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은 사도 요한이 쓴 편지입니다. 아마도 이 서신은 사도바울이 말년에 에베소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에 쓴 글일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지주의 이단들이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1서 1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우리가 알게 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바 된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한 1서의 주제는 교제와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의 본질, 그것이 바로 사랑인데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시는 교통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논지를 3장까지 계속하고,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4장에서 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고,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하나님 자녀들의 독특한 성품은 바로 하나님께로 받은 것인데 사랑의 성품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 사도 요한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바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II. 보여주신 사랑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모든 문제가 사랑에 있다고 하는 것을 모르거나 부인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때일수록 많은 사람들은 사랑 받기를 원하고, 사랑하기를 원하고, 사랑에 목마른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수많은 인쇄물들과 그리고 대중매체들, 그리고 유행하는 노래들 속에서 담겨있는 사랑에 대한 현대인의 갈망을 여러분은 날마다 접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이처럼 그들의 인생에 본질적이라는 것은 알지만 어떤 사랑을 해야 할지, 그리고 그 사랑을 어떻게 성취하며 살아야 될 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 그 참된 사랑을 반영하는 희미한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원천인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러나 그 사랑을 어떻게 찾아가고 또 그 사랑이 무엇을 우리에게 의미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A. 우리의 죄를 속하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보이셨는데 그 이유는 원천을 찾지 못하는 인간들의 비극을 해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사랑할 능력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를 이미 주셔서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창조되어 눈 뜨자마자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어 그에게 이끌어 혼인시키셨을 때 그는 한 번도 사람을 사랑해 본 경험이 없지만 이미 그 사람 마음속에 있는 사랑 때문에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아름다움을 명료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공평하게 바라보며 선한 관리자의 의무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고 그때부터 인간은 사랑의 커다란 문제를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 자체를 감축시키거나 사랑의 능력 자체를 쇠퇴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타락은 이러한 인간의 사랑의 능력과 사랑 자체의 방향을 바꾸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 앞에 행복한 사람일 수 있었던 아담과 하와 안에 있는 사랑이 타락한 이후로는 불행의 가장 커다란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문 지상에서 매일매일 보도되고 있는 끔찍한 살인 사건과 범죄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저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 저 사람의 존재가 방해가 된다고 믿기 때문에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살인입니다. 모든 폭행은 인격으로부터 굴복시킬 수 없는 사람을 폭력으로 복종시키기 위해서 이런 모든 폭행적인 범죄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사랑이 지나치고 자기만을 위하는 의욕에 사로잡히게 될 때 강탈과 도둑질 같은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이 사랑의 능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으로 악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악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따라서 살면 살수록 인간에게는 더 커다란 고통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와 같은 사랑의 특성 때문에 인간은 사랑할 능력을 가지고 잘못된 것을 사랑하고, 옳지 않은 것들을 욕망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면 할수록 인간은 끊임없이 불행해지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보여주심으로 참 그들이 돌아가야 할 원천적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참 사랑을 아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푸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런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나타남이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하게 대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고, 그 이전에는 아브라함의 가족들로 이어지는 족장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사랑의 성품들을 게시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선택 이전에는 그 이전의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성품을 보여주셔서 인간이 참으로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함으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찬란한 빛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 사랑의 계시의 절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이 인간들이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B.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심
오늘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분을 독생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입니다. 독생자라고 하는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라고 하는 단어는 ‘홀로’라고 하는 단어와 ‘태어난바 되었다’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것을 독생자가 아니라 독종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독생자 혹은 독종자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모노게네스’는 하나님의 아들인 성자를 향한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대하여 독생자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설명을 성경을 통해 가르침 받게 됩니다. 첫째는 삼위일체 안에서 아들은, 성자는 성부의 독생자입니다. 성자는 하나님께 나신바 된 성자이시고, 그래서 성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립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의 지성으로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히 그리스도의 나심은 성령의 나오심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는 우리 지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문제이겠으나 분명히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기에 그 분은 독생자이신 것입니다.
