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벼랑 끝에선 그대에게Ⅲ
(2012년 설교모음)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1 (2012.1.9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설교기간|2012년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2 (2012.1.10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3 (2012.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4 (2012.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5.04. 외부강의
1. 홀로 있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창13:5-8) 2012.1.9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약속의 땅에도 궁핍은 오는가?(창12:10-13) 2012.1.10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3
3.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창15:1-11) 2012.1.11 새해말씀사경회(저녁) 25
4. 별빛도 사라진 영혼의 바다에서(창17:1-8) 2012.1.12 새해말씀사경회(저녁) 38
5. 눈부신 새 아침을 맞고픈 그대에게(창22:1-18) 2012.1.13 새해말씀사경회(저녁) 52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1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1 (2012.1.9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2 (2012.1.10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3 (2012.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5.04. 외부강의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4 (2012.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5 (2012.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홀로 있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I. 본문의 배경
II. 떠나는 조카, 롯
A. 롯과 아브람
B. 롯의 배신과 결별
C. 아브람의 관용과 사랑
III. 홀로 남겨진 아브람
A. 홀로 있는 자의 하나님
B. 복 주시는 하나님
1. 온 땅을 주시는 하나님
2. 자손을 주시는 하나님
IV. 위기 속에 쌓은 제단
V. 결론
2. 약속의 땅에도 궁핍은 오는가
I. 본문의 배경
II. 약속의 땅을 덮친 기근
A. 그 땅에서 만난 하나님
B. 남방으로 가는 아브람
C. 약속의 땅에 기근 올 때
III. 궁핍한 날에 드러난 신앙
A. 환경을 통해 드러남
1. 약속의 땅을 떠나서
2. 사람의 꾀를 따라서
B. 궁핍 속의 불신앙을 경계함
IV. 결론
3.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
I. 본문의 배경
II.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
A. 신앙을 따라 전쟁함
1. 언약에 충실함
2. 조카를 사랑함
3. 분깃을 거절함
B. 홀로 두려워하는 밤에
III. 밤중에 임하신 하나님
A. 두려워말라
B. 방패와 상급이신 하나님
C. 보증하시는 하나님
IV. 결론
4. 별빛도 사라진 영혼의 바다에서
I. 본문의 배경
II.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A. 불신앙으로 낳은 아들
B. 아내의 불신앙 때문에
III.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
A. 전능하신 하나님
B. 하나님 앞에 행하라
C. 완전하라
IV. 결론
5. 눈부신 새 아침을 맞고픈 그대에게
I. 본문의 배경
II. 시험하시는 하나님
A. 하나님의 명령
B. 인간을 시험 하시는가?
C. 하나님의 두 가지 보심
1. 단순한 보심
2. 시간적 보심
III. 순종으로 고백하는 신앙
A. 최선의 것을 요구하심
B. 최종적 사랑을 요구하심
C. 순종으로 방황을 종결함
D. 미리 예비하시는 하나님
IV.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심
V. 결론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1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1 (2012.1.9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2 (2012.1.10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3 (2012.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09.05.04. 외부강의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4 (2012.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5 (2012.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홀로 있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창13:5-18)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의 배경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경건은 현실에 깊이 뿌리를 박은 경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종교생활 따로 돌고 자기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생활이 따로 도는 이중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믿고 사랑한 것만큼 이 땅에서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갔던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아브라함이 맨 처음부터 믿음의 조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저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신들을 섬기며 살던 사람들의 집안에서 태어난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많은 사람들 중 아브라함이었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아브라함이 어떤 의로운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주권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되었으니 이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질적인 시조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바로 이 아브라함이 다만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었던 신앙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실 수 있는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 하나님을 어린아이같이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고 그리고 하란을 떠나서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땅으로 어디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약속하시는 땅으로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Ⅱ. 떠나는 조카, 롯
그리고 오늘 여기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후에 일어났던 어떤 한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의 의미를 우리에게 진술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 사이에 모종의 갈등이 생겨나는 것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바로 떠나가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었습니다.
A. 롯과 아브람
그러면 이 롯과 아브라함은 먼저 어떤 관계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롯에 대해서는 출생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읽은 13장에는 이 사람이 아브라함의 조카였고 이미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왔을 때부터 이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고 가나안을 향해 출발할 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였고 가나안에 들어와서 큰 흉년을 만나자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빼앗길 뻔 한 아주 커다란 일을 만나고 거기에서 상당히 많은 물질을 얻은 부자가 되어서 다시 가나안으로 나오기까지 이 아브라함과 함께 동행 했던 사람이었으니 자식도 없는 아브라함에 있어서 이 롯은 자기의 자식과 같았고 어쩌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마음속으로 어쩌면 자신을 상속할 상속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여행길을 동행하였고 가족처럼 함께 살았고 그리고 그 흉년과 끔찍한 애굽 땅에서의 부끄러운 일들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얼마나 애굽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 애굽에 있는 동안에 상당히 많은 재물을 획득하게 되었고 그리고 가나안으로 들어와서는 벧엘과 아이 사이에 진을 치고 거기에 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긴 세월동안 가족처럼 살아왔으니 아마 이 아브라함에게 이 롯은 마음의 든든한 의지였고 사랑의 대상이었고 한 가족과 같아서 아들처럼 여기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도 사실은 자신의 외로움과 그리고 그가 지나온 모든 길 가나안땅도 애굽 땅도 모두 그에게는 타국이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타지에서 지낼수록 가족들 간의 유대관계도 돈독해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이 아브라함은 훨씬 더 많이 롯을 의지하고 롯과 함께 가족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왔을 것입니다.
B. 롯의 배신과 결별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이 롯의 배신과 결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모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던 롯을 아브람이 거두어 이만큼까지 재산을 불리고 아마 롯의 목자, 아브라함의 목자로 불리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롯에게 재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또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하면서 얻은 재산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이미 이 롯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많이 축복해주신 사람이었지만 물욕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식도 없고 후사도 없고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자기의 자식과 같은 롯에게 이 모든 것을 아까워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산이 점점 늘어나고 가축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롯의 목자와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다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축을 하는데 있어서 좋은 목초지나 혹은 물을 얻기 위한 다툼이 아니었겠습니까? 아마 이런 갈등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이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당연히 롯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같이 자기를 거두고 이제까지 가족같이 살아왔으니 자신들의 목자를 꾸짖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목자들을 잘 설득하여 아브라함과의 관계에 금이 가지 않도록 그렇게 처신했어야만 지혜로운 자의 처신이고 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롯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에 어울리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신앙을 떠나 인간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아버지같이 자신을 돌보고 자기가 의지해온 이 아브라함을 향하여 자신이 그렇게 이해관계를 내세워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온유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이제 우리가 헤어지자.’ 라고 말할 때에는 아마 아브라함은 중대한 결심을 했을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상처와 아쉬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화합을 하고 함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 아브라함은 적지 않게 고민을 했을 것이고 드디어 아주 중요한 제안을 이 롯에게 하게 됩니다.
C. 아브람의 관용과 사상
‘우리 앞에 많은 땅들이 있다. 그러니 함께 있으면서 제한된 목초지와 물을 가지고 너의 목자와 나의 목자들이 다투거나 또 너와 내가 다투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니 네가 왼편으로 가면 좋아 보이는 지역을 택하라. 그래서 네가 오른편을 택하면 나는 왼편으로 이동하고 네가 왼편을 택하면 나는 오른편으로 이동할 것이다.’ 라고 제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족처럼 살아온 이 롯과의 헤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아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아브라함에게 안겨다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아브라함의 관용과 사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와 같은 처지이니 ‘네 이놈!’ 하고 호통을 치며 네가 누구 덕에 이만큼 컸는데 감히 나를 배신하려고 하느냐고 꾸짖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당시의 아브라함은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개인적으로 군대까지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무력으로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여기에 이렇게 기름져 보이는 많은 땅들이 있으니 네가 먼저 택하라’ 그러면 이 롯이 개념이 있는 인간이었다면 ‘개념 없음’ 이라는 책이라도 읽었으면 ‘삼촌! 어떻게 제가 먼저 택하겠습니까? 삼촌이 가시고 싶으신 곳으로 움직이시면 남은 지역을 저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하겠습니다.’ 최소한 이정도의 개념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 롯의 마음은 아브라함을 멀리 떠났고 예전에 함께 누렸을 가족과의 관계와 같은 그 친밀함은 이미 단절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 저를 이제 어디로 인도하시렵니까?’ 그렇게 신앙적으로 갈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면 가축을 잘 먹여서 부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눈을 들어 요단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했다고 했으니 아브라함의 목자와 이 롯의 목자들이 물 때문에 다투었다는 암시를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좋아 보이는 그 땅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롯은 거기에서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얼마 있다가 불비가 내려서 심판을 당하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개념 없는 롯은 결국 요단 들판을 택하게 되었고 그는 기름지고 물이 넉넉해 보이는 미래의 성공이 보장된 길을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을 택했습니다.
Ⅲ. 홀로 남겨진 아브람
A. 홀로 있는 자의 하나님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은 홀로 남겨진 아브라함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정말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껏 까지 나타나시지 않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그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서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마치 롯과 아브라함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아브라함과 만나주실 수 없는 것처럼 찾아오시지 않다가 자기의 피붙이처럼 사랑하는 롯을 슬픔 속에 상처 속에 떠나보내고 난 후에 홀로 있는 외로운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홀로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의 내용은 나중에 생각해보더라도 우리가 먼저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시점을 보면서 커다란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롯과 아브라함이 사이좋게 지내고 애굽에서 돈을 많이 모으고 그리고 벧엘과 아이 사이에 진을 쳐서 가축이 불어나고 가문이 흥왕할 때 모든 것이 형통할 때에 찾아와주시지 않으시고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의 인생에 커다란 위기 속에서 주님이 찾아와주셨습니다. 이제 나이 많이 먹어 늙은 아브라함, 자식처럼 생각했던 롯이 배신의 칼을 꽂고 자신과 결별했습니다. 이제 자기에게는 피붙이가 될 만한 후사도 없고 자신은 늙고 그리고 이 많은 가축과 모든 것을 거느리고 살아야 되겠는데 이에 마음의 의지가 없는 그 외롭게 홀로 남겨진 그날에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는 장면이 13장뿐만 아니라 15장, 17장, 22장 여러 번 나타나는데 그 공통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브라함의 마음이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을 수 없을 그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롯을 떠나보내고 마음 둘 곳 없이 깊이 외로워진 이 아브라함, 바로 그때에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아무데나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어디에 우리가 있어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라고는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의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때가 되면 우리의 마음이 깊이 가난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즐겁고 흥겨울 때 하나님을 만난 경험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 찢기고 버림받고 상처를 받고 크게 실패하여 이제 내 인생에 의지할 데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날에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훨씬 더 많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제껏 믿음생활을 해오시면서 다른 때보다도 매우 특별하게 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신앙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예전에는 하늘에 계셔서 이 모든 세상을 돌보시는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그 위대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이 티끌 같은 지구 한 모퉁이에 살고 있는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예전부터 기억하고 계시고 알고계시고 또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를 향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신앙에 입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은 버선목을 뒤집어서 보여주는 것처럼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신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자기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증거나 사람들의 논리로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닌 초자연적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신앙의 근거를 가지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믿음이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믿는 것이라면 그 당시에는 확실할지 모르지만 더 분명하게 보이는 다른 것들이 우리에게 제시될 때 우리는 예전에 보았던 것이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이성의 논리라면 그 논리로 이해할 때는 신앙이 있는 것 같아도 그것보다 더 정교한 논리로 우리의 예전의 논리를 이길 때 우리는 예전에 내가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이 착각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우리에게 증거하심에 있어서 이러한 감각의 증거나 혹은 이성의 증거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직접 우리의 마음속에 도장을 찍으시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인치는 증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도저히 우리의 이성으로 믿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을 깨닫게 되고 이것은 인간의 어떤 논리로써 설득된 믿음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성경의 계시를 믿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인 쳐주심으로 굳게 믿게 된 그런 종류의 확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믿음을 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준비된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죄도 준비된 마음에 찾아오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도 준비된 사람의 마음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런 깊은 변화를 받고 하나님을 만날 때마다 우리의 마음, 우리를 둘러싼 상황,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섭리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나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공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깊이 만날 때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을 흔들어놓으십니다. 오늘도 성도 한분을 점심때 심방했습니다. 아내는 교회에 열심히 나갔지만 본인은 별로 인격적인 승복도 없이 떠돌다가 직장을 잃게 되고 아이들을 부양해야하고 그야말로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인격적으로는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그분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매우 성숙할 때에는 우리의 환경을 그렇게 움직이실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아주 성숙하면 하나님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을 그 말씀이 움직입니다. 크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나의 주변에 커다란 일들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 커다란 일이 내 마음을 움직인 것보다 오늘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더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을 다루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루시는데 말씀으로 다루어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굳이 환경을 흔들어놓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기르지 않습니까? 말로 해서 통하는데 왜 패겠습니까? 정신병자 아닙니까? ‘너 지금 잘못하는 것이다.’ 그러는데 아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가 잘못했습니다.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행동하지 마라.’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딸이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 너무 죄송해요.’ 그럴 때 ‘네가 죄송한 것은 죄송해서 뉘우치는 것이고 얻어맞는 것은 별도지!’ 하고 팹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정말 훌륭한 간증은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을 흔들어놓지 않으셨는데도 내 마음이 움직여서 변화된 간증이 가장 훌륭한 간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간증은 별로 안쳐줍니다. 일단 죽을 고비를 넘겨야합니다. 또 죽은 것은 간증거리가 안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죽었으면 말을 못하니까 말입니다. 병이 걸려도 이렇게 뼈가 잠깐 부러지고 감기에 걸리는 것은 간증이 되지 않고 병원에 가서 ‘가망이 없습니다.’ 라는 진단을 받아야 훈장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은 뒤집어보면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얼마나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게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리의 모든 잘못들이 드러나고 내가 인생이라고 살아온 모든 삶이 매주일 교회에 나가서 물론 졸기는 했지만 예배를 드렸는데 그것이 인생 살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못질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모든 것들이 드러날 때 회개하게 됩니다. 그 슬픔과 후회와 고통이 극심하면 회개하다가 까무러칩니다. 졸도합니다. 저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러면서 자기가 정말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가 넘어갈 정도로 회개하는 사람에게 그 충격은 하던 사업이 망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가문이 풍비박산이 되고 이런 것들이 가져다주는 충격과는 비교될 수 없는 내적인 충격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이 실컷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터지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와서 그리고는 ‘목사님! 저는 정말 이 환란, 사업이 박살나고 집안에 우환이 찾아오는 이런 끔찍한 환란을 통해서 저는 너무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은 것에 비하면 제가 받은 환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특별한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만날 하는 이야기를 깨달은 것입니다. 만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과외비, 인생이 뿌리째 흔들리는 고난을 통해서 한 줄을 깨달은 것입니다. ‘순종하며 살아야한다.’ 그런데 그런 환난을 안 만나도 말로 할 때 이렇게 말씀으로 하실 때 ‘아, 그렇구나! 하나님 제가 이제껏 불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정말 순종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그 사람은 횡재한 것입니다. 다른 인간은 인생을 뿌리째 뽑아서 과외비를 주고 그 한 줄을 깨달았는데 이 사람은 그냥 가만히 와서 앉아서 설교 한편을 들으면서 그것을 깊이 깨닫고 가슴에 새기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사람이 진짜 간증해야하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마지막에 나 같은 사람은 되지 말라고 간증하는 것 밖에 할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웅적인 간증에 홀리지 마십시오. 인간이 얼마나 완악하고 강퍅한 인간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아브라함이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겠습니까? 이 13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초기시절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지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가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자기의 부인인데 내 누이라고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나이 칠십 오세가 된 아브라함이 데리고 살던 여자가 얼마나 예뻤기에 말입니다. 너는 너무 아리따우니까 만약에 네가 내 아내라고 그러면 나를 죽이고 너를 빼앗아갈 것이다. 이게 믿음이 바닥까지 내려간 것이 아닙니까? 진짜 지조 있는 남자라면 죽으면 죽으리라고 아내를 지켜야지 여러분 ‘네가 첩으로 팔려가도 나는 살아야겠다.’ 는 것이 아닙니까? 이게 신앙인입니까? 이렇게 아주 말하자면 초창기 신앙이었기 때문에 신앙이 솟았다가 주저앉았다 솟았다 주저앉았다 이렇게 요동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당신만 간절히 바라보면서 소망을 당신께만 두면서 당신만 사랑하고 당신만 순종하면서 살아서 이후에 이루어질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본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직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이라고 섬기는 그런 우상이 지금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 지난 주일에 절에 가서 절하고 오신 분계십니까? 아니면 관우나 장비 사당에 가서 향불을 피우고 머리를 조아리며 주기도문을 외우다가 온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신약시대의 우상은 그것보다 훨씬 더 변형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이외에 자신이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그 우상은 아내도 될 수 있고, 자식도 될 수 있고, 자기의 명예도 될 수 있고, 심지어는 자신이 애착하는 어떤 물건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금슬이 좋은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것도 너무 지나치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없지만 하나님 보다 더 많이 사랑해서 그래서 저는 실제로 보았습니다. 친구가 수련회를 가서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고등부 수련회갈 때 절대 물가에 못가도록 서약을 받는 것입니다.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6대독자입니다. 아들이 그냥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집 아이들은 아무렇게나 굴려도 죽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6대독자입니다. 아버지는 장로님이고 어머니는 권사님인데 교회를 안 나옵니다. 그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6대독자를 데려가실 수가 있느냐고 그러는데 6대독자나 우리 집같이 아들 많은 집 아들이나 그 부모에게 소중한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 그런 것을 따집니까? 그런 것들은 좋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려면 하나님 안에서 사랑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드리고자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이 롯과 헤어지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에게 정말로 공개하고 싶었던 축복의 약속을 유보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얼마나 롯을 많이 의지하고 사랑했는지를 보여주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 다시 말해서 하란에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할 때 하나님만 바라보고 떠났던 그 마음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공평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그것이 소중한지 그리고 내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잃어버리고 나면 하찮게 여기던 그것이 사실은 내게 굉장히 소중한 것이었구나. 때로는 내 마음이 그것을 집착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손목시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오랫동안 시계를 못 고를 것 같습니다. 아무 시계도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 불과 200불도 안 되는 싸구려시계였는데 여행을 가서 산 것인데 똑같은 것도 없거니와 있으면 구할 것인데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다른 더 비싸고 좋은 시계도 전혀 차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끈이 헝겊으로 되어있어서 여름에 굉장히 불편합니다. 땀이 끈에 배고 그리고 뭐가 자꾸 묻고 그래서 여름에 항상 잃어버립니다. 여름에는 손목에 끼기 싫어서 벗어서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리고 나니까 그 시계가 그렇게 생각이 납니다. 오늘도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롯을 의지하는 아브라함의 그 마음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데에 있어서 중대한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고 그래서 롯이 이 아브라함과 갈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롯은 하나도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다. 모르겠지만 별로 아픈 흔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굉장히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엊그제 형제자매 둘이서 다음 주에 결혼하겠다고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형제자매에게 그랬습니다. ‘내가 다음 주에 주례를 서 줄 텐데 내 말을 들어라. 절대 입 벌리고 웃지 마라. 부모님이 섭섭해 하신다. 울지 마라. 하객들이 보면 사연이 있어 보인다.’ 제가 할머니하고 오래도록 살았습니다. 결혼하기 전날 할머니가 저를 부르셨습니다. ‘남준아, 나를 봐라.’ 그런데 일평생 살아오면서 할머니가 그렇게 정색을 하고 비감하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못 봤습니다. 항상 장난치고는 했는데 ‘나를 봐라. 내 눈을 봐라.’ 보았더니 ‘너 내일 장가가는 날 네가 웃으면 너를 다시 안 본다.’ 그러는데 그 표정이 너무 비장합니다. 