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2015년 새해말씀사경회 저녁설교)
설교기간|2015년 1월 12일-2월 1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5년 3월 2일
목 차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1 (2015.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2 (2015.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3 (2015.0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하나님 4 (2015.0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5 (2015.1.16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사랑하신 하나님(호 11:1) 2015.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2. 부르시는 하나님(호 11:2) 2015.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3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6 (2015.1.18 주일오전설교)
3. 안으시는 하나님(호 11:3) 2015.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4
4. 고치시는 하나님(호 11:3) 2015.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34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7 (2015.1.25 주일오전설교)
5. 이끄시는 하나님(호 11:4) 2015.1.16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47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8 (2015.2.1 주일오전설교)
6. 물러간 자여 돌아오라(호 11:5-7) 2015.1.18 주일오전 58
7. 불붙는 긍휼을 알라(호 11:8) 2015.1.25 주일오전 67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9 (2015.2.8 주일오전설교)
8.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호 11:9) 2015.2.1 주일오전 76
9. 주께서 부르시는 날에(호 11:10-11) 2015.2.8 주일오전 85
10. 신실하신 하나님(호 11:12) 2015.2.15 주일오전 93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1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1 (2015.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2 (2015.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3 (2015.0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하나님 4 (2015.0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5 (2015.1.16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6 (2015.1.18 주일오전설교)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7 (2015.1.25 주일오전설교)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8 (2015.2.1 주일오전설교)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9 (2015.2.8 주일오전설교)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10 (2015.2.15 주일오전설교)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1) 2015.01.12(월)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 사랑하신 하나님 >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호 11:1)
I. 본문해설
- 호세아서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
- 주전 8세기 여로보암 2세 때 선지자
- 북이스라엘 선지자로 유대 향수함
- 번영의 시대에 신앙이 피폐 지적함
- 뼛속까지 타들어간 사랑으로 선포
- 예수 그리스도 가리킨 예표적 인물
- Hosea 가정1∼3, Israel 배반 4∼13, 회복 14장
II. 자기 백성을 부르심
- 자녀 관계로 부른 자를 포기 않으심
A. 애굽에서 부르심
- "애굽으로부터 그를 내 아들로‥"
- Israel '내 아들' 부름 출애굽부터
- 출 4:22∼23. 아기 예수 부름 마 2:15
- 종살이로 고통 받음 죄에서 구원함
- 신자 의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함
B. 어렸을 때 부르심
- naal 유아, 어린이, 젊은이 가리킴
- 숫적 아닌 영적 신앙적 어림 가리킴
- 지금은 장성함: 국가번영+신지식
- 인생 지혜와 지식 없던 때 기억하라
- 그런 자들 구원해 양육하신 하나님
- 구원 은혜 못잖은 교회 통한 돌보심
C. 사랑으로 부르심
- waohabehu: "또 내가 그를 사랑‥"
- ahab 선택애와 신적속성인 사랑임
- "아들"로 부른 사랑은 혈연적 사랑
- 남녀사랑의 열정 부자 사랑의 깊이
- 인간의 경험상 최고 사랑으로 묘사
- 완전한 아버지로서 자녀 사랑하심
- 사랑으로 구원, 인도와 보호하심
- 선지자 가슴을 찢어 Israel 부르심
- 신자 의무는 하나님 사랑을 기억함
III. 적용과 결론
- 번영 속에 하나님 잊고 살지는 않나
- 범죄 했을지라도 경고하며 부르심
- 당신의 백성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
- 처음 부르실 때 그 사랑을 기억하라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2) 2015.01.13(화)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 부르시는 하나님 >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호 11:2)
I. 본문해설
- 사랑하는 하나님과 대조 이룬 반역
-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은혜 잊음
- 세속적 번영 속에 종교를 잃어버림
* 여로보암2세
a. 예후왕조 네 번째 왕 (BC 793-753)
b. 최고의 황금기: 정치, 군사, 경제
c. 수리아와 전쟁 승리, 유대를 압박
d. 최대영토: '하맛에서 아라바해’
II. 부르시는 하나님
- 죄악 클수록 간절히 부르신 하나님
A. 선지자를 보내심
- "그들이 저들을 불렀다" 선지자들
- 선지자의 사명 백성을 하나님께로
- 말씀을 선지자 통해 보내사 인도함
- 시대 어두울수록 큰 선지자 보내심
- 항상 말씀 주시나 귀 기울이지 않음
- 듣고자 하는 자에 말씀하시는 주님
B. 멀리 떠난 백성들
- "그들의 면전으로부터 걸어갔다"
- 선지자들 면전서 살아야 할 백성들
- 하나님 말씀 앞에서 살아야함 의미
- 어떤 삶의 상황이든지 말씀 소망함
- 하나님의 선하심 말씀으로 보이심
C. 우상 숭배에 빠짐
- Baalim '바알들': BC 3천∼1천년 경
- 농경신, Astarte 및 여신들과 성교
- 농사의 주기와 바알 성소에서 혼음
- 우상숭배의 이중 유익: 번영+쾌락
- 하나님과 바알에 함께 제사한 백성
- 종교적 혼합주의는 세속성 경고임
- 신앙 형식만 아니라 내용에 마음 씀
III. 적용과 결론
- 말씀으로 당신 향해 살도록 부르심
- 하나님의 면전에 사는 행복을 알라
- 범죄와 불순종했어도 다시 부르심
- 아내로 인해 찢는 슬픔 속에 선포함
- 그리스도 통해 하나님 마음보이심
- 백성 돌아오도록 부르며 기다리심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3) 2015.01.14(수)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 안으시는 하나님 >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호 11:3)
I. 본문해설
- 이스라엘 반역과 하나님의 신실함
- 자기 백성에 베푼 은혜 상기시키심
- 번영 때문에 바알 섬겼지만 부르심
- 바알이 할 수 없던 일을 생각나게 함
- 이것은 모두 사랑의 추억 담긴 것임
II. 고치시는 하나님
- 고멜처럼 타락한 백성을 찾아오심
- 이스라엘의 장점 아닌 신적 사랑임
- 자녀들과 사랑스런 유년시절 보임
A. 걸음을 가르침
- tirgalti "내가 걸음을 가르쳤다"
- weanoki: 내가 "한 게 바로 나였다"
- ephraim: 북왕국 이스라엘의 애칭
- 혹자 "에브라임위해 내가 걸었다"
- 에브라임과 유다 모두 같은 유년기
- 장성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 단순한 걸음 아닌 왕 앞에 행하는 것
- 어린 우리 왕이신 하나님 앞서 행케
- 사람으로 나신 예수께서 가르치심
B. 두 팔로 안으심
- "그가 그의 팔들로 그들을 취했다"
- 3ms로 앞 구절과 주어의 연결 깨짐
- 칠십인역 1cs로 바꿈 한글, RSV 등
- qaham: infinitive 혹은 perfect
- al zerootaiu "그의 팔들로써"
- 직접화법서 간접화법으로 넘어감
- 출애굽의 회고 "안으사" (신 1:31)
- "독수리 날개로‥업어" (출 19:4)
- 애굽 노예의 숙명적 줄 끊어 취하심
- 연약의 자녀들 건져내고 보호하심
- 구원이후 하나님의 인도 생각하라
C. 이스라엘을 고치심
- ki repatim "내가 그들을 고쳤다는 사실을"
- "질병∼치료하는 야훼" (출 15:26)
- 현실적으로 전쟁 다음 두려운 것임
- 예수님의 치료 사역 신적 성품 계시
- 영혼의 질병치료의 가능성 보여줌
- 패역한 이스라엘을 고치신 것처럼
- 때리시고 고치는 하나님께 돌아감
- 말씀으로 고치시는 하나님의 사랑
- 사랑으로 고치는 하나님을 만나라
III. 적용과 결론
- 구원하고 가르치고 보호하신 주심
- 배역하는 동안 망가진 영혼 고치심
- 사랑으로 이끌려온 날을 기억하라
- 다시 고쳐 당신 앞에 사랑받게 하심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4) 2015.01.15(목)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 고치시는 하나님 >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호 11:3)
I. 본문해설
- 번영에 취한 백성과 빛바랜 사진들
- 바알과는 나눌 수 없었던 그 추억들
- 유아시절 아버지 같은 하나님 사랑
- 걸음 가르치고 두 팔로 안으신 주님
II. 고치시는 하나님
- ki repatim "내가 그들 고쳤다는 것을"
A. 야훼 라파
- "질병∼치료하는 야훼" (출 15:26)
- 마라의 쓴물이 나무로써 단물이 됨
- 애굽의 질병과 이스라엘 보호 대조
- 질병 고침 뿐 아니라 예방 보호 포함
- 민 21장 음식 원망 불뱀사건과 놋뱀
- 요 3장 믿음과 놋뱀 바라봄+예수님
- 육체→영혼으로: 관심이 승화함
B. 영혼을 고치심
- 애굽에서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심
- 마라의 쓴물 고치고 불뱀 치료하심
- 패역한 마음의 병을 고치신 하나님
1. 말씀을 보내심
- 지성을 일깨우사 지식을 주심
- 객관적 말씀으로 주관적 반성
- 이해되는 지성 안에 영광 받음
- 삶의 개혁보다 생각 변화 필요
- 말씀은 익숙한 자기를 떼놓음
- 아픔을 동반하지만 소망 있음
2. 은혜를 베푸심
- 은혜는 선한의지에 힘을 베풂
- 사랑의 감화로써 감당하게 함
- 영적 힘으로 감당하게 도와줌
- 얽매임 끊음: 세속애+미워함
- 사랑의 힘의 부족과 인생문제
- 숙명같은 속박을 이길 힘주심
C. 관계를 고치심
- 망가진 관계는 영혼의 질병 입증함
- 말씀과 은혜로 생각과 의지가 바뀜
- 자기사랑과 아집으로 파괴된 관계
- 진리 앞에 자기세움과 은혜로 이김
- 하나님과 관계고침 수술중 도주함
- 말씀에 다루어질 때 자신도 온전케
III. 적용과 결론
- 추억 속 유년시절 사진과 치료사건
- 하나님의 선택애와 전능성 보여줌
- 절망적인 망가짐도 주님은 고치심
- 아픔 통해 온전히 치료하는 하나님
- 치료 동기가 사랑이니 소망 가지라
- 하나님 안에 참 자유가 있음을 알라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5) 2015.01.16(금)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 이끄시는 하나님 >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4)
I. 본문해설
- 이스라엘에게 제시한 빛바랜 사진
- 어릴 때 사랑하고 버린 것 아닌 관계
- 광야생활을 상기시키시는 하나님
- 그의 이끄심은 바로의 억압과 대조
- 채찍대신 사랑의 줄과 멍에를 드심
II. 이끄시는 하나님
- 사랑의 선택은 목적을 가진 은혜임
A. 사랑의 줄로 이끄심
- behable adam "사람의 줄들로써"
- 이는 "선택적 사랑의 줄들"이었음
- 어린아이에 걸음을 가르치는 줄임
- 짐승이나 육축을 매는 줄과는 다름
- 애굽 속박과 하나님 인도를 대조함
- 인격적 감화로 우리의 이끌어 내심
- 기다리고 말씀으로 설복하신 주님
B. 멍에를 들어주심
- "나는 그들 위해 멍에 올린 자였다"
- 편하게 음식 먹게 하시려고 배려함
- 멍에는 받을 갈게 하려고 씌운 기구
- 이중적 a 심판 10:11 b 인도 Mt 11:29
- 그들에 준 계명과 언약적 사랑 의무
- 무거운 것 아니라 자유를 주는 배려
- 죄 용서, 양심의 자유, 은혜의 해방
C. 먹을 것을 베푸심
- "또 내가 친절히 그에게 먹게했다"
- 만나 사건, 기브롯하타다와 Nu.11
- 매일 엄마처럼 식탁을 차려 먹이심
- 바알이 해준 적 없는 가족관계 보임
- 이제껏 말씀 베푸신 은혜 기억하라
- 내가 먹은 것이 아니라 먹게 하셨음
- 말씀 의미 각도 하나님 은혜 작용임
- 이해하려는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
III. 적용과 결론
- 번영에 취해 주님을 잊은 자 부르심
-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가족 관계임
- 인격적 사랑의 인도는 우리 위함임
- 다시 가족 관계로 부르시는 하나님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6) 2015.01.18 주일오전예배
< 불붙는 사랑을 알라 >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 11:5∼7)
I. 본문해설
- 하나님의 번영을 바알에 영광 돌림
- 바알이 줄 수 없는 언약의 묶인 관계
- berit/(Akk.)baritu 운명공동체
- Israel 미래적 형벌과 현재적 냉담
-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하나님 사랑
II. 이스라엘의 반역
A. 애굽을 그리워함
-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리∼" (5)
- 어차피 하나님과의 관계는 못 끊음
- 애굽은 하나님과 소명 없는 평안함
- 고통대신 죄악의 낙 기억. Hb 11:25
- 하나님 없던 삶으로 회귀할 수 없음
- 약속 땅에 가든지 광야에서 죽든지
B. 앗수르가 지배함
- Assyria, BC 2천년경. 북 Mesopot.
- 주전 930 왕국 분열-여로보암 반란
- 솔로몬 복수-애굽–여로보암 등극
- 최후 왕 호세아, 208년 19명의 왕들
- 호세아 조공중단과 살만에셀 침공
- BC. 722 멸망 은혜통치 or 죄의 억압
C. 하나님을 떠나감
- "나로부터 돌아설 것을 결심하여"
- 끈질긴 반역에 선지자들을 더하심
- 하나님께 돌아오라 부르시는 사랑
- 그때 그 바알신은 어디 있었을까?
- 번영준적 없고 아수르 막은적 없음
III. 적용과 결론
- 이처럼 우리를 사랑한 이가 없었음
- 사람은 물론 바알처럼 섬긴 세상도
-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곧 돌아오라
-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들을 고치심
우리를 고치시는하나님(7) 2015.01.25 주일오전예배
< 불붙는 긍휼을 알라 >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8)
I. 본문해설
- 하나님 없는 번영과 평안 그리워함
- 이스라엘의 반역에 대한 주의 경고
- 앗수르의 정복과 바알신의 무능함
- 징계 아니라 회개와 돌이킴 구하심
- 뼈속까지 타는 주 하나님 사랑 현시
II.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
A. ‘에브라임’을 부르심
- 빛바랜 가족사진들 보이며 부르심
- "에브라임이여‥내가 어찌 너를"
- 불순종했으나 여전히 사랑하셨음
- "지명해‥너는 내 것이라" 사 43
- "내종‥잊히지 않으리" 사 44:21
- 참사랑은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임
-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사랑함
- 어디 있든지 그대들은 '에브라임'
B. 버리지 않으심
- "놓겠냐‥버리겠냐‥두겠느냐"
- 부사가 4번이나 반복됨 "어찌" eek
- 에브라임 버림 신적 속성과 모순됨
- 아드마와 스보임: 창 14, 28; 신 29장
-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받은 도시들
- 그 백성들에겐 가족사진이 없었음
- 이스라엘 차마 버리지 못한 하나님
- 우리 사랑 아닌 하나님 사랑에 달림
C. 불붙는 긍휼하심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켜" (8)
- 공의에서 긍휼로: 비참에 슬퍼함
- 사랑의 세 측면: 인내+자비+긍휼
- "내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 하나님 긍휼을 최고 정동으로 묘사
- 죄악이 아닌 '내 아들'을 향한 사랑
- 악은 미워하시나 죄인을 사랑하심
- 그리스도께서 긍휼의 본을 보이심
- espranknisthe 정동: 신적 긍휼임
III. 적용과 결론
- 이처럼 우리를 사랑한 이가 없었음
- 사람은 물론 바알처럼 섬긴 세상도
-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곧 돌아오라
-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들을 고치심
우리를 고치시는하나님(8) 2015.02.01 주일오전예배
< 이스라엘의 영적회복 >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 (호 11:9)
I. 본문해설
- 세속적 번영만을 추구하며 하나님 배반함
- 이스라엘의 반역과 멸망을 경고하심
- 그러나 뼛속까지 타 들어가는 하나님 사랑
- 4번 "어찌", Israel을 버리지 않으심
- 진노 중에 은총과 회복을 예고하심
II.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
- 세 가지 질문:
a. 앗수르 침공과 멸망의 예언의 취소인가?
b. "다시는 (또다시)‥ 멸하지 아니하며" 뜻은?
c.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의 뜻은?
A. 맹렬한 진노 아님
- 역사적 BC. 722년 이스라엘 멸망함
- 앗수르의 북왕국 침공 취소가 아님
- "맹렬한 진노"와 "멸하지"의 참뜻
- 완전한 심판으로 황폐와 멸절을 뜻함
- 이스라엘 후손들이 받을 복 가리킴
- 이스라엘의 심판이 영적회복을 바라봄
- 육적 이스라엘 아닌 영적 이스라엘
- 남은 자를 뿌리 삼은 영적 이스라엘임
- a. 국지적: 긍휼 b. 우주적: 영적회복
- 당신께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 진노 중에 긍휼 베풀어 뜻을 성취함
B. 멸하지 아니하심
-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며"
- lo ashub "다시는‥아니하리니"
- 에브라임은 두 번째 소돔 같은 땅임
- 예루살렘 "새 소돔" 같음 (사 1:10)
- "세 자매: 예루살렘, 사마리아, 소돔" (겔 16:46)
-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반복치 않음
- 긍휼 없는 심판으로 땅을 정화하심
-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심
- lo abo beyir "진노로써 들어감"
- 심판을 위해 소돔으로 들어가신 여호와 (창 19장)
-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9절)
- a. 사랑 b. "식언치 않음" (민 23:19)
- "거룩한 자니": 이스라엘 심판에 관계됨
- 심판치 않기 위해 성에 들어가지 않으심
C. 이스라엘을 회복하심
- 완고한 반역과 불붙는 사랑의 권고
- 심판을 예고하며 당신께로 부르심
- 징계할지라도 Israel 통한 우주적 계획 성취함
- "찢으셨으나 ~ 치셨으나" (호 6:1)
- 옛 Israel; 돌 마음으로 돌이키지 않음
- 주님이 새 언약, 살 같은 마음 줌 (겔 11:19)
- "마음 가죽 베고 여호와께 속함" (렘 4:4)
- 영혼을 돌이켜 하나님의 생명에 잇대어 살라
III. 적용과 결론
- 불순종과 배역의 길을 간 이스라엘
- 그 결과로서 당한 비참에 아파하심
- 불순종한 우리에게 고통이 있을 수 있음
- 죄를 향한 미움과 죄인 향한 큰 사랑
- 뼛속까지 불타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이심
- 더 늦기 전에 돌아와 주님과 함께 살라
우리를 고치시는하나님(9) 2015.02.09 주일오전예배
<주께서 부르시는 날에>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호 11:10~11)
I. 본문해설
- 육적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굳은 마음
- 영적 이스라엘과의 새 언약, 새 마음
-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개 아닌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
-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사랑과 신실함으로 하심
- 신약시대에 있을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
II. 주께서 부르심
A. 사자처럼 부르심
- “사자” (aryeh): 능력과 위엄의 상징
- 부정과 긍정 모두: 포악함 (신33:20), 담대함 (잠28:1)
- 사자 소리의 양면성
a. 하나님 백성의 보호
- 무기력한 포로로 사는 자를 부르심
- 운명처럼 매인 삶에서 구원해 주심
- 약한 에브라임은 거절하고 멸망하였음
- 새 언약의 백성들을 복음으로써 부르심
-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파하심
b. 이방에 대한 심판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암3:8)
- 구약 “여호와의 날”의 양면적 성격: 긍휼 + 심판
- “소리를 발하심” 하나님께서 심판하심 (사27:13)
-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억압의 사슬을 끊으심
B. 떨며 나오는 자녀들
- "소리 내시면... 자손들 떨며 오되"
- 해석상 두 난점
a. “자손”(banim)과 “서쪽에서”(miyyam)
b. "바다로부터(의) 자손들이" (LXX)
- 애굽과 앗수르는 서쪽지역이 아니라 남쪽과, 동쪽임
- “서쪽”(yam)과 “바다” 두 의미
- 서쪽이 물론 “바다”이지만, 먼 바다 건너 섬들을 의미함
- 애굽은 남방을, 앗수르는 동방을 대표 한다
- 마지막 날에 사방에서 그리스도께로 올 것을 의미함
- 이방인들이 회심 통해 새 이스라엘이 될 것 예언
- 서로 다른 이유로 떨며 주께 나아옴
- 떨림: 심판 대상자들(두려움) + 언약자들(사랑)
- 육적 이스라엘. 애굽과 앗수르로 흩어짐
- “새 같이, 비둘기 같이” 귀소 본능
- 연약하지만 제 집을 찾는 비둘기 비유
C. 그들 집에 거주케 하심
- 애굽과 앗수르는 그들의 집이 아님
- 세상에서 번영을 꿈꾸나 영원한 집이 아님
- 그들의 집은 여호와와 함께 하시는 집
- “거주하게 하리니∼” (wehoshabtim)
- 버리지 않으심 (신4:31. 시37:28)
- 그리스도의 이름 임마누엘 함께 함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키는 능력자
- 당신을 떠난 자들이 우둔함을 깨닫게 하심
- 회복의 은총이 능력과 함께 나타남
- 약속을 따라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 주님께로 돌아와서 함께 동거하며 살라
우리를 고치시는하나님(10) 2015.02.10 주일오전예배
<신실하신 하나님>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 (호 11:12)
I. 본문해설
- 불순종한 에브라임과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
- 뼛속까지 불붙는 사랑과 안타까움
- 육적 이스라엘의 패역과 영적 이스라엘의 돌이킴
- 우주적 계획에도 불구하고 에브라임은 불순종 함
II. 하나님 백성들의 죄
-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동일한 반역
- 유다왕 웃시아, 아하스, 히스기야
A. 거짓과 속임수
- 먼저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함
- “나를 에워싸고”
a. 하나님과 다툼
b. 온갖 악으로 전면적 도전을 시도
- “거짓“ kachash: 실망, 속임, 실패
- “속임수“ mirma: ”배신“ (왕하 9:23)
- 마음을 떠나 형식만 남은 이스라엘의 신앙
- “에브라임” 애정 표시 “이스라엘” 언약의 표시
- 주님 경외함이 없으나 철저히 배교하진 못함
B. 정함이 없는 마음
-이어서 유다의 불신앙을 탄핵하심
- “정함“ rad를 ”다스리다“(yadah) 보는 견해
- 원형 rud ‘오락가락하다’ 라는 의미임 Q.3.ms
- 마음의 고정됨 없음 “신앙과 배신”을 오감
- 세상 번영과 하나님 두려움 사이에서 방황
- 마음을 확정한 자에게 주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III. 이스라엘의 하나님
A. 신실하심
- “신실” nehman 진실하심의 언약적 적용
- ‘진실’ 진리에 부합한 상태 모순 없는 주님
- 언약 관계에 적용, 거짓 속임수 없음
- 세상 번영과 신앙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스라엘
B. 거룩하심
- qodeshim 장엄, 신비의 복수 명사
- 관계에 있어 구별과 배타적 봉헌임
a. 존재적 초월성
b. 도덕적 완전성
- 이스라엘을 향한 요구 거룩한 존재 울림
- 하나님과의 평화와 온전한 생활함
- 여전히 당신의 불현 하는 계획을 이룸
IV.적용과 결론
- 하나님 언제나 우리에게 신실하심
- 번역에서 돌아오는 자에게 경험됨
- 거룩하셔서 당신의 뜻을 꼭 이루심
- 신앙은 주님 마음을 알고 돌아오는 것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1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1 (2015.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2 (2015.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3 (2015.0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하나님 4 (2015.0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5 (2015.1.16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6 (2015.1.18 주일오전설교)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7 (2015.1.25 주일오전설교)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8 (2015.2.1 주일오전설교)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9 (2015.2.8 주일오전설교)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10 (2015.2.15 주일오전설교)
사랑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호 11:1)
녹취자: 백지영
I. 본문해설
호세아서 전체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저는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을 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태생은 북이스라엘 출신의 선지자였지만 영적으로는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땅에 대한 깊은 신앙적 향수를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선지자이면서도 유대를 향해서도 말할 수 없는 애정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중 이 여로보암 2세는 아마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영명하게 빛나는 지도력을 행사했던 탁월한 군주였습니다. 이때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번영한 시대에 나라는 아주 놀라운 커다란 국운을 맞이하였고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적으로 아주 활기차고 번영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는 심각한 타락이 일반화되던 때였습니다. 모두들 번영한 시대이기 때문에 국운의 상승기를 맞이했다고 하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사태로는 준엄하게 책망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전달해 주어야 하지만 그러나 이 선지자는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북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평화로워 보이고 국운의 상승기를 맞이한 것 같은 이스라엘의 기초는 무너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랑으로 불러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간절히 부르짖게 하신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호세아’라고 하는 것은 ‘구원한다.’ 혹은 ‘구원’이라는 의미입니다. ‘호세아’, ‘여호수아’ 모두 다 구원과 관련된 이름이고, 그 큰 능력의 하나님이 이 선지자를 통해서 방탕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기를 간청하고 계시다는 점에서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 중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탁월하게 예표하고 있는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호세아서는 전부 14장으로 되어 있는데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눠집니다. 첫 번째는 1장서부터 3장까지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을 다루고 있고, 4장부터 13장까지는 이스라엘의 배반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4장에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국지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마지막 때에 맞이하게 될 위대한 복음의 영광과 번영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II. 자기 백성을 부르심
오늘 이 1절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님”, 이것이 1절의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을까요? 이것을 5일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A. 애굽에서 부르심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를 알리시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과 당신 자신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애굽에서 그들을 불러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애굽으로부터 그를 내 아들로 불러내었거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조금 차이가 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때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을 전체를 가리켜 “내 아들”이라고 호칭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그래서 모세의 지도력을 따라서 출애굽을 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내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이나 거기에 있으며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는데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구원의 동기가 얼마나 애틋한 사랑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발적으로 시작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할 때부터 이삭에게 야곱에게 그리고 요셉에게 이미 하나님이 베푸신 언약을 따라 이루어진 선택하시는 사랑이었고, 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거기에서 구원하셔서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운명처럼 거기 매여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그 백성을 구지 불러내어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그리고 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이 땅의 인류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그 모든 민족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말 이상적인 인류의 샘플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사적으로 얼마나 절묘하냐 하면, 출애굽기 4장 22절 23절 사이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시면서 그들을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 헤롯이 아이들을 살해하니까 예수님이 피신하신 곳이 애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자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돌아오십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마태복음 2장 15절에서 “내가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바로 아래서 종살이를 하던 그들을 불러내셔서 옛 이스라엘을 만드셨다면 이번에는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그 아들 한 사람 예수를 애굽에서 불러내심으로 신약의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교회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구약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하나의 씨앗이 되어서 심겨지고 그 심겨진 것들이 모두 썩고 죽으면서 신약의 교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약의 교회가 다시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서 사라지면서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시 썩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다시 썩지 않는 영원하고 완전한 나라입니다. 그것이 신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나라가 어떻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종말이 오고 어쩌고저쩌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미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 용해되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신약의 교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제 이 신약의 교회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소진되고 소멸되면서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찬란하게 서게 되는데 여기에 있는 그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그 통치는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며 그 통치는 그 영광이 신약의 교회와 구약의 이스라엘이 보여주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영광을 가진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번영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불순종하며 악한 길로 걸어가고 있을 때 그들에게 너희들이 그렇게 살면 준엄한 심판을 내려서 너희를 피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속에서 새까맣게 잊혀 가고 있는 옛날의 한 사건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그것은 곧 “너희는 내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에 불러낸 백성들이다. 내 아들들이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질 때 이미 그 사람 자신의 마음이 굳어지고 휘어져서 미끄러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향해서 네가 계속 그렇게 불순종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을 하셔도 그는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누가 갖고 있냐 하면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올바로 즐거워하고 두려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감정들이 평범한 사람으로서 이것들이 작동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인지 모릅니다. 정신적으로 폐쇄공포증이라든지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만 들어가도 숨을 못 쉬는데 엘리베이터 안에 뭐가 있습니까? 늘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것인데 어마어마한 공포로 밀려와서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벌써 정신이나 상태가 이상이 온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우리가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영혼과 정신의 기능과 작용들이 튜닝이 잘 되어 있습니다. 슬플 때 슬프고 울 때 웁니다. 그래서 한참 은혜 받은 사람들은 꼭 사춘기소녀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말씀을 전하다 조금만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배꼽을 잡고 울고 좀 슬픈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펑펑 흘립니다. 좀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면 분노할 줄도 알고, 이게 정상적인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깊이 침체되어 있고 그 다음에 무지한 상태가 계속 되면 웃기는 이야기를 해도 웃지도 않습니다. 슬픈 이야기를 해도 덤덤합니다. 그러니까 마음 자체가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런 번영을 주셨지만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나니까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오늘 이 번영을 누리며 사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그들을 건져주셨기 때문이고 그것에 대한 은혜에 자기 조상들은 감격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모두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영 속에서 숙명적으로 자신들이 종살이하던 그 애굽의 땅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셨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비어있는 땅도 아니고 이미 기라성 같은 족속들이 차지하고 있던 가나안 땅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정복하여 그 땅을 유업으로 누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에 다가오지도 않는 회개를 하려고 눈물 짜지 말고, 여러분이 살아온 삶에 잘못이 있고 없고는 모두 덮어두고, 오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처럼 오늘 우리는 한번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인생의 사건을 겪으면서 고통 받고 있고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것 때문에 여러분의 영혼의 자유가 없고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분명히 여러분에게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은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살고 죽는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원한 죽음과 삶을 갈라놓는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은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너희를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셨다고 눈물로 외칠 때 덤덤했던 것처럼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들은 제가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그 골고다 언덕으로부터 그 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해도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절대 원래는 그런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었을 때 여러분은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정말 나쁜 사람들이었지만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을 바랄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여러분의 마음에 있었을 때 여러분은 바로 그 골고다 언덕에서 2000년 전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의 마음을 찢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그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큰 사업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하인처럼 부리던 사람들도, 실패한 노동자도, 학교 선생님도, 뛰어난 학문의 세계를 가진 학자들도, 사회적인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2000년 전에 나를 위해 골고다언덕에 달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그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착한 신자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거칠어지기 전 까지는 말입니다.
일평생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가르쳐준 그 많은 교리, 그 많은 성경, 그 많은 설교들, 신학지식들을 다 잊어버려도 하나만 간직하고 있으면 여러분은 충분히 승리한 사람입니다. 나이 많아 치매가 올 지경에 이르러도 잠시 정신이 돌아올 때, 맞아,
(찬양)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마지막 피한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그래서 깊게 골 패인 할머니의 얼굴에, 백발로 얼룩진 할아버지의 얼굴에 눈물이 흐를 수 있다면 여러분은 충분히 믿음으로 산 것입니다.
