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76
목 차
알려지시는 하나님(시 76:1) 31
평화주시는 하나님(시 76:2-3) 37
주가 영화로울 때(시 76:4) 44
야곱의 하나님 때문에(시 76:5-6) 47
경외 받으실 하나님(시 76:7-9) 50
서원을 갚음(시 76:11-12) 54
시편76편 강해 1
알려지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시 76:1)
본문해설
76편은 전형적인 찬송시입니다. 아삽의 시라고 불리는데 다윗시대에 존재했던 아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 속한 시일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학자들은 76편의 배경이 무엇일지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앗수르 산헤립의 군대가 쳐들어왔던 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군대를 물리치시고 히스기야에게 승리를 주신 것을 기념하면서 쓰인 시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많은 학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언약백성들에게 알려진 분이라는 것을 표제처럼 제시하고, 2절부터는 어떻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지시는지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병행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한 짝을 이루고, ‘유다’와 ‘이스라엘’이 한 짝을 이룹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을 구분하는 것 자체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같은 의미의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시에 운율을 만들고, 같은 사상을 사람들에게 두 번 주입시키는 것입니다.
알려지기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선택하신 언약백성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시는 것은 그 분의 뜻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들은 몇 가지 중요한 교리를 터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인간을 창조하신 뜻이 구현되는 길이 있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사람답고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 인간에게 보여주기를 기뻐하시고 당신이 어떤 분인지 백성들이 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계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은 마치 산봉우리와 산의 관계와 같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헐몬산에 내린 이슬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에 비유합니다. 헐몬산은 해발 2000m가 넘는 높은 산입니다. 그 위에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수분이 형성되어 서서히 스며들면서 물이 내려와 계곡을 이룹니다. 실제로 보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생명의 젖줄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물이 헐몬산에서 쏟아져 내려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제일 먼저 언약백성들에게 주어지고, 언약백성들에게 주어진 지식은 헐몬산의 이슬처럼 그들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갑니다. 그래서 산을 두루 적시고, 산을 두루 적신 물이 산 아래 들판을 휘돌면서 모든 땅들을 기름진 땅으로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이 당신을 알기 원하시는 이유는 이것이 세상의 모든 인류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은택을 입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탐구하고 공부합니다. 그러나 탐구하는 주체가 탐구하는 개체보다 무한히 작기 때문에 탐구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탐구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알 수 있는 지식들을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는 지식은 인간이 자연을 탐구하면서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여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많이 남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계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남겨주셔서 이성을 사용하여 발견하고 탐구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해주셨더라도 이성만으로는 그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성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고 살아계시며 우리에게 당신을 알리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지도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계시들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갈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은 자신을 위한 지식이면서 동시에 남을 위한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가깝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을 위해 이 지식이 쓰이도록 도와야하고, 멀리는 이 지식을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빛처럼 비춰주어야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 빛이 없었을 때 사물을 대하였던 것과 다른 태도로 사물을 대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의 의무입니다.
