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주시는 예수님
2023년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 | 2023년 01월 16일 – 01월 18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3년 05월 31일
목 차
1. 중풍병자를 고치심(마 8:5-13) 2023.01.16.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3
2. 혈루병자를 고치심(막 5:25-34) 2023.01.17.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8
3. 나병환자를 고치신 하나님(눅 5:12-15) 2023.01.18.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3
고쳐주시는 예수님1 (2023.01.16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중풍병자를 고치심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마 8:5-13)
녹취자 : 김세나
예수님이 병자를 고친 기록이 여기 한 군데만 나오는 것이 아닌데, 이 사건은 매우 특별합니다. 어떤 점에서 특별한가 하면, 이렇게 예수님께 간청하였을 때 예수님께 응답을 받았던 이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의 군인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방인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이 사람의 믿음을 얼마나 높이 인정하셨는가 하면, 여태껏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났는데 나는 이 정도의 믿음을 가졌던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말씀하시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나중에라도 제대로 믿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더 하나님을 잘 믿게 될 것이라는 한 징표라고까지 말씀하실 정도였으니까 이 사건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병 고침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진 사건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높이 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주님이 매우 훌륭하게 보셨습니다. 알다시피 가버나움에 예수님이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군병 한 100명쯤 거느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지위가 어느 정도 될까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 당시 로마제국 군대의 편제가 사단이 한 6천 명쯤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생각해 보면, 군대 다녀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단이 있고, 연대가 있고, 대대가 있고, 중대가 있고, 소대가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중대장쯤 되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보는 것입니다. 로마의 하급 장교쯤 되겠습니다. 그 당시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였고, 로마의 지배력이 군인을 통해 유지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식민지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 같은 고관대작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 많은 병든 사람들이 나와서 고쳐주심을 바랬던 적은 있는데, 이 경우는 특이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으려는 자, 따르려는 자, 병고침을 받으려고 하는 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니까 쉽지 않았을 텐데 아마도 로마의 백부장이라는 신분도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오게 되어 간청하는데, 자기 병을 고치러 온 것이 아니라,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하인이 자기 집에 개인적으로 수족을 드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런 하인인데 중풍병에 걸려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한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리며, 고쳐주시길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긍휼이 넘치는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내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집에 누워 있습니다.” 움직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마치 자식을 보는 부모처럼 그의 질병의 상태까지 모두 이야기였습니다. 중풍 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중풍 병은 뇌의 기능에 문제가 생겨서 운동기능에 이상이 와서 온몸에 마비가 오는 것이 바로 중풍입니다. 우리가 “풍을 맞았다”는 표현을 합니다. 갑자기 마비가 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오면 거의 전신을 못 움직일 정도로 됩니다. 이 하인이 자유롭게 자기를 섬기면서 살던 사람이 이렇게 부자유하게 집에 누워서 아주 몹시 괴로워하던 사람을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위해 왔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그까짓 하인인데 그 하인에 대하여서 얼마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으면 누구를 시킨 것도 아니고 자신이 직접 와서 예수께 자기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 백부장의 믿음을 훌륭하게 보신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향한 따뜻한 사랑이 동반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참다운 믿음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언제나 사랑을 동반합니다. 사랑이 믿음을 동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나 참된 믿음이라면 반드시 사람을 향한 사랑이 동반됩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매일 주님께 나와 간구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을 채웁니까? 이 사람이 예수께 나와서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그가 너무 가엾고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하인이 그의 집에 매우 충성스러운 종이었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씩씩하게 자기의 능력을 따라서 열심히 일하던 이 사람이 중풍에 걸려 집에 누워 기동도 하지 못한 채 몹시 괴로워하였으니, 그 집안 식구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처지가 너무 가엾어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당시 있었던 의학적인 방법으로는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 믿음은 사람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음속에 더 많은 사람을 따뜻하게 품고 예수께 나아가는 그러한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예수께 인정받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그렇게 간청하니,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가자.”하였더니 백부장이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가 뭐라 했는가 하면, 이 하인이 자기 집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기를 “그러지 마십시오.” 