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돌아오라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사랑으로 돌아오라(호2:7) 2004.1.12 새해말씀사경회(오전) 1
2. 말씀으로 돌아오라(시107:20) 2004.1.13 새해말씀사경회(오전) 13
3. 기도로 돌아오라(사38:2-3) 2004.1.14 새해말씀사경회(오전) 29
4. 섬김으로 돌아오라(요21:18) 2004.1.15 새해말씀사경회(오전) 39
1.사랑으로 돌아오라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 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 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2:7)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좋은 신앙생활을 해 나가려고 할 때 방해가 되는 요인들이 참 많습니다. 사실 환경적으로 방해가 되는 요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환난을 많이 당한다든지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면 신앙적으로 많은 방해를 받게 됩니다. 또 여러 가지 많은 근심이나 걱정들이 생겨도 방해가 되는데 어쨌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그렇게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은 밖에서 우리들을 에어 싸고 온전한 믿음생활을 못하도록 가로막는 요인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훨씬 더 커다란 방해요인으로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름다운 신앙의 삶이 허물어지기 전에 먼저 우리 안에서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게 되고 우리 안에서 잘못된 변화들이 일어나게 되면 그게 우리의 마음과 삶을 지배하게 되고 생활로서 그것들이 밖으로 들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범죄 같은 것들이 행해지게 되고 정말 가혹 할 정도로 긴 시간동안 마음 한 구석으로는 정말 하나님을 잘 믿으며 신앙생활 하고 싶은데 실로 긴 세월동안 우리가 그런 어두움 속에 있으며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호세아의 이야기도 바로 그런 이야기 입니다. 호세아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아마 독신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훌륭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는데 무슨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지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를 아주 유명한 행실이 바르지 못하기로 널리 알려진 고멜에게로 장가를 가도록 부르셨습니다. 학자들은 아마 고멜이 평범한 집안의 아녀자가 아니라 바람기 있는 남자들을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창녀였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창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고멜에게로 장가를 가게하고 그리고 고멜과 함께 살면서 사실은 가혹할 정도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네게 장가를 가게 하셨는데 고멜이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속에 있는 음욕과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아주 쉽게 가정을 떠나서 다른 남자와 함께 동참하고 그리고 연애를 합니다. 그러다가 아비도 모르는 자식을 임신하여 가지고 와서 낳고 또 가출해서 그런 짓을 하고 돌아오면 용서해 줍니다. 그러나 잠깐 살다가 다시 가서 그런 짓을 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거룩한 선지자가 그런 여자하고 결혼을 했을 수가 있겠는가? 그랬다면 그 선지자의 사역이 제대로 되었겠는가? 그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예언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예언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까지 모두 예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바울의 띠를 취해서 손을 묶으면서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띠의 임자가 이렇게 되리고 예언하는 사건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행동 예언이라고 합니다. 구약에는 그런 행동예언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사야가 볼기짝을 내놓고 다닌 것이라든지 하는 이런 행동예언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호세아에게는 가혹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장가든 여자가 바람을 피우고 나쁜 짓을 할 때 미운 마음이 생기면 괜찮은데 호세아에게는 잔인한 고통이었지만 고멜을 향안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차라리 미워하면 편할 텐데 그것이 아니라 나갔을 때는 마음이 괴롭고 아픈데 시간이 좀 지나면 가슴이 미어지도록 고멜이 보고 싶고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멜도 사람이니까 가서 이 남자 저 남자와 바람을 피면서 나쁜 짓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그들이 모두 자기를 이용하기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실한 사랑은 내 남편 밖에는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와서 조금만 사랑을 받으면 또 싫증이 나고 평안해 지면 나타해서 다시 자기의 음욕을 해소하고 방탕한 생활에 대한 그리움을 이 단조로운 일상생활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도망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또한 이스라엘은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났는지를 말로 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승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시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 15년 전에 이 호세아를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호세아가 너무 불쌍해서 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데 사랑은 별로 없고, 이 호세아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열심히 섬긴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온 몸을 다 찢어 불태워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교재로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너무 그러한 헌신의 삶을 살았던 호세아에 비하면 내가 도대체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끔 교인들이, 물론 교인들이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목사님들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다른 나라 이야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엇 그제도 목사님을 한분 만났는데 교인들이 자꾸 자기를 쫒아 내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교회에서 왜 일어나나. “나는 교회에서 얼마나 행복하고 호강을 하나. 자동차만 마당에 서 있어도 기분이 좋다고 하는 교인들하고 같이 사는데” 진짜 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속상하게 하는 교인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와서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착하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교인들입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다 그럴 리는 없겠지요. 그렇게 마음도 안 아프다가 이 때 교만해 질까봐 한사람을 더 부과되어서 몇 달 동안 안 아팠던 마음을 한꺼번에 모두 모아서 아프게 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 이 호세아를 생각해 보자.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배신하고 도망을 가고 아비도 알지 못하는 자식을 안고 오면 그 아이를 받아서 성경에는 자세한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자기 손으로 미역국을 끓어 먹이면서 다시 그 아내를 끌어안고 살았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무슨 아픔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고 싶어 하셨던 것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십니다. 그것을 고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과 대비시켜서 보여 주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심을 찌려고 그들 안에 남아 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자극시켜서 긍휼에 불붙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시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보니까 또 그 사건들 중에 하나가 나타납니다. 고멜이 집을 나가서 외간 남자와 함께 붙어 다니고 그리고 방탕한 정욕에 빠졌습니다. 처음에는 호세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멜에게 행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러니 정신도 못 차리고 가정을 내 팽겨 치고 가서 바람을 피우고 나쁜 짓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냥 내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져서 방탕하게 보내는 고멜에게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하나님이 괴로움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죄악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하나님의 은혜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이 사라졌을 때는 기쁨이 사라졌을 뿐인데, 죄악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나면 견디기 힘든 고통의 대가가 그 기쁨의 대가인 고통이 밀려오는데 앞에 느꼈던 그 기쁨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 고통들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불에 딘 아이가 불에 디이고 나 다음이 그 불이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 활활 타 오르고 있을 때는 기쁨 때문에 모르는데 이제 데이고 나서는 비로소 죄의 정체가 무엇이고 마지막에 자신의 영혼과 인생을 어떻게 파괴하는 것인지를 생생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세상을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아이들을 기를 때 뜨거운 밥을 만지겠다고 아이들이 밥상에 와서 난리를 치면 그럴 때 한번 아이의 손이 뜨거운 밥을 만지게 해 주어 봅니다. 그랬을 때 아이는 뜨거워서 손을 움츠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안 그럴 것입니다. 이런 기대감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순간까지는 우리를 그 죄에 대해서 자꾸 막으시지만 그 일정한 한도가 지나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죄는 막는 성령의 역사를 우리 안에서 그치시고 그 죄로 향하게끔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때는 벌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벌써 마음에 우리들을 향한 섭섭한 마음과 불쾌한 마음 때문에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큰 은혜는 간섭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니 매 맞을 때가 좋을 때입니다. 야단맞을 때가 좋을 때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정한 한도가 넘으면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험을 통해서 그 죄의 맛을 보고 그 결과가 얼마나 쓰고 고통스러운 지를 깨닫게 하시고 인격적으로 스스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아내의 고멜이 나갔을 때 무엇이라고 말씀 하셨냐 하면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아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연애 얻은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면 찾을 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즉, 하나님을 잠시 떠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잠시는 득의 하는 것처럼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나가 표를 사려고 할 때 벼락을 내려서 배를 부수어 버리시면 못 떠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안 하시고 놔두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려고 할 때 그 과일을 만지는 것 까지는 내버려 두시다가 따려고 할 때 손목을 부수어 버리시면 문제가 해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고달프게 교회에 모여서 건축헌금하고 교회 짓고 신앙생활하고 주일 지키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런 것은 기도를 해도 잘 안 들어 주십니다. 따 먹어야겠다. 그런 마음이 들면 하나님께서는 따 먹게끔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죄가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아담 자신부터 치열하도록 하나님의 구원의 갈망하는 처지가 되었고 긴 세월이 지나서 그의 후손들인 우리도 구원을 갈망하는 그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배를 타고 가는데 어떻게 되었습니다. 바다가 잔잔하고 배가 순풍에 돛 단 듯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가만히 생각 해 보십시오. 선지자라고 다 같은 급수의 선지자가 아닙니다. 요나는 사실 하류 선지자 입니다. 아마 하류 선지자이니까 가서 표 사고 시간이 남으면 아마 상품점이 가서 티셔츠라도 하나 사 입었을지 모르지요. 삼천 주고 선글라스도 하나 쓰고 중국제 수입모자도 하나 쓰고 배를 타고 자기가 하는 짓이 무엇이지도 모르고 다른 관광객들처럼 “아! 좋다. 정말 좋다.”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갔습니까? 어려움을 만날 때 육지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도와 줄 수 있는 거리를 벗어나서 바다 한 중앙에 들어갔을 때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당신의 감정을 보여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풍랑이 이는데 태풍이 일어나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나님이 태풍을 발사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한곳에만 집중적으로 태풍을 발사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 배에서 멀리 떨어진 배들은 다 평안하게 지나가고 이 배만 움직이면 태풍이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 부셔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을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오늘 여기에 여러 가지 이유로 사경회에 나왔겠지만 아마 여러분 중에는 지금 현재 아직도 은혜 받으려는 먼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나오긴 나왔지만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훨씬 더 사랑하고 인간 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면서 믿음을 내 팽겨 쳤는데도 훌륭하게 순풍에 돛 단 듯이 득의 만만 해서 인생을 향해 하고 있는 분들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 향해하는 인생의 뱃전에서 그 촌스러운 티셔츠하고 선글라스 어울리지도 않는 것을 끼고 휘파람을 불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기다립시오. 곧 풍랑이 옵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이미 풍랑을 만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한번 보십시오. 누가 그 풍랑을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고멜이 세상 남자 사랑해서 그 복된 가정을 팽겨 치고 가서 그 남자를 따라가서 음행을 하고 더러운 일을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어느 순간이 되자 하나님께서 가시를 두고 담을 쌓아서 이 여자가 그 사랑하는 새 여인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고 만나려고 애타도록 부르짖어도 만날 수 없는 상항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므로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가 아프면 아파서 공부하고 피곤하면 피곤해서 안 하면 안 해서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화) 제가 아는 어떤 교인인데 그분은 그 딸아이 때문에 아주 많이 속상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더니 너무 짧은 치마를 입고 다녀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치마를 좀 길게 남들이 볼 때 머리도 단정하게 빗고 다니면 얼마나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버려 두라고 하였습니다. 다리 잘 생긴 것 좀 보여 주고 싶어서 그러는데 그거는 당신의 옛날스타이지니 짧게 있고 싶으면 짧게 입고 길게 입고 싶으면 길게 입고 머리도 볶고 싶으면 볶고 물들이고 싶으며 벌건 빛깔을 들이고 다니든지 회색을 하고 다니든지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경이 쓰여 진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길게 입고 머리도 조금만 단정하게 하였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겠습니까? 세상 다니는 모든 사람들 보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관심이 많으면 그 치마도 단정하게 입고 머리도 단정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제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서 통을 좀 크게 가져 라고 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교회를 하면서 보니 직원들도 그렇고 교역자들도 그렇고 말을 안 하지만 같은 값 주고 머리를 하는데 폭탄 맞은 것처럼 머리를 해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싫습니다. 볼 때마다 눈에 거슬립니다. 결국은 말을 안 하다가 시간이 지나다가 바꿔졌을 때 그 때는 말을 합니다. “아! 좋다. 지난번에는 이제 와서 이야기 이지만 폭탄이었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다 어디서 오는 것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관심과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관심도 많고 사랑도 많으신 분이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멀리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잠시는 그들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내버려 두시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못하도록 하십니다. 이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호세아가 이 여자를 다루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가서 바람을 피우고 나쁜 짓을 하고 아이를 가졌을 때 가서 다리를 부려 뜨려 놓고 머리채를 잡아끌고 와서 시원치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안 하였습니다. 찾아가고 기다리고 눈물로 애원하였습니다. 이건 결굴 무엇을 보여 주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순종하고 성령 충만하고 당신을 잘 섬기는 사람들에게만 인격적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거슬리고 멀리 불순종하고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인격적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한편으로는 때리시지만 또 어루만지시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이시지만 한편으로는 자녀를 잃어버리고 마음 아파하는 아버지의 눈물과 그 흐느낌을 우리에게 들려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어하는 우리 속에 있는 착한 마음들을 자극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여 주시는 분이 이 세상에서 누가 또 있겠습니까? 그래서 잠시 즐거움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헐떡거리며 정욕에 사로 잡혀서 외간 남자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남편과 가정을 팽개치고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런 잘못된 삶을 살던 고멜이 어느 한 순간 지금 내 형편은 예전보다 더 비참하구나! 차라리 내 본 남편에게 있을 때가 훨씬 행복했었구나! 그러면서 스스로 방탕하게 살던 생활을 청산하고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끔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스스로 고멜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또 만약에 이 호세아가 돌아가기만 하면 다리를 부러뜨리고 장작개비로 때리고 척추까지 부러뜨릴 정도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면 아마 고멜은 다르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계속 고생하는 것이 집에 들어가서 허리 부러지고 장애인이 되어서 드려 누워 오줌 똥 받아내는 것 보다는 이것이 더 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화) 옛날에 어느 전도사님이 가출한 아이를 타 일러서 집으로 돌아 보내려고 하니까 아이가 “전도사님! 저 집에 들어가면 맞아 죽습니다. 여기서 차라리 고생하는 것이 훨씬 낳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자녀들은 그렇게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가정은 고향과 같아야 합니다. 잠시 떠나도 시간이 지나면 그리워지는 그러한 아늑한 품처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이 바로 그런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영원히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불가능 합니다. 그 죄가 즐거움을 주는 동안에는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행복하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죄가 주는 즐거움이 사라지게 되고 그런 다음에는 영혼이 말할 수 없이 피곤해 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무 피곤하고 곤하여 지니까 그때에 비로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고 순리입니다. 그래서 그 탕자의 비유를 보더라도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생각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무 주리고 고통스럽고 배가 고프니까 내 아버지의 집에서 밥 많이 먹는 그 풍족한 일꾼들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자신이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결단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인격적인 사랑이 필요 합니다. 지금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멀리 떠나고 첫사랑을 상실하고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기도도 안 되고 말씀도 들어오는 것이 없고 곤고하고 허기진 생활을 하는 분들 계시죠. 여러분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누가 그런 곳에 가라고 그랬습니까? 누가 처음 사랑을 버리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상실하라고 누가 시켰습니까? 누가 여러분보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재와 주님과의 은혜 안에서 사는 그 복된 삶, 사명의 자리에 서서 보람 있게 살아가는 그 힘차고 아름다운 삶을 누가 여러분들에게 빼앗아 갔습니까? 어느 날 싫증을 내고 여러분 자신이 거기서 떠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싫증이 나고 더 좋은 것이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떠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좋았습니까? 행복하던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버리고 새로 만난 여인과 함께 연애 하면서 세상 사랑에 빠지고 나니까 그 세상이 주는 사랑보다 더 완전했습니까? 신실한 남편이었습니까? 사명을 버리고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가 힘이 들어서 팽개치고 그저 나 행복하기 위해서 창조의 목적을 이탈한 채 버르적거리며 살아갔더니 부자가 되었습니까? 마음에 평안이 있었습니까? 행복했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할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 주시리.