여러분은 웃지만 저는 일평생 살아오면서 할머니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처음 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게 나를 그렇게 사랑했던 할머니나 부모님들에게는 내가 장가가는 날 그렇게 새색시를 얻는 것이 좋아서 시시덕거리는 그 모습이 상처가 될 수 있겠구나! 그래서 제가 주례를 설 때마다 항상 이야기합니다. 너무 견딜 수 없이 좋을 때는 입 꼬리만 약간 올려라. 거기까지는 허락하는데 이빨을 내놓고 시시덕거리지 마라. 그리고 절대 울지 마라. 무슨 사연이 있는 줄 알고 사람들이 자꾸 상상한다. ‘울지 말고, 웃지 마라. 우아하게 있어라. 떠난 다음에는 좋아서 까무러치든지 입이 찢어지든지 상관 안하는데 부모님이 계신 데서는 그러지 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하나님은 너는 정말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하는데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믿음은 정신과 마음을 집중하여 하나님 한분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그분께만 온 마음이 꽂혀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 그것이 바로 믿음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면을 돌아보실 때 아브라함에게는 물론 사라를 사랑했겠지만 무슨 75세 넘은 노인이 사라하고 첫 연애에 빠진 것도 아닌 것이니 사래가 있는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물욕에 가득한 탐욕스런 사람이 아니었으니 늘어나는 짐승의 소떼나 양떼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로막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마지막 하나가 있었습니다. 조카 롯을 의지하는 마음, 하나님에게 온전히 향하게 방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슴 아프게 이 롯과 아브라함 사이를 갈라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는 돈이 없고 시련을 만나는 때 그때도 물론 힘들지만 정말 힘든 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그리고 찢어질 때 그때에 사랑은 남았는데 이 개념 없는 인간 롯이야 그랬겠지만 헤어진 그날도 가서 퍼질러서 잘 잤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남아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헤어짐이라는 것은 살을 이렇게 찢는 것과 같은 고통입니다. 마치 살을 칼로 베어 낸 다음을 살을 접어서 굵은 소금을 쫙 뿌리고 덮는 것 같은 그리고 그것을 누르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그게 바로 살이 에인다. 가슴이 에인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참 놀랍게도 신앙이 우리에게 없을 때 가슴이 에이는 일을 만나게 되면 주저앉아서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십니까? 이번에 김근태 씨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 사인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패혈증입니다. 패혈증은 이틀 안에 죽습니다. 패혈증이 뭐냐 하면 피 속에 박테리아가 들어가서 피 자체가가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몸을 돌면서 피가 흐르는 모든 곳 중에서 다 균이 침투하여 가장 연약한 부분을 침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과 24시간 안에 일어나는 질병입니다. 그것은 금방 죽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재미있느냐 하면 우리의 몸에 저항력이 남아있을 때에는 균이 침투하거나 질병이 생기면 온 몸에 군대 총동원령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몸의 저항력을 모두 소집해서 그 균이 침투해서 들어오는 그 지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방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항능력이 거의 상실되었을 때 균이 확 침투하면 우리 온 몸에 모든 기능들이 포기하고 항복하고 급속하게 그 균이 확 퍼져나가면서 덜컥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특히 정신적으로 크게 낙심하고 좌절할 때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아브라함이 비록 신앙을 팔아서 위기를 넘기고 믿음이 없어서 흉년을 만났을 때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까지 내려갔습니다만 이런 위기를 만났을 때 아브라함 속에 있는 모든 하나님을 의지하려고하는 신앙의 인자들이 다 들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롯의 배신과 결별에서 오는 슬픔과 모든 고통을 끌어안고 지극히 가난한 마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처분만을 기다리는 심령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마까이로이 호이 푸토코이’ 라고 희랍어 성경에 되어있는데 그 ‘푸토코이’는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안이 완전히 거덜이 나서 지금 내쫓겨서 아무데도 갈데없는 비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의 날개를 펴보십시오. 옛날에 가난한 집에 무엇이 많습니까? 애들이 많습니다. 애들이 줄줄이 딸려서 일곱 명이나 되는 애들이 그중의 둘은 업히고 하나는 앉고 그리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날에 길바닥에 쫓겨났습니다. 갈 데는 없고 보안등 아래 온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서 흐느끼고 있는데 손에 든 것이라고는 솥단지 몇 개와 수저밖에 없습니다. 이 추운겨울에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때 동네어른 하나가 길을 지나가다가 ‘아니 자네 한밤중에 이 길거리에 왜 나와 있는가?’ ‘제가 빚쟁이들에게 쫓겨나서 이 밤중에 여기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너무 가엾으니까 ‘이러면 안 되네 오늘 엄청난 추위가 몰려온다네. 잘못하다가는 이 아이들 여기서 얼어 죽네. 일단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오늘은 일단 우리 집으로 가서 따뜻한 저녁을 먹고 따뜻한 방에서 이불을 덮고 자고 내일 해가 퍼지면 대책을 의논해보세.’ 따라가겠습니까? 안 따라가겠습니까? 가자고 할 때 개념 없는 인간처럼 ‘독방입니까? 아니면 방이 두 개입니까? 나는 침대 없으면 허리가 아파서 못 자는데요. 아침은 줍니까? 제가 늘 유기농으로 아침식사를 하는데요.’ 그러겠습니까? 안 그럽니다. 그런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마음 그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위기 속에서 주님을 만날 때에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낮추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낮추도록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마음이 닫히면 안 들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환경을 흔들어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야 비로소 ‘아 그렇구나. 이 세상은 정말 허망한 것이구나. 모두 영원한 것이 없고 흘러가는 것이구나. 조카 롯도 영원히 내 자식처럼 생각했는데 결국은 떠나가는구나.’ 그리고 돌아보니까 하나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는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이 바로 이런 상황에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으로 부르짖는 한 마디의 기도는 생각 없이 중얼거리는 일만 마디의 기도보다도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라고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B. 복 주시는 하나님
이런 마음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으니 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만남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커다란 감격으로 다가왔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만남에서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꾸짖거나 책망하는 대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주셨습니다. 아무 책망 없이 복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롯을 잃어버린 가난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아오실 때 당신에게 당신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으로 당신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이 아브라함의 신앙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손이나 발로 하는 일들을 통하여 기쁨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여러분의 마음을 통해서 기쁨을 받고 싶어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섬긴 것을 뽐내거나 자랑하거나 주님이 주신 축복을 헤아리면서 교만해지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많은 복을 주셔도 하나님 대신 그 복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아이같이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가장 기쁘시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1. 온 땅을 주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는 축복을 하십니다. 여러분은 생각하시기에 아마도 아브라함이 조카보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내가 오른쪽으로 가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까 사방이 다 그냥 공터투성이었구나! 어디를 가든지 말뚝만 꽂으면 자기 땅이 되는 세상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거저 주어도 아무 쓸모없는 땅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6일 전쟁을 할 때 시나이 반도를 점령했습니다. 작년에 교인들과 가보았습니다. 무지하게 넓습니다. 그곳에 있는 이스라엘 땅보다 훨씬 넓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반납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도 없고 풀밭도 없고 심지어 지하에서 금이나 우라늄이라도 쏟아져 나왔다면 버려두었겠습니까? 그것을 파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땅은 주인 없이 버려져있습니다. 그러나 짐승을 잘 기를 수 있는 조건이 있는 촌락을 이룰 수 있는 땅은 제한되어있습니다. 거기에 어디 감히 명함을 내밉니까? 이미 다 구역을 짜고 있습니다. 가서 잠시 세 들어 살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땅을 빼앗고 통치하겠다고 하면 칼부림이 납니다. 그래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로 들어가서 그 사람들에 그렇게 구박을 받은 것입니다. 타관 땅에 들어왔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이놈이 남의 땅에 들어와 나그네처럼 살면서 우리의 재판관이 되려고 하는구나!’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성 사람들이 이 롯을 몰아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게 타향살이의 서러움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나는 유리하는 나그네’ 라고 하는 것이 자기 정체성의 고백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땅에 들어갈 때까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한 맺힌 한을 풀어주는, 맺힌 원한을 풀어주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단 말입니다.
2. 자손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다음으로 주신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너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나이 많아 늙은 이 아브라함에게 ‘네 핏줄로써 태어나는 네 아이를 주겠다.’ 그래서 그 자손들이 땅의 모래와 같이 많아져서 하늘의 별이나 땅의 모래를 사람들이 셀 수 없는 것처럼 너희 자손도 그렇게 번영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에게 ‘양을 100마리 더 주마.’ 아니면 소가 새끼를 날 때마다 쌍둥이를 낳게 해주겠다고 해도 아마 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가장 없는 것 그래서 그것이 한이 되고 원통한 것이 된 그것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하시며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땅이라는 것이 결국은 가나안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가나안은 구속사적으로 결국은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안식을 취하게 된 것이 결국은 안식은 이후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이 얻게 될 구원의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하나의 예표였습니다. 그들이 예표로 받은 그 땅에서 완전한 평화를 누렸습니까? 아닙니다. 수시로 외적의 침공을 받고 자신 들 속에서 일어나는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시련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예표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나안이라는 예표를 통해서 우리가 빼앗길 수 없는 영원한 구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완전한 복락과 쉼을 하나님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브라함을 복 주신 것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는 간절한 심령을 가진 여러분에게 오늘도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시고 여러분에게 원한이 될 정도로 가장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이 허락해주심으로써 여러분이 그 곤고함과 시련에서 벗어나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이니 사도 바울은 친히 말하기를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밖에서 복을 얻어 보려고 하는 무지한 시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이니 그 원리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으려고 생각을 해야지 그 밖에서 복을 받아보려고 자신의 힘으로 복을 일구고 그 복을 가지고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 사람들 앞에 으스대고 뽐내보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복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만약에 그런 사람에게 그런 복이 임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복이 아니라 사실은 영혼의 커다란 재앙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하는 조카 롯을 떠나보내고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하고 그분께 이끌림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축복의 언약을 받았던 아브라함과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 가까이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한해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Ⅳ. 위기 속에 쌓은 제단
마지막으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축복의 약속을 받은 후 아브라함이 한 일은 바로 제단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커다란 위기를 만나고 사랑하는 조카 롯을 떠나보낸 노년에 절망적인 외로움의 위기 속에서 그는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견고히 하였던 것입니다. 시련과 환란을 만나 정신없는 사람들을 만나 상담하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러면 ‘목사님 제가 지금 신앙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환난과 시련이 참 많습니다.’ 신앙은 태평하고 평화로울 때를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없는 그때를 위하여 신앙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가장 큰 시련을 만나고 소나기와 같고 불비와 같은 환난을 당할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사람을 향한 희망과 세상을 향한 기대를 거두고 거룩하신 하나님 한분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간구하며 예배 생활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환난을 만나기 전에 그 비싼 과외비를 지불하지 않고도 깨달을 수 있는 무료티켓을 수없이 보내십니다. 그것을 계속 찢어버리고 그리고는 유료과외를 하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딱 한줄 깨닫는 것입니다. 한 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이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라고 하신 그 말씀이 정확한 사실입니다.
Ⅴ. 결론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환난을 만났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 홀로 남으셨습니까? 여러분 혼자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견디기 힘든 괴로운 일이 있습니까? 문제의 해결은 예배에 있습니다. 내일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예배에 똑바로 참석하십시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이제껏 까지 여러분의 방도대로 해결해보다가 해결이 안 되어서 이 시련까지 왔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시고 이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 무엇을 여러분에게 가르쳐주시려고하는지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바로 거기에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있으니 문제가 있는 먼 곳에 열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옆에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두신 것입니다.
2.약속의 땅에도 궁핍은 오는가?
“그가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니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창 12:10-13)
녹취자 : 허혜숙
1.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어제 있었던 이 사건보다 시기적으로 좀 앞선 사건입니다. 어제 있었던 보다 먼저 일어난 일이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신을 섬기며 살아가던 데라의 집안의 아들 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이미 이 데라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아브라함이 맨 처음 가나안으로 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 데라가 식구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으나 아직 완전히 가나안 땅에는 도착하지 못하고 하란에 이르러서 205세의 나이로 아버지가 죽게 됩니다.
바로 거기서 아마 아브라함은 이제 아버지가 가나안으로 가려고 하는 길로 계속 가야 하는지, 아니면 여기에서 머물러야 하는지, 아니면 다시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야 되는지, 아마 아브라함에게는 무슨 결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이제 갈대아 우르에 섞여 사는 한 사람이 아닌 다른 민족이 되게 하리라’ 고 하는 큰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에게 커다란 격려와 신앙의 동기가 되었을 것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II. 약속의 땅을 덮친 기근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갔고 롯도 그와 함께 동행 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과 같이 지역에 거의 상관이 없는 삶을 사는 시대에는 어디로 이사를 가든지 거기가 그저 자기가 사는 땅이 되지요. 그러나 옛날에는 지연과 혈연이 단단히 묶여있는 사회에서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곧 커다란 상실과 외로움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두려움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이 그런 모든 한계와 위험을 무릅쓰고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감동과 신앙의 확신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가 가려고 했던 그 가나안 땅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이 아브라함은 처음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그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이르러서 세겜 모래 상수리나무에 이르러서 진을 치고 그리고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고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여호와께 단을 쌓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는데 이것을 구약의 주석가들은 예배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의 예배생활이 이미 시작되었다 이런 뜻입니다.
A. 그 땅에서 만난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서 처음 하신 말씀이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고 복을 주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그를 저주하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 때문에 복을 받게 해 주겠다, 히브리 성경에는 네 안에서 복을 받게 해 주겠다 이렇게 하나님이 큰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앙도 없던 이 아브라함이 굳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늘을 열고 하나님이 복에 복을 쏟아 부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약속의 땅을 기근이 덮쳤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아주 단순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죠. 약속의 땅에도 궁핍이 오는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도 역경이 오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유익은 무엇인가?
이런 하나님의 옳으심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이 오고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그 땅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땅이라고 하는 곳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 왔을 때 그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란에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하란에서 당신이 지시해 주시는 땅으로 가라 그래서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갈 새에 갈 곳을 모르고 떠났다고 했으니 아마 하나님은 가라고만 말씀하셨고 거기가 어디였는지는 하나님께서 행진하면서 가르쳐 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든 그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준행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났더니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한 번 하란에서 주신 약속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란에서는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고 창대하게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물론 이 가나안 땅은 그 당시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이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리라’ 고 다시 한 번 축복을 보증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때가 아브라함에게는 크게 두 번째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었고 이 때 아브라함은 커다란 감화를 받았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재단을 쌓고 하나님께 그 분의 이름을 높이며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커다란 신앙의 부흥이었고 처음 신앙의 시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크고 큰 일생에 잊혀 질 수 없는 신앙의 감격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땅에 기근이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왜 하나님이 가나안 땅, 하나님이 약속하셔서 가라고 하신 땅,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게 하시고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 땅에 들어갔는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는데, 왜 하나님은 그 약속의 땅에 기근이 덮치게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과 재앙, 그리고 고난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많은 재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주시는 것이라기보다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이 허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일본의 쓰나미가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라고 해서 발칵 뒤집혀지고 목사님이 사임을 하는 일까지 생겨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지 사람을 심판하고 죽여 버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고 돌이켜 살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큰 섭리의 허락이 있으니까 일어나는 것이고, 좁은 의미에서 보면 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전망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거나 혹은 이 가나안 땅에 풍년을 주실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 약속의 땅에 기근이 덮쳤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많은 문제들은 의문으로 남지만 한 가지 우리가 중요하게 눈여겨보아야 할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B. 남방으로 가는 아브람
그것은 바로 9절에서 ‘여호와께 재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아브라함이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고 했습니다. 남방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남방으로 내려가면 블레셋 땅이 나오고 그 블레셋 땅을 지나게 되면 애굽과 맞닿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점점 멀어져서 남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또 남방으로 내려 간 것이 반드시 불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대적하는 이런 불신앙 때문에 내려갔다고 결론을 내릴 명확한 근거는 우리가 본문만으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남방으로 점점 내려갔을 때에 아브라함의 영적 상태가 어땠는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10절과에서 13절 본문에서 분명히 나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누리던 그 신앙의 감격에서 멀어졌고 신앙이 아주 약화되어 있었던 때였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고 하나님만 의지해서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 그 하나님만 경배하기 위해 재단을 쌓았던 아브라함의 감격적인 신앙,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순종하던 이 신앙은 이 10절에 와서는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아브라함이 점점 남방으로 내려간 것은 분명히 육신의 생활에 문제를 해결하고 부를 얻는 데 남방으로 옮겨가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점점 이탈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번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것입니다. 문제는 받은바 은혜를 끝까지 간직하면서 미끄러지지 않는 것이야 말로 더 어려운 신앙생활입니다. 결국 약속의 땅에 기근이 왔습니다. 이 약속의 땅에 기근이 왔다는 이야기는 가나안 뿐 만 아니라 이 아브라함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간 거기 모두를 포함해서 커다란 기근이 임하여 양식을 구할 수 없고 가축들도 굶어 죽어가는 커다란 재난을 만났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가나안 땅에 기근이 오고 아브라함이 점점 남쪽으로 내려간 그 남방에는 기근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이 굳이 애굽까지 내려갔을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애굽에 내려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거기로 가라고 한 하나님의 계명에 처음엔 순종했으나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삼고 미래에 하나님이 자신들의 자녀에게 주실 그 축복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을 택하는 대신 육신의 유익을 위하여 약속의 땅에서 점점 멀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기근을 내리셨다고 우리는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은 커다란 궁핍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데라도 상당한 재산을 모아가지고 자기의 자녀들과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란을 떠날 때에 많은 소유가 있고 또 함께 데리고 있는 노예들도 있었던 것으로 성경에 나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최소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먹고 살 염려가 없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가나안에 갔을 때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그 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의 삶을 한동안 편안하게 이끌어 주셨을 것입니다. 아마 그는 그렇게 고향을 떠난 이후로 궁핍을 몰랐던 사람이었는데 커다란 흉년이 들었고 기근 때문에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다고 하니까 이 기근이 잠시 후에 끝날 정도의 기근이라고 아브라함이 판단을 하지 않고 이 기근의 고통이 상당히 오래 갈 것이기 때문에 가나안 땅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애굽에 들어가 살고자 그는 애굽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C. 약속의 땅에 기근 올 때
결국 이렇게 약속의 땅에 기근이 왔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도 기근이 오는가? 라고 물으면서 하나님의 정당성에 대해서 항의하지만 오늘 성경은 오히려 아브라함이 먼저 그 가나안을 떠나 점점 남방으로 옮겨감으로서 하나님께서 처음 그에게 주셨던 명령을 처음에는 순종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순종으로부터 이탈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이 고난을 주실 수 있고, 시련이 올 수도 있고, 약속의 땅에도 물론 기근과 궁핍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께서 처음 부르셔서 이제 초기 신앙이었던 아브라함이 그런 하나님의 오묘하고 심오한 섭리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신앙까지는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이 아브라함이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섭리 속에서 약속의 땅에 궁핍을 오게 하신 것이 아니라 명백한 아브라함의 불순종에 대한 징계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III. 궁핍한 날에 드러난 신앙
A. 환경을 통해 드러남
결국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궁핍한 날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의 신앙은 환경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경을 우리의 믿음을 재는 시금석으로 사용하시는 것을 봅니다. 신앙이 성숙하고 깊어지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환경에 매이지 않는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욥과 같이 순전하겠습니까? 커다란 재앙을 만나고 심지어 자신의 몸에 커다란 질병을 만나고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할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의 신앙은 이 환경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에는 그저 편안하게 교회에 오가고 하나님 섬기고 헌금하고 그리고 교회에서 주어진 의무들을 감당하면서 훌륭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시련과 환란이 올 때 고난이 닥치고 이제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않은 혹독한 재앙이 밀어닥칠 때 어디 하나 마음 둘 곳이 없고 지푸라기 하나를 붙잡으려고 해도 의지할 곳이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 한 분 앞에서 우리의 믿음의 정도가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그 환경을 통해서 재시는 것입니다.
