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41
목 차
가난한 자를 돕는 자를 복 주심(시 41:1) 47
하나님의 보호를 기도함(시 41:2) 51
내가 아플 때(시 41:3-4) 55
원수가 나를 저주할 때(시 41:5-9) 60
참된 복수(시 41:10) 64
완전한 중에 붙드시는 하나님(시 41:11-13) 69
시편56편 강해 1
시편41편 강해 1
시편41편 강해 1
시편41편 강해 1
시편41편 강해 1
시편41편 강해 1
시편41편 강해 1
가난한 자를 돕는 자를 복 주심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시 40:1)
본문해설
시편 40편을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중 어떤 사람들을 환란 날에 붙드시고 고통 받는 날에 건져주시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이웃에게 어떻게 행했느냐 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상은 시편뿐만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 매우 주의 깊은 관찰을 요구하는 사상입니다.
본문에 보면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라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빈약하다’라는 것은 가난하고 힘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는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탱하며 사는 사람이 있고, 자기를 지탱하는 것 이상으로 물질을 모으고 육체의 건강이나 물질이나 명예에 있어서 그 이상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 하나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언약공동체
구약의 사상은 하나님을 믿는 언약공동체, 곧 이스라엘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당신이 주신 모든 것들을 함께 나누고 누리며 사는 공동체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한 삶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동체 안에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험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신약의 교회로 이어집니다. 구약은 옛 언약의 공동체가 된다면, 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영적인 교회는 새 언약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교회의 지체들이 넘치도록 가지고 있는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함께 나누고 교통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람을 통해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이 함께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사는 공동체가 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물질로 돕는 것, 영적으로 약한 사람을 신앙적으로 붙들어 주는 것, 지혜가 부족해서 미련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나누어 올바른 길로 걸어가도록 이끄는 것, 모자라고 허물이 많아서 잘못된 일을 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바른 삶을 살도록 사랑으로 이끌어주는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그것을 안 하는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올바로 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자
본문에 보면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하는데 이 말은 조금 어렵습니다. 잘 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파카드’(dq'P;)라는 말인데 방문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날에 너희를 심판하시니라” 하나님이 방문하신 것입니다.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하고 병들고 돈이 없으면 누가 찾아옵니까? 옛말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사람이 가득 모여도 정승이 죽으면 오는 사람이 없다.”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승집 개가 죽으면 가서 정승한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지만, 정권이 바뀌었는데 옛날에 정승으로 지내던 사람이 죽었다고 거기에 얼굴을 내밀면 바뀐 주인한테 찍혀서 인생길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언약공동체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그래서는 안 되었습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 가난하고 힘이 없고 자기의 힘으로 설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이것이 복된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약공동체 안에 있으나 가난하고 병들어 약한 사람을 찾아가는 모습은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찾아오신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주님이 찾아오실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찾아오시겠습니까? 우리는 부자가 되어 본적이 없어서 모르는데 부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사람들한테 있기 마련이야.” 주님께서는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의 자식을 찾아가는 마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자녀들을 시집장가 보냈는데 누가 굶는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때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이 대신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 대신해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
“재앙의 날에 하나님께서 저를 건지실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하나님께 돈을 빌려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들이 언약공동체 안에서 유무상통(有無相通) 하며 살기를 원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를 구제하는 것은 당신 자신에게 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갚으시는 것입니다. 빈약한 자를 아무도 돌아본 적이 없을 때 그를 찾아가서 돕고 구제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의존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성품을 따라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충실하게 살려는 헌신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행동 하나를 보고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때로는 환란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보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건져주십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일을 한 것이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이 나에게 신세지신 것처럼 생각하고 갚아주실 것이라는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바로 거기에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시겠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거기에 형제들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이 함께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일치를 이루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기도함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시 41:2)
보호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사랑 때문에 빈약한 자들을 찾아가서 돕고 위로하는 사람이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모순들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은 진심으로 자기를 믿고 경외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누군지를 오히려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빈약한 자를 찾아가서 그를 돕고 위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세상의 질서들이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 앞에 올바른 질서들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르지 않은 질서들이 자꾸 생겨나기 때문에 이것들을 통해서 올바르게 살려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것 자체가 삶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도록 격려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복은 당신 앞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그분을 가까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
하나님은 이 세계와 인간들을 향하여 정하신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선을 경험하며 살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당신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도 선합니다. 선을 따라 살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당신 자신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같은 방향에 서있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을 등지고 항해하는 배처럼, 바람에 밀려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인생이 앞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종종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잠시 있는 일이고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모든 것들이 평정을 찾고 평안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대로 돌아갑니다.
