오르는, 국가적인 것으로 떠오르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그 부흥에 대한 사모함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다른 사람의 죄를 그렇게 구별할 마음이 별고 않드는거에요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인데 저 지체의 저런 믿음 없는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아파 하실까 그게 바로 자기 탓인 것 처럼 마음아파 하는 거에요. 그게 바로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다보면 말이죠 부흥을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할때에는 이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아주 뼈져리게 느끼는 거에요 모두 지체즐이에요
그런 것이 지금 오늘 이 피를 토하듯이 예언하고 있는 선지자의 안타까움이에요 근데 결국 어떻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은 뭐냐하면 주님이 자기들을 충분히 다스려 주시고 그리고 자신들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서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인 것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거 요셉이 바로 앞에 신들린 사람인 것처럼 보였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하는 비범한 민족이란 것을 보여주어서 나도 어떻게 하면 저들을 다스리고 있는 저들이 그토록 행복해 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걸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민족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거든요
그래서 선교에 있어서 이런 공식이 성립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매우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에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에 대해 생각을 하게되고 효과적인 선교가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선교가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뭔가 사람들은 오늘날은 근데 생각이 다르죠
어떻하냐면 무조건 문턱을 낮추면은 세상이 들어 올거라고 생각해 근데 사실 문턱을 많이 낮추는 거는 필요할 수도 있겠죠 근데 문제는 모든 것들을 그런 식으로 모든 걸 평준화하면 세상에서 사람들이 들어올거라 생각하는데 그거 아니에요 오히려 이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우리가 너희들과 똑같다 이런 것을 보여줌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치관과 인생관 행복의 이유 즐거움 만족 모든 이런 것들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줌으로써 세상사람들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과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구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반밖에는 못봤지만은 오늘 우리는 여기서 이런 사실을 깨닫는 거에요. 대적들이 하나님의 성소를 유린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못하는 성소가 되었을 때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 삶속에는 오랬동안 하나님 없이 살아온 이방 백성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어요 그 하나님을 선지자는 바로 그 앞에서 말하기를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랬는데 말하자면은 이 애비없이 살아온 아이들처럼 그렇게 무례하기 짝이 없고 인간의 도리와 인생의 참된 이치를 전혀 모르는 짐승과 같이 그런 식의 삶을 산 사람들로 나타난거에요 그걸 선지자가 안타까와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 결정적인 문제가 성소였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보라구
이 교회가 살아있으면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어도 살아 요 교회가 죽으면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도 죽어요 그래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 최고의 가치와 보람이 뭐냐하면은 이 죽었던 영혼들이 이곳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이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곳이에요 그게 제일 중요한거에요 내가 느끼는 만족감 행복 그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주일날 끝나고 나면은 아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그리고 이제 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그리고 맞어 나는 그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백성이야 나를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으셨구나 내 인생의 참된 본분이 무엇인가 맞아 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사는 것이 내 인생의 도리이지 하나님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 감화속에서 주일날 교회에서 떠나가는 것 이 이게 하나님의 교회가 성도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일이에요
이것을 못해주면 이것을 할 수 있는 힘이 교회에서 사라지면 그럼 다른 말로 말하면 이 이사야 선지자가 그런때를 당한거 아니에요 그 어떻게 되는 거에요 성소가 대적들에 의해서 유린되는거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갈한 목을 안고 쓰러지듯이 교회와서 엎드렸는데 이 생수가 솟아나질 않는거에요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하나님께 가면 살수 있을거야 그리고 엎드려지듯이 교회에 나왔는데 하늘에서 양식이 내리지 않는거에요 이게 이스라엘이 그런 상황이 되어버린거에요
그랬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하는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통치를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쉽게 얘기하면은 하나님의 법도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막가는 사람들로 가득찬 나라가 된거에요 그것을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겠어요
당신의 백성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두고 싶어하셨던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통해서 자기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나무를 심고 그 백성들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받으고 싶으셔고 했는데 그렇게 살아가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명예를 훼방하는 그런 처지가 된 자기의 백성들을 볼때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냐 이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를 위한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물론이고 조국의 교회를 위해서 세계의 교회의 그 찬란한 영광,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역사, 그런 것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에요
13.부흥 외에 대안이 없을 때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사64:1上)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는 63장 15절부터 살피고 있습니다. 시작에서 선지자는 “주여 주는 하늘에서 굽어보옵소서”라는 시도로 시작했습니다. 이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의 황무한 신앙의 상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처럼 살아가고 있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주기에 실패한 백성들의 신앙의 심장부에는 대적들에게 짓밟힌 하나님의 성소가 있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부패해도 세상 자체는 세상의 미래에 대한 척도일 수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부패해도 교회가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그 세상이 변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선하다고 할지라도 이 선지자가 탄식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가 하나님의 참된 영광을 보여줄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고 실패하면 그 세상의 미래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칼라일”이라는 영국의 사상가는 한시대의 울려 퍼지는 설교단의 외침을 보면 다음 시대의 세상의 역사가 어떻게 변할 가를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큰배에 비유한다면 설교단의 그 뱃머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설교단만을 의미하겠습니까? 물론 그분은 설교단에서 명징한 복음이 선포되고 그 영향을 받아 성도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역사들이 일어난 다면 그들이 반드시 미래의 시대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의미로 말씀을 남기신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주의 성소가 대적들에게 짓밟혀 하나님을 마땅히 공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생활의 심장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 선지자는 63장 마지막 부분에서 탄식하며 이제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을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런 다음 64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4장에서의 말씀은 과격한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수사법상으로 볼 때에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63장 15절에서 하나님보고 하늘에서 굽어 살펴달라고 호소하던 이 선지자의 외침이 시간이 지나고 나니, 하나님이 하늘에서 굽어살피시는 것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고 그 하나님이 이 세상으로 내려 오셔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고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은 하십니다. 그것을 선지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베푸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율법도 주십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세우시며, 선지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게 하시며, 왕을 보내어 다스리게 하시고, 주의 일꾼들을 세우셔서 백성들의 신앙을 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치는 일을 하나님이 언제나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이 늘 베푸시던 흔히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주심 가지고는 이 대적에게 짓밟혀진 것 같은 완전하게 무너진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 그것 때문에 신앙적인 정체성을 상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와 같은 것을 개선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선지자는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부흥이라는 것은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기적은 늘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보면은 이 부흥을 인간이 조건을 갖추면 언제든지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히려 그런 생각보다는 부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기적과 같은 축복이라는 성경적인 생각이 훨씬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흥은 일정한 조건을 갖추고 인간이 노력을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부흥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마치 부흥이 하늘로부터 내리기를 하늘에 완전히 차 있는데 인간의 어떤 오해나 잘못이 부흥이 오도록 가로막고 있음으로 이런 것들을 해체해버리고 나면 감당할 수 없는 축복스러운 부흥이 쏟아지게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마치 방송국에서 전파를 내어 보낼 때 사이클을 잘못 맞추면 잡음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천천히 돌려 정확히 맞추면 명쾌하고 깨끗한 음질의 방송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인간도 정확히 하나님의 뜻을 맞추기만 하면 슬롯머신에서 동전이 쏟아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부흥이라는 것은 쏟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부흥이 드물게 일어나는가 하면 인간이 그렇게 정확히 맞추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그것을 조심해서 최대한 어떤 조건을 갖추면 부흥이 오는 가를 연구해서 맞추면 지금도 언제든지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부흥주의(Revivalism)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부흥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부흥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언제든지 기적을 행하실 수 있고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는 항상 믿음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어떤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반드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가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명쾌하기 답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문을 열고 우상으로 가득 차있는 땅들을 정복해 나가실 때에는 항상 선교 속 위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함께 기적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법이 아니면 우상이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편견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교의 역사에서 보면 이런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한국에도 초기에 복음이 전해질 때에 이런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중국같은 곳에서 들어오는 선교보고에 의하면 사도행전을 읽는 것 같을 정도로 기적과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1960년대에 “앤드류 기이”와 “존 성”이라는 사람을 사용한 인도네시아의 부흥도 그런 기적적인 역사들을 많이 일어나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우리들이 역사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선교 역사 속에서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들이 말씀을 많이 이해하고 성숙되면 눈에 띄게 그런 기적들이 줄어듭니다. 물론 제 이야기를 주의 깊게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어떤 기적적인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 모두 말씀이 풍부하게 들어갔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성령이 역사하실 만큼 정결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말씀의 은혜가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해서 한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보이시기보다는 말씀을 통해서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충분히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충분히 말씀도 주시고 은혜도 주시며,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살아야할 가를 보여주셨는데도 63장의 상황은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는데도 그런 것들로부터 거의 신앙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에까지 다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말씀을 위탁받은 사람들의 가르침과 같은 것을 순종하지 않고 너무나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성전조차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신령한 영향력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과 거의 평준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과 제도들이 있지만 이것이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작동해도 사람들을 깨울 수 있을 정도로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의 참 길을 모르고 방황할 때에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기도를 안하고 살았기 때문에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갈 길도 응답해주신다는 것은 아는데 실질적으로 기도를 너무나 안 했고, 그러게 살아가는 동안 죄가 쌓였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데 도무지 이 기도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도하면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낼 수 있기까지는 최소한 자신이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소유하면서 살아야지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 마스터」에서 어떻게 말했습니까? 기도해야 한다고 말할 때 즉시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참된 신앙인가를 모르고 방황할 때에는 설교를 들으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도 무엇인가 오염이 되어서 설교를 들으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은 맞고 어떤 것은 틀리는 가를 백일하에 분명하고 명쾌하게 들어내 주어야만 내가 믿는 것이 잘못 믿는 것인지, 바르게 믿는 것인지를 고민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설교를 들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지지해주는 것도 아니고 잘못되었다고 말해주는 것도 아니며, 무엇인가 흐릿하고 명쾌한 답이 안나옵니다. 그런 말씀을 듣고 무엇을 결단하겠습니까? 잘못 산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들으면 된다는 것 같기도 하고 안된다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계속 모르겠지만, 모르겠지만 하고 얘기를 하는데 진짜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결단을 합니까?
표현은 인격적이어야만 하지만 드러내야할 성경의 진리는 명징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보고 결단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예배에 참여해서 설교를 듣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망가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를 통해서 받아야할 유익을 못받고 망가진 것이 헛바퀴가 돌 듯이 계속 도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매일 나오기는 나오는데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머리 속이 온통 혼돈스럽기 때문에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실제로 기도할 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에 참여해도 잘 안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예배를 통해서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교제를 통해서도 참으로 큰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구역공부같은 것도 잘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습니다. 진정으로 어떤 때에는 심령이 깊이 메마르고 가라앉아 있었는데 지체들하고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는 교제를 하다보면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솟아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비록 지금 침체되어 있고 혼돈스러워도 명쾌한 복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지체들을 만나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인 교제를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지 못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도전을 받게 됩니다. 지체들이 성경을 이야기하면 진정으로 성경에 대해 무지함을 알게되어 성경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기도해서 응답받은 대화를 하면은 자신이 옛날에는 기도를 좀 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을 보니 자신의 기도는 기도도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기도해야겠다는 도전들이 생깁니다. 이것은 작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인 인간들이 자신과 비슷한 인간입니다. 매일 보여서 먹는 이야기나 하고 놀러 다니는 이야기만 합니다. 그런 모임에서는 은혜가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괴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저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어쩌면 저렇게 재미있게 살까? 나는 이것이 뭘까? 안되는 기도나 하라고 매일 윽박지름만 당하고. 은혜도 안되는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는가를 구역장이 체크나 하고. 나는 이게 뭘까? 나도 저 사람들처럼 종교에 매이지 않는 자유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그러니 아무리 교제를 시켜줘도 그런 것 밖에는 받는 것이 없습니다. 수단은 남아 있는데 작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에서는 이렇게 작동하지 않는 것이 총체적인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가 아닙니까? 예배도 하나님이 세우셨고 지체도, 기도도 하나님이 세우셨으며 성도의 교제도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기회,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모두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지자가 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이렇게 드려서는 안되겠다. 일찍 오기로 우리 결의하자!”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전 주일에 궐기대회를 했습니다. “예배에 지각하는 성도, 물러가라! 물러가라! 늦게 나오려면 오지 말라! 오지 말라!” 그리고 대표 몇 명이 나와서 빨간 띠를 두르고 혈서를 썼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배에 잘 참석하기로 다짐한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렇게 궐기대회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루에 한시간씩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라고 부르기로 결의했다고 합시다. 그리고 가문의 명예를 걸고 지장을 찍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침체된 가운데 있어서는 안되기에 월요일에는 방배동에서, 화요일은 사당동에서, 수요일은 남현동에서, 목요일에는 동작구에서 늘 모임을 가지면서 성도의 교제에 힘씁시다.” 그리고 인감도장을 찍었다고 합시다.
그것까지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횟수를 늘일 수도 있고, 기도의 시간을 길게 가질 수도 있고 모임을 더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들을 개선하는 것을 가지고는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안되는 기도시간을 장시간, 들어도 흐릿한 설교, 드려도 하나님 만난 것 같지 않은 예배, 횟수만 늘여서 오래도록 참석하고 만나면 자신이 너무나 신앙에만 미쳤기 때문에 균형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생각나게 만드는 세속적인 신자들과의 교제의 횟수를 늘린다고 해서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역사에 보면은 현수막을 들고 광장같은 곳에 모여서 부흥이 일어난 예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은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버려둡니까? 내버려두기에는 이 선지자의 가슴이 타오릅니다.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며칠째 인터넷에 들어가서 서갑숙씨의 책에 대한 저의 논평 때문에 공격도 많이 받고 감동도 받았다는 편지도 많이 받았습니다. 온통 난리가 났는데 그것을 보면서 한달 째 계속해서 제 마음에 무거운 짐이 늘어갑니다. 그리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이 정말로 복음을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우리들이 알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구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접근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없도록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아십니까? 특별히 유흥가나 환락가에 종사하는 종업원들은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예화) 열린교회를 개척하려고 돌아다니다가 괜찮은 곳이 있어 보러 갔더니 옆에 있던 가계가 처음 엔 좋아하더니 교회가 들어오려고 한다니까 안색이 바뀌면서 당신이 들어오면 우리가 나간다 고 하며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거라고 했다. 그 집은 퇴페 이발소였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옆에 술집같은 것이 들어오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자신들끼리 손발이 맞지 않습니까? 술먹고 퇴폐이발소에 들어가고 퇴폐이발소에서 나와서 찻집에 들어가기를 원하는데 교회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히 분위기를 깨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싫어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기술적으로 접근할 수 없도록 그런 직업이나 생활하는 반경 자체가 완전히 복음을 전파받을 수 없도록 자신의 동아리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은폐시키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타락한 서울이라는 도시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우리들이 전도지를 들고 아파트에서 경비원들에게 욕을 먹으면서 이 골목 저 골목 다니고, 개한테 물리면서 전도지를 돌리는 것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어떤 의미에서 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구조적으로 그런 전도지조차도 받을 수 없게끔 그런 영역 속에서 사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이나 상황자체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무엇입니까? 교회만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저 건너편에 있는 안마 시술소도 하나님의 땅입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술집에서 몸을 팔고 방종하게 살아가는 구역질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아파트에서 저 아파트로 이사가고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오늘 복음을 접하지 못해도 내일 다른 교회에서 복음을 전해줄 수 있고, 또 어느 교회에 출석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든지 그리스도인이 열심만 내면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웬만큼 열심을 내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도록 격리된 사람들, 그리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나 일 자체가 도저치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없는 일과 행위이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복음을 의지적으로 거절할 수밖에 없는 영역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창기와 세리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은 그들에게 뚫고 들어가셨을까? 예수님은 특수선교사역자였구나!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복음을 전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그 복음을 듣고 근본적으로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변화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일을 버린 것입니다.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복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참된 영생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복음을 전하고 변화시켜야할 영역을 단지 성전이라고만 생각하지지 않으셨습니다. 성전에서 불결한 모습을 보시고 진노하시고 책망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기와 세리들이 있는 동네로 내려가셨고 빈민가에까지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또 예수님이 빈민들만 찾아가신 것은 아닙니다. 유명한 사람들에게 설교하시는가하면 무명한 사람을 가르치시고,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시는가 하면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도록 만드셨고 갈릴리에 가셔도 설교하셨습니다. 왜입니까? 모든 영역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모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창조의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선지자가 통탄하면서 대적에게 짓밟힌 성소를 향해서 애통하는데 결국은 64장 2절에서는 그 무너진 성소에 대한 안타까움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하면 열방들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성소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들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이시고 심지어는 이스라엘을 비웃고 있는 열방 모든 나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지 않는 한 이 선지자의 마음에는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교적인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3장과 64장에 나오는 부흥을 위한 기도는 이스라엘 자체의 영광은 물론이고 선교적인 지평을 여는 기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런 기도가 아닙니까? 만약에 늘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보여서 같은 자리에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면서 스스로 저 타락한 세상에서 자신을 건져내고 저 세상사람들과 같지 않게 만들어 주심을 감사하는 기도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없다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소금창고이지 무슨 교회입니까? 조명기구점이지 교회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작은 불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는 이
건져내어 살리세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 선지자는 처절한 고통을 느낍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권능을 받은 수시로 이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령한 선지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을 버리고 황무지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선지자임에도 그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해도 성과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과가 없어도 꾸역꾸역 매일 하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무슨 하나님의 종입니까?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할 일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월급받는 직장에서나 하는 말입니다.
아무래 해도 안될 때에는 생각을 다시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밥을 벌어먹는 사람도 장사를 하다가 안되면 뒤엎고 종목도 바꾸고 종업원도 바꾸어 보고 생각도 바꾸어 봅니다. 그런데 해도 안됩니다. 그렇기에 처절한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이제 모두 알았습니다. “진정으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보니 그렇구나! 진정으로 원천적으로 복음이 전파될 수 없도록 봉쇄된 상황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무슨 희망이 있을까? 매일 말씀을 들어도 변하지 않고 이렇게 교회에 나오라고 예수님 믿으라는 소식을 듣고 늘 도전을 받아도 그 인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처음부터 드리지 못하도록 봉쇄된 사람들은 정말로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 아이면 채워질 수 없는 그 갈증을 타락과 정욕, 쾌락에 자기 몸을 던지면서 살아가는 비참한 인간들은 정말로 무슨 희망이 있을까? 진짜로 안되겠구나! 다른 사람이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해야겠다. 이렇게 놀라운 사랑을 주님께 받고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내가 받았는데·····.” 영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미어 옵니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고 그렇게 버려졌다고 김목사가 눈물로 말해주던 그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여러분! 왜 이런 곳에 삽니까?”
“가나베”선교사라는 미국에서 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하비 칸”이라는 분인데 교수도 지내셨습니다. 그분이 창녀들을 위한 사역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것도 문화적인 차이일 것입니다. 창녀들에게 눈이 파란 외국 사람이 와서 열심히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말씀을 전해주자 창녀들이 호감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그런데 창녀, 창녀 일이 영어로는 “prostitute”라는 말인데 미국말로는 경멸의 뜻이 없다고 합니다. 직업적인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번역한 것이 창녀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만을 전했으면 되었는데 너무나 안타까우니까 “여러분은, 왜 그 창녀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자 순간적으로 창녀들이 바가지를 집어던지고 방망이를 던집니다. 그리고 두들겨 맞고는 창녀촌에서 쫓겨납니다.
그렇게 들고 정말로 가슴 저미는 마음을 가지고 그 영혼에 대한 한없는 불쌍함으로 다가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어두움 가운데 살면은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서갑숙씨 같은 사람에게 “당신이 그렇게 살아서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정말로 당신 안에 있는 갈증은 하나님의 영원에 대한 사랑의 갈증이 아닙니까? 빛으로 나아오십시오. 복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때에 듣는 사람마다 무릎을 꿇고 펑펑 울면서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찾아오셔서 전도지를 준 분은 당신 밖에 없었습니다”라고 울면은 이런 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라는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 호세아가 고멜을 찾는 것과 같은 처절한 마음과 살을 에이는 것과 같은 사랑을 가지고 눈물을 찾아갔는데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입니까? 사랑이 없었을 때는 사랑으로 하지 않기에 안됐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을 가지고 가도 안되는 적이 더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경험하게 될 때에 여러분들이 해보지는 않았지만 해보았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하겠지만 해보았다고 생각하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그 후미진 더러운 뒷골목에서 눈물로 복음을 들고 갔는데 그 영혼이 그렇게 불쌍한데 그 불쌍한 영혼은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정신병자 취급하면서 돌멩이와 방망이가 나아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외에 여러분들이 할 일이 남았습니까? 없습니다. 기도한다. 물론 기도합니까? 기도하는데 전에는 기도하지 않고 갔습니까? 누구 말 따라 전도하러 가기 전에 기도하면 비지땀이 팥죽처럼 쏟아지면서 그렇게 기도하다가 갑니다. 늘 기도하면서 무릎을 끓으면 핏기를 잃어버린 비참한 영혼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마약을 한 사람들의 얼굴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인간들의 얼굴 모습이 떠오릅니다. 알코올 중독자, 정신분열이 되어 도저히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늘 기도합니다. 가슴이 에어지라고 기도하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결과는 주님께 맡긴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영혼을 향한 참다운 헌신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남의 일처럼 쉽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과 결과에 대해서 무관심해지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그것을 압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만 받아도 그 곤고하고 상한 영혼을 보면 마음이 아픈데 완전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이 땅의 수많은 영혼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실 까요?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교회에 나와있는 영혼의 가치는 뒷골목을 헤매는 삶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영혼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형상이고 영혼입니다.
오늘날 선교가 안되는 이유도 영혼들에 대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과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전해도 도저히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선지자가 그런 상황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이 가는 곳마다 설교를 하면 반이라도 아사야 선지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데굴데굴 구르며 자신들이 영광의 주님을 배반했으며,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를 통회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더라면 이런 기도를 안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해서 사명이 다했다고 한다면 그것도 좋은데, 사명은 아직 남아 있는데, 부름은 아직 남아 있는데, 살아 있고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를 위해서 보냄을 받았는데, 자신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펑펑 우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이 선지자의 가슴이 찢어집니다. 이 말이 굉장히 무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처음에는 위에서 굽어보시라고 하다가 이제는 64장에서는 비참한 상황을 보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의 수단들도 도저히 적용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위에서 보고만 계시지 마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지만 마시고 당신 자신이 내려오셔서 이 일을 한번 해주십시오”. 이것이 부흥을 위한 기도의 동기입니다.
그래서 이 부흥을 간절히 간절히 구하기 전에는 항상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흥을 위해서 구하던 사람들을 보면은 비관주의자처럼 느껴집니다. 63장에서 여러 주에 걸쳐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보았지만 결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선지자가 비관주의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흥을 위해 기도한 모든 사람들이 비관주의자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기 이야기합니다. “부흥은 항상 절망적인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무엇입니까? 충분히 타락하고 병들기 전에는 부흥이 절대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흥이 오려면 빨리빨리 타락해야 겠습니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절망적인 시대만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절망적이다, 절망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 기준을 어디에다 맞추는가하면 옛날의 경험이나 다른 경험에다 맞춥니다. 그런데 표준을 잘 맞추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종의 무게를 다는데 이 저울에다 달았더니 2kg인데 저 저울에 달았더니 4kg이다. 그러면서 4kg저울에다 단 다음에 값이 많이 나가겠다고 생각하고 시장에 들고 가니 2kg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되면 안되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받는 느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과 역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중에서 형편없는 사람도 자신보다 더 한심한 신자하고 비교하면은 자신은 너무나 하나님만 믿는 사람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중에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보다도 더 뛰어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던 사람과 비교해보면 자신은 짐승처럼 인생을 막 사는 사람처럼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시작하기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선진국이다. 그래서 유럽교회는 성령님이 벌써 떠났고, 미국교회는 보따리를 싸려고 하는데 한국 교회에는 하나님이 아직 계시다. 그 말을 믿지도 않지만 무슨 할 일이 없어서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한국 교회를 성령도 떠나신 유럽교회와 비교하고 보따리 싸고 있는 다른 나라의 교회와 비교합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나라가 모두 못 산다고 해서 우리가 쪽박차고 사는 것을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한가? 그래서 “로이드 죤스” 목사님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참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모여서 매주 사람이 늘어나고 꽉 차고 헌금도 많이 나오고, 직원과 교역자들에게 제때에 거르지 않고 월급 주며, 땅도 조금씩 사고, 가구도 하나씩 들여놓으며 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만족하는 상황에 교회를 맞춘 것일 뿐 진정으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교회가 정말 무엇을 통해서 영광스러워지고 어떤 때에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어떤 교회 속에서 성도가 신령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성도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는다면 그런 식의 거짓된 만족에 빠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상황 속에서 선지자는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흥이 오기 전에는 항상 이렇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리고 성경에서 이미 경험되었던, 역사 속에서 경험되었던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하나님을 기뻐하는가에 대한 모습에 대한 상이 확실하고, 그런 교회가 되면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시고 그 교회는 세상을 얼마나 훌륭하게 고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간절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과 자신들의 교회를 비교해 보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무슨 일을 하기는 하는데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세상이 어떻든지, 다른 사람이 어떻든지 자신만이라도 진실되게 섬기며 주님을 믿다가 가야겠다는 말이 이리는 있지만 맞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만 잘 믿으면 됩니까? 다른 사람도 잘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깊이 경험하고 나면, 자신만 그 사랑을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고 살아가는 자체가 마음의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사랑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왜 이런 사랑을 모르고 살아갈까? 왜 그렇게 파리한 영혼을 안고 핏기없는 모습으로 살아갈까? 말하자면 이런 것이 목회의 하나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그 일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 일을 제쳐놓고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다고 생각되는 그 마음, 그것이 목회의 소명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무슨 일을 하고 어떤 행복을 누려도 도저히 만족을 줄 수 없고 오직 자신의 만족이라는 것은 그런 사랑을 모르는 인간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서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고, 자신이 감격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그 사람도 맛보아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는 그 참된 행복을 알게 하는데 도구가 되는 것만이 자신의 행복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부흥회 때 벌떡 일어난 것이 소명이 아닙니다. 손 한번 잘못 들어서 소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신학교 입학 면접시험에서 “어떻게 해서 신학교에 오게 되었습니까?” “교수님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무엇을 모릅니까?” “그저 저는 순종했을 뿐입니다.” “무엇을 순종했습니 까?” “우리 집사람이 저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가 말했습니다. “집사람을 보내고 선생님 은 집에 가시지요.”
그런데 아무 것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선지자의 심령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 무엇을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이 모두 감찰하시고 모두 하시는 것, 모두 하시고 자신이 이렇게 가슴아파하시는 것을 가지고는 그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예배에 만족을 하십니까? 저는 예배를 드리고 나서 항상 목마를 때에 수도꼭지에 입대고 빨아먹다가 수돗물이 끝난 느낌밖에는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죄인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변화되는 사람들이 있지만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짐승처럼 살았던 지난날을 회개하고 성도의 길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여전히 옛사람의 길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면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정말로 애는 쓰지만은 어떤 때에는 애를 쓰고 노력하는 것이 그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발견한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몸부림치지만 정말로 목숨을 주어서 그 영혼이 변화될 수 있다면, 우리가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목을 따서 그 피를 마음에 발라서 그 죄인들을 회개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은 정말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분노를 머금고 설교를 해도 회심하지 않았고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증언해도 돌 같은 그 마음에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물론 변화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은혜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놀랍게 새로워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뒤웅치는 놀라운 파도 앞에서 도무지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은 영혼들도 우리시대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 바위와 같은 영혼을 향해서 때로는 간질거리는 파도로, 때로는 뒤웅치는 파도로 수없이 때려보지만 도무지 요동하지 않습니다. 강퍅하게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그런 모습으로 매주일 눈앞에 보이는 영혼들을 위해서 우리의 섬김이 무슨 유익을 주고 있습니까?
고난으로 영혼을 살 수 없고, 탄식으로도 그 영혼을 살 수 없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이 선지자와 같은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 나는 원합니다.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내려 오시옵소서. 우리는 아무런 능력이 없고 우리는 너무나 미련합니다. 우리들이 성실하게 사는 것도 별로 의미가 없고 최선을 다해서 몸부림치며 피흘리고 고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는데 별로 기여하지 못하고, 대적에게 짓밟힌 하나님의 성소를 바로 세우는 일에 기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 주님! 우리의 모든 발동 가능한 모든 것은 해보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해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기적과 같은 영혼의 변화의 역사를 일깨워 주시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가를 우리가 그토록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해서 말해도 믿지 않던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대한 엄위하심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와 크신 음성을 수많은 죄인들(?) 하나님의 심판과 퍼붓는 진노를 보여주시는 것 밖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필설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묘사했지만 돌같이 굳어져서 우리가 전한 그 사랑의 증언을 도저히 믿으려고 하지 않는 이 돌멩이와 같은 인간들을 향해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주님이 가슴이 찢어져 철철 피되어 흐르는 그 가슴에 그 강팍한 인간을 끌어안아 주셔서 온 면상과 가슴이 그리스도의 핏덩이가 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뜨거운 그리스도의 품에 흐르는 십자가의 혈흔을 느끼면서 우리들이 그토록 언어로 표현하려고 애썼지만, 우리들은 느꼈지만 저들은 느낄 수 없었던 그 십자가의 사랑을 기적과 같이 돌 같은 영혼에게 생각나게 해주시는 그 일이 기적이 아니면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일시에 수많은 사람의 병이 낫고, 환상을 보고, 뒤로 자빠지며 앞으로 넘어지는 부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꿈꾸는 부흥은 성경의 부흥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 수 있었던 수많은 인간들이 거스르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엄위하신 진노를 발견하고 피난처되시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날개로 피하는 그 부흥.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위대한 회심을 동반한 놀라운 말씀의 부흥이 저와 여러분이 목말라 하는 참 부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꿈꾸는 부흥은 땅을 사기 위한 부흥도 아니며, 기도원 부지를 마련하기 위한 부흥도 아니며 교회의 성장을 위한 부흥은 더더욱 아닙니다. 부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일시에 수많은 죄인의 마음에 깨닫게 하셔서 마땅히 하나님의 그리워하시는 관계로 수많은 영혼을 돌이키는 진리가 역사하는 부흥이 참된 부흥입니다.
저는 두 마음을 우리가 늘 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인가 하면 한편으로는 감사하는 마음. 지금 우리들이 눈물로 말씀을 듣는 순간에도 정말로 한달 전만 해도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살던 그 흉악한 죄인들이 변화되어서 주님의 사랑의 날개로 피하여 우리의 형제가 된 사람들이 있고 자매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실하신 주님이 우리의 섬김은 보잘 것 없지만 항상 칠 배나 축복하셔서 지푸라기와 같은 작은 섬김을 통해서 영혼들에게 유익을 주시고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아름답고 기쁜 소식은 매일 들려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 우리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들의 섬김을 축복하셔서 그렇게 많은 영혼들을 구하시고, 늘 대충대충 밖에는 못사는 인간들인데 한 주도 하나님이 대충 사랑하신 적이 없이 우리를 그렇게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을 인해서 우리는 늘 감사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부흥에 대해서 설교한다고 해서 비관주의자인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감사합니다.
엊그제도 어떻게 지내느냐고 옥한흠 목사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그래서 쓰레기와 같은 인간이 늘 감사며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갚을 수 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한쪽에만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로 들어온 변화받은 착한 성도들 외에 어두운 그늘에 가려진 수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리들이 이쪽을 볼 때에는 정말로 감사할 수밖에 없지만 저쪽을 볼 때에는 하나님 앞에 겸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들이 섬기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사람들은 변화도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모든 것을 동원해도 보십시오. 무엇이라도 성경이 허락하는 방법이라면 어떻게 하든지 그 영혼에게 유익이 되는 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분명히 성질 같아서는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야단을 쳐야 마땅한데 이것은 다음 주로 미루고 일단은 격려를 해볼까?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믿음으로 살아라. 그래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신앙이 들어갔을 때에 야단을 쳐서 버릇을 고쳐 놓으려고 생각을 해보고 앞뒤고 바꾸어 보고 순서도 바꾸어 보고,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보아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기도입니다. “주여!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이 세상으로 내려오시옵소서!” 부흥의 진수는 하나님이 갑자기 그들 가운데 내려오신 것과 같은 저항할 수 없는 강한 영적인 권세로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 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눈물로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며, 책망하며 심방하는 일을 수없이 해도 도저히 돌아오지 않던 인간들이 어느 날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강한 영적인 권세 아래로 들어와서 수년을 우리들이 두드려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변화되지 않던 그 영혼들이 쏟아져 나오는 몇 마디의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물같이 녹아지고 바위와 같이 강팍하던 마음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역사가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서 하나님을 향해서 냉담하던 무지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될 때, 그때가 하나님의 부흥이 임한 때입니다. 선지자는 오늘 하나님 앞에 그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감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을 모아서 우리는 눈을 들어서 자신도 그 어느 한구석에서는 하나님을 늘 경배하고 공경하며 살려고 애쓰지만 또 한편에서는 죽어도 변화되지 않는, 이 부분만큼은 하나님 앞에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무지막지한 자아를 보아야 하고 그와의 싸움에서 얼마나 쉽게 패배하고 점령하지 못하는가를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도 두루두루 살펴서 희망없는 그 죄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역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더 높이 눈을 들어서 주님을 모로는 우리의 가족들, 복음을 들어도 냉담한 수많은 인간들, 원천적으로 복음을 전파받을 수 없도록 구조적으로 소외된 그늘 아래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그 비참한 인간들을 향한 연민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무엇으로도 우리들이 그들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섬길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에 우리는 처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이 땅에 강림하셔서 주 친히 역사해 주시는 기적과 같은 부흥을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리고 불시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항상 조짐을 보이신 후에 그 일을 행하시는데 그 조짐은 이 선지자처럼 그렇게 찢어지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고 강림해주시기를 피 어린 탄식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가 주님이 오시는 전조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러한 조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을 뒤흔드는 천둥과 번개, 그리고 높은 산 위에 우뚝 서있는 수 백년 묵은 나무들을 산산이 박살내는 낙뢰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천지를 뒤흔드는 위대한 낙뢰도 사실 그 처음 시작은 파란 하늘에 떠오르는 작은 손바닥만한 구름조각만으로 시작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 한 조각의 구름이 될 수 있습니다.
14.부흥의 능력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불의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사64:1下,2上)
어떤 의미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64장에서 시작되는 “주는 하늘을 가르고 이 땅에 강림해 주시옵소”하는 이 탄원은 이렇게 표현하면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조금 죄송하지만 약간은 격정정인 넘쳐남이 빚어낸 표현들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하나님! 하늘에 굽어살피고 땅을 내려보아 주시옵소서’하고 호소하던 사람이 64장에서는 갑자기 격정적으로 주님이 직접 내려와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하면서 얼마나 큰 벽을 느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선지자의 직무는 대단히 통합적입니다. 예언자 혹은 선지라고 불리는 이 사람들을 우리는 단지 미래에 대한 어떤 일을 예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예언자라고 할 때 이 예언자를 한문으로 쓰면은 미리 말한다는 의미에서의 예언자라기보다는 ‘예탁 받았다’는 뜻에서는 ‘맡을 예(豫)자’에다 ‘말씀 언(言)자’를 사용해서 ‘말씀을 맡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물론 이 선지자들이 그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보면 이 선지자들의 선포 속에 미래에 되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이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점쟁이처럼 미래에 대한 사실에 대해서 예언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주된 직무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설교자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선지자들의 비전은 이들이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고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그 신정국가 -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을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나라가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시는 나라의 이상을 삶의 구석구석에서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런 구도를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잘 모르면 구약이 오리무중입니다. 선지자를 모르고는 구약을 알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그런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마주해야 하는 벽이 얼마나 엄청났겠습니까?