참 이상한 것이 사람은 길러놓으면 점점 더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철이 들고 부모님의 은공을 아는데 교인은 오래 교회 생활을 하면 반대로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방금 예수를 믿어서 어린아이일 적에는 매일 눈물이 있습니다. 왜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우리 좋으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까? 내가 이렇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주님이 나를 저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셨으니 그렇게 건져낸 나를 아직도 애굽으로 다시 보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어떻게 살아야지 하나님 앞에 잘 사는 것일까? 늘 눈물이 있습니다. 일 년에 교회에 전도되어 오는 사람 중에 60퍼센트는 교회에 등록한지 일 년 미만 된 사람들이 전도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속에서 이 애굽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살아있는 감격이 있으니까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이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렇게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련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어리기 짝이 없는 신자들이 유익을 끼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것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원래 여기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원래 성도들이 아니라, 그 절망의 땅 그 어두운 종살이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빛으로 복음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어렸을 때 부르심
두 번째는 이스라엘을 어릴 때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불러내었거늘” 히브리말로 ‘나아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폭이 넓습니다. 아주 유아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 초등학교쯤 다니는 어린이들을 가리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주 젊음이 왕성한 청년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쓰인 것은 그냥 이스라엘이 나라로서 수적(數的) 이런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아주 어린아이와 같아서 유모와 같은 보호자의 도움이 없이는 홀로 생존할 수 없는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계시가 주어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분량이 얼마나 됐겠습니까? 그리고 그 조상들에게 주신 그 계시를 모두 남김없이 그들이 체험적으로 전수받고 간직하고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당신 자신에 대한 놀라운 지식들이 어떤 형식으로든지 가정교육을 통해서, 혹은 역사를 통해서, 구술을 통해서 보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가서 그 큰 기적을 행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 여호와시구나.’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희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열 번의 재앙을 통해서 일찍이 보도 듣도 못했던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간에 치솟는 믿음으로 애굽을 탈출하기는 했지만 그 놀라운 용기와 결심은 삼일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출애굽 할 때 그 신앙이 얼마나 갓난아기 같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어리다고 하는 것은 순수와 그리고 귀여움의 상징이지만 영적으로 어린 것은 그런 귀여움과 어여쁨의 상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는 어린데 육적으로는 영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육적으로 영악하고 폭력적이고 완악한 그것들을 꺾으려면 영적으로도 장성해야 되는데 유아와 같습니다. 지식과 판단력이 부족하니까 사람들 이야기에 쉽게 흔들리면서 진리 안에 견고히 서지 못합니다. 아는 지식들이 아주 천박하고 얕습니다. 그래서 충분한 판단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연인으로서의 광포함과 고집, 우악스러움, 욕망, 이런 것들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영적인 어린아이에 대한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어린아이라고 해서 방긋방긋 웃는 아기를 생각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육적인 갓난아이의 이야기이지 영적으로 어린 아기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상당히 장성한 이스라엘로 만드시기까지 하나님도 시간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주 직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불신앙 때문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그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나안을 정탐한 12지파의 대표자들이 믿음이 없어서 거짓말을 했고, 이것에 대해서 크게 낙심한 것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번지면서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과 2달이면 들어갈 수 있는 그 길을 약 39년,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 때문에 광야에서 40년 가까이 방황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40년의 세월을 허송세월로 보내버리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40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는 불순종과 죄를 저지르고 광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렇지만 죽고 사라지는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의 언약공동체는 하나님이 계속 유지하시면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조차도 번성하게 하십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놓고 보면 출애굽하고 그리고 물이 없어서 마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때와 그 다음에 마지막에 새로 태어난 세대들을 중심으로 해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인도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러 들어갈 때는 완전히 다른 공동체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40년이라는 세월동안 광야에서 이들을 연단하시면서 공동체의 신앙을 굳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평하고 원망하며 죽어갔지만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정복할 때 전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아주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에 하나님은 그들의 국가에 엄청난 번영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외적으로 그들을 성장시키신 것이었다면, 내적으로는 그들에게 그 후에도 하나님이 계속 말씀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숙시켜 가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하셨습니다. 전설적인 지도자 모세가 죽자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의 지도자를 세우셨고 여호수아도 죽고 모세도 죽고 나니까 사사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이 계시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을 통치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가르치시고 이끄시면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이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린아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장성하게 하신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맨 처음 주님께 은혜를 받고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마음이 감화되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서 무엇 하나만을 깨닫게 해 주셔도 그렇게 기쁘고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어느 청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항상 예배를 드리고 끝난 후에 청년들하고 모여서 차를 마시면서 교제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두 가지 생각, “하나님이 나같이 무지한 인간에게 어떻게 이렇게 진리를 깨닫게 하실까?” 라는 감격과, 또 하나는 “나는 정말 무지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구나. 내가 이 진리를 깨닫고 싶다.”고 하는 마음이 불 일 듯 타오르더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게 무슨 그렇게 가슴 저밀 정도의 감사의 제목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두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왜 내가 내동댕이쳐지듯이 태어났는지, 나의 존재근거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나는 나를 꺾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지, 내게 주신 가족은 도대체 내 인생에 무슨 의미인지, 도움도 되지 않는 그 사람들하고 왜 내가 운명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저 교회는 편의상 나오는 곳 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어리석고 미숙하기 짝이 없던 젖내 나는 얼간이 같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긴 세월동안 일체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로 무지한 여러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채찍이나 몽둥이로 구타를 하면서 깨닫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설복하시고 깨닫게 하시면서 일깨워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만큼이나마 무지에서 벗어나서 신앙생활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래 이렇게 그 칠흑 같은 어두움과 무지에서 건져내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격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진리라는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 진리를 모를 때에는 자신이 그 진리의 기준이 되고 자기 자신의 이성이 그 진리의 빛인 줄 압니다. 그리고 그 이성의 빛으로 사람들을 비추어보니까 사람들이 다 자기보다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그건 자기 생각이지, 자기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도 또 다른 빛으로 그 사람을 비춰보면 그 사람도 자기만 못합니다. 이 진리의 빛은 본래적으로 인간의 이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변상주(不變常住)하는 빛입니다. 자기 밖에 있는 변하지 않고 언제나 있는 그 진리의 빛입니다. 그것을 받게 될 때 즉시 자신의 이성 속에 찬란한 빛들이 들어오게 되고, 그 빛으로 자신의 영혼을 비춰볼 때 비로소 끝을 알 수 없는 엄청난 무지의 어두움이 드리워져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정말 지혜를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자신을 지혜롭다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혜가 없었을 때에는 볼 수 없었던 무지의 어두운 심연을 깨달은 그 진리의 빛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아무것도 모르고 어두운 동굴을 걸어가던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는데 전등을 하나 가지고 비춰보니까 바로 앞에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깊이의 구덩이가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고 놀랐는데 아직까지도 이 불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겁 없이 걸어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정말 지혜를 발견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누군가가 자기를 지혜롭다고 칭찬을 하면 우쭐해지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이 무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데 저 바보 같은 사람이 나를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고맙고 감격을 하는 사람들은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진짜 겸손한 사람들은 노력을 해서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보았기 때문에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게 진짜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하루 종일 마음을 다스리면서 사경회를 준비하며 글을 썼습니다. 정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말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내 앞에 드리워진 이 어두움 심연, 내가 발견한 진리는 티끌일 뿐이고 그 티끌 같은 빛으로 나 자신을 비추어보니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무지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우리보다 무지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남과 비교하기 위한 인생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기죽이거나 격려하기 위한 샘플이 아닙니다. 엄중하고 아주 막중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살아가야할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보다도 무지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사람들의 존재가 우리를 우월하게 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그 진리 앞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인 것을 말입니다.
나는 교회의 신앙의 상태를 재는 측정기가 여러 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예배가 끝나고 난 후에 기도의 함성소리를 들어보면 안다고 합니다. 그것도 꽤 좋은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더 구체적으로 성도들이 무위도식하지 않고 얼마나 섬기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 측정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교회에 헌금 들어오는 것을 보면 안다고. 그래서 요한 웨슬레 목사님도 울고불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지갑이 회개하기 전까지는 난 당신들의 회개를 믿지 않겠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저는 그것보다도 더 확실한 측정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지식의 욕구는 종종 사랑과는 관계없이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디어디서 차가 부딪혀서 몇 사람이 산산이 찢어져서 피투성이가 되었다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 볼 때 즐거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무 가슴 아프고 무서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담벼락에만 올라가면 볼 수 있다고 하면 예외 없이 모두 올라가서 봅니다. 사랑하고는 상관없고 호기심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참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자 하는 하나님에 대한 앎의 욕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욕망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인 하나님을 찾는 갈망입니다. 나는 그것보다 더 훌륭한 측정기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이중적인 적용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영적으로 그렇게 미약하고 지식적으로 그렇게 애기와 같이 판단력이 없었던 여러분을 하나님은 싫다는 여러분을 당신의 품에 안고 한 모금이라도 젖을 물리시기 위해서 당신의 목회자들에게,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마치 자신의 영혼을 회계할 사람들인 것처럼 안타까운 마음을 주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먹이고 돌보고 그렇게 해 오셨습니다. 이제도 구역이 재편되고 새로운 구역이 생기니까 구역장들 중에 몇 사람들이 고민을 합니다. 자꾸 구역예배 때 도망을 가니까 그 사람들 붙잡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삶에 대해서 오늘 이 말씀이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던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여러분의 무지의 눈의 비늘을 벗기고 어린아이와 같이 부끄러운 일을 버리고 그리고 그 우여곡절 속에 이만큼이라도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끔, 정말 저주받을 정도로 무지한 사람들은 면할 정도로 하나님이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까? 소중히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 지식들이 차가운 지성의 창고에 폐품처럼 내동댕이쳐지는 대신 지금 나의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서 나의 심령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를 여러분은 갈망하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적용은 정말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갈망이 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적용이 그렇게 신앙 안에서 어린아이 같은 여러분을 장성하게 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라면, 이것은 여러분이 영적으로 더 성장하기 위한 욕구가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그림은 아닐까요? 하나님은 신앙이라는 배에 여러분을 태워 하나님의 나라라는 항구로 헤쳐가기를 원하시는데 헤쳐가기는커녕 그냥 그 배에 누워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방향은 고사하고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위기 속에서 수시로 물에 차오르는 배 밑바닥의 물을 바가지로 퍼내기 위해서 급급한 나머지 배가 북쪽으로 가고 있는지 남쪽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차마 신경 쓸 새도 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성장은 한번 성장한 후에는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지만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어리석은 믿음의 초보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고 사도바울이라면 간이라도 빼주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서 물러가고 무지의 구름이 두터워지자 그들은 복음을 버리고 다시 어리석은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고쳐야 합니다. 구역공부가 점점 어려워지고 새가족 공부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매일 들려오는 이야기는 왜 그렇습니까? 그날 와서 처음으로 교제를 펴는 것입니다. 10년 전 열린 교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10년, 15년 전에 비하면 얼마나 좋은 교제들이 많이 나오고 풍부한 말씀의 재료들을 생산해 내고 있습니까? 더욱이 올해부터는 공과 책을 거저 준다고 하니까 더 걱정이 됩니다. 예전에는 다 돈 주고 샀으니까 애지중지 했을 텐데 거저 받아서 이 구석 저 구석에 돌아다니지 않을까 걱정이 많이 됩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은 어렸을 적에 불러내셨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먹이고 입히고 돌보신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을 양육하기 위해 애쓰신 하나님의 은혜와 교회를 생각하면서 “자라야 하겠다.”, “내 인생의 신앙의 모든 문제는 성장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깊은 자각을 가지고 다시금 말씀과 함께 성장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 사랑으로 부르심
마지막으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부르셨다고 말입니다. “내가 사랑하여 불렀다.” 히브리어 성경에 “또 내가 그를 사랑하여”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동사가 ‘아하브’라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히브리어에서 ‘선택하시는 사랑’, ‘선택애’(選擇愛)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러니까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선택하시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심지어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는 사람도 하나님은 먹이고 입히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아하브의 사랑이 아닙니다. 아하브의 사랑은 자기의 백성으로 선택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신 것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그들의 신앙이 아주 뛰어나고 순결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들다운 짓 못하면서 살 때가 많았고 그 광야의 40년의 세월이 불순종과 반역의 세월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수시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한 번도 내 아들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들로 부르신 그 사랑은 혈연적인 사랑 중에서 가장 완악한 죄인이라도 공통적으로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너는 내 신부라. 너는 내 아내라.”고 해도 사실 그렇게 살을 에는 것 같은 사랑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일부다처제였고 이혼증서만 써주면 내쫓을 수 있는 시대였으니까. 그런데 자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경험상 최상의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불완전한 아버지, 모자라는 우리 어머니는 나를 올바르고 충만히 사랑해 주지 못했지만, 때로는 사랑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은 그러한 어머니, 그러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완전한 사랑의 아버지, 자비하심으로 충만하고 아들이 죽음의 순간에 달하면 당신 자신이 대신 죽어서라도 그 자식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그러한 아버지의 심정으로 이스라엘을 내 아들로 선택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지만 그렇게 뛰어나신 채로 홀로 계셔서는 우리를 가르치실 수 없고 우리와 동행하실 수도 없고 우리를 교화시키실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수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지 어떤 신앙생활을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에 따라서 하나님의 슬픔과 기쁨 안타까움과 분노가 느껴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이 사라지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자기감정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는 이 감정을 초월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그 위엄과 영광을 직시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안광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때문에 소망을 갖고 불완전한 이 현실과 고통 받는 이 삶의 상황 속에서, 요동치는 파도를 보지 않고 예수를 보며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처럼 그렇게 살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순풍에 돛단 것같이 인생이 전개될 때에 웃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낙심해서 한숨을 쉬는 일은 불신자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삶의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반응의 전부라면 우리는 불신자나 다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 모든 것들은 인생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래서 정말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사실, 고통 받는 나와함께 눈물 흘리신다는 사실, 분노하는 이 현실 속에서 나와 함께 분노하신다는 사실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려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상실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배역과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불순종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서 엄중하게 경고를 하시면서도 주님은 자신의 경고가 실현되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라 이들이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호세아서에서 나오는 이 호세아의 결혼생활이 거룩한 선지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추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비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는 선지자들이 예언을 했는데 예언에는 말로 하는 선포적 예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 경건한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디블라임의 딸 고멜에게 장가를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멜은 그 동네에서도 소문난 창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같이 그런 유곽에서 노는 창녀가 아니라 학자들은 바알교의 신전 창녀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잤습니다. 선지자가 그런 여자에게 장가간다는 것 자체가 조롱거리인데 종종 하나님의 지시는 하나님의 높으신 지혜 때문에 어떤 때는 윤리적인 모순을 동반할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장면입니다.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의무적으로 장가를 들었더라면 이 사람의 결혼생활이 이스라엘에게 메시지가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고멜은 이 남자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경건한 사람 호세아는 신전창녀였을 고멜에 대해서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진실한 사랑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랑은 단순한 에로스의 사랑은 아닙니다.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아주 절절한 사랑을 하나남이 그에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가출을 해서 외간남자와 관계를 맺고 아들을 낳고 딸을 낳고 이렇게 또 아들을 낳고 하는 이 불결한 과정을 되풀이할 때마다 그는 그 아내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에게 뭔가를 보여 주어야겠다는, 내가 선지자이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그 마음이 아니라 사랑에 이끌려서 그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방탕한, 부인이라는 칭호를 붙이기에도 아까운 여자를 가서 데려올 뿐만 아니라 그가 진 빚을 자기가 다 갚으며 데려왔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정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눈물을 펑펑 흘렸어야 맞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하나님이 호세아의 가정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고멜처럼 음탕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 이방신들과 교접하며 그 불순종과 배역의 자식들을 낳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이 그 죄악을 미워하시면서 그렇게 몸을 팔고 끌려 다니는 아니 따라다니는 그 창녀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못하는 하나님 자신 안에 있어서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그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무서워서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은 없습니다. 잠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회개는 율법적인 회개가 아니라 그래서 복음적인 회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를 생각하며 그 그리스도의 고난의 형상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가슴을 찢었던 선지자처럼, 오늘 우리를 바라보며 가슴을 찢으시는 하나님을 뵈오며 하나님께로 돌아갈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은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닙니다. 그 사랑은 이용당하기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마음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그런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약점으로 잡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가를 생각하라고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번영한 여로보암 2세 때의 이스라엘 왕국처럼 우리도 번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만약에 우리들이 어떤 시련과 어려움을 당해서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다면 혹시 그 번영 속에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그 사랑의 채찍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책망할지라도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그 하나님의 사랑은 달라지지를 않았고 그래서 하나님은 한번 선택한 당신의 백성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꼭 같은 호세아의 불붙는 이 사랑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바로 이 교회에서 그렇게 여러분을 부르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등지고 살았던 모든 삶들을 내려놓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구하고 치료하셨기 때문에 내가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격하면서 나는 인생을 덤으로 사는 것처럼 살겠다고 다짐했던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 눈물, 그 사랑,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처음 불러주실 때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르시는 하나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호 11:2)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어렸을 때에 사랑하여 아들이라고 부르며 애굽에서 건져내셨지만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대조를 이루는 이스라엘의 반역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땅에서 번성하는 영화를 누리면서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잊었고 자신들이 이렇게 융성한 나라를 이루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복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세속적인 번영에 마음이 뺏긴 나머지 신앙은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래는 번철에 새카맣게 타도록 열렬하고 위에는 익지 않은 전병이고 그래서 먹을 수 없는 케이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세속주의, 이 세상에 대한 번영, 육체에 대한 관심에는 불같이 뜨거웠지만 하나님을 향한 관심은 아주 냉담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로보암 2세라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예후왕조의 4번째 왕입니다. 역사로 치면 주전 793년에서 753년경에 재위하던 임금이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황금기였고 정치, 경제, 군사뿐만 아니라 수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아래로는 남하정책을 써서 유대 나라를 압박하는 등 하맛에서부터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던 전성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이미 도탄에 빠져있었고 하나님의 징계의 북소리가 들려오는 지경이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북 왕국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타락하고 시대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하나님은 탁월한 당신의 말씀의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바로 이 호세아 선지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호세아는 탁월한 신학과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사랑, 질서정연한 메시지를 가진 선지자였고 일관되게 자신의 온몸을 불살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Ⅱ. 부르시는 하나님
A. 선지자를 보내심
그래서 나는 오늘 이 2절의 주제를 부르시는 하나님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시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셨다고 말입니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멀리하고 분향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선지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3인칭 복수대명사로 나옵니다. “그들이 저들을 불렀다.”라고 나옵니다. 그래도 많은 주석가들이 공통적으로 여기서 복수는 결국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을 했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에 선지자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비록 히브리어 성경에는 대명사로 나오지만 선지자라고 번역을 해도 좋은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은 단 한 번도 하늘의 창문을 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리쳐 음성을 들려주시며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잘 아는 선지자의 마음을 통해서 그의 입으로 하나님을 대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언제 기회가 있으면 선지자들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 참 좋을 텐데 그래도 오늘 조금만 선지자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본문을 진행해야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흔히 선지자라고 하면 예언자 생각을 많이 하고 사람들이 모르는 미래의 일들에 대한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선지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선지자에게는 앞날에 될 일을 투시하거나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지시를 받아서 미리 예언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필요한때에 아주 한정적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선지자의 본래의 고유한 직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의 가장 고유한 직무는 모세오경을 해석해서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율법의 정신을 따라 살도록 선포하는 것이 바로 선지자의 직무였기 때문에 오늘날 설교자의 기능과 아주 유사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호세아서를 쓰고 있지만 호세아 시대 때에는 호세아서가 없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그저 모세오경 정로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태어난 그 시대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주시면 그들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해서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핏줄을 타고 제사장처럼 대를 물려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작위로 당신이 원하는 사람을 불러서 그를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선지자로 부를 때에 하나님이 예외 없이 선지자에게 하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말씀과 함께 충만한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그의 온 지혜와 정신, 의지와 영혼에 기름을 부어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지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평소에 지성을 연마하는 일도 중요했지만 그것과 함께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생한 영적인 교통 속에서 주님의 심정을 전수받는 영적인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지자들이 많이 있지만 선지자들 모두에게 똑같은 말씀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전체적으로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다이아몬드의 면체마다 각각 다른 광채가 빛나듯이 아모스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운 측면을 설교하게 하셨고, 그리고 하박국에게는 믿음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의 측면을 설교하게 하셨고, 또 호세아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헤세드의 측면을 설교하게끔 하셔서 다양한 빛깔의 메시지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을 전해주는 것이 바로 선지자의 직무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고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며 그분께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온 영혼과 정신과 사상이 하나님 중심으로 다시 태어나는 선지자가 되는 영적인 체험이 필요했습니다. 이 말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더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선지자의 소명기사가 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소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마음, 혹은 하나님의 진노, 혹은 하나님의 탄식,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눈물, 이런 것들을 풍부히 가지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셨지만 단 한 번도 하늘의 창문을 열고 외치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선지자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그렇게 부르셔서 보내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선지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의 목소리 속에 담겨진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기들을 향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선지자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음성 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내고 선지자의 애끊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외침을 사람의 목소리로 밟아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선지자들이 받아야할 많은 고난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도 그 모든 것들에 개의치 않고 주님을 향해 받은 그 말씀 전달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였습니다. 여기에 복수로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이 북 왕국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기울어진 후에도 하나님이 끊임없이 말씀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합의 그 무서운 불법한 통치시대와 이세벨의 포악한 지배 속에서도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위대한 종들을 보내셔서 그 시대에 맞서 주님의 음성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참으로 분노하실 때 하시는 일은 더 이상 선지자들이 설교하지 않도록 스위치를 꺼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영혼의 깊은 밤과 영혼의 어두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위기를 맞게 될 때까지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수시로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들의 마음은 세속의 번영과 이 땅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이미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선지자에게 말씀을 들려주어 그 큰 능력과 기적으로 선포하게 하셔도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아니하자 하나님은 가엾은 선지자 호세아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들리는 목소리의 외침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그 대조를 보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이면서도 이름난 창녀 고멜에게 장가를 들어야했고 그것이 의무였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호세아의 마음속에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외간남자와 간통해서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자식을 낳아오는 그 여자를 향해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진실한 사랑으로 이 여자를 그리워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의 음성은 듣지 못해도 그렇게 눈앞에 비치는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고 음행을 하는 아내를 찾아나서는 이 비천한 선지자를 보면서 그들은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인생의 벼랑 끝까지 가있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같이 가슴앓이도 하고 아파도 하고 그중의 어떤 사람은 그 고난 속에서 말씀의 빛으로 돌아오고 어떤 사람은 어둠속에 사라졌습니다.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의 착한 심성이라든지 주변의 도움이라든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 인생의 위기 속에 있어도 때로는 죄악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 사람들은 결국은 그 깊은 영혼의 수렁에서 헤어 나옵니다. 예배에 와서 주님의 말씀이 들리기만 한다면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아직까지도 붙들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사람을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만 있다면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 그럴 수 없겠습니까? 여러분,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마어마한 일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죽음의 끝자락에서 보면 모두 하찮은 것들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어린 날 가슴이 저리도록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혹은 분노했던 일들이 지금도 그렇습니까?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몇 달 전에 그렇게 가슴을 끊이고 사람을 미워하고 때로는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좌절했던 일들도 지금 돌아보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대부분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것을 붙잡기보다는 지엽적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목숨을 거는 동안 낭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어떠한 삶의 처지에 있는지 다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한 가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거기가 어디든지 그리고 거기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곤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생의 깊고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남들이 어떻게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자기와 함께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가하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인생을 살면서 정말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는 눈을 뜨고 싶지 않을 정도의 시련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여러 번은 도대체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삶을 살았습니다. 눈을 뜨면 역시 고통스러운 현실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사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심지어는 기도하러 나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받고 혼란스러울 때는 기도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기서 조용히 세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시인 다윗이 가장 고난을 받을 때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 31:19-20)라고 노래했습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오감을 모두 닫고 정신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환경을 뛰어넘어 상주불변 하시는 하나님을 뵈옵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 안에는 언제나 요동함이 없는 고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평강과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생사를 주님께 의탁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두렵고 무서울 정도의 큰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자가 나타나 포효하고 부르짖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의 말씀 앞에서 산다면 그들은 두려워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잘못이 있었으면 하나님 앞에 회개를 했을 것이고, 생각이 나지 않으면 고통을 통해 깨닫게 될 테니 감사하고, 오류가 있었으면 시련을 통해서 깨닫게 되어서 고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글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은 종종 아첨하지만 원수는 우리를 교정한다.” 그래서 정말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악이 그를 이기지 못하고 주님이 그를 붙들고 계신한 그는 흔들리지 않고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붙들어주십니까? 우리의 가장 이상적인 신앙생활이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사는 것인데 주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드신 적이 있습니까? 어디를 붙드십니까? 목을 붙들면 숨이 찰것이고 어디를 붙드십니까?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린다는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지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에 묶이고 의지가 그 사랑에 감동을 받아서 그분께 속박되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손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인데 왜 하고 싶은 일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자기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의 손에 붙들린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최고로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칩시다.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별로 유쾌하지도 않은 세상 일찍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사람들이 받고 싶지 않아서 걱정이지 은사입니다. 받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 말씀에 어린아이처럼 귀를 기울이고 부르시는 주님께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B. 멀리 떠난 백성들
두 번째는 멀리 떠난 백성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라고 합니다. 여기는 히브리어 성경에 얼마나 재미있게 되어 있느냐하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불렀다. 그런데 그들은 선지자들의 면전에서 걸어가서 바알로 향했다.” 이렇게 나옵니다. 뭐냐 하면 선지자들을 대면하기 싫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선지자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핍박하고 피 흘려 죽게 만들었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왜냐 하면 예수님이 빛이셔서 싫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빛이고 우리는 어두움이기 때문에 당신이 싫습니다.”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슴속에 깔려있는 생각은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사람들은 선지자의 면전에서 사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개인적인 인격의 면전에서 산다는 것이 아니라 그 면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속에 이 세상의 번영에 대한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차고 신앙이 사라지자 담대하게 선지자들의 면전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걸어가는 곳이 바알들에게로 걸어갔습니다. 바알들이라고 복수로 나옵니다. 'Baals', ‘바알들’, 한 둘이 아닌 수많은 우상들인 바알들의 우상에게로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당신이 싫다고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은 그들에게 통고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좋게 말할 때 돌아와라.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기회를 준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비굴하게도 그 선지자를 보내어 그렇게 선지자의 만신창이가 된 가정을 통해서 뼈아픈 고통 속에서 그 신음과 함께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버리고 바알들에게로 향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며 거기가 길이 아니라고 바알은 너희를 구원할 하나님이 아니라고 눈물 어리게 외치면서 그렇게 떠나가도 끊임없이 쫓아가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그리고 고통 받던 때에는 마음 둘 곳 없어서 주님의 집을 자주 찾았고 어린아이처럼 우리 예수님을 의지했습니다. 한 번의 예배는 한 번의 제사였고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그 험한 시련의 파도를 헤쳐 나갈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이 너무 가상해서 큰 고통에서 건져주시고 핍박과 시련에서 구해주셨습니다. 요동치는 두려운 마음을 안정시켜주셨고 그들의 심령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앞에 가슴을 찢으며 눈물을 쏟으며 매달려야할 기도의 제목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번영한 가나안에 물질문명을 향해 마음이 쏠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이 멀어졌던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게 떠나고 나면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함의 첫 번째 표현이 기도가 되지 않고 예배에 참석해도 말씀의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신앙의 기본궤도에서 이탈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자기만 아는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가슴을 에는 것 같은 간절한 기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 마음이 한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절실함, 그리고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이타적인 기도들이 그렇게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들이 남몰래 응답될 때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마음에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시간도 그대로이고 기도하는 시간 길이도 그대로인데 내용이 변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런데 옛날 같지 않습니다. 한 주간 동안을 시련과 고통 속에서 살고 신앙이 흔들렸다가도 하나님의 집에 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느껴졌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하늘의 향취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올 때는 무거운 영혼으로 왔는데 돌아갈 때는 고단하지만 깃털 같은 영혼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찬양)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이제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어떻게 내가 직면하고 있는 이 커다란 시련과 고통이 사라질지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평강이 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주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모든 지각을 초월하는 어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속에 찾아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기 전 그분을 친근히 하며 살아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끼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행복은 그분을 친근히 하며 그분 가까이에서 그분의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신데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악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기에 시인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a)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 탁월한 선하심을 허공중에 외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그 지성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맛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에서보다도 당신이 이해되는 인간의 지성 안에서 그 마음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에게 “인간아 너 하나님 멀리 떠났지?”라고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의 외침보다도 더 명료하고 우렁찬 외침이 여러분 마음 안에 있습니다. 양심의 외침입니다. 그리고 고통당하는 영혼의 울부짖음입니다. 잠시 이 세상의 번잡한 물상에서 떨어져 침잠해보십시오. 기도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조용히 속세와 인연을 끊고 내 마음의 상태는 어떠한지? 내 영혼은 기뻐하고 있는지? 괴로워하고 있는지? 내가 지금 이어가고 있는 이 삶이 의미가 있는 인생인지에 대해서 한번 침잠하며 자기의 이성과 대화를 나누어야합니다. 그 고요함속에서 번잡한 사회 속에서 욕망에 출렁거리며 살아갈 때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던 아우성치는 영혼의 외침이 들립니다. 때로는 나 좀 살려달라고 피어린 음성으로 구원을 달라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님을 멀리 떠난 것이 우리의 영혼에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말씀을 듣고 울고불고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생각도 해야 합니다. 한번 분위기 타려고 하지마시고 생각을 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나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는가? 내 인생에서 지금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했던 때는 없었을까를 생각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C. 우상 숭배에 빠짐
자, 그렇게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음성이 싫어서 선지자들의 면전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어디로 갔습니까? 바알에게로 갔습니다. 이 바알의 별명이 ‘하다드’라고도 불리는 신입니다. 이 신이 가나안의 농경문화에서 나오는 신입니다. 그래서 주전 3000년경에서 1000년경에 그쪽에서 아주 널리 말하자면 세력을 떨쳤던 그런 영향력 있는 신이었습니다. 농경의 신이었고 농경문화에서 가나안 백성들이 살다보니까 농경문화에서는 무엇이 중요합니까? 농사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농사를 망치면 굶주림과 죽음입니다. 그 대신 농사가 잘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들이 먹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곡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팔면서 그러면서 재산을 형성하고 그것을 가지고 온갖 필요한 좋은 것들을 사고 별장도 짓고 하면서 떵떵거리고 살고 사실 그 땅에서 나오는 곡물을 중심으로 주종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옛날에 부자들을 이야기할 때 돈이 몇 만원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천석꾼 집에 시집을 간다더라.’하면 상당한 부자입니다. 중소기업 사장정도 되는 곳에 가는 것입니다. ‘만석꾼이더라. 그러면 랭킹에 올라있는 재벌가로 시집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농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원래 농경민족이 아닙니다. 유목민족입니다. 조상대대로 두루두루 짐승들을 끌고 다니면서 유목을 하고 부업으로 장사를 하면서 살던 무역을 하면서 살던 족속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출애굽을 하는데 유목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40년 동안 계속 방랑을 해야 했으니까 하나님이 아예 실정에 맞춰서 이동식 성전을 그림을 그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도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사실 문명이라는 것은 정착을 해야지 발전을 하지 유목민족에게는 문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갈 때는 다 버리고 가야합니다. 양을 치거나 짐승을 한철 치는데 이동을 할 때는 다 버리고 가야합니다. 집을 짓고 살아야지만 문명과 문화라는 것이 생겨나는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가나안전쟁에서 승리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때의 느낌은 시골사람들을 뉴욕에 데려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뉴욕에 가보면 정말 내가 시골스럽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전광판부터 시작해서 거리거리마다 넘쳐나는 사람들, 어마어마한 자동차, 더군다나 우리는 서울도 자주보지 못합니다. 이것을 뉴욕에다가 갖다놨으니 한참동안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여기가 더 맛있는 것 같고 저기가 더 맛있는 것 같고 사람들도 다 뉴요커들 아닙니까? 뉴욕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돼지이름 같아서 미안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있는 것입니다. 빌딩을 보려고 고개를 들어보니 직각으로 쳐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빌딩들이 새카맣게 늘어서있고 그때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이랬겠구나.’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도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니까 열등감이 느껴질 정도로 잘사는 것입니다. 자기네가 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문명이나 문화적으로 볼 때에는 하다못해 칼 하나 스푼 하나도 다 탐나는 것입니다. 왜? 미제면 사족을 못 쓰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그랬습니다. 한국은 미국으로 자동차를 많이 팔고 그러면서 한국은 미국자동차를 사주지도 않는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무리 싸게 해주어도 너희 나라 자동차 안 살걸.” 그랬더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이제 그런 면에 있어서 많이 극복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도 가나안을 정복을 했을 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앙이 제일 좋았을 때입니다. 하나님과 신혼의 단꿈을 꾸던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짧습니다.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권태기가 없었는데 못된 신부는 금방 권태기가 와서 바람을 피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어떻게 이 사람들이 이렇게 번영한 삶을 살까? 보니까 농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살면서 이제껏 농사를 지어본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씨를 뿌려서 곡식이 잘되는 축복을 하나님 앞에 받아본지가 조상들은 받아보았지만 광야에서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어떤 생각이 드느냐하면 하나님은 광야에서 한 주름 잡으셨지만 여기는 구역이 일본말로 나와바리가 바알의 나와바리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무슨 힘을 쓰실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래도 하나님이 여태까지 인도하신 것을 생각하니까 전혀 힘을 못 쓰신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 뭐냐 하면 수 천 년 동안 여기를 자기의 나와바리라고 차지하고 그렇게 번영한 문명을 일구게 만들었던 바알의 힘이 그들의 번영이 바알의 능력을 입증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하면 둘 다 보험을 들어놓는 것입니다.