(예화) 바다를 항해하던 배에 큰 풍랑이 일었습니다. 배가 갑자기 뒤집힐 정도가 되니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거기에 장군 한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두려워하고 아내가 특히 불안해합니다. 그때 칼을 빼서 아내의 목에다 겨누었습니다. 그리고 “여보 겁나”라고 했습니다. 이 때 아내가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아니요. 겁나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칼은 무섭지만 그 칼이 나를 사랑하는 당신 손에 있는데 내가 왜 겁나겠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이 풍랑은 무섭지만 풍랑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왜 겁납니까?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 받을 때 생겨나는 것이지 뒤에서 호박씨 까고 있을 때는 안 생깁니다.
그러니 하나님 면전에서 진실하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하나님 저는 정말 부족합니다. 그러나 더 온전해 지고 싶습니다. 하나님 저는 주님의 일에 충성스럽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 충성스러워 지고 싶습니다. 주님을 조금 밖에 못 섬기지만 많이 섬기고 싶습니다.”이렇게 진실하게 할 때에는 그런 자신감이 생깁니다. “내가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구해 주실 때 나를 이 세상에 영업사원으로 파송하신 것 아니데, 당신의 자녀로 나를 불러 주셨는데”이처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뒤에서 호박씨를 까면서 하나님을 찾으며 교회에서 얼굴 자주 보이고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혼이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지만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정말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있으면 든든합니다. 풍랑이 좀 이는 것 같아도 10만 톤짜리 항공모함을 탄 것처럼 든든합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주시냐 하면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안 주십니다. 잠시 죄악의 낙은 즐거운 것 같았는데 그 죄의 즐거움은 불순종의 즐거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육체의 평안함이 끝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견디기 힘든 가시밭길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담장이 쌓이고 예전에 내가 사랑했던 세상이 나를 배반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뒤에 하나님이 움직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처음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은혜를 버리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준 사명의 자리에서 떠나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때에 어느 한순간에 여러분들에게 영혼의 곤고함과 육체의 괴로움이 밀려오기 시작하면 그 곤고한 날에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이제 드디어 나를 향해서 행동하기 시작하셨구나. 그리고 이 뒤에서 호박씨나 까는 표리부동한 신앙생활로는 결코 이러한 상항을 개선할 수 없구나! 그리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내가 해결을 보리라고 하는 그러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가시 울타리를 만드시고 더 이상 갈 수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담을 쌓아서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사랑하던 세상과 함께 연애에 빠질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 뭐가 남았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스스로 떠났고 좇아가던 세상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외톨박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죄와 불순종의 결과 입니다. 하나님 버리면 세상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는 스스로 떠나고 세상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아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소금이 그 짠 맛을 잃으면 무엇에나 쓰겠느냐. 흙이라면 개어서 벽이라도 바르지만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에다 쓰겠느냐. 밖에 버리어지고 세상에게 밟힐 뿐이 아니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즉, 죄가 우리 신자들에게 역사하실 때 두 가지로 역사하시는데 “속임과 강압”으로 역사합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죄의 마지막이 정말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기쁘고 찬란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어서 우리를 속이고 일단 죄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런 다음 이 죄는 강력한 힘을 발휘 하면서 우리 안에서 폭력 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시고 은혜가 역사하는 방법은 우리의 성품에 맞게끔 인격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지만 죄는 우리 안에 강압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머리 속에서는 이렇게 하면 안 돼. 안 돼. 하면서도 방탕한 길로 우리를 끌어가는 것입니다. 이 고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머리 속으로는 호세아가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과 가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속에서 역사 하고 있는 음탕한 욕망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가정주부로 살아 갈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긴 세월동안 주님 믿으면서 살았다고는 하지만 순결했을 때가 얼마나 됩니까? 세상유혹과 그리고 핍박이 나를 꼬이고 유혹해도 주의 순결한 신부로 살아가던 때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고 예수님이 나의 마음의 전부이고 그리고 나는 그 예수님 앞에서 한사람의 정말 사랑스러운 신부로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라고 하는 그런 정절 있는 삶을 살아갔었던 적이 얼마나 됩니까?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삶에는 가시와 담장이 끊이지 않았고 그 가시에 찔리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그 죄가 가져다주는 고통과 어두움으로 칙칙한 인생의 날들을 얼마나 많이 보내왔습니까?
그런데 이제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없게 되면 모든 담대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담대함은 인간적인 배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담대함은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신다는 그리고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서 투명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선지자가 고멜을 그렇게 사랑했지만 사랑을 받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랑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시밭길이 나타나고 높은 담장이 나타나서 더 이상 죄에 빠질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항에 이르게 되자 본 남편이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우리들에게 향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두 번씩 세 번씩 집을 나가고 외간 남자와 정을 통했던 여인들을 데리고 살 수 있겠습니까? 불결하고 더러워서라도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했습니다. 호세아가 그 불결한 아내, 자기를 버리고 수시로 뛰쳐나갔던 그 여인을 생각하면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불붙는 사랑에 사로 잡혀서 그 아내를 찾아오고 그 아내를 돌보았듯이 하나님도 일평생에 우리도 그런 사랑으로 이끄시고 지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결국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주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따라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살아가는 동정적인 삶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능력, 사명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는 능력,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가슴 아픔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줄 수 있는 거룩한 관용, 그 지치지 않는 불붙는 열심, 연단된 꿋꿋함 이 모든 것들의 원동력은 결국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것이 원천이 되어서 흘러 나와서 모두를 적시면서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시냇물이 맑게 흘러가는 곳에서 항상 주위에 꽃들과 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냥 흙더미만 있고 일년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가는 그런 시냇가는 없습니다. 아무도 와서 꽃 가꾸는 사람 없고 풀 가꾸는 사람 없어도 바람에 씨들이 날라 와서 메마른 들판에서는 씨로 말라서 죽어 버리지만 이 개울물이 흘러가는 기름진 땅 가장 자리에는 언제나 풍성하게 꽃이 피고 풀들이 자라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자라고 그리고 좋은 열매들이 맺혀 지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없음 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없음이 모든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십시오. 어느 날 가 보니 개울이 마르고 양쪽에는 모든 풀들이 말라 죽고 그리고 아름다운 꽃들도 다 시들었고 나무도 생기를 잃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당연히 물길을 돌려서 그 시내에 물이 흐르게 하면 되는데 바보같이 그곳에다 플라스틱 풀들을 갔다 꼽고 종이로 만든 꽃을 그 풀에다 매달고 다 말라 죽은 나무에 가짜 사과를 실에다가 엮어서 매달아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하나님을 향한 참다운 사랑이 결핍된 채 뭔가 종교적인 의무만 해보고 교인 흉내를 내 보며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싫습니다.
여러분! 어느 호텔에 가 보니 나무가 있는데 너무 예뻤습니다. 그 나무를 보는 순간에 너무 싱싱합니다. 그래서 저런 나무 교회에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1미터 앞에 갈 때까지 몰랐는데 만져 보니 헝겊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플라스틱하고 썩어서 만들었는데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그곳을 몇 번을 갔었는데도 여태까지 나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만져보니 플라스틱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보아도 참 좋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 드는 것이었습니다. 가짜라는 것이 확인된 순간부터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쁘고 아름다울수록 “예쁘면 뭐하나. 저건 가짜인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그렇게 생명이 없는 신앙 생활하는 것을 얼마나 마음아파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시내의 원천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이라도 은혜를 받고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리고 나는 얼마나 자주 본 남편인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외간 남자인 이 세상의 품에 가서 더럽고 방탕한 날들을 보내었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깊이 회개하면 마음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쏟아 납니다. 쏟아나서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인격에 흐르게 되면 눈이 띄어 지면서 비로소 삶 구석구석에서 그 더러운 잔재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외관 남자와 함께 돌아다니던 기억들, 그 침상 더럽고 불결한 물건들 이런 모든 것들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삶의 개혁이 일루어지는 것입니다. 못 보는데 무엇을 고치겠습니까? 그렇게 살면 되겠니? 라고 했을 때 내가 뭘 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멜을 깊이 감동시켰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라.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장작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면 돌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변함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생각이 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들어가고 오래 신앙생활 하면서 진리의 말씀이 쌓이고 거룩한 취지에서 자라가게 되면 철이 듭니다. 철이 들면 무엇이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 다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다 정리 하고 그렇게 안 살게 됩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하면 계속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자기의 죄에 대한 사랑과 욕망이 역사할 때에는 남편의 사랑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가시밭길이 나타나고 담장이 나타나서 더 이상 자기가 얻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항이 되어서 죄의 쓴 열매를 맛보게 되자 그때 비로소 사랑하는 남편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신앙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로 안 듣겠다는 사람들 머리 속에 구멍을 뚫어서 집어넣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그냥 마음대로 해요. 그것이 그렇게 어거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기 싫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하기 싫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해서 이 끝에 가서 그 가시에 찔려서 울고 떨면서 피해를 보고도 결국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설득 당하려고 하는 열린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설득 당하려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더 좋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나를 설득하시면 나는 설득 당하고 싶다. 그것이 바로 우리말로 표현하면 은혜 받고 싶습니다. 깨닫고 싶습니다. 나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나는 갈 길을 모르니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호세아의 사랑과 같았습니다. 호세아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것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여러분들의 발길로 걸어서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올 때도 여러분들의 발로 걸어서 돌아온 것입니다.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움직이실 때에 마지막에 스스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집에 와서 용서를 빌고 다시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품을 스스로 떠나고 야비한 방법으로 주님을 배신하다가 세상을 사랑하다가 방탕하고 정절을 잃어버린 몸으로 돌아 왔을 때 한번도 하나님께서 “넌 너무 더러워서 안 된다” 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번이 몇 번째야. 지난번에 내가 말했지.”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돌아 와 돌아 와 맘이 고한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 와
돌아 와 주께 와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내가 사람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셔야 했던 이유는 방탕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말로 설명해서 이해를 못하니 호세아 같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하나님이 죄인을 얼마나 오래 참으시고 그리고 비록 자기의 발로 걸어가 죄에 빠졌을지라도 가시에 찔려서 고통하고 있는 그 인간들을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마음아파 하시는지를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찾아내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찾던 사람이었습니까?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습니까? 우리 중에 하나님을 믿기 전에 누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도와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인생의 주인인줄 알았고 온 우주의 통치자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모든 행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따라서 살았고 주님을 거슬리고 제 멋대로 살면서 주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정말 주님을 거슬리면서 그렇게 방탕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제일 처음 주님 앞에 나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가 그렇게 회개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긴 나날 동안에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이 세상에서 방탕하고 더러운 삶을 살았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주님 모르고 산 날들이 너무나 억울하고 불순종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접해 드린 것들이 너무 마음 아파서 회개 했습니다.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죄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런 불순종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기에 어떠한 행복도 없다. 라고 하는 것을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니 뼈저리게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깊이 회개 하고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준비하러 가면서 어두움이 내리는 바다 위에서 수평선을 바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둥그런 해가 수면으로 쑥 들어가고 바다에는 순식간에 어두움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30분 지나고 나니 컴컴해 지고 한 시간 지나니 완전히 깜깜해 졌습니다.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빛이 있고 저 수평선 쪽에서 캄캄한 어두움이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은 우리의 인생도 항해와 같아서 언젠가는 빛 가운데서 이 시간들이 끝나고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저 어두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그 죽음의 빗장과 함께 어두움 속으로 걸어 들어 갈 때 그때 나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물질도 명예도 세상에서의 성공도 갖고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내 마음 속에 정말 한번도 가 보지 않은 어두음이 드리운 수평선과 같은 죽음의 대양 위를 자신 있게 걸어 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캄캄한 어두음 속에서 주님이 내 안네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고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이 자꾸 갑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회심한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저는 회심한지 정확하게 27년 28년쯤입니다. 그러나 그 28년의 세월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왜냐하면 정말 순결한 신부로 살아가던 때가 너무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만난 이후로 그렇게 회심한 이후로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며 산다고 버르적거렸지만 그러나 많이 섬긴 날들은 순수함이 없었고 비교적 순수했던 날들은 육체의 게으름 때문에 충분히 섬길 수 없고 또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더 많이 섬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 살아 온 세월이 온통 빚 덩어리입니다.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 밖에 없다는 마음이 어찌 저 혼자의 마음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만약에 우리가 인생을 살아도 단 1년이라도 시원하게 하나님을 섬겨드리고 주님이 전부인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순결한 신부로 살아가는 날이 없다면 마지막 날에 우리가 어떻게 그 어두운 밤바다와 같은 죽음의 휘장 뒤로 걸어 들어 갈 때 주님께서 동행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을 고향처럼 생각처럼 여기고 산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타향처럼 생각하게 될 것이고 이 세상을 나그네의 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타향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고향처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곤고하겠지요. 신년 사경회니까 와서 어떻게 좀 은혜를 받고 내 인생의 대박이라도 터져볼까? 라고 생각하실 정도로 곤고한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견딜 수 없이 힘들어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누구는 없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에게 다급한 문제는 다급한 것이 아니라 정말 시급한 문제는 오히려 여러분들이 다급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말랐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말랐기 때문에 수많은 풀들이 죽어 가기 시작하고 꽃들이 시들기 시작하고 나무들이 생기를 잃어버리고 있는데 여러분! 무엇부터 고쳐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만을 사라하지 않았던 것을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 없음이 삶 구석구석 베여 있었던 것을 깊이 회개하고 그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도와 달라고 그 사랑 속에서 살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어야 합니다.
