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를 대적하는 순결함(2)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하라(야고보서 4:8)
녹취자 : 이민희
마귀를 대적해야 되겠는데 그리고 대적하면 반드시 그 마귀가 우리를 피해간다고 하는 약속이 있는데 사실 그렇게 대적해서 이기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가. 결국은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그 능력은 순결한데서 나옵니다.
첫 번째는 자기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겠지요. 양심의 예민함의 척도가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른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양심에 자기의 죄를 느끼고 안 느끼는 것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거듭난 신자의 양심을 이야기 합니다. 거듭난 신자의 양심과 거듭나지 아니한 자연인의 양심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신자의 양심은 거듭나는 순간에 영혼에 일어나는 거듭남의 작용을 통해서 양심에 놀라운 씻김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거듭난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나가게 하는 중요한 등불이 됩니다.
주님을 믿지 아니하고 거듭나지 아니하였을 때 느끼는 죄의식과 주님을 믿고 거듭난 후의 죄의식은 분명 차이가 많이 납니다.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죄를 지은 다음에 느끼는 것이 불편함이지만, 주님을 알고 난 다음 지은 죄의 느낌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진노아래 있다’라고 하는 정죄감, 죄의 책임에 대한 두려움, 용서받기를 원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양심 속에서 기능합니다.
사도바울이 ‘양심의 송사를 받는다’라고 이야기 했을 때 이것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양심의 경우와 거듭난 사람의 양심의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이야기하는 ‘양심의 송사를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서 씻겨 진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는 양심이 아니라(그 양심은 우리를 십자가 앞에 데려갑니다), 굽은 양심입니다. 그 양심은 하나님의 성품을 곡해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느낀 나머지 이제 하나님께도 버림받았으니 막 살아버려라 하는 자포자기의 마음을 넣어주는 이런 양심(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은30에 팔고 괴로워했듯이), 그런 것들은 바로 굽은 양심입니다. 괴로웠으면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 나아와서 용서를 빌고 요한처럼 십자가 앞으로 돌아와서 주님의 용서를 빌어야지 왜 자살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바로 그런 양심의 부정적 기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양심의 거리낌이 없어야 됩니다.
거듭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이 예민할 때도 있고 둔탁할 때도 있는데 다양한 상태인데 그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일지라도 신앙의 상태가 아주 순결하고 영혼이 깨끗할 때는 양심이 반짝반짝 빛나서 기능을 잘하지만 더러워질 때는 양심이 둔탁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둔탁해진다 할지라도 그 양심의 묵인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자가 자기양심에 거리낌 있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영적인 상태가 나쁘다할지라도 오래도록 장구한 시간동안 자기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양심에 거스르는 죄를 지으면서도 그렇게 되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은 여러분들이 이제껏 신앙생활하면서 마귀를 대적하고 이기는 것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물론 그런 면도 있습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귀를 대적하는 신령한 힘은 순결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 순결을 위해서 우선 첫 번째 해결해야할 것은 양심에 거스르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우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죄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성품이 독특해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한다든지, 예절이 바르지 않다던지,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꾸 왕따를 당하던다던지, 아니면 말주변이 없어서 말로 사람들에게 툭툭 상처를 준다던지 하는 그런 거친 면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양심을 거스르는 악은 아닙니다 . 그러니까 어떤 때 보면 사람이 뭔가 정돈이 되지 않은 것 같고 뭔가 사람이 잘 다듬어져서 세련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영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양심에 거스르는 죄가 먼저 없어야 된다’라고 하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선 순결해야 하고 순결한 데에서 담대함이 나옵니다. 우리가 몰라서 순결하게 못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용서를 구할 수 있지만 다 알고서 지은 죄는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자꾸 위축시킵니다.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오늘 하루를 살면서 우리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관리하는 첫 번째 지름길입니다. 양심에 거스르는 악을 행하면 어떻게 되느냐면 마음을 지키면서 애를 쓰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양심에 거스르는 죄를 지으면 여러 날 동안 간직하던 부드러운 마음이 한 번의 범죄로 갑자기 딱딱해지게 됩니다. 물론 그 한 번의 죄로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올 수도 있지만) 더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음의 부드러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 양심에 거스르는 악을 먼저 버려야 됩니다. 여기에서도 무엇을 이야기하냐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그리고 우선 손을 깨끗이 하라 손으로 짓는 악, 마음은 나중문제이고 손을 깨끗이 하라 이는 손이 하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손부터 우선 깨끗하게 하라, 씻어라. 