재미있었습니다. 대학에 선생으로 있었을 때 학생들이 학생회장선거를 합니다. 그러면 선거할 때 선거자금을 제일 두둑하게 내놓는 회사가 어디냐 하면 앨범제작사입니다. 뒷돈을 받으면 자기가 회장에 당선되면 이 회사에 주겠다고하는데 그 돈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몇 십만 원씩인데 학생 수가 워낙 많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앨범회사에서 그럽니다. 기호 1번과 2번이 나오면 양쪽 다 돈을 주는 것입니다. 누가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잘될 것 같은 사람 같은 경우에는 예를 들어서 천만 원을 주고 잘 안될 것 같은 사람에게는 오백만원을 줍니다. 그러나 둘 중의 하나를 고르지는 않습니다. 이해가 팍팍 되실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에게 보험 하나를 들고 하나님에게 보험을 드는데 바알에게 더 많이 건 것입니다. 바알은 그런 것 가지고는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통이 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질투가 아주 심하십시다. 안됩니다. 안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혼합신앙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하고 이스라엘 백성들하고 다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버렸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제사를 드리고 있고 절기의 제사를 드렸고 주일이면 꼭 예배드리러 나오고 십일조도 하고 선교회비도 내고 그랬는데 왜 그러십니까?” “나한테만 하는 것이 아니면 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합니다.
아직도 여기에 나이가 들어도 결혼하지 못한 형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올해는 꼭 가십시오. 아멘을 하십시오. 아니 왜 할머니가 아멘을 하십니까? 총각이 아멘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예쁜 자매가 나타났습니다. ‘설마 나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까?’ 그랬는데 너무 착하게 매일 만나서 방긋방긋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점점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문자를 보냈더니 답장도 옵니다. 편지를 보냈더니 답장도 옵니다. 얼굴이 예쁜 사람들은 성격이 못되었는데 성격도 너무 좋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으면 집안이 별로입니다. 그런데 집안도 뒤에서 조사를 해보니까 엄청난 부자인데 외동딸입니다. 참 대단합니다. 대게 그런 사람들이 신앙이 없습니다. 이 자매는 신앙도 뜨겁습니다. 늘 예배 때마다 뜨거운 눈물의 기도가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가지고 있으니까 교만합니다. 그런데 너무 겸손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대개 한사람에게 올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기한테 올인을 하는 것입니다. 나무랄 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너무 잘해주는 것입니다. 도시락도 싸주고 하루에 몇 번씩 문자를 하고 사랑한다고 하고 밤늦게 회사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그래서 사랑이 무르익었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똑같이 좋아하는 형제가 둘이 더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네들도 안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왜 그렇게 좁으시냐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질투가 많으셔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해서는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나만 섬겨라.”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을 정복하고 나서 사실 시간이 얼마 흐리지 않았을 때 여호수아는 벌써 비탈길로 내려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그것이 당연하면 이야기를 왜 하겠습니까? “너 교회 갈 거야? 안 갈 거야? 나는 갈 거야.” 그러면 대부분이 안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알의 마누라가 아스다롯이라는 여신입니다.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잡스러운 여신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 바알의 특기는 이 많은 여신과 항상 성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농사에 주기가 있는데 우기와 건기가 있는데 우기 때마다 바알은 부활하고 건기 때에 음부로 내려갑니다. 다시 우기가 되면 올라옵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자연의 사이클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따라서 비가 내리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토양에는 이른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보고 씨를 뿌리고 늦은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먹고 식물이 마지막으로 힘껏 성장해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가 언제 내리는지는 워낙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워낙 강수량이 적은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리를 만들어냅니다. 어떻게 교리를 만들어내느냐 하면 바알하고 아스다롯을 흥분시키자 그래서 그들이 교접을 하면 비가 내린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들을 흥분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신전에는 기다란 골목이 있고 수많은 쪽방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신전창녀들이 상주합니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밝혀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가나안 원주민들이 제사를 드리러 갑니다.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소원을 빌고 농사의 풍년을 빌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가 필요한 때에 가서 각방에 들어가서 신전에 상주하고 있는 창녀들과 성관계를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바알이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흥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농사에 필요한 비를 내려주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교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사실은 우상을 섬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들이 다 율법에서 금한 내용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처음에는 번영을 꿈꾸고 여기에서 바알에게 밉보이면 이 나와바리에서 뭐가 좋은 일이 있으랴하는 미신적인 믿음에서 시작되는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대단히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종교적인 행사에 육체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발산하는 요소들이 결합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이 우상숭배니까 이중의 유익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번영과 쾌락입니다. 번영과 쾌락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는 사소한 문제가 있고 나머지는 이 바알종교에 빠지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사소한 하나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별로 안 좋아하신다는 것인데 신앙이 없으니까 이것이 사소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풍조가 사소한 문제가 되었는데 이것이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물고 늘어지면서 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선지자가 얼마나 미운물건이겠습니까? 그것이 핍박했던 이유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날 “여호와와는 단절이다. 우리 모두 바알종교로 귀순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형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내 영혼을 바알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다 내어준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종교적 혼합주의가 주는 세속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신앙의 형식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는데 내용이 없어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질 어떤 내용도 없이 모두 바알 신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두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바알이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준 것이다. 심지어 바알에게 제사를 드려서 풍년이 왔다고 믿는 사람들의 곡식도 누가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밖에 이 세계의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 없으시니까 그러니까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네가 바알에게 갖다 준 제물도 내가 준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면서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편으로는 선지자들을 보내어 중대한 책망의 말씀을 하시며 경고하시기도 하시지만 오늘 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조차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끌 수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음란한 자식을 끊임없이 낳고 외도의 길을 걸어가는 이 고멜이 바로 이 신전의 창녀였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보는 것입니다. 상당히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손님인데 들어와서 교접하고 가는데 수없는 사람이 하고 가는데 누구의 새끼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여자를 향해서 의무감이 아니라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그 여자를 눈물겹게 사랑한 것입니다. 그것이 더럽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정신 상태에서 저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기 아내가 너무 가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구속해낼 물질을 가지고 찾으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는 그렇게 말하자면 실제로 체험하는 방식으로 자기 아내를 향해서 그렇게 방탕하고 치욕스럽게 타락하고 있는 그 아내의 방종을 보면서도 머리로는 미운데 마음으로는 불쌍해서 견딜 수 없는 불붙는 사랑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뭐냐 하면 은혜가 떨어졌을 때는 망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에이 왜 하필이면 이런 사람을 구역원으로 주었나? 생생한 사람들 좀 주지.’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으면 내게 정말 나쁘게 하는데 고통당하는 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망가진 채로 살 수밖에 없는 그 사람 그리고 그렇게 망가진 채로 살아오기 위해서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험난했겠습니까? 너무 가엾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간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번영을 하나님보다 좋아했기 때문에 쾌락을 하나님을 향한 정절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알에게 가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적 선택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답지 않게 불순종을 저질렀습니다.
Ⅲ. 적용과 결론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전처럼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그분에게서만 기쁨을 얻도록 여러분을 떼어놓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여러분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자기가 주인이 되었던 삶을 모두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면전에서 살고 싶어 했을 때 여러분은 목자이신 주님의 손에 이끌리는 어린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말씀으로 말미암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범죄 하거나 불순종했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불순종했어도 고멜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아무리 방탕하고 더럽게 살았어도 고멜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호세아는 그런 여자를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을 가지고 찾아 나섰습니다. 그것이 호세아에게 원래 있는 마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방탕한 아내로 말미암아 찢어지는 슬픔 속에서 전하는 그의 말씀은 눈물에 젖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단 한분이 이와 똑같은 핏빛사랑으로 우리들을 찾아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호세아와 같은 이름인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위대한 능력을 행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시기보다는 오히려 얼음장같이 차갑게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녹이시고 그 은혜로 그들의 심령을 두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그들에게 베푸시는 분이신지를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그분이 죄인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의 형상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펑펑 우시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가슴 졸여 하시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정말 죄인들은 악독하게 우리 예수님을 대적했고 심지어 그분을 진리를 증거 해주시는 분이시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때조차도 예수님은 그렇게 극악하게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람들조차도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그들을 위해 용서해달라고 비셨습니다. 이 사랑이 오늘 여러분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며 이 사랑으로 이 은혜로 돌아오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에게 들리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밤이 가기 전에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안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호 11:3)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해설
2절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신 하나님은 이제 3절에서 다시 한 번 당신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반역과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유년 시절에 베푸신 은혜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번영 때문에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께 범죄 하여 주님의 품으로부터 멀어졌지만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바알 신이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지만, 설령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바알이 그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알이 할 수 없었던 일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사랑의 추억이 담긴 그림 같은 한 장면이었습니다.
Ⅱ. 고치시는 하나님
이것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고치시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세 가지를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유년 시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일 두 가지와 그리고 지금도 이스라엘을 향해 하고자 하시는 한 가지 일입니다.
고멜은 남편으로부터 더 없는 사랑을 받은 여자였지만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음란한 성품과 타락한 죄의 경향이 끊임없이 사랑으로 부르는 남편을 떠나 자기를 사랑하지도 않는 이방 남자들에게 가 몸을 파는 신전 창녀로 살았습니다. 고멜처럼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뼈 속까지 타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주님은 찾아오셨고 당신과 똑같은 심정을 호세아에게 넣어주셔서 고멜을 그렇게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고멜이나 이스라엘의 장점 때문에 생겨난 사랑이 아니라 바로 호세아 안에 있는 사랑의 성향, 하나님 안에 있는 헤세드의 성품에서 비롯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강퍅하게 굳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치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사진을 한 장 꺼내어 보여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유년 시절 때 하나님과 더불어 찍은 사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A. 걸음을 가르침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일은 걸음을 가르치신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여기 ‘에브라임’이라는 단어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애칭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었을 때 두 아이를 생산합니다. 애굽에 있는 여자에게서 낳은 아이였는데 첫 아이 이름은 ‘므낫세’로서, 그것은 ‘잊어버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어린 나이에 형들의 모략으로 애굽에 팔려와 고난으로 가득 찬 일생을 살았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생산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의미에서 첫 아이를 ‘므낫세’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낳은 아이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에브라임’은 ‘번성하다’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놀랍게도 야곱이 와서 요셉의 자손을 축복할 때 당연히 큰 아이의 머리에 오른손을, 둘째 아이의 머리에 왼손을 얹어야 하는데 왜 그런지 어긋나게 얹어 축복의 오른손을 차자에게 그리고 열등한 왼손을 장자의 머리에 얹습니다. 요셉이 깜짝놀라 말렸지만 야곱은 개의치 않고 축복합니다. 이것은 에브라임이 므낫세보다 훨씬 강성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 에브라임은 풍성함, 번성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번성한 번영의 축복이 에브라임에게 내려갔고, 그래서 야곱의 마음에 에브라임이 므낫세보다 더 사랑스러웠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에브라임의 이름을 매우 좋아하셨고 그래서 에브라임이 열두 지파 중 한 지파에 불과했지만 북 왕국에 남아있는 모든 지파를 대표하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애칭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은 비록 남왕국 유다는 아니지만 북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이 담긴 별명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사실 이 3절은 굉장히 어려운 본문을 가집니다. 한글 성경으로 보면 별 것 아닌데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아주 매우 논란거리가 많고 복잡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내가 걸음을 가르쳤다.” 이것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걸음을 똑바르게 걷도록 가르쳤다.” 그러한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걸었다.”라고 해석하시는 주석가들이 있습니다. 어떠한 그림인가 하면 간신히 일어난 어린 아이를 붙들고 줄을 하나씩 떼어 줘서 줄을 붙잡게 하고 아빠가 뒷걸음으로 걷습니다. 아이가 아빠가 주는 줄을 붙들고 걸어올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걸었다.” 그것은 “내가 너에게 줄을 잡게 하여 그 줄을 잡고 네가 걸어오도록 내가 걸었다.” 사실 둘 다 똑같이 걸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단순히 “걸어라.” 하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진짜 시범을 보여 주면서 “야, 이렇게 걸으면 돼.” 꽉 잡고 아이와 함께 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 보십시오. 새카만 옛날의 일이지 않습니까? 750년경의 일입니다. 출애굽으로 따지면 15세기경 이니까 엄청나게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하나의 흑백사진처럼 또렷이 남아서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서 “네가 지금은 나를 버렸지만 내가 너의 생부다. 우리 사이에는 이러한 추억이 있었다.” 하시면서 그림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것은 북 왕국은 936년경에 남왕국과 북왕국이 갈라져 생겨진 나라인데 어떻게 어린 시절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갈라진 것은 자신들이 불순종하여 자기들이 찢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갈라놓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남북문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갈라놓으셨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허용했으니까 일어난 일이지만 정치하신 분들이 잘못해서 갈라놓은 것 아닙니까? 그랬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그 뿌리와 그 뿌리가 모두 하나로 만나서 에브라임의 출애굽의 사건 그 시대의 하나님의 마음은 에브라임의 어린 시절이기도 하고 유다의 어린 시절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브라임이라 불러도 아무 문제가 없고 이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할 때 일차적으로 들어야 했던 청중들이 북 왕국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러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하였다. 내가 너희의 아버지로서 너희를 낳아 너희를 내 아들로 불러 그래서 너희가 어떻게 걸어야 할지 너희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처럼 내가 너희에게 걷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여기에서 ‘걷다.’라는 말의 의미가 성경에서 아주 흔하게 나오듯이 인생길을 걷는 것,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이 ‘걷는다.’라는 의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행해야 할지 아직 모르던 유년 시절에, 부모가 자식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것처럼 가르쳤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가르치셨다고 해석하는데 깊이 동의가 되는 해석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걸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단순한 걸음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행하며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답게 살아가는 품위와 정결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어린아이 같은 이스라엘을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이스라엘을 차근차근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앙이 없는 그들에게 애굽의 열 번의 재앙을 보여 주심으로써 신앙심을 심어주셔서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홀로 한분이신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들고 섬기던 나일 강을 핏빛으로 물들게 하였고 개구리, 파리, 이, 악질, 독종, 이러한 것들로 인해서 더 이상 애굽에서 재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만들어 버렸고 마지막 아홉 번째에는 그들이 가장 최고로 떠받들어 섬기는 태양신을 꺾어 버리는 의미에서 백주 대낮에 캄캄한 어두움이 드리우게 함으로써 신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메시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재앙에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을 모두 치셔서 죽게 하실 때 이스라엘만 구원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넌 다음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은 시나위 반도였고 시내산에서 그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거의 9-10개월간 머물면서 거기에서 자신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섬기고 살아야 할지 세밀하게 가르쳐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 광야 세월 동안에 끊임없이 말씀을 보내시고 선지자를 보내시고 모세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들을 점점 더 성숙한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고 마지막에 이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유리방황하다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쯤 되어서는 그들이 정말 장성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바로 하나님이 어린아이처럼 미련하고 우매하기 짝이 없는 그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그 오랜 세월동안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하나님은 짐승처럼 살아갔을 그들에게 사사를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가르치고 재판하고 돌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왕국이 성립한 후에도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 주시고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살 수 있는 길들을 알려 주시고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 사건을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행하여 걸음을 걷듯이 살아야 할 것을 일러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애정을 가지고 이 아이를 위하여 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어린 아이를 낳아서 맨 처음 발을 때 놓으며 걷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하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 신기합니다. 조그마한 발로 어디서 배웠는지 일어서서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뱃속으로 낳은 아이가 한 걸음 한 걸음 떼어놓으며 뒤뚱뒤뚱 걸을 때 그렇게 대견해 하듯이 그 아이가 자라서 의젓한 청년이 되고 사회에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의젓한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걸음을 떼어놓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자식들을 대하면서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걸음을 가르치신 하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애들 다 길러 놓으면 다 자기 잘나서 큰 줄 압니다. 오늘 집에 가서 혼내주지 말고 따뜻하게 대해 주십시오. 조금만 키워 놓으면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 “아빠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 우리 애들은 그런 이야기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했다고 하면 가만 안 뒀을 것입니다. “너는 내가 없었으면 존재도 없었어.” “엄마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 한다면 혼을 내줘야 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줬는데 어디 감히 그렇게 말합니까? 그런데 애들은 모릅니다. 그냥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애들은 꼭 자기 같은 아들, 딸을 낳아서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아빠, 엄마 생각이 날 것입니다.
아이들이 커서 자기 힘으로 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이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서 신앙이 어느 정도 장성한 지금과 비교하면서 ‘정말 감사하다. 나같이 무지하고 어리기 짝이 없는 나를 하나님께서 이만큼 돌보셨구나.’ 하면서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길러 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말씀으로 섬기는 종들을 통해서 먹이시고 온갖 시련 속에서 보호하시고 성경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삶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일깨워 주셔서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게 하시고 살게 하신 것이고, 예수를 믿어도 정말 무지하고 싹수없는 사람이 되는 대신 그래도 어디 가서 중간이라도 할 만큼 가서 예수 믿는 사람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인간이라는 소리는 안 듣게끔 하나님께서 그만큼 길러 주셨습니다. 그 갈피갈피에 담긴 그러한 사랑과 애정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자식으로 마땅한 도리입니다. 오늘 한번 조용히 맨 처음 예수를 믿으려고 교회 왔을 때 낯설고 “성경 본문 어디입니다.” 하면 신약부터 구약까지 휘저으면서 찾던 기억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이렇게 나를 그 말씀으로 일깨워 여기까지 사람 만들어 데려 오셨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그렇게 우리의 손을 붙들고 걸음마를 가르쳐 주지 않으셨더라면 아마 지금도 교회 어느 한 구석에서 드러누워서 똥이나 싸면서 어린아이처럼 개기고 있었을 사람들을 다 늙도록 그랬을 사람들을 그렇게 걸음마를 가르쳐서 이만큼 하나님 앞에 자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르치실 때에는 선지자를 보내어 가르치셨지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 분을 보내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게 하셔서 그 눈에 흐르는 눈물로 그 얼굴의 표정으로 그 손의 섬김으로 그 발의 섬김으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그림처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발걸음을 가르치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르치시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우리의 손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주님을 믿고 살아야 할지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 주님의 가르침과 인도로 우리가 이제껏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끊임없이 당신께 범죄하고 이방신상에게 분향하며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전에 베푸셨던 은혜였습니다.
B. 두 팔로 안으심
두 번째는 두 팔로 안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알지 못하였도다.” 이 본문이 참 어려운 것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전혀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그가 그의 팔들로써 그들을 취하셨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고치는 것을 몰랐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주어가 맞지 않습니다. 걸음을 가르치는 것은 “내가”로 나오고, 그가 그의 팔들로써 그들을 취하였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말 성경에는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해서 히브리어를 모르는 흩어진 디아스포라 사람들에게 가르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주전 2세기경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헬라제국 시대 때에 그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것을 1인칭으로 바꿔서 주어를 “내가”로 다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다 받아들였습니다. 권위 면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이 훨씬 더 권위 있는 성경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면, 선지자가 화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직접 화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셨는데, 이런 표현이 아니라 선지자가 직접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쳤다. 직접화법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간접화법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가르쳐 주신 그 하나님이 바로 너희를 당신의 팔로, ‘제로하’라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이것은 힘의 상징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할 때 이것은 주먹이 아니라 팔입니다. 능력의 팔입니다. 힘, 세력, 능력, 보호, 이러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복수로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두 팔로 딱 안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취하는 것입니다. 다시 직접 화법으로 넘어갑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아주 흔하게 나오는 표현법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선지자의 의식 속에 하나님을 대언하는 1인칭 화법적 의식이 있고 그 다음에 객관자로서 그 사실을 보도하는 3인칭적 의식이 있어서 이 두 가지가 수시로 문장 속에서 교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시편에서도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하였다.” 그러면서 갑자기 “여호와께서 이렇게 이렇게 하셨다.”라고 하면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였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히브리어 문장법에서는 이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의미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국 이것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큰 능력을 가진 팔로서 이스라엘을 꽉 안고 취하신 것입니다. ‘라카’라는 단어인데 ‘확 낚아채다. 들다. 있는 것을 가져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탁’ 잡으셔서 당신의 품에 품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안았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안 좋은 상황, 홀로 두어서는 안 되는 정황 속에서 그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확 채어서 당신의 두 팔 속에 두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자체가 힘과 능력, 보호를 상징하니까 그 팔로 그들을 붙들고 있으니까 그들은 안전하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곳에서 그들을 낚아채신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한 이외 출애굽을 포함하여 광야 모든 생활 속에서 아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혼자 두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들의 삶의 사태에 개입하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그들을 보호해 주셨다는 의미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장 31절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주신 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모두 이스라엘을 홀로 두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취하여 당신의 능력 있는 팔 아래 품으시고, 혹은 날개 아래 얹으셔서 이동시키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특별히 독수리가 업어서 날랐다고 하는 것은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조류학자가 아니니까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석가는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많은 새들이 자기의 새끼들을 나를 때 항상 발톱으로 집어서 나르는데, 다리를 쭉 뻗고 날개 짓을 하면서 새끼를 데리고 날아갑니다. 밑에 있는 포수가 활을 가지고 쏜단 말입니다. 그 때 어미를 맞추지 않고도 얼마든지 새끼를 맞출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자기 새끼를 어깨 위에 얹는다는 것입니다. 날개를 펴면 푹 파진 부분이 생기는데 여기에 새끼를 올려놓고, 아마 금방 태어난 새끼는 아닐 것입니다. 그 독수리 새끼를 올려놓으면 발톱이 있으니까 엄마 목덜미 같은 것을 꽉 붙듭니다. 그리고 날아갑니다. 밑에서 포수들이 쏘고 싶어도 어미의 날개를 꽤 뚫기 전까지는 새끼를 맞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업어 나르는 독수리가 누구에 묘사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큰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안전하게 출애굽을 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림 같은 비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가슴에 와 닿는 비유였을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애굽의 노예 살이라고 하는 숙명적인 위험에 처해서 어린 이스라엘이 자기의 힘으로는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취하여 당신의 능력 있는 두 팔에 안아서 건져내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화) 저는 어제 저희 딸이 동영상 하나를 보여주는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늘 오후에도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어린이집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어린이집은 아마 처벌을 받을 것 같습니다. 어린이집에 4살짜리 아이를 보냈는데 자꾸 어깨를 아파하였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물었지만 말을 잘 안 했습니다. 엄마가 직감이 이상해서 CCTV를 돌렸습니다. 그랬더니 충격적인 장면이 나왔습니다. 4살짜리 아이들 식사시간이었는데 밥을 먹는데 한 아이가 의자에 앉아있는 체구도 굉장히 좋았던 여성 33살이라고 하는데 보기에는 75kg 되어 보이는 몸집이 아주 건장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4살 먹은 아이가 뭘 알겠습니까? 인민재판 받는 아이처럼 주눅 들어서 있었습니다. 뭘 잘못했나 보았더니 김치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뭐라고 뭐라고 하더니 애를 때렸는데 애가 2m 바깥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 장면 밖에 어제는 못 봤는데 오늘 보다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4살짜리 아이들이 정확하게 바둑판처럼 줄을 맞춰서 앉아서 무릎을 꿇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사는 즉시 구속해야 합니다. 구속하고 그 다음에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꿀밤을 툭 주는 것, 그것도 사실 좋지 않습니다. 4살짜리 아이가 뭘 알겠습니까? 그런데 그 한 75kg되는 체구에서 펀치가 날아가는데 무슨 생각이 났는가 하면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이 싸울 때였습니다. 무하마드 알리가 세계 최고였는데 조지 포먼이라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때 무하마드 알리 체중이 130kg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지 포먼이 나와서 한방 맞았습니다. 130kg짜리가 그 한 펀치에 공중에 붕 뜨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광경이 딱 생각이 났습니다. 딱 때렸는데 1.5m이상 애가 날아가서 고꾸라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못 일어났습니다. 바닥에서 기면서. 세상에 33살 되는 75kg쯤 되는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인터넷 검색어 1위입니다.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영구히 그 직종에서 퇴출시켜야 합니다. 보고 있는 저도 이렇게 분개하는데 엄마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애들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바둑판처럼 4살짜리가 줄을 맞춰서 무릎을 꿇고 앉아 광경을 지켜보겠습니까? 애들 부모들이 썼는데 이상하게 어린이집 앞에만 가면 안 들어가려고 운다는 것입니다. 그 사연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게 수십 번 일어난 것 가운데 하나가 카메라에 잡힌 것입니다. 경찰에서 수사를 들어갔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식으로 애굽에서 학대를 받으며 살았던 것입니다. 4살짜리 아이는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켜본 아이들도 트라우마가 무서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박받는 애굽의 종살이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두 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으셨습니다. 그래서 언약의 자녀들을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노예적인 속박으로부터 건져내시고 그들을 업어 가나안에 이르는 날까지 수많은 민족들을 그들을 대적하고 싸움을 걸어왔으나 하나님은 그 모든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번영에 취해서 행복하게 살면서 자신이 그렇게 비참하게 살 때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자신들을 건져 그렇게 하나님이 보호하고 인도하셨는지 그 팔로 안으셔서 어떻게 인생의 벼랑 끝에서 건져내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셨는지에 대한 그 애틋한 은혜를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는 가득히 가나안의 번영으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질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문명의 기계들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발을 들여놓고 그 속에서 즐거움의 뿌리를 키우게 되면 결국 마지막에 그 모든 것들, 물질의 노예가 됩니다. 그것은 속박 받는 삶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말할 수 없는 엄마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건져 이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와서 번영한 문명을 누리며 그 속에서 물질주의에 심취해가며 살면서 신앙을 모두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하나님이 애틋하게 인도해 주셨던 것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주님이 당신을 의지하며 살라고 준 번영이었는데, 그 번영 때문에 그 번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입니까? 여러분의 모습입니까? 정말 볼품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아무 희망도 없고 육신은 병들고 인생의 갈 길은 절망뿐이고 주님을 믿고 싶지만 어떻게 믿으며 그 분을 찾아가야 할지 길을 알 수 없었고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때에는 그렇게 살아갈 힘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여러분을 하나님이 운명처럼 매어 살던 그 속박에서 끊어 여러분을 취하셨고 그래서 당신의 품 안에 안으셔서 독수리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름과 같이 여러분을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서 죄의 포로가 되어 살던 여러분을 업어 나르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광활한 곳에 인도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거하였던 것처럼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 이제 발달한 문명의 이기에 젖어서, 스마트폰, 현란한 영상 기계들에 정신을 팔고 살던 여러분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빛바랜 흑백사진 두 장을 내어 놓으십니다. 희미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기억이지만 사진은 그때 순간을 정확하게 찍었습니다. 여러분은 걸음조차 막 떼어 놓지 못하는 신앙의 어린애들이었고 주님은 두 손가락으로 여러분의 팔을 붙들고 여러분은 다섯 손가락으로 아빠의 손가락을 붙들 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손가락을 붙들며 걸음마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유모처럼 당신의 교회를 통해서 젖내 나는 얼간이와 같았던 여러분을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으며 진리의 세계, 하나님의 은혜의 성품,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불변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야 하는지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을 섬긴 수많은 사람들은 도구였을 뿐이고 주님이 가르친 것은 사람을 통해서 가르쳤으나 사람의 사상과 말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성 속에 있는 생각과 하나님의 의지 안에 있는 뜻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고도 믿기 전 이 세상의 죄악에 매여서 주님을 사모하고 복음을 그리워하면서도 결코 떠날 수 없었던 이 세상의 줄을 하나님이 풀어 주셔서 끊어주셔서 자유롭게 돌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화) 10년도 넘은 일입니다. 911사태가 나고 이러면서 너무 어려운 때였습니다. 캐나다 목회자들이 저를 초청하여 말씀을 전하러 갔습니다. 공황이 너무 삼엄하여 연결 비행기를 못 탈 정도로 그렇게 검색이 심하여 3-4시간 걸렸습니다. 가까스로 도착해서 집회를 하였는데 그곳의 목사님이 낚시 광이었습니다. 저는 평생에 낚시 대를 들고 여러분 냇가에 가봤지만 한 번도 고기를 못 잡아 보았습니다. 손맛, 손맛 그러는데 무슨 손의 맛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낚시를 가겠냐고 해서 한 번이라도 낚아 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걱정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데리고 가더니 봉고를 몰고 가는데 봉고를 탁 여니까 튜브가 하나 나오는데 바람을 집어넣으니까 금방 보트가 되고 배터리를 다니까 금방 모터보트가 되었습니다. 둘이 그것을 타고 호수 가운데로 가서 던졌는데 정말 집어넣자마자 처음으로 묵직한 게 콱 물었습니다. 쇳덩어리가 걸린 느낌이었고 그것이 파닥파닥 하면서 전해지는데 이게 그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게 걸렸는 줄 알았습니다. 올려 보니까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 30cm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3마리 쯤 잡았습니다. 무지개빛 송어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홰를 쳐 먹지 않고 다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도 생각을 하나 봅니다. 물속에 들어가서 한 바퀴 빙 돌고 인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말입니다. 푱 하고 물속으로 사라지는데 그 때 떠올랐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자유’입니다. 자유. 한 마리는 꽤 컸고 두 마리는 작았는데 다 놓아주었습니다. 그 넓은 호수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살던 송어가 미끼에 걸려 올라왔을 때 얼마나 공포스럽고 무서웠겠습니까? 생전 처음 해보는 경험 이지 않습니까? 뭔가에 딸려서 공중으로 끌려오는 느낌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뚫어지고 아픕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빼서 미끼는 주고 “야, 참 예쁘구나. 가거라.” 하고 던졌을 때 그 자유.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믿고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때로는 가난에 매이고 때로는 죄에 매이고 때로는 죄와는 상관없이 힘겨운 사람들을 만나서 매이고 그러면서 고통을 받을 때 육신의 고통과 속박도 문제였지만 정신과 영혼의 속박은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이 주님께 은혜를 구하고 곤고한 심령을 안고 나와서 주님의 자비를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간구할 때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궁핍에서 건지고 질병에서 건지고 어떻게 해어 나올 수 없는 죄의 속박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긴 세월을 원수처럼 살고 미워하던 사람들은 우리의 영혼을 속박하던 개 줄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모든 미움의 줄을 끌러 우리의 영혼에 자유를 주셨습니다. 마치 사냥꾼의 그물에 걸렸던 새들이 놓여서 창공을 훨훨 날을 때 그 자유는 비상하는 자유는 그들의 생명의 표현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들을 그 속박 속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다가오셔도 그 분에게 건지실 능력이 없다면 연민 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이신 그 분은 여러분을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능히 여러분을 모든 속박에서 건져낼 수 있을 정도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건져내셨습니다.
