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 중에 드린 깨달음의 기도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불순종한자의 고난(욘2:2) 2004.4.5 십자가사경회(새벽) 1
2. 주의 앞에서 쫓겨났을 지라도(욘2:3~4) 2004.4.6 십자가사경회(새벽) 7
3. 영혼의 피곤을 이긴 기도(욘2:5~7) 2004.4.7 십자가사경회(새벽) 14
4. 구원이 주께 있습니다(욘2:8~10) 2004.4.8 십자가사경회(새벽) 19
1. 불순종한자의 고난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2)
불행하게도 요나라고 하는 사람은 불순종하는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는 사람 그러면 항상 구약에서 요나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사실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이 어떻게 요나에게만 일어나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마음속에 죄가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본성이 있으니 얼마든지 요나와 같은 삶을 살아서 이런 불순종하는 경우가 언제나 있게 되는 것이죠. 이 요나서는 비록 짧은 책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큰 사랑과 불순종하는 사명자 사이에서, 잠시 하나님의 역사가 지연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일을 하시는 것을 봅니다.
1장 전체의 제목이 불순종하는 요나라면 2장의 제목은 회개하는 요나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알다시피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로 가라는 분부를 마다하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을 때 처음은 득의하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배가 순풍에 돛단 것처럼 잘 나아갔고 바다 한가운데 갔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정식으로 개입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불순종하는 그 길에 하나님이 시작부터 곧바로 그 불순종을 막으실 때도 있지만 그러나 인간이 불순종하면서 걸어갈 때에 그 걸어가는 발걸음을 하나님이 한동안 두고 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를 막으실 수 있는 은혜가 모자라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이 불순종하는 길을 감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행한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잠시 불순종하는 자들의 뜻대로 일이 되어가게끔 내버려두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바다 한복판에 갔습니다. 바다 한복판에 갔으니까 이제 더 이상 도움을 구할만한 데가 없었겠죠. 풍랑이 일어도 해안 가까운데서 일어났다면 헤엄을 쳐서라도 나온다든지 해안에 있는 배들에게 구조신호를 보낼 수도 있었을텐데 하나님께서는 바다 한복판까지 가게 하셨고 그리고 바다 한복판에 가서 풍랑을 보내십니다. 그 풍랑은 아주 특별한 풍랑이었습니다. 요나가 타고 있는 배를 향해서 하나님이 발사하신 폭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위에 있는 넓은 해역에 일어난 폭풍이 아니라 그 배 하나를 겨냥해 일어난 폭풍이었고 그래서 그 배에 있는 사람들은 원인도 모르고 많은 물건들을 다 던져버리고 배의 무게를 줄여서 스스로 그 폭풍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이 사람들은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요나를 찾아내었고 그때 요나는 배 밑창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이 물고기를 두고 물고기가 어떻게 사람을 삼켜서 뱃속에 들어갈 수 있나 이런 얘기들을 많이 했습니다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물고기 뱃속이라 여기에 표현되어 있지만 그러나 커다란 물고기의 후실, 여러분들이 밥먹다보면 밥풀이 걸리는 그곳 거기에 들어갔을 것이라 추측을 합니다. 왜냐하면 고래 같은 큰 물고기는 그 후실 하나만 작은 방이 될 정도라고 하니까 굉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토해놓았다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밥풀이 코로 풀면 코로 튀어 나오듯이 그렇게 나왔을 것이라 봅니다. 거기서는 충분히 생존이 가능했을 것이라 봅니다. 아마 위 속으로 들어갔으면 녹아 버렸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요나가 일정을 지나게 됩니다. 드디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이 지점에 와서는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2장 뒤로 가면 “물풀들이 들어왔나이다” 하는 것으로 봐서 거기서도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방이 아니라 온갖 악취와 그리고 헤엄을 치면서 물풀과 물들이 수시로 넘나들지만 그러나 호흡은 할 수 있는 그런 곳에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역경 속에서 2장에서 드디어 요나가 회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한 상황을 하나님 앞에 말하는데 지금 상황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을 말합니다. 사실 요나는 1장에서도 보면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하고 바다에 던져질 때도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죽어버리고 말지’ 하는 마음이었고 그렇게 바다에 던진바 되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믿는 사람들을 자기마음대로 죽게끔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만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병들어 있을 때나, 가난할 때나, 부요할 때나 혹은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환경에 매어두기 쉽습니다. 가난할 때 하나님 잘 믿다가 부요해지면 하나님 잊어버리고, 또 부요할 때 하나님 잘 믿다가 가난해지면 하나님 원망하고 잊어버립니다. 요나의 심정은 불신앙적인 체념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예기치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죽었으면 기도를 하지 않았을 텐데 살았어요. 이것은 어떻게 보면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상황에 도달한 것 아닙니까? 그 상황을 요나가 고난이라고 표현했고 뒤에서는 스올의 뱃속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스올은 음부라는 뜻입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는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자기가 있는 처지가 지옥과 방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왜 그런 고난에 처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불순종과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커다란 고난에 처하게 된 것이지요. 그의 영혼만 고난에 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육체도 큰 고난에 처해서 죽고자해도 죽을 수가 없고 살려고 해도 살수가 없는 그런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불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범죄한 영혼에는 고통이 있고 그의 삶에는 곤고함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범하면 잠시는 우리의 뜻대로 득의할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기에 예외없이 영혼에 큰 고통이 임하고 우리의 삶의 상황이 큰 폭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 폭풍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폭풍이 나 혼자만의 폭풍이 되게 합니까?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오늘 보십시요. 만약에 요나가 그 배에 타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들이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그 수하물도 하나도 바다에 버리지 않고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한 사람을 배에 태웠더니 그 몇 푼 안돼는 더러운 배삯을 받고 온 배가 다 뒤집힐 듯이 소동하고 풍랑을 만나서 귀한 짐과 화물들을 다 잃어버리고 가까스로 목숨만 건지는 비참한 형국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죄는 자기 자신의 영혼에 파괴를 가져올 뿐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을 폭풍 속으로 휘몰아 넣습니다. 그래서 온 가정에 평안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심하면 큰 환란과 어려움을 인해서 재물을 잃어버리거나 육신이 깊이 병들거나 서로 사랑하며 잘 살던 가족들의 관계가 풍비박산 되지요.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그렇다고만 생각하시지 말고 죄 안에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파괴로 몰고 가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한 다음에 그 일이 있고나서 아담과 하와 사이에 있었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하는 그 아름다운 고백이 사라지고 아담이 하와를 원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하와를 주신 하나님도 원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미 벌써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그 고백이 아담의 마음속에서 깨끗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런 커다란 갈등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싸움 붙이셨습니까? 아닙니다.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이 특별히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 노력하시지 않으셔도 이미 들어온 죄가 각자의 마음속에 이기심을 자아냈고 자기중심적인 인생관을 갖게 되니까 창조의 올곧은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그로인해서 결국은 두 사람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부부간의 갈등의 원조입니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내려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인간적으로 금슬이 좋았던 부부가 어느 한쪽이 신앙을 버리게 되자 최악의 부부로 갈라서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결국은 죄로 인해서 자신의 영혼이 파괴되고 나면은 그 문제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가족과, 교회와, 그리고 사회에 커다란 풍랑을 몰고 와서 그들의 삶을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는 자기가 고난 가운데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죄의 달콤함이나 그리고 몸에 밴 듯이 편한 불순종하는 삶이 처음에는 참 좋지만 그러나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너무나 쓰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눈을 탁 뜨면 그때에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나는 이제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외톨박이가 되었다’ 하는 느낌을 받으시던 인생의 기간들이 있지요? 살아가는 게 어때요? 아침이면 눈을 뜰 의욕이 없고 밤이면 평안 가운데 잠드는 것이 아니라 번민 가운데 잠들고 온갖 꿈과 악몽에 시달리죠. 양심은 가책을 받고 하나님께서는 그 쓰라린 양심에 율법으로 소금을 뿌리시죠. 그때 그 가련한 영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디에 해결의 길이 있습니까? 때로는 쾌락에 빠져 보기도 하고 세상 즐거움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시 진통제일 뿐이죠. 궁극적으로 그것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죠.
