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2007-200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예수의 일을 구하는 자(빌2:20-22) 2007.4.4 수요예배 1
2.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시14:1) 2007.5.2 수요예배 8
3. 창조와 하나님의 충족성(창1:1) 2007.5.9 수요예배 21
4. 창조와 하나님의 경향성(창1:31) 2007.5.23 수요예배 33
5. 창조와 하나님의 아름다움(1)(창1:31) 2007.6.13 수요예배 45
6. 창조와 하나님의 아름다움(2)(창1:31) 2007.8.1 수요예배 58
7. 창조와 하나님의 영광(시108:4-5) 2007.8.15 수요예배 74
8. 시간과 영원(창1:31) 2007.9.12 수요예배 85
9. 아름다운 두 질서(시19:1-4) 2007.9.19 수요예배 102
10.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골1:18) 2007.10.3 수요예배 112
11. 머리이신 그리스도(골1:15-18) 2007.10.10 수요예배 128
12. 하나님을 아는 것과 선악의 판단(창1:1) 2007.10.17 수요예배 136
13. 선악의 판단기준 (1)(시14:1) 2007.11.7 수요예배 144
14. 선악의 판단기준 (2)(시14:1) 2007.11.14 수요예배 156
15. 도덕적 통치의 수단 : 계시(1)(롬1:20) 2007.11.28 수요예배 164
16. 도덕적 통치의 수단 : 계시(2)(롬1:20) 2007.12.5 수요예배 182
17. 도덕적 통치의 수단 : 계시(3)(고전15:1-2) 2007.12.19 수요예배 192
18. 도덕적 통치의 수단 : 계시(4)(약3:13) 2008.1.2 수요예배 203
19. 도덕적 통치의 수단 : 계시(5)(시119:18) 2008.1.30 수요예배 214
20. 하나님의 통치의 방법 : 은혜와 율법(롬5:21) 2008.2.6 수요예배 225
21. 도덕적 통치 방법 : 상벌(1)(롬2:9) 2008.2.20 수요예배 238
22. 도덕적 통치 방법 : 상벌(2)(계21:7-8) 2008.2.27 수요예배 251
1.예수의 일을 구하는 자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20-22).
사도바울이 쓴 이 빌립보서에 보면 빌립보교회와 사도바울의 아름다운 목회 적 교통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사도바울은 옥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옥중에서 사랑하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 교회는 사도바울이 자주장사 루디아의 전도를 통해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자신이 개척해서 세운 그 교회였죠 그래서 이 교회가 사도바울이 옥에 갇힌 것을 알고 노심초사하며 많이 기도하고 섬겼습니다. 그때에 에바브로디도라고 하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전도사쯤 되는 사람을 이제 자기네들의 소식을 가지고 사도바울을 찾아 가게 했습니다. 왔는데 그만 와서 사도바울을 돌아보다가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그로 인하여 근심하는 빌립보교회를 보면서 사도바울이 이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면서 이제 쓰는 편지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거기에는 이 디모데를 보내고 싶어 했는데 그런데 디모데보다 사실은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먼저 보낸다. 그 얘기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디모데에 대한 사도바울의 평가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어보는 이 말씀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사도바울은 평생을 복음 사역을 위해 애쓴 사람 이였고 하나님의 큰 능력이 함께 하는 목회사역을 선교사역을 수행했기 때문에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또 회심한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훌륭한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도바울 곁에서 함께 섬기고 일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늘 사도바울은 이 디모데의 삶의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내게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디모데만큼 너희에 대해서 진실하게 사랑으로 생각할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합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일을 구하데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한 사람이었다. 라고 말하는 것 이죠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누구나 조금씩은 주님의 일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주님을 다 섬기고 있거나 최소한 섬긴 적이 있는 사람들 이었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을 다 섬기는 사람들이였고 또 섬기고 있는 중이겠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지만 주님만 섬기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동기가 되어서 혹은 자신의 체면 때문에 혹은 자기에게 맡겨진 직분에서 비롯되는 의무감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거죠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은 이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던 사람이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애쓰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그 사명이 우리에 의해서 계승이 되는데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그 일들을 우리에게 계승해 주실 때 그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 이 디모데의 관심사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과 시련, 고난 이런 것들이 있었지만 이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의 일을 구하지 않던 사람 이였다고 오늘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이 보실 때 어떤 사람일까요? 모두 주님의 일을 크든 작든 섬기고 있지만 주님 보시기에 저희는 자기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그런 평가를 받고 있는지 한번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이렇게 디모데가 사람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추구한 사람 이였다고 소개하면서 그 디모데를 소개하면서 디모데에 관해서 언급할 때 처음 나온 생각이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그랬습니다. 그러니 디모데하면은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도 그리고 사도바울과 디모데를 잘 알고 있는 빌립보교회의 교인 마음속에도 디모데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아 설교잘하는사람, 아 똑똑한사람, 아 유능한사람, 아 공부많이한사람, 아 돈많은사람, 그렇게 떠오르는 게 아니라 디모데하면 떠오르는 게 뭐냐 하면 그 연단의사람 그 연단의사람 그게 떠올랐다는 거요.
디모데후서에서 사도바울은 아들과 같은 이 디모데에게 그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인지 평가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그에 신앙은 멀리 외할머니로부터 시작된 신앙 이였고 또 그 아름다운 신앙을 물려받은 어머니에게서 영향을 받은 신앙 이였어요. 아마 이 두 사람을 사도바울이 모두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네 할머니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닉의 속에 있었던 것인데 네게도 그것이 있구나! 그랬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은 거짓이 없는 믿음 이였습니다. 섞이지 않는 믿음 꾸며내지 않은 진실한 믿음이 이 디모데의 특징 이였습니다. 디모데는 육신적으로 매우 약해서 사도바울의 마음에 늘 근심을 주던 육체적으로 연약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골로세교회에서 목회할 때 고난을 많이 받은 그러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사도바울이 생각하기에 진실한 신앙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신앙 이였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사람 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참고 싶을 때가지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닙니다. 그럼으로 견디고 싶을 때까지 견디는 것은 연단이 아닙니다. 연단은 이제 더 이상 견디기 싫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 때문에 이것을 견딜 수밖에 없을 때에 다가오는 것 그것이 연단이에요 그것이 연단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디고 싶을 때까지 겪게 되는 어려움은 그것 그냥 고생이지 연단은 아니에요 연단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될 때 자기의 능력을 넘어서 밀려오는 그 고난을 가리키는 것 그것이 연단이에요 이 연단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아주 놀라운 힘이 있어요
여러분 지금은 좋은 기계들이 많이 나왔지만 옛날에는 길거리에 가다보면 산소 용접하는 집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커다란 통에다가 카바이트를 집어넣고 물을 집어넣으면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부글부글 끓으면서 거기에서 산소가 나옵니다. 그 가스에다 불을 붙이면 쉬- 하면서 불꽃이 나오거든요 그래 그것을 쇠에 대야 차가운 쇠에다 그것을 대봐야 기별도 안오죠 한참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드디어 그 쇠의 어떤 부위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해요 그래도 계속 대고 있으면 이번에는 벌겋게 달아오르던 게 새빨간 색으로 변해요 그래도 계속 불을 쬐고 있으면 벌겋게 달아오르던 그 부분 중에 불꽃을 직접 받던 부분이 하얀빛을 내면서 그렇게 타오르기 시작해요 그러다보면 드디어 이상하게 쇠의 표면이 흐물흐물하면서 거기에서 쇳물이 녹아내리기 시작하면서 구멍도 뚫어지고 그 다음에 길게 지나면 쇳덩어리도 잘라지고 하는 그런 작업들을 하는 공작소가 있단 말이죠
바로 그거에요 이렇게 참고 싶을 때까지만 참는 것은 그 불을 쉬-하고 한번 붙이고 그냥 꺼내버리는거에요 그럼 어떻게 되요 그 불이 닿아서 그냥 시커먼 거 내버려 둔거나 한번 벌겋게 달구어 내버려 둔거나 모양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모양이 변하려면 그게 녹아서 흘러내릴 때까지 대고 있어야 되요 완전히 다른 쇠가 되는 거죠 잘라지는 거죠 모양이 변하는 그죠 그게 바로 연단이에요 이 연단은 극심한 자기 고통을 가져다주는 거죠 생명이 있는 모든 피조물은 고통 받기 싫어해요 인간도 그 생명이 있는 자연적인 피조물들 중의 하나에요 그러니까 육체로 고통을 받게 되면 인간은 어떻게 하든지 그 육체의 고통을 피하려고 해요 그리고 마음과 정신의 고통을 받으면 어떻게 하든지 그 상황에서 도망치려하는 것이 생명을 가진 인간의 본성이에요 본성이란 말이죠
그것을 오늘 사도바울은 자기의 일을 구하는 것이며 사람의 일 곧 자기의 일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제일 어려운 것은 거기에 서 있는 거에요 그 자체가 무한한 힘과 에너지를 요하는 거요 왜 자기가 원하지 않은 상황인데 거기에서 끊임없는 고통이 자신에게 가해지는데도 그 자리에 계속 있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엄청난 힘이에요 그래서 사람은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인 고통과 마음의 이 고통을 견디지를 못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를 떠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여러 가지 사명의 자리가 있죠 그리고 혹은 있었죠 배가 고파서 떠난 사람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세요 먹고 살수가 없어 떠난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두 번째 거기 계속 서 있으면 죽이겠다는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친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없어요 그러면 죽을것도 아니고 굶어죽는것도 아니고 매맞아죽는것도 아니데 거기서 왜 떠나냐, 간단해요 정신과 마음이 고통을 받으니까 떠나는 거에요 그때에 떠날것이냐 말것이냐 결정하는 그 기준은 누구에여 자기 자신이에요 왜? 왜? 내게 맡겨주신 그 자리에서 떠나려고 하는데 힘드니까 간단한거죠 힘드니까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은 어떻게 되든지?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그 일은 어떻게 되든지? 주님이 내게 세워주신 그 사명은 나에게 어떻게 되든지? 교회에서 나에게 맡겨준 그 사명은 어떻게 되든지? 내가 그것을 감당하므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게 되는 영혼과 그리고 내 가족과 내 이웃과 이 모든 것들은 어떻게 되든지? 나는 싫다 왜냐하면 힘들기 때문에 그게 결국은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받은 많은 사람들 속에 사도바울이 찾아 볼 수 있었던 태도였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배짱이 맞을 때 열심히 섬기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고난과 슬픔이 쉴새없이 밀려오고 마음과 정신이 압박을 받으며 끝없이 고통을 당하지만 아무 대가도 얻지 못할 때 그것을 견디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이 자신을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떠나는 거에요 그래서 가정을 버려, 그래서 자식도 버려, 교회도 버려, 그래서 친구도 버려, 그래서 자신에게 주신 중요한 의무도 버려, 그리고 결국은 자기가 덜 고통 받고 편안한 그 길을 끊임없이 가는 거에요 사람보기에는 아주 좋은 선택을 하면서 매순간 진실하게 고민하면서 길을 선택해서 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런 사람들의 일생은 끊임없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을 버리는 삶이에요 전체적인 인생을 살고나면 끊임없이 갈지자로 휘면서 걸어온 인생의 길이지 거기에는 어떤 목표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사도바울이 보기에 이 어린 디모데는 거짓 없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여러 언급으로 볼 때에 이 사람은 사도바울처럼 통이 크고 담대하며 카리스마적인 영향력 이런 것을 갖고 있는 목회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그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경건한 신앙을 물려받았으니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아마 그런 샌님 같은 목회자였는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그에게는 큰 힘이 있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거짓이 없는 믿음 거짓이 없는 믿음 위선과 거짓 그리고 불순한 것이 섞인 믿음이 아닌 순전하고 단순한 믿음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진실하고 순순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연약한 몸으로 목회 사역에 많은 고난을 받고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다 겪었지만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이 디모데의 연단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도 디모데하면 마음에 떠오르는 그림이 디모데의 연단이었습니다. 아 젊지만 끊임없이 그 연단을 받은 목회자 끊임없이 예수의 일을 구하는 그러한 목회자 이것이 사람들에게 떠오른 그림 이였습니다.
사람이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가 고통을 많이 받으면 그걸 고생이라고 합니다. 고생은 하면 할수록 인간이 망가집니다. 고생은 하면 할수록 인간이 계속해서 망가집니다. 그런데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은 고생 그것이 아닙니다. 이 고생은 자기의 일을 구하며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당하는 고생이고 여기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똑같이 고생하는데 어느 목표를 향하며 가면서 그 목표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생이에요 그 목표가 예수일 때 그 목표가 우리 하나님일 때 이 고생을 가리켜서 우리는 고난이라고 말하는 거죠 이렇게 고난을 많이 당하면 그 사람이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가 어떤 쪽으로 이루어지냐 하면 그 사람이 고생하는 이유가 가는 쪽으로 이 사람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거죠 즉 고생하는 이유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찾아가는 이유가 세상이라면 세상을 닮아가면서 망가지는 거죠 그런데 고생을 하는 그 이유가 예수님일 경우 고생을 하는 그 이유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일일 경우에 그는 하나님과 예수를 닮아 끊임없이 그 고생 속에서 변화되어 가는데 이러한 거룩한 변화를 가져오는 고생을 가리켜 우리들이 그렇죠 고난이라고 부르는 거죠
저는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지만 많지는 않지만 주위에서 정말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들 성도들 주님의 일꾼들을 만났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그 모습의 향기를 풍기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 모두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한결같이 주님 앞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 분투하고 애썼던 사람들이였습니다 또한 아주 분명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산 사람들이 고난을 통해서 거룩해지지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자기의 편의에 따라 살고자한 그 사람이 단지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예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난의 사람 이였고 그들은 모두 거짓 없는 진실한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그들은 모두 고난을 받으면서도 가야할 인생의 분명한 사명의 항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푯대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찬양) 거친 바다 험한 산 비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에 사랑을~
그렇게 분명한 사명이 있는 사람들 그래서 자기는 어떻게 되든지 예수의 일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고생할 때 연단을 많이 받으면서 예수의 사람으로 변해갔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여러분은 이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그러한 감정의 체험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눈물을 씻은 후에는 아주 강철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조금 힘들다고 집어치워버리는 사람들 그게 하다못해 주일학교 교사의 일이든 교회 마당을 쓰는 일이든지 간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정함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결코 거짓 없는 믿음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일 수 없어요 그리고 자기의 사명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수가 없어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는 어떤 것인지 아세요? 여러분 그런 경험 해 본적 있죠 기도를 해야 되겠는데 정말 어려운 일이 생겨서 다급해서 부르짖어야 되겠는데 너무 상황이 힘들어서 눈물은 나오는데 기도는 안 나오는 적 없었어요 눈물은 나 너무 괴로워서 가슴은 복 받쳐 그런데 기도는 안 돼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는 기도가 쉬워요 하나님의 세워주신 사명의 자리에 있으면 넘어져도 금방 일어나 그런데 고무신들 거꾸로 신으면 그러면 넘어지면 못 일어나 하나님이 세워주시는 자리에서 마음과 정신에 끊임없는 고통이 와 때로는 육신적인 박해까지 와 그때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으면 하나님 앞에 기도드리기가 쉬워요 그리고 조금만 기도하면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어주셔 왜? 부족하지만 모자라지만 마음이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그러나 당신이 맡겨주신 그 자리에 서있어요 하나님이 열어주시죠 죽을 것 같고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도 그 자리에 서 있으면 하나님이 다시 기도의 문을 열어주셔요 울부짖지 않아도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 이 자리는 주님이 네게 세워주신 자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있을 때만 제인생의 의미가 있고 다른 것은 제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 어려운 일이 많고 고통과 시련이 그치지 않습니다.
(찬양)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그리고 거기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거기를 떠나가면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어요 물론 언젠가는 회복이 되겠죠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멀리 돌아가는 고통스러운 길이에요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를 떠난 사람의 청산유수와 같은 기도보다는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신음하는 소리에 하나님께서 더 많이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게 바로 연단이에요 디모데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여 자기의 일을 구하여 주님의 사명을 버렸을 때 이 사람은 바로 이것을 감당해 나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세워주신 자리는 어디입니까? 거기정말 연단이 있습니까? 어렵고 고통이 많을 지라도 거기계세요 거기가 가장 쉬운 자리입니다. 거기서 고생하는 것은 고난이고 거기를 떠나서 고생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생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해요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아주 정확하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의 삶을 헤아리십니다. 누가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주신 자리에서 마음과 정신과 육체에 끊임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자리에 흔들리지 않고 서 있으려고 애를 썼는지? 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버리고 자기유익을 위해서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떠났는지? 떠나지 않고 있지만은 마음으로는 그것을 버렸는지 예수님께서는 모두 아십니다.
사람이 볼 때에는 부족해보이고 사람이 볼 때에는 정말 모자라는 것 같고 사람이 보기에는 흠이 많은 것 같아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향한 인간의 모든 태도 마음과 정신의 경향을 모두 아시는 분이죠 그래서 그 자리에 서 있을 때 고생을 하면 눈물이 나오는 기도가 가능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라 그러셔서 제가 여기에 있는데 고난이 많습니다. 주님이 원하셔서 여기 있으라고 하셨는데 이미 나는 스스로 여기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니 그 말씀 때문에 나는 여기 있습니다. 고난이 많습니다. 나는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고 저렇게 모자라는 사람이고 이렇게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이고 이러한 결점과 저러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주님 앞에 매달려 그때에 그 사람의 유일한 위로는 뭐냐 하면 네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당하는 고생이 처음이 아니다. 주님도 너처럼 아버지가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 주님도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걸 묵상해요 그래서 마음이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마음속에 찬송이 나오는 거에요
(찬양)내 주에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네게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
그러면서 아! 그렇구나 거기서 예수님과 동변상련의 고통을 나누게 되는거죠 아! 그렇구나 예수님이 내가 없었더라면 여기 예수님이 계셨을 것이고 예수님이 여기에서 고난을 당하셨을 텐데 내가 예수님께 접붙인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이 나를 여기세 세워주셨구나 내가 지금 아픈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 당하신 고통이지 그럴 때 여기에서 신비하게도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거기에서 예수와 합일되는 기쁨이 스며드는데 이게 뭐냐면 부활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자리에서 고생을 할 때 예수의 고난이 스며드는 것이 예수님의 고난의 경험이라면 예수죽음의 경험이라면 그것을 통해서 예수와 합일을 경험하면서 그 예수와 연합되는 놀라운 기쁨이 내 가슴속에 스며드는 것이 바로 예수의 현대적 부활의 기쁨이에요 그래서 이 안에서 살아요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큰 능력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에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도저히 상식으로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면서 구주와 함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다시 사는 경험을 하는 것에요 그것이 예수의 뒤를 따라간다고 하는 말의 의미에요 그래서 자신의 일을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거에요
고난주간에 예수십자가 많이 묵상하시죠 여러분들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정말 거기에 있습니까? 그게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를 떠난 사람은 십자가를 벗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 십자가가 거기에 있습니까? 정말 거기에 있습니까? 고난주간에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합시다.
얘야 니가 그렇게 예수 믿고 복 받으며 살았지만 나를 위해 진 십자가의 흔적이 있느냐? 오늘 이 시간 네가 나를 위해 진 십자가는 뭐냐? 예수님이 물으실 때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 어디입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여러분들은 정말 예수고난 생각하며 여러분을 이기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 고난주간에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2.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오늘부터 수요예배의 새로운 시리즈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안 계신 것 같아도 사실은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14편입니다. 시편 14편 “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아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 고맙고 자혜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수요 예배 시간에도 하나님이 저희에게 찾아오셔서 은혜를 내려 주시고 말씀을 통해 깊이 깨닫고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그래서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저희를 도와 주십시오. 말씀을 전하고 들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은혜로 저희의 심령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 오늘 우리가 읽은 그 시편에서 시인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 이렇게 마음에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부패해져서 악을 행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곱게 간직하고 그것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주는 것이죠. 그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하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그러면 그것은 그렇게 우리 집에 무슨 물건 있다. 이렇게 인정하는 것처럼 객관적일 수가 없는 거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그러면 이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에 그 의해서 창조 되었다는 것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고요. 두 번째는 무어냐면. 내가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정신과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없고. 세 번째는 무어냐 하면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여기에 태어나게 하신 뜻이 계실 것이다.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된 다 라고 하는 세 가지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죠, 한번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보세요. 찰 난한 별들이 하늘에 떠있고. 그 하늘에 떠있는 무수한 별들은 질서 정연하게 움직여요 실록이 우거지는 5월입니다. 파란 이파리들이 아름답게 온 나무에서 솟아나요 그 색깔들이 하늘과 조화를 이루고 오랫동안 겨울잠을 자던 나무에서 새순이 돋더니 이제는 이파리가 활짝 피어오르기 시작해요, 그리고 꽃들이 피기시작하고, 가을이 되면 열매가 맺겠죠. 그 열매를 인간과 동물들이 먹고, 이런 질서 정연한 모든 자연세계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거죠. 이렇게 하나님이 법칙을 통해서 인간이 아닌 이모든 자연의 세계를 다스리셔요. 이것을 하나님의 자연적 통치라고 보는 거죠, 그러면 자연적인 모든 만물들이 이렇게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에 있어서 그 법칙을 따라서 태어나고 죽고 흘러가고 소멸하고 하고 하는 것들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그러면 자연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 그리고 인간의 도덕 세계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이 있기 때문에 그 법칙을 따라서 살면 축복 받고 평안하고 행복하며 그 법칙을 거 스리고 살면 결국은 고통을 받고 불행해지고 징벌을 받는 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론이란 말이죠! 그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이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거죠. 하나님이 없다라고 생각하면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은 우연이고 그러니 정신이고 무어고 이런 것 신뢰 할 수없고, 그 다음에 내 인생의 목표나 가치 같은 것들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으면 그다음에 누구 마음대로 살아요? 내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사는데 이 인간이 이끄는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절대로 행복한 길로 이끌지 않는다. 이 얘기에요.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이세상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신다 하는 것을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라고 불러요. 우리가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에서 이야기 하는 이러한 도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원래 이 도덕이라는 말은 도라는 말과 덕이라는 말 둘로 이루어져있어요. 이 도는 뭐냐 하면은 인간의 경험과는 상관이 없이 인간의 경험 이전에 인간에게 이렇게 지키면서 살도록 되어진 삶의 기준 이예요. 그게 바로 도예요. 도. 그러니 그 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이 없는 거죠. 인간의 모든 역사는 바로 이 도를 찾아온 역사예요, 그래서 어떠하든지 내가 행복하게 살고 싶고 살아있으니까 어떤 목표를 향해 가고 싶을 거라는. 그런데 먹고 마시고 춤추고 쾌락에 빠지는 것도 잠깐 이지 그걸로 인간이 행복해질 순 없거든요. 그러면 내가 계속 따라가면 행복해질 수 있는 그 기준이 뭔가? 그를 찾으려 애써온 것이 인간 정신의 역사예요.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찾질 못했어요. 찾았다는 사람들이 가끔 나타나는데,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은 뭐, 석가모니니 뭐 마호메트니 이런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 이예요. 근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들이 그렇게 찾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찾을 수 없었던 그 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길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도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특별히 내가 곧 그 도라고 말씀하신이유는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인간의 경험 너머에 있는 우리들의 인생을 다 바쳐서 그 표준에 맞춰서 살아야 할 그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이지 않는 속에서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동양에서는 흘러가는 물 있다가 사라지는 이런 자연 속에서 그 속에서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면서 인간이 살아가는 도리를 찾으려고 했어요. 그것은 마치 이렇게 희미하게 가리어진 보이지 않는 유리 같은 것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것처럼 희미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이면 참으로 지키며 따라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예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직접 보여준 거예요. 내가 곧 길이요. 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지키면서 살아야 할 기준과 인생이 가야할 표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자연적 사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도를 보여준 겁니다. 덕은 뭐냐 하면은 거기에 부합하며 살려고 하는 영혼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영혼의 힘이라는 게 뭐냐 하면은 어느 쪽으로 가고자하는 힘이 예요. 무슨 뜻이냐면 이렇게 물건이 있잖아요. 이렇게 있던 물건을 이렇게 옮겼어요. 그럼 여기 있는 게 일루 간 거 아녜요. 이렇게 옮겨도 마찬가지죠. 그죠? 그러면 전에는 여기 있었는데 이번에 일루 갔잖아요. 여기 있던 게 일루 간 거는 무언가가 작용을 했기 때문에 간 거 아녜요? 여기 있던 게 일루 가게 한 원인을 가리켜서 우리는 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 힘인데 아무 힘이나 힘이 아니라 올바른 힘. 영혼의 올바른 힘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의 목적에 자기의 힘을 가지고 거기에 부합시키려는 이것이 덕이에요. 그러니까 도덕이라는 단어는 객관적인 기준과 부합하면서 살려고 하는 인간의 주관적인 영혼과 마음의 힘이 합쳐져서 도덕을 이루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참 도덕적이다 하는 건 뭐냐 하면은 내가 인간으로서 행하여야할 바가 뭐라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두 번째는 자기가 영혼과 마음의 힘을 다해서 그것과 합치하는 생활을 해 나갈 때 그 사람을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그러는 거라 이거죠 그럼 이 기준을 이 세상에서는 올바르게 정할 수 없어요. 근데 하나님에게는 이 기준이 너무나 너무나 분명해요. 이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실 때에 목적이 있으셔서 만 든 거예요. 그건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 그게 이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 이것이 목적인데. 영광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언급할게요. 목적인데 이것이 바로 객관적인 도가 되는 거죠. 그럼 여러분이 이렇게 묻고 싶을 거 아녜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도라고 그랬단 말예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에게 나는 이세상을 영광을 위해 창조했다 이렇게 말씀만 하시면 이 아둔한 인간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인 거죠. 아이를 가리킬 때에, 좋은 예가 생각났어요. 에 내가 널 이렇게 자식으로서 대우해주고 교육을 시켜주고 이렇게 하는 거는 너 훌륭한 사람 되라고 그러는 거야. 얘, 너 훌륭한 사람돼야해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고 맨날 만날 때마다 훌륭한 사람돼야해. 얘, 너 훌륭한 사람돼야해 .예. 그러고는 뭘 하든 지간에 참견도 안하고 맨날 만날 때 마다 훌륭한 사람돼야대 . 훌륭한 사람돼야대. 얘가 이걸 알아듣냐 이거죠. 뭐가 훌륭한 사람인지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건 여러분도 아직 잘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아이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만 가르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계명을 주는 거예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도라면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고 애가 이해를 못하니까 구체적으로 거짓말 하지 마. 친구물건 손대면 안 돼 엄마한테 거짓말 하면 안 돼 학교공부 열심히 해야 돼 인터넷 너무 많이 하면 안 돼 음란사이트 들어가지마 숙제는 꼬박꼬박 해가야 돼 이러한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지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하나 주어진 명령이 다 이 아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럼 그 훌륭한 사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라면 그 창조하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면 그 영광은 나 혼자 돌리는 것이 아네요. 이렇게 밖에 보면 꽃밭의 꽃이 너무 예쁘잖아요. 요새 전 그거 보는 게 재미예요. 처음에 심을 때는 아 저 뭐 별로다. 더 사다 심지 더 사다 심지 했는데 나중에 확 퍼지고 나니까 하트모양이 입체로 확 떠오르는데 여러 사람 불러서 이거 좀 보라고 했어요. 지나가는 사람한테 너무 멋있지 않느냐. 이게 노란 꽃 빨간 꽃 파란이파리 큰 것 작은 것 다 섞여있으니까 그게 자악 어우러지면서 쉬익 떠오르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셔서 마지막 받으시고 싶은 것이 거기에 당신의 영관이 충만해 지는 거라면 그러면 난 작은 하얀 꽃일 수도 있고 너무 교만했나? 내가 꽃이라니까 여러분 굉장히 거부반응 보이는데, 아니 할미꽃도 꽃은 꽃이지. 나는 꽃이고 옆에 있는 사람은 이파리고 옆에 있는 사람은 장미고 이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정원이 아름답게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의 목적이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받으시기 위해서 사람은 각기 다 다르게 지으셔서 창조하셨으니까 창조세계 전체를 향한 목적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거지만 그 속에 있는 하나하나는 각기 개별적인 목적이 있을 거 아네요. 그렇게 아름답게 되기 위해서 너는 노래를 잘 하고 사람들에게 그 노래를 가르치고 그래서 우울한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넌 공부를 잘 하니까 공부를 잘 해서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걸 깨닫게 해주고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여라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다양한 재능을 주셨을 거 아녜요. 그런데 이렇게 하면 어떤 사람은 어 난 아무리 발견해도 없는데 아 그러지 말구 봐봐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 놀지 말구 해보려고 해. 그럼 그 재능이 드러나는 거라 게으른 사람들에겐 그게 발견이 안 되는 거라. 그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하고 어떤 사람은 돈을 잘 벌고 어떤 사람은 싸움을 잘 하고 어떤 사람은 물건을 잘 만들고 어떤 사람은 얼굴이 예뻐서 쳐다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고 아무튼 다양한 종류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아무리 그걸 가지고 지 잘났다고 막 이렇게 해도 그걸 가지고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저절로는 그쪽으로 향할 수 없어요. 그 도로 향하지 못한다. 얘기죠. 그 도로 향하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살아가고 싶은 인생이 없는 거죠.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이 없고 내가 너무 사랑하는 하나님께 내가 뭘 이바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 속에 녹아들어서 나를 막 채우는 거예요 그럼 이 사람은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거고 또 이 사람은 돈을 잘 버니까 돈 버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거 아녜요. 연기를 잘하면 연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거 아녜요 힘이 있으면 이 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거 아녜요. 그러니까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건 전체가 하모니처럼 엮어져서 마지막에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려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세상이 되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이 이 세상 창조하신 목적대로 온 세상의 인간들이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도록 불신자든지 신자든지 통치하시는 그것을 가리켜서 도덕적인 통치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주위를 돌아보니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사람도 많고 일부 보기에 전혀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기는커녕 하나님의 영광을 해치면서 사는 사람도 많은데 그 과연 하나님이 있는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이 바로 이 시편 14편애 나오는 모든 세상에 하나님이 없도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중요해요. 믿음이 큰 사람은 영혼의 올바른 힘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항상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봐요. 지난 주 엔가 터키에서 선교사를 포함해서 3명이 무슬림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했어요. 성경을 만들어 배포하는 사무실에 무슬림들이 난입해서 거기 잇는 3사람을 죽였어요.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냐 하면은 형제가 보는 앞에서 선교사를 죽여서 배를 갈라서 창자를 그 자리에 막 잘랐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터키사람 한 사람은 목을 잘랐고 손가락 발가락 귀 코 난도질해서 잘라 냈어요. 근데 그 무슬림이 죽어가면서 한 이야기가 정말 심금을 울려요. 만약 네가 예수를 부인하고 다신 이 짓 안한다고 우리 알라신이 유일한 신이라고 한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나는 무슬림으로써 이 땅에 태어났으나 그리스도인으로 죽습니다. 그게 뭐예요. 믿음 이예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그리고 지금도 온 땅과 하늘 위 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잠깐 동안 인간이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은 안 계신가 보다 . 잠시 고통을 당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하나님은 안계시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무어냐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것은 잠간 지나가는 것이고 반듯이 하나님은 살이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악을 즉각적으로 제거해서 당신의 공편을 보이시지 않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거미줄 같이 얽혀있는 거예요. 수없이 많은데 시간이 가니까 하나만 예를 들어 볼게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잘못할 때 있어요? 없어요? 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멘 이러는 사람들이예요. 잘못할 때 있어요? 없어요? 그거는 기어들어가요. 잘못할 때 있어요? 없어요? 그때마다 여러분들을 제거 했으면 저 텅 빈 교회당에서 목회를 할 거예요 아마. 어쩌면 나도 없을 지도 몰라요. 그런데 어떻게요. 오랫동안 참으시잖아요. 그러면 선을 행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순간이 무어예요? 여러분들의 악을 하나님이 참의시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피해를 볼 때에는 바로 그 악을 제거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쪽 편에서 보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기다시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서 잠시 이 세상 하나님께서 이세상을 통치를 안 하시는 무정부 상태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거죠. 그래서 실족 할 번 한 사람이 누구냐면 시편 73편에 나오는 시인이에요. 시인이 무어라고 했냐면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마음이 정직한자들에게 하나님은 선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믿었다. 이거예요 그런데 실제 돌아가는 삶의 상황을 들여다보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불법 무도한 놈들은 잘살고 죽을 대도 웃으면서 죽고 꽃가마에 상여에 쌓여서 호강 하면서 저승길로 가고 .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기는 아침마다 하나님이 야단을 치신다. 이 예기예요. 아침마다 질책을 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으니까 너 그렇게 날 사랑해서 되겠냐. 너 요즈음 삶의 태도가 그 모양 이냐? 야단치시는 거예요. 올바르게 해야지 이랬는데 알고 보니까 다 쓸데없더라 이거예요. 이 씨! 나도 막살아 버릴걸. 이계 뭐죠. 바로 믿음이 없는 거라 이거죠.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들이 와르르 허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꼭 믿어야 해요. 이것이 위험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힘이 예요 이단 순한 이게 머리로 생각하는 것 이상에 더 훌륭한 지식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무어냐면 믿음 이예요 굳건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을 통치 하고 계신다.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신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행복한 길로 인도 하실 것이다. 하는 것을 믿는 거예요 . 이 믿음이 굳세게 되면 눈에 보이는 많은 불합리하고 모순처럼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눈에 막 들어올 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이거는 잠시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무어라 했냐면 ”악인의 번성함은 뱀풀과 같도다. 시골에서 이제 소 먹이려고 둑 같은 데서 풀을 막 베잖아요 풀을 베면 풀을 이렇게 베어가지고 한 번에 이것 다 못하니까 베어 가지고 옆에다 쓰러뜨려 놓잖아요. 그리고 다 모으잖아 방금 베어서 옆에 쓰려 뜨려 놓으면 생명이 뚝 잘렸는데도 막 시퍼런 풀이 그냥 있는 거예요 한나절만 지나가면 그게 다 시들어서 검불처럼 돼서 며칠 지나가면 진짜 지푸라기가 되어서 바람이 불면 다 날라 가버려 이게 악인의 미래라고 하는 것에요. 믿음의 눈으로 근거를 꼭 붙드는 것 그래서 찬송가가 막 (찬송가)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으니 온 세상 이기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러면 인간을 이렇게 도덕적으로 통치하시는 가 다시 말해서 창조목적을 향해 인간이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시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거스리는 자들은 고통과 징벌을 통해서 그런 삶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이유 무엇 때문인가 라고 하는 거죠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인간 존재의 특수성 때문 이예요. 인간의 존재가 특수한 거예요. 왜 특수하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적인 이런 풀들 죽어있는 살아있지 않은 것 이런 것 이런 것 죽어있는 아니야 이것은 생명이 없는 것 아니야 여기다 올려놓으면 외부의 힘만 가하지 않으면 천년이 지나가고 고냥 이따 이거야 이런 물질들 이런 식물들, 식물들 보다 나지만 뛰어다니는 동물들 그런 것들은 도덕적으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거죠.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가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을 어떻게 하든지 자신은 못 먹어도 자식을 먹이려고 하고, 그다음에 나는 못 입어도 자식은 입히려고 해요. 가만히 자연세계를 보니까 자연의 세계도 똑 같아 여러분 집에다 제비들이 날아와 집을 지잖아요. 우리는 그 제비가 집을 지면은 그 헐러버리면 벌 받는다고 생각하고 가만 내버려두고 오히려 좋아하잖아요. 그렇죠. 그 집을 져요. 그래서 와서 어떠하다가 암놈 수놈 해 가지고 알을 까 제비 알을 새끼들이 태어나요. 그러면 몇 마리인 줄 몰랐는데 조금 있으면 찌찌지 소리 댓 마리가 있어요! 노란 부리를 벌리고 있어요. 이 어미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무엇이냐면 날개 짓 해가지고 수없이 날아다니면서 이 새끼들을 물어다 먹이는 건데 그것도 신기하게 말이야 아비가 벌레를 물 어와요 참 첫째 놈 입에다 물어 준다 그 다음에 다시 물어서 둘째 놈 입에다 딱 넣어주죠. 그러면 이게 무슨 경찰서에서 줄서는 것도 아니고 이놈들이 셋이 서 있잖아요. 그러면 이게 하다가 밀치다가 순서가 바뀔 수도 있잖아요. 그 어미를 알아 새치기한 놈도 있단 말이죠. 그래서 요렇게 요렇게 주다가 이렇게 주단 말이요. 정확하게 전달해 주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힘이 센 놈만 받아먹고 나머지는 굶어 죽을 거 아니 예요. 그러데 계속 이렇게 먹여요. 그러데 문제는 머냐면 인간이 하는 행실과 제비가 하는 게 똑같잖아요. 그러데 개도 마찬가지예요. 개나 제비가 하는 게 인간이 하는 것과 똑같잖아요. 우리도 애들이 셋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한 숟갈씩 주는 데 힘센 놈이 계속 밀치고 나만 달라고 하면 가만 두겠어요 저 쪽으로 가라하고 줄 것 아니에요 그러면 하는 행실은 제비나 인간이 똑 같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것을 보면서 인간이 못되면 제비 짐승만도 못 하구나 그래서 짐승만도 못한 놈아 그 얘기는 무슨 뜻이냐면 짐승보다 힘이 약하데 든 지 못생겼다든지 제비처럼 날아다니지 못했다든 지 머리가 새보다 작다든지 그런 게 아니라는 얘기예요. 그럼 뭐예요. 짐승만도 못한 놈아 그럼 무어냐면 도덕이 떨어진다. 그런 얘기예요 그러면 차이가 머냐 하면 똑 같아 겉모습은 똑같아 그런데 그 차이가 있어요. 그 차이가 무어냐면 새는 그 의미를 몰라 의미를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 이예요. 그러는 하나님이 종족들을 이 세상에서 멸절하지 않고 번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동물에게 주진 본능이야 그래서 제비가 그것을 주면서 눈물 펑펑 흘리면서 주는 것 아니라는 얘기예요. 그냥 자동으로 움직여지는 거야 이게 심지어는 거미 같은 것은 자기 몸을 뜯겨 먹이고 그 다음에 가시고기 새는 몸이 너널너널해서 죽을 때까지 물 펌프질을 하다가 새끼들이 애비 몸인 자기 몸을 뜯어 먹고 인생이 끝나잖아요. 그 의미를 만약에 안다면 그 고기들이 진짜 애비를 눈물이 나서 못 뜯어먹지 그러면 의미를 모르는 거예요 인간을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의미를 아는 거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냐면 영혼에서 나옵니다. 영혼의 기능 중 가장 탁월한 이 세상에 창조된 자연적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없는 것이 무엇이냐면 영혼이고 이 영혼 기능 중 가장 탁월한 것이 지성이란 말이야 지성 그것을 알 수 있는 힘은 지성이 아니면 비밀을 파악할 수 없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돌멩이나 풀이나 꽃이나 새들이나 뛰어다니는 멧돼지는 몰라 모르다 얘기요 그냥 새끼 낳고 새끼에게 본능을 따라서 하고 적이 나타나면 들이받고 뜯어먹고 이런 것뿐이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눈물 흘리는 감격하는 멧돼지 봤냐! 얘기요 산돼지 봤냐. 얘기요 없다 얘기요. 그러난 이런 자연적인 피조물들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는 물론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목적 그다음에 거기에 온전히 부합하는 삶이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그것을 이해시켜서 그래서 창조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하나님이 통치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을 대신해서 통치하는 존재들이 되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거예요. 인간의 지위는 탁월한 거예요 예수께서 뭐라고 그러셨어요. 이 천하보다도 한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 이천하는 인간 하나에 비하면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물리적인 크기잖아 그 안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의 영혼이 없어요.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닮은 영혼을 주셨어요. 그 하나님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 한 인간이 너무 소중한 거예요. 그 다음에 또 하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이 창조하신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창조하신 이세상을 하나님이 가만히 내벼려 두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녜요. 그래서 어떤 사람보고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어보니까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직장도 안 다니고 에덴동산에 벌거벗고 뛰어다니면서 과일이나 따 먹고 그리고 남녀가 함께 어울려서 놀았을 텐데 그게 바로 주일학교 학생 수준의 생각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좋겠어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어도 이세상의 문명은 계속 발전했어요. 특히 물질문명은 계속 왜냐하면 문명의 발전이라는 것이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씨 뿌려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연과 싸우기 위해 발전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고 인간은 죄가 들어오지 잘 들으세요. 정말 중요한 거라고 교리적으로 지나가면 다시 할 기회가 없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잘 들어요. 그 생명의 물가에서 발이나 씻으면서 과일이나 따 먹으면서 그냥 지낼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녜요 인간은 그렇게 될 수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죠 왜냐하면 그럴 수 있도록 창조하시면 중요한 모순이 발생하는 거죠.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셨어요. 아담을 창조하신 다음에 생육하고 번성하거나 땅을 정복하거나 다스리어라 그랬잖아요. 다스리다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라다예요 신기하게 라다라는 단어 뒤에는 전치사 배가 들어가요 전치사 뵈는 into의 뜻이 예요 다스리는 데 속속들이 다스린다는 뜻이 예요 다스리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왕이 왕국을 통치하는 것을 가르치는 거죠. 그러면 왕이 왕국을 통치하단고 봅시다. 그러면 왕이 제대로 나라를 통치하고 있다면 왕명 하나면 삼천초목도 벌벌 떨어야 잖아요. 왕이 너는 나에게 충성하라 그랬더니 저 쪽 동네에 있는 사람들이 놀고 있네! 왕국의 주권이 왕에게 온전히 있지 않은 거야 무엇인가 믿는 게 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인간에게 주신 통치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 보여주는 거야 그 큰 왕국을 다스리라고 생각해봐요. 여러분 혹시 아파트에서 줄반장 해 본 사람 손들어 봐요 손들어 봐요 그래 좋아요 줄반장해보니까 할 만 합디까? 줄반장에서 열 댓 명 다스리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죠. 말 많은 601호 아줌마 반상회에 죽여도 않나오는 701호 아줌마 회비라면 절대 안내는 802호 아줌마 이 사람들 데리고 한번 일해 보라고 해봐요 너무너무 힘들죠! 그러니 그 통치권이 이 온 세상 구석구석 미쳐야 됐으니 내게 보통 능력을 주셔서 할 수 있겠냐! 이 얘기예요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을 주신 거죠. 잘 들어봐요. 이 대목에서 인간이 완전하고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인간은 가만히 있질 못하는 거예요 .그게 완전성의 발현이 예요.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기구나 이런 것들은 일을 편하게 하고 밥을 먹고, 잠을 편히 자고, 일을 하기 위해 만들어 그런데 가끔 보면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보면 이만 몇 천 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밥이 나오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 언어도 사용하진 않았을 사람들이 인류학자들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사람들이 정교하게 색깔까지 입혀가지고 그래서 소와 자연을 그리는 거예요.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정신적인 능력이 다른 피조물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이 안에 있는 것이 바깥에 흘러나와서 표현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거예요. 잘 들으세요. 이게 신앙생활에서 엄청난 빛을 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신자가 주님을 점점 닮아서 온전한 신자가 되면 될 수록 이 마음 안에서 정신과 영혼의 변화를 가두어 둘 수 없는 거예요. 어떠하든지 바깥으로 나와야 되요. 내안에 하나님이 왕대어서 다스리는 이 아름다운 통치를 자산의 삶 바깥에서 구현에서 내안에 있는 게 눈에도 보아야지만 편안하고 만족이 되는 거예요. 아멘을 해야 할 대목입니다. 13년을 가르쳐도 몰라요. 그러니까 영혼의 깊은 변화를 받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면 그 생명나무 물가에서 발이나 씻으면서 드러누워서 떨어지는 과일이나 받아먹으면서 그렇게 못산다. 얘기요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안 되게 대있는 거예요. 그래서 못 말리는 사람 둘이 있어 은혜 받은 사람하고. 은혜 떨어진 사람 둘 다 못 말려 어떻게 못 말리까. 은혜 받은 사람은 가만히 못 있어 하여튼 무얼 하든지 이 땅에 하나님이 이루어지는 것에 자기를 기여하면서 살아야 돼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야 은혜를 놀랍게 받았는데 걸인같이 집에 누워서 텔레비전 본다. 그래 변화 받았다는 게 순 거짓말이란 거죠. 거짓부렁이라는 거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거요. 못 말리는 거예요. 그렇게 건강이 안 좋은데 정말 나와야 되요. 그렇게 돈이 없는데 바쳐야 되요. 그렇게 육신에 힘이 없는데 섬겨야 되요. 어, 노래 “내생에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그런데 은혜 떨어진 인간도 못 말려 왜냐하면 어제든 은혜가 떨러졌으니까 이치면 에서 보면 은 올바르게 살고 더 하나님에게 바르게 살아야지만 은혜로 돌아올 텐데 그게 안 되고 이안에서 자기가 왕 노릇 하는 것만큼 그것이 바깥으로 행동으로 들어나야지만 되는 것에요. 그것이 바로 악한 삶 자기 사랑의 삶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셔서 죄가 안 들어 왔다고 하더라도, 왜냐하면 애댄 동산에서 벌거벗고 뛰어다니면서 과일이나 따 먹고 물장구나 치지 않았을 거라는 거죠. 하나님은 그렇게 창조 안하시죠. 무엇인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연구하고 개발하고 그리면서 논문을 이루어가고 문화를 일구어가고 그랬을 거요 그 증거가 창세기에 보면 은 타락한 이유이기는 하지면 이제 그 에녹 손에 쥐어주고 거기에서 그 자손들이 태어나는데 어떤 사람들은 저기무야 기계를 잘 만드는 사람 노래를 잘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잖아요. 이게 결국은 무어냐면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죄가 들어오지 않았어도 자손은 번성하고, 자손 안에는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 그다음에 기계를 잘 만드는 사람, 어떤 사람은 옷을 잘 짖는 사람, 어떤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나왔을 거란 거죠. 그들끼리 거래가 이루어지고 하면서 창조의 세계가 그런 속에서 문명과 문화가 이루어 가면서 이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하나님의 원래의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 충만하게 드러내도록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지 인간을 반드시 이 도덕적인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무어냐면 그러면 이제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그것을 도라는 것을 깨우치고 그다음에 자신의 영혼의 온힘으로 거기에 합치시키면서 살아갈 때에 인간으로 태어난 가장 좋은 길을 걸어가면서 살고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냐, 공부를 하는 사람이냐,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냐, 농사를 짓는 사람이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냐, 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거는 각자 사명이 하나님 앞에 받은 달란트와 삶의 양상의 문제여요. 문제는 그것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게 중요한 거죠. 그러면 내가 물어 볼게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면서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지 않는 것 사람과 똥을 푸면서 창조목적을 따라 사는 사람 중 누가 행복하겠어요? 누가 행복 하겠어요. 아네요. 그럼 왜 그래요. 점잖게 이렇게 스승처럼 되어서 수많은 사람을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행복해 보이는데 왜 똥을 푸는 사람이 행복한 거지요? 응 그 왜 그런 거요.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에 복종하는 것은 그의 영혼과 정신이 누구를 사랑하고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의 문제지 무얼 하면서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대답하는 문제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이거죠. 그게 정답이라 이거죠. 그러면 이제 그러면 이제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지 좋은 데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고, 그다음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 같은 인간을 바로 이 시점에 태어나게 하셨는데 언젠가 죽을 텐데 그때까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면서 살 때 행복해지는 거구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이 우리에게 계명으로 보여주는 구나 그러면 됐다 이거죠. 그러면 하나님이 이세상을 도덕적인 목적을 가지고 통치를 하신다면 하나님에게 그 일은 되면 되고 말면 말고 해도 되는 일이예요. 꼭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일이예요. 그렇죠. 되면 되고 말면 말고 그러면 하면 하나님이 아니죠. 애들 장난도 아니고 할려면하고 말면 말고 그러면 누가 하겠어요. 그러면 아는 사람도 하나님이 책망 하시고 책임을 물으실 수없고 한사람도 칭찬 받을게 별로 없을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의지가 있었다. 없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그러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가 없겠죠. 하나님이 하나님에 이세상을 창조할 때 이 세상은 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창조 되었다 이게 목적이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은 여기에 이바지 하기위해서 내가 너를 창조 했다. 그게 개별적인 목적이잖아요 그러면 나는 이세상을 이렇게 가도록 이끌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서 도덕의지라고 부르는 거요 하나님이 도덕 의지가 있는 거요. 그러면 이제 말이 네 글자로 했으니까 어렵지만 여러분들이 맨달 신앙 생활하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 다섯 글자 더 어렵습니다. 도덕의지 딱 네 글자 내 이 도덕의지가 하나님이 정하는 목적대로 이세상을 통치해서 그 목적을 이루어 가겠다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도덕의지에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아주 명쾌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거죠. 아! 그렇구나.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정말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지으신 목적대로 살기위해서는 우리가 꼭 알아야 될게 있구나! 그게 뭘까 그렇죠. 하나님의 도덕의지구나 하나님이 이세상을 이끌고자 하시는 그 의지가 무엇인지를 내가 정확히 알 수 있고 두 번째 그 도덕의지를 따라갈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다면 아 그러면 내가 그렇게 원하기만 하면 그러면 할 수 있게구나. 그런 단순 명료한 답이 나오잔 아요. 아 그러면 하나님의 도덕의지가 무엇인지를 내가 아는 것이 뭐에요? 그게 지식이에요. 그다음에 그걸 알아도 그걸 사랑하지 않으면 못하는 거예요. 공부 잘하는 것 실은 학생 있으면 손들어 봐요. 누구는 고등부에서 그랬다나! 기도 제목을 내노라고 하니까 공부를 못해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나! 별종이죠? 기도 안 해도 응답 받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뭘 이야기 하다 이로 왔나 알아 아 그렇구나! 알았어요. 알았는데 그것 행할 힘이 없는 거요. 그거 못하는 거예요. 그거 못하는 거요. 다른 힘에 강력하게 이끌려서 그걸 꺾을 수가 없어 그래서 못하는 거죠. 술 먹으면 안 되는 대 안되는 대 너무 잘 알잖아 마지막에 뭘 가져오는가. 너무나 잘 알잖아요. 그런데도 힘이 너무 강해서 못 끈은 거죠. 아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의 도덕의지를 정확하게 아는 게 지식이라면 그 뜻대로 살아 갈수 있도록 이안에서 울컥하고 일어나는 힘은 뭐에요? 뭐라고? 뭐라고? 답이 나올 듯 말듯 했는데 뭐라고요? 아! 그것 힌트를 주자면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하고 그다음 죄와 구원 그리고 목자와 양 다 생각해봐 지식과 진리와 뭐야 열린 교회 교인 맞아요. 진리와 뭐라고요? 그렇죠. 진리와 은혜에요 은혜 그게 필요한 거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정확하게 알고 생각하고 공부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요 그다음에 뭐요 그렇게 다 알았어요. 그럴 때 있잖아요. 너무나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너무도 분명한데 너무나 해낼 힘이 없어요. 그렇게 살기 실어 오는줄 알지만 그렇게 살기 실타 이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이거예요. 작년에 가정의 달 다가 오니까 올에도 간증이 많겠지만 작년에 한 사람이 전도 받아 나왔는데 남편하고 도저히 막판까지 왔다 이 인간하고는 못살겠다. 그래서 오늘 내일 오늘 내일 도장 찍으려고 하는 데 하필이면 설교 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그러고 나서 울고불고 회개하고 그리고 가만히 생각 해 보니까 인생 이렇게 살면 안 됄것 같아 그래서 집에 가서 남편한테 “여보 내가 잘못 했어” 그게 좋다는 것을 일수도 도저히 할 수 없었는데 은혜를 받으니까 그게 가능해 지잖아요. 그게 뭐에요. 도덕의지를 알고 두 번째는 그 도덕의지를 따를 수 있는 힘을 주어지는데 그 은혜가 정체가 뭐에요? 뭐라고 답이 나오려고 했는데“...” 정말 정말 잘했어요. 저 사람 처럼 교리 공부를 해야 해요. 이따가 올라와요 내가 책한 권 줄게요. 농담 아니에요 진짜에요. 이속에서 은혜의 정체가 뭐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하나님 사랑의 감화예요. 꼭 하나님 사랑의 미련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은 이세 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주님은 나를 위해 목숨도 버리셨는데 난 이것을 참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는가! 그리고 회계하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 뜨겁게 사랑한다! 아내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던 거 남편한테 뭐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거 전에는 너무 자존심 상하고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 앞에 인간 이상인 내가 무릎을 꿇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니깐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 사랑으로 잊을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아멘! 거..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럼 그 두 가지가 필요해서 사실 결혼하고 사랑하는 거예요. 그죠 지성 지성으로 깊이 이해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돌아오는 거예요. 그럼 인자 문제가 뭐냐 하면 인간이 어떻게 하다가 다행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하나님의 창조목적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도 이해하게 됐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도덕의지를 읽을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그럴 수 있는 마음도 생겼어요. 그럼 하루에 한번 그렇게 한 다음에 이 인간이 끝까지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느냐? 왜 대답을 안 해. 아녜요. 사람에 따라서 오래도록 그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잘 안 되는 사람도 있지만은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한 번 하나님이 해주시면 자동으로 마치 진공의 이 우주공간을 한 번 쏜 로켓이 그대로 물체가 비행을 계속하듯이 그러느냐 그게 아니라 그거예요. 그리 안한다. 그리 안한다. 그럼 어떻게 되요 그렇게 안 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있고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한 목적이 있는데 이 서로 연결해야 된다고 했잖아 글로 안가고 다른 데를 향해서 가는 거예요. 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셔서 딱 정해놓으신 창조의 목적 그 인간을 향해서 가는가. 아녜요 이제. 하나님의 도덕의지를 이해하고 그다음에 사랑하면서 가잖아. 이렇게 정해놓은 천지창조의 목적을 선이라고 부릅니다. 선 선 줄 이아니라 굿 선함 그걸 얘기하는 거예요. 선 선이예요. 선을 향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이 선이 곧 바로 도야. 그 도를 향해서 가는 거예요. 이게 덕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가는가. 이렇게 가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선한 삶이예요. 그 안하고 그 악은 뭐냐 하면 이게 아닌걸. 다 악이 예요. 그럼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우리를 분명히 데려가려고 하는 목적지가 있어요? 그게 뭐죠 선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죄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 거야 목적지가 없어요! 목표는 하나예요 그 선을 못 따라가게 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무데나 가도 상관없어요. 그 목표가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악이 예요 그게 바로 악이라 그 얘기죠 아직도 이해 잘 안가죠 명쾌하게 이해가게 예를 하나 더 들어줄게요. 건강은 선한 것일까 악한 것일까? 선한 것이죠? 응 그러면 건강이 선한 것이면 몸에 병에 있는 거면 악이겠네? 맞죠. 맞아요. 틀려요? 맞잖아요. 건강이 목표로 하는 것을 우리가 건강히 살아가는 것이 목표잖아요 그죠? 질병의 목표는 뭐예요 우리를 죽이는 거? 그럼 과연 그 질병이 우리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걸까? 건강을 해칠 뿐이지 무슨 목표가 있을게 아니라 그거예요. 이게 바로 악이야 그리고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선을 향해 계속 가지를 않아 그래서 결국은 이것이 아닌 다른 목적을 향해서 가는 거예요. 근데 그 목적은 없어 그럼 왜 가느냐. 그게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고 나를 사랑하게 되니까 거기 빼놓고 아무데나 갈려고 하는 거예요. 그대로 내버려두시면 인간은 허망하게 죽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인간에게 개입하셔서 그래서 당신의 통치를 통치를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그분이 개입을 하시는 거죠. 그 첫째가 뭐냐 하면용서야 용서 그래서 이 선한 목적 천지를 창조한 목적대로 개인을 창조한 그 계획대로 합치하게 살아가지 않을 때 하나님이 단칼에 처단하지 아니하시고 오래도록 참으시면서 그들을 그들이 회개할 때 용서해주시는 거죠? 그래서 그들이 어느 순간에 어떤 용무로든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주님 앞에 깊이 회개할 때에 그 회개는 자기가 깨뜨려지는 거잖아 자기가 깨뜨려지는 작용의 정체가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이 이 세상 창조하신 이 선한 목적대로 인생이 갈려고 하는데 이거를 안 가고 다른 곳으로 갈려고 했던 자기에 대한 미움과 형벌 이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이 창조의 목적대로 안 가려고 했던 자신이 이 속에서 미움을 받고 형벌을 받아서 이 속에서 부르짖는다 이거죠 그럼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하나님이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99보다 회계하는 1사람을 더 기뻐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왜냐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던 그 사람이 깊이 참회하는 것은 이제 아주 확신에 차서 그 창조목적을 따라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전향을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이게 회심이란 말예요 이게 두 번째는 하나님이 뭘 주셨냐하면 은혜를 주시는 거죠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면 그 깨뜨려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용서해주시고 다시 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영혼과 마음에 힘을 주시는데 그 영혼과 마음에 주시는 힘의 정체가 사랑의 힘이야 THE POWER OF LOVE 사랑의 힘이란 말이죠. 왜 그래요 그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이기 때문에 그렇데 그래서 그 POWER OF LOVE 사랑의 힘을 준거야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둘이 있는데 사랑과 증오야 사랑과 증오 그 증오라고 하는 게 사랑의 또 다른 형태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가 걸어온 아픈 길을 용서해주시고 다시금 선한 길을 향해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충분한 은혜를 다시 베풀어주십니다. 아멘 그래서 오랫동안 불순종하고 하나님 뜻대로 못살던 인간들에게도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게 하시기 때문에 아멘! 그래서 성경 속에서나 우리 교회역사 속에서나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나 살펴보면 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과 비교 안 되게 다 한꺼번에 경험했던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큰 사랑을 경험하기 전에 큰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에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그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의 위대한 힘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 삶에서 돌이킬 수 잇도록 하나님께서 파워를 주시는 거다 그러니까 한번 잘못된 길로 걸어갔다고 해서 낙심하고 주저앉는 것은 옳은 게 아니죠. 우리가 의지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왔던 지간에 다시 하나님께 나아와서 은혜를 구하고 주님을 붙들어야 된다. 이겁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정해놓으신 것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했죠. 그 창조의 목적 4글자를 한마디로 하면 뭐라고 했어요? 선선이라고 했어요. 응 선 잘 들어보세요. 선이에요 그런데 여기 있는 인간들을 하나님이 도덕의지를 가지고 창조의 목적대로 살도록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죠 안서는 인간들을 계속 스스로 부딪치면서 고통을 받고 마지막엔 시무엘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 가버린 거죠. 그것까지도 해결이 안 되면 은 마지막엔 지옥에 보내시고 마지막엔 부활을 해도 마지막에는 영원한 형벌을 처하신단 말이죠. 그래서 이러한 괴로워 하시잖아요.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이 인간들을 비롯해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시면서 이쪽 방향으로 가시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무슨 뜻인지 알죠? 이렇게 갈려한다 이거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정해놓은 천지 창조의 목적에 대해서 스스로 어긋나는 행동을 하실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해요 안 해요. 그런 것을 자초한다 이거죠. 자 회사를 만들었어요. 회사를 만든 목적은 뭐에요. 이윤을 많이 내고 그 다음에 많은 사람을 취직해서 고용을 증진해서 사회에 이바지 하라고 자기도 부자 돼는 게 사업의 목표 아닐까요. 거기에도 선교적인 목표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런데 그러면 사장이라는 사람들이 항상 그렇게 올바른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회사 돈 빼내서 골프치고 나뿐 짓하고 돈 써버리고 탈세하고 그렇게 해서 결국 자신이 세운 회사인데 자기 때문에 기업을 도탄에 몰아넣는 거예요. 무슨 일인지 아시죠. 옛날을 생각해 보세요. 나라를 부왕으로부터 물려받았잖아요. 그러니 다 자기 백성들이잖아요. 그러면 목표가 뭐에요. 왕이 맨 처음 왕이 되면서 목표가 뭐였어요. 정신 똑 바로 차리고 왕이 되었을 때에는 겸손하게 어떻게 하면 내 백성에게 내 신명들을 이 땅에서 정말 부강한 나라에서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할 수 있을까 ? 그리고 몇 년 지나면서 주색에 빠지고 타락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하고 하는 형편없이 지혜가 없는 임금님이 되고 만다는 말이죠. 그러면 정해놓은 목표가 있어도 스스로 행동하는 것은 맞아요. 안 맞아요. 목표는 선한데 행동은 악하게 해서 이게 알맞을 수 있잖아요. 하나님에게는 그런가. 이 있을 수가 없다는 거죠 이것은 불변이에요 하나님은 항상 당신이 정해 놓은 신 이 창조 목적에 스스로 모순되지 않고 언제나 여기에 이바지하면서 사는 거요 응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봐요. 비유가 지금 떠올랐는데 창조의 목적이란 항구가 있어요. 돛단배가 수백 척이 있어요. 하나님이 바람을 부시는 거요 그러면 배들이 그 바람을 쫙 맞으면서 그러면서 이 그 항구를 향해서 가게 되잖아요. 그죠 그런데 사공이 멍청한 사공이 있어가지고 에끼 난 돌아갈 거야 그리고 나는90도로 꺾어가지고 이렇게 해서 절로 갈 거야 해서 확 돌리면 그러면 어떻게 되죠. 그러면 배가 맞바람을 치면서 막 기우는 거여. 거꾸로 돌아가서 난 더 뒤로 돌아갈 거야 배를 반대로 틀어가지고 바람이 부는데 이쪽에서 마주보는 거여요. 죽어라고 노예들이 등을 두드리면서 배를 젓는데 갈수가 없어요. 바람이 워낙 세게 쫙 부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시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찬송할 때 가장 커다란 찬송 제목중의 하나가 뭐에요. 주 우리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그것이 찬송의 가장 큰 제목이잖아요 두게 가 있는데 선하심과 인자하심 두개요 선하심이 항상 찬송의 제목이 되는 거예요. 그게 왜 찬송의 왜냐면 자기도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향하여 가고 있으니까 찬성제목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밀어 주시는 거예요. 안 되는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그리고 힘이 없는가. 같은데 하나님이 밀어주셔서. 창조의 목적이란 항구로 계속 가는 거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정하신 목적도 선이고 그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선하게 움직이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선하게 대우해 주시는 것도 선이예요. 이것도 선이고 이것도 선이에요 그래서 내가 이 두선을 가르쳐서 두선의 관계를 가르쳐서 선의 연속성라고 부르는 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목적이 선이고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셔서 그로 데려가려는 하나님이 선하심이 바로 이거라는 거요.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인들에게는 잘 안 느껴지는 거예요. 언제 느껴지냐면 거스르면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회개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매일 매일 느껴지는 거예요.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내 인생의 갈기를 내게 무엇이 필요 한지를 알고 앞서 행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나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하면 충분해 왜냐하면 하나님을 나를 그렇게 당신이 원하시는 그 목적을 향해 나를 이끌고 가시고 있기 때문이야 아멘 하는 고백이 생겨나요. 이것이 나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 한인간 모두사람에게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통치 하셔서 하나님이 나중에 다발처럼 엮으셔서 시냇물줄기들이 개울이 되어서 모이고 개울이 모여서 강을 이르구 큰강이 되어서 바다로 흘러가듯이 그렇게 한사람 한사람을 다스리셔서 결국은 창조된 모든 인간들이 결국은 이 땅에서 창조의 목적인 선을 향해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의지를 가지고 통치하시는 거죠. 끝냅니다. 끝내면 은 여기서 이룰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에요. 우리의 삶은 둘 중 하나겠죠. 이렇게 우리를 그 창조목적대로 되려갈려고 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 하면서 할 거나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거나 둘 중의 하나겠죠 전 그 중간 일 텐데요. 중간이 바로 반항 하는 거라 이거죠 바로 중간이 반항 하는 거라 이거죠. 어떠하다 힘이 없어서 조금 반항 하고 어떠하다 사람은 힘이 좋아서 강력하게 반항하는 차이지 그런다 이거죠 그러면 마지막 결론이 이거요. 오늘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에 대한 태도를 선택을 하는 거요 .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창조의 목적대로 살기위해서 자식을 다 드리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을 택하던지 그러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빨은 인생을 살면서 매일 매일 맞보고 느끼며 감격하고 그 사랑 속에서 살아가다가 죽음과 함께 주님의 품에 안기든지 아니면 거스르면서 사는 동안에 수없이 맞바람을 향하여 노를 젓는 것 같은 괴로운 고통 속에서 인생을 살든지 둘 중의 하나에요. 응! 주님이 이 세상 계실 때 간절히 비셨던 기도가 뭐에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하나님의 도덕 통치가 이 세상 구현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고 그것이 온전히 구현 대는 것이 하늘나라에요. 그 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 순종하면서 걸어가야 돼요. 여러분들이 이를 악물고 나와서 기도하고 박수치고 찬송하고 다 좋다 이거에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마음의 방향이 이런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드리고 난 순종하면서 살아야 되겠다. 라는 이 분명한 결단이 없으면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 못하는 거죠. 못하는 거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깊이 회개하고 내 인생의 참된 행복은 주님의 의지를 받아드리는 겁니다. 불순종 했던 모든 삶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에게 다시 은혜의 힘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사랑하며 내가 나의 사명의 자리에서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을 가장 행복으로 알겠습니다. 아멘 ! 그런 여러분들이 데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기도 할 때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가 말씀 속에 은혜를 받았는데 도와주시옵소서. 저희를 변화시켜 주시고 저희를 인도해주시옵소서 우리 하나님께 한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간구합니다. 부족한 저희를 주님께서 사랑해주시고 오늘이 시간에도 아버지 앞에 간구하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도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를 붙을 어 주시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주님 오늘도 저희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악인은 여호와가 어디계신지 모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앎이다 주님이 우리를 통치하심을 믿습니다. 살아계신 주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원치 안는 길을 걸으면서도 우리가 복 받기를 원합니다. 모든 삶을 오늘 이 시간에도 용서해주시고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보내주신 힘으로 그 능력을 으로 저희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섬기며 따라갈 수 있은 저의들이 되도록 주께서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역사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업과 은혜를 내려 주시도록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그래서 저희들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우리의 사명을 따라 살 수 있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은혜 내려 주시길 간절히 빌고 원하옵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살아있는 주의 자녀들 위해 이제로부터 영원히 함께 있어지어다. 아멘! 반주....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3.창조와 하나님의 충족성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라는 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장시간에 걸쳐서 도덕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세상을 당신의 의지를 가지고 다스리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다가 조금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아 이 설교는 굉장히 어려운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포기를 해요. 근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태도예요. 내가 이제 한 문장을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할 테니까 어려운 말을 쓰지 말고 쉬운 말로 풀어서 한 번 말해 보세요. 한 사람이 성화된다는 것은 중생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죽음은 그 성화의 완성이며 부활의 날에는 영화될 것입니다. 자 여기서 어려운 말이 뭐죠? 성화 첫 번째, 두 번째 중생, 세 번째 부활, 그 다음에 네 번째 영화예요. 이 말을 쓰지 말고 풀어서 해봐요. 한 사람이 성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생해야 합니다. 죽음과 함께 성화는 끝나지만 부활의 그 날에는 영화될 것입니다. 어려운 네 단어 쓰지 말고 한 번 풀어서 말해 봐요. 아주 말끔하게 말하는 사람에게는 제가 박윤선 박사 집 주석을 한 질 사드리겠어요. 자, 말끔하게 말해 봐요, 그 대신 길면 안돼. 여러분 중에 아무도 그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가장 짧게 제가 말해 볼께요. 죄인의 부패한 본성을 전인적으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덧입기 위해서는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혼이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와 믿음에 의해 다시 살아나야 하며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그 전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거룩한 역사는 죽음과 함께 완성이 됩니다. 죄에 대한 형벌로써 죽게 되는 육체를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다시 살리시는 몸의 다시 살아나는 그 날에는 우리가 몸과 영혼이 모두 영광스럽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해야지만 그 한 문장이 풀려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어려운 용어를 익히게 될 때에 그 때에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이야기할 때에는 그것을 다 풀어서 설명을 해요. 우리 중에 누구도 전도하러 나가서 “중생 했습니까?”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없어요. 중생이 무엇인지 몰라요. “예수 믿으세요?” 이렇게 물어보죠. 누구도 가서 당신이 진정으로 성화되기 원하면은 중생해야 됩니다. 당신이 중생하지 못하면은 영화의 날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의 통용되는 용어를 잘 익히면 그것은 마치 해면체와 같아요. 여러분 어머니가 겨울에 아침이 되어서 미역국을 끓여주려고 하면은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어요. 식구들은 대게 많은데 미역은 저 광에 가서 탁 뿌려드려 오는데 요만큼이예요. 근데 그것을 더운물에 담그면 불어서 이만해요. 양푼으로 가득해요. 그것을 참기름으로 볶아가지고 끓이면은 맛있는 미역국이 된다 말이죠. 그렇듯이 우리가 이런 용어를 잘 익히면은 우리끼리 의사소통을 하고 주고 받는데 있어서 엄청남 빠른 경제적 효과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성화 하나만 생각해도 가슴속에 쫘악 그 그림이 스며드는 것이예요. 용어를 익히지 않으면은 이런 행복을 느낄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을 거부감을 느끼지 말고 하나씩 하나씩 그 의미를 깨달아가면서 녹여가는 거예요. 잘 들어 보세요. 신앙이 깊어 간다라고 하는 것을 성경에 나오는 평범한 단어에 담긴 심오한 뜻을 깊이 이해하고 알고 경험하게 된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예요. 무지하고 심오한 영성,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지식만 뛰어나지만 영적인 깊이는 없는 그런 지식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죠. 거짓된 지식이예요. 그래서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익혀가는 거예요. 그래서 쭈욱 묵상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고 이야기 할 때 가슴이 확 밀려오면서 하나님 앞에 옷깃을 여밀 수가 있겠어요? 그럴 수가 없는 거죠
이것은 서론적인 설명이었고, 그렇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그 창조하신 목적을 가지고 그걸 도(道 ) 삼아서 그 목적에 부합하려는 인간의 영혼의 올바른 힘이 덕인데 그 두개를 합쳐서 도덕이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렇게 꼭 세상을 이끄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가리켜서 도덕의지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끌고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럴 수 있는 권한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어야 한다는 거죠, 자기의 소유여야지만 자신이 권한을 행사할 수, 자신의 것이여야지만, 소유권이 있어야지만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이거죠. 그렇잖아요. 자기의 땅에 다른 사람이 만약에 작물을 심는다든지 차를 댄다든지 하면 문제를 제기하고 그 사람들을 야단칠 수 있죠. 그러나 그 땅이 자기 땅이 아니라면 누구도 그럴 권한을 갖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이 도덕적 통치의 사상적인 기초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 창세기 1장 1절의 선언에 기초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몇 주 동안 창조에 관해서 말씀 드릴려고 해요. 잘 들어보십시오.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볼 것은 뭐냐 하면은 창조와 하나님의 충족성이예요. 즉 하나님께 왜 창조가 필요했나? 만약에 하나님이 아무것도 모자란 분이 없으시다면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창조하셔서 인간이 바라볼 때는 어떻게 보면은 하나님이 골머리 아프시게 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라 그러는데 말을 잘 듣나 어디? 안 듣잖아요? 왜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을 하나님이 만드셨을까?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인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만드신 것일까? 또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고 하는데 이 세상을 창조했다, 또 심판하셨다가 이렇게 무언가 이 세상을 자꾸 변형시키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도 무언가 당신 스스로는 충분하지 않고 이 세상을 창조해야지만 당신이 충분하신 분이신가 하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한번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주인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이 창조된 세계를 이끌어 가실 권한이 있다고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첫째가 뭐냐면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관해서요. 그게 뭐냐면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면 무언가 부족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냐?’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요. 자 이걸 왜 만들었까요? 부족해서 만든거요. 뭐 할려고? 이게 없으면 시간을 알 수 가 없어요. 그래서 만든거요. 이걸 왜 만들었을까요? 물을 담을 수가 없어요, 이것이 없으면. 그래 만들었어요.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으니까 자꾸 만들어서 우리 자신의 목적에 이바지 하는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것은 바로 무언가 당신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만드신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것은 이 세계 없이는 하나님이 부족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실제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뭘 얘기해야 되면은 하나님과 이 세상의 물질은 영원 전부터 함께 있었다고 말해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라는 역설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었단 말이죠. 그런 사람들도 있었다 이거죠. 근데 이제 이것은 아주 미묘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는 아니예요. 저도 한 때는 이 문제를 가지고 굉장히 말은 못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하나님이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라면 왜 이 세상을 만드셨을까? 또 세상을 보시면서 하나님도 만족을 못하실 것이 틀림이 없는데 근데 왜 만족스럽지 못한 이 세상을 만드셔서 스스로 이렇게 얽매이시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만드실까? 그런 분을 과연 전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 라는 그 미묘한 회의에 잠깐 빠졌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연구하고 사색을 하면서 그러면서 아주 말끔하게 이런 의심의 그림자들을 떨쳐 낼 수 있었던 것은 참 감사한 거죠. 어떤 거냐 하면 이런 얘기죠.
우선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이 속성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의 한 부분을 이루지만 그것이 없으면 그것이 될 수 없는 것. 이런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속성이라고 불러요. 부분이면서도 그 부분이 빠지면 그것이 될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이 바로 속성이죠. 예를 들자면 포도주의 속성은 바로 알코올 성분이죠. 만약에 포도에서 만들었고 포도주 냄새도 나는데 알코올 성분이 없다면 포도즙이지 포도주는 아니죠. 또 포도주와 똑같이 알코올 성분은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포도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화공약품으로 만들었다면 포도주가 아니죠. 이런 요소들이 바로 부분이지만 그것 없으면 전체가 그것이 될 수 없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예요. 그런 걸 가리켜서 속성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 속에는 속성 가운데는 인간에게서도 볼 수 있는 속성이 있고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속성이 있어요. 예를 들자면 사랑 같은 것은 인간에게 있어요? 없어요? 있죠. 하나님에게도 있어요. 그런데 닮았을 뿐이지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하찮은 사랑이예요. 이해가시죠? 지식이 하나님에게는 지식이 있는데, 인간에게는 지식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그 지식의 차이는 무한한 격차를 가지고 있죠. 그러나 있기는 있어요.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에게도 있고 인간에게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있다 해서 유통적 속성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런 인간에게는 전혀 아무리 눈 씻고 봐도 도저히 없는 속성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해서 고유한 속성이라고 부르든지 혹은 있긴 있지만 인간들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단절되었다 해서 유통하지 않는 속성, 불유통적 속성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떤 거냐 하면 무한성, 무한하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면은 어떤 존재가 있는데 한정이 있는 거예요. 시간도 한정이 있어요. 이거는 한 한 달 피면 없어지는 거잖아요. 한정이 되어 있죠. 이거는 여기에 있으면 여기에는 없어도. 오늘 이것을 들고 밖으로 나가면 내일은 여기에 꽃이 없어요. 장소가 한정이 되어 있어요. 있긴 있는데 이 물건은 꽃으로만 존재해야 되요. 이렇게 자기 존재가 줄을 긋듯이 한정이 딱 되어 있는 것을 가리켜서 유한하다고 얘기하는 거죠.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은 존재하기는 존재하는데 인간으로만 존재해야 해요. 내가 이 예배당에서 저 밖으로 나가면 여긴 내가 없어. 왜냐하면 존재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한정이 아예 없는 것을 가리켜서 무한이라고 그래요. 끝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신데 그런 하나님이 무엇이다라고 이렇게 한정을 지을 수가 없어. 그래서 여기도 하나님이 계시지만 한정이 없으시기 때문에 저 바깥에도 계셔요. 오늘 여기서 우리가 예배드릴 때 이 자리에 계시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기도할 때 거기도 계셔요. 이게 바로 무한성이예요. 이런 무한성, 그 다음에 완전성, 그 다음에 불변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이예요.
그럼 변한다는 것은 뭐냐? 변한다는 것은 있었는데 없어지고, 없었는데 생기는 거요. 그게 변하는 거죠. 굉장히 다정다감하고 사람에게 친절히 행하던 아주 신실한 친구였어요. 근데 한 5년 만에 만나보니까 아주 나쁜 놈으로 변해 있어요. 그래서 뭐라 하면서 만났을까요? 야, 너 많이 변했구나. 그게 무슨 뜻이예요? 옛날에 있던 것들이 거의 다 없어지고 옛날이 없던 것이 생겨났구나. 그 뜻이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에게는 그런 변함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그럼 여기서 굉장히 복잡한 의문이 안개처럼 막 피어오르기 시작해요. 근데 난 이러한 복잡한 의문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것이 굉장히 감사한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건 뭘 몰랐던 거야. 자기가 믿는다고 말하지만 모르고 믿은 거야. 근데 의문이 안개처럼 피어올라. 이 얘긴 뭐냐 하면 참된 진리의 빛을 찾아가는 그 욕구의 시작이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진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는 거요. 펼치면 한이 없을 것 같애요. 오늘. 그래서 그냥 조금만 맛만 보고 그냥 진도 나가겠습니다. 답은 안 내리겠어요. 집에 가서 생각을 해요.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그렇게 아무것도 있는 것이 사라지지 않고 없는 것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 불변함이라면 기도는 왜 해? 아무리해도 하나님이 안 해주시는데. 열심히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잖아요. 그래요? 안그래요? 아멘이라고 대답하면 아무래도 함정이 있는 것 같애. 그렇죠. 그런 의문이 떠오르는 거요. 계속 나오세요. 그러면 풀릴 거예요.
그럼 넘어갑니다. 근데 하나님의 불변성이라는 것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그래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어떠한 효과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불변성이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 거요. 존재하시지 않는 거요. 다시 한번 똑같이 반복할 테니까 들어보세요. 만약 하나님의 불변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떠한 효과도 바깥으로 나타내지 않는 그런 의미에서의 불변성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라 이 말이죠.
오늘 밤에 마당에서 묵상하면서 이걸 어떻게 여러분들에게 쉽게 설명해 줄까, 그러다가 딱 생각이 났어요. 그게 뭐냐면 친구를 10년 만에 만났어요. 근데 10년 전에 그 친구가 참 친절하고 특히 그 친구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뭐냐면 친구가 어려울 때는 불평하지 않고 그렇게 친구를 잘 도와주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근데 한 10년 후에 만났어요. 세월이 많이 지났죠. 그런데 재밌게 만나서 한 하루 종일 밥 먹고 이야기하고 교제하면서 10년 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어요. 근데 친구가 헤어질 때 쯤 되서 물어보는 거요. “근데 야. 넌 도대체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너 뭐하고 어떻게 사냐?” “응, 이제 뭐 좀 시작을 해야 되겠는데 한 2년 넘게 놀았더니 살림이 말이 아니다. 얼른 뭘 좀 시작을 해야 될텐데, 이렇게 마땅하게 잡히는 것이 없네.” “그래, 집은 어디 살아?” “어, 꽤 크게 잘 살다가 요즘은 전세돈도 까먹고 지금은 사글세 방으로 옮기려고 한다.” 그러니까 고개를 뚝 떨구면서 “너 힘들어서 어떻게 사냐?” 그러더니 헤어지면서 지갑에서 부시럭부시럭 그러고 꺼내더니 주머니에다 쑤욱 집어넣고 도망치듯이 “야, 야, 나 간다.” “이게 뭐야?” 하니까 “집에 가서 펴봐. 편지야 편지” 그래 넣어가지고 그러고 집에 가서 이게 뭔가 하고 펴보니까 100만원짜리 수표야. 그때 이 친구는 그랬어. 야, 이 친구 진짜 하나도 안변했구나. 이게 무슨 의미예요? 그렇지. 옛날에 가난하고 고통 받는 친구들을 만나면 누구보다도 먼저 도와주려고 했던 인정 많은 그 성품이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안변했다. 이거예요. 자기였기 때문에 도와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도와 주었을테니까 가난한 자기가 나타난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어떤 성향을 증명해 보여준 하나의 시금석이 된 거라 이거죠.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는 것 같애. 더 쉬운 예를 하나만 더 들어 줄께요. 이렇게 큰 공간이 있어요. 밀폐되어 있어요. 그리고 저 쪽에 작은 구멍이 하나 뚫리고 이 쪽에 구멍이 하나 뚫렸어요. 근데 이 쪽에서 어마어마하게 강한 펌프로 밀폐된 공간에서 화악하고 공기를 빨아들이는 거요. 근데 이 공기는 아무데도 올 데가 없죠. 공기는 어디서 오겠어요? 반대편에 뚫어진 구멍에서 올 거 아니예요. 그런데 컴컴한 공간이예요.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어요. 사람이 그 공간에 딱 들어가 보면 그 공간에 뭐가 있어요? 없어요? 아무것도 없죠. 물론 공기는 있지. 공기는. 근데 이 쪽에서 화악 잡아 땡기니까 저 쪽에서 들어온 공기가 일직선으로 타고 이쪽으로 빨려 나가겠죠. 그래요? 안그래요? 그러잖아요. 워낙 세면은 흩어지지 않고 그 공기가 일직선으로 빨려서 쫘악 일로 빨려 나갈 것 아니예요. 그런데 컴컴한 공간에 불켜도 마찬가지지만 와 보면 그 줄이 보여요? 안 보여요? 안보이죠. 절대로 안보이죠. 소리도 안난다고 쳐봐요. 그럼 아무 것도 없는 거요. 근데 어떤 사람이 그 공간에 밀가루 푸대를 들고 오다가 탁하고 떨어드리면서 밀가루 푸대가 탁 터졌어요. 밀가루가 온 천지에 휘날렸어요. 그때 딱 보니까 어, 야 이거 신기하다. 밀가루가 막 날리더니 여기에 딱 가루가 날려오니까 일직선으로 쫘악 빨려서 줄서듯이 반대편으로 나가요. 근데 그게 변함없이 계속 되는 거요. 그것도 하나의 불변이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나타나는 것 이런 것도 하나의 불변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불변하시다 라고 하는 것은 시체처럼 죽어 계시기 때문에 당신이 살아계신 어떠한 효과도 바깥으로 나타내시지 않는 분이시다 그 의미가 아니라는 거요. 그런 의미에서의 불변성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은 존재하시기 않는다는 언급과 똑같은 거라 이거죠. 그러면 뭐냐. 하나님 안에는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밖에 아무 것도 필요하시지 않으시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이 완전하신 하나님에게서는 무엇인가 당신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하나님의 의지와 지혜에 의해서 그것들을 흘려 보내는 그런 성향이 있는데 그것이 불변하다 이 얘기죠. 이해 안가시리라 확신해요. 이제 예를 들면 이해가 될거요. 이런 것들은 종을 치기 위해 만들었어요. 땡~. 시간을 보여주기 위하여 만들었어요. 다 인간이 스스로 부족해서 만들었어요.
그런데 도대체 인간이 그림을 이렇게 예쁘게 그려서 인간이 그림을 예쁘게 그리고 심지어 몇 만년전에도 인간이 그 아름다운 채색으로서 이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 같은 그림을 그려내요. 그러면 그게 인간이 뭐가 필요했을까요? 인간에게 뭐가 필요했겠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 그림을 그리면 밥이 생깁니까? 떡이 생깁니까? 그런데도 인간이 그렇게 표현하죠. 그것이 뭐냐면 인간의 정신 세계 속에 있는 것들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거예요. 동물은 아무 것도 이런 예술행위를 못해. 아무리 머리 좋은 개라도 이런 예술 행위를 할 수 없어요. 혹시 개가 싼 똥이 예술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우연이지 절대로 스스로 의도된 예술행위일 수 없는 거죠. 아니요 농담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얘기하는 거요. 뱀이 지나간 자국이 멋있게 보인다면 그것은 의도되지 않은 우연한 자국일 뿐이지 뱀이 그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그것들을 산출해 낸 것은 아니라는 거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거요. 인간은 하나님처럼 완전한 존재는 아니지만 인간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완전한 존재로 창조되었어요. 그리고 그 완전함은 이하의 피조물과 비교하면 더욱더 돋보여. 그래서 인간에게는 먹고 입고 이렇게 무언가 도움을 주는 도구가 아닌데도 인간은 자기 안의 어떤 정신을 표현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거요. 그것은 뭐냐면 인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완전성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예술행위들이 나오는 거란 거죠.
그러면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이시면, 당신이 그렇게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변했다 저렇게 변했다 이러는 분은 아니시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그렇게 변하시는 분은 아니시지만, 당신 자신이 완전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 완전한 존재로서 가지고 있는 성향,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이 완전함을 바깥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런 하나님의 성향에 변함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불변성에 대한 정의라 이거죠. 그러니까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라 이거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거요.
그러면 이 세상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이게 하나님 바깥에 있는 걸까 하나님 안에 있는 걸까? 그렇죠. 그러니까 이 세상은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시간이 지나면 썩고 사라지고 없어진다는 면에서는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해서 소멸되는 것들이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 속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는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이라 이거요. 그래서 나중에 더 공부하겠지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만드신 이 자연의 세계를 보면은 막 아름답잖아요. 여기 열린교회 마당만 들어와도 얼마나 아름다워요? 난 거기서 진치고 책을 보고 묵상을 해요. 오늘은 안 되가지고 아예 스탠드를 갖다가 거기다 켜 놓으라고 그랬어요. 얼마나 좋은 줄 몰라요. 차근차근한 그 비오는 날 그 우산 아래에서 쭈욱 책을 읽으면서 수요예배를 기다리는 거요.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그것의 정체가 뭐냐면은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예요,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내재성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내재하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신 효과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그렇게 아름다운거라 이거죠. 교회에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질 때에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거요. 왜 아름다우냐 하면은 그 사람 안에 계신 충만하신 하나님 때문에 아름다워지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당신 밖에 두신 것이 아니라 그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하나님 바깥으로 세상이 간 것이 아니라 창조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은 창조된 세계를 사랑하시고 창조된 세계 안에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결국은 하나님 자신과 더불어 교통하시는 거죠. 하나님 자신으로 돌아오는 거죠. 그래서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하나님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는 피조물들이 되는 거죠.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 모든 아름다움이 너무 신기해요.
(찬양)주 하나님 크시도다 아멘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무언가 부족했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이러한 어리석은 견해는 기각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다 쓸데없는 소리다 이거죠. 하나님은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으시면서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그리고 이 세계는 하나님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이 세상은 창조되어서 시간 속에서 소멸되어 간다는 점에서 하나님과는 다르지만, 그러나 창조하신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과 교통한다는 점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이다 이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거예요. 아멘
두 번째 엉뚱한 반론이 또 있어요. 그게 뭐냐면 그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때는 뭐하고 계셨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럼 여기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예요. 하늘나라도 모두 첫째 날 창조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두 세계를 창조하셔요. 천상의 세계와 그 다음에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셔요. 천상의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하나님이 천사들로 수종을 들어 당신이 다스리시고 지상의 세계는 인간을 두어서 수종 들게 하셔서 인간을 대리자 삼으셔서 통치하셔요.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데 이 지상의 세계는 하나님이 대리통치를 하신 거죠. 실질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을 대리자로 삼으셔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니까 인간의 지위는 천사의 지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위예요.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특히 죄가 들어온 이 때에는 인간의 지위가 형편없이 영광스러움을 잃어버려 천사들만 못한 존재가 되었지만 그러나 마지막에 영광스럽게 우리의 몸이 변화되는 그 때에는 우리의 지위와 신분은 천사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지위에 있게 되는 거죠. 아우구스투누수와 같은 교부들은 오히려 이 천사는 유시유종한 존재로 보았어요. 언젠가 하나님이 이 천사들을 모두 정리하시고 영화된 인간과만 무궁한 세계에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진술했어요. 우리가 그것은 성경이 정한 어떤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우리들이 더 이상 변론을 할 필요는 없지만 그처럼 인간의 지위는 천사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하나님 다음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가진 존재로 이 세상에 창조된 거죠. 그러니까 오늘날 이렇게 쓰레기 같이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의 이 처지는 너무 본래의 영광스러움을 잃어버린 비참한 삶이예요. 인간은 이렇게 살도록 창조된 존재가 아니예요.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첫째 날 창조하신 거요. 어떤 사람들은 첫째 날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땅에 있지 않은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혹은 영물들 천사나 이런 것들은 영원 세계 속에서 창조했다고 경솔하게 주장하는 교리 학자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거는 그야말로 정말 무지의 소치예요. 만약에 하나님이 사물을 창조하시던 첫째 날 이전에 만약에 무엇인가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거기에는 시간이 없는 세계예요. 그렇게 되면은 그것들은 시간과는 상관이 없이 영원성을 소유하게 되요. 그 영원성은 앞으로 나아가는 영원성이 아니라 뒤로 들어가는 영원성이예요. 기원에 관한 영원성이라 이거죠. 그러면 무슨 뜻이냐면 무시무종한 존재가 되는 거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영원한 존재는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없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서 언젠가 삼위일체 교리의 신비를 몇 번 설교한 적이 있죠.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영원성에 관한 교리였죠.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으시죠. 또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으시지요. 그러면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처음에는 성부 혼자가 계셨고 한참 뒤에는 성부와 성자가 계셨고 그 후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계셨으니 성부 혼자 계시던 때도 있었고 성부와 성자가 함께 계시던 때도 있었고, 비로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계시던 때가 있었으니 첫째 때에는 1위 1체요, 두 번째 때에는 2위 1체요, 세 번째 때는 3위 1체라는 결론이 나오잖아요. 아멘하면 안되는 대목입니다. 지금 틀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러한 혼란은 어디에서 오는 거냐면 시간이 없는 영원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그 일 속으로 시간을 끌고 들어갔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예요. 영원은 시간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초시간의 세계이기 때문에 성부가 계시고 성부에게서 성령이 오셨지만, 성부가 계시고 성자가 성령에게서 나으셨지만 결코 성부는 성자보다 앞서지 못하셨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셨지만 성령 없이 성부와 성자만 계시던 때도 없었다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시간 세계와 영원 세계의 차이예요.
아직도 이해가 안가죠? 그러면 더 잘 이해하게 해 줄께요. 그게 이 정신 속에서 증명이 되는 거죠. 자 봅시다. 과거는 흘러 갔죠. 현재는 지금 있죠. 미래는 아직 왔어요? 안 왔어요? 안 왔죠. 그러면 지금 현재가 지나가지 않으면 미래가 와요? 안와요? 그러면 지금 현재는 지나가는 과거가 되죠. 그리고 미래는 현재가 되죠. 매 순간 이 일들이 되풀이 되죠. 이 순서는 뒤바뀔 수 있어요? 없어요? 불가능한 거죠. 왜? 인간이라는 존재가 시간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시간 속에 있는 존재에게도 이런 영원의 특성이 증명이 되요. 어디서 증명이 되냐면 정신작용 속에서 증명이 되는 거요. 잘 들어 보세요.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 시간이 흘러가서 과거가 되죠. 그 다음에 미래였던 것이 현재로 와서 다시 또 과거로 들어가죠. 그런데 신기한 것이 일단 과거가 되고 나면 정신 세계 속에서는 선후의 관계가 없어요. 정신세계 속에서는 선후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생각이 날 때에 연대순으로 생각이 나요? 생각하니까 1982년이야. 난 어제일을 생각하고 싶은데 2007년 5월인데 한참 기다려야지만 계속 기억이 가서 아직도 2006년이야, 아 이러다가 하나 탁 생각이 납니까? 시간과는 상관없이 이 속에서 시간을 초월하게끔 과거의 기억과 그 과거 전의 기억과 그 과거보다 더 먼 기억들이 그 속에서 시간 순서로는 아주 먼 과거가 여기 있고, 좀 과거는 여기 있고, 금방 지나간 과거는 여기 있고 현재는 여기 있거든. 근데 이게 쫘악 짜부러 들어서 여기 하나로 존재하는 거예요. 전 이런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막 혼자 온 몸에 비늘이 돋는 것 같앴는데. 아 그렇구나 영원은 존재하는구나. 영원한 세계의 그 신비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신세계 속에 담으셨구나. 아멘. 진리의 하나님이시여 영원이시 하나님이시여, 사랑스런 영원이시여. 감탄이 나오잖아요. 그렇게 해서 입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우구스투누스가 그 삼위일체를 쓰잖아요. 유명한 일화가 있잖아요. 삼위일체론을 쓰는데 삼위일체의 교리의 결론은 알겠는데 이것을 설명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것을 쓰고 있는데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 어떤 아이가 조가비로 바닷물을 퍼서 요만한 웅덩이에 담드래. “야, 너 뭐하니?” “아저씨 저는요 여기에 있는 바닷물을요 전부다 퍼서 웅덩이에 담으려고 해요.” “그래? 재밌구나.” 그러고 뚜벅뚜벅뚜벅 바닷가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번쩍 하는 빛이 비치는 거요. 딱 돌아 보니까 아이가 없더라는 거요. 그때 깨달은 것이 아하! 그렇구나.
(찬양)주 하나님 크시도다♬ - 아멘 -
그렇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무한히 끝이 없으시는 하나님이시구나. 그거를 깊이 깨닫게 되는 거요. 그렇게 이 정신 속에서 나타나는 거요. 그러니까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더 시간 세계 안에 있는 거요.
여러분 그렇게 말하면 의문이 생기는 거요. 무슨 뜻이냐면은 그럼 하늘나라가 그렇게 시간에만 묶이는 걸까? 좀 틀려요. 그러나 시간 안에 절대적으로 묶이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그것도 시간세계예요. 종류는 약간 다르지만 시간세계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지 않았던 그 때는 뭘하고 계셨습니까? 라고 말할 때 그 ‘때’라는 말 자체가 시간이예요. 그 때는 시간이 없었던 거죠. 어떤 사람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서 이렇게 말하죠. 왜 하필이면 ‘이 때’가 아니고 ‘그 때’ 창조하셨습니까? 근데 그것도 의미가 없는 거죠. 어짜피 때라고 하는 것은 영원이었는데 영원이 이렇게 펼쳐지면서 때가 된거요. 그러면 어짜피 이 영원은 무한하기 때문에 언제 펼쳐지든지 그것은 그 때가 시간의 시작이예요. 그러니 그것은 선후를 이야기 할 수 없는 거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때보다 더 빨리 창조하실 수도 없고, 더 나중 창조하실 수도 없다 라는 결론이 나오는 거죠. 왜?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 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전 그 때에는 뭐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때보다 더 나중 때’에 이런 말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어짜피 창조의 뚜껑을 열어야지만 시간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것은 의미가 없는 질문이라 이거죠. 우리는 천지가 창조된 연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그 보다 더 빨리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수 있었다’ 그런 거는 없다 이거죠. ‘나중에 창조하실 수도 있다’ 그런 거 없다 이거죠. 처음과 나중이라는 것 자체는 시간의 선분위에다 찍는 점이예요. 그런데 영원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점을 찍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미가 없는 거라 이거죠. 그러니까 어느 때까지는 하나님이 세상 없이 존재하는 것이 괜찮다가 어느 때에는 모자라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런 이야기가 성립이 안되는 거죠. 그래서 존오웬 목사님은 말씀하시기를 실로 하나님은 당신 밖에 있는 어떤 존재에 의해서 자극 받거나 움직여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무한한 지혜와 영원한 의지 안에서 당신의 의지를 쫓아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라고 가르쳐 주었어요.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때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게 왜 그때였냐? 이렇게 물을 수가 없다는 거죠. 왜냐면은 그게 때의 시작이기 때문에 다른 어느 때에 시작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때가 하나님에게는 없다 이거죠. 그걸 생각할 수 없다 이거요.
그래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창조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 자신 안에 있던 그 모든 지성과 의지를 통해서 무로부터 그 모든 것들이 이 세상에 나오게 된거요. 무로부터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할 때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그 모든 것들이 창조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돼. 그러나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런 이치라고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이 ‘무(無 )’ 그러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사실은 이 ‘무’는 없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잠재된 가능성을 가리키는 거죠. 자, 있다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이렇게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에 익숙해진 우리들이 볼 때에 있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 있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할 때 없는 거요. 그런 점에서는 하나님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죠. 왜냐하면 거기는 영원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그 속에 들어갈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이 시간 세계 속에서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것들 그런 의미에서는 영원 안에 아무것도 없지만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는 그 영원 안에는 없는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있다 이거죠. 그렇게 해서 이렇게 이루어지는 거죠.
