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하나님을 사랑하라
녹취자 : 남궁지선
큰 계명과 작은 계명을 나누어서 생각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불합리한 결과들은 무엇입니까?
큰 계명과 작은 계명을 나누어 생각할 때 불합리한 결과는 ‘누가 큰 계명과 작은 계명을 정하겠느냐’입니다. 성경이 어느 계명을 얘기하면서 이것이 큰 계명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계명이 계명으로 주어집니다. 내가 잘 지키고 예민한 것을 큰 계명이라고 말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작은 계명이라고 말한다면 아주 편의적인 신앙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보겠습니다. 큰 계명이 있고 작은 계명이 있다고 만약 이것을 개인적으로 이렇게 판단을 한다면,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에는 여러 가지 계명들이 있고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전체적으로 이르는데 모두 지켜야 하는 계명이라는 판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율법사의 모순된 질문에 예수님께서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까?
여기서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결론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라고 나오는 것이잖습니까? 그것이 첫 번째고 나머지는 밑에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라는 이것이 계명을 지키는 방식과 원리에 대한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첫째 되는 계명이라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계명입니다. 모든 것들은 계명을 지키는 동기가 하나님 사랑이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일반적으로 세 개로 되어있다고 봅니다. 도덕법이 있고 제사법이 있고 민법 혹은 시민법이 있다고 봅니다. 도덕법은 십계명이고 제사법은 제사에 관한 법이고 시민법은 시민의 생활을 규휼(규율)하는 법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성취되셨고 이거는 그 당시의 법이니까 결국은 이 도덕법은 영원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계명을 지키는 원리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기에서 “둘째”라는 말과 “그와 같으니”라는 말을 동시에 고려해야 합니다. 순서상으로는 둘째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계명의 크기를 논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탁상공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의 성격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아주아주 엄청나게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A이고, 둘이 서로 사랑하겠죠? 이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이 사람이 이 사람을 한없이 사랑하면 이 사람과 관련된 거는 작은 게 없습니다. 이해가 안 가십니까? 부부 사이에 그런 감정이 안 드십니까? 웃지도 않고 대답도 안 하고, 다시 한 번 (더) 설명할게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아주 많이 사랑하면 이 사람에게는 이 사람에 대해서 작은 거라고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은 상대방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분노를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사랑하면 어떻게 그 사람을 기쁘게 할까 생각하지만, 사랑이 식으면 어느 선까지는 내가 안 해도 되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 생각하지만, 사랑이 식으면 어디까지가 죄 일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으로 미루어 보아도 이건 너무 분명합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이 화 안 나게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기쁘게 하는 게 목표가 됩니다. 계명의 크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이 있으면 그것을 어길 때 모든 것이 죄의 크기가 똑같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똑같지만, 예를 들어 마음으로 도둑질하는 것과 실제로 도둑질하는 것이 어떻게 같겠으며,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과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반감을 품은 것과 실제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어떻게 똑같겠습니까? 죄의 크기는 다르지만, 그 죄의 성질은 동일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람 안에서 계명을 어겼을 때 크기는 다를지 모르지만 계명의 본질은 모두 똑같습니다. 이 두 계명이 그렇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 양상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나타나지만, 결국은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같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결코 모순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여기에 보면 이 두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 양상은 다르지만 결국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두 계명이 결국은 온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못을 두 개를 그렸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 못은 하나입니다. 하나의 못이 이렇게 박힙니다. 여기에 강령이라는 말이 “크레마 타이” 라는 단어입니다. 못이 박혀있고 모든 옷이나 물건들이 많이 있는데 공중에 매달리려면 못에 걸쳐야 합니다. 그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라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입니다. 생활에 적용하면 계명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이 주는 모든 이렇게 살아라는 계명이 옷이라면 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하나의 사랑은 하나의 못이고 여기에 모두 걸려 있을 때 이 자체가 진짜로 걸려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모든 가르침이 하나로 수렴하는데, 그 수렴하는 최종적인 하나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4. 존 오웬은 “신자가 죄를 짓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죄와 관련하여 그 사람의 경건의 깊이는 무엇을 통하여 나타나는지 회개와 관련하여 생각해 봅시다.
