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생명의 표, 형제사랑(요일3:14) 2001.8.13 온가족 여름수련회(오전) 1
2. 미움과 영적 파괴력(요일3:15) 2001.8.14 온가족 여름수련회(오전) 14
3.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요일3:16) 2001.8.15 온가족 여름수련회(오전) 26
4. 십자가로 돌아온 요한(요19:35) 2001.8.13 온가족 여름수련회(새벽) 41
5. 탕자의 귀로(눅15:20) 2001.8.14 온가족 여름수련회(새벽) 46
6.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호5:15) 2001.8.15 온가족 여름수련회(새벽) 53
1.생명의 표, 형제 사랑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니라”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입은 자녀의 사랑하는 삶에 대해서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경험한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신앙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요한은 한때 과격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뢰아 아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었고 과격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신앙의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요한이 가장 감동을 받은 부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통해서 이 사람은 결별할 수 없었던 옛 삶을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 죽음이 자신의 구원에 어떤 관계를 가져다주었는가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요한의 고민은 좀 달랐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만났고 그리고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 교회가 서게 되는 아주 중요한 세 기둥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가 라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임을 입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대답을 사랑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이 요한 일서는 '사랑의 서신'이라고도 불려지는 것입니다. 아주 원숙한 사도의 사랑에 관한 신학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성경 구절에서는 자칫하면 얼핏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교리 적으로 오해할지도 모르는 발언을 사도가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얼거니와 사랑치 아니한 자는 사망에 거하니라” 자칫하면 이 성경 구절을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서 구원받지 못한 사망의 상태에서 생명으로 옮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가 우리의 삶 속에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의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관계와 그 관계에서 맺혀지는 관계 즉,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신령하고 영적인 그 본질이 우리의 도덕적인 삶의 열매들을 가져오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러면서 그 열매를 통해서 그 나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도들의 논쟁의 방법은 사실은 예수님께로부터 배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나니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삶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열매라고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상입니다. 단순한 도덕적인 열매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없이도 얼마든지 맺힐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깊은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만이 나라를 사랑하거나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전혀 만나지 못한 사람들 중에도 뛰어난 자기 절제력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님을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자기 자신의 기질을 잘 통제하고 법을 지키면서 단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정과 불의를 행치 않고 상당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 대해서는 그런 종류의 자신의 본성에 직접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일반적인 도덕적인 생활에 대해서는 아주 적은 관심밖에는 성경이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향한 성경의 기대는 도덕적인 삶이 아니라 거룩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는 사용할 수도 없고 붙일 수도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고, 이 세상의 모든 거룩한 것은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에만 거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양을 보니까 교회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예식장에서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식장에 가면 성구라고 안 합니다. 그냥 가구입니다. 그리고 계산상으로는 그 회사의 자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기에서 쓰여지니까 색깔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성구지요. 이것이 노래방에 가 있으면 성구가 아니지만 그러나 여기에 와 있으니까 이것이 니나노가 안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니까 성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용도가 다 끝나서 밖으로 꺼내놓으면 폐품이 되는 것입니다. 부셔버리면 쓰레기가 되는 것입니다. 태워버리면 재가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 그것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성도라고 부르는데 얼마나 성도가 되었습니까? 그래도 한참 예수를 믿은 사람은 그래도 예수 믿는 와중에서 조금 변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지금 방금 예수 믿은 사람이 어떻게 성도일 수가 있습니까. 성도는 되어 가는 것인데 말입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아직까지도 옛 기질이 그냥 남아 있어도 우리는 그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에 그는 비록 하나님의 자녀답게 훌륭한 인물이 되지 못했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그 사람이 믿음과 신앙의 고백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거룩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주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이 그들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게 만들어줍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 가는 성품에 대한 지식과 그의 실제적인 삶이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설명을 해도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혹은 기도 중에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깊이 경험하고 그분의 마음속에 있는 이 애정과 인애를 깨닫게 될 때 그때 그것은 금방 그분의 성품을 아는 지식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성품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자신도 그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그 지식이 자기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움직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될 때 성도의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 공의, 그 다음에 진리, 신실함 이런 하나님의 많은 의로움, 자비 이런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깊은 감화를 받게 될 때 그것은 아주 실제적으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역할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감화를 받아 가는 그 모든 경험을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많은 성품 중에 하나이면서도 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도덕적인 성품들을 대표하는 성품이기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 적으로 볼 때 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에 완전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사랑도 사랑이고, 사람이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랑도 사랑인데 사람이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랑은 항상 결함이 있고 완전하지 않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은 완전합니다. 그때 불완전한 사랑을 대하다가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대하면 그것이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모든 도덕적인 성품들이 사람 속에도 그런 성품인데 하나님만 의로우신 것이 아니라 사람도 의롭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의로운데 그게 완전한 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결함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완전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거룩한 의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사랑이라도 상대적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기분을 좋게만 만들어주지만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도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함부로 굴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엄위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거룩의 영향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아간다고 할 때 그것은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자신들이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라고 하는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쫓아서 거룩하게 살려고 애를 쓰다가 보면 부수적으로 열매가 맺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도덕적인 생활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들이 가족들을 전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항상 영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그래도 내가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나 신실한 형제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그리고 내가 가르치는 지체들에게는 내가 진짜 본받고 싶은 스승이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그런데 집에서만 나를 무시하고 그리고 집에서만 나를 알아주지 않아. 그때마다 항상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집안에서 대접을 못 받는 것은 내가 표리부동하거나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집안 식구들의 마음이 인간적인 친밀함에 있어서 너무 강퍅해져서 예수님을 나사로 사람들이 못 알아보듯이 우리 집안 사람도 나를 못 알아 보나봐. 집에서 이렇게 인정을 못 받으니 나는 선지자가 분명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참 그렇습니다. 우리가 늘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 이 속에는 저 자신의 경험도 사실 많이 묻어 있습니다.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가운데 혹은 기도하는 가운데, 혹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해서 하나님이 나의 어떤 신앙의 문제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내 앞에 그렇게 살아서 되겠는가.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었는데 네가 그렇게 살아서 되겠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너무 아파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뉘우치면서 통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 말씀이 계속 해서 나에게 영향을 주어서 내 심령에 자유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그 말씀이 계속 나의 양심을 일깨울 때 그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용서를 빕니다.
그렇게 해서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 변화된 태도를 가지고 가족들을 대합니다. 가족들에게 좋은 아내나 좋은 남편, 그리고 좋은 아들, 혹은 좋은 형제가 되려고 자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니까 하나님이 이런 것이 싫다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주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알고 그 성품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너 남편에게 그렇게 대하면 안 돼, 너 아내에게 그렇게 하면 안 돼, 너 동기간들에게 그렇게 하면 안 돼, 너 네 아버지에게 그렇게 하면 안 돼. 이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지적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을 고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을 사랑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을 고치고 그것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하나님이나를 기뻐하시지 않으시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문제를 가지고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씨름하고 자기가 고쳐지고 나니까 그러니까 동기간들이 보기에 저 성질머리가 개떡같았는데 교회에 다니고 나더니 사람이 온유해지고 신중해졌습니다. 제가 부모 말이라면 죽어도 안 듣더니 계속 교회에 다니고 회개하고 그렇게 하더니 이제는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남편 알기를 개떡같이 알더니, 사실은 자기도 개떡 비슷하지만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가 존경받을 게 별로 없지만 저 사람이나를 보고 좋은 아내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고 오니까 하나님 때문에 나를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알고 변화된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도덕적인 열매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자에게 맺혀지는 도덕적인 열매와 하나님 없는 사람들에게 맺혀지는 도덕적인 열매가 모양은 거의 비슷할지 모르지만 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도덕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면 형제에게 선행을 하면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만약에 진정으로 주님을 모르는 영적인 어두움 속에 있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의해서 우리의 영혼이 변화되고 우리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교제가 있는 생명의 나라로 우리가 영적으로 옮겨졌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런 영적인 주님과의 관계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나는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서 그리스도와 맺게된 그 관계가 거룩한 관계라고 말할 것 같으면 그 거룩한 관계는 반드시 거룩한 생활을 가져오고 그 거룩한 생활에 있어서 가장 두드려지는 열매가 형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나 공동체가 사랑 없음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공격할 때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정리를 하십시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그것을 비판하거나 공격할 때는 신학적인 균형을 잘 잡으면서 그것을 접근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냥 직격탄을 날리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이 없는가. 너희가 어려운 사람에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구제 헌금을 얼마나 했는가. 너의 용돈이 얼마인데 그 중에서 얼마나 가난한 사람을 나누어주었는가 라는 식으로 직격탄을 날리면서 접근하는 것은 그 비판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까닥 잘못하면 외식에 빠지기 쉬운 사람으로 만들어내기 쉬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그런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라도 제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렇다면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왜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주지 않습니까? 하고 직격탄을 날리고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도덕적인 면들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을 하면 강한 자극을 받을 것입니다. 자극을 받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이면서도 진짜 남들에게 사랑을 베풀거나 선행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가책을 느끼면서 이제 뭐라도 해서 이제까지 못한 것을 보충해야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적인 감화가 아니라 '선동'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동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것이 한국 교회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인가 하면 뭔가 기독교의 근본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근본적인 것들을 다룸으로서 그 사람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생명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단지 그 사람이 구제나 좀더 하고 무슨 사회를 위해서 어떤 일이나 하고 자기의 삶의 한 두 부분에 있어서 신앙적인 감화와는 상관이 없이 정직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된 사람인가 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쳐지면서 그 거룩한 관계가 치료되는 가운데 도덕적인 변화가 따를 때는 그 도덕적인 열매를 인해서 결코 사람들이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도덕적인 열매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자기를 변화시키고 움직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 안에는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무엇인가 자신의 도덕적인 선동에 의해서 무엇인가 선행을 행한 사람은 자신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관계의 감화가 없고 자기가 해놓은 것이 어떤 도덕적인 성과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과 집착을 갖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리새인들을 너무 나쁘게 생각하는데 그 사람들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시대에 와서 바리새인들의 표준대로만 신앙생활을 여러분들이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놀랄 정도의 그 수준에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문제로 삼으신 것은 그들의 도덕적인 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럼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하면 그 도덕적인 생활에 기초가 잘못 되어 있거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그 신령한 관계 속에서 세워진 도덕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로 하여금 그렇게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었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라든지 감격은 없고 자기가 피 흘리며 성취한 도덕적인 결과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것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을 가지니까 그리스도가 그들 속에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들어오면 이런 것들이 아무 쓸데없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것을 빼면 자기들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의에 가득 찬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논쟁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상관없이 형제를 구제하라. 형제를 도와주어라. 형제에게 뭔가 선행을 하라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너희가 만약에 형제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심각한 것은 네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것이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이 있는데 네가 진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 사람인가. 이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인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받고 사도의 이런 논리에 접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자신의 도덕적인 삶의 문제를 자신의 신령한 하나님과의 문제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야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성화의 시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깡다구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동에 의해서 줄지어 따라가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보스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따라가는 똘마니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선동들이 난무합니다. 참 걱정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환영을 받는가 하면 그것이 굉장히 빨리 가는 길입니다. 언제 인간이 심령 깊은 곳에 변화를 받아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고 주님과의 신령한 관계에서 치료를 경험하고 그래서 그 감화 때문에 주님을 너무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그 주님을 추구하면서 살다가 보니까 거룩한 삶을 성취하게 되고 그러다가 보니까 도덕적인 열매가 맺히는데 이것이 신령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앓는 이 죽지. 이것이 언제 변화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하는가. 똑바로 해. 그리고 그것도 못하고 네가 예수 믿는 사람이야. 그러면 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되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사람 속에 있는, 신자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전부다 주님이 심판하시는 날에 불타서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자기는 열렬하게 주님을 위해서 살았는데 사실은 자기 자신은 하나님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단지 일로 존재하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그렇게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의 성화의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아주 치명적으로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 똑같은 교리의 맥락에서 사도가 오늘 이 사랑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너희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하지 않는다. 한번 더 나아가서 미워한다. 이것은 심각한데 왜 심각한가 하면 네 안에 정말 그리스도가 있는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사망에서 그리스도가 없이 살아가는 영적 삶이 사망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맺어진 새로운 성도의 영적 생활이 생명의 삶입니다. 그 생명의 삶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거기에는 형제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생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를 심어놓으면 그 나무가 살아 있는 증거가 봄이 되면 이파리가 피고 이런 것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화: 예전에 졸업식 때 꽃다발을 받으셨는데 나무를 잘라서 거기에 풀을 발라 스치로폴을 잘 게 부수어서 거기에 묻혀서 하얀 나무가 되었는데 너무 아까워서 집 앞에 꽂아놓고 잊어 버렸는데 그 나무가 뿌리를 내려서 하얀 스티로폴에 온 나무가 덮여 있었는데도 불구하 고 파란 잎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살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형제를 사랑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
그러면 어떻게 해서 신앙에 있어서 여러 가지 많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여러 가지 많은 삶의 특징들이 있을 텐데, 단지 형제를 사랑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살아갈 때 우리들에게 그렇지 못할 때와 비교했을 때 파악할 수 있는 차이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선 예수님 안에 거하지 못했을 때와는 달리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그분과 생명 적인 교제를 누리게 되면 뭐가 있습니까? 기쁨이 있습니다. 우울하고 슬펐는데 이제 예수님 안에 있으니까 기뻐요. 전에는 돈이 많이 있어도 근심이 되고 늘 슬펐는데 이제는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하면서 뿌듯해지고 자랑스러워집니다. 기뻐집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게 되면 의로운 삶을 갈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게 되면 정직해지게 됩니다. 예수님 이 내 안에 있어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면 기도도 잘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에 대한 사랑도 생겨나고 그리고 교회도 자주 나오고 싶어지고, 뭐 많은 변화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많은 변화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다 치워버리고 너희가 정말 예수님과 생명 적인 관계 속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너희들이 형제를 사랑할 것이다.
형제 사랑이 최고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사도의 저의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깊이 변화를 받게 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전에 하지 않던 많은 일들을 하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게 되면 교회에 안 다니던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일날 예배도 거의 나올까 말까 그러던 사람들이 새벽기도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성경 공부 모임에도 부지런히 참석을 해서 한자라도 배우려고 하고 그리고 무엇인가 거들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자신의 몸을 드려서라도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싶어하는 이런 많은 변화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런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도 그것은 모두 다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이고 하나님을 만나고 영혼에 신령한 변화를 받은 사람에게는 그 모든 변화가 따라오지만 그러나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신령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사람이 예전에 없었던 것 한 가지가 무엇이 있는가 물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가 그 모든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영적으로 변화되지 못한 상태 속에 살다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놀랍게 영적으로 변화되고 나면 그러면 그 사람이 여러 가지의 일들을 하고 예전에 안 하던 짓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을 시킨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난 것입니다.