2.말씀으로 돌아오라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 할 찌로다. 저가 놋 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꺽으셨음이로다.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 도다.”(시107:20)
지난 시간에는 “사랑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자.” 하나님께 돌아감에 있어서 사랑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신앙의 가장 큰 대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사랑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대의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그렇게 사랑을 회복하는 그것이 정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살펴볼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감에 있어서 말씀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문제에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지 않으시고 이 모든 인생의 문제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나님께서는 보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는 돈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 또 자식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면 아이들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 또 질병이 나서 아프면 건강의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는 우리의 영혼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이 당하는 고난도 없고 의미가 없이 당하는 그 어떤 시련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우리의 인생에는 반드시 그런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이 우리의 영혼의 문제와 함께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들을 고치시는 방법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어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수시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그만큼 변화된 삶을 살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더 힘들고 곤고한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인생을 보는 눈이 열려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말씀을 깨닫고 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우리의 인생을 많이 절약하고 헛고생을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불순종하고 그리고 죄악 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환란과 고난을 당하고 인생의 많은 시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이란 어려움에 빠지게 되면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헤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그렇게 헤어나려고 몸부림을 치지 그냥 잠수해서 머리가 땅바닥에 쳐 박힐 때까지 그냥 잠잠히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몸부림을 치고 애를 쓰도 그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비로소 자기가 인생을 잘못 살아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깨달았다는 말씀이 무슨 특별하고 처음 들어 본 어마어마한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나를 사랑하신다. 혹은 신자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 물고기가 혹 물을 떠나서 산다고 하더라도 신자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 이러한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많은 날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가르쳐 주시기를 수없이 하셨지만 그 보낸 말씀들을 우리가 거절 하니까 우리가 어두움 속에서 살고 무지 속에 가쳐서 내가 왜 불행해지는 지도 모르고, 고통을 받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져서 그렇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고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행복하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시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셔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흑암과 사망에 앉은 것과 같은 캄캄하고 어두운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변화시키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이 오고 어려움이 와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고 고난이 많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인생에 있어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때가 사실은 질러가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가하게 또는 바쁜 시간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마음을 추스르는 이런 것들이 환란과 시련 가운데 있고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근심 걱정 없는 한가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 근심 걱정 염려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한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는데 때로는 돌아가는 것 같은 일이 질러가는 것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좌충우돌 하면서 고통을 당하고 많이 수고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 속에 역사하면서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게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거나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다고 생각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은혜 가운데 있었을 때는 우리가 잘못 살아도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올바로 살도록 해 주시고 우리가 또 은혜를 받음으로 사실 그렇게 큰 낭패를 만날 만한 행동을 하지 않고 살게 됩니다. 은혜 가운데 있으니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일까? 또 하나님 앞에 늘 기도 하면서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릅니까? 내 마음에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려고 하는 악한 본성이 있는데 하나님 주님께서 지켜 주셔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함으로 말미암아 나쁘고 악한 길로 가서 쓰디 쓴 열매를 맺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즉시 고통이 오고 그 고통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영혼은 싫증에 빠지고 육체는 하나님 앞에서 받은 거룩한 성도의 의무를 행하기에 게으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 멋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그리고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시어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우리의 참된 모습을 보게 하시고 이제는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되겠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깨달아 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면 처음에는 깨달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속삭이는 것처럼 들리던 하나님의 말씀은 우렁찬 함성이 되고 흐르는 강력한 물소리가 되어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죽었던 우리의 신앙의 양심을 일깨우고 내 입장에서만 보던 내 인생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본격적인 우리를 고치는 작업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치는 작업이 일어나는 것 중 처음 일어나는 작용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영혼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치시는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에 강력한 은혜를 주고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이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고치는 역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밀려와서 우리의 영혼의 병든 것들을 고치시고 죄로 인하여 영혼이 부패 해 진 것들을 깨끗이 고쳐서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화) 친구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와서 “오! 버스 새로 샀네.” 라고 했습니다. 새로 산 것이 아니라 칠을 새로 한 것입니다. 사실 그 버스는 500만원 주고 사서 벌써 본전 다 뽑았습니다. 그래도 워낙 좋은 것을 사서 생생하게 끌고 다녔는데 여기 저기 늙으니 이제 병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치고 돈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너무 보기 싫은 것입니다. 마치 병색 있는 여인네가 화장 안 하고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차를 폐차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꾸 망가지기도 하고, 그런데 전문가에게 물어 보니 그래도 지금 사려면 8000만원씩 하니 조금 수리해서 쓰시는 것이 교회의 이득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 또 전문가의 이야기를 잘 듣는 사람이니 400만원 주고 깨끗이 수리를 하고 우리 교회 있는 나동운 집사님에게 디자인을 예쁘게 해 달라고 해서 그 그림을 가지고 공장에 보내면서 수리했을 때 화장도 좀 해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퇴원할 때 화장도 좀 해서 보내라고 해서 한 일주일 동안 그 디자인대로 깨끗이 칠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요즈음은 길거리에 서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예화) 여성들도 그렇잖아요. 병색도 있고 인생에 살 의욕이 없어서 머리는 폭탄을 맞고 기미는 끼고 꾸지지 해서 새벽기도 나오는 것을 보면 인생의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진짜 불쌍해서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주일날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 그 사람입니다. 제가 말은 안하지만 어떨 때는 새벽에 본 그 사람 딸인가? 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화장을 하십시오. 밥을 좀 들 먹어도 화장품을 사서 좀 찍어 바르고 머리도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다니지 마시고요. 또 그런 사람이 전도는 열심히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은 득이 안 됩니다. 다른 곳에 갈 때는 예쁘게 입더니 전도하러 나올 때는 꼭 군고구마 장사 같이 입고 옵니다. 그렇게 삶의 의욕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예수 믿으세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상품을 파는 사람도 뭔가 때깔이 있어야지 그것을 사고 싶습니다.
어쨌든 자동차를 그렇게 고치고 색칠을 해 놓으니 하얀색에다가 빨간 점 회색 글씨, 반짝 반짝하게 닥아 놓으면 속은 관계없고 차를 타면 마찬 가지이지만 겉에서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돌아다녀야지만 “차가 참 깨끗하고 디자인도 참 산뜻하구나! 어! 열린 교회네.”라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폭탄 맞은 것 같은 차가 덜덜거리고 굴러다니면 “열린 교회 썩은 교회네”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고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 교회당을 우리들이 한 6개월 동안에 거의 쓰러질 듯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을 하면서 이 건물을 고쳐 놓았습니다. 제일 충격을 받은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 공장을 우리에게 판 그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가 이 공장을 팔고 가셨는데 여기서 쓰레기 처리하는 비용이 3500만원 정도가 나왔습니다. 그런 쓰레기 더미였는데 예배드리는 날 와서 딱 보고 그 할아버지가 입이 안 다물어 지시는 것입니다. 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게 고치면 정말 훌륭합니다.
이제 버스도 깨끗하고 고치고 칠을 해 놓고 나니 내 마음 속에서 “어 쓸만하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누가 그것을 만약 폐차 시키자고 하면 제가 정신 나갔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고쳐놓은 것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다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망가진 사람들 아닙니까? 안 망가진 사람들 있으면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 다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망가진 채 산산조각이 나서 망가진 채로 태어나니 이제 그 인간이 아름다워 지고 인생이 보람 있어 지는 길은 얼마나 아름답게 수리를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 공장을 발도 들려 놓을 수 없는 곳을 수리 해 놓고 나니 신문사에서 와서 리모델링 성공사례로 취재까지 하고 갔습니다. 요즈음도 발걸음이 거치지 않습니다. 소문나서 계속 오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사람이 보러 온 다고 할 때 교회가 발칵 뒤집혀서 안내를 하고 했는데 이제는 하도 자주 오니까 그냥 알아서 보고 가라고 합니다. 이처럼 고친다고 한다는 것이 그렇게 훌륭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가르침에 의하면 들 망가졌다고 자랑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를 보면서 실망했다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 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 실망스러운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가 그동안 안 고쳐진 사람을 너무 많이 고쳐 졌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고 어차피 망가진 본색이 들어 나면 “아! 올 것이 왔구나! 그렇지 그대가 그런 사람이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을 위해 오히려 교회가 할 일이 있고 우리가 섬길 부분이 있구나! 그러면서 고쳐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치시는데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는 방법은 항상 말씀을 보내셔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그럼 목사님! 말씀을 안 보내 주시는 사람을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 개꼬리 삼년을 묻어도 황모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 믿겠다고 걸어 왔을 때에 그 망가진 인간 그대로인데 줄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한 줄 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호박에다가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겠습니까? 생긴 것 그 자체 속이 안 고쳐졌는데 교인이라는 딱지 한 장 붙이고 시간이 흘러가서 집사라는 딱지 두개 붙이고 세월이 지나가서 권사, 세월이 지나가서 장로 군번 순서대로 이런 위원장 저런 위원장 되었다고 해서 줄을 그었다고 해서 호박이 수박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은 누구도 고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많은 깨달음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깊이 깨닫고 그 말씀 앞에서 감격하고 말씀 앞에서 감격하면서 아파하면서 회개하고 그 말씀 앞에서 흐느끼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라고 수시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고쳐지고 그런 기회가 거의 없는 사람들은 거의 안 고쳐지는 상태로 일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고쳐진 사람들은 결국은 삶을 살아가는데 안 고쳐진 사람답게 일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누에고치에서 실이 나오는 것처럼 그 누에고치에서 실은 없는데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속에 있는 것이 하나씩, 하나씩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서 흘러나오는 그 누에의 실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변화되지 않고 작대기만 몇 개 그어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줄을 그어 놓았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가 변화 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변화된 것만큼만 새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변화가 되지 않으면 교회는 나오지만 그러나 그 누에고치와 같은 그 사람 속에서 실처럼 빠져나오는 삶이 옛 삶이지 새 삶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깊이 은혜 받고 그리고 말씀 앞에 꺽여지는 것이 무엇이고 말씀으로 매 맞는 것이 무엇이고 말씀으로 어루만짐을 받는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씻겨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시지만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셔서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직까지도 고쳐질 것이 아주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은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패한 것들을 고치시는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성령으로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은혜를 체험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들이 옛 삶의 껍질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변화 시킨 다음에 어떻게 그 말씀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고치시는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은혜가 역사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첫 번째로 시작되는 영혼에 일어나는 변화의 반영입니다.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마음에 놀라운 변화 일어나게 되면 마음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전에는 근심과 염려로 가득 차 있던 마음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런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고치기 시작할 때, 마음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모든 것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마음은 영혼이 사물을 바라보는 창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뵈올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한 2년 전에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눈이 너무 나빠졌습니다. 정말 심각할 정도로 나빠져서 60대 노환일 정도로 글씨가 잘 안 보이는 것입니다. 참 고민입니다. 그래도 달고 다녀야지요. 그런데 의사가 진찰을 하더니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이 나이에 한쪽 눈이 이렇게 나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정밀 검진을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밀 검진을 시작했는데 눈을 X레이를 찍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좀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X레이를 찍는 줄 알았는데 주사부터 맞아야 된다고 하면서 주사를 혈관에다가 낳는데 이것은 세상에 두 번 경험할 것이 못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주사를 놓았는지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이 완전히 토끼 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새빨간 눈이 되었는데 아니 보니 것마다 전부 다 빨간색인 것입니다. 빨간 선글라스 낀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도 빨간 사람 내 손도 빨갛고 컵도 빨갛고 벽도 빨갛고 겁이 덜컥 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계속 살면! 내가 아무리 빨간색을 좋아하지만. 그러고 나서 눈을 벌리고 찍는데 몇 번을 토했습니다. 속이 막 뒤집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촬영을 하고 두세 시간이 지나 이제 그 빨간 것이 서서히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습니다. 마음이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으면 모든 보는 것이 그 마음의 창을 통해서 보니까 비관적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남편을 봐도 저 인간. 사람 될 것 같지 않고 자식을 바도 헛고생하는 것 같고 교회를 바도 희망이 없는 것 같고 나라를 보면 더 복장이 터지고 이런 생각이 들면서 모두 부정적인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말씀의 은혜를 주시면 그런 마음이 고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사랑스러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돈 밖에 모르는 수전노 같은 인생을 살았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창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대부분의 질병은 이 마음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제일 커다란 일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이 마음의 어두움을 지워주고 그리고 굽고 꾸겨진 마음을 펴 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그 마음으로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왜 창조하셨고 한번 밖에 없는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보람 있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의 변화를 받고 나면 세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그렇게 행복하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