큰 고난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외없는 공식이 있는데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이 평안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죽는 예는 없습니다. 범죄한 영혼에는 반드시 고통이 있고 그의 삶에는 폭풍이 깃들게 마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고통을 한없이 당할 때 그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기도가 무슨 종류의 기도였을까요? 하나님 나를 이 물고기 뱃속에서 나를 좀 나가게 해주십시요. 나를 살려 주십시요. 그렇게 기도하기 전에 필요한 기도가 무엇이었겠어요? 그렇습니다. 참회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양심이 그렇게 기도하도록 허락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최악의 환경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참회하며 기도했습니다. 이 사람의 신앙의 수준이 낮기 때문에 이렇게 회개하고도 뒤에 가서 하나님 원망하는 장면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의 문제이고 우리가 그것 때문에 2장에서 이 사람의 회개의 기도가 진실한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고 뼈를 깎는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너무나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어떤 염증이 생겨서 깊이 곪는다고 칩시다. 전 어려서 그렇게 온몸에 염증이 많았어요. 종기 같은 그런 것. 지금 와서 보니까 ‘몸 안에 열이 너무 많다’ 그런 진단이 나왔어요. 그런데 종기 같은 게 나면 너무 힘든 게 뿌리가 너무 깊어서 손도 못댈 정도로 아파 죽겠는데 거기다가 약을 발라도 겉에는 좀 낫는 것 같은데 속에는 점점 염증이 심해져요. 그러다가 견디다 견디다가 도저히 못견딜 정도가 되면 병원을 찾아가죠. 그러면 확실하게 치료를 해줍니다. 그것이 뭐냐면 째야 되는 것입니다. 의사가 째야 된다고 그러죠. 나는 주사라도 놓고 마취라도 시키고 할줄 알았는데 간호원에게 수술 준비하라고 하고는 칼이랑 가져와서는 치료실에 눕히더니 바로 칼을 들어요. 아니 마취제도 안놓나요? 그 얘기 하는 순간에 바로 칼이 푹 들어와요. 그때 제가 느낀 것은 일단 침대에 드러누워 칼을 대야할 상황이다 그러면 이 의사는 누워있는 사람을 사람이라고 생각을 안하고 무슨 물건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칼을 푹 대는데 손도 못대는데 칼을 댔으니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드느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나도 한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집어넣고 확 후벼 파버리는 거예요. 그러드니 고름을 짜내더니 그 다음에는 더 잔인해요. 커다란 탈지면에 소독약을 묻히더니 뚫어진 구멍 속으로 푹 집어넣고 후벼 파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나도 하겠다. 그러고 나서 치료비를 주는데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어요. 그 속에 탈지면을 집어넣고 아예 솥 가시듯이 몇 번을 후벼 파는 거예요. 그런 다음 거울을 이렇게 비추어보니까 구멍이 뻥 뚫어지고 고름을 하나 놓고 다 파내버린 거예요. 그러고 나니 참 신기하죠. 그때는 그렇게 아파도 그게 아뭅니다. 그게 금방 아물어요. 그러고 가서 주사 몇 번 맞고 약 먹으면 신기하게 아물어요.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이런 것이죠.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있고 불순종해서 커다란 영혼의 상처를 남기고 우리의 평안했던 삶에 폭풍을 몰고 왔다면 하나님 앞에 좀 진지하고 깊이 회개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왜? 그것은 체면상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겠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질 않아요. 왜? 그냥 서둘러 봉합을 하고 싶은 거예요. 왜? 하나님과 관계 개선은 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축복은 받고 싶은데 그러나 자기 아픈 것을 모두 후벼 파서 깨끗이 도려내어서 새로운 심령이 되기는 싫은 거예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너무 자존심 상하고 너무 아파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살아 보십시오. 여러분 인생길 걸어오면서 넘어진 지점들이 있지요? 그 넘어진 지점이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물질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해서 넘어진 사람들은 단골입니다. 단골로 그 물질 때문에 딱, 딱 넘어집니다. 또박또박 넘어져요. 또 불끈 하는 성질머리 때문에 잘 하다 막판에 가서 뒤집어 엎어버리는 그런 성격 가진 사람들은 참지 못해서 항상 그 지점에서 넘어집니다. 또 교만해서 어디가든지 무엇이라도 한자리 하지 않으면 안돼는 감투병 있는 사람들도 꼭 그 지점에서 넘어집니다. 정말 똑같습니다. 결국 그러한 계속되는 연결의 고리들이 무엇 때문이냐 하면 뼈아픈 회개의 부족 때문입니다.