시인은 산헤립에 의한 앗수르의 침공이라는 커다란 국가적인 위기 속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신 큰일을 하셨다는 것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는 마음
두 번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세상에 알리는데 가장 중요한 도구가 언약백성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전달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알려주시지만 당신을 아는 지식을 금광이나 경치 좋은 풍경, 우주에 있는 사물처럼 남겨 주신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남겨주셨다면 아무 도움 없이 인간이 부지런히 탐구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연에서 어떤 법칙을 발견하고, 탄광에 있는 지하자원을 발견하고, 좋은 유적지를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겠지만 그것은 간접적인 것이고, 인간이 부지런히 탐구하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 안한 사람보다 지식이 더 많아질 것이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찾은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원칙만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learned ignorance’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의 철저한 무지라는 개념입니다. 이상하게도 부지런히 공부하고 탐구해서 상당한 학식을 갖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한 가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언약백성들에게 알리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언약백성으로 사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획득하는 일에 대해 논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동기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순종을 목적으로 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헤롯에게로 송취 된 뒤, 또 그에게 되돌아와 심문을 받으십니다.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I am.”, “나다.” 한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 일체 대답을 안 하십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호기심으로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감춘바 된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다운 사람, 이스라엘 백성다운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해 꾸밈이 없고 순수한 경배의 마음을 가지는 것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세상 철학에서는 일체의 욕망에서 벗어나 무념무상하게 된 마음이야말로 진리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기에 가장 좋은 마음이라고 가르칩니다. 불교에서는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욕심과 분노, 어리석음, 이 세 가지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격동할 때 무지하고 사물의 이치를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설명이 다릅니다. 진리를 습득하고 깨닫기에 가장 훌륭한 마음은 불붙은 마음입니다. 진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사랑으로 불붙는 마음입니다. 차갑고 냉정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으로 불붙은 뜨거운 마음이야말로 진리를 습득하고 체득하기에 가장 훌륭한 마음상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사랑과 뜨거운 열정을 간직할 때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언약관계에 대한 충성과 꾸밈이 없는 헌신의 마음을 보시고 당신을 아는 지식을 풍부하게 선물로 주십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은 채, 수십 시간을 기도하는 것보다 단 한 시간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가운데 부르짖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 많은 교통을 하게 됩니다.
미국에는 많은 신학교들이 있지만 모든 곳에서 우리가 믿는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20여 년 전에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형제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를 가르친 신학교 교수들의 70%정도는 교회를 안 다닌다고 합니다. 예수를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학문적으로는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신학 논문을 쓰는데 8개의 언어를 요구합니다.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아람어, 아르메니아어, 콥틱어, 불어, 독일어. 얼마나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믿지를 않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세계 최고일지는 모르지만 교수 중 행복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경배의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에 충실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깊이 알게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부부로서 서로는 아는 것과 이웃으로 서로를 안다는 것은 확연히 다릅니다. 정보의 양으로만 보았을 때는 이웃 사람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루터를 연구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루터의 태어난 곳부터 시작해서 루터가 살았던 곳, 루터의 일생, 루터의 인척관계, 루터의 아버지가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같은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면에서 정보의 양은 자신의 아내에 대한 정보의 양보다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내를 아는 것보다 루터를 더 많이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에서 차원과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진정한 앎은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백성의 의무: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은 결코 머리 좋은 사람들에게만 알려지는 분이 아닙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들에게만 알려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관계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분입니다. 당신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하면서 자기 같은 사람을 언약백성으로 선택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믿음과 이성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탐구하고자 노력할 때,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풍성한 지식 속에서 남다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알려지기를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할 때,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모독입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예전에 모시던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세상물정에 관심이 없고 TV도 안보십니다. 늘 성경을 보고 공부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상갓집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목사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하더랍니다. “목사님, 저를 모르시겠어요?” “글쎄, 전 잘 모르겠는데요.” “저 구봉서입니다.” “구봉서라고요? 돌아가신 분하고 인척이 되십니까?” “아니, 목사님. 저를 정말 모르세요?” “글쎄, 저는 안면이 없는데요.” “목사님, 저 모르시면 우리나라에서 간첩입니다.” “간첩은 아닌데 전혀 기억이 없군요.”하며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구봉서는 3살 먹은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다 아는 유명한 코미디언입니다. 구봉서가 누구인지 학교에 와서 조교한테 물어봅니다. “구봉서가 재계의 거물이냐? 정치인이냐?” 학생들이 포복절도를 했습니다. 우리는 웃었지만 구봉서씨는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유명한 코미디언인 자기를 목사님은 모르고 있었다면 일종의 모독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중대한 신성모독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은 언약백성들의 의무이며 그 지식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 언약백성의 의무입니다.