저는 이러한 것들을 지금 현재 이 우주 안에서도 아주 훌륭하게 입증할 수 있다고 믿어요. 예를 들자면 여러분 이제 여기에서 로켓트를 타고 천체 바깥으로 나가요. 지구 바깥으로. 몇 천 킬로미터를 나갑니다. 그러면 거기는 뭘까요? 거기는요 우주 공간이예요. 거기는 뭐가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어요. 온도도 똑 같아요. -273도. 어디가도 -273도예요. 물론 태양 표면에 가면 얘기가 틀려지죠. 충분히 익으니까. 그러나 보통 우주 공간에서는 더운 데도 없고 추운 데도 없이 거의 모든 공간이,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을 제외해 놓고는 이렇게 태양이 가까이 있어서 열이 미치는 지역을 제외해 놓고는 모두 -273도 균일해요. 그럼 그 우주 공간에는 뭐가 있느냐? 없어요. 단 하나가 있어요. 수소 H분자가 있어요. 근데 그것도 하나하나 사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없다고 그러면은 정답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거요. 그러면은 그럼 없는 거잖아요. 그것도 더 발달이 되면은 그 H도 없는 것에서 생겨나는 거죠. 저는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화학 이러한 것들을 배우면서 지구상에 원소가 대게 많잖아요. 원소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난 온 우주에 이런 원소가 많은 줄 알았어요. 없어요. 우주 공간에는 오직 이 H 하나밖에 없어요. 근데 신기한 게 그 H를 결합을 시켜요. 근데 그것은 지구상에서도 가능해요. 3만도 정도 열을 가하면 이 수소가 수고 원소 두개가 합쳐져요. 이게 뭐냐면 헬륨이라는 원소가 되요 그러면 이것을 합쳐지게 하는 성분이 뭐냐면 열이예요. 열. 열에 의해서 합쳐지는 거요 그러면 이 지구위에 존재하는 철, 니켈, 망간, 나트륨, 무슨 뭐 알칼리 이런 수많은 원소들이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전부다 우주공간에서는 H 하나밖에 발견이 되지 않는데 이것이 열 작용에 의해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오늘도 신문을 보니까 슈퍼 노바의 폭발이 나오더라고요 별들이 팡하고 폭발하는 거거든요. 마지막에 근데 그 폭발하는 그런 열에 의해서 이 H밖에 없는 것들이 결합을 하면서 수많은 원소들을 만들어 내는 거죠. 그래서 역사적으로 재주꾼들이 무얼 만들고 싶어 했냐면 금을 만들고 싶어했어요. 만약에 금을 캐지 않고 만들 수만 있다면 세계의 재산이 거의 자기 것이 될 거 아니예요. 그래서 수없이 금을 만드는 법을 인간이 천여년이 넘는 동안 그 꿈을 가지고 2000년 가까이 인간이 노력을 해왔지만 결국은 못 만들었어요. 영원히 만들 수 없어요.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적어도 금이라고 하는 원소가 나오기 위해서는 과학도들이 적어도 50억 도의 열이 필요한데 그거는 지구상에서 만들 수 있는 열이 아니예요. 지금도 우주에는 엄청난 폭발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 폭발들 속에서 그것들이 생겨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지구는 그런 폭발들을 통해서 생겨난 많은 원소들이 정말 기이하게도 한 곳에 이렇게 모여 있는 한 덩어리를 이룬 거요. 아주 특이한 경유죠. 이런 거는 우주공간에서 진짜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가끔 있는 일이라 이거죠.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이 전부 불덩이예요. 기체야. 이런 딱딱한 덩어리가 아니예요. 로켓트를 타고 만약에 불에 안 탄다면 휘익하고 그 별을 향해 돌진하면 뚫고 반대편으로 나온다 얘기예요. 다 불덩어리지 이런 흙이 아니라는 거요.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들어내신 거죠. 그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셨다면 오히려 그것은 더 이상한 거죠. 그럼 그 있는 것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냐는 질문이 끊임없이 나오는 거죠. 아무 것도 없는 속에서 그러나 그 있다 없다는 시간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기준으로 볼 때에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있는 것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없는 것 같은 있는 것 그 속에서,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없으며, 또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있는 그런 것들이 나오는 거요. 그래서 아우구스투누스가 이런 말을 하죠. 참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한다는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기는 있으나 날마다 날마다 소멸하고 부패하여 있음을 상실해서 없음 속으로 달려가요. 그럼으로써 시간이 성립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있기는 있는데 그 재미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없었던데 나타났기 때문에, 나타났는데 결국은 사라지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라고 불리우는 거요. 그러니까 영원히 있는 것은 아니죠. 있기는 있는데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와 미래와 상관없이 이것을 볼 때는 있다가 사라지는 거니까 이것은 진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거죠. 그런 점에서 없는 것이라 이거죠. 그러니까 당연히 이 모든 것들이 창조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어야지 맞지 거기에 뭐가 있다면 그것은 영원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삼위일체와 하나님과 동등의 영원을 누리는 존재가 되는데 그러면 그 자체가 신이 되어버리는 거죠. 그렇게 되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거요.
그러니까 창조된 모든 것들은 그 위대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의존해 있는 거요. 인간의 참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아는 거요.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은 나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창조하신 그 하나님을 덕 입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한다라고 하는 그런 자기 고백,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서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길이예요. 거기에서 비로소 인간은 지혜를 발견하게 되요. 무엇이 있지만 없는 것이고, 무엇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통찰을 갖게 되는 거요. 그래서 시간 세계 속에서 많은 것들이 출렁거리면서 우리 앞을 지나가요. 돈, 명예, 물질, 욕망, 지위... 이런 많은 것들이 막 춤을 추면서 지나가요. 지나갈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면서 어떤 것들을 사랑하고, 붙들고,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목표로 삼게끔 우리를 자극해요. 내버려 두면 그런 시간 속에서 지나가는 것들이 우리의 지성 속에 지나가면서 생기는 이 많은 인상들이 우리의 지성 속에 끊임없는 폭력을 가하는 거요. 폭력을 가하면서 이것을 인직론적인 폭력이라고 하는데 폭력을 가하면서 돈이라는 것이 지나가면서 우리에게 폭력을 가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돈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요. 저 친구도 돈이 없으니까 난 필요 없어. 넌 돈이 많으니까 내 곁에 있어야 돼. 이건 돈이 되니까 부도덕해도 나는 이 일을 할 거야. 이런 식으로 폭력을 가하는 거요. 명예가 지나가면서 그것이 영광스러워 보여서 그것이 폭력을 행사하면 높아지기 위해서 수단방법 안 가리는 사람이 된다 이거죠. 이게 폭력을 가하는 거요. 우리의 지성에.
이런 것들을 자꾸 털어내는 반성과 참회의 시간이 없이는 이 영혼이 수없이 폭력을 당하면서 그러면서 이 지성이 어두워지게 되는 거요. 그래서 결국은 있지 않은 것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참으로 있는 것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불쌍한 존재가 되는 거죠. 그래서 죽음이 어느 날 오게 될 때에 그 때에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허무하게 이 세상을 마치게 되는 거요.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털어내야 되는 거요. 교회 다니는 것이 그것을 털어내 주지 않아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것들을 털어내는 가장 훌륭한 비결을 거룩한 고독에서 찾았어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쭈욱 돌아보면서 이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들풀과 같이 사라지는 존재이고 하나님만이 영원하신 분이시다.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고 변천하는데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그 하나님이시다 라는 거요. 그러면 우리의 후패해가는 겉 사람 때문에 슬퍼하지 않고 날마다 새로워져가는 우리의 속사람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거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슬퍼하는 대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 때문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거요. 이게 바로 지혜로운 현자의 삶이라 이거죠. 그래서 기독교는 말이예요 박수치고 교회 나와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 그런 게 아니라 이거예요.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이 아닌 그것을 예전의 그 추루했던 그 욕망에 사로잡히고 더러웠던 그 인생에 대한 모든 견해를 청산하고 그리고 그 영원의 찬란한 빛 앞에서 방막? 과 같은 현재를 살고 있는 존재로서 그런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그러면서 그 모든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고 오늘도 하루를 살면서 그런 욕망들이 우리에게 수없는 폭력을 가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지성이 더럽혀졌어요. 그때 닦아내야 되요. 거룩한 고독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그 안에서 드리는 기도로 그것들을 닦아내요. 깨끗하게 닦아내면서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 사용해야 할 것과 향유해야 할 것을 구별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요. 그게 바로 이 순간을 사는 인간이 영원을 향해 잇대어 사는 것이예요. 그러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도덕 의지를 받아들이게 되는 거요. 그래서 인생의 참된 행복과 보람을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 거기서 행복을 찾아가는 거요. - 기도 -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4.창조와 하나님의 경향성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상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세계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천상세계도 창조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영원 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첫째 날 이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에는 천상세계를 창조하시고 그래서 거기에는 천사들을 두어 당신이 직접 천상세계를 통치하시고 지상 나라에는 인간을 창조하셔서 당신의 대리자로 삼아 이 세상을 다스리셨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인간의 지위는 천사의 지위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뛰어나게 높은 것입니다. 천사는 영원토록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 그리고 당신이 택한 자녀들을 위하여 부리는 종이지만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만들어져서 그 지위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집의 유업을 받을 자들로 선택되었습니다.
이 지상생애에 있는 동안은 지상세계가 천상의 세계보다 불안전하고 시간에 속박에 훨씬 더 많이 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인간의 능력이나 이런 많은 것에 있어서는 천사들만 못합니다. 우선 천사들에게는 늙음이나 부패함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사는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우리는 부패하고 그리고 늙어가고 우리의 육신은 없는 것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런 점에서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육체가 이 시간상 속에 묶인다는 점에서 보면 영원세계에 사는 천사는 우리보다 월등히 더 완전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과 함께 영광스러운 몸으로 나타날 때 우리의 육신이 다시는 시간에 묶이거나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완전히 거룩하게 된 우리의 영혼과 함께 만날 때는 우리의 지위와 영광스러움은 천사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셔서 두 세계 모두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이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를 창조하신 목적과 지상나라를 창조하신 목적이 꼭 같다는 것입니다. 즉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 당신의 신성의 충만한 것을 영광스럽게 흘려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천상세계도 지상생애도 당신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창조의 목적을 구현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그 세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 영원부터 삼위 하나님으로 존재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는 각각 완전한 인격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겨우 하나님이 되시지 않고 성자도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각 위가 완전한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신데 세 인격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일하실 때나 활동하실 때나 모두 한 하나님으로서 움직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것을 가리켜 셋 안의 하나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격은 셋이요, 그러나 하나님은 세분이라고 말할 수 없고 한분 하나님이시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가 서로를 향하여 교통하고 계셨습니다. 이 교통은 그 본질이 사랑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각각 완전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보시며 가장 아름답게 보시고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서로 사랑으로 교통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은 바로 이 사랑의 교통 속에서 태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비한 생명과 사랑의 결합의 원리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서로 사랑으로 교통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한분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는데 그 영원 전부터 있는 사랑의 교통 속에서 바로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과 생명이 잉태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남녀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을 생육하실 때 사랑과 성이라는 방법으로 잉태하신 것도 이미 삼위일체 안에 있는 어떤 그림자를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완전하게 여기셔서 서로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하나님이 된 것처럼 인간이 서로 만나 서로를 사랑하게 될 때 서로를 완전한 자로 보며 서로를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의 교통을 이루게 됩니다. 생명은 바로 그 사랑의 결과로서 생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삼위의 사랑의 교통을 생명의 원천으로 삼으셔서 거기에서 수많은 피조물들을 이 세상에 창조해 놓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밖에 어떤 피조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뭔가 부족하시기 때문에 그러신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점에서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 그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당신 말고 또 다른 존재를 당신 밖에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조금만 생각하면 그렇게 말할 수가 없지요. 자,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죽을 때까지 인간으로 존재합니다. 이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제가 ‘있음’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있다.’ 어떤 사물이 있다 할 때 있는 것은 있음입니다.
하나님은 있음 그 자체로 꽉 찬 그것이 무한한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삼위의 사랑의 교통을 생명의 원천으로 삼으셔서 당신의 있음을 피조물들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있음을 나누어주실 때 하나님이 무한정하게 주시지 않고 한계를 딱 정해서 당신의 있음을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있음을 이 풀에 나누어주심으로 이 풀은 풀은 한계 안에서 있음을 갖도록 명령합니다. 그래서 풀이 되고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에 죽는 날까지 나무로 존재하다가 죽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하나님께서 있음을 나누어주시는데 어떤 것들은 꽃으로 있음을 나누어주시면서 꽃이라고 한계를 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있음이 들어가기는 갔는데 꽃이라고 하는 한계 안에서만 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있음을 하나님이 나누어주셨는데 훨씬 더 많은 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육체만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도 있고 영혼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인간인 한도 안에서만 존재하도록 범위를 정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해, 달, 별, 들에 있는 돌맹이와 그 다음에 물고기, 그 큰 산과 바다, 모든 것들이 다 이렇게 당신의 있음을 나누어주시되 한계를 딱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다 자기 자신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 밖에 무엇을 창조하셨다고 하시면 이만한 하나님이 당신 밖에 이런 물건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물건은 한계가 있게끔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수건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있는 것의 한계를 정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 가장자리가 보기 좋게 표현하기 위해서 자, 여기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라고 말하지 사실은 이 테두리가 세상은 테두리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테두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입니까, 아닙니까? 이 세상은 세상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이 세상이라면 꽃보고도 절하고 풀보고도 절하고 하늘에 달을 보고도 절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많은 옛 조상들이 바보같이 해와 달과 별과 이 땅의 있는 형상들을 보고 절하고 그것을 숭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꽃은 꽃이고 풀은 풀이고 세상은 세상입니다.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과 하나님은 구별되지만 이 하나님은 테두리가 없이 무한하신 분이니까 동시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까? 밖으로 도망친 것입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학생보다 더 말을 잘 알아듣습니다. 정말 잘 알아듣습니다. 어느 신학교에 가서 이것을 쭉 설교했는데 끝나고 학생들이 하는 말이 그러더랍니다. 김남준 목사님이 우리 학교가 굉장히 좋은 학교인줄 아나봐. 우리를 너무 똑똑하게 보시나봐.
이제 이것이 아주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그것을 창조하신 흔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이런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표를 가졌다고 표현하고 우리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 형상이 영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에는 하나님의 표가 있고 그리고 우리의 정신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 두 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생전 안 가본 곳인데 높은 산에 올라가서 쭉 펼쳐진 세상을 봅니다. 누가 일부러 만든 것도 아닌데 우리는 감탄합니다. 아, 정말 아름답다. 저 하늘, 저 구름, 저 봉우리, 저 숲, 저 흐르는 시내, 산 너머에 있는 저 수평선 아, 아름답다. 그렇게 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렇게 광대한 세계를 보지 않아도 봄이 되면 교회마당에 나무 몇 그루 심었는데 파릇파릇 새싹이 납니다. 그것도 부지런한 애는 빨리나오고 게으른 애는 늦게 나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보며 참 많이 배웁니다. 꾀를 부리고 안 나옵니다. 일치감치 나오면 아주 파스텔톤으로 파란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납니다. 삼층 사택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매일매일 색깔이 변하는 것이 너무너무 예쁩니다. 그 파릇파릇한 이파리와 그 다음에 하얀색 건물, 그 다음에 붉은색의 벽돌이 깔린 바닥, 그 다음에 빨간 빛깔의(?) 그리고 옆에 있는 세로로 기다란 창, 그 다음에 빨간 텐트레바 색깔, 이런 것들이 함께 조화되면서 그리고 옆에서 주일날 예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 걸어가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나무 한그루만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어쩜 그렇게 예쁜지,
언젠가 한번 어렸을 때 잠자리를 잡아서 잠자리 날개를 돋보기로 들여다보았습니다. 너무 예쁜 것입니다. 가느다란 줄들이 막 이렇게 나있고 군데군데 점도 있고 너무 예뻤습니다. 어떻게 이런 게 생겼을까? 그래서 이렇게 가벼워서 날개 짓을 하면 하늘을 날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잠자리도 그렇게 몸체 길이와 날개 길이가 모든 게 비율이 딱 맞습니다. 바보 같은 잠자리가 있어서 날개는 부채만 하고 몸집은 보이지도 않고 콩알만 하고 이런 게 나올 법도 한데 절대로 안 나옵니다. 사람도 어쩜 그렇게 비슷비슷하게 나오는지 짧은 사람도 있고 또 긴 사람도 있지만 또 키가 작은 사람은 머리통도 작습니다. 그래서 비율이 맞습니다. 키가 큰 사람은 머리통이나 손발이 다 큽니다. 그리고 또 뚱뚱한 사람은 살찔 때 배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얼굴의 턱에도 살이 쪄서 비율을 다 이렇게 이루어서 조화가 됩니다. 정말 예쁘게 그렇게 됩니다. 만약에 밥을 먹었는데 계속해서 상체만 커지고 하체는 안 커지면 아래는 90사이즈를 입고 위에는 110사이즈를 입으면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되고 이렇게 비율이 딱 맞게 정말 신기합니다. 늙을 때도 눈만 늙는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골고루 늙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균형을 잡아갑니다. 거 참 신기한 게 뭘 보더라도 비율이 다 있습니다.
어떤 학교에서 학생이 성경공부 시간에 질문을 하는데 선생님, 아담이 배꼽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하고 묻더랍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봤습니까? 난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목사님, 하나님이 남자 젖꼭지는 왜 만드셨습니까? 아무 짝에 쓸모없는데, 그런데 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배가 밋밋하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적당하게 엑센트로 하나 딱 찍은 것입니다. 여러분, 보면 만두 같은 것을 빚어서 위에 하나 탁! 얹고 만두도 만들 때 마지막에 돌려서 간장 뿌려먹게 만듭니다. 그게 다 인간의 배꼽을 보고 만든 것이 아닐까? 우리의 몸 전체는 하나님의 디자인에 대한 감각으로 꽉 찬 것입니다. 이 팔과 팔 사이에 전부다 비율이 다 똑같게 되어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보면서 아, 참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드는 그 근원이 무엇일까? 우리가 여러 개의 산들을 보면서 비교를 해서 아, 산은 이런 것을 예쁘다고 말해야 된다고 공식처럼 배워서 이래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탁! 보면서 아, 예쁘다. 그런 사람에게 왜 예쁜데? 그리고 설명하면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예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는 산은 안 예쁜가 하면 아니 그것도 예쁩니다. 이것은 아주 거대한 산이라서 예쁘고 이것은 산에 흰 눈을 잔뜩 이고 있어서 예쁘고 저것은 낮은 산인데 아주 좋은 색깔의 나무들을 이고 있어서 너무나 예쁜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이런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면 그들 속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말로 하나님의 내재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하나님의 기운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이 뭔가 사람들이 당신 말고 다른 존재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것 없이 지내시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창조하신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하나님도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이 않은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완전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왜 그런지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사용할 줄 아는 피조물입니다. 아주 놀랍습니다. 그래서 인간과 이 도구는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생활하는 모든 것들이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에 올 때 신발신고 오셨을 것입니다. 맨발로 걸어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목숨 건다면 올 수 있습니다. 오늘 입고 오셨습니다. 옷 벗고 올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니 있습니까, 없습니까? 목숨 건다면, 있습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여기에 앉았는데 흙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그 존재로서는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런 도구를 계속 만들어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이 무엇인가 이 지상에서 일을 해나가고 새로운 작용을 하려고 하는데 그러기에는 자신의 존재만으로는 부족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건설현장 같은 곳에 가보십시오. 그러면 옛날 같으면 수만 명이 들어도 들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콘크리트나 바위들을 크레인 꼭대기에 올라가서 손가락 하나가지고 까닥거리면서 수백 톤이 되는 이런 철강이나 콘크리트 덩어리 구조물들을 운반합니다. 그런 기계는 왜 만들었을까요? 그런 일을 하기에는 창조된 그대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인간이 그런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또 하늘을 나는 비행기 같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한국에 옛날에 돈을 많이 들여서 들여온 비행기가 있는데 일본이 레터 22기를 구하면 싸워봐야 다 떨어진다고 지금 고민하고 있는데 새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비행기가 있는데 그 비행기가 최고 속력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9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빨리 날아가고 장소를 이동하고 싶은데 인간은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기구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인간 자신의 존재만으로는 불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도 안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말고 인간이 써먹기 위해서 만든 게 아니라 그냥 창작한 예술품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림이나 아니면 예쁜 예술작품, 그 다음에 음악 이런 것들, 물론 음악 중에는 목적을 가지고 만든 것도 있습니다. 전쟁을 할 때 씩씩한 기상을 갖도록 흥분시켜야지 하고 만든 것은 인간의 뭔가 부족한 것을 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만 이 속에서 떠오르는 시 같은 것, 미술 작품 같은 것 그것 없으면 불편할까요? 오히려 설치작품 같은 것, 그런 것 길거리에서 다 떼어버리면 도로도 넓어지고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런데 의무적으로 건물을 하나짓는데 예술작품 하나 만들라고 시내에는 그렇게 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만듭니다. 결국 이런 것들은 옛날에 알타미라동그래(?) 같은 것을 보면 몇 만 년 전에 사람들이 벌써 정교하게 황조 같은 것을 그려서 만들고 그랬습니다. 그게 무슨 인간의 부족함을 채우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자기 밖에다 뭔가를 표현하고 만들었지만 인간이 뭔가 부족하고 불안전하기 때문에 만들었다기보다는 뭔가 인간이 탁월하고 인간으로서 상대적인 완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예술들을 창작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오늘 하나님이 이제 6일 동안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마지막에 창조된 모든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그랬을 때 이것이 바로 그렇게 마치 인간이 예술작품을 창조하듯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 홀로 있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창조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예술품처럼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예술품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예술품은 두고 보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예술품처럼 창조하신 이 세계가 당신 자신과 더불어 교통하고 그리고 당신 자신의 충만한 영광이 이 땅에 가득 차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시간 세계 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은 현재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현재 영원 전부터 항상 존재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 당신 자신을 현재화 시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영원 세계 속에서는 당신의 모든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계획이 당신의 이 마음속에 들어있었습니다. 지성 안에,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하나, 하나 밖으로 꺼내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럼 창조된 모든 것들은 또 다른 하나님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는 못한 존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것입니다. 선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처럼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 아닌 존재들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으로 충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또 다른 영원한 존재를 창조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자신으로서 부족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 자신만이 영원이시고 그 다음에 모든 것들은 시간 세계 안에서 이미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 세계 안에서 창조된 것은 있기는 있는데 진짜로 완전하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없다가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불쑥 하고 시간 세계 속으로 들어옵니다. 들어와서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것들은 점점 자기의 존재를 상실해서 결국은 무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제외한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는 신앙의 지혜는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없다가 태어났고 태어난 것이 없어짐으로서 자신의 존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간 세계 속에 있어야 보여 지니까 그러면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 세상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해야지 되는가 하면 항상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들이 갖는 유한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유한성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초상집에 가면 그 유한성이 생각이 납니다. ‘아, 죽는구나. 아, 어제까지 건강하게 나와 함께 밥 먹고 대화하던 이 사람이 이렇게 사라질 수 있구나. 죽을 수 있구나.’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가 죽을 수 있다면 나도 죽을 수 있구나. 이것이 나의 운명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때에 영원히 사라지는 것인가. 영혼은 있는 것인가. 육체는 어떻게 되는가. 그 이후의 세계는 어떨까 하고 비로소 시간 안에 있는 세계 말고 밖에 있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두 번 반복할 테니까 들어보십시오. 제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보여주나 시간은 이것들을 빼앗아가 버린다. 다시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보여주나 시간은 이것들을 빼앗아가 버린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안 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왜 그렇게 확신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그러니까 이제 여기에서는 그 자기가 누군가에 따라서 답이 갈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 들으십시오. “자기”라는 것은 “자아”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 자아는 복합체입니다. 단일체가 아닙니다. 뭐가 복합체인가? 이 자아 속에는 하나님을 닮은 순전하고 영원한 자아가 있고 또 하나는 죄로 말미암은 부패가 있고 소멸되어버릴 자아가 있습니다. 두 개가 같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 사랑할 때 그 자기가 이런 부패와 이런 것들을 다 벗어버린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해놓으신 질서 중에 자기가 가있어야 할 자리에 딱 있게 된 그 자아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충돌을 일으킬까, 안 일으킬까? 충돌을 안 일으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느스가 평생 했던 기도가 있습니다. 오르띠나떼 인내 까리따뗀 오르띠나떼 질서 있게 해주십옵소서. 인내 내안에서 까리따떼 사랑을 내 안에서 사랑을 질서 있게 해주시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더 사랑할 것은 더 사랑하고 가치 없는 것들은 사랑하지 말고 높은 가치를 지으신 하나님은 뜨겁게 사랑하고 덜 가치 있는 것들은 덜 사랑해서 사랑하지 않은 것은 사랑하고 사랑해야 되는 것은 사랑하고 이렇게 사랑의 질서를 바꾸는 일이 없도록 도와달라는 기도가 일평생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은혜를 깊이 받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면 이 질서가 바로 세워져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이다. 하나님이 최고다. 이 세상에 무엇이든지간에 심지어는 내 부모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방해되면 버려야 합니다. 은혜가 꽉 차면 이게 분명하게 하나님 제일주의가 딱 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너희 이웃을 사랑하고 그리고 너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그 다음에 이 세상에 있는 동물들, 생태계도 사랑하고, 이렇게 사랑의 질서가 똑바로 서는 것입니다. 사람을 너무 사랑하지만 사람의 사랑을 끝까지 붙들기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는 바보 같은 일은 안 합니다. 또 내가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 자연 세계를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을 버려야할 때 사람을 버리고 돈을 사랑하는 바보 같은 일은 안 합니다. 왜냐하면 오르띠나떼, 질서 잡힌 게 아닙니다.
그래서 잘 들으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는 우리 안에서 사랑의 질서를 잡게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질서가 바로 잡히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생각이 혼돈이 없고 모든 것이 똑바로 됩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안정과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면 제일먼저 머리통속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침체에 빠진 사람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몰라. 너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데. 난 몰라. 너를 이렇게 구원하신 뜻이 무엇일까? 몰라. 하나님이 네가 이렇게 사는 것을 보시면 좋아하시겠니? 몰라. 몰라, 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질서가 쭉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원고 없이 하다 보니, 말해보십시오. 대답을 잘해보십시오. 아, 맞아. 자아가 이렇게 복합체인데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는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위가 어디입니까? 아주 잘했습니다. 착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잘 보십시오.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것을 제시해주만 시간은 이것을 빼앗아간다. 무로 만들어버리니까. 그런데 자아를 사랑해. 나를 사랑해. 그런데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이렇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사랑의 질서에 이치에 있는 올바른 자아가 아닙니다. 그래서 부패하고 위치를 이탈해있는 자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데 이 자기도 미안하지만 자기를 사랑한다고 할 때 이 속에 있는 하나님과 만나게 될 그 순결한 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자기 사랑은 자기의 욕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 땅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 사랑합니까? 그 욕망을 만족시켜줄 때 내가 행복하니까. 그런데 잘 들으십시오. 공간을 사랑할 대상을 제시해주지만 그게 자기입니다. 그 자기를 죽어라 사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는 무로 사라집니다. 영혼만 남는데 이 영혼은 내가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존재가 점점 빼앗기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사랑했던 그 주체는 결국은 육체의 욕심이고 사라질 육체고 육체의 욕망인데 결국은 그것은 모두 시간 속에 빼앗겨버리고 무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사랑할 대상이 사라진 다음에는 그 사랑은 목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목적이 없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긴 안목에서 보면 여태까지 보면 결국은 계속 있지 않고 결국은 무로 사라져감으로 그 사랑할 것을 배신할 것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허무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해.
(찬양)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공간 속에서 사랑하라. 그래서 제시되는 존재입니까? 대답을 못하십니까? 공간 속에서 제시되는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공간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공간 안에 존재하면 눈으로 볼 수 있지요. 어디?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십니다. 그런데 사랑해. 그러니까 계속 사랑해도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우리의 사랑에 대신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빼앗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은 끝까지 목적이 있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육체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허무함과 대비되는 하나님 사랑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잘못 생각하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는가 하면 아, 그렇다면 결국 이 시간 세계 속에 있다가 공간 안에 나타났다가 시간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은 다 쓰레기구나. 아무 필요 없는 것이구나.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뭐만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빨리 하나님 오늘 어떻게 안 될까요? 오늘 좀 제발 부탁합니다. 그래서 이제 몸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당신 암 말기입니다. 할렐루야! 드디어 그 날이 오는구나. 좀 촉진할 수 없습니까? 왜 그러느냐고 하면 만약에 인간이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정말 기쁨이 된다면, 잘 들으십시오. 너무너무 중요한 대목이니 잘 들으십시오. 인간이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너무너무 기쁨이 된다면 굳이 하나님이 공간 속에서 창조하셔서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빼앗기는 이런 과정을 하나님이 두실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계의 창조는 허무한 게 됩니다. 다 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이 왜 존재하는가. 우연히 존재한다. 그 존재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쓸데없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는 여분의 존재라고 합니다. 없어도 되는데 괜히 생겨난 여분의 존재다. 하이데커 같은 사람은 인간이 왜 존재하게 되는가. 모른다. 아무 의미 없이 누군가에 의해서 내동댕이쳐서 던져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미, 무슨 의미이고 목적, 그런 게 무슨 목적인가. 그래서 싸르뜨레같은 사람은 인간의 존재의 근본, 외면할 수 없는 본질은 무상한 것이다. 불교 비슷합니다. 이 도시도 다 헛된 것이고 인간도 헛되고 저 공원도 헛되고 나도 의미가 없는 존재다. 결국 이것은 한없이 아무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안 태어나도 되는 존재가 태어난 것이다. 이런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인생관과는 너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잘 들으십시오. 마지막 이제 몇 부분으로 정리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은 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제시되지만 시간 속에서 완전함을 상실하면서 서서히 사라져갑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간이 빼앗아갈 수 없는 그 무엇을 인간 속에 주셨는데 그것은 영혼입니다. 그래서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곧 무엇의 아름다움인가 하면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물론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회사에서 면접 볼 때 영혼을 꺼내어보자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영혼을 꺼내어 보여줄 수 있어야지, 얼굴이 예쁘고 대학을 나오고 그리고 날씬하고 그리고 공부도 잘하고 튼튼해 보이고 똑똑해 보이는 사람이 회사에 취직도 잘 합니다. 시집장가도 좋은 곳으로 갑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아름다움, 그러면 인간이라는 말 자체가 영혼만으로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영혼과 육체가 함께 아름답고 건강해야지만 아름답고 건강한 인간입니다. 그런 점에서 충분히 동의가 됩니다. 그러나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은 인간 존재에 의해서 주도성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있습니다. 왜 육체는 언젠가는 벗어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육체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주도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통전적인 인간에 대한 생각을 할 때도 항상 우선순위는 분명하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상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너무나 사랑해. 이거 헛된 것 아닙니까? 마지막에 내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의 육체는 소멸해서 그래서 사라져버립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육체만을 사랑했다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결국 그 육체는 사라져갑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은 사랑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나를 사랑하면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늙어 가는데 여러분들이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영혼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마지막에 나의 육체는 시간 속에 빼앗겨도 영혼은 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사랑은 헛된 사랑이 아니고 나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원으로부터의 영혼이기 때문에 나의 영혼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사랑은 결국은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된 것이니까 아름다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향한 사랑이 그런 사랑입니다.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동시에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늘 피었다 사라지는 이 들풀, 그리고 80년 후면 사라지고 말 이 연약한 육체를 가진 인간, 조금만 잠을 자지 못하면 맥을 추지 못하고 며칠만 먹지 못하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 가련한 인간을 그래도 육체를 입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금 좋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눈에 들어온 것이 무엇입니까? 창조된 이 모든 세상, 그래서 첫째 날, 둘 째 날, 이 앞에 여섯째 날에는 안 나왔던 부사가 하나 나오는데 히브리말로 네오든데 심히 매우 좋았더라, 이것은 마지막 날만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 그렇게 좋았던 것입니다. 시간 세계 속에서 사라져갈 것들인데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그렇게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육체를 믿고 이 세상에 있는 이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속에서 끊임없이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이 세상에 대한 생각들이 우리의 영혼에 끊임없이 찍히고 때로는 이런 육신의 감각들이 우리에게 육욕을 불러일으키고 아직까지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죄의 본성을 일깨워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것들을 보는데 자꾸 방해받고 우리 자신의 기억과 생각들을 분산시키고 흩어지게 만드는 그런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나중에 서너 주 지난 다음에 시간에 대해서 설명할 때 상세하게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시간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산산이 찢어놓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시간이 가지고 있는 분리와 해체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산란해집니다. 그래서 주일날 은혜를 많이 받고 눈물을 펑펑 흘리는 이 모든 것이 올바르고 똑바르며 맞아, 주님이 나를 여기 세워주셨지. 내가 사라질 이 세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야지,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흐트러지면 이 기억들의 파편들이 막 찢어지면서 혼란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은 이렇게 우리를 분산시키고 영원은 이 분산된 것들을 한곳에 모아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과 시간에 대한 명료한 인상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니 인간이 영원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이 없이는 어리석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천상의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지상에 살면서 천상을 끊임없이 묵상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천상의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시간이 찢어놓고 흩어놓은 우리의 마음과 기억들을 한곳으로 통합시켜서 그래서 영혼과 시간 사이에 관계가 무엇인지를 보면서 공간 안에서 태어났다가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존재가 그 삶의 의미를 영원을 향해 잇대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거기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 이미 있었던 일이지만 여러분들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어떤 착한 일, 주님을 위한 섬김과 희생, 봉사, 눈물의 기도와 섬김, 전도,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마음 안에 미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일들이 밖으로 펼쳐져 나타날 때 그때 하나님의 기쁨은 당신의 창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큰 기쁨이 우리 인간들에게 느껴지며 그 속에서 하나님은 공간 세계 속에서 창조된 피조물이 시간 속에 사라져갈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과 더불어 교통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하며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잠시 머무는 세상에 살지만 여기는 천국 가는 대합실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여기는 천국가기 위해서, 지옥가기 위해서 잠시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여기는 여기대로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시간 속에 창조하셨으니 시간 속에 창조된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원래의 질서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나와 온 피조세계 속에 충만하게 되기를 사모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시간 세계 속에 창조된 인간의 가치입니다. 그렇게 정말 그 창조의 아름다운 영광을 드러내는데 이바지하면서 살 때 이 인간의 육체는 고난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은 그것을 인해서 가장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영혼 안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고 했는데 영혼 안에는 무슨 인, 무슨 인, 두 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영혼 안에는 목적인이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영혼 자신이 목적에 이바지하는 존재가 될 때 영혼은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하나님이 왜 창조하셨습니까? 당신과 더불어 교통하고 당신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영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영혼은 가장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오! 여러분들은 본받으셔야 합니다. 모든 신앙의 깊이는 어디에서 나온다고요? 교리를 외우는데서, 묵상하는데서, 실천하는데서, 기도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영혼 안에 또 다른 인자가 있는데 그것은 완성인 입니다. 영혼은 누구의 영혼이든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영혼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혼이 아닌 불순물들이 붙어있습니다. 이것들을 털어내어 주어서 순결한 영혼으로 정화시켜줄수록 이 영혼은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면 영혼이 자신의 창조된 목적에 이바지하면서 살아가니까 행복해지고 그런 성화 속에서 자신의 불결을 떨쳐버리고 순결해지니까 이 영혼이 너무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똥을 푸면서 살아도 정말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큰 회사를 굴리며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도 그 사람이 역시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시간 세계와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공간 세계를 시간 세계를 초월해계시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에게 아주 의미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시간 세계가 없었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 안에만 있었을 텐데 시간 세계가 도입되고 공간 세계가 도입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당신 자신을 영원에서 시간과 공간 속으로 무한대로 확대하시면서 창조된 세상을 통해서 당신 자신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쁨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수요예배에 나오고 안 나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진실하게 분투하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해서 싸우며 나아갑니다. 인간으로서는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주님이 나를 여기에 세워주셨기 때문에 내가 여기 서있음으로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고난과 슬픔을 당하면서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시간 세계에서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문제이고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찬란하게 보여주는 그런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하나, 하나 먹고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게 그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오히려 사라져갈 공간 세계, 있다가 없어질 시간 세계 속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히 드러나야 하고 사라질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영원을 향하여 그렇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찬양)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주님의 일, 주님의 교회를 위한 충성, 심지어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향한 사랑, 이것도 어떤 면에서는 공간 속에 제시되었으나 시간과 함께 빼앗기는 것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일 때, 시간 속에서 우리가 섬기고 나면 우리의 섬기는 대상도 사라지고 우리의 섬기는 일도 사라지는데 그렇게 섬겼던 의미는 영원에 가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시간 세계 속에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영원한 하나님의 신비에서 다 새겨 놓으십니다. 그러니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창조세계 속에서, 그러면서 우리는 이슬같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들풀처럼 이 땅에 잠시 있다가 스러지는 존재인데도 우리들이 우리 자신이 공간 세계 속에 나타났다가 시간 속에 사라진다는 것 때문에 낙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리고 시간이 빼앗아갈 수 없는 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갈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우리들이 오히려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서 시간 세계 안에 있는 동안에 사라져가는 공간 세계 안에 있는 많은 주님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들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영원 속에서 여러분들의 안식과 행복이 클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5.창조와 하나님의 아름다움(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한 하나님의 성품이 밖으로 창조의 세계를 만들게 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창조된 것들은 등급과 질서가 있어서 그 질서 순서대로 사랑해야지만 우리도 행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아우구스트니스’의 그 유명한 기도, “내 안에 사랑을 질서있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로 설교로 마쳤습니다. 장부책이 맞을 것입니다. 이중장부를 안 쓰니까. 틀림없이 맞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제 하나님과의 창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제 두 시간 정도 내지 세 시간 정도 말씀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 ‘윌리암 아메스’라고 하는 아주 박식한 청교도는 하나님의 창조를 능동적 창조와 수동적 창조로 나누었습니다. 즉 능동적 창조는 하나님이 맨 처음에 단번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창조하신 것을 가리키고, 수동적 창조는 창조된 그것들이 번식하고 변이하면서 자신과 똑같은 종자를 만들어내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서 사람이 나고 짐승에게서 짐승이 나는 것이 짐승이 있어서 그렇게 만들거나 사람이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간섭하셔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사물들이 번식의 행위를 통해서 계승되어나가게 한 것이 아닙니까? 이것도 역시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덕 입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을 수동적 창조라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물에 대한 놀라운 지혜와 이 세상을 당신의 뜻대로 만드시기 위한 사랑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많은 피조물들이 창조되었지만 인간만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이해하고 기억하고 알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랬습니다. 히브리말로 ‘토브’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히브리말에서 이 토브는 ‘선한’ 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아름답다.’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다고 하는 것과 일치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은 그 존재의 원리가 아름다움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에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어떤 사물이 존재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나누어질 수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는 모두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깃들어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왜 그렇게 아름다울까? 또 죄가 들어온 지금도 만물이 그때처럼 아름다울까? 그러면 인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 하나인데 인간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것들을 이제 하나씩 풀어가면서 왜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는지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심히 보기에 좋으신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게 되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다 예외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존재와 여기서 이야기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 목적에 다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하늘에 떠있는 큰 해와 달부터 시작해서 짐승과 곤충, 날아다니는 새, 작은 미생물, 모래알 하나에까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 모든 존재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는데 가장 적합하게 이바지하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선이라고 말합니다. 창조 목적 자체가 선이고 그 창조 목적에 적합하도록 있는 그 상태가 선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떤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당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있어서 해, 너는 이런 일들에 기여해라. 그리고 하나님이 하늘에다가 해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햇빛을 비추고 온도를 보존하고 식물을 개화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덜컥 창조는 하셨는데 위치는 거기가 아니야. 그래서 하나님이 당구 치듯이 쳐서 두 번, 세 번 자리를 옮겨야지만 겨우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을 창조해놓으셨는데 만들어놓고 보니까 창조의 목적에 적합하지 않네. 수리해야지 되겠다. 그리고 창조한 아담을 배를 가르거나 머리 뚜껑을 열어서 뇌수술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에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은 모든 사물을 만드시고 만드신 그것은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존재하고 또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원래 이 아름다움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왜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는 오직 누구만 계십니까? 하나님 한분만 계시니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 안에 있는 생각이나 특성들을 많이 혹은 적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지니고 있다고 봐야지 됩니다.
제가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서 신학교 다닐 때 강원도 산골 사북탄광이 있는 영월 그쪽에 농촌봉사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산골이니 가난한 마을인데 상을 차려왔는데 고사리 일색입니다. 그 앞산에 고사리가 질이 좋은 게 그렇게 많습니다. 지금도 제가 고사리를 참 좋아합니다. 고사리로 반찬을 했는데 고사리 국, 고사리 찌개, 고사리 무침, 고사리 전골, 고사리 빈대떡 등등 모든 것이 다 고사리였습니다. 고사리를 가지고 반찬을 여러 가지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 스스로 모든 피조물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특성이 모두 배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름다움, 곧 ‘신미’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정말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형체나 물질이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이시고 무한하고 완전하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아름다우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위로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저 아래 발아래 구르는 돌맹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 거기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가 누군가 하면 인간입니다.
이 아름다움의 본질은 완전성입니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이 완전한 것이 두 가지가 충족될 때 아름다움이 되는 것인데 자, 존재가 있고 어떤 사물이 있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 선인데 이 두 가지가 합치될 때 아름다운 것이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똑같이 이렇게 존재와 선이 일치가 되는 그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개별적인 사물의 완전성입니다. 자, 예를 들겠습니다. 꽃이 있는데 요만한 작은 봉우리가 되었을 때도 꽃이고 필락말락 할 때도 꽃입니다. 활짝 펴서 이슬을 머금었을 때도 꽃이고, 누렇게 시들어갈 때도 꽃이고, 다 다 말라비틀어져서 시커멓게 썩어갈 때도 우리는 그것을 꽃이라고 부르지 휴지라고 부르거나 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입니까? 활짝 피었을 때,
사람이 제일 아름다울 때 대해서 사람들마다 개성이 있으니까 사람에 따라서 각기 인간에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젊은 여성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그럼 누군가는 나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해. 젊어봐야 비린내 나지. 그래도 60은 넘어야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 얼굴이 깊이 패인 훈장과 같은 주름, 눈동자를 뒤덮는 그 눈꺼풀 거죽 눈 얼마나 아름다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그래도 삼분의 일쯤 되어야 됩니다. 민주 사회에 각자 자기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일은 안 일어납니다. 모두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스토리로 써나가고 나이를 안 밝히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싱싱한 젊은이들이 떠오르는 것이지 70세 넘은 할아버지하고 65세 할머니하고 경로당에서 연애하는 것이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이 떠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떠오를까? 왜 젊고 아리따운 여성이 이제 거의 늙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는 그런 할아버지 된 남성과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 것일까? 왜 아주 젊고 싱싱한 젊은 남성이 이제 막 태어나서 유치원도 안 들어간 여성과 더불어서 사랑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사람이 경향이나 성향이 다양한데 왜 이렇게 젊은 나이로 획일화 되어서 서로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받고 그런 것일까? 이유가 무엇일까? 가끔 보면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병으로 분류가 됩니다. 아주 젊은 남성인데 머리가 하얀 할머니를 사랑합니다. 외국 TV에 보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런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의사들은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봅니다.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납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완전성을 향한 갈망입니다.
어렸을 때는 친구들 만나면 서로 자기가 나이 많이 먹었다고 학생증을 화이트로 고치고 그러는데 안 해보셨나봅니다. 그러다 나이가 좀 들면 조금 젊어 보인다고 그러면 저녁 값은 자기가 내겠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 그게 바로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울 때는 활짝 피었을 때, 꽃으로서 꽃잎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아니,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 젊은 사람은 사람임으로 꽉 찼고 우리는 이렇게 폭삭 늙었는데 그러면 사랑이 결핍되었다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은 그런 표현을 제일 싫어하지만 제가 아프거나 약할 때 죽음의 기운이 많이 스며들어왔구나. 죽음의 기운은 없음입니다. 원래 있는 것을 상실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늘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주름살이 많이 생기지 않았고 여기 이렇게 머리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머리가 꽉 차고 얼굴도 팽팽하고 아침이 일어나서 눈곱만 떼고 세수하고 옷을 입고 나와도 얼굴이 팽팽하고 허리가 아파서 아침에 일어나서 에고! 그러면서 기어 다니지도 않고 하루 종일 운동해서 온 몸이 아파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아침이 상쾌합니다. 그게 완전성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그럼 우리 나이든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체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되어있으니까. 자기가 아무리 젊어서 사람됨으로 꽉 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됨이 육체의 사람됨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그게 인간의 영혼까지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개념 없는 젊은이들이 아름답습니까? 짜증납니다. 얼굴은 예쁜데 개념 없이, 개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요? 세상물정을 모르고 인간의 분수를 모르고 그렇게 형편없이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쁜 얼굴은 짜증나는 얼굴입니다. ‘확 벗겨서 마음씨 착한 사람에게 줄까보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것이 바로 개별적인 상으로의 완전성입니다.
왜 자동차가 똑같은데 일 년 쯤 타고 나면 무게가 10킬로쯤 줄어듭니까?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새것은 비싸고 일 년 타면 쌉니까? 그것도 아직 안 망가지고 새것인데.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99%의 순금이 14금 보다 훨씬 비쌉니까? 그런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사물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이렇게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 완전함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아름다운 사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자연 속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설명이 다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인간은 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썩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도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보면 그 인간이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것입니까? 추루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추루해져가고 있다고? 그럼 반대로 대답해보십시오. 겉 사람은 아직 생생하나 속사람은 날로 썩어가도다. 그럼 그것은 추루한 것입니까,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외모로만 판단할 수 없는 요소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제가 첫날 말씀드렸던 인간은 두 가지 질서 속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연적인 질서 속에 속해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그래서 늙으면 육체가 완전성을 점점 상실하는 것입니다. 한참 때 쌀을 몇 가마 들었느니 다 소용없습니다.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지면 지팡이잡고 뒤뚱뒤뚱 사람들 부축 받으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그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또 영혼이 있어서 도덕적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다고 해서 같이 망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고 이 질서에 따라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과 이런 것을 따라서 질서를 따라서 적절히 사랑하게 될 때 그때 이 사람의 영혼은 날이 갈수록 더 아름다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 그것은 기본입니다. 이제 거기서부터 점점 더 성화의 삶을 살면서 우리의 영혼이 아름다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있을 때 육체만 보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고 개, 돼지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그 육체 넘어서 있는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영혼을 보고 인간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 눈은 정말 현명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입니다. 하나님 닮은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눈입니다. 그러니까 늙어서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고 서금서금해져 가게 되면 우리는 가는 백발과 사라지는 홍안을 붙들고 막 서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다 껍질처럼 사라지고 나면 밝히 드러나게 될 나의 인간의 마지막 불멸하는 요소, 영혼의 아름다움이여. 그 영혼의 아름다움이여. 진실로 내가 사모하는 바로다. 아멘! 그런 고백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찬양)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히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새로워집니다. 날마다 이 세상의 날들은 나를 배반하고 나의 육체는 쇠잔해져가도 나의 영혼은 날마다 주님을 만나 정결해져갑니다. 그래서 내 육체가 젊었을 때보다도 성화의 길을 많이 걸어간 나의 노년에 나의 영혼이 썩어가는 나의 육신의 장막 안에 거하는 것이 더 행복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이런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인간의 어리석음과 제한성을 갖지 않으신 모든 것을 아시는 완전한 하나님은 그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내가 작년인가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그렇게 존경하는 은사님이계셨는데 그분이 총신의 학장도 하셨는데 지금 96세인데 94세 때 제가 찾아뵙습니다. 사모님은 7년 전에 돌아가시고 혼자서 외롭게 아파트에서 사시는데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움직이면서 사십니다. 가서 집회를 갔을 때 디즈니랜드 보여준다고 해서 필요 없으니 그 선생님이나 찾아달라고 그래서 선물을 사서 가서 큰 절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나 눈물이 나는지, 왜? 24시간 거기서 혼자 지내십니다. 일주일에 이틀씩 복지사가 오는데 그래서 교수님, 혼자서 얼마나 외로우세요. 그 말을 하는데 목이 메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활짝 웃으시면서 외롭긴 나 혼자 있나. 우리 주님하고 같이 있는데 외롭지 않아. 그때 내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그 나이까지 살 거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내가 저렇게 근력이 없는 나이가 되고 기억이 희미해져서 저런 상황이 되었을 때 나도 누가 나에게 찾아왔을 때 외롭긴 내가 혼자 있나. 우리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 허허,’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것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정말 아름다울 때는 외롭지 않습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다음에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죄 때문에 없어진 영혼의 원래 있음으로 가득 찬 영혼인데 죄 때문에 있으니 상실되어버린 것을 깊이 기도하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회기하면 영혼은 다시 있음으로 꽉 찹니다.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갑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게 인간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성화를 위한 모든 노력도 결국은 개별적인 우리 인간의 영혼으로서의 완전성을 소유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다운 존재가 되기 위한 그 과정입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되면 될수록 사랑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을 받습니다.
두 번째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는데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면 잘 알 수 있는가 하면 예를 들면 우리 옷차림 같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지금부터 표현 할테니까 머릿속에다 빨리 색깔을 칠하면서 그림을 그리십시오. 머리는 요란한 파머를 했는데 윗옷은 분홍저고리를 입고 아래는 새빨간 미니스커트를 입고 발에는 양말대신 버선을 신고 발에 신은 신발은 예쁜 고무신 대신 끈이 너덜너덜하게 매달려있는 여름에 신는 샌들을 신었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어깨에 메었는데 그 가방은 애들 기저귀가방입니다. 그리고 검정 선글라스를 하고 머리띠를 하나 하고 예쁩니까, 안 예쁩니까? 예쁘지 않습니다.
다시 그림을 하나 그리겠으니 따라 그려보십시오. 머리는 단아하게 쪽을 지어서 깨끗한 은색비녀를 꽂았습니다. 얼굴은 화장을 한 듯 안한 듯 갸름한 계란형 얼굴에 이목구비는 뚜렷하고 눈썹은 짙으며 이마는 튀어나오지 않고 적절합니다. 뺨에는 붉은 색조가 있고 아무 것도 화장하지 않은 생 얼굴인데 얼굴에는 티 하나 없게 하얀 얼굴이고 입술에는 마치 앵두와 같은 색깔이 감도는 그런 입술입니다. 목은 굵고 짧지 않고 가늘고 약간 깁니다. 어깨는 떡 벌어지지 않고 약간 가냘프고 거기에서 뻗어 내려오는 선은 유연합니다. 거기에 예쁜 치자 빛 한복을 아래위로 입었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비단신을 신었습니다. 그리고 왼쪽 손에는 난이 쳐진 아주 고급스러운 동양화가 그려진 부채를 들었습니다. 예쁩니까, 안 예쁩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게 요소요소가 다 맞는 것입니다. 아래위 그 다음에 목의 길이와 목의 직선과 비녀의 새로 선과 가로선, 그 다음에 아래위의 색깔, 거기에 어울리는 비단신과 여기에 만약에 애들이 들고 다니는 선풍기를 들었다면 안 어울리는데 합죽선을 하나 탁 드니까 어울립니다.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모델 중에 부분 모델이 있습니다. 전체는 못생겼는데 발만 예쁜 것이라 이 사람은 계속 발에만 보험 들고 발에다만 맛사지하고 발만 보여주고 사진 찍고 돈을 법니다. 또 손만 예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미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미녀는 손발 하나 하나보면 별로 예쁜 게 없어도 제 자리에 가서 바로 있고 손, 코, 입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가 다 예뻐도 그 위치에 5밀리만 각각 틀리게 같다 붙여놓으면 짜증나는 얼굴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코 하나, 눈 하나는 세계 최고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가장 균형 잡힌 위치에만 꽂혀 있으면 사람의 눈을 확 끄는 그런 미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그게 바로 보편적 질서입니다. 거기에서 코가 자기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 그때 가장 아름다운 사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보편적 질서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 파란 바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거기에 만나는 그 검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 예쁩니다. 부딪히면서 파도치면서 밀려오는 그 하얀 거품들의 자락들, 예쁩니다. 그런데 그 앞이 토지개발을 한다고 트랙터가 깎아나서 흙먼지면 거기서 보는 바다는 나쁠거야 없지만 예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똑같은 바다인데 더러운 백사장이 있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어서 그 솔가지 사이로 바람이 스쳐지나가고 거기에 흐르는 시냇물이 있고 하면서 그 숲속 사이로 보이는 백사장과 거기에 연한 길게 거품을 물고 늘어져 밀려오는 파도가 보이는 수평선 이것이 있는 바다의 자락들,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하나 하나가 완전할 뿐 아니라 완전한 그것이 다른 사물들과 어울려있을 때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이 꽃꽂이가 아름답습니까, 안 아름답습니까? 아름답습니다. 이 꽃하고 풀잎하고 다 어울리고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다 어울리니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자, 여기에 이렇게 이런 색의 종이 있는데 아름답습니까, 안 아름답습니까? 눈에 거스릅니까?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또 뭘 예를 들까! 그리고 위에 똑같은 색이 있는데 눈에 거스릅니까? 괜찮지요. 이것을 아름답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주변에 것들과 어울리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에 있는 성찬상도 어울립니다. 그러니까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에 호마이카 상이 여기에 올라와있다고 생각하면 짜증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어디에 사용하는지도 모르는 물건, 예를 들면 화성에 도착한 우주선 기계를 부수어서 꺼낸 기계, 10센티짜리 부속 하나가 있다고 칩시다. 그것을 여기에 까만 보자기에 올려놓으면서 이거 예뻐요, 안 예뻐요? 물을 때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게 주위에 뭐와 함께 있어야할지를 알 때에 이게 예쁜 건지 안 예쁜 건지의 판단이 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입니다.
보십시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이 교회를 창조하셔서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하실 때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사와 재능을 주시고 자연적인 성품도 각 사람이 다 틀립니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살아갑니다. 사랑이 충만할 때는 서로 다른 것이 너무 기쁘고 재미있고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나는 예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내가 아름다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저 사람이 나를 자기와 어울리게 해주니까. 예쁜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애를 7명을 낳았는데 나오는 애들이 다 판박이처럼 나온다고 한다면 두 번째까지는 모르지만 세 번째부터 무섭지 않겠습니까? 이름표를 붙여놓지 않으면 부모인 나도 도저히 애들을 구별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무섭지 않겠습니까? 로봇같이 찍어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하면 다르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달라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죄가 들어와서 다른 쪽에 담겨진 아름다운 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들을 상실했기 때문에 거기서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사유 중에 가장 미친 사유가 무엇인가 하면 성격차이라고 했습니다. 성격이 똑같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쓴다고 그럴 때 오냐. 집 팔자. 그래서 쓰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된다고 그러고 토닥거리는 부인이 있어야지만 이게 생계가 유지되지.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조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우주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어떻게 발견되는가 하면 우리 인간 속에서도 육체와 영혼이 틀린데 이게 함께 있어서 우리가 되는데 그러니까 육체가 있고 영혼이 있는데 때로는 영혼이 움직이는데 육체가 방해가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함께 있음으로서 인간 존재가 아름다워집니다. 또 육체와 영혼 사이에 작용이 일어나서 이것들이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많은 정신작용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육체가 사물을 보면 그것들이 감각으로 들어와서 지각이 되고 이게 영혼 속에 지성으로 새겨지고 그러면 거기에 대한 반응이 생겨나면서 수많은 심리현상들을 비롯한 작용들이 막 생겨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각각 아주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존재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의 우주처럼 전체가 연결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연결을 이루면서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그 존재로 하여금 진정으로 아름다운 존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을 때 그때 두 가지 질서 속에 속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자연적인 질서 속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인 질서는 인간의 육체와 관련이 됩니다. 인간의 육체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사람으로서 완전히 영근 사람으로서 이제 육체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최고점이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인간이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그 정점이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정점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육체를 위해서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해서 노화를 방지하려고 애를 쓰고 그래서 의학에서 엔티 에이즌이라고 해서 노화를 방지하는 것이 학문에 한 분야가 되어있습니다. 지금 같은 세대에 떼돈을 버는 분야 중에 하나입니다. 엔티 에이즌 크림 요만한 것 하나 만들어서 몇 십 만원 받아도 사람들이 막 사고 그렇게 합니다. 원료가 얼마인지 누구도 모릅니다. 그런 것, 그렇게 해서 자신의 육체가 본래의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천천히 가게 막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렇게 하다가 지치면 에이, 그리고 사실은 안 그래도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을 하게끔 하는 그런 것, 무슨 색조나 그런 것을 통해서 한다든지 그런 것입니다.
여러 해 전인데 우리 교회의 간사들이 수련회를 갔습니다. 주일날 가니까 화장을 예쁘게 하고 가서 수련회 장소까지 갔는데 아침에 새벽기도가 없으면 괜찮은데 새벽기도를 하러 세수만 하고 다 모였는데 옆에 있던 김기성 형제가 목사님, 저기에 있는 여자 분이 누구입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멀어지는 그 완전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는지 그 격차가 너무나 큰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성공하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씁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만 아니라 영혼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도덕적 질서 속에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늙지 않고, 혹은 늙은 것을 위장하거나 해서 사람의 육체의 완전성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하든지 유지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서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느낌이 막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형제 하나가 20세 때 29세 된 자매와 결혼했습니다. 별로 안 놀라십니다. 그런데 그게 20대 때는 문제가 안 되었지만 이게 40대 쯤 되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랑은 39세인데 자매는 48세이니 50세입니다. 그런데 만났는데 거의 비슷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는 계속 완전성에서 멀어지는 것을 방치했고 자매는 몸부림치면서 항거를 했기 때문에 비슷해 보입니다.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거꾸로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것이 인간의 육체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또 다른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덕적 질서 속에 속한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야말로 도덕의 문제입니다. 도덕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도’는 인간의 경험 건너편에 있는 선악의 기준이고 ‘덕’은 거기에 합치하려는 인간의 영혼의 힘, 혹은 아름다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러니까 순전하게 마음, 인간의 정신, 영혼 이런데 속하는 것입니다. 육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덕의 가장 본질적이고 고유한 요소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발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합치하려고 하는 이 마음의 움직임들이 끊임없이 이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도덕적인 질서 속에서 가장 완전성을 가지고 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식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위치로 안 가고 다른 데로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더러운 것이 됩니다.
마당에 있는 단풍나무들 정말 예쁩니다. 저는 저 나무 그늘이 어디보다도 더 좋습니다. 그 아래서 책을 읽으면 시름이 다 사라집니다. 묵상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그 나무가 그렇게 사랑스럽고 예쁩니다. 아침에는 그것도 숲이라고 새들이 날아와서 노래를 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여기에 뿌리 채 뽑혀서 여기에 올라와서 누워있다면 그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가 너무 예쁩니다. 바다를 헤엄치는 그 아기돌고래들의 그 몸짓 예쁩니까, 안 예쁩니까? 여기에 돌고래가 20마리쯤 들어와서 펄쩍 거린다면 아마 여러분 모두가 비린내가 나서 뛰어나갈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것은 제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덕적으로도 인간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럼 인간이 자기 위치를 정확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하나님 앞에 도덕적인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자기에게 맞는 작용을 해서 자기 때문에 사람들이 덕을 입게 하고, 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름답게 만들어지게 하고, 자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사람으로서 더 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겉 사람이 날마다 후패해서 가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향기 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면 우리가 필연적으로 겸손해집니다. 그래서 나의 판단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판단을 믿습니다. 그리고 내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질서가 가지런히 정리가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까지는 돈에 목숨을 걸고 이 세상에 내가 살아가는 전부였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면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도덕적인 아름다움과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과 사람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있는 것들이 모두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그럼 그 아름다움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하면 아름다움의 원주인이신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연적인 흔적이 있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흔적인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육체에 그보다 더 우월한 도덕적인 아름다움의 흔적이 그 사람 사람들, 영혼과 정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사람들이 욕망에 눈이 멀고 나면 이런 도덕적인 아름다움 것들은 다 개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그것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범죄하고 지명수배가 되어서 도망 다니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사진이 어떻게 인터넷에 돌아다니면서 범죄하고 도망 다니는 그 여자에게 어떻게 펜클럽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인터넷으로 정부의 법원에 그 여자를 용서해주라고 그랬습니다.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라고 용서를 해주라고, 가족의 품에 돌아가게 해주자. 왜 예뻐서. 그래서 그 여자는 예쁘지 않았더라면 자기의 얼굴이 안 알려졌을 터인데 팬클럽까지 생김으로 인해 전국에 그 얼굴이 알려 졌습니다. 그래서 알아본 사람이 신고해서 잡혔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밖에는 못 봅니다. 그게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한계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이 세상의 사람들도 거의 일치를 봅니다. 저 여자 예쁘지? 그럴 때 반응, 절세의 미인이구나. 그러는데 절반은 정말 보기도 싫다. 이러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거기에서 일치를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도덕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못 봅니다. 그래서 정말 아름다움이 아닌 데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착각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좋은 게 아닌데도 좋다고 착각을 하고 악을 행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바로 이런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질서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미학적인 질서입니다. 이런 질서로 꽉 차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신자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충만하게 고양되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흔적을 어디에서든 느낄 수 있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최고봉입니다.
(찬양)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에 별 울려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하나님의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만 겨우 하나님을 느끼는 영성은 이것은 퇴보한 영성입니다. 아! 아름답다. 이 나무 한그루를 만드신 하나님, 어두운 시골 밤 꼬리에 불을 키고 깜박이며 사라지는 반딧불 몇 마리를 보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주님이 한마디 창조하신 이 자연의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다니 이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내 마음에 눈이 멀어서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채 도시에서 내몰리며 살았구나. 아! 슬프다.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어떤 사람이 정말 아름답다면 그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보면서 주님이 은혜를 조금 주신 사람의 영혼과 삶이 저렇게 아름다우니 저 사람을 감화시키신 그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그 사랑에 완전하시고 자비가 충만하시고 의로움으로 가득 찬 그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 하나님이실까? 아! 내가 날마다 그분을 닮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을 느낄 때 인간은 온 우주의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꽉 차있어서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인간의 마음의 눈이 하나님의 탁월한 은혜에 의해서 열려져서 자연적인 사물 속에 깃든 하나님의 표와 도덕적인 피조물인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시력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럴 때 있습니다. 살아가는 그 당시에는 너무 쓰라리고 괴롭고 힘듭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고난과 연단의 고비를 다 지나고 회복하면 너무 감사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이렇게 치밀하게 그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는 고통밖에 없는 것 같았고 마라와 같이 쓴물을 마시는 인생의 계곡을 지나는 것 같았지만, 광야를 지나는 것 같았지만 지나고 보니까 어쩜 하나님이 그때 나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그런 지혜가 있으셨기 때문에 지금 나를 여기에 데리고 오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고난도 주시고 연단도 주셨구나. 아! 감사하다. 어쩌면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아름답게 인도하셨을까? 아멘!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때 뭐가 생기는가 하면 아! 하나님은 얼마나 그렇게 아름다우신 분인가. 그러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경륜의 완전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거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그래. 인생의 고난을 받으며 연단의 새벽을 지날 때도 그때는 가장 고통스러웠지만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데리고 오시기 위해서 그런 고난과 연단의 시간들을 내게 허락하셨구나. 결국은 이렇게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 속에 뭐가 생겨나게 되는가 하면 은혜가 확 밀려옵니다. 아! 그렇구나. 그때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았는데 하나님이 나만 시련의 들판을 지나게 하시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까 나는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러면서 왜 이 쓸모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그렇게 가슴 시린 사랑으로 인도하실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그때 생겨나는 마음의 각오가 아!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지나는 것들이야. 심지어는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도 다 지나가는 것들이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분은 이렇게 아름다우신 하나님 한 분뿐이야. 이렇게 아름다우신 하나님,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때문에 내가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주님만 사랑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뜻에만 순종하고 싶어 합니다. 아름다우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주님께만 복종하고 주님의 뜻대로만 살다가 결국은 주님께 합일되고 싶은 마음의 소원이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역으로 구름 같은 이 세상을 지나도 허무하지 않습니다. 왜? 기대하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 열심히 살지만 그러나 세상 자체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니까 이 세상을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는 주님의 뜻이 시간의 세계 속에 이루어질 때 그렇게 기뻐하면서 주 하나님 크시도다. 주 하나님 사랑이시도다. 찬송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발견하는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감격하고 기뻐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생활을 잘하면서 이 지성이 온전히 새로워지고 마음이 깨끗해지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도처에서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조금만 우리의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아까 저녁에 예배드리러 제가 먼저 내려오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은혜, 또 우리들에게 자녀를 주신 은혜, 섬길 자리를 주신 은혜, 거기에서 섬기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은 우리들, 그래서 어제 죽은 사람들이 살지 못한 내일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존재의 특권, 이모든 것들이 감사의 조건으로 다가옵니다. 왜? 그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리에게 입증해주는 수많은 증거들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수록 그런 마음이 듭니다. 아! 구름 같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분토와 같은 세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내가 사랑해야 할 분은 정말 이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나누어가진 다른 것들은 사랑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같이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마음이 생겨납니다.
찬송을 마음에 꽉 채워보십시오. 그 지나온 인생길이 평탄하지 않았지만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 도덕적인 완전하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오셔서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서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완벽하게 그분의 수중 안에 있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간에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 하나님은 아름다우시다. 우리를 향해 악을 행하실 수 없는 좋으신 하나님 그렇게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인간이 가장 큰 특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세상에 어떤 용맹스러운 짐승들도 어떤 예쁜 소리를 내는 새들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볼 수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의 지성을 주셔서 그래서 눈을 열어서 보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욕망의 눈이 멀면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자연 속에서도 안 보이고 자기의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 속에서도 안 보입니다.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도 못 봅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6.창조와 하나님의 아름다움(2)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31절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아멘! 우리 같이 잠깐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 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들이 새로운 복된 평안 가운데 수요예배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도 아프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기억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저희들을 보호해 주시며 저희들에게 주님 고난 보다 더 큰 위로와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셔서 담대히 이기도록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특별히 주님이 이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바가 무엇인지 알게 하셔서 저희들의 교회가 주님 앞에 더 올바르게 되도록 복을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오늘 드릴 말씀은 창조와 하나님의 아름다움 지난번에 했던 그것을 계속해 나가는 겁니다. 지난시간에는 이제 그런 말씀을 드렸죠. 아름다움이란 것이 무엇이냐? 그자체가 어떤 사물의 존재의 원리다. 다시 말하면 존재하는 것의 원리가 아름다움이다. 존재가 선하고 일치할 때 그것이 아름다움이 된다고 말씀을 드렸고 존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고 그리고 아름다움은 그리고 선은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에 맞는가.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드렸습니다. 이 존재와 선이 일치하는 방식이 무엇인가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이게 바로 어떤 사물이 개별적으로 완전해 질 때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그것이 다른 사물들과의 질 서속에서 아름다울 때 이두가지가 합쳐져서 아름다움을 이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아름다움이 그 자연 과 인간의 도덕세계 속에 펼쳐져 있어요. 그것이 아주 찰 난한 질서를 형성하는 거예요. 하나는 자연적인 질서이고 하나는 도덕적인 질서이다 예기입니다. 전 오늘 이 설교를 묵상하면서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탁 떠올랐어요. 왜냐하면 어제 오늘 교회를 쭉 돌아보니까 교회가 많이 낡았어요. 그래서 이거 이제 수리를 해야 할 텐데 내버려 두니까 교회가 너무 더러워지고 망가지기 시작 하는 거죠. 그때 이 교회를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지만 제가 깊숙이 관여해서 그래서 교회를 지었어요. 그때에도 교회를 질 때에도 여러 사람이 많은 이야기를 해줬지만 다 들을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통일적인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지어야지만 이게 올바르게 되지 벽은 집사님 말 듣고 천장은 권사님 말 듣고 기둥은 장로님 말 듣고 하면 나중에 교회가 제대로 잘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조언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무시도 하면서 그러면서 지었어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다시는 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이거는 이제 완전히 우리가 지은 것이 아니지만 지었다고 치면 이게 없는 것 아닙니까? 없는 상태 이속에서 이 속에서 짖는 거요. 그럼 이속에서 먼저 구상이 떠오를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림을 그리고 글자와 숫자를 표기해야 되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 없으시겠지요. 그래서 이것들에 대한 길이는 어떻게 높이는 어떻게 가운데 다리는 어떻게 만들고 복도는 어떻게 구성하고 방은 어떻게 만들고 하는 것들이 이속에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 것들은 만들 때에는 그걸 예쁘게 만하라고 하라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렇게 만들어야지만 이렇게 편안하게 다닐 수 있겠구나 이렇게 다리를 만들어 야지만이 양쪽 건물을 오 갈 수 있겠구나 이렇게 해야 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생활하고 움직일 수 있겠구나 라고 하는 개념이 이 안에 들어온 것 아니에요. 그러면 앞에 있는 길이 선 높이 이런 것들은 자연적인 것들이고 거기를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다니면서 어떤 목적에 이바지 하도록 구성하는 것은 도덕적인 목적이 되는 거죠. 이해가요? 그러니까 머릿속에 있을 때는 두개가 나누어지지 않고 두개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거죠. 응! 통일되어 있는 거란 말이죠. 이해가요? 어려운데 이해가요? 오호 한번만 더 이거 못 알아들으면 다음에 못나가니까 한번만 더 설명을 드릴게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잖아요? 그래서 이것들을 배열하시잖아요? 풀 꽃 사람 짐승 하늘에 나는 새 바다에는 물고기 돌멩이 모래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시잖아요? 응 창조하시면 그렇게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것 사이에는 거리도 있고 크기도 있고 길이 높이 부피 이런 많은 것들을 가지면서 가기 다른 물질들이 되잖아요?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셨지만 무질서하게 보이지 않고 조용히 질서가 있게끔 보여서 아름답단 말이죠. 그거를 자연적인 질서란 거죠. 그런데 자연적인 질서를 우리들이 볼 때 너무도 예쁘고 아름다운 거예요. 응! 그런데 그런 자연적인 질서를 만들어 놓은 것은 그냥보고 아 예쁘다! 아! 좋네! 그것이 아니라 그런그런 질서를 만들어 놓은 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무엇인가 영향을 받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어떤 선한 목적을 따라서 그 자연적인 질서를 이용하고 자연적인 질서의 영향을 받도록 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거죠. 에 그래서 그 앞에 있는 자연적인 질서가 자연의 질서고 뒤에 나오는 그것을 이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가는 이 삶이 영향을 받는 것을 가르쳐서 도덕적인 질서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모든 것들 인간이 사람에게 올바른 도리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는 이모든 도덕적인 생활 이것과 이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이 지성 안에서는 이두개가 아니라 하나였던 거죠. 하나님 안에 풀이 있겠어요. 꽃이 있겠어요. 풀이 있겠어요. 동맹이가 있겠어요. 그렇잖아요. 거기에서 나온 거란 말이죠. 그래서 이제 어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이 뭐냐고 말씀 드릴 때 여러분들에게 물으면서 아름다움이란 존재와 선의 일치다. 이렇게 말씀드렸잖아요. 그죠. 그리고 존재와 선의 일치하는 방식이 어떤 물건이 어떤 사물이 개별적으로 흠 없이 완전한 것이고 그 다음에 다른 것들과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아름다운 것이다. 그 존재와 선이 일치하는 것이다.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하나님은 하나님은 존재잖아요. 하나님도 존재란 말이죠. 그죠? 존재예요. 사물은 아니지만 하나님도 존재란 말이죠.
하나님은 존재이시니까 됐죠. 존재가 선의 일치하는 것이 아름다움인데 선은 창조의 목적이에요. 그럼 하나님 창조의 목적은 누가 정하셨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을 정하셨는데 하나님이 당신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을 거 스리실 수가 있겠어요.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을 정하셨는데 하나님 자신이 그 목적을 거 스릴 수가 있느냐 구요. 당호하게 얘기해야 돼요. 거 스릴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인간은 어때요. 건강해야지 하고 딱 정해 그리고 뒤에 가서 술을 마신단 말이죠. 스스로 모순된 행동을 해요 하나님에게는 그런 모순이 없으신 거죠.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정하신 창조 목적에 대해서 거 스릴 수가 없이 완전히 일치하셔요. 그런데 이세상의 모든 것들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에요 이렇게 있다는 점에서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게 시간 속에서 없어져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시간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극복해야 돼요. 시간을 초월해야 돼요. 시간을 초월할 수가 없어요. 결국은 이속에서 있다가 시간 속에서 시들어서 결국은 사라져 버리고 마지막에 나무도 모두 썩고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린단 말이죠. 그러니까 존재하기는 존재하는데 참으로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없는 것이죠.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인간은? 어떻게 되겠어요. 인간은 풀하고는 좀 다르겠죠. 왜냐하면 이풀이 5년 이고 10년 이고 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 인간의 육체도 결국은 사라져요. 사고로 죽던가 아니면 나이가 많이 먹어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죽음에 기운에 삼켜서 죽어져요. 그러면 우리의 육체는 이렇게 시들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이 살덩이만이 아니에요. 인간 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와 영혼이 합쳐져서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야릇한 게 육체는 시간 속에서 속박을 받으면서 결국은 소멸되어 시간 속에서 없어져 버려요. 영혼은 남는 거요. 그 남은 영혼은 인간이 아니지 그러면 인간이 아라고 소 나 돼지가 데냐면 아니야 인간이란 존재는 이렇게 영혼과 육체가 만나야 대는데 육체가 소멸해서 없어져요. 그런데 영혼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소멸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못되도록 하나님이 붙드셨어요. 그래서 이거는 하나님이 함께 영원 하고 시작은 하나님과 똑 같이 영원 하지 않았지만 끝나는 것 없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이다 이거죠. 그러면 이러한 영원한 성격을 가진 영혼이 사라질 육체와 만났으니까 이거는 존재하는 거예요. 이거는 완전한 존재에요? 불완전한 존재예요? 그렇죠. 불완전한 존재데 이것 보다는 비교 할 수없이 완전한 존재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인간은 이 풀이나 동물 보다는 훨씬 더 많이 존재하는 피조물이에요. 더 많이 있음을 가진 존재라는 거죠. 자 그러면 이제 보세요. 그러면 그러면 그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참으로 존재하시고 참으로 존재하셔요. 그 존재가 시간이 없어지거나 사라지거나 그러지 않고 영향을 받지 않고 길어도 끝이 없고 현재 그리고 미래로도 끝이 없이 하나님은 계속해서 존재하셔요. 그리고 모든 것들은 이렇게 태두리가 있어요. 이 리모콘 여까지만 존재하는 거예요. 여기 이 리모콘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태두리가 없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무한성이에요. 그렇게 무한하면서 시간을 모두 초월하는 하나님이 계신 동시에 하나님 당신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에 당신이 완전히 일치 하셔 그러니까 뭐가 돼는 거죠. 완전한 아름다움이 되는 거죠. 하나님만큼 존재하시는 사물이 없고 하나님만큼 당신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에 스스로 부합 하시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찰 난한 아름다움에 원천이 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아름다움의 근원이시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름다움 자체이신 존재 에요. 하나님은 그러면 우리가 지난 시간에 존재와 선이 일치하는 방식이 두 가진데 개별적인 완전성과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이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럼 하나님도 이 조건을 충족 시키셔야 지만 하나님이 아름다음의 근원이란 것을 밝힐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죠. 첫째는 뭐냐면 이 아름다음아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이제 각의의 완전성이에요. 각의라고 하는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키는 거예요. 월래 이 아름다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복수 성을 배경으로 하는 것에요. 복수 성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아름다움이나 선함이나 이런 것들 이야기 할 수없는 거요 으 이야기 할 수없는 거죠.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무인도에 여자 하나가 태어났어요. 최초로 그리고 아무도 없어요. 그 여자가 아름다워? 안 아름다워? 어! 아니 하다 못해 비교해 보고 얘가 더 났다 뭐 할 거 아니에요. 처음부터 이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복수 성을 배경으로 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신비합니다. 정말 신비한 거요. 요즈음 평범하게 이야기 하는 거지만 한때 다 제가 환희 했던 환희를 느꼈던 교리들이예요. 지금도 물론 느끼고 있지 중이지만은 복수 성을 배경으로 하는 거예요. 놀라워요. 하나님 자신이 셋이면서 하나시다. 이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워요. 그런데 그 셋 이신 그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고 자꾸 헷갈리는데 헷갈릴 거 없어요. 제가 언제 삼위일체 교리 알려 드렸잖아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 길게 한번 시리즈로 설교할 깨요. 그런데 그냥 이거만 기억하면 돼요. 성부 성자 성령님이 계신데 이 맨 처음에는 성부 홀로 계신 거예요. 그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신 거예요. 또 성부 성자에게서 성령이 발출하신 거예요. 나으신 거죠. 그래서 결국은 성부 성자 성령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 아 그러면 성부 하나님이 제일 먼저 그다음에 성자 그다음에 성령하나님이 이렇게 창조 되셨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서 성부만 고유하게 있는 존재이고 성자와 성령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 이 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거죠. 왜 안 되냐 하면 이일들이 일어난 것은 영원 세계 속에서 일어난 거죠 그 영원 세계 그 속은 시간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아요. 왜 하나님이 무한하신 하나님인데 거기에서 아들을 낳게 하셨을 때 아들을 낳으셨을 때 그 아들을 낳으시는 방식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 이 창조세계 안에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거하고는 틀려요. 후하고 숨을 불어넣으셨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게 하나님 자신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아닙니다. 후. 하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것들은 표양으로 나타내신 것이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라 육체를 창조하신 것처럼 영혼을 창조 하셔서 그 속에 넣어 주시는 거죠. 이 영혼은 영원한 세계 이 전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첫째 날 다 창조된 겁니다. 하나님 이 왜의 모든 것들은 다 첫째 날 창조된 것 이예요. 그런데 이 하나님이 어 아들이 신 성자를 낳으신 것은 인간을 창조한 거하고는 틀려요. 여러분들에게 한번 물어 볼게요. 무한한 것이 무엇을 덜어내면 그 무한한 것은 줄어듭니까? 줄어들지 않습니까? 줄어들지 않죠.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산수죠. 그러니까 성자는 하나님에게서 나오셨는데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로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동일한 본질로써 하나님이 낳으신 거예요. 응, 그럼 똑 같이 성부 하나님이 무한하시고 한정이 없으신 이런 모든 사물들이 한정이 있잖아요. 이 컵이 이런 태두리 안에 묶여 있잖아요. 이게 끝없이 사기가 나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모든 존재는 이렇게 한정이 있는 거예요. 한정성 이라는 거예요. 이 풀 안에 이렇게 있는 거예요. 이건 이젠 자라 가기는 하겠죠. 이것은 처음부터 창조될 때부터 얼 만큼까지 밖에 자랄 수 없다. 거기까지 향해 자라는 거예요. 인간도 이렇게 한정이 있는 거죠 내가 여기 있으면 내가 부산에 없는 거죠. 하나님은 그런 한정성이 없는 거죠. 한정성이 없으신 분이 아들을 낳으셨는데 그 아들도 한정이 또 없으신 분이예요. 그리고 무한하시니까 가능하잖아요. 그리고 그 무한 하신분이 또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삼위일체에서 할 때 체라고 하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님은 하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동일하다는 거예요. 물리적인 몸이 아니라 본질이 동일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 삼위의 하나님은 시간 전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앞 뒤 우선순위가 있을 수 없는 거죠. 그래서 그래서 시간이 있기 전에는 어떤 것들이 그 안에 있어도 그것은 모두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영원 속으로 빨려가서 그래서 모두 시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이상한 우리 차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죠.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시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오셨지만 성자 없이 성부가 계시던 때도 없고 성부 성자 없이 성부가 계시던 때도 없고 성령 없이 성자와 성부만 계시던 때도 없는 결론이 없다. 오늘 시간이 걸리니까 넘어 갑시다. 그래서 무한하신 하나님 그렇게 그러면 완전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오셔서 완전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오셨기 때문에 그 아들 하나님은 완전하셔요. 성령 하나님도 완전하셔요. 그러니까 또 참 존재요. 동시에 창조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공유하시는 거예요. 공유하시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영원세계 안에서 삼위하나님 이신 것이 시간세계 속에 들어오면서 삼위하나님이 질서 돕게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장면들이 펼쳐지는 거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부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구속하시고 성령하나님은 그 구속을 적용하신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 한다 이거에요. 이거는 반을 틀린 거고 반은 맞은 거죠. 하나님은 한분 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이 세상에 역사를 분업화 하실 수 없는 분이셔요. 창조하실 때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함께 일하시고 구속하실 때도 함께 일하시고 그 구속을 적용 시키셔서 믿음을 주실 때도 함께 일하셔요. 다만 그 함께 일하실 때에 삼위일체 중 어느 분이 주되게 그 일에 관여하시고 나머지 두 위의 하나님이 어느 때에 부차적으로 관여하시느냐 하는 구별은 있을 수 있지만 분업 덴 것처럼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라 이거죠. 그래서 삼위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 영원 전부터 시간세계 이전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하나님으로써 존재하는 양태를 가리켜서 내제적인 삼위일체론 이라고 이야기 하고 그것이 그 삼위일체 하나님에 이 양태가 시간과 공간을 가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삼위하나님이 일하시는 지가 펼쳐 질 때 이것을 외출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말하는 거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역사속의 경륜으로 나타나는 거죠.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계신데 성부하나님에게서 성자가 나오셨지만 성부보다 열등하시지 않다 이 예기죠. 절대 그렇지 않다 이거죠 그래서 이 삼위 하나님 한분 한분이 완전하셔요. 무한하셔요. 그리고 그 하나님은 창조목적에 완전 합치 하셔요. 그러니까 성부하나님은 성부하나님대로 완전한 아름다움이시고 성자하나님대로 완전한 아름다움이시며 성령하나님은 성령하나님대로 완전한 아름다움심이 되는 거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삼위 안에서의 완전성 이예요.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지만 성자와 성령이 존재하시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이 겨우 아름다워지시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게 한위 한위의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독립적으로 인격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이셔요. 그리고 어떻게 보 면은 세분이다. 라고 하는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거죠. 그런데 세분은 아니에요. 한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런 존재의 양식을 이 세상에서 자꾸 찾아보려고 하는데 그런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거죠. 이 세상 속에 물질 속에서 어떤 관계를 찾아보려고 하는데 그런 거는 다 잘못 된 거란 거죠. 그런 것을 표현 할 수 있는 만져지는 이감각적인 사물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 예를 찾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거다 이거죠. 여러분들이 흔히 들었던 게 아버지가 회사에서 사장이고 교회가면 장로고 집에 가면 아버지니까. 그 다 옛날에 정제 받은 양태론 이예요. 물 수증기 얼음 이런 비유 이런 것도 다 마찬가지 에요. 다 않데 는 비유라는 거죠 그런 사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세 인격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한분 하나님이 십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떤 시대의 서방교회는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삼위하나님을 이야기 했고 동방 교회는 삼위를 먼저 이야기 하면서 그 삼위를 먼저 통합해서 한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거죠. 점근이 각각 달랐죠. 어쩌턴 지간에 놀라운 것은 한분 한분이 부족한 것이 없이 완전히 아름다움 이시지만은 그 하나님이 삼위로 복수로 존재하심으로써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운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그 찬란한 월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시게 된 거죠. 그렇게 됨으로써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신 거죠.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이 시다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 이예요. 성경에 이렇게 말하죠. 그러면 만약에 하나님은 사랑이 시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거죠. 원래의 하나님이 사랑이셨다는 거죠. 지금 비로소 사랑이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도 사랑이셨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다. 그것이 변함이 없다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렇죠. 맞죠 그죠. 그런데 인간이 창조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 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셨다고 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 시다라고 하는 명제 자체가 성립이 않데 는 거죠. 그 사랑하는 대상이 없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이 어떻게 증명이 되느냐? 이렇게 물어 볼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이해 안가세요? 응! 몇 주 만에 나왔더니 이렇게 냉대를 하내요. 하나님이 지금은 사랑할 대상들이 많이 있잖아요. 우리인간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시잖아요?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시 잖아요. 그러니까 대상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나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라고 말할 때 그러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을 때에는 하나님은 무엇을 사랑하시나 그때도 사랑하고 계셔야지만 하나님에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때문에 생겨난 사랑이 아니라 월래 사랑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게 되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죠. 그러면 하나님이 월래는 어떻게 사랑이 실수 있느냐 그게 바로 삼위 하나님 사이의 위 간의 사랑 이에요. 위들 간의 사랑이에요.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령을 사랑하시고 상령은 성자와 성부를 사랑하시고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사랑하셔 왜 그렇게 사랑하셔요. 이런 왜 라고 하는 문는 물음 자체가 굉장히 우수 워 보이죠. 그죠? 그 아름다움의 유일한 원인이 뭐라고 그랬어요? 아름다움 아니. 사랑의 유일한 원인이 뭐라고 했어요? 답을 먼저 가리켜 주어 버렸어요. 사랑의 유일한 원인이 뭐라고 그랬어요? 아름다울 때 사랑하게 돼는 거예요. 아름다울 때 잘 들어보세요.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서 성부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아름다운 분이시고 성자 성령하나님도 그러 하시다면 아름다움이 무한하면 불러일으켜지는 사랑도 무한하겠어요? 무한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하나님 사이의 사랑이 무한 한 거요. 그래서 이사랑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사랑이에요……. 이해가죠. 왜 삼위이시지만 그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 하시지만 그 사랑은 하나님 밖의 그 무엇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거죠. 이것을 재귀적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거죠. 하나님 자신의 사랑은 재귀적인 사랑이에요. 하나님자신을 사랑하셔요. 그래 그 사랑이 무한 한 거예요.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착하고 그리고 아름답고 그러지도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아주 나쁘고 더러운 사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게 돼는 사람이 있어요. 응?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죠. 그게 뭐죠? 나한테 잘 해 주는 사람은 다 좋은 사람이에요. 응, 나한테 잘 해주는 사람은 다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나도 사랑하게 되요. 응! 어떤 사람이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게 되는 것을 목적적 사랑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저 사람은 아름답지 않은데 내가 사랑하는 이사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같이 없는 인간을 막 사랑해 주는 거요. 이것을 박애적 사랑이라고 해요 박애애라고 그래요. 그러면 삼위하나님이 하나님을 서로 사랑하시는 이 사람을 목적애일까? 박애애일까?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에요. 목적애일까? 박애애일까? 이 두 가지가 하나님 안에서는 구분이 안 되는 것이에요.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이 보실 때 비참 한데도 여기서 너무 넘치는 사랑이 있어서 성자하나님을 사랑 하신다면 성저하나님은 하나님으로써 결격이죠. 그렇죠? 그렇죠? 그런데 또 이런 문제가 나와요. 만약에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것이 성자하나님이 워낙 아름다우시기 때문이라는 이유 밖에 없다면 사랑하시는 성부하나님의 사랑이 결격이죠. 왜? 그건 한계가 있는 사랑 이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는 이 목적애와 박애애가 하나로 통일이 되는 거예요. 인간 속에서는 이것을 목적애와 박애애로 나누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깊이 감화되게 되면 은 이두가지가 다시 통일을 이루는 경험이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이런 거죠. 세상 사람이 다 나뿐 놈이 돼요. 다 죽일 놈 .쓰레기 같은 인간 . 난 너 싫어 다 침 뱉고 돌 던지면서 다 돌아섰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더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면 객관적으로는 아름다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도덕적이지도 않고 은혜도 모르고 욕망은 많고 죄만 짖고 악 가득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이 그를 너무 사랑해요 그게 뭐냐 하면 이 사람은 남이 못 본 그 무엇을 그 사람 안에서 발견한 거예요. 그게 뭐예요 .그게 뭐예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 거예요. 저 사람도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구나. 으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이 깊이 감화를 받으니까 남에게는 그 더러움과 죄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닮은 아름다운 형상이 포기하고 폐기 할 수없는 그 아름다운 사랑이 이 사람에게 보이는 거요. 잘 들어봐요. 그러면 그러면 어떤 위안을 보고 한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얼마나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 는 이 사랑의 깊이는 인간들의 많은 결점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안에 있는 그 아름다움을 발견 하는 능력에 달려 능력과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요. 다시 한 번 말할게요. 한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바로 그 모든 죄와 불결과 더러움 속에 묻혀버린 그 하나님의 형상을 얼마나 잘 발견하느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예기예요. 이해할 수 있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은혜가 떨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이 식으면 인간 다 못돼 보이는 거요 좋은 점 과 아름다운 것들이 발견이 안 되는 거요. 저인간은 저래서 쓰레기 같고 저인간은 저래서 갖다 버려야 되고 하나님은 왜 안 데려가시는 지 궁금하고 급기야는 그런 인간들하고 살아 있는 내가 너무 싫은 상태가 되는 거요. 응! 그게 결국은 그 사람들이 나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교통이 소멸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다시 은혜를 받으면 그 아름다운 것들이 보이는 거예요.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아름다운 부분이 있구나! 나에게는 없는 건데 . 저 사람은 저런 아름다움이 있는데 마치 쓰레기통에 피어나는 장미꽃과 같구나! 으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결국 인간 속에서도 이 두 가지가 통합되는 경험이 가능한 거요 이 땅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고향은 삼위일체하나님 이예요. 더하고 싶은데 진도 나가겠습니다. 그래 놓고 . 그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어요. 그러니 그것이 바로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이야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한 것을 보면 인간이 어떠한지를 알겠죠. 그렇죠. 마음이 반듯한 사람은 일도 반듯하게 해 놓아요. 마음이 반듯한 사람은 일도 반듯하게 해 놓아요.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똑 바른 인생의 길을 걸어가요. 마음이 찍으러 진 사람은 보는 것도 찍으러지고 일 해 놓은 것도 찍으러 져요.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이 해 놓은 모든 일 그가 만들어 놓은 시간 과 공간 세계 속에서의 모든 물건들 과 사업들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다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 아름다운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 하셨다면 아름답게 창조 하졌겠어요? 후지게 창조 하졌겠어요? 당연하죠. 하나님은 당신 자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거예요. 대개 어려운 질문인데 하나님은 왜 이름답게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어떻게? 하나님이 아름다우시니까 그런데 그걸 하나님의 운명이라고 하면. 썰렁 하잖아요. 하나님은 아름다우신분이니까 아름다운 것 밖에는 하실 수가 없었다 하나님 이 좀 덜 된 것을 아무리 하시고 싶어 애를 써도 그런 일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좀 그러잖아요. 그렇죠. 다른 대답이 있을 것 같죠? 그렇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무한하신 분고 무한하다는 것은 이런 한계가 없다는 뜻이 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말할 때 동그라미 쳐놓고 하나님 이렇게 쓰면 되죠. 그래서 불가능한 거죠. 하나은 그런 테두리가 없어요. 그럼 이 동그라미 쳐놓고 바깥은 하나님이 아니어야 되죠. 그건 있을 수가 없다 이거죠. 하나님은 무던무한 하신 분이예요 존재에 있어서 이런 태두리가 없으셔요. 이것 끝나고 이다음은 다음 공간이나 시간 속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 부분이 하나님에게 없으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게 하나님의 무한 성이예요 그것이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 영원성이란 말의예요. 그런 분은 하나님 이예요. 그렇게 무한하신 하나님이 예요 자 잘 들으세요. 그러니 그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세상은 모든 피조물들이 시간과 공간 속에 막 태어나는데 이게 하나님 안이에요? 하나님 밖이 예요? 이거 되게 심각한 질문 이예요. 그럼 다시 바꿔서 질문할게요. 자 하나님이 끝없이 무한하신 분이신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벗어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없고 결국은 그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움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이 그 모든 만물들을 통해서 당신 자신과 교통하기 때문이에요. 그니까 하나님이 무한하신 분이에요. 그 아름다움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생물들이 들어와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들어와 그럼 이것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 속에 담고 있어서 연결을 이루게 되는 거죠. 그게 이 우주에 찬란한 아름다움이 바로 그런 아름다움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별과 하늘의 달과 별과 이 모든 창조된 모든 세계 그 바람에 하늘거리는 풀잎들과 작은 꽃들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과 그리고 풀벌레 소리 광야를 휘두르는 바람과 세찬 파도소리와 들떠 오르는 구름과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바로 하나님 당신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거예요 근데 당신 자신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답고 또 당신이 그 모든 것들 속에 계셔야하기 때문에 아름답게 창조하신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간들도 그렇게 모든 자연적인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로 아름답게 몸을 창조하셨고 그 안에 영혼도 그런 질서를 잘 가지고 지켜서 아름다운 그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거예요 그 두 아름다움이 하나님 그 자신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타내어지는 그런 아름다움 이예요 그게 이 창조의 세계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계가 자연세계가 아주 아름답죠. 아주 아름답죠. 그래서 탁월하게 아름답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쇼. 눈을 조용히 감고 하나님이 홀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빛이 있어라 그리고 수많은 별들을 만드시고 태양과 그리고 물과 창공과 바다와 물에 다니는 고기와 공중을 나는 새와 풀과 나무와 꽃과 곤충과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만드신 거예요 그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하나님 위해 하나님 생각 안에 있던 의도를 훌륭하게 들어 낸 것 아닙니까? 훌륭하게 들어내겠죠! 그래서 정말 아름다운 세계가 되지 않았겠어요? 그때의 그 아름다움은 지금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는 거죠 지금은 인간들이 죄를 짓고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이 이 자연세계 영향을 미친것예요 자연계에 확 영향을 미친 거예요 그래서 가끔 질서를 어긋나는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요 그래서 사람을 섬기게 하기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짐승들이 사람을 물어서 죽여 그리고 사람의 통치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연계들이 성을 내서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파괴를 가져와요 이런 것들은 다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생긴 자연계의 불균형이라고요 불균형들. 또 원래 있는 그 세계가 지금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아름다운 세상이었죠. 근데 여기에서 이제 이 세계만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아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죄가 들어오기 전에 그러니까 올바르게 잘 볼 수 있는 거죠. 어떤 것을 올바르게 잘 볼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어떤 사물이 아무리 아름답게 존재한다하더라도 이 사람이 그 아름다운 것을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이 없거나 망가졌거나 무엇에 의해서 방해를 받고 있다면 이것은 아름다운 것을 올바르게 볼 수 없겠죠. 저 요새 굉장히 불편한 게 저 심리상태에도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난 이렇게 희미해요 모든 게 .안경을 써도 그래서 자꾸 모른 척 한다 그러는데 그 그게 모를 수밖에 없어요.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마당에 서서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 식으로 이름을 부르는 건 불가능해요. 누군지 구별이 안 돼요. 그래서 어떤 자매 이름을 계속 부르는데 대답을 안 해. 속으로 괘씸했는데 . 고개를 돌리고 앞에 다가왔는데 보니까 내가 부르던 그 사람이 아니야./ 딴 사람이 왔어. 하도 손짓을 하니까 온 거예요. 그 근데 이렇게 보니까 그러니까 아주 그렇게 선이, 어렸을 때 보았던 그런 세상을 좀 보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까 꼭 맹인이 하는 얘기 같네. 선이 또렷하고 파란 하늘 그리고 테두리가 선명한 구름 그리고 여러 겹으로 보이지 않는 도로 철길 그걸 보고 싶어요. 근데 거의 포기하고 그냥 살아요. 근데 생각을 해보세요.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아주 아름다운 상태로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저처럼 망가져 버렸으면 은 못 보거든요. 밖에도 사모님들이 와서 꽃을 많이 심었는데 지나가다가 저 꽃 예쁘지 하면은 꽃이 안 보여요 정말이 예요. 꽃이 안 보여요. 몇 번을 꽃 심은 거 봤냐. 길래 봤다고 그랬다고 그랬지만은 가까이 가서 보기 전엔 꽃을 더 심었는지 안 심었는지 안 보여요. 그런 그런 경우에는 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못 느낄 거안이에요. 그런데 이게 이중적인 문제가 생겨난 거예요. 이것도 저주를 받아서 아름다움을 상당 부분 상실했고 이것은 더 많이 상실한 거요. 그러니까 그 아름다움을 못 보는 거죠. 그런데도 그렇게 양쪽이 다 망가졌는데도 우리가 자연 속에 들어가면 숙연 해지는 거죠. 너무 아름답다! 너무 아름답다! 이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눈물 흘린 적이 있어요? 저는 그런 적이 있어요. 너무 아름다운 때는 너무 아름다운 광경을 볼 때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요. 아 이럴 때는 네. 네 계속 그래야지 그렇지 않아요. 그 증거가 정말 대볼까요. “여보 여기 너무 아름답다 우리 여기 살면 안 될까?” 그이얘기가 뭐에요. 그게 그 아름다움을 오래 붙들고 싶다 이 얘기예요. 이게 아름다움과 영원의 관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아름다움 건 시간을 초월 하는 거고 . 영원과 관계가 있 거요. 그러면 원래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음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노래를 짖었죠. “ 온 세상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자랄 수 있어요. 비오다 개이면 어여쁜 화초가 하늘에 뻗친 무지개 참 아름다워요.” 교회 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을 해야지만 겨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은 불우한 영성이에요. 음 그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찰난 했겠어요. 거의 압도 할 정도의 아름다움일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 아름다움을 보면 그 안에서 무엇이 생겨난다고 했어요. 사랑이 생겨나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것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니까 이 창조의 세계를 막 사랑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도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난 그런 사람을 연구대상이라고 생각 하는데 어떤 사람은 일평생 똥만 연구했어요. 그래서 똥의 아름다움. 그래서 여기서 전시회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65년 산 사람이 일평생동안 1년간의 똥을 하다고 치자이거요. 그 수많은 사람이 똥을 쌌는데 똑같은 똥은 하나도 없다는 거요. 각자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아름답다는 거요. 그래서 포스터가 뭐냐면 똥이 더럽다는 우리 생각에 오늘 똥집을 넣어주마! 응 그거 보다 조금은 나은 거죠. 어떤 사람은 고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어요. 그래서 고래 하나하나에 주민 번호를 부여 했어요. 고래에는 여기 그 무어가 부스럼처럼 난 것이 있어요. 그것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고 .그것 언제 다하겠습니까? 그렇게 빠져 사는 거예요. 그런데 잘 들어 봐요. 그런데 그 똥을 그렇게 연구하는 사람이 그 똥이 정말 아름답다는 사실을 깊이 심취하면 마지막에 누구를 발견해야 돼요? 그거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되고 마지막에는 인간을 창조하신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될 거 아니에요. 고래를 연구하면서 참 깊고 오묘하도다. 사랑스럽다고 발견하면 그다음에는 그것들을 아닌 누구를 더 사랑하게 대어야 돼요? 그것들을 내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끊어지고 하나님과 단절된 것 가운데 각기 존재하는 피조물들의 사랑으로 자기의 사랑을 바치는 이상한 현상들이 생겨나는 거죠. 그게 뭐 때문이 예요. 타락 때문에 생겨나는 거요. 타락 때문에 생겨나는 거요.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럴 가능성만 있었지 실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왜요? 너무 아름다운 그 창조세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이 더욱 아름다우시니까 그럴 수가 없는 거죠. 그럴 수가 없는 거죠. 이런 표현이 대게 이상할 줄 모르지만 어떤 사람이 마음이 너무 좋고 사랑이 많은데 불우해 보이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택배를 시켜서 돈을 벌게. 돈은 말이 안 되는 구나! 택배를 시켜서 아주 값진 물건들을 많이 보내서 자기를 가난에서 구해줬어요. 그때 그 밤길 그 비오는 길을 달려와서 그 오도바이를 타고 와서 자기에게 배달해준 택배의 손을 붙들고 비 오는데 얼마나 고생하셨어도. 정말 고마워요. 라고 말할 정도면 은 그걸 보낸 사람에 대한 감사는 어느 정도겠어요? 그런데 이게 비유를 하자면 택배 하는 사람에게 손을 붙들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정작 이것 보내준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게 된 거예요. 이게 죄가 들어온 다음에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생겨난 현상이 된 거죠. 그래서 오늘날 그럼 우리의 삶속에서 넉넉히 보여주는 것들 이예요. 예를 들자면 너무나 많죠. 하나님과 단절된 자식에 대한 사랑 하나님과 단절된 이성에 대한 사랑 하나님과 단절된 자기 인생의 목표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 무두 다 세상 사랑이에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이야기 했어요. 우리가 만약에 이 창조한 세계에서 어떤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아름다운 것들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왜냐하면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그것 때문에 네가 하나님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염려함이로다. 이 세상에서 어떤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면 우리는 그것 자체를 사랑하므로 사랑의 끈끈이에 달라붙는 것 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영혼은 죽음이다 이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지론이에요. 그래서 지난시간 마지막 설교할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이야기를 했죠. 응, “오르디. 나태 인명 가르다 땜”= 내 안에서 사랑을 질수 없게 해 주옵소서 . 감동적이니까 조금 더 말씀 드릴게요 글자 하나하나 똑 같지 않지만 대게 비슷해요. 그렇게 끈끈이에 달라붙도록 하지 말고 그것은 영혼의 죽음이니 하나님 안에서 그것을 사랑하자 누군가 내가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게 된다면 우린 이렇게 말하자 우리 모두 너와 나를 내신 우리하나님을 함께 사랑하자구나 그다음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아무것도 잃어버린 일이 없을 것이다. 여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밖갔에서 무엇을 사랑하게 될 때 영혼의 외도가 시작되나니 여기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이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 그것은 끈임 없이 소멸하고 변하고 사라지면서 사랑했던 우리를 고통 주는 거죠. 고통을 주는 거요. 사랑은 이 안에 남아 있는데 그 존재는 시간 속에서 사라져 버렸어요. 그래서 이승의 나루터에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니 그 사랑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창조물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이 그것을 보면서 놀라운 그 사랑을 보는 거요. 그때는 하나님이 성경을주시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주시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냥 모든 것들을 볼 때마다 땅에 구를 는 작은 돌멩이나 하늘에 있는 커다란 별들을 보면서 언제나 그 하나님에 놀라운 아름다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 발견하게 될 수록 그 누구를 사랑하게 되겠어요. 그럼 여러분들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거예요. 목사님 그러면 이상한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담은 타락을 했어요? 꼭 하고 싶은 질문이죠. 그죠. 그런데 그때에 지금 이 시간에 모두 논 할 수는 없지만 결론은 이러한 명백하게 비치는 아름다움 속에서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이런 모든 조건과 힘들을 물리치는 것이어야 했으니 아담이 죄짓고자 하는 것은 의지는 실로 초인적인 의지였다는 말 이예요. 왜 하나님같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거요. 자 그건 너무 길고 아주 복잡한 얘기에요. 자 넘어갑니다. 자 그럼 이제 오늘 요 마지막 부분인데 다 못할 겁니다. 다음에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심리적 경험과 사랑이에요. 이제 여기서 심리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뭔가를 아름답다고 불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어 아름답다고 어건 아름답고 하면 안목이 대단하시네요. 옷이면 옷에 대해서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다른 사람 보다 뛰어난 감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서 아우 안목이 뛰어나시군요. 라고 이야기 하죠. 물론 어! 남들이 다 벌려둔 땅을 사면 한 10년 뒤에 대박이 터졌더라. 그럴 때도 아 참 안목이 대단 하십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그건 또 다른 능력의 아름다움이겠죠. 그 다른 의미겠죠. 그것이 심미안이에요. 심미안이라고 말하는 거죠. 심미안 .그래서 심리학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어떤 사물들 속에서 다른 사람은 지나쳐 버리기 쉬운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그런 인간의 능력에 대한 이론과 학문을 가리켜서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러면 되죠. 심이라고 하는 것은 심사한다고 할 때 심자고 미는 아름 다답고 하는 거죠. 심리는요? 자 그러면 발견해 봅시다. 그러면 심미안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것인데 잘 들어 보세요. 그러면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건데 무어가 아름다운 것인지 인간이 어떻게 알길래. 그 아름다음을 구별해 낼까? 응! 모두 다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아주 갓난아이들도 두개의 물건을 갖다 놓으면 그중에서 어떤 것을 택해요. 두개에서 갖다 놓으면 그중에서 어떤 것을 택한다 이거요. 그러면 개 네들의 능력이 이렇게 시야가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이 어느 정도 발달대고 나면 그러면 각자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린 거죠 그러면 모든 아이들이 똑 같이 판단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인간에 마음속에 자기의 안목에서 볼 때 더 아름다운 것을 택하고자 하는 그런 본성을 누가 주셨을까? 어떤 물건을 보면서 예전에 본물건도 아닌데 이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어디서 오는 능력일까 라는 것이 궁금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연. 천성적으로 그런 것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도 그런 질문을 했죠. 사람은 모두 .상상력을 발휘하세요. 그림처럼 자 길이 있고 그다음에 길옆에는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거기에 오래 묵은 소나무들이 빽빽 하게 들어서 있고 그 소나무 사이사이로 끝이 없이 펼쳐지는 은모래 빛 백사장이 보이고 그 백사장이 끝나는 지점에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것 같은 물거품들이 일어나고 저 멀리에 쪽빛 바다에 찬란한 빛이 있고 그 위에 에메랄드 빛 하늘이 찬란하게 펼쳐지고 흰 구름이 아름답게 떠가고 하늘위에서 태양이 장열하면서 그 눈빛을 반사해요. 자 우리 모두 거기에 간 거예요. 그때 거기서 의견이 갈려요. 야, 아름답다. 지긋 지긋 하다. 더럽다. 토할 것 같다. 세상에 이것도 구경이라고 하냐. 이런 견해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안 나온다 이거요. 그러면 그런 것을 볼 때 모두다 예외 없이 야 정말 아름답다고 감탄할 수 있는 그것은 어디서 배웠냐 이거요 처음 온 해변인데 어디서 왔느냐? 우리의 고향에서 그런 기억을 다 가지고 온 거야. 우리고향은 어디? 영혼 하나님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온 거야 그것을 다 기억은 못하지만 그것들이 생각이 나는 거요. 아 아름답구나. 자 그러면 오늘의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물들이 존재해요. 존재하는데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게 될 때에는 이안에서 감정이 영향을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당연히 받죠. 감정이 영향을 받는가요. 자 그런데 어떤 것들이 아름답다고 하면 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전달이 되냐 하면은 이 감각을 통해서 전달이 되요. 시각을 통해서 혹은 촉각을 통해서 혹은 냄새를 통해서 이 가까이에서 똥내가 나면 빨리 치우겠죠. 이렇게 모든 것들을 놓고 본다. 그래서 이게 육관을 통해서 귀 코 입 눈 피부 이런 것들을 통해서 들어와요 그래서 들어오게 댈 때 이것이 여기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지성이지만 아 이게 참 좋다 이런 거는 우리의 의지와 관련이 되는 거예요. 명령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런데 어떤 것들이 있다. 이것을 있다. 딱 보는 순간에 우리의 심미안이 작동해서 아 예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안에서 출렁거리는 이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요. 이것을 정동이라고 저는 불러요 인간의 정이 동한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이게 동하는 거요. 동하는 거요. 제가 이 얘기를 왜하냐면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 예요. 맨 처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는 이런 정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창조 하신 거요. 그 아! 풀이 출렁이는 감동이 막 일어나는 거요. 그런데 일어나는 감동이 이 풀 자체에 묵인 출렁거림이 아니라 이것이 참 아름다워서 내 마음이 출렁거리게 하는데 이것을 지으신 사람이 즉시 영상이 되는 거죠. 왜 지성이 타락하지 않고 맑았기 때문에 이것을 본 순간 즉각적으로 이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여기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을 소급해 오가면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내려 온 거란 거죠. 그래서 이것들이 사다리가 되어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면서 감동을 받게 되는 거죠. 출렁거리는 거죠. 이일은 정동이 일어나는 거죠. 그럼 무슨 정동이 일어 나냐면 아름다움. 출렁거림이 일어나는 정동은 무슨 정동 이예요? 사랑의 정동이죠.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이 풀을 만드신 하나님! 하나님이 이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이 아름다운 나무들을 만드셨으니 하나님 자신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하나하나 뜯어서 보면서 이 사이의 이파리에 난 수많은 줄기와 여기에 나오는 만은 선들을 발견 하는 거요. 그것을 따라서 뿌리에서 뿜어 올린 빨아올린 양분들이 흩어져서 엽록소가 형성되고 잎을 형성하는 거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 섬세하심을 읽을 수 있는가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감동을 받는 거요. 그러니까 만물의 모든 것을 보아도 다 소리치면서 그 걸 보고 감동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모든 감동을 받는 대상의 감동을 주는 대상인 피조물들이 소리치는 거예요. 사람들아 나의 아름다움을 보고 너의 들이 찬탄하느냐! 사실은 나는 나를 지으신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희미한 투상일 뿐이다 그러니 나를 사랑 하지 말고 나를 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고 피조물이 소리 지르는 거요. 아! 아 다가오는 거요. 아! 가슴에 다가 오도록 아주 쉽게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줄게요. 얼마 전에 어버이 날이었어요. 우리 집사람이 그렇게 감동을 했어요. 우리아들 군대가 있잖아요. 특전사에 가있는데 얼마나 고달프겠어요. 그런데 그 성삼 그 뭐지 그것 잘 모르겠는데 응 .장뇌삼을 넣어서 달인 보약을 이렇게 한 박스를 해가지고 택배로 보냈어요. 그것월급 얼마 4만원 4만 7천인가 얼마 받는다는데 그것 어디서 돈 있어서 보냈겠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워낙 보약 그런 것 그렇게 썩 많이 내키지 않아하니까 그런데 우리 집사람 열심히 먹었어요. 그걸 볼 때 장뇌삼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게 뭐냐면 그것을 통해서 그것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느껴지는 거요.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그런 모상이 남아 있는 거죠.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모든 그 과정들을 사랑하게 된 과정들을 생각해 보세요. 허공중에서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어떤 증거들을 읽을 수가 있던 거죠. 지금은 이런 것 보면서 잘 못 읽어 그게 뭐냐 하면 취직을 시켜주셨다 든 지, 그럴싸한 형제에게 시집을 보내 주셨다 든 지, 나중에 눈물도 많이 흘리겠지만 일단은 좋잖아요. 세례복 입고 …….아니 웨딩드레스입고 결혼식도 하고 그러니까 좋잖아요. 그렇게 뭔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어떤 일들을 보면서 그 일이 너무 아름다운 건데 그것을 통해서 신앙의 눈으로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래서 심미학적인 입장에서 보다면 중생은 하나님의 아름다운을 발견하기거의 불가능한 눈을 열어주셔서 만물속의 묻어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해주시는 사건이 예요. 사건 이예요. 그러면서 이안에서 출렁거리는 정동이 일어나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이러한 정동이 같은 방향으로 계속 반복될 때 경향성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 경향성이 뭐냐면 사랑이라는 경향성이 예요. 자 자매가 지나가다가 좋은 형제. 멋있어 보이는 형제를 만났어. 멀리서 한번 봤어 키도 크고 배도 적당히 나오고 얼굴도 품위 있어 보이고 너무 좋은 거예요. 한마디로 뽕 하고 간 거요. 그때 출렁거리는 정동이 일어나요? 안 일어나요? 자매도 아니면서 뭘 대답을 해요. 자매들이 대답을 해 .출렁거리는 게 일어나요? 안 일어나요? 일어나죠. 그게 사랑인가? 그게 사랑일까? 그게 사랑 아니에요. 그러면 굉장히 중요한 얘기예요. 정말 중요한 이야기예요. 그거 뒤집어 봐요. 충격 받지 마세요. 그거 뒤집어 봐요. 하나님을 한번 얼핏 무슨 일을 통해서 든 지 그 흔적을 봤는데 그 출렁하고 정동이 일어나요. 사랑이 예요. 아니에요. 아까는 당연히 사랑이 아니에요 그러더니 지금은 왜 못해요? 사랑이 예요. 아니에요. 그것마저 빼면 나는 어떻게 되나. 그 얘기죠? 그게 벗겨져야 된다. 사랑 아닙니다. 사랑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제 혼란이 오겠죠. 도대체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신도중요한가. 매우 중요합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출렁하고 일어나는 잘 들으세요. 정동은 그 자체가 사랑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두가지점에서 중요한데 이런 정동이 일어나는 것이 사랑이 이미 있기 때문에 증거로써 일어나는 것일 수 있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두 번째 이러한 출렁거리는 정동이 사랑이 아니라 할지라도 반복해서 일어나는 그 정동의 반복이 경향성으로써의 사랑을 만들어 내는 거요. 사랑을 만들어내는 거요. 그런데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인간이 어떤 사물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것이 망각인 상태에서 나오는 오작동 일수가 있는 게 아니라 그게 대부분이라 이거죠. 중생하지 못 했을 때는 거의 대부분 100%고 그렇다 이거죠. 그러면 비록 오작동을 했었도 오해를 했다고 할지라도 아 이거 아름답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이안에서 출렁거리는 정동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죠? 그럼 사랑하게 되는 거죠. 그런 정동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많이 자주 일어나게 되면 지금 세상을 사랑하지 않지만 그것이 많이 일어나게 되면 결국은 세상을 사랑하게 되죠. 지금은 죄가 운데 있어서 하나님에 향한 엄청 사랑의 매임이 없지만 하나남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출렁거리는 정동이 일어나게 되면 이 자체의 경험을 가지고 당장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이것들의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 내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건 틀림없는 거예요. 그건 틀림없는 거예요. 그런데 신자의 경우에 무슨 문제가 생겼냐면 이런 게 지성과 관련이 있는 거죠. 하나님이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신 그거거든요. 이 그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열어 주신 거란 말이죠. 그런데 이 눈을 육신의 눈이 아니고 마음의 눈이고 영혼의 눈이야 그러면 이것은 영혼의 온전함과 온전한 상태에 의해 영향을 받는 거죠. 마찬가지죠 육체가 밥을 잘못 먹고 여기에 쥐 터지고 으더 맞고 퉁퉁 붓고 그러고 핏발이 서고 그러면 물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거 아니 예요. 영혼도 맑음을 일어버리고 영혼이 혼탁하고 더러워지게 되면 이것들을 올바로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죠. 무슨 뜻이냐면 은혜가 떨어져서 죄가 융성해도 이것을 보고 소라고 그러지는 않는다 이거요. 그래요 그러지 않는다 이거요. 성령 충만하다고 해서 이것을 천사로 보지 않는다 이거요. 성령 충만할 때도 이거는 풀이고 은혜가 떨어졌을 때도 이것은 풀이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안에서 이것을 인식하면서 일어나는 느낌이 죄 가운데서 있을 때 은혜가운데 있을 때 틀린 거요.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이것을 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 이 아름다운 것의 원주인이 대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더 클까? 글로 이것을 밟고 뛰어넘어 가는 거요.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고 죄 가운데 있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하나님에게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안 들고 여기에서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요.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요. 이게 무슨 이유 때문 이냐 면요. 잘 들어보세요. 좀 너무 깊이 들어가서 그런데 좀 더 들어보세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 속에서의 사랑이 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상 이것을 수단으로 사용해서 어디로 뛰어올라가지 않는 사랑이에요. 그렇죠? 하나님은 우리의 아름다움을 보시고 그 아름다움을 즐거워하시며 당신자신으로 돌아가는 거죠. 이것은 저는 자기 회귀적 사랑 이라고 하죠. 자기 회귀적 사랑 이예요. 그런데 이런 자기 회귀적 사랑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이 영원무궁한 세계 하늘과 땅에 오직 한분밖에는 없어요. 하나님에게만 이런 권한 있는가요. 인간은 이런 자기 회귀적 방법으로 사랑하면 영원히 파멸로 가는 거요. 그런데 은혜가 충만할 때 이게 정말 아름답구나! 그러고 이것을 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출렁거리면서 그러면 이 아름다운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시길래 그것을 약간 모양만 본떠서 만들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울까! 그러고 하나님께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거는 자기 회귀적 사랑이 아니라 영원 회귀적 사랑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글로 가버리는 거예요.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가버리는 거예요. 그것 누구를 사랑하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거요. 그런 것 끊어 버리고 이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고 자기 회귀적 사랑이 되는 거요. 이것 참 예쁘구나! 우리 집에 잔득 갖다 놓아야지! 끝이에요. 그래서 이것의 아름다음을 보고 사랑해서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거예요. 그래 돌아오는 거요. 인간을 풀로 비유했어요. 사람에다 비유해보고 이세상의 물질이나 모든 것들에 비유했어요. 이것이 바로 탐심 이것이 바로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이 탐심 은 곳 우상숭배라고 말한 정확한 의미라는 거죠. 신이 되는 거죠 자기 자신이 신이 되는 거죠. 이렇게 돌아오는 거죠.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죠. 돌아가야 되는 거죠. 그렇게 되는 거죠. 돌아와서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들을 사랑 하시고 모든 것들을 사랑하시고 사랑하는 인간이 이것들을 통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커다란 수레바퀴처럼 돌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부터 나서 그것이 인간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거요. 이렇게 안하려고 하면 하나님과 맞서야 되는 거요.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시작 되는 거요. 그러니까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인간이 행복해 지는 길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이 왜에는 없다고 하는 아주 추호도 회피할 수없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죠. 그런데 많이 남았습니다만 다음에 하기로 하고 그럼 여기서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향해서 너희는 나를 사랑하라 그러신다 이거요. 그런데 그게 너무 어려워요. 그것이 인간의 최대의 숙제 아닐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요. 하나님을 이 아니라 삶의 이유가 하나님이 되고 결국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그 사랑은 참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사닥다리가 되는 거요. 그래 우리의 인생은 모든 어려움은 그 사랑의 문제요 질서의 문제라 이거요. 응, 결국은 그 질서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가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영혼은 끊임없이 고통을 받게 되는 거죠. 그러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동태로 바꾸면 난 너에게 사랑받고 싶다. 난 너에게 사랑 받고 싶다. 난 너에게 사랑 받고 싶다. 그게 그 질문 속에서 그 명제 속에서 넌 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난 너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하는 하나님의 언명 그 속에서 인간은 참으로 누구인가 하는 것이 밝혀지는 거요. 조금 나선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만 은 실존주의 에서는 인간을 하이데거 같은 사람은 확 던져진 존재라고 봤어요. 이거는 물을 수가 없는 거요. 누가 먼저냐 이런 것 필요 없다 이거요. 중요한 거는 내가 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시간 고 공간속에 던져져 버린 존재다. 중요한 것은 뭐냐면 내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내가 본래 누구냐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이거요. 지금 내가 이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 이게 중요하다 이게 바로 저 유명한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 다라는 명제에요. 사르트르 같은 사람은 그런 애기했어요. 인간이란 존재는 쓸모없이 그냥 생겨난 잉여적인 존재다 이거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인간에게 무슨 목적은 인생에 무슨 목적이 있냐? 그냥 자기도 할 수 없이 왜 그랬는지도 모르데 던져졌기 때문에 이거는 무슨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의 고민은 결국 어디에 집중돼요. 그러면 이렇게 이미 존재해버린 의미와 가치도 없이 존재해 버린 나를 어떻게 이불안하고 이 흔들리는 나를 어떻게 진퇴 적으로 사랑할 것이냐 라고 하는 현실의 문제가 가장 화두로 떠오르게 돼는 거요. 그 속에서 그렇게 규정된 인간이 자기 갈 길을 찾아가겠어요. 이런 모든 사물들 속에 있는 이런 도덕적 나 자연적 질서 그런 다 말라빠진 그런 이야기 어디냐? 다 필요 없다 이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거요. 그래서 하나님하고 인간이 돌아가는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 보세요. 끊임없이 인간은 불안 해져요. 그게 아니다. 이거요. 뿐만 아니라 헤겔 같은 사람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커다란 조직책 속에 커다난 집단속에 한 개체 일뿐이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니까 무슨 얘기에요. 인간은 도대체 누구인가? 라고 하는 그 의미와 가치를 말해주지 못하는 거요. 가장 중요한 게 그래서 어떤 사람이 죽었대요. 그래가지고 죽은 사후의 세계로 갔대요. 누가 그러더래요. 너 누구냐? 저 한 미순 인대요. 네 이름 석 자 말고! 한 남편의 아내이고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나는 네 가족을 무른 게 아니고 너는 누구냐 말이다. 제가 그리스도인 이였고 어느 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다왔습니다. 나는 네 종교를 무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너 가 누구냐 이거야? 그러니까 이 사람이 나중에 막 소리를 지르면서 누구 제발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 있으면 좀 가리켜 달라 내가 도대체 누구냐? 다 쓸데없는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 오늘 결론을 얻는 거요. 인간이 누구인지 아무데가고 가르쳐 줄 수 없어요.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거요. 나 너테 사랑 받고 싶다. 그러니 너는 나를 사랑 해라! 만일에 사랑하지 않으면 뭔가 큰 벌을 내리실 것처럼 협박하시듯이 너는 나를 사랑하라 그 정도가 아니지 나를 사랑하라 나는 너에게 사랑 받고 싶다. 이것으로써 인간에 인간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어떤 식으로도 규정 될 수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여기서 명백하게 들어나게 되는 거요.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를 “너는 나를 사랑하라 ” 여기에서 우리 인간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여기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거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를 찾아보려는 인간은 미친 사람이에요. 마지막에는 정신병 마지막에는 그 생각을 포기하거나 끝까지 생각하면 정신병원에가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그릇된 곳에서 자기를 발견하거나 자기라고 착각하거나 한다 이거요. 누군가를 사랑 .거기에서 그게 얼마나 놀라운 초청인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너는 나를 사랑 해라. 그 초정을 한번 생각해보라이거요. 너는 나를 사랑하거라, 한번생각해 보세요. 응! 그 얼마나 놀라운 초청이에요. 나는 너에게 사랑 받고 싶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가 만족을 느낀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이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창조되었지만 그렇게 하나님께 명령을 받은 존재는 인간 하나밖에 없는 거요 인간에게만 하나님이 “넌 나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에게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넌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랑을 그런 하나님의 명령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아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나 왜 나 같은 인간한테 사랑받고 싶다고 하나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지 않은데 대게 부담이 된다. 이게 어둠속에 헤매는 사람이에요. 그 밖에서는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참다운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그래서 인간의 참다운 행복은 우리 밖에 펼쳐진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이것을 듣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는 출렁거리는 정동이 일어나서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화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이 하나님 자신에게도 회귀하는 길이에요.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이에요. 그게 그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은 상실대지 않아요. 그럼으로써 인간은 행복을 느끼는 거예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망가졌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아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수많은 것들.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 도덕적인 행동들 속에는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것들이 수없이 묻어 있어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이 세상에서는 환란과 고난 시련 그리고 괴로움이 많이 있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여기저기에서 지금도 그 아름다움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쏘다내어서 창조하시는 피조물들과 그리고 그것들을 보존하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작용 속에서 찬란한 눈부신 아름다움의 빛을 발견 하게 되요. 그리고 고백하는 거예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품어 주시나이까. 아 감사합니다. 가슴 벅찬 위대함 만물을 향해 소리치고 너희 중에 누가 하나님이 너희들 보고 그 분을 사랑하라고 명령받은 존재들이 있으면 한번 나와 봐라 이거야 적어도 나는 하나님이 나를 향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면서도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거야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다른 것은 조금씩 뿌려져 있는 데 그런데 엑기스가 뭉쳐져 있는 것이 있어요. 성경, 교회, 교리, 성도의 교제, 하나님이 세우신 성례 이 모든 것 속에는 그 아름다움이 한 번에 농축되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발견하려 하지 않고 희미한 것만 발견하려고 한다면 발견이 안 되는 거죠. 이것을 발견하면 아름다움의 흔적들이 막 발견이 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 같이 기도할 때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분으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지금 주님 예전에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우리 인생의 본질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하옵소서.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이번 시간에도 불러 주시 읍소서……. 전능하신 하나님 이 시간에도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자비하신 하나님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저희들을 불러 주였사오니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 사랑의 세습을 좇아 주님 앞에 우리를 사랑하라고 당신을 사랑하도록 불러주신 우리를 발견하고 주님을 감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세상과 저희의 깊은 더러운 것 우리에 대한 사랑과 우리의 욕망이 주장하는 모든 것을 그릇된 세습을 버리고 주님 그 창조의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옵소서. 우리의 삶 중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 속에 사랑이 좀 더 가득하도록 친히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7.창조와 하나님의 영광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게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시 108:4-5).