하나님이 선지자를 파송하실 때에는 신학교를 한번에 천명쯤 졸업시켜서 모두 선지자로 세우시고 인해전술로 나가라고 선지자들을 보내신 적은 없습니다. 선지자는 소수였습니다. 호위병이 딸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영혼 속에 임해서 주님이 그 시대를 향해서 들려주셔야 할 음성을 자신이 지닌 자가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보냄을 받아서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힘이 있습니까? 깔로 찌르면 찔렸고 목을 자르면 잘렸으며 사자에게 던지면 먹히면서 그렇게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창과 칼이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인데 창칼로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무엇으로 합니까? 자신에게 위탁하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 시대에 부딪쳐서 결국은 핍박받고 죽어갈 때에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때로는 그들의 말씀이 살아서 창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선지자였습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날 목회자들이나 신학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한때는 제가 그런 이야기에 참으로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제 눈을 뜨고 나자 참으로 아닙니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나는 내 신앙 지킬거야.” 아니면 “세상이 무엇이라 하든지 나는 세상과 관계없이 나만이라도 잘해야지.”, “세상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만이라도 작은 불꽃이 되어 한구석을 ·····.”
선지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으로 웃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렇게 통곡하는 마음으로 이 땅의 황무함을 기억하며 애원해달라는 이 애원이 자신이 한 교회를 개척한 뒤 왜 교인이 모이지 않을까, 왜 ○○집사, ○○집사, ○○집사는 매일 예배에 빠지는가를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눈을 들어서 세상 전부를 보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에게 있는 커다란 아픔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성소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선지자가 깊이 애통하면서 선지사역을 해나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노고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영적인 압박과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의 시각에서는 조금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소시민적인 발상, 나만이라도, 우리 교회만이라도 하는 발상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아닙니다. 온 땅,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땅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막지한 열방이 살아가는 그 땅도 주님이 창조하신 땅이고 그 땅에 거하는 백성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할 백성들입니다. 그렇기에 선지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보냄을 받았는데 사람들이 설교를 듣는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가하는 것입니다. 들어도 자신에게 듣기 좋은 말만 들을 뿐 부담스러운 이야기는 듣지 않으려고 하고 오랫동안 편안하게 살아온 삶을 규탄하면서 그 삶을 버리라는 이 선지자의 커다란 요청을 받아들이려고 하는가 입니다.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무슨 힘이 있습니까? 선지자는 왕도 아닙니다. 정치적인 힘을 동원할 수도 없고 무슨 권력을 휘두를 수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뿐이고 그 말씀이 힘이 되어서 그 영혼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그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깨닫는 방법 외에는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거기에서 깊은 한계는 느끼는 것입니다.
이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본 사람일 경우에는 그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소원이 얼마나 강렬하게 불길같이 타올랐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이 내려다보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성소에서부터 시작해서 종교지도자에게 이르기까지 왕과 백성과 모든 인간들이 속속들이 썩어서 도저히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고집을 쓰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큰 힘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걸어다닐 때 힘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른 생각을 하다가 기둥에 부딪힌다든지 벽에 부딪히면 머리가 터지고 이빨이 부러지는 상처가 납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 누가 쾅쾅 힘을 주고 내려갑니까? 사뿐사뿐 내려가는 것 같은데 잘못 디디면 발목이 부러지고 구르다 머리가 깨지고 심지어는 죽는 일도 일어납니다.
여러분, 소도 아닌 송아지가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보면 힘이 있어 보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장난이 아닙니다.
예화) 시골에 한번 내려갔는데 집에서 송아지의 코를 뚫으려고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어릴 때 가야하는데 한참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꽤 컸습니다. 그래도 송아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개처럼 줄을 매고 둘이 끓고 가는데 옛날에 “코 뚫지 않은 송아지 삼부자가 못 당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안목 끼어서 따라 가는데 이 송아지가 생전 처음 외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길이 있고 길을 따라 가면 무엇이 어렵습니까? 산으로 자꾸만 올라가겠다고 합니다. 당할 수가 없습니다. 장정 둘이 잡아당기는데 우리가 산으로 딸려 갑니다. 산에 풀이 있으니까 자꾸만 오르려 합니다.
이 세상이라는 것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 깨뜨린 심령을 갖는 심령이 되기 전에는 강력한 힘입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산과 같습니다. 아무리 해도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회심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회심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깊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데 회심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겁을 주면서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후에 지옥 불길 속에서 호통치면서 설교해도 멍합니다. 너무 야단을 치기에 거부반응이 오는가 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설교해도 멍합니다. 여러 사람을 놓고 해서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혼자 붙들어 놓고 이야기를 해도 멍합니다. “어쩌란 말이냐, 어쩌란 말이냐, 이 죄인아. 아무리 외치고 부르짖어도 바위처럼, 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이 회심하지 못한 신자여 나를 두로 어쩌란 말이냐?” 탄식이 나옵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거대한 한 시대를 이끌어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정말로 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선지자가 한계를 느끼며 하나님 앞에 “주님! 무슨 방법을 다 써보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내려와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합니까? “산들로 진동하기를”
성경에서 나오는 “산”이라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권세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말할 때에 하나님이 산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자주 노래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이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이 어디서 오나.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 왜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산을 향해서 눈을 듭니까? 저 움직이지 않는 저 엄청난 산을 누가 만들었을까?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인간사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표현을 기도의 교훈 가운데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간절히 기도하고 너희들이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옮기우라 해도 옮긴다’. 일어날 가망성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도 응답이 얼마나 놀라운 가를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주 풍부하게 이 산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강림하시면 산들이 진동한다는 것입니다. 산이 진동한다는 것이 그냥 지진이 나서 산이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고 산이 진동해서 뿌리째 뽑히기 위해서 진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진과 같은 것이 일어나 산 하나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두다 산(히브리 성경에는 복수로 나옴)이 아니라 모든 산들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어떤 뜻으로 이렇게 말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과 열방의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앙과 불순종이 우리들이 보기에는 산과 같이 견고해서 좀처럼 흔들릴 것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역사하시면 그것은 숙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하시면 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하시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산을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데 얼마나 쉽게 그런 산을 움직이는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이것은 너무 쉬운 것입니다. 여러분 건초더미를 잔뜩 쌓아 놓고 불을 붙인다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냥 성냥 하나를 그어서 던지면 “후···”하면서 단숨에 타버리지 않습니까?
요즈음 이곳저곳에서 산불이 사는데 한달 동안 정신이 없습니다. 백 몇십 건이 났다고 합니다. 담뱃불만 떨어뜨려도 온 산아 말라서 모두 풀의 섶과 같이 탑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물을 끓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물이 끓으라고 고사지내지 않아도 불만 때면은 물은 자동적으로 끓습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그렇게 쉽게 하나님이 산을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처절하게 외치고 몸부림치지만 하나님은 쉽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주 작은 성과를 보고 너무 대견해 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주 적은 것에 불과한데 자기들끼리 대견하다고 서로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한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으면 감사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삼사정도 대각성 전도집회를 했는데 한 명이 등록을 했다고 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등록하지 않은 것보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한사람의 영혼이 정말로 귀하지 않습니까? 또 그 사람이 나중에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인생을 살다가 완전히 실망한 청년이 청바지 차림으로 2층 교회당을 찾았을 때 교인 30명도 모이지 않는 교회에서 피골이 상접해 보이는 젊은이가 목회자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한사람이나 잘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사람을 얻은 것이 정말로 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삼일이 아니라 삼백일을 집회해서라도 한 명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해야 합니다.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전도지를 들고 가가호호 누비며 전도해서 한 달에 만장 이만 장씩의 전도지를 뿌리며 예수 믿으라고 수없이 이야기하고, 경비원들에게 쫓겨나고 개에게 물리면서 전도해서 한사람이 전도를 받고 한 두사람이 옵니다. 기쁩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물론 기쁩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그래서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 해 목회를 하면서 통계를 냈는데 전도지를 만들어 신문에 넣어서 뿌리면 일 만장 뿌리면 대략 한명정도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래도 참으로 감사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한 영혼이라도 구원을 받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일년 내내 교사나 구역장을 했는데 세 명을 가르쳤는데 두 명이 남았습니다. 한 명밖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다른 사람은 그것도 모두 잃는 경우도 있는데 그 두 사람을 그래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백번 인정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구원받아야할 사람이 많은데 그렇게 전도해도 한 명은 오고 구천구백구십구명은 오지 않았을까? 왜 일 만장의 신문을 뿌렸는데 한 장은 정성껏 읽혀서 감화를 주었는데 왜 나머지 사람은 감화가 없을까? 전도집회를 했는데 그 수많은 사람은 왜 교인이 되겠다고 등록하지 않고 한사람만 신자가 되겠다고 했을까? 그런 쪽으로 생각이 옮겨가면 무조건 자신이 대견스러워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의 균형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고 감사한 마음도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움도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부흥이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 없이 일상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저항인지 마치 산과 같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좀처럼 요동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가진 여러분 - 거듭나고 주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고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여러분도 이렇게 변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그들의 그 견고함이란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과 견고함의 신앙만 가지고 있으면 대단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확신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확신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들으면 신경질을 내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확신하고 누가 하나님이 없다면 성질이 납니까? 누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나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있습니까?
그런 것들이 산과 같이 견고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선지자가 온몸으로 부디치며 몸부림을 쳤지만 그런 몸부림과 부딪침이 싫어서가 아니라 - 그 희생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자신의 온몸을 던져서 피투성이가 되도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그 시대의 불신앙이 산과 같이 너무나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오시옵소서. 주님이 오셔서 직접 역사해주시면 내게는 산처럼 느껴졌던 이 엄청난 시대와 이 사람들, 이 부패한 교회가 단숨에 새로워질 것입니다. 마치 마른 풀 더미에 성냥불을 던진 것처럼, 그리고 펄펄 물을 끓이는 것처럼 뜨거운 불길아래 물이 요동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선지자는 지금 자신의 희생의 유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이 부흥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애원하듯이 하소연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항상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일하고도 도무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던가, 아니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부흥을 말하면서도 단지 부흥을 말할 뿐 최선을 다해서 살지 않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부흥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 하는가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누가 기도하는 가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기도하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한사람의 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 사람의 기도가 가장 힘이 있는 기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의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진리가 없는 것을 하나님께 불쌍히 보시고 부흥을 주셔서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해달라는 기도가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이지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입니까?
여러분들이 정말로 다른 사람들의 영혼들의 변화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고는 이 부흥이 와야 한다는 이 절박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왜 입니까? 상당히 살만하고 할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섬겨도 그 영혼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주 평범하고 그냥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에서 사람과 어울리는 재미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목표인 경우에는 부흥이 없습니다. 단지 좋은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함께 놀아주면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교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이 땅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하는데 아무런 이바지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극단적입니다. 우리 전도 영역이 얼마나 넓어졌는지 아십니까? 숭실대 고개를 넘었습니다. 그 고개를 넘어서 봉천동 고개까지 이릅니다. 그런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여러분들이 화요일이라도 나와서 운동화신고 뒤꿈치에 물집이 잡히면서 올라가고, 가정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고 욕을 얻어먹고 경비 아저씨에게 잡상인 취급을 당하고 개에게 물려서 다리를 절뚝거려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돌아와서 이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설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왜 사람들은 그 좋으신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일까? 나도 저런 인간들 중의 한 부류였는데 어떻게 내 마음에는 그 복음이 믿어지지 해주셨을까?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런 헌신적인 전도자들의 수고를 통해서 내게까지 복음이 이르게 해서 주님을 믿게 하셨을까?” 그리고 주님의 은혜에 정말로 감사한 생각이 들고 십자가 있음에 고마운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전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부흥에 대한 기대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허영입니다. 제발 부흥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부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실 부흥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삶에 있어서 어느 부분들이 하나님의 부흥이 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거룩해지지 위해서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불이나 때고 손이나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부흥이 온다면 목청 큰 사람 모인 교회에 먼저 부흥이 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린애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부흥에 대한 이야기만 합니다. ‘이것은 아니다. 저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목회는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보여줄 것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부흥이 오겠는가? 너무 인간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자신이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쪽 부류에 있습니다.
다른 한쪽 사람들은 수만 장의 전도지를 돌려서 한 사람이 왔는데 그렇게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한사람은 구원받았는데 그렇게 열심히 전한 구천구백구십구명은 자신들의 섬김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안타까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사람만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수고와 헌신은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을 가져오는 도구일 뿐 절대로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예화) 들면 여러분들이 시골 농부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시골 농부가 워낙 외진 곳에 살아가서 쟁기를 가는데 소도 없어서 자신이 멍에를 메고 자신의 부인보고 쟁기를 잡도록 하고 땀을 뻘뻘 흘리고 어깨가 벗겨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가는 사람을 여러분들이 보았습니다. 너무 불쌍합니다. 저러다가 쓰러져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마침 자기네가 경운기를 생산하는 집인지라 쟁기를 끌고 와서 잠깐동안 왔다갔다하며 갈았더니 이 노인들이 일주일을 갈아도 갈지 못할 밭이 시원스럽게 갈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노인네가 누구에게 인사를 하겠습니까? 경운기 앞에 가서 “아이고 주여! 감사합니다. 당신 어쩌면 쇳덩어리로 이렇게 잘 생긴 분이 우리 밭을 갈아주셨습니까?”하고 이야기합니까? 경운기에는 별로 관심도 없습니다. 누구입니까? 운전한 우리에게 와서 감사를 표하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부흥의 도구로 쓰여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로 쓰여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곡괭이나 하나님이 운전하시는 경운기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역사하시고 운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이 힘써 일하면서도 교만할 것이 없고 오히려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이 더 큰 축복을 부어주셨더라면 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훌륭한 마음이 아닙니까? 그래서 최근에 쓴 「부흥」이라는 책 속에서 제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부흥을 없는 날에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느냐? 부흥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망해버리느냐?” 그런 의미에서 부흥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부흥이 오지 않으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 하나를 깨우치며 나아가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가고, 어그러진 길로 나아가면 권면해서 불러들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부흥의 때에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강박해지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부흥이 없으면 희망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진정으로 충분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문맥이 이상하게 바뀌었음) 지금 여러분 그리스도인보다 모슬렘의 숫자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아십니까? 모슬렘의 숫자가 7억이 넘습니다. 전 세계에 파송된 이슬람교 선교사가 전세계에 파송된 기독교와 카톨릭 선교사의 수를 합한 것보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열심히 선교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보는데 우리의 힘으로는 정말로 힘겹다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보면서 답답한 것입니다. 부흥이 오면은 하나님이 그런 전세를 인간의 평범한 노력으로는 도저히 뒤엎을 수 없는 그런 일들을 하나님이 위대하게 역사하셔서 하시는 것입니다
일 이차 대각성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났을 때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도 복음의 혜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우리나라도 복음의 혜택을 입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옛날의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선교의 길을 열고 온 땅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부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 말씀은 그것입니다. 부흥이 없는 날에도 선교해야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교지를 가보면 시원한 선교지도 있지만 캄캄한 선교지가 많습니다. 한국에도 목회하는 목회자들을 보면 캄캄한 사람들이 있듯이 교인들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답답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선교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답답합니다. 본국에서는 열심히 헌금해서 보내줍니다. 보낼 때에 어떤 마음입니까? 선교지에 보내고 선교지를 위해 기도할 때는 영혼들이 하루아침에 우르르 추수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들이 헌신해서 주의 나라를 위해서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쉽습니까?
선교지에 가보면 “저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고 전도는 받았다고 하는데 저러고 살아가는가?”하고 생각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선교지의 소식이 들어오는데 보고서 들어오는 것은 날마다 장밋빛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좋지 않은 이야기를 왜 써서 보내겠습니까? 그런데 보면은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일년에 한 명도 구원받았을까말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선교사는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나마 가지 않으면 일년에 한 명도 구원하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본교회에서는 선교를 위해 헌금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영혼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영혼들이 말씀을 듣고 뒤집어지고 변화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는데도 영혼들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눈물로 기도해도 쉽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부흥이 정답입니다. 그렇다면 부흥이 올 때까지 가르치지 말아야 합니까? 온 동리를 헤집고 다녀서 발이 부르트고 전도해도 한 두 사람밖에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해야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일을 하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이보다 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 부흥이 없는 날에도 헌신하고 봉사하면서 한편에는 부흥이 없는 하늘아래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초라한가를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며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부흥이 오면 쉽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힘이 덜든다는 의미가 아니고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주님을 모르던 사람이 단숨에 예수님을 믿게 해주시고 오랜 패역 속에서 아무렇게나 살던 수많은 인간들의 마음을 뒤엎으셔서 완전히 새사람으로 만드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강림하심으로 가능하지 않습니까?” 이 선지자가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위에서 보고만 계시지 마시고 내려오시라고 기도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기도가 오늘날 우리들이 이 시점에서 정말로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상반절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직접 위대한 역사를 일으켜주시면 그렇게 인간의 평범한 힘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 엄청나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손쉽게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러면 그 일을 기대하는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것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구절 뒷부분은 다음 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역설적인 이야기인데 가슴에 잘 새기십시오. 우리들이 진정으로 부흥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라면 마치 부흥이 없을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해가 안가지 않습니까? 설명을 하겠습니다. 잘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다시 말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부흥을 원한다면 마치 부흥이 없을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부흥이 일어날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입니다. 그냥 입을 벌리고 그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놀라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홍해가 갈라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사람들이 이쪽에 있고 애굽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데 모세가 손을 내밀어 바다를 향해 명하자 밤새도록 바람이 불다가 새벽에 물이 갈라졌습니다. 그 광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무엇을 했겠습니까?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냥 입을 벌리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이 좍 갈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물기둥이 양편으로 섭니다. 그리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 땅은 히브리말로 “얍바샤”가 되었습니다. 얍바샤는 마른땅입니다. 만약에 바다가 갈라졌는데 한 길씩 들어가는 뻘이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물에 빠져죽지 않고 뻘에 빠져죽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마른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벽이 섰는데 그 속에서 물고기가 왔다갔다합니다. 이런 설명을 하자 누군가가 물고기가 밖으로 튀어 나왔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물고기가 알아서 하지 않았겠습니까? 손을 집어넣으면 물고기가 잡히는데 손을 빼면 허공입니다. 그 광경을 목격하면서 바다 가운데로 생긴 그 마른땅을 건너갈 때에 그들이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냥 입을 벌리고 감탄한 것밖에는 아무것도 업습니다. 그때는 찬송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 오른 후에 물이 합쳐지고 난 후에 제정신이 돌아옵니다. “야! 갈라져서 그렇게 되었구나!” 그리고 미리암의 소고에 맞춰서 이백오십만에서 삼백만명의 온 회중이 성가대가 되어서 ‘신중에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시뇨‘하면서 감동적인 찬양을 홍해에 메아리 치도록 했습니다. 그것도 이른 아침에 말입니다. 장엄한 찬송이 메아리칩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진정으로 우리는 의식없이 한참동안을 보아야합니다. 내가 단순히 “당신은 죄인이고 주님이 당신의 죄를 용서하십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면서 그 사람의 영혼에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렇기에 성과에 비해서 우리가 한 일은 너무나 작습니다. 그렇기에 부흥이 실제로 일어나면 우리는 바쁘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한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19장에 나오는 에베소서 지방의 부흥을 보십시오. 부흥이 일어나자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자신들이 마술에 쓰는 책들을 가지고 와서 불사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 때에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놀라움을 감탄할 것밖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소망을 정말로 가지고 잇는 사람은 그런 부흥이 올 때까지 살아가는 삶이 마치 자신이 살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제가 그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선교의 놀라운 부흥을 오기를 바라는 사람은 열심히 선교하러 가고 선교헌금하며 그 선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부흥을 주시면 이 형식적인 신자들이 정말로 주님을 만나고 거룩한 신자로 바뀌고 그래서 거룩하고 진실된 신앙생활을 해나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거룩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자신 안에 있는 수많은 거짓된 자아와 더불어 싸우고 투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부흥을 위해서 처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그는 이미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했거나 부흥에 상당히 가까이 가 있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으면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삽니다. 그러한 삶의 기초가 없는 부흥에 대한 갈망은 하나님이 주신 갈망이기보다는 부흥이 오면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종교적인 사행심이 가져다준 호기심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안됩니다. 자신이 부흥을 진정으로 갈망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나님이 해달라는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있으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이 앞에 진정으로 전 삶으로 삶의 전 영역 속에서 전포괄적으로 복종하고 순종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이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거침돌이 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선지자가 “우리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고 하나님이 소명하셨을 때에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소명을 받은 다음에 그 다음에 부흥을 구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소명을 받고 왕에게도 설교하고 평면에게도 설교하며 고통받는 사람에게도 설교했을 것입니다. 완악한 사람에게도 설교하며 핍박도 받아가며 자신의 전 꿈을 걸고 온 삶을 바쳐서 그 시대와 더불어 투쟁하며 불신앙의 그 아성이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온 몸에 피투성이가 되는 가운데 이 선지자가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하나님 소명을 주셔서 이 세상에 보내셨고 저는 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백성들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피를 토하듯이 외치고 눈물을 뿌리며 외쳐도 이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주여! 돌아오시옵소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 불이 섶을 사르고 불이 물을 끓임같이 하나님을 거스리던 대적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떨림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피묻은 삶이 있는 눈물의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오늘 우리의 마음에 와서 닿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진실한 고백이 없다면 어디에 가서 부흥을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15. 대적에게 주를 알게 하소서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64:2下)
재작년쯤인가에 제가 휴전선 근처의 고성군 쪽에 집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가서 깜짝 놀란 것이 그 나무가 우거진 산들이 전부 민둥산으로 변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몇 년 전에 예비군 훈련을 하다가 폭탄을 잘 못 쏘아서 불탄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을 탔다고 하니 굉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까지 불어서 얼마나 거세게 탔는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물을 퍼다가 쏟아 붓는 소방헬기가 서른 두 대가 있다고 하는데 전국에서 다 올라와 봐야 코끼리의 비스킷입니다. 전부 그냥 보고만 있습니다.
일주일을 탔는데 어느 정도로 무섭게 탔는가 하면, 휴전선 쪽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상당히 넓습니다. 아마도 팔 차선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산을 깎아서 길을 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쪽 불씨가 팔 차선 도로를 넘어서 건너편 산에 붙어서 바다쪽 산까지 전부 타버렸습니다. 진짜로 저희 집에 불난 것처럼 아까웠습니다. 그것은 오십 년이 지나도 회복이 안됩니다. 모두 다 타버렸습니다. 이년이 지났기 때문에 풀이 돋아나서 파란 골프장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일개 군이 다타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진정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 산불이 날 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지무지 합니다. 다 타버리니까 산에서 생계를 꾸려 가는 사람들, 잣을 따고 송이버섯을 따는 사람들이 모두 거지가 된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불이 얼마나 빨리 번지는지 산 짐승들이 도망을 가지 못해서 멧돼지, 노루 같은 것이 타서 바닥에 뒹굴더라는 것입니다.
섶이란 풀이 마른 것인데 섶도 아니고 나무가 섰는데도 불길이 번져가니 순식간에 일개 군을 전부다 태워버린 것입니다. 저는 걱정됩니다. 그것이 붙어서 이북의 금강산 쪽으로 올라갔다면 어떻게 할 뻔했겠습니까? 보상해달라고 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큰 문제가 안되고 그 아름다운 산들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절대로 산에 가서 불장난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홍수 때에는 물의 힘이 무섭지만 불의 힘이라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심겨진 산도 그렇게 탔는데 산 전체가 바짝 마른 잡초 산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불이 섶을 사르고 불이 물을 끓임과 같이 하나님이 역사해 달라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목회를 하면서 감사한 것도 많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이 줄어들고 변화 받았던 사람들도 신앙을 팽개치고 세상에 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래도 목회를 잘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워낙 착해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한사람 한사람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보니 감사합니다. 이런 것들이 오래도록 쌓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겠다는 희망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을 들어서 한번 거시적인 안목을 가져보십시오. 그런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보면은 소위 말하는 우리의 복음사역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처럼 진전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1995년도에 그렇게 신뢰할 수는 없지만 문화공부에서 작성한 통계 자료를 제가 직접 보았는데 한국에 있는 복음주의 적인 교단가운데서 한 교단인가를 제외하고는 모든 교단의 기독교 인구가 줄었습니다. 우리가 소속해 있는 이 교단도 95년 통계에 의하면 구천명 정도의 교인이 줄은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구천 명 정도면 백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구십개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를 출석을 하다가 출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목회자들과 그 많은 성도들 우리 교단의 교회가 거의 칠천개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년동안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는데 구천명의 교인이 그 당시에 교회를 빠져나갔습니다. 물론 안믿는 사람이 전도해서 믿은 경우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통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우리는 자세히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교회를 들여다보면은 무엇인가 조금씩 사람들이 변하고 또 주님을 믿고 전도된다고 보이지만 그러나 망원경을 가지고 보듯이 거시적인 구도에서 보면은 수많은 교회들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고 전진이 없는 선교적인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해결은 무엇인가? 오늘도 우리들은 그런 선교를 위한 전략을 짜고, 어떻게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마음을 붙이고 신앙생활할까, 그리고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는 전도자들의 숫자를 늘릴 것인가 하는 궁리를 많이 합니다. 우리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언제 그렇게 해서 어느 시절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밀치듯이 복음의 물결을 해일과 같이 몰고 와서 이처럼 교만한 세상을 쓸어버려서 주님을 믿고 만들고,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 끊임없이 들어오는 세속적이고 더러운 풍조들과 그리고 대충대충 때우면서 신앙생활 하려는 경박하기 그지없는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의 잘못된 신앙의 태도와 더불어서 싸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우리들에게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들이 부흥이 없이도 희망이 있다고 말하기에는 그 희망이 너무나 갈 길이 먼 희망입니다. 물론 부흥이 없어도 우리는 열심히 전도해야 되고 할 것입니다. 또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우리들이 진정으로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고,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승복하고 자신을 구원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참다운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신으로 와 닿는다면 ‘되면 되고 안되면 할 수 없지’라는 편한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큰 문제입니다.
오늘 선지자가 불이 섶을 사르고 불이 물을 끓이는 것처럼, 섶이 타오르는 불길을 저항할 수 없고 물이 자신을 끓이는 불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불이 붙고 불이 물을 끓이면 물은 순응하며 끓을 뿐이며, 불을 섶을 사르면 섶은 그 불에 탈뿐입니다.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업습니다. 오히려 섶이 있기 때문에 물이 더 맹렬하게 타오르고, 물이 있기 때문에 불이 물을 끓이는 강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오늘 선지자가 말하는 것처럼 주의 대적들로 교회는 에워 쌓여 있습니다. 수많은 세속주의와 수많은 하나님의 참된 복음에 저항하는 이교적인 사상과 세속주의적인 사고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를 엄청나게 위협하고 거스릅니다. 문화라는 이름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와서 신앙의 내용들을 천천히 갉아먹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그러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이제는 어린이들은 아직 모르겠지만 청소년들 같은 경우에는 수없이 교회에서 선교를 한다고 하고 위원회를 조직하고 애를 쓰지만 그 성과가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매우 미미합니다.
이 녀석들이 학교를 마치고 나면은 학원으로, 학원을 마치고 나면 PC방으로 갑니다. 부모도 애들의 얼굴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시간을 짬짬이 내서 그들이 접하는 문화라는 것은 깨고 부수며 음란하고 더러운 문화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눈을 현란하게 현혹시키는 감각적인 것들이 깊이 빠져 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PC방에서도 밤을 새지 않습니까? 저는 두어 번 정도 들어가 보았는데 들어가서 무엇을 하는가 보면 옆에 누가 오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빠져서 몇 시간씩을 그곳에서 소비하면서 가상의 세계에서 숨을 쉬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복음이 들어갈 빈자리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이든지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삶을 보여줍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복음은 너무나 시시한 것이고, 교회생활이라는 것은 너무나 답답하고 재미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슨 행사를 해서 자신들의 마음을 끈다는 것은 촌스럽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미국에 간 어느 목회자가 1.5세대들과 2세대들을 교육하면서 애로사항을 저에게 말하는데 설교시간에 듣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고개숙였다가 고개를 들고 옆에 있는 애를 보면서 ‘씩’ 웃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발음이 되게 촌스럽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하다가 무엇인가 발음이 틀리면 얼굴을 마주치고 자기네들끼리 찔끔 웃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시간 올라가도 자신은 절망밖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사역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 가보니까 정말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어른들은 좀 낫습니까? 낫기는 무엇이 낫습니까? 어른들은 세상에 있는 사람은 그만두고 교회에 온 사람들부터가 잘못된 사람들 투성이 아닙니까? 무슨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습니까? 그리고 꾸역꾸역 성실과 인내로 비가 오나, 눈이오나 교회에 나오는 사람, 그렇게 나와도 정말로 고맙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안하려고 했는데·····. 제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목회자들이 문 앞에 서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입에 올라서 몇 번씩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고맙습니까? 무엇이 감사합니까? 그래서 안하려고 애를 쓰는데 수십년 동안 입에 붙어서 잘 되지 않습니다.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감사합니다’. ‘무엇이 감사합니까? 목사님’. ‘그래도 교인들이 이렇게 빠지지 않고 주일날에 교회에 나와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모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그 모양이 된 것입니다. 무엇이 감사합니까? ‘반갑습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잘 지냈습니까? 안녕하세요?’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고맙습니까?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안변합니다. 두려움을 주어도 변하지 않고, 무엇인가 가슴에 감동을 주려고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무지무각하게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런데 하나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떻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한없이 부끄러운 일들을 자신의 명예로 여기고 살아가는 개고기 같은 인간들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이 자신 안에 거하는 신앙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일들이 가능하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절망스러운 느낌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교회대로 있고 세상은 세상대로 흘러갑니다. 세상은 교회에게 네가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고, 교회는 세상보고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떻습니까? 그래도 그런 세상에 대해서 희망이 있는 것은 교회인데, 교회는 유람선과 같은 교회가 되고 싶어합니다. 갑판에 앉아서 수영복이나 입고, 벌렁 두러 앉아 요나처럼 밀짚모자 쓰고 썬그라스나 끼고 순풍에 돛단 듯이 떠내려가는 배에 썬텐이나 하려들거나 옹기종기 모여 노래나 부르려고 합니다. 진정으로 우리들이 구명선과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기발한 상상이 아닙니까? 큰 파도가 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바다 한가운데로 배가 지나갑니다. 그 배에서 생명줄을 던져서 그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데 배에 탄 사람은 선장부터 시작해서 모두 항해의 최고의 목적은 주님이 그 배를 띄울 때는 생명선으로 띄웠는데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어떻게 우리들이 이번 여행을 신나가 즐기는가에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람선과 같은 교회의 모습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교회가 잃어버리고 나니 이 세상에는 저렇게 물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는 사람들 따로 있고 자신들처럼 배타고 바다 풍경을 유유히 보면서 지나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끔 그 배에 모여서 물에 빠진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지만 자신들을 일꾼 자천하지 않고 보내달라고만 합니다. 그러니 세상은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런 일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교회밖에 있는 이 상황과 교회 안에 있는 상황과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꾸만 복음 전파의 노력들, 이 세상이 변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세상으로 바뀌는 변화, 이런 것들에 기대가 점점 사라지고 나니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일들을 기대하지 않고, 심지어는 그런 일들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무엇인가 사고방식에 있어서 편협하고 잘못된 사고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되어 갑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과 앞으로는 더욱더 주님이 예고해주신 바에 따라서 인간들을 더욱 비참해질 것입니다. 더욱 비참해지고 병든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 눈앞에 펼쳐지는 지금의 이 사회적인 상황은 이십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십년 전의 상황은 그 이십년 전의 상황인 사십년 전에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은 날이 갈수록 황폐해지고 사랑이 메마르고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이제 세상이 얼마나 두려운지 현실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정도가 되었습니다. 확실히 예고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앞으로는 점점 현실 도피적인 문화가 굉장히 유행할 것입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정신을 팔고 사는 것, 이것이 더욱 발달하게 되면 인간 자신이 헬멧 같은 것을 쓰고 컴퓨터 앞에 드러누워 있으면은 태어나는 것부터 성장, 결혼,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완전히 밀폐된 상황 속에서 마약에 취한 것처럼 일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늘 돈도 못 벌고 고생하는 사람이 회장되는 꿈을 꾸며 깨기 싫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것을 입력해 놓고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면서 그런 환각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의 마약입니다. 그런 속에서 사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독교 신앙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가상 세계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이 창조되었고 그 역사 속에서 인간이 범죄했고, 그 역사적인 인간의 고통을 위해서 역사 속에 예수님이 오셔서 역사 속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역사속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님을 믿는 것은 인생을 살다가 너무 곤고하면 신앙으로 피난으로 가기 위해서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삶입니다. 삶입니다. 그래서 삶과 동떨어진 영성, 자기에게 처절하게 삶과 유리된, 분리된 영적인 생활은 전부다 거짓입니다. 기독교의 영성이 아닙니다. 수도사들의 영성이며 수도종교의 영성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고할 수 있는 사실은 그러므로 미래에는 이처럼 삶의 현장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삶을 위한 종교보다는 현실 도치적인 종교들이 굉장히 유행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불교를 비롯한 수도종교의 인기도가 상당히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보면은 여러분들이 아마도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너무나 무기력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위해서 애쓰지만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선교적인 진전은 매우 미약합니다. 농촌과 도시에서 목회를 하고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쓰지만 그 진전은 너무나 미미한 진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세상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모르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세상사람들을 보고 너무 욕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들이 짐승과 같다고 흉볼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라고 낫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몰랐으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하루 벌이에 웃고, 하루 장사에 웃으며 한달 월급에 기분 좋아하는 식으로 사는 것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다가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부흥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모두 개인적으로는 부흥 비슷한 경험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변했고 우리의 삶이 변했기 때문에 오늘 지금은 그래도 제법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처럼 이전에는 하나님을 모른 채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들의 운명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로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기만 하면은 주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를 정확히 알기만 하면 저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저렇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 삶이 정말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쁨, 환희, 오열, 가슴 벅참, 가슴시린 감동, 이런 단어는 이미 건강한 영적인 삶을 이어가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영상 산업이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는 것도 인간의 영혼에 있는 고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것도 엄청나게 번창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문화 예측가들이 잘못 짚은 것이 그것입니다. 영화산업은 급속히 쇠퇴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개인용 비디오들이 많이 보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혀 빗나갔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비디오 산업과 같은 것이 대규모의 영상산업을 엄청나게 촉진합니다. 그렇기에 어마어마한 떼돈을 벌고 도대체 십년 전과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법들로 인간들을 매료시키는 영화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전 세계의 문화의 차이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서 모든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관심사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웃깁니다. 한국에서만 「타이타닉」이 화제의 대상인줄 알았는데 미국가도 영국가도 동남아에 가도, 검은 사람이나 하얀 사람이나 덜 구워진 누런 사람이나 모두 그 때에는 타이타닉입니다. ‘케이트 윈슬렛’이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얘기로 전부다 엮어 집니다. 누구하고 얘기해도 그 얘기가 통합니다. 무서운 힘들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의 시각과 같은 것이 비디오와 같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방면에 어머 어마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을 점점 가공의 세계에서 현실에 도피하는 사람들, 아주 감각적인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확실히 예고할 수 있는 것,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마약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맨정신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알코올의 소비량이 늘어나고 마약과 마약은 아니더라도 전자적인 기법들을 동원해서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인간을 환상의 세계로 이끄는 첨단의 방법이 얼마든지 연구될 수 있고 인간을 어떤 식으로든 가공의 세계로 몰아 넣으려고 하는 감각적인 산업이 엄청난 번성을 이루리라는 것은 누구도 쉽게 전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복음의 미래는 어떻게 합니까? 점점 어둡게 만듭니다.