이런 날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도 잘 몰랐던 우리의 믿음의 깊이를 바로 거기서 재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믿음생활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진실하고 깊이 있는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 자신 편이기 때문에 남에게는 박하지만 우리에게는 매우 후합니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 편을 들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의 판단이 공평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판단하시는 것 보다는 내가 나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을 틀렸다고 부인할지언정 우리는 우리 자신을 두둔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믿음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보여 주심으로서 하나님 앞에 교만을 깨트리고 아버지를 더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시련과 환란을 당하게 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약속의 땅에도 기근을 내리십니까? 라고 물을 수 잇을 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 눈에 비친 이 기근과 궁핍은 오히려 아브라함의 마음이 가나안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임한 궁핍이요 재난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 번에 약속의 땅을 탈출하거나 혹은 갈대아 우르로 하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서서히 약속의 땅에서 멀어졌고 인간의 육신의 안목을 따라서 그는 살기 좋은 곳을 향하여 남방으로 내려가는 가운데 가나안을 자신의 기업으로 주시고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그 큰 명령,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그 명령을 하찮게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먹고 사는 일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약속을 헌 신짝처럼 내팽개쳐 버린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핍한 날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얄팍한 두께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매일 매일의 경건한 삶 속에서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신 것을 날마다 영적으로 경험하며 그 분을 향한 사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환경이 우리에게 커다란 재앙으로 다가와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품으로 더 많이 도망칩니다. 그렇게 될 때 그에게는 환란을 통해 하나님을 피한 것이 그 커다란 시련을 통해 우리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와 기도와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마주하고 은혜를 받는 영적 생활이 사라져 버렸을 때에는 믿음의 눈이 감겨졌기 때문에 그는 눈에 보이는 두 눈으로만 모든 것을 결정하고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걸어서는 안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딸린 식구들은 많고, 식구들은 먹여 살려야 되겠고, 많은 가축들도 거느리고 있는데 이 가축들도 먹여야 될 것이 아닙니까? 좀 더 좋은 목초지와 혹은 물건을 거래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은 이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 나중에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실제에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약속만 하셨지 등기권리증까지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좋은 땅에는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좀 더 좋은 조건을 찾아서 남방으로 내려간 것이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서 누리는 번영은 약속의 땅에서 받는 고난만 못합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을 떠나서 누리는 그 풍부함은 하나님 없는 풍부함이지만 약속의 땅에서 받는 시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작가는 말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도 하나님이 안 계시면 지옥이고 지옥도 주님이 함께 계시면 천국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 없이 천국의 비단 길을 걷기 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지옥의 불길을 지나고 싶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은 언약의 백성들의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세속적인 신자들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 지고 싶어 하지만 진실한 신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룩해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신자들은 하나님 때문에 이 땅에서 번영하고 싶어 하지만 진실한 신자들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형통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없겠습니까? 또 설령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섭리에 의해서 그런 고난을 당하여야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위대한 약속의 시련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가나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사람의 꾀를 따라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사래를 차라리 누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면서 거짓말을 하게까지 하여 아내를 잃고서라도 자신의 목숨을 보종하려고 했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거의 남자로서도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죽고 말지 자기의 아내가 팔려가서 결국은 다른 사람과 함께 정을 통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을 보면서라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쓰레기지 어떻게 믿음의 조상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가나안에 사는 원주민들도 이런 정도의 자존심은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신앙의 감격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사람다운 것이지 주님이 그 손을 놓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못 할 일이 이 세상에 따로 있는 것, 그런 것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누룩처럼 번져가고 있는 그 끔찍한 추문과 부도덕의 소문들인 것입니다.
언젠가 정권이 바뀔 것 같아서 어떤 족에서는 좋아하고 어떤 쪽에서는 염려하고 그랬습니다. 한 사람은 정권이 바뀌어서 야당이 정권을 잡기를 원하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야당이 정권을 잡으면 큰 일 나’ ‘왜?’ ‘그 동안 얼마나 굶주렸을텐데 정권을 잡으면 얼마나 끔찍한 부패가 일어나겠어?’ 그랬더니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고기는 원래 먹던 사람이 잘 먹어’ 누가 정권이 바뀌든지 간에 부패는 필연적이라는 이야기겠지요.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에 붙들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신앙생활 할 때에는 착합니다. 왜? 비록 순간순간 정욕이 솟고 이 세상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이 들지라도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을 때에는 자기가 그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찬송)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 마음일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그렇게 교회를 하고 나서 뼈아프게 가슴 아프게 말을 한 사람도 없지만, 어쨌든 마음에 신앙생활 하거나 혹은 교회에 손해를 끼치거나 덜 유능해 보여도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다가도 그 사람이 예배시간이나 혹은 홀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 모두 용서가 됩니다. 마음에 물이 녹듯이 모두 다 녹아버립니다. 왜? 저렇게 하나님 앞에 잘 살고 싶다는데 자기가 그렇게 할 능력은 지금 필요가 없지만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되고 싶다는데, 깨트려지는 것 없이 잘 하는 사람보다는 깨트려지면서 조금 못하는 사람이 훨씬 희망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것 없이 잘 하는 사람은 잘 해봐야 80점이지만 깨트려지는 사람은 못하면 50점이지만 잘하면 100점입니다. 누가 언젠가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역자를 쓰는데 1년 기회를 준다고 합니다. 1년에 교구 식구를 몇 명을 모으면 계속 교역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간다고 합니다. 아주 좋은 교구는 두 번 좋은 기회를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 기준이라면 나도 사역할 교회를 하나도 정착을 못하고 담임목사에 의해서 늘 쫓겨났을 것이다. 그렇게 안 하고 그냥 붙어 있었는데 이렇게 목회를 하지 않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 앞에서 지금은 무능하고 부족하지만 끊임없이 깨어지면서 주님의 오래 참으심 속에서 주님이 기다려주시는 가운데 물론 주님이 그렇게 하셔도 별것 아닌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세계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런 깨어짐의 세계가 없이 큰 시련을 만났을 때 그는 예전에 하나님을 좀 믿으면서 멀리했던 세속주의로 완전히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기 시작하고 불순종하기 시작하면 세상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담대하고 열렬히 죄를 짓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오랫동안 굶주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자기가 먼저 약속의 땅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큰 기근이 임하게 된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그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재앙을 함께 당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한 말씀과 정 반대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면 제일 먼저는 하나님 앞에 정말 올바르게 사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없다 이렇게 믿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빌붙어서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잘 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태도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일반은총 차원에서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고 어떻게 하든지 거기에 붙어서 그 사람 때문에 무엇인가를 얻어서 내가 덕을 보고 유익을 보고 심지어는 이용을 해서 나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누군가와 함께 살게 하시면 나는 이 사람을 복 받게 하기 위한 통로로 내가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그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뭐 돈이라도 있고 해야 덕을 주지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물질만이 아닙니다. 제가 교회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이 상처받았다는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말을 그렇게 많이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단어들 자체가 흉악하고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말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사고나 가치체계의 중심이 항상 자아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항상 모든 것들을 자기의 이익을 중심으로 판단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합니까? 그래서 제가 항상 이야기 합니다. 이 세상에 무슨 이해되지 않은 일이 일어날지라도 항상 마음속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마음의 번민을 줄이며 시험을 벗어나며 사는 훌륭한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런 일이’ 하고 나면 단칼에 목을 베고 싶은 복수심이 발동을 는 것입니다. ‘약한 인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용서와 사랑, 관용, 물질, 기회, 위로,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베풀어 주어서 그 사람들이 나와 함께 누리는 관계를 통해서 유익을 얻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 물질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돕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웃의 필요와 고통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무엇을 흘려보내라고 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을까?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 사람이 나보다 돈이 많아도 근심이 많으면 내가 그를 위로할 수가 있고 그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재산은 저 사람이 많아도 김치를 내가 더 잘 담그면 가서 김장을 대신 해 줄 수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라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이기심으로 얼룩진 이런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에 왕따 일어나는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너무 분노합니다. 세상이 흉악합니다. 이런 것들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학교에 배상을 물려야 합니다. 외국처럼 자기 아이가 그런 끔찍한 상처를 입으면 외국에서는 학교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책임을 다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재단에서 변상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애들이 자살을 해도 오히려 자살을 한 부모가 바보로 몰리고 죽은 애가 비정상으로 몰리는 그런 사회에 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항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모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교회에서 이 그리스도인인 아이들을 잘 훈련시켜서 그렇게 왕따에 처해진 아이들에게 집단적으로 다가가서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으면 어떻게 하냐구요? 그러니까 태권도 학원에도 보내야지요. 그래서 전부다 태권도 3단 4단을 만들어 가지고 한 방에 날려야지요. 그 대신 자주 사용하지는 말구요. 웃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은 자기 일에 집중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집중합니다. ‘난 아무래도 괜찮아, 난 괜찮아’, 주님의 큰 사랑을 나와 관련된 사람들이 누리도록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많은 것들은 이렇게 흘려보내라고 주신 것이고 흘려보내면 하나님이 더 많은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으로 도망쳤고 제 한 몸 먹고 살려고 아내까지 기꺼이 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주 모자란 사람으로 전락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 웃었는데 웃음 속에는 아브라함을 향한 상당한 비웃음이 거기에 깃들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아브라함의 모습이 아니라 여러분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은 거기에서 결국은 아내를 잃어버릴 뻔 하다가 바로에게 혼나고 그리고 뭔가 잔뜩 얻어가지고 나오는데 나는 아무리 본문을 읽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나는 그것은 부끄러운 물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곧 죽어도 눈을 부릅뜰 수 있는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같았으면 안 그랬을 것입니다. 아내를 잃어버릴 뻔 하다가 결국은 큰 봉변을 당하고 우리를 봉변당하게 할 인간들이다 보내라, 빨리 가라하며 소금 뿌리듯이 말이나 나귀를 잔뜩 얻어가지고 나왔을 때 어떻게 그것을 끌고 나올 생각을 하냐는 말입니다. 그 아내 얼굴 보기가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명색이 사내가 되어가지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뭐가 세상 사람과 다릅니까? 하나님 의지하는 신앙 하나 헌 신짝처럼 내동댕이치면 쓰레기 중의 상 쓰레기로 굴러가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데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도사 때인데 어느 자매가 교회에서 고백을 하는데 자기 남편이 다른 교회에 나간다고 합니다. 그 집안에 자식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2대 독자인가 3대 독자인데 결국은 대리모를 통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씨받이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낳아준 사람도 교회의 성가대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그 일을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라고 확신을 한다고 합니다. 정신병자 아닙니까? 사람이 한 번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맛이 가면 어떻게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주님을 만난 경험, 가나안에 와서 하나님이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재산을 들여서 재단을 쌓고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경험을 간직했더라면 청중들이 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얼마나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가 이렇게 비루한 인생을 잠시 후에 살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훌륭한 신앙의 삶을 살아도 그 훌륭한 신앙의 삶이 우리 자신의 손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은혜에 붙잡혀 있고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놓으시면 나는 이렇게 축복의 근원이 되기는커녕 쓰레기 중의 상 쓰레기가 될 것이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라 라는 고백이 있어서 주님이 복 주시고 우리를 존귀하게 하실 때 예수를 더욱 붙드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B. 궁핍 속의 불신앙을 경계함
하나님은 궁핍 속에 불신앙을 경계하도록 우리에게 언제나 가르쳐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궁핍해 보셨습니까? 요즘 같은 때에 양식을 걱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지던 때는 없습니까?
정말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고 가족들과의 작별을 생각해야 하는 그 절망의 벼랑 끝에 서 본적은 없습니까? 물질적인 궁핍은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고통을 줍니까? 인간의 기본적인 자존심을 박탈해 버리지 않습니까? 물질적인 궁핍을 겪는다고 해서 여러분이 모두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채찍을 맞고 있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심오하여서 어떤 사람들은 신앙하나로 올곧게 살려고 하는데도 하나님이 특별한 계획이 있으셔서 궁핍 속에서 특별한 연단을 하실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시험이 들면 대부분 악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고 야고보 선생도 시험 중에 정욕에 이끌려 미혹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궁핍 그 자체보다도 궁핍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묶여있던 우리의 자아가 해방되어 쏟아놓을지도 모르는 불신앙과 하나님을 맛보는 신앙의 태도를 깊이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시련을 이기고 고난을 참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연단하신 후에는 더 큰 축복을 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운명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들이 무엇으로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물질로 우리를 치셔서 우리의 신앙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보라고 이 아브라함처럼 일깨워 주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궁핍에 처했을 때 그 궁핍을 하나님 없이 모면해 보려고 약속의 땅을 떠나는 사람들은 되지 말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약속의 땅을 떠나서 하나님께 더 큰 징계를 받고 시련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마지막 자존감까지 상실하고 그렇게 부끄럽게 되는 수치에 떨어지는 것 까지는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여러분이 궁핍 속에 있다면 이 궁핍 속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없이 번영해 보려고 했던 불신앙 때문에 이 궁핍이 오는 것은 아닌지 내가 어디에서 가나안을 떠나 점점 약속의 땅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고 어디에서 떨어진 것을 기억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복을 주실 때에 우리 인간들을 달아보십니다. 그 복을 하나님이 담아 두실만한 그릇인지를 하나님이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물질에 집착하고 하나님을 떠나서라도 궁핍을 모면해 보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이 더 궁핍하게 하셨다가 오히려 그 궁핍 속에서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전에는 궁핍하기 때문에 신앙으로 살기 힘들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던 사람들이 돌이켜 궁핍하고 어렵기 때문에
(찬송)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은 불현듯 여러분을 그 궁핍 속에서 건져 하나님이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여러분의 신앙이 부끄럽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미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믿어지는 그것을 하나님 의지하여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었을 때 오히려 신앙이 필요합니다. 부요할 때보다 궁핍할 때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평화로울 때는 혼자 살 수 있지만 시련과 환란을 만났기 때문에 그 폭풍 속에서 주님의 돌보심이 필요하기에 신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렇게 거의 떡이 되다시피 신앙에서 미끄러져서 쓰레기와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우리보다 하나님께 사랑을 덜 받았겠습니까?
우리보다 하나님께 은혜를 덜 입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마음의 끈을 단단히 동여매십시오. 이미 해 보지 않았습니까? 그 궁핍 속에서 신앙이라도 팔아서 궁핍을 모면해 보려고 애를 썼는데 그래서 뭐가 좀 됩디까? 그렇지 않죠?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그렇게 하나님이 막으신 축복을 신앙을 팔아서 노력을 한다고 그것을 회복할 수 있게끔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렇게 방탕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계획은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이 모두 보고 계십니다.
IV. 결론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께 손드십시오.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나는 궁핍합니다. 이제껏 나는 교만하게 약속의 땅에도 왜 궁핍이 옵니까? 하고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곤궁하게 하십니까? 하고 하나님께 반항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 몸은 교회에 있었으나 내 마음은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주님은 모든 것을 풍족히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주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이 복 주실만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껏 궁핍과 고난 속에 살았다면 이제는 여러분만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복이 넘치는 사람이 되어서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이웃들에게 흘러 들어가고 여러분 때문에 망가진 사람들의 인생이 고쳐지는 은혜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복을 받기로 그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3.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라함이 쫓았더라”(창15:1-11)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어제 일어났던 사건 바로 이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 아브라함은 남자 망신 다 시켰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그렇게 큰 은혜를 주셔서 가나안까지 오게 되었고 하나님이 명백하게 이 땅을 너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셔서 은혜의 감격도 누렸습니다. 그래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속의 성공을 찾아서 점점 약속의 땅으로 멀리 떠나 남방으로 내려갔고 가나안에 내린 큰 흉년은 아브라함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으로부터 멀어진 것에 대한 징계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히브리 성경에는 네 안에서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갖지 못하였을 때에는 그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재앙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성입니다.
아브라함과 대조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는 완전히 하나님 모르는 애굽의 땅의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거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더니 하나님이 이 요셉을 보시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 보디발의 온 집에 복을 내리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 왕 바로도 이 요셉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자요, 하나님이 특별히 복 주시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 여러분이 올바로 하나님을 믿고 온전한 신자가 되는 것은 여러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가족의 문제이고, 딸린 모든 사람의 문제이고, 그리고 심지어는 온 나라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은혜 멀리 떠난 그리스도인과 동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망하려고 아예 뜻을 세우고 길을 들어 선 것입니다. 차라리 초신자와 동업을 하는 것이 낫지, 신앙생활 미끄러져서 죄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과 손잡는 것은 그러면 반드시 그 손해가 자기에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많은 복을 주셔서 가나안 땅에서 점점 부자가 되고 좀 더 성공하고 좀 더 좋은 생활을 위해서 남방으로 점차 내려갈 때만 해도 무슨 문제가 있겠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결국은 완전히 흉년이 들고 결국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을 때 거기에서 언약 백성의 모든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언약 백성은 집어 치우고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자기 아내를 들여다 보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애굽 땅에 들어갈 텐데, 내 누이라고 그래. 당신 내 마누라라고 하면 당신 살리고 날 죽일텐데, 그러면 안 되고 알았지? 그게 부끄럽지도 않았을까. 그래도 함께 하나님을 만난 사이인데 사래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의 경험을 다 보았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와서 집에 밤에 잘 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밤새도록 간증하지 않았을까. 남성들, 대답해 보십시오. 어제는 완전히 남성을 위한 사경회 였습니다. 여러분, 교회 와서 은혜 받으면 밤에 집에 와서 부인과 앉아서 도란도란 하면서 은혜 받은 이야기 많이 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도 별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뭡니까. 완전히 그냥 언약 백성으로서 체면이 아니라 거의 인간의 말종의 자리에 가서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지 주님이 탁 놓으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이 가장의 신앙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뭘 또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합니까. 아내가 기도를 잘 안하니까 남편이 그 모양입니다.
(예화) 굉장히 우스운 일이 있었습니다. 교역자들이 수련회를 갔는데 마음이 굉장히 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5-6학년 학생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아주 개판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설마 그랬는데 5-6학년이 있는 그 여러해 지났습니다. 거기를 갔더니 의자가 비닐로 되어 있는데 그것을 다 손으로 뜯어 놓은 것입니다. 예배를 개판으로 드린다는 것이 뜯어진 의자를 보면 뻔하구나. 그래서 이제 그 초등부 지도하는 교역자가 나한테 혼났습니다. 교역자가 모두 결국은 4,5,6학년을 잘 못 가르쳐서 결국 교역자가 혼이 나고 목사님이 굉장히 마음이 상하셨구나. 그러더니 갑자기 유년부 교역자는 도대체 누구야, 그러더랍니다. 저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회심을 안 하니까 올라가서 그런 짓을 하고 있잖아. 불똥이 그곳으로 튀었습니다. 그것이 남자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사랑으로 이해하고 그리고 깊이 감싸며 그렇게 신앙의 길을 걷는다면 남편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신앙의 현실은 우리가 이제껏 걸어온 삶의 발자취에 불과합니다.