뼈아픈 회개의 부족. 자기의 어떤 죄로 인해서 영혼이 더럽혀지고 큰 폭풍이 자기 인생 가운데 일어나게 되었다면 그것을 깊이 캐고 들어가서 마지막에 그 뿌리까지 파헤치고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끝까지 캐고 들어가서 진짜 후벼 파듯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리고 가슴 속에 ‘나는 이러한 죄에 빠질 가능성이 참 많은 인간이다 그리고 이 시험이 끝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내 본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 본성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런 종류의 시험이 단골로 나타나리라’그런 기대를 가져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경계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질 않아요. 결국은 더 큰 환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지점에서 자꾸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요. 여기 보면 요나가 큰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죄가 몰고온 고난이었습니다. 죄가 몰고온 인생의 폭풍이었고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서 징계하시기 위해 보낸 고난의 경우에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아무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 인간 버릇 고쳐 주시기 위해서 죄를 깨닫고 새 사람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는데 돈으로 슬쩍 발라서 그 고난이 물러간다든지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 섭리를 이루실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하기 전까지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뼈저린 회개를 여기에서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대답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물풀이 목에 매달리기까지 그렇게 고통스러운 날들을 삼일을 겪을 때에 요나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침묵이었습니다. 그게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불이 떨어져야지만 무서운 게 아니라 이미 내가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고 하나님의 어떠한 음성도 내 귀에 들리지 않는 영혼의 침묵이 계속될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불쾌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얻어맞고 피가 터지고 폭풍 속에 내동댕이치고서야 비로소 주님을 찾는 것은 정말 너무나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사람을 커다란 실패 속에 내동댕이치실 때 한번에 그렇게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경고하시고 끊임없이 책망하시고 끊임없이 나무라시고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뼈저린 깊은 참회만이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죄 때문에 몰아친 폭풍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그 큰 폭풍 속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눈물의 참회의 기도, 자신의 마음 밑바닥까지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머리까지 가득 찬 자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만이 이 환란과 폭풍을 잠재우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왜? 이 폭풍이 하나님께로부터 발사되었기 때문에 거두실수 있는 분도 역시 하나님 한분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즉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기가 죄를 지을 때는 오랫동안 꾸준히,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많은 은혜의 간섭을 뿌리치고 오랫동안 그 죄를 즐기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불순종의 길을 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 파괴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의 기도로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신앙적 한탕주의입니다. 죄가 들어왔으니까 그 뼈저린 회개와 참회의 기도를 통해서 자기 안에 있는 죄가 객관화 되고 객관화된 죄가 죽고 그리고 그것이 자기 몸에서 미움을 일으키고 빠져나가서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고 싶지 않다 하는 진실하고 솔직한 고백이 그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범죄로 인해서 모욕했다고 하는 깊은 회개가 자신 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것 없이 불편하니까, 심령이 컬컬하니까 빨리 회개나 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나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식의 편의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그 순간 커다란 두려움과 고통에 직면했겠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서 삼일동안이나 기도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전의 요나가 철저히 깨뜨려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진실한 참회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지금도 인생에 큰 폭풍이 일었고 그 폭풍의 원인이 자신의 죄인데도 머리만 굴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멎지 않습니다. 지금도 아마 여러분들의 인생에 많은 화물들을 바다로 하나씩 던지고 있을 거예요. 결국은 여러분 자신마저 삼키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짐승입니까? 노예입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얻어터지면서 인생을 살아갑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어떻게 여러분들의 인생을 복주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 한번 회고해 보십시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인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번 회고해 보십시요. 깊이 참회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들어주십니다. 여러분들이 무정한 부모라도 잘못한 자식의 애원을 들어주건만 하물며 하나님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범죄한 여러분들이 싫으신 것이 아니라 그 불순종과 죄 가운데 여러분 몸에 배어버린 그 심령의 죄악과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악한 경향성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미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떨쳐버리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아름다운 신앙생활 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참회를 통해서 폭풍 이는 삶을 모두 정리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2. 주의 앞에서 쫓겨났을 지라도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하였나이다."(욘2:3-4)
계속해서 요나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산 것도 아니고 사실 죽은 것도 아닌 본인의 고백과 같이 음부에 내려간 것과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고 그 은총을 통해서 주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사실까지 우리에게 경험될 때 은총이 정말 큰 은총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환란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한다고해서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징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 자신이 추호도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큰 섭리와 그리고 하나님의 순전한 계획 가운데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신자는 마땅히 환란과 바다에 던져진 것 같은 큰 고난을 당할 때에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순리입니다. 그리고 그런 환란과 어려움이 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그 시련 속에서 우리를 완전히 죽이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셨다 할찌라도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며 처음 회심의 때와 같이 그렇게 은혜의 지배 아래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어서 목숨을 건졌지만 그러나 아마 자기 자신의 마음은 그냥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지도 못하고 다시 살지도 못하는 음부에 떨어진 것 같은 상태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아마 바다 위로 내던져졌을 때는 지그시 눈을 감고 ‘이제 한많은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큰 물고기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숨은 쉴 수 있었지만 견딜 수 없는 물고기의 악취와 그리고 간간이 넘나드는 바다의 짠물들을 먹으면서 아마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매달리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우리가 큰 환란과 어려움을 당해서 징계 중에 있을 때 어려운 시련의 파도가 오면 ‘야, 이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구나. 이 모든 것이 나의 죄의 연고로구나’ 그리고 파도가 오자마자 엎드리며 눈물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합니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게 하기보다는 별로 좋지도 않은 자신의 머리를 가지고 이제 그걸 헤아리기 시작하고 인간의 잔꾀를 가지고 그 파도를 넘어 보려고 온갖 잡된 일들을 다 도모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옥죄어 오는 환란과 커다란 고난 속에서 이것이 자기의 능력과 자신의 힘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몸부림칠수록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되지 않는 그러한 어려움을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주님을 의지해야 되겠다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불순종하며 하나님 거슬리면서 다른 길로 가던 이 선지자도 역시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물고기 속에서 도저히 죽을 수도 없고 살수도 없는 그 고통스러운 광경을 지나면서 이 선지자의 마음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약해진 마음은 가난한 마음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첫째로 그는 정확하게 자신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지금 여기 있게 된 것은 주께서 자기를 던지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기를 던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뱃사람들이 던졌습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는 무정한 뱃사람들이 자기를 던졌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던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했지만 궁극적으로 그 일을 주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정신을 차릴 때가 되면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모든 인생을 주관하고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고 또 은혜 가까이 다가갈 때쯤 되면 인생을 보는 눈들이 달라지게 됩니다. 옛날에는 사람과 얽힌 관계 속에서만 내 인생을 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는 원인들이 되는 사람들만 원망하고 혹은 사람들만 좋아하고 사람들 때문에 맘 상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자 비로소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고 사람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일을 간섭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많은 사람과 내 인생의 여건들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부르짖고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똑같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인식하는 눈이 생겼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던지셨다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큰 파도와 물결이었습니다. 아마 바다 속에 던져졌을 때 그는 견딜 수 없는 두려움과 체념을 동시에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에 던져져서 이제는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가 했을 때 큰 물고기를 하나님이 보내셔서 그를 삼키게 하셨고 그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 그는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괴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그 물고기 속에서 넘실거리는 그 파도와 엄청난 폭풍우를 인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이 선지자는 그 파도와 물결이 주님이 보내신 것이라고 오늘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보내신 파도와 물결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파도와 물결을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일반적인 섭리에서 만나는 고통이 있고, 특별한 섭리에서 만나게 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건강한 체질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여러 날 무리하게 일하고 밤새워 기도하고 수시로 금식하고 그러면 우리의 육신이 연약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에 감기를 비롯한 질병들이 찾아오게 되지요. 이것은 일반적인 섭리에서 창조의 원칙을 따라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결과들입니다. 우리들이 좀 쉬고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관리하면 다시 새 힘이 솟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일반적인 창조의 섭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원칙을 따라서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에도 보면 많이 나오지만 모세를 대적했던 미리암이 눈꽃처럼 하얗게 되어서 문둥병에 걸렸던 사건 같은 것, 이런 것들은 결코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서 온 것은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기에 걸려서 몸이 아프고 그러면 고쳐 달라고 온 교회가 통성기도 않해도 자기가 병원 가서 주사 맞고 약 먹고 그리고 며칠 잘 진정하면 다시 새 힘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특별한 질병에 걸리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섭리로 그렇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치료받기 전까지는 건강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한 것을 일반적인 섭리로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면 안됩니다. 미리암이 어떻게 해서 나음을 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자기의 눈에 있는 어떤 질병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주신 가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를 자고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셨기 때문에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그것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입니다.
