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17일 새벽설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이 사람들은 누구를 가르키는 것일까? 그 앞에 보면 11장 1절부터 아벨에서부터 시작해서 쭉 여러사람들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누구를 가르키는 것일까? 물론 넓게 보면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르킨다고 말할 수 있지만 뒤의 문맥을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과 야곱, 이런 바로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가르키는 것 같아요. 그 이유가 무엇때문이냐면 고향을 떠난 사람들로 기록을 하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어쨌든 그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다, 이와 정반대의 표현이 그 하박국서 2장 4절에 나오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산다는 이야기와 여기서는 믿음을 따라 죽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같은이야기죠.
믿음을 따라 죽는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면 자신이 믿는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따라서 살다가 죽었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예요. 우리들이 믿음으로 산다라고 하는 말이 좀 애매해 보이잖아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주님을 추구하면서 산다는 것이 좀 애매해 보이지만 애매한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한 것이예요. 무슨 뜻이냐면 마치 군인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 발령이 나면 그 임지로 가족들을 데리고 가고, 그리고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나면 그 전쟁에 참여하기에 적합하도록 자신의 인생을 재편하잖아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군인이예요. 그러니까 그런 진정한 의미에서의 군인이 그렇게 전쟁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자신의 인생을 재편하는 것처럼 진정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가 믿고 있는 바를 따라서 인생을 재편하는 것을 반드시 동반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을 따라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생각과 뜻대로 정욕을 따라서 그렇게 방탕하게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자기가 도움이 필요하니까 그 순간만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이 주실것이라고 믿는 그래서 없는 믿음을 북돋는 그런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이 아니다라는 것이죠.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행사한 사람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어요.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믿음이 행사되는 것이지 그 믿음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음이 행사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는 누구든지 죄인이었고 믿음을 따라 산적이 없다가 어느 한 순간에 믿음이 생겨나게 되죠. 그러나 벌써 한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믿는 바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재편할 결심을 하게 되는 이런 모든 건 이거는 벌써 모두 그 사람 자신이 영혼안에 어떤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들이다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믿음 자체가 내가 원하면 가질 수 있는 그런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가 이미 내안에서 일어나는 영혼의 깊은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이예요. 어쨌든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자신이 믿는 바 그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 은혜 이런 것들을 붙들면 그것들을 최고로 생각하다가 그것들을 따라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만이 믿음을 따라 죽었다 이렇게 평가 받을 수 있다는 것이죠.
두 번째 보니까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랬거든요. 그런데 사실 그 약속이라는게 도대체 뭘까? 그 약속은 바로 너희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리라 그것이었죠. 그것만? 아니죠. 그것만 하면 무슨 양계장도 아니고, 사육장도 아니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렇게 해 놓고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된 것처럼 또한 내가 너희 후손의 하나님이 되고, 니가 나의 백성이 된 것처럼 너희 자손이 또한 나에게 사랑받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한 말씀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바로 그런거예요. 그런 약속을 못받은게 아니라 받았죠. 아브라함도 그 약속을 받았고, 이삭도 그 약속을 받았고, 야곱도 그 약속을 받았고, 요셉도 그 약속 속에서 산 사람이죠. 그런데 여기서 받지 못했다는 게무엇이냐, 이루어지지는 않았잖아요. 이루어진 것은 훨씬 후의 일이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이후로 약 430년이 흐른 후에 그때 비로소 이제 이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간지 430년 후의 일이라는 거죠. 그때 70여명의 가족이 들어갔잖아요. 그 430년이 마치는 날에 나올때에는 대충 어림 잡아서 300만명 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거죠. 그걸 가르키는 것이죠.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 약속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 약속이 실현된 것을 보지 못했다라고 하는 의미죠. 실현된 것을 보지 못했는데도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다 이거죠. 그게 뭘 지금 계속 입증하는 것이냐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는 말을 지금 증명하고 있는 것이예요. 그러면서 또 하나의 특징이 나오는데 뭐라고 하냐면 “멀리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찾는 자들을 나타냅이라”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걸 바라보면서 한 없이 즐거워한것이예요. 뭐를? 