(예화) 어렸을 때 전도부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혼자된 사람들이었다. 예수의 은혜를 많 이 받고 감사한 나머지 견딜 수가 없어 시장바닥, 골목길, 다리 앞에서 벽돌 몇 개 놓고 올라가서 한복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이 얼마나 인생을 고달프게 살았고 주님을 만나서 새사람이 되었는가를 눈물을 펑펑 쏟으며 간증한다. (요즈음 목회자들이 그렇게 설 교를 하면 교회가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서너 사람이 듣다가 스무 사람, 서 른 사람, 마흔 사람, 쉰 사람으로 늘어나는데 마이크도 없이 육성으로 합니다. 그러면 시종 드는 젊은 청년들이 카드를 주며 결신하라고 하는데 자신들의 교회에 오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전화도 없고 다른 수단도 없기에 결신하고 주소를 적으면 찾아가서 좀더 자세히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어떻습니까? 이제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책을 써도 짤막짤막한 것, 글을 써도 한번에 읽을 수 있는 것만을 좋아하는 세상이 되었고, 이제는 잡지가 나와도 읽는 잡지는 팔리지 않습니다. 휙휙 넘기며 그림으로 보는 값싼 잡지들이 팔리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시편23편을 석달 하고도 모자라 넉달 째로 넘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무엇인가를 얘기해달라는 것입니다. 한마다로 간략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출판사에서 저보고 연구대상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런가를 물었더니 요즈음은 삼십 초도 안기다려 주는 세상인데 한번 글을 썼다고 하면 심호흡을 몇 번씩하고 한번 졸다가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내용의 글을 쓰는데 그것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점점 세상은 그렇게 되어 갑니다. 전망은 어둡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무엇인가 그들과 접촉점을 찾아보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하는 것은 이상하게 세상 흉내내려면 촌스러워집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것은 자신만이 하는 것입니다. 누가 제 설교를 흉내낸다면 얼마나 촌스럽겠습니까? 자신의 것은 자신이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무엇인가 교회가 세상에 있는 것들을 흉내내서 우리도 그런 것이 있다고 해보려 하는데 얼마나 촌스럽겠습니까? 세상에 조예가 깊고 그 방면을 위해서 거의 일생을 바치면서 생명을 걸고 살아온 사람들이 그 엄청난 것들을 투자해서 만든 것들을 보면서 얼마나 촌스럽게 생각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다. 그렇기에 애는 쓰는데 성과가 너무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세상에 있는 사람일뿐입니다.
여러분 안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은 저 유아실에 있는 아이처럼 저렇게 통곡하고 회개한 후에 주님을 믿은 이 사건이 엄청나게 놀라운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이 볼 때에 그런 것일 뿐,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세상사람들이 볼 때에 기이하기 짝이 없는 구원의 경험들이 겨우 달리기 선수가 출발하기 위해서 출발선에 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진실입니다. 저 애들을 보십시오. 주일마다 통회 자복하지만 변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엄마아빠하고 똑같은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렇게 우리들하고 똑같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안 변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들에 호감을 사려는 몸짓 그리고 무엇인가 간단하게 기분 나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살짝 복음을 전하면서 친교를 이루면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되겠습니까?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이 누구 신가를 제대로 모르고 그저 교회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 재미있어서 엉기덩이 어울려서 십년 이십년 신앙생활 한 것이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때 많이 묻고 자신의 아집에 깊이 둘러싸여서 그래서 내가 몇 년짜리 신자인데 하는 교만한 아집밖에는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 무엇입니까? 깨뜨려져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버려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은 인격적인 승복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한 인간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이 그 인간이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이 볼 때에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은 기적이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 기적에 가까운 일들이 하나님의 전권적인 도우심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보면은 요즘도 하는지는 모르지만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프로그램이 있지 않습니까? “이닦고 세수하고 혼자서도 잘해요”하는 프로그램이 있지 않습니까? 애들은 그렇게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애들이 그렇게 신기하게 생각하고 따라하는 “혼자서도 잘해요”가 겨우 무엇입니까? 옷입고 세수하고 이닦고 정돈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는 것입니다. 무엇을 그렇게 혼자서도 잘합니까? 인생을 살아가는 것, 죽음의 문제, 어떤 인생을 살아야만 하나님 앞에 의미있는 것일까에 대해서 인간이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정말로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세상의 문제들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세상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맛보기 전에는 세상이 절대로 자신이 살아가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문제는 지식의 문제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입증하듯이 오늘 선지자가 그렇게 불로서 섶을 사르시고 불로서 물을 끓임과 같은 거침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켜주시는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는 것과 열방으로 두려움 속에 떨게 해달라는 것이 이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날 때에 가장 가슴깊이 밀려오는 후회가 전에는 내가 이 사랑을 몰랐을까하는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죽을 험한 세상이
왜 그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몰랐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 진정으로 세상이 그렇게 사랑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을 알고 나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알고 나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후회가 됩니다. 제가 처음 신학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연세 드신 목사님을 만날 때마다 매번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자네는 나이가 몇이지!”. “스물 일곱입니다”. “아! 좋다”. “내가 진작 주님을 알았더라면”. 그것도 한 두 번들을 때는 좋았는데 여러 번 들으니 싫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너, 몇 살이니”. “스물 다섯입니다”. “야! 그때는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헤맸는데, 그 나이에 나는 나 잘난 줄 알고 예수님 믿은 것 후회한다고 하며 돌아다녔는데, 물러 달라고 매일 기도했는데, 너는 지금 이렇게 말씀의 은혜를 받고 주께 승복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하니 얼마나 귀하니? 참으로 좋다”. 이렇게 말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몰랐습니다. 모르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알므로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만큼만 창조의 목적, 구원에 부합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입니까? 떡이 아닙니다. 물이 아닙니다. 공명선거도 문제이고 낙선운동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선하면 얼마나 선하겠고, 선하게 정치를 하면은 이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직접 알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알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선지자가 불의 섶을 사름과 같이 하나님이 친히 강림해달라는 이야기는 먼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종의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부흥은 항상 안 믿는 세상에 오는 것을 부흥이라고 말하지 않고 교회에 먼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하늘에서 굽어 살펴볼 때에 교회가 그 영적인 대적들, 세속주의와 같은 것에 모두 둘려 싸여 점령당한 것입니다. 오셔서 그런 것들을 다 태워버리시고, 살라버리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백성들이 세상을 불태우는 불꽃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그런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120명의 성도들이 숫자로 치면 얼마나 우습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강하게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니까 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시고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신 분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지 않습니까? 선교학자들에 따라서 주장이 다르지만 적게 보는 사람은 그 당시 기독교의 인구를 전 로마인구의 2%밖에 보지 않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많이 보는 사람은 8%입니다. 불과 2%~8%밖에 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로마를 복음으로 무릎꿇게 하는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문제는 세상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교회에 그런 지식들이 넘치고 주님이 살아 계신 증거들로 가득 찬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 아직까지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고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마치 전도지를 받고 복음에 관해 소개를 받으면서 이웃에 신장개업한 음식소개받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없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강한 능력없이 사역을 해나가고 있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서는 교회에 하나님의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서 형식적인 신자들이 변하여 참되게 회심하고, 회심한 신자들이 거룩한 삶을 살고 그래서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이 무엇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어주시는 그 영적인 권위와 권능이 무엇이고, 그것으로 세상을 정복해 가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터득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 시간에도 당신의 교회들에게 부흥을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 척박한 세상에 물처럼 흘려보내는 관계수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막혀 있으면, 기름진 논밭들이 모두 황무지로 변합니다. 그렇기에 한 교회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면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이 세상이 어떻게 하면 주의 대적들, 하나님을 대항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비롯한 수많은 대적들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하나님을 거스리며 불순종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하는 가장 훌륭한 일, 고상하고 대체할 수 없는 사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그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워가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참다운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목양받고 있다고 말 할 수 없고, 교회는 성도들을 돌보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부흥을 구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의 가장 커다란 고통이 무엇인가 하면 단지 이 세상의 악과 불의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악과 불의는 한가지의 뿌리로부터 비롯된 열매입니다. 그 뿌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무지입니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크게 만나고 부흥을 경험하게 되면은 모두 복음을 전하는 그 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주는 그 일이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꼭 그것이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는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시고 그의 인생의 불행의 궁극적인 뿌리를 가르쳐주는 피할 수 없는 사명감을 느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표증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풍부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기적의 은혜를 많이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들을 향해서 가슴 저미는 커다란 부담감을 가져본 사람들이 아니라면 여러분들은 아직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 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 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주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향한 비참한 고통들이 마음에 전해옵니다. 그리고 그런 사명감에 불타서 저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그 일이 복음전파의 동기입니다.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동리에서나, 혹은 화요일이나 토요일이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여러분들은 담대해져야 합니다. 주님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이 아무리 위세 당당하게 여러분들을 향해서 왜 이런데서 전도하느냐고 소리치며 삿대질을 하고, 심지어는 여러분들에게 폭력을 행해도 여러분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사실을 이것입니다. “저 인간은 나 아니면 희망이 없다. 내가 알려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결코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없는 한 너는 이 세상에 잠시 태어났다가 사라질 짐승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곳에 세우신 것입니다.
이 일이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는데 선지자가 지금 호소하는 것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해달라는 것입니까? 불이 섶을 사르는 것처럼 일어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이 그런 열정에 붙잡히고, “당신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할 때에 주저앉으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가를 말해달라”고 하는 하나님을 아는 역사가 무지몽매한 백성들 가운데 충만하게 나타나도록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상당히 중요한 진리 하나를 깨닫습니다. 교회가 부흥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해야할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순수한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르쳐 줄 것이 없는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날 리도 없지만, 일어난다고 해도 사이비 부흥일 뿐 진정한 부흥이겠습니까? 가르쳐 줄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화) 영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 어느 목사님 한 분이 설교를 하는데 저녁 예배에 교인들이 점점 줄어들어 알아봤더니 산 너머에 있는 동네에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이 몰래 그 교회에 가서 도대체 이 교회에는 무엇을 하는가하고 보았다. 그리고는 설교를 적어 가지고 와서 자신의 교회에 와서 설교한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데 사람들에게서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런데 목사님 하는 말, “여러분!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설교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왜 그렇습니까? 미안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오늘 이렇게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얼마나 분하면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부흥이 일어나도 무엇인가 정확하게 가르칠 것이 있어서 이 세상을 깨우칠 그 무엇이 있는 곳에 부흥이 일어나야지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고, 무릎을 꿇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중요한 진리를 이곳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강한 불길과 같이 일어나서 불살라 버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우리는 바라는 것입니다.
(예화) 19C 중반에 ‘찰스 피니’라는 복음 전도자(신학적으로는 조금 문제가 있음)가 2차 대각성 운동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 1850년경, 10만명 정도가 살고 있는 미국의 로체스터라는 도시에서 복음전하는 전도집회를 계획했다. 그 곳에 커다란 교회가 세 교회가 있었는데 한 교회는 목사님을 내어쫓았고, 나머지 두 교회는 무슨 일 때문인지 서로 소송을 해서 재판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6개월 동안 매일 설교하고 전도를 했는데 10만 명에 달하는 인구의 대부분이 그 집회에 나와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이야기.
문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강력한 복음전도의 역사, 구리고 구령의 놀라운 역사, 그래서 방종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것.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나는 일인데 사람들이 회개하는데 술집 주인인 회개를 합니다. 그런 후에 술꾼들이 술을 마시러 술집에 가니 술집 문에 모두 닫힌 것입니다. 그리고 푯말이 붙었는데 “폐업, 어젯밤에 주인이 회심하였음.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면 부흥회로 오시오”입니다. 그것을 본 술꾼들이 그 잘되는 술장사를 집어치우고 이런 팻말을 걸고 집회에 참석했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부흥의 역사는 항상 복음을 전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던 흉악한 인간들이 회개하고 변화되는 것으로부터 부흥의 소식이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엄밀한 의미해서 주님을 믿던 사람들이 수평적으로 이동해서 있는 숫자저인 변동이 아닌 정말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오는 것, 그리고 몰려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와서 크신 하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진정으로 땅 끝까지 알려지는 위대한 부흥의 흔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선지자가 오늘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오늘날 기대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세상 사람들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지금 하던 일들을 버리고 우리가 하듯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을 경배하는 일에 마음을 쏟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오늘 이것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언제까지 방황하겠느냐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31:22)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이 가까운 지점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31장은 실로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불러내신 이후로 어떻게 하나님께서 처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시며 마치 부부의 관계처럼 각별한 관계로 그 백성들은 하나님을 연모하고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오셨는지 낟낟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마음 깊이 그들을 생각하시고 그들을 책망할 적마다 하나님의 마음이 측은하고 그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언되기에 앞서서 먼저 언제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은혜를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을 향해 베푸시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 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들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겠다고 하는 마음의 결심이 생기는 그 때에는 바로 이들이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그때에 그런 자비와 긍휼을 보이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들이 어느 때에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풍부하게 입을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깊이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인 우리와 맺은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그리고 그 관계 위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보이신 그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결단을 촉구하시는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일 을 행하겠노라고 말씀하시고 여자가 남자를 안을 때가 오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읽은 이 마지막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도전들을 상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할 것이냐고 묻고 계십니다. 처녀 이스라엘을 향해서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할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의 방황이 어떤 종류의 방황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의 길로 들어오게 하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고 그리고 그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보다도 더 귀한 꿈에도 그리던 땅을 얻었습니다. 심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따고 짖지 않은 집에서 사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주신 것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떠나온 이래로 가나안땅에 이를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하나님 마음처럼 한결같은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의 길에서 만나를 먹으면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밤에도 낮에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시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할 자신들의 마음을 채우면서 불신앙과 신앙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야에서 불순종하므로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땅을 유업으로 주셨고 거기에서 복락을 누리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그 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 올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대신 그들은 가나안의 원주민과 거래하며 우상을 섬기는 이중적인 생활을 행해왔습니다.
마치 결혼을 한 후에 바람난 여자처럼 한 남자에게 있기를 거절하고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찾아서 떠돌아다니던 방탕한 여인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선지자에 의해서 지적되고 있는 방황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의 방황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을 온전히 사랑하고 주님을 자신의 행복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모두 방황하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주 버린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고 하나님께 제사하고 있었으며 선지자의 음성을 듣고 있었고 그리고 그들은 율법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는 아주 종교적인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의 눈에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럴듯한 종교생활은 방황하는 모습, 처녀 이스라엘의 약혼과 결혼의 관계를 깨뜨리고 방황하고 있는 모습으로밖에는 하나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진정한 신앙생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시각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참된 신자의 신앙생활, 주님으로 말미암은 진실한 신앙생활의 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의 눈과 그리고 우리의 평균적인 안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안목으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그러한 시야를 가질 때 우리들이 정확하게 우리 자신에 대해서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방황하는 처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먼저 깨달을 수 있는 사실 한가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럴듯한 신앙생활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눈에는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말 방황하는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우리의 방황하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를 팽개치고 세상에 나아가서 출석도 하지 않고 목회자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타락하는 것만이 방황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방황은 곧 그렇게 세상으로 완전히 돌아가 버린 사람들의 방황만이 방황이 아닙니다.
여기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진실한 신자가 되겠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함께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께로 정해지지 않은 모든 신앙생활은 바로 방황하는 신앙생활입니다. 흔들리고 방황하는 신앙생활은 정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비록 교회를 떠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던져버린 적이 없고 소문난 죄악에 빠져서 불신자처럼 살아간 날이 없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전부가 아니면 그것은 곧 방황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주님의 그 사랑과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전에는 내가 제법 그럴듯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었던 그 수많은 날들이 주님의 사랑을 깊이 맛보고 난 후에는 그런 생활이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이 아니었고 한편으로 세상에 대한 욕망과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미련 사이를 오고가는 방황하는 날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고 할 것같으면 오늘 주일날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이 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정한 신자이고 이제 하나님 앞에 흔들리지 않는 신자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어떻게 집념 어린 사랑으로 우리를 추적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이 수많은 고백과 삶들이 사실은 말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의 찬란한 빛을 받으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신실한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 안에는 정말 우리 속에 우리가 싫어하는 또 다른 우리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 수많은 자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게 만들지 못하고 우리의 인생의 꿈과 모든 보람을 하나님 한 분에게 온전히 드리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주님이 처녀 이스라엘아 너는 방황하고 있노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단지 왜관 적인 방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이스라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자기의 신부인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동일한 그런 사랑으로 자기를 사랑해주도록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남녀관계에 있어서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거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깊이 사랑하고 나면 이제 이 세상에는 여자도 존재하지 않고 남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 한사람을 향한 사랑이 절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절대’라는 말은 비교될 수 있는 대를 끊어버린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진실한 의미의 사랑이에요. 내가 저 여자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 다른 여자들은 내게 있어서 그냥 사람일뿐이지 여자는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어떤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유혹을 느끼지 않아요 어떤 아름다운 모습을 한,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수많은 남자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한사람과 사랑에 빠진 여자인 내게 있어서는 남자가 아니라 그냥 사람일뿐이에요 그래서 한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이성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는 이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오직 그 한사람만 존재하는 거예요 이게 사랑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속성이에요 한 남자 한 여자를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쳐다보고 있을 때에는 그 여자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그 남자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을 보면 그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 더많이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수많은 남녀가 눈에 들어온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 속에 있는 사랑은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사랑은 순결한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의 순결은 한사람 한 대상을 향한 사랑으로만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사람 다른 대상에 대한 사랑이 더 이상 자리할 수 없는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여러분들을 선택해서 구원하여 예수의 피로 여러분들을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후에 여러분보다 더 착한 세상의 백성들을 볼 때에 여러분들을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고 언제든지 여러분들을 주고 세상에 있는 백성들과 바꾸고 싶다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가지신 적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었다면 하나님도 방황하시는 하나님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 눈에 자기 자식밖에 없고 그 자식을 향한 사랑이 정말 뜨겁고 놀랍지만 솔직히 그 부모들도 자기 아들보다 더 잘생긴 아들을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자기 딸보다도 더 착한 딸들이 이 세상에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요. 그러나 사랑은 그런 조건에 매이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집 아이들보다 더 머리 좋고 똑똑하고 착한 아이들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랑은 나의 자녀들에게 있는 것처럼 여러분 모두의 마음도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도 우리가 그러한 존재하고 하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인 사랑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는 방황과 흔들림이라는 것이 없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십자가에서 당신이 구원하고자 하는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거에요.
우리에게 무엇인가 선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려고 마음을 먹으셨나요? 아니에요. 뭔가 우리를 구원해 내시면 우리가 아주 유능하고 훌륭하게 하나님 앞에 이용가치가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그런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를 건져내셨나요? 아니에요. 세상에는 우리보다 유능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세상에는 우리보다 훨씬 쓸모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우리는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을 섬기면서 살면서 얼마나 우리 자신의 무능을 자주 느낍니까? 저도 지난 한 주간을 살면서 정말 내 안에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만한 것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왜 나같이 무능하고 정말 보잘것없고 그렇다고 해서 영리하지 도 못한 그러한 무지한 인생인 나를 들어서 하필이면 이 자리 여기에 세워서 끊임없이 내가 여기에 있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손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자의식을 가지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이 비참한 인간을 왜 하나님이 여기에 세워주셨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를 우리는 그런 식으로 더듬어서 파악할 수는 없어요. 그냥 하나님은 하나님이 왜 우리를 사랑하시고 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건져내셔서 우리를 주의 자녀 삼으시고 오늘 그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어 주의 자녀 삼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 한가지는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번도 후회하거나 방황한 적 이 없는 사랑이라고 하는 사실이죠.
그래서 우리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 아무 쓸모 없고 주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은 그때에 우리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흠뻑 입은 우리들이 그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우리가 도달할 수는 없지만은 최소한도 방황하고 흔들리는 그러한 모습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깊은 것 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이 되는 것이에요. 주님의 마음에 가장 커다란 고통은 단지 이세상 사람들이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거스르고 방황하며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 모습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고통이요 슬픔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주님의 마음에 더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 신지 이미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자기를 사랑하셨는지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전히 주님처럼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기도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 모습, 그 자체가 우리 주님에게는 가장 커다란 고통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아주 잘 나타났어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왜 예수님은 헬라인들 사이에 태어나시거나 아니면 이스라엘과 상관이 없는 나라에 혈통을 입으시고 태어나질 않고 이스라엘의 혈통을 입으시고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선교의 명령은 먼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라고 하신 부탁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참다운 선교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선교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방황하고 흔들리면서 괴로워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정하고 있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심령의 변화와 부흥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그래서(?) 흔들림이 없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는 일도 아주 중요한 선교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됨으로써만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다운 선교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는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방황하는 모습이 하나님에게 주는 고통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이 방황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워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단지 교회에 출석하고 매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정말 마음이 하나님께 확정된 신앙생활을 하나님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이 은혜 받는 곳에서는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가도 유혹이 있는 곳에서는 다시 주님만을 따라가기에는 세상에 두고 온 것들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이중적인 마음이 주님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죽어 가는 이방의 백성들을 바라보시는 것도 주님의 마음에 고통이겠으나 특별히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하고 있는 그 모습이 하나님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가 방황하는 것을 마음 아파하실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주님이 방황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주님이 자기의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충분히 보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어떠한지를 충분히 보이셨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일반적으로 말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통해서 보였다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밝히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여러분들의 죄를 지고 어떻게 죽으셨는지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죄인이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순결하신 분임에도 불결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스스로 하나님께 범죄 하여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린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여러분들을 알았습니다.
여러분들은 한때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신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펑펑 우는 신앙의 감격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그 감격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때에 주님이 받으신 그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가책을 느끼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고난이 이제는 그 복음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리스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과 십자가에 죽으신 그 형벌은 바로 주 앞에 징벌 받아야할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죽으셨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것은 오직 한가지. 사랑하는 내 백성들아 이제는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너희의 영혼의 주인이신 목자 되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그 간절한 소원 말고 또 무엇이 그분의 마음속에 있었겠습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세월이 수없이 흘러도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 십자가,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더 이상 방황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 매일 매일 삶 속에서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주님의 기분에 따라서 시시때때로 변덕스럽게 다가왔다가는 물러가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되는 사랑이었습니다. 얼마 안돼는 우리의 신앙의 생활을(?)생애의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비록 1년밖에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걸어온 신앙의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그 뒤안길이 얼마나 사연이 많은 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에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펑펑 우는 은혜의 감격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올곧은 걸음으로 한번도 넘어지거나 쓰러진 적이 없이 신앙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었지만 또 때로는 넘어지고 또 때로는 쓰러졌습니다. 때로는 비쳐거리면서(?)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달려온 것입니다. 때로는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심령이 곤고해져서 더 이상 광야의 길을 걸을 수 없는 상황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마치 하갈이 이스마엘과 함께 벌판으로 나아갔다가 물도 떨어지자 주저앉아서 내 아이의 죽는 것을 볼 수 없다고 울부짖었던 것처럼 한 걸음도 더 옮겨 놓을 수 없는 인생의 곤고한 때를 걸어온 적도 있었습니다.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알면서도 결별하지 못하는 세상의 사랑과 자기 속에 독버섯처럼 솟아나는 죄성을 이기지 못해서 허우적거리며 쓰러지고 범죄한 후에는 다시 통곡하고 통곡한 후에는 눈물을 씻으며 다시 범죄 하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때 주님은 어떻셨습니까? 우리를 버려 두셨습니까?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한번도 하나님은 버려 두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걸어온 우리의 인생의 길에는 항상 우리의 알던 때에도 모르던 때에도 주님과 함께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메마른 광야에 주저앉을 때에 바로 우리 앞에 생수의 샘을 터치셔서(?) 주의 말씀으로 곤고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도 사실은 우리가 주도권을 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권을 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도움이 끊어지고 이제는 살 희망이 사라졌다고 할 그때에 어김없이 주님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남들에게 말하기 싫은 은밀한 죄로 말미암아 방황하고 깊은 시련의 계곡에서 비통한 눈물을 흘릴 때에도 사람들은 아무도 돌아 보아주지 목하고 나의 목회자도 때로는 내 마음의 깊은 고통과 아픔을 헤아려주지 못했지만 그러나 어김없이 주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고 자기의 사랑을 자기의 손길을 우리게 뻗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넘어진 그곳에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제가 이 찬송을 참 좋아해요 이 찬송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그 삼절 가사 때문이에요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생각하네
여러분들은 목사인 저는 그저 침체도 없고 늘 충만하게 사는 것처럼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하나님 이제는 나의 인생이 충분합니다. 이쯤에서 저의 생명을 거둬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가 일년에도 몇 차례씩 있습니다. 정말 내가 되고 싶은 나와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나 사이에 그 어마어마한 간격 주님을 위해서 살고싶어하는 나의 기대치와 실재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의 처지 그 사이에서 느끼는 고통과 견딜 수 없는 고독은 이세상의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그러한 고독이요 고통입니다.
무엇 때문에 들풀만도 못한 인생을 여기에 살아있게 하고 오늘 땅바닥을 기어다니다가 내일은 발에 밟혀 죽는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을 이 세상에 두게 하시고(?) 무엇 때문에 주님이 이렇게 욕되이 여김을 받고 이런(?) 이렇게 하나님이 만드시는가 그런 절망적인 생각이 가슴에 깊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확실히 그럴 때는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절망적인 자신의 모습과 절망적인 상황만이 캄캄하게 앞을 가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때 곤고함이 극에 다라서 이제는 내 힘으로 하나님께 하나님을 향해서 까치발을 뜨고 주의 손을 잡을 힘조차 없을 그때에 그 한계 치에 도달할 때에는 어김없이 주님의 손이 내려옵니다. 말씀을 통해서든 무엇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시다고 하는 인침의(?)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깊이 그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은 정말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변함 없이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같게 하시네
그래서 욥의 고독한 고백이 생각이 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 시시때때로 우리가 주님을 버린 적은 있지만 주님이 우리를 버리신 적은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자비하심을 입증하셨어요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모든 은혜가 이제는 사라졌고 더 이상 소망이 없노라고 생각되는 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 느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같이 쓸모 없는 무지랭이와 같은 인간들을 그래도 사람을 만들어 보시려고 자기의 이름을 빛내는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고 마시겠다는 열심으로 우리의 눈에 눈물을 씻기시고 굽어진 우리의 다리를 펴게 하시고 넘어진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오늘 여러분들을 여기가지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절대로 여러분들의 결단과 각오가 여러분들을 여기에 데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도 부족해서 우리를 성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셔서 우리를 여기에까지 데려오신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이란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는 방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세 번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이제껏 산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을 뿐 만 아니라 미래에도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사랑과 축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방황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껏 살아온 날들도 주님 없이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곤고하고 고통스러운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앞에 있는 미래의 날들이 어떤 날들일지 알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앞에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는 우리의 남은 날들을 가장 지혜롭게 사는 비결을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방황하지 않고 견고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미래에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그렇게 흔들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방황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육신적인 방랑은 종종 즐기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과거에 대한 집착, 두고 온 세상에 대한 사랑, 자기 맘대로 살고 싶은 방탕한 본성들이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는 그 일 하나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해서 우리로 늘 흔들리는 사람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환란과 시련을 훌륭하게 장군처럼 싸워서 이겼던 그리스도 인들이 평안한 때에 유혹에 넘어지고 자기에게 실패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말한바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커다란 대적은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하는 그런 부정한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그렇게 방황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을 향해 확정되지 못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주님만으로는 더더욱 살 수 없는 그 마음이 오늘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에 확정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주님만을 뜨겁게 사랑하고 세상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며 하나님 한 분께만 진실한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만을 섬기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종종 저는 인생이 짧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인생이 너무나 길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을 믿은 후에 한 일년 정도만 살다가 죽는다면 혀를 피나게 깨물고 한번 주님만을 위해서 진실하게 살다가 확 죽어버리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긴 인생인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면서 세상 즐거움을 맛보면서 적당히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짧고 주님의 마음에 들게 잘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길어요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펑펑 우는 감격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방황하고 흔들리는 모습으로 오늘 주님께 책망을 받는 처녀 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가장 커다란 고통이 있다면 자기의 사랑하는 여성이 이 남자 저 남자 품에 안겨서 만족을 누리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거절하고 이 남자 저 남자 품에 안기며 우상을 섬기며 신앙의 정절을 잃어버리고 그러면서도 저녁이면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는 이 창녀와 같은 이스라엘의 처지를 여러분들은 상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들이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그 확정된 신앙생활이 아니고는 매일 교회에서 만나는 여러분들의 모습이 하나님에게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고 고통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낮엔 해처럼 밤에 달처럼 그렇게 온전히 주님만을 사랑하고 싶은데 우리 안에 있는 못난 자아, 정리되지 못한 세상에 대한 욕심,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미련과 인간의 이념에 대한 연념(?) 때문에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흔들릴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자의 마음을 갈대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렇게 유한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인간도 그렇게 갈대와 같이 연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내가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살고 싶지만은 그러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너무나 미워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두 가지밖에 없어요 그 일은 무엇이냐면 끊임없이 이렇게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깊이 미워하고 슬퍼하는 깨어진 마음과 그리고 우리를 그러한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그 믿음, 한편으로는 그렇게 수시로 마음이 변하는 자신의 처지를 보고 비통해 하는 회개와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주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는 이 믿음 두 가지 이외에 우리들이 의지할 바가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서 흔들릴 때마다 오늘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치료법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멀리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내가 너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너를 깊이 생각하노라 그리고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기노라고 하는 주님의 이 아름다운 음성이 들려온 때는 이스라엘이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고통하고 자기의 볼기를 스스로 때리면서 내가 왜 이렇게 행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고 하며 뉘우칠 바로 그때에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겠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게 멀어졌을 때 즉시 가슴아파하는 뉘우침으로 회개할 줄 모르는 우리의 굳은 심령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더 골 깊게 만들고 우리의 영혼의 상황을 점점 더 절망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할 수 만 있으면 여러분들은 예배시간 마다 자기의 죄와 허물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주님만을 위해서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는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뉘우치는 회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회개 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한번도 우리를 용납해 주시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패역의 극치를 치달으며 멸망의 길을 달려간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주님이 오늘 내가 너를 측은히 여기고 너를 책망하여 말할 때 너를 생각하노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들리면서도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넘어지면서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회복을 위한 회개가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방황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우리들이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사는 것 이외에 우리는 특별한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매일 깨어있는 영혼의 시각을 가지고 감각을 가지고 자기의 작은 허물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등질지도 모르는 조짐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고 돌이키려는 그러한 말씀에 대한 깊은 감각이 우리에게는 너무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는 영혼들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커다란 고통이고 회심하지도 못했으면서도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염려할 줄 모르는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제게는 가장 커다란 고통입니다. 그들이 마음을 열고 자신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랜 세월동안 빛 한 번 들어간 적이 없는 어두운 철장과 같은 자신의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의 빛을 받아서 자기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말씀에 대한 미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재미를 터득하고 그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이 새로워지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길에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마지막 유혹이 많은 이세상의 길을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싸울 싸움을 모두 싸운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피묻은 무릎으로 걸어간 사람들이었고 그의 얼굴에는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 수많은 원수들에 의해서 할퀸바된 상처투성이의 면상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디 지름길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무릎으로 걸으면서 하늘 보좌까지 나아갔고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 고난의 칼과 화살을 맞으면서 그들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며 주님 사랑하나 붙들고 그 시련의 길을 지났습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외로워지는 경험도 했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동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기도 했으며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 오히려 진리와 함께 죽는 길을 비진리와 함께 사는 길을 버리고 오히려 그 길을 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순간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포기했던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길이 협착하고 거기를 찾는 사람이 적지만 그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라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일을 창조하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고 남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제껏 까지는 항상 하나님이 언제나 선두 적인 사랑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지만 그러나 어느 때가 올 것인데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 처녀 이스라엘의 마음에 커다란 감화가 일어날 때 이제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아니라 자기도 그 하나님을 끌어안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감격스러운 사랑의 때가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이스라엘의 변화를 기대하시는 것이 어찌 이스라엘을 향해서만 거시는 기대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의 사랑은 변함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계속되고 여러분들이 충만할 때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곤고할 때에도 주님 앞에 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등진 때에도 주님의 사랑은 계속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까지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 우리는 느낄 수 없습니다.
느끼지 못하는 사랑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에 감화를 받고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우리들이 체험해서 주님이 우리만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할 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의 행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날에 어떤 어려움이 올지 모르고 어떤 고난이 우리 앞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순종하면서 살아가면 순종하기 때문에 고난을 많이 당할 것이고 거스르면서 살아가면 거스르기 때문에 곤고한 일들을 당할 것입니다.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주를 위해서 살기 위해서 많은 고난을 당할 수 도 있고 거스르는 사람은 징벌을 받으며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많이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 우리의 인생을 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바람이 부는 벌판과 같은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그분을 꼭 끌어안는 사랑의 관계가 지속될 수 만 있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두렵겠으며 우리에게 무엇이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저는 교회를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제 목회의 시작인데 언제 하나님이 저를 데려가실 지 모르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있습니다. 잔잔한 포구에 닻을 내리고 평안하게 휴식을 취하던 제 인생의 때는 열린교회를 개척하면서 끝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함께 배를 타고 잔잔한 포구를 지나서 큰 바다물결이 뒤웅치는(?)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 한가운데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파도가 일어날지 어떠한 폭풍과 시련이 닥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것 하나는 태평양과 같은 잔잔한 바다를 일평생 항해하다가 저의 일생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직감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파도도 만나고 삼킬 듯이 밀려오는 집채만한 시련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 큰 뜻을 품고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시련과 고난과 파도와 아픔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깨칠 듯이 밀어닥치는 빌딩과 같은 파도 앞에서도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고 우리가 그분의 품에 안겨있는 사랑 받고 사랑하는 관계가 계속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 풍랑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잠잠 하라고 명하시면 잠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이 흘러가도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영원히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신앙의 이 현장에서 사라질 수 없는 숙제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주 되신 주를 참사랑하고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주님을 안으십시오. 이제 주님 혼자 여러분들을 사랑하게 버려두지 마십시오. 언제까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짝사랑이 되야 합니까? 이제는 주님을 그렇게 버려두지 말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에 반응하며 그분을 안으십시오.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전부가 되게 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의 모든 방황이 하나님 한 분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서 마침표를 찍도록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의 최고의 숙제가 되어서 이제는 내가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여러분들 되셔서 주님이 이제 여러분들을 볼 때에 더 이상 흔들리며 방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분을 여러분들의 품안에 안는 그런 진실한 신자들이 되어서 주님이 누구인지를 세상에 보여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십시오. 이것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우리를 부르는 초청입니다.
