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74
목 차
주께서 진노하실 때(시 74:1) 1
주의 회중을 기억하소서(시 74:2) 8
원수를 파하소서(시 74:3) 13
주의 대적이 깃발을 세울 때(시 74:4-5) 19
성소가 더럽혀질 때(시 74:6-7) 25
전도의 표지(시 74:8-9) 30
하나님께 올리는 탄원(시 74:10-11) 36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시 74:12-15) 42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시 74:16-17) 47
기억하소서(시 74:18-19) 54
언약의 성격(시 74:20) 58
강포한 자들이 가득한 때(시 74:20) 64
언약을 따른 탄원(시 74:21) 68
언약적 연대(시 74:22) 74
시편76편 강해 1
시편75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시편74편 강해 1
주께서 진노하실 때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시 74:1)
본문해설
시편 74편은 탄원시로 분류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간절한 탄원을 드리는 기도의 시입니다. ‘아삽의 마스길’이라고 하는데 아삽이라는 사람이 이 시를 썼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고 아삽에 의해 보관된 시여서 저자가 누구인지는 모른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시편 42편을 다윗이 썼지만 고라 자손이 보관했을 것이라고 본 견해를 사용하여, 이전의 다른 경건한 저자가 기록한 것을 아삽의 집안에서 보존해 왔기 때문에 관례상 아삽의 이름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대해 무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마스길’이라는 단어는 ‘사칼’이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오는 사역형 분사입니다. ‘사칼’(lk'c;)이라는 것은 ‘지혜롭다’, ‘히스킬’(הִשְׂכִּיל)은 ‘지혜롭게 하다’, ‘마스길’(lyKim')은 ‘지혜롭게 하는 것’, 이러한 뜻입니다. 여기에 ‘마스길’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이 시를 많이 읽으면 지혜를 얻게 된다. 지혜롭게 하는 시다.’ 이런 의미입니다.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
74편에서 시인은 언약 백성들의 곤고한 형편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민족이 침략을 당해서 성소가 부서지고 파괴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의 후기에 지어진 시가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1절에서 시인은 절망이 가득 찬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그들을 징계하시는 시기에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드린 호소입니다. 역사 속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다루십니다. 그것은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성화되도록 하는 방법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고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다양한 연단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 앞에 세우시는 것처럼, 하나의 몸으로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다루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네 가지의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그들이 타락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하나님이 징계하시면 백성들이 회개하고,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역사가 이어집니다. 축복, 타락, 징계, 회개, 다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어지며 이것들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것 같지만 그러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아주 커다란 유익을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구속의 위대한 계시를 점진적으로 백성들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역사를 계속해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짓고 타락하는 것도 유익하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지 않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우리가 죄 가운에 거하겠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 매일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받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지만, 어떤 때는 미끄러지고 넘어져서 하나님 앞에 돌이킨 뒤 깊이 깨닫고 나면, 그렇게 실패하고 미끄러지고 넘어진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새로운 인식들을 갖게 된 것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영혼의 곤고함을 경험해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의 고귀함과 가치를 뼈 속 깊이 깨달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어두움에 대한 경험을 통해 빛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깨닫고 목마름을 통해 물의 고마움을, 굶주림을 통해 양식의 축복을 깨닫게 되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의 어두운 면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성품과 언약백성을 향한 도덕적 의지를 보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고 책망하실 때,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은총이 다하였는가? 이제 그의 자비는 그쳤는가?”라는 시인의 탄식했던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조차 낙심이 될 정도로 엄중하게 징계하셨습니다.
징계의 두 가지 국면: 하나님의 경륜
그러나 여기에는 항상 두 가지 국면이 함께 교차합니다. 그것은 이런 징계를 통한 하나님의 경륜과 징계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해입니다.
우선 첫 번째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뒤로 물러가서 언약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상실하고 살아가는데도 계속해서 번영하고 행복하다면 결국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과 빛 잃은 등불과 같은 사람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뽑아 세우신 의도와 상반된 삶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뽑아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위해 뽑아 세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그들을 선택한 우선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뽑아 세우신 것은 멀리 뒤돌아보면 아브라함을 뽑아 세우신 이유와 같고, 앞으로 멀리 내다보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뽑아 세우신 것과 동일한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죄와 불신앙 때문에 자기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외적인 도움을 통해서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해주셨고, 그 수단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로 물러가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주시고 번영하게 하심으로 당신에 관한 지식을 세계에 전달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로 물러가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 그들을 징계하셔서 당신의 도덕적인 성품들을 세계에 보여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 없거나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징계를 받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들을 판단하시는 엄위로우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시기 위해 때로는 경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징계의 두 가지 국면: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인식
또 하나의 국면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바라보는 이스라엘 자신의 평가입니다. 이 시를 쓴 사람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임은 틀림없지만 완전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완벽한 신앙을 가진 인간도 아닙니다. 시에서 탁월한 신앙도 보이지만, 73편에서 본 것처럼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좌절하고 낙심하는 연약한 믿음도 보입니다. 오늘도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영히 버리시나이까”,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때론 때리고 치시지만 결국은 싸매고 고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당하였지만, 결국은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우리가 그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정당하게 징계를 받으면서도 그 진노를 너무 크게 읽은 나머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영원하고 신실한 연약 관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약화되었습니다. 그런 탄식들이 도처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보여주며 탁월하게 경건한 시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믿음이 얼마나 바다위에 떠있는 배처럼 요동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바다에는 한 두어 사람 밖에 못 들어 갈만한 다라이 보다 조금 더 큰 쪽배에서부터 수천 톤, 수십만 톤에 달하는 크기의 배가 있습니다. 파도가 잔잔할 때 작은 배는 물결에 흔들려도 큰 배는 조용히 항해합니다. 그러나 파도가 세차게 일면 차이가 없습니다. 저의 제자 가운데 한사람이 선장이었는데 항해를 하면서 17m나 되는 파도를 만나보았다고 합니다. 요즘은 기상학이나 예보가 발달해서 인공위성으로 탐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태풍이 언제 일어나서 어느 경로로 간다는 것을 예상하고 피해가기 때문에 요즘은 그렇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파도를 만나면 30만 톤짜리 배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모두 그 앞에서 가랑잎처럼 출렁거릴 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경건하고 온전해 보이지만 커다란 시련과 국가적인 징계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요동쳤는지를 보여줍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인간 중에는 ‘위대한’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가랑잎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오늘, 3시 52분에 잠을 깼습니다. 몸이 피곤해서 더 자야겠는데 도저히 잠이 안 옵니다. 조용히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우주 속에서 한 점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어느 한순간 태어나서 한순간 사라지는데, 그것이 우주에 무슨 영향을 미칠까? 박테리아 한 마리가 몇 초 동안 생존하다가 가글을 하고 입속을 헹굴 때 죽어 사라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자신의 존재의 유한함을 인식하고 허무감을 느끼는 것은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허무와 연약함의 끝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며 살게 할 수 있는 지성과 믿음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이며 그분의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게 됩니다.
시인이 경건하고 탁월한 영적인 깨달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절망의 탄식을 토해놓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시인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장구한 날들에 대한 기억은 잃어버리고 국가적인 재난과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내팽개쳐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인식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것 같은 날, 모든 은혜에서 끊어진 것처럼 징계를 받는 순간에 우리는 우리를 돌보고 이끄셨던 하나님의 큰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징계하고 분노하는 순간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한 것을 기억하며 고난의 때를 이길 수 있는 신앙을 북돋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인은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연기’는 ‘콧김’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화가 나면 격한 감정이 들면서 씩씩거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조금 저속하게 표현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학적 표현의 방식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전쟁 때, 병사나 장수들은 자기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복수심에 불타며 콧김을 뿜게 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신앙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보게 되고, 또 한편으로 시인이 직면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얼마나 엄중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치시는 양들이 아닙니까?”라는 고백을 통해 남아있는 시인의 믿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큰 진노를 발하실지라도 목양의 큰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을 이끌고 돌보시는 분이라는 인식이 시인에게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치시는 양들인데, 어찌하여 당신은 우리를 향하여 양떼들을 습격한 맹수를 다루시는 것처럼 진노하시나이까?”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든지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혹여나 우리의 생명을 취하신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을 폐기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양들이라고 부르셨고, 성경은 우리는 주의 손에 길러지는 양떼들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자로서 자기의 양떼들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깊은 사랑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언약적 사랑에 기초하여 시인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자비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회중을 기억하소서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시 74:2)
본문해설
이 시는 원수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상황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탄원을 올리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시가 언제 쓰여 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주의 대적이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 바벨론에 의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시인은 나라의 커다란 환란이 성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은총을 거두신 것과 성소가 더럽혀 진 것을 연결시켜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종종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를 향한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탄원하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그들을 징계하실 때도 이런 기도를 올렸지만, 많은 성경의 경건한 인물들은 하나님이 은총을 예전 같이 베푸시지 않는 것 자체를 진노의 표식으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시인도 성소가 더럽혀지고 나라가 침략을 받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것 자체가 그분의 커다란 진노라고 믿었고, 1절과 같이 주님이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는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 탄원을 올렸던 것입니다. 시련과 환란을 당하여 나라는 위기에 처하고 성소가 더럽혀지게 되었을 때,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언약백성으로 삼으시고 지금까지 지켜오신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를 상기시키며 간절히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얻으신 백성을 기억하소서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옛적부터 하나님이 얻으신 백성입니다.”라고 합니다. ‘얻었다’는 의미는 ‘낳았다’는 의미와 유사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낳았다는 것은 그들이 언약관계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었던 백성들인데 언약관계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또 ‘구속하셨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구속’은 여러 가지 의미를 떠올리게 만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신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있었던 일차적인 그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내시고 모든 환란과 위협으로부터 건져내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정성과 공력이 들어간 민족입니까?”라고 시인은 하나님께 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속의 개념과 하나님 앞에 보배로운 민족이라는 개념은 동전의 양면처럼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건져내어 구속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매우 소중한 백성입니다. 그들을 주님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셨습니다. 기업은 유산과 같습니다. 기업은 대부분 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땅에서 많은 소득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시고 기업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많은 열매를 기대하셨습니다. 이사야 5장에서는 그것을 의와 공평의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것처럼 의와 공평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온 나라와 모든 열방들이 의와 공평의 신학적인 의미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공평하게 살지 않고 자기 이익에 치우친 삶을 살면 형통하고 편안할 수 있는데, 왜 이 사람들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의롭고 공평한 삶을 사는가?’ 의문이 들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은 당신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입니다”라고 아뢰는 것입니다. 이 내용 중, 주님이 모르시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에 시인이 이렇게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희미한 기억들이 새로워진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실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성경적인 내용을 상기시켜드리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일종의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기시켜드리는 기도는 모든 것을 알고계신 하나님을 위한 기도라기보다는 이러한 사실을 늘 잊고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 기도자 자신의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감사 속에 과거를 향한 회고와 그분을 향한 찬송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의 거하시는 시온산을 기억하소서
시인은 “주의 거하신 시온산을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주의 거하시는 시온산’, ‘예루살렘’, ‘주는 이 성막에 계십니다.’ 혹은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니 천하는 그 앞에 잠잠할 지어다.’ 등의 구절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본질로서 거하신 다기보다 하나님이 그들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갖고 계시며 특별한 방식으로 교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주기도문을 시작하면서 설교하였듯이 하나님은 이 세계에 계시지만, ‘계시다’는 의미가 물질이나 영혼이 세계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계신 것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차원으로 세계 안에 계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물질과 영혼을 보는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이 계시냐?”고 말할 때는 차라리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물질의 길이를 시간의 길이에 아무리 대입시켜도 연상이 안 되듯이, 물질과 만물이 세계 안에 있다는 개념과 하나님이 계시다는 개념을 아무리 대입시켜도 연상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하나님에 비할 수 있는 사물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들보다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하나님은 모든 만물이 있는 것처럼 이 세계에 계신 것도 아니다. 그래서 세계에 모든 사물보다, 어쩌면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 영혼에 가까이 계신 분이시며 동시에 이 세계의 아무데도 계시지 않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이 ‘시온에 거하셨다’고 하는 것은 시온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시온에서 자기 백성들과 교통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의 성막 위, 혹은 지성소 안에 계신다 할지라도 거기 계시기 때문에 다른 곳에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이 성막에 계신다’고 할 때, 그분은 그 성막 안에서 자기의 백성들과 특별히 교제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답게 만드는 정수에 속하는 종교적 축복이었습니다. 그 축복의 중심성이 외곽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강해지는 데, 최종적으로 그곳은 시온이고, 시온산보다 더 안에 속한 곳이 성소입니다.
