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61
목 차
마음이 눌린 자의 기도(시 61:1-2) 57
피난처요 망대이신 하나님(시 61:3) 62
환난날에 피할 곳(시 61:4) 64
경외하는 자의 기억(시 61:5-7) 67
주의 이름을 찬양할 때(시 61:8) 70
시편65편 강해 1
시편61편 강해 1
시편61편 강해 1
시편61편 강해 1
시편61편 강해 1
시편61편 강해 1
마음이 눌린 자의 기도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 61:1-2)
마음의 욕망
성경에 보면 마음이 눌린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합니다. 마음이 눌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영혼이 평정의 상태를 누리며 살아가는 일상적인 균형이 깨뜨려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욕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욕망이 일어나면 우리의 마음에 평정이 깨뜨려지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행복해지는 것을 욕망으로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방법으로 행복해지려고 하면 문제가 없는데, 돈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든 돈을 많이 소유해야겠다는 욕망이 커지면 이미 의지의 힘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영혼과 마음이 총체적으로 돈에 대한 욕망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돈이든지 인간의 정욕이든지 명예욕이든지 많은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됩니다.
비유를 하면 손끝에 접시가 있습니다.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한쪽 귀퉁이에다 물건을 올려놓으면 기울어져서 결국 접시가 쏟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균형을 잃게 될 때 거기에서 온갖 사욕들이 나오고 죄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욕망을 줄이면 죄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옳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욕망을 억제하면 그러면 어느 정도 평형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불쑥’하고 어떤 욕망을 갖게 될 때, 그렇게 솟아오르는 것 말고 더 깊은 죄의 근원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더 깊은 죄의 근원이 모든 사악한 욕망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욕망을 제거해서 마음의 평정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현상이 제거되는 것이지 실제로 뿌리 자체가 제거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욕망
우리의 욕망가운데 죄를 구성하는 욕망이 있는가 하면, 우리를 점점 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거룩하고 신령한 욕망이 있습니다. 거룩하고 신령한 욕망의 저자는 원천적으로 성령님입니다. 그러나 이 욕망은 우리도 참여하는 욕망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욕망을 갖도록 우리 안에서 작용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지만 우리를 배제하고 성령님이 작용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의 감정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물질이라든지 명예라든지 성적인 욕망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을 품게 되면 영혼이 평형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그 욕망에 빠져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신령한 욕망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향한 갈망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우리로 하여금 죄와 사악으로 흐르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갈망에 가득 차 있을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부합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불안하고 안타까워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는 평정을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그러한 간절한 성화의 갈망을 가지고 있을 때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가장 큰 평정을 누리는 때입니다. 같은 갈망이라도 육신의 갈망은 우리를 끊임없이 흔들어 놓지만,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갈망은 우리로 하여금 평정을 누리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어 줍니다.
여기에는 차이점들이 많이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모든 욕망은 우리를 집중시키는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냉장고를 하나 바꿔야 될 텐데.’ 하는 욕망을 갖게 되면 길거리에 수많은 가게가 있어도 냉장고만 눈에 들어옵니다. 차를 바꿀 때쯤 되면 길거리에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차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 애를 시집보내야 될 텐데.’ 그러고 나면 생전 쳐다보지도 않던 남의 집 총각들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욕망은 관심사를 결정합니다. 욕망은 집중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악한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주목하고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지만, 신령한 갈망은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무엇이든지 집중하고 갈망하면 불안은 있게 마련입니다. 갈망하는 사랑의 감정 자체가 그것과 합체하고자 하는 것인데,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니까 갈망과 안타까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고자 하나님을 갈망하지만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차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리워할 때는 우리의 마음이 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갈망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분의 손에 붙들려 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마음이 집중된 가운데 하나님 한분을 전심으로 앙망하고 의지하는 믿음 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인 생활의 모습입니다.
마음이 눌릴 때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눌린다.” 이런 표현은 성경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눌리는 것은 자기 안에서 발견한 자신의 죄, 욕망의 크기, 밀려오는 절망과 불안, 이런 것들이 대게 사람의 마음을 눌리게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되기 전에 성령의 조명이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확 비춰주실 때 우리는 예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를 발견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절망하게 됩니다. 죄의 크기를 발견하고 깊이 절망하게 될 때 우리는 눌림을 경험하게 됩니다.
