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피하는 자를 위한 은혜
(201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그리하여도 내 하나님이시라(시31:13-14) 2012.10.15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
2. 사랑으로 구원하소서(시31:15-16) 2012.10.16 가을말씀사경회(새벽) 6
3.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한 은혜(시31:17-19) 2012.10.17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3
4. 당신의 장막에 감추시는 하나님(시31:20-21) 2012.10.18 가을말씀사경회(새벽) 20
5. 여호와를 사랑하라(시31:22-24) 2012.10.19 가을말씀사경회(새벽) 26
1.그리하여도 내 하나님이시라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한 은혜 1 (2012.10.15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시31:13-14)
녹취자 : 김세나
이 시편 31편은 전형적인 탄원시에 해당됩니다. 표제에 보면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언제 이 다윗이 이 시를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31편은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한 시편 중 하나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 시편 31편을 읽으면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31편만이 아니라 그가 히브리서나 로마서나 성경의 많은 책들을 공부하면서도 이 시편과 함께 칭의의 교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1절을 읽으면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부끄럽게 마옵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이 공의라는 것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당신은 복음 속에 칼을 두셨나이까 하고 절망했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 여기에 나오는 의가 인간의 의나 혹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기초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 의가 내가 성취한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따라 우리에게 주신 의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종교개혁의 대의를 발견한 유서 깊은 장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시편 31편은 전원적인 탄원시로 되어 있고, 꽤 긴 내용들이 12절로 나오는데 간략하게 이야기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원수들에게 에워 쌓여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친 그물에서 빼내 주시고 자기를 하나님께 피할 수 있도록 보호해 달라고 호소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게 원수들이 나빠서 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고백하는가 하면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내며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 지며 나의 뼈가 쇠하여 지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원수들이 이 시인을 부당하게 대우하고 악을 행해서 큰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께로 피하려고 하다 보니까 사실 당하게 된 이 모든 고통이 이면에 자신의 죄악도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까 자기가 당하고 난 고난이 단순히 저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만 생각되지 않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할 때 언제나 유의하여야 할 바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할 때 그것이 단순히 사람이 악해서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면 사실 복수할 마음 밖에는 그 사람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도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죄를 보게 하시고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고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이 정결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들이 연단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시인이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에 두려움으로 감쌌습니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무리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비방하고 사방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절로 미루어 보면 이것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 핍박을 당할 때 쓴 시라기 보다는 아마도 왕이 된 후에 다윗의 일가에서 일어났던 고통스러운 압살롬의 반역이나 세바의 반역이나 혹은 또 다른 어떠한 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던 어느 시기에 자기의 죄를 돌아보면서 쓴 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많은 무리들이 다윗을 비방하였고, 그러면서 다윗은 “사방의 두려움이 감쌌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깨달은 이 시인이 수많은 무리들의 비방과 그리고 공격을 당하면서 느꼈던 하나님과의 단절감, 내지는 두려움을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마음을 불순종과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오도록 만들어 주실 때에는 항상 각성이라고 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각성은 바로 다름이 아닌 율법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양심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가 지은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크고 엄중한 것인지 깨닫게 하시는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각성은 반드시 죄에 대한 확신을 불러오고 그 죄에 대해 확신하고 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러저러한 죄 때문에 이러저러한 형벌을 받을 만하다는 정죄의식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께 결코 돌아가게 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는 우리의 양심의 작용을 사용해서 우리가 이러저러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이러저러한 정죄를 받아야 한다고 확신시켜주지만, 거기까지만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돌아갈 것인가에 대해 율법이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더욱이 이 사람들이 다윗을 공격할 때에는 그냥 욕하고 비방한 정도가 아니라 그들은 아주 정교하게 의논을 하고 이 시인을 죽여 버리기로 모의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고 이 시인을 공격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당한 공의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순결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렇게 공격해서 자신들이 얻으려고 하는 이익이나 혹은 육신의 영달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비록 시인은 욕하고, 또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죄가 있는 사람이지만 이 시인을 공격하는 그 의도 자체가 사실 사악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이 시인이 깊이 깨달으면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리고 사면을 두루 돌아볼 때 이렇게 하나님이 그를 연단하시려 할 때 누구도 자신을 돕고 위로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럴 때 이 시인은 하나님이 이 사람을 그 즉시 반겨주시고 기쁘게 여기셨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도 가책이 있고 하나님께 나아가기에 부자연스러운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그때 반드시 필요한 작용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율법의 정죄를 이기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주께 의지하며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모든 것이 그럴 수 있는 상황에서 믿는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믿고 바랄 수 없는 중에서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여호와여 나는 그러하여도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한 이 말의 의미는 바로 상황은 원수들에게 공격을 받고 양심은 죄로 인하여 떨고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 줄 것이라는 증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 이 시인의 마음 속에 믿음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언약백성으로 부르시고, 그 백성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시고 자비로 베푸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으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굳게 붙드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상황은 시인에게 수많은 원수들이 에워싸 일어나게 하였고, 또 양심에도 깊은 정죄를 느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어떤 길도 발견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렇게 환경적인 깊음 속에서 고통을 받고 내면의 깊은 세계 속에서도 고통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어떻게 자신이 회복되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들이 비록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없고, 내 안에 있는 양심도 하나님께 돌아가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할지 가르쳐 주지 못하고 율법도 우리를 정죄하지만, 어떻게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지 알려주지 못합니다. 우리를 애워싸고 있는 수많은 악한 사람들의 비방은 더더욱 우리를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지 못합니다. 이때, 환경이나 자신의 마음의 상태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의지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한 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잘못했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진정으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고 이 모든 시련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지켜주실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언약백성으로서의 하나님을 향한 의존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주께 의존하고 말하기를,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시련과 어려움이 없이 평탄한 인생을 살고자 하지, 시련의 폭풍 속에서 고통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탁월한 지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에서 물러간 줄 몰랐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련과 어려움들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악한지 발견하게 되고, 혹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정결하게 되어야 할 존재인지 하나님 앞에서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때에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일어날 때 그러한 환경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그러한 환경 속에 자기를 두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마음이 아닌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시련 속에 더욱 굳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원망은 결국 절망하는 마음에서 나오게 되고 그 절망의 끝은 하나님을 욕하고 스스로 파멸해 버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는 다른 눈으로 자신의 인생과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자기에게 일어나는 이 모든 어려운 일들이 무엇 때문인지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고 해석함으로써 거기에서 평탄할 때에는 도저히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의지를 시련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우선 첫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그러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겠습니까. 세계에 하나님이 충만하시고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는 자비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죄짓고 악을 행할 때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차이일 뿐이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았든 못 살았든 혹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았든 반항하며 살았든 그 모든 삶의 짐을 짊어지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임을 깊이 인식하여야 합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하직하면 더 이상 인연이 계속되지 않겠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인생 끝난 저 너머에서 더욱 확실하게 만나는 하나님시기 때문에 영원히 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시라고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십니라고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의’라는 소유격은 하나님이 물건처럼 소유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이 티끌과 같은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자기의 인생 속에 개입하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그 섭리는 언제나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들은 시편 속에 흩어져 있는 시인들의 수많은 고백들 중 위기와 시련을 만났을 때 시인들이 즐겨 부르던 고백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 나를 지키셨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내 하나님이시나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이 고백은 자신의 인생의 주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고백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련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게 붙드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설령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지금 당하게 되는 커다란 고통이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회초리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하나님이 자기를 때리실 지라도 자기를 버리시지 않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내 하나님 이라는 고백이 나왔던 것입니다.