“시온산도 생각하소서”라는 말은 ‘기억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생각한다’라는 단어는 ‘사랑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시인이 시편 8편에서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십니까” 하며 감격할 때, ‘생각하다’는 ‘사랑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커다란 감격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주의 거하시는 시온산을 생각하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시온산에서 당신의 자락을 펼치시고 이 나라를 통치하기로 하신 것을 기억하시옵소서.” 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명
‘멜리딧 G. 클라인’(Meredith G. Kline)이라는 학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세 가지 큰 사명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사명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자의 사명입니다. 예배와 성결로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제위적인 사명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자가 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참으로 진실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드리기에 합당하도록 자기를 성별해야 합니다.
두 번째 사명은 성소를 지키는 사명입니다. 이것은 교회적인 사명인데, 한편으로는 교회를 순결하게 지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를 번영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 도덕적으로 순전한 사람이 되어서 교회를 깨끗하게 보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영적인 번영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번영하는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십니다.
세 번째 사명은 문화적인 사명입니다. 이것은 노동과 선교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선교를 받아 왕으로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무릎 꿇기 전에는 이 세계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과 자신들이 노동과 봉사를 함으로써 세계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가꿔야 한다는 것을 결코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배자요 성소를 지키는 자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 삶의 중심축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중심선상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시온산과 황폐하게 된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파하소서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시 74:3)
본문해설
2절에서 시인은 주님의 백성을 기억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 후에, 3절에서 주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탄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라는 것은 “다른 데로 가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시옵소서.” 정도의 뜻입니다. 우리가 발걸음을 떼어놓으려면 발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 뜻으로 “발을 드시옵소서”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쪽 방향으로 길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라는 것은 시온의 형편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악한 자들에 의해서 유린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영구히’라는 구절은 ‘지속적으로’ 혹은 “파멸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바로 그 땅으로 주님의 발걸음을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리로 와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시온과 성소가 악한 자들에 의해 파괴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고 인간적인 눈으로는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시인은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가지 대안은 하나님이 발걸음을 이곳으로 옮겨주시는 것이라고 시인은 못 박고 있습니다.
시온에 임하옵소서
세상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일로써 일을 처리하거나 일로써 일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시인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관계된 일은 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와주시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대안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유린되고 시온이 황폐하게 된 것을 해결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시온에 오시고, 성소에 오셔서 당신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이 대안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는 시온과 언약이 깃들어 있는 예루살렘과 당신의 임재를 약속하신 성전이 더럽혀지고 파멸되고 황폐하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먼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황폐함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당신과의 영적인 관계와 눈에 보이는 땅의 질서들을 통해서 그들의 영적인 밤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시온이 황폐하게 되고 성소는 유린되었고 예루살렘에는 커다란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이것은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돈을 모아서 예루살렘의 성소와 관련된 것들을 정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건축학적인 접근이지 신학적인 접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약속이 깃들여 있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온전함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 세우셨을 때 의도하신대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있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시온과 예루살렘과 성소가 온전히 서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성소를 지키는 것입니다. 원수들로부터 거룩한 성을 보호하고, 한편으로는 성소의 거룩함을 확장해 나가야 할 사명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시인은 장기간 계속되는 파멸을 보면서 “이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라고 간절한 간구를 드립니다. 원수들이 파멸하고 지나간 것을 바로 세우고 시온과 성소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의 대안이 “주님, 여기에 오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 뜻이 이루어지며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의 구약적인 전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여, 주는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임하시옵소서.”라고 노래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성소의 영광, 하나님과의 관계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성소를 더럽히고 파멸된 장소로 만들었던 끔찍한 악행들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의 침공을 두고 이 시를 쓴 것이라면, 이것은 그들이 성소의 모든 기명들을 뜯어가고 훼파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악에 대하여 “상태가 개선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는 파멸된 곳으로 주님이 발을 드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파멸과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이 깃든 시온이 파멸되고 성소가 더럽혀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와 성소에 관한 규례들을 율법을 통해 엄히 명령하시고 중요하게 생각하셨지만 그것은 성소와 하나님의 율법에 자동적으로 매달린 힘이나 약속이 아니라 언약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게 사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과 축복이 있다”고 하는 여호와 종교의 영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싸웠던 ‘아벡의 전투’를 기억할 것입니다. 전세가 불리해진 이스라엘은 법궤를 앞세워 전쟁에 나갔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법궤를 메고 나가면 하나님도 따라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보기 좋게 패하고, 법궤는 원수들의 손에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종교적인 의식이나 법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가지고 나갔을 때는 전쟁에서 졌는데 오히려 법궤를 빼앗기고 ‘이제는 법궤까지 빼앗겼으니 하나님이 완전히 우리를 떠나셨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 혼자 기적을 일으켜 그들에게서 법궤가 돌아오게 하신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똑바로 경험하게 만드셨습니다.
교회와 성도와의 관계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을 섬기는 것, 성소의 영광에 이바지하고 거룩한 시온의 번영과 부흥에 이바지하는 삶을 사는 것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에게 개인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행위를 하고 이런 저런 태도를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는 개인적인 일들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개인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으로 봉사하든지 간에, 그것들은 모두 전적으로 공동체에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이바지하고 어떤 이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교회에 흠을 내고 심지어는 파멸시키는 데까지 이바지합니다. 죽을 때까지 항상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사실을 인정하는 한, 언제나 ‘나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 있고 나는 교회의 일부다.’라는 생각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는 연합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소명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고, 신자로서의 소명은 세상에 있는 동안 주님의 성소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흩어진 많은 보편 교회의 성도들 중, 그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며 그리스도의 몸을 자신의 몸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도 시온산을 생각해 달라고 하나님께 빌고 주의 성소가 파멸된 것으로 인하여 안타까워하며 주의 성소가 원수들에 의해 짓밟힌 것 때문에 하나님께 탄원하고 호소하는 자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두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 잡혀 각기 자기의 안목에 옳다고 생각하는 소욕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성소와는 상관이 없는 삶의 태도들은 결국 영원한 것들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앙망하며 주의 거룩하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주의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끊임없는 평화와 합치가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 때 군인들에게는 하루빨리 이 전쟁에서 이겨 나라를 되찾고 백성들을 비참한 전쟁에서 구원해 내야 한다는 일념만 있다면 다툼은 곧 사라지게 됩니다. 전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나머지는 그 핵심적인 가치에 종속되어야 하는 가치입니다. 군인이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의견이 서로 달라도 분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내 지위가 무엇이며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는 끊임없는 분열은 교만과 이기심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윤리적으로 반응하고 노력하며 은혜를 받을 때 주님의 교회는 올바로 서가게 됩니다. 그러나 선행하는 은혜 없이는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갱신될 수 없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주님이 교회에 계신 것과 그 곳은 세상에 있는 다른 장소와 구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자신이 인생의 주인인줄 알고 살았다 해도 그 장소에 들어가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며 자신의 중심을 바라보고 참회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영광을 갈망하는 삶의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때 비로소 시온의 영광이 있고 예루살렘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주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도록 빌어야 합니다.