오늘 이 선지자의 마음에 그런 인식이 생겼습니다. ‘아, 내가 고통 받는 이 상황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통해서 온 것이고 내가 지금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이 파도의 큰 물결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이제는 더 이상 굴릴 머리도 없고 이 모든 상황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호소하는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보면 이 선지자의 애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 기도를 보면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진통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나는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이것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픈 것은 1장에 보면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을 두고 말하기를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요나가 불순종할 때에는 하나님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기가 싫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하시면 가지 왜 다시스로 가고 싶었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해가 안돼는 명령을 내리셨는데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것입니다. “니느웨로 가라. 멸망한다. 가서 전해라.” 요나도 선지자였으니까 구약의 역사를 많이 알았겠죠? 그런데 심상치가 않은 것입니다. 멸망시키실 것이면 하나님께서 그냥 다 싹 쓸어버리시면 되지 가서 멸망 받을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시는 것을 보니까 구약에 회개하던 역사가 많이 생각났고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신 광경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니느웨 백성들, 이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그렇게 괴롭히던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역사상 나오는 앗시리아 입니다. 그 앗수르 제국이 멸망당하는 것은 꿈에도 그리워하는 일인데 그런데 거기에 가서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해서 멸망할 것이다. 이렇게 증거 해서 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생각할 때 참 견디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선지자의 불순종하는 모습이 그렇게 특별한 불순종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화)우리가 일제 시대 때 일본 사람들한테 괴롭힘을 많이 당했죠? 그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징병으로, 징용으로 그렇게 끌려가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고 고통을 당하는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일본을 물속에 집어 넣으셔야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칩시다. 그러면 얼마나 기쁘겠어요? 아,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그리고 헤엄쳐서 나오면 남해 바다에 가서 몇 사람 건져줄까? 이러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동경에 가서 하나님께서 곧 물속에 집어넣으실 것이니까 정신 차리라고 외쳐라”그러신다면 여러분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갔는데 외쳤더니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나라가 물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바다 위로 더 올라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하나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일반적인 생각들을 꺾는 고통이 없이는 참 순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그가 은혜의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명령에 잘 복종하는, 그래서 자기를 매일매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순종이 쉽겠지만 어쩌다 한번 순종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순종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뼈를 깎는 것 같고 결국은 순종을 못합니다.
이 사람이 아무리 하류급 선지자지만 그래도 주님을 만난 사람이고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할 때 그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면 선지자가 이렇게 안가고 버티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겠습니까? 만약에 니느웨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모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더라면 그때도 이 사람이 다시스 가는 배를 탔겠습니까? 여호와의 낯을 피했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편견, 우리의 생각, 하나님이 우리 기뻐하는 데로 인도하셔야 된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교회를 두 번 옮기고 또 이번에 교육관을 마련하고 그러는데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아직까지도 힘 드는 중에 있지만, 정말 두 번의 교회를 옮기고 또 짧은 시일 내에 교육관까지 마련하면서 정말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워주신 십자가다’그렇게 생각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항상 ‘목회자가 이 일까지 해야돼나? 내가 그렇게 이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주님의 은혜 많이 받고 참 신자가 되고 싶어 했고 그러다가 목사로 소명을 받아서 목회자가 되려고 했을 때에는, 그냥 병든 영혼들 돌보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갈 길을 몰라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내가 만난 하나님을 알려주고, 그래서 주님을 믿으며 사는 인생의 참 길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려주고, 만날 수 없는 영혼들에게는 글을 쓰고 이러는 것이 목회자의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했지 누가 은행가서 도장 찍고 땅을 사고 건물을 사고 빚을 지고, 그래서 빚 갚을 걱정을 하고 이런 것은 사실 목회자가 져야할 십자가라고 생각을 안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깊은 반성이 내 마음속에 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럴 것 아닙니까 여러분? 남들이 보기에도 저 목사가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기 위해서 그렇게 고뇌하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면서 살다가 죽었다더라. 그러면 얼마나 아름다워 보입니까? 그런데 목사가 그냥 땅 사놓고 건물 사다가 빚 갚고 생고생 하다가 죽었더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 아닙니까? “그것 뭐 하러 사?”그렇게 얘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속에서 그러지요. ‘나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걸 버렸다고 그러지만 나도 벌레가 아니고 살아있는 인간인데, 나도 좀 한번 남들 보기에 고상하고 폼 나는 우아한 그런 십자가를 지고 살고 싶은데......’ 그러다 어느 한순간에 깊이 깨뜨려 졌습니다. ‘이것도 역시 다 인간의 생각이고 다 자기 좋은 대로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에 제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역자들이나 후배들을 만납니다. “목사가 그것까지 해야돼나?” 그러면 제가 옆에서 그럽니다. “맞아, 그것도 목사가 해야 돼. 당신이 안하면 누가 대신 해주겠나?”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서 지워주는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 것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십자가, 졌을 때 남들 보기에 우아해 보이는 십자가, 그것 지고 고통 받는 것 가지고는 안돼고 주님이 지워주시기를 원하시는 그 십자가, 그 무거운 짐, 그것을 자기의 생각과 의지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분별하면서 그 십자가를 지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 요나 선지자가 어떻게 하다보니까 성경에서 불순종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사실 요나를 만나고 나면 요나는 억울하다고 그럴 것입니다. 분명 그는 할말이 참 많을 것입니다. 어쨌든 1장에서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더니 큰 환란과 풍파를 만나면서 드디어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내가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주의 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의 대명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있어서 성전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많은 인생의 문제들을 성전에 올라가서 해결을 받았습니다. 성전에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신통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성전에 가면 하나님의 임재와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거기서 그들은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한나와 같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죄의 문제, 나라의 어려움, 그리고 외적의 침입, 많은 나라와 자기 개인의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성전을 향해 올라갔고 거기서 응답을 받은 후 더 견고해진 신앙으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바로 아까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싶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는데 이번에는 주님이 자기를 쫓아내셔도 주님의 임재를 마주하고 싶다 라고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셔도 피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징계하셔서 쫓아내실찌라도 “나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애절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게 되면 우리의 영혼에 서러운 일이 하나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뭐냐면 이렇게 당하게 되는 섭리적인 환란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더 큰 어려움이 생겨나는데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쫓아내신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마음속에 그 언어가 얼어붙고 그 언어를 토해 놓아도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 같지 않고 자신은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고 어떻게 자기가 그 어둠 속에서 이겨날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깊은 고통을 그 안에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양심은 우리가 지은 죄를 고발하고 또 우리를 정죄해서 ‘네가 그렇게 기도해봐야 하나님이 들으시나 봐라. 네가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이제 예수님 앞에 뻔뻔스럽게 나아와서 용서해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그러고 있느냐 하나님이 너를 돌아 보시기에는 네 죄가 너무 크다.’ 그렇게 우리의 양심이 송사하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은 큰 혼란 속에 잠시 놓이게 됩니다.
