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각성과 부흥을 위한 청년 집회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느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22-24)
우리 같이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들이 오랫동안 기도하며 기다렸던 이 회심집회를 갖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오늘 이 저녁시간에 저희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들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여기 나와 있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때로는 호기심으로, 때로는 우려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간절한 갈망으로 여기 지체들이 하나님께서 굽어살시고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 말씀을 들을 때에 왜 그런지 마음이 활짝 열리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기쁘게 들릴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저희들에게 그토록 알기를 원했던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 주옵소서. 주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저는 어렸을 적에, 두 세 살 때는 기억이 잘 안 나고, 기억의 끝자락이 한 네 살쯤 되거든요. 그런데 그 기억에 의하면 걸어 다니기도 했지만, 기어 다니던 기억이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주 허름한 예배당에 유리창을 할 수가 없어서 비닐로 막은 넓은 마루가 깔린, 겨울에는 추운 예배당에서 걸어다니기도 하고 기어 다니기도 한 생각이 나기도 하고, 연결된 생각은 안 나고 스틸 사진처럼 탁!탁!탁! 찍히는 생각들이 바람이 불면 떨리는 문풍지 같은 비닐로 만든 예배당, 그리고 예배 끝나고 업혀서 올 때는 캄캄한 산길, 어느 쪽이었냐면 정릉 쪽이었는데, 미아리 길음동 사라다 예술대학 쪽이었는데. 그런 희미한 기억의 끝자락입니다. 그때부터 제가 교회를 다녔거든요. 우리 부모님은 전혀 예수하고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제가 아버지의 자매들, 고모들하고 같이 살았어요. 그 중 두 고모들이 저를 데리고 열심히 교회를 데리고 다니셨어요. 저는 대소가에 전체를 통틀어서 14년 만에 처음 태어난 어린아이였고,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어머니가 저를 젖 한번 먹이려면 나를 찾아서 온 삼시사방을 다 찾아야지만 겨우 찾을 정도로 그렇게 사람들이 나를 좋아했습니다. 데리고 늘 교회에 늘 다녔지요. 그게 저의 처음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주일학교까지 다 거쳤는데, 정말 회심을 못했습니다. 성탄절에 발표회도 하고 남이 하는 것은 다 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때까지는 헌금을 주면 10환을 종이에 싸서 내던 기억이 나는데, 그 이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감성과 이성 중에서, 감성의 능력을 다른 사람에 비해서 크기를 조금 크게 가지고 태어나게 하신 거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춘기를 겪으면서 무지하게 홍역을 겪게 됩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사춘기를 겪었는데, 너무 너무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중학교 2학년짜리한테 "인생을 왜 사나?" 하는 질문이 떠오르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답을 주냐 이겁니다. 어느 날은 고모하고 같이 교회를 가다가 미끄러운 길이었는데, 봄이라서 얼었던 눈이 녹으면서 올라가야 하는데 자꾸만 미끄러졌어요. 그런데 그때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겁니다. 왜 눈물이 쏟아지냐면, 내 인생길이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눈으로 녹아있는 언덕길에서 엎드려서 막 울었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그러니까 고모가 "너 왜 우느냐? 지금 교회 가는데 왜 우느냐? 거기서 몇 번 넘어졌다고 우느냐." 제가 펑펑 울면서 고모한테, " 고모, 난 인생을 살아가는 게 이렇게 힘들어." 그랬습니다. 그런데 고모도 그냥 평범한 아줌마였거든요. 어린애한테 깊은 설명을 해 줄 수 있는, 교리적으로 설명해 줄 기반도 없고 그냥 열심히 교회 다니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야, 뭘 그거 가지고 그러냐. 나같이 힘든 사람도 사는데."