병을 고쳐 달라고 왔으니,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할 텐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가 뭐냐고 했더니 “주님이 나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부들이 집에 가겠다고 할 때, “지금은 오지 마십시오. 당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청소를 안 해서 개꼴이기 때문에 차마 모시기 민망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같이 그렇게 높고 고귀하신 분이 자기같이 사는 누추한 곳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그렇게까지 미천하게 수고하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 사람은 하인의 병 고칠 욕심으로 예수를 따라온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에 대한 상당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이 아주 탁월하신 분이시고, 자신의 집에 들어오셔야 할 정도의 분이 아니라고 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무 감탄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를 낮추고 예수를 높인 것만 예수님의 감탄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오지 마시고, 그냥 말씀만 해 주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그것도 자기 집에 가서 집 앞에서 말씀해 달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여기에서 집까지 거리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께는 거리가 아무 상관 없으니까, 여기에서 말씀만 하시면 저기서 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이러한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렇게 쉬운 믿음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아픕니다. 병원에 입원해야 할 텐데, 목숨이 오가는 수술입니다. 그때 목회자가 가서 그 현장에서 기도해 주기를 원하지, “하나님은 어디서나 계신 하나님이신데, 어렵게 차를 몰고 강남까지 오지 마십시오. 그 시간에 거기에서 기도해 주시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가질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고치시는 그 능력은 공간을 초월한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력했는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를 드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백부장인데, 제 휘하에 군사가 100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너는 저기에 갔다 와라. 너는 저기에서 저 일을 처리하라.’ 말로만 하면 그들이 모두 가서 다 자기 할 일을 완벽하게 해냅니다. 그리고 저도 남의 수하에 있습니다.” 자기 밑에 오십부장도 있고, 십부장도 있었지만 위에는 천부장도 만부장도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들의 명령이 떨어지면 자기는 신속하게 완벽하게 그 일을 성심껏 해내는 것이 로마 군인의 질서입니다. 이 사람이 보기에 예수님은 모든 영계와 자연의 세계를 지배하고 계시는 통치주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만약에 병이 나으라고 명령하면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예수님의 그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수하에 있는 사람, 자기가 수하에 있다는 것, 자기 수하에 군사들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주님이 말씀하시면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 일상의 군대생활의 경험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놀라운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 주셨는가 하면, 이 믿음이 이스라엘 중에서도 아무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말씀하실 때 청중이 누구였는가 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냥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일반적으로 따라오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고 난 다음에는 크게 세 그룹이 예수님을 에워쌌습니다. 첫째는 열두 제자의 그룹이었고, 그 다음에 그 주위에 70인의 전도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깥으로는 생업을 포기하고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어디로 이동하면 그 소식을 듣고 모이는 청중들이었습니다. 크게 네 그룹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을 따라서 움직이는 그 그룹들이 세 그룹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 멤버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 사람들과도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끊임없이 따라다니면서 전도사역을 위해 헌신하고 있지만, 이 사람의 믿음이 더 훌륭하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백부장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마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에 관해서 말하자면 로마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 먼저 보냄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방인으로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웠겠습니까.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이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야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복음의 소식들을 끊임없이 들렸을 것이고 단지 기적을 일으킨다는 그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분이 전파하시는 천국복음에 관해 귀를 기울이면서 이 사람은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자, 보십시오. 사람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 백부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믿는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의 간청을 예수님이 어떻게 안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굳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그를 통하여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 자기를 믿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 주님이 이 믿음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 주님을 의지하는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자랄 것이 없습니다. 넘치도록 힘을 주셔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그를 보고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이 하인이 예수께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하인의 믿음이 아니라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면서 고쳐주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화) 제가 21살에 회심을 하고 작은 개척교회에 나갔습니다. 