삼위일체 바깥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과 관계를 맺으신 그 방식 말입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 성자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는 인간의 생육의 방식으로 출생하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동정녀에 잉태되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을 빌리셔야 했으나 그가 흠 없는 하나님의 제물이시기 위해서는 참 사람이 되어야 했고, 인간의 모든 죄를 속할 수 있는 효과가 죽음 속에 있기 위해서는 그분은 단순한 사람이시면 안 되었습니다. 이런 독특한 방식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그 분은 독생자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태어날 수많은 인류들 속에 어떤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날 수가 없기에 그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독생자로 불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처럼 독생자로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 듣기만 하였던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만져볼 수 있고,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멸망을 앞둔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눈에 보이는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희망이 없는 병든 자의 헌데를 어루만지며 고쳐주시는 그 모습 속에서 병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가 위대하게 드러났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이 여자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가 볼 수 있도록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하나님의 사랑은 의심할 바 없이 명료해지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어야 할 모든 이유와 근거가 분명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더라면 복음서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복음서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복음서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이 없었다면 복음이 전파된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이 존재할 수 없었고, 만약에 그렇게 사도들의 행적을 통해 교회가 수립되지 않았더라면 서신서가 존재했을 이유가 없으니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신약의 모든 계시의 “Foundation”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이 눈부신 구원의 계시와 기쁜 복음의 소식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성취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사람의 몸을 입혀 우리에게 보내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성으로 들어가는 정문입니다. 누구든지 그 문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성체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성탄절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날입니다. 종교 개혁가들과 말씀에 충실했던 많은 교회사의 인물들이 이 성탄을 세속적인 명절이라고 생각하고 지키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 성육신의 사건을 과소평가한 사람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절기로서의 이 명절로서의 크리스마스, 성탄절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와 같이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오늘날 우리 신약 교회의 존재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어떤 절기를 지키는 것은 폐기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리는 이 일은 세상 끝 날까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것이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이 성육신의 사건은 가장 위대한 찬송의 제목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오늘 우리는 이 성탄절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가장 놀라운 우리의 구원의 계시의 절정이며 그런 점에서 이 성탄은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기쁨으로, 한편으로는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기쁜 이유는 바로 이 성탄이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위대한 은총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이 성탄이 슬픔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아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화목제물로 죽으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III. 화목제물로 주심은
그러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독생자로 우리에게 보내신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오늘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자, 오늘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는데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여기에서 이 세상은 단순히 자연적이고 우주적인 이 모든 물질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나타난 이 코스모스는 인간이 살고 있는 그 인간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인간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하여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그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한 세상이었고, 주님께 대항한 세상이었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망가뜨린 인간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살리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잊지 아니 하였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살 수 있었으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는 이 성탄의 사건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류는 많은 비참과 악들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뜨려진 인간의 이 모든 타락은 결국은 수많은 그 타락의 결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그것이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만들어 낸 이 세상의 비참함들 이었습니다. 이 모든 비참함들은 심각한 병적인 증상들을 인류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과학의 힘으로 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1970년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인간이 만든 로켓이 달나라에 가던 그 시대쯤 미국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컴퓨터 중 하나의 성능은 여러분이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 처리 용량의 1/30 정도가 슈퍼 컴퓨터였습니다. 그 후로 폭발적인 과학의 발달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과학적인 결과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산업혁명 이후에 어마어마한 과학의 눈부신 발달들은 인류 문명에 놀라운 진보를 가져왔고, 탁월한 물질의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와는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부를 누리며 살고 있고, 오늘날 중산층이 생활하고 있는 바가 17C에는 거의 왕족 수준의 소비 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들이 얼마나 풍부한 물질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두 과학의 덕입니다.