그게 저의 인생의 시작이었어요. 그냥 밀어치고 파고드니까. 인생이 무얼까? 그러니까 교회 가서 얘기 하나도 안 했어요.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겁니다. 나하고 성전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겁니다. 요셉이 복을 받았다, 나하고 무슨 상관이있냐 이겁니다. 나 그런거 필요없다. 왜 인생을 사는냐 이겁니다. 그때 좋은 선생님들이 있어서 지도를 해주면 좋은데, 그냥 책 같은 거 읽으며 중학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1학년으로 올라갔습니다. 서울 중동 고등학교였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받은 세대기 때문에 그런거 하고 상관이 없지만, 그때만 해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 시험봐서 들어갔습니다. 나 아는 여자애는 그때만 해도 학교 떨어졌다고,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투신자살했습니다. 그런게 다반사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조회를 하면 서너 명씩 실려나갔습니다. 체력이 없어서. 3시간 이상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6학년때. 삼당사락, 삼당사락하면서 다녔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들어갔습니다. 그 학교는 나름대로 엄청난 프라이드가 있는 깡패학교였습니다. 술하고 싸움하는거, 이 두 개가 아주 대표적인데, 여학생 빼놓고는 한 번도 안 맞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에 골목이 있었습니다. 10미터 되는 골목길인데, 아무도 못다녔어요. 여학생들 밖에 못 다녔어요. 남학생들은 못 나타나요. 자동차만 다녔습니다. 누가 감히 못 나타났습니다. 왜냐면 누가 나타나면 개패듯 팼습니다. 감히 여기가 어딘데, 거룩한 곳인데.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증세가 더 심각해졌습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공부고 뭐고 정신이 막 휘말려서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그런데다가 감수성은 막 어마어마하게 극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삼일 동안 앓았습니다. 그때보고 앓은 영화 중의 하나가 초원의 빛. 초원의 빛이여 영광의 꽃이여 다시는 그때가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속에 숨은 오묘한 힘을 찾으리. 그게 워드워즈의 시쟎아요? 그때 앓는다는 게 감정적으로 앓는 게 아니라, 진짜 막 몸살이 났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몸살이 무엇이냐 이겁니다. 이 몸살을 무엇으로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난 다른 사람들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아간다는 게 신기했어요. 어떻게 저 인간들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무시하는 게 아니라, 신기해 보였었어요. 그리고 가끔 친구들하고 내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지금 시험이 내일모렌데, 그냥 대학이나 들어가라." 그러면 나는 그냥 다 속물로 보였습니다. 대학이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나, 공부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나, 인생을 왜 사는지 모르겠는데. 제일 힘든 것은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너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제 책을 읽으면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한 것 입니다. 제일 먼저 읽은 게 누구냐면 쇼펜하우어였습니다. 저와 기질이 비슷했습니다. 읽으면서 굉장히 신이 났습니다. 그러나 읽고 나니까 시들해졌습니다. 그리고 전혀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결의 길이 없고. 그 사람 자신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만해도 학생치고 실존주의 작품을 안 읽으면 병신취급을 당했어요. 70년대에는 실존주의 작품이 온통 유행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실존주의 작품을 읽어 나가는 거예요. 카프카 라든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라든지, 하이데거라든지 그런 사람들의, 웬만하면 다 읽었습니다. 다 일리도 있고 깊이 공감하는데 하나 없는 게 뭐냐면, 내가 물음표 두 개만 제시를 하는데, 이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 세 개 네 개 다섯 개 여섯 개 증폭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답이 나오는 게 아니라, 밑줄을 긋고 신나는데 마지막 결론이 뭐냐면 나 혼자 고민할 때는 물음표가 두세 개 밖에 안 되는데, 읽고 나면 일곱 개 여덟 개 아홉 개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답이 안 나왔습니다. 읽어 나가다가 그래도 평안을 준 사람은 버튼 안틀러스였습니다. 그 사람의 책을 읽는데, 자기는 열 몇 살 때부터 세상의 고통을 생각하면 확 밀려오는 중압감 때문에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몇 번이나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때는 신앙도 없으니까 그럴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다 잊어 버렸습니다. 그때는 다 잘 못했는데, 영어는 재미있었습니다. 내가 사실은 영어가 좋아서 자살을 못했습니다. 그게 제 인생에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끝날 때쯤 되서 전국에 있는 모든 고등학교 입시 참고서를 다 봤습니다. 끝내고, 그 다음에 2학년 겨울 방학부터는 헤럴드지는 거의 끝냈고, 헤럴드지도 1년을 거의 매일매일 읽으니까 이제는 몇 사람이 돌아가면서 쓴다는 거까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12월부터 작심을 하고 뉴스위크, 타임즈 이런 것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한창 영어에 불이 붙어서 사전 하나만 있으면 어디 가든지 뭐든 할 수 있겠다고 자신만만 했을 때, 마침 그 버튼 안틀러스의 책이, 원서가 손에 들어온 거였습니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괴짜였습니다. 공부는 안하고 맨 뒤에 앉아서 사전 펴놓고 아무 쓸데 없는 것만…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행복의 정복자 이런 책들을 단어까지 다 찾아가면서 읽었습니다. 너 뭐하냐 그러면 버튼 안틀러스 그러면서 읽었습니다. 섬머 세트 모험의 써닝 업이라는 책을 다 읽는 정도가 아니라, 노트를 갖다놓고 번역을 해서 나중에 번역판 나오면 비교해 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읽으면서 보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은 너무 자기 밖에 몰라. 이 사람은 인류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을, 그렇게 해서 이세상에 있는 세계인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뭔가 해결이 있나 했는데, 마지막까지 읽는 동안 의심이 생긴게 뭐냐면,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결국은 이 지구는 멸망하고 말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뭐냐 결국은.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도 또 아니었습니다.
