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일어서라
(2001-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시119:81) 2001.10.7 주일오후 1
2.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창17:1) 2001.10.14 주일오후 11
3.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할 두 가지 이유(출3:4) 2001.10.21 주일오후 21
4.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1)(욘3:1-2) 2001.10.28 주일오후 30
5.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2)(욘3:1-2) 2002.1.6 주일오후 45
6. 어린아이와 같이 말씀을 사모하라(벧전2:1-2上) 2002.1.6 주일오전 56
7. 성화의 구원에서 자라가라(벧전2:2下 ) 2002.1.13 주일오전 68
8.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자의 의무(벧전2:3) 2002.1.13 주일오후 80
9. 완전한 도, 정미한 말씀(삼하22:31) 2002.1.20 주일오후 89
10. 나그네 인생길의 노래(시119:53-54) 2002.1.27 주일오후 95
11. 말씀으로 후대해 주시는 하나님(시119:17-18) 2002.2.3 주일오후 104
12. 나그네 인생길의 위로(시119:19) 2002.2.10 주일오후 112
13. 영혼이 소진되기까지 사랑한 말씀(시119:20) 2002.2.17 주일오후 121
14.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긍휼(시119:131-132) 2002.2.24 주일오후 130
15. 고난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말씀(1)(시119:71) 2002.3.3 주일오후 138
16. 고난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말씀(2)(시119:71) 2002.3.17 주일오후 150
17. 고난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말씀(3)(시119:71) 2002.3.24 주일오후 159
18. 고난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말씀(4)(시119:71) 2002.3.31 주일오후 167
19. 고난 중에 받은 위로(시119:92) 2002.4.7 주일오후 178
20. 말씀의 미각을 유지하는 비결(시119:102-103) 2002.4.14 주일오후 184
21. 기도 중에 말씀을 바라라(1)(시119:147) 2002.4.21 주일오후 191
22. 기도 중에 말씀을 바라라(2)(시119:147) 2002.4.28 주일오후 199
23. 고통 속에서 주의 판단을 인정함(시119:75) 2002.5.5 주일오후 208
1.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을 도우시는 하나님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119:81)”
오늘부터 사경회를 앞두고 주일 오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구원해 주신 것들을 한번 증거 받아 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119편 81절에는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고 하는 시인의 체험적인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시편에서 나의 영혼이 무엇을 한다고 하는 표현은 자주 나오는 표현인데, 그 표현이 갖는 의미는 ‘내가 하나님을 찾는다’ 아니면 ‘주의 구원을 사모한다’의 진심으로 한다는 표현의 극상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즉, 이인화에서 ‘나’라는 존재가 따로 있고 내 안에 영혼이 따로 있어서 그 영혼이 무엇을 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진심으로 한다고 하는 것의 극상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에서도 자기가 찾는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영혼이 찾는다고 얘기합니다. 즉 자기가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는 것에 대한 최상의 표현을 내 영혼을 무엇을 한다고 해서 자기와 영혼이 별개인 것처럼 묘사하는 문학적인 수법이 진심으로 그것을 한다는 것에 대한 극상의 표현입니다.
아침 설교에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이 마음이고 그 마음은 우리 심령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씀드리면서 우리의 삶과 인격 모두를 움직이는 심령의 중심성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다고 할 때 바로 그런 고백인 것입니다.
시인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을 통해서 구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의 깊은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간절해지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황적으로 굉장한 어려움에 둘러싸여서 곤란을 당하고 있고 고통을 당하고 있고 대적들에게 둘러싸여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한 분께로부터 오는 도움 이외에는 곤경에 처한 자기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에만 목을 매고 그 하나님의 도움만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을 하다가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여 전멸될 위기에 몰려있는 군인들이 응원군을 기다리는 것처럼,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고 이제는 도저히 자력으로는 일어설 수 가 없어서 천사와 같이 나타나서 자기의 기업에 투자해줄 투자자를 기다리는 기울어진 기업의 경영자처럼, 그렇게 시인은 간절하게 자기가 처해있는 이 역경의 상황에서 하나님만이 자기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그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집중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에서 사모한다는 말은 히브리 성경에 없습니다. 보역인데 적합하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향하여 내가 지쳐있습니다’라는 뜻인데 읽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여’, 혹은 ‘하나님의 구원을 응시하느라고 내가 피곤합니다’라는 뜻으로 썼습니다.
그러니 의미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향하여 내가 지쳐있습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만 구원이 오는데 그것만 전심으로 기다리기에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는지, 집중된 그 마음이 자기를 피곤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토속적인 한글표현으로 하자면 ‘눈이 빠지도록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집중된 마음으로 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만을 갈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될 때 -물리적인 환경의 문제이든지 영적인 문제이든지 마찬가지로- 이런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세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간절함은 이러한 집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 처했을 때 그 곤경을 극복할 수 있는 방도가 얼마든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깊이 신뢰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들을 정결하게 정화시키시기 위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으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예화)개척을 하거나 선교사로 나가려고 하면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많으나, 막상 개척을 하고 선교사로 나가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참된 신앙,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예화)자기의 기억력에 실망해본 적이 없는데, 그것은 한번도 자기의 기억력을 믿지 않았기 때문 이라는 어느 선교사의 말.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존경하고 우리가 돌봐줘야 하고 관계 속에서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해야지 너무 믿으면 상처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의심하면서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사람이 우리를 실망시켰을 때 우리는 즉시 ‘하나님 한 분만이 신실하시구나’하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실망해서 신앙생활 못한다는 사람은 다 핑계입니다. 자기도 실망시키는 사람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실망시키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신실하시다’고 찬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정화시키시기 위해서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을만한 도움을 다 끊으십니다. 외톨박이로 만드십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직접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 처해서 기도하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데를 다 두드려보는데 다 막혔을 때, 그 때는 하나님이 직접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그러니까 곤경 속에 처해있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곤경 속에 처해있으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생각하고 무릎을 꿇으면서 “하나님 저는 주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고 기도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해볼 것 다 해본 다음에 정말 안될 때 기도합니다. 그렇게 두드려 봐도 사방이 막혀서 도저히 움치고 뛰어지지 않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는 ‘아,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도와주시겠다는 사인이구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그냥 도와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어려움을 처했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받는 것인데, 사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라기 보다는 도와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새 마음 새 심령 새 삶을 가진 새사람으로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인해서는 약해지게 되어있습니다. 사모하고 그리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약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곡히 매달릴 때 우리의 마음이 약해지고 가난해져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을 갖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때로는 모든 도움이 끊어진 것과 같은 상황으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거기서 해야할 일은 ‘하나님만이 나를 도우실 수 있으며 하나님은 나를 능히 도우실 수 있다’라고 하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도움이 단추 누르면 기계가 움직이듯이 우리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당장 이루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때로는 정말 긴 인내를 필요하다 못해 마지막에는 거의 포기할 단계에 올 때까지,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는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때와는 거리가 먼 때도 있습니다.
이 시인도 곤궁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서 한가지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나를 도울 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생애에서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만이 나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도움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시간표대로 돕지를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응시하면서 결국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자체를 갈망하다가 눈에 빠질 정도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표현하기를 ‘내 영혼이 주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기대하고 사모하고 믿고 또 믿다가 나는 이제 지쳤습니다. 너무 피곤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얼마나 쉽게 포기합니까? 우리에게는 끈질김이 부족합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그렇게 모든 면에 있어서 그런 것들이 부족합니다. 육신적인 삶에 있어서도 그런 것들이 부족합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런 끈기, 무엇 하나라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끈질김, 이런 것들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한사람의 신앙의 강인함, 그리고 거룩한 삶을 위한 그의 열정의 뿌리와도 관계가 됩니다.
(예화)악어가 먹이 되는 짐승을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이야기.
좀 흉측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옳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한번 착수하고 끝까지 먹이를 물고 놓지 않는 그런 끈질김과 강인함이 우리에게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지치고 피곤할 정도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사모해본 적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들은 굉장히 쉬운 탈출구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체념입니다. 어떤 상황이 장기적으로 계속되면 거기에 길들여져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들의 습성입니다.
시인은 그런 것들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피곤할 정도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은 시인이 생각하고 있는 때보다 훨씬 늦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치고 피곤할 정도로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인내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믿는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그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리라. 반드시 그 하나님이 나의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며 나는 반드시 그 하나님께 응답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확고한 신앙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이렇게 피곤하여 지칠 정도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사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마지막인데 이 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기다리는 태도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간절히 사모하기에 피곤해질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그리워하고 갈망했는데 그는 놀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기다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거야. 내가 믿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반드시 도와주실 거야’ 마치 졸음이 오는 사람이 무릎을 꼬집으며 잠을 쫓는 것처럼 순간 순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의심과 회의를 ‘주님이 반드시 오실 거야 . 구원을 베풀어주셔서 나를 이 곤경에서 건져주실 거야’하는 자기 암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만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표현이 여기에서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나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란다’고 하는 말은 영어로 표현하자면 ‘hope in’ ‘...에 희망을 둔다’는 뜻입니다. 초점이 흐려지는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간절히 갈망하고 어려운 곤경 속에서 사람에게로부터 오는 도움에 대한 기대를 모두 끊게 만드셔서 이제는 마치 웅덩이 속에 갇혔던 요셉이 누군가 자기를 건져주는 것 이외에 자기의 힘으로 그 웅덩이에서 나올 수 없었던 것처럼 눈을 들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만 오는 그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정작 소망을 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당신의 너무 사랑하는 자녀들을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도록 곤경 속에 넣으시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드시면서 그 과정을 통해서 그를 변화된 사람으로,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하고 고쳐진 사람으로, 새 삶에 대한 욕구를 가진 새 사람으로 그를 만들고자 하실 때, 그가 하나님이 품고 계신 자기를 고치고자 하는 의도를 깨닫는 것 없이는 변화된 사람이 되기는 힘든 것입니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도 필요하나 알아듣지 못하면 때려야 팔만 아프지 소용이 없습니다. 설교도 책망하는 설교가 꼭 필요하지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욕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어려움 속에 두셔서 하나님 이외에는 도움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들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가 변화된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하는 기대를 갖게 만드시는데,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지 만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교리는 신자가 하나님이외에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희망을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실제로 이런 공식을 가지고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절망하고, 조금 믿음이 있는 사람은 요행을 바라고, 그보다 조금 나은 사람은 기도를 세게 해서 하나님을 꺾어버리려고 생각합니다. 세게 밀어붙여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항복시키려고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전적으로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십시오. 천사와 씨름할 때에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었는데 천사가 환도 뼈를 쳐서 절뚝거리며 주저앉아서 흐느낄 때는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씨름을 해서 꺾어 버렸다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어떻게 그렇게 불경한 표현이 있을 수 있습니까? 결국 회개하는 야곱을 향해서 마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감화를 주시려고 그렇게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에 감화를 드려서 하나님 자신 속에 있는 우리를 향한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을 자극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되어야지 세게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감동시키시면 열렬하게 기도할 수 도 있지요. 그런데 성령에 의해서 감동이 되어서 열렬하게 기도한다는 것과 혈기로 기도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믿음이 아주 없으면 절망해버리고, 두 번째는 요행을 바라고 세 번째는 세게 기도해서 꺾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웅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를 많이 한 믿음의 거장들이 우리들에게 영웅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수없이 나라를 에워싼 적군들을 물러가게도 하고 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승리를 경험하게 하기도 하고 열렬한 중보기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도 하는 그 어마어마한 기도의 능력, 이런 것들을 보면서 영웅과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진정한 기도의 영웅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기도하는 가장 비천한 탄원자일뿐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기도하면서 ‘내가 한 번 기도하면 될걸?’하는 것은 믿음을 가장한 자기 과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치 기도의 세계 자체에 대해서 자기가 하나님과 인척관계가 되는 것처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어쩜 그렇게 순전하니. 너는 내 친구다’라고 말씀하셔도 자기가 돌아다니면서 ‘하나님과 나는 친구 사이야’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영웅처럼 보이는 기도의 사람들은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날 신자 가운데는 구역질나는 카리스마를 흉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화)집회에 갔는데 어떤 여성도가 손을 꽉 잡으며 “주의 심판이 가까웠습니다. 그것을 전하라고 목사님도 보내시고 저도 보내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은 겸손에 대해서 설교했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허세입니다. 무엇인가 자기를 영적으로 우월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은 고도의 기만입니다. 물론 자기가 특별한 영적 생활을 할 수 도 있고 특별히 영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건드려주시니까 영적이지 하나님이 건드려 주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아는 모든 영적인 것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런 식의 그릇된 흉내 같은 것은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눈이 새카맣고 자기만 뭔가 이들이 모르는 영계의 비밀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중의 한 수를 오늘 부흥강사로 온 너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식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삶은 약한 것이 강한 삶입니다.
약할 때 강함 주시네 주 나의 모든 것
조금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기도를 세게 해서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태도가 마치 하나님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셔서 자기를 안 도와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다 불경스러운 사고 방식입니다.
시인이 3천년 후에 경험하고 있는 이런 우리들의 영적인 오류에 대해서 정확하게 길을 잡은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헤매는 사람들은 이 시인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3천년 동안 계시가 진전되어와서 신약의 찬란한 복음의 빛 가운데 거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그것을 못 깨달아서 영적 원시인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탈출구는 곤경에 처했을 때에는 그 곤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 곤경과 상관없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업을 하다가 돈이 모자라서 위기를 만나면 돈을 꾸러 다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서 곤궁에 빠진 자기를 어떻게 다루고 싶어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전수 받으면서 그 속에서 이제껏 까지 들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기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가슴 아파하시는 우리 삶의 어떤 측면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뜨거운 사랑, 이런 것들이 예전에 잘 나갈 때는 안보였습니다. 세상에 눈이 빠지고 자기 의에 눈이 빠져서 자기 스스로 감탄하고 세상을 향해서 감탄하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이 쓸 데 없는 것들에 의해서 온전히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런 마음이, 하나님의 그런 시각이, 하나님의 그런 생각이 느껴지거나 우리에게 전수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커다란 곤경에 처했을 때, 영적으로 어려움이 왔을 때, 그래서 누구도 나를 더 이상 도울 수 없고 나 혼자 외톨박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때, 그 때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향해 직접 일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 어려움과는 동떨어진 것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일하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커다란 어려움을 당하고 하나님을 찾을 때, 그 때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나면 사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 나의 곤궁에 빠진 이 상황은 서로 연결점이 없는 것 같았는데 신기하게 거기에서 연결점을 발견하면서 결국은 곤궁에 처한 나의 상황과 나를 고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삶의 밑바닥에서 하나가 되어 흐르고 있는 계획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쳐지면서 내 상황 속에서 나를 건져내셔서 하나님이 나를 이끄시는 놀라운 광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오려고 애쓰는 모습이 불쌍해서 칼로 조금 잘라 빼버렸더니 오히려그 자리에서 죽게 되었다-나오려고 날개 짓을 하며 애를 쓰는 동안 그 고통의 과정을 통해 원숙한 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주의 도움과 은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몸부림을 칠 때에 그런 마음의 변화의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보면 똑같은 말씀도 같지가 않습니다. 찬송가를 넘기다 보면 완전히 쭈글쭈글 거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부르다가 얼굴을 묻고 운 것입니다. 그 때는 그렇게 불렀던 찬송이 왜 지금은 안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의 마음이 정말 가난하고,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주님이 나를 빚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불붙는 마음을 느끼면서 나를 열고, ‘나를 고쳐주시옵소서’하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던 때와 그렇지 않고 일상적으로 말씀을 대하던 때와는 현저히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생애적인 변화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면, 별다른 말씀을 들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를 다루실 때에 하나님 앞에 노출되어있는 자신의 마음이 평상적인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은 곤궁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진심으로 갈망하고 너무나 갈망하기 때문에 자기는 지쳐서 쓰러질 것 같은 피곤한 상황인데도 하나님의 그 구원을 나의 영혼이 사모하면 사모할수록 ‘내가 전념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희망을 걸고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하는 것입니다.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은혜를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은혜를 간절히 알기 원하네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너나 실컷 사랑 받아라’하며 신앙에 대해서 무관심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인생이 정말 곤경 속에 처해서 사람으로부터 오는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희망이 끊어지고 이제는 웅덩이에 갇힌 요셉처럼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처럼 하나님 한 분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하나님을 응시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감동은 참 큰 것입니다.
인자가 무엇이관데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자기가 곤경에 처한 상황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돈이 필요한 것이고 건강이 필요한 것이고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해서 복 받는 것이고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그 어려움 속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지만 동일한 어려움에 다시 빠질 수 있습니다. 걸어가는 길 자체가 바른 길이 아니니까 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고난 속에서 자기에게 찾아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 받은 사람은 자꾸 빠지는 그 길을 안가고 다른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버리고 자기 혼자 불순종하며 가던 그 길을 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걸어가기 원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놀랍게 바꿔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우스운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상황이 어느 때인데, 지금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을 때인가’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크고 안타까운 기도의 제목, 곤경에 처한 어려움 속에서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하나님을 찾다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너무나 놀랍고 감사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를 고치시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딴 짓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도 시원치 않는데 한가하게 은혜만 받고 있는 것인가’하는데,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주님이 고쳐주시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인생에 목을 매고 부르짖어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놓으시는 경우를 많이 보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러면서 우리는 정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필요한 것을 아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지식은 완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다고 하시면 좋은 것이고 하나님이 나쁘다고 하시면 나쁜 것입니다. 실험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실험해보면 과외비만 자꾸 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처한 삶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상황이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가 주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긍휼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다가가셔서 베푸시는 영혼의 놀라운 회복은 더더욱 우리에게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영혼의 회복 없이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생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회복시키시는 방법은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오직 하나입니다. 이 시인이 시를 쓴 것과 오늘 우리들이 이 시를 설교 듣고 있는 것 사이에 3천년의 세월의 격차가 있습니다. 그 때 그 영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회복의 은혜와 축복을 다시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3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신실하신 성품을 주의 진리를 통해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대해서 목말라 하며 한편으로는 그 곤경과 어려움을 통해서 나를 빚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 앞에서 복종하며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다시 살리시고 곤경에서 자기를 구해내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자기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신실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이 가을 기도학교 사경회에 정말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저도 은혜를 많이 받고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들이 깊이 은혜를 받고 여러분의 삶의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여러분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늘 여러분들이 마음속으로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깊이 사랑하는 지체들까지라도 깊이 말씀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나서 곤궁한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도우심밖에 희망이 없었던 사람들이 그 말씀의 은혜 안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그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를 빚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실제로 경험하는 놀라운 회복의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주저앉았던 모든 신자들이 다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선하신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며 이제껏 살아왔던 신앙의 날들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변함없이 우리를 향해 신실하게 은혜를 베푸셨는지, 늘 하나님 앞에 이중간첩같이 야비한 삶을 살았어도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언제나 동일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여러분들의 인생을 다루어 오셨는지를 회상하면서, 정말 이제는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면서 사는 것 이외에는 일체의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주님만이 이 생존세계에서 나의 유일한 분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의 고백과 같이 여호와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영혼이 피곤하여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소망을 가지며 그 안에서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에게 2001년도 방배동 열린교회에서 하는 마지막 이 기도학교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실패와 한숨, 낭패와 좌절, 어리석음과 무지,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여기에 모두 묻어버리고 정말 변화된 사람으로 남은 한해도 충성스럽게 살아서, 아니 남은 생애도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서 주님의 마음에 큰 즐거움을 드릴 수 있는 아주 좋은 성도들로 변화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2.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
창세기 17장에는 아브라함이 구십 구세 때에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6장과 17장 사이에는 무려 13년이나 되는 세월이 흐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기록할만한 일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처음 부르심을 받은 후에 그의 일생은 그의 후손이 될 다윗이나 요셉 못지 않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온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16장과 17장 사이에는 13년이라는 하나님의 긴 침묵이 시작됩니다.
그 긴 세월동안 아마 아브라함은 부지런히 살았을 것입니다. 목축도 하고 자기 일을 하면서 살아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기는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 죽은 자와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하나님 앞에 죽은 자와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을까요? 여러분에게는 이런 때가 없습니까? 살기는 살지만 삶에 아무 목적이 없는 것 같고,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 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어떤 인격적인 만남도 없고 기도의 문은 닫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그런 속에서 지내는 긴 세월이 여러분에게는 없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긴 세월 동안 동행하시던 하나님과의 동행이 끊어지고 홀로 버려진 사람처럼 그렇게 13년의 세월을 지나야 했던 것은 이스마엘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네 몸에서 태어나는 씨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고 구체적이고 뚜렷하게 약속을 주셨지만, 아브라함은 불신앙으로 인하여서 첩인 하갈의 몸에서 소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불순종에는 신앙심이 부족하던 아내 사래의 충동이 매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래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부르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우유부단한 가운데 사래의 충동을 따라서 불순종한 것을 그대로 아브라함의 것으로 여기시면서 아브라함의 가족과 가문은 물론 아브라함 자신에게도 13년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시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상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은총으로 말씀하시지 않는 상황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땠을까요? 동행하던 하나님과의 만남이 끊어진 아브라함의 13년은 어떤 인생이었을까요? 성경에 기록할 필요가 없는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살았다고 해서 모두 산 것이 아니고 죽는다고 해서 모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그 자리에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 같아도 주님이 그 자리에 계시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죽는 것 같아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13년의 침묵을 깨고 구십 구세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은 백세에 낳을 이삭을 하나님이 지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이미 노인이 다 된 사래와 아브라함의 몸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씨인 이삭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우선 첫째는 구십 구세 때에 침묵을 깨고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보면서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팔십 육세 때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끊어진 후 1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는 하나님이 다시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뉘우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회개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나 이야기들은 거의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아브라함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끊어진 지 13년이 가는 긴 세월이 흐른 후에 주님이 찾아오시는데 이것은 그 주님과 불순종한 아브라함과의 만남을 하나님 자신이 주도하신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의 자녀들로 하여금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실패한 자들을 불러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고 주저앉은 자를 다시 일으켜 세워서 새로 시작하게 하십니다. 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사람들을 불러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바지했던 모든 사람들 중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순종하면서 일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불세출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육신의 혈기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해보고자 하고, 그리하여 사람을 쳐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을 때 하나님이 그를 다시 부르셨으나 완강하게 부인했습니다. 그것은 곧 그가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세의 성격은 하나님이 쓰시는 가운데서도 불쑥불쑥 나타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혈기로 하나님의 일을 그르친 모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새로 이스라엘의 지도자, 해방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보는 이 아브라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내의 충동을 따라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눈에 보이는 인간의 희망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이 사람에게 다시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까?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니느웨로 가도록 명령을 받았던 요나는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신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고 커다란 물고기 배속에서 죽을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훌륭하게 일하고 주님의 뒤를 이어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베드로와 그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돌이켜서 하나님이 다시 기회를 주신 사람들의 대명사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교회를 대적하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망가진 사람들을 다시 고쳐서 사용하시고, 불순종하며 먼길로 떠났던 죄인들을 다시 부르셔서 새롭게 기회를 주셔서 사용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서 인간의 많은 허물과 죄된 그의 일생을 통해서 그를 다시 고쳐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3년의 긴 세월을 어둠 속에서 지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아직 어린 신앙이었다고 봐야지 옳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경험하게 된 것은 겨우 12장에서의 일입니다. 5장을 지나오는 동안에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경의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22장의 모리아 산에서 자기의 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그 신앙에 비하면 이 16장의 신앙은 어린아이에 가까운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깊이 만난 것도 몇 번 되지 않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13년이라는 세월동안 대면하기를 마다 하셨을 때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신앙생황이라는 것을 거의 포기한 경우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으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일평생을 우상이 들끓는 갈대아우르에서 살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와중에서도 그는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살아가고 있는 그 시대의 평범한 한 아들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김없이 찾아오셔서 다시 그에게 말씀하심으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아브라함과 같은 지경에 있지는 않습니까? 너무나 긴 세월동안 영적인 침체가 계속되어서 이제는 별다른 신앙의 회복의 소망마저도 모두 끊어진 것 같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속에서 주님을 만나던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자기 암시에 빠져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오늘 소망을 가지십시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1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하나님과의 만남이 끊어진 속에서 살다가 신앙을 거의 포기하게 된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헤어진 그 지점에서 다시 관계를 시작하게 되신 것입니다. 옛날에 아브라함과 처음 관계를 시작하실 때 말씀으로 그 관계를 새로 시작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하나님은 오셔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심으로 끊어졌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아브라함과 맺은 그 언약을 다시 기억하셔서 그를 하나님 앞에 소중한 사람으로 세워주시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 앞에 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이런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도움 없이 주님께로 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까?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 나타나셔서 다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는 결코 새로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물론 여러분들에게는 다양한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도 종류가 여러 가지일 것이고 원인도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고통하고 갈등하는 상황도 단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제가 다 모르고 여러분의 고통이 무엇인지 제가 다 기억할 수 없어도 한가지 분명한 대답이 제게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어떤 문제에 있든지 영혼이 어떻게 침체되고 어떻게 갈급하고 어떻게 여러분들의 영혼이 고통받든지 주님을 만나면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13년 동안을 어두움 속에 지낸 아브라함, 회개한 기록도 별로 나타나지 않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당신의 신실한 언약의 관계를 보이신 주님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잊었으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잊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새로운 기회를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경회를 통해서 여러분들은 그렇게 주님을 새롭게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되고 유일한 소망은 그렇게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가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님의 손을 붙들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과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서 이렇게 긴 세월동안도 우리를 만나주시지 않으셨는데 이번에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나의 영혼의 침체는 회복이 되기에는 너무나 깊은 침체야’ ‘이제껏 내가 살고 지어온 많은 죄와 불순종이 너무나 커서 하나님이 그렇게 가볍게 나를 만나주실 수 없을 거야’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교차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창세기 17장의 아무 의도 없고 공로가 없는 아브라함, 그리고 13년 동안이나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사건을 우리에게 기록하셔서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말 여러분들은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과 은혜의 때가 그립지 않습니까? 처음 사랑의 때, 은혜의 감격이 있고 주님이 아니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무 소망이 없었을 것 같은 그 때, 기도를 하면 눈물이 쏟아지고 주체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이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 감격의 때가 그립지 않습니까? 언제어디서든지 주님이 동행해 주시는 것이 느껴지고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그 완전한 합일의 기쁨이 다시 여러분 속에 회복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믿음을 가지셔야 됩니다. 아브라함도 찾아오셔서 다시 만나주신 하나님이 이번 사경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게 찾아오셔서 만나주셔서,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던 그 수많은 장벽을 허무시고, 이번에는 다시 하나님의 참사랑과 은혜를 받아 주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내 생애의 새로운 출발의 한해가 되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처음 하신 말씀이 아브라함과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 만나기를 기대해야 할 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자기를 계시하시는 이 말씀은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13년 동안 하나님이 가슴에 묻어두셨던 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란다. 얘야 나는 아무 것도 못할 것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이란다.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노라고 언약을 했거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믿지 못하고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아 너의 유업을 잇게 하려 하느냐?”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아내의 말을 듣고 하갈에게서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한 불신앙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우리로 하여금 두 번째로 보여주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머릿속으로 계산했을 것입니다. 사래는 더 많이 계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너에게 네 몸에서 나의 씨가 너의 후손이 되어서 그 후손이 퍼져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리라”고 주님이 이상 중에 말씀하셨을 때 처음에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 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은 점점 작게 느껴지고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늙었고, 내 아내도 늙었고, 이제 내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이 몸에서 씨가 나오겠는가. 언제 그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내가 내 할 일을 하여 이 세상 사람들이 첩의 몸에서 아들을 낳아 자기의 유업을 잇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하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하늘에서 들린 하나님의 약속이 크게 느껴졌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약속은 희미해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풍속이 그의 마음속에 더 크게 역사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실패는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마음을 먹으시고 의지를 가지시면 능력이 모자라서 하실 수 없는 일은 그분에게는 없으시다’ 이러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기 때문에 저지르게 된 불신앙이요 그 불신앙은 13년의 긴 어두움과 침묵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을 어두움의 터널 속에서 하나님 없는 13년의 세월을 지나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회복된 믿음을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우리는 능력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전의 믿음은 예전에 우리들이 인생을 사는데 도움을 주었고 오늘을 사는데는 예전의 믿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나의 신앙,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그분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그 약속을 믿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행길을 운전해서 가는 것은 그만큼 사고의 위험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주의력이 분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지판을 보고 지형지물을 보면서 차를 타고 가기 마련입니다. 가는 사람은 다른 것에 관심이 없고 오직 중요한 것은 표지판입니다. 그러나 가끔 표지판이 잘못되어 있는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런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을 때에 낭패를 보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처럼 불변하시는 진리요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맡기고 의지할 유일한 표지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약속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때는 그 약속이 그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크게 다가오고 기도할 때에 주님이 주신 응답이 자신의 마음속에 크게 다가오지만, 어느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서 상황이 주는 메시지들이 들려오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점점 불확실해 보이고 눈에 펼쳐지는 상황은 점점 크게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게되는 것과 불신앙을 택하게 되는 순서는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없이 오랜 세월을 살다가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 어떤 현상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벌어집니까? 하나님 없이 살 때는 세상 일-사업하고 돈벌고 직장 다니고 승진하고 아들 딸 낳고 살아가는 것들-이 자기 관심사의 전부로 느껴져서 자기의 영혼의 문제라든지 영혼의 상태라든지 하나님의 교회라든지 하나님의 음성이라든지 그 잃어버린 은혜의 세계 라든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회복 될 때쯤에는 커다랗게 그 마음속에 차지하던 세상에 대한 생각들은 점점 작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마음속에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이 살고 싶다고 하는 소망,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염려들이 점점 크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은 점점 커서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고는 내가 도저히 살수도 없고 도저히 죽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만나서 나의 이 영혼의 문제, 신앙의 문제의 해결을 얻기까지는 자기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무런 낙이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주님이 저를 만나 주시든지 생명을 거두어 주시든지’라고 기도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항상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당신이 마음을 먹으시면 무슨 일이든지 우리를 위해서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약속이 믿어지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주님의 자녀를 삼으셨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자기의 외아들을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여러분들과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믿는 데 있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지만 주님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시고 값을 지불하시고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을 사셨습니다. 여러분 한 영혼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는 너무나 소중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머리에는 자기 아들의 피가 발리어졌고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하나님 아버지는 목격하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그의 피로 사신 백성들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소중하고, 그렇게 소중하게 여러분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로 타이르고 안되면 때려서라도 사람이 되게끔 만드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13년 동안 하나님 없이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찾아오셔서 다시 말씀하시고, 그의 영혼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으니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부족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매순간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날마다 날마다 전능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내가 그분을 찾으면 그분은 나에게 나타나실 것이며 내가 그분의 얼굴을 구하면 주님은 자기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실 것이요 무엇이든지 그에게 구하면 그가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이 믿음을 회복하고 신앙의 감격 속에 살면서 다시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하고 오히려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바라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믿음의 회복을 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완전은 흠도 티도 없는 완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그 어린 신앙을 가진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완벽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여기에서 지적하신 것은 16장에서 하갈이 아브라함과 나눈 대화와 그 후에 이루어지는 범죄의 과정들을 모두 보면 아브라함의 저항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완전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완전하지 않지만 완전 하려고 얼마나 몸부림치는 지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음을 하나님 앞에 입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커다란 정치적인 압박과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억지로 하갈에게로 들어가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까? 아닙니다. 16장 전체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주도하는 사람은 사래요 거기에 타의적으로 이끌려 가는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끌려 가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불신앙의 요구에 대해서 거절하고 항거하는 믿음의 분투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이것이 매우 슬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불 가운데서 나타나시고 놀라운 은혜 가운데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독점적으로 사랑하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려고 그를 택하셔서 이제껏 인도하신 하나님이셨기에 아브라함의 이렇게 우유부단한 모습은 하나님의 마음에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13년의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과 단절된 가운데 살아가는 영혼의 고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흔히 여러분들은 곤고한 인생의 변두리에서 고통을 받고 무엇 하나 되는 일없이 죽도록 고생을 하면서 이런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내가 뭘 잘못 했나. 내가 사기를 쳤나, 도둑질을 했나, 교회를 떠나서 방탕한 세상으로 흘러갔나, 내가 뭘 잘못했기에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고난과 어려움을 주시는 것일까?’ 그러면 그 사람에게 ‘그러면 네가 당하는 고난이 욥의 고난이냐?’고 물어본다면 자신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당하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은 순전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지금 당하는 모든 고난은 너의 죄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쉽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정답을 오늘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죄가 많아서 이런 13년동안의 영혼의 암흑기를 주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온전해 지려고 몸부림치지 않았기 때문에 13년동안 하나님과의 만남이 끊어진 영혼의 단절 상태를 지나게끔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고난은 욥이 당하는 고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가롯 유다의 고난도 아닐 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묻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당하는 그 고난이 정말 부당한 고난입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느끼는 영혼의 어둠이 정말 하나님 앞에 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어두움 속에 내버려두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하나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 분투하고 애를 썼습니까? 오히려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은 특별하게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주님을 거스른 적은 없지만 아브라함처럼 주위의 환경에 떠밀려 불순종의 길을 자기도 모르게 걸어가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서 영혼의 어두움이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단절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신자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주께서 우리의 인생을 마치고 부르실 그 때까지- 쉼없이 분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세상의 누구도 완전한 삶을 살 수 없다라는 사실이 완전해지기 위해서 몸부림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우리에게 알리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살아있음을 무엇으로 보여주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끝없이 몸부림치면서도, 분투하고 마지막에 우리의 신앙을 순전하게 다 지키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지키려고 분투하고 애를 쓰면서 사는 것 말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지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죄와의 싸움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불신앙과의 싸움에서 이미 전의를 잃어버린 사람, 온전해지려는 몸부림을 포기한 사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파도가 밀면 파도가 미는 대로 상황에 떠밀려서 사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죄악인지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그것이 제일 섭섭하셔서 13년 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나타나 내가 누구인지를 너에게 보여주었고 너에게 한량없는 축복을 약속하고 너와 나의 관계를 맺었거늘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만큼 너는 왜 나에게 온전해지려고 애를 쓰지 않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오늘 성경에 보면 온전해지기를 포기한 다음에 13년 동안 하나님과의 만남이 끊어진 어둠 속의 아브라함에게도 구원의 빛이 비쳤습니다. 억세고 강한 하나님의 팔이 빛과 함께 들어왔고 오랜 동안의 영혼의 침묵을 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복된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그를 건져내신 후에 다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로 하여금 예전에 13년 동안 살지 못했던 삶, 아브라함이 거의 포기했던 신앙의 길을 다시 걸어가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에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시작하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마음가짐이 남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것도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다시 찾아오시는 것도 그 마음을 통해서 시작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3년의 긴 어둠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누구도 찾아와서 이런 사실을 알려준 적이 없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나타나셔서 자기의 일을 시작하시기 원하십니다. 그것을 기대하면서 마음을 준비하고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냥 스쳐지나가지 마옵시고 꼭 만나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어린아이처럼 애원하며 주님의 옷자락을 붙드는 일 이외에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붙들고 한번만 만나달라고 하는 그 애원이 너무나 간절해서 여러분들의 속에서 애통하는 모습을 읽어내시고 여러분들을 다시 한번 만나주시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오랫동안 여러분들의 죄와 불순종을 통해서 아프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다시 주님을 만나기를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을 보시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의 아픔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시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다시 한번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에 불타는 것 이외에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올 한해도 속절없이 지나가지 않고 이번 사경회에서 주님을 꼭 만나서, 이전에 불순종과 죄로 인해서 긴 세월을 하나님과 단절된 어두움 속에서 지냈지만 예전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사는 동안데 살아드릴 수 없는 삶까지 합쳐서 정말 남은 생애를 훌륭하게 살아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도록, 전에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수치가 되었더라면 이제는 주님의 명예가 되도록, 예전에 주님을 순수하게 사랑하지 못했던 것까지 모두 보상이나 하려는 것처럼,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그 은혜의 사슬에 매여서 일평생 2001년도 기도학교 사경회에 새롭게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일생을 주 앞에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을 다시 만나야할 두 가지 이유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3:4)”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모세가 애굽을 떠난 후 40년 가까운 세월을 광야에서 생활하며 목부로 지내던 가운데 사명을 향해서 새롭게 부름을 받는 장면을 적어놓은 기사입니다. 지난 주에 창세기 16장과 17장 사이에 13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이 지났다고 하는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여기 2장과 3장 사이에도 정확하게 몇 년이라고는 헤아릴 수 없으나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던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둘 수 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모세의 생애가 세 토막으로 나누어지는데 40년 동안은 애굽의 왕궁에서 자라고 지성적으로 잘 준비되었고, 40세에서 80세까지는 미디안의 광야에서 영적으로 준비되고, 마지막 40년은 사역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커다란 변화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성경을 놓고 생각하면 부름을 받아서 사역하기 전 미디안에서의 40년 동안 이 모세가 영적으로 뭔가 깊이 성숙한 때라고 하는 것은 동의하면서도, 정말 미디안의 40년의 시간 전체가 모세로 하여금 영적으로 준비되어서 성숙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기들로 이어졌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단언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2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모세가 미디안에서 생활한 기간이 40년이었던 것에 비하면 기록들이 너무 짧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가 미디안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부분을 빼고 나면 거의 없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든지 주님을 전심으로 추구하면서 그 속에서 영적으로 성숙해 갔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40년 동안 애굽의 왕궁에서 지식인 훈련을 받았고 특별히 유모로 가장해서 자기를 양육시켜준 그 어머니로부터 히브리 사람의 신앙교육을 철저히 받았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로 미루어 볼 때 모세가 광야에 있었던 40년 동안 그렇게 허송세월을 하면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고, 무엇인가 신앙에 관한 의미 있는 생각들을 하면서 역사와 하나님의 성품들을 탐구하면서 보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보면 모세가 본격적으로 영혼의 강력한 변화를 경험하면서 불세출의 지도자가 되어서 애굽의 압제 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어서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어마어마한 일들을 수행할만한 지도자로서의 영적인 자질들은 -40년의 세월동안에도 어느 정도 다듬어졌겠지만- 오늘 이렇게 호렙산에 불붙지 않은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서 만난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해서 아주 빠른 속도로 그가 신령한 사람으로 변해갔다는 것을 우리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그를 애굽의 바로와 마주 서게 하시기 직전에 불붙는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임재로 마주한 그 순간부터 그 때까지 모세에게 일어나는 어떤 영적인 놀라운 경험들은 그 이전에 장구한 세월동안 미디안의 광야에서 쌓아온 영적 수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진보를 가져다 준 것이라고 봐야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40년동안 그러한 뭔가 좋은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우리들이 추측은 하더라도 부름을 받기 전까지 80년 동안의 모세 생애에 찬란한 영광은 없었습니다. 더욱이 성경은 그 애굽에서 40세쯤 되어서 민족을 돌아볼 마음을 가지고 신앙이라기 보다는 다듬어지지 않은 혈기로서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는 애굽의 병사를 때려죽이고 도망을 나오는 것으로 40년의 막을 내리는데, 그 돌아오고 나서의 삶은 그저 평범한 목부로 돌아와 시골에서 짐승이나 치면서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물론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도 있고 민족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을 것이며, 그 민족에 대한 여러 가지 희망,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것들을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품고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장 이후에 하나님을 만나고 펼쳐지는 그 다이내믹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선지자적인 특성 같은 것들을 그 80년의 세월에서 읽어간다는 것은 성경으로서 볼 때는 쉽게 동의 할 수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 3장 이후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펼쳐지는 놀라운 역사와 비교한다면 3장 이전의 애굽에서 그리고 미디안에서 지냈던 세월들은 잠자고 있는 시절과 비교될 정도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 때들이었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만약에 이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전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았었습니다. 또 신앙 때문에 그것을 마다하고 민족과 함께 고난을 받기 위해서 가시밭길을 택했습니다.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미디안의 이방사람의 집에 와서 얹혀 살면서 짐승의 똥이나 치고 사료나 주는 목부로서의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성경도 우리도 모세를 주목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3장에 나타나는 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로 하여금 잃었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미 벌써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 사람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어야 되었다고 하는 마음의 계획을 철저히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려고 굳게 마음을 먹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마음을 먹으셔서 모세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모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히브리 산파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끝까지 살리고 또 그를 갈대 상자에 넣어서 강으로 떠내려보낼 때만 해도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놀랍게도 그를 건져내게 만드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일 고기 잡는 어부에게 건져졌다면 훌륭한 인물이 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왕궁으로 들어가서 당시로서는 최고의 학문과 교육을 누리는 애굽의 왕궁에서 왕족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모세가 애굽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 등극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셨지만 사실 이 미디안에서 40년 세월동안에 자기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쓰임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건져내야 되겠다고 하는 강력한 소원을 마음에 품고 주께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소원은 서서히 씻겨 내려가서 이제는 그저 자기의 삶에 안주하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어졌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3장 이후에 하나님과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애굽에서 고생하는 내 백성을 인도해낼 지도자로 삼아야하겠다”라고 40년 전에 말씀하셨더라면 모세가 말하기를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주님은 사람을 잘 알아보시는군요. 제가 무보수로 열심히 일할 테니까 염려놓으십시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모세가 펄펄 뛰었습니다. “내가 누군데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놓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했습니다. 이것은 40년 세월동안 거의 씻겨 내려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 모세는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던 사명을 다시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영적으로 침체된 가운데 사명의식이 함께 흐릿해져 갑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새롭게 변화 받고 나면 눈이 떠져서 자기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새롭게 보게되는 것과 함께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변화 받기 전에는-하나님 만나기 전에는-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명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쓸모 없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가기 힘든 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당신 자신의 일에만 가장 적합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깨어있기만 하다면 자기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화)숟가락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그러나 밥을 퍼먹을 때 가장 적합하다-처음 만들어 질 때부터 보통 사람들이 밥과 국을 떠먹을 수 있도록 생각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기 위한 역사 속의 특별한 지도자로 쓰시려고 모세를 만드셨습니다. 그 일에 적합하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집어넣어서- 그 사람의 모든 성품 등이 지도자가 될 수 있게끔-용도에 맞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미디안 광야에서 짐승이나 치면서 목부로 산다면 못할 것은 없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항상 잘생긴 금수저를 드라이버로 사용하는 전기공처럼 그렇게 불편한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이 사람을 써야할 그 자리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물질적인 부유함이나 명예나 혹은 안락하고 편안한 삶에 자신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행복은 바로 자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에 자기 자신을 바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을 신앙적인 용어로는 사명의 자리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에게 무한한 희망이 되고 꿈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예화)사람들이 무슨 운동을 하고 있느냐고 자주 묻는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좋아하기는 하지만 하는 것은 없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저는 정말 못난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잘하는 것이 없고 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도 교회에 오면 힘이 납니다.
(예화)지난 번 캐나다 집회에 간 동안 교인이 덜 나왔다는 말에 한편 기분이 좋았다-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가 아니라서 그렇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던 그 자리에 우리를 다시 옮겨서 주님이 꼭 쓰시려고 하는 자리로 데리고 가는 놀라운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주님을 거스르고 비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돌아와서 펑펑 울고 새사람이 되겠노라고 회개하고 나면, 주님이 자기에게 처음 은혜를 주실 때에 주신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을 도외시하고 살아간 것에 대한 뼈아픈 후회가 그 회개의 중요한 한 제목이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회가 분명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자기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합니다. 무엇을 해도 내 일 같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사명이라는 것이 반드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몇 백명에 한 사람씩만 나오면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돌아가게 만들어 주는 힘이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소유나 안락한 삶이 아닙니다. 정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주님이 나를 쓰시는 것이 얼마나 신납니까?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하나님만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화: 어떤 사람이 청와대에 있다고 하면 직분에 상관없이 대단하게 여긴다)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행복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쓰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아직은 일할 힘이 남아있는데 명예퇴직 당해서 떠밀려 나온 사람들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생동안 한 직장에 살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밖에는 없는데 월급이 아까우니 나가라고 할 때 받는 느낌이 어떤 느낌이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은 월급이 얼마이고 무슨 일을 하는 것과 상관없이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부럽다는 것입니다. 창문을 열고 먼발치에서 출근을 하는 활기찬 직장인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고 싶은 데가 있어서 거기에 쓰임을 받아서 그 속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참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쓰실 때에 고난도 있고 어려움도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 느끼는 행복과 기쁨이 그 고난을 능가하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죽도록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당장 여러분들에게 직면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 만나고 해결하는 것이 급할 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서 목적 없는 여러분들의 삶이 바뀌어서 분명한 목적을 가진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감히 내가 말하건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이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서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이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사명의 자리로 자기가 돌아가서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나태함과 침체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본래적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잊어버리도록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멀리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는 물론이요 우리 자신에게도 전혀 행복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사용하셔서 여러분들을 통해 자기의 일들을 이루어 가실 때, 섬기고 나면 그 섬김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느끼고 섬길수록 주님이 얼마나 존귀하신 분인지를 깨닫게 되어서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열매를 경험하게 될 때 그 때에 그 사람의 행복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계산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아도 기쁨을 느낄 것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보람 때문에 자기를 다 드려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사람으로서 일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기뻐하시는 것이고 또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자’고 할 때에도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루고 싶은 것은 그렇게 함으로서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사명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게 되고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의 영혼이 파리해져 가고 깊은 침체에 들었을 때에는 그가 하나님이 원래 세워두셨던 자리에 있지 않고 떠나는 일들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과 사명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 놀랍게도 비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깨달으면서 다시 모세처럼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서 모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에게 하나님이 원래 주신 그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이제껏 까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사명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신앙을 인생의 양념처럼 생각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은 이 기회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서 정말 내가 왜 사는 것인가, 내가 무엇을 위해서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일하는가, 내 인생의 계획은 무엇 때문에 세우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사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 그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며 산다고 할지라도 그는 만물 중에 가장 불쌍한 피조물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원래의 사명의 자리를 찾는 것은 행복만큼이나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모세는 신앙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라고 하는 책을 최종적으로 탈고를 해서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그 책을 쓰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의문에 대해서 사실 신년 사경회때 많은 답변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말씀의 대충 줄거리는 파악했는데 줄거리만 파악하면 안되고 그것을 거의 전체적으로 파악해야지 만 진짜 자기가 의문시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답을 줄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잘 안 합니다.
그 중 한 예를 들면 신년사경회에는 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서 신령한 신자가 될 수있다는 내용이었고 여름 수련회에서는 방향은 좀 다르기는 하지만 당신이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뭔가 다를 것이다 그리고 구약의 커다란 주제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구약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동질성을 유지하게 하는 운동력이었다고 정의할 때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신약 적인 묘사는 빌립보서 3장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그러니까 보다 더 구체적으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필요한데 그 그리스도는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접근 방법은 다르지만 마지막에 코아(핵심)로 들어가면 신년사경회와 여름 수련회가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두 설교 다 자기를 굉장히 힘들게 만들어주는 질문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분명히 경험했느냐, 십자가의 사건을 분명히 경험했느냐고 물을 때에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거듭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분명히 주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도 아니고, 기도응답의 간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을 것은 다 있는데 자기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것으로서는 확실히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계를 느끼고 도대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해답을 못 내리고 결국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이해하도록 자극하지 않는 곳으로 가봐야겠다고 하며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은 말로는 그렇게 설명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경험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예화) 달걀 속에 병아리가 들었다가 거의 나올 때가 되어 웅크리고 있을 때 그 병아리는 알속에 있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깨고 나온 지 닷새 후 다시 그 달걀크기 속 으로 들어가라고 하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깊이 느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경험한 세상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알속에 있는 병아리와 같이 내가 그 속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비참할까, 하며 자신의 변화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복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변화를 받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 하시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세가 이전에는 이렇게 가시나무 떨기에 불붙는 것과 같은 놀라운 경험을 못한 것 같습니다. 경험했었더라면 이것이 그 불이구나 하고 빨리 신부터 벗고 신령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하나님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했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되었도다”하며 가슴을 칠 일이지 그것이 무엇인가 하며 이상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은 불인데 타지도 않고 이상하다’합니다. 그가 영적인 일을 육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효시가 되어서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놀라운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후로 하나님이 계속 그를 만나주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는 지도자로서 신령함을 갖추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이시며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이 세상의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신령한 세계를 상당한 정도 맛보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혈기가 펄펄 살아있는 이 모세가 감히 지팡이 하나 들고 허름한 차림으로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을 놓아달라고 하셨습니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바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통령을 합쳐도 상대가 안될 정도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권위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신령한 세계를 맛보면서 확신과 자기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권세보다도 크시다고 하는 놀라운 경험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그것이 동일한 깊이의 신령함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많이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도 전혀 신령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예화) TV방송에 기도원에서 병 고친다고 사람을 폭행하고 성령 수술이라고 손톱으로살을 파내 는 것들이 보도되었다
그런 것이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신령함에 대한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의 만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엄청나게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알고 그 세계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깁니다. 어떻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신령한 은혜의 세계로 성큼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더더욱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그 한번의 만남이 여러분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을 지는 모르지만 모세를 보십시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자기 혼자 이룬 영적인 진보보다는 오늘 이 불붙는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서 만난 하나님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해서 경험하게 된 그 신령함의 변화가 더 뛰어나게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서 그로 하여금 영적인 특질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는 거인과 같은 지도자였으나 그에게 거인과 같은 지도자가 될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애굽에서 학문을 많이 했다고 할지라도 40년 전의 학문입니다. 40년 전에 석학이었다고 하는 사람을 지금 데려다가 무엇에 쓰겠습니까? 학문의 세계는 6개월만 정보에 어두워도 뒤지고 3년만 책을 덮으면 학문의 세계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추격할 수 없는 격차를 두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모든 학술을 통달했다고 하지만 40년이 지나는 동안에 얼마나 많이 변했을 것이며 40년이 지나서 미디안 광야에서 잊어버린 것까지 치면 모세가 가지고 있는 지적 수준이라는 것은 국민 상식 수준밖에는 안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자기가 갖춰졌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안 쓰십니다. 그러나 다 털어먹고 빈 털털이밖에 안 남았는데 이제 쓰시겠다고 하니까 한편으로는 육신적인 오기도 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는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연발하는데 그것은 겸손의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 쓰셨습니다. 예전의 지식의 기억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지식의 깨달음 들을 주셔서 놀랍게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인지 한번 보십시오.