‘누른다’라는 것은 압력을 가해서 우리로 하여금 정상적인 생명을 이어갈 수 없도록 합니다. 그 때 경험되는 커다란 불편은 무엇입니까? 몸이 압사할 정도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면 목을 누른다든지 가슴을 누르면 가장 위협을 받는 곳이 호흡기능입니다.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이런 현상들을 우리들이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게 될 때도 눌리게 되지만, 자신의 믿음의 크기와 어울리지 않는 큰 시련을 만나게 되었을 때도 절망이 밀려옵니다. 그때 이런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라고 합니다. ‘땅 끝에서부터’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에 대한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세계 전체가 커다란 쟁반처럼 펼쳐져 있고, 그 위의 하늘은 쟁반 위에 엎어놓은 투명한 플라스틱 반구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쟁반처럼 세계가 펼쳐져 있어서 물이 계속 흐르다가 저 끝에서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곳이 ‘땅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땅 끝’이라는 것은 땅에서 떨어질 것 같은 위기 가운데 있는 가장자리입니다. 비가 오거나 물이 쏟아지면 끝없이 떨어질 처지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늘 평탄하고 안락한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사랑하실수록 그렇습니다. 내버려두면 우리는 끊임없이 부패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소금을 치시든지 기름에 담가 놓으시든지 삶으시든지 말리시든지, 식품을 보관하는 것처럼 우리를 그렇게 다루십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갈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절실히 매달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간구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사랑하는 시인에게 그러하듯이, 종종 우리로 하여금 땅 끝에서부터 하나님 앞에 부르짖지 않을 수 없도록 때로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유의해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가 의지할 바는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입니다.
피난처요 망대이신 하나님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시 61:3)
피난처이신 하나님
여기에서 나오는 ‘피난처’가 전쟁이 나면 피난하는 곳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피난처라는 것은 당시의 도피성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과실로 사람을 죽게 한다든지, 다치게 한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피해를 당한 사람의 가족 입장에서 보면 분노라는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보복을 당한다면 언약백성의 사회가 끊임없는 보복과 보복에 따른 복수, 원한이 꼬리를 물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언약백성의 삶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도피성이라는 것을 만들어주십니다. 만약에 잘못해서 누군가를 다치게 했거나 죽게 했으면 거기로 도망할 수 있습니다. 일단 도피성에 들어가면, 거기에서 심사를 합니다. 이 사람이 정말 사람을 죽일 의도가 없이 실수로 행한 것이라면 보복을 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다윗은 전쟁터를 누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싸움에 이길 때도 있지만 싸움을 피해야 하는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도피성의 개념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전쟁에서 질 것 같은 위기 속에서 도망칠 때 좋은 지형지물을 만나 안전하게 피하였던 경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라고 고백합니다. 안팎에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하는 가운데 주님이 자신의 피난처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생이 끊임없는 시련의 연속이고,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전쟁과 같은 상황일 때 오직 주님만이 피할 바위시고 산성이시며 유일한 보호자시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주님이 나의 피난처시요, 보호자가 되어 주시는 경험을 뼈저리게 하면서, 자신이 환란을 만나든지 고난을 만나든지 주님만이 궁극적인 피난처가 된다는 것을 노래했습니다. 사람들은 환란을 막는데 있어서 권력이나 물질이나 재능을 의지하지만 시인은 주님만이 인생의 유일한 피난처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결국은 내가 이기고 내가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힘입어 피하고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견고한 망대이신 하나님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의 역할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피한다’라는 말은 성경에 안 나오는 보역입니다. 망대는 성 위에 높이 지어서 사면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곳입니다. 적들이 달려와서 해칠 수 없는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우리에게 엉겁결에 밀려오는 환란 같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무엇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일어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 하나하나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 뒤에 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모든 환경을 당신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믿음생활을 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설령 우리에게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한, 이것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은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큰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면서 주님 앞에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생활입니다.
환란 날에 피할 곳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시 61:4)
본문해설
시인은 자신의 인생에 닥치는 모든 불행과 커다란 시련들을 전쟁에 비유하면서 “주님은 나의 피난처이시고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십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부지중에 살인하고 피난처를 향해 도망치는 사람이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의 치열한 공격을 피해 산으로 피하는 사람의 마음이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 가운데 시인은 환난을 피하고 시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주의 장막에 거함
두 가지를 고백합니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이것은 병행법입니다. ‘주의 장막’은 ‘주의 날개’와 같고 ‘거하며’라는 하는 것은 ‘피하며’ 와 짝을 이루며 병행법으로 이루어지는 구절입니다.