주의 대적이 깃발을 세울 때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시 74:4-5)
대적이 깃발을 세움
시인은 원수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모임 가운데 와서 어떻게 훼방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인은 ‘주의 대적이’라고 표현하는데 복수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는 원수들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합니다.”라고 하는데 ‘훤화한다’는 말은 우리말로 ‘떠든다’는 뜻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일어나다’, 혹은 ‘으르렁거리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회중에서 소리를 지르며 자기 기준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습니다.”라고 할 때, 히브리 성경에는 ‘자기의 기준들’, 또는 ‘자기의 표준들’을 ‘상징으로 또는 표적으로 세웠습니다.’ 라고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악을 자행할 때 누구도 그들을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회중임에도 거기에서 소리를 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 나름대로의 삶의 기준들을 훼파하고 거기에 자기의 기준들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인 것처럼 표준들을 세우고 그것으로 표적을 삼았다는 뜻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등등한지 시인은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 나무들이 서있고 나무를 하는 사람들은 도끼를 들고 올라갑니다. 혼자가 아니라 ‘원수들’이라고 복수로 표현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벌목을 하러 산으로 올라가서 힘차게 도끼를 내리찍습니다. 그러면 오랫동안 그 산을 지키고 있었던 나무들이 여기저기서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벌떼같이 몰려와서 나무를 찍으면 하나씩 하나씩 나무는 쓰러지면서 무성하던 숲은 황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염두에 두고 묘사를 한 것입니다. 도끼를 들고 자기를 베어버리려고 하는 벌목꾼들에게 나무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아무런 저항할 힘이 없는 나무들은 도끼에 찍혀서 무참하게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 갔습니다. 그 광경은 마치 이스라엘이 아무 대책도 없이 원수들에게 꺾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에 시인은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교회에 침투하는 세상의 가치
이것은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역사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대적들이 주의 회중에서 소리를 지르고 자기의 표준을 세워 표적을 삼았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이고 교회인데 그 안에 세속의 가치가 성경의 진리보다 높이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것은 누가 세운 것입니까? 하나님이 세운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대적들이 주의 회중에 세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적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 없이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원수들은 사람의 도움과 섬김 없이는 결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랜 시간 성도들을 유혹하고 설득하고, 특히 성령의 진리로 영혼의 깨우침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 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따르게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고 교회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하지 못하고 모양은 교회이고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지만,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소명 대신에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자기의 이름을 내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악한 마귀는 세상의 표준을 교회에 도입하고 그것으로 표적을 삼게 만듭니다. 교회가 원래 가지고 있는 소명에는 충실한 대신, 세상의 가치관들을 교인들에게 확산시키고 세상과 교회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는 것처럼 설득합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섬기고 봉사해야 할 기관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게 합니다. 모양은 종교의 모양을 가졌으나 실상은 교회도 세상 나라의 일부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악한 세력들의 궤계입니다.
이 당시에는 이스라엘을 침략한 원수들에 의해서 이러한 악이 행해지는 것을 보았다면, 오늘날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 같이 대놓고 교회를 침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단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지만 이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세상의 정욕과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이것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인들을 더럽히고 그 후에는 교회의 순수성을 파괴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서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우리의 선교와 사역과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고 전도하는 섬김과 봉사,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고 선교하는 목회적인 사역들은 결코 육적인 사역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질적이고 영적인 사역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사역들이 계속될 때 이것을 막아서고 방해하는 것은 육적인 세력들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교회에 침투해서 진리에 입각한 가치관을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바꾸고, 성경에 입각한 믿음의 규칙들을 세상의 규칙들로 변형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살아야 할 굳센 삶의 교훈들을 세상에 있는 규칙들로 제시하기 시작할 때 종교의 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영적인 힘들은 상실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힘, 진리의 표준
물론 기독교인의 삶 속에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διάφορα)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무엇 하나를 고집하지 말고 넉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디아포라’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견해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생각들을 용납하고 이해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나는 이것이 주님을 올바로 믿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나의 견해가 다른 사람의 견해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른 입장에서 그처럼 생각할 수 있고 나는 그것을 존중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에 관한한 성경이 명백하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이 두 가지를 아주 쉽게 바꾸는데 있습니다. 절대적이고 불변해야 할 것들은 너그럽게 포기하고 섞이고, 아무래도 괜찮은 것들에 대해서는 자기의 견해를 강하게 고집하므로 교회가 분열되고 사람들이 서로 반목과 질시를 일삼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나의 가까운 이웃이 성경 말씀을 거슬러 사는 것이 나에게 분노를 일으킵니까? 아니면 내 인생과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살 때 분노를 일으킵니까?” 전자가 아니라 대부분 후자입니다. 나는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안 지킬 때는 십계명 중 하나를 범한 것보다 더 나를 분노하게 합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성입니다. ‘약속을 지키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가치가 있는 덕목입니다. 그러나 십계명보다 더 커다란 것이겠습니까? 자기의 인생관과 거스를 때는 분노하고 자기의 인생관과 어울릴 때는 친구가 되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를 때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너그러움은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질서를 세우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끊임없이 원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결단과 용기와 깊은 성찰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가치관과 표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로부터 가져오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그들의 마음속에 살면 모든 표준들이 분명해지지만,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면 표준들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올바로 알거나 깊이 알지 못하면 불변하는 성경의 표준과 변할 수 있는 사람의 견해를 혼돈하거나, 혹은 개인적인 생각을 절대화해서 성경의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하는 지성의 분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준인지, 그 기준들이 우리의 모임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쉽게 “나는 진리를 알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 우리가 믿는 모든 내용들, 그리고 우리 가운데 통용되고 있는 습관과 생활의 방식들은 아주 엄정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의해 검증되고 확증되고 확인되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누구도 완전히 신앙과 부합한 삶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치열하게 진리에 의해서 검증되고 연단되어 예전에 우리 안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이 진리로부터 어긋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면, 정직하게 잘못을 돌이키고 정결하게 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노력들이 순환을 이루고 그 진리에 끊임없이 굴복하고 가까이 다가갈 때 주님이 원하시는 정신과 신앙의 표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힘은 육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들의 모든 힘은 그들이 붙들고 있는 진리의 표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진리를 기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건강한 사람입니다. 겨울철의 과일은 우리의 몸을 이롭게 하고 먹는 순간에도 기쁨이 있지만 치통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과는 독약과 같습니다. 밝은 빛은 우리에게 매우 좋지만 안질이 있는 사람들은 어둠속에 있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진리를 우리가 기뻐할 수 있고 그 진리를 마음에 띠고 진리를 표준으로 세우고 그 표준에 따라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못하는 면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기뻐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건강하게 살고 있음을 이미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 외적인 번영을 주시고 모든 것들이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이 흘러가는 것 같아도 영적인 시야를 가지고 바라보면서, 우리 가운데 진리의 표준들이 표적이 되고 있는지, 세상의 표준들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믿음의 표준들이 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믿음의 표준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며 살아가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성소가 더럽혀질 때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시 74:6-7)
본문해설
본문은 원수들이 성소에 들어와 성소를 파괴하고 더럽히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이 생생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성소를 더럽히고 파괴한 사건이 역사 속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바벨론 침공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소가 더럽혀짐
도끼와 철추를 가지고 성소의 조각품들을 쳐부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종교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었습니다. 주의 성소를 불살라 버리고 거기에 있던 금은기명들과 값진 보물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다고 했는데 얼마나 철저하게 주의 성소가 더럽혀지고 짓밟혀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파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고 막을 수 있는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파괴되고 더럽혀지는 성소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맺고 있는 관계를 반성하고 뉘우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파괴당하고 더렵혀지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 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권을 펼치셨습니다. 성소는 매우 거룩한 곳이고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다짐을 결단하며 종교적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인 행위가 삶 속에서 구체화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원수의 손에 불살라지고 더렵혀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여호와 종교의 본질이 결코 하나님이 세우신 성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고 이들이 범죄 하게 되자, 하나님은 성소를 더렵혀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슴 아픈 방법으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통치하시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의 성품과 뜻에 맞는 삶이 종교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할 때 성소는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는 곳이고 하나님이 언제나 도와주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더럽혀지지 아니하고 그 안에는 자동적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 법궤를 들고 나간 것도 바로 그러한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이 어떠하든지 법궤가 함께하면 내재되어있는 신비한 힘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결국 법궤는 빼앗기고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을 버렸을 때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가 아니라 궤짝에 불과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실하게 따르고 사랑하는 동안에 성소는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중심이자 왕권의 중심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버렸을 때 성소는 건물에 불과했습니다. 대적들이 쳐들어와서 도끼와 철추로 조각품들을 부수고 성소를 불살랐을 때 성소는 불타기 시작했고 더렵혀진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 하나님을 사랑함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주님이 진리를 보존하는 곳입니다. 세상은 교회의 도움 없이 진리를 받지 못합니다. 진리의 참 빛은 교회 안에서부터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교회보다 더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놀라운 증거도 교회 안에 충만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놀라운 증거는 주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주권을 백성들의 신앙에 의존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를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교회는 보여줍니다. 어느 시대의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하게 하지만, 어느 교회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니 너희는 그 앞에 잠잠 할지어다."라고 말해줍니다. 진리는 불변하지만 진리의 빛이 비추는 것은 가변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앞에 설수록, 매 순간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반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믿는 종교의 영적인 특성을 무시하고 미신적인 신앙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소와 거기에 있는 조각품들과 거룩한 땅 시온조차도 종교의 본질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종교의 본질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러르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에서 최대한 구현해내려고 몸부림치면서 살 때, 교회는 약한 것 같으나 강하고, 교회가 대적들에 의하여 짓밟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종교의 영적인 특성을 찬란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만 성소에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이 돈독한 때에도 핍박과 시련은 늘 교회에 있었습니다. 원수들이 핍박하거나 교회를 불사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소가 더렵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행위 자체 때문에 성소가 훼파되고 더렵혀졌다고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필요할 만큼 성소의 백성들이 먼저 죄를 짓고 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결 같이 성소를 보존하고 율법을 지키며 성소의 규례를 따라 예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마음에 하나님을 버린 후였습니다. 원수들이 도끼와 철추로 성소의 조각품들을 쳐서 부수고 성소를 불사르는 악행을 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성소가 더렵혀지고 있다는 생각에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들이 한 행동보다 더 나쁜 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하여 일어났습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몰랐기 때문에 성소를 불사르고 도끼와 철추로 조각품들을 쳐서 부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영적으로 성소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본분을 불결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를 지었고 오히려 악한 원수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성소가 파괴되고 거룩한 곳이 더럽혀지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여호와 종교의 영적인 특성을 깨우쳐주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크고 위대한 일들을 매순간 이루시기 위해 당신의 마음을 역사 속에서 보이십니다. 한 나라를 향하여, 한 보편교회를 향해서만 이일을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을 향하여도 당신의 마음을 보이십니다. 성령 안에서 매일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복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외적인 환경을 통하여 당신의 생각을 보여야할 필요성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주님을 우러르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심판을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분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도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시는 가장 큰 형벌이 내버려 두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의 백성들을 불러 말씀으로 깨우치시고, 환경으로 깨우치셔서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주님의 교회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속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 표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의 종교의 본질을 굳게 붙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의 표지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시 74:8-9)
본문해설
시인은 원수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땅을 침공하여 파멸시키고 있는 절망적인 상태를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성소를 유린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를 파괴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말하고 있는 바를 직접화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의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여기에서 ‘회당’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흩어진 가운데 생겨난 제도입니다. 그래서 ‘회당’이라고 한 이 번역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모에드’(d[e/m)라는 단어인데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모에드’는 모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혹은 ‘대회’라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어떤 건물을 가리키기보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회집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지만 여기에서는 회당은 복수형태로 나옵니다. 그래서 회당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곳마다 이들이 불 질렀나이다.” 이렇게 번역을 하면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항상 경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크고 작은 규모로 어떤 장소에서 모일 것입니다. “회집한 곳마다 파멸하였다”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거처를 대적들이 파멸하는 만행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소만 유린된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들의 삶의 처소가 원수들에 의해 파멸된 것을 보여줍니다.