저는 지난 수요일까지 한 삼주에 걸쳐서 천지창조의 목적과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천지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말인가?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원래 구약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카보드”라는 단어인데 “카베드”라는 상태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무겁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명예나 이런 것들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무게가 있어 보일 때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이 영광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잠언에 보면 “백성이 많은 것이 왕의 영광이요” 그랬습니다. 똑같은 나라끼리 정상회담을 해도 미국대통령이나 아프가니스탄이나 아프리카에 있는 이름도 잘 모르는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할 때 둘이 나란히 앉았지만 아무도 똑같다고 봐주지 않습니다. 이유는 작은 나라의 대통령이 키가 더 크고 몸무게가 더 많이 나갈 수 있습니다. 옷도 더 비싼 것 입고 손에다 금팔찌를 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뒤에 있는 나라의 그 힘, 이런 것들이 배경이 되어서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영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본체적 영광입니다. 혹은 영광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진리 자체, 영원 자체, 아름다움 자체, 영광 자체, 사랑 자체 이렇게 불릴 수 있습니다. 뒤에 자체라는 말이 들어가는 이유는 사람은 내가 지니고 있는 금이나 혹은 값비싼 패물 때문에 영광스러워지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 상관없이 하나님 자신으로 영광스러워지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유가 있어서 사랑스러워지지만 하나님은 무엇에 영향을 받아서 사랑이 많으신 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에게는 진리 자체, 영원 자체, 사랑 자체, 영광 자체 이렇게 분리됩니다.
설교를 들을 때 좀 어렵게 들리는 단어를 처음에 들을 때 뜻을 정확하게 알아두면 그 다음에는 굉장히 쉽습니다. 왜 한 두 번씩 설교해야 할 말이 한 다섯 글자로 줄어드니까. 그게 바로 본체적 영광입니다.
두 번째는 발산적 영광입니다. 그 발산적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나타나는 영광의 효과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보면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도 특별히 당신의 임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을 때 거기에는 불기둥이나 구름기둥이나 아니면 빽빽한 구름이나 찬란한 빛이나 폭풍과 같은 바람소리나 세미한 음성이나 이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기억나시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가리켜서 발산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이 발산적 영광은 모세의 타지 않는 떨기나무속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불은 불인데 타오르는 불, 물질을 태우지 않는 불,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거기 임재하시기 때문에 나타나는 효과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면 반대편에는 안 계신가? 그러면 하나님일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어느 곳에 당신이 거기에 특별히 계시다는 증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발산적 영광입니다.
세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효과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반응적 영광으로도 부릅니다. 예를 들어서 제 멋대로 살던 못된 인간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교회에서 많이 받고 술을 끊고 정직하고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보다. 저 개망나니가 어떻게 변해서 저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하나님은 못 봤지만 하나님 만난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효과적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이 셋 중에서 어떤 것일까요? 몇 번째일까? 말해보십시오. 비도 오는데, 그렇습니다. 세 번째입니다. 열린 교회의 교인들은 어쩜 이렇게 똑똑한지 열 번 가르쳐주면 압니다. 세 번째입니다.
그러면 이제 왜 영광을 돌린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것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통해서 아! 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했지. 아! 너무 아름답다. 어떻게 저러지, 아! 저 사람이 변한 게 하나님 때문이구나.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을 돌린다고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돌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뜻입니다. 대게 여기까지만 하는데 비도 오니까 조금만 더하겠습니다. 한번 배우면 굉장히 쉽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나타날 세상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그럴 때는 하나 둘 세 개 중 어떤 것일까요? 어떤 것? 두 번째와 세 번째가 합쳐집니다. 그러면 첫 번째 영광 자체는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나라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하늘나라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찬란한 하나님 자신의 본체적 영광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지성은 감당할 수 없는 분량입니다.
저는 그런 것은 못하지만 한때 해보고는 싶었습니다. 겨울에 스키를 타고 가면 선글라스를 쓰고 갑니다. 눈에서 반사되는 그 빛이 결막염 같은 것의 원인이 되기에 꼭 쓰고 가야지 됩니다. 운전할 때도 여름에 광양이 풍부할 때 앞차 유리에 눈부시게 비추면 눈이 자꾸 망가집니다. 그래서 가벼운 선글라스 정도는 사람들이 쓰려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자신을 아무리 천국에 가서 온전해진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적당히 보여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물론이고, 그래서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너희가 내 영광을 보고는 살수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이게 영광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오늘 다 못할 것 같으니까 다음 주에 하고 오늘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리겠으니까 잘 이해하시면 신앙생활이 정말 비옥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이 세계를 보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서 시인이 “주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럴 때 그 영광은 바로 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영광을 합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 영광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 모든 것 안에 계신 효과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외워두셔야 합니다. 성부에 의해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 새 천지창조의 계획을 삼위 하나님이 모두 세우시는데 성부 하나님이 주로 관여하셔서 창조의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주관하십니다. 그것을 말씀이신 성자를 통해서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되는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나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시고 한편으로는 인간이셔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중보자가 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아오실 수 있도록 또한 중보자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이런 예수님이 중보자로서의 사역은 창조에도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아들에게 모든 만물을 맡기셨습니다.
세 번째는 성령 안에서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그 위를 운행하시더라.”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운행하시더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가 히브리말로 “메라헤패트”라는 단어인데 그렇게 많이 나오는 단어가 아닙니다. 운행한다고 그러면 우리들이 버스 운행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인덕원에서 호계동까지 가면 호계동으로 가면 인덕원에는 버스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오히려 그 말의 뜻은 성령께서 어미 닭처럼 날개를 죽 펴서 그 창조될 우주를 감싸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메라헤패트”라는 이 분사의 명사인 “라하프”는 “너풀거리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게 닭이 알을 품고 깨듯이 그렇게 이 우주보다 훨씬 크신 성령님이 그것을 감싸고 계신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감싸서 당신 안에 모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그 모든 것을 감싸서 있으심으로서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성령님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된 모든 것이 계속해서 핏줄처럼 성령님과 관련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성령님과 보다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니 이는 인간 안에 영혼이 있는데 그 영혼은 성령과는 다르지만 그 영이라는 점에서 그 둘을 서로 교통할 수 있는 자질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이 인간 안에 계시다고 그럴 때 이런 물건과 성령님의 함께 계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놓으신 모든 피조물들은 영적으로 다 연결이 되어서 모두 성령님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삼위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한 하나님 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들이 연결이 되는데 하나님 이외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모든 것들이 연결을 이룹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만물의 상호교통이라고 부릅니다.
이 교통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적인 교통과 도덕적인 교통입니다. 자연적인 교통은 여러분들이 자연을 많이 배우면 너무나 잘 압니다. 어떻게? 여기에 물을 부으면 흙이 물을 먹고 이 속에 있는 물질을 분해하면 뿌리가 그것을 빨아드립니다. 빨아들이면 그것들이 물과 함께 올라가서 나무속에 퍼져가면서 양분을 공급하고 줄기 가지가 뻗어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봄철에 아직 나무에 잎이 없을 때 이렇게 청진기를 대고 큰 나무에 귀를 기울이면 물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로쇠액이 바로 그런데서 꺼내는 것입니다. 나무에게는 굉장히 안 좋은 것입니다. 자기가 자라려고 올려 보내는데 중간에서 주사기를 꽂고 다 빼앗아가니 위에 있는 나무는 어떻게 하라고, 그게 고로쇠액입니다. 그래서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쭉 올라가면 열매가 맺히고 그러면 새들이 와서 먹습니다. 곤충이 와서 꽃가루를 나르는데 곤충은 나무끼리 접붙여주고 번식시킬 사명감으로 거기에 날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꿀을 따라서 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다니는 가운데 생식이 이루어지고 나무가 번성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가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하나 다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이 지구도 끝을 알 수 없는 드넓은 우주 속에 한 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주에 나가면 별의별 사물들이 다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우주 공간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입니다. 오직 수소분자 H 한 종류만 공간에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하나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어서 사실은 우주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그래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아무 것도 없는 그 속에서 그 찬란한 별들이 만들어집니다. 별들은 기체 덩어리에서 점점 식어지고 굳어지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폭발해서 별의 일생을 마치는데 그렇게 고체가 된 위성에는 수많은 물질들이 존재합니다.
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저는 개인적으로 천체의 물리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이 무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틀림이 없다는, 예전에도 성경을 읽으면서 확신을 했지만 그러나 그 공부를 하면서 더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로부터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다고 그러면 훨씬 더 엉터리 설명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있었던 것들은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천체물리학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줄 수 없지만 다시 무로 사라집니다. 없는 것으로 사라집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블랙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 자연에 있는 모든 것들에 교통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죄가 들어온 이후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해서 죄가 들어오자 이 세상은 인간도 저주를 받았지만 이 세상도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모든 것들이 그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연결을 이루고 있었던 아름다움이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게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광의 정체는 아름다움입니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합니다. 너무 아름다우면 눈이 부시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들으실 것입니다. 남들이 아! 눈이 부십니다. 저기 계신 분은 계속 고개를 끄덕이는데 눈이 부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아름다워서 그런 것입니다. 조금만 예쁘게 보이십시오. 눈부셔서 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찬란한 아름다움 그 자체가 사실은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연적인 것들이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연결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상호교통을 이루고 있는지는 이제 자연과학 쪽으로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런 것들이 아주 정교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때 이 사람 안에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사랑과 믿음이 있으면 그 지식 하나 하나가 이 사랑과 믿음을 실어 나르는 훌륭한 도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있는 그런 사랑이 이런 지식들이 늘어감으로 말미암아 이런 풀 한포기를 보면서 감탄합니다. 아! 놀랍구나.
(찬양)주 하나님 크시도다
그러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미생물부터 시작해서 저 하늘에 떠있는 지구의 수십 배, 수천 배가 되는 어마어마한 우주 공간의 천체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이 모두 성령 안에서 창조된 한 가족이기 때문에 핏줄처럼 연결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것들 사이사이에 전부다 전선처럼 연결이 되어서 그것으로 그 안에 삼위 하나님의 영광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 어렸을 때 보면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트리를 합니다. 그거야 크게 못하지만 시청 앞에 트리를 크게 해놓고 점등식을 합니다. 모두 모여서 스위치를 키면 불이 들어옵니다만 스위치를 안 켰을 때도 반짝반짝 들어옵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비추면 유리에서 반짝반짝 비춥니다. 그런데 전기가 들어오면 파랗고 빨갛고 노란 전구가 들어오고 그것이 반짝이면서 아주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해냅니다. 바로 그렇게 만물을 반짝이고 찬란하게 만들었던 것이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 물질들이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어느 정도씩, 그리고 그것들을 성령 안에서 창조하셔서 하나로 묶으셨기 때문에 이게 자연적 상호교통, 혹은 자연적 질서, 혹은 자연의 아름다움 이렇게 쉬운 말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풀이나 나무, 원래 이렇게 있는 물질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연적인 피조물들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 도덕적 피조물이라는 존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이 왜 도덕적 피조물인가 하면 자연이라는 말은 한자로 말하면 스스로 그러하다는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도덕이라는 것은 돈은 인간 밖에 있는 기준입니다. 선과 악 이런 것들을 판단하게 만드는 기준입니다. 이 사람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노란 사람이든 물건을 훔치는 것은 나쁜 것인데 똑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피부색깔이 어떻든지 간에 선하게 판다하는 기준이 인간에게 있어서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덕이라는 것은 영혼과 정신의 힘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힘입니다. 그래서 그 덕이 있는데 영혼이 강한 힘을 가지고 그 기준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영혼의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정신의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육체도 그렇게 따라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두 개를 합쳐서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준이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이 영혼과 정신의 올바른 힘이 덕입니다. 덕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사람들에게 퍼주기 좋아하는 그런 게 아니라 덕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 뜻대로 살아야지만 행복한 그 마음과 정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덕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사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아름다운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바로 그런 정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영혼과 정신, 마음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 필요한 게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그렇게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하나도 안 어려우실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쉽게 하는데, 그게 도덕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려면 스스로 자기가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책임도 집니다. 그런 것을 이 세상에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존재는 이 온 우주에 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천사들이 있지만 하나님 밖에 없는데 이 땅에 있는 인간을 당신 닮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연 하나님이 이 온 세상을 하나님 대신해서 다스릴 수 있도록 권한을 주셨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큰일을 맡겨보십시오. 본인도 죽을 노릇이지만 따라 하는 사람도 망합니다. 동장도 할까 말까 하는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면 모두 불행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그런데 새, 호랑이, 돌맹이, 소나무, 꾀꼬리, 바다의 싱싱한 횟감 이런 것들은 모두 자연적인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인 상호교통으로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주 복잡하고 독특합니다. 인간이 자연적인 피조물인가 도덕적 피조물인가? 이렇게 물어보면 당연히 도덕적 피조물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인간은 자연과는 상관이 없을까? 이렇게 쉬운 질문을, 있겠지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영혼만 있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고 안 부릅니다. 또 영혼이 없어지고 육체만 남았어도 사람이라고 안 부릅니다. 목숨이 딱 끊어지는 순간 명사가 바뀝니다. 사람에서 시체로 바뀝니다. 그래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있어야 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게 육체인데 육체는 자연의 질서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가 되면 개도 자고 돼지도 자지만 만약 안자면 그 다음날 자꾸 헛것이 보이고 눈껍풀이 내려가고 피곤하고 정신이 집중에 안 됩니다. 그것은 개나 닭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왜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까. 대표적인 것이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개도 때리려면 눈을 감으면서 피하는 것을 아십니까? 개는 멍하게 있다가 맞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피합니다. 돌맹이를 던져보십시오. 펄쩍 뛰면서 피합니다. 인간도 때리려고 이러면 피하려고 그러고 아니면 눈이라도 감으려고 합니다. 왜? 제일 상하기 쉬운 게 눈동자니까 그것이라도 건져보려고 굳게 감습니다. 그런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독특한 게 아니라 자연적인 피조물, 육체가 자연에 속해있기 때문에 자연에게 주신 짐승과 똑같은 본성과 작용들을 주신 것입니다. 개도 추으면 떱니다. 속담도 있습니다. “개 떨듯한다.”고, 떱니다. 더우면 헉헉 거리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복잡한 일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체에 있어서는 자연에 질서에 속했는데 영혼은 도덕적 질서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겹치는 것입니다. 이게 겹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이 세상을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겹치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하나님께 대들면서 악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제 여러분들의 마음에 말씀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느껴집니다. 아멘! 오늘 오신 분들은 탁월하게 이해력이 뛰어납니다. 제가 눈빛을 봅니다. 설교자를 뚫어버릴 것 같은 지혜의 눈빛을 보니 굉장합니다. 수요일마다 늘 그렇지만 아주 그런 눈빛이어서 이해가 잘 되는 눈빛입니다. 이제 잘 들어보십시오. 너무 재미있습니다.
개는 배가고프면 저기 살이 붙은 뼈다귀가 있습니다. 막 뛰어가서 먹습니다. 그리고 배가 부르면 뒷집개가 와서 먹어도 그냥 둡니다. 왜냐하면 자연적 본능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도덕적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가 고프면 개는 즉각적으로 뛰어가서 먹을 것은 먹는데 인간은 육체로서는 개와 똑같아 즉각 뛰어가 먹고 싶은데 참으면서 도덕이 명령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먹어도 됩니까? 저게 내 것이 맞습니까? 저거 먹고 다음날 경찰서 가는 것 아닙니까? 별 생각을 다하면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도덕이 먹어도 좋다. 그러면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명령하는 명령자가 정신이 어리버리해서 남의 것인데도 먹으라고 그러고 제 것이 아닌데 가지라고 그러면 그 사람이 경찰서를 부지런히 드나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개는 그렇게 먹고 끝났는데 인간은 먹어야 살아야 한다는 동물적인 욕망 때문에 이제 먹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이 속에서 머리를 굴리는 게 먹고 배부르면 되는데 이게 아니라 ‘저거 기왕에 맛있게 먹는 방법이 없을까? 저것을 그냥 먹지 말고 튀겨 먹어, 삶아 먹어, 볶아 먹어, 단 것을 넣을까, 신 것을 넣을까? 그러다가 기왕에 먹는 것 예쁜 그릇에 담아먹으면 안 될까? 모양을 예쁘게 하고 고기도 더 맛있는 고기가 없을까? 소를 새로운 방법으로 길러볼까? 오늘만 이렇게 먹으면 안 되지,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계속 먹고 싶은데 요것 가지고 될까? 더 벌어야지 되겠네.’ 이러면서 복잡한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동물들의 자기 사랑은 자신과 종족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국한되어있습니다. 세계 평화 위해서 싸우는 개를 보셨습니까? 한국 지키는 호랑이를 보셨습니까? 고등어가 동해안을 지킨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도덕적 판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사랑은 훨씬 더 고차원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동족을 보호하는 그 이상의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이 자연적인 질서 속에만 속하면 안 될 텐데 도덕적인 질서 속에도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여기서부터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이 안에서 두 개가 속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깊은 마음의 심령 속에서 작용을 일으키면서 나의 생각과 욕구, 행동, 의지, 결단을 만들어내면서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끔 만듭니다. 살면서도 내 뒤에 왜 이런 삶의 실이 명주실같이 거미줄 같이 뽑아져 나오는지 설명은 못합니다. 어떤 때는 이게 마음에 안 듭니다. 잘라내도 계속 나옵니다. 또 계속 뽑고 싶은데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모르면서 인간은 살아갑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래오래 장수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 가난한 이웃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 천신만고 끝에 애를 쓰면서 신방을 하고 설교를 하고 교회가 부흥이 안 되어서 괴로워하고 이런 사람이 오래 사는 게 아니고 누가 오래 사는가 하면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사람, 되도 괜찮고 말아도 괜찮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그렇게 슬금슬금 그렇게 사는 이런 사람들이 병도 안 걸리고 오래오래 삽니다. 장수합니다. 그런 장수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아주 극소수가 탁월한 신앙이나 탁월한 사상 때문에 스스로 변천하는 세상 속에 살지만 자신 속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만 그 사상과 신앙으로 눌러서 변천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극히 소수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보면 위대한 사상의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전부다 60세가 되기 전에 전부다 죽습니다. 대부분 죽습니다. 대보겠습니다. 대보나마나 무지하게 많습니다. 칼빈, 스펄전, 아우구스트니스,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윗필드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50대에 죽습니다. 누가 죽어도 가슴을 찢고 울어줄만한 관계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오래 사는 것입니다.
어떻든 그런데 인간이 이 속에서 복잡한 게 일어납니다. 거기에서 이제 인간이 그런 자연적인 것들은 하찮고 우습게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이 뛰어나다는 것은 이제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간다고 대답해보십시오. 여러분들 중에 아무리 고민이 많아도 고민이 없는 돼지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보십시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그랬습니다. 마음이 편한 돼지가 되기보다는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이런 영혼을 가지고 있고 도덕적 질서 속에도 속해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존재이기는 한데 문제는 그것 때문에 인간이 고달파지기 시작합니다. 왜 얼마나 간단한지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면 되는데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잠을 못잡니다. 먹어야 되는데 먹어야만 한다는 육체의 욕구와 넌 돈이 없으니까 먹으면 안 되고 참아야 된다고 하는 도덕의 욕구 사이에서 인간이 계속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것 때문에 인간은 노예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개나 돼지나 모든 것들은 그냥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일반적인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그냥 사는 것입니다. 하늘에 비만 내리고 먹을 것만 있으면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안 됩니다. 인간은 그냥 먹을 것 있고 그냥 비가 내리고 이런다고 해서 살 수 있는가 하면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영혼의 복잡성과 영혼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이 수많은 작용의 복잡성 때문에 인간은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외부로부터 오는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도 태어날 때 아주 운이 좋아서 법이 잘 되어있는 나라에서 태어나서 훌륭한 부모님 밑에 자라고 좋은 친구들과 교제하고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서 교육을 받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부모가 가르치는 것, 나라에서의 법이 똑같은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면 그래도 인간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부모님을 만났는데 그대로 하니까 학교에서 매일 꼴찌입니다. 좋은 스승을 만났는데 그대로 사니까 회사에 가서 매일 잘립니다. 법을 잘 지키면서 사니까 다른 사람에게 다 뜯어 먹힙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니까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고민이 계속됩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말씀드리는가 하면 이게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연적인 피조물들 사이에 희미해진 연결들이 다시 복원이 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퍼져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 빛을 드러내고 또 인간 안에서 인간과 인간들끼리 이런 연결을 맺고 있는데 영적인 연결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렇게 맺고 있으면 이렇게 잘 맺어서 성령님으로 묶어져서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스며들어갈 때 그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가십니까? 하나만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무릎을 칠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의 교인입니다. 그런데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잘 살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거의모두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럼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이니까 서로 사랑합니다. 없으면 물건을 서로 주고 서로 희생하고 서로 높이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종노릇합니다. 그러면서 사는데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막 스며들어갑니다. 이런 어려운 일이 있고 우리 식구 중에 누가 영적으로 죽어가고 그러면 모두 회심하지 못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살립니다. 사랑이 있으니까 그 속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집단이 열린 교회에 있다. 그런데 어느 집단이 세상에 있는데 이것은 눈만 뜨면 악다구니로 뜯고 싸우고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창문을 부수면서 다 훔쳐서 도망가고 내가 그런 동리에 한번 살아봤습니다. 철거민촌에 한번 살아봤는데 대단합니다. 우리도 철거를 해서 왔는데 그냥 어느 날 보따리를 싸서 새벽에 식구들이 다 갑니다. 그것도 먼저 가는 사람이 임자라고 그런 행정이 있는지 모릅니다. 가니까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갔는데 캄캄한 벌판으로 가는데 거기가 밭이었습니다. 거기에 하얀 줄을 8평씩 그어놓았습니다. 아무나 갖다 짐을 풀면 거기가 자기 땅이었습니다. 사는 것은 알아서 살라고 했습니다. 텐트를 치는 사람 벽돌을 쌓는 사람 그렇게 아우러지게 집 한 채를 짓는데 8만원인가 들여서 지었다고 하니까 우리 집 16평을 33만원을 주었는데 동리에서 부자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8만원 들여서 지어서 땅값까지 들여서 그때 15만원에 팔았습니다. 68년도 그 정도 되었으니까 4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동리가 급히 세워집니다. 그런데 경찰서에 가려면 30분을 걸어가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주먹이 센 사람이 왕입니다. 하루 저녁도 골목이 조용한 날이 없습니다. 부부가 싸워서 이년 저년 하면서 머리를 잡고 싸우는 소리가 안 들리면 저기서 누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도망가고 저쪽에서 칼을 들고 저놈의 자식 죽여 버려라 하고 쫒아가고, 그런 집단이 있다고 칩시다. 어떤 게 아름답습니까? 비교가 안 됩니다.
그게 바로 그런 것은 이렇게 자연적 피조물 속에 물이 잘 오르고 곤충들이 이용하고 하나님이 여기에 당신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는 그런 종류와는 종류가 다른 영광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두 개가 이 세상에서 함께 만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이런 도덕적 질서 안에서의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과 자연의 질서 안에서의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이런 인간들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영광이 중심이고 가장자리로 자연의 이 모든 것들이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자연 속에서 회복되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들 속에서 이렇게 회복되는 하나님의 영광이 틀린 것 같습니다. 이거 뭐 내 몸에 있는 질서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내 영혼하고 그런데 상관이 있습니다. 이게 이제 생물학 같은 것을 깊이 공부해보면 과학으로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나오는데 그게 우리 성경의 눈으로 보면 다 풀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식물학자들이 모두 다 얘기를 합니다. 나무를 잘라보면 나이를 알 수 있는 테가 나옵니다. 일 년에 하나가 되는 게 아닙니까? 그게 왜 하나가 되는지 아십니까? 일 년이니까 하나지. 일 년에 한 살씩 먹지 두 살씩 먹습니까? 그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여름에는 기온이 따뜻하고 뿌리가 충분한 양분을 공급하니까 쭉쭉 자랍니다. 그래서 나무가 자랍니다. 그런데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잎이 다 떨어지고 그 시기가 나무 자신이 자기를 보호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시간이 지났는데 그렇게 빨리 물을 빨아들이고 광합성 작용을 해서 다시 자기의 몸을 키우지 못합니다. 천천히 자랍니다. 빨리 자란 그 사이 사이에 천천히 자란 것들이 끼어있는 것입니다. 그게 나이테입니다. 일 년에 딱 하나 생기지 어떤 나무는 세 개나 네 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같은 땅에 같이 자랐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나무가 자랐으면 30년이 되었으면 하나의 나이테가 1 센티라고 하면 30년을 자랐으면 직경이 30센티가 되어야 하는데 밖에서 나무 크기만 보면 그 나무가 몇 년인가를 판단하지 못합니다.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왜냐하면 너무나 틀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게 그 땅에서 일어난 일과 이 나무의 나이테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그 땅에 큰 전쟁이 일어났다든지 온 마음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든지 아니면 큰 불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죽어갔다든지 그러면 이 나이테가 틀려집니다.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인간 안에 주신 도덕적인 질서와 자연적인 질서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놓고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봉헌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악한 길로 가면 재앙이 온다. 땅이 곡식을 내지 않고 하늘에 비가 그치고 그리고 풍재가 일어나고 깜부기의 재앙이 오고해서 결국은 이 나라가 황폐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잘 안 믿으면 복수하시는구나. 그것을 심판이라고 그러시는구나.’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잘되고 있는 것도 한 번에 확 없애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이 틀림없이 하나님의 심판 속에 있지만 동시에 땅과 사람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런 도덕적인 질서를 바르지 못하고 살 때 그때 이 자연적인 질서들도 함께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화분 두 개를 놓고 하나에게 참 예쁘다, 참 좋구나. 그러면서 사랑을 계속 주고 하나는 매일 한 번씩 때립니다. 진짜 죽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한번 설교 시간에 한번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의 신비, 물을 놓고 물에 써 붙입니다. 사랑, 평화, 예쁘구나. 죽일 놈, 넌 없어져야지 돼. 나쁜 자식, 이렇게 해서 영하 2도에서 결정을 형성할 때 몇 초 동안에 결정을 나타나는데 현미경으로 찍어보니까 물이 틀립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물이 있는데 굉장히 영혼의 힘이 올바르고 강한 사람이 이것들을 붙들고 있을 때 물의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뭘 얘기하고 싶은가 하면 인간이 자연 속에 속해있지만 또한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 두 개가 밀접하게 연결이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찬다고 할 때는 이 자연적 피조물들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도덕적 피조물들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 두 개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서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낼 때 그때 그 안에서 인간은 인간과 모든 만물들은 최고의 행복한 상태를 누리게 됩니다. 그 영광이 증진되면 증진될수록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은 행복을 더더욱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보면 가장 행복한 신자가 누군가 보십시오. 돈이 많은 신자.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자살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사람들, 그것을 기뻐하는 사람들,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나를 통해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에 감격하는 사람들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물질의 다과를 넘어서서, 젊고 늙음을 초월해서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받고 그것을 가지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사랑과 생명을 나누어주는 것은 이제 인간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는 이 자연까지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도록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도구로 불림을 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오직 인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은 바로 이렇게 창조의 목적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은혜를 받아야 하는가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멘!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뿐만 아니라 내 곁에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심지어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자연적인 피조물과 온 우주를 위해서도 이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 사람만이 창조의 목적을 위해서 살 수 있고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충만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교회에서 이 신자들 간에 아름다운 연합은 우주 속에서 회복될 장엄한 하나님의 나라의 그 영광스러움을 향하여 가는 처음 시작입니다. 아멘!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여기에 두셨을까! 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명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기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해야지 될 이유도 바로 회심하지 않으면 이렇게 끊어져있습니다. 그 인간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대학을 들어가고 돈을 많이 벌어도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육신을 위한 것이고 그것이 잘못 사용되면 자기의 영혼을 망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것이 그 사람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8.시간과 영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에는 천상의 세계를 이 땅에는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은 당신이 직접 통치하시며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시고 지상의 세계는 당신 닮은 인간을 창조하셔서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당신의 뜻대로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천상의 세계이든, 지상의 세계이든 창조된 모든 세계와 함께 시간이 도입됩니다. 창조된 사물이 있기 전에는 시간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존재하는 것이 있어야지만 시간이 도입이 되는데 그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일 경우에는 시간이 도입될 수 없으니 이는 하나님이 초시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영원하신 분이라고 찬송합니다. 성경에서는 특히 아주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며 또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품에 대해서 영원한 찬송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 표현도 사실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 아니라 영원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원에 대한 생각은 오직 둘 중의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끊임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환하는 영혼입니다. ‘윤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시간관입니다. 그래서 한자리를 계속 돈다고 해도 이것은 끝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 불교의 윤회론 자들입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세월의 흐름, 억겁이라고 말하는데 억겁이라고 하는 것은 천년의 한 번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일억 번을 뚫었으니까 그 시간의 길이는 무한합니다. 무한한 그것이 원적으로 계속 순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짐승으로 태어났던 존재가 어떤 때는 사람으로, 어떤 때는 식물로 하면서 빙빙 도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시간관이 직선적인 시간관입니다. 시작도 없이 계속되어서 끝나는 지점도 없이 달려가는 시간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시간관은 이런 직선적인 시간관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틀렸습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직선적 시간관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반만 맞은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만 시간은 직선이고 역사 이전으로 가게 되면 그것은 결코 시간이 직선이라고 말할 수 없는 독특한 시간 세계를 가집니다. 그것은 초시간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영원하시다고 하는 그 표현은 영원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시간 속에 있는 존재들이 그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데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시간 속에 모셔다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묘사하면서 그 하나님은 영원하다고 노래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원은 그런 점에서 본체적인 영원과 효과적인 영원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본체적인 영원은 그 자체가 영원이라는 것입니다. 영원 자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원 자체는 곧 진리 자체, 선, 자체 아름다움 자체와 같이 그 영원 자체는 곧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그것이 영원 자체입니다. 그 하나님 자신이 바로 영원이십니다. 그래서 이 영원은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입니다. 그 영원 안에는 시간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있고 또 동시에 아무 것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영원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것들 가운데 이 세상에 태어난 것들이 없을 것이고 또 태어난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 그 형태와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그대로 존재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안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있고 동시에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 영원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아주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존재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시간이라고 하는 그 자체는 무엇에 의해서도 파악이 되지 않고 사물들에 의해서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물들에 의해서 파악이 되는 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과 사물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영원하시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조금 어렵더라도 이 설명을 귀담아서 잘 들어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시간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는 존재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존재라고 하는 것은 시간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편의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과거는 미래에 있는 시간이 끊임없이 달려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가 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현재를 거쳐 과거가 된다고 하는 이 순간 앞에 이야기하는 시간들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한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 문장 안에는 이미 이야기 되어진 과거와 지금 언급되고 있는 현재와 그 이어서 나올 말의 미래가 함께 공존하면서 시간 속에서 단어의 의미들이 연결이 되어서 내용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현재라고 하는 그것이 두께를 잴 수 없을 정도의 아주 얇은 시간입니다. 무한소의 얇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방막의 현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방막과 같은 현재에서 과거로 지나갑니다. 그러면 과거 속으로 지나가버리고 나면 과거에 존재했던 것은 지금 누릴 수가 없습니다. 아직 현재에 도달하지 못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시간 안에서 누리는 것은 과거도 누리지 못하고 미래도 누리지 못하며 오직 누리는 것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방막의 현재만을 누릴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매일매일 만나는 내가 낯설지 않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렇게 방막의 현재만을 누리면 매일매일 만나는 내가 낯설어야 하는데 그런데 낯설지 않은데 그 이유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현재는 사라져 가는데 사라져가는 것이 그냥 사라져가지 않고 많은 기억들을 남기면서 사라지게 때문에 그 기억들의 연결을 지어서 내가 오늘 방막의 현재 속을 살아가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면서도 내가 낯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아, 너무 행복합니다. 다른데 가서 이야기를 하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기억들을 이 속에서 만들어내면서 마치 오늘 이 현재가 방막의 현재를 누리고 지나가는데도 이상하게 과거에 있는 모든 존재를 내가 함께 누리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 안에 기억이라는 세계를 만들이 않았다면 인간은 매순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낯선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놀라운 영혼에 기억이라는 기능을 주셔서 자신을 향해 낯설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면 인간을 비롯한 어떤 사물이 매순간 방막의 현재를 누리면서 지나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과거와 현재, 미래 이런 것들이 당신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바라보시면서 그 사물 전체를 누리시는 것입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그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는 감추어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지하심입니다. 모든 시간을 초월해서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데도 어떤 사물을 모르는 것은 오직 두 가지의 장난 때문입니다. 공간의 장난, 그리고 시간의 장난입니다. 우리가 눈만 망가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물을 못보고 있는 것은 기둥 뒤에 숨었을 때는 공간의 이동 때문에 우리가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 만약에 여기 있었던 어름덩어리를 내가 어제는 볼 수 있었는데 오늘은 볼 수 없는 것은 시간이 이것을 모두 녹여버리고 시간 속에서 수증기로 모두 증발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남은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그것을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물에 대해서 원인과 결과를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모든 것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이해의 부족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 중에 아무도 자기의 죽을 날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해놓으셨습니다. 그게 바로 영원 자체이신 본체적 영원이십니다.
그 다음에 이제 효과적 영원입니다. 하나님만 영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아니지만 영원한 것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도덕적인 가치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 제일은 사랑이니라. 사랑, 공평, 정의, 이런 우리들이 만져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그런 도덕적인 내용들, 이런 것들도 영원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다. 그럴 때 그것은 아주 틀립니다. 돌맹이가 있다 하는 것과, 물이 있다 하는 것과, 수증기가 있다 하는 것과, 민주주의가 있다 하는 이것은 틀립니다. 그런데 모두 다 있다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랑, 공평, 정의, 우정, 박애, 선, 아름다움 이런 것들도 영원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인 것 말고 아주 실제로 크기와 모양을 가진 것들 중에도 영원한 것들이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영화 후에 있게 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 이것은 분명히 만질 수도 있는 몸입니다. 그러나 공간 안에는 묶이지 않는 몸입니다.
또 하늘나라에는 천사를 비롯한 많은 하늘나라는 하늘나라의 나름대로 사물이 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생명수 강가와 그 다음에 생명나무, 실과들, 그 다음에 천사들의 합창소리, 노랫소리, 그 다음에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사용되는 성도들의 기도를 담은 향로, 뭐 이런 영원한 세계 속에 여러 가지 사물들이 나옵니다. 그런 사물들도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것은 그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이 덕을 입혀주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영향을 받는 그 덕으로 말미암아서 영원해진 사물들입니다.
이 땅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뭐가 있을까? 이 땅에 영원한 것,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들, 그게 무엇일까요? 대답해보십시오. 빛, 빛이 영원할까요? 태양도 몇 십 억년이 지나가면 없어진다고 합니다. 다 타서, 그러니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혼, 이것은 영원합니다. 그런데 영혼이 영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이 영원이 존재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지 하나님이 관계를 끊어버리면 그것은 영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제 하나님과 비교해볼 때 무시무정하신 분입니다. 처음도 없고 동시에 끝도 없으신 영원이시지만 이런 영원한 것들, 이것은 끝은 없지만 시작은 있는 즉 유시무종한 존재들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유시무종한 영원한 사람들과 천사, 그리고 영원한 가치, 그리고 영원한 사물들로 가득 차 있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시간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자신 있게 말해보십시오. 틀리면 어떻습니까. 회개할 것도 아닌데, 자, 하늘나라에는 시간이 있을까, 없을까? 제가 이래서 여러분들이 교리공부를 안 하는 것이 이제 다 들통이 납니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면 과거가 아무리 달려가도 과거일 수가 없고 미래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미래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현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누구밖에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교리를 가르쳐줄 때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 성부 홀로 계셨는데 성부에게서 성자가 낳으시고 또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님이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간단한 생각에 아하!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한 세 시기로 나누어질 수 있겠구나. 처음 시기는 성부만이 계시던 시기, 두 번째는 성부와 성자가 계시던 시기, 마지막 세 번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던 시기, 이렇게 말하면 된다고 그랬습니까, 안 된다고 그랬습니까? 그것은 이미 벌써 시간을 가지고 들어와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는 영원 안에서는 선후의 순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명제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성부 홀로 계셨고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님이 나오셨지만 성부 없이 성자 홀로 계신 때도 없었고 성령 없이 성부 혼자 계시던 때도 없었고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존재에 있어서 시간의 앞뒤 순서를 다툴 수 없이 영원부터 함께 계셨다. 이게 삼위일체의 교리입니다. 여기에서 어긋나는 것은 다 이단입니다. 옛날 같으면 다 화형 당했습니다. 요즘 마음이 좋아서 살려주지만,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제 없으면 집에 가서 회개해야 합니다. 교리공부를 열심히 못한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르는데도 용기가 있었던 것도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럼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도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 뭐라고 시작했습니까? 천상세계와 지상세계를 창조하심으로 하나님이 시간을 도입하셨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 어떻게 이 창조 세계에 도입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만 하나님에게는 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세계가 하나님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영광을 이 세계 안에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뭐가 부족해서 창조한 것이 아닌가? 또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전에는 그때 무슨 일을 하고 계셨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주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하는 것을 제가 몇 주 전 설교에서 상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창조의 목적 첫 번째 설교에서, 다시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두 종류의 사물들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눈으로 현미경으로 보는 것을 포함해서 육안으로 혹은 육관으로 관측할 수 있는 그런 사물들, 가시적 사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눈으로 손으로는 만져질 수 없지만 그러나 마음속으로 있는 지성으로 사유해볼 때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물들,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우선 가시적인 사물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가시적인 사물들입니다. 인간의 눈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파악이 되는 사물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시간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방법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상실해가면서 비로소 시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반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아닙니다. 왜, 예를 들자면 수정 같은 것들은 시간이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형성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없어지는 것을 통해서 시간이 관측되는 것이 아니라 생겨나는 것을 통해서 시간이 관측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지혜롭게 반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조금 지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 이 꽃만 보더라도 목사님의 이아기가 틀렸다는 것이 입증이 됩니다. 왜냐하면 저 꽃이 어제는 봉오리였는데 이제 시간이 지나니까 활짝 피니까 완전해지면서 결국은 시간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러니 시간이 어떻게 자기를 허물면서 존재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단히 현명한 반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사물을 어느 한 구간 안에서 봤기 때문에 그런 결론에 이루게 됩니다. 사물 전체를 놓고 볼 때는 그럴 수 없습니다. 수정이 한없이 커갑니까? 그렇다면 온 세상이 수정으로 뒤덮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더 이상 수정이 형성되어지지 않으며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고 하지만 다이아몬드가 없는 때도 있었고 그 다이아몬드도 타오르는 연탄불에 집어넣으면 기체가 되어서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니 시간 속에서 주변의 여건이 변하면 얼마든지 자기를 소실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 긴 시간의 길이를 놓고 보면 존재하는 그 모든 사물들은 시간 안에서 점점 변천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상실해감으로서 시간의 존재를 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고등학교 동창생 한사람을 만났습니다. 30년이 훨씬 넘었는데 처음으로 전화를 해서 날 만나러오겠고 하니까 무슨 일이겠어요. 목소리를 들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안다. 이리 와라. 그래서 와서 차를 한잔 마시면서 인생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곤궁하게 산다고 그래서 이제 좀 보태어주어 보냈습니다. 이렇게 얼굴을 보니까 이제 50대의 실직자입니다. 그 얼굴 형태는 고등학교 때 시커먼 모자 눌러쓰고 경쾌하게 다니던 그 틀이 그냥 있는데 얼굴이 완전성에서 멀어져서 턱도 튀어나오고 이빨도 썩고 초로의 할아버지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을 통해서 아, 시간이 흘렀구나.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부패입니다. 그래서 가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 세상에 모든 사물들은 다 부패합니다. 이 부패가 무엇인가 하면 채소 같은 것을 보면 썩습니다. 파란 채소였는데 갑자기 변하면서 액체로 변해서 물이 줄줄 흐릅니다. 그러면서 사라지면서 기체로 변하면서 점점 없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아무 것도 안 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부패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존재하는 것들 속에 비존재가 침투하는 것입니다. 난 그렇게 정의를 합니다. 그러면서 존재를 허물어가는 것입니다. 그 허물어가는 것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이런 것을 하나씩 둘씩 이렇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아는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10년의 세월을 생각하니까 그게 어제 있었던 일같이 느껴집니다. 나는 내 얼굴을 못 보니까. 거울로 보니까 익숙해져서 10년 전하고 지금하고 비교가 안 되어집니다. 그런데 10년 전의 사진을 갖다놓고 보니까 정말 낯설게 보입니다. 몇 달 전에 제가 93년에 교회 개척하던 사진을 보았습니다. 웬 젊은인지, 어쩜 슬림하고 경쾌하고 자신만만하고 배도 덜 나오고 볼도 덜 늘어지고 설교를 한번 들어봤더니 목소리는 누구를 잡아먹을 듯 카랑카랑하게 어디 가서 기 하나 꺾이지 않을 것 같은 진리는 혼자 다 아는 것처럼 카랑카랑합니다. 힘들 텐데 좀 쉬엄쉬엄하지, 속사포처럼 쏘아댑니다. 그것을 보면서 시간이 지났구나. 왜? 그때 카랑카랑하던 목소리가 지금은 사라지고 속사포처럼 쏘아대던 그것을 이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패기만만하던 그런 정신도 지금은 별로 없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비존재에 의해서 침투를 당해서 깎여져나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시간이 흘렀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원래 크림을 안 바르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안 바르는 사람입니다. 진짜 생 얼굴로 다녔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출판실에서 목사님, 사진 찍으로 갑시다. 웬 사진인가, 하도 신문사에서 사진을 달라고 그리고 책에도 써야지 되는데 제대로 된 사진이 없으니까 날을 잡아 하루 가서 사진을 찍읍시다. 그래서 이제 사진사 한분을 모셔서 차를 타고 제비울 미술관, 남한산성에 가서 온갖 폼을 잡으면서 미래에 어디 쓸지도 모르는 사진을 한 200장 찍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4일 만에 그분이 아주 현상기술이 좋으신 분입니다. 그 일을 계기로 해서 우리 교회에 교인도 되셨는데 그런데 찍어 왔는데 경치도 너무 잘 찍으셔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진을 받고 나서 시험에 들었는데 그것은 동의할 수 없는 내 얼굴입니다. 정말 이게 누군가? 그것을 보면서 아, 세월이 흘렀구나. 그때부터 크림을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시간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됩니다.
여러분들도 보면 왜 같은 친구였는데 푹 늙은 사람을 보면 아, 세월이 흘렀구나. 또 옛날에 쓰던 물건들 같은 것이 많이 망가지고 변한 것을 보면서 아, 세월이 흘렀구나, 또 요만한 나무를 어렸을 때 심었는데 자란 것을 보면서 아, 이게 세월이 흘렀구나.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가시적인 사물에 있어서는 자기를 허물어가면서 그러면서 시간이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 자체로서는 파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트니스가 무엇이라고 그랬는가 하면 시간, 그러면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은데 그것을 말해보라고 그러면 정신이 혼돈스러워집니다.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시간이 파악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들은 시간 안에서 예전에 존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그리고 잠시 후에 존재할 것과도 또 다른 존재로 존재하면서 자기를 잃어버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늘나라에 있는 사물들, 거기에서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함께 썩지 않을 우리의 몸을 덧입을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셔서 하늘나라에 두신 그 영광스러운 많은 사물들, 그 하늘나라를 이 허공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장소입니다. 그런 공간과 시간 안에 존재하는 하늘나라에서는 그러면 시간이 어떻게 파악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아까 정의하기를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가 스스로 허물어져가면서 잠시 전과도 다른 존재이고 다가올 시간과도 다른 존재로 있음으로서 시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이 그것을 덧입히셔서 영원한 사물로 만드셨으니까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쇠퇴하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보니까 한 천 년 전에 하늘나라에 온 사람은 수염이 발끝까지 내려오고 얼굴은 다 쭈글해서 눈코 입이 구별이 안 되고 방금 천국에 온 사람은 팽팽하고 그런 나라가 된다면 사실 그 나라에서도 화장품이 필요하고 성형수술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우리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의 외모나 이런 것들이 아름답지 못해서 스트레스 받는 사람도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거기에 가면 모두 찬란한 아름다움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볼 때 끊임없이 마음이 끌리는 그런 아주 완성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압구정동에서 판에서 찍어낸 것 같은 그런 종류의 판박이 미인이 아니라 똑같은 자들이 하나도 없는데도 모두가 다 최고의 아름다움이어서 천사들도 미인대회를 하면 순위를 매길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그 아름다움이라는 본질 자체가 완전성에 있다고 여러분들에게 누차 가르쳤는데 그러면 존재의 소식이라면 완전성이 점점 깎여져 나가는 것인데 그러면 지금은 아름답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아름다움이 사라져가게 됩니다. 사라져 가게 된 것만큼 그 사람의 존재는 추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막의 한 시대를 장식했던 저명한 여배우들은 어느 한순간에 있더니 툭 하고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전혀 안 나타납니다. 그 안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가하면 어리고 젊었을 때 팬들의 가슴에 찍힌 그 청순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후에 완전성을 잃고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덮기 싫어서 그래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영원히 가슴속에 생생하게 남는 것입니다.
전쟁과 평화, 로마의 휴일 이런데서 나왔던 사람 가운데 오드린지 가드린지 그 햇번이란 여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랬습니다. 절대 안 나타났습니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한 7-80대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구조를 호소하는 모델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이제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상실한 것은 자연적 아름다움이고 다시 가지고 나타난 것은 도덕적 아름다움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어떻든지 간에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시간이 있는데도 그렇게 안 없어진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첫째는 가만히 있는 것, 가만히 있으면 절대로 변하지 않게 소실되지 않으면 그러면 그것은 시간에 의해서 깎여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또 시간을 관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서는 시간을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가 하면 형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상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마모의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깎여져나갑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계속해서 채워짐으로 존재합니다.
자, 이제 이 부분이 영원에 관한 개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몇 분만 더 설명하겠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이 썩지 않을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분명히 육신을 입은 채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육신은 여기에 있는 육신과 다릅니다. 시간이 지나면 늙고 썩고 도가니도 망가지고 하는 그런 써금써금한 육신이 아닙니다. 시간 속에서도 완전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그런 육신, 그러면서도 아주 쉽게 말하면 시간이 지나가면서 자꾸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거기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 하면 아,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무상하구나. 무상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상하다. 덧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지금 얼굴이 예쁘다고 자랑하고 생 얼굴로 다니고 그래도 그러지마, 나도 48살까지 생 얼굴로 다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금방 그 아름다움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의 육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 육신을 가지고 있고 공간도 있고 이런 모든 물질들도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영원도 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인간을 예를 들자면 시간 속에서 인간이 마모되어지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영혼의 측면에서도 깎여나가는 자기를 잃어버리는 일들이 없어야 할 것이고 육체에 있어서도 자기를 잃어버리고 깎여져나가는 일들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렇게 깎여져나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방법이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계속해서 생겨나면 됩니다. 시간 속에서 잃어버려도 계속 생겨나면 될 것입니다. 여기에 물이 이렇게 있는데 물이 계속 샙니다. 그런데 새는 것만큼 똑같은 분량이 계속 부어집니다. 그러면 여기 이렇게 계속 찰랑찰랑 넘칠 것입니다. 그러면 형식상으로 보면 아무 운동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보면 물이 꽉 차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러나 사실상 보면 여기는 끊임없이 빠져나가는데 동시에 끊임없이 샘솟듯이 부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그대로 꽉 찬 물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이 변함이 없다고 할 때는 그 안에 반드시 생명의 작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작용이 없으면 그 안에서 계속 무한하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커다란 기둥과 같은 나무토막 하나를 산에다 갖다 꼽아놓았다면 그게 몇 백 년이나 가겠습니까? 아마 흔적도 없이 모두 썩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나무를 꽂았는데 그게 생명이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면 그거 몇 백 년, 몇 천 년이 가도 오히려 더 큰 나무가 됩니다.
제가 작년에 미국에 가서 생애 최초로 3200년 된 나무를 봤습니다. 세쾌아 원목인데 살아있습니다. 그게 크기가 얼마나 되는가 하면 12사람이 손을 잡아야지만 그 나무를 에워쌀 수 있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가장 넓은 곳이 뚝 잘랐을 때 직경이 12미터입니다. 가장 가느다란 둥지를 잘랐을 때 직경이 8미터입니다. 직경이 12미터이면 한 40명 내지 50명이 둘러앉아서 수건돌리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이입니다. 그런데 아직 얼마나 더 살지 아무도 모릅니다. 생생합니다. 지금도 생생한 이파리가 그냥 계속 쏟아져 나옵니다. 3200년이 지났는데, 생명이라는 것이 그래서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 아주 중요한 결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인간의 육체가 하늘나라에서 시간은 있지만 마모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영혼이 있는데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고 하늘나라에서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끊임없는 생명을 부어주셔서 그것들을 계속 살아있게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시간 속에서 인간의 영혼에 질들이 자꾸 나빠지기도 합니다. 나쁜 짓을 하고 악한 경향성이 생겨나면 인간의 영혼의 질이 나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도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셔서 그것을 계속 존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영적인 참 하나님의 생명까지 들어간 사람은 신자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반적인 생명만을 넣어주시기 때문에 영혼이 멸절되지 않고 계속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똑같이 이런 것은 자연인데 이런 피부, 이런 것은 자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연적인 것들에도 하나님이 영원의 효과를 덧입히시고 특별히 인간의 이 정신세계에도 하나님이 영원에 효과를 덧입히신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할까요, 안 행복할까요? 그러면 이 땅에서는 언제 여러분들이 행복한지 물어봅시다. 자, 권사님, 언제 행복하십니까? 그러니까 불신자들도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정도의 행복을 이야기해보십시오. 언제 행복합니까? 별로 없어서 잘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십시오. 또 그 옆에, 언제 행복합니까?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주 맛있는 요리를 예쁜 음식점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먹을 때 행복합니까, 안 행복합니까? 기분 좋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면 기분 좋습니다. 그 다음에 아주 깨끗한 집에서 잠을 잘 때 기분 좋습니다. 새 차를 샀을 때 기분 좋습니다. 아주 시원한 생수를 목말랐을 때 먹을 때 기분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늘나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지 않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행복은 어디서 오는 행복입니까?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행복이니까 이렇게 육신의 감각기관을 사용해서 먹고 여기서 미각을 느끼면서 짝 번져가는 음식물의 맛있는 맛, 뭐 이런 것, 그리고 아까 정욕대로 무엇을 행했을 때 쾌락을 채우고 이런 것들은 하늘나라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그 행복은 육체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아주 완전을 유지한 상태에서 아름답고 조화로운 상태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지만 그 행복의 주안점은 영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인간의 영혼은 언제 행복합니까? 인간의 심령이 참 행복할 때가 언제입니까? 뭐 맛있는 음식을 잔뜩 봤을 때, 그것은 영혼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만났을 때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까?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성령님이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지식들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을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의 영혼과 온 마음 안에 느끼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 아주 큰 기쁨과 행복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그런 하나님 때문에 맛보는 기쁨이 계속 증가하겠습니까,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니면 감소하겠습니까? 감소할 리는 없겠지요. 그것은 말이 안 되고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싫증이라는 것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도 싫증이 있습니까? 그럼 나는 묻습니다. 왜 없지요?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거기는 죄도 없고 완전한 곳이니까요. 그럼 제가 묻습니다. 그럼 아담은 완전하지 않았나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무슨 결함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아름다운 세계를 보면서 맨 처음 자신도 창조되어 눈을 뜨고 온 세계를 보고 감탄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한없이 감탄하면서 하나님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찬양)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런데 왜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까? 그 자리에 그 모든 사물들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증진하는 기쁨이 있었더라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싫증을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도 똑같이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금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의 의심에 쐐기를 박아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상세하게 보고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성경의 부분적인 기록들을 미루어보면 천사들의 타락이 있었습니다. 천사들의 타락은 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된 후에 그 천사들이 그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왕권에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도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천사들의 나라는 완전한 나라가 아니었을까요? 왜 천사들이 도전했을까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늘나라에도 여전히 싫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도입되는 그 영원한 천국에서는 이런 싫증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상태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어떤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 자신이 무한하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로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이것은 이미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있는 것들 성경이나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이 존재하게 하시는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안에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을 인간들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 발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 지식이 증가하고, 잘 들으십시오. 인간의 지식이 점차 증가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잘 알게 되는데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성령이 없이 인간이 지식만을 계속해서 열어간다면 결코 이 세계가 참 신비하고 놀랍다고 하는 것은 깨닫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인간들이 발견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지식과 함께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런 모든 지식들을 가장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지식의 엑기스만을 모아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지식의 엑기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시며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엑기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한 분이시며 그 선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 엑기스만을 모아놓은 것이 성경책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을 제쳐놓고 다른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탁월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이런 것들을 알 수 있지만 이게 핵심이지만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해서 인간을 구원해내는데 충분하지만 이것들을 알면서 이것보다는 그 아름다움의 진리의 농도가 더 덜하기는 하지만 흩어져있는 모든 세계와 학문들 속에 있는 그 진리들을 함께 알고 이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눈에는 이 온 세계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꽉 찬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해야지만 겨우 찬송이 나왔는데 이제 이런 것을 알게 되면 들에 핀 백합, 공중에 나는 새, 이런 것들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위대한 그리고 살아계셔서 지금도 당신의 사랑과 생명을 끊임없이 이 세계 속에 흘려보내어주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영성이 더 훌륭한 영성입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출발은 여기서부터, 그래서 그것들을 깊이 사랑하면서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어도 항상 그것을 휘돌고 그 핵심은 한권의 책, 그것이 항상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 한권의 책의 중심에 더 중심에 있는 그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진리들을 이 밖의 세계에서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깨닫고 또 하나님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파악하면 파악할수록 제대로 파악했으면 그리스도 예수가 점점 더 아주 탁월하고 아름답고 존귀하게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이 중심이시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부지런히 성경을 탐구하고 그리고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알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그리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 설교, 그리고 기독교적인 작품들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그 지식의 빛과 함께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속에 기쁨과 행복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눈을 꽉 채우면서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계에 있는 사물들은 눈을 꽉 채우면서 다가옵니다. 가난할 때는 이 세상에 있는 돈과 물질들, 건강이 부족할 때는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들, 이런 모든 사물들에 대한 유혹들이 확 밀려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의 빛이 성령으로 역사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을 불러일으킬 때 우리는 그렇게 물밀 듯이 밀려오는 아주 명백한 외관을 가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 대신에 전혀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있어서 사람들이 저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행복할 것이라고 할 때 이 사람은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고통과 시련 밖에 없기 때문에 저 사람은 슬프고 괴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야. 그런 환란의 때에도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소유함으로서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해서 기도가 되고 한숨이 변해서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한시적인 이 세상에서 이 모든 환란과 시련을 이기면서 나아가는 그 위대한 힘이 이 세계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찬양)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잠시 머무는 이 끊임없이 변천하는 이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에 잇대어서 거기에 내 삶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이 세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그리고 만져지고 볼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제공되는 유한한 것들보다는 무한한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이런 계시의 덩어리인 성경, 그리고 이 자연 속에 가득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보여주실 때 인간은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져있고 그리고 또 지식이 없어서 무지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리 눈을 씻고 들여다보아도 거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안에 욕망과 더러운 욕심들이 가득차서 그 영원의 세계를 생각하는데 있어서는 이 더러운 욕망이나 이런 것들이 아주 독약입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캄캄한 밤에 시커먼 선글라스를 쓰고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 안에 있기 때문에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눈멂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끊임없이 보여주셔도 그것을 못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제 이메일에 상담이 많이 들어옵니다. 대부분 제가 답장을 안 합니다만 어떤 것을 보면 너무 쉽고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여태껏 설교한 게 많습니다. 그런데 교인들도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나는 답변이 퉁명스럽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를 들어보십시오. 툭, 그리고 끝냅니다. 들어보면 다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안 듣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는 그렇게 괴로운데 거기에 답이 있다고 하는데도 안 듣습니다. 그러다 만약에 내가 돈이 많이 필요한데 어디에 가면 돈이 묻혀있다고 그러면 달려갈까요, 안 달려갈까요? 달려갑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인간의 영혼이 어둡기 때문에 고통하면서도 진리를 찾는 수고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뭔가 자기는 가만히 이렇게 있으면서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결해주어도 해결도 안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기 인생의 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테입까지 다 사서 포장해서 택배로 보내줍니다. 그러도 나서 다시 답장이 안 오는 사람은 백 프로 안 들은 사람입니다. 들은 사람은 답변이 옵니다. 교회에서 뭐 어쩌고, 저쩌고 막 그러는데 그럴 때 목자와 양의 테입을 한번 들어보라고 하면서 한 일주일 뒤에 만나서 질문 있습니까? 하면 없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안 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그런 것들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그런 죄의 영향들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서는 진리를 막 사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여기서는 보여주셔도 보여주시는 것의 반은 보고 본 것 중의 반은 이해를 하고 반은 이해를 못합니다. 이해하는 것 중의 반은 적용을 하고 반은 내버려두고, 그렇게 하는데 그 나라에서는 보여주면 성도들이 모두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진리의 빛을 고대하면서 그 진리의 빛이 비추면 전율하듯이 행복해합니다. 그 다음날 비추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새로운 차원의 진리의 빛입니다. 그 다음날은 또 다른 차원의 빛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나중에 천국에 간 성도들이 높은 수준의 지식 속에서 살겠네요. 맞습니다. 나중에 갈수록 수준 높은 천국의 지식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는 것이 갑자기 초급반도 안 하고 올라가서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해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잘 들어보십시오. 환란과 시련의 물결이 막 요동치고 내 육체는 끊임없는 시간 속에서 부패를 경험하면서 나 자신은 소멸되어갑니다. 아름다운 용모도 사라져가고 내가 누렸던 지위들도 낮아지고 높아지고 재물도 있었다, 없었다. 변천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다 삶의 양태입니다. 기껏해야 유효기간이 80년 밖에 안 됩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50 용모평등, 60 학력평등, 80 경제평등, 어차피 서금서금해서 아무 것도 못 갑니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입니다. 까막까막하기는 서울대를 나왔으나 중학교를 나왔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변장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니까 얼굴이 예쁘게 생기나 못 생기나 50이 넘으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변장술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들의 유효기간이 다 80년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봅니다.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지식 속에 늘 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그런 분이셨구나. 아, 정말 나는 지난 날 얼마나 무지하게 살았나. 막 소리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선한 분이시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렇게 탁월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이 이렇게 놀랍고 아름답단다. 그렇게 소리친 사람들이 시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시편에 보면 오버 충만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민들아 나오너라. 열방아 노래할지어다. 혼자서는 못하는 것입니다. 오보하는 게 아니라 이 속에서 꽉 찬 영원한 아름다움에 대한 그 감격들이 막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또 내일 깨달은 말씀은 이전에 것은 차원이 안 되는 새로운 말씀이고 또 다음날 깨달은 것은 그 전에 깨달은 것과 비교도 안 됩니다. 예전에 내가 그것도 신앙생활이라고 또 나도 뭔가 아는 것처럼 교리책을 펴놓고 사람들에게 한수 가르쳐주겠다고 왼쪽 무릎위에 올려났었지. 아, 이것은 정말 내가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그래서 옛날에 내 모습에 얼굴이 붉어집니다. 또 새로운 것을 깨닫습니다. 너무너무 깨닫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기쁨이 성경을 통해서 확 밀려옵니다. 이 사람은 이 땅에서 이미 천국을 미리 당겨서 맛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이 선장하시는 삶입니다.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라. 그래서 이것이 바로 본향을 향하여 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지혜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소원이고 우리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시시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살 때 기껏 해 봐야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인데 오르고 나면 시기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목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작았을 때는 아무도 목사가 좀 굉장히 높은 목사님이 되면 수많은 사람의 표적이 됩니다. 사업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멍가게나 하고 주위에 신경 안 쓰게 할 때는 쳐다 도 안 보다가 사업이나 크게 하고 높이 되면 막 조사하러 다니는 사람도 많고 고자질하는 사람도 많고 신정화라는 사람도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어렵게 그렇게 교수로 들어갔으면 가만히 있었으면 괜찮았을 것인데 왜 그렇게 높아져서 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가만두겠습니까. 지방대학에 가서 가만히 살면 누가 뭐라고 시비를 걸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높아지니까 그 사람처럼 못 되는 사람들이 막 하니까 한방에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높아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또 우리처럼 돈이 없는 사람들은 세계 경제 동향에 대해서 그렇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농협 쌀로 먹고 살았고 오늘도 먹고 사는데 무슨 미국에 금융시장이 출렁거린다고 해서 농협 쌀 먹다가 수입쌀 먹겠습니까? 그렇게 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돈이 있는 사람은 매순간 신문에 앞부터 보는 것이 아니라 중간부터 보면서 오늘의 주가동향을 보면서 하루에 몇 번씩 가슴이 철렁철렁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행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가지지 못할 때 그것을 얻기 위해서 불안하고 이미 그것을 성취해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잃어버릴지도 모를 염려 때문에 불안해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결국은 소유한다고 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모두 다 우리의 영혼에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도 우리의 영혼에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요즘에서야 초야에 묻히고 싶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갑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하는 것들, 가지지 못한 채 욕망을 가지고 높아지지 못해서 괴로운데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는 그 자리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모두 다 영혼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기쁨을 얻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그렇게 안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아는가. 잠시 지나는 모든 것들이 다 시간 속에 사라져가는 것들 속에 사라져가는 한 존재로서 이 땅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자신을 들여다보아도 허무하고 10년 만에 나타나서 팍 늙은 내 친구를 봐도 불쌍하고 태어난 아이들을 봐도 곧 그렇게 팍삭 할 것을 생각하니 불쌍하고 이미 팍삭한 사람은 잃어버린 것 때문에 불쌍하고 그러니 이 세상에 뭐 그렇게 영원한 기쁨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 것을 찾는 것 자체는 화장실에서 다이아몬드를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에 것을 사모하라. 그래서 하늘나라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늘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끊임없이 그 빛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전율할 것같이, 여러분, 말씀을 들으면서 전율할 것 같은 행복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꽤 있는데. 전율할 것 같이 온 몸에 살갗이 다 일어나는 것 같은 이때는 자매나 이런 것 없습니다. 육체, 환경 이런 것을 다 초월합니다. 그런 경험 오래 된 것 하나만 내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항상 옛날 것을 말하면 겸손해보이고 최근 것을 이야기하면 교만해보입니다. 아주 옛날 것을 이야기하겠습니다. 1989년도의 일이었습니다.
(예화: 1989년도에 경험한 일- 단칸방에 세 식구가 살던 때 감기 기운으로 몸이 안 좋아 잠이 들지 않아 성경의 누가복음을 읽는데 말씀이 막 살아서 움직이는 경험으로 온 몸이 전율하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세계가 열리며 형용할 수 없는 색깔과 빛이 드러나면서 자신과 세계의 부패를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러 가는 광경, 하나님을 떠난 도성 속에 잠들어있는 교회를 생각하며 한참을 우시며 기도하시다 그때의 깨달은 바를 적고 나니 어느 덧 아침이 되었다는 내용)
이 세상에서 그런 경험들이 우리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든다면 그 하늘 날에서 매일매일 하나님이 뭔가 보여주실 때 그거 뭐 다 아는 것, 그저 하나님이 내가 천국까지 왔는데 사람을 어떻게 보시고 수준을, 그런 지식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찬란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면서 온 몸이 전율하였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매 순간마다 탄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보여주시면 언젠가는 다 보여주셨을 것인데 끝이 있을까? 왜냐하면 하나님이 무한하신 분이시니까. 하나님이 무한하시다고 하는 것은 진리도 무한하고 영원도 무한하고 아름다움도 무한하고 선함도 무한하고 힘과 능력도 무한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찬란한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환란과 시련, 우리의 믿음을 뒤흔들어놓고자 하는 이 세상의 핍박과 고난,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정욕과 죄악들, 그리고 우리에게 밀려오는 우리는 원하지 않는 그 감당할 수 없이 밀려오는 이 세상의 모든 시련과 환란, 이런 것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그것은 바로 이런 영원하게 누릴 수 있는 그런 신령한 진리의 기쁨들을 이 속에서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든 가치를 우리는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 안에서 즐거워하고 진리 안에서 행복해하는 거기에 우리의 인생에 참된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진정한 행복과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사람들이 그런 진리를 아는 일이 전문적인 목회자만 해야 하는 일이고 우리는 예배만 참석해서 그렇게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쇼하는 것만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들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만난 사람들이나 보면서 사는 것이지 자기 자신은 그것을 누리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더 혼란스러운 것은 이 세상에서 그런 즐거움들은 제켜두고 이 세상에서 만족을 누리고 육체를 즐겁게 하는 복을 하나님 믿는 것을 수단으로 해서 이 세상에서 한번 얻어 보겠다고 이것을 신앙의 선두에다 세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혼란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찬란한 기쁨 속에서 증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어제와는 다르게 새롭게 보여 지는 하나님의지식과 성경의 역사로 말미암아서 죄가 있어서 죄에서 거룩해져가지는 않지만 거기서는 죄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 진리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그 지혜와 지식의 빛이 더 찬란하게 비췸으로서 인간의 영혼은 행복해져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가만히 있는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 것입니다. 꽃이 활짝 폈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움이 이런 자연적 사물들에 조차도 그 아름다움이 더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계속해서 증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꽃이 이렇게 피어가면서 아름다움이 증진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생명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뚝 꺾어서 버리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름답지만 저것은 추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게도 당신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끊임없이 흘려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를 가득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 물질 세계도 하나님이 그런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 많은 세상에서 굴러다니는 돌맹이와 하늘나라에 있는 돌맹이는 다릅니다. 돌맹이라는 본질은 차이가 없지만 거기서는 그 아름다움이 그것과 다릅니다. 그래서 그런 찬란한 아름다움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바로 그런 영원을 사랑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트니스가 나의 영혼이여, 나의님이여, 나의 사랑이시여 라고 말했습니다. 영원 자체가 당신의 그리운 님이며, 그리고 당신의 그리운 진리며, 당신의 그리운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영원을 찾아가는 삶입니다. 진리를 통해서 자신이 그 진리의 세계에 깊이 합치시키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영원 안에 계신 분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시간 속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붙은 이런 끊임없는 속된 헛된 욕심과 가리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유한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의 대한 끊임없는 미움과 정죄, 이런 것들에 발목 잡힌 상태에서는 그 영혼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이 영혼에게는 끊임없는 고통이요 시련입니다. 그러나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혼으로부터 오는 은혜, 그 지식의 빛을 바라보면서 하늘을 향해 하나님 앞에 날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9.아름다운 두 질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19:1-4).