II.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
A. 신앙을 따라 전쟁함
아브라함과 사래가 공통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랬는데 하나님이 초기 신앙이니까 크게 혼내지 않으시고 봐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많이 회개하고 새로워져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13장과 14장 사이에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우리가 점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암튼 그때 이제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몇 나라가 한 다섯 나라 정도 있는데, 그 때 나라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중국이나 미국, 한국 이런 나라를 생각하면 안 되고 그저 관양동, 평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원래 이 쪽 나라 사람들이 그게 있습니다. 부풀리는 것이 있습니다. 개울은 강이고, 호수는 강이고, 밭은 평야고 동산은 산맥입니다. 그냥 그렇게 이해하고 그러한 조그마한 나라고 성 하나 있으면 나라라고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라고 하는 것을 정하기가 애매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라라고 쳤습니다. 다섯 나라고 있는데 더 큰 나라가 몇 있었습니다. 그 나라에게 복종하면서 이제 신하처럼 고분고분 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말하자면 도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 걸렸습니다. 그 네 나라가 힘을 합쳐서 까부는 다섯 나라를 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결국 싸워 봤는데 게임이 안 되었습니다. 땅을 다 잃어버리고 그 다음에 사람들이 다 잡혀가고 재산도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그 소식이 들려 왔는데 전해 준 사람도 거기에 속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들과는 아브라함이 동맹을 맺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이런 일들이 많이 있으니까 동맹을 맺어서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끔찍한 소식은 조카 롯이 사로 잡혀 가고 그 집안 식구들과 모든 재물들까지 노략질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새끼처럼 길렀는데 등에다가 칼 꽂고 그리고 뭐 네가 좌 하면 내가 우 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더니 삼촌 먼저 소리 안 하고 보따리 싸가지고 간 나쁜 녀석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소하다 그랬으면 될 텐데 아브라함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자기의 집에서 훈련을 시킨 무사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이 한 사람이 아무리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무력을 함께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가축 떼와 재산과 자기 가족과 노예들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예비해서 계속 군대들을 기른 것입니다. 여기에서 훈련된 자라고 하는데 히브리말로 ‘하멕하닉’이라는 단어인데 아주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아서 아주 능숙한 싸움꾼이 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사들을 길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유사시에 대비해서 힘을 길러서 재난에 자기 자신을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남을 치기 위해 준비한 사람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준비한 사람이었지만 사랑하는 조카 롯이 포로로 끌려가고 그 집의 가속들과 재산까지도 약탈당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아브라함은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나가 그래서 사건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II.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
그렇게 해 놓고 15장에 딱 들어오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두려워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14장과 15장 사이에서 아브라함은 가장 어두운 인생의 한 밤 중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나던 때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문제는 어떻게 해서 318명이 돌격을 해서 그래서 놀랍게 그 전쟁에서 승리하여 롯도 구하고 재산도 다 빼앗고 모든 일들을 완수했는데 문제는 언제 이들이 전선을 정비하여 자신을 공격하러 올지 모르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이미 소돔과 고모라의 다섯 왕은 이 네 왕의 나라에 싸움의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미 판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가문 하나를 겨냥하여 이 네 왕이 힘을 합쳐서 군사들을 정비하여 돌격해 오면 아브라함은 도저히 그 전쟁은 아브라함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인생이 어둡고 두려운 밤을 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A 신앙을 따라 전쟁함
물론 그는 신앙을 따라서 전쟁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 똑바로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인생의 두려운 밤이 왔다고 마음도 캄캄해져서 걸려 넘어진 길에 주저앉아 버린다고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며 신앙까지 어두움 속에 빠져서 방황하게 되면 그러면 커다란 낭패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만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딸린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함께하는 교회, 그리고 나와 관계를 맺은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도탄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한 사람의 신앙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그것과 상관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큰 시련을 만나거나 고통을 당하는 장면들을 심심치 않게 보았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요나 아닙니까. 이 사람이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기 위해서 배표를 살 때 그저 손님 한 사람이 자기 배에 타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 몇 푼 안 되는 뱃삯 받고 그 인간 태웠다가 거덜 날 뻔 하지 않았습니까. 그 한 사람을 그냥 바다에 던지고 나니까 폭풍이 잔잔해졌습니다. 그 요나서를 히브리어성경으로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람이 불어 폭풍이 일어나게 하셨다는 그 대목이 히브리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바람을 발사하셨다. 얼마나 실감이 납니까. 대롱을 대고 그 자리에만 후 하고 불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매일 매일 기도해야 할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뭐냐 하면 복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녀를 위해 빌어야 할 최고의 축복 또한 돈 많이 주십시오가 아니라 좋은 만남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인생의 캄캄하고 두려운 밤을 지날수록 신앙생활을 똑바르게 해야지 어차피 인생의 캄캄한 밤을 지나는데 밤처럼 살자, 그리고 주저앉아 버리면 자기 하나가 잘못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딸린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더군다나 가장들, 오늘 각성하십시오. 깊이 생각하고 아내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태만 하는 남편들이 있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거꾸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아내도 저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항상 정신차려라. 아내가 저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니 가장인 너는 얼마나 더 잘 해야 되겠느냐.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아, 부르시면 신앙은 우리 집사람이 전공입니다. 그녀와 말씀하시옵소서. 그게 앞 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똑같은 쓰레기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 그래도 최소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두려워 떠는 밤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13장에서 크게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만나면서. 14장에서는 상당히 은혜 가운데 있는 이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선 세 가지 중요한 아브라함의 신앙의 증거가 나옵니다.
1. 언약에 충실함
우선 첫째는 언약에 충실했습니다. 무슨 언약이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고 점령을 당할 때, 히브리 사람 하나가 달려와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서 일어난 일을 알렸는데 그 사람이 바로 마므레라는 사람이었고 이 형제들과 아브라함은 동맹관계에 있었습니다. 이 동맹의 위험을 무릅쓰고 충실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언약에 충실한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언약에도 충실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매우 중요한 의무입니다. 여러분, 십계명에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이 나오는 것은 좀 생소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사고 났는데 보셨습니까. 법정에서 이 사람이 이런 일을 행했는데 당신이 본 대로 말해 주시겠습니까, 라고 할 때 거기에 휘말리기 싫어서 적당히 대답하는 것은 십계명 위반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왜 그렇게 중요한 신앙의 항목으로 다루셨겠습니까. 이웃과의 신실한 언약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에서 구현되어야 할 정의의 개념이 그처럼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언약에 충실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험이었습니다. 다섯 나라의 왕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할 각오를 기꺼이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연적인 올곧은 성격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의 면모를 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여러분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신실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거짓말이나 하고 돈 계산 하는 셈이나 흐리고 무엇인가 정확한 것이 없고 불투명하게 살고 그러면 안 됩니다.
2. 조카를 사랑함
둘째는 자기를 그렇게 가슴 아프게 배신한 이 조카를 사랑하였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이 전쟁에 참여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자, 여러분 남의 이야기이니까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버려진 조카가 있는데 그 조카를 자식처럼 아들도 없지 않았습니까. 자식처럼 잘 길러서 어쩌면 자기의 재산까지도 물려줄 생각을 했는데 이 녀석이 배신의 칼을 꽂고 돌아섰을 때 이런 일을 만나면 우리가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결국 때는 목욕탕으로 가는구나. 자기가 그렇게 하더니 결국은 그렇게 돼지, 그렇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포로로 끌려가 고통 받는 조카, 그리고 함께 노략질 당한 그 많은 가속들, 그리고 재물들을 생각하며 조카 롯을 위해서 분연히 일어서는 사랑을 보여 주였습니다.
3. 분깃을 거절함
그 뿐이었습니까.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나누어 갖게 됩니까. 전리품을 당연히 나눠 갖게 됩니다. 전쟁에서 이긴 사람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필요 없다. 그것은 모두 너희들이 가져라 하면서 이 전설적인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10분의 1을 드립니다. 이게 바로 처음 십일조의 말하자면 원조 격입니다.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바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한 오라기 신발 끈 하나도 내가 갖지 않겠다. 다 필요 없다. 오직 이 젊은이들이 먹은 것, 나와 함께한 도망 와서 나에게 이 슬픈 소식을 전해주어 이 전쟁에 참여하게 했던 에스골과 마므레의 몫을 나누어 주어라. 나는 필요 없다. 그리고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아브라함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네가 혹시 나중에라도 그렇게 말할까봐 나는 한 실오라기도 신 발끝 하나도 가지고 가지 않겠다. 그러니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 테니 하면서 전쟁에서 돌아오는 분깃을 거절하였습니다.
전쟁의 의도가 얼마나 순수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따라 전쟁을 했기 때문에 언약에 충실했기 때문에, 조카를 사랑했기 때문에 분깃을 거절했기 때문에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 무섭고 두렵기는 하였지만 이 아브라함은 담대하게 하나님을 바라볼 근거를 가진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야 그 때 은혜 가운데 있었으니까 그 인생의 캄캄하고 두려운 밤을 지날 때 신앙을 따라 살았지만 인생의 어둡고 두려운 밤을 지날 때 무섭고 괴로워서 영혼의 어두운 밤까지 겹쳐 우리가 신앙에서 멀어져 죄 가운데 빠졌다면 이제 우리는 끝난 것일까요 라고 말입니다. 뭘 그것을 물어 보십니까. 매일 매일 여러분의 마음속에 나는 끝났다. 나는 희망이 없다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리고 어디에서 미끄러졌는지 보고 인생의 두려운 밤 보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더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홀로 두려워하는 밤에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홀로 두려워하는 밤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신앙에는 부끄러움이 없이 언약에 충실하고, 조카를 사랑하고, 분깃을 거절함으로써 전쟁을 치렀지만 그러나 역시 이 전쟁은 단순히 신앙으로만 하는 전쟁이 아니라 현실이었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그들이 자기의 집안을 향해 돌격해 오면 이번 싸움에는 도저히 승리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인생의 어둡고 두려운 밤에 홀로 하나님 앞에 그 밤을 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이 우리가 형통하고 만사가 잘 풀릴 때에는 우리가 혼자가 아닌 것 같고 따르는 사람도 많고 날 존경한다는 사람도 많고 사랑한다는 사람도 많고 친구도 많은데 정말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에는 별빛조차 없는 밤바다에 버려진 작은 배 한척처럼 아무도 없이 혼자 노를 져 가야 하는 것 같은 그러한 홀로 있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사면을 돌아보아도 도움을 청할 때도 없고 또 도움을 청해도 이 아브라함의 처지에서는 누구 이웃 한 두 사람이 아브라함의 역성을 들어준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고민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은 신앙이 있었고, 그리고 부끄러움이 없이 이 전쟁을 치렀지만 역시 두려워하는 인생의 밤을 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떠한 두려움도 없다고.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 않습니다. 의심과 믿음은 한 신자 마음에 동시에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확신에 차고 은혜 안에 있는 때에도 우리의 환경이 워낙 위기를 만나게 되면 어느 한 순간에 머리가 하예 지고 아무 계산도 나오지 않는 환란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두려워 떨게 되는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그 큰 능력을 가졌던 사도바울도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의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아야 했던 그러한 때가 하나님 섬기는 가운데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선지자 엘리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저앉아서 이제 나만 남았나이다 하며 하나님 앞에 절망을 토해 내지 않았습니까. 훌륭한 믿음의 사람 모두 그랬습니다. 여러분은 나귀 턱 뼈 하나로 천 명을 춤추며 때려 죽였던 삼손이 전쟁이 끝난 다음, 그 턱 뼈를 내 던지며 주저앉아서 내가 물이 없음으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 다시 쳐들어오면 나는 죽게 되었나이다. 강함과 약함이 한 사람의 마음의 빛과 어두움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렇게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에는 항상 격려를 받아야 합니다.
(찬양)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그렇게 격려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식을 만할 때 찬송을 부르며 사랑하는 형제, 자매의 기도를 받으며 격려를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감동을 받으면서, 그래 눈에는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내가 믿음으로 주님을 믿고 걸어가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적인 삶은 정 반대입니다. 인생의 어두움이 올수록 교회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너무 사정이 어려워서 신앙생활 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사정이 어렵고 환란이 어려워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환란이 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영혼의 어두움을 물리치며 주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기도 속에서 주님께로 더 가까이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 고통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거미줄 같은 신앙이라도 붙들고 십자가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이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 때 거기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적 없습니까. 고민이 너무 많고 괴로워서 기도도 안 되고 죽을 것 같은데, 더 죽겠는 사람이 상담을 해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곧 죽을 사람과 죽을 것 같은 사람하고 둘이 만나서 상담을 주고받는데 이 사람은 자기와는 상대가 안 돼는 더 어려운 사람입니다. 하다가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해, 사실은 그게 하다 보면 자기한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상담을 다 해 줬더니 그래도 그 사람이 그것도 위로가 된다고 눈물을 흘리고 고맙다고 말하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상담하라고 하나님을 그 인생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워지는 경우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것이 바로 시험에 들었을 때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얻는 유익입니다.
(예화) 우리 교회 어느 전도사님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오늘도 나왔을 것입니다. 교사 한 사람이 전도사님 상담 좀 해야 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왜 자기를 시집 안 보내주시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상담 받는 청년은 서른 살이고 상담 받는 전도사님은 서른다섯인데.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래서 시험에 들수록 교회에 악착같이 나와서 그리고 그냥 교회에서 개겨야 합니다. 그냥 그리고 성도들과 만나고 그리고 이마저 떠나면 나는 영혼의 어두운 밤에 들어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그래야 합니다. 정말 마음이 산란하고 불만이 가득하다가 임종을 앞에 둔 성도를 심방을 합니다. 그러면 손을 잡고 기도하면 항상 눈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럽니다. 너가 나처럼 건강하게 살고 내가 너 대신 죽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런데 가만히 그렇게 심방을 하고 돌아오면 죽음이라고 하는 질문,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전망에 놓고 보면 지금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고민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한 유익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얻습니다. 물론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한분만이 나를 건질 수 있습니다라고 믿으며 혼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하고 은헤를 빌고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을 받고 주님께 순종하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은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 홀로 두려운 사람들이 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그 길들을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III. 밤중에 임하신 하나님
그렇게 보면 우리는 아브라함보다는 훨씬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함께 신앙을 나눌 만한 사람이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밤중에 바로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홀로 있는 것 같은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경험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난한 마음, 빈 마음, 하나님 한분만을 앙망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A.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으로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아.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부르는 것 같은 친근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브라함에게 제일 먼저 주신 말씀이 두려워 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깊은 두려움 속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지켜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도대체 두려움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인생의 두려운 방입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밤이 두렵기 때문에 그러므로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리면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신앙을 가진 사람과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모든 사람이 두려운 밤을 지날 때 신앙의 사람은 신앙의 도움을 받아 그 두려운 밤을 불꽃처럼 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을 가진 사람과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화) 회심하고 얼마 안 돼서 기도원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삼각산을 올라가는 기도원인데 세검정에서 걸으면 부지런히 걸어도 1시간 20분을 걸어야 기도원 꼭대기까지 걷습니다. 지금은 다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보름달이 뜬 때는 낫습니다. 그런데 특히 겨울 그믐달에 한번 갔다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한번 쓰려고 랜턴을 살 수는 없고 문방구에 들러서 초등학교가 사용하는 꼬마전구를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어떠랴 그리고 혼자서 올라갔습니다. 올라 갈 때 시간이 9시쯤 되었을 것입니다. 직장 끝나고 저녁 먹고 먼 길을 올라갔으니까 정확하게 3분의 2를 올라갔는데 이게 망가졌습니다. 캄캄한데 그믐밤인데 구름까지 꼈습니다. 춥기는 무지 추운 1월이었습니다. 그 길이 기도원으로 쭉 나 있는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니는 작은 샛길입니다. 그린벨트 올라가서 불법으로 세운 것이었습니다. 그 때도 7번 허물었는데 8번째 세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서 기도하기에는 정말 좋았습니다. 올라가서 기도하면 인천부터 시작해서 육군사관학교까지 다 보였습니다. 하여튼 올라갔는데 아니 길이 보여야 갈 것 아닙니까. 걸어도 쭉 낭떠러지가 보이고 쭉 걸어서 하얀 벽이 나타납니다. 그 건너편에는 무당들 하고 목탁 두들기는 사람들이 밤중에 제사를 지낸다고 쭉 모여 있습니다. 하얀 게 나타나 보면 얼음벽입니다.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내려 올 수도 올라갈 수도 없었습니다. 길이 보여야 내려가든지 올라가든지 하지 않습니까. 큰 일 났습니다. 그래서 결국 세 시간 반 만에 거기까지 올라갔는데 정말 무서워서 혼났습니다. 그런데 처녀들이 거기를 부지런히 올라 다닙니다. 기도원에 있는 처녀들입니다. 하루는 무섭지 않습니까 그랬는데 그 사람이 아주 나를 가련하게 쳐다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뭐가 무섭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해도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이지.