예배와 일반적인 삶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하실 때 두 가지 원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작은 원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생활, 즉 종교의 영역이고 밖에 있는 넓은 원은 그들의 일반적인 생활입니다. 이 두 가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의 종교생활이 가장 잘 집약된 것이 예배생활입니다. 예배생활의 핵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선지자에게 말씀이 주어지고 그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언약백성들의 태도에 있습니다. 그 속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던 율법의 계시들을 자기 삶의 표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넓은 원에 비유할 수 있는 일반적인 삶의 영역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재정립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떨어질 수 없는 연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종교생활을 제대로 안하면 바깥에서부터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안에부터 먼저 흔들리게 됩니다. 안에 있는 예배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게 은밀한 영역이기 때문에 바깥으로는 표가 나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에 뜰만 밟는구나.”라고 책망했을 때, 정해진 날 성소에 나가서 규례를 따라 제사를 드리는 모습 속에서 무엇이 얼마큼 무너지고 망가졌는지 일반적인 사람들은 외면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사를 드리러 가서 술을 먹고 드러눕는 사람이 있겠으며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럴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완전하신 하나님의 눈에는 이 모든 것들이 판단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먼저 무너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되어 있는 삶이 무너지면서 자신의 욕망과 소욕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다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삶의 외적인 영역들을 적절하게 다루시면서 그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당신의 감정을 보여주십니다. 징계, 심판, 혹은 하나님의 책망하시는 섭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관을 직시했던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명백하지만 그들이 모르던 사실들에 대해 책망하시고 각성을 호소하면서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께서는 개인이든, 교회든, 혹은 사회이든 커다란 심판과 징계가 임하기 전에 충분히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충분히 말씀을 주십니다.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충분히 거절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성소를 차례대로 유린당하게 하시면서 그들의 종교생활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다음, 전국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의 처소를 유린당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그들을 향하여 징계하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인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 런지 우리 중에는 아는 자가 없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표적’, 혹은 ‘표징’은 히브리어로 ‘오트’(t/a)라는 단어입니다. 이 ‘표적’이라는 단어는 모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범죄 했던 사건에서부터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모두 진멸해버리겠다고 말씀하시자 모세가 목숨을 걸고 용서해달라고 매달립니다. 성경책에 기록된 자기의 이름을 차라리 지워달라고 호소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때 하나님이 두 번째로 제시하신 것이 백성들은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되 나는 함께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신데 하나님이 없이 가나안땅을 차지하면 뭐하겠습니까?” 모세는 그 핵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단장품을 모두 제하고 회막을 만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회막에 나아가서 자신들의 죄와 강퍅함을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빌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거두시고 그들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모세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우리에게 당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표징을 보여주시옵소서.” 하면서 다시 매달립니다. 그때 하나님의 임재가 모세의 앞을 지나가는 큰 징표를 주십니다. 이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에게 선을 베푸신다는 표징입니다.
그런데 이 표징이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나 종교, 백성들의 일반적인 삶, 어느 영역을 들여다보아도 하나님의 은총의 표징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은 절망적인 심경을 하나님 앞에 토설합니다. 표징과 함께 사라진 것이 또 하나 있는데 ‘선지자도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진노의 표현은 징계하시는 게 아니라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최고의 진노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아이러니합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반항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그 섭리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책속에서 세상 사람들, 심지어 신자들이 하나님께 반역하는 감정을 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반역과 하나님을 향한 도전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끊임없이 막으십니다. 양심의 자연적인 작용으로부터 큰 징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자연적인 섭리 속에서 막으시는 은혜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방법으로 죄의 출산과 반역이 노골화되는 것을 하나님이 막아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진노하시면 붙들고 있던 손을 놓으십니다. 그러면 인간은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극악한 악인들의 형통함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공동체를 그렇게 다루실 때가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거두십니다. 선지자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갈지 모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커다란 진노의 표현입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명예와 부와 지위를 주시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돌이켜 주님의 사람이 되고 주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 되도록 그들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말씀으로써 보내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책망하시고 진노하실 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여전히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붙들고 계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은총 안에서 복주심
본문은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철저히 감추시고 당신의 불쾌함과 진노를 백성들에게 보이고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단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를 끌어안고 하나님의 마음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의 힘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신약 교회사 속에서도 늘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교회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고 생각에서 차이가 날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공통적인 합치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통치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를 전심으로 바라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이 사회가 하나님이 주신 정직과 공평, 자비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온 땅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로 가득차지 않아도 사람들이 일반은총 안에서 삶의 질서를 따르며 사는 나라가 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일반적인 은총 안에서 복을 주십니다. 이러한 공평과 정의가 무너지고 파괴되면 하나님이 그 나라를 심하게 다루십니다.
이번에 중국에 가서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몸서리치도록 가슴이 아팠습니다. 북한 보육위에서 나와 탈북자들을 데리고 갈 때, 굴비처럼 철사로 입을 뚫고 사람들을 꿰어서 데려간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서 철사로 묶어 간다고 합니다. 중국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끔찍해서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끌고 가면 탈북자들을 안 넘겨주겠다고 하니까 요즘은 밧줄로 묶어서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지금도 길거리에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가고, 식량난도 더 악해졌다고 합니다. 그래도 93년도처럼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는 이유는 옛날에는 사람들이 배급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지금은 이것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서 산 밑을 호미로 파서 조그만 땅을 만들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생존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10년이 넘도록 중국, 일본, 한국에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북한만 십년이 넘도록 흉년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살아가는 것과 땅이 척박해 지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북한을 도와야 합니다. 이번에도 마음에 눈물이 났는데 이것 때문입니다. 북한에는 20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그중 상당수가 굶어 죽었습니다. 옛날에 남한으로 넘어온 탈북자 한사람이 집 앞에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붙들고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이렇게 넉넉하게 사는데도 왜 우리를 돕지 않았느냐?” 그랬을 때, “김정일이 개념 없이 얄밉게 굴어서 안 도와줬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고사하고 역사 앞에서 그것이 정당화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깊이 반성해야 하는 지점에 와있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굶주리는 동포들을 돕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절실하게 느끼면서, 이 모든 슬픔을 종식시킬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제 신문에서는 식량을 카드로 내밀면서 북한을 설득하자고 하는데 불가능합니다. 백성들이 다 굶어 죽어가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포악하고 완악하게 사는 이들을 일반 섭리 속에서 다루어 고난을 주십니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호소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정을 토로 하고 있습니다. 이 때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어떤 내용으로 기도했는지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탄원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시 74:10-11)
본문해설
시인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호소하면서 하나님이 이 상황에 개입해 주시도록 간청을 드리고 있습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항하여 훼방하고, 하나님의 이름은 원수들에 의해 능욕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이름의 명예입니다. 그런데 지금 원수들에 의해 하나님의 성소가 파괴되고 주의 백성들이 모인 곳이 훼파되어서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두고 계십니다. 대적들은 짓밟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너희의 신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력하게 파멸당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현실 속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름이 능욕을 받을 때
시인은 자신의 안녕과 행복만을 위해서 이러한 탄원을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마음속에는 그보다 더 큰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은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이방백성들 가운데서 현저히 모욕을 당하고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와 불순종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멸하고자 하시고 모세에게 제안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쓸어버리고 모세를 통하여 새로운 후손을 세우리라고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명예스러운 일일수도 있는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한번 선택한 당신의 백성을 파멸하실 때 이방가운데 받게 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오히려 모세는 우리가 알아듣게 하기위해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 같은 화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면 이방사람들은 여호와라는 신이 자기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켰지만 능력이 모자라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파멸시켰노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께 매달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훼파되어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말발굽으로 성소를 유린했고 언약 백성들은 개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때 예레미야의 가슴에 불이 임했고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상황 속에서 그는 유명한 예레미야 애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백성들은 장롱 깊이 묻어두었던 패물과 재물들을 가지고 양식을 사기에 급급했습니다. 자신의 행복과 평안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가치가 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언약백성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그들의 삶의 보람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고난의 길을 가도 거기가 천국이고, 그럴 수 없다면 세상의 부귀영화도 그에게는 가시방석 같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많은 세상에서 언약백성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
시인은 통탄하며 대적의 훼방과 원수의 능욕을 하나님께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믿었다면 이렇게 그 앞에서 처절하게 간구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주의 성소가 유린되고 언약백성들이 모인 곳이 훼파되는 이유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불순종과 악으로 말미암아 불쾌함을 나타내셔서 그들을 당신께로 돌이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태도를 바꿔달라고 탄원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고 불순종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터득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종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역경과 어려움이 오고, 신앙에 반하는 상황이 전개될 때 하나님의 능력은 멀리 있고 그분의 권능은 언제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쉽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돕기에는 너무 멀리계신 하나님이라고 오해합니다. 세상사는 결국 우리의 의지대로, 악하면 악한대로 선하면 선한대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셔서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간섭하지 않으시는 국외자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이 왜 떠났으며 하나님의 간섭이 왜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라고 일깨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대적들의 훼방과 원수의 능욕을 하나님께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기도에 마음을 쏟아 동참할 수 있다면 그들이 악인들에게 짓밟히는 동안 침묵하시던 하나님은 이 상황에 개입하실 것이고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셨을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바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뀌어야 할 분이 당신이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그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는 멀리계신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가까이 이끄는 수단처럼 보이지만, 본질을 생각해 보면 기도를 통해 주님을 멀리 떠났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분의 의지와 상관없는 것을 구하던 우리가 바뀌어 그분의 의지에 부합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보다 더 커다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성도들 치고 기도의 세계가 없는 사람이 없고, 기도의 세계 속에서 자기를 주님 앞에 복종시키는 기도의 정신을 함양한 사람 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완고하고 독선적인 사람들은 기도의 연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정복하심
오늘날 교회와 선교의 상황은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를 많이 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 악하기 때문에 구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악한 상황을 보면서 짓밟히고 모욕 받는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들에게 능력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상황을 주님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신 상황으로 묘사합니다. 오른손은 능력의 손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선택한 자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사야 41장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오른손은 선택의 상징이자 하나님의 권능의 표징입니다. 오른손의 능력이 이스라엘에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이스라엘을 모욕할 수 없고 그분의 이름을 유린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을 거두시자 원수들은 이스라엘을 능욕하기 시작했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있는 곳이 더렵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른손은 하나님이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큰 권능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백성들이 주의 은혜의 권능을 경험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 뜻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키시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자랑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세상을 정복하실 때 세상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방식으로 일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움과 환란과 시련과 핍박이 있을 때, 하나님이 큰 권능의 손, 오른손으로 교회를 붙드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원수들이 목숨을 잃고 파멸합니까? 구약 시대에는 언약백성들을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써 하나님이 이방 백성들을 파멸하시는 사건이 종종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앗수르군대 18만여 명이 하루 저녁에 몰살당한 사건을 볼 수 있지만, 디도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쌌을 때 그들이 멸망당했다는 보도를 신약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방식이 구약과 신약에서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줍니다.