한때에 그것보다 약간 깊이 빠졌던 사람이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였습니다. 거기에 빠져서 거의 모든 작품을 섭렵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데미안이라는 작품의 서문에 뭐라고 했냐면 이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 사람만 있어도 좋겠다고 했을 때, 내가 그 밑에 썼습니다. 그 몇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나다. 그렇게 해서 아주 깊이 매료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사상은 기독교와 불교가 만나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결국 회심치 못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인도에 가서 8년을 삽니다. 그러다가 동서양 사상이 섞이게 됩니다. 어쨌든 읽으면서 어쩌면 인간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해서 푹 빠졌습니다. 그런데 역시 마찬가지는 뭐냐면 지성과 사랑이 합일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안식이 온다는 겁니다. 그게 사실은 불교사상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르치스 운트 골트문트에 보면 나르치스가 결국은 골트문트의 품안에 안겨서 잠이 드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럼 예지가 뭐냐 이겁니다. 이 사람은 찾았다고 하는데, 나는 뭐냐. 좋다, 그러면 내가 그 예지를 만나면 내가 이 사람의 품에서 잠들겠다. 그런데 그게 뭐냐? 결국은 물음표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도스토예프스키에 푹 빠졌습니다. 그것은 이것보다 훨씬 현실적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고뇌하는 것이 너무나 현실적이었습니다.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구원의 서광이 비쳤습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를 확실히 몰랐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면서 방황을 막 하다가 결정적으로 톨스토이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성경을 읽을 때 불러다가 친절하게 성경을 가르쳐 줬으면 그렇게 빙빙 안 돌았을 겁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작품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애에서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안식을 느껴보기에는 처음이었습니다. 그게 벌써 제가 기독교 체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말 안식을 느끼면서 마지막에 그 레프리오도프가 그 여자를 찾아가는 장면을 읽다가 벌떡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맞아! 도덕이 없는 사랑이 무슨 미친듯한 사랑이냐! 그러다가 톨스토이의 작품을 하나하나 읽어가는 가운데 결정적으로, "아, 나는 이제 기독교로 돌아가야 된다." 하게 한 책이 인생론이었습니다.
지금 그것을 보라고 하면 유치하다고 할 것입니다. 제가 그 인생론을 세 권을 샀고 세 번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 결국은 나한테 분명하게 가르쳐준 것은 선과 악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인간으로 왜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던 모든 문제와 숙제들이 선악에 대한 문제들로 관련된다는 것이 거기에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얘기하는 선악이라는 사상은 내가 여러분에게 설교를 통해서 가르쳐주는 그런 분명한 기독교적 선악사상은 아닙니다. 인류의 보편선을 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편선을 설정하고 나아가는데, 결국은 공리주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도덕주의 속에서 깊은 안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이 나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가도록 진지하게 생각하는 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게 참 이상한 게, 회심을 하지 않으니까 성경에 온갖 치사한 핑계로 꽉 차 있었습니다. 보지않는 자는 복이 있다. 이거는 못 보여줘서 그런거 아니에요? 보여주고 믿을래 말래 하지, 보지않는 자는 복이 있다. 보이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요, 보이는 것들은 있는 것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 하나님을 믿음으로 알게 될지니. 이게, 안보여 주겠으면 말지.