두려워말아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하나님이 긴급히 오셔서 ‘두려워 하지 마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까지 아브라함의 마음은 믿음이 있었으나 요동 쳤습니다. 그리고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요동치던 아브라함의 마음은 파도 없이 잔잔한 바다처럼 평화가 밀려 왔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그러한 이야기가 성경에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습니까. 내가 근거 없이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B. 방패와 상급이신 하나님
밤중에 찾아와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하신 두 번째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의 무엇입니까. 아니.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했습니다. 방패가 무엇입니까. 전쟁할 때 자기를 보호하는 방어용 무기입니다. 칼이 사람을 찌르고 창이 사람을 찌르는 데 있다면 활이 사람을 쏘는데 있다면 방패는 자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무슨 방패를 썼는지 고고학적인 자료는 없더라도 워낙 옛날이니까 그게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역사를 보면 대게 방패가 희랍 사람들이 방패를 잘 썼습니다. 희랍 군대가 사용한 방패는 사각 모양의 방패로 굉장히 컸습니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이 사용한 것은 약간 작으면서 팔뚝에 끼는 동그란 방패였습니다. 희랍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방패는 막 돌격하다가 방패를 딱 세우고 딱 붙으면 하늘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도 절대로 맞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방패가 그 사람을 완벽하게 보호합니다. 성경에 보면 방패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다윗도 뭐라 그러는가 하면 주는 나의 영광, 나의 방패, 내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라고 합니다. 그 방패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보호 받으리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는 너의 방패다. 그러니까 만약에 네가 두려워하는 자들이 너를 공격한다면 방패인 나부터 부숴야 할 것이다. 나 여호와를 당할 자가 없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너를 보호할 것이며 내가 너를 지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짧은 순간 하나님의 이 말씀, 아브라함아 하는 친근한 음성,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두 번째 음성, 나는 너의 방패란다. 그리고 세 번째 음성에서 아브라함은 완전히 모든 문제를 해결 받았던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근거가 있습니다. 너의 상급이니라.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 앞에 상을 주는 것이 상급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계속, 하나님이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너는 나로 말미암아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이 내게 무엇을 주실 것입니까. 지금 방패에 관심이 있습니까. 상급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 만약에 계속 두려웠다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어떻게 방패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당신은 나를 이 네 나라의 임금의 예상되는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나를 지키시겠다는 것입니까. 이 전쟁은 내가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인데 당신에게 대책이 있습니까. 그것을 나에게 들려 주십시오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내가 너를 지킬 것이다. 저들이 나를 깨뜨리지 않고는 나를 파멸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하나 말씀 하시니까 이미 정리가 되었습니다. 너의 상급이니라. 하나님, 무엇을 주시려고 하는데요? 이제는 문제가 보호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와 복을 받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관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충분한 증거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뭐냐 하면 이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훅 하고 사람의 마음에 밀려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경험을 못 하셨습니까.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데 마음이 막 불안하고 요동을 칩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막 밀려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그러한 마음의 작용에서 무엇인가를 예고해 주시는 적도 없지 않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 근거 없이 그러한 두려움이 밀려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고, 그리고 그 두려움 속에서 매몰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 탄 군대와 창, 칼 손에 든 무사들을 데리고 오시면서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아브라함이었습니다. 318명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부상을 입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하고 있을 때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거라. 나는 너의 방패란다. 이 한 마디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평화를 주었고 그 말씀 하나 때문에 깊은 인생의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멘. 그러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장들. 왜,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서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이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꿈꾸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군대, 누구를 통해서 군대를 보내 주시려 하나이까. 누구를 통해 돈을 조달하려 하시나이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에 결코 당신의 말씀을 식언하지 않으십니다. 확고하게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으로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을 인생의 캄캄한 어두운 절망의 흑암을 지나는 아브라함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이렇게 오늘밤 기도하면 하나님이 굉장히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눈에 보이는 증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몫입니다. 어떻게 하시든지 당신은 하실 수 있고,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만, 오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브라함과 같이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나는 저에게 한 말씀만 해 주시옵소서. 아무개야, 두려워하지 말거라. 내가 바로 너의 방패란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기만 하면 나는 나의 일생을 주님께 맡기고 이 절망에 홀로 두려워하는 어두운 밤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아멘. 이러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특히 목회를 하고 난 다음에는 이렇게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는 것 같은 끔찍한 위기를 만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늘 괴로움과 고통, 기쁨과 이런 것들은 있지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열린 교회를 하기 전에 정말 큰 시련을 당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냐 하면 여름이었는데 한 시간 반 내지 세 시간을 매일 기도했는데 온 몸이 땀으로 완전히 젖어서 내복과 바지, 티셔츠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기도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의 마음속에 아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길게도 말씀 안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함께하는 것을 이제부터 보여 주겠노라. 그리고는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고 집에 갔더니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여전히 힘들어하고 하나도 바뀐 것 없습니다. 그 다음 날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런데 변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강물같이 솟아나는 기쁨, 그리고 내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나를 지키실 것이며 나는 하나님 앞에 약속을 어겼어도 하나님 당신은 당신이 내게 주신 말씀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대담한 확신. 그리고는 갑자기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 그 직전 까지는 기도할 때에는 높은 파도가 치는 바다를 쪽배를 타고 고생하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을 보여 주겠다는 응답하신 그 다음 부터는 파도는 하나도 안 변했는데 갑자기 배가 항공모함이 된 것입니다. 정확한 비유입니다. 파도는 계속 칩니다. 그런데 내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고생을 하다가 정확하게 6개월 후에 제가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꿈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인생에 캄캄한 무서운 밤을 지날 때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보호해 주리라, 이렇게만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라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란다. 상 받아 보셨습니까. 상. 별로 받은 적이 없습니까.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상 받아 보십시오. 정말 좋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면 여러분이 아브라함처럼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나고 홀로 두려워하는 이 밤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이 밤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상급을 주시기 위한 밤인 줄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인생의 밤을 믿음으로 지났던 믿음의 많은 선배들이 바로 그 어두운 밤중을 지나면서 하나님 앞에 상급을 아울러 받았습니다. 어디 이 아브라함뿐이겠습니까. 그의 후예 야곱이 그랬고 요셉이 그러하였습니다. 다윗이 그러하였고 믿음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터널 끝에서 만나는 햇빛은 유난히 눈부십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 빛이지만 너무나 긴 시간을 어두움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 여러분을 버리시려고 그 어두운 밤을 지나시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브라함처럼 신앙을 따라 살았어도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 앞에 돌이켜 회개하면 비록 그 어두운 밤이 나의 죄 때문에 이르게 되는 밤이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방패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아브라함은 즉시 주 여호와여 내가 무엇을 주시렵니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싶었던 상급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리라. 그가 너의 상속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번성하여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상급이 되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 누구를 의지해야 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여러분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서 좀 보탬이 되셨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여러분의 수단과 방법 의지하고 신앙까지 팔고 아내까지 팔아서 위기를 모면 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마지막에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지경에 떨어졌던 아브라함과 같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게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 만나게 하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인생의 어두운 밤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이 어두운 밤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에 정말 중요한 것은 실제로 빛이신 그 분을 만나는 것이지, 어두움 속에서 빛, 빛, 빛 소리로 외치는 그것이 우리에게 눈을 떠 아무것도 보지 못하도록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렇게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특히 가장들에게 도전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처럼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인생의 캄캄하고 두려운 밤을 지날 때 무서워서 혼자 어떻게 할 수 없을 그 때에 영혼의 어두운 밤까지 찾아와서 신앙까지 미끄러져서 이제는 타락하고 뒤로 물러갔을 때에 내기 합시다. 여러분은 가망이 없다고 말하겠지만 내기 합시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이 기록이 보여주지 않습니다. 바로 그 앞장에서 아내까지 팔고 목숨을 부지해 보려고 하였던 인간 말종까지 내려갔던 그 사람도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믿음으로 살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을 이끄시는 그 손에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기 합시다. 여러분은 캄캄하고 두려운 인생의 밤을 지날 때 해결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내기 합시다. 한 번도 말고 열 번만 주일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며 눈물로 나를 이 인생의 두려운 밤에서 아브라함처럼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내게도 한번 너는 두려워 말아라. 내가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해 달라고 한번 매달려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주님을 못 만나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만나게 하시려고 허락하신 인생의 파도는 자기가 재물이 되어 그 바다에 던져지기 전 까지는 요나의 풍랑처럼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바람을 발사하셨기 때문입니다.
C. 보증하시는 하나님
아무 희망도 없는 캄캄한 인생의 무서운 밤을 지날 때 아브라함을 살려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자 그의 마음에는 평화가 왔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면서 아브라함을 정말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보증해 주셨습니다. 증표를 주신 것입니다. 나를 위해 재물들을 준비하거라. 그리고 그것들을 각각 갈라놓아라. 그리고 그것들을 마주 보게끔 내려놓고 나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습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언약 체결 의식을 아브라함이 늘 보면서 살았습니다.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큰 왕이 나라를 조그맣게 떼어주면서 동신들에게 그 지역을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둘이 약속을 맺습니다. 이 마을은 네가 다스려라. 네가 사실상 왕이다. 세금 거두고 재판을 하고 그리고 잘 살게 다스려라. 그 대신 너 위에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내 땅을 너에게 잠시 맡기는 것이다. 네가 여기서는 왕처럼 하되 나한테는 절대 복종하여라. 전쟁이 나면 너는 군대를 파송하고 나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자기를 한 고을의 영주를 삼아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리고 둘이서 이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문서를 씁니다. 세 장을 씁니다. 실제 있었던 언약 체결입니다. 세장을 쓰고 약속을 맺은 그 왕과 영주가 소를 찢어서 절반을 쪼개고 그러면 그 소에서 엄청난 피가 쏟아집니다. 그 사이를 핏길을 둘이 걸어갑니다. 그러면 수많은 증인들이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리며 이 언약을 지켜봐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두 사람 중 우리 두 사람이 여기에서 엄숙히 약속을 맺는데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동맹이 아닙니다. 우리 둘 중 하나가 약속을 배반하면 이 소가 두 쪼가리가 되어서 우리 길을 내고 있는 것처럼 당신이 우리를 찢어 주시옵소서라는 약속의 서원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제 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시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 짐승을 마주 놓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제 이 사이에 불길로 임재 하셔서 이 쪼개진 고기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이런 것을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직까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것을 확실 속에 그것을 심어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여태까지 자라왔던 인생의 경험 중에서 가장 진지하고 진실성 있는 언약체결 의식의 그림을 동원해서 보여준 것입니다. 의미가 무슨 뜻입니까.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다. 그리고 너에게 자식을 줄 것이고 이 땅도 너에게 모두 줄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갈데아 우르에서 너를 끌어내었다. 반드시 나는 이 일을 이룬다. 내가 이것을 증명하마. 고기를 찢어 놓고 하나님이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약속을 안 지키면 고기가 쪼개진 것처럼 나 하나님이 쪼개져서 멸망하리라. 말이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수준에서 당신이 이 언약을 쉽게 여기지 아니하고 성취하실 것이라는 것을 더 이상 실감 날 수 없는 방식으로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그림처럼 아로 새겨 주신 것입니다. 그림처럼 아로 새겨 주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무슨 표시입니까.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깊은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밤중에 임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하신 보증이었습니다. 구하십시오. 모세도 이러한 아브라함의 전통을 따라서 내가 주님께 은총을 입을 줄 무엇을 통해서 알겠나이까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더니 내가 선한 형상으로 너의 뒤를 지나갈 텐데 나를 볼 수는 없으나 내가 너를 지나가겠다. 그것이 너의 증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IV. 결론
인생의 두려운 밤은 당신 혼자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지나갑니다. 이 세상이 원래 어두움의 세상이고 죄의 세상이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우리의 인생길이 원래 그렇게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홀로 두려워하는 밤이 왜 없겠습니까만, 하나님 버리고 홀로 두려운 밤에 우리가 얻은 것이 우리에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어두운 밤처럼 타락하고 미끄러져서 영혼의 낭패를 보는 일 말고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절망은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절망의 끝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 버리는 것이 절망의 종착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이 두려운 밤이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만나주실 그 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이 무섭고 두려운 인생의 밤을 지나며 영광스러운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였습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불길처럼 지나가는 하나님을 뵈 오면서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리면서 그는 하나님이 그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보증을 가지고 새로운 신앙의 출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렇게 인생의 밤을 지날 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두려움이 변하여 방패와 상급이 되는 인생의 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4.별빛도 사라진 영혼의 바다에서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1-8)
녹취자: 박은희
I. 본문의 배경
오늘 또 한 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라고 하나님이 말씀 하셨을 때와는 좀 다른 분위기를 여러분이 엿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읽은 이 17장과 16장 사이에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염두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86세 때에 이스마엘을 낳았고, 하나님이 17장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때가 99세였으니 정확히 13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입니다. 13년을 건너뛴 것은, 13년 동안의 일어난 일은 성경에 별 기록할 의미가 없는 13년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13년 동안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영혼의 어두운 밤바다를 지나는 것 같은 시기였을 것입니다. 사람이 시련을 당하거나 궁핍하거나 고난이 오거나 환란이 와도, 하나님만 수시로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시고,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궁핍 속에서 희망을 갖게 만드시고 이렇게 하시면, 이것은 별빛조차 사라진 밤바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순간순간 살아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II.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여러분은 종종 다른 사람은 나를 정말 불쌍하고 가련하게 보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고 씩씩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저 꼴로 어떻게 사나? 저렇게 힘들어서 어떻게 인생을 살까? 하지만, 하나님이 바로 그 시련의 계곡에서 은혜를 주시고, 고난의 어두운 밤에 횃불처럼 나타나셔서 당신의 언약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시련 속에서 마음이 상하지만, 순간순간 주시는 은혜는 그 괴로움을 능가합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때에 우리는 영혼의 밤바다를 지나고 있는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외관상으로 사업이 잘되고 모든 것이 형통한 것 같아도,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부러워해도 깊은 고독 속에 잠이 드는 밤, 분주한 일에 대한 생각으로 눈을 뜨지만,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는 이미 사라져 버린지 오래인 고단한 날들을 지날 때, 우리는 사람들이 부러워할지라도 거기가 바로 별빛조차 사라진 영혼의 어두운 바다입니다. 그 때가 언제 입니까?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입니다.
우리는 이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주신 이후, 창세기의 대부분의 기록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꽉 찹니다. 그리고 이후에 그 자손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언제나 기억되고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만나기를 기뻐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수시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그에게 분에 넘치는 언약을 주시고,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시므로 아브라함과의 교제를 이어가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찾는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찾아와, 그와 함께 교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13년 동안이나 아브라함에게 침묵하셨다는 이야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13년이라는 끔찍할 정도로 긴 침묵의 시간, 이시간이 바로 아브라함에게는 별빛조차 사라진 영혼의 밤바다를 지나는 것 같은 시기였을 것입니다.
A. 불신앙으로 낳은 아들
그 옛날 발달한 관측기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나침반조차도 없던 시대에 별빛 하나를 바라보고 항해를 하던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믐 캄캄한 밤바다에 배를 띄웠고, 그리고 그 배는 이미 먼 길을 떠나 한밤중에 밤바다에 왔습니다.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하늘에 구름이 짙게 끼고 달빛 사라지고 별빛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한편으로는 파도와 싸우고 한편으로는 항로를 찾아야 합니다. 견딜 수 없는 풍랑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어디론가 떠밀려가는 그 작은 배의 불안함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이렇게 가혹하리만치 긴 13년의 세월을 하나님이 침묵하신 영혼의 밤바다를 홀로 항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처럼 좋은 믿음의 동지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을 잘 돌보아 이끌 수 있는 목자도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하나님이 이렇게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아브라함을 홀로 영혼의 밤바다에서 침묵 속에 항해하도록 버려두셨을까요? 불신앙으로 낳은 아들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2장에서, 13장에서, 15장에서, 세 번, 네 번 거듭해서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해줄 것이다” 심지어 15장에서는 “네 상속자는 엘리에셀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그 아들이 상속자가 되겠다.”고 말씀 하시고 그것을 믿질 못할까봐 하나님이 그를 이끌고 밖에 나가서 하늘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그 별을 셀 수 있나 한번 봐라” 그것으로도 아브라함이 온전히 믿지 못할 것 같으니까, 어제 말씀 드린 것처럼 쪼갠 고기사이를 하나님이 지나시면서 말도 되지 않는 하나님이 만약에 약속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쪼개지기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에게 모욕적인 언약을 보이시면서 까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보증하셨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온 것이 17장에서 10년이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많은 세월이 지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확실한 약속의 보증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또 한 번 어린아이같이 여기에서 넘어지게 됩니다.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갈이라고 하는 여종이 있었는데 이 여종은 애굽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니까 그런데 나는 아이를 봐야 되겠다. 그러니까 이 여종에게로 들어가서 애를 낳아라. 그러면 그 여종으로 말미암아 내가 아들을 얻겠다.”
B. 아내의 불신앙 때문에
12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신앙에서 미끄러져서, 남자답지 못한 행동을 하여 아내를 위기에 처하게 하더니, 이번에는 그것을 복수나 하듯이 이 여자가 신앙에서 완전히 미끄러져, 그래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었을 아브라함의 발목을 걸어서 크게 넘어뜨리는 장면이 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앙으로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이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제일 먼저 사라에게 일격을 가하시므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나이 많아 늙은 여주인이 아이가 없습니다. 첩인 자신이 주인의 아기를 가졌고, 불러오는 배를 보면서 아마 부부가 대견해 했을 것이고, 잠자리에서 이 아브라함은 아마 아이를 갖지 않은 그저 종이었을 때보다 특별히 더 잘해주면서 그를 대우했겠죠? 분수를 모르고 이 여종이 교만해져서 이제 이 사래를 멸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이 집안의 주도권을 부인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보복의 칼이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이 칼은 이 사래가 하갈에게 직접 겨눈 칼이 아니라 남편에게 겨눈 칼이었습니다. 내가 이 여종에게 수치를 당하는데, 이것은 내가 당해야할 수치가 아니라 당신이 당해야할 수치다.
우리가 이 여자의 말에 동의 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언제 하갈을 사랑했습니까? 그 여자에게로 들어가서라도 아들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아브라함은 그저 성격이 무단한, 오늘 열린교회에서 가정 평화를 위해서 아내 따라 교회 나오는 남편들 같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무던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머리 굴리는 것은 아내인 사라였고, 그래서 아브라함도 싫지 않은지 이 여자와 동침을 했고 그리고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종이 교만해져서 여주인을 멸시했는데, 왜 이 모욕을 아브라함이 받아야 합니까? 어쨌든 멸시를 당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여자는 종과 싸우는 대신 아브라함을 압박하여 이 여자를 내 쫒게 학대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제 이 여자가 견디다 못해 도망을 치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래도 다시 이 여주인에게로 돌아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갈에게서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았고 그 이름이 이스마엘 이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잠시 이 아내와 남편은 신앙을 떠나서 행복감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첩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그 역시 자신의 소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일은 하나님이 매우 가슴 아파하는 사건이었고,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간절하게 최선을 다해서 세워주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전면적인 의심이요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내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아내의 불신앙을 핑계 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장으로 족장으로 불러 주셨고, 그에게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에 맞먹는 놀라운 영적인 특권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 아브라함은 비록 사래가 믿음이 흔들려 첩을 통해서 아이를 보자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세상의 정신이요, 이 땅 가나안의 풍습이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우리 언약백성의 도리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네 몸에서 상속자를 나오게 하시고, 그 아이로 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이 되어 이 땅을 주기로 약속하셨으니 기다리자 하나님의 능력을 믿자고 아내를 설득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래의 불신앙의 치우친 충고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그리고 그는 이 불순종의 크게 동참하여 일생일대의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죄를 하나님 앞에 짓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내가 신앙으로 바르게 살도록 권면할 때에는, 남편들이 그렇게 완고하다가도 그 남편이 어떻게 좀 일어서서 그래도 신앙으로 좀 살아보려고 그러는데 여자들이 신앙적으로 좀 우위에 있잖습니까? 우선 교회도 더 오래 다녔고, 열심히 다녔고, 교회 밥을 먹었어도 남자보다는 훨씬 더 평일에도 와서도 밥을 먹으니까 훨씬 더 많이 먹었잖습니까? 그리고 목회자하고도 아마 남성들 보다는 우리교회에선 별로 그렇지도 않지만, 어쨌든 목회자에게도 아마 남편보다 아내가 더 잘 알려져서 누구의 아내 그러면 잘 몰라도,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고 다니는 아무개 집사의 남편입니다 이렇게 소개를 하면, ‘아, 그 사람이 그 사람의 남편이었구나!’ 라고 알잖습니까? 그러니까 이게 신앙적인 면에서 대가 세어지는 것입니다. 이 대가 센 것이 항상 성령 충만 하고 말씀 충만해서 지식의 빛이면 지식의 빛,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의 정동이면 마음의 정동, 선한 의지의 크기면 선한 의지의 크기, 개념이면 개념, 이런 게 항상 많으면 좋은데, 무슨 아내가 교회 밥 더 먹었다고 해서 무슨 성인군자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열심히 거의 전도라기보다는 아부수준으로 애원을 해서 남편을 데리고 와서 몇 달 교회 다니다가 남편이 계속 교회를 안 나옵니다. 왜 그러느냐? 부부싸움을 대판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래도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에는, 남편보다 신앙이 좋았기 때문에 그 인간 어떻게 한번 좀 구원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렇게 해서 남편이 교회에 나오고 이제 제법 은혜도 받고 신앙생활 한다고 하니까, 이제는 그동안 남편을 위해 양보하고 참았던 설움이 복받치는 모양이지? 본전생각이 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또 끌어내립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은 한번 뭔가 이루었다고 해서 다 됐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어야지만, 그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틀림없이 아내의 불신앙 때문에 남편에게 고통을 주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깊이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어떤 분은 여러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내가 언제 그 인간보고 예수 믿지 말라고 핍박했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뭐 치매 걸린 것입니다. 남편한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말을 하면 좀 알아들어야지. 맨 처음 자기는 이 교회 와서 은혜 많이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어둠가운데서 자기를 진리의 빛으로 불러주신 것에 대해서 매일 감격하던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성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고, 교회는 나올 생각도 안하고, 평생소원은 가난해도 온 식구 손잡고 교회 나오는 것이라고 그랬잖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뭐 어느 자매는 어느 교회에서 그랬답니다. 새벽기도 때마다 남편 구두를 들고 교회에 오더랍니다. 그래 목사님이 “그게 뭐냐?” 그랬더니 “하나님, 신발먼저 왔습니다. 주인도 오게 해 주시옵소서.” 얼마나 간절하면 그랬겠습니까? 그때 마음의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뭐가 부러웠습니까? 다 필요 없고 주일날이면 부부가 함께 손잡고 자녀들과 함께 교회에 와서 믿음생활하면, 지금보다 훨씬 가난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오래 기도하고 간구했더니 그 기도 들어주셨습니다. 아이들도 왔는데 그렇게 속 썩이더니 고등부 중등부가고 유년부가서 예수님 만나고 완전히 새로운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남편도 그저 탁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말씀이 조금씩 귀에 들어갔는지 집에 와서 그래도 가끔 성경도 읽고 그리고 기도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의 신앙이 미끄러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껏 까지 관성적으로 자신이 집안의 신앙을 이끌어왔던 그 힘을 가지고 남편과 자식에게 신앙의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여성들이 교회에서 좀 깊이 관여해서 일을 많이 하잖습니까? 그러다보면 자기들끼리 뭐 찧고, 뭐 어쩌고저쩌고 하는 일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별로 은혜롭지 않은 일을 보거나 또 경험했다고 칩시다. 그게 뭐 100% 자기는 잘했고 남만 못했겠습니까? 그건 자기 생각이고, 일에는 결국은 상대성이 있잖습니까? 그러면 이 이야기를 남편이 들었을 때에 신앙의 어떤 영향을 끼칠까? 생각을 하고, 영혼을 위하는 마음으로 마음에 덮고, 기도 많이 하면서 남편의 신앙을 붙들어야 되잖습니까? 그것을 가서 그냥 쏟아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보면 여 집사님들이 다투고 나면 남자들이 서로 적수가 됩니다. 그게 뭐하는 일입니까?