내 목숨을 근데 두 번의 두 번째 뜻을 설명하면 결국 더 충격 받을 꺼 에요. 그 뜻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냐면은 비아노야 라는 시 라고도 하는데 이성 이예요. 이성 이성. 그래서 직역을 하면 너희 마음과 이성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격 아녜요? 알지도 못하는 너희 하나님께 목숨을 드릴수가 있어요? 물론 알아도 하나님께 목숨을 안 바칠 수도 있어요. 근데 모르고 목숨을 바친다면은 그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열심히 알아야 그것이 일평생의 의미야. 그래서 신자가 되는 그 순간, 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학교의 학생으로 입학하는 거야. 그 손수건을 달고 코찔찔 흘리는 학생으로 입학을 하는 거야 그래서 처음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1학년 삼반 명찰 달고..요즘 수건 안 달고 다니죠? 우리 땐 왜 이렇게 코를 많이 흘렸는지…….그래서 수건을 항상 달고다녀. 이 수건으로 닦아서 수건이 하얀색하고 노란색하고 이렇게 응…….돼 있는 그 수건을. 그 땐 그렇게 우스워 보이지만 한 십 한 오년정도 공부를 하면 이제 의젓한 대학생이 되는 거야. 그래서 세상의 이치들을 잘 깨달아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오늘 성경을 우리가 읽어보니까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전하니 어느 것도 들리는 소리가 없으나…….그러면서 뭔가 통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봤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은 낮은…….여기서 날은 낮이 예요. 낮은 또 낮에게 말해요. 밤은 또 이어오는 밤을 향해 말해요. 근데 거기에는 어떤 들리는 소리도 없어요. 그리고 어느 누구도 없어요! 그런데 무엇인가 서로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는 거예요. 이게, 이게 바로 우주의 신비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에 그건 누구 머리에서 나왔어요? 그렇죠? 하나님 마음에서 나왔죠.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생각에서 나와서 그래서 이 세상을 완전하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어요. 그런데 창조된 이 세상은 아름다워요? 안 아름다워요? 정말 아름답죠. 지금은 죄가 들어와서 우리 눈도 희미해지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아름다움도 많이 흐려졌어요. 아주 많이 흐려졌어요. 그래서 이 이거 이 정도의 아름다움은 아무것도 아녜요. 그런데 본래는 이런 것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아름다움을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이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그 아름다운 게 왜 아름다울까? 그죠? 아름답기 위해선 반드시 그것이 복수여야 해요. 그래야지 아름다운 거예요. 복수여야지만. 왜냐하면 그것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어..질서..그니깐 그것의 아름다움의 정체는 완전성인데 그게 질서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게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거예요. 이 꽃이 만약에 한쪽만 있다고 하면은 두 쪽 있는 것보다 아름다울까요. 덜 아름다울까요? 예? 덜 아름답죠. 왜 그러죠? 이 두개가 있어서 두개의 균형을 이루어주는 거예요. 이 누가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닌데 인간 안에 이런 감각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쁜 거죠. 그렇게 저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질서예요. 그런데 이 질서가 이제 시인이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하고 할 때에 이 낮과 낮, 밤과 밤 이거는 자연대 자연이에요. 낮, 낮에는 단순히 추상명사로서의 낮이 아니라 낮이 되면 찬란한 햇빛 속에 수많은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겠지? 우리가 태양은 직접 안 보지만 태양의 빛을 받아서 예쁜 나무, 풀 꽃, 파란 풀밭, 그리고 에메랄드빛 하늘, 솜털 같은 구름... 응? 그 다음에 흘러가는 시냇물, 바람에 나부끼는 미루나무의 잎사귀의 반짝임들, 잔디밭에 뿌려진 보석같이 영롱하게 빛나는 아침의 이슬방울들...이런 것들이... 낮은 그것들을 보여주잖아요. 그죠? 그.. 그...빛이 있는 낮, 그 안에서 그 사물들이 서로 아주 미묘한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뿐만 이 아니죠. 자. 자 그 날이 그날이 시간을 두고 다른 날과 연관을 맺는다고 생각해봐요. 그러면 봄에 열린 교회 마당에 들어서면 은행잎도 새순이 돋고, 단풍나무도 새순이 돋고 잔디밭에서도 새순이 돋으면서 파스텔 톤으로 어린 잎사귀들이 자라나기 시작해요. 근데 가을날이 되면 단풍잎이 물들기 시작해요. 은행잎은 노랗게, 단풍잎은 빨갛게 물들기 시작해요. 그리고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어요. 그럼 그걸 보면서 우리가 봄날에 보았던 그 파스텔 톤, 여름에 보았던 그 짙은 초록빛의 녹음, 지금 가을에 보고 있는 이 단풍이 물든 아름다운 광경들을 서로 연결 할 때 그때에 그 말들 안에서 사물들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변하는 광경을 볼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근데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의미를 전달해준 다는 거죠. 응? 의미를 전달해 준다는 거예요. 예? 그래서, 잘 들으세요. 눈에 보이는 아, 예쁜 나무, 아, 예쁜 들판, 이거는 자연적 질서고, 이게 무슨 의미를 전달해 줄때 아, 그렇구나! 아, 그렇구나 하고 감탄하게 하는 의미는 도덕적 질서예요. 좀 더 상세히 설명할 테니까. 하나도 안 어려워요. 음, 하나도 안 어려워요. 젖 먹을 힘을 다해서 내가 쉽게 설명을 하고 있는 중이예요.(청중 웃음)그게 자연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예요. 그래서 들어보세요. 어…….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눈에도 나무는 나무로 보이고 불신자의 눈에도 나무는 나무로 보여요. 신자의 눈에는 나무가 나무로 보이고 불신자의 눈에는 그게 뭐, 도끼로 보인다든지 도넛으로 보이는 게 아니란 말이죠. 모두 똑같이 그렇게 눈에 들어와요. 그런데 그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아, 그 뜻이 그런 뜻이었구나, 야ㅡ 정말 아름답다 이렇게 감탄을 하기 위해서는 나무에 빛이 비쳐야 되는 게 아니라 이 머릿속에 빛이 비쳐야 되요. 그 빛이 뭐냐 하면은 진리의 빛이야. 그래서 진리의 빛이 인간의 지상 안에 있으면 나무와, 들과, 풀과, 아름다운 자연들을 볼 때에 눈으로 이렇게 볼 때에, 들어온 그 것이 마음에 비추어져요. 불신자도 야, 이 산 너무 예쁘다 야, 이 계곡 너무 좋다, 야, 진짜 이 바닷가 정말 예쁘구나, 야, 여기서 몇 달 살다갔으면 좋겠다. 불신자도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근데 그거는 자연적 질서의 아름다움만 보고 감탄을 하는 거예요. 그 이상으로 못가는 거예요. 그것은 이 안에 진리의 빛이 많이 없어도, 그 정도는 인간이 어느 정도 알 수 있어요. 그것도 인간마다 차이가 나요. 응? 그렇게 감탄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이고, 여기 펑퍼짐하고 좋네, 삼겹살이나 굽자 이, 이런 사람도 있다 이거예요. 그거는 ..그.. 그걸 느끼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 정도가 틀려요. 그런데 신자안에는 신자안에 참 진리의 빛이 지성을 환하게 비추고 있을 때에는 그 풀 아래, 나무 아래 풀밭 ,풀밭 위에 꽃들, 꽃 위에 푸른 하늘, 푸른 하늘 한가운데 구름, 그 구름 사이를 스쳐지나가는 아름다운 바람소리, 이런 것들을 보면서 그 사물 하나하나가 질서를 가지고 있어서 아, 예쁘다 그러는 동시에 그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질서의 의미를 이 진리는 깨닫게 해주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깨닫게 된 아름다움이 도덕적 아름다움이란 말예요. 그럼 자연을 보면서 깨달은 아름다움은 무슨 아름다움이겠어요? 자연적이 아름다움이죠. 어려울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늘 경험하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그렇게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온 우주에는 자연적인 질서와 도덕적인 질서 두 가지가 함께 엮어져서 이 창조의 아름다움의 세계를 지어내는 거예요. 옷감을 보면 이렇게 짜지고 이렇게 짜지죠?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서 옷감을 만들잖아요. 이게 자연적인 질서라면 이건 도덕적인 질서예요. 그래서 이 두 가지가 함께 엮어져서 찬란한 아름다움을 이 세계가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은 이걸 못 보는 거예요. 이..이거 기껏 봤다는 게 이것만 보는 거예요. 응, 이것만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기쁨을 참다운 창조세계를 보면서 느끼는 그 참다운 기쁨이 모자라는 거예요. 그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거예요ㅣ. 전 신잔데도 별로 못 느끼는데요? 그럼 두 가지 원인 이예요. 아니 세 가지 정도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모자라서 그런 거예요. 하나님을 잘 알면, 그 하나님이 만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새로워지게 되는 거예요. 이해하죠? 응 이해하죠? 응 그래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서 그래요. 그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면 그게 너무 새로워 보이는 거예요. 너무너무 새로워 보여요. 응! 너무 새로워 보여요. 가끔 그,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 보면 은 그 왜, 곤충들의 세계 같은 거 하잖아. 그럼 우리 야 정말 너무 신기하다 야 어떻게 곤충이 저렇게 자기새끼를 보호하고 희생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을 보면서 신기해하잖아 그런걸 알고나면은 산에 가서 거미나 벌레 같은 거볼 때에 느낌이 예전과는, 몰랐을 때보다는 다르게 느껴지게 되잖아요. 그런 거예요. 그러면 세 번째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고 느끼고 판단하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그걸 알게 될 때 인간은 감탄하게 되는 거예요. 정말 아름다워요. 세계가 . 정말 아름다워요.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살아. 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만물들을 창조하셨어요. 만물들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이 땅에 있게 된 것 , 그것 가리켜서 존재라고 하잖아요. 그죠? 그런데 이 땅에[ 있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들이 있어요. 원래 사물이라는 말 속에는 존재하는 모든 걸 다 포함하는 거예요. 사물들이 있어요. 근데 그것이 아무렇게나 막 이렇게 비벼서 이 세상에다 휙 던져버리는 것이 아녜요. 하나님께서 창조 하실 때 순서대로 창조하시는 거예요; 제일 먼저 뭘 창조하셨어요? 무생물을 창조하셨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땅, 바다 이런 것들을 창조하신 거예요. 그것들은 굉장히 양적으로 많아요. 그것들을 창조하신다음에 그 다음에 뭘 창조하셨어요? 식물들을 창조하신 거예요. 만일 거꾸로 창조하셨다고 하면은 참 힘들었을 거예요. 그죠? 인간을 제일 먼저 허공중에 창조하시고 (청중웃음) 그 다음에 그 놈이 막 떨어질라치면 밑에다가 지구를 창조하셨으면 스릴이야 있었겠지만 그 엉덩이가 얼마나 아팠겠어요. 떨어지느라고 그니깐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세요. 그래서 땅은 자라나는 생물의 기반이 되는 거고 식물은 땅만 있으면 충분히 살아요. 그렇죠? 그 땅의 적절한 온도와 습기와 양분만 가지면 살 수 있잖아요. 그 양분은 땅 안에서 무한정으로 계속해서 생성이 되는 거예요. 분해 작용을 통해서 그래서 거기에 식물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고 나니까 하나님이 그 다음에 뭘 창조하셨어요? 육축과 동물들을 곤충들을 창조하신 거죠. 그죠? 바다의 생물들도 다 창조하시고 그 것들은 그 먹이를 식물에 의존하는 거예요. 거의 모두 식물에 의존해요. 그렇게 창조하시고 동물들을 지으신 다음에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뭘 창조하셨어요?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누굴 먼저 창조하셨어요. 아담을 창조하셨다고 남자들은 뻐기는데 한번 만들어보고 다시만 든 게 더 좋아요. 아니면 시제품으로 만들어 놓은 게 좋아요? (청중웃음)시제품으로 만 든게 더 좋다고? 아 여러분 가전제품 딱 내놨는데 이게 1호 제품입니다. 싸게 드릴게 가져가세요. 아무도 써보지 않았습니다. 그럼 여러분 쓰겠어요? 아 그러니까 몇 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써보다가 어 그거 괜찮다 그래야 사죠. 요즘처럼 사이클이 빠르면 은 몇 년까진 안 가지만 그래도 몇 달 지나야 돼. 그래서 하나님이 남자를 먼저 만드신 게 이 심오한 뜻이 있는 거죠. 남자는 개척 적이고 진취적이고 모험적이고 도전적이에요. 여자는 그렇지가 않고 관계 중심적이고 이미 차지한 땅들을 가꾸는 데에 효과가 있어요. 여자를 덜컥 창조했어요. 아니 땅을 아직 차지하지도 않았는데 뭘 가꾸겠어요. 남자가 정복하고 개척하면서 여자는 그것들을 창작…….그러니까 하나님은 남자를 먼저 창조하신 거예요. 그 다음에 여자를 창조하신 거예요. 여자 남자 생긴 다음에 그 다음에 애가 태어나는 거예요. 남자 혼자 있는데 애가 툭 튀어나오면 젖은 누가 먹여요?(청중웃음)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순서를 따라서 차곡차곡 창조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게 제가 쓰는 용어에는 피라미드를 형성한다 이거죠. 이 밑에 있는 층이 제일 두터워요. 그다음 그다음이에요. 근데 이 이 존재하는 사물들이 우주를 이루는데 이게 아주 미묘한 연관이 있는 거예요. 맨 밑에 있는 피조물들 무생물들은 그냥 존재만해요. 그런데 식물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살아있어요.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복사해 낼 수 있어요. 어떻게 복사해내죠? 씨앗을 통해서 자기를 복사해내요. 어떻게 하든지 번성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잡초 하나 심어놓고 안 뽑으면 은 이게 막 씨를 퍼뜨려가지고는 막 번져 나가는 거예요. 모든 게 그렇게…….그렇게…….그렇게…….자기를 번식. 자기를 복사해서 번식시키는 그런 능력은 돌멩이에는 없어요. 돌멩이 여기다 놓으니까 나중에 세월이 지나서 이게 새끼를 쳐서 두개가 됐더라! 그런 거 없어요. 땅을 내버려뒀더니, 4평을 샀는데 새끼를 쳐서 8평으로 늘어났더라! 그런 거 없다 이거예요. 그냥 있는 그대로 거기서 소멸해 가는 거죠. 그러니까 무생물은 존재하고 식물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살아있고 동물은 또 틀려요. 동물은 인간처럼 볼 수 있어요. 냄새 맡을 수도 있고 살갗에 감촉도 있고 그 다음에 그것에 맛을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사물들을 봐요. 그럼 사물들을 이렇게 딱 보면 은 이 속에서 약간의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들이 여기서 작동이 되면서 뭔가 행동에 영향을 주는 거예요. 본게. 근데 이것들이 모두다 예술이나 무슨 학문이나 이런 거에는 관계가 없고. 철학하는 개 봤어요? (청중웃음) 그런 거 없고 모두 생존의 기능과 관련 있는 거예요. 그 주인이 오면 은 개가 와서 막 꼬리치고 매달리는데 그게 왜 그러는 거예요? 그게 무슨 뭐 사랑이 충만하고 뭐 그래서 그래요? 그래서 한번 꼭 안아 주면은 만족하고 물러갑디까? 뭐 줄때까지 계속 매달리잖아요. 그래서 모든 것들이 생존의 기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러고 내가 경계하는 어떤 사람이나 동물이 나타 나면은 미친 듯이 개가 짖어요. 그게 뭐죠? 자기 서식지를 보호하는 거예요. 장소를 보호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그 장소 안에서 자신과 자손의 생명이 보존되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의 침입을 가로막는 거예요. 그래서 개들이 군데군데다 오줌을 싸죠? 그 냄새를 풍기면서 여기는 내구역이니까, 이 냄새 맡고 오지마라 니 오줌냄새하고 틀리잖아. 그 뜻이에요. 그 서식지를 확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물에게는 또 한 가지가 추가가 되요. 그게 뭐냐면 존재하고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을 하는 거예요. 근데 인제 그러나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어요. 그러나 인간에게 와서는 이제 이 3개하고는 구별이 될.구별.현격히 구별되는 그 무엇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돌멩이하고 식물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거예요. 식물과 동물의 차이는 더 엄청나죠. 근데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거예요. 왜 현격한 차이가 나타 나냐 하면은 인간은 이제 영혼과 영혼이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 영혼은 영원에 속한 거예요. 육체는 시간 안에 속한 거예요. 그래서 시간을 초월하는 것과 시간 안에 묶이는 것이 만나. 이 만나는 경계선이, 면이 어디냐면 인간의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영혼이 없는 개에게는 마음이란 게 없는 거예요. 그런 거죠. 그래서 자기새끼에게 젖을 먹이지만 이거는 하나님이 작동해놓으신 규칙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자식을 버리는 개 봤어요? 새끼를 버리는 개 봤어요?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자식을 버리는 인간이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동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못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동. 동물은 자기 자식에게 젖을 먹이면서 그래요 우리 집에 개가 테리라는 개가 있었는데 아주 영리해요. 쥐약을 먹었어요. 근데 눈에서 불이 막 나요. 그런데도 죽을 때가 됐는데 자기 집으로 뛰어 들어와 가지곤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거예요. 그런데 도저히 못 참겠으니까 젖물린 자식들을 뿌리치면서 뛰어나와서 마당에서 쓰러져서 죽어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은 이 개는 그렇게 고통스럽고 죽어 가는데도 뛰어 들어와서 마지막으로 자식에게 젖을 물려 . 그래 개는 본능이 이걸 시키는 거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뛰어 들어와서 자식에게 젖을 먹일 때에 그 의미를 알고 뿌리치고 자식이 죽든지 말든지 뛰어나갈 때도 그 의미를 안다 이거죠. 그게 인간과 동물의 뚜렷한 차이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무분별하게 동물의 세계에서 일어난 어떤 일을 가지고 인간에게 본받으라는 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이건 좀 무리가 있는 논리라 이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지만 동물은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그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이.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가 더 추가가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살아 있을 뿐…….아…….존재할 뿐 아니라 살아있고 감각하고 그 위에는 인식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지성이에요. 그래서 인식이라는 것은 사물을 이렇게 봐. 이 감각이에요. 이.이게 어떤 인상으로 우리 마음속에 확 와 닿아. 지각이에요. 이것이 뚜렷해서 아, 꽃!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성도가 아름답게 가꾸어놓은 꽃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 요즘 꽃값이 비싸지 이.이런 많은 생각들을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꽃에 대한 인식이에요. 그런 걸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인제, 그러면 인제 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는 그런 특별한 기능을 주셨을까 라는 질문이 제기되잖아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러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 있는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모든 질서의 주인이시며 이 질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간에게 깨닫게 하셔야지 만 이 세상을 하나님 대신해서 가꿀 수 있는 거예요. 이해되죠? 자, 아주 낮은 수준으로 내려와서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직원 한 1000명 정도를 거느리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에요. 그런데 이제 이 나는 더 이상 이 회사를 경영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먼 나라로 떠나가야 되요. 그래서 내가 갔다가 올 동안에 한 3년 동안 내가 도저히 와서 이거를 그 제대로 관리를 할 수가 없는데 뭐, 급하면 나한테 전화도 해서 물어보기도 하고 그러겠지만 내가 올 수가 없는 사정인데 누군가에게 이 자리를 맡기고 가야 될 거 아녜요. 예? 맡기고 가야 될 거 아녜요. 자, 누구한테 맡기겠어요? 사지 선다형이니까 골라보세요. 1번 힘센 놈. 덩치가 실~하고 소도둑같이 생긴 그런 사람. 두 번째 예쁜 놈. 기생오라비처럼 호리호리하고 빨간 티셔츠입고 야리야리하게 생겼어요. 멋쟁이에요. 세 번째는 아무나. 아무나하면 너무 장난 같으니까 회사 오래 다닌 사람. 음. 네 번째 주인인 내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 몇 번째? (청중들: 세 번째) 아 맞았어요. (청중 웃음.)
네 번째 주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 몇 번째? 아 ! 맞았어요. 정말 잘하셨어요. 문제가 너무 쉬워서 상은 못 드릴 것 같아요. 그럼 당연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하나님처럼 이 세상을 다스리게 맞기셨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수없는 존재에요. 개, 돼지 같이 힘이나 세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맡기실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그러니까 인간을 상당한 존재로 창조 하셨어야 되었다 이거요. 예수님이 열두 살 밖에 안 되셨을 때 성전에서 성경박사들과 토론 하고 계셨죠? 예! 대단한 것 아니에요? 예수님의 지성이 얼마나 대단했는가 보여준 것 아니에요. 그죠? 누구와 상대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렇죠.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정말 특별한 존재로 창조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준거요. 그래서 하나님이 무어라 하셨어요? 온 천하를 다줘봐라 내가 인간 영혼 하나 와 바꾸지 않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모든 창조 중에 최고의 결 작품이 인간이에요. 그러게 인간을 이해하는 거요. 인간이 하나님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거예요. 그래서 이 존재의 피라미드의 맨 위에 있는 거요. 그리고 피라미드위에 계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들어 보세요. 이렇게 세워지는 것들이 자연적 질서라 그랬죠. 그래서 아랫것들은 위엣 것들에 봉사하게 되어 있어요. 땅은 식물을 내 식물은 동물의 먹이가 되는 거요. 동물은 인간의 또한 먹이가 되요. 물론 인간은 식물도 먹어요. 예! 또 사람은 한번 건강해져 볼라고. 광물도 먹더라고……. 모르세요? 은도 먹고 금도 먹고 그런다 말이에요. 응, 몸에 좋다고 먹는데 기본적으로는 무생물은 식물에게 식물은 동물에게 동물은 인간에게 이렇게 봉사하게 되어있는 거요.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봉사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필요한 한도 내에서 그것을 이용하라는 거지 내가 위니까 이것 막 짓밟아도 좋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 이것 성경적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개발을 많이 하면서 살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면 너무나 많은 것을 자기 한사람을 위해서 많이 소비하려고 하는 거죠. 샤워를 할 때 물이 1이라면 욕조에 물을 타 놓고 목욕을 하는 것은 60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이 낭비 되는 거요.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이렇게 소박하게 입고 다니면 되는데 복잡한 옷을 입으려고 하는 거요. 그러면 이제 자연이 자꾸 파괴가 되는 거죠. 특히 모피 같은 것들이 그런 거죠. 전 주로 즐겨 입지 않는 성격입니다. 만은 그 모피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죠. 미국에 있는 어떤 사람이 비욘드 더 비프라는 책을 썼어요. 소고기를 넘어서 그 뜻이에요. 이 사람이 커다란 그 음식 그 패스트푸드 패스트 푸드점에 떨어진…….그 회사이름 잘 모르는데……. 거기에 삼목 자였어요. 근데 일종의 깊은 자연적인 회심을 하고 나서 이제 이. 그…….육식을 안 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아…….그 사람의 주장을 내가 100%동의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뭐. 고기 먹으니까. 근데 그 분의 이야기 요약이 뭐냐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근의 주된 원인은 인간의 과도한 탐욕적 육식생활에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면은 하나님은 이 땅에 충만한 곡식을 주셨잖아요. 그래서 그 곡식들을 생산해서 인간들이 나누어 먹으면 충분해요. 여러분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곡식이 이 지금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모자랄 것 같아요? 남을 것 같아요? 딱 맞아요.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한 쪽에서는 남아도는데 한 쪽에서는 한 남아도는 쪽에서 없는 쪽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 거예요. 남의 나라다 따질 가없어요. 북한이 식량문제로 굉장히 고통을 받죠. 제가 요번에 북한에 갔다 왔잖아요. 봄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해요. 그런데 1년에 모자라는 쌀이 얼마냐면 150만 톤. 남한에서 남는 쌀이 얼말까요? 150만 톤이에요. 정확해요. 제가 무릎을 쳤어요. 야, 정말 놀랍다 근데 이번 해에 큰 일 났어요. 이번 홍수로 200만 톤이 깎인 거예요. 그니깐 350만 톤이 모자라는 거예요. 이게 가을에 보통문제가 아녜요. 그렇게 하나님이 딱 주시는 거예요. 북한이 90년대부터 계속 홍수를 만나거나 한해를 만나가지고 곡식이 계속 안됐어요. 그런데 일본 풍년, 남한 풍년, 중국만주 풍년. 주요국가가 다 풍년이에요. 거기 만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균등하게 흘러가서 얻는 것에 잃는 것이 있는가에 없는 것에 흘러 들어가면 균형이 이루는 거요. 우리나라가 중세에 와서 모줄 띠고 이거 뭐 하지만 미국 같은 나라는 비행기로 확 뿌려버리고 내 버려둬요. 그럼 벼가 잘 자라는 거예요. 직파 농법이라고 해요. 직파 직접 뿌린다는 거요 뿌리도 너 튼튼해 쌀도 훨씬 맛이 있어요. 수확량은 좀 널 조금 나겠죠. 물론 골고루 잘 뿌린 것이 아니라 비행기로 확뿌리니까 수확량은 떨어지겠죠. 그러고 트랙터로 확 거두어서 한사람이 몇십 만평씩 그냥 그렇게 농사를 짖는 거예요. 그러니 남는 거예요. 그러니 그 예기는 뭐냐면 그런데 인간이 먹을 곡식을 소도 먹는다는 거요. 소고기 1kg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소가 20kg을 먹어야 된다느거요. 그러니 모든 식량들을 이 짐승들이 막 먹어 치운다는 거요. 그러고 요만한 고기를 만들어 내는 거요. 그거를 여유가 이세상의 소수의 사람들이 그걸 잘라서 먹는 거요. 그래서 결국은 굶주린 사람들이 나온다고 하는 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피라미드로 만드신 이 세상에서 동물과 식물 무생물과 이 모든 가을을 사용해서 인간이 사용할 수 있게끔 인간에게 지혜를 주셨는데 인간이 그것들을 마구 개발하고 남발하면 안 된다 이거요. 꼭 필요한 것을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개발하면서 인간이 약간의 욕망이 펼치는 대로 쫙쫙 뻗어 나가지 말고 약간 줄이면서 그러면서 돈 있다고 해서 그것을 막 쓰고 그래서 그것들을 소비생활을 늘리지 말고 이것을 줌 줄여요. 그러면 환경이 덜 파괴 돼 버리는 거요…….중국에 썅사땜을 만들었어요. 쌍업을 가로 막아서 물을 저장해요. 땜을 만들었는데 이게 세계 최대의 땜이 예요. 물을 저장해요 그래서 물을 저장했는데 이게 세계 최대의 땜이에요. 그 발전 치수는 지금 이져버렸는데 어마 어마 해요. 그 발전소 하나가 남한에서 발전하는 모든 발전량의 훨씬 초과해요 비교도 안 돼요. 그래 환경문제들이 생기니 그러지 마라 그러지 마라하고 건거요. 어떻게 된 줄 알아요. 물을 꽉 채우면 몇 년 뒤에 지구의 자전축이 움직인대요. 그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자전축이란 것이 뭐냐면 지구가 약간 비스듬히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15도 쯤 이렇게 되어있다고 이것이 축이에요. 그럼 창세기부터 지구가 여태까지 그 축을 따라서 지구가 이렇게 돈 거요. 물을 너무 많이 나와 가지고 이렇게 된 거요. 응, 그렇게 된 거요. 그렇게 탐욕이에요. 그러면 막 철이니 기름이니 뭐니 막 빨아 드려가지고 막 공장속 에 때려 넣어가지고 어마 어마한 물건들을 막 만들어 내는 거죠. 그러니까 15달러 밖에 안하던 기름값이 80달러가 넘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석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요. 이러면 나라는 치열한 고통이 시작 되는 거요.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이거요. 하나님이 인간을 모든 나머지 동물과 식물과 그다음 피도세계에 대해서 하나님이 위에 세우시면서 이것들의 섬김을 받게 하셨어요. 그런데 이것을 섬기는 하나님은 너 쥐었으니까 막 짓밟아라.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 밑에 있는 것들을 사용을 하고 그 위에는 나 하나님이 있으니 나를 섬겨라 그 뜻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을 섬기는 한도 안에서 이것들을 사용해야 되요. 그런데 그렇게 안하고 그냥 자기가 마지막 이 모든 이 우주의 목적 인것처럼 모든 것들을 두둘 겨서 자기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이바지이 하라고 족치는 거예요. (웃음) 권력과 돈으로 족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지구 환경이 파괴돼요. 파괴된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북극지방의 빙아 들이 다 녹아내리면서 멀쩡했던 섬나라가 물속으로 사라진 거요. 그런 이변들이 일어난 거요. 그런데 이것은 잘못 된 거죠. 그러니까 이것들은 모두다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면 그것을 신자들도 세계를 봐 불신자의 사람들도 세계를 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진리의 빛이 없으니까 자기가 이 모든 무생물이나 식물이나 동물보다 더 뛰어난 능력과 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만 알아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자기 자신의 목적의 달성을 위해 무자비하게 이런 것들을 갖다가 말하자면 부셨트리는 거요. 파괴하는 거요. 어디로 목적이 있는 파괴가 아니라 그냥 인간중심의 행복하게 하기위한 것이 최종적인 목표가 돼는 거요. 그렇게 해가지고 짓밟고 죽여 버리는 거요. 그렇게 되니 파괴되는 거요. 그게 인간의 일이다. 그런데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과 다름이 없다 이거요. 그것 왜 그러냐면 세상에 진리가 없어서 그래요. 간혹 불 때고 에 박수는 치는데 텅빈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면 삶의 태도가 하나님 앞에 고쳐지지 않는 거요. 그러니까 미친 듯이 펑펑 울고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박수나 치고 덜덜덜 떨면서 인사치레나 하고 돈 조금 내고 이것 펑 뛰기나 해가지고 자기에게 돌아오기나 기다리는 이런 식의 사행성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거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살아 있어도 뭔가 이 창조의 세계를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이바지를 못하는 거요. 예전에는 자기 혼자 온 이우주의 최고의 중심이기를 원하면서 살았는데 이번에는 하나님 백으로 그렇게 살고 싶은 거요. 응,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누구냐 하면 진짜 이 모든 우주의 창조주이신 실권을 가진 왕이 아니라 입헌군주국의 형식적인 왕 그래서 실권은 총리가 다 갖고 그러고 밥이나 먹을 때 명절 때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선물이나 받치면 되는 뒷방 늙은이 같은 왕 그러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창조의 목적 그런 개념이 없는 거죠. 나는 만나서 예수님을 왜 믿느냐고 물어 봤을 때 그 얘기를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을 아무도 못 만나봤어요. 여러분들에게는 대답이 있어요.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말했어요. “ 만약에 너희에게 어떻게 그렇게 소망가운데 주님을 믿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대답할말을 준비하거라! ” 준비하거라! 응! 으 할래루야 아멘 그 두 마디 가지고는 안 되죠. 하나님이 이 머리를 우리에게 무게중심이나 잡으라고 디자인으로 주셨어요. 생각을 하고 생각을 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그러면 그 세계 속에서 누구이고 그리고 내 인생은 어디로 가야 되는지를 생각하라고 .하나님이 부르신가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이런 생각을 얼마나 안하고 사는지 몰라요. 불교신자 만도 못해요. 작년에 어느 잡지사에서 나를 인터뷰하겠다고 왔어요. 나는 별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구지 하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얘기하자고 그래서 서재에 앉아서 1시간도 더걸렸어요. 그랬더니 뭐라고 그러냐면 불신자 였어요. 어우 목사님 제가 여태 기독교 믿는 사람들 많은 인터뷰를 했는데 목사님은 틀려요. 나는 좋은 얘기하는 줄 알았어요. 정말 틀려요 목사님, 뭐가 그렇게 틀린데요? 어휴 목사님 말씀하시는 것 보니까 다른 목사님하고 틀려요. 스님 같아요. (청중웃음) 내가 며칠 동안 충격에서 혜어날수가 없었어요. 내가 눈치가 대개 없지 …….그러니 얼마나 이 세상 불신자들 눈에 기독교가 펑 하는 종교인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요. 매일 먹고 마시고 몰려다니고 말이지 그런 종교로 비춰지고 있지 않아요. 자기세력이나 불킬려고 하고 말이죠.,그렇게 돼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는 동물들에게는 없는 지성과 마음을 주신 거요. 그래서 인간 안에 있는 영혼을 가리켜서 별명을 지성적 영혼 이라고 부르는 거요. 지성적 영혼이라고 부르는 거죠. 왜 그렇게 부르냐면 어떤 사람들은 동물에도 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안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동물의 영혼을 이야기해요. 그런데 구별하기위해서 그거는 비이성적영혼이라 이렇게 보는 거요. 나는 동물의 영혼을 인정한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인정해요. 그럴 경우 그건 비이성적영혼이에요. 그게 지성적 영혼을 가진 그건 비지성적 영혼이에요. 지성적 영혼을 가지고 있는..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그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의 의미를 가슴에 세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거예요. 얼마나 놀라워요. 노래“ 여호와 우리 주여 주에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인자가 무엇이 간데 저를 권고 하시나니까” 그래서 그 시인이 너무 가격해서 사람이 무엇이 간데 주께서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찾아온다 이거요. 사람의 자식이 무엇이 간데 하나님이 그 비참한 인생을 찾아오 시니까, 그러면서 감탄하는 거요. 그러니까 그럼 하나님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어 산 옆에 물이 있고 그리고 나무 밑에 풀밭이 있고 나무위에는 열매가 있고 그런걸. 이해하는 거시 아니잖아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모든 만물 속에 내제 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그 모든 것들 인간에게 주신 의미 그걸 생각하는 거요. 그가 정말 제대로 된 군인이라면 나라에서 주는 수많은 해택들이 있죠. 좋은 무기 아 싸우라고 주는 무기구나 따뜻한 잠자리 여기서 피로를 풀고 내일은 철저하게 훈련에 임하라고 국민이 내게 주는 선물이구나! 휴가 잘 쉬고 와서 새 마음 새 몸으로 이 나라를 지켜달라는 뜻이구나! 응? 그런 거를 깨어있는 군인이면은 항상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 안하는 사람은 전쟁나면 다 도망갈 사람들이에요. 다 도망할 사람들이에요. 뉴스들이면 짜증이 막 나요. 비행기 한대에 400억씩 주고 사줬더니 뭐 하수도 빠져서 뭐 망가졌다. 그래가지고 고치는데 100억이 들었데요. 최신 전투기 사줬더니 기름 늘 때 물이 들어가서 공중에서 떨어졌다고...... 생각나세요.. 생각나요? 그 조종사가 죽었잖아요? 몇 년 전 얘기예요 그 첨단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니까 그 살아있는 군인이고 깨어있는 군인이라면 그렇게 생각해야 되잖아요. 우리 입장이 돼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 일용한 양식을 주셨어요. 의미가 없을까요 그 양식이 없으면 살아있을 수 가없잖아요 우리가 외로울 때 기댈 수 있는 사랑하는 친지들을 주셨어요. 의미가 없을까요 의미가 없을까요 지금도 살만한데 하나님이 나에게 더 좋은 집을 주셨어요. 의미가 없을까요 다른 사람이 이해를 못하는데 나에게는 뛰어난 지성을 주셔서 나는 이 자리에 못하는 것을 잘 이해를 하게 해주셨어요. 의미가 없을까요 남이 못 보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나에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어요 의미가 없을까요 그걸 끊임없이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하나님이 이 세상 전체를 창조하신 목적과 어떻게 연결시키며 살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면서 살라고 하나님이 동물들에게는 없는 이 지성을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지성을 주신 거예요 인간의 이 지성은 아주 뛰어나요 이 지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인간이 머리가 좋아봐야 그러는데 안 그래요. 그걸 하나님하고 비교할라 그러니까 자꾸 그러지 부지런히 진리를 탐구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면 지성이 높은 사람과 그냥 꾸역꾸역 밥만 먹으면서 그런걸. 집어치우고 산 사람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라는 거예요 인류의 문명사를 보면 인간의 지식이 천천히 장구하는 세월에 걸쳐서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창조하시자마자 확 꽃이 핀 거예요 확 꽃이 핀 거예요 꽃이 확 핀 거예요 제가 최근에 이 책을 이 그 도덕적인 통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300년 전에 영국에서 출판된 책을 백 권을 구했어요. 거의 못 구하는 책인데 구했어요. 어쨌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구했습니다. 내용이 너무 탁월해요 다 읽고 나서 자존심이 상하는 거야 그렇게 탁월한 책을 썼는데 21살짜리가 쓴 거야 예! 지는 300년 전에 태어나고 그 300년 후에 태어났는데 처음엔 몰랐어요. 나중에 그 책을 소개하는 책을 보니까 21살짜리가 쓴 거예요 그 어떻게 21살짜리 지금은 지금은 20살이나 21살짜리는 컴퓨터 앞에 매달려서 삑뽁거리면서 스타크래프트나 하고 있을 얘들이 이 우주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대해서 막 쫙 사방에 펼쳐가는 거요. 발전하고 있는 거여? 쇠퇴하고 있는 거요?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는 거죠. 절대 학문의 세계가 무조건적으로 모든 방향에서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거은 아니에요. 또 발전해 본들 대부분 발전 하지..........몰라요 이해도 못하고 그런 현저한 차이가 있는 거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손을 얻고 세기세요. 제발 세기세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세계는 어쩌다 생겨난 거야 대수롭지 않은 거여 그런데 이거는 우리에게는 이 우주와 이모든 세계가 우리 옆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누구의 작품이에요? (청중)하나님. 하나님 말고 우리아버지 작품이란 말이 예요. 우리 아버지 작품이에요. 우리가 그 아버지를 사랑해요 그 아버지 작품이에요. 응,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사랑해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동물들에게는 없는 영혼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영혼을 주셔서 그 안에 있는 지성으로 물질의 세계를 이해하게 하시고 거기서 자연적인 질서들을 발견하게 되고 영적인 세계들을 이해하시고 거기에서 도덕의 질서를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뭘 발견 하냐면 그런 질서가 하나님 안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요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하나님이 우리 을 위해서 만들어주신 거요. 그런데 이것들을 사랑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이용하라고 만들어 주신 거요. 사랑해야 할 분은 오직 이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밑으로 내려가면 안 돼요. 질서를 역행하면 안데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평생의 기도제목이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이여 내 안에서 사랑을 질서롭게 하소서! 원어“오리지나때 임매옴 까리따땜 ”내안에서 사랑을 질서롭게 해주옵소서!그게 무슨 뜻이냐면 이용 할 것은 이용하고 사랑할 것은 사랑하는 것 그래서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 섬기도록 하고 우리는 그것을 섬기면 악이 되는 거요. 우리들은 그것들을 섬기지 않고 심지어 우리는 우리 자신도 섬기지 않아요. 왜 우리 자기 자신은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아니에요. 요즈음 뭐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이 많이 나오죠. 그것 다 헛소리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안 가르쳐 주어도 다 알아요. 자기는 우리들이 끝임 없이 거부하고 부인해야 할 대상이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하나님 안에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기는 그 하나님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는 대도 자기를 학대한다. 그런 사람 존재하지 않아요.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된 사랑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은 질서를 따르고 있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요. 그 즐거워하는 거요. 하나님은 그래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거예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거예요. 이 밑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고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거예요. 아 즐겁다. 그리고 기뻐하는 거예요. 그리고 행복해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목사님노래) 주에 영광은 온 세계위해…….) 콱! 어두운 하늘을 가르면 대각선으로 하늘을 찢을 듯이 파문을 그리며 떨어지는 나무에 온 하늘에 은은히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 바람과 비, 물풀, 흙, 공기, 태풍, 노도와 같이 몰아치는 거친 파도 우리는 그 모든 속에서 소리치면 자연 속에 음성을 듣는 거요. 응! 우리는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우리를 경계하지 마라 우리는 모두 한분에서 태어난 종자들이란다. 바로 그분은 우리를 이 세상에 있게 하신 창조주이시니 너희는 그분의 위대한 능력을 찬송하라 온 피조물들에게 소리 지르는 거요. 그런데 이런 모든 피조세계에 있는 탁월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매우 기뻐하게 될 때 그때 인간의 지성 안에는 아주 놀라운 새로운 특징이 생겨나게 된 거예요. 그 놀라운 특징이 무엇이냐 다음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10.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8-20).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는 두 가지 질서가 있는데, 하나는 자연적인 질서와 도덕적인 질서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자연적인 질서와 도덕적인 질서 두 질서 안에 있는 존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 들은 물체로 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에만 속해있지만 인간은 육체로는 자연적 질서 안에 속해있으니 자연적 질서 안에 있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물질이 아니니까 자연적 질서 안에 있지 않고 도덕적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이 영혼의 작용인 마음을 선하게 혹은 악하게 가짐으로써 육체를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 선하게 또는 악하게 살 수도 있는 독특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죠. 그렇게 된 인간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이용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게끔 그렇게 살도록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 인간은 육체로는 자연 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과 가까이 지내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갈수록 인간은 건강하게 되지만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간의 육체는 질병과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 서울에 어떤 집사님 한분이 계셨는데 사업을 밤낮을 안 가리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꽤 벌었단 말이에요. 어느 날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간암말기라는 판정을 받았어요. 그래서 집에 가서 그냥 편히 쉬시라고 그 죽을 날이 불과 한 달 정도 밖에 안 되니까 생명이 손을 쓸 수 없으니까 맘 편히 계시다가 잡수고 싶은 거 잡수고 만나고 싶은 분 만나고 돌아가시라고 그러고, 그러니 아직까지 나이가 젊은데 이런 사형선고를 받으니 참 너무 비참하잖아요. 죽더라도 공기 좋은 곳에서 한적하게 살면서 있다가 죽고 싶다. 그래서 제주도를 내려 왔답니다. 제주도에 가면은 뭐 호텔들이 많이 있지만은 오래 됐지만은 가장 풍광이 뛰어난 호텔 중에 하나가 하이하트라는 호텔입니다. 바다 쪽으로 불쑥 나와서 육각형으로 지은 호텔이에요. 그래 한 달밖에 못산다고 그러니까 수속 받고 오니까 며칠 지났잖아요? 그래서 기왕에 죽는 거 방도 좀 괜찮은 방으로 들어가서 어차피 한 달 치만 내면 되니까 들어가서 살은 거예요. 그리고 죽는다니까 약도 쓸 수 없고 할 일이 없는 거지.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는 찬찬히 걸어서 바닷가에 내려가서 하루 종일 앉아서 바다를 드려다 보며 이제 인생을 생각하면서 눈물도 짓고 또 하나님 앞에 기도도하고 그러면서 이제 올라와서 뭐 좀 먹고 그리고 밤에 그 문 활짝 열어 놓고 파도소리 들으면서 잠을 자는 거예요. 다행히 그렇게 통증이 심하지 않았나 봐요. 그렇게 자는 거예요.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또, 한 달이면 죽는다고 했는데 두 달이 됐는데 안 죽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호텔 값이 장난이 아니잖아요. 아니 그러면 안 되겠다 금방 안 죽으면 호텔비가 너무 많이 나오겠다. 거기서 하루에 20만원이고 하루에 한 7만 원 정도 주는 콘도로 옆으로 옮겼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이제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고 이제 식구들에게 고별 유언이나 편지 같은 것도 쓰고 안 죽는 거예요. 6개월이 지났는데 혹시 이러다가 실수해서 사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래요. 그리고 몸도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봤더니 당신이 도대체 무슨 일을 했냐. 당신 몸에 놀랍게도 암세포가 죽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물론 하나님의 각별한 그 분을 살려주려는 하나님의 각별한 역사가 있었죠. 그렇지만 자연적인 질서 속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속 끌이지 않고 그냥 인간이 죽는다는 시점에 딱 되면 은요 여러분들은 모르겠지만 은 죽는 그 백지장 한 장 차이에 딱 들어가게 되면 미운사람도 없고 욕심도 없고 싫은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무상무념의 상태라는 거예요. 그리고 죽음 직전에는 아주 짧은 순간 안에 그 긴 인생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확 스쳐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을 비운 거죠. 그러니까 도덕적 질서의 측면에서도 인간을 막 미워하고 막 속 끓이고 그러는 것들을 접은 거죠. 그러니까 어때요 몸이 자연으로 돌아가니까 건강도 회복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존재가 자연적 질서 안에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두 번째는 뭐냐면 영혼이에요. 그래서 영혼은 도덕적 원리에 속해요.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깝지만 인간의 영혼은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죄에 가까워지는 거죠.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죄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거예요. 그러닌 까는 인간이 참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어요.
자연과 가까이 지내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살고 두 번째는 은혜를 거스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의 강화를 받으면서 순종하며 살고 그러면 육체와 영원 아울러져 건강해져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자연적 질서에 속해 있는 거죠. 그런데 자연적 질서에 속해 있는데 이것들을 어떻게 엮어 내냐에 따라서 선한 목적을 위해서 이바지하기도하고 악한 목적을 위해서 이바지하기도하는 거예요. 그렇죠? 오늘 오후에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어요. 저 박헌준목사 입니다. 저 200만원만 빨리 입금해 주십시오. 박목사가 이렇게 문자로 해서 사고가 났다고 이럴 일이 없는데, 그리고 전화를 해보니까 사기야. 이걸 온 교역자에게 다 돌렸어. 그러나 다행히 아무도 돈이 없어서 입금을 못했어. 어쩌면 내 이름 팔아서 여러분들에게 보낼지도 몰라. 교통사고가 났는데 빨리 200만원만 입금해주면 내일 아침에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럴 듯 한거죠. 그래서 전화해 보니까 한 15분전에 콧노래 부르면서 애들하고 내려가는 것을 봤는데 문자에 그게 오느냐 이거에요. 사지죠. 이거 어때요? 이 핸드폰이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죠? 이 핸드폰을 가지고 보고 싶은 사람과 연락할 수도 있고 그리고 이 핸드폰이 있어서 정말 선교적으로 너무 너무 좋아요. 그 뭐냐 하면은 문자를 가지고 교회에서 소식도 보내고 그리고 지체들 간에 서로 연락도 주고받고 또 전화 걸어서 이야기하는 그렇고 편지보내기에는 시간이 걸리고 이런 이야기도 툭툭 써서 보내면 시간도 안 걸리고 비행기 타고 가는 것보다 빠르게 가고 답장도 보내고, 뭐 요새는 꼭 누르면 음성으로도 읽어주고 저 같은 경우에는 생각이 많은 수첩하고 연필을 가지고 다는 것을 너무 싫어해요. 그래서 산책을 하다가 생각이 뭔가 탁 나면 핸드폰을 꺼내서 탁탁탁탁탁 적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한달 두 달 석 달 하면 몇 백 페이지짜리 책이 날 올 수 있을 정도로 메모가 되요. 언젠가는 산책을 하다가 머리에 떠올랐는데 그걸 머리에 막 적는데 한 참 적었어요. 전화기에다 메모를 했는데. 한참을 적었는데 너무 두 다리가 아파. 그리고 시간을 봤는데 1시간 45분 동안 서서 그걸 적었어요. 밤중에. 호숫가에 서서. 안 움직이고.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편리해요. 그런데 똑 같은 기계인데 사기를 쳐. 얼마나 나쁜 목적이 기여 하냐. 핸드폰은 도덕적 피조물이 아니에요. 전파는 무슨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에요. 유리창이나 전기 이런 것들은 처음부터 착한 성품을 갖고 있어서 창조의 목적으로만 막 갈려고 있는 성격이 있는 게 아니란 거예요. 그래서 전기가 들어왔는데 야한 책을 탁 피면 전기불이 저절로 탁 나가고 성경을 피면 껐는데 턱 불이 들어오고 그러지 않는다는 거죠. 절대 그러지 않는다는 거죠. 마이크를 사용하는데 허튼소리하면 전기가 탁 나가고 좋은 소리를 하면 볼륨이 커지고 그러지 안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자연적인 것이지 도덕적인 것이 아니에요. 근데 그런 모든 것들을 질서를 움직여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되게 하느냐 마느냐하는 그것은 인간에게 달린 거라 이거에요.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세계를 돌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이란 존재를 아주 특별하게 창조하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거예요. 그것들을 이용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인간들이 창조하신 거죠
창조하실 때 그 모든 피조물들은 이 온 땅위에 그 정말 아름답게 창조가 된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게는 그 자체가 아름다워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복수성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하나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모두 존재하는 것은 다 복수에요. 그래서 복수이기 때문에 복수로써 그 모든 관계를 갖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질문하겠어요. 그래도 하나만 있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뭐요? 국보1호, 우리 집 외아들, 뭐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것은 좀 갑갑한 이야기고, 갑갑한 이야기고, 그렇게 따지면 두 개 인 것이 어디 있어있어요? 만약에 그런 논리로 따진다면 두 개 인 것이 어디 있어요? 이 세상에? 아니 공장에서 이런 것을 수 만개를 생산해냈는데 과연 이게 똑 같다고 할 수 있어요? 그건 하나님 이외에 모두 똑같게 만들 수가 없어요. 그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 되고 모두 복수에요. 똑같이 생긴 게 여러 개 있다는 의미에서 복수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된 것은 없고 아무리 하나된 것이라도 그것을 해체하면 여러 개로 이루어 졌다는 거에요. 무엇도 하나로 되있는 게 없어요. 그것이 바로 이 세계의 존재에요. 한 때 우리 인간은 이 세계에 있는 사물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원자죠? 그러나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은 나중에 과학이 발달되고 나니까 원자 안에는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가 있다는 것이 발견됐어요. 그 후에 과학이 더 발달 되니까 그 안에 다시 코크라고 하는 또 다른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최근에 만난 어떤 공학을 전공한 사람과 대담의 대화를 해보니까 과학자들은 이러한 것들이 무한하게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는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무한한 세계에요. 물질을 쪼개고 쪼개도 무한해요. 어느 한 지점에서 더 이상 안 쪼개진 다는 건 없다 이거에요. 계속 쪼개진다 이거에요. 그래도 아무리 쪼개도 어느 한 순간에 한번만 딱 쪼개면은 이것이 무. 아무것도 존재했는데 이것이 탁 쪼개니까 없어져 버리는 것은 나타날까요? 안 나타날까요? 안 나타나죠, 그러면 그것은 그 놀라운 기적이죠. 그러니까 결론은 뭐에요? 인간이 아무리 나누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는 뭘 의미하냐면 결국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없었는데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라 이거에요. 하나님 자신이 혼자가 아니시잖아요.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시고 또 성부는 성부 안에 여러 경향성들을 가지고 계셔요. 다만 그것이 일관되게 한 방향을 향해 흐르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이 말씀하신 다음에 시건을 하고 그리고 또 당신이 말씀하신 후에 후회하고 그러시는 분이 아니에요. 한 방향으로 흐르지만 그렇지만 하나님은 여러 가지 경향성을 가지고 계시는 거죠. 이렇게 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로 되는 것이 없이 수많은 무수한 요소들로 이루어 져서 이 세상이 창조가 된 거죠. 창조된 세계는 무생물과 식물과 동물과 그 다음에 인간. 이렇게 네 개의 층차로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 하신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모두 도덕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를 구연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 개의 많은 존재들로 이 창조하신 우주를 구성하셨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러면 하나님이 똑같은 것들로 아무것도 똑같은 것들로 만들지 아니 하시고 서로서로 다른 것들로 만드셔서 그래서 이 세계에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하신 거죠. 그렇게 인간을 보면은 누구도 똑같이 생긴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교인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무도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없어요. 왜 그 똑같이 생기면 안 되죠. 똑같이 생기면 안 되죠. 다르게 생겨야지만 다른 것들이 모여 있을 때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러면은 모든 사람들이 볼 때 정말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러니까 아주 잘 생긴 사람은 못생긴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잘 생긴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렇죠? 그러면 만약에 잘생긴 어떤 사람이 있는데 다른 사람도 모두 자기처럼 생겼다. 그러면 그 사람은 돋보일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잘 생겼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만 못하기 때문에 그가 돋보이는 거죠. 그러므로 그 보다 잘생기지 못한 사람은 또 잘 못 생긴 것 때문에 잘 생긴 사람을 아름답게 드러냄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람, 덜 아름다운 사람, 이런 사람들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밝게 들어오는 별, 흐르게 불이 들어오는 별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밤하늘을 형성하는 것처럼 그렇게 형성하는 거죠. 이렇게 설명하니까 어떤 사람이 나에게 반문해. 그러면 그 못생겨서 못생긴 것을 통해서 기여하는 사람이 잘 생긴 것을 통해서 기여하는 사람에 비해서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건 벌써 중심이 자기라는 중심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게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시면서 아름답게 생각하시는 그것이라면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에 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예쁘게 생겨서 전체를 아름답게 보이느냐 내가 덜 아름답게 생겨서 다른 사람들을 아름답게 만들도록 이바지하느냐 이것은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라 이거에요. 결국은 마음 중심에서 이 모든 세상을 내려다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기뻐하시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감상을 하시면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거기 이바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한 거죠.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또, 이것은 육체만을 가지고 이야기했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감각적이기 때문에, “정신이 고상한 여자가 되고 싶으니? 그러나 얼굴은 지겹게 못생기고. 정신은 덜 고상하지만 육체는 아름다운 여생이 될래?” 그러면 전자를 택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물론 여러분들은 전자를 택하실 거고, 택하셨어요.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 제가 으뜸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똑같다면 아름다울 수 없어요.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데 여러분들이 얼굴도 똑같고, 나이도 똑같고, 옷도 똑같고, 몸무게도 똑같고, 성질도 똑같은 사람이 모여서 예배드린다면 무섭지 않겠어요? 좀 무서울 것 같아요. 우린 각기 달라요. 그러니 하나님이 이 세계를 똑같이 창조하셨을 리가 없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어떤 피조물에게는 존재를 많게 하시고 어떤 피조물에게는 존재를 덜하게 하시고, 어떤 피조물에게는 존재를 더 조금 주셔서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하신 거죠. 돌멩이 같은 것은 존재를 조금 주신 거죠. 왜? 이렇게 큰 덩어리로 존재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존재하고 잇을 뿐이에요.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고, 스스로 생장할 수도 없을 뿐이에요. 그런데 식물은 좀 낳죠. 식물은 장소를 움직일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변하면서 성장해요. 열매를 맺어요. 동물은 좀 더 복잡하죠. 새끼를 낳아요. 그리고 원하는 곳으로 장소를 이동해요. 사물들을 보고 어느 정도는 생각을 해요. 인간을 어느 정도 닮았죠. 인간은 더 복잡하죠.
그래서 우리들은 흔히, 존재한다고 하면 형체를 가지고 이렇게 존재하는 것을 말하거든요. 그런데 그렇지 않죠. 왜냐하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각각 틀려요, 물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과 수증기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이런 물체가 존재가 존다한다고 하는 것과 사람이 존재한다고 할 때 의미가 각각 틀려지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존재하는 분이고, 인간은 많이 존재하는 것이고, 동물은 그보다 더 적게, 식물은 더 적게, 무생물은 가장 적게 존재하는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뭐냐? 그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자기생성, 자기복사, 자기 확장이에요.
자기 확장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신을 자신 속에 있는 생각이나 뜻을 밖으로 표출해서 사물들 질서를 지어서 마치 자신의 생각이 이 속에서 질서를 가지고 펼쳐지도록 만드는 것이죠. 이런 능력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죠. 동물에게도 약간은 이런 것이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떼를 지어 다니는 사슴 같은 것들이 피 튀기게 싸워서 암컷을 차지하고 많은 사슴들을 자신의 수하에 이끄는 지도자가 되는 거죠. 이런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닮은 모상이 되는 거죠.
또 자기 복사는 뭐냐 하면 똑같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거죠. 이것은 하나님에게서도 발견되죠. 성부하나님이 당신 닮은 성자를 낳으시고 또 성부와 성자에게서 두 위를 닮으신 성령이 발출하셔요.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있는 식물들은 이렇게 자라다가 그 다음 씨를 떨어뜨려 이듬해 자신과 닮은 개체를 만들어 내죠. 이게 자기 복사죠. 그리고 열매의 씨를 통해서 똑같은 종자를 번식하는 거죠. 짐승도 마찬가지죠. 짐승은 훨씬 더 복사 능력이 더 고차원적이죠. 그냥 똑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새끼를 낳아요. 강아지가 새끼를 낳아도 많이 나면 7마리 8마리 낳거든요, 그런데 이 개의 새끼들이 그 8마리가 있는데 다 성질이 틀려. 밥을 주면 뒤에 쳐져서 눈치를 보며 못 먹는 놈이 있는가하면, 일단 달려가서 발부터 집어넣고 보는 강아지가 있고, 아무튼 여러 가지 예요. 땅에 떨어진 것만 전문적으로 주서 먹는 강아지도 있고. 그러니까 이렇게 자기를 복사하는데도 다양하게 복사해내는 거죠. 그런 것을 복사를 잘 해내면 잘 해낼수록 그 존재는 더 탁월한 존재가 되는 거죠.
그 다음에는 자기 생성능력 이예요. 자, 식물들을 봅시다. 식물들이 있는데 원래는 요만한 나무였어요, 그런데 양분을 먹으며 매일매일 생성을 해, 그런데 앞에 있는 존재와 나중에 있는 존재는 구분이 되요 안돼요? 구분이 안 되는 거죠. 속에서 점점점점 자라는 거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형상을 향하여 거기에 다 다를 때까지 그 한도 내에서 나무는다 끊임없이 생장을 하는 거죠. 동물들의 경우, 더욱더 놀랍죠. 똑같이 이 양식을 먹어요. 그러면 위장에서 화학작용을 통해 영양분이 퍼져요. 그런데 놀랍게 어느 한 쪽에서만 세포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뇌부터 시작해서 발의 각질까지 세포들이 자라는데, 세포들이 자랄 때는 세포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세포가 가지고 있는 작용과 기능까지 함께 전수를 받는 거죠. 그래서 발바닥에 달라붙은 각질의 세포는 사물과 부딪혀 발바닥을 상처 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심장의 세포는 그것이 점점 자라면서 핏줄을 만들고 핏줄을 갖고 그리고 그 피를 움직일 수 있는 독특한 살 조직으로 변하는 거죠. 그래서 심장의 살 조직과 간의 살 조직을 떼어 비교하면 서로 다른 것이라는 거죠. 이렇게 식물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차이점을 만들어내며 복잡하게 성장을 하는 거죠. 이렇게 복잡하게 생장을 하면 할수록 그 존재는 훨씬 탁월한 존재가 되는 거죠.
그 점에 있어서 최고의 존재가 하나님이시란 말이죠.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셨는데, 그 성자는 아버지 하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하나님이세요. 그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이 다시 하나님을 낳으셨는데 그 하나님도 역시 무한하고 불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세요. 조금도 그 질이 떨어지지 않는 또 다른 하나님을 낳은 신거죠. 성령님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최고의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 온 세상에 이러한 사물들이 죽 펼쳐져 있어요.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모든 피조물이 모두 다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있었잖아요. 그러면 이런 질문이 떠오르게 되죠?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이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리고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었다면 악은 어디에서 오느냐? 이런 의문이 생겨나지 않아요?
그래서 고대의 철학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세상의 존재가 위부터 아래까지 이렇게 우주에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위에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 이예요. 아래는 물질이고. 그러니까 위에는 선한 것이고 아래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악한 것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영혼은 매우 선한 것인데, 물질인 몸에 갇혀 있기 때문에 악한 것에 갇혀져 있다고 보는 거죠. 그러면 살아있는 인간보다 죽어서 분리된 영혼이 훨씬 더 아주 값지고 아름다운 것이 되는 거죠. 선한 것이 되는 거죠. 이러한 생각에 많은 철학자들이 빠져들었고, 특별히 마니교 같은 것에는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사상들이 아직도 기독교 속에 흘러요.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는 감사한데 세상에 나갈 때는 가서는 안 될 곳에 할 수 없이 나간 사람처럼, 그리고 또 이 세상은 별로 필요가 없는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될 영혼이 어쩔 수 없이 거쳐야할 곳이라고 여기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은 속히 작별하고 떠나야할 불필요한 곳으로 여겨지는 거죠. 이것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참된 신앙이 아니죠. 이 문제를 다음 주 마당세미나에서 다루려고 해요.
그런데 들어보세요. 잼있어요. 그런데 이제 어떻게 보았냐하면, 하나님은 100% 존재하는 분이라고 보았다는 거죠. 인간은 한 80쯤 존재한다고 합시다. 이런 %는 나오지 않았지만 예를 들어 이렇게 존재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20%가 모자라는 거죠. 이 20%가 모자라는 것을 악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렇다면 동물은 50쯤 된다고 하면, (나머지) 50이 악인 거죠. 또 돌멩이는 20쯤 되니까 80이 모자라서 80이 악이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거죠? 하나님이 가장 선하고, 인간이 그 다음으로 선하고, 그다음 동물이, 그다음 식물, 그 다음 돌멩이나 이런 것들은 훨씬 더 못한 존재가 된다고 생각한 거죠.
자, 그런데 여기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나오게 되는 거죠. 이런 이방의 사상을 갖게 될 때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되는 거죠. 어떤 문제냐 하면,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세상은 처음부터 결함이 있느냐?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하나님보다 못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만 못한 동물, 동물만 못한 식물, 식물만 못한 무생물들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은 각각 모자라는 것들이 모여 있는 세계가 되는 거죠. 그럼 이 세계가 아름다울 수 있겠어요. 아름다울 수가 없죠. 처음부터 악이 있었다는 것이 되는 거죠.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되죠. 그러면 만약에 어쩔 수 없이 악이 있었다면 하나님이 무능하신 분이 되는 거고, 만약에 고의적으로 악이 있게끔 내버려 두셨다면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분이 되시는 거죠.
그래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많이 고민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예요. 이런 사상에 젖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분이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이 세상도 선하여야 할 텐데 어떻게 선할 수 있느냐? 그러려면 완전해야 하는데 어떻게 완전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떠오르게 된 거죠.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이제 깨닫게 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100으로 존재하는 분이지만 인간은 처음부터 80쯤으로만 존재하게 하셨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80만 꽉 채우면 그게 아름다운 것이지 하나님보다 20이 못하다고 해서 악하거나 추한 게 아닌 거죠. 그다음에 동물은 다시 50.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의문이 풀리는 거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있어요. 우주의 많은 만물들이 있어요. 생명이 없는 것들이. 이것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20쯤에 존재로 창조하신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20의 계획만 꽉 차게 창조하신 거죠. 그러면 아름답겠어요, 안 아름답겠어요? 아름답죠. 식물은 50쯤으로 한계를 정하시고 거기에 꽉 채우셨어요? 예뻐요, 안 예뻐요? 예쁘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활짝 핀 꽃을 보며 ‘정말 예쁘다’하는 것이지, ‘이게 뭐가 예뻐, 말도 못하는 게 뭐가 예뻐.’하지 않는 것이죠. 그런 사람은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이죠. 그렇게 말하진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이미 그런 것들을 충분히 인정하는 것이죠. 꽃은 꽃이면 충분히 예쁜 거예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보기 싫다고 그렇게는 말이 안 되는 거죠.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으로서 충분하죠. 사람이 사람으로 정해놓은 테두리 안에 꽉 채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세계를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최고의 존재이시지만 인간은 인간을 꽉 채웠기 때문에 예쁘고, 별은 별을 꽉 채웠기 때문에 예쁘고, 풀꽃은 풀꽃을 꽉 채웠기 때문에 예쁘고, 굴러가는 돌멩이 하나도 돌멩이 하나의 계획을 꽉 채웠기 때문에 예쁜 세상이 된 거예요. 그게 전체가 밝기는 각각 틀리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가 된 것이죠.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아름다운 세계가 되는 거죠. 만약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어요. 별들이 사라지고 생기는 일들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인간의 타락과 상관없이 별들이 사라지고 생겨나고 했을 거예요. 별들이 생성되잖아요, 그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그 모든 세상들의 별들의 밝기와 생성과 소멸 이것들을 보시며 전체가 움직이는 교향악처럼 되는 거죠. 띠리리띠리리~♪ 여기서 피리가 막 불다가 끝나, 그리고 멈추니까 여기서는 바이올린이 막 나와, 조금 있다가 피리가 다시 살아나서 막 움직이니까 바이올린하고 함께 하던 첼로가 딱 멈추는 거죠. 이러면서 음이 계속되다 멈추고, 멈추다 계속되고, 계속 되가 멈추고 하면서 다른 것들이 막 섞이면서 아름다운 교향악을 만들어내는 거죠. 이 모든 우주 자체가 하나님이 그런 아름다움으로 창조하신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하늘의 별, 이 땅에 있는 사물들, 그리고 바다에 있는 물고기, 공중에 나는 새, 들에 풀, 그리고 아름다운 나무들, 그리고 인간.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라서 완전한 자기를 소유하고 있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인 거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인간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아닌 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학자들이고,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한계가 있는데 창조될 때는 이것이 꽉 찼어.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탁락하므로 말미암아서 자신도 저주받고 이 모든 세계도 저주 받아서 인간을 80으로 정해놓으셨는데 인간이 30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 자기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된 거예요. 육체도 잃어버렸죠. 불사하도록 창조된 존재인데, 60년 80년 살면 죽는 존재로 떨어진 존재가 된 것이죠. 영혼은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처음부터 창조된 존재인데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채로 태어나는 거죠.
그래서 원래는 80정도의 불량인데 사실은 10도 안남은 거죠. 동물도 마찬가지죠. 동물들도, 식물들도, 인간이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바위들까지 모두 저주를 받으므로 원래에 하나님이 정해주신 크기에서 떨어지게 된 거예요. 떨어진 것만큼 그것은 악한 것이 되는 거죠. 그래서 세상이 본래에 가지고 있어 찬란한 아름다움을 다 상실한 거예요. 만약에 창조된 세계의 완전한 회복이 될 때 그때 우리는 처음 창조된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될 거예요. 그나마 우리가 자연 속에 깊이 들어가 보며 그 무한한 아름다움을 감지하잖아요. 그 존재도에 있어 떨어졌는데도 느낄 수 있으니 그 상태가 회복되면 얼마나 더 느낄 수 있겠어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돌멩이나 식물 짐승들은 타락하기 전보다, 창조되기 전 자신의 존재를 꽉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인간에게도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성령의 도움으로 그 존재를 채워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인간에게 주신 거예요. 그게 뭐예요? 예수를 믿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육체의 생명은 연장시킬 수 없지만 부분적으로 영혼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원래의 영혼으로 끊임없이 발전을 하는 거죠. 성령과 진리로 발전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발전하게 될 때 인간은 본래에 하나님이 주셨던 인간의 존재의 한계를 꽉 채우는 존재가 되어가는 거죠. 그러나 다 채울 수 없죠. 그러다가 영화의 때에 육체와 영혼을 모두 채우는 거죠. 그러니까 영화된 육체와 영혼은 불멸의 몸을 입는 거예요. 거기가 끝이냐? 거기가 끝이냐? 거기가 끝이 아니에요. 그렇게 자기를 꽉 채운 지점에서 자기를 능가하진 않아. 그래서 영화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돌멩이가 동물이 되거나, 동물이 사람이 되거나 사람이 되는 일은 없어요. 그러나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빛을 받아서 점점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은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세계의 완성 이예요.
그런데 오늘 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이제부터예요. 그런데 지금 현재는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에게 지정하신 것을 꽉 채우지 못한 상태가 되어있죠. 그렇죠? 맞죠? 인간은 더 그렇죠.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이 다 탄식하면서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체, 동물만 못한 동물, 식물만 못한 식물, 무생물만 못한 무생물들로 가득 찬 이러한 세계가 된 거예요. 그런데 이 모든 피조물이 마지막 날에 자신의 존재를 다 회복하는 날이 될 때에는 (잘 들으세요, 잘 들으세요) 지금과 비할 수 없이 아주 찬란한 영광의 세계가 되겠죠? 그렇잖아요.
은혜 받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사람 하나가 은혜 받고 성화되어서 진실한 신자의 길을 가도 눈부신데... 그래서 안 믿던 가족이 예수 믿고, 심지어 하나님 안 믿던 사람들이 그 사람 얘기 듣고 하나님이 없다는 수십 년 동안의 자신의 신념을 접고 예수를 믿게 되잖아요. 눈부신 거죠. 오죽했으면 뭐라고 해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얼마나 놀라워요?
그렇게 되는데, 하물며 인간이 그렇게 성화를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원래 거기에 도달할 수 없어요. 성화로는 완성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완전하게 채우도록 만드셨을 때 인간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육체도요, 이 세상에 있을 때나 누구는 더 예쁘고, 누구는 덜 예쁘다고 그러지, 하늘나라에 가 봐요. 눈, 코, 입 이 다 동일한 사이즈가 되는 게 아니에요. 다 달라요. 그 나라에서는 다 예쁘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게 이 세상에서도 경험이 돼요.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고 지체들 이렇게 보면 안 예쁜 사람이 없어요. 다 예뻐요. 은혜가 없을 때 보면, ‘저 사람에 왜 이렇게 성질머리가 급해!’ 그랬는데, 은혜 받고 보면, ‘어쩜 저렇게 신속해’이렇게 되는 거죠. 사랑이 없이 보면 ‘왜 이렇게 뜬 물에 물탄 것처럼 우유부단해!’하다가, 은혜를 많이 받고 보면, ‘저 자매는 참 신중한 성품을 주셨구나.’하는 거죠.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 은혜받기 전에는 성질 급한 저 인간 때문에 고통을 받는 다고 생각했지만 결단력 있는 내가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신중한 저 사람 때문에 우리가 오류에 빠지지 않고 보호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다 예쁜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영혼도 각자 다 틀려, 육체도 다 틀리게 만든 거죠. 그리고 마지막 날에 영화롭게 되어도 우리 얼굴의 모습이 다 틀려요. 그래도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다 달라서 아름다운 거죠.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때에 세계사 찬란하고 아름다울 텐데,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피조물들이 자리를 꽉 채우게 될 때 얼마나 아름다운 피조물이 되겠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완전함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러나 마지막에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는 그 날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의 모든 피조물들이 원래 하나님이 주신 존재를 회복하게 될 것이에요. 그러면 모두 모두가 전부 아름답게 되게 될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더 많이 존재하니까 찬란하게 빛나는 별처럼 빛나게 될 것이고, 동물은 그보다 못하니까 덜 빛나는 별처럼, 식물은 그만 못하니까 더,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무생물들은 어두운 별처럼 그렇게 반짝거리면서 크기와 그 밝기의 차이에 따라서, 또 인간은 모두 밝게 빛나는 별이라고 했는데 같은 인간은 하나도 없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붉은 색의 별빛을 내고 어떤 사람은 푸른색의 별빛을 내는 거고, 또 어떤 사람은 하얀색의 별빛을 내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주 다양하게 찬란한 밤하늘의 별처럼 그 존재 하나하나가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이에요. 이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란 말이에요.
왜? 이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존재하기 때문에 그 모든 밝음과 존재, 그 영광과 찬란한 이 모든 것들은 각 존재가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여기에 많은 등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것이 스스로 빛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기를 통해 전원을 통해 공급되듯이 우리 모두가 이런 형체를 가지고 있지만 각기 다른 밝기의 영광의 빛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연결된 만큼 찬란한 온 우주 속에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밝기와 빛으로 발산함으로서 온 우주 안에 하나님의 영광의 다양함을 찬란하게 들어내서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온 우주 안에 충만하게 선포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아직 그만한 데에 이르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그 마지막 때에 그 모든 것이 완성될 때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는데, 그 모든 존재들 위에 가장 중심이 되어서, 마치 다른 무수하게 많이 빛나는, 반짝이는 큰 별과 작은 별들, 어둡고 흐른 수많은 크기의 다양한 별들이 마치 이것 하나를 위해서 엑스트라로 존재하는 것처럼 포진하게 되는 그 중심이 되는 존재가 있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리스도예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탁월성이에요. 그게 그리스도예요.
자. 이제 조금 어려워집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왜 그렇게 탁월하신가? 하는 거죠?
이것을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을 해요.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생명 주시기 때문에 라고 대답하면 안 되죠! 왜냐하면, 지금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 똑같이 창조된 한 존재로서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가 존재하는 이 세계에, 이 우주에 수많은 만물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한 빛을 다양하게 드러내고 있는 모든 만물들 가운데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빛으로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기 때문에 그런 거죠.
자. 그러면 들어보세요. 우리가 지금 인간을 밝은 별에 비교했어요. 인간의 다양함은 별들의 빛깔에 비교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찬란하게 비치는 그 별빛이 인간을 통해 비춰지는 하나님의 영광, 즉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면 그 본질은 뭐냐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어떠하기 때문에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냐? 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아름다움이에요. 아름다움은 영광이예요.
자.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인간이 다른, 흐린 별들과 같은 동물이나 식물보다 더 찬란한 빛을 드러내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냐 이것이죠?
두 가지 요소밖에 없어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첫째는 뭐냐면,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존재를 꽉 채웠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그렇게 찬란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이 성도님이 마지막 때에 자기의 존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꽉 채우게 되었을 때에 밝은 별빛이 된다고 칩시다. 밝은 별이 된다고 칩시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이 성도님도 자신의 존재를 꽉 채우게 될 때 또 밝은 빛이 된다고 칩시다. 둘 다 인간으로 정한 한계는 같으니까 같은 빛이 되겠죠? 그런데 이 성도님과 이 성도가 각기 틀린 사람으로 창조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가 붉은 빛을 내면, 여기는 푸른 빛을 낼 수 있게 되겠죠. 그렇게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이예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육체를 입은 인간으로서 태어나셨다는 점에 있어서는 인간의 한계를 가지신 분이었죠. 그렇죠? 그래서 인간의 한계를 가지신 분이었어요. 그리고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까지 인간의 존재를 꽉 채운 채 사셨던 분이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꽉 채우지 못한 인간들이 가득 차있는 이 세상에서 그 인간의 존재를 꽉 채운 존재로서 사셨으니까 당연히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찬란한 탁월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그분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지위나 물질, 명예나 재능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탁월하게 인정을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참 사람으로 오심으로서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이심을 스스로 드러내셨다는 것이죠.
(찬양)내 주님이 입으신 귀한 옷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꽉 채우신 분이예요. 찬란한 아름다움이 되셨던 거예요. 자. 만약에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의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는 교만하게도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요. ‘아하! 영화의 날에는 우리도 모두 예수처럼 되겠구나! 그러면 예수님의 그 탁월하심은 결국은 영화의 날의 우리의 탁월함과 맞먹는 것 이구나’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아주 중대한 교리적 문제가 생기죠. 타락한 이 세상에 육체의 옷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존재를 다 채우지 못한 인간들 속에서 자신존재를 꽉 채우신 인간 예수였기 때문에 그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우실 수 있다면 인간들이 모두 자기의 존재를 회복하는 영화의 날에는 예수는 보이겠어요? 안보이겠어요? 대답해 보세요? 예수님은 보이겠어요? 안보이겠어요? 같이 영광이 같은 정도가 되니까 안보일거 아니예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뭐라고 그래요? 그분은 만물위에 뛰어나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드린 이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또 하나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면,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존재를 꽉 채우고 사신 분일뿐만 아니라 그분은 또한 완전하신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신성은 그 하나님의 존재는 짜여진 한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100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거죠. 그런 숫자로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는 틀이 없어요. 이 만큼의 분량을 채워야지만 하나님 답다. 이런 것은 없는거라 이거죠.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은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의 존재를 꽉 채우고 사셔서 아름다우셨지만, 그 아름다움은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무한대로 꽉 찬 존재였어요.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으신 신의 성품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죠. 그러데 놀라운 일은 예수님이 이 완전하신 신의 성품이 인간의 존재를 꽉 채운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아름다움이셨을 턴데 그것을 인간의 육체아래 감추신 거죠.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에 나오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라는 말의 의미예요. 그래서 드러내기만 하면 정말 찬란해서 눈부실, 그 인간이 존재를 채운 것 정도는 비교도 되지 않을 그 탁월함을 다 보여주질 않으시고 인간의 그 성품 그 아래 예수님께서 스스로 감추신 거예요. 없으셨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감추신 거예요. 아주 밝은 빛이 있는데, 그것을 육체의 껍질 속에 예수님께서 감추신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이 그 우리의 몸이 부활할 영화의 날에는 이것을 더 이상 감추지 아니 하시고 찬란하게 드러내실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겨우 인간의 존재를 꽉 채운 존재로서 찬란하게 될 터이지만, 예수님은 인성으로는 인간의 존재를 가득 채우셨을 뿐 아니라 동시에 신으로서는 신의 충만함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존재를 전부를 회복하고 영화롭게 되어 진다고 하더라도 말일에 나타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찬란한 탁월함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 보여주셨던 탁월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탁월함으로 다가와서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한 탁월함 때문에 성부 하나님도 보이지 않을 정도인 그런 찬란한 탁월함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삼위 하나님의 그 찬란한 위엄과 영광이 그렇게 부활의 몸을 입고 그리고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채우시고 하나님으로서의 그 모든 존재를 온전히 구연하신 그 탁월하심 앞에서 우리의 영광의 빛은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천국에서 누리게 될 모든 그 찬란한 영광의 빛은 근원적으로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함의 빛으로부터 발산 받는 그 영광의 빛이고, 삼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찬란한 영광을 빛을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함을 통해서 그 영원한 무궁 세계에 구연하시는 것이란 말이죠. 그것 이예요. 바로 그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자신의 존재를 안전히 회복하게 될 때에 찬란하게 아름다운 이유는 인간이 인간의 존재를 회복하고 동물이 동물의 존재를 완전히 회복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이 참으로 자신이 돌아가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이예요. 이것이 바로 질서의 완전성 이예요.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 이예요.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영화의 날에 우리의 육체를 모두 부활시키고 우리의 영혼을 온전한 영혼으로 만드셔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으로 가득차게 하실 때에 거기에 교만한 인간이 잇을 수가 없고 분수를 모르고 까부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지금은 많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제자리에 있는 인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얘기죠. 그것이 추하고 더러운 것들을 만들어 내는 거죠. 추하고 더러운 것을 만들어내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파란 새, 예뻐요? 안 예뻐요? 대답을 해보세요. 예뻐요? 안 예뼈요? 이 교회당에 200마리쯤 풀어놓으면 예뻐요? 안 예뻐요? 왜 똑같은 새인데 왜 그래요? 여기가 질서랑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예요. 공원에 풀어놓거나 숲속에 풀어놓으면 나뭇가지를 날아다니면서 너무 예쁜 소리들을 내는 거죠. 거기가 있어야 될 자리예요. 그래서 인간이 하나니 앞에 아름답게 되는 거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 마지막 날에 당신이 있어야 될 자리에 있으심으로서 찬란해 지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그 모든 인간을 비롯한 별처럼 빛나는 그 수많은 존재의 질서를 이루는 기준점이 되시는 거예요. 그 중심이 되는 거예요. 탁 중심이 되시는 거예요. 거기에서 그리스도 예수는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속에 한 질서로서 인간과 같은 한 위치를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질서의 기준이 되시고 모든 질서를 창출하는 근거가 되시는 거예요. 거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함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예요. 그래서 현세에서나 그리고 마지막 부활의 때에나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성은 우주 모든 사물가운데 승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그 탁월성, 모든 만물가운데 중심성, 그리고 모든 만물들을 회복시킬 회복의 씨로서의 교회의 중심성, 그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신앙이예요. 신앙의 힘 이예요. 그러니까 깊고 뛰어난 영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일수록 바로 이 세계 안에서 그 모든 질서와 아름다움의 중심이 그리스도시다는 것과 그리고 그 분은 인간 그 자체의 존재를 가득 채우심으로서 그만 못한 모든 인간들의 탁월한 모본이 되시고 또 하나님 자신으로서 그 무한량한 영광을 찬란하게 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모든 피조물들과 똑같이 육체를 입으셨지만 그 신성에 있어서는 모든 피조물과 어깨를 겨룰 수 없는 비교될 수 없는 타자로서 영광과 위엄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 이 모든 세상의 학문, 이 세상의 모든 물상들을 연구하면서 탐구해가는 모든 학문은 그 종착역이 그 학문의 탐구를 통해서 모든 만물과 모든 피조물들 위에 탁월하게 뛰어난 완전한 존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높고 아름다우심을 발견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예요. 그런데 너무너무 영적으로 어두워서 그분에 관한 수많은 정보들을 접하면서도, 그것을 이용해서 밥먹고 살고 오늘 따뜻하고 행복하게 살고 돈벌고 그리고 이것들을 즐기고 사랑하고 여기에 빠져있지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가라고 가리키는 그 마지막 지점을 향해 못가는 거예요. 그 마지막 지점이 뭐예요? 탁월한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이란 거죠.
그래서 세상 공부로 말하자면 세상의 학자가 더 잘 알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네. 그런데 그들은 100의 지식을 가지고도 탁월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해. 그런데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들만큼 공부 못해. 그런데 10의 지식을 가지고도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뵈옵는다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10의 지식이 아니라 100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10의 지식으로 보는 것보다도 더 찬란하게 볼 수 있겠죠? 예? 그것이 끊임없이 우리들이 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자신에 대해서 주님 안에서 배워가야 되는 것 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는 이미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만드는 인간이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제가 한 일년, 일년반 동안 천체물리학을 공부했어요. 과외선생님을 불러다가. 의도를 가지고 공부했어요. 그런데 잘 가르쳐요. 그런데 별이 이렇고, 별의 움직임이 이렇고, 별이 이렇게 태어나고를 설명해 주지만 나는 그 설명을 듣고 나서 그것이 어떻게 되는지는 그 선생을 통해서 듣고,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내가 설명해 주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학생의 설명을 듣고 ‘아멘, 아멘’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공부하는 것과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서 공부하는 것과의 차이예요.
그렇게 놓고 본다면 한번 조용히 생각을 해보세요. 이 세계는 아름다움으로 꽉 차있는 거예요. 더군다나 회복될 세계는 더 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때요? 교회 와서 겨우 하나님을 느껴지는 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다 느껴지는 것 이예요. 오늘 주일날 설교 속에서 이런 눈들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어요? 스트레스는 마음에 오는데, 그 스트레스는 어떤 스트레스가 오든지 간에 마음에 긴장과 떨림과 고통은 매 한가지야.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고통과 그 다음에 사업이 안 되서 고통 하는 염려가 마음에 주는 이 고통이 그 아픈 느낌이 틀려요? 아픈 느낌이 틀려요? 왜 대답을 못해? 아픈 느낌이 틀려요? 아픈 느낌은 같은 거요. 그 아픈 게 얼마나 아프냐? 혹은 무슨 목적을 위해 아프냐 하는 것은 틀릴 수 있죠? 남편이 사업이 안 되도 이혼을 결심한 사람은 마음이 안상해. 저 인간한번 쪽박 차 바라 그러고 깨고소하다 그러지. 맞죠? 뭐 또 큰 소리로 대답해. 남편이 옆에 있으면 얼마나 무한하겠어요? 그러겠죠? 그러나 남편을 너무 사랑하고 있을 때 남편 사업이 안 될 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겠죠? 그렇죠? 근데, 그 고통이라는 측면에서는 이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고통이나 그 다음에 자기의 육체의 어떤 것들을 위한 고통이나 마찬가지라 이거죠. 그런데 그럼 똑같이 힘들고 괴롭죠? 마음은 똑같이 고통을 받고 똑같이 밥도 안 넘어가고 똑같이 괴로운데, 이 몸은 왜 그렇게 괴로운지를 알아서 암세포 형성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그렇게 못하게 하기도 한다 이 얘기예요. 놀랍잖아요? 사업이 안 되서 뇌졸중으로 열 받아서 죽은 사람은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민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은 사람은 없어요. 애가 나쁜 짓을 해서 화병이 나서 쓰러진 엄마는 있어도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다가 울화통이 터져서 죽은 사람은 없다 이 얘기예요. 없다라고 하는 것이 이게 신기하지 않아요? 난 여러분의 가슴이 이 얘기가 얼마나 와 닿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은 감격이었어요. 우리의 몸이 어떻게 그것을 알아보냐? 야~ 정말 놀랍다. 자식이 말을 안 듣고 나쁜 짓을 하면은 화병이 나서 쓰러지는 엄마들이 있잖아요. 근데 회심하지 못한 구역식구를 붙들고 막 괴로워하다가 화병으로 쓰러진 구역장 봤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놀라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시실과 날실처럼 엮기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거죠. 그 모든 세계가 반짝거리면서 찬란하게 아름다운데, 거기에 우뚝 그 모든 찬란한 아름다운 별빛과는 비교될 수 없는 찬란하고 무한한 빛의 기둥이신 그리스도가 서 있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 세계들이 이 질서를 형성하면서 움직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실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였겠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사람의 눈에는 가난한 집에서 얘 하나 태어났다고 했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렇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아름다우심은 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방점을 딱 찍는 사건이 되는 것 이예요. 찬란하게..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해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이 완성된 세계의 중심이 되셔서 그래서 그 찬란함을 뿜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함에 덕 입어서 우리 자신들도 탁월한 존재들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구속의 길을 열어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를 한 교회 안에 묶어주신 거예요. 그래서 그 속에서 잠시 후 온 우주 앞에서 그 탁월함을 모두 드러내셔서 만물을 화목하게 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들은 먼저 누리고 있는 거예요. 어디서? 교회 안에서 머리이신 예수 안에서 누리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감탄하는 거예요. ‘아~ 높으신 주님!’
그분을 바라보는 거예요. 그 찬란한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하심, 그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타락하지 않았어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 타락해서 자기를 잃어버렸으니 아무것도 아니요. 그렇게 모두 잃어버린 존재를 그 탁월하신 예수님이 자기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구속의 길을 여셨으니까 그 사랑에 덕에 있어서도 그 탁월하심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눈을 들어 이 세상을 보면서 만물들이 그 아름다움과 그 모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의 완성이신, 그 모든 질서의 한복판에 서 계신 부활하신 예수의 탁월하심을 우리들이 볼 수 없다면 만물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그러니까 이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지 않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이고, 이 불행보다도 더 시급히 개선해야 할 더 큰 불행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바로 그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예요. 우리가 바로 성화의 길을 가야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예요.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예요. 충성 되이 섬기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11.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5-18)”.
이처럼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탁월함을 가지신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내려오셨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과 함께 아름다움을 겨루실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게 하셔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아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우리의 육신의 눈이 감당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만물가운데 가장 뛰어난 탁월성을 지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분인지를 모르는 인간들을 위해 친히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내려오셔서 육체로는 완전한 피조물이 되시고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활로 입증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이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 인간과 함께 사시지 않았다면 복음서의 기록은 없겠지요. 만약에 성경 66권 중에서 복음서를 떼어버린다면 복음이 없으니 전파될 선교도 없을 것이고 사도행전도 없을 것이니 말이지요. 또 사도들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복음의 증거도 없으니 교회가 세워질 리가 만무하고 교회에 보내지는 나머지 서신도 의미가 없겠지요. 마지막 날에 위대한 일들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보내주시기 위한 계시니 계시록도 없겠지요. 이 신약성경의 찬란한 기록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도성 인신이 있었기에 쓰여 졌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이 기록에 남아있기에 우리들이 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령의 감화가 있는 사람들은 영적의 차원에서 새롭게 육신의 두 눈으로는 본적도 만진 적이 없는 그분을 더 분명하게 믿음으로 만나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미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는 존재하시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하심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탁월성을 우리에게 보이셨는데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창조세계에 처음으로 개입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만세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계획을 당신의 지성 안에 가지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신 이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 모두의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원래 그렇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는 없지만 성경에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이 계시가 또한 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삼위, 곧 세 인격을 가지셨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이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삼위에서 ‘위’는 원래 자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음식점에 가면 입구에서 물어볼 때. “우리는 세 사람(싼위)입니다.” 라고 대답하며 “위”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것은 곧 ‘우리는 세 개의 자리가 필요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성부가 성자가 계심으로 비로소 성부가 되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성자가 계심으로 비로소 성령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완전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세 분이라고 말하지는 않고 한 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체라는 말은 원래 몸이 하나라는 뜻인데 몸이라는 말이 물리적으로 하나의 몸이 되어 머리가 세 개가 나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에서의 ‘체’는 신적 본질을 뜻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정이 없으신 분입니다. 한정이라는 것은 여기서부터 여기가 유리고 여기에서 이 부분은 플라스틱이고 플라스틱이 끝나는 부분에서 나무의 재질이 시작되는 한 마디로 각각 분리되어 나뉘는 물질의 성질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정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것인 것이 끝나는 것이 한정이지요. 제가 서있는 강대상 옆의 나무 이파리는 여기에서 여기로 끝납니다. 강대상은 여기까지이고 그 경계를 넘어서면 그냥 공간일 뿐입니다. 우리도 당연히 한정이 있습니다. 우리 몸이 끝나는 부분에서는 우리 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정된 존재이기에 여기에 와있으면 집에는 없는 것입니다. 한정이 있으니 공간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삼위일체를 그릴 때 동그라미를 세 조각으로 나누어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데 과연 성부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이 시작하는 지점에서 끝나 한정지어진다면 어떻게 그 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어떤 분이 “세 분 하나님이 합쳐져서 무한해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이 한 분 혹은 두 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니 그것 역시 어패가 있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각 하나님은 모두 무한하고 끝이 없습니다. 성령과 만나는 지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 무엇도 성부, 성자, 성령의 구분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고 순결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존재에 있어서 한정되지 않고 섞이시는 분이신가요? 이것은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끝나는 지점이 없이 성부도 무한하고 성자, 성령 모두 무한하시다면, 무한한 존재가 케이크처럼 쌓여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좌우는 무한하나 상하는 한계가 있는 것이니 그러한 설명도 옳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무한하려면 좌우상하 모두 무한하여야만 무한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는 정말 어려우면서도 신비하며 한없이 오묘한 교리입니다. 성부도 안 계신 곳이 없이 우주에 무한히 가득하시고 성자, 성령도 무한히 가득하시다면 섞여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것도 그릇된 설명입니다. 짙은 포도 원액에 맑은 생수를 따랐더니 10%의 포도원액이 되었습니다. 그 혼합된 액체를 다시 물과 포도원액으로 나눌 수 있을까요? 섞어서 완전히 다른 물질이 되는 것은 다시는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이 섞인다면 제 4의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일까요? 서로를 제한하지 않으시면서 무한하신 하나님, 그래서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무한하시며 또 끝이 없으시고 동일하게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결국은 삼위일체의 결론밖엔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삼위가 모두 무한하다면 성부가 계신 곳에 성자, 성령이 안 계실 수가 없고 성령이 계신 곳에 성부와 성자가 계신다는 것은 필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한 위가 홀로 존재하시지 않으시고 모두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단, 삼위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하나님이 각각 어느 위가 주되게 그 일을 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면 창조에 있어선 성부가, 인간을 구속하는 것에는 성자가, 죄인들을 믿게 만드시는 것에는 성령이, 각 일에 있어 주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한 위가 역사하실 때 다른 두 위를 배제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성부 하나님이 주로 개입하셔서 이 세계는 성부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부 홀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성자 하나님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 안에서 이 세계가 창조된 것입니다. 이 세 전치사 “의하여, 통해서, 안에서”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능력과 지혜에 있어선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의 중보자는 성자에 의하여(‘창조의 중보는 성자에 의하여’, 혹은 ‘창조의 중보자 되신 성자를 통해서’가 아닐까요...), 창조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교통하고 모든 것들 속에 하나님이 친히 계시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써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만물끼리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인간의 자연적인 질서와 도덕적인 질서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지를 설명 드린 것처럼 그런 유기적 사물의 연결이 바로 성령 안에서 창조된 것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중보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중보자란 죄가 들어온 다음에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으니까 할 수없이 중보자가 생겨서 죄 있는 하나님과 죄 없는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릇됩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성자가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자는 우리가 죄를 지은 이후에 비로소 중보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이전 그리고 세상이 창조된 그 처음부터 성자는 이 모든 세계의 중보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하여 이 세계가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이 타락했을 때 성령이나 성부를 사람 몸 입혀서 세상에 내려 보내지 않으시고 성자를 사람 몸 입혀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으니 세상이 죄를 지었을 땐 당연히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속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이것이 성부, 성령이 아니라 성자라는 것은 얼마나 필연성을 가진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조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가 없이는 만물이 지은 바 된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이는 또한 성자하나님을 통하여 창조되신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필요한 것 아닐까요? 창세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데 누구에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 대목에서 신비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씌어진 ‘아마르’라는 동사는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말하다’라는 뜻의 다른 동사인 ‘다마르’는 입을 가지고 어떤 대상에게 언어로 말하는 것이지만, ‘아마르’는 듣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에게 언어로서 말 하는 것만이 아니라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자기 의사소통’의 의미가 모두 이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사소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 성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 중보자이신 하나님이 필요하셨을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죄 짓기 전 아담은 죄는 없었지만 아담이 하는 모든 선한 일이 완전하게 선할 수가 있었을까요? 죄 없는 인간이 아무리 완전하다고 해도 인간이 행하는 어떤 선행이 하나님 앞에 충분히 완전하게 그의 존재와 영광에 부합할 정도로 교통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에 있어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고 인간은 하나님처럼 무한한 존재가 못되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충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충분하였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을 창조한 것이지 인간을 창조한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선행도 죄가 있어 속죄의 피로 씻을 필요는 없었겠지만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께 완전히 올려드릴 수 있을 만한 섬김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에는 더욱 심각해져서 우리가 어떤 선한 동기에서 선행을 하더라도 큰 결함이 있기에 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을 만한 선행이 되어서 그리스도 예수께 올려져 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직접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 올려져서 예수께서 그것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완전하신 하나님이 불완전하고 더러운 죄인들과도 교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할 때 그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영광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중보 되어서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각양 좋은 은혜와 은사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내려져오고 우리의 선행과 아름다운 것과 기도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올려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하게 살아도 그것 때문에 스스로 자기 의를 느끼고 교만해져 가는 사람은 선행은 있으나 그 마음에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이므로 그 선행은 하나님께 올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알아가길 원하십니다. 이렇게 성자께서는 모든 창조세계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이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인간에게 있어서 너무나 절실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도저히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는 진노아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차치하더라도 그 분 앞에 두렵고 무서워서 그분 앞에 설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이후에는 성부의 중보자 직이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미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중보자였던 그분을 아담이 범죄 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은총을 베푸셨는데 육체의 죽음을 요구하시는 것과 함께 두 번째는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구원은 제사 제도를 계시하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중보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그 놀라운 사랑의 깊이는 타락 이후에, 잘못되지 않았으면 잘 몰랐을, 더욱 찬란한 사랑과 탁월하게 아름다운 창조의 으뜸이신 중보자 예수의 머리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을 ‘리 캅투스 라치오(다시 머리되심)’의 교리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째는 창조 때 이미 머리되셨고 망가진 이 세상의 구속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다시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교리입니까? 이러한 교리를 알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더 놀라운 사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왜 탁월하신가?’와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전 시간에 배웠습니다. 이 교리는 월요일 마당 세미나에서 했던 것과 포개어 놓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한 예수교장로회나 열린교회의 머리만이 아니라 온 우주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머리가 되셔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예수가 머리되셔서 모든 세계가 예수님 몸의 지체처럼 창조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인간이 그렇고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서로 서로 연관을 가져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 창조 하셨을 때 가장 예수와 가깝게 창조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삼위 하나님께 가까이 있을수록 하나님 안에 있는 도덕적이고 자연적인 질서들이 아주 섬세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가 마음이 평안한 상태로 가만히 있었는데 누가 와서 우리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울 때 그 욕지거리가 귀(육체)를 통해서 전달 받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맞히는 것은 기억의 작용(영혼)이 밑바닥에서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해석하는 순간 눈을 통해 들어온 나를 비난하는 사람의 입과 귀를 통해 들려온 공기의 울림이 해석되어서 육체와 영혼 사이에 있는 막으로 비유될 수 있는 마음을 파르르 떨리게 합니다. 거기서 슬픈 감정이 막 일어나는데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귀에 들린 것은 육체이고 기억을 더듬는 것은 영혼이고 감정의 출렁거림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영혼에 속한 작용이면서도 육체와 동떨어지지 않고 거기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정보가 육체를 통해서 내려가다가 영혼을 울려서 기억나게 하고 마음이라는 막을 만나 슬픈 감정을 일으키고 난 뒤, 육체와 영혼에 모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막 떨면서 육체에 영향을 미쳐서 혈압이 오르고 근육이 긴장되면서 감정의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이것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육체의 작용이지만 자연적인 질서와 도덕적인 질서가 겹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때 이 사람이 분노한 채 옆에 있는 나무를 붙잡게 된다면 감정의 떨림이 그 나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뜨거운 눈물이 나는 것은 자연(육체의 작용)이지만 분노의 떨림이 나무에 전달되는 것은 바로 영혼의 작용인 것입니다. 도덕과 자연 사이를 뒤엉키면서 어떻게 분해할 수 없을 정도로 도덕과 자연 사이를 뒤엉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도덕과 자연이 한꺼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미움을 당하는 사람보다 더 해로운 것입니다. 진짜로 밉다면 내가 더 건강하게 행복하게 하나님 안에서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수인 것입니다.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잘 사는데 미움을 안고 사는 사람이 원한을 안고 죽어간다면 그것이 행복이겠습니까?
이렇듯 자연세계와 도덕세계는 그렇게 놀랍게 엮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안이라 모든 자연세계도 하나님과는 물론이고 사물들과의 관계가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생물 존재의 양상이라는 것이 모두 다른 존재를 파괴하면서 존재하는 것이 다른 존재를 유익하게 하면서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짐승들이 집을 지어도 고목나무 속을 파고 새들이 벌레를 잡아먹을 때도 나무를 쪼아서 먹으니 나무에게는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가 되겠습니다. 해충이 이파리를 파먹게 되면 나무는 전체 이파리에게 비상경계 체제를 내립니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방식이 서로에게 의존하는 형태가 아니라 서로에게 해를 가하는 형식이 됩니다. 그런 관계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모든 사물들의 아름다운 교통이 끊어진 것이 인간의 죄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다면 고치는 것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고침에서 비롯되어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하셨듯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 세상을 고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어서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그 부활과 함께 형성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창조의 머리셨는데 성자를 통해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이 삼위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을 성자를 통해서 공급되도록 보내주도록 되어있었는데 인간이 타락하자 그 통로가 끊어진 것입니다. 영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영생의 본질은 생명과 사랑인 것입니다. 끊어졌어도 여전히 성자는 만물의 머리시지만 이 상태로는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피조세계가 회복할 수가 없어서 예수님이 아버지에 의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창조할 때 성부가 주도하셔서 성자와 성령이 함께 함으로 창조되었듯이, 구속에 있어서도 성부가 주도하셔서 성자와 성령이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세상이 망가진 것이 결국은 한 사람 아담에 의해서 파괴되었는데 그 사람 한 사람밖엔 없다면 그 사람만 구속하면 되었는데 이렇게 수많은 씨를 퍼뜨려서 온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따라서 살아야 할 인간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긴 했지만 땅을 제대로 정복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창조의 목적에 맞게 세계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망가진 인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하셔야 할 일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셔야 했습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할 때 그것은 두 가지를 내포(하나님과의 회복과 지체들간의 교통??)합니다. (두 가지 의미에 대한 결론이 조금 불분명해서...) 죄가 들어와서 죄를 짓고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수많은 증상들이 생겨났습니다. 콧물이 나고 목이 알싸하다는 것은 감기가 든 것인데 의사가 아니라서 그것이 어떤 바이러스이고 내 몸에 그 바이러스가 있는지 없는지 정밀하게 파악할 수는 없어도 다만 중상을 통해서 감기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수많은 증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가난, 질병, 고통, 인간관계 파괴, 시련 등의 많은 중상들이 그것입니다. 이것들은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영혼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육체가 엄청나게 고생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어서 영혼이 제 기능을 못하니까 육체가 계속 고생하게 됩니다. 대개 이 세상을 고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증상을 고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무지도 퇴치하고 질병을 없애기 위해 의료적인 방법을 써서 도움을 주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에 국한 되는 것입니다. 이미 죄가 들어와서 영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에 영혼(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합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는 현상을 치료하는 종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의 불행과 고통의 원인을 치료하는 종교입니다.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우리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이루신 십자가의 공로를 토대로 성령께서 그 모든 믿는 자들을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또 그들끼리 모두 연합시켜 성도의 교통을 이루게 하시는데 이는 창조될 때 교회 안에 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실 때 성령 안에 계시게 하신 하나님이 성령 때문에 영혼 사이에 교통이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한 자리에 앉아 예배드리고 같이 식사를 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고 아플 때 서로 위로하면 살아가는 모든 육체의 행동들은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다는 것을 우리의 몸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증상이 안 나타나면 우리의 영혼 안에도 없는 것입니다. 열도 안 나고 기침도 안 나고 콧물도 안 나고 춥지도 않고 뼈도 안 쑤신다면 감기에 걸리지 않은 것처럼, 그런 행동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성령 안에서 함께 묶여져 있는 지체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교회 안에서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지체간의 연합은 지금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마지막 날에는 교회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도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지길 원하시기 때문에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이 충만하게 이루어져서 우리들이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도 상호 교통을 회복해서 함께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통해서 자기 회기적 교통을 하는 것이 바로 창조의 목적이고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설명을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필요와 부족이 있어서 물건을 만들지만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무언가 부족해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마치 예술작품이 무슨 용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가의 혼이 넘쳐 무언가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 창조되어 그 자체가 예술가의 기쁨과 감탄이 되듯이 말입니다. 그것이 자기 회기적 교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자기 회기적 교통을 할 수가 없습니다. 헨델이 이사야 53장을 읽다가 뜨거운 십자가의 경험을 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울다가 대곡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일주일 만에 작곡한 뒤, 그것이 초연되고 난 뒤 마지막에 모두가 기립하여 박수칠 때, 헨델이 “오 하나님, 이 작품이 정녕 제가 작곡했다는 말씀입니까?”라고 고백하여 자신의 곡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회기적 사랑이 아니라 직선적 사랑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도 그의 고백록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자, 자! 너희들아, 우리 모두 함께 우리를 내신 창조주를 사랑하자꾸나. 혹시 그대가 지체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본다면 그 아름다움 때문에 지체를 사랑하지 말고 그 아름다움을 주신 하나님 때문에 그 지체를 사랑하라. 그대가 발견하는 좋은 모든 것들을 볼 때마다 그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 좋은 것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하라.”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교회를 옮길 때 버선발로 가방을 받으러 나오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이 목사를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이 그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거기서 사랑이 툭하고 끊어져서 아름다움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될 때가 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 언젠가는 그를 여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실망시키지 않는다 하여도 그 사람이 공간 속에 모습을 나타내 사랑해보라고 해도 시간 속에서 완전성을 잃어버려 사라짐으로 목적 없는 사랑이 되도록 배반해 버립니다. 그 사랑은 갈 데가 없는 사랑이 되는 것, 그것이 악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서 훌륭한 면이 있는데 그 사람을 고매하게 성화시킨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면 원래 사랑했던 하나님은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린다거나 공간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시간 속에 사라지므로 우리의 사랑을 대신하는 분이 아니므로 하나님을 여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잃지 않고 사람도 잃지 않는 놀라운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실망한다는 것은 사랑의 동기가 주님이 아니고 섬김의 동기가 주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먼저 계신 목사님께 너무 충성하신 분이 다음에 오신 목사님께는 견딜 수 없는 가시가 된다면 그 섬김의 동기가 주님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동기를 사람들은 혼돈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누가 자기의 책을 읽거나 설교나 강연을 들을 때 ‘참, 훌륭합니다.’라고 할 땐 그 사람이 제법 똑똑한 사람처럼 여겨지고 괜히 헐뜯을 땐 ‘지식이 부족하고 아직 모자라서 나를 헐뜯는 구나‘하는 마음이 든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면 변함없이 그 길을 계속 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시므로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중간적인 과정이며 시작이고 머리가 되심을 통해서 모든 창조 세계의 머리가 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새 하늘과 새 땅 위에서 다시 머리가 되시면 그리스도 예수만이 탁월해지신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들이 아주 탁월해지게 됩니다. 모든 만물이 탁월해지면 예수 그리스도가 빛을 잃으시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어떤 가정이 지하실 방에서 고생하며 살다가 노력의 복을 주셔서 새로 지은 32평 아파트에 꿈같이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마지막 잔금을 내고 올라가봤더니 소유한 짐들이 그 아파트의 격에 맞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누군가 고급 가구를 선물하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고급가구가 그 옆에 있는 볼품없는 낡은 가구와 짐짝들과 서로 어울리겠습니까? 이윽고 남편의 사업이 번창하여 모든 가구들을 그 이태리 옷장에 맞추어 탁월한 가구를 배치하고 최신형 가전제품과 조명까지 갖춘다면 그 때에야 비로소 모든 것들이 함께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의해서 완성되고 완전하게 회복되어 아름다운 인간이 되면 주님이 그 탁월성의 빛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 수준에 맞지 않았던 창조세계가 찬란하게 회복될 때 그때야 비로소 주님의 탁월성이 더욱 돋보이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질서와 자연적인 질서가 거미줄처럼 불이 들어오면서 모든 만물들이 찬란한 완전성의 빛을 자랑할 때 그 가운데 우뚝 서 계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인성과 신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탁월하심이 천상의 세계와 지상에 있는 모든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며 모든 완전케 된 존재 위에 탁월한 완전함으로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계시며 영원하시게 됩니다. 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비쳐오는 찬란한 영광의 빛 앞에서 모든 세계가 아름답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교통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 그런 회복을 위해 먼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교회는 그분께 붙어있고 그분에게서 사랑과 생명을 충만히 받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안으로는 성령 안에 있는 교회가 되고 밖으로는 그 생명과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성령 안에 있지 않는다면 아무리 선교와 농촌봉사를 하더라도 생명과 사랑은 가지지 못하고 맨몸만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세상의 회복을 위해서 거의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조국 교회, 교파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이름 부르는 모든 교회, 심지어는 진리의 가르침에서 빗나간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참되신 예수그리스도께로 다시 참회하고 돌아와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반이 다른 이교도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저들이 찾는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참된 진리의 빛으로 돌아오도록 피부 색깔이 틀리고 세대가 틀리고 시기가 틀려도 그 모든 교회들이 이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어 그것들이 어느 교회를 통해서든지 누구를 통해서든 교회 안팎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우리는 그들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인간의 죄에 의해서 파괴되고 억눌려있는 세상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로 다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되는 것이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같이 이 쓸데없는 인간들을 생명주시고 사랑주시는 도구로 부르신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아니었으면 도저히 생명과 사랑을 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흘러가도록 하시므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생명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하십니다. 성도의 이 지위와 인간으로 창조하신 이 영광스런 하나님의 창조를 인하여 기뻐하고 깊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12.하나님을 아는 것과 선악의 판단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우리가 지난 세 시간에 걸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공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질서는 자연적인 질서와 도덕적인 질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모든 두 가지 질서 가운데서 가장 탁월하고 중심이 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시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번에 이어진 세 번의 설교는 여러분들이 한번에 버리지 마시고 테이프를 사든지 도서관에서 빌리든지 인터넷에 들어가던지 반복해서 들으시면서 그 진리를 여러분들의 것으로 삼으셔야지만 나머지 모든 기독교의 진리들을 이해하는데 중심이 설 것이다 이렇게 믿어집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이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무엇을 삼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땅에 많은 인간들을 창조하셨고 이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정말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혹은 철학자들이 정확하게 말하면 교부들이 인간을 깊이 탐구하면서 차라리 인간을 작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예요. 이 시간에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그걸 다 설명하면 여러분들은 또 알아듣겠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요새 계속 감탄하면서 지내는게 ‘아~인간은 정말 작은 하나님이구나’ 인간이 어마어마한 존재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요새 제가 감격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그 어마어마하게 창조된 인간이 그렇게 위대하게 창조되었고 하나님 닮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창조세계를 다 망가뜨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개, 돼지나 소, 말 숲속을 뛰어다니는 사자나 코끼리가 뭘 망가뜨리겠어요? 기껏해봐야 풀 포기나 꺾고 나무나 부러뜨리는 정도겠지 뭘 망가뜨리겠어요? 그런데 인간은 육체의 힘에 있어서는 한 마리 소에 미치지도 못하고 단단함에 있어서는 한 개의 바위덩어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러한 미약한 존재인데도 이 존재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모두 망가뜨릴 정도의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거란 말이죠. 인간 이외에 모든 피조물에게는 영혼이 없어요. 그래서 그것들은 그냥 생명을 유지하면서 종족을 보존하면서 자연의 질서에 속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동물들에게는 약간의 뛰어난 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그것에는 전혀 비할 수 없어요. 인간만 영혼을 가진 존재로 창조된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기계나 꼭둑각시처럼 만들지 아니하시고 당신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다면 당신을 닮은 생각, 행동, 이런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야지만 하나님이 위탁하신 창조의 목적을 구현할 수 있을 것 아니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세 가지 대상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그 의도대로 이 땅에서 섬기면서 살아갈 수가 있도록 되어졌다 이거죠.
