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28일 새벽예배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히 5:13).
그러면서 이제 사도는 앞에서 한 이야기를 토대로 해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젖을 먹는 자 마다 어린아이니. 그는 의에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그랬거든요. 구원은 못 받았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죠. 어린 아이라는 말에서 벌써 중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태어났는데 안자라는 거죠. 여러분 정말 잘 생각하셔야 돼요. 전 여러분 볼 때 참 답답한데 그냥 교회 나오고 그냥 신자라고 고백을 하고 그러고 살아가잖아요. 근데 인생을 사는데 신앙이 도움이 되요? 그렇게 그런 정도로 신앙생활을 해선 안돼요. 그러니깐 자기 자신에게 영적인 성장이 있는 가. 신앙에 성장이 있는 가? 이걸 진지하게 묻고 성장이 없으면 망가진 거예요. 병든 거라고요. 거긴 하나님과의 평화도 없어요. 더군다나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그렇게 굉장히 불행한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신앙 아무리 많은 시간을 쏟고 아무리 뭘 해도 그래도 뭐 아직 부족하다고 하고 계속 신앙생활 하라고 그러는데 그런 거에 대해서 어떤 반감 같은 거 생겨날 수 있어요. 반감은 아니더라도 아휴 어떻게 그렇게 까지 하겠는가. 그런 생각할 수 있죠. 그건 뭐 생활비 받는 직장 생활도 안하는 목회자나 그렇게 할 일이지 아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이게 성경은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거죠. 그런 핑계에 대해서 이건 뭐냐 하면 하루 종일 교회 와서 살아라. 무슨 뭐 뼈 빠지도록 교회에 와서 일해라.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게만 한다고 해서 신앙이 자랄 것 같으면 그럼 문제가 없죠. 신앙이 자라는 원리는 그런 게 아니거든요. 근데 이 신앙이 성장을 안 하면 단지 성장만 안하는 게 아니라 아주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나쁘냐. 그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불명에가 되는 거예요. 고통스러우신 거죠. 근심거리가 되는 거죠. 그리고 겉모습으로는 교회에 나오고 들락날락 하면서 그럴듯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신명은 완전 죽어 있어서 그래서 마음에 죄에 소욕이 가득 차고 그리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자신에 인생에 황제가 자기 자신이에요. 그리고 자신에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한 수단이 되어버리는 거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죠. 그러니 항상 마음속에 주님이 믿노라 고는 하지만은 하나님과의 평화 그 다음에 그분이 나와 동행해 주시는 것 그래서 내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고 계시다 라고 하는 그런 확신 그런 거 없죠. 그렇다고 해서 뭐 그냥 혁띠 풀어 놓고 배고플 때 밥을 퍼먹는 것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 죄에 대해 포만감을 느끼는 사람은 가슴이 새가슴이 돼서 그렇게 못해요. 그러니깐 세상을 버리자니 예수님만 따르자니 세상 사람을 못 버리겠고 세상을 따르자니 그나마 신앙 양심이 자기를 허락 안하고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되나 막 갈등하는 그거를 자기 자신은 자신의 신앙에 성장을 위해서 투쟁하는 걸로 생각한다 이거죠. 넌센스야. 하나님에 나라에서 상이 하나도 없어요. 상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백성들이 우상 숭배와 하나님의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떠나지 못 했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대접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결과를 알수 있어요. 하나님에 심판이에요. 게으름 나태 무지 그리고 절제없음. 세상을 사랑함 이런 것들이 떡이 되다시피 눌러 붙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런 본성들을 성령에 은혜로 진리에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되어서 주님을 따르고 닮아야할 필요를 못 느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러는 동안에 그 사람에 삶에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신앙이 무엇인가를 왜곡되게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빛이 되는 대신에 어두움을 보태고 살아가는 거죠. 교회를 다니고 말하고 이러는데 있어서 기독교적인 용어를 쓰는 것 이외에는 사람이 바뀐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탐욕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 끔찍한 자기 사랑. 