오늘 자식이 없어서, 사래가 하갈에게로 들어가 아브라함보고 아이를 낳으라고 했던 것과 꼭 같은 이런 오늘 우리사회에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렇지만 이와 유사한 아내의 불신앙 때문에 넘어지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나는 오늘 신앙을 가진 아내인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항상 맨 처음, 남편이 예수 믿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양보하고 희생하겠다고 생각하던 그 초심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지금도 매 맞으면서 교회 다니는 성도들, 요즘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그러는데 많이 있습니다. 많이 있습니다. 그 여성도가 예수 안 믿었으면 남편에게 맞을 사람이 아닙니다. 어떡하겠습니까? 맞으면서라도 신앙생활 해야죠. 나는 그런 것 용납 안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남편이 때리면 어떻게 하고 보자고 그랬죠? 집어넣고, 그 다음에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절대 집안에서 그런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아내들의 불신앙이 남편의 신앙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오히려 아내가 헌신과 기도와 감사로 남편을 돕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정도로 하면 이제 남편들은 은근히 기가 사시겠죠? 아, 역시 오늘날 나의 신앙이 왜 이 모양인가 했더니, 오늘 목사님이 모든 신비로운 비밀을 다 가르쳐 주셨군요. ‘우리 아내가 못나서 내가 이 모양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이 바로 그 아브라함과 너무 닮았군요. 아니, 들을 이야기가 있고, 안 들을 이야기가 있지. 이게 명백히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세상풍습이라고 하는 것을 알면서 왜 이러한 불신앙의 방법으로 자식을 보려고 했을까요? 아마 아브라함은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 나이에 무슨 그렇게 노욕의 정욕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기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처음 만든 여자 하와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하와는 처음으로 창조된 여자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아담이 이 여자가 처음 이끌려나올 때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결국 잠시 후, 이 여자를 통해 끔찍하게 하나님께 범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은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그것도 모자라서 남편에게 주었을 때 그 역시 이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하와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네가 어찌하여 선악과를 먹고, 그리고 이 남편에게도 이 선악과를 주었느냐? 이것은 전적으로 너의 책임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맨 처음 찾으신 사람은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마치 친근한 아버지가 아들을 걱정하며 찾는 것처럼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과 더불어 언약을 맺은 언약의 머리로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 이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고 할 경우에는, 아내의 충고를 따르거나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결코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남편이 아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남편이라도 올바르게 정신을 차려서 신앙과 일의 이치를 올바르게 놓아야하고, 남편이 신앙이 식어지면, 아내라도 그렇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내의 불신앙 때문에 주어진 충고를 따라서 가장 고통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13년의 세월을 침묵하셨고, 이것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불쾌감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13년의 세월이 흐른 후,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거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 이 말씀의 의미를 해설하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이 13년의 세월을 흐르게 하실 때에, 13년 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아브라함의 심경은 어땠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은 이 13년의 세월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는 그 때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어도 하나님은 그 사람 마음에 당신을 만날 준비가 되었을 바로 그때에 나타난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1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세월이 흘렀고, 그리고 그 아이, 이스마엘도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그 사이에 무슨 평화가 있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도 교만하였던 그 여자가,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브라함 앞에서 튼튼하게 자라고 뛰놀고 있었을 때에, 그가 과연 옛날처럼 사래에게 고분고분 복종했겠습니까? 이러한 문제는 후에 이삭을 낳은 후에까지도 계속되어서 결국은 이스마엘과 하갈이 이집안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불행한 이별이 이루어지고, 그때에 비록 첩에 몸에서 낳은 아들이긴 했지만, 그 자식을 떼어 보내는 아비인 아브라함의 심정이 얼마나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필요하지 않은 인연을 만들어서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칼질한 어리석은 인생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고 있는 불순종은 오늘 한번만 보면 크게 문제가 안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면,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들을 일으켜 우리의 삶에 질서를 흩뜨려 놓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장 좋다고 불신앙을 선택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13년의 세월은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이 덧없이 흘러갔을 것이고, 아브라함은 곤고하기 짝이 없는 13년의 세월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충분히 낮아지고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겼을 그 어느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 끔찍하게 불순종한 아브라함에게 준엄하게 책망하시고, 네가 불순종으로 이스마엘을 낳았으니 내가 이스마엘을 데려가리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권세가 없으셨겠습니까?
III.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
A. 전능하신 하나님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책망 한마디 없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놀랍게 그 앞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시는 호칭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이 아브라함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까지 해설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란다. 말씀하십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얼마나 강한 자책을 주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왜 당연한 이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는 이 사실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은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그것이 결국은 무엇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충분히 그 약속을 이루실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데서 나온 죄악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비굴함이 어디에서 옵니까? 정직해 질 수 있는 용기가 없을 때, 모든 비굴함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의 올 곧은 정절을 더럽히는 것이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핍박을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잃어버리게 될 때에, 비루하게 타협하면서 신앙의 정절을 더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아무리 그 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충분히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굳센 믿음,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우리를 타락으로부터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상급과 그리고 형벌에 대한 신앙과 일치합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은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젊은 사람이었고, 보디발의 아내가 미모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히 그 여자의 요청은 거절하기 힘든 두려운 요청이었을 것입니다. 당장 이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면 아마 자신은 커다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 유혹을 거절하였을 때, 평소 이 여자의 성품으로 볼 때에 자신을 보복하리라고 하는 것도 충분히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가오는 그 모든 고난보다도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겠습니까? 여자의 눈에는 너와 나밖에 없다 판단되었지만, 요셉에게는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약속하신 일들은 반드시 이룰 수 있으신,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이 신앙을 잃어버렸을 때에, 나머지 모든 것도 함께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생을 잔재주로 사는 사람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당장은 이기는 것 같고 잘하는 것 같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우리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자신 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잔재주를 부리며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저 사람을 이기고 이 사람을 꺾어 자신에게 유익해 보이는 길을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그 모든 삶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은 잠시인 것이, 마치 의인의 고난이 잠깐 동안인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는,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옛날 불신자 시절의 살아가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택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 나를 찌른다고 칼을 뽑아들고, 누가 나를 아프게 한다고 창을 집어 들고, 누가 나를 때린다고 나도 물고 뜯으려고 하는 이런 식의 삶을 사는 것은, 짐승이었던 시절의 살던 삶입니다. 이젠 달라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내가 가는 인생의 그 길이 하나님의 마음의 기쁨이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옳은 길이라면, 지금은 내가 비록 그 옳은 길을 걸어가는 그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손해가 나는 길 같아도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부끄럽게 하시지 않을 것이라 하는 신앙, 그게 바로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잃지 말아야 될 자존심 입니다. 자존심 입니다. 자존감 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이런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 많은 재물, 그 많은 은혜, 그 탁월한 계시, 하나님이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는 것 같은 언약의 표징을 보여주는 증표까지 받고도, 그는 하나님이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친히, 반드시 그렇게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자리에서 미끄러졌습니다. 한번 믿은 것이 영원히 자신의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착각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생깁니까? 잔머리 굴린다고 믿음 생기는 것 아닙니다. 살 길을 부지런히 찾는다고 해서 신앙이 북돋우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접하고, 은혜를 받음으로써 믿음은 유지되고, 강화되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나갔으니까 마음의 별 큰 아픔이 없이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제가 10년 동안 교회에 살았잖습니까? 여기서 7년을 살았는데 3층에서. 교회 이사 온지 한 2년 밖에 안 되는데 교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아이들이 예배드릴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저 교육관 빌딩을 알게 하셨잖습니까? 기도해 보니까 이게 틀림없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래가지고 그냥 아주 감격스럽게 행복하게 그렇게 새벽 5시에 마음의 뜻을 굳히고, 그리고 그날 제직회하고 그 다음날 밤에 결국은 3억 원을 주고 계약을 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기적과 같이 역사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노무현 대통령이 있을 때에, 계약을 막 했는데 대출해 주지 말라고 지시가 내려가지고 고통을 받게 됐는데, 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돈 때문에 괴로움을 당해 본적이 없습니다. 눈만 뜨면 그 돈 때문에 고통을 받는데 저녁때 잘 때 창문을 딱 열면, 그 빌딩이 딱 보이는 것입니다. 창틀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데 아무리 믿어도 돈이 안 생깁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는데 결국은 끝전은 치렀는데 그 다음에 막 여기저기서 돈을 얻고 이렇게 해가지고 얼마나 힘이 드는지 10억을 빌렸는데 매달 이자가 천만 원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데, 순간적으로 정말 며칠 동안은 ‘도대체 내가 저것을 왜 산다고 도장을 찍어서 이 고생을 하나?’ 하는 불신앙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교인들이 가끔 그런답니다. 아하, 그때 어려웠지만 우리가 참 그 빌딩 사길 잘했다고, 목사님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지금 그것 없었으면 우리 어떡할 뻔 했냐고, 그런데 그 때는 아무도 그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조용합니다.
그 때 내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아아, 그렇구나! 우리의 믿음은 한번 하나님이 주셨다고 영원히 있는 믿음이 아니라, 이게 바람 앞에 등불과 같구나. 막 이렇게 바람이 불면 지키고 기름 붓고 하듯이 매일 매일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늘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으로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변화를 주시고 할 때에, 이 믿음이 유지되는 것이구나.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예전에 가졌다할지라도, 지금 계속 은혜를 받으면서 그 믿음을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요, 내 주변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이 세상에 있는 돈이나 환경이나 형편이나 사람들의 위로나 이런 것들로는 일으켜 세워지질 않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든 믿음은 들음에서 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깨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새로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가 식을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이럴 때도 있잖습니까? 간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가득해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도와달라고 울면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뜹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마음의 근심과 걱정이 모두 사라지고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러면서 위로와 평화가 확 밀려옵니다. 사람들이 시련 속에서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평안하냐고 물어보면, 왜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 마음과 생각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서 시련과 고통과 괴로움을 만날 때마다, 그때마다 우리가 제일먼저 해야 될 일은, 몸부림치면서 거기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두 개도 말고 한 가지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될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그래서 이 엉킨 가닥들을 풀 수 있도록 하나님 나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지고 그냥 고통을 받는데, 또 들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목사님 지금이라도 빨리 팔아버리셔야 됩니다. 그때 팔았으면 진짜 큰일 났습니다. 지금 거기서 천명이 예배드리는데 어디로 갈 것입니까? 어디로 갈지 한번 사면을 돌아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이 지혜를 제일 먼저 주셔야 됩니다.
(예화) 옛날에 내가 한번 언젠가 설교시간에 예로 든 적이 있는데, 어렸을 때 저는 부모님은 시골에서 사업하시고 할머니하고 같이 서울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할머니가 시키는 일 가운데 제일 싫은 일이 실패 감는 일이었습니다. 실을요, 돈을 비싸게 주고 사면 실패에 감긴 실도 있는데 이상하게 할머니는 꼭 시장가서 잔뜩 엉킨 실을 사 가지고 오십니다. 그것은 좀 싸게 판답니다. 그래서 가져오셔서 내손에다가 걸어주시고 당신은 감으시는 것입니다. 이게 완전히 댄스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할머니, 아유! 이것 정말 싫어. 가위로 끊어버리고 다시 해.” “얘야, 원래 이 실은 공장에서 한 가닥으로 나왔기 때문에 찬찬히 들여다보면 다 풀리게 돼 있단다.” 그리고는 얽힌 것마다 실패를 집어넣었다 꺼냈다 손을 뒤로 돌렸다 앞으로 돌렸다 하면 시간은 가지만 결국은 정말 할머니 말씀이 딱 맞습니다. 그래서 딱 감아서 하나의 실패로 탁 모이는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렸을 때에 하나의 앞으로의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어떤 통찰을 어린마음에 가르쳐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뭐 그런 일이 별로 일어나지도 않지만, 하여튼 혼란스럽고 걷잡을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항상 실패를 감던 때의 그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을 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니까 정확하게 너희가 시험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께 뭐를 구하라? 지혜를 구하라.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는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될 것 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실오라기 풀듯이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풀어 가면, 그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런 시험에 들도록 우리의 마음에 붙은 많은 더러운 찌꺼기들을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이 떨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한번 주어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이 심령이 새로워져서 신앙 안에 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것, 그리고 설교를 듣는 것, 제발 설교 테이프 좀 꼭 들으십시오. 지난 설교 테이프 좀 열심히 들으시고 그리고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 쌉니다.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기계들이 그저 요만한 mp3, 만원, 이만 원, 삼만 원만 주면 살 수 있을 정도로 쌉니다. 사서 주머니에 넣고 항상 듣습니다. 일하실 때도 늘 듣고 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힘을 공급받을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상황이 와도 ‘아, 그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그 깊은 죄악의 골짜기에서도 건져주신 위대하신 하나님이신데 내가 주님을 의뢰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이며 나의 구원이라
주님을 찬송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B. 하나님 앞에 행하라
둘째는 하나님 앞에 행하라 말씀 하셨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라” 이 ‘내 앞에서’란 히브리말이 ‘나의 얼굴 앞에서’ 이렇게 됩니다. ‘나의 얼굴을 대하여’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 이게 지금 뭡니까? 이게. 하나님이 네 씨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만들어주겠다고 하셨는데, 이런 불신앙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낳으려고 하는 이 시도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뒤에서 행하는 것입니까? 뒤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뒤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위기를 만나 지옥과 같은 13년의 영혼의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 하여야 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고 할 때에, 하나님 뒤에서 행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잖습니까? 하나님은 안 계시는 곳이 없는 하나님이시고, 어두움 속에서 행하는 일이라고 주님이 모르실 리가 없으며, 홀로 있는 날 밤에 자신이 혼자 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보시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깊이 각성하고, 어디서든지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뭐냐 ? 하나님의 현존의식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입니다. 여기 바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그 의식입니다. 그런 의식이 범죄를 막아주고, 낙심할 때 그를 일으켜 세워주고, 그리고 고난을 받을 때 큰 위로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면전의식이 있는 삶과 없는 삶은 어떻게 다를까?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에 누구께 기도드립니까? 하나님께 기도드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때는 기도를 했는데, 정말 양심의 손을 얹고 이야기를 해도 허공에 한 것 같은 때 없습니까? 있죠? 그것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하는 이 말은,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지 동네 아저씨한테 올리는 기도겠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고, 그 앞에 우리자신이 우리의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은 지금 나의 기도를 기뻐들으시고, 그리고 나의 기도는 향연처럼 그 분에게로 올라가고 있다고 하는 상호적인 확신이 나의 마음속에도 있을 때 이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인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의 임재 앞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기도입니다. 어디 기도가 그것뿐입니까?
여러분 매주일 마다 울려 퍼지는 설교입니다. 한사람은 푹 자고, 한사람은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 앞에 다 들켰구나, 하나님이 어쩌면 족집게 같이 나를 향하여 저렇게 말씀하실까? 우리집안 누가 나의 형편을 목사님에게 쪽지로 이미 정보를 준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정확하게 느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게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면전에서 드리는 기도, 하나님 면전에서 드리는 예배, 하나님 면전에서 섬기는 섬김, 하나님 면전에서 주 앞에 올리는 헌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면전 아닌 곳에서 올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질적인 차이를 갖는 것입니다.
교회일 하다가 싸움질하는 사람들 있지요? 왜 그래요? 왜 그럴까요? 이미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면전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안서 소송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 서있는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모든 섬김에 있어서 불평과 불만이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이게 결국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섬김이 아니기 때문에 원망과 미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영혼의 경고등입니다. 13년 동안 아브라함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마 제단도 쌓고 예배도 드리지 않았을까요? 나름대로 하나님 섬기고 기도는 왜 안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일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 등 뒤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뭐냐 하면, 그 주님의 임재 앞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기도하다가도 마음으로 축복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새벽기도에 나와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으며 기도하는 성도들, 그것은 그는 울면서 기도하고 마음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임재 앞에서 기도하도록 허락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임재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도 임재 앞에서 듣고, 섬기고 봉사할 때도 바로 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섬기고 봉사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임재 앞에 들어올 수 있도록 팔을 벌려주시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에 ‘아! 내가 주님의 임재 안에 있구나. 내가 예배를 드릴 때에 아! 이것 봐 내가 하나님의 품 안에 있어. 그분이 지금 내가 당신께 올리는 이 예배를 가장 기뻐하시는 구나. 아! 오늘도 나의 섬김이 하나님의 마음에 향기롭게 제물처럼 올라갔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섬기는 이 섬김을 너무 기뻐하셔.’ 언제입니까?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어떻게 좀 자기의 잔재주로 헤쳐 나오려고 하는 성도들이여! 오늘 여러분이 그 시험에 들고 인생의 벼랑 끝까지 내몰리면서 잃어버린 것을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에 내가 잃어버린 것 중에 제일 큰 것은 돈입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 중에 제일 큰 것은 사랑하던 사람입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 중에 제일 큰 것은 나의 지위와 명예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있다가도 없는 것입니다. 정말 잃어버렸으나 계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올리는 기도, 그분의 임재 앞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임재 앞에서 섬기는 섬김, 그분과의 임재 앞에서 경험하는 평화, 눈물이 있었고, 감격이 있었고, 그리고 나 자신을 다주어도 아깝지 않은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네.