셋째로 내 하나님 이라는 고백은 자신의 인생의 주권을 주님이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을 당하고 이렇게 핍박을 당하는 고통의 날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결국 이 고통과 시련조차도 주님의 그늘 아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주권 속에서 자기를 지키고 건지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이 시인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는 내 하나님 이라는 고백은 이 하나님이 자신의 영원한 기업이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시인이 비록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악을 행해서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이 시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누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면 어디에서도 이 시인이 유업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이 하나님은 자신의 유업이셨습니다. 유업이신 이 하나님이 잠시 자기를 징계하시면 그는 당하면서라도 하나님을 잃지 말아야 했고 책망을 듣고 혹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도 그는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시련 속에서 붙들고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몸부림쳤던 경건한 시인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인생이 어두운 밤바다를 지나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날에 여러분들은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 속에서 증거를 찾으려 하지 말고 믿음으로 곧바로 호소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어떠한 경우에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이 몸을 입고 오셨을 때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들이 이러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 나는 희망이 사라졌다고 말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면 그때야 말라고 여러분 자신을 포기하고 우리 예수님을 붙들어야 할 때이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모든 인간적인 계획들을 버리고 오히려 주님을 굳게 붙들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하나님 붙들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새벽에 기도할 때에도 “이러한 인생의 커다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내 하나님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고쳐서라도 나를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해주시고 나를 때리고 징계하셔서라도 나를 깨끗케 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살게 나를 내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사랑으로 구원하소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한 은혜 2 (2012.10.16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31:15-16)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당할 때에도 이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이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구원을 위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크게 네 가지 내용이 나오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의뢰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당하면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섭리하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오늘 시인이 자신의 앞날이 주님의 손에 있다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움직이시는 주관하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자신의 미래의 인생을 주님의 손에 맡겨도 괜찮다고 하는 신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권 사상은 그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하고 좋은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온전히 자기를 의뢰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키실 것을 믿고, 그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며 사는데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앞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불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반역은 대부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자기의 능력을 믿으며 살려고 하는 대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한 심령과 깨뜨려진 마음을 좋아하시는 것은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고백하고 삶으로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죽은 자와 다름없는 자신을 의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기에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앙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모든 만물 가운데서 보다도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고 그 분께 의뢰하는 신자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온 땅과 만물 위에 드높은 임금의 보좌보다도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한 신자의 마음이 우리 주님에게는 가장 높은 보좌입니다. 시인이 고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러한 마음을 갖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였기 때문에 거기에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한계를 발견하고 주님의 도움을 바랬기 때문에 이 시인은 자신의 앞날을 주님의 손에 맡기며 어린아이처럼 의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열렬 했을 때 그 때 우리의 마음은 바로 이러한 의존의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의존의 마음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하였고 그 의존의 마음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그 의존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대신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맡기신 사명도 떠나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도 떠날 수 없습니다. 왜나 하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에 우리 주님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유능함, 그리고 모든 사람들 뒤에 뛰어난 지혜, 그리고 남들을 능히 가르칠 수 있는 지식, 훌륭한 자연적인 성품들, 모두 탁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합친 것 보다 당신께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맡기고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마음을 통해 더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믿음을 인정해 주셔도 여러분은 자신의 믿음을 믿는 대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신실하게 살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을 주신 것 때문에 주님을 덜 의지하는 것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님이 더 많은 것을 주시고 여러분을 높이시면 높일수록 이 모든 것들이 귀하게 느껴지지 않고 이렇게 내 인생에 깊이 개입하셔서 아침마다 늘 새로운 사랑으로, 성실하심으로 나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깊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 건져 주소서. 복수로 나오는 것을 보아서 시인을 에워싸고 있는 원수들과 박해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왕이 되기 전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도 그는 많은 원수와 미워하던 자들의 추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쳤고, 왕이 된 후에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황망히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한 때는 모두 자신의 품에 있는 백성들이었고, 자기 자식 같은 백성들이었는데, 일단 하나님이 악인에게 기회를 주시고 시인을 연단하고자 그 백성들의 다수의 마음이 이 시인으로부터 돌아섰습니다. 물론 다윗이 잠시 신앙의 길에서 미끄러져 범죄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시인의 착한 시인은 잠시 망가졌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윗이 행하는 일이 심히 악하게 보일 정도로 그는 범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백성들을 버리거나 미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높은 귀족이나 혹은 돈 많은 재벌들과 함께 손잡고 나라를 일으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하고 원한에 맺히고 빚이 많고 억눌리고 그리고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가 나라를 세우고자 주님께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그를 알아보고 진정으로 따른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다윗이 사울과는 달리 얼마나 목자의 심정으로 그 불쌍한 백성들을 보듬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범죄했지만 그 마음이 어디로 갔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자 이 모든 징계는 예언대로 실현이 되었고 그리고 자기의 백성들은 존귀한 마음 대신 저주를 퍼붓고 흙을 뿌리며 욕설을 공공연하게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많은 원수들에게 시달리면서 그는 원수들을 죽이고 이기기 위하여 칼을 대는 대신 칼을 가는 대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답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원수들로부터 핍박하는 자들로부터 자기를 구출해 달라고 우리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기도가 제일 좋아하는 마음의 풍취입니다. 교만한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릴 수 없지만 겸손한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릴 수 있습니다. 인생이 위기 속에 있을 때 시련을 만나거나 여러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태를 당하였을 때 여러분은 제일 먼저 무엇을 하십니까. 인간적인 계획을 세우고,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출해 보기 위해서 애쓰다가 더 큰 불순종과 죄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자신도 구출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리하여 급기야는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비난을 퍼붓는 불신앙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단순한 마음입니다. 어떠한 일로 말미암아 이 어려움이 당하였든지 주님이 나를 도와주시면 능히 나를 거기서 건져내실 것이라 믿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도움을 호소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올무에 빠지려니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말입니다.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위기를 주시고 또 우리를 사랑하던 사람들로 발뒤꿈치를 들어 우리를 배반하게 하시는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기 위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일생 중 사랑하던 사람들이 배신을 하거나 혹은 함께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자기를 비난하고 등을 돌리는 것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건강이나 약간의 재물을 잃어버리는 것이 낫지, 이렇게 한 마음으로 사랑하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거나 혹은 헌신하던 마음이 변하여 배신하는 마음이 될 때 그 고통은 우리의 마음의 살을 에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아파할 것도 아시고, 어느 지점에서 가장 못 견뎌 하시는 것도 아십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을 아프게 하실 때에는 그 아픔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신 것입니다.