한 30명 되는 교회였습니다. 목사님이 어느 날 난감해하셨습니다. 교인이 많아도 그렇겠지만, 몇 명 안 되고 연세도 50대 중반이 넘으셔서 평생 노동운동 하다가 교회를 개척했는데, 설교도 젊은이들처럼 유창하신 것도 아니었고, 교인이 얼마나 모이겠습니까. 교인 하나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거의 울면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오셔서 기도 좀 해 주세요. 큰일 났습니다.” “누가 아픕니까?” 가방을 싸면서 전화를 받는데, 돼지가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에 돼지를 몇 마리 기르는데 집과 돼지우리가 2m 더 안 떨어져 있었습니다. 발판에 집을 지어놓고 돼지를 기르는데 며느리가 교회 나가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눈물도 많이 흘리고 그렇게 은혜받고 교회도 열심히 섬기는데 문제는 시어머니였습니다. 시어머니가 독살스럽게 핍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워낙 믿음이 좋으니까, 요즘 같았으면 다 때려치웠을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시어머니에게 꼼짝도 못하던 때였습니다. 신랑은 어중간하고 교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며느리가 핍박을 다 견디면서 살아가는데, 돼지가 새끼를 가졌는데 시름시름 병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그것을 며느리 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며느리가 예수를 믿어서 재수가 없어서 돼지가 새끼를 낳아야 하는데 시름시름 앓고 있으니 돼지가 죽으면 며느리 책임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께서 가셔서 돼지에 손을 얹고 열렬히 안수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돼지가 나았습니다. 제가 옆에서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볼 때는 웃긴다고 요즘 같았으면 돼지가 병들었으니 안수해달라는 교인도 없지만,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가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돼지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 돼지 때문에 핍박을 받고 믿음을 지키려 하는 그 자매의 눈물이 가엾어서 가서 기도해 주었는데, 그것이 돼지의 믿음으로 돼지가 나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자매의 간절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돼지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응답의 역사는 이것입니다. 본인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도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 놀랍게 은혜의 역사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입니다.
(예화) 아들이 특전사를 들어갔는데, 맨날 공익근무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더니 마음이 바뀌어서 특전사를 갔습니다. 그 부대가 얼마나 위험합니까. 매일 간절히 기도를 하였는데 나중에 휴가 나와서 간증을 하는데 미군들과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낙하 훈련을 실제로 했는데 내려오던 미군과 낙하산이 엉켜서 둘 다 떨어져서 죽을 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자기도 그 속에서 ‘여기에서 떨어져 죽는구나.’ 하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였는데, 기적적으로 바람이 불면서 낙하산이 풀어져서 진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부모가 매일 기도하는데,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하나님께서 그 위기에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받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기도를 하는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누군가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너무 예수님이 기쁨 충만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예수님은 그 중풍 병 걸린 하인을 만나지도 않은 채 기도하였고, 그렇게 선언하시자 즉시 하인이 나았습니다. 당연히 백부장이 돌아가 보니 하인이 멀쩡했을 것이고, 언제 멀쩡했는가 시간을 돌아보니까 예수님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는 그 순간에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무엇을 기뻐하는지 여러분에게 보이셨습니다. 사람을 향한 따뜻한 사랑, 예수께 대한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의 기도를 지금도 들어주셔서 가장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생사 간에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여러분이 된다면 인생의 수많은 난관들을 은총의 기회로 바꾸며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기는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혈루병자를 고치심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여자가 자기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25-34)
녹취자 : 김세나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매우 특이한 병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해 온 여자였습니다. 혈루증은 부인병의 일종일 것이라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때의 병에 대한 명칭과 지금 의학적인 분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완벽하게 추적할 수 없겠지만, 여자가 몸에서 계속 하혈을 하는 증세입니다. 이것이 열두 해 동안 계속되었다고 했으니 이 여자의 삶이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졌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 사람이 결혼한 여자인지, 아니면 혼자 사는 사람인지 아이가 몇 명인지 어느 동네 사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어쨌든 부인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부인병은 대부분 결혼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병이 아니겠습니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가정을 해 보면 몇 해 어떻게 살다가 혈루증이 발병되어서 12년 동안 끊임없이 하혈을 하면서 살아왔으니 이 여자의 삶도 혈루증과 함께 흘러내렸던 것입니다. 그 증상을 고치기 위해 의사를 찾았습니다. 정말 능력이 있다고 하는 의사를 다 수소문을 해서 돌아다녔기 때문에 많은 의사를 만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많은 의사를 만나서 많은 치료를 받았더라고 되어 있지 않고,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 그리고 가진 것까지도 모두 허비하게 되었으되 효염이 없고 도리어 중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사중의 어려움이 겹쳤습니다. 