첫째 대상은 뭐냐하면 하나님이예요. 자기 자신과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나와 세상을 창조하셨다 라는 정도만 아는 것을 가지고는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 수가 없어요. 하나님 명의로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 라는 것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을 직접 다스리신다면, 인간을 대리자 삼지 않으시고 직접 가꾸신다면 어떻게 가꾸실까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인간과 그리고 및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리고 하나님이 이 사물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잘 알아야지만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끔 다스릴 수가 있었던 것이예요.
(예화) 만약에 여러분들이 큰 사업을 하다가 자식에게 그것을 물려줬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자식이 허랑방탕해서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온통 관심은 회사 돈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러면 물려줘 봤댔자 그거 불과 10년이 가지 못해서 다 거덜내고 털어먹고 망하거나 유치장에 들어가 있을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그 사람이 가업을 자기 새끼에게 물려줬는데 그 자식이 아버지 못지않게 그 가업을 잘 이어서 종업원들을 훌륭하게 먹여살리고 백성들에게 고용의 기회를 주고 그래서 그 회사가 발전해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야 하겠어요? 맨 처음 그 회사를 만든 아버지의 창업의 정신, 그리고 경영의 철학, 그리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물건들을 정성을 들여서 생산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장인정신, 종업원들을 사랑하는 부모와 같은 마음, 나라에 애국하고자 하는 나라를 아끼는 마음, 이러한 모든 비전을 자식이 그대로 물려받은 가운데에 그것을 더 잘 구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지만 아버지를 대리해서 대를 이어서 그 가업을 번영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아요?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는 그것이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 공장 주인이 내 아버지지’ 이런 정도를 아는 것으로는 안된다 하는 것이죠. 그렇죠? 그거예요. 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의 핵심은 이미 그런 종류의 앎이라면 거기에는 초월적인 사랑이 내포되어 있는 거예요. 자~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착한 아들이 있어서 아버지의 창업의 정신, 경영의 철학, 종업원들을 아끼는 마음, 제품에 대한 장인 정신, 국가에 기여하고자 하는 충성스러운 마음, 세계화 전략의 비전...이런 모든 것들, 아버지의 열정을 이해한다면 그 자식이 아버지를 사랑하겠어요, 안 사랑하겠어요? 그렇죠. 아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 없이는 불가능하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의 다름이 아니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하나님 대신해서 가꾸고 돌보기 위해 주신 인간이 그 목적을 위해 지녀야할 첫 번째 사명이예요.
두 번째는 뭐냐하면, 창조하신 이 모든 만물들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만 가꾸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지식이 없이는 안되는 거죠. 저는 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가꾸는 것은 잘 못해요. 나는 이상하게 특별히 길러본 적도 없지만 이상하게 화초들이 내 곁에 있으면 죽어요. 내가 너무 예뻐서 질투하나봐~ 어쨌든(말이 안된다고 계속 궁시렁들 대시는데...)...좋아요. 이 교회를 지을 때 열린공간 귀퉁이가 지저분한 골목이 보여서 교회가 ‘대쪽같은 신앙’ 이거 얼마나 좋으냐 해서 ‘대나무를 심어주쇼’ 했어요. 대나무를 한 열그룬가 사다가 심었어요. 시퍼렇게 자라는데 그 옆에 갈 때마다 기분이 참좋아요. 대나무가 잎사귀 소리도 나고...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시들시들하면서 잎이 떨어져요. 확 뽑아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살리면 참 좋겠다 그랬더니 사모 구역에서 한약재를 잘 삭혀서 거기다가 부어줬어요. 그랬더니 시퍼렇게 다시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니 ‘아휴~ 저 대나무를 잘 살리고 돌보아야 하는데...’라는 사명감이 있어도 어떻게 거름을 주고 돌보면 그것이 잘 살아날 것인가 하는 것을 모른다면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겠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들의 이치를 잘 깨달을 수 있도록 놀라운 지성을 하나님이 주신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역사적인 건물들을 보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건축이나 그 다음에 수학이나 학문 이런 많은 것들이 천천히 진보되어 온 것이 아니라 한번에 휙 뛰어올라서 단번에 인간이 그 지성을 발휘해서 놀라운 문명의 세계를 만들어 간 거예요. 아주 오래전 일인데 텔레비전에서 조선시대 초기에 세종대왕 그때 쯤이예요. 얼마나 수학이 조선시대에 발달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 다큐멘터리를 했어요. 그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던게 뭐냐면 서양에서 미분과 적분, 다시 말해서 이런 물체들의 부피나 이런 것들을 재는 것들이 수학적으로 적립된게 뉴턴 와서거든요. 그런데 그 역사 프로그램에서는 이미 조선시대 초기에 15세기 초죠. 이때 이미 조선 시대 수학자들이 그러한 물체들의 체적을 잴 수 있는 미적분을 했다는 증거를 거기다가 대는 거예요. 그리고 계산기를 만들어서 사용한 거예요. 그게 뭐냐면 산목이예요. 여기다 이렇게 도표를 그려놓고 나무 가지를 놓고 몇 곱하기 몇은 산목을 이렇게이렇게 움직이면서 나중에 이동한 나무의 개수를 가지고 일십백천만 십난 단위로 나중에 한꺼번에 계산이 딱 나오는 거예요. 깜짝 놀랬어요. 이게 결국은 뭐냐하면 인간의 지혜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서히 서서히 발전해 와서 지금 우리들이 최고로 발전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착각이예요. 물론 미사일, 달나라 가는 것, 펑펑 터지는 휴대폰 이런 것들은 지난 세기에 못 누리던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인류가 누리고 있는 수많은 문명 가운데 일부일 뿐이지 전체적인 것 아니란 거죠. 제가 한 3년 됐나요. 휴가 기간중3.에 유럽을 다녀오게 됐는데, 거기에 가서 저는 역사를 보는 눈이 한꺼풀 벗겨지는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경험했어요. 여러분 목욕탕에 가면 굉장히 기분 나쁜게 있죠. 천정에서 물 떨어지는거, 목욕탕은 따뜻한데 겨울에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차가워요. 그게 목욕탕을 돌아다니는 사람 위에 뚝뚝 떨어져요. 아주 기분 나쁘죠. 지금이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아직도 목욕탕에서 그 문제를 해결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유적지에 가니까 이미 벌써 주전 2세기, 3세기경에 이 문제를 다 해결한 거예요. 어떻게 해결한 거냐면 목욕탕이 있는데 목욕탕의 천정을 이렇게 둥글게 만든거예요. 둥글게 하고 둥글게 한 천정을 편평하게 한 것이 아니라 둥글게 한 천정을 다시 홈을 파서 둘렀어요. 그러니까 물방울이 맻히면 뚝 떨어지는게 아니라 맺히자 마자 그 골을 따라 옆으로 모여서 흐르게 되어 있어요. 이 모인 것들은 흘러서 목욕탕 가장자리 홈을 파서 굴러온 물방울들은 모여서 그 가장자리 홈을 따라 한 곳으로 흘러가게끔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게 이미 주전 5세기, 4세기, 3세기 이미 그때 벌써 이런 공법들이 이루어진거예요. 그 목욕탕을 보고 오늘날 사우나와 너무 똑같아서 충격을 받았어요. 너무나 똑같아요. 사우나 안에다가 시계까지 만들어놨어요. 구멍을 세 개 뚫어놓고 이쪽 구멍에 햇빛이 비추면 아침, 중간에 비추면 점심, 저쪽에 비추면 저녁이예요. 목욕을 하고 나오면 그 옆에는 다방이 있어요. 그래서 쥬스를 팔아. 락카도 있고... 똑같아요. 그게 2천년의 간극을 뛰어넘은 거예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사물들의 이치를 깨달아 알 수 있는 놀라운 지성을 주신 거예요. 그런 사물들을 잘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창조의 목적에 맞게끔 가꾸고 다스릴 수 있는 놀라운 실력들을 발휘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에 모든 생물들에게 주신 공통된 명령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는 것이예요. 인간에게도 그 말씀을 하시고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동물과 식물 심지어는 바다에 있는 것들에게 까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세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것 말고 두 가지를 더 명령하세요. 그게 뭘까요?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이였어요. 나는 이 두 말, ‘정복하라 다스리라’가 이미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을 염두해 두고 계셨다고 하는 암시로 여겨져요. 정복은 아직 가보지 않은 땅을 힘을 가지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스리는 것은 그렇게 정복된 땅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대로 이 세상의 자연 사물들이 존재하고 번성하게 하고 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들도 하나님이 의대하신 대로 관계를 지어서 결국은 인간의 손에 의해서 생육하고 번성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새롭게 정복해 나가고 정복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관계를 갖도록 다스려서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계획과 뜻이 피조 세계 속에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원하셨던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인간에겐 비상한 지혜를 주셔서 이 모든 사물들을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놀라운 힘과 능력을 주신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대단한 것이예요. 물론 하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처럼 놀라운 기술의 발전들을 가져왔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것이죠. 이것이 학문과 모든 분야에 있어서 이루어지는거죠. 그러면서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놀랍게 전개되어온 거예요. 지금으로부터 몇 십년 전이예요. 제가 지금 연대를 잊어버렸어요. 몇 십년 전에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때였어요. 아주 깜짝 놀랄만한 일이 발생했어요. 알프스쪽에서...그게 뭐냐면 등반하던 사람이 조난된 사람을 발견하고 신고를 했어요. 그래서 경찰이 가서 봤는데 좀 조난된지가 오래된 것처럼 보였어요. 꽁꽁 얼어 있었어요. 몸이...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어쨌든 조난된 사람이니까 건졌는데 사람의 모습이 어째 틀려요. 그래가지고 결국 과학자들을 부르게 되었고 의사들을 부르게 되고...이렇게 이렇게 됐는데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린 결과 3천년전 사람이라는 판단이 내려졌어요. 3천년 전에 거기를 오르다가 눈 사이에 빠져서 얼어서 부패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얼어서 일반적인 학설에 의하면 얼음 속에 들어가도 5백년이면 완전히 부패한다고 본대요. 그런데 3천년이 지났는데 거의 생생한 생시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학자들이 깜짝 놀란 것이 뭐냐면 몸이야 3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이겠지만 깜짝 놀란게 뭐냐면 그가 입고 있는 옷과 가지고 있는 장신구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교하더라는 거죠. 3천년 전이면 주전 10세기니까 다윗 시대란 말이죠. 그러니까 아주 정교하게 되어있던 거죠. 그러니까 그 기술이라고 하는 것도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조금씩 조금씩 발전한게 아니라 한번에 확 발전한 거죠.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에 가인의 자손들이 곧 성을 만드는 장면들이 나와요. 그거는 보통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예요. 수학이 발달하지 않고는 건축술이 절대로 발달할 수 없어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트렁크만한 벽들을 2백개 쌓으라고 한다면 온전히 쌓을 사람이 없어요. 쌓아놔도 며칠 있으면 우루루 무너집니다. 그게 거의 과학에 가까워요.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면 커다란 화물선이 컨테이너를 차곡차곡 쌓고 운반하잖아요. 그러한 운반선이 아주 커다란 배일 경우에는 그 컨테이너를 1만개씩 실어요. 상상이 안가죠? 1만개씩이나 실을 수 있는 수십만 톤의 배가 있어요. 이 컨테이너는 하나하나 올리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사이사이 네 귀퉁이에 파이프가 올라와서 거기에 딸깍딸깍 끼어서 올라가게 되어있는 거죠. 그런데 이것을 공장에서 만들다가 몇 밀리(미터)만 오차가 나면 그대로 톱으로 잘라서 이 컨테이너를 폐기해요. 이유가 무엇때문일까요? 그게 몇 밀리 차이나는건 눈에 뵈지도 않지만 이십층 삼십층 쌓아놓으면 무너져 버리는 거예요. 바다로 가다가 쌓아올린 것이 치수가 몇 밀리씩만 차이가 나면 누적되서 올라가면 이렇게 화물이 기울어지면서 무너지는 거죠. 그래서 컨테이너가 굉장히 과학적인 제도 속에서 생산이 되는거죠. 아주 정밀하게 생산이 되는 거예요. 그런 수학이 발전되지 않으면 절대로 건축 기술이 발전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성을 세울 수가 없는 거래요.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지혜를 인간에게 주신 거죠.
마지막 세 번째가 뭐냐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기를 아는 지식을 주신거예요. 동물들은 반성이란 것이 없어요. 인간은 반성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객관화 시켜서 볼 수가 있는 거죠. 이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예요. 영혼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거죠. 이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을 닮은 거예요. 하나님은 당신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하시는 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반성하셔서 뉘우칠 것은 없지만은 항상 당신 자신이 하나이신 동시에 당신이 당신 자신을 볼 수 있는 자기 회귀적인 반성을 가지고 있단 말이죠. 인간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반성의 놀라운 힘은 어디에서 나오냐면 내가 하나인데 의식하는 나와 그 다음에 나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의식하는 내가 실제로 존재하는 나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심지어는 자기를 꾸짖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예요. 그런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비춰주시는 계시의 빛 안에서 자기가 좋고 기뻐서 어떤 행동을 하고는 다시 그 계시의 빛 아래서 자신을 객관화 시켜서 자기를 교정하고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거예요. 그런 기능을 주시지 않으면 한번 이탈한 인간이 꾸준히 그 길을 가서 결국은 창조의 목적을 한 번만 벗어나면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거죠. 그런 능력을, 자기 자신을 아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않았다면 인간은 참회도 할 수 없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을 거예요. 그래서 보면 아주 악한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줄을 모르는 거죠. 그리고 항상 자신이 옳고 자신이 분리가 안되고 언제나 하나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반성이 일어나지가 않는 거예요. 자신이 항상 옳고 자신이 가는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그런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성향으로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자~ 이런 놀라운 능력을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 모든 창조 세계 안에서 위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가 어떤 위치인가 하는 것을 알고 이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과 계획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자기를 알 수 있는 반성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렸더라면 이렇게 다스리셨을거야’ 하고 그 세계를 가꾸어 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사명이란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그 완전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완전이 아니라 발전할 수 있는 완전이었단 말이죠.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곡괭이 하나를 들고 부인하고 올라가서 이제 산이라도 깎아서 감자라도 심아 먹으려고 올라갔어요. 그런데 산의 반은 흙이고 반은 돌멩이예요.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곡괭이를 내리치면서 큰 바위는 뽑고 작은 돌멩이들은 건져내면서 그렇게 화전이라도 일궈먹을 셈으로 불을 태우고 나무를 불태우고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에 맘씨 좋은 사람이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감자라도 일궈 먹으려고 애를 쓰는 그 사람들이 불쌍해서 이리로 오라고 해서 데리고 내려갔어요. 그래서 밭을 하나 줬어요. 보니까 오랫동안 일구던 밭이었는데 봄철에 심으려고 깨끗이 쟁기질을 해가지고 보드랍게 흙을 다 파서 언제 거기 뿌렸는지 채소 씨까지 뿌려가지고 싹이 요만큼씩 착착 자라나고 있는 거예요. 자~ 이제 가시넝쿨 속에서 그거라도 불태워 가지고 바위를 걷어내고 돌멩이를 치우면서 감자라도 일궈먹으려던 사람에게 산에 있는 돌가닥 밭에 비하면 여기에 이렇게 쭉 펼쳐져서 깨끗이 정리되고 비료까지 주어서 싹까지 나고 있는 이 밭은 완전한 밭이예요, 불완전한 밭이예요? 완전한 밭이잖아. 그런데 자기가 더 잘 가꾸므로써 여기에 없는 것을 여기에 더 집어넣을 수는 없지만 심어 놓은 이 채소를 잘 가꾸면 이것이 싹이 아니라 점점 자라서 줄기 가지 잎을 뻗고 거기에서 여러 가지 곡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사람 앞에 있잖아요. 창조 세계가 그랬단 말이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이것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창조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한편으로는 피조세계를 이해하는 지식을 가지고 자기 반성의 태도를 가지고 이 피조 세계를 잘 돌보면 이것은 점점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어서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피조 세계가 될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완전한 세상으로 창조하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인간에게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명령을 내리셨던 것이예요. 그런데 인간에게 이런 놀라운 능력을 주셨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죄가 들어오게 된 거예요. 죄가 들어오자 제일 먼저 망가지게 된 것은 인간의 영혼이야. 이렇게 위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사물들의 이치를 이해하고 자기를 반성할 있는, 자기를 알 수 있는 이런 능력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었는데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사물들을 바르게 알고 자기 자신을 알면 천상과 이 세상의 존재를 다 이해한 거예요. 그러면 자기의 존재의 자리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안다 이거예요. 그런데 죄가 들어오게 되니까 하나님을 몰라보게 되었어요. 사물들의 이치들에 대해서는 그래도 꽤 아는 것들이 남아있지만 그러나 본래 사물들의 이치를 아는 방식이 죄가 들어오기 전과 죄가 들어온 후에는 틀려져 버린거죠. 무슨 뜻이냐면,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렇게 꽃이 아름다우면 ‘야~ 이 꽃이 참 아름답고 향기도 좋구나. 이 향기는 꽃 속에 있는 무슨 성분 때문에 나오는 것일까?’ 이런 것들을 탐구하고 알 뿐만 아니라 이 꽃들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드신 하나님이 그 뒤에 계시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사물 하나하나를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단절되지 않는 가운데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면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자~ 이런 꽃이 있는데 ‘꽃이 참 예쁘다. 여기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향기는 바로 자기를 괴롭히는 해충들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뿜는 물질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는 수준에서 그쳤을 때와 이 꽃의 아름다움은 결국은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의 반영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 이 꽃을 아름답게 만드셔서 다른 꽃들 옆에 있게 하셔서 창조세계를 빛나게 하신 다는 사실을 알 때 이것을 아는 깊이는 틀리는 거죠. 의미가 틀리는 거죠. 그렇죠? 정말 틀리죠. 그러니까 이 뒤에 계신 하나님을 모를 때에는 이 물질의 자연적인 의미만 전달이 되지 도덕적인 의미는 전달이 안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만 알 경우에는 ‘참 아름답구나, 예쁘다’ 이런 정도만 알지만 이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아~ 나는 얼마나 한 송이의 꽃만도 못한가! 풀 한 포기만도 못한 존재인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잖아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을 올바로 아는 것이지 단절됐을 때 이미 이 지식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참된 지식으로서는 결함을 가진 것이 되는 거죠.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이렇게 지식이 서로서로 단절되게 된거죠. 그리고 지적인 능력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떨어지게 된거죠. 그렇고 보니까 그 다음에 무슨 문제가 생겨나게 됐냐면 창조된 이런 사물들의 의미를 알 뿐 아니라 이것들을 내신 하나님 까지도 창조물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타락하기 이전에는, 무엇을 보고 알게 되던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도록 자연적인 사물과 사물의 이치와 도덕적인 이치가 항상 하나였어요. 그런데 자연적인 이치는 어느정도 깨닫는데 이것을 내신 이도 모르고 창조하신 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거죠. 그러고 어떻게 되냐하면,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이런 ‘사물들은 나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라고 하고 질서를 다시 정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창조될 때 똑같이 창조된게 아니거든요. 왜? 그렇게 하나님이 세상을 간단하게 만들질 않으셨어요. 너무나 뛰어난 솜씨로 다양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다양한 재능과 다양한 관심사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알록달록 하게 창조하셔야지만 이 세상을 각자각자 색깔에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각가 다른 곳을 정복하며 다스리고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죠.
(예화) 자~ 세 사람이 산을 여행한다고 칩시다. 한 사람은 식물학자, 한 사람은 지질학자, 한 사람은 미술가예요. 똑같이 세 사람이 산을 여행할 때 세 사람의 관심사는 틀려요. 식물학자의 관심은 풀, 꽃, 나무, 이파리, 뿌리 이런 것들이예요. 두 번째 지질학자의 관심은 나무, 풀은 상관도 없어요. 깎아지른 절벽, 토양의 색깔, 바위의 종류, 그 다음에 바위의 색깔, 거기에 포함된 금속들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아요. 미술가는 그런 것들 필요없어요. 산과 산의 곡선, 골짜기와 골짜기의 대칭과 비율 그리고 이쪽 산의 색깔과 이쪽 아래 있는 풀밭의 색깔 이런 디자인에 관심이 많을 것 아니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셨다면 토양이나 이런 것들을 탐구해야 할 것이고, 식물도 돌보아야 할 것이고, 시간 없어서 빼었지만 동물학자도 거기 들어간다고 한다면 풀, 꽃 아무 상관없고 뛰어다니는 다람쥐, 청솔모 그리고 여기저기 나타나는 멧돼지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을 것 아니예요? 이렇게 다양한 관심사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꽂히는 사람들이 아주 다양하게 많아야지만 하나님이 이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지 않느냐는 얘기예요. 나라가 모두 군인이면 나라가 어떻게 나라가 되겠으며 나라가 모두 빵 만드는 사람이면 나라가 어떻게 나라일 수 있게느냔 말이죠. 이해가지죠? 그래서 하나님이 다양하게 만드신 거예요. 죄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사람들은 함께 모이지 않고 굉장히 많이 흩어졌을 거예요. 어떤 사람은 이 꽃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것을 창조하신 것을 너무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거죠. 그러면서 이걸 어떻게 더 잘 가꾸어서 더 아름다운 품종으로 만들어서 이 땅에 이런 향기로운 백합을 온통 퍼뜨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겠지만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보면서 향내를 맡으면서 이 향기를 여기만 두지 않고 모두 나누어 가져서 사람들이 원하는 때에 이 백합 향기를 만들 수 있을까...말하자면 향수 이론가가 되는거죠. 이런 식으로 다양하게 접근을 했을 것 아니예요. 그리고 결국은 어떤 사람은 꽃 하나를 보면서 이 꽃의 여섯 개의 이파리의 모양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어떤 사람은 색깔 때문에 찬양하고 어떤 사람은 향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어떤 사람은 꽃잎의 비율 때문에 하나님을 노래하고...이렇게 됐을거란 거죠. 그렇게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저렇게 재주를 가지고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구현해 갔을텐데...죄가 들어오게 된거죠.
죄가 들어오게 되니까 이번에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게 된거죠. 죄가 들어오게 되니까 그렇게 다양하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들이 다양하게 악이 되어서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악들을 이 세상에서 만들어 내는 거예요. 일부러 그렇게 죄를 지을려도 그렇게 다양한 죄를 지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 죄들이 인간의 관심사에 따라서 무엇을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든지 간에 그것을 통해서 죄를 짓는 거예요. 컴퓨터 맨날 만지작 거리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뛰어나가서 부동산으로 사기치고 그럴 수 없어요. 결국 컴퓨터 만지던 사람은 컴퓨터 가지고 사기치는 거예요. 기계를 만지던 사람은 어떡하든 기계를 만지다 사기를 치는 거예요. 기름을 주무르던 사람은 가짜 기름을 만들어서 어떡하든 사기를 치는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빼어난 재능 이것들을 이용해서 죄를 짓고 창조 세계의 마지막 목적이 자기인 것처럼 수많은 죄가 분출하게 되는거죠. 그래서 결국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 다양성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웠던 세상이 죄가 들어오면서 부터는 그 다양성 때문에 아주 흉악한 죄들이 그렇게 범람하는 죄가 창궐한 망가진 세상이 된거이죠. 고통스런 세상이 된거야. 그러면 하나님은 이렇게 각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끊어진 상태에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인간들 그래서 결국은 크고 작은 죄, 알록달록 한 수많은 죄들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는 정반대로 세상을 끌어갈 때 하나님은 좌시하고 침묵하시는가? 만약에 그러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사람들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실 것인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13.선악의 판단기준 (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세계는 자연적인 질서와 도덕적인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궁극적으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그 질서를 이해하고 그 질서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자면 매 순간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삶인가 하는 것을 물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매 행동 하나하나마다 이것이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를 판단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들은 없고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따라서 살면 그것이 곧 악한 삶이 된다고 하는 것을 성경이 오늘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악한 삶을 영위하게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한 마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면 정말 선악의 판단을 위한 기준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존재한다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답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악을 위한 판단기준은 결국은 실제적인 인간사회에 있어서는 법이 되겠죠. 그렇죠 법이 어떤 것은 악이고 어떤 것은 선이라는 사실을 판단해 주기 때문에 법은 최소한 도덕이라고 가르치는 것이죠. 법을 기술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서 이 사회를 통솔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느냐 그리고 그것을 변화하는 사회 속에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이제 법과 관련해서 많은 그 분과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법을 어떻게 잘 만들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법제정 일원이겠지만 만들어진 법을 어떻게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끔 해석을 해서 모든 사람들의 삶을 안정되고 행복하게 할 수 있겠느냐 라는 것은 법해석학이라는 학문이 담당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것은 너무나 세부적인 것이고 과연 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제정할 근거를 갖는 것이고 그 법을 세우기 위해서 선악의 기준 법을 세우는 정신 같은 것들은 어떻게 세워지고 형성되는가? 또 판단되는가? 라고 하는 부분은 법 자체 안에서의 문제를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죠.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법철학이라고 합니다. 이 법철학에서는 법이 어떻게 해서 무엇을 근거로 이것은 범법행위고 이것은 착한행위다 라고 하는 것을 법이 명시할 수 있는 그 근거가 도대체 무어냐? 그러면 그 근거는 많은 시행령과 규칙들은 법을 근거로 형성되고 많은 법률은 국가의 최고의 법인 헌법을 토대로 구체화됩니다. 그러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헌법을 규율하는 그리고 헌법에 입각해서 형성되는 많은 법률들 속에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제공해주는 근거가 있을 텐데 있으니까 판단을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게 뭐냐? 이것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이론이 법철학 안에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법사상이고 둘째는 실증법사상입니다. 실증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실제로 법이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거죠 그러니까 법률로 제정된 모든 것들은 실증법이에요 실제로 정해진 법이라이거죠 실체를 가지고 있는 법이에요 애매모호한 게 아니라 이것 되고 이것 안된다하고 딱 부러지게 법률이 명시한 것이죠. 그 실증법이론에 의하면 법률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공동체의 규약이기 때문에 국가라는 공동체가 합법적인 절차에 걸쳐서 이러저러한 법률을 만들면 그걸로 끝이지 그걸 무슨 기준에 의해서 만들었냐 같은 것은 따지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기준이 되어서 선악을 판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들이 이제 합리주의가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받아드렸어요 그러다가 보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냐 하면은 사회공동체 국가라고 하는 것이 항상 좋고 올바르게 법을 만드느냐하면 그게 아니라 이상한 힘이 작용해서 세월이 잠시 흐르고 나면 매우 나쁘다고 판단을 받을 수 있는 법들을 만들어 내는 거죠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박정희대통령이 계속 대통령 할 수 있다고 길을 열어 놓은 유신헌법 같은 것, 그다음에 일본의 군국주의 헌법 같은 것, 그리고 독일 나치치하에 이루러진 법들, 이태리 파시즘치하에 만들어진 법들, 어떤 독재국가라도 법 없이 나라를 통치한 적은 없어요. 그건 최소한 그렇게 되고 보니까 이 실증법이라고 하는 것을 그냥 국가라는 공동체에 맡겨주어서 그냥 절차에 따라서 법만 만들면 그걸로 끝이지 그게 왜 생겼는지 그런 거 물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이 질문이 그런 이론이 무색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인제 현재에 와서는 실증법사상이 많이 쇠퇴하고 오히려 자연법사상으로 회귀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난 거죠 그럼 자연법사상이라는 거는 뭐냐 그것은 인간이 어느 집단이든지 구체적으로 법률을 제정해서 한 사회 안에서 범법행위와 범법행위가 아닌 것들을 구별해내는 기준을 만들지만 그것은 그때에 그 사회가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치라는 게 있다는 거죠 이것을 법률에서는 조리하고 합니다. 조리라고 하는 말은 좀 어려운 말이지만 우리말로 이야기하자면 경우에요
예를 들자면 이 사람이 나에게 막 요구를 해 그런데 법에 이러면 안 된다. 라고 이러는 것은 없어요. 그런데 “야 넌 그건 경우가 아니다” 우리 그런 말 많이 쓰죠. 그건 경우가 아니잖아 그럼 경우는 어디에 나와 있는 법이에요 그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 물어보거나 생각을 해볼 때에 네가 하는 행동은 사람들이 다 법으로는 뭐라고 명시는 안 되었지만도 그러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다 그럴 때 우리는 너 그런 태도는 경우에 안 맞는 거다 지금 머리가 뻐근하죠.
(예화)제가 중동고등학교 다닐 때 일이 였어요 애들이 컨닝을 그렇게 열심히 했어요 한 애가 컨닝 하다가 걸렸어요 그래서 결국은 정학을 당했어요 그 애를 적발한 선생님이 음악선생님 이였어요. 그런데 음악선생님인데 노래를 되게 못해요 박자는 맞아요 나팔 불던 분이였는데 웍웍웍 하는 분 이였어요. 그러데 이제 음악시간이 됐는데 그러고 나서 정학이 풀리고 나서 나중에 돌아와서 음악시간 되었는데 그 애가 딴 짓을 했어요. “야 인마 넌 도대체 음악시간에 왜 여기서 이렇게 딴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선생님이 지적을 했는데 그 애가 고분고분하게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되는데 그러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핑계를 된 거에요 선생님하고 언쟁이 벌어졌어요. 그러다가 얘기하는 게 “저 선생님한테 유감이 많습니다.”학생들이 거기 다 듣고 있다가 황당해했죠 “선생님이 옛날에 저 시험시간에 보고 썼다고 지적하시는 바람에 제가 정학을 먹고 결국은 정학 받은 학생이 됐습니다.” 우리들은 전부다 이제 가슴을 졸이면서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담대할까 정학한 게 뭐 자랑이라고 그런데 뭐라 그러냐면 벌떡 일어나 하는 얘기가 “제가 아무리 시험시간에 보고 썼다 할지라도 선생님이 그러지 말거라 하고 타이르면서 끝내 실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학생들이 전부 다 무슨 뜻이에요 경우가 아니다 선생님이 하도 대화가 안 되니까 “야 인마 지금 네가 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걸 입으로 내놓으면 안 된다. 뭐한 놈이 성낸다고 네가 잘못 했으면 개정의 점이라는 게 있어야지 그렇게 하고 시간이 흘러가도 아직까지 선생님이 잘 못 했다. 그러지 말어라 하고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야 되는 건데 그걸 치사하게 고발해서 찔러서 그래서 정학을 시켰다. 그럼 거기 있는 모든 학생들이 “아 쟤 말이 맞다” 그렇게 생각 하겠는가 이거예요 여러분도 그래야 되는데 그래요 그러면 여러분도 경우가 없는 거지
북한에 갔어요 흉보는 것 아니고 북한을 갔는데 뭐든지 비싸요 금강산을 올라가는데 너무 목이 말라요 제자 사실 허리도 아프고 그래서 산에 오르는 거 되게 싫어하거든요 내려올 텐데 왜 그렇게 올라가 버스에 이러고 앉아서 가는데 사모님들이 앞에서 김 목사님은 허리도 아프고 산 올라가는 거 안 좋아하시니까 틀림없이 우리 산 올라갈 때 안 올라가실 거야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너무 짜증이 났어요. 그래서 제가 1700미터를 올라갔다는 거 아닙니까 이틀 동안 850미터짜리 두 개를 올라갔어요. 거의 죽는 줄 알았어요 얼굴이 하얘져 그래서 어쨌든 올라갔는데 너무 목이 말라요 옆에 있는 목사님이 “우리 생수 하나 주시오” 그랬더니 생수건 콜라건 뭐든지 간에 2유로를 받는 거야 비싼 거죠 2400원 정도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제 그걸 들고 먹으면서 올라갔어요. 내려오다가 또 목이 말라서 또 그 사람한테 “우리 하나씩 주시오” 했더니 이번에는 3유로를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우리 올라갈 때 2유로씩 먹었다고요” 그러니까 “아닙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짓말을 하겠냐고 여기 많은 증인들도 있고 분명히 올라가다가 2유로씩 먹었는데 내려올 때에 왜 3유로를 달라 그러느냐” 그랬더니 “우리 그렇게 판적이 없습니다.” 우기는 거예요 “이 사람도 보고 이 사람도 봤다 ”했더니 할 말이 없잖아요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떻게 해요 아, 죄송합니다. 하고 그러면 3유로 받아야 되지만 2유로에 가져가세요 그럴거아니예요 “아 그렇습니까 아까 잘못 받았습니다. 4유로씩 내시라우요”
이게 뭐죠 경우가 없는 거죠 자기는 논리를 갖췄는데 보편타당성이 없는 거죠 그런 경우라고 하 것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게 글로는 안 쓰여 있지만 모든 사람 속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데 그렇게 사람들 속에 있는 경우라고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자연법이라 한다 이거거든요 이러한 자연법으로서의 선과악의 궁극적으로 선악의 판단이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우리같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고민한 게 아니에요 뭐 별로 고민도 안하지만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나 고민한 게 아니에요
로마시대 키케로 같은 사람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면서 선악의 목적들 혹은 선악의 궁극적끝들 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피니부스라는 책을 썼어요. 책이 잘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미국에 주문을 해서 거의 속달로 부쳐왔습니다. 일주일도 안 돼서 그 책을 받아서 열심히 읽었어요. 이틀 만에 이틀 만에 한 권을 다 읽었어요 그러고 나서 너무 실망 했어요 세상에 뭐 이런 책을 그렇게 좋다고 평가를 하나 그래서 뭔가 그랬더니 선악의 궁극적기준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뭐냐? 어디 존재 하냐? 그랬더니 인간 본성에 존재한다는 거예요 내가 그 책을 향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물었어요 그럼 그 놈의 인간 본성은 도대체 뭐냐? 물론 마음속으로 소리를 질렀죠 겉으로 소리를 지르면 전신병자잖아요 그래 계속 결론은 마지막에 인간본성 안에 선악의 판단의 기준이 있다. 그 인간본성이 도대체 뭐냐? 인간도 뭔지 모르는데 본성을 설명할 수 있겠어요 그럼 만약에 인간의 본성 안에 그런 궁극적인 법들이 존재한다면 그러면 이세상은 왜 그렇게 혼란스러울까? 결국은 자연법사상으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예를 들어 볼까요 옛날에 한번 예화를 들었었는데 제가 만들어냈거든요 들어 보세요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테러국가가 있어요 거기에서 끊임없이 테러리스트를 보내서 이 자유 민주국가들을 괴롭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어느 나라에서 간첩을 파견 했어요 임무는 뭐냐 하면은 그 나라에서 가서 그 테러국가에 가서 그 조직들이 어떤지를 살피고 그리고 그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워오라는 그러한 첩보명령을 받고 파견이 되었어요 잘 들어 보세요 계속 생각하시면서 들어야 되요 그래가지고 이 사람이 이 세상에 이 테러는 근절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고 자기네 나라가 테러의 위협을 받으니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기에 스파이로 잠입해서 들어 갔어요 거기서 열심히 정보를 채집하고 이제는 이 테러를 근절시키고 급기야 공격을 해서 그 나라를 뭉개버릴 작전을 세우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탄로가 났어요 그래가지고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단 말이죠 막 도망을 갔어요 그래서 결국 어는 시골에까지 잠입을 해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도저히 힘도 없고 배도 고프고 날고 어두워져서 할 수 없어서 어느 외딴 시골집을 들어갔는데 이 사람은 너무 세상물정에 눈에 어두운 사람이라서 그런 사람이 자기네 나라에 침투해서 도망자가 되고 수배자가 된지도 몰랐어요 그러고 나서 아 이렇게 밤도 야심한데 어디 먼 길 가겠냐고 하면서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그러면서 배고프다니까 밥도 주고 해 가지고 같이 해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둘이 같은 민족이에요 그럴 수 있잖아요 우리는 대부분 같은 민족이지만 미국 같은 나라만해도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지니까 독일 사람도 있고, 중동사람도 있고, 뭐 한국 사람도 있고, 별나라 사람들 다 있잖아요 그래 얘기하다보니까 양족집안 부모들이 서로 잘 아는 사이에요 그때 비로소 인제 이 사람이 자기 상황을 다 털어 놓고 자기가 지금 쫓기고 있다는 것을 그러고 이 나라가 정말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 이 사람이 자기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바로 그때 수사 기관에서 쳐들어 와 가지고 동네를 샅샅이 수색하는 거예요 그때 이 사람은 이제 이 사람에게 도망갈 길을 열러 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사람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공작금 중 거액을 주면서 이거라도 가지고 여생을 편안하게 살아라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준 이 은혜를 일평생 잊지 못하겠다 그리고 바이바이 하고 도망쳐서 무사히 그 위기에서 헤어 나오게 되었어요.
자 그러면 이제 이 스파이를 그 위기에서 구출해서 그래서 목숨을 건지게끔 도와준 이 시골농부의 행위는 선한 거예요 악한 거예요 헷갈리죠 선한행위에요 악한행위에요 왜 대답을 못해요 아무거나 해봐요 선한행위에요 악한행위에요 여러분도 벌써 대답을 못 하잖아요 기준이 안 되는 거예요 인간본성은 어디 갔어요 인간본성 안에 선악판단기준이 있다며, 물론 여러분이 그런 것 아니지만 키케로가 얘기한 것이지만 그 아저씨 주장대로라면 여러분 안에 본성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럼 뭔가 판단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럼 뭐에요
자 몇 개의 원으로 이루어져있죠 자 우선, 덕분에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 농부가 자기를 보내준 이 행위는 선한행위에요 악한행위에요 밖으로 나가면 수사관들이 그 간첩을 잡으려고 달려왔는데 자기 국민인 이 농부가 거짓말 치므로 말미암아 놓쳤어요. 그러면 이 농부가 그 스파이를 살려준 행위는 그 나라에게는 선한행위에요 악한행위에요 밖으로 가서 테러리스트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괴로움을 받는 많은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 농부의 행동은 선한 거예요 악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요 선악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하나 더 나아가서 그 나라는 아니지만 그 나라와 함께 손잡고 자유세계를 공격해서 테러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많은 동맹 국가들에게는 이 농부의 행위는 선이에요 악이에요 그럼 어떻게 되요 선악선악 그러고 이게 어떻게 상황 따라서 선악선악이 바뀌는 거예요 그럼 도대체 뭐 어떤 거야 되는지 힘센 사람 편들어야죠 그럼 또 안 되죠 그럼 뭐에요 물론 껍질이 바뀌면서 튀어나가도 변하지 않는 것 있어요 테러리스트국가에서는 ‘부모님 주어 패라’ 이렇게 가르치고 자유 민주국가에서는 ‘부모를 잘 해줘라’ 또 다른 나라에서는 ‘아예 죽여 버려라’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거죠 통일이죠 그다음에 예를 들자면 친구를 사귈 때는 어떤 나라에서는 ‘진실한 우정으로 사겨라’ 또 다른 나라에서는 ‘반 죽여라’ 그 다음나라에서는 ‘속여먹어라’ 그 다음나라에서는 ‘친절하게 대해줘라’ 이러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면 원이 바뀌어도 계속 일치를 이루는 것들이 있고 원이 바뀌면 일치를 못 이루고 이렇게 휘 둘리는 게 있단 말이죠 이해가시죠
원이 바뀌어도 일치를 이루면서 똑바로 가는 것들은 뭐냐 하면은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아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목적대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기위해서 최소한의 양심의 빛을 사람들에게 주셔서 공통성을 갖게 하는 거죠 질서가 너무 혼란스러우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 자연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죠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에 대해서 많이 연구하고 인간에 대해서 많이 설교해요 답은 거기 없어요 하늘에 있지 거기 없다 이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서 이루어진 이 모든 세계는 무수한 다양성을 보여주지만 이 다양한 수많은 것들 안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 한분에게로 올라가는 거예요 거기에 모든 답이 있다 이거에요 그래서 인간이 인생의 위기가운데 있을 때에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배움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의 위기든지 순탄한 길이든지 궁극적으로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 한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될 때에 그때에 그 인생의 문제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오늘날 보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땅의 이야기만 듣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선 답이 없어요 하나님에 관해서 더 많이 말해야 하고 하나님께 주목하게 될 때에 인생의 문제는 인간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놀라운 방법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죠 그게 여러분들이 회심의 경험에서 잘 나타나요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혼자 넉넉히 살아갈 수 한 절대로 하나님 안 믿습니다. 하나님 믿을 수 밖에 없을 때에는 혼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때에 그때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 이었어요 문제가 너무 많고 복잡해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문제가 많고 복잡할 그때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답은 이 모든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하나 답을 다 찾으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사실 그렇게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이 문제 제쳐놓고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사실은 그 질서의 빛 아래로 들어가게 되니까 사실은 이 문제는 이렇게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아주 놀라운 질서 속 에서 자기에게 닥친 일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자연법사상 그것을 인간본성에서 찾던지 자연에서 찾던지 어디에서 찾던지 간에 그것들이 궁극적인 선악의 판단기준은 될 수 없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극적인 판단을 제공해 주는 기준이 뭐냐? 성경은 성경전체의 첫 시작을 이렇게 말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얼마나 놀라워요 성경전체의 요절은 뭘거같아요 성경전체의 요절이 어디인 것 같아요 요한복음 3장16절이에요 그런데 요한복음 3장16절을 올려놓는 받침이 되는 토대는 창세기 1장 1절이에요 1장1절이 없으면 요한복음3장16절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할 수 있었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예수께서 구속하셔야 했고 그리스도예수의 구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를 보여주는 1장1절이야말로 참 중요한 토대에요 놀라운 거는 요한복음 3장16절을 기록하기 전에 1장1절과2절에서 창세기를 다시 한 번 되풀이 합니다. ‘태초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지언바 된 것이 없다’ 창세기의 축소판 이죠 그렇게 토대를 만들어 놓고 그다음에 요한복음 3장16절 나오는 거예요 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그러면 이 세계에 대한 모든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우리는 어려서 교육을 받으면서 남에 물건에는 절대 손을 대지 말라고 그렇게 교육을 받았어요 요즘은 뭐 남의 물건에 손을 참 잘 대죠 유혹도 많고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경우들이 점점 없어져 가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남에 것에 손을 대지 않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그건 내 것이 아니니까 그것의 소유권은 그것을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있어요 그것을 존중하면서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양식이에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것은 단순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나도 창조하셨다. 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것은 곧 그 분께 대한 전적인 복종의 의무를 포함하는 거예요 그게 없으면 말이 안 되잖아요 이거 여기 이게 있는데 아 이것은 목사님 것이지 그러면서 와서 예배 시간에 걸어 나와서 홀짝 마셔버린다면 사람이 아니지, 이러면 말이 되지 여기다가 여기 올려놓은 것은 누구든지 설교 듣다가 목마르면 와서 마시라고 올려놓은 건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경우는 좀 없는 사람일지 모르지만은 그러나 그 행동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겠죠 그런데 말고 저건 목사님 거야 목사님이외에는 손댈 수 없지 목사님만 마시는 거야 그런데 와서 먹는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럼 누구 거에요 하나님 거죠 나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럼 누구 거에요 하나님 거죠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죠 뭘 하든지 주인인 그분께 물어보고 사용 해야죠 아주 어려운 게 아니라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에요 물어보고 사용 해야죠 그렇죠 그래요 안 그래요 맞잖아요
그것을 침범당할 때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 때문에 분노하게 되고 심지어는 목숨을 서로 빼앗고 빼기는 일도 벌어지는 거죠 사소한 물건가지고 엄청나게 싸우고 결국은 폭력이 일어나는 경우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 그것을 침범하는 것은 그 물건에 대한 자기 주재권에 대한 도전 이예요 그러면 그것은 존재자체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이죠
제가 여러분 예화 이야기 했잖아요 황제의 궁에서 황제의 직무실을 청소하던 노예가 황제의자에 털렁하고 앉아서 몇 번 들썩들썩했다 헝겊이 닳면 얼마냐 닳겠어요. 그런데 그 관경이 황제의 눈에 띄었다 그러면 즉시 사형이겠죠 그 왜 그러죠 왜 그렇게 그 사람이 거기다 뭐 좀 더럽혔어요 아니죠 의미의 문제에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주재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렇게 보시는 거죠 의미의 문제에요 그 대표적인 경우가 뭐죠 선악과의 문제에요 그 뭐 하나님이 그 수많은 것을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주셨는데 그 선악과 하나가지고 뭐 그렇게 쩨쩨하게 그러시느냐 그건 의미의 문제에요 그러니까 그 선악과를 하나님이 먹지마라 하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따 먹었을 때의 그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어떤 생각을 드러내 보여 준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나는 하나님을 제거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마어마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벌도 무한하게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실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그 분께 복종하며 살아야 할 의무가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고백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복종하며 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실천적 무신론자에요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고백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모두 창조하셨고 그리고 우리까지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을 정해 놓으셨는데 어떻게 살아야지만 할 수 있을까?
자 도로도 별로 없고 마땅한 교통수단도 없던 때라면 어차피 가기 힘들지만 교통이 이렇게 발달하고 잘 돼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부산을 가겠다고 목표를 세웠어요 꼭 가야될 이유가 있어요 내가 오늘 저녁까지 부산 도착해야한다 부산에 있는 뭐뭐뭐 어떤 어떤 동네 어떤 집에 도착을 해야 한다. 자, 가야되겠다는 목표는 분명하게 정해 졌어요. 그리고 무슨 일 일지는 모르지만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부산에 가겠다 열의는 매우 뜨거워요 그런데 한국지리를 전혀 몰라 그러면 그 사람이 그 뜨거운 열의만을 가지고 인천공항에 딱 내렸을 때 아무지식 없이 부산에 갈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그럼 뭐가 필요해요 구체적인 지식이 필요해요 우선 대한민국은 항공편이 발달해서 거기서 리무진을 타고 김포공항에 가면 하루에도 수십 차례 씩 부산 내려가는 비행기가 있단 말이에요 또 눈이 많이 오거나 안개가 끼어서 그게 갈 수가 없다면 기차역 서울역이나 아니면 광명역으로 가면은 KTX가 한 시간에 두 대씩 있고 그건 매우 빠르게 도착할 수 있다는 거 부산에 내리면 이러저러한 교통편이 있고 이렇게 이렇게 찾아간다는 것을 알아야지만 갈수 있어요 잘 들어 보세요 두 번째 어떻게 어떻게 찾아가면 부산을 간다는 것은 잘 알아 왜 한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런데 사장님이 너 부산거기 갔다 와라 명령했는데 거기가면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가기가 싫어 두 경우 다 목표를 이룰 수가 없겠죠
그래서 하나님이 두 가지를 다 우리에게 강조를 하십니다. 우선 뭐냐 하면 깊은 회심을 통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라고 하는 아주 놀라운 결단과 각오가 필요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회심입니다. 하나님을 배향하고 살던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로 전향하게 되는 것이 그게 바로 참된 회심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깊은 지성이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고 창조된 모든 세계가 어떤 원리 속에서 이루어져서 그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들어내고 또 우리가 우리자신의 영혼과 우리밖에 세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을 이성만으로 모두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런 처지가 인간의 처지에요 특별히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창조세계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빛이 많이 사라졌고 인간의 영혼 그 자체가 어두움에 휩싸여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보면서도 그게 아버지의 작품이고 아버지의 지성과 의지가 깃들여 있다고 하는 것을 잘 읽을 수 없는 사람이 됐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불쌍해서 주신 안내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성경이에요 그러니까 마음으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되겠다는 깊은 각오만 있으면 아직도 지성이 약해서 그 모든 연관관계는 파악은 못하지만 이렇게 살고 이렇게 이렇게 하거라 하고 가르쳐주는 규칙을 따라서 성경말씀대로 순종하면서 가면 그 원리와 모든 것을 다 몰라도 결국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의약품이 만들어지는 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져요 그리고 그것이 수많은 임상실험을 통해서 결국은 약으로서 정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제약회사에서 심장병 약을 만들고 있어요 심장병을 앓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신물질을 가지고 개발해서 약을 만들었어요. 그래가지고 안전하다. 라고 하는 판단을 받은 다음에 희망자들을 모아서 일정한 동네에 무료로 약을 나누어 줬어요. 심장병에 효과 있는지를 실험하기위해서 그런데 결국은 많은 돈을 쓸어 붓고 연구를 했는데 이게 별로 심장병에 도움이 안 된다는 해롭지는 않지만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최종적인 임상결과가 나왔어요. 그래서 이제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늘 그랬듯이 그 사람들에게 실험을 끝내고 이것이 심장병에 도움이 안 되는 약이라는 것이 연구진들에 의해서 임상실험의 결과 파악이 됐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들은 이제 더 이상 실험적으로 그 약을 복용하실 필요가 없고 그것은 심장병에 도움이 안 됩니다. 다 가져 오십시요 아무도 반납을 안 해요 그래서 회사에서 궁금해지기 시작 했어요 먹어도 효과가 없다 그러는데 심장병환자들이 그걸 약통을 쥐고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그걸 끝까지 감추고 안 내놓을까? 그래서 제약회사에서 사람을 보내 물어 봤어요 그랬더니 뭐냐 하면 이게 부부생활을 하는데 아주 탁월한 효과는 준다 이거에요 심장에는 도움이 안 되는데 그 약이 뭐냐 하면 비아그라에요 그래서 비아그라는 만들라고 그래서 만든 게 아니라 실수로 나온 약이에요 그래가지고 그게 1년에 지금은 뭐 많이 싸졌다고 그래요 처음에는 그게 독일에서 한 알에 우리나라 돈으로 이만오천원정도에 팔렸다고 해요 원가는 몇 원도 안 돼 그러니까 무지한으로 돈을 버는 거죠 그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이 그 약을 복용하면 이러한 이러한 변화가 어떠어떠한 약리적인 작용을 거쳐서 변하가 일어나서 나의 성생활을 만족하게 해 준다. 라고 하는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설명서에 쓰여 있는 것을 믿는 거예요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됩니다. 그러고 또 설명서로 신빙성이 없으면 약사 말을 믿는 거죠 그리고 의사의 처방을 믿는 거예요 그러고 그것을 복용을 하니까 거기에서 약효가 나타나서 그 약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거죠 그래서 말이죠 그 약리작용을 다 이해를 하고 약을 먹으려면 약 몇 통 못 먹고 죽을 거예요 공부를 하기 위해서 냉장고 스위치를 켜기 전에 사온 냉장고를 다 부셔봐야지 알 것 아니에요 여기에서 단추를 누르면 전기가 어디를 통해서 이게 이렇게 돌다가 이렇게 냉기가 나오면서 음식이 신선하게 보관이 되며 이 냉기의 성분은 뭔가? 그리고 스위치를 눌렀을 때 불이 만들어지게 되는 전기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콘센트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전봇대를 타야 될 거고 그 선에 매달려서 계속 가다 보면 발전소까지 가야 될 거란 말이죠 발전소에서 계속 어떻게 발전이 되는가 보려면 결국은 원자력 속으로 쑥 들어가야 될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모든 것을 끝까지 파고들어서 다 못하고 그냥 어떤 사실들을 믿으면서 그 신뢰 속에서 받아들이면서 쌓여가면서 인간의 행동들이 결정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성경을 주신 거죠 그러니까 이러한 사물의 이치에 대헤서 잘 알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보다 그런 걸 잘 몰라도 말씀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전도하라고 그러시는 구나 아멘 하면서 전도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순종하고, 또 이웃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고 그랬을 때 왜 훔치지 말라고 그러시는지 훔쳤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다 몰라도 그 창조주 이 좋은 세상을 만드시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하지 말라 그러시니 그런데도 내가 했으니 주님 마음 얼마나 아프실까? 그러고 회개하고 순종하면 그러면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은 이론적으로 모두 분석을 못해도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복종할 때 결국은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우라를 실제의 삶에서 선을 행하며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것은 사실은 단순한 지식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초월적이고 진실한 사랑에서 나오는거 예수님께서 그래서 이런 말씀 하셨죠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동기와 원천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 초월적인 사랑이에요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이 초월적인 사랑은 단순히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지식이 아닌 지식을 통해서 올 수는 있지만은 본질적으로 사랑은 하나님께 인간의 영혼에 부으시는 은혜의 작용의 결과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뭘 발견하게 되냐면 하나님께로부터 부으시는 놀라운 은혜에 의한 사람이 우리 안에 지순의 사랑으로 넘쳐날 때에 우리는 창조에 목적을 따라 살아야겠다는 깊은 갈망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리고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거기로 인도하는 길잡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따를 때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그 사람을 강화시켜주시고 또 실제적인 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해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제쳐놓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의 사물들을 통해 이치를 깨닫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공부해서 이치를 깨달아서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겠다. 라고 할 때에는 결코 갈 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의 질서 안에 하나님 창조의 목적과 또 창조주 하나님 자신과 창조의 목적과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흔적들을 남겨놓으셨지만 그것들은 이 성경의 빛을 받을 때에 그것이 아주 신비하게 다가오는 것이지 성경의 빛을 받지 않으면 그것들 자체로는 창조의 목적에 따라서 살아야할 인간의 질서 특별히 자연적인 질서를 넘어서는 도덕적인 질서 같은 것들을 충분히 보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달해 주는 최고의 원천은 하늘에 있는 별이나 땅 아래에 있는 사물들이 아니라 성경이에요 성경이 하나님과 이 우주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고 이 성경 계시의 빛을 받을 때에 이 모든 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아름다운 흔적들이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는 거죠
비유를 하자면 어둠속에 반사물질이 많은데 어둠속에 있을 때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환하게 불을 비출 때 그 불빛을 받으면서 반짝반짝 빛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쫙 비칠 때 그때 아주 찬란한 빛들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눈으로 볼 때에는 희미했지만 성경의 계시의 불빛으로 비출 때에는 아주 찬란한 보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이 선악의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의 창조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무엇이 선인가 악인가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어떠한 목적으로 세계를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그리고 어떠한 질서를 구축하시므로 인간들을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게 하시려고 의도하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이 바로 그 표준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과 인간마음속에 있는 표준은 사람이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마음 안에 있는 이 표준과 마음을 인간이 충분히 알고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 수 있도록 허락 하셨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성경의 계시에요 분명히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이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창조의 목적, 내가 태어나고 존재하는 이유, 오늘도 나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목표,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고 싶고 그리고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에요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에요 그때에 이 성경은 최고의 장원으로 떠오르는 거예요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자연현상을 누비고 이 세상의 역사를 뒤적거려도 성경처럼 명백하게 나 여호아는 이런 존재니 너는 이렇게 살거라 이렇게 믿거라 이렇게 생활하거라 이길로 가거라 라고 명백하게 가르쳐 주지는 않아요 성경만이 아주 충분하고 명백하게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
그런데 들어보세요 예를 들자면 마늘을 많이 먹으면 몸에 참 좋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마늘을 먹는 사람과 그렇게 그이야기를 믿으면서 마늘을 먹으면서도 마늘이 어떤 성분으로 되어있고 나의 체질은 어떤 체질이고 이것이 내 몸에 들어가서 분해를 하면서 무슨 작용을 일으키고 그래서 결국 어떻게 내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지에 대해서 상세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 이해가 없이 동네아저씨가 그것 먹으면 건강해진다고 말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먹는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마늘을 대할 때 생각이 전혀 달라지지 않겠어요. 그래 안 그래요 그러니까 지식의 문제는 이 지식을 버리고 믿음을 택할 것이냐 믿음을 택하고 지식을 버릴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아멘하고 믿는 그것이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다음에는 왜 내가 그것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믿을 때 나에게 어떻게 해서 나를 행복하게 하고 결국은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게 되는 길을 탐구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의무에요 모든 신자의 의무 탐구하는 그 정신이 이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순종하고 더 잘 믿고 더 잘 믿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목적에서 그때 깨닫게 되는 것 그때에 아주 놀라운 지식이 우리 안에 주어지게 될 때 그 지식은 올바른 지식이 일 때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을 계속 불러 일으키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비유하나를 들자면 사랑이 모닥불과 같아요. 활활 타올라요 그런데 지식은 장작과 같아요.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데 불이 아무리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아도 내버려두면 땔감 없으면 결국은 불은 살리게 되어있어요 그러나 타오르는 불에 장작을 두 세 개 씩 올려놓으면 그 불은 장작이 계속 얹어지는 한 그 불길은 며칠이고도 계속 유지가 되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지식과 사랑의 관이에요 그러고 보면 한때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 사랑이 식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불이 어느 순간에 꺼내서 휙 버리고 나서 난 냉담 이렇게 표현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이 타오를 때에는 성경을 대하든지 예배를 드리든지 지체들과 말씀으로 교제를 하든지 늘 하나님에 대해서 깨닫는 빛이 하나님이 그런 분이셨구나 하나님이 그렇게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구나 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아!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이루어져 있구나! 아! 내가 이일을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이시구나 깨달음이 장작이 되어서 계속 들어오는 거예요 불이 계속 타오르는 거예요 그다음에 한 순간에 이게 싫증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더 이상 장작이 주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때 가슴이 타오르고 있던 모닥불도 함께 꺼지는 거예요 그 불이 다시 켜질 때에는 멍하고 있는데 사랑의 불이 펑하고 가스 터지듯이 그렇게 폭발하듯이 가슴에 붙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들어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 마음속에 모닥불이 다시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법사상은 자연 속에 인간의 자연본성 안에 선학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아니에요 성경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예요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하는 그 커다란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시지 않고 성경에 상세한 내용들을 가지고 판단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창조의 목적 오늘 우리가 학교에서 다른 사람의 답안을 베껴 쓰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 맞냐? 너가 오늘 음식을 과식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 맞냐? 하나님이 그렇게 판단 내리시면은 인간이 하나님의 판단을 일일이 해석하기가 너무나 어려워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탐욕하지마라’ ‘이웃의 물건을 도둑지질 하지 마라’ ‘너의 부모를 폭행하지마라’ ‘사람들 속에 신의를 시켜라’ 아주 이렇게 딱딱 떨어지게 논쟁이 필요 없게끔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이런 게 하나님의 놀라운 친절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의 선악의 판단의 기준이 창조의 목적이 있다. 라고 고백하는 것과 똑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은 인간의 선악을 판단하는 모든 기준은 성경 안에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자, 선악의 판단의 기준이 인간의 자연본성 속에 있다고 그럴 때에는 애매하고 모호하지만 60몇 권 성경이 선악을 판단하는 우리의 삶의 규칙이 됩니다. 라고 할 때에는 분명해요 불분명해요 분명해요 핑계할 수 없는 거죠 그 성도의 행복은 성경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배워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앙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14.선악의 판단기준 (2)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지난 시간에는 도대체 선악을 위한 판단의 기준이 무엇인가 그래서 실증법주의 자연법사상 조금 골치 아픈 것 같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국은 사람들이 세운 기준이 어떤 것이 더 타당성을 가질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절대적인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지난 시간의 요지였습니다.그러면 선악 판단할 수있는 그 기준이 무엇이냐 이것이죠.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그건 성경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 대답은 받는 대답이죠. 그래서 디모데에서 보면 은 모든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해주고 또 모든 선 한일을 행하고 또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성경이다 그러니까 모든 선 한일을 행함에 있어서 또 선한 사람이 됨에 있어서 완전한 사람이 됨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우리에 신앙고백을 보면 은 세례 문답 속에 보면 은 성경은 우리의 행위와 신앙에 대한 유일한 규칙입니다. 말을 했죠. 그러니까 틀린 말은 아니죠. 그러면 궁금하지 않아요. 성경에는 수많은 행위의 규칙들이 있어요. 선악을 판단하게 만들어줄만한 수많은 규칙들이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하는 자는 죽으리라 이것이 악이에요 선이에요 이렇게 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선이에요 악이에요 선이죠 이렇게 따지면
헤아릴 수 없이 만은 행위의 규칙이 있는데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그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최근에 중국에서 중국 사람으로서는 천지가 깜짝 놀랄만한 법이 전 인민 대회에서 통과가 되었어요. 뭐케요 물권법이에요 물건에 관한 권리를 주장 할 수 았는 법률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것이 뭐 대단하냐. 대단한 것이죠.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에요 공산이라는 말자체가 사유재산제도를 인정을 하지 않는 것이죠. 그러니까 얼마나 웃기게 되어있어요 아파트를 지어서 분양 을하고 집을 지으면 은 집은 자기 것인데 땅은 나라 것이에요 땅주인이 언제든지 달라 고하면 주어야 돼요 물론 계약을 한때 30년 50년 이렇게 빌려줘요 이번에 전부다 법을 바꾸면서 사유재산을 완전히 보장해주는 법유일 만든 것이죠. 자기네끼리도 거기에서 좌파들은 반대를 하고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이아니라 14년걸 쳐서 토론하고 토론하여 통과가 된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은 상해 같은데서 소송이 봇물처럼 밀려드는 것이에요 여태까지는 어땠느냐 간단한 것이죠. 지난번에 중국에 갔을 때 광개토왕 능을 들렸어요. 사실 우리나라 영토였잖아요 고구려영토였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이 서있으니까 그것이 서 있으니까 유네스코에 등록을 하려면 주변에 집이 없어야 하거든요 근데 집이 백백 하게 들어선 것이에요 우리 경주에 가보면 은요 가보면 은 얼마나 웃기냐면 유명한 왕릉이 있는데 고 앞에까지 집이 다닥다닥 붙었어요. 지금도 많이 안 변했을 것에요 그러니까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집에 둘러싸여 있어서 능이 있는 것이에요 광개토왕릉도 그랬거든요 우리나라에서 그것 정리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빨간 띠 매고 몇 번 데모하고 최루탄 묵나오고 죽 내사니 하고 경찰서 끌려가니 피가나 오니하고 그러다가 합의를 보고하고 소송까지 하고 난리를 쳐야 겨우 될 거에요 불과 6개월 만에 600세대 다 이사를 시켰어요. 순식간에 그것도 불과 몇 만원 안주고 왜 그래요 공산당이 이사가 그러면 끝나는 것이에요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죠. 어마어마한 변화 아니에요 이런 법이 생겨나는 것이죠. 그러면은 예전에는 공산주의 그러한 날이 올 거라는 것을 모태 똥이 경고했어요. 내가 나타나서 자본가와 지주들을 정리를 해서 내 백성을 해방을 시켜주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나타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근데 나타나기도 했지만은 자신들이 그 사람들의 나타남을 격려하는 것이에요 자본가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러면은 공산주의 치하에 만든 법도 영원한 법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잖아요. 그러면 보세요. 공산주의에 있는 작은 법들이 많을 것 아니에요 그것이 어디로 가는 이상이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대한민국 법령집이 이정도 쯤 되요 재보았어요 이것을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정하는 것이 문제에요 왜냐하면 국회 열리고 나면 정정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그런 업체가 생겼을 것이에요 예전에는 정정이 되어만 이만큼 소포로 와요 그것을 하나씩 넘기면서 법령집이 묵어진 것이 아니라 푸르게 되어있어요 풀리면서 바꿔놓고 바꾼 것은 묶어놓고 항상 현행으로 비치를 하는 것이죠. 요즘에야 더 잘되어 있겠지마는 그러면 저쪽에 헌법부터해서 다음은 법률이에요 그다음은 대통령령 그다음에 시행규칙 심지어는 관공서내부에서 쓰는 규정까지 해서 어마어마해요 법이 말이에요 그러면 모든 것들이 규칙은 령을 위하고 령도 여러 가지에요 대통령이 있고 국무총리령 그다음에 각 부장관이 내는 부령이 있어요. 지금은 지방자치제도 가있으니까 시장도 그런 조례를 만들 수있죠. 그렇게 많은 규칙들이 있죠. 그 령들은 위에 것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이렇게 국회에서 법률을 제정을 했는데 법률에다가 모든 것을 할 수가 없잖아요 법률에서 중요한 사항을 정해놓고 이러이러한 것은 대통령에 의하여 정한다. 그러면 국회에서 시행 할 수있는 령을 만드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을 보고 부에서는 부령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시행령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에요 그럼 맨 밑에 처리되는 그것은 국무총리령하고 대통령 법률 하나만해도 많은 령들이 딸리는 것이에요 예를 들면 사상이 불순하면 이러이러한 혜택을 주지를 않는다. 그러면 그 밑에서는 사상이 불순한자란 첫째는 어쩌고저쩌고 둘째 어쩌고 셋째 어쩌고 정하는 것이죠. 아니면 이러이러한 연금을 받을 수있는 자격은 대통령으로 정하기로 한다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법률이 체계를 이루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법률일 수없이 많잖아요 그러면 시행규칙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이죠. 이것에 상당부분이 그런 것이죠. 그것은 령을 위하고 령은 법률을 위하고 법률은 마지막에 다모하져서 무엇을 구체화하냐면 헌법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이제죠 그러니까 헌법이 바뀌면 은 이하의 법들이 전부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법원에 내리는 판결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헌법을 아무나 바꾸게 만들 면은 나라에 질서자체가 쉼 없이 흔들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래서 헌법까지 쭉 움직이게 되는 것에요 그러면 그 나라에 수많은 법률을 다 연구하지 않아도 헌법을 갔다가 놓고 찬찬히 읽어보면 헌법을 가진 나라가 가고 싶은 것이 어디인가 알 수있는 것이죠. 거기에 모든 것이 다 들어나는 것이죠. 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주권이 모든 국민에게 있는 나라로 갈 것이냐 국민이 모두 직접 정치에 참여할 것이냐 대표자를 세워서 대의 정치를 할 것이냐 대통령은 얼굴마담으로 삼을 거냐. 실권을 줄 것이냐 아니면 정치에 중심이 대통령에게 있게 해서 강력한 국가를 만들 것이냐 결정권이 국회에 있어 안정적인 국가를 만들 것이냐 의미들이 거기에 담겨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그것을 보면 알 수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가 있는데 종종 드물지만 하위에 있는 법이 상위에 법하고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어요. 상위에 법이 이리로 가려구하는데 이것을 시행하려구하는 법이 이 루간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럴 경우에는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아래에서 만든 권위가 적은 법이 위에 권위가 높은 법을 자꾸 건드리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되냐면 요 누군가가 이것이 문제가 있다고 제기를 하면 법률에 그칠 경우에는 대법원에서 판결을 하는데 만약에 헌법과 저촉이 된다면 헌법 재판소 소관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헌법 재판소나 대법원에서 아래의 법률은 위의 법률 혹은 위의 법률인 모순이 된다고 판단을 하면 아래의 법은 무효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왜 구지 만든 법인데 그냥가지 무효가 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그 아래 있는 것들이 위에 것들과 연결이 되겠음 만들어야지만 한나라가 가고자 하는 국가에 이상이 실현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성경이 바로 많은 규칙들로 이루어져있어요 그렇지만 사실 성경이 우리가 살아가 기위해서 필요한 판단을 내리기위해 필요한 모든 규칙을 담고 있어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죄에요 아니에요 그다음에 히로뽕을 받는 것이 죄에요 아니에요 여기 히로뽕이 안 나오는데 담배도 없고 게임을 많이 하는 것이 죄에요 아니에요 컴퓨터 게임 말이에요 여기 안 나와 있어요. 중학생이 핸드폰 들고 다니는 것이 죄에요 아니에요 그러면 성경은 우리가 만나는 삶에 모든 상황에서 선과 악을 판단될 수있는 모든 경우를 다 다루어주는 것은 아니에요 그럴 수가 없겠죠. 성경이 쓰인 것이 2000년 전에 써졌는데 어떻게 그것을 미리 포괄할 수있겠어요. 그러면 성경은 과연 지금도 선악 판단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책일까 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아요. 그래서 말이죠. 하나님은 성경책만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에요 성경이 우리에 행위와 모든 삶에 유일한 규칙인데 그 규칙을 잘 이해하면은 성경이 다루고 있지 않은 지금 질문한 것 같은 것의 선악에 판단을 정확히 내릴 수있는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 어린아이로 돌아가 보도록 합시다. 초등학교 때 유치원 때 보면 은 어머니가 사주신 그림을 보면 은점으로 이어져 있죠. 1번 2번 3번 점으로 찍혀있어요 즙 난 우두둑 찍혀있어요 그런데 색연필을 하지고 1번에서 2번 긋고 2번에서 3번 긋고 3번에서 4번 긋고 4번에5번 긋고 5번에서 6번 긋다 보면 은 훌륭한 개가 만들어지는 그런 경험 있죠. 그러면 이제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성경이라는 법을 만드셨는데 이 성경이라는 법은 많은 규칙들을 담고 있고 이런 것이 선이고 이럴 때 악한 것이고 이런 때 선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려서 성경의 목적은 무엇이에요 왜 성경이 필요한 것이죠. 교훈하고 책망하고 갈기를 모르는 사람에게 이일이다 가르쳐주는 것이에요 그 길고 안가거나 잘못 가는 사람을 야단처서 옷가게 하는 것이죠. 이 미가는 사람은 확 꺾어서 올바르게 가게하고 그 다음에 계속가게 하기 위해서 교육을 하고 그러기 위해서 성경이 필요한 것이죠. 그러면 한길로 계속가게 하는데 그 가짓수는 수없이 법률이 많아도 헌법을 지향하고 헌법 전체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을 하듯이 그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도 많은 규칙들이 있는데 가닥가닥 모아져서 하나를 향한다. 이것이에요 그것이 무엇이에요 그것이 창조의 목적이에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에요 이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에요 바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더 중요한 것이 없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가 살아있다는 의미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에요 그것이 창조의 목적이에요 그 창조의 목적 그것을 염두에 두어 두시고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창조를 하셔서 모든 세계를 설계하시고 창조하셔서 그 창조를 질서 높게 하셨어요. 이것이 자연적인 질서에요 그 자연적인 질서는 창조의 목적대로 이세상이 움직이기에 인간이 행동하고 섬기기에 가장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에요 그래서 또 하나의 질서가 도덕적 질서에요 그래서 이 질서를 따라서 성경이 만들어진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이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이 세상이 움직여요 하늘에 별들이 돌고 그것 말고 이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을 이해할 수있는 피조물은 이 지상에 인간이외에 아무도 없어요. 개나 돼지는 창조에 목적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물론 구속이 완성되는 그날에 함께 기뻐할지는 몰라요 그러나 창조의 목적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이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차이에요 제가 언제 가시고기 이야기한적 있죠. 가시고기 아빠고기가 엄마는 새끼만 낳아놓고 도망가요 그러면 아빠 고기가 깔 때까지 물질을 하면서 산소를 공급을 해요 그래가지고 새끼가 나오면 못나오게 물질을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먹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일주일 이주일 지나면서 지느러미가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그러고 거기서 죽어요. 그러면 새끼들이 아빠에 몸을 다 뜯어 먹어요. 뼈만 남아요 그러 때 물속을 물질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어요. 덩치도 작은 물고기가 되어서 그래서 다 뜯어 먹히고 대가리하고 뼈다귀만 떨어지는 아빠의 몸을 지나서 문밖으로 나오는 것이에요 놀랍지 않아요. 그런데 무슨 문제냐 하면은 이 가시고기는 이것을 하기를 하는데 인간보다 낫잖아요. 사람도 이렇게 하지 그러나 패지 이렇게 패고 저렇게 패고 자식도 패고 마누라도 패고 패지 그러니까 비슷하기는 한데 틀려요 그런데 이 가시고기는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면서도 자기가 왜 그런지는 모르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효도 같은가 설교를 한때 자연적인 것에서 끌어오는 것은 해석학적에서 잘못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같이 물질을 하는데 인간이라는 놈은 자식을 팬다. 이것이에요 모양은 비슷하지만 물고기 만두 못하지 인간이 팬다. 이것이에요 그러나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 것이에요 그것은 무슨 소리입니까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면 개는 개를 보면서 저 개만도 못한 개새끼 욕하는 것 있어요. 없잖아요 돼지 보면서 저것은 있지 돼지 이하야 그런즉 있어요. 없어요. 모든 사물은 그것이 불가능해요 개는 아무리 미쳐도 개 이하일 수 없는 것이에요 돼지도 아무리 미쳐도 돼지 이하 일수는 없어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자기 이하일수가 없어요. 풀만도 못한 풀 그런 소릴 들어보았어요. 없어요. 이상하지 않아요. 저는 이것을 해석을 한때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하였는데 그런데 단 한 종류의 존재가 자기이하일 수가 있어요. 누구에요 인간이에요 그래서 저 인간 같지 않은 놈 그러면서 심지어는 개만도 못한 놈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인간만이 인간보다 못한 상황까지 내려 갈 수있는 게에요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에요 뭐가 위대합니까. 묻고 싶겠죠. 하나님이 한 인간이 인간이하가 될 수있을 가능성까지 인간에게 주신 것이에요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면 인간이 인간 이하가 되는 길이 모두 하나님을 본받으려다가 인간이 이하가 되는 것이요 뭐가 하나님을 봇 받으려다가 인간이하가 됩니까. 인간이 인간이하가 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본뜨려다가 모두 인간이하가 되는 것이에요 자 어떤 것이 인간 이하에요 남의 물건을 강탈을 하면 인간이하겠죠 멀쩡한 사람들이 조용히 성도의 옆구리에 시퍼런 칼을 대면서 자매 돈 내놔 라고 합시다. 돈을 빼앗아갔다고 칩시다. 인간이하죠 예배 시간 내내 칼을 만지면서 돈 훔칠 생각하였다는 것이죠. 그것이 무엇이에요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 아니에요 모든 것은 하나님 것이에요 그래요 안 그래요 여러분들의 모든 것이 누구 것이에요 하나님 것이잖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자유롭게 사용 하실 수있죠.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모든 것이 주님 것이죠. 그것을 흉내 내는 것이에요 내 것 은물론 내 것이고 이것도 내 것이다
하나님을 흉내를 내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 모든 악이 결국은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이에요 심지어는 하나님이 싫어 그리고 하나님 미워 도망가는 것도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이에요 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에요 착한자다 악한자다 나는 네가 싫다 이렇게 판단하실 수있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만이 하실 수있는데 자기가 위에 올라가서 하나님 못써 판단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잘렸어 판단하는 것이에요 누구를 흉내 내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이에요 방탕함 이것도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이에요 어떤 점에서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억제 당하실수 없는 분이시죠 누구에게 의해서도 제한당하시거나 구속당하시거나 하나님 그러지 마세요. 이 금을 넘어오시면 제가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다. 고해서 하나님이 못 넘나드시는 것 아니에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언제든지 행하실수있는분이에요 그것을 흉내내는것이에요 그럴수있는것은 인간밖에 없는것이죠. 그것을 행하는것이 위대하다는것이아니라 그런 악을 행할수있는 선택할 수있는 도덕적인 능력 그 자체가 위대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왜 여러분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보았죠.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스테스라는 사람이 아야 기했잖아요. 누구한테 이야기를 해요 주제 파악 못하는 사람한테 이야기하잖아요 본래의 뜻은 너가 얼마나 위대한 영혼인지를 깨달아라라는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창조를 하였어요 그런데 그러니까 인간만이 창조의 목적을 이해 할 수 것이에요 그것도 욕망 따라 살면 생각안하고 지성을 깨우치지 못하면 몰라요 그래서 일평생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는 사람이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고 그중에는 학문을 많이 한사람도 포함되어있죠 자 그러면 그 창조의 목적을 염두에 두어두시고 하나님이 이 법률과 같은 성경을 만들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성경만 주셨느냐 그것이아니라 그러면 이런 의문이 나오지 않아요. 성경을 전혀 모르는 나라도 거기가면 법이 있어요. 없어요. 법이 글로 쓰인 것이 아니더라도 법이 있어요. 없어요. 있죠. 우리나라에서도 법이 만들어진 것이 고조선시대에요 고조선 시대라고 해보아도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정도죠 그 이전에서 사람이 많이 살았어요. 그리고 굉장히 발달한 문명생활을 했어요. 지금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70년대나 80년대 되었을 것이에요 유럽에 오스트리아와 이태리 국경을 여행을 하던 얼음을 있는 계곡을 여행하던 사람이 조난당한 사람을 발견을 해서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이 달려왔어요. 사람이 어름사이에 빠진 것이에요 몸이 이렇게 나왔어요. 그 사람을 건져서 데리고 가보았는데 이상해요 왜냐면 패션이 요사이 패션이 아니에요 불같은 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어요. 나중에 몇 주가 지나면서 감정결과 놀라지 마세요. 주전 3000년대 사람이라는 것이 발견되었어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 사람이 빙하 속에 들어 있다가 녹으면서 몸이 올라온 것이에요 썩지 않고 냉동된 상태로 최근의 등산객으로 착각할 정도라니까요 그가 가지고 있는 부장품들을 다 조사가 되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정교한 무기와 장신구들 그리고 옷감 이런 것들을 이용해서 문화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거죠 단군 조선이 세워지기 1000년 전 이야기죠 그러면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살 때도 삶에 규칙이라는 것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있었죠. 성경이 쓰인 것이 제일 오래된 것이 주전 1400년 전인데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에요 그럼 이전에는 어떻게 된 것이에요 그런 규칙이 있었는데 그 규칙들이 사람들에 본성의해서 생겨나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라 형제들 간에는 서로 죽이지 마라 이웃에 물건을 훔치거나 몸을 상하게 하지 마라 심지어는 간음하지마라 결혼했으면 부끼리만 그런가. 해라 재판할 때는 거짓말하지마라 그런 조항들이 다 쓰여 있는 것이에요 사냥을 한 다음에는 혼자 먹지 말고 나누어 먹어라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면 이미 이러한 모든 인간 안에 있는 그런 것들이 규칙들이 이속에 들어오게 되면 사회에 질서가 생기겠죠. 그렇죠. 규칙들이 이해가되기 생기면 사회가 질서가 생길 것 아니에요 그 질서가 마지막에 가고 싶어 하는 최종적인 질서가 무엇이냐 이것이에요 그것이 창조의 목적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묻고 싶겠죠. 하나님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랐는데 창조 목적을 압니까. 우리도 창조의 목적을 모르는데요. 그런데 그것은 창조목적을 이해를 못 핫 어도 창조목적을 따르도록 이속에 정신과 영혼이 세팅이 되어있는 것이에요 그랬기 때문에 이세계가 창조되어서 이 멸망하지 않고 질서와 모든 것들이 유지되면서 하나님에 세계가 보존될 수있었던 것이에요 웃기는 대화가운데 있잖아요. 부인이 아이를 탁 낳았데요. 남편이 와가지고 여보 정말 애 낳느라고 고생했어. 그런가. 부인이 무어라고 했는지 아세요. 여보, 따스할 때 드세요 식인종 부부의 대화 레요 만약에 사람이 자기 새끼를 따끈따끈 할 대 먹어버린다면 세사이어‘뻗게 되었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런가는 인류역사에 별로 없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악한 것으로 여겼어요. 이러한 놀라운 질서 이런 것들은 자연 질서만큼이나 놀랍게 도덕적인 질서가 새겨져 있는 것이죠. 놀라운 것이죠. 자 들어보세요. 양심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이렇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가 있어요. 태양은 여기 있고 지구는 태양의 주의를 돌고 또 다른 지구주의를 돌고 이렇게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에요 태양이 사라지고 나면 지구가 먼저 사라질지 모르겠지만 이모든 관계가 깨지는 것이에요 왜냐면 태양이 그만한 질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뛰쳐나가려는 지구를 끌고 있고 지구는 뛰쳐나가려는 힘이 있기 때문에 태양 속에 풍덩 들어가지 않고 이 만근 유지하고 도는 것이에요 지구가 절반밖에 안 남았다 어마어마하게 회전이 빨라지겠죠. 이쪽에 있든 달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조수간만의 차이도 다 인력에 의해서 결정이 된 것이죠. 모든 것들이 그렇게 쭉 이 우주에 모든 사물들이 다 자리와 질서를 가지고 있어요. 자연적 질서에요 인간에게는 도적적인 질서라는 것이 있는 것이죠. 하나님과 이하에 있는 것이죠. 자기가 어디에 서야하는지 그리고 이런 저런 악들이 행해질 때 자기가 어느 위치에 서있어야 하는지 자기위치에 서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의 작용을 해야 하는지 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질서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라는 것이죠. 그 질서의 마지막 목표는 창조의 목적을 향해가는 것이에요 이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의 아름다움과 사물의 완전성의 아름다움을 찬란하게 구가를 해서 하나님자신이 피조세계에 구사를 해서 찬란하게 구사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에요 그러면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은 어느 위치에 있어야하고 아버지는 어느 위치에 있어야하고 엄마는 어느 위치에 있어야하고 자식은 어느 위치에 있어야하고 목사는 광부는 선생은 군인은 어느 위치에 있어야하는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에요 그 모든 것들이 창조의 목적에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양심이라고 하는가는 이 질서에서 이탈을 하는 것이에요 이탈을 했기 때문에 아 이것은 아니다 이 자리는 내자리가 아니다 내가 내 자리 은 이탈을 했기 때문에 다른 것들과 다르구나 하며 괴로운 것이 양심이에요 그러니까 들어보세요. 그 질서에서 조금 이탈하면 조금 움직이는데 많이 이탈하면 크게 움직여서 고통을 주는 것이죠. 예수 믿는 사람이 잠을 많이 자야 돼요 안 돼요 의사가 많이 자라고 한사람 하나님이 완전히 자라고 한사람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멀쩡해요 아프지도 않아 밥 먹는 것을 보면 전혀 아픈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한없이 자 그것이 질서에서 이탈한 것이에요 아니에요 이탈한 것이죠. 양심의 가책을 느낄까요. 안 느낄까요. 그냥 게으름 피우다가 탁 쩌 을 대 일어났는데 12시가 되어 햇빛이 비출 때 찔리지 않아요. 짜증나죠. 그런데 그것도 질서를 이탈을 한 것이죠. 살인을 했어요. 그것도 질서를 이탈한 것이죠. 그런데 어때요 전자는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상해 이 귀중한 시간이 ㄹ이렇게 버리면 안 돼 는데 그러면서 자기가 미운 것이에요 짜증나면서 이러면 안 돼 는데 그렇지만 점심대면 다 잃어버려요 왜 그러냐면 질서에서 많이 이탈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간에 의식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에요 사람을 죽였다 오랫동안 남는 것이에요 죽였지 생명을 전하는 도구가 되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들리는 것이에요 양심에 가책이 들려오는 것이에요 질서에서 많이 이탈을 하면 강력하게 들려오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은 법을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움직이려면 한두 객아니라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때 최상의 창조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너 자리는 여기다고 하는 법을 주셔야 되요 그랬죠. 그래야죠 예를 들자면 이런 것 아니에요 집을 샀다 팔았다 섰다 팔았다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거든요 이것은 아닌가. 같다 생각이 들면서도 텔레비전에 나와 투기꾼이 그러면서 나오면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러면 안 돼 는데 그래도 그냥 해 그런데 법이 생겼어요. 한번만 그러다 걸리면 사형 그러면 어떻게 되죠. 사람들이 못하는 것이죠. 싱가포르라는 안가가 재미있는 나라에요 껌 씹다 걸리면 10만원이에요 그리고 겁을 팔다가 걸리면 60만원벌금이에요 자동차나 담벼락에 페인트하다 걸리면 곤장을 받아야 돼요 여성을 히야 까시다가 문제가 되면 많이 받아야 돼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데려다가 물볼기를 칩니다. 앞은 옷을 입히고 물을 분 다음에 곤장을 친대요. 두어 대 맞으면 탁 터져 버리죠. 옆에 외가 의사가 있는 것이죠. 진단을 하서 더 맞아도 됩니다. 그러면 더맞아야 되고 고만 맞아야 됩니다. 그럼 치료받고 나서 나머지 받아야 돼는 것이요 여러 해 전에 미국 청소년이 페인트를 그리고 다니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걸렸어요. 그래가지고 판결이 났는데 6대로 판결이 났어요. 미국에서 난리가 난 것이에요 클린턴 대통령이 편지를 보냈어요. 그러나 2대깎아서 4대 받았어요. 이렇게 법이 ;딱 시행이 도면 어떻게 되죠.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에요 그래가지고 여자들이 거의 옷을 벗다 시피하고 걸어 다녀도 수작을 거는 사람이 없어요. 왜냐면 죽기를 각오를 해야 해요 양심적 이여서 그런 것 이아니라 법이 무서워서죠. 법이 밖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안에도 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두 가지에다가 하나님의 법을 해 겨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는 들판에 새기시고 또 하나는 가슴에다가 새긴 것이죠. 그 마음에 새겨진 법이 율법이에요 그래서 쓰진 율법이 오기 전에도 이거 그렇죠. 이속에 쓰인 것이 훨씬 오래된 거시죠. 돌에 새겨진 것은 나주엔 새겨진 것이죠. 하나님이 그 질서를 따라서 살도록 창조하신 것이죠. 무엇 으보고 증거가 나와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숨잖아요. 누가 뭐라고 그랬나. 이미 벌써 창조될 대부터 이안에다가 새기신 것이에요 벌서 창조의 목적을 심각하게 위반했다 고하는 질서이탈의 의식이 이안에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는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시죠. 아담아 네가 어디 있었느냐 어디 있느냐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창조의 목적을 향하게 되어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 을하고 싶겠죠. 그러면 목사님 하나님이 그렇게 밖에도 법을 주시고 안에도 법을 주셨는데 왜 이세상이개판입니까 우리 중에 누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새겨져있는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문제에요 그것이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 분명하게 새겨져 있어서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있어서 그래서 문제가 안 되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끊어진 것이에요 예를 들자면 건물이 이렇게 있는데 건물부수는 기계가 와서 부셔놨어요 유리 즉각 나무 벽 무너진 것 기둥 부러진 것 형광등 돌아다니는데 대충 이것이 어디 붙어있는지 아는데 완전히 복구할 수 없듯이 분명히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도록 법을 세우시고 우리 밖에도 법을 주셨는데 영혼의 눈이 어두워서 우리의 법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요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무지 때문에 그러네. 다가 인간에 이 마음은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서 명정하게 되는 것 이아니라 이 타락한 이후에는 이속에서 욕망이 치밀어 올라와서 마음에 안광들을 흐리고 지성을 더럽혀서 자기 마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법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 볼 수있는 어떻게 저렇게 악을 행하고도 사람들의 양심에 가책이 없을까 하는 것이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일들 평범한 사람들은 토해버릴 것 같은 일들을 하면서도 자신이 질서에서 이탈되었다는 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죠 죄가 그 사람을 망가트린 것이죠. 최근에 저는 일주일 지나도 30분도 텔레비전 볼 시간이 없는데 잠깐 보는데 오늘날 만연에 있는 가정에 파과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거기서 무엇이라고 하냐면 부부가 살고 있는데 남편이 바람을 피었어요. 그러다가 그 여자도 가정이 있는 여자에요 남편에게 발각이 났어요. 그러니까 남편이 그 남자를 만나서 개 패듯 팬 것이에요 그래놓고 소송을 걸줄 알았더니 그것을 안 ?고 너 이렇게 나쁜 짓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데 회사에 알려서 ‘짤 리고 그다음에 사회에서 매장을 시켜버리겠다 그럼 너무 무섭잖아요. 한번만 봐달라고 애원을 하면 우리 같으면 감목 속에 넣던지 돈을 달라고 하던지 그럴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라 너가 너 죄를 나한테 용서 받을 수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나도 너 마무리하고 자야겠다. 그것이 우리의 전반적인 생각이에요 나는 잠깐 동안 보면서 엽기적인 소송을 보는듯한 것이에요 같은 남자로서 어떻게 그렇게 복수를 할 생각을 하냐. 이것이에요 더 놀라운 것은 그 일이 실행이 돼서 그것이 우리생각에는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안가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로부터 굉장히 이탈이 된 것이든 요 그런데 그들은 못 느끼는 것이죠. 우리가 왜 이 세상에 변화를 위해서 노력해야하냐면 말이죠 이런 것들은 절대로 사람 안에서 생겨나지 않아요. 사회가 이런 것들을 도와주어요. 그래서 사회가 될 때 이 양심의 빛은 현저하게 흐려지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많이 이탈을 했는데도 전신이 이탈했다는 생각을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만 올바르고 경건하게 사는 것 이아이고 세상을 바꾸어야 돼요 왜냐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사랑을 전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안에 있는 법도 신뢰 할 수 없는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이안에 양심의 빛만을 가지고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없는 것이죠. 혹 안 다고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아는 것은 불가능 하는 것이죠. 성경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죠. 또 한걸음 나가 성경을 통해 창조의 목적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해한 것과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죠. 자 생각해봅시다. 자신을 낳아서 자식을 위해서 열심히 직업 활동을 해서 돈을 벌고 아이들을 올바르게 교육을 시키고 잘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 부모의 사명이라는것을 잘아요 그런데 모든 부모가 그렇게 사는것은 아니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을 해야되요 사랑을 하면 그렇게 살수가 있어요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을 모두 이해를 해도 그렇게 살수가 없는것이에요 그럼 결국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면 선악을 향한 판단을 성경을 통해서 내려준다고 하더라도 우리속에 그렇게 하나님이 정하신 선을 기쁘게 따를수있는 마음이 없다면 알면서도 결국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못하는것이에요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는것으 대단하게 여기는것이아니라 창조의 목적을따라 사는것 하늘에 별과 달들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우주의 질서의 일치 그 일치의 어울림의 아름다움을 구가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내가 한구석에서 이렇게 존재하고 섬김으로서 마지막에 창조의 목적에 어떻게 이바지하는 것을 알뿐만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쉼을 얻게 되는것이죠 그러면 그렇게 될수있는 비결은 선악을 아는것만으로는 안돼어요 무엇이 필요해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 초월적인 사랑 그러면 보세요. 마지막으로 내가 내 아내만을 사랑하고 부모만을 사랑하고 자기가 속해있는 회사만 사랑하고 하는가. 자신에게 뻗어 있는 어떤 것들만 사랑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창조의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질서 전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결국은 자신이 사랑하고 존재하고 작용하고 사랑하고 하는 모든 도적적인 행위와 이 결정들이 전부다 모세혈관처럼 이어져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향해 흘러가도록 자기를 허락을 안 해요 하나님이 아름다움이죠. 옛날에 충신이라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 없잖아요 임금을 너무 사랑하고 임금에 대해서 헌신적이어서 임금이 마음속에 모든 질서 모든 계획들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질서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고치고 그 질서에 항거하는 무리들을 토벌하는 일에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것에요 그것이 충신이에요 바로 그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초월적인 사랑이 하는 것이 덕이 되는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을 하고 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가. 이외에는 창조의 목적 전체를 받아들이게 하는 자원은 없는것이에요 예를 들어 봅시다. 하늘을 향해서 비행기 2대가 날아가는데 요즘비행기는 1시간에 3200키로 날아간데 대단하죠. 비행기가 날아가는데 1도 정도가 틀려요 똑바르면 똑바로 갈 터인데 출발할 때 너 똑바른데 속도가 시속 3000키로 에요 몇 초가 안 되면 이 비행기와 저 비행기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되는것이죠 그리고 몇 분 지나면 한비행기는 서해 바다 있고 한비행기는 동해바다 있는 것이죠. 그렇게 되는것이죠 그러면 결국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창조의 목적대로 살기위해서는 이런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됀 다는 것이죠. 대체로 하나님 뜻대로 살자 이런 생각을 가지면 기울기가 틀린 비행기가 출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죠. 자 저기가 창조의 목적이에요 저기를 겨냥을 했어요. 겨냥을 했으면 똑바로 나가야하잖아요 그런데 똑바로 갈 필요 있다 1도 정도 틀려도 세상에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리고 출발을 해요 근데 열심히 살지 않을 때는 몰라 예를 들어 창조의 목적대로 살자고 하는 사람의창조의 목적을 위해 살자고 하는데 둘 다 식물인간 상태에요 둘 다 누워 있어요 그러면 이것이 달려가야지 벌어질 것 아니에요 그런데 에너지가왕성해 돈도 많지 젊어 힘도 꿈도 있어 좋은 꿈 나뿐 끔 맛있어요. 그리고 능력도 있어요 권력도 있어요 그리고는 돌격 앞으로 한다. 이것이에요 그런데 각도가 조금만 차이가나도 그 에너지를 가지고 달려가면 창조의 목적과 먼 방향으로 가는 것이에요 여러분 가끔 그런 생각한적 없어요. 사람을 보면 은 교회를 다니는 것 이외에는 직업이 없는것 같고 다 하나님을 위해 쓰는 사람 같고 입만 열면 교회이야기 하는데 아닌가. 같은 사람 그런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아무도 완벽하게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렇지만 표 대는 정확하고 목표도 분명 해야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으로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자신에 삶의 모든 방향에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려고 애를 써야하는 것이에요 참 신기한 것은 놀라운 비결은 성경에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신기하게도 낫선 도시에 가면 호텔이나 숙박업소에 가면가. 서랍에 지도가 들어 있잖아요. 그 지도는 도시를 어떻게 찾아야하는지 나와 았는 것이잖아요 성경도 그런 것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의 창이가 무엇이냐면 놀랍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일까 내가 이렇게 사랑을 하고 창조의 목적대로 살고 싶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것을 열심히 공부하면은 그렇게 살아가면 놀랍게 능력을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은 말이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전달해주는 책이에요 그래서 이 성경을 많이 탐구하고 이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그 진리 안에서 생명 선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뿐만 아니라 또한 악을 미워하고 선을 따라 살아갈 수있는 실제적인 능력을 생명과 사랑을 이안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에요 얼마나 놀라워요 그래서 결국은 그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이 모든 인생사에서 선악을 판단할 수있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결국은 창조의 목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되는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매일 매일 사람의 본분을 생각을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오늘이 시간에도 아버지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신실하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자비하신주님 함께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가운데 저희들을 붙들어주시고 아버지 앞에 살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자비하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하오니 저희들에게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였사오니 하나님 저희들ㅇ게 지혜와 지식을 주셔서 주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향해 살아갈 수있도록 도와주시고 실지로 살아갈 수있는 능력과 힘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희들을 도와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저희들이 받았으니 아버지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사명을 감당할 수있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15.도덕적 통치의 수단 : 계시(1)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오늘이 열다섯번째 시간입니다. 이제껏 달려온 것을 죽 돌아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영원한 세계 속에서 이 시간세계를 만드셔서 이 세계를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하셨는데 자연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로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하셨고 그리고 우리는 그 창조의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창조의 분명한 목적을 따라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렇게 부름 받은 우리들이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도록 창조하셨는데 죄 때문에 타락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어 구속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다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생명과 사랑의 힘으로 다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해주셨다 이거죠. 그래서 선악이라고 하는 그 기준은 인간이 수없이 많이 세우지만 하나님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는 틀림없이 이 선악의 기준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 그리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표준이 되어서 거기에 부합하는 것이 선이고 거기로부터 멀어지고 이탈하는 것이 악이라 이것이 열다섯 번의 줄거리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를 하셨다면 하나님이 그 창조하신 세계가 그렇게 창조의 목적을 이루도록 하나님이 다스려야될 것입니다. 그래야 지만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을 정하셨다는 것이 말이 된다는 것이죠. 만약 하나님이 창조 목적은 정하셨는데 둘 다 문제죠 하나님이 그런 것은 정하신 것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들을 쓰레기 쏟아놓듯이 확 쏟아 노셔서 아무렇게나 살게 내버려두셨다 그러면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큼 비이성적인 게 어디 있겠어요. 우리 눈앞에 있는 이 모든 사물 가운데 사람이 만든 것 중에 단 하나도 목적과 이유가 없이 만들어 진 것은 하나도 없어요. 하물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거기에 목적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잖아요. 또 목적이 있게 세상은 창조하셨는데, 안 되도 할 수 없게 놔두신다.. 그것도 가장 바보 같은 생각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진행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 목적을 이해하는 존재들이 있어야될 것 아니에요?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특이성이 있는 것이죠.
저는 음식점에 가면 제일 기분 나쁜 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어서 오세요 하고 분명히 소리는 나는데 사람이 없어. 보니까 유리 통에 인형이 두개가 들어서 문을 열면 자동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어서 오세요 그래요. 차라리 해놓지를 말지. 그건 나아요. 옛날 어느 냉면 집에는 문을 열면 어서 오세요 그래요. 뭔가 봤더니 구관조 한 마리가 거기 있던 거예요. 냉면추가 실제로 제가 들었어요. 그런 것들은 굉장히 기분 나쁘지 않아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창조목적을 정하시고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러면 그냥 당신 혼자서 하시면 되잖아요?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 같은 것은 만들지 마시고, 빛이 있어라 하니 있게됐으니까, 영광아 가득 차거라 영광아 점점 늘어나거라 하면 점점 늘어날 거 아니에요?.. 그러면 거기에는 뭐가 없겠어요? 하나님과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 사이에 교제가 있을 수 없잖아요. 그렇죠? 그게 바로 묘미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거예요.
