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날 떠나 어디로 갈까
녹취자 : 이재호
오늘은 1과를 공부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인생의 외로움을 느꼈던 경험을 이야기해 봅시다. 사진이 나오는데 사진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세 장의 사진이 있는데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단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맨 왼쪽에 어느 여자 분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은 기다림,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두 번째 큰 사진은 확실히 외로움입니다. 나이는 드시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아무도 쳐다봐 주는 사람없이 쓸쓸히 걸어가고 있는 외로움입니다. 옆에는 범죄자 같기도 하고 연인을 기다리는 남자 같기도 한데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1번 문제를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인생의 외로움을 느꼈던 경험을 이야기해 봅시다.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체1] 저는 모태신앙이어서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쭉 해왔는데요. 하지만 늘 마음 안에는 어떤 외로움, 해결되지 않는 외로움, 공허함들이 늘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채워보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채우려고 많이 애를 썼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잠깐의 해소는 될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외로움, 공허함에 부딪히게 되면서 참 많이 고민하고 힘들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지체2] 청년시절부터 언제나 저의 생각 속에는 제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나의 세상은 나 혼자 뿐이다’ 이런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그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 사람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가지곤 했는데 술을 마시고 좀 취하면 나의 머리속에 드는 생각이 ‘잠시후면 너는 집에 가게 된다. 그러면 너는 혼자가 된다.’ 이런 생각이 들어오면서 사람들과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이 너무 심해져서 그 외로움을 잊어버리고자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지체3] 중학교 때 학교 너머 저 푸른 하늘을 보면서 ‘저 하늘은 그렇게 파란데 왜 이렇게 외로울까’ 하는 그런 것들이 기억이 있고 대학 준비하면서 고등학교 3학년 때 두꺼운 책을 이렇게 안고서는 공부할 때인데 그 때 기억이 납니다. ‘내가 왜 그렇게 외로웠을까?’ 생각해보면 인생이라는 확정되지 않은 그런 것이 외로움을 주었구나! 결혼해서 살면서 남편과 같이 하는데 그 때는 외롭더라구요. ‘함께 혼자인 것’ 그 때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외로움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 문학가들이 과장해서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나 다 그런 외로움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외로움의 정체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의 문제를 한 번 보겠습니다.
외로움을 사전에 찾아보니까 ‘홀로 있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 고독을 찾아보니까 ‘홀로 있는 듯 외롭고 쓸쓸함’ 그랬습니다. 차이가 무엇인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외로움의 정의는 진짜로 홀로 혼자 있는 것입니다. 고독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혼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외롭고 쓸쓸함입니다. 결국 외로움은 장소적으로 자기가 동떨어져 있어서 사람들과 접촉이 없는 데서 오는 거라고 하면, 고독은 심리적인 것입니다. 결국 외로움은 장소적인 고립감이고 고독은 의미적인 소외감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표현하냐면 ‘외로움은 선택하지 않는 고독이고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독해지려는 사람은 고독해지려고 막 노력을 해서 고독해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심리속에서 어쨌든 그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무 고독이 없습니다. 생각 없는 사람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인도에 버려져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외롭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생각이 없는 사람은 사람들 속에 살면서 고독을 느끼지 않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외로운 장소에 가면 고독해지기 쉽습니다. 그 고독은 우리가 진리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 길목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누구도 고독을 느끼지 않고서는 성숙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독은 항상 우리에게 긍정적인 것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고독은 우리에게 절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좌절하고 죽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사역을 할 때 교회 바로 옆에 모그룹 회장집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깜짝 놀랄 뉴스가 신문, 방송에 터져 나왔습니다. 그 회장이 부엌칼로 자신의 온 몸을 50번이상 찔러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집 안에 농구코트도 있고 경호원들도 있고 개들도 있고 아름다운 정원에 큰 집에 대그룹의 회장인데 뭐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왜 그랬을까요? 외로운 것이 아니라 고독해서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는 어떻게 이 고독을 어떻게 잘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간이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도약할 수도 있고 파멸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한 번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2번 문제를 해보겠습니다.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 뜻밖에 신 앞에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너는 누구냐?’ 당신은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 한 번 여러분들이 답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음의 순간 무신론자인 저에게 신이 나타나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지금이 꿈 속인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존재 여부조차 알 수 없으니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다만, 신은 없다는 신념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신의 영향력을 부정하고 산 자신의 인생이 부끄럽고 덧없었을 따름이라고 고백할 것 같습니다.