영적 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회복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은 많은 불순종과 죄로부터 돌이켜서 그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으면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도덕적인 많은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은 모두 한가지의 변화가 가지고 온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결코 나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를 깊이 깨닫고 감화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사망과 어두움 속에 있던 그 사람이 변화를 받아서 새 생명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의로는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그 죄악 된 어두운 생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의 선행을 의지해서는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영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깊이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직면할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받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쓸모 없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자기 자신이 인간으로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자기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인 자신에게 부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구속의 감화를 통해서 변화를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나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용서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용서를 받은 대상은 사람인 자기 자신입니다. 이미 구원의 경험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랑이 나뉘어질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 구속의 경험에 의해서 용서를 받은 사람은 사람인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경험 그 자체 속에 이미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그 사랑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구원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영적인 침체 속에 살아가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사랑과 그 은혜에 깊은 감화를 받고 회개하게 되면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사랑도 같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통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사도가 “너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서 그것을 통해서 너희가 그리스도 없는 사망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명의 자리로 옮겨간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간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 것을 통해서 너희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 문맥상 사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형제들 속에서 사랑이 구체화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이런 것을 가지고 논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존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충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 하나님과 신령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치우쳤다거나 이런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 자체가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이기 때문에 너희 자신의 생각에는 신령한 하나님과 생명 적인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이 눈에 보이는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그 형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스스로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령한 그 교제에 대한 확신이 잘못된 것이다. 그것을 여기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 이것은 사도의 이야기였고 그 다음으로 여러분들의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 이 문제를 검증해봅시다. 언제나 우리의 신앙의 체험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잘 분별되기만 하면 우리의 신앙의 경험은 성경 다음으로 우리에게 소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주님을 믿으며 이제까지 살아왔는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깊은 만남을 경험하고 예전에 영적인 관리를 잘못해서 어둠과 방불한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가 거의 끊어진 가운데 살다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여러분들 속에 다시 생겨나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럴 때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여러분들 속에 일어났을 때 그때 여러분 속에는 항상 공통된 회개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맺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맺힌 삶들과의 관계를 가지고 회개하는 일들이 꼭 필요했습니다. 이처럼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엮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알고 나니까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그를 감동시켜서 그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때는 결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죄가 심각하다라고 하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항상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1907년에 있었던 평양의 대 부흥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부흥을 설교하는 가운데 부흥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선교사가 사랑을 설교하는 가운데 하늘을 가르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선교사가 ‘이기랑’ 선교사로 기억하는데 우리말로 바꾼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예를 들었는가 하면 선교사가 사냥을 나갔습니다. 선교사가 왜 사냥을 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도 아버님이 사냥을 좋아하셨는데 그때만 해도 그런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총을 탕 쏘면 이 총이 격발이 재대로 안 되고 총신이 터진다든지 그래서 위험한 일들이 많이 발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총을 쏘다가 조작을 잘못해서 총알이 새끼손가락을 스쳐서 다쳤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아파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야기를 예화를 들어준 것입니다. 내가 사냥을 하다가 총을 쏘는데 사고가 나서 새끼손가락을 조금 다쳤는데 온 몸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아프고 다리도 쑤시고 해서 며칠동안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작은 지체가 하나님 앞에 실족하고 고통을 받아도 머리이신 예수님까지도 아파하시고 그리고 다른 건강한 모든 지체들도 아파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 적인 연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느낀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교회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 각자 각자의 영적인 상태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요지로 설교를 했는데 막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 받기 전에 사람들은 항상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많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여러분들은 건강합니까? 여러분들의 신앙의 건강함을 예배에 참석하고 철야 기도에 나오고 그런 것을 가지고 건강함을 재려고 하면 안 됩니다. 교회 제일주의로 생활하는 것, 그런 것만을 가지고 영혼의 건강함을 재려고 했다가는 언젠가는 여러분들이 크게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교회에서 오라고 하면 다 집어치우고 달려오고 가정에서도 교회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집안일 다 집어치우고 교회로 달려오는 것에 의해서 영혼의 건강함이 판단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분명한 시금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혼에 대한 건강함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지체를 보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그 영혼이 병들어있는 것입니다. 새끼손가락 하나가 찢어져서 피가 흐르는데 머리도 정신이 집중이 안 되고 온 몸에 고통을 느낍니다.
(예화: 집회에 가셨는데 손이 닿지 않은 부분이 가려워서 고통스러웠는데 다행히 괜찮아서 설교 를 하셨다는 이야기, 설교를 하시는 가운데 설사가 나오려고 할 때 통성 기도를 시키고 화장실에 갔다가 왔는데 몸에 작은 한 부분에 일어나는 변화를 온 몸이 감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는 이야기)
마취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일시적으로 병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부분 마취를 하면 수술대에 누워있으면 다리나 이런데 서거 서걱하고 가위로 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부분 마취를 하고 있으면 다 들립니다. 그런데 거기서 막 살가죽을 잘라내는데 통증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를 병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건강함은 단지 종교적인 열심에 의해서만 우리의 영혼의 건강함이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지체 중 한사람이 고통받을 때 정말 고통으로 느껴집니까? 주님을 진실하게 믿던 어느 지체가 실족했다 라는 소식이 들릴 때 정말 가슴이 아픕니까? 주님을 멀리 떠나 있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던 수많은 지체들 중 하나가 어느 주일날 다시 주님께로 돌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새 사람이 되기를 결심할 때 정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천하를 얻은 것처럼 뛸 듯이 기쁩니까?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만큼 그 영혼의 소생함이 여러분들에게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작은 지체 하나에 고통 하는 생활 견디기 힘든 상황의 환경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잠시 편안한 생활을 할 때에도 고통받는 생활을 하는 지체의 생각이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리고 누구는 고통을 받고 아파하는데 나는 이렇게 지내도 되는가 하는 자극을 가져다줍니까? 그런 것이 영혼의 건강함의 표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그런 예민함을 가지고 고난받는 지체들을 인해서 함께 아파하고 우는 자들과 울고 웃는 자들과 웃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베풀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십자가의 그 큰 은혜를 가슴에 간직하고 영적으로 깊은 변화를 추구한다면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그런 영적인 변화를 통해서 무엇을 돌려 드릴 것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서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그리고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여러분들이 가득 채워지고 나면 여러분들은 그 지식과 은혜를 가지고 지체들을 부지런히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운동이나 선동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우이웃 돕기나 어떻게 하자고 하는 선동이나 이런 것들에 의해서 되어져야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연약한 지체들을 돌보고 그 지체들을 사랑하고 하는 이 일들은 훈련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훈련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깊이 감화를 받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 같이 쓸데없는 죄인에게 미쳤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사랑의 부채의식을 느끼는 개개인의 영적 생활을 통해서 이런 것들이 구체적으로 구현되어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다. 그러면서 지체들을 섬기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대접을 못 받는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도 주님을 주님답게 대접해 드리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와도 그리고 아무리 많이 섬겨서 수많은 지체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고백이 항상 가슴속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연약한 지체들을 돌보면서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체들은 기도의 도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섬김과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연약한 지체는 경제적인 섬김만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와 함께 해주고 그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고 쓰러지려고 할 때 그를 붙들어 주고 누군가 뜨거운 사랑으로 그 지체를 감싸안는 그런 따뜻한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말씀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 현저하게 결핍된 지체들은 단지 따뜻한 호의나 사랑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어떠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쳐 줄 수 있는 가르침의 섬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렇게 함께 주님의 사랑에 감화와 은혜를 받은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고 그 형제를 자신보다 훨씬 낫게 여기면서 그러면서 그 형제를 위해서 섬기는 일을 명예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져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안 사람들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하면서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가 우리 개개인을 향해서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고백을 하고 나니까 그렇게 개인적인 고백을 통해서 만나게 된 형제들이 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사랑의 필요성이 점점 더 증대됩니다. 진리에 목마르지 않은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갈증을 갖습니다. 복음에 목마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는 목마릅니다. 복음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목마름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목마른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논리적이지 않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어리거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교리 적인 논리를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분별력이 있지 않습니다. 그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미 그런 사랑에 교리들을 깊이 이해하고 체험한 성도들이 그들의 무지까지도 그런 연약함으로 알고 기다려줄 수 있는 섬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영혼이 무지의 껍질을 깨고 변화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를 가르치고 사랑하고 섬기고 돌보고 그래서 그 사람 자체가 자신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 그를 섬기는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그런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지체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여러분들의 달란트로 여기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체들을 섬기고 지체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지체들을 위해서 섬기는 종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 그런 섬김이 여러분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신령한 관계 속에서 은혜의 빛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사랑과 그 은혜는 그런 신령한 은혜와 감격을 항상 간직하고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받고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돌이킴과 회개, 은혜와 신앙의 감격을 주시면 주실 수록 그것을 깊이 받아들이면서 부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니 더 많이 종이 되어야 하리라.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주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았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친절한 안내자가 되리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령한 은혜를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격처럼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의 받은 바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신령한 은혜 체험에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경험은 우리가 아무리 신령한 세계를 많이 알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미치게 된 그 모든 좋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섬기고 사랑하고 어느 한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는 지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렇게 섬기면서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또 자기를 향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터득하면서 살아가는 이 삶이 은혜 받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여러분들의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많은 지체들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변화 받는 삶을 살아가도 그렇게 주위의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더욱 소외감을 느끼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지체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강퍅하기 때문에 변화 받지 못한다고 그렇게 말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이 변화 받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강퍅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충분히 기도하고 친절과 위로로 그 형제들을 섬기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섬김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고 우리의 사랑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도 자신을 돌이키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조차도 그런 중보 기도의 섬김과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의 무릎을 꿇는 섬김을 통해서 자신들은 영적으로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화를 통해서 느끼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두 그런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변화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알고 이렇게 지체들을 섬기면서 살아감으로 끊임없는 영적인 성장에 좋은 유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미움과 영적 파괴력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우리들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나면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 중에서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 주제와 관련된 것 하나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즉 사람이 은혜 안에 있을 때의 생각과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을 때 생각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은혜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생각들이 분명하지만 은혜 안에 있지 않을 때는 죄에 대한 생각들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큰 죄와 적은 죄를 상식으로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자기가 생각하는 ‘이것은 큰 죄이고 이것은 적은 죄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맞을지 모르지만 항상 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미움의 죄입니다.
특별히 여기에서는 일반적인 미움의 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들 속에서의, 자매들 속에서의 미움의 문제를 사도가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굉장히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정도는 그렇게 큰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하는 도적질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거나 음탕한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 때는 황망하게 놀라면서 내가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생각을 하지하고 가책을 느끼지만 사람들을 미워하는 죄를 가지고 진지하게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심령을 만지기 전에는 별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스쳐 가는 음욕이나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강력한 탐심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없어도 저절로 마음속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항상 모든 사람이 불 경건한 욕망에 불붙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이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기 전에 옛날에 미워하던 사람을 아직까지도 미워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옛날에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은 요즘도 마음에 잘 안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미움의 죄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다른 어떤 죄보다도 굉장히 뿌리가 깊은데도 우리는 그것을 항상 과소 평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실제에 있어서는 사람을 미워하는 이것은 하나님께 드린 우리의 모든 예배와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를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혹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물을 가지고 주님 앞에 왔다가 그때에 누군가에게 혐의가 있거든 그 예물을 드리지 말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목한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그 명령을 준행하지 않고 그가 무작정 예물을 주님께 드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그런 향기로운 제사가 아닙니다. 그는 그의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사는 신앙의 행위지만 주님이 받지 않으시는 제사의 행위는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행하는 차가운 종교적인 행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미움의 문제를 아주 사소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죄는 몰라도 미움에 문제에 있어서는 누구도 성경의 이런 지적에 대해서 자유 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입은 다음에 받은 가장 큰 부르심이 성화의 소명이라고 할 것 같으면 마지막 우리가 성화 되기까지 끝까지 성화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우리의 내적 본성 중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을 미워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특별히 이 미움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구원을 받은 형제일 경우에는 그 미움이 배나 더 하나님께 심각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이지만 그가 미워하는 한 대상이 주님을 믿는 사람이 아닐 경우에는 그 사람이 그를 미워함으로서 받는 고통과 악,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은 개인 안에 머무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연결이 되지만 그러나 가깝게 보면 개인 안에 자기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부름을 받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미워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섬기고 있고 또 깊이 사랑하는 공동체를 한편으로는 섬기면서 한편으로는 허무는 행동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있거나 서로 깊이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것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입니다. 교회의 공금을 횡령을 하거나 교회의 명예에 중대한 손상을 입힌 사람들은 교회에서 징계를 합니다. 그래서 치리를 해서 그 사람들을 적당한 벌을 줍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교회 안에서 깊이 미워하고 형제를 깊이 시기했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을 치리 하거나 벌하는 경우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때때로 사람을 깊이 미워하고 형제를, 자매를 깊이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이 문제는 우리들이 공공연하게 짓는 어떤 범죄보다도 더 크게 하나님의 교회의 생명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초대 교회에서 부흥의 강력한 불길이 일어나다가 6장에 와서 그 부흥의 불길이 멈추는 광경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교회가 구제하는 일로 인해서 히브리 파 과부들과 헬라 파 과부들,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 이 부류에 알지 못하는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원망하는 마음은 항상 적당한 분량의 미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부어주시는 강력한 그 권세에 의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열차와 같이 지나왔습니다. 핍박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매도 맞고 고난을 당했는데 신기하게 그 힘찬 복음의 전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핍박과 시련, 고난으로도 끌 수 없었던 그 복음의 불길이 잠시 꺼지는 듯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밖에서 오는 시련이나 고난 밖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원망과 미움의 문제였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 강력한 시련과 고난의 위협 앞에서도 꺼지지 않던 이 은혜의 불이 사람들이 미워하고 원망하기 시작하자 교회 안에 찬바람이 불고 딱 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문제를 사도들이 적절하게 다루고 사람들 속에 다시 화해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니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 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의 무리를 복음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강력한 전진의 역사가 제기되었습니다. 이처럼 아주 강력하고 놀라운 영향력을 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구제하는 문제를 가지고 히브리 파 과부들보다도 헬라 파 과부들이 무엇인가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사실 그것을 교회 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교회 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에서 보면 그 사람들의 원망하는 마음, 원망을 사는 그런 태도들 그래서 결국은 마음속에 들어온 미움의 죄들이 핍박과 칼날로도 끌 수 없었던 복음에 강력한 불길을 꺼트렸습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를 아주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가 그 안에 영생이 없다는 표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는데 하나는 사도가 수사법 적으로 어제 말씀드린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너희가 만약에 형제를 계속 미워하면서 산다면 너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에 갖지 못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람을 정말 미워하면서 살아가는 이것은 바로 주님이 그 사람 안에 안 계시다는 표다. 그런데 너희들은 주님이 너희 안에 계신 사람들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희들이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경에서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구원받은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근본적으로 가려내는 그런 결정적인 구원문제에 관한 것만이 영생이 아닙니다. 이것은 희랍어 본문으로 보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는 신령한 영향력의 생명성을 가르쳐서 영생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만약에 계속해서 형제를 미워하면 너희 안에 영생이 없다.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입니까? 너희가 그렇게 해서 살면 너희 안에 주님이 충만하게 역사 하시지 않는다.