그런데 이 모세가 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든지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모세야,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는데, 하나님은 모세가 일생동안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험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임재가 불꽃 가운데 나타나서 거기에서 모세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를 육적인 사람에서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으로 바꿔놓으신 것입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호렙산에서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사경회를 통해서 정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육적인 상태에 있었던 여러분들이 놀랍게 변화되고 정말 새로워져서 얼마 안 되는 우리의 인생을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살고, 하나님의 마음에 큰 즐거움을 안겨드리는 그런 생애를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①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3:1-2)”
인생을 살다보면 자기가 걸어온 길이지만 지워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원해서 걸어온 길인데 그것을 돌아보면 그것들이 항상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회도 있고 아픔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아픔과 후회 정도가 아니라 수치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옷감을 짜는 것과 같은 한결같은 우리 인생 중에서 그 부분들을 잘라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신앙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생활이 곧 인생이요 인생 그 자체가 신앙생활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어떤 때는 분명히 내가 선택하고 살아온 길이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 부끄럽고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우리 마음대로 그렇게 지워지거나 없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의 걸어온 믿음의 길, 우리들이 밟아온 신앙의 길은 누에 입에서 토해서 나오는 실과 같아서 우리들이 돌이킬 수도 없고 지워버릴 수도 없습니다. 죽는 날까지 우리가 살아온 인생은 우리가 살아온 인생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신앙의 길은 우리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그 발자취의 주인공들은 우리이고 또 주님이 우리가 그 길을 걸어온 것을 아십니다.
우리들이 지워버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다시 시작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에서 실패해 본 것을 잘 알지만 인간의 결심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미약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시작하고 싶고 새로 살고 싶은데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희망한다고 해서 우리들이 마음먹은 때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그렇게 지워버리고 싶은 인생의 한 토막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요나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속에 이 사람보다 나쁜 사람이 수없이 많이 나오는데 불행하게도 ‘불순종’하면 이 사람 이름이 들먹여지니까 요나도 무척 괴로울 것입니다. 한번 실수했는데 요나가 불순종한 사람의 대명사가 된 것입니다. 요나도 ‘다윗은 불순종은 안 했느냐’ ‘아브라함은 불순종을 안 했느냐’고 말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빼놓고 불순종 안한 사람이 어디 있으며 자기를 보고 불순종의 대명사라고 말하고 있는 그 그리스도인은 불순종 한 적이 없겠습니까? ‘다 불순종했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 하는 것이 요나의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를 보면서 불순종한 것만을 보는데 사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불순종해서 한 때 실패한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 결국 자기의 사명으로 돌아가게 만드시고 그런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교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신실한 하나님을 보고 감탄하게 하기 위해서 요나라고 하는 인물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순종의 과정들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저는 언제부터인지 성경을 읽다가 어떤 사람이 잘못했다든지 요나처럼 불순종을 했다고 하면 그렇게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요셉을 보고 감동을 받는 것보다는 야곱을 보면서 더 많이 은혜를 받습니다. 요셉은 내가 바라보고 그리워하는 이상적인 신앙의 인물일 뿐이지 그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쓰러지고 넘어지는 과정을 보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너무 비슷하니까 그렇습니다.
요나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 속에서 한결같이 믿음을 따라 산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을 보면 오히려 예외라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요나의 모습은 오늘 늘 쓰러지면서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와 가까운 신자의 그림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믿은 이후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의 길을 돌이켜보면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설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해 놓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제껏 까지 인도하시기까지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우리는 사실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론 어떤 때는 가슴이 불타서 ‘내 생애 단 한번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고 하는 때도 있었지만 어떤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면 내 인생에 무슨 기쁨이 있을까’하고 하나님 앞에 약속했던 것들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돌이켜 선적도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한 적도 많지만 죄와 불순종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허물면서 살아온 적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이중 인격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대해주셨는데 그 한결같이 대해주시는 관계를 우리들이 맛볼 수 있었던 은혜는 예외 없이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번 잘못 나간 사람을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영원히 은혜의 세계에서 낙인찍힌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고 배교에 가까운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쓰러지고 무너진 곳에서 하나님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시작하도록 만들어 주시고,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도 거미줄 같은 신앙이지만 주님 의지하는 마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지금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 보기에 반듯하게 서 있지만 휘청거리던 때가 누군가에게는 없었겠으며 내가 믿는 이 신앙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온 모든 날들이 내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 같은 그러한 실패 속에서 허위적거리던 때가 누군들 없었겠습니까? 골 깊어 맑은 물 흐르는 곳에는 항상 높은 산이 있는 법입니다. 높은 산봉우리가 장엄하게 이어지는 그 사이사이에는 내려가도 내려가도 맞닿을 수 없는 깊은 골짜기들이 연이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 씩씩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 사람도 정말 하나님의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은혜를 많이 맛보면서 살아온 사람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나의 불순종은 사실 좀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불순종에도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해보려고 하다가 난관에 부딪히니까 어렵고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완의 순종, 순종을 하려고 했는데 미수에 그친 경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명을 받아 가서 때를 쓰며 노력을 하는데 하다하다 너무 힘들어서 주저 앉고 어려움을 만나니까 다른 길을 생각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불순종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적인 불순종입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약점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야겠다고 하며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섬기려고 덤벼들었을 때, 그 때 우리의 열정과 마음을 일평생 동안 계속 유지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빛나는 보석같겠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려움이 오면 기도로 이기고 고난이 닥치면 믿음으로 이기는 것은 공식이고, 실제로 그런 어려움 속에 부딪힐 때에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신앙의 열기도 떨어지고 결국은 환경에 밀리면서 고통을 받다가 어려운 순종의 길보다는 쉬운 불순종의 길을 택해서 미완의 순종으로서의 불순종을 경험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적인 불순종인 것입니다. 장려할만한 것은 못되지만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불순종은 그런 종류의 불순종이 아니었습니다. 고의적이고 치밀하게 계획된 종류의 불순종이었다는 점에서 악질적인 불순종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너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라 그 악독이 내 앞에서 상달하였다”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문제는 응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들 같으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거나 예레미아처럼 “주님 명령은 좋으나 나는 너무 어립니다. 내가 어떻게 그 명령을 이행할 수 있겠습니까”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능력을 주겠다”하도록 해야 하는데, 요나는 어떻게 했는지 그 말씀 뒤에 “그러나”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라” 나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저 큰 성 니느웨로 가서”하시며 계속 말씀하시는데 요나는 속으로 이미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맥락에서 짐짓 범죄한 자는 용서받을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짐짓’은 히브리어로 ‘계획 속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죄를 범하려고 면밀히 계획한 가운데 구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하는 죄에 대해서는 제사를 통해서도 그 죄를 사함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불순종도 사실 그와 유사한 것입니다. 우발적인 불순종이 아니라 면밀하게 계획된 불순종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안 주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그 판단이 불신실하시다고 비난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갔는데 돌멩이가 하도 많이 날아와서 차마 순교는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과 처음부터 안 가려고 작정을 하고 감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동안에 불순종할 방법을 고안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끝나자 “그러나”라는 접속사 하나 남겨놓고 딴 길로 걸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복음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강력히 불순종하고 신학적으로도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요나와 같은 사람을 들어서 이방 선교의 새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전하지만 그러나 그 이방의 땅에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요나는 불순종을 고의로 계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불순종의 특성이나 문제에 대해서 1장에 상세하게 나옵니다. 결국 하나님이 내버려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제비뽑기를 해서 그 사람을 당첨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요나에게 있어서는 엄청나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 때 요나가 불순종을 촉진하게 한 요나의 신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역신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장 2절에 보니까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려고 욥바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가진 것입니다. 그 당시 가지고 있었던 개념은 신들에게 구역이 있어서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을 벗어나면 그 신이 더 이상 자기를 돕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렇게 유일신 신앙을 고수하지 못하고 그 땅의 토착신들을 섬기려고 애를 썼던 하나의 신학적인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요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스라엘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간섭을 많이 받지만 배를 타고 다시스쯤으로 가버리면 하나님이 더 이상 나를 어떻게 하시지 못하리라’라고 하는 얄팍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니느웨에 대해서도 적용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당시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오늘날처럼 나가서 곳곳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선교의 성공을 거두게 하는 보고들이 들어오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방세계로 보내진 최초의 선포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도우시는데, 니느웨에서도 우리를 도우실까’ 다시말하면 ‘니느웨에 가서도 우리의 신앙이 효력이 있을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낯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스라엘의 경내를 떠나서 먼바다로 갔는데도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그를 찾아내어서 풍랑을 일어나게 하시고 제비를 뽑아서 그가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풍랑을 대작하게 하신지라”라고 나오는 부분이 히브리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바다에 바람을 발사하신지라”라고 나옵니다. 요나가 타고가는 배를 정확하게 겨냥해서 그 바다에 바람을 일으키시니까 배가 지나가면 바람이 따라가면서 계속 풍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배가 뒤집어질 것 같은 위기를 경험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살면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을 끝까지 따라 다니는 것처럼 시련과 재난들이 따라다닙니다. 왜냐하면 인생에 그 풍랑을 일으키셔서 그를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완악함을 보십시오. 요나가 첫 번째로 잘못한 것은 계획된 불순종이었고 또 하나는 돌이킬 줄 모르는 완고함입니다. 풍랑이 일어나면 겁이 나야 하는데 어떻게 퍼 질러 잠을 잡니까? 오죽했으면 이방 사람이 와서 히브리 사람이니 ‘너희 하나님께 기도 좀 해봐라’라고 했겠습니까? 선지자라고 하는 인간이 얼마나 전락했으면 이방 사람에게 기도 좀 하라는 말을 듣는 신세가 됐겠습니까? 인간의 신앙의 추락은 끝이 없습니다. 올라간 것이 별로 없어도 내려가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정말 한없이 내려간 것입니다. 이방사람만도 못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죄악이 주는 평안으로 배 밑창에 들어가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사인을 보내주셔도 회개하면 될텐데 회개를 안 합니다. 갈 때까지 가려는 불신앙입니다. 결국은 바다에 던지웁니다. 그 풍랑 이는 바다에 던지우면 죽임을 당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죽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을 등지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이 떨어지고 바닥까지 내려가서 죄와 불순종 가운데 살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면 살텐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도 죽는 것이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심리입니다.
자살한 사람들에게 ‘죽을 결심이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라고 하는데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죽을 결심과 살 결심은 종류가 완전히 다릅니다. 삶의 의욕이 없는 사람이 죽을 결단은 잘 내리고 삶의 결단이 넘치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이상하게도 죽기로 결심하는 일에 약한 것입니다. 종류가 완전히 다릅니다. 무기력 속에 살아온 사람도 죽음에 대한 결단을 쉽게 내릴 수 있지만 건강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약한 것입니다.
요나는 죄악의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이니까 “나를 던져라”한 것인데 그 속에서 자기가 죽어서 그들을 살려야겠다는 이타적인 정신을 발견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때는 지옥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었을 테니까 ‘어둡고 침침한 스올에 내려가 버리는 것이 낫지 살아서 다시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께 죄에 대한 책망을 받고 다시 순종하는 길을 가야하고... 골치 아프니 죽어버리자’ ‘살아서 하나님을 대면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지’ 하는 마음으로 “던져라”한 것입니다. 오히려 배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입니다. 짐을 버리고 애쓰다가 할 수 없이 애석하게 생각하면서 그를 바다로 던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점찍어 놓으신 사람은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마음대로 죽으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 것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그를 삼키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 요나가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이후로 최초로 한없이 회개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면 위액으로 다 녹아 없어졌을 텐데, 학자들은 그가 큰 고기의 후실에 낀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서 고기가 물을 들이마실 때면 수시로 물풀들이 들어와서 자기를 감는 것입니다. 그 난리를 치며 죽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며 2장에서 철저한 회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를 했다고 하더라도 요나가 지은 그 고의적인 불순종의 악함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악질적인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1장의 그 악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3장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2장에서 요나가 진실된 회개를 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사명을 받은 이후로 최초로 하나님 앞에 진실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했을 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참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도 중요한 것은 그 길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경회라고 하는 것은 불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보여주시지 아니하셨더라면 볼 수 없었던 자기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 우리들이 그런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거울 앞에 자기를 비춰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잘못 살아온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진실한 회개가 누구에게든지 꼭 필요한 이유는 요나처럼 이렇게 계획된 가운데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요나처럼 의도적으로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순종하면서 길을 걸어갔는데 한참 걸어가니까 환경이 너무나 힘들어서 불순종의 길을 택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디에 속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는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불순종을 했습니다. 그 경우에 해당됩니까? 그렇지 않으면 두 번째로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순종을 하려고 했지만 상황이 너무 어렵고 힘에 겨워서 믿음이 식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불순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둘 다 내 경우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고 하나님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있다. 내 문제는 무엇일까?’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세 번째 경우는 그냥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번 요나처럼 커다란 불순종을 함으로서만 죄와 악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이 계속 일상 속에 쌓여서 청소를 하지 않고 살아가다 보니까 그것이 굉장히 커다란 영혼의 짐이 되어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도 주님을 찾을 기력이 없고 주님이 명백하게 말씀하셔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우리들이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판에 박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불순종입니다.
그 종류가 셋 중에 어디에 해당되든지 간에 그 종류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지 모르나 질에 있어서는 모두 죄와 불순종이라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에게 더 이상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는 것은 커다란 범죄를 통해서만은 아닙니다. 사실 아주 유별나게 신앙이 불안정한 사람을 제외해놓고 주일이면 꼬박꼬박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수요일 저녁도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새벽에는 새벽기도 나와서 예배드립니다. 또 화요일에는 전도도 나오며 살아갑니다. 무슨 죄를 그렇게 억수로 짓겠습니까? 영화 구경 한번 마음대로 못 가보고 그 좋다는 노래방이 뭐 하는 곳인지도 구별 안가는 사람도 교인들 가운데는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얼마나 짓겠습니까? 아이들 데리고 고궁에 들어가면서 나이를 속인 것 가지고도 갈등을 느끼는 사람들이 무슨 큰 죄를 짓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매일 성경 읽으려고 애를 쓰고 사는 것은 후줄근하게 살아도 어쨌든 주일날 교회에 오면 그래도 말씀을 들어보려고 애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얼마나 짓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는 죄 자체가 무서워서 죄를 멀리 하는 것이 아니고 불순종은 불순종 자체에 어떤 파괴력이 있기 때문에 불순종을 멀리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의 비참함 때문입니다. 죄와 불순종은 그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다기 보다는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해를 깨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영적인 생명 속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들을 그 생명적인 공급이 계속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영적인 강력한 파괴력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계속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는 죄 가운데에서 살아가면 어젠가 하나님이 손 좀 보십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한번 위기를 만날 것이고 건강하다고 돌아다니면서 나쁜 짓 하면 언젠가 한번 하나님이 휘청하게 하실 것입니다. 자기 잘났다고 교만에 들떠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 언젠가는 한번 크게 넘어져서 자기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비참한 인간인 것을 깨닫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순식간에 요절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그대로 있습니다.
죄와 불순종은 실제적인 자신의 삶에 있어서는 즉각적인 파괴력은 갖지 않을 지 모르지만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즉각적인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충만한 은혜 생활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마음과 생각을 품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으면 당장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의 공급이 안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얼굴을 별로 본 적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파괴력은 즉각적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가져오는 것은 큰 죄와 불순종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요나와 같은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그냥 하나님 앞에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주님이 만져주시는 은혜, 경건의 감화, 이런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때에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고 깨트려지는 일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 여러분들이 해당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든 지간에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남들이 보기에는 반듯하게 교회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가는데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죄와 불순종의 파괴력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무기력을 가져다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기를 펴면서 살 수 없도록 우리를 한없이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 있는 사람들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실패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방법은 첫째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입니다. 2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셨던 명령을 다시 되풀이 하셔서 “일어나 저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것을 그들에게 선포하라”하십니다.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일어나라’고 번역된 이 말은 히브리 성경에서 굉장히 많이 쓰여진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들이 -모두 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 단순히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엎드려 있는 사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무너졌던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각성을 동반한 새로운 출발을 암시하는 말로서 이 ‘일어나라’는 명령어가 자주 쓰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도 아버지 집을 멀리 떠났던 그 탕자가 마지막으로 결단할 때 “내가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할 때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넘어졌는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넘어진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주님이 일으켜 세우시지 않으면 다시 시작할 수 없을 정도로 주저앉은 사람들, 무너진 사람들은 모두 가슴이 메마른 사람들입니다. 한때는 그 가슴에 주님의 사랑이 물 되어 흐르고 신앙의 깊은 감격이 있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그리고 그 사랑을 입고도 주님을 멀리 떠나서 살아가는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인간을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강물과 같이 넘치는 기쁨, 강물과 같이 넘치는 사랑 속에서 주님 의지하면서 살던 그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싹 메마른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쓰러진 사람들, 다시 주님이 일으켜 세우시지 않으면 안될 사람들의 마음은 고갈되어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 없습니다. 그의 삶은 마치 기름을 치지 않은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열심히 돌면 돌수록 과열되어서 여러 가지 위험한 문제들을 불러일으키는 망가진 기계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제일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쓰러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우리의 홈 그라운드가 아닙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수많은 대적들, 우리들이 쓰러지기만 하면 박수와 갈채를 보낼 수많은 원수들, 그리고 우리들이 넘어지고 우리들이 엎드려지기만 하면 환호성을 지를 수많은 원수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실로 이 수많은 원수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 땅의 상황은 우리를 격려하며 우리를 위로하는 우리 지체들의 수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속에서 정말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붙드는 신앙이 아니면 그는 이방인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사람의 마음, 그가 하나님 앞에 다시 시작하려고 할 때 느끼는 가장 커다란 두려움은 자기는 누구도 도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으며 누구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절망감입니다. 그것이 마치 어두운 구름이 햇빛을 가리우듯이 복음 안에 있는 모든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리게 될 때 그대 그는 정말 그 엎드린 상태에서 일어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은 항상 이렇게 해서 쓰러진 사람들, 그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화)중국의 모택동은 아직도 중국사람들에게는 신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가까이에서 전기를 쓴 의사의 결론은 '위대한 인간은 없다'이다)
저는 신앙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위대한 신자는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에는 영웅적인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흠모가 굉장히 강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에게 비치는 커다란 산과 같이 거룩한 성도의 모습, 수많은 시련을 피 튀기는 싸움 속에서 승리를 이끌면서 걸어온 위대한 마지막 승리자들, 그런 사람들의 모습도 결국은 우리 앞에 비춰진 그의 일부이지 그 사람 자체가 수없이 쓰러진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도 겸비해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깊이 존경할 때의 마음이 예전에는 영웅주의적인 존경이었다면 지금은 그 사람을 수없이 일으켜 세워주신 하나님이 역사 하신 은혜의 산 증인으로서의 위대함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눈물이 납니다.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그 사람을 통해서 쓰러진 너를 세우고 너의 메마른 마음을 채우셔서 결국은 수많은 유혹과 수많은 쓰러짐, 수많은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결국은 내가 존경할 수밖에 없는 그대가 있기까지 역사 하신 그 하나님, 그런 은혜를 입은 그 사람으로서 큰 존경과 부러움을 표하게 됩니다.
항상 자기의 자녀들의 약함을 헤아리면서 쓰러진 그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요나는 질적으로 나쁜 사람이었고 의도적이고 계획된 범죄로 쓰러졌습니다. 지금 그가 물고기에 의해서 바깥으로 내 토해지고 어느 육지 바닷가 한가운데 쓰러질 듯이 엎드려져서 거의 빈사 상태에서 창백한 얼굴로 삼일 밤 삼일 낮 동안 그 물고기 뱃속에서 온갖 시달림을 다하고 이제는 스스로 일어나서 발걸음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파리해진 모습으로 거의 송장과 같이 바닷가에 누워있었습니다만 그것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당한 고난이었습니까? 순종의 길을 걸어가다가 시련과 고난을 당해서 자기의 걸어가는 이 신앙의 전투복에 피 묻힌 그런 종류의 고난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계획되고 의도된 대로 불순종하며 걸어가다가 자기 스스로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엎드러져 있는 그의 옆구리에 손을 얹으시고 다시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쓰러졌든지 간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엎드려져있는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우리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으시고 우리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능력으로 일으켜 세워주시는 그런 은혜가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으로 인해 넘어졌든지 -요나와 같이 계획된 불순종과 범죄로 인해 넘어졌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맡은 사명이 너무나 무거워서 회피하다가 쉬운 길을 택하느라고 인간적으로 동정 받을 수 있을만한 불순종과 죄로 넘어졌든지 혹은 생각 없이 살아오다가 하루하루 쌓인 작은 죄악들이 너무나 커서 이제는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막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받는 파리한 신자가 되어서 엎드려졌든 지간에 어떤 경우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것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합니다.
(예화)어린아이가 넘어졌기에 일으켜주려고 했더니 그 아이의 엄마가 놔두라고 한내용-자립심 을 길러주는 교육방법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일으켜주는 엄마의 품속에서 사랑의 정서를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뛰다가 넘어졌을 때는 아프지 않은데 누군가가 일으켜 세워주면 더 서러워서 울게 된다. 그것은 아파서 운다기 보다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일으켜 세워줌을 통해서 확인되는 사랑의 관계에 감격해서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하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네가 스스로 불순종해서 엎어졌으니까 자립심을 길러라. 일어나라” 못 일어나면 발길로 차시면서 “일어나지도 못할 것이면서 왜 엎어졌느냐”하신다면 이 세상에는 엎어져 있는 신자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십니다.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자리에서 걸어가다가 쓰러졌을 때에 주님의 은혜로운 도움의 팔이 아니면 스스로 지팡이 짚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쓰러질 능력은 있지만 자기의 힘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돌아다보면 항상 나를 사랑하시는 놀라운 은혜,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죄 가운데 살아서 확 지워버리고 싶은 인생 밖에는 산 것이 없는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과 나 사이의 파기될 수 없는 사랑의 관계가 있다라고 확인시켜 주신 굉장히 많은 경우는 항상 이런 실패와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서 지워버리고 싶은 인생 밖에는 살지 못하고 주저앉았을 때 인간의 마음이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갖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실 때에 그 때에 걸어온 길은 모두 부끄러운 길이었지만 그러나 앞으로 걸어가는 그 길은 정말 부끄러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성경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어했던 그 신앙의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부단히 쓰러지고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그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온 결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인간은 없습니다. 가끔 저보고 실망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과분합니다. 기대를 걸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백 번 양보해서 만약에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제가 여러분보다 좀 낫다고 여겨지시면 ‘하나님이 김목사의 겨드랑이를 더 많이 만져주셨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없이 눈물을 흘리고 쓰러지면서 걸어올 때, 차이는 하나님이 일으켜 세워진 사람들은 넘어지고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다시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깨닿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파기될 수 없는 언약의 관계를 확인하면서 주님 의지하면서 살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발걸음을 옮기면서 신앙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오늘 이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엎어져 있는 곳에서 다시 일으켜 세움을 받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엎어진 곳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쓰러져서 할 수 있는 일이 공상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에 엎드려진 사람들은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기만 하면 그는 다시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도 있고 싸울 수도 있고 견딜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고 손발로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께로부터 다시 일으켜 세움을 받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다시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보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요나를 부르신 다음에 이상한 것 하나는 “너 왜 딴 배 탔느냐”고 묻지 않으신 것입니다. 일으켜 세우시면서 하신 말씀이 “내가 너에게 명한다”였습니다.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지긋지긋한 것입니다. 사람은 이 정도 되면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포기할 줄 모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일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그 사람을 세우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의 영적인 상태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자기 자신의 말로 ‘저는 크게 불순종하는 것이 없습니다’하고 살아가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의 삶이 순종의 길을 지속적으로 걸어가고 있다면 여러분의 영혼 속에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마음이 다 쓰러져서 뭉개진 상태가 되어서 엎드려진 상태가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께서 별로 안 기뻐하신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주일날 예쁜 옷 입고 교회에 나오고 꼬박꼬박 헌금해도 자기 자신은 압니다. 양심이 증거합니다. 커다란 과오를 저지른 것이 없어도 ‘요즘 내가 하나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본인이 압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아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없는 것 자체가 고도의 성숙의 표징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꿈 깨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는 면역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번 사경회때 하나님을 만난다고 칩시다. 그러면 몇 번째입니까? 수십 번도 더됩니다. 감격스러울까요, 안 감격스러울까요? 수십 번도 더 만나서 그 분이 그 분인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는 면역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외식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제법 말씀도 알고 은혜도 경험한 사람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쫓는 신앙생활에서 실패했으면서도 잘 다듬어진 신앙의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나쁩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깨트려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은혜 안에 살면서 주님과 만나면서 자기가 깨트려지고 다시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런 은혜의 감격을 못 느끼니까 자신의 무감각한 상태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저렇게 잘 깨트려지는 것은 인간이 하도 모났기 때문에 다듬어지는 초기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대책이 없는 위선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마치 그런 것들이 영적인 미성숙의 소치인 것처럼, 그리고 자기같이 이렇게 고도로 성숙하면 무엇에도 흔들림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항상 저 말씀에 대해서는 내가 동의 할 수 있고 이 말씀에 대해서는 동의 할 수 없다고, 상대적인 입장에서 강의를 듣는 것처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도의 위선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진정한 회복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입만 열면 옛날에 받은 은혜를 자랑합니다. 벌써 수십 년 써먹었는데 지겹지도 않습니까?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간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경험하는 햇살과 같은 하나님의 이 은총이 어제 경험한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화)청년 시절 8개월 동안 저녁마다 하늘을 관측했었다-단 하루도 그 석양을 언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에 면역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면역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나 은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 때문이 아니라 무감각해진 죄인들의 부패성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다시 상기시키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관심사와는 빗나간 것을 보게됩니다. 우리들이 엎드려있을 때에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은 ‘나는 지금 엎어졌으며 나는 너무 힘들다.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로 돌아가야 되겠다. 기도만 할 수 있으면 살 수 있을 텐데. 내 마음이 너무나 메말라서 고갈되었는데 다시 하나님의 생명적인 은혜가 내 가슴속에 흐르기만 하면 나는 살 수 있을 텐데. 정말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 그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원래 세워두셨던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불순종으로 멀리 떠났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손에 지문이 있듯이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하나님이 독특하게 만나주셨듯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은혜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여러분들이 거기 서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바로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만세 전에 만들어 놓으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명으로 돌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면서 숟가락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예화)숟가락으로 여러 가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원래 밥을 먹을 때 사용하면 가장 결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결함투성이의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주님이 세우신 자리에 서있으면 하나님의 사명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전에는 ‘내가 설교자가 안됐더라면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그것이 다 쓸데없는 일처럼 여겨지면서 ‘내가 목사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으면 내가 뭐 할 일이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각자 각자 하나님이 처음 은혜 받을 때에 불러주신 그 자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여러분들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왜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이 남들에게 주시지 않는 은혜를 주셨을까요? 그렇게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도 만날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특별한 은혜의 만남을 왜 여러분들에게 주셨을까요? 왜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여러분들을 건져내셔서 여러분 자신도 서있기를 버거워하는 그 자리에 하필이면 하나님이 세워주셨을까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거기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신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 서서 주님 섬기면서 살라는 사명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힘들어서 나는 다시 일어서야 되겠다’가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신 것과 함께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게 하시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을 다시 순종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려고 하는데 은혜 받아서 뭐 하려고 합니까? 간증하려고 합니까? 사람들에게 자랑 하려합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주님을 믿는 여러분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신 것은 쓰러진 여러분을 일으켜 세워서 속 편하게 만들어 주시려고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쓰러진 여러분들을 일으켜 세우셔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다시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다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서 넘치도록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 속에 깊이 빠져 있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분투하면서 순종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그런 열망이 없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시작하게 하시는 방법은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그 일으켜 세운 자로 하여금 다시 순종의 길로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 만나고 싶으시지요?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으시지요? 왜냐하면 ‘그 힘든 사명의 길, 내가 한 때는 버려 두고 온 책임 있는 그 자리로 나를 돌아가라고 하실 텐데 어떻게 하나’ 하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종하면서 걸어가는 그 길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당하는 고난과 영적인 고통보다는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일어나 니느웨로 갔습니다. 삼일 길을 “이제 하나님이 너희 나라를 멸하실 것이다”라고 외치며 말씀을 단순하게 전했더니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짐승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베옷을 입고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어려운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은 도움이 덜 될 테니까 여러분 자신의 경험에 비춰서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과 화목하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회복의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영혼들을 섬기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 힘들었습니까, 기뻤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때가 제일 기뻤고 십자가를 많이 질 때가 제일 가벼운 인생을 살았을 때입니다. 그 순종의 길로 다시 돌아가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여러분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번 사경회에서 정말 주님을 만나고 쓰러진 나를 주님이 일으켜 세우시고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불순종하며 걸어왔던 그 길을 돌이켜서 다시 순종의 길을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그 기대와 마음을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무슨 대안이 있습니까? 불순종하면서 살아봤지 않습니까? 사명을 등지고 행복하던가요? 주님을 믿고 주님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건조하게 느껴져서 이 세상의 즐거움과 불순종에 빠져봤지만 그것이 우리를 기쁘게 하던가요?
결국은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곤고한 심령이 되어서 해변에 엎어진 요나와 같은 신세가 되어서 주님의 은혜를 힘없이 기다리는 그런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이번 기회에 다시금 주님의 손에 의해서 일으켜 세움을 받아서 다시 순종하게 하시는 주님 만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이런 일들은 무엇을 통해서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5.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②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3:1-2)”
1장의 제목을 '불순종하는 요나'라고 한다면 2장의 제목은 회개하는 요나이고 3장의 이름은 다시 순종하는 요나이고 4장은 불평하는 요나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각 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명확합니다. 2장에서 회개하는 요나의 모습은 예전에도 몇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회개하는 요나를 물고기로 토해놓게 하시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건졌다기 보다는 죽지 못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렇게 바닷가에서 물고기에 의해서 토해 내치고 엎드려서 아직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시는 장면이 3장 1절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고 나옵니다. “여화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입니다. 첫 번째는 1장에서 임했고 두 번째로 3장에서 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이 요나를 선지자로 불러주신 사명의 말씀이었다면 3장의 말씀은 오랜 불순종 끝에 회개한 이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그 사명을 상기시켜 주시는 말씀이라고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이 2장에서 정말 하나님 앞에 생애적인 회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회개를 통해서 이 요나가 예전에는 깨달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깨닫고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길로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올바르지 못한 것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거기에서 돌이킬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의 돌이킴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나가 뱃사람들에 의해서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3일을 있으면서 거기에서 비로소 회개를 하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되었으니 인간의 완고함이 정말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되기보다도 오히려 죽음을 택할 정도로- 완악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선지자인 요나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을 외치라는 명령이었는데 한 사람을 선지자로 불러서 그 엄중한 명령을 -이민족을 향해 가라는 선교의 명령을-주셨을 때 그 하나님의 명령이 얼마나 중차대할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어긴 요나의 모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한번 보십시오. 그런 죄를 저지르고 완전히 곁길로 갔습니다.
불순종한 사람을 거론하기만 하면 이 사람 이야기를 거명해야 하는 불명예를 수천 년째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처럼 살게 해주십시오’ 할 때 자주 거명되는 사람은 아브라함 같은 믿음, 다윗 같은 용기, 솔로몬 같은 지혜를 얘기하는데 안 좋은 것을 이야기할 때는 꼭 ‘요나 처럼’ 합니다.
(예화: 새가족 환영회 할 때 꼭 한두 번씩은 요나의 이름이 나온다)
사실 요나 보다 나쁜 사람은 많은데 왜 요나는 그렇게 되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순종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다시 회개했다든지, 회개의 깊이가 깊었다든지, 아니면 그가 왜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안하고 딴 길로 간 모든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불순종의 원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불순종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도 안되겠지만 한번 하나님 앞에 잘못하면 그것으로 우리의 모든 인생이 끝난 것처럼 절망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의 불순종은 우연한 불순종, 연약한 가운데 짓게 되는 불순종이 아니라 아주 절묘하고 철저하게 계획된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에 주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불순종 속에서 자기가 산산이 부서지고 파탄된 가운데서도 희망 없는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말씀해주시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자기가 원해서이건 적극적으로 원하지 않던 간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주일 오전 예배는 물론이고 오후예배까지 참석하고 열심히 구역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여러분들 속에는 불순종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여러분들을 시험할 때에 항상 수준에 맞게 시험합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고 주일 잘 지키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에게 주일 아침에 다가와서 ‘오늘 교회 가지 말고 노래방이나 가자’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런 정도에는 안 넘어간다는 것을 마귀도 알기 때문입니다. 마귀도 자기가 못 하는 것은 포기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서 졸지언정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말려도 간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마귀도 그것은 양보합니다.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십일조 해오던 사람에게 마귀가 아무리 떼어먹으라고 유혹해도 안 넘어갑니다. 그 사람이 심오한 진리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 다른 방면으로 깊이 들어와서, 그렇게 성실하게 십일조생활 하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생활을 꾸준히 하고 주일이면 교회에서 사는 생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내용은 다 파먹은 껍데기로 만들어버릴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 안 믿을 때 자기 멋대로 살고 하나님 거역하면서 살고 교회도 내키면 오고 안 내키면 집어치우던 생활보다야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순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불순종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순종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우리의 영혼에 어두움을 드리우게 만들고 하나님의 참 사랑의 교제 안에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불순종이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짐승처럼 살던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치고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은 교회를 박차고 세상에 나아가서 허랑 방탕하게 살 때에만 찾아오는 것아 아니라 성실한 교회생활을 하는데도 전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상황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니까 그렇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자기에게 주신 선지자로서의 고유한 사명을 망각한 사람인 이 요나에게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사실 1장에서 그렇게 불순종 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목소리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풍랑이 일어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제비를 뽑았을 때에 요나가 당첨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 사람에게 너는 누구냐고 물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집어던질 때에 풍랑이 일어나서 바다 속에 빠진 것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었고 요나가 바다 속에 들어가자 갑자기 풍랑이 잔잔해지면서 평화로운 바다로 바뀐 것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한번에 소화시켜서 배설해버렸으면 끝났을 텐데 밥 먹다가 밥알이 걸리는 그곳, 후실이라고 하는 곳에 들어가서 숨도 막히지 않고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속에 들어가서 물고기가 잠수하면 물을 마시고 일어나서 숨을 쉬면 공기를 소통하고 그러다 미역줄거리까지 들어와서 온 몸에 휘감기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거기서 회개를 하기까지 죽지 않게 살려주신 것도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모두 상황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상황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 있는데 정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황을 통해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해석을 필요로 하고 그 해석은 아직까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황에 의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우리의 자세를 하나님 앞에 바꾸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지 않고 살았다고 합시다. 그러다 어려운 일이 닥칩니다. 한번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못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깨달으라고 주시는 것이다’하고 즉각적으로 그것을 느끼면서 반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계속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고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상황을 흔들어서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설교를 통해서 깨닫고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예화: 말 잘 듣는 자녀에게는 말로 하지 때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주님의 진리에 의해서 수시로 만져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비록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을 흔들어서 말씀하시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 하겠다는 사람도 많이 만나고 목회자의 아내가 되겠다는 사람도 많이 보는데, 저는 항상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다고 하면서 열명 중 아홉은 같은 대답을 합니다. “저도 사실은 이 길을 안 가려고 했는데 상황이 나로 하여금 이 길을 가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상황에 의해서 떠밀려서 사명의 길에 들어섰다는 사람의 소명은 전혀 신임하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런 것은 소명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일 마음을 바꿔 먹었더라면 -상황만 가지고 해석했다면- 목회자 소명이 아니라 장사하는 것이 제 길이라는 경우를 못 느꼈겠습니까? 어려운 일이 계속 생겨나고 싫다는 사람도 생겨나고 교회 건축이니 해서 너무 힘든 일이 생겨난다고 확실히 목회 하라는 것이 아니고 딴 일이나 하라는 신호인가보다 하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만 그 상황은 항상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그 해석은 자칫 잘못하면 자기 좋은 대로 해석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상황으로 계속 몰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가 되기로 했습니다”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상황에 의해서 떠밀려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것이 유일한 근거가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인정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상황은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2장에서 그 정도로 하나님이 상황을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요나는 그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의해서도 움직이지 않는 그 마음이 상황을 통해서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있을 지 그것도 의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 하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에 의해서 인도를 받는 것은 상황에 의해서 인도 받는 것 보다 훨씬 신뢰할만하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우리를 움직여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는 한 그것은 신뢰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의 깨달음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움직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로소 상황도 정확하게 해석될 수가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선교사의 삶은 매우 특별합니다. 목회자와는 다릅니다. 선교사의 삶은 자기와 문화가 같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보다 더 자질이 뛰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도 그만큼 더 많이 하고 많은 어려움들을 이겨야 하기 때문에 소명도 뛰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부인이 되는 사람도 목회자의 아내와는 좀 다릅니다. 목회자의 아내들도 고생을 많이 하지만 선교사의 아내는 그야말로 선교사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선교의 삶과 개인의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입니다. 존재 자체가 이미 선교적인 존재로 가 있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그 사람들 속에서 두 사람이 함께 사역을 해 가는데 그 사역의 세계에서 생각을 접으면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라는 것이 선교사들에게는 있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되려면 그 부인되는 사람도 선교사가 될 각오를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화: 헌신되고 진실하던 한 형제가 사랑에 빠졌는데 자매는 선교는 물론 목회와도거리가 멀었다-둘이 함께 좋아하는 상황이 함께 선교가게 하신다고 말했다)
(예화: 남미 쪽으로 선교사로 나간 분의 부인이 두 번이나 물에 빠져 자살하려고 했는데 결국 부인은 한국에 남겨두고 선교 나가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깨트려진 가정 문제는 목회자 가정이 깨트려진 것을 보는 시각으로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받고 있는 정신적인 압박은 이루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리가 선교사의 자리인데 어떻게 둘이 서로 좋아한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길이겠습니까? 그럴 때 상황이 나로 하여금 선교를 가게 한다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을 통해서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자신의 마음속에 호소하여 자기를 깨트리고 자기 속에 파고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요나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려주셨지만 그 말씀을 듣고는 요나가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다 못해 물고기 뱃속에서 토해 내침을 당하고 바닷가에 엎드려져 있습니다. 이제 불순종하려고 해도 불순종할 힘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셔서 순종의 길로 걷게 하시고 싶으셨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으로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 요나로 하여금 일어설 힘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많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상황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는 할 수 있는데 그 상황이 우리의 심령을 깨트릴 수는 없습니다. 상황은 자만하던 마음을 움직여서 겸비하게 만들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정말 주님밖에는 믿을 분이 없구나. 주님밖에는 의지할 이가 없구나’하는 마음이 되도록 우리를 바꿔놓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상황을 보면서 우리의 심령이 깊이 깨트려져서 그 상황을 통해서 들리는 음성에 의해서 우리가 깊이 깨트려져서 아버지 앞에 새 삶을 살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상황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깨달을 수 있는 훌륭한 전초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많은 음성을 들려주셨지만 이제 여러분들이 요나처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들리는 하나님의 새 음성이 여러분들에게 필요합니다. 오랫동안 하늘은 닫히고 그 교제의 창문이 막혀서 상황을 통해서 겨우 하나님의 음성을 짐작밖에 할 수 없던 상황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그 찬란한 하나님의 은혜의 빛, 말씀의 빛이 가슴속에 들어와서 자신이 걸어가고 있었던 죄악 된 길을 보이고, 자기가 처한 위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분명하게 의심할 수 없도록 명료하게 지시하시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하시는 말씀의 풍성한 깨달음의 빛이 들어올 때 그가 비로소 예전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고 새 삶을 살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난과 시련이 우리를 무릎 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고난과 아픔, 심지어는 죽음의 공포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끊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고통, 그리고 우리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 하늘의 문이 굳게 닫히고 더 이상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 아버지의 말씀을 통한 깨달음이 더 이상 없고 상황을 통해서 막연하나마 하나님의 뜻을 짐작은 하지만 가슴을 후벼파고 들어와서 나를 갱신시키는 하나님의 진리에 의한 은혜의 작용은 없는 삶, 이 삶이 우리에게 있어서 최대의 고통이요 시련이며 고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를 멀리 떠났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상황이 아니라 아주 명료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말씀의 은혜를 받을 때 보면, ‘하나님이 나 혼자에게 대면하고 말씀하시는구나’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바로 그런 데서 오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말하고 싶습니다. 한번 지난해를 보십시오. 사람의 현재는 과거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그리고 사람의 미래는 현재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과거를 떠나서는 오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과거에 걸어온 길을 올해도 걸어간다고 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걸어온 길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부끄러움도 많고 요나처럼 불순종하며 걸어온 길이 많지 않습니까? 그 길을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올해도 걸어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너무 우울한 이야기가 될 지 모르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순종하는 길을 걸어갔던 요나라고 해서 하나님이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마음이 한없이 낮아지고 자신의 힘으로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할 수도 없을 그 때에 다만 엎드러져서 주님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주님이 어떻게 나를 만져주시지 않으면 나는 이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하는 마음으로 엎드려져 있을 때였습니다.
삼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서 씨름하다가 바닷가에 퍼진 그 요나가 무엇을 결심할 수 있을까요? 돌아갈까요, 니느웨로 갈까요? 이것도 할 수 없고 저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대신 바뀐 것이 있다면 예전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우던 그 치밀한 교만, 계획된 불순종,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담대한 욕망, 이런 것들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힘없이 무너져 앉은 한 덩어리의 진흙이 되어서 주님의 손에 의해서 빚어질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엎어져있는 그 요나에게 상황을 통해서밖에 말씀하시지 않았던 하나님이 생생한 음성으로-처음 요나를 선지자로 소명할 때처럼 생생한 음성으로-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게 되었는데 이 말씀의 강도나 깊이, 그리고 이 말씀 속에 긷든 하나님의 변화의 모든 능력은 1장에서 주었던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강도로, 그런 은혜로, 이 요나에게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말씀을 통해서 불순종하던 삶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길이 열린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에게도 여러분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들이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동안에는 우리들이 그 어려운 시련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작년 한해가 물고기 뱃속에서 지낸 한해였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사경회 기간 동안에 깊이 깨닫고 새로운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며 작년 한해가 돌이켜서 다시 순종하는 길로 걸어간 한해였다면 올해도 거기에서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작년에 걸었던 그 걸음으로 지속해서 아버지 앞에 새 삶을 살아가는 그런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만 하면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실패에서 다시 시작할 기회로 바꾸는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만 하면 우리는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고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나와있는 2절 첫 번째 명령형 동사가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일어나라"하는 것이었습니다. ‘달리다쿰’할 때의 ‘쿰’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단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3일 동안이나 씨름하고 바닷가에 엎어졌습니다. 일어날 기색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탈진한 상태인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어나라”하십니다. 스스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러진 요나의 어깨를 번쩍 일으켜 세우시지 않으시고 ‘너 스스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과 다시 시작하려고 하는 신자의 개별적인 결단은 함께 역사 함으로서 진정한 옛 삶을 청산하고 새 삶을 걸어가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결단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결단이 필요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주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편에서의 결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얼마나 강력한 결단을 요하는지 예수님께서는 한 손이 범죄 하면 아예 잘라버리라고 하셨고, 기독교 역사에 보면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였지만-그것을 명령으로 실천했던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예화: 실제로 놀음하던 사람이 손목을 잘라버린 이야기)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눈이 범죄 하면 눈을 빼 버리라” “한 손이 범죄 하면 손을 잘라 버리라”고 하신 것은 문자적으로 실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범죄 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실제로 자신의 손목 하나를 자를 정도의 강력한 결단을 매일 되풀이하는 삶이 아니면 자신 속에 있는 범죄 하고자 하는 욕구와 결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하지 못한 것을 보면 두 손으로 두 눈을 뽑아버리겠다’고 하는 정도의 결단이 결국은 자신의 깊은 내면의 세계 속에 있는 선하지 않은 것을 보며 그것을 통해서 만족을 누리며 살려고 하는 결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인터넷이 가정을 파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루이스 베일리라는 청교도가 “이 험한 세상에서 신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 이상으로 세상을 알려고 애쓰지 말라 그것이 경건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것은 인간 속에 있는 악을 행하려는 욕망과 옳지 않은 것을 보면서 살려고 하는 욕구가 얼마나 본질적인 것인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 순간 자신의 지체를 잘라내는 결단 속에서 죄와 더불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하고 승리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신앙의 이력 속에 결단의 순간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결단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쓰러져서 일어날 기운도 없는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처음 만나셨을 때도 하신 말씀이 이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일어나 네 발로 서라 그리고 내가 네게 나타난 것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들의 사환과 증인이 되어”하셨습니다.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만나서 눈이 멀고 혼비백산하여 엎드러졌는데 예수님께서 “일어나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단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경회든 성경이든 결국은 우리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분명히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명료한 음성이 들리고 그렇게 분명하게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결단을 실천할 수 있는 담대함과 능력들을 공급해주신다고 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도 그 결단대로 될 지는 모르지만 결단이 없으면 금년 한해의 삶이 작년만 못할지언정 더 나아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경회를 맞이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깊이 각오하고 결단을 하면, 하나님이 그 일들을 기뻐하신다면 도와주실 것이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면 우리가 포기할 것 아니겠습니까? 결단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했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내 뜻이니까 포기하고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면 이루어지리라고 하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총체적으로 결단을 하면서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어서라고 하는 이 명령을 결단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여러분들에게 붙여진 부끄러운 이름들이 있습니다. 걸핏하면 주일도 빼먹는 신자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결단하십시오.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으면 뭐하나. 너는 결국 나와 겨루어서 한번도 이기지 못했어” 새벽기도가 하는 이야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결단이 필요합니다. 무엇하나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그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담대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목표한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습니다’하는 결단, 그런 용기를 하나님 앞에 간직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신년 심방을 하고 나면 열 가정씩 교회 근처로 이사왔었다- 우직 순종형, 주저형, 마지못해 순종형이 있다)
공기 좋은 곳에서 큰집을 쓰면서 사는 좋은 유익들을 다 포기하고 이곳에 오면 여러 가지 불리하지만 한 가지 축복은 교회가 가까워서 새벽기도에 늘 나올 수 있고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것 하나면 지하실로 내려가도 괜찮고 방 네 개가 둘로 줄어도 괜찮다는 선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와야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방배동교회 옆으로 가서 신앙생활 해야지’ 결단했더니 전에 살던 집보다 더 싸고 더 큰집이 나와서 간증하고 싶은 경우가 되고 싶겠지만 그것은 자기 욕심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화: 인덕원 예배당 옆으로 먼저 이사 간 성도들에게 미안한 마음-기도 많이 해서선교적인 터가 잘 잡히도록 하나님이 미리 보내셨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분명한 사실한 하나는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결단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때에 내리는 결단, 그것은 적합한 상황에서 내리는 한번의 결단을 놓치면 적합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세 번, 네 번 결단을 해도 그 첫 번째 결단을 내린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때가 아주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서 결단하리라’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절하게 일어나기를 원하시고 앉은뱅이와 같이 앉아 있던 신앙, 오랫동안 깨닫기는 했지만 더 이상 변화가 없는, 현실에 눌어붙은 삶을 하나님이 청산하시기를 바라시는데 ‘내가 결단하리라’ ‘용기를 내리라’하는 마음을 가지고 깊이 결단해서 하나님 앞에 돌이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에 보니까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처음 하나님이 주신 그 명령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단은 거기에 기여할 수 있는 결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온갖 사연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 때 요나는 아마 새로운 기대를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가 미끄러진 그 지점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다가 요나를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삶이 주는 유익은 계속 진도를 나간다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삶은 한참 딴 길로 가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서 다시 돌아오면 지난번에 미끄러진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화: 50이 넘으셔서 신학 공부를 하신 어느 침례교 목사님이 젊은이들을 부러워하시던 이야기)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들이 미끄러졌던 지점에서 세우십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나면 그냥 같이 흘려버리고 잊어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다시 세우십니다. 정직이 문제가 되어서 여러분들이 미끄러졌으면 다시 그 정직의 문제를 세우십니다. 순결이 문제가 되었으면 다시 순결의 문제에 여러분을 세웁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은혜 받고 난 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가정의 문제입니다. 미움의 문제 때문에 미끄러졌으면 은혜 받고 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한 문제에 대면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뜻을 우리의 회개와 결단을 통해서 성취해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일호의 차착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해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다시 미끄러지는 것도 여러분들에게 달렸고 다시 결단을 하는 일도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를 세운지 벌써 8년이 되었습니다. 엊그제 같은데 얼마 안 있으면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무엇 하나 한 것 없이 바람을 잡는 것 같은 세월인데도 야속할 정도로 빨리 세월이 흘러가 버리는 동안에 우리들이 생각 없이 살고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 주실 때에 갖게 하셨던 그 목표로부터 이탈된 삶을 사는 것은 엄청난 인생의 낭비요 불행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쏜살이 시위를 떠나 과녁을 향해 단번에 날아감 같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보면 기대가 됩니다. 우리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린 나이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의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저들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생각하면 정말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못 살았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늦게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늦었어도 주님 만난 그날이 자기의 남은 생애의 첫 번째 날이요 미래의 첫 번째 날이었던 것을 어떡합니까? 그것만해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이제 주님을 만났으니 이 미래가 주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혀서 사는 남은 생애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미끄러질 시간이 없습니다. 뒤로 물러설 시간도 없고 더 이상 낭비할 만큼 우리가 젊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삶은 결단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아서, 만일 우리가 조금 미끄러졌다면 더 많이 미끄러지기 전에 주님이 우리를 처음 부르셨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서 주님이 우리를 먼저 믿게 만들어 주셨을 때 우리를 세워주신 그 가정에서, 그 직장에서, 그 사업장에서, 일터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보람이요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이일은 간단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휘어잡지 않으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금년 한해동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어린아이같이 은혜를 받게 하셨지만 여러 사람들이 2001년도라고 하는 신앙의 외나무다리에서 많이 미끄러졌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누구는 이 삶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만 왕도가 없습니다. 매일매일 마음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자신을 잠그고 육신의 소욕과 마음에 원하는 바를 따라 하기보다는 우리를 움직이시는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며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의 수고를 그치고 ‘내 품으로 돌아 오라’고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아직도 많은 일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더 이상 미끄러질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새롭게 일어서서 기쁨과 은혜가 풍성한 삶을 살면서 우리같이 쓸모 없는 죄인들을 건져주시고 구해주셨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각오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어린아이와 같이 말씀을 사모하라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1-2上)
사도 베드로는 이 편지를 자기의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베드로서는 핍박을 앞두고 있는 아주 어려운 시기에 그 사람들을 소망 가운데 살도록 붙들어주기 위해서 쓴 편지들입니다. 그는 바로 그 앞부분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수신자들이 어떻게 주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평범한 복음 적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거듭난 것은 썩어질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하도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을 깊이 상기시킨 다음에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한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그리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그렇게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지난 한해를 보내고 한해를 시작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한해가 시작될 적마다 올해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올해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있을 것이다. 우리 이렇게 스스로 자신에게 말하지만 그러나 어느 해든지 우리들이 희망을 갖지 않고 한해를 시작하는 적이 없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받기에 적합한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한해가 시작되면 새롭게 시작하는 그 마음을 바다, 떠오르는 새해 첫 번 일출 이런 것들과 많이 연결을 짓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제 한번 동해안을 가서 여기 1월 1일에 사람이 많이 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여관방 하나에 10만원씩 줘도 방을 못 구할 정도로 사람들이 바글바글 끓는답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한번보고 그리고 심호흡을 하면 일년 동안에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모양입니다.