많은 의사를 만났는데 많은 괴로움을 겪었고, 가진 재산을 다 허비하게 되었고, 아무 효염이 없고, 오히려 증세가 심각해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절망하기에 충분하겠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까지 온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한 많은 병자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친절히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사례도 받지 않고 고쳐 주시는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눈먼 자가 눈을 뜬다고 하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더 이상 의사를 찾아갈 수 있는 돈도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의사를 믿고 맡겨 보았지만 증세는 점점 위중해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이 소식은 이 여자에게 마지막 희망인 것 같은 그러한 암시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접근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리 가운데 끼어서 뒤로 들어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시니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뵙고 무엇인가 치료를 받던지 대화를 하려고 했으니 뒤에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자신의 질병에서 구원을 얻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이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비참한 질병의 상태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 한분이라는 생각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렇게 복잡하게 이 구원이 무슨 종류의 구원인가, 영적인 구원인가 육적인 구원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자신은 지금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고, 마지막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만지기만 해도,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일종의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만나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는 형통함을 사용하시기보다는 오히려 난관을 사용하셔서 당신을 만날 기회를 갖게 하십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다 보면 마치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갈 길을 모두 막으시고 막다른 길로 나를 몰아넣으신 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렇게 결국 우리를 어느 상황으로 몰아가셔서 거기에서 주님을 찾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이 분명히 저 사람을 그렇게 인도하셔서 항복을 받아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여기에서 무릎을 꿇고 주 앞에 용서를 빌고 살려달라고 믿음으로 매달리면 반드시 기적을 볼 것이라고 하는 시점에서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불행이 막을 수 없이 더 크게 진전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불행을 해결하고자 몸부림쳤지만 한계를 느꼈고, 결국 하나님 이외에 자신을 고치실 분이 없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혈루의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혈루증이 없었던 기억도 있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기억도 있으니 이렇게 혈루의 근원이 마르는 것을 이 여인을 느꼈던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혈루가 그친 것이 아니라 근원까지 말라서 자신의 병이 씻은 듯 나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 여인이 인파를 헤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댄 그 간절한 소원이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반전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무리 가운데서 뒤로 돌이키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이 생각하기에는 갑갑한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가고 있기 때문에 누가 손을 대었는지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서로 밀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면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이것은 공손한 어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참 답답하십니다. 상황을 보십시오. 한두 사람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에워싸고 밀치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는데 누가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찾아내겠습니까?” 이런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책임을 묻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으로 그 옷에 손을 대고 혈루의 근원이 마른 그 여자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쐐기를 박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서 능력이 나가는 것을 느끼셨기 때문에 분명히 이 일을 행한 자가 있다고 믿었고, 예수님은 이 일을 행한 여자 쪽을 향하여 몸을 돌이키시며 그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이 여자는 자기가 예수님 모르게 살짝 옷자락을 만지고 혈루병에서 구원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구나, 라는 사실에 두려워하였으니 마치 남의 물건을 훔친 것 같은 그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두려움으로 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떨면서 그분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쭙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살짝 만지고 혈루의 근원이 마르고 병을 고친 상태로 돌아갔더라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몰래 옷자락을 살짝 만지고 병을 고쳤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두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굳이 그 여자를 찾기를 원하셨고, 그와 대화하기를 원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마음으로 거기까지 나아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그 믿음을 인정하심으로 이 여자의 마음속에 당신을 믿는 신앙을 굳건하게 하기 위하여 쐐기를 박으셨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두려워 떨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혈루병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제는 두려워 떨며 예수님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용서를 받고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으니, 이 여자가 이제는 관심사가 혈루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옮겨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이 어렸을 때, 그리고 우리가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 몰랐을 때는 자신의 난감한 처지 때문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실 마음속에는 자신이 행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 하나님을 정말 만나기 위해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관심사가 자신의 삶의 상황이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도 합니다.