그때에 양심은 여러분들을 송사해서 여러분들을 낙심하게 만들어도 여러분 안에 남아있는 작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은 소리칩니다. ‘나의 이 모든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으니 빈 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믿음은 소리치는 것입니다. ‘바로 네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시지 않으셨느냐? 네가 맨 처음 회심할 때도 그렇게 죄인이었고 네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 않으셨느냐?’ 그 믿음에 귀를 기울이면서 기도하면 처음에는 아주 커다란 양심의 외침에 묻혀서 아주 가느다랗고 희미하게 들리던 믿음의 외침이 점점 더 큰 소리로 들리고 이제 양심의 송사가 점점 파리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은혜를 힘입어서 담대히 예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주님이 부르셔도 주님의 얼굴을 피하던 선지자가 이번에는 주님이 자기를 쫓아내셔서 기도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옛날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도 주님 밖에는 자신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제가 21살 때 회심하고 주님을 믿게 되면서 가장 가슴에 깊이 와닿던 것이 무엇이냐면 ‘주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다.’ 그때 눈물 흘리면서 많이 불렀던 찬송이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깊이 아주 뼈저리게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이 불순종 했던 요나가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쫓아내실찌라도 내가 다시 주님의 임재를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까는 뱃사람들이 자기를 들어 던질 때 눈을 지그시 감고 ‘그래요, 하나님 차라리 절 죽이세요. 그래요, 죽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게 사실은 세상 사랑을 포기한 마음이 아니라 아주 강퍅한 마음입니다. 이 죄 안에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로 가득 차고 어느 정도 죄의 깊은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굳어진 요나의 마음이 녹아지면서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자신이 쫓겨난다고 할찌라도 주님이 자신을 쫓아내신다고 할찌라도 자기는 하나님을 바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자신의 편견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였던 것들이 생각나면서 깊이 뼈저리게 회개가 하나님 앞에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형편입니다. 그래서 이 요나는 물고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그 사모함을 가졌습니다.
우리들이 믿음생활 하면서 아직 은혜가 남아있고 그래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하는 것은 아니지만 간간히 깨닫는 말씀이 있고, 예배에 주시는 은혜가 있고 그럴 때에는 우리가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눈빛 앞에 사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나와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교회가 있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 염려해 주는 목회자가 있고,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지체들이 있고 기쁨과 서러움을 함께할 믿음의 식구들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줄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이 죄 가운데 떨어지고 하나님 앞에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고 영혼에 어두움이 찾아오고 양심의 외침은 커지고 믿음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들리지 않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느껴질 때, 그래서 지체들로부터도 멀어지고 급기야는 목회자의 시선으로부터도 멀어질 때 그때에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자신 혼자 깊은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그 두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그때 비로소 생각하게 됩니다. ‘아, 그때는 몰랐지만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사는 그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이었는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집을 떠난 탕자가 쥐엄 열매를 먹고자 했지만 그것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을 때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며 그 아버지의 집에 있는 자녀는 그만두고 품꾼이라도 얼마나 행복한가? 내가 돌아가면 나를 많은 품꾼 중의 하나라고 그렇게 생각해달라고 부탁해서라도 아버지 가까이에 살고 싶다. 탕자가 그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생활은 항상 하나님 앞에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자족하는 방법들을 배워야 합니다. 어느 지체가 옛날에 병상에 누워서 그랬습니다. “목사님, 내 인생에는 왜 이렇게 괴로움이 생깁니까? 견디기 힘든 시련이 겹겹이 쌓이고 많은 어려움이 있으니 하나님이 아마 나를 징계하시나 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뭘 염려할게 있느냐? 하나님 앞에 사랑하는 교회가 있고 돌봐주는 목회자가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요 복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비록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어도 주님이 항상 내 가까이 계시고 또 내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사는 이것이 참 행복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요나가 그 피비린내 나는 환란을 통해서 그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사실을 깊이 깨닫고 지금 요나처럼 바다 한가운데 떠도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에 깊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길 빕니다.
