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믿음관을 가졌던 여인들이 빠졌던 죄, 간음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4장과 5장에서 많은 죄악들이 나오면서 그것들에 대해 심하게 탄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고보 선생이 이 문제를 가지고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고자 하냐 하면 “봐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그 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열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심리적으로 나는 그렇게 믿는다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서 나오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 한번 봐라.” 그러면서 많은 악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교회 바깥에서 불신자들에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악들을 여기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간음하고, 돈 있는 사람들은 품삯을 주지 않아 그 품삯에 소리치고 하는 그러한 현상들이 여기에서 벌어집니다. 교회지도자란 사람들은 말을 막 하고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더럽히는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앙을 가지고 신자가 거룩한 삶을 위해 분투하는 것은 죄의 근원이 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인데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욕망은 사실 완전히 제거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목표는 완전히 제거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거기에 종노릇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을 적절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욕망자체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자기 안에 죄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게 될 때 인간이 죄에 항거하고 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질 될 정도로 죄의 힘이 우리 안에 아주 득세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죄에 종노릇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자기 안에 일어나는 죄의 욕구와 세속적인 욕망에 휘둘리게 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때에는 머리 속으로 이것은 나쁜 것이고, 옳지 않고,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인데라고 생각하면서 가책을 받으면서도,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양심의 가책의 힘보다는 그 죄를 짓고자 하는 자신 속에서 솟아나는 욕망이 크니까 거기에 종노릇하면서 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해서 갖는 목표와 사단이 우리에 대해서 갖는 목표가 동일합니다. 사단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씨를 말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우리를 죄의 종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 어떻게 고백을 하든지 주일날 교회에 가든지 말든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죄에 의해 휘둘리는 종된 삶을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사단이 우리 신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목표입니다.
우리는 정반대로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욕망을 완전히 씨를 말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내적인 부패성 등이 남이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하는 것은 제가 말씀드리는 그런 점에서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이지만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욕망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누구도 흠이 있으며 누구도 살아가면서 마음이나 행위로써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지만 노예상태에서만 살아가지만 않으면 다시 말하면 죄에 대한 욕망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도 그것을 어거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절대로 방해할 수 없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필요한가 하면 신앙의 목표라고 하는 것은 밖에 드러난 한두 가지 죄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들과도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내적인 쇄신을 통해서 죄를 짓고 싶은 욕망,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욕구, 이런 것들을 성령의 은혜로 서서히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새로워지고 영혼의 참된 변화가 일어나서 내적인 욕구와 성향 그 자체가 아름답고 거룩한 쪽으로 바꾸어지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했고 진실한 신자들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했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뿌리와 더불어 싸우는 일에 대해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선을 행하거나 죄를 미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들의 마음속에 진실된 죄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세상과 간음하는 여자들이 나옵니다.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특별히 그 죄를 지적하면서 세상과 벗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인간 속에 있는 많은 욕망 가운데 세상을 사랑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세상 사랑의 극치가 뭐냐 하면 간음입니다. 이 간음으로 인해 마음이 완악해지면 마지막으로 가는 종착역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간음과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항상 대표적인 죄로 지목됩니다. 간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강퍅해지면 우상숭배로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간음은 간음이고 우상숭배는 우상숭배이지, 간음하면 다 절로 도망가나,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굳어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극도의 반항심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은 그중 대표적인 원인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주 혹독하게 다룬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저항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상숭배로 간다는 것은 결국 배교로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볼 때 참된 신자는 배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배교에 가까운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두 가지, 간음과 우상숭배,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배교적인 선택입니다. 참 신자는 배교할 수 없지만 배교에 가까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극렬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지독한 반항, 원망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적개심으로 불탈 수 있습니다. 신자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정도가 되면 마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치 불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불이 조금 붙었을 때는 소화기를 가지고 끄면 되지만 많이 붙어서 타오르면 불 자체를 사람의 힘으로 쉽게 어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씨를 서서히 말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죽여갑니다. 우리 마음에서 세상을 사랑해서 우리 자신이 더러워지고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씨가 서서히 말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역사적으로 4-13세기 이후까지 수도원 운동들이 굉장히 많이 퍼졌습니다. 수도원이라고 하는 용어의 모노스트리라고 하는 자체가 모노스인데, 그것은 히랍어로 홀로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말하고, 참여하는 것이 세상인데 어떻게 그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느냐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주의를 제창한 사람들이 그런 모든 것들이,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밖에서 흘러들어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시를 떠나서 산속에, 심지어는 산속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도저히 인간이 큰 마음먹기 전에 올라갈 수 없는 곳에서 높은 산꼭대기, 심지어 절벽 끝에 수도원을 지어서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는 거에요. 어린 시절에 들어가서 장성하여 마지막으로 죽어서 자신의 해골을 교회당에서 비치하기도 합니다. 신기하게 세상과 완전히 절연하는 그 수도원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들이 다 일어납니다.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냐면 물론 세상도 문제가 되지만 인간 안에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몰랐던 거에요. 가인에게 누가 살인을 가르쳐 주었습니까? 가르쳐준 사람이 없어요. 미워하는 것을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배운 적이 없어요. 자연히 그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이 세상 사랑이고 신자도 그런 사람이에요. 똑같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 은혜의 힘으로 이런 것들을 누르고 살아갈 수 있도록 소명된 사람이 신자입니다.