어째든 저는 한해에 우리의 인생을 넓은 바다에 비유한다면 거기를 떠가는 우리의 인생은 그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 한 척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배들 중에는 이제 막 항구에서 건재되어서 나온 생생한 배도 있지만 그러나 오랜 동안 풍상을 겪으면서 수없이 항해를 해서 서금서금한 배도 있고 그리고 어떤 배는 값지게 비싼 재료로 만든 배도 있지만 고기 몇 마리 잡기 위해서 띄우는 다 부서진 것 같은 배도 있지만 쪽배도 있는 법입니다.
어째든 간에 배가 우리의 인생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심령은 그 배를 운행하는 항해실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길이 어디로 가는가 일년동안 우리의 인생에 항로가 어디를 향해서 가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심령에 달렸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주님의 것이 되면 주님이 가다리고 계신 포구를 향해 갈 것이고, 우리의 심령이 세상의 것이 되면 또 예년처럼 실패를 되풀이하면서 세상을 향해 가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주님에 의해서 우리의 심령이 점령당하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 항해하는 핸들 키를 주님이 직접 붙드시고 그래서 폭풍과 파도를 헤치면서 주님이 운행해주신다고 할 것 같으면 금년 한해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 항로에 키를 붙들고 계신 그 주님이 그 모든 시련이나 풍랑 파도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오늘 사도가 자기의 편지를 받는 이 수신자들에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심령이 주님에 의해서 점령당하는 그래서 심령에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는 비결을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두 명령형 동사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버리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모하라는 명령입니다. 버리라는 삶의 개혁과 관계되어 있고 사모하라는 영적인 욕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일먼저 사도는 궁극적으로 사도가 생각하는 영혼의 참다운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그 영혼이 변화되며 그 영혼의 참된 변화는 오직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사도 베드로로부터 편지를 받고 있는 이 수신자들이 거듭날 때 경험했던 바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듭난 것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들, 혹은 이 세상에 공교한 지혜들로 거듭난 것이 아니라 항상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거듭나고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원리가 이미 신자가 된 지금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들이 거듭난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들의 영혼이 변화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는 그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먼저 “버리라”고 하는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모든 악독, 모든 궤휼, 그리고 외식, 그리고 비방하는 말, 이 모든 것들을 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에 그가 정말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재료가 집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를 지어 가는 온전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악독, 이것은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악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 안에도 얼마든지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신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고자 하는 악과 그리고 그 주님 앞에서 부도덕한 삶을 살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이런 죄들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의 삶은 정말 순전하게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릴 이유가 없이 그렇게 충만하고 풍부한 삶을 살 것입니다. 제 속에도 여러분 속에도 여전히 악이 남아 있고 그리고 악독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미워하고 떨쳐버리려고 하는 의지가 없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의 심령이 대대적으로 개혁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궤휼을 말하는데 이 궤휼은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의 잔 꿰입니다. 인생을 살되 신령한 지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살지 않고 세상 적인 잔 꿰, 세상 적인 지혜로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궤휼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미워해야 할 세상의 지혜이며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기 전에 자기를 먹여 살렸던 이 세상의 잔 꿰입니다. 이것들을 청산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의 진정한 개혁이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변화되기 전에는 세상의 지혜, 그리고 악인의 잔 꽤 살았으나 주님을 믿고 변화된 이제는 악인의 잔 꽤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빛,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의 지식의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신령한 삶의 변화를 위한 조건입니다.
세 번째는 외식입니다. 이 외식은 속으로는 하나님을 향해서 옳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판과 자기 자신의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하는 모든 거짓되고 위선 된 생활이 종교에 적용된 것이 외식된 삶입니다. 그러니까 이 외식의 반대는 진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계속해서 진실해지기를 회피하고 거짓과 그리고 위선으로 자기 자신을 포장하면서 살려고 하는 그런 헛된 생각들이 그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한 그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기 힘든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비방하는 말인데, 이 비방하는 말은 마음속에 있는 비방에 가장 쉬운 표현이고 마음속에 있는 이 비방에 마음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정죄하고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못마땅하게 하는 그런 마음의 경향성, 그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죄들이 신자 안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당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자녀로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요? 이미 벌써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엄한 경계와 박해는 시작이 되었고 그리고 그 박해 속에서도 주님을 믿으면서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는 것은 인생에 전부였고 정말 생명을 걸지 않고는 기독교 신앙을 그 시대에 견지할 수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영원하도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거듭나고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아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했어도 여전히 그 속에 이런 악독과 그리고 궤휼과 그리고 외식과 그리고 형제를 비방하는 악한 말들을 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신자 속에 잘 남아 있고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에게 사로잡혀야 할 사람의 인생을 죄와 육신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기 위해서는 이처럼 삶에 대한 단호한 태도에 개혁이 뒤따를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신자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 신자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서 그로 하여금 참다운 신자의 길로 돌아서도록 만들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방법은 무궁무진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을 회심시켜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고 회심의 기억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에 또 다른 회심을 불러일으켜서 회심에 기억을 회개를 통해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실로 무궁무진합니다.
그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역사 해주시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주님을 믿고 이렇게 신앙 생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 속에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는 부덕한 삶을 청산하고 그것을 미워하고 버리는 결단하는 마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로 돌아오고자 하는 자를 돌이키시고, 당신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순종할 힘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의 깊이를 열어 보이셔서 그들의 심령에 참다운 변화를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난 한해와 똑같은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첫 주일을 맞이하고 작년에 내 인생이 흘러온 것처럼 올 한해도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라고 그렇게 편안한 마음을 가지신다면 여러분들의 인생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많이 베푸시고자 해도 결국 여러분들의 결단하는 태도가 없이는 여러분들의 삶에 대대적인 개혁이 불가능하고 여러분들의 삶에 참다운 개혁이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여러분들이 경건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 신자들이 매순간 분투하고 결심하고 결단을 내리고 살아가야 할 그런 장엄한 촉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앙은 목숨을 건 모험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주님을 찾고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쫓아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은 주님을 믿기 전에 우리들이 생각했던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난 후에 인생이 많이 바뀌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인생이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가던 그때보다 더 편안해졌는가 라고 물으면 저는 결단코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고도 마음고생이 많고 예수를 안 믿었다면 이렇게 많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예수님을 믿기 전과 비교한다면 행복했는가 라고 말한다면 전 거기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우리들이 변화되고 나니까 삶의 가치관도 바뀌고 생각도 바뀝니다. 옛날에 시시하던 것들이 지금은 굉장히 중요해졌습니다. 옛날에 중요하던 것들이 이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른 방향으로 가니까 무엇인가 주님 안에서 우리의 인생에 푯대가 있고 목표가 있으니까 힘들고 분투하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분투하고 도전하는 목표가 있으니까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정말 불행한 사람들은 돈이 많고 시간이 많고 인생에 목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쩔 줄 몰라합니다. 누가 말했듯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맨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을 사람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는 삶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심령이 그분의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우리의 삶을 개혁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개혁했습니다. 예전에는 은혜 받지 않았는가. 은혜 받았습니다. 옛날에는 하나님 앞에 새롭게 결심하지 않았는가, 결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그래서 신자의 삶은 천로 역정입니다. 마지막에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우리 안에서 이런 부패한 우리의 욕망 그리고 더러움,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육신의 소욕 그리고 특별히 이런 신령한 일을 위해서 힘쓰지 않는 그런 육적인 게으름들은 여전히 우리 속에서 존재합니다. 숨이 멎어야지 만 끝납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딱 죽으면 이제 죄도 더 이상 역사하지 못합니다. 그때까지는 계속해서 한편으로는 부패한 삶,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악과 더불어 싸우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로 부어지는 신령하고 아름다운 은혜를 끊임없이 공급받으면서 이 치열한 믿음의 싸움을 분투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이제 교회당을 지으면 이사를 가겠지만 그것은 그때 일이고 지금은 구역들이 많이 늘어나서 저녁때 자면서 구역숫자하고 구역공부를 할 장소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책이 안 섭니다. 그러니 이 추운데 밖에 나가서 어디 공부할 수도 없고 주위에 어디 구역 공부할 만한 곳을 얻어보려고 하니 턱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지하 식당을 돈을 들이지 말고 깨끗하게 해서 서로 식당에 내려가서 공부하고 싶은 장소를 만들면 참 좋겠다. 아무리 머리를 써도 거기 이외는 장소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 저녁 이틀 저녁에 내려가서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돈은 안 들이고 청소를 깨끗하게 하고 그래서 한번 좀 환하게 만들어보자.
그래서 간사들과 그리고 교역자들, 전도사님들도 작업복을 입고 아침 9시까지 집합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하여튼 돈은 들이지 말고 깨끗하게 하라. 그래서 토요일 새벽까지 했다고 합니다. 했는데 그 더럽던 공간이 토요일 날 제가 와서 들여다보니까 아주 깨끗해졌습니다. 왜 그랬는가 했더니 바닥을 5번을 갈고 왁스칠을 하고 그 다음에 5-6번을 페인트칠을 했는데 처음에 칠할 때는 이까짓 것 해서 여기가 깨끗한 장소가 될 것 같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 칠하니까 좀 낫고, 세 번 칠하니까 더 낫습니다. 그리고 나는 말씀 준비를 하러 갔는데 돌아와서 보니까 아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무슨 웨딩 홀처럼 만들어 났습니다. 오늘 심심하시고 특별한 계획이 없으시면 거기서 결혼식 하실 분 있으면 하십시오.
그런데 깨끗합니다. 얼마나 깨끗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놓고 각 사무실에 있는 꽃다발 받은 것, 거꾸로 매달아 놓은 것 그것 다 공출해서 받아서 지하실에다 걸었더니 아주 환합니다. 나는 오늘 점심을 거기서 먹고 싶은 생각이 있을 정도로 깨끗해졌습니다. 바닥을 보니까 그 바닥이 생겨난 이래로 최고로 깨끗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했더니 5번을 갈고 5번을 왁스칠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야 노동이 얼마나 좋은 건가. 내가 그것을 보면서 그랬습니다. 이것 봐라. 은혜도 한번 받으면 안 된다. 한번 해봐야 표시가 안 납니다. 그런데 한번 두 번 세 번 분바르고 그 다음에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냥 글라인드로 사정없이 갈아서 때를 벗겨낸 다음에 왁스를 다섯 번이나 바르니까 아무리 못 생겼어도 화장품을 다섯 번 바르면 그래도 잠시는 봐 줄만 합니다.
똑같이 우리의 삶도 개혁했습니다. 결심했습니다. 뭔 결심을 그렇게 매일 하는가 하는데 하루도 못 가면 매일매일 해야지 됩니다. 삼일가면 삼일마다 한번씩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결단하고 그리고 옛 삶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자라는 쓸모 없는 욕심들, 주님을 거스르며 살고자 하는 부패한 본능들 이런 것들이 속에 쓴 풀처럼 돋아날 때 가끔 낫을 들고 과감하게 배어내는 개혁을 해야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균형 잡힌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실패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년 한해 시작할 때 여러분들이 제일먼저 해야될 일은 결단하는 일입니다. 지난 한해동안 내 삶을 실패로 이끌어오게 만들었던 것을 결단하고 삶에 모든 방향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서 오랫동안 고통 하였던 것들을 결단을 하고 버려야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습관적으로 짓던 죄와 불순종에 대해서 회개하고 그것들을 결단하고 또 한편으로는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민첩하게 살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우리의 게으름들을 청산해야지 됩니다. 하나님 앞에 바칠 가장 훌륭한 제물 중에 하나가 게으름입니다. 자, 내 안에 있는 게으름 이제 죽여서 주님의 손에 드립니다. 게으름들, 그 게으름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배이면 머리가 흐릿해져서 더 이상 자세한 것을 알고 싶지 않고 그 게으름 영이 우리의 기도 생활에 배이면 하루 기도하지 않는다고 뭐가 되나. 로마도 어차피 하루에 안 이루어졌는데, 그리고 기도 생활에 전부 다 부패가 깃듭니다. 그 게으름이 섬기는 생활에 깃들게 되면 하나님을 위해서 태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게으름이 순결한 삶의 정신을 잠식하게 되면 그 다음에 불결하게 됩니다. 불결과 게으름은 아주 사촌입니다. 같은 혈통입니다. 그리고 이런 게으름들이 경건 생활에 깃들이게 되면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경건하게 살고자 애쓰는 분투하는 삶에 이제 영향을 미쳐서 부패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하게 이제까지 나의 삶을 실패로 이끌어왔던 옛 습관과 옛 삶에 대한 철저한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순종에 대해서 설교하다가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식으로는 안되고 실제에 있어서는 며칠 해보다가 나중에 그 결심을 이행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만큼 진지하게 결단을 내리고 이제까지 자신의 삶을 부패하게 했던 옛 습관이나 불순종에 대해서 끊어버려야 되겠다고 아주 결단을 내리면 그 순간에 하나님이 자기의 결심을 기뻐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죄인의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단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첫 주입니다. 영시 예배 때는 잠자다가 못 나왔다고 할지라도, 아니 많이 나왔습니다. 이번 영시 예배가 기록입니다. 주일 2부 순서만큼 거의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자다가 못나온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망년회 하다가 못나온 사람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포기하기에는 이르고 일년이 아직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첫 주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깊이 결단을 하십시오. 습관적인 생활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청산하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동안에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오느라고 했지만 이런 결단이 없었기 때문에 우유부단하게 흘러온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제껏 까지 예배 생활에 게을렀던 사람들에게는 예배 생활에 결단을 해야지 됩니다. 우리 교회 자매들 가운데는 수요 예배 때 그렇게 나오고 싶어도 시부모님들과 남편이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그 핍박 때문에 수요 예배에 가슴아프게 못 나와서 구역 예배에 와서 테이프를 사 가지고 가는 자매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아무 이유도 없이 수요일 날 예배도 안 나오고 세상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일찌감치 집에 들어가서 TV나 보는 이런 삶도 개혁을 해야할 개혁 대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여러분들에게 이 교회에서 주일 날 나와서 낮 예배나 달랑 드리고 가면 신자의 의무는 끝났다고 가르쳐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렇게 해서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수요일 날 안 나오면 천국에 못 갑니까? 그런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겨우 죽어서 천국에 가려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자녀 삼아주셔서 어두운 세상에 우리를 두셨는데 좀더 우리가 깊이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그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 앞에 주일날도 닦여야 하고 수요일 날도 닦여야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원하고 여러분들에게 바래도 잘 안 합니다.
31일날 영시 예배를 드리던 그 직전에 전야제가 있었는데 저는 치료를 받느라고 못 왔는데 누가 그러던 데 앙케트를 받았는데 김 목사에게 선물하고 싶은 일 번, 건축헌금 100억이랍니다. 나는 사실 그게 큰 선물이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그리고 이인가 삼인가에 뭐가 나왔는데 목사님께 드리고 싶은 새해 선물, 그게 사실 나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인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변화된 자신, 하나님 앞에 가책을 느낀 것이 순서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새벽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일년동안 건축 헌금 100억 빼놓고 간절하게 보이셨던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지체들이 다 읽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안 합니까? 왜 안 줍니까? 진짜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
주님이 제일 기뻐하는 선물은 여러분들이 은혜 받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서 여기다 리본을 묶어서 하나님께 그냥 선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이 보시기에는 눈물겨운 선물입니다. 지금 그냥 드리면 안 될까요? 그 무슨 변화되지도 못한 것을 드려서 뭘 합니까? 변화되어서 정말 변화되어서,
옛날에 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누가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진짜 리본으로 묶어서 가지고 왔는데 그때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상자를 열어보니까 파인애플 하나하고 야자 하나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근사하게 리본을 묶어서 진짜 이것이 귀한 것이다. 사실 파인애플은 어떻게 먹는지 알겠는데 야자는 어떻게 먹는지 먹어봤어야 알지, 망치로 두들기고 벽에다 두들기고 송곳으로 파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째든 파서 먹으려니까 속이 썩었습니다. 순간에 악취가 가득 났습니다. 리본을 아무리 묶으면 뭐합니까? 속이 썩었는데, 차라리 안 썩은 사과나 하나 갖다주지. 그래서 리본은 내가 주겠으니 변화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리본은 많은데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매일 만날 적마다 교회가 어떻게 됩니까? 교회 건축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지요? 그런데 난 아주 솔직히 이야기해서 교회 건축보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여러분들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기만 해보십시오. 그러면 교회는 저절로 지어집니다. 어떻게 지어지는가 하면 아니 변화 받아서 진짜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서 변화되었으면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날 것이고 그까짓 것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성도들이 헌신을 하는데, 그것 보다 더한 일도 해냅니다.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데 그렇게 변화되는 일, 하나님이 올해도 제일 기뻐하시는 선물은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정말 예전에는 악독한 사람이었는데 선한 사람들, 예전에는 잔꾀를 가지고 살았는데 이제는 믿음으로 살고, 전에는 외식했는데 이제는 진실 하나에 생명을 걸고, 예전에는 형제 사랑이 없었는데 이제는 형제 사랑으로 살아가는 그 변화된 삶 그것이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먼저 어떤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지를 회고하면서 결단을 해야지 됩니다. 이제 2001년도에 내 삶을 실패하게 했던 더러운 것들이 2002년도에는 이 거룩한 땅에까지 들어와서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리라 하는 그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오를 새롭게 해야지 됩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갓난아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그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신기한 게 뭔가 하면 이렇게 침대에 뉘니까 입에서 배너의 물질들이 나왔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난 다음에 간호원이 우유를 50cc를 타 가지고 들고 왔습니다. 그것을 아이 입에 꽂으니까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갓난아이가 입을 오물오물하면서 그것을 빠는 것입니다. 발길질을 하고 고개 짓을 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배속에서 연습을 많이 했으니까 그런데 무슨 배 안에 젖꼭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연습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젖꼭지를 대니까 그것이 먹는 것인 줄 알고 빠는지, 그게 어린아이의 본성,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는 것 이런 것을 아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를 들고 있는 갓난아이, 왜 어린애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왜 젖에다가 비유를 했을까요? 하필이면 밥 먹는 것에 비유하든지, 사실 어른들도 한 두끼만 굶겨놓으면 진짜 먹는 일에 집중합니다. 주위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다고 합니다. 막 정신없이 퍼먹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것을 안 하고 갓난아이, 신생아입니다. 난지 일주일이나 열흘밖에 안 된 그런 어린 아기를 말합니다 아이가 백일쯤 지나면 배가 고파서 젖을 달라고 막 울고 그래도 딸랑이 같은 것을 가지고 막 흔들면서 정신을 현란하게 하면 아이가 잠깐 울다가 잊어버리고 그 딸랑이를 쳐다봅니다. 그러다가 딸랑이가 사라지면 다시 젖 생각이 나서 웁니다. 그런데 금방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통하지가 않습니다. 그 애는 딸랑이가 뭔지도 모르고 소리도 잘 안 들립니다. 거기다가 갖다 괜히 흔들고 하면 애가 정신착란이나 생기지 안 됩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 아기는 오직 거의 본성적으로 딱 그것 하나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먹는 것 하나에. 그런 마음을 신자가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해야 됩니다. 그것이 변화된 자신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중요한 첩경입니다.
우리가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고 제멋대로 살던 우리들이 이만큼이나 변화되게 만든 그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이만큼이나 변화시켜서 그래도 주님의 뜻을 구하면서 사는 사람들로 바꾸어놓았습니까? 물론 고난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 신앙의 연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시련과 고난이 우리를 새사람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이만큼이나마 변화시켜주었던 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두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들어오니까 깨닫게 되었고 깨닫게 되니까 예전에는 알지도 못하고 짓던 많은 죄와 부패한 생활들에 대해서 미움을 갖게 되었고 그리고 그것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아갈 용기와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우리의 욕망에 이끌려서 하나님 거스르며 살던 사람들인 우리의 발목을 잡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하고 자학하는 마음으로 인생의 길을 포기했을 때에도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알려주신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였습니다. 주님이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 우리의 영혼들을 어루만지시고 고치시는 큰 은혜의 작용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 안에 부패하고 더러운 것들이 있는데도 주님이 이만큼이나마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이제까지 우리를 지켜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얻지 못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고통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열린 신문을 보면서도 몇 개의 간증을 읽으면서 이 세상에는 정말 변화 받고 싶어하고 그리고 주님을 제대로 섬기고 싶어하면서도 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갈급 해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마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하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그 길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던 때,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내 속에 있는 부패 함들을 이기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그런 많은 대적들을 이기면서 지혜롭게 믿음으로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지 모르는 것도 많았고 또 알고 있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없어서 그 지식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어두운 세상에서 그렇게 쓸모 없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 한사람, 한사람 삶의 상황은 다르고 주님을 만난 깊이도 동일하지 않지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어두움의 자식에서 빛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던 자리에서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살수 있는 사람들로 우리의 입장을 바꾸어놓으셨습니다. 무엇이 그리하셨습니까?
그래도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점이 있고 훌륭한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분을 택하셨고 그리고 택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누가 여러분들을 때리고 훈육한 사람이 없어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췸을 얻어서 그 말씀을 통해서 부족하지만 주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로 하나님이 만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여러분들의 삶의 질을 얼마나 놀랍게 바꾸어놓았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아직까지도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악독과 궤휼과 그리고 진실함이 없는 외식과 형제에 대한 미움이 남아 있는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트려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여러분들이 얼마나 막 나가는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그런 사람들을 주님이 단정하게 만드셔서 올 한해도 어떡하면 금년 한해를 주님의 뜻대로 살수 있을까? 어떡하면 금년 한해 내 앞에 펼쳐진 이 한해동안 연장된 생명을 통해서 우리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그의 명예를 높이는 삶을 살수 있을까? 어떡하면 올 한해 산하에 내린 눈 때문에 깨끗해진 밭과 같이 그렇게 좀 순결한 삶과 마음으로 우리 주님께 드리며 살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는 착한 자녀들로 하나님이 바꾸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새해 한해를 시작하면서 집도 작년의 집 그대로 살아도 좋고, 직장도 작년에 다니던 직장에 다녀도 괜찮고, 작년에 하던 사업 올해 계속 해도문제가 없지만 우리 자신은 작년에 우리 자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 요즘 수요일마다 참 기쁩니다. 시편 6편을 강해하는데 젊은 지체들, 나이가 어린 지체들에게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교회당을 다 돌아보고 마지막에 들어갔다가 다시 내려와도 밤늦게까지 엎드려서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가 하나님 앞에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깊이 뉘우치고 그리고 숙명적으로 따라다녔던 나의 삶을 실패하게 만들었던 옛 습관, 옛 생활과의 단절은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첩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그리고 흐느껴 울면서 회개하고 아파하면서 우는 이유는 그것을 짤라내는 통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침을 받았을 때에 내가 되지 말았어야 할 나를 잘라내는 아픔, 그리고 내가 살기 싫었지만 그러나 살수밖에 없었던 나와 동떨어질 수 없는 나의 옛 삶을 단절하고 잘라내는 그 결단, 그게 너무 아파서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이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잘못을 주님이 아파하시는 그 마음으로 눈물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이 안 기뻐하시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마음처럼 변화되지 않는 자신이 안타까워서 흐느껴 울면서 나는 갈길 모르니 나를 인도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목놓아 매달렸던 적이 언제입니까? 우리들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 가면서는 절대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한해가 저무는데도 주님을 기쁘게 섬기면서 살아오지 못했던 후회들, 그리고 남은 기간이라도 주님을 더 잘 섬기고 싶다는 사모함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 같은 그런 은혜는 무엇을 통해서 옵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부패한 우리의 마음에 각질을 벗겨내고 우리의 심령에 자각하는 마음을 주실 그때에 우리에게 이렇게 변화를 갈망하는 마음들이 생겨나고 그리고 이제껏 까지 익숙해왔던 친숙했던 삶에 대해서 고별하고 싶어하는 그런 결단하는 마음들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 전체가 이런 사실에 대한 간증으로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이겼기에 우리도 이길 수 없는 우리를 이기고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우리를 서게 할 수 없었지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이기게 하심으로 우리는 이겼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원래는 이 세상이 고향이었던 삶들이었기 때문에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우리 마음에 오셔서 이런 우리의 옛 삶에 대한 사모함을 박살내주고 그리고 다시 부패한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만드셔서 하늘가는 밝은 길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이 무엇으로 그 일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진리를 아는 빛도 없고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도 없어서 오랫동안 부패와 패역으로 가득 차서 말기 암 환자처럼 아무 희망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다가오셔서 고쳐서 새살이 돋게 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게 만들어주신 것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깨닫는 우리들에게 오셔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그분을 보게 하시고 만날 수 없던 우리들을 만나주셔서 새 삶에 대한 소망을 갖게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우리의 심령이 그 말씀에 은혜에 의해서 녹아질 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까?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고치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아팠지만 그 아픔 속에서 우리를 건강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기 때문에 말씀 앞에서 말씀이 요구한 대로 결단하고 순종의 삶을 향해 걸어갈 담대한 용기들을 얻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농담처럼 말씀드렸지만 사실입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드릴 영원하고 훌륭한 제물입니다. 여러분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되어서 주님 앞에 바쳐진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더 바라시며 그래서 주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항해에 선장이 되어주신다면 여러분들은 또 주님께 무엇을 더 바랄 나위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작년 한해 여러분들을 괴롭혔던 실패가 올 한해에는 계속되지 않기 바랍니다. 작년에는 꿈만 꾸던 소망 사항들이 금년에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새해를 시작하면서 이 사경회에 좀 간절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새벽에도 나와서 기도하면서 내 마음을 열어주셔서 이번 사경회에 정말 주님을 만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옛 실패들이 눈밭처럼 펼쳐진 2002년도는 범하지 못하도록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나에게 이것들을 이기며 살수 있는 은혜의 능력을 주시고 처음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하며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녹아지던 그 처음 주님의 사랑과 은혜의 만남으로 데리고 가셔서 그래서 정말 새 삶을 살게 도와달라고 여러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새벽 기도도 하시고 주님이 지시하시면 금식 기도도 하시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변화 받고 싶어하는지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새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지를 주님 앞에 보이시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그 사모함을 거절하지 않고 이번 사경회에도 여러분들을 만나주셔서 정말 새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7. 성화의 구원에서 자라가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下)”
지난 시간에 우리는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갓난아이가 엄마의 젖을 빨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절히 사모할 때에 참다운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고 삶의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고, 그렇게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결단을 하고 우리들의 오래된 악습과 잘못된 우리들의 삶, 이런 것들에 대해서 끊어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2절 하반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한 후에 “왜냐하면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두 가지를 다루게 되는데 우선 첫째는 2절 하반절에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에서 자라 가는 것과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 2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이 힘써야 할 바”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사도는 우리가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로 낯선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것은 “내가 너희들에게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을 갖기를 요구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계속 성장해서 구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의 양면적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을 두 가지라기보다는 두 측면을 함께 말하는데 하나는 즉각적인 측면이고 또 하나는 점진적인 측면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한 쪽에서 보면 이미 얻은 구원이고 다른 한쪽에서 보면 아직 다 얻지 못한 구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지 만 겨우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죄인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어떤 노력을 통해서, 아니면 장시간의 수련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는 업적으로서의 결과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죽게 하심으로 복음의 터를 놓았고 누구든지 자기는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음으로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주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데 이것은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장기간에 걸쳐서 획득될 수 있는 구원이 아니라 믿는 그 순간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마음으로 믿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즉각적으로 당신 나라의 백성의 명부에 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또한 취소될 수 없는 구원이기도 합니다. 한번 구원받은 사람들을 주님께서 그의 믿음의 상태에 따라서 다시 버리시기도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자기의 신앙의 상태를 통해서 겨우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 생활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겠습니까?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이며 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혔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으면 주님이 나를 자기의 자녀 삼으실 것이라’고 하는 그 신앙 하나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즉각적인 구원 말고 점진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구원을 말하는데 그 구원은 바로 성화의 구원입니다. 성화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 사람 속에는 한편으로는 거듭났기 때문에 하늘의 신령한 생명과 은혜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옛 사람의 성품이 남아있는데 이것은 믿는 한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패한 인간의 욕망과 더러운 것들을 물러가게 하셔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가득 채우셔서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분투하고 애 쓰는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한 성품들을 버리고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의 성품으로 가득 채워서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섬겨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그래서 성화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점점 더 옛날에 빠졌던 죄 된 생활, 더러운 성품들로부터 결별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감으로서 성화가 촉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화는 두 부분으로 되어있는데 한 부분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생활함으로서 성품 자체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지런히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해서 삶 전체가 주님을 섬기는 삶이 되는 것, 이것이 성화의 두 요소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고 모든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 점점 온전한 행위로 갖춰져 나아가는 이 두 가지가 성화의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화의 구원은 완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성화 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시는데 그 주시는 힘이 하나님의 촉촉한 은혜의 작용에 의해서 왕성해 질 때에는 그의 인격도 빨리빨리 변하고 그의 삶도 빨리빨리 변해서 옛 모습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바뀌어가지만 그런 은혜의 작용들이 그치거나 지지부진할 때 개꼬리 삼 년 묵어서 황모가 되지 않는 것처럼 부지런히 교회에 다녀도 그는 여전히 옛 사람의 인격, 옛 사람의 생활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때로는 함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의 부도덕한 삶이나 야비한 인격 그리고 신실하지 못한 구원의 태도들 때문에 부끄러운 적이 많이 있고, 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서로서로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마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저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신앙 자체는 인생을 보다 더 가치 있게 살아가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나보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신앙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주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가려는 정진하는 노력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에 그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어도 하나님 앞에 변화된 인격, 변화된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빛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는 완전한 삶을 살수 없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사람의 선행, 인간의 모든 좋은 것들의 공로는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경은 그런 것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즉각적인 구원을 받아들일 때에는 인간이 주님을 믿기 전에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을지라도, 천성적으로 좋은 성품을 타고났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죄인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이외에 아무 것도 효력이 없기 때문에, 좀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거나 인간의 자비한 마음으로 선을 베풀며 살아온 것이 우리의 영혼의 운명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하시는 보혈의 능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구원받은 이후에는 성도들이 끊임없이 이 즉각적인 구원의 토대 위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성화의 구원을 위해서 정진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으며, 또한 열심히 노력해서 성화를 많이 이룬 사람과 게을러 거의 노력하지 않아서 성화를 거의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짐승과 인간의 차이보다도 심각하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만약에 우리에게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가려고 하는 의지적인 노력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성화의 발전이 없다면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즉각적인 구원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즉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지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에 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가 맺히면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의 종류와 그 나무가 생명이 있는지의 여부를 분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가 끊임없는 성화의 구원에 헌신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적인 변화와 성화를 열매를 통해서 입증하지 않는다면 그가 확신하고 있는 즉각적인 구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지막 날 하나님이 모든 교회와 세상을 심판하실 때 여러분들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정말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구원의 은혜에 참예하게 되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정말 그 사람이 여기 없다니’하면서 놀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즉각적인 구원, 이것이 진실한 것으로 인치기 위해서는 점진적으로 얻어지는 이 성화의 구원이 우리에게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이 익숙하게 들어온 구원은 바로 이 즉각적인 구원입니다. 어떻게 예전에 살았더라도 오늘 내가 믿기만 하면 주님의 공로로 천국 갈 수 있다고 하는 이 즉각적인 구원을 사람들에게 많이 강조했고 그래서 이것이 마치 우리의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구원에 대해서 물어보면 예외 없이 나오는 질문 하나가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하나님이 그 구원을 취소시키지 않는다는 교리를 가르쳐 주고나면 모두 공통적으로 묻는 질문이-“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나쁜 짓을 하면 그 사람도 천국 갈 수 있습니까?”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수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일수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가 구원을 받았는데 일생동안 성화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고 일생동안 죄를 지으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같이 강조해야 합니다.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성화의 구원의 진전이 없이는 즉각적으로 얻은 구원의 놀라운 감격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언젠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맨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에 뚜렷한 회심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 말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기의 생명을 버리셨는데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하며 깊이 감격하면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와 구원의 감격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이 죄악 된 세상에서 분투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그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도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셨구나’할 때 세상은 작아 보이고 그리스도는 커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붙은 욕심을 떨쳐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편리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세상이 죄악 된 세상인데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면 항상 고난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걸어가도록 강요합니까? 누가 여러분들이 성화의 삶을 살지 않는다고 유치장에 가두겠습니까, 아니면 목사가 여러분들 종아리를 치겠습니까. 신앙은 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성화 되기 싫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기 싫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고 싶은데 안 믿어지는 것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자신의 마음 자체가 주님을 거절하고 문을 닫고 완전히 강퍅해 지는 것은 누구도 도울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성화의 구원 속으로 들어가기는 싫다고 한다면 하나님도 역사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힘을 주시고 성화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거룩해질 은혜를 공급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문이 열려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기도의 문이 열려지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만큼 성화의 영역에서는 주도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지만 항상 하나님은 혼자 일하시지 않고 자기에게 순종하고 그렇게 성화의 욕구를 느끼면서 성화 되고 싶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의 마음을 잡으셔서 성화의 소명을 신자들 속에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가슴을 녹이시는 -정말 자기가 예수 죽인 죄인이요 예수님이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야지 만 이 십자가의 은혜의 감격이 유지되는데 그런 계속된 성화의 삶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 받고 싶어하는데, 거룩해지고자 하는 소원이 없는 사람들이 은혜 받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의 종교적인 탐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아서 무엇 하렵니까? 사람들이 흔히 은혜 받고 싶어하는 동기를 깊이 추적해보십시오. 은혜 받지 않고 사는 것이 힘드니까 은혜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올바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동기일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신앙 생활을 왜 그따위로 하느냐고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사람이 없어도 기도도 도저히 할 수 없고 예배시간에 나와서 늘 졸고 성경은 새해부터 결심하고 한 장도 안 읽고 쉽게 얘기하면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신자의 어떤 생명이 있는 영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도 없고 억지로 예배시간 30분이 넘어서 설교나 듣고 가려고 의무감으로 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편합니까? 기도하려고 해도 못하겠고 교회도 의무감으로 나와서 달랑 앉았다가 가면서 살자니 너무 힘들어서 은혜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 받으면 그렇게 힘든 것이 없어집니다. 기도하면 기도가 쏟아져 나오고 예배에 나오는 시간이 너무 기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니까 너무 신나고 교회의 한구석이라도 섬기니까 성도들도 인정해주고 목사도 인정해주니까 삶이 편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욕구는 그런 동기에 의해서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런 동기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는 그 은혜가 그 사람의 삶을 석 달도 주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는 동기는 거룩하고자 하는 동기여야 합니다. ‘행복해지고 싶다’ ‘세상에서 번영하고 싶다’ ‘세상에서 큰 일을 한번 내고 싶다’는 욕망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동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지울 수 없는 소명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화의 소명이고 그것은 자기 자신이 거룩해져 가는 구원받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없는 자에게 빼앗아서 있는 자에게 더 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끊임없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거룩해져야 할 필요를 더 많이 느끼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더 많이 깨트려지고 그 속에서 십자가의 즉각적인 구원의 감격들이 끊임없이 삶 속에서 반복됩니다. 반복되면서 그 은혜가 자신으로 하여금 더 거룩한 삶을 향해서 도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를 격려해서 점점 풍성한 삶을 살게되고 성화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예전에 하나님이 주셨던 즉각적인 구원의 감격조차도 잃어버리고 살아가도록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는 자기 속에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체험이 사라지니까 감히 거룩한 삶을 살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삶이 점점 뒤로 퇴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점점 자라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를 구원에서 자라가게 만드는 힘은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에 대한 깊은 감화를 통해서 그가 이러한 성화의 구원에 이르기까지 자라 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처럼 완전해질 수 없고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닮고 주님의 마음을 완벽하게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입증하는 길이 성화의 노력이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지,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서 한번 맺은 신앙적인 혼인 언약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지를 입증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진실한 사랑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고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해서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이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만약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는 성화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의 성화를 위해서 노력할 때 지불해야하는 수고와 고통을 즐겁게 생각하며 그것을 지불하고서라도 자기가 주님의 성품을 닮고 자랄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노력하는 성도의 성화의 정도와 거의 노력하지 않고 버려진 채 살아가는 성도의 성화의 정도는 훈련된 개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똥개의 차이가 아니라 짐승과 고등교육을 받은 인간의 정도의 차이가 될 정도로 엄청납니다. 한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모욕을 받으시고 한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숨질 때까지 우리들이 계속해야할 가장 커다란 의무이고 이것을 통해서만,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만 신자는 하나님의 연합, 그리고 주님과의 은혜의 교제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화의 놀라운 변화가 무엇을 원동력으로 해서 촉진되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의 은혜가 그로 하여금 거룩해지지 않을 수 없도록 계속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에 비교했습니다. 그래서 거울을 비춰보면 그 거울을 통해서 자기가 더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그런 기능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잘못된 사람이거나 자기가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깨닫게 된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빛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깨달음이 있으면 빛이 많은 곳에서 사는 것처럼 사람들이 단정해집니다. 쉽게 얘기하면 선악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배운 사람들은 악을 행하더라도 가책을 느끼면서 행하는데 악이 무엇인지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최악의 삶이 바로 이런 식으로 묘사된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도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겨우 비춰볼 수 만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서 들어가고 나면 속에서 성화 되지 못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이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나면 성도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오지만 기쁨이 오기 전에 먼저 아픔이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아파 본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무너지는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새사람으로 다시 세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가 젖을 빨아먹으면 그 젖이 들어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해서 섭취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의 질은 죄인의 마음속에 있는 질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천국입니다. 완전한 하늘나라의 시입니다. 이것이 들어갑니다. 속에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와 부패성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마음은 이 마음의 영향을 받아서 더 확산되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혈기와 육신에 속한 성품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의 섭취에 의해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 변해 가는 과정에서 성도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삶에 뚜렷한 진전을 경험하던 때는 늘 회개가 있는 삶을 살 때, 그래서 성도들의 영적 생활 속에서 참회가 사라져 가는 것은 위험신호입니다. 언젠가 예전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어도 만약에 그에게서 참회의 은혜가 사라진다면 그는 얼마 안 가서 아주 강퍅한 사람으로 변할 것입니다. 예전의 어떤 은혜에도 불구하고 강퍅한 사람으로 변하고 다시 그의 성화의 진전은 멈춥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깊이 깨트려지는 참회의 은혜가 계속되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직까지는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고 많이 망가지고 속에 죄도 많은데 신령한 젖을 사모하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이 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마음, 올바르지 못한 삶에서 오는 가책 같은 것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성도는 고통을 느낍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자니 죄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고 세상의 죄를 따라서 살자니 하나님의 사랑과 결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위엄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니까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참회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손가락질합니다. 제가 예수 믿는 사람이고 목사가 되었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의 평균적인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보다 훨씬 더 양심적인가’하는 질문에 목사인 저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훨씬 더 도덕적이냐?’하면 아닌 것 같고 ‘훨씬 더 희생적이냐?’해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보다 못 하지야 않겠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빛이요 이 세상의 자녀들은 어두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강력한 대조를 이루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 모두 그렇다고 대답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더 도덕적으로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운동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운동으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화 되기 만 하면 변합니다. 그런데 성화 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까? 그 말씀에 위로를 받고 참된 참회를 경험하면서 예전에 하나님과 잘못되었던 관계들을 청산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이 세상을 향한 훌륭한 섬김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을 위해서 충분히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한 기도의 집이고 이 세상에 있는 구원받지 못한 더러운 수많은 백성들을 위해서 통곡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자신 속에 성화를 위한 욕구가 사라져 가니까, 자기 자신의 죄악 됨을 인해서 울지 않는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 있는 죄악 된 질과 똑같은 질을 가지고 있는 세상을 보면서 아파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서명운동을 해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양심을 지키며 살겠습니다 하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길은 새 삶은 새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헌 사람에게서 새 삶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새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뀐 사람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 영혼이 변화가 되어서 다른 삶을 살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질적으로 변화 받은 사람이 새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참회에 의해서 성화가 촉진되는데 참회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성령의 불과 눈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삶의 부패성을 씻어내는 성화의 실천이 없다면 그는 예전에 아무리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어도 정말 드라마틱하게 하나님을 만났어도 그 체험이 그 사람을 새사람 만들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조그만 망치로 얻어맞았다면 이 사람은 커다란 쇠 덩어리로 얻어맞은 것 같은 강도로 주님을 만난 간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력한 강도로 주님을 만났어도 거의 그 주님과의 만남이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못 바꿔놓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보다는 충격에 있어서는 적은 정도밖에 안되지만 그것이 삶의 방향 전체를 뒤바꿔놓는 전환점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충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놀라운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내 신앙생활이 이렇게 지지부진한가보다’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로서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버리십시오. 충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한 모든 사람이 충격적으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어떤 도둑이 15년만에 풀려나면서 기독교 언론기관에 자신의 감동적인 간증을 실었는데, 다시 도둑질을 해서 감옥에 간 이야기)
그러니까 그 뒤에 뒤따라오는 이 성화의 노력이 없을 때에 그 충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없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다시 도둑질하다가 감옥에 들어갔다고 해서 옛날의 그 사람의 회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간 보태졌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충격적으로 만난 사실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 사람이 한번 감옥이 들어갔다는 이유 때문에 예전에 그가 한 모든 간증이 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를 불러다가 간증한 그 교회들의 성도들은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그렇게 살아야지 했는데 감옥에 또 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을 만난 극적인 경험이 아니라, 얼마의 크기로 주님을 만나주셨든지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옛날에 성냥이 없던 시대에 옆집에서 불씨를 얻어다가 그 불씨를 살려서 밥도 하고 장작도 땠던 것처럼 처음에 얼마나 큰 것을 주셨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속에서 역사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이 일에 간증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제 생애를 지나면서 번개가 치는 것처럼 충격적으로 주님을 만날 때가 있지만 어떤 때는 자다가 우연히 생각난 하나님의 말씀 하나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제 마음을 후벼파면서 삶 전체를 움직이는 놀라운 경험들을 많이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번 만난 일회적인 하나님의 강력한 체험이 문제가 아니라 이후에 계속해서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 되려고 애를 쓰면서 살아가는 그 노력이 뒤따를 때에 크기는 작은 것 같아도 그것이 여러분들의 일생을 바꿔놓는 아주 훌륭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오늘날 우리에게 이 성화의 삶이 있습니까?
이제는 예수를 믿고 변화된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누가 교회를 두 달 넘게 다녔는데 변화가 안되었다’는 것이 놀라워야 정상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그 사람이 새 사람된 것은 당연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 거꾸로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참회의 은혜가 있습니까? 성도가 참회하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책망 받을만한 일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삶을 살아가고 있거나 아니면 심령이 무디어졌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전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굳어지면서 점점 사람들의 심령이 강퍅해져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보더라도 성화의 진전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참회의 은혜가 있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아픕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하는데 강퍅한 사람은 그런 찬송 안 부릅니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만이 자기가 강퍅하다고 늘 아파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온유하고 변화된 사람들은 작은 강퍅을 엄청나게 크게 보는데 심령이 강퍅한 사람은 큰 강퍅함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각의 문제입니다.
(예화: 장님들은 눈감고 얼마 짜리 지폐인지 구별해내지만 우리는 할 수 없다)
감각이 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화의 삶이 멈춘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성화의 삶을 괄목할만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소수입니다 그 이유는 성화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섭취욕구가 없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매일 성경 읽습니까? 백 명의 교인 중 네 명만 성경을 읽는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속에서 어떤 성화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활용을 하며 그것을 소진할 때에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수영이나 어떤 운동을 열심히 하고 나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쏟아낸 땀만큼 물을 먹고 싶고 없앤 칼로리만큼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이 생겨납니다. 성화의 삶을 위해서 애를 쓰고 성화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려고 욕구를 가지고 살면 살수록 말씀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성화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려고 하는 실천하는 삶과 또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욕구 두 개는 항상 이렇게 상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루라도 성경을 읽지 않으면 마음이 건조해지는 것을 느낍니까? 그리고 하루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고통스러운 마음을 느낍니까? 성화의 진전된 삶을 살기 위해서 빛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습니까? 드러누워 자기 위해서는 컴컴한 환경도 상관없지만 깨알같은 글씨를 읽고 공부하기 위해서는 찬란한 불빛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들이 성화에 있어서 진전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들은 결국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을 통해서 해결해 나가십니다.
여러분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력한 갈증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싶어하는 간절한 갈증이 있습니까?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싶어서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대학입시가 끝나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수험번호를 기다리는 수험생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간절히 귀를 기울이는 그 사모함 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간절한 사모함 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성화의 삶, 성화의 구원을 위해서 전진하려고 하는 그런 간절한 사모함이 여러분 속에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 앞에 남아있는 신앙생활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은 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는 아주 형식만 갖춘 신자가 되거나 아니면 언젠가 이 신앙도 집어치우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형식만을 지키면서 자기 자신은 영혼의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저 변화 자체를 거부하고 형식을 지키는 것으로서 만족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예배 생활은 짐승의 목을 꺾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여러분들의 심령이 정말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회복시키십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회복시키시는 방법도 역시 하나님의 마음과 맞부딪치게 하심으로서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을 갖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활하다보면 그런 일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입이 깔깔해서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직장에 가고 싶으나 아내가 붙잡으면서 애써서 해놨으니 한술이라도 뜨고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술 두술 먹다보니 먹고 싶어서 한 그릇 가득 먹게 된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말씀을 듣는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 속에 새로운 말씀의 욕구를 창조하시는 놀라운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들이 성화의 구원을 향해 발돋움할 수 있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그런 사모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며칠 전 밤에 잠을 자다가 깼습니다. 머리가 초롱초롱했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감동이라고 까지는 말하지 않겠는데 마음속에 설교하고 싶은 내용이 간절히 생각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고 결국은 그것이 이번 새해 말씀 사경회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어느 교리 하나를 이번 사경회 때 설교하겠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그 말씀이 제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니까 제 자신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제껏 까지 무엇인가 계속 전진하다가 막힌 것 같은 상황을 다시 넘어갈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여러분 자신들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성화의 소명을 살게 할 수 없습니다.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위에 여러분들의 분투하는 노력과 삶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여러분의 심령이 움직이는 대대적인 방향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정말 성화의 삶에 어떤 진전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금년 한해는 여러분들이 아무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새 삶을 살겠다고 할지라도 12개월이라고 하는 이 깨끗한 달력을 옛사람이 더러운 발자국을 찍고 돌아다니는데 여러분들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아무리 미래를 응시한들 여러분들이 새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이러한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살 수 있는 그러한 전환점들을 맞이하고 또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진리의 교리를 가르쳐 주시는 그런 변화의 역사들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주님과의 만남을 간직한 채 전심으로 성화의 삶을 추구하고 그 은혜 속에 잠겨서 주를 위해서 사는 훌륭한 전환점들을 여러분들이 맞이하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자의 의무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3)”
이처럼 신자가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는 감화와 영향력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향을 받는 삶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무신론자의 삶을 택하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아마 그러한 비극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열심히, 꾸준히 신앙생활하고 믿는다고 했지만 어느 날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을 각성시키시고 진리의 복음이 여러분들에게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을 때에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믿음생활 해오던 것과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신앙생활이 많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그런 현격한 차이를 가져왔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의 작용들을 통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믿지 않으려고 하는 여러분 속에 자라나는 오류들을 그 진리의 말씀으로 계속해서 솟가내는 변화의 작용들이 오랫동안 사라졌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견지해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신자가 끊임없이 성화의 소명을 따라 산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의 인격과 삶에 관한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런 성화의 소명을 따라 살면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감화를 계속 유지할 때 비로소 자기가 무엇을 믿고 어느 진리 위에 확고하게 서야 되는 지도 함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깨닫고 그 말씀을 통해서 감화를 받는 은혜의 영향력들이 우리 속에 유지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사실 상 무신론자와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날마다 새로운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갓난아이와 같은 사모함이 없이 어떻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이길 수 있겠으며 또 세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은혜의 작용을 통해서 성도는 성화의 소명을 완수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가 계속 우리 안에 살아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계속 성화의 소명을 따라 사는 가장 중차대한 비결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감화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자체를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으면서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힘입어 성화의 소명을 다하면서 살아가야 할텐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감화와 은혜를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현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 말미암는 감화를 유지하면서 살아가야지 만 자신의 성화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을 생명적인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오늘날의 풍조가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을 거의 그치게 하고 있고 또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점점 희박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이 문제는 이쯤에서 덮어두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으면 그리하라”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사도가 이렇게 말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갓난아이처럼 사모하고 그 말씀의 감화를 통해서 성화의 소명을 다하여야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인 것처럼 느낌을 주면서 서신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저는 오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도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성화의 소명이 있고 그 점진적인 구원, 즉 성화의 구원을 위해서는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모하고 그 속에서 계속 자라가야지만 되는데 그러한 너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이다”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것을 구원의 경험과 관련시켜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이 사도의 마음속에는 일차적인 생각입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성화 될 수 없습니다. 성화는 자기 자신의 의지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고 자기 속에 하나님이 중생과 함께 심어놓으신 생명의 원리를 가지고 그 노력을 사용해서 성화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님께서 거듭남을 주셨는데 거듭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속에 심어놓으신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완전히 어떠한 생명도 느끼지 않았던 죽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그 순간에 그 심령을 하나님 앞에 예수의 생명을 가진 산 심령으로 만드십니다. 중생의 은혜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새로운 생명을 심으십니다. 그리고 그 거듭남과 함께 신자 속에는 중생의 원리가 함께 지배해서 생명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 모조로 꽃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해서 굉장히 정교하게 만듭니다. 멀리서 보면 똑같습니다. 그래서 한 쪽에는 생명이 있는 화분을 두고 다른 쪽에는 모조로 잘 만들어진 화분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모조 화분에는 아무런 원리가 없습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생명의 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꽂아두면 햇빛이나 습기에 의한 물리적인 변화를 통해서 탈색된다든지 변형되지 않는 한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한 쪽 화분에는 생명의 원리가 지배합니다. 아름답게 활짝 핀 꽃도 물을 주지 않으면 하루만 지나도 금방 시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적절하게 물을 주고 여러 가지 환경을 조성하면 꽃이 더 활짝 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름에는 따뜻하니 꽃이 금방 피고 시들고 겨울에는 추우니까 꽃이 오래갑니다. 그리고 적절한 비료를 공급해주면 더 무성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예화: 꽃을 선물 받아 꽃병에 꽂았는데 정수기의 물로 계속 갈아주면 그 속에서 뿌리가 나서 오래도록 가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주변의 모든 조건들이 생명의 원리에 잘 맞으면 번성할 수 있지만 생명의 원리에 전혀 맞지 않으면 금방 시들 수도 있고 성장이 멈출 수도 있는 원리가 살아있는 식물 속에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 거듭나기 전에는 생명이 없는 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원리가 지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거듭나서 예수님 믿기 전에 이 세상에 살면서 생명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어있는 영혼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거듭나고 나면 조화에서 생화로 바뀐 것처럼 생명의 원리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환경이 잘 맞고 자기 안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중생한 생명의 원리와 부합한 삶을 살면 중생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이 새 생명은 너무 과대 평가할 수도 없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살지 않고 경건의 비밀이 없이 살아가면 그 사람의 생명의 원리를 주님이 심어놓으셨는데도 거의 생명이 있는 사람처럼 살지를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정말 하찮습니다. 그러나 그가 은혜 생활을 잘 해서 그 새 생명의 원리가 강력하게 역사 하게 되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능력의 근원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의 풍성한 삶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대평가 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강하게 만들어주는 비결은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계속 말씀의 영향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 점점 더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이 생명의 능력이 풍성해져서 자기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지배하면서 그 믿음이 없었더라면 살 수 없었던 풍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로 들어가는 첫 걸음인 거듭나고 구원을 얻는 그 경험을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이니까 이것은 ‘너희들이 정말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즉각적인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너희들이 정말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렇게 성화의 소명에서 살아가야 한다’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 거듭난 경험을 하나님의 인자를 맛보는 것에 비유했을까요? 거기에 대한 답은 2절에 보면 거듭난 것이 세세토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통해서 라고 사도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복음의 내용은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자신이 죄인이고 정죄 되었으며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는 것 밖에는 어떠한 전망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인간인데, 복음은 그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누구든지 아무 공로 없어도 그 예수가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고 굳게 믿는 그 신앙, 그것을 갖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하신다고 하는 이 복스러운 약속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 다른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같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의해서 정죄된 인간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용서하시고 그를 구원하셨느냐고 할 때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을 때에 강력한 회심을 경험하면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면서 그 사랑을 체험하면서 회심과 함께 거듭났느냐, 아니면 그런 강력한 회심의 체험은 없지만 거듭났느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력한 회심의 경험을 통해서 같이 거듭남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거듭남은 기억할 수 없지만 거듭나는 순간에 체험했던 회심, 하나님의 그 은혜에 대한 놀라운 사랑,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깊이 각인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인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억이 신자의 삶을 끊임없이 주장하면서 그런 은혜를 받은 자기를 향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구원 이후의 최대의 열망이 주님을 닮아서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거든”하는 말씀은 아주 쉽게 표현하면 ‘너희들이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속 성화의 소명을 따라 살아서 성화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 전진하는 그것 없이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고 그는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구원을 경험한 신자들의 축복과 관련해서 이 3절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구원을 성도가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그런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신자의 마음속에 최초로 주님의 성품을 따라서 거룩한 사람이 되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야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심으십니다. 그가 많은 지식이나 성화의 교리, 그리고 깊은 진리의 체계들을 모두 다 이해해야지 만 겨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남은 본성의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그 순간 그런 복잡한 교리들을 다 모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그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이 살아있는 그 때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말로 다 표현을 못해도 본성적으로 그 마음속에 주님을 닮아서 거룩해지고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그분을 섬기고 기쁘게 하는 삶이기를 원하는 마음의 씨를 그 속에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씨입니다. 그런 마음을 본성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데 그것이 말하자면 은혜의 씨입니다.