그런 속에서 방황을 하다가 아주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고민을 계속하는데, 사실 누구 하나 나한테 와서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혼자서 막 고민을 하고, 옆에 있는 친구 하나가 나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줬습니다. 막 고민을 하다가 나중에 어떤 마음이 생기냐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위급할 때는 하나님을 불러야 하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뜻을 선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된다는 것이 다 거짓말이라도 난 그걸 믿고서라도 좀 편안히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난 그게 정상적인 믿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예쁜 절실한 의뢰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도를 한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길을 보여 주십시오.' 그래도 '살아계신 하나님' 이런 말은 안 썼어요. 치사해서요. '절대자시요, 만약에 당신이 계시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 지를 보여주십시오! 내가 신뢰할 수 있다면, 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에 발을 들여놓는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모두가 나처럼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는 자체가 왜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이런 진지한 문제와 고민 속에서 교회를 찾게 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친구 따라 나오기도 하고, 아니면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 어디 한번 그 교회 가보면 물도 괜찮다는데, 어떻게 한 번 가면 길이 없을까? 뭐 이런 경우도 있고, 벼라 별 생각을 하면서 다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확실한 것은 그 모든 것들 중에 하나도 의미없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힘들어질 때마다 내가 생각하는 게 예수님 안 믿었을 때에 내가 그렇게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던 때를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기가 아무리 힘들어도 거기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해요. 그거는 목표가 있고 가야 된다는 비젼은 있쟎아요. 그거는 언제 끝날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철학자라는 사람들도 마지막에 신뢰할 수 없는 죽음으로 다 죽습니다. 성병으로 죽는 철학자, 자살한 철학자, 에이즈에 걸려서 사망하는 철학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뭔가 인생에 있어서 참된 것이 무엇인지 찾은 사람이라면 나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 사람처럼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뢰성이 안 갔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참된 길을 찾아보려고 몸부림을 쳤는데, 길이 없었을까? 성경에는 답이 나와 있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다음에 하나님이 동산 밖으로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동산을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신 것입니다. 칼입니다, 칼. 그래서 히브리어 사전을 보면 화염검이 아니라, 검화염으로 나옵니다. 칼에서 번쩍이는 신비로운 불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뭘 의미하냐면, 접근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인간이 무엇인가 자력으로 인간이 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이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그렇게 찾아 보려고 몸부림 치는 것입니다. 저 아마 주님 못 만났으면 머리 깎고 중 되었을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도 많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지고 볶고, 대판거리 싸우고, 자식들 때문에 속 끓이고, 한 사람이 죽으면 인생 전체가 뒤흔들려 통곡하고, 상실감에 괴로워하고, 인간이 이러면서 사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을 그때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찾으려고 애써도 그 길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루도는 화염검을 두어서 그 생명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의 죄 때문에 그렇다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죄라는 개념 자체가 오늘날의 우리 개념으로 보면,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조차 죄에 대한 개념을 아주 흐리게 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들 그 속에는 모두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자연적인 목적과 도덕적인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자연적인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자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니까 이런 관계가 계속 유지되어야만 밤과 낮이 오고, 계절과 계절이 순환하면서 곡식들이 열매를 맺고, 그래야만 인간들이 그걸 먹고 살 거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자연적인 목적입니다. 그것에서 질서있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코스모스가 바로 질서있게 움직인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도덕적인 목적입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것이나 바깥에서 사용하는 것이나 거의 비슷합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 존재 바깥에 있는 어떤 기준입니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그쪽으로 향하여 가려고 하는 영혼의 힘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은 그 도가 분명히 있고, 도덕으로 가려고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도덕적인 사람입니다. 부도덕한 사람은 그 '도'가 아예 없거나, '도'는 있는데 아예 힘이 모자라서 말로는 그러면서 속으로는 딴짓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고 인간을 그 창조의 목적대로 지으셨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자꾸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완전히 원수를 맺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천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처음 사랑이 타락하면서, 본성적으로 계속 대물림이 되어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질적인 생활 속에서 전철을 타고 쭉 갈 때에는 내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끽 하고 서면 뒷사람이 달려가서 앞사람에게 부딪히고 미끄러지고 생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얼마나 큰 힘으로 앞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똑같이 우리들이 우리 자신은 모르지만 그런 강력한 하나님을 거스르는 관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뭘 보면 알 수 있냐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오늘이라도 해보려고 결심을 해보세요. 그리고 또 하나는 여러분들이 끌리고 좋아하는 일을 해 보려고 해보세요. 여러분이 끌리고 좋아하는 일은 노력을 안 해도 저절로 되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안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예수 믿지만 술을 되게 좋아한다고 합시다. 이건 여러분이 노력 안 해도 벌써 움직입니다. 좋은 환경만 만나면. 그런데 내일 새벽기도 나와야지 하고 결심해 보세요, 되나.