물 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그렇게 샘솟듯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울고 웃고,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울고 웃고, 세상의 지위에 높고 낮음에 따라 울고 웃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눈에 보이는 것들은 잠시 스쳐 가는 것들이고 내 안에 예수님 때문에 진정으로 행복해 지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보내어 질 때에 하나님께서 또 고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하고 나니 그 다음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오지만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 양쪽에 강도가 한사람씩 매달려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두 강도가 함께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한 강도의 마음이 깊이 변하면서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차마 자기가 살아온 짓이 있기 때문에 구원해 달라고 까지는 말하지 못하고 당신의 나라에 이르실 때에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이렇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나니 그 다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생각도 생겨나고 또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들게 되고 그리고 예수님과 낙원에 대한 기대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변화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도록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많은 환란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창조 하시고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많은 어려움과 우리의 인생을 사는 곤고한 이유들을 하나님께서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시고 주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하나님 허락 하에 일어나는데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필연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로는 환란과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멀리 떠난 우리 자신의 불순종한 모습을 보여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마음을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생각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우리의 영혼에 보내어 주시고 우리가 성령으로 그 말씀의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를 않고 머리로 그런 생각이 든 다고 할 지라도 가슴으로 정말 “제가 죄인입니다. 하나님 모두 저의 잘못입니다. 제가 부족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는 무릎은 끓는 견비한 자기 고백이 생겨나지가 않는 것입니다. 머리 속에서만 왔다 갔다 할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보내시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성령으로 역사하게 해 주시면 그 때 우리가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헐벗은 것도 보았고 그 때 비로소 우리가 눈 먼 것도 보이고 우리가 얼마나 악한 존재이고 마음 깊은 곳이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어 주시면 우리의 마음이 열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때 어떻습니까? 너무 마음이 괴롭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 좀 하면 하나님께 아부라도 해서 좀 어떻게 이 어려움을 피해갈까 생각하고 물에 빠졌을 때 구명조끼 잡는 느낌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렸는데 주님께서 말씀을 보내어 주시니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깨닫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깊이 병들고 깨뜰어졌던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 관계를 깼습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와의 관계를 깨시는 적이 없습니다. 왜.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월을 많이 지나고 보면 신앙이 어렸을 때는 하나님 때문에 토라지기도 하고 앙탈도 부리고 하나님을 원망도 하고 그러다가 신앙이 깊어지고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비로소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하나님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이제껏 까지 움켜지었던 자기의 방법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아름다움도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은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제 멋대로 살아가며 고통을 받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지체 하나가 무릎을 꿇고 진실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너무나 많은 날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찮게 여기고 제 마음대로 자행자지하며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고 그래서 오늘의 제가 경험하고 있는 이 고통은 저의 불순종의 씨앗이 자란 열매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될 때, 그 때 하나님을 향한 모든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이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기대어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마음이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셨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깊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손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딴에 큰일을 했다고 폼 잡을 때에 하나님께서 본 척도 안하실 때도 가끔 있습니다. 동기가 바르지 않거나 그럴 때에 그렇지만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해서 하나님과 저희의 이 화목한 관계가 깨뜨려졌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회개하고 나면 그 다음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어두운 그림자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나는 비록 가진 재물 없고, 높은 지위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내가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내 안에 다시 살아 계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두 번째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만 고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 하면 교회와 나와의 관계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병든 신자들의 대부분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교회와의 관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정말 불쌍한 사람들은 누군가 하면 돈 없고 권력 없는 사람들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사랑할 교회, 존경할 목자, 섬길 사명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일생을 인도하실 때에 어떻게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들려 주셔서 그 죄악 가운데 있는 자기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들은 사람이 누구와 사귀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 한번 잘 믿어 보려고 하면, 세상 친구들은 계속 이어 갈 수가 없습니다. 자꾸 끊어지게 되고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형제자매들로부터 사람을 받으면서 주님이 누구인지를 배워가게 되고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또 자기보다 어린 교인들이 들어오게 되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끔 보면 새 가족 위원이라고 명찰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달고 다니긴 하지만 그런데 저 사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 가족이었었는데 새 가족 위원이라고 그러면서 달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많이 자랐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니 금방 새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자기 새 가족 세대를 가장 잘 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금 새 가족이 끝났으니 요즈음은 새 가족들이 뭐를 필요로 하고 무엇에 도움이 필요한지를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하십니다. 예전에는 예배드리려 등록은 했어도 남의 교회 같았는데 지금은 예배당 들어 올 때마다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시냐고 하니 이걸 짓느라고 성도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라는 것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걱정하시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준비하고 있으니까 기다리시라고. 어쨌든 그러던 사람이 이제 교회에 와서 새 가족 한 모퉁이를 섬기고 교회의 한 모퉁이를 돌보면서 비로소 이 교회가 내 교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목양을 받으면서 누군가 내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리고 내가 아플 때, 내가 곤고할 때 달려가서 내 고통을 털어 놓고 어루만짐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목자들이 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나면 반드시 교회에 원망과 지체들에 대한 미움 목자에 대한 서운함 이런 모든 것들이 뒤엉켜 누가 잘했고 잘못하였는가는 나중의 문제이고 어쨌든 그렇게 교회와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교회에 대한 사랑이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쳐지고 나면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왜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셨는지 그리고 왜 교회에서 자기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돌보는 그 목회자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았던 것을 깊이 회개 하고 그리고 참된 목양의 그늘 안에 돌아와서 풍성한 목양의 꼴을 먹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시고 그 말씀이 성령으로 우리의 영혼에 역사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두 번째로 교회와의 관계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세 번째로 말씀을 보내어 주실 때에 사람들과의 관계도 고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옛 말에 “인심이 곳간에서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무엇이냐 하면 항상 우리의 영혼과 신앙의 인격은 곳간과 같다. 그래서 거기에 쌓은 사랑과 선이 많으면 용납하기 힘든 사람도 없고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도 없습니다. 그 곳간에 많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들에서 꺼내어서 나누워 주면되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현재 5000원 밖에 없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내가 지금 너무 힘들거든.” 5000원만 비려 줘도 아니고 “그냥 줘.” 그러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만지작거리는 것입니다. 저 지체가 어려운 처지에 처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 오 천원을 주면 자기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됩니다. 그러니 힘듭니다. 그런데 주머니에 한 오십 만원정도 들어 있습니다. 이 때 누가 “정말 내가 어려운 이야기 좀 해도 될까?”라고 하면서 5000원만 빌려 달라고 하면 망설이지 않고 빌려 주게 됩니다.
(예화) 제가 아는 목사님 교회의 교인인데 외교관으로 UN에 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각국이 모였는데 거기에서 그 외교관이 우리나라에 대해서 우리나라가 이제 옛날의 나라가 아니고 굉장히 발전한 나라라고 그것을 설명을 했답니다. 그곳에 제 3세계 아프리카에서 온 대표들이 많이 있었는데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 이면서 그렇게 깊은 감명을 받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박수를 받으면서 우리나라 진짜 괜찮은 나라라고 한번 연설을 하고 저렇게 깊이 동의 하고 박수를 받으니 기분이 좋아서 나왔는데 그 시커먼 아프리카 사람 하나가 오면서 정말 연설을 감명 깊게 들었다고 하면서 한국에 대해서 6.25전쟁 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는데 그렇게 필름에서 보는 것처럼 부강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다고 하니 너무 반갑다고 하면서 그는 아프리카의 정말 가난한 어느 나라 대표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맙다고 하면서 그렇게 잘 사는데 어떻게 그냥 계실 수 있느냐고 하면서 원조 좀 해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가슴이 덜컥 내려 안드라는 것입니다. 그럴 여유는 없는데 그래서 조심스럽게 방에 가서 뭘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수첩을 뒤적거리면서 “트랙터 한대, 지프차 한대, 병원차 한대 이상 세대입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그건 문제없다고 하며 당장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원조해 주었답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므로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제 겨우 80년대에 조금 먹고 살만 하는데 2000km나 되는 고속도로 하나를 무료로 놔 달라고 하면 우리나라도 못 놓는데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자기가 쌓은 것에서 내 놓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와서 자기에게 뭔가를 요구 하지 않아도 아는 척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짜증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나 하나 추스르면서 살기도 힘든데 무슨 지체들을 위해서 대신 짐을 지고 그들이 회개 못한 걸 대신 해 줍니까? 나도 회개가 안 되는데.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고 짐을 대신 져 주고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고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여건이 허락을 안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내셔서 그 사람을 고치시고 새 사람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쳐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쳐지고 평안과 위로가 넘쳐나고 교회와의 관계가 고쳐져서 이제는 주일마다 교회 가는 것이 행복이고 사랑할 교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측은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세상 모두를 가진 것 같습니다. 고통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언제나 돈은 없지만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시련 속에서 무릎을 꿇으면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비로소 마음의 눈이 떠여져서 다른 사람의 고통 받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이지적이게 되고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은혜 받은 것만큼 사랑으로 사람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인간미가 없는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성공하지 못합니다.
미국에 있는 정치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대한 자질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을 웃길 줄 아는 재능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미 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지도자이고 자기의 목표에 불붙는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일지라도 그것 밖에 없는 사람들은 항상 “돌격. 나를 따르라.”하고 달려가면 나중에는 자기 혼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미가 너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와 같은 전사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목표 내 인생과 신앙에 대해서 이글거리는 눈빛을 갖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 이글거리는 눈빛을 가지고 있어도 사람이 삭막한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글거리는 눈빛이지만 가끔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손도 잡아주고 눈물도 씻겨주고 그리고 안아도 주고 배고프면 먹여도 주고 이럴 수 있어서 자기처럼 못사는 사람들도 함께 끌어안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진짜 인생에 있어서 성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나 하나도 추스르기도 힘 드는데 누가 와서 나에게 기대는 것이냐 이것입니다. 짜증나게. 하여튼 기대기만 해 봐. 힘들어 죽겠는데. 기대기만 하면 밟아 버릴 거야. 그러고 뭐가 좀 힘들게 하면 “그래. 한번 해봐.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죽을래. 살래” 이렇게 사람이 살벌해지는 것입니다. 저도 한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가 보니 진검을 빼들고 세상의 목에 겨누고 한번 해볼래. 하고 승부를 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 검을 꼽고 나를 너무 힘들게 했던 사람을 끌어안고 함께 펑펑 울어주면 나를 반대하던 사람이 내 편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힘들어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그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속에 늘 주님 앞에 기도드리는 두 가지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지성의 큰 그릇을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만났습니다. 지금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성에 그릇은 이만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정말 시인 못지않게 하나님을 만났는데 사도 바울이나 이런 사람들처럼 하나님 만난 것을 잘 풀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는 그릇이 필요한데 그것이 지성이 그릇입니다. 지성의 그릇이 크면 커다란 신학자가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을 만난 과정을 신학 화 하면서 그것을 지성적으로 풀어내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말 똑똑한 사람들의 지성에까지 호소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커다란 하나님에 관한 진술들을 풀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릇이 그냥 불만족스러울 정도로 너무 작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께서 한번 큰 그릇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은혜가 떨어지면 인격이 어쩜 그렇게 옹졸한지 그릇이 조그만 해 가지고 뭐를 도대체 담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격의 그릇을 넓게 해 주셔서 나 좋다고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싫다고 하는 사람 심지어는 반대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 인격의 그릇에 끌어안고 시인이 고백하였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원수들이 나를 미워하나 나는 저희를 위하여 기도하나이다.” 그런 인격의 큰 그릇을 가지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두 가지가 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저도 얼마 안 된 인생이지만 살다가 보면 은혜를 하나님 앞에서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나를 너무 싫어하던 사람들, 부당하게 나를 비난하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시는 놀라운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저의 동역 자가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칼로 맞서서 항복을 시켜서 내 편으로 만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한번 지검으로 승부를 해 볼 것이야. 라고 하며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쌍칼을 들고 싸워 본들, 그게 그렇게 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으로 우리가 고쳐지고 나면 반드시 사람과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기 전까지는 밉던 사람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 받기 전까지는 저 인생 왜 사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은혜를 받고 보니 내 인생 왜 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입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면 섬기리.