한국의 단편소설 가운데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소설이 있어요. 내용은 거의 다 잊어 버렸는데, 결론이 뭔가 하면 애를 낳았는데 애비를 안 닮은 거예요. 나중에 찾다찾다보니까 발가락 하나가 닮은 거예요. 그래서 위로를 받는다는 이야기예요. 부모가 왜 그렇게 자기 닮은 자식을 좋아하는 이유가 뭐예요. 뭐라고 생각을 하세요? 물론 이제 자기 닮았을 때에 싫어하는 것도 있어요. 왜 나처럼 그렇게 공부를 못하냐?. 왜 날 닮아서 못생겼냐? 부모들도 그것을 알잖아요.. 왜 날 닮아서 성질머리 그 모양이냐? 누가 그러데요 ‘공부 좀 해라 넌 왜 이리 공부를 못하냐’ 막 이러니까 ‘엄마는 공부 좀 했어?’ 이러더래요. 그런 경우를 제외하곤 자기를 닮았을 때 아주 좋아하죠. 그 이유가 뭘까요? 그를 볼 때에 나를 보는 것 같은 거.. 그게 인간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는 것이죠. 찬송가에도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계속해서 당신을 닮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당신이 될 수는 없어도 당신을 닮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것도 그 마음이에요. 그렇게 닮을수록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질들이 주님을 닮을수록 주님은 우리를 보시면서 당신 자신이 우리 안에 계신 것 같은 교통의 기쁨을 누리시는 것이에요.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은 자기처럼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을 보면 만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죠? 이해되시죠? 뭐냐하면 교통이 잘 되는 거예요. 얼굴은 틀려도 이 속에 정신과 영혼이 이 사람이 주님을 닮고 저 사람도 주님을 닮고, 이 사람이 은혜 가운데 있고 저 사람도 은혜 가운데 있으니까 성령 안에서 교통이 풍부하게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것도 굉장히 복잡한 내용이지만은, 어쨌든 그런 교통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럼 거기에서 교감이 막 흐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속에서 말하자면 마음과 정신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예기 꺼내면 잠깐 예기하는데 6시간씩 그렇게 흘러가는 거예요. 점심도 안 먹고 말씀 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런 경지에 들어가 봐야지 만 ‘아 성도의 교제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만날 모일 때마다 과자 사다놓고 서로 즐기는 게 교제가 아니라.. 진리가 그 안에 있어야지 만 교제가 비로소 이루어지는 거예요. 왜? 진리가 서로를 통하게 만들어 주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니까 ‘코를 날 닮았네, 얘 좀 봐, 입이 날 꼭 닮았어. 발가락 좀 봐 날 쏙 빼다 닮았어.’ 그러고 좋아하지만, 하나님이 발가락이 있으세요? 입술이 있으세요? 볼이 있으세요? 없으시잖아요? 왜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그러면 어때요? 하나님이 교통하시는 데 있어서 그런 거는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외모는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굉장히 소망이 있지 않아요? 외모가 문제가 안 된다는 거..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하나님을 닮은 많은 영혼을 가진 사람, 하나님처럼 생명으로 꽉 찬 영혼, 하나님처럼 사랑으로 꽉 찬 영혼, 그런 영혼과 하나님께서는 일치를 이루시며 기뻐하시는 것이에요.(10;58)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굉장한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굉장한 거라 이거죠. 굉장한 것이기 때문에 올바로 안 살면 인간은 2,3년 살다가 복날에 맞아죽는 개보다도 더 불행한 것이에요. 개야 복날에 몇 대 맞아 목메 달려 죽어 보신탕으로 돌아가면 잠깐이지만 인간이 올바로 살지 못 할 때 그 고통과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거죠. 정신분열증에 걸릴 수 있는 피조물은 인간 이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개가 정신분열증에 걸렸다는 것 들어본 적 있어요? 분열될 정신이 없어요. 인간만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어마어마한 책임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대목이에요. 제가 그래서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회심하기 전에 몇 번을 죽으려고 그랬어요. 자살하고 싶어서. 그 이유가 뭐냐하면 인간으로 사는 게 너무 힘든 거예요. 가난한 것도 이기겠어요. 저도 꽤 가난해 봤거든요. 뭐 다 이기겠어요, 그런데 인간으로 살아있는 것이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때 진짜 좋은 전도자가 와서 나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었다면 지금쯤 더 훌륭한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혼자서 지독하게 방황을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거죠. 창조된 이 세계는 스스로 창조의 목적을 모릅니다. 아무도 이해를 못해요, 이 피조세계는.. 그러니까 창조목적에 대해서 인간을 제외한 이 어마어마한 우주와 피조물들은 다 수동적이에요. 다시 한번 반복할게요. 너무 중요한 대목이에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적 피조물들은 창조목적에 대해서 수동적이에요. 하나님이 이끌면 이끄는 대로 그냥 가는 거예요. 그럼 창조목적에 대해서 능동적일 수 있는 존재, ‘능동적’이란 말이 여기서 무슨 뜻이냐면 창조목적을 알고 어차피 창조목적은 결국은 실현되고야 말지만 그래도 창조목적을 알고 자기가 창조목적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그것을 포기하고 창조목적을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흘러가게 할 수 있는, 그런 점에서 능동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 외에는 없는 거야, 이 지상에는.. 인간과 천사에게만 그것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상에서는 인간들에게만 그 능력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인간이 돌이나 풀, 나무처럼 모두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어서 하나님이 이끄시면 이끄시는 대로 움직이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한데, 창조목적을 알고 그 것을 따라서 살 수 있는 그 두 가지 능력이 인간에게 있어야지 만 돌이나 풀, 나무, 개처럼 창조목적에 대해서 소극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에요. 저는 아직 신앙이 어렸을 때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굉장히 유치하게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뭐 그것을 당신이 다 할 수 있는걸, 굳이 인간을 만드셔서 그 인간을 보고 그렇게 하시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 아이를 낳잖아요. 아이를 낳는데, 우리는 늦게 아이를 낳았어요. 결혼한 지 7년 만에 아들 하나를 낳는데, 제 밑에 동생 되는 장로님이 딸을 먼저 낳았어요. 얘, 자랑을 만나면 만날 와서 하는 거예요. 하루는 그 때 처음으로 나도 딸 하나 낳았으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뭐라고 그러냐면, 형님, 딸을 길러 보니까 아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그러냐 했더니 옛날에 자가용도 없잖아요? 시내버스 타고 덜덜거리고 집에라도 딱 가면 이제 차가운데 있다가 이제 집에 들어가면 안경에 서리가 쫘악 끼잖아요, 그럼 딸아이가 그 때가 3살, 4살쯤 될까, 크리넥스 착 뽑아 가지고 탁탁 탁탁 온다는 거예요. 아빠 안경 닦으라고.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가지고 와서 안경 닦으라고 주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거예요. 난 내가 닦는데.. 그러면서 아, 진짜딸이 정말 좋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 그 후에 딸을 낳아보니까 정말 재미있어요.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그럼 잘 생각해보세요. 자기가 빼서 닦으면 되지 이렇게 말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틀리잖아요. 자기를 닮은 그 아이가 부부의 사랑 가운데 생명으로 태어나서 아빠가 안경이 뿌옇게 되어서 자기 얼굴을 못 보는 것을 알고 크리넥스를 하나 떼어 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 때 그것을 바라보는 아빠의 모습이 유치해요?..아니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유치해요? 그럼 도대체 그런 것이 유치하면 고상한 것은 이 세상에 뭐가 고상한 것이에요?... 하나님의 모상이예요. 모두... 여러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하나님이 못 하시는 것이 있겠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교회를 지을 때 어느 교회가 부지를 마련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그 다음날 가보니 이미 지어졌더라, 그런 교회 건축 보셨어요? 왜 대답을 안 해요? 성경에 보면 산도 옮기신다는 데.. 그러니까 뭐 그렇게 복잡하게 설계도 그리고, 감리 붙이고, 콘크리트차 오고, 그 인부 부르고..뭐 복잡하게 그렇게 해요. 온 교인 30일 금식기도.. 하나님이 완성된 집을 하늘나라에서 크레인으로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대한민국 건축법에 맞게. 아멘! 그러면서 열렬히 기도하고 뼈만 남아서 온 교인이 가보니까 지어졌더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어요? 없어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내려주실 때 30일 굶어서 해골 같은 교인 박수하는 것보다는 그 교회를 지으려고 할 때 목회자 하나가 강대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그것을 보다 보니까 딱하게 여긴 장로님들이 와서 금식을 하네 철야를 하네 하고, 그 광경을 보면서 교인들이 월세 금을 떼고 퇴직금의 일부를 떼고 집을 옮겨가고 적금을 깨고, 이렇게 해서 100만원씩, 50만원씩, 1000만원씩.. 옛날에 우리 첫 번째 교회 옮길 때는 어느 청년 하나가 20일 노동해 가지고 와서 봉투에 넣어서 바쳤어요.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아름다운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거예요. 그 목적을 지성으로써 이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는 대로 자기 의지를 행사해서 성취하고 살아가는, 그러면서 매 순간 자신이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열심히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 재미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거예요. 아주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쉬운 수준으로 얘기하자면 하나님이 그래서 세상을 창조하신 거예요. 그걸 유치하다고 이야기하면 안 된 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두 가지를 주셔서 창조목적을 이해하고 그 목적을 따라서 살면서 이 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이 더 충만하게 드러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신 거예요. 지성과 의지..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겠죠. 목사님 그러면 고전적인 인간의 3요소 지성과 정서와 의지.. 지, 정, 의, 그러면 이 욕망 ‘정’은 어디 간 것입니까? 사실 욕망은 의지 쪽에 가까워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분은 지성과 의지만으로 구분을 했어요. 벌써 마음에 욕망이 생긴다는 것은 의지 쪽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욕망의 움직임은 의지를 향하는 것이라고 봤어요. 그런 면에서는 존 오웬 목사님도 마찬가지죠. 욕망은 인간의 삶의 방향타라고 말했어요. 방향타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뭐냐면 의지의 가는 방향을 정해준다는 것이죠. 욕망이.. 그래서 하나님이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영 안에 의지의 작용과 지성의 작용이 있는 거예요. 그것을 똑같이 인간에게 닮은 것을 주셔야지 만 교통을 하실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을 닮은 ‘영혼’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영혼’ 안에 당신을 닮은 지성과 의지를 주셔서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지성을 영혼을 가진 인간이 지성으로써 이해하고 하나님이 가진 의지를 인간이 영혼 안에 가진 의지로써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과 한 마음으로써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거예요. 하나님 앞에 인간이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는 거예요. 딱 두 가지.. 그게 뭐냐면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서 사는 것. 나머지는 전부다 장식품이에요.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한 거예요. (질문)믿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답변)믿는 것도 알기 위한 것이고 살기 위한 것이에요. 알기 위하고 살기 위한 거예요. 믿는 게.. 그러니까 믿음은 수단에 불과한 거예요.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에요.(25;20)아는 것은 지성으로, 사는 것은 의지로써 사는 거예요. 마음을 잘 지킵시다. 왜? 마음에서 아는 것이 파악이되고 마음에서 선택을 하고 살아야할 방향을 정하는 거예요. 이것을 잘 지키지 않으면 혼란이 오는 거예요. 이것도 또 수단이 되는 거예요. 지성과 의지 이 두가지를 인간에게 주신 거예요.
Ⅰ. 계시와 사법적 행동
자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 목적을 가지고 계신데 어떻게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 목적을 따라 살도록 도덕적으로 통치하시느냐, 두 가지 수단이예요. 계시와 상벌 이 두가지를 가지고 수단으로 통치하시는 거예요. 이 두가지 수단을 어떤 방법을 가지고 통치하시느냐 하면 그게 바로 은혜와 율법으로써 통치하시는 거예요. 앞으로 여러 주 동안 이 문제를 상세하게 다룰 거예요.
A. 계시 : 사법적 집행을 위한 공표
자 그러면 이제, 하나님 당신 자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목적대로 이 세상을 이끌고 가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인간들이 알게 해 주셔야 된다 이거죠. 그것이 뭐냐 하면 사법적 목적을 위해서인 거죠. 사법적이란 게 무슨 뜻이냐면 어떠한 행동을 할 때 미리 정해진 규칙을 따라서 행동하고 상대방이 그 규칙에 부합하며 살면 상을 주고 어긋나면 벌을 주어야지만 그것이 사법적 행동이 되는 거예요. 이런 사법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있어야 하죠? 법이 먼저 서 있어야 된다 이거죠. 법이.. 그래서 그게 뭐냐 하면 계시예요, 계시. 계시가 뭐냐 하면 사법적 집행을 위한 공표예요.
가끔 보면 말도 되지 않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관청에서 손을 못 쓰는 경우가 있죠? 왜 그러냐 했더니, 법이 없데요. 법이 없어서 그렇게 못 한데요. 지금은 건축법이 무지무지하게 강화됐죠. 그거 어기면 큰 일 납니다. 그래서 몇 달에 한 번씩 비행기에서 사진을 찍어요. 찍어 가지고 몇 달 전에 찍은 항공사진 위에다가 똑같은 크기의 사진을 탁 엎어놓고 딱 비쳐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딱 맞아야 돼. 그런데 안 맞는 부분이 나오죠. 그러면 표시를 해서 왜 이게 안 맞는지를 조사하는 거예요. 아 여기는 도로공사가 있었구나, 아 여기 이 집은 한 층 더 지었는데 허가가 나갔구나. 다 대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근거가 없이 지어졌다던가 하면은 즉각 철거 명령이 내려오고, 철거 안 하면 즉시 구속이에요. 벌이 굉장히 커요. 몇 번 나오고 그 다음에 구속이에요. 그리고 그래도 안 하면 집달리(?)들이 와서 강제로 헐어 버리고 비용 청구해요.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 때 일이었어요. 월곡동에 살 땐데 그 동네 뒤에 가면 밤나무골이라고 산이 있어요. 지금은 전부다 집 천지죠. 그 산이 그렇게 큰산은 아닌데.. 그게 요즘으로 말하자면 어디냐 하면 창문여중 있는데 거기쯤이에요, 산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산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밤나무가 꽉 차있구요. 지금도 눈만 감으면 눈에 선해요. 거기 옹달샘이 있어서 방학 때면 아침마다 강아지 데리고 거기 세수하러 가죠.(31;30) 그러면 막 강아지도 따라오고 그래서가서 세수하고 그 다음에 주인이 있긴 있지만 그래도 가을이면 가서 돌멩이 던지면서 밤도 좀 따먹고..그러고 오면은 저쪽에 도살장이 건너편에 있었어요. 소 잡는 소리도 좀 나고. 그 때 저는 알았어요. 물 먹이는 소. 밤나무 골 거기에다가 소를 묶어놓고 도살장 들어가기 직전에 바케스로 물을 막 먹이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끌고가요. 그러면 소가 벌써 동료들이 죽은 냄새를 맡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하면서 그렇게 슬피 울어요. 그래서 끌고 가면은 요만한 통로 안으로 들어가면 백정 아저씨가 도끼로 때려 죽어서 나오는 곳인데.. 그래서 조그만 산이었는데 그때는 산이 컸겠죠. 왜냐하면 집이 하나도 그 뒤에까지 없었으니까. 그래서 가끔 노루를 잡아 가지고 와서 눕혀놓고 잘라서 팔고 그랬어요. 그래서 거기는 온 동네 아이들이 놀이터고 쉼터였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아무나 올라가서 나무를 자르는 거예요. 그러고는 거기에 집을 짖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동네에 소문이 나기를 ‘가서 무조건 차지하면 된 데더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새카맣게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낮에는 못하니까 밤에 가서 천막 치고 그 다음날 천막 속에다가 블로커 쌓고 해서 집을 졌는데 순식간에 그 밤나무골이 전부다 온 산이 집천지가 된 거죠. 지금 같았으면 아마 어림없죠. 난리 났을 거예요. 다 그런 거는 왜 그래요? 법이 허술하거나 아니면 법이 허술하지 않아도 집행할 능력이 없으면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만약에 상명하복 관계에 있는 사람이 저 사람을 내가 원하는 목적대로 뭘 부리고 싶다라고 하면 저 사람에게 일을 시켜야 될 것 아니에요? 그리고 규칙을 정해줘야 될 것 아니에요? 너 9시까지 나와야 된다. 그리고 6시에 퇴근해야 된다. 이 정도만 하면 안 되죠. 만약에 그렇게 안 하면 월급 안 줘. 이제 둘 다 들어간 거예요. 뭐냐면 9시까지 나와, 6시까진 일해야 되, 그 대신 그렇게 안 하면 돈 안 줘. 9시까지 나와 6시까지 일해야 되 이건 규칙이에요. 두 번째 그렇게 안 하면 난 돈 안 줘 이거는 상벌이에요. 이렇게 보여주고 압박을 가하고 상을 약속해야지 만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도가 말하자면 집행이 되는 거예요. 재미있는 얘기 해 줄까요? 직원들이 들으면 재미 하나도 없을 텐데. 직원이 점점 늘어났는데, 직각을 만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날 심각하게 얘기했어요. 너 직장생활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 그런데 여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곳인데 그러면 되겠느냐? 그러지 마라. 물론 이해는 가요. 직장은 6시 딱 퇴근인데, 교회에서는 수요일 날 밤 10시나 돼야지 집에 가죠. 금요일 날 금요기도회 끝나면 11시쯤 되죠. 토요일 날은 주일 준비하느라고 바쁘죠. 주일은 주일대로 모임 있죠. 월요일 날도 출근하지. 그러니까 사실은 가면 피곤해서 늦게 오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격적으로 호소하고, 때론 야단도 치고 그랬어요. 그런데 안 돼요. 기도를 하는데도 응답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출판사에 있는 어느 한 분이 자기네도 그래가지고 너무 힘들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일반회사 같으면 뭐 험하게 막나가니까 시말서를 써라, 나가라 그러는데 같이 믿는 사람들끼리 그럴 수 없으니까 자기네들도 고역이었데요. 그래서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하다가 어떻게 했냐하면 한 달에 두 번 지각하면 휴가를 한 번 빼기로 이렇게 했데요. 아 너무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와서 이제 웃으면서 이랬어요. 지각해도 괜찮다. 그 대신 한 달에 두 번 지각하면 일주일 준 휴가에서 하루 빼라 그랬어요. 그랬더니 일시에 싹없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직원들 좀 출근 일찍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안 됐는데..믿음이 없어서..근데 딱 되는 거예요. 아 참 좋구나.. 그 다음엔 무슨 현상이 생기냐면 다 하루만 지각하는 거예요. 하루.. 하루는 괜찮으니까..(웃음) 제가 이렇게 살아왔어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각 사람의 출결 상황이 나에게 올라와요. 나중엔 석 달에 한번으로 됐는데. 거기에 도장을 찍고 늦게 오고 지각 많이 한 사람에게 내가 유감의 편지를 보냈어요. 도장 찍어서..그랬는데도 안 고쳐 지더니 두 번 지각하면 휴가 하루 뺀다 그랬더니 다 잘 나오는 거예요. 모두 한 번 씩만 하는 거예요. 그 다음달 되면 그거는 취소하기로 되어있으니까 그 다음에 한 번 지각할 수 있고, 그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한 1년 그러다가 이것도 눈에 너무 거슬려.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번씩 다 이렇게 해요. 그래서 인제 이랬어요. 그러면 취소하지 말고 모아두었다가 두 번 지각하면 월요일날 당직을 시켜라 그랬어요. 그런데 완벽하게 사라졌어요. 완전히 사라졌어요. 아무도 지각 안 해.. 8시 45분 출근인데 43분에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쿵쾅 쿵쾅... 카드 딱 대러 가는 거예요. 44분 45초에 탁! 삑빅! 휴우! 하는 거예요. 왜? 10분 늦장 부리다가 2번만 부리 면은 월요일날 하루 나와서 근무를 해야 돼. 숙직을 돌아가면서 했는데 이제는 지각 많이 하는 사람 시켜라..이렇게 했기 때문이죠. 보세요! 규칙이 주어지고 두 번째 상벌이 주어지면 사법적 집행이 가능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시는 거죠.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무언가 하면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그리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선악을 정하셨다는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할 것 아니에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믿었으니까 하나님 있는 것 알지만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있는 거 모르는데 어떻게 창조 목적을 따라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명백하게 알 수 있도록 창조하셨는데 죄가 들어 온 다음에는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알아보지를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믿고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이 모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사는 게 가장 좋은 거지만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먼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버려두셨다면 아마 이 세상은 가히 살 수 없는 아비귀환의 세상이 됐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몰라도, 창조의 목적은 다 이해하진 못 해도, 인간이 무심결이라도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법을 새기시는 거예요. 그 법을 하나는 우리 몸 밖에 새기시고 하나는 몸 안에 새기시는 거예요. 몸 밖에 새겨진 율법은 바로 십계명으로 새기시는 거예요. 그리고 몸 안에 새기시는데 이 인간의 몸, 마음 안에 새기시는 것이 양심 이예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새겨놓으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정을 안 해도 확실한 것 하나는 뭐냐 하면 선한 일을 하고 살면 마음에 평안이 와요. 불안하고 죄를 지으면 이 속에서 끊임없는 불안과 괴로움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하면 질서에 대한 의식이예요. 질서.. 그래서 율법 나올 때 그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하겠지만은, 질서에 대한 의식이예요.
Ⅱ. 계시의 내용
그래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법을 새기셔요.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인도하신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그 보여주신 것을 가리켜서 ‘계시’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계시의 내용은 둘로 나뉘어지는데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뉘어져요. 일반계시, 특별계시를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라고 부르기도 해요.(43;40)
A. 일반계시
그래서 그것을 일반계시 그리고 특별계시 둘로 나뉘는데, 일반계시는 사람이면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계시라고 부르고 그런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가 자연적인 것. 즉, 풀이나 나무나 돌멩이, 하늘, 바다, 바람, 구름 같이 자연적인 것이 거나 혹은 인간의 본성이거나 사람이 살아가는 역사나 이러한 누구든지 눈을 가진 사람이면 볼 수 있는 이런 것들을 매개체로 해서 하나님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계시라고도 부르고, 특별계시는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주시고 내용도 일반계시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내용들인데 모든 인간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허락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접근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접근이 가능한 거예요. 여러분 같은 사람들.. 그런데 이것은 자연을 통해서 매개체로 오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을 통해서 오는 거죠.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다든지, 아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든지.. 이러한 신령한 사건이나 사실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리켜서 특별계시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일반계시가 아주 폭 넓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라면 그것이 하나의 초점으로 쭉 모아져요. 모아지는데 그게 뭐냐 하면 창조의 목적이에요. 그런데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부터 들여다봐야지 만 목적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예수님부터 먼저 봐야지 만 그것이 이해되게끔 되어있다 이거예요. 구조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잘 들어봐요, 이제.. 세상에서 제일 쉽게 설명을 해줄게요. 들어보세요. 자 이렇게 이쪽은 구약이고 이쪽은 신약이에요. 이쪽 끝은 영원까지 맞닿아있고 이쪽 끝도 영원까지 맞닿아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맨 시작점이 창조예요. 그 이전의 영원은 우리가 모르니까. 창조예요.. 그 다음에 이쪽으로 계속되어 세계가 완성이 되요. 그리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가 끝이에요. 그런데 이 창조와 종말, 여기에서 중심점이 어디냐 하면 중심점에 누가 계실까요? 예수님이에요. 근데 예수님이 중심이라고 하는 말은 이 끝과 저 끝 사이의 거리와 시간적으로 중간이라는 뜻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의미상으로 중간이라는 거죠. 의미상으로..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기다란 골목길이 있는데 골목길에 보이지 않는 저 어두운 끝이 창조고, 골목길 보이지 않는 저 어두운 끝이 종말이에요. 근데 한 지점에 보안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그 곳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비춰주는 빛이 가장 찬란하게 비취는 지점이에요. 그러니까 시작을 태초로 가서 시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더듬어서 보이는 데까지 들어갈 수 있는 거죠. 이렇게.. 이해 가죠? 이렇게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또 미래도 우리가 완전히 다 알지는 못해. 그렇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이 가장 환하기 때문에 예수님부터 출발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천히 더듬어 가보면 예수님 안 보고 어두운 골목길 보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데 예수님 먼저 보는 거예요. 아, 여기 환하게 빛이 들어오는 거예요. 아, 골목이구나!, 아하, 골목의 폭이 이만하네. 골목의 폭이 이만하니까 저쪽 골목의 폭도 이만할 것 아니에요. 그 정도는 상식적으로 떠오를 것 아니에요. 안 보여도..그렇죠? 오, 여기 집들이 죽 서있구나!, 아하, 여기는 산길이 아니라 안전한 동네 길이구나. 그럼 그렇겠죠? 뭐 몇 미터 가다가 어둡다고 해서 갑자기 거기서 사파리가 되가지고 코끼리가 뛰어나다고 사자가 튀어나오고 뱀이 춤을 추고 뭐 그러진 않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예수님부터 시작을 해서 태초도 보고 저쪽도 보는 거예요. 죽 보게 되는 거예요... 그게 계시예요.
1. 자연적 질서의 계시
그런데 그런 계시는 특별계시이고 그래서 일반계시 혹은 자연계시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보이시는 지를 여러분에게 설명 드리겠어요.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서 자연적인 질서를 계시해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자연적인 질서를 보면서 이거는 우연히 된 사건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그 긴 진화론 얘기를 여기서 지리멸렬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렇지만 얘기 들어보면 참 재미있잖아요? 지구에 아무 생명체가 없었는데 물이 생겼다 이거예요. 그리고 단백질이 모이고 그러더니 공중에서 번쩍 하는 번개나 전기가 있고 그런 방전에 힘입어서 아주 미약한 생물인 아메바 같은 것이 만들어지고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더 고등하게 발달이 되어서 원숭이까지 오게 되었고 원숭이들이 다 모여서 사는데 그 원숭이들 중에 일단의 무리들이 우리가사는 여기 말고 저 아래로 내려가면 뭐가 있을까 그러고 아래고 이동을 했더니 그 원숭이들이 인간이 됐다는 거예요. 이사 간 애들만 사람이 된 거죠.. 그런 바보 같은 상상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면서 원숭이하고 인간이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러니까 장구한 세월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진화되어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원숭이가 있고 여기에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도 어디론가 진화되어 가고 있는 중이겠죠? 이 원숭이도 진화되어 왔고,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진짜 사람과 원숭이는 같은 것은 극히 소수만 나오고 그 사이에 형체를 알 수 없는 비슷한 것들이 땅을 파면 수없이 나와야 되거든요. 내 말이 틀려요? 맞잖아요? 그 중간 것들이 발견이 안 되는 거예요. 개하고 고양이 중간쯤 되는 것, 식물과 동물의 사이에 있는 것, 동물과 사람의 특징을 동시에 가졌으면서 뭐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런 것, 이런 것들이 훨씬 더 폭 넓게 발견되어야 하거든요. 근데 그거 발견이 안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모든 것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합리적인 상상이에요.(54;10)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성에 맞게끔 자신들이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 게 아니라 이거죠. 모든 것이 우연이라 그러는 거죠. 자 그건 마치 무엇과 똑같으냐면 이런 거예요. 여러분, 잠수함이 하나 발견 되었어요. 그걸 놓고 이제 설명을 하는 거죠. 오랜 세월 흐르는 동안에 물에 떠다니던 철 성분이 계속 바다에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거기까지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거리는 거예요. 무거우니까. 무거우니까 가라앉는다는데. 그죠? 그래서 오랫동안 세월을 두고 가라앉으니까 어마어마한 물의 압력에 의해서 함께 모이면서 눌려서 철판이 됐다는 거예요. 그리고 어느 날 폭풍이 일어나서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물이 요동을 치니까 이게 놀랍게도 앞뒤가 확 휘어지면서 통같이 되었다는 거죠. 이게 너무 급격하게 휘어지는 바람에 공기가 미처 물이 들어올 새가 없이 돼서 속이 텅 빈 그런 배가 생겨났다는 거죠. 그러면서 아마 과학이 발달되면 저 엔진도 어떤 식으로 진화해서 저렇게 진화됐는지 물리작용으로 설명이 될 것입니다라고 우기는 거죠. 그게 얼마나 복잡한 얘기예요? 그냥 사람이 만들어서 물속에 집어넣었다고 하면 간단한데 그렇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 목적이 없이 존재하는 것 없어요. 인간도 목적이 없이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목적이 없이 창조하셨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연을 죽 보면 그 속에 아주 놀라운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놀라운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몸이 있잖아요. 길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의 길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의 길이, 목과 여기, 어깨와 어깨, 뼈와 뼈 사이, 이 모든 것 들이 전부다 이정한 비율로 이루어져 있는 거예요. 그리고 놀랍지 않아요? 모든 사물을 반을 쪼개면 다 대칭으로 만나요. 안 그런 사물이 아무것도 없어요. 시계, 반쪼가리 내면 두 개가 딱 만나죠? 자 이것도 반으로 나눠지죠? 나눠지죠. 인간도 딱 나누어지면 눈도 데칼코마니, 코도 데칼코마니, 콧구멍도 입술도, 이렇게.. 이렇게 나누면 물론 안 맞겠죠. 그러니까 이렇게 나누면 되요. 가슴, 어깨, 그 다음에 나온 배, 모두 다, 그리고 몸이 불어날 때도 대칭에 맞게 불어나는 거예요. 왼쪽 배만 이렇게 튀어나온 것 보셨어요? 오른쪽 엉덩이만 밥을 먹었더니 계속 나왔더라. 살이 올랐는데 계속 머리 쪽으로만 쪄가지고 화성에서 온 사람처럼 그렇게 되었더라. 그런 거 없잖아요? 그러면서 이렇게 똑같이.. 의자, 여러분이 가지고 다니는 가방, 심지어 숟가락, 젓가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집에 가서 봐요. 다 대칭이에요. 다.. 대칭으로 이루어져있어요.. 그러니까 아주 놀라운 질서를 가지고 아주 놀라운 질서 속에서 이루어져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놀라운 질서 속에서 이루어져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설계된 거라 이거죠. 기획것. 그렇게 된 거라는 거죠.
하나님 모르던 우리의 조상들이 자연을 보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을 배우는 거죠. 어떻게? 개미가 열심히 가을까지 열심히 일하고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배우는 거예요. 아 저렇게 열심히 일을 해서 겨울을 준비하는 구나. 그러면 우리도 건강이 있고 날이 따뜻할 때 열심히 일해야 살 수 있다. 이렇게 배우는 거예요. 심지어는 물이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을 보면서도 배우는 거죠. 그게 순리라고 하는 것을 배우는 거예요. 흐르는 물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것. 이런 것을 보면서 배우는 거예요. 그 속에서 지혜를 끊임없이 터득하면 터득할수록 그 멀리 계신 위대하신 하나님은 몰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창조목적으로 자꾸 돌아가게 되는 거예요. 완전히 돌아가진 못하죠..그리로 돌아가죠. 그 질서를 따라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워요. 이런 자연적인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계획해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인간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우리가 산에 갔는데 돌멩이가 수없이 많아요. 근데 무질서하게 널려있으면 홍수가 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바위들이 굴러 와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비록 깍지 않고 다듬지 않았어도 네모반듯하게 정렬이 되어있고 구획이 짜져있다면 누군가 거기다 손을 댄 거죠. 그렇죠? 옛날에 집터 이었든지, 왕궁 터였든지, 뭘 지으려다가 포기를 했든지 몇 가지 중에 하나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건 뭘 보고 알 수 있어요? 그 의도와 계획은 자연적으로 있는 거라 할지라도 무질서하지 않고 질서를 갖추고 있을 때에는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했다는 것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죠. 산에 가서 나무를 봐요. 나무가 심겨진 게 종류도 여러 가지고 생긴 것도 제 각각 생긴 것들이 산에 죽 있어요. 그건 뭐죠? 그야말로 자연산 이예요. 누가 심은 게 아니라 세월이 지나면서 그냥 바람에 날려서 이 나무 저 나무 씨들이 날아와서 비바람 맞으면서 그냥 자란 거예요. 나무들도 못 생겼어요. 그런 나무들이 산을 지키는 거죠. 근데 어느 산에 딱 가보면 요렇게 서서 딱 보면 나무가 일자로 쫙 서있는 거예요. 또 요쪽에 가서 딱 보면 일자로 쫙 서있어요. 그래서 격자로 딱 서있는 거죠. 그런 뭐죠? 계획 된 조림이죠. 누군가가 나무가 크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벌써 오래 전에 띄엄띄엄 심은 거예요.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도 정확해요. 그래서 탁탁탁 짜져 있고 경제성이 있는 나무들로 꽉 차있어요. 이건 뭐죠? 기획 조림이에요. 그건 누군가가 와서 한 거예요. 우연히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거예요. 불가능 한거죠. 그러니까 없는 질서가 생기거나 있는 질서의 일부분이 허물어 졌을 때는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왔고 혹은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방해하거나 파괴한거죠. 그런 거죠. 그런 자연을 보면서 그 질서를 보면서 누군가에 의해서 계획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죠. 이제 여기에서 많은 종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봐라 이것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질서 정연하고 무엇인가 자연사물 속에 일정한 규칙이 있으니 이것은 산신령이 한거다. 그러면 산신령 믿는 종교가 되는 거죠. 아니면 우리 증조할아버지의, 또는 수천대의 할아버지가 만들었다. 무당이 되는 거죠.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종교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속에 있는 질서는 의식은 했는데 그 질서를 만든 분이 누구인지 모르게 될 때 이제 수많은 이방의 종교들이 생기게 되는 거죠.
그러면 거기서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되요. 아, 이 자연의 질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창조목적을 충분히 알고 깨닫는데 있어서는 충분하지 않구나!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경우 있죠. 답안을 먼저 보고 문제를 풀면 쉽죠? 왜냐하면 틀린게 나오면 틀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니까 답은 정해져 있는데..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세요? 그렇지만 답을 모르고 풀면, 틀렸어도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 못 하는 거죠. 특별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충분히 알고 자연세계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이 세계 안에 계시는 증거들이 수 없이 가슴 안에 다가오게 되는 거예요. 무얼 봐도 다 보게 되는 거예요.
전 요새 힘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늘 저녁때도 세소 하면서 그 생각을 했어요. 온 우주가 힘으로 꽉 차 있는 거예요. 그 힘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거기 계신 효과를 나타내시는 거예요. 그 힘은 영이신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에요.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세요. 그러나 그 하나님은 또 어디에도 안 계세요. 하나님은 모든 사물 속에 계시지만 모든 사물과 절대로 섞이시지 않으시고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데나 다 계시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아무데도 안 계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하늘에 계시다고도 말해야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특별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일반계시로 다가오게 되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게 되는 거죠.
(찬양)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죽 부르는 거예요. 그럼 뭐 말할 수 없는 그 신비가 꽉 차있는 거죠. 온 세계 안에, 창조세계 안에.. 그 온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하늘의 별, 쾅하고 들려오는 벼락 치는 소리, 이 모든 것을 들을 때에 한없는 감미로움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라고 고백을 하게 되요?
(찬양)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죽 찬양을 부르는 거예요..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온 세계가 하나님으로 꽉 차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신 증거를 쫙 보여주는 것이에요. 밤하늘의 별과 흐르는 물소리, 모든 것들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창조의 이치를 안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거예요. 환경을 파괴하지 말아야 되요. 진짜 회심하고 창조세계가 무엇인지 안 사람들은 세계를 그렇게 파괴하는 게 아니에요. 그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계..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지식의 관심사가 딱 세부분으로 정리가 되있었던 거예요. 피지카, 이게 자연학이에요.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자연적인 사물들의 이치를 공부하는 거예요. 그리고 로기카, 거기에서 논리를 세우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세 번째 에티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이냐.. 그거에요.
오늘날은 말이죠, 오늘날에 가장 각광을 받는 학문이 경제에 관한 학문일 거예요. 뭐 경제, 경영 이런 것. 그러니까 옛날에 법대에 몰리고 이런 사람들이 이제는 그런 것 안하고 경제 쪽으로 몰리는 거예요.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고액연봉을 받는 사람 10억씩, 20억씩, 심지어 30억씩 이렇게 연봉을 받는 사람이 있어요. 안 믿어지시죠?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 물건을 만들거나 그런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뭐냐 하면 경제와 관련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그 쪽으로 공부하려고 사람들이 수 없이 몰리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도 아주 웃기고 천박한 거예요. 인간사회의 이 경제의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삶을 절대로 행복하게 할 수는 없어요. 여러분들이 가난하게 살 때도 있었고 부유하게 살 때도 있었잖아요. 그 때 부유하게 살았기 때문에 행복해졌다고 느끼셨던 분 손들어 보세요. 나는 얼마 전에도 그런 생각했어요. 지금도 생각을 바꾸면 너무 감사한 게 많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 더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나 돌이켜보면, 가난했어도 지금보다 행복한 때 있었어요. 더 행복한 때.. 가난했어도.. 자가용도 없고,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고, 친구만나서 술이라도 한잔 하러가자 그러면 가슴이 덜컹 내려안는 그 때에도 행복한 때 더 많았어요... 너무 물질 중심으로 휘달려 가는 거예요. 대학이든지 공부하러 온 사람들 대부분 경제를 하겠다고 오는 데, 이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국부론이라는 유명한 책을 쓰잖아요? 뭐라고 그랬냐면, 경제는 도덕을 하는 사람에 의해서 연구되어야 하는 학문이다. 케인즈라고 하는 미국의 경제학자는 또 이렇게 얘기했어요. 경제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쿨 헤드, 웜 하트. 머리는 냉철하지만 가슴은 따뜻한 사람들이 경제학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지금은 어때요? 나라가 잘 살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비참하게 되는 거예요. 농경사회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 동네끼리 다 돌려서 양식도 먹고 그랬어요. 지금은 자기돈 없으면 일절 없는 거예요. 일절 없는 거예요.. 너무너무 비참한 거예요. 옆집에 누구 사는지도 모르니까. 그러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이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라고 해도 그것을 선택할 때에 가난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고통 받을 사람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경제학을 하면 안 된다 이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하든지 그런 거 상관없이 도덕과는 상관없이 한탕 올릴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할 수 있는 기술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몰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사회가 천박해 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 돈 벌고 잘 살기 위해서 미친 듯이 경쟁하고 자기를 소모하면서 사는 거죠.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자연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 죽 관찰하기만 해도 그런 삶이 잘못된 삶이라는 것을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을 자연적 질서 속에서도 계시하시지만 도덕적 질서 속에서도 계시하시는 거죠. 그 대표적인 것이 섭리예요. 계시는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지만 섭리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에요. 왜 악인이 번성하고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지 몰라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면 결국은 이것들이 바뀌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죽 역사가 흘러가면서 바뀌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가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잠시는 악이 승리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그 악이 파멸하고 선이 이기게 만들어 주는 궁극적인 승리를 주는 그 위대한 힘, 그렇게 이 세상의 질서를 조정하는 위대한 능력, 이런 것들이 어디에서부터 나오고 누구에 의해서 행사되느냐고 물을 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안는 사람들은 그냥 이 세계가 그렇게 되어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 게 어디 있냐 이거죠. 누군가가 세팅을 해 놨고 그것을 지금도 그것을 돌리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 이거죠. 그것이 결국은 뭐예요? 결국은 말하자면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힘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역사는 잠시 보면 모순이 만은 것 같아도 세월이 흘러가 보면 결국은 하나님이 그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하신다는 것이 입증이 되는 거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그때는 로마가 거의 파멸할 때였어요. 반달족의 침입이 시작이 되고 막 무너져가고 있는 그런 때였어요. 그때에 로마제국이 얼마나 강한 나라였어요. 1000년 가까이 번성하잖아요. 역사상에 둘도 없는 나라예요. 어마어마한 나라죠. 나라는 망했어도 그들의 교육, 정치, 법, 건축기술, 예술, 문학 이런 것들은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잖아요.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법, 도로, 건축, 문학 이런 모든 것들,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금도 행사하잖아요. 그래서 보면은요 어느 나라든지 강한 나라는 자기나라 상징을 새를 그려요. 우리나라는 봉황이잖아요. 근데 새를 그리는데 그 새 중에서도 무슨 새를 택하냐면 독수리를 택해요. 신성로마제국에도 독수리를 택했죠. 그 다음에 미국도 대표적으로 독수리를 택하잖아요. 백악관 문장에 보면 독수리가 딱 나오잖아요. 그게 뭐냐하면 로마시대 문장이에요.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로마시대 이후의 모든 국가의 이상은 로마 같은 나라가 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의 표본이 된 거죠. 미국도 이상이 그거예요. 온 세계를 미국제국이라 보고 통치하는 거예요. 그 이상으로.. 근데 요새 제국 안에 몇 군데서 말을 안 듣고 까불어서 제국에서 불편해 하고 있죠. 이라크, 북한, 한국도 가끔 머리를 디밀고 한번 해보자고 하니까 굉장히 지금 황제께서 기분이 나쁘신 거예요. 그런 거예요. 독수리 문장을 사용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그게 이상이에요.. 그럴 정도의 나라였어요. 다 허물어져 간 거예요. 그때 사람들이 이 나라를 그렇게 망가뜨린 것은 기독교인들이 미신같은 종료를 퍼뜨렸기 때문이라고 그랬는데, 그거 아니거든요.. 오히려 스토아철학 같은 것들이 그렇게 망가뜨린 거죠. 그런데 그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글을 쓸 때 이런 얘기를 해요. 로마 초기에 나라가 굉장히 번성했다 이거예요. 그 사람들은 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안 믿는 사람들도 있었잖아요. 근데 뭐라고 그랬냐면, 하나님이 그 황제들이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왜? 하나님이 비록 충분하게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아니라도 그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면 하나님이 그들을 평안하게 하시고 복을 주셔야지 만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라도 올바르게 살잖아요.
우리들이 이렇게 보면 그런 말이 있잖아요.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좋은 의미에서 고생을 해도 마지막에 활짝 피는 것, 악한 자에게서는 결코 못 봐도, 선한 자에게서는 반드시 본다. 그런 믿음, 그런 신뢰, 그거를 굳게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갖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본래 양심 속에 심어주시기도 했지만 역사의 경험을 통해서 수 없이 망하는 악인들과 그리고 마지막에 원통함을 풀고 결국은 복을 받는 선인들의 수많은 본보기들을 본 거예요. 그러니까 악하게 살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깊은 불행한 말로가 올 것이라는 것을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두려워하는 거예요.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갖게 해주신 거예요.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도덕적 질서를 통해서 당신 자신과 창조의 목적을 보여주신 거죠. 충분히 보여주시진 않죠. 그래도 인간들이 엉겁결에라도 그렇게 살게끔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거예요. 죽 만드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겨예요.
그러니까 잘 보면 나라가 법을 만들잖아요. 법을 놓고 좍 보면 대부분이 성경말씀과 일치하는 거예요. 다 나와요. 법에서 만든 많은 것들은 이 성경에서 따라 살으라고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도적질하지 마라, 그 다음에 거짓증거하지 마라, 이런 것들이 죽 나오는 거예요. 그것들을 반영하는 거예요. 안 맞는 부분이 있죠. 안 맞는 부분은 뭔가 하면 휜 거예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이익에 따라서 휜 거예요. 그렇게 해 가지고 법이 휘게되는 거죠. 그 속에서 살아가니까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합치하는 부분도 있지만 합치하지 않는 부분 때문에 그 속에서 갈등을 느끼며 사는 거예요. 내가 올바르게 살아야 하겠다는 것과 세상이 올바르게 살아주기를 원하는 것 사이에 갈등을 느끼게 되는 거죠. 양보하며 살면 세상을 닮아가고 거기 섞이는 것이고, 양보하지 않고 그것과 더불어 싸우면서 길을 열면서 살면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끔 살아가는 그런 삶이라 이거죠. 그것을 하나님이 자연 속에서 인간들에게 계시해 주셔서 인간들이 오늘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죄를 짖지 않는 거죠. 악을 행하다가도 사람이 보면 감추고, 이렇게 라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거죠. 그러니까 먼저 잘 안 다음에 아는 것만큼 이 세계를 보면 그렇게 아름다워지는 거죠.
그래서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음악에 대해서 잘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더 잘 들리는 거죠. 더 잘 들리면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 거죠. 언젠가 한번 TV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우연히 TV를 탁 틀었는데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어요. 정말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실 수 있는 분이셨는데 그만 몸이 아프셔서 결국은 내려놨는데, 땀을 비 오듯 쏟으면서 연주를 하는 거예요. 좍 연주를 하는데.. 제가 그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명을 받은 게 아니라 청중석을 카메라가 좍 비쳐주는데 거기 청중 중 몇 사람이 손수건을 꺼내서 계속 우는 거예요. 그때 내가 너무너무 자존심이 상한 거예요. 두 가지 점에서 자존심이 상했어요. 저 사람은 장난감같이 생긴 통하나 가지고 낑깡낑깡 해서 저렇게 사람을 울리는데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서서 저것 기껏 해봐야 질서를 흉내낸 가락에 불과한데 나는 질서 그 자체를 설교하는데 왜 사람들이 울지 않는 것일까? 우는 것이 최고는 아니지만..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뭐냐하면 나도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왜 저 사람들이 우는 저 감동적인 눈물에 동참하지 못 할까? 거기서 오는 열등감, 그날밤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나중에야 이유를 깨닫게 되었어요. 그게 뭐냐하면 음악을 좋아하지만 음악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똑같이 들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깊은 감동으로 다가오는가 하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그랬으면 음악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어야죠. 안 했어요. 그래서 여전히 지금도 그 모양이에요. 그게 창피해요. 근데 그렇게 음악에 대해서 잘 알면 음악이 들리기 시작하고 들리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턴 느껴지기 시작해서 목석과 같은 사람이 그 ‘지고이네르 바이젠‘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비 오듯 쏟는 거예요. 교회 가서도 그 사람이 그렇게 울었으면 좋겠어요. 그 자연의 질서를 보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거죠. 그러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그 정도이니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고, 모범답안을 먼저 봤어, ’아!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구나! 아하! 그런 거구나!‘, 그 모범답안을 알고 그 다음에 내려와 보는 거예요. 창조세계의 찬란한 아름다움, 형형색색 그 아름다운 단풍들, 그것들이 사라져서 나무들이 모두 발가벗고 이제 추워서 죽은 것 같은 나무들이 내년에 다시 거기서 잎이 돋고 가지가 움트며 확 자라면서 그 생명의 놀라운 전달자가 되는 것을 보는 거예요.. 나는 그러는 거예요. 인간이 태어나서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겠느냐 이거죠. 이건 보통 놀라운 기적이 아니다. 인간이 정말로 귀신에 씌우기 전에 어떻게 이렇게 명백하게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그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 살고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해서 추어도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살 수 있겠는가 말이죠. 안타깝지 않아요?
(찬양)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막 밀려오는 거예요.. 막 밀려오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을 알고 보면 말이죠, 바닷가에 서서 파도가 확 치는 소리를 들으면 주님이 나에게 들려주시는 사랑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거예요. 바다를 가로질러 온 바람이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그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요. 먼 들판에 꺾은 선 그래프를 그리면서 찬란한 빛을 내며 떨어지는 그 벼락, 그 광채와 그 무서운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온 땅과 하늘에 꽉 찬 주님의 권능,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그 하나님의 힘과 생명의 기운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통치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는 구르는 돌멩이 하나, 흐르는 물 한 방울, 개울, 거기에 떠가는 나뭇잎, 나뭇잎 안에 자리잡은 그 많은 잎의 무늬를 보면서도 우리는 그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이 자연의 세계 속에 질서를 만들고 너희들이 나를 향하여 살 질서를 정하였으니 너희는 이 질서를 따라 살며 행복하거라. 아멘. 찬송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할 뿐만 아니라, 그런 자연 속의 질서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런 부끄러운 인간들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17.도덕적 통치의 수단 : 계시(2)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하나님을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여야 하고 이 뜻대로 살면 이런 상을 주고 이 뜻대로 살지 않으면 이런 저런 형벌을 내리겠다고 하셔서 이제 이 세상을 하나님이 친히 창조의 목적을 향해 다스려 가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이 왜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보여주시는 것이 계시라고 했거든요 그 계시는 2가지로 나뉘는데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접근할 수 있는 일반적인 계시와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면 거기에 접근하기 어려운 그런 특별계시 이렇게 2로 나뉜다고 말씀이 드렸습니다. 그 일반계시가 바로 이 세상에 있는 자연만물들 그리고 또 이 세상에 있는 역사의 경험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 아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의 양심으로 깨eke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연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보여주는 계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맨 처음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특별한 계시가 필요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아주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혼이 맑고 깨끗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늘 영혼 속에서 볼 수 있었고 그리고 자연을 보면서 아주 감격해 하며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 놀라운 증거들을 보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늘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왜 창조를 하셨는지 창조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잘 알기 때문에 그리고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 자연 속에 있는 계시로만으로도 충분하였던 것이에요 그런데 인간이 범죄를 해서 타락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창조이시고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데 있어서 2가지 어려움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우선첫째는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이 본래의 그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모습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전달해주었던 그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에요 그러면 그 잃어버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되요 제 동창들이 만났어요. 20대에 대학 다닐 때 동창들 얼굴이 있잖아요. 그때 애인도 사귀고 하면서 서로 인사도 하고 눌러도 다니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한동안 연락이 끊어져서 한 40년 만에 만난 것에요 40년에 만났으니까 20대 해어졌다가 환갑이 넘어서 40년지나 서 만나서 동창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래요. 아니 이 할머니가 그때 너 따라다니다 그 꽃다운 색시냐 그것은 다른 사람만 그런 것 이아니라 자기 마누라도 그렇게 된 것이죠 20대대 꽃답고 꽃다운 예쁜 모습이 이제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살아져 버리고 60년 넘으면 용모 평준화된다고 했죠. 그때는 부족한사람이나 한 인물한 사람이나 비슷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때에 예쁘고 고왔던 모습을 보면 은 그 티가 나지만 그 기억을 못하는 사람은 얼굴을 보면서 40년을 돌려보면서 그때의 아름다운 얼굴을 알 수 없는 것 아니에요 언제 한번 20대 초반에 찍은 사진을 교역자와 직원에게 보여주었더니 비명을 질러요 어쩌면 이렇게 날씬하시냐고 그 말을 거꾸로 하면 요즘 이렇게 퍼졌냐. 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내가 지들도 퍼져바라 마찬가지고 이러 헤 창조한 아름다운세상이 죄로 인해 망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생생한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죠. 2번째는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에요 시력이 나빠졌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우월성은 꽃을 보고 꽃이라고 생각하고 돌을 보고 돌 인줄 알고 걸려 넘어질까 봐 조심하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꽃을 보고 곳의 의미를 생각하고 꽃 만든 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고의 기능 돌멩이를 보고 돌멩이로 말미암아 연상되는 다른 사실들을 생각하는 정신적 추론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의 사물 을보고 만지고 하는가에 말하자면은 이점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것들이 무너져 버린 것이죠. 무너져 버려서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세계를 보면서도 저것을 누가 만들었을까 아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렇게 만들 분이 없겠구나 하는 것은 기본이것이거든요 이 기본도 알 수 없는 인간이 된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궁금하죠 뭐가 궁금하냐면 학문의 세계에 들어가서 인간이 얼마나 그동안에 이 지식을 많이 쌓아 올렸는가를 보면 은 외로워져요 왜냐면 ]내가 공부해서 알게 되는 지식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이에요 그리고 옛날에 다 발견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누구도 발견하지 않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들이에요 어떤 경우에는 세계에서 최초로 발견한 것이야 하는데 1000년 전에 책에서 발견 되는 것이에요 인간에게 이런 역사가 많아요.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죠 벨이라는 사람이 발명한 것이에요 그런데 벨보다 더 빨리 발명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벨이 4시간 먼저 접수를 시켰어요. 그 사람은 생각지도 못했죠. 이것을 누가 만들었으랴하고 가지고가니까 이미 벌써 특허 접수가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먼저 만들어놓고 벨이라는 사람이 그사람 것을 베낀 것이냐 아니에요 각자한 것이죠. 물리학 자중에; 뉴턴이라는 사람 알죠. 그 사람이 사과가 떨어져서 머리에 맞는 것을 보면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잖아요. 공부만한 천재였어요. 천재 윗사람이 수학 광학 이런 것에 대한 이론을 수립을 해서 인류의 최초로 미적분을 완성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이런 물건을 잴 수 있는 계산법을 만드는 것이죠. 그런데 이사람은 연구를 하느라고 발표를 안했어요 그사람은 연구계속하고 연구체 미쳐서 발표할 생각을 못했는데 독일에 라이트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해서 체적을 내는 것이라고 발표를 했을때 이사람이 펄펄 뒨것이에요 어느놈이 내것 베겼다고 뛴것이죠 나중에 알고보니까 그사람하고 상관없이 미적분을 완성을 한것이죠 그래가지고 미적분의 완성의영광은 라이트 리첼이라는 사람에게 돌아간것이죠 이렇게 놀랍도록 인간에게 탁월한 능력을 주셔서 어마어마한 연구를 하게한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꽃잎 하나도 사람들이 연구를 했을까 하면서 보면 은 기절을 할 정도에요 꽃잎하나에 대한 지식이 방하나 에 K쌓아도 안 돼는 어마어마한 지식이 있는 것이죠.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지져 보고 색깔 루 내고고 그러게 연구를 하면서 그 수많은 의문은 제시를 하면서 누가 만들었을까 그런 질문은 안하는 하나님이 이것을 창조하셨다 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더 쉬울 터인데 그런 질문과 대답은 못할까 그것이 문제라 고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무엇이냐면 인간에 지성 속에 도덕적인 판단하는 능력과 자연적인 것을 판단하는 능력이 있는데 타락했을때 이것이 무너지게 되었는데 자연적인 것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호해주신 것이에요 그런데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심각하게 무너진 것이에요 남아있기는 한데 심각하게 무너졌어요. 그래서 무엇이 되었어요. 세상을 창조하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몰라본 것이죠. 예를 들어 불우이웃도 돌아보고 적십자 헌금도내고 거지에게도 천원도 주고 하는 것은 착한행동이에요 못된 행동이에요 착한행동이죠 그런데 그 인간이 지 아버지 어머니를 몰라봐 그래서 어머니를 학대하고 아버지에게 행패를 부려요 그러면 하위에 있는 작은 도덕적인 행동들이 이사람을 선한사람으로 만들 수 있어요 없어요. 없는 것이죠. 그래서 기본이 훨씬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죠. 무언가 교육을 잘못 받아서 인색해서 거지에게 돈을 주지 않고 적십자에 도와주지 않고 나라에 충성을 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인간으로 살아야할 도덕적인 행동을 잘하면 우리는 그사람을 도덕적으로 가망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에요 왜 그것은 가르치면 되는 것이라는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이 무슨 소리입니까 도덕적인 것이 무너졌다 우리에게는 무어도 있고 무어도 있고 판단력도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몰라보니까 다른 것을 알아보고 이치를 알아도 캐 들어가서 왜 그것을 하냐고 하면 자기가 좋아서 그렇게 했다고 말하는 것이에요 이해되죠. 그래서 결국은 자꾸 성경을 열 때마다 모두 죄인이고 모두 눈이 멀었고 모두 판단력이 없고 다 치우쳐서 악한사람이고 죄인이고 왜 이러나 그것이 그런 뜻이라는 것이죠. 하나님 아버지를 몰라보는 것이죠. 세계를 지은분이 하나님이시고 세계를 왜 지웠고 왜 자기를 만들었는가를 모르는 거죠 그러니까 이 후에 조금 도덕적으로 산다하더라도 연결이 없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시죠. 그러게 인간의 영혼에 어두움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판단을 하수 없게 되는 것이죠. 저는 눈이 나쁘면서 이 죄인의 눈 어두움에 대해서 정말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어요. 마음이 조금 우울할 대면 내가 눈 때문에 우울할 것이다 생각을 많이 해요 저는 천성적으로 선 면 비율 색 빛에 대해서 나도 피곤할 정도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그러잖아요. 아래 의도로 안 맞는 옷 입으면 피곤하다고 그래도 신경 쓰여요 감색양복에 감색 양말 입다가 검정색 양복 입으면 검정색 양말로 갈아 입어야되요 그런데 그러니까 눈이 나빠지고 나니까 면도 뚜렷하지 않아요. 언젠가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신호등이 몇 개로 보이나 보니까 6개로 보여요 그래서 누가 옆에 누가 있으면 물어보아요. 신호 떨어졌나. 그러면 평상시에는 어떻게 다녀요 눈치를 보면서 앞차가 가면 가는구나. 따라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전에는 안경을 쓰면 선면이 또렷해요 그리고 임목서 여드름 자국까지 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는 선명하고 좋아요 근데 요즘은 뭐든지 흐릿하고 안보여요 처음에는 낙심을 많이 했어요. 나중에는 아우구스티우느스를 공부를 하면서 많이 고쳐먹었어요. 야곱 같은 사람들은 말년에 눈이 어두워졌지만 오히려 눈이 더 밝아져서 손자를 축복을 한때 손을 어긋 맞추어서 누구를 축복할지를 알잖아요. 그뿐 만아니라 뉴턴을 신락원을 만들 때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눈 속에서 눈을 가지고 영적인 것들을 바로 보면서 딸의 도움을 받으면서 불후의 명작을 짓잖아요. 어쩌면 내가 이것이 눈이 좋아서 좋은 작품이 안 나온다고 생각하면서 희망을 가지는 것이죠. 나에는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에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그러면서 이제 영적인 정신적인 것에 눈을 많이 뜨고 가는 것이죠. 교인들이 나를 위해서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요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니까 괜찮아요. 그러 헤 해서 눈이 어두워져서 분수가 없게 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상태에서 인간을 내버려두면 결국은 인간이 결국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인수가 없을 것이고 하나님에게 무슨 뜻이 있어서 인간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인간이 걸어가야 할 사실을 모를 것 아닙니까 그것이 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에요 여러분 배속으로 난 자식이 부모도 몰라보고 사물에 이치도 모르고 그래서 여러분 그 아이가 지능이 없어서 거의 단순히 지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악하거든 그냥 남아이어서 아이를 남을 때 이 아이에게 걸었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짐승 같은 삶을 자식이 산다고 생각하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떨지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작정하졌냐면 인간들에게 본래에 창조의 목적을 아가서 살 수 있게 만들어주자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알아도 그렇게 돌아갈 수 없는 인간에게 능력을 주자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이 2가지를 타락한 인간들에게 부여하시고 주신 것이에요 이것이 무엇이냐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시는데 무엇을 통해 주시죠 진리와 은혜 혹은 성령 항상 두 가지에요 예배에 감격에 빠진다는 것도 지성으로 진리를 알고 그다음에 의지가 은혜의 감화를 받는 것이에요 그래서 길을 모르는 인간들에게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지성을 밝게 해주시고 알지만 돌아갈 힘이 없는 인간들에게 은혜를 부여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에요 타락한 이후에도 타락한 이전에도 필요했어요. 타락한 이후에는 필요성이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된 것이죠 우리교회에서도 보면 은 한때 말씀을 너무 깊이 깨달은 교인이 있어요. 예전에는 설교테입을 1000개 이상들은 교인들이 많아요. 지금은 와 천개며 는 1500시간정도 들은 것이죠. 5시간씩 300일 한 시간씩 5년을 들어야하는 분량이죠. 그렇게들은 사람들이 많은 것이죠. 그런데 어떤 날 미끄러져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미끄러지면 은 아주 확실히 미끄러져요 왜 높이 올라간 사람이 미끄러지면 은 무슨 소리냐면 워낙 제주가 없으면 못 알라가서 떨어져야 발뒤꿈치 깨지는데 엉덩이 보일정도로 높이 올라가서 떨어지면 중상이에요 그렇게 깊이 미끄러져요 군노는 짐에 여기저기까지죠 하나님이 지식을 많이 주시면 거기에는 아주 중대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에요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보통으로 안면은 안 돼요 그러면 미끄러져요 그것은 무엇을 보여 주냐면 지식은 남아있어요 무엇은 없어요. 은혜가 사라지는 것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어죽을 때가 되었을 때 맛나가 내리니까 무엇이라고 그랬어요. 너무 좋다 그래서 맛나 번역을 하면 이것이 웬 떡이냐 그런 것이거든요 나중에는 맛대가리 없는 맛나라고 그런 것이에요 그렇게 된 것이에요 그 모습은 얼마나 진지해요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도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상처라고 하지 않으시고 타락이라고 하시는 것이죠. 그런 것이에요 또 은혜가 너무 뜨거워 그런데 뭐에요 지푸라기와 같아가지고 10분 타고나니까 태울 것이 없어요. 그래서 진리는 장작이고 은혜는 계속 타는 불길이에요 그래서 불 끄는 방법은 간단해요 더 이상 장작을 안 넣으면 불길이 끝나는 것이에요 그리고 제아무리 잘하는 불이라도 장작을 넣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특별계시를 하는 것을 마련을 하시는 것이죠. 특별계시는 3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시거나 혹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거나 그다음에 이적이 일어나거나 이런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말씀이라고 한때에는 감동을 받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뜻이라고 생각하며 전해준 말씀이 있을 것이고 성경에 나온 것처럼 이것을 적어로 하늘에서 적으라고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죠. 그런데 원래 특별계시는 성경보다는 따라서 넓었어요. 그러니까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이적 하나님의 나타나심 말씀하심 이런 많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것일 얼마나 특별했겠어요. 그런데 그 특별계시는 만약에 지금도 계속된다면 많은 혼란이 뒤따르겠죠. 그렇죠.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그분도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그런 분이였어요. 그분이 신문지상에 엄청난 광고를 냈어요. 사실은 요지가 무엇이냐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에요 그것도 불과 3-4년 안에 전쟁이 일어나고 그때 백성들이 회계하고 새나라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어요. 안 일어났거든요 80몇 년도에는 주님이 오신다고 해서 전부다 들 집에서 나와서 하얀 옷 입고 산으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주님을 기다려도 주님은 오시지를 않는 것이죠. 그래서 허탈하게 다들 흩어지고 어떤 사람은 다시 그때는 몰라보았고 다시 말씀하신다. 고하더라. 이런 헛소리가 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에 대한 계시를 계속해서 주시지를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일정시점에서 끝내는 것이죠.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찬란하게 특별계시의 정점이에요 찬란한 빚을 드러내시고 빚을 본 사람들이 빚에 대해서 직접 본 사람들이 증명하는 시기까지만 허락을 하시고 거기부터 특별 계시를 뜯으시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난 것도 사건이니까 사라지고 말씀한 것도 사라지고 이적도 의미가 다른 이적이니까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모든 것들은 문서로 남게 되었으니까 이 성경을 정확하게 말하자면은 특별계시의 특별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 말고는 특별계시가 존재를 하지 않으니까 특별계시는 성경이다라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칠려구 보닌 것이냐 하면 첫째는 우리에게 그냥 잘사는 법을 가르쳐주기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창조주의 하나님께 돌아가게 만들려고 않는 계시에요 그렇게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수가 없고 또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에게 돌아갈 수 있게 하기위해서는 구원이 필요를 했어요. 그래서 특별 계시는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계시에요 그러니까 이 성경을 보면서 성경은 모든 것을 담고있지 않아요. 왜 어떻게 세상이 창조되었는지 부분적으로 담고 있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담고 있지만은 철학처럼 논리적으로 담고있지 않아요. 목적차제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는 것을 목적을 담게하는 것이죠. 창조의 모든 이치을 알기 이새서는 성경만가지고 모자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애를 낳아서 학교를 안보내고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만 계속 읽히면 세상에 적응 할 수 없는 인간이되는 것이죠.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이치를 깨닫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그런 시간이 필요한것이라는 것이죠. 또 두 번째는 이 성경은 특별계시의 성경은 말씀과 사실의 계시에요 무슨 뜻이냐면 특별계시는 성경을 보여주어야지만 특별계시가 아니라 예배 하나님이 반드시 교회 제도 이런 것들을 통해서도 그 속에 특별계시의 요소들이 묻어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또 그 창조주 하나님께로 인간이 돌아가야 된다고하는 것을 인간이 깨닫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제가 호주를 갔는데 어느 교인이 간증을 해요 자기아들이 신앙생활을 열심을 안내었는데 한국에 잠시 다녀왔는데 다녀온 길에 소문을 들었는지 열린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겠다고 그랬데요. 그래서 열린 교회에 왔는데 새가 족반에 공부를 하라고 그래서 새가족을 고우를 했더니 한사람이 당신 구원을 받았냐고 그러면서 사영 리를 전해서 들었는데 그런데 늘 듣던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전해주던 사람이 십자가를 전해주면서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형제의 마음속에 쇼킹한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죠. 인간의 마음에 십자가를 전하면서 눈물을 흘리 수가 있구나하고 회심을 가질 수가 있었다라고 하는 것이 간증의 요지에요 그럴 경우에는 그가 성경을 가르쳐준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십자가에 대한이야기를 하는데 그사람이 십자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에 의해서 듣는 사람에 대해 회심이 일어나게 되는 그런 것이 특별계시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것이 자체가 특별계시가아니라 거기에 특별계시가 묻어서 그렇게 전해지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 중에는 성경 한 번도 읽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까는 왜냐면 66권을 다 읽어야 구원을 받는것 이아니라 거기에 중요한 사실이 성경은 펼쳐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가슴에 다가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죠. 어느 교회 목사님과 저녁을 먹는데 목사님이 그래요 집에 가서 전도를 하는데 하사람은 나목사인데 이 교회에 있으니까 일요일 바쁘더라도 교회 들려서 예배드리시고 예수 믿으세요. 그러니까 지나가는 말이라도 목사님 고맙습니다. 한사람을 그러는데 한사람은 시간 없어요. 제가 거기에왜가요 그러니까 목사님이전도를해도 말을 안 들으니까 그래 너 잘났다 너 일평생 백 살 될 때까지 가위로 여기서 고기나 잘라라 그랬데요. 그리고 헤어였는데 이자매가 집에 왔데요 자는데 계속 그 소리가들리더레요 내가 백발 될 때까지 갈비나 잘라라 계속 그러면서 자기가 머리가 허에져가지고 이것을 잘라서 밥을 먹고 산다. 고하니까 갑자가 비참해지더래요 그 다음날 자기발고 교회에 나온 것이에요 놀랍지 않아요. 그러니까 무엇이냐면 죄인이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거기에 성경을 모두 이해해야 한는 것 이아니라 예배 전도 구속에 특별계시가 있어 전달되게 될 때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많은 요소를 가지지 못하니까 하나님 말씀을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죠. 유명한 예화로는 이기 풍목 사였거든요 그때는 한량이죠. 여선교사가 성경을 나누어주니까 성경을찢어서 코를 풀 더레요 여선교사가 열이 받아서 하나님이니 코를 가만히 두나보자 그 후 집에 돌아왔는데 콧소리가 들리는데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이에요 내가 높으신 분의 욕을 먹였는데 내가 무슨 일이 생기지 그러다가 두려움이 확 밀려오면서 자기발로 교회에 걸어가서 회심을 한 것이에요 그래서 제주도의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잖아요 그런데 모두 66권 모두 읽어야지만 구원받는다고 하면 이중에서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많을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안하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이 특별계시는 역사적인 계시에요 그래서 한 번에 하나님이 다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희미하다가 차츰 차츰 보여주다가 창조의 하나님의 알고 구원을 받고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구약에서는 희미하게 비치는 것이에요 잘아보이다가 그리스도에게 와서는 찬란한 정오에 햇빛처럼 비치는 것이에요 그렇게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이렇게 특별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냐면 율법과 복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이것이 특별 계시의 내용이고 즉 성경의 내용이에요 또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에요 하나님에 말씀을 전 사랑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에요 그러면 초등학교 수준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란 둘로 나뉘는데 율법과 복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이것이 내용이고 즉 성경의 내용이에요 또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 사랑합니다. 그럴 때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하신 것이에요 그것은 초등학교 이하의 수준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란 둘로 나뉘는데 율법과 복음입니다. 구약은 모두 율법을 기록한 책이 아니고 신약이라고 해서 모두 복음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구약 속에서는 율법을 통하여 복음을 드러내셨고 신양에서는 복음을 통해서 율법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율법은 무엇인가 율법 그러면은 굉장히 무섭고 두렵고 거부감이 느껴지고 그래서 당신 율법적이야 이렇게 말하면 듣기가 좋아요 나빠요 그렇게 좋은 소리가 아닌 것이 분명하죠.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고 율법이라는 말 자체가 구약성경 속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져요 첫째는 넓은 의미의 율법이고 두 번째는 좁은 의미의 율법이에요 넓은 의미의 율법은 하나님이 창조세계와 하나님에 뜻을 보여주신 모든 계시를 가르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율법은 나쁜 의미가 아니에요 그래서 시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죠. 특히 119편 시편에서 율법은 내영 혼을 소생하게 하나이다.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주의 율법은 나의 기쁨이요 등등 복이있는 사람은 영호와의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럴 때 그것은 좁은 의미의 율법을 가르키는것아니라 넓은 의미의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에요 그래서 다윗 같은 시인은 3000년 전의 사람이지만 이 율법을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 을하고 율법 때문에 지혜와 명철을 얻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 율법은 부정적인 율법이 아니죠. 그러면 좁은 의미의 율법이 있어요. 넓은 의미의 율법은 창조세계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내용이지만 좁은 의미의 율법은 선악의 기준이고 그리고 지키면서 살고 어기고 죽는다는 하나님의 처벌과 징벌에 대한 계시에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것이 법이다 이것은 하면 안됀다고 하는 그것이 우리가 그 죄를 범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것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는 범하지 않았는데 알고 난 다음에는 죄를 범하게되는 일이 많이 일어나게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신호등도 없고 줄도 없을 때에는 막 건너다녔어요. 그런데 노란 줄이 생기고 신호등이 생기면 이제는 건너갈 대 순경이 있나 보고 가는 거예요 그것은 법이 생긴 것이에요 건너지 말라 그리고 신호등을 달아놓은 것은 불이 파란불일 때만 정해진 횡단보도로 다녀라 그러면 막 건너다니다가 어려워도 내려와서 건너면서 질서를 지켜요 그러나 올은 것이 이것이요 저런 것이 놓은 것이라고 가르쳐 줄때 이간이 그것을 지키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곽선희 목사님이 설 교속에서 예화를 들었는데 이런 설교를 하니까 장로님들이 어느 목사님에게 물어보았데요. 율법이 무엇입니까 율법으로 말미암아 가입하였다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였다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장로님들 다음주일날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십시다. 그러니까 시골에서 사모님이 소반에다가 여러 가지 된장찌개도 그리고 반찬을 놓고 목사님이 나오셔서 배고픈 짐에 밥을 막 먹을려구하는데 잠깐만요 제가 볼일이 있어서 잠깐만 나갔다가 금방 돌아 올 터인데 다드시는데 요것은 드시지 마십시오. 무엇인가 그랬더니 사발하나를 뚜껑을 닫아 놓았드레요 먹지 말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열지 마십시오. 그래가지고 목사님이 잠깐 나가셨어요. 장로님들이 밥을 먹는데 반찬이 수없이 많은데 저것이 무엇일까 반찬이 그것이 아니어도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저기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에게 말이야 갈비일거야 열지 말라고하는서은 우리가 먹을 까봐 그럴 거야 그런데 너무 궁굼해서 밥이 넘어가는지 안 넘어가는지 모르겠어요. 열어볼까 열어보지 말라고 그랬잖아 그냥 얼어보고 닫으면 되잖아 그래서 열어보았는데 참새 한 마리가 날라 가버리더레요 그때 목사님이 들어시드레요 거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물어요.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까요. 하나님이 그것만 먹지 말라고 그랬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의 호기심을 재촉을 한 것이에요 제가 콜라를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7년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콜라를 먹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날부터 콜라를 먹고 싶어서 지금까지 먹고 있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콜라 전도사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전교인 만남의 식사 장소에서 콜라를 맛나게 먹어서 콜라 매상이 올랐다 고해서 콜라 전도사라고 그래요 지금도 생각이 꼭나요 음식점에 가면 제일 그거부터 먹어야되요 그것은 하지 마라 하는 순간에 그것 을하고 싶은 거예요 먹고 싶은 거예요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담배 많이 피잔 아요 연기가 들어가서 코물씩 눈물씩 그러면서 나오는데도 용돈가지고 가서 피잖아요. 왜 그래요 간단해요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학교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 기를 쓰고하는 것이에요 예전에 장발 기르고 다니면 은 경찰이 가위들고 다니면서 자른 것 기억하세요. 치마 자들고 다니면서 여자가 다니면 서라고 해서 센티로 제었다공요 뭐 그런 것이 맛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마음대로 킬러라고 하니까 여기까지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있지 그런데 요즘은 없죠. 하도 흔한 것이라서 그런 것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하지 말라 하지마라 하니까 제가 중등부 전도사할 때 부장집사님이 오셔서 전도사님 이것 못해먹겠습니다 왜 그러세요. 아치 참 이놈의 아이들이 집에 가서 불러오지 않으면 안온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루는 가서 벨을 눌렀더니 누구세요 그러고 안열어주더레요 몆번누르고 그래 더니 나오. 더레요 그래서 저 오늘 못가요 그래서 착각하지 마나는 너 교회가자고 온것아니야 출석부를 꺼냈데요. 열면서 나도 이제 할만큼 했다 매주 와서 불러갔는데 너는 오늘 부로 잘렸다고 빨간 줄로 겼데요 너 이제 찾아오는 것도 질렸으니까 예수 믿든지 다른 교회가 던지 담음대로 해라 나는 너희 집에 이제는 올 이유가 없다 줄 걷어 빨간 줄그었데요. 다시 안 올게 그리고 갔데요. 그 다음날 교회 나왔어요. 참 놀라워요 인간이라는 것이 그러니까 이것을 저지르지 말라 그러면 죽는다. 이런 식으로 율법이 이야기를 해도 인간의 죄를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좁은 의미에서 율법에 대해서 굉장히 비관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러나 유익은 있죠. 율법이 아니면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게 되는 것이죠. 거울에 비교를 하잖아요. 야고보 선생이 거울을 보면 은 여기가 때가 있고 그런 것을 안다 이것이죠. 근데 그것이 자기를 고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좋아요 이렇게 밥 먹고 보니까 고춧가루가 낀 것이에요 얼마나 고마워요 그러나 계속 그냥 낀 체로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보는 것이 찝찝한 것이에요 없는 줄 알고 살면 얼마나 좋은데 그것을 보아가지고 말이지 그것이 왜 그럴까 그런데 이좁은 의미 율법이 2가지로 나뉘는 데 처음에는 에덴동산에서 주어진 율법이에요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그러냐면 선악과를 먹지를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죠. 두 번째는 무엇이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다음에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지게 되요 그런데 이 율법은 굉장히 특별해요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충격적이었겠죠. 이스라엘 백성에 실질적인 조상이 아브라함이었거든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처음 말씀하셨던 것이 무엇이냐면 너를 복주고 복줄 것이며 네의 자손이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게 될 것이다 몆번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민족을 이루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살 때에 200-300만 명이 되었을 때에 꽉차있는 이스라엘의 자부심은 하나님은 우리만 특별히 편애하시는 하나님 이시라는 것이었어요. 그런 것이 하나님이 애급에 징벌을 내리시는데 바로에 처음 난 장자까지 죽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징벌을 내리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있는 곳에는 빛이 비추고 질병이 들어가지고 다 죽어가는 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축은 멀쩡하고 그 정도가 아니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가면 은 홍해가 쫙 갈라지고 마른 땅처럼 뛰어나고 걸어가고 나서 애급의 전차가 따라오니까 물이 합쳐 수장을 시키자 뭐 뜻도 보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인도 하시는 것이에요 너무 너무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야 이제우리는 정말 땡잡았구나. 우리 이제 복 터졌구나 생각을 했는데 일찍이 뵈옵지 못했던 정말 엄위롭로 두려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되요 빽빽한 구름사이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임재 두려운 엄위가 온산위에 가득한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조금 더나 가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에요 그 가운데 율법이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네 뜻은 이러이러하다 이렇게 이렇게 믿고 이렇 이렇게 살아라. 만약에 이렇게 산다면 너희에게 복을 줄 것이지만 아니면 너희는 죽는다. 여기는 사망에 이르는 조항이 들어오는 것이죠. 그래서 무엇이냐면 축복의 단비와 심판의 칼이 들어오는 것이에요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많은 하나님의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굉장히 성숙하게 다루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시는 것이에요 그것이 시내 산에서 주시는 율법이에요 지미면 살지만 어기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축복과 두려운 심판이 함께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율법이에요 그것들을 잘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인간들은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무엇을 깨닫게 되요 분명히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계시구나 그리고 목적이 있어서 이 세상을 지으셨구나. 우리는 거기로 돌아갈 수 없구나. 돌아갈 힘도 없구나. 깨닫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율법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은 내합으로 도저히 창조주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고 내합으로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구원을 갈망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에요 이때 눈을 뜨는 것이 복음이에요 그러면 그 복음은 무엇일까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기도를 한대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가 이처럼 넓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아리셨는데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지식과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주시고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오늘도 은혜를 받게 도와주시고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우리를 또한 창조하셨으니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그 안에서 경함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오늘이 시간에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온 마음과 온 뜻을 다해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을 하되 마음을 다하여 사랑을 하고 그리고 말씀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는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서서 주님의 말씀을 사랑 을하고 말씀에 싫증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은혜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나님에 대한 말씀에 대한 사랑이 불일도록 도와주시고 그래서 처음의 그때처럼 주님의 말씀을 사랑 을하고 주님의 말씀에 즐거워하고 그 말씀에 미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기도) 저음에 권고를 한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해갈하던 때를 생각을 해보아요. 말씀에 미각을 잃어버리면 세상에 대한 미각이 일어납니다. 말씀에 미각이 사라지면 은혜에서 떨어집니다. 그래서 미끄러집니다.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고 미끄러지면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중상을 입습니다. 예전에 그 열심 어디로 갔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정말 뜨겁게 사모하던 그 열심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 이 시간에 회계하면서 내 인생에 많은 문제가 있는가.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맛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내영 혼이 미끄러집니다. 하나님 이 시간에 은혜 내려주셔서 주님의 말씀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우리같이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심령 안에서 살아날 수 있도록 친히 역사해 주시옵소서. 아버지하나님에 사랑에 때 은혜에 때 아버지 하나님과의 사랑을 나누던 때 어버지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고 따르고 주님의 음성을 신랑의 음성처럼 즐거워했던 그런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회복시켜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 을하고 갈망을 하고 그리워하며 아버지하나님과 살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비나이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목마를 심령으로 주님의 말씀을 그리워하게 하시고 그래서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풍족해지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미끄러진 영혼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아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고 아버지하나님이여 저희들에 마음에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이 깃들어서 저희들에 심령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물데 인 동산과 같이 우리의 심령이 비옥해지고 변화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버지하나님이여 열심을 내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에 어린아이와 같은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런 순수한 심령을 주시옵서서 역사해주시옵소서
기도) 복 받은 성도는 돈 많은 성도도 아니고 몸 건강한 성도도 아니고 썩을 몸까지고 출세하는 성도도 아니에요 어린아이가 엄마의 가슴을 파헤치며 젖꼭지를 찾듯이 영혼의 양식을 찾는 성도들 지천으로 널려있는 테이프 책 언제나 교회가면 듣는 설교들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부요해졌다면 북한동포를 생각해보세요. 만주지방에 있는 성도한사람이 편지를 보냈어요. 그 설교 받아 적고 방송국에서 불러주는 그 성경 받아쓰면서 돌려보며 은혜를 받는다고 말이죠. 우리정말 생각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고 있는 고민대부분 사치스러운 고민입니다. 이 시간에 기도를 한때 다시 한 번 기도합시다. 하나님우리들을 용서해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맛나가 싫다고 투정을 부리며 고기 달라고 소리 지르던 패역함이 없는지 하나님 오늘이 시간에 우리의 심령을 일깨우시고 뜨거운 은혜를 받고 우리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이 기도합니다. 오랫동안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형식적인 예배와 형식적인 말씀 생활 속에서 저희들에 심령이 세상을 쫒고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참다운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 하나님 저희가 불평과 원망 그리고 온갖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핑계로 주님의 주신 자리에서 미끄러지면서 우리의 영혼이 더러움에 물들며 사는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도 진리이외에 심령을 새롭게 할 도구 가없고 우리의 심령에 변화를 것이 없사오닌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우리에 심령에 변화를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자비하신아버지 우리 엑 역사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저희들이 주님의 품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주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역사해주시고 변화를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우리의 묵은 땅과 같은 심령을 변화주시고 죽은 것 같은 우리의 심령에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 목마름 사름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도록 은혜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에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18.도덕적 통치의 수단 : 계시(3)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고전 15:1-2).
하나님이 이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통치를 하시는데 인간이 아닌 모든 자연적인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자연적인 방법으로 통치하시고 또 도적적으로 판단할수있는 영혼과 지성을 가진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만 도적적으로도 하나남의 통치를 받는다 말씀드렸습니다 자연적인 통치는 육체와 관계된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무리하고 영향을 공급받지 않고 하면 육체가 계속상하게 되는것이죠 또 자연으로부터 멀어져서 절제가 없이 무분별하게 욕망을 따르는 삶을 살면은 건강을 헤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그들이 선하게사는 지 악하게 사는지에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을 판단하시고 그에 합당하게 대우해 주시는것이죠 그래서 그 선악을 따라서 하나님이 각자를 판단하셔서 미래에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지만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판단을 따라서 복을 받거나 혹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거나 하며 살아가도록 만드신것입니다 어떤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는 가운데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고 어떤사람은 그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고 이렇게 궁극적으로 인간을 통치하심으로서 당신이 이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구연해 가는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에요 그런데 이제 이렇게 세상을 통치해가시는데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그 수단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계시와 상벌이에요 즉 하나님이 이세계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는 내가 창조한 세계이고 그리고 이러이러한 목적을 따라서 세상을 창조하였으니 이런이런 일은 하고 이런이런 일은 하지말고 살아라 만약에 이 말에 순종하면 너희를 복주고 행복하게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징벌을 받고 고통하리라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 계시에요 어떤 나라에있는 백성들을 올바르게 살게 하기 위해서는 법이 있어야죠 그래서 먼져 없던 법을 만들때에는 나라가 법을 먼져 보여줍니다 이러이러한 일은 이제는 하지말아라 그것이 바로 계시에요 만약에 그말만있고 그뒤에 아무말도 없으면 그것은 권고사항이죠 그것이 매우 중요할수록 반드시 법에는 그것을 어긴자들에 대한 상과 벌이 규정이되어있는것이에요 즉 간첩이 있으면 그 간첩을 신고하는 사람에게는 1억원의 포상금을 주지만 감추어주는 사람에게는 이러이러한 벌을 준다하는 것은 나라가 꼭 그 일을 백성들로 하여금 하게 하고싶은 의지를 보여주는것이죠 이것이 바로 상벌이에요 그런데 이 계시 곳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는데 일반계시는 누구든지 접근 할수있다는 점에서 일반계시이고 특별계시는 특별한 사람들만 접근한다는 점에서 특별계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일반계시는 이제 자연적인 사물들과 인간에 역사 경험 이런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그뜻을 알려주시는것이 바로 일반계시라고 말씀드렸고 특별계시는 이런 자연적인 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타나시거나 혹은 이적이나 혹은 꿈 이런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말씀하시거나 이런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이 이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그리고 우리가어떻게 살아야 하는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계시들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모두 끝났고 그것들이 성경의 기록된 형태로 남게 되었으니 원래 특별계시는 성경보다 큰 범주의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마지막 남아있는것은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이 특별계시이며 특별계시라고 할때에는 성경이라 말하고 그 이외에는 특별계시가 없다하는것이옳다 이말씀입니다.
그러면 특별계시는 다시 하나님에 말씀이라고 할수있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이 이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뜻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것이 냐라고하는 행동의 규칙과 교훈과 믿음의 규칙을 보여준다는것이죠 그것이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특별계시는 성경이고 성경하면 하나님의말씀이며 말씀하면 그것은 곧 성경을 가르치는것이고 그것이 특별계시라고 생각을 하면 틀림이 없는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과 무엇으로 이루어지느냐 할때 율법과 복음으로 이루어진다고 지난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율법은 넓은 의미의 율법과 좁은의미의율법으로 나뉘어지고 넙은 의미의 율법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의지를 보여주는 계시의 총채를 가르킨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이 율법은 부정적으로쓰이는 율법이아니라 영혼을 소생하고 변화시키고 참회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우리의 갈길을 보여주는 넓은 의미의 율법이에요 그리고 좁은의미의 율법이있는데 이 좁은 의미의 율법은 2가지로 나위어 지는데 에덴동산에서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율법과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율법으로 나뉘어 지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지키며 살아야할 그리고 그것을 어기면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이 들어오는 그러한 율법이라는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과 그리고 그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사는 구체적인 삶에 규칙이 무엇인가하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성경이 가르치고자하는 전체적인 사상이 무엇인가하는것을 바르게 배우지 못하면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많은 계명들 이것을하지말라 저것을 하지 말라하는 수많은 율법의 계명이 나와요 그런데 그것들이 어떻 의미를 가지고 우리를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들어오지 않는것이에요 그렇게 들어오지 않게되면 순종하는것이 마음에만 의존하게 되는것이에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으로 차있을때는 순종을 하는데 이것이 식으면 자기가 왜 해야되는지를 모르는것이죠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사는것이 힘들게 되어지는것이죠 예를 들어 홀어머니가 외아들을 키우면서 떡을 팔아 행상을 하면서 자식 공부를 가르치는것이죠 그런데 아들이제멋데로 살다가 어느순간에 어머니의 희생을 생각하게 되는것이에요 그러니까 정말 눈물 겨운것이에요 자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젊은 날을 희생을 하면서 자기를 위해 손발이 다 닭도록 행상을 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르치는것이에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이 아이에게 신신당부를 하는것이에요 그것이 무엇이 냐면 너는 술담배를 하지를 마라 그러고 이야기를 하는것이죠 그러니까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에 감격해있었는데 어머니가 하지 말라고 그러시면 저는 안합니다 그랬다는것이죠 그래서 항상 술을 먹거나 담배를 피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을 대마다 어머니를 생각을 하는것이죠 그 어머니가 하지마라 그런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아이가 그런행동을 안하면서 학교를 다녀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아무리 효자라도 항상 마음속에서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느끼는것이 아니잖아요 그럴때는 궁굼한것이에요 어머니는 나보고 다른 친구들 하는 술담배를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가 이러는것이죠 그때에 꼭 이것을 지켜야할까 회의가 드는것이죠 다시 예를 들어 저희 고등학교 다닐때도 담배를 많이 피웠습니다 한 반학생가운데 70% 담배를 피웠어요 담배를 피는데 정말 재미있는것은 무엇이냐면 늦게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는 애들은 정신없이 담배를 피워요 그런데 일찍 배운 아이들이 있어요 이 아이들은 슬슬 고 3때 담배를 끝기 시작을 해요 무엇이냐면 그 중에 제 친구하나는 담배를 피웠어요 골초였어요 학교 다닐대도 담배를 가지고 다녀요 왜끊었느냐 물어보니까 안식교에서 하는 금연학교를 가면 우선 데려다가 제일먼져 담배피우다가 죽은 사람의 폐를 보여주는것이에요 그것을 보면은 정산인은 불그스름하고 담배피우다 죽은 사람은 폐에다가 짜장을 발라놓은것같아요 짜장을 칠해놓은것같아요 시커멋게 그것이 니코틴이에요 그것을 설명을 하는데 마지막에 어떻게 죽는지를 설명을 하는것이죠 그래서 담배를 끊으신것이죠 그렇게 부모님이 애처롭게 호소해도 말을 안듯더니 그것이 잘못되었다는것을 보니까 그것을 끊을 마음이 생기는것이죠 자 보세요 어머님의 애틋한 사랑을 알뿐아니라 왜 어머니가 그렇게 담배를 피우고 술을 먹으면은 인생을 망치게 되는가 이아이가 이성적으로도 알고 있어서 자신의 인생을 어머니의 기대대로 꽃피우기위해 술에취하고 담배를 피우는것이 어떻게 가로막는지를 이해를 할 수가 있다면 더 잘계명을 지킬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무슨뜻이냐면 성경 하나하나 보면서 어 도둑질 하지 말라고그랬네 어 훔치지 말라고 그랬네 어후 열심히 교회를 다니라고 그랬네 이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체를 하나님이 명령을 하실 때 궁국적으로 우리를 데려가게 하시려는 우리의 인생을 향한 최종적은 목표가 술먹지 말고 거짓말 하지말고 이것이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잖아요 너 이놈의자식하면서 어머니가 회초리로 때리고 성적표를 그지같이 받아오면 너 어디갈꺼야 하며 조 팬다고 하면 그러면 이아이는 일평생 고등학교때 공부 잘하는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잖아요 엄마의마음속에는 이것들이 하나하나 만나서 인생을 결정을 한다는것이에요 맨날 정오까지 퍼질러 자고 거짓말이나 치고 공부안하고 농때이 부리고 그리고 학교가서도 공부안하고 못된친구들하고 어울리고 모양이나 낼려구 하면 이 인간이 어찌 될지 알잖아요 그 아이 행동 하나하나가 그 아이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 계획과 어긋 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패는것이라는것이죠 그러니까 이아이가 그런 엄마가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인생의 계획들을 깊이 동의 하고 깨닫는다면 그러면 엄마가 하나하나 명령을 내릴때 그것이 내인생전체에 어떻게 미치게 되는지를 알게되면 그러면 아주 놀랍게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것아니에요 하나하나 계명을 아는것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으로 창조목적과 우리가 걸어야할 계획을 알게될대 성경에 나오는 계명들이 깊은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게 되는것이라는것이죠 더군다나 무식하기짝이 없어서 성경의 계명를 보면서 돈이 쏱아지고 부자가 되는것처럼 계명에 접근 하는것은 쓰레기 같은 생각이라는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믿는것이 인생을 변화를 시키지 못하는것이라는것이죠 어쨌든 그래서 그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선과 악이 무엇이라는것을 알게 되는것이라는것이죠 문제는 무엇이냐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렇게 살게 힘을 주는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인간에게 어떻게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할것인가의 뜻을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서 보여주시는것이죠 그것이 바로 복음이에요 그런데 이 복음은 사람들은 흔히 이러헥 이야기를 해요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설교해야합니다 그러면서 복음은 아 간단한것입니다 이야기를 해요 요즘도 이단들이 있어서 그렇게 교회를 시끄럽게하고 어지럽다고 하는데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라고 보는것이죠 어제도 목사님이 모여서 신천지의 단체가 안양에 있는교회를 굉장히 심하게 헤집어 놓았다고 했는데 제가 보십시오 우리가 목회를 하면서 물렁물렁 한 음식만 먹이니까 이렇게 지나가니까 교인들이 흔들 흔들 하는것이죠 교리를 가르쳐야된다는것이죠 그러면은 복음은 간단한것입니다. 예전에 한참 무슨 이단이 나타나가지고 그렇게 해가지고 다락방 운동이니 하면서 한참 기승을 부렸어요 그때 그쪽해서 하는 이야기는 십자가를 말이 않들어있으면 설교가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라고 죽으신것 그것이 들어있어야지만 설교다그러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을 해야할것인가 예를 들면 긴이야기가 나올수있어요 자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그 말이 일리는 있는데 그런데 이제 좀더 그 말은 깊은 검토를 요구한다는것이죠 예를 들어 복음이 무엇이냐 그럴때 그 복음은 성경에서 복음 그러면 그 복음은 좁은의미의 복음과 넓은 의미의복음으로 나뉘는것이에요 그러니까 얼마나 재미있느냐면 복음이 이런것아니에요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 인간이 타락을 했고 타락 에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셧고 구속 그를 믿는 자는 마다 구원을 얻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믿는자들을 위해 천국을 예비를 하셨다 이것이 복음이잖아요 그런데 한국에 나타난 이단가운데 이 사실을 부인한 이단은 많지를않아요 무슨뜻인지 이해가 가시겠어요 그것이 복음이라는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 믿으면 나머지는 아무 t이상 없다고 생각하는것은 바보같다는 것이죠 더군다나 우리와 같은 복음적인 신앙의 표준으로서 사도 신경을 이야기를 해요 전능하사 천지를 하나님을 제가 믿사오며 제가 아까 말씀드린것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것 아니에요 그런데 16세기17세기 영국의 역사를 보면 많은 이단들이 생기는데 그중에 단 하나도 사도신경을 부인하는것은 없는것이에요 무슨뜻이냐면 사도신경이 고통적은 신앙을 표현하는 가장 압축된 신조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 믿으면 아무나 상관없다고 생각하는것은 잘못된것이죠 왜냐면 그것이 모든 기독교 신앙의 핵심진리에는틀림이 없지만 사이사이에도 수많은 진리가 있고 그것을 해석하는것을둘러싸서 더 많은 개연성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안됀다는것이죠 실지로 이단들중에 그 이야기의 사도신경을 정면적으로 부정한이단이 어디있는지 말씀해보세요 절대로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부인하고 든다면 그것은 이단이 아니라 이교에요 이교하고 이단은 틀려요 이단은 기독교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잘못믿는것이교 이교는 처음부터 틀린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해가지고는 이단이 될 수가 없어요 안전능하사 천지를 안만드시 하나님아버지를 우리가안 믿사오며 그의 외아들이 아닌 예수를안밎사오니 그는 동정녀 마리에게 안태어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안받으시고 안죽으시고 십자가에 안죽으시고 사흘만에 안살아 나셧으니 그러면 이단 구실을 할 수가 있느냐 는 것이죠 이단구실을 할려면 기독교에 탈을 써야하는데 그러면은 기본적으로 그런 신경을 따르지 않으면 이단의 구실을 할수있냐는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사도 신경만 동의하면 모두 형제 자매요 그다음에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것은 아량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기독교에 부지를 보여주는것이라는것이죠 오늘 사도바울이 내가 전해준 복음을 그러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전해준 복음이 무엇이에요 심지어는 사도바울이 뭐라고 말하냐면은 내 복음에 이르기를 라고 말을 해요 나의 복음 나의 복음에 이르기를 복음이 자기 복음이 어디있어요 에수그리스도의복음이지 내가 김목사의 복음 그러면 여러분들이 나를 정상으로보겠어요 드디어 고단하더니 맛이 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겠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담대하게 이야기를 해요 나의 복음에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전해준 복음 예수님이 전해준 복음이라고 안하고 내가 전해준 복음을 너희들이 받으면 너희는 구원을 받을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것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오늘 정리를 하시면 여러분들의 정신이 새로워질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은 2가지로 나뉘어지는것이에요 첮째는 좁은 의미의 복음이에요 좁은 의미의 복음 아까 사도신경을 제가 낭독을 하면서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간단하게 할수있어요 그것은 무엇이냐면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위하여 죽으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에요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이 바로복음이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고 살아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에요 여기서위하여 라고 말하는것은 몆가지를 설명을 하는것이죠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우리가 덕을 보게되었다 또하나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이 죽어야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 그런의미를 가지는것이죠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해서 죽었다 그런의미를 가지는것이에요 그것이 복음이에요 그것이 가장 줄이고 줄인 핵심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다시 사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에요 그러면 이것에 동의 하지 않는 이단이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것을 부인하는 이단이 얼마나 되겠으며 예수님이 죽으셨다는것을 부인하는 하는 이단이 얼마나 되겠어요 이단은 그렇게 안하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셧다 그리고 에수님이 다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부인을 안해요 믿어요 그런데 부활하셔서 우리교주를 찾아오셨다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하는것이죠 그런데 뒤에를 짤라내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죽고 살아나셨다고 하니까 우리의 형제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바보라는것이죠.