인간이 이렇게 죄의 관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죄의 관성을 가지고 태어나니까, 하나님이 보기에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고, 인간은 거기를 향해서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모든 사물들의 질서를 그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마음을 돌이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다스리려는 통치의 방향과 안 맞을 거 아닙니까? 안 맞으니까 하나님이 뭔가를 이끌려고 하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이 사람과는 안 맞으니까 자꾸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피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뭐냐면,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장 안타까운 게 뭐냐면 진지함이 사라진 것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 속에서 진지함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게 현대 사상의 큰 문제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을 하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회심치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원수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정을 하든지 안 하든지 여러분 몸 속에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속에. 하나님이 정말 변함없이 신실하게 당신이 창조하신 한쪽 방향으로만 우리 인생을 이끄시려고 애를 쓰십니다. 그리고 열심을 내십니다. 그럴수록 우리들은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이 질서 속에서 자기는 계속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하기 위해서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들이 자신이 사는 삶과는 반대의 길인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막 괴로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서 원수 된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그런 원수 된 상태에서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모든 것들이 자기의 틀 속에 굳어져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이유가, 어렸을 때는 엄마 무릎에 놓고 가르쳐 주면 다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처럼 나이를 먹으면 개똥철학들이 머리 속에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이상한 사상들을 형성합니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되고 가려진 재료들로 쌓아 올려지면 문제가 없는데, 자기 멋대로 건축자재를 가지고 쌓듯이 사상을 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 속에서 사상적으로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너로 하여금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고… 가르쳐도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성과 감정, 의지, 생각, 이 모든 세계가 전부 다 뿌리는 영혼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라는 뿌리에서 지성, 감정, 의지, 생각, 마음, 이 모든 것이 다 나온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어두움 속에 있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어두운 영혼의 상태는 결국은 우리에게 생각의 무지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명백한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는 이런 명백한 것에 대해서도 인정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더 모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 같은 것에 대해서는 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무지해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상태를 변화되지 않은 가운데 계속 있으면서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막 얘기한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스며들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알고 싶다는 그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듣는 것과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뉴스를 그렇게 오래해도 낚시꾼들의 귀에 들리는 것은 내일 충청도 지역에 비가 온다는 것 뿐입니다. 왜냐면 그리로 낚시하러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실험을 하나 해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해서는 짧게만 해도 엄청나게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지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이키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굉장히 빠르게 변화됩니다. 그런데 가장 절망적인게 뭐냐면, 생각이 없이 교회에 열심히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진지함 없이는 진리의 세계는 영원히 닫힌 세계입니다. 지성적인 진지함이 없이는 모든 진리의 세계는 다 닫혀 있는 것입니다. 진지해져야 됩니다. 그렇게 영혼이 어둡고 캄캄한 상태에 있으니까 그 속에서 생기는 인간의 모든 행동과 정서와 생각하는 것들이 전부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반대하는 마음들을 다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입장에서 보시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인간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들겠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매우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내가 대등한 관계에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거절을 당했거나,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거절을 당했으면 그것으로 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하찮은 사람에게 거절을 당했으면 이건 엄청난 모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인간에게, "너는 예수를 믿어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내가 너에게 주마." 이렇게 보여주시는데 사람들이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아주 공개적인 모독입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나한테 달린 문제가 아니라, 회심치 않고 주님을 믿는 진지한 생각을 갖지 않는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요, 하나님께 대한 아주 심한 부끄러움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당신을 믿으라고 하시지 않고, 당신이 행한 어떤 것을 기초로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어떤 것이 무엇이냐면,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Jesus died for us.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죽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위한 죽음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은 몇 가지를 내포하는데, 첫째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상태에서 태어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오가는 악한 생각을 하며 계속 죄를 짓고 있습니다. 