정말 신이 맞으시죠? 신이 맞으시다면 저보다 더 저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셔야 되는 것 아닌가요? 왜 이제와서 저에 대해서 궁금하신거죠? 제가 그렇게 한 때 미치도록 찾고 헤맬 때는 제 앞에 안 보이시더니 왜 이제서야 제가 궁금하신 겁니까?
죽음의 순간에 신을 만난다면 순간 놀랍고 순간 누군가와의 만남이 반갑기도 하겠지만 그런데 그 신이 나를 몰라본다면 공포에 빠지겠죠. 아마. 더군다나 ‘네가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진정 신이 나를 몰라볼 수 있냐고 반문하겠지만 속마음은 신을 부정했던 나 자신을 원망하겠죠. 그러나 인간의 속성이 죽음 앞에서는 약할 수밖에 없기에 당신이 진정 신이라면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달라고 그러면 진정 당신을 신으로 인정하고 순종하며 살 거라고 매달리겠죠.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압권인 답변을 그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신이면 무엇이든 알텐데 왜 나보고 누구냐고 물어보느냐’ 마치 항의하는 대답이셨는데 신이 몰라서 물어보겠습니까? 시험하느라고 물어보는 것일겁니다. 우리가 우리 애들보고 ‘이름이 뭐지?’ 하고 그 때 우리가 우리 아이의 이름을 모르겠습니까? 자기 입으로 대답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어느 작가가 책에서 똑같은 이 질문을 합니다. 난감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죽었습니다. ‘너는 누구냐’하고 묻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아무개의 아내고, 두 아이의 엄마고, 교회의 권사고’ 쭈욱 이야기 합니다. ‘아니 그런 것 말고 네가 누구냐? 어느 나라를 묻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태어났는지 몇 년생인지 누구 엄마인지 아내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느 교회에 소속되었는지 그런 것 말고 네가 누구냐’ 결국 대답을 못 하는 것입니다.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이야기가 끝납니다. 결국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관계맺는 대상을 가지고 내가 누구라고 말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관계를 다 빼버리고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은 할 수 있을 겁니다. ‘56kg, 161cm, 허리둘레 31inch, 발사이즈 얼마’ 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나의 정체성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숫자는 태어나면서 여지까지 한 번도 똑같은 숫자를 유지 않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계속 허리가 커진 것은 우리가 공감하는 숫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나지 않습니까? 그것을 무엇으로 규정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철학의 역사는 바로 이런 것을 규명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역사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아야지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잘 사용하는지 못 사용하는지 알겠는지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른다면 우리가 그것을 판단할 기준이 없지 않습니까? 인간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인간이 누구라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이런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끝까지 생각하면 돌아버립니다. 다행히 우리의 정신이 그렇게 오랬동안 집중할 수 있게 안되어 있고 마음이 분산됩니다. 그래서 수시로 잊어버립니다. 그 덕분에 우리들이 안죽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답할 수 있겠습니까? 왼쪽에 그림이 있습니다. 물음표, 실선으로 되어 있는 것은 여기서 와서 이리로 가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근원도 모르고 결국은 사람들하고 같이 살지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근원도 모르고 현재에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정체를 알 수 없고 기껏 파악한다고 해봐야 생물학적 정체성이고 물리적인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인생을 의미있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면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나는 창조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나는 그 사랑에 덧입어 살고 하나님이 가장 선하신 분이고 나는 그렇게 선하게 살도록 지정된 것입니다. 가끔 무신론자들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논리가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세상이 개판이냐?’ 하고 묻지 않습니까? 사실 그 질문도 말이 안됩니다. ‘왜 세상이 선하고 질서있어야 하느냐’ 우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만든 법칙이냐?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우연이니까 개판이 되도 이상할게 없고 좋게 되어도 이상할게 없고 중간쯤 되어도 이상할 게 없어야 하는데 왜 신이 이 세상이 개판인 면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신이 없는 증거가 될까?’ 그 것 자체가 신이 있다면 세상이 좋아야 된다, 신이 이렇게 개판인 세상이 된 것은 신이 없다는 증거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의 의해서 창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딱 한 줄로 요약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것이 유일한 성경구절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게 그 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이 성경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은 비참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이 두가지만 알고 있으면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 3번 문제를 보겠습니다. 자신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 같이 느껴 본 경험을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자아가 있는데 온전히 하나다라고 느끼는 때는 드뭅니다. 