조지 휘필드라는 위대한 18세기의 설교자가 가슴이 식을 때마다 자신이 회심한 교회에 찾아가서 그 의자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었던 것처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의 벼랑 끝에서 결핍의 속박 속에서 죄의 사슬에 매여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어떠한 희망도 없었을 때 주님의 교회를 찾아서 어느 자리에 앉으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한적한 시간에 홀로 와서 한번 앉아 보십시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Ⅲ. 적용과 결론
조용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나를 여기까지 부르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은 이렇게 가슴 저미는 사랑으로 매순간 인도해 오셔서 그래서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있고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과거의 사건들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매일 그 은혜가 생각났고, 매일 매일 그 사랑을 지금 누리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거룩한 은혜의 정동으로 채웠습니다. 그래서 매일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 많다고 고백하였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이러한 큰 사랑으로 이렇게 말할 수 없는 은혜로 돌보고 이끄셨는지에 대하여 감격하는 사람들이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생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눈물의 감사는 언제나 여러분에게 남은 인생을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는 거룩한 열정에 불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품 안에서 소외된 사람들, 그렇게 두 손을 붙들고 걸음을 가르치는 은혜의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개념 없이 인간을 살기 때문에 고달픈 삶을 사는 힘겹게 이어가는 이웃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자신에게 하나님의 커다란 진노가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는데 이것이 바로 구령의 열정이었고, 영혼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당하신 고난의 남은 것들에 참여하는 그러한 종류의 겪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왜 우리가 은혜 가운데 있을 때 은혜에서 멀어진 지금은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그러한 품질의 삶을 살아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비밀들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우리를 만드셨고 그렇게 영혼들을 위해 주님을 섬기며 살 때 우리가 휘파람 불며 살 수 있을 정도로 물질이 넉넉하고 근심이 없고 시련이 없고 이 세상에서 어떠한 염려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속의 근심, 밖의 걱정, 늘 마음은 요란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때문에 고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전의 우리처럼 그러한 사랑을 모르면서 살아가던 불쌍한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며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매 순간 주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을 권면해 주시고 도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지금 그 처음 아름다운 기억들, 어린아이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손가락을 붙들고 걸음마를 배우던 여러분이 그 품에 안겨서 잠들고 깨면 즐거워하던 여러분이 그 처음 사랑의 기억을 잊어버린 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르면 부를수록 멀리하고 이 세상의 번영을 위해 바알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마음이 어떠실 지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 들어가면 못 합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관계로의 부르심입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젊은 시절에는 잡아먹을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피를 토하며 설교하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결코 영혼은 위협과 협박으로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무감각해지고 사랑을 잃어버리고 나면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파괴적인 담대함으로 뭉쳐집니다. 지옥이 뜨거운 불길로 입을 벌려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성격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20여년의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여러분과 같이 아주 어리고 인격도 미천하고 아는 것도 없었던 사람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을 알아왔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협박하고 위협하고 무섭게 해서 벌벌 떨게 하는 말씀의 전달자 보다는 그들 속에 잠들어 있는 착한 마음,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 첫사랑의 기억 속에서 빛바랜 흑백사진을 아빠와 함께 찍을 때 그 착했던 마음들을 다시 일깨워 그들 스스로 그 사랑의 줄에 매여서 주님을 버림이 주님에게 고통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통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서 인격적으로 주님께 돌아오게 하고 싶었습니다. 성공적으로 잘 해왔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끊임없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였고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이 길을 더 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어린 아이 같은 여러분에게 걸음을 가르쳤고 주님 앞에서 사는 것을 사랑으로 가르쳐 주었고 여러분을 그렇게 가르치신 아빠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즐거워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풍랑과 시련, 풍파는 가득하여도 그 분이 취하신 그 두 팔 아래 안겨 어린아이처럼 잠들고 안식을 취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떠나서 처음 사랑을 버려서 세상이 여러분에게 그러한 사랑을 주었습니까? 바알이 정말 그러한 번영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정말 신앙을 버리면 번영할 것이라는 우상들의 감언이설이 정말 사실이었다면 여러분은 왜 그렇게 피폐한 정신 속에서 물질적인 번영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까? 모두 진실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떨어질 때까지만 우리를 유혹하지 떨어지고 나면 세상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돌아오십시오. 그 유년 시절로 돌아오십시오. 일체의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앙망하고 그리워하던 그 흑백사진을 찍던 시절로 돌아오십시오. 그렇게 외간 남자에게 몸을 팔고 수없이 자식들을 낳아가지고 오는 고멜을 향한 죄인인 호세아의 마음이 뼈 속까지 타들어간 사랑이었다면 호세아가 고멜을 사랑한 것보다도 교회를 더욱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심정으로 여러분을 찾으시겠습니까? 이 주님의 사랑을 등지지 말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고치시는 하나님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호 11:3)
녹취자: 이경순
Ⅰ.본문해설
여로보암 2세 때의 세속적인 번영에 취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복주셨지만 그들은 바알 때문에 번영을 누린다고 생각하며 주님이 은혜를 주시면 주실수록 더욱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채찍을 가지고 나타나 무섭게 징계하시는 대신 빛바랜 사진 두 장을 그들에게 내 미셨습니다. 한 장은 하나님이 어린 이스라엘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가리키는 사진이었고 그리고 또 한 장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 때에 애급에서 그들을 업어 나르시고 그 팔로 안으시는 광경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한 장더 사진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고치시는 광경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또 내 팔로 안아 주었는데도 지금 이스라엘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잘 모른다.” 이런 뜻으로 읽힙니다. 아무리 여러 번을 읽어봐도 그런데 사실은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내가 그들을 고쳤다는 것을 ‘키 레파틴’이라는 두 단어로 되어 있는데 ‘고쳤다는 것을’입니다. 과거사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걸음마도 가르치고 팔로 안아 주셨으니까 지금 너희를 고치실 수 있다 이런 뜻으로 쓰신 것이 아니라 세장 다 옛날에 찍은 사진입니다. 한 장은 걸음마를 가르치는 사진, 두 번째 장은 하나님이 애급에서 그들을 품어 나르시는 사진, 마지막으로 그들이 질병에 걸렸을 때 그들을 하나님이 고쳐주시는 광경입니다.
우리 모두 어렸을 때 아파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잘 생각해 보면 아주 그림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파본적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선 가족들의 관심이 급상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제일 좋은 것은 형제들이 많이 있어도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눕혀놓고 수시로 물수건을 갈아주면서 근심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그리고 평소에 먹지 못하던 것들도 사다 주십니다. 저는 부모님이 사업하신다고 멀리 떨어져 있고 저는 혼자 서울에 유학 왔기 때문에 할머니 하고 살았습니다. 오늘도 이 설교를 생각하면서 옛날 생각이 납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씩 아주 엄청난 독감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항상 그 때마다 할머니 사랑을 독차지 합니다. 평소에도 사랑해 주셨지만 그렇게 아플 때면 항상 고기를 사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푸주간이 없었고 고기 아저씨가 “고기 사려/ 선지사려.” 그리고 구루마나 자전거에 싣고 다닙니다. 당연히 냉장은 안 되었습니다. 그 대신 아주 신선한 고기입니다. 거기서 한 근 혹은 반근을 사십니다. 그 고기가 얼마나 귀했는지 구어 먹고 국 끓여먹고 그러지 못하고 무를 여러 개 사다가 채를 치고 그리고 고기를 썰어 넣고 넉넉하게 볶는 겁니다. 그리고 저한테는 특별히 고기가 많이 들어간 무나물을 퍼서 주십니다. 그런데 참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니었던 게 독감에 걸리면 입맛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고기를 씹는데 꼭 나무를 씹는 것 같았습니다. 왜 맛있게 느껴질 때는 안사주시고 그런 기억이 아직 그림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은 가족관계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아플 때 남편이나 아내나 온 가족이 아플 때 잘해 주세요. 잘못해주면 섭섭한 게 평소보다 세배 네 배되고 잘 해주면 마음에 오래도록 추억에 남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사랑 많이 받은 애들이 시집 장가가서 가정을 잘 꾸립니다.
어쨌든 한번 그림을 그려 보세요 이스라엘이 어린애입니다. 손을 잡고 걸음마를 가르치는 첫 번째 사진, 업어 나르시는 두 번째 사진, 마지막에 세 번째는 머리에 물수건을 얹고 누워 있는 이스라엘을 엄마 같은 아버지 하나님이 간호하고 있는 장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바알이 해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바알은 이스라엘에게 해준 것이 없지만 설령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에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해주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엄마 같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을 사랑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알은 이스라엘을 나은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나으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을 애급에서 건져 내신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내 아들이라고 불러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렇게 반역한 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고 불러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비교할 수 있는 것을 비교해야 합니다.
Ⅱ.고치시는 하나님
A. 야훼 라파
그러면서 오늘 11장 3절의 문맥은 출애굽기 15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냐면 홍해를 건넌 다음에 마라라고 하는 곳에 이릅니다. 물이 없습니다. 물을 발견했는데 쓴물이어서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해서 나무하나를 던집니다. 그랬더니 그 쓴물이 변하여 마실 수 있는 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당신의 속성을 새롭게 계시해 주십니다. 그것은 “나는 여호와 라파다.” 즉, “치료하는 여호와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만약 나에게 순종하면 나는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사람들이 걸렸던 질병에 걸리지 않고 구출함을 받은 것처럼 내가 그렇게 너희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출애굽을 할 때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는데 비 개구리, 이, 악질, 파리, 독충,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같이 겪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재앙에서 보호해주십니다. 그 사건을 상기시키시면서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여기에는 질병에 걸렸을 때 고쳐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것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그것은 한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의학 그러면 병 걸린 사람들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의학이 점점 발달하면서 가만히 의사들이 생각을 해 본 것입니다. 그것은 병을 걸렸을 때 고치는 것은 너무 좋은 것이지만 더 좋은 것은 안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설에 의하면 아테네에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를 만드는데 신이 둘이 나타납니다. 포세이돈이라는 신이 나타나서 “나를 섬겨라. 그러면 내가 모든 전쟁에서 언제나 이기게 해주마.” 그리고 카드를 내미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테네는 지혜의 신인데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날 섬겨라. 그러면 전쟁을 안 하게 해줄게.” 그랬는데 누굴 택하겠습니까?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의학도 병이 걸렸을 때 그것을 치료해서 낫는 것은 좋겠지만 가장 이상적인 것은 치료할 정도까지 병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방의학이라는 것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구라파에서는 이 예방의학이 엄청난 투자를 많이 하면서 발전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치료의 개념을 질병으로부터 낫게 해 주는 것과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모두를 치료의 개념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도 ‘여호와 라파’의 일이고 고치시는 것도 ‘여호와 라파’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라에서 사건보다 더 생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억에 남는 치료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기브롯 핫다아와라는 곳에서의 사건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게 다 떨어졌습니다. 삼백만병 가까이 되는 사람이 매일 먹어야 하니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만나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람들이 너무 감격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그것을 새벽에 모아서 매일 매일 주시는 것입니다. 이틀씩씩 가져와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먹을 것에 대한 염려에서 해방된 것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감격은 정말 엄청났습니다. 그 다음에 “야 새벽이다. 오늘도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 주실거야. 야 가자.” 그리고 바가지를 들고 가는데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맨 날 그것만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가자.” “에이 맛대가리도 없는 만나야.” 그러면서 갑니다. 교인들하고 비슷합니다.
이상한 교인 한사람을 봤는데 매 주일마다 1부부터 4부까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주일날 딴것도 해야지 왜 그러니까 똑같은 이야기를 뭐 그렇게 듣냐고 하니까 “네 번이 다 달라요.” 하는 것입니다. 물론 토씨는 다르겠지 그러다가 마음이 변심하면 ‘에이 맨 날 맛대가리도 없는 똑같은 소리네.’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투덜거리면서 다니는 것입니다. 해아래 새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하던 짓을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아 맛대가리도 없는 것.’ 먹으면서 슬픔으로 가득차서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래 그러면 고기를 먹어봐라 하고 메추라기를 확 보내주십니다. 발목이 빠지도록 메추라기가 와서 쏟아지는 것입니다. 메추라기 먹어보셨나요? 참새보다 훨씬 낫습니다. 참새는 먹을 게 없지만 메추라기는 큽니다. 구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을 허락해주실 때 사랑으로 허락을 해 주실 때가 있고 “그래. 그럼 네 맘대로 해봐라.” 그러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잘 구별해서 들어야 됩니다. 먹었습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고기를 달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벌하신 것이 아니라 음식투정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들이 고기를 달라고 해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만나를 먹으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먹지 굶어 죽었으면 얼마나 심각했을 텐데 그것은 탐욕이었던 것입니다. ‘기브롯 핫다아와’라는 뜻이 ‘탐욕’이라는 뜻입니다. 아직 고기가 잇 사이에 있는데 징벌을 받습니다.
거기서 경험하는 것이 유명한 불 뱀 사건입니다. 불 뱀은 두 가지 학설이 있는데 불같이 새빨간 색깔이라는 설이 있고 또 하나의 학설은 물면 독이 퍼지는데 온몸에 신열이 나고 불붙는 것 같아서 불 뱀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가보지 않았으니까 모르겠는데 그래도 많은 학자들은 아마 후자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아직도 새빨간 뱀은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에 감염이 되어서 죽을 지경입니다. 자 그런데 이게 참 신기합니다. 하나님이 뭘 명령하시냐면 “지팡이 끝에 구리로 뱀을 매달아라. 그리고 그것을 높이 들어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여기를 봐라.” 그리고 높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은 신기하게 나음을 얻었습니다. 역하고 거꾸로 가는 마음에 ‘아파 죽겠는데 보긴 뭘 봐.’ 그러면서 완악했던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이 사건을 예수님이 다시 언급하십니다. 그러면서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리어야 하리라” 그러면서 모세의 지팡이 끝에 매달려 있던 구리 뱀이 높이 쳐들려 사람들이 그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 뱀을 보고 불 뱀에게 물려 죽을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인자도 그렇게 들려야 되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면 어떤 공식이 성립 되냐면 모세의 손에 들렸던 지팡이의 구리 뱀, 나무에 달린 예수그리스도, 모세의 구리 뱀을 바라보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바라봄, 우리의 믿음, 그들의 육체의 치료, 우리의 영혼의 구원, 이런 공식이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야말로 치료자이시다.”라는 것을 아주 깊이깊이 각인 시켜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 번영에 취해서 지금 앞뒤를 분간 못하고 방탕으로 치닫지만 그들의 영혼은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어린 시절에 물수건을 머리위에 얹고 엄마 곁에 누워있는 그 사진을 한 장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봐라. 너희가 아팠을 때 나 여호와는 너희를 치료했다.” 뭘 보여주는 것입니까? 자기 자녀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과 동시에 그를 고칠 수 있는 여호와의 능력을 함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구속사적으로 요한복음 3장하고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치료자로 오셨다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망가진 영혼을 가지고 육체도 망가졌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망가졌다는 느낌이 안 듭니다. 엄청나게 밤에 신나게 놀고도 아침에 일어나면 생생합니다. 얼마 안갑니다. 몇 년 안갑니다. 주일날 교회 갔다 와서 밤늦게까지 야구를 하다가 집에 들어와서 막 신음소리를 내고 앓아눕습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말짱 합니다. 그게 젊음입니다. 생명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몇 년 안갑니다. 벌써 특별히 운동하고 자기 관리안하면 여자는 23세부터 늙기 시작합니다. 남자는 26세부터 늙기 시작합니다. 완전성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인간의 육체도 이미 죄 때문에 망가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주님이 치료하는 치료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치료는 오늘날 인간중심으로 치료를 생각하는 그 치료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치료였습니다. 우선 육체는 이 세상에서 죽지만 썩지 않을 몸을 입음으로 하나님이 영원하고 완전한 몸이 되도록 치료하십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병든 그 영혼을 중생과 회심으로 살아나게 하신 후에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사랑 안에서 그 온전한 영혼이 되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영혼이 온전하게 가도록 만드시고 마지막에는 죽음과 함께 성화를 완성시키고 부활의 날에 영혼도 완전히 영화되어서 그래서 육체와 함께 불멸의 존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이 인간을 향한 치료의 과정이고 이 세계도 심각하게 망가집니다. 그래서 지구의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무분별하게 자원을 개발하고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면서 탐욕적인 삶을 이어간다면 지구의 마지막 사용기간이 주후 삼천년이면 끝날 것이다. 삼천년이면 지구를 버려야 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나왔던 영화 인터 스텔라 보면서 조금 ‘헐’ 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그렇게 기술이 뛰어나면 지구를 고치지 왜 버립니까? 그런데 그게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이 지구 전체가 하나님의 생명을 담지 한 하나의 위성으로서 그 하나님의 창조에 목적에 부합하는 지구가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아무튼 그런 전체의 그림으로 놓고 보면 고치시는 하나님이라는 그림이 우주적으로 다가옵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 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 속에서 유아기를 보내며 성장해 왔습니다. 이런 사랑은 바알이 베풀어줄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아프고 누워 있을 때 행주치마를 입고 엄마가 옆에 와서 아이의 뜨겁게 오르는 몸의 열을 걱정하며 밤잠도 안자고 물수건을 갈아주면서 간호하는 그런 추억은 바알하고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알은 처음부터 그렇게 이스라엘을 사랑한 신이 아닙니다.
B. 영혼을 고치심
여기서 고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림은 보여주는 사진은 과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마라의 쓴물에서 구원해 주시면서 계시해주시는 여호와 라파에 대한 계시 그리고 민수기 21장에서 음식원망으로 불뱀 사건에서 구원해주신 그 모든 것들을 그림으로 하면서 요한복음 3장은 이제 치료의 관심사가 육체에서 영혼으로 승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지금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애절한 음성을 들려주시면 들려주실수록 멀리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습니다. 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의 계명대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상을 미워하고 우상에게 희생을 드리는 것을 경멸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던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를 통해 그렇게 애타게 불러도 이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방에게 희생 제사를 드리고 분향을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이 행동으로서 선지자들의 음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고 행동으로서 바알에게 제사하고 우상들 앞에 분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동의 근원을 캐고 들어가면 망가진 마음, 고장 난 영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치료의 추억을 상기시키면서 어떠한 사랑으로 엄마처럼 그들을 간호하여 고쳐주었는지를 하나님이 빛바랜 사진처럼 그들에게 보여주시면서 상기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너희는 지금 세상적으로 번영하는 시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큰 소리 치면서 너희들이 잘 살고 있지만 차라리 몸이 고장 나서 덜컥 들어 누워서 아픈 외과적인 환자보다 더 심각한 질병의 상태에 있다. 내가 예전에 너 어렸을 때 엄마 같은 하나님 아버지가 이렇게 고쳐주셨다. 그러니까 너희가 이런 망가진 삶을 살면서 말씀을 멀리하고 우상에게 제사를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너희의 삶이 고쳐지기 위해서는 너희의 영혼의 치료가 필요하다.” 그것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이 절망적인 질병에 걸렸을 때 불 뱀에 물리거나 애급에서 애급사람들이 걸렸던 그 질병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그 큰 능력으로 그 큰 사랑으로 자신들을 치료해주셨다는 사실을 회고한다면 자기들이 아무리 영적으로 망가지고 죄짓고 불순종해서 악한 자들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고치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패역한 우리의 마음, 호세아가 잘 쓰는 단어가 패역입니다. 히브리말로 ‘마슈브’라고 하는데 확 굽은 것입니다. 나무 같은 것이 자라고 굽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명입니다. 안 고쳐집니다. 어제도 이야기 했지만 33살 넘은 여교사가 애를 때렸습니다. 그 여자가 몸무게가 100키로가 넘는답니다. 그 몸에서 엄청난 펀치의 파괴력이 나온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런 일이 처음일이라는 것이 나는 안 믿어집니다. 상습적이라고 봅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내 가슴이 막 칼로 긋는 것 같았습니다. 네 살짜리 애들이 얼마나 귀엽습니까? 어디 그렇게 때릴 때가 있습니까? 그까짓 김치가 뭔데 말입니까?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 속에 그런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나온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오늘 짓는 죄는 예전에 지었던 죄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짓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이냐면 마음의 패역한 성향입니다. 그것은 운명입니다. 안 고쳐집니다. 그러면 정말 아무 희망도 없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안 고쳐집니다. 불가능합니다. 어마어마하게 권력과 권세를 가진 사람 앞에서 그런 것을 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치에 자기가 눌려있으면 발휘는 못하는데 그것을 할 가능성은 항상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에서 법을 자꾸 엄격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법은 이미 드러난 행동에 관심이 있지만 신앙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그 사람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 은혜,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는 악한 습관은 중독과 같습니다. 제가 몇 번 설교했습니다. 제가 담배 골초였다고 한 곽 반씩 피웠습니다. 세례 받고 네 번을 끊으려고 했는데 세 번째 실패하고 네 번째 성공했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겠습니다.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마약은 그것의 200배랍니다. 그러니까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렸을 때 아이들이 습관이 되는 것에 대해서 아주 무서운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감시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벌써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패역합니다. 그래서 이미 굽어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씀을 들으러 나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의지의 힘이 필요하고 말씀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은 아주 양심의 가책 없이 쉽게 일어나고 하나님 한분만을 경배하고 제사하는 것은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우상에게 제사하고 분향하러 가는 것은 습관이 되어 있어서 김유신이 타고 다녔던 말처럼 기생집으로 덜렁 덜렁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려서 말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자기가 맨 날 그리로 몰고 갔으니까 그리 간 것이지, 베려면 자기를 베야지, 그게 바로 익숙해진 우리 습관입니다. 그런데 이미 그렇게 돼 버린 것입니다. 이미 되어버린 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게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확 하고 필이 오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 나에게도 그런 거 있는데 어떻게 하나?’ 있다 그겁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것이 우리 속에서 엄청난 힘을 휘두르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거기에 저항 하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선하고 경건한 습관은 그렇게 우리를 휘두르는 것 같은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악한 습관은 거의 폭력적으로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떤 마음까지 드냐 하면 자신이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피해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충동이나 성향들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여자 분도 애를 살해할 목적으로 때리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김치 안 먹었다고 죽이고 싶겠어요? 결혼은 했더라고요 작년 12월에 그런데 애기를 아직 안 낳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신혼인데 말입니다. 애를 때렸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보고 만약에 하라고 그러면 아마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심호흡을 하고 여러 번 결단을 하고 연습을 해야지 연기라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분은 아주 쉽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속에 같은 상황이면 얼마든지 팰 수 있는 게 ‘마슈브’, 딱 굽은 게 있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애를 김치 안 먹는다고 한방 쳐서 한 1m - 2m 나가떨어지게 하는 일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여자 아이들을 때려서 가르치는 것은 짐승입니다. 여자애들은 때리면서 가르치면 안 됩니다. 남자애들은 때리면서 가르치는 것은 괜찮은데 여자애들은 예뻐해 주면서 곱게 길러야 되는 것입니다. 아들은 맞아도 됩니다. 딸은 때리면 안 됩니다.
1. 말씀을 보내심
그런데 그러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굽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고치시는 분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패역한 마음의 운명적인 그 병을 하나님이 어떻게 고치시느냐 하면 여기서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머리 어디에 질병이 났든지 간에 수술 할 때는 칼로 하듯이 여러분이 어디가 병들었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것을 고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주셔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질병이 아니니까 육체의 질병이라면 마취를 시켜놓고 의사가 환자 의식이 없을 때 칼로 찢어서 고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영혼의 질병이고 마음의 병입니다. 그러니까 치료하고 고치는 것도 마음 안에서 작용이 일어나야지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마음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어떤 결론이 성립 하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머리에 아직 다가오지도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와서 푹 잔다든지 예배시간 내내 딴 생각을 해서 우스갯소리 예화하나 한 것밖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든지 그런 경우에는 아예 머리까지도 안 온 것입니다. 허공중에 흩어진 것입니다. 이해는 됩니다. 그러면 머리까지는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질병이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기 때문에 머리에 있는 것이 마음까지 내려와야 됩니다. 우리들이 질병에 걸리면 제일먼저 병원에 가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선 정확한 검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서 검진을 하고 필요하면 엑스레이 그것도 안 되면 초음파 그것가지고 불완전 하면 CT, MRI 별난 이름 가진 것 많습니다. 이름이 새로울수록 값이 점점 비싸집니다. 사진 한 장 찍는데 백 몇 십만 원 받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해요 찍습니다. 아니면 머리를 뚜껑열어놓고 보자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찍어야 됩니다. 그래서 충분히 환자들에게 의료비를 내게 하고 그리고 진단을 다 합니다. 그러면 거기서 정확한 병명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일 먼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영혼의 변화에 이르는 첫 번째 과정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이 마음까지 안내려가더라도 일단 이 지성으로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지만 마음에 내려갈 가능성이 있지 이해도 되지 않은 지식이 어떻게 마음으로 내려가겠습니까? 가능합니까? 그리고 내려간들 그게 올바른 지식이 아닌데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우리의 부패한 본성과 결탁되어 있는 우리의 자아를 떼어놓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우리 편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거듭난 선한 본성과 남아있는 악한 본성이 있는데 선한 본성은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쫒아서 살고 싶어 하는 본성입니다. 그런데 또 한 악한 본성은 끊임없이 자기를 주인삼고 욕망을 따라서 세상의 만족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본성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스라엘의 마음속에도 이 두 가지 본성이 함께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신자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선을 쫒는 마음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려고 하는 이 악한 마음이 두 개가 공존하듯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아가 선한 본성과 결탁이 되어서 하나가 되는 것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져야 합니다. 예전에 받았어도 얼마동안만 은혜가 끊어지면 그 결탁되어 있던 것들이 풀립니다. 그리고 자아가 그 편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패한 자기의 옛 본성과 자아가 하나가 되는 것은 특별히 안 해줘도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드는 비유지만 음식을 안 썩게 하기 위해서는 냉장고에 넣거나 기름에 재어 놓거나 말려놓거나 소금을 왕창 뿌려놓거나 이렇게 해 줘야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상하게 만들려면 특별히 거기에 상하게 하는 약을 치는 게 아니라 그냥 따뜻한 실내에다 며칠 놔두면 곰팡이가 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결국 우리자신에 대해서 판단하는 게 자아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부패한 본성과 딱 달라붙어서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자아입니다. 그런데 자아가 어느 날 튀어나와서 자아를 비판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비판이 되겠습니까? 그놈이 그놈인데, 그래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비쳐주면 그다음에는 그 말씀의 빛으로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이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인식하는 것이 영혼의 변화를 맞는 첫걸음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여러분이 은혜를 받을 때 쾅 하는 이 충격은 가슴으로 먼저 오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옵니다. ‘아 이게 나였구나. 내가 있는 곳이 여기였구나.’ 그런 것을 ‘쾅’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외심의 최고의 표현중 하나가 주의 깊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동생이 물 떠달라고 하면 아무렇게나 떠다가 탁 갖다 주지만 어른이 물을 떠오라고 하면 가면서 흘릴까봐 조심하고, 물 한잔 가져오라는 사람이 중국의 황제일 경우에는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하는 미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위가 그 태도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곤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일먼저 해야 될 일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쇠락한 마음을 달라고 제가 매주 기도합니다. 쇠락(衰落)에서 그 쇠(衰)가 한자로 물 뿌릴 쇠자입니다. 요즘 쓰지도 않는 말입니다. 아침에 마당에 물을 뿌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쇠락해진 정신으로 똑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진을 찍는 것입니다.
삶의 개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각의 변화입니다. 미련한 사람들을 만나면 병 고치기 힘들다 그러면 무당한테 갔다가 한의사한테 갔다가 양의사한테 갔다가 아니면 자연치료 쪽 해보고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괴로움 다 당하고 마지막에 죽는 겁니다. 삶의 개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생각의 변화가 와서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는 우리에게 맨 처음에는 아픈 데를 찌르는 칼 같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째듯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치료하는 것과 똑같이 그렇게 제일먼저 말씀으로 진찰을 하고 그 말씀으로 고치고 수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 뽑고 파괴하고 무너뜨리기는 일을 위해 소명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다음에 세우고 건축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2. 은혜를 베푸심8
두 번째는 말씀을 보내시는 것과 함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영혼이 병들게 되면 영혼이 병들었다고 하는 것은 영혼이 물질이 아닌데 병들었다고 하는 것은 바이러스가 들어갔겠어요? 아니면 썩어서 냄새가 나겠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기능에 고장이 난 것입니다. 영혼의 대표적인 기능은 지성과 의지입니다. 특히 의지가 병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패역하게 되고 인간의 영혼이 망가지게 되면 의지가 선 한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며칠 전에도 왜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을 하면 말을 안 들을까 그런데 명령하는 마음은 선한 마음인데 명령을 받드는 마음은 병든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병이 들어서 이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행사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혼이 병들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의 작용이 혼란스러워져서 진리를 올바로 볼 수 없고 자신의 삶이나 자기를 관찰하는 것들을 올바르게 못하게 하고 의지가 병들어서 선한 힘이 현저히 사라지게 되어서 생각으로 끊임없이 선한 것을 마음을 먹어도 실행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 그게 결국은 망가진 영혼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어떻게 고치 시냐 하면 은혜를 주셔서 고치십니다. 이 은혜는 그렇게 결함이 있는 의지의 훌륭한 치료제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가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비췸이 역사하는 곳이 인간의 지성이라면 은혜는 우리의 의지에 작용해서 선한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이 사랑의 힘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감화를 받은 데서 생겨나는 의지의 새로운 변화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할 때에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는데 은혜를 받고 나면 아주 그런 놀라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언제가 한번 미래의 군인의 모습하고 나왔는데 2025년 그렇게 계획을 잡아놓고 지금 완전군장하면 45kg을 메고 뛰는데 그때쯤 되면 군인들의 수가 많이 줄어들고 그 대신 아주 고급 장비들로 무장을 하는데 개인당 180kg을 맨답니다. 들고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지금 쌀 두가마가 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한 시간에 7km를 뛴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맨 몸으로도 7km로 뛴다는 게 상당한 힘이 들어가는데 왜냐하면 로봇 같은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공 피복이라고 하는데 인공근육이라고 합니다. 부분적으로 벌써 나와 있습니다. 차고 다닙니다. 그것을 180kg 로보캅 같은 것을 입고 뛰는 것입니다. 신나는 일이겠지요.