“주의 장막에 거하며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로다” 이것이 환란 날에 시인이 자기를 보호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장막’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동식 성전입니다. 다윗 때에는 가나안에 들어와 정착을 한지 상당시간이 지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성막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도록 고정된 성전을 지은 것이 솔로몬 때입니다. 다윗의 때에도 광야시대의 성막과 같은 것을 성전으로 삼아서 거기에서 희생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것이 전쟁에서 사람을 보호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피하려면 커다란 성벽이 있고 강력한 군대가 있고 대문이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성소와 지성소라고 해봐야 18평정도 되는 공간을 물돼지 가죽으로 덮개를 씌우고 천으로 짜서 두른 것인데 말을 타고 돌격을 하면 단번에 부서져버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장막에 거하는 것이 어떻게 환란 날에 피하는 방법이 되겠냐는 이야기입니다.
전쟁의 날에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무서운 상황이 벌어졌을 때 주의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의 비유이자 은유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주의 날개 밑으로 피함
시인은 병행구에서 이야기하기를 “주의 날개 밑에 피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날개 밑에 피한다는 것은 닭이나 다른 새들이 자기 새끼들을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모든 새들이 자기 둥지에서 알을 품고 새끼를 보호하는 방법이 날개 그늘 밑에 두는 것입니다. 밖에서 보면서 날개 속에 새끼들이 숨어있다는 것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시골에 있는 친척집에 가면 솔개가 자주 하늘에 뜹니다. 빙빙 돌면서 ‘뭐라도 없나?’ 하고 찾습니다. 어미 닭이 소리를 지르며 비상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풀을 뜯던 노란 병아리들이 그 신호를 듣고 어미 품으로 옵니다. 어린 마음에 ‘저 많은 병아리가 날개 속으로 다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다 들어갑니다. 20마리 정도를 품고 보이지 않게 날개로 완벽하게 싸고는 고개를 들고 소리를 지릅니다. 사실 자기도 채어갈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어미의 본능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미새를 해치지 않고는 새끼들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눈에 띄지 않도록 날개 밑에 완벽하게 감추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쟁이 나고 환란이 나면 도망을 가야합니다. 칼에 칼을 맞부딪히면서 싸워야겠지만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의 승리는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을 했습니다. 신앙의 참된 본질은 환란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들을 당신의 날개 아래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환란을 당할 때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새끼들이 어미의 날개 그늘 아래로 파고드는 것처럼 주님의 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형통한 날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피해야 하는 날들을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 앞으로 돌아와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다윗은 고백합니다. 전쟁이 일어난 큰 환란, 말할 수 없는 고난, 심한 환란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보호를 입으면서 아버지 앞에 살아가는 은혜의 비밀들, 신앙의 깊은 비밀을 터득을 한 것입니다. 놀라운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분께 쉼을 얻고 그분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기회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고난이나 시련,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이 있을 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완고하고 주님 없이 살려고 하는 우리를 당신에게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안에서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경외하는 자의 기업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시 61:5-7)
경외하는 자의 기업
이 시는 시인이 왕이 된 다음에 지은 시라고 여겨집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의 본분이라고 보았습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그분을 경외하면서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누리며 살 수 있는 기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기업’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누리게 되는 행복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주셨노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도 훌륭한 것이지만, 이미 하나님이 주신 것을 헤아리면서 그분 앞에 감사하는 것은 더 훌륭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될 때 주실 것에 대해서도 바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주신 것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왕으로 장수케 하사˛
시인은 세 가지를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먼저, 장수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쟁과 굶주림, 질병 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빨리 죽던 때였습니다. 1949년도 중국 남자들의 평균 나이가 35살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5살 정도에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아주 일찍 장가를 갔습니다. 만약에 그 당시에 지금처럼 결혼을 늦게 했다가는 장가들면 얼마 안 있다가 죽는 것입니다. 저희 할아버지만 해도 마흔에 저를 보셨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나이가 제 나이 때는 제가 중학교를 다녔을 것입니다. 인생의 시간표가 앞당겨졌던 것입니다. 장수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의 가슴에는 와 닿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아주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왕의 장수가 중요한 것은 왕이 오래 살아야 자손을 많이 낳습니다. 왕실이 번성해야 나라가 든든히 서는 것입니다. 왕위를 이을 자식들이 많이 있어야 나라가 든든합니다. 물론 왕이 될 사람들끼리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 왕의 혈통이 끊어지고 나면 나라가 무주(無主)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왕의 장수를 구합니다. 한 왕이 오래도록 선정을 베풀면서 나라를 통치할 때 그 나라의 기강과 제도, 법이 온전하게 서는 것입니다.