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거기에서 그치면 신앙이 아닙니다. 기적을 경험한 신앙이 모두 구원을 경험한 신앙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가룟 유다 같은 경우도 똑같이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그 권능을 다른 사도들과 함께 마태복음 10장에서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구원의 증거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연약하기 때문에 그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만,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는 우리의 관심사는 ‘아, 이 문제는 사실 나에게 더 큰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한 방법이었구나. 나의 이 병을 고쳐 주신 것은 나를 진짜 인격적으로 만나주셔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하여 나에게 베푸신 은총의 사건이었구나.’하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나아가야지만 인격적인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훔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들통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떨며 예수 앞에 와서 엎드려 자기가 이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았다는 사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고 이제는 재산도 다 허비하고 아무 효험도 없고, 더 중하여 아무 희망이 없었다는 사실까지 예수님께 여쭈게 되었을 때 이 여자의 마음에는 그 옛날 혈루병을 겪으면서 느꼈던 그 비참한 절망의 심정과 그랬던 자기가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고 완전히 나은 놀라운 은혜의 경험 사이에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여러분 자신이라고 상상해 보면 한편으로는 기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설움과 안타까움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무엇인가 자신이 매우 잘못했기 때문에 주님께 꾸지람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이 여자가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하는 이 모습 속에서는 어떠한 당당함도 읽을 수가 없습니다. 황송함이 짝이 없는 마음으로 예수께 은총을 호소하고 있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또 한 번의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딸아.” 얼마나 충격적인 호칭입니까. 이 때 예수님의 나이 30대 초반에 불관하였는데, 이 여자는 예수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나이로 딸이 되려면 10대 초반 정도가 되었어야 하는데 그 나이에 무슨 혈루증이 생기겠습니까. 여인에게 이 호칭은 아마 상상하지도 못한 호칭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목자이셨습니다. 목자의 마음으로 나이와 상관없이 가엾은 여인에게 느끼는 하나님으로서의 정, 그리고 함께 사람의 몸을 입은 인간으로서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그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가엾은 여인에게 친근하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이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렇게 혈루증이 있는 여자들은 당시 성전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불결한 여자 취급을 받아서 모든 종교생활에서 제외되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육신의 고통과 종교적인 소외감, 사회적인 소외감,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가난하게 되어 말하자면 소외감이 가득했던 그야말로 고통받고 외로운 여인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려워 떨며 엎드린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이 여자가 행한 모든 일을 인정하는 것처럼 그런 믿음으로 내게 와서 옷자락을 만지고 그 능력으로 네가 나음을 얻었으니 너는 참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와 같은 표현인 것입니다. 여자의 마음에는 아마 혈루병을 앓고 난 후에 이렇게 따뜻하게 자기를 인정해주고 이런 애정으로 자신을 호칭해 주는 사람을 정말 오랜만에 만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그것 때문에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의지하고 그분께만 붙어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기적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것은 예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이미 고침을 받았지만 더 이상 이 질병의 고통이 그 여인을 괴롭히지 않도록 주님이 선언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열두 해 혈루병을 앓는 동안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평안히 가라.”는 것은 ‘샬롬’입니다. 그 ‘샬롬’이 여자에게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샬롬도 사람들과의 샬롬도 심지어 자신과의 샬롬 조차 잃어버린 채 불안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갸여운 여자였습니다. 누구 하나 돌보는 이 없었을, ‘긴 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랬을 이 여자에게 “딸아, 평안히 가거라.” 예수님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옷자락을 만지고 병고침을 받았으니 재산을 내놓아라. 일생을 나를 위해 바쳐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요구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이 주님께 받은 은혜가 어떠한지 알면 그렇게 살기로 스스로 결정할 일이었습니다.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라.” 이 때까지 이 여자는 노예의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혈루병에 사로잡혀 그 병의 갑질을 당하며 오히려 그 병 때문에 노예처럼 묶여 그 병 때문에 가고 싶은 곳에 가지도 못하고 가기 싫은 곳도 가야하고 원하는 것은 겪지 못하고 바라지 않은 것은 겪어야 하는 그러한 노예와 같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선언으로 더 이상 그 병이 이 여자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해방을 시켜 주셨고, 마지막으로 “건강할지어다!”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몸만의 건강이 아니라, 몸뿐 아니라 영혼까지 건강해져서 진짜 이 혈루병을 통해서 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는 참으로 건강한 인생을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예전처럼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여자 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그 질서대로 살아서 몸도 마음도 샬롬을 누리며 건강하게 살아서 많은 사람에게 내가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이 너희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그 뜻이 아니었겠습니까.