자, 똑같은 비슷한 고백을 사도 바울이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네 안에 사는 이 그리스도시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혹은 “네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죄 죽임을 통해서 충만한 영적인 상태에 도달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자기가 못 박혔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고 그리고 내 안에는 주님만 살아 계시다 라고 느꼈으니까 사실 주님이 내 안에서 거의 죽으신 것처럼 느껴지는 영적인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같은 곳에서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거기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가 안 계신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는 계십니다. 그러나 언제나 같은 영향력으로 우리 안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은혜가 역사하고 그 은혜가 충만할 경우에는 정말 나는 없습니다. 내 안에 사시는 이 주님밖에는 없습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해 만족합니다. 자기는 찬양 받으시는 주님께 완전히 굴복합니다. 그렇게 굴복된 상태가 마치 죽은 상태와 유사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그때는 주님이 완전히 살아 계십니다. 그러나 죄악이 그를 삼키고 영적인 어두움이 찾아오게 되면 분명히 한번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우리를 버리실 리는 없는데 우리의 마음 구석을 아무리 찾아봐도 주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로는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미움이 가지고 있는 신자의 내면 세계에 대한 영적 파괴력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속에서 예수 안에 있는 참 생명의 역사 하심이 고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살면서-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 누군가를 지겹도록 미워하면서 산 사람의 얼굴은 그 얼굴 자체가 파괴적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도 늘 사랑하고 이렇게 하면서 산 사람은 정말 얼굴 자체가 다릅니다.
제가 2년 전에 호주에 갔을 때 무슨 산인지 이름도 모르는데 어떤 깊은 산꼭대기였는데 여기는 꼭 한번 들렸다가 가라고 해서 가보니까 산 하나를 전체를 도는데 구석구석에 조각들을 해놓았습니다. 그 조각이 무엇인가 하면 인디언들이었습니다. 호주에 인디언들이 아주 평화스럽게 살고 있었는데 영국 사람들이 건너와서 거기를 대신 차지하게 됩니다. 그때 아주 무자비한 학살이 이루어집니다. 주일날 예배 드리고 원주민을 사냥하러 가자. 하고 예배를 드린 사람들이 성경 찬송을 놓고 총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그리고 누가 많이 쏴 죽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짐승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캐나다도 마찬가지고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역사를 읽어보면 아주 깊이 우리로 하여금 반성하게 만드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 또 길어지지만 하여튼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죽이는 광경을 다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디언들을 대검으로 찔러서 죽이는 장면,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 이런 것들을 다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스럽게 살아가는 인디언들의 모습을 다 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국 사람도 마찬가지고 캐나다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신대륙을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는 진짜 하나님이 가슴아파하시는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교도들이기 때문에 이제 가서 그들을 이렇게 진멸하고 죽이면서 땅을 정복해 가는 과정을 제국주의적 식민주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토벌 작전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 청교도들조차도 메인플라워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갔을 때 뭘 알아요. 이미 벌써 이민이 1620년 전에, 그때 벌써 한 80-100년 전에 그 영국 사람들이 이주를 갑니다. 그곳에 90여명 정도가 이주를 갑니다. 4년 뒤에 사람들이 가보니까 모두 다 죽었습니다.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었습니다. 그때 1620년 전에 그 잔혹한 이민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으로 건너갔을 때 그 두려움과 떨림이 어떻겠습니까?
그때 와서 거기서 곡물을 기르는 법, 맹수를 퇴치하는 법 거기서 생존하는 방법들을 인디언들이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첫 번째 ‘댕스 기빙데이’(?)는 인디언들을 모두 초청해서 함께 지냅니다. 그때는 그 사람들이 그들을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나자 이제 아무래도 땅을 정복해가려고 하는 의지를 갖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토벌되어야 할 가나안에 악마적인 원주민이라고 규정을 하면서 자기들의 어떤 식민주의적인 영토 확장을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정당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인디언들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인디언들은 그 대륙에서 그 낯선 사람들과 함께 공생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서로 도우면서 그런데 그런 기본적인 것을 깨트리는 것이 서양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들은 또 다르게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호주도 똑같은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할아버지인데 돌아가셨는데 거기에서 일평생을 그 산 속에서 그 인디언들을 학살한 호주 인들을 대신 참회하면서 평생을 사셨다고 합니다. 심지어 노벨 평화상 후보로도 올라갔는데 개의치 않았고 그리고 도시에 한번도 내려오지 않고 그 산 속에서 일평생을 인디언들을 위해서 지은 그 호주 인들의 죄를 뉘우치면서 살았습니다. 테러의 위험도 굉장히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산 속에 통나무로 지은 전시관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면 그 분의 살았을 때 장소를 설명하고 인디언들의 대한 사랑과 호주 인들의 죄를 참회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크리스천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 크리스천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80도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이빨이 빠져서 말도 헛 나오는데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저 모습이 사람을 사랑하면서 산 사람의 모습이구나. 진짜 성자의 기품이 그 속에서 느껴졌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사람을 사랑하면서 산 사람과 미워하면서 산 사람들이 그렇게 차이가 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작용이기 때문에 마음에 있는 상태가 장기적으로는 모두 이 얼굴 표정과 그리고 자기 신체를 통해서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의 생명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군다나 그 피로 구속함을 받은 형제를 미워하면서 살아갈 때에 그것은 형제를 향해 칼을 뽑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영혼을 작살을 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미움은 아주 사단이 하나님의 성도들을 지속적인 죄 가운데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아주 훌륭한 코걸이입니다.
이런 상상을 여러분이 한번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말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말에 힘이 얼마나 셉니까? 우리 어렸을 때 보면 연탄을 나르고 자갈이나 모래를 나르는 것 모두 말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이 세고 그 엄청난 위력을 가진 말을 결국 무엇으로 통제하는가 하면 제갈 하나로 통제를 합니다. 막 달려가는 놈을 급정거하고 싶으면 입을 확 잡아 당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가 찢어지는 것 같으니까 발을 들고 살려달라고 난리를 치면서 스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들은 급브레이크 정도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입이 아파서 서는 것입니다. 말귀를 알아들어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은 자유롭지요? 앉을 수도 있고 일어설 수도 있고 화장실에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습니다. 여기저기 다 돌아다닐 수 있는데 여러분들의 이 코를 젓가락 하나 정도로 들어갈 정도로 딱 잘라서 끊어지지 않는 링을 하나 박고 거기다가 기다란 밧줄을 하나를 잡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손가락 하나로도 여러분 모두를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탁 끼어서, 원하는 대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사단이 그것입니다. 미워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미움의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때는 어디든지 의지적으로 움직이고 다닐 수 있는데 일단 무엇인가 미움이 가슴에 확 꽂히고 나면 그 다음에는 사슬 하나가 걸리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끌어낼 수 있고 말씀을 듣는 사람을 벌떡 일으켜 세울 수도 있습니다. 순종하며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을 확 잡아 당겨서 불순종의 길로 걸어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가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탁 끼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나쁩니다. 그리고 모든 죄는 우리의 영적 생활을 파괴합니다. 모든 불순종 중에서 좋은 불순종은 없습니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는 안 그렇습니다. 병균이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나쁩니다. 그러나 예방 주사에 들어가면 좋습니다. 그것을 맞아야지 만 뇌염에 안 걸립니다. 그러나 불순종은 약이 되는 불순종, 영적 생활에 유익을 주는 죄는 없습니다. 모두다 나쁩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발적이고 이렇게 저렇게 죄를 짓는 것도 나쁘지만 그것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결정적인 문제를 안겨주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결정적인 문제를 안겨주고 우리의 영적 생활을 앉은뱅이로 만들어버리는 죄는 무엇인가 하면 지속적으로 짓는 죄입니다. 그런데 미움은 대게 간헐적인 죄입니까, 지속적인 죄입니까? 오늘은 애가 미웠었는데 내일은 애가 너무 사랑스럽고 애가 갑자기 미워. 저녁때는 애는 괜찮았는데 또 애가 미워. 이렇게 돌아다니는 감정은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과 미움이 백지 한 장의 차이입니다. 너무 뜨겁게 사랑했는데 사람이 변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자고 일어나니까 아니더랍니다. 애가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저녁때가 되니까 애는 싫고 제가 좋아. 그런 사랑의 감정은 없습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속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지속적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도 비교적 지속적입니다. 미움과 사랑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마음에 한번 탁 들어오면 그냥 잠깐 머물렀다가 가려고 하지 않고 들여보내 주면 살짝 들어오고 들어오게 내버려두면 앉으려고 하고 앉아 있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거기에 들어 누우려고 그러고 들어 누워 있는 것을 내버려두면 등에서 뿌리가 나서 털썩 달라붙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생활에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생활이 궁극적으로 무엇입니까? 사랑 안에서 그 뿌리가 굳어져서, 뿌리는 박으면 그 뿌리 때문에 견고해지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번뜻 하고 아! 주님 정말 사랑해요. 그리고 그 다음에 눈물을 씻고 나면 별로 인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뿌리를 내려서 쭉 뿌리를 박아서 견고해서 자기도 어찌할 수 없이 그 사랑에 매여서 사는 그런 일치된 그 영적 생활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과 그저께 저녁에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애가 아침 구름과 같다고 주님께 비난을 받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런데 미움도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어떤 미움이 생기고 나면 그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아주 좋은 일이 일어나 봐야 미움의 성장을 멈출 수 있을 뿐이지 미워하는 마음을 졸지에 바꿔서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질문 하나 하겠는데 여러분들이 굉장히 누군가를 미워했는데 누구든지 좋습니다. 미워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을 아주 뜨겁게 사랑하게 된 경험이 있으면 한번 말해보십시오. 더군다나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된 경우가 있으면 말해보십시오. 거의 생겨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런 미움의 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름 받은 형제를 향한 미움일 경우에는 그것은 자신의 영적 생활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 미움이 노출되어서 행동으로 표현되었을 때는 상대방의 영적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표현되지 않았을 때는 상대방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나를 미워하는지 안 미워하는지 나는 이름도 잘 모르니까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는 아주 깊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칼로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들이 오해하기 쉬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미움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표현이 되어서 그를 헤치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별로 죄가 아니다.’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인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이 미움 그 자체는 마음의 죄입니다. 교리문답에서도 보면 우리의 죄에 대해서 말할 때 외면적인 죄와 내면적인 죄를 가지고 말하는데 외면적인 죄가 살인, 간음, 사기, 도둑질 이런 것들이 있다면 내면적인 죄는 미움, 시기, 부패한 욕망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자신의 어떤 영적인 생명을 철저하게 고사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그런 강한 미움을 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실 리가 없습니다. 피묻은 칼을 가슴에 품고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뭔가 좀 예배를 드리고 열정적으로 하나님께 빠지려고 하면 야, 그 칼을 버려라. 그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버리고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간직한 채 뭔가 이렇게 하나님과 열정이 있는 관계로 회복하고 싶어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영혼의 건강함을 위해서라도 미움의 문제를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온전히 공경하던 사람도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차게 되면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께 매우 불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미움의 죄로 말미암은 그 불결은 여타의 도덕적인 불결보다 훨씬 더러운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 안에 주님의 참 자유가 없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참 사랑이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껍질만 살아가는 아주 메마른 신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움의 출발은 대게 원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늘 원망을 많이 하는 사람, 작은 일에도 격분하고 작은 일에도 섭섭한 상처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생활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미움은 그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을 초토화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다른 죄들은 자기를 공격하는 상대방이 보이는데 미움은 그 상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저 사람을 내가 미워하면 그 사람으로부터 미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화살이 날라 온 것이기보다는 자기 안에서 여러 가지 이기적인 욕망들이 돌출 되면서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우리를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즉 그 안에는 예수의 참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영혼에 참다운 회복을 원한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기도가 막히고 말씀이 여러분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고 주님의 은혜로운 생명의 영향력들이 여러분 속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깊은 성찰과 반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여러분들이 그렇게 여러분 마음속에 묶어놓은 사람들을 풀어주고 그리고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거두어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화의 경험을 통해서 보면 참 놀라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한 사람이 누군가를 깊이 미워할 때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진실 되게 기도하기만 하면 이미 그 사람 속에서 사랑이 이기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미움의 감정을 품은 사람들이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그 사람과의 진정한 화해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서 끌어안고 악수하고 다 위선입니다. 자기 속에서 먼저 풀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단 누군가를 미워하는 죄를 그것이 죄라고 생각을 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받아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리고 그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기도하기만 하면 이미 그 사람 속에서 사랑이 미움을 이기기 시작하는 중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싫은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조차도 싫은 것입니다. 다 경험입니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해도 다 못하는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왜 기도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의 영혼을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기도를 많이 받고 싶으면, 생략하겠습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입니다.