그것을 주셨을 때 그가 앞에서 설명한 것과 똑같이 생명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그가 계속 은혜로 예배를 드려서 주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성화의 소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사는 것이 왜 신자의 중요한 의무인지를 배워가고 그런 삶을 앞서서 살아가고 있는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따뜻한 신앙의 교제를 나누면서 계속 성화의 삶에 대한 도전을 받으면서 살아갈 때에는 처음 주님에 의해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을 닮고 싶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다고 하는 거룩한 소망의 씨가 점점 자라서 마치 나뭇가지가 성장하고 줄기 가지가 뻗어나가서 온실을 가득 채우는 것처럼 그 마음을 가득 채우면서 점점 더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의미에서 처음에는 주님이 주신 그 성화의 열망을 내가 지켰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열망이 자기를 지키는 것 같은- 생명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난 신자가 하나님 앞에 받는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 깊은 은혜의 감격이 있고 난 후에 성도가 공통적으로 모두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의 최고의 가치가 주님 닮은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주님을 섬기는 신자가 되는 것이라는 열망을 갖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성도들은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성화의 요구는 항상 그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 성화의 요구를 따라서 살 때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증진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안에 주신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기 때문에 성화의 요구는 성화 되어가고 있는 성도에게 있어서는 고통스러운 짐이 아니라 아주 기쁜 의무입니다. 그 자체를 하나의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신자 안에 이러한 성화생활을 통해서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일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처음 주님을 믿을 때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고 요구하시는 것도 굉장히 간단하게 느껴지는데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점점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온전한 삶을 요구하셔서 어떻게 보면 우리를 점점 조여오십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주일에 교회만 나가도 하나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시지만 신앙이 점점 깊어지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 사람의 삶에 간섭하시고 가책을 느끼게 하시고 심지어는 그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서까지도 하나님이 이의를 제기하시면서 온전한 삶을 살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지 못할 때에는 그것이 굉장히 무거운 짐입니다. 그리고 ‘쉽고 간단하게 믿는 방법이 없나’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쉽고 간단하게 믿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가 있고 그리고 그 요구를 따라서 살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맛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속에 은혜가 살아있을 때는 이렇게 자기를 향해서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요구하신다고 하는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예화: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심부름을 시키면 가슴 설레며 좋아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집요하게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순종해야 한다. 왜 이렇게 했니?'말씀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책망과 양심의 가책이 살아있는 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자녀의 큰 특권입니다. 부모가 야단칠 때 아이들은 '이 세상에 나 혼자 살면 얼마나 좋을까, 빨리 어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합니다. 그런데 사실 잘못 살았을 때 누군가 자기를 야단쳐주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책망해 주는 사람이 없는 인생은 얼마나 부끄러운 인생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얼마나 잘못된 인생인지 모릅니다.
(예화: 어느 교회 목사님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집사를 크게 야단을 치셨는데 자신의 잘못을 야단쳐주신 것에 대해 무척 고마워했다는 이야기)
(예화: 고아를 전도했는데 자신이 예수 믿는 대신 자기를 혼내달라고 부탁한 이야기)
야단맞는 자체가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관계가 살았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관계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입니다. 여러분들이 남의 아이를 야단치면 싸움 납니다. 자기 아니니까 불러 놓고 야단도 치고 때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없다면 그것은 사생자입니다. 요구가 있고 난 다음에 책망이 있습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라’ ‘왜 바르게 살지 않느냐’하는 하나님으로부터 강력한 요구를 받으면서 산다는 것이 신자에게 있어서는 큰 축복입니다. 그러한 성화의 삶을 살려고 하는 구체적인 요구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처음 맛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경험들은 성화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경험들이 계속 더 강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주님께 계속 요구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주 책망을 받는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주 느끼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자를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런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사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더욱 온전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을 꼽으라면 저는 일생을 살면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숨질 때 되도록 그 성화의 삶이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맛보면서 살아가는 그 놀라운 축복, 그 특권을 누리면서 성화의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가장 커다란 축복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구원받은 신자의 의무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데 “너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화의 의무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화의 삶을 살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화를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 후에 비로소 그들에게는 성화의 삶에 대한 요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만 성화의 요구가 살아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 그들 속에 생명의 원리를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성화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급선무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앞에서 회개하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죄를 죽이는 삶을 살수도 있고 성화의 삶을 살수도 있고 정말 주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온전한 삶을 향해서 지향하는 인생을 살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구원 자체가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 속에 성화의 삶을 살 씨를 주셨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영혼을 뒤흔드는 강력한 신앙의 경험으로 점철되어야지 만 겨우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겁한 변명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이미 주님이 여러분 안에 주신 은혜의 생명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를 받고 주님이 주신 새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으면서 온전한 성화의 삶을 살아야되겠다고 애를 쓰면서 살면 놀라운 성화의 진보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의 의무입니다. 축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의무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할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 막가는 인생들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요구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성도들이 직면해야 되는 것은 성화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내가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서 주님 뜻대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가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살게되고 그럼으로써 그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와 세상을 정복해가면서 하나님의 통치가 긷든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도착하기도 전에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하기 전부터 그 땅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수 있기 위해서는 가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통해서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몰아낸 후에야 그 땅을 차지하고 거기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온갖 승리,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의 그 풍성한 사랑, 축복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성화의 땅 위에 있는 열매들입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 거기에 신령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가 있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 그 밭에서 곡식을 거둬들이는 것처럼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 거기에서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고 그런 자비를 베풀면서 살 수 있는 열매를 거둡니다. 그렇게 하면서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통치가 성화의 노력을 통해서 영역을 갖게되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영적 그리스도인과 육적 그리스도인’을 읽고 이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다 그리스도인이고 아니면 아니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있고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인데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실제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본다면 성경에는 아주 풍성하고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있고 나머지는 모두 불신자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이분법적으로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었지만 도덕적으로 아주 저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주님이 구원한 사람들인데도 도저히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것이 기대되지 않는 사람들도 나옵니다.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해서 실패하고 생명의 원리에 따라서 역사하며 살아가고 있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구원받지 못했는데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구원받기는 했지만 풍성한 삶을 못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그 극단도 조심해야 하고 반대로 또 하나는 구원받았지만 풍성한 삶을 못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모두 한번도 거듭나보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경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육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화 되어야 한다는 희미한 마음의 기대는 남아있지만 성화의 삶을 거의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신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화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이는 사람들만이 거듭난 사람들이고 성화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진전이 없는 사람들은 전혀 구원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설정할 것 같으면 몇 명이나 구원을 받았을까요? 그리고 반대로 예전에는 성화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진전을 보이다가 어느 순간에 죄에 빠져서 더 이상 성화의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지지부진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분법적으로는 설명이 안됩니다. 얼마든지 사실은 구원받았지만 -분명히 그들에게 새 생명의 원리가 심겨졌지만- 그것이 풍성한 원리가 되어서 신령한 은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질병적인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는 적절한 처방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오늘 분명하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모든 사람들의 의무는 성화의 삶입니다. 그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고 구원받았어도 성화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그 인생은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에 묶여있고 교회에 와서 아무렇게나 예배드리고 가고 자신의 전 삶에 있어서 육신적인 자아가 살아서 펄펄 뛰면서 살아가고 있고 마음도 전혀 주님의 것으로 바쳐지지 않고 있는 그 신자의 삶 속에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미치냐는 것입니다. 순종하면서 살아가야지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이 그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깊은 은혜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No holiness no happiness” 신자의 삶에 있어서 거룩이 없으면 행복도 없습니다. 은혜 받고 자기 부족을 깨달으면서 점점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성화의 삶이 있을 때 신자는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정하신 영적 생활의 법칙인 것입니다.
9.완전한 도, 정미한 말씀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삼하22:31)”
사무엘하 22장은 다윗의 생애에서는 잊혀질 수 없는 한 시점을 기록하고 있는 장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데 첫째는 20장에서 세바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정권을 잡았는데도 세바라고 하는 무리의 강력한 반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반란을 모두 평정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주목할 만한 일이 나오는데 21장에서 전쟁 때 죽은 사울과 요나단을 비롯해서 사울 집안의 시체들을 다윗이 명령해서 모두 모아 장사지내주는 일이 있고 나서 하나님이 그 땅의 백성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다윗을 대적하는 반란군들을 토벌했으니 왕국의 평화가 왔고 두 번째는 전원에 대해서 다윗이 은혜를 베풀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기뻐하셔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있었고,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이 22장 바로 앞에 있는 21장 마지막에 블레셋이 쳐들어왔는데 그 블레셋을 보기 좋게 물리친 국가적인 전쟁에서의 승리가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의 큰 축복이 있었기 때문에 22장 맨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의 대적과 사울의 손에서 건져내신 때에 다윗이 지은 노래”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31절에 다윗의 시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찬미가 나와있습니다.
그런 큰 은혜와 능력을 하나님이 주셔서 일생일대의 어려운 과업들을 모두 완수하고 왕국은 지극한 평화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운데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 대적을 이기게 하시는 능력, 이런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부어주셨지만 사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의 반응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기적적인 은혜의 역사들이 왕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다윗의 사상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주고 자기에게 힘을 전달해준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전해주는 도구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율법이었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다윗의 신앙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윗을 참 좋아하는데 다윗의 신앙의 몇 가지 특징을 들라고 하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다윗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결정적인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고 하는 시편의 고백처럼 다윗의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그래서 다윗에 관한 기록을 읽으면 가끔 이 사람이 구약시대의 사람이 맞는지 할 정도로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에 대한 풍부한 체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깊이입니다. 다윗은 인간의 내면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영적인 깊이 있는 통찰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음이니이다”고 하는 인간 본성 밑바닥에 깔려있는 죄에 대한 확신이라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절대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인간의 한계라든지, 이런 것들은 영적인 시각이 아니면 분별해 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탁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대개 하나님 앞에 용감하고 확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거칠어지기 쉬운 것인데- 다윗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특별히 사울의 집에 행한 것이나 생명을 위협하며 추격하는 사울과 일행을 대하는 다윗의 태도나 자기에게 반기를 든 압살롬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것이나 요나단과 그 이하 므비보셋을 대하는 모든 것을 볼 때, 정말 다윗은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거칠고 무례합니다.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을 사랑하는 따뜻한 것이 없습니다. 거칠게 확신 있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숭배하는 사람과 자기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사람의 두 종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확신 있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항상 숭배자가 있습니다. 깊이 고뇌하며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이 너무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은 결단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용기와 결단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은 참회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크게 쓰임 받았던 아사, 히스기아, 요시아와 같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처음에는 신앙이 좋았는데 마지막에는 불행하게 마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칩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릅니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흘렀다가 다시 성령의 은혜로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를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참회의 마음입니다. 깊은 참회의 세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영원한 가치가 있는 다윗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저는 성경 중에서 다윗이 쓴 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풍성한 예증을 가지고 있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예화: 기도원의 새벽기도 시간에 어느 목사님이 기도하면서 울먹이며 시편을 읽으시던 이야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체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체험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다윗의 고백에서 ‘하나님의 도’라고 했는데 단수로 되어있는 ‘길’입니다. ‘순전하며’는 온전하고 깨끗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길은 깨끗하며-혹은 온전하며-’, ‘정미’는 ‘체루파’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인데 ‘차라프’라고 하는 동사의 피동명사입니다. ‘차라프’는 구약성경에서 많이 나오는 ‘연단하셨으니’ ‘단련하셨도다’의 뜻입니다. 그래서 금이나 은을 순결하게 만들기 위해서 제련하는 것입니다. 이 ‘정미하다’는 단어가 뜻을 정확히 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순정하니’라고 번역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잘 연마되어서 흠이 없는’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며’ 했는데 그 도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온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순전하다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살려고 애를 써보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의 도가 온전하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전 방위적이고 온전한 순종을 기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가능합니까? 신기하게도 순종하면서 애를 쓰면서 산 사람들은 신자가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 죄를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지만 죄에 지면서 사는 것이 숙명적인 삶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직장생활이나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다 부정하면서 정직하지 못하게 살아가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이 요구하시는 삶의 표준대로 정직히 살려고 애를 많이 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이 결코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개 그렇게 살아보지 않은 사람, 조금 살려고 하다가 힘들어서 집어치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님이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직장생활하기도 힘든데 교회 와서 봉사하라고 하고 월급을 올려 받아도 난리인데 감사헌금, 주정헌금, 십일조, 또 재산을 처분해서 건축헌금 하라고 하니 그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그 뜻을 이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금은방을 하는 사람이 목사님의 권면을 받고 주일에 문을 닫았는데, 1년 후 계산 해보니 매상이 20%이상 줄었다-그러나 그해에 가족 중 아픈 사람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놀랍게 피할 수 있는 길이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냅니다. 살아보지도 않은 사람이 ‘이것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주님도 못살 것을 알고 그냥 해보신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다는 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시면서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딱 들어맞나’를 경험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경험은 집에 누워서 놀 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그 말씀을 적용하고 그대로 살려고 애를 쓸 때 하나님이 그 말씀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했습니다. 여러 번 제련해서 그 담금질로 인해 흠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많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미하여 ‘체루파’의 상태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꼼꼼히 살펴서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탐구가 필요합니다.
(예화: 외국에서 몇 십 년만에 대한민국의 낯 설은 동네에 내려서 서울을 찾는다면 누구에게 물어봐도 알기 때문에 약도가 필요 없지만 방배 4동 680번지를 찾는다면 서초구의 지도가 필요가 필요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믿고 구원받았으면’할 때에는 서울 찾아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구원받고 싶은 사람에게는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몇 년 동안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죄인 됨과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과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신자다운 삶을 살아야겠다’고 할 때에는 문제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구원과 함께 주어지는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정말 주님의 자녀답게 좋은 신자로서 주님이 나를 보실 때 기뻐하시고 나도 주님 때문에 행복한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보통 많은 질문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정확한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지 모릅니다. 때로는 대부분은 잘 되었는데 어느 한 부분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답변을 잘못 가질 때가 있습니다. 이단이나 잘못된 가르침에 빠진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단이라고 다 틀리는 것이 아니라 맞는 것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다 틀리면 이단도 아닙니다. 이단이라는 말 자체가 끝이 다르다는 것이고 처음부터 다르면 이단이 아니라 이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 알거나 모르면 중대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화: 나사에서 3천 2백억 원을 들여서 외계에 탐사 선을 쐈는데, 한 연구원이 π3.14의 값을 잘못 입력해서 우주에서 실종된 이야기)
그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은혜 받는 것 같았는데 점차 그리스도인의 삶이 유실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면서도 그 뜻대로 안 살아서 그렇게 되어버린 경우도 있지만, 쉽게 얘기하면 그리스도인의 삶,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흐지부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처음에는 불붙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다 와해되어버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려면 정신을 좀 차려야 합니다.
(예화: 마치 복부인들이 투기 세미나에 모인 것처럼, 증권회사의 전광판 앞에 있는 사람들처럼)
주식만 가지고 있어도 동향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데 구원의 은혜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성화에 관심이 없겠습니까? 성화는 구원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고 성화는 구원의 주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화의 삶을 잘 살면 구원의 감격이 넘치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았는데도 십 원도 안 되는 구원으로 느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꼼꼼히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면서 거기에서 정말 그 하나님의 말씀이 흠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신앙의 경험 속에서 간증으로 체험하는 일이 있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정확하게 배우고 익히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하고 꼼꼼한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이 말씀의 생활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방패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무조건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방패 삼아서 그 길대로 행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성화의 삶에 적용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흠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흠 없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시련 속에서 버리신다면 공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보호가 되어주시고 방패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세바의 반란이 일어날 때에도, 사울에게 쫓길 때에도, 불레셋이 쳐들어왔을 때에도, 심지어 자기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다윗의 온 관심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연단하시고 그래서 나를 정결케 해주시옵소서”라는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집요한 추구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모든 시련과 환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련과 환난을 이기고 나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밟아본 길같이, 단련된 금같이 자기의 마음속에 남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피하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다윗을 죽이고 싶어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결코 다윗은 죽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노리는 대적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뜻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이 요구하는 바, 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쓰고 그 말씀을 엄밀하게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흠 없는 진리임을 입증하는 방식의 삶을 살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언제나 그는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 거했고 그분의 그늘 아래서 그분의 방패의 보호를 받으며 원수들과 대적이 자기를 짓밟으려고 노도와 같이 덤벼드는 그날에 오히려 주님의 그늘에 피해서 주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그 놀라운 은혜를 맛보면서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해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모하며 그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 이런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0.나그네 인생길의 노래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시119:53-54)”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운 내용들이 시편 119편에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편 119편이 없었더라면 신앙생활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답답하거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릴 때 이 119편을 천천히 읽고 명상하는 일은 언제나 저의 영혼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전장을 다 읽지 않더라도 한 두절만 깊이 읽어도 샘솟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만드는 주옥같은 구절들이 119편 속에는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이 119편 54절은 우리의 가슴에 아련하게 다가오는 정서를 느끼게 만드는 고백입니다. 이 119편 같은 시는 단지 은혜를 경험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말씀이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고 그 삶으로 분투하면서 세상에 살면서 고난 속에서 말씀을 통해 위로를 얻고 이기는 전투적인 과정을 밟아온 사람이 아니면 정말 고백할 수 없는 주옥과 같은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으시면 너무 지나치게 주관적이 아닐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목사님, 제 영성이 어느 정도 되는 지 모르겠습니다’고 질문해 올 때,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시편 119편을 혼자 조용히 읽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대의 영적인 깊이가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영성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전 삶과 자신의 전인격을 걸고 하나님을 추구한 결과로서 생겨나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성이라는 것이 어느 날 한순간에 주님을 만나서 신비하게 변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분히 오류가 많이 섞인 생각이고, 성경적으로 볼 때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그분을 향한 진실한 사랑으로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삶의 전 방면에서 주님을 추구한 성화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징입니다.
그래서 죤오웬이라는 청교도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 하나님과의 ‘다바끄’의 연합 -하나님과의 연합된 마음을 히브리어로 ‘다바끄’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진실한 사랑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한마음이 된 연합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정반대이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한 인격적인 애정의 결과가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말이 보여주는 바는,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에 정지된 개념일 수 있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개념은 끊임없이 발전해 가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하나님과 어느 한순간에 연합을 느끼는 것은 영혼의 강력한 변화를 통해서 한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패한 인격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신자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과 결부됩니다. 물론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의 온 마음이 확 사로잡히면서 주님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은 감정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충동이 내포되어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온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획득된 결과로서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순간에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 청교도가 ‘연합의 결과가 사랑이 아니라 주님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사랑의 결과로서 주님과의 연합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은 그 배경에 이미 온전한 사랑의 성취라고 하는 성화의 교리들을 뒤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순간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 속으로 들어가고 그래서 그분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이 반복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풍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영혼의 참된 변화의 한복판에 -그것이 정말 진실한 영성이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결핍되어있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실한 영성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강해하면서 이런 문제들을 여러분들에게 언급했습니다만 모든 신령한 영성의 한복판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령한 영성이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사람들이 ‘신령해진다’고 하면 사랑으로 풍성해진다는 개념보다는 ‘겁나고, 보면 다 안다’는 식의 것들이 훨씬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영적 변화의 한복판에 있고 그 변화의 핵심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입증되지 않기 때문에 119편을 계속 공감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의 영적인 자질들을 어느 정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은혜 받을 만한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양한 삶의 상황에서 말씀에 은혜 받을만한 때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고난받을 때입니까, 형통하고 기쁠 때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둘 다 기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둘 다 핑계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고침을 받고 새 삶을 찾으십시오’ 했더니 ‘고난이 너무 겹쳐서’ ‘너무 정신이 없어서’ ‘이 풍랑이 지나가고 나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풍랑이 지나고 나면 다른 풍랑이 옵니다. 그리고 형통하고 좋을 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구닥다리 신앙을 하기에는 새롭게 경험하는 기쁨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의 상황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 고백, 거기에는 반드시 삶의 상황이 있습니다. 악인의 줄이 자기를 얽어매거나 -죽음의 위협입니다- 혹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혹은 가슴 아픈 상황을 보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 곁을 떠나는 외로운 상황을 만나거나 하나님이 마음속에 기쁨을 주는 평안한 때나 모든 때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적들이 날뛰니까 더 하나님만 사랑하게 되고, 오늘은 주님이 기도에 응답해주셨으니까 더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을 안 해주시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모할 이유가 되고, 비 오니까 따뜻한 방안에서 성경 읽고, 날이 맑으니까 기분 좋아서 창문 열어놓고 하나님 말씀 사모하고, 흐려서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으니까 하나님 말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전 방면에서 추구되는 것이지 예배 시간에 ‘오늘은 영성을 추구하는 시간이다’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화: 고승들이 죽었을 때 태우면 사리가 나오는데 의학자들의 견해로는 평소의 생활 하는 자세와 관련 있다고 한다)
그에게서 사리가 나왔다고 할 때 그가 무엇을 해서 사리가 나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수도 정진하는 전 삶 속에서 그가 택하였던 모든 수도의 자세들이 집결되어서 마지막에 사리를 만든 것입니다.
‘80년대에는 사회 변혁을 추구했고 90년대에는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추구했으니까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에는 영성을 추구해야한다’고 하면 말이 됩니까? 그렇게 조각조각 나누어서 추구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영성이라고 하는 것도 자신의 전 삶을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향한 그 진실한 사랑을 자신의 삶 속에서 고백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애쓴 그 모든 추구의 결과로서 맺혀지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키면서 그 감격과 은혜를 누렸던 이 119편과 같은 시편을 읽으면서 자기가 마치 성경의 저자와 일치된 것과 같이 느낄 때 성경이 정말 열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혼자 조용히 읽으면서 ‘어쩌면 내 말을 하고 있을까’하는 일체감을 느낀다면 이 119편 저자의 경험에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그는 이 저자와 비교할 수 없을 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동질의 영적인 quality들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이 119편이 아름다운 시이고 중요한 시입니다.
여기에 보니 시인은 율법을 버린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서 말합니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라고 나옵니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먼저 이야기하고 거기에 대한 자기의 반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버린 악인’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119편에서 이 시인의 경험은 대부분 언약공동체 안에서의 경험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시편에서 ‘악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 언약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악인과 의인으로 가르는 것입니다. 그 악인들의 특징을 ‘율법을 버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의 언약공동체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율법에 대한 불 신앙을 담대하게 입으로 선언하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율법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율법을 읽느냐 안 읽느냐, 또 그 율법에 대해서 어떤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느냐, 율법에 대해서 존중심을 갖느냐 안 갖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율법은 그들에게 고백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인될 수도 있는데 문제는 율법이 그들의 삶의 토대가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율법대로 있고 거기에서 삶이 떠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시인은 악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고 사는 이 시인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의를 행하는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삶의 원동력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의해서 공급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복판에는 하나님의 율법-말씀-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떠났기 때문에 율법을 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시인 주변에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들이 바르게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것을 핑계 삼아서 ‘시대가 다 그러니까’, 그리고 ‘주위 사람 중 그렇게 믿는 사람이 어디 있어’ ‘사람이 환경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쟎아’라는 말로 변명하며 현실과 능숙하게 타협을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정 반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 때문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버린 많은 악인들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생각과 삶에 암시적으로 혹은 가시적으로 영향을 줄 때 이 시인의 반응은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그 사람들을 향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적개심에 불탄다기보다는, 그들을 향한 적개심과 대적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그들 안에 있는 불 신앙,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신실치 못함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런데 그 경건한 신자는 그런 성향을 통해서 자신이 그들에게 분노함으로 말미암아서 자신이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은혜를 받으며 정체성을 유지하며 사는 신자의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126절을 보면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했습니다. 폐했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율법은 누구도 폐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삶으로서 자신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태도로 무법 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압도적인 다수입니다. 그 안에서 신앙을 가진 시인이 위축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지금이 바로 기회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 버리고 율법을 폐한 채 무법 하게 살아가니까 이 때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저 사람들을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하시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주의 말씀이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고 불 신앙으로 흐르는 그 때를 오히려 하나님이 이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불러일으키실 기회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앙입니까?
시인은 분노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 분노를 통해서 이 시인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을 버린 저 사람들 속에 있는 것과는 다른 질의 삶의 근원이 이 시인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속의 투영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깊은 사랑, 그리고 그 율법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울고 웃고 거기에서 힘과 소망, 용기, 인내, 이런 것들을 발견하면서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아온 이 시인 속에 있는 신자로서의 삶을 살게 하는 어떤 원천이 이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사람들을 끌어안고 녹일 것이냐, 아니면 한번 전투할 것이냐 하는 것은 나중 문제이고 이렇게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포기하고 불 신앙으로 흘러가던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깊이 감화와 은혜를 입으면서 일평생 살아온 신자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으며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은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의 참 진리라고 하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신앙입니다.
역사를 보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라고 하는 회의가 시작되면서부터 급속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신앙에 유일한 표준이 된다고 하는 확신들이 무너져 가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도 있고 성경 하나를 가지고 그렇게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도 하나의 시대적인 산물이고 단지 그런 시대에 이런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의 생각을 우리들이 파악을 해서 우리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참고자료로 쓰면 되는 것이지 이 수 천년 전에 쓰여진 글 하나 하나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움직일 수 없는 지침이 된다고 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이다’하는 사상을 갖는 것입니다. 단군신화를 통해 농경 사회에 대한 암시, 토템족들의 갈등, 전쟁, 승리들을 해석해 내는 듯한 방식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런 식으로 믿어야 된다고 하는 확신은 19세기 이후로 누룩처럼 번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굉장히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아무리 번역해 놓아도 팔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만이 성경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확고한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확신들은 누룩처럼 번져 가는데, 일단 그런 사상에 물들었던 사람들이 ‘아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이다’하는 확신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안됩니다. 그럴 정도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가 우리의 삶과 신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이 시인은 분노를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사람들을 보면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결사대를 조직해서 전부 처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눈물로 호소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지 -저들을 심판하시든지, 저들을 감화시키시든지- 이 언약공동체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서 살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간절한 탄원입니다.
그런 사상은 시편 119편 136절에 나옵니다.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이것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람들이 변화되고 그 신앙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참 진리라는 것과 그 삶이 우리의 전 삶의 방면에서 우리를 붙들어 줄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럴 때일수록 경고를 받으면서 자기도 그렇게 신앙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더더욱 진리의 말씀을 붙들면서 살아가는 삶을 여기에서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이 지난 사경회 때 마음 지킴의 교리에 대해서 개괄적인 것들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아무리 지킨다고 애를 써도 마음을 지키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마음을 아무리 지켜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 지킴의 목표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목표가 있으니까 마음을 지키는 것이지, 인생의 목표가 없는데 그냥 가고 싶은 대로 가라고 내버려두지 마음을 지키면 뭐합니까?
마음이 어디로 가려고 할 때 가지 못하게 재갈을 물리고 잡아당기면 인간은 계속 구속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분명히 가고자 하는 목표가 있을 때에 그것을 계속 억제할 때에는 그것이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표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지키면서 사는 삶에 대한 교리가 찬란한 한줄기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방치하고 사는 사람들, 삶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어져야겠다고 하는 뚜렷한 헌신의 목표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에 별 도움이 안됩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율법을 버리는 것을 보면서 그들도 한때는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을 냈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그 율법을 떠난 것을 보면서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다시 한번 자기의 마음을 동이면서 율법을 향한 충성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건한 신자의 반응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세상이 너무 악해서’, ‘요즘 신자들이 다 그래서’, 그‘런 것이 인륜이니까’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주 비겁한 것입니다. 시인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이 일하실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분노합니다. 내 안에는 저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리고 이것으로서 나는 저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하는 진실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가 정말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 성도입니다.
악인이 횡행할 때에, 율법을 버린 악인들에 의해서 에워싸인 때에 시인이 행한 첫 번째가 자기의 정체성을 느끼면서 분노하는 것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래서 다시 주님의 말씀에 자기를 묶는 것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때에,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율법에서 떠난 그런 시대에 두 번째로 시인이 말씀을 붙들면서 살아가는 한가지 비결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는 나의 노래가 되었습니다”입니다. 자신의 인생 길 전체를 하나의 나그네 된 집이라고 봤을 수도 있고 혹은 언약 공동체 그 자체를 집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자신의 육신을 하나의 장막으로 보고 그것을 집이라고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용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것은 그런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해석해도 가능하다고 보는데 “나의 나그네 된 이 세상의 인생 길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래는 그들의 삶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노래는 대부분 단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하늘에 계시니 그 기쁜 음성 높여서 찬양하네
와 같이 구슬픕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생을 살면서 고난과 역경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그런 멜로디들이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떻든 시편에는 모두 곡이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곡을 따라서 이 시편을 낭송했던 것을 보아도 분명히 그들은 노래와 떨어질 수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보면, 정말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때에 정말 하나님 앞에 노래했습니다. ‘생활 점검표’에 보면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즉시 하나님 앞에 감사하라’고 나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기쁜 일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했을 때 하나님 앞에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에 그 노래를 통해서 시인들이 이전에 이보다 더 큰 환난 때에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해 주셨던 구원의 행동을 회상하면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백성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런 마음이 투영된 것입니다. 상황은 사람들이 율법을 다 버리고 언약 공동체 안에 살면서도 한 형제라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없고 오히려 저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들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시인에게 있어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분노하고 자신도 저들처럼 미끄러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살기를 다짐하지만 그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신앙의 선조들이 자주 고백했던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 자기를 “나는 여기에 우거하는 나그네라”했습니다. ‘겔’ 혹은 ‘굴’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잠시 머물다’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사람들이 가득할 때 시인이 느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그리고 이 세상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뻐하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사모하지만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이 세상이 영원한 자신의 집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참된 신분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나의 나그네 된 집’이라고 표현합니다. “거기에서 주의 율례는 나의 노래가 되었습니다”합니다. 여기에서 ‘율례’는 ‘후끄’라는 히브리 단어인데 ‘율법’은 ‘토라’입니다. 두 단어가 거의 교차적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엄밀하게 구분한다면 ‘토라’는 ‘후끄’보다 훨씬 큰 개념입니다. 여기에서 ‘율례’라고 표현된 ‘후끄’는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의식을 지키는 세세한 규정들입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가 즉시 알 수 있는 것은, 율법 속에는 십계명과 같은 도덕적인 법도 있고 민법도 있고 제사의 규례에 관한 의식 법도 있는데, 이것들을 전면적으로 다 버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시인은 뭘 찾으면서 위로를 받느냐면, ‘내가 오늘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제사하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어떤 하나님의 민법의 규정을 좇아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면서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시인의 마음속에 놀라운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악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전면적으로 버리고 막된 삶을 살아갈 때 그 속에서 분노를 느끼며 다시는 그렇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마음의 허리띠를 동이는 동시에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 그 율례, 그것을 좇아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작은 계명을 좇아서 살아가는 삶의 즐거움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신앙생활의 감격에 빠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인이 세상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역사가 아무리 많이 흘러가도 신자가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동일합니다. 오직 이 신자는 자신이 이 세상에 살면서 악인들이 처처에 횡행하고 율법을 떠난 많은 사람에게 에워싸일 때에 거기가 타향과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신앙생활에 오금을 펴지 못하도록 좌절시키는 원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신자가 세상을 이기는 훌륭한 비결 중 하나는 이 세상이 잠시 머물 세상일뿐이고 이 세상은 하찮은 것이고 이 세상이 지나고 나면 -나그네와 같은 삶의 여정의 막이 드리우고 나면- 우리의 경배와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확신입니다. 세상에 살아있고 그 세상에서 영원히 머물 사람처럼 성실하게 자기에게 주신 사명의 분깃을 따라서 충성스럽게 살지만 그러나 항상 세상은 세상이라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입니다. 그런 나그네가 유일하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나그네 된 이 세상에서 하늘의 위로와 그 사랑을 미리 당겨서 맛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런 신령한 위로와 기쁨들을 이 세상에 아직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미리 당겨서 맛보도록 만들어 주실까요? 하나님의 말씀, 거기에 기록된 주님의 계명을 좇아서 살려고 하는 많은 신자들, 그 하나님의 말씀의 계명을 좇아서 살려고 하는 진실한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쁨과 은혜를 누리도록 그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세상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언제나 신자가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많이 알고 있는 성도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위한 지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은 세상을 많이 아는 성도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은혜를 공급받고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 속에서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감화가 있고, 세상에 빼앗겼던 우리의 마음을 다시 점령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저런 근심, 이런 저런 애착, 그리고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갈등하며 답답한 마음으로 예배당에 들어와도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심령에 강한 감화를 끼치면 그 다음에 일주일 내내 그렇게도 고민하고 갈등했던 것을 한 순간에 싹 쓸어버리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확 점령하는 것입니다.
마음 자체가 다 무너지고 다른 것에 의해서 점령되었는데, 마음이 새로워져야지 지킬 것도 있고 지킬 것이 있어야 지키지 않겠습니까?
(예화: 예전에 할머니께서 가져갈 것이 없으니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말씀)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수시로 세상이 쳐들어와서 차지한 성도의 마음을 점령해 버리는 위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마음이 확 점령될 때에 다 떨쳐버리고 다시 우리의 마음이 지킬 가치가 있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지키려고 애를 써도 또 스며들어와서 부분적으로나마 차지한 것을 다시 쓸어버리고 지키는 것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가 이 세상에서 평생 동안 해야할 의무이고 또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위로의 노래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금년 한해 동안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서 마음을 잘 지키면서 승리하는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말씀으로 후대해 주시는 하나님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7-18)”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두 하나님이 자기를 후대해주시는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히 대우해주셔서 그 하나님의 대우해주심이 자신들의 분에 넘치는 것 같아서 감사하고 기뻐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은혜가 식은 성도들에게 주님을 향한 감사가 사라진 이유는 바로 주님이 자기를 후대해주시는 체험들이 메말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인이 시편 23편에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그렇게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는 항상 주님이 자신들을 특별히 대우해주셨다는 감격과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지 하나님 앞에 섭섭한 것은 오래 가고 감사한 것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사악함입니다. 그래서 신기한 것이 하나님 앞에 감사해서 ‘이 쓸모 없는 지푸라기와 같은 나도 이렇게 사랑하셔서 나에게 이렇게 분에 넘치는 대접을 해주시는구나’ 하는 감사는 회상을 해도 그 감사의 감격이 빨리 안 오는데 섭섭했던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어쩜 그렇게 묵상이 잘되는지 온 몸과 마음이 그 섭섭함에 젖어듭니다. ‘맞아. 그 때 내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시고 나 혼자 버려 두셨어.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오랫동안 기도해도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어주셨어’하는 섭섭함들은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 일은 평생동안 잊지 않고 가슴에 간직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 베풂을 받은 사람들은 곧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은혜 베푼 사람은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은혜 베풂을 받은 사람은 곧 잊어버리는데 사실은 거꾸로 되어야 합니다. 은혜 베풂을 받은 사람은 정말 세월이 많이 흘러도 누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것, 누가 자신에게 후대해준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 된 도리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했던 것은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전에 너희가 어떤 존재였고 소망이 없는 가운데 애굽의 바로의 치하에서 얼마나 비참한 종살이를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과 그런 아무 희망이 없는 너희들에게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 능력과 함께 나타났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일평생 살 듯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런 죄악 된 세상, 애굽과 같이 아무 희망이 없는 죄 가운데 있는 형벌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던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구해주셔서 자기들을 그 소망이 없는 세상에서 건져내셔서 빛의 나라로, 그리고 소망의 나라로 옮겨 놓았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은총과 자신들의 비참한 과거 사이에 브릿지가 되는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며 부채의식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아름다운 삶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하나님 앞에 후대 받은 경험들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가끔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마치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도 사실은 권장할 만한 이야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사람을 너무 사랑하셔서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삶 속에서 자기 같은 인간을 특별히 대우하시고 자기와 같은 인간을 매우 특별하게 사용하신다고 하는 감사와 은혜의 감격들, 그런 기쁨들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아름다운 출발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의 후대해주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 더 큰 후대하시는 은혜를 입고 싶어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욕망, 그래서 아무리 도와주어도 마음에 차지 않아서 계속해서 더 달라고 하는 욕심 있는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은혜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더 많이 후대 받으면서 살기를 원하는 그 갈망은 신령한 것이고 오히려 순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성도들이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것은 그의 영혼이 정말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싶어하고 더 많이 하나님의 후대해주시는 은혜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성도의 강렬한 갈망은 반드시 그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를 힘입어서 주님의 뜻대로, 그리고 주님의 자녀답게,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하는 소원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병들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에 대한 갈망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공식으로 보면 성도가 신앙의 은혜 가운데 멀어질 때에는 부지런히 은혜의 수단에 참여해서 말씀도 듣고 깨닫고 은혜 받고 거룩한 욕망에 불을 지피며 부지런히 그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반대로 마음속에서 은혜가 사라지기 시작하면 그러한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방편에 참여할 마음이 잘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건강했던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두움들이 깃들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나를 후대해서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겠습니다”합니다. 어떻게 보면 거래하자는 내용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면 제가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서 시인이 말하는 바는 ‘나는 여호와의 종입니다’ 인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노예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저를 주님이 후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다 마찬가지고 상정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시대에도 원칙적으로는 계급이 허락되지 않았는데 종살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나라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종살이와 다른 점은 고착된 세습적 신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같은 경우 옛날에 종으로 태어나면 자식도 종이고 대대로 계속 종밖에는 될 수 없었습니다.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에 어느 정도 관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지극히 제한되었고 종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버지도 종이고 할아버지도 종이고 그 밑에 대대손손이 종일 수밖에 없는 고착되고 세속적인 신분이었는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종이 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가산을 모두 날리고 빚을 졌다든지 이웃에게 잘못했다든지 전쟁이라든지, 어떤 이유로 인해서 노예가 되어도 안식년에 무를 수 있었고 희년이면 무를 수 있는 돈이 없어도 몸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모두 해방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착된 노예제도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라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예에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그저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는가하면, 비록 노예 살이지만 좋은 주인을 만나서 그 주인을 진심으로 섬기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보면 그런 노예들이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자유인이 되는데, 그 노예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디를 간들 이렇게 좋은 주인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이 주인과 함께 맺은 교제의 은혜, 그 관계가 너무 감사하고 소중해서 이 주인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같이 진심으로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에게 매어서 종살이하는 그것이 억압된 종살이가 아니라 정말 자기 스스로 기쁘게 선택한 종살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데리고 가서 기둥에 대고 귀를 뚫어서 그 집안에 영원히 -자유인이었지만 스스로 종이 된 사람으로서- 남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진심으로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서 무엇을 얻는 것과는 상관없이 귀 뚫린 노예처럼 그렇게 충성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귀 뚫린 노예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구원해주셨을 때에 우리에게 무슨 짐을 지우셨습니까? ‘내가 너 구원했으니까 본전 찾아야겠다’하시며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짐을 지워주셨습니까? ‘너를 내가 구원할 테니까 너는 이 다음에 목사 되라’하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자유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후대해주시는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고 귀해서 이제는 주님의 노예로, 주님의 종으로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이 없어서 귀를 뚫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인이 되었지만 스스로 종이 된 사람들이 바로 후대함을 입은 종들입니다. 그들은 종이지만 그러나 종처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비록 종이지만 종처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인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인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그런 맥락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많이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더 하나님의 후대해 주시는 은혜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를 더 후대해 주십시오.’ 우리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주님, 제게 더 많이 은혜를 주십시오. 제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겠습니다’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얘야 저것을 해야겠다’하면 귀 뚫은 종들은 아주 기쁘게 ‘예 주인님’하면서 일하듯이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주님의 분부인줄을 알고 정성껏 그 분부를 준행하면서 일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제게 더 많이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더 많이 나를 후대해 주십시오’ 하는 고백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우리들이 흔히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형통함을 구하고 더 많은 것을 달라고 할 때에 그 배경에 깔려있는 생각은 이런 생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내 인생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내 사업에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주님 해결해 주시옵소서. 주님이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시면 제가 힘 좀 펴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렇게 저를 후대해 주시면 제가 주님의 귀 뚫은 노예처럼 주님의 분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알고 주님 앞에서 살겠습니다’ 그런 고백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는 많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오늘 여기에서 이 시인은 무엇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후대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렇게 ‘하나님이여 나를 후대해 주셔서 나로 하여금 주님 앞에 주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게 해주십시오’할 때에 시인이 하나님께 대해서 기대했던 그 후한 대우, 그 후대해 주시는 은혜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후대해주시는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서 손가락질을 받다가 주님께서 나의 누명을 벗겨주시고 나의 의로움을 많은 사람들에게 입증하실 때 원수들의 나를 향해서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잊을 수 없는 후대하심입니다.
오해를 받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릇된 판단으로 인해서 명예가 많이 훼손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명예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때 하나님의 놀라운 후대입니다.
(예화: 예전에 모시던 목사님은 새로 이사간 집에 심방 가셔서 구석구석 살펴보시며 좋아하셨다)
셋방살이할 때는 아이가 울어도 눈치보이고 벽에 글자 하나를 그어도 눈치보이고 못 하나 박으려고 해도 눈치 보이는데 자기 집 지니고 살면 정말 감격적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후대해주시는 은혜입니다.
교회에 승진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승진을 못하고 있다가 어느 한순간에 승진을 해서 자기와 어깨를 겨루던 동료들이 결제 판을 들고 와서 결제를 해달라고 할 때 느끼는 그 포만감 같은 것들도 모두 하나님이 후대해주시는 은혜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헤아릴 수 없이 하나님의 후대의 조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노예로 있었던 요셉이 마지막에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느끼는 하나님의 후대해 주시는 은혜는 얼마나 감격스러웠을 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후대하시는 큰 은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윤활유와 같아서 우리의 메마른 삶에 은혜를 얼마나 촉촉이 적셔주는 지 모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예화: 영국에 유학중인 한 집사님의 딸이 유럽의 유명한 콩클에서 은상을 받았다-연주 하는 동안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가족이 따로 떨어져서 살던 생활의 외로움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시는 감격들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도 모두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인생을 살면서 -늘 그렇다면 좋지만 그것이 어려우면- 1년에 한두 번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을 볼 때 ‘어쩌면 하나님은 저 사람만 저렇게 사랑하실까’라고 샘이 날 정도로 후대하시는 은혜에 대한 간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금년에 그런 인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런 주님의 후대하심을 많이 맛본 사람이었습니다. 이름 없는 한 집안에서 양이나 치고 짐승들의 똥이나 치던 목동에서 한 나라의 제왕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다윗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그 후대하시는 은혜를 경험했겠습니까? 시편의 80편이나 넘는 시를 시인이 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대한 간증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 인생의 갈피갈피 순간순간 마다 자기를 향해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그 후대하시는 은혜,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주님이 부르셔서 그 피로 구속하시고 시시때때로 인생의 역경 속에서 나를 건져내시는 은혜, 원수들은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비난의 화살을 퍼붓지만 그들의 이빨을 꺾으시고 뺨을 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원수는 나를 넘어뜨리려고 함정을 파고 올무를 놓았지만 그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오히려 그 원수들을 그 그물에 스스로 걸리게 하시고 자기가 빤 함정에 빠지게 하시는 기가 막힌 하나님의 후대하시는 은혜를 삶의 모든 순간에 맛보면서 산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다이나믹한 인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후대해주시는 것이 무엇이냐고 말할 때 그는 그런 모든 사건들 속에 맛보았던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밀쳐버리고 하나를 세우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의 종의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후대해주시고 특별히 대우해주신다고 하는 놀라운 간증을, 이름 없는 목동에서 제왕의 자리에 이르도록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까지 그렇게 엄연한 후대의 간증을 가졌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모두 밀치고 주님이 자기를 후대해주셨다고 할 때 그 후대의 방법 중 가장 자신의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져있는 것은, 주님이 자신의 눈을 떠서 주의 법의 기이함을 보게 해주실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를 보고 이제껏 까지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의 진리를 보고 이제껏 까지 자신이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품의 지식들에 눈뜰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때, 그 때 시인은 하나님이 정말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향해서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자기를 그 거룩의 도성으로 부르고 계시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소명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깊이 하나님 앞에 감사했던 것입니다.
다른 많은 축복들, 다른 많은 은총들은 이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섭리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에 다가옵니다. 그래서 물론 우리로 하여금 간증을 갖게 만들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만들지만 우리 영혼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효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영혼에 일깨워서 직접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고치고 수술하시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은혜의 기름을 부으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있기만 하면 다른 모든 육신적인 축복들을 통해서 우리 영적인 축복도 함께 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직접 베푸시는 이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자기의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이 어두워져 있어서 후대해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자기의 눈의 비늘을 벗겨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기의 지력으로는 볼 수 없는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더 눈뜨도록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인식을 갖도록 만들어 주시지 않으면 자신이 영혼의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을 떠서 주님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될 때 자신은 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해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예전보다 더 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갈 수 있었고 그렇게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더 변화되고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서 자신에게 베푸시는 물질적이고 이 세상적인 후대함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자신에게 주실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의 눈을 떠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후대하심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 아직은 큰 물질을 소유한 부자, 세상에서 승승장구하고 출세하는 관리, 그리고 끊임없이 사업을 해서 성공하는 유능한 사업가, 복 받은 사업가의 길을 아직은 못 걷고 있다할지라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고 여러분들의 눈을 뜨게 하셔서 주의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하시고 있는 한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후대하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인생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후대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눈뜨는 그 개명의 사건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깊은 세계에 눈뜨게 될 것이며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 큰 은혜를 맛보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의 사랑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매 순간마다 이런 마음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축복,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는 주님의 손이 날마다 아침마다 새롭게 나의 눈을 만지고 지나가시며 내 영혼의 껍질들을 벗기시고 주님의 신령한 은혜와 신령한 진리의 세계에 눈뜨고 그것들을 소유하고 그것들을 보면서 아버지 앞에 더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인 것입니다.
마지막에 이 시인이 하나님의 큰 은혜 가운데 수를 누리고 죽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가 죽을 때 마지막 품에 안고 간 것은 왕관도 아니었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피묻은 창칼도 아니었습니다. 그 인생의 여정을 마치고 주님께 갈 때에 마지막 가슴에 묻고 갔던 것은 일평생 자기가 사랑했던 하나님의 율법, 주님이 끊임없이 눈을 뜨게 하셔서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은혜의 오묘한 세계와 그 은혜의 세계 속에 살 수 있도록 자기를 단련하는 비범한 방법들과 어두운 세상에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한 삶의 수많은 규칙들을 그는 터득했고 배웠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더라면 아마 시골에서 양의 똥이나 치면서 평범한 목부로 그렇게 살았을 그 쓸모 없는 사람을 주님이 이런 은혜의 말씀들을 통해서 주님의 사람으로 빚으시고 한 나라를 그에게 주시고 제왕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왕이기 이전에 주님 앞에 스스로 기쁘게 종이 된 한 사람의 자유인이었으며 자유인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주의 노예가 된 주님의 몸종과 같은 인생을 이 사람이 살았습니다.
마지막에 갈 때에는 피 묻은 칼, 그리고 피 묻은 창도 아니고 한 나라의 제왕의 면류관이나 만조백관을 향해서 흔들던 홀도 아니고 그가 가슴에 마지막 끌어안고 간 것은 지키면서 살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과 함께 시인은 쓰러진 곳에서 일어났고 엎드러진 곳에서 다시 세움을 받았으며 핍절한 곳에서 다시 부요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그 수많은 축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경험한 수많은 인생의 경험, 자기를 후대해주신 경험이 왕관 쓰고 하나님 앞에 경험한 것보다 더 많았고 칼보다 많았습니다. 칼보다 창보다, 그리고 면류관과 왕의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는 홀에 얽힌 추억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진 후대하시는 은혜의 기억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이 시인은 죽을 때까지 주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나오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넘어진 하나님의 자녀가 다시 일어서는 그 놀라운 힘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통해서 인 것입니다. 갈 길을 알지 못하고, 순종하고자 하지만 순종할 힘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주의 백성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금년 한해에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말씀을 붙들고 이기고 승리하는 주의 백성들 되기 바랍니다.