마치 더러운 쓰레기통에서 악취가 계속 나듯이, 이 속에서 솟아나는 계속되는 더러움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존재의 사라짐입니다. 곧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고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형 당한 사람보다 열 배 더 죄를 지은 놈이 있습니다. 뭘 판결해야 하겠습니까? 곱빼기 사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한 번 죽으면 끝입니다. 그 이상을 못됩니다. 그게 사람으로서 지불할 수 있는 최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죄를 지었는데 인간들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구원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자기의 형상을 따라 만든 피조물이 인간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자연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여도.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천하를 다 주면 뭐하냐? 한 생명만도 못하다. 천하에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Be there! 있어라! 하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45분 27초) …. 영원히 그 사람 속에 깃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인간을 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얘기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생 동안을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 지를 보여 주시고,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 믿음입니다. '아! 예수님이 바로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신 죽으셨다. 나는 아무리 하나님 앞에 죄지은 것을 후회해도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가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 나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다. 그래서 결국은 십자가에서 모두 피 흘려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두 번째는 영어의 'for' 자체가 '위하여' 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내가 유익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큰 징벌을 당하셔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옛날에 조신시대만 해도 곤장을 맞을 일이 있으면, 종을 대신 내어 보내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종을 물볼기를 사정없이 쳐서 다 터져서 피가 낭자하게 되면 그 덕에 진짜 죄를 지은 양반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형벌은 예수님이 당하셨지만 나는 유익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유익은 하나님과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까 어린 시절에 그렇게 고뇌했던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중에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갖고 나서 그게 왜 그렇게 고통스런 시기를 지났는가? 사람들은 다 나를 보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내가 몇 사람한테 물어보고 그랬거든요, 그 시절에. 그러면 선생님한테 물어봐도 엉뚱한 얘기만 해요. 너는 애가 유별나다든지, 철학과 갔으면 좋겠다든지.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가정에 문제가 많은 거 같다든지. 결손가정 취급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이해를 못했습니다. 결국은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대표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표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모두 당신의 품 안에 안으시고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때 왜 그렇게 괴로웠나 하고 생각해 봤더니, 내가 나중에 기독교 신앙을 갖고 깨달은 것인데 그게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 하나님과 영적인 연결이 이어졌을 때 요즘 같으면 기도하면 되지 않습니까? "내 마음에 번민이 많이 생깁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설교 한 편 듣고 나면 다 털고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거는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도대체 이 인간들은 마치 길이 있는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한참을 써내려 가지만 마지막에 자기도 비참하게 죽더라, 자기도 모르겠다더라. 이런 인간들이 다 있습니까? 그리고 깨달은 게 있다면, 아무도 자기들이 중간에서 잘못 가리킨 것에 대해서 책임을 안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결국은 하님과의 연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뭔가 필요해서 간절히 기도하면 무엇인가를 주시지 않습니까? 주시는 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다시 태어나고 깨어나고, 이런 경험을 통해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그런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는 이 길이 바로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회심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거스리며 살아왔던 모든 길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정직하게 뉘우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가 아니면 두루 도는 화염검에 의해서 차단된 하나님과의 생명나무의 길은 지나 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두루도는 화염검을 걷고 우리로 하여금 보좌에 나아가 그 생명에 다시 연결이 되어서 그 생명나무의 힘으로 살아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고뇌하고 괴로웠을 때 우리 집이 가난했느냐? 물론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굶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됐지 않습니까? 그 시절에 뭐가 그렇게 많이 필요해요. 나는 그 당시에 욕심이 별로 없는 청소년이었고, 지금도 그래요. 먹고 살면 됐지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하늘의 자원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그것에 대해서 나에게 극복하며 살아가는 제 3의 힘이 내 영혼에 필요했는데, 그것들이 아무것도 주지 못했습니다. 철학이, 문학이, 사상이 잠시 박수치게 만들고 입에 거품물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식자처럼 만들어주는 효과는 있고 한 잔 술 마시면서 너덜거릴 때 사람들이 볼 때 지성인의 고뇌라고 볼 수 있는 그 무슨 분위기는 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이게 무슨 얼어죽을 개뼈다귀냔 말입니까? 이게 실제 다 사치스런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치열한 것이고, 죽고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데, 농을 하고 있을 때냐 하는 것입니다. 살다가 보니까 다 여유 속에서 오는 것이지, 진짜 죽음과 벼랑 사이에 오고 가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다 사치입니다. 식자처럼 보이면 어떻다는 것입니까, 내가? 그런거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 왜 사느냐 이겁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인간으로 사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고, 나에게 행복이 될 수 있겠느냐 그것입니다. 무엇이냐 이겁니다.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이겁니다. 