여러분, 아주 정직하게 고백을 해보십시오. 여러분 아주 미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서 충분히 기도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기도를 했으면 지금 미워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라고 제가 말씀드릴 때 그 사람의 얼굴이 안 떠오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여러분, 정직하게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또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모르고 그러니까. 그런데 나를 집요하게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인 기도라도 괜찮습니다. 아니 형식적인 기도라면 말이 안 되지만, 마음이 충분히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일단은 내가 미운 사람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대한 거기에 진심을 담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안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도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미운 사람에게 하나님 아버지 두들겨 패서라도 저 인간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어떤 부인이 예수 안 믿는 자기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닙니다. 하나님, 저의 원수 기억해주시옵소서 원수라고 합니다. 그것도 원수라고 안 그렇게 하고 왠수 라고 했습니다. 실화입니다. 하나님, 저의 저 원수를 주님이 기억해주시고 하나님, 저를 흔들어서라도 하나님 정신차리고 돌아오게 만드시옵소서.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야, 네 남편 네 원수인데 네 손 좀 봐야지 되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러면 하나님 안 됩니다. 인격적으로 어떻게 타일러서 주님께 돌아오게 해주실 수 없을까요? 그렇게 기도해야지. 그러니 복음화가 요원하지.(?)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천둥번개가 쳐서 뒤집혀지는 일들만 통해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갈망이 영혼에 대한 갈망보다도 훨씬 큽니다. 그런데 사실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영혼을 향한 갈망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갈망을 바라보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막 이렇게 치실 때 내 남편이 당하면 나도 얼마나 아플까. 이런 것은 없습니다. 먼 산에서 막 고생하면 생고생 좀 해봐라. 이 자식. 우리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너는 짐승이래. 거기서 한번 땅바닥에서 아주 혓바닥이 나오도록 구르면서 짐승 가나 불러라. 그리고 다 얻어맞고 그냥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면 그때 내가 받아주지. 그러니 가정 복음화가 될 리가 있습니까.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울리는 징과 같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랑해야지. 회개하고 돌아와. 다 사랑해주지. 하나님이 하늘에서 너희들 죄를 다 씻고 천국으로 올라와라. 그러면 사랑해주지. 해준다니까. 그랬습니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죄 가운데 사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도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 예수님이 내려오셨습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을 위해 살고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그들의 죄를 위해 희생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런 사랑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웃으면서 들었지만 70%이상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중보 기도가 될 리가 있습니까? 그렇게 뻣뻣한 것입니다. 마귀가 역사 하는 저 인간, 이것은 순전히 영적 전쟁이다. 저 안에 있는 저 술 좋아하는 귀신, 담배를 피는 저 마귀 저것을 두들겨서 내쫓아야지. 그런 식으로 비인격적으로 생각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예화: 어떤 부인이 남편이 예수를 안 믿어서 밤새 철야 기도를 하고 왔는데 남편이 친구들을 잔뜩 데리고 와서 술상을 보라고 하면서 구박을 하기에 술상을 봐서 친구들에게 집어던 졌다는 이야기)
복음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결국은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사랑의 문제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먼저 알고 그 사랑을 받은 것은 엄청난 빚 덩어리입니다.
(예화: 친구 중 한 사람이 교회에 다니시는데 부인이 믿지 않는 사람이라 남편을 핍박하는데 힘 들게 사는 그 친구를 보고 왜 그렇게 하며 사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님 때문에 산다고 하 면서 아내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는데 그 부인이 먼저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렇게 핍박을 받으며 살지 않을 것인데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짐을 지고 산다는 이 야기)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빚 덩어리입니다. 한번 그 사랑에 빚을 지면 버리고 희생해야 할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말씀이 위로가 되는군요.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못 받았는데, 참 큰일날 뻔했군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주님의 사랑을 먼저 알았기 때문에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하는데 나는 용서해. 내가 그를 위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데도 그 사랑을 모르고 나를 박해해. 그때 그를 마음으로 용서하고 끌어안고 사는 삶은 고통스러운 삶이지만 그 고통을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님 섬기고 주님이 사랑하라고 한 영혼들을 끌어안고 사랑하면서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은밀한 그 기쁨과 그 놀라운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인정하심, 그리고 주의 자비로우신 그 위로 이런 것들은 받아본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모릅니다.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받아본 사람이 아니면 모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빚 덩어리가 되어서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았기 때문에 더 많이 용서하고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이 희생해도 여전히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안 받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라는 그런 자연스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너희 안에 영생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해주셨어도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엄위를 보이시고 회개하고 자기의 죄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사유하시는 긍휼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긍휼과 은혜를 입고 나면 자기가 빚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이 항상 맺힌 관계를 풀고 미워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풀어나가서 화목한 관계로 만드는데 있어서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니까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형제가 나보다 훨씬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 미움의 문제가 아닐 때에는 누가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만 하면 옆에서 입에 침을 바르고 자기가 받은 은혜를 무시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은혜를 받은 사람인데 자기는 존재 자체가 은혜 덩어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이 빚진 사람이라고 하니까 네가 먼저 용서해라. 그러니까 돌변하는 것입니다. 재도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자기가 와서 잘못했다고 눈물을 흘리면 내가 근엄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괜찮아 이렇게 이야기를 해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위세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이 서로 미워하고 화목하지 못한 관계가 되었을 때 그때 자기가 자기 발로 걸어가서 -예수님께서 “가서” 그랬습니다. -무릎을 꿇고 너를 미워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자유가 없는데 이것은 모두 나의 죄 때문이라고 용서함을 비는 그 사람이 그 사람보다 훨씬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보내신 사자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일수록 한번 맺힌 것을 풀지 않습니다. 가증합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보다 역사 하는 힘이 큰 것은 막걸리 한 사발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 막 재떨이를 집어던지고 싸우다가도 직장 끝나고 가서 막걸리를 먹으면서 미안하다고 하면 다 풀어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번 맺히고 나면 풀지 않습니다. 우리 서로 같이 이렇게 잘 용서하고 화해하고 지냅시다 그러면 기도해볼게요. 뭘 기도해봅니까? 즉각적으로 순종해야지 될 것이 있고 기도해서 응답 받아야 할 것이 있지 뭘 기도를 해봅니까? 그렇게 한번 맺힌 것을 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미움은 미움대로 창고에 넣고 또 이쪽은 이쪽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미워하면 주님의 영생이 그 사람의 속에 없을까? 그 죄의 심각성 때문입니다.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미움은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미움이 어떻게 살인이 되는가 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선 무엇인가 하면 죄와 어떤 완성이라고 하는 것과 관련지어서 설명해본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최초의 작은 죄는 궁극적으로 마지막에 끝까지 가고 싶어하는 그 결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만한 마음은 환경만 조성되고 끝까지 내버려두면 무엇으로 발전하고 싶은가 하면 하나님보다 높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이 가고 싶어하는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논리에 의해서 미워하는 것은 결국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가 하면 마지막에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살인입니다. 살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는데 죽이는 것이기보다는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워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적극적인 악을 가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이 미움의 감정입니다. 그가 미국에 있는 데도 싫은 것입니다. 소련에 있어도 싫고 어디에 있어도 싫은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움의 감정의 끝입니다.
그렇게 설명이 되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왜 미움을 살인이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마음으로 그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실행을 하지 않았어도 여기서 살인을 하지 않았어도 살인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살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의 간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마음에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라는 말이 덧붙입니다. 실제 간음과는 다릅니다. 이것도 마음의 살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를 자기 속에서 수없이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죽이는 그 죄의 영향력이 아주 굉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고갈시키는 것입니다. 자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깊이 용서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미움의 마지막 해결책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 생명력이 우리 안에서 복원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면 항상 제일 먼저 그 문제를 위해서 기도해야지 됩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오늘은 충분히 마음이 따라오지 못했지만 내일은 더 마음이 따라오고 더 마음이 따라와서 그래서 그 영혼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그리고 그 영혼을 축복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속에 사랑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자유함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영적인 생명력들이 다시 역사하고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 힘듭니다. 그 힘든 과정을 통해서 십자가에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지불하신 그 희생의 대가를 우리 자신이 몸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 모든 성화가 그렇지만 직접적인 십자가의 감화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들과 우리 속에서 진정으로 화해할 수 없습니다. 그를 정말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끌어안고 용서할 때는 너무 힘들지만 그때마다 예수님께서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그런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주님의 그 고난에 참여하는 길을 배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 십자가의 감화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사도는 이제 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옳지 못하며 그 형제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가를 1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갑자기 형제 사랑의 문제, 그리고 미워하지 말라는 문제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의 사건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형제 사랑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치고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사랑은 세상에서 가르치는 일반적인 동포애나 혹은 이웃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사랑이 많고 적음, 그런 문제보다는 기초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가페의 사랑의 원주인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께로부터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그 아가페의 사랑을 흉내내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함에 있어서는 사람 속에 있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될 수 없지만 그러나 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 가르치는 이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이 나누어지지를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라는 단어를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희랍어로 ‘아가페 토이’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아가파워’라고 하는 “사랑하다”라고 하는 동사의 피동명사입니다. 그런 아가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랑하는 자들아”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주님을 진정으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의 그 궁극적인 삶의 모습은 사랑입니다. 그럼으로 기독교의 모든 영성은 마지막에 사랑의 삶을 동반합니다. 사랑의 삶을 동반하지 않는 모든 신령한 은혜 체험들은 가치가 없거나 그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령한 경험과 거기로부터 비롯되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알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를 불붙게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인격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가장 절망적인 죄인의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읽어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바로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그를 섬기며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가득하게 되는 그 놀라운 날에 이 세상은 사랑의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고난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사람들 속에 흐르게 되고 그 속에 진정한 화해가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사도는 오늘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표지판입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다른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 사랑은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입니다.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삼으심으로 우리와 화목한 관계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기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가 모두 다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는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과 그 은혜의 깊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혹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일치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정확하게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사랑하지 못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설명했던 바와 같이 주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경험은 있는데 자신의 영혼이 매우 핍절하고 자신의 영혼이 매우 곤고해져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어떤 것이라고 하는 지식은 남아 있지만 그 지식 속에 깃들여야 할 생생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정서가 완전히 고갈되어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는 망가진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둘 다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실 때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퍼줄 수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에 대한 감화가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받는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부당한 대접들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죄인들을 참으시는 하나님의 그 인내하시는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 깊은 성품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던 옛 성품들이 일시에 모두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옛 성품들을 덮고 있을 때 그 은혜가 오래 되면 오래될수록 그 은혜 속에서 우리의 모나고 그리고 완악하고 강퍅하고 그리고 포악한 우리의 성품들은 서서히 죽어갑니다.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빨리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우리의 옛 성품을 덮고 있는 그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언제 우리들이 은혜를 받은 적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우리가 이미 이겼고 정복했다고 생각되는 옛 성품과 옛 사람의 속한 기질들이 일제 반기를 들고 궐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이 세상에서 달려갈 길을 모두 마치고 숨을 거둠으로 주님의 품에 쓰러지듯이 안기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진정한 휴식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 끝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숨질 때까지 자기의 옛 성품과 더불어 성화의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 앞에 충성을 입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도 결국은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가장 중요한 수련의 한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일회적인 경험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분이 누구이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 대한 놀라운 감격, 그리고 그 사랑 앞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한없는 무가치함, 이것들을 보면서 끊임없이 진리와 은혜 안에서 성숙하며 주를 알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있어서 풍부해지는 것처럼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성품을 아는 진정한 변화된 기질들이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주님을 아는 참 지식이 우리를 바꾸어놓기 전에 우리의 본래의 모습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본래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우리의 본래의 모습, 우리의 옛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우리에게 사랑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원수 맺기를 잘 하는 사람이었고 한번 맺은 원수, 그 관계를 풀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원망하고 그리고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입은 작은 상처를 갑절이나 큰 고통으로 상대방에게 갚기를 원하는 포악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래 좋은 성품은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믿기 전에 비교적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기껏해야 그것은 자극 받지 않은 남보다 특별히 좋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며 기껏해야 그가 가지고 있는 무딘 자연적인 기질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은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성화에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그가 부단한 성화의 몸부림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경험한 변화된 인격과 성품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그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를 바꾸어놓기 전에 우리는 한결같이 포악하고 강퍅하며 신령한 것에 감동 받기를 싫어하고 그리고 쉽게 원수 맺으며 작은 피해에도 불같은 복수심에 불타는 그런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사라지고 나면 그 악하고 그 강퍅하고 더러운 기질들은 영락없이 솟구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온 영혼을 오염시키고 그리고 각양 수많은 욕설들과 그리고 폭력과 무자비한 말과 앞뒤를 생각하지 않는 상처를 주는 행동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 오래되고 우리들이 점점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확신에 불타면 불탈수록 이런 파괴적인 기질을 가질 위험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매 순간마다 이런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깨달으면서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인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것이 바로 자기 때문이며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옛날에 어떤 성품을 버리고 새로운 은혜로운 성품들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통해 우리 안에 성령을 역사 하게 하신 그 은혜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우리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덕분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사랑의 감화와 감동이 지속되지 않고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감동과 그 감화에 현재적인 경험만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미워하는 일을 그치게 만들어줍니다. 일단 형제를 미워하고 그 미움이 지속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면 패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을 무차별하게 파괴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정서와 사랑, 그 은혜를 아는 지식 속에서 아름답게 자라가던 그 아름다운 신앙의 세계를 가졌던 사람의 마음을 거의 황폐하게 초토화시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오랜 동안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씨름하며 자기를 이기고 살아왔건만 그렇게 거룩한 신앙의 길을 걸어온 사람답지 않게 옛 기질에서 온전히 지배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화에 있어서 퇴보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화의 세계에는 항상 진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비교적 신실하게 은혜 생활을 하다가 마음이 강퍅해지고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마치 귀신들렸다가 내어 쫓고 나니까 더 많은 귀신이 소제된 것을 보고 그리로 들어와서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악하게 되었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진 사람의 그 악함은 실로 주님의 은혜를 통해서 성화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과 비교할 수 있으리 만치 그렇게 악한 형편으로 바뀌어져 가는 것입니다. 