17.앙망하는 자를 통해 오시는 하나님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64:3~4)
선지자는 산을 진동하게 하는 것처럼 주님이 친히 역사하셔셔 큰 일을 행하시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이 그렇게 큰 일을 행하시면 산들을 진동시키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어떤 것입니까? 물론 홍해를 가르는 사건도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고 수많은 원수들이 몰려올 때에 그들을 이기도록 승리를 주신 사건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전쟁 속에서 보여준 사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위대함이라는 것은 조금 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때에 부흥을 기원하는 이 이사야 선지자의 마인드와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래 전에는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해야만 응답되는 것들이 이제 과학의 힘으로 해결되는 것들을 보면서 한 때 그리스도인들이 혼란에 빠졌던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해야만 되던 일들이 과학의 발달로 기도를 통하지 않고도 해결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하늘을 쳐다보면서 농사를 짓고, 제때 비가 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사람들이 관계시설이 잘 되고, 지하수 개발이 잘 되면서 이제는 농업 용수를 공급받으면서 농사를 잘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기도해서 응답 받을 필요가 없을 상황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과학자들이 보는 인류의 미래는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밝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는 것 때문에 걱정을 하지만 자신들은 능히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쌀 한 톨을 주먹만하게 만들고 감자를 수박 만하게 만들며, 나무에는 열매가 달리고 뿌리에는 무 같은 것이 달리는 것을 만듭니다. 닭 한 마리를 소 만하게 만들고, 더 발달하면 동물 하나의 몸에서 뒤에는 물고기, 앞에는 돼지고기, 옆에는 쇠고기가 되도록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지진을 일으키시고 폭풍을 몰고 오시는 하나님 정도는 능력으로 생각지도 않는 시대를 우리들이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자연을 다스리는 인간의 힘이 아무리 위대해진다고 할지라도 인간 자신을 다스리는 인간의 능력이 탁월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잘 살고 조금 전과 같이 과학자들은 인류를 먹여 살릴 자신이 있다는 장미 빛 공약을 내어놓아도 그것 때문에 인간의 삶이 질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불행의 요인들을 하나님과 대면하는 신앙으로 해결하지 않고는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산을 움직이고 진동하시는 것과 같은 위대한 능력은 수많은 인간들을 바꾸어 놓으시는 그 하나님의 변혁의 손길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이 쪼개어지고 바닷가 갈라지는 기적을 많이 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많이 고치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신앙이 오히려 훨씬 더 뛰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의 포기하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너희들이 나에게 적응을 해라”고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만 그렇게 하고 다니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사람마다 그렇게 하고 다닙니다. 그것이 결국은 이 세상이 불행하고 사람들의 삶이 어두운 이유입니다.
바다를 가르는 하나님의 능력도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하고 관계가 없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렇기에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이 배가된다고 할지라도 역시 인간은 자신 앞에 매우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땅에 강림하셔서 부흥을 주실 때에 그렇게 움직이지 않던 인간들이 변화되고 새로워집니다. 그것이 사실은 산 하나가 흔들리는 것보다도 위대한 역사입니다.
실제로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시라는 경탄과 고백을 받아내는 것이 무슨 화산이 폭발하는 장엄한 광경이라든지, 성경을 읽다가 수 천년 전에 홍해가 갈라졌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감격을 해도 얼마나 감격을 하겠습니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현장에 오셔서 나도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나를 주님이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에 “세상에 내가 이렇게 바뀌었나! 예전에는 주님만 없으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요즈음은 주님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으로 바뀌었구나!”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한 놀라운 은혜. 여러분 하나하나는 산보다도 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변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바꾸겠습니까? 요즈음 같은 때에 산 하나를 들어 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10억 정도 주면 산 하나를 번쩍 들어 냅니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6개월 정도만 벌떼같이 트랙터들이 매달리면 간단하게 들어 냅니다. 그런데 얼마나 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집에 가서 산을 하나씩 그려놓으십시오. 그것도 돌산을 그려 넣으십시오. 그렇게 변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부흥은 그렇게 변하지 않는 돌산과 같은 수많은 인간을 한번에 뒤흔들어 놓아서 진정으로 인생에 대한 모든 생각을 바꾸고 하나님에 대해서 대적하거나 무심하게 살았던 모든 불순종을 뒤엎어서 열렬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것을 선지자가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적 중에서 최고의 기적은 우리 같은 사람이 하나님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진정으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변하지 않는 인간인가를 깨달으면서 절망하는 사람들은 부흥이 간절히 소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 그런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도 믿고,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도 믿고, 시시때때로 은혜도 받고 신앙생활을 하며 거룩하게 살려는 의지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바뀌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하며 자신 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명이 있는 것을 거의 자각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단지 반공포로들이 전향하는 전향전도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과 그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하는 진실한 사람으로 삶의 경향성이 바뀌고, 자신의 삶에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거치는 걸림돌이 되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진실한 사람들로 변화되고 고쳐지기 위해서는 기적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사실은 천지창조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천지는 하나님이 그저 “있어라”하고 말씀하시면 생겨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얘, 사람 되라”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되라고 한 두 번 말씀하셨습니까? 매일 말씀하시는데도 자신 안에서 부단히 자신이 깨어지면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닌 그렇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입니다.
선지자가 그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주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너무나 차갑고 냉혹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에게 고난을 줍니다. 그런 것을 보고 마음과 뜻을 다해서 외치지만 자신의 평범한 사역으로서는 이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오셔서 산들처럼 움직이지 않는 이 인간들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완전히 기경하시고 바꾸셔서 새로운 인간들로 만들어주시기를 기대하는데 그것이 부흥에 대한 기대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자주 나타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것을 하나님이 전혀 행하시지 않는 분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그런 일들을 행해오셨고 그러했기 때문에 돌덩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정도나마 하나님을 믿으며 오늘 자신의 예언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단순한 돌 같은 백성들의 마음을 뒤집어 엎으셔서 하나님을 열렬히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방의 빛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좇아서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백성들로 단숨에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지자가 믿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의 기적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이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아서 완전히 새사람을 만드는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가 계속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부흥은 일종의 하나님의 비상섭리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아주 특별하게 역사하시는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하나님이 그렇게 기적적으로 역사해주시는 일들로만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도저히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때에 하나님이 종종 간섭하십니다.
그렇기에 그런 위기 속에서도 선지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받지 못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불명예를 드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바르게 보여주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잠자는 역사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대신에 지금 거기에 항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예외적으로 나타나셔서 강하게 간섭하심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일시에 영적으로 소생시키셔서 거인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던 그 기적적인 부흥의 역사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점점 성장하면서 우리들은 보다 더 우리가 무엇을 믿고 우리가 교회를 통해서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명백하게 밝힐 필요가 있으며,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어느 극단에 흐르지 않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깊이가 있는 뿌리깊은 경건의 터전 위에서 ,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줄기와 가지가 뻗어 나가서 많은 넝쿨들을 맺고 그 아래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와서 쉼을 얻게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분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문제는 우리 앞에 있는 상황들이 모두 낙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전세가 낙관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의 증거에 의해서 입증이 됩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악한 영의 세력들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미 예고되고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복음 사역을 더욱 방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다워질수록 교회를 훼방하고 더럽히고자하며 쓸모 없는 교회로 만들고자하는 사단의 집요한 도전들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또 하나는 세상이 점점 우리들이 기대해왔던 평범한 사역으로서는 변화되지 않는 아주 극단적인 강팍함들이 이미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문화 속으로 들어가서 보면 섬찟할 정도로 무섭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일각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반감, 심지어는 지금 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고 약 오만여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는 종교 가운데 사탄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예 회사를 하면서 수익금의 일부를 그 사탄교에 기부합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자신들이 사탄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메신저라고 생각하면서 문화나 사상 같은데 침투해서 사람을 하나님을 부인하는 쪽으로 끌고 가며, 나아가서는 사탄의 세계에서 그 조정을 받으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선전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악령들의 영향은 구체적으로 사회를 통해서 나타나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선교전선에 심각한 영향을 줍니다. 굉장히 힘들지 않습니까? 오늘날에도 가만히 보십시오. 교회에 등록하는 교인도 있고 성장하는 교회도 있지만 대부분 수평 이동입니다. 그 자체가 전혀 의미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매일 빙글빙글 돌뿐 무엇인가 벽을 깨뜨리고 뛰쳐나가면서 그 영향력이 밖으로 뻗어 나가는 그런 일들이 영적인 역사를 동반하면서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선교적인 어려움입니다. 앞으로 우리 나라만 보더라도 점점 더 잘 살게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대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점점 더 잘 살게 될 때에 이제는 구라파의 사회들이 걸어간 똑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신앙도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불분명한 사람들이 시간도 많고 돈도 많아질 때에 정말로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겠습니까?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삶을 보면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나이든 사람들이 많은 고령 사회가 될 것이고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저 편안하게 살고 이 세상에서 좀더 건강하게 즐기며 사는가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데에 집중되어 있고, 그렇게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나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는 인간의 처지, 마지막 심판에 대한 인간의 운명 같은 것은 모두 종파적인 복음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미래의 교회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선교전선은 성공을 기대하기 상당히 어려운 전선입니다. 그렇게 다가오는 전선들을 그저 간단하게 세상의 흉내나 내며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꾀어서 무엇인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고 그리스도인들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가오는 미래를 너무나 모르는 생각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독교가 문화 안에 존재하기에 미래에 교회가 직면하게 될 십 년이나 이십 년 후의 문화에 대해 생각해야 될 것이고 그리고 또 우리들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문화들이 새로운 계층의 사람들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생각들도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만약 거꾸로 지나가더라도 이렇게 사회의 통상적인 가치 체계를 완전히 부인하고 멋대로 살아가는 세대들이 형성될 것이라는 것을 이삼십 년 전에는 인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우리들이 미리 예측하고 탐구하고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은 어떤 면에서 세상으로부터 오는 공격을 교회가 방어하기 위한 수비적인 노력들일뿐 공격적인 노력은 아닙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다른 사조와 인간의 황량하고 거친 정신문화와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수비가 아니라 공격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사람들이 문화에서 그런 저속하고 반 하나님적인 불신앙을 촉진시키는 문화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확실하게 변화돼서 살아간다면 세상이 얼마나 놀랍게 변하겠습니까? 그렇게 세상사람들이 변하게 되는 일들이 선교를 통해서 일어나는데 그런 현상들이 낙관적이지 않고 굉장히 어둡다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기대하는 바는 우리들이 평범한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 그저 한두 명이 아니라 한번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고 돌아오게 하는 거룩한 말씀의 삶을 우리들이 기대하지 않고도 다음 세대의 교회가 정직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지하며 간직하며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낙관입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상황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벌써 많은 교회들이 참다운 복음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거의 알지 못하고,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참된 복음을 알게 되어, 옛날에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 전부 헛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가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 아니라 슬픈 일입니다.
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곳에서는 정직하게 복음이 무엇이고, 인간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그분을 믿는 것이 참된 도리이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이고, 그 기대하시는 거룩한 삶이 어떤 영적인 자원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공통된 진리들을 만날 수 없습니까? 그것은 결국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다양성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의 진리를 진실하게 경험하지 못하기에 신앙생활의 은밀한 부분들이 비밀로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날마다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거룩한 능력을 공급받으면서 영혼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힘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는 삶은 손에서 손으로 전수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로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비밀에 속한 것입니다. 개개인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그러한 생명과 영적 생활의 원리를 경험해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들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이 오직 두 가지 밖에 없는데, 차가운 지식 또는 판에 박힌 종교적인 생활의 외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사람들이 더 열심을 내고 살아가는데 그것이 정말로 가한 것입니까?
앞으로 교회가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 영향력이 세상 속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습니다. 또 세상에 나름대로 영향을 미치겠다고 세상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이 복음주의 역사가 걸어온 길입니다. 우리라고 해서 어떤 예외적인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모두 그런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뻔한 것입니다.
우리는 잘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못 산다고 해서 갑자기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나한 나라 속에서는 부흥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이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사람들이 너무나 살기 힘들어지자 삶이 고달프고 전쟁의 폐허 위에서 먹고살려고 몸부림치고 질병과 싸우느라 하나님을 믿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삶이 풍요해지자 사람들은 이제 무엇이 그렇게 심각할 것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특별히 우리 나라의 퇴폐한 성문화, 쾌락주의와 같은 것을 가져다준 나라의 사람들이 우리 나라보다 훨씬 감각적이고 그런 것들에 대해 밝히는 타락한 문화의 선구자가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진정으로 조상의 뿌리를 찾아간다고 하면 서구의 사람들이 그런 조상을 가진 사람입니까, 우리가 그런 조상을 가진 사람입니까? 우리는 뒤에서 호박씨 까는 문화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양반이라고 점잔을 빼면서도 뒤에서는 첩을 거느리며 살고, 심지어는 남자는 한 가정에 충실하고 정결해져야 한다는 사상을 동양의 사상 속에서 쉽게 읽어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우리 조상들의 살아온 역사를 보면 우리는 결코 경건한 조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조상들의 사고방식을 보면, 남자가 적당한 쾌락주의 속에서 사는 것이 남성다움의 한 표시인 것처럼 통용되고 있는 사회 속에서 한 시대의 아들과 딸로 우리들이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한 때 부흥이 있었기 때문에 경건한 조상들이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언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예화) 17세기말쯤(1690년대쯤)에 어느 목사님의 설교 기록을 보면 그 타락해가는 미국의 역사를 통탄하며 자신이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 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가서 7년이 지나는 동안에 그 할아버지의 회상에 의하면 그 나라에 서 욕을 하거나 남을 비방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도덕한 일을 행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성자와 같은 사람들이었는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조상을 두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금 그런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온통 쾌락 자체가 하나의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세 가지에 미칩니다. 스포츠, 섹스, 사이언스. 즉 3S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환경이 좋아지고 소득이 높아지고 시간이 넉넉해지면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타락할 가능성-충분히 엉망진창과 같은 사회가 될 가능성이 많은 나라가 이런 우리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선교적인 상황은 어떻게 됩니까? 정말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기본적으로 핏줄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이 차마 없다고 말 못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대단한 신앙은 아닙니다. 어느 여론 기관에서 조사를 했는데 미국인들의 92%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런 통계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미래에 대한 전망이 우리가 훨씬 어둡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지금도 미래에 대해서 그런 사명감을 느껴야 할 교회에서 이런 세상에 대한 슬픔이나 복음이 사라져가고 있는 안타까움이 없는데 그때에 가면은 그것에 대한 어떤 갈망이 생겨나겠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분투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타락하고 세상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해야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묻어서 가면 자연스럽게 세상과 동일한 인간이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어렵습니까? 아니면 세상과 똑같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어렵습니까? 전자는 피눈물을 흘려야 되지만 후자는 경건한 생활을 하지 않고 묻어서 살아가면은 바로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말로 우리들의 미래에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해보나마나한 싸움에 목을 거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애를 쓸 것이고 부흥이 오지 않아도 그렇게 힘을 쓰면 그냥 통째로 교회를 들고 양보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세를 뒤엎을 수는 없습니다. 대적하는 세력들이 워낙 강력해서 노도와 같이 밀려들 때에는 하나님 당신을 의지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선지자에게 부흥에 대한 간절한 희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화) 교인이 많이 모이는 한 교회의 부목사님께 “요즈음 목회의 상황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목사님! 쨉 가지고는 게임이 안됩니다”. 무슨 말인가 물었더니 권투할 때 슬슬 때리는 잽이 있지 않습니까?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무엇인가 분명한 복음을 선포해서 한 방에 때려 눕혀서 기절하도록 만들어야지만 머리를 흔들고 새 사람이 되어 일어나는데 매일 톡톡 때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위로를 하려고 “그것도 많이 맞으면 쓰러지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이분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목사님! 그런데 그것도 너무 많이 맞아서 사람들이 이제는 이골이 나서 내성만 강해집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하나님의 교회의 미래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때를 보십시오. 그리고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십시오. 지금 60년대처럼 부흥회만 열면 사람들이 새카맣게 모여들고, 길에서 전도지를 들고 소리소리 치며 예수 믿으라고 하면 눈물을 펑펑 흘리며 등록카드를 쓰던 때는 지나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강팍해지고 신앙과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절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교회가 여러 가지 병을 고쳐주면서 사람들이 질병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클린턴”이 무엇이라고 발표했습니까? 게놈프로젝트가 거의 완성됐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완성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저는 비전문가이기에 잘 모르지만 인간에게 질병이 왜 일어나는가를 규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태어난 사람을 조사해보면은 언제쯤 되면 무슨 질병이 걸릴까를 알고 성격이 어떤 사람으로 자라는가하는 것까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지도를 펴놓고 찾으면 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질병이 정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머리만 아파도 기도 받으려고 찾아오던 때는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방금 전에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수많은 현대인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과학이 발달하면서 간절히 기도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을 기적과 같았던 일들이 척척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점점 하나님을 깊이 의뢰하고 갈망하면서 살아가야 할 필요들을 점점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으로서 신앙과 인생의 안목을 갖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앙이 깊은 사람은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궁극적인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손댈 수 있겠습니까? 게놈 지도를 펼쳐놓고 죽을 사람을 좀더 살게 하고 병에 걸릴 사람들을 걸리지 않도록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의 질이 더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코가 낮은 사람을 높이고 눈을 째고 귀를 늘리고 입을 바꾸어 아름다운 모양으로 만들어 놓을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 몸부림치는 고독의 문제나 자신의 실존을 안고 영혼을 잇대어 흐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무거운 인간의 깊은 근원에 있는 불행의 문제를 과학이 고칠 수 있겠습니까?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경건하고 말씀에 굳게 선 사람들은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과학이 발달해도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고달파집니까? 모두 하나씩 핸드폰을 가지고 예배시간에 삐삐 울리는데 옛날에는 그것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그것 없이 옛날에는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가지고 사니까 인간이 점점 고달프고 힘이 듭니다. 어디에 가도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질이 나아진 것입니까? 좀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는데 좀더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삶의 구현이 되는 은혜 있는 인생과 일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그렇기에 이러한 앞에 다가오고 있는 선교의 전망들이 상당히 어두운 것입니다. 적어도 외국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데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어둡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어둡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이 부흥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가당한 생각입니까? 정말로 그러한 하나님의 부흥과 인간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하나님의 장엄한 능력이 이 교회와 도시사회 속에 뻗어 나가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물결 속에 떠밀려 회심하고 거룩한 성도들이 되기를 결심하는 일들에 대한 기대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진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선지자가 말하는 것이 간절히 갈망하는 자신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하면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적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을 앙망하는 자를 위해서 이런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바로 산을 뒤흔들어 놓는 것과 같은 놀라운 부흥입니다. 그런 부흥을 누구를 위해서 행하십니까? 자신을 앙망하는 자를 위해서 행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것은, 성경의 역사를 보면 사람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건너서 사방 팔방으로 일어나면서 세상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건너뛰시는 발자국의 지점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역사를 바뀌실 때 하나님이 항상 사용하시는 도구는 사람입니다.
어느 과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렛대의 원리를 이야기하면서 “나에게 기대란 막대기를 하나 주십시오. 내가 한 손가락으로 지구를 움직여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데 기다란 막대기에다 지렛점을 받치고 움직이면 그것이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역사가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시대에 사람들은 이런 저런 방법을 준비하느라고 부산을 떨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더럽혀 놓은 즈음에 자기를 이 세상에 알리시기 위한 방법으로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택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모두 신앙을 잃어버린 사사시대 때에 - 여호수아와 여호수아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유일신 신앙을 모두 상실하고 있었을 때에,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 백성들과 구별된 것을 거의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게 되었을 때에 -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사무엘 한사람을 준비시키시기 위해서 한나로 하여금 눈물 흘리며 여호와의 집에서 아들하나를 구하며 부르짖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그렇게 부르짖는 소원에 응답하셔서 아들 하나를 주셨습니다. 한나의 뱃속에서 아기가 자라고 있을 때에 한나는 이 아이를 낳음으로써 자신의 인생의 부끄러움을 면했다고 - 이 집안의 할 일을 다했다고 - 생각하고 있었지만 한나의 배가 불러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쳐서 새 백성을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꿈도 같이 부풀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한 전환점을 이루셨습니다. 그렇게 몇 사람을 통해서 건너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이 누구를 밟고 계십니까? 이사야를 밟고 계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미래를 위한 가장 훌륭한 투자는 사람을 위한 투자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자라나는 목회후보생이 많은가를 물었습니다. 나중에 목회자가 될 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 교회는 그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고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제가 해주는 것이 없고 일년에 두 번씩 헌금 거두어서 등록금에 보태주고 일년에 한번씩 세미나나 해준다고 하며 무엇을 해줄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제가 생각할 때에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그들을 잘 목회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별다르게 대접해주고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이라고 대접을 해주며 길러왔기 때문에 교회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 목사될 사람들의 거들먹거림, 되고 난 후에 더 거들먹거림과 같은 것이 이런 과정에서 배운 것입니다.
(예화) 신학교에 있을 때 3월에 입학을 하고 4월이 되면 양복입고 넥타이를 하고 오는 학생들이 많다. 어느 날 학생 하나가 출석을 부르는데 시간도 없는데 “1번 ○○○전도사님, 2번 ○○ ○전도사님,”하고 부르기에 뒤통수를 때리면서 들어가라고 했다. 그들 가운데는 열 여덟, 열 아홉 살짜리도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들 싹이 노랗다. 그렇게 해서 무엇이 되겠냐? 다 집어치워라. 학교 오는데 양복입고 넥타이 매고 올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 평범한 바지 에 편한 옷 입고와야 돌아다니면서 활동하고 기도하고 일하며 공부도 편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런 사고방식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런 사고방식 속에서 자라서 무슨 목회자의 길이 하나의 종교적인 특권층인 것처럼 훈련받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거들먹거리며 다니는 그 구역질나는 종교인들을 만드는 것 밖에 무엇이 되겠습니까? 들어오면 그 껍질부터 벗겨버려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기본은 무엇인가 하면 자신이 교회 속에 들어오면서 사랑하는 모든 지체들 가운데 일원이 되었다는 마음, 그것이 자신이 목사라는 의식보다도 먼저 선행되어야할 모습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 것들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지속적인 연합의 의식입니다. 신앙의 실제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활의 실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목양하고 잘 가르쳐주며, 잘못했을 때 책망하며,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갈 때 꺾어서라도 바른 길을 가도록 만들며, 무엇이 옳은가를 몰라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옳은가를 가르쳐 주는 것, 그것을 잘하는 것이 미래의 목사될 사람들을 향한 최대의 봉사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동의하던 동의하지 않던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모두 사람을 밟고 건너간 역사입니다.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신 역사입니다. 시간만 있으면 죽 읊어 보면 아담으로부터 모두 사람을 밟고 역사하신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잘못 선택했다고 말할 수 는 없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 바르게 살지 못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그만큼 누를 끼치 것이며, 제대로 살아서 제대로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불꽃처럼 일어나서 하나님께 큰 영애와 기쁨을 안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며 밟아갈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부흥의 역사가 건너올 때도 항상 사람을 밟고 건너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아무 사람이나 밟고 건너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앙망하고 갈망하며 주님의 그런 역사를 사모하며 그런 역사를 위해서 자신이 징검다리가 되고 싶어하며 한 줌의 타서 없어지는 불쏘시개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건너오시는 것입니다.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계획된 대형 군중집회를 통해서 부흥이 일어나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없지는 않지만 희귀합니다. 궐기대회를 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황무하게 되어 버리고 대적들이 모두 짓밟은바 된 것 같은 상황 속에 하나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갈망할 때에 하나님이 오실 수 있도록 길을 내어드리는 가장 훌륭한 것은 “몇 월 며칠에 무슨 광장에 모여라”고 하는 프로그램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궐기대화를 한다든지, 규탄대회를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정말로 오늘 선지자가 고백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산을 진동시키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을 향해서 냉담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거침없이 불신앙 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브레이크 풀린 자동차와 같은 역사를 단숨에 정지시킬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눈물을 뿌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통해서 눈물과 땀에 젖은 길과 뿌려진 그 핏길을 밟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닳고닳아서 세상사람도 말싸움 하다가 지면은 “너 교회 다니지”하고 물어봅니다. 그 사람의 말이 이렇습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이 회의를 참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회의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과 공산당입니다. 그만큼 말이 많습니다. 말이 화려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도 잘하고 입을 다물 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은 도무지 배울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쥐꼬리만큼 배우고 그 다음에는 개꼬리만큼 말하고 싶어하기에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훈수를 두어야지만 자기의 사명이 감당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가 변하겠습니까?
우리 죄악과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를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하나님의 마음이 없이 말만 잘하는 사람들은 모두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색깔은 화려하지만 종이로 만든 조화에 불과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의 눈길은 끌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시선을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그런 거품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이 성찰하고 자기의 죄와 악함을 고백하며, 시시때때로 이 세상의 역사를 바라보며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스리며 살아가고 주님이 만들어 놓은 땅에서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살아가는 가를 보면서 가슴아파해 본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죄가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한편으로는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파해 본 사람들, 그 시대를 향해서 마음 아파하고 한편으로는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용서받기를 바라는 자기의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말에 능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중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말이 별로 가치가 없는 것처럼 그들의 존재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복받치는 서러움 가득한 어조로 영광스러운 부흥을 위해 기도라기보다는 신음처럼 토해놓는 이 선지자 이사야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범죄하고 멸망을 향해서 치달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먼발치에서 돌을 던지며 저항하고 있는 선지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는 순간순간 예언 사역 속에서 두 가지 결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탁을 전해줍니다. 두 가지 결탁이 무엇인가 하면 순간에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됨, 즉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제가 이 사람을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의 선지자라고 부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시고 하나님이 정말로 영광을 받으셔야한다는 간절한 갈망이 가슴에 가득 찬 그것이 오늘 부흥을 부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선지자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의 마음과 결탁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과 그분의 위대함을 알 때에 그런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며 살지 못하는 백성들을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63장 뒤편에서 보인바와 같이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백성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막보고 살 수 있는가?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리기보다는 오히려 너희들이 있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바르게 알게 하는데 방해가 되는 무익한 존재들이 되도록 만들었냐고 통탄할 때 선지자의 마음속에는 인간적으로 백성들을 향해 그칠 수 없는 분노가 치미는데, 그 분노는 혈기적인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거룩의 갈망이 만들어낸 분노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결탁된 것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떠난 백성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은혜가 우리 가운데 많이 살아 있을 경우에는 잘못해도 복원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순발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엉망으로 살다가도 은혜가 있으면-은혜의 하나님의 말씀이 호소한다든지, 뭔가 양심을 자극하면은 바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바닥이 나면 그 앞에 불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걸어갈 때에 멸망의 불길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그 길을 돌이킬 힘이 없게 됩니다. 정말로 돌이키지 못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술 하나도 못 끊지 않습니까? ‘안먹으면 되는데····.’ 그것은 우리처럼 먹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 먹는 사람들은 바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바닥이 나버리면 그 다음에는 자신의 힘으로도 어떻게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등지고 달려갈 때는 한참은 자신의 힘으로 달려갔는데 조금 더 달려가다 보면 자신이 죄를 붙들고 죄를 잡으려고 하나님을 떠났는데 한참 세월이 흘러가다 보면 죄가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죄는 계속 가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죄의 노예가 되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선지자도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이키라고 말하면서도 이 인간들 속에서 돌이킬 그 무엇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를 “왜! 하나님은 이 백성이 이렇게 강팍해지도록 내버려두셨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주도권을 한번 발동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무리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께 불명예를 안겨드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한때 그렇게 사랑하시던 백성들이 아닙니까?”.
이것은 책임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백성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데 자신이 아무리 사역을 해도 이 백성을 속에는 스스로를 돌이킬 그 무슨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이 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역사해 달라고 호소하고 잇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가 회상하는 한 사실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절망적인 상황이 이스라엘 속에 많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산을 진동시키는 것과 같은 인간을 고쳐놓는 위대한 부흥을 주신 때가 있었는데 그때 부흥을 보내는 통로가 무엇이었는가 하면 갈망하는 사람,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아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시내산에 올라와 있는 모세에게 빨리 내려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내려가 보니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면서 범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죄하자 하나님이 다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한번만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만약에 쓸어버리시려면 자신도 함께 쓸어버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일단은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약속대로 가나안을 주지만 당신은 가시지 않고 사자만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이 떠졌습니다. 가나안을 달라고 해서 주겠다고 하셨고 약속을 지키신다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이 싫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당신과는 관계없는 백성으로 당신의 사자의 인도를 받아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눈이 떠지면서 통곡을 합니다.
하나님의 황송한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데 히브리 말은 “핫다바라 하라”입니다. 황송의 말씀이 아니라 재앙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가지 않으시는데 가나안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제 단장품을 제하고 눈물 흘리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얼마나 영리한 사람입니까? 회막을 하나 만듭니다. 지금 말하자면 별도의 기도처소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하는 말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그곳에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들은 진 속에서 함께 생활하다가도 그곳에 수시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해주시도록,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구하며 회개하고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곳에도 보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인 역사는 항상 그러한 앙망하는 사람들을 타고 - 그런 사람들의 강한 하나님을 향해 고정된 시선들 타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진입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믿는 사람들이 모두 변화되고 새로워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든지 그렇지 않습니다.
(예화) 어느 군중학자가 실험을 했는데 개미 백 마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20마리는 놀고 80 마 리는 열심히 일하더랍니다. 그래서 며칠을 조사해서 놀고 있는 개미를 모두 잡아내었습니 다. 그래서 80마리가 남았는데 다시 64마리는 열심히 일하고 16마리는 또 놀더라는 것입니 다. 계속 잡아내도 계속 20%는 일하지 않고 노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떻습니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진정으로 한 교회에서 20%만 변하지 않는 교인이고 80%가 열렬한 교인이라면 사도바울도 와서 한 수 배우자고 할 것입니다. 목회자가 얼굴이 시뻘개져서 열렬하게 설교해도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는 가도 모른 채 오해하기 쉽습니다. 교인들이 무엇인가 가슴 아픈 사연이 있어서 간절히 기도하면은 열심당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저 교인들은 저렇게 치우쳤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 소수의 질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하고 바라는 사람들이 모두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절망이 아닙니다. 렘5장에서 하나님이 심판을 예고하면서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예루살렘 거리를 사방팔방으로 걸어다니면서 단 한사람이라도 당신을 갈망하는 자가 있는가를 찾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있으면 이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생각나도록 만듭니까?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을 앞두고 하나님과 벌였던 논쟁을 생각나도록 만들지 않습니까?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망한 그 성 말입니다. 그것과 같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그렇기에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들이 너무 없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원동력이 결국은 어디에서부터 나옵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시고 거룩한 분이신가 하는 것을 자기 자신이 경험하고 체험을 했을 때에 이 세상 사람들이 대충대충 믿으며 살아가고, 교회가 대충 예배하며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으면서 그냥 듣기 좋은 말로 사람들을 꼬이는 현실은 가슴이 꼬이고 분노가 치밀어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이사야는 이사야6장에서 소명을 받으며 그것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스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뵈옵고 인간이 얼마나 티끌과 같이 더러운 존재이고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 가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랬는데 나와서 보니 신앙이 있다는 인간들이 그런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대면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았던 백성들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가르침을 받는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지금 선지자는 끌어 오르는 것인데 그 상황을 개선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자신 안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친히 강림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능력을 주셔서 무슨 일을 하게 하는 일이 이미 한계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 한계는 이미 선지자가 처절하게 맛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자신이 오시고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권세로서 이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누가 그 하나님의 부흥이 이 시대의 교회로 건너오는 징검다리로서 자신을 드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화) 기찻길에는 항상 그 밑이 기름먹인 침목이 있습니다. 그것을 깔고 그 위에 레일을 놓는다. 요즈음에는 나무가 비싸니까 시멘트로 하는데 승차감은 시멘트보다 나무 침목이 더 좋다. 침목이 놓이고 레일이 놓인 다음 기차가 간다.
그 기차가 한 역에서 다른 역으로 갈 때까지 얼마나 수많은 나무를 밟고 통과를 하겠습니까? 이런 상상이 됩니다. 부흥이라는 하나님의 기차가 오는데 누가 그 아래에 “나를 밟고 지나가시옵소서”하는 침목을 될 것인가? 그런데 그 자격은 체격과 관계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을 해서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타고 당신의 그 거룩한 부흥을 보냅니까? 공부 많이 한 사람을 사용해서 보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부흥이 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조상 대대로 신실하게 믿은 사람들만 사용하십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처음 믿은 초신자를 사용하십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원리는 하나입니다.