시인은 어쩌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고 모든 것이 형통한 가운데 부족한 것이 없는 세월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시련을 당하게 되었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원수들이 되어 자기를 에워쌌습니다. 처음에는 이 원수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마음속에 복수의 칼날을 세웠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이 고난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죄가 명백하였고 원수들이 비난하던 죄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지었던 죄가 자기를 여기에 데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시인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도움이시며 자기를 이 깊은 시련에서 건져내실 분이 우리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찬양) 폭풍 후 흑암 속 해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가는 인생길이 힘들고 시련이 넘칠 때 사람을 의지하고 인간에게 희망을 걸면 사람이 너무 초라해집니다. 그리고 또 다른 올무에 걸리기 마련입니다. 이 때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그 분이 나를 붙들어 주시고 건져주시면 누구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어 주십시오. 시편에서 하나님의 얼굴이 인간에게 향하실 때에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악인을 향하여 얼굴을 비추실 때에는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시기 위함이고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기의 언약백성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실 때에는 은총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구약에서도 이렇게 당신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시는 것은 최고의 영적인 축복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남을 위해 빌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었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나갈 때에 제사장이 그들을 향해 축복하기를 “여호와는 그 얼굴빛을 네게 비추사”라고 축복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시고 떡을 주시고 우리에게 권력을 주시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축복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축복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께만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신비한 복입니다. 어떤 때에는 시련과 고난이 죽을 것처럼 심하던 때에도 능히 믿음으로 극복을 했는데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모든 복을 주셔서 넉넉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아주 작은 유혹에 넘어져 하나님을 배반하기도 합니다.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오는 것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의 얼굴빛을 비추셔서 은혜를 주실 때에는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시련과 난관을 은혜의 힘으로 이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시지 않으실 때에는 아주 작은 시련도 이기지 못하고 아주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고 계실 때에만 하나님의 사람이지 주님이 손을 놓으시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하셨고, 죄가 들어온 후에는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함은 이런저런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깨뜨려진 마음, 물같이 녹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최고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에서 믿음이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셔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영적인 은혜, 우리의 영혼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헐몬산에 내린 눈이 녹아 흘러내려 그 산 아래로 물을 두루 적셔 맑은 물이 흘러나오게 합니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인데도 헐몬산 아래로 내려가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람의 몇 길씩 되는 파란 물이 한없이 내려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우리의 영혼 위에 내리시는 영적인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영혼을 두루 적실 때 우리의 모든 일반적인 삶 속에서도 그 은혜의 힘을 입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조차도 사랑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조차도 용서하고 그리고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그들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그 모든 힘들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생각과 뜻이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체의 오래 참음과 자비하심으로 품어서 그들도 부족하지만 함께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인격적인 포용력이 어디에서 옵니까. 자신에게는 칼날과 같이 엄격해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용서하고 기다려주고 참아줄 수 있는 관용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진리는 칼 같아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예리해도 아무에게나 그 칼을 들이대지 않고 주님이 자기를 향해 오래 참으신 것처럼 그들이 진리가운데 돌아오도록 눈물로 기도하며 기다려주는 아버지와 같은 너그러운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의 인격이나 성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셔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로운 성품들을 우리에게 비춰주실 그 때에 우리는 주님께로 받은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일체의 오래 참음과 관용으로 용서하고 그들의 허물을 덮으며 기다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났던 많은 사람들은 우리와 이미 관계가 깨져서 다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많은 사람들조차 만약에 그 때 우리가 주님의 은혜에 넘치는 삶을 살았더라면 용서하고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얼굴빛이 필요합니다. 진노하고 심판하기 위한 얼굴빛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는 그러한 얼굴빛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를 체험하게 됩니다. 인생의 곤고한 날에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사람들은 차갑게 외면하는 고통의 때에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거기 계셔서 간구하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상황은 바뀐 것이 없어도 일단 주님이 우리의 영혼에 은혜를 주시면 놀랍게 나의 인생의 난관을 헤쳐 나갈 힘이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주님께 매달리지 않았다면 이런 저런 세상의 자원이 없기 때문에 인생의 길을 헤쳐갈 수 없었다고 믿었지만, 하나님께 마음을 모두 쏟아 놓은 후에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만이 나를 도우실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문제는 은혜의 부족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고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우리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이 매일 비춰주시는 그 은혜의 힘 때문에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은혜를 간절히 구하여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주의 사랑을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예전 성경에 인자라고 나오던 말들을 사랑으로 바꾸었고 이 히브리 단어는 헤세드라는 단어입니다. 이 헤세드는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의 장점이나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을 헤세드, 혹은 인자 혹은 이 사랑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이 조속으로 변하는 분이 아니시니,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불변하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 보이는 것들 통해서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철이 들기 전 까지는 하나님이 이렇게 다루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철이 들고 난 후에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든지 그 뒤에 있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던 격동기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 가장 슬픈 예언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외쳐야했고 자기의 눈으로 그 예언이 실현되어야 하는 것을 목격하여야 했던 예언자였습니다. 예언자가 자신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볼 때에는 아마 기뻐하고 감격하였겠지만, 예레미야의 경우는 예언할 때는 눈물이 났고 예언이 성취되었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했고 예루살렘 성은 이민족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습니다. 그 아름답던 성전은 겁탈당한 부녀자처럼 다 망가져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전쟁 속에서 굶주림으로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분주히 돌아다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면서 선지자는 슬픈 노래를 지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초토화된 나라를 보면서 이 시인도 찢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하였지만 그러나 어느 한순간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렇게 때리시고 예루살렘을 치시는 것은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을 깨고 영적인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큰 사랑의 표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통한 가슴으로 슬퍼하던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우리는 변덕스럽고 하나님을 배반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주신 그 약속을 영원히 변하지 않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우리를 평탄한 길로도 인도하시고, 때로는 우리를 때리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우리가 죄가 없어도 폭풍과 시련이 가득한 밤바다를 지나게도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고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한번 정하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이루시기에 적합한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고난의 길을 가게도 하시고 때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은 이 모든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헤세드를 구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실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은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한번 언약을 맺은 자기의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회개할 때마다 우리가 동일하게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회개할 때에는 하나님은 나를 버렸다, 혹은 나는 하나님을 너무 멀리 떠나서 여기까지 왔다라고 생각했지만 회개할 때마다 사실은 하나님이 언제나 거기에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멀리 떠나거나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고 악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무한한 담장을 쌓고 거리를 만든 것이니, 한발 짝도 안 되는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 이러한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의뢰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주님의 얼굴빛을 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소망을 두고 주님께 돌아온다면 하나님은 바로 거기에 계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주께 피하는 자를 위한 은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한 은혜 3 (2012.10.17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31:17-19)
이어서 오늘 읽은 부분에서 시인은 악인을 위한 탄원과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고백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 하였지만 악인들이 자신에게 가하는 그 많은 비방과 커다란 공격은 이 시인 홀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주님께 도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과 18절에서 시인은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인간관이 문제인데, 시편에는 인간에 대한 관점이 나오는데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것이 이제 악인과 의인입니다. 여기에서 악인과 의인의 대조는 윤리적인 기준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포함하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윤리적인 기준에 의해서 도덕적인 사람은 의인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악인으로 불린 다기 보다는 보다 더 본질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면서 나눕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의인 혹은 악인으로도 나오고 혹은 성도와 악인으로 나오고 다양한 표현으로 나오지만, 그 본질적인 차이를 가르는 중요한 것은 의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이고, 악인은 그 관계가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은 단지 그들의 외형적인 고백이나 혹은 겉모습으로 볼 때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 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몇 가지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또 하나는 선택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느냐. 왜냐하면 선택받고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원인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말을 하시드라고 시편에서 말하는데 이것이 헤세드의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피동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은총을 입혀 주신 사람, 그래서 그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이고 성도인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삶을 규율하는 율법 이상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랑의 성향입니다. 이러한 비밀스러운 세계를 갖은 사람이 성도, 혹은 의인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회가 커다란 분열이 있고 또 커다란 나뉨이 있을 때마다 가장 이슈가 되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규정에 따라서 얼마든지 상황은 바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WCC 대회를 한다고 해서 한쪽에서는 그것을 비판하는 소리도 있고, 한쪽에서는 옹호하는 소리도 있는데 모든 것들이 결국 마지막에 논쟁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사람을 신자로 끌어안고 포용하고 심지어는 종교 간에도 다원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리고 어떻게 규정하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구약은 신약의 성도와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적인 자격이나 혹은 특성 같은 것들이 덜 풍부하게 드러난다 하더라도 아주 분명한 것 하나는 이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의인, 혹은 성도는 악인들에게는 없는 내면의 어떤 세계에 하나님의 의해 일어난 변화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성도 혹은 의인입니다.