돌같이 굳어진 마음과 사라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 자기를 지탱해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버린 거룩의 세계들은 획기적으로 복원되지 아니하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불가능할 정도로 뒤로 물러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한 싸움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사도가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서 실제로 목숨을 버려서 자기의 생명을 던져 형제를 구원하는 그 거룩한 희생이 있기 전에 매일매일 경험하야 할 자기 죽임이 있습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신의 마음과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그리고 형제를 미워하려고 하는 자신의 속 사람과의 치열한 투쟁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그 미움이 심령 속에 뿌리를 내려 정착하려고 하는 자신 속에 있는 미워하는 마음과의 치열한 투쟁, 생사를 건 치열한 몸부림을 통해서 사랑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한 사람 속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고 그 형제의 모습 속에서 주님의 형상을 보며 그를 섬기고 사랑한 아가페 적 사랑의 성품은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성도가 주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지체들을 진실 되게 끌어안고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된다면 그 성품은 하루아침에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상급을 주셔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가르고 신령한 세계를 본 전격적인 체험은 자신의 노력 없이도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지만 완악하고 원수 맺기를 잘하고 형제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기를 즐기는 포악하고 강도와 같은 난폭한 우리의 성품이 변해서 지체들을 주님의 형상을 가진 영혼으로서 사랑하고 섬기고 그를 자기보다도 훨씬 낫게 여길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아름다운 성품 속에 깃들인 이 사랑의 특성은 결코 하루아침에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앞에서 부단한 자기 죽임과 깨어짐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자기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이루신 십자가의 고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어떠한지를 알아 가는 그런 자신의 성화의 진보가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서 자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열렬한 신자가 되고 그리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성품은 그대로 있을 것이며 오히려 뒤로 물러가 퇴보함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 속에서 살았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뒤로 물러가 아주 강포하고 완악하고 그리고 형제를 쉽게 미워하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참으로 예수를 못박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참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이 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사실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 글을 쓰고 있는 요한은 한때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리움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만큼 성질이 과격하고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져서 이들을 모두 쓸어버리면 좋겠다 라고 하는 아주 과격한 성격을 가진 열혈남아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오늘 이렇게 변해서 가장 자기들 공동체 속에 있는 가장 연약한 지체조차도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신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며 어떤 이유에서든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고 더더욱 우리가 읽은 본문 뒤편으로 넘어가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섬기지 않으면서 살아가지 아니하면 우리의 기도도 헛것이라는 사상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과격하고 난폭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이 사람을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말하기를 사랑의 사도로 바꾸어놓을 수 있었던 그 위대하고 놀라운 힘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역사적인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제자들이 사도 요한과 같이 진실한 사랑의 성품에 감화를 입은 사람들임을 입증했다 라고 하는 기록들을 볼 수 있습니다. 폴리갑과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86세에 자기를 박해하는 그 핍박 앞에서 한 위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은 한결같이 자기를 사랑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사랑, 그것을 배반하는 그 배교의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순교의 길을 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순교를 하고 나면 어마어마한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상에 대한 기대보다는 자신이 여기에서 신앙을 배반하고 주님을 부인하는 것은 86년 동안 한결같이 받아온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순교의 길을 가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그렇게 바꾸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가 그렇게 과격하고 그렇게 격렬했던 사람이 바뀌어서 이런 놀라운 사랑의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입니다. 그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가 그를 이렇게 놀라운 사람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하는 것을 요한은 알지도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하고 방금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 사도 요한과 베드로는 마주 앉아서 얼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는 위치를 교회 안에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그의 회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습니다. 바나바의 보증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 젊은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회심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자라온 배경도 요한과 그리고 이 사도 바울은 전혀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요한에게 지속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닌데 결국은 그렇게 과격하고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있어서 열심을 품었던 그 사람이 놀랍게 변화되어서 고린도 전서 13장을 기록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말하는 그 사랑과 요한 일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그 진술에 있어서 어떤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린도 전서 13장을 풍부하게 해설한 것이 요한 일서 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동질의 것입니다. 두 사람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요한은 그저께 새벽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던 모든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기를 죽이는 그 죄인들을 바라보시며 어떤 복수심도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은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죽어 가시거니와 당신을 그렇게 죽게 함으로 하나님께 받을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기억하시면서 그때 당하게 될 그 영혼들의 고통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조용히 눈물로 죄의 용서를 구하던 예수님의 모든 모습을 요한은 지켜보았습니다. 거기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 십자가에서 자기들을 위해 죽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받는 광경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성품에 대한 감화는 이 사도 요한의 이후의 일생을 충분히 바꾸어놓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매일매일 예수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지고 주님이 이 세상에 자기를 들어서 아무리 훌륭하게 사용하셔도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섬김과 하나님을 위한 열심에 대해서 박수와 갈채를 보낸다고 할지라도 그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기는 단지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쓰레기와 같은 죄인을 보면서도 이 사실을 기억하면 결코 자고 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쓰레기와 같은 죄인을 보면서도 자신을 저 사람과 다른 삶을 살도록 바꾸어놓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긍휼을 통해 주어진 죄의 용서가 자신에게 다른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이지 자기 안에 있던 어떤 선한 것이 자기를 다른 삶을 살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의인이라고 부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실 때마다 우리에게 정말 몸둘 바를 모르는 그런 자각이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너는 나의 사랑 받는 자녀요 택한 족속이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실 때에 하나님 우리를 향한 그런 당신의 묘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나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면 저 사람들은 아직 주님이 용서해주시지 않으셨고 나는 주님이 용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각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 자각이 있고 나면 성화의 길이 힘들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대한 깊은 감화가 우리에게 있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겪는 과정에서 맛보는 그 고난은 정말 고난이 아닙니다. 그래서 형제를 향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는 항상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형제가 나에게 한없는 고통과 그리고 아픔을 줍니다. 그때 고통을 받을 때에 우리 속에서 느끼는 반응은 복수심입니다. 그리고 미움은 그 복수의 한 표현입니다. 미움은 마음으로 복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화살과 같습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화전”이라고 나옵니다. 화전은 불화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로마 제국 때 쓰여졌던 그런 불화살을 의미하는 것이기보다는 독화살입니다. 불화살은 원래 살생용이 아닙니다. 살생용이 아니고 방화용입니다. 그래서 로마 시대의 전쟁의 역사를 보면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날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불화살입니다. 불화살이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큰 것은 굉장히 멀리 날아갑니다. 기구에다 화살을 끼어서 거기에 불을 붙여서 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맞으면 죽었습니다. 그런데 목표는 사람을 살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지에 날려보내서 꽂아서 불을 태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막 백병전을 하면서 불화살을 겨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거기에 나오는 불화살을 그런 불화살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은 문맥에 안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총을 맞아도 사람이 사는 수가 있는데 화살을 맞으면 사는 수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치명적인 부위에 가서 맞아야 사람이 죽는데 팔에 맞는다든지 다리에 맞는다든지 그러면 안 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가 하면 전쟁에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활을 그냥 쏘는 것이 아니라 활로 공격을 하기 전에 화살촉에다가 아주 무서운 독을 묻혀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어디에 맞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 살을 뚫고 들어가면 그러면 전쟁터에 누가 치료해주는 위생병도 별로 없었던 시대였는데 팔을 맞으면 독화살이 아니면 그 화살을 뽑고 다시 살수 있는데 독화살에 맞으면 거기에서 맹 독이 핏줄을 타고 온 몸에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때 불붙는 것 같은 그런 열이 나면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화살입니다.
미움은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어느 한순간에 휙 하고 날라 와서 쾅 하고 꽂히면 온 몸에 확 전달되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미움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열 받는다’는 표현을 쓰시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미움의 불화살을 맞았을 때 열 받는 것입니다. 확 꽂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특정한 주사를 맞아본 분들은 알지만 한번은 병원에 갔더니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어서 주사액이 한 컵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어린애 팔뚝만한 주사였는데 그것을 엉덩이에 꽂으면서 쑥 집어넣는데 신기하게 여기에 집어넣는데 불과 한 일 이분 사이에 온몸으로 그것이 확 퍼지면서 혀끝까지 펄펄 끓는 그런 주사를 맞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움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그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은 어느 한순간에 휙 하고 화살이 날아와서 쾅하고 꽂히면서 갑자기 하나님의 사랑에 막 불붙고 하는 예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참 잘 안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은혜를 받아도 막 놀다가 다른 짓을 했는데 갑자기 졸다가 번뜻 하고 말씀 몇 마디 들으니까 갑자기 화살을 맞은 것처럼 온 몸이 하나님의 사랑에 펄펄 끓어서 불과 세시간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그런 예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정복하는 것과 미움이 우리를 정복하는 것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정복하는 것은 서서히 정복합니다.
여러분은 스데반이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을 위해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할 때 성령으로 충만해지면서 사실 그 충만함이 사랑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과는 다른 경우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원래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설교하는 구절에서 볼 것 같으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애절한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못 마치고 죽었지만 설교 전편에 흐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그 사랑이 가득 차고 완전해지는 경험을 성령을 통해서 특별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경우와는 다릅니다. 서서히 사랑이 자신 속에 자라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미움은 안 그렇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휙 날라 와서 꽂히고 나면 확 번지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가면 살인한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짐승 보듯 하고 그리고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발물처럼 생각하는데 그들도 사람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확 솟구칠 때 억제하지 못했거나 억제할 수 있는 환경이 허락되지 않아서 그렇게 솟구치는 미움을 표현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확 번져오는 것입니다. 그 불을 끌 수 있는 무기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전갈을 아실 것입니다. 가제하고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물리면 죽습니다. 8시간 안에 죽습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화: 중동에 오래 근무를 하던 사람들이 새로 오는 신참들의 군기를 잡는다고 장화 속에 전갈 을 넣어 곯려주는 이야기)
우리 속에 일어나는 솟구치는 그 미움은 독성과 같습니다.
(예화: 우체국 장으로 계실 때 그 앞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계셨는데 풀 섶을 산책하시다가 뱀에 물려 병원에 가셨는데 해독할 수 있는 병이 서울에 있다고 해서 이곳저곳을 방황하 다가 세브란스 병원에 가셔서 한 대 50만원의 주사를 맞았더니 나으셨다는 이야기)
미움이 그렇게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대책이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이가 갈리도록 미워하면서 절 천지 원수졌던 사람을 어느 날 화해하고 죽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하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무협지에 보면 아버지가 한을 품고 죽다가 마지막에 아들에게 ‘이 한을’ 그리고 죽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그놈이 벗어놓고 간 짚새기 한 짝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범인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못 푸는 것입니다. 절대 못 푸는 것입니다.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에게는 대책이 있습니다. 온몸을 가득 채우는 그 불같은 미움을 종식시킬 수 있는 딱 한방의 주사 제가 있는 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고통을 주고 그래서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사람을 보면서 자신이 그리스도께 행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음에 사랑을 입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 미움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공포도 정복할 수 없는 그 인간의 미움을, 다시 말하면 너 재를 계속 미워하면 넌 죽는다. 내일까지 미움을 청산하지 않으면 넌 사형이다. 그래도 그 미움을 버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리 살고 싶어도 그것 때문에 미움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 대해서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멈출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깊은 깨달음, 깊은 깨달음이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가 누구이고 어떻게 해서 죄의 용서를 받았으며 왜 주님의 사랑을 이렇게 받으면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나면 미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미워하는 그 사람도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대신 죽으심으로 구속하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 그는 결코 그 미움을 계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문을 하나 하겠으니 설교의 내용들을 여러분들이 확인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격, 그래서 나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주님이 왜 용서하셨을까 하는 아주 특이한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에 대한 사랑의 감격이 여러분 속에 강력한 감동으로 역사하고 있을 동안에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미워하겠습니까?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자기가 주님께로부터 받는 이 사랑,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희생이 분에 넘치는 사랑이며 그리고 그 사랑 앞에 황공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리스도인이 그 순간에 누구를 미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한 공동체 속에서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펑펑 우는 신앙의 감격이 사라질 때 미움은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빨을 가진 뱀처럼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어처럼 한번 먹이를 콱 물면 놓지 않습니다. 무섭습니다. 연못가에 와서 물을 먹으려고 하는 들소들을 입을 벌려서 송아지 하나를 뒷다리를 콱 깨물면 죽어도 놓지 않습니다. 송아지가 살겠다고 몸부림을 칠 때 송아지를 따라서 악어가 뒤집히기도 하고 바로 다시 뒤집히기도 하고 물 속에서 막 뒤척이면서 난리를 치는데 결국은 악어가 안 놓습니다. 송아지가 죽어서 물에 떠오를 때까지 안 놓습니다.
우리의 미워하는 마음도 그렇습니다. 한번 콱 물면 죽어도 안 놓습니다. 결코 놓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움입니다. 그것을 종식시키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형벌 받아 마땅한 여러분들을 위해서 주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주님의 마음에 고통과 상처를 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여러분들만을 골라서 주님이 구원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죄인 중에 괴수였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주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을 우리를 꼬구려 틀려서 우리를 새사람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도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시고 아무 가치 없는 죄인을 위해서 고귀한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심으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산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죄인에 불과한 여러분들이 주님이 흘려놓으신 그 피 길을 걸어감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속의 산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런 놀라운 사랑을 입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나를 구했고 나는 모든 좋은 것을 그분께 빚졌다고 생각을 하면 그러면 여러분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는 미워하는 사람이 훨씬 불쌍한 사람입니다. 미움을 받는 사람은 단지 감정적으로 상처를 입고 저 사람이 왜 나를 미워할까 하고 고통을 느낄 뿐이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칼로 찌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아름답게 쌓아온 신앙의 정원들을 스스로 초토화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잠시 미워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대가로 하나님과의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혼의 축복을 마다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미워하고 그리고 미워하는 그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다시 그 사람과의 미움의 관계를 딛고 사랑하는 가장 좋은 비결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앎을 기초로 합니다만, 첫째로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주님 앞에 저렇게 흉악한 죄인이었고 주님을 미워하고 거슬리던 죄인이었는데 용서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여러분들이 누구인지를 진지하게 묵상하십시오. 다만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한때는 여러분들도 주님을 지독히 미워하고 악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의 그 용서하시는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결은 무엇인가 하면 인생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의 삶이 얼마나 덧없는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수많은 정욕과 그리고 모든 욕망들, 이런 것들 가운데 미움이 하나에 불과합니다.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미워하게 된 동기를 추적해 가보면 치사하게 이를 때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보다 더 뛰어나다는 이유, 시기심이 원인이 됩니다. 어떤 때는 내게 준 아주 지극히 작은 상처, 그러나 사실 그런 것들은 누구도 받을 수 있고 자기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준 적이 있는 사람인데 자기가 받은 것만을 절대화시키면서 그를 미워합니다. 이런 많은 인간사 속에서 돌아가는 치사한 구실들이 미움의 이유가 되고 있는데 사실 그 인생이 잠깐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님 이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다가 사라져 가는 것이라고 하는 덧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고 나면 훨씬 더 넉넉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막 뭔가 뜻대로 안 되면 막 고통스럽고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때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참자.
그 영광의 구주 날 사랑하사
금 면류관 쓰고 늘 찬송할 말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잠시면 지나갈텐데. 그래서 어떤 때 너무 고통스럽고 쓰라린 일이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잠시 지나갈텐데. 조금만 더 참자. 눈물흘림을 며칠만 더 당하자. 여러 가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행할 길을 다 걸어가자. 그러면 잠시 후에 더 이상 고통이 없는 때가 오리니 그때 우리가 주님 앞에 받을 위로가 오늘날 우리가 여기에서 받는 고통에 비할 바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넓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는 상당한 침체 속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육체적인 컨디션 때문이었습니다. 아픈 것입니다. 허리도 아프고 그래서 병원에서 진찰을 해보니 척추가 주저앉았다고 말하고, 비뚤어졌다고 말하고, 고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말하고 이러니까 너무 슬픈 것입니다. 거울 앞에 서보면 하나님의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이 늙어 가는 것입니다.