부흥을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타고 오십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도저히 과거나 전력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 쓰임 받아서 하나님의 부흥이 오게 하는 손길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설교 속에 가끔 듣는 “조지 휫필드”는 무엇 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열 다섯 살 때 술집 웨이터였습니다. 그 사람의 특기가 코미디였습니다. 남의 흉내를 그렇게 잘 냈다고 합니다. 그러던 사람인데 그 사람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서 무엇보다도 부흥이 오게 하는 분명한 징검다리가 되게 하는 자격이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보다는 죄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깊은 아픔과 슬픔을 간직한 삶, 그래서 자신의 눈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이 이 거만한 육체들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을 드러내기까지는 편하게 눕고 먹을 수 없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가장 간절한 고백이 된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십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부흥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치 모든 구름이 비를 몰고 오는 것은 아니지만 비가 오기 전에는 항상 구름이 일어나듯이 사람을 통해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는 것이지만 벌써 기차가 지나갈 조짐이 보이면 철로가 깔립니다. 부흥이 올 조짐이 보이면 그런 것들을 놓고 깊이 아파하고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원하는 마음이 되어서 우리들이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이 세상을 고치고자하는 소망을 갖고, 고쳐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주의 전폭적인 도우심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내십니다. 그들의 울부짖는 기도 속에서 부흥의 단비를 내리기 위한 구름들이 하늘로 피어오릅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되매 그 어두움 속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마른 이 땅에 부흥의 비가 폭우처럼 쏟아 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며 산 그리스도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두 개의 역사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기록해주는 역사책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 자신이 기록하신 역사책입니다. 여러분들이 천당가면 충격 받을 일 한가지를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너무나 유명했던 사람들을 그곳에서 만나지 못해도 놀라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너무나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을 그곳에서 만나지 못해도 충격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흥에 대한 깊은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명예롭게 사람들이 기억해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자신은 무명해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자신을 기억해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오히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은 잃어버리고, 자신을 통해서 자신들 가운데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것이 진짜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설교 말씀도 전혀 못 받으면 벌레 씹은 얼굴로 가고, 조금 받으면 고맙다며 고개 숙이고, 아주 은혜 받으면 설교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밟고 자신에게 오시는데 무엇을 밟았는가가 무엇이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주님이 내게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누구 밟고 오셨습니까?” “왜?” “그 사람 찾아보게요”. 그것이 무엇 때문에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왔다”.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어디다 바치면 가장 가치 있게 쓸 수 있겠습니까? 가장 인생을 가치 있게 쓰는 비결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부흥의 큰불을 지피시면 그 쏘시개로 사용됩시오. 장엄한 부흥의 불길이 타올라서 온 산을 뒤엎을 때에 처음 소시개가 되었던 사람을 불길이 기억해 주겠습니까? 기억해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주지 못해도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불길과 같은 역사가 우리 때문에 번져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누가 그런 불쏘시개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 쏘시개와 같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먼저 교회생활과 신앙생활 속에서 일상적인 기능을 하는데 익숙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기능에 익숙해진 사람은 안됩니다. 무엇은 하든지, 심지어는 교회가 여러분의 사역과 섬김을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하나님 앞에 부흥의 불쏘시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그런 일상적인 사역을 훌륭히 감당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앙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을 향한 앙망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그래서 어느 작가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는가? 원래 수리아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붙지 않았습니까? 희랍어로 “크리스 토이”인데 명사가 붙고 뒤에 "호이“라는 말이 붙으면 이 명사는 명사이고 뒤의 호이는 거기에 소속된 인간들, 저속하게 말하면 똘마니들, 열렬에게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 열렬하게 그것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바로 ‘호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크리스천입니다. 벌써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누구냐고 할 때 예수를 열렬히 따라다니던 똘마니와 같은 사람들, 예수를 열렬히 사랑하고 좋아해서 예수밖에 모르는 인간들, 그 뒤를 계속 따라 다니고 추구하는 인간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름 붙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합당합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주일날에 교회당에 가는가, 아니면 아이들이 학교의 가정환경 조사서에 무엇이라고 썼는가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며, 제사를 지내는가 그렇지 않은가, 술을 먹는가 먹지 않는가, 애들의 세례를 어디에서 주는가하는 것들이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표준이 되는 것은 얼마나 본질로부터 멀어졌는가를 보여줍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에도 종사할 수 있습니다. 저와 같이 한 교회의 목사로 있을 수도 있고 모두 저처럼 될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저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두 목사가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학교선생이 되어서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업을 할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노동을 할 수 있고 직장생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말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성직자를 두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무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성직에 종사하면서도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도 하나님을 열렬하게 앙망하고 매일매일 출근하는데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에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에 이것은 무엇에 종사하며 사는 것과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는가하는 삶의 목표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 기관에 종사하면서 정말로 그리스도인과 같은 사람을 보기 힘듭니다. 대장간에 쓸만한 식칼이 없다는 것이 같은 말이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늘 교회의 직원들에게 이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고 직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영혼의 위협이 되는 것인가를 기억하라고 권고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부흥은 항상 목회자를 통해서 내려오는 부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로를 사용하십니까? 정말로 하나님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런데 그 역사들이 정상적으로 통제되고 확산되기 위해서는 누가 필요합니까? 진리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들을 이 교회에 미치시는 것일 뿐, 우리가 무엇에 종사한다고 해서 그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요셉은 그저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노예도 너무 점잖은 말입니다. 종처럼 그렇게 살면서 그가 하고 있는 일들이 무슨 일이었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장생활에서 하는 일 중에서 가장 비천한 일과 같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변소나 치우고 마당이나 쓸다가 승진해서 청소부들을 데리고 이것저것을 치우며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그 사람이 어떤 환경 속에서 살든지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 집안의 집사가 되었고 죄수가 되었으며 또 다르게 그의 직업이 계속 변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껍데기이고 그 속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요셉의 삶의 흐름의 기본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을 구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해는 속히 지나갑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사람들이 되기 위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밟고 건너오실 수 있는 그러한 도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군가가 하나님과 교회의 보좌 사이에, 그리고 은혜 받고 변화된 교회와 세상 사이에 자신을 던져서 “나를 밟고 교회와 세상을 건너가시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드러눕는 사람도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밟으라고 드러누웠는데 하나님이 밟으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의 영광에 대한 깊은 사모함과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사람, 마음과 생각과 몸과 모든 전체가 주님의 영광에 대한 사모함에 붙잡혀서 어찌하든지 자신을 밟고 지나가서라도 어두운 이 땅에 빛이신 주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어리석은 이 인간들이 산을 진동시키고 움직이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고 무릎을 꿇게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밟고 지나가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님의 눈에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잠시 살다가 살고 가는 이 인생을 우리가 죽어도 영원히 사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웁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자신이 찾아오셔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부흥의 역사를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보다 미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더 보람된 일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그러한 놀라운 도구로 사용해주시도록 끊임없이 적어도 우리 자신은 하나님이 우리를 밟고 지나가실 사람들이라는 거룩한 자존심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정말로 주님이 우리를 밟고 지나가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우리 속에 있는 그 무엇들을 끊임없이 토로하고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우리 자체가 어두운 세상에서 당신이 밟고 지나가실 만큼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갈망으로 채워진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를 그렇게 아버지 앞에 세워주시기를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18.하나님의 교회가 진노 아래 있을 때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사64:5)
이어서 선지자는 하늘을 향해 들던 고개를 다시 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면서 하나님이 곧 강림하셔서 섶을 사르고 물을 끓이는 불같이 산들을 진동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주시고 열방으로 하여금 벌벌 떨게 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고 또 그런 일들을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을 통해서 베푸실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면서도 그는 이제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다시 선지자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부흥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소방의 불을 끄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선지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가장 절망하고 있는 당시의 만연해 있는 우상숭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은 항상 공식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감격하다가 그 사랑이 식어지고 그 사랑이 식어지면 세상에 대한 번영이 그리워지고 세상에서의 번영이 그리어지면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그 번영하게 하는 요인을 이방 신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상숭배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심판하고 그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앞에서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러한 패턴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선지자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 데까지 간 그 마지막 우상숭배의 모습, 하나님보다는 이 세상의 강대국들을 더 의지하는 번영에 대한 헛된 영광에 대한 추구, 그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외심들, 이런 것들을 보면서 통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선지자는 분노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런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너무 좁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면 지진이 나고 전쟁이 일어나고 나라가 커다란 위기에 빠지며 개인의 삶이 곤두박질치며 불시에 질병을 얻으며 죽음과 고난이 줄을 잇는 것만을 우리들이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선지자는 오늘 하나님 앞에 ‘주님이 오늘 진노하셨습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때는 아직까지 이스라엘이 국제적인 상황하에서 갈 데까지 간 멸망의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조짐이 보이긴 하였지만 오늘 선지자가 63장에서부터 계속해서 애통하며 마음 아파하고 있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징벌하셔서 더 이상 세속적으로 번영하지 않거나 다른 나라의 침입을 받아서 국가가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는 그런 눈에 보이는 현실 인식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지금 선지자가 읽고 있는 이 하나님의 진노는 63에서부터 계속 흘러나오는 문맥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소가 유린되고 이제는 아무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열방의 수많은 나라들이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진노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교회적으로 적용하고 다음에 개인적으로 적용해봅시다.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하나님이 혼내시는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뜻하지 않게 커다란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교회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아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직면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평화스러운 시대에 어느 날 갑자기 관공서에서 불법건물이 아닌 한 내일까지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담임목사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갔다든지 죽었다면 그것도 교회의 문제이고 교회의 일꾼이 자꾸만 사고를 쳐도 문제입니다. 재정도 있고 사람도 모이며 그런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교회는 잘 지속됩니다. 사람도 특별히 많이 모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교회는 계속 나오고 성실과 인내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출석생활을 계속합니다. 헌금도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교회를 꾸려갈 만한 정도가 됩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모든 일들을 수행해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교회를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오늘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표증이 사라진 것 자체를 하나님의 진노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목회하고 또 목양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단지 하나님께 혼나지 않으려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신앙생활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더 행복하고 더 의미 있고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그렇기에 선지자의 시각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들의 교회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시에 모여 예배하고 헌금하며 직원들의 생활비를 주고 교회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일군을 사서 일을 하고 주보를 찌고 신문을 만들며 현수막을 걸고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서 선교비를 지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우리들이 무엇인가 일어났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회개하고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 가운데로 나아오고 악한 영에게 고통받던 사람들이 자유함을 얻으며 강철같은 심장을 가진 흉악한 죄인들이 깊이 뉘우치면서 주님의 진실한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이런 일은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매일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아무런 변화도 없이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정해진 예배를 하고 마음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이 해방감을 느끼면서 교회당을 떠나는 이런 일상적인 상황의 반복, 그런 것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싫어하시는 진노의 모습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마음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오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진실로 아는 사람이고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여러분들이 만약에 아는 사람들이라면 단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징벌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의 불신자들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왜 우상을 섬깁니까? 그들이 왜 평소에 생각나지 않던 잡신들에게 때가 되면 궂을 하고 떡과 돈을 바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신들로부터 복을 받기 위한 것보다는 신들을 심술나게 만들어서 자신의 인생이 고통받고 싶지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드리는 제물은 제물이라기보다는 뇌물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 안에 있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행복 속에서 살지 않는 것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뜨겁게 사랑해주신다는 조건이 묻지 않는다면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히려 용서의 참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실레아 쉬링크」라는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후회가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정당한 형벌과 고통을 지불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지불하지 않고 하나님과 불화하게 사는 것보다 그 고통을 지불하고서라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그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용서를 통해 다시 우리에게 부어진다는 약속이 없다면 용서가 무슨 의미를 가집니까?
여러분 한번 잘 회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될 때에 진정으로 그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큰 은혜를 경험하고 우리가 오랜 동안 지고 다니던 죄의 멍에서 해방되던 때를 그 직전의 우리의 마음의 작용들을 회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용서를 빌면서 잘못했다고 간절히 회개하고 눈물을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에 우리 마음의 두려움은 우리가 이렇게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지은 죄에 대해 징벌하실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이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님이 다시 사랑해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이 회개를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적인 회개를 통해서 인간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율법적인 회개는 무시무시한 두려움 -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율법적인 회개라고 보았습니다. 복음 적인 회개는 그런 과정을 혹시 거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율법적인 회개에서는 진노를 피하기 위한 소원이 회개의 동기이지만 복음적인 회개에서는 그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용납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 동기입니다.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마음속에 찾아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
이 말이 기가 막힌 말입니다.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상한 마음을 어떻게 고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죄를 지으면 지은 것 때문에 형벌을 방아서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죄를 지은 것은 우리 몸의 상처와 같아서 칼에 찔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면 살아 달라붙고 피는 흐르지 않지만 여전히 견딜 수 없는 통증과 아픔이 있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펑펑 흐르는데 다행이 붙였습니다. 조금 지나고 나자 피는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이 쓰라리고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형벌도 받았지만 죄를 지었다는 죄의식 때문에 견딜 수 없이 우리의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우리의 양심이 발목을 잡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어떻게 죄로 말미암아 상한 마음을 고치십니까? 이렇게 하면 고쳐집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비는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래 복수하지 않을게. 되었다. 가보아라”고 말씀하셨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런 사죄는 성경에 비추어 보면 진정한 사죄가 아닙니다.
용서의 확증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완전히 알고 경험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주님의 진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회개하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다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의 의를 기쁘게 행하고 주의 길에서 주님을 기념하는 삶을 살고 순종하는 생활을 해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던 때에 우리를 향해서 차마 이기지 못하는 기쁨을 쏟아 부으시던 그 참된 사랑과 기쁨의 때로 우리를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진정으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확증받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평안하고 아무런 일이 없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만족하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평안한 것은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평안한 것, 무엇이 평안한 것입니까? 신앙은 잠들어 있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만 남았을 때 평안합니다. 사고를 일으키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차피 교회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우리들이 평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늘 평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사롭지 않은 일이 교회 속에서는 늘 일어나야 합니다. 살아있는 표증이 느껴져야 합니다. 오늘은 이 사람들이 회개하고 내일은 저 사람들이 회심하며, 오늘은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어지고 내일은 저 사람들이 영혼의 강한 힘과 능력을 얻어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끌어 앉는 변화의 역사들이 늘 일어나야 합니다. (?)한 교회가 되어야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살아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선지자는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이사야 선지자의 눈물에 젖은 외침 속에서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를 봅니다. 거대한 조국 교회가 아무런 일이 없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부흥의 좋은 소식이 들어오지만 상당수는 참된 부흥이 아닙니다. 이곳 저곳에서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숫자에 비교할 수 없는 많은 교회들이 지난 주와 다름없는 예배를 오늘도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주님을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오늘도 돌덩이와 같은 무거운 가슴을 앉고 아무 일없이 교회당으로부터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와 다름없는 삶을 살고 어제와 다름없는 삶을 상아가면서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염려와 근심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겨를이 없고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향락이 너무나 재미없어서 주님을 마음에 둘 여유가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 그런 진취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죄와 더불어 싸워 승리하기 위해서는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주님의 전폭적인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죄와 분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변하지 않는 자신의 사악한 본성 앞에서 눈물 흘리며 주의 능력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달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도록 자신과 처절하게 투쟁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입술로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도 마음으로는 하나님과 멀어진 삶이 종교생활의 근본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노 어린 시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때문에 행복해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아무 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이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아무런 기대도 없이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성경은 죽은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소원이 있습니까? 너무나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하고 살았고 너무나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의 이루어지지 않은 마음의 한이 된 소원, 날마다 그 소원을 붙들고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고 무릎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눈물에 젖고 땀에 절고 피에 배인 그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주님이 오셔서 단 하나님의 소원을 들어주겠노라고 말씀하실 때 서슴없이 “오! 주님! 제가 너무나 긴 세월 동안 눈물에 젖고 피에 절고 땀에 배인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이 한가지 기도제목의 성취를 보기 위해서 제가 죽지 않고 이제까지 살아 있습니다. 이 기도제목을 이루어 주시고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할 그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의 초점이 없는데 어떻게 기도의 초점이 있겠습니까? 분투하는 삶이 없는데 투쟁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열렬하게 살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열렬한 기도의 제목이 있겠습니까?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의 얼굴을 뵈오리라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기도의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기도의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누구를 기도의 사람이라고 부릅니까? 마음속에 눈물에 젖고 땀에 배고 피에 절은 그의 생애에 성취되지 않으면 안되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을 가르쳐서 기도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이 기도 저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기도의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장시간을 기도에 바치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기 기도하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단 30분도 기도하지 않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른데 가서 찾아보십시오. 기독교는 그런 승리의 비결이 없습니다. 그것도 심령이 살아 있을 때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런 삶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삶을 모두 허물어 버리십시오. 재건축 하십시오. 모두 망가진 집을 가지고 매일 돈을 투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판잣집에 미화사업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모두 헐어버리고 재개발해야 합니다. 판자촌 같은 여러분의 삶에 기도의 집을 지어볼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두 허물어 버리십시오. 트랙터를 가지고 와서 싹싹 쓸어버리십시오. 그리고 다시 지으십시오. 그리고 기도가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 할지를 성경으로 조명받고 그 집부터 다시 세우십시오.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긴 시간을 기도에 바치시면서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각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주저리주저리 기도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의 생애를 기도의 생애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 기도에는 주도적인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작은 기도의 제목들은 진정으로 거기에서 흘러나온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왜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왜 여러분들의 구역 식구를 위해서 기도합니까? 왜,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합니까? 왜! 옆에 있는 지체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왜! 교회의 재정의 상태를 위해서 기도합니까? 왜! 이일 저 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합니까? 왜! 이런 저런 행사의 성공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그 끝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어떤 주도적인 열망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습니까?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해 냉담한 죄인들, 그러한 냉담한 관계 속에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 그런 교회와 개인의 현실의 변화가 오기를 갈망하는 그 주도적인 열망은 그 모든 일의 동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십시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십시오. 주님의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열려진 하늘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지식의 빛을 쏟아 부어주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약 이 시대의 교회에 하늘의 문을 열고 그 찬란한 영광의 지식을 쏟아 부어 주시고 그 찬란한 복음의 빛줄기를 우리에게 비추어 주신다면 이 시대의 교회가 이렇게 어두울 수 있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물 붓듯이 쏟아주고 계시다면 왜 교회 속에서는 아직까지도 그 사랑에 부은바되지 못해서 한을 품고 일그러진 영혼의 모습을 마음에 끌어안고 살아가는 망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대다수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정말로 여러분을 향해서 은혜와 긍휼을 쏟으시고 자비와 사랑을 쏟아 부으신다면 이 세상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이처럼 교만한 얼굴을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멸시하며 창조의 하나님을 훼방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지상에 있는 우리들의 교회를 너무나 기뻐하신 나머지 하나님의 능력을 쏟아 부신다면 어떻게 아직까지도 우리는 악한 영들의 권세에 눌리고 그러한 세력들에게 지배받은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별로 도움도 없는 무력감을 느끼는 상태 속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 행하셨던 땅을 가르고 재앙을 내리시고 전쟁을 일으키시고 칼과 칼이 비대이고 피가 피를 잇대이는 그 처참한 형벌의 현장을 우리에게 그 한없는 긍휼과 자비와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주실 뿐, 우리가 어느 곳에서 한없이 넘치는 하나님의 긍휼을 찾을 수 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긍휼, 주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사랑 안에서 살아야할 사람들인가를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선지자와 저와 함께 이 시대의 사람들, 이 시대의 교회를 하나님이 진노 아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봅시다.
어떤 부모가 패역한 아들을 향해 너무나 진노한 나머지 그를 집에서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 아들은 깡통을 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빌어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커다란 대갓집에서 유업을 이을 상속자의 지위에서 쫓겨나서 깡통을 차고 빈민가를 돌아다니며 뜨물 찌꺼기를 얻어먹는 신세가 된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입니까? 다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용서를 받고 가락지를 끼움 받고 새 옷을 입히운 채 상속자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그의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그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한다면 그가 가망성 있는 인간이겠습니까? 깡통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뜨물을 거두었는데 돌아와서 감사합니다. “감사하다. 너무 감사하다. 정말로 감사하다. 나는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누가 나보다 행복하겠는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이 희망 있는 사람입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 스스로가 무엇인가를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눈을 부릅뜨고 이 시대의 교회들 속에서도 은총의 증거를 찾아내자면 많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형벌하지 않으시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왜 우리 교회 속에서는 불행하고 우울한 일만 일어나겠습니까? 오늘도 어떤 사람이 회심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그렇기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우리의 예배에 더 큰 축복이 있다면 오늘 선지자가 예언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시고 실제로 강림하시는 것처럼 현저한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여기에 모인 이 백성들을 당신이 모두 살리며 불꽃과 같은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리라는 하나님의 전폭적인 부어주심이 있었다면 그 때에 일어날 모습은 오늘 우리들이 본 모습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된다면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이 얼마나 놀라울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근 지방에 있는 어느 큰 도시에 집회를 갔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제게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는 너무 갈급합니다. 우리는 너무 메말라 있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메마르면 비를 기대하는 마음조차도 없습니다. 그것을 오늘 선지자는 진노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선지자가 꿈꾸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한없이 기뻐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 그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을 이 이사야는 자신이 소명을 받을 때에 6장에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가를 이 선지자가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합당한 대접을 해드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선지자가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형편이 없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견딜 수 없는 모욕이고 하나님이게는 수치입니다. 견딜 수 없는 수치와 모욕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선지자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냉담해져 있고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두려움, 어떤 기쁨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이 인간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읽었는데 이 백성들은 이런 선지자의 시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음주에 계속되겠습니다만 뒤에서 보면 무엇인가 선한 일을 계속합니다. 의로운 일을 행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선지자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노 아래 있는 모습이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그렇기에 무엇이라고 한탄하는가하면 “우리가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는 그들이 구원받을 만한 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서 선지자가 볼 때에 그들의 구원의 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자기의 그 외침에 대해서 반응해야만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여망이라도 보이지 않겠습니까? 왜입니까? 하나님은 진노하시지만 돌이키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선지자들의 공통적인 신학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들이 무섭게 타협없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그냥 증거하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끝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 속에는 두 개의 자의식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의식과 다른 하나님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이 두 개의 자의식이 한 인격 속에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선지자는 제사장의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아오고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속죄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두 마음이 함께 한 인격 안에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에스겔이 아닙니까? 오늘 이 이사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냉혹한 선포자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때에 그래도 구원의 여망을 발견했다면 “어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노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진노 아래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며 진노를 물러가게 하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물 붓듯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시라도 회개 없이 그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왜 우리를 강팍하게”. 강팍하지 않을 때에는 마음에 감동을 잘 받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신다고 말하면 막 웁니다. 그러나 강팍해졌을 때에는 주님이 사랑하신다고 말해도 주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 있으며 도와주실 것은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꼬인 마음이 되는 것이 바로 강팍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반감을 품게 됩니다. 옛날 같으면 모두 돌에 맞아 죽을 죄입니다.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선지자가 오늘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갈급하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충격받은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집회에 갔는데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주일 설교사 길다면서요?” 그곳까지 소문이 났나 봅니다. 몇 분이나 설교하느냐고 묻습니다. 80분에서 90분 정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랍니다. “우리 동네에서 그렇게 설교하면 모두 일어나서 갑니다”. 진짜로 갑니다. 강단을 뛰어 내려가고 싶었습니다. 길게 하긴 했습니다. 2시간 40분 정도를 설교했는데 400명 정도가 모였는데 40명도가 그냥 갔습니다. 그냥 일어나서 등을 보이고 갑니다. 그런 사람은 구청장하고 이야기하다가도 등을 보이고 그냥 못 갈 것입니다. 아마도 동장하고도 그렇게 하고 못 갈 것입니다. 뛰어 내려가서 문 앞에서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누가 말씀하시는데 가느냐? 생사가 걸린 일이 있느냐?”. 정말로 막가는 시대입니다.
무슨 희망있습니다. 정말로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일을 베푸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갈한 영혼으로 진노의 시대에 아파하시면서 언젠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수치스러운 날들의 아픈 기억들을 모두 거두어 버리시고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한없이 부어주시는 진리의 빛, 복음의 빛과 하나님의 사랑의 폭포수와 같은 부어짐을 기대하면서 구름 한 점 없고 빗방울 하나 없는 이 거칠고 황량한 벌판을 눈물을 흘리면서 걷노라면 어느 때인가 하나님이 서럽도록 푸르른 날에 손바닥만한 구름을 떠올리시고 구름이 구름을 부르고 그 구름이 이어져서 언제인가는 마침내 먹구름이 가득차고 거기에서 천둥과 낙뢰를 발하고 서럽도록 메마른 이 땅에 폭우와 같은 하나님의 의가 쏟아지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목마른 소수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심판을 연장하시는 지도 모릅니다.
연속극을 방영하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마지막 끝나는 광고가 나올 때면 입맛을 다시는 인생들이 어느 안전이라고 일어서서 집에 갑니까? 그렇게 바쁜 사람은 교회당에 외지 말라고 광고를 써 붙였으면 좋겠습니다. “귀하신 분, 입장 사절. 이곳은 가난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집에 앉아서 라디오나 들으라고 하십시오. 짧게 하는 사람 불러다가 집에서 예배드리든지 하라고 하십시오.
하나님이 이러한 시대의 무지한 백성들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사면들 두루 살펴도 당신의 마음을 나눈 자들이 없고 자신의 마음을 한 때 보여 주었던 사람들도 그 마음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신들이 깨뜨리고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은 혼자입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용서하신 이 일은 그 용서를 통해서 물 붙듯 부어주셔야 할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대한 서곡에 불과했습니다. 사랑의 부어짐이 없는 속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언젠가 제가 한참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몸부림 칠 때에 울면서 며칠 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더 이상 저에게는 용서라는 말이 의미가 없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사죄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사죄 이상의 사랑을 제게 부어주셔서 저를 향한 넘치는 긍휼, 저의 넘치는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폐하지 아니하시는 저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보증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체적인 표현은 잘 못해서 말하지 제대로 못했지만 제가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대신해 드렸습니다. 그 마음이 어찌 제 마음뿐이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아닙니까?
눈을 들어서 세상을 보십시오. 세상은 어두워지고 우리는 이제 인류 역사에서 어쩌면 다섯 시가 넘어가고 있는 말세의 마지막을 살고 있습니다. 좋으신 주님이 이제 그 모든 인내를 끝내고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냉담함과 주님을 기뻐하지 않는 이 사악함은 누룩처럼 번져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도 이런 누룩이 가득해서 이제 하나님을 향해서 기뻐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는 냉담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기쁨아래 사는 사람들이 진노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진노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쁨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일들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잇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부처주시고 우리의 교회에 긍휼과 은혜를 폭포수 같이 내렸을 때에 우리 조상들이 맛본 부흥의 때에 부흥과 같은 큰 영광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셔서 주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드러내심으로 우리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때에 우리는 오늘 선지자가 후회하고 잇는 것처럼 우리가 보다 기쁨으로 의로운 길을 걸어가고 불의와 타협하며 죄악과 타협하는 대신 우리들이 올곧은 신앙의 길을 걸어갔다면 아마도 하나님의 부흥은 기운은 아마도 더 오랫동안 우리 시대의 교회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우리들이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않고 더 많이 순종하고 섬기는 기회로 삼아서 우리의 인생을 주의 길로 행하고 어디서든지 주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기억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우리들이 했더라면 더 오랫동안 부흥의 기운들이 우리 가운데 지속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했고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범죄 덕분에 이제 이렇게 진노 아래 살고 있는 시대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뚜기와 황충과 멧이 모든 곡물을 먹어버린 요엘이 응한 황무한 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모든 교회가 넣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고 눈을 치켜 뜨고 찾아보아도 폭포수와 같이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발견할 수 없는 시대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갈해도 우리를 해갈시켜줄 샘물이 없고 허기져서 먹을 맛나가 없는 시대에는 이런 하나님의 영광이의 부음을 아는 우리들은 어떻게 이 어두운 역사의 교회 한 복판을 지나야 합니까?
오늘 선지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진노하셨거늘 누가 우리를 진노하리요’.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읽을 수 잇습니다. 이런 황무한 시대를 살아가는 두 가지 비결을 배웁니다. 하나는 회개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우리의 백성들의 지은 모든 죄를 우리가 회개하는 일입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고
주 뜻 이뤄지이다
우리에게 주님의 음성을 전해주고 있는 이 동일한 사람, 이사야에 의하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교회가 여호와의 놀라운 은총을 회복하게 될 때에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현저한 변화가 하나님의 교회에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선지자는 56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일컬음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위해서 회개할 마음도 없고 그렇게 할 기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잇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회개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시대가되었습니다. 이제 누가 그들의 죄를 위해서 도고할 것입니까? 누가 형벌받을 내 백성을 위해서 중보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아닙니까? 주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주님의 긍휼이 무엇인가를 안 사람들, 주의 영광과 자비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문을 열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으시는 거룩한 부흥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짐승처럼 무지몽매한 이 백성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도고할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죄가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를 가로막았던 때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 백성들의 하늘 끝에 달한다 할지라도 누군가가 이 백성의 죄악을 인해서 애통하고 통회하는 중보기도를 드리며 이들의 모든 죄를 자신이 진 것처럼 짊어지고 우리의 죄와 악함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부흥을 보내고 그들을 용서하시는 통로로 삼으셨던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너무나 자주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일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냉담해져 있고 구원해주겠다고 말씀하셔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필요하다고 믿지 않으며 성령을 주겠노라고 말씀하셔도 그것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능력을 부어 주겠다고 말씀하셔도 능력보다는 쾌락을 달라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범죄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오래 전에 우리에게 부어졌던 그 부흥의 기운의 불씨들이 더 많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이 시대의 교회가 거기에서 불을 지펴 횃불을 밝히고 거기에서 불씨를 얻어 또 다른 모닥불을 피웠다면 이렇게 춥고 어둡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후회는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의 죄까지, 회개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죄까지 우리가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긍휼과 자비를 구하며 형벌받아 마땅한 우리 백성들을 용서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유독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을 알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또 한가지 우리가 마지막으로 발견하는 중요한 지침이 뒤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찌 구원받으리요”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는 여기에서 분명히 절망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절망이 파괴적인 절망아 아닙니다. 거룩한 절망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의 증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생명을 걸고 피가 터지는 외침으로 주의 진리,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외쳐도 귀 기울이는 자가 없고, 나를 정신병자로 모는 시대를 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무런 반응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 눈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내 동포가 형벌받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떠났고 주님의 진노 아래 있어도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하나님,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묻는 것은 다시 선지자가 희망을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밖에는 이 일을 행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시대에 냉담한 교회를 깨우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걸출한 사람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입니까?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이제 누구를 신뢰하겠습니까? 어떤 방법을 신뢰해 볼만합니까? 업습니다. 아무런 대안도 없습니다. 대안은 오직 하나님 당신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제 설교가 낙심할 정도로 비관적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끝까지 들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조국교회의 미래를 어떻게 보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어둡게 본다고 했습니다. “60년이 지나도 우리가 조국교회에서 복음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대안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한 분만이 대안이십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절망의 특징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정신 세계는 실로 특이합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이 부흥을 주시지 않는 가장 큰 문제는 인간들이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나 인간들이 용기 백배합니다. 이것을 하다가 안되면 저것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다가 저것이 안되면 이것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다시 반문합니다. 수없이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한번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한번 무릎을 꿇어본 적이 있나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서 배우는 두 번째 지침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인간을 향해서는 충분히 절망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충분히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회관 중의 특이한 한가지는 그치지 않는 은총의 교리입니다. 무슨 말씀인지를 아십니까? 이 교회는 한 인간의 목회적인 역량이나 교인들의 신앙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 앞에 유익하게 봉사하는 건강한 모습으로 설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에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이 그 교회를 심판하실 때까지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페하지 않는 은총의 증거는 역사 속에 일어났던 부흥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는 정체성을 잃고 이방 백성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선지자처럼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외칠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흥을 주십니다. 그래서 장엄한 하나님의 백성의 숲이 우거지게 하십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 모두 고사되고 그루터기 밖에 남지 않습니다. 악한 원수가 와서 모두 잘라 갔습니다. 그런데 그 그루터기에서 하나님이 잎이 피고 싹이 나게 만들며 가지가 뻗어서 숲을 구성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점점 늘어나고 기독교가 기승을 부릴 때 로마는 자신들의 무력이 깨끗이 없어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핍박하자 그들이 전에는 말로 복음을 전했는데 이제는 피로 복음을 전합니다. 침체될 만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중세 시대의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합니까? 교회는 완전히 죽어버린 시대였습니다. 성경에서 이제는 예수님이 세우시려는 교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신학을 하고 성경을 연구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틴 루터나 칼빈과 같은 사람들이 오래 전의 교부인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을 보았을 때 그 당시로 보면 약 천 백년 전의 교회의 모습이 자신들의 교회와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아닙니까?
그들이 어거스틴을 보자 그들의 가지고 있는 생각이 거의 선교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완전히 씨가 마를 것같이 되어 있던 상황인데 하나님이 그 작은 불씨들을 사용하셔서 천년동안 묻어 놓았던 고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들을 깨우시면서 이제는 명맥이 끊어진 것 같았던, 멸종 위기에 있었던 교회를 장엄하게 다시 서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17세기 18세기가 되어 합리주의가 일어나 교회가 수없이 문을 닦고 있는 시대에 하나님이 다시 군데군데에서 놀라운 부흥을 주셔서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밖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충분히 절망해도 문제가 없는 이유는 그 절망 끝에 우리는 마지막 희망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흥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침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용서를 하나님 앞에 빌며 절망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하나님에게 있는 구원의 소망을 견고히 붙들고 주께서 그 일을 행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19.교회가 하나님을 버릴 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사64:6)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또 다른 국면을 우리들이 살펴보았습니다. 천재지변을 일으키시고 산 자를 죽이시며, 평화로운 땅에 전쟁을 불러오시고 곳곳에 수많은 전염병과 수많은 사람들이 시체로 죽어 나가는 그러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만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설교자는 비교적 평화의 시대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땅히 부어져야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없고 그러한 사랑과 자비에 감동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큰 능력이 그들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에 그 상태를 하나님의 진노하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왜 나타났고 그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짧은 성경 구절에서 ‘다’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되는데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뒤에 나타난 두 개의 묘사, 즉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는 말과 두 번째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첫 번 째 나타난 사실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앞서 말한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라는 사실이 전제이고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이 두 가지 묘사인 것입니다.
정함과 부정함을 떠 올 릴 때에는 반드시 제사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레위기를 비롯한 제사의 규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것을 허락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허락하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복잡하기 이를 데 없이 보이는 수많은 제사에 대한 규칙도 사실은, 하나님이 제사 그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죄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그 제사의 복잡한 규례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그 모든 제사의 규례들을 만족하게 하셨고 성취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더 이상 그런 제사의 규례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사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겠습니까? 부정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사하러 나올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만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예를 들면, 레위기에는 특별히 질병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부정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가 나옵니다. 그 중 한 가지 문둥병에 대한 예를 들면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이 세세하게 규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병이 걸린 사람이 문둥병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순간부터 그는 스스로 외치기를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치면서 이스라엘을 떠나서 진 밖에서 홀로 거니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정한 자로 취급을 받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도록 제사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규례 자체로 보면 문둥병에 걸려 부정한 자가 되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부정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대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은혜 이런 것들을 운운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제사의 규례에서 ‘문둥병 걸린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것으로 단정합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이면에 감추어진 문제이고 일단 문둥병이 확인이 되면 그 사람이 이스라엘의 진에 들어올 수도 없고 더구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나아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완전히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으로서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문둥병이 걸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뵈옵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를 통해 자기의 죄를 용서받아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런 모든 길에 있어서는 철저히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그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시고 하는 것은 나중의 문제이고, 일단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대면이 성립할 수가 없게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문둥병자는 영원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그 병을 치유 받고 자연적인 방법이든 무슨 방법이든 일단 치유 받고 나았다는 말을 제사장에게 하면 제사장이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그 사람이 정말 났는 지를 확인한 후에, 유예 기간을 갖고 살핀 후 정말 완치되었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들을 통해서 정결케 하는 예식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록 문둥병이 걸려 발병을 한 상태에서 얼굴이 다 망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 뵈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시라는 성품에 비추어서 볼 때에 문둥병 걸린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두 버리셨다고 교리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핵심은, 그렇게 문둥병 걸린 것이 자기의 책임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예수님도 시인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걸린 병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문둥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만나주시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사에 열납되지 못하는 것의 예를 들면, 길에 가다 시체를 만진 사람, 아이를 낳으며 피를 쏟은 여인들, 그런 사람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하나님을 뵈올 수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싫어하시거나 미워하시거나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문제로 삼으시는 것은 문둥병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사랑을 많이 받는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이 아무리 사랑이 많으셔도 그들이 이렇게 부정하게 놓여 있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거룩하신 성품 때문에 그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면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공경하고 사랑하며, 그 한 분만을 위해 충성하고 사는 가운데 저지른 실수나 잘못들은 허물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라갔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께 드리던 그 경배의 정신을 우상을 향해 바쳤습니다. 그 죄악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존재 그 자체를 불결하고 부정하여 하나님을 뵈올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은 엉뚱한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의의 문제였습니다. 제사의 규례를 잘 지키고 규례대로 하는 것도 의였고 공평하게 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것도 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자기들이 옳고 그른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방식을 따라서 좀 더 옳은 일을 하고 싶어했고 좀 더 바른 길을 걸어가고 싶어했습니다. 단 우상을 섬기며 사랑하는 문제는 접어두고 그 이외의 다른 것을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성경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논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나를 버렸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버렸습니까? 너희들이 나만을 섬기지 않으면 그것은 버린 것이다.”입니다. 유일신 신앙을 버리면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를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장시간 동안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설교했습니다. ‘유일신 신앙이 유일한 대안입니다.’ 테이프를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유일신 신앙을 버리고 나면 신앙이 나빠지거나 하나님을 덜 사랑하고 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를 버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우상숭배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정하게 문둥병 걸린 사람처럼 만들어서, 하나님이 그들을 아무리 사랑하셔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때문에 그와 대면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로 되니까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거룩한 감격을 경험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하는,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일련의 변화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독특성을 다시 되찾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별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버리고 나면, 그 동안 바라보기만 하고 미처 얻지 못했던 세상의 죄악된 욕망과 세상의 헛된 영광들에 대한 허기짐이 갑자기 충동적으로 솟아올라서, 더 쉽게 세상에 물들어 빠져가는 것,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대면해서 수시로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커다란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은총, 그들을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거룩의 영향력,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역사 해야 수시로 불결과 더러움들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그런 정결성을 유지하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모두 멈춘 것입니다.