이 시인이 바로 그러한 변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기름부음을 세 번이나 받았고, 그리고 첫 번째 기름부음에서 하나님의 신이 강력하게 임하여 그에게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악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영혼의 또 다른 세계가 있었기 때문에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었고, 핍박을 받고 악인들에게 비방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이 이 악인들의 비난을 통하여 혹은 박해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는지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악인은 이러한 세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비록 겉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에 맡게끔 행동하고 이러저러한 잘못이 없이 지내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순전히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적인 행동들이고, 그 사람의 내면에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외하는 마음의 성향에 뿌리를 내린 도덕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이 없고, 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주님께 간절히 호소하면서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셔서 스올에서 잠잠하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명예를 높여주시고 자신을 괴롭히는 악인들은 수치스럽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올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음부 정도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개념이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내세사상들이 신약처럼 또렷하고 명료한 형태로 발전된 계시를 가지지 않은 측면들이 많기 때문에 이 스올이라는 단어는 히브리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들어가게 되는 어떤 상태를 가리켜서 스올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스올은 죽음 이후에 도달하게 되는 상태인데, 아주 칙칙하고 어둡고 불쾌하고 적극적으로 막 고통을 받는다는 개념 보다는 생기를 잃어버리고 어둡고 칙칙하고 모든 기쁨이 박탈된 상태에서 들어가는 상태이다, 그것을 히브리 사람들이 스올이라 불렀습니다. 만약에 살아있는 상태에서 스올이라 이야기 할 때에는 정말 그렇게 있고 싶지 않은 고통의 상태를 스올이라 불렀습니다. 예를 들자면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뱃속이라기보다는 후두부에 들어갔다고 학자들이 생각을 하는데 커다란 물고기의 후두부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수시로 콧구멍으로 물이 들어오고, 물풀들이 들어왔나이다 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 있는 상태를 “스올에서 부르짖나이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많이 나오지만 또 하나의 예가 야곱이 요셉도 잃어버리고 마지막에 베냐민을 지극히 사랑했는데, 베냐민을 자기 아들들이 애굽으로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그 때 아버지 야곱이 느끼는 그것을 스올로 들어간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시인이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였을 때 첫 번째 것은 악인들의 수치를 구하는 것이라면, 스올에서 잠잠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직선적으로 해석을 하면 저들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그들에게는 어떠한 기쁨도 없는 우울하고 희망이 없는 상태가 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악인들이 자신에게 한 것과 아주 일치를 이루면서 받은 그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갚아 당신의 공의를 행해 달라고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인이 악인들 때문에 명예를 훼손당하고 부끄럽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악인들 때문에 스올에 들어간 상태가 되어서 거기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 귀머거리, 눈 먼 장님과 같은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구체적으로 이 시인이 시련 속에서 무엇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였는지 18절에서 묘사하는데 그것은 바로 말 이었습니다. 그들이 여기 의인이라 표현되는 시인을 포함한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때리고 치는 완악하고 교만한 말, 이것 때문에 시인이 큰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러한 속에서 이 시인은 그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교만하고 완악한 말이라 묘사합니다. 이 교만이 사람을 향한 악인의 태도를 보여준다면, 완악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악한 자의 마음의 성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어떤 물건이 굽었는데 돌이켜 펼 수 없도록 굽어버린 상태를 완악이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주 성향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사실 새롭게 고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교만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을 향한 마음의 어떠한 상태이고 태도인데, 자기 자신이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으뜸 되게 하나님처럼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판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 시인을 아주 야비하게 때렸습니다. 이 시인은 그것을 거짓입술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성향이 이들에게 있었다면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 했을 텐데 마음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거짓으로 말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을 악의적으로 해석해서 말로 커다란 고통을 줄 때 이 시인은 저희들의 입술이 말하지 못하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악인에게는 이것이 단지 말해보는 것이었지만, 시인에게는 뼈 속 깊이 와서 박히는 화살이 되었고 고통 받을수록 이 하나님의 사람은 아버지께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이 시인은 악을 악으로 갚는 대신 자신의 당하는 모든 악을 하나님의 섭리의 손에서 해결해 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악인들을 부끄럽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나 자기를 모함하는 사람들을 자신도 모함하기 위해 계획을 세운 적이 없었고, 스올에서 잠잠하게 빌었지만 그들을 죽이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들을 무례한 자로 여기고 거짓입술이 말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나 실제로 그들을 체포하여 자기를 비방한 죄를 정죄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아들 압살롬에 의해 반역을 당하고 황망히 도주의 길을 떠나야 했을 때 이 다윗의 신앙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당시 법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하들은 법궤를 가지고 피난을 가자고 말했을 때, 이 시인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내가 돌아와 하나님께 뵈오리다”라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의 미래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지금 당하는 고난이 만약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이고 하나님의 진노 이외에 없다면 이 법궤를 가져간들 무엇 하겠으며 만약에 이것이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당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섭리 안에 있다면 결국엔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서 다시 이 왕궁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법궤를 보게 하실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과 이 시인의 차이였습니다. 모든 자신의 인생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시련이나 어려움을 만나고 역경을 만날 때마다 아버지의 큰 사랑으로 인도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자신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악인이 시인을 공격하고 부당한 말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었지만 그러나 이 시인은 보다 더 큰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섭리 가운데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들을 향해 칼을 가는 대신 이 모든 내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로 하나님이 무엇을 섭리하시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자기가 큰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 경험하게 된 유익을 19절부터 토로하고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들에게 이렇게 험하게 고난을 당할 때에 그들에게 복수의 칼을 갈지 않은 것은 악인들이 자기에게 하는 것처럼 똑같이 되갚아 그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지 않은 것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시인에게는 주를 두려워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 기쁘고 가슴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아픔 속에서 결국엔 주님을 두려워하는 그 마음이 이 시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동물들도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고통을 당할 때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악인에 의하여 일어나는 일, 의미 없이 일어나는 고통들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에서 보면 그 섭리의 견지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결국 우리를 성숙시키시고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날들을 돌아보면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게 살았던 시간들은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이 고통을 통해서 어떤 일을 나에게 이루시는지 묵상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아주 커다란 유익과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록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만 고난을 자처하는 사람도 없고, 행복을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인의 마음속에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들이 자기에게 행한 것 같이 똑같이 갚지 않았고 원수들이 자기에게 행한 것처럼 똑같이 보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이렇게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고난 속에서 어떠한 태도를 갖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는데 주를 두려워하는 자는 주께 피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격으로 놓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쌓아두신 은혜는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주께 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분, 이 시인이 쓴 시 가운데 이러한 고백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바위이시오, 산성이시오, 제가 아주 좋아하던 찬송가에도 그러한 구절이 나옵니다.