그런 마음이 깊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랑 받을 때 보다 사랑할 때 행복해지고 용서 받을 때 보다 내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면서 그렇게 고난에 동참할 때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행복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기 전에는 지나가기만 하면 항상 어떤 느낌이 들었나 하면 “사람들은 왜 나만 자꾸 미워해”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사람 있지요? 그런데 제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는데 대부분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미워 할만한 이유를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소갈머리가 없던지 예의 바르지 못하든지 이기적이든지 타산적이라든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든지 하여튼 무엇인가 이 성격에 모난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살아 올 때는 사람들을 나만 미워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니 이렇게 박해를 받는구나. 라고 하지만 그런 것 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소갈머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없어서 인격 적으로 미성숙하고 소갈머리가 없어서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신앙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비로소 그런 것들이 고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니 사람들을 향해서도 아주 많이 너그러운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전에는 그냥 그렇게 인격이 박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 자기를 핍박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 자기를 싫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고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시니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고 나누고 섬기고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디를 지나가도 사람들이 다 이 사람 겉에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거친 이 세상의 벌판을 가르고 흐르는 한 줄기 시내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 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면 샘처럼 솟아나서 주위와 자기와 만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 마음과 삶에 꽃이 피고 그리고 풀이 돛아 나게 만들어 주어서 삭막하던 사람들이 인간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정말 메아리와 같아야 합니다.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은 정말 화가 날 일이 있어서 산에 올라가서 “아! 인생 더럽다”라 했더니 한참 있다 저기서 “아! 더럽다.” “이 자식 누구야” 그러니 “이 자식 누구야.” 메아리 입니다. 그래서 내가 은혜를 받고 내 영혼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메아리치면 정말 박복한 인격이었는데도 변화가 되고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랑을 받으면서 변화의 놀라운 역사는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하나님의 깊은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자기와의 관계를 고쳐 주십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경험하게 된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항상 동일합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나와 그리고 지금의 나가 항상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무슨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를 따라서 존재하므로 바보같이 싫어하시는 일들에 대한 소망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유혹을 받으니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지지 내가 나 된 것이 좋겠습니까? 싫어지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서 모든 욕심이 잉태하고 범죄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죄를 짓고 나니 불리 현상이 심각하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할 때 나 자신이 너무 싫고 미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고쳐지고 나면 자기와의 관계가 고쳐집니다. 즉, 혼란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떻게 혼란 속에 들어가게 되나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짐으로 자기와의 관계가 깨뜨려 졌습니다. 그러고 나니 자기를 야단쳐야 할 때는 사랑해주고 자기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겨야 될 때에는 아주 가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기적이 되고 자기중심적이 되다가도 갑자기 자기를 확대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사람 자기 자신도 너무나 불쌍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셔서 잘 고쳐지고 나면 놀라운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변화가 생겨나는가 하면 이 사람이 깊이 은혜를 받고 고쳐지고 나면 언제 자기를 야단을 치고 언제 사랑해 주어야 될 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에게도 있는 본성인데 그 사랑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로 말미암아서 올바른 방법으로 사랑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면 올바른 방법으로 자기를 사랑할 수 있도록 그렇게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 믿기 전에 열등감 때문에 아주 많이 괴로워했던 사람입니다. 사실은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많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팔 다리가 하나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모자라는 것도 많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저보고 다재다능하다고 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 제 친구들 중에는 저를 쳐다보면서 절망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만 만나면 요즘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뿌듯하고 기쁨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짜증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이것도 별로 제대로 하는 것이 없고 저것도 별로 잘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옛날에는 너무 심했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하나님을 안 믿을 때니 “왜 우리 부모는 너를 이렇게 태어나게 하셨을까?” 무슨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얼굴이 미남으로 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언변이 좋은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세 사람만 모이면 말을 못했습니다. 안 믿어지시죠. 그 세 사람 중에 여학생이 한사람 끼워 있으면 더 더듬어 집니다. 책 읽는 것은 좀 좋아 했다고 하지만 그만큼 안 읽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무것도 내 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자존감이 빵점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도 한참동안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점점 더 복음에 깊은 의미를 깨달으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 생각 했다는 생가가 듭니다. 무슨 생각이냐 하면 저는 모든 면에 탁월하고 높아지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다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꼭 가 보고 싶은 산 중에 하나가 에베레스트 산입니다. 올라갈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지난번에 산에 갔다가 산소부족 때문에 쓸어 질 뻔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냥 가서 곁에 서서 한번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으로 보면 그렇게 신비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8000미터나 넘는 거봉, 밟아 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몇 명 안 되는 산, 올라가지는 못하지만 그 아래서 한번 바라보기만 해도 얼마나 멋있을까요. 그런데 그 산이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아름다운 산이 그 산 하나만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도 작고 높이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올라 다닐 수 있는 산 중에도 아름답고 예쁜 산이 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한참동안 변화되고 나니 그 다음에는 인생에 대한 생각이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나를 에베레스트 산처럼 태워 나게 하시지 않고 남산처럼 태어나게 하셨을까? 왜 모락산처럼 태어나게 하셨을까? 라고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 사실은 이 세상ㅇ에서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은 뛰어난 재능만이 아니라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도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런 열등감 같은 것들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완전히 사라 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진짜 가끔 주제파악을 못해서 걱정이 될 정도로 열등감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과정에는 또 치유하시는 과정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요즈음도 저는 자존감이 없는 형제자매들을 보면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꾸 놓여 주셨습니다. 공부도 못하는 줄 알았는데 신학대학 가 보니 그래도 할만 하구,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조금씩 조금씩 보여 주시면서 격려를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인생에 있어서 참다운 가치가 세상적인 그런 탁월함이 아니다. 이런 신앙으로 깨뜨려지니 이렇게 변화되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고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 그리고 교회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정말 우리를 귀하게 생각한 사람, 너는 이 세상에서 너무 귀하고 정말 너무나 소중한 존재다고 인정해 주는 속에서 살아 본 사람이 아니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하고 일그러진 자화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좀처럼 고쳐지지가 않습니다.
요즈음도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전도도 많이 했지만 많이 나았습니다. 아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서 교회의 공간이 포화상태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공간을 좀 마련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도 교회에 왔을 때 솔직히 교회에서의 공간이 집보다 조금 더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교회에서 공간 적으로도 어른들이 나를 사랑해 주고 존중히 여긴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느끼면서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게 될 때 그 때에 이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양육 받는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집은 온갖 좋은 것을 다 갖다 놓고 교회는 마치 다 낡은 교실처럼 만들어 놓고 그렇게 자녀를 양육 시키면서 그러면서 무슨 교회가 엄청난 고난에 동참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한쪽면만 본 것이지 다른 쪽 면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가난한 자를 돕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조금 덜 누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또 한쪽 면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이처럼 나 자신을 향해 올바른 자존감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지 때문에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원수처럼 대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볼 때 죄된 육체는 우리들이 적수처럼 다루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우리 자아 전체를 그렇게 다루라고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보내어 져서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또 교회와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나면 그 다음에 나 자신과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분명히 알고 자존감을 잃고 스스로 열등감에 빠지기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줄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껏 까지는 전혀 다른 새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의 고침을 받고 이렇게 모든 관계에 고침을 받아서 정말 주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시는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3.기도로 돌아오라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 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사 38:2~3)
우리가 아침시간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데 첫째 날은 사랑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기도로 돌아가자 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히스기야라고 하는 유대왕국의 임금이 나옵니다. 솔로몬 이후로 나라가 둘로 나뉘면서 북쪽은 이스라엘이 되었고 남쪽은 유다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라가 둘로 나뉘어서 남 왕국의 유다가 되었는데 이 유다나라에 의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정통성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북 왕국은 비록 사람 수도 많고 나라도 크지만 그러나 정통적인 왕권은 유다나라를 통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라가 둘로 나뉘어 진 뒤에 이 유대나라에 히스기야라고 하는 임금이 나중에 나타나는데 그 임금이 정말 청사에 길이 빛날 정도로 그렇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임금이었습니다. 정치도 잘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말 신앙으로 다져진 그런 임금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신앙을 가지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이제 히스기야를 기점으로 그 이후부터 나라는 점차 기울기 시작해서 결국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왜 그렇게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하냐 하면 이 사람 때에 아주 커다란 종교적인 개혁과 그리고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이 아주 놀랍도록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북 왕국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을 맞이할 때 북쪽 사람들까지 초청을 해서 잔치를 하면서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두고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뒤에도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음으로 영향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교회나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해 주시고 은혜를 많이 주시면 이 열렬했던 신앙들이 다소 식습니다. 물론 성실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은 좀 천천히 식고 정신없이 아무렇게나 살고 지식적으로도 정리가 안 된 사람들은 빨리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마음이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시면 결국은 개인이든지, 교회든지, 국가든지 실패하고 말 것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한번씩 그 사람들을 혹은 교회를 한번씩 휘둘려서 그들에게 있어서 더러운 찌꺼기들을 털어 내시고 영적인 갱신을 경험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완악하고 모진지 신앙을 떠나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로서 근심을 안 해도 되는데 사서 근심을 하는가 하면 이제는 걱정을 할 때쯤 됐는데 걱정을 안 하고 천하태평으로 살아가는,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라보시는 생각하고 너무 뭐가 안 맞습니다. 그래서 혼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은혜 받기 전까지 걱정하고 근심하던 것들이 마음속에서 다 사라져가고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자기를 다스리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의 평강이 자기를 다스리고 자기 안에 충만하게 되면 근심과 염려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조금 지나다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마음이 혼란해지고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게 됩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 앞에 근심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교회는 잘되어 가는가?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내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정말 순종하며 살아가는 건가? 이런 마음과 생각들이 계속 내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에는 무슨 그런 근심, 그런 염려, 그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서 전혀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으면 생각이 변하고 예전에 염려 안 하던 것에 대해서 염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종종 있는 일입니다만 어젠가 그젠가 같이 식사를 나누면서 들은 이야기 입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수련회에 가서 은혜를 많이 받고 오더니 대뜸 집에 와서 하는 이야기가 “아빠! 우리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라고 했답니다. 그러니 은혜를 받고 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근심이 생기나 봅니다. ‘저렇게 살면 안 될 텐데. 왜 저렇게 살까?’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이 남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위해서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모두 염려와 근심이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것 입니다. ‘그 은혜 받지 말까보다. 근심이 그렇게 많다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나! 지금 근심도 무거워 죽겠는데 그 위에다 또 근심을 언지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그게 틀립니다. 뭐가 틀리냐하면 같은 근심이라도 우리를 자꾸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 우리의 심령을 썩어 들어가게 만들어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치면에 빠지게 하는 근심이 있고 우리로 하여금 근심할수록 우리의 심령이 더욱 빛나고 근심할수록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지게 하는 그런 종류의 근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룩하고 경건한 근심은 우리의 영혼을 계속 살아 있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에 이르는 근심입니다. 전자는 사망에 이르는 염려입니다. 그런 경건한 근심은 건강에도 해롭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 들어 봤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너무 염려하다가 화병이 생겼다.” 안 들어봤지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대게 시어머님 미워하고 남편 미워하다가 화병에 걸리지, 마귀와 오랜 세월 싸우다가 말하자면 사람이 포악해 졌다는 그런 이야기 들어 본 적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경건한 염려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쉽게 완악해 지니 하나님이 때로는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나, 국가에 있어서나 위기를 한번씩 주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를 보면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진짜 아사 임금과 함께 청사에 길이 빛날 정말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정말 염명한 군주였습니다. 정말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이런 임금은 다윗과 같은 임금과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정말 그 민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역사에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주시면 그 사람 때문에 나라가 잘되고 교회가 잘되고 가정이 잘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나라와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히스기야 임금이 그렇게 염명한 군주이고 샛별 같은 신앙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인데 이 사람이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그러나 역시 사람에 불과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말년에 가서는 성령으로 시작한 그의 아름다운 신앙의 역사를 육체로 마무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에는 그래도 히스기아가 신앙을 잘 지키며 살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무엇인가 이 히스기야를 한번 흔들어 놓아서 바닥까지 한번 소지하고 싶으신 그런 필요를 하나님께서 느끼셨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히스기아는 훨씬 더 빨리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보다 속히 자기의 일생을 마감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이 사람을 바닥까지 흔들어 놓으셨는가 하면 그것은 개인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어길 수가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가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유언하라고 하시더라. 만약에 히스기아가 몇 년 동안 중병에 걸려서 누워있는데 그런 말씀이 임했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데 히스기야 임금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너 이제 바로 죽는다고 그래라.”라고 그러니 이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그 선고를 들었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겠습니까? 아직 나라를 위해 할일도 많고 그리고 자기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아마 히스기야의 마음에는 이때가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때구나. 라는 생각이 안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아의 영혼을 놀랍도록 새롭게 하시고 그래서 결국은 생애적인 찬송을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히스기야를 갱신시키신 것입니다. 이 의미를 구체적으로 공부해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시고 다루시는 섭리를 볼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나 불순종 반역 차마 보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벌하시는 뜻으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고 인생의 커다란 위기를 주시는 때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히스기야 임금처럼 하나님께서 잠자는 것 같은 영혼을 일깨우고 하나님 앞에 다시 살게 하시기 위해서 굳어진 우리의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서 잠자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 위해서 땅의 것들에 고정되어 있는 우리의 시선을 들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게 하시려고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고난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위기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이 히스기야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을 선고 받았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인간적인 방법으로 애를 썼을 것입니다. 상황은 병들어 있는 상황입니다. 의원의 도움도 받았지 않겠습니까? 죽으려고 의원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살려고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너는 이제 죽고 다시 못 산다. 너의 집에 유언하라.” 그것은 의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데려 가셨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겠다고 하는 의지를 선지자를 통해 보여 주셨는데, 이제는 의원으로도 소용이 없고 누구를 불려도 도움이 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은 병들어서 의원들을 의지하면서 어떻게 다시 살아 보려고 애를 쓰던 이 히스기야의 마음을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의원들에게 기대할 수 없었고 의원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었고 좋은 약이나 좋은 치료법 어떤 것에도 희망을 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커다란 어려움을 주시고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혹하게 다루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서 그렇게 하신다기 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뢰하고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움을 우리 인생에 주시기도 하십니다.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 오는 고난은 우리가 피할 길도 있고 그리고 우리가 이제껏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많은 경험들과 그리고 지혜도 이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당신의 면전에 세우시려고 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주시는 어려움인 경우에는 그 어려움은 결코 인간의 재주나 힘으로 피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것을 금방 압니다. 그러나 지혜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이 히스기야 임금이 하나님 앞에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는 선고를 받았을 때에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의 특징 중 첫 번째로 하나님만은 바라보는 기도였습니다. 병들어 누웠을 때 의원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좌우를 모두 물리고 그리고 면벽을 한 채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이 기도는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는 기도였습니다. 병들어 누었을 때에 히스기아가 그 병을 났게 해 달라고 이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임금이 기도하지 않았을 리도 없고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이 질병이 물러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았을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드리는 이 기도는 이제껏 드린 그 기도와는 차원을 달리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이야기가 보통 어려움은 보통 기도가 되는데 특별한 어려움일 때에는 보통 기도로 안 되고 특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특별한 어려움 단지 우리를 달련하시기 위한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세우시려고 하는 그런 강력한 의도가 있는 어려움일 때에는 창자까지 쏟아내는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부르시는데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심으로 죄의 길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들, 불순종의 길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이리가도 살 수 있고 저리가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 이외에는 살 길이 없다. 라고 하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들만 하나님 앞에 살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임금이 바로 그런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고 선언 하셨는데 이제 의원이 무슨 소용이 있고 약이 무슨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래 다시 너를 살려 주마”라고 말씀을 하신다면 모르거니와 다른 것은 이 특별한 어려움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도였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흔들고 계시고 이제는 내 인생의 어려움, 내 인생이 이런 어려움에 직면 했구나 라는 것을 알고 그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 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그 큰 어려움을 보면서 처음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것들을 극복해 보려고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포기 하지 않고 그렇게 몸부림을 쳤는데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 앞에 세워 보시려고 마음먹으신 어려움은 그 어려움이 그렇게 쉽게 인간적인 방법에 의해서 해결이 안 됩니다.