식량의 문제를 가지고 염려 하지만 과학자들은 가볍게 생각합니다. 유전 공학을 통해서 김장통 만한 무를 만들고, 황소만한 토끼를 만드는 것이 너무나 쉽기 때문입니다. 뿌리에는 감자나 고구마 같은 열매가 달리고, 그리고 줄기 가지 위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고, 또 열매는 감이나 사과, 배 같은 탐스러운 열매들이 각각 맺어서 하나의 나무에서 여러 종류의 결과물들을 얻음으로 인간의 식량의 문제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오늘날 지구 온난화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지만 과학자들은 이것도 과학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거대한 기계를 만들고 이제 수면 아래 3000m내지 4000m 아래에 있는 차가운 바닷물을 위로 끌어 올리고, 위에 있는 뜨거운 바닷물을 아래로 흐르게 하여서 전체적인 이 지구의 바다의 온도를 떨어뜨려 기상의 문제, 온난화의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공해의 문제들도 해결하는데 자본이 많이 들기는 하지만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원전에 사용하고 남은 이 쓰레기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과학자들은 좀 더 싼 값으로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때가 온다면 이 모든 지구의 해로운 쓰레기들을 모두 우주 바깥으로 날려버려 지구를 청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이제 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루어졌던 과학의 놀라운 기술과 진보, 발전은 인간의 놀라운 수면의 연장을 가져왔습니다. 1940년대 이 한국의 남성들의 평균 연령이 41세였던 것을 알고 계십니까?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건너갔을 때에 그때에 인간의 수명은 겨우 34~36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제 우리나라를 기준으로도 80세를 넘기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인간의 수명이 120세가 되는 날이 올 것이며, 끊임없는 안티 에이징에 대한 연구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 젊은 30대쯤에 끝나는 이 젊음을 60대 이상까지 연장할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믿고 있습니다.
더욱이 여태까지 이루어졌던 뉴튼, 물리학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지를 연 양자 물리학의 발전의 덕분으로 우리는 오늘날 눈부신 물질문명의 발전 속에서 고속 열차, 자기 부상 열차를 비롯해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가전제품들 그리고 더 많은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옛날에 과학의 정의는 있는 사실들을 연구하는 학문이었지만 양자 역학에서는 마음속에 있는 상상을 사실로 만드는 것이 과학의 임무이라고까지 호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양자 역학의 새로운 발견은 이제까지 있었던 폭발적인 과학의 혁명은 폭발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성과입니다. 만약에 이 양자 역학의 무한한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뉴튼이래 산업 혁명으로 우리가 일궈온 과학의 기술의 발전이 겨우 성냥으로 불을 키는 것에 불과했다면 이제 이것은 이글거리고 타오르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은 폭발적인 효과들을 인류 사회에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비싼 돈을 들여서 로켓을 쏘는 일이 이제는 점점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나노 튜브를 이용해서 탄소 공학으로 양자 역학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을 해서 10km 바깥 넘는 높이의 탄소 막대를 연결하여 거기에 엘리베이터를 매달고 인간이 원하는 대로 우주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시대가 곧 올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과학의 놀라운 발전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미래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최근에 흥미 있는 자료 하나가 공개되었습니다. 40년 전에 어느 대학의 학생들에게 40년 후에 한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 한번 다음 물음에 답해보라는 앙케이트를 냈습니다. 국민 소득은 40년 후에 얼마쯤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 당시 1960년대 70년대 대학생들이 40년 후에는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500불 쯤 될 것입니다 라고 적어냈습니다. 실제로는 19000불이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상상도 못하는 미래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더더욱 우리의 예측을 불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왕에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최근에 영화에서 보고 있는 많은 상상과 같은 작품들, 예를 들면, 토탈 리콜에서 차가 빌딩 사이로 막 날아다니는 이것들은 공상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양자 역학을 이용해서 그런 기계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과학적인 추론에 근거해서 만든 작품들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나는 일어나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오늘날 과학의 관심사나 지식들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부터 말하는 이것을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과학이 발전하고 그리고 그렇게 양자 역학이 발전해서 우리의 상상 속에 있는 것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그 크리에이터의 행위를 과학이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것이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우리의 죽어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좋은 것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의 수명은 30세 40세 밖에 안 되는 데에서 70세 80세 늘어났고, 앞으로는 120세 130세로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수명이 30세나 40세일 때보다 지금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만족도 자체가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먹고 입고 이 세상의 자원을 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행복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못하든지 간에 그에게는 영혼이 있고 영혼은 그 고향 자체가 영원이기 때문에 잠세적인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잠시 그 관심사를 돌릴 수는 있고, 회피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들은 대치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찾으면 찾을수록 사랑할 수 없는 불구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 