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를 대적하는 순결함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겸손한 자의 특징은 비굴이 아닙니다. 겸손한 자의 특징은 비굴이나 자기 비하 이런 것이 안입니다. 겸손한 자의 특징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게 될 때 그 생각에 쉽게 굴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될 때 그 하나님의 마음에 의해서 쉽게 지배를 당하고 하나님의 의지를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의 의지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쉽게 포기하는 그런 사람의 겸손한 사람이고 그것이 순복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결코 자기를 비하하거나 열등감에 빠져서 스스로 기를 펴지 못하거나 그런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순복하며 사는 삶은 죄를 이기는 삶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잘 꺾어지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게 교만한 사람이에요. 물론 교만한 사람은 사람을 무시하고 사람 앞에 자기를 뽐내고 자랑하고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죠. 그러나 그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꺾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쉽게 꺾이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당신의 생각을 알려주셔도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도 하나님의 마음에 의해 쉽게 점령당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정서가 풍부하지 않아요. 겸손한 사람은 늘 눈물이 있고 자기깨어짐이 있고 참회가 있고 거룩한 기쁨이 있고 영광을 아는 화기가 있는데 교만한 사람들은 말은 많이 하고 행동은 분주하게 하지만 정서가 없어요. 깨뜨려질 줄 모르니까 눈물e 없고 교만한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뭔가 내 의지는 이런 거다, 가르쳐주셔도 하나님의 의지 앞에 자신의 의지를 내어놓지 않습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의지를 꺾을지라도 자기 자신의 뜻을 펼치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들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한 사람들, 그래서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의지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쉽게 꺾어지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록 죄가 좀 있다 할지라도 또 연약함으로 인해서 죄를 짓고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잘 꺾어지는 사람들은 자신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자주 만나요.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이죠.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별로 죄를 안 짓는 것 같아도 교만하게,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쉽게 꺾어지지 않는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남이 보기에는 반듯한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거의 만나지 못해요.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었어요. 물론 죄가 있어야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죄와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겸손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에 의해서 쉽게 꺾이는 사람들은 계속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신앙 안에서 살려고 하면 죄 가운데에서도 점점 더 거룩해져가는, 말하자면 거룩함의 진전이 있다 이거죠. 그러나 바르게 사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완고해서 하나님 앞에서 꺾어지지 않고 순복할 줄 모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삶이 겉보기에는 단정한 삶 같아도 그는 결코 거룩해질 수 없어요. 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이런 이치를 잘 모르고 단지 죄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으로 이런 저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은 것이다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죄와 굳어진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는 죄의 악한 경향들, 그래서 하나님께 항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려 하는 그런 저항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이런 것들이 정말 잘못된 거죠.
그래서 앞에서 이야기한 간음한 여자들도 결국은 야고보 선생이 지적하고자 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죄를 짓고 자기를 더럽히는 이면에는 뭐가 있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복하고 사는 하나님의 인격에 의해서 꺾어지는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믿음은 믿음이고 행위는 행위라는 그런 식으로, 오히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를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복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피하리라.
우리는 흔히 영적인 세력들을 이기는 참다운 힘이 어디서 난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이 영적인 것들을 이기는 이런 힘이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힘, 다시 말하면 영력에 의해서 이런 것들을 이기고 물리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마귀를 대적하고 마귀를 이기게 하는 담대함, 마귀의 도전을 느낄 때 신자로서 “그래, 내가 너를 대적하겠다”. 그런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세요? 순결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제로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기도 하지만 순결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이런 악한 세력들을 대면할 때 담대함이 생겨요. 왜?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고 하나님이 자기를 기억하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양심이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해요. 모든 죄가 다 똑같은 건 아니에요. 그래서 질적으로는 다 하나님을 향한 거역이지만 양심을 거스르는 죄, 자신의 양심이 아주 명백하게 “너 이거 잘못했지?”하고 가책을 느끼게 하는 뚜렷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순결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영적인 대적들을 직면할 때 담대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거예요. 