오히려 내 자신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처럼 내가 마땅히 되어야 할 나와 현재에 있는 나, 마땅히 그렇게 하고 싶은 나와 실제로 욕망하는 나 사이에 괴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위대한 사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분열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한 번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지체1] 저 같은 경우에는 하루에 몇 번씩도 경험하지만 한 자아에 대해서 패배감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경우는 바로 예배를 통해서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 나왔을 때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마음을 부어 주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영혼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제 자아를 발견할 때입니다.
[지체2] 저는 제 안에 두 자아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많이 경험했는데요. 내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 싶어하는 자아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두 자아가 서로 충돌을 일으킬 때가 많은데 제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냐면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 싶어하는 자아가 제 영혼을 지배했을 때입니다. 제 육신대로 살고, 내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 때에는 오히려 제 영혼이 속박을 누리고 불행하다고 느꼈을 때가 많았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제 영혼이 자유함을 누리고 행복함을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지체3] 신앙이 없을 때는 내 자아는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서 좋은 자아가 만들어질거라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고 도저히 내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상황까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된 후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으니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은 알고 계시겠구나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나와 말씀에 순종하기 싫은 이유, 불평, 불만을 갖는 나와 계속 충돌해서 힘이 들긴 합니다.
이런 자아의 분열 현상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느낍니다. 그리고 아주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부터 시작해서 아주 위대한 신앙의 경지에 이른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런 것은 공통적인 것입니다. 어거스틴도 고백론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자기 안에 있는 자아의 분열입니다. 어거스틴은 시간과 집착을 가지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분열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믿고 나서 성경적으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해부하고 진단했습니다.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이야기 그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손에게 명하면 손은 말을 듣습니다. 이것을 집으라고 하면 집습니다. 내가 발도록 명령하며 어디로 가라고하면 갑니다. 그런데 마음에 명령하면 마음은 듣지 않습니다.’ 무엇을 느겼습니까? 손에게 명하고 발에게 명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내가 목이 마르니 물컵을 들고 어디를 가자 하면 발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게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게 명령하면 ‘너 하나님의 말씀따라 살아라.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라.’ 라고 명령하면 그럴 마음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자신에게 명령하는데 자신이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것을 마음의 질병상태라고 본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내가 손에게 명령하면 일반적일 때는 시키는 대로 할 것입니다. 부러졌을 때는 손을 올려도 자지러지게 아플 때 내가 목마른다고 그것을 들으라고 하지만 손이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이미 그것을 알아서 아예 물을 마시는 즐거움 보다는 그것을 들기 위해서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이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알 경우에는 팔에게 그것을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명할 때 듣지 않는 것은 병들었고 망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 망가진 것을 고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온전하게 한 마음으로 되어 있다면 여기에서 인간은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느낍니다. 행복, 쉼, 안식, 평화, 기쁨, 엄청난 에너지를 느낍니다. 자기가 분열될 때에 분열된 그것을 안고 싸우느라고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데 그 에너지가 저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차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찢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찢어지는 이유는 한 쪽 마음이 병들어가는 것입니다. 폐를 엑스레이를 찍으면 폐결핵 검사를 했을 때 ‘반이 썩었습니다.’ 