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는 그러면 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이신 성자를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이 땅에 오게 하시고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그토록 낮아지게 하셨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서 십 절이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 뭐였었냐 하면은 하나님에게는 그 성자 그리스도 예수가 외아들이였지만 그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아들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에게는 정말 소중한 아들들이였다. 똑같은 아들이였다 이거죠. 예수님과 똑같은 아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였다 이거죠.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서 당신에 자녀 삼으시려는 이 구원에 계획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성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에 몸을 입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인간처럼 온갖 결핍과 연약함에 복종된 생애를 살게 하셨던 것이거든요. 그러니깐 그렇게 보면은 그렇게 보면은 오늘 십 절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우리에 가슴에 다가오는 거죠.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아 예수님은 천사만도 못 하시네’ 이런 생각을 갖도록 만든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가 바로 그 것이 이 세상에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방법이였기 때문이였다. 그런 이야기죠. 그러면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에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에 주가 되게 하셨는가 이거죠. 우리에 구원은 사람에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 졌지만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구원이 이루어 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 몸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성인이 다 되신 후에 그리고 다시 삼년 동안을 공적인 생애를 다 사신 후에 그리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아들에 피를 보혈을 받으시고 그래서 그 보혈을 믿는 사람들 마다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던 거거든요. 근데 오늘 여기에 보니깐 많은 아들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고난을 통해 고난에 인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하나님께 합당하도다 그러거든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구절이 다시 히브리서 5장 9절에도 이렇게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에 아들이라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었음즉. 나오거든요. 이러한 성경에 표현들은 오해를 자아낼 수 있죠. 아 예수님도 온전한 분은 아니였구나. 그랬더니 고난을 많이 당하시고 그거를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고 그래서 온전하게 되셨구나. 근데 그건 사실이 아니거든요. 만약에 예수님이 죄가 있으셨다면 그 분이 우리에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에 그 대속에 행위가 죄인은 우리를 구원해 낼 수 있는 효력이 없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제물은 흠 없는 제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었다 여기는 그냥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되었다. 이거는 뭐냐하면 예수님이에게 어떤 흠이나 죄 그런 것들이 있었다기 보다는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하나님이셨지만 그 하나님에 성품을 사람에 성품 밑에 감추셨거든요. 그러니깐 예수님께 있어서 연약한 것들이 있었다 이거죠. 죄는 아니지만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사람에 몸을 입기 전에는 배고플 수가 없었죠. 그죠? 그리고 눈물 흘리셔야 할 일도 없고. 또 모르시는 것도 없었죠. 그러나 사람에 몸을 입으시고 난 뒤에는 시장하시면 배가 고프시고 그리고 괴로우면 눈물이 나고 그리고 모든 알고 계셨지만 또 사람에 몸을 입고 계시는 동안에는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예수님이 모른다고 대답하셨거든요. 만약에 사람에 몸을 입지 않고 하늘에 계셨더라면 모를 리가 없죠. 이런 것들은 죄라기 보다는 죄나 혹은 인간이 가진 죄로 말미암는 그 모자람이라기 보다는 주님이 죄는 없으시지만 스스로 사람에 몸을 입으심으로 사람에 몸을 입으심으로 스스로 자처하신 그런 연약함이였다 그런거죠. 그래서 그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죄나 허물이 있는 데서 온전케 되어지는 우리들에 온전케 되어지는 것과는 달리 사람에 몸을 입으셔서 가지고 계신 여러 가지 한계들을 고난을 통해서 극복하시면서 자기 자신이 말하자면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질만한 드려질만한 더 하나님 앞에 더 합당하게 드려질만한 그런 우리에 구원을 위한 제물로써 자신을 준비하신 것이죠.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려 볼 게요. 이런거거든요. 예수님이 사람에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 하늘에 계실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에 마음을 온전히 알고 그리고 하나님 자신과 하나이신 분이였잖아요.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어리 시절을 지나고 그리고 이제 성년이 되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하나님에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많은 영혼들을 보시면서 그들과 가까이 하시잖아요. 그들에게 가까이 가시면서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지니실 수밖에 없으셨던 연약함과 한계를 극복하고 예수님 자신 안에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야할 충분한 이유와 소명에 불타게 됐던 것이죠.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린 시절에도 예수님이 예수님이셨지만 그러나 사람에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죄로 말미암는 깊은 슬픔 믿음이 없는 세상을 바라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 뼈져린 마음 그리고 자기를 제물로 주시기 까지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그 말하자면 불붙는 사랑 이런 것들을 예수님이 충만히 느끼게 된 것은 고난을 통해서 그것들을 느끼게 됐다는 거죠. 태어나자 기저귀 차고 다닐 때부터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백성들을 보시면서 눈물 흘리셨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깐 그렇게 사람에 몸을 입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사람에 몸을 입으시고 죄인들에 삶을 죄는 짓지 않으셨지만 죄인들에 비참한 삶을 함께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이 깊이 그 영혼들에 대한 아픔과 슬픔 눈물 그리고 이들을 향한 하나님에 마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이 인간들에 아픔 그래서 당신이 이들을 구원해야 할 그런 이유를 깊이 발견하신 거죠. 그런 의미에서 온전케 되셨다는 거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잠시 낮아져서 사람에 모양을 입으시고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고난을 당하신 모습을 지니시는 동안에는 어리석은 사람들 눈에는 천사가 예수님보다 훨씬 높은 지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라는 거죠. 그러나 이런 복음에 비밀을 깨닫고 나면 예수님이 천사보다 못한 분으로 여김을 받으면서 이 세상에 사셨던 그 날들을 보면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천사들만도 못하도록 보이게 이 세상서 그렇게 비참하게 고난을 당하며 사신 그 궁극적 이유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 순간 우리는 정말 마치 진흙 속에 묻혀진 보화를 발견하듯이 고난 받는 비참한 사람에 껍질을 그 속에 존재하고 계신 하나님에 아들 그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거를 볼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신앙에 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사람들이 그 예수님에 껍질을 속에 담겨진 그 예수님에 참 사랑과 예수님에 그 하나님에 그 아들 되심을 깊이 목도하고 본다면 그게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겠는가 이거죠. 여러분은 그런 의미에서 복된 사람들이죠. 왜 그걸 발견한 사람들이니깐.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