어느 한 순간에 예술, 음악, 문학 이러한 것들이 한 순간에 사치품처럼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인데, 그 관계를 끊고 살아가는데서 오는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생명의 통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사람 있습니다. 회심했지만 은혜가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이 통로가 막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믿는 사람으로서 매우 행복한 삶을 못사는 것입니다. 자원이 끊어진 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결국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이 자력으로 자기의 비참함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오늘날에도 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이 사회의 화려한 경력을 집어치우고 티벳으로 떠나고, 다른 종교로 귀의하고, 인생의 이런 길들로 떠나면서 종교에 귀의합니다. 결국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한다면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속에서 자원을 찾기 위해서 인간이 얼마나 애쓰고 몸부림 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리처드 기어라는 유명한 배우가 수년 안에 티벳의 라마 불교에 귀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화려한 은막 속에서 엄청난 돈을 벌고 살고 있어도,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못 느끼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발달한 물질문명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점점 고통받고 소외당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행하신 일은 바로 자기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의 눈물 콧물이 이 세상에 떨어진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 생명적인 관계가 완전히 떨어졌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는 인간들인데, 그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먼저 행동하시지 않으면 도저히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단번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게 하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33년 동안을 예수님을 이 땅에 살아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나서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행복했던 사나이라고 묘사했지요? 예수님이 과연 행복하게 할만한 무엇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아내도 없고, 자녀도 없었습니다. 물질도 없으시고, 장수하며 긴 인생을 사신 분도 아니었습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신 분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시고, 목수의 집안에서 가난한 아들로 태어나셔서 일평생을 궁핍과 비참함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못 가지고 있었던 것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헐벗고 굶주린 생애를 사셨지만,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과의 완벽한 관계 속에서 하늘의 자원들이 한없이 공급되는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충만한 진리요, 충만한 은혜라고 불리워집니다. 그런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신 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를 철저히 낮추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멸시와 욕과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신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모든 인생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풀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그 분이 바로 두루 도는 화염검에 의해서 차단된 그 생명나무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서 왜 우리의 생명이 끊어졌는지 발견하고 동시에 그분의 부활 안에서, 죽음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이어지는 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부활과 죽으심을 동시에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 모든 사람에게 원하시는 모든 것은 이것입니다. 이제껏 하나님 앞에 제멋대로 살던 모든 삶과 생각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리고 자기의 지난 모든 죄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 앞에 그의 죽으심이 나의 죄 때문이었다고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그 죄를 미워하기까지 진실하게 회개하고 참회하고 참회하여야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찬송)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죄가 따라서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보면 그 죄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의 우리의 죄에 대한 정당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한 깊고 모진 고난은 우리의 죄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무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서 당하신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 살아있는 사람이 지불할 수 있는 최고의 치욕을 다 겪으시면서 털 깎는 자 앞에서 잔잔한 양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 자체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시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이며, 바로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 죽으시는 그 속에서 예전의 나처럼 방황하는 모든 인간의 해결의 길로 하나님이 함께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 회심하면서 그런 생각이 밀려 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어린 시절에 그렇게 치열하도록 고통하고 그렇게 괴로워하는 고통을, 그렇게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인생의 무게를 못 이겨하던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나의 죄 때문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런 죄의 값을 치르며 사는 삶을 불쌍히 보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그 죄의 값을 지불하고 안식의 길을 여셨음에도 내가 어리석게도 계속해서 죽음의 길에 서 있었구나.'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이 변해서 그 십자가를 붙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하나님! 난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그런데 내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서 일평생 주님을 대항하며 사는 이 쓰레기같은 인간을 위해서 주님의 외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이, 저는 가정에 태어나면서 이 세상을 살면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계속 사랑해 주신다면 내가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찬송)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않네.
