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녹취자: 이 솔
교회를 개척하고 10년쯤 되었을 때쯤 일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목회에서 어려움을 경험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어려움이 없었느냐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경험한 어려움은 특별한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10년 동안 아무도 저의 리더십에 도전한 사람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저의 리더십에 대한 도전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욕하고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수군수군하면서 사람들을 모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목회자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여러분들이 경험하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한마디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내 젊음과 내 재능과 그리고 내 물질과 그리고 모든 것을 버려서 이 교회를 위해서 일했는데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나를 비난하고 있지도 않은 일로 나를 비난하면서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은 저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한번도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교회를 그만둘까 그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어거스틴에 깊이 심취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에 두 가지 큰 주제를 직면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파고들게 되었고 그리고 또 하나의 주제는 교회였습니다. 많은 과정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저를 깨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열심히 교회 일을 물러냈습니다. 제게 아까운 것이 없었습니다. 내게 얼마나 사랑이 없는 지를 깊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마 제 생애에 그렇게 많이 울었던 해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교회에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났으나 나는 문제에 초월해서 구름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서 제가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났고 그 깨달음을 이제 사경회에서 설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원고 초고도 거의 이정도 불량인데 이것을 기도원에서 3일만에 다 썼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약 13년 세월이 흐르면서 7번을 완전히 새롭게 이책을 썼습니다. 여러분 손에 들어간 이 책이 7번을 뒤집어서 다시 쓴 책이 이 책인데 그 골격은 그대로입니다. 이 책의 내용이 제가 순수하게 신학을 탐구해서 내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의 세계를 열어주실 때 결코 아픔 없이 열어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많이 깨어지는 사람이 새로운 세계를 봅니다. 그런 아픔이 없다면 그 목회자는 죽어가고 있는 목회자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깊이 만났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가 50세 되던 해였습니다. 우안 신학교가 CRTs가 세워지기 약 2년 전의 일이였습니다. 저에게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50세가 되기 전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저는 그 기도를 마틴 로이드 존슨에게서 배웠습니다. 그 분이 40세 때 기도하기를 50세가 되기 전에 주님을 깊이 만나는 부흥을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저도 그 기도를 드렸고 이 책은 그 응답의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의 업적을 과장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 책을 받으면서 ‘그냥 김목사가 또 책을 한권 썼구나. 수십 권의 책중 또 하나를 썼구나.’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단언하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현재 한국이나 미국이나 교회론에서 이런 내용을 다룬 책은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조직신학에서 교회론을 딱 열면 제일 먼저 교회의 정의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부름 받은 백성들의 무리다. 그리고 구약의 칼 에대 그리고 신약의 에클레시야 라고 시작합니다. 이 책은 그 전까지 알아야 할 일부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부 이부 할 때의 여기서부터 현대의 조직신학이 시작되고 제 책은 여기를 다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현재의 모든 신학이 이렇게 되었느냐면 역사적인 뿌리를 캐면 원래의 조직 신학은 이런식으로 교회론을 썼습니다. 그러다가 종교 개혁이 일어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다음에는 종교개혁 신학자는 빨리 빨리 개신교의 신학을 발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발표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개신교는 시작할 때부터 카톨릭을 보면서 시작한 것입니다. 요건 성경적이지 아니다 이건 성경적이지 아니다 생각하는 것부터 발표를 하면서 개신교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지요. 동의합니까? 동의 부동의. 그러니까 카톨릭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는 종교개혁자들하고 거의 같은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칼빈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루터도 안썼습니다. 많은 종교 개혁자들이 안썼습니다. 왜? 카톨릭의 삼위일체나 자기들이 믿는 삼위일체가 거의 같았기 때문에. 그래서 반복해서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론이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카톨릭이나 종교개혁자들이나 동감이었습니다. 이미 신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내용을 종교 개혁자들이 반복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정의부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속성들 그것들을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예만 한두가지 들면 교회에는 보편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보편성을 카톨릭에서는 온 세계 어디를 가든지 카톨릭 교회가 있다. 그래서 보편성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그 보편성은 실제에 온 세계에 교회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솔직히 교회가 없는 지역이 세계 지도에 훨씬 더 많았습니다. 지금도 역시 많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영적인 교통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이 교회의 보편성이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도성 하나만 더 예를 들겠습니다. 