성경에서는 악인의 번성함이라는 것을 순간으로 보고, 하나님의 선을 영원한 것으로 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들을 나타납니다. 악인은 번성하는 것 같지만 벤 풀에 무성함 같을 뿐, 아침에 풀 베어 놓았을 때는 살아있는 풀과 다름이 없지만 한 낮에 태양빛을 받고 나면 전부 시드는 것처럼, 악인의 말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질서가 생겨나서 오히려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고통이 생기고, 신앙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나타나지 않는 것 같은 때도 그것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잠시잠깐 거스르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질서대로 모든 만물들을 움직이고 계시다는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죄악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의 질서들이 때로는 대세를 이루기도 합니다. 큰 파도처럼 밀려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자신은 밀려오는 파도 위에 뒤움치는 작은 배와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 계명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악인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시작해서 세상으로 끝나지만 우리의 생명은 지상에서 시작되었으나 영원을 향해 잇대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숙제는 “고난을 받느냐? 평안한 삶을 사느냐? 이 시간의 세계 속에 있느냐? 아니면 시간세계가 끝나고 영원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느냐?” 이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그분의 마음에 맞게 인생을 살아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즐거워하도록 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은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때로는 시인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도 있지만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신 것 같고, 악인들은 처처에 횡행하고, 모든 사상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권세를 잡은 것 같아 모든 것이 그들의 질서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 때도 시인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하나님은 견디기 힘든 인생의 고통, 악인에게 당하는 말할 수 없는 수모와 괴로움들을 통해서 그것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당신의 뜻을 시인의 인생에서 아름답게 수놓아 가신 것을 회고하면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환경이 어떠하든지 자신의 인생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 가운데 좌정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유일한 위로이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플 때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 41:3-4)
병든 자를 고치시는 하나님
시편 41편 첫 절에서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이렇게 고백을 하고, 이어서 2절과 3절에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후대해 주시는지를 기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이것은 시인 자신을 하나님 앞에 비겨서 한 말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빈약한 자를 찾아가서 위로하고 곤고한 사람들을 도우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병들었을 때를 이야기합니다. “일생에 빈약한 자를 권고하고 붙들며 하나님 때문에 자비를 베풀며 살았던 사람은 병들었을 때 하나님이 반드시 병상에서 저를 붙들어 주시고, 그 병상에서 낫게 해주십니다.” 이렇게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친절 중 하나가 병중에서 저를 위로하고 고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의료혜택이 없던 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질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선교 초기, 그리고 60년대 70년대까지만 해도 병이 낫는 것이 주님을 알고 믿게 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의료혜택이 발전하지 않았으니까 질병에 대해 무방비로 노출되어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때는 더하지 않았겠습니까? 시인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빈약한 자를 붙들고 위로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던 사람들이 질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돕고 외롭게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셔서 그들을 일으켜주시는 것을 언약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많은 은혜와 친절들을 언약 공동체 속에서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경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분명한 약속, 이런 것들을 붙들면서 하나님 앞에 본론을 말씀드립니다.