이 때에 몸부림 치고 애를 써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수고와 슬픔 밖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속히 모든 신앙을 끊으십시오. 모든 신앙을 끊고 “내가 벧엘로 올라가리라” 거기 가서 내가 이전에 그 하나님을 만나리라. 그런 신앙을 가지고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죽든지 살든지 뜻대로 하소서. 히스기야가 바로 그런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많은 기대들을 떨쳐 버리고 정말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내 인생이 주님의 손안에 있구나! 그것을 믿고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이 히스기야의 기도의 특징은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 사실이 어떻게 나아 있습니까? 통곡과 눈물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히스기야 임금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태도는 눈물로 나타났습니다. 통곡하는 기도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스기야 임금의 영혼 속에서 어떤 싫증이나 나태함 그저 어떻게 되겠지 이런 안일한 태도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피를 쏟듯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히스기아의 기도를 통해서 안일한 삶으로 말미암아 히스기아의 마음속에 깃들었던 싫증이나 게으름 하나님을 향한 은밀한 이 나태함 이런 것들이 모두 다 털려져 나가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생애적인 어려움을 만나서 폭풍우 같은 시절을 지내며 하나님을 붙들고 몸부림치다가 보면 어느 순간에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어느 순간에 깊이 깨달으면서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내 인생은 오로지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히스기아가 바로 그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은 그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그 죄와 세상 사랑과 하나님 앞에 순전하지 못한 마음들을 먹물처럼 쏟아내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사안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거기 어울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싫으면 마시구요. 하나님! 기왕이면 은혜를 좀 주십시오. 뭐 안 주신다고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우리를 세우시기 위해서 어려움도 주시고 시련도 주시는데 그 하나님 앞에 정말 매달리는 자세가 각오와 결단이 서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니까 얼마나 우리의 신앙생활이 곤고하고 피곤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기 싫은 결혼 생활 억지로 이어 가는 것처럼 어떤 지겨움과 권태감 같은 것들이 꽉 차서 하나님과 헤어 질 수도 없고 계속 살 수도 없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만신창이가 되고 우리의 영혼은 병들고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해 놓은 우리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것이 전 전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살려 두시고 또 이렇게 기회를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돌이킬 날을 허락하시기 위함 입니다. 그래서 여태까지는 정말 짐승처럼 살고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은 인생을 살아 왔지만 그러나 돌이킨 후에는 정말 형제들을 굳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두시고 또 지금처럼 은혜의 자리를 보내시고 어떨 때는 폭풍과 같이 말씀하시고 어떨 때는 이슬비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굳은 마음을 녹여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려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었으면 그렇게 많이 울까요? 얼마나 자신이 싫고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면 그렇게 통곡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에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겠습니까?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소서
정말 히스기야의 이 기도는 통곡과 눈물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면벽을 하고 다시 살고 죽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이 애달픈 히스기아의 마음을 무엇으로 위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장군들이 가서 더 넓은 영토를 점령 했다라고 하는 선전보가 이 사람의 마음을 위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름다운 후궁들이 더 들어 온다는 소식이 히스기야의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저녁상을 페르시아 요리로 차려 놓았다고 하는 그런 소식이 히스기야의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무엇으로도 이 히스기아의 마음은 위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네 눈물을 보았고 너의 통곡하는 기도 소리를 들었으니 내가 네 수명을 연장해 주리라. 그래 살려 주겠다.”라는 하나님의 직접 주시는 말씀 이외에는 히스기아에게 어떤 것도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본 적 있습니까? 이렇게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내 인생의 모든 희망이 하나님 앞에 걸려 있고 빈들 벌판에 홀로 서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 같은 간절함으로 눈물을 쏟으며 창자까지 토해 놓으려는 것 만치 그렇게 진액에 베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린 때가 있습니까? 기도 하면서 우리의 이마에 땀이 맺힌 적이 있습니까? 눈물이 흘러 내려서 흥건해 진 적이 얼마나 됩니까? 정말 피를 토하고 죽을 것처럼 피에 베인 그런 간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적이 얼마나 됩니까? 쓸어져 가는 가정을 위해서 아내와 남편들이 이렇게 피눈물 나게 기도 한다면 우리의 가정은 바로 설 것입니다. 교회가 기울어 가는 것 같아도 이름 없는 성도들이 교회의 한 구석에서 주님의 몸인 교회를 부여안고 이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을 고쳐 달라고 그렇게 통곡하듯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교회를 어찌 바로 세워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너무 형식적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많고 얻고 싶은 것은 많지만 우리의 기도는 얻고 싶은 욕망만큼 간절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많이 기도 했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뜯어 볼 필요도 없는 쓰레기 같은 우편물들이 되어서 천사들이 쓰레기통에 쳐 넣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통곡과 눈물과 간절함으로 기도의 화살을 쏘아서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을 뚫고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있는 두 번째 하늘을 깨 뚫고 신령한 보좌와 어린양이 계신 그 삼층 청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나님 앞에 힘 있는 기도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큰 목소리나 육체적인 몸부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심령 깊은 곳에서 울어 나오는 진액이 베인 통곡과 눈물로 가득 찬 호수 이외에 어떤 것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나 그 사람이 해 온 일생동안의 일들보다도 한순간에 부르짖는 그 간구하는 음성을 들으시면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적이 많습니다. 인용해도, 인용해도 영광이 마르지 않는 누가복음 18장을 기억해 보십시오. 세리는 일생동안 나쁜 짓 밖에는 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에서 은혜를 받고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지만 자기같이 더러운 죄인에게는 하나님이 오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하나 잘한 것이 없고 주님 앞에 내놓을 만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슬피 울면서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그렇게 하면서 기도의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 만나 주셨습니까? 그 사람을 만나 주셨습니다. 일생동안 선한 일을 하며 살아 온 바리세인이 못 만난 하나님을 죄 가운데 살아온 세리가 만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며 살았기 때문에 만난 것이 아니라 그 죄 속에 갇혀서 절망적인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되 정말 간절한 눈물로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세리가 왜 가슴을 쳤는지 기억하십니까? 너무 간절하게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면 폐가 수축되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가슴에 통증이 아주 심해지고 호흡이 곤란해지게 됩니다. 그 때에 손으로 가슴을 치면 혈관이 좀 확장되는 효과가 일어나는지 호흡이 그렇게 부드러워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타까운 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 합니다. 세리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하게 눈물로 기도하다가 호흡이 어려우니까 가슴을 두드린 것입니다. 멍이 덜도록 가슴을 두드리면서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의 나 된 것, 죄뿐이지만 제가 주님 앞에 깨끗하게 되어서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오니 저의 힘으로는 이 일을 할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많은 죄에도 불과하고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그 많은 허물에도 불과하고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많이 있어서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통곡하는 기도와 눈물을 흘리는 애절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생애에 기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 경애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그렇게 눈물과 통곡이 베인 기도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기도의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자기의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생애였지만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는 기도의 눈물을 받으신 후에서 비로소 십자가에서 흘리시는 그 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가슴을 찢는 기도가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기도가 있습니까? 목이 메
이는 기도가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 생활이 얼마나 건조하고 형식적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심지어는 복음 사역을 위해서 수종을 드는 그런 일꾼들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생활이 그렇게 건조할 수 없습니다. 저는 도대체 그 사람들이 무엇으로써 자신의 죄를 이기고 무엇으로써 이 간교한 세상의 유혹을 이기면서 신자의 삶을 살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어떻게 그런 기도생활로 험악한 세상을 이기고 죄 된 자기의 육체를 이겨서
내 평생 사는 동안은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예화) 언제가 외국에 가서 집회를 하는데 우리 일꾼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선교사도 모이고 기자도 모였었습니다. 굳이 제 강의를 듣고 싶다고 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가슴을 찢어 본 적이 있습니까? 통곡해 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은 날마다 통곡하고 흐느껴 우셨는데, 그러면서 이 통곡하며 쏟아져 나오는 기도를 설명할 때 사람들이 심음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습니다. 현재 문서 선교부에 예쁘게 테잎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서 달라고 해 보십시오. 두개씩, 두개씩 해서 네 개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기도가 있습니다. 한번 들어 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그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이 특별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것을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이 특별한 어려움 속에서 내 자녀들이 나를 찾았습니다. 통곡과 눈물로 나를 찾는 동안에 저희가 새로워 졌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 만나게 하시려고 주신 어려움은 인간의 방법으로 극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열 두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의원을 만나고 가산을 탕진했는데도 괴로움만 당했을 뿐이지 병세는 점점 깊어 갔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났을 때에 그 다리 사이로 떨어지는 그 피를 닦으면서 주님 앞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비록 부족하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이 범죄 해서 우리가 죄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간절함 통곡과 눈물로 주님을 찾고 주님 앞에 회복을 구하는 간절한 몸부림으로 당신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용서해 주지 않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히스기야가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그 기도의 제목이 너무 분명했습니다. 뭐 여러 가지가 아니라 오직 뭐였습니까?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한번만 하나님 앞에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제목이 얼마나 많습니까? 눈을 들어 보면 너구나 다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 해 줄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이 특별한 어려움에 처하게 하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에는 그 때에는 기도의 제목이 하나입니다. 하나. 그래서 빛을 모두 모을 때에 그 빛이 열을 내고 물건을 태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 할 때에는 기도의 제목이 또렷하고 분명하게 한 가지 초점에 모아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했을 때에 히스기야의 기도는 명료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히스기야가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한 이 기도의 이유는 왕국의 영토를 넓혀 주시거나 그리고 자식들이 잘 되게 해 주시거나 혹은 나라가 부강하게 해 주시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필요가 없는 기도는 아니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려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십시오. 하나님 저는 더 살고 싶습니다. 살아서 하나님 섬기고 이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명료했습니다.
전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지금 오셔서 여러분들에게 주님께서 “그래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들어 주겠느냐?” 말씀하실 때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그 한 가지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붙들고 매달리십시오.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에 기도하는 우리가 그 한 가지 제목에 생사를 건 것처럼 보이게 만드십시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중요한 한 가지 기도의 제목을 놓고 그렇게 몸부림을 치면서 기도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딸려 있는 많은 기도의 제목도 같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니 “그래. 살려 줄께. 그런데 병은 못 고쳐 주겠어. 계속 누워 있어야 되겠어.” 하나님께서 그러실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질병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살려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면 “그래 네가 다시 살 것이다. 네 눈물을 보았고 네 수한을 15년 연장 시켜 주겠다.”라고 하시고는 못 일어나 계속 병상에서 골골거리게 하시며. “하나님! 살려 주신다면서요.”라고 다시 물으면 “내가 살려 준다고 했지 병났게 해 달라고 기도 했느냐?”라며 하나님께서는 장난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가장 우선적인 기도제목 하나를 붙들고 승부하면 나머지는 따라 옵니다. 놀랍게 따라옵니다.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주님이 바라보실 때에 저렇게 기도하다가 죽지. 라고 느껴지실 정도로 생사를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흐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렇게 기도하는 길이 쉽겠습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가슴을 지어 뜯으면서 드리는 기도 속에서 기쁨도 있지만 그러나 그 고통이 무엇인지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 때에 훌륭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과정에서 오는 유혹과 어려움 그리고 고통, 견디기 힘든 외로움과 통증, 이런 것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계속 할까요? 그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기도하는데 그 때에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 그렇게 기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얻었고 그리고 영원히 저주 받을 자리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겟세마네 동산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제자들도 모두 사라지고, 믿었던 제자들은 잠들어 있고, 그 깊은 밤중에 하나님 앞에 홀로 피를 쏟으시면서 기도 하시던 예수님의 그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통곡한들 예수님처럼 아프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홀로 댄들 예수님처럼 고독하겠습니까? 우리가 가슴을 치며 기도한들 우리의 마음의 고통이 일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실 십자가를 앞에 놓은 예수님의 그 고통만큼 크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예수님도 그 길을 걸어 가셨는데 그것의 십 만분의 일도 안 되는 그 작은 고통을 우리가 못 받는다고 해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간신히 쏟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고 가셨던 그런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셨던 길을 뒤 쫒기 위해서는 주님이 엎드렸던 자리에 우리도 엎드려서 주님이 흐느끼셨던 자리에서 우리도 눈물을 흘려서 그 기도의 고난에 동참 할 때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이 가능한 것이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런 간절한 통곡함으로 기도할 때에 기도 제목이 명료했습니다. 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처럼 명료한 기도제목 한 가지를 붙들고 생사를 걸어 보십시오. 인생의 위기는 기회로 바뀔 것이고 벼랑 끝에 서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닥다리를 놓아 주실 것입니다.