그런데 그런 것처럼 우리의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이 의지가 약해졌는데 은혜를 받게 되면 놀랍게 의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새벽기도는 나의 사명이 아니야 그런 분들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몇 번씩 도전을 해보았는데 늘 실패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거는 내 소명이 아니야 내 분량이 아니야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은혜는 그것을 이기게 만듭니다. 놀랍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그 엄청난 중독에서도 벗어나고 그러는 게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계속 은혜 안에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무슨 치유가 어쩌고 그러는데 망가지는 것만 있고 치유는 없습니다.
로이 클레멘스라고 하는 영국의 목회자가 있었는데 영국에서 천명교회를 목회하면 한국에서 일 만 명 정도의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책도 썼습니다. 교회가 크니까 꽤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한 15년 되었는데 영국에서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 로이 클레멘스라는 목사가 도망을 갔습니다. 정부와 도망을 갔는데 정부가 남자였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확신을 우리에게 깊이 더해주는 것은 대학을 다닐 때 게이였습니다. 그러다가 캠퍼스에서 전도를 받고 정말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세월이 흘러가면서 목회자가 되기까지 얼마나 미워했겠습니까? 자기의 동성애를 그런데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가슴에 새기십시오. 이 세상에서 망가지는 일은 일어납니다. 그런데 치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치유는 마지막 날에 됩니다. 그런데 계속 은혜 안에 살면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게 금 하나님이 단정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된 것입니다. 불완전한 세상에서 그러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이렇게 보면 모릅니다. 사람들 많으니까 모릅니다. 각자 와서 한 삼사년 다니다가 만났는데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아무개 집사님 너무 좋아요 아무개 형제 너무 좋아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아우 신중하고 예의바르고 기도 많이 하고 영혼사랑하고 그러다가 얼마 같이 있었는데 뭔 사건이 있었고 은혜가 떨어졌습니다. 성질을 막 부리는 것입니다. 정말 깜짝 놀랐다고 그 사람 변했다고 하는데 변했다고 그러면 안 되고 원래도 돌아간 것입니다.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래서 굉장히 목회에 도움이 됩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아 저런 것 이었구나 그런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막 깜짝깜짝 놀라고 가슴이 덜컹덜컹 하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받은 사람이 저럴 수가 있을까 그랬는데 그냥 잘 사는 게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일 년 전에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일 년이나 지났는데 그 바닥이 안 나오고 저렇게 살까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좀 더 망가져도 저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능하면 피차에 옛날 모습 보여주지 않고 살다가 조용히 죽는 게 그게 너무 멋있습니다. 외국에서도 보면 정말 아름다웠던 은막의 스타들이 전성기 때 싹 사라지고 일체 매스컴에 얼굴을 안 내밉니다. 왜냐하면 그 어렸을 때 예쁜 모습으로 남고 싶다는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은혜 받은 여러분의 모습이 전부인 것처럼 우리 서로 착각하고 살다가 죽자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인 힘입니다. 거기에서 놀라운 의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은혜아래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은혜를 계속 부어주실 때 은혜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사랑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계속 받으면 사랑이 생깁니다. 사랑은 어떤 마음이 있냐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누군가를 사랑하면 뭐든지 나쁜 것이 안보이고 나쁜 것도 좋게 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사랑이 쏠린 쪽으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세상 번영에 취했습니다. 번영을 사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여름이면 여름별장 겨울이면 겨울별장을 짓고 부자들이 그렇게 번영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최고의 호화스러운 삶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세상으로 쏠리니까 세상의 아름다움이 확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의자를 만드는 사람이 한번 나왔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저 그런데 그 의자를 맞추고 일 년을 기다려야지만 의자를 납품을 받는답니다. 주문을 하고 한 1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한 개에 삼천만을 내야 된답니다. 세상에 1년에 15개 밖에 안 만든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사가 확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그것들이 눈부시게 빛나니까 그것에 계속해서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인식하니까 사랑이 강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도 그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계속 은혜 안에 살아갈 때 그 때에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을 고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께 돌아온 다음에서 당신을 계속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영혼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C. 관계를 고치심
이렇게 고침을 받고 나면 그 다음에 아주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는데 관계가 고쳐지는 것입니다. 자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을까요? 말씀을 사랑하는 성향들이 다 죽거나 약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기도를 좋아하고 그 기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의 취향이 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을까요? 거기에서 즐거움을 얻던 마음의 경향성들이 바뀐 것입니다. 관심이 멀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등산 다닌다고 막 이 장비 저 장비 막 사다 모읍니다. 저는 등산을 별로안하니까 모르겠는데 등산 가는 사람들을 보면 장비도 장난이 아닙니다. 그렇게 막 좋은 것을 사다 모읍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등산에서 골프로 취미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장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들이 벌써 다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기도하고 은혜생활하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고 하는 것에 적합한 것들을 구하지 그것과 상관없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서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바뀌게 되면 자기가 깨뜨려지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쳐집니다. 당연합니다. 회개하고 새 삶을 살게 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고쳐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시험에 들었을 때 만나게 되는 많은 어려움들이 대부분 하나님의 징계라기보다는 자기가 잘못 살면서 뿌렸던 많은 삶의 열매들을 쓰라림 속에서 거두는 것입니다. 힘이 있고 권세가 있을 때에는 그렇게 못하다가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되면 여러분에게 섭섭했던 사람, 한 맺혔던 사람, 무시당했던 사람들이 모두 대적으로 나타납니다. 왜 그럽니까? 교만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못하면서 살았으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버려 둬. 그냥 생긴 대로 살다가 확 죽어버릴 거야.” 그렇게 결심하면 그렇게 가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고쳐진 사람으로 살아도 이 세상이 그렇게 행복하기가 어려운데 그렇게 망가진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면 두 번째 선택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맨 날 말씀을 깨닫고 나서 용감하게 수술대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긴다고 눕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다 찢고 수술을 합니다. 창자를 반쯤 꺼냈는데 변심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술대에서 내려와서 다 필요 없다고 하고 호수 다 빼고 링겔을 집어던지고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오겠습니까?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수술 받아 본 경험은 수 없이 많은데 꿰매 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쳐져 본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고통스럽다는 기억밖에 없고 고쳐졌을 때 질병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어떤 자유함이 있는지에 대해서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생각해서 우리를 고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에브라임을 싹 쓸어버리고 유대나라로 통합시켜버리든지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새 민족을 일으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에 담긴 이 그림 같은 추억들 그 어린아이 시절에 한 걸음 한 걸음 아이에 걸음을 가리키시고 그 애급에서 그들을 품어 나르고 병들었을 때 그렇게 사랑스럽게 간호해주면서 기른 자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이스라엘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을 하나님이 그렇게 선택하셔서 사랑하셨고 또 절망적으로 망가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고쳐주셨습니다. 지금은 여러분에게 새까맣게 잊힌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한 때는 늘 울어도 눈물로는 다 갚을 수 없다고 찬송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을 하며 주님 앞에 그렇게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아픕니다. 망가진 부분을 주님이 고치실 때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을 그렇게 치료하시는 동기가 무엇일까요 망가진 채로 살게 내버려두지 않고 오늘도 선지자를 통해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눈물과 함께 찾아와서 너는 내게 고침을 받으라고 눈물로 부르시는 주님의 그 치료의 동기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망가진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그들을 고쳐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자기의 자녀들이 당신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 무엇에도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노예요 노예살이요 억압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 지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누구로 말미암아서 오늘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며 하늘의 은혜를 힘입으며 우리의 무한한 죄도 용서받으면서 살아가게 되었을까요?
(찬양)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 할 때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바로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그렇게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과 사랑 안에서 살라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려 화목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호세아가 자기의 가정의 비극을 소재삼아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보여주었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온 몸을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찢어 우리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시면서 까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려는 사랑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끄시는 하나님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4)
녹취자: 조원정
Ⅰ. 본문해설
이 세상의 번영에 취해서 주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번영이 바알이 베풀어준 은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반역을 채찍과 칼로 다스리는 대신에 빛바랜 사진 세장을 내미셨습니다. 하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는 사진이었고 또 한 장은 팔로 안아 애굽에서 나르시는 사진이었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들이 질병에 걸렸을 때 고치시는 사진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사진도 바알의 신당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때리시고 채찍으로 다스리는 대신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타일러 당신께 돌아오도록 촉구하였습니다. 경건한 선지자가 음란한 여자를 취하여 장가를 들게 하셔서 그 결혼 생활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셨고 뼈 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호세아를 통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이 어떻게 그들과 유년시절을 보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고 합니다.
Ⅱ. 이끄시는 하나님
A. 사랑의 줄로 이끄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해 주셨는데 그 사랑은 ‘아하브’의 사랑입니다.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선택의 목적을 가진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어제처럼 세장의 사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사랑의 줄로 이끄신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사람의 줄들을 가지고 혹은 사람의 줄들로서 복수로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크게 두 갈래로 해석을 하는데 한 갈래의 해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율법으로 말씀으로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을 이끄셨지만 그 이끈 것은 짐승들을 묶는 것 같은 그런 포악한 포승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길로 실족하지 않도록 실족하지 않도록 그들을 붙들고 인도하신 것이었다고 일반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큰 차이는 없습니다만 또 한 가지 해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아이들을 걸음을 가르칠 때 부모가 줄을 떼어주고 아이가 손으로 잡고 걸음마를 배우도록 한 풍습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무엇을 한들 크게 문제이겠습니까? 두 번째 해석이 다수의 의견은 아니지만 상당히 은혜로운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유년시절에 선택받은, 구원받은 백성들은 되었지만 출애굽 이후에도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될지 잘 모르든 시절에 주님께서는 마치 오늘날로 말하자면 부모가 손가락을 내밀고 어린아이는 이 손가락을 한 손에 한손씩 붙들고 일어서면서 걸음마를 배웠던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선택적 사랑의 줄로 이끄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를 붙들고 자신은 뒷걸음질을 치고 아이는 아장아장 걷는 그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짐승이나 육축을 매는 것은 강제하기 위해서 거스를 때에 낚아채어 고통을 주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매는 줄입니다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끄실 때에는 인격적인 방법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끄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이라고 하는 이것은 선지자가 마음속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에 받았던 노예로서의 속박과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수백만 명으로 인구가 늘어났으나 나라가 없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바로의 지배아래 있었고 노예로서 온갖 학대를 받으며 많은 노역에 종사하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노역에 종사하며 고통을 받아도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분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에 겪었던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옛 생활이었습니다.
노예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속박시켜 주셔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짐승같이 내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모세의 지도를 따르게 하셨고 선지자들을 세우시고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사사들의 돌봄을 받으면서 여호와를 믿는 신앙의 맥을 이어가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든 것을 속박으로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통제를 받는 그런 삶을 살게 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보내어 그 모든 것을 누리게 하셨습니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존재의 울림을 울려 퍼지게 하고 싶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들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고 거룩하게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자신도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고 싶다는 부러움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방탕하고 이 세상 번영에 취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패한 마음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모든 거룩한 제도들이 성가시고 귀찮은 의무거리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사랑 안에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말씀으로 속박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그 하나님의 간섭이 말할 수 없는 은총이었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은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의무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제도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교회, 이런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주님 앞에 이런 선택받은 백성으로 살게 하셨을까 하는 감사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하나님의 계명이 전혀 수치스럽거나 부담스러운 것이 되지 않고 오히려 아무 속박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완전히 떠났습니다. 어렸을 적 그렇게 하나님이 줄을 띄워 그 줄을 붙들고 걸음마를 배우던 그 어린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번영을 준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것도 사실이 아닌 이유 하나를 붙들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바알을 숭배하고 우상에게 분향하였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의 바로는 채찍으로 때리고 줄로 묶어 개처럼 돼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렸지만 주님은 사랑의 줄로 그 짐승 같은 삶을 살던 애굽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신실하고 거룩하게 사는 법들을 어린 아이에게 걸음을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하나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속에서 엄마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배우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추억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이런 추억이 있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세상에 속박 속에서 살던 때에 주님이 건져 주셨습니다. 바로처럼 여러분을 노예 삼아서 채찍과 막대기로 때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바로의 압제보다도 더 큰 마귀의 압제를 받으며 육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고 마음의 정욕이 바로의 사슬보다 더 큰 줄이 되어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 깊이 묶인 사악한 습관의 줄에 매이고 하나님 없는 양심의 줄에 매이고 하나님이 마음에 새겨놓으신 율법의 정죄를 당하며 우리는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노예처럼 사는 비참한 삶속에서 이따금 세상이 던져주는 한 점의 고기, 한 시간의 휴식에 천하를 모두 얻은 양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며 그것이 인생의 본질인양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은혜를 많이 받고 그 은혜를 잊어도 그 사람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아무 소망이 없던 인생의 바닥에서 노예 살이 하며 죄에 매여 살던 여러분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을 여러분은 회상하고 있습니까? 매일매일 그 은혜가 여러분에게 감격스럽습니까? 그렇게 이 세상에 매여 이 세상의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었던 여러분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런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낳으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머니 품과 같은 교회에서 낳아 이제 막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은 시절에 당신의 종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 젖을 물리시고 먹여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셨습니다. 태어나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는 얼간이와 같은 여러분을 하나님이 사랑의 줄을 띄워 여러분을 붙들게 하시고 한 걸음씩 한걸음씩 인간이 누구인지 세계가 왜 창조되었는지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 삶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하나님이 누구시고 우리 이웃이 누구인지를 배우며 한 걸음 한걸음 걸어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유년시절을 여러분은 보내었습니다.
아이가 장성하고 난 후에는 어렸을 때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그 사랑의 때, 주님의 손에 이끌려 인간으로 신자로 한 걸음 한걸음 걷는 때를, 행복했던 때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번영을 택했고 거룩함을 따르는 지복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을 즐겼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의 마음을 불붙게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픈 자화상이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많이 가르쳐도 그것밖에 안 사는데 그나마 안 배우면 어떤 사람이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태어나서 항상 일생동안 왕성한 지식의 욕구를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지식의 욕구가 강한 사람이 있고 거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외부로부터 지식을 흡입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세 살, 네 살, 다섯 살, 그런 때입니다. 엄마 이게 뭐야, 아빠 이게 뭐야, 아이들이 수없이 말을 걸어옵니다. 귀찮도록 동화책을 가지고 와서 엄마 아빠 무릎에 쏟아 넣으면서 읽어 달라고 합니다. 그 시기가 바로 유아기입니다.
그때에 지식을 넣어 주어야 합니다. 아무 지식이 아니라 철이 들고 나면 머리가 깨어서 받아들이기 힘든 지식들, 하나님의 존재, 세계의 창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 선과 악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판단이 되는지에 대한 선언적인 지식들을 아이들에게 흡수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그런 똑같은 일이 신앙의 세계에서도 일어납니다. 오래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해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흡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탁월하게 경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 있는 성도들은 다릅니다. 언제나 자신의 부족을 알고 겸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빨아들이려 합니다. 그렇지만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폭풍 흡입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유년의 때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첫사랑의 때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막 호흡합니다. 그렇게 빨아들입니다. 그 말씀을 먹으면서 부쩍 부쩍 신앙이 자라고 어른다운 성도다운 풍모를 갖추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왜 주님을 떠나셨습니까? 주님을 버리고 주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게 된 것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바알이었지만 여러분에게는 무엇이었습니까? 세상일수도 있고 자기사랑일수도 있습니다만 과연 바알이 이런 빛바랜 사진을 이스라엘에게 내밀수가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여러분을 한 걸음 한걸음 하나님의 성도로 사는 법을 가르치셨고 그때 여러분은 주님 아니면 살 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품을 파고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의 줄로 인격적인 감화를 끼쳐 우리들을 이끌어내셨고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복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관계 속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다시한번 그렇게 주님 앞에서 주님의 손을 붙들고 걸음마를 배우던 우리의 처음 사랑의 유년시절처럼 그렇게 주님께 신앙을 배울 수 있다면 한 걸음 한걸음 발을 떼어 놓으며 하나님이 누구신지,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마음이십니까? 정말 그때 그렇게 대견해하시는 주님의 손을 붙들고 신앙의 걸음마를 배우던 그때 그 마음입니까?
B. 멍에를 들어주심
두 번째로 주님은 멍에를 들어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멍에를 올린 자였다고 말합니다. 벗겨주었다고 번역을 하는데 벗겨주었다고 보다는 히브리어 성경으로 볼 때 올려 주었다가 맞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멍에는 얼굴에다 씌우는 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소로 말하자면 등위에 걸쳐 놓은 나무 등걸이입니다. 삼각형으로 되거나 아니면 일자로 되거나 반달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그것을 등에 메고 앞에다 걸고 그 줄에다 쟁기를 건다든지 아니면 마차를 건다든지 해서 소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해서 농사를 짓거나 짐을 나르거나 밭을 갈거나 하는 그것이 멍에입니다. 멍에를 심어 준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 멍에라고 하는 이 단어가 성경에서 멍에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데 이중적인 의미를 제시합니다. 예를 들면 호세아 10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이것은 아주 명백하게 멍에라는 말을 징계, 혹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누군가의 압제를 받는 것, 이렇게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 보면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쉬게 해주겠다고 하고 갑자가 멍에는 무엇인가 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멍에를 같이 멘다고 하는 것은 선생님과 학생, 어떤 기술 같은 것을 가르칠 때에 장인이 있고 그 장인 밑에서 기술을 배우는데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인격적인 연합이 되고 운명 공동체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기억을 해보면 양복 만드는 사람이 되려면 학원에 가서 배우는 것은 후에 생겨난 것이고 잘하는 양복집에 가서 취직을 합니다. 처음에는 월급도 안 줍니다. 기술 가르쳐 주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니까 밥이나 먹여주면 가서 다림질도 하고 청소도 하면 그 주인이 금방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데리고 있어봐서 싹수가 있어 보이면 기술을 조금씩 조금씩 가르쳐 줍니다. 홀랑 다 가르쳐주면 떠날 것 아닙니까? 조금씩 배우는 것입니다. 재단하는 작대기로 맞기도 하고 혼이 납니다. 그러면서 사제 간이 형성되고 사랑합니다. 그때 그 영역에 있는 사람들은 사제 관계가 아주 깍듯했습니다.
그것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3일 동안 매일 화제에 올랐었는데 그 아줌마인가, 33세인가,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겠는데 그 폭력교사가 결국은 경찰서에 출두를 했고 구속될 것 같습니다. 한 번도 때린 적이 없고 그날 처음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화면을 본 사람은 그것을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아주 숙달된 동작으로 수많은 애들을 폭력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보육교사 자격증을 인터넷 수강으로 땄다는데 사실 선생님이 있어서 얼굴을 대면하고 학생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가르쳐야 하는지를 이렇게 하면서 배워야지 인터넷에 해가지고 클릭만 하면 점수를 준다고 한다는데 그렇게 해가지고 땄는데 이것을 보는 사람이 살인자인지 폭행 범인지 어떻게 알고 자격증을 그렇게 남발하는지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민주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라디오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가슴이 아팠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의 책임이 교사도 있지만 원장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원장님이 그 원에 같이 있었을 텐데 그 앞에서 그렇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원장이 오래 동안 그런 것을 묵인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같이 처벌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멍에를 멘다고 말씀하실 때는 어떤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살아가느냐에 대해서는 너희는 나의 도제가 되라고 하며 초청합니다.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서도 요리에 관심이 많을 텐데 가니에르라고 하는 프랑스의 최고의 요리사가 여러분에게 같이 멍에를 메고 나와 함께 배우겠다고 하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노래 좋아하시는 분들 많지 않습니까? 죽은 파바로티가 살아나서 아무래도 너는 내 제자가 되어야겠다고 하면 여러분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저주나 징벌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택이고 인도의 의미에서 이 멍에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나오는 이 멍에는 그런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애굽에서 그렇게 억압을 받고 살아가던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짐승이 그렇게 멍에를 메고 힘들어 할 때 음식을 먹으려면 멍에를 쓰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힘이 드니까 주인이 와서 짐승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멍에를 이렇게 들어 올려주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에 대한 부담이 없이 편한 몸이 되어서 아래에 있는 먹을 것을 먹는, 주인이 짐승을 너무 사랑하고 가엽게 여겨서 멍에를 대신 들어주고 주인은 좀 힘들더라도 자기 짐승이 편안하게 밥을 먹게 해주는 그 그림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짐승이 메는 멍에를 메고 그렇게 속박 받으며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멍에를 벗겨주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유하게 되는 멍에, 하나님과 같은 운명공동체가 되어서 진리에 대해 배우고 하나님의 언약백성답게 사는 것을 배우는 그 멍에를 허락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준 계명이었고 언약적 사랑의 의무였는데 이것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배려였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런 멍에를 주실 때 그 심정이 마치 인자한 주인이 하루 종일 밭을 가느라고 수고한 자기의 가축이 밥이라도 편하게 먹게 하기 위해서 그 멍에를 들고 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특별한 자비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해주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소가 사랑스럽고 귀해도 주인만은 못할 텐데 소는 자유롭게 여물을 먹고 그 소가 힘들까봐 멍에를 잠시 들고 있는 주인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양심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주시고 죄의 사슬에 묶여있는 속박으로부터 은혜의 해방을 하나님이 베풀어주셨습니다. 아무리 짊어지고 일평생을 살아도 아무 상급이 없는 그 무거운 죄의 짐, 노예의 멍에를 벗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주님이 그들에게 멍에를 메어 주셨습니다. 이 멍에는 자유하게 하는 멍에였습니다.
언젠가 한번 교육 다큐멘터리에서 대책 없이 비만으로 고통 하는 사람들을 조사한 것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십대 중반쯤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나왔습니다. 엄청납니다. 백 키로가 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체구인데 신기합니다. 과자를 너무 좋아하는데 조그만 과자 말고 큰 봉지를 하루에 8팩에서 13팩을 먹는답니다. 물론 삼시세끼 다 먹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 청년이 하는 이야기가 가슴에 쿵하는 울림을 주었습니다. 자기도 너무 살이 쪄서 사람들이 놀리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결심을 하고 다이어트를 했다는 것입니다. 살이 조금씩 빠지기는 하는데 너무 고통스럽답니다. 왜냐하면 밤에 자기 전에도 치킨도 먹어야 하고 한없이 먹어야 하고 라면 박스 큰데다가 아예 박스 채 사가지고 와서 놓고 밥 먹는 것 말고 그것을 8봉에서 13봉을 먹는 다는 것입니다. 칼로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살찌면 안 움직입니다. 얘기는 자기가 어느 한 순간에 다 집어치웠답니다. 사는 게 아니랍니다. 왜냐하면 너무 속박 받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과자 먹고 싶을 때 먹고 해야 하는데, 항상 과자가 옆에 뜯어져서 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떠나면 심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금단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 자기가 탁 풀어 버리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한없이 찝니다.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사람 오십도 못 살 것 같습니다. 병원에 가서 조사를 해 보니까 이십대 중반 밖에 안 되었는데 오십대 넘은 사람의 건강지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콜레스테롤, 당뇨부터 시작해가지고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무엇을 말씀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그것을 안 하는 것이 엄청난 속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래서 풀어줍니다. 그러면 그 다음날 어떻게 되는가 하면 진짜 속박이 무엇인지 그 정도 먹고 싶은 것 못 먹는 것은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그렇게 뚱뚱한 사람은 없습니다. 미국 같은 곳에 가면 대단합니다. 그때 뭐 한 사람은 나오려면 문을 부수고 나와야 되고 크레인으로 나오고 사백 몇 키로 되는 사람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예 배를 가르고 위를 잘라 버립니다. 위가 크니까 계속 들어갑니다. 별의 별것을 다합니다. 자기 힘으로 못 일어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 자유를 대가로 마지막으로 치루는 속박입니다.
먹고 싶은 것을 좀 절제하고 아주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많이 먹을 것을 조금 먹고 제가 가르쳐 드렸습니다. 한우 맛있으면 몇 점? 네 점, 충분합니다. 내일 또 먹으면 됩니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렇게 해야지만 나중에 더 큰 속박을 안 받는데 그것을 속박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이게 무슨 인생의 의미가 있을까 하고 막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봇물처럼 밀려오면서 몸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주일날 교회 잘 나오십시오. 제발 좀 예배드릴 때 졸고 딴 생각하지 말고 예배 좀 열심히 들으라고 그렇게 잔소리 듣는 것, 무위도식하지 말고 똑바로 하라고, 섬기기만 하면 다냐고 정신상태가 똑바로 해야지, 이렇게 잔소리를 듣는 것이 엄청난 속박일 것입니다. 벗어버리면 예수님이 지어주신 멍에를 벗어버리고 애굽에서 메었던 그 멍에를 메야 합니다. 당분간은 신나고 자유롭습니다. 마지막에 그렇게 속박을 벗어버린 결과 다가오는 그 속박은 얼마나 커다란 속박이 될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계명도 주셨고 언약백성으로 살아야 될 의무도 주셨습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때 주님의 마음은 무거운 것으로 우리를 고통 받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더 큰 멍에를 메고 노예처럼 사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생명의 이르는 멍에를 하나님이 메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을 때에는 그 속박이 즐거웠습니다. 그 속박 속에서 우리는 달콤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런 속박을 받으면서 살아갈 때 그 속박 없이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여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의 참 사랑 속에서 살던 때의 추억이었습니다.
무엇을 먹을 때 멍에를 들어 올려준다는 선지자의 이 표현이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와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나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도 해낼 수 없는 그런 의무를 지워주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커다란 의무와 짐이 되는 것은 결국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C. 먹을 것을 베푸심
마지막 세 번째는 먹을 것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서 내가 먹을 것을 두었노라고 말합니다. 직역을 하자면 또 내가 친절하게 혹은 내가 부드럽게 그에게 먹게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어제 본 것과 같은 그림과는 다른 사진 한 장이 제시됩니다. 그것은 매일 엄마처럼 식탁을 차려 먹이는 그림입니다. 어린아이를 위해 엄마가 즐거운 마음으로 요리를 합니다. 이유식을 만들고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아이가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을 만듭니다. 그 아이와 마주 앉아 그 아이의 입에 그 음식을 떠먹이며 즐겁게 먹는 자신의 자녀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어린 시절에 그렇게 먹이셨습니다. 육적으로 먹이셨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먹이셨습니다. 그들이 조상도 먹어 본 적이 없는 만나라는 신비한 음식을 먹으며 그 광야에서 굶주림을 면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삶을 것을 예표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육적으로 먹여 광야에 기진해서 쓰러지지 않도록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제때에 먹이시고 입히시고 그들의 신발이 해어지지 않고 의복이 낡지 않게끔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으니 사십년 가까운 광야의 길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믿고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살아온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날들이 없었고 우리는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우리의 삶의 고비 고비마다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들이 기진하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길을 행했고 우리는 인생의 길을 그 긴 세월 동안 걸어왔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꿈꾸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너그러운 분이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넘치게 채워주셔서 그 공급해 주시는 물질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제껏 까지 도우셨던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그렇게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람다운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최소한의 우리의 삶의 여건들을 능가하는 세심한 배려를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품위 있는 삶을 유지하면서 살아오도록 도우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사업하고 직장하고 다니고 내가 벌어서 쓴 돈이고 부모님이 준 돈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모든 물질의 공급에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이 담겨있었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물질에 궁핍할 때 얼마나 고통 받는지를 아셨고 때마다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아시는 엄마와 같은 세심함으로 매순간 여러분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던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주님께 빚지며 살아온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에 빚지며 살아온 우리의 지난날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돌리고 회상해도 그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에 목이메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영혼의 식탁을 차리시고 굶주린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불리게 하신 그 은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기근은 물과 떡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필요한 양식이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을 더 이상 지탱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오히려 삶보다는 죽음에 훨씬 익숙해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고갈된 우리의 정신의 상태에 살 힘을 주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으로 삶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닥까지 지쳐 쓰러져 있는 우리들을 도우시고 북돋아 일으키셨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 나만의 추억입니다. 인생의 곤고한 골짜기에서 아무 희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굶주린 내 영혼을 위해 식탁을 베푸셨습니다.