12.나그네 인생길의 위로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시119:19)”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후대하시는 최고의 방법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오늘 시인은 자신의 탄원을 하나님 앞에 더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합니다. 먼저 시인은 자기의 처지를 고백하고 두 번째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소원을 아뢰고 있습니다. 자기의 처지는 땅에서 객이 되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탄원의 내용은 주의 계명을 자기에게 숨기지 말아달라고 하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시인은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하는데 여기에서 ‘객’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계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구르’라고 하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구르’는 ‘잠깐 머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객’은 우리말로 잘 번역하면 ‘나그네’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나그네라고 부르는데 그 나그네는 가는 길이 하도 머니까 지나가는 동리를 그저 지나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 한 동리에 들어가서 하루나 이틀 머물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며칠씩 거기에서 거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그네가 그 동리에 거처하는 동안에는 비록 그 동리에 정주하고 사는 거주민과 같아 보일지라도 그들이 거주하는 삶의 방식은 아주 다릅니다.
그래서 이 ‘계르’의 반대말은 히브리말로 ‘요세브’이고 ‘거주민’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들은 거기에 털썩 주저앉아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과는 삶의 방식이 많이 차이납니다. 거주민들은 거기에 집도 짓고 치장도 하고 살지만 나그네는 잠깐 거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최소한 자기가 필요한 것만을 꾸려서 거처하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거기에 사업을 벌이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돈을 꾸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재산을 빌려주거나 하는 일들은 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떠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헤매다가 드디어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미국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하던 장사가 있었는데 하나는 청과 장사이고 또 하나는 보석장사였답니다. 둘 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업이기 때문이었답니다. 보석은 아무리 크게 장사해도 커다란 궤짝 하나면 한 짐에 짊어질 수 있고 청과 장사는 매일 받아서 매일 파니까 언제든지 조국이 부르면 보따리 싸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그네의 삶의 모습입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를 나그네라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 대해 말하면서 ‘그들은 이 땅에 있을 때에 나그네로라고 자처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방황하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약속은 가나안 땅을 받았지만 짐승을 데리고 여기저기 떠도는 처지였습니다. 남의 땅에 잠깐 들어가서 묵을 때마다 그의 고백은 한결같이 ‘나는 나그네로라’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신앙의 고백이었고 그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자신은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과객일 뿐이라고 하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고백을 이 시인 다윗이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나그네입니다’ 이 시가 언제 쓰여졌는지 정확한 연대를 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저 이 사람의 시에 익숙해져 있는 저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는 상당히 영적으로 완숙하고 정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 쓴 시입니다. 그래서 후기작품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나는 이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할 때에 ‘땅’이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는 히브리 성경에는 정관사가 나옵니다. ‘그 땅 안에서 객이 되었습니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땅에서 객이 되었습니다’하는 것은 단순히 일반적인 인생사를 이야기한다기 보다는 자기가 거하는 그 땅에서 특별히 자기가 나그네와 같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추측하는 바와 같이 후기의 시라고 한다면 이 고백은 우리에게 더 깊은 감동을 줍니다. 저는 ‘그 땅’은 자신의 왕국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한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자기가 나그네가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들었을까요?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때에 ‘이 세상은 나그네길, 나는 다만 나그네라’하고 느낍니까? 자기가 속한 고향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있을 때 나그네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노래마다 고향타령 하는 노래였습니다. 향수에 젖었을 때 자기가 나그네라는 것을 가장 잘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고향에 대한 깊은 향수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 데나 정들면 고향이지’합니다. 그러나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여기가 자기 집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화: 통일전망대에서 한 할아버지가 눈물을 닦던 이야기)
향수가 느껴질 때 지금 사는 곳이 남의 나라라는 의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고 자기가 마지막에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 인식이 뚜렷하고, 가야할 곳에 대한 사모함이 있을 때 나그네와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화: 할머니께 옛날에 살던 집에 가시고 싶으시냐고 물었더니 너무 고생하고 살았기 때문에 가시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셨다)
향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나그네라는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로부터 왔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으면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거기가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성도들이 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그 본향에 대해서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구약시대 아브라함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러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나그네셨기 때문입니다. 고향은 갈릴리 셨지만 예수님 집은 어디였습니까? 여기 묵으시고 저기 묵으시고 떠돌이처럼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이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다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고난받은 후에 당신이 가야할 곳에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사상이 바울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바울은“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유대인으로서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은 그 당시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로마는 사상최대의 국가였는데 그 중에서 특등국민이었던 것입니다. 그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혹독한 고문을 받을 수 없고 불법적으로 체포되거나 감금된 수 없었으며, 자신이 설령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황제를 친히 알현해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귀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예전에는 자신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는데도 그가 자신을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소외했거나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가 아니라 본향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 있었기 때문에 나그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성경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에도 잘 나타납니다. 그 연로한 나이에 주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어린아이처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들었던 사도 요한 속에 있었던 궁극적인 소망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비록 그리스도의 고난과 참음에 동참하여 밧모라고 하는 섬에 유배된 죄수의 몸으로 있지만,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과 결별하고 정든 교우들과 헤어져서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에 유배생활하고 있는 죄수의 몸이지만 그러나 잠시 후 주님이 다시 오시면 자기가 돌아갈 그 나라에 대한 깊은 사모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성경의 끝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많이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을 전혀 가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고,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잘 먹고 잘 살면서도 그리움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 일이 바쁘기 때문에 집회에 나가지 않는 면도 있습니다만 그것보다도 외국에 집회가 있어서 가면 가기도 전에 벌써 이곳이 그립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에서 오라고 해도 그 좋은 곳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여기에서는 제가 이렇게 유창하게 설교를 하는데 그곳에 가면 더듬거리면서 영어로 하는데 저는 싫습니다. 공항에 내리면 집도 다르고 나무도 다르고 사람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다르지 않은 것은 저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벌써 방배동 이 골목이 그렇게 그리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일정만 마치고 속히 돌아옵니다. 아무리 대우를 잘해줘도 여기가 더 좋습니다. 자기가 돌아갈 곳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 있을 때 우리는 ‘나그네로라’는 마음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다 그런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고난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든지 부를 누리든지 항상 그들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나그네라’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 둘 수 없도다
기라성 같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가 있는 영광으로 들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산 것처럼 그렇게 용감하게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집착과 아집을 버렸으니까 담대하게 사는 것입니다.
저는 직장 생활하면서 제일 부러운 사람은 돈이 많으면서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부인이 든든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화: 직장생활 할 때 월급이 20만원이던 시절에 한 동료 직원의 수입이 6백만 원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직장은 일로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거기에서 받을 위로와 기쁨이 넘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어려움이 닥쳐도 그것은 잠시이고 내가 여기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면 그 나라에서 위로가 있으리라’고 하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 성도들입니다.
오늘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한 나라의 제왕이 된 사람이 자기 말 한마디이면 법인데 ‘난 나그네라’합니다. 정말 나그네이면 어쩌겠습니까? 왕이고 한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그 사람이 ‘나는 다만 나그네야’하는 고백을 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얼마나 현실에 불충실했던 사람인가를 보여 준다기 보다는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에 대한 소속감이 얼마나 강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안 사는지 아십니까? 그 나라에 대한 소속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충성스럽게 살지 않으면 그 나라에 갔을 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황금 면류관을 쓰는데 자기는 개털모자나 쓴다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일생동안을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다가 주님 앞에 가야합니다.
(예화: 충현교회 김창익 목사님이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요즘 헌금 내는 것을 보니까 천국이 없어졌나봅니다’라고 하셨다)
‘만약에 그 나라가 있고 그대들이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잠시 머문 후에는 돌아갈 나라가 그 나라라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인색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하는 말 아니겠습니까? 멀쩡하게 살아서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묻힐 땅 파는 믿음 없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아예 비석까지 다 깎아놓고 자기가 들어가기만 하면 되게끔 땅까지 파놓고 관까지 묻어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자기가 돌아갈 고향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가 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충성스럽게 살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불붙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 이 쓴 책 가운데 ‘The Country that I love best'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라는 제목이 붙은 책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써 내려간 내용은 이 고생과 수고를 마친 후에는 돌아갈 나라, 이 시련과 고통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고 난 후에는 돌아갈 나라, 거기에 대한 그리움들을 절절히 남겼습니다. 지금 그런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런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충성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잠시 사라지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은 모두 잠시 다 삭아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 이 땅에 쌓아두면 좀이 먹고 동록이 다 상한다. 너희들이 정말 쌓아 두려거든 하늘 나라를 위해서 쌓아 두라”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헌신하고 많이 배워서 남 주고, 돈 벌어서 다른 사람 퍼주고, 높은 사람되어서 무릎꿇고 다른 사람 섬기는 그런 삶을 살지 않고 어떻게 그 나라에 가서 주님을 뵐 면목이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자기를 사랑하고 많이 배워서 자기 행복하게 살고 돈 벌어서 자기 쓰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떵떵거리며 사람 밟고 살아서는 잠시 후 다가오는 그 나라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 나라는 여러분들이 길어봐야 몇 십년 사는 나라입니다. 80년 후에는 여기에서 같이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80년 후 그 나라에서 모두 만납니다. 그 때 여기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하나님 앞에 희생하지 아니함으로 누리는 즐거움은 잠시이고 거기에서 맛보는 위로와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고 사랑을 보여주셔서 이제까지 살아오게 하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헌금이 넘치도록 나오는 날은 마음에 눈물이 나옵니다. ‘성도들이 많이 헌신했구나’합니다. 헌금이 안 나오는 날은 가슴이 아픕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어려우면 그렇게 은혜 받고도 이렇게 헌금을 못했을까’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는 ‘나는 다만 나그네일 뿐이라’고 하는 고백을 가지고 산 사람들-잠시 머물 세상이기 때문에-입니다.
그 시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모함과 소속감이 얼마나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두 번째입니다. 그 나라에 대해 소속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세상 나라는 덜 사랑하고 관심이 없을 것 아닙니까? 대충 살다가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나라에 대해서만 관심이 많고 이 나라는 예고편인데, 영화관에 가서도 예고편이 나오면 화장실 다녀와도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자기가 궁극적으로 가야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자신이 나그네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일수록 이 세상을 그렇게 가볍게 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잘 살고 싶어했습니다. 잘 먹고 잘 산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렇게 살다가 얼른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드려서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화: 한산에서 베를 짜는 아주머니가 절대 서울에서 모시를 사면 안 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곱게 짰어도 뒤로 갈수록 성글게 짠 것이 많기 때문이다-한결같이 짜는데 7일 걸리면 날라가며 짜면 4일 걸린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결같이 한올 한올 모시를 짜듯이 하루하루를 정성껏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잘 살기 위해서는 피눈물나게 고생해야 하는데 대충 살기 위해서는 노력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내키는 대로 살면 됩니다. 하나도 안 힘듭니다. 그래도 힘들다면 자기가 죄 짓느라고 힘드는 것이지 가치 있게 살기 위해서 받는 고난이 아닙니다.
신기한 것은 그 나라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는 개판 치면서 살 것 같은데 아닙니다.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대신 이 세상은 자기를 사랑해주고 자기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삶 자체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삶으로서 고백할 수 있는 여백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 천국에 대한 소망이 신비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오는 소망이냐, 아니면 진정한 영성을 가진 천국에 대한 사모함이냐를 가늠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삶에 대한 관심을 보면 됩니다.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역사적인 세상에 대해서 단절되어 버리고 난 신앙은 신비주의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은혜 속에서 주의 나라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서 그 사모함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에 더 공을 드리려고 하고 이 세상의 삶을 더 잘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바로 정상적으로 그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입증하듯이 두 번째 나오는 것이 “주의 계명을 내게서 숨기지 마옵소서”입니다. ‘숨긴다’고 하는 말씀은 ‘싸타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문자 그대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감추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환난 날에 주께서 나를 감추시고’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주님이 감추시고 나면 대적들이 시인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계명’ 지시입니다. ‘이렇게 살아라’ ‘이것은 하면 된다. 이것은 하면 된다’고 가르쳐 주시는 삶을 향한 실제적인 지시들입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미쯔바’ 즉 ‘계명’입니다. 여기에는 단수로 나오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지시들을 나로부터 감추지 말아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감추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자신 안에 그런 것들을 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어느 순간에 말씀에 대해서 눈을 떠서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놀랍게 그 진리들을 발견할 때 ‘나는 도대체 그 긴 세월동안 뭘 믿고 살았나. 아무래도 내 눈에 뭐가 씌웠나보다. 성경에 이렇게 많이 나오고 이렇게 성경에 두드러진 교훈인데도 내가 왜 그것을 못 보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마치 자기 눈이 가리웠던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이 문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감추고 가리신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가 있는데 그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나 자신의 편견, 그리고 나 자신의 사고방식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놓는 것, 그리고 오랫동안 살아왔던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솔하게 판단하는 것,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것들을 잘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얼렁뚱땅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섬세하게 설명을 하면 ‘뭐가 이렇게 복잡해. 결국 잘 믿으라는 얘기네’하고 확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의 세미한 것들을 잘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논리로 없이 마구 덮어버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 자신의 약점 때문인데 그렇게 우리 자신의 눈이 가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 그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법의 그 아름다움과 기이함을 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문학적인 수사법이고 실제로 이 말이 함유하고 있는 바는 앞에 나온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시옵소서”의 연장선상입니다. 그렇게 열어서 하나님이 계속 보게 만들어 주셨는데 나의 어떤 잘못으로 인해서 나의 눈이 다시 가리워져서 주의 그런 진리를 계속 발견하고 깨닫게 되는 축복에서 나를 배제시키지 말아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간절한 탄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 이 시인은 하나님이 주의 법을 향해서 열어주신 그 눈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와 법의 기이함을 보고 그 계명을 계속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축복으로 친 것입니다. 그것은 나그네 된 길에서 자기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시인이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치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와 같음이니이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어서 이 세상에는 위로가 없는데, 그래도 이 세상에서 정말 이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도록 받는 특별한 위로가 있다면 하나님이 자기를 후대해 주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몰라줘도 주님이 나를 후하게 대우해 주시는 것이다” 어떻게? “눈을 열어 주의 법을 보게 하심으로 주의 말씀에 은혜를 받게 하심으로 주의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 나의 삶을 참회하게 하시고 더 높고 거룩한 삶을 향해서 도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가 자기를 후대해 주시는 하나님의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시인이 자기는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이고 이 세상에서는 분깃도 없고,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는 기업도 없고 긍극적으로 자기가 돌아가야할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 즉 하나님의 모든 삶을 위한 지시들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감사했다고 하는 것은 시인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고 싶어했는가 하는 순종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더 진실한 신자가 되고 더 온전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집안에서 커다란 물건을 치울 때는 희미한 불빛만 있어도 됩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치우고 싶으면 찬란한 빛이 필요합니다.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나 장판에 묻은 티까지 깨끗이 세제로 털어 버리기 위해서는 환한 빛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충 살려고 할 때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정미한 것이 싫습니다. 얼렁뚱땅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코미디 같은 설교나 좋아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정말 하나님 앞에 바르고 참된 신자가 되려고 고민하고 애쓰면 애쓸수록 정말 대충대충 줄거리만 맞는 내용의 진리를 가지고는 절대 그런 삶을 살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더 찬란한 진리의 빛이, 그리고 더 세미한 갈피 갈피에 숨어있는 자신의 죄와 실패한 삶의 원인들을 비춰줄 수 있는 아주 밝은 말씀의 빛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욕구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결국은 거룩한 삶에 대한 욕구가 없습니다.
(예화: 교리반에서 어떤 분은 예전에는 예배드리러 갈 때 아무런 기대가 없었는데 안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갔다고 했다. 어떤 분은 자기가 교회에서 교사이고 집사인데 안가면 본이 안될 것 같아서 갔다고 했다. 열심히 다니면 하나님이 복 줄 것 같아서 다녔다고 했다)
그분들은 모두 악한 분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바리새인들이 꼭 그랬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악하기 때문에 바리새인이 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하고 진실한 성찰, 그리고 하나님 앞에 참된 자녀가 되려고 하는 진지함들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대충대충 살아간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찬란한 말씀의 빛을 비춰주셨을 때에 그들이 그 말씀의 빛 앞에 드러난 진실들을 다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 숨어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기 때문에 마치 있어서는 안 되는 세상에 억지로 있는 것처럼-대합실에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 하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속히 그 나라에 갈 생각만 하고 산 사람이 아닙니다. 나그네인데도 이 땅의 주인처럼 더 이 땅을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 객인데도 이 땅의 주인보다 더 정성껏 살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세심하게 자신의 삶을 살피고 정사하고 그것들을 주님의 말씀에 적용하면서 살려고 많이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이 시인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거룩한 성도들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진리 안에서 일어서서 정말 진실한 삶을 사는, 그래서 소망을 천국에 두었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기에 자신의 신명을 드리는 그러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3.영혼이 소진되기까지 사랑한 말씀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119:20)”
이 119편은 정말 아름다운 시입니다. 저는 이 119편에서 맛본 회복의 경험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119편을 천천히 낭독을 시키면 그 사람의 영성을 알 수 있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이 119편이 주는 은혜는 참 놀랍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해주십시오” “나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되었으니 주의 계명을 내게 알게 해 주시옵소서” 나그네 인생 길에 하나님이 계명을 주시고 그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 시인의 마음에 기쁨이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격렬한 고백으로 토해놓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의 율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 성경은 이보다 훨씬 의미가 깊습니다. “내 영혼은 주님의 판단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항상 소진되었습니다”의 의미입니다.
하나씩 더듬어 보자면, 첫 번째로 “내 영혼이 소진되었습니다”하는 표현입니다. ‘마음’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시인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갈급 함을 느끼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기는 의문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나머지 왜 영혼이 소진될 정도로, 다시 말하면 영혼이 완전히 기운이 빠져서 탈진될 정도로까지 되었을까요? 그런 상태를 어떻게 말씀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목마른 갈증이 있으면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그 영혼은 이미 풍성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셨습니다. 앞으로 복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 더 깨닫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자신은 너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는 자기 자신의 무지에 대한 한탄,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목마름 들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읍시다’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된 사람들은 ‘이만큼 살면 됐지 은혜는 무슨 은혜’합니다. ‘비록 풍성한 삶은 못살고 있지만 풍성한 삶을 알고 있는데 이 정도면 됐지’ ‘기도 안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처럼 이렇게 기도 안 한다고 마음 아파하는지 봐라’합니다. ‘순종 못해서 나처럼 이렇게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있는지 생각해 봐라’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의 반응이고 자기 긍지입니다.
이 시인에게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세계를 맛보았고 그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깊이 경험하고 난 다음에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으로 자신의 영혼이 소진되는 것 같은 아픔들을 느낀 것입니다.
(예화:냉장고를 들여다보면 그 집안 식구들, 특히 주부의 삶의 의욕을 확인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거룩해지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의 영혼이 소진되었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극에 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 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 사람이 거의 은혜를 못 받아서 고갈 상태에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고갈을 느끼는 것입니다.
신자가 은혜 안에 있을 때 갈급 함을 느낍니까, 아니면 죄 아래 있을 때 갈급 함을 느낍니까? 옛날에는 갈급이 뭔지도 몰랐던 사람이 은혜 안에 들어와서 심령이 주의 은혜로 깊이 젖어서 그 은혜로 촉촉이 될 때 메마르면 즉시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다 다시 기도를 하든지 말씀의 은혜를 받든지 해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자기의 영혼에 어떤 갱신이 이루어지고 풍부한 은혜로 주님이 자기를 만지고 지나가시면 다시 기쁨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도들이 갈급 함이 있는데 그 갈급 함을 못 채워서 문제가 아니라 그 갈급한 마음 자체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말 목마른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잡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원하는 간절한 목마름이 한 신자에게 있다는 것은 그가 벌써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영국과 스웨덴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스톡홀름에서 한 그리스도인 부부가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들어가서 로이드죤스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주일 오후 저녁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서 예배드리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나가면서 하는 말이 “다음에 다시 와서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한번의 예배를 위해서 스톡홀름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시 오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적시고 지나간 은혜의 경험이 풍부하면 그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보다 더한 경우가 죠지 윗필드의 경험입니다. 3백년 전에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범선을 타고 건너 와서 윗필드가 인도하는 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은 다음에 “다시 한번 더 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태풍을 뚫고 대서양을 건널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은혜의 감격이 얼마나 컸으면 한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저는 어차피 나그네와 길손 같은 인간입니다. 나그네와 길손 같은 제게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이 대접해주실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이한 법들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주시고 내가 하나님의 그 계명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충분하게 내 마음속에 임하지 아니하므로 내 영혼이 소진되고 있습니다”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화: 중국에서 설교를 듣고 편지를 보낸 이야기-신앙의 자유가 없는 중국에서 성경을 구하기 힘들어 극동방송에서 불러주는 성경을 받아 적은 것을 가지고 신앙 생활 한다)
(예화: 1640년경에 영국에서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함께 묶여진 성경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었다-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쳤을 때 성경책 가격이 지금 돈으로 2억 4천만 원이었다)
성경 한 권 값이 아파트 한 채 값이라면 성경 살 사람이 얼마나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17세기 청교도 시대에 성경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천으로 널려있습니다.
우리가 시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정말 자신의 영혼이 소진되는 것 같은 느낌, ‘내가 오늘 하루 양식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내 영혼을 만지고 지나가시는 주님의 말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하는 고백이 정말 우리들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손만 뻗으면 성경이 있고 더군다나 성경을 펼치기만 하면 그 밑에 빽빽하게 설명까지 달려있습니다. 영어 한글이 비교된 성경도 나오고 그림 찍은 성경도 나오고 무겁지 않게 얇은 성경도 나오고 잘 보이게 큰 성경도 나오고......여러 가지 성경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찍어내면 뭐합니까? 사랑하고 그 진리의 의미를 깨달으려고 사모하고 갈급하게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너무 소수입니다. 더욱이 손만 뻗으면 그 성경들을 해설한 책들이 있고 그 성경들을 풀은 설교 테이프들이 있으니까 마음이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늘 듣는 거’ ‘나중에 테이프로 들으면 되지’ ‘테이프 살 필요 없이 인터넷에 들어가서 들으면 되지’하면서 언제든지 깨달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다고 하는 자족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 하나가 그 순간에 깨닫지 못하면 스쳐지나갈 것이라고 하는 안타까움 속에서 마치 유효기간이 찍혀있는 티켓을 활용하는 듯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그런 갈급 함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현저히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책을 많이 가지고 있고 책들을 집에 잔뜩 쌓아놓고 테이프를 몇 박스씩 사다가 책상 밑에 넣어놨다고 해서 거기에서 풍성한 삶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 자신이 소화시키고 깨달아서 그것으로서 우리 자신의 영혼의 양식을 삼고 거기에서 만족을 얻으면서 은혜를 받을 때에 비로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그 은혜로 인해서 풍성해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에 그렇게 소진된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미쉬파트’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되어있습니다.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공의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나의 영혼이 소진하였습니다’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시인이 도대체 왜 그렇게 하나님의 판단을 사랑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자기가 필요로 하는 만큼 풍부하게 말씀이 주어지지 않음으로 자신의 영혼이 소진되는 것 같은 고통과 아픔을 느끼는 일들은 왜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판단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를 보여주는데 첫째는 시인 속에 있었던 삶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줍니다. 그 삶은 하나님의 판단을 따라 살고 싶은 삶의 욕구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있는데 그것을 따라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판단들에 대한 사모함이 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제일 억울할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도 있고 신앙심도 충분히 있었는데 그것이 잘못인지 몰라서 불순종했을 때, 그 때 억울하지 않습니까? 죠나단 에드워즈 시절에 피비 바틀렛이라는 5살 정도 된 아이의 회심의 기록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매일 사라졌는데 알고 보니 창고에 들어가서 하나님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곳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놀랍게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후로 그 아이는 교회 가는 날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옆집의 과일을 훔쳐와 엄마에게 야단을 맞게 되었는데 그 때 그 아이가 울면서 누나에게 그것이 잘못하는 것이라고 왜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고 싶은 사람의 가장 커다란 한은 몰라서 그렇게 살지 못한 것입니다. 살 용의도 있고 힘도 있고 각오도 되어있는데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살지 못했을 때, 그런 삶을 살기를 갈망하는 성도들에게는 그것보다 더 억울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집요한 욕망,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과의 보다 완전한 연합 속에서 살고 싶으니까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삶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가 하는 것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이름을 인정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자기의 기도도 헛것이고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도 헛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알고 싶어하느냐가 하나님에게는 중요합니다.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과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더 거룩한 삶을 살고 싶어서 자신의 지식의 현저한 부족을 느끼면서 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고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갈망은 예수님 보기에는 같은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호기심과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소원이 담긴 진리를 향한 갈망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판이하게 다릅니다.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 거룩해 지고자 하는 성화의 불타는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목마르게 사랑하고 있으면 여러분들은 성화의 진전이 계속 있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여러분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크게 만나고 뒤집어지는 것을 몇 번씩 해서 이제 더 이상 뒤집을 것도 없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주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이 없으면 옛날에는 어땠을 지 모르지만 지금은 거룩해지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가 사라진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세상이 점점 전문화되어가기 때문에 결국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전문가를 많이 의지하면서 살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많은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비전문가의 고뇌하는 판단보다는 전문가의 상식적인 판단이 훨씬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예화: 가끔 지체들이 찾아와서 3일 동안 금식하고 5개월 동안을 기도해왔다고 말해도제가 즉석에서 판단해주는 것이 더 정확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도 성립됩니다. 전문가의 실수는 비전문가의 의도적인 파괴보다도 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책임감이 강해야 합니다.
(예화: 설교를 테이프로 제작했는데 음질이 떨어진다고 하면 마음이 몹시 상한다.-음향업자를 불러 10원 짜리 나사를 3천원짜리로 바꾸니 음이 잡히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최상의 작품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에 최상의 도구들을 선택합니다. 그래야만 그 작품이 나옵니다.
성화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그렇게 복잡해. 그렇게 힘들면 차라리 천당 안가고 말지. 그렇게 힘들여서 가려면 이 세상을 지옥처럼 살아야 하는데’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대충대충 살아가고 되다 만 신자 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면 그렇게 힘들게 살 필요 없습니다.
오후에 왜 여기 이렇게 나와서 앉아있습니까? 가서 텔레비전을 보던지 외식을 하든지 취미생활을 하든지 하지. 그러나 정말 제대로 된 신자가 되려고 애를 쓰면 일주일에 한번 달랑 와서 성경 어디를 읽었는지도 모르는 예배 드리고 도망치듯이 빠져나가는 그런 예배생활 가지고는 우리가 역사와 전통에 빛날 수는 있어도 정말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에 빛나는 진실한 성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일 하루만을 고민해 가지고는 소용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 더 깊이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지 사람이 누구인지 주님의 은혜가 죄인들에게 어떻게 역사하고 죄인들이 어떻게 죄를 끊고 신령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돌이킬 수 있는가에 대한 세세한 하나님의 진리들을 깨닫기를 사모하는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된 사람이고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중고등부 아이들이 한번 악수한 적도 없고 본적도 없는 연예인 하나 보고도 그 사람이 너무 좋으면 브로마이드를 산다 사진첩을 산다 인터넷을 뒤진다 하는데, 진짜 자신이 신자되기를 원하고 진실한 성도가 되어 성화의 삶을 살기를 원하면서 자기 자신이 지식에 대한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면 -어떤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어떤 삶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가에 대한 판단에 대한 사모함이 없다면- 그 사람 자신이 거룩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의욕이 있는가 하는 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만드는 대목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에 의해서 날마다 성화 되어가고 그래서 진실한 참회와 자기 깨어짐 속에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용납해주셔서 자기와 연합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꾸준한 교회생활, 성실과 타고난 인내로 버티면서 사는 그 신앙생활은 얼마나 곤고하고 괴로운 신앙생활이겠습니까? 그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진실한 신자, 사모함이 있는 신자들의, 정말 그런 삶을 살기를 갈급 해 하는 사람들의 금을 싸다 주고 은을 담아다 주고도 얻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사람들을 상주시고 어떻게 사는 사람들을 이 시대에서 당신을 경외하는 자라고 인정하시고 당신의 친밀함을 보이실까’ 하는 것이 금이나 은, 없어질 이 세상의 모든 영화보다도 더 소중한 것입니다.
가끔 세상이 살기 싫어서 미친 듯이 차를 몰고 사람들이 있는 공원 같은 곳을 질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화: 몇 해전 여의도 광장을 차로 질주하다가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한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인간들이 꼴 보기 싫어서 다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 필요 없는 것이지만 어떻든 차를 타고 나와서 살아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 다른 사람에게 치이고 싶지도 않고 치고 싶지도 않고 안전하게 도로를 운행하고 마지막에 집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어진 사선, 정확하게 작동하는 신호등, 그 지시대로 정확하게 움직이는 뒤에 있는 많은 차량, 신호에 의해서 정확하게 도로를 횡단하는 준법정신이 있는 시민들, 이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너무 소중한 사람들이고 소중한 환경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갈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부르심인 성화의 소명에 따라 살려고 하는 욕구가 우리 속에서 없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과 그리움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새가족 환영회를 하면서 많은 지체들의 간증을 들었는데, 그중 여러 사람들은 마치 바싹 마른 스펀지처럼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것을 깨닫고 알고 싶은 마음의 갈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의 말씀의 그 은혜로 가득 차 있고 그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먹으면서 살려고 하는 몸부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까지나 유지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한때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감각이 무뎌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서 살아가려고 하는 욕망들이 쇠퇴합니다. 신령한 것들에 대한 욕망들은 감퇴하고 아주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서 예민해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원함에서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급속히 옛 삶으로 돌아가는 광경들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런 삶을 기뻐하실 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성도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간절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몇몇 종류의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이면 무엇이든지- 주님의 판단이면 그 어떤 것이든지 주님의 그 공의를 따라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하나님의 그 판단을 깊이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소진되는 것 같은 그런 아픔을 느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모두 잠들어있는 시대에 깨어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들이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라있는 시대에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은 첫째로 삶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다고 말씀드렸고, 두 번째로 시인이 보여주는 것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은 곧 시인 속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원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입증 받으시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동일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이 결핍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신비주의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결핍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은 학문적인 탐구의 대상으로서 사랑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그 말씀을 주신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 때문에 그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고 그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시련과 고난으로도 끊어놓을 수가 없고 모든 환난과 핍박으로도 단절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한 이 시인은 보다 더 열렬하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려고 애를 썼고 그리고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더 온전해지기를 갈망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 전체에서 그런 사랑이 고백되기를 원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주님을 향한 경건한 애정을 철저하고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입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끊임없는 건축자재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어떤 것이 주님의 판단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들, 그것 없이는 이 사람이 그런 삶을 구축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곧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모든 판단들에 대한 애정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서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에 우리들의 신앙의 경험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우리가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 안에 있을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을 때마다 그 명령이 우리에게 요구할지도 모르는 순종의 무게 때문에 힘들어하기보다는 지키며 살 수 있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찬송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가 말라있는 때에 주님께서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적어도 그 외침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더 소수라고 하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누군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순종하고 거기에서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거룩의 소명들을 깊이 인식해서 더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앎으로서 자신이 거룩하고 진실한 성도의 삶을 구축해나갈 수 있기를 주님은 오늘도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러한 사모함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판단을 깨달으므로 말미암아 지게 될 순종의 의무에 눌리기보다는 오히려 깨달음의 기쁨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대로 사는 기쁨이 주는 자유 함을 더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판단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소진해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있지만 간헐적일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목마르지 않고 이따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나고 갈증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좋은 신자로 빚어지고 싶지만 그런 갈망은 간헐적이고 무지한 상태 속에서도 편안하게 견디면서 살아갈 수 있는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지속적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런 종류의 하나님의 모든 판단에 대한 그리움이 ‘모든 때 동안에’ ‘언제나’ ‘항상’ 그런 갈망이 유지되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 싸울 때에도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눈앞의 적군을 이기는 것보다도 더 간절한 소원은 주님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달아서 주님을 경외하는 성도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금과 은을 많이 획득해서 부를 누리는 때에도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이 물어보신다면 시인은 더 많은 금과 은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주님이 내게 주신 이 계명, 주께서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각은 내 인생의 보물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언제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충만할 때나 갈급 할 때나,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런 간절한 갈망을 유지하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시종일관 주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간 성도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주일날 와서 말씀을 들으면서 겨우 뜨끔하고 ‘말씀 좀 읽어야 될 텐데’ ‘연초에 사다 놓은 테이프는 언제 듣지’ 그러다가 다시 돌아가서 그대로 일주일만에 다시 교회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 되지 말고 성경을 볼 때마다 ‘1600년대에는 이 책이 2억 4천만원이었다지. 이것을 내 손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가’하는 생각을 해야합니다. ‘내가 은혜 받은 설교, 이 한편을 듣지 못해서 변화 받지 못한 사람도 많았을 텐데, 내가 언제든지 내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생각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다가가서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4.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긍휼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시119:131-132)”
시편 119편에 나오는 시인의 고백 가운데 가장 부러운 고백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시인은 이미 119편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자신의 심령이 상한다던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자신이 갈급 하다는 종류의 표현들을 여러 곳에서 표명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131절에서도 시인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목이 마른 사람이 탈진한 상태에서 한 모금의 물을 얻기 위해서 입을 벌리고 헐떡이는 것처럼 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갈급 함으로 몸부림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그 말씀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이런 마음이 시인에게는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신앙의 가장 커다란 대적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진리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것보다 무기력과 무관심입니다. 도무지 신앙에 대해서 진지해지려고 하지 않고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아무려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생각하는 우리의 신앙의 태도가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신앙적 위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날 정말 우리가 이런 헐떡임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하고 주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새롭게 빚어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고통을 호소하는 영혼의 진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변화되어도 그 변화가 영혼을 깨트리면서 흘러나오는 진정한 변화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혼의 변화를 받는 것 같아도 근본적으로 그것은 하나의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현상에 대한 태도의 변화이지 근본적으로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고 내적인 갱신을 통해서 전에 사랑하던 것들은 버리고 전에 사랑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열렬히 사랑하게 되는 진실 되고 참된 변화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누룩과 같이 넓게 퍼져서 이제는 신앙의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를 받은 다음에 눈을 뜨고 보니까 변화 받기 전의 저처럼 살아가는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때는 그 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만난 주님을 말하고 예전의 나에게 무엇이 문제였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새롭게 해주고 싶어하시는 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아듣도록 사람들에게 말하기만 하면 그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변화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은혜와 옛날의 내 신앙생활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찬찬히 설명을 하면 할수록 나를 측은하게 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 함, 그리고 그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이 변화시키셔서 고치실 때에 나타나는 그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심령의 변화, 이런 것들에 대한 경험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멈춰버리니까 누군가가 그렇게 깊이 변화되면 그것을 굉장히 위험스럽게 생각하는 상황으로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성경을 보면 성경 속에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거의 유사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이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기에 갈급 한 것처럼 헐떡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그 현실을 보면서 시인은 눈물을 시냇물처럼 쏟으며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죄악 된 삶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통증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이 시인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결국 시인의 내면의 세계가 오늘날 무감각한 우리 그리스도인과는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나는 내면의 세계를 지녔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좀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성화의 삶에 있어서나 주님이 누구신지를 배워 가는 지식의 진보에 있어서나 기도생활에 있어서나 주님을 위해서 섬기며 살아가는 충성된 헌신 생활에 있어서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중간쯤 가다가 그만 두는 것이 문제입니다. 풍성한 사람, 넘치는 은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선명한 진리의 말씀이 가져다주는 영혼의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기는 했고 그것에 대해서 마음 뛰기는 했지만 그것을 실제로 누리면서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지 아니하면 그것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과 나을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인은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헐떡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장 한 모금의 물이라도 넣어주지 않으면 뚫어질 것처럼 되어버린 이 시인의 견딜 수 없는 갈급 함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의 무지무각한 우리들의 신앙생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거의 없는 채 그렇게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영적 삶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과 한번 비교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고 그 말씀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고난을 당할 때는 말씀으로 주님이 위로하시고 시련 속에서 쓰라림만으로 통곡할 때에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아픈 가슴을 쓸어 내리시며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역경에 처할 때는 그 속에서 주의 말씀과 약속을 붙들므로 역경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되고 혼자 있어 외로운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친구들이 나를 버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떠나도 마지막까지 내 곁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놀라운 사랑을 말씀을 통해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가깝게 느끼는 때가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받으면 가깝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주님을 깊이 느끼고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셔서 위로가 필요할 때에 위로를, 능력이 필요할 때에 힘을, 지혜가 필요할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그리고 우리들이 너무 무기력할 때에 주님이 감당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는 것을 너무나 친밀하게 경험하는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운 영향력 아래 있을 때입니다.
신기한 것은 고민고민 하다가 교회에 나가니 하필이면 그날 내 자신의 문제를 말씀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쓰러질 것 같은 무거운 가슴을 안고 성경을 폈는데 하필이면 하나님이 나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시시 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 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사실 주만 보며 산다는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산다는 고백과 동의어입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을 보여주셨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외로울 때에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어떻게 우리들이 고난받을 때에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에 어떻게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셨습니까? 그런 위로가 무엇을 통해서였습니까? 우리를 책망하실 때에도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때에도 우리를 위로하실 때에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때에도 언제나 그 도구는 우리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이 내 영혼의 만족을 줄 때에 우리도 주님께 만족을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들이 고갈되고 우리의 심령이 메말랐을 때 우리는 그 화려한 신앙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인생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아니하고는 우리가 예전에 아무리 많이 은혜를 받고 예전에 우리들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다고 할지라도 그 과거가 오늘 주님의 뜻대로 살도록 저절로 우리를 붙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이며 나의 나된 것이 주님의 은혜이며 오늘 한 순간도 나를 붙드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시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제 주위에는 정말 겸비하고 겸손한 인격을 갖춘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의 공통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자신도 그 사람을 쉽게 고치시기 어렵지만 말씀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책망하고 나무라는 사람이 없어도 언제나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고치십니다. 성질이 급하고 과격한 사람들은 말씀 앞에 서고 영향을 받을 때마다 자기 속에 있는 이 패역한 격정, 패역한 인간의 나쁜 기질들을 직면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 큰사랑을 입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살수가 있을까 하는 자괴함을 느끼게 만들어서 자기 참회로 들어가게 만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일일이 사람들의 책망을 받으면서 고쳐질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그렇게 해주겠습니까?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다뤄가서 그 말씀을 통해서 영향을 받아서 고쳐질 수 있는 관계를 하나님과 갖지 아니하면 우리들이 결코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살아있습니다. 말씀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사람이 그를 고치려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고칩니다. 그래서 원수 된 것을 풀게도 하시고 고난을 이길 담대함을 갖게도 하시고 어둠 속에서 빛을 보게 하셔서 모두 타협하는 시대에 진리를 따라 살도록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얻기 위해서 입을 벌리고 헐떡거리며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였습니다. ‘주님이 내게 해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최고의 은혜,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최상의 대우는 헐떡거리는 내 영혼에 주님의 말씀을 베푸셔서 그 진리를 통해 그 주님의 인격을 느끼게 하시고 그 진리를 통해서 내 영혼의 만족을 주시는 것, 그 이상으로 내 영혼에 행복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그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이 이 시인의 고백에 녹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물질이나 명예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거품과도 같지만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깊이 변화시키시고 그래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새겨놓은,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주님이 우리에게서 떠나가신 후에도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남아서 주님이 우리를 일깨우시는 한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증언할 때에 흐느끼며 눈물을 닦는 성도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경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고치시되 금이나 은으로 고치지 않으시고 몽둥이와 사망의 줄로 우리를 이끌지 아니하시고 사랑의 말씀으로 은혜의 진리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감화시키셔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이고 주님이 아파하시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이 모든 일을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지금 보기에 아무리 일천하고 그리고 한 사람이 그의 삶 속에서 아무리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만약에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기만 하면 그는 반드시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할 거룩하고 순결한 성도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완고함은 정말 부끄러운 것이며 그 완고함은 그가 드리는 많은 헌신을 의미 없게 만드는 놀라운 역사 하는 도구가 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의 헌신, 중심으로 하나님께 부복하지 않는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 이런 것들이 주님에게는 받으실만한 것이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받기를 사모해야 하고 주님의 말씀의 손으로 우리를 빚어서 우리를 새사람 만들어서 우리를 고쳐서 주님의 자녀로 삼으신 이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기쁨이 느껴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이 기뻐하고 우리를 통해 받고 싶어하시는 가장 큰 제물이 무엇이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아마 일주일 동안 마음에 기도하면서 고민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다음 주에 얼마나 헌신해야 되나’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는 하지 말고, 그러나 마음에 주님이 감동시키는 대로 넘치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변화입니다.
저는 사람들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는 신자들을 보면서 이러한 필요성을 더 많이 느낍니다. 여러분, 교회가 은혜로워서 그 교회에 몸담은 성도들은 하나님 보고 나온 것이 아니라 은혜 보고 나온 것입니다. 은혜가 식어지면 교회를 떠나겠지요. 목사를 보고 온 사람은 목사가 변하면 떠나겠지요. 시설이 좋아서 교회를 찾은 사람들은 환경이 어려워지면 교회를 떠나겠지요. 그렇지만 주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그 말씀에 영향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과 모든 환경은 주님의 은혜를 전해주는 도구일 뿐 내 진정한 사랑은 우리 하나님뿐이시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과 환경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신앙의 가치들 때문에 은을 얻기 위해서는 헐떡거리지 않던 사람이 금을 얻기 위해서는 입을 벌리지 않던 사람이 자신의 건강과 생명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헐떡거리지 않던 사람이, 오늘 주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목마른 사슴처럼 입을 벌리고 헐떡거리며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되어야 할 신앙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정말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서 주님의 말씀에 의해 지배받으며 날마다 우리 자신이 고쳐져서 좀더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좀더 순전해지게 날마다 그 말씀에 영향을 받으며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변화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에게 불쾌한 물건이 되어버린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진노하시는 하나님과의 화해가 필요한 인간 사이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에 있었던 간절한 소원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고 어둠에 있던 우리들이 진리의 빛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던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은혜 아래서 살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끝까지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전히 어둠 가운데에서 주의 진리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에 현저히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어떻게 그분이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오셨는지를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우리 위해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며 단지 구원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온 몸으로 온 영혼으로 주님의 주님 되심과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우리의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찬송하며 산 이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본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헐떡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한번의 주님과의 만남, 말씀을 통한 한번의 은혜와 자신의 은과 금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뒤에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그것은 예전에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그 긍휼을 내게로 돌이켜 베풀어달라고 하는 간구였습니다. 그러니까 시냇물을 찾는 사슴처럼 헐떡이며 주의 말씀의 은혜를 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헐떡거리면 주님께 그 말씀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내가 헐떡거리며 주님의 말씀을 받고 그 진리의 은혜 아래 살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주님, 주님이 만일 이러한 저의 소원에 응답해 주신다면 그것은 나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의 은혜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과 신앙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 더욱이 그것이 마치 자기의 전리품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우리를 결코 그렇게 만들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자신에게 긍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지성으로 자기의 논리로 주의 말씀을 깨우치면 그 말씀은 객관적으로 자신의 성실한 노력에 공력 당해서 자기 안에 들어오고 자기의 것이 되어서 자신의 인생을 윤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얻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헐떡거린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 헐떡거림을 채우시는 분은 전적으로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짐승과 같은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 때문에 주님이 베풀어주신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주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우리보다 신앙이 일천한 사람들을 하대하고 그들을 경멸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겸손합니다. “이것을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정직하게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주님의 것이었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의 판단으로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그렇게 수시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뜨게 하시고 진리를 보게 하셨을까요? 오늘 말하기를 ‘주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의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말씀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새 삶을 살게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 인격적인 특징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말씀의 은혜 가운데 여러분들이 살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이 꿀 송이처럼 들릴 것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살라고 명령하신 그 계명들이 여러분들에게 전달되는 커다란 꽃다발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나같이 부족하고 아무 보잘것없는 인간에게 이렇게 살라고 지시해주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운 주님이신가. 당신의 자녀가 차마 짐승처럼 이 세상을 사는 것을 보실 수가 없어서 지키며 살 말씀들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결심을 베풀어주셨으니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시인이 바로 그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제나 오늘이나 주님은 당신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열어서 그 법의 기이한 것들을 깨닫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은 그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며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시련의 빈들을 홀로 지나면서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광야를 지나면서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합니다. 주님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 아버지의 그 큰사랑을 한 몸으로 느끼고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 영혼을 어루만지십니다.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화의 노력을 멈추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처음 주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주님이 물으셨을 때 ‘Road, I want to be a Christian in a my heart’ ‘주여 내가 신자 되기 원합니다. 제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린아이처럼 고백했던 그 초심으로 돌아가십시오. 내게 많은 지식 없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명예나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는 영광이 없어도, 그리고 주님의 교회가 꼭 필요할 때는 바칠 것이 없어서 마음 아파할 정도로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괜찮습니다' 우리 주님에게 여러분 보다 더 귀한 선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회가 너무 물질을 필요로 하니까 어느 지체가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너무나 교회가 필요한 때 제가 도움이 안 되어서 너무 죄송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그대 자신보다 하나님 앞에 고귀한 선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헌금 못하는 것만큼 배나 더, 많은 헌금을 드린 사람보다 배나 더 진실한 신자가 되십시오” 제가 위로했습니다.
시인이 헐떡거리며 주의 말씀을 원했습니다. 금을 위해섭니까, 은을 위해섭니까? 출세를 위해섭니까, 자랑을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시인은 영적인 곤궁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바라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주님이 내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영혼을 새롭게 하셨던 역사들을 새롭게 생각하면서 주님에게 긍휼을 호소했습니다. “오셔서 나를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주의 말씀에 헐떡이는 내 영혼에 만족을 주시고, 그래서 일평생 사는 동안에 왕이신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시인이 간절히 주님께 그 은혜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5.고난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말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확실히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삶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신앙이 나갈 때에도 삶과 관련이 있고 신앙이 들어올 때도 자신의 삶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할 때 신앙과 삶이 분리되면 안 된다고 하는데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생활이라면 분리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사실 실제적으로 교회의 출석과 삶이 분리된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신앙과 삶이 분리될 수는 거의 없습니다. 신앙이 참되면 반드시 삶도 진실해져갑니다. 신앙이 열렬하면 삶도 열렬해집니다. 신앙이 순결하면 삶 속에서도 그가 불결한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사람됨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과 같기 때문에 사람됨이 새로워지면 그의 삶도 새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오늘 이 시인이 119편에서 진술해 나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경험들, 그것들을 통해서 번뜩이듯이 빛이 비추는 그의 놀라운 영성들은 철저히 그 모든 신앙의 토대를 삶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지금 119편 전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방대한 경험, 그리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은 말할 수 없는 행복과 기쁨 같은 것들을 말하고 있는데 그런 모든 은혜들을 그는 진공상태에서, 혹은 높은 수도원에서 경험한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가던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거나 혹은 신앙에 대해서 충고를 해주거나 할 때에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치열한 삶 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목표와 똑같은 목표를 가지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어하는 목표와 똑같은 목표를 가지고 인생 전체를 걸고 그 삶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일 경우에는 누가 가르쳐주고 충고를 해주어도 실제적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고 단지 가르쳐주면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가 아닌데 가슴에 와 닿지 않고 그리고 실제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시편 119편은 전혀 실제적인 시편이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성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그 고난과 하나님의 말씀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는 좀 다르게 나옵니다.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두 문장이 아니라 한 문장으로 나옵니다. 먼저 이제 하나씩 짚어보면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이 “그것이 내게 좋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토블리 키 그리고 쭉 나오는데 키 이하에 사실이 내게는 좋습니다 그래서 It is good to me that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나에게 참 좋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좋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유익”이라고 하는 그 말이 “토브”인데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의 그 토브입니다. 그러니까 언젠가도 설명 드린 기억이 나는데 이 “토브” “좋다” 라고 하는 단어는 아름답다. 행복하다, 기쁘다 그런 개념, beautiful, 그런 것과 좀 다르고 하나님 앞에서 조화와 균정을 지닌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한 어떤 선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시인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을 포함해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선, 예를 들자면 시편 23편에 나오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주는 선하신 주님” 하면서 쭉 나온 게 거의 다 모두 “토브”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 토브, 선하다 특별히 이것이 하나님과 관련지어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이런 것과 관련지어서 이야기할 때 이 토브는 “좋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받아들인 느낌에서 좋다, 행복하다, 기쁘다, 아니면 위로가 된다. 그런 개념이 아니라 명백한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었을 때 조화와 균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최선의 아름다움을 가진 것, 최선의 상태, 그것을 가르쳐서 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행하였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한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라고 하는 그런 기도 같은 그런 것들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하다라고 느껴지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판단하는 것 가운데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거나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는 선하다, 그는 선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선의 사람이다 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기준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 앞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선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신앙적 선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염두에 둔 신앙적 선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시인이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잘못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눈에 좋아하는 바대로 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심지어는 대적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불순종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습니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모두 누구의 판단이었습니까? 하와의 판단이었고 사람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선한 것으로 여겼고 그것을 따랐을 때 범죄 하게 되었고 불순종하게 되었고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시인이 그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는 좋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선한 것이 하나님의 기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선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선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선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막 연단을 받는데 그것이 어떻게 선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람 만드시기 위해서 막 단련시키시고 말씀으로 깨트리실 때, 처참할 정도로 고통을 당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선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선입니다. 왜 신앙의 눈으로 보고 신앙의 관점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니까. 그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에게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고난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상황의 문제라기보다는 자기가 누구인가. 그러니까 이 시인도 예전에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고난이 나에게는 선입니다. 누가 감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고난이 선이면 한번 줄까? 그렇게 이야기할 때 나는 그럼 당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대게 고난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당하고 있는 중에는 그런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대게 하지. 자기는 막 코에서 단내가 나는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합니다. 폭풍우 흑암 속에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불길과 같은 연단 속에서 나를 거쳐가시는 하나님, 그래서 내게 선입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어째든 바뀌어진 시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선합니다, 이렇게 바뀌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그리스도인 중에 한 부류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자기는 죽어도 안 바뀌려고 하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이용해서 자기의 주변만 모두 바꾸려고 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들이 가장 가련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살면서 시련을 만날 때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련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누가 시련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게 이렇게 전해져 오는 때가 자주 있습니다.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아플까!