그런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좁은 의미의 복음이에요 그러니까 좁은 의미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파를 한것이죠 너희들은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너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다 너희의 죄는 너희들이 감당해야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그리고 그분이 너희의 죄를 위해 죽으신후에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고 다시 살리렸다고하는것은 그분을 인정하셧다는것이고 인정하셧다는것은 너희가 그분이 자기의 죌 때문에 죽은엇이 아님을 보여주는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것이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우해 죽으시고 다시 사셧다 죽으신 후에 다시 사셧다 라고 하는것을 외칠때 수많은 사람들이 회계하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것이죠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에 죄를 인하여 회계를하고 예수님을 믿게되는 이것은 길고 복잡한 복음을 통해서가 아니에;요 간단한 복음을 통해서도 회계를 할 수가 있는것이에요 그러면 충분히 구원을 얻게 된는것이죠 그러면 사도바울이 내가 전해준 복음을 지금 까지 전해준 복음을 이야기를 햇다면 설교할 필요도 없죠 갈라디아교회가서 예수님이 죽고 삼일만에 살아나셨다 아멘 계속 그이야기만 하고 다니면 되잖아요 그래도 구원의 역사는 나타나겠죠 그런데 실제로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쓴 편지 전체가 복음을 잘풀어서 설명을 한것이에요 그래서 등장한것은 넓은 의미의 복음이에요 넓은 의미의 복음은 복음 교리를 가르치는것이에요 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이 복음이지만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에 죄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그 죽음이 어떻게 너희에 죄를 죄에서 건졌는가 이런 상세한 교리들이 필요하게죠 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것을 믿을수있는가 또 우리가 어떻게 믿을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에 공로를 받아들일수있나 또 한걸음 더나아가서 내 마음속에 믿음이 있는데 참된 믿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수있는가 이런 여러사실들이 그 간단한 복음으로부터 적용되어서 나올수잇는것이아니에요 그것이바로 넓은 의미의 복음이에요 그것이 바로 복음의 교리에서 사도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전해준 복음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살아나셨다 는것만 말하는것이아니라 그것은 사도바울이 전해준 복음이 아니에요 엄밀히 예수님이 전해준복음이죠 그런데 그것은 풀어서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기도해야할지를 사도바울이 이 교인들에게 다 가르쳐준것이죠 그 고린고 교회을 보면은 교회에서의 질서의 문제 사랑에 문제 방언과 이런것들에 대한 문제 헌금생활에대한 문제 다 나오잖아요 그린도서에보면 그것이 복음이라는것이에요 그런데 그 모든 교훈들은 반드시 교훈하나하나가 전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우리의죄를 위한 죽음과 부활에 다 연결이 되어야한다는것이이죠 예를 들면 에베소서 5장에서 너희들은 서로 형제들에대해서 자비하고 사랑을 베풀고 용서하는사람이되라 이것은 어떻게 살아야할것인가에 대한 교훈에 대한 명령이에요 그 앞에 무엇이라고 나오냐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생축으로 드림과 같이 즉 에수님이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재물로 바치셨다 이것은 복음이에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셧다 그러니까 형제들을 사랑을 하고 이해를 하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면서 그래서 서로 달라도 서로 이해를 하면서 살아야된다 이것은 복음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교리로서 생활을 밝히는것이죠 참복음을 아는것은 참복음을 안다고할 수가 없는것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셧다는사실을 알고 그P 다음에는 내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내 믿음과 무슨관계가 있는지 그것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른 다고 하는것은 복음을 안다고 하는것이아니2죠 이제 여기에서 복음에 교리를 알아야 힐필요성이 나오는것이죠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설교해 가는 과정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고하는 이 복음에 진리를 우리에게 더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설명해 주는 그 과정이 사도행전의 전개 과정이에요 그리고 교회가세워진다음부터는 이제 매주 거의 비스한사람이 만나는것이에요 복음을 전할때는 오늘 복음전파하고 저기가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 너희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셧다 너희죄를 회계하라 저쪽으로 가면 새로운 사람이에요 어제 메시지를 전해도 회중이 다르니까 새로운 메시지야 그런데 이렇게 모여서 매주일 모이는것이에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고 다시 사셨다 어 저거 교회 들어오기전에 들은이야기인데 들어왔는데 그것을 이야기를 해요 그다음주도 똑같고 그다음주도 똑같은것이에요 그리고 아무것도 안해 그럴수없는것아니에요 예수님을 믿고 사람들이 모이게 되니까 그다음에는 무엇이냐면 예수님이 우리죄릉 위해죽고 다시사신 구원의 감격을 받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기도를 하고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가 나오는것이죠 그러니까 그것을 풀어서 쭉 믿음 기도 삶이것에 예수님이 죽어서 다시 사신것으로부터 어떻게 진리를 끌어내어서 사람들에게 믿고 살아갈수있는가하는것을 사람들에게 제시한것인데 그것이 바로 서신서에내용이에요 고린도 전서 에베소서 골로세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쭉 나오는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복음을 안다라고 하는것은 복음 그짧은 복음 진술 그차제츨 아는것 뿐만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이제 하나님앞에 어떻게 믿고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것들을 깨닫게 됨으로서 이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빛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믿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기도하며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알려주는 빛이 되는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이것이 바로 복음 지혜에요 복음지혜 인생을 살기위해서 행복을 묻는 그대에게 같은 시리즈에서 인간이 참 행복하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런 지혜를 율법속에서는 발견을 할 수가 없는것이에요 부분적으로는 발견되지만 풍부하고 전체적으로 발견되어서 사람을 하나님앞에 슬기롭게 살도록 만들어주지 못하는것이죠 그런데 복음은 바로 그런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있는것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것이나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바로 지혜다 하는것이에요 그 지혜가 바로 많은 인류의 역사가운데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어떻게 살아야하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면서 찾던 바로 그 이상의 놀라운 지혜가 바로 복음 속에 닮겨져 있는것이죠 그러니까 잘 들으세요 예수님을 믿는데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박수도 열심히 치고 심지어는 기도도 열렬히 하는것같은데 왠지 사람이 답답해 보이고 지혜가 없어보이는것이죠 지혜라고 하는것은꼬 뭐 요렇게 요렇게 해서 직작찾아가고 사업고 이리메치고 저리매치고 해가지s고 돈을 s벌고 하는 지혜를 말하는것이아니라 지혜가 있으면 사람들이 무계가 있잖아요 평안하고 웬만큼이나 어려움과 환란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과 그다음에 곱게 자리잡은 그것이 있잔항요 이런것들이 지혜에요 그리고 눈앞에 당장이익이 되는것같아도 그것에 이익이 되지않고 멀리보고 판다나하는것 이세상에 석여 살면서 이세상에 있는것이최고인데도 보이는 이세상에 것보다도 하늘나랑에 있는 사모함으로 균형과 절재화조화속에서 의 안정감 이런 지혜 이런것들이 바로 지혜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어디서 오냐면 복음을 잘 아는데서 온다는것이에요 복음을 잘 아는데서 그러니까 여기서 설교되는 많은 여러분들이 듣기에는 어려워 보이는 설교들이 복음을 여러분들에게가르치기위한 설교에요 그래서 이런것들을 잘 이해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살아갈 때 아주 풍부한 지혜를 갇게 된느것이에요 그래서 그 지헤가 여러분들의 가는길에; 힘이되고 여러분들을 여러분들의 영혼을 보호해주고 슬기롭게해서 여러분들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해주는것이죠 그런데 싫어해 왜 않싫어하지 그래 그런데 여기 않은 사람이야기하는것이아니라 조국교회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것이에요 무슨말이냐면 텔레비전을 보면서 추리영화같은 것 나오면 심지어는 드라마 같은것 보면은 저사람이저사람이 무슨관계가 있는가 저는 가끔 처다보면 왜 싸우는지도모르겠는데 그것이 어떻게 집안에 뿌리 까지 외우잖아요 머리까지 굴리면서 드라마를 보는것이에요 그런데 설교는 그렇게 안된다는것이죠 혁띠풀면서 가만히 않아서 웃겨주기를 바라는것이죠 아니면 그냥 l 뭐하라고 그러면서도 감동을 주었으면 그러는것이죠 바보에요 바보 그것이 인생을 사는데 무엇이 도움이 되겠어요 우리가 하다못해 청소를 하거나 잡일을해도 머리를 쓰고 지혜가 필요한데 인생을 하나님앞에 옳게 창조으이 목적을따라서 그것도 죄인이 그것도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그길을 따라 살아가고자 할때 얼마나 복잡한것이 많겠어요 그것을 바르게 이해할수있는것이 얼마나 필요하겠어요 여러분 오늘도 외부에서 손님이 오셔서 우리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설교들이 어떻게 성도들을 가르치는지에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한번 여러분들이 한번해보세요 오늘 저녁에 집에가서 아마 집에가면 열린 교회 말씀 안내 라는 한권쯤은 가지고 있을거에요 없으면 문서선교부 가서 달라고하세요 펼쳐보면은 거기에 3000번정도 설교했다고 해요 설교한내용이 시리즈별로 나와있어요 살다가보면 예수믿다가 보면 실증 날때가있잖아요 성화와 실증 기도하다가 싫을때 막힐때가 있잖아요 잘찾아보면 기도가 막힐때 라는 시리즈가 있어요 그리고 내가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이렇게 은혜에서 미끄러지고 부패했을까 은혜와 부폐가 나와요 그 하나님을 믿을려고하면 이상하게 갈대처럼 흔들리고 올곧지를 못한것이에요 찾아보면 성화와 올곧음이 나와요 이제는 예수를 믿었으니까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아야하는데 하여튼 예날에 원수를 믿으면 이를빡빡 갈고 예수 믿지않는 사람은 막걸리 먹고 화해를 하는데 뭐 심지어는 죽은엄마까지도 죽어라 미워하는것이에요 이미 죽었는데 그래가지고나는 이럴까 찾아보면은 미움과 용서가 나와요 그뿐만 아니죠 마음에 하나님뜻디로 살아야지 하며 눈물도 흘리는데 눈을 떠보면 9시30분이에요 나는 왜 이럴까 뒤져보면 게이름이 나오는것이에요 아니 그렇게 친절하는 가르쳐주는 교회가 어디있어요 아니 웃으면서 하는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래보면은 예날에 내가 인터넷에 상담할 때 빛발치듯 상담이들어오잖아요 상담을 다 해주었어요 그런데 보면은 해줄것이 없어요 왜냐면 다 한이야기에요 뭐 교회에 있는데 목사님과의 사이가않좋은데 일만시키고 헌금만 내라고 하고 뭐 이야기늘 길어도 목자와 양 들으면 되잖아요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모른다고 중생과 회심 그러넫 무슨이야기냐면 그런것 하나하나에 대한지식이 쭉싸이게 되면은 이렇게 인생의 밝은 빛이 보이는것이에요 어떻게 살고 어떻게 믿어야 할지가 전체적으로 보이는것이에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좋은 비유가 떠올라요 예날에 술먹으면 안됀자고 하는것이 통설이잖아요 그랬더니 불란서에서 통계를내놓았어요 프랑스에서 심장병이 없는것은 포도주를 먹기때문이다이거에요 그런데 이사람은 그 소식을 듣자 마가 매일 저녁마다 한병씩 먹어서 알콜 중독이 되었어요 이것도 아니죠 또 어떤사람은 커피를 마시지 마라 그러니까 절대 안마시는것이에요 그런데 커피가 심장병에 도움을 준다는것이죠 그래서 그사람이 커피에 밥말아 먹을정도로 먹는것이에요 그런데 커피는 괞찬은데 커피에 있는 설탕 때문에 혈관이 막혀 돌아가셨어요 무슨뜻인지 이해가시죠 여러분 굉쟝히 위험해요 우리 노회에 있었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듣고 정말 목사님한분이 독감을 지독하게 걸려서 그냥 정신을 모차리고 콜록대고 그러니까 그 젊은 목사한사람이와서 목사님 왜 그러세요 아이고 그렇게 독감에 걸려서 감기에 걸려서 정신을 모차리고 코물일 쏟아지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그러니까 아이고 목사님 몽이 약하시니까 그렇죠 십전대보탕이 아주 좋데요 그것한번 드세요 그러면 한의원에가서 제가 맥이이런데 십전대보탕 먹어도 되요 안돼요 그렇게 물어보아야 하잖아요 슈퍼 가면 팔잖아요 이렇게 수퍼는 아니지만 뭐야 마트인가 가면 팔잖아요 생산지도 불분명한것 그것을 사다가 집에 사다가 푹 드신것이에요 그랬더니 폐에 물이 찬것이에요 그러데 그 약은 감기걸렸을때 먹으면 치명적이라는것이에요 그래가지고 물이차기 시작을 하는것이애요 병원에 갔더니 호수를 넣어 물을 빼고 그런것이에요 간신히 살아난것이에요 그러고나서 나는 고생을 했다고 하니까 그목사님이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말 한마디로 끝내기에는 생명이 오락가락하는데 누구 상식듣고 우루루 따라가면은 건강을 잃어버리는 요인이 되는것이죠 그러면 무엇이냐면 지식을 가져도 총체적으로의학을 다배울수 없지만 우리가 다 알면 왜 여기있겠어요 개업을 했지 그렇지만 그래도 무언가 믿을 만한 의사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사람한테 물어보던지 저 몸살낳는데 십전 대보탕 먹어도 돼요 하지마 그렇게 말듣고 하면 낳아요 커피먹을려구 하다가 두잔먹어도 되요 물어보고 시키는데로하던지 아니면 자기가 몸에대해서 공부를해서 전체적인 이해를 가지고따르던지 저는 누가 건강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해도 저는 따르지 않습니다 검증이 될 때까지는 그게 무어라고 함부로 집어넣어요 몸에대가 그래도 죽을뻔하다가 살아나니까 죄송해요 그 한마디에 끝내요 죽은다음에 그러면 어떻게 해요 천국가서 너 때문에 죽었다고 하니까 죄송해요 그것이 지혜에요 거기에 수많은지혜가 숨어있는것이에요 그래서 교인들도 보면은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어도 교인들도 등급이 있어요 멍한 교인이있어요 멍해요 그런사람들은 뭐냐면 그냥 와서 회계를 한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식이 총채적으로 정리가 안돼어서 주는것만 받아먹는것이죠 이단교회에 따라가서 성경공부를 한다고 하고 뭐 왜 그렇게 해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것아니죠 지혜가 없으니까 그렇게 가는것이에요 그렇게 살아가는것이에요 그러니까 신앙이 무엇이냐면 복음과 복음의 감격에 깊이 사로잡혀서 좁은의미에 복음의 감격에 깊이 사로잡혀서 어덯게 하면 십자가의사랑을 입은내가 하난님을 지속적으로 사랑을 하면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을 위해 기도를 하며 그리고 그분께 봉사하며 살아갈수있을까 생각하고 가고자 할때 많은 저항들이 있잖아요 얼마나 많은 저항들이있겠어요 내안에서 끊임없이 욕망과 죄가 일어나고 머리로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하는데 악한 습관들이 베어있죠 본성의 문제가나오죠 또 아무도 없이 고요히 가면좋은데 여기저기서 환경과 상황이 일어나면서 뱃머리를 때르듯이 내인생을 흔들어놓죠 이런 많은 폭풍과 바다가 이는 폭풍속을 지나며 가는것이 하나님앞에 살아가는 신자의 일생이에요 그러면 거기에 얼마나 많은 지헤의 빛이 필요하겠어요 그런데 교리를 어렵다고하고 집어치우고 안배운다고하는것이죠 그러니까 연체동물같은 신앙생활을하는것이에요 이리흔들 저리흔들 그렇게 낙지 교인이되는것이에요 성경에서는분명히 너희는 이 세대를본받지 말고 본받지 말라는것은 틀에 찍히지 말라는것이죠 낙지는어느그릇에든지 잘 담겨요 접시에넣으면 퍼질르면되고 컵에 담기면 서있으면되고 동그란그릇에는 주저않으면되고 어떤 그릇에도 정응하며 살아가는것이죠 그러니까 뼈대가 있고 좀 이렇게 똑바로서잇어야지만 정채성이있어야할터인데흐믈 흐믈한 낙지교인이되는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에 참된 빛의삶을 살지못하는것이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어떠하리 이러면서 흔들리면서 살아가는것이에요 그런데 신자의 일생은 그런식의 타령이 되면 안돼고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외어 넉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어디로 가오리까 이런 신조가 있어야 신자의 삶이 시작되는것 아니에요 거기에 고난이 있는것이고거기에서 죄와투장이있는것이고 창조목적을 거스르는데서 한판싸움이 있는것 아니에요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전투적인 삶이거든요 공부를 해요 공부 말씀을 계속 공부를 해야해요 새로운 빚들이 들어오게 될 때 그속에서 변화가 일어나는것이죠 뭐해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배우기 위해 이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터틀리우스의 말대로 참회하기위해 태어나고 그렇게 참회의 눈물을 앃은후에서는 창조의 목적대로 살기위해서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고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나가야하는것이죠 그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요즘은요 정말 안타까워서 이야기하는것이에;요 요즘은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었는지 몰라요 제가 직장생활하면서 은혜를 받을때 설교 테잎은 많이 듣지 않았지만 성경을 들었어요 성경을 듣기위해서 여기에다가 이렇게 녹음기를 메고 다녔어요 녹음기가 지금 성경책의 한배 반 만했어요 거기다가 테입을 꽂고 메고 다녔어요 지금은요 요만한 카세트 쓰지도 않아요 요만한 엠피쓰리 여기에 꽂아서 그리고 이어폰도 선도 없어요 탁키면서 생생하게 기침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리는것잉에요 그렇게해가지고 문서선교부에서 복음 교리 수없이 나오는거사 가지고 하다가 이제는 테입하나에 1500원씩 샀는데 요즘은 mp쓰리로 만들어주는데 그것 거기에 넣어가지고 끼구다니면서 하나씩 하나씩 듣고 감격하고 그렇게 신앙생활 하라는데 뭐가 그렇게 바쁜지 좀처럼 안한다는것이죠 요즘도 잘나오실꺼에요 전주에서교인이 계셨어요 한의사하는분인데 전주에서 올라오는것이 쉽겠어요 그런데 구지 고속버르를 타고 온대요 아이고 4시간씩 어떻게 오느냐 물어보니까 아무문제가 없데요
바스를 타서 귀에꼿고 천천히 메로를 하면서 오면은 그런시간이 일주일 동안 안난다는것이죠 맛는이야기죠 그렇게 말씀을들으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서 교리를 접하고 깨달을때 빚이 들어오는것이에요 그런것들이 하나둘씩 쌓여갈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감격도 새로워지는것이죠 그러니까 말씀은 전혀 접하지 않고 십자가를 경험을 해야한다고하는데 뭐 들어야지 경험이 되는지 말든지 하지 매일 세솏적인 생활에 얽매어서 살면서 어떻게 구원의 감격이 새로워질수있겠어요 나는 정말 갑갑해요 왜 그럴까 저렇게 인생을 버벅거리면서 그냥 막장에서 바닥에서 몆년째 해매고 있는데 자기는 돈없어서그런다고 하는데 돈없어서 그런것 아니에요 빽이없어서 그런다고하는데 아니에요 자식이 없어서 그런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딴자식도 속석어요 자식나서 그정도 고생안하는 사람이 어디잇어요 그런것이 없어서그런것이 아니라 한가지가 부족해서 그런것이죠 그것이 무엇이냐면 복음 지헤가 부족해서 그런것이엥요 복음지혜는 복음의 교리를 통해서 전해져 오는것이죠 그렇게 하얗게 내리는 수많은 복음의 지혜들이 문서선교부에 그것도 매일 사라고 하니까 돈이 없다고 핑계를 대서 도서관에 갔다놓았거든요 가서 이름만 대면 일주일씩 이주일씩 빌려주는데 안해 안해 안해 한번도 도서관에 안찾아간사람은 회계하세요 회계 나중에 여러분들이 인생을 갈지자처럼 살다가 주님앞에 가면 너 왜 그렇게 살았냐하면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어서그랬다고 하면 하나님이 그럴거에요 내가 김목사를 보내서 너희에게 다들려주고 도서관에서 무료로 빌려주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인생을 살았느냐 너는 그 인생이 좋아서 살은것이다 그렇게 인생을 사는것이 어쩔수없다고하지만 자기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는것이에요 그렇지않아요 그리고 뭐해요 여러분들이 뭐해서 그렇게 바쁜지 묻고 싶어요 그것이 주님이 다 그만두고와라 하면 끝이에요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목회는 일이 많아아 너무 일이 많아 내일아침에 병원에 가야하는데 책한권 마무리 해놓고 가야해요 이렇게 일이많아요 제가 지난번에 입원할 때 스케줄을 보니까 새카메 탁 입원하니까 다 안해도 되는것이드라구 무 외부에 가기로한것 목사님 입원했습니다 외부에 오기로되어있는데 목사님 입원하셧습니다. 끝이지 원고 보내주셔야 하는데 입원하셨습니다 끝이죠뭐 우리 같이 점심 먹기로 되어있는데 입원하셧습니다.끝이에요 다 안해도 되는것들이에요 그것도 그당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앗어요 이래도 되는구나 거짓말을 못해서 그렇지 입원했습니다 그러면 끝이구나 더군다나 죽었습니다 그러면 다안해도 되는것이죠 예날에 어떤형제가 이야기하는데 자기 삼촌이 탈령을 했데요 그당시에는 잡히면 죽을정도로 맞잖아요 헌병들이 미친듯이 잡으러 다니는것이에요 어느날 집에 확들여닥치는것이에요 일주일 전에 삼촌이 죽었데요 그친구가 말하는것이 재미잇어요 큰일날뻔했데요 그때 안죽엇으면 잡혔을 터인데 딱 잡았다 그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부풀었겟어요 일계급 특진인데 탁잡앗는데 일주일전에 죽었습니다. 죽으면 다 안해도 되는일이에요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간이 창조의 목적대로 살기싫으니까 본질적은것 미루어버리고 본질적인것 다 미루어버리고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그러는지 바쁘다고하는 사람 내 스케줄을 보이고 싶어요 너도 이렇게 새까맛니 다 소용없는 것이에요 잠시 머물 이세상 헛된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더 귀하다 아멘 그래서 실험을 해보았어요 요번주에는 설교못하고 다음주에는 하겠자민 그때 올때 뒤부분을 할터인데 여러분들이 한번 일주일 동안에 한번 복음교리를 담긴 시리즈를 아무거나 택해요 자기가 알잖아요 양심이 말하잔항요 휘청거리면 성화와 올곧음 그다음에 이것이 죄인서 지 은혜인지 모르면 죄와 은헤의지배 고린도 전서 사랑 오늘 도서관 봉사자들은 예배끝나자마자 올라가요 축도끝나자마자 올라가요 최화영간사도 올라가고 빌려줄테니까 가지고 가서 제발 들어요 그한시리즈만 기도하고 들으면서 기도하고 들으면서 기도하고 그리고 수요일날 한번 와봐요 서점도 문열어놓아요 팔릴지 모르니까 문열어놔요 그래서 가서 열린공간에 많이 복닥 거리지말고 그거 하나 덜먹어도 살아요 그리고 저문서선교부와 도서관에서 바글바글해가지고 예날에 그런 시절이 있었거든요 테입 하나 살려변 기다려야 할때가 있었어요 요즘은 너무슬퍼요 그래 하나님이 그러시는것 같아요 봐라 이놈아 이것이 너의 목회현장이다 그러는것 같아요 말씀을 깊이 계속 먹어야되요 한번들었다고 이해해요 무 이해해요 10/1도 이해못했어요 이해하면 무얼해요 살지를 못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해요 또 듣고 또듣고 또 듣고 그러면서 말씀속에 잠겨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는 은혜에서 미끄러진 사람입니다 저는 읂{에서 미끄러진사람입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은혜에서 부패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되어야되겠습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말씀을 듣고 그속에서 재충전을 하고 그렇게 살아야되요 그것을 위해 태어난것이에요 얼마나 하나님이 대단하게 섬길수있는지 물어보고싶어요 자기가 창조의 목적을 기뻐하고 그 목적을 따라 살수있게했어요 아무시리즈나 하나가지고 기도하면서 서너개라도 들으면서 하나님앞에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를 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거에요 왜 그 빛이 우리에게 주는 기쁜이야말로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기쁘게 하는것이에요 맛있는음식 옷 친구들의 반가움 이런 모든 것은 영적 기쁨이 아니에요 이것은 우리 영혼을 기쁘게 못해‘요 우리의 영혼을 진심으로 기쁘게 하고 우리영혼의 만족을 주는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이에요 율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수가 있지만 그러나 복음을 통해서 복음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찬란한 지혜의 빗이 들어올때 하나님이 진리의 빗이 들어올수있는지 어떻게 하면 창종의 목적대로 살수가잇늕지에대한 감동과 은혜와 희열 환희 기쁨 감격이 이안에 넘치는것이에요 그래서 세상의 박해와 고난 어려움이 와도 그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인생의 즐거움을 잡고 살아가게되는것이에요 다시한번 우리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부흥이 일어나도록 주님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이시간에 우리같이 한번 기도할 때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은헤을내려주시옵소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옵서소 우리를 복음교리를 통해 보여주신 찾조의 목적 창조의 목절대로사는 길 지혜 을 습득하며 기빠하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저희들을 사랑해주시고 오늘 이시간에도 기도하고 간구하게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오늘 이시간에도 도와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하나님아버지 저희한사람 한사람 붙들어 주시옷소서 주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하여 말씀에 깊이 쉼치하며 그 말씀속에 진리를 깨닥고 교리로 말미암아 깨닫고 창조의 목적으 따라 살아갈수잇도록 힘과 능력을 내려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께 순종을 하며 주님의 중심으로살도록 주님이 역사해주시옵소서 주님이 은헤를 내려주시옵서소 온마음과 온뜻 심령을 다하여 저희들이 충만한 은혜속에서말씀중심으로 은혜중심으로 살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서소 하나님아버지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은혜를내려주시옵서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님께 순종하며 살도록 저희에게 힘을 주시옵서서 저희들에게 말씀에 대한 감격이 없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시고 하나님에대한 지식들이 우리마음안에 멀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시고 은혜내려주시옵서서 주님의말씀으로 뜻을 쫓아 기쁨으로 살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주님게서 새롭게 하도록 은혜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주님이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19.도덕적 통치의 수단 : 계시(4)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함으로 그 지혜를 보일지니라”(약 3:13).
지난 수요일에는 여러분들에게 복음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또 우리인간에게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그 뜻을 알겠금 하시는 것이 도덕적인 통치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하나님에 뜻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을 계시라고 하는데 이 하나님의 계시는 이제 일반적인 계시와 특별한 계시로 나뉘는데 그 특별한 계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성경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율법과 복음으로 나뉜다고 말씀을 드렸고 지난시간에는 복음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복음은 아주 좁은 의미에서의 복음이 있고 넓은 의미에서의 복음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위해 죽으셨다 이것이 우리게 가장 짧은 복음이지만 그러나 그 복음은 계속해서 더 설명을 붙이면서 확장되어 나갈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복음 교리 복음 진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간단한 복음 뿐만아니라 복음 교리들을 올마로 깨닫고 터득해 나갈 때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선악이 무엇이며 그리고 창조의 목적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태것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 계시라고한다면 그것이 인간의 정신 속에 들어와서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자신도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고 다른 사람들도 창조의 목적으로 인도를 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연만물들을 창조 목적으로 이루는데 아비지 하도록 사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시하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고 깨달을 수 있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과 다음시간에 생각해보고자 하는것은 이런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이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살펴보는 것 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추어주시는 계식 있으면 우리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해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 입니다. 하나는 이성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에 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밖에 있는 대상들과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셨어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지성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기능이에요 그래서 자기와 자기 밖에 있는 사물들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이러한 지적인 능력을 지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들이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에는 이 지성이 필요한데 이 지성은 두 가지 기능으로 나뉘어 져요 하나는 무엇이냐면 번쩍하고 깨닫는 기능이에요 이것이 바로 오성 오늘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총명이라고 부르는것입니다. 그리고 또한가지는 하나하나 이치를 터득함으로 알게 되는 이성 이 두가지 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적인 능력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에 촉명과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이 자연세계를 통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천지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게 하는 도구라고 생각하면 되는것이죠 인간이 가장 시급한 것은 이것을 아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아는것 이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가장 중요한 의무이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인간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반드시 지성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돼는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맨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셨을때에는 이총명도 이성도 모두 기능이 아주 완전하고 깨끗했습니다. 그래서 총명으로 잘깨닫고 이성으로 잘깨달을수가 있었다고 하는것이죠 그것이 바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였어요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을 설명할수있습니까 왜 새해서부터 대답을 안하기로 했어요 인간이 확실하게 알고있는것을 인간이 아는것을 다 왜 그일이 일어나는 지를 설명을 할수있겠어요 설명할수없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인간이 어짜피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알수있는 능력을 부여받지는 않았어요 인간에게는 그것이 필요한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어떤것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이것들을 더듬어 가면 알수있게 해주신것도 있고 어떤것은 도저히 인간이 그렇게 몰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왜 그런지는 다 설명을 안해주시는데 이것이다 이렇게 살아야한다 이렇게 믿어야한다 라고 하나님이 번쩍 빛을 비추듯이 성경으로 기록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권위로 가지고 믿어라 이렇게 해서 전달하시는 지식이 있다고 하는것이죠 그런데 그 지식은 우리가 다 이해느 못하지만 오류는 없어요 미국에서 이런 실험을 했데요 아이들에게 아디들은 친구들과 싸우지않고 착하게 지내는 것이그게 좋은 것이잖아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그러면 아이들에게는 친구들과 싸우지 않고 지내는 것이 좋은 것이고 친구들을 괴롭히고 친구들과 싸우고 다투는것이 나쁘다는것이 머릿속에 있겠죠 선생님이 가르쳐준것이잖아요 아니란말이야 선생님이 가르쳐준것이 아니란말이야 그래서 선생님이 실험은 한것이죠 자 선생님이 어떤반에가서는 너희들 싸우지말라 다투지말고 사이좋게 지내야돼 그렇게 가르친것이죠 아이들이 따른것이죠 그러니까 아 선생님이 가르쳐주니까 저렇게 받아들이는그나 생각하는것이죠 그런데 다른반에가서는 애들아 싸워라 친구를 괴롭히고 그리고 친구하고 계속 다투 정말로 진진하게 가르친것이죠 그랬더니 아이들이 선생님 그렇게 가르쳐주면 안돼요 그러더레요 그럼 이것이 무엇이에요 그런데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가서 야 이학교에서 선생님이 최고인데 선생님이 하라고 하면 하는것이지 다투고 싸워도 된다구 이야기했고 너희들이 아무리 싸워도 야단안칠터이니 그렇게도 좋다 선생님이 해주엇잖아 그리구 학교왔으면 선생님 말 잘듣는것이 착한아이지 선생님 말잘안듣는 아이들이 착한아이일 수 있어 이렇게 선생님이 반론을 제기를 하면 이 아이는 반박할 수가 없는것이죠 그런데 놀라운것이 학교에 와서는 선생님의 말을 들어야한다는 도덕원칙보다 친구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 더 높이 있다는것을 이아이들이 아는것이에요 무슨이야기냐면 학교와서 선생님 말을 안듣는것은 나쁜것이고 듣는것은 좋은것이지만 그것보다는 친구와 다투지 않는 것이 훨씬더 높은 차원의 인식이라고하는것을 이아이에게 누가 가르쳐 준것이냐는것이죠 이아이는 해명할수없어요 해명할려구 할수록 혼란스러울것이에요 설명할려구하면 분명할거에요 선생님 그렇게 가르쳐 주면 안돼요 말하는것이죠 이것이 무엇이냐면 이것이 바로 촉명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남겨준것이에요 만약에 그런것이 없다고 한다면 교육도 소용이 없을거에요 교육도 인간을 하얀 백지인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하얀백지에요 교육과 환경에 의해서 무엇이라고그리던지 된다는거싱에요 그런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것이죠 잘들어보세요 인간에게 없는것은 가르칠수없어요 그래서 가르친다고하는말은 라틴어의 레드 까르는 이끌어 낸다는것이죠 있는것을 이끌어 내는것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더확힐하게 알게 해주고 깨닫게 해주는것이죠 무슨이야기냐면 진정한 교육은 하나님이 먼저 심어놓으신 교훈이있기 때문에 거기에 돌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되는것이에요 그런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총명이에요 그 조그만 아이가 선생님 말씀잘듣는것도 훌륭하고 싸우지 않는것도 훌륭한것이지만 선생님 말쓰듣는것보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는것보다 친구와 싸우지 않는것이 훨씬 더 높은 수준 더 쉽게 이야기해서 선생님 명령을 어기는 죄를 짓더라도 친구들고 다투지 않는 것이 옳을 것라는 것을 아는것이 어디서 오느냐는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총명이라고하는것이죠 그런데 이 총명은 영혼이 밝을때에 이 총명은 빛나는 것이에요 그래가지고 이 세상에 잡동사니 지식이 아주 많고 영혼은 어두운상태에 있는 사람보다는 세상에 있는 지식이 별로 없는데 영혼이 밝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더 총명해요 인생을 막 몰고가다가 시궁창에 박고 인사사고 내고 그렇게 안한다 이것이죠 인생이라는 차를 잘못몰고가는 사람은 자기가 그길을 가는지 그럴듯한 이야기할수있어요 배운것이 많으니까 이사람은 그 이유를 다 대지는 못해요 그러나 직감으로 알아요 그것이 영혼의 밝음과 관계가 있는것이죠 인간이 죄를 짖고 나서 하나님을 떠난 다음부터 인간에 영혼은 캄캄한 어두움에 붙잡히게 되어요 이 영혼이 어둡게되면은 이 총명은 캄캄하게되는것이에요 눈멀게 되는것이에요 그거에요 그러니까 죄가 들어온다음에 하나님께서 이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려주셔야지만 그것으로 선과 악의 기준을 삼고 살아갈것아니에요 그런데 그것을 인간이 영혼이 죄가 들어와서 어두워졌기 때문에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성령을 통해 어떤일을 행하셔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빛을 비추시는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조명이라고하는것이에요 껌껌한것을 비춘다는것이죠 이조명은 성령님께서 인간이 있는데 이렇게 있는데 눈을 잘 뜨고 있어도 불을 끄면 아무것도 안보이잖아요 그때에 봐야할 대상을 향해서 불빛을 환하게 비추어 주시면 이것을 볼수있을거 아니에요 그런상태가 아니라는것이죠 인간의 상태는 인간을 볼수있는 능력은 충만하게 있는데 그냥어두워서 못보는것이아니라 비유하자만 어두음도 내리고 자기눈도 어두워진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눈도 뜨게 해주시고 눈을 떳는데 만물이 어두우면 소용없잖아요 눈도 뜨게 해주시고 봐야할 대상도 빛을 비추어 주셔야지만 조명이 성립이 되는것이죠 좀더 복습할게요 인간이 죄를 짓고 난다음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보는 것 인식하는것과 관련해서 2가지 어려움이 생겨난것이에요 하나는 자기안에 어려움이고 또하나는 자기 밖에 있는 어려움이에요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인간과 함께 저주를 받게 되었어요 찬란한 빛을 잃어버리게된것이죠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60씩 70씩 나이를 먹어도 15살이었던 적이 있잖아요 그렇죠 그렇지만 그 70먹은 얼굴에서 15살 때 얼굴을 찾아낸는것이 보통노력으로 되겠어요 그래서 이세상이 죄가들어와 망가져서 본래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음을 잃어버린것이에요 또 하나는 그것을 볼수있는 인간이 저주를 받아서 그런 밝은 빛을 볼수있는것을 빼앗긴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구하는 어떤 진리 어떤 창조 목적 이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는 봐야할 대상에도 빛을 비추어주시고 그것을 보는 인간자신도 눈을 열어주셔야 하잖아요 그래서 이 조명은 성령님이 비추시는데 시간만을 열어주시는것이아니라 영적인 시력도 회복시켜주시는것을 말하는것이에요 그래서 조명이라는 말자체가 인간의 지성에 더해지는 지식을 가르키는것이죠 그래서 그 빛을 통해서 그 조명이 없을때에는 보지를 못했는데 하나님이 성령으로조명을 해수시니까 봐야할 대상도 보고 볼수있는 능력도회복을 하는것이죠 제가 이번주에 설교를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버님은 눈이 좋으셨는데 어머님이 눈이 나쁘셨어요 그것을 물려받았어요 그런데다가 눈이 안좋아질만한 환경속에서 계속 살았어요 특히 신학대학원을 졸업을 하고는 계속 야간 학교 강의를 했어요 생활도 불규픽하고 그러니까 눈은 급속도로 나빠져서 얼마나 눈이 나쁘냐고 말을 하는 데 병원에 가서 0,1부터 하면 안보이면 간호원이 이것이 몇 개나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손가락으로 보이지 않고 팔뚝으로 보여요 그런정도로 눈이 나쁜데 물체자체 물체가 어떻게 생긴것이 아니라 그 물체가 그 물체인지 식별이 안돼는것이에요 냉장고인지 라면박스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지어 멀리있으면 2사람인지 3사람인지 식별이 안돼는것이죠 그런데 그런것을 판을 갔다가 놓고 물어봐야 소용이 없지 그렇게 눈이 나빴어요 급속하게 나빠지는데 도저히 불편하면서도 못보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최근 2년동안에 급속도로 주저않으면서 도저희 정상적인 생활이 불편할 정도로 자동차를 타면은 신호등 불빛이 6개로 보여요 신호등 조차도 식별할수없게되니까 몇 번을 인도같이 생긴데 길인줄알고 올라간적이있거든요 그래서 어쨌든 병원에 안갔겠어요 그런데 가는데마다 비관적이고 정밀검사 받아도 소용없데요 그런데 이번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갔더니 자기네가 고쳐준다고 해요 어째든간에 수술을 했어요 한쪽을 수술을 했는데 말이죠 생전 처음 경험해 본것인데 무서웠어요 눈에다가 큰 바늘을 눈동자까지 찔러 마췩를 하고 기계로 눈을 벌린다음에 고춧가루 같은것을 계속 넣으면서 아무것도 안보이는 가운데 우주석 같은것이 내려와서는 칼로자른다음에 가는 소리가 나는것이에요 눈동자를 가는모양이에요 끽~~~소리를 내명서 가는것이에요 그리고눈을 덮어죠 그리고 복잡한 수술 과정을 마치고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하루밤을 잤는데 그다음날 아침이 되었어요 그런데 두눈가지고 도 불편했느데 한눈가지고 보니 말이아니죠 그래서 새벽에 간호원이 약을 아니 주사를 놓으려고 왔어요 그래도 나는 벌써 붕대를 풀어주랴 농담삼아서 아이고 나 언제 까지 이렇게 있어야 되냐 그랬더니 제가 열어드릴께요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애정도 없이 확열어주더라구요 그순간에 아찔하면서 빛이 확들어와요 그런데 믿어지지 않는것이에요 이쪽은 감고 한쪽으로보는데 텔레비전도 식별을 못햇는데 작은 글씨가 보이는것이에요 그리고 보니까 이쪽으로보면은 하얀색이네 이쪽으로 보면은 계란색이에요 제가 교회에와서 계란색이라고 생각했던모든것이 하얀색이였어요 눈이 한순간에 확 떠지는것이에요 일주일 후에 다시하나를 더하고 그 다음날 눈을 열었을때에는 보이는 세상은 지금까지 적응이 안돼요 좋다 나쁘다 보다도 너무 선명하게 인상이 새겨져서 마음에 어떤 느낌이 아주 형언할수없는 느낌이에요 화장실에들어가서 세수한달동안 못하거든요 화장실에들어가서 양치질하면서 거울을 보는데 정말 충격받았어요 태어나서 제얼굴을 그렇게 또렷하게 본것이 처음이였어요 아주 흉악한 늙은이 하나가 도사리고 있어요 정말 충격이였어요 한번도 내가 저렇게 생겼을거라고는 생각한적도 없고 깨달은적도 없는 얼굴이었어요 지금도 나자신에게 적응이 안돼는것이에요
그러면서 모든 빛 선 면 이런 모든 것들이 새로운의미를 가지고 눈속으로 빨려들듯이 다가오는것이에요 나는 수술하고 밤에 교회에와서 제일 놀란것이 나는 이교회가 계속 어두워서 조명을 계속 달았어요 그런데 알고보니까 열린교회가 편의점 수준이에요 어디가든지간에 편의점 같이 환한 것이에요 그래도 등 더 달아야지 그랬어요 그런데 그런것이 바로 조명이에요 보게해주시는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이 거기 왜 있는지는 몰라도 거기있다는것을 아는것이에요 하나님이 어떻게 존재하시는지는 모르겠는데 하나님이 눈을 뜨게 해주시니까 하나님이 거기계시다는것을 부인할수없는것이에요 뿐만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다는것도 아직은 지식이 모잘라서 다 설명할수없지만 그게 틀림없는사실이라고 하는것이 가슴속에 확실하게 받아들여지는거이죠 그 받아들이는 도구가 무엇이냐면 신앙으로 받아들이는것이죠 어떤의미에서 신앙은 보이지 않는것을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은 오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조명으로 보여주시는 그것을 이치적으로 따질수는없어도 보았기 때문에 아멘 이라고 믿는데 이것이 신앙이에요 그런데 바로 하나님은 이러한 총명 이러한 총명을 통해서 인간에 이성으로는 도저히 깨달을수없는 그러나 인간으로 하여금 정말 하나님을 경배를 하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선하게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지식들을 하나님이 전달해주시는것이에요 그 빛이 그 지식을 빛이라고 말할수있는데 그게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빛들이에요 초자연적이고 신령한 빛들이에요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들중에 누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이성으로 증명을 할 수가 있겠어요 증명을 하면 그것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설복이 될까요 설복된다면 그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날까요 여러분들중에 누가 2000년전에 사람의몸을 입으시고 여자의 몸을 통해 이세상에오신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할수있는 사람이 누가있겠어요 참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몸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오신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난 독생자라는 사실을 증명할수있는 사람이 누가 잇겠어요 이세상에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전달해주는 유일한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수있는 사람이 누가있겠어요 땅위에 돈주고 집짓고 세워지면 교회지만 부서지면 공터가 되어버리가나 공장이 들어서는 이교회가 이렇게 모이는 사람들에 이 모임이 보이지 않는그리스도예수의 몸이며 영원한 하늘나라의 모형이라고 하는것을 여러분이 안믿는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일수가 잇겠어요 반드시 인간들이 이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하나님은 이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것이며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누구를 설득시킬수가 있겠어요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근간이 되는 이 치명적인 모든 진리들은 이성을 초월하는것들이에요 머리를 굴려서 알수있는 것이 아니라는것이죠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진리의 밝은 빛을 비추어주셔서 조명해주시므로 우리의 총명이 뜨이지 않으면 알수없는 지식들이에요 그러니까 이 지혜는 총명은 이 초자연적인 빛은 하늘로부터 온것이고 하나님게로 난 지식이에요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너희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너희 참 신자 맏아 묻는것이에요 만약에 너희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믿은 그리고 거듭난 참신자라면 너희들에게는 지혜가 있을것이고 총명이있을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행함을 보일지니라 믿는다고 떠들지만 너희에게는 행위가 없다 그러나 너희들이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지혜와 총명이있을것이고 초자연적인 빛이 너희의 삶을 사로 잡았다면 그러면 너희들은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것이다 왜 초자연적인 지식이 너희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믿도 창조의 목적도 믿고 심판하실것도 믿는 다면 너희 살아가는 삶이 어찌 틀리지 않을수있겠느냐 하는것이죠 구원이라고하는것은 여러관점에서 구원이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가지고 왔는지를 이야기를 할 수가 있어요 예를 들자면 살고 죽는 것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이죠 그러나 인식하는것에 관련해서 말한다면 구원얻은 사람에게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알수없는 이 감각들이 생겨난것이에요 예를 들자면 구원받지 못했을때에는 영혼이 죽어있고 따라서 지성도 죽어있어요 그래서 영적인 생명과 관계가 없는 지식들은 얼마든지 얻을수있지만 영적인 생명과 관계가 없는 아름다운 것들은 얼마든지 자기도 사랑할수있지만 신령한 것을 사랑할수는 없는것이죠 그런데 거듭나게되면은 신령한것들속에서 아름다음을 발견하게 되는것이죠 세상에 있는 육체 물질 명예 이세상에서의 생명 이런것들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신령한 아름다움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리스도의 탁월성 그분의 고결한 인격 그리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 이런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것을 발견하게 되는것이에요 이런것을 발견하면 사랑이 생겨나는것이에요 영원이 거듭나지 않았을대는 세상을 사랑하며 살던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살더디 거듭나고 나면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사랑을 하고 하나님대문에 신령한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안에서 계속 생겨나게 되는것이죠 그것이죠 그러면 똑같은 논리에 입각을 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총명이 가리워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진리를 볼수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거듭나고 구원얻은 사람들에게는 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것을 볼수있는 이 총명의 지각이 생겨나게 되는것이에요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계시를 이세상에 인간들에게 계시하는 방법이라는것이죠 그러면 귾임없이 이 총명이 증진된다라고 하는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이러한 이러한 빛들이 들어오는 것을 말하는것이죠 이 총명은 가변적이에요 더 총명해질수도 있고 총명이 부패서 흐려질수도 있는것이죠 총명이 더 증진된다고 하는것이 무슨뜻이냐면 새로운 것들을 하나님께서 끝임없이 보여주셔서 그래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진리들을 더개닫고 예전에 알지못했던 아름다움을 더 많이 인식하게 된는것이죠 그래서 사랑고 총명이 함께 역사하면서 자라는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성장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장 갈망하여야할 바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끊임없이 열어놓으신 총명의 눈을 닫지르 않으시고 열어놓으신 눈이 닫히지 않고 하나님이 더 열어주셔서 진리의 빛을 더 많이 풍성하게 깨닫게 될대에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창조의목적의 존귀함을 더 많이 인식하게되고 더뜨겁게 사랑하게 되는것이죠 그래서 신자의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은 하늘을 열러 끊임없이 총명에 빛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도록 그것이 신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제목이 되는것이죠 그러면 이제 이렇게 하나님이 밝은 빛을 비추어주셔서 총명이 증진될때에 어떤일이 생겨나게 되느냐는것이죠 그것이 무엇이냐면 지혜롭게 되는것이죠 이지혜는 진리가 가져오는 효과에요 지식하고는 틀여요 지식을 구술이라고한다면 지혜는 그 구술을 꿰는 꿰미와 같아요 그러니까 지식이 부족해도 지혜가 뛰어날수있꼬 지혜가 부족해도 지식은 많을수도 있어요 또 지혜가 뛰어나다고할지라도 지식이 별로 없으면 없는것 보다는 지식도 뛰어난데 지혜도 많게 되면은 꿸수있는 구술이 많겠죠 그래서 그 지혜는 진가를 발휘하는것이죠 이 지혜는 한인간의 지성에 지식의빛이 풍부하게 비친 효과에 그래서 이지혜는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따라서 선과 악이 어떤것인지를 명확하게 알아서 그것을 깨닫고 자신에 삶을 거기에 함치시키기 위해서 살려구 할대에 진리를 추구하려고하는 마음안에 지혜를 주시는것이죠 이 지혜는 하나는 원초적인 지혜가 있고 파생적인 지혜가 있어요 즉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시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바로 이 지혜로 우리에게 오셔요 하나님 자신이 지혜이셔요 그러니까 이 지성의 모든 생각과 주파수를 그 진리에 맞추고 사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지혜이시기 때문에 그 지혜의 빛을 받으면서 살아가서 신도 빛을 받게 되는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성경을 열어주실때에만 진리의빛이 비추는것이아니라 성경대로 산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할때도 진리의 빛이 어오는것이에요 그게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진리이시만 또한 진리의 빛을 사람에게도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그 진리가 비추는것이죠 이것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라고 하는 의미에요 그런데 이 지혜는 로부터 난 지혜라고 성경이 말을 해요 지식은 밑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라가는것이에요 그런데 이 지혜 내가 설명할수없어도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의해 창조된것 내가 이성적으로 모두다 논증할수없어도 창조목적이 있다는것 내가 다 설명할수없어도 내인생의 참된가치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이라고하는것을 깨닫게 해주는것은 땅에서 쌓아올라가는 지식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라고 하는것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지식에 빛 초자연적이고 그리고 신적인 그 진리의 빛을 받기전까지는 희망이 없는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게로부터 비추어오는 그 찬란한 진리의빛 앞에서 새로운 진리의 세계를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세상에 살고있으면서도 이세상에 얽매이지않고 이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살아져갈것과 영원이 있는것 아까 어린아이에 보여준것같이 높은 가치와 낮은 가치를 구별하며 살아갈수았는것이죠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가 이런적 없어요 머리로는 다 알겠는데 가슴에 다가외 않는적 없어요 그때 참 괴롭죠 알기는 다알겠는데 가슴에 다가오는것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가오지 않는 그 사실을 맨처음 깨닫을대는 감격을 한것이에요 이해되죠 도대체 그러면 무슨작용이에요 왜 그런일들이일어나요 인간에 이 영혼이라고 하는것은 끝임없이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실증을 느끼겠금 만들어져 있는것이에요 이것도 설명을 하면은 긴데 하나님을 닮은 것이에요 아주 놀라워요 그러니까 영혼에 기대치가 아주 높은것이에요 영혼은 먹을것을 많이 쌓아두엇으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것가지고 만족을 못해요 그러니까 여뤄분들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한순간에 번쩍 하고 가슴에 다가오는것이죠 물론 이제 성경을 설교할때는 설교자는논리적으로설교를 해요 그런데 은혜는 논리에의해서 설복당해서 들어오는것이아니에요 논리적으로 이렇게 이렇게 설명해 나가는데 번적하면서 빛이 들어오는것이에요
그러면서 내가 예전에 볼수없었던 내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게 해주시는것이에요 어느순간에 번쩍하고 자신의 지성속에 퍽하고찍히는것이에요 퍽하고 찍히는것이 무엇과 같으냐면 세상에서 이렇게 살다가 돈을 보거나 정욕적인것을 보면서 확 가슴에 다가와서 마음이 확 빼앗길대 있죠 그것과 똑 같은것이에요 그래서 요한 칼빈선생은 육신의 것도 총명에 비추고 하늘의신령한 것도 총명의 빛에 비춘다고생각을 한것이에요 다시한번이야기를 할게요 그래서 요한 빈은 인간에 총명 오성이라고 하는곳에 육신의 것도 퍽고들어오고 신령한 것도 퍽하고 들어온다고 생각을한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두 개가 한꺼번에 막찍히면 인식이 되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냐 지성의 맑음이라고 하는것이 나오는 것이에요 절대 여러분들이 마음이 산란한 상태에서는 절대로 은혜를 못받아요 욕망에 의해서 먹을 것 입을거 놀거 오락 쾌락 이런것들이 마음에 번쩍번쩍 사이키조명처럼 비추는 상태에서는 초자연적인 신령한 빛이 비추지를 않아요 비추인다고해도 감지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 마음지킴이전에 생각 지킴이 중요한것이에요 마음과 생각을 조심하고 쓸데없는 것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기위해서 자기를 다듬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것이에요 분명히 알기는 아는데 예날에는 이사실을 알았을대 기뻐하고 아멘아멘하고 그렇게 눈믈을 펑펑 흘리며 감격을했는데 어느 순간에 가슴에와닫지 않아요 이제는영혼에 실증 이온것이에요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드냐면 내가 이렇게 교리를 많이 깨닫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를 많이 깨달았는데 또 어떤것이 내 영혼을 비추어서 내 총명을 비추어서 나를 감격하게 할수있을까 하는 두려움운 마음이 드는것이요 그것은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교만한 마음이에요 왜냐면 자기의 지성은 간장종지 같고 하나님의 은헤의 세계의 비밀은 온주주와 같이 드넓기 때문에 자신이 많이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햇빛에 비교하면 사진관에 후레쉬같은것이에요 그러니까 더 많은 진리에 대한깨달음이 얼마든지 그 사람속에 내려올수있는것이죠 그때 사로잡회게 되는것이죠 우리가 여러분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많이 하잖아요 주님 만남니다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인격적으로 만나셨습니까 물어보는데 인격적으로 만나든지 몽둥이로 만나든지 어째든 만난것인데 만났습니까 하는데 만난다는것이무엇이에요 예전에 만났던 하나님의성품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것이엥요 말로 안다고 해서 아는것이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만나고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다고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이 깨달은 새로운것이 무ㅏ이에요 하나님을새롭게 깨달았다고하는데 그것이 무엇이에요 내가 그랬잖아요 맨날 만날때만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고 맨날 이야기를 하고 자기를 찬송을 부를때만다 주님 나를 사랑하시네 주님 나를 사랑하시네 자기도 해놓고 정작 그 빛이 번쩍 비출때는 전에는 본적이 없는것 같은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는것이에요 참놀라운것이 무어이냐면 보는것이 최고에요 보는게 듣는것 냄새맡는것보다도 더 강력한 끌림이보는것이에요 남한테 눈감고 한시간동안 들은이야기는 한시간그대로 다썰을 풀기에 충분하지 않은데 어느 한순간에 눈을 탁 열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을때 그것을 보았을때 그건있지 눈만 감으면 계속 이야기가 나오는것이에요이속에서 상상의 기능이 발동을 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경험이 되는거싱에요 제가 2주동안 다른교회에가서 예배를 드렸잖아요 거기서 얼마나 등록을 하라고 그러는지 거기도 새가족부가 있는데 지극정성으로 챙겨줘요 자리까지알려주고 달력,주보도 갔다주고 떡국도 드시고 시라고 그러고 다음주오시라고그러구 그래서 같은 교회 두 번가면 거기서 시험이 들까봐 한번은 여기가고 다음은 길건너 교회갔어요 그런데 주일날 목사가 낮예배에 뒤에 앉아서예배드리는것이 쉽지가 않거든요 경험이었어요 몸은 아픈상태였지만 가서 혹시 누가 알아보면 어떻게 하나 그런 근심을 했어요 편도선 수술 하고 나서 시골에 내려가서 한주가 있을때인데 너무 일찍가면 시골교회에서 얼마나 기대를 걸겠어요 그래서 10분정도 살짝들어가서 에어컨 앞에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예배를 드리는데 젊은목사 한사사람이 설교를하는데 여호수와 본문을 읽었어요 그러고시작을 했는데 잘나갔어요 근데 10분지나고 나서 설교가꼬이기시작을 하는거에요 맹구가어쩌구 무슨 어쩌구 오락가락오락가락 하더니 주제도 없고 결단도 없고 끝냈어요 그래서 이제 나는 축도는 받고와야지 축도를 받고나오려구하는데 목사님과 장로님이 손을 내밀면서 김남준 목사님 아니십니까 목사님을 발견하는순간 설교가 엉키기 시작을 했습니다. 어쨌든 지상최대로헤매드라구요 처음에 그렇게 힘차게 나가더니 혹시 이교회에서 그러면 어떻게 하나그랬더니 안그랬어요 이제는 책표지와 많이 틀리니까
그런데 그 두주동안에 예배를 드리면서 그런생각이들었어요 내가 목회하는교회도 뒤에 않으면 이렇게 예배를 드릴지도모르겟구나 생각을 햇어요 어떻게 그렇게 예배를 우리가 만약에 그렇게 예배를 드린다면 정말 우리가 정말 세상에 있는 사람과 다르게 살수있을까 사람들은 이 신앙에 경험을 천시하는 경향이있꺼든요 그런데 아니에요 진리에 대한깨달음이 없는 경험은 무시되어야해요 오히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경험이 높여지는곳마다 위험은 증가가 되요 그러나 진리에 대한 참된 깨달음과 함께 인간의 경험은 강조되어야해요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났다하는것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고 하나님의 경험에대한 경험은 조명을 통해서 인간에 총명에 에전에 알지못했던 예전에는 알았으나 지금은 번쩍이는 새로운 빛으로 다가와서 우리르 붙잡는것이에요 그래서 이 지성에 대한 깨달음이 지성에 깨달음이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과 함께 마음안에서 만나는것이에요 이때에 그 진리를 확실이 붙들수있는 경험이 일어나게됭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정동경혐이에요 그것을 꽉붙들게되는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한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라고하는데 과연 우리가 예전에 알지못하던 전혀 엉뚱한 지식을 새롭게 발견한다는뜻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앞에 깊이 은혜받은 말씀도 사실 우락 전혀 몰랏던 말씀인것 없어요 알았지만 느끼는것이 없고 영혼에 찬란하게 진리의 빛으로 다가오지않았기 때문에 시시하게 보이는것이죠 생선싫어하는사람이 어물전에 가면 그물고기가 그물고기처럼 보이는것처럼 그러나 생선을 좋아하는사람은 머리부분 등부분 꼬리부분 맛과 색깔이 다 틀리게 보이는것처럼 진리에 대한 깊은 인식이 생겨나게 되면 그 진리에 대해하나하나의 새로운 빛깔이 들어오게 되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받게 되는것이죠 그것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의미에요 그러면 결론을 내겟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세사을 창조하신 목적 선악의 판단기준 이런것들을 정하셨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알여지지않으면 우리는 그대로 살 수 없고 살수없다면 우리는 행복해질수없어요 더군다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없구요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게서 이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선악의 기준 이런것들은 성령으로 말미사마 우리속에 조명되어 져야해요 그리고 우리마음속에 받아들여져야해요 그대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것이죠 분별력이있는 사람이되는것이죠 그러면 끝임없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을 받고 그 빛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을 받아들이며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이셔요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이렇게 찬란하게 밝은 빛을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가 리모컨으로 켰다 껏다하는것이아니에요 그러면 무엇이죠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는마음이 생겨나는것이죠 계시록 4장에 보면은 사도요한이 예수님 앞에 계시를 받는 장면이 나와요 하늘로부터 두루마리가 떨어져요 그런데 인봉이 되어버렸어요 요한에게 주신 사명은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계시들을 적어서 그래서 일곱교회에 알여주어 대비케 하라는것이였습니다.그 두루마리속에서는 바로 그계시들이 담겨있어요 그런데 봉해져있어요 그러면서 들려오는 천사의 소리가 하늘에나 땅에서나 이 계시의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는 아무도 없다 말하는것이죠 그럴대 요한이 90세가 넘는데 주님앞에서 어린아이처럼 큰소리로 울었어요 그러자 다시 어린 양 예수가 이 인을 떼기에합당하니 예수님이 그인을 떼어주시고 마지막날 에될 위대한 계시들이 열리는것이죠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가장 형편이 어려워서 하나님 앞에매달려 본적이있었죠 취직. 사업이 안돼어서 금식기도 해본적 있을것입니다 자녀들 대학들어가기 위해서 시험치러 보내고 추운데 교회와서 않아서 먹고 싶은 밥도 못먹고 잠도못자고 하나님앞에 기도한적은 있었을거에요 우리의 목회사역에 복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기도한적있을거에요 그러나 우리속에 있는 열망을 보세요 진르를 깨닫기 위해서 초자연적이고 신령한 빛 예전에 어둠속에 있던 내영혼을 살리고 참된 진리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던 그 찬란한 빛 그것이 사라진것이 내게 사라진것이 안타까워서 다시한번 그 진리의 빛을 내마음속에 비추어 주도록 그것만이 내영혼을 다시 눈뜨게해줄것이고 오류에 길에서 바른길로 거짓의 길에서 참된 길로 나를 바꾸어 놓을수있을것이라고하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준적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제목을 가지고 매달리지를 않습니다. 지천으로널려있는 하나님의 말씀들 소중한줄 모르고 발로 차듯이 굴려버리면서 살아갑니다 영혼을 살릴 진리의 말씀들이 거기에 있건만은 그 찬란한 빛 대신 창조의 목적에 대해 가르쳐 줄수도없고 선악의 기준에대해서도 알려줄수도 없는 마셔도 목마르고 먹어도 배고픈 그것ㅇ;ㅔ 목숨을 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은혜를 받기를 원하면서도 우리의 인생은 꼬이는것이죠 사람들은 생각을 합니다. 아 복잡하고 어려운 진리 그게오늘 부채에 시달리고 사업에 위기를 시달리고 건강이 나빠지고 가정에 어려움이 생겨서 방황하고 있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사실은 인간의 모든 문제는 인간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계의 문제이죠 하나님이 인간의 여러분들을 몰라주셔서 문제가 생기는것이아니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몰라서문제가 생기게 되는것이죠그래서 바로 우리에게는 그런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진리에 빛이 필요합니다 그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의 눈을 열어 주의 법에 기이한 것들을 보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앞에 기도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돌아보면은 정말우끼죠 우리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왠만해서는 하나님앞에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왠만해서는 주님앞에나오서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안합니다. 그렇게 손들고 주님께 도와달라고 나오는것은 대부분 보면은 신령한 것이아니라 먹고 마시고 행복하게 사는 이유들이에요 그런것이 안돼니가 심령이 죽고싶고 그러니까 주님앞에 나온것이에요 그런데 놀랍게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대에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셔서 해결하시는것이아니라 필요한것 때문에 하나님앞에 매달리게 하셨는데
가르쳐 주시는 것은 전혀 다른것을 가르쳐 주시ㄸ것이에요 돈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서 이제는 벼랑 끝에 까지 밀려서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때에 한번 살려달라고 매달렸더니 하나님이 돈을 쏟아부어주신것이아니라 어디선가 들리던 주님에 음성 너는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아멘 돈 때문에 고통을 받다가 한번살려달라고 매달렸더니 돈은 안주시고 너는 내것이다 인새의 문제가 해결이되는것이에요 그얼마나 놀라워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 초자연적이고 신령한 빛이 우리를 비추지 않으면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것은 안구하고 엉뚱한것을 구하는것이에요 진짜 그렇게 벼랑 끝에 몰려있는 사람에게 돈준다고 영혼이 살아나겠어요 하나님이 돈 안주시죠 그러면 너는내것이라 너는내것이라 네게 어찌하여 방황하고 있느냐 너는 내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럿나니 너는 내것이라 거기서 마음에 확 녹아내리면서 되는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조명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데리고 가는 방법이에요 그것을 깨달으면서 생각을 하는것이죠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게 된것도 사실은 돈이 없어서가 아닉라 내가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살았기 때문에 올길을오게 된것이구나 여기서 하나님이 나를 다시 불러주시니까 이제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알겟구나 그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을 하고 그분께 순종할 마음이 생겨나게되요 지식이 좀 부족해도 그럴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것이죠 그러니까 무어라고 해요 주님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뜻대로 살기로 했네 눈물 뚝뚝 흘리는 사람에게 똑똑 한 사람이 가서 뭘 어떻게 살건데물어보면 대답을 할수있겠어요 뭘 알아야 이야기를 하지 몰르지만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그렇게 살구 싶은것이에요 그순간만큼 순수한 마음이 되는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생각을 해보라는것이죠 다움주에 우리 사경회를 하잖아요 제목을 감동을 받아서 제목을 정하면서 그랬어요 우리 집사람이 여보당신 입원도하고 계속 괴롭고 힘들었었는데 힘든 설교 다시 할려구 하지 말고 예날에 설교 골라서 해도 우리 모두 은혜받을 수있을거야 그이야기도괜찬은것같앗어요 그리고 가만히생각을 해보니까 인생살날 얼마 안남았는데 재탕만 하겠어요 그래서 이제 기도를 하면 서 제목을 정했어요 제목을 정하면서 그런생각을 햇어요 과연 이 제목을 보고 사경회 제목이라고 줄때 이것을 보고 빛에 시달리고 사업에 어렵고 쪼들리고 가정이 깨지고 그다음에 마음이 곤고하고 이런 사람들이 무슨 뒷다리 극는 소릴까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들었어요 그런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것이죠 많은 인간들의 어리석음은 자기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자신을 모른 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것이죠 바보에요 사실은 자기가 하나님을 몰라서 생기는것이죠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돌아보면은 분명하죠 돈 때문에 시달려서 왔는데 하나님이 돈은 안주시고 너는 내것이라 뭐 바람잡는 소리에요 말로만 내것이라 내것이라그러렴 뭐해요 주셔야지 너는 내것이라 하지말고 내돈은 네것이라 그래야죠 그런데 신기하게 도저히 해답이아닌것 같은 곳에서 인생의 문제가 풀리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 관심이 잘되고 복받는 것어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복받고 잘될 수가 없고 우리에 관심이 진리에 비쳐야되요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에 인생이 어디에서 꼬였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주시는것이요
기도)이시간 우리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고 특별히 저희들이 놓여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아시는 주님 하나님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과 그리과 뜻도 저희들이 알게 해주시고 저희들을 진리의 참된빛으로 조명해주시옵소서 특별히 사경회를 통해 깊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도록 역사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시간에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께서 사랑해주시고 기도하고 간구하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우리한사람 한사람 주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불러 여기까지 이끌어 주사옵고 또 2008년 문턱을 넘게 하셨나이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옵소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높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 축복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하나님아버지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온 마음과 온 뜻 다하여 아버지의 뜻을 깨닫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진리의 눈을 열어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어리석지만 진리에 그 빛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 사랑하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시고 그래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 기도합니다. 저희들이 새해를 시작했사오니 말씀으로 말미암아 진리와 덤불의 우리들이 변하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온 마음과 온“뜻을 모아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비나이다. 전능하시 아버지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 기도하고 간구하오니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온 마음과 온 뜻을 다하여 지성을 밝혀 초자연적이고 신령한 빛들을 우리에게 주셔서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하게 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간 구학 기도합니다. 오늘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저희들이 한마음으로 진리의 빛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며 하버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사모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창조의 목적에 거슬러 살던 저희들에게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저희들에게 기뻐하시는 믿음의 생활로 날마다 이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고 진리에 순종을 하며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 재힘을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오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19.도덕적 통치의 수단 : 계시(5)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119:18).
1월 아마 2일날 제가 수요예배 설교를 하고, 사경회 하고,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올라온 걸로 기억이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주님이 통치하시는데 당신의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통치하시는데 하나님이 계시와 상벌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당신이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의 수단이 계시라고 그랬는데 이 계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렸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있고 복음이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달하시는 것을 계시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 인간 쪽에서 보면 그렇게 전달해 주시는 것을 우리들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뜻을 우리들이 알 수 없지 않겠어요? 예를 들자면 아주 예쁜 옷을 입고 나와서 아주 아름답게 춤을 춘다고 하더라도 눈을 감고 푹 잔다면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없을 것이고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한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귀를 막고 있다면 그러면은 전달될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려주셔서 보여주시고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받아들이고 알 수 있어야 하겠죠? 그래야지만 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서 자신의 삶을 거기에 맞추든지 말든지 그것은 나중 문제고 일단 알아야지만 아 하나님이 이렇게 믿고 이렇게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데 이것을 계시라고 하고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을 받아 들여야 하는데 그 통로가 바로 우리의 지성이예요. 그래서 영혼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장소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은 굳이 비유를 하자면 영혼이라는 것이 있을 때 지성은 그 영혼의 머리부분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은 되는 것이예요. 그래서 영혼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무엇인가 자기 밖에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 알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지성이예요. 지성.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저 사람 참 지성적이다'라고 하면 그 사람이 공부도 참 많이 하고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도 많고 어쨋튼 두뇌 활동이 활발한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지성적인 사람이라고 하죠. 그러나 잔머리 굴리는 사람을 우리들이 지성적인 사람이라고 얘기를 안합니다. 잔머리를 굴리면서 교도소에 들어가고 그런 사람을 지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단 말이죠. 그래서 지성이라고 할 때는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까지 이 안에 포함을 하는 것이란 거죠.
그런데 말이죠 한번 이런 생각을 해보세요. 사실 오늘 내용이 이 책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인데 제가 하옇튼 쉽게 할려고 무지 애를 쓰고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잘 알아 듣는 척 하면 제가 보람을 느낄 것이고. 그런데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에게 아주 쉽게 이 진리를 설명해 드리겠어요. 이보다 더 쉬울 수는 없어요. 언젠가, 재미있는 소설을 써도 책이 그렇게 안팔리는데 유홍준씨라는 사람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역사책을 썼어요. 역사책이라기보다는 문화유산이 왜 이렇게 지어졌고 여기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를 책을 썼는데 100만부가 팔렸어요. 우리 고등학교 동창인데 적어도 일년 먼저 학교를 나왔어요. 그런 책이 100만부가 팔린다는 것은 아마 단군 이래 없는 일이었어요. 그 책 덕에 그 양반이 문화재청장까지 했잖아요. 잘 들어보세요. 자 우리들이 말이죠. 그 얘기는 그 정도로 해 놓고. 꽃이 이렇게 있어요. 꽃도 없고 우중충한 예배당이었는데 누가 와서 봉사하고 그러더니 주일날 와서 예배당에 들어서니까 꽃이 활짝 핀 이 아름다운 꽃꽂이가 있는 거예요. 보는 순간 기분이 좋아요, 안좋아요? 좋죠? 그때 기분이 왜 좋을까요? 예쁘니까. 쉽잖아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딱 보니까 꽃이 예쁘다. 그러니까 좋은 것이예요. 그런데 들어보세요. 그 사람 보고 이것 예뻐요? 아멘, 아 너무 예뻐요. 왜 예뻐요? 그러면은 답을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할 수도 있고 할 수 없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꽃을 딱 보는 순간에 아 이쁘다라고 하는 말은 표현을 하지만은 왜 예쁘냐, 그리고 왜 예쁜 꽃을 보았을 때 네 마음에 기쁨이 생기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설명할 수가 없어요. 자, 그것 한 토막 밀어놓고. 그 다음에 예전에는 놀러가면 그냥 푸른바다 넓은 백사장 거기에서 그저 돗자리 하나 놓고 벌러덩 누워서 그저 수박이나 먹고 노는 것이 좋았는데, 그러고 나서 가끔 이제 야 우리 여기 근처에 명승고적지가 있는데 한번 가보자 그러고 뭐 오래된 절도 있고 궁도 있고 그래서 갔는데, 뭐 맨날 기와집에다가 허연 벽에다가 2층 3층도 있고 뭐 그저 그런 것, 재미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 책을 읽었어요. 쭈욱 읽으니까, 야 이게 신라시대 때 지은것이구나. 신라시대가 언제냐 도대체. 조선 500년, 고려 500년을 지나고, 야 천몇백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고, 이게 이렇게 처마가 올라가는 것이 무슨 뜻이고, 이 끝에 달려있는 기와장은 왜 이런 모양이고, 여기에 있는 벽돌의 숫자와 벽돌과 벽 사이에 그려있는 이 띠는 이게 어디로부터 유래되었고 무슨 뜻이고 영원에 관한 뜻이고 불멸에 관한 뜻이고, 주춧돌 하나까지 다 사연이 있는 것이예요. 그 책을 다 일고 난 다음에 다시 그건물을 보게 될 때 예전하고 느끼는 것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죠. 남대문이 국보 1호인줄 아시죠. 다시 조정한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난 어렸을 때부분터 거기를 수없이 다니면서 창피했어요. 아, 저게 국보1호일까? 그렇게 없을까? 저게 중국에 있는 것보다 큰 것도 아니고, 이상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처마 끝에 보석이 두루 박힌 것도 아니고, 뭐가 저게 국보1호인가? 더 근사한 것이 국보 1호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체면이 설까?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 거요. 그런데 그 남대문이 왜 그렇게 절묘한 건축술인가를 책 한권을 쓴다고 해도 다 못 쓸 꺼요. 그것을 다 살펴보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이 다 보이는 것이예요. 그러면서 몰랐을 때는 그냥 삐쭉 서 있고 교통체증만 일으키는 이상한 대문이었는데 그것을 잘 알고 나니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해되세요? 다 했어요. 오늘 설교. 그것이예요. 무슨 뜻인가 여러분들은 50%는 이해를 했어요. 이제 설명만 붙이면 되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이 계시라고 했죠. 이 계시를 인간이 잘 알게 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되고, 또 내가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성령의 은혜를 주시면 이 안에서 생명과 사랑이 샘솟듯 솟아나는 것이예요. 그래서 아무리 노래방 가서 노래책을 뒤지면서 유행가 불러봐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 안 생겨요. 그런데 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은 주님을 사랑하고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이 이 안에서 생겨나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신는데 어떤 것은 인간이 연구를 하고 이성의 활동을 사용해서 하나씩하나씩 공부해 나가면 차차 깨달아 지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것은 그렇게 인간이 하나하나 공부해 나가도 죽어도 알 수 없는 사실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은 그것도 전달해 주시고 이것도 전달해 주셔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는 계시를 계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엑기스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이 온 우주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지만 그것은 희미한 흔적이고 그 아름다움이 농축되어서 묻어 있는 것이 이 성경이예요. 그래서 이 성경에 농축되어 있는 아름다움이 너무 진해서 이해가 잘 안되기 때문에 사람을 통해서 풀려질 때에 아름다움이 확 퍼지면서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예요. 이해되죠?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시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이말씀하셨는데 인간이 하나하나 따져보면 '당연하지, 그렇지' 이렇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어떤 것은 꽃을 딱 보는 순간에 아, 아름다워 가슴이 기쁜데, 그것은 분명한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들어오는 사람마다 아, 예쁘다, 아 정말 예쁘다 그러는데 아무도 왜 이 꽃을 보는 순간 그렇게 마음이 기뻐서 뛰는 지를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분명한 진리인데도 우리에게 확 다가와서 아멘하고 우리를 감격시킬 뿐이지 왜 그럴 수 밖에 없는 지는 탐구해 낼 수 없는 진리가 있다 이거예요.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술 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아멘하고 믿지만 술이 어떤 것이고, 술을 먹으면 인간이 무슨 작용이 이 몸속에서 일어나고, 그것이 왜 인간의 중추신경을 마비시켜서 사람이 필름이 끊겨지게 하고, 그럴 때에 어떻게 정욕을 자극하고,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그리고 가정에 폭력을 행사하게 하고 하는 것을 하나하나 깨달아 가게 되면 무슨 결론이 도달하게 되냐면은 당연하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너무 당연하지 이런 결론에 도달할까요, 안할까요? 도달하죠. 이런 것들은 이성을 통해서 깨달아지는 것이예요.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하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이제부터 너희에게 왜 술을 먹으면은 안되는지 가르쳐 주겠다, 알코올이란...' 이렇게 시작을 하면은 이 한권을 다 써도 모자라는 것이예요. 이해가시죠? 그것이예요.
그런데 이런 것은 어때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야 했지만 육체 관계는 없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야만 했다. 그것을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으로 인간의 몸에서는 태어나야 하지만 육체관계를 통해서는 태어나서는 안된다. 또 그런 육체 관계없이도 얼마든지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사례가 부지기수다, 그런 예가 부지기수다. 그런 식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느냐 말이죠. 있어요, 없어요? 설명할 수 없어요. 그러면 이것은 뭐요? 이성이 필요가 없는 지식이예요. 이성으로 설명이 안되는 지식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이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은 지성으로 받아들이는데 이 지성의 두 개의 더듬이로 받아들이는 것이예요. 하나는 총명의 더듬이, 또 다른 하나는 이성의 더듬이로 받아들이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도저히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 그런 것은 '아멘'하고 총명의 더듬이 혹은 오성이라고 하는데 총명의 더듬이로 받아들이는 것이예요. 받아들일 때 그때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거요. 그런데 이 믿음은 머리 속에서 일어나지만 머리 속의 일만이 아니예요. 이것은 영혼 전체에서 마음까지 포함해서 일어나는 일이예요. 그러니까 믿는 그것 자체가 영혼과 전 인격의 작용이란 말이예요. 그러면 안 믿었을 때와 믿었을 때는 이 사람의 마음도 틀리고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지의 방향도 틀리는 거요. 그런 것이 바로 총명으로 받아들이는 거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여러분들이 어느 순간 '아멘' 하고 믿었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한 학기만 연구해 보겠습니다. 이러고 나서 마지막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 것이 맞습니다. 내가 이제 다 이해했으니까 믿겠습니다. 이런 사람 아무도 없단 말이죠. 만들긴 누가 만들어 지가 원래부터 있었던 거지. 그걸 아는 인간이 누가 있어. 성경 기록한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봤어? 보았으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이 나중일 수가 없고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창조하셨어야 해. 순환논리적으로 들으면서 도저히 이성으로 이해가 안되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어느 한 순간에 믿을 수 있는 거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구나. 2000년전에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2000년전에 살다 죽으신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은 공자나, 석가나, 마호메트와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예수님이었구나.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나의 죄 때문이었구나 ,아멘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요. 증명해봐, 증명해봐 그것을 증명할 수 있어요, 없어요? 증명할 수 없어요.
(찬양)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질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질 않네
모든 사람이 미쳤다고 그러죠. 2000년 전에 죽은 예수가 어떻게 널 지금 사랑하냐? 우린 증명할 수가 없어요. 그 예수가 어디 있냐? 우린 뭐라고 그래요? 내안에, 그리고 하늘 안에, 그리고 네 옆에 지금도 네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예수. 그러니까 듣는 사람은 이해를 못하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시는 계시예요. 우리도 그렇게 우리 이성으로 믿을 수 없는 많은 사실들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정신이상자라고 그랬는데 어느 한 순간 우리의 마음 속에 아멘하고 믿어지는 거요. 그것을 성령님이 하시는 거요. 그 속에서 내 마음 속에서 그것이 딱 하고 믿어지는 것이예요. 그래서 누가 와서 이만한 책을 가지고 와서 예수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죽어도 소용없다고 하지 않아요? 절대 설복당하지 않아요. 그것이 바로 총명이라는 더듬이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딱 받아들이는 거요. 이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그러는 거죠. 그래서 의심하지 않고 주님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한 성경의 진리들을 이 성경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거짓말 하실 수 없고, 가장 아름다우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분께 대한 신앙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그러는 거죠. 이 믿음이 강하면 강할 수록 믿음이 강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어린 아이처럼 잘 믿으면 믿을수록 사람들에게 내가 왜 이것을 믿는 지를 설명은 못해도 이 총명이 잘 발달하여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아주 또렷한 이해를 갖게 되는 거요. 그렇게 아멘하고 믿게 되는 거죠. 그 때에 잘 알게되는 거죠. 그래서 믿으면 알게 되는 거요. 회심하기 전에 성경을 보면서 제일 짜증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믿지 않고 보지 않고 믿으면 복이 있다. 지들이 보여줄 수 없으니까 꽁무니 빼는 것 봐라.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보고 믿는 것은 불안하기 짝이 없어요. 근데 보지 않고 믿는 것은 이것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직접 보아서 믿게 된 것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얘기요. 그래서 잘 믿는 사람이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때 총명의 더듬이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뭐든지 아멘,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를 인간에게 번쩍번쩍하며 인간에게 보여주실 때 그때 퍽퍽퍽 그렇게 와서 나의 이 지성에 찍혀. 그런데 그것이 뭐냐면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예요. 그러면 아름다운 것을 보면 볼수록 뭐가 생긴다고요?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요. 그리고 기쁜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어떻게 네가 2000년전에 죽은 예수가 살아있다고 증명할 수 있느냐 그런 논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어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도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상하다고 그러지만 나는 이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을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냥 나는 내 갈 길을 가는 거요. 그런데 매번 믿을 때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내 가슴 속에 찍히듯이 느껴지는 거요. 그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거요. 비록 내가 이성으로 뛰어나서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무슨 영어 원서를 읽고, 두꺼운 교리책을 줄줄줄 꿰고 이런 것은 못해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좍-좍-좍 찍히는 거요. 설교 다 듣고 나도 오늘 들은 설교 서론, 본론, 결론 얘기해봐. 그러면 또 몰라요. 담임 목사가 말했지만 그것을 옮길 능력도 없어요. 그렇지만 뭐예요. 난 봤단 말예요. 하나님은 아름다우시다. 말할 수는 없지만 딱 찍히는 거요. 그래서 가슴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거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니까 하나님을 점점 더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거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에 학력이 필요없어요. 학력으로 믿는 것이 아니예요. 아멘하고 잘 믿으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꽉꽉 가슴에 와 닿으면서 그렇게 감격을 하게 되는 거예요.
(예화) 옛날에 어느 목사님이 시골교회 가서 집회를 하는데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어요. 동네에서 하옇튼 속을 썩이던 노인 한 사람이 예수를 믿었대. 기도를 하는데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정말 높으신 하나님이고, 자기는 그 하나님을 보니까 미련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거요. 이 사람이 공부를 좀 한 사람이면 얼마나 묘사가 많겠어요. 정말 위대하고 높으신 주님이시며, 우리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미천한 피조물입니다. 뭐 이렇게 기도할 수 있잖아요. 그 피조물이라는 것도 모르고, 위대하고 높고 영광스럽고 이런 단어 자체를 몰라, 그 시골 할머니가. 맨날 참외 밭이나 일구면서, 닭 모이나 주고, 돼지 뜨물이나 주고 살던 그 할머니가 아는 것이 뭐가 있겠어요. 그 동네가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이었어요. 옛날에 여러분 시골에 가보면 그 때는 굉장히 추웠기 때문에 집을 아주 낮게 지었어요. 들어갈 때는 항상 이러고 들어가. 들어가도 사실은 고개를 펼 수 없는 것이 위에 메주 덩어리들이 쭈욱 매달려 있단 말이예요. 왜 그러냐 하면은 그것이 조상의 지혜야. 높이 지으면 우풍이 휘도는 거야. 그래서 이것을 잔뜩낮추어 짓고. 그러면 여름에 밥을 먹어도 밖에 나와서 먹고 잠이나 자러 들어가지 컴컴한 토담 집에서 무슨 문화생활할 일 있어요. 텔레비전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곳인데? 그러니까 낮으막하게 짓는 거죠. 그러니까 온 동네에 높은 곳이라고는 없는 거야. 그런데 전기가 들어오는 거요. 그러니까 엄청 높은 것이 하나 들어 온 거예요. 그것이 뭐냐면은 전봇대요. 세상에 저것이 뭣에 쓰는 물건이냐 그래? 젓가락 같이 생긴 것이, 저렇게 큰 것이? 할머니가, 땅달막한 할머니가 배는 나와서 이렇게 쳐다보면서, 이렇게 쳐다보면서 야, 정말 높다. 그러고 기도하라고 하면 전봇대 같이 높으신 하나님, 뚱돼지 같은 나를 돌아보사, 그것이예요. 그것도 그 사람에게는 표현할 수 있는 진솔한 거요. 충분하잖아요. 하나님을 전봇대 같이 높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돼지 새끼 같다고 생각하면 여기 전적 타락의 교리를 비롯해서 도덕적 불완전성,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과 영광, 모두 다 나온 것이예요. 이 할머니에게는 전봇대가 너무 위대해 보이는 거요. 무엇에 쓰는 물건이 저렇게 높은 것이 있나? 하나님은 저 전봇대 같이 높으시다 이거예요. 그러고 그 전봇대 위에서 내려다보시는 그 돼지. 돼지를 줄려고 죽통을 가지고 가잖아요. 돼지가 그것을 줄려고 가면 물러나 있다가 뜬물을 가득 채워주면 차례로 서면 되는 거거든요. 꼭 죽통이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러고 들어간다고, 죽통 속으로.. 꼭 한 녀석이 그러고 들어가. 그리고 똥 밟았던 발을 그 죽통 속으로 집어넣고 밟으면서 퍼먹어요. 그러니까 돼지죠. 그리고 그런 고기를 먹고 사는 우리는 또... 그러니까 그것을 보면서 체면도 없고, 규칙도 없고, 탐욕에 가득차고 말귀도 못 알아듣는 그런 것이 자기라고 생각했으니까 전적 타락, 도덕적 불완전성, 탐욕. 정욕, 타인에 대한 배려없는 이기심, 다 나온 거잖아요. 다른 사람은 웃겠지만 그 사람 자신으로서는 충분한 거요. 그것이 바로 오성이라는 것이 하는 것이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결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잘 믿어야 한다는 것이요. 그런데 이것이 부흥회 때 많이 복창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틀리게 가르쳐 주려고 하는 거요. 믿는 것은 믿는 대상이 아무거나가 아니예요. 진정한 믿음이 되려면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예요. 그것이 뭐냐면은 계시여야 한다는 것이예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시는 것이어야 한다 얘기예요. 강남에 어느 교회가 있었는데 몇 해 동안 거기를 다닐 일이 있었어요. 교수생활 할 때인데. 교회가 성장을 했어요.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그 교회를 잘 아는 분이 무어라고 그러냐면은 이 교회는 믿음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그러면은 이렇게 교회가 부흥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믿음이 어떤 거냐면은 목사님이 어느날 갑자기 전화로 박집사 교회로 와. 불르더라는 것이죠. 양장점하는 사람이예요. 양장점 때려치고 교회 근처에서 곰탕집을 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성도들은 너무 믿음이 좋아서 목사님이 그렇게 하시면 아멘한다는 것이예요. 그랬더니 곰탕집이 이렇게 잘된다는 것이예요. 그때에 곰탕집에서 곰탕먹고 있었거든요. 이 보라, 이렇게 잘된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은 믿음과는 상관없어요. 그렇게 해서 간증거리로 남은 집은 잘된 집만 남은 것이겠지. 아니 그것을 분석을 해서 투자를 해도 할까말까인데, 내 요즘 국민을 우롱하는 것 같애, 이 신문을 이렇게 보면은. 내 여러분들에게 얘기할께. 이명박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서, 12월달에 선거했죠? 11월까지는 이 사람이 당선될지 안될지 생각은 하지만 아무도 장담은 못했잖아요. 어쨋튼 뚜껑을 열어보니까 당선이 되었어요. 그래서 재계의 회장들을 만났어요. 만나서 투자를 많이 좀 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우리는 10억을 하려고 하는데 20억 투자하겠습니다. 10조 투자하려고 했는데 15조 하겠습니다. 한쪽은 1조 8천억원을 하려고 했는데 3조원를 하겠습니다. 일주일도 안되서 막 그러는 거요. 그것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곰탕집 하나를 하려고 하는데도 6개월 1년을 재고하는데, 아니 돈 10조, 20조원이 얘들 장난이예요? 이명박씨 얼굴보고 투자했다가 만약에 밑지면 이명박씨가 보험회사에서 물어줄 것입니까? 우리는 그런 것을 믿지 않거든요. 끊임없이 사업을 분석하고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결정을 해도 실수할 수 있는데 곰탕집의 곰자도 모르는 목사가 어느날 전화를 해가지고 양장점 하는 사람에게 너 곰탕집 하고, 곰탕집하는 사람은 자건거포 하고, 자전거포하는 사람은 쌀가게 하라고 그랬을 때에 성공한 것이야 그게 남겠지만, 성공한 사람이야 담임목사님이 전화해주셔서 믿음을 가지고 했더니 이렇게 부자가 되었다고 그러지만은, 망한 사람이 플랑카드 들고 돌아다니면서 우리 담임 목사님이 얘기해가지고 쫄딱 망했다고 이러고 간증하고 돌아다니겠느냐 말이죠.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말씀 전할 때도 보면은 사람들이 아멘을 못해서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어떤 사람은 얘기하다가 자기도 헷갈려가지고 이삭이 아브라함을 낳고 그러니까 '아멘' 하고, 설교가 막 흥분을 해가지고 그렇게 마귀 짓을 한 인간이 어떻게 지옥에 갈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밑에서 아멘하고 그러는 거야. 자꾸 믿는다고 그러는 사람들은 그것이 안믿어져서 그러는 거요. 진짜 믿는 사람은 말이 없어요. 내 마음 속에 믿어졌는데. '믿습니다'하고 고개를 막 흔드는 것은 뭐냐면은 안 믿어져서 그러는 거요. 믿어졌으면 좋겠는데 환장을 하겠는 거요. 막 털면서 믿습니다. 아멘. 그러는 거요. 그런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거요. 심지어는 자기가 일 저질러 놓고 주님이 뒤처리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거요. 믿음은 엄격하게 딱 제한이 돼서 성경속으로 딱 들어가는 것이예요.
그런데 총명의 더듬이를 얘기했잖아요? 이성으로 이렇게 이렇게 이성으로 원인, 결과, 원인, 결과, 따져서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칠 수 없는 것, 이런 것들은 총명의 더듬이로 받아들이는데 또 하나는 뭐냐면은 그런 것이 아닌 것이 있는 거죠. 일단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술취하지 말라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신실하게 사는 성도가 왜요? 취하지 않을 수 있잖아요? 그렇게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이런 것은 너무 독선적이지 않아요? 얼마든지 우아하게 술을 마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면 술 한모금만 요렇게 입에 댄 사람도 다 방탕한 사람이겠네요. 그러면 우리도 성찬식때 술 이렇게 대었는데 그러면 우리도 방탕한 건가요? 이렇게 토 달 사람이 있겠어요? 없잖아요. 그니까 맨처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의 추론을 생각할 때 믿어져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예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이것 총명의 더듬이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아니면 이성의 더듬이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반절은 총명의 더듬이를 작동해야 될 것 같은데, 이것은 아무래도 이성의 더듬이가 작동해야 될 것 같애.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그것이 아니예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총명의 더듬이로 받아들이는 것이예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그럴때에 아멘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예요. 취하지 말라 그러시잖아. 그때에 너무 독선적이지 아닐까? 취한다고 하는 것이 기준이 어디야? 알코올 농도 몇%인가? 음주운전의 그 기준인가? 이게 아니라는 것이죠. 주님이 술취하지 말라 이것은 방탕한 것이다 그러면은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죠. 무슨 이의가 있겠느냐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동정녀 탄생하고 틀려요. 그러고 나서 가만히 아멘하고 믿어서 그렇게 살고 싶어. 그런데 한번 생각을 해보는 거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유를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 왜 그렇게 좋은 술을 취하지 말라 그러셨을까? 인간이 술에 취하면은 그렇게 기분이 좋다고 그러는데 왜 하나님은 하지 말라고 그러셨을까? 한번 공부해 볼까? 그러고 한번 의학 전문 사전을 뒤져보는 거야. 아니 꼭 이렇게 믿어라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는 거요. 그렇게 할려면 여러분들 지금도 바쁜데 더 바뻐요. 예를 설명하는 거요. 그래서 공부해보니까 알코올의 성분이 나오는 거요. 그랬더니 이것이 들어가서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온몸에 퍼지면서 혈액순환을 좋게 하는데 너무너무 혈액이 빨리 돌게 해서 열받게 한단 말이죠. 그러면서 통제를 잃어버리게 하고 작은 감정에 복받쳐서 정욕이나 이런 것들을 불러 일크키고 판단력이 흐려져서 사람들을 경솔한 결정을 하게 되고,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더듬게 되는데 실제로 술을 먹고 취하기 때문에 인간사회에 어떤 문제를 일으키게 되고. 요즘 영국이 그렇다고 그래요. 술을 먹는 나이가 10대 아래로 내려간다고 그래요. 초등학생 가운데에서도 알코올 중독자가 상당 수 나온다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그 신사의 점잖은 나라에서, 우리나라도 많이 나아졌는데요. 한 30년전만 하여도 진짜 술 먹고 길거리에서 바지 내리고 오즘 누고, 그러고 게걸하고 토하고, 그런 것들이 자료로 다 나오잖아요.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삶과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은 조화될 수 없겠구나. 이것을 우리는 시험해 보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미리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술 취하지 말라 이렇게 명령하시는구나 생각하게 될 때에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어련히 알아서 다 챙겨보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을까 하고 더 잘 믿을 마음이 더 많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이해를 잘 하게 되면은 그 다음에는 믿을 마음이 더 많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 잘 믿을수록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잘 알수록 더 많이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성경에 의심이 안가게 되는 것이예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를 이쪽은 총명, 이쪽은 이성의 더듬이로 받아들이는 거요. 오늘 참 설교 제대로 걸렸다. 자기 깨어짐을 공부하는데 요새 궁시렁거린다면서요. 어렵다고. 난 그때 말해보고 싶어. 정지용씨 흉내내면서 말해보고 싶어. 해 봤어? 연구해봤어? 얼마나 연구해 봤어요? 자기 깨어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모른다면 그 사람은 아직 회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죠. 자기 깨어지는 것, 무슨 교회오다가 윗층에서 벽돌떨어져서 머리통 깨어지는 것, 그런 것이 자기 깨어지는 것 아니잖아요. 그걸 알잖아요. 사실 그 할머니는 자아라는 말도 몰라. 그런데 어쨌튼 자기 아집과 자기 고집, 자기만의 본성이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는데 어느 한 순간에 막 허물어 지는 거요. 난 아무 것도 아니구나. 그리고 그렇게 주위에서 당신이 잘못한 거야, 당신이 못됐어, 그렇게 살면 안돼, 그렇게 얘기할 때에 넌 잘났니? 그렇게 대들고 그렇게 파괴적이었다가 어느 한 순간에 이유도 없어요, 그냥 설교를 듣는데 이것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확악 밀려오면서 가슴이 무너지는 거요.
(찬양)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 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막 걷잡을 수 없이 막 눈물이 쏟아지면서 내가 잘못했다, 나는 인간도 아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나를 보실 때 주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그러면서 막 흘러내리는 이 마음 속에서 후회가 생겨나면서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픈 거요. 엄청나게 후회하고 보니까 나하고 원수졌던 사람하고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고, 내가 교회에서 불순종하면 또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고, 사명을 맡았는데 내팽겨쳤는데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고, 삶도 개판이었는데 이제 그렇게 살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요. 그러고 뭐라고 그러냐면은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그러면서 눈물을 씻고 환한 얼굴로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내 평생 살리라
아멘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에요. 이제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 돌아가지 않으리 나 이제 아버지의 집에서 살리, 주님의 품에서 살리라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고는 꿋꿋하게 제 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자기깨어짐이야. 아멘. 그것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말이예요. 근데 자기 깨어져 본 사람보고 간증해 보라고 그러면은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나도 모르게’, ‘왜 그런지’, 그게 뭐예요?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이라는 것이죠.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시죠. 알기는 분명하게 알았어.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이었어요. 그런데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이니까 경험은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는 했는데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때에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그 일이 일어났는지, 그 때 내 마음과 의지가 어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거역하지 않고 결국은 내가 깨뜨려질 수 있게 되었는지, 이런 것은 하나도 모르는 거야. 설명이 안돼. 똑같은 것이 반복되어야지만 비로소 아, 이게 그거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예요. 그런데 이제 이것을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갖다 놓고 분석을 하는 거요. 하나, 하나. 그 사람이 깨뜨려지도록 하나님이 거기 보낸 모든 사람이 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신 모든 사람이 결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깨드려지는 것도 아니고, 깨뜨려지다 마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러면은 굉장히 흉한 거요.
(예화)어렸을 때인데 그때는 동네에서 닭집에서 닭을 사다 먹은 것이 아니라 닭먹고 싶은 생각이 나면은 닭장에 가서 닭을 잡아서 목을 비틀어서, 이제 죽여서 뜨거운 물을 끓여서 물을 부어서 배를 갈라서 다리 잘르고 목 치고 해서 요리를 해 먹잖아요. 동네에서 있었던 일인데 분명히 닭의 목을 탁 틀어서, 2마리인가 3마리를 딱 해서 꼴깍하고 죽는 것을 확인했단 말이예요. 이제 놓고 뜨거운 물을 푸욱 끓여다가 해가지고 털을 막 뽑는 거요. 그래서 두 마리는 정리를 했는데 마지막 세 마리를 털을 뽑는데, 반쯤 뽑았는데 닭이 살아서 막 달리는 거요. 상상할 수 없어요. 벌써 반쯤 털이 뽑혔는데 확 돌아갔던 목이 탁 일어나면서 막 도망가는 거요. 생각해보세요. 차라리 깨끗이 누드로 누워있는 닭이 훨씬 예쁘지, 반 뽑혀가지고 고개는 뿌러져가지고 오락가락 하면서 어딘지도 모르고 막 비척거리면서 달려가봐요. 그꼴이 된다 말이예요. 여러분도 웃었잖아요. 그렇게 된다 얘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깨뜨리시는 과정을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거예요. 그때에 보세요, 여러분. 죄인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모두들 오, 주님 기다렸습니다. 꽉 주님을 붙들어요? 절대 안그래요. 주님이 막 불길 가운데 있어서 고통을 받아서 주님이 너무 불쌍해서 구원의 밧줄을 주어도 무엇 좀 재미있는 것이 남아있나 하고 그 불 속에서도 무얼 좀 한번 해보는 거죠. 그럴 때 이 자기깨어짐이라는 교리를 잘 탐구해서 알면은 그것을 쫘악 펼쳐놓고 이 인간의 상태가 어디 있는지를 정확하게 딱 갖다 놓을 수 있는 거요. 여기서 하나님이 너에게 이미 비추어 주신 그 진리들을 꼭 붙들지 않기 때문에 네가 지금 안깨부수고 있는 거다. 넌 아직도 찬란한 진리의 빛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어. 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서 그 빛을 위해서 기도해야 돼. 네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감동을 받았지만 너 아직 너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 아직까지도 너는 너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신뢰하고 있어.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 붙들고 살지 못하는 거야. 그렇게 탁탁탁 나오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요? 그러면은 더 많이 나를 깨뜨리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아니면은 그냥 엉겹결에, 그런 표현 말고 그 때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셨으니까 그 때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환하게 비추는 거요. 그러니까 그것을 다 터득하고 나면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나를 이 교회로 인도하시고, 그 중에서도 맨날 뒤에 앉아서 졸다가 안내인의 손에 이끌려 여기 나와서 앞자리에 앉게 된 것도, 앞자리에 앉아서도 간 크게 앉아서 조는 사람이 많은데 자기가 깨어 있었던 것도. 그래서 그 아름다움의 빛이 찬란하게 들어오는 거야. 내가 여태까지 쓴 책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책이 자기깨어짐이야. 그것이 어렵다고 약간의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했을 때에 내가 깨뜨려지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어요. 해봤어? 정말 해봤느냐고? 한번이라도 이것을 잘 이해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 봤느냐고요? 절대 안어려워요. 하나씩 하나씩. 그래가지고 그렇게 하면서 발견하게 될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막 하나하나의 교리의 갈피갈피사이에서 말이죠. 찬란하게 비추는 거요.
그것은 마치 뭐하고 똑같으냐면은 무슨 남대문 같은 곳에서, 자 봐, 야 얼마나 멋있냐? 빨갛고, 노랗고, 집도 크고, 너의 대문보다 훨씬 크잖아. 옆에 또 맛있는 것도 파는 남대문 시장도 있고, 좋지? 믿어 이 사람아,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야, 이 나무는 못 하나 없이 지어진 건축물이고, 그리고 이것이 이러이러한 경로를 통해서 지어진 것이고, 이것과 이것의 각도가 이렇기 때문에 독특한 아름다움이고 그러면서 쭈욱 설명할 때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깨닫게 될 때 남대문을 딱 보는 순간에 정말 많은 사람이, 외국 사람이 옆에 있으면 설명을 해 주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절실함을 느끼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거요? 아는 것만큼만 보이는 거죠. 음악, 문학, 예술, 건축, 모든 것들이 아는만큼만 보이는 거요. 그럼 막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그런 아름다운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잘 설명해 준 사람이 잘못한 거요, 그것을 열심히 노력을 해서 이해를 안하는 사람이 잘못한 거요? 그래서 우리의 일평생의 의무는 이 두 개의 더듬이로 이해나는 거요. 짜악 받아들이는 거요. 그래서 이성으로 하나하나 깨닫게 될 때 그때에 너무너무나 말하자면은 아름다운 생각이 드는 거죠.