결국은 경건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러니까 경건의 깊이는 하나님 사랑의 깊이이고 결국은 이 사랑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항상 발견합니다. 이것은 결국은 진리의 작용입니다. 진리를 통해서만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경건한 사람일수록 작은 죄에 대해서 큰 회개를 하게 됩니다. 핵심이 그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의 없으면 아무렇게나 행하고도 이 사람에 대해서 자기가 잘못한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을 정말 사랑하면 상대방은 괜찮다고 하는데도 자기가 왜 그 사람한테 그렇게밖에 못했을까 후회하게 됩니다. 결국은 사랑의 깊이만큼 사랑하지 않거나 잘못 사랑한 것에 대해 뉘우치게 되기 때문에 한 사람의 경건의 깊이는 회개의 깊이라는 말이 성립을 합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잘못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회개하므로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합니다. 결국은 신앙의 경건의 깊이는 죄를 인식하는 깊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살아있는 성령의 지각으로 자신의 죄를 정확히 보고 그 죄를 슬퍼하는 깊이와 거기에서 자기를 개혁하려고 하는 깊이가 사실은 신앙의 깊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목표는 사실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 밖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행복을 가장 커다랗게 방해하는 것이 결국은 죄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깊이가 죄를 아는 깊이라고 주장하는 청교도들이 강조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어둠 속에 있을 때에는 옷에 뭐가 묻어도 잘 안 보입니다. 그래서 짙은 색깔의 옷은 관리하기가 편합니다. 사실 관리하기가 편한 게 아니라 더럽다는 걸 감추어 주고 자기가 잘 인식을 못하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도 세탁한 지 몇 달 된 것입니다. 하얀 자켓이라면 못 입고 다닐 것입니다. 완전히 백색 자켓이라면 얼마나 뭐가 많이 묻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색깔이니까 커피를 먹다 흘려도 표가 안 나고 생선회를 먹다가 초장이 떨어져도, 떼고 나면 표가 안 나는 것입니다. 하얀 옷이라면 마른 고추장을 떼어도 붉은 자국이 남게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실제로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람들이 안(못) 느끼는 것입니다. 감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열망만큼 진리의 빛 아래서 자신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낮에 설교했듯이 인간이 아무리 행복하려고 욕망하고 몸부림을 쳐도, 진짜 자기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얼마나 있으며, 혹시 행복했다고 주관적으로 느껴도 그 행복이 계속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4시에 한국 최대의 재벌 중 한 사람인 신격호 회장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말 껌 하나 팔아서 시작해서, 재계 5위까지 올라가고, 그리고 50대 중반이 된 나이에 사랑에 빠지셔서 롯데라는 이름까지 만들었는데 결국 가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재산을 남겼는지 누가 갖는지 모르겠지만 자녀들하고 부인들하고 나눠 갖지 않을까요. 결국 어쨌든 갑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어느 순간에 행복을 욕망했고 거기 도달했다 해도 거기 도달한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고백은 그게 자기가 찾던 진짜 행복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지금은 구원파 교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는데, 가수 박진영 엔터테인먼트 회사 사장. 그 사람이 젊었을 때 20억을 모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26살에 20억을 모았답니다. 지금은 50세 중반은 넘었을 것 같은데 30년 전에 그 정도 벌었으니까 굉장히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의 고백이 하나도 안 행복하더랍니다. 얻지 못했을 때는 그렇게 자기가 되면 행복할 거라고 굳게 믿었고, 그래서 삶이 활기찼는데 막상 손에 넣어보니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행복입니다. 열렬히 원하지만 없기 때문에 도달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가져보면 그게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꾸 이야기하면 허무한 마음이 깊어질까 봐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5. 오래 섬길수록 마음이 강퍅해져 가고,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이기적이 되어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섬겼지만 마음이 굳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인간관계에 얽히고 종교적인 허영심을 가져서, 좋은 평판을 받고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이렇게 되면서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 자신의 계속되는 삶의 틀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것이 자신에게 살아있을 때 하나님 사랑이 순수한 동기가 될 때, 그때 정말 하나님을 향해 굳어진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내가 이렇게 꾸준히 섬기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내가 한 섬김의 자리에 오래 있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내가 어떤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각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매일매일 재연될 때에 이때 우리가 올바른 삶의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6.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까?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성경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른지 말해 봅시다.
본질상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결국은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하나입니다. 종종 사람을(은) 하나님 밖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불행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해도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형제를 잃어버려도 하나님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하나님 사랑으로 사랑할 때, 그때 사람은 잃어버려도 사랑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랑한 게 만약에 인간의 사랑이었다면 이 사람이 사라질 때 인간의 사랑도 함께 없어집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었다면 이 사람이 사라져도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영원히 있습니다. 그래서 한 인격 안에 궁극적으로 두 대상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사랑은 반드시 다른 사랑에 종속되게 되기 때문에 세상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한 마음에 똑같이 우위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누구 하나가 이기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은 우위에 있지 않습니다. 우위에 있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봅니다.
7. 차갑고 냉담한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칙과 과정은 무엇입니까?
차갑고 냉담한 마음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는 일 사이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 사랑에 목마른 마음은 마음이 준비되고 그래서 하나님 사랑이 없는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고 가난해집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했던 사랑에 염증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고 말씀에 목마르게 되어서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람에게 사람이 어떤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자꾸 말해 줌으로서, 그것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고, 싫어하는 것은 그것의 나쁜 것을 계속 알게 해줄 때 결국은 마음이 그 사랑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없습니까. 듣기도 싫은데 누군가가 와서 험담을 계속 합니다. 그 말을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만날 때마다 듣게 되니까 처음에는 그렇게 동의하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이 험담하는 사람을 같이 자기도 싫어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성장하는 비결은 세상보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앎으로서 하나님에게 점점 더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때 그 보여주는 것만으로 저절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셔서 그 사람이 하나님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섬기는 사람이 언제나 기도해야 할 제목은, 음식을 설명하면서 지루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곧 먹어보러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사람 있습니다. 한번 해볼까요? 맛있는 통닭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름을 바꿔서 바로 튀겼습니다. 제일 좋은 닭으로 튀겼고, 따뜻합니다. 튀김옷이 매우 바삭거리고 고소합니다. 옆에 아주 시고 달콤한 무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콜라도 있습니다.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먹고 싶어집니다. 결국은 영혼을 섬기는 사람이 늘 기도해야 할 제목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그 아름다움을 실감 나게 설명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는 일들이 얼마나 싫증이 나는 일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가르쳐 줘야 됩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확한 묘사입니다. 정확한 묘사.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사람에 대한 사랑,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즐거움을 자신이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홈쇼핑에 나오는 사람도 이거 제가 요새 쓰고 있는데 너무 좋아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 얘기를 해요, 제가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어요. (등등) 공통된 멘트를 날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가 실제 그것을 누리고 행복해하는 사람의 묘사가 전달하는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 가운데 생활하는 것이 여러분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구역원들과 순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