그게 가장 중요해요. 그게 다는 아니지만 그게 기본이에요. 심지어 초대교회로 올라가면 신자의 죄에 관한 논쟁이 나오는 가운데, 뭐냐 하면 고의로 계획을 하면서 죄를 짓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라고 까지 한단 말이죠.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 살아가다가 연약해서 우발적인 죄를 지을 수 있을지언정 딱 계획을 세우고 또 죄를 짓는 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다 이거죠. 그것의 진위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것이 맞느냐 틀리냐를 이야기하기 전에 중요한 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양심으로 책망 받을 그런 적극적인 죄가 없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중에서 가장 커다란 것이 이런 거예요, 간음. 더더군다나 마음이 완전히 둔해져서 자기가 그런 죄를 짓고도 그 죄 때문에 아파할지 모른다고 한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병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순간의 유익이나 한 순간의 즐거움, 한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그래서 이것이 명백하게 옳지 않다고 자신의 양심이 꾸짖는 그 죄를 저지르는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우선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야 해요.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되요. 그래도 죄의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런 의지는 없었지만 우발적으로 짓는 죄들도 있고 심지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짓는 죄도 있잖아요. 이런 것들도 다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하물며 양심이 책망할 죄를 저지른다. 그런 것들은 안 된다 이거죠. 그러니까 아주 정직하고 분명하게 살아야 해요. 지극히 작은 일에 대해서도. 제가 망고를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비싸서 사먹기가 참 쉽지 않아요. 필리핀이나 그런 나라에 가면 굉장히 좋죠. 그래서 외국에 나가면 정말 한 가방 사오고 싶어요. 그런데 그렇게 사오면 무슨 문제가 있냐 하면 세관고지서에,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세관고지서에다 아무 것도 안 가져왔음이라고 써야 되요. 가져가려고 잔뜩 샀다가 나중에 그걸 발견하고 나서 아, 이건 안 되는 거구나. 몇 개를 가져왔는데 모르고 가져왔어요. 집에 와서 세관고지서를 보니까 표시가 되어있어요. 하지 말아야 되요. 양심이 그건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우선 중요한 것은, 내가 모르는 죄는 피할 수가 없어요. 모르는 죄는 내가 아직 모르니까, 내 영적인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니까 내가 피할 수 없고, 죄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깨닫지 않은 것은 사실은 우리가 잘 피할 수 없어요.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이 그렇게 커다란 잘못이 되는 줄 몰랐을 때에는 마음을 잘 지킬 수 없었어요. 그러나 그런 거 말고 우선 성경을 들쳐볼 필요가 없어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지식에서 이런 것은 죄다라고 할 수 있는 아주 명백한 경우에 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서 순복하는 삶을 살 수가 없어요. 더군다나 그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그것을 하찮게 생각하고 양심을 헌 신짝처럼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옳지 않은 것이에요.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이 결국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담대함을 얻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순결 그 자체가 마귀를 이기게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순결한 그 마음에 신령한 빛을 비추시고 영적인 것들을 제압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강인한 힘을 가지고 살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 영적인 파워에 대해서 먼저 갈망했다기보다는 먼저는 순결해지기 위해서 고민하고 자기 자신을 더러워하고 더 많은 순결을 원했던 거죠. 그런 순결을 추구한 결과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담대함이 생겼던 거죠. 그러니 오늘날 도덕적으로 불결한 삶을 살면서 자신이 무슨 하나님의 어떤 능력을 전유하고 있는 것처럼 행사하는 것은 아주 더러운 것이에요. 아주 더럽고 불결한 것이에요. 성경에 의하면 그런 사람에 경우 세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님이 실제로 그런 것들을 주셨는데 그가 점점 타락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지키지 못해서 잃어버리는 그런 과정에 있는 경우를 말할 수 있고 두 번째 가능성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 옛날에 그것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 만들어냈던 그런 자세, 폼을 모두 잃어버린 다음에도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는, 그런 것들을, 그런 시늉을 하는 말하자면 겉보기에만 그렇게 흉내를 내는 그런 거죠. 그리고 또 하나의 가능성은 뭐냐 하면 실제로 매우 부도덕하고 더러운 삶을 사는데도 영적인 힘 같은 것들이 느껴질 때는 사실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마귀의 세력에 사로잡힌 것일 수 있다는 거예요. 저는 실제로 세 번째 예에 해당하는 것을 굉장히 많이 봤어요. 예를 들자면 무당이 순결합니까? 청결합니까?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파워가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영적인 어떤 세력이나 힘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성령의 능력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기독교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그렇게 행사하는 가운데서 그런 악령에 사로잡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거죠. 제가 95년도에 빈야드에 갔을 때 저는 그것을 느꼈어요. 이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그리고 오면서 보니까 나중에 예배시간에, 진실한 참회가 없어요. 예배시간에 사람들이 짐승소리를 내고 기어 다녔다고 하던데 성령의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악령의 역사에 가깝다고 보는 거죠.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순결해지기를 원해야 하는 거예요. 능력이 많은 사람이 되기보다 순결해야 해요. 그렇게 되면 반드시 그에게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주시는 거죠. 성경에서 세례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는데 능력의 사람이었는데 헤롯조차도 그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고 하죠. 그런 순결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는 거죠. 그러니 마귀를 대적하고 그런 것들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