그런 시련 속에서 시련을 당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그 시련 속에서 자기가 바뀌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우리는 흔히 고난 속에서 자기가 바뀌는 사람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극소수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새롭게 빚어져서 그 고난에서 뛰쳐나온 다음에 그 고난에 미학,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주의 사람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가 하면 그냥 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고생이라고 합니다. 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면 고난을 당하면 사람이 망가집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순탄한 인생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성품이 원만하지, 역경과 시련, 파도 막 이런 것들을 거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사람들이 거칩니다. 단 하나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전자의 사람들과는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신 속에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소수입니다. 그래서 고생을 많이 하고 시련을 많이 당하고 지지리 고난만 받았을 뿐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성품 자체가 망가집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무슨 고난 자체에 사람을 바꾸어놓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고난이 망가트리고 그리고 그 고난은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새롭게 고난을 신앙적인 도약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은 많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시인은 변화된 것입니다. 변화되니까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내게는 선한 것입니다. 뭐가, 고난 당한 것이 내게는 선한 것입니다. 예전에도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가 있었을 텐데 변화되고 나니까 고난 당한 것이 내게는 선합니다. 그런 판단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좋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말 성경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리고 딱 끊어지고 그 다음에 “이로 인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선 하나 하나 짚어서 말하자면 ‘율례’라고 하는 것은 지난번에 살펴본 ‘미슈파트’가 아니라 같이 율례가 되는데 이것은 ‘호끄’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호끄는 미슈파트가 하나님의 판단이라면 이 호끄는 규례, 규칙, 법도, 하나님의 원칙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삶의 규칙들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규범, 규칙, 법도 이런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래 이것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의 법도를 배우려고 고난 당한 것이 내게는 좋습니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뒤에서 한꺼번에 붙어서 옵니다. 뭐 이렇게 번역을 해도 큰 문제는 없는데 재미있는 것은 고난 당한 것은 완결형이고, 그 다음에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완결형으로 되어 있는데 완결형이 아니라 미 완결형입니다. 그래서 고난 당한 것은 끝났고 배우는 것은 계속 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번역을 하자면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선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문장은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그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나이다’ 미 완결형 내지는 진행형 동사입니다.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끝났는데도 교훈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랬는데 여기에서 고난은 이렇게 괴로움인데 그러니까 초점 자체가 이렇게 뭔가 커다란 시련을 통해서 자기를 막 억누르는 그런 어떤 공격적인 그런 것보다는 ‘짜라르’라는 단어와 여기에 쓰여진 것과 다른데 그 앞에 단어가 만약에 관점 자체가 밖에서 막 뭔가 퍼부어서 당하는 그런 것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안쪽에서 바라본 것이라고 할까. 성이 공격당할 때 성밖에서 막 공략을 당하는 성을 보는 것이 ‘짜라르’라는 단어이면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안쪽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내적인 괴로움과 고통, 그런 것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할 때, 그 엄밀한 의미가 이렇게 상당히 내면의 고통들을 지시하는 말입니다. 동사 자체가,
그럼 예를 들자면 그저 이런 것이 어떨까 싶은데 ‘마음 고생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론 그 두 개가 분리가 되는 게 아닌데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이 속에서 일어나는 견디기 힘든 괴로움,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내적인 강렬한 고통과 압박, 이런 것을 경험한 것이 내게는 유익이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내가 주의 율례를, 주의 법도를, 주의 삶의 규칙을, 규범을, 모범을 그런 것들을 내가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견디기 힘들게 괴로움을 당했는데 그 근원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들이 가능성 있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시인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고 당하게 된 그런 고통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뿌려놓은 씨를 자기가 거두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원리에 의해서 당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째든 그것은 하나님의 한 징벌에 한 수단으로 자기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그 범죄에 의해서 많은 대가들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 대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것이 보상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명백하게 그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예고하셨고 그리고 그 징계는 예고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지은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형벌을 받는 가운데 그 속에서 경험한 그 견디기 힘든 마음고생과 고통, 외부적인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 속에 투영되었던 그 견디기 힘든 고통과 아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가능성은 비록 시인이 잘못하지 않았지만 시인이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는 이외에도 시인은 고난을 많이 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시인은 주님을 만나서 크게 은혜를 받고 기름 부음을 받기 전까지는 특별한 원수들에게 에워싸여서 산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은혜, 기름 부음, 그리고 그를 왕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받자온 후에 그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데도 정치적으로 혹은 다른 이유로 자신과 맞서는 수많은 대적들과 에워싸여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 시인은 견디기 힘든 많은 마음고생들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형벌을 인해서 당한 고생이 있고, 죄에 대한 형벌로서 당한 고생이 있고, 죄는 없는데도 시인이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살기 위해서 당한 고생이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이 시인의 인생에 다른 영향을 끼쳤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 왜 그렇게 뻔뻔한 표정입니까?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지금 고난 당한 것에 대해서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시는 방법으로 당하게 된 고난이고, 또 하나는 죄와는 상관이 없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경건하게 인생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가운데 당하는 고난이 있을 것인데 이 두 가지가 고난이었는데 종류가 다른 고난이 시인의 삶과 신앙에 다른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신기하잖아요. 그게 신기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시험을 이기는 길’ 시리즈가 있는데 그것을 여러분들이 꼭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들으라고 그럴 때, 그때가 좋은 때입니다. 좀 들으십시오. 그것 집에다 꽂아놓기만 하면 저절로 나오는데 차 속에다, 나야 뭐 내 설교 듣고 돌아다니는 게 좀 그렇겠지만 전 제 것이 안 들어집니다. 초창기에는 좀 들었는데 이제는 정말 안 들어집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쭉 듣고 나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진짜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안 듣습니다. 그런데 제가 녹취된 것은 가끔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들을 수 있습니다. 책 그것 뭐 쓸데없는 테이프 다 버리고 갖다가 꽂아놓으면 차 타고 다니면서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남편 차에다 그것을 몰래 넣어주어서 그 테이프 듣고 그리고 변화 받고 우리 교회 등록한 남편들 많이 있습니다. 한번 손들어보라고 그럴까요?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아내가 대중 가요 테이프 빼고 목자와 양, 이런 것 시편 23편 집어넣으면 출근하면서 가다가 노래나 하나 들으려고 켰는데 이상한 사람 목소리가 나오는데 조금 듣다가 예화도 나오고 하니까 재미있으니까 계속 듣다가 그러다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 18개 짜리 들으십시오. 꼭 들으십시오. 그래서 테이프를 살 돈이 없으면 다른 테이프라도 팔아서라도 들으십시오.
그런데 거기서도 제가 이야기한 게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할 때 시험을 이야기하면서 창조적인 시험, 파괴적인 시험 그리고 이야기하는데 그러니까 다 쓸데없는 구분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어떤 시험이든지 간에 시험이 오면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면서 사는가에 따라서 그 시험이 자신의 신앙에 놀라운 감화와 기회가 되어서 이 시인처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시험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잘못되면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 처음에는 객관적인 시험이었는데 나중에는 결국에는 주관적인 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기도문 가르쳐주실 때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라고 말하신 다음에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시험에 들면 대게 악에 빠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주 굉장히 논리적인 사고를 가지신 분이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아! 그럼 하나님에게 징벌도 받을만하네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징벌을 통해서 고난을 당하고 그것을 통해서 시인이 이렇게 성결해지게 되었다면 그러면 오늘 내가 성화 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고난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고 고난을 받지 못한 것은 내게 징벌이 없기 때문이고 징벌을 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너무 착하게 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악한 논리가 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왜 아닌가. 그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얻어맞은 사람이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얻어맞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매도 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때려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데 말로 할 때 듣는 성도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습니까?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사랑입니다. 말로 하면 듣는데, 그러니까 사무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더 낫습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이 혼내시면 펑펑 울면서 아빠 잘못했어 그리고 그 품으로 들어가서 통곡하고 예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갈 것 같지요? 은혜 받은 여러분도 안 그렇잖아요.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고난의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보십시오. 내가 타락했는데 하나님이 혼내셔서 된통 얻어맞아서 내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간증거리가 되지만 그냥 주어 터지다가 죽었는데 그게 무슨 간증거리가 되겠습니까? 그 간증거리가 있는 사람들만 간증하고 다니니까 ‘하나님 앞에 혼나면 저렇게 다 돌아오는가 보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지 간증할 것이 없어서 얻어맞고 생고생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더 많습니다.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가 훨씬 더 많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간증할 게 없습니다. ‘바르게 안 살면 주님이 혼내시더라. 그래서 나처럼 이렇게 되더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들 중에 소수의 사람들이 그 어두운 고난의 골짜기에서 벗어나서 이 시인처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그렇게 순진하고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선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시인이 뭔가 아주 하나님의 그 관점 앞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 앞에서 옳다고 판단될 수 있는 그런 상태에 자기 자신이 서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인이 어떻게 해서 고난을 통해서 큰 유익을 받게 되었는가, 오늘 다 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만 하고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우선 고난을 통해서 시인이 경험한 것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아까 꺼냈던 이야기를 먼저 마무리를 해야지 될 것 같습니다. 두 가지 고난에 가능성 하나는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 당하는 형벌, 하나는 의롭게 살면서도 당하는 고난이 있는데 그 고난이 미치는 영향은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결국은 어떻게 고난이 왔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그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삶을 바꾸어놓는 것입니다.
자,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다가 미끄러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다가 미끄러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심도 없고 무슨 욕심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냥 단지 하나님의 사랑이 감사해서 주님의 일을 하려고 그 일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이고 그래서 자신의 물질과 건강, 심지어는 자신의 시간까지 다 드리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고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시는 고난이고 괴로움입니다.
아까 나는 그 인덕원 예배당 동영상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는데 해설 가운데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이어서 우리가 그곳으로 가는데 그래도 순탄한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해설자의 설명이 무엇인가 하면 그런데 그것이 감사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뭔가 순탄치 않은 역경을 만나게 하심으로서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한 마음이 되는 중요한 기회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그런 역경이나 혹은 어려움을 통해서 강화될 수 있었다는 그런 요지가 아닙니까?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이 어떤 사심도 없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런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고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자기가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랬을 경우에는 그 고난이 분명히 자기가 잘못해서 받은 고난이 아닌데도 자신의 영혼에 커다란 손해를 입히면서 그 고난이 자신의 신앙을 깊이 상처내면서 그 고난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일하는 것만큼 신앙생활도 열심히 해야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시험에 듭니다. 그렇게 됩니다.
또 반대로 자기가 잘못해서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혼내시는 가운데 징벌을 당하는데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리는 사람들은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아갑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어떠한가를 깨닫습니다. 징벌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엄위를 느꼈지만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 그래서 고통을 싸잡아 안으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고난 중에 큰 위로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인데 그 고난을 통해서 정금과 같이 자신이 변화되는 그런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이제 와서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따지고 책임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자기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자기의 죄 때문에 당하고 있는 고난인데도 자기가 의로운 하나의 의인으로서의 고난을 당한다고 착각하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참회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고난이 어떻게 해서 오게 된 것이고 자기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당하게 되는 이 고난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기 때문에 오게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 이미 다 일어난 일인데 이제 와서 그 고난의 출처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불순종했습니다. 안 그랬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범죄 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니까 지금 와서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잘해야지 됩니다. 지금이라도 잘하라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이제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고 그리고 자기가 범죄를 인해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으니까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붙들고 그리고 지금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이 징벌 속에서의 고난을 그것이 내게 선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예전과는 달리 변화된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이것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그런 고난을 통해서 자기가 ‘이것이 선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는데 고난을 통해서 고난의 어떤 점들을 통해서 그런 고백들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난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뒤로는 항상 인간은 중심에 바로 서지 못하는 특성을 가진 연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보면 그렇습니다. 너무 교만해서 거의 과대망상증에 빠져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열등감에 빠져서 일상적인 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얼굴이 못 생겼는데도 자기가 공주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도 유전입니다. 그것은 백신도 없습니다. 백신 예방약도 없습니다. 그런데 또 반대로 남들이 볼 때 괜찮은데 자기는 못났다고 시녀 병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좌우로 치우쳐서 살아갑니다. 심한 열등감은 교만에 또 다른 표현입니다. 자기를 향해서 갖는 기대가 스스로 너무 과대하니까 그런 열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과대한 기대를 갖지 마십시오. 그저 평범하게 살고, 물론 여러분까지 다 싸잡아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미안한데 우리 같은 사람들, 나는 거기 안 들어간다면 할 수 없습니다. 빼고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평범하게 이렇게 살면서 가끔 몇 십 년에 한번씩 천재가 나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저 즐거워하다가 죽는 것이지, 뭐 그렇게 그저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지 우리가 모두 영화배우가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이렇게 보면 그저 좋다 이런 것이지 뭐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텔레비전 속으로 뛰어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누가 써주겠습니까? 텔레비전에 네가 나왔으면 꺼버리겠네.
그런데 고난을 통해서 자기의 연약함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 보면 오늘날 흔히 성경공부를 통해서 성경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우쭐대면서 사람들이 모르면 한 수 가르쳐주는 것과 같은 어떤 그 고자세 적인 어떤 뭔가 베푸는 자로서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고자세 같은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시종일관 시편 119편에 나오는 시인은 엎드려져 있는 상태에서 이 시를 낭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뭘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지금 설교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을 잘 나가게 하나님이 놔두셨다면 절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생활만으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감사해야한다고 믿던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위기를 만났습니다. 비로소 뭘 깨닫습니까?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나면서 자신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손들고 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그 사람은 사업에 실패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사업도 승승장구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귀찮아. 그럴 정도로 사업도 잘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게 인간성이 나빠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인간성이 좋아서 친구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돈을 너무 많이 벌면 부부 사이가 별로 안 좋은데 부부 사이도 너무 좋습니다. 오직 하나 안 고쳐지는 자식, 그 애가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가시입니다. 무엇이라도 안 됩니다. 그런 속에서 막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승승장구하다가 어느 순간에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식을 보면서 가슴이 숯처럼 탑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뭘 깨닫는가 하면 자기가 미친 듯이 돈벌어서 자식 좋은 옷 사주고, 좋은 컴퓨터 사주고 필요한 것 다 사주고 비싼 과외 시켰지만 하나님이 이 아이를 고치시기 전에는 희망이 없다라고 하는 그런 확신을 가집니다. 그때 누구를 의지하는가 하면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만듭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만듭니다. 그래서 인간이 다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오, ‘훅’ 바람에 날리는 찌끼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늘 깨트려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참회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참회의 체험 한복판에 있는 결정적인 경험은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운 삶이 정말 티끌과 같다는 것, 소중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비할 데 없는 티끌과 같다는 것,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그래서 더 주님을 닮아가며 더 주님의 거룩하게 하신 은혜를 의지하며 살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그런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인생을 살면서 그 고난 속에서 자기 자신을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고난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런 고백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고난은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입니다. 다만 그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얻지 못할 때는 우리들이 그렇게 고백할 수 없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무엇인가 신앙에 깊이 유익한 것을 얻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입니다.
요즘은 거의 없어진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칼을 갈러 다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칼 가세요’ 그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칼 갈으샤’ 그리고 다녔습니다. 꼭 라틴어같이, 목소리도 아주 구성집니다. 짝 울려 퍼지면 이제 칼, 가위 그런 것을 가지고 옵니다. 별로 돈도 많이 안 받은 걸로 기억됩니다. 그럼 처마 밑에서 구두 통 같은 것을 놓고 그 다음에 그라운드를 놓고 먼저, 그것은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막 돌리면서 싹 그렇게 돌면 불똥이 튑니다. 애들이 거기에 새카맣게 달라붙으면 그 아저씨는 가라고 야단치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갈고 나면 한동안 두부를 썰어도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끊어집니다. 그런 것을 갖다가 그 칼 갈으샤 그 양반이 돌리면 자르륵 하면서 깎여나갑니다. 그러면서 서슬이 퍼런 날이 됩니다. 그것을 또 마지막 다시 한번 정돈한다고 물을 뿌려가면서 굵은 숫돌에 한번, 고운 숫돌에 한번 갈고 마지막에 그 아저씨 항상 하는 게 닦아서 햇볕에다 한번 비쳐봅니다. 무슨 사무라이처럼 비쳐봅니다. 반짝입니다. 탁 대기만 하면 착착 썰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숫돌과 같은 고난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고 그리고 성공할 때에도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승리할 때도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리고 끊임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긍휼히 아니면 자신이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사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서만 자기의 자녀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에게 부종 된 삶을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도 말이지 보십시오. 큰 고난이 큰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큰 고난이 큰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영적 성숙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어떤 것인가 하면 고난의 크기는 작은데 그 속에서 큰 교훈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은 큰 고난을 당했는데 아주 적은 교훈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있는 교훈까지 다 까먹는 것입니다. 왜 마음이 닫혀서. 아니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의 신앙이 더 온전해지려면 하나님이 계속 해서 여러분들을 갖다가 고난의 불구덩이 속에 계속 굴리셔야지 되네요. 사업도 한번 망한 것 가지고 안 되고 한 삼 년마다 한번씩 털어먹고 심하면 유치장에도 들어가고 그렇게 해야되네요. 유치장에서 성자가 나옵니다. 간증집도 나오고, 전도하는 강사도 나오고 그렇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야지 되네요. 그래요 성화의 삶을 깊이 살아갈수록 살아가는데도 하나님이 계속 해서 그런 식으로밖에 안 다루신다고 할 것 같으면 굳이 성화 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잘못 살다가 얻어맞으면 또 깨닫고 그리고 더 마음이 부서지고 그렇게 살다가 또 수평적으로 계속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그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영적으로 어렸을 때는 큰 고난을 통해서도 조금밖에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성숙하면 작은 고난을 통해서도 많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적으로 어렸을 때는 ‘고난’ 그러면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가 집안을 다 박살을 내고 엄마가 막 잡혀가고 언니 오빠들이 가출을 하고 풍비 박산 되면 그게 고난이라고 생각했지만 신앙이 많이 크고 자라고 나면 이제 그 고난의 이유들이 많이 이동을 합니다. 자기가 불순종해서 당하는 고난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애를 쓸 때 당하게 되는 고난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사업이 망하고 인생의 위기가 와서 당하는 고난이 아프지만 은혜 충만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는 왜 이만큼 밖에 못 사니’ 그럴 때 느끼는 깊은 아픔 그것이 그것보다 덜 하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삶 속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파헤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느끼는 고통의 강도는 예전에 신앙이 어렸을 때 회사에서 잘리고 사업이 망하고 자식들이 속을 썩여서 당하는 그 마음 못지 않게 하나님 앞에 괴로운 것입니다.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의 자녀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똑같은 원칙이 죄의 문제에도 적용이 됩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덜컥 죄를 짓고 펑! 터져서 생난리가 나서야 비로소 이 죄가 대게 무섭네. 그리고 깨닫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영적으로 깊이 성숙하고 나면 작은 죄를 탁! 보면 그 죄가 어떻게 성장할 것이며 어떻게 자기를 사망으로 이끌어가서 마지막에 파멸에 결과가 어떠할 지에 대해서 압니까, 모릅니까?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피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성냥을 놓고 탁! 그어서 불을 붙여보고 불이 나서 집이 타고 사람이 타는 것을 보면서 아! 대게 무섭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그 성냥 곽을 보면서 그 성냥 곽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거의 모든 상상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그것을 하겠습니까?
참 우습지, 옛날에 종 암동에서 있을 때 일인데 주유소에서 있었던 사람들이 불을 냈습니다. 불을 낸 이유가 무엇인가 했더니 라이터를 키는데 기름이 떨어져서 그 기름을 넣으려고 기름 창고에 들어갔는데 너무 어두워서 성냥불을 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순간에 이 모든 지식들이 스톱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펑! 하고 불이 났습니다. 담배 한대 피려다가 그냥 다 화재가 일어나는 참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잠깐 멈춘 것입니다. 그게 말하자면 영적인 수준의 차이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제일 먼저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사업을 다시 일으켜주시고 뭐 복직시켜주시면 십일조 잘할게요 그런 약속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는 너이고 나는 하나님이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 너는 단지 한 인간일 뿐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니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그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피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피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그래서 옛날에 선교사들이 와서 테니스를 치는데 그러니까 선교사에게 은혜 받은 조선시대 양반이 가서 선교사님 지금 뭐하십니까? 땀을 뻘뻘 흘리면서 테니스 하는 중입니다. 어이구, 그렇게 힘든 것들은 아랫것들에게 시키시지, 고난이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서 테니스 치면서 땀을 흐리는 것 그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떨어지면 발목이 부러질지 모르는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기와 장을 나르는 것은 고난입니다.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은 결국은 피하다, 피하다 피할 수 없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도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사람입니다. 피하다 피할 수 없어서 결국은 당할 수밖에 없는 그 괴로움,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정말 연약한 존재이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됨으로서 이제 그의 시선이 이 세상에서 시선을 돌려서 자신의 삶 전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16.고난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말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지난주에는 제가 교회에 없었고 그 지난주에 ‘고난 중에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첫 시간을 우선 했는데 그때 왜 그러면 성도가 고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히 배우게 될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그 첫 번째 이유는 성도가 고난 중에 자기의 연약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연약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하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상세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장부책이 정확합니까? 예, 정확하지요?
그 지지난 주에는 좀 더 많이 설교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좀 그랬습니다만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은혜가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커다란 장벽 가운데 하나가 인간이 자기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앙이 좋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하나님께서 강하게 시련을 주셔서 그들의 마음을 낮추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자기의 연약함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예전에 모시고 있던 목사님께서 당신과 함께 사역하시는 부교역자들을 모아놓고그들의 부족함을 지적하시면 상처를 당할까봐 예전에 은혜 받고 당신 자신이 주일 학교를 섬기실 때 이야기를 하시는데 아이들이 참회 가운데 주님을 영접하고 신앙 안에서 잘 자라가며 주일 학교가 부흥을 하면서 급기야는 7-800명 모이는 성장을 하니까 여러 곳의 교회에서 초빙을 받아 주일학교 성장을 이야기하면 그렇게 부흥되어지고 했는데 어느 날부터 학생 수가 줄기 시작하면서 400명까지 내려가게 되자 너무 마음이 아파 하나님 앞에 금식하면서 자신이 사역한 모습을 돌아보며 부끄러운 자신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자신을 깨닫게 해주셨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손을 떼겠으니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라고 하시는 그때 비로소 당신이 하나님 앞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회개하며 간절히 매 달리면서 한가지 깨달은 것은 재능도 늘어났고 경험도 많이 쌓였고 교육에 대한 노하우도 많이 개발되었는데 한가지 사라진 것이 있으니 그것은 처음 영혼을 맡았을 때 지극히 떨리던 연약한 마음, 하나님이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사역을 승리할 수 없다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자기가 깨트려지고 나니까 다시 교회 학교의 변화가 왔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나님이 점점 우리를 정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든 간에,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하나님 앞에 거역하는 그런 죄들을 거두기만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만 신앙이 깊어지고 나면 주님을 섬기기에 모자람이 없이 온전히 섬기기를 원하고, 더 신앙이 성숙하고 나면 우리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이외에는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사랑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만 우리 자신이 독점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그 전도사님이 무슨 주일 학교 안하고 놀러 다녔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마음까지도 다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격언 같은 것, 속담 같은 것 하나 만들겠으니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런 것입니다. 마음이 강한 사람의 온전함보다는 오히려 온전하지 못한 사람의 깨트려진 마음을 하나님이 훨씬 기뻐하십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보기에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보기에 의롭게 살면서 마음이 강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의롭지 못하면서도 연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훨씬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이런 고난을 주십니다. 폭풍우를 지나는 것 같고, 시련 속에서 저녁 때 눈을 감으면 아침에 눈을 뜨기 싫을 정도로 그런 극심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낮추시고 그들로 하여금 정말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연약함을 깊이 깨닫게 만드심으로서 그 자녀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드십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으면서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때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이 극심할수록 어떤 생각을 해야지 되는가 하면 ‘내가 좋지 않은 방면으로 이렇게 강한 사람이었구나’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애들도 매 맞을 때 막 까불고 그렇게 하다가 엄마만 매만 딱 들면 무릎을 딱 꿇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리고 막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싹싹 비는 애들이 있습니다. 누구는 그랬다고 합니다. ‘이 녀석’하고 때리려고 하니까 살려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엄마 딸 살려주세요. 그렇게 하더랍니다. 그런 애들은 덜 맞습니다. 누가 많이 맞는가 하면 몽둥이를 딱 들고 엎드려 하면 짝 엎드려서 죽여라, 때려라. 네 자식 죽지, 내 자식 죽나. 많이 맞습니다.
(예화: 고등학교 시절에 많이 때리는 학교였는데 친구 중에 한 애는 맞으면서도 거의 움직이지 않아 잘못했다고 빌면 덜 맞을텐데 왜 그런가 했더니 쪽팔려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조금 손보시면 딱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덜 맞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하나님 앞에서는 진심이어야지 됩니다. 우선 이것만 면하고 보자. 그것이 선생님들에게는 통하는데, 엄마 딸에게는 통하는데 하나님에게는 안 통합니다. 진심으로,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의 수준이 깊어지고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하나님 앞에 크게 혼나는 법이 별로 없습니다. 영적으로 성숙의 깊이가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조금 하나님께서 안 좋아하시면 그것을 즉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잘못했다고 비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작대기로 때리셔야지 만 그게 겨우 무서웠는데 신앙이 깊어지고 나면 하나님이 자기를 싫어하시는 것이 너무 두려운 것입니다. 그렇게 바뀝니다. 그게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잘 하셨습니까 물어보면 제일 싫어하는 말이 ‘대과 없이 교회에 다녔습니다.’ 대과는 그럼 도대체 무엇입니까? 얼마나 큰 사건을 칠 작정을 했는데 대과 없이 신앙 생활했습니다 하는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밖에 몰랐습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하나님이 보게 하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연약해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자신 만만한 청년들을 보면 슬픕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한 게 아니라 객기 충만하게 보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그 연약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자신이 정말 연약하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그 다음에 그렇게 될 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게 지난주까지입니다.
그럼 오늘 두 번째로 그러면 주님이 왜 고난가운데 하필이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그 고난 가운데 두시는데 그 고난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에 나오는 대로 그 두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성도가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주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삶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배타적인 권리입니다. 그것이 주권입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주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에 적의 비행기가 영공을 허락 없이 들어오면 경고를 했는데도 계속 들어오면 미사일을 날려서 공중에서 산산 박살을 내도 그것은 정당한 행위입니다. 그게 무엇 때문입니까? 영토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도 땅도 계속해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옆에 나라에서 땅속으로 파고 들어와서 한반도를 뚫고 들어왔다고 하면 여기에 대해서 배타적인 권리를 가집니다. 하늘에 대해서도 갖습니다. 저는 법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구가 계속 돌면서 하늘이 계속 바뀌는데 그것은 어떻게 되는지 나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런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주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의미는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뜻과 동의어입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물론 주님을 믿기 전에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태어나고 싶어하실 때 사람들을 태어나게 하시고, 그리고 땅에 그만 두게 하시고 싶으실 때 하나님이 데리고 가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에도 하나님께서 적어도 개입하셔서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그리고 건강하게도 하시고 병드는 것을 허락하시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신앙을 인정하는 사람이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나 모두에게도 미치고 심지어 영들의 세계까지 미치고 심지어는 이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미생물의 세계까지 하나님의 주권은 다 미칩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권한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좀 다릅니다. 다르다기보다도 그런 일반적인 의미만으로는 충분히 설명이 안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도 우리의 삶에 대해서 주님의 주권은 미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끔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고 또 우리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어떤 상황 속에서 우리를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필이면 왜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났을까? 뭐 그게 무슨 불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한국에 태어났을까? 그것도 하나님의 커다란 뜻이 계시겠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대화하는데 많은 제악을 받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미국이나 영국에서 태어났다면 많은 사람과 대화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중에는 본토인 이상으로 영어를 탁월하게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보통 사람들, 나 같은 사람은 그런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선택 가운데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왜 그랬는지 사실 우리는 설명이 안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부터는 예전에 하나님의 주권을 대하듯 그런 태도와는 다릅니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삶에 대해서 권한을 가지고 계시고 자기를 통치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나를 다스려주시는 것이 내게 기쁘다. 내가 그 하나님의 자녀 된 것, 그리고 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존재로서 주님의 통치아래 있는 것이 난 참 기쁘고 감사하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도 결국 알고 보면 그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에 대해서 삶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나 혹은 마음에 있어서 그것을 기뻐하지 않고 거스르려고 하는 것이 결국은 죄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성도가 언제 배우게 되는가 하면 고난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주님을 왕이시다. 뭐 그렇게 말하지만 깊은 신앙심이 있을 때에는 그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삶에 있어서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 왕이 명령하시면 절대로 하기 싫은 일인데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일을 합니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데 진짜로 명실공히 주님이 우리 인생의 왕이실 때에는 그 왕의 명령을 따라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합니다.
옛날에 어느 대통령이 있을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재산가의 집안에서 아버지하고 아들이 대판 싸움을 하고 법정에 고소를 하니까 매일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그룹의 집안 싸움에 대해서 이야기가 났다고 합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 같으면 대통령이 그런 일까지 나서겠습니까, 또 집안 일인데, 그런데 이 사람은 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청와대에 들어오라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자식들이 다 들어갔는데 들리는 비화에 의하면 청와대에 불러놓고 대통령이 소리 소리를 지르면서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못 되어 먹은 놈들 같으니라고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하는 것들이 아버지를 걸어서 고소를 하고, 아비는 자식을 걸어서 고소하고, 동기간끼리 고소하고 창피하지도 않는가 하면서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가만 안 두겠다고 뒷집 아저씨나 혹은 큰아버지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이 그 일 때문에 직접 불러서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청와대에서 그렇게 야단을 쳤으니 참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서 싹 끝났습니다. 그 일이 잘한 일인가, 잘못한 일인가의 판단은 제가 할 몫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신앙이 충만할 때에는 하나님이 명실공히 왕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그 명령이 그것이 최선입니다. 사극에서 못 보셨습니까? ‘어명이여!’ 그러면 맨발로 뛰어 나와서 땅바닥에 엎드립니다. 어명이라는데,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배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했는데 한번 들어보지 뭐, 마음에 맞으면 하고 안 맞으면 할 수 없고, 옛날에 사극 시대로 갔으면 모두 참형에 처할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할 때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렇게 하지 말고 ‘어명이요!’ 그렇게 해야지 됩니다. 그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으면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기는 부르는데 그 왕이 어떤 왕인가 하면 입헌군주국의 왕입니다. 입헌군주국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영국의 여왕이나 아니면 일본에 천왕이나 태국의 국왕이나 실제적인 권리는 총리가 다 가지고 있고 그저 의뢰 적인 왕, 외국 사절이 오면 만나주고 왕관 쓰고 밥이나 한번 같이 먹고 사진 찍고 그런 왕처럼 생각합니다.
정말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삶의 실권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그 ‘실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독자적으로 여러분들과 관계없이 갖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신앙으로 반응함으로서 실제적인 왕권을 여러분들 속에서 펼쳐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이 하나님이 왕이 되십니다. 거의 순종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거의 왕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한번 진짜 혼날 때가 있습니다. 다 쌓아놓았다가 한번에 청산을 합니다. 그래서 뭘 배우는가 하면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지 배우고 자기 인생이라는 왕국을 자기 자신이 왕이 되어서 통치할 때 얼마나 그 통치가 개떡같이 되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어느 순간에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다가 깊이 실패하고 낙심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손들고 옵니다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통째 반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자신의 인생을 자신 혼자 넉넉히 잘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한번도 깨트려본 적이 없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는 어느 한순간에 분명히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내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내 자신이 왕이 되어서 내 자신의 의미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고 내 인생을 다스리면 반드시 실패한다, 그 고백이 신자에게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심이 깊어지고 나면 육신적인 박력이 많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게 주님의 주권을 따라서 사는 것이 그것이 인생의 최선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터득하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주권을 깊이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 승복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신자들이 어디 그렇습니까? 언제든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주권을 놓고 하나님과 다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감정싸움입니까, 자존심 싸움입니까?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인생에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시기를 원하고 자기는 거기에 저항하는 이유는 그 주권이 각각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자기 계획이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자기 계획이 완벽하게 일치하면 주권에 대한 다툼과 충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계획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나름대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고 또 그 계획을 깨달으면서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우리는 그것에는 아랑곳없고 그냥 비슷하게만 따라가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계획은 결국은 대부분이 우리의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 욕심의 궁극적인 원인은 우리 스스로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보다는 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그런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광을, 그런데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그 신자가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목사지만 가끔 이렇게 어디다 세워놓은 커다란 호텔이 망했다, 어디다 세워놓은 가게가 부도하고 도산하고 도망갔다. 이런 것들을 가끔 봅니다. 그때는 우리는 이렇게 지나가면서 여기다 이런 큰 호텔을 세운 사람은 정말 이상하다. 왜냐하면 나는 경영을 배운 사람도 아니고 무슨 사업에 입문한 사람도 아닌데 탁! 봐도 여기에 세우면 망할 것이 확신이 오는데 어떻게 그렇게 평생 사업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그 좋은 참모들을 데리고 수년동안 연구를 해서 여기다 이렇게 망할 것이 뻔한 시설을 만들어놓고 결국은 도산해서 법정관리로 넘어가고 도망 다니고 왜 그럴까? 지나가는데 가게가 문을 닫았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망했다고 합니다. 망할 것은 설 때부터 알았는데, 거기는 그 가게 안 된다. 그런 생각이 오는데 저 사람들은 왜 판단이 없을까? 그런데 기업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기업을 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 뭘 해야지 되겠다 라고 딱 마음이 꽂히게 되면 젊은 청년들 말로 필이 딱 꽂히게 되면 그러면 거의 눈에 뭐가 쓰인 사람처럼 변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르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경향을 우리 모든 신자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어떤 욕망, 자신이 하고자 하는 그런 것들이 확 솟구치면서 자신의 판단을 흐려놓으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주관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끔 좌절시켜주지 않으시면 그 사람은 진실한 신자가 될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시인이 여기서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고통을 많이 당했습니다. 괴롭힘, 특별히 “고난 당했다”고 하는 이 히브리말이 내면의 고통을 많이 의미합니다. 그런 내면의 많은 고통들을 당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또 외면의 고통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면의 많은 고통을 당하고 나서 그것이 내게는 유익이었다. 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과 함께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무엇인가 자기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이 있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디자인, 자신의 인생을 향한 디자인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런 것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교회당을 한 달째 가까이 매일 출근하다시피 가서 보면 거기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와서 봉사합니다. 미장을 하는 사람, 벽돌을 쌓는 사람, 그리고 목수, 전기를 하는 사람, 설비를 하는 사람, 화장실을 만드는 사람, 벽돌을 나르는 사람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면에서는 다 나보다 전문가들입니다. 내가 미장을 해봤겠습니까, 배관을 해봤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지 이것들이 모두 합쳐져서 마지막에 어떤 예배당 건물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그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수시로 전문가들이 비전문가인 나에게 질문을 받고 허락을 받으면서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 전체적인 계획을 우리 일하는 스텝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어야지 된다라고 하는 것을, 그래서 마지막에 지어지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여러분들을 구원하셔서 여러분들에게 망가진 건물이라고 비교를 한다면 그러면 서금서금하고 무너지려고 하는 벽돌을 부셔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와서 부습니다. 그리고 또 잘라낼 것을 잘라내고 그렇게 하면서 깨트려지면서 막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은 하나 깨트려지면서 맞아, 그렇게 깨닫습니다. 이 계단은 다 삭은 계단이야. 이것을 내가 밟으려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날 깨트리셔서 왕창 부수시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새로운 계단을 만들고 계시는구나. 이 벽이 무너지면 내 인생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지만 하나님이 야속하게도 우르르 허무시는데 그때는 내 인생이 끝난 것 같았는데 하나님이 새롭게 벽돌을 쌓으시고 지으시는 과정을 통해서 보니까 더 안전하고 비바람 들어오지 않는 좋은 벽이 서게 된 것입니다.
나 자신의 삶 속에 오셔서 막 껍질을 벗겨내십니다. 막 아픕니다. 여태까지 살아온 방식인데 왜 그러시냐고 하니까 다 벗겨내시면서 새 색깔을 다 칠하십니다. 나는 이것이 싫은데, 그때 하나 하나 ‘아멘’하며 견디면서 나중에 보니까 예전에 자기와 비교될 수 없는 새로운 자기를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주권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시인에게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고난의 계획이 무엇이 있는지, 주권이 도대체 무슨 계획을 지향했는가. 여기에 보니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성경에 보면 이게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면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주의 율례를 배우기 위하여 괴로움을 당한 것, 그것이 내게는 선한 것입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이로 인하여 라고 하는 게 전치사인데 ‘레마안’ 이라는 단어인데 영어로 말하자면 ‘in order to’입니다. 무엇 무엇하기 위해서 그런 뜻입니다. 주의 율례 주의 법도를 배우기 위해서 고난을 당한 그것이 내게는 선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시인이 고난을 당하게 만드셨는데 거기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주권을 가지고 계신데 그 주권은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계획이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율례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눈뜨지 않고 여러분들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배울 수 있습니까, 알 수가 있습니까? 알 수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감화를 받기 전까지는 여러분들은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눈곱만큼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지하게 일생을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리고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자신을 인생을 향한 계획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무 쓸모 없는 것 같은 인간을 구원하신 것이 단지 구원받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은혜 받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을 통해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배웁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자신의 뜻대로 안 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인생을 비관하고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한번 되게 해보려고 인간적인 술수를 쓰는 가운데 죄를 짓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많이 파괴하면서 살았지만 어느 순간에 깊이 고난을 받으면서 깊이 깨닫습니다. ‘내 인생은 주님의 수중에 있구나. 주님이 내 인생에 주인이시고 주권을 가지고 계시구나. 나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내 인생을 디자인하고 계시구나.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해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구나’ 이것을 깊이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궁금하니까.
난 뭐 별로 사본 적이 없지만 왜 주유를 하거나 하면 주차 복권이라고 하면서 하나 줍니다. 여기 은박으로 살짝 입혀서 동전으로 긁어, 그것도 십 원 짜리로 긁어야 잘 긁어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긁으면 소나타 승용차도 나오고 무슨 복 주머니도 나오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여러분은 한 반쯤 긁다가 그만 두는 사람이 있습니까? 손들어보십시오. 반쯤 긁다가 거기 동그라미가 있으면 일억을 준다고 하는데 그런데 반쯤 긁었습니다. 일억을 줍니다. 아래표시가 나오면 거기까지 긁고 아! 힘들어 그만 두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궁금합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주권을 가지고 계시고 그 주권 속에는 우리를 향한 좋은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그 고난 속에서 무릎을 꿇고 배우게 되면 그 다음부터 주님이 자신의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이 너무 궁금한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살라고 그러실까? 그리고 주님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실까? 그리고 주님이 앞으로 내 인생을 어떻게 디자인 하실까? 그게 궁금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온전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우리의 인생의 길은 그렇게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주님의 뜻을 다 모릅니다. 희미합니다. 그래서 너무 궁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그것을 단번에 보여주시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살다가 보면 다 해결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매일매일 순종하고 그리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보면 어느 때 그렇게 궁금하던 하나님의 계획이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온전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뜻,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시려고 때로는 여러분의 신앙 생활의 와중에 고난도 주십니다. 그 고난 속에서 여러분의 뜻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니고 주님의 뜻이 위대한가를 보게 하시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인생의 계획이 얼마나 하찮고 조잡하며 주님이 품고 계신 그 계획이 얼마나 아름다운 계획인지 하나님께서 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7.고난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말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세 번째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71절을 다루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 중에 영혼의 유익을 얻게 하실까? 왜 우리는 고난 중에 주의 말씀을 깨닫게 될까? 첫 시간에는 고난 중에 하나님이 인간인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알게 하신다. 두 번째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다 자기가 주인이었는데 고난을 당하면서 자기의 인생을 움직이는 통치자이신 주님의 손이 있다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 앞에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주님을 믿는 자녀를 고난 가운데 두실까? 특별히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것과 관련해서 왜 우리들을 고난 가운데 두실까? 세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이 속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헛됨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화: 총각 때 들으신 이야기-- 군대 시절 어느 분이 높은 지위에 있었는데 운전병이 몰고 올 차를 기다리다가 정문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육군 중위가 오기에 경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도대체 경례를 할 생각을 하지 않기에 불러 야단을 치니까 그 사람의 하는 이야기가 자기의 애인을 만나기로 했는데 자기가 늦게 와서 안 보여 찾느라 정신이 팔려서 그렇다고 말하기에 그냥 돌려보냈다는 이야기)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대면하면서도 그 말씀에 깊이 깨닫고 그 말씀에 깊이 젖어들지 못하는 커다란 원인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일단 세상에 눈이 팔리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어떻게 설명이 되는가 하면 심리적으로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항상 정보라고 하는 것은 제시되는 정보와 같은 쪽으로 갈려고 하는 욕구가 있을 때 그 정보는 빨려들 듯이 자신의 마음속에 와서 꽂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았을 때에는 소원이 계속해서 거룩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어떻게 살아야지 만 내가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지 만 내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수 있을까? 이런 갈망을 가지고 있고 욕구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게 가슴속에서 박힙니다. 왜냐하면 제시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정보와 자신이 가고자 하는 삶의 정보가 같기 때문입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단 그 신자의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러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필요로 하는 정보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정보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심리적인 교란 현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 쪽으로 가고 싶기 때문에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더 많이 알고 싶은데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와 세계와 주님 앞에 순종하는 삶의 행복,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죄와 그 죄의 비참함을 우리에게 계속 증거 합니다. 그러니까 안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아주 현격하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잘 들리던 하나님의 말씀이 잘 귀에 안 들어오고 그리고 마음이 산란해지는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만 혹시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는지 한번 깊이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 교묘하기 때문에 어느 날 이제껏 믿었던 하나님에 대해서 이혼 증서를 써드리고 세상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배반을 공식적으로 고백하고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 신앙을 가졌다가 미끄러진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행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식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유지하고 마음을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사실 자기가 세상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그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그리고 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지금 저지르고 있는 죄의 심각성보다는 훨씬 가볍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진단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들이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냥 살아갈 때는 거의 몰랐는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확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안이 확 열리면서 뭘 보게 되는가 하면 이제껏 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온 많은 삶의 발자취들이 사실은 죄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눈을 확 떠서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눈을 떠서 그 죄가 어떻게 비참한 결과를 자신의 영혼과 삶 속에 몰고 왔는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저는 요즘도 목회적으로 좀 깊이 연구해야 할 주제라고 할까 이런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갑작스러움 미끄러짐, 무슨 말씀인지 아실 것입니다. 신앙에서 쭉 미끄러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서히 미끄러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아주 갑작스럽게 미끄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과 몇 주전까지 이렇게 충만한 것 같이 살다가 갑자기 확 미끄러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이제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돌연적인 범죄, 그 다음에 영적인 미성숙, 영적으로 깊이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이 잘 없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갑작스럽게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상당히 오래도록 준비되어 왔을 가능성, 그리고 네 번째는 예전에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아무렇게나 살았던 그 패역이 고쳐지지 않은 가운데 은혜가 떨어질 때 그때 옛 기질들이 확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저는 뭐 그렇게 깊은 경지까지는 안 가봤지만 사람이 뭔가 일을 막 하다가 안 되면 술이 먹고 싶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너무 힘들고 괴롭고 그래서 술을 먹고싶다라는 심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있을 수 잇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과거에 술주정뱅이로 살아가지 않던 사람은 그런 충동이 일어나도 실제로 거기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선 술을 어디서 사는 지도 잘 모를 것이고, 물론 이제 가게에 가면 사지만 그렇지만 옛날에 그렇게 왕년에 술을 거하게 잘 먹었던 사람들은 그런 충동이 확 일어날 때 제 범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았던 사람들이 은혜 받고 미끄러졌던 사람들이 또 미끄러집니다. 여러분들이 과거에 크게 미끄러졌던 그 지점은 죽을 때까지 거기에 빨간 표시를 하고 살아야 할 여러분들의 약점입니다. 또 미끄러집니다. 절대로 또 미끄러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여전히 스터디를 필요로 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신속하게 사람들이 미끄러지는 것일까 라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자기가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을 잘 모르지만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확 비쳐주실 때 성령님은 그 죄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죄의 결과가 너무 비참하다는 것 그것을 인식하게 끔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될 때 신자는 미각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닷 말하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더럽고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에 미각이 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언제든지 이런 위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자기의 자녀들을 고난 당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 속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이 그를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인 정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신앙으로 돌아감으로서 가능해지지만 고난을 통한 마음의 변화는 이런 순결하게 그를 정화시키시는 한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면서 마음에 더러움과 세상에 대한 욕망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잘 귀에 들어오지 않고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을 염려하신 나머지 고난을 통해서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세상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실하신 이가 하나님 한 분밖에 없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 자신에게 삶의 참된 보람이 없다라고 하는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통해서 철저하게 고통을 받으면서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의 모습을 비쳐볼 때 자기 자신이 비로소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며 살았는데 세상은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이때에 신자의 마음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세상 사랑하다가 깊이 고난을 당하면서 어느 순간에 이 세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주님께 불순종하면서 주님께 드려야 할 사랑을 세상에 바치면서 상당한 기간동안 살아왔는데 사실은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 고통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다 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문제는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지 자기가 사랑하는 이 세상에 있는 즐거움과 이 세상에 있는 물질, 세상에서 손에 넣기를 원하는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으로서 자신의 영혼의 참된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세상 속에 살면서도 이 세상이 자신의 인생에 참된 행복을 위해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비로소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던 영혼의 참된 기쁨과 행복이 있었던 때가 사실은 자신이 가장 부요한 때라고 하는 비교적인 의식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비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깊은 변화를 경험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한 사람의 신앙이 점점 깊어질수록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 순결의 상태는 훨씬 더 요구한 기준이 높아져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그 죄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좀 덜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그것은 죄 자체가 상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 자체는 절대적인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고 불순종이지만 그 죄를 지은 자기의 자녀가 어떤 지식을 갖고 있으며 어떤 믿음의 상태에 있으며 그리고 그가 이제껏 자신을 아는 지식을 얼마나 소유했는가에 따라서 그 죄에 다루시는 방법이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다루시면서 많이 맡은 사람에게는 많이 구하시고 적게 맡은 사람들에게는 적게 구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성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칼빈도 신자가 죄를 이기는 중요한 비결 가운데 하나가 이 세상이 헛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순간, 순간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살고 그리고 이 삶의 터전이 곧 자기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그라운드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 없이는 사실 주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우리의 사명의 일터도 없습니다.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에는 밤하늘이 어두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낮에는 아무리 반짝여도 사람들이 자기를 보아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하게 자기의 빛을 발하는 것은 세상이 어두울수록 밤이면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살고 이 세상이 많이 타락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실한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험한 요소일수 있지만 진실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며 사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많이 타락했고 세상이 너무 어둡다고 탄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언제 어느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다수인적이 있습니까? 언제나 소수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진실하게 그분을 사랑하는지에 의해서 그는 어두울 때 오히려 진가를 발휘하면서 그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려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에녹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들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종종 하나님이 고난을 당하게 하심으로 그의 삶의 동기를 순수하게 만듭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감격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는 그는 세상에 나아가서도 우리는 항상 세상이 낯섭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고 그리고 부패와 분투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 그 삶의 발자취들 하나 하나가 이어져서 어두운 세상에 어떻게 주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마음속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함을 상실하게 되고 세상을 너무 많이 깊이 사랑하게 되면 그는 은혜의 세계에 들어와서는 낯설고 세상 속에서는 오히려 본향과 같은 포근함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그가 먹고 마시고 살아갈 때에는 자기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했고 그 소유와 누리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종종 영혼이 비참하고 위험한 상태에 대한 근심까지 잃어버릴 정도로 거기에서 맛보는 즐거움과 기쁨이 큽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에 고난을 당합니다. 비바람이 불고 파도가 칩니다. 인생의 바다에서 자기가 비로소 외로운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면 왜 그런지 평안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따뜻하게 해주었던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가슴에 상처와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이 주위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런 시련을 당하기 전까지는 세상이 고향처럼 느껴졌는데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세상의 배반을 당하게 되고 자기가 믿고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끊어져버리고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그때 비로소 자기 안에 하나님도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철저하게 자기가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신자가 종종 경험하는 고독은 육적인 고독이 아니라 영적인 고독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무섭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되었음에도 자살의 충돌을 느끼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제로 시도에 옮겨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불신자에 비해서 훨씬 소수입니다. 그 이유가 심리적으로 왜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살인하며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그런 자살에 대한 충동을 많이 느끼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특히 신자가 크게 범죄 했을 때 자살의 충동을 많이 느낍니다. 실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많이 느낍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전혀 모를 때에는 세상에서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 자신이 정말 외톨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데 그것은 세상 밖에는 어떤 다른 세계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신자는 자기가 그 속에서 철저하게 그 세상을 사랑하며 살았는데 어느 한순간에 그 세상에 철저히 버림을 받고 그리고 배신을 당하고 난 다음에 이 세상이 정말 의지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그분을 붙들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신앙의 세계, 혹은 영적인 상태를 그나마 가지고 있으면, 아직도 꺼지지 않은 은혜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으면 그쪽으로 가는데 그것마저도 모두 상실한 상태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볼 신앙심조차 없게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차가운 거절감을 동시에 느끼는 것입니다. 범죄한 신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차가운 거절감이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회개하기 전까지는, 거기에서 이중의 고독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불신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보다도 더 불행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제대로 믿지 않으면 신자라고 해서 단지 신자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 사람들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한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백성들이 당신에게 바쳐야 할 사랑을 세상에 바치는 것을 보면서 내버려두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종종 그들의 삶에 한가운데 들어오셔서 그들을 뒤흔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정체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결코 우리의 편일 수 없다는 것, 죄 많은 이 세상이 우리가 영원히 살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고난 속에서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 신자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커다란 죄이구나.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양립할 수 없구나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이제 신자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면서 하나님께로 마음이 돌아가기 전에 그때 신자의 마음에 파고드는 또 하나의 생각,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정체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이 정말 헛된 것이구나. 그리고 그것이 정말 쓸모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오 그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도다” 그러니까 가끔 그렇습니다. 젊다는 이유 때문에 마음대로 세상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들을 이렇게 쳐다보면서 삼 십 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젊으니까 술도 퍼마시고 나쁜 짓도 하고 막 방탕하게 삽니다. 지금은 세상이 아직 안 버렸나봐. 그래서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세상을 버리기 전에 시간이 흐르면 세상이 자기를 버립니다. 그리고 죄도 어떤 특정한 죄들은 그 사람이 이용가치가 있을 때 죄도 자기를 허락하지 그 사람이 그런 한도까지 넘어서면 죄도 그를 버립니다.