부산에 내려가니까 어느 사람이 상처를 주었습니다. 목사님이 김남준 목사님이십니까?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하니까 상상하던 것과는 너무 다르네요. 그래서 어떻게 상상했는가 하고 물었더니 감을 잡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자기 친구와 설교를 듣는데 한참 듣더니 저 양반 50은 훨씬 넘었어 그랬다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인생에 맛을 많이 본 사람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참 설교를 하더니 조금 있다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의 음성이 나오기에 자기가 그랬다고 했습니다. 30대 초반이야. 그러더니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나를 어떻게 상상했는가 하고 물었더니 얼굴이 하얗고 야리야리 하고 그럴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못 생겨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상상이 안 가더랍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우울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언젠가 글을 읽으니까 여자들이 폐경기가 되고 노화가 오는 그 시기를 ‘사축’이라고 했습니다. 사춘기 말고 사축이 오는데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사춘기는 신체적인 특성이 긍정적으로, 발전적으로 변합니다. 가슴도 나오고 겨드랑이 털도 나오고 여자의 특성이 막 나오니까 그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사축도 똑같이 자기의 육체적인 특성을 보면서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어느 날 폐경이 오고 주름이 지고 자기는 아직까지도 젊었다고 생각했는데, 전철을 탔는데 누가 애야 거기 가까이 가지 말아라. 할머니 불편하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엄청 충격을 받으면서 심리적으로 우울증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피식 웃었습니다. 우울증 올 일도 많다. 나이가 오면 늙고 기계가 쓰면 망가지는 것은 당연하지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진짜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 우울한 그 모든 모습이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데 하여튼 그 몇 년 전에 잠깐 동안 왔습니다. 그런데 위로와 안정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놀라운 탈출구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래서 어떤 때 진찰을 받으면 객관적으로 자신의 몸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의사에게 가서 나 좀 진찰 좀 해주시오. 어디가 아프십니까? 조금 더 써야 하겠는데 아직 기계가 벌써 이래서 큰일이라고. 조금 더 써야지. 그러고 나니까 마음에 평화가 왔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가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그 대신 무엇인가 하면 다 잠깐이면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30년 전에 저를 비교해보면서 ‘그 30년의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를 보면 앞으로 30년은 더 빨리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데 조금만 더 참으면 되지’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미움을 청산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도움이 되는 두 번째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인간의 오역칠정에 덧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의미에서의 덧없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면하고 사는 궁극적인 영생의 삶 이외에 이 세상에서 보이는 모든 삶들이 결국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바로 요한 일서 2장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 세상도 지나가고.....” 그것을 생각하면 진짜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밖에 참되고 진실하고 영원한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저 사람과의 만남은 일시적이지만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가슴아파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으면 미워하는 마음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 고통받으면서 사는데 잠시 후면 우리 모두 이 껍질을 벗을텐데 그도 불쌍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이 누구를 미워할 때는 용서해 줘. 짧은 세상에 그러고 사냐. 그것은 남이니까 그렇게 말하지. 자기는 그렇게 못합니다. 똑같습니다. 야, 뭘 그러고 사냐, 사랑해버려. 그런데 이렇게 손짓 하나로 사랑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해버려.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사랑해버려. 기왕 난 자식인데 사랑해버려. 이 손짓 하나로 사랑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외상값 갚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라고 해서 쉽게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게 미워해. 좀 사랑해. 손짓 하나 해서 해결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믿음을 주시고 성령이 오시고 성화의 투쟁을 하고 왜 그렇게 복잡한 길을 하나님이 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고 말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훌훌 털어 버렸으면 좋겠는데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워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결핍으로 말미암아 오는 불안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깊이 받을 때 안정감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미워할 때도 안정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움을 버리면 인간이 무엇인가 제대로 된 대체적인 감정적인 역사가 있을 때, 아주 쉽게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랑에 의한 깊은 감화에 의해서 미움이 내어쫓기면 괜찮은데 그것이 아니고 미워하면 안 된다. 나는 더 이상 이 사람에게 복수할 수 없다고 스스로 정리해버리고 나면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굉장한 불안감입니다. 자신의 삶에 고통이나 상처 아픔 이런 것들이 생각날 때 유일한 위안은 무엇인가 하면 그를 생각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것입니다. 저 자식, 잘사나 두고보자. 나쁜 놈. 확 죽어버려라. 이런 식으로 상상을 하면서 자신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입증을 하겠으니 잘 들어보십시오. 아주 훌륭하게 증명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고 있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성령이 강력한 은혜를 주시면서 네가 그렇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면서 성령이 역사 하실 때 즉시 무릎을 꿇고 순복 했으면 평화가 오는데 갈등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자신 속에는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양심에 가책을 주실 때 그때 그 고통은 가히 죽음의 고통에 방불한 것입니다. 당위적인 측면에서 보면 용서해야 되는데 논리적으로 거기에 항거할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아직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그 치열한 갈등은 진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할 정도의 강력한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고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생각을 가는 것이 미움을 청산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하면 ‘십자가를 진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혜 많이 받았을 때 어떤 찬송을 즐겨 불렀습니까?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이 찬송을 부르고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생각할 때우리 속에 들어오는 상상은 가히 정말 엽기적입니다. 무슨 상상인가 하면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화영장에 끌려가면서 ‘존귀 영광 모든 권세’ 꼴에 무슨 화영이야.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라 하늘이 열리고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모두 일어나서 나의 고난받는 광경을 지켜보고 주님도 벌떡 일어서셔서 네가 나를 위해 죽는구나. 냅둬. 그렇지 않으면 토인들이 사는 아프리카 정글을 정말 무릎이 피가 나도록 누비다가 어느 한순간에 식인종의 칼에 맞아서 죽는 그런 광경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로 갑자기 거꾸로 돌아가서 순사가 칼을 들고 목에 대면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이 사진에 침을 뱉으면 살려줄게. 그러니까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자기 영혼의 선교지 에서나 좀 잘해. 그것은 영웅주의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어느 한순간에 죽어버리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예수 죽임의 정신을 붙들고 죽을 각오로 사는 일입니다. 죽는 것은 순간이지만 사는 것은 평생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됩니까? 주님이 날 위해서 베푸신 그 놀라운 사랑이 너무나 크고 쓸데없는 인간을 위해서 베풀어주신 그 구속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이 너무나 크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그래도 낯이 있지. 어떻게 주님이 그렇게 자기를 위해 놀라운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고난과 희생이 없는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성도들이 ‘고난은 죽어도 싫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없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고난을 꼭 반찬을 가려먹듯이 난 고난을 받을 용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난 이런 것만 주십시오. 이런 고난, 이런 고난은 나하고는 적성이 맞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주고 이런 고난, 자기가 잘 하고 있는 것만 고난, 자기가 잘 하고 있는 것만. 안 됩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얼마나 절묘합니까.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니 얼마나 절묘합니까? 그 입맛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기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축구를 하다가 골대에 헤딩해서 머리가 터지는 것을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고난입니까?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은 자기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 자기가 좋지 않은 일, 자기가 원하지 않는데 동기 자체가 자기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 그것이 고난입니다. 주님이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주신 그 십자가는 형제를 용서하라고 그렇게 이야기만 하지 마십시오. 내가 다른 것을 열심히 할게요. 몸바쳐서 청소를 하라고 하면 하고, 돈 내라고 하면 하고, 철야를 하라면 하겠으니 다른 종류의 고난을 내가 넘치게 받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선택으로 하겠습니다. 그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이 무슨 고난입니까.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싶으셨습니까?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싶으셨습니까? 오죽 했으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랑하는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옮겨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응답은 네가 그것을 져야 한다. 싫은데도 주님이 그 십자가를 고통인줄 알면서도 그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의 삶이 없는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자기 부인의 삶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자기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데 그것이 무슨 십자가입니까? 자기 부인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부인해야 하는데 미워합니다. 미워하는데 그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나는 이러면 안 된다. 부인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이러면 안 된다. 용서해야 된다. 너무 싫다. 그러면서 주님이 명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짊어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그 피를 흘리면서 사역의 현장에서 몸부림치면서 뛰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교회 한구석에서 훌쩍이면서 흐느껴 울며 자기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데 용서하라는 그 주님의 명령 앞에 눈물로 자기를 부인하며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심령의 고통을 이기는 사람, 그들이 받는 상급이 나는 작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훌륭한 십자가입니다.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가장 확실한 십자가고 가장 가불되지 않은 상급을 받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누가 알겠습니까, 그 속을. 그렇게 미워하는 줄을 누가 알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늘 허허 그리고 웃고, 예수 안에서 한 형제고 이러면서 살면서 그 가슴속에 썩어 문드러지는 그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그 미움을 극복하고 결국은 그를 사랑하기까지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 앞에서 치러야 했던 그 치열한 자기 몸부림과 처절한 죽임,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한 사람이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다가 그 사람이 미움을 넘어서서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으면 그의 마음 밑바닥에는 피가 흥건합니다. 무슨 피, 자기를 죽인 그 피가 흥건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은 가불 당할 일이 없습니다. “어유 이것을 누가 잘해 놨네.” “아, 제가 했다는 것이 아닙니까?” 벌써 반은 상급을 받은 것입니다. “이 헌금 누가 이렇게 많이 했어?”“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벌써 깎아먹습니다. 그런데 어디 가서 그것을 자랑하겠어요. “내가 옛날에 엄청나게 미워했는데..”저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 날 미워하지?’ 그랬는데 “내가 용서했다는 것이 아닙니까?” 누가 알아줍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은 비교적 고백할 길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 그대로 열납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원수 맺은 것을 왜 풉니까? 얼마나 좋은데? 뭔가 뜻대로 안 되면 그 사람을 씹으면서 이 자식, 저 자식, 욕하고 죽어버려라 그러면서 저주를 퍼붓는데 얼마나 신나는 일이고 위로가 되는 일인데 왜 없애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주님 때문에. 그는 내가 자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 하는 줄을 몰라도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한량없는 사랑, 주님이나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도 주님을 위해서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입고 내가 주님 앞에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이 사람이라도 용서함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뒤를 따라가고 주님의 그 고난에 동참해야지 하고 용서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는 이 첫사랑으로 돌아가는 이것이 바로 미워하던 형제를 용서하는 구체적인 세 번째 비결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십자가로 돌아온 요한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에는 마태복음에 실려있지 않은 십자가 사건의 기사 한 토막이 상세하게 나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세 번째 남기신 말씀입니다. 즉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을 시작을 해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마지막에 어떻게 십자가에서 네 번째 말씀을 남기시고 그리고 어떻게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으며 또 죽으신 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시체를 치웠는지 그리고 심지어 오늘 우리가 읽은 앞부분에는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물과 피가 흘러나온 것과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에 장사지내는 장면까지 아주 상세하게 그림같이 묘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요한 복음에만 나옵니다. 왜 그럴까? 왜 다른 복음서에는 이런 상세한 기록들이 생략되고 요한 복음에만 이 상세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뒷부분들이 나올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6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 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장면에 보면 상세하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시는 그 마지막 광경, 운명하시는 광경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누구에게로부터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요한이 직접 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경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 버리고 도망갔다고 그랬는데 요한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와서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섬세한 필체로 보도하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과 함께 요한도 도망갔습니다. 너무나 두려워서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도망갔습니다.
한때는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고 말했던 사람들, 또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그 보좌 우편과 좌편에 있고 싶다고 말했던 사람들, 예수께서 마시는 그 잔을 자기들도 마실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람들이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힘없이 병정들에게 끌려가시고 고난을 당하시자 제자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 결국은 모두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고난받는 자리에 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서 심문과 체포와 처형을 당하시는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던 제자들의 도움 없이 당신 홀로 십자가를 감당하시고 우리를 위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시는 중에 특별히 예수님이 사랑했던 제자들이 옆에 없도록 하시고 주님 홀로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은 매우 특별한 섭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 십자가의 고난이 누구와도 나뉘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에게 알게 하시고 또한 그 십자가의 의미를 우리 이후에 예수님의 생애를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이처럼 다른 사람과는 도저히 나뉘어질 수 없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홀로 하나님 앞에 감당해야 하는 적이 많이 있습니다. 힘쓰고 애쓰며 서로 나누고 우리가 진 십자가를 서로 사랑의 짐을 지며 격려하면서 가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는 반드시 누구와도 나뉘어질 수 없는 자기만의 십자가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나누어질 수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홀로 지지 않으면 안 되는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그 십자가가 사실은 가장 소중한 사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키에르 케고아’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단독 자로서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사랑과 충성, 우리의 진실함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와도 나누어질 수 없는 그 십자가를 지고 어떤 태도로 감당해야 하는가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 있어서 아버지를 향한 진실함과 사랑, 정절과 그리고 믿음의 깊이에 있어서 인정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자기 홀로 십자가를 지고 갈 수밖에 없게 남았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아니하고 심지어는 자기를 버리고 간 제자들을 원망하거나 심판을 선고하거나 혹은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잃을 것이라거나 이렇게 선고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말할 때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들이 모두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따라간다고 말할 수 있을 때조차도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셨고 그리고 그 십자가가 홀로 지어야 하는 십자가라는 사실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일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베드로에게는 당신을 버릴 것을 명백하게 예고하시면서 그러면서 그를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돌이킨 후에는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하면서 사명을 북돋아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는 이 마지막 광경, 죽으신 후에 그 마지막에 물과 피가 흐르는 그 신비한 광경, 예수님의 그 고난의 마지막 가슴아픈 그 광경을 생생한 필체로 요한이 적어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과 함께 모두 도망갔지만 그러나 유일한 한 사람이 돌이켜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십자가 앞으로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입니다. 그 과정과 경로를 우리는 생생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12 사도 가운데는 이 요한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마지막 광경을 지켜본 유일한 증인이었으며 더욱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자기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개인적인 주님의 음성을 들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언젠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예수님이 어떻게 운명하셨는지에 대해서 교회에 증언할 기회가 있었을 때 다른 열 한 제자는 예수님의 운명하시는 광경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마태의 글은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는 들은 이야기를 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요한은 아주 분명하게 자신이 본 바를 기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실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어떻게 죽어 가셨나. 교회가 사도들에게 물어볼 때에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요한 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사에 나오는 그들의 최후가 거의 모든 사람이 순교의 길을 갔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그 말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갔던 베드로는 로마의 박해시기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을 덜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고 결국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을 받을 때 예수님을 버린 죄들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용서하셨고 그래서 그들은 그 용서의 은혜를 주님께 진 사랑의 빚으로 여기고 일평생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시 요한 이 한 사람이 유일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 가운데 유일한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요지부동의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요한은 12제자 가운데 나이가 어린 제자였고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그 품에 기대어 예수님의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들으며 교제를 나누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며 끌려가는 그 모습을 뒤로한 채 어쩌면 베드로보다 더 멀리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의 양심이 요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향해 베푸신 그 한량없는 사랑과 처음 불러주심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을 따라다니며 섬기던 과정까지, 부유하지 않은 공동체 살림살이에서 자기들을 어떻게 먹이시고 기르시던 것부터 시작해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각별히 자기를 사랑하셔서 그 품에 두고 먹고 마셔서 제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예수님이 자기 아들처럼 생각하던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한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 예수님을 버린 가책과 후회가 다시 예수님 앞에 나타나면 예수님과 한패로 몰려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를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목숨을 위해서 주님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늦었지만 그는 예수님께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광경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이 이야기를 기록할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도착한 것으로 보아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광경은 못 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광경이라고 저는 묵상합니다. 십자가에 다 못 박고 이제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볼 이유가 없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골고다의 길을 내려올 때 그 수많은 인파를 헤집으며 거꾸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주님께 돌아올 때에 그는 이미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토록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시고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려서 섬기시던 그 백성에 의해서 배반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아마 그 젊은이는 틀림없이 펑펑 울면서 수많은 인파를 헤집으며 거꾸로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있고 마리아를 비롯한 몇 명의 여인들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막 달려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까지 갔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결정적인 순간에 버리고 간 그 제자,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해주신 그 사랑을 배신으로 갚은 이 사람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가시관을 쓰시고 피 흘리며 죽어 가시는 예수님 앞에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무슨 이야기가 있다는 말입니까.