평화주시는 하나님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셀라) (시 76:2-3)
분문해설
“그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2절과 3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알려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막’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회막을 가리키는 단어와는 다른 ‘시쿠트(tWKsi)’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이동하면서 한 장소에 머물게 될 때 쳤던 거처를 처소라고 합니다. ‘처소’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마하나임(!yIn"j}m')’, ‘진’이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장막은 하나님이 잠시 계시는 곳이 아니라 항상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처소라고 번역된 ‘마하나임’, ‘진’은 군대의 개념입니다. 군대는 전쟁을 위해 야영을 하고 진을 칩니다.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위해 전쟁하시는 용사로서 하나님의 개념이 이 단어 속에 묻어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해석할 때 단어의 사용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한 단어가 시편이나 구약성경, 혹은 성경 전체에서 갖는 의미를 해석하면 그 구절을 통해 시인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림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 그림이 얼마나 정확한지에 따라서 성경 해석이 정확하고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군대로서 주둔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살렘에 계시는데 잠시 와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항상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온에 계시는데 군대가 주둔하는 것 같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군대의 중요한 임무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과 영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군인은 이러한 세 가지 조건에 침해를 받을 때 폭발하듯이 전쟁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군인의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그 일을 위해 공여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항구적으로 계실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진을 치시고 군대를 주둔시킨 것처럼 함께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화를 보증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살렘(!lev;)’은 ‘평화’라는 뜻인데,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명칭의 옛 형태입니다. 예루살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은 ‘평화의 성,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예루’라는 말이 아마도 히브리어에서 성을 의미하는 ‘이르(ry[i)’에서 왔을 것이라고 봅니다. ‘살렘’은 평화입니다. 평화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 가운데 항구적으로 거주하시고 무엇 때문에 언제든지 전쟁하실 수 있는 군대로서 시온에 주둔하시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도 아니고, 시온이 최고의 경치와 풍광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시온’이란 이름은 ‘찌온(@/Yxi)’, 마른땅이라는 뜻입니다. 기름지고 풍성하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군대가 주둔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항구적으로 거기에 거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예루살렘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나 시온의 탐나는 특징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그곳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기에 항구적으로 거하시는 것이며, 그들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도전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킨 것처럼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아주 중요한 적용점을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 하시는 것, 보편적인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영적인 도전 속에서 지켜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신 언약 때문입니다. 그 언약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언약백성의 한없는 은총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은택입니다.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
1절과 연결시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유다에 알려지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알려지게 되었을까요? 언약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에 대하여 그들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 지식을 따라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시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충분히 알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진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성품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알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관계에 기초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을 알리십니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왕이 나라 일에 간섭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라가 평화롭게 굴러가면 백성들은 왕의 존재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오고 강력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상황이 옵니다. 백성들의 평화가 깨뜨려지고 삶이 위협을 당합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이방의 군대들이 밀려오고 백성들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습니다. 이럴 때 리더십이 요구됩니다. 이 때, 왕권을 올바르게 행사하면서 왕이 가지고 있는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진치고 있는데 그 군대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이 유다와 이스라엘에 알려지게 된 놀라운 계기가 있다고 3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 온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하나님은 아주 기적적인 방식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주십니다. 악한 자들의 화살과 방패와 칼이 없는 것처럼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를 드러내고 시온에 당신의 군대를 두신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평화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와 이방의 군대의 차이를 유의해야 합니다. 언약백성과 함께하는 군대이신 하나님과 이방의 군대와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살렘, 평화를 위한 전쟁입니다. 이방나라의 전쟁은 탐욕과 정복을 위한 전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전쟁은 평화를 위한 전쟁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먼저 침공을 당하게 하시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먼저 공격하게 하여서 이방나라들을 정복하기도 합니다. 이 정복의 궁극적인 목적은 평화의 수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하셨을 때, 바로가 쉽게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땅에 전대미문의 고통스러운 십대 재앙을 퍼붓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순순히 놓아주었더라면 그런 환란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순종하고 거역하면서 자신의 왕국에 환란을 끌어들여 전대미문의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평화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핍박받으며 사는 고통스러운 세월은 땅의 평화를 깨뜨리고 온 땅으로 부르짖게 만들었습니다. 그 음성이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평화가 깨뜨려진 것입니다. 이런 평화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을 거부할 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가기 전까지 가나안은 평화로운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의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 상태가 평화입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곳은 없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자각하고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에 맞도록 나라가 다스려진다면, 언약백성들 만큼 하나님을 아는 빛이 그들에게 없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평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기독교 국가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 국가도 다스리십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자스민혁명은 10년 전까지 만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억압과 폭력, 잔혹함이 꽉 차서 용납할 수 없는 수위가 되면 하나님은 평화를 수립하기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무너뜨리십니다.