스스로 손으로 죄를 만들어가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 교리를 말할 수 있겠느냐, 믿음으로 구원 얻는 교리의 안전함을 지금 죄를 계속 짓는데 활용한다고 한다면 그 믿음이 정말 구원 얻은 자의 믿음이라 할 수 있겠느냐, 야고보의 논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은 거듭난 사람의 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간음에까지 가는 이 교회의 여인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그것이 구원받은 믿음일 수 있겠느냐며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이 야고보서의 이야기를 가지고 굉장히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이신칭의의 교리와 상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고보의 이야기는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뿌리를 통해 열매를 검증하라고 했다면 이 사람은 열매를 통해 뿌리를 검증하려는 그 차이이지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간음하면 구원 못 받은 사람이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이신칭의의 교리를 지금 손으로 악을 행하는 그 입에 담대함을 제공해주는 근거로 사용하고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거듭난 믿음일 수 있느냐, 그것은 입술의 믿음이지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원하셨을 리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여기서 가까이하다는 나아가다의 의미입니다. 히브리어로 ‘카라브’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접근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이것은 성화의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을 지키고 죄와 싸워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이기느냐 우리의 힘으로 죄를 이기느냐 하는 논쟁이 얼마나 바보 같은 논쟁인지를 금방 압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려고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죄와의 싸움, 자신의 마음을 이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지키려는 투쟁의 경험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우리마음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저는 정말 힘들다고 생각하고 목회는 거기에 비하면 훨씬 쉽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보다 힘든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지키는 일에 유능하다고 할 것 같으면 사실 이렇게 일주일에 몇 번 씩 예배드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 년에 서너번씩 사경회하고 이렇게 교회가 복잡해질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얼마나 어려운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연초에 선포한 마음지킴의 교리를 수련회에서 선포하면 마치 새로 배우는 사람들처럼 괴로워합니다. 들은 지 6-7개월밖에 안 흘렀는데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그만큼 자기마음을 지키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힘을 다해서 마음을 지키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그 마음을 지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죄를 이기는 삶을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죄를 이기고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면서도 그는 자기가 그걸 이길 수 있다고 생각 안하고 자기 자신이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하나님의 도움의 힘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아이가 너른 들판에서 아빠의 커다란 잠바를 입고 있습니다. 그 큰옷을 입으면 바람이 불 때 날아가려고 하는 힘이 대단히 커서 그것이 날아가지 않도록 꽉 붙들고 있는데 그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그 옷의 뒤에 달린 모자에 바람이 담겨서 낙하산처럼 자기를 끌고 갈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놔버리면 아이는 바람에 떠밀려 갑니다. 옷깃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꽉 쥐고 있지만 그 아이의 몸은 바람에 흔들흔들하면서 날아갈 것 같습니다.
결국 그것은 자기가 꽉 붙들고 있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키며 사려고 애를 많이 쓰고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많이 쓰지만 애쓰면 애쓸수록 결국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지키는데 얼마나 무능한지 깨닫게 되고 그래서 결국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갈망한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붙들고 있는 이것을 놓게되면 우리는 날아가고 맙니다. 바로 그런 관계입니다. 실제 성화생활에서 몇 번만 경험하면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에 대해서 성경이 그렇게 단호하게 강조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그렇게 단호하게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체험하지 않고는 그런 교리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들이 이 문제를 다뤄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순종하는 것만큼 순종할 힘을 주시고 정결해지려는 사람들을 정결하게 하시고 회개하려는 사람들을 회개하게하시고 믿으려는 사람들을 믿게 하시고 회심하려는 사람들을 회심하게 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들이 유혹이 많고 악의 세력들이 관영한 이런 세상에서 살면서 정말 순결하게 살아야합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순결은 정말 영원히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하는 길입니다. 굉장히 힘든 대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님의 그 놀라운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받는 그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순결한 삶을 살기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힘들다고 할지라도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쉽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날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쉽잖아요. 그래서 그 기쁨으로 그 멍에를 지고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성결의 길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