상당한 시간, 침묵이 흘렀을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 앞에 돌아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시기 위해서 “여자여, 아들이니이다” 보십시오. 저 옆에 있는 저 사람이 바로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제껏 까지는 내가 마리아 당신의 아들이었지만 나는 이렇게 죽으니 이제 옆에 있는 이 요한이 아들처럼 당신을 섬길 것입니다. 이 말 하나로서 이미 요한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색함, 예수님을 버린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꺾어진 감정을 갖고 계시지는 않을까 하는 그 마음의 불편함과 고통을 모두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보라 네 어머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이 요한이 예수님을 버리고 갔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마음속에 한 형제라고 하는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것을 깊이 뉘우치고 예수님과 화해의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어 가시는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 피 떨어지는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요한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볼 수 없었던 그 마지막 광경을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제일 먼저 돌아온 제자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운명하셨습니다. 간악한 병정들은 예수님이 운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옆구리를 찌른 그 창은 옆구리와 허파를 지나서 심장을 터트렸고 요한이 물과 피가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 그 광경은 바로 심장이 터져서 흘러나온 그 피와 그리고 몸에서 흐르는 체액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요한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그 십자가의 못 박히신 채 흘리신 그 옆구리의 물과 그 피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입었다고 하는 사실을 요한은 여러 차례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 생생하게 흐르는 피와 예수님의 몸에서 흐르는 그 물을 보면서 그 보혈이 바로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하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보혈의 메시지의 생생한 자료를 제공해주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이렇게 복음이 성취될 수 있었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때는 주를 버렸지만 그러나 주님께로 돌아가는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그러나 이 제자가 주님을 버린 것을 뉘우치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십자가 아래 돌아왔을 때 주님의 마음이 이미 멀리서 달려오는 요한의 모습을 보기 전에 그를 용서하고 계셨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모두 버리고 자기를 위해서 도망간 제자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차이가 있다면 누가 빨리 예수님께 돌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주님을 버리고 멀리 떠난 사람들임에는 공통적으로 같지만 그러나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는 데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마지막 광경이라도 보기 위해서 돌아가고 그 피 흘리시고 매달리신 십자가 아래서 용서와 화해를 경험한 요한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모두 주님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지만 누가 먼저 돌아오는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목숨이 아까워서 생명보다 귀한 예수님을 버렸던 요한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주님께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하게 쓰임을 받았는지는 사도행전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한때 주님을 버리고 예수님을 멀리 떠났던 것에 대해서 많이 가책 받는 대신에 오늘 이 시간에도 자기에게 달려오기를 원하시고 돌아와서 화해와 용서의 은총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그 십자가의 주님을 기억하며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최고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모두 주님을 버렸지만 그러나 그렇게 주님을 버리고 떠난 많은 제자들 가운데 제일 먼저 예수님께로 돌아갔던 요한과 같이 그렇게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이 그런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탕자의 귀로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우리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이미 시작되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삶에서 느끼는 재미와 즐거움들은 사라지고 무엇인가 내면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 같은 것들을 느낄 때에 경험하는 심정입니다.
애들이 자꾸 부모의 말을 안 듣고 그리고 뭔가 부모가 싫어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 부모가 아이들을 야단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그래, 해라’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멈칫 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한 사랑으로 그 사람을 붙잡으면서 ‘너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말아라 그렇게 하지 말아라’ 하는 동안에는 막 하나님을 거스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탁 놓으시면서 ‘네 마음대로 해라.’ 그때 인간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던 자신이 곤고하다 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필연적으로 곤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곤고할 때 하나님께 돌아와야지 되겠다. 돌아가고 싶다. 아직 돌아가지는 않지만 그러나 돌아가고 싶다. 그러면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뭔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거나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나 좀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결단은 못 내렸지만 ‘하나님, 나 주님 없이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때 즉각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주시는 느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령한 경험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때에 우리가 느끼는 것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살던 사람들, 지속적으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던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자기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그 영혼을 돌이키시게 하기 위해서 죄악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오랫동안 완고하게 불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순간에 번쩍 하고 격렬한 회개를 하게 만드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짓게 만드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단속적이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맛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그런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번 세 번 도전해도 하나님께로부터 기도 속에서 차가운 거절감 을 느낄 때 말씀도 마음에 다가오지 않고 무엇인가 자기를 변화시킬만한 어떤 좋은 것들이 나타나지 않을 때 그때 성도는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리고 오랫동안 불순종과 완고함의 껍질 속에 누적되었던 그런 각질들이 벗겨져 나가고 하나님의 생생한 은혜의 속살들을 이제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오늘 이 집을 떠난 방탕한 탕자처럼 이제 깊이 하나님 앞에 뉘우치게 되면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사실은 오래 전부터 자기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15장에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을 보면서 사실 우리는 주인공이 돌아가는 탕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가 주인공입니다. 아버지가 만약에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집으로 돌아가는 그 탕자의 귀환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으며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의 귀환을 위한 결단이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기의 주인공은 기다리시는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다시 자신의 삶을 뉘우칠 때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기다리셨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이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며 이 아들이 마지막에는 그렇게 비참하게 되리라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둘째 아들을 보아왔고 그리고 이 둘째 아들이 넉넉한 환경이 되면 어떻게 반응하며 살다가 어떤 결과를 맞으리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유산의 절반을 떼어서 둘째 아들을 주고 그리고 이 둘째 아들은 가서 허랑 방탕하게 보내면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이 아들로 하여금 정말 소중하고 귀한 것이 자유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라고 하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이 아버지는 자기의 재산의 상당 부분을 이 아들에게 주어서 허비하기까지 하면서라도 그것을 성취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진리를 보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위해서 많은 것을 허비하고도 아까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행동을 보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에게는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많은 물질이나 부, 환경 이런 것들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맺고 싶어하시는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주머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운 축복을 안 주신 적이 많지만 그러나 당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그 놀라운 사랑과 마음에 흡족함이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실제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은 자신은 비록 가난했지만 하나님의 창고에 있는 물질로 살았습니다. 자신은 비천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창고에 있는 면류관 중 하나를 쓰고 한 나라의 임금이 되기도 하고 부족한 가문에 태어나서 한 시대의 역사를 움직이는 걸출한 사람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고 싶은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에게 아버지가 되고 네가 내 아들이 된 것을 인해서 얼마나 행복한지 네가 알 수 있다면 그렇다면 좋으련만,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이 없어서 불평하고 저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지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손에서 주어지는 선물을 인해서 기뻐하기보다도 주님 자신이 자기 하나님이 된 것을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성도들이 그분의 마음에 참 기쁨이며 그렇게 주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사람을 향해서 주님이 아무 것도 아끼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아끼시고 우리와 그런 관계 속에서 사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이 비유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이 사실을 아버지는 직접 말이나 강요한 행동으로 이 아들에게 깨닫게 하시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깊이 체험하고 그 결론에 도달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인격적인 방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올바른 일을 할 때만 형통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할 때에도 형통함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거스르고 주님의 계시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니느웨이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다시스로 가는데 배는 떠났고 바다는 평온했습니다. 그리고 기분 좋은 항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가 말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좋은 생각을 가질 때에도 좌절과 방해가 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은 길로 갈 때에도 때로는 형통함이 있습니다. 물론 그 형통함은 하나님께로 오는 형통함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냥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올바르지 않은 길로 가는 데도 오랫동안 막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켜만 보고 계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인격적으로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돌아서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이 가르쳐준 결론보다도 가장 강력한 결론은 없습니다.
신앙이 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신자의 내면의 속에 가득할 때에는 주님이 말씀하시면 즉각적으로 그 하나님의 마음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도 함께 느낍니다. 그것이 일종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전달되는 하나님의 마음은 실제로 무엇인가 행동을 하고 경험한 것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신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언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지속적으로 거할 때, 그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머리로는 ‘이것을 하고 싶다. 이것을 하면 재미있겠다. 이것을 하면 좋겠다. 그런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데’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아주 강력하게 끌리지만 신자가 은혜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그것은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그것으로 인해서 아파하고 슬퍼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유혹이나 시험이 가져다주는 욕구보다도 훨씬 크게 다가와서 우리를 지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꾸어놓는 것입니다.
저는 찬송가 147장을 참 좋아하는데 그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감격이 나오는데 그런데 문득 찬송가 가운데 3절인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주 달려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그러니까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은혜 안에 사는 그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성도들 속에도 세상에 붙은 욕심이 역사 할 때가 있습니다. 강력하게 우리를 끄는데 그때 즉시 묵상하는 것입니다.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 나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이고, 그분이 어떻게 나를 위해 죽으셨으며, 왜 이 쓸모 없는 죄인을 이렇게도 사랑하시는가. 이것이 가슴속에 확 밀려올 때에 그때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는 것입니다. 증명이 되잖아요. 아무리 끌림이 강해도 끌림보다도 강한 하나님의 마음이 신자 속에 전달되니까 죄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변화는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 안에 있을 때는 거룩한 신적인 정서가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서는 영향을 덜 받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영향을 많이 받는 그런 민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이식된 신앙, 스스로 뭔가 자신의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이든지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결론에 도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어거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큼 불편해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계속 무엇인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결론에 도달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신앙생활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닌데 이해를 하십시오. 군대에서 군 종을 하시던 분들은 좀 나은데 군대에서 이렇게 소령, 중령 뭐 이렇게 해서 군대 생활을 직업 군인으로 하시다가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하시는 분들은 아주 잘하시는데 잘못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군대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군대는 군인들이 모여 있어도 이렇게 똑같습니다. 옷만 바꾸어 입으면, 운동장으로 집합. 다리가 보인다. 그러면 한 3분이면 후닥닥 나가서 ‘좌우로 정열’ 하면 짝 섭니다. 교회에 와서 ‘운동장으로 모인다.’ 그러면 엎드려 자는 사람, 걸어가는 사람, 운동화 끈을 매는 사람, 또 밖으로 나가다가 화장실로 새는 사람, 도망가는 사람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열을 받는 것입니다. 잘 참지를 못하십니다. 성격이 불같아서. ‘그따위로 하려면 그만둬’ 그렇게 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군인 출신인데 그 교회 전도사 평균 수명이 1년입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항상 현역이 아니면 전도사를 안 쓰신다고 했습니다. 현역 출신만 쓰신다고 했습니다. 방위들이 얼마나 슬프겠어요. 그런데 그따위로 하려면 그만둬. 그런데 그것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빨리 와라. 그럴 때 어떤 사람은 엎드려서 뒹굴고 어떤 사람은 책보고 어떤 사람은 운동화 끈을 매고 그런데 그것이 아름다워 보여야 합니다.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군대처럼 획일적으로 안 움직이고 막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개기는 사람이 있고 이것이 아름다워 보여야 합니다. 참 아름답다.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지금도 자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워요. 어떤 사람은 여기 나와서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고 어떤 사람은 침을 흘리며 자고 얼마나 아름다워요. 이런 것들을 하나의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도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하여튼 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면 되잖아요. 뭐 하러 돈을 줍니까? ‘너 그따위로 하면 내 유산 국물도 없어. 태도를 고쳐’ 그러면 오늘날 현대인들은 얼마나 말을 잘 듣겠어요.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이 매일 모여서 하는 말이 우리 죽을 때까지 유산 나누어주지 말자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도달하는 결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에 의해서 경험을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통해야지 정상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째든 자기 자신이 경험하고 도달하는 결론, 거기에 도착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강요된 그런 신앙이 아니라, 그러면 여러분 중에도 부모님이 교회에 다니니까 등살에 못 이겨서 교회에 나오시는 분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내가 하도 바가지를 긁고 그저 교회라도 갖다오면 찌개라도 맛있는 것을 끓여주니까 할 수 없이 코가 꿰어서 교회에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까? 자기는 신앙이 요만큼 밖에 없는데 남편이 이만큼을 강요해서 어거지로 교회에 다니는 부인들은 없습니까? 감사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렇게까지 라도 하나님이 환경을 만들어주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인격적으로 자기를 다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결단하고 자기화 된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들이 그런 자연스런 인격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전 재산의 절반 정도를 허비하는 것이 아까운 투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결핍 속에서 하나님께 축복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그래도 응답이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뭔가 우리를 향해서 아끼시는 것이구나. 아끼시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자기의 자녀들보다 더 아끼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 인격적인 결론에 도달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크게 두 번째로는 그 아버지가 마지막에 그 아들이 돌아올 줄 알고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보니까 허랑 방탕하게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이제 빈털터리가 되고 심지어는 목숨을 부지할 양식조차 없게 되었을 때 이 아들은 아버지의 집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왔을 때 이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아버지의 모습은 예전에 아버지 그대로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가정에서 좋은 옷을 입으시고. 그렇지 않습니까? 아들의 모습은 옛날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재산을 모아 가지고 위풍당당하게 먼길을 떠날 때에는 멀끔한 신사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 옷과 그 재산 모두 다 처분하고 이제는 거지 중에서 상거지가 되어서 돼지우리에서 뒹굴다가 왔으니 거지 정도가 아니라 말할 수 없을 몰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남루한 차림새로 돌아오는 자기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목을 끌어안고 그리고 입을 맞추며 그 아들을 진정으로 용납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시지만 그러나 결승점에서 달리기 선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테이프를 들고 있는 그런 마라톤 경기와 같은 심판과 같은 태도로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면 오는 것이지’ 라고 기다리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조금만 돌아가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보다도 더 많이 달려오셔서 우리를 용납해주시고 우리를 맞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오 성품인 것입니다. 결국은 이 만남을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아버지의 집에서 입에 풀칠이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에게 지난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다시 아들의 지위를 허락해주시고 그리고 기업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들이 여러 해 동안 주님을 떠나고 불순종하는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갈 때 우리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서 주님과 불화한 가운데 느낀 그 영혼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리고 정말 더 가난하게 살아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라는 생각을 갖고 하나님께 돌아갔는데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신과 함께 주시는 것을 우리는 늘 봅니다. 이것이 바로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고 그 재산을 모두 먹어버린 방탕한 탕자를 이렇게 뜨겁게 사랑한 아버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래도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고 그런 가운데 부서지지 않은 자아를 인해서 괴로워하며 다시 아버지 앞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잘 맞아주시겠습니까. 지금도 동구밖에 기다리시면서 여러분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들이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아들이 이런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맛볼 수 있기 전에 그에게는 중대한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단이었고 그리고 자신의 생애를 건 모험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고 하는 결단이었습니다. 이 커다란 시련을 통해서 아들은 자기가 지은 이 잘못이 아버지께 대한 잘못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잘못이라는 사실을 터득했습니다. 나의 죄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도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인생을 바라보는 영적인 시야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 그 죄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의 장본인이 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 용서해주시옵소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겠습니다. 결단을 하고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돌아갔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그 오랜 동안에 방랑의 끝에서 돌아온 범죄하고 타락한 그 아들을 놀라운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것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다리시는 아버지로 묘사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 안으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여러분들은 모두 머리 속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인가 용단을 내리고 이제껏 까지 하나님을 떠나서 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던 그런 삶의 방향들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은혜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진정한 성도들,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의 백성들의 돌아옴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이 각자 세워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하나님이 그 자리에 세워주셨을 때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자리는 비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있으라고 하신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이 대신 가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사실은 교회 안에 있는 탕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많이 거스르고 재산을 허비한 적은 없을지 모르지만 재산보다 소중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면서 주님 섬기라고 세워준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날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 아버지는 잠을 이루지 못하실 것이며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돌아오지 않고는 그분의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면서 인격적으로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속히 돌아가서 그 사랑 안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6.