분쟁지역에 질서유지를 위해 유엔에서 파송하는 군대를 평화군(peacekeeper)이라고 합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무기를 동원해서 군대를 파병합니다. 필요하면 그것을 억누르고 억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나라를 그렇게 통치하십니다.
산헤립의 군대가 18만여 명을 거느리고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고 하나님은 스스로 군대가 되어서 그들을 하루아침에 모두 멸망시키십니다. 좁게 보면 그것은 전쟁이지만, 넓게 보면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렘에 계시다는 2절과 3절의 내용이 전쟁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이 군대로서 시온 가운데 거하시는 것 자체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해 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인 왕국으로 드러난 신약의 시대의 전쟁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입니다. 강력한 영적인 전쟁 앞에서 우리의 최고의 자산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께서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파송되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지구상에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보낸바 되신 총사령관입니다. 그분이 교회와 함께 계셔서 하나님과의 평화와 사람과의 평화를 동시에 이루셨습니다. 그분이 군대처럼 교회 안에 성령으로서 거주하심으로 교회에 다가오는 모든 영적인 도전과 위협에 대해서 승리를 안겨주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돌아가야 할 참된 모습입니다. 이전에는 물리적이고 육적인 전쟁의 형태를 띠면서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왕국인 이스라엘을 보호하셨지만 지금은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하시며 영적인 왕국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면 돈을 주시고 크게 사랑하면 영적인 은혜를 주신다고 한 것처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조금 사랑하면 돈과 좋은 환경을 주시지만 정말로 사랑하면 당신의 교회에 진리의 검과 믿음의 방패,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시키셔서 영적인 전쟁에 적합하도록 그를 강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살렘에 계시고 군대의 진으로서 시온에 계시는 것과 같은 동행이 교회에 있을 때, 그렇지 않은 일만 개의 교회가 할 수 없는 일을 한 개의 교회가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개 교회 하나를 절대시 하거나 우상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우주적인 보편교회들과 연대를 이루면서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주님이 하실 그 일을 뒤이으며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적인 자원과 물질적인 자원, 영적인 자원을 부어주셔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돈을 아껴 써서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자원을 낭비하는 것보다 영적인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은혜들을 가지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하는 일에 온전히 사용될 때 이것이 낭비 없는 삶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70년대 초반에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회를 세우면 저절로 되었습니다. 목마른 영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것을 설교라고 할 수 있을까 할 정도인데도 하나님이 허기진 영혼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부어주셔서 순수한 마음으로 성도들이 따를 때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교인들이 모이면 헌금을 걷어서 교회를 짓고 기도원을 지었습니다. 교회를 짓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초창기에는 기도할 마음으로 기도원을 지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큰 교회가 묘지를 삽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죽든지 결국엔 마지막 날 만날 텐데 많은 돈을 들여 묘지를 사고 부활의 동산이라고 해서 거기에 교인들을 묻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인 자원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은혜를 많이 받으면 세상의 불신세력과 싸우고 분투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습니까? 은혜 받고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싸우며 은혜를 다 쏟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자원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주 가슴아파하시는 행동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꿈을 꿉니다.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당신이 가지고 계시는 위대한 영적인 능력으로 교회와 함께 하셔서 전쟁과 갈등이 그치지 않는 세상에 전쟁이 사라지게 하시고 진정한 평화가 오게 하시는구나.’ 교회가 이러한 능력으로 충만해질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가 영화로울 때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시 76:4)
본문해설
4절부터 6절까지는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쳐들어오는 앗수르의 군대들을 하나님께서 멸하시는 내용을 회고합니다. 4절에서 “주는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 존귀해지셨을까요? 성경은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를 멸하신 것을 ‘약탈했다’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점령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빼앗고 무력화시키고 무장해제 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을 공격하는 이방의 군대들을 공의로 멸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사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것을 ‘약탈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가 영화로울 때
전쟁에서 승리하면 영토를 차지하고 영광을 받습니다. 전쟁에서 승자의 커다란 기쁨은 탈취물을 나누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포로들을 잡아오고 고관대작들을 체포해서 후송하고 많은 금은과 병기들을 압수하고 심지어는 패전국에 전쟁배상금까지 물립니다. 전쟁에서 이긴 공로에 따라 탈취물을 나누어 주고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은 영광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위해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커다란 기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쟁에서 악한 자들의 소유를 빼앗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은 영화로우시고 존귀하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화와 존귀는 제일 먼저 당신의 언약백성에게 알려졌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커다란 혜택을 입은 사람이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언약백성들을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기적적인 승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을 보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해하려는 무리들을 정의로운 심판으로 멸망시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중 대표적인 것은 나라가 환난과 우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는 불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환난가운데서 저지른 잘못이요 악이었습니다.