하는 진단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망가진 것만큼 불구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스코트 펙이라는 사람에 의하면 유명한 불교도였는데 나중에 연구를 하면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되고 심리학자이고 정신과 의사이고 신학을 공부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가지 책을 쓰셨는데 그 중 한 책에서 ‘욕망을 강력하게 갖고 거기에서 만족을 느낄 때 자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일이 일어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들이 여성과 성생활을 하는데 거기에서 극도의 쾌락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때에는 돈을 주고 몸을 파는 사람에게도 사랑한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감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아의 경계가 무너진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라는 것을 확정하는 이 경계가 무너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도덕적인 판단을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의 혼돈 속에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단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고 난 다음에는 절대로 그런 감정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성행위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락이나 세상의 쾌락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몰입되었을 때 모든 인간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아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 일상이 되어 버린다면 매우 그의 삶은 병든 마음에 이끌리는 삶이 되기 때문에 온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병들었을 때 자기 자신이 그 마음을 명령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도 신자가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면 인간은 끊임없이 수많은 약속들을 남발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것을 치유하는 구체적인 약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약이시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혼이 거듭나고 변화된 마음이 되고 말씀과 성령으로 치유될 때 그 때에 이런 망가진 것들이 회복되는데 회복되는 방식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채우면서 이것들이 회복되어 가는 것입니다.
자 4번 문제를 보겠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소중하게 느껴졌던 때가 언제였는지, 왜 그렇게 생각되었는지 나누어 봅시다.
[지체1] 나의 존재가 소중하다 느껴졌던 때는 제가 몇 해 전에 많이 아팠을 때였는데요. 평생 약을 먹어야 되는 상황 속에서 저보다도 더 많이 우시는 우리 부모님과 또 여러가지로 걱정해주는 우리 가족들을 보며 정말 우리 가족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러면서 나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되더라구요.
[지체2] 나를 타자가 바르게 이해해주고 공감하면서 진지하게 경청해 줄 때 그 타자는 결국 하나님이라고 보면 되는데 제가 회개할 때 가장 저를 소중하게 여기게 됐구요. 두 번째로는 타자가 사람이 필요할 때 내가 그의 형편을 도와주어서 그가 그의 의지의 대상이 되어 주는 거죠. 그럼 제가 ‘쓸모 있는 존재구나’ 생각이 들게 되었거든요. 관계적인 면에서 ‘나는 참 소중한 존재로구나’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지체3] 저의 존재가 소중하게 느껴졌던 것은 성령 체험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 안에 저의 데스티니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 삶이 달라지게 된 것이죠. 세상이 주는 어떤 보람과 기쁨보다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이 잔잔한 물결처럼 항상 내 마음에 스며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에 내 가족을 포함해서 내 이웃들에게 대하는 태도와 언어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야기를 다 요약하고 보면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을 때, 누군가를 사랑할 때, 거기에서 자신의 존재가 소중하게 느껴졌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돈, 빌딩, 이성, 높은 권력의 자리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내 인생의 의미를 결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 사람은 돈, 빌딩, 재산, 이성, 심지어는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들 때문에 자기가 소중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이 나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권력을 좋아하기 때문에 파리처럼 끼어들어서 나를 그렇게 해 줄 수 있지만 그 것 때문에 내가 진짜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소중한 존재가 든다라고 하면 내가 만약 돈도 없고 빌딩도 없고 지위도 없는데 나를 소중하게 여겨줄 사람들은 아니잖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소중함을 내가 찾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옆에 그림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다시 사랑합니다. 여기에서 또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연의 모든 만물들도 이렇게 학대하면서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진짜 우리들이 자연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저렇게 자연에게 고통을 주면서 사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때에 내가 정말 소중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의 의미를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사랑만이 이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라고 하는 인간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써 내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