그렇게 한번 살아. 그게 불신자에 대표라 이거죠. 영적인 생명은 급속히 쇠하고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는 그가 교회에 미쳤다고 하지만은 그는 전혀. 마음속에서는 복음과 그 다음에 하나님에 자신에 모든 것을 요구하시며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반감같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 거죠. 진리에 참된 복음을 가르쳐 주면 저렇게 엄격하고 힘든 신앙생활 말고 이렇게 좀 편안하면서도 훨씬 더 효율적인 신앙생활이 있을 꺼다 생각하는 거죠. 외식하는 자들은 언제나 그렇게 생각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는가. 그리고 자신들에 영혼에 필요한 것을 자신들이 스스로 처방을 내려서 요구를 하는 거죠. 나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게 나에게는 실제적인 설교가 필요합니다. 나에게는 또 이런게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참되게 서기에 비껴가는 것처럼 그런 사람이 뭐냐 하면 어린아이다 이거죠. 젖을 먹는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가봐야 알겠지만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젖을 먹는 아이다. 아이가 갓 태어나면은 참 신기 합디다. 태어난지 한 삼 십분도 안됐는데 어떻게 젖을 먹는지를 아기가 알아요.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혀와 입 끝을 놀리면서 젖 끝을 넣어주면 그걸 빤단 말이에요. 사실 배 속에서 젖 빠는 연습을 했을리는 없는데 말이죠. 참 신기해요. 하나님이 먹고 살게끔 조치를 해 주셨어요. 본능속에. 먹어요. 처음에 태어나면은 50cc정도 먹더라구요. 50cc라 해봐야 숟갈로 몇 숟갈 될 정도죠. 근데 이게 점점 양이 많아져. 우리 아이들은 우리 큰 아이를 보면은 18개월 그 땐가 한 번에 250cc 5분 안에 먹어 버리더라고 그럼 내 생각에 들어보세요. 십 개월 된 아이가 250cc정도 먹으니깐 십년 된 아이는 2500cc 먹겠구나. 그렇게 생각하죠. 안됩니다. 그래서 엄마들은 다 알고 아이들이 우유를 싫다고 해도 엄마 나 이제 컷으니깐 우유 싫거든 밥 줘. 그래서 아이하고 협의해서 우유를 끊는게 아니라 어느 상황까지 가면은 우유를 띠고 이유식을 먹이죠. 이유식을 먹이다가 시간이 끝나면 다 버리고 밥상에 앉혀 놓고 턱받이 해서 그래서 밥 먹이잖아요. 죽 쒀서 먹이다 그 다음에 밥 먹이잖아요. 그렇게 해야지 자라지 우유 먹고는 안되요. 그래서 아무 생각도 없이 자꾸 간단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데 그런 생활을 그런 것들을 선호 하는 사람들치고 영적인 성장을 계속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보셨어요? 없다고요. 신앙이라는 것이 일단 신앙 생활을 하다 브로크에 걸려서 미끄러지던지 침체가 되면은 옛날에 자기가 늘 들었던 말씀을 듣고 회복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 그러겠죠. 아니 옛날에 한번 설교하실 때에는 뭐 새로운 말씀을 듣고 변화 받은 사람 있느냐 늘 듣덛 말씀 듣고 변화 받았지 그러더니 오늘은 새벽은 왜 또 갑자기 그러십니까? 들어보라구요. 결론은 똑같은데 결론은 똑같지만 전개되는 방식이 달라야지만 그 말씀이 그를 변화시켜요. 자 들어봅시다. 이제 갓 신앙생활을 했어요. 근데 갓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제 겨우 거듭나고 신앙생활 할라고 그러는데 이게 마음을 잘 못 지키고 흔들리고 그래요. 그리고 아는 것도 별로 없어요. 뭐 세례문답도 제대로 못 외우고 거듭났으니깐 그때 그 사람은 그럴 때에 여러분 자신이 다 경험이 있을 꺼에요. 예수님 바르게 믿어야지 그랬는데 아는게 없어. 그래도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도우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내가 한번 믿기로 한 예수님이 이러면 안되지. 복금에 골격만 알고 있는데도 그거를 깨달으니깐 내 마음도 지키게 되고 다시 세상으로 안나가게 되고 신앙 생활하고 싶어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세월이 많이 흘러가면서 환란도 당하고 설교도 많이 듣고 이런 저런 교리도 많이 배우고 그랬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미끄러져서 완전히 망가진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요. 기도를 하라고 해도 쇠힘줄이야 기도도 안해. 왜? 힘드니깐. 근데 뭐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으라 해도 안해. 왜? 뭐 단정적으로 얘기는 안하는데 뭐 꼬인 것도 많고 그 다음에 귀찮고 싫어 힘도 들고 또 시간도 없도 또 말씀을 연구하려면 교회까지 나와서 공부를 해야되고 뭐 그러기에는 너무 바쁘고 여러 가지 핑계에요. 아 그러고 요즘에는 또 요즘 내가 신앙 생활하는 것에 대해서 아이렇게 힘들게 신앙생활 하는 것 밖에 없나. 이런거 회의도 생기고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오셨거들랑요. 근데 그 속에 당신도 포함 되있어요. 전혀 감동 안받아요. 감동 받겠느냐? 안받는다. 벌써 지적인 교만이 자라서 자기가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믿기 시작한 사람이 신앙생활 잘 하세요. 