˚내 영혼을 고치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시편 41편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깊이 참회하는 배경에서 쓰여졌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다윗은 영혼의 침체 속에서 인간 존재 안에서 영혼과 육체가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를 잘 보여주었던 인물입니다. 그가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는 어김없이 육체의 큰 고통이 찾아왔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참회할 때 자신의 살가죽이 뼈에 붙는 것 같은 상태가 되었고, 눈이 깊이 패여 가련한 처지의 육체가 된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회개와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진지하고 절실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 그는 영혼만 병든 것이 아니라 육체도 깊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 속에 살았던 시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잘 되고 좋은 때는 표가 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잘 안되고 어둡고 힘든 날에 신자가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갈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간절한 갈망과 몸부림이 얼마나 절실한가 하는 것은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은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종종 당신이 아주 많이 사랑하는 자녀인데도 그릇 행하고 당신을 떠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떠남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받게 되는 큰 고통과 괴로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 기회로 삼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고통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자비 속에서 그분의 말씀의 빛 아래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을 말씀의 빛이 없는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끊어진 단절 속에서 살아가게 될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그것이 없으면 단지 그것이 없을 뿐이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없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범죄함으로 영혼은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고 육체는 고통 하는 영혼으로 말미암아 질병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시인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탄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는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아뢰며 그 영혼을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빈약한 자를 붙들어 주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 병들었을 때 주님이 그의 육체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질병 중에서 건져주시는 것처럼, 그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병들었을 때도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영혼의 깊은 질병의 상태로부터 건져달라고 빌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병들지 않는 건강 속에서 육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찌 병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병이 들게 된다면 즉시 그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육체는 한 때 병들었으나 다시 건강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순결하고 하나님 앞에 죄짓지 않은 상태 속에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장 경건한 신자의 영혼이라도 범죄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하나님 앞에 말씀과 은혜의 감화를 입어 빈약한 자를 붙들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면서 섬기던 사람도 때로는 죄를 짓고 영혼이 추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육체와 같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치료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치료를 통해 고침을 받음으로써 영혼은 본래의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푸시는 은혜와 무한한 용서
하나님이 은혜의 언약 아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무한한 두 개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끊임없는 은혜의 베푸심과 그렇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무한한 용서입니다. 하나님을 늘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의지하였던 경건한 성도들은 한결같이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지은 많은 죄와 불순종을 통해서 오히려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불순종과 죄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으로 곤고해진 영혼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자신의 영혼에 진정한 쉼과 위로를 줄 수 없고, 영혼이 병들었을 때 참된 치료를 가져다줄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며 사는 것 외에는 인간에게 아무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왓슨 같은 후기 청교도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말하기를 “육체의 양식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떡과 물이지만, 영혼의 양식은 바로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것인데 바로 하나님의 용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에게 죄가 많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진실한 뉘우침, 자신이 무엇을 행했든지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보여드리는 자기 개방,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엇 하나도 하나님 앞에 숨기는 것이 없는 솔직함과 진실함, 하나님 앞에 일시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고 뼈아픈 양심의 가책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과의 참다운 사랑의 관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진실함과 성실함, 그것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다시 일어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짓과 허위, 위선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한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말씀의 찬란한 빛 앞에 자신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아름다운 헌신으로 다시 옷 입기 위해 주님의 은혜를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 세상에서 죄를 용서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은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손에 붙잡히는 떡과 물, 육신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받은 감격은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물에 새기는 것 같이 잊혀집니다. 그러나 우리를 죄 가운데서 건져주신 십자가의 사랑,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도탄에 빠진 영혼의 상태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죄의 은혜, 이것은 돌에 새긴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잊지 않고 우리의 가슴에 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당하게 대해주시는 것 같을 때 우리를 어떻게 용서해주셔서 어떻게 당신의 자녀 삼으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나를 소외시키는 것 같은 외로움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회상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 앞에 용서 받기에는 너무나 큰 죄를 지은 것 같을 때 주님이 우리를 어떤 죄악 가운데서 건져주셨는지, 그리고 주님을 믿고 알게 된 후에 우리의 삶과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반역하던 우리의 옛 삶을 한번 대조해 보십시오.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사랑이며 자비인 것입니다.
원수가 나를 저주할 때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5-9)
원수들에게 당하는 고통
시인은 인생의 깊은 시련 속에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하나님 앞에 네 가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악감’(惡感)입니다. 원수들이 자기를 에워싼 가운데 “저 인간이 병들었으니 저가 언제 죽고 언제 멸망할까?” 그러면서 악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존재 자체가 소중합니다. 반면에 이득과 상관없이 그가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미움의 감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당하게 된 모든 고통을 토해 놓습니다.