3. 영혼의 피곤을 이긴 기도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2:5-7)
요나 선지자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의 목전에서 쫓겨날찌라도 주의 성전을 바라겠나이다.’ 하는 자신의 마음의 결심을 통촉하시고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셨는가를 여기에서 다시 노래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물이 영혼까지 들어왔다” 그랬는데 사실은 영혼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문자적인 번역이고 원래 의미는 ‘목구멍’이라 이렇게 이해가 됩니다. 물이 목구멍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넘실대는 그 물이 목구멍까지 들어오고 물풀들까지 자기 머리를 감싸는 그런 경험을 이 선지자가 했습니다. 아마 이 경험은 바다에 던져졌을 때의 경험일수도 있고 또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 간간이 후실로 들어오는 물이 물풀을 머금고 선지자의 육체를 괴롭혔던 경험을 노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선지자는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이 마치 하나님이 자기를 땅속에 집어넣으시고 땅이 빗장을 잠근 것 같이 그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하는 “음부에 내려간 것 같다”는 고백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그 속에서 자기를 건져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우리의 불순종과 우리의 죄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깊은 웅덩이 같은데 가두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가두셨다기 보다는 우리의 죄와 불순종 안에 우리를 그렇게 가두고 깊은 음부에 우리를 떨어뜨리는 것 같은 그러한 기능이 있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은 인생을 사는데 참 편리한 선택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불순종하는 것이 좋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것이 자기 보기에 기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신자는 편하고 어떠한 희생도 없고 좋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신의 영혼에 깊은 침체와 파괴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물이 목구멍까지 넘어오고 물풀들이 머리를 감싸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뒤따르고, 그들의 영혼은 깊은 땅 속으로 내려가 땅이 빗장을 잠근 것 같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없는 단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섭리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사람들을 그 죄 가운데 한동안 가두시고 그래서 그 죄의 어둠 속에서 신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한 죄와 불순종이 마지막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자신의 인생의 가시가 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때에 신자는 누구에게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에 건져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죄는 자신이 짓고 자신이 좋아서 불순종해서 영혼의 깊은 파괴를 가져오고, 그래서 죄 가운데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기를 거기에서 건져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삶이 신자의 삶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불순종과 죄로 인해서 영혼의 깊은 침체, 그리고 육신적인 고통,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여러분들의 삶이 깊은 어둠 속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곳에 들어가게 되었든지 간에 여러분을 거기서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정말 교묘하게 아주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더군다나 이 사람은 사명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명을 져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에 이런 깊은 어두움과 섭리적인 고통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돌이키고 하나님을 찾으니까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 가운데서 헤어 나올 수가 있습니까? 불순종한 결과로 말미암아 미치게 된 영혼의 큰 고통과 어려움에서 헤어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도 불순종과 죄로 미끄러진 영혼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이렇게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인생의 혼란과 어두움의 와중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자기에게 미치게 되었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도가 주의 성전에 미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어떤 기도였습니까? 스스로 싫어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이 사람이 그 절망적인 환경을 거치면서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할 즈음에 결국은 자신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였습니다. “내가 잘못했고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쫓아내셨고 나는 주의 임재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나를 주의 목전에서 징계해서 쫓아내셔서 내가 다시 주의 얼굴을 뵈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할찌라도 나는 주님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믿음으로 드린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결국 모든 죄와 불순종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범사를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약해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약해져서 주님을 향한 최고의 의존의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에게 도움이 되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나를 지켜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벽에도 주님을 찾고 밤에도 주님을 찾고, 언제나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상태에 있는 신자의 영혼의 경향성입니다.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니까 아주 자연스럽게 거기에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의존의 마음이 깊으면 순종도 절실해집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비록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떠났을찌라도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죄와 불순종의 각질들을 벗겨내십니다. 그리고 그를 갱신 시켜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은혜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약해집니다. 그리고 마음은 매우 부드러워지고 우리의 생각은 예민해져서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의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우리의 뜻대로 살아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지도 모른다 하는 영적인 소심함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 상태를 벗어나게 되면 아주 담대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도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나 두려움이 없이 자신의 안목에 하고 싶은 대로 막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많은 죄를 짓게 되고 하나님 의지하지 않게 되니까 불순종하게 됩니다. 영혼에는 소심한 감각들이 사라지게 되고 심령은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 하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 안에 있는 민족주의적인 편견이 역사하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기로 다짐했을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심하게 굳어졌는지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는데도 그는 듣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내시기 위해서 폭풍을 일으키셨는데도 그는 그 폭풍 속에서 잠들었습니다. 이것은 평안이 가져다 준 잠이 아니라 죄악이 가져다 준 잠이었습니다.
풍랑 이는 배의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시던 예수님의 잠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의 상태에서 오는 평안의 잠이었다면 이 선지자 요나의 잠은 죄악의 잠이었고 무감각의 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지 않았고 또 기도할 수도 없었고 기도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러나 환란을 당하게 되었고 자신의 생명이 이제 백척간두에 서게 되자 그는 비로소 강퍅한 마음 깊이 잠재되어 있던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그 마음은 주님이 자기를 쫓아내실찌라도 자신은 그렇게 자기를 쫓아내신 주님의 임재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는 절실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은혜의 경험이 많아지고 신앙의 체험이 깊어지면 우리가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줄다리기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얻어내는 방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추어 보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되는 중요한 기회로 하나님께서 삼게 해주십니다.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 뜻을 찾게 되는 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를 하나님 앞에 주장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자기를 맡긴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께 자기를 모두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일단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면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선지자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이 되었고 아버지 앞에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방편을 활용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을 쏟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도는 하늘의 보좌까지 이르지 못하고, 주님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절박하게 필요로 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많은 기도의 수고는 폐기처분 됩니다. 그리고 마음을 쏟아 부어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집중시키고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의존의 믿음을 갖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많은 기도는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영향력을 상실합니다.
이 모두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자로서 먼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타오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고난 속에서 겨우 그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타올랐지만 예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그 삶 속에서 이렇게 주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타올라야 합니다. ‘아,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못 박히신 십자가를 보니까 내가 주님 없이 살수 없는 존재 이구나’하는 하나님을 향해서 가난하고 절박한 마음이 될 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런 간절하고 집중된 기도가 어떻게 가능해졌는지에 대해서 또 하나의 단서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생각이라는 단어입니다.
“내 영혼이 피곤하였을 때에 내가 생각하였습니다.” 누구를 생각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 영혼의 피곤은 곧 그 자신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깊은 침체에 들게 되었고 바다에 던진바 되어서 그가 경험하게 된 영혼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영혼이 피곤하고 더 이상 자신이 죄와 더불어 싸우고, 자기 안에 있는 불순종을 토설하고, 자기 안에 있는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그러한 모든 삶으로부터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진 영혼의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우리의 영혼이 피곤해지는 적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모든 의무를 다 이행하고, 어떤 때는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일에 보내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의 영혼이 생기와 발랄함에 넘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깊은 피곤에 사로잡히는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오늘 이 선지자의 고백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의 영혼도 이렇게 깊이 피곤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니까 은혜의 체험도 있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제껏 까지 역사해 주셨는지에 대한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지식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의 영혼은 ‘하나님 이외에 의지할 분이 없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부를 수 있는 영혼의 원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피곤하고 낙담될 때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낙심되고 피곤할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정말 다시 따뜻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없다.’ 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다시 갖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 의존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 의지하고 살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자녀들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처럼 불순종하고 범죄 했을 때 환란과 시련을 주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환란과 풍랑이 너무나 커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버림받고 이제는 사망 가운데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우리가 주님을 버리고 불순종할 때 주님의 마음에 시기가 얼마나 컸으면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들을 사망 가운데 내동댕이치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버림 받은 것 같은 외로움과 고통이 클수록 결국은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그들을 돌이켜 당신 가까이에 두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이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셔서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기까지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혼의 피곤과, 육체의 게으름, 그리고 불순종, 이런 모든 어두운 삶들을 버리고 예수를 붙잡고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에는 싫증도 없고 그리고 그 은혜에는 피곤함도 없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랑에 응답하며 사는 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4. 구원이 주께 있습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하니라.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2:8-10)
이제 마지막으로 요나는 태도가 하나님을 향해서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정말 태도가 바뀌고 새로워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고난을 주시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불순종한 끝에 당하는 이 고난과 괴로움은 말할 수 없이 쓰디쓴 고통이고 아픔이지만 그러나 사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그렇게 하시는지 동기를 잘 살펴보면 이것은 그냥 쓰디쓴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은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찾아오는 큰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이 4가지인데 첫째는 자유입니다. 예전에는 죄에 매여 있었지만 이제는 자유 합니다.
