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사랑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녹취자: 김라영
기독교 역사이래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논의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의 본질을 지성에서 찾았고, 또 어떤 사람은 감정에서, 또 어떤 사람은 의지에서 찾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지 휫필드를 회심에 이르게 했던 청교도 작가 헨리 스쿠걸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 속에서 신앙의 본질을 이런 데서 찾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신앙의 본질은 인간의 지성과 정서, 의지 모든 것이 통합된 속에서 찾아야 된다는 신앙의 전인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읽은 이 성경구절은 사도바울이 감옥 속에 있을 때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을 위해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 속에서 오늘 우리가 묻는 신앙의 본질에 관한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 모르는 죄수의 몸으로 갇혔는데 그 감옥 속에서도 마음 속에 사라지지 않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지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은 지식과 정서와 의지가 모두 통합된 사랑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사랑이 무엇일까요? 아가페로 되어있는 이 사랑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사랑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신의 사랑 아가페,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숙명적인 스토르게의 사랑, 형제들 간의 필리아, 그리고 남녀 간의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아가페는 단순한 신의 사랑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왜 소유격인 너희라고 썼을까요? 그래서 이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은 이러한 부분들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줍니다. 첫 번째 설명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면 결코 예수 믿지 않습니다. 도저히 자기 힘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죠. 그렇게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 중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를 믿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자신이 좀 더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도저히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서라도 행복하기 위해 신앙을 선택한다는 것이죠.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로스의 사랑으로 묘사합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이것을 믿음으로 보십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구원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인 줄 알았더니 그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냥 인류애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죄지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이 외 다른 것으로는 더 확실하게 나타날 수 없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서 ‘확증하다’라는 단어는 법정적 용어입니다. 재판에 앞서서 도저히 뒤집힐 수 없도록 제시되는 결정적인 증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하고 보니까 자기사랑으로 예수를 믿은 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뿌리신 핏길을 걸어 휘장을 지나 보좌에 이르고 난 후에 거기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받고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을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고 구원해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는 원래 없었던 아가페의 사랑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갖게 된 사랑은 아가페 때문에 생긴 사랑이기는 하지만 아가페 자체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랑을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어의 ‘charity’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인간은 에로스의 사랑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고 그 구원을 통해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고 아가페의 사랑을 입은 후에는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까리따스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과 믿음을 가진 에로스의 사랑의 지평융합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기독교대학에 들어와서 여러분들은 기대할 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아주 놀라운 경건한 분위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녀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의 사실여부가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불완전하고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도 완전하지 않으며 더욱이 우리는 죄인의 본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선함 때문이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고유한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숙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풍성해지다’라는 단어의 원래 그리스어 뜻은 ‘경계를 넘쳐서 흐른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점점 더.. 매일매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 속에서 점점 더 크게 불일 듯 일어나서 넘치게 되는 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숙제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묻습니다. 제가 맨 처음 예수 믿을 때에는 그래도 뜨거운 신앙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때보다 지식도 많고 봉사도 더 자주 하는데 왜 이런 옛날과 같은 뜨거움이 없을까요..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예전에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이 내 안에 점점 더 풍성하게 솟아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에게 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지를 사람의 몸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준 사랑의 정점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 안에 점점 더 솟아나서 그 사랑이 불처럼 일어나는 것 없이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연애를 해보면 누구에게나 공통된 공식이 있습니다. 사랑의 표현은 후퇴할 수 없다. 반드시 사랑의 표현은 앞으로 전진하게 되어있지 결코 후퇴할 수 없습니다. 후퇴한다면 결코 관계의 만족을 누릴 수 없고 사실 여기에 육체적 타락의 덫도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서 점점 더 풍성해 질 때 그 사랑이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거기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 표현하는 사랑의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두 번째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불일어나듯이 점점 더 풍성 하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것에 대한 기억이 희미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냉담하던 사람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뜨거워졌었는지를 잊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하였습니다. 여기에서의 ‘지식’은 그리스어로 ‘에피그노시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는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불처럼 일어나기 위해서는 온전한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 지식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나님 자체에 대해 가르쳐주는 지식만 ‘에피그노시스’는 아닙니다. 이 ‘에피그노시스’는 넓은 의미에서 모든 만물들에 대한 지식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이렇게 설명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매순간 창조물들을 붙들고 계시지만 그 모든 창조물들이 그것으로 존재하고 서로 관계를 맺는 원리들을 만드셨습니다. 그 원리 안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붙들고 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 모든 만물의 원리가 되십니다. 여러분들이 학문을 해서 어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이 모든 사물들 안에 원리를 심으셨기 때문이고, 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학문 안에 여러분들의 지성 안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학문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모든 만물의 원리이신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 아는 것은 부분적이 될 수밖에 없고 파편적이 될 수밖에 없고 더욱이 어떤 지식의 학문을 습득해서도 궁극적으로 그 지식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지를 모르게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불붙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식을 제대로 갖는 것입니다. 그 모든 지식의 중심에, 정점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예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 지식의 빛만큼 사랑의 불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그림을 여러분들에게 그려드리길 원합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있고 그 불길을 계속 타오르게 하는 두 개의 장작이 있습니다. 하나는 ‘에피그노시스’ 지식이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지금 설명하려고 하는 ’모든 총명‘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총명은 그리스어로 ’아이스테시스‘라고하고 현대에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노에시스‘라고 썼습니다. ’아이스테시스‘ 혹은 ’노에시스‘라고하는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사물에 대한 인과관계적인 지식이 아니라 통찰력에서 나오는 판단, 혹은 직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모든 총명이라고 한 것은 칼빈이 올바르게 주석한 바와 같이 모든은 범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깊이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사랑의 불을 일으키는 원리는 이런 것입니다.
’아이스테시스‘라고 하는 이 단어는 사물에 대한 통찰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판단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인간이 누구인지 이 세계가 무엇인지 당신은 어떤 분이신 지를 가르쳐 주실 때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지식은 인간에게 모두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수학에서 공식 혹은 공의를 배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등학교 2학년에 나오는 어떤 공식은 대학 수학으로라야지만 증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높은 차원의 수학에서 이미 만들어낸 결과인 공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걸 적용해서 문제들을 해결해가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예수그리스도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동정녀의 몸에서 오셨다는 것,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죄의 용서 받는다는 것,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피가 지금도 우리를 살린다는 사실들은 이성적으로 대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인격적인 신뢰를 기초로 그 분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기초 안에서 우리는 하나하나 공부를 해 나가며 이 계시의 말씀이 참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지성적으로 친숙하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지식과 총명이 사랑을 불처럼 일어나게 하는 것일까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신학대전」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설명합니다. 첫째 사랑은 성령이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가운데 인도한다.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사랑은 우리에게 올바른 성향을 형성한다. 올바른 성향은 헛된 것들에 흔들리지 않게 하고 올바른 성향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것을 판단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은 지혜로울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이 사랑이 우리 안에 불같이 계속 일어날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통하여 자신이 행복할 뿐만 아니라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습니다. 많이 공부하고 많이 재능을 타고 난 사람도 하나님은 종종 안 쓰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안 하시는 일이 하나 있는데 당신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쓰지 않고 폐기하시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가장 중요한 인생의 숙제는 풍부하고 올바른 지식을 성경을 통해, 학문을 통해 섭취하고 계시의 말씀을 잘 믿는 ‘아이스테시스’를 통해서 사랑이 불길같이 일어나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자기의 것으로 사셨으니 여러분들은 지명하여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점점 더 사랑하고 모든 삶의 동기가 예수의 사랑이 되게 하기 위해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날이 갈수록 예수를 사랑하며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