오늘의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매주 똑같이 예배 드리고, 같은 시간에 똑같이 비슷한 순서로 예배 마치고 비슷한 길을 걸어서 비슷한 삶끼리 비슷한 길을 걸어갑니다. 뭐가 바뀌고 있습니까? 정말 그 안에 무슨 작용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제 자리에 맴도는 팽이처럼 전진도 없고 후퇴도 없이 그저 기껏해야 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그 이상의 무엇이 정말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쓸데없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고 신령하고 거룩한 것들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으며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분의 성품을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들은 사라지고 차가운 의무감만으로 교회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신령한 즐거움을 교회 속에서 느낄 수 없으니까 세상에서나 맛볼 수 있는 즐거움들을 교회 안에서도 누려보고자 하는 그런 모임들이 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예배의 순서를 바꾸고 설교 시간에 이 옷 저 옷 바꾸어 입고 설교단에 올라가며, 이런 저런 사람들을 세워서 이런 저런 일들을 더 하게 하고, 이런 저런 의식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치장하고, 이런 저런 식으로 교회를 세우고 이런 저런 일들을 하는 것, 그러한 우리의 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몇 분 일찍 나오는 것과 늦게 나오는 것이 무슨 중요한 일이 되겠습니까? 어차피 썩을 사과인데 그 사과가 붉은 빛을 띠든지 푸른빛을 띠든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제사상에 올리지 못할 음식인데 그것이 탐스럽게 요리된 것과 조잡하게 요리된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과 다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전제에서는 우리의 올바른 신앙생활과 똑바른 믿음 섬김, 그리고 정결한 신앙의 경건 등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성경구절 만큼 오늘날 오해되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 거지들이 입었던 누더기 말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진실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렇게 사는 것과 매 순간 순간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은 후에 어마어마한 차이를 빚어냅니다.
전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가 많았는데 차를 탈 때에는 늘 영어 단어 50 여개 정도를 외웠습니다. 매일 원서를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를 찾으며 외울 때 어린아이들 눈에 나이 먹은 저의 모습이 우습게 보였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6년 넘게 계속하니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람과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빚어내었습니다. 좁힐 수 없는 차이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늘 예배를 소중히 여기며 경건 서적을 가까이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당장은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지 모르지만, 해를 거듭한 후에 보면 한 사람은 깡통이고 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한 창고와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생각 없이 내키는 대로 교회 왔다갔다하며 사는 사람과 하나라도 더 바르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 역시 처음 한 두 달 동안에는 차이가 나지 않을 지 모르지만 몇 년이 지나고 나면 한 사람은 성도이고 한 사람은 짐승의 모습일 것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거의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친구였을지라도 나중에 만나면 할 이야기가 없을 것입니다.
그 만큼 우리가 순간순간 살아가는 의로운 삶, 의로운 결정, 의로운 교회 생활, 이런 것들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완전히 부정하다고 생각하시고 그들을 거의 만나주시지 않는 이런 삶, 선지자가 피어린 통곡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탄핵하면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있는 이런 광경에서도 그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았겠습니까? 제사장은 얼마나 거만했겠으며 아무렇게나 제사를 지내면 얼마나 따졌겠습니까?
요즈음은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옛날에 시골에서는 그 절차를 가지고 할아버지들이 따지고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로 존재 자체가 부정해져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나 중요한 문제이지 하나님 앞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보십시오. 피고름이 쏟아지고 누더기를 입은 문둥병자일 경우 제사장에게 가면 당장 그 사람을 쫓고 혼자 있게 하라고 진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잠시 후에 나타나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화장으로 얼굴을 꾸미고, 보석과 값진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면 뭐가 달라졌습니까? 하나님의 제사의 규례에는 명백히 문둥병자는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제사할 수 없다고 간단히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육체적으로 더럽기 때문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이지 옷을 더럽게 입고 피고름이 떨어져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고쳐지기 전까지는 그가 입는 무슨 옷 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사람이 아닌데......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동이나 의로운 경건들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그 자신이 열납될 수 없는 아주 근본적인 죄악 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것을 돌이켜서 치료받기 전에는 그의 의식들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 )면서 보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고 성실한 신자 가운데 아주 못된 신자들이 많습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이 참된 신자의 표가 아니면 교회도 속고 자신도 속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데 그런 식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운다는 것은 두 번 죄를 짓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가지고 있는 시야가 얼마나 넓고 입체적인 동시에 그 통찰이 얼마나 영적이고 뛰어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살아 계신 영이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내적인 세계가 없는 사람들은 항상 외적인 것에 현혹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럴 듯한 교회의 모습! 헤롯이 지어놓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제자들이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건축과 화려한 장식에 감탄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 뒤로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습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리라 하며 흐느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는 그런 통찰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자신의 신앙생활을 그럴 듯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성실한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러분들이 참된 신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림도 없는 생각입니다. 정말 교회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일생을 교회에 붙어 지내는 사람 가운데 지옥에서 ( ?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용납되어지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신령한 작용들을 거의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엇으로 몰두하겠습니까? 그들 속에 더러운 욕심은 펄펄 살아 있고 - 신령한 하나님과의 대면이 없으니 죽을 리가 없습니다.- 아집과 독선과 위선과 거짓이 살아 있으며 육신의 욕망도 왕성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규칙의 껍질을 깨고 담대하게 세상을 위해서 데뷔할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모습을 쓰고 속에서는 각종 탐심과 욕심들이 동기가 되어서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식으로 살아가니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도 없고 주님이 자신 안에 거하고 자신이 주님 안에 거하는 생명적인 관계에 대한 경험도 없이 일정한 규칙을 따라서 살아가고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할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삶을 보면서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목사님의 강대를 유리로 만들었더니 거룩하지 못하고 속되다는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유리든 돌이든 나무이든지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 위에서 무슨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지는 관심이 없고 전통적으로 나무를 썼는데 그것이 왜 유리이어야 하는지 그런 쓸데없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평생을 허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부에는 그 사람이 한 번도 하나님을 섬긴 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핏대 내고 열 내고 혈기를 부리면서 정의의 사자같이 교회 생활했는데 하나님은 한 번도 그런 사람의 섬김을 받으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의 누더기와 같은 의와 더러운 옷과 같은 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보여주는 것은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니’입니다. 이는 가을철에 낙엽이 되어 떨어진 나뭇잎들이 햇빛에 말라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가을이 되면 누런 낙엽에 길가에 잔뜩 떨어져서 바람이 불면 전부 날리는데 아무 의지도 없고 아무 생명도 없습니다. 나무에 달려 있을 때에는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그 나무에 붙어 있는데, 떨어지고 나면 모두 바람에 날립니다. 밟히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버리고 먼지가 되어 흩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쇠패한 잎사귀는 생명이 없고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자신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귀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 올 때에 두려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그들을 무서워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항복을 해서라도 그들 중에 은혜를 입기를 원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 자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신들 중에 여호와와 같으신 신 그 분이 어디에 계시며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같이 함께 해주신 민족이 어디에 있느냐 그들이 기도할 때 그렇게 가까이에서 들어주신 신이 우리를 보호하느냐? 그들 뒤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두렵게 하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입니까? 어떤 대단한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물론 여러분들은 물질, 사회적 지위, 권력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또 남다른 지식이나 공부에 재능이 있어서 대우를 받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며 또 워낙 뛰어난 미모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영원이라는 맥락에서 비추어 보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전도서 기자가 말했던 것과 같이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니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된 것입니다. 많은 무리들을 거느려 보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금한 적이 없고 마음에 원하는 것을 억제한 적이 없이 모두 살아 보았고 모두 누려보았지만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그렇게 곱고 아름다웠던 얼굴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모두 쇠패해집니다. 가졌던 재물도 모두 가져봤지만 죽은 후에 누가 가질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 내게 있던 권력은 내일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브이 아이 피가 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위대한 사람이고 누가 대단한 사람입니까? 하나님 앞에 대단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래도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이유, 이 모든 인생의 허무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소망을 잃지 않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적인 것들이나 우리의 외향에 속한 것들이나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들 때문이 아닙니다. 영원의 빛 아래서 보면 지식을 가진 사람도 뛰어난 권력을 소유한 사람도 아무 것도 아닌데 우리들 중의 다수는 그 나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의미 있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사랑하고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전능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지극히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그 분을 의지하며 살고 그 분도 그렇게 사는 것을 원하시며 세상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나마 훌륭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떼어버리고 나면 우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믿고 나서 손해 본 것 있습니까? 주님을 버리고 얻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얻고 싶은 것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어떤 것들이며 그것을 소유하면 여러분들이 정말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무엇을 가지고 가셨습니까? 당신의 그 땅에서 쫓겨나서 다시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리셨습니까? 땅을 잃어버리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땅이 없는 민족으로 다시 만드셔서 노예의 서러움을 당하게 하셨습니까? 전쟁을 경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 번도 그들이 완전히 진멸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고 그리고 왕국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세상의 나라가 모두 다 겪는 어려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우리는 다 쇠패한 잎사귀 같으니 불면 바람에 뒹구는 낙엽과 같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지 않고 그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거룩한 능력들을 하나님이 거두어 버리시니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만큼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나면 관록이 생기고 이력이 붙어서 하나님 없이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을 까요? 그런 질문이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심으로써 우리들은 비로소 이 험한 세상, 험한 존재의 그 허물을 뛰어넘어서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존재,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강대상을 가리켜서 성물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용도에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공장에 있을 때에는 가구라고 하지 성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의 용도가 끝나고 망가져서 쓰레기장에 가져가면 폐품이지 성구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주님을 경배하는 일에 관계되어 있는 동안에만 거룩할 성자 성구인 것입니다. 이것을 버렸는데 술집에서 카운터로 사용하면 성구로 부르지 않습니다.
이 나무 자체에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모든 나무 가운데 꺼냄을 받아서 이 예배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것이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여하는 동안에만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의로운 사람도 훌륭한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 안에 뛰어난 자랑할 만한 그 무엇을 가진 사람들도 아닙니다. 다만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인데 스스로 범죄하여 하나님을 버렸고 반역하였던 흉악한 죄인들이었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유리하던 그 몹쓸 죄인들을 주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 예수를 주셨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진리를 믿어지게 하셔서 그 생명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관계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께 나아가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로부터 스스로 부어지는 거룩과 신령의 은혜를 누리면서 하나님 백성의 독특성을 유지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 무지로 인해서 수시로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약화되는 것들이 있고 주님이 주신 것들을 바르게 관리하지 못하는 적도 있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더 깨달아가기를 원하고 더 온전해지기를 원하고 정결해지기를 원해서 날마다 주님 안에서 새로워져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전부입니다. 그분이 우리 인생과 우리 마음,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진짜 길가에 뒹구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낙엽과 같은 존재들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에게 지적 받고 있고 그들이 무언가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사라지고 아무 의미가 없는 초라한 잎사귀와 같은 존재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이 행하고 있는 종교적인 의무들은 더러운 누더기가 되어버렸고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들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선지자가가 지금 통곡하듯이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모든 것을 얻고도 우리 안에서 주님이 사라지면 정말 주님께로부터 받는 신령한 은혜와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는 이 영적인 삶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아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이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물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시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많은 일을 행하는데도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러운 누더기가 되어서 불쾌감을 드리고 스스로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바람에 뒹구는 낙엽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여러 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는 것이 자신의 인생 전체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하는 유일신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금 그 수많은 특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 쓸모 없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쓸모 없는 여러분들이 그래도 하나님 앞에 존귀하고 귀한 것은 비록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아도 주님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하는 그것이, 온갖 연약함과 온갖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하나님밖에는 없는 것처럼 온 세상이 하나님 한 분만의 이름을 높이는 그런 세상을 보기를 원하며 살아가는 그 마음 때문에 여러분이 오늘도 존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죄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그 분이 우리의 약점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고 우리가 얼마만큼 거룩해지기에 무능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러나 단 하나 우리는 선지자와 같은 인물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사소한 것들을 위해서 소중한 것을 버리는 무모함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말라깽이 같이 되어버린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신앙을 생명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갈망하고 선지자가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이 놀라운 일들을 행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이 장면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우리가 갈망하고 선지가가 마음속에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세상은 부유한 세상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는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시선을 한 몸에 모으는 그런 무엇을 건설하기 위해 선지자가 이렇게 흐느껴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을 갈망하고 있는 이사야의 마음속에서 꺼질 수 없이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소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이 백성이 유일신 신앙으로 돌아가게 해주옵소서. 하나님 한 분만 만나서 행복해 하고 하나님 한 분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가장 행복으로 아는 그런 은혜를 부어주소서.” 오늘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고의 것으로 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렇지 못한 이 세상을 향해 선지자의 마음이 될 것이며 부흥 없이 지나는 이 시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여러분들은 자원해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이 이 패역한 도시 한 복판에서 가장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게 도와주시고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었던 수많은 백성들이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은 자기의 의를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20.병든 냉담함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사64:7)
지난주에 상당히 중요한 설교를 여러분에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단지 커다란 재앙, 난리, 기근이 일어나서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심판을 받는 것이 곧 하나님의 진노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사실은 아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그 현실이 하나님의 진노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또 다른 측면 즉,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은총을 거두셔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활기, 생명의 기운이 사라질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고 게신 증표다 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러한 선지자의 진노를 말하는 시각이 계속되고 있고 그 시각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면밀히 관찰하며 토로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여기에서 선지자는 두 가지 냉담함을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의 냉담함,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냉담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냉담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고 분발하여 쫓아가서 하나님을 붙잡는 이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냉담함은 하나님이 우리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시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돌아보시기 않기 때문에 우리들이 소멸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역사 속에서 읽어낸 것은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도 냉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도 냉담하시고 차가운 기류가 흐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다는 선지자의 이 말이 정상적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왜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제사가 있고 선지자가 있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겠습니까? 선지자의 이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부름은 그런 의례적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할 때에 그 부르는 것과 똑 같은 의미입니다. 생활 속에서 별 의미 없이 부르는 상투적인 ‘주여!’(입버릇으로 무의미한 습관적인 호칭)라는 부름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주님을 부른다는 ‘카라네’는 하나님과 대면할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부르는 그런 종류의 하나님을 향한 부름입니다.
예화) 11세기 어느 대주교가 매일 거룩한 모습으로 주님을 부르는데 하루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더욱 폼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음. 그런데 이변이 일어나서 하늘 문이 열리며 “그래 내 가 여기 있다. 네가 날 불렀느냐?”하는 음성이 들려 그 주교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이야 기.
그런 것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을 싣고 전 소망을 실어서 부르면 하나님을 만날 것이며 나의 이 부르짖음을 통해서 주님을 대면하고 싶다는 전인적인 기대를 가지고 부르는 것이 곧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기대 없이 의식적으로 부르는 것은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자신의 온 마음과 성품, 전존재와 전 인격적인 기대를 걸고 주님을 간절히 부르겠습니까? 어젯밤 고스톱 치거나 노래방에서 날 새우고 노래 부르던 사람이, 또는 일주일동안 거의 교회를 잊고 산 사람이 그런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기도는 자기가 그렇게 해야하겠다고 생각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원에 가면 마음놓고 소리지를 수 있는데, 저도 젊은 시절 기도원에 올라가면 목이 터지도록 소리지르고 내려오곤 했는데 신앙심이 깊지 않아도 거의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심령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소리인지 남이 하니 그저 따라 고래고래 악쓰는 소리인지를...
그런 것이 신앙심이 깊지 않은 청년의 마음에도 느껴지는데 완전한 지식을 가진 영이신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읽어내겠습니까? 그런 진실한 마음이 담긴 간절한 부르짖음은 전 삶이 하나님을 추구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마지막에는 그 승부가 삶에서 나는 것입니다. 기도자체에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삶에 대한 아주 진지하고 깊은 통찰과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기도에 대한 생각과 견해가 아주 천박하고 가벼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전에 에례미야를 향해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 보라고 하시는 표현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배 드리는 사람이 없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 인생에 있어서 추구점이 된 사람, 아주 헌신적으로 사는 사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주님 한 분이 자신에게 있어서 추구점이 된 사람으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잊고 지나가시는 예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수많은 대중 중에 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부른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소리내어 기도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가 마음속에 간절한 애원이 있으면 그것이 터치고 나와서 소리를 내게 하고 부르짖게 합니다. 진짜 우리들이 간절하고 절박함 속으로 들어가면 잠잠할 수가 없습니다. 조금 슬플 때에 눈물을 훌쩍거리지 너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을 때에 어떻게 통곡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을 그렇게 통곡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조작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새벽 기도 시간 등에 절제시키는 이유는 자기 혼자 터질 듯이 기도하면 그 사람은 문제가 없는데 옆의 사람은 문제가 됩니다. 자꾸 기도가 헷갈리니까. 모두 그렇게 기도하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게 기도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 지하실이나 삼층으로 가서 기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조작된 것은 거짓이고 가짜입니다. 저도 한 때는 그런 유혹을 많이 받았습니다. 손바닥에서 피가 터지도록 박수도 쳐보고 그랬는데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모든 것이 인격적이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간절한 탄원과 통곡이 가능해지는 것은 기도하러 오기 전에 이미 삶의 초점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르는 자가 없다는 것은 찾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다는 것은 무슨 내용입니까? 그것은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할 때에 두 가지 신앙적인 길에서 대조하여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도 너를 찾을 것이요,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너를 버리신다고 말합니다. 중간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삶이 아니면 하나님을 버린 삶입니다. 우리 신앙의 경험이 그것을 증명해줍니다.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까?
중립지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뵙고 싶든지 뵙고 싶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그저 약간 뵙고 싶다는 중립지대는 상상 속에서는 존재하지만 실제의 마음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을 부르는 자가 없다는 것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배교하고 하나님을 향해 모욕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는 그런 것만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우리 속에 사라져 버린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 그 놀라운 은혜와 축복들을 현재적으로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버린 냉담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다는 말은 단지 하나님을 열렬하게 찾지 않는 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하지 않게 되는 것은 단지 하나님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자신의 마음을 끄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엔가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기업체의 사장님이 한 분 있는데 여직원을 채용할 때에는 학벌과 용모를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는 면접을 해서 선착순으로 못생긴 자매들만 뽑았습니다. 물론 머리는 똑똑한 조건에서 말입니다. 결국 회사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졌다고 합니다. 그 여직원들이 전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든 즐거움을 회사 생활에 두고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와서 보고 썰렁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회사가 잘 돌아가는데... 커피숍이나 단란 주점이 아닌데...
문제는 회사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다른 데 빼앗겨 있기 때문에 그 일을 사랑하고 그 일 때문에 열심히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로 한 시대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추구하지 않는 것은 단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수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데에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라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너의 마음에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아주 적나라하게 말한 것입니다. 양립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헐떡이는 마음과 주님의 사랑을 향해 헐떡이는 두 마음은 한 인격 속에 공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를 부르는 자가 없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초점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최대의 의무는 그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자신들의 지고의 영광을 추구하고 이 세상의 번영을 추구하면서 살지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을 추구하며 주님 자신의 영광이 온 땅에 그리고 여호와의 긍휼히 온 백성들 위에 임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기를 사모하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바로 그처럼 하나님 자신을 찾고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정체는 냉담함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은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영적인 나태와 침체가 오고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냉담함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들 중에 누군가 선각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냉담하게 살 수 없다는 자각으로 그 냉담한 상태를 뿌리치고 분발해서 그런 삶을 살 수 없다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는 그런 사람들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향해서 냉담한 마음을 갖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히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속속들이 썩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하고 사기, 협잡, 간통, 도둑질 등 그 시대의 사회악이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이사야 앞에 보면 부동산 투기, 부의 축적 하나님의 안식년 제도 등을 무시하면서 이권을 챙기고 살아가는 포악함 이런 것들에 대해서 다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썩어 있는 모습들을 다 모아서 피를 토하듯이 예를 들면서 말하지 않고 아주 본질적인 것을 말한 것입니다. 나를 찾는 자가 없고 분발해서 주님을 붙들려고 하는 인간도 없다고 말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냉담함이 그 백성들 모든 사람들 속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당시 이스라엘을 향해서 예언할 때 이스라엘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했는데, 전병은 히브리 성경에 보면 팬케익, 빈대떡입니다. 구워먹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울 때 앞뒤가 똑같이 익도록 적당히 뒤집어야 맛있게 구워지는데 내버려두니 아래는 타서 먹지 못하고 위는 익지 않아서 못 먹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속적인 것에 대한 사랑과 신령한 것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비교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에 대해서는 지글지글 끓듯이 열렬해서 다 타버렸고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는 너무 냉담하니까 날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 앞에 주님이 받아 주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냉담함 이면에 있는 것은 세상을 향한 미친 듯한 열렬함입니다.
예화) 며칠 전 자정 가까운 시간에 아들을 데리러 도서실에 갔다가 사당동의 음식점에 들어감. 그 깊은 밤에도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향락을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음. 자신의 즐 거움을 위해서는 열렬한 세상의 모습을 입증하는 듯함. 또한 하나님을 향한 냉담함을 보여주 는 것임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때에 일어나는 눈에 띄는 현상은 차가움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아주 차가운 사람들이 세상에 나아가 자신의 육신의 욕망과 꿈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열렬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 교회 속에서 볼 수 있는 이런 냉담함은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직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예배나 기도, 우리의 찬양 속에서 무언가를 조작해서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것은 범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백성들이 모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열광하는 이교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려도 침묵 이상 아무 것도 없고 기도를 해도 오로지 차가운 정적만이 감돌고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 받는 사람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저 모였다 흩어지는 상황을 계속하는 것은 커다란 범죄입니다.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그 현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해야 합니다. 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였는데 우리 중에 누구도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없는지에 대해 누구든지 이의를 제기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단정하고 경건하게 예배해야 합니다. 법썩떨고 무질서한 이런 것들은 질서로우신 하나님을 예배하기에는 적합한 방식이 아닙니다. 열린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마음이 계속해서 냉담한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중대한 질병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삶에 있어서 주님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다 주저앉아서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 자기 혼자 뛰쳐나가서 자기라도 주님을 따라가리라는 그런 신앙의 고백도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들도 교회에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교회의 정문 앞에 열렬하게 살던 사람만 들어오라고 써 붙인다면 몇 사람이나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다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는 그 삶들이 자기들의 냉담한 상태가 매우 잘못되었으며 이런 상황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모르던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그 하나님의 마음이 그 사람에게 부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냉담해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설교자로서 한없는 무력감을 느낄 때는 설교가 물 흐르듯이 잘 되었는데 그것만 있고 아무 것도 없을 때입니다. 오히려 설교가 잘 안되었을 때에는 설교가 잘 안 풀렸으니까 저럴 것이라는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 말을 다 했는데 단지 그것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만 하는 태도를 보일 뿐 아무도 열렬해지지도 않고, 자신이 냉담하게 살았던 태도에 대해서 뉘우치는 마음도 없으며, 자신이 이제껏 잘못 걸어온 길에 대해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거기에서부터 돌이켜야겠다는 의지조차 보일 수 없을 때 가장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냉담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주일날 등산을 하는 삶도 가끔 산꼭대기 올라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음악회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며 계속 눈물을 닦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기 좋아하는 취미 생활이나 놀이에 빠져서도 그렇게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에 이슬이 맺히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보다 마음이 더 냉담해서야 그 삶에 정말 하나님이 계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냉담한 것은 아주 심각한 영혼의 질병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깊이 이해하면서 그런 영혼의 철저한 무감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깊이 성찰하고 거기에 대한 처방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추구하는 그런 인생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로 가득찬 시대에 그 속에서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으며, 매주일 모여서 똑같이 예배하고 같은 시간에 흩어질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교회의 시대입니다.
선지자가 오늘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냉담한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의 냉담함을 무엇으로 함부로 깨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설교 시간에 냉담한 사람들, 어쩌다 특별 조제한 예화나 하나 들면 깔깔대고 웃다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면 역시 차가워지면서 침묵이 흐릅니다. 그런 냉담한 사람들을 무엇으로 뜨겁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자신만이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시고 그들을 열렬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오늘 그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고 이렇게 아무 관계없는 것 같이 냉담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주님의 진노 아래 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시대의 삶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예배 시간에 그런 얘기 한 번 들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예배 중에 찾아오시니까 사람들이 그 냉담하던 마음 차갑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고 그 마음이 녹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일어나니 시간도 장소도 간 곳이 없고 흐느껴 우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부흥이 일어나는 곳마다 정서가 회복되는 것을 봅니다. 백성들이 냉담했었는데 막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고 뜨거운 마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으면 전부 시인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 성가 가사는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느끼는 것이 많으니까 막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은혜 못 받을 때 팔짱 끼고 앉아 끝나기만 기다리던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면 웃음도 눈물도 많아지며 정서적으로 풍부해집니다. 냉담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친밀함과 주님 자신을 향한 초점이 상실되었을 때에 마지막 단계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고 나면 반역하는 마음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욕심, 미움, 매사 사건과 사람을 향한 터무니없는 짜증들, 수많은 감정들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주님 만나고 회개하고 주님 한 분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만큼 신앙에 있어서 정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지성이나 의지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 우리의 선택이나 이런 것들을 하게 하는 그런 결정적인 동의는 정서가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싸우면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을 때 지성은 해서는 안 된다고 시키지만 감정은 폭발합니다.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통제가 되지 않고 퍼붓고 봐야 합니다.
예화) 같이 화음을 맞추어 노래하던 후배가 스스로 노래에 취해서 중요한 서류를 자신도 모르게 국수 가락처럼 찢음. 지성이 중요한 서류라는 것을 인식하나 감정이 움직이면 그것을 감지 하지 못함
차가운 신령한 은혜, 냉담한 하나님의 사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차디찬 사람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목소리 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느낌과 정서를 그대로 전수 받아서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냉담해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누가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보고 즐거워하겠습니까? 어느 인간들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보고 영원히 기뻐하는 것이라고 바보 같은 고백을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디에 그런 종자가 존재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만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끼리만 통하는 얘기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냉담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 철저하게 깃들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든지 말든지, 세례를 받았든지 받지 않았든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을 하든지 말든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없으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고백을 하든 실제 살아가는 삶은 무신론적인 삶입니다. 느껴지지 않는 이념을 위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옛날 우리 나라에 자생한 빨갱이들이 생겨났을 때 그 사람들이 전부 이북의 사주를 받는 것처럼 말했지만-물론 그런 사람도 있었지만- 스스로 이북과 상관없이 자라난 빨갱이들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놓지 않는데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념을 위해서 생명을 내어놓지 않습니까? 신나 뒤집어쓰고 불붙여서 옥상에서 떨어져 죽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고백하면 뭘 하겠습니까? 우리가 교리를 배우면 뭣하고 성경을 알면 뭐하고 청교도, 예배, 목양의 원리를 알면 뭐합니까? 실제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열정이 사라지고 냉담해지고 나면, 고백을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살아가는 삶은 무신론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없는 냉담함을 선지자가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라고 보는 이 통찰은 아주 정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게 넘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냉담했던 적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오늘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년 52주 지나가도 텔레비전 쳐다보며 가끔 찔끔거리지만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돌 같은 얼굴에 눈물 한 번 흘려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마음이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는 마음이겠습니까?
하다못해 이웃에서 불우이웃 돕기 자선금 조금만 잘못 걷어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손을 걷고 싸우는 열혈여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살아가는 비천한 이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는 분노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가슴에 이것을 새기십시오. 내가 무엇을 고백하든 어떤 신앙을 고백하고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에 하나님의 열정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실제적으로 무신론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졌던 오류, 곧 하나님께로부터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냉담함이 문제가 안 된다는 그것에 똑같이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돌 같은 사람들은 신앙의 초보 때에는 눈물도 많고 감동도 많지만 자기처럼 성숙해지고 나면 견고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다 살아보아야 압니다. 오늘 처음 예수 믿고 말씀의 세계에 대해 들어보고 은혜 받고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체험하고 이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보면서 감동 받고 눈물을 흘리는 것, 그런 것 가지고는 모르고 더 살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한 교회가 건강한지는 새로 믿는 사람들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오래 믿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느끼며 기도하는 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열정이 우리 속에 없으면 우리가 무엇을 고백하든지 우리의 삶은 무신론입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넣고 담금질을 해야 합니다. 하다못해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느껴지지 않고 주님의 그 능력과 사랑과 그 생명이 내게 느껴지지 않으면 “하나님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다 굳어진 이런 돌 같은 마음이 되었습니까? 내 마음을 이렇게 방치한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금식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의 열정의 불꽃이 사라져가는 것을 크나큰 두려움으로 여기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특별한 기도를 하는 것은, 빚에 몰리고 직장 쫓겨나는 위기, 결혼을 앞둔 그런 선상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좀 신령해져야 하지 않습니까? 사고도 이제 좀 영적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여러분들을 통해서 부흥의 부싯돌이라도 때려서 불꽃이라도 떨어뜨려 보시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온통 가득한 냉담함, 하나님의 교회에까지 가득 찬 이 차가움, 우리의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이 냉랭함! 주님의 심판의 경고를 들어도 두려워 떨 줄을 모르고 심판받아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피흘리며 찾아오시는 주님의 발자취를 말해도 눈물 흘릴 줄 모르는 냉담함! 하나님이 버린 시대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의 피곤함이 역력합니다. 주일이면 기쁜 것이 아니라 한없는 피로감이 몰려옵니다. 제가 있던 교회에서 예배 시간 30분 당기고 줄이는 것으로 청년들과 당회가 실랑이를 했습니다. 청년들은 30분만 예배를 늦게 시작하면 자기들도 예배에 다 참석할 수 있다고 하고 당회는 빨리 끝나고 가서 쉬어야 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죄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뿐만 아니라 이런 모습으로 예배드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죄를 자기의 죄처럼 여기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넘치소서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부으소서 내게 성령의 불을
은혜와 긍휼을 하나님이 열방 중에 널리 부으셔서 돌덩이와 같이 굳어진 그 백성, 교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흐느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람들로 갈아엎어 달라고 기도해야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이렇게 찾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죄는 그들만의 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허물과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두 번 째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냉담함입니다. 주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그리고 우리의 죄악을 인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쳐다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냉담하십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냉담하기보다는 이들이 냉담하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눈에도...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항상 그들을 향해 끓어오르는 사랑과 긍휼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사랑이 느껴지는 때는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그런 사랑의 관계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그 사랑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공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냉담하고 범죄하고 불결해지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신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선지자의 고통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는 중보자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 백성의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백성을 버린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 백성 사이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이 백성 사이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 편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그 사랑과 긍휼과 은혜와 아버지의 말할 수 없는 그 긍휼이 절절하게 느껴지는데 자기가 선포할 때 소리를 들어야할 이 백성들은 듣지도 않거니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냉담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냉담한 이 백성들의 마음을 일깨워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스며들게 하고 그리고 자신들을 버리고 자신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셨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사실은 그들을 향해 퍼붓고 계시는 그 놀라운 사랑에 눈을 뜨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 사이에서 선지자는 자신의 찢어질 듯한 긴장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도구가 되는 사람들의 내면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은 수시로 하나님과 백성들 관계 사이에서 스위치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 깊이 몰입되어 들어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을 징벌해서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함에 도전하는 모든 불의의 세력들을 멸하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움을 입증하셔야 된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느 한 순간에 이 백성들의 상태를 스위치 되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니까 이 백성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셔야할 의무가 하나님께 있는 것은 아니고 이 백성들도 그럴 가치가 있는 백성들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이 변화시키시는 그런 감화가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기 때문에 주님이 그 일을 해주시도록 탄원합니다. 말도 안되는 면목없는 탄원인지 알면서도 무대포로 하나님 붙들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 양쪽을 스위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이 제대로 된 선지자는 이 제사장의 하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를 오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선지자들이 칼 들고 다가오는 사람들이고 제사장들은 손수건 들고 백성들의 눈물을 씻기는 사람이 되라는 이런 양분된 생각이 사실은 진정한 선지자의 영성과 그 하트를 가지고 있는 내면의 세게 속에서는 그것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선지자가 지금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선지자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이 도도하게 흐르는 이 냉담함의 물을 물길을 거슬려서 다시 하나님을 열렬하게 찬송하고 하나님께 무언가를 해드려서 주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주님께 감동을 드려서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비오듯 내리게 만들어줄 가능성을 선지자는 솔직히 이 백성들 속에는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가치가 없고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인데도 이상하게 하나님이 그냥 왜 그러는지 이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부으시는 그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길밖에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예를 들면 5월에 있을 온 가족 교회 오는 날을 생각해봅시다. 전에는 내 마음대로 살아서 본이 안되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들이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그래서 돈도, 이익도, 포기하고 모든 손해를 감수하면서 온갖 비위를 다 맞추어 주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 남은 것이라고는 교회에 다니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 외에는 다 양보했습니다. 그런데 안 돌아옵니다. 본만 보여서는 안되고 직접 복음을 전해야된다고 해서 책도 사다주고 테이프도 사다주고 안면 깔고 사영리도 가르쳐주었습니다. 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해서 별 것을 다 해보았습니다. 가족들이 평화한 가운데 한 마음이 되어야 복음이 전해진다고 해서 그들과 오락도 같이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안 돌아오는 것입니다. 고스톱 칠 때에는 화기애애한데 끝나고 사영리 펼 때에는 다시 찬밥입니다. 무엇을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라고 해서 참아도 봤습니다. 작정기도도 해보고 뭘 해도 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기도가 쎄지면 세질수록 더 강팍해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했었고 마음의 감동을 주어볼까 본이 되어 물질이라도 주어볼까 하면서 그들에게 실낱같은 기대라도 있으면 걸고 싶었습니다.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것이 모두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 같은 어떤 조짐도 안 보이고 강팍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 인간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지 이 인간들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역사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밖에 소망이 없으니까 그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런 예가 성경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갔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르지만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이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믿는 자를 잡아내려고 영장을 가지고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내가 종교지도자가 되어서 뭐하나? 정말 그리스도가 누구실까? 내가 이렇게 열렬하게 살고도 구원을 못 받았다면 헛것인데..... 주님 내가 믿는 신앙이 잘못되었다면 좀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걸어가다가 주님을 만났다면 우리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그런 마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직 마음속에는 증오심과 복수심이 가득 차서 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타났고 엎드려졌을 때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우리의 구원이 도무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는 고백은 그것은 성경에서만 발견한 진리라기보다는 자신의 체험 속에서 입증된 진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은혜가 우리 가족들에게는 임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에스라 시대를 보십시오. 그 백성들 중에 누가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두목과 장로 두령들이 모두 이방여자를 얻어 타락하고 엉망인 삶을 살았으며 율법을 경시하며 짓밟아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혼혈아들을 낳고 부패한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면서 슬퍼하고 가슴 아파했습니까? 에스라가 너무 기가 막혀서 옷을 찢으며 성전 문 앞에서 통곡하며 울 때에만 해도, 처음에 사람들이 그 우는 이유를 모르고 의아해했습니다. 그 백성들에게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을 때에 에스라 한사람이 엎드려 통곡하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구하니까, 그 악랄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일시에 녹이시면서 은혜를 갈망하고 율법에 대한 충성심을 잃었던 것들에 대해 회개하는, 민족적인 회개가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아무 기대를 걸 수가 없고 포기해야할 상황이 올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포기할 수 없지 않습니까? 선지자가 그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을 보고는 어떠한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절망하지 않는 굉장히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그 일방적인 은혜의 부으심, 그 역사적인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흥에 대한 기대입니다.