시인은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왕의 장수를 구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왕’은 자신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여겨집니다. 비록 자신이 이 나라의 왕이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종 같은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임무를 되새기는 표현입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두 번째 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기도 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기도 합니다. 그는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거한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잠깐 있다 가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짓고 영구히 사는 형태를 가리킵니다. 그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할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와 진리로 보호하소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는 소원이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입니다. ‘인자’는 죄인들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과 진리의 말씀을 예비하사 저를 보호해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이 떨어지지 않고 놀랍게 일치를 이루면서 시인의 마음과 삶속에 반영하고 함께 역사하였던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그분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가 변화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 가운데 정수에 속하는 것이 그분의 말씀을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시는 분인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원했습니다. 받은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뜻대로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시인과 같이 하나님 앞에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보호해달라는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찬양할 때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시 61:8)
본문해설
시편 61편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리하시면”이라는 것은 바로 앞의 7절에 나와 있는 내용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장수케 하고, 하나님 앞에 거하게 하셔서 인자와 진리를 베풀어 주실 때 나는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분명해 보이는 고백이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 전체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
하나님은 모든 세계에 있는 물질과 구별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늘에 계시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이 하늘에 더 많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이 세계 안에 계시면서도 이 세계와는 구별되시는 분으로 세계를 초월해 계십니다. 인간이 확실하게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이름과 실체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이름 있는 곳에서 그 실체도 지각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가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며 사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는 곧, 하나님에 대한 태도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 높아지실 수도 없고 낮아지실 수도 없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질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이 낮아지고 멸시받는 것을 볼 때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 의해 높아집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삶으로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다.’라는 것을 보여줄 때, 사람들은 ‘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아, 그런 분이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깊이 인식합니다. 그렇게 진실하게 고백을 하게 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이름 신앙’을 배경으로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러이러하게 은혜를 내게 베풀어 주시면 내가 주님의 이름을 이렇게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히 찬양함
성경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라는 것은 단순히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마음을 가득 채우는 힘의 표현입니다. 찬양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솟구치고, 질서 지어진 방향을 따라 삶으로 표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는 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올지 안 나올지는 시간이 흘러봐야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진실로 기뻐하며 찬양할 때 그의 영혼은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동작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칭송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의 달콤한 말이나 거짓된 표현에도 우쭐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사람에 의해서 속고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참되고 진실한 찬양일 때 그것은 반드시 삶을 동반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영혼 안에서만 일어나는 행동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그의 정신과 신체까지 지배해서 쏟아져 나오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찬양과 경배, 영광을 드릴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성도로서 아름다운 생활입니다. 자기를 다 드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때 시인은 참된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언제까지 그러합니까? 영원히 그러합니다. ‘영원히’라는 개념은 물질 속에 둘러싸여 생각이 물질에 고정되어 있을 때는 떠오르지 않는 개념입니다. 인간이 물질을 보고 사물을 보면서 머무는 생각들은 대부분 육신의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영원을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유한한 삶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 또한 유한한 육체의 감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영원을 생각하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싫어하는 물건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것을 보면서 ‘영원’이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게 될 때 그를 영원히 오래도록 증오해야겠다는 감정이 생겨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반대편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을 사랑하고, 또 물건이 좋다고 느껴질 때 그것을 보면서 영원을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사람을 보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이 지속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비록 보는 것은 육체의 감각으로 시작이 되었지만 그것은 계기일 뿐이고, 마음과 정신, 영혼, 이런 작용들로 사랑하고 미워하게 될 때 이것이 영원이라는 개념을 함께 가지고 들어오기가 쉽습니다. 육체로 감각하는 사물들은 영원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어렵지만, 영혼과 정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데 있어서는 그런 감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서원을 갚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에게 주신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고 진리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나의 서원을 이행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서원’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서 살겠습니다.” 이것은 언약백성의 매일 반복되는 서원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무엇을 행하게 하시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개인적으로 약속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앞에 서원의 제사를 드립니다. 곤궁하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이 이렇게 도와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약속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단을 쌓은 것처럼, “이렇게 아버지의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해주신다면,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는 당신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여기는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라는 식의 약속을 합니다. 이것은 율법에 규정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 간절한 탄원 속에서 무엇인가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약속에 대한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무시한다면 사실은 약속을 맺은 그 사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언약을 하고 자신의 의무를 준수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에게도 일반적인 의미의 서원들과 특별한 의미의 서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많은 고난과 역경의 시기를 지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많은 약속을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진리의 말씀이 없이는 내가 곤궁했을 때 하나님 앞에 많은 것들을 약속하고 헌신한 것들을 다 지키면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마음이 크게 감동되게 하셔서 선한 일을 결심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약속대로 시행하며 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결국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인자와 진리를 구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끊임없이 감화를 받으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서원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우리를 붙드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십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주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가지고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65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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