어린아이처럼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무엇 때문에 주님은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나님 앞에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이, 주님이 내게 주신 그 구원의 은혜가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께 찬송을 올리던 임재 앞에서 드리는 그 찬양, 아직도 여러분 마음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그 분 앞에서 그분과 평화를 누리며 그분의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 분께 탁월하게 사랑을 받으며 사는 삶, 그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도 하늘나라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 면전에서 사는 기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주님의 등 뒤에서 사는 일에 기쁨을 느끼기 시작할 때 그의 영혼은 황폐해지기 시작해 지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임재 앞에서 살도록 아브라함을 불러주셨던 것처럼 오늘도 여러분을 불러주고 계십니다. 다시금 그 임재 앞에 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C. 완전하라
마지막으로 “완전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로 이 ‘완전’이라고 하는 말은 추호의 잘못이 없고 흠이 없는 수학적인 완전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온전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온전하였습니다. 추호의 사심이 없이 언약을 지키고, 롯을 사랑하고, 추호의 물욕도 없이 전쟁을 치렀을 때, 두려워 떨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은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완전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의 친교가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려고 하는 마음 없이는, 온전한 삶을 살려고 결코 몸부림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 모든 사면을 두루 살피시면서 당신 앞에 온전하기를 힘쓰는 사람을 지금도 찾으십니다. 완전하지 않은 사람 일만 명과 완전한 한사람을 하나님은 바꾸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사람 일만 명 보다는 완전한 한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주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힘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놀라운 약속을 주시고,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가며 약속의 보증까지도 인 쳐주셨는데 그 신앙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말도 되지 않는 아내의 불신앙적인 충고를 따라 돌이킬 수 없는 악을 행하였을 때에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아, 이제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 아니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보았지만 모두 도움이 안 되는 구나. 하나님, 이제 나는 당신과의 관계를 끝냅니다. 이제 나는 내 힘으로 살겠습니다. 결별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갈에게로 들어가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 뭐 가나안 사람들 다 그렇게 사는데, 통용되는 문화인데. 아이, 그 정도쯤이야 현실적으로. 아이, 요즈음에 누가 그러는 사람이 있어. 아이, 그런 것은 너무 극단적인 신앙의 태도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완전함의 최대의 적입니다. 무너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살며시 스며들어오는 그 불완전함 때문에 신앙의 커다란 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완전해지고자 애를 써도 결코 그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모를 그릴 때에 마음속에 찌그러진 세모를 생각하면서 세모를 그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손으로는 똑바른 세모를 그릴 수 없어도, 마음속에서만은 정확한 정삼각형을 생각하면서 손을 움직일 때에 비슷한 그림이 나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한 신앙의 기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살기로 했어야 한다는 명제를 가지고 살 때에, 그 사람만이 회개할 수 있고, 그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고, 그 사람만이 자기에게 이뤄진 어떤 좋은 것들을 보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칼 같은 자신의 삶의 기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어디서나 불꽃같은 눈으로 내 삶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도덕 원칙입니다. 원칙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모든 면에 있어서 신뢰할만한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IV. 결론
오늘 신앙에서 깊이 미끄러져서 고통하고 계신 분들 있죠?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디부터 시작되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신앙에서의 미끄러짐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 온전한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마음의 결심을 접기만 하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야.’ ‘아이, 현실적으로.’ ‘아이, 그럴 수도 있지’ 라고 하는 안이한 생각들이 처음 은혜를 허물고, 도덕의 규칙을 허물면서 여러분을 어느 날 눈을 떠보니까 13년의 캄캄한 침묵 속에서 영혼의 밤바다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늘 회개 합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시길 바랍니다. 다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별빛조차 사라진 영혼의 밤바다를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다시금 침묵 속에 계신 그 하나님이 사실은 그 침묵 속에서 나를 다시 부르고 계시다는 사랑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께로 돌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5.눈부신 새 아침을 맞고픈 그대에게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18)
녹취자 : 정은숙
I. 본문의 배경
누구든지 인생에는 어두운 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밤에는 항상 시험과 위험, 그리고 고난이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인생의 어두운 밤이 영혼의 밤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어제도 말씀을 드렸듯이 시련과 환란이 와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불쌍히 여긴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에 희망이 있고 기쁨이 솟으면 시험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두움 속에서 우리의 영혼의 밤이 함께 다가오고 우리의 심령에 큰 고통이, 우리의 마음에 혼란이 함께 찾아오게 될 때 때 우리는 영혼의 어두운 밤도 환경의 어두운 밤과 함께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밤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아침이 다가오기를 갈망합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에 밤새도록 괴로워하는데 병원은 없고 문을 연 약국도 없을 때 마치 그 새벽을 기다리는 병자처럼 말입니다.
II. 시험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보면 이 일후에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시험하시려고 부르셨다고 되어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일이 복수로 나옵니다. 그 일들 있고 난 연후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신 그 책망을 받고 난 이후에 도대체 무슨 사건들이 있었기에 그 많은 사건들이 일어난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까요? 굵직굵직한 사건들만 짚어서 말하자면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심판이 있었고 거기에 유황비와 불비가 내리면서 그 화려하던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롯의 집안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간신히 환란에서 벗어나는 장면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삭이 출생한 후 하갈과 이스마엘이 결국은 추방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고 바로 앞에는 우물을 놓고 아비멜렉과 담판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태어난 것입니다. 백세에 낳은 아들이었으니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기적이 이 사람, 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에 보면 이 이삭, 그 아들이 지게를 지고 아브라함을 따라갈 정도가 되었으니 꽤 세월이 많이 흐른 것입니다. 적어도 십 년, 좀 더 넉넉히 잡으면 십오 년 이상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럴 때에 아브라함의 생애에 다시없는 커다란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다른 위기는 아브라함이 잘못해서 불러들인 위기였는데 이것은 그런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뭔가를 분부하셔서 아브라함이 순종하려고 하니까 찾아오게 된 위기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백세에 낳은 그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아들 독자 이삭을 당신 앞에 번제의 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커다란 위기였기 때문에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셨다고 하면서 시험하시는 하나님을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A. 하나님의 명령
그러면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독자 이삭을 데리고 그 동네가 아니라 약 삼 일 길 떨어진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일러주신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바로 이 독자 이삭을 바쳤던 그 장소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장소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논증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 사실 여부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만일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이삭이 아브라함의 손에 이끌려 모리아산으로 올라가 제물로 드려지는 이 장면, 이것은 바로 후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셔서 일체의 순종함으로 자기 자신을 드려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질 십자가 사건의 훌륭한 예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아들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할 때는 인신제사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그를 구별하여 하나님만 섬기는 종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해 그렇게 괴로워하던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약속의 서원을 따라 하나님 앞에 그 아들을 바친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의미에서의 바침이 아니라 이 아이를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번제는 불로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이고 산 짐승을 불로 태우지는 않으니 불로 태우기 전에 반드시 그를 피를 흘려 죽게 하는 일이 있고나서 그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에 후일 모세의 율법에서 나오는 번제의 제사법이 아브라함에게 모두 계시되었는지 그것은 우리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모세에게 주어진 번제의 예법은 아브라함이 드리던 그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새롭게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이미 모세에게 주어진 번제의 예법이 세세한 항목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이 알고 있던 예법과 좀 달랐을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일했을지 모릅니다. 만에 하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더 끔찍한 상상을 우리에게 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제사의 예법의 제사를 주실 때 짐승을 그냥 죽이기만 해서 불태우라는 것이 아니라 죽인 다음에는 그 짐승을 해체했어야 했습니다. 제사에 쓸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을 구별해내고 그리고 각을 떠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엄청난 명령이었고 이 명령을 아브라함이 받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후에, 계시가 점진되고 난 후에 밝혀진 바 그 빛을 가지고 투사해서 이 사건을 보면 하나님은 결코 인신제사를 기뻐하는 분이 아니시라고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이 제사는 아마도 실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어느 정도 우리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정도의 계시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이방 종교들 속에는 이렇게 자기의 자식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의적 의식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몰렉에게 드렸던 그 희생도 바로 자식을 죽여서 드리는 희생이었습니다. 고고학적인 발굴들을 보면 그 어린아이를 가정과 나라, 동네의 평안을 위해서 주물로 만든 우상의 뚜껑을 열고 그 속에 아이를 집어넣어서 뚜껑을 닫고 불에 굽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대에 생겨난 풍습이지만 어쨌든 그러한 인신제사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것을 명령한다고 할 때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받으며 하나님은 이런 명령을 실행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만 생각을 하고 정리를 해도 아브라함이 이 명령을 들었을 때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B. 인간을 시험 하시는가?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인간을 시험하시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신정론의 문제를 거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22장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도 않으시고 사람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시험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각자 자기의 욕심에 이끌리기 때문이라고 아주 명료하게 단언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는 것인가, 안 하신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신다는 것인가, 안 하신다는 것인가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우리는 모순되는 이 성경을 조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시험을 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그것을 밝히 알아내기 위해서 평소와는 다른 어떤 조건이나 상태를 가하여 어떤 사물들의 진위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시험을 해서 인간의 반응을 보기 전까지는 그가 당신을 믿는 사람인지, 공경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이것을 하나님이 아실 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보여준 어떤 신앙의 행위를 하나님이 착각하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성립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시험하는 분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상적으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음성으로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아 이제 내가 너를 시험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성경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당신이 직접 주시기도 하고 또 그것을 받는 인간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이해해야지만 하나님의 의지와 지성, 생각이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에 인간의 화법을 가지고 기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성경 속에는 두 개의 관점이 교차하면서 서술되어 갑니다. 하나의 관점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관점이요 또 하나의 관점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에서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하고 말할 때는 하나님이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 고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느낌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서 해석을 첨가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기록을 한 것입니다.
평생 잊히지 않을 명쾌한 비유를 여러분에게 들겠습니다. 해가 어디에서 뜹니까?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그래서 동해바다를 여행하러 갈 때에는 항상 출발할 때는 오후에 출발하고 돌아올 때에는 오전에 돌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전에 출발하면 강릉 갈 때까지 계속 유리창에 비치는 해를 보면서 가야 합니다. 오후에 가면 해가 넘어가고 올 때에는 뒤에다 해를 두고 올라오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해를 묘사할 때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묘사하고 해가 하늘을 달린다고도 시에서 표현합니다. 그 말이 우리에게 늘 통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해가 그 얘기를 들으면 기절을 하겠지요. 자신은 언제나 거기에 있고 지구가 하루에 한 번씩 스스로 돌고 일 년에 한 번씩 태양 주위를 돌 뿐인데 그런데 이 태양 쪽에서 보면 지구는 정신없이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팽이처럼 돌아가는 그것이 스스로 돌면서 태양인 자신을 보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매일 달린다고 하니 우스운 것입니다.
하나는 과학적 사실이고 하나는 현상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합니다. 태양이 중천에 떴을 때 만나자라고 이야기하지 지구가 태양을 향하여 절반을 돌았을 때 만나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고민할 필요가 없이 한 칼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야고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22장에 들어가서 다시 한 번 더 왜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시험일 수 없는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이 아닌지 그것을 한 번 논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아브라함이 백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까, 안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기 전까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심지어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안 믿었죠. 그것은 사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일은 자신에게 자연적으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아들 이삭은 백 프로 누가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서 ‘내가 가져가야겠다.’ 하나님이 다시 찾으시는데 그게 시험이 됐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과 똑같은가 하면 내가 10억쯤 되는 돈을 친한 친구에게 내가 무슨 일이 있어서 당분간 한국에 못 들어오는데 맡아달라고 맡겼습니다. 평소에 10억을 자주 쓰는 사람이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만원 가지고도 달달 떠는 주부가 10억을 받았을 때 얼마나 떨리겠습니까? 또 무슨 돈인지 은행에 넣지 말랍니다. 그래서 5만 원짜리 묶음으로 사과궤짝에 넣어서 지하실에 넣어놓고 그 사람이 맡긴 건데 잘 있나 매일 한 번씩 열어봅니다. 그런데 며칠 있더니 와서 달라고 합니다. 시험이 됩니까?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안 옵니다.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뭐, 이렇게 많은데 한두 개 쓴들 알랴 하면서 하나씩 빼서 시장도 보고 차도 마시고 옷도 사 입고 하나만 빼도 꽤 오래 씁니다. 하나에 오백만원이니까. 하나씩 하나씩 썼는데 워낙 많으니까 상당한 세월이 흘렀는데 거의 그대로 있습니다. 한 켜 썼는데 몇 년 걸렸습니다. 아이가 기어 다닐 때 갔는데 초등학교 들어가도 중학교 들어갈 때도 안 옵니다. 들리는 이야기에는 그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러 가지 즐거운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래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사업도 잘 안 되고 별 볼일 없습니다. 자기만 아는 돈인데 궁리를 합니다. 10억이라고 하면 실감이 안 나니까 100억으로 올립시다. 나에게 100억이 여기 있으니까 노후에 큰 땅을 사서 한 10억 들여서 저택을 짓고 잔디밭을 만들고 거기서 농장도 하고 등등 많은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장하는 사람도 만나고 대지도 어디가 좋은가 알아보고 하는데 주인이 왔습니다. 내일 트럭 가지고 찾으러 오겠다고 합니다. 시험이 됩니까, 안 됩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오래된 외상값을 떼어먹는 것입니다.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이야기가 딱 맞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이 되니까 그것이 시험이 되는 것이지 이것이 내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첫날처럼 분명했다면 그것이 왜 시험이 됩니까? 오히려 아이고, 왜 이제 오냐, 매일 신경 쓰느라 힘들었다. 빨리 가져가라고 하고 그날 저녁에 다리 쭉 뻗고 진짜 이제는 지하실 문 꼭꼭 잠글 필요도 없고 정말 편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깊이 동의되는 걸 보면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은가 알 수 있습니다. 어제 진 외상값 갚을 때 시험 안 들지만 십 년 전 외상값 들통 나서 갚을 때는 왠지 강탈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독자 이삭을 주셨는데 태어난 핏덩이를 그 다음날 아브라함아 내가 좀 실수했다 이애는 이집에 태어날 애가 아니었는데 넌 다음 순서고 내가 회수해가겠다. 별로 그렇게 큰 시험에 들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 아이가 정말 무수한 사연을 안고 태어난 아이가 아닙니까? 그 아이가 자라고 자라서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새끼였겠지요. 그렇게 사랑하는데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뼈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 화법입니다. ‘네 아들’ 그렇게만 하면 아브라함이 충분히 알 텐데 ‘네가 사랑하는 독자’ 하나님이 두 번 상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 보시기에도 아브라함이 이 독자 이삭을 당신 못지않게 사랑하는 것으로 느껴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브라함이 이것을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어떻게 보면 하나님 앞에 도둑적인 심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무엇인가 하면 항상 자신의 것과 남의 것, 그리고 인간의 것과 하나님의 소유를 정확히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깊이이고 양심의 맑기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 내 곁에 있어도 내 것이 아닙니다. 제일 너절한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한테 돈 거래하고 안 갚는 사람들, 물건 거래하고 셈이 흐린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 믿는 사람하고 거래하면 신용도도 뛰어나고 물건도 심하게 깎지 않고 거래를 하면 불신자 하고 거래할 때 보다 남는 것이 좀 더 있을 때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한 이 세상 사람들의 기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물건을 누구든지 경제원칙에 의해서 적은 돈을 주고 좋은 물건을 제 때에 구입하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심하게 후려치거나 심지어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약점을 이용해서 빚에 몰린다던지 돈에 몰린다던지 해가지고 뼈아프게 하면서 후려쳐서 상거래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업하는 사람들이 금방은 돈을 버는 것 같아도 수많은 적들을 만들면서 원한을 사고 자신도 그 부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잘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 생존전략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큰 사업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보면 진정한 사업의 성공은 돈과 사람을 함께 얻어야지 사람은 잃고 돈만 얻는 것은 잠시는 성공한 것 같지만 성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점 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은 영원히 세월이 흘러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법이 그렇게 허락을 하는 것 이외에는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법이 그렇게 허락을 해도 사실은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하나님의 소유일 때에는 그 소유 의식이 불분명할 때 사람은 자꾸 시험에 들게 됩니다. 우리 모두 경험했지만 월급 백만 원 탈 때에는 십일조 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월수 3천이 될 때 3백만 원을 꼬박꼬박 십일조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비율은 똑 같은데 다릅니다. 실제 있었던 일인데 옛날에 조용기목사님 설교에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잘 나오던 교인이 처음 신앙을 갖고 은혜도 받고 그랬는데 안 나오더랍니다. 심방을 가서 왜 안 나옵니까 그랬더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핵심이 아니더랍니다. 그래서 핵심이 뭐냐 그랬더니 목사님,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한 번 예배드리는데 이백오십만원씩 낼 수 있습니까?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처음 교회 올 때 쫄딱 망해서 예수 믿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사업에 복을 주셔서 한 달에 순수익이 1억 원이 오른 것입니다. 그 당시 천만 원 십일조 내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랬답니다. 우리 같이 기도합니다. 똑같은 예화가 허셀포드목사님 설교집에도 나왔습니다. 하나님, 너무 많이 복을 주셔서 십일조가 많아져 힘들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조정해 주시기를……. 갑자기 손을 잡고 알았다고 했답니다. 그게 모두 인간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소유를 넘나들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제가 설교 하면서 얘기 한 적이 있는데 제가 고등학교 때 수양회 가서 죽은 친구를 알고 있는데 6대독자였습니다. 우리 같이 아들이 많은 집은 막 굴려도 안 죽는데 육대독자가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장로고 어머니는 권사였는데 교회에 발을 딱 끊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하나님과 자신의 소유 사이의 이 경계가 얼마나 불분명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를 여러분 자신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버려야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해 갖는 섭섭한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갖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돈을 잊어버렸다 칩니다. 누가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은혜 받을 때 손들고 찬송하지 않았습니까?
(찬양) 이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생명은 그만두고 딴 것이라도 제자리에 놓으십시오. 찬송은 입에 침만 바르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찬송에 합당하게 사는 삶은 자기의 마음을 찢고 피를 쏟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순종하는 삶에는 십자가의 보혈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그 주인이 와서
“돈 줘.” 그럴 때 자꾸 멈칫멈칫하면서 “내가 이십년 동안이나 갖고 있었는데.” “아, 줘.” “내가 매일 열어보고 계속 만지작거렸는데.” “그러니까 달라고.” “들리는 소문에 네가 죽었다고 하던데.” “달라니까, 내가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맡기자마자 찾아가지 왜 이십년 만에 와서 달라는 거야.” “그게 무슨 상관있어 내 놔.”