로마 카타콤에 가면 그림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지위가 높은 군인 한 명이 로마군인 들에게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 같은 모습이 되어 죽어가는 장면입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황제를 호위하던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카타콤에 숨어있는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물과 떡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것이 발각되었고, 이러한 행동은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낙인찍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수많은 군사들이 그를 표적으로 삼아 화살을 쏘는 방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온 몸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이 세상 누구의 얼굴에서도 볼 수 없는 지극한 평화와 용서, 그리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가득한 가운데 운명합니다. 그의 순교는 오히려 그에게 화살을 쏘았던 많은 군인의 가슴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이구나.’라는 인상을 강렬하게 심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세상을 정복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해하거나 개인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쉽게 앙심을 품게 됩니까? 그들에게 구약 시대에 임한 것 같은 천벌이 내리기를 바라며 기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는 여호와의 오른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수가 고통을 만나거나 가슴 아픈 일로 괴로움을 당한 것 때문에 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에 나타난 오른손은 무력이 아닙니다. 주님이 교회에 오른손을 얹고 계실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가장 완악한 죄인들을 굴복시키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드십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오른손을 거두신 것에 대하여 당신의 품에서 손을 빼어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도록 시인이 간구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의 오른손으로 교회에 복음의 일들을 행하도록 호소하고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은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매달리는 백성들에게 당신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악인들의 박해나 괴로움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버린 것과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오른손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당신의 교회에서 거두실 때 교회가 얼마나 초라해지는지를 발견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몸부림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큰 사랑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기도하고 매달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시 74:12-15)
본문해설
시인은 11절까지 우울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버리신 것 같은 환란과 악인들의 침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때 문득 시인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역사들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과거의 고난에서 건져주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회상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훌륭한 찬양이 됩니다. 우리가 찬양하는 내용 중, 하나님께 새삼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모두 당신이 행하신 일이고 당신이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당신 자신이 행하신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하고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경건의 기술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찬양할 제목, 왕이신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나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왕으로서 자기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모든 인간을 가리킨 다기보다 전능한 신이신 하나님과 대조를 이루는 이 땅의 언약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시인의 찬송의 제목이었습니다.
우리는 왕의 치하에서 살아 본적이 없기 때문에 이 말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 왕정 하에 살던 사람들에게 왕이란 백성의 자랑이요 백성의 힘이요 백성들의 구원입니다. 왕은 나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고, 자비를 베풀 수도 있고 학대할 수도 있는 모든 권한을 왕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은 이 세상 제왕들과는 견줄 수없는 일체의 자비하심과 사랑으로 자신들을 통치해 오신 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들 침공하여 예루살렘이 유린되고 시온이 짓밟히게 된 사건은 시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시인은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진노를 살만한 일을 한 여호와의 기업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책망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책망하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어렸을 적부터, 조상 때부터, 아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득한 옛날부터 의롭고 자비롭게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왕이었습니다. 언약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시인은 회상을 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두운 절망적인 역사 속에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주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구체적인 구원의 행동을 먼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이것은 명백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던 날, 홍해를 가르신 사건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 앞에 섰고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준 것을 후회하는 바로가 군대를 급파했습니다. 육백승의 병거가 군사들을 싣고 질풍같이 달려왔습니다. 하나님이 불기둥으로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지 아니하였다면 그들은 아마 진작에 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그들을 구원해주지 않으시고 무서운 애굽 군대와 대치상황을 겪게 하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밤새도록 바다를 향해 명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가난해 질만큼 가난하게 된 때, 그들 중 완악한 자들이 “어찌하여 우리를 여기로 인도하여 죽게 하느냐?”고 모세에게 대항하고 있던 그때,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바다를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마른땅과 같은 길을 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벽처럼 선 물 사이로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시인은 이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악한 나라의 군대가 성소를 유린하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을 더럽혀 땅에 엎어 버렸지만 지금보다 더 암담한 절망의 끝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큰 권능을 생각하며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은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찬양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일깨워 하나님께 고정하게 하고 우리의 심령을 일깨워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찬양의 목적입니다.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13절에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는 바다를 나누신 사건을 뜻하는 것 같고 “리워야단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이것은 또 다른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비유적회고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해석해봅니다. 이것을 왜 용으로 표현했는지는 모르지만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습니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뒤에 따라 들어왔던 바로의 많은 군사들이 파멸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에서 용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징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것은 악한 자들이 파멸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이 다시 합쳐지고 그 속에 애굽의 군대들이 수장되는 광경들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악한 자들이 잠시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것 같고 큰 권세로 파멸시킬 것 같아 보이나 결국은 하나님이 심판하여 그들의 머리를 깨뜨리셨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악한 군대들의 만행도 하나님이 물리쳐 주실 것이다.”라는 기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리워야단의 머리를 파쇄하시고’라고 할 때, ‘리워야단’은 히브리어로 ‘악어’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악어에 관한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것은 포식자의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용의 머리’, ‘악어의 머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의 상징이고 머리를 파쇄하셨다고 하는 것은 완벽하게 진멸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절은 문자 그대로 악어와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회고라기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들어섰을 때 그들이 가는 길을 가지 못하도록 방해했던 나라의 왕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머리를 파쇄하셔서 사막에 거하는 자들에게 식물로 주셨다.”는 의미는 그들을 깨뜨리셔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시고, 그들을 파멸시켜서 전리품을 나누게 하신 것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한 후, 광야 생활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중 몇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가 바산 왕 옥과 아모리 왕 시혼을 깨뜨린 것에 대해 여러 번 감사의 찬송을 올렸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합비루’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합비루’라는 말은 당시 고대 근동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기도 했지만 ‘이주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합비루라고 부른 것은 오합지졸들이 몰려다니는 거지 떼 같은 이주민이라고 멸시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멸시를 받을 만큼 하찮아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을 꺾고 광야에서 만난 수많은 나라들을 깨뜨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셔서 전리품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누어 갖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고 이끄신 방법이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 섬김의 길에서 시련을 만나고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할 때조차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자기를 믿는 언약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다를 나누시고 큰 능력으로 용들의 머리를 부수신 것처럼 우리의 생애의 난관과 시련들을 꺾으실 것이며, 광야와 같은 섬김에 길에서 만나는 많은 시련과 고난들, 하나님의 교회의 번영을 해하고자 하는 원수들의 집요한 시도를 하나님이 깨뜨리고 파쇄하셔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무이고 하나님 앞에서 언약백성들이 행해야할 바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시 74:16-17)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본문은 출애굽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자연세계와 땅의 만민들이 경계를 이루고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말합니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이것은 가고 오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낮과 밤, 빛과 해,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낮과 밤을 대조시킨 것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 시편 19편에서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통치가 끝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온 천하에 가득한 하나님의 통치의 증거가 우주의 한쪽 구석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난다는 것을 대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낮과 밤이라는 표현이 시편에서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선과 악의 날카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들은 흔히 생각할 때 인간에게 행하는 악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요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악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있고 멀리서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는 관점으로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에게 일어나는 충동적이고 자의적인 성격의 악입니다. 그러나 먼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놀라운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통치하시며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수단과 방법이 됩니다. 그것 없이는 하나님이 그 일을 못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의지로 행한 악을 사용하여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지혜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론에서 악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던 과거를 회상합니다. ‘만약에 악이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악이 없게끔 완전하게 창조하지 못하셨을까? 만약에 악이 자연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하나님은 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선하게 만드시고는 악을 주셨을까? 악이 보태어짐으로써 모자라는 선을 보태기 위함이었던가?’ 고민을 합니다. 나중에 ‘악이 인간에게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그것을 선으로 바꿀 수 없다면 그분이 어찌 하나님이실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서 악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악의 문제는 아주 신비합니다. 그래서 잘 연구하면 이것이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아주 훌륭한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앨빈 플랜틴가’(Alvin Plantinga)라는 철학자는 “인간세상이 왜 악하냐고 묻는 것 자체가 종교적인 질문이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다.”라고 반박을 합니다. 상당히 성공적인 반론이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선만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도 주관하신다 하는 의미도 이 안에 묻어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이것을 출애굽 당시와 연관시켜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해석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애굽 땅의 모든 초태생을 죽이시기 직전에 내리셨던 형벌중 하나가 어두움이 온 땅에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애굽 사람들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재앙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라’(Ra)라는 태양신이 신앙의 대상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태양신, ‘라’를 섬기면서 바로는 ‘라’의 아들이라고 믿어왔습니다. 동양으로 본다면 천자(天子)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태양이 빛을 잃고 흑암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요동치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성소가 더렵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린당하고 있는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모든 세계와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회상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건의 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고 하면서 고난을 당할 때 눈을 들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그 속에서 논리를 찾고, 그 논리 속에서 신앙을 찾았습니다. 오늘 당하고 있는 고난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하나님 앞에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있는 경건의 기법이었습니다.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이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땅의 경계’는 민족들의 경계입니다. 나라와 나라사이의 경계를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지키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각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오면 나라의 경계에 대한 분쟁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나라와 나라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나라의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면 기근과 전쟁이 임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예고하고 있습니다.