17세기로 기억이 되는 데요. 캐플러라고 하는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가 있어요. 이 사람이 『우주의 하모니』라는 책을 썼어요. 그 책을 급히 외국에서 구입을 해가지고 다는 못보고 너무 두꺼워가지고, 정말 놀라워요. 그게 뭐냐면은 제가 지난번에 천지창조의 목적을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우주속에, 질서 속에 다 반영되어 있다고 했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사람이 이 천체에 대해서 연구한 거요. 그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이니까 사실 그 때에는 자신들이 발견했다고 그래도 과학수준으로 보면은 그때는 초등학생 수준이고 지금은 대학생 이거든요. 비교가 안되거든요. 그래도 그 사람들은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 사람들은 핸드폰이나 좋은 것 만들줄 알지 그런 것은 모른단 말이죠. 그런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주의 그 아름다운 질서를 다 탐구하여 가지고 자기가 이것을 묘사를 한 거요. 예를 들자면 태양이 있고, 그 다음에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 이렇게 쭈욱 행성들이 있잖아요. 그것들이 도는 궤도를 따라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자기네 천문학적인 지식으로 측정을 해서 그것을 갖다가 음표화 해 본 거요. 그랬더니 그 궤도 자체가 그것을 음표화시켜서 피아노로 땅 칠 때 굉장히 아름다운 화음이 나더라는 것이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은 우주에서 많이 발견한다면 마지막에 결론 부분에 가서는, 오늘 그것을 인용부분을 안가져와서 너무나 안타까운데 결론부분에 가서 그 사람 하는 얘기가 뭐냐면은 ‘오, 위대하신 하나님, 주님의 그 크고 놀라운 지혜는 우리들이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놀라운 질서가 있고 우리가 아무리 우둔한 지혜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모든 것 위에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연구하고 기록한 이 모든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데 도움이 될망정 거침돌은 되지 말도록 불쌍한 저를 긍휼이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창조세계를 보면서 도처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초등학교부터 별난 과목을 다 배우는 거요. 밥먹고 살라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성경만 열심히 공부하지 말고 시간나는대로 여러분들이 상식을 넓혀가요. TV같은데서 생명, 그 다음에 지구, 우주, 이런 것들에 대해서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이 나와요.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아침드라마나 보면서 훌쩍거리지 말고, 그런 것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 아, 신기하다, 아, 대게 웃기네 그러고 TV 탁 끌 때, 우리는 뭐라고 그래요? 아, 그렇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구나. 꽃잎 하나에도, 작은 잎사귀 하나에도, 그리고 내 마음 안에도, 우리의 영혼안에도.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최고의 행복은 이 세상에 있는 나보다 큰 동물들은 주님을 알지 못해도 나는 이렇게 늙음에 복종하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후패해져가고 그리고 한끼만 먹지 않아도 어지럽고 기운이 없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지성을 주셔서 한편으로는 믿음을 가지고 총명의 더듬이로, 또 한편으로는 이성의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을 알도록 이렇게 만들어 주셔서 이 모든 지식들을 가슴 안에 통합시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그래서 선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셨구나 아멘.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냐 이거죠. 그런데 자기깨어짐을 놓고 이것을 도대체 누가 읽으라고? 해 봤어? 오늘 시인이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어요?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은 주님의 법의 아주 아름답고 기이한 것을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뭐라고 그러냐면은 하나님, 나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총명의 더듬이로 주님을 아는 것만 주님이 눈을 열어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이성의 더듬이로 아는 것도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실 때, 그 때에 우리는 예전에 몰랐던 하나님을 알아가는 거요. 그 속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한 아름다움도 우리들이 지성으로 발견하게 되는 거요.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는 비교될 수가 없을 정도의 지혜와 지식으로 그러고 이렇게 살아가는 거죠.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예요. 아멘. 오늘부터 하나님, 자기 깨어짐이 어렵다고 하는 이 말 자체가 내가 안깨어져서 그럽니다. 하나님, 제가 정말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가까이 다가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20.하나님의 통치의 방법 : 은혜와 율법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하나님이 이 세계에 당신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구연하시려고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수단이 둘이 있는데 계시와 상벌이라 말씀을 드렸고 지난 세 시간에 걸쳐서 계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상벌을 말씀 드려야 되겠는데 이 상벌을 다음 시간으로 미루고 이 하나님의 계시와 상벌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데 그것을 수단으로 그 수단을 어떤 방법으로 사용 하셔서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세상을 다스리시는가 하는 문제를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고자 합니다.
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방법이 둘이 있는데 은혜와 율법 이 두 가지에 의해서 이 수단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의 목적대로 이 땅을 통치하시는 거예요 우선 율법을 생각해 봅시다.
율법은 불신자들을 통치하실 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에요 이 불신자들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처럼 성경 계시를 통하여 율법을 받은 사람들이 있고 또 이 성경 계시의 율법을 못 받은 사람들이 있어요. 두 종류의 사람들인데 구약시대의 이방인들과 그리고 오늘날의 불신자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계시를 받아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익히 알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을 따라서 심판을 받고 또 성경 계시를 못 받아서 성경을 모르던 사람들도 심판을 받는데 그것은 양심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율법을 두 군데에다 새기셨는데 하나는 둘 판에 새기셨고 또 하나는 인간의 마음에 새기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큰 틀에 있어서는 이렇게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위해서는 이러이러한 것을 지켜야 한다. 라고 하는 그 규칙이 인간자신의 마음 안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것을 가리켜서 양심이라고 말하는데 이 양심은 그래서 본성에 새겨놓으신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에요 양심은 본성에 새겨놓은 율법이다. 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이렇게 인간본성 안에 새겨놓으신 이 율법이 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이것들을 따라서 인간들이 살아가면 마음의 양심의 편안함이 있고 비록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위로 같은 것은 없어도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러고 어느 사회에서든지 이렇게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 사회에서든지 존경을 받고 인정들 받게 된다. 이런 거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살다가 보니까 편리해서 이것이 좋아서 그래서 형성된 것이지 어떤 절대적인 그런 도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생긴 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요즘은 많이 있다 이거죠 어려운 이야기인데 쓰지 않겠어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틀린 이론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살다보니까 편리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인간 저 밖에 이렇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세계가 운행되어져 가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최소한의 규칙들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이 규칙들을 어기게 되면 당장 뭐가 지장을 받느냐 하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이것이 직접적으로 방해를 받는 거죠 대표적인 게 뭐죠, 살인이에요
한번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우리들이 무기도 발달하지 않았던 50년 훨씬 전에 6.25가 났을 때에도 이백만명이라는 사람이 죽었어요. 그때 인구의 비율로 미루어 본다면 그 삼천만이라 그랬죠. 이백만이라고 하는 숫자는 지금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숫자에요 그러니까 만약에 사람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도록 자유가 주어진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예요 그러면 이 사회 자체가 붕괴 돼버리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경우를 그 캄보디아 갔을 때 봤어요. 캄보디아 인구의 53%가 17살 이하에요 중간세대가 없어요. 70년데 킬링필드 대학살 때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사상적인 이유로 죽인 거예요 어느 정도이냐면 손이 곱다는 이유로 죽였어요. 노동자와 농민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죽여 버린 거예요 그리고 조금이라도 자본주의 냄새를 풍기는 모든 책들을 다 태워버렸고 대학생들을 다 학살했어요. 말하자면 이런 자본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을 청소하지 않는 한 이 사회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죽인 거죠 지금 어떻게 되느냐 하면 모든 분야에서 학문과 사회기반 자체가 다 무너져 버렸어요. 대학의 교수가 공과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의 수학실력이 고등학교 1학년내지 2학년밖에 안 돼요 왜 그러냐면 가르쳐 줄 수 있는 선생들이 다 죽었어요. 아직도 거기는 악보를 화음을 넣어서 노래를 부르는 악보를 몰라요 지금 막 보급이 되고 있어요. 왜냐하면 악기를 하는 사람들을 다 죽여 버렸으니 그래서 악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굉장히 불쌍한 나라에요 제가 보기에는 앞으로 다른 태국이나 주변에 있는 월남이라는 이런 나라들하고는 완전히 상황이 틀리고요 제가 보기에는 최소한 30년내지 50년까지는 나라에 희망이 없어요. 그렇게 걔들이 자라서 세대가 꽉 채워지고 그러고 모든 사회의 지식기반이 다 허물어져 버렸어요. 이것들은 100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을 거라고 학자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자 어쩌다가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마다 한 번씩 전쟁이 일어나도 이렇게 끔직한 위기를 맞이하는데 자유롭게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아프리카 케냐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죠. 선교사한테 편지가 왔는데 기도해 달라고 편지가 왔어요. 그런데 종족 간에 투쟁으로 번져서 밤에 원한 맺힌 사람 집에 찾아가서 다 죽여 버리고 도망치는 거예요 그 소식을 들은 친척이 그 놈이 누군지 찾아내서 밤에 가서 다 죽이고 오는 거야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팔레스타인 자치국 안에는 끊임없이 폭탄이 날라들잖아요 거기에 주민가운데 절반이상의 사람이 안정제를 먹어야지만 살아간다고 해요 습관적으로 언제 폭탄이 날아올지 모르니까 이런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법들을 살다보니까 그러는 게 좋겠다. 너도 죽이고 나도 죽이고 그러면 안 되겠다 이렇게 해서 만든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원칙을 세워놓은 것을 인간이 이성을 통해서 그것을 죄인이라도 그것을 찾아가고 알 수 있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동양에서는 사람 죽이면 큰일 나는데 서양에서는 죽여도 괜찮고 많이 죽일수록 더 덕스럽고 동양에서는 부부가 정절을 지키면 큰일 나는데 서양에서는 정절을 지켜야 되고 이런 식의 법이 존재하지 않아요. 놀랍게 약간의 차이성은 있지만 중요한 토대에 있어서는 시대가 흘러가도 계속해서 기본적인 골격들이 유지되어 내려오고 있다. 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양심을 본성 속에 새겨 놓으시니까 이런 것들은 가지고 살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속에서 자라나면서 그런 인식이 조금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살면서 그것을 경험하는 거예요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데 사람을 죽이면 큰일 나는 것으로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거예요 본래부터 그런 게 있는데 자라면서 그런 교육을 받아 남에 것을 훔치면 큰일 나는 것으로 교육을 받아요 그러니까 본래에도 그런 양심이 있는데 그런 속에서도 교육을 받으니까 이것들이 잘 지켜져서 각각 도덕의 어떤 원칙들을 만들어 가는 거예요 지금 이런 것들이 무너진다고 한탄을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해요 이러면 안 되는 거라고 양심이 가르치고 아이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타고났는데 밖에 나와 보니까 죽이는 사람도 많고 속이는 사람도 많고 법대로 사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손해를 보고 그러고 책임도 안 진다 이거죠 그때 이 아이는 혼란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자기의 행동이나 사상을 판단할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지고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주체가 자기가 된다. 라고 보는 거죠 그런데 자기를 신뢰할 수 없는 거죠 이렇게 되면서 혼란이 오게 되는 거죠 이렇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비록 불신자들이 사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러한 법도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징벌을 하셔서 그런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시는 거죠
그래서 옛날부터 우리조상들 어느 나라든지 조상들 마음가운데 선조들 마음가운데 확신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가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던지 선하게 살면 하늘로 부터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반드시 악한 끝이 있어서 징벌을 받는다. 사실은 그 원칙을 세상 속에 들이밀 때 100%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렇죠. 아무리 형한테 구박받고 착하게 살아도 계속 가난하게 사는 사람 있지 어느 날 박을 뜯어보니까 황금이 쏟아지고 그런 동생만 나오는 거 아니라 이거죠 그잖아요 그런데도 그런 것이 딱 맞지 않는다는 것을 어른들도 알면서도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는 이렇게이렇게 하거라 그러면 그 끝에다가 그렇게 착하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끝이 좋은 것은 아니다. 라고 가르치진 않는다 이거죠 마치 그것이 마치 틀림없는 법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양심이 율법을 따라서 올바로 작용될 때에 이 사회가 그나마 평안해질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는 그것을 벗어난 짓을 해도 자기 자식에게는 그렇게 안 가르친다 이거죠 그래서 자기는 도둑질을 해도 자기 자녀에게는 도둑질을 가르치지 않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사회가 지탱되어 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성령의 작용이라고 하는 거죠 성령의 작용 이 성령의 작용이기는 한데 성령이 작용하는 방식이 신자에게 작용하는 방식하고는 좀 틀린 방식으로 이 불신자들에게는 작용을 하시는 거죠 성령이 신자들에게 작용하는 방식과는 틀리게 불신자들에게 작용하는 방식은 불신자의 마음을 사용하시긴 사용하시는데 그의 영혼을 바꾸어놓고 마음의 경향을 고치고 이렇게 해서 사람자체를 근본적으로 새사람을 만드는 이런 역사와 함께 하나님이 성령으로 작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만 그 사람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결국은 그 안에는 성령의 작용을 따라서 본성에 새겨진 율법을 행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참회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진지한 사모함 그런 것은 없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에게 이렇게 통치하시는 거예요
저도 이거 직접 본 게 아니라 들은 이야기인데 미군들이 전쟁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부대마다 따라가는 의사가 있어요. 무슨 의사일까 정신과의사 가서 전쟁이 딱 벌어져서 영화에서 사람 죽이는 게 간단하지만 대부분의 군인들이 사람 죽여본 적이 없거든요 가서 사람이 비참하게 폭탄에 맞아서 사람 보는 자리에서 팔 다리 모가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 자기가 막 총을 난사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면서 쓰러지면서 사지가 막 찢어지는 거죠 이걸 볼 때70%정도가 정신에 문제가 생기는 거죠 아주 쉽게 얘기하면 정신병증세가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월남전이 끝나고도 계속해서 정신적인 공항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군인들이 많았다고 그래요 그게 인간이에요
그게 왜 그럴까요? 전쟁이 성경적으로 허용이 되는 전쟁이 있고 없고는 나중 문제이고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 비참하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이 자기 앞에서 죽는 이것자체가 인간의 이 율법적인 본성하고는 어울리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불신자들을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율법으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 속담에도 그런 거 많아요. 도둑맞은 사람은 두 다리 뻗고 자지만 도둑질한 놈은 오그리고 잔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누가 그렇게 오그리고 자게 만들어요. 자기 자신의 양심이 자기 자신이 거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진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는 이 양심에 작용의 힘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살아있는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은 살고자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 양심의 작용은 때로는 목숨을 끊게까지 만들어요. 그렇죠. 그런 것을 일본사람들이 특히 잘해요 무사정신이 있어 그런지 몰라도 우리는 그냥 돈 먹고 사기 치면 난 그런 적이 없다 나도 그 사람이 누군지 한번 보고 싶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아니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쇠고랑 차고 가는데 유서 한 장 써 놓고 깨끗이 죽잖아요. 그렇죠. 요즘 우리나라 사람도 그런 사람 종종 나오잖아요. 그죠 그런데 뭐나 하면 얼마나 양심의 힘이 큰지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까지도 포기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그렇게 대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불신자들을 이렇게 통치하시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그나마 질서를 유지하면서 돌아가는 거예요 이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사람의 본바탕은 악해요 그리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라 이거죠 그럼 그런 것들을 발견하는 게 뭐냐 하면은 그 언제였죠. 미국에 홍수가 엄청나게 나서 그 뉴올리온즈 가요 그랬을 때 여러분 미국 가 보신 분은 알겠지만 굉장히 질서 있는 나라이거든요 그런데 전기가 끊어지고 모든 것들이 엉망진창이 됐어요. 그러니까 마 아비규환이에요 상점에서 물건 다 약탈해가고 뭐 난리였어요. 그럼 여러분 우리에게 만약에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그렇게까지 안하겠죠 그죠 동방예의지국인데 안 그럴 거 같죠.
1982년도가 3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전국에 전쟁이 준하는 사이렌이 울리 적이 있어요. 민방위 통제소에서 전국적으로 울린 것은 훈련 빼놓고는 그때가 처음 이였어요. 그러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연습이 아니라 실제 상황입니다. 공습경보가 울린 거예요 그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응평 이라는 사람이 미그기를 몰고 넘어 온 거예요 여러분은 이건 100%전쟁이에요 그때는 전쟁난다고 얼마나 협박을 많이 했잖아요. 우리는 그냥 예배당에 들어가서 기도했는데 집사람하고 나하고는 그때 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을 기억을 해요 여보 이거 전쟁난 거 틀림없어 교회 들어가서 기도를 했는데 사람들은 어디로 뛰어간지 아세요. 슈퍼로 뛰어가서 불과 모든 것 설명 끝날 때까지 한 20분정도 시간이 있었는데 제일먼저 싸그리 없어진 제 뭐냐 하면 라면하고 쌀이에요 그 나중에 라면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요 야 ! 대단해 그러니까 그러한 사태가 벌어진다고 하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그 자기 본능은 다 드러내요 법이 없다 법이 즉 법이 실행이 될 수가 없다. 라고 생각될 때 그때에 양심의 기능은 확 찌그러지면서 그러면서 정상적인 기능이 심각하게 손상을 당하는 거예요
언젠가 한번 한 2년 전이에요 그 월남에 이야기를 상세하게 쓴 글을 읽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건 아니겠지만 소수의 한국국민들이 월남에 가서 마지막에 종전하기 전에 그 베트콩으로 의심받는 사람들을 얼마나 비참하게 학살했는지에 대한 그 기록들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당한 사람이 집요하게 그 사람이 누군지를 찾아내는 과정을 진짜 소설처럼 한편의 드라마에요 진짜 결국은 찾아내가지고 집어넣었어요. 전범으로 그런 기록들을 보면서 느끼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이 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고 환경에 의해서 이 양심이 얼마나 저해 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하고 세월이 많이 흐르는데도 그 악을 저질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가책이 떠나지 않는 거예요
우리역사를 보면 수양대군이 자기 조카를 죽이잖아요. 그게 단종현상 아니에요 그러고 나서 그렇게 고통 받는 장면이 생생하게 나오잖아요. 역사성도 있지만 말이죠. 특별히 박종원씨의 소설을 통해서 생생하게 드러나요 양심이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 힘이 너무 잠시 멈추는 것 같지만 궁극적이고 굉장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기에 훌륭한 도구가 되었던 겁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인간의 종자자체가 진작에 파괴되어서 사라졌을 거라는 거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그 안에는 비록 그들이 창조의 목적에 따라 행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하는 것은 나를 위한다. 대의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은 없어요. 그러고 그렇게 행하는 것은 이렇게 이런 걸 따라서 사는 사람들을 누군가가 보호해주고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은 벌 줘야 되는데 그러기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이 나라였다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에 나라가 서게 되는 것이죠. 인간의 요구의 의해서 세워졌지만 이정부가 세워져서 나라가 큰 권력을 가지고 이 사람들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단체든지 자기가 동의를 해야지 가입을 하는데 내가 언제 대한민국 선택한 적이 있냐 말이죠. 그런데 그런 거 필요 없어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대한민국 국민이고 태어나면 그 갓난애도 법을 지켜야 되죠. 그 대한민국의 법을 따라야 된다는 이거죠 그 법에 의해서 보호도 받고 처벌도 받게끔 되어있는 거죠 그러면 태어나자마자 그렇게 강요되는 거죠 그렇게 이 모든 세상이 인간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태어나면서부터 법아래서 태어나는 거죠 꼭 율법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법령집이 이만큼이에요 그 법을 지키면서 살아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다 몰라요 이렇게 엄청난 법이 태어나자마자 이걸 지키면서 살도록 주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세계가 멸망당하지 않고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거죠 아주 절묘하죠
2차 대전 때만 해도 처어칠 같은 사람이 뭐라 그랬냐면 이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제대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원자폭탄이다 그랬거든요 원자폭탄을 만드니까 전쟁이 안 일어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웬걸 잠시 후 저쪽에서 원자폭탄을 만들어요. 이젠 이북도 가지고 있으니까 사실 뭐 별거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원자폭탄 하나만 날리면 도시 하나가 완전히 기체가 되어서 확 하고 사라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너도나도 전 세계에 수천 개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누구도 감히 그걸 못 쓰는 거예요 썼다하면 그건 자기가 죽으려고 작정하기 전에 쓸 수가 없는 거죠 이렇게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묘한 균형을 잡아가신다. 그렇게 해서 이모든 세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서 팽팽한 긴장이 있으면서도 결국은 인류가 멸망되지 않게끔 안정적으로 이렇게 하나의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게끔 하시는 거란 이거죠
그러나 이것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은 단지 이 세계가 멸망당하지 않고 계속 자손들을 번식시키면서 짐승들이 새끼를 까는 것처럼 이렇게 해가지고 인간과 동물과 식물이 가득한 세계가 되는 것 그것만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자연적인 번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번영에 있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하나님으로 서로 교통하시며 사랑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처럼 그 생명과 사랑을 인간이 잘 받아서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그 안에 사랑하시는 것처럼 인간들이 서로 질서 속에서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질서를 아름답게 가꾸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자신이 창조주란 사실을 인간들의 도덕생활과 모든 자연피조만물들의 자연생활을 통해서 동시에 풍부하게 드러내 보여주시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이렇게 인간이 벌 받을까봐 무서워서 미워하면서도 살인을 못하고 그리고 이후에 받을 고난이 두려워서 남에 것에 손을 대지 못하고 그러나 탐욕은 계속가지고 있는 이런 식의 세상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충분히 영광을 받으실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신자들에 대해서는 또 다른 통치의 방법을 가지고 계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은혜에요 은혜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뭐라 그러냐면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왕노릇 하여 은혜가 왕이 되어서 왕이 되어서 통치하는 겁니다. 왕명은 끝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 그것도 알면서 왕의 명령에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은 이것은 사소한 잘못이 아니라 왕 자체에 관한 전면적인 공격이며 도전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도전하는 자들이 각오해야 되는 것은 왕의 징벌을 통해서 파멸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왕이 다스리시는 그것은 최종적인 권위와 힘을 가지고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는 거라 이거죠
요즘은 제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집이 요 바로 위층이죠. 교회는 여기 아래죠 학교도 안가죠 예전에는 학교는 안양, 집은 인천, 교회는 서울, 이 삼각형을 그리면서 다녔는데 하루에 차타는 시간만 수요예배 같은 경우만 여섯 시간이에요 이건 뭐 그냥 아주아주 지긋지긋하죠. 근데 지금은 너무 좋아요 제가 전 교인 중에 집에 제일 가깝거든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런데 인천에서 다닐 때보면 말이죠. 좀 빨리 가기위해서 고속도로가 아니라 산업도로를 타요 아주 악명 높은 산업도로에요 어마어마하게 큰 차들이 쌩쌩 달리는데 하여튼 이 승용차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무서울 정도에요 휙하고 지나가면 차가 막 이러고 흔들려요 그러고 막 위에서부터 빵빵 그러면서 막 20톤씩 되는 게 막 내려와요 나중에 왜 그러나 그랬더니 이게 못선데요 서지를 못한데요 24톤쯤 되는데다 30톤쯤 싣는데요. 그 말이 뭐 진실이라고 안 믿어지는데 그 사람들이 너무 빨리 달리다가 뭐가 나타나면 그냥 브레이크 밟는 거 보다 부딪히는 게 안전하데요 브레이크를 밟으면 특히 석재 같은 것이 있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차가 어떻게 될지 모른데요 그렇게 끔직한 길을 몇 해 동안 다녔어요. 항상 거기는 개판이에요 그래서 하여튼 새벽에 일찍 나왔다가 밤늦게 들어가곤 했는데 잠깐 늦어서 차가 밀리기 시작하면요 질서가 엉망진창이에요 그런데 저 뒤에서부터 올 때 이상하게 오늘은 그 못된 차들이 말이죠. 딱 질서정연하게 달리면서 1차선을 그때 1차선은 승용차만 다녔잖아요. 1차선을 승용차에게 내줘서 죽죽 가는 거예요 어 이 사람들 회심했나. 이거 왜 이러나 틀림없어 저 앞에 경찰이 딱 서 있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어마어마한 차를 몰고 다니면서 그렇게 횡포를 부리던 사람도 뭐 승용차 운전수가 창문열고 왜 그러냐고 그래도 말도 안통해요 소리 고래고래 지르고 어떤 때는 창문으로 침 탁 뱉고 그러는데 그러던 차가 그 승용차만치도 안 되고 하얀 오도바이 조그만 거 탄 사람이 딱 손가락 하나로 오라 그러면 말이지 꼼작도 못하고 뭐지 비상등 키고 껌벅껌벅 거리면서 저쪽으로 가서 얌전하게 서서 큰 차에서 내려와서 고개를 숙이고 처벌을 받는다 말이지 그게 뭐죠 법의 힘이에요
하나님이 불신자들에게는 이러한 교통순경과 같은 역할을 율법으로 하게 하시는데 신자에게는 은혜로서 이런 일을 하게 하시는 거죠 이 은혜는 성령님의 작용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일반은혜 혹은 특별은혜 이렇게 두로 나누어서 불러요 즉 사람들 속에 역사하셔서 사상을 불러일으키시거나 하나님을 향한 참회 같은 것 우리의 구원자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이런 것들을 깨닫게 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죄를 지을 때 자기에게 임하게 될 양심의 가책 그다음에 사후에 자기가 받게 될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지만 사필귀정에 의해서 받게 될 무서운 보복 이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것도 성령님이 그 사람에게 작용하시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런데 작용하실 때 마음과 심령에 깊이 작용해서 그를 전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게 아니라 생각의 기능 그리고 마음에 있어 판단의 기능에 작용을 하셔서 그러한 율법적인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결말에 대한 생각들을 분명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시고 그 다음에 그 죄의 크기 그 죄에 대한 마지막 결과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사람들 속에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자극을 받고 깨닫게 하셔서 그래서 죄를 억제하시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일반은혜에요 그러니까 불신자들 속에도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불신자들이 어떤 결정을 하거나 혹은 마음을 바꾸는데 있어서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그 마음을 바꿔 놓을 수가 있는 거죠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 거죠
그건 아주 놀라운 거죠 그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걸 가리켜서 일반은혜라고 말씀하시는데 특별은혜가 있어요. 이 특별은혜가 뭐냐 하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깊이 들어가셔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죄에 대해서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순종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고치게 만들고 하는 커다란 본질적으로 그 사람의 성품에 변화가 오는 이러한 역사를 일으켜요 이것을 가리켜 특별은혜라고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객관적으로 쓰일 때에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값없이 베푸시는 은총이지만 주관적으로 쓰여질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감동을 주시는 것을 가리켜서 은혜라고 부르는 거죠 은혜 그러니까 네가 구원받은 것이 다 은혜로 된 것이다. 이 얘기는 첫 번째 경우이고 요즘에 네가 은혜가 충만하구나! 라고 하는 것은 두 번째 경우에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령의 작용이 계속될 때에 그래서 끊임없는 사랑의 감동을 불러일으킬 때 이때 우리 안에 은혜가 있다. 라고 말하고 이 은혜가 우리를 통치하는 거예요 왕노릇하는거죠
자 어떤 식으로 왕노릇 하는지 여러분들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자 은혜와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정욕을 예로 들 수 있어요 인간이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정욕에 빠지게 되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사랑이라고 하는 정욕은 그것의 동기가 되고 그것을 물들여요 그래서 어떻하냐하면 자기욕망대로 살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정욕이 확 물들게 되면 분명히 남에 돈인데 이것을 자기가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또 그런 자기 사랑의 정욕에 물들게 되면 분명히 인간으로서 저 사람에게 해야 할 도리가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는 내가 희생을 해야 돼 그래 안하려고 한다 이거죠 이러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모든 우리의 삶에 정욕이 지배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자기밖에 모르는 아주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버리는 거죠 그럼 반대로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을 온통 통치하게 되면 무엇을 보든지 그 사람은 보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게 되요 왜냐하면 그를 감동시키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은 마지막으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게 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이기 그렇다 이거죠 그래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은 결국은 받은 그 사랑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에요 그런 은혜가 사람 안에 계속 역사하게 될 때 인간은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일을 행하고 살아가매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거죠 그래서 이사랑은 이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로 하여금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할 의무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 사랑의 감동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은혜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의무들을 팽개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면 그 사람은 반드시 불충한 삶을 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진정으로 충성스러운 삶을 살기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을 때에는 너무 힘들게 보이는 의무가 주님의 은혜가 내 마음속에 가득하게 되면 아주 쉬운 의무가 되는 거예요 새벽마다 나와서 기도하십시요 아휴 새벽에 언제 11시에 퇴근해서 언제 새벽에 나와 그러면 아침은 어디서 먹습니까? 이러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게 되면 나머지 것들이 다 사소해 보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해야 할 의무가 아주 쉽고 가볍게 느껴지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한 도리를 행하게끔 만들어 주는 거죠 그래서 일생 다 산 다음에 하나님 앞에 칭찬 받으려면 여러 소리 그만두고 은혜 충만한 삶을 살아야 되요 조금 부족해도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면 그래도 하나님 앞에 인생 다 살고 나서 하나님 앞에 뭔가 한 게 있습니다. 은혜가 고갈된 삶을 살면 허우적거리면서 많이 애쓰면서 살아도 결국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요. 그리고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사랑에 붙잡혀서 살았으니 허우적거리고 일평생을 산들 거기 뭐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이 있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어요. 그래서 은혜가 이렇게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신자에게 하나님이 이런 통치를 실행하시냐하면 두 가지에요 중생과 성화에요 중생은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의 은혜가 불신자들에게 임하는 방식은 뭐냐 하면 저 사람에게 하나님이 생각을 바꾸어서 이렇게 일하게 하시고 싶기도 하고 저런 일을 행하게 하시고도 싶어요. 그때에 성령님이 오셔서 영향을 끼치신 후에 성령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시지 않고 영향만 주시고 성령님 자신이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거듭나지 못한 사람 안에는 성령님께서 와서 상주하시는 것이 없다. 이 얘기에요 내주하심이 없다 이 얘기에요
그런데 믿는 사람의 경우에는 성령께서 그의 중생을 통해서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데 그래서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거듭나게 하시는데 거듭나게 하시는 게 뭐냐 하면 예전에 있었던 그 사람의 영혼과 마음을 움직이는 원리를 빼버리고 새로운 원리를 심으시는 거예요 옛날의 원리는 뭐냐 하면 죄와 사망의 법의 원리에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전에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 가운데 살았을 때에는 이미 영혼자체가 죄에 사로잡았어요. 영혼자체가 캄캄한 어두움 이였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지성적으로도 눈이 멀어서 명백한 증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이라고 하는 명백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거죠 그리고 그가 애써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마치 샘에서 물이 나오는 것처럼 이속에서 계속해서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하고 기회 있으면 자기의 정욕대로 살고자하는 그것이 이 사람 속에 계속 솟아 나오는데 이것을 사실은 그 사람 자신의 힘으로 억제하고 고칠 수가 없다 이거죠 그래서 율법은 인간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그 빛으로 보여주지만 그 죄를 이기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본분으로 돌아가서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 능력은 율법에 없는 거예요 양심에 그런 능력이 없는 거죠
언제한번 지독한 알코올중독자를 상담해본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이 교회 와서 계속 행패를 부리는 거예요 담임목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담임목사 만나게 해달라는 것은 밑에 사람 만나봐야 천원 이천 원씩밖에 안주니까 돈을 더 받아가려고 만나자 그러는 거거든요 그럼 하도 그래서 내가 만나 줄 테니 오라 그래라 그래서 만났어요. 만났더니 자기 이야기를 쭉 하는 거예요 노숙자생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상당히 총명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한테 그랬더니 뜻밖에 그러는 거예요 사람들은 내가 목사님 보자 그러면 돈이나 좀 뜯어갈려고 보자 그러는데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난 인생 상담 하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자기가 어떻게 해서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는지 쭉 얘기를 하면서 기본이 하루에 세 명 내지 일곱 병을 먹어야 된데요, 소주를, 그래야지만 정상적인 생활이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이야기는 하는 정상적인 생활이라는 거는 불안을 느끼지 않고 취해서 이렇게이렇게 살아가는 이런 삶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내가 테이프를 한 세트를 줬어요. 무슨 테이프를 줬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다 듣고 와라 그랬더니 노트에다 새카맣게 적어가지고 이주일 만인가 다시 만났어요. 세 번인가 내가 만나줬어요 쭉 얘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다 할 시간은 없고 이 설교와 관련해서 내가 한 가지만 얘기하려는데 자기가 알코올중독에 빠졌더니 온 집안 식구들이 자기를 지기가 너무 식구들을 친척들은 괴롭히니까 온 식구가 가족회의를 해가지고 이 자기를 정신병자로 만들더라는 거죠 진짜 그렇게 해 가지고 피해보는 사람이 있다고 언제가 TV에 나오더라고 아 물론 알코올중독자니까 어느 정도는 맛이 좀 갔겠지만은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닌데 알코올중독보다 더 무서운 정신병자로 몰아가지고 온 기족이 동의서를 써서 말하자면 정신병원에 집어넣은 거죠 정신병원에 나와서 그 다음에 보호시설로 갔는데 민간보호시설로 갔는데 쇠창살이 다쳐져 있는 옛날에 뭐 기도원 감금하고 그런 일 있어잖아요 그런데 간 거예요 3년 동안을 거기 갇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더 이상이 이 사람이 술을 안 먹으니까 안 먹는 게 아니라 안줘서 못 먹은 거죠 3년이 지났으니까 3년 동안을 술을 냄새고 못 맡은 거예요 이 사람이 치료 된 거니 그리고 풀어 줬는데 그 사람 말이 재미있어요. 거기 나와서 제일 먼저 한일이 술 먹는 일이였어요. 안 고쳐지는 거예요 고쳐지질 안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고칠 수도 없었고 고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게 바로 죄인이 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그 모습이 그 사람은 알코올중독자였으니 그렇지만 우리는 도덕적으로 그렇게 자신만 사랑하고 자신중심으로 살아가고 창조주의신 하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것을 인간이 이사회에서 가르쳐주는 도덕이나 법룰 이런 거로는 절대로 그 사람을 바꿀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전의 원리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만을 사랑하며 살아가던 그 죄와 사망의 법을 뽑아버리고 그리고 생명과 성령의 법을 그 사람 속에 심은 거예요 이게 중생이에요 그러면 이것은 마치 뭐하고 꼭 같으냐면 그 우리 왜 골수 이식같은거하잖아요 그죠 골수에서 계속해서 백혈구 같은 것도 만들어져서 피를 형성하고 이렇게 되잖아요. 이런 작용이 인간에게서 끊어져 버리면 계속 외부로 부터 피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건데 우리 몸 안에는 그런 조혈세포들이 있어서 그래서 그 안에서 스스로 피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런 것들의 기능이 망가지게 되면 인간이 죽는 거예요 말하자면 이러한 생명과 성령의 법 쉽게 얘기하면 은혜의 원리를 심으시는 것은 이렇게 이 안에서 인간본성자체가 바뀌어져서 여기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감동과 감화가 이 안에서 계속해서 생겨나도록 만드시는 원리를 인간의 영혼 안에 심으셔서 인간의 마음에 작동하게 하시는 거예요
이것을 가리켜서 생명과 성령의 법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이생명과 성령의 법이 인간의 마음속에 심겨지게 되는데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은 이것을 심어놓으면 성령과 상관없이 우리 안에서 저절로 계속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생명과 성령의 법이 인간 속에 심겨졌는데 심겨진 이것이 성령이 계속해서 그 사람 안에 계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힘을 입어서 이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게 만들고 하는 이런 작용들을 이 안에서 계속해서 역사하시는 거 이게 바로 성령님이 은혜를 통해서 우리 신자들을 다스리시는 방식이라 여기에서 사랑과 생명이 계속 쏟아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모든 은혜의 작용들이 성령으로 말미암는데 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작용이 우리인간의 본성 안에서 영향을 미치면서 발생을 하는 거예요 영혼에서 생겨나지만 우리의 본성과 동떨어지지 않고 불신자에게는 성령에 의해서 사용되는 건데 이 신자의 경우 은혜의 역사는 단순히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그 사람을 감화하고 감동하여 그 사람의 본성과 함께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성령의 계속적인 은혜 속에서 살아가게 될 때 이 사람의 본성자체에 변화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잔인하던 사람이 자비로운 사람으로 급하고 조급하던 사람이 침착하고 그런 사람으로 악하던 사람이 선한사람으로 남을 배려할 줄 모르던 이기적인 인간이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자비심 있는 사람으로 이렇게 성품자체가 변해가는 거에요 그러나 성령이 떠나고 그 성품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는 얘기할 수는 없는 거죠 왜냐하면 그런 거 상상할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신자에게는 성령이 오시기만 할뿐 신자에게서 성령님이 나가시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성령과 본성은 그렇게 함께 하나가 되어서 우리자신을 변화시켜가는 거라 이거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거죠
처음 예수 믿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밀려와도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이상하게 본성이 그 옛 본성이 잘 드러나는데 성화가 많이 되면 이 사람 안에서 이런 성품이 아주 항구적인 성품이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거죠 이제 이처럼 해서 성화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들은 인제 죄에 의해 지배를 받던 상태는 끝나요 그래서 예전에는 죄가 이 사람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죄를 행할 수밖에 없고 기껏해야 양심의 빛에 자극을 받으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겨우 창조의 목적에 맞게끔 살아갔었는데 거듭나고 나면 죄의 절대적인 지배가 사라지면서 그러면서 이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역사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죄가 그 사람을 노예처럼 지배한 상황은 끝났지만 죄의 영향은 계속해서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은 사람도 은혜가 떨어지면 좀 공평하지 않은 방법으로라도 돈은 좀 벌고 싶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조금 손해를 끼치더라도 내가 이익을 얻고 싶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지배하고 싶고 라고 하는 이 창조의 목적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자기 자신을 우월하게 하기위한 욕망들이 이 안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자기 즐거움을 따라서 이런저런 죄를 지을 마음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유혹을 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신자는 완전히 완성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가 여러분들이 이 설교를 듣고 나서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불신자는 완전히 율법으로만 다스리고 신자는 완전히 은혜로만 다스린다면 그게 사실입니까? 그러면 신자는 율법을 배울 필요도 없고 율법은 신자에게 아무런 작용도 못하겠네요, 라고 하는 질문이 떠오를 수 있죠 신자에게 율법이 어떤 작용을 해요 안 해요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해요, 안 해요 하지, 왜냐하면 신자에게 율법이 작용하지 않으면 죄를 회개할 수도 없어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이 죄다. 라고 하는 것은 율법이 보여주는 것이고 그래서 넌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야 돼 라고 하는 고발은 양심이 하는 거거든요 율법이 법이고 그것이 마음에 비출 때 양심에 작용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마치 죄인이 죄를 지었을 때 법정에 불려 나갔을 때 검사가 무조건 저 자식 죽여 버리자 라고 그러지 안잖아요, 왜 죽여야 되냐 그러니까 판사님 기분 안 나빠요 죽여 버려요 그렇게 말하는 검사 없잖아요 검사가 들고 나갈 때는 법을 다 뒤져서 그런 놈들 죽이는 법이 없나 그러고 찾아가지고 나가는 거예요 보십시오, 최고로 죽일 수도 있게 되어있습니다. 여기딱 적용시켜서 죽여 버립시다. 이게 변호사는 반대죠 그죠 빠져나갈 때가 없나 뭐 이런이런 죄를 지은사람은 죽여야 되지만 그렇지만 그러니까 살길이 여기 있다 이게 변호사하고 검사의 차이잖아요. 그러니까 변호사도 법을 보고 얘기하는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율법이 신자에게 적용을 하는 거죠 그때에는 성령의 작용이지만 그 성령의 작용은 일반적인 은혜의 작용이죠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 앞에서 심오하게 뉘우친 것도 아닌데 어 내가 남의 물건 훔쳤는데 이렇게 발각 나서 개망신당하는거 아냐 그러고 잠을 막 못자는 거에 밤중에 도로 갖다 둘까 아니면 미안하다 그럴까 어떻게 할까 막 고민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뭐냐 하면 성령의 일반은혜가 이 사람 속에 역사하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이 불신자들은 그것을 통해서 결국은 그것을 버리게 하고 그래서 결국은 양심을 가책을 받아서 그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이 끝이지만, 신자에게 있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그 정도가 끝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까지 돌아가는 것이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바야 그러니 그것이 끝이 아니라 이거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다가도 결국은 마지막에 그 끝은 이 범죄를 포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이 사람의 마음속에 자기의 죄를 깊이 깨닫게 하시고 결국은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리로 그를 데리고 가셔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사람의 통치가 실현 되는 거란말이죠 그런 점에서 틀린다 이거죠 이렇게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이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에게 구현해 나가는데 이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죄에 대해서 끊임없이 죽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살아나는 이것을 통해서 신자라고할지라도 점차점차 죄의 영향으로 벗어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승리하셔요. 결국은 신자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악을 행하고 잘 못살게 될 때 결국은 신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고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받은바 구원의 은혜에 합당하도록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뀌어져 가게 되는 겁니다. 이게 결국은 죄를 죽이는 삶이에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사람 안에 확하고 번성할 때도 있고 사위어져가는 작은 불꽃처럼 그렇게 야위어 갈 때도 있어요. 신자의 의무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작은 은혜들을 끊임없이 사랑하게 해서 그래서 활활 타오르도록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의무에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신자 안에 당신 자신의 통치를 실현해 가시는 거죠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이 아무리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시고 커다란 도덕심을 불러일으키신다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인간을 위해 대신 죽으셔서 그래서 이루고자 하시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데 있어서 신자들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불신자들은 몰라도 그들은 알게 하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해서 자기도 그 목적을 사랑하게 하시고 또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받으며 그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매순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죠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은혜와 율법으로 통치하시는 그런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21.도덕적 통치 방법 : 상벌(1)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롬2:9)
아마 오늘하고 한번만 더 설교하면 이 도덕적 통치를 모두 스물두 번에 걸쳐서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와 다음번에 두 번에 걸쳐서 드릴 말씀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심에 있어서 수단을 가지고 계시는데 첫 번째가 계시였다면 두 번째는 상벌을 가지고 이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통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은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하는 당신의 뜻을 계시 즉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세상을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가지고 다스리는 것을 가리켜서 도덕적 통치라고 부르죠. 그런데 이것이 이루어지려면 적어도 네 가지 요소가 있어야 됩니다.
첫째는 만약에 어떤 사람들에게 이러이러한 통치자의 뜻을 따라 살아라. 그리고 꼭 그것을 관철할 의지가 있다면 첫째는 먼저 법을 만들고, 그 법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되겠지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행동하고 살아라. 이것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인 나의 뜻이니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공표해야 되겠지요.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고 그 행동으로 법을 어겼을 때에는 그 사람이 하고 있는 행동을 파악해야 되겠지요? 알려져야 되겠지요? 알려졌으면 그 다음에 그 행동이 문제가 있으면 법을 가지고 그 행동을 비춰봐야겠지요? 여기에서 판단이 나오겠지요? 판단이 나오면 그 다음에 죄의 경중이 드러나겠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거기까지만 하고 나머지를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 법은 있으나마나한 법이 되겠지요?
그래서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정당하게 형벌을 내리고 또 법을 잘 지켜서 선을 행한 사람들에게는 상을 줄 때에 사람들은 이중적으로 격려를 받겠지요? 악한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것을 보면서, 형벌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저런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고 또 올바르게 살아서 큰 상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올바르게 살아서 저렇게 상을 받을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리고 내가 법을 지키면서 사는 이것은 나에게 반드시 유익이 되어서 돌아온다!’ 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될 때에 사람들은 법을 많이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실 때에 그렇게 다스리신다고 하는 것이죠.
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의 가장 큰 위기는 신앙의 중심에 하나님이 와야 하는데 하나님은 축출되고 인간이 그 중심에 오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이 세상의, 온 우주의 중심인줄 알고 자기가 행복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고 제멋대로 사는 인간이 어느 한 순간에 복음진리를 듣고 그리고 ‘쾅’하고 충격을 받으면서 비췸을 받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한 것과 자기가 죄인인 것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그리고 돌이켜 회개하는 자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돌아오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깨닫고 보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 온 우주의 중심에 계시고 거미줄같이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이 모든 세상을 통치하시며 위대한 인물로부터 시작을 해서 발아래 밟혀죽는 하찮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모두 그들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도 그 많은 피조물들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아주 미물에 지나지 않는 티끌 같은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중요한 분이시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살아있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또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지으신 목적대로 살기위해서는 더더욱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기독교의 신앙을 갖는다는 뜻이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오늘날은 정반대가 되어있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지요? 모두 한사람, 한사람이 우주의 중심이에요. 그리고 자기가 최고예요. 교회에 와서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이 이 모든 세계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는데 그 죄인의 결정적인 특징이 자기를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궁극적인 판단 심지어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고 하는 것도 자기가 능히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게 죄인의 결정적인 특징이에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조금 깊이 들어갈 테니까 이해를 하십시오. 어렵지는 않아요. 중세시대까지는 이 기독교신앙이 서구사회를 지배했어요. 우리는 뭐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여기는 동양이니까…… 기독교신앙이 서구사회를 지배했어요. 태어나면 주민등록도 교회에다 하고, 재판을 받을 때도 교회에서 재판을 받고, 결혼을 해도 거기서 하고, 죽을 때도 교회에서 죽어요. 그러니까 교회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인간이 생활을 하는 것이에요. 그 때에 그 기독교를 통해서 배운 그 인간관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기도 했지만 그것으로는 워낙 부족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판단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 빛 아래서 자기 이성의 판단을 신뢰해야 된다.’ 라는 것이었고 혹시라도 하나님이 주신 성경의 계시와 자기가 내리는 판단이 틀리면 즉시 복종해야 된다고 배웠어요.
그래서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아래 있을 때 거기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총아래 굴복하고 있으면 그것이 가장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상태라고 믿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중세시대가 어땠어요? 캐톨릭 시대죠. 모든 교회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교회가 타락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있는데 그 권세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중세 교권주의 시대의 교회의 횡포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은 직접 알 수가 없어요. 성경 읽는 것 자체를 엄하게 벌했어요. 그리고 이 성경을 자기네 나라말로 번역하는 것을 못하게 하고 당시에 아주 식자층들이나 사용하는 고전 로마글자 즉 라틴어라고 하는 것으로 된 성경만 했고 그리고 심지어는 설교도 라틴어로 했어요.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뛰어난 식자층의 몇밖에 안 되는 것이죠.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이에요? 그런 것 필요 없다는 것이에요. ‘그런 것은 알아들을 필요 없고 일단 그렇게 드리는 미사에 참석하면 본인이 알던 모르던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영혼 속에 주입이 된다.’ 고 그렇게 믿었단 말이죠. 그리고 ‘그 은혜에 의해서 살아간다.’ 라고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그 시대 속에서 살면서 교회는 자기가 가진 권력으로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개성과 그리고 인간의 본성들을 심각하게 억압을 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이제 사람들이 17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과학이 발달하게 되고 지리상의 발견도 이루어지게 되면서 모든 것들이 눈부시게 발전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런 속에서 이제 사람들이(역사를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아무튼……) ‘이것은 참된 인간이 처해야할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라는 반성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길게는 13세기, 14세기부터 일어난 일이지만 17세기로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운동들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리고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해서 이제 폭발적인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이성을 위에서 억누르고 있는 이 권력과 같은 신앙을 제거해야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본을 보이지 못한 교회의 권력을 제거해야지만) 우리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이 생겨나게 된 것이에요. 그러면서 교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래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발생과 함께 제일 먼저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이 교권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사실은 이러한 역사를 보면 이 하나님의 계시가 그 계시에 온전히 순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사로잡힌 가운데 인간들을 사랑하면서 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자신이 이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교회가 보여주지 못할 때, 그리고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을 세속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할 그 때에 얼마나 커다란 인간들의 저항에 부딪히는가하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나오는 것이 소위 근대주의라는 것이에요. 거기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최고다. 믿을만한 것은 인간의 이성이고 나머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우리들의 이성을 지배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고 거부하는 것이에요.
처음에는 그릇된 교권에 대한 투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제는 초자연적인 것으로부터 다시 말하면 인간이 언제나 경험할 수 있고, 알 수 있고, 반복해서 실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초자연적인 진리들에 대해서는 안 믿으려고 하는 세상이 되었어요.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뭐든지 인간이 깊이 연구하고 탐구해가면 정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에요. 이야기하면 더 길어요. 더 긴 이야기로 들어가면 더 재미있거든요. 그런데 그냥 설교시간이니까 이 정도만 할게요. 나중에 마당세미나 할 때 그때 하죠.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제 인간의 이성이 최고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그때부터 이 과학과 학문이 엄청나게 발전하는 것이에요. 그 중세 때에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거나 개발을 해놓고도 사실 신뢰를 못했어요. ‘이것이 진짜 맞을까?’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이 항상 유한하다고 배워왔기 때문에 그랬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 속에 그 때는 철학자나 그런 사람들도 엄청나게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어줘요. 그런데 어쨌든 결론은 뭐냐 하면 그런 사상을 제공해준 사람들이 모두 불신자는 아니었어요. 그리스도인들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하면 예를 하나만 들어 볼게요. 꼭 해야 되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에요. 여러분들 그 고등학교 다닐 때 철학자 데카르트라는 사람을 만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도 크리스천인데 뭐라고 얘기 하냐하면 예전에는 하나님이 곧 진리라고 생각했어요. 이 사람이 그것을 부정하고 ‘하나님이 영원 전에 진리를 창조하셨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진리와 하나님 사이를 편을 갈라놓는 것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하나님 자신이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은 다가갈 수 없게 멀리 계시고 하나님은 진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셔서 그 진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연 속에는 자연의 진리가 있고 인간의 도덕생활 속에는 도덕적인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에요. 얼핏 보면 이것이 조금도 우리가 하는 이야기와 틀린 것 같지 않은데 차이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런 진리를 창조하시고 움직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분명하고 판명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자연 속에서 어떤 법칙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은 발견한 것이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믿을만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법칙을 어긋나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다른 법칙은 계속해서 노력하면 발견해갈 수 있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해놓고 보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했느냐하면 무엇을 하나 발견하면 인간이 의심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것위에 그것, 그것위에 그것, 그렇게 쌓아가면서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이루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해놓고 하나님이 계신 신앙의 세계는 인간이 이렇게 생각을 하고 탐구를 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완전히 별도의 세상인 것으로 제외해놓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그전까지는 자연을 보고 어떤 아주 훌륭한 규칙을 발견하게 되면(어떤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속에서 규칙을 발견해요. 그 규칙을 논리로 풀어요. 그 다음 마지막 세 번째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까지 결론이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자연, 거기에서 논리, 그 다음에 거기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될까? 하는 윤리를 가져오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논리라고 하는 것에 뭐가 작용을 했느냐하면 아까 얘기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운 어떤 법칙들을 보면 ‘하나님이 이것도 이렇게 만드셨구나!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될까?’ 이렇게 아주 순박한 결론들을 냈었단 말이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런 인간의 이성이면 뭐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전에 신성하게 믿었던 성경을 다 찢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이성으로 있을 수 없는 일…… 이것들은 지금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예전에도 일어날 수 없다하며 다 찢어버리는 것이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지금 수 만 명을 먹여보라 이거에요. 지금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럼 지금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때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 진짜로 그랬다기보다는 예수님이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 한두 명을 주니까 거기 모인 많은 사람이 혼자 먹으려고 그러다가 네 것, 내 것 다 내놓으니까 아마 다 먹고도 남은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나눠먹고 살라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다 해석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이제 기고만장하게 되는 것이죠. 세월이 흐른 것이죠.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자유주의 시대가 도래 하게 되는 것이죠. 자유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이제는 신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19세기쯤 오게 되면 어느 정도로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없느냐하면 아무관심이 없어요. 그러고 나서 교회가 보니까 심각한 위기를 만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에요. 인간의 이성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해결이 안 되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니까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죠.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어떻게 되었어요? 교회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하나님을 보여준 게 아니라 그 세상의 풍조를 그대로 따라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역사의 자료를 보면 그 당시는 19세기말이죠. 교회의 주일예배설교 제목이 ‘감자를 먹는 즐거움’ 그 다음에 ‘짐승은 우리에 기르는 것보다 방목하는 것이 좋다.’ 그 다음에 부활절쯤 되면 ‘생매장 당하는 것의 끔찍함’ 이런 설교들…… ‘한 잔의 커피를 먹는 유익’ 그 다음에 나중에는 ‘천연두 예방주사 맞아야하나? 말아야하나?’ 이런 설교의 제목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실제로…… 그러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겠어요? 교회가 와르르 무너진 것이죠.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 어떤 일이 일어나요? 두 번에 걸쳐서 세계대전이 일어나요. 세계가 쑥밭이 되는 것이에요. 그 현실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제 반발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허무주의에요. 인간의 이성을 믿었더니 된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때까지만 해도 인간의 이성은 자기만을 내세우는 이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 어떻게 해야지만 행복할지를 우리 인간이 스스로 탐구하면 찾아갈 수 있다. 그런 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라는 그런 종류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죠? 여전히 하나님 없는 선, 악 이런 개념들이 여전히 있는 것이죠.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를 가게 되면 선도 가르치고 악도 가르치는데 그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공동체의 행복을 위한 것이에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이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20세기에 들어오면 그 다음에 나라마다 물건을 만들어서 팔아야 되는데 시장이 부족한 것이에요. 그러면서 제국주의가 일어나게 되는 거잖아요? 아주 간단하게 훑고 지나가면…… 그러면서 거기서 사람들이 요렇게 가리키는 것이에요. 동그랗게…… 요기서만 통용될 수 있는 선을 막 가르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어때요? 일본제국주의 안에서는 너무 너무 선하고 그리고 그것을 행하다 죽었기 때문에 자손대대로 칭송을 받을만한 선한 일인데 그렇게 선한 일을 행한 그 사람 때문에 주변에 있는 약소국가의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고 나라가 짓밟히는 것이에요. 무슨 얘기인지 아시죠?
그러니까 결국은 그러다가 팡하고 터진 게 2차 세계대전이에요. 그래서 수없는 사람이 피 흘리면서 죽어가는 것이에요. 전 세계가 쑥밭이 되는 것을 보면서 결국은 이성 너를 믿었는데……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통용되는 저 멀리에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객관적인 진리가 있고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고…… 그것들을 우리들이 찾아갈 수 있고 그것대로 산다면 이 세상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돌아온 것은 잿더미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비참한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에요.
그 다음에 뭐냐 면 ‘너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보좌에서 확 잡아서 끌어내려는데 그 끌어 내침을 당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이성이죠.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가느냐하면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 그런 것은 고사하고 무슨 인간 전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신의 섭리, 그리고 알지 못하는 운명의 계획, 그런 것은 쥐뿔도 없다 이거에요. 그러면 우연이다, 우연…… 우연히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연히 이끌리다 만나면 그게 만남이 이루어지고 각 사람의 운명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미리 정해진 어떤 원칙이나 원리가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연히…… 안 태어나도 될 인간들이 괜히 태어나서 그렇게 섞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가지고 어떻게 되요? 진리라고 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발을 하는 것이에요.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서…… 그러면서 쳐부수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것이 40년대, 50년대 60년대에 일어났던 세계의 흐름들이에요. 그냥 획획 지나가지만 그렇게 되었던 것이에요.
이게요 이렇게 되니까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객관적인 것도 없다…… 다 이렇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뭐라는 것이에요? ‘너에게는 그게 진리지만 나에게는 다른 진리가 있어. 저 사람은 자기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거야!’ 각자가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유머가 있는데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유머가 있었어요. 여러분 학교 앞에 가보면, 우리 학교 다닐 때 보면 표어가 이렇게 붙어 있잖아요? 하얀 판에다가 까만 글씨를 쓰던지, 표어가 이렇게 붙어 있잖아요. 그런데 6.25가 딱 끝나고는 무슨 표어가 붙었는지 아세요? ‘무찌르자 공산당!’ 이게 써 붙여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제 전쟁이 끝나고 한이 많이 풀렸어요. 그러니까 60년대쯤 들어서서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는 제일 급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돈이 있어야지 길도 닦고, 공장도 세우지…… 그래야지 기계도 돌리고 그럴 것이 아니에요? 그러려면 어디서 돈을 가지고 와야 해요? 자기는 못 먹고 피죽을 먹으면서도 빨리 수출을 해서 해외로 수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지요? 하다못해 밀가루를 많이 심던지 감자를 많이 심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뭐라고 써 붙였느냐 하면 ‘증산, 수출, 건설’ 이렇게 60년대에 써 붙인 것이에요. 나이 드신 분들은 기억이 나지요? 뭐 60년대 태어나지도 않았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요? 증산, 수출, 건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볏단을 이렇게 안고 있는 거…… 뒤에는 공장 그림이 나오고…… 그 때는 이 매연이 나오는 게 번영의 상징이었잖아요. 그죠? 그렇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50년대는 무찌르자 공산당이라고 하는 그게 있는 것이에요. 그때 대통령이 누구에요? 이승만대통령이었잖아요. ‘그놈들 죽여야 된다. 그놈들하고는 같은 땅에서 못산다.’ 그래서 우리는 피죽을 먹고 고무신을 신어도 그놈들은 무찔러야 된다. 이렇게 모두 합일을 본 것이에요. 그게 옳건 그러건 간에 합의를 본 것이에요.
60년대는 증산, 수출, 건설이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 60년대 생각이 나는데…… 그 때 김, 오징어 먹는 것은 생각도 못했어요. 왜요? 그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이 잡혔는데요. 왜 먹는 것은 생각도 못했어요? 일본사람들에게 다 갖다가 수출하는 것이에요. 김은 소풍이나 가야지 한번 그것을 싸가지고 가지 상상도 못해요. 지금 제 기억 속에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중학교 3학년 때쯤 되었을 때 오징어 큰 거 한 마리가 거의 이천 원 가까이 갔던 것이 기억이 나요.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큰돈이에요.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얘기냐 하면 그만큼 있기는 있는데 접근해서 그것을 사먹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죠. 그러니까 상상도 못하지요. 그것 전부 다 갖다가 파는 것이에요.
그러다가 70년대가 되었어요. 막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에요. 박정희 대통령이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한 번 더 해야겠어요. 그러다가 한 번 더 했단 말이에요. 그 다음에는 계속해야 되겠어요. 그래서 학교 앞에 가면 ‘유신으로 번영하자.’ 그렇게 써 붙이는 것이에요. 기억나죠? 70년대에……
80년대에는 노태우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다음에 뭐라고 써 붙였느냐하면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그렇게 써놨어요.
그리고 80년대를 마감하고 90년대로 넘어왔어요. 그리고 이제 김영삼 대통령이 들어섰죠? 그때부터 구호가 없어졌던 것이에요. 구호가 마지막에 있었던 것이 뭐냐 하면 ‘삐삐는 진동으로’ 그게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그게 객관적인 기준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현대의 사상이에요.
잘 들어보세요. 그렇게 되니까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하면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것을 우리나라 기준으로 말한다면 산아제한을 통해서 한 집안에 아이가 하나씩밖에 안 낳는 것이에요. 뭐라고 하냐하면 ‘정신없이 낳다보면 거지꼴 된다.’ 이게 50, 60년대 표어거든요. 그러면서 결국은 집안에서 교육을 받을 때부터 이 한 아이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몸소 터득하면서 배우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태어나자마자 온 집안이 자기를 떠받들어줘요. 그러고 살아가는 것이죠. 그게 바로 현대의 정신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중심으로 기독교신앙이 돌아오게 되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잘 들어보세요.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자기를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에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죄 가운데 있는 존재라고 하는 복음의 선포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복음이 이미 복음이 아닌 것이죠. ‘주님이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이것부터 이야기를 하니까 ‘왜 그러시지? 내가 바라지도 않는데…… 되게 부담스럽게 왜 그러신데?’ 그러니까 자기가 정말 비참한 인간이고, 나 혼자서는 도저히 이 인생을 살수가 없고, 나는 정말 구제 불가능의 인간이다. 이렇게 생각될 때에는 ‘주님이 당신을 위해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럴 때 ‘아! 여기에 길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죄는 없는데 십자가를 설교하는 것 자체가 매우 썰렁한 거예요. ‘왜 그분은 괜히 쓸데없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셨느냐?’는 것이에요.
오늘도 잠깐 보다가 온 길이에요. 뭐 교회에서 천당 갈래? 분당 갈래? 그러니까 90%가 분당 간다고 그래요. 천당 안가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되니까 이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내가 이렇게 방황하고 불행하게 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없는 것이에요. 그래 내가 중심이다 보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피해자라는 것이에요. 자기 자신도 그렇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상황이 자기를 그렇게 몰고 갔고, 그리고 자기는 상처투성이의 인간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는 ‘당신이 그렇게 고통 가운데 있는 그 자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때문이다.’ 라고 정직하게 가르쳐 주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참된 인생의 길을 찾게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정신에는 너무나 안 맞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 안에서 상처라는 말을 많이 쓰기 시작한 것이요. 80년대에도 그런 단어를 안 썼어요. 그런 단어가 없었어요. 그런데 90년대 들어서면서 이 단어가 누룩처럼 퍼져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하면 죄 대신 자기가 상처 받은 피해 입은 존재가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서 그 다음에 인간의 죄, 인간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올바로 돌아와서 완전히 변화된 새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창조목적을 거스르던 인간이 창조목적을 따라 사는 것, 이런 것이 아니라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다. 당신을 끊임없이 펼쳐라. 당신 안에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고 그것을 펼칠 수 있는데 당신은 자신감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고,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인간들에게 상처를 너무나 받았다. 예수님이 당신 같은 사람을 격려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그 힘든 역경도 감당하셨더니 부활하신 것처럼 당신도 환경과 모든 것이 어렵고 상처가 많은 피해자이지만 그러나 당신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잘 될 것이라 믿으면,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면, 생각을 너무 부정적으로 하지 말고 늘 잘될 거다! 잘될 거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를 잘 격려하면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 라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교회의 윤리적인 수준이 이 세상에 있는 윤리적인 수준과 똑같은 수준이 되어버린 것이죠. 그 교회의 윤리적인 수준을 결정해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참회와 회심, 그리고 죄가 얼마나 자기를 괴롭히고 비참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그리고 자기가 짓고 있는…… 지으려고 하는 바로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뼈아프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그 현재적인 인식, 그래서 그분이 나의 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 사랑으로 구원을 얻은 내가 어떻게 그 죄를 또 지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는 그 각성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하는 이 노력이 교회의 도덕적인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주님께 돌을 던진 이 세상의 손과 내가 어떻게 악수를 할 수 있겠으며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은 이 세상과 내가 어떻게 입을 맞출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교회의 도덕적인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거든요. 교회에서 제멋대로 산다고 해서 어느 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팬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왜 때리느냐고 했더니 아니 애비가 애들을 때리는 게 문제가 되느냐고…… 나는 그분이 때리는 것은 못 봤어도 욕하는 것은 봤어요. 어우 막 무섭게 욕하더라고요. 막 뺨을 후려치신데요…… 집사고, 장로고, 청년이고 할 것 없이 막 발로차고 그런데요. 실화에요. 누구냐고 하면 이름도 댈 수 있어요. 나는 아니에요. 나는 그럴 담력도 없고…… 그런데 교회에서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면 뭐가 교회의 윤리적인 수준을 지탱해 줄 수 있겠느냐고요? 생각해보세요. 딴 사람들은 굉장히 참 그렇게 참 잘살던데…… 어이구, 그래도 내가 집사가 저 정도를 사는데 권사인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더 잘살아야지! 그럴 것 같지요? 그게 며칠이나 갈까요? 속이 썩었는데 그게 며칠 가겠어요. 그렇지요? 몇 해 전에 요기 우리 브릿지에서 네 살 먹은 애 둘이서 싸웠대요. 막 싸우다가 여자애가 ‘야! 너 우리 왜 싸우는지 알아?’ 그러니까 ‘네가 잘못했잖아!’ 그러니까 네 살 먹은 애가 ‘아니야 우리 모두 시커메서 싸우는 거야!’ 전적 타락의 교리를 배우는 것이죠. 교리라고 알아야 싸워요…… 그 아이의 말이 진실이죠.
그 자기 속이 썩었는데 ‘이러지 말아야지!’ 이 정도 아니고는 그 윤리적인 수준이 그렇게 높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또 하나님은 사실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래서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살아가던 그 인간이 깨뜨려져서 자기가 쓰레기에 불과하구나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자기를 우상으로 삼던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시게 하고 자기는 밑에 내려앉아서 주님의 통치에 아주 겸손하게 복종하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의 시작이 회심이에요. 그 회심 자체가 없는데…… 회심 자체가 없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요. 그렇게 해서 신앙을 갖고, 꿈을 갖고, 비전을 갖고, 나도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면 나도 한번 활짝 핀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격려를 받으면서 자기가 꺾이지 않을 때 그 때 그 사람이 살아가는 그 인생은 양상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지 이 신앙의 중심의 깃발은 자기가 여전히 쥐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죠.
오늘날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바로 그것이에요. 그런데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죄에 대한 개념이 사라진 것이에요. 죄는 사라지고 뭐만 남느냐하면 상처, 그 다음에 능력 없음, 이런 것들만 남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것이죠? ‘당신이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 것은 당신의 죄 때문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고통은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십시오.’ 이렇게 설교를 하면 짜증이 나겠지만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셨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사느냐? 가슴을 펴라 왕 같은 제사장이다, 성경을 보아라!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지 않느냐? 믿어라.’ ‘무엇을?’ ‘당신이 잘 될 것을 굳게 믿어라!’ 이거에요.
그러면 사람이 교회에 나와도 이 속에 깊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인식이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흉한 형벌을 받으셨다고 하는 아주 분명한 인식이 없는 것이에요. 그들을 움직이는 것이 십자가에 대한 감격, 구원에 대한 감사,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죽었던 인간을 이렇게 살려 해주셨으니까 이제 나의 모든 남은 생애는 주님의 것이다. 라는 구원에 대한 감사로서의 이 구별된 삶, 이런 것들에 대한 인식이 없고,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중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실제적인 원동력이 성령을 통해서 그에게 공급되지 않는 것이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죠? 이익이 맞고 아주 그냥 세상말로 하면 배짱을 안 건드리면 교회에 다니지만 배짱을 건드리면 다 집어치우는 것이죠.
그런 속에서 무슨 윤리를 기대할 수 있겠어요? 기독교는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 한, 두 가지를 고쳐서 단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모든 잘못된 삶의 본질이 그 사람 안에 있다고 보고 그 하나님과 대적하여 살려고 하는 자기를 이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하나님이 계셔야할 자리에 자기를 놓는 그 자아가 깨뜨려져서 그래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그것이 사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유익이고 또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에요. 그런데 그런 일들이 안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설교하고 그러는 것 자체에 대해서 굉장히 싫어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하나님인데 혹시 명백하게 죄를 지었다면 그렇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당신을 그렇게 만든 환경과 상처 준 모든 가족과 이웃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고 당신은 마치 여리고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서 쓰러진 불쌍한 나그네와 같은 존재입니다. 라고 말을 해줘야지만 흐느끼는 것이에요. 그것은 회개가 아니에요. 자기 설움에 겨워서 우는 것이지…… 죄가 미워서 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것이 회개일수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고쳐지지 않는 것이죠. 그렇지요?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속에 뭐가 있느냐하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고 오늘은 일찍 마치겠습니다. 기도해야지요?
그게 뭐냐 하면 정말 복음이 들어갔고 죄에 대한 개념,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당신의 의지를 갖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선하게 살면 복을 주시지만 어긋나게 살면 그들을 징벌하신다고 하는 이 사상이 시퍼렇게 살아있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되요. 사랑하기 전에 먼저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진정한 경외의 정신이에요. 경외의 정신이에요…… 그러니까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 죄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살아있지 않으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그런 것들이 분명히 살아있을 때 말씀을 통해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면 자기가 주님을 향해서 제발 나를 좀 영접해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비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바뀌어요? 자기가 자기의 죄 때문에 망가진 비참한 존재라는 인식이 없고 오히려 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자기의 죄를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싶으셔서 안달을 하시는 분으로 비치는 것이에요. ‘당신이 지금 죄를 아무리 많이 지었어도 그게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꿈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이 활짝 필래? 하나님 안 만나고 인생이 그냥 쭈그러들래?’ 그러는 것이죠. 하나님이 막 다가오셔서 도와주고 싶으셔서 어쩔 줄 모르시는 분이니까 그러면 그냥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데 한번 해볼까? 그러면서 ‘그러시죠. 제가 당신께 허락해드리니까 당신이 오셔서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영광을 내가 그대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지요? 회심을 안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 자기 배짱에 맞으면 사는 거예요. 교회도 다니고…… 헌금도 하고…… 그러나 베짱이 안 맞으면 다 집어치우는 것이에요. 그게 무슨 뭐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데 목회자…… 그거 뭐 거지같은 존재지…… 우습게 보는 것이죠. 마음에 안 들면 갈아치우면 되죠. 갈아치우기가 뭐가 복잡해요? 그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켜서 진짜 갈아치우든지, 능력이 안 되면 그 옆에 가면 오라고 환영하는 교회들이 수없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정든 교회를 어떻게 떠날까?’ 뭐 그러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이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데 나 하나가 이 교회에서 떨어져나가면 이 교회의 몸은 얼마나 아플까? 주님은 얼마나 불명예스러워지실까? 그리고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목사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지체들은 나 때문에 얼마나 아파할까?’ 이런 생각들이 필요 없는 것이에요. 자기가 하나님인데, 자기가 중심인데, 모든 판단을 자기중심으로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서 죄에 대한 개념이 교회 속에서 쫙 빠져나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상호 호혜주의로 가는 것이에요.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그 대신 ‘금과 은도 내게 있다’ 고 얘기하는 것이죠.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야기인데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해요. 실화라고는 하는데…… 토마스 아퀴나스 수도사가 살았을 때 교황은 이노센트 2세였데요. 그런데 저도 어느 자료에서 읽은 것인데 그런 얘기를 해요. 수도사가 교황을 만났는데 교황이 금고를 확 여니까 엄청난 보석들이 쏟아져 나오더래요. 그러면서 그것을 손으로 이렇게 만지면서 그러더래요. ‘이보게 이제 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그랬대요. 그 다음에 지어낸 이야기가 명백한 이 아퀴나스의 반론이 나오는 것이죠. ‘교황이시여!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 안 믿어져요. 그랬으면 그 목이 붙어 있겠어요. 벌써 죽었지! 어쨌든 누가 지어냈더라도 그런 비유가 된 거지요.
그래서 이런 때일수록 이런 혼란스럽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면 그것이 영광이에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들이 아주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영광이에요. 그 영광은 여러분들이 열린교회 나오고 나서 벼락부자가 되고 두 계급, 세 계급 승진을 하고 아파트 투기를 했는데 그것이 억수로 오르고 세금도 덜 내고 이런 것이 영광이 아니라 그런 것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여러분들을 통해 나타나고 그 통치를 받으면서 여러분들이 아주 행복하게 살아갈 때, 그것을 행복해하며 살아갈 때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그러면 이런 시대일수록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무리 시대가 복잡해도 해결은 너무 간단해요. 너무 간단한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에요. 그것이 무엇이에요?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그리고 절대로 신앙에 있어서 이 세상에 유행하는 풍조를 따라가면 그것이 어느 시대이든 대부분 멸망의 길이에요. 그 이단들이 그런 말을 잘하는데 그런 길이에요.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이 이런 충고를 해요. ‘인간이 모든 진리를 완벽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것이 정말 진리다라고하는 사실이 내 지성 속에서 완벽하게 설득되게 하라. 그리고 그 전까지는 믿지 마라.’ 그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설득되고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것은 우리들이 믿음으로 아멘하고 받아들여야할 것이 있고, 어떤 교리는 맞는가 하나, 하나 검토할 수 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단도 그것에 의해서 판단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오웬 목사님은 후자를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섣부르게 아무 교인이나 받아들이지 말고 그렇게 생각하라 이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정직한 말씀을 듣고 그러나 그게 언제나 그 시대에는 입맛에 안 맞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은 절대 틀린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 현대 속에서 살다온 사람들이에요. 일주일 내내 접촉하고 만나고, 대화하고, 같이 밥 먹고 살고, 심지어는 함께 어울려 잠자던 가족들이 모두 자기를 신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런 현대인들이라는 것이에요. 그런 사람이 교회에 와서 그것과 평행을 이루는 이야기를 듣다가 돌아갈 때 결국은 그는 그 밥에 그 나물밖에는 안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정직한 말씀을 듣고 그것이 아프고 힘들어도 이게 참된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게 힘들고 아픈 길이라도 이게 결코 대중적인 길 일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깨닫고 그 다음에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가 그의 속에서 경험될 때에 그 때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어요?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아무리 주인이라고 그래도 자기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이 자기 앞에 분명히 살아계신데 어떻게 자기가 그것을 부인할 수 있겠어요? 세상 사람들이 다 너는 문제없고 훌륭한 인간이라고 박수를 쳐도 나는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고 보면서 깨닫는 것이에요. 그리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는 정말 가치 없는 인간이고 나의 영광은 주님의 십자가아래서 굴복하면서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를 깨닫는 것이에요. 그게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기의 욕망을 거침없이 발휘하면서 그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들은 결국은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자기혼란에 빠져도 주님께 다스림을 받으며 가는 이 길은 남이 볼 때는 꽃처럼 빛나는 향기로운 생활 아니고, 별처럼 빛나는 생활이 아니라도 그 안에서 늘 내안에 계시는 주님,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통치에 복종하면서 사는 나 같은 인간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내가 정말 벌레만도 못한 미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그리고 내가 여기에 살아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이 창조한 세계가 더 아름답다고 여기시느구나! 아! 이 얼마나 놀라운 감사의 제목인가!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매일 매일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 사람의 즐거움이 되고, 다른 세상이 그 사람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것이 참된 신앙의 간증이고 하나님의 이 도덕적인 통치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행복이라고 여겨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꿈꾸는 것이에요. 그것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시작이 되는 것이에요. 모든 행복은 하나님 안에…… 밖에 있는 그 행복은 행복처럼 보여도 결국은 그것이 불행일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그 안에서 행복을 꿈꾸고 행복을 꿈꾸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기쁨을 꿈꾸고 그래서 자기가 그 안에서 행복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에요.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들이 가는 것처럼 말갈 때 소갈 때 안가도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의 끝이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의 불복종하는 불순종 없이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것을 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성도의 행복을 찾아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 안에서……
영혼이 솟아나는 기쁨과 영생의 행복, 무엇보다도 이 천 년 전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 오늘도 나와 함께 동행 하시고 세상의 어떠한 일이 닥쳐도 그분 때문에 나는 평화를 얻고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며 살아가는 행복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아멘! 그렇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
22.도덕적 통치 방법 : 상벌(2)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7-8).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고 따라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당신의 창조목적을 따라 살도록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 땅에서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의 육체와 환경 그리고 그의 영혼과 마음의 복을 주셔서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그들로 각각 자기의 죄의 질에 따라 고통을 받으며 살게 하시는 것이죠.
그러나 만약에 이러한 규칙이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면 아마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에 주님을 믿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의 현실을 보면 착하고 성실하게 살던 사람들이 큰 불행과 고통을 당하는가 하면 또 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살았는데도 남들이 보기에 태평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깨닫기가 어리석은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모든 사상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이 지상에서의 삶을 이 지상에서 끝내지 아니하시고 다가오는 내세에까지 연결하셔서 결국은 당신의 도덕의지를 실행하신다는 것이죠.
즉 이 세상에서 섭리 속에서 모두 이루어지지 못한 공평을 하나님께서는 죽음이후의 내세에 이 일들을 이루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천국은 인정하지만 지옥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지옥과 천국 모두 신화일 뿐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여러분들에게 스물한 번에 걸쳐서 설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각각 목적 있게 만드셨습니다.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 그리고 벌레 한 마리부터 시작해서 하늘높이 떠있는 태양과 그리고 별, 달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존재에 목적이 있다면 가장 하나님을 닮은 존재인 인간이 아무 목적도 없이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창조되었다면 그것은 인간이 손을 뻗쳐서 사용할 수 있는 돌이나 나무, 풀이나 꽃, 그리고 물이나 혹은 공기와 같은 것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창조의 목적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그런 창조의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것대로 살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주셔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큰 고통을 도입하도록 허락하셨다면,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허락하셔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정말 깊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해야 될 것입니다.
그랬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이 행한 불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무런 상관도 하시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건이 되는 것이죠.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구원을 얻은 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큰 기쁨이 되었다면 그 구원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마땅히 큰 슬픔이 되어야 옳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구원의 초청은 당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그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을 통한 구원의 초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놀라운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그런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모독이죠!
(예화) 오늘 신문을 보니까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시민들이 모인 곳에 갔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젊은 청년이 하나 있으니까 자기는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손을 이렇게 내밀었더니 이 청년이 ‘내 몸에 손대지마 나는 악수 안 해!’ 그런 것이에요. 그러면 이 대통령이 얼마나 그 자존심이 상했겠어요? 그렇지요? ‘그러려면 저리 꺼져 이 멍청아!’ 그렇게 말했는데 그것이 모두 녹음이 되어가지고 인터넷에 떠서 백만 명이 조회를 했데요. 아마 사르코지라는 사람이 민주주의 시대의 대통령이었으니까 그렇지 만약에 중국시대의 황제였더라면 그 자식은 단칼에 모가지죠……. 황제가 ‘얘야’하고 손을 내미는데 ‘손대지마 나는 너와 악수하기 싫어’ 그 사람만 죽을 것이 아니라 아마 삼족이 멸할 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썼어요. ‘나는 어떻게 대통령이 그런 거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어떤 사람이 대통령을 옹호하면서 그랬대요. ‘프랑스 국민 누구도 다 평등하지만 대통령을 모독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잘했다.’ 그렇게 썼어요. 그러니까 하물며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었던 황제들을 모두 합해도 하나님이 높아요. 뭐~유치한 얘기지요…….
그런데 그 분이 당신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면서 ‘너희는 그렇게 살아서는 절대로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고 너를 지은 그 목적으로 돌아올 수가 없다. 네 힘으로 돌아올 수 없는 너를 위해서 내가 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노라.’ 그런데 ‘싫다’ 자기의 의지로 싫다고 거절하고…….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들이 겪는 많은 모순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인생을 이 육체의 죽음 그 이전까지 줄을 그어서 생각하니까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인생의 어떤 구간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 영원한 세계까지는 필요 없고 조금만 확장해서 보아도 기가 막히게 이게 모순이 아니라 질서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죠? 그러면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예화) 요셉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어요? 물론 아버지의 사랑을 등에 업고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한 것은 좀 잘못된 것이었고 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도 형들의 입장에서 보면 샘나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구덩이에 집어넣어서 죽여 버리려고 할 정도로 잘못한 것이었습니까? 그렇게 해서 결국은 돈을 받고 애급에 가는 상인한테 그를 팔아먹어서 노예살이를 일상으로 시켜야 할 정도로 그렇게 잘못한 것이에요? 그래서 갔어요. 그것도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죠? 그래서 거기에 가서 열심히 종노릇했어요. ‘뭐 내가 여기에 와서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며 비관하고 그러지 않고 그리고 성실하게 일해서 그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서 이번에는 그 가정에 총무가 되었어요. 아내와 먹는 음식 말고는 그 보디발이 모든 집안의 일을 이 사람에게 맡겼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보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공평함이 작용한 것 같지 않아요? 어떻게? 가서 투덜대지 않고 성실하게 마당이라도 쓸면서 그렇게 노예로서 만족하고 열심히 일했더니 그에게 하나님께서 상을 주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그래서 비록 종이긴 했지만 온 집안에서 보디발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 되어서 그 집안 모두를 돌보고 다스리는 권한을 갖게 되었어요. 거기까지는 순리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 아 이 여자가 자기를 유혹을 하는 것이에요. 그것도 다른 여자도 아니고 보디발의 아내가……. 그러니까 그러면 그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이 사람은 젊은 청년이었는데 한 순간의 혈기로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그 유혹을 거절했거든요. 유혹을 거절한 동기가 무엇이었어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이 여자는 ‘우리 둘 밖에 누가 있느냐?’ 했더니 요셉은 ‘셋이 있잖아? 너와 나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데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해서 하나님께 죄를 얻겠느냐?’ 고 했어요. 그러면 그렇게 정당했으면 하나님이 그 못된 여자를 혼쭐을 내주고 그리고 이 사람의 명예를 높여주셔야 옳지 않아요? 그런데 당장 인생이 곤두박질을 쳐가지고 저 감옥 속으로 떨어진 것이죠. 거기서 딱 필름을 끊어버리면 짜증이 나는 영화지요! 어떻게 하라는 것이에요? 짜증나는 영화지요. 뭐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이 영화예술가운데 전위예술이라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말하자면 시대를 앞서가는 그런 예술이라는 것이죠. 예전에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관 이런 것들을 다 무너뜨리면서 영화를 그런 식으로 끝내는 그런 영화들이 말하자면 20세기에 많이 나왔어요. 보는 사람들은 막 너무 헷갈리는 것이에요. 요새 영화를 딱 보면 나쁜 놈, 좋은 놈 이렇게 고르면서 보는데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 아주 신나게 두드려 패고 죽여 버리고 막 잘되는 것으로 필름이 딱 끝나는 것이에요. The End 하면서 딱 끝나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이에요? 얼마나 짜증나는 것이에요? 그렇게 딱 끊어서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이죠.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감각적인 사람들이니까 항상 눈에 보이고 만지고 이러는 인생이 다고, 죽은 뒤에는 가본적도 없고 태어나기 전에도 다녀온 적이 없으니까 그것은 필요 없고 이것으로서 다 끝나서 그래서 이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게 보면 동의할 수 없지요. 그렇지 않아요?
(예화) 그 옛날에 왜 (요즘도 그렇지만) 시내버스가 있으면 앞에 엔진에 않으면 뜨끈뜨끈하잖아요? 겨울에……. 그게 경로석이에요. 노인네들 앉으면 안 일어나요. 얼마나 좋아요? 저도 거기 참 좋아했어요. 권사님 한분이 일평생을 교회에서 신실하게 심방하고 열심히 사신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끝나고 거기에 성경가방을 들고 앉으셨는데 버스가 다니다가 뭐가 나오니까 브레이크를 팍 밟은 것이에요. 이 할머니가 힘이 없으니까 팍 앞으로 튀어 나갔는데 요즘은 유리가 참 좋아요. 웬만큼 해도 깨지지 않거든요. 옛날 유리는 쾅 부딪히면 비처럼 우르르 쏟아지면서 깨지는 유리였어요. 이 권사님이 밖으로 튕겨나간 것이에요. 튕겨나간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옆의 트럭이 밟고 지나간 것이에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아주 비참하게 즉사를 한 것이에요. 그것을 보고 가족들 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울부짖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냐? 살아 계시다면 우리 어머니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일평생 교회에서 기도하시고 가난한 자를 돕고 그리고 그날도 심방 다녀오다가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느냐?’ 그러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하면 우리가 늘 머릿속에 담고 있는 이 규칙들이 안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우리교회에도 어느 형제가 있는데 부모님이 그렇게 금슬도 좋고 참 평안하게 사시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그 자리에서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말이에요……. 이렇게 하면서 고통스럽고 막 혼란이 생기는 것이에요. 왜? 인간이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이 심겨져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나도 맨 처음에 신앙생활 초기에는 그런 것들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웠어요.
그리고 또 최근에 우리 목사님 한분이 이 근처에서 돌아가셨는데 저도 밤에 문상을 다녀왔는데 그렇게 신실하셔요. 은퇴하시고도……. 은퇴하셨으니까 목사님이 연세가 많으시잖아요? 아침마다 교회에 나오셔서 전도지 들고 전도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아휴 그만하세요! 목사님!’ 그러면 ‘아니요. 내가 이제 교회도 이제 다 사임하고 원로목사가 되었는데 아직 팔다리에 힘이 있는데 내가 이 복음을 전해야지…….’ 그러면서 아파트를 다니면서 한집, 한집 매일매일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건강이 안 좋아지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들, 며느리와 병원에 가서 진단을 했는데 아들, 며느리들이 말을 안 해주는 것이에요. ‘뭐 어떻게 되었나? 결과가 나왔나?’ ‘그런데 아버님…….’ ‘아! 뭐가 안 좋대?’ ‘예’ ‘많이’ ‘예, 조금 많이…….’ ‘암이래?’ ‘예’ ‘얼마나 산대?’ ‘두 달 정도…….’ ‘아이! 감사하지 뭐! 여태까지 살았는데…….’ ‘치료받으시죠!’ ‘싫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살았는데 때가 돼서 주님이 부르시면 이제 내가 죽으면 주님께 가는데 그까짓 치료는 받아서 무엇 하느냐?’ 그러고 평안하게 다시 또 그 다음날 또 전도나가시고……. 온 교회교인들이 은혜를 받았어요. 뭐 그리 잘못했느냐 이거에요? 평생 그렇게 착한 목사로 교인들 돌보면서 그렇게 살았는데 무엇을 잘못했느냐 이거에요. 어떤 의사는 그래요 이 암이 스트레스가 제일 큰 요인이라고……. 스트레스, 음식, 공기 뭐 그런데 유전자……. 목회라는 것이 하도 속을 많이 썩어야 되니까 이게 겉으로는 음식도 먹고 해가지고 얼굴은 멀쩡한데 속은 다 곯아서 장암, 간암, 폐암, 대장암, 방광암, 또 무슨 담낭암 그렇게 해가지고 사람들이 막 죽어요. 그것도 하나님이 부르시니까 가는 것이지 뭐 교인들이 속 썩였다고 암에 걸리고, 뭐 좋은 교인이 있는 목사는 그럼 뭐 천수를 누리겠네요? 그것도 다 소용없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그런 것을 또 어떻게 풀어야 해요? 풀리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어떤 사람은 악하게 살아온 것에 대해서 중대한 심판을 행하시므로 본을 보이시는 적도 있지만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배를 타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는 아무리 불행하게 상을 당해도 나는 가서 자신 있게 위로해요. 너무 그렇게 아파하지 마라 어차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이다. 왜? 누구도 죽지 않으면 인생을 끝낼 수가 없고 신자는 하늘나라 갈 사람이었고 불신자는 자기의 행한 바를 따라서 받을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타는 것이에요. 여기에서 보면 죽음이라는 강을 건너갈 때 그저 편안하게 살다가 아침 잘 먹고 조용히 낮잠 자다 죽으면 고급유람선을 타고 건너간 거예요. 그리고 가다가 며칠 좀 앓다가 또 몇 달 앓다가 또 가족들 속 좀 끊이고 충분히 헤어질 준비도 하고 떠나면 그러면 그냥 허름한 여객선 타고 떠난 것이고, 그러다가 갑자기 사고라도 당해서 ‘으악’하고 죽으면 그것은 뭐 그냥 곧 가라앉을 듯이 삐거덕거리는 쪽배를 타고 건너간 거예요. 그러면 어차피 강을 건너가는데 그 무슨 유람선을 타고 저쪽에 무슨 성도들이 강 건너편에서 성도들 하나씩 하나씩 죽음의 강을 건너오는 것을 보다가 유람선을 타고 건너오는 성도들이 오면 더 많이 환영해주고 쪽배를 타고 건너오면 무슨 발길질을 하고 그런답디까? 다 소용없어요. 그것은 하나의 양상일 뿐이에요. 하나님이 데려가실 때가 되니까 사고도 당하는 거고, 질병도 걸리는 거고, 혹은 충격 받고 쓰러져서 죽기도 하고 놀러갔다가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다양하게 하나님이 불러 가시는 거예요. 문제는 거기가 아닙니다.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내세의 상급과 형벌을 둘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죽음과 함께 도입되는 상벌, 그리고 또 하나는 부활과 함께 도입되는 상벌이에요. 우리는 흔히 알기로 죽으면 천당 간다, 지옥 간다, 이렇게 알고 있지만 신학적으로 보면 우리들이 각자 죽으면 육체를 여기다가 남겨놓고 죽잖아요? 영혼만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완전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아니에요.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이 개혁신학에서는 이것을 중간상태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 각자가 육체를 가지고 세시기로 나누어지잖아요? 육체와 영혼이 만나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되어서 살다가 죽어요. 그러면 육체는 이 땅에 남겨두고 영혼만 하늘나라에 가요, 아까 몸을 그대로 가지고 이 세상에서 엄마, 아빠 부르며 살던 것과는 그 양상이 틀리잖아요? 그 시기가 틀린 것이죠. 그러다가 나중에 주님이 우리 모두를 부활하게 하실 그 때에 다시 이 땅에 있는 육체와 영혼이 만나서 이제 완전한 인간 존재가 되는 것이에요. 그 때에 인간 존재는 맨 처음에 있던 이렇게 언젠가는 시간 속에서 썩어버릴 몸과 영혼이 만나는 그러한 인간 존재가 아니라 썩지 아니하고 멸하지 아니할 육체와 영혼이 만난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점에서 지금 인간 존재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에요. 그래서 중간상태는 이 둘 사이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중간 상태라는 것이죠.
아직까지도 우리는 이 중간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상황, 그리고 이 중간상태는 다시 둘로 나눠지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구원받은 자들이 가는 낙원과 그리고 구원 받지 못한 악한 자들이 가는 음부로 나뉘어요. 이 두 가지가 각각 천국, 지옥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어요. 그러나 성경의 여러 가지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거기는 궁극적으로 들어가게 될 천국과 지옥과는 좀 다른 곳이다. 그러나 거기서도 구원받은 영혼은 아직 육체를 못 입었지만 거기서 기쁨과 안식을 누릴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거기서도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는 아니지만 거기서도 고통과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거든요.
그래서 죽음과 함께 악한 자들은 각각 음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기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 믿지 아니하는 자 등등 이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그 본성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두려워하거나, 살인하거나, 행음하거나, 뭐 이런 사람들이면 다 거기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본성을 가지고 행한 대표적인 악들을 여기에서 열거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지만 그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서 나오는 본성의 작용이 행동으로 구현될 때 이렇게 여러 가지 악한 행동들로 나타나는데 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과 함께 즉각적으로 심판을 받음으로 음부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선한 자들, 즉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그래서 그 구원을 얻은 사람들로서 쓰러지고 넘어질 때도 있었지만 날마다 자기를 도우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리스도를 힘입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려고 애썼던 모든 사람들, 그렇게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하는 것이 바로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의 본성이라 이거에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낙원으로 옮기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비록 육체는 여기에 두고 갔지만 영혼은 그 낙원에서 안식과 위로를 어느 정도 누리게 되는 것이죠.
이제 마지막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심으로써 이제 이 모든 세계는 완성되고 영원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부활과 함께 일어나요. 그래서 이것을 성경에서는 부활은 곧 이제 중간상태에 있었던 인간 각자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부활한 인간의 육체와 만나 부활한 완전한 인간의 존재를 이루는 것을 가리켜서 이것을 이제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죠. 신자의 경우에 그것이 영화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됨으로써 이제 인간은 이제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시간과 공간속에서 자기를 소멸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서 영원한 존재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거기에는 늙고, 그 다음에 몸이 쇠해지고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없지요. 질병이든지 그런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들이 완전한 육체와 완전한 영혼으로 불멸의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부활이 각각 다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악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부활로 일어나요.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망가뜨리고 무한한 영광이신 하나님께 대적하고 도전한 그러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그 죄는 무한히 큰 죄거든요. 그 무한히 큰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합당한 형벌은 무한한 형벌이에요. 무한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셔서 그 심판의 힘 때문에 이 세상에서 소멸되어서는 그 심판이 무한한 심판일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악한 자들을 부활하게 하셔서 어떠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도 파멸되지 않는 몸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형벌이 내리는 것이죠. 여기가 바로 지옥이라고 하는 곳이에요.
이 지옥은 성경에 의하면 끊임없는 고통과 괴로움의 장소에요. 그러면 이 지옥에서 겪는 그 아주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괴로움과 고통은 영혼만의 고통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을 아우르는 인간 전체에 가해지는 고통인 것이에요. 그래서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 지옥의 모형을 경험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잘못해서 마음에 큰 번민과 괴로움이 일어나서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때를 지나는 경우가 있지요. 그것이 지옥에서는 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 안에서 그것들이 무한대로 확장되어서 인간에게 그 고통이 경험되어진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정신적으로 그런 고통을 받아도 그래도 그 고통이 감소하게 될 희망이 있어요. 어떤 희망이 있느냐하면 예를 들면 첫째는 고통에 대한 면역이에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이 계속 지속될 때에 자기가 파멸되지만 않으면 그 고통을 처음에는 많이 느껴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고통을 느끼는 것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보면 저 사람이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까? 그런데 그 사람도 처음에 그런 일을 당했을 때는 못살 것 같았어요.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나니까 견디면서 또 살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인간의 하나의 적응성이에요. 적응성이에요. 그리고 또 어때요? 죽음 이후에 지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자살이 하나의 탈출구가 되는 것이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말이에요. 탈출구가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러고 나면 영혼이 잠잠한 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기 때문이죠. 착각일지라도 인간은 그런 희망이 있어요. 그래서 헤르만 헤세 같은 문학가는 자살할 수 있는 존재가 이 모든 세계에서 인간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죠. 의지를 가지고 자기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이것을 인생에 있어서 비상구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지옥에서는 몸 자체가 이미 불사의 몸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자기를 죽일 수도 없거니와 혹시 죽인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몸은 파멸되지 않는 몸이에요. 그러면 보세요. 그 인간이 자연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지금처럼 시간 속에서 소멸되는 인간보다는 훨씬 뛰어난 육체와 정신의 힘을 가진 존재일 것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고통을 일정한 상태에 가만히 내버려두시는 것을 통해서는 그 인간의 고통이 무한하게 증진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지옥의 고통은 계속 증가하는 것이에요. 이 증가되는 방식이 육체와 영혼에 동시적으로 증가된다고 봐야지요. 정신적으로는 어떨까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그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에게 커다란 공포와 두려움, 절망감이 매순간 지속되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그것과 하나님의 두려움은 사실은 한 하나님의 양면이에요. 여러분 아마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해보았을 거예요. 엄마는 언제나 그 엄마인데 내가 엄마를 속이거나 나쁜 짓을 하면 그 엄마가 큰 소리로 나를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요. 그런데 내가 만약에 엄마에게 칭찬받을만한 일을 하고 돌아오면 똑같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도 그것이 내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찬란한 위엄과 영광을 보여주시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있는 그 사람들에는 그것이 커다란 정신적인 고통인 것이에요. 하나님의 공정하신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되는 것이죠. 고통이 되는 것이죠. 또한 육체도 끊임없이 가해지는 점증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 이제 그들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은 상태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거기는 해와 달이 없으니까 아침, 저녁이 없겠지만 이 지구상의 시간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아침마다 새롭고 언제나 새로운 공포와 큰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지도 않고 끊임없이 그런 고통 속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는 것이에요.
선행자들은 즉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서 그래서 쓰러지고 넘어지기도 했지만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며 하나님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을 부활시키시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생명의 부활이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생명의 부활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그 생명의 부활로 그들의 육체와 영혼을 만나게 하시는 것이죠. 여기서도 기쁨은 육체와 영혼 전체를 아우르는 전 존재적인 기쁨이 주어지는 것이죠.
영혼의 기쁨은 어떤 것일까요?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사실은 육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혼에 있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그분의 성품을 우리들이 이미 있는 성품이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깨달은 성품인데 그 성품이 나의 지성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그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이 내 마음속에 전달되어졌을 때 그렇게 행복했더라면 그 빛은 천국에서 볼 수 있는 그 찬란한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치는 영광의 빛에 비하면 아주 작은 빛에 불과하거든요. 찬란한 태양빛에 비하면 그것은 뚫어진 바늘구멍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불과했거든요. 그러면 거기에서 그렇게 아침마다 여기의 시간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아침마다 새롭게 하나님이 어제에 모르던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보여주시는데 이게 만약에 하나님이 유한하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이젠 나는 더 보여줄게 없다.’ 그럴 때가 나타날 것 아니에요? 그렇지요? 그러면 이제 싫증에 빠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아무리 아침마다 새롭게 많이 보여주셔도 더 이상 알 것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모두 이해하는 일은 하늘나라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도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거기서도 지식의 발전이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아마도 거기서도 더 많이 아는 사람과 덜 아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에요. 그것은 무엇이 좌우하느냐? 여기서 교리반을 열심히 한 것이 거기에서 좌우하느냐? 성적순으로 빛이 나느냐? 그것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틀림없이 거기에는 이 지식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져요. 어쨌든 거기서 찬란한 빛이 비추이는 것이에요. 그래서 깨닫는 것이에요. 얼마나 놀라워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많이 당해요. 그러다가도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 깨닫게 되요.
(찬양)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렇게 괴로운 인생길을 지나는데도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고 눈물의 계곡을 통과하는데도 거기서 주님의 성품을 요만큼 알고 나면 가슴에 밀려오는 그 기쁨이 너무 큰 거예요.
(찬양)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감격이 확 밀려오는 것이에요. 그렇게 막 기쁘니까 어떻게? 이제는 조금 아까까지만 해도 너무 절망을 해서 콱 죽어버리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내 마음속에 알게 되니까 감격이 솟아나면서 기왕에 죽으려면 주님을 위해서 죽자! 는 마음이 생겨날 정도로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러면 거기에서 여기서는 아직까지도 영혼의 어두움이 많이 남아있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많은 욕망들이 그 진리를 깨닫는 것을 방해해요. 그런데 거기에서 그 진리의 찬란한 빛이 환하게 비취면서 우리 속으로 확 들어올 때 그 때에 우리의 마음속으로 밀려오는 그 계시의 빛은 얼마나 찬란하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는 별을 보기가 쉽지 않잖아요? 더군다나 별의 모양을 망원경으로 관측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하면 허블망원경을 띄우는 것이에요. 그러면 공기가 없는 곳으로 대기권 밖으로 쏴서 우주 공간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그리고 그것을 쫙 펼쳐서 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거기에 망원경으로 보니까 몇 백만 광년, 몇 천만 광년, 몇 억 광년이 떨어진 곳의 별들도 관측이 되고 심지어 말하자면 은하의 모양 같은 것들도 그렇게 아름답게 관측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하늘나라에서 이렇게 우리의 이 깨달아지지 않던 많은 것들도 많이 없어지고 뭐 욕망도 별로 없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찬란한 이 계시의 빛이 비춰지게 될 때에 그 때에 얼마나 놀랍겠어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과 죽어도 깨닫지 못하는 혼탁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은 말씀이 깨달아지면서 계속 빛들이 들어오고 막 떨리면서 은혜를 받아요. 한사람은 옆에서 계속 침을 흘리면서 잠을 자는 거예요. 예배시간에……. 얼마나 차이가 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무한하게 확장되어서 여러분 마음속에 다가온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찬란한 그 계시의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췰 때 그 희열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이것이 바로 도열의 기쁨이에요. 그런 찬란한 기쁨이 우리 속에 확 오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주시는 천국의 행복이에요. 행복이에요. 우리는 천국! 그러면 거기는 금도 많고 그 금 갖다가 어디다가 팔려고? 천국에는 그 금을 살 사람이 없어요. 또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래 뜯어다가 파는 것을 천사가 허락한다고 치자. 그것을 뜯어 팔아서 무엇을 살래? 아니 무엇을 사겠어요?
(찬양)밤이나 낮이 없으니 그 영광뿐이라 영광 예루살렘성 영원한 곳이라~
그것을 팔아서 무엇을 사겠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육체에도 하나님이 큰 행복을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이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육체가 괴로움을 당해요. 질병으로, 연약함으로, 또 질병이 없어도 마음고생만 해도 몸이 축나요.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안 그래요. 시들지 않고 병들지 않는 완전한 몸을 입게 되요. 거기에서 하나님과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님의 새로운 성품을 보고 기쁨 속에 떨며 그러면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되는 것이죠. 거기에서 우리는 이 지상에 있는 동안에 그렇게 사랑했던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마음껏 그분을 경배하게 될 것이고 여기서 하나님을 세세무궁토록 당신의 이 찬란한 영광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는 그 속에서 불멸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전달자들로서 또 무엇인가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며 그 영광 속에서 살게 될 것이에요.
다시 누구도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의로움 그의 충만하신 영광과 창조세계에서 주인 되심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도전하는 일이 없이 그렇게 완전한 영광 속에서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고 그 영광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함께 사랑하며 그 영광을 함께 누릴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마무리하시는 최종적인 영광이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큰 계획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또다시 하나님이 인간에게 끊임없는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이 만드신 이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끊임없이 가꾸며 창조세계를 향해 주님의 영광이 더욱 충만하게 드러나는데 이바지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에요. 무한한 사랑과 은혜가운데 그분을 기뻐하면서 말이에요…….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