자, 이제 다리를 질질 끌고 흐르는 피를 닦으며 예수께 다가왔던 이 여인의 처지와 혈루의 근원이 마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을 믿기로 결심하고 새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가벼운 이 여자의 발걸음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격차가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야말로 구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역전이었습니다. 실패했던 자가 이제는 성공하게 되었고, 병든 자가 건강하게 되었고, 고통받는 자가 행복하게 되었고, 예수 모르던 자가 예수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단지 그 당시 의료 혜택이 모자라서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이 병든자를 고쳐 주신 것은 믿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이제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임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은 그 기적을 보는 모든 사람이 기적을 보는데서 멈추지 말고, 그 기적을 통해서 모든 기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도입하게 하신 예수와 함께 온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의 행복을 누리고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라고 천국의 맛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혈루증과 같은 여인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그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질병적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셔야 합니다. 그래서 “딸아. 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이제는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살거라.” 하나님 앞에 선언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신 하나님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눅 5:12-15)
녹취자 : 김세나
문둥병자가 있었습니다. 그 말이 낮춤말이라고 해서 새로운 번역서에는 나병환자라고 하였습니다. 나병환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무리 속으로 못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율법에 이미 이들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생활하거나 혹은 집단적으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전에 나온 ‘벤허’와 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 예수님이 한 동네를 지나실 때 그 동네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사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모든 사람들도 그 사람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본인도 율법에 그렇게 사람들이 있는 곳에 와서는 안 되는 위험한 환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병환자들이 그랬듯이 그는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얼굴을 가려서 자기가 나병에 걸린 것을 사람들이 확인하지 못하게 한 채, 어떤 의미에서 숨어서 이 동네까지 들어왔다고 우리들이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랬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사람도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예수’라는 분이 선지자라고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분이 모든 병자를 고쳐주신다고 하는 것, 참으로 사랑이 많으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하는데 나병환자도 나았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이 어찌하든지 예수를 만나면 자신의 불행한 처지가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듣는다고 많은 믿음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들어서 듣는 많은 것에 모두 은혜를 받고 그것을 마음으로 붙들면 믿음이 들을수록 커지겠지만, 그러나 많이 듣고도 흘려보내는 사람보다는 아주 작은 소식을 듣고도 그것을 마음으로 꽉 붙드는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이 비록 소문을 들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동네까지 들어와 주님 앞에 제일 먼저 한 일이 보고 엎드려 간구한 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 주님이신 줄을 알아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나병은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어느 한 부분서부터 나병이 생기기 시작해서 말기가 되면 온 몸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생겨납니다. 예전에 한하운 시인의 보릿고개 같은 것을 보면 문둥병에 걸려 길을 걷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하나 발가락이 떨어졌다.” 발가락까지 문둥병에 걸려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질병이 있지만 너무 끔찍해서 사람들은 새로운 의학이 들어오기 전에는 문둥병을 ‘천주의 병-하늘이 저주를 내린 병’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나병은 절망적인 질병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해볼 수 없는, 암으로 말하자면 말기 끝까지 가 있는 그런 처지에서 마지막 자기의 인생의 희망을 예수께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 앞에 와서 보고 엎드려 주님께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것은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만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해결할 길 없는 절망적인 인생의 문제를 그 하나님의 아들은 해결하실 수 있다. 단, 중요한 것은 그분이 그것을 원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래서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깨끗하게 한다’라고 하는 말에 한 번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깨끗하게 한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나병이 들렸으면 고름이 줄줄 흐르고 살이 녹아내리면서 그 고름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를 합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조차도 그 사람과 당연히 격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무서운 병에 가족들이 옮는 것이 끔찍한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병환자에 대한 관리를 철저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끗하게 해달라는 이야기는 자기가 불결하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무서운 병에 걸려서 나병의 병이 고름을 통해 흘러내리고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으니 불결한 사람입니다. 의학적으로 불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못지않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나병이 이스라엘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지면 국가가 멸망하게 됩니다.