제가 그렇게 감수성이 예민했었습니다. 상처를 얼마나 많이 받았던지…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족들 얘기만 나오면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확 밀려와서 하나님이 이 쓰레기같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예수 믿었고 3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정말, 예수 믿지 않았을 때의 그 고통, 그것과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극심한 늪에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너무너무 사랑하던 사람들을 잃어버릴 때도 있었고, 그때도 똑같이 안 믿는 사람처럼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려던 인생의 길에 좌절된 적도 있었습니다. 회심하기 전과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그때는 자원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 난관을 만나면 내가 포기하기 전까지 인생 전체가 다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살면서 너무너무 사랑하던 사람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사랑했지만 다른 이유로 공간을 함께 할 수 없었던 사람들, 죽음이라는 강 저편으로 너무너무 사랑하는데도 떠나 보내야 할 때 인간이 거기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절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전 같으면 그 이별의 나루 저편에서 펑펑 울다가 술이나 퍼 마시며 세상을 원망했을 텐데, 이제는 이 세상에서의 슬픔을 저 하늘에서의 소망으로 바꾸는, 승화시키는 비결들을 터득했습니다. 사랑했던 사람들 멀리 떠나 보내고, 혹은 공간을 함께 할 수 없거나 혹은 죽음이라는 강가에 건네 보내고 나는 건너 갈 수 없었을 때, 예수 믿었을 때나 안 믿었을 때나 똑같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 가지 차이는 그 나루터에서 슬피 울고 낙심하는 대신에 그 나루터에서 깊이 기도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찬송) 잠시 머물 이 세상 헛된 것 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그 마음이 생기면서 오히려 보이는 이 세상에서 이별의 고통을 맛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렇구나, 나는 본래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오히려 이 나라에 속한 사람이 아니지.' 그러면서 인생이 타향살이에 속한다는 지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께서 많은 물질의 복을 주셨습니다. 지위의 복도 주셨습니다. 회심하기 전에는 유명한 수필가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수필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책을 써서 백 만부 이상 팔리는 밀리온 셀러의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문과 교수가 되고 싶었는데, 생명없는 영문보다는 생명있는 신앙을 가르치는 교수의 길도 걸어가 보았습니다. 해보고 싶엇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해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더 기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예전에는 인생길을 혼자 걸었는데,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아플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옆에서 잠이 들면 혼자서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제 가슴에 손을 얹고 토닥토닥 거리면서 '하나님, 제가 많이 아프거든요. 저에게 힘을 주세요!' 제가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합니다. '주님, 오늘 제가 외롭거든요. 오늘 저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옵소서.'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진리가 없어서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를 때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세요? 술을 퍼먹고 이튿날 아침에 머리가 터질 듯 아픈 고통 속에서 친구네 집 곁방에서 눈을 뜨는 비참함을 여러분들 느껴본 적 있습니까? 그리고 무섭도록 가슴시리게 다가오는 매일매일의 현실들을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외롭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인생을 길을 평탄하고, 행복하고 그리고 즐겁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 건 다 원하는 삶이 아닙니다. 문제는 의미입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을 살고, 치뤄야 하는 고통을 치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오히려 인간으로서 행복입니다. 좋은 날만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고 그렇길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것을 붙들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찬송)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사람들이 혼자서 얼마나 외로운지 아시죠? 그 치열한 소외감, 혼자라는 생각이 드는 아침, 고난과 시련을 만났을 때 그 막막함, 아무도 없고 혼자라는 느낌, 이제는 없습니다. 회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확신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슴에 막 밀려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널 사랑하신다. 그래도 사랑하신다. 심지어는 내 속에 하나님을 거스리며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어도 너의 돌이키는 때를 기다리시며 하나님은 널 사랑하신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 마음에는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의 영혼을 향한 눈물이 가득합니다.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왜 망설입니까? 여러분, 주일학교 학생이 쓴 글을 읽어보셨지요? 설교가 무슨 말인지 계속 몰라서 이 자리에서 '하나님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전 뭐가 뭔지 모르지만, 회심해야 될 거 같아요. 절 좀 도와주세요, 절 좀 만나주세요.' 고사리 같은 손을 모우고 애들이 기도할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간절함이 없는 것, 만나야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 주님 앞에 매어 달리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회심하고 나면, 여러분들에게 행운이 쏟아진다고 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회심은 우리로 하여금 예전에는 회심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해 줍니다. 어떤 인간으로부터 받는 고통보다도 구김이 없는 더 순결한 사랑, 아무리 행복해도 가책이 없고 아무리 즐겨도 뉘우치거나 후회할 일이 없는 그러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목회자로서 나에게 소원이 있다면, 이 집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과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눈보라치는 북풍한서의 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양떼들이 몸을 함께 기대고 체온을 비비며 추위를 피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고난 당하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함께 양떼들처럼 서로 기대어 사는 그러한 삶을 내가 보는 것, 그래서 그 속에서 치열하도록 진리를 알아가고 그에 합당하도록 살아가고,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인생을 지난날 나처럼 어두운 속에서 홀로 버려진 것처럼 흐느끼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바로 그들이 흘리는 눈물을 위해서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생명과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날마다 하늘나라에 소망이 가득 찬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좋으신 주님을 더 이상 버려두지 말고,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시는 그 주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영접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