저도 처음 믿는데 신앙생활 잘 하세요 그러면 이제 믿은 것이 뭘 안다고 그러고 신앙 생활 많이 한 사람이 해서 그러면 아휴 잘난척 하네. 뭔가 하여튼 다 뒤틀리고 꼬여 있는 거죠. 그런데 이제 하나님에 말씀을 듣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알지 못하던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과 논리로 이 복음을 해석하면서 지평을 넢혀 주면서 이 해석들을 듣기 시작할 때에 막 이 망치로 뒷 통수를 맞은 것 같은 변화들이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좋은 예가 뭐예요. 엠마흐로 그 두 제자 있잖아요. 절망과 공포에 휩 싸여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들도 선지자와 시편 선지자 그 다 알고 있는 사람들 이였어요. 예수님이 그걸 다 알고 있는 그것들을 갖다가 다시 인용하시면서 그러면서 메시아에 대해서 설명하시기 시작하였어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다시 살것을 쭉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결론 자기들도 알고 있는 것이였는데 설명하는 방식들이 예수님이 독특했어요. 그랬더니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셨던 그분이 바로 메시아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망치로 뒷 통수를 꽝 하는 것. 마음에 성령이 임하시면서 뜨거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사도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그들이 이미 머릿속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정리해주는 거죠. 하나님이 사랑하셨는데 어떻게 사랑하셨느냐 어떻게 사랑하셨느냐 그토록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까지 사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변화받고 놀랍게 새워지기 시작하고 그니깐 그렇게 결론은 똑같아도 전개되는 방식이 달라야 하는 것이에요. 아무것도 자신에 영혼을 위해서는 노력하지 않고 그리고 신앙 생활이 힘들다고만 그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 나라가 적합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에 나라가 적합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순결한 빛 아래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뜨러운 사랑을 나누면서 그 은혜 속에서 지고에 행복을 누리며 사는 선택받은 성도에 아름다운 특권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회의 고민 그리고 시련 그런 그러면서도 하나님과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의 말 할수 없는 비굴함 믿음으로 살지 않으니깐 적당히 세상과 야합하고 자신에 결점과 부족을 보는 데 있어서는 소경이요 우맹이고 다른 사람들에 결점을 보는데 있어서는 아주 기가 막힌 그 매서운 눈초리를 가지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성죄하고 비판하고 그러면서 자기 멋대로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자기가 상상속에서 고안해낸 하나님 상상 속에서 고안해낸 믿음에 내용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죠. 경건에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자요 그런 모든 현상들이 어디에서 오는 거야? 의에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완전히 자기가 해체된 상태에서 마지 못해 끌려가는 것 같은 신앙생활을 노예처럼 어떤 복음에 능려도 맛보지 못한채 계속해서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는 것이죠. 왜 그러냐 세월이 많이 흘러도 어린아이가 다 늙어서 수염이 나고 얼굴은 다 쭈르러지고 그래도 기저귀를 차고 젖병을 들고 언어 대신 울음 소리로 대신 하는데 무섭잖아요. 돋보기까지 쓰고 요람에 누워서 그렇게 버둥거리고 있다고 똥을 싸고 그러고 있다고 생각을 해봐요.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사람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말 할 수 없는 불명예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가 오늘 의에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순수한 어린 아이를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병적인 유아 상태에 있는 그런 어린 아리가 있다 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들어가지 아니하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닦아 내고 어린 아이처럼 옷 깃을 주에 말씀 앞으로 나오고 끊임없는 참회와 하나님에 은혜에 대한 갈망과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기 원하는 사모하는 심정으로 매일매일 아버지 앞에 나오는 그런 진실한 삶에 신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