나 같은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왕의 식탁을 베푸시고 그 어전에서 왕이신 하나님과 함께 수저를 들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 누구에게서도 받아본 적이 없는 그 넘치는 위로 홀로 이 세상에 버림받은 줄만 알았는데 주님이 베푸셨던 감당할 수 없는 그 사랑 그리고 마치 이 세상에 나밖에 존재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의 섬김을 우리들이 받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내가 외톨이가 아니고 하나님의 집에 사랑받는 친자녀이며 나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여러분의 유년시절에 주님이 베푸신 은혜의 그림이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있어서 동역자들 몇 사람, 성도들 몇 사람, 그렇게 외국에 앉아서 우연히 나의 살아온 과거를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서 듣고 있던 사람이 그럽니다. 목사님 한편의 드라마를 듣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여러분도 은혜의 젖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찬양)
내주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나 주 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정말 왜 이 패역하고 쓸모없는 무지하고 어리석고 이 땅에 남겨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티끌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 이 비천한 인간을 남겨두시고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자비와 사랑을 유년시절 뿐만 아니라 지금도 베풀어 오셨을까요? 곤고한 인생에 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버렸지만 돌아가면 언제나 주님은 거기에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자리에서 우리를 찾을 때 우리는 사라진 적이 있었지만 언제나 곤고한 인생의 길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먹이신 은혜였고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시며 육신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며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만 있었던 은혜가 아니라 지금도 베풀고 계신 은혜고 여러분이 주님을 모질게 반역하고 버리는 때에도 하나님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기를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에게 제사하고 이방신상에게 분양할 때조차도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Ⅲ. 적용과 결론
번영에 취해서 주님을 잊은 지 아주 오래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이 여섯 장에 사진을 보면서 사실은 바알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사진 중 단한장도 바알과 찍은 사진은 없었습니다. 이 세상이 도저히 줄 수 없는, 비유할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이 베푸셨고 바알과는 연애하는 사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만은 영적인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에게는 추억이 있고 유년시절에는 그 엄마 아빠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마음이 어두워졌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간절히 다시 그 유년시절의 사랑의 관계로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주님의 마음 안에 불붙고 있었던 자기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이 마음을 쏟아놓으셨지만 이제는 여러분을 향해 이 마음을 쏟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 속히 돌아가 그 사랑 안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물러간 자여 돌아오라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 11:5-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북왕국 이스라엘의 번영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번영이 바알에게로부터 받은 열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부강했으나 신앙적으로는 병들어 갔던 것입니다. 주님이 끊임없이 불러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세상 번영에 취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빛바랜 몇 장의 사진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바알과의 추억에서는 나올 수 없는 가족사진이었습니다. 어린 아이 같은 이스라엘을 두 손을 잡아 걸음마 시키시는 엄마 같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진이었습니다. 그들을 고통 받는 애굽에서 건져 두 팔로 안아 나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가족사진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이 질병에 걸렸을 때에도 하나님은 누워있는 어린 아이를 옆에서 간호하는 엄마처럼 그렇게 이스라엘을 치료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면 부를수록 멀리 도망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안타깝게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는 바알과의 관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매우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사랑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 관계입니다. 언약 혹은 계약이라고도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베리트’라는 단어입니다. 학자들은 이 단어의 어원이 어디에서 왔을까에 대해서 몇 갈래의 설명을 하는데 그 중에 가장 우리의 마음에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설명이 아카드어에서 어원을 찾는 것입니다. 아카드어는 여러분이 역사시간에 배운 함무라비 법전이 기록되어 있는 언어입니다. 아카드어로 ‘바리투’라는 단어에서 ‘베리트’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왔을 것이라고 추론합니다. 아카드어 ‘바리투’는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발에 채우는 족쇄를 가리킵니다. 둘 혹은 셋, 그 이상의 사람들을 도망가지 못하도록 쇠로 만든 차꼬로 함께 채워버리는 것입니다. 아무 관계가 없던 사람들이 바리투에 채워지면 밥을 먹을 때에도, 용변을 볼 때에도 함께 움직여야 하는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연합적 성격을 잘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선택적인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했고 그 사랑 때문에 이스라엘은 선택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서 당신을 떠나 불행한 삶을 사는 인류를 구원하실 대책으로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과 사랑을 주셔서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집요하리만치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탕한 길로 들어섰고, 선지자가 피어린 외침으로 불러도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눈물 어린 음성으로 이스라엘의 미래에 받을 심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마는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에 대해서도 냉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은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하나님의 헤세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러간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우리 주님의 안타까운 외침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II. 이스라엘의 반역
A. 애굽을 그리워함
이스라엘의 반역은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그들은 애굽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은 애굽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라고 말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 고려할만한 주석가들의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은 진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아수르의 침공을 받아서 멸망당할 때에 이스라엘이 바로 애굽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는 그것을 비유로 말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 것은 주전 15세기의 일이었고, 오늘 호세아 선지자의 이 외침을 듣고 있을 때에는 주전 8세기입니다. 그러니 800년 전에 떠나온 애굽으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네 땅을 버리고 돌아갈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그림 같은 은유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끊임없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그렇게 애썼던 방황하던 광야의 생활을 염두에 두면서 그들이 신앙이 없어서 그렇게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그 마음을 너희들이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로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10대 재앙을 목격하면서 주님이 보내신 종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하였습니다. 홍해가 갈라질 때, 그리고 자기들을 따라오는 애굽의 병거들이 그 물길 속에 수장되었을 때, 그들은 홍해 건너편 언덕에서 미리암의 소고에 맞추어 수백만의 성가대가 되어 찬양을 불렀고 그 합창 소리는 홍해바다를 가득 메웠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3일이 채 지나기 전 마라라고 하는 곳에서 쓴 물을 머금어야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부터 40년 가까운 광야의 방황하는 세월동안 그들은 수없이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세운 종 모세를 폐하고 우두머리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기로까지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길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에서 그토록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을까요? 애굽이 광야보다 훨씬 나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맛도 없는 만나를 먹으면서 고기가 생각날 때에는 애굽 생활과 광야의 생활을 비교하며 그때가 좋았다고 회상하였습니다. 정력에 좋은 식품을 광야에서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애굽에서 먹던 마늘과 외 같은 것들을 그리워하며 그때가 좋았다고 회상하였습니다. 끊임없이 방황하는 광야의 생활이었으니 그래도 정착해서 살던 애굽 생활이 편리했을 것입니다. 전쟁을 만나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갈 때면 그래도 평화롭게 종살이 하던 애굽이 고향인 것처럼 그리워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애굽에 대한 공정한 회상이 아닙니다. 고깃국을 먹는 것은 잠깐 식사 시간이었고 그들이 마늘을 먹인 것은 더 많은 노동력을 착취해서 성을 건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아도 남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겪으며 가슴을 조려야 했고 등에는 채찍에 맞은 자국으로 멍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애굽을 생각할 때에 그 모든 그림을 함께 생각하며 광야의 생활과 비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서 이런 질문을 하시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기도하기도 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기도 싫고, 순종하기도 싫고, 교회를 섬기기도 싫은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힘드냐?” “네” “그러면 구원을 취소해 주마. 세상으로 돌아가라. 나 너 건드리지 않을게. 평안히 살다가 지옥 가거라.” 그럴 때 아멘하고 갈 사람은 여러분에게는 없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애굽을 돌아보는 것입니까? 거기로 아주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휴가가고 싶은 것입니다.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그리워한다고 할 때에 채찍에 맞고 싶어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일까요? 벽돌을 나르기 위해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까? 그 사람들에게 짓밟히며 살기 위해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그리워했던 것은 채찍이나 비참한 종살이가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 잠깐 잠깐 있었던 애굽 생활의 즐거움, 그것만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모세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말합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에서 누리는 죄악의 낙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좋아했고, 그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했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 없이 살던 때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 모든 때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자유, 하나님 없는 간섭받지 않는 자기의 삶에 대한 향수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 나오는 애굽이라는 단어는 결국 하나님 없는 자유로운 삶, 그리고 소명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내 인생의 내가 주인이 될 생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안, 그러한 평정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떠나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중 누구도 애굽으로 돌아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자주 결심했으니 그 중의 몇 만 명 정도는 애굽으로 돌아갔어야 맞지 않습니까?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선택지는 단 두 개밖에 없었습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행복을 누리든지 아니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리고 불평하다가 비참하게 멸망당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도 역시 그 두 가지 선택지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들은 첫 번째 선택지를 택하지 않고 두 번의 선택지를 택하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애굽 생활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공정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 없이 그곳에서 누리던 죄의 낙만 즐거워하지 말고 거기서 어떻게 비참한 영혼으로 짓밟히며 죄의 종살이하며 살았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때 그 삶이 살만한 것이었으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한 때는 여러분이 그런 삶은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이 세상을 배반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온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면 주님 없이 살던 때에 그 즐거움이 거기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세상은 여러분을 배신자라고 낙인찍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와 짝하며 살던 여러분이 세상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내 주인은 이제 세상 네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밖에 없다라고 돌아갔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 세상에 지명 수배된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자녀들이 종종 실수하는 게 그런 것입니다. 은혜가 있을 때에는 말씀 붙들고 좀 손해가 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기도하고 믿는 자녀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럴 수 있는 은혜들이 거의 소진되었습니다. 사는 것이 너무나 고달프고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때 이 세상의 자녀들이 어떻게 사는지 커닝 합니다. 너무 지혜롭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보니까 그들과 경쟁해서 이 세상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방식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후회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한번 따라해 봅니다. 탈세도 해보고, 뇌물도 줘보고, 권모술수도 써보고, 정치도 해봅니다. 예전에 세상에 있을 때에는 그런 거 가끔 해도 거의 안 걸렸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어떻게 오랜만에 한번 해봤는데 딱 걸렸습니다. 사업이 망하고 자녀들이 죽고, 고통당하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고, 건강을 잃어버려서 죽음의 벼랑 끝까지 왔다 갔다 한 후에야 뼈에 사무치도록 깨닫습니다. 뭘 깨달았느냐고 물었더니 어마어마한 교훈을 깨달은 줄 알았더니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맨날 하는 이야기입니다.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를 인생이 뿌리 채 흔들리는 고통을 겪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복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물질의 축복을 받고 세상에서 번영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훅 하고 한번 불어버리면 다 날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이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줄 때에 깊이 깨닫고 은혜를 받는 사람, 그 사람은 어마어마한 과외비를 절약하는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한 그리스도인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서 휴가차 찾아 온 아들과 즐거운 며칠을 보냈습니다. 날이 매우 추웠고 길이 빙판 투성이여서 아버지는 몇 번이나 아들에게 당부를 했습니다. “조심하거라.” 차가 출발하고 한 시간 반쯤 되었는데 집에 연락이 왔습니다. 아들이 커다란 교통사고로 고속도로 응급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래서 이 아버지가 달려갔더니 얼마나 큰 사고가 났는지 차가 완전히 폐차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적같이 아들은 조금 경상만 입고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가벼운 상태였습니다. 링거를 맞고 있는 아들 가까이 가서 손을 붙잡았을 때 아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나 정말 깨달았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이야.”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안 당해도 늘 알고 있단다.” 그게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말 인격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사는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할 만한 그런 드라마틱한 간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어떻게 보면 정말 아름다운 신앙생활입니다.
(찬양)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그 말씀 앞에 마음이 녹으며 주님의 뜻을 깨닫고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아도 주님 앞에 자기의 뜻을 꺾고 복종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정신의 만남은 이 세상에서 어떤 극적인 사건보다 더 커다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애굽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붙는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애굽으로 돌아갈 수가 없단다. 그것은 너희의 선택지일 수 없단다. 너희들이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나를 원망하고 죽는 것도 너희들이 선택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다. 얘들아 너희는 나와 함께 약속의 땅에 이르자.”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두고 온 생활을 그리워하지 말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혼의 본향을 그리워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앗수르가 지배함
두 번째는 아수르가 지배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아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다가 솔로몬 때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 임금은 어린 아이 같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탁월한 지혜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함께 주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세월이 지나면서 그는 교만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주신 지혜도 신앙을 버리고 나니까 국가를 세속적으로 경영해 나갔는데 거기에만 사용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솔로몬 재위때 추구했던 연혼정책이었습니다. 여러 나라에 에워 쌓여서 그들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정략적으로 결혼을 시도했고 이때 시집온 여자들이 각기 자기네 고향에서 섬기던 우상을 가지고 들어와 왕궁은 다원주의 종교를 이스라엘 전체에 퍼뜨리는 본산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매우 슬프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이 선지자의 계시를 받고 꼭 성공하리라고 믿으며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솔로몬은 집요하게 여로보암을 추격했고, 그 추격을 피해서 그는 애굽으로 망명을 하였습니다. 솔로몬 때까지는 왕국이 하나였는데 그 아들 르호보암이 등극하고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아버지 솔로몬은 신앙은 없어도 지혜는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 인간은 지혜도 없고 신앙도 없고 귀도 팔랑귀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간신배들의 놀음에 빠져 백성들을 포악으로 억압하고 억누르는 정책을 씀으로써 결국은 백성들의 민심은 완전히 이반하였고 열두 지파 중 열지파가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여로보암을 불러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 새로운 나라를 수립했으니 이것이 바로 북 왕국 이스라엘의 탄생이었던 것입니다. 열지파대 두 지파, 그러니 사실은 이스라엘은 이름만 남은 유대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북부메소포타미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성장하던 신흥국가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바로 아수르라는 나라입니다. 여러분이 역사시간에 앗시리아라고 배운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주전 2000년, 그러니까 아브라함보다 약간 늦은 시대에 생겨났고, 바로 주전 900년에서 600년까지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던 때였습니다. 다행히 여로보암 2세 때에는 이스라엘이 강했기 때문에 앗수르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역사가 흐르며 결국 이스라엘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하던 대로 그 길을 밟아야 했습니다. 결국 930년에 분열되어 세워진 북 왕국 이스라엘은 722년 조공을 중단한 마지막 임금 호세아를 치기 위해 출병했던 살만에셀의 군대에 의해 짓밟혀 폐허가 됩니다. 208년 19명의 왕들을 거쳤던 북 왕국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가 뒤따랐고 수도 사마리아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마어마한 인구를 자신의 나라 각 곳에 흩어져 이주시켰고, 이스라엘의 땅에 이민족들을 이민 오게 함으로써 혈통을 섞어버리는 끔찍한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시대까지 유대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통행하지 않던 이유인 것입니다. 결국 주전 722년에 완전히 망해 버리게 되자 혹독한 아수르의 통치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했더니 그 다음에 자유를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아수르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은혜의 통치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속박 받는 삶을 싫어하고 자유를 찾으면 자유가 있을 것 같지만 주님이 은혜로 다스리던 자리를 사단이 빼앗고 죄의 지배를 받고 마귀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이고 하나님이 지키신 나라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세워주시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나라의 근본을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애굽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했더니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자마자 아수르의 혹독한 지배를 받았습니다. 주님이 다스릴 때에는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백성이었고 존귀한 자들이었지만 앗수르가 다스리고 나니까 그들은 짓밟히는 피지배민족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통치를 기뻐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하나님을 떠나감
마지막 세 번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간 것입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로부터 돌아갈 것을 결심하여”라고 나옵니다. 그들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확고하게 하나님을 거스르겠다고 작정했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다시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고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배역하고 반역하며 하나님을 떠나도 그들이 입고 있는 영혼의 상처와 그 비참함이 하나님 아버지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반역하면 반역할수록 하나님은 더욱더 충성스러운 당신의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커다란 하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일깨워 하나님 앞에 돌아가게 하고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면 호세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능력을 땅에 불러 내리는 기이하고 신비한 그런 힘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었고, 옷자락을 휘두르며 강물을 말리면서 건너던 엘리사의 기적 같은 것들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공포보다 위대합니다. 이 선지자는 주님의 심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끄지 못하는 불붙는 긍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그의 가정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온 인격과 존재를 통해서 불살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외칠수록 끊임없이 모질게 반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스라엘과 그들을 차마 놓지 못하고 당신께 돌아오도록 눈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서 자신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더욱이 집에 데려다만 놓으면 끊임없이 집을 떠나 얼굴도 알지 못하는 외간 남자와 동침하여 아이를 잉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멜을 보면서 그는 더더욱 하나님의 심경을 체험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배반하고 음탕한 길로 가는 이 고멜을 찾아나서는 선지자의 발걸음이 주님의 명령 때문이었다면 많이 괴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하나님은 호세아의 마음속에 그 방탕하고 더러운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까리따스의 사랑의 마음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뼛속까지 스며들어갈 정도로 골수에 사무치리만치 아내가 없으면 차라리 그 이름을 부르다가 돌멩이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까지 이 아내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찾아 나섰습니다. 그때마다 자기의 눈물겨운 사랑을 거절하고 외간 남자의 품에서 정을 통하는 이 고멜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망가진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아내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눈물이 그의 마음을 찢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호세아는 그런 비극의 선지자가 자기의 피를 잉크삼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쓴 하나님의 마지막 연애편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들이 그렇게 주님의 부르시는 부르심에 응답하고 돌아오기만 했다면 방탕한 고멜을 용납하여 사랑해 주었던 호세아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이스라엘을 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바알을 향한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두 마음을 품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묻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전 722년에 살만에셀의 공격으로 아수르의 군대에 의해 사마리아가 짓밟혀 폐허가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이 그렇게 끈질기게 섬겼던 바알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고 공경을 받고 제물을 받았으면 한번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줘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앗수르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한번쯤은 지켜줘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은 바알을 사랑했으나 바알은 이스라엘을 사랑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알의 목표는 이스라엘과 뜨겁게 혼인해 부부가 되거나 이스라엘을 입양해 자신이 자녀로 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하나님과 이간질 시키고 그들의 신앙을 짓밟아 그들을 보통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바알에게는 그렇게 아수르의 침공으로부터 이 백성들을 구원해 낼 능력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참된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선택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한 사람들의 말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들이 이스라엘의 마음을 훔쳤지만 그 신들 중 아무도 이스라엘을 사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짝사랑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고 더욱이 여러분과 가족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꺼내놓으시는 그 빛바랜 가족사진, 어린 이스라엘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가르치는 그림이 찍힌 사진, 핍박받는 애굽에서 그들을 취하여 품에 안고 그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시는 엄마 같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 병들어 있는 이스라엘 곁에서 가슴아파하며 눈물로 간호하는 엄마 같은 하나님의 그림은 그런 사진은 바알의 품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사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배반하고 그 품에서 떠나려 하는 것일까요?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불가이해한 존재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열렬히 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하나님을 떠나려 합니다. 그 분을 떠나서 살 수 없으면서도 그 분과 함께 살 수도 없는 그런 이상한 존재가 바로 신앙을 떠난, 신앙이 없는 인간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의 품에서 떠나자 그런 수많은 모순율들이 그들의 삶을 가득 채웠고 그래서 그들의 삶은 단정한 질서를 잃어버려 설명하기 어려운 삶이 되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이스라엘 백성을 간절히 눈물로 부르셨던 것처럼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은 호세아의 간절한 부름을 거절하고 불순종의 먼 길로 가서 역사 속에서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새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호세아가 자기의 슬픈 가정생활을 그 슬픔을 잉크삼아 핏빛 연애편지를 여러분에게 보냈다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찢어 그 피로 여러분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의 그 사랑의 품에서 쉼을 누렸던 사람들은 자신이 의롭다고 믿던 종교 지도자들이나 혹은 뛰어난 정치가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더러운 죄인이라고 낙인 찍혔던 창기와 세리 같은 사람들이 그 분의 품 안에서 쉼을 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예수님이 피로 쓴 그 연애편지를 뜯어보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품을 떠나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하나님의 통치아래 사는 것이 고달프고 슬프고 외롭게 느껴지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불붙는 우리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던 착한 마음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호세아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분이 호세아의 마음속에 있던 사랑보다 더 큰 핏빛 사랑으로 오늘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그 분은 이미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모두 주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생명도 여러분을 위해 주셨는데 그 분에게 여러분에게 주지 않고 아끼고 싶은 그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들을 우리를 위해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원받은 여러분을 위해 모든 것을 또한 선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등진 삶에는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빛 가운데 사는 것만큼 가벼운 삶은 없고 주님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삶 보다 자유스러운 삶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한 해가 여러분 앞에 펼쳐졌습니다. 달력이 바뀌었다고 저절로 다른 한 해가 펼쳐진다는 것은 자기 암시일 뿐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얼마나 슬프고 괴로운 삶의 사태들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얼마나 더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한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사랑의 크기만큼 하나님에게 대입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그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사랑으로,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품으로 불러 그 사랑 안에서 그 어린 이스라엘의 유년 시절처럼 그렇게 우리와 가족으로 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불붙는 긍휼을 알라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없는 평안을 그리워하였고, 이런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방신 바알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번영이지만 바알의 축복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 모든 은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번영 속에서 교만하여 불순종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에 의해 침공을 받고 이스라엘의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셨지만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죄악에 대한 복수라기보다는 그들을 돌이켜 다시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부르시기 위한 주님의 음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불순종했지만 보복하시는 마음으로 이들을 징계하시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들을 때려서라도 회개하고 돌이켜 당신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주님의 의지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8절은 하나님의 불붙는 긍휼이라는 제목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II.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
A. ‘에브라임’을 부르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속에 온전히 불붙듯 하는 이 긍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가지로 보이셨습니다. 첫째는 그들을 ‘에브라임’이라고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에프라임’이라는 이 히브리어 단어는 풍성함, 혹은 번성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애칭으로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반역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보이며 우상 숭배의 길로 갔건마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하는 자녀 에브라임을 향한 그 사랑의 불은 끌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보호하지도 못할 바알 신을 섬기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그들을 준 번영이라고 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보이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반역하는 이스라엘에게 빛바랜 가족사진 여러 장을 보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촉구하셨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바알이 그들에게 복을 주었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과 바알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에 비교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깨우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에브라임이여 네가 어찌 너를”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심으로서 불순종했으나 여전히 우리 주님의 마음에는 이 북왕국 이스라엘이 사랑하는 아들, 에브라임이었음을 하나님께서는 밝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여 방종한 길로 가고 똑같이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던 그때에 주님은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회복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그렇게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 ‘야곱’은 역시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이 보호하고 지키실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를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도 타지도 아니할 것이고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시 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당신이 창조주요, 구속자이심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나의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반역하고 우상 숭배의 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의 이름이 하나님 마음에서 잊혀질 수 없도록 만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긍휼이었던 것입니다. 참 사랑은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고 그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느냐에 달린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린 시절에 할머니께 들은 옛날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나중에 세월이 흐른 다음에 그 이야기의 출처를 확인해 보니까 일본의 역사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궁핍하고 가난하게 살았을 때에는 먹고 사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가족들에게 공급될 식량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고려장의 습관이 어느 나라에나 있었습니다. 일본의 한 이야기가 이제 그러한 역사를 반영합니다. 이제 워낙 궁핍하고 흉년이 겹치니까 풍습을 따라서 이제 어머니를 고려장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의 풍습은 땅에다 묻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산속 깊은 곳에 도저히 노인 혼자서는 다시 집으로 찾아올 수 없는 곳에 노인을 갖다 두는 것으로 이제 고려장을 대신 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아들이 여러 날 고민한 끝에 그 지방의 풍속을 따라서 노모를 지게 위에 지고 그리고 산을 넘고 숲을 헤치면서 모친이 도저히 찾아올 수 없는 곳까지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모를 업고 가는 아들의 마음도 매우 무거운데 어머니는 그 지게 위에서 계속 무슨 장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하고 뒤돌아 봤더니 지나가면서 한 10m 지나갈 때마다 나뭇가지를 하나씩 꺾어서 땅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숲속 깊이 들어갔을 때 “어머니 도대체 그거 뭐 하러 자꾸 꺾으세요?” 하니까 “얘야, 나는 여기서 죽어도 괜찮은데 너무 깊이 들어왔다. 이렇게 깊은 산속에서는 길을 잃어버리기가 십상이란다. 돌아갈 때에는 내가 분지른 그 나뭇가지의 표지를 보고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가거라.” 거기서 아들은 지게를 내려놓고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면서 그러면서 이 세상의 풍속이 어떠하든지 이 어머니는 자신이 버리게 된 것을 깊이 회개하고 다시 모시고 가서 살아서 그 동네에 고려장의 풍습을 종식시켰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런 풍속이 에스키모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이가 들어서 노동력을 상실하게 되면 부모는 아이들에게 재촉해서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을 저 얼음 벌판 위에 짐승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갖다 두게 합니다. 그러면 짐승들이 와서 자기를 잡아먹고 살찌워 그래서 자손들이 그 고기를 사냥해서 먹도록 자기를 자연에 제공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돌아가고 거기 조용히 앉아서 묵념하듯이 자신의 최후를 기다리면서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찢어 맹수들에게 주어 그들이 미래의 자기의 자손들을 위한 식량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에스키모인의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결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 물이 높은 데로부터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한없이 당신이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흘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제게는 한 아들과 한 딸이 있습니다. 딸은 23년 기르는 동안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야단친 적은 몇 번 있을지 모르지만 때린 적은 없었습니다. 아들은 1년에 한번정도씩 몇 년에 걸쳐서 매를 댔습니다.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좋은 교육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에 제가 자녀 교육에 대해서 깊이 회심하고 돌이켜 서기는 했습니다마는 그 전까지 몇 차례 때린 것이 아직도 마음에 깊은 아픔으로 남습니다. 그때에는 초달을 차마 못하면 아이를 망치느니라고 하는 잠언의 말씀을 내 자신이 따른다고 생각해서 아이에게 매를 대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리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교육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사랑의 매라는 것은 없다. 매를 들고 때리는 그 순간에 누구든지 분노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그것이 결코 사랑의 동기가 되는 매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려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한 2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한 4~5년 정도, 그저 모두 합쳐서 많이 잡으면 10차례 정도 매를 때렸지만 그것이 아이에게 좋은 교육을 가져다주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실망과 분노의 마음이 내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자녀를 때렸다라고 말하는 것이 늦었지만 솔직한 고백이라는 심정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매우 후회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지나갔는데도 아이는 그것을 마음의 상처에 담지 않았다고 하지만 제 마음에 맞은 아이보다 더 깊은 상처가 남았습니다. 그 아이가 6학년이었을 때 자녀 교육에 대해서 제가 회심했던 중요한 사건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깊이 기도하다 깨달은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자녀 때문에 힘들어하며 자동차를 혼자 운전하고 갈 때, 어느 산길을 돌아설 때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너도 내 아들이고 네 아들도 네 아들인데 내가 내 아들을 대하는 거하고 네가 네 아들을 대하는 것은 많이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지 않니?” 가던 길에 차를 세워놓고 길가에서 핸들을 붙들고 한동안 펑펑 울었습니다. ‘아, 결국은 사랑이 없는 것이구나.’라고 말입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하나님은 우리가 잘 살기 때문에 사랑하시고 못 살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식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라는 이유 때문에 당신이 선택하셨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당신에게서 나음 받은 자녀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신분인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몸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모질게 반역하고 주님의 품을 떠났는데도 이 더럽고 걸레처럼 되어 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에브라임아”라고 그들의 유년 시절의 애칭을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빛바랜 가족사진을 내밀며 너와 나의 관계는 가족이고 설령 백번 양보해서 바알이 네게 그 큰 축복을 주었다고 할지라도 바알과 너의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를 능가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그래서 여러분은 에브라임이니 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버리지 않으심
두 번째는 버리지 않으심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너를 놓겠느냐 어찌 너를 두겠느냐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어찌 너를 놓겠느냐” 네 번이나 반복해서 “어찌”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이 에브라임을 어떤 일이 있어도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백성을 에브라임이라고 부르시면서 이들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에 모순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면서 이 백성을 당신이 결코 버릴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면서 아드마와 스보임에 대한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리셨습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기 위해서 전쟁에 나갔을 때에 출정했던 도시로서 소돔과 고모라 지역의 왕들과 함께 출정하였으니 아마도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 있는 작은 도시의 임금들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9장에서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비처럼 쏟아지는 유황불 비를 받고 멸망하게 되었고, 신명기 29장에서 모세는 자기의 유언적인 설교를 남기며 다시 한 번 이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의 광경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훈삼아 이야기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가 전설이지 결코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믿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30년 전에 소돔과 고모라의 유적이 놀랍게도 사해 바다 속에서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역사학계의 커다란 충격과 같은 고고학적 발굴이었고 그래서 타임지 같은 시사지에서도 특집으로 다룰 정도로 충격적인 발굴이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아드마와 스보임이라고 하는 도시는 소돔과 고모라성과 함께 멸망당한 그 지역의 도시이고, 이 모든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버릴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은 결코 당신이 그렇게 버릴 수 없는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와 같이 놓겠느냐” 히브리어 성경에는 ‘넘겨주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받은 대표적인 도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지 않은 이방의 백성들이었고, 그들이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극악한 죄를 지으며 불순종의 길을 갔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백성들에게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 같은 어린 시절의 가족사진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주님을 떠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버렸어도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마 자식은 부모를 버려도 그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집을 멀리 떠나 허랑방탕한 탕자를 매일 동구 밖에서 기다리던 그 탕자의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다리셨고 그래서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안타까운 사랑을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깨우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에 따른 반대급부로서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라는 이유 때문에 사랑하시고 당신이 우리를 낳아 당신의 자녀 삼으셨던 이유 때문에 그 언약 관계 안에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사랑하고 불순종할 때 넉넉히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당신의 자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바치고 드리고 섬기고 위대한 일을 이루어서 하나님에게 없는 무엇을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넘치는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그 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렇게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살면서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납니다. 여러분이 성령 충만할 때는 제법 자신의 믿음이 대단한 줄 알고 뽐내지만 그러나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나면서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되고 우리의 인생은 마치 뒤움치는 파도 위에 떠 있는 한 가랑잎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신앙의 연단이 필요합니다. 어떤 때는 성령 충만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고갈될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잘 섬기며 주님을 위해 봉사할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뒤로 미끄러져 어둠 속에서 우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뒤로 미끄러지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범죄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이 그러한 깊은 부침 속에서 영화와 비참, 성공과 실패, 좌절과 승리,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어떤 사람은 내가 성공할 때 좌절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침체에 빠졌을 때 성령 충만하고의 차이일 뿐이지 우리 모두 그렇게 파도치는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기억해 보십시오. 구약 성경에서 그 사람만큼 하나님이 예뻐하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그를 통해 내가 모든 일을 이루리라”고 말씀하셨고 심지어 다윗의 위가 영원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범죄 했고 미끄러져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 동안을 어둠 속에 잃은 양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 다윗의 진면모이냐고 말입니다. 둘 다 다윗의 진면모였습니다. 눈물겹게 주님을 사랑하던 다윗도 그 사람 다윗이었고, 물러가 침륜에 빠져 미끄러진 다윗의 실패한 모습도 다윗의 진면모였습니다. 다만 후자는 주님의 은혜에서 미끄러진 때요, 전자는 주님의 은혜에 붙들려 살고 있었던 때의 차이일 뿐이니 미끄러진 곳에서 다시 건지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게 되고, 듣는 이 서있는 그곳에서 그를 미끄러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덕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모든 흥망성쇠와 그리고 영적인 부침,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당신의 백성을 붙들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에게 기대를 걸던 모든 소망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그렇게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를 버리지 않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이 바로 우리가 믿는 믿음이고, 그 주권을 의지하여 사는 생활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생활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그들을 낳았고, 그들을 그 애굽에서 건졌고, 사리분별도 못하는 그들의 두 손을 붙들고 걸음마를 가르치셨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주셨고, 그 어린아이와 같은 아이들을 그 광야의 길에서 인도하시면서 당신의 그 뜨거운 눈물로 사랑으로 그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도록 가르쳐 오신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함으로 그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가족의 관계를 잊어버렸지만 이것은 철없이 달뜬 마음에 정욕이 시켜서 한 일이요, 온전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완전하고 독립적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의존하시는 것처럼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기뻐하고, 아파하심은 결국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이 백성들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그림인 것입니다.