예를 들자면 그런 것입니다. 그냥 막 술을 퍼마시고 그리고 젊은 날을 살았습니다. 나이가 들었는데 이제는 안 마십니다. 왜 안 마시는가 하면 위가 서 너 번 빵구가 났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먹으면 대굴대굴 구를 정도로 아픕니다. 그래서 못 먹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죄를 버린 것이 아니라 죄가 그 사람을 버린 것입니다. 죄도 상대를 안 해줍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죄는 자기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두 가지 삶의 자세를 그 삶 속에서 늘 견지해야지 됩니다. 그것은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여하신 소명을 심각하게 느끼면서 그것이 생명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사업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것 하지 말고 열심히 사업을 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진실하게 돈을 벌어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유익하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선교의 역사에 보면 항상 물질로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이후 사도시대로부터 시작해서 항상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하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하나의 재능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 하듯이 어떤 사람은 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주위에서 공부할 기회를 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이 흔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공부할 기회를 주어서 열심히 공부해서 그래서 뭔가 이 세상에 기여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가르치는 그런 길을 걸어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그 삶을 각기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부르신 일터라고 생각하면서 그 안에서 성실하게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인생에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의 삶의 자세는 자기 자신이 전혀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그런 초월적인 신앙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명을 이루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일에는 이 세상에서 목숨을 걸었지만 자기가 만족을 얻고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누리면서 이 세상에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런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왜 여기가 영원히 있을 집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가야할 본향이 있는 사람들은 벌써 자신의 삶의 자리를 대하는 그 태도 자체가 다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난 속에서 이 세상에 헛됨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잘 직시해야지 됩니다. 야! 정말 헛된 것이구나. 주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삶의 자리는 너무 소중하고 귀하지만 그러나 결국 우리들이 마지막에 가야 할 곳은 주님의 나라이구나. 그리고 우리에게 세월이 많이 흘러도 우리에게 있어서 빛을 발하지 않는 진정한 영광과 기쁨은 천국의 소망이구나. 그것을 하나님이 느끼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라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도록 만들어주면서 인격적으로 스스로 그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고난 속에서 가르쳐주시는 바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 속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고 그것들을 버립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해주시고 사랑해도 후회하지 않는 것, 사랑해도 결코 후회되지 않는 영원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때에 신자의 마음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놀라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돌 같은 마음이 녹으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진실처럼 느껴지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순종하면 마지막에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비상한 확신을 세상에 대한 사랑을 떨쳐버린 자기의 자녀들에게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그분의 말씀에 아멘 하고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고 하는 신자로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도록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세상은 우리를 버렸지만 주님이 오래 참으시는 은혜 가운데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들이 돌이켜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날을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의 그 사랑의 마음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일생에 참된 소망이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율법을 묵상하고 그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면서 매 순간을 살아가는 그것, 그래서 무엇을 하면서 살든지 거기에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붙들며 살아가는 그 삶이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거대한 행복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복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따로 있고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지만 신자는 그것으로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소원함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원함을 통해서 비로소 거룩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탐구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마음을 갖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습관적인 삶 속에서 굳어지고 더러워진 그 마음을 어루만지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러운 밭과 같은 마음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 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정으로 가르치고 싶으셨던 진리, 그리고 진정으로 그의 영혼 속에 뿌리박기를 원하셨던 신앙의 참된 원칙들을 그 고난을 통해서 세워놓으시고 그리고 그 심겨진 하나님의 진리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그와 교통해주심으로서 비로소 그 고난이 신자의 영혼을 위해서 커다란 유익을 주는 그래서 오늘 이 시인처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백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8.고난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말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인이 모든 사람이 당하면 괴로워하는 고난 당한 것이 자기에게 유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저는 왜 하나님이 고난 가운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가에 대해서 삼 주에 걸쳐서 예비적인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그 고난을 통해서 교만하던 신자로 하여금 자기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고, 두 번째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향해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또 세 번째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취하려고 했던 이 세상에 부와 영광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는 것이 어렵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세우지 않은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너지는 것이 어렵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뭐가 어렵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워지는 것보다는 무너지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무너지지 않고는 세워지는 법이 없고 무너지지 않고는 세워졌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사실은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세워졌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무리 풍부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씀 앞에서 좌절하고 깨트려지는 풍부한 경험 속에서 산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말씀에 지식은 계속 인공위성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뇌리 속에서 도는 것이지 한번도 그의 실존을 꿰뚫고 들어가서 그를 변화시킨 것은 아닙니다. 익숙해지는 것이 곧 그것을 경험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많이 안다는 것은 나름대로 느낀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 느끼는 정도,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은 정도도 제 각각이고 그것에 대해서 표현하는 정도도 제 각각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굉장히 많은 것을 느끼고도 조금밖에 내색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을 느끼고도 많이 말하는 사람이 있고 사람마다 다 제 각각이고 또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에 강도도 정말 제 각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들어서 영향을 미쳐서 그 안에 잘못 세워진 것들을 먼저 허물어트리는 일들이 필연적으로 있습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위험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말씀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데 그 말씀 앞에서 깨트려져본 적인 거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주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러면 그럴 바에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게 낫다. 그런 뜻이 아니고 그러니까 그런 상태로 자꾸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조금 깨달은 것을 가지고 많이 선생노릇을 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이 위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심겨지기 위해서는 먼저 깨트려지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보십시오. 시인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것이 선합니다. 선입니다. 무엇이 내가 고난을 당한 그것이 내게는 선합니다.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119편의 저자가 다윗이라고 확신을 하는데 그런데 거의 보편적인 합의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그 시를 지었을 때 불신자의 삶에서 신자의 삶으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다윗 같은 사람은 태어나면서 신자였습니다. 히브리 사람으로 태어났고 또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주 예쁘고 좋은 신앙으로 자라서 기름부음을 받고 한 나라의 제왕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물론 그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불신자의 삶에서 신자로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또 그 앞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그랬을 때에 그 그릇 행하였더니, 혹은 고난을 당했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이라. 그것은 결국 신앙생활의 정체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을 살아갔는데 문제는 겉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면서도 그 속에 사실은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시지 않는 자기 나름대로의 그 뜻과 인생에 대한 목표, 성결하지 못한 사고 사상, 인간의 어떤 경험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신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확신이나 신념 이런 것들이 막 우후죽순처럼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서 있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깊이 깨트려지고 보니까 비로소 자기가 그릇 행했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예전에 만약에 자신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변화 받기 전에 ‘너 그릇 행하고 있다, 너 그릇 살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수궁 할 수 있습니까?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이 가르쳐주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남이 가르쳐주는 것은 도구일 뿐이지 성령님이 오셔서 그 사람의 마음을 진심으로 찌르시고 감화시키실 때, 그는 핑계되지 않고 인격적으로 진실로 승복하면서 정말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릇 행했다’ 라고 하는 것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렇게 연약함을 알고 주님의 주권을 배우고 그럼으로 이 세상이 헛된 것들임을 아는 이 모든 것들에 정 반대를 생각해보십시오. 자기가 굉장히 강한 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목을 맵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무너져야 할 것들이 신자의 삶 속에서 세워진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허물어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속에 진심으로 심겨지기 어렵습니다. 물론 심겨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표현,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심겨지기는 심겨지는데 그런데 무엇인가 하면 가시나무 떨기가 가득하고 돌짝 밭에 뿌려지고 해서 잠깐 뿌리가 내리는가 하면 말라서 죽어버리는 그런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제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러면 하나님이 이 시인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기에 시인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후반부입니다. 이로 인하여 고난을 통해서, 그러니까 성도의 고난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 의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사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심의 또 한 면입니다. 사랑과 두려움, 그것을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그 두려운 마음으로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에는 항상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구나. 정말 하나님이 간섭하시는구나. 욕심을 내면 뺏어 가시고, 그리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내 영혼에 침체를 주시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지 않고 아낀 것조차도 하나님이 가지고 가시는구나. 하나님이 참 두렵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필요한데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밖에 없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노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데 그것은 고난의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계곡에서 물이 쭉 내려옵니다. 봄에 물이 높은 곳에서 내려오다가 땅바닥에 떨어집니다. 그러면 막 휘돌면서 이 바위에도 부딪히고 저 벼랑에도 부딪히고 하면서 내려옵니다. 하도 많이 부딪혔기 때문에 그 물이 시퍼런 것입니다. 멍이 들어서, 그런데 정면에 커다란 벽이 쾅! 하고 나타납니다. 물이 부딪히면서 퍼렇게 멍이 듭니다. 그때 결국은 그 환경은 자신을 향해서 무엇인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결국은 물이 막 내려가다가 결국 쾅! 부딪히면 물길이 그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물길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살다가 고난을 많이 당하게 되면 더군다나 동일한 지점에서 계속 넘어지면서 고난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를 혼내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그 고난을 통해서 요구하시는 바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네가 가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목적을 내가 가지고 있으니 다시 한번 생각하라. 이게 희랍어에서 회개하다가 ‘메타노에오’인데 ‘메타’는 ‘투와이스’고 ‘노에오’는 ‘프링크’입니다. 프링크 투와이스가 ‘회개하다’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는 생각이 굉장히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이 안 바뀌면 회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바뀝니다. 죄에 대한 생각도 바뀌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바뀌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도 바뀝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이 바로 그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다가 계속 망합니다. 하여튼 모든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근원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손잡기만 하면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지 기도를 안 해서, 뭐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아서 그것이 아니라 때로는 전면적인 인생의 방향 수정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지 됩니다. 사업에 성공 할 생각을 먼저 하기보다는 그것을 생각해야지 됩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이 날 야단치신다’ 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다른 길을 걷게 하시는구나’ 그 하나님의 그 계획이 무엇일까? 그렇게 하고 생각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내가 고난 당한 것이 내게는 유익입니다” 왜냐하면 혹은 “이로써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런데 이 율례라는 말이 ‘후케이카’ 라는 말로 되어 있는데 카는 your 당신의 그런 뜻이고 ‘후카’라는 말은 ‘후끄’ 혹은 ‘후카’ 라는 말은 하나님의 법도, 규칙, 규례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이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달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것을 깨닫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신자가 살아가면서 어떤 하나님의 소중한 진리에 대해서 깊이 깨달으면 그 하나의 강력한 깨달음, 다른 많은 생각들의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잘 실감이 안 나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아주 고난을 많이 당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주 뼈저리게 깊이 깨달았습니다. 깨달은 그 진리는 딱 그것입니다.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신다 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 깨달았지만 그 사실 하나를 깨닫고 나니까 예전에 알지 못했던 많은 인생에 있어서 삶의 이치들을 깨닫도록 그 하나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자극을 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두꺼비집에 불을 올리면 집 전체에 불이 들어오듯이 똑같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어두움 속에서 살고 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많은 무지들이 깨어나면서 야!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것을 자신의 작은 삶 속에 규칙을 다 적용하고 보니까 하나님의 그 사랑, 하나님의 그 말씀의 은혜가 정말 한가지를 깨달았지만 자신의 많은 삶의 규칙과 법도들을 가르쳐주게 됩니다. 시인이 그런 경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세상을 사랑하는 그런 신자들이 마지막까지 깊이 변화되어서 신자들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많이 축복하시면 우리 멋대로 인생을 살게끔 하나님이 후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깊이 변화를 받고 주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면 주님의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당신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살고 싶은 삶을 마음껏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삶을 마음껏 사시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 삶이 기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그 삶을 살지를 않으십니다. 결국은 순종하는 생활과 내적인 충만함이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런데 그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그때에 혹은 그 이전의 때에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완전한 일치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 고난이 바로 앞에 나오는데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은혜로 구속받은 백성이면서도 주님이 그 시인을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이 따로 있고 자기는 주님의 자녀이면서도 자기가 살아가는 뜻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현저하게 충돌을 일으켜서 하나님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어서는 도저히 당신이 사시고 싶은 삶을 사실 수가 없으니까 고난을 통해서 그의 교만을 꺾으시고 교만을 꺾으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에 비해서 얼마나 헛된 것이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를 깊은 깨달음의 세계 속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을 고난을 통해서 많이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시면서 이 시인으로 하여금 그 고난이 도구가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가 도저히 옛 생각, 옛 삶, 옛 확신을 버릴 수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당한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난을 인내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그 고난이 도구가 되어서 주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깊은 뜻들을 드러내시고 자기를 깎으시니까 자기가 그 고난을 통해서 새롭게 자기의 인생을 향한 자기의 계획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할 때에 히브리어 성경에서 ‘토브’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브리’ 내게 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가 그렇게 극심하게 고난을 당하고 뼈저리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그 모든 고통의 순간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인내하고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선하다고 생각할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신앙이 회복되니까 그 고난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 것입니다.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의 신앙의 깊이는 자신의 고난에 해석에 대함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현격히 차이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고난을 대하는 태도는 곧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동일합니다. 그 속에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행복 속에서 하나님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뛰어난 사람,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사람은 항상 그 고난을 해석하는 강력한 해석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고난을 당할 때 세상 살기 싫어. 가족들이 여러분들에게 고난을 줄 때, 지겨운 인간, 내가 왜 저런 인간을 낳았을까? 내가 왜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든 나쁜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여러분들의 입맛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신앙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해석해낼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지면 고통과 아픔은 있지만 가슴앓이는 있지만 그러나 불평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으니...”
그래서 신자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때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몰라도 자신이 그의 편에 서서 그의 고난을 해석해주고 그리고 그 해석한 고난을 인격적으로 그에게 알게 하고 그래서 고난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에 아무 관심이 없었던 사람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주는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 시인은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빛나는 계획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율례를 그에게 가르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율례를 가르쳐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법도대로 살지 않는 시인을 고난을 통해 바꾸어놓아서 주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율례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고쳐놓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삶에 어느 한 부분이나 어느 한 모퉁이에서 속한 일들이 아니라 이것은 시인 전체의 삶에 초점을 세상에서 육신에서 하나님으로 주님의 율례로 바꾸어 놓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시인에게 총체적인 고난과 그리고 고통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똑같은 방법으로 자기의 자녀들을 다루십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삶의 초점이 하나님을 향해 풍만하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내적인 동기가 날마다 뚜렷하고 실제로 여러분들이 마음과 뜻을 모아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항상 그렇게 순수하고 정직하게 출발을 했어도 참고 견디기에 충분히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수시로 그런 분명한 삶의 초점과 동기들이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시지만 우리들이 많이 빗나가면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초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그저 누구 때문에 내게 다가오는 고난이고, 어느 인간 때문에 나에게 다가오는 고난이고, 그리고 재수가 없어서 당하는 고난이다라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한다면 그런 태도 속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 모든 우리의 인생에 기쁨과 슬픔, 고통과 행복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고난받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볼 수 없는 자신을 그 고난 속에서 보았고 고난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 앞에 도저히 배울 수 없는 순종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율례들을 새롭게 배우게 되었고 그 율례를 지키면서 사는 그 일이 주님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유일한 비결이라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미끄러지는 것은 순서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그의 신앙에 미끄러짐은 그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사랑과 교제, 그분께로부터 받는 영적인 축복들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기 시작하고 경건을 위한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미끄러지기 시작하고 그의 내용을 가득 채웠던 신앙생활은 내용이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으면서 이제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되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지막에 남아 있는 내용까지 모두 빠져나가면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서는 그 형식조차도 지탱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오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서 그의 삶이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그리고 그의 확신과 믿음까지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격이 망가지고 그의 모든 삶의 태도들이 고장나기 시작합니다. 망가진 상태에서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것은 망가진 정도가 아니라 망가진 상태에서 아주 굳게 굳어져서 패역을 형성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일시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 과격한 회개를 통해서도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아주 완전한 패역을 구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의 경우에는 각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돌이켜 서기 힘든 그런 영적인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상태 속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을 고치시기를 원했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사람을 고치시기에는 이미 벌써 자만심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훨씬 더 대단하게 생각하는 삶의 태도들이 바위처럼 굳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인간의 뜻을 쫓으며 사는 것이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배신을 불러오는가 하는 것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신 다음에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십니다. 매 순간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주님이 우리를 고치고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때때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가 안락함 속에서 굳어지는 것보다는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주님 앞에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주기도 하십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저질러놓은 모든 일들에 대한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하나님이 자신의 죄로 인한 비참함을 경감시키지 않으심으로 죄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사는 삶의 가치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종종 당신과 나누는 그 사랑의 교제가 얼마나 뛰어난 가치가 있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너무나 사랑하는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결한 가치를 깊이 인식할 때까지 어두움 속에서 미끄러진 상태에서 지내도록 내버려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고, 자신의 부르는 노래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 같고,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아름답게 우러나던 하나님을 향한 가락들이 모두 끊어져서 어디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를 찾아볼 수 없을 때조차도 주님은 그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님이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겁에 질린 얼굴로 더 이상 형벌은 싫습니다 라고 하나님의 바지 자락을 붙드는 그런 노예적인 복종을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을 멀리 떠난 삶의 비참함을 내가 깨달았고 주님 자신이 나의 생명의 기업이 되시는 것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는 것보다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오늘 이 시간에 나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옵니다. 나에게 삶의 법도들을 깨닫게 하셔서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주님 자신이 원하시는 삶을 충분히 사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저항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주님의 뜻을 어그러져 살도록 우리를 강요하는 세상을 향해서는 완고한 사람들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그런 복종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 우리의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이유는 이 시인이 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편 119편의 시작이 무엇인가 하면 “행위 완전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랬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시인이 행위가 완전한 사람 같은가. 전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였을 때 너 노래한번 해봐라.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기가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니까 아무나 보고 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완전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이 완전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내세우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많은 고난,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이 아닌 것들을 붙들고 살아가다가 그것이 헛된 것인지를 알고 주님을 다시 붙잡음으로 온전해진 사람, 자신이 제일인지 알고 교만하게 살아가다가 큰 시련을 당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에 가까운 시련을 맛보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 벌레라’ 고백을 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주님의 위대하심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보다는 하나님의 율법을 더 붙들게 된 사람, 그래서 더 완전해진 사람,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환난과 시련을 많이 겪으면서 그 속에서 어떻게 불안전한 인간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 가고 어떻게 겉으로만 주님을 섬기고 내용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신앙 생활하던 사람이 진실한 신자로 변화되어 가는지를 깊이 경험했습니다. 어디서 고난의 풀무불 속에서 일곱 번 연단하고 아홉 번 단련한 은과 같이 금과 같이 그렇게 철저하게 연단을 받으면서 자신 속에 있는 더러운 생각과 잘못된 확신, 하나님을 향하여 순전하지 않은 마음의 찌끼까지 끌어내려서 성결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바꾸어놓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그 다함이 없는 치열한 열심 앞에 굴복하면서 그는 자신도 완전한 자가 아니지만 “행위 완전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아주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는 정말 온전해지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신자는 온전해지고 싶은 욕구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우리의 마음속에 ‘이 정도만 신앙생활해도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이지’ 하고 자기 스스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확실히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신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름다워지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끊임없는 욕망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치열하게 노력을 합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치열하게 노력을 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도 그것은 하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 속에 분명히 있는 목표는 온전한 신자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에 드는 온전한 신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현실적으로’ 라는 말 좀 안 썼으면 좋겠습니다. 주일을 지켜야지요. 아 그럼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기도하셔야지요? 아 정말 맞아요. 기도하라는 설교를 들으면서 정말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찔린 게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맞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서 많이 헌신하셨는데 우리도 헌신해야지요. 그런데 사실 현실적으로, 그러니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표준은 항상 ‘현실적으로’라는 한 토막의 부사를 통해서 확 꺾어지면서 적용이 불가능한 이상형으로서 딱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은 현실대로 따로 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긋난 철길같이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을 향한 어떤 훌륭한 표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표준은 표준일 뿐이고 현실은 현실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제가 어제 교리반 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교사들이 맨 처음에 한국에 들어와 보니까 이 나라가 세 가지 때문에 망하는데 그게 사실은 일본 사람들의 의도적인 것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무엇인가 하면 술, 술독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일본 사람들이 한국인을 무기력하게 하기 위해서 퍼트렸다고 하는 그 화투, 노름입니다. 마지막에 세 번째가 흡연입니다.
항상 세계 역사를 보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강점할 때에는 제일먼저 염두에 두는 것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갖게 만들면서 정상적인 사고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한 기술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일본 사람이 우리 나라를 점령할 때에 그렇게 화투 같은 것을 퍼트려서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그런 데로 빠지게 하고 정상적인 역사 의식을 못 갖게 만들어버린 것이나 아니면 스페인이 필리핀 같은 나라를 지배하면서 농구를 확 퍼트렸습니다. 그래서 골목골목마다 농구대를 다 세워놓았습니다. 그래서 애나 어른이나 모두 뛰어 나와서 농구공을 집어던지느라 역사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깜빡 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게 만듭니다. 그게 통치 기술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석이 다르겠습니다만 제가 보는 견해에서는 프로 축구, 프로 야구 그런 것이 왜 생겼습니까? 그거 독재하던 사람들이 하도 골치가 아프니까 민중의 불붙는 가슴을 축구장으로 보내자 해서 다 보낸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려서 막 열광하고 그러면서 거기에 다 기운을 쏟고 나니까 이제 ‘독재 정권 물러가라’ 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고도의 정치적인 의도들이 다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다른데 마음을 쏟으면서 살게끔 그런 식으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일제 시대 때도 그런 것을 선교사들이 본 것입니다.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선교에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데 복음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적용은 시대에 따라 전하는데 그 조선의 전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거기에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하게 대입을 시킨 것입니다.
또 하나 빠진 게 있는데 영국이 중국을 통치할 때 막 갖다가 뿌린 게 무엇입니까? 마약입니다. 그래서 중국에는 복음이 들어갈 때 그 사람이 신자인가 아닌가는 아편을 끊었는가 안 끊었는가를 보는 것이 최대의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 조선 시대의 정황에다가 딱 적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지혜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술과 도박, 그리고 흡연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고백 속에 집어넣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례 받을 때 술을 안 먹게 작정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노름을 안 하겠다고 하면서 거기에 집어넣어서 발을 씻게끔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노름하던 사람이 자기 손을 도끼로 끊었다는 무용담처럼 퍼트려서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섬찢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데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자로 살아간다고 할 때에 사실은 술을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담배끊는 것보다 더 힘든 일들이 이 디지털 시대에 이 불법이 횡행하고 야비하고 사랑이 식어진 시대에 훨씬 더 많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러니까 바뀌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크리스천이면 음란 사이트에 채팅을 안 한다든지, 그것보다도 어려운 일이 너무나 많은데 지금 여전히 그런 것 가지고 시비를 하고 그러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문에 났었던 일인데 아래 지방, 경상도인가 어디서 있었던 일인데.
(예화: 목사님이 교인들과 같이 바닷가에서 회 종류를 드시는데 비릿한 냄새가 나니까장사하는 아줌마가 소주 한잔으로 입가심을 하면 비릿한 기운이 없어진다고 권유를 해서 먹었는데 세월이 많이 흘러 그 목사님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교회 중직들이 약점을 캐고 하다가 예전에 술을 드시던 그 일을 거론하므로 결국은 신문에 까지 나온 이야기)
치졸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왜 그렇게 삽니까? 이제는 제가 지금 술 먹고 담배 피는 시대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도 아니고, 아직 술을 끊지 못한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함도 아니고, 담배 피는 성도들을 담배 안 끊어도 된다고 허용하기 위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그것보다 이제는 더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이렇게 부정직한 시대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이렇게 불의 한 시대에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면서 ‘아니오’ 해야 할 그곳에서 ‘아니오’ 라고 말하고 ‘그렇습니다’ 라고 말할 그곳에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술 먹고 싶은 것 참는 것보다도 더 힘들고 담배를 끊는 것보다도 더 힘듭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게 자신의 삶 속에서 신자가 신자라는 사실을 정확히 드러내 보여주는 그런 신자들이 이 세상에는 더 많이 필요합니다.
어느 법조인을 만났습니다. 커다란 법률 회사를 만들고 외국의 변호까지 합니다. 자기는 인권변호도 하고 가난한 사람을 무료로 변호도 해주고 고통받는 사람의 편에 서서 자기가 앞장서서 변호사들을 세워주고 막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변호사 일로 돈을 많이 벌텐데 세금은 정확히 냅니까?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더니 목사님, 그것만큼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
그러니까 정말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모든 희생이 없이는 안 됩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시대가 악하고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밝은 빛이 필요하고 시대가 부패하면 부패할수록 더 순결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시대가 악할 때 신자들이 모여서 기껏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너무나 실망되는 일입니다.
시대가 악하고 어두우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면 불퇴전의 결의를 다지고 이 시대가 이러니까 현실적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펴기 어려우니까 더 성결해지자. 더 정직해지자. 더 열렬해지자. 이러고 돌아가도 세상이 바뀔까 말까 인데 세상이 어두워서 이제 이 어두운 세상에 당신이 자녀들밖에 희망이 없는데 그 자녀들이라는 인간들이 모두 모여서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이러다가 돌아갑니다. 뭔가 해보려고 하는 사람이 왔다가도 신앙심이 깊어 보이는 사람들이 신앙고백의 표준을 이야기하면서 ‘그렇지만’ 쪽으로 그리고 돌아가니까 자기가 받은 은혜도 이게 교회에서나 통용되는 은혜이지 현실적으로는 적용이 안 되는 곳이구나. 그리고 ‘현실용 신앙은 따로 있나보구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아니 조금도 과장이 아닌 사실입니다.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의 마음속에 주님을 너무 사랑합니다. 어떻게 할례 받지 못한 짐승과 같은 놈들이 특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뽑아 세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욕하고 주님의 영광을 저렇게 훼방할 수 있을까? 저 놈이랑 당장 하고 확 뛰어나갔다가 키가 구 척이나 되는 골리앗 걸어나올 때 ‘현실적으로’ 그랬다면 그가 히브리서 11장에 올라갔을 수가 있었습니까?
히브리서 11장에 올랐던 그 모든 믿음의 증인들 중에서 ‘현실적으로’ 라고 말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유다서에 나오는 아담의 칠 대 손 에녹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캄캄하고 어두운 부패한 시대에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의 깊은 심판의 선고를 받은 후에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외쳤습니다. 현실적인 삶이었습니까? 더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노아입니다.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청천 대낮에 그리고 그것도 높은 산꼭대기에서 120년에 걸쳐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현실적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를 개척해나간 신앙의 사람들은 세상이 이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생애를 산 것이 아니고 ‘세상이 이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택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날 이런 식으로 ‘현실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사려가 깊은 사람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은 이 시대는 사실 무모한 사람들을 원합니다. 홍해와 같은 바다를 앞에 놓고 현실적으로 하고 주저앉은 사람보다는 주께서 이 바다를 가르시리라는 무모한 사람들, 이제껏 오랜 세월동안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인생의 숙명적인 비극과 고통 속에서 ‘그럼으로,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희망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모든 실패를 운명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재 그 자체가 희망에 빛이 되어지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신앙이 없이 살았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살라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은 그런 식으로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만 살아서는 이 세상이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대가 어두울수록 밝은 빛과 같은 사람을 만들고 싶어하고 그리고 불의 할수록 그 어떤 불의에도 때묻지 않는 것처럼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그를 통해서 원 없이 당신의 뜻을 이루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의 손에 붙잡혀서 이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도구로 하나님 앞에 한번 살아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미력이나마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주님의 나라를 거드는 한 기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의 그 영광스러운 전개의 과정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셔서 고난도 당하게 하시고 시련도 당하게 하신 후에 거기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을 배우게 하시고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그의 법도를 지키며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삶의 행복과 그 뛰어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계속 그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불의해도 ‘현실적으로’ 라고 말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런 현실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신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도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놓기 위해서 오늘도 여러분들을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치열한 열심히 굴복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9. 고난 중에 받은 위로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119:92)”
이 세상에 누구든지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대부분 고난과 시련에 대해서 예찬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대부분 다 남의 고난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찬사이거나 혹은 자기 자신의 고난이라면 과거에 겪은 고난을 보면서 ‘그 고난이 내 인생의 약이었다'고 표현하는 법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든지 간에 고난은 항상 쓰고 즐거움은 항상 달콤한 법입니다.
그런데 애처롭게도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는 항상 그 고난이 친근하게 따라다닙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한 성향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정결하게 만드시기 위해서도 우리에게 고난이 따라다니지만, 때로는 자신이 불결하지 않아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다보면 그 사명을 향해서 걸어가는 그 길에,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 삶의 과정에 많은 고난과 고통이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은 때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한없는 편안함 밖에는 다른 어떤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막상 신앙의 길에 들어서고 나면 우리들이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주님을 믿기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가치 있는 삶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뿐이지 여전히 고난도 있고 시련도 있고 아픔도 있고 눈물도 있습니다. 그런 많은 시련들을 당해갑니다. 그리고 그런 시련과 모진 고난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사람들로 만들어 가신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민둥산에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흙을 파서 물을 붓고 묘목을 꽂아놓을 때는 심어놓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면 '저 나무들이 저기에 살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온상이나 평지에서 정원사들의 따뜻한 손길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편안하게 자랐던 그 묘목에게 물기 없는 메마른 민둥산에 꽂아놓은 묘목으로서 산에서의 첫날밤은 정말 괴로운 것일 겁니다. 도무지 '저기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던 끝에 어떤 나무들은 빨갛게 타 죽었지만 어떤 나무는 신기하게 그 산에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라갑니다.
그 나무가 그 산에 뿌리를 내리고 그 산에 사는 모든 나무들 속에 한 가족이 되기까지 아마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나무가 산에 박혀서 바람에 흔들리면서 간신히 자기를 버티고 있는 몇 가지 나뭇가지에 의지하면서 묘목으로서 첫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년, 2년, 3년, 4년,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오히려 그 나무는 옛날에 묘목으로 자랐던 그 정원보다 그 산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뿌리를 뻗고 줄기 가지 하늘로 치올라서 많은 입과 가지를 드리우면서 그 산을 기름지게 만드는 그 산의 어엿한 한 가족이 되게 마련입니다.
신자의 일생도 그와 같습니다. 주님을 잘 믿으면서 그 생명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신자의 일생은 나무와 같습니다. 동물은 오래 나이가 먹으면 비참해지고 그 몰골이 흉악해지지만 식물은 나이가 오랠수록 자태가 의연하고 기품이 있는 값진 물건이 됩니다. 그렇게 신자가 아름다운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서 자라기까지 비바람도 불고 천둥번개도 치고 괴롭힘도 많이 당합니다. 그런 속에서 한 나무가 거목이 되어가듯이 신자의 삶도 똑같이 고난 속에서 영글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난의 마지막 결과이지 고난을 당할 때에는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고통과 참기 힘든 괴로움이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만 당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는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고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훌륭하고 정금과 같은 주님의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 고난의 풀무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예전에는 도저히 경험해본 적이 없는 치열한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하게 하셔서 그 고난의 풀무 불 속에서 연단 받고 또 연단 받으면서 그렇게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바로 하나님 앞에 이런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고난이 얼마나 크고 막중했는지 그 고난속에서 자기는 멸망하는 것이 마땅했노라고 추억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내의 한계에 비하면 고난은 너무나 컸고 자신의 성품과 자신의 모든 삶의 그릇에 비하면 시인이 통과해야 했던 고난의 골짜기는 너무 치열한 골짜기들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수많은 사람들을 대적으로 맞이하여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 경험할 수 있는 극한 상황을 모두 경험하면서 그는 쓴잔을 마시면서 일생을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인이 회고하는 바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 시련, 그 환난 속에서 멸망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품에 따라서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 인내의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나면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너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에게도 그런 빙점과 같은 한계가 있었고 그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고난을 회고할 때에 ‘나는 틀림없이 그 고난 중에서 멸망하였을 것이다’ 히브리 성경에 ‘아바드’라고 쓰고 있는데 그것은 성이나 집 같은 것들이 공격을 받아서 와르르 무너져서 초토화되는 그런 상황을 묘사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주님이 연단 하신 그의 신앙을 통해서 오는 강인함이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뛰어나게 강한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극심한 고통, 견디기 힘든 괴로움들을 시인이 치열하게 경험하면서 그 괴로움 속에서 멸망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정신적으로 멸망되지 않을 수 있었고 또 하나는 육체적으로 멸망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시련을 많이 겪으면서 이 시인이 수많은 시련 속에서 자신이 멸망할 것 같은 그런 위기를 많이 느꼈지만 그러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멸망하지 않고 굳게 서있을 수 있었습니다.
시련과 환난을 많이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면, 우리의 정신의 질서가 어느 일정 시점을 넘어가 버리면 와해되어버리게 됩니다. 정신의 질서가 와해되어버리게 되면 가치에 대한 판단도 혼돈이 오게되고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체의 논리적인 기능들이 현격히 쇠퇴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고 내리는 결정마다 결정과 결정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어서 하나하나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것처럼 어떤 하나님의 섭리의 궁극적인 성취를 위해서 걸어가는 기능들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그리고 육체의 괴로움이 호소하는 대로 결정해버리고, 그래서 삶이 실타래가 뒤엉킨 것처럼 흐트러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적인 와해가 일어나게 되면 육체가 무너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드는 사람들은 대개 악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정신적으로 시험에 들어서 가치의 체계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삶이 무너지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생활이 문란해지게 되고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더러운 일들에 손을 대고 안 좋은 습관들이 다시 그 시험 속에서 고개를 들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에게도 그런 위기가 있었고 시인도 그런 위기로 치달을 정도로 깊은 고통을 당했지만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시인은 말하기를 “주의 법이 나에게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했습니다. 여기서 주의 법은 ‘토라’ 율법입니다. 즉 ‘주님의 율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입니다. 즐거움은 히브리 성경에 보면 복수로 나옵니다. ‘샤솨’라고 하는 단어인데 기쁨의 극한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자면 주님의 율법이 나의 기쁨들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고난 중에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기쁨은 복수인데 고난은 단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단 한번의 고난에도 나는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한 고난 속에서도 정신적으로 와해되지 않고 육체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내가 그 속에서 인내하며 견디며 그 고난 속에서 멸망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주의 법이 주는 기쁨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받을 때에는 항상 우리들이 그 고난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씁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고난은 사실은 고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연단 시키시기 위해서 다가오는 고난은 하나님과 일대 일로 독대를 하기 전에는 해결이 되지를 않는 법입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것이고 그렇게 놔야지 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매달릴 수밖에 없을 터이니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연단 하셔서 고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난을 많이 당했고 그 고난이 시인에게는 견디기 힘든 무거운 것이었지만 시인은 그 고난 속에서 병들지 않을 수 있는 샘솟는 치료의 근원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받는 기쁨이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그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받는 기쁨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 시인은 이 즐거움을 복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이지만 그 율법 속에 담겨진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이 받는 기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쁨이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고난 속에서 주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표준에 자신의 삶을 비춰보며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의 존재를 성찰해 보면서 그 치열한 고난의 때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세우는 훌륭한 수련의 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 치열한 연단 속에서도 시인은 꺾어지지 아니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자신을 성찰하며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고난보다도 더 큰사랑으로 자기와 관계를 맺고 계시며 관계를 맺고 있는 자신을 향해서 인생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난 속에서도 시인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고 이 고난의 때가 지나가고 나면 반드시 평화의 때가 온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일정한 목적으로 데려가고 계시며 그 목적이 성취되고 나면 이 고난의 때가 소중한 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남다른 시각으로 고난을 보면서 고난 속에서 불평과 원망을 하는 대신에 그 고난 속에서 위로의 용기를 얻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시련 속에서 깊이 인내하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즐거움으로 그 고난에서 오는 모든 아픔들을 승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하시던 때를 가만히 돌아보면 너나 할 것 없이 고통을 배경으로 깔고 있었던 때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얼마 되지 않는 인생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탁월한 친교를 누리던 때에는 항상 고통 가운데 저의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을 응시하던 때였습니다. 고통받던 때 이외에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느끼고 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고통을 받을 때에, 그래서 이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나 자신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주님이 내 인생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과 이 세상에서 주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몰고 오는 지를 깊이 깨닫고 있을 그 때에는 항상 고난 속에서 주님을 응시할 마음이 있었고 그렇게 고난 속에서 주님을 응시할 때 저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그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바로 고난 속에서 자신이 멸망했어야 마땅할텐데도 그 고난 속에서도 멸망하지 않고 진멸 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고난을 풀무 불 삼아 더 정결한 신앙으로 연단 되어서 결국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은 그 고난을 혼자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딘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말씀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기쁨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바라보시는 시각을 발견하고 자기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주님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이를 인정하고 언제나 자신의 시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시각을 받아들이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죄를 지적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홀딱 벗겨서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게 한다고 할지라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벌거벗기기만 하고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내버려두는 법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정미한 말씀이라도 우리를 쳐서 피가 흐르게 하고 그것으로 끝나게 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항상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에 대한 지적, 우리의 비참한 삶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탁월한 노출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엄위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 뒤에는 항상 싸매시고 고치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놀라운 역사가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때리고 치시기도 하시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만일 그 말씀으로 매맞지 아니하였더라면 도저히 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신령한 기쁨들을 주시기 마련인 것입니다.
(예화: 등에 커다란 종기가 나서 수술 받은 이야기-수술 받을 때는 더 아팠지만 수술 받은 후 통증이 현저하게 떨어지면서 나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정확하게 지적해 주실 때 그리고 성령이 주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책망하실 때 때로는 하나님이 심하게 매질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의 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아픔을 느끼면 그가 하나님의 친자녀임을 보여주는 훌륭한 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끝내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때리신 다음에는 항상 하나님이 싸매어 주시는 것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그렇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늘 싸매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맛본 기쁨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치시지만 치신 후에는 우리를 놀랍도록 싸매십니다. 그 싸매어 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때리실 때에 배운 것 못지 않게 싸매어 주시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많이 배웁니다. 그래서 매 순간마다 이 시인이 끊임없는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했지만 그러나 그 모든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하면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위로를 통해서 큰 기쁨을 얻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의 주님 되심에 대한 그 감사와 감격이 하도 기뻐서 그 힘 때문에 고난도 이기고 시련도 이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가 어떻게 고난을 이기고 시련의 풀무 불을 통과하면서 까지 연단 된 주의 사람으로 자라갑니까? 무엇을 통해서 신자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렇게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하고 마지막에 확신 하나만을 붙들고 가는 길이라면 그것은 정말 오래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는 이 시인처럼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하는 가운데서도 주의 말씀이 주는 큰 위로가 있습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다다라서 추락해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던 사람들이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은혜를 받고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되는 일들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얼마나 사랑 받는 존재인지를 터득하고 그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즉시 그는 치열한 시련도 이기고 고난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그 영혼 속에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기쁨과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동행하시는 증거를 마음껏 맛보고 누리는 성도들의 삶은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고난과 시련의 계곡 속에서도 찬송하고 노래부를 수 있는 삶을 구가할 것입니다.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많은 시련과 고난들입니다. 저는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예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혼나느라고 고난과 시련의 골짜기를 통과할 것이고 여러분들이 주님의 뜻대로 산다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때로는 쓰디쓴 광야의 골짜기들을 지나야 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의 안락함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행복을 도모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폭풍 부는 날에 촛불을 켜고 들판을 안전하게 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 모진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환경의 편안함이 아니라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 환경을 능가하는 평안, 모든 지각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 시련과 고난 속에서 시련과 고난보다도 더 큰 기쁨을 우리에게 주셔서 남들이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그 기쁨과 그 은혜의 힘으로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이기는 그런 진실한 신자들이 되는 것,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고 또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큰 기쁨을 누려 시련도 고난도 이기고 승리하는 좋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 말씀의 미각을 유지하는 비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119:102-103)
저는 여러분들이 태어나서 모두 두 번 결혼하기를 바랍니다. 한번은 부부로서 남녀가 만나서 결혼하기를 바라고 한번은 이 시편 119편과 결혼하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의 신앙의 여정 가운데 시편이 없었더라면 특별히 119편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신앙의 여정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때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으리 만치 침체된 때에도 시편을 읽으면 우리에게 은혜를 회복시켜주고 다시 우리의 거친 마음을 진리 속에서 찾아오시는 주님이 어루만지셔서 우리로 하여금 낙심한 가운데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살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삶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시의 기록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서 인간 승리를 이룬 사람들의 성공담도 아닙니다. 시편을 기록하는 동안에 이 시인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이어서 때로는 눈물 골짜기를 지나면 어린양같이 두려워 떨고 흐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믿음으로 그 모든 시련의 폭풍을 지나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편, 특별히 119편의 원시림을 지나면서 우리와 다름없이 똑같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며 시련의 바다를 건너며 근심의 광야를 지났던 한 평범한 하나님의 사람,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코 평범하지 아니하였던 하나님의 자녀, 그 시인의 고백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계시의 말씀보다도 우리의 마음에 살 깊이 와 닿는지도 모릅니다.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는 좌절하기보다는 오히려 격려와 소망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시편의 기자 속에서 우리는 그의 눈물, 그의 한숨, 그의 신앙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여러분들이 일생에 두 번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한번은 주님 안에서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또 한번은 하나님의 말씀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 중에서 특별히 갈라디아서인지 로마서와 결혼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한 때 누가복음을 너무 좋아해서 정말 누가복음과 결혼했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시편이 좋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그렇게 시편과 결혼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꿀 송이보다 더하니이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칠 때 성경으로 글을 가르친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깁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붓에 꿀을 묻혀서 히브리 글자를 쓰면서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그것을 따라서 빨아먹으면서 글을 배우게 한답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이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송이 꿀보다 더 다니이다’하는 것은 바로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글자 하나 하나를 가지고 성경말씀을 쓰면서 그 위에 꿀을 묻혀서 손가락으로 따라 쓰면서 빨아먹으며 아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에 이렇게 달다는 암시를 어려서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과 꿀을 비교한 것의 답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매일 꿀을 먹는다면 그 꿀이 그렇게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달고 자신의 영혼의 큰 기쁨이 된다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송이 꿀’ 말고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다른 표현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원수의 노획물 같이 내게 기쁨입니다’와 같은 표현들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획득한 전리품들을 나눠 갖는 잔치 보다 더 기쁨니다라는 표현도 나오듯이 여러 비유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데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를 히브리 성경에서는 “주의 말씀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달콤한지요 내 입에는 그 말씀이 꿀보다 더 답니다”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의 맛이 달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이 자신의 입맛에 대해서는 너무 달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감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고통스러워하고 심지어는 지루해하고 심지어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닫지 않으려고 하는 반대방향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푼 것이 설교인데 듣기 싫은 소리하면 ‘설교하지마’합니다. 결국은 그렇게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객관적으로 단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접하는 사람의 입맛과 상당히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시리즈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정을 돌아보면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달콤해서 정말 그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얼마나 달콤하고 기쁜지 그 말씀에 늘 접하며 그 말씀의 은혜 속에서만 살았던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지루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어떤 아름다운 미각도 찾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며 살던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입맛에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달콤합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말씀 자체가 가져다주는 효과라기 보다는 말씀을 매개체로 해서 만나주시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체득되는 기쁨이요 경험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영혼에 달콤함을 주는 것은 말씀 그 자체가 아니라 사실은 말씀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그런 달콤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주의 말씀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라고 고백했으니까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자신에게는 이렇게 달콤하고 황홀할 정도로 감미로운데 사실은 지금 자기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감미로움을 느끼고 있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거의 잃어버린 채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시인은 많이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보다 더 정확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 간직하고 있는 영혼의 상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이 영혼의 상태에 있어서 심각한 질병의 징후라고 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한 사람의 착한 신자가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거스르며 담대하게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기 전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착하고 잘 순종하던 하나님의 자녀가 하루아침에 마치 귀신들린 사람처럼 악인으로 변모해서 담대하게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떠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거스르고 반역하는 불순종의 삶이 구체화되기 전에 마음의 틈새를 가르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 신자의 마음이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나타나는데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 아름다운 미각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예화: 늘 고기를 먹고 싶었는데 할머니께서는 몹시 아파 입맛이 없을 때 사주신다)
같은 사람인데도 미각이 건강 상태에 따라서 많이 변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짜장면 한 그릇을 먹으면서도 ‘이 맛이 아니야’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옛날의 그 입이 아닌 것’입니다. 미각세포가 젊었을 때와 틀리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사람인데도 그렇게 미각이 수시로 변하는 것처럼 신자의 미각도 수시로 변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더욱 위험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달콤함을 느끼는 것은 신앙의 초기적 증상이고 -은혜의 초기적 증상이고- 신앙이 매우 깊어지면 무덤덤해진다는 생각을 암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예화: 사슴뿔이 처음 날 때는 말랑말랑 하지만 점점 자라며 먼저 난 부분은 딱딱해 져서 녹용으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게 된다)
진실한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실한 신앙이 완벽한 신앙일까요? 진실한 신자가 주님의 기준에 완전히 도달한 사람일까요? 진실한 신자가 내적인 부패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서 무죄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런 상태에 들어가는 신앙의 경험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저는 그런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진실한 신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늘 자기 깨어짐의 세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신앙의 초기 시절에만 경험해야 될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경험해야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전진하려고 할 때 발목 붙들고 있었던 사람은 모두 이런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의 아집과 독선이 교회의 발목을 붙들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전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신자가 주님 앞에서 자기 깨어짐의 세계가 있는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그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매일 교회당에 엎드려서 눈물 콧물 흘려도 전혀 변한 게 없다’고 비난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자기 깨어짐이 있으니까 그나마 후퇴를 안하고 불변의 자세로 서있지 만일 그것도 없다고 한다면 악한 데로 전진해서 괴물과 같은 사람으로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 깨어짐의 세계가 정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만일 가롯 유다에게 자기 깨어짐이 있었다면 그렇게 사단에게 마음을 내어준바 될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가 만일 요한처럼 예수 홀로 버려둔 것을 후회하며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골고다에서 내려오는 군중들의 어깨를 밀치면서 십자가 언덕으로 올라가서 피 떨어지는 나무 십자가 아래서 무릎을 꿇었더라면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거룩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중요한 표징이었습니다.
요한 계시록 제 5장에 보면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인봉이 되어서 주의 계시를 볼 수 없다-고 하니 어린 아이처럼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백발의 노 사도가 주님의 말씀인 계시를 보여줄 사람이 없다고 하니까 통곡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에클라우센’이라고 희랍어 성경에 나오는데 ‘통곡하면서 운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많이 크게 소리를 질러서 통곡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종의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것이 정말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이 사회를 좀더 밝고 명랑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이 지혜를 모으고 헌금을 모으고 기구를 만들고 조직을 하고 감시대를 만들고 하는 그 일을 열심히 하는 것보다 거기에 참여하는 각 사람들에게 자기 깨트려짐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의 심령에 내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사람이 만든 기구가 할 수 없는 위대하고 큰 일들을 이루어 놓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깨어짐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주께서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나이가 많이 들어서 백발이 성성해서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 깨어짐의 세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도 하지만 우리를 한없이 연약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를 한순간에 천국에 데려가기도 하지만 어느 한순간 그 사랑 때문에 절망의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 같은 좌절을 경험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 사랑의 위대한 힘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의 신자가 주님을 진실되게 사랑한다면 그에게는 반드시 그런 자기 깨어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문제는 그런 자기 깨어짐이 왜 오느냐는 것입니다. 훌륭한 찬양단이나 성가대가 그런 자기 깨어짐을 유발합니까? 거창한 학위나 목회자가 걸치고 있는 고고한 복식이나 화려한 예배당이 그런 자기 깨어짐을 유발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깨어짐을 유발합니다.
(예화: 이번 예배당을 건축하며 강대 상 뒤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벽돌을 깨 트려 쌓았다)
자기 깨어짐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소중한 것인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응시함으로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천에게는 명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신앙이 관조적으로 흐르면 안됩니다. 흔히 내리는 명상의 정의는 영혼의 시선을 한 곳에 응시하고 자기가 적극적으로 어떤 생각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개념이 좀 다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도록 주님의 말씀의 미각을 덮고 있는 것들을 다 거둬내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나면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대한 미각들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은 묵상을 통해서 먼저 해야될 것은 무엇을 찾아간 다기보다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춰서 옳지 않은 생각들의 껍질들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 독특하고 고유한 말씀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영혼의 속살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거의 묵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각질이 계속 쌓입니다. 그것들을 걷어내야 합니다. 그런 말씀의 미각의 회복을 통해서 자기 깨어짐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에게는 그런 입맛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이 나의 입맛에 어찌 그리 달콤한지요'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예전에도 아마 이 시인은 안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고 또 자기와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달콤함을 모른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주님 안에서 이런 은혜, 이런 사랑의 달콤한 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가져다준 영혼의 효과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하면 이런 말씀의 미각을 간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직업이 3만9천 가지쯤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포스터에 있는 영화배우 코에 그려놓은 콧수염을 지우는 직업도 있다고 하고 위스키나 포도주를 감별하는 감별사도 있다고 합니다. 눈을 감고도 포도주를 마시고 몇 년 산 무슨 브랜드인지를 거의 알아맞힌다고 하니까 굉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 스킨 로션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후각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보다 더 기막힌 사람들이 나왔는데 물맛 감별사입니다. 눈을 감고 물을 마시면서 프랑스산 생수인지 알래스카 빙하에서 채취한 것인지를 감별한다고 하고,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어떤 종류의 물을 마셔야 할지를 권할 수 있다고 하니까 대단합니다. 그런데 감별사는 그 물맛의 차이를 아는데 먹는 사람 중에는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맛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이 사실은 승리하는 인생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달콤함의 미각을 간직하고 그 말씀 앞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큰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간직한 사람은 주님의 은혜 아래 살 것이고 주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소유한 사람이고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모자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면 주님께 기도해서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기도해도 주님이 주시지 않는 것은 그에게 필요가 없는 것이니까 주님이 안 주셨을 것이고 고난이 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고난을 물리치거나 이길 힘을 공급받을 것이고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기 깨어짐 속에서 그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면서 주님의 일을 이루면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재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어느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입맛에는 매우 달콤합니다’고 고백했습니까?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히브리 성경에는 “내가 주의 판단들로부터 멀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당신께서 나에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복수로 되어있으니까 시인은 주님이 자기에게 살라고 주신 말씀 가운데 자기 취향에 맞는 몇 가지를 골라서 순종하면서 살아간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소중한 것은 자기의 취향에 맞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시인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때문에 사랑했고 주님이 자신에게 살라고 제시하시는 삶의 판단들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면서 살려고 애를 쓰고 살아갈 때에 시인 속에 있었던 확신은 '주님이 명령하시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초점 그 자체가 주님께 놓여있고 주님이 자신에게 제시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로 하여금 신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었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판단을 따라서 살려고 했던 그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분투하면서 살았을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함으로서 말씀의 미각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잠시는 그렇게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천적인 순종이 없이 성도가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달콤한 미각을 간직하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진리의 말씀이 들려질 때에 거기에 반응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영혼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과는 관계없이 살아가는 삶의 무기력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초롱초롱한 눈으로 주님의 판단을 구하며 주의 뜻을 좇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달콤한 미각이 간직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실천적인 삶의 장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영혼의 위로를 위해서 엔조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다운 미각이 오래도록 그의 영혼 속에 간직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는 그런 일들이 가능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기 때문에 시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주의 말씀과 판단을 따라 살려고 하는 실천적이고 의지적인 순종의 노력 없이 말씀의 미각을 간직한다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부지런히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진실된 삶을 살려고 애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름다운 미각을 간직하고 자기 깨어짐이 있는 신앙생활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1. 기도 중에 말씀을 바라라(1)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시119:147)”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엇인가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분투하는 장면이 오늘 읽은 본문의 뒤편부터 시종 일관 지속되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은 그 시편의 길이만큼이나 다양한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큰 감사와 감격에 넘치는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시인이 깊은 영혼의 침체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회복을 갈망하며 분투하는 장면들도 나옵니다.