교회는 사도성이 있다가 교리였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이것을 1대 교황 베드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교황은 그 사도들의 명맥을 이어가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교회 전체를 통활하는 것이 사도성이라고 본 것입니다. 아포스톨리씨티. 종교개혁자들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사도성이라 함은 1대 교황이 베드로고 교황에 의해 교회가 대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그 사명을 교회가 그대로 계승하기 때문에 교회는 사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시대에는 그 전통이 물려 내려가면서 똑같이 빠지게 되었고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고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서는 이런 사유를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아예 빠져나가 버린 것입니다. 특히 슈라마커 이후로는 교회의 신학이 직업적인 성직자의 교육으로 딱 분할이 되고 더 이상 교회는 통합 쪽으로 신학을 가르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논의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상황이 생겼는지 아세요? 교회가 사랑을 이야기 하는데 그 사랑을 이야기하는 교회의 현상을 보면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하지 말자. 그게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맘이 맞는 사람들끼리 뭉치고 그들끼리 교제하고 그들끼리 주고받고 이게 깊어지면 이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이 되고 아니면 무관심해지고 그런 것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 책은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작은 이것입니다. 삼위일체론부터 시작합니다. 성부가 계시고 성자가 계십니다. 성령이 계십니다. 이 삼위는 각각 인격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가 단일체를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일인격 일단일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인격은 교통적 인격입니다. 혹은 관계의 인격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교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안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행복을 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는데 복수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의도는 멀티플라이 멀티플라이 멀티플라이 계속 늘어나는 것입니다. 늘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혼자 있을 때에는 관계가 필요 없습니다. 두 사람이 늘어나게 되면 관계가 생깁니다. 세 사람이 늘어나면 또 관계가 생깁니다. 이 관계는 이렇게도 됩니다. 네 사람이 늘어나면 이 관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일일은 딱 한 개 관계 밖에 안생기지만 삼일경우에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그다음에 이런 관계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점점 더 복잡해져갑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인간이 이렇게 있게 되면 이런 식으로 관계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도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당연히 한사람은 N-1 관계를 갖게 됩니다. 자기 빼고 모든 관계를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명이면 한사람이 다섯 개의 관계를 가지니까 삼십개의 분포도를 이루게 됩니다. 만약 하늘에서 내려다 본다면 거미줄처럼 엉켜있을 겁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복수로 창조하신 것은 당신이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인격체로써 서로를 사랑하시면서 하나를 이루시는 것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갖는데 이것이 사랑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이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그리고 이 사람들 전체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하나의 일체된 사랑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 하나님이 인류를 만드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깨집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창조되었을 때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뼈이고 그다음에 살이었습니다. 둘이 서로를 향해서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하는데 이건 가장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고 여기에서 카인이 태어나고 아벨이 태어나고 셋이 태어났어요. 타락하지 않았으면 똑같이 서로 살중에 살로 뼈중에 뼈로 살아갔을 것입니다. 온 일류에 대한 하나님이 기대했던 관계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 대한 관계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시면서 그 인류 사회가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할지에 대한 해답은 죄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계와 유사하다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 가운데 무한히 용서해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아무리 결점이 있어도 무한히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한히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당신이 무한히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본인이 분명히 아니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그렇게 사랑해주고 있습니다. 무한히 용서해줍니다. 자신을 용서 못한 적이 있습니까? 결국은 용서해 주었습니다.
어떤 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늘 그렇게 합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그리신 사회는 바로 그런 사회입니다. 완전한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완전히 행복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딱 잘라서 말합니다. 이 사랑은 자기 발전적이지 않습니다. 전기를 생산하는 것처럼 원동기는 스스로 전기를 생산합니다. 원동기는 자기가 전기를 생산합니다. 그런데 자기 발전적이지 않습니다. 자기 발전적이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뿌아이더 지우웬 뿌스 자즈더. 사랑의 기원이 자기 안에 있지 않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면 그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불신자들은 그들도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사랑도 일반 은총 안에서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책임이 없지 않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너무 멀리 나가지 말고 여기서 끊습니다.