여기에 이 여자들은 신자입니다. 왜 그런 무서운 죄를 범했습니까? 그리고 왜 하나님을 공경하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과 원수된 가운데 주님과 저항하고 있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욕망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무서운 거에요. 그래서 죄는 마치 뭐와 같냐하면 영화에서 보면 적국들이 성에 와서 막 밀면서 공격하잖아요. 작은 죄와 타협하면 빗장을 살짝 열었을 뿐인데 물밀듯이 밀치면서 노도와 같이 적국들이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밖에 적군들이 있을 때에는 아직도 그 싸움이 승산이 많지만 노도와 같이 마음의 문을 열고 원수들이 밀려들어오면 그 싸움을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죄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연 사람들은 거의 도와주지 않는 것처럼 죄가 아주 쉽게 우리 자신의 세계 속에 들어와 유린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승리의 삶을 살았던 간에 오늘 쟁취할 승리는 따로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죄에 대해 묵상할 때 죄의 달콤함을 생각하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있습니다. 크든지 작든지 죄의 쓰라림과 처절한 비참함을 더 많이 묵상해서 죄에 대한 혐오감을 신자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길러야 합니다. 그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눈을 뜨면 제가 묵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눈을 떠서 엎드린 상태에서 그대로 눈을 떠서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죄의 즐거움에 대한 기대가 내 마음을 지배하지 말기를, 죄의 비참함과 죄의 파괴적인 쓰라림, 죄가 몰고 왔던 하나님과의 관계의 철저한 파괴, 그리고 죄가 몰고 왔던 무거운 짐, 하나님 없이 고통 해야 하는 그런 삶, 이런 것들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가슴을 깊이 파고듭니다. 죄에 대한 달콤함이 우리의 마음에 떠오른다고 하더라도 죄의 비참함과 쓰라림에 대한 인식이 워낙 크면 그 즐거움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돈이 없으면 이웃집에 들어가서 도둑질이라도 해서 돈 좀 챙기지 왜 돈 없이 힘들게 살아요? 그건 뭐냐 하면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약간의 돈을 없음으로써 그런 일을 하게 됨으로 맛보게 될 비참한 결과에 대한 인식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거에요. 죄는 들어오기 전에 죄는 항상 이런 비참한 것이 아니라는 암시를 많이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려요. 그리고 죄를 짓는 것이 별 것이 아니라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는 거에요. 죄를 짓는 것은 별게 아니고 죄의 쓰라림은 하찮은 것이고, 그 대신 죄를 통해서 얻게 되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크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서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해서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끔 우리를 설득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죄가 주는 달콤함보다는 죄가 몰고 오는 비참함, 그리고 그 죄의 파괴적인 결과, 죄 아래 살았던 나의 인생들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처절하게 고통했던 때의 기억, 이런 것들을 많이 명상하면서 이런 악에 빠지지 말도록 해야 해요. 누구든지 이런 악에 빠질 수 있는 거에요. 이 여인들도 한때는 경건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악에 빠졌습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행위와 믿음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복음적인 믿음관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영광스러운 교리를 자기 자신이 신앙을 온전히 파수하는 수고를 거절하는데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되고 변화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