“경계를 정하셔서 서로 침범할 수 없게 하시고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할지라도 사시와 연한과 추위와 더위, 심음과 거둠, 이 모든 것들을 질서 있게 주겠노라고 다짐하십니다. 이것이 노아의 언약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들이 모두 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이 세상을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맹세하십니다. 인간에게 축복으로써 여름과 겨울 같은 뚜렷한 사시와 연한들을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시인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비록 지금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원수들에게 짓밟혀 성소를 유린당하였으나 하나님이 역사적인 상황을 온전히 지켜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며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묵상했습니다.
경륜 안에서 선을 이루심
세상에 자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자신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나쁜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본래부터 나쁜 일, 좋은 일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좋아 보이는 일도 잘못 사용하면 나쁜 일이 되고 나빠 보이는 일도 잘 사용하면 좋은 일이 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받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론 나빠 보이는 일들을 통해서 좋은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요셉이 자기의 형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들을 나를 해하려고 악을 행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갚으셨나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때로는 나빠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도 모르는 우리 자신을 보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십니다. 성소가 유린당하고 하나님의 처소가 짓밟혀 백성들이 고통을 받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기 직전까지도 두 개의 신앙이 대립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신앙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를 나쁘게 못하실 것이다.’라며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은총을 하나님을 섭리의 창살에 가두는 구실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을 당하고 끌려가면서 후자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기 위해 힘쓰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아, 하나님의 생각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이 나에 대해 이런 뜻을 가지고 계시구나.’를 깨달으며 나의 생각을 그분의 생각에, 나의 뜻을 그분의 의지에 맞추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선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극히 크신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선으로 인도하신다고 해서 어떠한 어려움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걸어가는 길에서 때로는 역경과 시련, 형통하지 못한 상황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도 인생의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일생을 다 살고나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올바르게 그 길을 따라가려는 순간순간의 몸부림을 통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계속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따라 가고자하는 사람은 생을 다 산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고자 하는 모든 몸부림 자체를 통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안에서 행복해집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커다란 행복의 비결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의지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을 비추심
인간은 죄를 비롯해 여러 가지 불완전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잘 모릅니다. 남은 잘 들여다보고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가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십니다. 자기는 자기 자신을 잘 성찰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진리의 빛을 받는 분량에 비례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은 진리의 빛을 받지 아니하면 불공평하게도 자신의 육체밖에는 사랑하지 못한다.”고 한 것처럼, 진리의 빛을 찬란하게 받을 때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보고 사랑할 자신과 미워해야할 자신을 공정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이 사람 속에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진리의 빛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리를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빛은 좋은 것이지만 안질이 걸린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을 주는 것처럼 진리를 가르쳐 준다 해도 인간의 마음이 굽어서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공정하게 보지 못합니다.
진리가 있건 없건, 물은 물이고 꽃은 꽃이고 산은 산이고 바다는 바다입니다. 보는 대로 압니다. 내가 진리에 처해 있어도 배고픈 것은 배고픈 것이고, 진리를 멀리 떠나도 배고픈 것은 배고픈 것입니다. 나의 영혼의 상태와는 상관이 없이 육체가 목마르면 물을 먹고 싶고 목이 마릅니다. 이것은 신앙이 없어도 잘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육체 앞에 세워서 육체의 처지, 상황들을 통해 나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선하신 분이라는 표지가 됩니다.
예를 들어, 불길이 솟아오르면 거기에 구리, 철사, 플라스틱, 종이들을 던집니다. 그러면 각양각색을 내면서 타오릅니다. 그것이 타고 있다는 것은 불길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불길이 원래 있었지만 잘 안 보였는데 태울 것을 넣으니까 색깔을 내면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선하게 대우해주시는 분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관점에서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선입니다. 우리가 만약 선을 거슬러서 행동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것을 태우셔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우리는 고통을 주시는 것 자체를 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 하나님은 나를 싫어하신다. 나만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피해를 주시는 분이다.’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 자체가 선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스르면 우리에게 고통을 주셔서라도 선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삶을 통해 계속해서 드러납니다. 크고 작은 우리의 삶의 상황, 내가 만나는 시련과 역경, 좋은 일과 나쁜 일,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묻어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라도 ‘너의 마음이 어떠한 줄 알아라.’ 하시면서 나 자신 앞에 세워주십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는 회피하고 변명할 수 있었는데, 나를 나 자신 앞에 세우시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워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는 사실을 양심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때론 가혹해 보이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당신의 큰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였든지 당신의 음성을 듣고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은 성소가 유린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짓밟히는 고통스러운 역사의 한 장을 지나면서, 자기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지나면서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민족들과 사시와 연한을 구분 짓고 그들로 시간 속에서 영영히 이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를 묵상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 하나하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일어나는 쓰라린 일, 회상하기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들이 당시에는 뼈저리게 아픈 악으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시고 병든 우리를 고치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과 영광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억하소서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시 74:18-19)
본문해설
나라가 위기를 만나고 성소가 훼파되던 때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행동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18절은 시편의 대표적인 저작방식인 대구법, 혹은 평행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원수’는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성소를 유린한 적군을 가리키고, 뒤에 나오는 ‘우매한 백성’은 피해를 당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원수가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훼파하고 성소를 더럽히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렇게 짓밟힐 수 있느냐? 너희는 헛된 신을 섬기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비방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주의 성소가 유린당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비방이고 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악의를 품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작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할 때
본문은 “그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사실인데, 첫째는 원수들이 예루살렘을 훼파하고 성소를 유린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고 그 원인은 백성들의 죄 때문이라는 점에서 주의 백성들이 주의 이름을 능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성소가 유린당하고 시온이 파괴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예레미야애가 1장을 보면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소를 유린하였을 때 백성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은 성소가 유린되었을 때도 집안에 숨겨둔 자신들의 돈을 가지고 나와서 천정부지로 치솟은 가격을 주고 곡식을 사기위해 분주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너희에게는 내게 임한 것 같은 불이 없느냐”고 외쳤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일신의 양명을 구하고 자신의 안위를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주를 능욕하는 행동이라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한 자들은 불신앙을 가진 원수들이었지만 침공을 당하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실천적인 무신론자의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기억하소서
시인은 “주의 산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산비둘기는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되는 제물인데 가장 가난한 자가 올리는 제물이었습니다. 산비둘기의 생명과 가난한 자의 목숨이 병행법으로 일치를 이루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산비둘기라는 제물 자체가 가난한 자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산비둘기를 가져간다는 것은 정말 가난하지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착한 마음으로 이 예물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이 산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이런 회화적인 어법이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산비둘기의 생명 자체는 외적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힘없이 약탈당하는 이스라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나마 살아남아서 이러한 상황을 보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시인과 같은 남은 자들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산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옵소서. 이 산비둘기는 가난한 자가 주님 앞에 바쳐져야 할 제물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에브욘’(@/yb]a)이라는 단어는 ‘가난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결핍되어 가난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마음이나 심정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자신의 시편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하며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라고 노래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은 외적으로 볼 때 한나라의 제왕이었지만, 심정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거지와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비참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몸부림치며 구하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외적으로 약탈을 당하고 버림받아 가난하고, 마음이 궁핍하여 하나님이 필요한 가난한 자들입니다. 백성들의 생명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의 백성들은 원수들에게 짓밟혀 주님의 이름을 능욕하기 위해 빚어진 것이 아니라 당신의 나라와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세움 받았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이 백성들, 가난한 자들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시인은 간절히 호소합니다. 화자가 단수로 쓰여졌지만 이것은 시인 자신을 가리킨다기보다 하나의 대표명사로서 이스라엘의 경건한 백성들 모두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배교하는 것 같은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불꽃을 유지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남은 자들을 불씨로 삼아서 다시 불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은 자기의 선택된 백성들을 아주 버리시는 법은 없습니다. 버리시는 것 같아도 그것은 정결하게 하기 위한 과정이고 깨끗하게 하셔서 다시 흥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에 시인은 “산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시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시옵소서.”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이 주님의 손에 달린 것처럼 주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평화와 안녕도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시인은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앞에 간절히 탄원하고 있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도 영적으로는 이와 같은 상황 속에 있는 백성들이 아닙니까? 시대에 묻어가지 말고 그 시대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을 가지고 주님을 간절히 의지하며 간구하는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언약의 성격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시 74:20)
본문해설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탄원을 올린 시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기도에 묶으려고 하는 것처럼 언약을 하나님께 상기시킵니다.
언약의 양면성
이 언약은 일방적인 면과 쌍방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주권에 관한한 언약은 일방적입니다. 그러나 의무와 순종과 관련해서는 쌍방적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언약이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무제한적인 사랑, 은혜, 자비, 긍휼, 주권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고,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의무, 책임, 순종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바에 따라 그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정당성을 드러내는데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 긍휼을 호소할 때에 언약을 제시했고,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에게 “너희는 올바르게 살아라.”고 하실 때에도 언약을 제시했습니다. 더욱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실 때도 언약을 제시하셨지만, 그들을 심판하실 때도 언약을 제시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말로 ‘언약’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적당한 말이 없습니다. ‘언약’이라고 번역하면 일방적으로 약속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계약’이라고 번역하면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쌍방적으로 약속을 맺는다는 개념은 전달되지만 언약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서 주권 안에서 맺어지는 일방성의 개념은 전달이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말의 한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언약의 개념이 상당히 잘못 전달되었습니다. 언어 안에서 의미가 규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약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언약관계에서의 일방성만 지나치게 강조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에 개신교 안에서 언약개념을 가지고 언약의 일방성을 강조하는 해석가들과 쌍방성을 강조하는 해석가들이 함께 나오게 됩니다. 후에 영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이 두 가지가 아주 절묘한 조화를 이룬 형태로 설명됩니다. 존 오웬 목사의 업적중의 하나가 그것의 탁월한 이해입니다.