두 번째는 ‘광포’(廣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명예를 깎아 내리는 행위입니다. 시인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 다 나쁜 것은 아니었는데 원수는 모든 것을 악하게 해석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광포하고 선전해서 시인이 그동안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쌓아왔던 아름다운 덕과 명예를 허물고 있는 것입니다. 몸이 상하는 것은 조금 상하는 것이지만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자기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할 정신적인 기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훨씬 더 큰 고통일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시편 41편은 아마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썼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다윗과 같은 임금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습니다. 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올바르게 행한 모든 임금들의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사람들은 다윗의 길로 행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윗의 길로 행하지 않고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편에서 어떤 사람의 분명한 기준이 됩니다.
그가 백성을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권력 있는 자들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억울하고 병들고 빚지고 원한이 맺히고 사울의 치하에서 밟힐 대로 짓밟힌 불쌍한 백성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는 일평생 자신을 백성들의 목자처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면서 백성들을 이끌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자, 수많은 원수들이 그에 대해 거짓을 말하며 그가 행한 것들을 악하게 말해서 명예를 깎아 내리고 소문을 냈던 것입니다. 결국은 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을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모든 사람들에게 이를 광포해서 결국은 시인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지도력을 잃어버리도록 조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당한 두 번째 고통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저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병이 걸려 누웠을 때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이러면서 저주를 퍼부었던 것입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항상 다윗의 가까이에 있던, 자기가 신뢰하고 사랑하고 함께 떡을 먹으며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들이 이 틈을 타서 다윗을 배신한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 의해 반역을 당할 때 다윗과 함께 일생을 같이 하고 피붙이처럼 여기며 돌봐주던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앞세워 반역을 일으켰던 때의 사건들을 회고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자기 자식으로부터 시작해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사랑하는 전우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자기를 향해 발뒤꿈치를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담을 당하고, 명예를 실추 당하고, 저주를 받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향해 배신의 발뒤꿈치를 드는 상황이 되어 철저히 고립된 가운데 시인은 이제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환영만 받고 사랑만 받고 존경만 받고 대접만 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이 자신에게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해도 당신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기를 원하시지, 당신과 상관없이 그것들을 사랑하고 거기에 헌신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당신이 정말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마음 둘 곳 없는 삶의 상황에서 대적들에게 에워싸이고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순간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밖에는 자신에게 소망이 없다는 것을 이런 사건을 통해 시인의 가슴 속에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배신과 저주 속에서 내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주님을 의존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지만, 그것을 통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마음과 심령을 깨끗이 고쳐서 당신을 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인을 징계하였으나 당신이 사랑하는 시인을 괴롭혔던 악인들의 행실에 대해 공정하게 갚으실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허물이 많아 주님이 사람을 들어서 우리를 정결케 하실지라도 우리를 악담하고 거짓을 선전하고 저주하고 배신했던 모든 인간들을 하나님께서는 정죄하실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인생을 살면서 이런 깊은 고난의 때 어디 한 곳도 의지할 곳 없는 절대적인 고통과 괴로움의 때 주님을 붙드는 것 외에는 어는 곳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침묵하며 벙어리가 되고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귀머거리가 되고 진실하게 자신을 살피며 눈먼 자가 되어서 마음속으로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참된 복수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시 41:10)
본문해설
시편에 보면 복수에 대한 기도가 자주 격렬하게 나타납니다.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해 주시도록 비는 기도와 “내게 힘을 주셔서 내가 저들을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계시가 충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 것처럼 풍성하게 전달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본래의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계시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큰 사랑이 언약백성들에게 독점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시편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만민들과 이 땅에 있는 많은 짐승과 식물들을 먹이고 기르신다는 신앙의 고백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큰 은혜, 이런 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점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을 아는 지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편에 이런 내용들이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증거가 예수님이 오시고 당신 자신의 삶과 십자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성령이 