성경의 빛을 받으며 해석을 하기만 한다면 성경 다음으로 우리의 인생의 훌륭한 참고서는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지난날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지난날들을 회고해 보면 우리의 마음속에 언제나 그런 그림들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을 당해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을 때에도 사실은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셔서 안타까운 음성으로 우리를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셨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까지 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성품 그 자체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바알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전능하시고 그들에게 많은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택을 잃어버렸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영광을 바알에게 돌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고 그들을 버리시는 대신 호세아 같은 사람을 부르셔서 살을 찢는 가족의 아픔을 사용해서라도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끊임없이 외간 남자의 품에 동침하고 애비도 모르는 자식들을 낳아오는 그 불결하고 더러운 여인을 한 칼로 정의에 내치는 대신 정의를 능가하는 사랑 때문에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망가진 자신의 아내를 찾아 나서게 만드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저 호세아의 눈물겨운 사랑을 보고 너희를 향한 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한번 생각하라고 주님께서 그렇게 호세아의 가정을 찢으셔서라도 당신의 헤세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었던 사람들이고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주님은 여러분을 버리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C. 불붙는 긍휼하심
마지막 세 번째는 불붙는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켰다고 하는 것은 공의로 이스라엘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로 돌이켰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런 변화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잘못된 해석일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스라엘 백성을 공의의 저울에 달아보신다면 스보임과 아두마처럼 그렇게 버려서 심판을 받아서 멸망하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불공정하시다고 말할 수가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속에 이 에브라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달랐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하나님은 공의에서 긍휼로 그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처하게 된 비참함 때문에 안타까워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왜 비참합니까? 우리는 여로보암 2세의 시대를 살고 있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의 국운기를 맞이했습니다. 경제는 호황을 누리고 있고, 영토는 넓어졌고, 백성들은 부유해서 여름 별장, 겨울 별장을 짓고 사는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비참합니까?” 이것은 두 가지로 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시간과 역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여 앗수르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 주전 722년에 멸망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 광경을 보시면서 주님의 마음이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이스라엘 백성의 비참을 보셨기 때문인데 이는 마치 예수님이 40년 후에 멸망할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통곡하시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대답은 이들이 비록 물질적으로는 엄청난 번영을 구가하고 그리고 나라는 부강해졌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비참하게 쇠락해 있었고, 곤고한 영혼으로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영혼의 상태를 긍휼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네훗마이’라고 되어 있는 이 희랍어 단어는 ‘나암’이라는 말의 변형이고, 이 나암은 후회, 슬픔, 회개, 긍휼 이런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긍휼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이라고 할 때 원래 그 사랑은 하나님에게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게만 있는 사랑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당신을 닮은 형상 안에서 이루어지게끔 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세 가지 측면에서 관측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 가지가 뭉쳐서 사랑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삼각뿔이 있는데 전체가 사랑인데 그 사랑을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삼면으로 돌려 볼 수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 첫째 면이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가장 탁월한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래 참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관계에 있어서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독립된 인격체입니다. 유식한 말로 타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도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고 타자인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각각 자신의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일치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있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고 칩시다. 사랑합니다. 그런데 각각 독립된 인격체이기 때문에 항상 내 마음에 맞게끔 행동하고 움직여 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그 갈등이 생길 때 관계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고통을 받으면 누구든지 미물인 동물조차도 고통의 상태에 있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통을 안 받기 위해서는 이 사람하고의 관계를 끊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하고의 관계를 끊고는 다시 혼자 살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너무 커서 그래서 잘 마음에 맞지 않아서 고통을 받는데도 ‘미래에는 괜찮아지겠지.’라는 소망을 가지고 견디는 것을 오래 참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가끔 우리 주위에 보면 마치 자신이 엄청난 결단력이 있는 사람인처럼 “나 한번 고개 돌리면 쳐다도 안보는 사람이야.”라고 자랑삼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짐승과 같은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마치 자신은 엄청난 결단력 있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이익에는 아주 밝아서 자신의 이익에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꼭 달라붙어서 단물을 빱니다. 그것은 짐승과 같은 성품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자비는 무엇이냐 하면 상대방의 부족이나 모자라는 것을 느꼈을 때 자기 자신을 다 베풀어서라도 그에게 이익을 얻게 하려는 것, 이것이 자비입니다. 마지막 긍휼은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비참한 상태에 있을 때에 원인을 고려하면서 그를 가엾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불문에 붙이고 그가 비참하고 고통 받는 상태 때문에 아파하고 슬퍼하는 그 마음이 긍휼입니다. 그게 긍휼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는데 절대 그러지 말아야 되는데 지갑에서 돈을 빼서 자꾸 훔쳐가는 것입니다. 괘씸하겠어요? 사랑스럽겠어요? 괘씸하기도 하고 염려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큰돈을 훔쳐가지고 도망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걸렸습니다. 그래서 “너 이놈의 자식.” 하고 막 뛰어갔습니다. 얘가 엄마가 소리를 지르니까 놀래가지고 막 도망을 가서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여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졌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거기서 찬송하겠습니까? “거 봐라. 네가 죄를 짓고 무사할 줄 알았느냐. 이렇게 하나님이 택시로라도 너를 갈아 버리시지 않느냐?” 그거는 엄마도 아닙니다. 아이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지는 순간 그 아이가 왜 달려가게 되었는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구급차를 부르는 게 그게 진짜 엄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긍휼이라고 보시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게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눈물어린 사랑으로 안타깝게 자신의 마음에 불붙는 긍휼을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악은 미워하시나 죄인은 사랑하시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본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그 죄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신 적이 없고, 어떠한 경우에 자기의 백성들을 책망하실 때에도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간절한 소원은 그 어린 양들이 회개하고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긍휼의 정동하는 그 마음이 바로 제자들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삼으신 그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흉내 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은 없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 바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였던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전에는 듣기만 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표현하여 볼 수 있도록 주님의 그 눈물어린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우리를 이처럼 사랑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상처도 많이 주었고, 우리에게 꿈과 사랑을 주었던 사람들이 또한 절망과 좌절을 주기도 했습니다. 배신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던 모든 사람들은 한때는 둘도 없는 친구들이요,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뜨거운 열기만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 변함없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요동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가 당신을 버릴 때에는 기꺼이 버림을 받으시고 돌아올 때에는 마치 그런 적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으로서 언제나 거기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멸시하고 버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우리의 인생에 꼬인 것이 있다면 하나님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불순종과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기쁨과 복락이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주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시킨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주님께서는 오늘 여러분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메마른 영혼의 밑바닥을 한번 보십시오. 정말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삶을 지탱해가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나의 어머니이시고 아버지이신 것이 여러분을 그렇게 행복하게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불순종하고 메마른 가슴을 안고 주님 거스르며 사는데도 오늘 이 시간에도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당신께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이 주님 앞에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돌아오는 모든 백성들을 향해 관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모두 주님 없이 어두운 인생의 밤길에서 헤매지 말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세속의 번영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선지자의 안타까운 음성으로 불렀지만 부르면 부를수록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빛바랜 가족사진을 보이며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바알과의 관계에 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아수르에 의해서 멸망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네 번이나 반복되는 ‘어찌하여’라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차마 버리실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진노 중에라도 그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안타까운 음성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II.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
오늘 우리가 읽은 이 9절은 8절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을 예고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9절을 읽으면서 우리들에게 드는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바라지 아니하고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말씀을 반복하는데 그러면 이것은 아수르의 한 침공을 예언한 것에 취소인가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다시는’ 히브리어 성경에 ‘또 다시’라고 나오는데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임하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뜻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A. 맹렬한 진노 아님
제일 먼저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진노가 맹렬한 진노가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것을 하나님은 취소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미 주전 722년에 아수르에 의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아수르 침공에 대한 예언의 취소가 아닙니다. 여기에 나오는 맹렬한 진노, 멸망시킨다고 하는 이 표현은 완전한 심판으로 인해 황폐해지고 멸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하나님이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을 치셔서 아수르의 침공을 받게 하셨지만 완전히 이들을 멸절시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지도에서 북왕국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멸망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멸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맨 처음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을 택하신 그때부터 하나님의 마음에는 육적 이스라엘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육적 이스라엘은 껍질을 깨고 영적 이스라엘을 태어나게 할 한 알의 밀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 육적인 이스라엘을 사용해서 영적인 나라를 태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은 연속성을 가지고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그리스도의 교회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바로 완전하게 성장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될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멸망시키신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남은 그루터기에서 영적인 이스라엘이 태어나게 하심으로써 육적인 이스라엘 안에 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신학의 영적 교회로 이어지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스라엘 후손들이 받을 복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심판이 영적인 회복을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예언은 국지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긍휼로 나타났고, 돌이켜 회개하고 순전하게 된 사람들을 역사적인 그루터기로 삼아 신약의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판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주적으로는 오늘날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누리는 하나님의 그 한없는 긍휼과 자비로서 성취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끊임없는 타락과 반역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렀던 그 가슴 저미는 호세아의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배반하고 음탕한 길로 가 애비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자식들을 낳아오는 자신의 음란한 아내 고멜을 찾아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복수심에 불타는 대신 그렇게 망가진 채로 끊임없이 당신을 떠나 이방의 신상에게 절하며 바알을 섬길 수밖에 없는 이들의 비참한 형편을 긍휼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불순종하고 반역의 길을 걸어가면 반드시 거기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미워해서 보복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고 부르시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반역하며 살아간다고 해 보십시오. 태양을 등진 사람이 자기 앞에 어두운 그림자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반역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복수하지 않으셔도 자신이 행한 일의 열매를 거둠으로써 수고와 슬픔, 고통과 번민, 불안과 고독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그 인생의 결과의 쓴 맛을 보게 하셔서 그 마음을 설복하실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고통을 만나도 그것은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직 버리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그 선을 거스려 악하게 살 때에 고통과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불순종하고 아무리 먼 길로 떠났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면 친근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고, 주님을 멀리 떠나면 진노하고 가슴아파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 우리가 주님의 얼굴빛을 피하여 살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을 떠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고 있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은 여덟 번이나 반복해서 같은 음성으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는 것일까요?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메마르고 거친 길로 들어섰습니다. 여러분은 뼛속 깊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악하게 살고자 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선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온 인생길에 선하고 좋은 것이 있다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한 것이요 악하고 반역하는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뼛속 깊이 사무쳐 있는 여러분의 악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반역하며 대항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때리셔서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면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몸은 쳐, 마음은 쳐서 고통과 슬픔에 잠기게 할지라도 그 영혼을 깨끗케 하여 당신께로 돌아올 기회로 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주님이 당신 안에 있는 긍휼 때문에 맹렬한 진노를 발하시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불순종의 길을 가야겠습니까? 계속해서 하나님께 저항하는 죄의 길에 머물러 있어야 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래 참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심하여 그 죄악에 머물러 있게 하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노 중에서도, 그 고통 속에서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알고 그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멸하지 아니하심
두 번째는 멸하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히브리어 성경에는 “또 다시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니”라고 나옵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이스라엘은 한 번도 멸망한 적이 없는데 왜 하나님은 마치 이스라엘이 이전에 하나님께 멸망을 받은 것처럼 여기서 ‘또 다시’, 'again'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이사야서와 에스겔, 그리고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해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1장 10절에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방탕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서 예루살렘은 새 소돔과 같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니 일종의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선택된 이스라엘백성 전체를 의미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에스겔 16장 46절에 보면 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세 딸이 있었는데 한 딸은 예루살렘이고 또 다른 딸은 사마리아고 마지막 딸이 소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물려받고 있는 유다 왕국의 수도였고, 사마리아는 갈려져 나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리고 소돔은 그 패역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유황과 불비로 쓸어버린 그래서 사회 밑바닥에 수장시켜버린 도시입니다. 그런데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행하는 죄악상들을 보시면서 그 세 도성이 모두 타락한 한 애미 밑에서 태어난 계집들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문학적인 표현과 신학적인 진술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얘들아, 너희가 에브라임이지만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너희들의 삶을 보니 너희가 소돔과 같구나. 그래서 소돔은 첫 번째 에브라임이었고, 너희는 두 번째 에브라임이 되어 버렸다. 첫 번째 에브라임이라고 할 수 있는 소돔은 내가 불비로 모두 쓸어버려 멸절시켜버렸다. 그런데 두 번째 에브라임, 너희를 향해서는 내가 그렇게 할 수가 없구나.” 그 뜻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반복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긍휼이 없는 심판으로 두 땅을 깨끗이 쓸어버려 정화하셨지만 에브라임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소돔은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었고,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걸음마를 가르쳐 주셨고, 그들이 고통 받을 때에 그들을 업어 나르셨습니다. 노예로서 속박 받는 운명의 줄을 끊어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모든 좋은 것을 주셔 후히 누리고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아름다운 가족사진이 소돔에게는 없었고, 에브라임에게는 있었습니다. 에브라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반역의 길을 걸어갔고, 음탕한 간음을 저지르며 우상을 섬겼지만 한번 자기의 아들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마치 끝없이 타락하는 자신의 아내를 의무가 아니라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으로서 찾아나서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며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진노로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이 말씀은 원래 진노로서 들어가지 아니하리라고 히브리어 성경에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배경이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비로 심판하시기에 앞서 먼저 당신 자신이 직접 사자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당신의 눈으로 직접 그 백성들이 얼마나 더럽고 패역한지를 확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가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마지막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때처럼 사마리아에 들어오시면 그렇게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룩한 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하시는 성품과 관련된 것입니다. 당신의 의로운 성품은 당신의 거룩함이 도전 받을 때에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항거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발현은 언제나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칭찬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그 사마리아 땅 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조화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공의로 말하자면 마땅히 소돔처럼 쓸어버려야 마땅한 이스라엘이었지만 그들과 가족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차마 심판을 위해 그들 속에 들어가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은 깨뜨릴지라도 그 속에서 태어날 영적인 이스라엘은 더 뜨겁게 사랑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신약의 교회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이었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의 한 몸의 지체로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 당연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시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멸망이 예고되어 있고 동시에 그 멸망이 완전한 멸절이 아닌 영적인 회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징계라는 점에서 이 말씀은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처럼 아니라 하나님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언제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참을 만큼 참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면 놓아버리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놓아버리는 순간 사랑한 것만큼 상처를 받고 미움으로 바뀌는 그런 불완전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반역하고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 아십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인애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침 구름과 같은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아침에 안개도 아니고 구름도 아닌 것이 산허리에 잠깐 나타났다가 햇살이 퍼지면서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이 사라지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사랑이 이스라엘에게도 있기는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시련을 만날 때에 드디어 주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런 방식으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징계하실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아이들을 때리지 말라고 했더니 어느 분이 설교를 듣고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히 때리라고 나왔기 때문에 그 설교는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절대적인 선언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때릴 때에는 언제나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살이 들어가서 다시 말하면 미움의 감정이 들어있는 가운데 혈기로 때리기 쉽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는 아이들을 때리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 자, 그러고 나면 충만한 사랑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때릴 수 있다면 때려도 좋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이를 여러 번 때렸지만 그런 마음으로 때린 적은 없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여러분은 하십시오. 여러분은 워낙 완전한 분들이시니까요. 신약 성경에 자녀들을 때리라고 나오지 않습니다. 때려도 좋습니다. 그런데 절대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때리는 것은 죄를 짓는 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보기에는 자기 뱃속으로 나온 새끼지만 자기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의 탁월함은 그의 어떤 외적인 행동 한 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그가 어떠한 더러운 죄인이라도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읽어내고 그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해 주는 데에서 신앙의 깊이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보기에 돈 훔치고 나쁜 짓하고 아주 패역하게 한 여러분 새끼라도 그를 미워하고 징계하기 전에 그가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부모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음속에 분을 품고 매질할 정도로 그렇게 대우 받아서 안 되는 존귀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두 번째 의미는 민수기 23장 19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식언치 아니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마음에 없는 말씀을 하시거나 혹은 약속하시고 그것을 스스로 위반하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대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 순종하겠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는 고백도 진실하고 그것을 스스로 거슬려 악을 행하고 우상을 섬기며 사는 것도 진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 우리의 말을 식언하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불일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제껏 여러분을 한번 붙드신 후에 결코 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끊임없이 그 손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멀리 떠날 때조차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고 그랬기 때문에 불순종의 길을 걸어갈 때 그렇게 고통과 괴로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그렇게 눈물로 여러분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데 여러분이 그 부르심을 거절하고 가던 길을 감으로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안타깝게 눈물로 부르시는 주님의 그 음성을 거절하고 방종한 길을 걸어감으로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여러분의 그 불순종과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으로 인하여 행복해질 수 있는지 한번 물어 보십시오. 그렇게 눈물겨운 주님의 사랑을 버리고 끊임없이 우상을 숭배하며 방종한 길로 걸었을 때 여러분이 얻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고멜이 눈물겹게 자기를 사랑해 주는 거룩하고 경건한 남편을 버리고 이방 남자들 품에서 몸을 팔고 이방 신상에게 절하며 방탕한 삶을 살았을 때 그가 얻은 유익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 그 불순종 때문에 행복했었습니까? 왜 하나님은 여덟 번이나 반복해서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것일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여러분, 언젠가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한 것입니다. 이미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긴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도 바알과 함께 침상에서 뒹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같이 모자라는 사람에게 당신의 마음을 주셔서 눈물로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왜 돌아가지 않습니까? 왜 하필이면 오늘이 아니고 또 내일입니까? 왜 오늘이 아니고 모레, 또 글피, 언젠가 다른 날이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때까지 여러분이 당할 것은 끊임없는 괴로움과 슬픔, 주님을 멀리 떠난 데서 오는 비굴함과 외로움 밖에는 없는데 왜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지금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까?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말을 할 때 그 사람 마음속에 있는 심정을 전수받는 데에 있습니다. 더욱이 그 분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린 적이 없지만 하나님은 매일매일 쓰라린 가슴으로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는 아픔을 느끼시며 통곡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심정을 하나님은 사랑하는 교회에 주셔서 그렇게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도 울어주지 않는 남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왜 오늘이 아닙니다. 왜 오늘 주님께 돌아가지 않고 또 내일이어야 하고, 또 모레이어야 하고 언젠가는 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날로 연기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데 오늘 여러분보다 여러분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가 더 굳은 얼굴로 예배당을 나서는 여러분을 보면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여러분이 나보다 더 좋은 목회자를 만났다면, 흠이 없고 더 순전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심오한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그런 목회자를 만났더라면 돌아왔을 사람들인데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묻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주님께로 돌아가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이스라엘을 회복하심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육적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치셔서 그 껍질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들의 불순종과 반역을 보복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태어나게 하실 그 진정한 이스라엘을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이 이들을 징계하실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우주적인 계획은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눈물로 외쳐도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그는 끊임없이 방탕한 길을 걸어가고 눈물로 찾아가도 또 다시 집을 떠나는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언젠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그 날에 그들이 돌아오게 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라고 말할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충분히 고통스러운 땅을 걸어오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외롭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오늘이 아니고 또 내일이어야 합니까?
옛 이스라엘은 이렇게 눈물겨운 호세아 선지자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이 돌같이 굳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그 가슴에 새겨지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11장 19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따라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 그분을 등지고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비록 악한 마음으로 주님을 대적하고 바알의 품에서 잠자리를 같이 하지만 그러나 거기를 떠나 아침에 바알의 집에서 나오는 날에 밀려들어오는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은 여러분이 주님과 혼인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 충만하고 헌금 많이 할 때뿐만 아니라 물러가 침륜에 빠져있는 때조차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께 돌아가는 길은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III. 적용과 결론
15살 어린 나이에 교회를 가던 아이가 성경 찬송을 내려놓고 논둑 위에 엎드려져 통곡하며 울었을 때 그 서러움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립감으로 흘리는 눈물과 서러움이었습니다. 그 후 지옥 같은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그리고 21살 되던 해에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와 회심했을 때 제 가슴을 칼로 에는 것처럼 찢어놓았던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그때부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논둑에 엎드러져 푸른 하늘 아래서 그렇게 통곡하며 울던 때, 세상에서 나는 버림받고 홀로 있는 존재일 뿐이라고 절대적인 고독감에서 쓰라려하며 통곡할 때 주님이 내 옆에 함께 울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그때조차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나의 실존의 아픔에 동참해 주셨고 그래서 시련과 고통 속에서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며 아파하고 고통 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주님이 내 안에서 아파하시고 고통 하시던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주님을 반역하며 살아왔던 그 수많은 날들이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날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도 모자라는 날들인데 왜 오늘 안 되는 것입니까? 왜 또 다시 내일이어야 하고 또 다시 먼 후일을 언젠가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무거운 짐과 고통을 다시 안고 이 예배당을 나가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가슴 저미는 음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불순종과 반역의 길을 걸어갔고, 그 결과 그들은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과응보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죄의 더러움보다는 사랑하는 자신의 자식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더 아파하시며 죄를 향한 미움과 죄인을 향한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였던 뼛속까지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못 박혀 살을 찢고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할 때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돌아올 때 비로소 행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상처받고 불행하게 사는 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의 의도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렇게 당신의 품으로 돌아와 그 은혜 아래 살 수 있도록 간절히 부르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께서 부르시는 날에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호 11:10-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안타깝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마음이 완악해져서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새 언약을 주시고 새 마음을 주셔서 에브라임이 거절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받아들이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고 앗수르의 심판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거절당한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을 진노가 아닌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행하셔서 오늘 우리가 여기 구원 얻은 자녀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II. 주께서 부르심
A. 사자처럼 부르심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신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큰 축복과 이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0절과 11절 두 절의 대의는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자처럼 부르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리’ 혹은 ‘아리에’라고 히브리어에 나오는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사자를 가리킵니다. 모든 맹수 중에서 가장 탁월한 용맹과 위엄을 지닌 짐승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호랑이하고 사자하고 싸우면 누가 이기냐고 묻는데 해봐야 압니다. 그런데 실제 밀림에서는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그때그때마다 다른데 호랑이는 항상 홀로 다니는 짐승인데 비해서 사자는 강력하면서도 무리를 지어서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니까 호랑이와 사자가 맞닥뜨리게 되면 항상 하나의 사자가 아니라 다수의 사자와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에 호랑이가 피하는 것이 밀림의 법칙입니다. 그러니까 탁월하게 용맹스러울 뿐만 아니라 무리를 지어서 생활하니 사자를 당할 수 있는 짐승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자에 대해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그려내고 있습니다. 신명기 33장 20절에는 이 사자가 포악함의 대명사로 거론되고 있지만 잠언 28장 1절에서는 의인의 담대함을 사자로 표현합니다. 그러니 이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에 가득 찬 보호를 뜻하고 이방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무서운 능력 있는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머문 지 43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운명과 같은 노예 생활에 매여 포로처럼 살고 있었던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운명과 같은 그 생활에서 그들을 누가 건져낼 수 있다고 믿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가고 그들의 말발굽 아래 사마리아가 짓밟혔을 때에 하나님의 긍휼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주전 586년에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은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귀환하여 다시 그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짓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도 예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 끊어지지 아니하여 이렇게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리라고 하는 것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으로 된 일이었습니다.
주석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여기에 나오는 사자처럼 부르시는 주님의 이 모습은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로 성취되었다고 해석합니다. 악한 에브라임은 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초청을 거절하고 멸망하였지만 하나님은 새 언약의 백성들을 복음으로서 부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안팎의 얽매인 것들을 끊어버리셔서 그들로 복음의 감화를 입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바로 이 복음을 웅장하고 힘차게 이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자비로우신 분이시며 말할 수 없는 가슴 저미는 사랑으로 그들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고 고통 하는 이 세상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려주어 포로처럼 얽매인 체 살아가는 그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 백성들이 거절한 은총을 그리스도의 교회가 받아들이게 하시고 그것을 받아들인 교회마다 사자처럼 부르시는 주님의 복음을 선포해서 그 모든 불쌍한 백성들을 당신의 품에 모으시는 것이 주님의 비전인 것입니다.
사자의 소리의 또 하나의 국면은 바로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아모스서 3장 8절에는 사자가 부르짖은 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의 양면적 성격이 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시는 그 심판의 날에 당신을 의지하고 따랐던 백성들은 신원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긍휼을 보여주시는 날이고, 이스라엘에게 악을 행했던 자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소리와 함께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이사야 27장 13절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그 모든 사슬들을 끊어버려 그들로 하여금 고토로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할 것이라고 하는 이 예언은 국지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실현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제 이 신약의 시대에 이루어지고 종말에 이 모든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통해서 단지 당신의 눈물겨운 사랑만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선포해 주셨지만 그 복음이 그려내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끊임없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불순종해도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혀서 눈물만 흘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모든 악한 것들을 소멸하시고, 또 그 모든 마귀를 무장 해제시켜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으로 인간을 그 모든 사슬과 죄에서 끌러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마귀의 일을 멸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단순한 사랑의 눈물겨운 초청이 아니라 영적인 것들 파하는 능력이요, 얽매인 것들을 끊어버리는 권세이며, 또한 악한 것들을 파멸하는 하늘의 위대한 힘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신약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이루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웅장하게 이 세상에 울려 퍼뜨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헌금하고, 교회를 경영하면 꾸려갈 것입니다. 그 교회는 그런 목적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 뿐만 아니라 온 땅에 울려 퍼지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다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단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직까지 이 세상에 어두움이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이루어진 공동체로서 하나님이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의 맛보기로 세워주신 기관입니다. 그 백성들이 웅장한 복음의 사상으로 무장하여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이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고유한 일을 위해서 온전히 헌신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자원들을 주셨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중대한 불순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자신들이 먼저 경험하고 이 복음이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철학이고 그리고 온 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 복음을 선포하고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한 때는 어둠 속에서 죄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애굽에서 허망한 일에 종사하며 핍박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짓밟힌 사마리아를 뒤로 한 체 앗수르 땅으로 끌려갔던 에브라임 백성들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 복음을 들려주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매우 연약한 사람을 통해 울려 퍼진 한 줄기 빛이었지만 그 복음이 위대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생동안 얽매여 살던 그 죄의 포로 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도처에 그런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이렇게 애굽에 포로처럼 앗수르의 포로처럼 묶여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누군가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그 두 번째 사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주님의 이 사랑의 부르심을 전달해 주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떨며 나오는 자녀들
두 번째는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실 때에 당신의 자녀들이 떨며 나아올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올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해석상의 난점이 있습니다. 자손이라는 말은 올바르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 서쪽에서라고 번역된 이 본문이 문제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미얌’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직역을 하면 바다로부터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f 서쪽이라고 번역했을까요? ‘얌’이라는 단어에 저 아래로 내려가 보면 서쪽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선적인 뜻은 바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이 ‘바다로부터 자손들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서쪽이 말이 안 되는 것이 애굽과 앗수르는 서쪽이 아닙니다. 애굽은 남쪽이고 앗수르는 동쪽입니다. 그래서 이게 바다라고 번역이 되어야지 맞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바다가 서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다로부터 자손들이 온다는 의미는 바다에서 물고기도 아니고 무슨 사람이 오겠습니까? 이것은 바다에 있는 많은 섬들로부터 거기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도 예루살렘으로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오게 되어 구원을 누리게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 말은 애굽은 남방을, 앗수르는 동방을 대표하고 바다는 그 먼 곳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그래서 그들도 그 하나님의 자비로운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빈부나 문화나 민족이나 피부의 색깔과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전망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그 뚜렷한 회심을 통해 에브라임이 거절했던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복음이 사자처럼 울려 퍼질 때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오는 그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그 사랑 때문에 떨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떨게 될 것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애굽과 앗수르로 흩어져 있었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로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새같이, 비둘기 같이 라고 하는 이 묘사는 자기의 집을 찾는 새나 비둘기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새는 자기의 집을 찾아갈 때 머뭇거리거나 혹은 집을 찾지 못해서 여러 곳을 오고가는 일은 없습니다. 새들에게는 자신의 집을 기억하고 찾아가는 귀소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언젠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울려 퍼질 때 망설이지 않고 그리스도의 품으로 달려오게 될 수많은 백성들의 회심은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약하기 짝이 없지만 제 집을 찾는데 있어서는 신속한 비둘기처럼, 새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축복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도 여전히 완악하게 반항하고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망설임이 없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에 역사하고 복음으로 그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기 전까지는 수많은 번민의 밤들, 두려움의 날들을 지냈지만 그 복음이 마음속에 믿어지고 난 후에는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쓰러질 듯이 추수하게 된 영혼으로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어떻게 하나님과 상관없이 주님을 거역하고 살았던 우리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누군가를 통해서 이 능력 있는 복음을 우리에게 들려주셨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심판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거룩하신 분이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맨 처음 회심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옥의 불길에 무서워 떨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와 십자가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 두려운 공포들이 어느 정도 우리의 마음을 때려 하나님으로 향하게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우리를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 “우리가 죄인이고 주님만이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나의 일생의 주인이 이제는 우리 주님뿐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만든 것은 그 율법의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이 십자가의 사실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 떨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에 마음이 녹아 그 긴 세월동안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드렸던 것을 후회하며 그 사랑에 떨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의지할 것 없이 떨며 나아오는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큰 어려움은 늘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첫 회심의 감격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떨었던 그 사랑을 그 자비와 긍휼을 지금도 느끼고 있다면 에브라임처럼 그렇게 집요하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바알을 숭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야 말로 여러분이 떨며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 앞에 살아야 할 시간입니다.
C. 그들 집에 거주케 하심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집에 거주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에서 ‘거주하게 하리니’라고 하는 말은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짓고 안정된 정착생활을 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과 앗수르로 끌려가 포로로 살았지만 거기는 그들의 영원한 집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번영을 꿈꾸며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겼습니다마는 그것은 그들의 영원한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돌아갈 집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집요하게 당신을 버리고 방탕한 길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신실한 언약을 거두시지 아니 하시고 끝까지 신실하게 충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신과 함께 영원히 그 집에 거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신명기 4장 31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버림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까? 아마 소수의 사람들만이 버림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그 핏빛 약속들을 성경 속에서 수없이 만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감격적인지를 여러분은 모르고 있습니다.
한 5~6년 전 일이었습니다. 어버이 주일에 설교를 하고 2층에 있는 제 방에 있을 때였습니다. 사전에 약속도 안하고 아저씨보다는 좀 나이가 많으신 노인 한 분이 직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깨로 유리문을 밀고 제 방에 들이닥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슨 불만을 호소하러 온 분인 줄 알았습니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 앞의 소파에 탁 앉으시자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통곡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십니까?” 그랬더니 울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막 예배를 드리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우리 엄마와 아빠가 저를 난지 7일 만에 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된 것입니다. “제 나이 65세입니다.” 노인이었습니다. 그 65년의 간극을 뛰어넘어서 버림받은 그 설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면서 그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그 어머니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아직까지도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괴로워하며 한참을 울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버림받는 것입니다.
다윗은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을 두 번이나 겪었습니다. 육신의 친 아버지에게서도 겪었고 결혼한 후에는 사울에게서 지독하리만치 겪었습니다. 자신은 사랑했지만 그 사랑의 대가로 돌아온 것은 차가운 버림받음이었고 심지어는 살해의 위협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가 고백하기를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라고 하였겠습니까? 그것이 버림받음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한테 버림받는 것은 “우리는 버림받았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비천하고 연약한 처지에 있는 아이를 누가 버렸을 때에 그것이 정말 버림받은 것입니다.
저는 어제도 손녀하고 한 두 시간 놀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할아버지가 자꾸 생각이 나서 몇 번을 울었습니다. ‘이런 아이의 상태에서 버림받았구나. 그것이 그에게 지워지지를 않는구나.’ 육신의 부모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자기의 핏줄을 끊고 버리는데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오죽 했으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면서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그 이름이 바로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절한 것을 오늘 우리들이 누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요새는 거의 아침서부터 저녁까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냅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들,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선택한 것의 결과였지만 또 부분적으로는 우리와는 상관없이 운명처럼 강요된 것입니다. 어떤 것들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본성 속에 나도 어찌할 수 없이 숨겨진 하나의 성향으로 짊어지고 태어나고, 어떤 것들은 몸부림치며 항거해도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억압하는 태산과 같은 삶의 환경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하며 살아야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왜 나에게 그렇게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는지 혹은 도대체 오늘날 내가 도달하게 된 이 비극적인 상황 중에서 나의 책임이 얼마큼이고,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책임이 얼 만큼이고, 운명처럼 내가 항거할 수 없도록 그렇게 강요된 것이 얼마 만큼인지 계산을 하려고 하면 머리가 아픕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대부분 설명할 수 없이 내가 왜 의도하지 않았던 이 불행한 상황 속에서 상처를 받고 살아야 하는지 대부분의 사실들이 설명되지 않는 체 무한한 세월의 침묵 속에 삼켜져 뒤로 미끄러져 갑니다. 그리고 아마 우리가 의문을 품고 있는 수많은 삶의 사태들과 가슴 아픈 삶의 상황들이 결국은 대답되지 않은 채 영원 속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확실히 믿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수시로 우리를 버려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나쁜 일과 그 어떠한 고통과 커다란 상처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해할 수 없을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놓을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십자가에서 장렬하게 죽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회개한 후에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죽었다고 전해지는 베드로와 같은 용기는 없다고 할지라도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 다른 사람이 아닌 지금 나대로의 나, 이 한계 안에서 주님이 내게 베푸신 그 선과 그 자비한 사랑을 능력이 닿는 한계 안에서 찬송하고 기리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뿐입니다.