이 시인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에 은혜를 부어주시고 그 은혜로 그 영혼이 참다운 만족을 누리게 될 때 비로소 주님을 사랑하는 삶도 가능하고 신자다운 생활도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만들고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시켜주는 놀라운 변화, 놀라운 은혜들을 갈망하는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 영혼의 변화에 참된 수단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들이 아무리 신자의 이름을 가지고 교회에 모여서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 산다고 하더라도 그가 정말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그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들을 인도하신다고 하는 확신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무신론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형식과 껍데기 속에 머물고 그 껍데기 속에 있는 내면의 속 사람은 전혀 변화되지 않고 자기의 이성과 자기의 주의 주장을 따라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으로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 것을 깊이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시인이 경험했던 것처럼 영혼이 진토에 떨어지는 것같이 비참한 처지에 있고 어두운 죄악 속으로 들어가서 여러분의 마음에 어떠한 평강도 발견할 수 없을 그 영적인 깊은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건져주셨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이러한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실 때에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음의 빛으로 우리의 영혼에 참다운 변화가 가능하게 만드셨다는 체험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깨트려지고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이제껏 알지 못했던 무지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인격을 경험하게 되고 그 인격적인 경험 속에서 신자의 참된 축복, 그리고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책들이 최근에 굉장히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읽으면서도 마음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도 그 자체가 너무 비인격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모든 책들이 기도만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는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은 모두 기도하지 않는 데에 가장 커다란 원인이 있다’는 논지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경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관심은 기도보다도 기도하는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똑같은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올라와도 하나님의 관심은 누구의 기도냐는 것입니다.
(예화: 똑같이 나라 걱정을 해도 탈세하고 애국심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과 우국지사 가 하는 말이 같을 수 없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똑같다고 해서 그 기도가 같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간절히 한다고 해서 그 기도가 모두 같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관심은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이 바뀌면 기도의 내용도 바뀝니다. 사람이 자라가면서 요구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어릴 때는 사탕하나 주면서 이웃집 아저씨에게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면 그렇게 하고 사탕 얻어먹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구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처럼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람이 참되게 변화되지 않으면 그가 하는 기도도 하나님 앞에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깊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을 적게 밖에 영화롭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깊이 변화 받지 못한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 기도 속에서 찾고 주님의 그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기도하기보다는 주님 앞에 드리는 그 기도를 자기의 뜻을 성취하고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들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깊이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진토에 떨어진 것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새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까? 악인에 에워싸여서 핍박을 받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아파하던 이 시인이 그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모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이 시인은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고 환난과 위중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을 변함없이 신뢰하고 따르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주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깊은 변화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점점 더 깊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흔히들 하나님 앞에 깊은 회심을 경험하고 인생에 있어서 어떤 강력한 돌이킴의 시간들이 있었던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주님의 진리를 알고 강력한 돌이킴의 체험도 있고 평균적인 신앙생활을 꾸준하게 이어가고 그의 삶 속에서 특별하게 소문날 죄가 보이지 않고 안정적인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변화된 사람들에게는 변화된 기준을 가지고 그 사람이 더 온전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죄악 되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경건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기 훨씬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그 일에 깊이 관여하면서 신앙에 있어서 여러 가지 점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외관상으로 황량하게 버려졌던 공장의 상태를 0이라고 치고 우리들이 교회에 들어가서 입당예배 드릴 때쯤의 완벽한 모습을 100이라고 친다면 80%까지 완성하는데는 두세 달이면 되는데 나머지 20%는 10%를 높이는 것이 80%까지 올라갈 때의 20%를 높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시간이 걸립니다. 이쪽과 저쪽에서 벽을 쌓아오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약간 틀어졌다면 그 부분을 말끔하게 마무리하는데 드는 시간이 지금까지 벽을 쌓아온 시간의 절반 이상이 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벽을 허물고 쌓을 때는 ‘하루가 다르다’고 하더니 요즘은 ‘변한 게 없네요’합니다. 변한 게 없어도 매일 몇 십명이 매달려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한 것입니다. 벽을 쌓던 사람이 마지막 문틀 하나를 가지고 하루 종일 매달립니다.
그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짐승처럼 살던 사람을 하나님이 한 대 때리셔서 정신 번쩍 차리게 하셔서 울며불며 회개하고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하고 돌아서서 ‘이제 교회 빠지면 안되겠다. 교회 다니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주님의 형상을 닮기까지 성화 되라고 하신다니 부담은 좀 가지만 그렇게 살아야 겠구나’하고 정돈되는 것은 마치 80%의 공정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틀이 잡힌 사람들의 죄가 더 교묘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의 오류가 훨씬 더 정교해서 자기 자신도 파악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들이 신문에 날만한 커다란 죄를 짓고 여기에 온 사람들이 있습니까?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은혜 받기가 두려울 정도로 엄청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여러분 모두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싼 자재로 집을 짓다가 두 벽을 쌓았는데 마지막을 마무리 할 수 없어서 그냥 시멘트로 대충 발라놓으면 비싼 자재가 아깝습니다. 블록으로 막 쌓아서 회벽으로 쌓은 것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이상합니다. 마무리를 정교하게 해야지 만 아름다운 공간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천장을 하얀색으로 하기를 원했었는데 평촌 예배당에 가보면 나무가 접혀서 각도가 꺾어졌는데 각도기를 재보면 90도입니다. 연인원 100여명이 넘는 사람이 천장에 매달려서 하얀 페인트를 칠했습니다. 그래서 조명이 비치고 그림자가 떨어지면 선명한 선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건물이 아주 아름다운 건물이 되었습니다. 대충하는 줄 알았는데 연인원 100명이 넘는 인원이 매달려서 머리에 하얗게 뒤집어쓰고 사포 질을 했습니다. 칠하는 사장의 말이 이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천장이 나오고 여지껏의 수고가 빛을 발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예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재료는 괜찮은데 녹슨 대못으로 쾅쾅 박아서 옆을 지나가다가 살이 긁히는,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벽을 한번씩 발로 차고 지나가는 그런 건축물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보는 사람마다 ‘어쩌면 이렇게 곱게 마무리를 해서 이렇게 예쁜 건축물이 되었을까’하는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싶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하신 것은 바로 우리를 깎고 다듬고 변화시키고 해서 주님의 형상을 닮기까지 온전한 사람으로 ‘너를 보는 이마다 주 생각하리’해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무리가 너무 힘듭니다. 많이 깎여지고 많이 변화되고 많이 다듬어지고 많이 부서져서 예전에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마구 살아갈 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것들을 붙들고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고민하고 하나님 앞에 가슴조리면서 주님 앞에 깨트려질 수 있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 사역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교회에서도 일꾼으로 인정을 받고 교회 의사결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깊이 개입하고 교회를 위해서 물질적으로도 헌신을 많이 하는데,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는데, 도저히 살아있는 신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신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우리 교회라고 그런 사람들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지속적인 감화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은혜의 역사가 계속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바랄 최고의 축복은 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매일 뵈옵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늘 자극을 받으며 그 말씀의 감화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결점과 불결한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의 허물들을 깨달으면서 그것들을 깨치며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씀에 의한 은혜의 작용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만 우리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보면 우리의 생애 중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던 때가 언제입니까?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실 수도 있고 안 계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있어도 거기에 주님이 계실 수도 있고 안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주님이 그 사건 안에 계셨습니다. 사업을 잘 해서 돈 많이 벌면 그 안에 주님이 계십니까? 물론 한 사람이 신앙생활 잘 하면서 사업을 할 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돈이 막 벌리면서 ‘내가 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벌어주시는구나’ 하면서 하나님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돈 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병상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데, 병상에 누운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상에 한번 누워보고 죽음에 직면하면서 ‘주님이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구나’를 깨닫고 신앙의 자세가 새로워지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병상에서 주님을 만납니까? 병상에서 오히려 더 절망 중에 시달리며 마음이 강퍅해지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모든 것은 다 상대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모두 하나님이 계실 수도 있고 안 계실 수도 있는데 한 상황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심령이 깨트려질 때 하나님이 안 계시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그 삶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우리는 흔히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령한 세계가 있는데 그 속에 한 번 쑥 들어가면 -마치 입장권을 들고 극장에 들어가면 계속 그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것처럼- 계속 신령한 은혜 속에서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런 삶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이 만일 가능했다면 하나님이 천국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찬송가의 그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거의 아홉 달 가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길’이라고 하는 요한복음 15장의 성화의 교리를 설교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길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한번 신령한 세계 속으로 쑥 들어가면 계속 신령한 세계 속에서 그것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고 그것을 맛본 사람 중에서도 그러한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핍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습니다.
한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 때 그 결정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통해서 그 사람이 간헐적으로가 아니라 계속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지속적인 자기 깨어짐, 그것만이 그를 은혜 안에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적 그리스도인과 영적 그리스도인’ 제 4과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과 관련이 됩니다.
(예화:집회 갔을 때 어느 장로님이 ‘이 지역에서 나만큼 주의 일 많이 하는 사람이 없 습니다’했는데 집회가 모두 끝난 다음에 악수하면서 창피해하던 이야기)
자기 자신이 ‘나 쓸만하다’ ‘괜찮은 사람이다’ ‘신앙하면 나지’ 하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왜 필요로 하겠습니까? 제가 늘 말씀드리듯이 우리의 신앙의 경험은 성경의 빛을 받아서 정리되기만 하면 성경 다음으로 우리에게 굉장히 소중한 신앙생활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주님이 여러분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져서 그 십자가만을 사랑해야겠다고 결심하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자부심에 넘치던 때였습니까? 그럴 때에는 십자가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그런데 나는 이제 그것을 다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했습니다. 히브리인으로 태어난 것이 죄입니까? 율법의 의를 따라서 열심히 산 것이 뭐 잘못된 것입니까? 난 지 팔일 만에 할례 받은 것이 창피한 것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배설물과 같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닌데 이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고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교만이 일상화된 사람들에게는- 결코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현재적인 체험’이 어떻고 ‘영적 그리스도인’이 어떻고...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말일 뿐 가슴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자기가 정말 변화 받아서 남들이 볼 때 좋은 신앙인으로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도 많고, 안 믿는 가족들은 예수에 미쳤다고 합니다.
다 그렇게 얘기를 해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가. 다른 사람들은 나보고 예수에 미쳤다고 말하지만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비하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비루하고 초라한가'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가 많이 바꿨다고 말하지만 반쯤 타다가 연기만 내는 나무같이 그렇게 성화 되다가 중간에 멈춰버린 존재라는 사실을, 그래서 불 꺼진 장작이 그 나는 연기로 불 때는 사람을 눈물 나게 하고 괴롭히듯이 성화 되다가 맛만 보고 중간에 그쳐서 주님의 마음에 그렇게 아픈 눈물을 드리는 것을 자기도 압니다. 그 때 자기가 변화된 것, 자기가 깨달은 말씀, 자기가 주님을 섬긴 것, 희생한 것, 봉사한 것, 주를 위해 산 것, 주님 만남의 체험, 이런 것은 다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오직 떠오르는 것은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이 나를 많이 변화시켜 주셨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보게 변했다고 말하고 내 가족들은 날 보고 예수에 미쳤다고 말하지만 주님 저 이렇게 더러운 사람입니다. 이렇게 망가진 사람입니다. 주님이 고치려고 해도 그렇게 고쳐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자기 절망을 경험하는 것이 자기 깨어짐의 핵심입니다. 깨어지고 나면 주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평생 성도들이 그렇게 당신에 대한 절대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 소유를 다 팔고 내 모든 행복을 팔고 심지어는 내 생명을 단축하고 내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사야될 것이 있다면 그것입니다. 까만 머리 팽팽한 얼굴로 주님을 영접했었는데 은혜 생활하고 신앙생활 하다가 세월이 많이 흘러서 백발이 되고 얼굴에 윤기가 사라지고 골 깊이 패여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는, 그래서 그 말씀의 빛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비추는 그 은혜의 감화, 영적인 성찰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런 은혜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깨어짐의 세계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존경받아야할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죄의 크기나 그 사람의 악한 일들에 대한 소문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죄는 나를 향한 죄가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죄였습니다. 문제는 그가 아무리 단정하게 살아도 이런 깨어짐의 세계가 없으면 그는 지독한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깨어짐의 세계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된 사람입니다. 저는 그것이 정말 소원입니다.
마지막에 거룩한 그 사람이 진짜 거룩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람들 말고, 처음에는 혈기로 시작한 것 같아도 나중에 변화되어서 성령으로 마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인의 마음을 깊이 변화시킬 때에 그런 경험들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바라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랍니다’했습니다. ‘바란다’고 하는 것은 희망을 그분께 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put hope'라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말씀‘은 히브리 성경에서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인생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거기에 두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고치고 변화시킬 것이라고 하는 분명한 사실들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계속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계시는지요? 그것만이 우리를 주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신자다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성경에 보니까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했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축복의 말씀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니까 시인이 바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비추시고 자신의 존재의 현주소를 밝혀주셔서 그 말씀을 나침반 삼아서 자신이 그 말씀 속에서 나타나는 주님의 기대를 따르는 존재가 되고 싶고 그 기대를 따라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로 기복 신앙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정리가 됩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초보일 때에는 기도를 많이 해서 하나님에게 통보하는 것입니다. 소리도 고래고래 많이 지릅니다.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안 해주실 것 같은 것을 센 기도로 하나님을 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고 나면 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들어오도록 충분히 항복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보적인 기도는 자기가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만 높은 수준의 기도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시도록 자기를 다 포기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흘러 들어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 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
22. 기도 중에 말씀을 바라라(2)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시119:147)”
신자가 아무리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바라고 살면 그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예수님이 사셨던 것 같은 완벽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기대를 가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모두 비웃었습니다. 왜냐하면 본받을 수 없는 것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주님처럼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신자의 신실한 신앙생활은 어느 정도 주님의 모본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늘 기도하고 늘 성경보고’ 하면 마지막 결론은 ‘너를 보는 이 마다 주 생각하리'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모본을 반영한 것입니다. 진본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실물을 카피 뜬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모본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정말 그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 주님의 모본을 반영하는 인격, 그런 삶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결국 자기 자신의 결심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고 그 사람 속에 들어와서 새롭게 역사 하시는 주님이 하실 수 있는 일들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그렇게 들어와서 역사 하시느냐면 진리를 통해서 그 사람 속에 오셔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변화되고 나면 그 다음에 즉각적으로 인생이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주님이 오셔서 자기와 함께 사시는 것이라고 하는 아주 분명한 경험을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면서 살고 그 말씀에 의해서 영향받는 삶을 살아야지 만 그가 신자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너무 분명한데, 그것이 기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말씀에 대한 체험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지식의 진보들은 우리들이 흔히 하나님의 어떤 성품에 대한 경험은 없이 차갑게 1권, 2권, 3권 학습의 진도를 나가는 성경공부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 차이점을 이야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경 공부는 지적인 탐구임에 비해서 이 시인에게 있어서는 성경공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가는 그것이-바이블 스터디 클라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존재적인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가고 그 속에서 주님의 성품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뼈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아 가는 지식이지만 그 지식을 체득하는 방법 자체가 오늘날 우리의 삶을 바꿔놓지 못하는 실패한 성경공부를 통해서 체득하는 지적인 탐구에 편중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아갑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그 지식이 쌓여가고 그것이 그의 삶 전체 속의 체험에 녹아들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몰랐을 때에는 살 수 없었던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고 그런 생활에 대해서 도전하도록 이 사람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결국 이 사람의 말씀에 대한 경험들이 얼마나 풍부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만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감화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건강에 있어서 심각한 위험신호입니다. 앞으로 위험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로 미끄러지는 타락, 침륜에 빠지는 것,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 그 마음속에서 시작된 미끄러짐, 침륜, 이런 것들은 결국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주의 말씀에 의해서 끊임없이 감화를 받고 은혜를 받는 삶을 못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이 세상에서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축복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감화를 받는 삶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는 삶이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구해야 할 삶입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깨어짐이 있는 지체들입니다. 그들은 늘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형상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형상이 날마다 새로워져 갑니다. 그래서 때묻은 구슬을 닦아내듯이 그러한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형편없이 살던 사람이 닦아지고 다듬어져서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평생 간직하고 사는 것이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축복입니다.
문제는 오늘 시인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란다’고 고백하기 전에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했습니다. 새벽이 되기 전에 벌써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은 나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해 주실까? 주님은 오늘은 나에게 당신 자신의 어떤 성품을 가르쳐 주셔서 나로 하여금 그 성품에 감화를 받고 그 성품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어떤 삶을 살라고 하실까?’를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 시인이 새벽 전에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한 일은 간절히 부르짖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르짖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면서 사는 일이 가능했을 지도 모릅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과의 살아있고 생생한 교제를 통해서 그 경건이 시작되고 또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 생활이 동반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탐구는 얼마 가지 못해서 지적인 포만감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런 지적인 포만감을 느끼게 되면 그것은 사실 실제로 많은 지식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 사람이 포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감퇴되었기 때문에 느끼는 포만감입니다.
(예화: 다이어트의 많은 방법 중 먹지 않았는데도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거짓된 포만감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며 영양의 공급이 현저하게 줄게 되어 몸이 상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탐구하고 말씀을 깨달으려고 한다고 해도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가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지적인 호기심이 가져다 준 탐구에 불과하고 그런 속에서 어느 순간에 만족을 느끼게 되면 그것은 영적인 포만감이 아니라 지적인 포만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성경에는 똑같은 이야기만 써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적인 포만감입니다. 그런 것들은 풍성한 삶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가 된 이후로 보따리 싸들고 다니면서 좋은 설교 들으러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소위 ‘sermon taster’ ‘설교 맛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이 자신의 심령 깊은 곳을 침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에 대한 호기심이나 탐구뿐만 아니라 진정하고 인격적인 기도생활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기도생활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말씀 생활에 커다란 유익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기도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것을 크게 두 갈래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선 첫째는 기도 생활은 그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작용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신자가 깊이 영향을 받을 때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신자가 그 말씀에 대해서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아주 적은 영향력이라면 ‘내가 사는 삶이 잘못됐다는 것이네’정도의 의구심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말씀의 충격에 따라 ‘여태까지 내가 산 삶은 짐승과 같은 삶이었구나’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정말 더럽고 수치스러운 일이구나’ ‘내가 살아있으면 살아있을수록 하나님에게는 누가 되는구나’하는 생각까지 우리를 데려갈 수 있습니다.
그런 말씀으로부터의 깊은 감화가 오게되면 반드시 거기에 대해서 사람은 크든 작든 반응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응이라고 하는 것도 물이 흘러갈 때 물길을 터주면 더 잘 흘러가듯이 반응이 올 때에 그렇게 자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극된 은혜로운 깨달음,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을 터놓아서 자신의 마음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응하고 그것을 고백하게 만들어야지 만 이것이 풍부한 은혜를 자기에게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건드리고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은혜로운 자극이 느껴지는데 그 때에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그 은혜에 대해서 기도로 반응해야지 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의 역사가 더 증폭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서 뭔가 은혜를 받은 것 같고 뭔가 하나님의 인격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예배 끝나자마자 눈물 씻고 밖에 뛰어나가서 세상적인 노래나 듣고 술친구들과의 약속에 뛰어가면 받은 은혜의 정서들이 금방 고갈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생활은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극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기도하려고 결심하려는 것은 마치 맨땅을 손으로 파는 것처럼 힘이 들지만,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깨트리고 움직이기 시작하실 때 그 때 기도하는 것은 흙을 삽으로 파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의 큰 능력에 의해서 자신이 압도되었을 때에 기도하는 것은 마치 굴착기로 땅을 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거의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극을 받는 신령한 경험은 전혀 없이 열심히 기도만 해야겠다고 하는 경건 생활은 절름발이 경건 생활이고 현실적으로 효율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극을 받은 것을 깊이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서 기도하면 그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우리 속에 있는 각양 더러운 감정, 욕망, 부패한 욕심, 하나님을 거스르는 완고한 마음, 이런 것들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흠뻑 자기를 다 드리면서 열심히- 자기가 열심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간절히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셔서 자신의 중심을 쏟아 붓고 -깊이 기도하고 난 다음에 느끼는 느낌이 정결함입니다.
죄의식과 자책감들 속에서 견딜 수 없고 심지어는 오늘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일들이 하나님의 진노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가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하나님이 내 마음을 열어서 간절하게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눈물로 자기의 죄를 토설하고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주님 의지하는 마음 주시고 그 기도 속에서 주님이 자신의 눈물을 보시는 것이 느껴지고 사죄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렇게 간절한 기도가 한참 지난 후에 은혜 속에서 그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날 때 느끼는 것은 정결함입니다. 이것이 기도 속에 있는 정화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하시고 진리의 복음이 믿음을 심어서 그를 한번 정결하게 하지만 그 정결해진 사람은 기도가 말씀의 영향력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때묻는 자신의 영혼의 더러움들을 털어 버리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이 없이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들은 무모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경력이나 과거의 화려한 이력, 하나님에 대한 풍부한 체험과는 상관없이 기도의 필요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존합니다. 그것은 평생 우리들이 져야할 짐이고 평생 져야할 우리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입니다. 그 기도 속에서 끊임없이 정결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결해지기 위해서는 흔히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도생활 없이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뭔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면 좋지 못하겠구나’하는 반성 같은 것들을 우리들은 깨어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성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도덕적 법칙이나 인과율에 의존해서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아서 장단점을 찾는 것이고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러한 도덕 규칙이나 자기 자신의 인생관에 비춰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면전 앞에 자기를 세우는 데서 경험하는 깨트려짐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참회라고 부르고 자기 깨어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깨어진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풍부한 기도생활을 기초로 자기 깨어짐이 그 사람의 인격의 특징이 되는 것이지 기도생활을 거의 하지 않는데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깨어짐이 아니라 얻어맞음입니다. 못하니까 하나님이 수시로 손 좀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자기 깨어짐이 아닙니다. 그냥 얻어맞는 것입니다.
징계와 자기 깨어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징계는 하나님이 혼내시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은 하나님 앞에 혼나기 전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보아서 자신의 삶이나 존재, 마음, 신앙의 태도, 죄의 모든 뿌리까지 비추어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몰고 올 마지막 결과를 생각하면서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게 되기를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기 깨어짐입니다.
물론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는데도 자기 깨어짐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생활들이 정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이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기가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위엄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깨닫고 깨트려지고 주님의 도덕적인 완전성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 존재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통된 현상이 자기 깨트려짐입니다. 한 사람이 굉장히 열심히 기도생활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깨트려짐이 없다면 정상적인 영성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아무리 그가 열심히 기도하려고 애를 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기도생활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데 실제적인 원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 기도생활 가운데에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깨트려짐을 통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많이 받았을 때 많이 깨트려졌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는 우리 자신이 잘 깨트려지지 않았습니다. 얻어맞은 적은 많지만 깨트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신자의 마음이 계속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고 나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의 갈증이 생기는 순환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화: 심방가면 먼저 책꽂이부터 보는데 그 사람이 어떤 신앙생활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다 읽고 난 다음에 기도하고 싶어지는 책이면 좋은 책입니다. 설교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들으나 마나한 설교가 가장 안 좋은 설교입니다. 들었을 때나 안 들었을 때나 아무 차이가 없는 설교입니다. 그것은 설교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들었을 때 그 설교자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설교입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설교는 설교를 다 듣고 나면 설교자가 떠오르고, ‘어쩌면 저렇게 박식하고 말도 잘할까’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도 안보이고 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싶어하게 만드는 그런 설교, 조용한 골방을 찾아가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폐부를 가르고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설교, 제목도 잊어버리고 설교자의 이름은 잊어버렸어도 그것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붓게 만든 그 설교가 훌륭한 설교입니다.
기도는 이처럼 말씀에 의한 영향력을 극대화시켜서 사람을 정결하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더럽게 때묻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연초에 주님이 ‘마음 지킴의 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 잘 지키고 계십니까?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이 끊임없이 정화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밭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즉시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리고 결실할 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되거나 혹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기도생활 하셔야 합니다. 기도가 살아있는 신앙생활, 마음으로 하나님을 늘 찾는 간절한 기도의 영에 의해서 지배되는 신앙생활은 그를 끊임없이 정화시켜 주어서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이 더럽게 때묻었을 때에 그것을 인정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트려주는 놀라운 힘이 그 안에 내재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러한 말씀의 은혜 속에서 살기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 예배당에 입당하면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을 하나씩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입당 감사헌금도 할 것입니다. 그 입당감사헌금은 신학교 다니는 학생들을 위해서 장학금으로 지급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 소중한 것은 기도의 헌신을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을 위한 기도의 헌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이 기도생활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받은 은혜가 간헐적인 은혜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여러분 속에 남아서 여러분의 삶을 움직일 수 있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자신의 무릎을 쳐서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생활이 필수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변절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배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깊이 영향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진실하고 인격적인 기도생활, 환경에 의해서 쉽게 굴복하지 않는 견고한 기도생활이 어떤 식으로든지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당할 때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평생 새벽기도의 헌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지킬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주님이 자기에게 처음 은혜를 주셨을 때에 자기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루고자 하시는 사명에 눈 뜰 때에 느꼈던 진지함, 그리고 생명보다 소중한 자신의 사명에 의해서 살아야겠다고 하는 진실한 결심, 주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복음의 진리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지 않았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이 이 세상에서 주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훼방하면서 살았을 수밖에 없는 이 벌레 같은 인간들을 주님이 은혜 주셔서 바꿔놓으셔서 우리 같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어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은 아마 100만원이나 1000만원 헌금보다 훨씬 힘들 것입니다. ‘일평생 새벽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 주님의 이름과 교회의 명예와 조국의 교회와 잃어버린 영혼과 하나님 앞에 은혜 받아야 할 나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미혼이었을 때나 기혼이었을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높은 지위에 있을 때나 낮은 지위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내가 그렇게 다니엘처럼 시종일관 주님을 찾으면서 살겠습니다’
그런 기도생활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이 정화되어가고 그러는 가운데 주의 말씀의 은혜가 증폭되기 때문에 이 시인은 기도생활로 자신의 마음을 준비하고 준비된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심어 아버지 앞에 거룩한 삶을 위한 전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끊임없는 시련과 도전, 핍박 고난, 어려움, 난관, 모든 것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살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힘이 그 모든 것들을 이기게 만들었고 날마다 행위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주 앞에 복스러운 존재로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전진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감화를 받는데 있어서 기도생활이 주는 또 하나의 강력한 유익은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이 기도생활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면에서 우리의 마음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의 곤고한 일도 많고 이렇게 저렇게 죄로 말미암아서 심령의 어려움도 많고 할 때 주님 앞에 깊이 뉘우치면서 기도할 때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정결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게 자신이 정결해진 것을 느끼면서 그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설 때 그 마음에는 또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 수 없다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감정이 기도가 가져다주는 힘입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범사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남 보기에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어도 ‘주님 저 혼자는 정말 못합니다’합니다. 처음에는 잘난 척하는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태껏 잘 살았는데도 은혜를 깊이 받고 나면 살 수가 없어서 ‘오늘 하루도 저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합니다. 그 이유는 은혜 받기 전에는 살아있으면 다 사는 것이었는데 은혜를 받고 나니까 살아있는 모든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은 모든 것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밥 먹고 돈 벌며 하루동안 기분 좋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은 후에는 그런 것을 가지고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있기 위해서는 내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이 충분히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뭔가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하루를 살았을 때에 그것이 산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언제 죽었었습니까?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도 없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행복도 없고 살아가는 이 모든 생존이 그분의 불명예였고 그분에게 고통을 준 행위였기 때문에 주님을 믿기 전의 우리의 생은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혜 받고 나면 도저히 내 힘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시편 119편에서 보여준 아름다운 신앙의 모본,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은 결국은 지금 설교 속에서 여러분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그 마음입니다. 시인이 시종일관 그 마음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실하고 인격적인 기도생활의 도움 없이는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 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믿음생활 해오면서 오랫동안 예수 믿으면서 마음속으로 ‘나는 하나님 앞에 정말 비천한 존재입니다. 주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나는 아무 희망이 없는 존재입니다’하는 고백을 뼈 속 깊이 간직하면서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땅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희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말씀을 바라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전심으로 주님을 찾으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우리에게 이런 마음을 유지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셨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잠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그것이 가슴에 와서 깊이 꽂히고 자기 자신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믿으며 그 말씀을 의지해서 자신의 인생의 항로를 바꾸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리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열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섬기고 충성하고 죄와 더불어 싸우는 모든 일들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의롭게 사는 사람도 좋아하시고 율법의 의를 행하는 사람도 좋아하시고 긍휼을 베푸는 사람도 좋아하시고, 주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선악간의 행위를 떠나서 주님이 간절히 찾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당신께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그렇게 깊이 칭찬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신앙의 고백과 교훈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높은 덕목인 것처럼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삶을 곧 하나님을 버리는 삶이라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갖게끔 만들어줍니다. 수시로 우리의 죄와 욕심에 의해서 주 의지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주님이 변화시키셔서 주님의 뜻대로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생활이 가져다주는 힘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이 교회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하며 다리 꼬고 앉아서 ‘한 번 들어보지’하는 태도와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무엇이든지 나에게 말씀하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소서’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간절한 부르짖음의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한 것 사이의 차이는 마치 씨앗을 콘크리트 위에 뿌리는 것과 보드라운 밭에 뿌리는 것과의 차이와 같습니다. 콘크리트 바닥에 아무리 씨앗을 뿌려도 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기도를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바꿔놓으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기 전에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의 영혼의, 자신의 마음의 묵은 때를 하나님 앞에서 털어 냈습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에 의해서 감화 받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간절한 부르짖는 기도생활이 그의 말씀생활에 감화를 불러 일으켜서 시인으로 하여금 그 가시밭길을 지나는 것 같은 난관 속에서도 주님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말씀에 의해서 감화를 받는 삶을 누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가시밭길이 오히려 하나님과 밀어를 나누는 그런 시기가 되었고 시련에 가득찬 때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런 생애에 잊혀지지 않는 때가 되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 속에서 이 봄을 지내며 기도를 잊어버린 여러분들이 그 게으름과 나태한 생활을 여기에 다 묻고 가십시오. 그리고 새 예배당에서 정말 주님 의지하고 매달려 기도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3. 고통 속에서 주의 판단을 인정함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119:75)”
서양 속담에 '쇠는 뜨거울 때 때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지금도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장터에서 건장한 체격의 시골 사람들이 쇠조각으로 어떻게 연장을 만드는지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구브러진 철판이나 쇠동가리를 뜨거운 불 속에 집어넣고 풀무를 열심히 돌려서 시뻘겋다 못해서 하얀빛이 날 정도로 뜨겁게 달궈지면 그것을 집게로 집어서 모루 위에 놓고 재빠른 손으로 망치질을 해 대면 몇 번 불 속에 들어갔다 나갔다 한 후 쇠가 칼도 되고 낫도 되고 호미도 되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크게 영향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과 인생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가장 나쁜 경우는 아무 것도 들은 것이 없고 아무 것도 깨달은 것이 없으면서 교만해져서 제멋대로 사는 것이지만, 그 다음에 나쁜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머릿속에는 많이 남아있어도 그 사람 자신을 두들겨서 새 사람 만드시는 하나님의 변화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 위에 유위부족(猶爲不足)하여 교만한 마음까지 얹혀져서 그 교만함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영향력을 거부하고 자기 생긴 대로 살려고 고집을 쓰고 살면서, 더욱이 그런 사람이 남들을 가르치거나 지도하는 선생노릇을 할 요량이면 그 사람의 인생은 더 없이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 심령에 영향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의 영향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셔도 불에 잘 달궈진 쇠와 같이 그렇게 우리 자신의 마음이 잘 준비되지 않으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우리 속에 역사 하시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원리적으로 볼 때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녹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대체로 하나님께서는 녹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녹이시는 법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먼저 신자는 주님이 갖기를 원하시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알고 그 마음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그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물론 그 노력만으로 그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혼까지 새로워 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애쓰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변화되려고 애를 쓰는 그러한 마음 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영혼에 이르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시인은 하나님 앞에 정말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특이한 고백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괴롭게 하시는 것은 주의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입니다. 그 고백이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실하심은 우리말로 신실하심으로 번역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그 앞에 나오는 것이 ‘주의 판단은 의롭사오며’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말씀에 의해서 변화 받을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이 시인이 제일 먼저 주님 앞에 고백한 것은 ‘주님의 판단은 의롭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집안에도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무능하고 도덕적으로 잘못되고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고 남편을 존경하지 않고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어머니들, 부모에게 할 도리를 다 안 하는 자식, 그렇게 잘못 살아가고 있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일깨울 때마다 그것을 수긍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부분 수긍을 안 합니다. ‘당신은 가장이 되어서 가정도 안 돌보고 밖으로만 나돌며 그렇게 태만한가’하면, ‘나 혼자만 먹고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 가족 먹여살리려고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돌아다니고...’하며 자기 얘기를 합니다. 자식도 마찬가지고 부모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 앞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주님 앞에서 악한 신자들은 항상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변명이 많고 자신의 불의한 행실에 대해서 너그럽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서 어떻게 말씀하시고 판단하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롭다고 표현하는 대신,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잘못하는 사람들이 대개 말은 잘합니다. 사람들이 말싸움에서 지면 그것이 바로 자기가 정당한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는 양 의기양양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잘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변화되고 그 말씀으로 다시 일어서는 영혼의 회복의 과정을 경험하면서 “주님의 판단은 의롭습니다”합니다. ‘주님의 판단은 언제나 의롭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고백하기 전까지는 영혼의 곤궁함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점에 있어서는 양보를 안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이 한번도 여러분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신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돌아가면 신실하게 하나님이 거기 계셔서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용납해주셔서 우리를 주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다시 새 힘을 주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우리가 잘못한 것을 잘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불의를 덮어두고 그것을 의롭다고 말씀하시면서 까지 잘못된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 앞에 넘치는 위로를 경험하고 사랑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직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야비하고 용렬하고 비열한 사람들-속이 좁고 토라지기 잘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안되면 뒤에 가서 그 사람을 비난하며 동조하는 사람들을 만드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위로를 많이 경험하지 못하면서 삽니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판단은 의롭습니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을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인생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회의주의적인 태도도 안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게 필요한 말씀은 이런 말씀인데’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잘못된 인생을 살아오고도 하나님이 자신의 엉덩이를 두드려줄 것 같은 기대를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말씀만을 기대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목사님, 오늘 저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의 말씀을 주십시오”하는데 위로를 하든지 야단을 맞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자기에게 위로가 필요한지 혼이 나야할 지를 어떻게 압니까? 아이가 0점짜리 시험지 들고 오면서 “엄마 오늘 나 위로가 필요해”해서 정말 위로해주면 야단 맞고 새사람이 되는 기회는 언제이겠습니다.
성도들 중 어느 누구도 ‘책망이 필요합니다. 저를 박살 내주십시오. 저는 깨트려져야 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 때입니다. 위로가 문제가 아닙니다. 반쯤 죽여주십시오’하는 성도는 본적이 없습니다. 늘 ‘위로가 필요합니다’ ‘곤고합니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내가 곤고한 것은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힘들어서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뭘 고치라고 마시고 위로해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목회도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듯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가 그 성경으로부터 받기를 원하시는 영향입니다. 그렇게 해서 변화된 사람이 되면 사람이 위로해주지 않아도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시는 분은 없네’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주님으로부터 받는 그 넘치는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항상 옳습니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119편의 고백 속에는 시인이 바르게 살면서 말씀대로 살면서 핍박을 받는 경험도 있고 잘못 살아서 하나님 앞에 야단맞아서 고난을 당하는 경험도 있어서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마치 해부하듯이 정확하게 가르면서 이 시인의 정서를 이해해야 합니다.
시인이 여기에서 “주의 판단은 의롭습니다”고 할 때 시인의 두 가지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이 자기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주님이 내가 되기 원하는 나와 실제로의 나, 그리고 나를 향해서 하나님이 살기 원하시는 표준과 지금 살아가고 있는 표준을 정확하게 비교하시면서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을 정확하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렇습니다”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제일 다루기 힘든 사람이 잘 삐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감정이 너무나 충동적이어서 다루기가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사람 앞에서 삐지는 것도 인격적인 미성숙인데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닫고 삐쳐버리는 것은 굉장히 큰일 나는 일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한계에 올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으로 갔는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서는 그 정도까지 밖에 사랑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복잡한 판단을 해야할 상황에 직면했는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서는 판단력이 떨어져서 그 문제를 적절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 깊어지고 영적인 수준이 높아질수록 판단이 정확해져서 신앙의 지식이 여린 사람들이 그들 앞에 서면 말을 안 해도 마치 자기 자신을 들키는 것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은혜도 많이 받고 하나님을 풍부하게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도 많이 쌓여져 있는데 어떤 문제를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다루시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 앞에 토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게 말해서 토라지는 것이지 나쁘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즉시 영적인 침체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대체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면서 어느 한 부분에서 실수하거나 잘못해서 죄를 짓거나 불순종해서 그 한 부분에 있어서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닫히고 틀어져 버리는 것은 전면적인 하나님을 향한 항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역입니다. 그럴 때 즉시 영적인 깊은 침체로 들어가고 그는 쉽게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적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이 한결같이 살아가다가 어느 한 순간 ‘아차’하고 실수를 해서 잘못을 범하고 하나님 앞에 가슴 아파 하는 사람이 훨씬 빨리 회복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를 다루신다는 이유 때문에 마음이 틀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가르침을 찾아서 그것을 선호하고 자기를 통해서 자기를 합리화시키려고 한다면 이것은 조직적인 반역입니다.
범죄 행위를 해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칼을 들이대고 돈을 빼앗는 것은 그냥 강도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 이상 면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작전을 짜서 강도를 하면 특수강도입니다. 그리고 서너 명 이상이 조직을 갖춘 것은 범죄 단체 조직에 관한 법률 위반입니다. 그것은 죄가 점점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신데, 하나님이 여러분을 많이 사랑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한번도 여러분들에게 사과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이 거기 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고 변화 받은 사람들은 ‘항상 주님은 옳다’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시다’ 그리고 ‘주님이 나에 대해서 판단하시는 것은 항상 정확하고 진실이다’라고 하는 고백이 확신처럼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하고 말고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판단은 항상 옳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와서 용서를 비시는 법은 없다’ 시인이 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신앙의 고백 속에도 먼저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세 살 먹은 아이가 이야기를 해도 그것이 진리이면 주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옳습니다’ ‘의롭습니다’고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영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회복시키실 때에는 그런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 받지 못하고 살아갈 때에는 자신이 굉장히 어려운 일을 만나면 ‘왜 이럴까’합니다. 심방을 가도 곤경에 처하고 어려움을 많이 당하면 반응이 대개 세 종류입니다. 첫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뭔가 깨달으라고 곤경을 주셨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심이 많은 것 같지만 하나님이 정신 차리라고 어려움을 주셨는데 이 사람은 더 큰 어려움을 안 주시는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참 답답합니다.
공부를 하도 못해와서 ‘공부 잘하라’고 한 차례 때렸더니 그냥 감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한다고 말할 때 ‘나같이 못된 사람을 이렇게 사람되라고 책망해주시는 어머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참 감사합니다’해야 되는데 ‘더 때릴 줄 알았는데 이것밖에 안 때리시니까 참 감사합니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사해야 될 대목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마음 아파해야 할 대목인데, 변화된 다음에 나중에 감사해야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깨달으라고 어려움을 주셨는데 ‘더 큰 어려움 당하는 사람이 많은데 얼마나 감사합니까’하는 형이 첫 번째 케이스입니다.
그 다음 케이스는 죽도록 맞아도 정신 못 차리는 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깨달으라고 어려움을 주셨는데도 자신이 그렇게 곤고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고백하는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불평과 불만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나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까’하며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물론 어느 때는 대놓고 ‘당신이 개떡같이 살아서 혼나는 거야’할 수도 있지만 우회적으로 깨닫는 것이 더 잘 깨닫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어려움도 주시고 사람되라고 책망도 하시지 않습니까’하며 권고하면,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 형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대개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라고 하는 고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판단이 옳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형이 순종형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리고 고난을 당하면서 자기 자신의 아픔을 헤아리는 대신에 자기를 그렇게 때리시는 하나님의 고통 하는 마음을 먼저 읽고 아파하는, 깨달은 마음을 가지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시인이 바로 그렇습니다. “주께서 저를 괴롭게 하심은” 그는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께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고통주시는 분은 아니지만 자신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신자가 잘못한 대가를 받게 하심으로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고 영혼의 변화에 이를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고난을 받으면서 그것을 깊이 터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는데 이렇게 되도록 만든 실제적인 원인은 자기 자신의 죄와 불순종에 있지만 하나님이 이것을 사용하셔서 자기를 바꿔놓기 위해서 그것을 그대로 당하도록 하나님이 허락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석해서 ‘괴롭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어떤 비난이나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잘못해서 그 대가를 받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깨닫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고난을 이야기할 때 욥과 같은 고난을 이야기하는데 그런 고난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악한 삶을 살아서 뿌린 그 씨앗을 열매로 거두는 과정에서 고통을 많이 맛보게 됩니다. 개중에는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애매하게 고난을 많이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는 자기가 뿌려놓은 씨들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 나라의 고자질 문화는 잘못된 것이다-몰래카메라 찍는 것 등)
물론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을 만나서 속임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는 적도 많습니다만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입증된 사람을 속이거나 그를 해코지 할 때에는 악인의 마음에도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야박하고 아랫사람들을 이용하려고 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수단 정도로 생각하며 야비하게 사는 사람들이 배신을 많이 당하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도 의리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항상 동지가 많습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 자신의 담임 목사님의 의리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전도사로 있다가 교회를 개척한다고 하면 힘에 넘치도록 헌금을 해서 보내주고, 교회 짓는 일에 걷어붙이고 일해준다는 이야기)
의리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눈물 겹게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고 하더라고 항상 그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 그 사람을 돕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메아리와 같습니다.
요령으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고 잔꾀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어려움도 많이 만납니다. 자신이 잘못했을 때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이야기하고 그렇게 처신하는 사람들은 고통은 많이 당하지만 야비하게 배신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면서 늘 핑계나 대고 자신이 잘못한 것 변명이나 하고 다른 사람들을 물고 늘어지기나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이것이 주님의 성실하심 때문입니다’ ‘주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제가 지금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하는 고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흔히 고난을 많이 당하면 성화 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를 무조건 때려 기른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전혀 안 때린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난 자식이니 각자 진단해서 해결할 일입니다.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고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각자 적용해야 합니다. 한 대만 때려도 큰일 날 애가 있는가 하면 맞아야 정신 차리는 애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고난을 많이 당한다고 해서 그 고난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고난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영향을 받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그를 그런 사람 만드는 것입니다. 일생 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죽도록 얻어맞으면서 고생만 했을 뿐 고난 속에서 고난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경험 못한 사람은 악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예화: 외국에 이민 가서 고난을 많이 당하며 살던 사람들이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고 거칠어진다)
그러나 은혜 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의 삶을 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이 낮아지고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자기와 같이 어디서도 돌봄을 받을 수 없는 인간을, 복음이 많고 하나님의 은혜가 많은 한국 땅에서도 받지 못했던 그 하나님의 은혜를 그 척박한 이민 생활 속에서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맛보고 만져주시는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사랑하고 변화된 가운데 살아가는-본국의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고난이 가져다 준 성과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들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의 고백은 ‘주께서 괴롭게 하시는 것은 주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고생하는 것은 주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입니다. 잘못된 삶을 살아왔고 그릇된 판단을 해왔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서 제멋대로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괴로움을 당하고 곤고한 일을 많이 만나고 가지고 있던 재물은 날아가고 육신의 질병은 찾아오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등 돌리고 친구들이 배신하고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서글픈 상황을 만날 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은 의로운데 인간들이 나쁘기 때문에 저렇게 배신하고 원수마귀가 자기 행복을 시기해서 어려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은 변화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개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기도를 세게 하면 이런 것들이 물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런 정도의 천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시인도 그랬을 지 모르지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면서 어느 순간에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간섭하시기 때문이다. 내 영혼이 잘못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지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나를 깨닫게 하셔서 나를 돌이키게 하시려고 적절한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이고 그 어려움 속에서 나에게 연단을 하나님이 허락해주시는 것이다’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시는 것은 주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하며 ‘지금 내가 당하는 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내 잘못 때문입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간섭하셔서 내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잘못된 길로 갈 때에 그렇게 되도록 주님이 결코 내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셔서 깊이 개입하셔서 내 인생을 터치하시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신실한 계획이 성취될 수 있도록 내 뜻을 좌절시키고 주님께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나의 계획을 망가트리셔서라도 하나님이 나를 제대로 된 길로 이끄시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축복을 이야기하는데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문제는 하나님의 관심사이고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게 살고 복을 많이 받으려고 하는 생각을 갖기보다는 주님 앞에 옳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야단을 쳐서라도 옳은 사람 만들고 싶어하시는데 우리는 곁길로 가서라도 복 받고 싶어합니다. 그런 가운데 아무리 많은 고난을 당해도 그 고난을 통해 이 사람이 새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이고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행복해지기 보다는 거룩해지고 더 진실해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어하고 그 무엇인가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고싶어하는 그런 삶을 살고싶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자신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읽어낸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이 정말 나를 내버려두시지 않는구나. 내가 불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을 떠나서 잘못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곤고하게 하시는구나. 괴롭게 하시는구나.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직 나를 향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뜻이고 주님이 나를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계시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처음에 나를 가게하고 싶으셨던 그 계획의 도상에 나를 다시 세우고 싶어하시는 그 마음을 내게 보여주시는구나’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아무 것도 깨닫는 마음이 없이 한번에 심판하시기 위해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번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행복이 다 신령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그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무엇인가 변화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이 시인처럼 오늘 ‘주님이 나를 괴롭게 하십니다’ ‘주님이 나를 곤경 속에 내버려두십니다’ ‘주님이 나를 고통 가운데 내버려두십니다’하는 고백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고백이 있다면 뒤따라오는 시인의 고백도 함께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제가 신실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이며 제가 바르게 살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나를 거저 버려두실 수가 없어서 주님이 제 삶에 간섭하고 계시는 증거입니다’하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형식적으로 신앙생활하지 말고 엄숙하게, 예배시간에도 좋고 아니면 혼자 나와서 기도하는 시간에도 좋고,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목사가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유명한 회사 사장도 아니고 교회를 몇 십년 다니며 충성한 권사도 아니고 그저 주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너무 받고 싶어하는 한 마리의 어린양입니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오늘날 제가 당하는 이 곤고함이 모두 제 자신의 부정직과 더러움 때문이고 주님의 모든 판단은 옳으며 제가 이렇게 불순종 가운데에서도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고 주님이 간섭하셔서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주님이 내 영혼을 정말 사랑하시기 때문인 줄을 알았습니다’하는 고백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래서 단 한시간 만이라도 하나님의 눈빛 앞에 한번 서보십시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정말 내 마음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가. 이제껏 내가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면서 정말 나는 내 마음을 지켰는가. 지금도 내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주님이 내 마음의 전부이고 정말 주님을 내가 사랑하는가.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지 버릴 수 있고 주님이 아파하고 슬퍼하시면 어떤 것이든지 포기할 수 있는가’하는 것을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기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되어서 와서 예배 드리고 아침에 가방 들고 나와서 구역장 공부 마치고 컴컴할 때 집에 돌아가면 동네 사람들은 여러분 보고 예수에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예수에 미쳤다고 하면 뭐합니까? 하나님이 ‘네 마음에 나 없다’하시면 끝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피곤한 생활을 합니까? 하면 하고 안 하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신자반부터 들어가서 다시 사십시오. 그렇게 해서 뭐하겠습니까? 1년이 지나도 어른인 척이나 하려고 하고, 사람들이나 가르치려고 하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벌판에 서있는 한 마리의 떨고 있는 양같이 주님의 사랑 받고 싶어하고, ‘주님은 제 생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입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살지 않는 것은 제 인생에 있어서 뼈저린 비극입니다’하는 고백이 있습니까? 그런 경지로 들어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깊이 우리 자신을 만지시고 우리를 빚으시지 않겠습니까?
불 속에서 잘 달궈져서 붉은 빛이 나다못해 흰빛이 나는 쇠가 되어야 하나님이 말씀으로 툭툭 건드리시면 변화되면서 새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돌 같은 마음은 짐승 같은 삶을 살기에 적합하고 녹은 마음이 성도의 삶을 살기에 적합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마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뼈를 묻겠습니다’하는데 그런 얘기는 혼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마음이 딱딱하고 그렇게 자기 자신이 깨트려지지 않는 사람이 뼈를 묻겠다고 하면 오히려 공포입니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시인이 다른 곳에서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친구라’ 정말 그런 마음으로 언뜻언뜻 돌아가야 합니다. 매일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매일 안되면 언뜻언뜻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 속에서 보고 하나님 앞에 혼나면서 하나님이 조금 야단치셔도 그것 때문에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에 대해서 그렇게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착한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큰 능력을 소유했어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미끄러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제왕으로 높여주셨어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마음이 부요해져서 주님께 버림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울같은 사람입니다.
성도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능력 많이 받은 사람도 세상이 감당합니다. 하나님께 많은 축복 받은 사람도 세상은 감당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과 연합된 사람들, 그 마음이 하나님께 부종된 사람들, 그래서 늘 자신의 죄와 불순종을 인해서 곤고하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신실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기의 불의를 버리고 하나님께 속하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의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능력 많이 받은 사람들이 되는 것보다 정직하고 진실한 신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일을 해도 주님이 하신 일보다는 작습니다. 천지를 창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이 나를 그렇게 순수하게 사랑하시는 것처럼 주님 사랑하고 세월이 많이 흘러도 어린아이처럼 늘 깨트려져서 형통할 때에는 주님을 자랑하고 고난을 만나면 시인처럼 주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하는, 그래서 언제든지 주의 말씀에 의해서 인도 받으며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일어서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