강림하셔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깨닫게 하시기 전까지는 제자들도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때까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 하고 물어볼 정도로 모든 생각이 이스라엘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에서 복수를 비는 기도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런 것은 사실이지만, 시편에 나오는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는 개인의 원수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대적하는 원수들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행복을 위한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온전히 서서 그분과 연대를 이루는 언약백성으로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본질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펼쳐지지 못하도록 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들을 복수해 주시도록 자신 있게 하나님께 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방해받지 않고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결국 원수들의 멸망을 비는 그들의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두 가지의 이유로 시편 안에는 원수들의 멸망을 빌고 대적하는 자들의 저주를 비는 기도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옵소서”라고 비는 것입니다. 개인이 받는 고통과 괴로움을 하나님께 연합되어 있는 언약백성의 한 지체로서 당하는 공격이요 고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언약적인 연대에 의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복수를 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함
그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완벽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호와가 내 편이시니 누구를 두려워하리니까?”라고 할 수 있는 담력이 있어야 하는데, 내적으로 담대한 선언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완전한 교통,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완전한 화목이 있을 때만 이런 종류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
나의 노래이시며 나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 자신 사이에 거리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물론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매일 의지하면서 함께 동행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41편을 보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일로 인하여 깊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아도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이 필요한 것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비참함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데 불쌍히 여겨야 할 이유가 무엇이든지 지금 당신의 자녀가 처해 있는 깊은 고통의 상태 자체를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도 자녀들을 볼 때 항상 마음이 좋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놈이 무엇을 하는 것일까? 저것은 옳지 않은 행동인데.’ 그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많이 고통을 받게 되면, 그가 고통을 받고 괴로워하는 현재적인 상황 때문에 그가 저렇게 되기까지 저질렀던 많은 잘못들이 생각나지 않고 그가 처한 비참한 상태가 더 많이 가슴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성향이 없으면 그런 감정이 생겨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면 사랑이라는 다발에서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이 확 쏟아져 올라오는데 그게 비참한 것과 연결되어서 나타날 때는 긍휼로 나타납니다. 완고한 인간과 관련지어서 나타날 때는 오래 참음으로 나타납니다. 도움이 필요한 인간들을 만날 때는 자비를 통해 나타납니다. 사랑이라는 다발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프리즘을 통과하듯이 쏟아져 나오게 되면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에 따라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원수들을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 되어주셔야 하고, 자기에게 한없는 능력을 주셔서 저 원수들을 밟아 이겨야 되겠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않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죄의 흔적들이 남아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니”라고 노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를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생각함
우리의 인생의 곤고함은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직접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죄인들을 어떻게 용서해 주시는지, 완고한 자들을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 불쌍한 사람들을 어떻게 긍휼히 여기시는지, 불의한 자들을 어떻게 징벌하시는지, 고난 받는 자들을 어떻게 위로하시는지, 이런 것들을 앎으로써 직접 보아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자신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짧은 인생길, 굽기도 하여라.” 수많은 사연, 인생의 시간의 길이를 보면, 정말 짧은 것 같지만 사연을 보면 한없이 길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수많은 사연을 안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받는 유일한 위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성품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모든 사람이 남처럼 느껴지는 외로운 때에도 쓰러지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세상의 친구들이 모두 버려도 그분은 언제든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 이것을 믿고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시련과 고난이 많이 오면 그 때 우리는 하나님보다는 우리의 자신의 능력을 주목합니다. 우리의 자원으로는 이길 수 없는 환경이 우리를 누를 때 우리는 낙망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자신의 능력과 자원의 한계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전능하시도다.” 당신이 말하시는 것을 모두 시행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안에서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을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살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서 그분 앞에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국은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과 합일될 때 “저 원수들을 복수할 수 있도록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켜 주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며 믿음입니다.