(찬양)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이스라엘의 모든 곳이 그렇지 않지만 바위들이 많이 있는 산이 있고, 그 바위는 풀 한포기로만 없을 정도로 시내산 같은 경우는 바위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거기에 굴들이 파여져 있고 딱 붙어서 숨으면 무슨 적군들이 아무리 많은 화살을 쏘고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안전합니다. 더욱이 그 바위에 찾을 수 없도록 숨기시고 주님의 두 손으로 덮어주신다고 할 때 그 때 그것이 표명하는 것은 안전입니다. 여기에서 주께 피한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뢰입니다. 하나님께만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유일한 피난처라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대신할 또 다른 피난처가 있다고 믿지 않고, 나의 피할 곳은 하나님이 유일한 거처이고 다른 어느 곳도 내가 주께 피할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주께 피한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안전입니다. 주께 피하기만 하면 누구도 그를 해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인이 주께 피할 때 그는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고통 받는 자리에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만약 시인이 똑같이 악인이었다면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주었을 것입니다. 살인도 하였을 것이고, 그리고 더 강력한 무력으로 그 악인이 자신에게 고통을 준 것 만큼 응징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지만 시인에게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이 시인에게 하나님이 시인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한 것처럼 악인들도 용서해주고 선대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는 원한에 맺히도록 고통을 당하여도 악을 악으로 갚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주께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만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어렸을 때 우리가 동네에서 형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거나 얻어맞고 난 다음에 엄마를 부르면 엄마가 오시면 우리를 치마폭에 싸시고 역성을 들어 주셨던 것처럼 이 시인도 하나님께 그러한 것을 기대하면서 주님께 피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무한히 강하게 나타내 보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누구도 보일 수 없는 약함을 보일 때가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사람을 무서워하고 혹은 그 사람에게 굴복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찬양)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 하여 주신다
그래서 악인에게 에워싸이고 고통을 받으며 우리의 인생의 길이 어느 방향으로 펼쳐질지 모르는 때 조차도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 악인들에게 비방을 당하여도 요동하지 않는 마음의 평화,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떠들지 않고 잠잠히 하나님의 손에만 자신의 인생을 의존하는 신뢰,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망명의 길을 떠날 때 그 착하던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네가 사울의 집안에 그렇게 나쁜 짓을 행한 것처럼 하나님이 너에게 그대로 갚으시기를 원한다고 독설을 퍼부어 댔습니다. 다윗이 언제 하나님께 왕이 되고 싶다고 기도했습니까. 그리고 사울처럼 못된 인간은 제거하시고 나를 대신 써달라고 하나님께 빈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그는 사울을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그는 시인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시인은 어찌하든지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고자 하였습니다.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항상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기 때문에 살려 주었고 증표로 그의 옷을 조금 베어 그의 물병을 훔쳐 가지고 나온 것을 인하여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그런 행동을 하였다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던 순수한 신앙을 가진 어린아이 같은 시인이었습니다. 끔찍한 고통을 당하여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였을 때, 이 시인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귀머거리처럼 듣지 아니하고 그리고 장님처럼 눈을 감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였습니다. 입으로는 잠잠하고 있었으나 시인이 주님께 피한 기도 시간에는 입술로는 잠잠하지만, 그의 마음으로는 눈물어린 탄식으로 하나님께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고난, 시련의 길을 통과하였던 방법이었습니다. 시험은 악과 매우 가까이 있고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의 마음이 시험에 들면 악에 매우 가깝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악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들은 결국 실제적으로 범죄하게 되고 하나님께 악을 행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련과 고난 속에서 사람을 미워하고 인간에게 복수를 꿈꾸는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너무 주님께로부터 멀리 마음이 떠났기 때문에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당신의 은혜의 날개 그늘 아래 돌아와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알도록 주님만이 우리의 의지할 유일한 바위이고, 피할 산성이시라는 것을 일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행하신다고 믿고 하나님께로 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바로 그를 위하여 은혜를 예비해 주십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 그 은혜를 쌓아두신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가 아니라 많은 은혜를 예비하고 계시며 당신께 피하기만 하면 그 쌓아두신 은혜를 베풀어 그 은혜가 너무 크다고 감격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이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시련 속에서 주님께 피하여 주님 앞에 눈물을 흘렸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고통을 능가하는 큰 기쁨으로 갚아 주셨고 우리의 수취와 부끄러움이 변하여 명예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능력도 주시고 저런 자원도 주시고 그런 힘도 주시지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 대신 그것을 믿고 신뢰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주시는 것들을 통해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터득하고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든지 구차하게 사람 앞에 은혜를 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부끄럽게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올무에 빠질 것이요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안전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의뢰하고 주님께 피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한 점에서 이러한 고난은 여러분도 모르고 있는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살려는 하는 교만을 치료하는 약입니다. 이 시련 속에서 주님께 피하여 주님이 쌓아두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그 은혜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맛보고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당신의 장막에 감추시는 하나님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한 은혜 4 (2012.10.18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시31:20-21)
악인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시련이 있었지만 결국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은혜 주신다는 사실을 이 시인은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고백을 감격 속에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20절이 나옵니다.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형식상으로 놓고 보면 19절에 주를 두려워 한 자가 주님이 숨기신 사람들인지, 그 앞에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케 하옵소서”에서처럼 악인들을 숨기셨다고 하시는 말씀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20절에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여기에서는 복수이고 주께 피하는 자는 단수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고쳤으면 합니다만 여기 19절에 주를 두려워하는 자, 주께 피하는 자가 사실 단수가 아니라 히브리 성경에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라고 했을 때 그들은 악인들이 아니라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 그리고 주께 피하는 자, 바로 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이 시인을 괴롭히고 있는 악한 사람들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 특징은 사람의 꾀, 말다툼입니다. 여기에서 꾀라고 되어 있는 이 로케스(רֹכֶס)라고 하는 단어는 원래 음모를 가리킵니다. 좋은 의미에서의 지혜나 아니면 발상, 혹은 생각, 이런 것이 아니라 철저히 어떤 사람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오도록 파멸을 가져오도록 악의를 가지고 계획하고 모의한 그러한 음모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면 결국 이 시인을 공격하는 악인들이 가지고 있는 의도는 일을 제 상태로 돌려놓아서 하나님의 법을 세운다든지, 혹은 무엇인가 그릇된 것을 바로 잡아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건설적인 동기가 아니라 이 시인을 고통을 주어서 파멸하게 하는 것, 그 자체가 이 모든 음모의 목적인 그러한 의미의 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도 이렇게 악한 꾀에 있어서는 이 세상의 어두움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어두움 속에서 수많은 악들과 더불어 살아왔기 때문에 익숙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점에 있어서 훨씬 더 못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공격을 당하면서 그들은 곧 사람의 음모를 가진 사람들이고, 그 음모가 겨냥하는 바는 자신의 파멸과 그리고 실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악인과 의인의 대조가 나오는데 이 악인과 의인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윤리적인 행동의 구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구분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그 사람의 본성, 이런 것을 기준으로 구분이 된 것입니다. 악인은 의인에게 있는 어떤 본질적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의인에게 있는 본질적인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통하여 영적인 은혜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 영적인 은혜의 핵심이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이 언약백성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인간들을 사랑하시는지 알고 이 사랑을 율법 속에서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들도 악을 행하고 미끄러지고 죄를 지을 때가 있지만, 그러나 집요한 꾀를 가지고 의도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미끄러지고 불순종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그를 수시로 변화시켜 그를 회개시키고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의 특징이라면, 악인은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이 없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제 에워싸서 이 시인에게 비난을 퍼부으며 파멸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또 다른 특징은 말다툼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혀들의 다툼이라 나옵니다. 그래서 다툼은 하나인데 혀는 여럿입니다. 레슈놋(לְשֹׁנֽוֹת)이라 나옵니다. 원래 히브리 말로 라숀(לָשׁוֹן)