언약을 기억하소서
여기에서 시인이 “언약을 돌아보소서. 언약을 기억해 주십시오. 회상하십시오.”라고 호소합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습니까? 자신들의 죄와 비참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역사적으로 징계하신 것에 대해 한 번도 원망하거나 정당성에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 언약백성들의 죄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대비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더라도 문제가 남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만 언약의 당사자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언약의 당사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원수들에게 짓밟히고 성소가 유린되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으로 끝난다면 쌍방관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따라 응보하시는 하나님은 주권은 성취되지만, 일방성에 따라 자기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고 언약관계를 도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은 설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것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데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봅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베리트’(tyriB])입니다. 학자들은 ‘베리트’라는 말이 바벨론어의 ‘바리투’에서 오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견해입니다. ‘바리투’는 족쇄를 말합니다. 죄수들을 옥에 가두고 도망갈 수 없도록 이 사람의 발하나와 저 사람의 발하나를 묶어놓는 것입니다. 족쇄로 묶인 사람들은 운명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면서 선포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서로가 서로의 소유가 된다는 말은 운명공동체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영영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시는 섭리적인 심판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뜻과 상관없이 원수들이 한 짓입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들은 그러한 역사관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확고하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덕적으로 명백하게 언약을 저버리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불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방성의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완전하신 하나님이고, 언약의 당사자인 인간은 불완전한 사람인 것을 하나님이 다 아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분 앞에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서 살아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삼는다고 했던 사도바울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뿌리 깊은 언약사상을 배경으로 하나님께 “언약을 돌아보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백성이 저지른 악과 죄를 본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내버려두시고 끝내셔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언약을 돌아보신다면 이 백성들을 이렇게 내버려 두셔서는 안 됩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때리시는 것은 언약의 쌍방성을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당신을 배반한 자식을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는 것은 일방성의 소산입니다.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시인은 하나님의 약점을 찌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해서 약점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신 말씀에 토대를 둔 것입니다.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죄짓고 악하여 범죄 했고, 하나님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 붙이사 악인들에게 짓밟히게 하셨습니다.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분이시고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한번 선택한 당신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영원하신 사랑과 은총의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언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구약성경에서 언약백성의 믿음이라고 할 때, 이 믿음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하는 심리적인 확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이루어지는 신앙의 방식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믿음의 방식이 언약을 기초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리고 무한이 높으신 하나님을 명상하면서 ‘그분 때문에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이다. 그분이 다 도와줄 것이다.’라고 여기는 신앙은 엄격한 의미에서 진실한 신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주 옛날부터 성경의 구속사 시대를 나누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존 오웬 목사가 쓴 『성경적 신학』이라는 800페이지 가량 되는 두꺼운 책을 보면 시대를 나눕니다. ‘아담의 시대, 노아의 시대, 아브라함의 시대, 모세의 시대’ 이런 식으로 나눕니다. 그 시대를 구분하는 근거는 단순히 사람이름이 아닙니다. 사람이름으로 구분한다면 아담만 있겠습니까? 아브라함, 모세, 노아만 있겠습니까? 중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람이름을 따라서 나누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대를 나누는 핵심이 있습니다. 그 핵심적인 열쇠는 언약입니다. ‘아담시대’에는 아담시대의 언약이 있습니다. ‘노아시대’ 하면 노아와의 언약이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죽었어도 노아의 언약이 그 시대를 결정하는 키입니다. 언약이 서로 다른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을 가진 언약이지만 언약이 시행되는 방식이 시대마다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노아가 죽었어도 노아에게 주신 언약의 방식을 따라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관계가 드러날 때는 노아가 죽어도 노아시대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었어도 여전히 아브라함의 시대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약시대’는 일관성에서는 같은 언약이지만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언약이 주어져서 언약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구약에서 작동했던 방식과 전혀 다릅니다. “너희를 위하여 세우는 새 언약이니”라고 할 때, ‘디아데케 카이네’(καινὴ διαθήκη)라는 희랍어를 씁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제품인데 새로 나왔을 때 ‘네오스’(Νέος)라는 말을 씁니다. 작년에 만든 것과 똑같은 옷인데 형태가 하나도 안 바뀌고 올해 또 나왔습니다. 그런데 새것입니다. 이것이 네오스입니다. 또는 작년에 만들었는데 올해 새로운 것이 나왔습니다. 수동식에서 전자식으로 바뀌거나 아니면 성질자체가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카이네입니다. 핸드폰이 스마트폰으로 개발되어 나왔다면 이것은 네오스가 아니라 카이네입니다.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 된 것입니다. 신약은 시기적으로만 새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륜으로 역사를 움직이실 때 하나님의 언약의 경륜이 각각 칼라풀 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이 언약입니다.
언약, 우리의 소망의 근거
“언약을 돌아봐주십시오.”라고 할 때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당신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짓고 불순종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해 당신은 비난 받으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내버려두시는 것은 언약을 맺으신 당신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예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없애버리고 너를 시조로 삼아서 다시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모세가 그러지 마시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그렇게 하시면 이방 백성들이 생각할 때, 여호와라는 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끌어냈지만 힘과 능력이 모자라서 끝까지 인도할 수 없으니 죽여 버려서 자신의 무능함을 정당화시켰다는 비난을 받으실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언약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언약을 돌아보소서.”라고 백성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가장 약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을 하나님의 약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완전성 때문에 오는 약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때문에 언약백성이 갖게 되는 소망의 근거로서의 약점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것은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라는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강포한 자들이 가득한 때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시 74:20)
본문해설
어제는 언약의 특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인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회개했던 것은 언약의 쌍방적인 특성,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으면서 언약의 당사자로서의 의무를 온전히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으로 데려가 묶으신 것은 하나의 은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 차체가 생명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무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커다란 특권이고,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일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큰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가 여러분에게 넓은 땅 덩어리를 떼어주면서 그 나라의 임금이 되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의무도 따르겠지만 그 자체가 얼마나 커다란 은택일지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언약 관계 속으로 백성들을 불러들이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 속에 구약과 신약이 함께 놀랍게 들어가 있습니다. 일방성의 은총이 복음적인 특성을 가졌다면 그런 언약 관계 안에서 의무를 행하고 살아야 하는 구약적인 특성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언약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당신이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돌보아주시옵소서. 우리가 언약의 의무에 충실하지 못하여 성소를 짓밟히게 하시고 예루살렘이 파괴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정당한 징벌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우리에게 베푸실 은총이 남아있지 않사옵나이까?” 이렇게 탄원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강포한 자들이 가득할 때
시인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처소가 가득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영구적인 지배의 형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포악한 자가 어느 시대에든 일어날 수 있고 그들이 일어나서 종종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입니다.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라는 것은 강포한 자의 세력이 집에 항구적으로 머물면서 포악함이 보편화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어느 시대에든 도둑이 있고 강도가 있고 범법자들이 있습니다. 사회가 맑으면 범법자들이 죄를 지어도 금방 발각되고 발각되면 사회전체가 범법자들에 대해서 항거하고 저항하기 때문에 모를 때는 그렇게 할 수 있어도 알려지고 나면 도망을 가거나 멀리 이사를 가야합니다. 그런데 사회가 이것들을 용납하고 이해를 해주면 “그래. 내가 돈을 좀 훔쳤다. 내가 법을 좀 어겼다. 너희들은 다른 게 뭐냐?” 이러면서 많은 사람들의 묵인, 혹은 지지 속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아갑니다. 오늘날의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몰래 숨어서 하던 일들이 백주 대낮에 떳떳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어제도 선거를 하면서 경선에 부정이 있었다고 했더니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데 내가 재수 없게 걸렸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성이나 후회, 자기 잘못에 대한 진정한 인정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사람이 용기를 내서 도전을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의 처소가 항구적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나그네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거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주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적군이 쳐들어 올 때 그 안에 내통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일본 강점기에 거기에서 부역했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해서 7년 동안 식민지처럼 지배했습니다. 그때 독일 정권에 찬동하는 정권을 프랑스에 세웠습니다. 그 사람들은 배반자들입니다. 부역을 하고 독일이 연합군과 전쟁을 할 때 나라 전체가 독일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등 그들에게 유용한 일들을 했습니다. 나중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펼쳐졌고 나라를 다시 빼앗았습니다. 되찾기 전에 히틀러는 잔일할 정도로 프랑스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엄청난 파괴가 이루어집니다. 드골 대통령이 돌아와서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파리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파괴되었습니다. 고문당했습니다. 그러나 해방되었습니다.” 그 후, 7년 동안 단 한 줄이라도 나치를 찬성하는 글을 쓴 신문과 잡지를 모두 폐간합니다. 그리고 독일 정권에 부역한 사람들 7천명을 사형시킵니다. 요즘 우리로 말하면 과거청산에 있어서 확실하게 줄을 그은 것입니다. 그때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고 동유럽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한없이 높입니다. 역사청산이 확실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이 안 되어 있습니다. 정의의 개념이 무너지고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고 죽은 사람들을 제대로 예우해 주지 않으니까 국민들에게 애국심이 현저히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존립에 있어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삼키기 전에도 벌써 바벨론과 내통하며 그들에게 빌붙어서 권력과 부를 누리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인간들이 이스라엘 안에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다.”고 할 때 강포한자는 배반한 사람들과 예루살렘과 시온에 진군한 애굽의 병사들을 가리키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었을 때 비굴하게 나라를 팔아먹은 인간들이 떵떵 거리고 호령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사 큰 능력으로 역사에 간섭해주십시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흑암한 곳에서 드리는 기도
‘땅 흑암한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캄캄하다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고 지키며 살아야 할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어둠이라는 것은 율법의 빛이 사라져서 캄캄하게 된 것을 뜻했습니다. 무지의 어두움 속에 강포한자들의 처소가 가득한 상황에서 시인은 언약백성이 하나님의 언약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된 것을 놓고 하나님께 간섭해달라는 간절한 탄원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을 때도 복과 은혜를 주시고 영적인 은총을 내리지만, 악이 가득하고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때도 간섭하셔서 당신의 자녀들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럴 때 먼저 깨어난 선각자가 항상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고 몸부림치며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언약을 따른 탄원
“학대 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시 74:21)
언약의 일방성, 하나님의 신실하심
21절은 언약사상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언약 안에는 쌍방적인 개념과 일방적인 개념이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는 은총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쌍방성이라는 측면을 고려할 때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위반하실 일은 없습니다. 그분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실하다는 말 자체가 언약관계를 기초로 한 진실에 대한 해석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진리이시고 노력 없이도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그 언약을 배반한다든지 언약을 스스로 어기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방성을 가지고 쌍방성을 폐기하시지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불안정하고 가변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파기할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신적이 없어도 인간에 의해 얼마든지 파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언약관계를 인간에게만 맡겨두었다면 약속은 벌써 깨어졌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일방성을 가지고 백성들이 당신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헤세드, 자비입니다. 공의의 측면에서 보면, 이미 한쪽이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파기하셔도 그분을 비난할 이유가 없고 정당합니다. 그러나 언약의 당사자인 백성들은 자신들이 언약을 파기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일방성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일방성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하면서 은총을 구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용서는 언약의 쌍방성의 표현이 아니라 일방성의 표현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냥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진실하게 참회하고 은혜를 구하는 자를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로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가 공로가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이 나에게 커다란 손해를 입혔는데 그가 용서해 달라고 진심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그래. 사람이 살면서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용서할게.” 이렇게 용서를 했다면, 그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내가 용서받은 것은 내 사과가 진실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자비심과 너그러운 도량 때문에 내가 용서를 받았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언약에 근거하여 호소함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순종을 위한 무한한 능력의 공급입니다. 순종하려고만 하면 하나님은 순종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죄를 짓고 언약관계를 파괴했을 때 진실하게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하여 한번 선택하신 사람들과의 언약관계가 하나님의 의해 파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파멸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언약에 대한 시인의 집착은 굉장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기억하사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탄원하며 나아가야 할 텐데, 오히려 이 계시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던 구약시대의 시인들이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신실하고 열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학대받는 자의 명예를 구하는 탄원
시인은 그런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합니다.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학대 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라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학대받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벨론으로부터, 바벨론과 내통한 친바벨론파로부터 능욕을 당하고 고통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학대를 받았고 이것 자체가 언약에 대한 중대한 침범입니다.