독일에서 성악으로 유학을 하고 온 동료 교수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습니다. 그 교수님이 한번 자기가 독일에 유학생활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기숙사에서 잠을 자는데 바로 옆에 채플실이 있는데 새벽에 잠이 잠깐 들었는데 귀신 우는 소리가 나고 너무 기괴한 소리가 들려서 마음이 산란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답니다. 그러면서도 궁금해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그 소름 끼치는 소리를 따라서 갔더니 채플실이더랍니다. 거기에 어느 한 뇌성마비에 걸린 장애인이 피아노 앞에 앉아서 피아노도 당연히 못 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더랍니다. 피아노 건반과 뚜껑에 온통 침을 튀기면서 눈물 흘리며 찬양하는 그 소리가 기숙사에서 자는 학생들에게는 귀신의 비명 소리처럼 들렸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어떤 면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자비와 사랑만큼 올바르게 응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는 못했습니다. 구하면 언제나 받을 수 있는 은혜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악하고 하나님을 등졌기 때문에 충분히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인생은 강단 없이 끊임없는 삶의 사태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중 대부분의 고통은 나 이외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보며 너는 이것이 잘못됐다, 저것이 잘못됐다, 왜 인간성이 그 모양이냐, 너는 병신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모두 눈물겨운 사연을 안고 남이 알지 못하는 그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겪으며 생존해 오는 동안에 생겨난 마음과 정신의 장애였습니다. 물론 일찍 주님을 알고 그 사랑의 손에 붙들려 그 은총을 의지하며 그 진리대로 살았더라면 그렇게 심화되지 않았을 장애였지만 그때에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장애가 발생했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 온 하나의 생존 방법이었습니다. 그런 모든 한계들이 어떤 것들이 나 스스로의 힘으로 개선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떤 것들이 일평생 십자가처럼 그냥 지고 살다가 신음하며 죽어야 할 것들인지를 우리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를 버리신 적이 없고 언제나 사람에게 버림받았을 때 당신을 찾아가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우리에게 신실한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살아 숨 쉬는 날 동안 우리의 입술의 혀가 굳어지기 전까지 그렇게 어느 정도는 장애를 가진 채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그 신실하심과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그 자비와 긍휼을 나의 능력 밖에서는 할 수 없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도 안에서 찬송하고 기리고 그 하나님을 노래하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사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이라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신앙에 있어서 엘리트주의를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성공했다더라, 예수를 믿었더니 부자가 되었다더라, 예수를 믿었더니 자손들이 복을 받았다더라. 몇 년 전에도 어느 목사님 설교를 읽는데 그 권사님이 정말 예수 잘 믿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큰 아들은 하버드대, 둘째 아들은 프린스턴, 셋째 딸은 예일대에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에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내가 아는 정말 신실한 사람들 중에는 그 권사님보다 더 훌륭하게 주님을 섬겼는데도 자녀들이 그렇게 안 풀린 집안 많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공식이라고 그 설교단에서 그렇게 선포를 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수가 있습니까? 내가 어떠한 인생을 살아왔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 일어난 모든 나쁘고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선하시며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약속을 따라서 오늘도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던 하나님이 오늘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육적인 에브라임 백성들은 그 피 저린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더욱 완악해져 멸망의 길로 갔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할례된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돌아가기를 원하면 돌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돌아가고 싶어 하는 여러분을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없이 어두운 인생의 밤길을 헤매지 말고 돌아와 주님과 함께 그 집에서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호 11: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불순종했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은 계속되었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은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불길 같은 사랑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이방신들에게로 달려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은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에도 불구하고 결국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이키지를 않아 결국은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은 계속되어서 바로 이렇게 잘려져 나간 구약 이스라엘의 그루터기에서 신약의 영적인 백성들이 열매로 맺혀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읽은 이 성경 구절은 11장의 마지막 끝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12장 1절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위치에 상관없이 이 말씀은 조금은 비관적이긴 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모두의 반역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거룩하심을 대조함으로써 11장을 마무리 짓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이제 10번 동안 계속되어 오던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시리즈를 오늘 설교로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들은 말씀을 가슴에 새겨 단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여러분에게 적용하여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 하나님 백성들의 죄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의 이런 불붙는 사랑에도 이미 그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깊이 병들어 버린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뜻밖에 북 왕국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남 왕국의 죄까지도 함께 거론이 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 때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하던 당시 남 왕국의 왕위는 웃시아와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왕으로 이어졌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길이 빛나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었습니다. 비록 그 끝은 육체로 마친 것 같은 아쉬움이 있지만 그 사람은 분명히 일생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앞의 두 왕은 이스라엘 왕들 중 패역한 왕들 중 두 사람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 숭배와 교만의 죄에서 건지지 못한 무기력한 왕들이었던 것입니다.
A. 거짓과 속임수
제일 먼저 호세아 선지자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은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에브라임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애칭이었고,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언약을 맺은 당사자로서의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먼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면서 선지자는 거짓과 속임수로 하나님을 에워쌌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첫째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상태가 하나님과 다투고 있는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에워싼다’라는 단어는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쟁의 기록에 많이 나오는 동사입니다. 포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포위하는 것은 뭔가 적대하는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그런 대적하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께 항거하며 무엇인가 하나님의 통치에 거스르고자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들의 그 죄가 얼마나 보편적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만 명의 군사를 두 명이 포위했다는 서술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속임수와 거짓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죄는 몇몇 지도자들이나 혹은 몇몇 하층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고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광범위하게 자신들의 악으로 에워싸고 하나님과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카하쉬’라고 하는 단어인데 ‘실망, 속임, 실패’, 이런 의미입니다. 속임수는 ‘미르마’라는 단어인데 열왕기하 9장 23절에서는 이 말이 배신이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결국 수없는 속임수와 배신으로서 그 불신앙의 풍조로 참된 하나님을 에워싸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가슴 저미는 슬픔으로 자신의 가정의 비극을 재료삼아서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에게 말하였지만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주 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께 반역하고 대적하며 배신과 거짓으로 일관하며 하나님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마음을 떠나 형식만 남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절교하고 배교를 선언했던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경외함이 없었지만 철저히 완전하게 하나님을 배교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결국은 이 사람들의 마음이 수 없는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 찼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우리의 관심을 데려갑니다. 자, 바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물론 바알이 고도의 도덕성을 갖춘 신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알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은 온전히 사랑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랐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빛바랜 가족사진을 보여주시며 이스라엘을 어린 시절부터 걸음마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도록 인도하고, 애굽에 포로 되어 있을 때에 노예 살이 하는 그들을 하나님이 업어 나르듯이 구출한 사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순전히 따르기를 거절했습니다. 자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완전한 배교도 아니고 완전한 신앙도 아니고 결국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 찬 삶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듣고 계십니다. ‘아 왜 그랬을까? 참 우상을 섬겼네. 참 못됐구만. 왜 그러지?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오늘 2700년 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모습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 우리의 보람은 속임수다.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거짓을 행하는 것이다.’ 라고 결단을 하고 거짓과 속임수를 행했다고는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왜 이렇게 이 사람들은 거짓과 속임수로 하나님도 아니고 바알도 아닌 둘 다 섬긴, 그런 의미에서는 둘 다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 그런 이상한 삶을 살아간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말 그들이 헌신했던 것은 바알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구였습니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독교의 반대를 이단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단은 교회가 경계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인을 받으며 공존하고 있는 이단이 있습니다. 자아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 바알이 좋아서 바알에게로 간 것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의 번영을 바알이 주는 것 같이 생각이 될 때에는 바알에게 가서 매달렸습니다. 왠지 무언가 부족한 것 같고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면 하나님 편에 붙었습니다. 순간순간 자기의 사랑과 행복에 충실한 삶을 살았더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인생 전체가 속임수와 가식, 거짓으로 가득 찬 삶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종 상처 때문에, 고통 때문에 시련이 와서 예전에 내 인생 속에 있었던 트라우마 때문에 라고 핑계를 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았고 그 마지막 살아온 무게를 하나님이 달아보셨을 때 그것이 바로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찬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지는 않았지만 철저히 배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양다리를 걸친 체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편으로 바알을 섬기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제 이 설교로 열 번의 시리즈를 끝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말씀 앞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 한 번도 거짓과 속임수의 삶을 선택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매순간 충실하게 자기 본위의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그 마지막 결과가 하나님 앞에 거짓과 속임수로 살아온 일생이었다고 판단이 내려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판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끝까지 자기 본위의 중심성을 버리지 않고 이럴 때에는 세상을 섬기며 번영을 꿈꾸고, 저럴 때에는 하나님께 피하고 의지하며 이런 삶을 살아감으로써 가장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이단적인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여러분이 그토록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도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좋아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올바른 것을 좋아하고 올바른 것을 사랑하기에는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자신이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꺾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거짓과 속임수로 행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나를 버리고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서 자기 본위의 삶을 산다면 결국 여러분의 삶도 마지막에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면 거짓과 속임수로 살아온 인생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 끊임없이 배반의 길을 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적받을 죄였던 것입니다.
B. 정함이 없는 마음
이어서 선지자는 유다의 불신앙을 탄핵하고 있습니다. 정함이 없는 마음이라고 오늘 성경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킹 제임스 버전을 비롯해서 칼빈 주석 등등 몇 가지 무게를 가진 저술가들에게서 이 성경 본문은 전혀 다르게 번역됩니다. 그 이유는 오늘 정함이라고 번역된 ‘라드’라고 하는 이 단어 하나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두 글자로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세 글자로 된 ‘라다’의 변형이라고 오해되었고 그래서 이 본문은 완전히 다른 번역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스리고 하나님과 거룩한 성도들에게 대하여 신실하도다.” 라고 번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번역이 본문을 곡해한 잘못된 번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히브리어 본문 상으로 그렇고 말해도 여러분이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는 12장 2절에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고” 라고 나옵니다. 결국 하나의 문맥 안에서 유다는 이스라엘과 꼭 같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북 왕국 유다를 12절 바로 앞에서 신실하다고 칭찬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말 성경이 다행히 이 구절을 매우 올바르게 번역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에서 ‘정함’이라고 번역이 된 동사는 ‘정하다’라는 것인데 ‘루드’라는 것이 원형이고, ‘오락가락하다, 방황하다, 혹은 배회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의 완료 3인칭 남성 단수 시제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정통성을 가진 유다 나라조차도 마음의 정함이 없이 불신앙과 신앙, 세상의 번영과 믿음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에 고정됨이 없고 신앙과 배신 사이를 오가며 세상의 번영을 위해 바알을 좇다가 두렵고 무서우면 하나님께로 피하는 이중적인 생활을 계속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확정함이 없었기 때문에 남왕국 유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물위에 떠도는 거품처럼 물결이 흔들면 흔드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치우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마음을 확정한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마음을 확정하는 것이 하나님이냐, 우리냐, 주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가 마음을 확정할 수 있겠으며 우리가 마음을 확정하려고 마음먹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 홀로 우리의 마음을 확정할 수 있을까, 이런 유치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자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사야 26장 3절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57편 7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라고 하나님을 기뻐하였습니다. 이 모두 마음이 굳게 확정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호세아서를 읽을 때에 호세아의 시각에서 늘 호세아서를 읽지 고멜의 시각에서 호세아서를 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번 고멜의 시각으로 돌아가서 이 호세아서를 읽어보면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도달할 수 없었던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이해에 대한 폭을 넓혀준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호세아와 같을 때는 매우 드물고 고멜과 같은 때가 훨씬 많으니까 고멜의 심정에서 이 호세아를 읽는 것도 매우 큰 유익을 주리라고 봅니다.
자, 그러면 같이 가봅시다. 자, 어찌되어서 이 결혼이 성립되었는지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나 고멜은 경건하기로 이름난 선지자 호세아와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 고멜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유명한 창녀였고, 그리고 뼛속 깊이 음란한 기질이 배어 있는 여자였습니다. 경건한 선지자였을 테니 성 생활에 남다른 열정이 있었을 리가 없고 혹시 있어서 밤마다 그녀를 사랑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이 여자는 한 남자의 사랑에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색기가 많은 여자였습니다. 자, 이제 지루해진 이 남편, 늘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것 이외에는 모르는 이 남자를 등지고 그리고 예전에 행했던 그 창녀 사업으로 돌아갔습니다. 활기 넘치는 육악에서 신전 창녀로 생활하면서 맘껏 즐거운 인생을 누리고 수입도 챙겼습니다. 그러다가 애가 덜컥 생겼습니다. 돌아갈 곳도 없고 아이를 가지고 있는 한 이 직업도 계속 할 수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고맙게도 남편이 찾아왔습니다. 곤경 중에 있는 나 고멜을 위로하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이런 생활 그만 두고 우리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갑시다.” 못 이기는 채 돌아갔더니 정말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아이를 낳았습니다. 조금 사랑스럽기도 했지만 육악에서는 맛볼 수 없는 따스함과 평안함이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도 어느 정도 느껴졌습니다. 나 비록 창녀이기는 했으나 내 새끼는 사랑했거든. 그래서 내 새끼를 보면서 예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좀 안정되기 시작했을 때 나의 음심은 다시 불붙듯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의 뼛속 깊이 하나님의 사랑이 사무치는 것만큼 나 고멜의 뼛속 깊이 음란한 기질이 사무쳐서 외간 남자의 품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버리고 남편을 버리고 떠나왔고 그것이 약간은 가책이 되었으나 금세 영업을 하면서 몸을 팔고 수많은 남자들과 연락의 밤을 지내면서 나는 그런 고민을 잊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고멜의 삶입니다. 그러다 다시 애가 덜컥 들어섰습니다. 애를 낳았습니다. 이제는 자기를 상대해주는 남자도 없고 외로워졌습니다. 두고 온 자식도 보고 싶기도 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가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와서 데리고 가자 또 다시 갔습니다. 이런 생활을 계속 반복해서 한 것입니다. 고멜이 뭐 이상한 일을 했습니까? 순간순간 자신에게 충실해서 살았을 뿐입니다. 무슨 도저히 우리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고 나는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을 고멜이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착각입니다. 그냥 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게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렇게 그냥 살아온 기록을 보면서 경건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은 가슴을 찢는 것입니다. 왜 이랬을까? 그렇게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왜 이렇게 배반하면서 주님을 거슬러 살았을까 하는 깊은 동정과 분노를 함께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매우 큰 도전을 준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인가 중대한 결단과 신앙의 각오 없이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매몰되어서 생각 없이 인생을 살면 마지막에 다 살고 난 다음에 여러분의 인생의 평가는 그저 고멜과 같이 음란한 삶이었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양다리를 걸치고 거짓과 속임수로 살아온 인생이라고 하나님 앞에 달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던 이유이고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나 자신은 버림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던 이유이고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함이라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예수 죽음을 날마다 짊어지는 것이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길이라고 말했던 근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커다란 대적은 이단이나 이교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을 향한 긴장 없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고 그리고 모순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도 자기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마음, 이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커다란 적이라는 것입니다.
열 번의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 중의 다수는 설교와 아무 상관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의 마음은 이 말씀이 후벼 파고 지나갔고, 어떤 사람의 마음에는 대못을 박았고, 어떤 사람의 마음에는 포도주를 발라 주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어느 한 순간 말씀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찔끔 흘리고 가슴이 시큰해지는 것은 고멜도 하던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을 나 중심으로 살던 삶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치료가 필요하고 고치시려는 주님의 그 말씀의 은혜로운 역사 앞에 자기 자신을 복종시키는 승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성경 전체 수없이 읽어보아도 자기의 가슴에 목을 박고 선지자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어쩌면 신전 창녀로 살아갔을지도 모르는 이 고멜을 구타했다는 이야기 들리지 않습니다. 언제나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지아비의 사랑으로 방탕의 죄를 저지른 죄를 묶기보다는 그렇게 비참한 상태가 되어 버린 아내에 대한 연민의 눈물을 흘리며 자기 품으로 돌아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순간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그런 분이 아니라 망가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고쳐서 올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 한 번의 획기적인 돌이킴도 필요하지만 지속적으로 그 말씀의 빛 아래서 고침을 받으려고 하는 순복하는 마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거짓과 속임수, 정함이 없는 유다의 마음은 모두 그것을 추구한 결과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붙들려 살지 않은 자연스러운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오늘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이 마음을 물려받음으로써 그 말씀의 빛 앞에서 여러분의 거짓과 속임수에 가득찬 삶, 정함이 없이 흔들리는 마음으로 이어진 삶의 궤적을 추적하십시오. 그리고 확실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와 대조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제시함으로써 이 11장을 마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유다가 정함이 없는 것은 새로운 소식이 아니지만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한 자이시라고 하는 이 속성은 이들에게 아주 새로운 것이어야 했습니다.
A. 신실하심
‘신실하다’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네만’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진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진리가 있고 그 진리는 실제적으로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밖에 있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알던 모르던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 진리는 모든 인간을 규율합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혹은 어떤 사람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인간이 그렇게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음의 규율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찾아와 그들을 죽음으로 데려가고 죽음의 휘장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하나님이 그럴 권리가 있다고 믿던, 그렇게 믿지 않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기 밖에 존재하는 진리가 그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내가 의지를 가지고 그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그 진리는 내게 인식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내가 삶으로서 그 진리와 함께 융화되어서 그 진리와 어울리는 삶을 살려고 할 때 그래서 내가 오늘 진리를 따라 산다, 진리를 붙든다고 말할 때 그 진리는 바깥에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서도 상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곳에서 설교마다 진리는 인간에게 있어서 진리는 존재와 인식 사이에 걸쳐 있다고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진리가 무엇인지가 인식되고 나면 인간은 그 진리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거기에 자기 자신을 합치시켜서 선하고 바람직한 상태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해서 도달하게 된 바람직한 상태를 우리는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진실은 솔직함과 정직함을 동반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을 죽였습니다. 돈이 탐나서였을 수도 있고 혹은 미운 감정에 북받쳐서 사람을 순간적으로 살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죽였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사람이 ‘내가 저 사람을 죽였어. 그래서 어쩠다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우리들이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직하긴 하지만 진리에 자신을 부합하게 하려는 노력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죽였어. 배 쨀래? 어쩔 건데? 할 테면 해 봐.’ 우리는 이런 사람을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순간의 실수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양심에 큰 고통을 받으며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때 나는 너무나 나쁜 일을 했고 죽은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범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와 진리를 인식하는 것, 인식하고 거기에 부합하게 사는 것 사이에 인간 속에서는 언제나 모순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욕을 먹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진실하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이신 그 분이 진실하신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는 하나님 아닌 것과 하나님인 것이 섞여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온전히 진실하십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면 여러분을 굳이 그 뒤를 까보면 진짜 하나님 속마음은 다를 거야라고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진실함이 약속에 대해서 적용될 때에 그것을 우리들이 ‘신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faithfulness', ‘믿을만함, 신실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 관계에 수없이 거짓과 속임수로 하나님을 놀렸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붙드는 것 같다가 놓아버리고 놓아버리는 것 같다가는 붙들면서 정함이 없는 관계를 지속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실 수가 없었습니다. 법적으로 보자면 언약을 맺은 당사자중 한 사람이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언약을 깨뜨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이 언약을 파기하신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사람이 그 언약을 파기하고 멸망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언약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 사랑할 때도 거기 계셨고, 배반하고 도망갔어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고, 돌아가 보니 역시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신실하신 증거입니다. 결국 하나님에게는 거짓과 속임수가 없었고 하나님은 이렇게 두 마음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일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와 함께 세상 번영과 신앙 사이에서 수없이 흔들림으로 하나님을 조롱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도 이 신실함은 부분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신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신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저 진실하던 사람이 저렇게 우리에게 고통을 주다니 혹은 악을 행하다니, 혹은 나와의 신실한 관계를 배신하다니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믿음을 당신의 저울에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자기가 신뢰하고 일생동안 믿어오던 사람들이 자기를 배신했을 때 삶이 뿌리 체 뒤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항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에 믿음이 있다면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자기가 믿고 신뢰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은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실하신 하나님이 더욱 돋보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늘 말씀 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람에게 너무 기대를 걸지 말고 항상 최악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사셔야 됩니다. ‘오늘도 우리 아내가 나를 참 사랑해 주는구나. 아 따뜻하고 나를 아껴주는구나’ 생각하면 항상 그것이 새로운 인상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당연하지. 내가 지 남편인데. 날 사랑해야지. 안하면 죽으려고?’ 그러면 오늘까지 사랑해 주다가 내일 바뀌면 분노가 치솟고 그리고 배신감이 인생을 뿌리 체 뒤흔들게 됩니다. 사람의 일이 그렇게 크게 인간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아내가 따뜻하게 친절하게 사랑으로 대해주면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에게도 신실함이 있지만 하나님의 신실함과 또렷한 대조를 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하거나 혹은 관계가 깨지고 배신을 겪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정말 신실하신 분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래서 남이 여러분에게 아부하는 것도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결국 불완전한 인간 편에서 보면 아부와 신실함의 차이는 기간의 차이입니다. 물론 동기의 차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항구적으로 지속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마음에 있을 때에도 우리의 할 의무를 해야 되지만 마음에 없을 때에도 그렇게 해야지만 관계가 지속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여태까지 살아온 믿음 생활을 쭉 추적해보면 아부와 신실함이 뒤섞였지 신실함 하나로 일관되게 살아온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 없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여러분을 신실하게 대해주지 않고 배신했다고 상처를 받지만 여러분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상처를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너무 희망을 걸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끊임없는 거짓과 속임수로 하나님을 에워싸고 정함이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오갔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당신의 신실하심과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옳으심이 그들에게 고민거리가 되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분의 팔 아래서 복종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를 않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보면서 “주님 앞에서 내 인생이 기억된다면 나는 충분합니다. 주님의 신실한 것이 나에게 있어서 언제나 기쁨이고 내가 잠시 미끄러지거나 혹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할 때에도 언제나 주님의 신실하심이 나의 상처에 위로가 되고 나의 고통에 은혜가 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실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선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기를 배신하고 자기에게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신실하신 성품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흔들리는 죄인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복락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의 첫 걸음은 좋은 부모를 만나 그 부모에게서 인간 안에 깃들여진 하나님의 신실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쓰레기 같은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에 그 사람은 100m 달리기의 인생에서 좋은 부모를 만나 신실함을 배운 사람들은 30m 앞에서 출발을 하는 것이고, 아까 말한 그런 불우한 사람들은 30m 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30m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이 될지는 모르지만 누가 몸부림치면서 인생을 살았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시지 사람이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 그리고 칼 구스타브 융은 각각 1850년과 1875년에 태어났습니다. 이 쌍벽과 같은 두 위대한 심리학자의 그늘에 가려서 사람들에게 잊혀진 중요한 학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1870년에 태어난 아들러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평생 아주 똑똑하고 유능한 형 밑에서 그 비교 의식 속에서 열등감을 가지고 일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 형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프로이드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사람은 자기 선배인 프로이드를 아주 싫어합니다. 아들러라고 하는 사람이 두 사람하고는 상당히 다른 심리학을 전개했습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전반적으로 그 사람의 사상은 기독교의 성경의 가르침하고 잘 융합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읽으면서 무엇인가 우리가 참고할만한 아주 중요한 것들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자신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과 미칠 수 없는 것 사이에 구별을 분명히 함으로써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뭘 해도 악평을 하는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굳이 그런 거 아니더라도 나를 아주 명백하게 잘못해서 배신해서 큰 고통을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지 간에 아들러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비판해. 나를 성찰하면서 고쳐야지, 고쳐야지 거기까지는 내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나를 저 깊이 인격적으로 나를 미워합니다. 내가 무얼 하든지 그 사람에게 나는 싫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한테 반역을 하고 대적을 하고 심지어는 배신을 합니다. 그것은 나라는 사람이 그것을 고쳐 놓을 수도 없고 영향을 끼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그것 때문에 허비하면서 보냅니다. 그래서 아들러는 프로이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렸을 때 어떤 트라우마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다라고 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일체 거부합니다. 결국 자기가 하기 싫으니까 과거를 핑계 삼으면서 의지의 나약함으로 도피하는 것이라는 보는 것입니다. 나는 그 점에 있어서는 프로이드의 견해보다는 아들러의 견해가 성경에 훨씬 가까이 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자기가 망가진 삶을 사는 것을 맨날 옛날 상처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혹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해석을 해줄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과거에 그런 사건들 때문입니다. 혹은 과거에 그 트라우마 때문입니다.”라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그러고 다니는 것은 추한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배신하고 뼛속 깊이 나를 미워하고 내가 뭘 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자유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리는 요지는 아들러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그렇게 주님이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종종 배신을 당해도 그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던 경험을 가져다주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해석을 하고 자유로워지라고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짧은 인생이니 자기를 배신한 사람의 과거의 상처를 부여안고 자기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을 가지고 씨름하면서 피를 말리고 살을 썩으면서 사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언제 그러고 살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치유책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문제를 계속 만들어 낼 뿐이지 치유책은 거기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거나 미움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불완전함, 인간의 불완전함을 깨닫게 되고 자기에게 고통을 주었던 그 사람의 모습과 똑같은 것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슷하게 생긴 것들끼리 주고받는 일이었으니까 그냥 퉁치고 없었다고 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삶에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을 때에 이상하게 거기에서 신앙이 불꽃처럼 솟구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비밀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기대를 걸지 말고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요동쳐도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 된다는 것을 믿고 그 분의 신실하심을 붙들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빕니다.
B. 거룩하심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게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 거룩하심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가 ‘코데쉼’ 복수로 나오는 것을 가리켜서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실수가 없고 거룩한 자들, 혹은 성도라고 번역되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어법에서는 신비하거나 장엄한 것들을 복수로 표현하는 어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장엄의 복수, 혹은 신비의 복수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신데도 복수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얼굴은 한 사람이 하나밖에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히브리어에서는 인간의 얼굴이 너무 신비하기 때문에 복수로 사용합니다. 물이나 혹은 하늘같은 것도 마찬가지로 복수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형태는 복수이지만 신실하신 하나님 한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거룩하심,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과는 구별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들을 만드셨으나 하나님은 이것들 위에 초월해 계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들이 하나님께만 배타적으로 봉헌되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한 은혜의 빛 아래서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게 초월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은 의롭고 완전하셔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늘 자비와 은총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어울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요구되는 삶을 살 때에 이스라엘은 이방을 향해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평화와 온전한 생활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멀리 떠난 여러분을 부르시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집을 멀리 떠난 고멜을 찾아 나서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부를 때에 고멜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빨리 집에 와서 취직해서 돈 벌어오라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선지자는 고멜에게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너는 아무렇게나 시궁창에 굴러도 괜찮은데 애들이 불쌍하니까 와서 좀 도와 달라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호세아가 사랑하는 고멜에게 원하는 모드는 그냥 돌아와서 자기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맺으면서 그냥 살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유별난 삶, 너도 나와 같이 그렇게 피 끓는 열정으로 내가 앞 골목에서 선포할 때 너는 뒷골목에서 전도하라고 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사는 것입니다. 아침이면 일어나서 아침 해 먹고 빨래하고 설거지 하고 저녁 되면 같이 앉아서 TV도 보고, 신문도 읽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가정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입니다. 어떤 영웅적인 삶을 살아내라고 여러분을 하나님이 당신께로 돌아오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나와 혼인 관계에 있는 나의 신부이니 나와 함께 살자고 하는 것이 주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신실하셨습니다. 우리가 신뢰했던 우리 자신은 때로는 우리를 배반하고 우리가 믿었던 가족들은 종종 우리를 버리기도 하고 우리가 의지했던 사람들은 우리를 배신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변함이 없이 똑같은 성품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면서 흔들리지 않고 우리를 붙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신실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것은 거짓과 속임수, 정함이 없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경험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 신실함은 반역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만 경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연약하신 것 같지만 강하시고, 늘 자신이 우리에게 양보하는 것 같지만 당신의 뜻을 꼭 이루고야 마십니다. 신앙은 권고 받을 수는 있지만 강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열 번에 걸쳐서 최대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공은 여러분에게로 넘어갔고 이제 여러분이 이 말씀을 받고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모순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은혜로 우리 의지를 움직여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용도로 사용된다고도 생각을 합니다. 은총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가진 인간에게는 이 두 명제가 모순처럼 보이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일주일이라도 모여서 집회를 하자면 제가 설명해 드릴 수 있겠습니다마는 여러분 중의 그 철학적인 변론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똑같은 질문을 들었을 때에 아주 간명하게 비유를 들었습니다. 장작을 자르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떡국처럼 장작을 자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며칠 동안 날카로운 도끼질로 톡톡 거리고 쪼면 손가락만한 송판 하나를 만들 수는 있을 것입니다. 누가 그 짓을 하고 있겠습니까? 당연이 옹이가 있는 쪽은 도끼를 내리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안 쪼개집니다. 나뭇결을 보고 때리고 반쪽으로 찢어진 장작을 눕혀놓고 정수리를 치면서 사분의 일 쪽을 내고 말렸다가 아궁이에 던져서 불을 때는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 중 누가 먼저 그것을 깨달은 사람도 없고 상식적으로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내릴 수 있는 판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돌이키려는 사람들에게 돌이킬 힘을 주시고 돌이키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주었던 은혜도 거두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어떻게 보면 그것은 여러분이 한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로 돌아가면 전적으로 주님이 하신 일이고 여러분이 주께로부터 도망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 없이 여러분이 한 일입니다. 신앙은 효도와 같은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들뜬 마음으로 고향을 등지고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고 성공을 찾아서 도시로 떠나지만 세월이 흐르고 자식을 낳고 철이 들면서 결국은 부모의 마음이 이것이 아닌 거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귀향하는 것과 같은 것이 신앙입니다.
나는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에게 주님의 마음을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충실한 성경 해석자로서 11장을 부끄러움 없이 해석하려고 공정하게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이 말씀을 들은 책임이 무겁게 지워졌습니다. 제 설교는 끝났지만 이 말씀은 끊임없이 여러분의 마음에 붙어서 여러분에게 호세아 11장을 어떻게 하려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뿌리치고 다시 거짓과 속임수의 삶을 사시든지 정함이 없는 마음의 삶을 지속하든지 혹은 고요히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찢고 돌아오는지는 여러분이 하나님 한분 앞에서 결단할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좋으신 하나님의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의 초청을 거절한다면 슬픔의 어두운 그림자가 더욱 짙게 여러분의 인생에 드리워질 것이지만 그러나 이 말씀을 인격적으로 깊이 받아들이고 그 주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깨달아 인격적으로 주님께 돌아간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치셨지만 고쳐주실 것이고 여러분을 때리셨으나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의 삶이 오늘보다는 훨씬 나아질 것이니 그렇게 주님께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