이라고 하는 것은 혓바닥을 가리킵니다. 혀. 이 혀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언어도 가리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창세기 10장에 보면 바벨탑을 쌓기 전에 바벨탑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내리기 전에 온 땅에 구음이 하나더니, 할 때 그것이 바로 라숀, 혀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도 tongue 이라는 말 속에 언어라는 뜻이 있습니다. 방언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래서 지난 성경에는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라고 하였는데 정말 탁월한 번역입니다. 좋은 의미에서 혀가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 혀입니다. 정말 구설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 말로 악인들이 시인을 얼마나 괴롭게 하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을 행하고 수많은 말로 이 시인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록 하나님을 향한 선한 뜻을 가지고 있어도 악한 행동을 통하여 선을 도모하는 것은 대부분 옳지 않다고 믿기 때문에 진실을 가지고 있고, 또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면에서 유순하게 이 모든 어려움들을 해쳐나갑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 이외에 거리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있는 악들을 쏟아내며 자신의 소욕을 이루어 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환경을 이 세상에서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옳은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닌 사람들이 승리하게 하시고, 혹은 옳지 않은 사람들이 득세하게 하셔서 오히려 모함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이 말다툼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허락하십니다. 정의의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파멸로 이끄시고 자기의 자녀들을 상주시는 것이 맞지만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은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커다란 경륜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고 때로는 우리가 알 수 있게끔 그렇게 하시지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경륜을 통해서 자기의 자녀들을 다루시는 방법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이 시인도 원수들의 뼈저린 음모와 그리고 가시 돋친 이 말다툼을 통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공하는 길로만 달려갔더라면 도저히 맛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서 쌓아두셨던 은혜, 인생 앞에서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에게 예비하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가장 곤고하고 고통 받는 그 날에 주옥같은 감사의 시를 쓰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 시인은 바로 그렇게 고통스러워 보이는 대적들의 음모와 모든 꾀로부터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보호의 방법은 고통과 시련 없이 악인을 단번에 파멸시키는 것으로서 나타나지 않고, 악인이 고통을 주었지만 파멸시킬 수는 없도록 주님이 보호하시면서 이 모든 일들을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대적들을 향하여 쇠기둥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너를 치기는 하겠지만 결코 파멸시킬 수 없는 예언자가 되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적들로 이 시인을 치열하게 공격하게 하셨지만 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하나님이 이 시인을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음모뿐만 아니라 치열한 구설의 다툼을 겪게 하셔서 때로는 이 시인의 마음에 가시로 만드는 채찍에 얻어맞는 것 같은 고통을 허락하셨고 때로는 사람들의 이 구설의 다툼 때문에 시인의 명예가 더렵혀지던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다툼과 그 고통 속에서 시인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 모든 다툼에서 결국엔 벗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이 시인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피하는 법을 배웠고 이 모든 자기를 해치려는 음모에 대하여 또 다른 음모로 대적하는 대신 자기의 명예를 훼손하고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이 모든 구설의 다툼에 또 다른 독한 말로 싸우는 대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벗어나게 하시고 자기를 변백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신뢰하며 아버지께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 시인은 그러한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한 번도 경험할 수 없었을 아주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셔서 그래서 결국엔 비밀한 장막에 감추셔서 이 모든 것을 극복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은밀한 곳, 그 비밀스러운 장막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시인을 만나 주셨고 거기에서 악인들은 결코 누리지 못하는 평강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악인의 이 큰 비난에 들 내지도 아니하고 그의 마음이 요동쳐 평화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복수의 분노에 불타는 마음을 갖는 대신 그 은밀한 곳에서 비밀스러운 장막에서 성공하고 승리하는 자들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거기에서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 보다는 일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의 성취에 만족 해 하던 이 시인을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을 통해서 은밀한 곳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은 이 시인을 독대하셨고 이 세상의 악인들은 결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의 영적인 특징인 하나님과의 교통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통해서 부어주시는 은혜의 생명을 흠뻑 맛보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곳에 주님이 이 시인을 숨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장막에 이 시인을 감추셨으니 이 장막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곳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물들이 정돈되고 그리고 이 세상에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만들어 준 평화도 어느 정도는 나를 평화롭게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없이 만들어진 평화는 종종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육욕에 흐르게 하고 타락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물로 말미암아 평화는 이룩되었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시련과 고난을 만나고 사물의 모든 질서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아주 혼란스럽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꼭 붙드시면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를 베푸셔서 아버지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당신의 큰 사랑으로 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어떻게 붙들고 계시는지를 평탄한 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시련과 고난이 올 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종종 주위에서 보면 냉온탕 요법으로 건강을 챙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언젠가 지방에 내려가서 목회자 한분을 만났는데 굉장히 힘든 가운데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자기는 냉온탕 요법을 한2년 하면서 몸이 훨씬 좋아진 것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늘 바빠서 그런지 한 30분 걸리는데, 차가운 물에 2-3분, 그리고 뜨거운 물로 들어가서 2-3분, 다시 나와서 찬물로, 이것을 왔다 갔다 하면서 12번 정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몸에 왜 좋은지 아십니까. 왜 좋은가 하면 몸이 평상시 온도에 있다가 갑자가 뜨거운 물에 몸이 들어가면 확 풀어집니다. 그러다가 몸이 충분히 풀어진 다음에 차가운 물에 쑥 들어갑니다. 그러면 몸은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면, 몸이 굉장히 나쁜 환경이 자기를 침투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일하게 있던 세포에 비상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확 깨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쉽게 이야기 하면 자고 있는 사람에게 어리바리 새벽기도 나온 사람들에게 찬 물을 확 끼얹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감이 모두 깨어나면서 모든 세포들이 비상이다 하면서 옆에 있는 세포들을 깨우는 것입니다. 경계근무를 2-3분 동안 서는데 아무 일이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찬물에 적응하려고 하는데 뜨거운 물에 풍덩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다시 온 세포가 벌떡 일어나서 이것은 또 웬 난리인가 하면서 다시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우리 몸에 있는 안일하고 편안하게 안주하려는 세포들에게 비상령을 발동해서 일으켜 깨우는 것입니다. 너무 많이 하면 끝나고 나면 굉장히 피곤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십 번 하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것입니다. 몸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영혼을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노회를 갔는데 어느 후배 목사님이, 목회자들이 서 있는데 나를 보고 그랬습니다. 가장 행복하게 목회하시는 목사님이라고 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눈물이 흘리지 않는 목회가 어디에 있는가. 만약에 있다면 그게 정말 좋은 삶일 수 있겠느냐.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참 공허합니다. 정말로 10%도 마음에 와 닿지 않고 공허합니다. 어디 목회만이 그렇겠습니까. 우리 인생살이 그 자체가 눈물이고 시련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당신을 충분히 버리고도 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거짓된 평안과 행복을 한 없이 누리게 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인간이 누구이신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러한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말을 안 듣고 공부하는 애들은 그 엄마가 두들겨 패서 고달프고 철이 많은 든 아이들은 부모가 때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제 인생길을 어떻게 해쳐 가며 살 것인가 생각하며 괴롭습니다. 마찬가지로 철이 안 든 성도들은 수시로 징계를 당하고 회초리를 맞으면서 괴롭겠지만,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가 이렇게 큰데 나는 이렇게 밖에 못 살까. 혹은 주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게으르게 섬겨도 되는 것일까. 하나님이 내 마음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셨는데 주님이 창조의 목적을 위해 만드신 이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악하고 더러울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변화된 세상이 될 것인가, 이러한 고상한 목적 때문에 괴로워 할지 모르지만 이 속에 있는 눈물과 고통은 어떤 경우에든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오늘 이 시인에게도 경건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시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만나고 하나님 사랑 경험하게끔 만들어 주신 이유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시면서 이 시인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셨고 구설의 다툼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어 주시고 오히려 그 큰 시련 때문에 하나님의 은밀한 성품을 깨닫고 비밀스러운 장막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체험하게끔 만들어 주셔서 큰 은혜를 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한 점에서 보면 우리가 이렇게 괴로움을 만나고 혹은 악한 사람들의 꾀로 인하여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악한 사람들의 꾀를 만나면서 더 악한 꾀로 악한 사람들을 더 많이 괴롭힐 생각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악인들이 구설의 다툼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큰 고통을 줄 때, 더 독한 말로 그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악한 사람들의 음모와 말다툼으로 고통을 당할 때에 그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너는 나의 은밀한 곳으로 도망치거라. 너는 나의 비밀스러운 장막으로 돌아오거라. 거기에서 내가 너를 맞아주마 하는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빛으로 부름 받은 주의 자녀들이 하고 싶은 모든 행동을 다 하고 어떻게 빛으로 살 수 있겠으며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다 하고 어떻게 이 세상에 소금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악인의 음모를 향해 더 악한 음모로 그들을 대적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을 드러낼 수 있겠으며 독한 말을 비수처럼 쏟아내는 사람들에게 더 큰 칼을 휘두르는 말의 다툼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향기, 예수의 편지된 삶을 살 수 있겠으며 더욱이 너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태도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고린도교인들이었기 때문에 사도는 엄중하게 자기의 교인들을 책망하면서 차라리 악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겠느냐고 교회 일로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자기의 자녀들에게 준엄한 책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의 결말을 알고 계시고 우리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행한 악을 아실뿐 아니라 사람들이 모르는 선한 행실도 하나님은 모두 기억하십니다. 다소간에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끊임없는 올무가 있지만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 지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위로와 은혜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한 모든 정당한 형벌을 받고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지, 단지 피하고 도망치는 것만이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이 시인이 자기가 악인들에게 고통을 받으며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았다고 했으니, 바로 이 주의 은밀한 곳에서 주님이 비밀스럽게 숨겨주신 이 장막 안에서 악인들의 비난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지 않았겠습니까. 