그러면 결국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도 하나님께로부터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객체는 이렇게 여럿이지만 이 사랑은 하나입니다. 이런 세상이 되기 위해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것이 다 끊어집니다. 이렇게 끊어집니다. 그것이 오늘날 보이는 사회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세상을 내버려 두시지 않고 계속해서 원래 의도하셨던 사랑의 세상을 만드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사람과 관련시키면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고 요렇게 사랑을 받던 사람이 끊어집니다. 사랑이 내려올 때는 이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게 끊어집니다. 단절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사랑도 지장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수많은 미움이 생겨납니다. 배오가 생겨납니다. 자기애가 생겨납니다. 증오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용서해 주심으로 다시 사랑이 흐르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 은혜가 힘이 되어서 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주어졌지만 여전히 이들에게는 잔존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성화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이 어찌 사랑이겠느냐. 유대인 종교지도자들도 그런 일을 한다. 바리새인도 그렇게 한다. 그래서 결국 목회자는 누구냐 하면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다음에 성령으로써 이들을 돌보아서 이렇게 수시로 끊어놓는 잔존하는 죄들을 죽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살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결국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제가 여러분 나이 때에는 어떤 사람이 좋았냐면 확신하는 사역자 혹은 교역자 불타는 확신을 가진 사람. 지금도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타는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확신이 너무 큰 나머지 이런 확신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자기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은 무엇을 보여 주냐면 자기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죄도 좋아하시고 의도 좋아하신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항상 사람을 보실 때 죄와 사람 자신을 인 죄를 불리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증오하시고 이건 하나님이 배호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그 덕분에 여러분들은 그렇게 못됐으면서도 하나님이 짓밟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살려주셔서 말도 안되는 인간이 변하여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목회자는 뛰어난 학자일수도 있고 행정가일수도 있고 은사를 받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사람이 아니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가 나누어지고 찢어진다는 것은 너무 괴로운 일입니다.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치 이 일치는 합치입니다. 이 일치는 권력이나 이 단순한 인간적인 신념의 공유 이런 것을 통해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있습니다. 이와 동일한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고 여기 시간입니다. T-1 T0 T1 T2 Tn 이렇게 됩니다. 이후에도 없습니다. 그럼 같은 시간이라고 볼 때 T1이라고 봅니다. 같은 시간 안에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어디에도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의 존재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은 지구상 유일한 종류 유일한 객체입니다. 내 인생의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인생은 나의 인생이 아닙니다.
우린 물론 배웁니다.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저런 면이 내게 부족하다 내가 열심히 기도해야지 이런 것을 배웁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내가 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모욕입니다. 나는 나로 태어났습니다. 이건 부동의 명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는 나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내가 나를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어느 강사님이 왔습니다. 의사였습니다. 강의를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모님하고 같이 왔습니다. 우리 넷이 같이 앉아있었는데 자기가 자기 부인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본받으세요. 최소한 하루에 전화 3통을 한다고 합니다. “사랑해. 잘 지냈어.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 하루에 최소한 3통입니다. 석 달에 1통이 아니라 하루에 3통입니다. 그리고 너무 잘해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그래서 장로님 제 경험에 의하면 아내를 너무 사랑하면 자기가 뭘 잘해주었는지 기억을 못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도 경험해봤지요. “엄마 고마워. 이때까지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고 희생해주어 고마워.” 그러면 엄마는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한 게 뭐가 있니? 니가 잘 컸지.” 그런데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진짜 엄마 맘에는 잘해준 것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슴 아프게 했던 일만 기억에 남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위해 희생한 것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은 교회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교회에 대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무엇을 그렇게 헌신했는지 아무것도 기억 못합니다. 집에 가서 실행해보세요. “여보. 고생 너무 많이 했어. 내가 목회한다고 당신만 고생을 많이 시켰어.” 혹은 “여보. 미안해 당신 목회하는데 도움을 못주고 내가 힘들게만 했어.” 이렇게 말해보세요. 그때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가 여러분을 정말 사랑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어. 다 내가 부족해서 그랬지. 내가 잘해준 것이 무엇 있어?. 늘 당신을 외롭게 하고 힘들게 했지. 너무 미안해. 그게 매일 매일 가슴에 너무 아파.” 이런 사람은 진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비참한 사람이 누군가하면 끊임없이 남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나도 힘들어. 나도 사랑해줘. 나는 좀 사랑 받으면 안 돼?” 이러는 사람은 가엾은 사람입니다.
잊지 마세요. 책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관통하는 진리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세요. 참된 사랑은 원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가 누구든지 그가 의인이든지 죄인이든지 아니면 자기의 원수든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자신은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원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사랑 받기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참으로 참된 사랑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다시한번 알려주겠습니다. “참된 사랑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자신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독감. 누가 느낍니까? 사랑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고독감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혼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구와 같이 있습니까?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 마다 하나님께로 났도다.
왜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고독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그가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면 아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 그 사랑하는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은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사랑을 받으라는 수동 명령조차 없습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수동적으로 허용한 것입니다. 심지어 “아이 짜즈”도 안 나옵니다. 왜?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런 명령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이 명령을 하실 필요가 없고 사랑을 안 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악해지기 때문에 이런 명령을 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이미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을 할 필요가 없고 올바르게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면 할수록 악에 빠지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은 이런 명령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인간에게 가장 커다란 숙제가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이 사랑이 참된 사랑이여야 합니다. 가짜 사랑이여서는 안됩니다. 참된 사랑이여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떤 사랑이 있을 때 이 사랑은 끊임없이 시험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테스트 되어야 합니다. 무엇에 의해서.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끊임없이 테스트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정말 뜨겁게 사랑하지만 참된 사랑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만약 참된 사랑이 아니면 그것은 “우스 아이” 참된 사랑이 아니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숙제는 사랑을 하는 것 이고 그 사랑을 끊임없이 시험함으로써 테스트함으로서 이 사랑을 순수하고 참된 사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나는 이미 여기 도달했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일생은 과정입니다. 무슨 과정이냐면 불완전한 사랑에서 완전한 사랑으로 이분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사랑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다음에 보다 더 완전한 사랑을 추구하는 완전한 사랑을 추구하지 않으면 그 자신은 죽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살아 있다는 의미 자체가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모두 완성될 때 그 하나님의 나라는 결론적으로 어떤 모습입니까? 처음 최초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회는 완전한 사랑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이 사랑의 관계가 깨트려집니다. 그 다음에 타락입니다. 그 다음에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구속이 이루어집니다. 그 사랑은 이렇게 깨어진 파괴되었던 사랑이 다시 복원된 것입니다. 이 구원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은 사랑이 완전해져가는 과정입니다.