(예화) 홈페이지에 있었던 내용, 교회를 섬기면서 좌절된 상태에 있었는데 ‘부흥’ 설교를 듣고나 서 내린 결론이, 자신은 실망하리만큼 하나님 앞에 기도해본 적이 없다는 내용이었음.
실망! 여러분은 교회를 위해서 기대를 가져볼 정도로 기도해보셨습니까? 실망으로 말한다면 선지자는 더 이상 선지자의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심지어 이런 사람들 잡아서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는 톱으로 켜서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 인간들을 행해서 무엇을 더 희망을 갖겠습니까? 그런데도 눈물로 예언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넘치소서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부으소서 내게 성령의 불을
비추소서 빛되신 주님 말씀
이 백성들의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모두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시려고 마음을 가지시면 하시는 것입니다. 막 쏟아 부어서 순식간에 하나님의 마음이 냉담한 인간들의 마음에 부는 바 되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불효 막심하게 살았던 인간들의 마음속에 피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하셔서 효자로 만드시는 일을 순식간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교회와 우리 자신을 향해 많이 염려합니다. 우리는 경박한 낙관보다는 진지한 성찰이 가져다준 비관이 진실이라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망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빚지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직은 다 썩은 교회를 향해서라도 그 교회를 이제 버렸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개입하셔서 일시에 이런 은혜와 긍휼을 하나님의 교회에 쏟아 부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주님의 빛되신 말씀을 만방에 찬란하게 횃불처럼 타오르게 만들어서 ( ? )을 터뜨릴 만한 영광스러운 기쁨의 날이 오도록 만드실, 그런 가망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진지해질지언정 절대 낙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짜 부흥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부흥을 위해서 쥐뿔만큼도 기도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한숨 많이 쉬고 절망합니다. 절망하리만큼 기도해봤습니까? 마음이 상심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보았습니까?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합소서.
우리 주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자기 마음대로 변하지 않는 세상과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도 도저히 변화하지 않는 차갑고 냉담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통곡과 슬픔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그러셨는데, 우리는 주님보다 능력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님보다 의롭지도, 주님보다 더 많이 수고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낙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아깝지 않을지라도 우리 시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으신 아들의 공로는 아깝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과 강팍함, 하나님의 교회의 배교적인 냉담함 때문에는 하나님이 진노하실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런 인간들을 고쳐서 주님 찬송하는 무리들을 만드실 것을 기대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온 교회 지붕부터 기초 끝까지 당신의 피와 물을 발라 교회를 세우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속죄의 희생은 끝났지만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속 하시는 일은 무릎을 끓고 이 땅의 교회들을 위해서 탄원하며 중보하시는 기도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인간들에게는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교회의 제도나 프로그램을 가지고도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펼칠 때마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만한 어떠한 조짐도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 백척간두의 낭떠러지 앞에 와 있을 때에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리고 주의 언약의 관계들을 보여주셨음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역사하셔서 세상 사랑에 불붙어 헐떡이는 인간들의 마음에 세속적인 불길을 끄시고,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신앙을 보며 눈물 흘리게 만들고, 잠시 전에 사랑하던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버려서라도 주님의 사랑을 사고 싶어하는 백성들로 바꾸어 놓으신 수많은 증거들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보고 기대를 걸지 않지만 교회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언약을 믿고 거기에 충실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냉담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난주에도 예배를 드렸고 오늘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세상의 자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버린 교회들이 허다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그들을 청소하지 않으시고 아직까지 내버려두신 것은, 단지 하나님이 무관심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인내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병든 교회를 보면서도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부흥이 부어질 기회를 우리들이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감사 와 기도
한 편으로는 나같이 쓸모 없는 인생에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아픔을 언뜻언뜻이라도 읽을 수 있게 해주시고 이 시대와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인간들과 교회는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희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슬퍼하지만 비관하지 않고 낙담하지만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추슬러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이렇게 냉담하고 어두운 시대를 지났던 지혜로운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처럼, 주께서 오라시는 날에 찬란한 주의 영광을 하나님 앞에 돌리셔서 넘치는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핍절한 교회에 강물같이 흐를 날을 기대하면서 하나님 앞에 오늘도 기도합니다.
우리 시대에 부흥의 날이 오지 않아도 관계치 않습니다.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성실하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며 하나님을 열심히 전하고 성결하게 살아가는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궁극적인 삶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늘에서 아멘 하고 있습니다.
21.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64:8)
장시간에 걸쳐서 선지자는 부흥을 갈망하기는 하지만 그런 부흥을 기대하기에는 너무나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가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된 상태를 인해서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우리들이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그 성경 바로 앞 부분에서 하나님을 찾는자가 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비참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범죄함으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 부정한 자가되고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고 우리는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갑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고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고 이것은 결국은 주님이 우리의 죄악을 인해서 얼굴을 가리셨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도 찾아 볼 수가 없었어요. 백성들은 하나님 모르는자 처럼 살아가고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계명은 휴지짝이 되어버리고 저마다 자신들의 욕망을 신 삼아서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진노를 살만한 일들에 모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있어서 그들의 하나님을 떠난 삶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대비해서라도 알 수 있을 정도의 그러한 상황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서 그렇게 살아가고 그들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비교해 줄만한 그런 사람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그런 때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눈에는 이제는 더 이상 이제 이 백성들에게 소망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바로 그런 상황에서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짧은 문맥이지만은 63장 뒷부분부터 이64장에 이르기 까지 말이죠. 거의 같은 패턴이 유지되는 거예요. “주여 하늘에서 굽어보옵소서 주의 성소가 황무하게 되었나이다.” 탄식하고 그러고 나서 뭘 했습니까?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 찌라도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똑같이 그렇게 도저히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그 민족의 비참한 지경을 보면서 선지자가 절망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선지자는 다시 마치 노래의 후렴구처럼 “주는 아버지시라 우리는 진흙이요 아버지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모두 그의 손으로 지음바된 자들이라”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왜 선지자가 이렇게 현실 상황에 대해서 깊이 절망하고 하나님을 찾는자가 아무도 없고 주께서 그런 놀라운 일들을 행해 주셔야 할만한 어떠한 의무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선지자가 이렇게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그저 후렴구 처럼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라고 하는 이 구절을 되풀이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오늘 이시 간에 한 두달 전에 설교했던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하는 이 구절을 다시 해설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듣지 못하신 분들은 앞에 나오는 이미 63장 앞부분에 나오는 그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라고 그것을 설교한 것들을 여러분들이 들어보십시오. 다시 설교할 수도 있지만은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성경에서 그려내는 그 아버지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아버지가 아나라 그랬죠. 그죠. 그런 아버지가 아니예요. 그 아버지는 그저 무게만 잡고 징계할 때 나타나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라 그런 엄격함과 함께 그 모성애와 부성애가 혼합되어 있는 것 같은 어떤 때는 마치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아요. 전혀 느끼지 않는 모양이예요.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어머니의 사랑 아니죠. 글쎄 뭐 특별한 아버지는 다르겠지만 아버지는 때리면 그만이죠. 그리고 그런 것을 내색을 안해요. 얻어마진 아이 종아리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약을 발라주는 사람은 어머니죠. 그죠. 그렇잖아요. 이렇게 말하니까 누눈가 나는 내가 발랐는데요. 그러더라구요. 불행한 사람이예요. 어머니죠. 저는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그 묵상 할수록 정말 어떤 때는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어요. 한 번도 그렇게 불러본 적은 없지만은 어쨌든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느끼는 아버지의 이 부성애가 원래 그러한 부성애여야 되거든요. 우리가 아버지를 느끼면서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에는 그런 부성애여야 하거든요. 그런데 뭔가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외곡된 이 세상의 구조 속에서 그 아버지의 사랑이 굴절된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복원해야지요. 이제 그래서 그런 아버지에요.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그러면서 선지자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예요. 몽둥이 들고 나타나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라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자기 백성을 징계하심시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의 백성의 죄를 향해 분노하시면서도 그 죄로 말미암아 형벌받아야 할 자기의 백성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 백성들이 정결하지 못하고 부정하기 때문에 당신 앞에 나아오는 것은 허락 할 수 없으면서도 결코 자기 앞에 나아오지 않는 다는 이유 때문에 그 백성들 버리실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요. 그러니까 묵상을 많이 해야해요. 우리 아버지들 가운데는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가 별로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볼려고하면 안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진짜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가를 볼려고 해야되요. 아버지들은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요. 그리고 아버지들은 자기가 그런 아버지가 될려고 노력해야되요. 정말이예요. 우리 아버지들이 정말 제대로 살아야되요. 아버지들이 제대로 살아야지만 인류는 희망이 있는 거예요. 남자들은 전혀 고개를 안 끄덕거리고 여자들만 계속 끄덕거려요.
그러니까 그런 아버지예요. 선지자는 그거를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말이 주는 그 풍부하고도 완전한 의미를 깊이 느끼고 있었거든요. 그것을 깊이 느낀거예요. 그 하나님을 부르는 거예요.“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은 이 신앙이 결국은 쌍방적인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은총과 자비를 보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붙드는 이러한 생활이 이게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기대할 것이 없어요. 그럴 정도로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누구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분발하여서 붙잡으려고 하는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히 소유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렸던 신앙의 특권들과 축복들을 회복하고 싶어서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들이 없는거계요. 그러니까 한쪽을 향해서는 어떤 기대도 할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선지자는 오로지 택한 자기의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맺은 관계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의 상태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렇죠. 그게 뭐냐하면 한번 자기의 백성과 맺으신 그 언약의 관계를 그 백성들의 신앙의 상태에 따라서 지웠다 다시 쓰셨다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구요. 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이 진실이라고 하는 진실한 성품은 그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언약 관계에서 신실함으로 나타나요. 믿을만한 그런 분으로 나타나요. 선지자가 거기에 호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일시에 교회 안에 무엇이 강력하게 회복되냐하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 강력하게 회복되는 거예요. 무슨 의미 이냐하면은 이 하나님은 믿으면서 그저 습관적으로 아버지 아버지 부르기는 하지만은 그러나 사실은 그 이름이 갖는 참다운 의미를 잘 모르던 사람들이 이 부흥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축복, 그리고 자기가 그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된 이 한없는 관계의 행복, 이것에 대해서 눈뜨게 되는 거예요. 그 것이 부흥이 가져다 주는 효과예요.
그리니까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어떤 아무것도 그들을 위해서 행하시지 않았는데 한없이 하나님을 향해서 행복감을 갖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하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충만한 은혜속에 있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과 자기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별 감격이 없었는데 그런 부흥의 깊은 영향을 받고나면 그러면 즉각적으로 자기가 그 하나님의 자녀인 것, 주님이 자기의 아버지인 것, 이 관계 자체에 대한 무한한 기쁨과 행복, 자긍심을 갖는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님이 자기의 아버지가 되고 자기가 주님의 자녀되었다는 것에 대해 한없는 행복을 느낀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하면 그의 마음이 기쁨으로 그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갈 준비가 되어있다라고 하는 의미라 이얘기죠. 그러잖아요. 바로 그거예요.
젊은이들이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불만이 대부분 많죠. 그러나 아직도 특이하게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무한한 프라이드를 느끼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아버지가 가난하기 때문에 자기가 가난한 청소년 시절을 보내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그 부끄러움이나 고통 그런 것을 느끼지 않아요 그런걸 느끼지 않는다구요.
(예화) 군인을 아버지로 둔 어느 자매가 쓴 글을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자기 아버지를 너무나 존 경해서 더도 덜도 말고 꼭 아버지 같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 아버지는 대단한 아버지죠 그죠. 그런 마음을 갖는 아이는 자기 아버지의 계급이 무엇이든지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왜 아빠가 별자리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별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별 두개 별 세 개 그게 문제가 아니라. 뭐 계급이 별로 높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서 허드레 일을 하면서 군에서 근무한다고 할지라도 그 자식이 그 아버지의 아들된 것, 자녀된 것에 대해서 한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끼면 그것으로 충본한 거예요. 그 아버지로 인해서 그 아버지가 막 전근 다니기 때문에 오는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어. 우리집 은 가난해. 뭐 이런 것들에 대한 불평이나 원망도 없다 이거죠.
부흥이 일어나면은 그런 강력한 효과가 미치는 거예요. 그리니까 어떻게 되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실리게 되니까 삶과 모든 신앙 생활의 모든 동기가 진짜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에요. 제자리로, 전에는 교회 나오고 신앙 생활하면서 꿈은 세상적인 가치기준에 있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랑하는 거 교회와서도 자랑하고 그리고 사람들 부러워하는거 교회와서도 부러워하고 이러면서 이중적인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자녀된 것으로 충분하다. 주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나같은 인간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선택이 되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보호 아래서 살아간다 라고 하는 무한한 자긍심과 한없는 감격을 경험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 다른 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요. 그게 부흥이 가져다 주는 효과예요.
오늘 이 선지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 관계에서 워낙 충실하지 않고 자기의무를 져버렸기 때문에 인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뭔가 하나님을 향해 힘을 모으고 뜻을 모아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하고 주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시선을 모으려고 하는 이러한 신앙적인 깊은 노력과 그런 어떤 신앙의 불을 지피는 모습을 전혀 찾아볼수 없었기 때문에 이 백성들에게 기대를 건다는 것 이 백성들이 뭔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그 몸부림에 기대를 걸고 그런 몸부림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향해서 다시 은혜를 배풀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기대를 더 이상 할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 백성들을 통해서 일하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희망을 거는 거에요. 그러면서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주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떼어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를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의 상태가 이러하지만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버리실리가 없고 그리고 반드시 그 백성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배푸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정으로 부흥이 무엇인지를 알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결단코 이 땅에 있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 하나님을 향해 냉담한 상태, 그리고 무지무각한 상태, 이런 것들 때문에 실망하거나 낙망하지 않는다 이거죠. 다시 말하면 이런 얘기예요. 교회의 상태에 대해서 깊이 근심하고 염려하지 않는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참된 교회의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이고 교회의 잘못된 상태 때문에 과도하게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예요. 그걸 기억해야되요.
이 선지자가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하고 그 관계를 확인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예요. 이 백성들은 아무 희망이 없고 하나님을 다 버렸고 그리고 이제 이 백성들이 다 쇠패해서 ‘후’ 부는 바람에 굴러 날아가는 가랑잎과 같은 처지가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난 것은 아니라 이거죠. 뭐가? 하나님이 그 교회를, 그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신한 아직 이 백성들은 끝난 백성들이 아니라는 거죠. 여전히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시라.
많은 교회를 돌아보지 못했습니다만은 진짜 인간적으로 보면은 구라파에 있는 교회들이나 호주나 이런 교회들, 미국에 몇몇 교회들을 이렇게 돌아보면 진짜 완전히 하나님이 안계신 것이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런 교회도 있어요. 동성애에 빠진 목사를 교단에서 인정을해서 그 목사가 어제 밤에는 남자 친구하고 그 짓하고 오늘은 나와서 설교하는 거예요. 그 때 교회안에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하죠. 사람이 모이질 않아요. 그것은 그 교회당을 유지할 수 있는 헌금이 없는거예요. 아예 교단에서 패쇠명령을 내려요. 너무 적게 모이니까 먼 동네에 있는 그 쪽교회하고 합하고 교회 없애라. 보조를 해주다 해주다 이제 지치니까 없애버리는거예요. 그런 교회들에 들어서서 그런 교회들의 상태를 보면은 아주 확연하게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살기는 그렇게 안 살아도 믿는 거라도 분명하게 믿으면 말이좀 이상하지만은 살기는 그렇게 살아도 그래도 뭐가 옳은 것인지 신앙하는 내용이라도 똑바르면은 그래도 기대를 좀 거는데 그것도 다 잘못된 거예요. 예수님의 신성도 부인하고 말이죠. 구원에 있어서는 교리들도 다르고, 이렇게 아주 어리석을 정도로 믿는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아!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그렇게 단정하고 싶어요. 그런데 역사를 보면은 그런 교회들도 하나님이 살리시는 거예요. 그게 기적이잖아요. 살리신다고요. 그런 교회들을 그러니까 부흥의 현장만큼 하나님이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들어내 보여주는 장면이 없어요.
가끔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도 아니고 가끔 이제 그런거 있잖아요. 어떻게 하다가 난리통에 아이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그 아버지가 그 아버지가 자기를 버린줄 아는 거에요. 그 고아가 그래서 한을 품고 이제 자라는 거에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버지가 수십년 세월동안을 이 아이를 찾기위해서 몸부림을 친거에요. 그러다가 진짜로 찾는 경우가 있잖아요.
하나님은 당신과 맺은 그 관계를 백성들을 포기해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거죠. 끝가지 붙들고 계셔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런 교회를 만났을 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 이것은 교회도 아니다. 그렇게 간단히 얘기해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진리의 빛이 그 교회에 가득했을 때에 그 곳에서 우리처럼 하나님의 교회와 그 교회의 영광의 회복을 위해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갖던 수 많은 사람들을 그 교회가 길러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그러한 은혜와 긍휼을 넘치도록 그들에게 쏟아부어주시기를 우리들이 기도할 뿐이죠.
선지자가 그것을 호소하는 거예요. 간절히 호소하는 거에요. 우리도 이런 선지자의 마음을 갖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부터도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보면 돌맹이부터 치켜드는게 우리 심보거든요. 그러지 말고 잘못된 교회를 보면 볼수록 거기에는 더 커다란 은혜, 하나님의 긍휼의 부으심, 그런 부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 할 것 밖에는 우리들이 할 일이 없는 것이죠.
그 다음 두 번째는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긍휼을 기대하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 시니 우리가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된 자들이라”. 이런 고백이나오죠. 결국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진흙을 생각해 보세요. 진흙 덩어리가 녹노위에 덩어리로 올라가서 녹노를 돌리면서 손으로 진흙. 토기를 빚는 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 마찬가지예요. 누가 전해주지 않았어도 그 인간이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받은 지혜로 똑 같은 생각을 하게되는거죠.
그래서 녹노로 굴리면서 그것을 한쪽발로 계속 차면서 굴리면서 그러면서 이렇게 토기를 만드는거 아니계서요. 그릇을 그런데 그렇게 토기를 만드는데 이 선지자는 실제로 그런 광경을 많이 보았고 그리고 거기는 팔레스타인 쪽은 진흙이 굉장히 많은 동네예요. 그러니까 그 진흙에다 글씨까지 쓸정도였으니까 그만큼 점토가 많은 곳이에요. 그걸 이렇게 빚는 장면을 본것이죠. 그런데 결국뭐냐하면 여기에서 토기장이 마음대로 빚는거예요. 어떤 것은 큰 그릇을, 작은 그릇을, 구부러진 그릇을, 넙적한 그릇을, 평평한 그릇을, 네모난 그릇을, 둥그런 그릇을, 마음대로 이 토기장이가 빚어내는 것 처럼, 쉽게 얘기하면 이 백성들이 이렇게 되었는데 이제는 이 백성들에게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거에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거에요. 주님이 하실일이옵나이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거예요. 주님께 호소하는 거예요. 주님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 선지자가 하나님께 상기시켜드리면서 아울러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사야 선지자뿐만 아니라 시인들도 마찬가지고 다른 선지자도 마찬가지고 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긍휼한 성품을 자극하는 가장 강렬한 방법이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 우리르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왜 내버려 둡니까? 우리 도와 주십시오. 막 그런 몸부림치고 매어달린 그런 기도도 하나님이 긍휼의 성품도 자극하지만 당신이 게입하지 않으면 모두 명망될 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 주께 맏기오니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사실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렇게 간구하는 모든 성경의 저자들의 마음속에는 정말 대답이 없기 때문에 주님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님 앞에 원하고 바라는 바는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무엇인가 주제넘게 청구하고 하나님께 요구하기에는 자신들이 너무나 죄악되고 자신들이 너무나 비천하기 때문에 은혜와 긍휼에 호소하면서 하나님께 처분에 맞기는 그 기도,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신 성품을 자극한다는 것을 알았단 말이죠.
그래서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피끓는 몸부림으로 매달리며 은혜를 구하고 또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치 하나님 앞에 멸망당할 각오는 하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주권에 호소하면서 주님의 긍휼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우리는 진흙이고 주님은 우리의 토기장이시니 당신이 우리를 무엇으로 빚으시던지 당신의 마음이시옵나니다. 빚다가 망가지면 파기해서 버리는 것도 당신의 권한이시오니 이제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거예요.
그거 보면은 이 히브리 사람들의 이 정서가 말이죠. 나는 한국사람의 정서와 굉장히 통해요. 기가 막히게 통하고 히브리 사람들의 전통적인 맬로디가 그 거기에서 느끼는 그 뉘앙스가 말이죠. 우리나라 창에서 느끼는 그 뉘앙스하고 굉장히 비슷해요. 한이 많고 아주 우울하면서도 뭔가 깊이가 있는 그런 거라고요. 그래서 나는 구라파 사람들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경을 훨씬 잘 이해할거다. 그렇게 생각해요. 문제는 공부를 안해서 그렇죠. 공부만 똑같이 한다면은 훨씬 더 잘할 것이다 그거예요. 우리로 말하자면 그거 아니예요.
어느 외국사람이 한국의 시를 읽다가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아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 미국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글을 쓰는 가운데 그런 얘기를 했어요. 뭔냐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리이다. 영번에 약산 진달래꽃을 내가 다 따서 뿌릴 태니까 나보기가 여겨워서 나처다보는게 지겹다면은 그러면 내가 다 꽃을 뿌려놓을태니 그 꽃을 살짝 밟고, 그리고 나를 보리고 다기옵소서.
그런데 자기는 도대체 이해가 안가더래요. 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는데 왜 가라고 그러느냐 이거야 간다고 그러면은 칼을 들고 앞 길을 막아서라고 ‘못가’ 이렇게 이야기 해야지,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가라’ 그것도 그냥 가기 어려우니까 진달래 꽃으로 양탄자를 깔아줄태니까 그걸 밟고 가라. 자기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데 어느 순간에 눈을 탁 떠서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고 나니까. 그것은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서양 사람으로 말하면 칼들고 갈 길을 막아서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힘이라는 것,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부터 이 한국인의 역설적인 정서속에 깃들여있는 강한 흡입력을 느꼇다는 저죠.
그 비슷한 것들이 성경에 많이 나와요. 지금 선지자가 진짜 하나님의 처분대로 해달라는 거에요. 아무렇게나 하나님이 처분하시면 그냥 선지가는 만족을 하겠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선지자가 원하는 건 뭐예요. 오직 하나예요. 뭘 원해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그대로 해달라는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게 뭐에요.? 하늘을 가르고 이땅에 강림하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수 많은 원수들을 불의 섶같이 불사르고 불이 물을 끓임과 같이하사 그래서 산을 진동하는 것과 같이 그런 하나님의 혁혁하고 엄위로운 영광을 이 땅에 충만하게 보이셔서 이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특별한 백성이고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이 백성들을 향한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아직도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자기만이 아니라 온 땅에 있는 백성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기 원하는 그런 마음이었어요. 그거 하나 이외에는 이 선지자의 마음속에 다른 갈망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은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진실이 아니란 말이죠. 모든 것을 처분대로 해 달라고 요구하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오직하나 하나님의 은혜와 부흥을 통해 쏟아부어지는 하나님의 그 긍휼, 그래서 그 백성들을 죽은 그 백성들을 다시 살리시는 그 위대한 변화를 보고 싶어한 거예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강렬한 소원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하고 하나님 앞에 내 몸을 불사르며 주를 위해 산다고 할지라도 내가 이것을 하나님에게 청구할 수 있는 어떤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주님!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음을 내가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주권을 제발 이렇게 나타내 보여주십시오. 그래서 주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그걸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이 멧세지 속에서 우리들이 받는 것이 뭐냐하면은 오늘 이 성경 구절 뿐만이 아니라 전편에 흐르고 있는 것이지만은 특별히 이 성경 구절을 통해서 우리들이 받는 것은 뭐냐하면은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깊이 잠들어 있고 생명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이런 시대에는 소망이 뭐냐면 이런 사람이 있어야 되겠다. 이런 사람이, 그가 누구 이던지 간에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이거죠. 교회와 이 백성들의 많은 죄 그리고 교회의 깊은 영적인 어두움과 무기력함,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잠들어 있는 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낯설어하는 이 침체되고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대한 깊은 그 백성들의 이런 하나님을 향한 무감각 이런 것들을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죄를 토설하듯이 하나님과 그 백성사이에 중보의기도를 올릴 사람, 그러한 사람, 그러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죠.
여러분!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안 만나고 살아가는 때는 거의 없어요. 그러나 때로는 일상적으로 만나는 그런 하나님 말고, 특별한 하나님과의 만남과 그 은혜와 축복이 아니면 안되겠다 하는 때가 있다 이거죠. 저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해요. 뭐 금년에도 아무 일도 없었죠. 뭐 그죠. 교회가 뭐 어려움이 크고 작은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뭐 사는게 다 그렇죠. 특별한 어려움이 뭐가 있었어요. 교인들은 꾸준히 늘어났고 그죠. 그리고 또 뭐 언제 우리들이 사람들이 시험에 들어서 교회 안 나온적 있어요. 꾸준히 나왔고 그런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또 더 많은 사람들은 은혜 받았고 그러던 사람들도 다시 회복하고 그래서 예배드리고 또 우리들이 예배드리는데 하나님이 전혀 은혜 안주신날 있었어요. 거의 없었잖아요 늘 하나님이 은혜 주셨죠. 그렇죠 그리고 가고 그 다음날 기도 하면서 살다가 또 몇 사람 더 오고, 그리고 오고 이렇게 하면서 지내왔잖아요. 이거 말고 그건 일상적인거 말고 뭔가 이런 것들을 박차고 하늘로 오르는 그런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 뭔가 기억 할만한 어떤 전환점이 될 만한 어떤날, 늘상 있었던 그러한 예배가 아니라 정말 우리의 머리속에 우리의마음 속에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어떤날 그런날 좀 하나님이 주십시오.
그러면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면은 우리들이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가르칠려고 하고 우리들이 힘을 모아서 어떻게 하든지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은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지체들, 사랑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능력이 없어서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지체들, 그런 지체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베푸실 것 아니에요. 누군가가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호소하면서 주님의 긍휼한 성품을 자극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고 은혜와 긍휼을 넘치도록 우리와 우리의 교회위에 부어주시도록 간구해야될 사람들을 교회는 필요로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수일 수는 없습니다. 항상 소수입니다. 그 소수를 통해서 부흥의 새벽이 밝아오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그런 소수로 살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2. 정직한 판단과 호소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사64:9-10)
앞에서 이사야가 절망적인 자신들의 상태를 하나님께 호소한 다음에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당신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면서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든 생사가 아버지의 손에 달렸다는 전폭적인 하나님의 주권 위에 인정을 하고 난 후에 오늘 설교하려는 구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는 하는 9절과 10절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뉘어집니다. 첫째는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라고 하는 하나님께 대한 호소와 두 번째는 다시 한 번 ‘우리가 주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상기시켜드리는 것과, 마지막으로는 ‘시온과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다.’ 라고 하는 탄식! 이 세 가지로 나뉘어 지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시인은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답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더 이상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것, 그리고 죄와 악함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죄악으로 인해서 그들이 구르는 낙엽처럼 몰려다니는 것, 이 모든 황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호소의 특징은 정직함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용서, 긍휼, 은총, 사랑 이런 것들을 더 할 수 없는 탁월한 열심으로 하나님 앞에 호소하면서도,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한 백성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때문에 범죄한 그들에게 더 이상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하나님의 그러한 판단이 태도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확인시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과히 분노하지 마옵소서’ 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이 진노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그러한 진노, 은총의 사라짐, 긍휼의 메마름,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된 황량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현실이, 선지자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그렇게 하시는 것이 부당한 것은 아니다는 정직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바는,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들을 향해서 분노하시고 또 자신들이 죄악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의해서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까지, 당신의 사랑 받는 백성들에게 베푸실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잠시 감추신 것에 대해서 선지자는 정당하다고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죄악된 백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간절히 호소하는 바는 자신들이 죄인들이고 하나님이 그 죄를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영원히 기억하지는 마시고 언젠가는 그 많은 진노와 침묵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리고, 다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가 있었던 것처럼,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에 주님의 진노가 끝나는 때도 있을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직함입니다.
어젯밤에도 어느 형제가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는데 요지는, 제가 교회를 비판한다는 것이었으며 다른 교회의 예배현실을 비판한다고 분노하며 올린 글이었는데 너무 피곤하고 화도 나서 다 지워버리고 잠자리에 드려다 생각해 보니, 이 사람도 한 영혼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 여러 번 읽어보고 새벽까지 서너 시간 걸려 답장을 써서 한 영혼을 위해 올렸습니다.
그냥 버려 두면 다른 데 가서 배울 수 있습니다. 잘못된 확신에 붙잡힌 사람들은 너무 불쌍합니다. 예전에 신학교에 있을 때 핏기 없는 신학생들의 눈물이 떠올라 눈물이 왈칵 솟았습니다. 교인 한사람이 담임 목사 붙들고 상담하는 셈치며 조용히 기도하면서 답장을 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옳습니까? 다 잘합니까? 다 잘났습니까? 물론 특정한 방면에서는 잘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방면에서 잘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부족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인데 자기가 비판받기를 싫어하면 하나님 앞에 살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그러한 비판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잘못된 판단으로 이루어진 비판이라면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를 향한 비난인지 아니냐를 보지 말고,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먼저 봐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다 옳겠습니까? 다 비판받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목회 하던 교회를 향해서도 막 질책을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목양을 받은 자기 제자들에게 야단을 칩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향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정직한 것입니다. 진짜 어떠한 지적들이 우리의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느냐 우리의 현실이 정직하고 올바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우상을 숭배하고 부정한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외면하는 그런 냉전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무조건 자기 백성들을 감싸고 있거나 무조건 자기 백성을 죽이겠다고 덤비는 칼을 든 사람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기민족을 버리게 하지 않았고 자기민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눈 어두워지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정직하게 백성들의 모습과 하나님의 태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백성들의 죄는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하나님이 어떻게 그 죄를 잊을 수 있을까 했는데 선지자가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인식하는 그 자체가 정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부흥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기 전에 그들에게 놀라운 선물이 하나 주어지는데 그것은 정직하게 교회를 볼 수 있도록 눈에 비늘이 벗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각성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현실을 정확하게 알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 우리의 기도 이런 것들이 다 올바르게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설교든지 우리의 기도든지 우리의 경건생활이든지 심지어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봉사든지 모든 것이 바로 그 시점에 자기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면 다 웃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비유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집집마다 공통적인 문제로 자식들의 공부하는 것을 신경 쓰는데, 한 아이가 고2까지 놀다가 고3이 되어 달라지고 부모의 마음에 무엇인가 달라졌다는 인식을 갖게 했습니다. 인생의 중대한 문제로 아버지와의 면담을 요청해서 진지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들었더니 마지막 겨울 방학이니 스키장이 좋을까 다른 어떤 것을 하며 노는 것이 좋을까 판단이 서지 않아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모든 진지한 고민이 하나님께 감동을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돈키호테적인 발상입니다. 어떤 고민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치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으면 열정도 기도도 헌신도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1910년인가 코카사스 공산당이 제정 러시아를 쳐들어오고 민주 혁명이 일어나 쳐들어 올 때, 교회가 한 것은 축도할 때 몇 도쯤 하는 것이 폼이 제일 좋겠는가? 바늘에는 천사가 몇 명쯤 올라가겠는가? 의자의 깎는 조각은 무슨 모양이 좋겠는가? 하며 공론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두 도끼에 맞아 죽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읽어내는 연장선상에서 섬길 수도 있고 봉사할 수도 있고 그런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 좋은 대로 뭔가를 하는 보람에 교회를 다니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은 하나의 인간관계로 묶여진 그런 교회 생활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정직하게 그 상황을 볼 수 있어야 거기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이라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시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은혜, 자비, 긍휼을 다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하신다고 옛날의 조상들과 비교해서 자부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은혜 발견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생각이 나면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더 붙잡기 위한 그런 은혜에 대한 회상이어야지 하나님 앞에 방종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구실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고 이야기하는 태도들이 하나님 보실 때에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4, 5 개월 전에 부흥을 시작할 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 돌아다녀 본 사람은 그래도 한국교회만큼 살아 있는 교회는 없다고 하는데 그 말 믿지도 않지만, 왜 할 일이 없어서 우리 교회를 자기들이 말하는 성령님이 떠나버리기 위해서 보따리 싸신다는 미국교회나 이미 파장이 된 유럽교회와 우리 한국교회를 비교하니까? 도대체 밥 먹고 할 일이 없습니까? 다 죽어가고 문닫은 교회를 보면서 마지막 얻는 결론은 ‘우리는 안전하다. 그러니까 사는 대로 살자.’ 이것 아닙니까?
그러나 선지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탄한 시대를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진노 아래 있습니까?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모든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고 무역을 해서 돈을 벌어오고 나라가 제대로 운영이 되어 어디 반란이 일어나는 곳이 없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원래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이 모습이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비추소서 주님의 영광 온 땅 위에
부으소서 내게 성령의 불을
넘치소서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전하소서 빛되신 주의 말씀
전쟁이 일어나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온 나라가 피바다가 된 그런 상황이 아니라 거기에 비교하면서 그래도 낫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을 한없는 사람으로 보여주실 때 은혜와 긍휼이 확 쏟아 부어져서 그 완고하고 마른 뼈와 같은 백성들이 주님의 사랑과 넘치는 하나님의 긍휼 아래 사는 행복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행복 때문에 흐느끼며 감격하며 살던 그런 때를 연상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읽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정직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비판한 적도 없지만 굳이 비판을 했다면 잘못되었으면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아직 그런 적은 없지만 이 강단에 와서 열린 교회의 잘못된 점을 비판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지를 받고 있는 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면 순종할 필요도 없고 순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끌어내야 합니다. 강대에서..... 그러니까 설교자의 임무는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낭만을 심어주고 가슴을 부풀게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해야할 일은 아까 말씀드린 여러 가지 요인들 때문에 현실적인 자기 개인의 영적인 상황이나 교회의 영적인 상황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진리의 참된 말씀과 그 말씀의 저울에 달아본 현재 자신들의 신앙의 모습과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어서 자기들의 판단이 잘못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서 정직한 인식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자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격상 비관적일 필요도 낙관적일 필요도 없습니다. 솔직히 미리 그렇게 되는 것은 위험하고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슨 모임이든지 기도 모임할 때에 절대적으로 주의를 주는 것은 자기 감정에 따라서 기도회를 인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데 처음부터 각오를 하고 단상에 올라옵니다. 그러면 마음먹은 쪽으로 휘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어도 자기 의지 쪽의 구절만 읽고 그런 부분만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역이 이루어지는 곳에서의 교인들도 그런 경향이 심합니다.
