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3일 새벽예배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그러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러므로 혹은 그러나, 그런즉 이런 접속사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앞의 내용들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에서도 그러므로가 나오는데 “그러므로 형제들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객관적 내용들이 기록이 되어 있고, 그 그러므로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 사역의 객관적 결과를 주관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 사역의 적용의 결과가 무엇이냐면 그게 바로 “성소에 나아갈 담력을 얻었나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궁금한게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성소만을 얘기하고 지성소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하나님과의 진정한 대면은 사실 지성소에서 이뤄진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앞에 보면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비교하며 그 대제사장이 지성소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대면하던 그 광경을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연관시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근대 여기서 성소만을 얘기하는가? 이제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구별의 의미가 없어지고, 그래서 모든 지성소는 성소가 되었고 모든 성소는 지성소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 이유가 무엇때문이냐면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던 휘장, 그 한 장의 휘장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휘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성소는 12평 지성소는 6평이 었는데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 하나의 차이는 어마어마한거죠. 그러니까 그 성소는 대제사장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뵈옵던 곳인데 그 성소까지는 제사장들이 들어가고 제사장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고, 지성소는 대제사장 이외에는 못들어가고 1년에 딱 한번이에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순간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그 막은 양쪽에서 황소를 매달아서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의 엄청나게 질긴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것이 위로부터 찢어진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신 바로 그 순간에 찢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소가 이미 지성소화 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결론을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충분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래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것은 곧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 하나님을 뵈올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하는 것과 맞먹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두 번째 궁금한 것은 “담력을 얻었나니” 여기에서 담력이란 것은 용기를 가리키는 것이고, 흔들리지 않은 마음을 뜻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럼 이제 이러한 담력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 라고 말했는데 그럼 예전에는 어땠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시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제가 아니라 제사에 의한 임시적 속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어떠했는가 하는 것은 이런 담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라고 할때 항상 이 제사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 제사라고 하는 임시적 방편을 위해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왔지만은 그러나,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편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신의 죄가 완전히 속할 것이며 그리고 이렇게 제사라는 하는 방편 자체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지로 제사 속에서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릴 때마다 충분히 하나님이 그 제사를 통해서 자기의 죄를 용서하시고 열납하시는 것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가 충분히 하나님 앞에 용서 받았고,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이 있는데 하물며 이 불완전한 속죄의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할 때 그들에게 거치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선 이러한 제사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사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메시아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제사에 참여해도 하나님이 그를 용납해 주시지 아니하는 것들을 많이 경험했을 거라는 거죠 실제로. 뿐만아니라 속죄자체가 완전한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나서 다시 양심이 더럽혀지고 죄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거라는 거죠. 그 뿐만 아니죠. 그렇게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 자신을 충분히 용납해 주신다라고 하는 것,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이 제사의 방법을 통해서 경험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였을 거라는 거죠. 이런 여러 가지 많은 이유로 인해서 그들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주님을 충분히 뵈올 수가 없었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제사를 나아감으로써 충분히 그리스도를 뵈올 수 없었고, 그리고 죄의 용서의 진수을 충분히 경험할 수 없었고 그 용서의 효과가 영원히 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죄인들의 마음에는 얼마나 커다란 떨림이 있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들은 담력을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담력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객관적 속죄 사건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 객관적 사건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믿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그는 그 사건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그래서 담력을 얻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담력은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이 모든 것이 나의 공로에 달리고 나의 상태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공로와 의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달렸다는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달렸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나의 상태나 아니면 나의 조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이것은 완전히 객관적 사건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내 죄를 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충분히 자기를 우리의 죄에 대한 댓가를 충분히 치러주신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충분히 우리의 죄를 위한 댓가를 치러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속죄의 사랑이 우리에게 담력을 준다고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이제는 우리의 상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를 따라 자기를 다 지불하신 객관적 속죄에 기초했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고 또 그리스도 예수께서 아주 명백하고 분명하게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도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를 통해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죄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죄가의 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을것이다라는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충분히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권한의 보혈을 우리에게 적용시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이것도 아주 하나의 굉장히 커다란 세계가 펼쳐져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고 하는데 그렇게 구원받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할 때에 그 때에 주님이 나를 온전히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 같은 그러한 경험이 없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 하나의 커다란 세계가 열립니다. 또 하나의 세계가 필요해요. 아주 굉장히 기다란 논의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단 하나는 거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객관적 속죄 사건과 그리고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나를 용납받게 하는 그것 사이에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우리 자신의 마음에 모든 잘못된 틀들을 주님께서 깨뜨리고 뒤집히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위해 못박혀 죽으신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뢰하고 또 온전한 의뢰를 통해서 온전히 그분께 순종하고 그러는 믿음의 원리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다시 용납되어지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고 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날마다 소유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속죄의 그 효과에 참여할 때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비는 그런 삶이 되어질 것입니다.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신실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이처럼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은혜를 내려 주시고 저희들 한사람 한사람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 안에 붙들어 주셔서 주님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피와 보혈을 온전히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늘 승리하고 이기며 나아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