(예화) 여러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보면 그곳은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18세기에 독일 사람들이 와서 탐구를 하다가 밀림 속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유적지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없습니다. 잉카 문명의 유적도 마찬가지이고, 발해라는 나라가 사라진 것을 비롯하여 이 세계에서 여러 나라들이 외부의 침략에 손상되지 않은 엄청난 문명의 흔적을 남겨 놓았으면서도 깨끗이 사라져버린, 그래서 도대체 왜 멸망했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 나라들에 대한 공통적인 추측이 뭐냐 하면 질병입니다. 질병에 의해 감염이 되어서 싹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살아남는 사람이 있겠지, 그 질병이 나라 전체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할 수 있습니다. 페스트가 휩쓸고 지나갈 때 페스트가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유행하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그랬는데 그게 항상 한쪽에서만 이루어졌습니다. 중국에 붙어있는 아래쪽에서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페스트는 중국 운남성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운남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스페인까지 넘어가는데 3년 밖에 안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페스트가 일어나면서 유럽 인구의 3명 중 1명이 죽습니다. 그 당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왕위 계승 전쟁을 놓고 100년 동안 전쟁이 이루어집니다. 100년 동안 박 터지게 싸운 것이 아니라 싸우다가 멈추고 다시 싸우고, 다시 싸우기를 100년을 하였습니다. 결국 그 100년 전쟁을 끝낸 것이 무기로 끝낸 것이 아니라 페스트가 끝나게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페스트가 누구를 승리하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창과 칼을 들고 벌판에서 싸워야 하는데 상대방의 무기가 무서워서 못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저 친구도 감염되었으면 어떻게 하지?’ 그 생각 때문에 길게 끌던 100년 전쟁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페스트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질병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율법에 보면 나병에 대한 규정이 세세하게 나옵니다. 나병이 사람에게 집에게 그리고 그가 걸렸을 때는 어떻게 격리 조치를 하고 그가 쓰던 물건은 어떻게 처리를 하고 등등 모두 나오고 그가 나았을 경우에 어떻게 검사를 해서 그가 나았는지 확실하게 증명을 하고 그를 다시 이스라엘의 회중 속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그러한 규정이 아주 상세하게 주는 이유가 이 질병이 주는 치명적인 위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고쳐주시는 방식이 우리들이 보았을 때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거기에 들어온 것도 율법적으로 불법이었고, 그 사람과 같이 있는 것도 불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대고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병이 걸려서 고름이 줄줄 흐르는데, 그게 나병 균을 가지고 있고 옮기는데 어떻게 보면 온 몸이 질척질척 하게 된 사람인데 그냥 멀리 놓고 “네가 나을지어다.”라고 하셔도 충분히 고칠 수 있지 않으신 분 아니십니까. 어제 그렇게 예수님이 고치셨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손을 대시면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저 병은 멀리서 기도해도 나을 병이고, 이 병은 손을 안 대면 안 나을 병이라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율법적으로 불결한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러 갈 수도 없는, 하나님 앞에 예배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사람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히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실 수 있는 분이 굳이 예수께서 손을 내미셨고 내민 손을 그에게 대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렇게 말씀하시자, 나병이 곧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큰 능력으로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증거로 그들의 믿음의 동기가 되게 만드셨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더러워하고 불결해하는 이 나병들린 환자조차도 하나님께는 너무나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라고 하는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굳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깨끗함을 받으라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스토리의 가장 핵심입니다. 결국 온몸에 나병이 들려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지만, 이 사람은 예수의 스치는 소문을 들으며 예수께 자신의 절망적인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격리되어 있어야 할 그가 예수가 계시는 한 동네를 찾기까지, 찾아서 많은 인파를 헤치고 예수께 나아와 그분을 뵈옵고 엎드려 간구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난관이 있었겠습니까. 그 모든 것을 물리치며 주 앞에 생사를 걸고 예수를 만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그 문제가 온 몸에 나병이 들린 것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입니까? 아니 심각하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능력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문제가 있으나 이분에게는 모든 것이 다 말씀 한 마디로 고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내 몸이 너무 절망적으로 나병에 걸렸으니 예수께 나아가도 그분이 나를 상대해주시지 않을 것이다, 너무 절망적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나를 고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자리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이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시체조차도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태워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께 나아가면 반드시 그분이 나를 용납해 주실 것과 그 큰 능력으로 고쳐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여러분도 이 믿음을 가지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손을 대어서 고쳐주셨습니다. 