사실 구약언약 자체는 진정한 휴머니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단순히 인간을 억압하고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 하나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묶어 언약관계 안에서 참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이 땅에 펼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 줍니다. 그 점에서 구약의 야훼 종교가 진정한 휴머니즘의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반드시 사회에 학대받는 계층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결국은 사람들을 학대하고 짓밟으면서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국가를 영위해가고 사회를 존속시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시고, 언약 맺은 백성들끼리 누구를 지배하고 누구를 억압하는 일이 불가능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예를 들어, 토지개혁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헨리조지의 영향을 받아 이 나라의 땅 전체를 국유화하고 땅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지배받고 지배하는 구조에 묶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사실 레위기에 나오는 희년사상을 반영한 것입니다. 땅을 잃어버려도 그 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돈을 가지고와서 도로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년에는 그런 것 없이도 모두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누구도 땅 때문에 짓밟히거나 학대받는 일이 없는 균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안에 높낮이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인간으로서 존재의 존엄과 가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백성들에게 행한 악은 언약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 행한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죄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언약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사상을 갖고 하나님이 많은 돈과 능력과 남다른 재능을 주셨을 때 그것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세우는데 이바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짓밟고 지배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학대 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이것은 명예를 구하는 탄원입니다. 나라가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고 성소가 짓밟히고 유린되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시인은 그들의 명예와 존엄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여호와 종교가 휴머니즘을 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짓밟히고 학대받는 자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할 명예나 존귀함을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시인은 이것을 어디서 배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대접해 주시는 것 가운데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학대받는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서 수치 속에서 돌아가지 말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탄원
시인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 ‘궁핍한 자’, 유사한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다윗의 시에도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다윗 한사람의 문체가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자비를 호소하는 기도의 보편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외적으로 무력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비참한 이들을 상대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디 가서 기대거나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 상황은 누구에게 기대거나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의지하는 외적인 상태를 보여줍니다. 내적으로는 자신을 의지하고 신뢰하던 마음이 깨뜨려지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진실하고 간절한 의존의 마음을 함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있습니다. 시인이 올리는 기도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짓밟히고 버림받고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을 상실하고 비참해질 때 그것을 보고 마음아파하면서 “언약공동체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의 돈을 빼앗았을 때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남의 명예를 실추시키거나 근거 없이 평판을 훼손했을 때는 거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물질을 훔치고 빼앗은 것도 죄로 여기지만, 근거 없이 그 사람의 평판을 허물어뜨리고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게 하고 수치를 알리는 것을 커다란 잘못으로 규정합니다. 물건을 빼앗는 것은 그 사람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명예를 빼앗는 일은 그 사람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커다란 잘못이며 죄일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물건을 도둑맞았다는 소문은 몇 번 흘러가다 마는데, 어떤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다는 소문은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져 나갑니다. 근거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퍼져갑니다. 한번 훔친 것은 자기의 죄로 끝나지만 누군가의 평판을 허물고 명예를 훼손했을 때는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옮기면서 그 죄에 계속해서 동참하게 합니다. 이런 것에 대한 교육이 현저히 안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저급한 민주주의 내지는 표현의 자유와 같은 세상의 정신에 영향을 받으면서 성경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중요성
시인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태가 되어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어떤 한나라와 공동체를 용서하고 다시 사랑을 베풀고 싶을 때 경건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부어주셔서 당신의 마음에 꼭 맞는 탄원을 올리게 하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부흥회의 역사를 보면 많이 나오는 사례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간절히 호소하는 것처럼 우리도 교회와 사랑하는 공동체를 품고 기도한다면 얼마나 많은 변화가 오겠습니까? 이것은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언약적 연대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시 74:22)
본문해설
하나님이 원통함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통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만연한 죄와 강포들을 보았습니다. 온 땅에는 불의한 자들이 번영했고 그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학대하고 짓밟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백성들 속에 원통함이 쌓였습니다.
˚일어나소서˛
시인은 “주의 원통함을 푸십시오.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십시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여기에 ‘일어나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구약성경에 특히 많이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동작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이것은 은혜와 상관이 없는 표현일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커다란 사실을 깨닫고 결단하면서, 새로운 삶을 향하여 일어나는 자기개혁을 뜻합니다. 신약에 와서도 이와 같은 결단의 용례가 구약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먹으려고 하는데 찾을 수가 없었을 때, 그가 결단한 것은 “일어나자. 그리고 아버지께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도 구약에 나오는 ‘일어나다’라는 말의 의미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동일한 단어들이 성경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는지를 염두에 두면서 해석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이 단어를 적용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앉아 계시거나 누워계시다가 일어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들이나 백성들의 상태에서 떨쳐내듯 일어나는 어떤 개혁과 변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일어나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우리들에게 어떤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는데, 이것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껏 우리들을 지켜보셨다면 이제는 역사적인 상황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위해 일해 주십시오.”라는 일종의 탄원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상태를 하나님이 자신들을 내버려 두신 상태로 표현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힘입어 떨치고 일어나 현실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이런 식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언약적 연대,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
“주님의 원통함을 푸십시오”라고 할 때 여기에서 시인이 느끼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있는 언약적인 연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학대를 받고 어떤 사람은 포악한 자들에게 억눌림을 당하며 짓밟힐 때, 현상적으로 보면 그것은 단순히 사람에게 억울하게 짓밟히는 것 이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로 보면 그렇게 학대받고 짓밟히고 고통을 받는 백성들 가운데 주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언약을 파기한 악인들에 의해 짓밟히고 이민족에 의해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는 거기에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역사를 통해 독일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독일만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마는 일류 역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유럽을 점령하면서 가는 곳마다 유대인을 색출하고 유대인 600만 명을 죽였습니다. 유명한 홀로코스트의 사건이 그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죽을 구덩이를 스스로 파게 한 뒤, 총으로 쏴서 죽이다가, 나중에는 사람들을 계곡으로 몰고 가서 수십만 명을 집결시켜 총으로 쏴서 죽였습니다. 죽은 사람들을 계곡에 가득 채워놓고 흙으로 묻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으로는 자기들이 원하는 만큼 죽일 수 없으니까 만들어 낸 것이 가스실입니다. 가스실 옆에 소각장을 만들어 가스실에서 죽은 시체를 계속 태웠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할 당시, 러시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침공했습니다. 전투기가 3,000대, 대포가 8,000문, 156개 사단 300만 명의 군인들을 동원했습니다. 결국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 같았지만 겨울이 오면서 불리해졌습니다. 포로를 잡을 때 인원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대형 부대를 한 번에 잡았는데, 한번은 60만 명을 한꺼번에 잡고, 한번은 70만 명을 한꺼번에 포로로 잡았습니다. 추운 겨울에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처음부터 포로를 먹이거나 수용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군데 모아놓고 130만 명 모두를 서서히 굶겨 죽였습니다. 그런 끔찍한 만행들을 저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 출신이지만 그들이 다 유대교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도 있고 철학자들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몰트만(Jürgen Moltmann)’이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나치에 의해 유대인들이 몰살당하는 끔찍한 민족적인 고통을 전부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신학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입니다. 그것은 “600만 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유대인들이 죽어갈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계속 물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대답은 “하나님이 바로 거기에 계셨다. 고통 받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살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대받고 짓밟히고 고통 받는 상황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원통해 하면서 “공의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의 비참한 비극 한가운데 주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끔찍한 고통과 괴로움을 하나님 자신의 원통함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적 연대입니다.
이러한 그림은 신약시대에 명료하게 나타납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을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여 박해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가 되셨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상황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박해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언약적 연대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도바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시며 “가시 돋친 막대기에 뒷발질하는 것이 너에게 고통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이나 소가 거치적거린다고 뒷발질을 할 때 뒤에 있는 것이 가시덤불이라면 차면 찰수록 자신의 발에 상처가 생기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영적인 연합을 통해 구약시대보다 더 생생하게 언약적 연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본문을 보면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고통 받고 학대받는 백성들 속에서 주님이 고통당하고 계신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이 능력이 없으시거나, 권세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언약적인 연대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지만 언약적인 연대를 통해서 고통과 수치는 하나님께 그대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적인 상황에 개입하셔서 정리하시고 사람들을 올바르게 고쳐주실 때 하나님의 큰 역사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고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시인이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소서˛
시인은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라고 호소합니다.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억은 은총이고,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억은 심판입니다. ‘기억해 달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셔서 이들을 심판해 달라고 하는 탄원입니다.
‘우매하다’는 것은 동정적인 의미에서의 ‘우매함’이 아니라 징벌적인 의미에서의 ‘우매함’ 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정신과 마음을 버렸기 때문에 어리석고 우매한 자가 되었고, 그렇게 어리석고 우매하기 때문에 “종일토록 사람들을 학대하고 짓밟음으로써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속에서 학대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과 하나님의 명예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였습니다. 백성들이 짓밟히고 학대받는 곳에서 주님의 명예도 땅에 떨어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이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시고 백성들의 원한을 푸심으로 당신의 원한도 푸시고 당신의 이름이 다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간절한 탄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사랑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사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성품이 우리 안에 충만해지면 가장 작은 것을 보면서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거기에 형제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면 거기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시겠습니까?”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닮음이 결국은 참된 사랑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명예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때문에 기도를 드리는데, 이 두 가지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치를 이룹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적으로 연대되었으므로 시인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 모든 일들을 위하여 일하여 주십시오.”라는 탄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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