악인은 이 일로 비난할 때 시인에게 그것은 허무한 비난에 불과했고 근거 없는 비난에 불과했지만 아무런 죄도 없이 순결한 사람이었다고 시인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발견하였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사람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악인들은 이 시련을 통해 이 시인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추어도 없었지만 이 시인은 이 모든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은총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여기에서 사랑으로 번역된 단어가 헤세드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로 이 시인의 마음속에서 이 큰 찬양이 터져 나올 때 이 시인은 고난 속에서 깨달은 두 가지를 찬송 속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주님이 숨겨주신 거기가 견고한 성이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말과 칼, 달리는 병사 밖에 없는 사람들로 어찌 높은 산성을 오르겠으며, 그 산성에 숨어있는 사람들을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그 성이 견고했기 때문에 적들이 해칠 수 없었던 것처럼 주의 은밀한 곳에 숨을 때 비밀스러운 장막에 하나님이 자기를 감추셨을 때 그 견고한 성에서 그는 안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놀라운 인자하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자기가 옳은 사람이기 때문에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베푸신 은혜였고, 자비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고 당신 자신의 사랑의 성품 때문에 시인에게 이 은총을 입히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시인에게 큰 은혜와 자비를 보여 주셨고 큰 바위에 숨기시고 당신의 손으로 덮어주셔서 시인의 영혼을 보호해주시고 오히려 환란 날에 그 영혼을 아름답게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를 이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악인들이 상상이나 하는 세계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러한 세계를 주셔서 악인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시고 흐트러진 우리의 신앙을 올바르게 하사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은혜를 충만히 누리시며 아버지 앞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시험 가운데 있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누구도 그 시험 속에서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여러분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두 손을 높이 들어 진심으로 축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도록 빌어야 합니다. 처음 기도는 내키지 않는 기도이지만, 그 기도를 깊이 하는 가운데 여러분은 진심으로 악한 사람들에게 복을 비는 마음이 될 것이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밀한 곳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고치고 계심을 보이실 것이고 비밀스러운 장막에서 쌓아둔 은혜를 체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종종 시험에 들게 될지라도 악에 빠지는 것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깊은 시험 속에서 오히려 이렇게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 숨어 비밀스러운 장막에 감추어져 더 큰 하나님의 자비의 성품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5.여호와를 사랑하라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시31:22-24)
이 시인이 이렇게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쌓아둔 은혜를 고난 속에서 깊이 체험하였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고난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고백한 것과 같이 시인은 이렇게 시련을 당하고 원수들에게 비난을 받고 모함에 빠져들고 하는 이 과정을 통해서 그는 놀랐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갑작스러운 놀람, 그리고 갑작스러운 정신의 충격은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목전에서 끊어졌구나 라고 하는 자각에서 오는 충격이었습니다. 시편에 보면 주의 목전에서 끊어진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언약백성들의 최고의 절망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는 그 면전에서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의미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이러한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느낀 절망감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의심과 믿음, 소망과 낙심, 결단과 주저함,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조차도 두 가지가 어느 정도는 함께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큰 고통을 당하고 원수들에게 비방을 당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고난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자신의 악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몸부림 치고 있었고 그리고 일순간 그는 크게 놀라고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자기 자신이 끊어졌다라고 하는 절망까지 경험하였습니다. 민수기 14장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택하는 절망의 끝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 절망의 끝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고 파멸해 버리는 것입니다. 욥기 1장에서도 고난을 당하는 욥에게 그 아내가 말한 것이,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고 충고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절망은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궁극적인 목적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의미에서든지 절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절망의 끝은 건설적이고 창조적이고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는 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소망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하는 절망을 뜻하지 않습니까. 이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마음이 굳어져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는 배교에 가까운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그 절망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소망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끊임없이 시련을 당하고 고통을 겪고 심지어 죄를 짓고 악인에게 이렇게 구설의 다툼을 경험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결국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하나님은 절망의 저자가 아닙니다. 절망은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불순종의 길을 갔던 사람들이 그 불순종과 불신앙의 대가로 겪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말하든지 절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그리고 이 절망은 죄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이 절망을 인간의 죽음에 이르는 유일한 병이라 우리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비록 우리의 잘못 때문이라 할지라도 절망에 들어가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것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말고 자신을 의지하며 산 그 마지막 결과가 선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든 죄와 불순종의 궁극적인 원인은 의지적인 면에서는 자기 사랑이지만, 지성적인 면에 있어서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시든지 하나님의 판단보다는 나의 판단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이 지적인 교만이 범죄를 가져오고 불순종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그 불순종과 하나님을 대항한 그 모든 결과가 행복하고 아주 선하고 바람직한 것이라면 누가 자신의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키겠습니까. 인간은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자기를 꺾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난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지막에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아버지의 집에서 가져온 모든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고 이제는 거렁뱅이가 되어서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돼지를 치는 목보가 되었고 그리고 돼지우리에 돼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허기를 채울 수가 없어서 돼지 사료에게 주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 했습니다. 만약 그날 쥐엄 열매가 거기 있어서 배불렀다면 아버지의 집이 생각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그러한 존재입니다.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를 믿을만하고 의지할 만한 구석이 있는 만큼은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쉽사리 그것 때문에 자기를 굴복하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당신이 직접 절망을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절망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를 내버려두심으로써 주님의 목전에서 끊어진 것 같은 깊은 한계를 경험하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 체험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깊은 절망 속에 있을 때 신자들이 선택하는 것은 결국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는 배교에 가까운 길을 택하거나 아니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망과 파멸, 기도와 회복, 이 사이를 가르는 것은 신자의 믿음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느니라. 시편에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러한 체험이 있는 자들에게는 단지 시편 속에 나오는 후렴구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 그리고 마음에 모든 탄식과 울부짖는 기도가 주님의 귀에 들렸다고 하는 그 믿음, 이것이 이 시편의 구절 속에 녹아있는 체험적인 묘사입니다. 시인도 한 때는 절망했고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로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였고 주님을 향한 간절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이 시인이 경험한 바 였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 절망적인 상황을 만난 모든 사람에게 은밀한 곳에 피할 기회를 주시고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쌓아두신 은혜, 인생 앞에서 베푸시는 은혜를 그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고 그 믿음은 절망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의 외침인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만약 인생의 벼랑 끝에 있다면 거기에서 이런저런 설교를 듣고 책을 보고 성경을 읽고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것, 거기에서 나오는 비결, 하나님이 그러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지 여러분들이 모두 알았다고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벗어나지 못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영혼의 몸부림이고 그것 없이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깊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더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본 그래서 회개하게 된 모든 그 마지막의 실천적인 열매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날이 지나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시대의 정신과는 결별하고 이 간절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가장 훌륭한 표현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이 시인은 이 깊은 절망의 벼랑 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엄중히 갚으시리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큰 고난과 절망, 대적들이 자기를 비난하는 뼈아픈 이야기와 비방을 듣고 심지어는 그 큰 고난을 통해 자신에게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죄악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이 시인은 하나의 커다란 유익을 얻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예전에는 추어도 몰랐던 깨달음이 아니라 예전에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더 깊이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지식을 거론하면서 인간의 지식에는 사변적인 지식과 실천적인 지식이 있다고 구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인데도 인간이 무엇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변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깨달았을 때 마음속에서 지식들이 질서 지어지기는 하지만 그냥 그렇게 지식이 마음속에서 생각으로 질서 지어지는 것으로 끝나고 행동을 산출하지 않는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변적인 지식입니다. 