완전한 중에 붙드시는 하나님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시 41:11-13)
언약백성들의 믿음
보복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어떤 의미인지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한 성품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릴 때 겪게 되는 가장 큰 고통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멀어지고 범죄하게 되면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고귀한 확신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와 맞서시고 나에게 징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나와 하나님이 한편이 되고 나의 대적자들이 나와 하나님을 맞서는 구도가 마음속에 확신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범죄한 상태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미끄러지고 범죄 해서 고귀한 확신을 상실했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 거치는 것들로 인해 죄를 지은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담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의 원수가 이기는 것을 당신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언약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입니다. 비록 자신이 죄를 짓고 잘못했지만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하고 다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게 될 때 자신의 많은 허물과 죄 때문에 주님이 자신을 징계하실지라도 악인이요 원수인 대적자들에게 자신이 파멸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택하신 언약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축복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가 잘못해서 이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하고 조금 팼습니다. 그런데 옆집 사람이 와서 이렇게 패서 되겠느냐고 하고 한대를 때리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시겠습니까? 내 새끼가 내 마음에 안 들어서 나는 팰지라도 다른 사람이 와서 패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의 관계가 그런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하나님은 그를 징계해서 책망하시고 때리실지라도 원수가 패는 것은 용서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시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원수가 나를 이기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하게 된 배경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내가 비록 하나님 앞에 잘못해서 주님께 책망을 받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당신의 사랑을 받는 한 가족입니다. 그러나 원수가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입니다.
하나님 앞에 꺾임이 있는 신앙
하나님에 의해서 꺾일 수 있는 사람들은 악인이 아닙니다. 악인은 패망하면서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꺾임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도 안 짓고 특별히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도 않고 신앙생활 해나간다고 합시다. 그것이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청교도 목사님은 말하기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잘 길들여진 짐승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짐승들도 보면 길들여지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잘못할 때가 있고 혈기로 살 때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꺾이는 사람, ‘내가 잘못됐구나. 이것은 아니구나. 내 생각이 틀렸구나. 내 의지가 너무 강했구나.’ 그리고 꺾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면 처음 주님을 믿을 때는 잘 꺾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 휘기는 하는데 꺾이지는 않습니다. 휘는 것과 꺾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휘는 것은 휘어진 것 같지만 놓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대나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휘어지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생명이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절대로 그 안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문화, 오랫동안 신앙생활 해온 교회, 자기 일에 나름대로 굳어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꺾이지 않는 완고함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본성과 충돌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반항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 사람의 본성을 건드리는 상황이 나타났을 때 절대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참지만 그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체면도 있고 여러 가지가 걸려 있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꺾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다운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 모든 것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을 맞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니까 점점 더 마음이 굳어지고 완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친밀함, 내가 비록 범죄하고 때로는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는 고백,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나를 버리지 않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큰 자비, 이런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담대하고 아름다운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신앙생활은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자기 꺾임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거기에서 많은 향기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음을 깨달음
시인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는 중에 있었습니다. 원수를 만나서 멸시를 당하고 고통받는 것조차도 어쩌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섭리 속에서 혼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원수가 이기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내 원수는 악인이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영원히 하나님 당신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 원수들이 이기도록 내버려두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인이 죄를 짓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 봤더니 마지막 도달하는 결론은 하나님을 대신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버리면서까지 얻어야 할 것은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일생을 사는 동안 허물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가 죄에서 돌이키고 난 후에는 인구조사를 하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던 끔찍한 죄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얼마나 커다란 깨달음과 변화를 받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당신의 사랑에서 미끄러지도록 내버려 두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일러주셔도 인간은 실감하지 못합니다. 잃어버리고 나서 비로소 그것을 아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불을 본 아이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호기심을 그칠 수 없지만 한 번 불에 데여 본 아이는 그 불을 두려워하게 되듯이, 경험하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큰 섭리 속에서 그렇게 하도록 허락을 하십니다. 놔두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시인으로 하여금 그렇게 해서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중에 붙드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시인은 의미심장한 고백을 하나 덧붙입니다.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단지 고통을 받고 원수들에게 시달린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범죄 해서 원수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받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완전함을 지키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면서는 “주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며 당신은 내 편이십니다.”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복종, 하나님을 향한 무제한의 헌신, 그 속에 자신은 없고 주님만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 핍박과 환란, 배신과 갈등, 이런 것들은 죄악 된 세상에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던 사람이 발꿈치를 들고 나의 가슴에 칼을 찌르는 괴로운 일들은 이 세상에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일들이 늘 있는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이 내 편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붙어있고 자신의 모든 삶에서 온전해지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갈 때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보호하십니다.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인간들을 붙드셔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일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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