4.섬김으로 돌아오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네 번째 아침입니다. 첫 시간에는 하나님을 사랑으로 돌아오라. 둘째 날은 말씀으로 돌아오라. 어제는 기도로 돌아오라. 그리고 오늘 네 번째 아침에는 섬김으로 돌아오라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처음 주시는 은혜이건 두 번째 주시는 은혜이건 항상 은혜를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면 거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도 하시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즉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모든 은혜의 경험들은 그것이 첫 번째 경험하는 것이든지 두 번째 경험하는 것이든지 모두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의 경험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왜 사는지를 모릅니다. 또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미안하지만 잘못 안 것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대체 왜 사는지 그리고 자기가 이 세상에서 바쁘고 힘들게 버르적거리면서 살아가는데 사실 그게 뭘 위해서 그러는지 본인도 잘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영적으로는 어두워서 판단하고 깨닫지 못하고 또 지식적으로는 눈이 멀어서 무지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고 또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아무리 은혜가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우리가 그럼 무슨 새 까먹은 정신입니다. 아무리 은혜가 떨어졌어도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 된 것도 알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알고 그리고 예수 잘 믿고 죽으면 천국을 가고 안 믿고 죽으면 지옥을 가고 그런 정도는 알지 않습니까?” 그럼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알면 뭐합니까? 그대로 안 사는데.” 그러니 알면 뭐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나타나실 때 귀신도 그분이 예수님이신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귀신도 믿고 떠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귀신을 내어 쫒던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이다.” 행함으로 천국에 간다는 뜻이 아니라 인정으로 거듭나고 변화된 사람들이라면 그 삶의 열매가 거듭난 본성과 일치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니까 아는 것만 가지고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제가 그렇게 대답하니까 이제 여러분들은 할말이 없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을 토대로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국은 우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떻게 살고 마지막에 어디로 간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하더라도 그 아는 것이 참다운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의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그대로 살려고 애를 쓸 때에 그 때에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무엇이고 그리고 그 은혜가 어떤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보존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뒤로 물러가면 잠시는 세상이 주는 기쁨과 하나님 없이 정욕에 만족을 느끼면서 기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뒤로 물러간 채 영원히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로 물러 간 사람들이 결국은 잠시는 행복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은 마음에 이전보다 더 커다란 곤고함과 그리고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옛말에 “흥진비례”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까불고 장난을 치고 그렇게 좋아하다가는 잠시 후에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흥이 다 지나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싫증이 나고 짜증이 나서 그 다음에는 슬픔이 찾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이치입니다. 잠시는 흥이 납니다. 그 아담과 하와가 떨리는 손을 내밀어서 선악과를 따고 그리고 한입 베어 먹는 그 순간에 얼마나 즐거웠겠습니까? 특히 하와가 먹고 얼마나 즐거웠겠습니까? 꿀컥 삼켰습니다. 혼자 먹고 그냥 끝내지 남편에게도 또 줍니다. 그래서 먹고 목에 걸렸답니다. 목에 보면 여자는 없고 남자는 튀어 나왔다고 주일 학교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그러고 나서 얼마나 짜릿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결과는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베드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요한복음은 20장에서 끝나도 되는 성경인데 21장은 부록입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도행전과 사복음서 사이에 있는 간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21장 전체의 주인공은 오직 한사람입니다. 누구냐 하면 베드로 입니다. 그래서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예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는 장면을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혈질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고 순수했지만 충동적이었고 또 충동적이기는 했지만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식이나 위선 이런 것은 없는 사람이었는데 기질이 그러다 보니 항상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부어 주셨을 때는 그 기질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저는 그 베드로 전서를 읽을 때에 아주 통쾌한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미래에 올 소망을 이야기 하면서 핍박가운데서도 흔들리지 말라고 담대히 외치는 그 베드로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 특유의 기질을 봅니다. 그러나 그 기질은 기질 혼자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긴 기질이 되어서 역사하니까 담대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기질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제 고쳐가야 되지만 그러나 그 기본적인 뼈대는 지문과 같아서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기본적인 성향은 성화되면 모두 아름답습니다.
(예화) 오늘날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못생긴 사람, 잘생긴 사람, 아이고! 예쁘다. 오 더 예쁘네. 세상에 저런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니 저것도 얼굴이라고.’ 이렇게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래서 젊은 자매들도 보면 어떤 자매들은 형제들이 자꾸 좋아한다고 편지를 보내서 짜증이 나는 자매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자매들은 365일 개점 휴업상태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못하면서 목사님한테 와서 나보고 어떻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니 어떡합니까? 명령을 해서 보낼 수도 없고.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모든 인간들이 다 아름답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이라고 해도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담과 하와가 자식들이 놓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낳았을 때 그 자식들이 각각 다 얼굴이 똑 같았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났는데. 각기 다르게 태어났을 것인데 다 예뻤을 것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지금 이렇게 볼 때에는 얼굴이 잘 생긴 사람, 못 생긴 사람 이렇게 보이지만 은혜를 받아 보십시오. 그럼 다 예쁩니다.
그것이 저는 의사는 아니지만 의학적으로도 저는 소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얼굴이 이렇게 생겼는데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코가 2~3cm 좌우로 이동하거나 입이 2~3cm 찢어졌다 줄어졌다 그러지는 않지만 그저 그 은혜를 받아도 거접 눈은 거접 눈이고 새우 눈은 새우 눈입니다. 그래서 각각 다른데 바로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뭐냐 하면 여러분이 가진 얼굴은 가진 사람은 전 세계에 한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없었고 장차도 없습니다. 이것이 완전히 특허라는 것입니다. 독점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못생겼다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밖에 없는데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이게 은혜를 받기 전에는 마음에 하나님을 안 믿으니까 죄가 들어와 서 미움, 싫증, 증오 그 다음에 배래별 것들의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런 감정들이 있어서 이 감정들이 결국은 신경에 전달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짜증이 나면 얼굴에 그 짜증이 막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신경에 전달이 되면 이 신경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신경이 예민해지면 이 신경이 힘줄을 잡아당깁니다. 그러니까 힘줄이 얼굴을 똑같이 잡아당기고 있어야 하는데 막 잡아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코가 2~3cm 이동하고 눈이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있는 자리에 그나마도 그렇게 내버려 두어야 하는데 이렇게 막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굴이 막 일그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죽어라고 미워하면서 은혜 받고 변화되지 않으면 보십시오. 온갖 화장품을 미제 일제 찍어 발라가지고 그렇게 알록달록하게 해도 아침에 세수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그건 벌써 조화가 다 깨졌고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다 풀어지고 그래도 얼굴 근육이라도 원래 창조의 질서로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우 눈을 새우 눈대로 짭짤해서 예쁘고, 딸기코는 딸기코대로 상큼해서 예쁘고, 돼지 코는 돼지 코대로 구수해서 좋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다 생긴 대로 다 예쁩니다. 정말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 얼굴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예쁜지.
그런데 똑같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인 기질이 조금은 그래도 은혜를 받고 쭉 성화가 되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예화) 어떤 사람이 아주 자랄 때서부터 누구한테 지고는 못 베기는 성격이 있습니다. 바둑을 두다가 지면 확 엎어 버리든지 한수 두수 물러 달라고 해서 하여튼 어거지로해서 이기고야 말고 화투 치다가 지게 생겼으면 한 장 살짝 훔쳐다가다가도 하여튼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삼판이승제로 하기로 해서 삼판이승에서 끝냈는데 그런데 오판삼승제로 바꾸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해서 결국은 이기고야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적수가 많습니다. 회사에 가서도 항상 경쟁심리가 있으니까 동료로 생각하지 않고 적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지고 어떻게 베기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세상에서 그렇게 하고 사는 것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있어서 제일 소중한 분이 예수님 밖에 없으시구나! 라고 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이 기질이 발동이 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오늘 기분 떡입니다.” 왜냐고 하나님께서 물으시면 “어떻게 저 사람이 나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나도 하나님께 영광 좀 돌리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꼴에 무슨 영광이냐. 네가 더 변화 되어야지 영광 돌릴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다른 사람 같으면 그 영광 돌려 드린 다는 것 그것도 내가 하나님께 큰 선심을 썬 것인데 뭐 그렇게 까다로울까? 라며 돌아서는데 이 사람은 “예”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뼈를 깎아내라면 뼈를 깎아내고 살을 도려내라면 살을 도려내겠습니다. 어떻게 변화되면 하나님보시기에 제가 좋겠습니까? 나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변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그런 마음이 오히려 없어서 걱정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인격과 기질의 그릇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담기는 것입니다. 너무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경쟁적이지가 않은데 결국 은혜를 받아도 쓸데가 없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반대도 하나 해서 격려도 해야겠지요.
(예화) 이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하여튼 그렇게 사람들에게 처집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가면 자신이 없고 자존감도 없고 기질적으로 누구에게 덜어내고 박수를 받기 보다는 선하고 좋은 일을 하다가도 누가 쳐다보면 찔끔해서 좋은 일도 멍석 깔아놓으면 안한다고. 그렇게 소심한 기질은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를 들어 내지 않는 기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 살 때에는 늘 처지는 것입니다. 늘 사람들이 와서 밀쳐 냅니다. 자기가 시작은 했는데 어만 이 와서 박힌 돌 빼내고 밀쳐냅니다. 늘 그렇게 처지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변화가 찾아와 그렇게 크게 변화되고 나면 그 다음에 이 사람의 그 기질의 우그려지고 찌그려졌던 것들이 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올지 않구나! 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자녀인가? 그리고 내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 전에는 망가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예수 안에서 회복된 이 형상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그리고 더더욱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은 전 세계에 나 같이 생긴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전무후무 하고 나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전매특허 같은 얼굴 이 존재가 얼마나 귀한가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그려졌던 것들이 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나니까 그 겸손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질 속에서 은혜를 받으니까 어디 가든지 다른 사람은 그냥 자기를 들어내고 싶은 욕망이 있어 그것과 싸우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는데 이 사람은 그것을 별거로 생각을 합니다. 즉 거액의 헌금을 해도 슬그머니 무명으로 하고 그리고 하여튼 자기 이름 내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또 얼마나 놀라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제 됐습니까? 수평을 이루었습니다. 이게 이렇게 좋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질이 은혜에 깊이 잠기기 전까지는 장점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그 기질 때문에 늘 넘어졌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이등이나 하지 왜 자기가 딱 나서서 이 사람들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죽기까지 따라 가겠다고 했을 때 그 같이 있던 제자들이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기분이 나빴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힘을 합해서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하면 얼마나 났습니다. “이 사람은 다 주님 버릴지라도” 이미 벌써 다 알고 있습니다. 주님 버릴 것이라는 것을. 나는 죽는데 까지도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그럴 때 그 동료들이 볼 때 저 잘난 척 또 하는구나.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그것을 지켰으면 할 말이 있습니다. 해 냈는데 뭘 이야기 하겠습니까?