위기를 만나 나라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큰 능력으로 대적들을 파멸하시고 백성들에게 탈취물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계시며 언약에 충실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이끌고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의 영화와 존귀를 찬양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함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기백성을 보호하는 분이지만 지도자와 백성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앙망하느냐에 따라 그분의 보호가 달라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국가적인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성전에서 간절히 빌었고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긍휼이 여기사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살아가는 것, 주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 어떠한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앙망하기를 멈추지 않는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고난과 환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호하고 능히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와 축복을 주셔서 마치 한 사람을 붙들어 주시는 것처럼 국가도 그렇게 붙들어 주십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손에 나라의 안녕을 부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악인들을 보지 아니하시고 당신을 의지하는 의로운 사람을 보시며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시듯,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의 삶에 평화와 은혜를 주십니다.
전쟁은 또한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큰 능력으로 전쟁을 이기게 하신 것처럼, 신약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영적인 전쟁 앞에서 승리를 가져다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우리를 날마다 붙드시고 큰 은혜로 도와주셔서 자기 백성들이 당신을 의지하며 평화롭게 국가와 교회생활을 이어가도록 보호하고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를 통해 영광과 존귀를 나타내시는 주님의 섭리를 찬송하며 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붙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야곱의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시 76:5-6)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
많은 학자들은 이 시가 앗수르 산헤립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이긴 것을 기념하며 쓴 시라고 추측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루아침에 그들을 모두 몰살시켜버린 큰 역사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잠에 빠진다’는 이야기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죽는 것과 잠드는 것은 매우 유사하지 않습니까? 잔다는 표현은 그들이 몰살되어 죽어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다른 나라를 먼저 공격해올 정도라면 그들은 강한 정신과 무기로 단단히 무장한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강한 자들이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힘 있는 장군들과 그를 따르는 용감한 병사들이 하나님의 크신 역사로 패배했다고 하며,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끝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들을 돕는 응원군이 올지라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 앗수르는 아주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는 바벨론이 저물어가면서 떠오르는 신흥국가였고 전쟁으로 다져진 군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대할 때 ‘이 작은 나라쯤이야.’ 하고 쳐들어 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큰 낭패를 만나게 되었고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6절에서 시인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여기서 ‘꾸짖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하셔서 병거와 말이 모두 함께 죽어버린 것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
여기에서 ‘야곱의 하나님’이 다시 등장합니다. 시편 75편에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야곱은 족장 중 한사람인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애칭으로 ‘야곱’을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좋아서라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이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능력과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언약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하여 징계의 채찍을 들어서 그들을 견책하실 때도 이방 나라가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괴롭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관계에 있는 자녀들을 향한 주님의 보호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경건한 백성들은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분이고 자신의 구원의 소망도 하나님 한 분이라는 분명한 인식에서 멀어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시험에 들거나 믿음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신앙이 미끄러지고 불순종해서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 질서가 흔들립니다. 그러면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고 우리 앞에 펼쳐질 생활의 변화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환경과 사물의 움직임, 사람들과의 관계까지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를 중히 여기고 모든 것이 그분의 다스림과 통치 속에서 나온다는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맺으신 언약관계를 중하게 여기시고 우리가 언약관계를 이탈해도 당신은 언약에 충실한 분이십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깊이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생겨나게 됩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찬송함
시인은 야곱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를 선대해 주시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주시며 은혜로 이끌어 주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언약백성을 향한 변하지 않는 자비 때문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언약백성들은 환난과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만이 우리의 희망이고 보호자이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깊이 터득해가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바라보며 살아야할 언약백성의 의무를 일깨워줍니다.