그럼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창조 타락 구속 완성되었을 때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이 나라는 ‘다트’의 나라입니다. 희랍어로 ‘그노시스’의 나라입니다. 그러면 무슨 다트입니까? 무슨 그노시스입니까? “다트 엘로힘.” “그노시스 그리스도” “그노시스 예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날 희랍 사상에 물들어서, 모든 이런 개념들을 분석적으로 보는 그런 풍조에 물든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 지식(쯔스)의 완성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바국 선지자가 무엇이라 합니까? “물이 바다를 덮은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하게 되리라.”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클레누보 베르나두스 신비주의 사상가 굉장히 깊은 신학자입니다. 이분이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식은 사랑 그 자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다트 그노시스’는 사랑과 나누어지지 않는 다트 그노시스입니다. 지식에 넘치게 될 때 그때 그 지식의 넘침은 곧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파괴되었는데 다시 하나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구시키고 생명을 부어주시는데 이 생명이 곧 사랑입니다. 이 생명은 자기 종속의 관점에서 본 것이고 사랑은 관계적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이런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당연히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 인간이 서로의 다름 이동 혹은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동과 차이는 없을 수가 없습니다. 가깝게는 나는 네가 아닙니다. 너는 그가 아니고, 그는 너가 아닙니다. 나는 그가 아니고 그는 내가 아닙니다. 이 자체가 이미 차이입니다. 그리고 다른 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사랑이라는 자체는 동일 존재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존재들 간의 사랑’(상이더 존짜이 간더 아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안에 독단을 갖습니다. 독단. 혹은 편견. 이해되지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러한 상이함,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런 것들을 말하자면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사람 자신이 이런 것에 대해서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찢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런 식으로 쪼갭니다. 교회가 이런 지도자들에 의해서 인도된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교회를 크게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여러분 모두가 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열심히 배워요. 겸손하게.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이 부흥했을 때는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교회가 안 되었을 때에는 고난을 받는 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목회를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주 겸손하게 가서 배우십시오.
여러분에게 이름만 대면 아는 세계적인 학자가 있습니다. 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에 대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교회에 가서 더더욱 그것을 느꼈습니다.” 말이 됩니까? 자기는 세계적인 학자고 저는 시골의 박학도인에 불과합니다. 세계적인 학자가 무엇을 배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배워야 합니다. 모든 창조는 어디에서 유래했습니까? 창조는 결국은 모방에서 나옵니다. 무언가를 보고 끊임없이 흉내 내는 것에서 창조가 나옵니다. 그걸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그러나 부러워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그렇습니다. 목회자는 앞서 간 선지자들의 후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자신의 인격과 생활 속에서 육화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사랑 안에서 말입니다.
우리의 존재라는 것은 모두 필멸의 존재이고 필사의 존재이며, 소멸하는 존재입니다. 모두 잠깐 지나갑니다. 저도 젊을 때가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은 늙어본 적이 없지만 늙은 사람은 젊은 적이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늙어 본적이 없다. 늙은이는 모두 젊어본 적이 있다. 모두 그렇습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구에, 그것도 여기 중국 온 땅이 아니라 여기 우한에, 우한도 우한 전체가 아니라 항꼬에, 항꼬 전체도 아니고 이 조그마한 3층 건물 중 2층에 살고 있으나 가끔은 탈출해서 여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십시오. 인생이 얼마나 미미한가가 느껴집니다. 우리는 한순간을 밤하늘을 가로지르면 찬란한 빛을 발하다 사라지는 별똥같이 그렇게 어두운 세상에 잠깐 사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의 기회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완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50, 60세쯤 될 때에 달관한 듯한 그 무엇이 느껴져야 합니다. 아무도 그 사람에게 내쳐지지 않을 것처럼, 그러면서도 그는 누구도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 의존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매일 매일 우리의 사랑을 쇄신하라.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완전한 사랑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짧은 강의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