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여기서도 하나님이 기다리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번역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거의 정확한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끊임없는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그러나 거절하고 번영할수록 하나님을 버렸으며 물질적으로 부유해질수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생활은 형편없이 퇴락 했습니다. 끊임없이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내 곳으로 돌아가서 기다리겠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계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고 마음을 열면 아주 쉽게 하나님의 은혜에 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들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적하고 적극적으로 불순종해서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만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록 정상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겉모습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항상 우리를 향해서 화목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 초청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는 그 모든 우리의 반응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교회 밖에만 탕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탕자가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신앙생활을 버린 사람들 가운데만 주님을 떠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판에 박힌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 속에도 주님을 버린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끊임없는 용서의 기회를 주시고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핍절한 영혼의 상태에서 돌이켜 생명 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끊임없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거기로 초청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끊임없이 거절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고 동시에 또한 그 모습은 우리의 모습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렇게 거듭되는 초청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다 더 깊고 근본적인 회개를 기대하십니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 저희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나의 얼굴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리라” 말씀하신 것은 ‘더 힘들어야지 만 너희들이 겨우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거듭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보다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가까이 에서 하나님이 초청하셔서 그 초청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의 영적 소경 됨을 깊이 깨닫고 근본적인 갱신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작은 깨달음이 있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면서 어떤 문제들을 발견해서 그것을 부지런히 고치려고 애를 쓰는데도 이상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회복이 없고 나 혼자 애를 쓰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때는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쉽게 낙망하기 쉬운데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낙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그렇게 작은 것들을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도 근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개혁을 요구하시고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개혁을 기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본질적인 개혁과 그리고 본질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계실 때에는 그런 어떤 부분적인 수리만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이 영적 생활의 한계가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그리고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 한계를 뛰어넘고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구가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거룩하고 은혜로운 정서가 메마르고 그리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강력하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자신이 너무나 원숙해졌기 때문에 성숙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아주 가장 커다란 영적인 교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혹은 신약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던 걸출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항상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신앙의 세계를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는 광대하고 지극히 넓어서 일정 기간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섭취하고 그 은혜의 세계를 돌아다녔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우리를 변화시키고 감동시킬 수 없을 정도로 더 이상의 새로운 내용이 없으리 만치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가 협소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섭취하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신령한 변화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 하나님의 넓은 은혜의 세계에 비하면 태평양 바닷가 어느 한 섬, 해변에서 어린아이들이 모래성을 쌓으면서 만져본 바닷물 정도에 불과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그 영광의 세계에 대해서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누가 그 광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세계에 대해서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내가 깨달을 가망성이 없다’라고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의 신앙의 모습 속에 자기 깨어짐을 거절하고 살아가는 완고함에서 비롯되는 무감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경험을 통해서 구약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고 구약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면서 그 속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놀랍게 작용을 해서 구약을 해설해놓은 신약의 성경들을 13권이나 기록을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기독교 신앙에 관한 지식은 거의 사도 바울에게 빚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빚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원은 한가지 목표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그로 하여금 부당한 깨어짐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의 참예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하여 그는 외길로 달려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일정기간동안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맛본 다음에 차갑게 그 수준에서 굳어지는 신자의 생활은 상대적인 의미에서는 다른 동료들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세계를 맛보았다고 할지라도 엘리처럼 차갑게 굳어져가고 그 지식 사이사이에 깃들여야 할 그 지식이 가져다주는 생명 적인 하나님과의 교제와 열정,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느낌, 그리고 거기서 오는 신령한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 이런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채 살아가는 것은 정말 하나님에게도 그리고 본인에게도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부단한 자기 깨어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단한 자기 깨어짐이 없이는 결코 우리는 연단 된 꿋꿋함이나 성숙한 경건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그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에 훌륭한 일군으로 만들고 거목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의 동산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데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은 우리가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 있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부단한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만 주님의 은혜에 세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 속에는 세상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마음이 자신과 교회와 그리고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훌륭한 망원경이 됩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통해서 자기를 보면서 교회를 보면서 자기의 이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정말 우리들에게 자기 깨어짐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자기 깨어짐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들이 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몸부림치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자기의 부족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법이 없습니다. 주께 맡은바 사명을 잘 완수해서 자기를 이 사명에 세우신 주님께 만족을 드리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 아버지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 자리에 세워주셨는데 자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이 그르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깨트려지는 법이 없습니다. 좀더 신실하기를 원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구성하며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증 된 마음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즉, 자기 깨어짐이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기 깨어짐이 없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지 않으면 이미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이사이에 깃들였던 그런 하나님과의 생명 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 희열, 열정, 사랑, 교감 모든 것들이 빠져나가고 엘리 제사장과 같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시는 수도 있다라고 하는 차가운 정보만 그의 가슴속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의 어떤 신앙의 경력을 가지고 있든지 마른 뼈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단한 자기 깨어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기 깨어짐이 무엇인가? 그것이 두 가지로 오늘 요약되어 있는데 그것은 하나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회개와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하나님께 대한 추구입니다. 어느 시대에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 깨어짐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번영의 수단으로 생각했고 신앙을 자기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방편으로 생각해왔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고 평강 주시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자녀들에게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삶을 선물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나 자기의 자녀가 축복 받고 복 받고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많이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삼으시고 그들 자신을 한없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에게 전수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무리 많은 은혜를 부으시고 축복을 부으시고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번영을 주신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하나님 자신의 소중함을 ‘이 모든 번영과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보다도 뛰어나다’고 그렇게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주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귀하다는 고백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자기의 백성이 자기를 인해서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당신은 당신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면서 당신의 선택된 백성들에게만 부어주시는 독특한 축복을 부어주시면서 탁월한 교제의 감격 속에서 살기를 갈망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언제나 이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지적을 보십시오. 주님이 그들과 말할 수 없는 교제 속에서 살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들이 당신과 교제하면서 그 안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셨지만 그러나 그들이 죄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도 당신 자신의 것으로 돌아가셔서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칠 때까지 기다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우리가 죄가 없다 하면 속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이 깊고 영적으로 원숙해지면 원숙해질수록 우리의 죄는 아주 고등 화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견고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한때 힘썼던 사람들이 노골적인 배교에 가까운 죄를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갈피갈피 정말 그런 죄들이 깃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면 자라갈수록 그 사람 속에 있는 그 죄가 평범한 말씀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들을 가지고는 찾아내기 힘든 내면의 죄들이 그의 거룩한 삶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수록 그는 좀더 깊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자기도 찾아내기 힘든 자신의 내면의 죄들을 깊은 성찰 속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분변하고 찾아내는 은밀한 죄에 대한 탐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자기는 그래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네 하고 더 이상 자기의 성찰이 없고 그리고 정사의 삶이 없이 이미 도달한 신앙과 은혜의 수준에 만족하며 자기만 못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우월감을 느끼며 산다고 한다면 그나마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모든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알기를 더욱 힘쓰면서 그러면서 죄를 뉘우치는 자기 부인의 삶이 매일매일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진실해져야 합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하여튼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당김이 없이 판에 박힌 듯이 계속 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 깊이 두려워하면서 그 형식 속에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애를 써야 합니다. 진실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 속에서 주의 말씀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죄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는 일들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뉘우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게 만들고 차갑기 그지없던 사람의 마음에 뜨거운 열정을 불어넣습니다.
겨울에 온 산하가 모두 얼어붙어 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 산에 올라보면 온 산이 얼음으로 덮여있습니다. 그런데 봄이 가까이 올라치면 얼음은 예전과 다름없는 얼음인데 얼음 속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물이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입니다. 졸졸졸 흘러갑니다. 그 흐름을 통해서 얼음이 겉으로 속으로 녹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온 계곡을 가득 매웠던 그 얼음이 사라지고 파란 물들이 솔밭 사이로 노래하며 계곡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한순간에 진지한 회개, 지금은 비록 세상 적인 표현으로 뒤집어지는 것 같은 폭발적인 회개를 경험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진지하게 자기를 성찰하면서 주님의 말씀 앞에 자기의 영혼의 상태를 헤아리며 진실한 눈물을 흘리며 나를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지금은 그 회개가 여러분들의 인생의 지축을 뒤흔드는 생애 적인 회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눈물이 여러분들의 차갑게 얼어붙은 영적 생활의 밑에 흐르는 한줄기의 계곡 물줄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진지한 회개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그 눈물은 결국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회개로 변할 것이며 결국은 아무 대책 없이 굳어져서 이렇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마치 운명인 것처럼 생각되는 그 엄청난 차가움, 하나님께 대한 그 냉담함,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자라가지 못하는 그 불구 됨, 이런 모든 상태를 결국은 해결해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만 기다라시기 때문입니다. 즉 진지하게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자에게는 항상 뉘우침 뒤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격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회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지 만 멈추었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성장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또 하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이라고 할 때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순결한 영이신 그분에게 얼굴과 다리 팔 같은 것들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안쓰로 포멀피즘’ 즉 하나님을 사람처럼 생각하고 묘사하는 이 신인 동형적인 이 묘사는 모두 이해가 떨어지는 인간의에 생각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을 향해서 얼굴을 드시는 이유는 오직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구원받을 백성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심판하기로 작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부으시기 위해서 얼굴을 드시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향해 얼굴을 드심으로 은총을 회복시켜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시편 107편에 나와있는 시인의 고백대로 주께서 얼굴을 가리우시매 모든 이 세상에 피조물들이 시들어 가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생기를 잃어버리고 기쁨과 사랑, 말할 수 없는 이 희열의 감격 속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인들은 사실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에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향해서 얼굴을 드시고 그렇게 우리를 대면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의 온 영혼은 살아납니다. 어둡던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의 등불들이 켜지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던 무지로 말미암아서 어찌할 수 없이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사람들 마음 구석구석에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깨닫게 만들어주는 진리의 빛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이 비칠 때 그때 사람들은 한없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굿모닝’이란 말이 영국에서 왔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잘 아시지요? 정말 그 나라는 이렇게 습하고 그리고 밝은 햇살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해양성 기후에 특징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찬란하게 햇빛이 쏟아지는 날이면 런던에 있는 시민들은 특별한 날이라도 되기나 한 것처럼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여기저기서 일광욕을 즐기고 우리들이 얼굴이 탈까봐 뭘 바르고 가리고 다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사람들은 쏟아지는 햇볕을 마음껏 맞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처럼 행동을 합니다. 세상에 햇빛 하나도 오래간만에 나와도 그렇게 기쁜데,
영혼의 햇빛 예수여 언제나 함께 계시고
이 세상 구름 일어나 가리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은혜의 임재 아래 살아본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가사를 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얼굴빛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 주님의 그 임재 속에서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은 참된 만족이 무엇인지를 터득해 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주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자라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 사랑이 당신을 향한 추구로서 입증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가장 커다란 죄악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열렬하게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열렬하게 기도한다든지 아니면 열렬하게 일을 한다든지 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구하지 않는 것, 왜 주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나는 성장이 없을까. 주님 내게 주님을 더 알려주시옵소서. 왜 내게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 있어서 진전이 없을까. 저로 하여금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해주시옵소서. 왜 내게는 주님의 말씀의 세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성장이 없을까. 이러한 것들을 고민하면서 나를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해달라고 정말 간절히 알기를 원하는 그런 하나님 자신을 향한 추구는 단지 일을 추구하는 것이나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하는 마음이 애절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치고 나면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의 소원도 그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 것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목마르고 더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세워져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얼굴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번영한 나라에 살면서 아쉬운 것이 없이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살고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이 사람들, 하나님께서 어느 한순간에 세상에 그 번영과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의 진정한 기업은 하나님 자신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겠다 라는 말과 동의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어떻게 하면 주님의 보다 더 풍부한 임재 속에서 내가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더 큰사랑을 알까. 어떻게 하면 주님과 나누고 있는 교제가 친밀함을 더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께 더 요긴하고 필요하게 될 수 있는가를 가지고 더 깊이 고민하며 주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추구하는 것, 그분과 대면하기를 몸부림치는 것, 이것이 주님을 향한 추구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찾기를 얼마나 갈망하는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목마른 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주님을 아는 지식, 그 속에서 살고싶어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회개와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간절한 추구가 있을 때 기다리시던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그렇게 하나님을 추구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은혜의 세계로 귀환하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우리를 성찰하며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잘못들을 뉘우치려고 하는 집요한 회개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말할 수 없는 영적인 부유함과 그리고 신앙의 풍성함을 우리에게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기다리시면서 우리들이 당신께 나아와 진정한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추구로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그 은총과 충만한 은혜의 생활을 이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이런 은혜 속으로 들어가서 그 부유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핍절하고 껍데기만 남은 형식적인 신앙의 생활과 미련 없이 결별하고 주님 자신의 생명이 있는 그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렇게 정직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한 추구의 마음을 회복해서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