언약백성들은 커다란 환난을 만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결국은 언약의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그 분을 의지하면서 언약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외 받으실 하나님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시 76:7-9)
본문해설
시인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와 그분을 경외해야 할 언약백성으로서의 의무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굉장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진노는 언약백성들에게 내리신 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 없이 언약백성을 치려고 하는 이방 군대들을 심판하시는 진노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대적하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친 가족처럼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의미이고, 이 보호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보호가 아니라 매우 특별한 보호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호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심판의 양면성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당신의 자비와 신실하심과 사랑을 나타내실 때 정반대의 상황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참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자비롭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하고 굽어있는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공의를 베푸심으로써 당신을 알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용서와 은혜를 펼쳐 보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 군대에 포위되었다가 그들이 모두 멸망당하는 광경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향한 당신의 공의를 보이시고,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자비와 언약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큰 자비와 은혜, 넓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만 경외할 것이다. 주님은 언약백성들에게 공경 받으실 분이시다.”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방군대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면서 ‘만약에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을 배반하고 그릇행할 때 우리에게 이러한 진노를 쏟아 부으신다면 누가 주의 목전에 설 수 있겠는가?’ 하며 반성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친구가 혼나면 자세를 바르게 하지 않습니까? ‘나도 잘못하면 저렇게 맞겠구나.’ 하고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방군대가 파멸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구나. 그분은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당신의 심판을 수행하시는 분이구나.’라는 것을 절실하게 경험하며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아울러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이 판결이 하늘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판결이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위에서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당신의 판결을 선포하시고 그 앞에 땅은 두려워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 때문에 이방백성들뿐만 아니라 언약백성들까지도 두려워하고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9절은 심판이 가지고 있는 양면적 특성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지고 있는 양면적인 특성을 보여줍니다. 공평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땅을 내려다보시고 판결을 선언하실 때, 하나님의 법에서 어긋나게 살던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되겠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던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 위로의 날, 하나님께 상을 받는 날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언약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온유한 자’는 언약백성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순하고 부드러워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거나 행하는데 있어서 순종적인 상태입니다. 이들은 사람을 향해서 부드럽고, 쉽게 하나님께 자기를 굴복시켜 아버지의 뜻을 행합니다.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이웃을 향한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은 언약백성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미명하에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그들을 정죄하고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친절은 항상 함께 갑니다. 이웃을 향해 친절하고 사랑을 베풀며 자비와 은혜를 베푸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온유한 자’라고 표현하고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심판하러 일어나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현실 속에 모순이 있는 것 같고 때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무시되는 것 같아보여도 하나님은 언약백성들을 붙들고 계시며 그들을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큰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약백성들에게는 자비와 친절을 보이시며 그들을 해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정당한 분노와 공의를 베푸심으로써 언약백성들로 하여금 당신을 따르고 의지하고 소망하며 사는 것을 기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결론과 적용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동시에 언약백성들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깨닫고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깊어져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삶의 모든 방면에 적용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깊어져가는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아름다운 신앙생활은 당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이해해서 오만해지거나 하나님의 정의를 오해해서 그분께 나아가는 자유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분을 더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그분의 사랑에 이끌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서있는 한, 나에게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신실한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입니다.