나와 그리고 내 후손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 그것 때문에 한없이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이 즐거워하는 것이 단지 자신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진다는 사실 때문에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하나님과 자신과 또 자신의 후손이 맺게될 관계,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렇게 간섭하시고 자신과 관계를 맺으신것처럼 자신의 후손들과 관계를 맺어서 그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고 행복해할 그것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고 환영하고 기뻐했던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예요. 이것이 바로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믿음의 그 요체는 뭐냐하면 단지 믿기만 하는 것이 믿음의 요체가 아니예요. 그러면 믿음의 요체는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예요. 그게 믿음의 요체예요.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오늘 약속을 받고 다음 주에 그 약속이 실현됐습니까? 아니예요. 오늘 약속을 받고 내달에 실현됐어요? 아니예요.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이 성취되는 것은 보지 못하고 그냥 그리워하고 환영하다가 죽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아니 뭐, 약속을 주시기만 하셨지 성취도 안됐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우냐? 근데 사실은 이들이 환영하면 죽을 수 있었던 그 모든 기쁨의 요체는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는 것, 그것이 이들의 기쁨의 요체가 아니가 자신과 관계를 맺으신 그 하나님이 기쁨의 요체였고, 자신의 후손들과 관계하게 될 그 하나님 자신이 이들에게 기쁨이었던 것이예요. 그랬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외국인이다, 나그네라 이런 증거를 받으면서 살기를 기뻐했던 것이죠.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해보세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그리고 들어왔어요. 가나안땅으로 들어왔어요. 이제 다시 그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끝났어요. 이제 잊혀진 고향, 더군다나 이삭과 야곱은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죠. 그러는데도 그들 모두가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어요. 물론 목축을 하고 매매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다녔기 때문에 나그네로라고 하는 삶을 살았지만 오늘 성경에 의하면 그들은 이 땅의 고향을 버리고 더 나은 본향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나그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예요. 그 나은 본향이 뭐예요? 하늘나라죠. 땅에서 말하자면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 하늘로 말하자면 하늘나라, 그 나라를 그리워했 때문에, 다만 가나안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외국인이다 나그네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거기가 어디라고 할찌라도 이미 그들의 고향은 이 세상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 세상은 모두 무너질 장막집으로 가득찬 영원할 수 없는 도성일 뿐이고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본향은 하나님의 품이었어요. 그거를 그리워하면서 그들은 일평생 외국인과 나그네로라는 증거를 기뻐받으면서 살았던 것이예요. 이게 바로 신앙이예요.
그래서 청교도들이 자신을 순례자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천로역정에도 보면 그 믿음씨라는 사람이 바로 순례자로 나오죠. 순례자라고 하는 것은 옛날로 말하자면 성지를 향해 가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이야 비행기를 타고 윙 날라가서 테라비 공항에 내려가지고 호텔에 들어가 묵으면서 그렇게 관광을 하지만 옛날에는 어림없잖아요. 산넘고 물건너 그렇게 속죄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성지 순례를 떠났어요. 그때는 도적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많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었어요. 그들은 어느곳에서 하룻밤을 묵어도 정주지 않는 왜? 거기가 자기가 가야할 궁극적인 곳이 아니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순례자, 혹은 필그림이라고 불렀던 것이죠.
그런 순례자적인 삶을 바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 족장들이 살았던 것이예요. 그래서 아브라함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고, 또 요셉도 그랬고, 이렇게 자신들이 죽으면서 결국은 마지막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았으니 이것은 단지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였습니다. 그들이 그것보다도 더 궁극적인 본향을 그리워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품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죄많은 이 세상에서 거기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마음에 합당하게 살 수 있었던 큰 비결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의 마음은 세상과 세상의 것, 땅에 있는 것들로 가득차 있죠. 그래선 안됩니다. 우리들이 수시로 죄 많은 이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고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본향이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땅은 잠시 스쳐지나가는 나그네의 길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나그네는 나그네 길에서 큰 집도 짓지 않고 영구히 살 것같이 사업을 벌이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사람들이 약속을 따라 살 수 있었고 그래서 약속에 따라 죽을 수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본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오늘 이 아침의 시간에 아버지 앞에 나와 이처럼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와 함께해 주시고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오늘도 저희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죄 많은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닌 것을 기억하고 주님의 나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일평생을 살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