두 번째는 명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이름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집안에 법적인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큰 유익은 담대함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네 번째 큰 유익이 있는데 그게 의외에도 아픈 것입니다. 징계입니다. 징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큰 유익입니다. 왜요? 예전에는 징계라고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징계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용하는 말이지 불신자가 쓰는 말이 아닙니다. 불신자는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고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 진실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올바르게 살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셔서 우리를 고통중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요나가 이렇게 많이 바뀌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러한 징계를 통해서였습니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요나를 새롭게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이전의 잘못된 태도를 바꾸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꿔진 태도가 뭐냐면 놀랍게도 감사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오늘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립니다.”
사실 요나에게 있어서 감사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처음 니느웨로 가라는 그 사명을 받을 때부터 요나는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고서야 지존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이렇게 쉽게 거역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는 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불순종 하면서 범죄 했습니다.
풍랑이 왔고 그리고 배가 큰 위협을 받게 되었고 자신을 제비 뽑아 바다에 던질 상황이 되었을 때에도 그는 전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거나 그런 것 없었습니다. 그냥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래, 죽으면 죽는 거지 뭐’ 그리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맡겼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명이 끝나지 않은 사람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던져 버리시니까 거기서 큰 물고기에게 삼키게 되고, 거기서 물들이 들어오고,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삼일이라는 긴 기간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었고 매달리는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속에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가득 찼던 영혼의 어두움과 죄의 세력들이 잠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가 올바르게 살지 못해서 혼을 내시면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에 아직 불평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징계의 목적이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징계의 목적이 완성되는 것은 길게 보면 우리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이지만, 짧게 보면 개별적인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혼을 내실 때 그 혼내시는 범죄를 통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태도를 바꾸실 때까지 하나님이 혼내시는데, 그때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으면서 아직까지도 불평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개별적인 징계의 목적이 도달된 것이 아닙니다.
(예화)여러분들이 만약에 아이를 앉혀놓고 야단칠 때 나는 원래 너를 가졌을 때부터 네가 싫었다. 그러면서 일생동안 걸어온 길을 다 짚으면서 아이를 야단치는 부모가 있습니까? 정신병자지요. 그것은 남의 애들이나 그렇게 야단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잖아요? 왜 학교 갔다 바로 집으로 오지 딴 데 갔다 밤늦게 기어들어 오냐? 그것 하나 가지고 야단을 치는 것이지요. 그렇게 개별적인 잘못에 대해서 하나님이 혼내실 때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향한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거잖아요. 그렇게 바뀌기를 바라는데 태도가 똑같아요. 죽으라고 야단맞기는 하지만 ‘그래, 패라. 내 자식 죽냐? 네 자식 죽지?’ 이런 태도로 부모에게 대하면 징계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잖아요? 그러면 더 야단을 치지요. 그런데도 이 아이가 꺾어지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에는 징계의 도수를 높이는 문제가 아니라 ‘이 녀석 마음에는 뭐가 있나?’ 인간적인 부모인 우리들 마음에는 약간 두려움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아요? 하나님은 그렇지 않지요. 두렵지 않지요.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개별적인 징계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예전에 가지고 있던 태도가 바뀌어야 돼요. 그것이 개별적인 징계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혼내실 때 만약 우리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고난이 더 길어지는 것입니다. 아직 먼 것입니다. 혹시 태도가 바뀌지 않았는데 한 가지 고난이 끝났다면 걱정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회초리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수십 가지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중의 어느 하나를 피가 나도록 후려쳐서 하나님이 반드시 사람 만들고야 마십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서 우리에게 만약에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다. 하나님의 친자녀가 되었다면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하신다고 그럽니다.
그랬더니 이 선지자가 바뀌었습니다. 그 속에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얼마나 웃기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선지자로 불러 주셔서, 하나님이 직접 임명하셔서 니느웨라고 하는 앗수르의 수도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외치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들을 작정이었고 또 변화될 작정이었습니다. 그때에 그 일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한 일입니까? 자기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한 나라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이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역사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외치고 전파할 수 있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사명을 받았을 때 감사해야 되잖아요? 그러나 감사하지 않았죠. 그러나 하나님이 징계의 회초리를 대신 후에 감사할 것이 거의 없는 죽음의 문턱에서 이 선지자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산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면 이 시간에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됩니다. 무엇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야단치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아, 아직까지 내가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렇게 하나님 대적하면서 잘못된 길로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시지 않으셨구나. 이렇게 야단치시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여겨주시고 나를 향해서 아직까지도 가지고 계신 기대가 있으시다는 증거구나’ 그것을 생각하면 감사한 것입니다. 주님의 수중에 있으면 변화 되잖아요?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잖아요? 그러니까 그 아픔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서원을 갚겠나이다.” 무슨 서원을 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한 가지 그 서원 속에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령하시는 그 사명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것이 이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드렸던 서원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3장 이후에 그 사명으로 돌아가는 선지자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을 때,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으면서 견지하여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그 태도가 무엇이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 때 그 잘못에 대한 앙갚음으로 우리에게 보복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인간의 부모도 그렇게 안하잖아요? ‘너, 내 마음을 아프게 했지? 너도 한번 아파봐라.’ 그러면서 복수하는 부모가 있다면 정신이상자죠. 그렇게 안하죠. 더군다나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그렇게 다루실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안하시죠.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원래 그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자녀의 명분을 주시고, 은혜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십니다. 이 사명에는 일반적인 것이 있고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명이라 함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자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참다운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에게 있는 공통된 사명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각자 각자에게 개별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어 가기를 목회를 하면서 힘쓰고, 어떤 사람들은 평신도가 되어서 그렇게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가기를 애씁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에서 살림을 하면서 그렇게 애를 쓰고, 어떤 사람은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그렇게 애씁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 학생의 위치로서 공부하면서 애를 쓰고, 어떤 사람에게는 섬겨야할 부모님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돌봐야할 자식들을 주셔서 각자 맡은 자리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게 하시고 교회에서는 은사를 따라서 이런저런 사명을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르심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것들은 개별적인 것입니다.