서원을 갚음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시 76:11-12)
본문해설
전쟁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백성들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전쟁의 승리가 워낙 놀랍고 컸기 때문에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서원하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기 가운데 건져주시면 이렇게 당신께 헌신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적군을 물리치고 이러한 승리를 얻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모든 예상을 초월하고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군대가 거의 상하지 않고 승리를 얻었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에게 기적적인 도우심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서원을 갚음
은택을 입은 사람들은 위기의 때에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갚아야 했습니다. 큰 은혜를 입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전에 서원한 것은 갚고, 지금 서원한 것은 앞으로 기억하면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구체적으로 서원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확인하고 나의 삶은 하나님을 향해 살아야하는 것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의 경우,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면 나머지 10분의 9는 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10분의 1을 드리는 것 자체가 전체를 대표합니다. “10분의 1안에 포함된 나의 모든 소유를 주님께 드립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와 비슷한 예가 이것입니다. 출애굽 때, 애굽 땅의 처음 난 것들을 하나님이 모두 죽이시고 피를 바른 집 안에 있는 초태생들은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초태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은 처음 것을 하나님이 살리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열개 중 하나를 드리는 헌신을 통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남은 아홉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시옵소서.”라는 포괄적인 신앙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백성들이 경외할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을 마땅히 경외해야할 분이라고 묘사합니다.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통로이자 계기가 됩니다.
이것에 대해 김 희보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전체를 보면, 역사가 잠들어있는 것 같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큰 위기를 주심으로 신앙을 일깨우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나 배, 비행기의 엔진을 돌리는 것과 같은 작용을 합니다. 엔진을 돌리면 오랫동안 멈춰있던 엔진이 가동되면서 찌꺼기들을 쏟아내고 다시 힘 있게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종종 행하시는데,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건도 그렇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하심으로써 잠들어 있던 왕과 대신들로부터 백성들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한분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승리를 주셨고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가 경외할 분이고,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높여야할 분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깨달으면서 강력한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방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보면서 주님께 서원을 갚았습니다. 은혜에 감격하여 다시 서원을 하면서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며 살아갈 언약백성의 본분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왕들이 두려워할 하나님
76편의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이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이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라고 노래합니다. 고관들은 지휘가 높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만합니다. 그리고 쉽게 굴복하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기를 꺾으심으로 세상의 높은 지휘를 갖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겸비하여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왕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돌이키사 그들을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 때 니느웨 백성들이 어땠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선지자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더니 모든 백성들이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겸비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큰 능력을 발하여 역사를 움직이실 때 고관들은 기가 꺾기고 세상의 왕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됩니다.
만민의 하나님
하나님의 역사는 먼저 언약 백성들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들에게 큰일을 행하셔서 그들이 주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확장되어서 이방의 많은 사람들까지도 굴복하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교회를 통해 이러한 그림을 드러납니다. 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큰 은혜와 위엄과 능력을 경험하고, 경험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의로우심을 전하면서 세상의 고관들과 만민들이 복음에 굴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교를 위해서라도 그분의 임재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크고 놀라운 능력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시편76편 강해 1