그 사람한테는 하나도 호소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내 돈을 달라고 하는데 네가 시험에 드냐고 하니까 금방 안 찾아가서, 내가 매일 만졌기 때문에, 우리 집 땅에 묻어놔서, 내가 매일 쳐다보니까 정이 들어서, 그게 말이 됩니까? 자기 것이 아닌데. 그 사람은 진심으로 하는데 듣는 사람의 귀에는 전혀 호소력이 없는 말도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인간이고 신앙이 짧으니까 하나님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안 되지만. 그러나 나는 오늘 그것이 거짓이요, 착각이요, 허위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뭐가 여러분 것이었습니까? 생명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태어났는데. 뭐가 그렇게 섭섭합니까?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섭섭장부를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둘 다 꺼내놓고 대차대조를 한 번 해볼까요? 게임이 되겠습니까? 소유의 경계가 불분명한데서 모든 시험이 생겨납니다. 그게 왜 시험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본다면.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고 그래도 소유에 대한 생각이 뚜렷하지 않으면 계속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소유의 개념이 분명해야합니다. 아니, 죽을 때 돼서 찾아온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것이 아닌데. 그런데 여러분이 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있다, 그렇게 되면 이 시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설교를 해도 나는 그렇게 못 하겠다 그러면 갈 길로 가십시오. 그리고 인생의 벼랑 끝에서 4탄은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3탄에서 못가겠다 그랬는데. 그런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항상 옳고 나는 언제나 틀렸다는 생각입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이 네가 옳구나, 하나님이 옳다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묻고 싶은 얘기가 그것입니다. 자, 어쩔 수가 없다고 칩시다. 하나님을 그렇게 원망하고 섭섭한 마음이 계속 드는 게 그래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불신앙의 눈이 어두우면 그렇게 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도움이 됩니까? 자기의 마음만 계속 썩어 들어가는 것이지 하나님 섭섭하고 하나님 그렇게 안 봤는데, 하나님 당신에게 실망했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앙칼진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적절히 대적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이 들어간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겠습니까, 예배가 올라가겠습니까, 이일 저일 섬긴다는 그 섬김이 하나님께 열납이 되겠습니까? 전부 다 세상 말로 삽질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합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해 보십시오. 사실 오늘 그 예화 준비도 안 한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왜 네가 섭섭하냐고 하니까 내가 계속 만지던 돈이라서, 자기 것이 아닌데 왜 자꾸 만집니까? 뚜껑 딱 닫아서 땅에 묻어야지. 우리 집에 있었기 때문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욕심에 이끌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섭섭하고 이렇게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께 그런 의무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것부터 먼저 청산하고 버려야 합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집에 가면서 딴 생각하지 말고 오늘 이 비유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실감이 안 나면 집안 식구들 중에 남이 맡기기만 하면 잘 가져가는 사람한테 돈을 맡겨보십시오. 그리고 몇 년 후에 가서 실험을 해보십시오. 그때 그 사람이 그런 핑계를 댈 때 마음이 움직이고 호소가 되는지 해보란 말입니다. 절대 호소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데.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섭섭한 마음을 품고 적절하게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심지어는 거기서 더 지나쳐서 내가 갈 때가지 가보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버려야합니다. 그래야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더하고 싶은데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이 아브라함이 이 아이를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갔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질문했을 때 아비의 마음은 자기가 번제의 칼을 맞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번제할 불과 나무는 우리에게 있는데 번제에 바칠 양은 어디 있지요?” 아브라함은 “너란다.” 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이 독자 이삭을 죽이기 위해서 칼을 잡고 아이를 찌르려고 했습니다. 죽이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때에 내가 이렇게 찌르려고 큰 폼을 잡는 순간 사자가 하지마라 하고 손목을 잡을 거라고 알았을까요? 오히려 아브라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 아들을 내가 죽여도 하나님은 다시 살리실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이는 그 마음은 진실했지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생각을 깨고 아예 그 아이를 죽이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여기서 ‘사랑하는’ 이 빠졌습니다.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자, 이제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아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 안 경외하는지를 아들을 죽이려고 하기 전까지는 잘 모르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의 두 가지 보심
1. 단순한 보심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바라보시는 두 가지의 보심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보심은 단순한 보심입니다. 이 보심은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무한하고 영원한 분으로서 어떤 일들의 사건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싹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없어져버리고 바로 그 사물들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한꺼번에 하나님의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과거에 대해서는 생각이 안 나는 것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생각이 나게 해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혜를 주셔서. 그런데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앞에 일어날 일을 알게 해달라고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해도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리 일어날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아주 비유적으로 간접적으로 알려주시지 내일 내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비디오처럼 떠올라서 매트릭스에서처럼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식으로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알려주시면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알 수 없는 성격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십년 이십년 백년 정도 회상을 하는데 미래에 대해서는 1초 앞도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무엇에 의해 가려져 있는가 하면 시간 혹은 공간에 의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가 가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시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지금이야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자동차를 타고 강릉을 가려면 태백산을 넘어야 하는데 대관령을 넘는데 아흔아홉 구비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느 날 내가 자동차를 가지고 몇 구비나 되는지 세어보았습니다. 아흔아홉 구비는 옛날길인 것 같고 그때 난 길로는 일흔일곱 번을 커브를 돌았습니다. 정확하게 일흔일곱 번을 도니까 이렇게 돌면서 가기 때문에 산모퉁이로 돌아가면 뒷 차는 앞차를 놓칩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띄워놓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앞에 가는 차 뒤 따라 오는 차 이미 산을 넘어서 내려가는 차까지 한꺼번에 수십 대를 다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면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단순한 보심입니다.
2. 시간적 보심
또 하나는 시간적 보심인데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만약에 시간을 초월해서 한 번에 보시는 것 밖에 없다면 인간과 교통할 수 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계속 불순종하면서 까불었습니다. 그래서 눈 떠 보면 언제나 벼랑 끝입니다. 그래서 언제 교회와도 항상 자기한테 하는 사경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교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달아서 회개하고 내가 이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하고 자기 인생을 바로잡았습니다. 큰 용기를 발휘해서 불순종하던 것을 순종하고 그리고 아까 얘기한대로 잘못된 거래관계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하고 정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예배가 그렇게 감격적인 것입니다. 자기는 힘들게 그 일을 했는데 하나님은 기도할 때 찬송 부를 때 예배드릴 때 말할 수 없이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 일입니다. 큰 아들이라고 있는 데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니까 아버님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한 성격 하시는 분이었는데 “너 그따위로 하려면 호적 파가지고 나가라 너 같은 놈 안 본다.” 그러면 “잘못했어요.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그래야 되는데 “예, 제가 파가지요.” 못됐지요. 나중에 그런 갈등이 있고 어느 날 교회에 갔는데 너무너무 서러운 것입니다. 별로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정과 사랑도 없었지만 하나뿐인 우리 부모도 결국은 내가 예수님 따라간다고 할 때 같이 가지 못하고 나를 버리시는구나 그러면서도 마음속에 이보다 더 한 일이 생겨도 제가 하나님 앞에 이 복음 사역자가 된다는 소명은 지키겠다고 기도를 하는데 엄청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나면 불안하고 그래야 하는데 놀라운 위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찬송이 나왔습니다.
(찬양)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오늘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그때처럼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그렇게 서럽게 다가온 적이 없습니다. 아, 하나님만이 내 아버지시구나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내가 그렇게 어려움과 박해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 목회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이 결단과 결심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 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모두 한꺼번에 보시는 것 밖에 못하신다면 영원 전부터 다 알고 계시는데 제가 드디어 이 핍박을 이기고 끝까지 ‘이 길을 순종하며 가겠습니다.’ 했을 때 혼자 난리치는 것이지 하나님은 옛날부터 다 알고 계시는데 무엇이 새로울 게 있겠습니까? 당연한 걸 얘기하는 것처럼 웃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막 들어오면서 “성도 여러분, 성도 여러분“ 칼빈 파크 앞에서 어떤 형제가 손을 흔들며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했는데 “오늘 열린교회에서 사경회를 하거든요.” “우리 그래서 모인 거 아냐” “오늘 강사가 김남준목사님입니다.” 돌아서면서 짜증이 날 겁니다. 모르는 것을 이야기해야지 다 알고 있는 것을 성경책 들고 설교하러 내려오는 사람한테 말입니다. 하나님이 한 가지로만 보신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결단과 어떤 행위를 보시면서 하나님이 느끼시는 이것을 우리가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이 두 가지로 함께 보시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충격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새롭게 하나님께 알려진 것같이 우리의 마음에 전달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쁨을 따라 살아갈 때는 행복과 즐거움, 주님의 슬픔과 가슴 아픈 일들을 따라갈 때는 고통과 번민이 생겨나도록 만드심으로서 우리를 도덕적으로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신학적인 이론인데 아주 쉽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제야 알았노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다분히 사실이라기보다는 사실이면서도 교훈적인, 일어날 수 없는 일, 하나님의 예상을 깨뜨리는 일들이 발생했다고 하는 놀라움의 표현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알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고백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움직임을 털끝만한 것도 보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예상외의 행동이나 태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마음 안에 머물지 않고 시간과 공간 속에 표출이 되어서 쏟아져 나올 때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아브라함을 향하여 이제야 네가 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고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유행처럼 돌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옛날에는 그런 것이 없었는데 옛날에야 둘이 사귀다가 결혼하고 싶으면 어느 날 형제가 먼저 말합니다. “내가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나 결혼하고 싶다.” 좀 센스가 있으면 꽃 한 송이 들고 가서 했겠지요. 지금처럼 라이트를 켜고 횃불을 켜고 불꽃놀이를 하고 이벤트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벤트를 바라는 이유가 여자들이 바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야 네가 나에게 청혼하는 줄 알겠노라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라고 할 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청혼하려는 줄 모르겠습니까? 청혼하려고 오라고 하나보다 하고 갔는데 호텔에 가서 바이올린도 연주하고 꽃다발이 들어오고 불꽃놀이 하면서 엄숙하게 드레스입고 마주 앉아서 오늘 우리 헤어지자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 흉내 내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런 것을 원하는데 당연히 하나님도 여러분이 그렇게 고백할 때 하나님의 마음의 큰 기쁨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III. 순종으로 고백하는 신앙
그래서 결국 이제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해서 순종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A. 최선의 것을 요구하심
그것이 네 가지인데 첫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은 산전수전 다 겪고 심지어 아내를 팔 위험에 놓일 정도까지 배도 고파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소 천 마리를 내놔라 아니면 양 오천 마리를 내놔라 아니면 네가 가지고 있는 가축 내일 모두 죽여서 불태워 제물로 드리면 지상 최대의 번제를 받으며 내가 그 제물을 흠향 하겠다 이렇게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에게 시험이 됐겠습니까? 좀 불편하기는 했겠지만 시험까지는 안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도 그것은 최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새벽 설교에 다윗이 범죄하고 제사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 제사를 드릴 제사장이 없었겠습니까? 헌제자가 왕인데. 제물이 없었겠습니까? 나라의 모든 소유가 자기의 것인데. 무엇이 없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다윗이 성전건축을 위해서 바친 금을 계산기로 다 계산해보니 금 한 돈에 5만원이던 시절에 30조 원어치였습니다. 지금은 20만 원쯤 하니까 120조 원어치를 바친 것입니다. 소 한 마리 몇 푼이나 가겠습니까? 무엇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바쳐도 하나님이 그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시면서 구약의 제사장들이나 구약의 사람들이 들으면 충격을 받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제사를 안 기뻐하신다. 왜? 다윗에게 있어서 그것은 최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선의 것이 무엇입니까? 그 마음을 깨뜨려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소유에 대한 경계를 넘나들었던 것을 회개하시고 바로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선의 것은 여러분 위해서 감추고 최선의 것도 아닌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 이렇게 봉사하고 저렇게 섬겼는데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최선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받지도 않으실 제사를 하라고 하셔서 한 사람의 마음을 녹는 것처럼 그렇게 만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아, 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었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아이였구나 고백하는 것입니다.
B. 최종적 사랑을 요구하심
두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최종적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삭을 아주 지정해서 바치라고 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아내 사라를 바치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멀리 보내버렸던 이스마엘을 다시 불러서 그 아이를 번제로 바치라고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최종적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향한 사랑은 위험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을 쇄신시켜야 할 정도로 이 아들에게 깊이 빠져서 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함께 최종적인 사랑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을 다투는 모든 것은 세상이요, 죄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올바로 사용했더라면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고 이삭을 볼 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백세의 몸에서 하나님이 이 자식을 내게 주셨구나 이 아이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아이에게 복을 주셔서 하늘의 별과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셔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했더라면 이 이삭을 옆에 둔 것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증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삭을 주셨지만 이삭을 위한 하나님이 될 정도로까지 마음의 사랑이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허물고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최종적 사랑을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까지 어떻게 내몰려서 그 벼랑 끝에 모래가 부스러지기까지 신발을 내놓고 그 벼랑 끝에 서있게 되었는지를 생각을 해보십시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고난을 받을 때 그게 아프다고 반응을 하는 것은 짐승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만 주신 특권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껏 환란의 밤이 오고 인생이 벼랑 끝으로 가는 것 같은 때에는 항상 이 문제가 돈이면 돈이 모자라서 건강이면 건강이 모자라서 못된 사람들이 있으면 악한 인간들이 내 옆에 많아서 돕는 좋은 사람들이 모자라서 평판이 떨어져서 명예가 훼손되어서 이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해결하도록 자원이 주어져도 이미 그 문제 자체가 자원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면 자원으로 해결하겠지만 문제의 근원은 자원들의 질서를 움직이고 있는 여러분의 심령입니다. 이 심령에 하나님이 최종적인 사랑이 아니라 돈이에요, 사람이에요, 물질이에요, 지위에요, 명예에요, 자신의 편안함이에요, 행복이에요. 이런 것들이 최종적이 사랑이 되고 있는 한은 그때그때 돈 몰릴 때 돈 주시면 그 때 뿐이고 어려움 당했을 때 해결해 주시면 그 때 뿐입니다. 오히려 어려움이 오고 돈이 모자라서 쩔쩔매며 하나님 도와달라고 할 때가 하나님 가장 가까이 있는 때입니다. 그리고 돌아서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변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결국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최종적인 사랑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 식의 땜질로 이제까지 오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질 치면서 오다가 마지막에 이제 모래가 떨어지기까지 벼랑 끝에 딱 서있는 지점이 오늘 서있는 지점입니다. 이제 더 뒤로 물러설 데가 없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죄지은 것을 뉘우치는 것이 회개라구요? 누구나 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회개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걸어왔던 그 궁극적 뿌리는 하나님보다 나를 최종적으로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것이 회개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와 철저히 하나 되어 있지만 깨드려지며 회개하는 사람은 비로소 자기를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따를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한 번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도전해보십시오. 내가 이 인생의 어두운 밤바다에 오기까지 네 말만 듣고 왔다. 내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리기까지 내가 너한테만 순종하면서 왔는데 너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느냐. 그러면 언제나 자아는 대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사람에게는 목표가 있지만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목표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아니면 아무데나 가도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는 그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질문해도 대답이 없는 것을 보면서 결국은 이 인간은 끝까지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구나 하고 자아를 향해서 결별을 선언해야합니다. 그리고 나, 인간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을 나, 인간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좋아하는 그것을 택하겠노라고 최종적인 사랑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고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기도도 허공을 치는 기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C. 순종으로 방황을 종결함
세 번째 이렇게 아브라함은 순종으로 방황을 종결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속에 생각이 많아질 때가 두 번 있는데 은혜 받았을 때와 시험에 들었을 때입니다. 은혜 받으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초롱초롱하고 반짝반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생각부터 시작해서 막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생각인가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은혜의 고귀함에 대한 색깔들이 불꽃놀이처럼 떠오르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는 부정적이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마치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아래서부터 벌레 같은 것들이 스멀스멀 일고여덟 마리가 기어 다니면 잠이 안 오지 않습니까? 생각이 스멀거리면서 막 올라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을 때는 생각이 반짝일 때마다 이 속에서 막 엔돌핀이 솟아납니다. 그렇게 밤새고 난 날은 그 다음날 아침에 졸리긴 하지만 피곤하지는 않습니다. 밤새도록 하나님과 연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입니다. 하나 솟아날 적마다 기분 나쁜 일 억울한 일 그래서 여러분이 누구하고 미운 감정이 생기면 이속에서 언어가 막 솟구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거야 그러면 저 인간이 이렇게 말하겠지 그러면 내가 이렇게 말할 거야 그러면 이렇게 대들겠지 그러면 이렇게 눌러버릴 거야 이렇게 핑계를 대겠지 그럼 이렇게 말할 거야 그 사람은 계속 자는데 혼자 계속 얘기합니다. 스멀거리면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올라올 적마다 뼈 사이에서 쓴물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그렇게 밤을 새고 난 날은 아침에 온 몸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사지가 아픕니다. 그것이 의학적으로 증명이 되는데 시간이 없어서 증명은 안 하겠습니다.
제가 회심한 교회는 우리 집 사람 만나기 전 스물한 살 때 다니던 교회인데 이삼십 명 모이던 작은 교회였습니다. 과자공장 다니던 직원들이 교회에 많이 나왔습니다. 요즘엔 안 그렇겠지만 그 당시 과자공장은 딱 열두 시간 근무입니다. 꼬박 서서해야합니다. 다리가 퉁퉁 붓습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근무하고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금요일은 열시 반부터 찬송 부르기 시작해서 항상 금요 기도가 끝나면 세시 반, 길게 하면 네 시 좀 일찍 끝나면 세시 십오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쭈그려서 자고 한 시간 반 시간 정도 자고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바로 직장으로 내뛰어서 또 열두 시간 서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피곤하다고 합니다. 젊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이 속에서 막 반짝거리니까 의학적으로 몸에 기쁨이 샘솟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스멀거리면서 올라와서 생각을 가득 메우는데 아무런 생산적인 생각이 아니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티끌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고 인간의 마음만 계속 피를 말리는 겁니다. 그리고 수없이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지만 종결이 됩니까? 돈, 돈이면 되겠구나 갖다가 확 집어넣습니다. 종결이 안 됩니다. 수채 구멍에서 물 빠져나가듯이 빠져나가고 다시 문제가 불거집니다. 아, 빽이면 되겠구나 갖다 막습니다. 확 빠져나갑니다. 왜? 어차피 이 세상에 인간이 감당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 앞에 세우시려고 주시는 시련은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는 막아지지 않습니다. 막아지면 하나님의 의도가 좌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당신 앞에 세우시려고 주시는 시련은 쓸어 부으면 쓸어 부을수록 자원만 계속 날리는 것입니다. 멈추십시오. 그런 것으로는 인생의 방황이 종결이 안 됩니다. 방황의 종결자는 순종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이유들은 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같습니다. 순종함으로써 방황은 종결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이 은혜를 받고 여러분 자신을 두고 한 집회와 같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정말 많은 것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 많은 깨달음과 은혜, 감동이 벼랑 끝에 선 인생의 종결자가 아니라 순종이 종결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순종합니다, 이 순종이 종결자가 됩니다. 깊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시간이 없어서 더 펼치지 못하는 게 좀 섭섭한데 순종만이 방황의 종결자입니다. 어떤 때는 순종을 해도 지금까지 잘못되어 온 게 너무 많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지금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거기에서 시작해서 문제를 풀어가기 시작하십니다. 전쟁을 할 때 화력과 비행기 폭격 군인 군함 모든 것을 동원해서 민둥산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어느 전략적 요충지를 향해 공격하고 그 자리를 수많은 군인들을 희생시키면서도 차지하려고 합니다. 거기가 결정적인 위치이고 거기를 차지하면 그 나머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말씀으로 받은 많은 은혜로 그런 삶의 한 지점을 공격해서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방황을 종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D. 미리 예비하시는 하나님
마지막 네 번째, 미리 예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 이제 끝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이 사건이후 얼마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었겠습니까? 제물이 있어야지요. 불도 칼도 나무도 다 준비되었는데 제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수양 한 마리가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난 태어나고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수양이 뿔이 얼마나 크길래 그게 걸렸을까도 이상하고 수풀도 못 지나가는 수양을 어디다 씁니까? 늘 다니던 길일 텐데.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 속에서 준비된 제물이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순종으로 방황을 종결하면 인간이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방법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IV.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심
그런데 못된 인간들의 심보가 그걸 보여주시면 순종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순종이겠습니까? 마치 경품타려고 하는 것같이. 그것으로서는 하나님이 믿음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순종으로 방황을 종결하고 나면 그리고 그 다음에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면 우리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하나님이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도 얘기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신약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이 능히 죽음에서 저를 다시 살리시리라는 부활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생각대로 안하셨습니다. 아예 죽이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막으시고 제물까지 준비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 각본 속에 전혀 없었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법입니다. 확실한 것은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나 미리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V.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우리의 신앙의 닻을 주님께 던져보는 것입니다. 노를 저어서 저 깊은 데로 가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순종으로 방황을 종결하려고 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 이 신앙을 갖고 주님께 순종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Ⅲ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