그런데 다 도망을 갔고 그래도 딴 사람들은 도망을 가도 그냥 도망만 갔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부인을 하다가 결국은 도망을 갔습니다. 이 기질이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다 도망갔지만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하던 베드로는 그 꽁지도 안 보이고 오히려 말없이 옆에 있던 요한이 제일 먼저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혀 계실 때에 골고다 언덕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무슨 망신입니까? 그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기 때문에 어쩌면 그렇게 철저하게 실패해서 은혜 안에 없을 때에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가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베드로를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사용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정말 순수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순수함이 아니라 변화된 인격 안에 이제 주님의 사랑이 담기면 정말 죽기까지 충성할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제 실망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기나 잡으러 가자며 그물을 들고 갈릴리 바닷가로 갔습니다. 밤새도록 잡아도 누가복음 5장에 처음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를 때처럼 똑같은 상항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고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고기를 낚게 되었고 또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 오신 것을 알게 되자 베드로가 제일 먼저 물속에 띄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헤엄쳐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마주 앉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아무 말 없이 조반을 먹이셨습니다. 그 바닷가에서 떡을 굽고 생선을 익혀서 제자들에게 식탁을 차리시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참 눈물나지 않습니까? 실패한 사람들에게 찾아 오셔서 그렇게까지 대접해 주실 이유가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고 계신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식탁을 베풀어 주신 후에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는데 이 광경은 아마도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과 베드로가 일대일로 대면하는 첫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예. 주님 사랑합니다.” 두 번째 물으니까 좀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못 믿으시는가보다. 어쩌면 네가 정말 나를 버리고 그렇게 도망을 가고도 사랑한다는 말이 그 입에서 그렇게 나오느냐고 물으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도 “사랑합니다.” 라고 말을 했더니 세 번째 또 똑같은 말씀으로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심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예수님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세 번 다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결국은 다 같은 말인데 “내 양을 치라” 그것 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고 싶은 것은 왜 나를 버리고 도망갔니? 왜 나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니? 그것을 예수님께서 꼬치꼬치 캐묻고 싶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은 옛날이 아니라 그리고 미래가 아니라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묻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양을 치는 것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릴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영혼을 위해서 목자의 마음으로 섬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도 목자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도 양의 문을 통과한 사람만이 그가 진정한 목자이다. 그리고 양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던 이것은 주님을 향한 직접적인 사랑이 없이는 영혼을 섬기며 그 목양을 위해서 일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나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 그 사랑을 많이 경험하고 그 은혜를 받고 나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영혼을 사랑하고 그 영혼을 섬기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맡기시는 일이 많이 있으시지만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속에 자신을 하나님이 어떻게 많이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경험하고 뼈저린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필연적으로 자기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영혼들에 대해서 관심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돕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커다란 마음의 부채 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동기가 바로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는 동기이고 작게는 그런 동기를 가지고 어린 영혼들을 가르치고 구역장을 하고 새 신자 교사를 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베드로에게 물으신 다음에 양을 맡기신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제자로 부르셔서 잘 가르치신 다음에 사도가 되게 하신 다음에 그들을 영혼들에게로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은 양의 집으로 보내셨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려서 하나님 자녀 삼도록 예수님이 이미 벌써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 살아 계실 때에 사도들을 파송했던 것입니다. 사명은 언제나 살아 있었지 죽어 있다가 다시 사명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야바의 뜰에 끌려가서 심문과 고초를 당할 때에 그 모닥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준 사명 잊지 말아라?” 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자마자 나타나셔서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준 사명. 이스라엘의 잃은 양에게고 가서 그들을 잘 구원하는 것 알고 있지. 똑바로 해.” 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겠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신자의 마음속에서 사라질 때에 사명도 함께 사라집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어쩌면 소수일지는 모르지만 사명은 무슨 사명. 와서 그저 컬컬하니까 은혜나 받고, 이게 무슨 하나님의 은혜가 막걸리입니까? 컬컬하니까 와서 은혜나 받고, 그리고 그저 곤고하니까 그냥 은혜나 받자. 이게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그게 내가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내 마음 속에 깊이 다가올 때 그 때에 유혹에 눈이 멀었던 우리의 영안에 비늘이 벗겨지고 방치되었던 사명이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무엇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에 따라서 그 눈이 사랑하는 것만이 제일인줄 알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등불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제물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을 사모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마음의 등불이 꺼지고 어두워져서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못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둑을 좋아할 때에는 사람들 머리가 전부 바둑돌로 보이는 것입니다. 고구마 장자 이야기를 들으니까 사람들 머리가 다 고구마로 보인 답니다. 군밤장사는 그 군밤머리가 사람들 머리하고 얼마나 똑같습니다. 사람이 뭐든지 간에 마음에 사랑하는 것들로 인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안보입니다. 그냥 어떡하든지 간에 나 좀 어떻게 좀 벌어먹고 살고 집이라도 좀 넓혀가고 그리고 옛날보다 어떻게 좀 먹고 마시고 편안하게 좀 살아볼까? 라는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되지 그 이상의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더러운 죄인이 되고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희망이 없는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부터 비로소 이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기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을 회개하고 그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아도 될 것들에 대한 사랑을 모두 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인간의 모든 세상에 대한 집착과 육신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영안의 비늘은 벗겨지고 자신의 인생의 참된 가치가 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에 오르고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그리고 어떻게 높은 지위에 오르느냐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얼마나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실제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시라는 사실이 느껴질 때 눈에 비늘이 벗겨지면서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날 기회가 많이 있었지만 그때는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 사명을 보여 주셨습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제 인생의 전부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저의 참된 꿈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네 사명이 있거든. 그게 바로 이것이다.”라고 이미 예전에 보여 주신 것이지만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네 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원래 양을 먹이던 것은 누가 하시던 것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출발은 결국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으면 직접 하셨을 그 일. 그게 사명입니다. 그래서 이 사명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보케이션이라고 합니다. 이게 라틴어 보카치오에서 왔는데 이 보카치오는 목소리입니다. 그건 무슨 뜻입니다. 그 보케이션이라고 하는 것은 직업을 가르치는 것인데 보카치오에서 왔습니다. 즉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거기로 그게 바로 소명이고 그 소명을 받은 사람이 이루어가야 하는 삶이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명은 모두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으면 직접 하셨을 그런 일들이 사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그 사명을 잘 이루어 갈수 있고 그 사명이 없으면 도저히 그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이 양을 먹이던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이제 예수님이 직접 전도하고 하나님 믿으려고 나온 영혼을 간수하고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이제 하늘에 오르셔서 당신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셔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분신이 되어서 예수님이 찾아 가시고 싶으신 곳에 찾아가서 예수님이 끌어안고 흐느끼셨을 그런 영혼들을 찾아가서 그 영혼들과 함께 울며 그 영혼들과 함께 아파하며 그 영혼들을 돌보고 사랑하고 그렇게 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대신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실 일들을 대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시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시고 또 사명을 이미 맡겨주신 사람들도 따라서 예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그의 아름다운 지위가 사명을 감당하게 해 주지 못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명 우리가 감당해 나가는 하나님의 그 사명이 이 집안에 들어 온 많은 조명기구라고 할 것 같으면 주님을 향한 사랑은 원선에서 흘러나오는 전류와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명을 맡고 직분을 맡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만약에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이 죄인을 사랑하시고 그리고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에 대한 깊고 진실한 인격적인 사랑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모든 사명은 빛을 잃은 조명기구와 같이 아무른 유익을 줄 주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잘 준비된 것 같고 능력도 있고 지식도 있고 많은 것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이 사명을 맡기시지를 않고 오히려 모자라는 게 많아 보이는 사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사람을 맡기시는데 그 뒤를 캐보면 반드시 그 뛰어난 재능과 아름다운 학식 그리고 인간적인 능력과 바꿀 수 없는 사명을 맡기실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 그러한 사랑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순교하고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로마 외각에 가면 쿠오가디스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 갔습니다. 그 교회로 이어진 골목의 길이 있는데 옛날의 그 운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의하면 로마에 큰 핍박이 일어나니까 성도들이 전부 다 카타콘으로 숨고 지하에 굴이 있는데 이 굴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아직까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굴이 많은가 하면 그 지역이 석회암 지대입니다. 그러니 물 같은 것들에 약합니다. 그래서 많은 굴들이 생겼나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마어마한 핍박이 몰아닥치니까 이제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떠나가는데 저기서 예수님께서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마치 그 모습이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본 것처럼 그렇게 극적인 광경이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물었던 것이 “꾸어 바디스 도미네” 라틴어로 “꾸어”는 where 어디로 그런 뜻이고 “바디스”는 당신은 갑니다. 라는 뜻입니다. “도미네”는 주님. 그래서 “주님! 주님이시여. 당신이 어디로 가고 계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너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를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가노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서 계시는 곳의 있던 그 돌멩이를 그대로 떠다가 교회에 갔다가 안치 해 놓았습니다. 워낙 또 신비하고 미신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그 돌이 그 돌인지는 사실 주님만이 아시겠지만 어쨌든 장소는 그곳이라고 하는 것이 고증이 되니까 돌은 믿을 수가 없어도 그래도 어쨌든 여기에 주님이 서셔서 큰 핍박당하고 그 고통 속에서 도망 나오는 베드로의 일행을 보고 “너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를 위해 다시 십자가에 목 박히려 가노라” 그 때에 베드로가 황급히 엎드려서 절하고 그러고 로마로 돌아와서 진짜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내가 어떻게 동일하게 질 수 있겠느냐. 나를 거꾸로 매다 달라고 해서 거기서 순교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사명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나 즐겁고 유쾌한 길이 아닙니다. 무한한 인내와 그리고 무한한 자기 복종과 그리고 끝없는 자기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일생을 산다고 해 보십시오. 주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제 멋대로 살다가 짐승처럼 먹고 마시다가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누군지도 알고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셔서 그 피로 내 죄를 씻으신 그 크신 은혜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의 머리를 잘라서 신발을 삼아도 바꿀 수가 없고 우리의 살가죽을 벗겨서 예수님의 외투를 만드셔도 바꿀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힘들어서 나만 위해서 짐승처럼 자기만을 위해서 안일하게 살고 자기만을 위해서 희생 없이 살고 자기만을 위해서 아무것도 섬기는 것도 없고 바치는 것도 없이 그렇게 일생을 살았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마지막 날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 때에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복음을 모르고 진리를 몰랐던 사람들이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예수님 누군가가 저에게 가르쳐 주었다면 저도 예수님을 위해서 살았을 것입니다.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너는” 하고 예수님께서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니?” “아니요. 몰랐니?” “아니요.” “은혜가 없었니?” “아니요.” “그럼 왜 그랬니?” “주님보다 나를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보다는 내 인생의 계획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밖에 대답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어떻게 주님을 만나시겠습니까?
정말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 행복해서 잘 살고 많은 것들 누리는 사람 정말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럼 뭐가 부럽습니까? 잠시 후는 모두 끝날 것이고 인생의 참된 가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누렸느냐 그것이 아니라 얼마나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 각자 각자에게 주신 사명 똑같지는 않지만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이 있지 않습니까?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 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머리가 하얗도록 일생을 살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한번도 산 적이 없었던 사람 걸어온 인생의 발자취 모두 다 주님 거슬리고 대적한 것 밖에 없는 그 노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주님의 뜻을 깨달았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이 육체는 힘이 없고 정신은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진 것도 없고 그리고 내가 선한 뜻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늙은 나를 따를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 노년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쓸쓸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가? 한걸음 더 나가서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그것에 의해서 인생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니 좋은 집에 안 살면 어때요. 자존심 상할 것 없습니다. 그리고 크고 훌륭한 직장 아니고 와락와락 돈버는 그런 사업을 하고 있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는 그가 주님이 세워 주신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보십시오.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물으시고 그것도 세 번이나 예수님께서 물으시고 베드로가 그 세 번의 질문에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을 했더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돌아갈 사명의 자리를 일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의 자리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죽음을 앞에 둔 자리였습니다. 제가 한 15년 전에 이 말씀을 읽고 은혜를 많이 받고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나니까 일생에 좋은 말씀이 되는데 처음에는 참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놀리시는 것도 아니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 나 사랑 하냐.” “네 사랑합니다.” “정말 사랑하니?” “그럼요.” “너 정말 나 사랑하니?” “예. 주님. 주님도 아시잖아요. 저 주님 사랑합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으면 그게 쉬운 일입니까? 베드로가 그렇게 살지 안 살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한순간이라도 진실해져서 마음 가득히 예수님만을 향한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여 주는데 그 대답이 쉬운 일입니까? 여러분 일생 살면서 그런 고백 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 이제 세상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 세상사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그 고백하는 것 그게 오늘하고 내일하고 그렇게 되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진실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래. 정말 내가 이 때를 기다렸다. 내가 너에게 큰 능력도 주마 내가 너에게 복도 주마 내가 너의 자손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겠다.” 뭐 이렇게 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네가 날 사랑하느냐? 정말로 사랑하느냐? 정말로”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밖에 제 인생에 소중한 분이 없습니다.” 고백을 하고 났더니 “그럼. 너 죽어라.” 이게 바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젊어서는 네 원하는 데로 다녔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사람들이 너를 띠 띄어 네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니 이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를 가리키심 이러라.
그럼 우리의 마음속에 이러한 그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주님은 우리 앞에 가시밭길을 놓으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정말 세상사랑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에게는 이 세상보다도 더 치열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정말 우리가 세상사랑 다 버리고 주님만 순수하게 사랑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저는 그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 두 번째로 여러분의 마음에 이러한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무거운 십자가 가시밭길과 같은 길을 놓으시고 예수님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형통한 길을 누리면서도 살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저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세 번째로 이렇게 질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예수님만을 사랑한 사람들의 진정한 유익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
물론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한 사람들. 그래서 자신의 마음속까지 뼈 속까지 예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에 사무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특별한 사명을 준비하시고 그리고 십자가를 준비하시고 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은 이 세상에서 가시밭길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한번도 영혼의 싫증이 없으셨던 그 분이셨고 언제나 그분의 마음은 하나님. 주님. 그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생 사시는 동안에 그분의 마음은 피멍이 들었습니다.
왜냐 하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세상을 보시면서 피멍이 들었고 그리고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죄가 왕 노릇하는 이 세상을 보시면서 가슴 아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많은 인간들이 거스리므로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고 타락한 인간들이 오히려 자기의 뜻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세상을 보시면서 심령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렇게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일생이 부귀와 영화를 누리던 일생이었습니까? 모든 것을 누리던 생애 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고난과 핍박이 예수님의 친구였고 외로움과 십자가가 예수님의 형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일생을 살면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왔지만 타향처럼 사셨고 그래서 공중에 나는 새도 깃 들것이 있건만 여우도 굴이 있건만 인자 되신 예수님의 생애는 머리 둘 곳 없으신 생애였습니다. 이 세상의 왕들이 모든 것을 차지했고 예수님은 누리시지도 못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신 생애였습니다. 고난보다도 더 큰 은혜가 예수님의 생애에 넘쳤고 그리고 가시밭길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아버지의 위로가 예수님의 전 생애에 넘쳐서 그래서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가슴 아픈 생애를 사시면서도 동시에 행복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참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아무 사명도 감당해 나가지 못하다가 그러다 죽는 사람의 일생은 얼마나 비참하고 허망한 일생이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마지막 주 앞에 가는 날 자신들이 살았던 삶을 후회 할 것이고 참된 인생의 가치는 어떻게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았느냐. 그기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주님 자신을 향한 사랑을 회복시키셔서 그 사랑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떠나 왔던 사명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고 내 팽개쳤던 그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서 거기서 죽기까지 주님을 섬기는 그건 진실한 사람들이 될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더 높이시고 존귀하게 만드셔서 그래서 이 세상에 잠시 살면서도 영혼을 향해서 잇대어 살수 있는 그런 아름답고 진실한 신자가 되도록 주님께서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