멀리 떠난 허물과 죄로 말미암는 비참에 복속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서 인간의 고통은 점점 가중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발달한 물질문명과 폭발적인 기술의 발전, 과학의 발전은 인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멀리 떠나 곤고해진 영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참 사랑이 끊어졌기 때문에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이 비참한 처지를 개선할 수는 없을 것이고, 더욱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기대하셨던 모든 인류를 하나의 사랑으로 엮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이 놀랍고 위대한 일들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성취할 수 없는 비전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속에서 인간의 과학 기술과 문명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인간의 문제를 한편으로 해결하면서 또 다른 문제들을 만들어 냅니다. 또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문제들을 도입하게 되고 그리해서 인간은 결국은 기술의 발전과는 상관없이 점점 더 자신으로부터 고립돼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살고 싶다는 표현을 영어로 말할 때 “I wanna collect myself” 라고 말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나 자신을 좀 모아보고 싶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다양한 근심과 염려 속에서 자기 자신이 생각이 찢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할 수 없는 혼란을 느낄 때에 그때 “I wanna collect myself”라고 말합니다. 내 자신을 좀 한번 모아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기술의 문명과 과학의 발전 속에서 산산이 찢어져서 그래서 인간이 본연으로 자기를 집중하고 모아야 할 그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이 기술 사회의 특징이고, 더군다나 이 기술 사회가 자본주의 속에서 함께 돌아감으로써 인간은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고 그래서 인간은 더더욱 자기 자신을 한번 모아볼 수 있는 이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비참함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인간으로부터 소외를 경험하게 됩니다. 뜨겁게 사랑 받기를 원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사랑하고 싶지만 그러나 그 사랑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그 사랑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까지 행복하게 해 주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에 인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영혼을 다시 살리는 일이 없이는 인간이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기 예수로 평화롭게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습니다. 구유에 누이신 천진한 아기를 뵈오며 우리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이 세상에 죽으시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할 죄인은 우리이건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셨고, 죽음은 우리의 몫인데 생명이신 그 분이 죽음에 복종되심으로 죽어야 할 우리를 살리시고 살아야 할 당신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 성탄은 바로 이렇게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현시입니다.
고통 하는 이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 하는 이 세상은 수많은 고통의 현상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분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물질로서 땜질하듯이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의 궁극적인 뿌리가 되는 그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우리의 인간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도입된 고통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죽으시기 전에 우리에게 충분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마음인지, 당신의 형상을 주셨건만 그 형상대로 살지 않는 비참한 인간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구원하고 싶어 하시는지, 그들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의 희로애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충분히 보셨고, 그리고 이 기록들은 오늘도 우리에게 남아서 그분을 만나는 다리가 되고 있습니다.
IV.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기 예수가 오신 이 성탄절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참된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신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렇게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의 문제를 뿌리부터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고, 우리는 먼저 그 사랑과 해결책을 깨달은 사람들이고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뻐하고 소망에 벅차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사랑을 모르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방황하고 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이 고통의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가 참으로 돌아가야 할 완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말 절실한 것은 이렇게 이 구유에 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한 삶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거룩한 생활을 통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그 복음의 소식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의 행복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깨닫고 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 성탄을 가슴 깊이 감사하며 가슴 벅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 그리스도의 모든 복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오신 이 복된 성탄에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붙들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여 독생하신 성자를 알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