이런 개별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명과 일반적인 하나님의 사명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다 그러면 개개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는 가운데에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각자 각자에게 사명을 허락해 주셨는데 그것을 관심 없이 내팽개치고 그러고도 그 사람이 진실한 신자가 되어 갈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저 같은 경우는 많은 부르심 가운데 목회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목회를 하다가 잘 안되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하면 ‘도대체 누가 똑바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서 교회에 이런 어려움이 생길까? 박 집사야 ?최 집사야?’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결국은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 하나님 앞에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몇 주 동안 등록하는 사람도 없고 사람도 보내주지 않으실까? 혹은 내가 어떤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안들길래 이렇게 교인들이 교만해지고 말씀에 깨뜨려지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려워지나? 왜 우리 목장에 가뭄이 들었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개별적인 사명과 일반적인 사명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잘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또 거꾸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되겠다.’ 하는 일반적인 사명에 마음을 쏟으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으면 개별적인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은 어느 하나를 포기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무얼 자기 일처럼 걷어 부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신 일반적인 사명에 대해서는 도무지 고민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진실한 신자가 될까?’...... 그러니까 개꼬리 3년을 묵어도 황모가 안된다고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도 여기저기 나타나서 마치 교회가 자기 집안인 것처럼 얼굴은 내미는데 사람자체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진실하게 변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런 사람이 개별적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일그러진 모습들입니다. 때가 되면 결국 자기가 함량이 미달된다고 하는 것을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불비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그때에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본래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되고 십자가가의 은혜와 감격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았을 때 우리가 했던 수많은 서원을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가 되겠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세워주신 자리에서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살지 않았습니까? 그게 수많은 서원입니다. 그것을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서원, 이런 것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굉장히 두려운 것입니다. 정말로 두려운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여러모로 서원을 하지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하는 서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세례 받을 때에 ‘내가 ~ 이렇게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겠습니다.’ 하는 약속, 심지어는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감당하겠습니다.’ 하는 서원부터 시작해서 아주 가깝게는 ‘교회 앞에 건축을 하게 되면 이렇게 헌금 하겠습니다.’하는 서원에 이르기까지 내가 한번도 얘기한 적은 없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지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훌쩍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 뒷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마음에 안타까울 수가 없습니다. ‘저런 태도로 살면.......’하나님은 하늘에서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어디든지 계십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이유를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여호와의 낯을 피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뭐 좀 해보다가 잘 안되니까 미국으로 보따리 싸고, 중국으로 보따리 싸도 거기가면 하나님께서 안계십니까? 바다 끝에 가도 거기서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모두 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런 태도로 하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축복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서원은 그것이 해로울 찌라도 갚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한번도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맘에 들지 않아 교회를 떠나는 사람보고 “당신 집사 될 때 이렇게 약속했는데 제대로 하시지 건축헌금 해놓고 그것도 다 내팽개치고 가버리면 그게 옳습니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듣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앞날을 이렇게 보면서 조용히 염려가 됩니다. ‘아, 저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보십시오. 진실한 참회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진실하게 뉘우치면 그러면 하나님 앞에 서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서원을 하나님 앞에 갚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그가 하나님 앞에 참 의미심장한 고백을 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옵니다.”하는 고백입니다. 이 구원을 말할 때 어떤 구원을 두고 이야기한 것인지 지금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우리 생각에는 선지자가 1차적으로는 자신의 구원을 두고 얘기한 것 같습니다. 물고기 코 속 그쯤 들어가서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그 고통스러운 광경이 삼일이나 계속될 때에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 요나의 마음에 큰 변화를 주셨는데 결국은 요나가 그 속에서 자기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잖아요. 나올 수도 없고 그리고 설령 나온다고 하더라도 나오면 바다 속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요나가 자기를 이 상황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백을 하면서 결국 자기가 다시 산다고 하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죄가 너무도 분명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시 그 사명지로 보내실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구원은 하나님께 있나이다.”라는 이 고백은 어느 정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주권을 가지고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앗수르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주실 수도 있다.’ 라는 고백도 이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 선지자가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불순종한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이 지금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든지 알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겨나게 되면- 징계 아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여러 번 회초리를 가지고 치시면서 무슨 어려움은 생기지 않겠습니까?-그때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힙니다. 기도를 해도 명쾌한 응답이 없고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징계 과정에서 생긴 많은 어려움들을 자신의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징계 하셔서 질병에 걸리게 된 아사 왕이 하나님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는 징계를 통해서 오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래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지를 않고 자신이 마음대로 자신의 육신의 방법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징계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기름으로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능력이 모자라서 우리를 징계를 못하신다는 이야긴데 그러실 수가 있겠습니까?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을 깊이 녹이시고 깊이 변화시키시면 그때 비로소 자기를 향한 구원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려움의 강도를 더하시고 그 자신의 징계로 말미암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을 계속 수포로 돌아가게 하실 때에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 앞에 항복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마지막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 물고기에 명하시매 요나를 토해 놓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고백이 나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 징계 받고 고난 받는 기간을 연장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죄수를 데려다가 문초할 때는 “입을 열 때까지, 바른 말을 할 때까지 매우 쳐라”그리고 주리도 틀고 매질을 해서 올바르게 실토할 때까지 고통을 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순종 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징계를 해서 우리에게 마땅한 고백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징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방법은 인격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삼일이나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환란 속에서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으로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해야지만 주님이 건져 주셨을 때 ‘아, 이게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 주신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버릇을 고치시기 위해서 주시는 징계의 고통은 백약이 무효입니다. 아무것으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만 해결이 됩니다. 다른 것으로써는 절대로 해결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셔서 “가서 토해 놓아라.” 하시니 물고기가 토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징계 받을 때에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이 무슨 이유 때문에 다가오는 고통일까? 궁금해 하지만 답은 항상 한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심부름꾼들입니다. 물고기가 거기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시니까 삼키지 않았습니까? 똑같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입니다. 심부름꾼 하고 싸워봐야 소용없습니다. 고래보고 “야, 이 자식 내가 무슨 새운 줄 아냐? 내가 무슨 물고기로 보이냐? 내가 사람이다. 내가 너 먹이냐? 떡밥이냐? 왜 날 삼켰냐?” 그 속에서 아무리 소리 지르고 찔러봐야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심부름꾼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주신 징계는 절대로 일반 섭리적인 방법에 의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셔야만 됩니다. 하나님이 토해 놓으셨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이 요나를 사용하셔야 될 정도로 그렇게 요나가 고귀한 인물이었는가?’ 아닙니다. 아마 그런 정도 수준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어디서든지 만나실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망가진 사람 고쳐서 쓰시는 것입니다. 그게 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 거두시고 새사람 쓰시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고치셔서 그 사람을 사용하시잖아요? 결국은 사명 주신 그 사람을 사명지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일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고기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자 요나의 곤고하고 고통스럽던 징계의 상황이 끝났습니다. 여러분은 삶의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그 상황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징계 가운데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굳게 매달려서 주님이 나를 고쳐 주시고, 그리고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징계 중에 드린 깨달음의 기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