자기의 심적인 상태가 컨트롤이 안되어서 그것을 못할 것 같으면 아예 다른 사람한테 물려줘야 합니다. 선지자는 그것이 임무입니다. 그것에 자기 사역의 최종적인 가치를 건 사람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어서 말씀의 저울에 자기 개인의 신앙의 상태, 교회의 영적인 상태, 국가의 영적인 상태를 달아서 몇 근쯤 나가는 지를 정확하게 보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성격상 목회를 하든지 친척들 가운데 죽을병에 걸린 것을 주위의 사람들이 끝까지 숨기고 죽게 하는 것은 나쁘다고 봅니다. 죽을 각오를 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죽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성급하게 하는 것은 안되지만 분명하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권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듣기 위해 온 사람입니까? 기분 좋은 얘기를 듣기 위해서입니까? 정직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까? 보십시오. 오늘 선지자는 정직하게 인정합니다. 자신들의 죄와 주님의 진노, 토기장이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인식과 정직한 고백에서 하나님을 향한 의뢰의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항상 기도할 때에 말씀을 듣거나 내가 보지 못하는 모습들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 정확한 인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그런 태도를 가져야함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주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상기시켜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고 있는 일 가운데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은 당신의 성품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성품에 대한 상기와 당신의 성품에 대한 묵상을 그렇게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묵상만큼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의 삶을 정사, 꼼꼼하게 살피게 하는 힘도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참 사랑이 많으십니다.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참 새롭구나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니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도 이상하게 증대되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묵상하며 살아가는 경우에는 사랑이 없는 포악한 삶, 용서하지 못하는 잔인함, 이런 것들이 가장 예민하게 감지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단 설탕물을 먹으면 과일 어떤 것을 먹어도 달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각이 단 것에 젖어 있을 때에는 조금만 쓴 것이라도 즉각 알아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대한 묵상으로 우리의 영적인 미각이 젖어 있을 때에는 그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바로 집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그것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놀라운 은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는 교만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즉시 그것이 거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묵상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치 못해서 그렇지 절망이나 낙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은혜를 주시고 내편이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데 안돼는 것은 그 분이 안 하시니까 안돼는 것이고, 그분이 안 하시는 것은 안 하는 것이 좋으니까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모든 것은 마지막으로 집약하면 한 뿌리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지식 거기에서 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런 것을 발견합니다. 능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굉장히 영적인 사람을 봅니다. 능력이 많은 것은 인정하겠는데 그 삶들로부터 배울 것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영적인 어떤 특질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풍부한 지식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결해야 합니다. 스펄젼이나 영적인 인물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설교를 참 많이 했습니다. 오늘 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자비 이런 것 가지고 캐고 들어가면서 다시 나누면서 수 없이 메시지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자연스럽게 휘돌면서 온 땅을 적시면서 돌듯이 하나님의 성품에서 어떤 진리를 끌어내고 그것을 가지고 물을 품어 내어 우리의 메마른 삶을 적시고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성품에 대한 설교를 듣고 나면 우리 자신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품을 묵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은 그 사람 속에 깊이 묵상되고 있으니까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으면서 조용히 명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백성입니다.’ 라는 상기시킴은 똑같은 의미에서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의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은 주님에 의해서 소유된 백성이고 이 백성의 백성 됨은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실 때에만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선지자와의 기도에 동참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지가가 그들을 중보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합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어느 정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하나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 한 사람의 악인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도 아주 큽니다. 예를 들어 아이성을 공격할 때 아간과 같은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도탄에 빠뜨립니다. 반대로 한 사람의 의인의 힘도 매우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개인으로 다루시기도 하면서 집단으로 다루시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해도 교회가 정말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면 그 교회에서 여러분들은 덤으로 은혜를 받습니다. 자신은 자기 영혼을 위해 전혀 기도하지 않는데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을 봐서 긍휼을 베푸시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선지자가 간절히 호소하면서 주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등진 가운데서 영혼 속에 어둠이 있는 사람들은 부흥을 위해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이런 일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 싫어하고 교회가 하나님 떠나고 하나님도 교회에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려고 하는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호소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한 가지가 필요한데,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자기가 백성들을 위해서 증보하는 기도가 능력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 중보자는 하나님 앞에 중보받는 사람보다 훨씬 더 온전한 사람,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의 목회를 위해서 가끔 주일에 나오고 토요일에 술 먹는 날에는 나오지 않는 사람이 저를 위해 중보기도한다면 저는 싫습니다.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 시간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연약한데 훨씬 신령하게 살고 하나님과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그 중보의 기도가 능력이 잇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지자가 주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역사 속에서 오늘날 부흥을 위해서 산 사람은 너무나 소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빛이 좋지만 완전한 빛 앞에서는 살기는 싫습니다. 어둠은 싫지만 완전한 빛도 싫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지만 하나님만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섰던 이 자리에 살 수 없습니다. 역사의 중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선지자의 심령이 어떠했을지 나는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심판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었지마는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 그래서 수없이 위기를 선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권고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 그들을 보면서 이 선지자가 깊이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 백성이 주의 백성이라고 호소할 때 그 마음은 녹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그 백성을 인간적으로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하나님도 사랑했지만 이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하고 이 백성을 향해 간절히 호소할 때 이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느꼈겠는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을 깊이 묵상하면서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한 삶의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상태가 부흥을 위해서 깊은 통증을 느끼며 기도할 수 있다면 성화의 완전에 있어서는 몰라도 영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의 상태에 있어서는 이 지상에서는 거의 갈 만큼 간 사람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 경험도 그렇게 말해줍니다. 한 사람이 진심으로, 우발적으로 한 두 시간이 아니라 무릎을 끓고 기도할 때마다 황무한 이 땅을 생각하면서 무너진 교회를 생각하면서 핍절한 영혼들과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하나니 앞에 호소하면서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에서 멀어진 그 고통을 자신이 전수 받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는 거의 이 세상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물론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있긴 있지만 주도적으로 흐르는 갈망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명에를 위해서 살고 싶고 주께서 택하신 그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고 예루살렘이 황무하게 되었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이고 예루살렘은 핵심부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스리고 있는 하나님이 늘 우선적으로 찾아와 주시기로 항상 거하시기로 약속한 그 장소, 거기가 거룩한 성읍, 시온과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가 다른 장소에서 별로 없어도 마지막에 이 장소에 불씨가 남아 있으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어지면 희망이 없는데 후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 교회가 앞으로 희망이 있는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서 열심을 내느냐? 물론 그런 것도 미래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조석변이입니다. 올해 펄펄 뛰면서 자기밖에 없는 줄 알고 교회 앞마당에 무덤을 만들어 달라고 그러던 사람들이 일년 후에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그런 것들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오히려 교회의 미래는 그런 다수의 사람들을 보는 것보다도 그 교회 안에 간절한 기도의 불씨를 간직한 사람들이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불씨만 있으면 언젠가 붙습니다.
이번에 산불의 경우에도 다 끄고 돌아갔는데 어딘가 불씨가 남아 있다가 바람이 부니까 다시 훨훨 타오른 것 아닙니까?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기 생활하고 콩가루집안이 되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막내딸 하나가 그 가슴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들어가고 나니, 이전에는 성인만 되면 집안을 뛰쳐나가려고 작정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니 가족들이 다 영혼들로 보이고 그들을 위해 아파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불씨가 하나 당겨진 것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나이와 상관없이 집안에 하나만 있으면 언젠가는 불이 붙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서도 처음에 혼자 믿었지만 지금은 다 같이 믿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또 믿었어도 지식 하나 없이 그저 다니다가 자기가 변화 받고 나니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하는 자기의 부모님이 너무 불쌍해서 가르치고 깨닫게 하여 변화 받게 하는 그런 가정들을 우리들이 발견합니다. 그것이 불씨입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마귀의 관심 대상도 되지 않습니다. 신경 쓸 일이 뭐가 있습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짓 늘 하면서 사는데 상이나 가끔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경계할 일이 없습니다. 기도를 방해하고 싶어도 하지를 않으니 방해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자기의 본업을 할 소속감을 갖지 못합니다. 웃으면서 한 쪽에서는 눈물이 나고 썰렁합니다. 마귀의 본업은 자꾸 세상에 있는 것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좋아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든지 버리겠노라고 굳게 다짐하고 교회에 다니는데 마귀가 뭐 할 일이 있겠습니까? 또 마귀가 좋아하는 일은 말씀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인데 원래 집중하지 못하고 교회 오면 자는데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주식 시세 올라가면 토끼 눈이 되는데, 말씀 시작하면 동태눈이 되는 것입니다. 방해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꼭 살게 하고 싶은 그런 삶을 살아주는 것입니다. ‘나는 저 안에 저는 내 안에....’ 자기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삽니다. 그러니 할 일이 없습니다.
예화: 이 설교를 다른 곳에서 했는데 설교들을 때는 웃으면서 몰랐던 한 자매가 집에 돌아가서 ‘너는 나도 상대 안 한다.’ 라는 말이 자꾸 생각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상대해 주시지 않는다고 했을 때에는 섭섭지 않았는데 마귀가 상대해 주지 않는다는 말은 너무 섭섭했다고 합니다.
네오나드 네이븐 힐(?)이라는 저자가 자신은 천국에서는 이름 없는 성도로 살고 싶고 지옥에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이름은 마귀가 기억할 리 없겠지만, 바울, 예수 그리스도, 이런 분들의 이름은 지옥의 게시판에 늘 공고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성도들을 유혹하러 나가는 사람들에게 가다가 이런 분들 만나면 그날이 제삿날이니 빨리 도망가든지 무릎을 꿇든지 하라고 교육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참 상상력도 풍부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교인들은 상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각자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그런 불씨들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쟁의 경험이 없지만 참전 용사이셨던 저희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면 싸울 때 상대편의 지휘관만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 찾아내서 저격수에게 지시를 하거나 저격수가 없을지라도 지시가 내려지면 수많은 사람의 총이 그곳을 향해 쏟아진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도 요동하지 않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한 사람이 쓰러지면 전선이 와해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지휘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도 마찬가지로 겨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라고 결심하는 그 순간에 마귀의 요시찰 감시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성결하게 살수록 화살을 겨누고 더 진실하게 살려고 기도 열심히 하면 화살 끝에 불까지 붙입니다. 그러면 겁나서 어떻게 살겠나 하는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방패들이 있습니다. 능히 이기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한 시대에 태어나서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 영적인 싸움터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을 위해 처절하게 섬기며 산 사람들은 신령한 세계만 누리며 산 삶들이 아니라, 이러한 자기를 유혹하고 자기를 쓰러뜨리려고 하는 수많은 영적인 도전과 계교들 속에서 산전 수전 화생방전까지 다 겪으면서 한 사람의 영적인 인물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원 산꼭대기에서 불 받고 와서 단번에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 만화스러운 생각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이 세상 나라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통치하시고 이스라엘을 시온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언약에 따라서 당신의 왕과 일꾼들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아주 사단의 적극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은 당신을 믿는 백성들을 통해 움직여 나가시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교회를 통해 움직여 나가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병들면 여러분 모두 같이 병듭니다. 교회가 건강하면 지금은 병들어도 같이 성장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설교자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100년 전의 사람인데 그 교회는 만 이천 명에서 이만 명까지 모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숫자입니다. 한국에는 이만 명 넘게 모이는 교회도 많지만 그곳은 상상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그런데 75년도에 제가 아는 목사님이 그 교회를 갔다 오셔서 너무 슬픈 상황이라고 전하셨습니다. 주일날 할머니 할아버지 70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스펄젼이 알면 얼마나 통곡하겠습니까? 거기서 그 장엄한 설교가 울려 퍼지고 노동자, 시인, 박사, 정치가, 빈부나 귀천이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75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년에 갔을 때 이제는 더 줄었겠다는 생각으로 그 교회의 근황을 물었더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 500명 이상 모인다고 합니다. 새로 오신 목사님이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로 견주면 50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것입니다. 막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정직한 생각들을 고쳐서 정직하게 하나님과의 잃어버렸던 관계를 다시 찾게 만들고, 그 분의 생명과 은혜를 다시 공급받고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에 다시 부합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힘과 기능을 소유하고 입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결정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돌아간 뒤의 텅 빈 교회당을 두고도 어쩌면 악한 세력들은 일 주일 내내 작전을 짤지도 모릅니다. 다음 주 예배에 허탕치게 만들 방도를 강구하면서......
그래서 슈 레티머라는 청교도가 ‘이 세상에 가장 성실한 종교적인 인물이 있다면 그는 마귀일 것이다. 성도들은 쉬는 적이 있어도 마귀는 쉬지 않고 자기의 교구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악한 영의 세력이 근무지를 무단으로 이탈했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말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근무지를 이탈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탈영한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화지만 마귀는 그렇게 집요하게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선지자는 벌써 기울어 가는 이스라엘 역사를 본 것입니다. 광야와 같이 황무해지는...... 그렇게 되면 안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긍휼과 자비, 황폐한 백성들이 그 교회를 가면 생명을 얻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것이 가장 커다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약간의 감동을 받는 것, 이런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선지자가 보기에는 황무한 광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고요하고 사람이 없고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고 이따금 쓰러진 짐승의 시체를 찾는 까마귀의 울음소리, 그런 것 이외에는 들리지 않는 적막한 곳입니다. 우리가 직감으로 교회의 그런 모습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죽은 것과 같은 잠들어 있는 상태를 경험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들이 오늘 선지자가 말하는 광야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이 광야가 되면 문제가 아닌데 이제 마지막 남은 이스라엘의 불씨, 예루살렘과 시온이 그 불씨가 꺼지면서 광야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예루살렘이 불씨가 꺼지고 시온이 광야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까? 문제는 그 장소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황폐하게 되어 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초막이면 어떻고 궁궐이면 어떻습니까? 내 주 예수 모시면 그곳이 하늘나라이지만 주님이 안 계시면 수입품 대리석이 깔린 곳이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화려한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거기 안 계시는데 .... 그러니까 결국에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망가진 상태 속에서 살아가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물 붓듯 부어지는 이러한 축복들이 사라져 버린 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선지자의 이러한 탄원서에서 교회의 모습을 읽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이런 상태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 힘을 다해서 애쓰지만 도저히 추수되지 않는 영혼들!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인간들의 옷자락을 붙들며 매달리지만 정말 그들을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기 위해서는,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소낙비처럼 쏟아 부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악과 불순종으로 강팍했던 마음이 우리의 울음 섞인 수많은 말로도 돌아오지 않던 영혼들이 자신의 영혼 속에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소낙비를 맞으면서 스스로 무릎을 꿇고, 그 쏟아지는 의의 비 아래서 자기가 죄인인 것과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르며 살았던 날들을 회개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쏟아 부어주시는 부흥으로 말미암은 은혜와 넘쳐나는 은혜 없이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이러한 시야를 가지고 주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호소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23.부흥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사 64:11-12)
개인적으로, 혹은 교회적으로 신령한 것을 추구하다가 낙심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기의 육체의 자랑을 위해서 애쓰는 경우에는 쉽게 낙심하지 않지만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거나 선한 일을 도모하다가 더 쉽게 낙망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부흥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몇 번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부흥을 위해 기도했는데 그런 부흥이 일어남을 보지 못한 채, 첫 세대에 기도하던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낙망합니다.
약간의 추측이 가미되기도 했지만 어떤 목사님은 이런 추측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상기시키면서 500여 형제들이 그 예수님의 승천을 본 것처럼 암시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을 때 120명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부탁하신 말씀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것들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당부를 들었을 때 500명의 사람들이 모두 들었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은 120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분 추측은, 처음에 그 명령을 받았을 때에는 모두 함께 시작했지만 불과 열흘 정도밖에 안돼는 사이에 380명의 사람은 가고 일부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점은, 신령한 것들을 추구하며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낙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에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강한 소망을 갖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것들에 대한 강한 소원은 곧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교회적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아주 훌륭하게 입증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불현듯 근심하게 되는 때가 있지요? 어느 한 순간에 내 영혼이 이러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확 밀려오면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얼마나 오래 갔습니까? 자신의 영혼에 대한 심각한 근심이 엄습할 때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심각한 결심이 오래도록 지속됩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영혼에 대한 진지한 근심을 경험하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고쳐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자신의 영적인 문제를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서 마지막 끝을 보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에 불과합니다.
마치 마라톤 대회를 할 때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스타트 라인을 출발하지만 마지막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인 것처럼 역시 이런 신령한 것들을 향한 추구도 그러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이 중간에 그만 두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지만 그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는 생각, 다시 말하면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교회의 참된 부흥 이런 것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자극들은 받지만 그러나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응답이 너무 늦다고 생각하고 쉽게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낙심의 심리를 가만히 보면 반드시 불신앙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말로는 그렇게 안 하지만 신자의 심리 속에는, 자신이 기도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 또 관심이 있으셔도 지금 내 마음이 이렇게 간절하고 애절한 것처럼 내 문제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지는 않으신다 라는 불신이 낙심의 밑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도에 있어서 깊은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깊이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기도일 것 같습니까? 종종 우리 주위에는 여러 시간을 기도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 그리고 아주 매우 열렬하게 기도하는 사람들, 기도하는 것이 전공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요즈음에는 조금 덜 한지 모르겠는데 70년대 80년대 초만 해도 기도원 다니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보통 기도를 하고 특별 기도를 하려면 기도원에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회에서 기도원을 세웠는데 교회의 교인들이 헌금한 재정보다 기도원의 재정이 몇 배가 되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헌금이야 교인들만 하지만 기도원은 초교파적인 헌금을 합니다. 그런 것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그러던 때가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만큼이 진실인가? 정말 그렇게 원 없이 긴 시간 동안을 습관적으로 기도를 많이 해서 목소리가 맛이 가 버릴 정도로 목 자체가 아예 망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영적인 사람이라는 표시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강단에 서면 권위가 있고 주눅을 들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깊은 기도의 결과인가?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점에 있어서 조국교회의 교인들이 정리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깊은 기도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정직해야 됩니다. 마치 자기가 어떤 영적인 면에 있어서 한 수 위인 것 같은 뻐기는 듯한 태도, 자기의 목소리라든지 아니면 자기의 기도의 세계 등에 대한 자부심,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깊은 기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정말 깊은 기도란 무엇인가? 오랜 시간의 기도인가? 부르짖어서 상한 목소리인가? 기도 시작할 때부터 오토바이 시동 걸고 끝날 때까지 가는 방언기도, 기도원을 전전하는 기도인가? 아니면 훌륭한 분에게 안수 기도를 많이 받아서 깊은 기도가 되는 것인가? 여러분들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정리가 되어 있습니까? 깊은 기도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은 굉장히 커다란 주제이니 나중의 문제로 접어 두고 깊은 기도의 본질을 무엇인가?
우리 교회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이상하게 기도만 시작하면 자신이 어떤 무아의 경지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스스로를 암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정말 깊은 기도인가? 결론은 ‘아니다’입니다. 그러면 깊은 기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세게 기도하는 것과 깊이 기도하는 것은 과연 같은가? 늘 쓰는 말이면서도 다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고 풀어나가겠습니다.
깊은 기도의 본질은, 기도하는 그 사람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충분히 교통할 수 있을 정도로 정결해진 나머지, 하나님의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가 유통하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이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정결해진 나머지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과 함께 유통하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깊은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께 굉장히 가까이 다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응답의 특권을 전매 특허를 낸 것처럼 그런 느낌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갖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은 옳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사야 64장을 마지막으로 하면서 이 부분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선지자가 보는 상황은 완전히 절망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다 황폐하게 되었고 영적으로 모두 피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도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읍, 성전, 성소, 특별히 거룩한 땅으로서의 참된 모습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의 불신앙과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보아도 정말 이제는 이 땅을 사는 이 백성들이 주의 백성들이고 주님의 영예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부름 받은 택한 백성의 모습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을 보든지 무엇을 보든지 간에 아무런 희망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쪽 구석에서 모두 부패해져 가도 한 쪽에서 열렬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고 하나님 앞에 자기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광을 인해 애통하고 있다면 선지자가 이렇게 절망하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면을 둘러보아도 언제나 그러하듯이 간절하게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너무나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 선지자는 아주 충분히 절망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주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선지자들의 심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이 선지자들은 영적으로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의 심정을 공유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말씀을 선포하던 때의 영혼의 상태와 기도하는 때의 영혼의 상태가 거의 교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기도의 영으로 설교하고 설교의 영으로 기도했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이 하나님과의 확연한 교통을 기도 속에서만 누린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에도 누리면서 살아갔다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고 이 본문을 봐야 합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64장 마지막에서 선지자가 새롭게 발견한 사실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터질 것 같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는 ‘억제하시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억제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엇인가 가득 차서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것들을 나오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억누르고 있는 상태가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선지자가 안 것입니다.
그러면 쏟아져 나오려는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이 억누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다름이 아닌 다 죽어 가는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넘치는 은혜와 긍휼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그렇게 만든 악한 무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입니다. 이것이 속에서 용솟음치고 폭발할 것처럼 치솟고 있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억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최종적으로 발견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하나님이 부흥을 위해서 일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그것을 본 것입니다.
넘치소서 은혜와 긍휼이 열방 중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자기 백성들을 향해 솟구치는 것, 대적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분노가 솟구치는 것, 이 두 가지는 항상 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억누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하나님께서 쏟아부어주셔야 하는데, 이 백성들의 죄악이 이것을 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없는 백성들의 냉담함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끌어 오르고 있는 이 쏟아부어주고 싶은 은혜와 긍휼을 억제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선지자가 이 깊은 기도의 영과 설교의 영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발견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이 64장 마지막에서 결국은 이런 결론 하나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은 온 세상 가득히 자기의 은혜와 긍휼을 쏟아 붓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이 세상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고쳐지기를 원하시는 분이지만, 우리의 죄악이 그것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고 그런 부흥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는 우리의 냉담함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것을 억제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가난한 마음을 갖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간절히 기도하게 하고 그러다가 쏟아 부어주시지만, 때로는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아무도 구하는 사람이 없는 그 때에 ‘확’ 하나님의 부흥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시기도 합니다. 갑자기 어디엔가 그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부흥이 안 일어났던 때라해서 그만큼 기도하지 않았던 때라고 그렇게 공식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바로 부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망이 가득 차서 백성들의 죄나 하나님을 향해 갈구하지 않는 어떤 그 반응이 없는 그러한 상태를 가지고 도저히 억제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때에 결국은 둑이 터지듯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도바울 경우가 그런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다메섹에서 가는 길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만나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데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그렇게 간절히 바란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보다는 요즈음 우리가 더 간절히 하나님 앞에 바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에는 사람의 기도에 매이지 않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개인에게 교회에게 쏟아져 부어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절대로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시대라 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버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이 식어서 더 이상 교회의 부흥이 오지 않기를 원하고 게신 것도 아니라는 사실들을 역사를 보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정말 기독교 신앙의 측면에서 보면 중세 시대의 교회를 교회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작년에 영국에 가서 굉장히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는 곳인데 거기는 말하자면 묘지입니다. 커다란 건물은 아니고 여러 왕들의 무덤도 있고 합니다. 거기서 청교도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일들이 이루어 졌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같은 것들이 거기에서 작성이 되고 굉장히 신령한 중요한 회의들이 이루어지는 그런 곳인데, 예배 드리는 장소가 있고 사람들이 앉는 좌석이 고급스럽게 되어 있습니다. 그 좌석에는 깃발이 하나씩 꽂혀 있습니다. 그것은 가문의 깃발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제가 그렇게 소수를 위해 이 교회 안에 차별된 좌석을 만든다면 받아들이겠습니까? 굉장히 부조리한 우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 당시의 문맥으로 볼 때 종교 개혁이 일어날 때 그 교회를 정말 살아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개신교로 들어오고 그러면서부터 그 교회의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교회들로 변해 갔습니다. 18세기 교회 같은 경우는 더 더욱 그러했습니다.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죽음의 기운에 가리웠던 교회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 십년 수 백년 동안 생기를 느낄 수 없던 그런 교회들, 누가 특별히 그런 교회들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도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쏟아 부어져서 교회를 확 살아나게 하는 이런 놀라운 역사를 불러일으킬 때에, 누가 그 광경을 보면서 그 옛날에 죽은 교회가 언젠가는 이렇게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해서 부흥을 부어주시는 일을 경험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거의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도 없는데도 예외적으로 마치 바람이 이리 저리 불 듯이 그렇게 계획표에도 없이 하나님의 부흥이 한 도시에, 한 국가에 밀어닥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죽어 있는 것 같더라도 그 교회의 상태를 보면서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선지자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찌할 수 없이 불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솟아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자기 백성들에게 쏟아 붓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끓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부흥에 대해 많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떻게 하면 부흥을 오게 할 수 있다라는 쪽으로는 발전을 보기가 힘듭니다. 또 그런 쪽으로 대답을 자꾸 많이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좀 이상한 부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들이 부흥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부흥이 왜 안 오는가에 대한 많은 깨달음 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흥을 많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떻게 해야 부흥이 오는가 보다는 무엇 때문에 부흥이 안 오는가에 대한 통찰을 많이 갖게 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은 터질 듯이 은혜와 긍휼을 쏟아 부어주기 위해서 끓어오르고 넘쳐 나고 있는데 무엇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누르고 있는가 거기에 대한 통찰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냉담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못 만나고 핍절하게 살아가는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께 책임을 묻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영혼이 은혜로 충만할 때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우리들이 곤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는 마음이 아프시면서 다시 우리에게 그 은혜와 사랑을 물 붓듯이 부어주고 싶어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억제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전하면 좀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까? 나 혼자만 다가옵니까? 회개할 때에 그런 느낌 없습니까? 어느 한 순간에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그러면 마치 어느 한 순간에 하늘이 확 열리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 긍휼, 은혜, 이런 것들이 확 밀려오지 않습니까? 찬송 가사 중에도 ‘강물같이 흐른다, 밀려온다’ 이런 표현들 많지 않지 않습니까? ‘쏟아진다’ 이런 것들이 대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표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자기가 어떤 불순종과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혔을 때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죄들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 때에 그 문제가 해결이 되고 나면, 조금씩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다가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느 한 순간에 탁 깨뜨려지고 와락 하고 쏟아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들이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그것은 예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면서 순간적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서 용서의 감격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확 밀려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때 우리는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찼었는데 자기가 곤고하게 살 때에는 물 한 방울 안 나오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탁 터지고 나니까 그 물이 자기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 밀려 와서 자신을 해갈시켜 주는 정도가 아니라 흠뻑 적시는 것 같은 그런 경험을 합니다. 우리는 그때에 “아! 나의 죄악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 큰 은혜를 가로막았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 마음을 선지자가 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이 당장 일어나지 않는 다고 해서 하나님도 마음이 없으신 것처럼 그렇게 생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흥에 있어서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은 신앙적인 숙명론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한 번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곤고하고 힘들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할 힘도 없고 하나님께 매달릴 용기도 생기지 않을 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침체 속에 있을 때, 하나님도 나를 잊으셨나봐 이제는 내가 너무나 범죄 했고 더럽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겐 관심도 없고 멀리 가셨나봐 그렇게 생각하면 낙망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 사라진 가운데 건조하게 살지만 하나님은 터질 것 같은 가슴을 가지고 계시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무슨 문제가 그렇게 나에게 은혜와 긍휼을 쏟아 붓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가득 찬 마음,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억제하게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음식만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죄도 객관적으로 보면서 냉철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쏟아 부어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의 그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가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희망을 갖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부흥이 더디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곧 그 일이 일어날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사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뼈 빠지게 기도하다가 결국은 내 생애는 보지도 못하고 가는구나 라고 탄식하듯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데 나는 죽어도 이 기도는 남아서 하나님의 교회와 역사를 움직일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신이 그 부흥에 참여하느냐 아니면 하늘에서 응원을 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차이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령해지면 신령해질수록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면서 영원을 향해 연대감을 가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런 진리를 오늘 선지지가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제가 정말 이런 깊은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불길보다도 주님의 마음이 먼저 부어진 사람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간절히 권했던 광경이 무엇입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누구의 마음을 품느냐가 그 마음의 주인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낱 인간이고 죄인이고 수많은 한계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이 우리에게 살게 하고 싶으셨던 그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을 버리고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말은 쉽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갑니까? 우리 옛 조상들이 아주 슬기롭습니다. 지어먹은 마음이 삼일을 못 간다고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삼일을 못 갑니다. 하물며 느껴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품고 살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에게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강력하게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타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행동의 제한을 받는 것은 노예입니다. 신자의 삶을 가장 강력하게 움직이는 것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자유로운 행동에 제재를 가할 때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말을 근거로 하면 그저 하던 일을 멈출 수 있는 마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뭔가 찜찜한 일을 행하려고 할 때 주님이 이 일을 기뻐하실까 라고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이것이 불순종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늘 느끼면서 사는 길입니다. 이런 자기 반성과 이런 것들이 불 받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짐승 같은 사람에게 불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럴 리도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는 그런 고통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에 의해서 억제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 이 선지자의 마음이 진짜 자기도 그렇게 억제하기 힘든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그 은혜와 긍휼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쏟아 부어 주셔서 자기 백성을 자기 백성답게 만들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그 분의 마음에 가득 찬 부흥의 소원과 샘솟듯이 쏟아 부어져 온 땅에 가득히 부어질 그 은혜를 백성들이 가로막는 것입니다.
누구도 억제하고 계신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드리려고 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 그 열망하는 하나님과 냉담한 백성 사이에서 선지자의 마음은 정말 억제할 수 없이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영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선지자가 낙담하지 않고 계속해서 부흥을 위해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흥을 위해 기도하다가 낙심하거나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다가 주저앉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그 부패성과 불신앙 그리고 그것을 계속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할 이 삶의 무거운 무게, 이런 것들을 거부하는 자기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문제들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모두 꿰뚫어 보고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뒤편에 보면,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선지자는 그렇게 이 쏟아 부어질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가득찬 은혜와 긍휼 그러나 백성들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억제되고 있는 하나님의 그 부흥에 대한 욕구를 보면서 선지자는 심한 괴로움을 당한 것입니다.
저는 살아 있는 신자의 중요한 영적인 특징은 자기 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참 잘 살고 있으며 감사할 따름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는데 그 감사가 지나친 나머지 갈망이 없는 것은 감사가 아니라 자부심입니다. 그것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그저 감사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저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용어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부심입니다. 이 두 가지의 정서가 항상 공존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열매도 많고 은혜를 받고 이렇게 충성스럽고 이렇게 순종하고 진보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눈을 돌리면 “내가 좀 더 정결했더라면, 내가 더 많이 깨뜨려졌더라면, 그렇게 철저하게 순종했더라면, 내가 마지막까지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 다 내려놓고 완전한 순종으로 나아갔더라면 이보다 더 많이 감사 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한 쪽으로는 넘치는 감사와 함께 더 큰 감사를 못하도록 가로막는 이 잘못된 자기를 함께 볼 수 있는 탄식이 동반된 감사일 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령한 감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끝나는 것은 “저 좀 보세요. 얼마나 사람이 괜찮습니까?” 말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런 식의 시야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기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모두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 시온을 보건 예루살렘을 보건 예루살렘을 성전을 보건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기 않았습니다. 희망이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깊은 영교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크게 깨달은 사실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이 없는 백성인 것처럼 모두 파리해져 갔으나, 폭발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터질 것 같이 가득 차 오르고 있다는 것을 , 백성들이 반역하면 반역할수록 이것을 더욱 용량을 가득 채우면서 차 오르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선지자는 한 편으로는 미래에 일어날 위대한 일들에 대해서 가슴이 두근거리며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겠지만 또 한 편으로는 심히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제 중요한 것은 은혜와 긍휼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부흥의 계획을 하나님이 품으신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이 땅에 놀라운 은혜와 능력의 역사를 부어주셔서 죽은 자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실 것이라는 성경에 누워 있는 약속만을 가지고는 충분히 기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선지자가 필요한 것은 ‘히어 엔드 나우’ ‘여기 그리고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 조상의 때나 우리 자손들의 때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때, 이 대륙이나 저 대륙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있는 우리들이 모여 있는 바로 이 장소에서 하나님의 부흥을 부어 주시지 않는 것이 마음속에 심한 고통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 버렸으면서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사라진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들이 얼마나 핍절한 지를 모르는 사람들, 수치를 교만으로 바꾸고 진리를 시대의 정신과 교환한 채 그렇게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 핍절한 수많은 영혼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터질 듯이 치밀어 오르는 은혜와 긍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죄와 이 땅의 불순종으로 그 하나님의 마음이 폭발해서 우리에게 끓어 넘치지 못하도록 억제하게 만드는 죄악들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 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리라
영적으로 볼 때, 결국 아주 극단적인 의미에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깊이 들어가다 보면 결국 그리스도인의 최종 선택이라는 것은 둘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부흥이 임하는 하늘 아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살든지 부흥이 아직 오지 않는 하늘 아래서 그 부흥을 기다리며 서럽게 울며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크게 두 가지로 대두(?)되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는 지금 후자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물 붓듯 쏟아져서 패역한 수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포도원에 훌륭한 포도나무가 되고, 비가 오기를 그치고 이미 포도원이 되기를 포기한 수많은 땅들이 새순이 돋고, 나무 가지가 움터서 아름다운 열매들이 가지마다 뻗어 나가 결실하면 그런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선지자로 하여금 이 부흥을 향한 하나님 앞에서의 이 간구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처절하게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 할 말은 많지만 64장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겠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 겠습니까? 우리는 정말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래도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빛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빛이 싫어서 어둠 속에 살기는 하지만 인생의 참된 목적을 오해할 정도로 어둠 속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빛 가운데 살고 싶어도 그 빛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어두움이 싫어도 어두움 밖에 다른 세상이 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 어두움에 매여 어두움을 운명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처지가 다행스러우면 다행스러울수록 우리는 많이 빚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빚지고 주님의 은혜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빛 가운데서 쏟아지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가 아니고 진리의 빛 가운데서 경험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은 빛과 열이 함께 경험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은 받았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받은 적이 없다는 고백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전 이번에 중국 갔다 오면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고 있는 이 복음의 빛 이 사랑의 빛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어떻게 여러분들에게 느끼게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왔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더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 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잘 믿고 우리의 인생 중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니면 누가 그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서 기도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이 거룩한 부흥이라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약간 극단적으로 보이는 결론, 은혜와 긍휼이 쏟아지는 부흥의 하늘 아래서 신령한 감격과 기쁨 때문에 울며 살든지, 아직은 부흥이 없는 이 땅에서 언젠가는 그러한 부흥을 주시기를 통곡하고 탄식하며 살든지 둘 중의 하나뿐이라는 결론을 빛이 없이 누가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잠시 지나가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가장 소중한 일에 모두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이 우리의 시대에 우리의 교회를 향해 이 땅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처절하고 터질 듯이 가득찬 그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붓고 싶어하시는 그 마음을 우리들도 함께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찬란한 부흥이 물 붓듯이 부어질 때 무슨 일인가 하며 놀라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 아!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는 그 기도, 우리의 가슴을 지나 뼈까지 사무친 우리의 오랜 원한을 하나님이 풀어주시는 때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부흥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부흥이 없는 시대를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장엄한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가득한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환호성을 부르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훼방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이 시대에 그들과 함께 살아 나가야 하는지를 배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혜로운 종들이 되어서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도록 준비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역사는 우리의 신실한 신앙을 기록해줄 필요가 없지만, 신령한 역사 속에 우리가 이러한 부흥을 향한 간절한 기도와 갈망 그것으로 역사를 움직인 하나님의 도구들로 그렇게 기록될 수 있다면 여기서 만난 우리의 만남이 얼마나 기쁜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부 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