이 믿음대로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금하게 되어 있는 이 사람을 접촉하셨고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실 수 있었는데 그의 몸에 손을 대시며 다시 말씀드려서 손을 내밀어 어루만지시며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를 깨끗하게 고쳐주시면서 결국 하나님이 이 모든 사람이 버린 나병 들린 환자조차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어루만져 이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새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십시오. 내 인생의 문제 중 어떤 것도 그분이 해결하시기에 힘들거나 어려운 문제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손에 어루만져져 고침을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아라. 다만 제사장에게로 가라.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라. 율법이 정한 대로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제사장들에게 받으면 예물을 드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입증하고, 그렇게 너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안 했습니다. 뭘 안 했는가 하면, 나머지는 다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스라엘 사회로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그에게 몸을 보였고, 깨끗하게 된 것을 확인을 받고 결례의 제사를 드리는 것까지는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순종하지 않았는가 하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이게 알려지면 이때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 초기인데 너무 많은 대적자들이 생겨날까봐 그래서 아마 예수님께서 많은 대적자들을 만들기보다는 지금은 더 빨리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너는 그렇게 내가 고쳐줬다는 소문 내지 말고, 그냥 완치함 받은 것만 보여주고 정상 생활로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똑같은 이야기가 마가복음 1장에 나옵니다. 45절에 보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가서 이 사실을 널리 전파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불순종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얼마나 기뻤으면 그랬겠습니까. 인생의 어려운 문제에 있다가 하나만 해결이 되어도 만나는 사람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자기가 완전히 온 몸에 나병이 감염되어 죽음 직전 말기까지 갔었던 사람으로서 완전히 회중에게서 멀리 단절되어서 극도의 공포와 외로움 속에서 시달리다가 깨끗하게 나은 몸이 되었을 때, 이것을 예수님은 이르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가리켜 “내가 나병에 걸렸던 사람인 줄 너희 모두가 알지?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았겠니? 내가 예수를 만났어! 그 예수가 나를 고쳐주셨어!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나에게 희망이 있다는 사람이 없었어. 그런데 예수님은 나에게 희망이 되어 주셨어. 예수님은 나에게 완전히 다른 삶을 주셨어!” 온 몸에 나병이 그렇게 퍼진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과 완치되어서 깨끗하게 살아가는 삶 사이에 격차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됐을지 한번 느껴보십시오. 놀라운 감격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설교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의 형편이 이 나병 환자보다 나았을까?’ 아닙니다. 저는 그때의 심중으로는 이렇게 멀쩡한 몸을 가지고 이렇게 괴롭게 사느니 이런 병이 걸리더라도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병자로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예수를 만나기 전 상태가 이 사람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몸에 나병이 걸렸지만, 나는 정신의 나병이 걸렸습니다. 영혼의 나병이 걸려서 도저히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병에 걸린 이 사람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단절되었던 것처럼 나도 내 영혼의 나병이 걸리자 나 스스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멀어져 가장 가까운 가족들조차도 타인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내 형편이 이 사람의 형편보다 덜 절망적이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 다 그러한 것입니다. 잘 묵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예수가 나를 이렇게 고쳐 주셨다고 하는 감격이 있는가, 그래서 그것을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도 가서 전파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마음속에 우러나오는 자기가 받은 은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간절한 열망이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를 전파하게 했고, 그 전파를 들은 사람은 또 예수의 소문을 내게 되었으니 그 소문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그 소문을 들은 사람 중 이 나병환자와 같았던 사람, 누군가에게는 그 소문이 구원의 메시지로 들려 살 길을 찾지 않았겠습니까. 전파하는 사람이 없으면 누가 들을 수 있겠으며 듣지 못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들음으로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전도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전파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고, 예수를 전파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서 소문을 내기 바랍니다. 그 소문의 또 다른 인생의 벼랑 끝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