그런데 실천적인 지식은 생각 속에서 그 지식이 질서 지어졌을 뿐 아니라 행동으로 산출된다는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실천적인 지식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성경은 이 문제를 지식을 얻는 한 방편이라 할 수 있는 믿음과 관련하여 말합니다. 소위 ‘퓌데스 살비피카’(fides salvifica)라고 하는 믿음 중에서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과 그렇지 못한 믿음을 가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말씀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뻐할 뿐 아니라 혹은 슬퍼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이 마음에 떨어져서 삶으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예 믿음이 안 생긴 경우는 그만 두더라도 일시적인 믿음, 그리고 마음속에서 이러이러한 사실이 이러하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동의 이러한 것들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상태가 심각하시다는 것,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 돌이키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 하나님이 은혜를 예비하셨다는 것, 모든 것을 알고 난 후에 실제로 그 하나님을 붙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기도가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한 이 시인은 그 고통스러운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성품이 무엇인가 하면 진실한 자는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한 자는 엄중히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이 교만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정적인 특징입니다. 이 교만은 단지 사람들을 향해 내가 너보다 더 훌륭하다고 하는 자기 자랑이나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교만입니다. 이 교만이 무엇입니까. 저 사람 보다는 내가 더 가치 있는 인간이다. 저 사람 보다는 내가 더 선한 인간이다. 저 사람 보다는 내가 더 우월하다. 저 사람의 판단보다는 나의 판단이 더 낫다. 이것을 하나님께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 보다는 자신이 판단하고 뜻하는 바가 더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이고 죄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이러한 사람들을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복수하시느니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멸시하고 불순종한 것에 대해서 엄중하게 복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진실한 자는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이 보호는 시편에 나오는 언약백성들이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말하자면 은택입니다. 진실한 자는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진실한 자는 시편에서 흠도 티도 없고 어떠한 결점도 없는 완전무결한 성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편에서 바라보는 인간관은 아주 복음적입니다. 인간에 대한 관점이 비관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관적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큰 자비와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인간이 희망이 없다고 보는 것이 시편이 바라보는 인간관입니다. 그래서 시편 구석구석에서 나오는 ‘진실한 자’라는 표현은 진리가 있고, 인간은 항상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진리를 떠나서 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기억하고 그리고 그 진리에 합치된 삶을 살려고 하는 이 모든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진실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 진실한 사람은 자기가 잘못했어도 회개하는 사람이고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에, 그러한 시련과 고난을 있게 한 인간을 향해 이를 갈고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들은 진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진리와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진리로 끊임없이 돌아가려고 하는 성향을 갖은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고 그 진리에 합치된 상태가 진실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평가하시는 것과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심각한 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면서 내리시는 평가는 그가 얼마나 진실한가 하는 이것이 사람들이 우월하게 생각하는 소유가 많이 있다든지 능력이 뛰어나다든지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가끔 이야기 하지만 찌그러진 양은그릇 보다는 금 그릇이 좋습니다. 양은그릇은 몸에도 해롭습니다. 금그릇은 몸에 좋습니다. 금성분이 몸속으로 계속 들어가면 중금속을 제거하고 좋은 역할을 합니다. 우황청심환이나 귀중한 약들을 보면 금가루로 싸지 않습니까. 음식점에도 보면 금가루를 뿌려줍니다. 그러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찌그러진 양은그릇 보다는 금 그릇이 훨씬 귀하다는 것을 알지만, 여러분들이 깨끗하게 보관된 양은그릇에 밥을 먹겠습니까. 개 밥그릇으로 사용하던 금 그릇에 밥을 먹겠습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사람이 가진 능력이나 재능, 소유, 지식, 이 모든 것과 진실함은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진실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가 가지고 있는 우월한 특징들은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데 사용하는 가능성이 아주 많은 것입니다. 돈이 많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돈이 별로 없고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 더 나쁜 일을 할 경우가 많습니다. 권력이 없고 덜 진실한 사람보다는 큰 권력을 손에 넣고 사악한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실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의 존재 가치는 그가 가지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그런데 그 선한 의지는 진실한 의지의 다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하면 단 1초도 망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사람이 되면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막대기와 같은 인간을 사용하셔서 하늘 뜻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능력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진실하기만 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니 우리의 없는 것 때문에 참된 있으심의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품을 이 시인이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랬으니까 악인들이 이 시인을 공격하고 비난을 퍼부었을 때 복수의 칼을 갈거나 악한 마음을 품기 보다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섭리 속에서 자신을 이 시련 가운데 두셨는지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 시인의 마지막 결단은 여호와를 사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어찌하든지 나만 예수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정말 예수를 잘 믿는 상태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나만 하나님 사랑하면 충분해, 다른 사람은 상관없어, 나만 하나님 사랑할 꺼야. 이것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깊은 회심을 경험하고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겠다라고 생각했을 때 그 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살아도 난 상관없어. 나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된다고 하였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신의 그 10대 때부터 쓴 결심문 속에서 1번에 이러한 결심문을 올렸습니다. 나와 나의 모든 이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 깊이 회개하고 그 분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허무해 보이고 마음이 아픕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나만 사랑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불행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누군가가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고 내 일처럼 그렇게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커다란 기쁨이 마음에 용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시인이 모든 성도들아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간곡히 외치는 이 외침의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인생의 벼랑 끝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그렇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마지막 결론을 내립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입니다. 바란다고 하는 단어는 ‘바타’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소망을 둔다는 뜻입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들의 특징입니다. 언약백성들의 특징은 소망을 자기에게 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둔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이 노력하고 자신이 이 세상이 이렇게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꿈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 할지라도 소망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학자들 가운데 이슈가 되는 것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칼빈이 가지고 있는 이 세계와 그리고 저 세계에 대한 생각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칼빈이 워낙 이 세상에서의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과 복종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소위 칼빈주의적인 세계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현실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제네바를 방문하고 충격적으로 놀란 것이 그 때가 겨우 16세기 중반이었는데 칼빈은 지도자로서 이미 스위스가 어떻게 살 길을 찾아야 할지 제시하면서 이미 400년 전에 공업화를 부르짖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한 것들을 보면 그가 굉장히 현실적인 지도자였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부문에서 해박한 지식을 갖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사실은 신앙에 있어서 타계성, 즉 피안성 보다는 현세성, 차안성을 훨씬 더 강조한 사람이다라는 견해가 우세하였습니다. 그런데 학자들 사이에 새로운 저작들을 연구하면서 그가 철저한 현세적인 개혁, 이러한 것들을 펼치기 까지 그 이면에 있는 영원한 나라에 대한 그리움, 천상의 하나님께 대한 소망, 이러한 것들이 견고한 토대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들을 밝혀내는 작업들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확고하게 믿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특별히 성화에 관한 부분을 다루면서 그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때 이 모든 속에서 우리들이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는 비결을 들어가는 가운데 현세가 잠시적인 것이라 생각하면서 허무함을 묵상하라는 것이고, 그리고 천상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묵상하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설교 속에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묻어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 먹이시고, 복주시고, 번영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이 시간 세계 너머조차도 다스리시는 무한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소망의 닻을 내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사람들이고 담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펠 전투에서 사망한 비운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사랑하는 아들과 사위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죽으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 우리의 육체만을 멸하는 이 세상 사람들 보다 우리의 영혼 까지 멸할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자고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 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큰 능력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는 시련과 고난이 그치지 않습니다. 세상의 구조가 원래 그렇게 되어있고, 구원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의 구조도 그러한 하나님의 연단을 필요로 하는 구조입니다. 이 속에서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되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한 은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